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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마르크스주의, 트랜스 해방, 그리고 젠더의 사회적 구성새로운 세대의 퀴어 활동가들이 논쟁을 벌이고 있다: 마르크스주의가 트랜스 및 퀴어 해방을 위한 전략이 될 수 있는가? 2020년은 미국 역사상 트랜스젠더 살해 사건이 가장 많았던 해였다. 미국 전역의 주 정부들은 현재 트랜스 청소년의 권리를 대폭 축소할지 여부를 논의 중이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지배계급 내 자유주의와 보수주의 세력은 “트랜스젠더 문제”에 대해 손만 비비며 고민하고 있다. 하지만 지난 몇 년간 퀴어 활동가 청년층은 점점 더 부상하고 있다. 이들 청년들—그중 다수가 트랜스젠더이다—은 ‘흑인의 생명은 소중하다(Black Lives Matter)’ 운동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맡았으며, 특히 흑인 트랜스젠더 여성들의 요구를 운동의 의제로 포함시키도록 이끌었다. 이를 위해 브룩클린을 비롯한 여러 곳에서 흑인 트랜스젠더의 생명을 지키기 위한 대규모 시위를 조직했다. 그러나 그들의 모든 진보적인 본능과 자본주의 국가에 대한 태동하는 의문에도 불구하고, 많은 젊은 퀴어 활동가들이 마르크스주의를 불신한다. 이는 주로 수십 년에 걸친 자본주의의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비방 캠페인의 결과다. 활동가들의 살해나 투옥 같은 극단적인 사례부터, 퀴어 권리의 일부 진전과 같이 부르주아 이데올로기가 특정 요구를 신자유주의에 편입시킨 방식에 이르기까지, 자본가 계급은 오랫동안 이데올로기로서 마르크스주의의 신뢰를 떨어뜨리고, 마르크스주의의 지지자들을 스탈린주의와 연관시키며, 억압받는 집단의 해방 투쟁을 마르크스주의 운동과 분리시키려 해왔다. 이러한 자본주의의 비방 캠페인은 — 주로 스탈린주의의 영향으로 인한 — 공산주의 운동의 역사적 실패와 결합되어, 많은 활동가들로 하여금, 마르크스가 단지 자신의 경험 바깥을 바라볼 수 없었던 이성애자, 백인, 유럽인, 시스젠더 남성에 불과했기 때문에, 마르크스를 버려야 한다고 주장하게 만들었다. 이러한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마르크스를 의심하는 이들은 동성애 해방 문제에서 마르크스주의 단체들의 역사적 실패와 트랜스 해방 문제에서 일부 단체들의 현재의 실패를 모두 지적할 수 있다. 그러나 트랜스 해방 지지를 반대하고자 일부 소위 마르크스주의 단체들이 사용하는 논리를 분석해 보면, 그들이 마르크스주의자라고 할 수 없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오히려 그들은 정체성과 욕망의 해방을 반대하는, 인종차별적이고 가부장적이며 억압적인 자본주의 국가 편에 서기 위해, 마르크스주의의 핵심이 되는 철학적 원칙을 거부한 반동주의자들이다. 이러한 가짜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진지하게 받아들여져서는 안 되며, 우리는 그들로부터 마르크스를 구출하고, 마르크스주의가 억압받는 자들을 위한 유일하게 진정한 해방 전략이라 주장해야 한다. 트랜스혐오적 “좌파”의 실패 이러한 마르크스주의의 왜곡을 반박하기 위해, 유감스럽게도 그들 중 일부와 논쟁을 벌여야 한다. 20세기 이래 자칭 좌파 내에서 게이 및 트랜스 해방을 반대하는 가장 큰 세력은 스탈린주의였다. 스탈린과 그의 동맹자들은 동성애 합법화와 같은 러시아 혁명의 수많은 사회적 성취를 배신했다. 스탈린과 스탈린주의는 보수적인 사회적 세력이 되어, 노동계급의 전체 부문이 제기한 요구들을 진정한 사회주의를 방해하는 소부르주아적 혼란으로 치부해버렸다. 이는 러시아, 쿠바, 그리고 20세기 수많은 변형된 노동자 국가들*에서의 반퀴어 정책으로 이어졌으며, 미국과 그 밖의 지역에서 공산당 내 퀴어 당원들을 제명하는 사태를 초래했다. 이러한 사회적 보수주의는 오늘날에도 많은 스탈린주의 분파들 사이에서 계속되고 있다. 예를 들어, 이 기사에서 다루기에는 너무 심각한 정치적 문제들로 가득 찬 영국 공산당은, 2019년에 “‘성별 유동성’이라는 반동적 악몽”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발표했는데, 이 글은 트랜스젠더들과 우리의 동맹들이 “성별의 물질적 현실”을 부정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 글에서 그들이 성(sex)과 젠더(gender)가 동의어라고 주장한다(두 개념은 동의어가 아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1] 이것이 반反-트랜스 “좌파” 대다수의 주된 논리다. 하지만 트랜스혐오적인 “좌파”는 스탈린주의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트랜스 해방을 가치 있는 투쟁으로 인정하지 않는 다양한 절충적인 성향의 집단들도 존재한다. 어떤 이들은 트랜스해방투쟁이 다른 투쟁들로부터 주의를 분산시킨다고 주장하는데, 이는 모든 억압을 무시하고 착취에만 집중하는 계급 환원주의적 전략을 함의한다. “젠더 이데올로기에 대한 사회주의적 비판”을 표방하는 블로그 Freer Lives와 같은 다른 이들은 더 나아가 트랜스 정체성이 근본적으로 부르주아적이라고 주장한다. Freer Lives가 2020년에 발표한 “모든 좌파는 여성 권리에 관하여 J.K. 롤링을 지지해야 한다”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주장했듯이, 젠더 이데올로기의 성차별주의에 맞서 여성을 옹호하는 롤링의 입장은, 실제로 오늘날의 세계에서 이 새로운 성차별주의를 이용해 여성 억압을 유지하려 해온 자본가 계급과 그 엘리트 하수인들의 이익과 대립하는 것이다. 이 문제에서 좌파-자유주의자들(left-liberals)과 극좌파들은 바리케이드의 잘못된 편에 서 있다. 안타깝게도, 퀴어성에 대한 이러한 사회적 보수주의는 20세기 일부 트로츠키주의 정당들 속으로도 스며들었다. 트로츠키주의자들 중에는 게이 해방 운동에 동참한 이들도 있었지만, 그렇지 않은 이들도 있었다. 예를 들어, 트로츠키의 제4인터내셔널 내 최대 정당인 사회주의노동자당(SWP)은 스톤월 사건 전후로 급속히 성장하던 게이 권리 운동에 용납할 수 없을 정도로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으며, 퀴어 민중들에 대해 매우 억압적인 정책을 펼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쿠바의 카스트로가 이끄는 관료 체제에 무조건적인 정치적 지지를 보냈다. SWP는 오랫동안 공개적으로 퀴어임을 드러낸 사람들을 당원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1976년, CWI(또 다른 트로츠키주의 경향)의 당원들은 팸플릿에서 다음과 같이 밝혔다. 진지한 사회주의자들은 “게이 해방”이 노동 운동에 독립적인 기여를 할 수 있는 사회적 토대를 조금도 제공할 수 없다는 점을 인정할 것이다. 그 반대를 증명하기 위해 때때로 제시되는 온갖 기이한 이론과 감성적인 주장들은 순수한 학생 정치에 여전히 만연한 극심한 혼란과 전망 부재의 증상일 뿐이다. 이러한 사례들에서 우리는 퀴어 정체성에 대한 “이론적” 반대가 퀴어 민중들의 삶과 퀴어 해방 운동에 대한 정치적·물질적 반대로 빠르게 변화될 수 있음을 볼 수 있다. 이는 노동계급 내 퀴어 구성원들과 정치적 경향으로서 마르크스주의 사이의 분열을 야기하는 결과를 낳았는데, 왜냐하면 노동계급 내 퀴어 구성원들은 마르크스주의 정당 지도자들이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싸워줄 것이라고 항상 신뢰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론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우리는 이 점에 대해 매우 명확해야 한다. 퀴어 및 트랜스 노동자에 대한 지지는 어떤 사회주의 단체에게 있어서도 절대 타협할 수 없는 요소여야 한다. 그러나 퀴어 및 트랜스젠더에 대한 이러한 노선의 문제는 단순히 억압받는 집단의 해방 투쟁을 거부하는 것을 훨씬 넘어선다. 이 입장은 또한 변증법과 역사적 유물론 모두에 대한 중대한 거부를 의미한다. 즉, 트랜스젠더 해방을 거부하는 사회주의 운동의 세력들은 부르주아 도덕에 적응하며 마르크스주의의 이론적 토대마저 거부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노선을 취하는 집단들은 사회 통제를 유지하려는 자본주의 국가의 편에 서고 있다. 그들은 우리의 신체와 욕망이 온전히 발전하는 것을 계속 부정하는 사회의 가장 우익적인 세력들과 동맹을 맺고 있다. 이 집단들은 사실상 퀴어 해방 운동을 신자유주의에 넘겨주어, 운동이 포섭되도록 방치하고 국가에 대한 어떠한 도전도 제기하지 않고 있다. 이론보다 더 깊은 차원에서, 이 소위 좌파 집단들은 모든 좌파 정치의 근본적 목표인 인간 해방을 거부하고 있다. 그들은 역사의 잘못된 편에 서서 반동 세력의 대열에 합류했다. 그들은 우리의 동지가 아니며, 좌파들 속에서 패배시키고 사라지게 만들기 위한 측면에서만 그들을 진지하게 고려해야 한다. 젠더는 사회적 구성물이다 젠더는, 이 트랜스혐오자들이 주장하듯이, 생물학적으로 미리 정해진 것이 아니다. 오히려 젠더는 사회적으로 구성된 것이다. 현대적 형태에서, 젠더는 자본주의 체제를 유지하는 기능을 한다. 젠더와 섹슈얼리티의 현대적 형성에 이르게 된 역사적 과정이 있다. 예를 들어, 존 디에밀리오(John D’Emilio)가 『자본주의와 게이 정체성』(Capitalism and Gay Identity)에서 쓴 바와 같이, 게이와 레즈비언은 항상 존재해 온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들은 역사의 산물이며, 특정한 역사적 시기에 등장했다. 그들의 출현은 자본주의의 관계와 연관되어 있다. 20세기 후반에 수많은 남성과 여성이 스스로를 게이(gay)라고 칭하고, 비슷한 성향의 남성과 여성으로 구성된 공동체의 일원으로 인식하며, 그 정체성을 바탕으로 정치적으로 조직화할 수 있게 한 것은 바로 자본주의의 역사적 발전, 더 구체적으로는 자유로운 노동 체제 덕분이었다.[2] 디에밀리오(D’Emilio)는 본질적으로 자본주의의 부상이 정체성(identity)의 발명에 물질적 조건을 제공했다고 주장한다. 생산이 가정 밖—공장 및 여타 작업장—으로 점점 더 이동함에 따라, 사람들은 가족 밖에서 삶을 꾸릴 자유를 점점 더 많이 얻게 되었다. 이것이 정체성의 부상으로 이어졌다. 그 이전에는 남성과 성관계를 갖는 남성이 있을 수는 있었지만, ‘게이’라는 정치적·개인적 범주는 존재하지 않았다. 젠더의 경우에도 유사한 과정을 볼 수 있다. 젠더화된 관계는 수천 년 동안 존재해 왔지만, 현재 이해되는 바와 같은 젠더의 구체화는 자본주의의 부상과 함께 일어났다. 많은 전(前)자본주의 문화는 성별에 대해 비이분법적인(nonbinary) 이해를 가지고 있었는데, 이는 유럽 식민주의자들에 의해 원주민 문화에서 특별히 말살됐다. 역사적으로 여성은 자본주의 생산 체계에서 매우 특정한 역할을 수행해 왔는데, 바로 전형적인 무급 재생산 노동을 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자본주의적 관계에서 핵가족에 대한 현대적 이해가 등장했으며, 이는 젠더에 대한 이분법적 이해를 재확인하고 강화했다. 핵가족이라는 매우 귀중한 자본주의적 도구를 보호하기 위해, 이 이성애규범적 가족 단위에 도전하는 젠더 표현들은 억압당하고 가혹하게 처벌받았다. 실제로 젠더 구조는 항상 지배와 폭력의 기반 위에 있었다. 엥겔스가 『가족, 사유재산 및 국가의 기원』에서 쓴 바와 같이, [어머니]의 전복은 여성 성별의 세계사적 패배였다. 남성은 가정에서도 지휘권을 장악했고, 여성은 격하되어 노예 상태로 전락했으며, 남성의 정욕의 노예이자 단순히 산아도구로 전락했다. 여성의 이러한 격하된 지위는 … 점차 완화되고 미화되었으며, 때로는 더 온화한 형태로 포장되기도 했지만, 결코 폐지된 적은 없었다. 젠더의 형성 젠더 비규범성에 대한 억압은 문화의 거의 모든 요소에 스며들어 젠더와 섹슈얼리티에 대한 헤게모니적 이해를 형성했다. 이 과정은 “젠더 규율”(disciplining gender)이라고 불려왔다.[3] 이를 통해 우리는 젠더가 결코 생물학적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오히려 그것은 역사적 시기에 따라 변화하는 사회학적 범주이다. 영국 공산당의 횡설수설로 돌아가 보자면, 그들은 앞서 인용한 같은 기사에서 아래와 같이 썼다. (트랜스 권리를 위해 투쟁하는 이들은 성별이) 일종의 의학적 음모라고 주장한다. 즉, 출생 시 의사들이 모여서 의논한 뒤 당신에게 “젠더 역할(gender role)을 할당”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임산부 여러분: 20주 초음파 검사를 받을 때, 여러분은 아기가 남자아이인지 여자아이인지 확인하기 위해 검사를 받는 것이 아니다(‘레드 파이트백’(Red Fightback)은 이렇게 말한다.)[4] 그건 전부 의학적 음모일 뿐이다! 그리고 아기가 태어나면, 그들이 아기를 검사하고 말한다, 남자아이라고, 또는 여자아이라고 —그것도 전부 의학적 음모다! 이런 것들(남자아이와 여자아이, 남성과 여성)은 실재하지 않는다 — 모르겠는가?? 간성(인터섹스) 아기들의 존재는 차치하고라도 — 그들은 자신들 주장의 전체적인 유사과학적 근거를 무너뜨릴까 봐 이 문제를 신중하게 회피하고 있지만 — 아기가 태어날 때 우리가 그들에게 정체성과 특성을 부여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은 터무니없이 공상적인 입장이다. 갓 태어난 ‘남아’에게는 파란 담요를, ‘여아’에게는 분홍 담요를 사준다. 최근 잇따른 지독한 젠더-리빌(성별공개) 파티 사례만 봐도, 아이가 태어나기도 전에 아이의 젠더에 얼마나 큰 의미가 부여되는지 알 수 있다. 이는 그 자체로 의학적 음모는 아니다 — 비록 우리가 간성인 사람들의 입장을 고려한다면, 아기의 동의 없이 규범적인 신체상을 강요하는 것은 분명히 의학적 음모이지만 — 오히려 출생 전부터 자아를 형성하기 시작하는 사회정치적 맥락이다.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자칭 마르크스주의 단체가, 사회가 아이들에게 출생 시 젠더 역할을 부여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것은 사실상 현대 사회 전체를 외면하는 것이며, 마르크스의 역사유물론적 분석을 거부하는 것이다. 게다가 젠더를 구성하는 요소의 상당 부분은 생물학적 성이 아니라 소위 ‘젠더 표지(gender markers)’에 있다. 예를 들어, 드레스는 여성적이고 정장은 남성적이다. 하지만 그것 또한 역사적으로 변하지 않는 상수는 아니다. 비교적 최근의 역사 속에서 하이힐이 남성의 것으로 여겨지거나 소년들이 종종 드레스를 입던 시절도 있었다. 시아라 크레민이 저서 『남성화된 여성: 크로스드레싱의 변증법』(Man-Made Woman: The Dialectics of Cross-Dressing)에서 설명하듯이, 서구화되거나 유럽적인 여성적 스타일의 즐거움은 그 무엇보다도 미학적이다. 우리는 차려입는 것을 좋아한다. 우리는 비단 같은 원단, 반짝이는 것들, 그리고 생생한 색상을 즐긴다. 역사의 우연이 파란색을 남성적인 상징으로 만들었다. 남성에게 있어 면 양말은 좋고, 팬티스타킹은 나쁘도록 만들었다. 이러한 비합리성이 제2의 본성이 되었다.[5] 무엇이 여성에게는 하이힐이, 남성에게는 부츠가 어울리도록 만들었을까? 과학적인 근거는 없다. 오히려 젠더는 사회적 지위와 다양한 젠더 표지들로 구성되며, 크레민의 말대로 “역사의 우연”에 의해 의미를 부여받는다. 그러나 젠더 자체가 사회적 구성물인 반면, 젠더화(gendering) 행위 자체는 매우 물질적인 과정이다. 특정 방식으로 젠더화된다는 것은 당신이 해야 하거나 하지 말아야 할 매우 현실적이고 물질적인 것들이 있다는 것을 의미하며, 이러한 젠더화에 저항하는 것은 종종 사회적 고립과 심지어 폭력에 직면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모순은 트랜스 경험을 이해하는 데 있어 핵심적인 요소이다. 젠더는 끊임없이 변화하는 개별화된 범주들의 집합이자, 억압과 종종 폭력까지 수반하는 매우 실체적이고 물질적인 과정이다. 이는 두 가지 결론으로 이어진다. 첫째, 젠더화 과정이 자본주의 체제의 일부이기 때문에, 개별화된 관점에서는 트랜스 해방이 불가능하다는 점이다. 이는 해방이 개인 단위의 과정(person-by-person process)이라고 주장하는 이 글 후반부에서 논의할 이들과는 대조적으로, 젠더화는 그 어떤 개인적인 행동이나 개인보다 더 큰 것이기 때문에, 해방은 반드시 집단적인 반자본주의 투쟁(mass anti-capitalist struggle)이어야 함을 의미한다. 둘째, “젠더의 물질적 현실”을 거부하는 것은 트랜스젠더들이 아니라, 오히려 젠더에 대한 비역사적인 생물학적 정의를 고수하며 젠더의 역사적 현실과 젠더화의 물질적 현실을 모두 거부하는 바로 이 “젠더 비판적 좌파들”이다. 영국 공산당과 그 일당이 음모론으로 치부하려는 것은 사실 자본주의 하에서 가장 쉽게 관찰되고 기록된 사회적 통제 과정 중 하나이다. 변증법적 젠더 이 혁명가 행세를 하는 트랜스혐오자들은 젠더의 역사적 현실을 거부할 뿐만 아니라, 자신들의 공인된 정치적 입장과 반동적인 정서 사이의 모순을 해결할 방법을 고집스럽게 찾으려 하면서 변증법 자체도 거부한다. 젠더가 생물학적으로 정해져 있어, 결코 변하지 않거나 새로운 형태를 취하지 않는다는 생각은 근본적으로 비변증법적이다. 이는 출생 시 부여받은, 삶의 물질적 현실과 무관하게 결코 변할 수 없는 불변의 정체성을 전제한다. 그러나 마르크스주의자로서 우리는 우리 자신이 위에서부터(*역주: 신이나 어떤 초월적 존재로부터) 내려받은 존재라는 관점을 거부한다. 이러한 반反-트랜스 가짜 마르크스주의를 받아들이려면, 젠더는 변할 수 없다는 그들의 노선에 동의해야만 한다. 하지만 설령 젠더가 생물학적이라는 그들의 잘못된 주장을 받아들인다 해도, 그것이 젠더가 변할 수 없다는 뜻은 아니다. 예를 들어, 눈과 머리카락은 (대부분의) 인간이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는 것이지만, 눈동자와 머리카락 색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자연스럽게 변할 수 있으며, 사람들은 머리카락을 염색하거나 컬러 렌즈를 착용할 수도 있다(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한다!). 그들이 “머리카락 색깔의 물질적 현실”을 거부하는 것인가? 태어날 때 사지를 모두 가지고 있다가 사고로 한쪽을 잃은 사람은 자신의 신체에 대한 물질적 현실을 배반하는 것인가? 변화하는 조건 때문에 시간이 지남에 따라 변하는 생물학적으로 미리 정해진 속성들은 수없이 많다. 그리고 설령 젠더를 생물학적 성별(Sex)과 동의어로 보는 과학적으로 부정확한 정의를 받아들인다 해도, 그렇다면 간성인 사람들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간성인 영아들에게 그들의 동의 없이 성별의 규범적 범주에 맞추기 위해 수술을 시행하는 의사들은, 이 간성인 아이들의 물질적 현실을 부정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소부르주아와 포스트모더니즘의 젠더 거부 행위에 대해 그토록 분노하는 이 사회주의자들은, 왜 이러한 비동의적 성전환 수술에 대해서는 똑같이 분노하지 않는가? 이 모든 주장은 과학적으로 전혀 타당하지 않다. 그렇다면 우리는 과학적 문제를 다루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진리’를 다루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젠더는 물질적 조건이나 개인의 신체적 속성을 초월하는 무엇이어야 한다. 그것은 우리를 정의하는 더 높은 차원의, 일종의 도덕적 진리여야 한다. 그러나 영원한 진리에 대한 이러한 믿음은 반反변증법적이며, 따라서 반反마르크스주의적이다. 엥겔스가 그의 기념비적인 저서 반뒤링에서 썼듯이, 우리는 따라서 도덕 세계에도 역사와 민족 간의 차이를 초월하는 영구적인 원리들이 있다는 구실을 들어, 어떤 도덕적 교리를 영구적이고 궁극적이며 영원히 불변하는 윤리 법칙으로서 우리에게 강요하려는 모든 시도를 거부한다. 우리는 반대로, 모든 도덕 이론은 궁극적으로 당시 사회의 경제적 조건의 산물이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사회가 지금까지 계급 대립 속에서 움직여 왔듯이, 도덕은 언제나 계급의 도덕이었다. 그것은 지배 계급의 지배와 이익을 정당화해 왔거나, 억압받는 계급이 충분히 강력해진 이후로는 이러한 지배에 대한 피억압자의 분노와 미래의 이익을 대변해 왔다. 이 과정에서 인간 지식의 다른 모든 분야와 마찬가지로 도덕에서도 전반적으로 진보가 있었다는 점은 누구도 의심하지 않을 것이다. 다시 말해, 도덕적 교리를 “영원하고, 궁극적이며, 영원히 불변하는 윤리법”으로 믿는 것은 지배 계급의 도덕, 즉 노동계급을 억압하고 통제하는 데 이용되는 도덕에 대한 묵인에 지나지 않는다. 이 소위 “젠더 이데올로기”에 맞선 전사들은 의도적이든 아니든, 우리를 억압하고 있는 부르주아 도덕에 좌파적인 위장을 제공해 주고 있다. 트랜스 마르크스주의의 향방은? 그렇다면, 마르크스주의 운동의 일부 세력이 퀴어와 트랜스 해방 투쟁을 항상 지지해 온 것은 아니라는 점을 감안할 때, 반反마르크스주의자들의 주장이 옳은 것일까? 우리 퀴어와 트랜스 사람들은 마르크스주의를 우리 해방과 양립할 수 없는 이론으로 치부하고 버려야 하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은 단호한 ‘아니오’이다. 우선, 마르크스주의 운동과 퀴어 해방 운동의 역사를 살펴보면, 퀴어 해방이라는 과제가 제시되었을 때 많은 마르크스주의 단체들이 이를 강력히 지지했음을 알 수 있다. 오스카 와일드가 퀴어라는 이유로 재판을 받았을 때 그를 변호한 것은 초기 공산주의자들이었다. 많은 제국주의 국가들이 그렇게 하기 수십 년 전에 볼셰비키는 러시아에서 동성애를 합법화했다. 그리고 현재도 많은 마르크스주의자들이 투쟁의 최전선에 서 있다. 이러한 단체들은 마르크스주의 이론의 결함을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 20세기와 21세기에 걸쳐 좌파의 상당 부분의 퇴보를 보여주고 있다. 이 점은 1970년대 아르헨티나의 동성애자 해방 전선 전 멤버였던 마르셀로 베니테스(Marcelo Benítez)가, ‘레프트 보이스(Left Voice)’의 아르헨티나 자매 사이트와의 인터뷰에서 지적한 바 있다. 1970년대 퀴어 마르크스주의자로서의 경험을 회고하며 그는 “나는 마르크스주의가 아니라 좌파와 갈등을 겪고 있었다. … 좌파 내에서 동성애자로 살아가는 것은 매우 힘들었다”고 말했다. 우리는 퀴어 문제와 관련하여 좌파 일부 세력의 실패를 바라볼 때 매우 비판적이어야 하지만, 그 실패를 마르크스주의 탓으로 돌려서는 안 된다. 스탈린주의자 및 기타 집단이 퀴어 해방 투쟁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 것은 마르크스주의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마르크스주의의 부재 때문이었다. 마르크스주의는 우리에게 해방을 위한 필수 조건을 확보할 수 있는 길을 제시할 뿐만 아니라, 현재 운동 내의 잘못된 지도부에 맞서 싸울 수 있는 도구도 제공한다. 마르크스주의를 배반한 이들이 마르크스주의자라는 칭호를 차지하는 것을 허용하기보다는, 우리는 그들을 트랜스 배제적 급진 페미니스트들, 심지어 종교적 우파의 일부보다 나을 바 없는 존재로 규정하고 거부해야 한다. 영국 공산당은 그들의 모든 주장과 구호에도 불구하고, 마르크스와 레닌이 정의한 방식의 공산주의자가 아니다. 이러한 마르크스주의 왜곡자들은 이론적·정치적 영향력이나 지도력을 가져서는 안 된다. 마르크스가 저술하고 레닌과 트로츠키가 발전시킨 마르크스주의의 근본으로 돌아감으로써, 우리는 마르크스주의가 트랜스 해방을 쟁취하기 위한 명확한 전략을 제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트랜스 여성이자 레프트보이스의 브라질 자매 단체 회원인 버지니아 기첼(본 호의 다른 기사에서 인터뷰됨)의 말을 인용하자면, 분명히, [책 트랜스젠더 마르크스주의의 출간은] 삶의 모든 영역에 걸친 완전한 해방에 관심이 없으며 트랜스 해방 논의에 아무런 기여도 할 수 없는, 백인, 유럽인, 이성애자, 시스젠더 마르크스에 대한 관점에 반박한다. 혹은 마르크스가 여성 해방에 대한 해답으로 제시한 것이 단지 여성의 경제적 자립을 보장하기 위한 노동시장 진입뿐이었다는 관점에도 반박한다. 사실 러시아 혁명에서 마르크스주의 사상의 실현은 삶의 모든 영역을 변혁하려는 시도의 정점이었으며, 러시아는 임신중단을 합법화하고 동성애를 비범죄화하며 공공 구내식당, 세탁소, 어린이집을 보장한 세계 최초의 국가가 되었다. 이는 오늘날에도 많은 자본주의 민주주의 국가들이 제공하지 못하는 것들이다. 그러나 혁명기 러시아에서 벌어진 혁명과 반혁명의 과정은 또한 20세기 가장 중요한 지도자 중 한 명인 레온 트로츠키가 발전시킨 ‘연속혁명론’의 과학적 토대를 제공했다. 이것이 바로 나에게 있어 21세기를 위한 마르크스주의의 모습이다… 즉, 계급 투쟁은 권력 장악으로 끝나지 않고, 오히려 더욱 격화된다는 결론이다. 혁명은 해방의 과정을 끝내는 것이 아니라, 단지 시작할 뿐이라는 트로츠키의 연속혁명론은, 개인적 해방에 대한 포스트모던적 사상이나, 혁명이 자동적으로 해방을 가져올 것이니 더 이상 할 일이 없다는 계급 환원주의 단체들의 뻔한 주장보다 훨씬 더 명확한 트랜스 해방으로 가는 길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심도 있는 연구를 통해서만 우리는 이 전략을 트랜스 해방 과제에 어떻게 적용할지, 그리고 트랜스 해방 운동의 주도권을 위해 어떻게 투쟁할지 발견할 수 있다. 트랜스 해방 운동 지도부의 실패 조직화된 좌파의 상당 부분이 퀴어 해방 운동에 대한 주도권과 관심을 포기한 상황에서, 현재 이 운동의 지도부는 불균형적으로 포스트모더니즘적이고 자유주의적이다. 이들은 계급 정치를 거부하고, 대신 정체성 중심적(identitarian)이고 개인주의적인 정치를 채택한다. 이 중 한 부류는 케이틀린 제너나 피트 부티지지 같은 인물들을 대두시키는 대표성 정치(representational politics)에 매몰되어 있다. 이런 인물들은 자신의 정체성을 무기화하여 퀴어 공동체에 해를 끼치는 자신들의 정치적 행보를 은폐한다. 또 다른 부류는 선거 정치에 지나치게 얽매여 있어, 트랜스 억압을 지속시키는 국가의 역할을 간과하고 있다. 이 세력은 진보 성향의 인사나 퀴어 및 트랜스젠더 인사들이 의회에 충분히 당선되기만 하면, 그들이 트랜스젠더 억압을 종식시킬 법안을 통과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 듯하다. 그러나 트랜스젠더 억압은 이 글의 다른 부분에서 다룬 모든 이유들로 인해, 자본주의 체제가 스스로를 유지하는 방식의 일부다. 이를 고려할 때, 트랜스젠더 억압은 단순히 법적인 문제가 아니라 구조적인 문제이므로 국가가 이를 종식시킬 수는 없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반反트랜스 법안의 폐지와 트랜스 커뮤니티를 위한 중요한 개량을 위해 싸워서는 안 된다는 뜻은 아니다. 우리는 반드시 그렇게 싸워야 한다. 하지만 우리는 그러한 타협책을 자본주의의 현실을 바꾸는 것과 혼동해서는 안 된다. 트랜스 활동가들에게 민주당에 대한 믿음을 가지라고 권유하는 것에서부터 동화(assimilation)를 궁극적인 목표로 삼는 것에 이르기까지, 퀴어 운동의 이러한 자유주의 지도자들은 일관되게 급진성을 약화시키는 세력이 되어 왔다. 트랜스 해방 운동의 또 다른 부류는 접근 방식은 더 급진적이지만 정치적으로는 마찬가지로 개량주의적이다. 보통 스스로를 급진주의자라고 칭하는 이 세력은, 마르크스주의와 모든 총체적·보편적 이데올로기의 가치를 모두 거부한다. 대신 그들은 퀴어 이론의 영향을 받은 전략을 따르는데, 이는 결국 해방 투쟁을 개인화하는 결과를 낳는다. 다시 말해, 이 전략은 사고방식을 바꾸는 것을 세상을 바꾸는 수단으로 본다. 이 전략의 핵심은, 트랜스혐오를 극복하는 길은 먼저 자신의 내면화된 편견을 인식하고 변화시킨 다음, 다른 이들도 그렇게 하도록 돕는 데 있다는 것이다. 이 전략을 신봉하는 이들은 또한 정치 자체를 거부하는 경향이 있는데, 동성 결혼 합법화와 같은 성과는 단지 동화주의에 불과하며, 현 체제 내에서 결혼이 주는 실질적 혜택과 무관하게 “체제”에 굴복하는 것일 뿐이므로, 어떤 개량도 싸워 얻을 가치가 없다고 주장한다. 이 전략은 체제에 어떻게 “저항”하거나 싸울지에 대한 많은 길을 제시하지만, 궁극적인 승리와 퀴어 해방으로 향하는 길은 제시하지 않는다. 그 결과는 아무런 진전도 없이 영원히 저항하는 것에 불과하다. 이러한 틀 안에서, 중간적인 “승리”조차도 승리가 아니다. 왜냐하면 국가로부터 얻은 것은 무엇이든 쟁취할 가치가 있는 것으로 간주되지 않기 때문이다. 트랜스젠더에 대한 억압은 단순히 이데올로기적인 것이 아니라 물질적인 것이기도 하다. 달리 말해, 트랜스젠더들이 심각한 억압에 직면하는 것은 단지 트랜스혐오자들 때문만이 아니라, 자본주의 체제가 그들을 착취하고 비하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따라서 트랜스젠더들의 물질적 조건을 바꾸기 위해서는 물질적 해결책이 필요하다. 대표성(representation)은 물질적 해결책이 아니다. 아무리 선의가 가득한 트랜스젠더라 해도 혼자서 자본주의 체제를 내부에서 바꿀 수는 없다. 실제로 “권력 구조를 내부에서 변화시키려는” 모든 시도는 거의 전적으로 실패로 돌아갔다. 우리는 흑인 대통령이 인종차별을 끝내지 못했고, 여성 부통령이 성차별을 끝내지 못했으며, 게이 CEO들이 동성애 혐오를 끝내지 못했다는 사실을 목격했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또다시 그 거짓말에 완전히 속아 넘어가야 하는가? “우리는 대표성 정치가 과거에 실패했음을 알고 있습니다,” 자본의 홍보 담당자들은 우리가 이렇게 믿게 만들고 싶어 한다. “하지만 이번에는 다를 것입니다. 이제 트랜스 CEO가 더 많아지면 실제로 뭔가 달라질 것입니다.” 더 많은 트랜스 CEO를 고용하고 더 많은 트랜스 정치인을 선출함으로써 체제가 스스로 바로잡을 것이라고 믿는 것은 패배가 확실한 내기이며, 현재 많은 주에서 역사적인 수준의 억압에 직면해 있는 트랜스 아이들을 버리는 행위다. 이는 매일 살해당하는 트랜스 여성들(대부분이 흑인 및 유색인종(brown)이다)을 버리는 것이다. 이는 자신들을 위해 만들어지지 않은 세상에 억지로 적응해야 하는 트랜스 성노동자들과 논바이너리 사람들을 버리는 것이다. 자유주의자들은 우리에게 인내심을 가지라고 말하려 하지만, 우리는 그 인내심이 희생자를 낳는다는 것을 이미 목격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정치를 단순히 거부할 수는 없다. 우리를 억압하는 자들은 조직화되어 있으니, 우리도 그래야 한다. 우리의 목표는 단순히 억압에서 벗어날 수 있는 몇 군데의 공간을 확보하는 것이 아니라, 억압을 종식시키는 것이어야 한다. 우리는 승리하기 위해 싸워야 한다. 승리하기 위해서는 승리할 수 있는 전략이 필요하다. 포스트모더니즘과 퀴어 이론은 승리가 가능하다는 전제를 거부하기 때문에 승리할 수 있는 이론이 아니다. 대신, 우리는 트랜스 및 퀴어 해방을 위한 투쟁에 마르크스주의적 접근을 채택해야 한다. 트랜스 해방에 대한 사회주의적 관점 진정한 마르크스주의자들은 트랜스젠더와 다른 특별하게 억압받는 집단을 해방시킬 수 있는 것은 오직 노동계급뿐임을 인식한다. 이는 어떤 도덕적 우월성 때문이 아니다. (거의 모든 퀴어들이 알고 있듯이, 노동계급 구성원들도 신념은 매우 반동적일 수 있다.) 이는 오직 노동계급만이 자본주의 체제를 무너뜨릴 전략적 힘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모든 것을 움직이는 것은 노동계급, 오직 노동계급뿐이기 때문이다. 노동자들은 경제 전체를 움직이는 원동력이므로, 오직 그들만이 경제를 멈출 힘을 가지고 있다. 물론 이는, 자본주의를 종식시키는 것이 트랜스 억압의 모든 사례도 즉각적으로 종식시킬 것이라는 뜻이 아니다. 그러나 연속혁명 이론이 보여주듯이, 사회주의의 수립은 트랜스 해방을 위한 필수적인 전제 조건이다. 그러나 우리가 “노동계급”이라고 말할 때,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분명히 강조하고 또 강조해야 한다. 오랫동안 노동계급은 안전모를 쓴 시스이성애자 백인 남성이라는 이미지로 그려져 왔다. 물론 그 남성들도 노동계급이지만, 웨이터와 성노동자, 교사, 택배 기사, 개인 비서, 그리고 온갖 직종에서 일하는 사람들, 즉 우리가 전통적으로 “노동계급”이라고 생각할 때 떠올리지 않을 수도 있는 사람들 역시 노동계급이다. 게다가 미국의 노동계급은 인종적 측면은 물론 젠더와 성적지향의 측면에서도 그 어느 때보다 다양해졌다. 트랜스젠더와 퀴어의 압도적 다수는 노동계급에 속한다. 따라서 우리가 “노동계급이 특히 더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킬 것”이라고 말할 때, 이는 백인 구세주들이 가난하고 억압받는 대중을 구하러 날아와 구원한다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가난하고 억압받는 대중이 스스로 일어나, 노동자로서의 자신의 지위를 활용하여, 스스로를 해방시킬 것이라는 의미다. 이 점을 보여주는 가장 훌륭한 사례 중 하나는 아르헨티나의 마디그라프(Madygraf) 공장에서 시스젠더 노동자들이 트랜스젠더 동료의 더 나은 근무 조건을 요구하며 파업에 돌입했던 사건이다. 그 파업은 마디그라프에서 진행 중이던 운동의 핵심적인 부분이었으며, 결국 노동자들은 공장을 점거했다. 오늘날까지도 그 공장은 노동자 소유로 운영되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이에 대해 공상적인 환상을 품고, 언젠가 노동계급이 트랜스포괄적인 혁명적 강령을 가지고 깨어날 것이라고 가정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우리는 트랜스 해방에 대한 사회주의적 관점에서 가장 시급한 필요 중 하나를 매우 명확히 인식해야한다. 바로 급진적이고 혁명적인 지도력(leadership)이다. 이러한 지도력은 노동계급과 특히 억압받는 이들로부터 건설되어야 하는 전위당(vanguard party) 형태를 띠며, 이 당은 혁명의 순간을 위해 구체적으로 스스로를 준비해야 한다. 트로츠키의 말처럼, 혁명은 하늘에서 떨어지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조직된 당만이 수행할 수 있는 준비 작업이 승패를 가를 것이다. 물론 이는 당연히 전위당의 당원들이 혁명을 기다리며 한가롭게 손가락만 비비고 있어야 한다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그들은 자신의 작업장과 지역사회에서 투쟁에 참여하며, 끊임없이 반자본주의적 관점을 위해 싸우고, 운동이 억압받는 이들의 요구를 받아들일 것을 요구해야 한다. 트랜스 해방을 위한 투쟁은 자본주의를 종식시키기 위한 투쟁이다. 오직 자본주의의 몰락과 사회주의 사회의 도래만이 트랜스 민중들을 해방시키고 우리가 삶을 온전히 누릴 수 있게 할 것이다. 2021년 6월 6일 Left Voice에 게재된 기사를 번역함. 글쓴이: 시빌 데이비스 번역: 돌멩 [1] 성(sex)은 태어날 때 부여받는 생물학적 특성이다. 이를 이해하는 한 가지 방법은 성을 대략 네 가지로 구분하는 것이다: 음경이 있는 사람, 질이 있는 사람, 둘 다 있는 사람, 그리고 둘 다 없는 사람이다. 반면 젠더(gender)는 개인적 정체성, 사회적 관계, 외모가 복합적으로 작용하는 더 복잡한 사회정치적 과정입니다. 젠더를 결정하는 과정이 이토록 복잡하기 때문에, 사람이 될 수 있는 젠더의 수는 사실상 무한하다. [2] John D’Emilio, “Capitalism and Gay Identity,” in Powers of Desire: The Politics of Sexuality, ed. Ann Barr Snitow, Christine Stansell, and Sharon Thompson (New York: Aakar Books, 2009), 100–113. [3] John M. Sloop, Disciplining Gender: Rhetorics of Sex Identity in Contemporary U.S. Culture (Amherst: University of Massachusetts, 2004.) [4] 역주: 영국의 마르크스-레닌주의 조직을 표방하던 레드 파이트백은 2020년에 『마르크스주의와 트랜스 해방: 영국 좌파 내 트랜스혐오에 맞서다』라는 책을 썼다. 저자가 인용한 영국공산당의 구절은 레드 파이트백의 주장을 ‘의학적 음모’를 주장하는 것이라며 비꼬고 있다. 레드 파이트백은 현재는 조직 내부 균열로 해체된 것으로 보인다. [5] Ciara Cremin, Man Made Woman: The Dialectics of Cross-Dressing (London: Pluto Press, 2017). /* 스크롤 여백만 주고, 화면에는 안 보이게 */ .ftn-target { display: inline-block; /* 줄바꿈 안 생김 */ width: 0; height: 0; scroll-margin-top: 200px; } document.addEventListener("DOMContentLoaded", function () { // name="_ftn1", name="_ftn2", name="_ftnref1" ... 전부 대상 document.querySelectorAll('a[name^="_ftn"]').forEach(function(a) { var idValue = a.getAttribute("name"); // 이미 같은 id의 요소가 있으면 또 만들지 않음 if (!document.getElementById(idValue)) { var span = document.createElement("span"); span.id = idValue; span.className = "ftn-target"; a.parentNode.insertBefore(span, a); } }); }); /* 본문 각주 번호 + 아래쪽 각주 번호 색 지정 */ a[href^="#_ftn"] sup, a[href^="#_ftnref"] sup { color: #BF202D; } /* 밑줄이 보기 싫으면 */ a[href^="#_ftn"], a[href^="#_ftnref"] { text-decoration: none; } /* 마우스 올렸을 때 살짝만 강조하고 싶으면 (선택) */ a[href^="#_ftn"]:hover, a[href^="#_ftnref"]:hover { text-decoration: underline; } /* 페이지 전체가 오른쪽으로 넘치지 않게 */ html, body { max-width: 100%; overflow-x: hidden; } /* 본문 영역 폭 강제 고정 + 긴 단어/문장도 줄바꿈 */ #bo_v_con, .bo_v_con, .cke_editable, article { max-width: 100%; overflow-wrap: break-word; word-wrap: break-word; /* 구형 브라우저용 */ } /* 워드에서 붙은 이미지/표가 화면 밖으로 안 나가게 */ #bo_v_con img, #bo_v_con table, .bo_v_con img, .bo_v_con table, .cke_editable img, .cke_editable table, article img, article table { max-width: 100% !important; height: auto; } /* 워드가 p, span에 폭을 박아놓은 경우 강제로 해제 */ #bo_v_con p[style*="width"], #bo_v_con span[style*="width"], .bo_v_con p[style*="width"], .bo_v_con span[style*="width"], .cke_editable p[style*="width"], .cke_editable span[style*="width"], article p[style*="width"], article span[style*="width"] { width: auto !important; max-width: 100% !important; } /* 기본 blockquote 스타일 */ blockquote { border-left: 4px solid #c0392b; /* 사이트 분위기와 맞는 붉은 계열 */ padding: 12px 18px; margin: 20px 0; background: #fafafa; font-style: normal; color: #333; line-height: 1.6; } /* blockquote 안의 p 태그 정렬 */ blockquote p { margin: 0 0 10px 0; text-align: justify; } /* 마지막 p 태그 여백 제거 */ blockquote p:last-child { margin-bottom: 0; } /* 본문 안 링크 스타일 */ #gpt-article a { color: #cc0000 !important; text-decoration: none !important; } #gpt-article a:hover { color: #990000 !important; } // https://로 시작하는 링크만 target="_blank" 적용 document.addEventListener("DOMContentLoaded", function () { const links = document.querySelectorAll('#gpt-article a[href^="https://"]'); links.forEach(link => { link.setAttribute("target", "_blank"); link.setAttribute("rel", "noopener noreferrer"); }); }); -
[번역] ICE반대운동을 이끄는 디트로이트 ‘민중총회’디트로이트에서 수백 명이 모인 ‘민중 총회(People's Assembly)’가 결성되어 이민세관단속국(ICE)과 트럼프 행정부에 맞설 전략을 토론하고 행동에 나서고 있다. 이들이 보여 준 민주적·독립적인 자기조직화 모델은 다른 도시에서도 본받을 만한 유용한 사례다. 트럼프 행정부의 이민자 공동체 공격이 갈수록 거세지면서, 전국 각지의 주민들은 어떻게 이웃을 지켜낼지, 어떻게 ICE의 단속에 맞서 방어할지 자문하고 있다. 교사, 간호사, 동네 주민들은 ICE가 들이닥칠 때 어떻게 대응할지 논의하기 위해 위원회를 꾸리고 있다. 학생들은 반ICE 집회에서 ‘권리 알기’(Know Your Rights) 전단지를 돌린다. 시카고에서는 ICE가 학교에 진입하려 한다고 판단한 교사들이 그들의 출입을 금지했다. 시카고 교원 노조는 이민 단속에 협조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표명하고 ‘생추어리 팀(sanctuary teams)’을 만들어 ICE 대응 체계를 구축했으며, 학생들을 보호하기 위해 학교 앞 집회 참여자들이 다 함께 학교로 걸어 들어가는 워크인(walk-in)에 동참해 줄 것을 호소했다. 세인트루이스와 인디애나폴리스에서 댈러스와 LA에 이르기까지 대규모 반ICE 집회가 잇따랐다. 이런 저항과 항의 행동이 중요한 까닭은, 반동 정치가 아직 이 나라를 통째로 삼키지는 못했다는 분명한 신호이기 때문이다. 트럼프가 끊임없는 행정 조치로 우리를 짓누르려 들지만, 평범한 사람들은 스스로를 조직해 맞받아칠 길을 찾아내고 있다. 디트로이트에서는 수백 명이 모여 ICE에 어떻게 맞설지 논의하는 ‘민중 총회’(People’s Assembly)를 결성했다. 이 자리에는 이민자, 교사, 학생, 각계각층의 노동자, 다양한 좌파 그룹이 함께했다. 이들은 ICE를 어떻게 밀어낼 것인가를 두고 여러 전략을 토론한 끝에 행동에 나서기로 결정했다. 그 후로 수백 명이 계속 모여서 합의된 전략과 전술들을 민주적인 방식으로 실행에 옮기고 있다. 이 공동전선 성격의 총회는 자기조직화가 실제로 작동하고 있음을 보여 주는 중요한 사례다. 이 경험에서 무엇보다 주목할 만한 점은 총회의 민주적이고 독립적인 성격을 지키기 위해 헌신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이다. 이들은 좌파, 노동조합 운동, 공동체 세력이라는 서로 다른 경향을 하나로 묶는 일의 힘을 이해할 뿐 아니라, 그 힘이 지속되려면 운동이 스스로 힘을 통제해야 한다는 점까지 알고 있다. 우리는 민주당과 그들에게 종속된 제도권 비영리 단체 관료 및 노조 관료들의 포섭 전술을 경계하고 그에 맞서야 한다. 지금 토론 중인 핵심 사안 중 하나는 ICE와 트럼프 행정부에 맞설 구체적 전략을 어떻게 발전시킬 것인가이다. 단속이 벌어질 때 활동가들을 신속하게 소집하는 대응 네트워크를 어떻게 꾸릴 것인가, 광범위한 정치 투쟁을 통해 예방에 주력할 것인가, 사람들이 자기 일터에서 조직될 수 있도록 어떻게 도울 것인가, 트럼프 행정부가 부추기는 공포의 문화와 서사에 맞서 선전과 정치 교육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 등이 문제다. 이 총회의 인상적인 특징 중 하나는, 정치적으로 조율하여 여러 전략을 동시에 실행하기 위해 다수의 실행 그룹을 만들어 냈다는 점이다. 이는 토론 자체가 민주적이고 열려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ICE가 우리 공동체에서 누군가를 끌어내려 할 때 이에 맞서기 위해 가능한 한 많은 사람을 모을 방법을 모색하는 것은 절대적으로 중요하다. 그러나 우리는 전술적으로는 유연하되, 민중의 저항과 대응을 지원하고 그 역량을 키우는 데 전략적으로 집중해야 한다. ICE를 감시하는 순찰대에만 집중할 것이 아니라, ICE에 맞선 집단적 대응을 스스로 조직하는 노동자와 공동체 구성원들을 전략적으로 뒷받침하고 그들의 힘을 키워 주는 방향으로 우리의 노력을 쏟아야 한다. 이것의 한 예가 바로 교사들이 학교에서 만들고 있는 생추어리 팀이다. 교사들의 사례는 병원과 그 밖의 일터에도 널리 알려져야 한다. 이런 위원회를 어떤 모습으로 구성할 수 있고 또 어떻게 만들 수 있는지에 관해서, 한 고등학교 교사와 한 임상의의 설명이 최근 『레프트보이스』에 실렸다. 또한 운동은 공동체가 ICE에 대한 집단적 대응을 함께 구체화할 수 있는 장소로서의 지역 총회(neighborhood assemblies)를 적극 홍보해야 한다. 단속이 벌어질 때 1선 방어선은 언제나 그 현장에 있는 사람들, 말하자면 이웃, 동료, 학교 직원, 병원 직원, 교회 신자들이다. ICE가 들이닥치면 우리 모두가 대응할 책임이 있다. 예를 들어 어느 식당이 단속을 앞두고 문을 걸어 잠그면, 이 식당은 함께 나서서 자신을 지지해 줄 공동체를 필요로 한다. “민중 총회”는 바로 이렇게 서로 다른 집단이 한자리에서 조율하는 장이 되어야 하며, 그래야만 ICE에 가장 큰 타격을 입고 그에 맞서 싸우는 이들의 요구를 더 광범위한 운동이 더 구체적으로 뒷받침할 수 있다. 일부 학교와 병원 행정처는 본인이 미등록 이주민이거나 미등록 가족을 둔 학생을 지지한다고 나서기도 한다. 이 같은 노력도 뒷받침되어야 한다. 하지만 우리는 사장과 선출직 공직자들이 움직이기를 마냥 기다리거나 거기에 기댈 수 없다. 결국 학생, 환자, 이웃의 안전을 지키는 최전선은 다름 아닌 일선 직원들이다. 당신이 ICE의 표적이 될 위험이 있는 이들과 같은 일터에서 일한다면, 사장이 입을 열 때까지 기다리지 말자! 동료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ICE가 문을 두드릴 때 어떻게 할지 계획을 세우자. 동료들이 다 함께 입장을 밝히는 공동 성명을 작성하자. 다른 일터와 손을 맞잡고 민중 총회에 함께하자. 거듭 강조하지만, ICE를 밀어내고 우리 공동체를 안전하게 지키는 싸움은 여러 층위가 얽힌 투쟁이고, 전국 각지에서 시기와 장소에 따라 그 양상을 달리한다. 그러나 절대적으로 중요한 것은 거리에서, 학교에서, 우리의 일터에서 대중 운동과 집단 행동이 펼쳐져야 한다는 것이다. 예전에 피하지 못했던 함정을 피하는 것도 중요하다. 절박한 마음이 짙어지고 당장 행동해야 한다는 압박이 거센 지금과 같은 시기에는 ‘효율’을 극대화한다는 명목으로 토론을 건너뛰고 행정적 구조나 막후 조직을 세우고 싶은 유혹이 강하게 작용한다. 하지만 이런 발상이 놓치는 것은, 대중 총회와 노동자 위원회의 힘이 민주적 과정을 통해 쌓인 신뢰와 동의에서 비롯된다는 사실이다. 이 길은 더디고 어수선할지도 모르지만 바로 이 지점에서 힘이 생겨나며, 이 힘이야말로 가장 많은 사람들이 운동의 주인이 되고 총회의 결정을 직접 실행하게 만드는 주체성의 토대가 된다. 따라서 활동가와 조직가들은 무엇이든 ‘시스템화’하려는 본능에 저항해야 한다. 그렇다고 해서 구조나 절차 자체를 내다 버려야 한다는 말은 아니다. 그러나 이런 방법을 민주적 과정을 건너뛰기 위한 ‘지름길’로 써먹는 순간, 우리는 정작 위원회나 총회가 가진 잠재력의 발목을 잡게 된다. 우리는 새롭게 등장한 사람들을 진행 중인 운동에 끼워 넣을 부속품 정도로 여기는 본능에서도 벗어나야 한다. 오히려 새로운 모임 자체를 활동가들이 참여하고 있는 하나의 독자적인 단위로 대해야 한다. 이민자를 향한 공격에 새로운 입법으로 응수하자는 압력도 만만치 않다. 이민자의 권리를 제도적으로 다지기 위한 입법 조치는 분명 중요하다. 이민자를 지지한다고 자처하는 지방 정부와 주 정부는 말뿐 아니라 행동으로 보호 입법을 통과시키고 ICE에 맞서야 한다. 그러나 지금까지 그런 입법 활동조차 없는 민주당 의원들에게 우리의 희망을 걸 수는 없다. 더 중요한 점은, 의원들에게 전화를 거는 방향으로 운동을 전환하는 순간 우리의 힘은 거리에서 멀어진다는 사실이다. 안타깝지만 ICE도, 그리고 지금 이 순간 위험에 처한 우리 이웃들도 다름 아닌 거리에 있다. 다시 말하건대 디트로이트 민중 총회의 사례는 전국 각지의 운동이 발전시켜 나가야 할 값진 경험이다. 계급 독립성을 위해 싸우는 자기조직화 단위들을 통해서만 우리는 운동을 강화할 수 있고 포섭으로부터 지켜낼 수 있다. 2025년 2월 7일 Left Voice에 게재된 기사를 번역함. 글쓴이: Brian H. Silverstein and Tristan Taylor 번역: 강성윤 /* 스크롤 여백만 주고, 화면에는 안 보이게 */ .ftn-target { display: inline-block; /* 줄바꿈 안 생김 */ width: 0; height: 0; scroll-margin-top: 200px; } document.addEventListener("DOMContentLoaded", function () { // name="_ftn1", name="_ftn2", name="_ftnref1" ... 전부 대상 document.querySelectorAll('a[name^="_ftn"]').forEach(function(a) { var idValue = a.getAttribute("name"); // 이미 같은 id의 요소가 있으면 또 만들지 않음 if (!document.getElementById(idValue)) { var span = document.createElement("span"); span.id = idValue; span.className = "ftn-target"; a.parentNode.insertBefore(span, a); } }); }); /* 본문 각주 번호 + 아래쪽 각주 번호 색 지정 */ a[href^="#_ftn"] sup, a[href^="#_ftnref"] sup { color: #BF202D; } /* 밑줄이 보기 싫으면 */ a[href^="#_ftn"], a[href^="#_ftnref"] { text-decoration: none; } /* 마우스 올렸을 때 살짝만 강조하고 싶으면 (선택) */ a[href^="#_ftn"]:hover, a[href^="#_ftnref"]:hover { text-decoration: underline; } /* 페이지 전체가 오른쪽으로 넘치지 않게 */ html, body { max-width: 100%; overflow-x: hidden; } /* 본문 영역 폭 강제 고정 + 긴 단어/문장도 줄바꿈 */ #bo_v_con, .bo_v_con, .cke_editable, article { max-width: 100%; overflow-wrap: break-word; word-wrap: break-word; /* 구형 브라우저용 */ } /* 워드에서 붙은 이미지/표가 화면 밖으로 안 나가게 */ #bo_v_con img, #bo_v_con table, .bo_v_con img, .bo_v_con table, .cke_editable img, .cke_editable table, article img, article table { max-width: 100% !important; height: auto; } /* 워드가 p, span에 폭을 박아놓은 경우 강제로 해제 */ #bo_v_con p[style*="width"], #bo_v_con span[style*="width"], .bo_v_con p[style*="width"], .bo_v_con span[style*="width"], .cke_editable p[style*="width"], .cke_editable span[style*="width"], article p[style*="width"], article span[style*="width"] { width: auto !important; max-width: 100% !important; } /* 기본 blockquote 스타일 */ blockquote { border-left: 4px solid #c0392b; /* 사이트 분위기와 맞는 붉은 계열 */ padding: 12px 18px; margin: 20px 0; background: #fafafa; font-style: normal; color: #333; line-height: 1.6; } /* blockquote 안의 p 태그 정렬 */ blockquote p { margin: 0 0 10px 0; text-align: justify; } /* 마지막 p 태그 여백 제거 */ blockquote p:last-child { margin-bottom: 0; } /* 본문 안 링크 스타일 */ #gpt-article a { color: #cc0000 !important; text-decoration: none !important; } #gpt-article a:hover { color: #990000 !important; } // https://로 시작하는 링크만 target="_blank" 적용 document.addEventListener("DOMContentLoaded", function () { const links = document.querySelectorAll('#gpt-article a[href^="https://"]'); links.forEach(link => { link.setAttribute("target", "_blank"); link.setAttribute("rel", "noopener noreferrer"); }); }); -
613 발전노동자 대행진, 무엇을 내걸고 어떻게 싸울 것인가1. 들어가며 기후위기 대응을 명목으로 한 석탄화력발전소 폐쇄가 본격화되었다. 현재까지 서천 1·2호기, 영동 1·2호기, 보령 1·2호기, 삼천포 1·2호기, 태안 1호기가 폐쇄되었다. 2026년 태안 2호기·하동 1호기·보령 5호기 폐쇄가 예고 되었지만, 대체 발전소 건설 지연이나 중동전쟁 등을 이유로 순연된 상황이다. 11차 전력수급기본계획(2025.02)에 따르면, 2038년까지 태안과 당진, 하동 1~6호기, 보령 5·6호기, 삼천포 3~6호기, 동해와 영흥 1·2호기 등 총 37기를 폐지하고 LNG 발전소로 전환하겠다고 하고 있다. 시기는 상이할 수 있으나, 발전소의 순차적·단계적·일방적 폐쇄 국면은 지속될 예정이다. 자본의 시간표는 매우 빠르고 또 일방적이다. 자본은 기후위기를 해결할 수 있을 것처럼 굴지만, 노동자에게 그 책임과 비용을 전가한다. 석탄화력발전소 폐쇄와 전기차로의 전환 등은 매우 빠르게 추진되고 있지만, 이윤 극대화를 위한 다단계 하도급 구조와 불안정한 노동 환경은 여전히 공고하다. 발전소 폐쇄 국면, 노동자들은 “석탄화력발전소는 멈춰도 우리 삶은 멈출 수 없다,”라는 기치 아래 여러 투쟁을 이어왔다. “414기후정의파업”(2023), “정의로운 전환을 위한 330 충남노동자 행진(2024)”, “발전HPS지부 파업 투쟁”(2024), “정의로운 전환을 위한 531 대행진(2025), “고(故) 김충현 비정규직 노동자 중대재해 대응 투쟁”(2025) 등이 그 예시다. 그 결과 매년 9월 기후정의행진에는 “공공재생에너지로의 전환, 발전 노동자 총고용보장”이 핵심 요구안으로 제시되고 있다. 작년에는 공공재생에너지법 5만 입법 청원이 성사되기도 했다. 그리고 올해 6월 13일, 경남도청이 있는 창원에서, 발전노동자 총고용 보장과 공공재생에너지 전환을 내걸고 발전노동자 대행진이 조직되고 있다. 여기서는 석탄화력발전소 폐쇄 과정과 반복되는 발전소 노동자의 중대재해가 드러낸 다단계 원하청의 구조를 살펴본다. 이는 결국 비용 절감과 이윤 확보만을 핵심 목표로 작동하는 자본주의가 만든 결과임을 다시 확인하고자 한다. 원청교섭 쟁취 국면에서 613 대행진을 위치지어야 할 필요 역시 강조하고자 한다. 2. “저들의 계획 속에 너와 나의 미랜 없지” 석탄화력발전소 폐쇄 흐름은 순차적이고 연속적이다. 특정 시기에 모든 호기를 한 번에 폐기하는 것이 아니라, 한 발전소의 일부씩을 꾸준히, 수년간 폐쇄한다. 고용불안과 해고의 결과는 당연히 누적되겠지만, 동시에 이를 노동자들이 피할 수 없는 현실로 수용하게 할 우려도 크다. 예를 들어 "이번에 몇 호기가 폐쇄되지만, 나는 다행히 해당하지 않는다."라는 식으로 안도하면서, 노동자들을 개별적이고 수동적인 위치에 머물게 할 가능성이 크다. 또한 발전소 폐쇄 흐름은 그 자체로 매우 일방적이다. 석탄화력발전소 폐쇄 일정 및 대체 건설 계획과 전망을, 소수의 국가 관료가 “전력수급기본계획”이라는 이름으로 밀어붙이고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저들의 계획 속에 너와 나의 미랜 없지.”라는 한 민중가요의 가사가 현 상황을 정확히 보여준다. 노동자들은 철저히 배제되었고, 변화에 적응할 여지조차 없었다. [그림 1] 전쟁, 대체건설 등의 명목으로 일방 순연된 발전소 폐쇄의 시간표 정부입장은 뚜렷하다. 첫째, 정부는 석탄화력발전소 폐쇄에 따라 발생하는 유휴 인력을 한편으론 과소평가하면서도[1] 마지못해 인정하고 있다. 당시 산업통상자원부의 보고서(2021)[2]에 따르면 석탄화력발전소가 폐쇄되고 LNG 발전소로 전환되는 과정에서 약 5,000명의 전환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있다. 둘째, 발전소 폐쇄가 되더라도 발전소 내외부로 전환 배치가 될 것이란 기만을 펼치고 있다. 2025년 10월 태안화력발전소를 방문한 김성환 기후부 장관의 발언이 이를 대표적으로 드러낸다. 당시 김성환 장관은 태안 석탄화력발전소 1호기 폐지를 “기후위기에 대응한 녹색 대전환의 신호탄”이라고 평가하며 1호기 노동자 129명 전원을 다른 사업장으로 전환 배치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하지만 이는 임시적인 처방에 불과할 뿐 아니라, 발전소 대부분이 부족한 인원 속에서 정년퇴직자 재계약을 통해 버티고 있는 상황을 무시한 발언이다. 더욱이 2026년부터 폐쇄 예정인 다른 호기들의 인력 재배치 방안을 전혀 고민하지 않고 있다. 셋째, LNG뿐 아니라 풍력 및 태양광 같은 재생에너지 투자와 개발을 공공부문이 주도하고 이를 통해 창출되는 일자리에 노동자들을 전환 배치해야 한다는 요구에 정부는 민간 기업과의 경쟁이나 공정거래법 위반 가능성을 이유로 반대하거나 수동적으로 대응하고 있다. 에너지 생산과 분배에 대한 결정권을 틀어진 자본과 정부는 이윤만을 위해 파괴적 생산을 몰아붙이고 있다. 이미 동서, 서부, 남부발전은 "미래 먹거리 반도체 산업"을 위한 LNG 발전소 건설 입찰에 뛰어들었다. 제반 비용은 국가와 지자체가 부담하는 반면 세제 혜택과 보조금 등의 혜택은 SK나 삼성 같은 기업에 집중되어 재벌 특혜의 성격을 띠는, 그 자체로도 막대한 물과 전기를 소비하는 그 클러스터에 말이다. 3. 반복되는 발전소 비정규직 노동자의 죽음이 드러낸 발전소 위험 현장 발전소 노동자들의 작업복은 상이하다. 꾸준했던 민영화와 외주화로 인한 결과다. 노동자들의 작업복에 적힌 회사명도 다르고 운영 인원 자체도 매우 적다. 형식적·징벌적 안전 체계는 마련되어 있지만, 부족한 인원과 쪼개진 고용 형태는 강한 노동강도와 위험 환경으로 노동자를 내몰고 있다. 그 결과 발전소는 중대재해와 산업재해가 반복되는 일터가 되었다. 2025년 6월 2일, 서부발전 태안화력발전소에서 선반 작업을 하던 김충현 비정규직 노동자가 사망했다. 그가 작업하던 선반에 방호덮개는 설치되지 않았다. 2018년 컨베이어벨트에 감겨 사망한 김용균 노동자의 중대재해 이후 태안화력발전소의 컨베이어벨트에는 근접 작업 예방을 위한 방호 장치가 빠짐없이 설치되었지만, 감김 사고가 발생하는 선반 전체에 대해서는 어떠한 안전장치도 마련되지 않았다. 그 와중에 TBM(Tool Box Meeting, 작업 전 안전 점검 회의) 이나 위험성 평가 등 안전보건 관리 체계는 매우 형식적, 징벌적으로 운영되고 있었다. 도급계약이라지만 원청 한전KPS의 구두 작업 지시는 일상이었고, 하청의 하청으로 내려갈수록 위험한 작업이 전가되며 음지화되었다. 2018년 12월 김용균 노동자의 죽음 이후에도 발전소 중대재해는 반복되고 있다. 2026년에만 벌써 두 건이 발생했다.[3] 쪼개기 계약으로 인한 인원의 부족, 위험의 전가, 사업주 책임 공백의 결과를 그대로 반영하듯, 사망자 절대다수는 하청 비정규직 노동자였다. 특히 올해 3월 23일 영덕 풍력발전소에서 발생한 화재 참사는 다단계 하청 구조 아래에서 중대재해가 발전소 유형에 국한되지 않음을 여실히 드러냈다. 당시 사망자들은 모두 운영사인 ㈜영덕풍력발전에 고용되어 있지 않았다. 3명 모두 유지보수를 담당하는 외부 위탁업체 소속이었고, 이중 2명은 계약직(일용직) 노동자였다. 당시 작업 현장에 원청인 ㈜영덕풍력발전 소속 직원은 없었다. 육상 풍력발전소 시공을 했던 회사(유니슨)와도 직접적인 관련이 없었다. 석탄화력발전소 폐쇄되고 모든 노동자가 재생에너지 일자리로 전환된다 하더라도, 그 전환될 일자리가 불안정하면 안 된다는 점을 뼈아프게 보여준 사례기도 하다. 한편, 발전소가 곧 문을 닫는다는 명분은, 필요 인력을 충원하지 않는 명분으로 활용되고 있었다. 일례로 고(故) 김충현 비정규직 노동자가 속해있던 하청업체 ㈜한국파워O&M의 정원은 27명이지만, 현재 25명만 일하고 있다. 정원에도 미달하는 적은 수의 노동자가 불안정하게 일한다는 점은 사고의 위험을 높일 수밖에 없다. 이처럼 발전소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죽음은 이러한 쪼개기 계약 구조를, 설비나 안전 관련 문제가 있어도 의견을 개진하지 못하게 하는 구조를 여실히 드러냈다. 이는 고(故) 김충현 사망사고 이후 구성된 정부와의 협의체 (“고 김충현 사망사고 재발방지를 위한 발전산업 고용안전 협의체”, 이하 협의체) 주관으로 17,000여 명의 발전소 노동자를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2025) 결과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발전 공기업에 비해 1차 협력업체 노동자들의 경우 3.73배, 2차 협력업체 노동자들의 경우 3.86배 더 많은 업무 중 사고를 경험했다고 응답했다. 또한 사고가 발생해도 보고하지 않았다고 응답한 경우가 32.3%로 상당히 높았으며, 특히 발전 공기업(40.2%), 1차 하청업체(31.6%), 2차 하청업체(42.2%) 노동자에서 두드러졌다. 이는 현장에서 위험을 자유롭게 발언하고 개선하기 어려운 분위기가 조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위험을 느껴 작업을 멈추면 계약이 끊길까 봐 두렵다"라고, "그래서 작업을 계속 진행하게 된다"라는 한 하청 노동자의 말은 이러한 상황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또한 원하청 등 위계화된 고용구조가 발전소 폐쇄 흐름에서 더욱 극적으로 작동한다는 점은 이미 알려져 있다. 심지어 노동부도 "(발전소 폐쇄 국면) 인력 감축은 발전공기업에서는 발생하지 않았고, 특히 협력업체(특히 2차)와 자회사 중심으로 발생. 발전공기업 – 자회사 - 1차 협력사 - 2차 협력사(때론 3차까지 포함) 등으로 중층화된 발전사의 고용구조는 석탄화력발전소 폐쇄에 따른 고용 충격의 차별성으로 이어짐"[4]이라며, 이를 인정하고 있다. 실제로 그동안 폐쇄된 석탄화력발전소 8기에서 일하던 정규직 601명은 전원 재배치됐지만, 하청 노동자 667명 중 39명은 일자리를 잃었다. 발전소 폐쇄로 인해 노동자들이 겪어야 하는 고용불안은 현재진행형이다. 앞서 언급한 협의체 설문조사에 따르면, 2차 하청 노동자의 68.1%가 현재 고용불안을 느낀다고 답변했다. 발전소 폐쇄가 예정되어 있기 때문이라는 점이 44.7%로 가장 높은 비중을 차지했다. 또한 발전소 폐쇄 이후 본인의 고용을 유지하지 못할 거라는 답변이 자회사 66.4%, 1차 협력업체 85.8%, 2차 협력업체 89%로 매우 높았다. 실제로 1년 단위로 재계약을 반복해 온 발전소 하청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경우, 폐쇄가 곧 회사 정원의 감소를 의미한다고 인식하고 있다. “서로 눈치만 보는 거야. 누가 먼저 나가는지. 이게 어떻게 보면 잔인하죠. 같이 일했던 사람끼리 싸움 붙이는 거”라는 한전KPS 하청 노동자의 발언은, 발전소 폐쇄가 노동자 내부의 의자 뺏기 싸움을 유도할 수 있단 우려를 정확하게 표현하고 있다. 고용불안은 단순히 불안감으로 그치지 않는다. 쌍용자동차 정리해고로 인해 수십 명의 노동자들이 죽음으로 내몰렸던 사례, 한국GM 공장 폐쇄로 2명의 노동자가 죽음으로 내몰렸던 사례, 폐쇄를 앞둔 삼천포발전소 노동자의 자살 사례 등, 일방적 폐쇄와 해고가 노동자를 (가장 극적인 형태인) 죽음으로 내몰았던 사례를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앞서 발전소 폐쇄가 만성적, 순차적, 일방적 성격을 가지며, 이로 인한 불안과 해고는 누적된다고 언급한 바 있다. 이미 폐쇄를 경험한 주체들이 확인되고 있다. 예를 들어 보령발전소의 경우 2026년 6월 30일과 12월 30일 폐쇄가 예고된 상황에서 (그 일정이 변경되었더라도) 인원이 절반으로 줄어들게 되면, 그 대상이 본인들이 될 수 있단 있다는 불안감이 현장에 상존하고 있었다. 발전 5사 등 원청은 하청 노동자에 대해 자기는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면서 책임을 지고 있지 않다.[5] 당진 1호기 폐쇄를 경험한 당진발전소 노동자들의 경우 언더-티오로 2~3년째 유지되고 있다. 호남발전소 폐쇄 당시 하청 노동자들은 개별 자구책을 모색해야 했고, 그중 일부는 여수발전소의 2차 하청 노동자로 들어와 매년 계약을 갱신하며 일하고 있다. 한전KPS 하동사업소의 경우 하청업체 노동자들의 고용 형태를 단기노무원으로 일방적으로 변경했고, 폐쇄를 명목으로 26년 12월 31일까지만 계약 연장하겠다고 한 상황이다. 2024년 발전HPS 지부의 파업 투쟁 결과 지자체와 발전 5사, 노동조합이 참여하는 고용보장 협의체가 구성되었다. 그러나 협의체 논의는 폐쇄 연기와 맞물려 올해 12월로 미뤄진 상황이다. 김영구 발전HPS지부 하동지회장은 폐쇄가 예고되었다가 연기되는 반복되는 상황 속 현장이 "희망고문"과 같은 상태에 놓여있다고 말했다. 이러한 사례들은 고용과 안전을 책임지는 주체가 다층적 구조를 이루고 있는 상황에서, 폐쇄로 인한 대응이 개인적인 자구책 수준으로 축소되는 현실을 여실히 보여준다. 4. 비용 절감 자본주의, 심화하는 기후위기 발전소를 포함, 다단계 하도급 구조는 수많은 현장에 뿌리 깊게 정착했다. 이는 그 자체로 불안정한 노동 형태를 양산해 왔을 뿐 아니라, 노동자들이 위험 작업을 거부하지 못하게 만드는 결과도 초래하고 있다. 일례로 성동조선, 현대중공업의 표준도급계약서(2021)에 따르면, 하청 노동자의 단체행동, 작업거부, 작업 태만으로 원청에 손해를 끼칠 경우 “즉시 계약 해지”를 할 수 있다. 또한 안전관리 등의 벌점 관리에도 중대재해나 산재 은폐로 인한 벌점뿐만 아니라 일반 안전사고(산재)와 작업 중지 건수에도 벌점을 매기고 있기도 하다. 징벌적이고 통제적인 안전이 원·하청 구조에서 강화될 뿐만 아니라, 작업중지권을 포함한 노동권 침해가 ‘계약’을 통해 관행적으로 이어지고 있다는 뜻이며, 이는 하청 노동자에게 작업중지권을 사용하면 위험이 해결될 거라는 기대 대신 불이익이 따라올 거라는 불신을 가져오는 핵심적인 기제다.[6] 케이블 통신 노동자 역시 그렇다. SK브로드밴드의 통신망을 유지, 보수하는 노동자들은 20여 개의 2차 하청업체로 쪼개져 고용되어 있고, 계약을 매년 갱신하고 있다. 이들을 대상으로 한 안전보건 실태 조사에 따르면,[7] 폭염경보가 발현되었음에도 작업을 한다는 응답이 70%에 달했다. 작업 중지를 하지 못한 이유로 절차가 복잡하거나 사측의 보복이 두려워서 행사할 수 없다는 응답이 80%로 압도적이었다. 이처럼 용역, 외주, 아웃소싱, 도급, 사내하청, 파견…. 온갖 불안정 노동 구조의 양산은 이윤만을 위한 자본의 전략이었다. 그 결과 불안정 노동과 사회적 불평등은 심화했다. 다른 한편, 이윤만을 바라보는 자본의 멈출 줄 모르는 과잉 생산은 그 자체로 지구를 파괴해 왔다. 한쪽에서는 경제적 가치가 없다며 대량으로 폐기되는 물품들이 쏟아지지만, 동시에 다른 지역에서는 식량과 물 부족에 시달리고 있다. 새벽배송이니 로켓배송이니 하며 24시간 돌아가는 생산과 소비, 유통 시스템이 구축되었다. 공장식 축산과 반도체 클러스터와 같은 지구 파괴적 산업의 집약화, 비트코인 채굴로 인한 자원 파괴도 일상적이다. 하지만 자본은 기후위기를 초래한 책임은 교묘하게 가린 채, 마치 기후위기의 해결사인 척 행동하고 있다. 정의선 현대차 회장은 친환경 전기차 생산을 통해 미래를 돌파하겠다는 계획을 밝히고 있다. HD 현대건설은 2024년 "기후변화 완화"를 재무적 중대이슈 1위 및 환경 · 사회적 중대이슈 2위로 꼽기도 했다. 이것이 기만이자 일종의 그린워싱임을 우리는 잘 안다. 이윤 창출에 도움이 될 때는 ‘녹색 자본주의’를 이야기할 수도 있겠으나, 자본의 초점은 “기후위기 해결”이 아닌 “이윤 창출”이기 때문이다. 이를 보여주는 사례는 매우 많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취임 첫날 파리 기후협약 재탈퇴를 비롯한 행정명령에 서명했다. 그는 취임 전부터 기후위기를 ‘사기’라고 주장하며 화석연료 생산을 확대하겠다는 공약을 내세웠고 이를 단행했다. 트럼프는 또한 자신의 패권 유지를 위해 스스로 초래한 전쟁 위기를 기후 규제 완화를 위해 활용하고 있다. 2026년 4월 6일, 미국 환경보호청(EPA)은 석유 및 천연가스 채굴 과정에서 발생하는 ‘천연가스 플레어링(Flaring, 가스 연소 배출)’ 규제를 대폭 완화하는 최종안을 발표했다. 강경한 대이란 노선이 호르무즈 해협 봉쇄 위기와 에너지 수급 불안을 심화시켰고, 이를 다시 "미국의 에너지 지배력 강화"라는 명분으로 환경 규제를 철폐하는 근거로 활용하는 것이다. 2025년 초 프리드리히 메르츠 독일 총리는 “조기 총선에서 승리하면 가스 화력발전소 50개를 짓겠다”라고 공언했다. 윤석열 전 대통령은 24년 11월 7일 기자회견에서 “24조 원 규모의 체코 원전 건설 사업 계약이 마무리되면, 원전 산업을 비롯한 우리 산업 전반에도 더 큰 활력이 불어넣어질 것”이라고 말했다. 이재명 현 대통령 역시 고리 2호기 원전 수명연장을 승인했고, ‘현실적’, ‘기술적 한계’ 등의 이유를 들며 온실가스 감축목표를 터무니없이 낮게 설정하고 있다. 가덕도신공항을 비롯한 파괴적 개발도 밀어붙이고 있다. HD 건설이 이스라엘에 수출한 굴착기 등 중장비는 "어떠한 굴착 환경이나 작업조건에서도 최고의 생산성을 약속하며" 10년이 넘는 시간 동안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터전을 파괴하는 데 사용되었다. HD현대를 비롯한 수많은 기업이 이스라엘의 학살을 뒷받침하는 동안 어마어마한 양의 온실가스가 배출되었고, 수많은 팔레스타인 사람이 살해당했으며, 지구생태계는 파괴되었다. 자본주의는 또한 현장 노동자 안전 체계 마련을 비용의 문제로 치부하며 비극을 가속했다. 여기서 멈추지 않고 기후위기와 관련한 책임과 비용을 노동자에게 전가하고 있다. 이윤 생산 체제인 자본주의에서 “무엇을, 얼마나, 어떻게 생산할 것인가.”는 모두 개별 자본이 결정한다. 그리고 이는 매우 기후부정의하다. 앞선 발전소 사례에서 단적으로 확인할 수 있듯, 자본은 비정규직 하청 구조를 활용해 에너지 전환의 책임과 비용을 노동자들에게 떠넘기고 있다. 언제든지 자를 수 있다는 점을 빌미 삼아, 노동자의 협상력과 힘을 봉쇄하려고도 하고 있다. 공동체의 안전보다 이윤 생산을 우선시하는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제기가 필요하다. 우리는 충분히 질문을 던질 수 있다. 석탄화력발전소 폐쇄 후 대체 건설될 발전소는 왜 반도체 클러스터에 투입되어야 하나? 석탄화력발전소의 폐쇄 시점, 노동자의 총고용 보장 및 에너지 전환에 대한 전망을 노동자 스스로 결정하고 집행할 수는 없나? 공백을 최소화하면서 효율적인 대중교통 노선을 우리가 직접 설계하고 운영할 순 없나? 무기 생산에 쓰일 기술력을 의료기기 생산으로 전환할 순 없나? 우리는 위법하고 부당한 생산을 거부하면 안 되나? 결국 자본의 과잉 생산에 제동을 걸고, 사회적 필요에 따른 생산을 조직할 수 있어야 한다. 생산이 주체가 된 노동자가 기후정의를 실현한다는 건 '언제', '어디서', '얼마나' 생산하느냐를 포함해 “왜”, “어떻게”까지 나아갈 수 있을 때 가능하다. 이는 자본 중심의 권력관계가 바뀌어야 한다는 점에서 정치의 문제기도 하며, 자본주의를 넘어서야 가능한 문제기도 하다. 5. 613 대행진을 원청교섭과 사회적 총파업 조직의 교두보로! 상황이 낙관적이지만은 않다. 정부는 정규직 노동자들이 반대한다는 핑계를 대면서 비정규직 정규직화, 위험의 외주화 철폐, 공공재생에너지로의 이행 등의 책임을 의도적으로 회피하고 있다. 불안정 노동의 구조, 위험을 노동자가 말하지 못하는 일터도 여전히 공고하다. 김충현을 비롯한 수많은 노동자의 죽음과 부상, 질병을 반복 목도하는 현실이 아프기도, 또 무력하게 다가오기도 한다. 그럴수록 확고해지는 점들도 있다. 자본과 정부로부터 독립된, 확고한 노동자 투쟁이 필요하다. 정부 논의나 협의체 결과 등을 바라보거나 따라가는 수준으로 우리 역할이 한정될 수 없다. 폐쇄 일정에 시차가 발생하고 분절적 대응 양상이 굳어질수록 힘을 모으기 어렵기에, 원하청 노동자들이 공동으로, 사업장 담벼락을 넘는 활동을 함께 만들어야 한다. 장기적으로 실제 파업을 만들어내고 사회적 힘을 갖게 만들어내야 한다. 어렵더라도 진짜 사장 국가와 발전 5사를 앉혀야 한다. 613 대행진을 비롯한 집회와 투쟁이, 이러한 투쟁을 건설해 가는 데 교두보로서 역할해야 한다. 이러한 기조 아래, 아래를 강조한다. △ 비정규직 철폐가 곧 기후정의다! 현장 안전장치의 미비·노동자 참여권의 박탈· 인력 부족과 강한 노동강도의 강요·반복되는 쪼개기 계약과 만성적 고용불안·위험 작업의 외주화(이주화) 등은 자본의 비용 절감 기조 아래 자행되고 있다. 고용구조의 더 아래로 내려갈수록 위험 작업을 거부하기는 어렵다. 과잉 생산에, 지구에 해로운 생산에 문제 제기하기도 어렵다. 관련된 정보조차 알 수 없는 경우도 허다하다. “노동자들이 현장 통제력을 확보하지 못한 채 자본의 계획에 종속되도록 만드는 이 비정규직 시스템이, 자본의 맹목적 과잉 생산을 막을 수 있는 가능성을 봉쇄”[8]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쪼개지고 불안정한 고용구조가, 기후위기 대응과 완화를 위한 노동자들의 집단적인 활동에 방해로 작동하는 사례 역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특수고용노동자라서 작업중지권 발휘가 어렵다.”, “일용직이라서 안전보다 고용을 신경 쓸 수밖에 없다,” “발전소 폐쇄 등 산업전환 과정에서 특히 하청 노동자들은 심각한 피해를 입는다” 등등. 자본이 노동자를 저비용(저임금) 고위험 노동으로 내몰고, 필요할 때 쓰다가 손쉽게 내버리기 위한 수단으로 활용했던 메커니즘, 과잉·파괴적 생산을 지속시켰던 이러한 구조가 기후위기를 초래한 근본 원인이다. 그렇기에 누구도 배제하지 않는 정의로운 전환은 비정규직 철폐이며, 비정규직 철폐가 곧 기후정의다. 이러한 요구를 내걸고 총노동 차원에서의 싸움을 조직하자. △ 원청교섭 투쟁 국면, 7월 총파업의 교두보로서 613 대행진을 조직하자 오랜 투쟁 끝에 노조법이 개정되었다. 원청교섭을 쟁취하여 진짜 사장을 교섭장에 앉혀야 한다는 투쟁 국면이 열렸다. 개정 노조법에 의하면 직접적인 계약관계가 없더라도 하청 노동자의 노동조건을 실질적‧구체적으로 지배‧결정하고 있다면 원청은 하청 노동자와의 단체교섭에 응해야 한다. 정리해고나 구조조정에 맞서는 파업, 임금체불에 항의하는 파업이 “정당한” 쟁의행위로 인정될 수 있다. 하지만 정부는 시행령 등을 통해 하청노조들의 원청 사용자성에 대한 적법성 입증과 판단부터 교섭 창구 단일화 및 분리 절차[9]등 전체 45일간 절차를 밟도록 강제함으로써 원청자본가들이 교섭을 지연, 회피, 거부할 수 있게 했다. 그 결과 많은 자본은 여전히 자신의 사용자성을 거부하고, 교섭에조차 나오지 않고 있다. 그러나 원청자본가들의 교섭 무력화 시도는 이곳저곳에서 무너지고 있다. 2026년 화물연대본부는 서광석 열사의 죽음을 안고, CU 원청을 교섭장에 끌어냈다. 현대IHL지회도 램프 사업 매각 투쟁을 통해 현대모비스 원청 대표를 합의 주체로 끌어냈다. 이들 사례가 보여준 건 명확하다. △개별사업장 투쟁으로만 머물지 않고 전국과 지역 노동자들의 연대와 공동 투쟁을 조직하면 가능하다는 것 △물류 봉쇄나 10일 넘는 파업을 통해 그들의 이윤이 압박받을 때 움직인다는 것이다. 한전KPS비정규직지회의 경우 한전KPS의 사용자성을 지방노동위원회로부터 인정받았다. 2024년 발전HPS지부는 진짜 사장 한국남부발전을 상대로 파업 투쟁을 전개했고, 소기의 성과를 거뒀다. 발전노동자들도 불가능하지 않다. 이러한 선례들을 조합원들에게 더욱 선전하고 토론해 나가자. 물론 다단계 하청 구조 속 나의 원청을 어디까지 설정할 것인가는 쟁점으로 남아있다. 발전소 폐쇄 국면이기에 더더욱, 발전 5사와 국가가 모든 노동자의 고용과 안전을 일차적으로 책임져야 한다. 수의계약 확보나 고용유지 등의 수세적 요구는 자본의 단계적, 분열적 폐쇄 전략 앞에서 쉽게 무너질 가능성이 크기에, 이를 더욱 강조해야 한다. 민주노총은 2026년 핵심 요구 중 하나를 “원청교섭 원년! 초기업 교섭 돌파”로 결정했다. 올해 정기대의원대회에서도 원청교섭 사업장의 공동 투쟁과 공동 파업을 통해 원청교섭과 7월 총파업의 사회적 파급력을 확대·확장하고, 산별 임단협 투쟁도 총파업 투쟁을 엄호, 지원하는 방향을 결의했다. 금속노조 역시 7 ~ 9월 (원청교섭 사업장 7월 총파업 복무, 8말 9초 총파업) 시기 집중 공동 파업을 원청노조와 공동으로 전개한다고 결의한 바 있다. 613 발전노동자 대행진을 7월 총파업 투쟁을 촉발하는 계기로 활용하자. 대행진을 계기로 만나는 노동자들에게, 7월 위력 있는 총파업을 통한 원청교섭 쟁취 투쟁의 주체가 되자고 조직하고, 설득해 나가자. 발전소 폐쇄 계획도, 발전사 통합 계획도 정의로운 에너지 전환과는 거리가 멀다. 정부의 시간표와 계획에 대응하는 정도를 넘어서자. 이러한 행진과 집회를 전국적으로 조직하여, 현장 노동자의 파업을 넘어 전 사회적인 투쟁으로 확장할 수 있는 기반으로 만들어 나가자. [1] 기후부(산자부)는 발전소 폐쇄에 따른 유휴 인력 수를 계산할 때, 단 한 명도 신규 채용하지 않은, 퇴직자 정원을 메꾸지 않았을 때를 가정한 수치를 제시하기도 했다. [2] “(2034년까지) 폐지되는 30기 인원 모두가 일자리 전환이 되지 않는다고 가정하면, 최대 7,935명의 일자리가 없어질 것으로 추정된다. (중략) 폐쇄되는 석탄발전소 30기 중 24기는 LNG 발전으로 전환되면 7,935명 중 LNG 발전소 필요한 인원은 3,024명에 불과. 일대일 전환을 가정했을 때, 전환 불가 인원은 4,911명” - 산자부 ‘정의로운 에너지 전환을 위한 폐지 석탄발전소 활용 방안 연구’ 용역 보고서, 2021 [3] 2018년 김용균 사망 이후 발전소 사망 현황 (14건 사고 사망, 폐쇄 비관 1명 자살) 1. 2019년 5월 중부발전 신서천화력발전소 37미터 높이 크레인에서 떨어진 부품에 일용노동자(50대)가 맞아 사망 2. 2020년 9월, 서부발전 태안화력발전소 1부두 화물노동자(60대)가 화물차에 적재된 컨베이어스크루장비(석탄하역기)가 떨어지면서 이에 깔려 사망 3. 2020년 11월 28일 남동발전 영흥화력발전소 화물노동자 심장선 씨가 3.5미터 화물차 상부에서 석탄회를 싣다 떨어져 사망 4. 2021년 7월 중부발전 신서천화력발전소 하청 노동자 이**(40대)가 전신 화상 치료 중 사망 (2020년 4월 발전소 공사 현장에서 전기설비 폭발 사고로 화상) 5. 2021년 8월 동서발전 당진화력발전소 3부두 선박, 이산화탄소 용기호스 고체적압을 하던 하청 소속 노동자 4명이 질식, 이중 1명(40대) 사망 ○ 2021년 8월 21일 새벽, 남부발전 부산LNG발전소에서 원청 갑질에 항의하며 투신, 자살 시도 6. 2021년 10월 15일 폐쇄를 앞둔 남동발전 삼천포발전소에서 일하던 하청 노동자(30대) 자살 7. 2022년 3월 폐쇄를 앞둔 남동발전 삼천포발전소에서 하청노동자(40대)가 3호기 보일러 건물 5층에서 추락사고 8. 2022년 7월 21일, 동서발전 당진화력발전소 내 신축공사현장, 40대 노동자 쓰러짐(폭염으로 당시 34도) 9. 2023년 2월 9일, 중부발전 보령발전소, 1부두 하역기에서 낙탄 청소를 하던 하청 노동자 이**(50대)가 15미터 높이에서 발판(그레이팅)이 떨어지며 함께 추락 10. 2023년 11일 중부발전 신서천화력발전소 본관 5층 보일러실 배관에서 밸브가 폭발해 고압 수증기 누출로, 정비작업 중이던 한전KPS 소속 노동자 1명 사망, 중부발전 소속 노동자 2명 중화상 11. 2025년 6월 2일, 서부발전 태안화력 2차 하청노동자 김충현 사망 12. 2025년 7월 28일, 동서발전 동해화력발전소 환경설비개선공사 비계 해체 작업 중 30대 노동자 추락 사망 13. 2025년 11월 6일, 동서발전 울산화력발전소 해체 작업 중 붕괴 사고로 9명의 노동자 매몰. 1명은 HJ중공업의 하도급업체 코리아카코 직원, 8명은 코리아카코의 일용직 14. 2026년 3월 17일, 한전KPS 인도사업소에서 석탄재 저장 호퍼 내부 점검 중 잿더미 매몰로 노동자 1명 사망 15. 2026년 3월 23일, 영덕 풍력발전소 날개 균열 수리 중 화재로 인해 하청업체 노동자 3명이 사망, 이중 2명은 일용직 [4] 산업통상자원부, 고용노동부, “석탄화력발전소 폐지가 고용에 미치는 영향” (2022) [5] 이러한 불안감이 만성화되면서 무뎌지는 분위기 역시 존재했다. [6]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금속노동조합. “금속노조 작업중지권 실태와 과제”(2024) [7] SK브로드밴드 전송망 유지보수 하청노동자 노동안전보건 실태 토론회. 2024.10.16 [8]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기후정의팀 3차 워크숍 토론문 중 [9] 교섭 창구 단일화 대상 확정→자율적 단일화 시도 14일→과반수 노동조합에 의한 단일화→자율적 공동교섭대표단 구성 5일→공동대표단 구성하지 못할 시 노동위원회의 결정→하청노조 사이의 교섭 단위 분리 /* 스크롤 여백만 주고, 화면에는 안 보이게 */ .ftn-target { display: inline-block; /* 줄바꿈 안 생김 */ width: 0; height: 0; scroll-margin-top: 200px; } document.addEventListener("DOMContentLoaded", function () { // name="_ftn1", name="_ftn2", name="_ftnref1" ... 전부 대상 document.querySelectorAll('a[name^="_ftn"]').forEach(function(a) { var idValue = a.getAttribute("name"); // 이미 같은 id의 요소가 있으면 또 만들지 않음 if (!document.getElementById(idValue)) { var span = document.createElement("span"); span.id = idValue; span.className = "ftn-target"; a.parentNode.insertBefore(span, a); } }); }); /* 본문 각주 번호 + 아래쪽 각주 번호 색 지정 */ a[href^="#_ftn"] sup, a[href^="#_ftnref"] sup { color: #BF202D; } /* 밑줄이 보기 싫으면 */ a[href^="#_ftn"], a[href^="#_ftnref"] { text-decoration: none; } /* 마우스 올렸을 때 살짝만 강조하고 싶으면 (선택) */ a[href^="#_ftn"]:hover, a[href^="#_ftnref"]:hover { text-decoration: underline; } /* 페이지 전체가 오른쪽으로 넘치지 않게 */ html, body { max-width: 100%; overflow-x: hidden; } /* 본문 영역 폭 강제 고정 + 긴 단어/문장도 줄바꿈 */ #bo_v_con, .bo_v_con, .cke_editable, article { max-width: 100%; overflow-wrap: break-word; word-wrap: break-word; /* 구형 브라우저용 */ } /* 워드에서 붙은 이미지/표가 화면 밖으로 안 나가게 */ #bo_v_con img, #bo_v_con table, .bo_v_con img, .bo_v_con table, .cke_editable img, .cke_editable table, article img, article table { max-width: 100% !important; height: auto; } /* 워드가 p, span에 폭을 박아놓은 경우 강제로 해제 */ #bo_v_con p[style*="width"], #bo_v_con span[style*="width"], .bo_v_con p[style*="width"], .bo_v_con span[style*="width"], .cke_editable p[style*="width"], .cke_editable span[style*="width"], article p[style*="width"], article span[style*="width"] { width: auto !important; max-width: 100% !important; } /* 기본 blockquote 스타일 */ blockquote { border-left: 4px solid #c0392b; /* 사이트 분위기와 맞는 붉은 계열 */ padding: 12px 18px; margin: 20px 0; background: #fafafa; font-style: normal; color: #333; line-height: 1.6; } /* blockquote 안의 p 태그 정렬 */ blockquote p { margin: 0 0 10px 0; text-align: justify; } /* 마지막 p 태그 여백 제거 */ blockquote p:last-child { margin-bottom: 0; } -
[정세집담회] 613 발전노동자 대행진, 무엇을 내걸고 어떻게 싸울 것인가기후위기 대응을 명목으로 석탄발전소 폐쇄가 본격화하고 있습니다. 정부와 자본이 전력수급기본계획을 앞세워 발전소를 일방적으로 폐쇄한 결과 고용불안은 발전소 노동자들에게 집중됩니다. 김충현 협의체 설문조사(2025) 결과, 발전소 폐쇄 이후 본인이 고용을 유지하지 못할 것이라는 답변은 자회사와 협력업체를 가리지 않고 매우 높았습니다. 발전소 현장 다단계 하청 구조도 여전히 공고합니다. 위험작업은 계속 외주화, 음지화되었습니다. 이는 김충현 노동자의 죽음을 비롯한 발전소 중대재해 재발로 이어집니다. 기후위기 시대, 발전소 노동자들은 공공재생에너지 확대와 총고용 보장을 요구하며 싸우고 있습니다. 2024년 태안 330 발전노동자대행진, 2025년 창원·태안 531 발전노동자대행진에 이어, 올해 6월 13일 창원에서 다시 투쟁을 조직하고 있습니다. 노조법 2·3조가 개정된 지금, ‘진짜 사장’ 국가와 발전 5사에 맞서 모든 노동자 고용보장을 걸고 싸워야 합니다. 나아가 재생에너지 민영화를 막고, 에너지를 얼마나, 어떻게 생산할 것인지 노동자들이 결정해야 합니다. 613 발전노동자대행진을 앞두고, 이러한 투쟁을 함께 만들 방안을 토론해봅시다. - 사회 : 이재백 (발전노조 서부본부장) - 발제 : 조건희 (사회주의를향한전진 투쟁위원회) - 지정토론 : 김영훈 (공공운수노조 한전KPS비정규직지회) - 시간 장소 : 5월 22일 금요일 19시 민주노총 15층(서울 중구 정동길 3) (※온라인 줌 병행) ※아래 첨부파일에서 발제자료를 다운받을 수 있습니다. -
국민배당금 논쟁은 무엇을 드러내는가‘국민배당금’ 제안은 반도체산업 초과이윤이 누구의 것이며 이를 어떻게 통제할 것인가에 관한 논쟁을 촉발했다. 보수세력은 노동자 파업에는 국가 개입을 요구하면서도, 기업 이윤과 주주 권리는 성역으로 놓으며 색깔론 공세를 폈다. 그러나 국민배당금 제안은 다단계 하청구조, 만연한 노동재해, 기후·환경파괴, 반도체산업의 전쟁산업화 경향을 건드리지 않는다. 반도체산업의 막대한 호황 앞에, 우리는 국민국가 내 분배론을 넘어 생산수단 소유와 통제에 대한 문제제기로, 노동자계급의 국제연대로 나아가야 한다. 이른바 국민배당금 제안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한국 자본주의 역사상 유례없는 이윤을 축적하고 있다. 삼성전자는 2026년 1분기 영업이익 약 57조 원, SK하이닉스는 영업이익 37조 원을 기록했다. 이 막대한 이윤은 AI 인프라 구축과 연동된 수요 폭증의 결과다. 일부는 2026년 두 기업이 합산 600조 원에 달하는 영업이익을 올릴 것으로 본다. 이 거대한 이윤은 AI산업의 ‘병목’으로 부각되는 메모리 공급에서 우월한 지위를 점한 결과다. 초기 AI 인프라 투자는 그래픽처리장치(GPU)에 집중되었으나, 최근에는 AI 추론기능 부각에 따라 이를 처리할 메모리 반도체 수요가 폭증하고 있고, 이에 따라 병목, 즉 메모리 반도체 공급 부족과 가격 폭등이 나타나고 있다. 5월 11일, 김용범 청와대 정책실장은 ‘차원이 다른 나라: AI 시대 한국의 장기 전략’이라는 제목의 글을 SNS에 게재했다. 요지는 AI 인프라 시대의 과실은 특정 기업만의 결과가 아니라 반세기에 걸쳐 전 국민이 함께 쌓은 산업 기반의 결과이며, 그렇기에 그 과실 일부는 전 국민에게 환원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소위 ‘국민배당금’ 제안이다. 국민배당금의 토대는 지속적 초과이윤에서 나오는 초과세수인데, 김용범의 글은 반도체산업의 초과이윤이 지속적으로 창출된다는 전제를 담고 있다. 다음날인 5월 12일 코스피가 장중 5% 폭락했고, 보수언론은 이를 김용범 정책실장의 국민배당금 제안 때문이라고 보도했다. 국민의힘은 ‘공산당 본색’, ‘사회주의 급행열차’, ‘기업이익 배급제’ 등 색깔론 공세를 폈다. 청와대는 서둘러 진화에 나섰다. 5월 13일, 이재명이 직접 김용범의 국민배당금 제안은 개인의견이고, 배당 제안은 초과이윤이 아니라 초과세수에 대한 것이며, “기업의 초과이윤을 국민배당하는 방안”이라는 보도는 “음해성 가짜뉴스”라는 입장을 밝혔다. 보수언론과 국민의힘 모두 노사관계라는 ‘사적 문제’인 삼성전자 파업에 대해서는 긴급조정권을 통한 국가 개입을 요구하면서도, 이윤에 대한 국가 개입은 비난한다. 양자를 관통하는 믿음은 분명하다. 기업 이윤은 불가침이라는 것이다. 이윤을 위협하는 노동자의 파업권은 국가가 제한할 수 있지만, 기업 이윤과 주주 권리는 국가가 건드릴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런 믿음에 따르면 노동자의 요구는 국민경제를 위협하는 집단 이기주의이나, 기업이 얻은 이윤은 사적 소유라는 성역으로 남아야 한다. 그 이윤이 국가의 공공재정 투입, 세제 혜택과 인허가 혜택, 연구개발 지원, 전력망 구축, 용수·토지 제공 등으로 이루어졌다고 해도, 국가는 이윤에 대해 개입해서는 안된다. 보수세력의 발작적 반응은 그야말로 시대착오적이다. 자유주의 경제지 <이코노미스트>조차 AI가 만들어낼 지대(rent)와 초과이윤의 집중을 그대로 둘 수 없으며 정상적인 자본수익률을 초과하는 이윤에 대한 과세와 토지·자연자원에 대한 부담금으로 초과이윤을 환수할 수 있다고 제기한다. 나아가 AI 기업의 부분적 국유화, 모두에게 AI기업 주식을 나눠주는 방안까지 거론한다. 물론 이코노미스트의 제안에 담긴 문제의식은 체제 변혁이 아니라 자본주의 체제의 안정화에 있다. 그러나 자유주의 경제지조차 초과이윤의 환수를 논하는 상황은, 한국 보수세력의 낡은 반공주의와 자본의 소유권에 대한 물신숭배를 드러내기에는 충분하다. 국민배당금, 어떻게 볼 것인가 첫째, 국민배당금은 이런저런 기본소득론과 마찬가지로 산업의 소유와 통제에 대해, 생산과정에 대해 침묵한다.[1] 국민배당금은 삼성전자와 하이닉스 같은 대기업이 구축한 다단계 하청과 비정규직 양산, 반도체산업에 대한 국가적 자원 집중과 특혜, 기후·환경파괴적 생산은 하등 건드리지 않는다. 배당금은 반도체산업의 실태는 그대로 둔 채, 그 불평등을 수용하라고 요구한다. 더군다나 반도체산업의 초과이윤은 제국주의 패권경쟁과 군사AI 경쟁 속에서 전략물자로 격상된 반도체의 지위와도 결부되어 있다. 이렇듯 반도체산업의 초과이윤은 전쟁산업 확대의 결과이기도 하나, 국민배당금은 반도체산업의 군사화 문제를 조금도 건드리지 않는다. AI산업과 반도체산업을 둘러싼 제국주의 열강 사이의 경쟁이 전쟁 위험을 높이더라도, 그렇게 발생한 초과이윤을 배당하면 된다는 식이다. 둘째, 국민배당금은 한국 반도체산업의 막대한 초과이윤이 오로지 한국이라는 국민국가에 속한다고 규정한다. 그러나 반도체산업은 국민경제 안에서 완결되는 산업이 아니며, 전 세계에 걸친 노동분업과 공동노동의 결과다. 한국 반도체 대기업이 초과이윤을 취한다면, 그것은 ‘한국인’만의 몫이 아니다. 반도체산업의 초과이윤은 원료 광물을 채굴하는 저임금 위험 노동, 공급망 하단에 위치한 각국 노동자들의 저임금 장시간 노동 등, 세계 노동자 민중에 대한 착취와 자연자원 수탈의 결과다. 삼성전자와 하이닉스는 AI 인프라의 핵심을 장악한 초국적 자본이며, 한국은 더 이상 세계 자본주의의 주변부에 위치한 하청 생산기지가 아니다. 그러나 국민배당금은 세계적 착취와 수탈의 산물을 국민국가 내부 분배 문제로 축소한다. 필요한 것은 ‘한국 국민에게 얼마를 나눌 것인가’가 아니라, 한국은 물론 세계 노동자들이 함께 만든 부를 왜 특정 자본이 전용하는지에 대한 근본적 의문을 제기하는 것이다. 앞서 말했듯, <이코노미스트>조차 ‘부분적 국유화’를 거론하는 형국이다. 셋째, 국민배당금 구상은 반도체산업의 초과이윤이 지속적이라는 가정에 근거한다. 그러나 이 가정은 허술하다. AI 인프라 투자는 폭발적으로 늘고 있지만, 이 투자가 실제로 그만큼의 이윤을 지속적으로 창출할 수 있는지는 입증되지 않았다. AI 기술이 쓸모없다는 뜻이 아니라, 막대한 설비투자가 이윤의 실현을 훨씬 앞서 나가고 있다는 것이다. 지금 반도체산업 초과이윤은 빅테크 기업의 선점 경쟁에 따른 공급 병목의 결과이며, 그 배경에는 격화하는 제국주의 열강투쟁이 있다. 물론 이런 이윤은 당분간 지속될 수 있다. 그러나 공급이 확대되고, AI산업에서 나오는 이윤이 기대치에 미치지 못해 빅테크의 투자 조정이 시작되면, 반도체산업 초과이윤은 급격히 축소될 수 있다. 자본주의에서 이런 현상은 낯설지 않다. 19세기 철도산업, 20세기 초반 자동차산업, 1990년대 말에서 2000년대 초까지의 닷컴 열풍 등은 모두 광기어린 투자에 필연적으로 뒤따르는 연쇄적 파산과 거품 붕괴를 겪었다. 반도체산업 국유화와 노동자 통제를 제기한다 그럼에도 국민배당금 논쟁은 중요한 균열을 드러냈다. 반도체산업에서 나오는 이윤은 더 이상 ‘특정 기업의 뛰어난 경영 성과’만으로 포장될 수 없으며, 이윤에 대한 처분권은 총수와 주주에게 독점적으로 귀속되어서는 안 된다는 문제제기는 정당하다. 그러나 국민배당금은 이 정당한 문제의식을 협소한 분배론으로 가둔다. 그 결과 국내 반도체산업 속에서 발생하는 노동 재해와 다단계 하청구조를 통한 초과착취, 노동자계급 내 불평등 심화는 물론 세계적 노동분업 속에서 이루어지는 착취와 수탈, 환경파괴는 건드리지 않은 채, 이를 용인하는 대가로 소액의 금전을 건넨다. 필요한 것은 국민배당금이 아니라 반도체산업의 국유화와 노동자 민중의 통제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같은 ‘전략산업’은 사회 전체의 필요에 따라 운영되어야 한다. 국제연대 강화와 함께 AI·반도체산업의 전쟁산업화 중단, 반도체산업 다단계 하청구조 철폐, 하청노동자 직접고용, 노동시간 단축, 노동안전보건조치 강화, 전력과 물 사용에 대한 사회적 통제, 기후위기 대응을 추진해야 한다. 문제는 누가 생산수단을 소유하고, 누구의 필요를 위해 무엇을 얼마나 생산할 것인가다. 해답은 반도체산업의 국유화와 노동자계급의 산업통제, 그리고 노동자계급의 국제연대에 있다. [각주] [1] “분배를 가지고 야단법석을 떨고 거기에 중점을 두는 것은 도대체 잘못된 것이다. 소비수단의 그때그때의 분배는 생산조건 자체의 분배의 귀결일 뿐이다 … 물적 생산조건들이 노동자들 자신의 조합적 소유가 되면, 오늘날과는 다른 소비수단의 분배가 나타난다.” 맑스, 「고타 강령 초안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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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 이것은 현대중공업 자본을 대리한 사법부의 계급투쟁이다2026년 5월 21일,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금속노조 현대중공업지부 사내하청지회가 HD현대중공업을 상대로 제기한 단체교섭 청구소송에서 원고 패소를 확정했다. 사내하청지회는 2016년 원청에 단체교섭을 요구했고, 현대중공업이 이를 거부하자 2017년 소송을 제기했다. 사건은 2018년 12월 대법원에 올라간 뒤 무려 7년 6개월 동안 계류됐다. 그러나 대법원이 내놓은 결론은 ‘구 노동조합법이 적용되는 이 사안에서는, 하청노동자와 근로계약관계를 맺지 않은 현대중공업에 단체교섭 의무가 없다’는 것이었다. 대법원은 누가 노동조건과 노동과정을 지배하는지, 그렇게 만들어진 이윤을 누가 취하는지에 대해 철저히 침묵했다. HD현대중공업 원청은 출퇴근, 휴식시간, 인원 활용과 작업배치, 잔업과 특근, 안전 문제까지 생산과정 전반을 지배한다. 그런데도 대법원 다수의견은 누가 실제로 노동조건을 지배하는지가 아니라, 원청자본과 하청노동자 사이에 형식적 근로계약관계가 있는지를 중심으로 판단함으로써 다단계 하청구조의 본질을 철저히 외면했다. 현대중공업 전체 노동자 4만여 명 중 2만 5천여 명이 하청노동자다. 원청은 생산과정을 지배하지만 다단계 하청구조 뒤에 숨어 사용자로서의 모든 의무를 회피한다. 하청노동자들이 만든 이윤은 가져가지만, 위험과 비용은 떠넘긴다. 대법원은 단체교섭 요구가 2016년경 이루어졌고, 개정 노조법에 경과규정이 없다는 명분으로 구법을 적용했다. 이런 점에서 이번 판결은 얼핏 ‘소급적용 불가’라는 일반적 기준을 적용한 결과로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문제의 본질은, 대법원이 개정되기 전 법으로도 노동3권 보장을 위해 사용자 개념을 확장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실제로 반대의견을 낸 대법관 4명은 ‘구법을 기준으로 보아도, 현대중공업이 하청노동자의 노동조건을 실질적·구체적으로 지배·결정할 수 있다면 사용자로서 단체교섭 의무가 있다’고 밝혔다. 즉, 이번 판결은 노동자들이 노조법 2조 개정 전에 단체교섭을 요구했다는 이유로, 개정 노조법을 소급적용하지 않아서 내려진 필연적 결론이 아니다. 이는 대법원이 자본가들을 대리해 이 땅 모든 비정규직 노동자를 상대로 수행한 ‘계급투쟁’이다. 우리는 그간 깨닫고 또 깨달아온 교훈을 다시 확인하고 있다. 원청교섭은 힘으로 쟁취할 수밖에 없다. 돌아보자. 현대중공업 하청노동자들은 지난 23년간 쏟아진 그 무수한 탄압 속에서도 노동조합을 지켜 왔다. 노조법 2·3조 개정도 정부나 국회의 선물이 아니라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숱한 직접고용 쟁취투쟁, 원청교섭 투쟁, 손배가압류 철폐투쟁이 만들어낸 성과였다. 지금 필요한 것은 더 많은 비정규직 노동자들과 함께, 현대중공업을 비롯한 모든 원청자본에 맞선 투쟁을 조직하는 것이다. 사법부가 원청자본의 책임을 지웠다. 노동자는 투쟁으로 그 책임을 다시 새겨 넣어야 한다. 현대중공업 하청·이주노동자의 원청교섭 쟁취투쟁을 엄호하며 진짜 사장에게 책임을 묻는 투쟁, 다단계 하청구조를 깨는 투쟁을 조직하자. 가자! 7월 총파업! 2026년 5월 22일 사회주의를향한전진 -
사회적 대화, ‘들어가서 할 말은 하자’는 논리가 남긴 것은 무엇인가예나 지금이나 사회적 대화가 필요하다는 근거는 비슷하다. ‘들어가서 할 말은 해야 한다.’ 그러나 1998년 이후 사회적 대화의 역사는 분명하다. 그간 노사정 대화는 정리해고제와 파견제 도입, 기간제 고용 일반화, 파견 확대, 직권중재 폐지와 맞바꾼 필수유지업무제도 도입과 대체근로 허용 등 무더기 노동개악으로 이어졌다. 1998년 같은 합의 형식을 취하건 2006년 같은 배제 형식을 취하건, 사회적 대화의 끝에는 노동개악이 있었다. 이재명 정부가 내세우는 ‘사회적 대화 2.0’ 역시 전혀 새롭지 않다. 노동운동을 대화라는 허울로 묶어두고 투쟁의 칼날을 무디게 만들며, 결국 자본이 요구하는 노동개악을 관철하려는 시도의 반복일 뿐이다. 사진: 뉴스1 사회적 대화, 노동개악의 통로 김영삼 정권 이후, 정부와 자본은 종종 ‘경제위기 극복’, ‘고통분담’, ‘사회적 대타협’이라는 이름으로 노동조합 지도부를 노사정 대화 테이블로 불러들였다. 그리고 이는 노동자의 요구를 관철하는 장이 아니라, 자본과 정부가 구조조정과 노동개악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노동운동의 동의를 확보하는 수단으로 작용했다. 1998년 IMF 외환위기 당시 노사정위원회가 대표적이다. 예나 지금이나 사회적 대화가 필요하다는 근거는 비슷하다. ‘들어가서 막아야 한다’, ‘할 말은 해야 한다’, ‘대화를 거부하면 노동운동이 고립된다’ 등등. 그러나 노사정위원회의 결과는 정리해고제와 근로자파견제 법제화였고, 이 합의는 오늘날 한국 자본주의의 기틀을 만든 분기점이었다. 결국 1999년 2월, 민주노총은 노사정위원회에서 탈퇴했다. 2005-2006년 민주노총의 사회적 교섭 추진도 마찬가지였다. 당시 이수호 집행부는 출범 때부터 사회적 교섭을 강조했다. 그러나 화물연대 파업 탄압, 철도노조 파업 3시간 만에 공권력 투입, 2005년 울산건설플랜트 파업 탄압, 아시아나항공·대한항공 조종사 파업 긴급조정권 발동 등 노무현 정부가 파업을 철저히 탄압하고, ‘비정규직 보호입법’이라는 이름으로 기간제법 제정과 파견법 개악을 추진하는 상황에서 노사정 대화는 비정규직 권리보장 입법을 관철하는 공간이 아니라 노동개악을 둘러싼 협의 틀로 작동했다. 2005년 1월과 2월, 이수호 집행부는 대의원대회에 ‘사회적 교섭방침’을 상정했지만 격렬한 반대로 통과시키지 못했다. 3월 15일 대의원대회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럼에도 3월 17일 중앙집행위원회는 대의원대회를 거치지 않은 채 노사정 교섭 추진을 결정했다. 노무현 정부는 2004년 11월 비정규직 관련 개악 법안을 국회에 제출한 뒤, 2005-2006년 내내 비정규직법과 노사관계로드맵을 노동개악 두 축으로 병행 추진했다. 비정규직법이 기간제·파견 노동을 확산하는 법안이었다면, 노사관계로드맵은 파업권과 노조 활동을 위축시키는 법안이었다. 민주노총과 비정규직 운동진영이 요구한 것은 상시업무 정규직화, 비정규직 사용사유 제한, 파견법 폐지, 불법파견 시 직접고용, 특수고용노동자 노동3권 보장이었다. 그러나 정부가 ‘비정규직 보호’라는 이름을 붙여 추진한 법안은 정반대 내용을 담고 있었다. 기간제노동을 일반화하고, 파견노동을 확대하는 것이 핵심이었다. 이 법안은 2006년 11월 30일 국회를 통과했고, 비정규직을 줄이기는커녕 기간제·파견 노동을 합법적 고용형태로 고착시키는 결과로 이어졌다. 2006년에는 노사관계로드맵을 둘러싼 사회적 대화가 이어졌다. 민주노총은 2006년 6월 노사정대표자회의에 복귀했지만, 정부가 내놓은 노사관계선진화방안, 즉 노사관계로드맵은 노동개악 종합 패키지였다. 2006년 9월, 정부는 민주노총의 뒤통수를 치며 민주노총을 배제하고 긴급 노사정대표자회의를 열어 로드맵에 합의했고, 이날 합의된 내용은 △기업단위 복수노조 허용 3년 유예 △노조전임자 임금지급 금지 3년 유예 △기존 필수공익사업장 직권중재를 폐지하되 필수유지업무제도 운용 및 쟁의기간 대체인력의 채용·하도급 허용 △필수공익사업장 확대(혈액공급, 항공, 폐·하수처리, 증기·온수공급업) △부당해고 벌칙조항 삭제 △정리해고 사전통보기간을 60일에서 50일로 단축 등이었다. 1998년과 2006년 모두 사회적 대화가 노동개악으로 이어졌으나, 같은 방식으로 진행된 것은 아니었다. 1998년 노사정위에서는 민주노총 지도부가 정리해고제와 근로자파견제 도입에 합의했으나 2006년 노사관계로드맵 합의는 민주노총이 노사정대표자회의에 복귀했음에도 정부가 민주노총을 배제한 채 한국노총·경총과 전격 합의한 사건이었다. ‘개악안에 합의하지 않겠다’, ‘할 말은 하겠다’는 방침으로 참여한다고 해도, 정부와 자본은 사회적 대화라는 틀로 노동운동을 묶어두고, 합의든 배제든 노동개악을 관철했을 뿐이다. 사진: 매일노동뉴스 청와대 노동절 기념식, 어떤 요구를 말해도 그 본질은 노사정 화해의 장이다 결국 1998년 이후 사회적 대화의 역사에서 반복적으로 드러난 결과는 분명하다. 그간 노사정 대화는 정리해고제와 파견제 도입, 기간제 고용 일반화, 파견 확대, 직권중재 폐지와 맞바꾼 필수유지업무제도 도입과 대체근로 허용 등 무더기 노동개악으로 이어졌다. 합의건 배제건 사회적 대화의 끝에는 노동개악이 있었다. 우리는 이런 경험 위에서 2026년 노동절을 관통하는 정세를 봐야 한다. 이재명 정부는 노동절을 계기로 ‘노동존중’ 외양을 강화하고, 민주노총을 사회적 대화의 틀로 끌어들이려 한다. 5월 1일 청와대 영빈관에서 열린 정부 노동절 기념식에 관한 언론 보도에는 대통령, 민주노총과 한국노총 위원장, 경총 회장이 나란히 선 장면이 담겼다. 일부 동지들은 정부 행사 참여가 옳은 일이었다고 한다. ‘노동조합은 투쟁만 하는 조직이 아니라 교섭도 해야 한다. 민주노총 위원장은 오전에는 대통령 앞에서 노동자의 요구를 말했고, 노동절 집회에서는 광화문에서 7월 총파업을 선언했다. 정부 행사에 가서는 축사뿐만 아니라 서광석 열사 사망, 특수고용·플랫폼노동자 노동권, 자본의 원청교섭 거부 실태를 고발하고 중대재해처벌법 무력화를 비판했다.’ 물론 양경수 민주노총 위원장은 실제로 그런 말들을 했다. 그러나 이런 반론 역시 새롭지 않다. 앞서 말했듯 예나 지금이나 사회적 대화를 정당화하는 논리는 비슷하다. 핵심은 사회적 대화의 결과는 모두 노동개악이었다는 점이다. 당연히 노동조합은 정부와 만날 수 있다. 그러나 핵심은 노동조합 대표자가 ‘요구를 말했느냐’가 아니다. 문제는 그 말이 어떤 자리에서 이루어졌는가, 어떤 정치적 맥락 속에 배치되었는가다. 정부가 노동자계급과 자본가계급, 적대하는 계급 대표자들을 모아놓고 노사화해주의를 설파하는 자리에 노동조합 대표자가 참여했다는 것이 문제의 본질이다. 그것도 불과 11일 전 열사가 목숨을 잃은 상황에서 말이다. 1998년 노사정위원회에 참여해야 한다는 주된 논리도 ‘들어가서 할 말은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결과는 무엇이었나? 정리해고와 파견제 도입이었다. 1998년 2월 7일자 조선일보 청와대 노동절 기념식은, 국가가 ‘노동절’을 자신의 정치적 성과로 포섭해 재구성하는 자리였다. 언론은 대통령과 경총 회장, 한국노총 위원장과 함께 민주노총 위원장이 나란히 선 장면을 담았다. 바로 이 장면이 정부가 의도한 정치적 효과였다. 정부는 노사정이 함께 박수치는 장면을 연출하며, 불과 11일 전 서광석 열사의 죽음에 대한 국가의 책임을 지우고 자본에 대한 분노를 희석했으며, 열사의 죽음이 만든 계급투쟁 격화 소지를 제어했다. 물론 앞서 말했듯, 민주노총 위원장은 그 자리에서 노동자의 요구 또한 말했다. 그러나 청와대 영빈관에서 대통령을 만나 ‘원청자본의 교섭해태 실태’, 심지어 ‘파견법·기간제법 폐기’를 말한다고 해도 본질은 달라지지 않는다. 정부가 노사정 대화를 강조하는 이유는 노동개악을 준비하고 있기 때문이다. 노동개악과 노동탄압은 사회적 대화와 함께 온다 윤석열 정부가 건설노조 탄압, 주 69시간제 추진, 노조법 2·3조 개정 거부권 행사 등으로 노동운동을 정면 공격했다면, 이재명 정부는 노동운동 상층을 대화의 장으로 불러들여 상생의 이름 아래 노동개악을 추진한다. 2026년 1월, 정부는 청와대와 고용노동부·재정경제부·중소벤처기업부 등이 참여하는 범부처 ‘노동구조개혁TF’를 출범하며 전체 노동자를 대상으로 한 노동개악에 나섰다. 언론에 따르면 노동구조개혁TF가 주도하는 노동개악 추진방향은 △기간제 비정규직 노동자 사용기한 3년 이상으로 연장 △직무·성과급제 확대 △전략산업 특별연장근로 확대 △지역 메가특구 노동시간 규제완화 등이다. 이어 3월 19일, 이재명은 정부 1기 경제사회노동위원회 출범식에서 “노동자들이 기업이 원하는 고용유연성을 수용할 수 있는 상황을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동시에 ‘노동자들의 일방적 희생을 요구하는 방식은 옳지 않다’고 덧붙였다. ‘해고가 죽음이 아닌 사회’, ‘전환의 시대에 맞는 노동시장’ 등 정부의 언사는 부드럽지만, 그 방향은 지난 정부와 하등 다르지 않다. 이재명 정부도 지난 정부와 마찬가지로 ‘유연안정성’이라는 이름 아래 해고와 전환배치, 직무·성과급을 확대하는 대가로 사회안전망을 일부 제공하겠다는 것이다. 본질은 더 쉬운 해고와 더 많은 비정규직이고, ‘사회안전망’은 이를 위한 부가조치일 뿐이다. 2026년 3월 19일 이재명 정부 1기 경사노위 출범식 이런 거시적 흐름은 주요 노동자 투쟁에 대한 태도들에서도 여실히 드러나고 있다. 노동부 장관과 집권여당 대표 등이 요란하게 장기투쟁 사업장들을 방문했을 뿐, 문제해결은커녕 장기투쟁을 낳은 악질자본가들에 대한 그 어떤 제재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심지어 노동조합 회계공시제도조차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 이렇듯 이재명 정권은 한편에서는 ‘노동운동 열심히 하라’는 덕담과 함께 노동자 민중운동 세력을 향해 ‘대화’를 제의하면서도, 다른 한편에서는 자본에 맞서는 전투적 투쟁을 탄압한다. 어디 화물연대 투쟁뿐인가. 2026년 2월, 세종호텔 로비농성을 이재명 정부가 지휘하는 공권력이 침탈했고, 4월에는 지혜복 교사의 고공농성에 연대했다는 죄목으로 고진수 동지가 구속당했다. 유예되고 또 유예된 택시월급제 즉각 시행을 요구하며 공공운수노조 택시지부 고영기 동지가 고공에 오른 상황에서조차, 민주당은 택시자본가들을 위해 월급제 유예법안을 통과시켰고 이재명은 거부권을 행사하라는 요구까지 짓밟으며 택시노동자들을 외면했다. 이렇듯 이재명 정부의 허울뿐인 ‘노동 존중’을 떠받치는 것이 사회적 합의주의다. 일터기본법의 실체도 마찬가지다. 정부와 여당은 이 법을 노동법 밖에 놓인 특수고용·플랫폼·프리랜서 등을 보호하는 법이라고 설명한다. 그러나 불안정노동자에게 필요한 것은 ‘일하는 사람’이라는 모호한 범주가 아니라 노동자성 인정이고, 근로기준법과 노조법의 전면 적용이다. ‘그래도 이전보다 나아지지 않느냐’고 반박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일터기본법은 노동권의 보편화가 아니라 차등화다. 이재명 정부 계획에 따르면, 한쪽에는 근로기준법과 노조법을 적용받는 ‘진짜 노동자’가 있고, 다른 한쪽에는 일터기본법을 적용받는 ‘일하는 사람’이라는 이름의 2등 노동자들이 양산된다. 결국 정규직-비정규직-일하는 사람 사이의 위계, 노동자계급 내 위계를 더 촘촘히 제도화할 뿐이다. 사회적 대화 2.0은 조금도 새롭지 않다 사회적 합의주의는 노사정이 대등한 대화를 할 수 있다는 환상을 유포하며 투쟁 대상을 흐린다. 노동자들이 원청자본을 향한 분노와 함께 ‘진짜 사장 나오라’라고 외칠 때, 사회적 대화는 ‘노사정이 함께 허심탄회하게 이야기하며 해결하자’고 말한다. 그러나 지금 필요한 것은 원청교섭을 요구하는 노동자를 죽음으로 몬 자본에 맞선 투쟁이다. 대통령이 직접 ‘모범 사용자가 되겠다’고 말한 공공부문 원청조차 비정규직 노동자와의 교섭을 거부하고 있음을 드러내며 투쟁을 확대하는 것이다. 누가 비정규직을 양산했는가? 누가 그 노동자의 임금과 노동조건을 지배하면서도 사용자가 아니라며 교섭을 거부하다 죽음으로 몰았는가? 누가 노동자를 자영업자로 위장해 권리를 박탈했는가? 국가와 자본이다. 물론 노동자는 국가·자본과 대면할 수 있다. 그 대면은 계급투쟁을 배경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노사정은 애초 대등한 힘을 가진 주체가 아니다. 경사노위 내 노동자 대표가 그 어떤 논리와 당위로 국가와 자본을 설득해도, 결국 문제를 결정하는 것은 힘이다. 기억하자. 1998년 당시 노사정 합의에는 △실업대책기금 조성 △해고회피 노력 △해고자 우선채용 같은 완충 조항도 포함됐지만, 정세를 규정한 것은 자본이 요구한 정리해고제와 파견제 도입이었다. 2006년 노사관계로드맵도 마찬가지였다. ‘직권중재제도 폐지’를 명분으로 내세웠지만, 그 실상은 ‘필수유지업무제도’를 통한 파업 무력화였다. 노동자 대표가 회의장 안에서 아무리 효과적인 논리를 역설한다고 해도, 그것은 그저 말이다. 그 말에 힘을 부여하는 것은 결국 계급투쟁이다. 민주노총은 2026년을 원청교섭 원년으로 만들겠다고 했다. 이는 곧 한국 자본이 수십 년간 공들여 구축한 다단계 하도급체계를 계급투쟁으로 뚫어내겠다는 뜻이다. 사회적 합의주의와 단절하지 않고 원청교섭 쟁취, 특수고용·플랫폼노동자 노동자성 인정, 모든 노동자의 노동기본권 확대는 불가하다. 이재명 정부가 내세우는 ‘사회적 대화 2.0’은 조금도 새롭지 않다. 남은 과제는 분명하다. 거듭 파국을 낳아온 사회적 대화를 중단하고 △원청교섭 쟁취 △팔레스타인 학살과 제국주의 전쟁 반대 △차별금지법 쟁취 △물가임금연동제와 실질임금 보장 △청년일자리 창출 등 절박한 요구를 걸고 7월 총파업을 조직하는 것이다. -
[성명] 오늘 삼성 노동자를 향한 칼날은 내일 다른 노동자를 향한다이재명은 오늘(5월 18일) 삼성 파업을 두고 "모든 국민의 기본권은 보장되지만, 본질적 내용을 침해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공공복리 등을 위해 제한될 수 있다", "노동권만큼 기업경영권도 존중되어야 한다"라고 말했다. 결국 긴급조정권으로 파업권을 봉쇄하겠다는 협박이다. 삼성전자 노동자들의 요구가 한계를 지님은 분명하나, 삼성전자 노동자들이 파업할 권리는 정당하다. '노동권만큼 기업경영권도 존중해달라'고? 마치 기업이 피해자라는 투다. 실상은 정반대다. 이재명 정부는 1년 365일 기업경영권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파업권 행사 자체를 봉쇄하는 극악한 시도로 노동자들을 협박한다. 재벌의 이익과 경영권을 공공복리로 둔갑시키면서 말이다. 법원도 "노조가 쟁의 행위 기간에도 평상시와 동일한 수준의 인력, 가동 시간 등에 대한 의무를 준수해야 한다"라며 파업권 짓밟기에 나섰다. 그동안 이건희, 이재용을 비롯한 경영진들은 자신들만의 막대한 부를 위해 온갖 비리와 부패를 저질렀다. 무노조 경영으로 노동자들의 저항을 참혹히 짓밟았고, 수많은 백혈병 피해자의 절규를 무시했다. 온갖 유해물질에 대한 정보는 '영업비밀'이란 명분으로 감춰왔고, 지금도 감추고 있다. 비정규직에 대한 초과 착취 역시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그들은 적자일 때도 자신들 배를 충분히 불렸다. 예를 들어 2023년 노동자들은 적자로 인센티브를 전혀 받지 못했지만, 등기이사 1인당 평균 보수는 상여금 포함 44억 2백만원에 이르렀다. 그뿐인가? 천문학적인 노동자 민중의 혈세를 삼성과 SK하이닉스에 몰아주고, 물과 전기 등 공공자원을 반도체산업 자본이 마음대로 쓰게 만드는 반도체특별법을 통과시켰다. 이렇게 그들의 경영권은 365일 내내, 아니 수십 년 내내 100%가 아니라 1000% 존중되고 있다. 삼성의 막대한 이윤은 노동자들의 피와 땀 위에 세워졌다. 노동자계급의 공동노동이 만든 사회적 부다. 노동자들은 부의 분배를 요구할 정당할 권리를 가지고 있다. 물론 삼성전자 노동자들의 투쟁은 큰 한계와 약점을 가지고 있다. 정규직만의, 그것도 반도체 부문 노동자의 권리와 이익에만 힘을 쏟고 있다. 수많은 하청·비정규직의 권리와 이익을 외면하고 있다. 하지만 하청·비정규직에 대한 초과 착취에 앞장섰던 자본가들, 그들 편에서 법과 제도를 설계했던 정치인들은 노동자들을 비난할 자격이 없다. 긴급조정권은 공공 복리가 아닌 재벌 이익을 위한 노동권 압살일 뿐이다. 노동자들은 긴급조정권 카드를 들이밀며 노동권을 압살하려는 이재명 정부와 투쟁해야 한다. 또한 이 투쟁의 한계와 약점을 극복해 가야 한다. 이 길을 위해 힘을 모으고, 또 모으자! 2026년 5월 18일 사회주의를향한전진 -
[우리의 투쟁] 이스라엘의 가자지구 가스전 개발사업에 참여하는 한국석유공사 규탄 기자회견이 열리다.이스라엘과 미국 제국주의 열강은 950일째 팔레스타인 가자지구 주민을 집단학살하고, 중동으로 전쟁과 학살을 확대하고 있다. 팔레스타인 집단학살에 반대해 온 울산의 노동자 민중은 5월 13일, 11시 40분 한국석유공사 앞에 모여 한국석유공사가 이스라엘의 가자지구 가스전 개발사업 참여를 통해 집단학살과 자원 수탈에 공모함을 규탄하며 기자회견을 개최하고 항의면담을 진행했다. 약 60여 명이 이번 기자회견에 참여했다. 이번 기자회견은 지난 2025년 11월 26일 “팔레스타인 집단학살 공모기업 한국석유공사 규탄 국제행동의 날” 집회 후 6개월 만에 이뤄졌다. 기자회견 참가자들은 노동자민중의 세금으로 운영되는 한국석유공사가 여전히 가자지구 영해 가스전 컨소시엄 사업에 참여하며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집단학살 비용을 대주고 있음을 규탄했다. 특히 이탈리아 에너지기업 에니(Eni)가 자국 노동자들의 반대와 파업에 부딪쳐 컨소시엄에서 전면 철수한 반면, 한국석유공사는 에니의 컨소시엄 지분까지 흡수하며 이스라엘 기업과 단 둘이 자원수탈 프로젝트를 유지하고 있는 것을 강하게 규탄했다. 서울에서 온 팔레스타인평화연대 눈보라 활동가는 “한국석유공사가 자회사를 통해 집단학살이 자행되는 전범국과 거래하면서 한국 국민의 세금을 낭비하는 게 말이 됩니까?”라고 꼬집으며,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집단학살이 인류의 존엄을 위협하고 국제법마저 위반하고 있는 현실을 지적했다. 민주노총 최용규 울산지역본부장은 “전쟁과 제재의 피해는 권력자가 아니라 평범한 시민들에게 돌아간다. 병원에는 약이 부족해지고, 아이들의 일상은 무너지고, 노동자와 서민들의 삶은 벼랑 끝으로 내몰린다”며 팔레스타인에서 쿠바, 중동으로 번지는 미 제국주의와 이스라엘의 침략과 전쟁, 경제봉쇄를 강력히 규탄했다. 이어 ‘울산 노동자가 앞장서서 전쟁과 침략, 제재와 학살에 반대하며 민중의 생명과 존엄, 자주와 평화를 지키기 위해 끝까지 연대할것’을 강조했다. 금속노조 현대자동차비정규직지회 이수기업 해고노동자로 현대자동차와 투쟁중인 정성훈 노동자는 “팔레스타인 집단학살보다 더 참담한 건, 공기업인 '한국석유공사'가 이 비극의 현장에서 이스라엘과 손을 잡고 자원약탈에 가담하고 있다는 사실”이라고 성토했다. “일제강점기의 아픈 역사를 가진 우리가, 이제는 가해자의 편에 서서 다른 나라의 영토를 침범하고 자원을 약탈하는 일에 동조한다는 것은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며, “죽음의 땅에서 퍼 올리는 가스가 아니라, 평화와 인권이라는 인류 보편 가치를 지키는 길을 택하라”고 촉구했다. 이어 금속노조 현대글로비스울산지회 김미옥지회장과 정의당 박민자 사무국장이 기자회견문을 낭독했다. 기자회견문은 한국석유공사의 책임회피와 기만을 낱낱이 드러냈다. “지난 6개월 동안 한국석유공사는 ‘지분(15%)이 적은 만큼 책임도 적다’며 집단학살 공모 책임을 회피했다. 또한 산업통상부는 ‘좋은 소식 기다려 보자’며 시간을 끌었다. 그러나 한국석유공사와 산업통상부의 대답은 순간을 모면하려는 거짓과 기만이었다” “한국석유공사는 철수는커녕, ENI가 포기한 운영권을 갖고, 올해 2/4분기부터 본격적으로 탐사를 추진할 예정이다. 이스라엘 집단학살 공모 책임이 더 커진 만큼 한국석유공사에 대한 규탄과 컨소시엄 철수 요구를 더 키울 수밖에 없다” 팔레스타인 평화를 위한 울산긴급행동은 서울, 부산, 대구, 춘천, 전주, 영국 스코틀랜드 등 팔레스타인에 연대하는 단체들과 함께 한국석유공사의 집단학살 공모 규탄과 컨소시엄 철수를 촉구하는 전국 동시다발 공동행동을 진행하고, 영국 스코틀랜드 등지의 국제연대 활동과도 함께함을 알렸다. 자원약탈 컨소시엄 즉각 철수 요구와 함께, 팔레스타인의 평화와 해방을 위해 자유선단연합(FFC)을 통해 가자지구로 항해하는 배에 탑승한 김아현(해초), 승준, 김동현 활동가의 투혼을 지지하며 무사 귀환할 때까지 함께할 것임을 선언했다. 기자회견 후 한국석유공사 측과의 항의면담이 진행됐다. 항의면담에는 해외팀장 등 한국석유공사 측과, 민주노총 최용규 울산지역본부장, 조시형 노동안건보건국장, 뎡야핑과 눈보라 팔레스타인평화연대 활동가, 팔레스타인평화를위한울산긴급행동 강진관 활동가가 참여했다. 면담에 참여한 활동가들은 한국석유공사의 컨소시엄 참여의 부당성을 짚으며, 사업 철수를 강력히 촉구했다. 한국석유공사 측은 사업강행 의사를 피력하지 않은 상태로 항의를 경청했다. 이어 기자회견 참가자들은 “울산 노동자 앞장서서 팔레스타인에 평화를”, “한국석유공사는 가자지구 바다에서 손 떼라”, “한국은 팔레스타인 자원 약탈 중단하라”, “KNOC DANA You Can’t Hide. Stop Fueling Genocide(한국석유공사-다나는 숨지 마라, 집단학살에 연료를 대지 말라)” 등의 구호를 외쳤다. 마지막에는 영국 스코틀랜드에서 한국으로 원어민 영어강사로 일하러 온 이주노동자가 “Free, Free, Palestine”을 선창하고, 60여 명의 노동자민중이 이를 함께 외치며 전 세계로 연대의 목소리를 타전했다. 노동자민중이 피땀 흘려 일한 돈으로 낸 세금을 학살과 수탈에 사용할 수는 없다. 우리는 팔레스타인의 집단학살, 제국주의 식민지배와 점령, 수탈, 인권 유린, 국제법 위반 행위에 한국정부와 한국석유공사, 그리고 여러 한국기업이 공모, 협력하는 것을 가만히 둘 수 없다. 이번 기자회견과 항의면담에 뒤이은 실천투쟁으로, 5월 14일부터 5월 22일까지 울산의 한국석유공사 본사 앞에서 7일간 1인 시위를 진행할 예정이다. [팔레스타인 집단학살 이스라엘의 가자지구 해역자원 약탈 공모기업 한국석유공사 규탄 기자회견문] 미국과 이스라엘의 패권과 자원약탈을 위한 침략전쟁은 집단학살, 테러와 살인, 삶의 터전과 문명 파괴, 굶주림과 질병, 공포와 절망, 혐오와 배제로 전 세계를 야만의 시대로 내몰고 있다. 전 세계 노동자 민중이 미국과 이스라엘의 야욕과 침략전쟁을 멈추지 못한다면, 전쟁과 집단학살, 무기 수출과 문명 파괴를 이윤 추구의 기회로 삼는 기업들의 야만적인 폭주를 멈추지 못한다면, 과연 인류가 희망과 미래를 기약할 수 있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중동지역 전쟁은 한국을 포함한 동아시아의 정세와 절대 무관하지 않다.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집단학살을 아직도 멈추지 못했기에, 미국과 이스라엘의 이란침략, 이스라엘의 레바논 침략으로 이어져 중동지역은 전쟁의 참화를 겪고 있다. 미국과 이스라엘의 이란침략과 호르무즈 해역 무력 봉쇄에 따른 전쟁 양상을 봤을 때, 한국, 일본, 필리핀 등 미군이 주둔한 동아시아와 남중국해 주변 나라에서 전쟁 발발 시, 그 전쟁의 전개 양상과 참상을 충분히 예측할 수 있다.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집단학살과 중동지역 전쟁은 한국기업들과 절대 무관하지 않다. 한국 국가방위산업, 민간방산기업, AI 기업, 건설기계 기업, 에너지기업, 식품기업 등은 이스라엘의 전쟁 수행과 집단학살을 지속시키는 지렛대로 역할하고 있다. 이들은 살상 무기와 군수물자 수출, 방위산업 협력, 팔레스타인을 파괴하는 건설기계 수출 등 다양한 형태로 전쟁에 연루되어 있다. 한국석유공사는 팔레스타인 집단학살 이스라엘의 가자지구 자원약탈에 공모하는 대표적 기업이다. 한국석유공사는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가자지구 영해 가스전을 약탈하는 컨소시엄에 참여하여 팔레스타인에 연대하는 한국을 비롯한 국제 사회로부터 지탄받고 있다. 한국석유공사는 팔레스타인 가자지구 영해 자원약탈 컨소시엄 - 이탈리아 기업 ENI 지분 70%, 한국석유공사 다나 페트롤리엄 지분 15%, 이스라엘 기업 Ratio 지분 15% - 에 참여해 집단학살에 공모해 왔다. 팔레스타인에 연대하는 한국 단체와 국제단체들은 2025년 11월 “팔레스타인 집단학살 공모기업 한국석유공사 규탄 국제행동의 날” 집회를 열어 한국석유공사의 컨소시엄 철수를 촉구하는 항의서한을 전달했다. 그 후에도 팔레스타인에 연대하는 한국 단체들은 국민 감사청구인 서명운동, 산업통상부 항의 전화, 국민신문고, 국민 감사 청구 기자회견 등 한국석유공사의 컨소시엄 철수를 거듭 촉구해 왔다. 지난 6개월 동안 한국석유공사는 ‘지분(15%)이 적은 만큼 책임도 적다’며 집단학살 공모 책임을 회피했다. 또한 산업통상부는 ‘좋은 소식 기다려 보자’며 시간을 끌었다. 그러나 한국석유공사와 산업통상부의 대답은 순간을 모면하려는 거짓과 기만임이 밝혀졌다. 이탈리아 기업 ENI가 자국 노동자 민중의 강력한 투쟁에 압박받아 2025년 12월 컨소시엄에서 최종 철수했다. 이제 팔레스타인 영해 자원약탈 컨소시엄에 남은 기업은 한국석유공사와 이스라엘 Ratio뿐이다. 그러나 한국석유공사는 컨소시엄 철수는커녕, ENI가 포기한 운영권을 갖고 Ratio와 함께 이스라엘 정부로부터 가스전 탐사권을 획득해 올해 2/4분기부터 본격적으로 탐사를 추진할 예정이라고 한다. 지난 2025년 12월, 이스라엘 정부가 2026년 10월 탐사권 만료 후, 다음 라운드인 5번째 가스전 탐사권 입찰을 발표했으며, 이번 입찰에는 가스전 탐사권 해당 해역에서 팔레스타인 영해가 더 늘어난 게 확인되었다. 한국석유공사의 이스라엘 집단학살 공모 책임은 더 커졌다. 그런 만큼 한국석유공사에 대한 규탄과 컨소시엄 철수 요구도 더 커질 수밖에 없다. 팔레스타인 평화를 위한 울산 긴급행동은 서울, 부산, 대구, 춘천, 전주, 영국 스코틀랜드 등 팔레스타인에 연대하는 단체들과 함께 한국석유공사의 집단학살 공모 규탄과 컨소시엄 철수를 촉구하는 전국 동시다발 공동행동을 전개하고자 한다. 우리는 2025년 10월, 유엔 팔레스타인 인권 특별보고관이 한국을 ‘가자지구 집단학살 공모 국가’로 지명한 사실을 기억한다. 국제법을 위반하면서 팔레스타인 영해 자원약탈로 이윤을 추구하는 한국석유공사에 수치심과 분노를 느낀다. 우리는 한국 정부와 한국석유공사에 강력히 촉구한다. 팔레스타인 집단학살 이스라엘의 가자지구 자원약탈 컨소시엄에서 지금 당장 철수하라! 또한 우리는 이스라엘의 집단학살 중단, 팔레스타인의 평화와 자유, 해방을 위해 가자지구 항해 선단에 오른 김아현(해초), 승준, 김동현 활동가의 투혼을 지지하며 무사 귀환할 때까지 함께할 것이다. ▸이스라엘은 가자지구 집단학살 지금 당장 멈춰라! ▸이스라엘 점령군은 가자지구에서 즉각 철수하라! ▸이스라엘은 레바논 점령과 학살을 즉각 중단하라! ▸미국은 이란침략 중단하고 중동지역에서 즉각 철수하라! ▸미국은 쿠바 봉쇄를 즉각 해제하라! ▸한국석유공사는 가자지구 영해 자원약탈 컨소시엄에서 즉각 철수하라! ▸HD현대, 한화 등은 이스라엘 집단학살 공모를 즉각 중단하라! ▸제국주의 침략전쟁에 맞서 반제반전 국제연대를 강화하자! 2026년 5월 13일 팔레스타인 평화를 위한 울산긴급행동 /* 스크롤 여백만 주고, 화면에는 안 보이게 */ .ftn-target { display: inline-block; /* 줄바꿈 안 생김 */ width: 0; height: 0; scroll-margin-top: 200px; } document.addEventListener("DOMContentLoaded", function () { // name="_ftn1", name="_ftn2", name="_ftnref1" ... 전부 대상 document.querySelectorAll('a[name^="_ftn"]').forEach(function(a) { var idValue = a.getAttribute("name"); // 이미 같은 id의 요소가 있으면 또 만들지 않음 if (!document.getElementById(idValue)) { var span = document.createElement("span"); span.id = idValue; span.className = "ftn-target"; a.parentNode.insertBefore(span, a); } }); }); /* 본문 각주 번호 + 아래쪽 각주 번호 색 지정 */ a[href^="#_ftn"] sup, a[href^="#_ftnref"] sup { color: #BF202D; } /* 밑줄이 보기 싫으면 */ a[href^="#_ftn"], a[href^="#_ftnref"] { text-decoration: none; } /* 마우스 올렸을 때 살짝만 강조하고 싶으면 (선택) */ a[href^="#_ftn"]:hover, a[href^="#_ftnref"]:hover { text-decoration: underline; } /* 페이지 전체가 오른쪽으로 넘치지 않게 */ html, body { max-width: 100%; overflow-x: hidden; } /* 본문 영역 폭 강제 고정 + 긴 단어/문장도 줄바꿈 */ #bo_v_con, .bo_v_con, .cke_editable, article { max-width: 100%; overflow-wrap: break-word; word-wrap: break-word; /* 구형 브라우저용 */ } /* 워드에서 붙은 이미지/표가 화면 밖으로 안 나가게 */ #bo_v_con img, #bo_v_con table, .bo_v_con img, .bo_v_con table, .cke_editable img, .cke_editable table, article img, article table { max-width: 100% !important; height: auto; } /* 워드가 p, span에 폭을 박아놓은 경우 강제로 해제 */ #bo_v_con p[style*="width"], #bo_v_con span[style*="width"], .bo_v_con p[style*="width"], .bo_v_con span[style*="width"], .cke_editable p[style*="width"], .cke_editable span[style*="width"], article p[style*="width"], article span[style*="width"] { width: auto !important; max-width: 100% !important; } /* 기본 blockquote 스타일 */ blockquote { border-left: 4px solid #c0392b; /* 사이트 분위기와 맞는 붉은 계열 */ padding: 12px 18px; margin: 20px 0; background: #fafafa; font-style: normal; color: #333; line-height: 1.6; } /* blockquote 안의 p 태그 정렬 */ blockquote p { margin: 0 0 10px 0; text-align: justify; } /* 마지막 p 태그 여백 제거 */ blockquote p:last-child { margin-bottom: 0; } -
[원청교섭 쟁취! 이재명 정부에 맞선 7월 총파업 조직하자! - Ⅱ] 근로기준법·노조법이 '기본법'이다! - 일터기본법 제정에 반대한다‘일터기본법’은 권리의 보장이 아니라 권리의 그림자다. 사각지대 해소가 아니라 사각지대의 법제화다. 노동법을 확장하는 기본법이 아니라 노동자를 차별하는 기본법이다. 자본의 책임 회피에 국가가 합법의 도장을 찍어 주는 흐름에 맞서, 우리는 일터기본법 제정에 단호히 반대한다. 사진: 참여와 혁신 1. “새로운 노동”이라는 거짓말 「일하는 사람의 권리에 관한 기본법안」(이하 ‘일터기본법’)을 밀어붙이는 이재명 정부와 민주당은 이렇게 읊는다. “세상이 변했다. 플랫폼이 등장했고 ‘긱 이코노미’가 확산됐다. 프리랜서가 늘었다. 기존 노동법으로는 이 새로운 노동 형태를 포괄하기 어렵다. 그래서 새로운 법이 필요하다.” 그럴듯하지만, 자본의 책임을 가리려고 정성스럽게 만든 알리바이다. 특수고용노동자는 하늘에서 떨어진 ‘새로운 존재’가 아니다. 근로계약 관계로 일하던 노동자를 자본이 ‘외부화’해 만들어 낸 가짜 개인사업자다. 자본은 종속 관계라는 실질을 그대로 둔 채 형식만 바꿔치기했고, 노동법은 그 술수에 끌려다니며 노동자를 근로기준법 바깥에 내다 버렸다. 플랫폼노동자 역시 마찬가지다. 기존 노동법의 허술한 틈을 비집고 들어가, 처음부터 노동자성을 지워 버리는 방식으로 조직된 노동일 뿐이다. 기술은 그 은폐를 한층 매끄럽게 다듬어 주었을 따름이다. 본질은 똑같다. 노동자를 ‘사업자’로 위장시키는 낡은 수법이다. 프리랜서노동은 또 어떤가. 더 이상 “자유로운 일”이라는 환상으로 포장되지 않는다. 이들도 노동조합을 만들고 노동권을 외친다. 어째서인가? 그 영역이 산업화되고, 자본의 맨얼굴이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종속성이 더는 감출 수 없을 만큼 선명해졌기 때문이다. 결론은 분명하다. “새로운 노동 형태”라는 말 뒤에 숨은 실체는, 노동자성을 박탈하려는 자본의 집요한 시도가 빚어낸 ‘불안정 노동의 전면화’다. 노동자가 노동자인지 아닌지가 모호해서가 아니라, 자본이 노동자를 노동자가 아닌 것처럼 둔갑시키려 획책한 결과다. 이 구조를 그대로 둔 채 “새로운 법”을 만들어 “별도로 보호하겠다”고 하는 것은 자본의 공작을 국가가 승인하는 행위다. 2. 노동법 적용을 회피하는 네 가지 핑계 노동법으로 이들을 포괄할 수 없다는 주장은 네 가지 핑계 위에 위태롭게 서 있다. “사용자를 특정하기 어렵다.” 누가 이들의 노동으로 배를 불리는가? 특수고용·프리랜서노동자에게는 그들과 직접 계약을 맺은 기업이 사용자다. 플랫폼 노동자에게는 플랫폼 기업과 그 플랫폼을 이용하는 사용업체가 사용자다. 이윤이 흐르는 길을 따라가면 사용자는 반드시 드러난다. ‘사용자가 보이지 않는’ 것이 아니라, ‘사용자로 보지 않으려는’ 의지가 있을 뿐이다. 심지어 일터기본법조차 ‘사업자’라는 이름으로 상대방을 지목하고 있지 않은가. 이름 한 번 바꿔 부른다고 책임이 증발하지는 않는다. “노동시간을 획정할 수 없다.” 그렇다면 기준을 만드는 일이야말로 정부와 입법기관의 책무다. 획정이 어렵다면 노동의 양태에 맞는 규율 방식을 법에 담으면 될 일이다. ‘기준 설정이 어려우니 노동법 밖으로 나가라’는 말은 국가의 직무유기이자 노동자에 대한 배신이다. “지휘·감독 관계가 불분명하다.” 낡아빠진 인식이다. 오늘, 자본은 단지 작업반장이 옆에서 지시하는 방식으로만 노동자를 통제하는 것이 아니다. 자본은 이미 오래전 공장형 직접 통제는 물론 노동과정 전반에 대한 유연한 통제를 도입했다. 건당 임금체계는 노동자가 스스로 채찍질하도록 강제하고, 알고리즘은 ‘자유롭게’ 일하는 노동자를 24시간 감시하고 평가한다. 낡은 지휘·감독 개념으로 세상을 들여다보는 것은 자본의 진화를 따라잡지 못하는 무능이거나, 따라잡지 않으려는 회피다. “프리랜서들은 자유롭게 일하고 싶어서 스스로 선택한 것이다.” 가장 악질적인 거짓말이다. 지금의 특수고용·플랫폼·프리랜서노동은 정규직 고용과 나란히 놓인 대등한 선택지였던 적이 없다. 해당 직종 자체가 불안정 노동으로 통째로 메워져 있어, 그 직업을 갖는 순간 권리 없는 노동을 강제로 떠안게 되는 구조다. “자유”의 이면에 “권리 없음”이라는 형벌을 묶어 노동자에게 들이미는 이 이데올로기를 우리는 단호히 거부한다. 결국 특수고용·플랫폼·프리랜서노동자들의 노동법 적용을 가로막는 것은 노동의 형태가 아니라, 노동법 밖으로 이 노동자들을 내몰며 책임 회피를 제도화하는 국가와 자본의 의지와 기획이다. 3. 권리 차별의 제도화 - 근로기준법 바깥에 쌓는 장벽 일터기본법은 근로기준법상 ‘근로자’와 그 외의 노동자를 노골적으로 ‘갈라놓는다’. 근로기준법을 적용받는 노동자에게는 근로기준법·최저임금법·남녀고용평등법·퇴직급여보장법이라는 보호가, ‘일하는 사람’에게는 종이우산 같은 선언적 보호가 차등 분배된다. 법을 통해 노동시장을 ‘근로자’와 ‘노무제공자’라는 두 계층으로 갈라놓는 차별의 고착화다. 머지않아 이 법은 근로기준법으로 진입하려는 노동자들 앞에 가로놓인 벽이 될 것이다. 법원과 행정기관은 ‘기본법이 적용되는 일하는 사람’과 ‘근로기준법이 적용되는 근로자’를 갈라놓는 해석 기준을 신나게 쌓아 갈 것이고, 지금이라면 근로자로 인정받았을 노동자들이 ‘기본법 적용 대상’이라는 옆길로 밀려날 것이다. 판관들은 ‘어차피 일하는 사람 기본법이 있지 않느냐’는 구실로 노동자성을 부정할 것이다. 분기의 조짐은 이미 곳곳에서 확인된다. 골프장 경기보조원이 겪는 괴롭힘에 대해 근로기준법상 괴롭힘 규정 적용은 부정하면서, 산업안전보건법상 ‘노무제공자’로 분리해 보호한 사례가 있다. 택배기사에 대해 근로기준법상 근로자임은 부정하면서, 산재보험법상 ‘특수고용 특례’로 산재보상만 시혜처럼 인정한 사례가 있다. 노동자성의 본체는 끝까지 인정하지 않으면서 곁가지 권리만 부분 배급하는 이 흐름이, 일터기본법을 통해 전국적·전면적으로 확장될 것이다. 이 법은 기본법의 원칙과도 정면으로 충돌한다. 본래 기본법이란 개별법의 확장과 발전을 견인하는 등대다. 그러나 이 법은 거꾸로 개별법의 확장을 가로막는 방파제다. 일터기본법 제3조 제2항이 “다른 법률에서 규정하고 있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이 법을 적용한다”고 정한 것은, 개별법 우선·기본법 보충이라는 전도된 구조다. 범위 설정도 기만적이다. “모든 일하는 사람”을 말하면서도 정작 본문에서는 “다른 사람의 사업을 위하여 자신이 직접 일하고 보수를 받는 사람”(노무제공자)으로 대상을 좁힌다. 경제적 종속성을 핵심 개념으로 삼는 노조법상 근로자보다도 협소한 범위이며, ILO 결사의 자유 협약이 보장하는 자영노동자와 자유직업인을 아우르는 ‘노동자(Worker)’ 개념과는 한참 동떨어져 있다. 헌법상 노동기본권을 내걸고 실상은 대상을 배제하는 명백한 입법적 기만이다. 사진: 민주노총 4. 실효성 없는 선언 일터기본법이 외치는 권리 보장은 껍데기뿐이다. 직장 내 괴롭힘 금지를 규정하지만 사업주는 “예방 조치를 취하도록 노력하여야 한다”는 가벼운 권고만 받는다. 근로기준법이 괴롭힘 발생 시 사업주에게 조사·징계·피해자 보호 의무를 강제하고 위반 시 형사처벌까지 부과하는 것과는 비교 자체가 무색할 정도다. 보수지급, 계약변경·해지 제한, 불이익취급 금지 등 모든 권리조항에 벌칙도, 과태료도, 강제도 없다. 분쟁 해결은 ‘조정’이라는 가장 느슨한 방식에 의지하는데, 사용자가 조정을 거부하면 절차는 그대로 종결된다. 강제이행 수단 없는 권리선언은 법이 아니라 정부와 국회의 기만이며, 노동자에게는 차라리 모욕이다. 이에 대해 정부와 국회는 “기본법이기 때문에 처벌조항이나 강제조항을 넣기 어렵다”고 둘러댄다. 그렇다면 묻자. 기본법과 함께 개별법 개정안을 묶어 패키지로 내놓으면 될 일 아닌가? 돌아오는 답은 한결같다. “나중에.” 5. "선언이라도 하면 낫다"? - 2020년 산안법의 교훈 “일단 선언이라도 해 두면 개별법도 따라서 개정되겠지.” 안이한 낙관은 아무것도 보장할 수 없음을 우리는 이미 똑똑히 목격했다. 2020년 산업안전보건법 전부개정 당시, 제1조 ‘목적’ 조항은 ‘근로자의 안전 및 보건’을 ‘노무를 제공하는 사람의 안전 및 보건’으로 바꿔 달았다. 특수고용·플랫폼노동자까지 빠짐없이 보호하겠다는 거창한 선언이었다. 언론은 ‘일하는 모든 사람의 안전이 지켜진다’고 일제히 박수를 쳤다. 6년 동안 무엇이 달라졌는가? 특수고용·플랫폼노동자에게 실제로 적용되는 조항은 단 4개다. 제5조, 제6조, 제77조, 제78조. 모두 선언적이고 추상적이다. 취객을 응대하고 고객의 욕설을 온몸으로 받아 내지만 감정노동자 건강장해 예방조치(제41조)는 그들에게 닿지 않는다. 위험한 작업 앞에서 멈춰 설 권리, 작업중지권(제52조)도 그들에게는 허락되지 않는다. ‘전속성 기준’에 따르면 앱을 두 개 사용하는 순간 산안법의 어떤 조항도 적용되지 않는 무권리 상태로 추락한다. 법의 ‘목적’을 바꿔 보호 범위를 ‘선언’했지만, 지난 6년 동안 플랫폼·특수고용노동자의 안전과 생명을 지키기 위한 실질적 제도 개선은 단 한 글자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 사이 죽고 다친 노동자의 이름만 차곡차곡 쌓여 갔다. 선언은 노동자의 무덤 위에 세워진 비석에 불과했다. 아픈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위로’가 아니라 ‘치료’다. 빈껍데기 입법을 성과로 포장하고, 그 가짜 성과를 명분 삼아 진짜 개혁을 무한정 미루는 패턴이 다시 반복되려 한다. 우리는 이 잔인한 동어반복을 더는 용인하지 않을 것이다. 6. 반복되는 역사 - 제2의 비정규직법 파견법은 중간착취 금지와 직접고용 원칙에 구멍을 뚫고 간접고용을 합법화하는 통로가 되었다. 도입 당시 ‘한정적·예외적’ 활용을 약속했으나, 결과는 제조업 사내하청과 간접고용의 일상화, 원청 책임의 증발이었다. 기간제법은 또 어떤가. 노동자들은 근로기준법 안에 ‘기간의 정함이 없는 상시고용’을 원칙화하고 비정규직은 예외적으로만 허용되도록 규율할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정부와 국회는 근로기준법은 건드리지 않은 채 별도의 ‘기간제법’을 만들었다. “2년이 지나면 무기계약 전환”과 “차별시정제도”를 선전했다. 결과는? 2년이 차기 직전에 계약을 끊고 새로 뽑는 초단기계약의 전면화, 직접고용을 회피하기 위한 간접고용의 폭발적 확산, 해소되기는커녕 고착된 임금 차별이었다. 두 법의 공통점은 명백하다. 근로기준법의 원칙은 손도 대지 않은 채 그 바깥에 따로 법을 만들어, 자본의 책임 완화 통로를 제도화한 것이다. 지금의 일터기본법은 그 길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 ‘일하는 사람’이라는 새 범주를 마련해 한 단계 낮은 권리를 배급하려 한다. 근로기준법 바깥으로 밀려난 노동자는 또 한 번 시험대에 오를 것이다. “당신은 일하는 사람 기본법의 대상인가, 아니면 그냥 자영업자인가.” 노동자, 일하는 사람, 순수 자영업자로 이어지는 단계적 탈락의 경로가 만들어진다. 일터기본법은 이 ‘강등의 기제’가 되어 자본의 책임을 완화한다. 사진: 오마이뉴스 7. ‘추정 조항’이라는 허울 함께 발의되는 근로기준법 개정안에는 다음 조항이 포함되어 있다. “다른 사람의 사업을 위하여 자신이 직접 노무를 제공하는 사람은 이 법과 관련한 분쟁해결에서 근로자로 추정한다.” 정부는 이를 두고 노동자성 판단의 일대 진보라며 자화자찬한다. 그러나 이 조문은 근로기준법 제104조(감독 기관에 대한 신고) 바로 다음에 온다. 근로자 정의(제2조)는 손대지 않고, 분쟁이 발생한 뒤에야 입증책임을 사용자에게 맡기는 장치다. 게다가 정부는 이 추정 제도의 적용 범위를 “민사소송”으로 한정한다. 노동 사건의 절대다수가 노동청·노동위 단계에서 종결되는 현실에서 이 추정은 사실상 실효성이 없다. 임금체불 한 건 이기려고 변호사를 선임해 민사소송까지 밀고 갈 수 있는 노동자가 도대체 몇 명이나 되겠는가. 임금을 다툴 때만 임금에 관하여, 노동시간을 다툴 때만 노동시간에 관하여, 해고를 다툴 때만 해고에 관하여 근로자로 ‘추정’되는 것이 도대체 무슨 노동권 보장인가? 권리는 분쟁 앞에서 마지못해 인정받는 것이 아니라 평상시에, 일터에서, 매일 작동해야 한다. 8. 근로기준법과 노조법이 기본법이다 노동관계의 기본법은 이미 우리에게 있다. 근로기준법과 노조법이 그것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새 이름표를 단 또 하나의 법이 아니라, 이 두 기본법을 현대화해 모든 일하는 사람을 정면으로 끌어안도록 만드는 일이다. 일터기본법 제정을 당장 중단하라. 이 법은 노동법의 확장이 아니라 노동법의 후퇴이며, 노동자에 대한 배반이다. 근로기준법 제2조가 규정하는 노동자 개념을 확장하고, 제대로 된 노동자 추정 조항을 정의 자체에 새겨 넣어야 한다. 분쟁 단계에서 뒤늦게 작동하는 절차적 추정이 아니라, 일터에서 매일 작동하는 실체적 추정이어야 한다. 자본의 비노동자화 시도를 적극적으로 규율해야 한다. 이미 시행 중인 미국 캘리포니아의 ABC 테스트처럼, 고용관계를 추정하는 명확하고 강력한 법적 지표를 법령에 담아야 한다. 이 기준의 경우 기업이 노동자를 ‘독립 계약자’로 분류하려면, △업무 수행에서 기업의 통제와 지시로부터 자유롭고(A) △기업의 통상적인 사업 범위 밖의 일을 수행하며(B) △독립적으로 해당 직업 또는 사업을 영위한다는 점(C)을 기업이 모두 입증해야 한다. 변덕스러운 개별 판결에 노동자의 운명을 맡길 수는 없다. 자본이 계약 형식을 왜곡하여 노동자성을 박탈하려 한다면 법이 단호히 막아야 한다. 근로기준법 자체의 보완도 미룰 수 없다. 초단시간 노동, 초단기 계약, 5인 미만 사업장에 대한 차별 구조, 다양한 고용형태에서 벌어지는 권리의 구멍 등에 대처할 수 있도록, 근기법을 더 촘촘하고 더 단단한 법, 모든 일하는 사람을 한 사람도 빠짐없이 끌어안는 법으로 다시 써야 한다. 이는 ‘임금노동관계’라는 낡은 틀에 갇혀 있는 노동권 개념 자체를 새롭게 벼리는 작업이기도 하다. 자유롭게 일한다는 것이 권리를 반납한다는 뜻이 되지 않도록, 노동권의 외연 자체가 확장되어야 한다. 노조법 또한 마찬가지다. 노조법상 근로자 개념을 ILO 결사의 자유 협약의 ‘노동자(Worker)’ 수준으로 활짝 열어, 모든 일하는 사람이 단결하고 교섭하고 행동할 권리를 누리도록 해야 한다. 사용자 개념 또한 실질적 지배력을 휘두르는 자본을 빠짐없이 포착하도록 다시 정의되어야 한다. 노동권의 진짜 보장은 제도적 시혜에서 오지 않는다. 단결과 투쟁의 권리를 누가 어디까지 행사할 수 있는가에서 온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새로운 법이 아니다. 노동자의 이름을 ‘일하는 사람’으로 바꾸어 변두리로 밀어내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일하는 사람을 ‘노동자’로 호명해야 한다. 노동자 정의를 그대로 좁게 유지하며 그 노동자가 아닌 이에게 권리의 부스러기를 적선하는 것이 아니라, 일하는 모든 이에게 노동자라는 이름과 그 이름에 따라붙는 온전한 권리를 되돌려 주어야 한다. 사진: 노동과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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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주의 기초학습#12] 사회주의 정당의 기본노선착취 당하는 모든 노동자가 날카로운 계급의식을 가진다면 자본주의는 단 하루도 지속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노동자계급의 의식은 불균등하며 정세에 따라 진동한다. 때로는 비약적으로 발전하기도 하고, 때로는 엄청나게 퇴보하기도 한다. 바로 그렇기에, 노동자계급의 선진적 일부로서의 ‘사회주의 노동자당’과 ‘노동자계급’ 그 자체는 구분된다. 특정한 노동자가 아니라 노동자계급 전체의 이익을 위해 투쟁하는 집단, 운동 전체의 이익을 위해 투쟁하며 노동자계급을 이끄는 의식적 집단이 바로 당이다. [목차] 1. 노동자계급에게는 왜 사회주의 정당이 필요한가 1) 노동조합 투쟁, 끝없이 굴러떨어지는 바위를 밀어 올리는 시시포스의 노동 2) 노동조합과 노동조합주의 3) 전 계급의 단결에 기초한 대중권력기관, 노동자평의회 4) 사회주의 정당의 존재 이유, 계급의식의 불균등성 5) 노동자평의회와 사회주의 정당 2. 전위정당에 대한 이해 1) 누가 당원인가? - 러시아사회민주주의노동자당 규약 1조 논쟁 2) 당과 대중의 관계 3) 사회주의 정당의 기본조직 4) 사회민주주의(개량주의) 진보정당의 ‘양날개론’ 비판 3. 사회주의 정당의 노선 1) 노동자계급 혁명을 통한 자본주의 철폐 - 칠레와 그리스의 경험이 말하는 것 2) 노동자계급 자신의 과업으로서의 노동자 혁명 3) 노동자계급 국제주의 – 국적이 아니라 계급으로 단결하자 4) 노동자계급 공동전선 추동 5) 노동자계급 헤게모니 형성 1. 노동자계급에게는 왜 사회주의 정당이 필요한가 1) 노동조합 투쟁, 끝없이 굴러떨어지는 바위를 밀어 올리는 시시포스의 노동 자본주의가 존재하는 한, 자본가계급은 착취강화 시도를 멈추지 않는다. 자본가계급은 더 많은 이윤을 축적하고자 가능한 한 임금을 줄이고, 노동시간과 노동강도를 늘리고, 더 많은 노동자를 기계설비로 대체하려는 시도를 지속한다. 많은 경우, 조직되어 있지 않은 다수의 노동자들은 자본가의 착취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며 저항하지 않는다. 그러나 자본가의 착취 강화시도는 생존을 위한 노동자들의 집단적 저항, 곧 계급투쟁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투쟁은 단지 경제적 문제에 머무르지도 않는다. 1838년부터 10여 년간 이어진 영국노동자들의 인민헌장 제정운동, 프랑스 노동자들의 1848년 2월혁명과 6월 봉기, 그리고 1871년 파리코뮌, 1905년과 1917년 러시아혁명, 1918년 독일혁명, 1936년 스페인혁명, 1968년 프랑스 5월혁명, 1987년 한국 노동자대투쟁 등등. 자본주의의 역사는 거대한 계급투쟁의 역사이기도 하다. 크고 작은 계급투쟁 속에서, 노동자는 자본가와의 적대적 이해관계에 대한 스스로의 인식, 즉 계급의식을 형성한다.[1] 노동자계급은 이런 각성과 함께 계급조직을 건설해왔다. 계급투쟁의 경험이 조직이라는 물질적 형태로 축적되지 않는다면, 그 성과는 자본의 반격과 함께 형체 없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이중 노동조합은 가장 보편적인 계급조직이다. 그러나 노동조합은 자본주의 철폐를 목표로 하지 않는다. 오히려 노동조합의 작동 원리는 자본주의적 임노동관계, 즉 노동력 상품화를 전제한다. 자본주의 속에서, 노동자는 자신이 가진 ‘노동력’이라는 ‘상품’을 자본가에게 판매해야 생존할 수 있다. 노동조합의 본질적 기능은 노동력 상품을 자본가에게 더 높은 가격, 즉 더 높은 임금에 판매하는 것이다. 그런데 노동조합이 노동력 상품을 (자본가의 의도에 비해) 보다 높은 가격으로 판매할 수 있는 이유는, 노동조합이 노동력을 ‘집단적으로’[2] 판매하기 때문이다. 가장 기본적인 노동조합 활동인 ‘단체’교섭(collective bargaining)의 본질은, 조합원집단의 노동력 판매 조건을 둘러싼 자본가와의 흥정[3]과 투쟁이다. 미조직 노동자는 자신의 노동력을 개별로 판매해야 하나, 조직노동자는 단결권·단체교섭권·단체행동권을 행사할 수 있다. 이를 통해 노동조합은, 임금을 노동력의 가치 이하로 떨어뜨려 더 많은 이윤을 쌓으려는 자본의 공세에 맞서 조합원의 생존권을 방어한다. 이렇듯 노동조합은 착취가 이루어지는 조건을 개선하고, 착취의 결과를 완화하기 위해 투쟁하는 조직이다. 바로 그렇기에, 노동조합이 조합원들에게 줄 수 있는 성과는 자본의 안정적인 이윤축적과 직결되어 있다. 전반적인 이윤축적의 위기가 도래하거나, 한 자본이 다른 자본과의 경쟁에 뒤처져 지불능력이 부족할 경우, 노동자는 자신이 가진 노동력을 높은 값에는커녕 노동력 재생산비용 이하로 판매해야 하는 처지로 내몰린다. 그렇기에 불황이 도래하면 상당수 노동조합은 임금삭감, 노동조건 후퇴, 해고를 용인하기도 한다. 호황기에도 마찬가지다. 대부분의 노동조합은 더 많은 임금과 복지를 요구하며 불황기에 겪은 고통에 대한 보상을 요구한다. 그러나 그 이상의 요구로 나아가지는 않는다. 적어도 일상적 시기에는 그러하다. 이런 점에서 ‘회사가 있어야 근로자도 있다’는 인식이 많은 노동자들에게 존재하는 이유는, 단지 자본가의 선동 때문이 아니라 노동력을 팔아야 생존할 수 있는 노동자계급의 상황, 또한 혁명적 노동자조직을 가지지 못한 노동자계급의 상황에 기인한다. 앞서 설명했듯, 노동조합은 착취의 원인인 ‘생산수단의 사적소유’와 ‘노동력 상품화’ 그 자체에는 맞서 싸우지 않는다. 그저 자본가의 공격에 맞서 방어하고 또 방어할 수 있을 뿐이다. 그래서 로자 룩셈부르크는 노동조합 투쟁을 ‘시시포스의 노동’이라고 설명했다. 노동조합은 바로 이윤의 공격에 대항하려는 노동자 계급의 조직된 방어, 다시 말하면 자본주의 경제가 가지고 있는 임금률을 아래로 억누르는 경향에 직면하여 노동자 계급을 보호하려는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두 가지 이유에서 그렇다 첫째, 노동조합의 과제는 자신의 조직을 통해 노동력이라는 상품의 시장 상황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조직은 중산계층이 프롤레타리아화되면서 끊임없이 노동시장에 새로운 상품을 제공하기 때문에 계속 파괴된다. 둘째, 노동조합의 목적은 노동자 계급의 생활 수준을 향상시키는 것, 즉 사회적 부에 대한 노동자 계급의 몫을 확대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몫은 노동 생산성이 향상함에 따라서 자연적인 과정처럼 숙명적으로 계속 낮아진다. … 노동조합을 통한 투쟁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진행하고 있는 객관적인 사실들로 인해 일종의 시시포스 노동으로 바뀐다.[4] 2) 노동조합과 노동조합주의 통상 자신의 활동을 소속 ‘조합원’의 권익 실현에 한정한다는 점 역시 노동조합의 주요한 특징이다. 현실의 노동자들은 수많은 업종과 고용형태로 분리되어 있기에, 특정 노동자의 당면 이해와 전체 노동자들의 장기적 이해는 때때로 충돌한다. ‘조합원’의 이해를 우선하는 노동조합의 동학상, 노동조합에 속하지 않은 미조직 노동자들을 포함한 전체 노동자계급의 이해는 종종 노동조합의 투쟁 과제에서 배제된다. 비정규직 투쟁을 외면하고 파괴하기까지 하는 정규직 이기주의, 여성노동자 차별을 구조화하는 성별임금 이데올로기, 이주노동자에 대한 차별을 당연시하는 민족주의와 인종주의 등이 그 예다. 이런 과정을 통해 전체 노동자계급과 무관하게 자신만의 이익을 추구하는 집단이 형성되기도 한다. 특정 산업의 호황과 해당 산업 노동조합이 보유한 교섭력을 바탕으로 자신들만의 이해관계를 배타적으로 추구하는 집단, 소위 ‘노동귀족’이라고 불리는 집단이다.[5] 이들이 문제가 되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윤율 저하에 따라 자본주의의 위기가 만성화한 상황에서, 자본가들은 노동자계급의 생존권을 더욱 가혹하게 공격할 수밖에 없다. 안정적인 이윤축적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군부독재에서 신자유주의로 이행하며 케인즈주의 계급타협 체제를 한 번도 경험한 적 없는 이 나라의 조건에서는 두말할 것도 없다. 대다수 노동자계급이 생존에 허덕이는 상황에서, 극히 일부 노동자들이 고임금과 기업복지를 누리며 자신들만의 이해관계를 추구하는 상황은 그 자체로 노동자계급의 단결을 심각하게 훼손하며, 노동자계급운동에 대한 미조직 대중의 반동적 정서를 강화한다. 앞서 말한 대로 미조직 대중은 자신의 노동력을 개별로 판매해야 하는 처지다. 지배계급은 미조직 대중의 분노를 십분 활용해 조직노동자운동을 탄압한다. 노동조합은 이런 한계들을 가진다. 이렇듯 노동조합은 보편적이고 필수적인 조직이나, 그 자체만으로는 전체 노동자계급의 장기적이고 근본적인 이익을 위한 투쟁을 조직할 수 없다. 특정한 조직은 특정한 의식을 낳는다. 혁명조직은 혁명적 의식을, 조합조직은 조합적 의식을 낳는다. 단기적이고 부문적인 이해관계에 종속된 노동자 의식, 노동조합으로 조직된 특정 집단의 이해관계에 종속된 노동자 의식을 ‘조합주의’라고 한다. 이렇듯 노동자계급에게는 조합주의를 넘어 노동자계급 전체의 단결을 추동할 조직이 필요하다. 노동자계급 전체의 단결을 추동하고 실현하며, 자본주의 국가권력을 타도하고, 나아가 사회주의 권력기관 그 자체로서 노동자계급을 지배계급으로 조직할 전체 노동자계급의 투쟁조직이 바로 노동자평의회다. 또한 노동자평의회가 창출되기까지 노동조합을 포함한 계급조직 안에서 노동자운동의 발전을 이끌고, 노동자평의회 내부의 한 경향으로서 활동하며, 노동자평의회를 노동자 권력으로 이끄는 의식적 지도조직이 바로 사회주의 노동자당이다. 3) 전 계급의 단결에 기초한 대중권력기관, 노동자평의회 자본가계급의 착취와 억압을 분쇄하기 위해서는 자본주의적 사적소유의 폐지가 필수적이다. 사적소유는 자본가들의 개별적 생산수단 소유에서, 주식회사나 국유기업 같은 집단적 소유까지 다양한 형식을 취하지만, 자본가계급이 생산수단과 노동과정에 대한 지배력을 독점한다는 점은 다양한 형식을 관통해 동일하다. 이러한 자본주의적 사적소유의 폐지, 즉 사회적으로 연합한 노동자들이 생산수단을 공동으로 소유하고 통제하며, 따라서 무엇을 얼마나 어떻게 생산하고 분배할 것인지 스스로 결정하는 힘을 쟁취하는 것은 착취와 억압을 끝장내고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는 데에서 핵심적인 토대다. 이 토대는 개별 기업이나 특정 산업부문, 일부 지역에서 마련될 수 없다. 전국적이고 전면적인, 모든 산업에 걸친 변혁이 이뤄져야 생산수단 사적소유를 폐지할 수 있다. 이 과정을 일관되게 추진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노동자계급의 권력 장악이 필요하다. 자본주의적 사적소유를 폐지하고 노동자계급의 공동체적 소유를 전면적으로 확립하기 위해, 그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부딪힐 자본가계급의 공공연한 저항을 분쇄하기 위해, 여전히 남아 있을 노동자계급 내 의식 편차를 극복하고 다른 피억압 민중과의 동맹을 성공적으로 이끌어가기 위해 노동자계급은 국가권력을 활용해야 한다. 그러나 자본주의 국가권력을 재생산하는 선거, 그 선거로 만들어지는 의회를 바탕으로 노동자 권력을 세울 수는 없다. 노동자계급은 자본주의가 남긴 억압적, 관료적 국가기구를 그대로 물려받아 사용할 수 없다. 기존의 국가 질서는 자본가계급의 착취와 억압을 유지하고 혁명을 차단하기 위한 용도로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사회혁명에 나선 노동자들은 낡은 억압적, 관료적 국가기구를 해체하고, 작업장에 바탕을 둔 대중적, 민주적 평의회 권력기구를 새롭게 창조해내야 한다.[6] 4) 사회주의 정당의 존재 이유, 계급의식의 불균등성 착취 당하는 모든 노동자가 날카로운 계급의식을 가진다면 자본주의는 단 하루도 지속될 수 없을 것이다. 모든 노동자가 노동조합을 결성할 것이고, 전투적 임금·단체협상 투쟁은 물론 계급적 연대투쟁에 나설 것이며, 노동자평의회와 사회주의 노동자정당 건설을 통해 국가권력 장악으로 나아갈 것이기 때문이다.[7] 그러나 노동자계급의 의식은 불균등하며 정세에 따라 진동한다. 때로는 비약적으로 발전하기도 하고, 때로는 엄청나게 퇴보하기도 한다. 10% 남짓한 한국 노동조합 조직률이 드러내듯, 일상적 시기에는 사회주의를 지향하는 노동자는 물론이고 노동조합에서 투쟁하는 노동자조차 소수일 수밖에 없다. 일상적 시기에 다수 노동자는 자본가계급의 이데올로기에 잠식되어 있는 것이 현실이다. 지배계급은 피지배계급의 단결을 막고자 부단한 노력을 기울인다. 이것이 능력주의, 성차별주의, 민족주의, 인종주의 등이 물질적 힘으로서 존재하는 이유, 노동자계급의 다수가 가장 보편적인 계급조직인 노동조합으로조차 조직되지 못하고 있는 이유다. “사회의 물질적 힘을 지배하는 계급은 사회의 정신적 힘도 지배한다”는 맑스의 말마따나, 피지배계급을 분열시킬 수 있는 이데올로기를 끊임없이 생산하고 유포할 수 있다는 것이 지배계급의 힘이다. 운동의 퇴조기에는 많은 노동자가 자본가계급의 이데올로기에 휩쓸린다. 그러나 사회주의 정당은 일상적 시기와 운동의 퇴조기에도 끊임없이 자본주의에 맞선 투쟁을 전개하며 노동자계급을 이끌고자 노력한다. 당의 입장이 당장 큰 반향을 얻기 어려운 상황일지라도, 당은 대중 속에서 호흡하며 노동자계급의 단결을 추동하고, 정세에 대한 대응방향을 제시하며 자본주의에 맞선 투쟁을 조직하고 이끌어야 한다. 이렇듯 노동자계급의 의식은 불균등하다. 투쟁하지 않던 노동자들이 자본주의 발전에 따라 자연히 투쟁대열로 들어오는 것도 아니다. 경제위기가 저절로 계급투쟁 격화를 낳는 것도 아니다. 바로 그렇기에, 노동자계급의 선진적 일부로서의 ‘사회주의 노동자당’과 ‘노동자계급’ 그 자체는 구분된다. 맑스와 엥겔스에 따르면, 공산주의자들은 그들이 한편으로 프롤레타리아의 다양한 일국적 투쟁들에 있어서 국적에 상관없는, 프롤레타리아트 전체의 공동 이해를 내세우고 주장한다는 점에서만, 다른 한편으로 프롤레타리아트와 부르주아지 사이의 투쟁이 경과하는 다양한 발전 단계들에 있어서 항상 운동 전체의 이해를 대변한다는 점에서만 다른 프롤레타리아 정당들과 구별된다. 따라서 공산주의자들은 실천적으로는 모든 나라의 노동자 정당들 중에서 가장 단호한 부분, 언제나 운동을 추동적으로 이끌어나가는 부분이다 : 그들은 이론적으로는 프롤레타리아 운동의 조건들, 진행 및 일반적 결과들에 대한 통찰을 여타 프롤레타리아트 대중에 앞서서 가진다.[8] 위 글에서 추론되는 점은 다음과 같다. 첫째, 노동자 계급에게는 다수의 당이 존재한다. 하나의 계급에게는 하나의 당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9] 둘째, ‘공산당’은 다른 프롤레타리아 정당과 대립되는 당은 아니지만 구별되는 당이다. 즉, 공산주의자들은 전체 프롤레타리아의 ‘일부’이다. 셋째, 공산주의자들은 전체 프롤레타리아의 이해를 대변한다. 즉, 특정 프롤레타리아의 단기적 이해는 전체 프롤레타리아의 이해와 항상 일치하는 것은 아니며, 공산주의자들은 양자가 충돌할 경우 단호하게 전체 프롤레타리아의 이해를 대변한다. 넷째, 공산주의자들은 운동의 조건들, 진행 및 일반적 결과들에 대한 통찰을 대중에 앞서서 가진다는 점에서 선진적 집단이다. 이렇듯 특정한 노동자가 아니라 노동자계급 전체의 이익을 위해 투쟁하는 집단, 운동 전체의 이익을 위해 투쟁하며 노동자계급을 이끄는 의식적 집단이 바로 당이다. 앞서 살폈듯, 노동조합으로 조직된 노동자들조차 자신이 속한 산업과 고용형태에서 유래하는 부문적 이익으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당의 주요 과제는 대중의 계급의식을 끌어올리기 위한 투쟁, 전체 노동자계급의 단결을 추동하는 투쟁이다. 당은 그 과정에서 노동자계급을 이끈다. 5) 노동자평의회와 사회주의 정당 그렇다면 앞서 살핀 노동자평의회가 존재하는 상황에서도 사회주의 노동자당이 필요한가? 그렇다. 계급의식의 불균등성은 노동자평의회 내에서도 마찬가지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혁명은 사회주의 정당과 노동자평의회, 두 조직의 상호작용 속에서만 가능하다. 노동자평의회는 대중의 권력기관이며 사회주의 정당은 노동자 평의회 내에서 다른 정치적 경향과 경쟁하며 대중을 혁명으로 이끌고자 분투한다. 러시아혁명 당시를 살펴보자. 혁명의 과정 속에서 당(볼셰비키)과 평의회(소비에트)의 관계는 매우 역동적이며, 사건의 흐름은 노동자평의회가 대중의 요구를 왜곡하고 굴절시키는 경우도 얼마든지 드러낸다. 1917년 2월 혁명으로 등장한 자본가들의 권력기관, 임시정부는 즉각 전쟁을 끝내라는 대중의 요구를 결코 수용하지 않았으나, 소비에트는 10월 혁명 직전까지도 임시정부의 권위를 인정했다. 이는 당면 혁명을 ‘부르주아 혁명’으로 못 박은 소비에트 다수파의 정치적 입장에 근거했다. 각 당파는 소비에트에 대한 정치력 영향력을 분점하고 있었고, 볼셰비키를 제외한 정치세력은 소비에트를 그저 임시정부를 지키기 위한 수단 정도로 생각했다. 그랬기에 소비에트를 누가 주도하느냐의 문제가 곧 소비에트가 권력기관이 될 수 있느냐, 혁명이 전진할 수 있느냐의 문제와 직결되었다. 혁명 초기 소비에트에 대한 볼셰비키의 영향력은 미미했다. 1917년 4월, 전쟁 중인 독일과 즉각 종전협상을 요구하는 대중투쟁이 정치적 위기로 번지자, 임시정부는 소비에트 내 온건 사회주의자들을 임시정부 장관으로 임명해 소비에트를 통제한다. 6월, 임시정부는 ‘전쟁 종식’이라는 대중의 요구를 받아들이기는커녕 러시아군에게 공세를 명령했다. 이에 충실하게 협조하던 소비에트 지도부의 입장으로, 즉각 종전을 원하는 대중의 정서는 소비에트와 더욱 멀어진다. 7월에는 러시아 수도 페트로그라드 수비대 병사들, 크론슈타트 수병들, 그리고 노동자들이 일으킨 봉기로 임시정부-소비에트-대중 사이의 균열은 더욱 명확해진다. 그런데도 소비에트 내 멘셰비키와 사회혁명당 지도자들은 임시정부에 대거 입각해 자유주의자들과 연립정부를 구성하며 볼셰비키를 불법화한다. 자본가의 권력기관인 임시정부와 노동자의 권력기관인 소비에트가, 서로 대립하기는커녕 화해하고 융합하는 상황에까지 이른 것이다. 그러나 소비에트가 볼셰비키를 불법화한 절망적인 상황에서조차, 볼셰비키는 민주적 소비에트 권력의 가능성을 놓지 않았다. “이 새로운 혁명에서 소비에트가 나타날 수도 있다. 아니, 나타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 소비에트는 현재의 소비에트, 즉 부르주아와 협력하는 기관이 아니라, 부르주아에 대당하는 혁명적 투쟁기관일 것이다. 그때에도 물론 우리는 소비에트를 모범으로 삼아 국가 전체를 건설하는 노선을 지지할 것이다. 일반적인 소비에트가 문제가 아니라, 현재의 반혁명 또 현재의 소비에트의 배신과 싸우는 것이 문제이기 때문이다.”[10] 볼셰비키의 불법화 이후에도 볼셰비키는 대중 속에서 영향력을 넓혀 갔고, 결국 10월,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라는 구호를 현실로 만들었다. 러시아 10월 혁명의 성공은 난관 속에서도 노동자평의회를 권력의 주체로 세우려는 볼셰비키의 지도력 없이는 불가능했다. 이렇듯 사회주의 정당만으로도, 노동자평의회 만으로도 혁명은 불가능하다. 양자의 유기적 결합이 혁명을 가능케한다. 2. 전위정당에 대한 이해 1) 누가 당원인가? - 러시아사회민주주의노동자당 규약 1조 논쟁 전위정당 개념은 이념적으로는 대중의 ‘자생성’에 대비해 당의 ‘의식성’을 강조한 1902년 레닌의 소책자 『무엇을 할 것인가』에서 처음 제기되었고, 이념과 조직적 측면을 포함한 총체적 제기는 1903년 러시아사회민주주의노동자당 2차 당대회에서 벌어진 규약 1조, 즉 <당원 자격에 관한 논쟁>에서 비롯되었다. 1903년 2차 당대회 당시 레닌이 제출한 규약 1조 초안은 다음과 같다. “당원은 당의 강령을 받아들이고, 물질적 수단으로 당을 지지하며, 당의 한 기구에 속해 활동하는 사람이다.” 이에 반해 마르토프가 제출한 초안은 다음과 같다. “당원은 당의 강령을 받아들이고, 물질적 수단으로 당을 지지하며, 당의 한 기구의 지도 아래 정기적으로 당을 지원하는 사람이다.” 레닌에게 당원은 당기구에서 활동하는 사람이었으며, 마르토프에게 당원은 당을 돕는 사람이었다. 전자는 당원 자격을 당에서 활동하는 사람으로 제한하자는 주장이고, 후자는 지지자도 당원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주장이다. 앞서 살폈듯 사회주의 노동자당은 노동자계급의 의식적 일부, 즉 ‘전위’[11]다. 그렇기에 사회주의 노동자당은 모든 노동자가 아니라 자본주의에 맞서 투쟁하는 노동자, 계급적 노동자를 조직대상으로 삼는다. “당 조직으로 공인된 조직의 성원만을 당원으로 인정한다고 할지라도, 특정의 당 조직에 ‘직접’ 가입할 수 없는 사람들은, 당 조직이 아니지만 당과 관련된 조직 속에서 여전히 활동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운동에의 참가와 활동으로부터 제외한다는 의미로서 방기한다는 말은 언어도단이다. 반대로 참된 사회민주주의자로 이루어진 우리의 당 조직이 강고하게 되면 될수록, 또 당내의 동요와 불안정성이 적으면 적을수록, 당을 둘러싸고 있으며 당에 의해 지도되는 노동자 대중의 분자들에 대한 당의 영향력은 더욱 넓어질 것이며, 더욱 다면적으로, 더욱 풍부하게, 더욱 성공적으로 될 것이다. 요컨대 노동자계급의 전위로서 당은 계급 전체와 혼동되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계급의 당이다. 그러므로 계급의 거의 전체가 (그리고 전시나 내란 시에는 완전히 계급 전체가) 당의 지도하에 행동해야 하며, 가능한 한 긴밀하게 우리 당에 동조하여야 한다. 그러나 자본주의하에서 계급 전체가 또는 거의 전체가 그들의 전위나 사회민주당의 의식성과 적극성의 수준까지 고양되리라고 생각하는 것은 바로 마닐로프주의거나 ‘추수주의’인 것이다. 현명한 사회민주주의자라면, 자본주의하에서는 노동조합 조직조차도 모든 또는 거의 모든 노동대중을 망라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의심하지 않는다. 전위와 전위에 이끌리는 모든 대중과의 차이를 망각하고, 광범한 층을 점차로 선진 수준까지 끌어올리는 전위의 항상적 임무를 망각하는 것은 단지 자신을 기만하는 것이며, 우리 임무의 위대성을 외면하는 것이며, 우리 임무를 축소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당에 동조하는 자와 당에 소속하는 자의 차이, 자각된 적극적인 자와 원조하는 자의 차이를 말살하는 것이야말로 이와 같은 외면이고 망각이다.”[12] 레닌의 강조점은 명확하다. ‘당’은 ‘계급의 당’이지만, 계급 그 자체와는 다른 것이다. 당은 계급 전체를 망라할 수 없으며, 그러려고 해서도 안된다. 당은 계급의 의식적이고 선진적인 부분이어야 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당은 끊임없는 계급투쟁의 부침 속에서도 중핵을 보존하고 확장함으로써 노동자계급을 권력으로 이끄는 투쟁조직이어야 한다. 혹자는 ‘전위당’의 필요가 러시아 전제정의 혹독한 공안탄압에서 기인했으며, 오늘날 전위당은 시대착오적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주목해야 할 점은, 위 인용문에서 레닌은 ‘러시아 상황’이 아니라 ‘자본주의 사회’의 계급과 계급조직의 관계에 대해 논하고 있다는 점이다.[13] 전위는 정세적으로 끊임없이 진동하는 계급을, 단기적인 경제적 이해를 넘어 권력의 주체로 형성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는 노동자계급의 선진층이며, 이 선진 부위의 축적과 단결이 곧 당의 건설이다. 자본주의체제를 변혁할 당을 만들고자 한다면 그 당의 성격은 당연히 전위적일 수 밖에 없다. 이런 점에서 ‘전위’를 무엇인가 신비한 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오류다. 사실 ‘당원은 당기구에서 활동하는 사람이다’라는 레닌의 주장은 매우 소탈한 것으로 들리기도 한다. 앞서 살핀 것처럼 계급의식의 불균등성에 따라 당원 자격을 한정하는 것은 불가피하며 이는 음모주의, 엘리트주의와 하등 관계가 없다. 그럼에도 전위정당은 종종 음모가 집단, 직업적 혁명가들만 가입할 수 있는 집단, 엘리트주의적 집단이라는 오해를 받아왔다. 레닌 자신이 한 번도 당원 자격을 음모에 능한 직업적 혁명가들로 제한해야 한다고 주장한 적이 없음에도 이런 오해는 널리 퍼져있다. 이를 더 자세히 살펴보자. 논쟁 당시 레닌에 따르면, 당을 구성하는 범주는 다음과 같다. 당 조직은 오직 직업적 활동가로만 구성되어야 한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극히 제한되고 비밀스러운 조직으로부터 매우 광범하고 자유로운 느슨한 조직에 이르기까지 모든 종류, 모든 등급, 모든 색채의 다양한 조직이 필요하다. … 마르토프 동지의 정식 초안이 당과 조직 간의 관계에 대해 전혀 언급조차 하지 않았음에 반해, 나는 대회가 소집되기 1년 전에 이미 어떤 조직이 당에 가입해야 하고 어떤 조직은 그렇지 않은가에 대해 지적하였다. … 1) 혁명가의 조직, 2) 가능한 한 다양하고 광범한 노동자 조직 (나는 이 말을 노동자계급에 한정하고 있지만 다른 계급의 일정한 분자도 일정한 조건에서는 여기에 들어올 수 있다는 것을 자명한 사실로 전제하고 있다). 이 두 범주가 당을 구성한다. 다음으로 3) 당에 동조하는 노동자 조직, 4) 당에 동조하지는 않으나 실제로는 당의 지도와 통제 하에 있는 노동자 조직, 5) 적어도 계급투쟁의 대발현의 시기에 부분적으로 사회민주당의 지도에 복종하는 노동자계급의 미조직 분자. … 마르토프 동지의 견해를 보면 당의 경계가 완전히 불분명하다. … 이러한 느슨함으로부터 어떠한 이로움이 생기는가? ‘명칭’이 널리 퍼져나가는 것이다. 그 해악은, 계급과 당의 혼동이라는 조직 해체의 사상을 가져오는 것이다.[14] 레닌은 ‘혁명가의 조직’만으로 당을 구성해야 한다는 사고를 명시적으로 부정하며, ‘가능한 한 다양하고 광범한 노동자 조직’도 당을 구성한다고 말한다. 즉, ‘당의 한 기구에 속해 활동하는 사회주의자’로 구성된 당은 노동자계급의 일원으로서, 노동자계급과 가장 넓은 접촉면을 유지하며, 노동자계급의 운동을 추동하고 조직하는 과정에서 종국적 승리로 이끌고자 분투한다. 전위당은 대중 속에서 행동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이는 당연하다. 이렇듯 전위당의 본래적 의미, 그 어디에도 엘리트주의와 음모주의는 존재하지 않는다. 물론 의문은 남는다. ‘대중 속에서 활동하더라도, 전위당은 당원 자격을 엄격히 제한하므로, 결국 사회주의 정당은 늘 소수일 수밖에 없지 않느냐’는 질문이 있을 수 있다. 실제로 운동의 침체기와 일상적 시기에 사회주의 정당은 소수일 가능성이 높다. 자본주의 철폐를 지향하는 사회주의 정치의 대중화는, 그 본질상 언제 어디서나 가능한 것이 아니다. 사회주의 대중화는 자본주의 사회의 위기와 계급투쟁 확대를 그 필요조건으로 한다. 그리고 자본주의의 위기와 함께 벌어지는 파업을 비롯한 노동자투쟁 확대는 급진적 노동자들의 비약적 확대로 이어지기도 한다. 1905년 1차 러시아 혁명 이후의 공세기에, 레닌은 혁명이 배출한 급진적 노동자들을 당에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이 위험을 과장하지 말자, 동지들. 사회민주주의는 이미 자기 이름을 확립했고, 하나의 경향을 만들어냈으며, 사회민주주의적 노동자 간부들을 형성해 냈다. 그리고 이제 영웅적인 프롤레타리아가 실천으로, 명확히 인식된 목표를 위해, 순수한 사회민주주의 정신으로, 일관되고 집단적으로 싸울 준비와 능력이 있음을 입증했으니, 우리 당 소속 노동자나 중앙위원회의 초청으로 내일 당에 가입할 노동자 백에 아흔아홉은 사회민주주의자일 것임을 의심하는 것은 그저 터무니없는 일일 것이다. 노동자계급은 본능적으로, 자발적으로 사회민주주의적이며, 사회민주주의가 지난 10년 넘게 기울인 활동은 이러한 자발성을 의식성으로 전환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허수아비를 때리지 말자, 동지들! 모든 살아 있고 성장하는 정당에는 언제나 불안정, 동요, 흔들림의 요소가 있게 마련이다. 그러나 이러한 요소는 영향받을 수 있으며, 굳건하고 확고한 사회민주주의 중핵의 영향에 따를 것이다.[15] 2) 당과 대중의 관계 계급투쟁 확대는 전위와 대중의 간격을 급격히 좁힌다. 격화하는 계급투쟁 속에서 대중은 자본주의 그 자체에 대해 집단적 의문을 제기하며, 이는 사회주의 정치가 급진화된 노동자 대중 속으로 뻗어나갈 계기를 형성한다. 이것이 사회주의 대중화의 조건이다. 물론 위기가 사회주의 대중화 자체를 보장하지는 않는다. 중요한 것은 위기에 조응하는 과제를 제시하고 선도할 사회주의 정당의 주체적 능력이며, 이러한 능력은 일상적 시기에 준비된다. 해당 준비의 핵심은 혁명적 강령, 노동자계급과의 일상적 결합, 그리고 당원의 주체화를 추동할 당내 민주주의다.[16] 당은 노동자계급의 유기적 일원이어야 한다. 당원은 당의 제반 문제를 자유롭게 토론할 수 있어야 하고, 이를 통해 당론 결정에 참여할 수 있어야 한다. 일상적 시기에 살아있는 당이 아니라면, 그 당은 혁명적 시기에도 살아있을 수 없다. 전위는 대중과 호흡하며 대중을 올바른 길로 이끌고자 노력하며, 성공과 실패 속에서 스스로를 교정한다. 1917년 러시아혁명 당시를 반추하며, 레온 트로츠키는 당과 대중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서술한다. “대중은 사회재구성에 관한 준비된 계획을 가지고 혁명에 돌입하지 않는다. 다만, 구체제를 더 이상 견딜 수 없다는 격렬한 감정으로 혁명에 돌입할 뿐이다. 계급대중의 지도적 부위만이 정치강령을 가지고 있는데, 이것도 혁명의 시험과 대중의 승인을 거쳐야 한다. … 지도조직이 없다면 대중의 혁명에너지는 피스톤 실린더 안에 들어가지 않은 증기처럼 사방으로 흩어질 뿐이다. 그러나 역시 원동력은 피스톤이나 실린더가 아니고 증기에 있듯이 혁명의 원동력은 대중에게서 나온다.” “소비에트는 공장위원회에 뒤처졌다. 공장위원회는 대중에게 뒤처졌다. 병사들은 노동자들에 뒤처졌다. 더욱이 지방은 수도에 뒤처졌다. 이것이 혁명의 불가피한 역동성이다. … 볼셰비키 역시 혁명의 역동성을 따라잡지 못하고 뒤처졌다. … 대중은 균일하지 않을뿐더러 손을 데이고 소스라치게 놀라자빠진 다음에야 혁명의 불길을 다루는 법을 배운다. 볼셰비키는 경험을 통해서만 배우는 대중의 각성 과정을 가속할 수 있을 뿐이었다. 이들은 참을성 있게 설명했다. 그리고 이번에 역사는 이들의 참을성에 보답해 주었다.”[17] 트로츠키의 서술은 대중의 자발성과 당의 의식적 지도 사이의 변증법을 보여준다. 전위는 대중의 에너지를 조직하고 방향을 부여하는 피스톤이다. 그러나 계급투쟁의 역동성은 언제나 대중으로부터 솟아나며, 당은 이를 선도하기도 하고 뒤따르기도 한다. 살아있는 당은 바로 이 흐름을 이해하고 그 흐름 속에서 자신을 갱신할 수 있는 조직이다. 당은 토론의 자유와 행동의 통일을 결합해, 대중의 경험을 의식적 전술로 만들며, 이를 통해 전위와 대중의 간극을 실천으로 메운다. 혁명적 강령, 노동자계급 속에서 활동하는 실천적 당원, 토론의 자유와 행동의 통일을 보장하는 민주집중제, 이 총체가 ‘인민의 호민관’으로서의 당을, 또한 혁명을 가능케 한다. 3) 사회주의 정당의 기본조직 사회주의 정당은 기초조직을 노동현장에 둔다. 노동자가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공간, 생산과 착취가 일어나는 공간, 계급투쟁이 벌어지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사회주의 노동자당은 노동현장으로부터 계급투쟁을 조직하고, 지원하며, 개입하고, 이끈다. 노동현장에 존재하는 당의 기초조직, 노동현장에 뿌리박은 ‘당의 한 기구’, 이를 ‘현장분회’라고 부른다. 현장분회는 생산현장에서 투쟁을 조직하고 이끌며, 사회주의 정당의 이념과 강령을 알리며 대중을 조직한다. 이를 통해 일터에 당의 존재를 드러내고, 일터의 투쟁과 전체 노동자투쟁을 잇는 선전·선동을 수행한다. 앞서 살폈듯 노동조합은 조합원에 대한 분배의 확대를 중심 목표로 활동하며, 이는 때로 사회주의 정당의 노선과 충돌하기도 한다. 그렇기에 사회주의 정치운동을 노동현장에서 전개하기 위해서는, 노동조합과 독립적인 당의 기구가 생산현장에 존재해야 한다. 즉, 사회주의 정당의 당원은 그저 당원증을 가진 노동조합원이 아니라, 일터에 포진한 사회주의 정치활동가를 지향한다. 현장분회는 대규모 제조업 생산현장으로 한정되지 않으며, 소규모 공장이 모인 공단, 서비스 노동 등 당원의 구체적 노동형태에 따라 지역적 형태 등 유연한 조직형태에 기반할 수 있다. 이에 반해 통상적인 사회민주주의(개량주의) 진보정당의 기본조직은 ‘지역구’다. 지역구 단위로 선거가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진보정당의 목적은 의회진출이며, 이에 중요한 것은 선거에 필요한 재정과 표의 확보다. 그렇기에 대다수 진보정당은 선거 단위에 조응해 당원을 편재한다. 양자의 차이는 현장분회가 노동자를 ‘계급’이라는 집단으로 조직하고자 하는 데 반해, 지역구 체제는 노동자계급을 자본주의 선거제도 아래 ‘유권자’로 조직한다는 것이다. 지역구 체제 아래 진보정당에 속한 노동자들은 ‘시민’으로서, 한 사람의 유권자로서 편재되고, 해당 노동자들 또한 시민적 정체성으로 지역구민을 만나며 당의 득표 확대를 위해 활동한다. 진보정당의 당원은 동료 노동자들에게 국가와 자본에 맞선 계급투쟁을 선동하는 노동자 정치운동가로서가 아니라, 최대한 온건한 모습을 요구받는 한 사람의 시민으로 정체화되는 것이다. 선거 중심 활동과 조직체계는 사회민주주의 진보정당에 내재한 국민정당화 경향[18]을 증폭시킨다. 사회민주주의 진보정당은 애초 노동자계급정당으로 출발했더라도, 결국 전 국민을 조직대상으로 삼는 국민정당으로 귀결해왔다. 그 동학은 다음과 같다. 선거에서는 투쟁하는 노동자도 1표, 투쟁하지 않는 노동자도 1표, 교수와 변호사도 1표, 자본가도 1표를 행사한다. 그렇기에 투쟁하는 노동자의 목소리는, 선거에서 1/N에 지나지 않는다. 선거 중심 활동과 선거대응에 초점을 맞춘 조직체계 아래, 노동자계급은 당의 핵심 주체가 아니라 일부가 될 수 있을뿐이다. 이렇듯 현장정치활동이 존재하지 않는 통상적 사회민주주의 정당의 구조상, 노동자는 일터 바깥에서만 당원이 될 수 있으며, 그것도 한 사람의 시민으로서 그러할 뿐이다. 이에 따라 일터의 투쟁은 오로지 노동조합에 맡겨지며, 정당의 활동은 현장투쟁과의 결합력을 잃고 의석 확대를 위한 표와 재정의 조직화로 축소된다. 한국에서 이런 모델, 즉 노동조합은 경제투쟁을 하고 진보정당은 정치투쟁을 한다는 역할분담론은 ‘양날개론’으로 제시되어 왔다. 4) 사회민주주의(개량주의) 진보정당의 ‘양날개론’ 비판 운동진영에 이른바 ‘양날개론’이 처음 제시된 시기는 1990년대 중반이며, 민주노총의 정치세력화 역시 이런 모델에 근거했다.[19] 그렇다면 노동조합의 경제투쟁과 진보정당의 정치투쟁이라는 역할분담론은 어떤 문제를 가지는가? 경제투쟁과 정치투쟁의 분리를 전제로 하는 양날개론은 그 자체로 오류다. 정치투쟁은 진보정당이, 경제투쟁은 산별노조가 한다는 역할분담론에 따라, 정치의 공간과 경제의 공간은 무 자르듯 분할된다. ‘현장’은 ‘노동조합 임단협투쟁’을 하는 곳으로, ‘의회’는 더욱 중요하고 거시적인 ‘정치’가 행해지는 것으로 표상되는 것이다. 경제투쟁과 정치투쟁이 분리될 경우, 경제투쟁은 그야말로 조합주의적 이해관계에 한정된다. 노동조합 밖에서 사회적 격변이 벌어지건 말건 노동조합은 소속 조합원들의 임금과 노동조건을 개선하면 그만이다. 또한 양날개론 역할분담론에 따라 정치는 현장의 외부, 까마득히 먼 의회에서 직업정치인들이 하는 것이 된다. 정치가 이렇게 정의되는 순간, 노동자계급의 정치적 임무는 전적으로 진보정당의 의회진출 확대에 맞추어진다. 이에 따라 노동자들이 할 수 있는 ‘정치’는 진보정당 후원사업과 투표 조직으로 한정되며 노동현장 안에서의 정치활동은 텅 비게된다. 이는 정치운동과 노조운동 양자 모두의 후퇴를 결과한다. 그러나 계급투쟁은 그 자체가 경제투쟁과 정치투쟁의 융합이다. 1987년 노동자대투쟁은 경제투쟁인가, 정치투쟁인가? 1996-97 총파업 투쟁은 경제투쟁인가, 정치투쟁인가? 모든 거대한 계급투쟁에서 경제투쟁과 정치투쟁은 뒤섞이며 상호 발전한다. 또한 양날개론은 필연적으로 관료주의와 노동자정치의 왜곡으로 이어진다. 양날개론자들에게 ‘정당’이란 의회에 진출하기 위한 도구이며, ‘정치’란 의회에서 노동자계급을 대표하는 행위이다. 그렇기에 양날개론자들에게 현장투쟁은 고될 뿐 별 성과가 없는 것이며, 의회에 진출하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한 임무다. 이에 따라 노동조합의 인적·재정적 자원을 진보정당으로 동원하는 것이 노동자 정치세력화의 첩경으로 놓인다. ‘진보정당에 의한 노동조합의 안정적 동원’[20]이 목적이 되는 순간, 노동조합 내에는 ‘묻지마 단결’이 최우선 과제로 놓인다. 노동조합 내 다양한 정치적 경향의 존재에 ‘분열’이라는 딱지가 붙고, 정치적 소수파를 노동조합 밖으로 내모는 행위가 단결의 이름으로 행해진다. 논쟁과 토론을 통해 이루어지는 조합원의 정치의식 발전은 봉쇄된다. 정치의 목적이 선거와 의회진출로 놓임에 따라, 당은 계급투쟁이 배출한 전투적 노동자들이 아니라 선거기술자, 출세주의자로 채워진다. 심지어 ‘진보정당도 의석확대를 위해 자본가정당의 정치기술을 구사할 수 있어야 한다’, ‘진보정당도 협상에 능해야한다’는 투의 이데올로기가 일종의 교훈처럼 유포된다. 이를 통해 당은 노동자계급의 통제를 벗어나며, ‘국민정당’으로 귀결한다. 이러한 한국 양날개론의 원형은 독일 사회민주주의자들에게서 유래했다. 로자 룩셈부르크는 ‘당의 정치투쟁과 노동조합의 경제투쟁’이라는 역할분담론을 다음과 같이 비판한다. 노동조합과 사회민주당이 “병행 행동”(parallel action)을 하며 “동등한 권위”를 지닌다는 이론은 전적으로 근거 없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역사적 뿌리를 갖고 있다. 이 이론은 부르주아 사회의 평화롭고 “정상적인” 시기라는 환상에 기초해 있다. 이 시기에는 사회민주당의 정치투쟁이 의회투쟁으로만 소모되어버리는 듯 보인다. 그러나 노동조합 투쟁과 마찬가지로 의회투쟁도, 부르주아 사회 질서라는 토대 위에서만 수행되는 투쟁이다. 노동조합의 활동이 경제개혁 작업인 것과 마찬가지로, 그것은 본질상 정치개혁 작업이다. … 최종 목표는 의회투쟁이나 노동조합 투쟁 그 너머에 있다. … 노동조합과 사회민주주의의 “동등한 권위”라는 이론은 단순한 이론적 오해나 혼동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잘 알려진 기회주의적 사회민주주의 경향의 표현이다. 이 경향은 노동계급의 정치투쟁을 의회투쟁으로 축소시키고, 사회민주당을 혁명적 프롤레타리아 정당에서 소부르주아적 개혁정당으로 바꾸려 한다. … 물론 이것은 노동조합 조직을 정당에 흡수시킨다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노동운동 전체와 그 일부인 노동조합 간의 실제 관계에 상응하는, 사회민주주의와 노동조합 간의 통일을 회복하는 것이 목적이다.[21] 3. 사회주의 정당의 노선 1) 노동자계급 혁명을 통한 자본주의 철폐 - 칠레와 그리스의 경험이 말하는 것 곳곳에서 제국주의 전쟁위기가 심화하고 있다. 미국과 유럽 ‘민주주의’ 국가들조차 극우세력이 발호하고 있으며 그 배경에는 이윤율 저하에 따른 자본의 이윤축적 위기가 있다. 일반화한 저출생 문제가 드러내듯 현 시기 자본주의는 전체 노동자계급의 가장 기본적인 생존조차 보장할 수 없다. 자본가계급은 체제를 지배할 능력이 없음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다.[22] 그러나 문제는 어떤 지배계급도 스스로 권력을 내려놓지 않는다는 것이다. 노동자계급이 혁명을 지향하건 평화적 이행을 지향하건, 지배계급은 평화적 이행을 허용하지 않는다. 그 과정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지배계급의 조직된 폭력, 국가권력이다. 칠레와 그리스의 사례는 자본주의 국가권력에 맞선 결정적 투쟁 없이 이행은 불가능하다는 점을 여실히 드러낸다. 레닌이 말했듯, 혁명의 문제는 곧 국가권력의 문제다. (1) 1973년 칠레의 경험 1970년 9월, 칠레 노동자 민중은 살바도르 아옌데를 대통령으로 선출했다. 아옌데는 사회당, 공산당, 급진당 등 좌파와 중도좌파 정당이 결성한 ‘인민연합’(Unidad Popular, UP) 소속으로 출마하여 토지개혁, 대외 종속 탈피, 기간산업 국유화, 교육·보건 공공성 강화 등 개혁 프로그램을 공약으로 제시했다. 아옌데 정부는 집권 이후 미국 자본이 장악하고 있던 구리 산업을 비롯해 은행, 석유, 통신, 제약 등 주요 부문 국유화 조치를 단행했다. 이는 1971년 7월 11일 의회가 만장일치로 의결한 헌법 개정에 기초한 것으로, ‘초과이윤 조항’을 통해 미국 자본에 대한 보상을 최소화했다. ‘사회주의로 가는 칠레의 길’을 내건 아옌데 정부는 이러한 개혁을 자본주의 체제를 유지한 채 합법적으로, 즉 기존 헌정질서의 틀 내에서 추진하려 했다. 사실 인민연합정부는 출범부터 의회제도를 비롯한 기존질서 유지를 ‘보장법’으로 약속했다.[23] 현존 정치체제와 사법체제, 교육제도·노동조합·사회조직의 사회주의 지향으로부터의 독립, 출판과 대중매체에 대한 국가로부터의 독립 등을 서약하며 제도 내에 존재할 것을 다짐하고서야 출범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처럼 자본주의 국가의 골격을 건드리지 않았음에도, 자본은 아옌데 정부에 극렬한 반격을 개시한다. 칠레 자본가계급은 보수 언론과 정당, 교회, 자본가 단체들을 통해 조직적으로 아옌데 정부를 흔들었다. 특히 1972년 10월에 발생한 '트럭 소유주 연맹'의 대규모 파업은 결정적인 전환점이었다. 이 파업은 CIA가 수백만 달러를 투입해 기획한 것으로, 물류망을 마비시켜 아옌데 정권을 흔들기 위함이었다. 더욱이, 의회 다수와 사법부는 인민연합 정부의 경제 개입 조치를 '합법성 결여'라 비판하며 사보타주에 나섰고, 1973년 8월 22일에는 하원이 아옌데 정부가 '헌법을 위반했다'는 결의안을 채택했다. 이는 군부의 정치 개입을 정당화하는 명분으로 작용했다. 이미 그 무렵 칠레 군대는 우익 쿠데타 세력으로 기울고 있었다. 그러나 칠레 노동자 민중은 자본주의가 정한 틀 내에 머무르려 하지 않았다. 경제를 마비시키려는 자본의 사보타주와 군부의 쿠데타 위협 속에서, 1972년부터 1973년까지 노동자 민중은 공장과 지역에서 자발적이고 수평적인 권력기구를 형성하기 시작했다. 바로 산업조정위원회(cordones industriales, 직역하면 ‘산업 벨트’)이었다. 산업코르돈(산업조정위원회)은 작업장과 지역 단위를 잇는 노동자 조직으로 공장점거, 생산통제, 분배 조정, 쿠데타에 맞선 방어조직 형성 등을 수행했다. 유통부문에서는 노동자와 주부, 학생들이 '민중공급위원회'(공급과 물가위원회)를 구성하고 식량과 필수재의 배급을 자율적으로 조정했다. 산업조정위원회와 민중공급위원회처럼 노동자 민중이 자본가들의 공격에 맞서고자 자발적으로 만든 조직들이 전국으로 확장되고 이것이 정부의 지지, 지원과 결합할 경우, 이것이 ‘이중권력’으로 발전할 가능성은 충분했다. 아옌데 정부는 이런 조직을 잠재적 권력기구가 아니라 자본가들을 놀라게하는 성가신 존재들로 취급했다. 1973년 6월, 군부가 쿠데타를 시도하자 산업코르돈은 수십 개의 공장을 접수하고 생산과 물자 이동을 자체적으로 통제하며 반격했다. 하지만 아옌데 정부는 이 흐름을 지지하지 않고 오히려 사회화된 기업을 자본가에게 돌려주는 조치를 취했고, 위기 타개를 위해 피노체트를 내무장관으로 기용하는 타협을 선택했다. 이는 치명적인 선택이었다. 결국 1973년 9월 11일, 피노체트를 중심으로 한 군부는 쿠데타를 단행했고, 아옌데는 대통령궁에서 자결했다. 칠레 군부는 대대적 학살을 자행했고, 정치적 억압뿐 아니라 경제 구조의 근본적 재편을 추진했다. 그 중심에 미국 시카고대학 경제학과에서 밀턴 프리드먼에게 학습한 신자유주의 교리로 무장한 경제학자 집단, 이른바 ‘시카고 보이즈’가 있었다. 이들은 피노체트 정권 하에서 고삐 풀린 시장 개방, 국영기업의 민영화, 노동권 축소, 복지 철폐 등 신자유주의 정책을 대대적으로 도입했다. 이는 이후 IMF가 세계 곳곳에 강요할 ‘구조조정 프로그램’의 원형이었다. 아옌데 정부가 추구한 ‘사회주의로 가는 평화로운 길’은 무참히 짓밟혔고, 군부와 자본의 연합은 칠레 노동자 민중의 삶을 벼랑으로 몰았다. 칠레의 비극은 단지 민중연합의 적들이 악랄해서가 아니었다. 자본주의 국가기구의 ‘중립성’에 대한 환상, 부르주아 헌정질서 내에서의 점진적 개혁에 대한 집착, 그리고 노동자 민중이 아래로부터 만들어낸 투쟁과 기구에 대한 방기. 이것이야말로 ‘체제 내 사회주의’가 가진 구조적 한계를 드러낸다. 혁명이 배제된 사회주의는, 자본이 허용하는 만큼만 존재할 수 있을 뿐이다. (2) 2015년 그리스의 경험 2008년 세계 금융위기와 이어진 유럽 재정위기는 남유럽 국가들에게 심각한 타격을 안겨줬다. 그리스는 가장 큰 피해를 입은 나라 중 하나였다. 유럽연합(EU), 유럽중앙은행(ECB), 국제통화기금(IMF)으로 구성된 ‘트로이카’는 그리스 정부에 퇴직연령 상향, 연금 삭감, 최저임금 삭감, 단체교섭 제한, 해고 요건 완화, 공공부문 축소 등 가혹한 긴축정책을 요구했다. 그리스 실업률은 30%에 가깝게 치솟았고, 청년실업률은 50%를 넘겼다. 분노한 대중은 기존과는 다른 대안을 찾기 시작했다.[24] 이런 상황에서 ‘시리자’(SYRIZA)와 같은 급진 좌파 정당들이 대안으로 떠올랐다. ‘급진좌파연합’ 이라는 뜻의 시리자는 2004년 여러 좌파정당의 연합체로 결성되었고, 이후 2012년에 하나의 통합 정당으로 재편되었다. 시리자는 긴축정책에 맞선 대중운동을 정치적으로 대변하면서 지지층을 빠르게 넓혀갔다. 시리자는 2012년 5월 1차 선거에서 16.8%, 6월 2차 선거에서 26.9%를 얻어 범그리스사회주의운동당(PASOK)를 제치고 제2당으로 부상했다. 2009년 선거에서 4.6%를 획득했음을 감안하면 놀라운 성장이었다. 결국 시리자는 2015년 1월 총선에서 36.3%를 득표하며 집권에 성공하게 된다. 트로이카가 강요하는 긴축안에 맞선 대중투쟁이 시리자의 집권 배경이었다. 긴축을 둘러싼 협상이 시작되었다. 트로이카는 강경하게 가혹한 조건을 강요했고, 그 강경함 뒤에는 다른 채무국에 대한 경고도 포함하고 있었다. 그리고 2015년 7월 9일, 시리자는 굴욕적 긴축안을 트로이카에 제출한다. 2015년 7월 5일 긴축 찬반을 둘러싼 국민투표에서 압도적 다수가 '긴축 반대'를 결정하고 단 4일이 지난 뒤였다. 7월 12일, 그리스와 트로이카가 합의한 긴축안은 △연금 삭감 △노동유연화 △해고 공무원 재고용조치 등 구제금융 합의에 위배되는 법률 철회 △500억 유로 규모 국유자산 민영화 등을 포괄하고 있었다. 이렇게 대중의 기대를 품고 집권한 시리자는 트로이카의 긴축안 집행자로 전락했다. 시리자의 몰락은 통상적인 사회민주주의(개량주의) 정당의 몰락 경로와 전혀 다르지 않았다. 물론 2008년 금융위기 이후 계급투쟁의 발전 전망에 중대한 타격을 주었다는 점에서, 시리자의 굴복이 남긴 상처는 더 컸다. ᅠ 명백히 드러났듯, 긴축의 중단은 열강의 대리자들과 한 테이블에 앉아 입씨름하는 것으로 이루어질 수 없었다. 시리자는 트로이카와의 협상 테이블을 박차고 나와 그리스 노동자 민중의 힘에 호소했어야 한다. 또한, 유럽노동자계급의 연대를 구하며 트로이카의 악랄한ᅠ강요에 맞서 함께 싸우자고 호소했어야 했다. 그 힘과 함께 ‘유로존 탈퇴’라는 도약을 감행하지 않고, ‘긴축의 거부’는 불가능했다. 시리자가 부상하던 당시, ‘혁명과 개량의 이분법을 넘어서자’는 말장난을 하는 사람들은 한국에도 많았다. 자본주의 위기가 심화하는 지금, 시리자의 몰락이 남긴 역사적 교훈을 상기하는 것은 중요하다. 자본주의 국가권력에 맞선 결정적 계급투쟁 없이 이행은 불가능하다. 2) 노동자계급 자신의 과업으로서의 노동자 혁명 사회주의 혁명은 한 유형의 착취자를 좀 더 진보적인 다른 유형의 착취자로 대체하는 지난날의 혁명이 아니라, 모든 착취자의 손아귀에서 생산수단을 빼앗아 전체 사회의 공동 소유물로 만들고 생산자들 자신이 운영함으로써 계급 그 자체를 철폐하는 혁명이다. 따라서 사회주의 혁명은 노동자계급이 전면적이고 능동적으로 참여하며, 노동자계급의 주도권과 능동성에 바탕을 두어야 비로소 승리할 수 있다. 이렇듯 혁명은 노동자계급이 사회의 운명에 직접 개입하며 자신의 억눌린 잠재력을 해방하는 과정이다. 이탈리아 혁명가 안토니오 그람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첫째, 혁명이 부르주아 국가를 전복하는 데 착수하고 그러한 전복에 성공한다고 해서 반드시 프롤레타리아적인 것은 아니다. 둘째, 또한, 혁명이 중앙정부가 부르주아 정치권력을 집행하는 수단인 대의제도와 행정조직을 제거하는 데 착수하고 실제로 그렇게 한다고 해도 그 혁명이 반드시 프롤레타리아적이고 공산주의적인 것도 아니다. 셋째, 민중봉기가 자신을 공산주의자라 부르는 자들(또한, 실제로 신실한 공산주의자들)의 수중에 권력을 쥐여준다고 해서, 그것이 프롤레타리아적이고 공산주의적인 것도 아니다. 혁명은, 자본가계급이 지배하는 사회의 깊은 곳에서 발전하는 프롤레타리아와 공산주의의 생산적 힘을 해방하는 정도만큼만 프롤레타리아적이고 공산주의적이다.”[25] 노동자계급의 힘을 해방하는 과정이 사회주의 혁명이라고 할 때, ‘평의회’는 단지 자본주의 타도를 위한 수단에 그치지 않는다. 평의회는 혁명의 발발, 확산, 승리에 있어 결정적 역할을 하는 투쟁기구일 뿐만 아니라 혁명 이후에도 노동자권력의 핵심을 구성한다. 역사적 계급투쟁은 평의회 형태의 권력을 창출해왔다. 1871년 파리코뮌, 1917년 러시아혁명 과정에서 나타난 노동자·병사·농민 소비에트(평의회), 1918-19년 독일혁명 과정에서 나타난 노동자·병사평의회, 1919-1920 이탈리아의 ‘붉은 2년’ 당시 금속산업 노동자들이 주축으로 건설한 공장평의회, 1972-73년 칠레 인민연합 정부 당시 산업코르돈(산업벨트, 산업조정위원회), 1979년 팔레비 왕조를 타도한 이란혁명 과정에서 나타난 쇼라(평의회), 1980-81년 폴란드 국가자본주의에 맞선 ‘연대노조’ 등이다. 계급투쟁 격화와 노동자계급의 자기권력으로서의 평의회 형성이라는 흐름은 한국에서도 드러난다. ‘민주노조’는 고유명사다. 1987년 7·8·9 노동자대투쟁 이후 민주노조운동의 흐름은 국제 노동운동사에서 손꼽힐 정도로 역동적인 것이었다. 한국 민주노조운동은 △생산현장에 기반해 사업장 모든 노동자를 조직했다는 점에서 △총회 민주주의 등 아래로부터의 노동조합 민주주의를 구현했다는 점에서 △생산현장 점거파업으로 자본가의 소유·경영권에 균열을 내며 이를 일상의 ‘현장권력 쟁취투쟁’으로 확장했다는 점에서 △사업장 담장을 넘어 연대투쟁의 전통을 만들었다는 점에서 평의회적인 것이었다. 주체들이 그것을 노동조합이라 불렀건, 평의회라 불렀건 간에 말이다. 이는 서구 노동조합의 전통과는 판이하게 다른 것이었다. 19세기 말 영국·독일 등 서유럽 노동조합들이 구성한 노동조합은 숙련노동자 중심의 직종·직능별 조합체제였다. 이는 특정 노동자 부문의 고용안정과 임금인상에는 기여했지만, 비숙련 노동자와 여성노동자 등을 배제하며 전체 노동자의 단결과 계급적 연대를 제약했다. 이후 서유럽 노동조합들은 산업별 체계로 전환했으나, 이는 생산현장에 기초한 투쟁기관이 아니라 상층 중심의 관료적 협상체계였다. 반면 1987년 노동자대투쟁 이후 한국 노동조합은 단지 임금교섭의 수단이 아니라, 생산현장에서 자본의 독재에 맞서 싸우는 노동자계급의 투쟁기관이었다. 이런 민주노조운동의 변혁적 지향을 집약하는 구호가 바로 ‘노동해방’이었다. 사회주의 정당은 노동자계급의 자기해방을 위한 투쟁의 일부로서, 노동자계급과 함께 투쟁하며 노동자계급을 이끈다. 사회주의 정당은 노동자계급의 대리자가 아니다. ‘전지전능한 유일당’은 더더욱 아니다. 사회주의 노동자당은 노동자계급의 자기 해방운동의 역사적 과정을 안내하고 촉진하는 촉매 역할을 담당할 뿐이다. 사회주의로 나아갈 수 있는 혁명적 상황을 낳는 것은 노동자들의 집단적 행동이다. 사회주의 노동자당이 하고자 하는 것은 이러한 노동자대중의 운동을 의식적인 것으로 만드는 것이다. 그리고 이 운동의 에너지를 자본가계급으로부터 정치적, 경제적 권력을 빼앗아 노동자 자신의 권력으로 대체한다는 궁극적 목표로 향하게 하는 것이다. 바로 이렇게 대중의 에너지가 모이고, 그 에너지가 혁명의 기관차를 움직일 수 있는 올바른 방향을 찾게 안내하고 앞장서 이끄는 것이 진정한 사회주의 노동자당의 역할이다. 우리가 추구하는 사회주의 노동자당은 이러한 자주적 운동을 가로막는 온갖 유형의 관료주의적 질서와 통제, 억압에 맞서 투쟁하면서 노동자 스스로의 운동, 즉 노동자계급의 의식과 조직, 노동자민주주의를 발전시키는 당이다.[26] 3) 노동자계급 국제주의 – 국적이 아니라 계급으로 단결하자 사회주의 혁명은 근본적으로 세계혁명의 성격을 지닌다. 자본주의 자체가 생산과 분배를 국제적으로 실행하는 세계체제인 한, 이로부터 단절한 채 한 나라에서 노동자계급 해방을 달성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어느 한 곳에서 혁명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사회 위기가 표면화한다는 것은 곧 지구적인 차원에서 위기가 누적됐다는 것을 의미한다. 경제위기만이 아니라 기후 위기 같은 재난 상황 역시 일국의 경계를 넘어 전 지구적 범위에서 다가오고 있다. 또한 어느 나라에서 노동자혁명이 일어나든, 반드시 세계 자본가계급이 연합해 이 혁명을 진압하려 정치적, 군사적으로 간섭할 것이다. 궁극적으로 사회주의는 자본주의의 무정부적 경쟁이 초래하는 낭비와 자연 파괴를 막기 위해 전 지구 차원에서 의식적, 계획적으로 생산과 분배를 조직해야 실현할 수 있다. 따라서 노동자혁명의 시작은 일국적일지라도, 세계혁명의 전망 아래 여러 나라로 확산하며 노동자계급의 국제적 협력을 성취했을 때 비로소 완전한 승리를 기대할 수 있다. 그 점에서 노동자 국제주의를 구현하는 것은 단지 고귀한 이상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노동자계급의 해방을 실현하기 위한 현실적이고 필수적인 과제다.[27] 20세기 식민지 재분할과 대공황 극복을 둘러싸고 벌어진 두 차례 세계대전은 자본주의가 인류를 절멸할 수 있음을 드러냈다. 그리고 오늘날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대만과 남중국해를 둘러싼 미·중 대결, 그리고 팔레스타인 학살은 또 다른 세계대전의 전조다. 지금, 미국 헤게모니의 쇠퇴 속에서 제국주의 전쟁위기가 확산하고 있다. 2차대전 직후 세계 GDP의 50%에 달하던 미국 GDP 규모는 1985년 플라자합의 당시 35%로 줄어들었고, 이제는 세계 GDP의 24-25% 가량에 불과하다. 이에 반해 중국은 무서운 속도로 부상했으며[28] 브릭스를 축으로 세력 확장을 꾀하고 있다. 균열하는 세계 자본주의라는 조건 속에서 군비지출 확대는 당연한 일이다. 2025년 4월 28일 스톡홀름국제평화연구소에 따르면. 2024년 세계 각국 군사비 지출은 2023년보다 총 9.4% 증가했다. 미국 군사비 지출 5.7% 증가, 중국 7% 증가, 러시아 38% 증가, 독일 28% 증가. 일본 21% 증가. 열강은 직접 전쟁을 치르고 있거나, 대리전에 참여하고 있거나, 전쟁을 준비하고 있다. 자유무역 시대 종말과 보호주의 전면화, 급증하는 군비, 우크라이나를 무대로 장기화하는 대리전. 이런 열강투쟁을 조건으로 극우세력이 득세하고, 극우세력 득세가 다시 열강투쟁 격화로 이어지는 형국이다. 노동자계급 국제주의는 자본주의 태동 이래 변함없는 과제였지만, 다시 세계대전의 위기 앞에 놓인 오늘날 그 중요성은 그야말로 막중하다. 오늘의 한국 노동자계급의 국제주의 연대투쟁 주요 과제는 다음과 같다. 첫째, 보호주의 관세전쟁과 함께 확산하는 민족주의와 애국주의에 맞선 투쟁. 둘째, 군비증강, 한·미·일 군사동맹 강화, 무기수출 확대 등 군사화와 제국주의 전쟁에 반대하는 투쟁. 셋째, 팔레스타인 학살에 맞선 연대투쟁, 넷째, 이주노동자 탄압과 이주민 혐오조장에 맞선 투쟁이 그것이다. 첫째, 보호주의 관세전쟁이 촉발한 애국주의 이데올로기에 맞서야 한다. 이윤축적의 위기 앞에 국가와 자본가계급은 끊임없이 애국주의를 부추긴다. “한국 산업을 살리자”는 선동 뒤에는 보호주의 심화에 따른 경제위기를 명분으로 한 착취강화 시도가 담겨있음은 물론, 자본가들 사이의 투쟁에 노동자계급을 동원하며 ‘타국 노동자계급을 억압해야만 한국 노동자계급이 생존할 수 있다’는 분열 조장이 담겨있다. 사회주의 운동은 국가와 자본의 애국주의 선동에 맞서 세계 노동자계급 공동의 이해를 내세운다.[29] 둘째, 제국주의 전쟁과 군비증강, 전쟁산업 확대에 반대하는 투쟁이다. 세계 곳곳에 전운이 깔린 지금, 각국 지배계급은 급격한 군비 확대에 나서고 있다. 2023년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발발 전까지만 해도 유럽 각국 방위비는 나토 가이드라인인 2% 이하였다. 최근 방위비를 5%까지 올리겠다는 유럽 각국의 결의는 노동권에 대한 전면 공격과 복지 축소를 동반한다. 전쟁산업 확대 역시 노동자계급의 투쟁 대상이다. ‘K-방산’은 한국을 제국주의 열강의 보급기지로 만들고 있으며, 이는 그 자체로 한반도 전쟁위기를 고조시킨다. 이미 한국은 모든 유럽 국가를 합친 것보다 더 많은 포탄을 우크라이나에 공급했으며[30], 마스가(MASGA, 미국 조선업을 다시 위대하게) 프로젝트는 한국 조선산업 노동자들을 미 해군력 증강의 도구로 만들고 있다. 셋째, 팔레스타인 학살에 맞선 국제연대를 확대해야 한다. 이스라엘 지배계급이 서방 제국주의의 지원과 묵인 아래 자행하는 팔레스타인 학살에 맞선 투쟁은 이미 세계정세의 핵심축이다. 이탈리아 노동자들이 9월 팔레스타인 연대총파업으로 길을 보여주었듯, 한국 노동자계급 역시 일터와 지역에서 팔레스타인 연대운동을 확대해야 한다. 넷째, 이주노동자 탄압과 강제추방에 맞서는 연대가 필요하다. 9월 4일 미국 현대차-LG에너지솔루션 합작공장에서 이루어진 한국노동자 대규모 체포 구금사태에 분노했다면, 한국에서 이루어지는 이주노동자 단속 추방에도 분노해야 한다. 노동조합은 이주민에 대한 혐오선동, 이주노동자 단속 추방에 맞서 지역과 사업장 모든 노동자들을 보호하는 구심으로 서야한다. 4) 노동자계급 공동전선 추동 노동자계급의 의식은 불균등하다. 산업, 고용형태, 지역, 조직화 수준의 차이에 따라 노동자들은 서로 다른 경험과 의식을 가진다. 따라서 사회주의 정당은 노동자계급 전체의 단결을 추동하기 위해 공동전선(United Front)에 주목한다. 공동전선은 자본가계급의 공격에 맞선 투쟁, 제국주의 전쟁에 맞선 투쟁, 소수자 차별에 맞선 투쟁 등에 있어 광범하게 적용될 수 있다. 사회주의자들은 공동전선 속에서 △공동전선이 내건 요구의 쟁취 △대중의 계급의식 고양 △투쟁조직 확대를 추동한다. 또한, 그 과정 속에서 사회주의 세력의 영향력 확대를 도모한다. 공동전선 내에는 투쟁하는 노동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개량주의 정당을 지지하는 노동자도 있을 수 있고, 개량주의 정당 자체도 있을 수 있다. 이렇듯 다양한 대중의 공동행동 속에서 대중의 혁명적 능력을 확대하고, 노동자계급의 투쟁 진지를 확대하며, 사회주의자 노선과 개량주의 노선의 차이를 실천적으로 드러내어 혁명적 정치세력을 확대하는 과정 없이 혁명은 불가능하다. 공동전선의 필요성을 여실히 드러내는 대표적 사례가 바로 1930년대 초 독일에서 히틀러가 집권하게 된 과정이다. 1차 세계대전 패전 후, 바이마르 공화국 하의 독일 자본주의는 심각한 경제위기와 사회적 혼란을 겪고 있었다. 대공황의 충격 속에서 실업자는 1932년 2월 600만 명에 달했고, 중간계급이 몰락하면서 나치당이 급부상했다. 이 시기 노동자계급은 독일공산당(KPD)과 사회민주당(SPD)으로 나뉘어 있었고, 공산당은 1928년 코민테른 제6차 대회가 채택한 ‘사회파시즘론’에 따라 사회민주주의를 파시즘과 동일한 기능을 수행하는 부르주아 지배의 한 형태로 규정했다. 사회민주당이 저지른 역사적 배신[31]이 이러한 인식을 강화시켰다. ‘사회민주주의 주적론’에 따라 독일공산당은 당원들에게 “사회파시스트를 공장과 노조에서 몰아내자”고 선동했고, 1931년 프로이센 사회민주당 주정부 해산을 위한 국민투표에 나치와 함께 참여했으며(소위 적색 국민투표), 1년 뒤 나치세력에 의해 프로이센 주정부가 해산될 때 공산당은 이를 기뻐할 정도였다. 이러한 사회파시즘론이 파시즘 부상과 나치 집권의 길을 열었다. 1933년 1월 히틀러가 합법적으로 총리에 임명되고 나치가 정권을 장악했다. 나치는 집권 직후 공산당과 사회민주당을 동시에 불법화했고, 독일 노동조합총연맹을 해체했다. 단결하지 못한 독일 노동자운동은 파시즘에 의해 철저히 분쇄되었다. 공산당과 사회민주당이 공동전선을 구성할 수 있었다면 나치를 막을 수 있었다. 이는 전혀 과장이 아니다. 히틀러가 권력을 잡기 전 마지막 선거 결과는 다음과 같다.[32] 사회민주당과 공산당의 합산 득표는 나치보다 많았다. 정당 득표수 비율 나치당 11,737,021 33.1% 사회민주당 7,247,901 20.4% 공산당 5,980,239 16.9% 중앙당 4,230,545 11.9% 국민당 2,959,053 8.3% 바이에른인민당 1,094,597 3.1% 기타 - 6.3% 이러한 공동전선은 단순한 전술적 연합이 아니라, 공동투쟁으로 노동자들의 계급의식을 고양하고 혁명적 실천으로 나아가게 하는 가교다. 바로 그러하기에, 사회주의자들은 공동투쟁 속에서도 자신의 주장을 알리고 논쟁할 권리를 보유해야 하며, ‘대중투쟁강령’은 이러한 실천의 매개다. 오늘날 한국의 노동자계급과 피억압 민중은 오랜 침체기를 겪고 있다. 개량주의 정당들은 선거와 의회주의를 통해 노동자들을 체제 내로 끌어들이고 있으며, 민주노총 상층의 노조 관료들은 민주당에 의존해 노동자투쟁을 통제하고 있다. 이런 조건 속에서도 대중투쟁강령을 매개로 한 공동전선의 적극적 운용은 필수적이다. 개량주의 정당과 노조 관료들이 장악한 현실 속에서도 노동조합은 여전히 중요하며, 노동자평의회 정신에 입각한 공동전선은 노동조합운동의 민주적·전투적·계급적 재편에 있어 핵심적 과제다. 사회주의 정당은 노동자평의회가 어느날 갑자기 나타나기를 고대하며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노동조합 내에서 활동하며, 또한 다양한 노동자 투쟁조직 내에서 활동하며 노동조합운동의 평의회적 발전을 추동한다. 중요한 것은 공동전선과 인민전선의 차이다. 공동전선은 노동자계급을 중심으로 피지배계급의 공동투쟁을 조직하기 위한 전술이다. 즉, 공동전선은 노동자계급의 독립성을 전제하며 이에 지배계급 분파와의 공조를 배제한다. 그러하기에 공동전선은 자본가 정당과의 연합을 포괄하는 인민전선(Popular Front)과는 완전히 다르다. 이른바 ‘민주대연합’은 자유주의 정당과 민주당을 포괄하는 전형적인 인민전선으로, 노동자계급을 자본가 정당의 하위 파트너로 전락시킨다. 인민전선은 노동자운동을 체제 내로 포섭하는 지배계급의 수단일 뿐이다. 5) 노동자계급 헤게모니 형성 모든 혁명은 억압받는 민중의 혁명이다. 그러나 그 혁명의 본질을 결정하는 것은 어떤 계급이 민중을 이끄는가, 어떤 계급이 혁명을 주도하는가다. 노동자계급이 주도적으로 제반 사회적 의제에 개입하며 해당 의제의 계급적 본질을 드러내고, 피억압 민중을 자본주의에 맞선 투쟁대열로 이끌 때 사회주의는 가능하다. 이것이 노동자계급 헤게모니다. 그러나 노동자계급의 헤게모니는 노동자가 이런저런 민중의 투쟁에 단지 연대하는 것으로, 노동자의 요구와 다종다기한 민중의 요구를 기계적으로 조합하고 절충하는 것으로 형성되지 않는다. 노동자계급 헤게모니는 사회적 억압 자체가 자본주의 계급사회의 산물이며, 따라서 계급투쟁의 영역임을 실천으로 드러낼 때 형성된다. 예를 들어, 가부장제 아래 고통받는 여성의 해방은 기업과 정부에서 여성 고위직을 늘리는 것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성별분업과 여성노동에 대한 체계적 저평가는, 자본에 맞선 남성노동자와 여성노동자의 단결 투쟁을 통해서만 해소된다. 해방은 착취자와 억압자의 성별을 바꾸는 과정이 아니다. 기후위기 역시 마찬가지다. 일상이 된 기후재난은 ‘탄소배출권 거래제’, ‘탄소세’와 같이 탄소에 시장가격을 매기는 방식으로 해결되지 않는다. 이윤을 위한 기후파국을 불사하는 자본주의 생산체제 자체를 바꾸지 않는 한 기후위기의 해결은 불가능하다. 청년취업난은 중장년층 노동자 퇴출로 해결되지 않는다. 청년실업은 노동시간을 단축으로 일자리를 나누고, 이윤이 아니라 공공복리를 위한 일자리를 창출하는 과정을 통해 가능하다. 이 모든 투쟁이 자본가계급에 대한 투쟁과 직결되어 있다. 노동자계급은 이에 대한 총체적 투쟁 전망을 제시함으로써 헤게모니를 형성할 수 있다. 만약 노동자들이 조각조각 쪼개져 모두 단기적 이해관계에 함몰되어 있다면, 노동자계급 헤게모니 형성은 불가능하다. 예를 들어, 어떤 강력한 노동조합이 소속 조합원들의 단기적 이해관계에 종속되어 잔업과 특근을 늘리고, 조합원 자녀에 대한 우선 채용을 요구하며, 기후파국이 오건말건 탄소 다배출 공정 확대를 요구한다고 가정해보자. 이런 노동조합은 결코 전체 운동을 주도할 수 없다. 노동자계급의 헤게모니는 사회 각 부문에서 벌어지는 투쟁들을 단순히 병렬적으로 나열하지 않고, 계급투쟁의 보편적 관점으로 재조직하는 과정이다. 노동자계급이 여성운동, 성소수자운동, 기후정의운동 등 다양한 운동을 ‘계급 적대’라는 관점으로 해석하고, 운동의 목표 쟁취를 위해 계급투쟁이라는 투쟁 수단을 제시할 때, 그 투쟁들은 자본주의 체제 전체를 겨누는 변혁적 실천으로 발전한다. 바로 그렇기에 노동자 ‘계급’의 관점으로 세상에 대한 해석을 제시하는 과정, ‘계급’의 관점으로 제반 투쟁에 대한 총체적 관점을 제시하는 것이 필요하다. 노동자계급은 협소한 단기적 이익을 넘어, 피억압 민중 전체의 해방을 자신의 과제로 내걸 때 비로소 사회변혁의 주도 세력으로 올라설 수 있다. 그것이 노동자계급 헤게모니이며, 그 헤게모니 형성을 주도하는 구심이 사회주의 정당이다. ----- [1] “개인들은 다른 한 계급에 맞서 공동의 투쟁을 수행해야 하는 한에서만 하나의 계급을 이룬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은 경쟁자로서 서로 적대적 관계에 있다.” - 칽 맑스 · 프리드리히 엥겔스. 『독일 이데올로기』, 1845-46년. [2] 신자유주의 이론가들이 임금에 대한 시장결정 메커니즘을 왜곡한다는 이유로 노동조합에 반대하는 이유다. 그들에게 노동자는 항상 개별적인 노동시장 참여자여야 한다. [3] 노동조합 관료층의 존재는 노동력 상품의 판매 조건에 대한 흥정이라는 노동조합의 기능 그 자체에서 비롯된다. 따라서 노동조합의 자주성·민주성·연대성·투쟁성·변혁지향성을 강화해 노동조합을 노동자계급의 투쟁기관으로 세우기 위한 노력이 필수적이다. [4] 로자 룩셈부르크, 『사회개혁이냐 혁명이냐』, 1899년. [5] 노동귀족의 역사는 자본주의의 역사만큼이나 길다. 엥겔스의 다음 언급을 보자. “노동조합들은, 자본이 노동자계급을 붙잡아 매는 속박으로부터 노동자계급을 자유롭게 하는 데 성공했는가? … 노동조합들이 그렇게 해오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시도하지조차 않았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그것을 해오지 않았기 때문에 노동조합이 쓸모없다고 말하는 것은 우리와는 거리가 멀다. 반대로, 영국에서도 다른 모든 공업국에서도 노동조합은 자본에 맞선 투쟁에서 노동자계급을 위해 필수적인 것이다. …… 노동조합들이라는 저항 수단이 없다면, 노동자는 임금 제도의 기준에 따르면 자신의 몫인 것조차 받지 못한다.” - 엥겔스, 「임금제도」, 1881년. [6] 사회주의를향한전진, 「기본강령」 [7] 경험과 역사를 통해 우리는 이런 관점이 틀렸다는 점을 잘 안다. 그러나 2인터내셔널의 사회민주주의 정당들은 이런 진화론적 낙관론을 공유하고 있었다. 그 결과는 1914년 1차 세계대전 발발이라는 초유의 위기에 직면한 2인터내셔널의 파산이었다. [8] 칼 맑스 · 프리드리히 엥겔스, 『공산당 선언』, 1847년. [9] 따라서 스탈린주의 ‘유일당’ 이론은 맑스주의와 아무런 관련이 없다. 유일당 이론은 그 자체로 노동자 민주주와 양립할 수 없으며, 따라서 ‘프롤레타리아 독재’와도 아무런 상관이 없다. [10] 레닌, 「슬로건에 관하여」, 1917년 7월. [11] 전위(vanguard)는 본래 군사 용어로, 선두 부대를 뜻한다. [12] 레닌, 『일보전인 이보후퇴』, 1904년. [13] 물론, 레닌은 러시아의 극심한 공안탄압을 들어 전위당의 필요를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는 ‘자본주의 사회’라는 조건에 더해 ‘러시아 상황’을 함께 들어 이루어진 논증이었다. 즉, 러시아의 구체적 상황에서 더더욱 당은 전위적이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14] 레닌, 『일보전인 이보후퇴』, 1904년. [15] 레닌, 「당의 재편」, 1905년. [16] “볼셰비키의 경이로운 성공은 적잖이 1917년에 당이 띤 성격 덕택으로 돌릴 수 있다. … 1917년에 모든 수준의 볼셰비키 페트로그라드 조직 안에서 가장 기본적인 이론과 전술상의 쟁점을 둘러싸고 자유롭고 활기찬 토론과 논쟁이 계속 벌어졌다. 다수파와 의견이 다른 지도자들이 자유롭게 자기 견해를 위해 싸웠으며, 이 싸움에서 레닌이 패하는 경우도 드물지 않았다. … 가장 중요한 것은 상황이 급변하는 와중에 이들이 각 기구 나름의 특정한 지지층에 알맞은 전술과 호소를 재단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엄청난 수의 새로운 당원이 충원되었으며 이들도 볼셰비키의 행동 방식을 형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 알렉산더 라비노비치, 『혁명의 시간』, 1976년. [17] 레온 트로츠키, 『러시아 혁명사』, 1930년. [18] 숱한 서유럽 사회민주주의 정당, 유로코뮤니즘 정당들이 국민정당화되어갔다. 독일 사민당은 1959년 고데스베르크 강령을 통해 마르크스주의와 결별했고, 기간산업 국유화 강령 등을 폐기하며 스스로를 국민정당으로 선언했다. 이탈리아 공산당은 1973년 ‘역사적 타협’을 선언하며 기독교민주당과의 협력에 나섰다. 영국 노동당 역시 1950년대 중반 국민정당화를 택했다. 1978-79년 노동당 정부의 임금인상률 제한에 맞선 노동자 총파업(불만의 겨울)으로 인한 노동당 정부 몰락 이후, 대처가 주도하는 신자유주의 시대가 열렸다. 프랑스 사회당과 스페인 사회노동당은 집권 이후 민영화와 긴축으로 전환했다. 스웨덴 사회민주당은 1980년대 이후 복지 축소를 주도했다. [19] 민주노총은 1995년 출범부터 산별노조 건설을 내걸었고, 1996-97 총파업 이후에는 노동자 정치세력화를 본격적인 자신의 과제로 삼았다. 2000년 창당한 민주노동당은 산별노조-진보정당의 양날개론 모델에 근거했다. [20] 이것이 과거 민주노총의 민주노동당에 대한 ‘배타적 지지방침’의 본질이었다. [21] 로자 룩셈부르크, 『대중파업, 정당, 노동조합』, 8장 「노동조합과 사회민주당의 단결」, 1906년. [22] “부르주아지는 자신의 노예들에게서 노예 상태에서의 생존조차 보장해 줄 수 없기 때문에 노예들에 의해 부르주아지가 부양되는 대신에 부르주아지가 노예를 부양해야 하는 그런 처지에 노예를 빠뜨리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부르주아지는 지배할 능력이 없는 것이다.” - 칼 맑스 · 프리드리히 엥겔스, 『공산당 선언』 [23] 1970년 9월 4일, 아옌데는 36.6%의 득표율로 대통령 선거에서 1위를 차지했지만 과반수를 넘지 못했다. 당시 칠레 헌법에 따라, 과반 득표자가 없을 경우 국회가 상위 두 후보 중 한 명을 대통령으로 선출해야 했다. 아옌데의 인준을 위해서는 기독교민주당(PDC)의 지지가 필요했고, 이들은 아옌데 정부가 현행 제도를 유지할 것이라는 보장을 요구했다. [24] 기존 그리스 정치 판도는 중도우파 신민주주의당(ND)과 중도좌파 범그리스사회주의운동당 (PASOK)이 번갈아가며 집권하던 구조였다. [25] 그람시, 「두 혁명」, 『신질서』 1920년 7월 3일자. [26] 사회주의를향한전진, 「기본강령」 [27] 사회주의를향한전진, 「기본강령」 [28] 최근 중국의 경제위기로 미·중 경제력 격차가 확대되고 있다는 인식이 있으나, 이는 상당 부분 착시다. 첫째, 미국은 인플레이션을 겪고 있고, 중국은 디플레이션을 겪고 있다. 이 때문에 달러 기준으로 본 미국 경제 규모는 실제보다 부풀려지고, 중국은 실제보다 과소평가된다. 둘째, 최근 3년 사이 위안화 가치는 달러보다 15%가량 하락했다. 이에 따라 같은 양을 생산하더라도, 달러 기준으로 본 중국 산출량은 15% 과소평가 된다. 2024년 기준으로 미국의 명목 GDP는 28조 달러, 중국은 18조 달러이나, 세계은행의 구매력 평가(PPP) 기준에서는 이미 2014년 중국 경제가 미국 경제를 앞질렀다. [29] “공산주의자들은 … 국적에 상관없는, 프롤레타리아트 전체의 공동 이해를 내세우고 주장한다” - 칼 맑스 · 프리드리히 엥겔스, 『공산당 선언』, 1847년. [30]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 제이크 설리번이 선택지를 제시했다. 한국법은 교전지역 무기수출을 금지한다. 미 국방부는 한국을 설득할 수 있다면, 41일 안에 155mm 포탄 약 33만 발을 항공과 해상으로 수송할 수 있다고 계산했다. … 한국 측은 간접지원이라면 수용 가능하다는 태도를 취했다. 연초부터 포탄이 쏟아지기 시작했고, 결국 한국은 모든 유럽 국가를 합친 것보다 더 많은 포탄을 우크라이나에 공급하는 국가가 되었다.” - 2023.12. 04. 워싱턴포스트 [31] 독일 사회민주당은 1919년 로자룩셈부르크와 칼 리프크네히트를 살해하고 독일혁명을 진압한 주역이었다. 1932년 파시즘 부당 당시 독일 공산당의 지도자인 에른스트 텔만은 공동전선을 거부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히틀러-파시즘’에 대한 기회주의자들의 과대평가보다 더 재앙적인 것은 없다”, “우리의 전략은 공격의 주요 방향을 사민주의에 돌리는 것이다.” (텔만, 독일공산당 중앙위원회 연설, 1932년 2월), “트로츠키는 진심으로 공산주의자들이 리프크네히트와 로자의 살인자들과 … 공동행동을 하자고 한다. 트로츠키는 여러 글에서 독일공산당과 사회민주당 지도자들 사이의 협상을 요구함으로써 노동계급을 길에서 벗어나게 하려 했다.” (텔만, 코민테른집행위원회 12차 전원회의 폐회 연설, 1932년 9월), [32] https://en.wikipedia.org/wiki/November_1932_German_federal_election /* 스크롤 여백만 주고, 화면에는 안 보이게 */ .ftn-target { display: inline-block; /* 줄바꿈 안 생김 */ width: 0; height: 0; scroll-margin-top: 200px; } document.addEventListener("DOMContentLoaded", function () { // name="_ftn1", name="_ftn2", name="_ftnref1" ... 전부 대상 document.querySelectorAll('a[name^="_ftn"]').forEach(function(a) { var idValue = a.getAttribute("name"); // 이미 같은 id의 요소가 있으면 또 만들지 않음 if (!document.getElementById(idValue)) { var span = document.createElement("span"); span.id = idValue; span.className = "ftn-target"; a.parentNode.insertBefore(span, a); } }); }); /* 본문 각주 번호 + 아래쪽 각주 번호 색 지정 */ a[href^="#_ftn"] sup, a[href^="#_ftnref"] sup { color: #BF202D; } /* 밑줄이 보기 싫으면 */ a[href^="#_ftn"], a[href^="#_ftnref"] { text-decoration: none; } /* 마우스 올렸을 때 살짝만 강조하고 싶으면 (선택) */ a[href^="#_ftn"]:hover, a[href^="#_ftnref"]:hover { text-decoration: underline; } /* 페이지 전체가 오른쪽으로 넘치지 않게 */ html, body { max-width: 100%; overflow-x: hidden; } /* 본문 영역 폭 강제 고정 + 긴 단어/문장도 줄바꿈 */ #bo_v_con, .bo_v_con, .cke_editable, article { max-width: 100%; overflow-wrap: break-word; word-wrap: break-word; /* 구형 브라우저용 */ } /* 워드에서 붙은 이미지/표가 화면 밖으로 안 나가게 */ #bo_v_con img, #bo_v_con table, .bo_v_con img, .bo_v_con table, .cke_editable img, .cke_editable table, article img, article table { max-width: 100% !important; height: auto; } /* 워드가 p, span에 폭을 박아놓은 경우 강제로 해제 */ #bo_v_con p[style*="width"], #bo_v_con span[style*="width"], .bo_v_con p[style*="width"], .bo_v_con span[style*="width"], .cke_editable p[style*="width"], .cke_editable span[style*="width"], article p[style*="width"], article span[style*="width"] { width: auto !important; max-width: 100% !important; } /* 기본 blockquote 스타일 */ blockquote { border-left: 4px solid #c0392b; /* 사이트 분위기와 맞는 붉은 계열 */ padding: 12px 18px; margin: 20px 0; background: #fafafa; font-style: normal; color: #333; line-height: 1.6; } /* blockquote 안의 p 태그 정렬 */ blockquote p { margin: 0 0 10px 0; text-align: justify; } /* 마지막 p 태그 여백 제거 */ blockquote p:last-child { margin-bottom: 0; } -
[원청교섭 쟁취! 이재명 정부에 맞선 7월 총파업 조직하자! - Ⅰ] 2026년 원청교섭 투쟁의 조건과 과제노조법 2조가 개정되었음에도, 하청노동자들은 다단계 하청구조 뒤에 숨은 '진짜 사장'을 상대로 노동3권을 행사하기 위해 처절하게 투쟁해야 한다. 이번 연속기고 <원청교섭 쟁취! 이재명 정부에 맞선 7월 총파업 조직하자!>는 순서대로 △개정 노조법 시행 이후 원청교섭 투쟁의 조건과 과제 △일터기본법의 본질 △7월 총파업을 조직하기 위한 투쟁방향을 살피고자 한다. 사진: 공공운수노조 화물연대본부 1. 개정 노조법의 성과와 한계 2025년 개정 노조법의 성과를 살펴보자. 첫째, 노동조건을 실질적으로 지배하는 자를 사용자로 규정하는 '사용자 개념 확대'다. 개정안은 노조법 2조 2호, 사용자 정의에 “근로계약 체결 당사자가 아니더라도 근로자의 근로조건에 대하여 실질적이고 구체적으로 지배 결정할 수 있는 지위에 있는 자도 그 범위에 있어서는 사용자로 본다”는 조항을 신설했다. 이에 따라 형식적으로는 ‘가짜 사장’과 근로계약을 체결한 비정규직노동자들도 원청에 단체교섭을 요구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둘째, 노동쟁의 대상 일부 확대다. 노조법 2조 5호 개정에 따라 노동자들은 △노동자의 지위 △노동조건에 영향을 미치는 경영상 결정 △사용자의 단체협약 위반 등에 대해서도 파업권을 행사할 수 있게 되었다. 기존 노동법은 노동쟁의를 “근로조건의 ‘결정’에 관한 주장의 불일치”로 인한 분쟁상태로 규정했다. 이 정의에 따르면 법률이나 단체협약에 따라 이미 결정된 권리의 이행을 둘러싼 분쟁, 즉 '권리분쟁'은 파업권 행사 대상이 될 수 없었다. 노조법 개정은 기존 노조법이 쟁의행위 대상에서 배제해왔던 특정 권리분쟁 사안을 일부 포함해 노동쟁의 범위를 소폭 확장했다. 즉, “근로조건 ‘결정’에 관한 주장의 불일치”시 쟁의권을 행사할 수 있다는 한계를 그대로 유지하면서 일부 사안을 명시해 쟁의대상을 소폭 확대한 것이다. 셋째, 노조법 2조 4호 라목 삭제를 통한 특수고용·플랫폼·프리랜서노동자의 노동조합 결성권 확대, 해고자와 퇴직자 등을 조합원으로 포괄할 단결권 확대다. 현행 노조법은 '근로자가 아닌 자의 가입을 허용하는 경우'에는 이를 노조법상 노동조합으로 보지 않았다. 이 조항이 노조법 2조 4호 라목이다. 윤석열 정권이 '화물연대는 노조가 아니'라며 공정거래법을 동원해 화물연대 파업을 탄압했듯, 노조법 2조 4호 라목은 특수고용·플랫폼·프리랜서 노동자의 노동3권 행사를 막아왔다. 또한 박근혜 정권의 전교조 탄압에서 드러난 것처럼 해고자, 퇴직자의 노동조합 가입을 사유로 한 탄압의 근거 조항이었다. 노조법 2조 4호 라목 삭제로 더 넓은 단결권 행사가 가능해졌다. 2022년 7월 23일, 옥포조선소 앞 하청노동자 희망버스 사진: 노동과 세계 그러나 그 한계 또한 분명하다. 첫째, 개정 노조법은 노동자 정의를 확대하지 못했다. 또한 노동조합을 조직하거나 노조에 가입한 사람은 노동자로 보는 '노동자 추정조항' 명문화에ᅠ실패했다. 주지하듯 화물노동자, 학습지교사, 택배노동자, 배달라이더, 대리운전노동자 등 특수고용노동자들과 플랫폼노동자들은 사용자에게 종속되어 일하면서도 법적 신분은 '개인사업자'로 취급되었다. 윤석열 정권의 화물연대 탄압처럼, 국가와 자본은 특수고용노동자들의 노동조합을 불법으로 규정했고, 교섭을 요청해도 자본가는 '당신들은 노동자가 아니'라며 교섭을 거부했다. 이런 현실을 바꾸기 위한 요구가 노동자 추정조항 신설이었다. '일단 원청이 고용한 노동자로 보고, 자본이 노동자성을 부정할 경우 이를 증명할 책임을 자본에 지우자'는 요구였다. 이 조항이 빠짐에 따라, '나는 원청자본에 고용된 노동자'임을 입증할 책임은 여전히 노동자에게 남았다. 더욱 근본적인 지점으로, 현행 근로기준법은 노동자를 너무 좁게 정의하고 있다. 자본은 오래전부터 ‘근로계약’이라는 형식을 우회해 노동자를 외부화해 왔다. △도급 △용역 △위탁 △플랫폼 이용계약 △프리랜서 계약 등 다종다기한 이름과 함께 노동자는 법적으로는 ‘개인사업자’가 되었지만, 실제로는 원청자본이 만든 업무체계 안에서 일하고, ‘운임’, ‘수수료’ 등 이름이 붙은 임금을 받는다. 문제는 이들에게 노동자성이 없는 것이 아니다. 자본이 엄연한 노동자를 노동자 아닌 존재로 규정하고 국가는 그 형식적 계약관계를 핑계로 노동법 적용을 미뤄왔다는 데 있다. 따라서 필요한 것은 특수고용·플랫폼·프리랜서노동자를 ‘별도 보호대상’으로 분리하는 것이 아니라, 노동자 정의 자체를 넓혀 이들을 노동법의 주체로 명시하는 것이다. 둘째, 사용자 정의 확대는 한계적이다. 개정 노조법은 사용자 범위를 '노동조건에 대한 실질적 지배력' 개념에 따라 확대했으나, 명시적으로 '원청'을 '사용자'로 본다는 규정은 빠졌다. 이에 따라 '누가 실질적 지배력을 행사하는 사용자인가'를 둘러싼 공방은 필연이며, CU-BGF자본의 행태에서 보이듯 원청은 자신이 실질적 지배력을 행사하는 사용자임을 부인하고자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고 있다. 이미 그래왔듯, 원청은 하청구조를 더욱 복잡하게 만들고, 지휘-명령 체계를 은폐하며, 책임을 하청업체에 전가하는 방식으로 사용자성을 조직적으로 회피할 것이다. 개정 노조법은 '실질적 지배력'이라는 올바르나 여전히 추상적 기준만을 제시했다. 현장에서는 여전히 "누가 실질적 지배력을 행사하는 사용자냐"를 두고 끝없는 공방이 반복될 수밖에 없다. 실제로 교섭을 요구받은 자본가들 대부분이 교섭을 거부하고 있다. 사진: 금속노조 2. 원청교섭은 법리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2026년 3월 10일, 개정 노조법 시행 이후 원청자본의 행보는 대략 세 가지로 나타난다. 첫째, 사용자성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다. 둘째, 교섭요구 사실공고를 거부하거나 지연하는 것이다. 셋째, 교섭에 응하더라도 의제를 좁혀 투쟁을 제어하는 것이다. 만천하에 드러난 노골적인 사례가 서광석 열사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BGF자본이다. BGF리테일은 CU편의점에 물류를 배송하는 화물노동자들의 운송료, 배송시간, 배송체계, 업무량과 노동조건을 실질적으로 지배하면서도 자신은 사용자가 아니라고 강변했다. 화물노동자들은 일곱 차례 교섭을 요구했지만, 원청은 계속 교섭요구를 무시했을 뿐이다. 심지어 서광석 열사 사망 이후에도 BGF 자본은 사과조차 하지 않았고, 열사 사망 이후 진행한 교섭조차 “긴급 협의”일 뿐이라며 원청책임을 회피했다. 현대자동차그룹도 마찬가지다. 금속노조는 3월 10일부로 69개 산하 지회가 22개 원청자본을 상대로 교섭공문을 발송했으나, 교섭노조를 확정해 공고한 사업장은 한화오션과 HD현대중공업 두 곳뿐이었다. 금속노조 원청교섭 사업장 중 현대자동차그룹 산하 노조들이 다수를 차지하지만, 현대자동차그룹은 자신이 교섭요구 사업장 노동자의 사용자에 해당하지 않는다며 교섭에 응할 수 없다고 통보했다. 사진: 금속노조 원청자본가들의 전략은 단지 ‘거부’에 그치지 않는다. 법 규정상 비정규직노동자와의 교섭을 완전히 거부하기 어려운 경우에는 노동·안전·보건 등 법이 강제하는 문제로 교섭의제를 제한한다. 원청자본이 생산과정, 임금, 고용, 노동시간 등 제반 문제를 지배하고 결정한다는 점은 원청노동자와 하청노동자, 진짜 사장과 가짜 사장 모두가 안다. 그런데도 원청자본은 법이 강제하는 최소한의 의제로 교섭을 축소하며 자신은 사용자가 아니라고 강변한다. 비정규직노동자들의 악전고투로 법이 바뀌었고, 최소한의 경로가 열렸다. 그러나 여전히 원청과 교섭할 수 있는 비정규직노동자는 극소수다. 이렇듯 현 조건에서 원청자본에 대한 교섭의무 강제는 바뀐 법조문이 이루어주지 않는다. 결국 오늘의 투쟁이 노조법 2·3조 개정 이후 실제로 무엇이 바뀔 것인지를 결정한다. 3. ‘악질사용자’ 이재명 정부는 하청노동자들의 원청교섭을 보장할 의사가 없다 서광석 열사가 사망한 4월 20일 당일, 고용노동부는 “노조법 제2조에 따른 교섭문제를 넘어선 상황”이라며 화물노동자를 ‘개인사업자’로 규정하고 화물노동자들의 노동자성을 부정했다. 이는 화물노동자들의 쟁의행위를 ‘파업’이 아니라 ‘집단운송 거부’, ‘개인사업자들의 담합’이라고 규정하며 공정거래법을 동원해 화물노동자들을 탄압한 윤석열 정권과 하등 다르지 않은 입장이다. 이재명 정권은 그 한계가 분명한 노조법 2조 개정안의 테두리를 넘어 비정규직노동자들의 진출을 용인할 의사가 없다. 민주노총이 집계한 원청교섭 현황은 이를 분명히 보여준다. 4월 15일 기준, 민주노총 산하 단위노조 558곳이 원청 425곳을 대상으로 교섭을 요구했지만 교섭요구 사실공고를 이행한 곳은 30곳에 불과했다. 그마저도 상당수는 노조가 노동위원회에 시정신청을 제기해 사용자성이 인정된 이후에야 공고에 나선 곳들이었다. 4월 23일 기준으로는 571곳 원청 회사에 교섭요구 공문을 보냈지만 교섭요구 사실을 공고한 곳은 46곳에 그쳤다. 이재명 정부와 고용노동부는 원청사용자성을 적극적으로 인정하고 교섭을 강제하기는커녕, 복잡한 절차와 소극적 해석으로 자본가들의 교섭 해태를 부추기고 있다. 교섭요구, 교섭요구 사실공고, 교섭노조 확정공고, 교섭단위 분리, 노동위원회 시정신청, 노동부 판단지원위원회 검토 등으로 이어지는 절차는 노동자들에게는 끝없는 관문이다. 반면 원청자본에게는 책임을 부정하고, 교섭을 지연하고, 현장투쟁을 소진시키는 수단이다. 정부가 지배하는 공공부문에서도 이재명 정부는 악질사용자일 뿐이다. “공공부문 모범사용자가 되겠다”는 이재명 정부의 약속이 무색하게, 공기업 중 교섭요구를 공고한 기관은 두 곳에 불과하다. 정부가 지배하는 공공부문에서조차, 원청자본은 비정규직노동자와의 교섭의무 부정으로 일관한다. 이런 정부와 ‘대화’하는 방법이 있다면, 그것은 오직 계급투쟁일 뿐이다. 사진: 공공운수노조, 매일노동뉴스 4. 지금, 왜 이 험난한 투쟁을 해야 하는가 원청 대자본은 국가권력의 협력과 함께 위험과 부담을 하청자본으로 전가하고, 하청자본은 재하청자본으로, 특수고용노동자에게로 책임을 떠넘긴다. 원청 자본은 납품단가와 계약조건을 통제하면서도 실질 사용자로서의 책임은 부정한다. 노동자는 원청이 만든 생산과 유통체계 안에서 일하지만, 법적으로는 하청업체 직원이거나 개인사업자로 취급된다. 이 구조에서 원청 대자본의 이윤은 늘어나고, 공급망 하단 노동자의 임금과 권리는 굶어 죽지 않을 정도의 임금노예 상태로 한정된다. 서광석 열사의 죽음은 이 구조가 낳은 참혹한 결과다. 열사의 죽음은 BGF라는 악질기업의 일탈이 아니라 한국 대자본의 보편적 행위가 낳은 결과다. 서광석 열사의 죽음에 대한 분노는 단지 BGF 자본에 대한 분노가 아니라, 다단계 하청구조 뒤에 숨어 나 자신의 고혈을 빠는 이 땅 자본가들에 대한 분노다. 그 분노를 모아낼 수 있다면, 비정규직노동자들의 대대적 진출 역시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그 모든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사진: 노동과 세계 그렇기에 원청교섭 투쟁은 단지 개정노조법을 현장에 적용하는 문제가 아니다. 원청교섭을 요구한다는 것은 다음 의문을 동반한다. 누가 내 임금을, 운임을, 수수료를 결정하는가? 누가 내 업무량을 정하는가? 누가 인력배치를 결정하는가? 누가 계약해지 여부를 결정하는가? 이 모든 과정 뒤에서 결국 누가 이익을 보는가? 이렇듯 원청교섭 쟁취 투쟁은 자본이 수십 년 동안 구축한 다단계 하청구조, 그 속에 숨긴 산업과 생산에 대한 지배력, 생산현장 내 권력관계를 드러내고 집단적 힘으로 강제하기 위한 투쟁이다. 원청교섭 투쟁은 자본이 공들여 구축한 이윤축적 체제에 대한 집단적 의문으로 이어질 수 있다. 원청자본가들이 교섭을 완강히 거부하며 여지조차 주지 않으려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렇기에 어렵고 험난하다. 그러나 투쟁으로 희망을 만들고 그 희망을 확장할 수 있다면, 그 파괴력은 우리의 예상을 뛰어넘는 거대한 계급투쟁으로 발전할 수도 있다. 바로 지금, 목적의식적으로 원청교섭 쟁취 투쟁을 조직해야 하는 이유다. -
사업장을 떠나면 한국에서 안녕이라 그랬어최근 잇따르는 이주노동자의 죽음, 그리고 이주노동자들에 대한 폭행과 괴롭힘 사건은 이주노동자를 한 사업장에 묶어 두고, 사장 동의 없이는 떠날 수도 없게 만드는 한국 이주노동제도의 필연적 결과다. 폭행을 당해도, 임금을 떼여도, 위험한 작업장에서 다쳐도 마음대로 사업장을 옮길 수 없다면, 이는 노예노동과 다르지 않다. 이주노동자가 사업장을 바꿀 권리를 보장하지 않고, 이주노동자 인권을 개선하겠다는 정부의 말은 철저한 기만이다. 사진: 노동과 세계 이곳에서는 더 이상 인간으로 살 수 없다 에어건으로 장기가 파열돼 응급수술을 받고, 기숙사를 비웠다며 뺨을 맞고, 술 취한 관리자에게 박치기까지 당하는 이주노동자들의 현실이 잇따라 보도되고 있다. 한국의 이주노동자 제도가 이주노동자의 자유와 권리를 제한하는 사이, 이주노동자들은 괴롭힘과 폭행의 표적이 되고 있다. 이주노동자들은 아무리 심한 괴롭힘과 폭행을 당해도 사업장을 떠날 자유가 없다. 고용허가제를 통해 발급되는 E-9 비자로 들어오는 이주노동자는 사장의 동의 아래 최초 3년 취업 기간 중 3회, 사장의 추천으로 재고용된 기간 1년 10개월 중 2회만 사업장 변경이 가능하다. 임금체불, 휴·폐업, 성희롱·성폭력, 근로조건 위반 등은 횟수에 포함되지 않지만, 이주노동자가 스스로 입증해야 한다. 입증하는 동안 계속 그 사업장에 머물러야 한다. 엄청난 부담이 노동자에게 전가된다. 임금체불도 ‘월 임금의 30% 이상을 두 달 이상 지급하지 않은 경우’ 등 피해자 누적될 때까지 참아야 하고 복잡한 요건을 충족해야 한다. 이러니 온갖 불이익을 당하고도 사업장을 쉽게 떠날 수 없다. 계절노동(E-8), 일반기능인력(E7-3), 숙련기능인력(E7-4), 회화강사(E—2) 등도 사업장 변경 제한은 마찬가지며, 고용허가제보다 훨씬 어렵다. 물론 사업장을 떠나도 어려움이 없어지지는 않는다. 사업장을 떠나는 순간, 이주노동자는 곧바로 체류 자격 박탈의 위험 앞에 놓이고 3개월 안에 고용노동부가 알선하는 사업장과 매칭되지 못하면 출국해야 한다. 생존의 위험, 체류 자격 박탈의 위험, 강제 출국의 위험이 이주노동자를 계속 쫓아다닌다. 고용노동부가 알선하는 사업장이 지금의 사업장보다 더 나으리라는 보장도 없다. 이주노동자들은 스스로 사업장을 선택해 들어갈 수 없고, 고용센터에서 소개한 사업장만 들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모든 위험을 감수하고 사업장을 떠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그것은 단순한 이직이 아닙니다. 그것은 절규입니다. ‘이곳에서는 더 이상 인간으로 살 수 없다”라는 절규입니다.”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이주노동팀 최정규 변호사, 노동절 맞이 긴급 이주인권딴체 기자회견, 2026년 4월 30일) "베트남으로 돌아가, 집에 가, 한국에서 안녕, 바이 바이" 최근 내가 일하고 있는 ‘이주노동법률지원센터 소금꽃나무’는 3월 10일 이천 중앙산업에서 야간 노동을 하다가 컨베이어벨트에 끼여 숨진 베트남 23세 이주노동자 응웬반뚜안님의 유족 위임을 받아 투쟁했다. 동생이 입국한 끝에 고인이 숨진 지 38일 만인 4월 17일 정주노동자와 차별 없는 배·보상, 공식 사과, 재발 방지대책 마련에 합의했다. 응웬반뚜안님은 평소에 야간노동이 힘들다고 말했는데, 아무리 힘들어도 사업장을 떠날 수는 없는 게 바로 이주노동자의 현실이다. 사업장 변경 자유를 가로막는 고용허가제는 수많은 이주노동자가 위험한 현장 상황을 인식해도 위험하다고 말할 수 없게 만드는 구조적 요인이다. 파주 식육가공업체 태운푸드에 다녔던 베트남 이주노동자 응웬꽁투씨는 지난 2월 11일 저녁 7시 반 영하 8도의 날씨에 공장 정문 앞에서 이유도 모른 채 벌을 섰다. 이유도 모른 채 반성을 쓰라고 해서 ‘직원은 거절하거나 불만을 표현할 권리가 없다’라고 썼다. 그 이후 발가락을 다쳐 절뚝거리며 일을 했는데 “두 달 동안 쉬라”라는 말을 들었다. 사업장 변경을 요구했지만 “베트남으로 돌아가, 집에 가, 한국에서 안녕, 바이 바이”라는 말을 들었다. 사장은 이주노동자가 자유롭게 사업장을 옮길 수 없다는 점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베트남 이주노동자 응웬꽁투 반성문 사진: 소금꽃나무 언론에 많이 보도된 박치기 사건(술 취한 관리자가 4분 동안 22번 박치기를 한 사건)의 피해자도 상담하고 함께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노동자는 사장의 추천을 받아 재고용 되기 위해 60만 원만 지급하겠다는 관리자의 합의서에 서명했다. 당사자의 신청만으로도 기간 연장과 재입국이 보장되어야 하는데, 사장의 추천이 없으면 불가능하기에 이주노동자는 회사에 찍히지 않기 위해 눈치만 보게 된다. 사진: 이주노동법률지원센터 소금꽃나무 자유로운 사업장 변경이 중요한 이유는, 이것이 가능해야 괴롭힘과 폭행뿐만 아니라, 임금체불, 노동안전, 열악한 숙소, 차별 문제 앞에서도 자신을 보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지독한 위선 아래 계속 쓰러지는 노동자들 사업장 변경 자유 없이 이주노동자의 권리보장은 불가능하다. 폭행을 당해도 떠날 수 없다면, 위험한 작업장에서 다쳐도 떠날 수 없다면, 그 노동은 자유로운 노동이 아니다. 그런데 이재명 정부는 고용허가제를 폐지할 생각이 전혀 없다. 지난 4월 22일 민주노총 ‘한국 이주노동제도 진단과 대안 토론회’에서 한은숙 노동부 외국인력담당관(과장)은 “이주노동자는 내국인보다 임금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해 잔업이 많은 고임금 사업장으로 이동하려는 경향이 있다”며 “이에 따른 갑작스러운 이동 증가는 사업주 인력 운용에 어려움을 주고 장기적으로 노동자 숙련 형성에도 도움이 되지 않을 수 있다”고 말했다. (“노동부, 이주노동자 사업장 이동 완전 자유화 어려워”, 매일노동뉴스, 4월 23일) 고용허가제를 폐지하지 않겠다는 분명한 입장이다. 노동부가 주도하는 ‘외국인력 통합지원 TF’에서는 ‘1년간 1회만 제한 후 자유화’와 ‘2년간 2회 제한 후 자유화’ 등이 논의되고 있다고 한다. 1년간은 한 번만 사업장 바꿀 수 있고, 2년간은 두 번만 바꿀 수 있다는 것인데, 결국 1년이든 2년이든 강제노동을 하라는 뜻이다. 여전히 노동자를 특정 사업장에 묶어 두는 족쇄를 그대로 두겠다는 것으로, ‘눈 가리고 아웅’하는 꼴이다. 다음 사업장이 어떨지 알 수 없고, 고용센터가 알선한 사업장, 즉 정부가 고용허가를 내준 사업장에서만 일할 수 있으며, 이주노동자 고용 업종과 규모는 일정하게 제한되어 있는데, ‘갑작스러운 이동 증가’라는 핑계를 대고 있다. 애초 고임금 사업장으로의 이동을 문제로 보는 것 자체가 노동권과 인권의 말살이다. 이주노동자를 저임금의 값싼 노동력으로만 바라보는 시각이다. ‘규모는 많이, 권리는 적게’라는 기조 아래 권리 없는 노동자를 확대하겠다는 정책이다. 사업장 변경 제한은 누구에게 이익이 되는지는 분명하다. 바로 자본가들이다. 이 정부는 자본가들의 이익을 조금도 침해할 생각이 없다. 이주노동자의 열악한 현실은 한국 사회 인권과 노동권을 아래로 계속 끌어내린다. 정주노동자의 권리는 이주노동자와 경쟁한다고 향상되는 것이 아니라, 이주노동자의 열악한 노동현실을 바꾸면서, 전체 노동자들의 노동조건을 상향평준화 하는 것에 있다. 이재명은 작년 스리랑카 노동자 지게차 학대 사건 이후 “이주노동자들의 기본적 인권도 지켜져야 한다”라고 말했다. 고용허가제를 폐지하지 않고 기본적 인권을 지킬 수 있는가? 이 지독한 위선 아래 이주노동자들은 지금도 수없이 괴롭힘을 당하고, 다치고, 죽고 있다. 이러한 위선에 맞서야 하지 않는가? 이주노동자들과의 연대를 다짐하고 이재명 정부와의 투쟁을 다짐해도 모자랄 판에 양경수 민주노총 위원장은 국제연대의 상징인 5월 1일, 메이데이 날 청와대에 가서 이재명의 손을 맞잡았다. 이주노동자의 현실을 생각하면 너무나 비통하다. * 제목의 '안녕이라 그랬어'는 소설가 김애란의 소설집 제목에서 끌어왔다. 작가는 소설에서 우리말의 '안녕'에는 '반갑다'라는 뜻과 '잘 가'라는 뜻 말고도 '평안하시냐'는 혹은 '평안하시라'라는 뜻이 있다고 했다. 글에도 썼지만, 사장들은 자신들의 동의 없이 이주노동자가 사업장을 떠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협박한다. 이때 안녕(바이)은 이주노동자에게 대한 협박과 조롱이다. -
정당한 출발, 분명한 한계, 잘못된 노선삼성의 막대한 이윤은 노동자들의 피와 땀 위에 세워졌다. 보수 언론은 ‘긴급조정권’ 발동까지 언급하며 삼성전자 노동자들을 공격하고, 정부 역시 "일부 노동자의 과도한 요구"라며 삼성전자 노동자들을 압박한다. 노동자들의 파업권 행사는 정당하다. 그러나 이 투쟁이 전체 노동자계급의 지지를 얻고 반도체사업의 진정한 변화를 도모하려면, 투쟁의 한계도 직시해야 한다. 반도체산업 노동자들의 투쟁은 정규직 노동자의 성과급 분배 요구의 한계를 넘어 나아가야 한다. 삼성의 이윤은 노동자계급의 공동노동이 만든 사회적 부다. 바로 그 부를, 또한 그 부를 만들어내는 생산수단을 누가 통제하고 누구를 위해 사용할 것인가? 사진: 경향신문 삼성전자 노동조합 공동투쟁본부는 성과급 제도 투명화와 성과급 상한제 폐지, 영업이익 15% 성과급 지급을 요구하고 있다. 삼성전자가 발표한 1분기 영업이익은 57조 2,000억원이며, 올해 전체 영업이익은 270조를 훌쩍 넘어 300조원에 이를 거라는 예측이 많다. 인공지능(AI) 산업의 급격한 성장에 따라 AI 서버에 필수적인 고대역폭 메모리(HBM)와 고용량 DRAM, SSD 수요가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있기 때문이다. 수많은 보수 언론은 영업이익의 15%면 대략 40조 원이 넘고 1인당 5~6억 원이나 되는 관계로 노동자들의 요구가 반도체산업 경쟁력을 약화할 것이며, 경제 전반에 타격을 가져올 것이라며 연일 삼성전자 노동자들을 공격한다. 반도체산업 비정규직 노동자의 열악한 현실이 마치 정규직 노동자들의 고임금과 무리한 요구 때문이라는 거짓 선동을 맘껏 펼치고 있다. 최근에는 이재명도 나서 “일부 노동자의 과도한 요구, 부당한 요구가 다른 노동자에게 피해를 준다”라고 했다. 보수 언론들은 긴급조정권을 발동하라고 요구하고 있다. 이재명의 발언은 이런 요구에 응답하기 위한, 파업권을 짓밟기 위한 사전 포석일 수 있다. 정당한 출발 노동자들은 그동안 흘린 피와 땀의 가치를 인정받고 싶어 한다. 삼성은 아주 오랫동안 ‘무노조경영’으로 노동자들의 저항을 짓밟아왔다. 자본의 잔인한 독재 아래 수많은 노동자가 온갖 유해 물질에 중독되어 백혈병과 각종 희귀암에 걸렸다. 주말과 밤낮을 가리지 않고 생체리듬이 파괴되는 야간·교대 근무와 고강도 반복 작업으로 크나큰 육체적·정신적 고통을 겪어 왔고, 지금도 겪고 있다. 반도체산업 노동자들은 각종 재해와 질병에 시달린다 사진: 전국삼성전자노동조합(전삼노) 2024년 3월, 반올림이 전국삼성전자노조와 함께 발표한 건강실태 조사에 따르면, 삼성전자 노동자의 정신건강 문제는 아주 심각한 수준이다. 수면장애 비율은 일반 임금노동자에 비해 최대 3.7배 높았고, 우울증상 역시 약 2.5배에 달했다. 무엇보다 자살충동은 7배, 자살시도는 10배에 이르는 것으로 보고됐다. 2024년 4월 삼성전자 메모리사업부 화성사업장에 입사한 고 김치엽씨의 자살은 삼성의 성과 압박이 낳은 비극이었다. 그의 SNS와 진료기록 등에는 ‘잘해보려는데 일그러진다’, ‘파트장 기대에 미치지 못한다’, ‘입사 1년도 안 돼 정신건강 휴직을 할 것 같다’, ‘다른 사람만큼 해야 하는데, 실행 능력이 밑바닥이다’ 등의 내용이 있었다. 삼성의 실적은 이런 노동자들, 또한 삼성전자 정규직 노동자들만이 아니라 수많은 하청·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노력과 희생으로 이뤄졌다. 그런데 지난 4월 29일 삼성에서 제기한 쟁의행위금지 가처분신청 심문회의에서 사측 대리인단은 "영업이익은 원래 주주와 회사의 것"이라며 노동자들의 노력과 기여를 철저히 부정했다. 이런 태도를 보이며, 파업을 봉쇄하려는 회사에 맞선 투쟁은 정당하다. 삼성은 2023년 반도체(DS) 부문이 대규모 적자를 기록했다는 이유로, 2024년 초에 지급된 초과이익성과급(OPI)을 0%로 책정하면서도 경영진 1,000여 명에게는 총 1,752억 원 규모의 자사주를 성과급으로 지급했다. 노동자들은 경영진의 이런 비열한 행동에 분노했고, 노동조합으로 가입해 목소리를 내야만 회사를 바꿀 수 있음을 깨달았다. 적자일 때도 자기 잇속은 절대 포기하지 않는 자들이, 흑자가 났다고 노동자들의 몫을 순순히 인정할 리는 없다. 영업이익이 천문학적 액수여서 그렇지, 영업이익의 15% 성과급 지급 요구 자체는 결코 과도한 요구로 볼 수 없다. 무엇보다 노동자들이 투쟁하지 않는다면 경영진이 이익 대부분을 차지할 것이란 점에서 투쟁은 꼭 필요하다. SK하이닉스는 지난해 성과급 상한(기본급 1,000%)을 없애고, 영업이익의 10%를 성과급으로 지급했다. 고대역폭 메모리(HBM) 분야에서 삼성을 제쳐 나가는 시점에 노사관계 안정이 필요하다고 판단했을 수 있고, 2024년 삼성전자 노동자들의 첫 파업을 보며 노동자투쟁을 초기에 통제할 필요도 느꼈을 것이다.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SK하이닉스 자본이 물러선 이유는 파업까지는 가지 않았음에도 노동자들이 대규모로 결집하며 힘을 보여줬기 때문이다. 2025년 8월 14일에는 만 명이 넘는 SK하이닉스 노동자들이 집회를 열며 자신들의 분노와 요구를 드러냈기에 회사는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삼성 자본이 드러내는 위기의식도 현장을 멈춰 세울 수 있는 노동자들의 잠재력에 대한 두려움의 표현이다. 분명한 한계 그런데 삼성전자 정규직 노동조합들은 수십만 명이 넘는 하청·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이해를 적극 수렴하고 대변하려 하지 않는다. 정규직의 이해와 요구만을 관철하는 데 관심이 있을 뿐이다. 삼성전자 노동자들의 투쟁을 전면적으로, 무조건적으로 지지할 수 없는 핵심 이유다. 삼성전자 초기업노조 최승호 위원장은 이재명의 경고와 비난을 ‘LG유플러스를 두고 한 얘기’라고 했는데, 이렇게 다른 노조에 책임을 전가하는 모습은 이 투쟁의 한계와 약점을 분명히 보여 준다. 이런 모습이 나타나는 이유는 무엇일까? 단지 노동조합 지도부가 계급적 관점, 연대의 관점을 갖지 못하고 있기 때문인가? 단지 투쟁 경험이 부족해서인가? 그것만이 아니다. 삼성전자 노동자들 스스로 자신의 투쟁을 전체 노동자와 연결된 투쟁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 투쟁은 우리들에게만 국한된 투쟁’이라고 느끼고 있으며, 따라서 연대를 추동해야 할 필요도 거의 느끼지 못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파업이 단호하게 뻗어나갈 수는 없다. 여론의 압박이 세질수록, 파업의 심리적 기초는 더 약화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대사업장 노조들의 투쟁에서, 노동부의 압박이나 중재를 받고 지도부가 한순간에 뒤로 물러서는 일은 흔하게 발생한다. 이것은 이미 원청 대기업과 하청, 정규직과 비정규직이 깊게 분열된 현실을 반영한다. 이미 상당수 노동자가 보통 노동자는 꿈도 꿀 수 없는 성과급과 복지, 상대적 고용안정에 안주하면서 나타나는 모습이다. 이런 모습이 고착되면 이른바 ‘노동귀족’이라 불릴 정도로 특권화된 일부 집단이 형성된다. 상대적 고임금과 복지에 길들여진 노동귀족적 정서를 표현하는 실리주의는 더 강하게 성장한다. 물론 이것은 절대불변의 법칙이 아니다. 경제위기가 깊어지면 대기업도 노동자들에게 양보할 여유가 없다. 이에 따라 기존 지위를 잃지 않기 위한 노동자들의 저항은 거세질 수 있다. 후퇴의 역사가 오래된 만큼 관료주의가 깊게 자리잡힌 현대·기아 등 다른 대공장 노조보다, 이제 막 투쟁에 나선 삼성전자 노동조합들이 더 역동적 모습을 보여 줄 가능성도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현 투쟁의 한계와 약점을 직시해야 한다. 우리는 비정규직을 확대해 막대한 초과이윤을 거둬들이는 자본가들이, 지금도 그들의 편에서 법과 제도를 설계하는 정치인들이, 경찰을 동원해 화물연대 투쟁을 짓밟고 서광석 열사의 목숨을 빼앗은 정부가 오히려 노동자들에게 ‘비정규직을 대변하라’고 지껄이는 치 떨리는 위선과 기만을 바라보고 있다. 그러나 일종의 ‘사회공헌기금’을 회사에 요구해 하청·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게 주는 방식으로 사회적 고립을 벗어날 수는 없다. 이는 따가운 비난을 벗어나기 위해 하청·비정규직 노동자들을 들러리로 세우는 또 다른 기만에 불과하다. 또한 ‘노사 상생’이라는 기조 아래 만들어지는 기금은 하청노동자들의 투쟁력과 단결력을 약화하고, 하청노동자를 평생 비정규직 신세에 가둔 채 던져주는 작은 시혜에 불과하다. 그것이 아무리 ‘사회적 책임’이라는 포장을 두르고 있더라도, 이는 자본이 거대하게 양산한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존재와 그로부터 나오는 막대한 이윤에 대한 묵인을 전제한다. 이 점에서, 제반 사회공헌기금 또한 다단계 하청구조 속에서 고통받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에 대한 배신임은 매한가지다. 물론 하청노동자들이 투쟁하기 위해서라도 돈이 필요하다. 그러나 그 기금은 원청자본이 ‘고달픈 현재에 만족하라’며 건네는 돈이 아니라, 노동자 자신의 연대의식에서 나와야 한다. 아무리 적은 액수라도 하청노동자들의 조직화와 투쟁에 연대하고자 노동자가 모은 기금, 반도체산업 노동자가 안전할 권리를 위해 노동자 자신이 모은 기금은 비정규직 넘쳐나는 반도체산업, 일하다 죽고 다치는 반도체산업을 바꾸기 위한 투쟁의 일부다. 이는 노사가 협조해 조성한 기금, 즉 현상태를 유지하기 위한 기금과 질적으로 다르다. 무엇보다 하청노동자들에 대한 성과급 동일 지급 요구, 기본급 동일 인상을 내걸고 투쟁에 나설 준비를 해야 한다. 예전엔 성과급만이 아니라 기본급 동일 인상이 금속노조 정규직 노조들의 기본 요구였다. 하지만 노동운동 후퇴에 따라 연대 정신은 약화했다. 자동차 하청노조들은 “성과급이 완성차 정규직의 전유물이 아니”라고 외치며 싸웠다. 작년 현대·기아차 사내하청 노조들이 성과급 삭감에 반대하고 나섰지만, 큰 투쟁을 만들지는 못했다. 2024년 12월, 한화오션이 협력회사에도 같은 비율의 성과급을 지급하기로 약속했다. 실제로는 근속 및 국적에 따라 성과급을 차등 지급했고, 사외업체 노동자, 물량팀 노동자 등은 성과급 지급에서 제외했다. 한화오션이 하청노동자에게 성과급을 지급한 이유는, 470억 손해배상·가압류 청구로 하청노동자들을 잔인하게 탄압했던 악덕기업 이미지를 바꾸고, 정부의 원하청 상생모델 구축에 협조하는 모습을 보여 이후 정부 지원을 더 많이 받으려는 의도에서 비롯되었다. 물론 하청노동자들의 끈질긴 투쟁이 뒷받침되지 않았다면 이마저도 불가능했을 것이다. 당장 삼성전자 정규직 노동자들이 계급적 행동에 나서리라고 기대할 수는 없다. 단지 노동조합 역사가 짧아서가 아니라 현장이 조합주의, 실리주의에 매몰되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청·비정규직의 상황은 다르다. 그들은 초과착취 속에서 열악한 노동조건에 맞서 하나 둘 저항의 길을 찾고 있다. “명일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은 삼성전자 화성·기흥·온양 사업장에서 반도체 운송 업무를 위해 하루 12시간 교대근무와 3만 보를 초과하는 ‘과도한 걷는 노동’을 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각종 근골격계 질환이 속출하고 있으나, 1년 단위로 도급계약이 갱신되는 상황에 고용상 불이익을 우려해 산재 신청을 하지 못하고 있다. 2024년 말 명일은 126명의 노동자를 일방적으로 해고했다. 단체협약에 따라 감원 시 사전 통보 및 협의를 거쳐야 하지만, 이를 무시했다” (서비스일반노조 명일지회 기자회견, 2025년 8월 6일) 사진: 참여와 혁신 수년째 부당해고 및 노조탄압에 맞서고 있는 서비스연맹 명일지회, 작년 통상임금 투쟁을 벌였던 금속노조 이엔에스지회는 하청노동자들의 열악한 현실을 드러냈을 뿐만 아니라, 투쟁의 잠재력도 보여 줬다. 하청·비정규직 주체들의 능동적 개입은 반도체산업에서 원·하청 연대의 길을 실질적으로 만들어내는 가장 주요한 통로가 될 수 있다. 초호황 국면에서도 지독한 차별과 소외에 짓눌리는 하청·비정규직의 분노는 지금도 산처럼 쌓이고 있다. 따라서 이 지점에 운동 역량을 집중할 필요가 있다. 높은 성과급 비중의 위험성 삼성전자, SK하이닉스, 현대차, 기아차 등에서 ‘영업이익의 몇 %’를 성과급으로 지급할 것인가를 둘러싼 논쟁이 격렬해지고 있다. 그런데 노동조합운동이 기본급 대폭 인상에 중심을 두고 성과급 비중은 보조적으로 놓지 않는다면, 나아가 성과급제 철폐를 위해 싸우지지 않는다면 성과급 요구는 오히려 노동자들을 분열시키는 도구가 될 수 있다. 성과급에 모든 힘을 쏟아붓는 투쟁은 자본의 이윤 논리에 노동자들을 종속시키는 부메랑이 되어 돌아올 가능성이 아주 크다. 왜냐하면 성과급제 자체가 노동자를 통제하는 관리자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두 번째로 성과급제는 노동자를 경쟁시키고 분열시키는 데 적합한 제도다. 세 번째로 성과급제는 노사협조주의를 확산하는 수단이다. 이윤이 많이 남을 때는 특별성과급을 지급하고, 이윤이 적어지면 성과급을 지급하지 않는 논리는 결국 회사가 어려우면 임금삭감을 감내해야 한다, 회사가 어려우면 누군가는 해고되어야 한다는 말과 같다. 이에 따라 노동자는 등골이 휘게 일하며 회사가 번창하기를 바라게 된다. 이런 식으로 성과급제는 노동자의 투쟁의식을 마비시켜 노동자들을 노사협조주의의 포로로 묶어두는 장치로 둔갑한다. 지금 성과급 투쟁에서도 삼성전자 반도체를 담당하는 부문(DS)과 모바일, TV 등 가전을 담당하는 부문(DX) 노동자들 사이의 갈등이 깊어지고 있다. 반도체 부문 노동자만 챙긴다는 비판을 제기하며 많은 조합원이 노조를 탈퇴하고 있다. 반도체 부문에서도 메모리 사업부와 파운드리(위탁생산), 시스템 설계(LSI) 사업부의 차이도 있다. 메모리 부문은 엄청난 흑자를 기록하고 있지만 TV와 생활가전 사업은 적자가 예상되는데, 이에 따라 자본은 ‘성과 없는 곳에 보상 없다’는 논리를 들이대며 노동자들을 갈라치고 있다. 자본은 DS의 초과 성과 영업이익을 DX에 분배하려 하지 않는다. ‘다른 사업부가 반도체에 무슨 기여를 했길래 내가 받아야 할 성과급을 가져가느냐’고 반발하는 노동자들도 있다. 삼성은 DS부문에서도 메모리, 반도체연구소, TSP사업부 공통조직, 파운드리와 LSI, CSS(LED·전력반도체 등 개발) 등 부문별로 성과급을 차별하겠다고 한다. 입만 열면 반도체가 모든 기술과 모든 노동의 총합이라고 말하면서도 말이다. 이런 갈라치기에 노동조합이 정면으로 반박하며 힘으로 맞서지 못하고, 이에 따라 정규직 내에서도 성과급을 받지 못하는 노동자가 생기니, 하청·비정규직 노동조건 개선은 얘기도 꺼내기 힘든 분위기다. 적자의 책임은 노동자들에게 있지 않은데도 말이다. 하청·비정규직에 대한 초과착취가 아주 오랫동안 변하지 않고 있는데도 말이다. ‘성과를 내면 보상받을 수 있고, 성과를 내지 못하면 희생을 감수해야 한다’라는 논리를 받아들이면, 희망퇴직, 정리해고 등 노동자 죽이기 구조조정 앞에서도 무력할 수밖에 없다. 노동자의 생존이 기업의 이윤에 달려 있다는 자본가들의 논리에 맞설 수 없기 때문이다. 노동자의 생존을 기업의 이윤과 상관없이 보장하라는 요구로 나아가지 못한 채, 임금 삭감 없는 노동시간 단축, 정리해고 폐지, 비정규직 철폐, 모든 노동자 민중의 생존권 보장 투쟁으로 나아가지 못한 채 구조조정을 수용하며 노동자 일부를 희생양으로 만드는 비극을 맞이하게 된다. 하지만 적자와 부실의 책임은 노동자들에게 있지 않다. 전 사회적, 전 세계적 계획화와 민주적 협동를 가로막고 이윤을 위해 무정부적 생산을 지속하는 자본주의 체제 자체에 있다. 따라서 자본주의 질서를 근본적으로 문제 삼으며 자본주의 이윤 논리에 도전하는 투쟁을 향해 대담하게 나아가야 한다. 그런데 성과급제 논리에 노동자도 박자를 맞추면, 이런 투쟁은 엄두조차 낼 수 없다. 노동자들은 영원히 자본가들의 노예로 살아갈 수밖에 없다. 따라서 임금인상 투쟁은 투쟁에 족쇄를 채우는 성과급제 논리를 되짚어봐야 하며, 기본급 대폭 인상 기조를 세우고 그에 따른 장기적 투쟁계획을 마련해야 한다. 이 방향은 삼성전자 노동자들의 운명과도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반도체산업의 초호황은 영원히 지속될 수 없다. 빅테크 기업들이 AI 인프라에 천문학적인 비용을 쏟아붓고 있지만, 이를 통한 직접적인 매출이나 수익 창출은 아직 불투명하다. AI 기반 서비스의 수익화가 지연될 경우, 빅테크 기업들이 AI 데이터센터 투자를 축소할 수 있으며, 이는 반도체 수요 급감으로 이어질 수 있다. 또한 고대역폭 메모리(HBM) 과잉생산 가능성도 꾸준히 제기되고 있다. 곳곳에서 터져 나오는 전쟁은 핵심 원자재 공급 차질과 물류 및 생산 불안정성을 키우고 있다. 무정부적 과잉생산과 전 세계 경제위기로 반도체산업 초호황이 끝나거나, 대규모 적자가 발생하면 자본가들은 임금 삭감, 구조조정 공격에 나설 수밖에 없다. 성과급제 논리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면, 노동자들은 자본가들이 만든 과잉생산의 후폭풍을 뒤집어쓰게 된다. 노동자 스스로 고용·임금·노동조건을 희생해야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논리와 제대로 맞설 수 없다. 근본 대안을 향해 정의당 등 일각은 노사정 대타협을 통한 초과이윤 환수를 제기한다. 그러나 재벌대기업의 초과이윤에 대한 환수는 어디까지나 계급투쟁의 결과일뿐, '사회적 대타협'으로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박근혜 국정농단의 본질은 이재용 3세 승계 작업을 위해 삼성이 국가권력을 매수해 국민연금을 동원한 사건이었다. 이 엄청난 범죄를 저지르고도 이재용은 건재하다. 이렇듯 삼성은 총수 일가의 세습경영을 위해 온갖 불법과 탈세를 저지르면서도, 백혈병에 걸린 노동자들에 대한 제대로 된 보상은 거부했다. 지금도 영업비밀이라는 이유로 노동자들의 건강을 망가뜨리는 유해물질 정보를 공개하지 않는다. 국회는 온갖 규제 완화와 재벌 특혜를 선사하며 공적재정을 자본의 이윤으로 바꾸는 반도체특별법을 통과시켰다. 노동자 민중은 특정 기업에 물, 전기 같은 공적 자원을 마음대로 처분할 수 있는 권한을 양도하지 않았는데도, 정부는 삼성과 SK하이닉스가 이 자원을 마음대로 쓰도록 허용했다. 이윤에 혈안인 자본주의체제는, 심화하는 기후위기는 안중에도 없다. 이렇듯 이윤 논리에 따라 움직이는 자본과 그들의 정부는 결코 생산력 발전의 성과, 수십만 노동자의 공동노동으로 만들어지는 성과를 사회 전체를 위해 활용하기는커녕 이를 억압한다. 따라서 그 성과를 사회 전체의 이익을 위해 활용하기 위해서는 그들과 단절해야 한다. 이윤 논리와 단절해야 한다. 특정 산업에서 창출되는 막대한 이윤은, 해당 산업 자본가의 경영능력이 특출나서가 아니다. 이재용의 경영능력이 뛰어나 삼성전자가 호황을 누리는 것이 아닌 것처럼 말이다. 또한 해당 산업의 노동자들만 열심히 일한 결과도 아니다. 적자기업, 혹은 파산기업 노동자들이 게으르게 일해 적자나 파산 상태에 처한 것이 아닌 것처럼 말이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생산을 통해 만들어지는 부, 나아가 사회에 막대한 영향을 미치는 기간산업 자체를 전체 노동자 민중이 공유해야 한다. 그 일차적 경로가 산업 국유화와 산업에 대한 노동자 민중의 통제다. 산업을 국유화하고, 해당 산업 노동자 전체가 구성하는 ‘노동자 통제위원회’, 노동자 민중의 자주적 기구들이 만드는 ‘사회적 통제위원회’를 떠올려 볼 수 있다. 물론 누군가는 물을 것이다. ‘아무리 삼성과 하이닉스라도 이윤을 비정규직 노동자 정규직 전환과 중대재해 예방에 사용한다면, 국제 경쟁력이 약화되지 않겠는가?’, ‘TSMC 노동자보다 덜 일한다면 한국 반도체산업이 망하지 않겠는가?’ 바로 그래서 노동자의 국제연대가 중요하다. 국적으로, 산업으로, 사업장으로, 고용형태로, 심지어 사업부서로 노동자들이 쪼개질수록, 자본가들은 웃는다. 전 세계 노동자들의 협력으로 반도체산업을 노동자 민중에게 이롭고 안전한 사업으로 재편하기 위한 국제연대에 나서야 한다. 생산의 사회화는 사업장, 업종, 지역과 국경을 뛰어넘어 급격히 확대되고 있다. 이에 따라 생산과 소비를 균형 있게 조절하고, 각종 생산부문을 세계적 차원의 계획으로 통합하는 새로운 사회질서가 절실히 필요하다. 사회적 생산력의 발전은 공동체주의에 입각한 새로운 사회질서를 절실히 갈구한다. 결국, 자본주의를 변혁할 노동자 ‘계급’의 힘이 이 문제를 풀 수 있다. 이 거대한 힘을 조직하는 것은 가장 느린 길처럼 보일 수 있지만, 가장 확실한 길이며, 유일한 길이다. 엄청난 탄압과 고립 속에서도, 노동자계급 전체의 해방이라는 기준으로 투쟁하는 노동자들은 늘 탄생했다. 노동자들은 자신의 강점만이 아니라 약점도 살필 줄 안다. 그래서 더 단단해지고, 깊어진다. 삼성전자 노동자들의 성과급 투쟁은 많은 악선동에 시달리고 있다. 그러나 문제는 악선동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투쟁 자체의 약점에도 있다. 약점을 돌아보고, 극복하자. 그렇게 전체 노동자계급과 함께 한발 더 나아가자. -
[발언] 노동절, 우리는 끓어오르는 분노를 안고 이 자리에 섰습니다정권은 바뀌었지만 노동자의 삶은 바뀌지 않았다. 화물연대 서광석 열사가 목숨을 잃었다. 고진수 동지가 구속당했다. A학교 투쟁, 세종호텔 투쟁, 울산 워릭·덕스 어학원 원어민 강사 노동자들의 투쟁, 그리고 현대차 자본과 경찰 폭력에 맞서 이수기업 해고노동자들이 싸우고 있다. 자본이 요구하면 공권력이 집행하고, 노동자가 희생당하는 현실을 끝장내기 위해 노동자들은 함께 싸워야 한다. 지난 노동절, 현대차 비정규직지회 이수기업 해고자 정성훈 동지의 사전 발언을 소개한다. 우리는 오늘, 희망이 아닌 참담한 배신감과 끓어오르는 분노를 안고 이 자리에 섰습니다. 또 한 명의 동지가 우리 곁을 떠났습니다. BGF자본과 이를 비호하는 공권력의 추악한 결탁이 화물노동자의 소중한 목숨을 앗아갔습니다. 자본의 탐욕이 노동자를 사지로 내몰 때, 국가는 어디에 있었습니까? 정권이 바뀌면 노동자의 삶도 바뀔 것이라 믿었던 우리의 기대는 이제 처절한 절망과 분노로 돌아왔습니다. 민주당과 이재명 정부는 출범 당시 노동자의 눈물을 닦아주겠다며 온갖 달콤한 약속을 쏟아냈습니다. 하지만 지금 무엇이 변했습니까? 간판만 바뀌었을 뿐, 자본과 결탁한 공권력의 칼날은 조금도 무뎌지지 않았습니다. 지금도 노동자의 삶은 여전히 벼랑 끝 낭떠러지입니다. 서울에서 성폭력 피해학생을 보호하려다 억울하게 해임되시고 부당전보 승소판결을 받고도 교육감과 경찰에 의해 무자비하게 진압당하고 연행되신 지혜복 선생님과 연대시민들, 세종호텔 자본과 사법부에 낙인찍혀 아무 죄도 없이 구속까지 당한 고진수 지부장 동지도 있습니다. 울산에선 비자제도의 허점을 이용해 연차 사용을 못하게 막고 수당도 떼어먹고, 이에 저항하여 노조를 결성하자 보복해고시킨 워릭·덕스 어학원 원어민 강사 동지들, 전혀 법의 보호를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 이수기업 해고노동자들도 똑똑히 기억합니다. 현대차 자본의 구사대와 울산 북부서 경찰의 폭력 앞에 무자비하게 짓밟히고 폭행당했던 야만적인 순간들을 우리는 절대 잊지 않습니다. 전 국민이 지켜보는 국정감사장에서 김영훈 노동부 장관은 책임지고 현대차 구사대 폭력사건을 조사하고 국회에 보고하겠다고 호언장담했습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어떻습니까? 자본의 폭력 앞엔 무기력하고, 노동자의 절규 앞엔 오만한 '말뿐인 행정'입니다. 우리를 폭력으로 짓밟았던 구사대와 경찰들 그 누구도 책임지지 않았고, 처벌받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이재명 정부가 말하는 정의입니까? 권력의 자리에 앉아 '노동 존중'을 입에 담으면서도, 정작 자본의 폭거 앞에서는 눈을 감는 비겁한 행태를 이제는 끝장내야 합니다! 우리가 목격하고 있는 현실은 여전히 자본이 명령하고 공권력이 집행하며 노동자가 희생당하는 야만의 연속일 뿐입니다. 정치권이 자본의 눈치를 보며 노동자의 삶을 정치적 소모품으로 이용하는 한, 이 땅의 민주주의는 한 발짝도 나아갈 수 없습니다. 우리는 구걸하지 않습니다. 빼앗긴 권리를, 기만당한 우리의 삶을 투쟁의 이름으로 다시 쟁취할 것입니다. 더 이상 억울하게 죽는 노동자가 없어야 합니다. 더 이상 우리의 권리를 빼앗길 수 없습니다. 단결된 노동자의 힘만이 이 추악한 결탁의 고리를 끊어낼 수 있습니다. 우리가 뭉치면 세상이 멈추고, 우리가 싸우면 세상이 바뀝니다. 승리할 때까지 끝까지 함께 싸웁시다!
공지/성명/논평
온라인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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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투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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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언] 원청교섭 사업장 선봉 파업과 금속노조 총파업으로 원청교섭 쟁취하자!2026-04-23 | 조회 20,9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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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포트] 미국과 이스라엘은 가자 집단학살, 이란 침략전쟁 당장 중단하라! 한국정부는 파병논의 중단하라!2026-03-23 | 조회 29,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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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포트] 가부장제, 제국주의, 자본주의에 맞선 3.8 여성파업대회2026-03-09 | 조회 33,843 -
[발언] 3월 6일 오후 12시 반. 서울역 광장에 여성파업의 대오로 모여주십시오! 동지들!2026-03-05 | 조회 1,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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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언] 저는 이제 동지들과 3.8 여성파업 현장에 서 있겠습니다2026-03-03 | 조회 1,198 -
[후기] 국민건강보험고객센터지부 단식농성 15일차, 계급적 연대로 직접고용 쟁취하자!2026-02-24 | 조회 36,37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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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호텔 로비농성장에서 미국 셧다운 연대 구호를 외치다2026-01-31 | 조회 31,48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