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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차 쓰겠다니 해고! 울산 워릭-덕스 영어강사 이주노동자들의 투쟁울산의 영어학원 워릭프랭클린, 덕스어학원에서 일하던 이주노동자 영어강사들이 연차 사용, 노조 가입, 노동조건 개선 요구를 이유로 계약만료 해고와 협박, 비자 통제 등 탄압에 시달리고 있다. 이는 개별 사업주의 일탈이 아니라, 국가와 자본이 이주노동자를 무권리 상태로 내모는 구조적 차별의 결과다. 정주노동자와 이주노동자의 공동투쟁을 확대하자. 사진: 전국민주일반노조 부산본부 “연차를 자유롭게 쓰고 싶었다. 그러나 사측이 이를 인정하지 않아 원하는 날짜에 휴가를 갈 수 없었다”, “노조에 가입했다”, “돌아온 것은 해고였다” 수십 년 전부터 노동자에게 익숙한 이 이야기가 2026년에도 반복되고 있다. 바로 ‘울산의 대치동’이라 불리는 옥동에 위치한 워릭프랭클린과 덕스어학원 울산캠퍼스 영어강사 이주노동자들의 이야기다. 2026년 3월 11일 오전 고용노동부 울산지청 앞 기자회견장에는 고용노동부를 규탄하는 영어 발언과 구호가 울려 퍼졌다. 정주, 이주노동자들이 “워릭! 덕스! 위아 피플 투!(우리도 인간이다!) 투쟁”을 함께 외쳤다. 이주노동자 중 회화지도(E-2) 비자로 한국에서 일하는 이주노동자들은 일터에서 사용자의 일방적 노동통제에 시달렸다. 연차를 원하는 대로 쓰지 못하고, 노동시간과 일하는 학원이 일방적으로 변경되었다. 평가기준을 알 수 없이 계약갱신 거부에 시달렸다. 그러다 법대로 연차를 쓰고 싶어 노조에 가입했더니, 사용자는 “노조에 가입한 것에 대해 대가를 치르겠다”고 협박했다. 결국 단체교섭이 결렬되자 2026년 3월 1일부로 워릭에서 일하는 조합원 4명을 계약만료로 해고했다. 덕스어학원 분회장도 5월 1일부로 계약만료를 통보했다. 이렇게 노조에 가입한 이주노동자를 모두 부당하게 해고하고 있다. 기자회견에 참가하며 2003년 굴지의 대기업 현대자동차 아산공장에서 월차를 쓰고 싶다던 비정규직 노동자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 소망을 말했다가 폭행당하고, 식칼테러까지 당해야 했던 현장. 23년이 지났는데 현장은 똑같다. 이주노동자들 중에 그나마 노동조건이 낫다는 영어강사 이주노동자들조차 ‘원하는 날짜에 연차를 쓰고 싶다’는 이유로 해고당하고 있다. 이 얼마나 허울 좋은 K-민주주의 대한민국인가! 이주노동자에게 철저히 배제된 노동권, 노동탄압 백화점 워릭프랭클린 옥동원 리아 밀러 해고노동자는 “해고 통보 후 지난달 다시 일을 하라고 계약서를 받아 서명했지만, 아무런 설명도 없이 그 계약서는 다시 회수되고 취소됐다”며, “나는 일을 못한 것도 아니고 학생들을 실망시킨 것도 아니며 우리의 책임을 회피한 것도 아니다”라고 밝혔다. 그러면서 “결국 이유는 단 하나, 우리가 노동조합에 가입하고 더 나은 노동조건을 요구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주노동자에게 연차 사용권도 노조할 권리도 없는 것인가? 덕스어학원 울산캠퍼스에서 5월 1일부 해고 통보를 받은 강사 루시 라워레스는 “우리가 목격한 차별은 조직적이고 잔인하다”며 사측이 “주변 지인과 가족들에게 연락해 노조 탈퇴를 종용하는 파렴치한 짓까지 저질렀”고, “미디어 계정을 샅샅이 뒤져 비자 위반이라는 거짓 주장을 만들어내기 위해 사진들을 왜곡”한 사실을 폭로했다. “계약서는 무기화됐고 노동자들에게 불리한 새 서류에 서명하게 하려고 출입국사무소 신고나 거액의 벌금을 언급하며 협박을 서슴지 않았다”고 밝혔다. 이뿐 아니다. 사측은 정주노동자를 모아 어용노조 설립을 추동했다. 이주노동자들의 정당한 노조 활동을 공격하는 복수노조 탄압까지 자행하고 있다. 이주노동자에게 노조할 권리, 노동기본권을 차별하는 탄압은 사용자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구조적 차별이기도 하다. 한국 자본가계급은 이주노동자를 고용노동부(고용허가제), 법무부 소관으로 구분하고 인권과 노동권 보장 없이 시시때때로 자본이 원하는 인력공급 필요에 따라 주먹구구식으로 ‘사람’을 ‘사용’하고 있다. 기간제법도 취업을 목적으로 하는 이주노동자는 2년을 초과해도 무기계약 노동자로 전환하지 않는다고 서울지방법원이 판정한 것을 대부분 적용하고 있다. 잭 민주일반노조 외국어교육지회 지회장은 이주노동자들에게 고용불안과 사측의 통제를 구조화한 이 점을 비판했다. “2년 넘게 일한 이주노동자들이 있는데, 취업비자 노동자를 ‘소모품’ 취급할 명분은 어디에 있는가” 물으며 “이 판례는 ‘기간제’ 굴레의 법적 필연이 아니라 탐욕스러운 사측이 만든 차별의 산물이라는 증거”라고 꼬집었다. 배성민 민주일반노조 부산본부부장은 “지방노동위원회가 부당해고를 인정하더라도 이주노동자들은 사용자에게 이적동의서를 받아야 퇴사와 복직이 가능하다”며 이주노동자들이 실제로 복직하기 어려운 구조를 비판하며 “기간제법 차별 철폐와 이적동의서 폐지도 함께 싸워야 할 우리의 과제”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E계열 비자를 가진 이주노동자들은 사업장 변경의 자유가 없다. E-2비자 노동자의 경우, 기존 사업주에게 이적동의서를 받도록 강제당하는데 그 과정에서 절반 정도가 작성 대가로 임금삭감, 퇴직금 포기, 금품지급 등의 권리 침해를 겪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답게 살고 싶다! 위아 피플 투! 울산이주민센터 김현주 센터장은 20여년 전과 다르지 않은 현실을 개탄하며 “이주노동자들의 부당한 노동 문제는 한국인들이 똑같이 겪는 억울한 일”이라며 “고용노동부는 법무부 소관(E-2비자) 이주노동자라고 회피하지 말고 책임있게 나서라”고 요구했다. 기자회견 참가자들은 영어강사 이주노동자들의 임금체불과 부당해고 등에 대한 고용노동부의 특별근로감독 실시와 워릭 덕스 사측의 노조탄압 중단과 부당해고 철회를 요구했다. 아울러 이주노동자에게 비자 차별 없는 기간제법 적용을 요구했다. 제조업 현장이든 서비스업 현장이든 교육현장이든 이주노동자는 ‘이주노동자’라는 이유로 차별당하고 있다. ‘글로벌 K’를 강조하는 한국 일터의 이주노동자 차별은 오직 정주노동자와 이주노동자의 단결로만 극복될 수 있다. “위아 피플 투(We are people too)”는 “인간답게 살고 싶다”는 노동자의 오랜 구호와 같다. -
[우리의 투쟁] 열사 정신 계승, 곧 죽은 자의 뒤를 산자가 따른다는 말은 이수 투쟁에 끝까지 함께하는 것어느덧 이수기업 노동자들이 정리해고된 지 528일, 천막농성 328일이 되었다. 오늘도 변함없이 현대자동차 정문 앞에서 “이수기업 정리해고 철회 고용승계 촉구 결의대회”를 진행했다. 현대차 자본은 교섭에 나오지만, 여전히 이수기업 공정 및 1차 업체 고용승계를 거부하고 2차·3차 업체 취업 알선이라는 헛소리를 늘어놓고 있다. 이수기업 해고 동지들도 500일 넘도록 생계 고통을 견디며 노동자의 자존심과 정당성을 놓지 않고 투쟁해 왔다. 로자 룩셈부르크의 말처럼, “골고다 언덕을 오르는 심정과 고통”을 이겨내는 투쟁이 아닐 수 없다. 이수기업 동지들과 여러 장기투쟁 사업장 동지들이 보여주듯이, 고통을 견뎌내는 인내, 정당한 요구 쟁취를 위한 끈질긴 투지, 계급적 연대를 소중히 여기는 관점은 앞으로 모든 노동자가 생존권과 고용안정 투쟁, 부당한 해고에 맞선 투쟁, 노동자가 주인 되는 세상을 위한 투쟁까지 능히 감당해 낼 수 있다는 점을 시사해 준다. 이런 긍정적 시사점을 오늘 이수기업 규탄집회에서 엿볼 수 있다. 이수기업 해고자 김병선 동지의 연설을 사회주의를향한전진 온라인 신문 독자들에게 소개한다. 이수기업 해고자 김병선입니다! 투쟁~~ 우리의 투쟁이 벌써 528일이 되었습니다. 뒤돌아보면 참으로 빠르게 지나간 것 같습니다! 하지만 하루하루 되짚어 보면 참으로 힘들고 답답한 날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처음 해고되고 투쟁에 ‘투’ 자도 모르는 동지들이 뭉쳐서 투쟁을 시작했습니다. 안 대표 이름처럼 미숙한 동지들이었습니다. 하지만 500일 넘게 투쟁하면서 구사대 깡패들과 몸싸움도 하고 여러 투쟁 사업장을 돌면서 보고 듣고 느끼면서, 지금은 안미숙 대표 성명처럼, 또 다른 안 동지로 거듭난 것 같습니다. 그 중심에는 안 대표가 서 있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이 자리를 빌려서 감사함을 전합니다. 지금 현대차 주가가 한주에 50만 원, 시가총액이 100조가 넘는다고 합니다. 그 배경에는 휴머노이드. 아틀라스를 공개한 이후라고 생각합니다. 로봇의 투입은 노동자 노동의 질이나 환경개선이 아닐 것입니다. 자본의 이윤을 극대화하기 위한 현대차의 큰 그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그림에는 이수기업 정리해고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현인 기업, 2.3차 업체 노동자들의 해고가 이어질 것입니다. 해고는 살인입니다. 그리고. 비정규직은 철폐되어야 합니다. 지금 현대차와 교섭이 한 창 진행 중입니다. 그 누가 말합니다. 현대차 교섭이 원활하게 이루어지려면 1차 업체 고용승계가 아닌 다른 방안을 생각하는 게 어떠냐고. 저는 생각합니다. 우리가 1년 넘게 투쟁하면서 1차 업체 고용승계를 외쳐 왔습니다. 지금 와서 1차 업체 고용승계가 아닌 다른 방안을 생각한다는 것은 이수기업 해고가 부당해고가 아닌 정당한 해고라는 걸 우리 입으로 말하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현대차와는 협상이 아닌 투쟁으로. 1차 업체 고용승계를 쟁취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 싸움 힘든 싸움입니다. 그리고 긴 싸움이 될 수 있습니다. 여기 모인 동지들, 투쟁하는 동지들, 우리 이수기업 투쟁, 끝까지 함께 하자고는 말씀드리지 못합니다. 하지만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우리가 목요일마다 현대차 규탄 집회를 엽니다. 그 집회의 시작은 투쟁하다가 산화하신 열사를 기리며 묵상으로 시작합니다. 그 묵상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바로 열사 정신 계승을 외칩니다. 그 정신은. 무엇입니까? 죽은 자의 뒤를 산자가 따른다는 말이 무슨 의미이며, 열사가 꿈꾼 세상이 어떤 세상인지 가슴에 손을 얹고 그 뜨거움을 느끼는 동지들이라면, 우리 이수기업 투쟁, 끝까지 함께할 거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이 투쟁을 하면서 1년이 넘어서 끝까지 몇 명이 남아서 투쟁할까? 걱정이 많았습니다. 하지만 500일 넘은 이 시점에 생계의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10명의 동지가 투쟁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너무나 고마우며 감사합니다! 저는 긍정의 힘이라는 말을 믿습니다. 힘듦을 힘듦으로 받아들이면, 이 투쟁 또한 더 힘들어질 것입니다. 노력하는 자도 즐기는 자를 이기지 못한다는 말처럼 우리의 이 투쟁도 즐기면서 승리하는 그날까지 끝까지 함께 투쟁했으면 좋겠습니다. 투쟁~~ /* 기본 blockquote 스타일 */ blockquote { border-left: 4px solid #c0392b; /* 사이트 분위기와 맞는 붉은 계열 */ padding: 12px 18px; margin: 20px 0; background: #fafafa; font-style: normal; color: #333; line-height: 1.6; } /* blockquote 안의 p 태그 정렬 */ blockquote p { margin: 0 0 10px 0; text-align: justify; } /* 마지막 p 태그 여백 제거 */ blockquote p:last-child { margin-bottom: 0; } -
[번역] 탈성장 및 “화려한” 공산주의에 대한 에코 공산주의 대안아르헨티나의 마르크스주의자 에스테반 메르카탄테는 신간 『불타는 붉은빛 - 생태 위기에 맞선 공산주의적 성찰』에서 자본주의를 “다차원적” 생태 위기의 근본 원인으로 정면 비판하면서, 탈성장과 에코 모더니즘 같은 생태주의의 흐름과 중요한 대화를 전개한다. 이 흐름들에 맞서 메르카탄테는 노동을 자기 해방의 주체이자, 사회와 자연의 관계를 질적으로 전환시키는 행위자로 삼는 “에코 공산주의(Ecommunism)” 전략을 주창하며, 이것만이 재앙을 피할 수 있는 길이라고 역설한다. 이 책이 스페인어로만 출간된 상황에서, 사회주의적 입장의 국제 학술지 『LINKS』의 페데리코 푸엔테스가 『좌파 사상(Ideas de Izquierda)』 편집위원이기도 한 메르카탄테와 만나 책에서 제기된 핵심 논점들을 짚었다. F: 마르크스주의, 생태주의, 기후 위기에 관한 문헌이 이미 존재하고 끊임없이 늘어나는 상황에서, 이 책을 쓰기로 결심한 계기는 무엇인가요? M: 이 문제가 오늘날의 논의에서 그토록 중대한 초점이 되었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입니다. 지금의 생태 위기는 여러 쟁점이 교차하는 문제고, 이 문제와 그에 따른 영향은 다양한 학문 분야에 걸쳐서 고려되어야 합니다. 이 책에서 저는 두 가지를 탐구하고 싶었습니다. 한편으로는 (스페인어 사용자들에게 상대적으로 접근성이 떨어지는) 마르크스주의적 관점을 논의에 도입하고 싶었어요. 특히 이 책이 출간된 아르헨티나에서 그랬죠(지금은 스페인에서도 출간되었습니다). 존 벨러미 포스터의 초기 저작부터 사이토 고헤이와 안드레아스 말름 같은 최근 저자들까지, 지난 수십 년 동안 나온 에코 마르크스주의(ecomarxist) 저작 대부분이 상대적으로 주목받지 못했습니다. 저는 혁명적 좌파 활동가들과 생태 운동가들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대화를 염두에 두고, 생태적 비판을 제시하는 몇 가지 동시대 문헌을 종합해 보려고 했습니다. 그리고 에코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자신의 관점을 발전시키기 위해서 천착해야 할 물음들이 있는데, 그 부분에도 기여하고 싶었습니다. 다른 한편으로, 카를 마르크스의 정치경제학 비판이 자본 축적의 반생태적 성격을 폭로하는 데 어떻게 기여하는지 모든 각도에서 살펴보고 싶었습니다. 이 책의 내용 중에, 자본 생산 및 순환의 여러 국면을 재구성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자본–노동 관계에서 출발해서 점점 가속화되는 상품과 화폐의 흐름에 기반한 세계 시장의 형성에 이르기까지 살펴보는 거죠. 이는 순환의 각 단계에서 이런저런 생태 문제들이 어떻게 발생하는지를 사유할 수 있게 합니다. 마지막으로, 마르크스주의가 그간 제대로 다루지 못했지만 우리가 반드시 토론해야 할 핵심 물음이 또 하나 있습니다. 바로 자본에 대한 생태적 비판과, 자본주의를 넘어서서 자본 이후 사회를 예비하는 혁명적 전략을 서로 어떻게 연결할 것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포스터, 사이토 같은 이들이 중요한 논점을 제시했지만 이 문제는 여전히 중대한 약점으로 남아 있죠. 비교적 최근에 이 문제를 다루려는 시도들이 있었는데, 예컨대 안드레아스 말름의 “생태 레닌주의” 같은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접근이 신선하기는 해도, 사회주의 사회로의 이행을 위한 첫걸음으로서 혁명을 통한 권력 장악은 오늘날 더 이상 의제가 아니라는 말름의 견해는 그의 제안을 다소 허황된 것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이 책은 제가 근본적이라고 믿는 어떤 논의에 기여하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말하자면 생태적 관점에서 인류를 착취로부터 해방시키는 동시에, 서로 구별되면서도 하나의 통일체를 이루는 사회와 자연 사이의 균형 잡힌 대사 작용을 복원하는 공산주의적 전망을 중심으로 혁명 전략을 어떻게 발전시킬까 하는 것입니다. F: 환경주의자들은 흔히 기후 변화에 초점을 맞추는데, 당신의 책은 이 문제를 더 광범위한 “다차원적” 생태 위기 안에 위치시킵니다. 이 부분을 좀 더 자세히 설명해 주시겠습니까? M: 우리가 다차원적 위기에 직면해 있다는 생각은 스톡홀름 회복력 센터의 연구가 잘 보여 줍니다. 이 연구는 여러가지 ‘지구 위험 한계선’을 설정합니다. 온실가스와 지구 온난화에 관한 것뿐만 아니라, 생물 다양성 상실, 삼림 파괴와 토지 이용 변화, 해양 산성화, 대기 오염, 그 밖의 여러 한계선도 포함하고 있어요. 스톡홀름 회복력 센터는 아홉 가지 한계선과 각각에 대한 임계점을 제시하는데, 바람직한 삶은 차치하고 “견딜 수 있는” 삶을 위해서라도 악화가 가속화되는 것을 막고 예측 불가능한 결과가 초래되지 않게 하려면, 이 임계점들을 넘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이 제가 말하는 다차원적 생태 위기입니다. 이 쟁점을 제기하는 것이 중요한 이유는, 녹색 자본주의 옹호자들이 생태 문제에 대처하기 위해 제안하는 해법 상당수가 단일 쟁점, 주로 기후변화에 초점을 맞추는 경향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내놓는 제안에 따르다 보면 하나의 문제를 해결하려다가 결국 다른 문제들에 부정적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예컨대 에너지 전환을 이루려면 축전지 생산의 원료인 리튬 같은 광물을 대규모로 채굴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는 더 많은 자원 채굴로 이어지고 이 과정에서 막대한 양의 물이 사용되며 칠레, 볼리비아, 아르헨티나 같은 종속국들의 생태계가 훼손됩니다. F: 왜 이 위기의 원인이 “자본주의의 DNA”에 있다고 보시나요? M: 자본주의 사회의 특징 중 하나는 자연을 가치 증식 가능한 대상으로 전환시키려는 충동입니다. 노동력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죠. 자본에 종속된 노동은 물리적으로 가능한 최대의 가치를 끊임없이 생산하도록 강제됩니다. 가치 법칙이 자연으로까지 확장되면 농축산업이든 목재 공급용 농장이든 양식업이든 광업이든 간에 최저 비용으로 최대 자원을 추출할 수 있는 기술을 개발하는 것이 우선시됩니다. 자연은 오로지 전유 비용이라는 관점에서만 “가치 평가”가 이루어지죠. 그러면서 특정 지역들은 폐기물 “투기장”으로 지정되는데, 이건 자본이 착취할 수 있는 하나의 “서비스”로 간주됩니다. 역사적으로 자본의 논리는 환경에 대한 영향을 기업의 방정식에 포함시키지 않았습니다. 전통적 경제 이론에서 이 부분은 기업 운영 비용에 내재하지 않는 “외부성”으로 존재합니다. 자본주의 국가들은 세금, 벌금, 탄소 배출권 같은 방식을 포함한 환경 거버넌스를 통해 이것을 “교정”하려고 했죠. 그렇지만 이런 조치들은 자본과 자연의 관계나 각종 생산 활동의 부정적 영향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지 못합니다. 그저 오염에 “가격”을 매겨서 기업이 대가를 지불하게 할 뿐, 생태계를 복원하는 데는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하죠. 자본은 중장기적으로 심각한 결과를 초래하더라도 단기 수익을 우선시합니다. 오늘날 우리는 과거의 행위가 낳은 이런 예기치 못한 결과들을 목도하고 있습니다. 이를테면 이전 세기의 온실가스 배출이 야기한 기후 변화 말이죠. 그렇지만 이런 결과를 알고 있는 지금도, 석유 기업들은 사업을 접어야 할 시점이 가까워 오면서 마지막 한 방울의 석유까지 채굴하려고 서두르며 결과를 더욱 악화시키고 있습니다. 사이토가 마르크스의 표현을 빌려 묘사한 것처럼 “내가 죽은 뒤에 대홍수가 오든 말든” 하는 관점으로 움직이는 이런 행태는 세대 간 지속 가능성이라는 전망을 무너뜨립니다. 많은 기업이 지속 가능성을 주문처럼 되뇌지만 대부분은 순전히 그린 워싱에 불과합니다. 자본주의의 논리는 지리학자 닐 스미스의 표현처럼 “자연의 생산”을 시도하는 것으로 귀결됩니다. 즉 자본이라는 사회적인 것에 의해 전적으로 매개된 자연이죠. 그렇지만 이런 시도는, 스미스는 그 한계를 조금 과소평가하고 있는데, 긴장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자연의 대사 작용은 매우 복잡하기 때문입니다. 이 작용을 포섭하려는 자본의 시도는 예측 불가능한 결과를 낳고, 그 영향의 크기는 자연을 지배하려는 노력에 비례합니다. 자연 법칙이 부과하는 한계를 무시하고 이윤을 위해서 그것을 “비틀려”는 지배 시도에 맞서서 자연이 “복수”한다고 말할 때 엥겔스가 염두에 둔 것이 이 부분입니다. F: 책의 서론에서 당신은 환경이 국가 정책과 기업 관행에 매우 깊이 침투해 있다고 설명합니다. 그렇지만 아자이 싱 초더리(Ajay Singh Chaudhary)의 표현을 빌려서, 당신은 오늘날 지배적인 것은 “우파 기후 현실주의”라고 주장합니다. 이것은 무슨 뜻인가요? M: 초더리는 지배 계급의 상당수가 기후 정책을 겉치레에 불과한 것, 무력한 것으로 만드는 데 일조하고 있음을 정확히 지적합니다. 그들이 기후 변화 부정론자라서가 아니라, 기후 재난이 갈수록 빈번하게 파국적으로 되풀이되고 악화가 가속화되어도 자신들은 살아남을 수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초더리는 “무장한 구명정”이라는 발상을 제시하는데, 충분한 자원을 가진 사람들이 기본 필수품을 모두 갖춘 지하 벙커에 투자하면서, 동시에 언젠가 선택된 소수만 지구를 탈출할 수 있게 해 줄지도 모를 기술에도 투자하는 행태를 말합니다. 이 같은 생각이 얼마나 실현 가능하고 또 얼마나 순전한 공상인가 하는 것이 적어도 현재로서는 명백한 물음이겠죠. 그렇지만 제가 관심을 갖는 것은, 이 세력들이 생태 위기를 인정하면서도 위기와 관련해 무언가 조치에 나서기를 거부하는데 스스로 아무런 모순도 느끼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그들은 우리가 너무 자주 듣는 “우리 모두 한배를 타고 있다”는 생각을 허물어뜨립니다. 생태 위기에 관한 한, 우리는 한배를 타고 있지 않아요. 그렇기 때문에 노동자계급과 빈민이 우리만의 해법을 찾아야 합니다. 부정론자든 아니든 지배 계급의 어떤 분파도 그걸 우리 대신 찾아 주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F: 극우가 세계적으로 영향력을 확대하고 있습니다. 현재 아르헨티나와 미국에 극우 대통령이 있죠. 이 상황 때문에 국가 정책이나 COP(유엔기후변화협약 당사국총회) 같은 국제 포럼의 입장이 부정론 쪽으로 기울었을까요? 이것과 관련해서, 이 광범위한 극우 내부에서 에코 파시즘 경향이 부상하는 현상을 어떻게 해석하십니까? M: 극우가 전 세계적으로 세력을 강화하면서 파리 협정과 2030 의제를 거부하고 COP에서 이탈하려는 부정론의 목소리가 힘을 얻고 있습니다, 이건 의심의 여지가 없어요. 그렇지만 극우 사이에서 분열과 긴장이 발생하고 있기 때문에 상황이 그리 단순하지는 않습니다. 두 달 전까지만 해도 트럼프와 일론 머스크는 동맹이었지만 지금은 정면충돌하고 있습니다. 트럼프는 계속 부정론자였지만 머스크는 전기 자동차를 옹호합니다. 둘의 싸움 때문에 전기 자동차와 관련 기술에 대한 공적 재정 지원이 삭감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다른 결과가 나올 수도 있었죠. 우리가 자주 보았듯이, 매우 강력한 부정론자인 극우가 자기 사상을 언제나 반드시 일관된 정책으로 전환시키지는 않아요. 우리는 각각의 경우마다 어떤 동맹이 형성되는지, 대자본의 어떤 부문들에 어떤 양보가 이루어지는지 살펴봐야 합니다. 또 하나 중요한 점은 부정론자들의 공격이 여러 다자간 포럼에서 의제가 정체된 것을 정당화하는 데 기여했다는 점입니다. 좌파와 진보 진영은 우파의 공격으로부터 이런 포럼을 방어하려고 하는데, 그러다 보니 이런 포럼들이 인색하고 무력하고 냉소적이라는 정당한 비판까지 침묵시키는 경향이 점점 강해지고 있습니다. 부정론자들의 공격이 오히려 기업들의 “녹색 자본주의”와 이 포럼들에 일정한 정당성을 부여한 것이죠. 우리는 이런 위험도 경계해야 합니다. 에코 파시즘의 출현 역시, 아직은 맹아적 단계지만, 주목해야 할 중요한 현상입니다. 생태 위기의 결과가 악화될수록 이른바 “비상 조치”가 점점 더 노골적으로 에코 파시즘의 성격을 띠는데, 이건 놀라울 것도 없죠. 이를테면 극우는 기후 위기 때문에 이주민의 물결이 거세질 위험을 이야기하면서 이걸 외국인 혐오와 연결시킵니다. 분명히 해야 할 점은, 노동자 계급이 사회적 필요에 응답하고 근본 원인인 자본주의에 맞서서 이러한 위기로부터의 출구를 제시하는 독자적·혁명적 정치 전망을 발전시키지 못하면, 반동적 해법이 강제될 가능성이 갈수록 높아진다는 것입니다. F: 에코 파시즘의 성장과 나란히 종말론적 전망이 갈수록 확산되는 것을 목격하고 있습니다. 특히 환경 파국론이나 붕괴 담론이 대중 운동을 이끌어 낼 수 있다고 믿는 일부 좌파 진영에서요. 이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M: 붕괴라는 것도 여러 형태를 취할 수 있습니다. 첫 번째로, 특정 반자본주의 좌파 진영은 경제 위기든 생태 위기든 모든 위기에 대해서 매번 낡은 기계론적 파국론을 가져다 붙입니다. 주체적 지형에서의 어려움, 그러니까 혁명적 사회 세력 건설의 어려움을 보상해 줄 객관적 요인으로 그런 위기를 끌어오는 거죠. 이런 경향은 혁명 운동의 역사 내내 반복적으로 등장했습니다. 그들이 생태 위기를 연료로 쓴다는 점은 놀랍지 않아요. 두 번째 경향은, 희소한 화석 연료에 의존하는 사회 조직은 어떤 유형이든 유지 불가능하다고 믿으면서, 자원 고갈이 사회적 수요의 축소를 필연적으로 강제한다고 봅니다. 그들에게 세계화는 지속 불가능한 것이고, 지역적·공동체적 영역으로의 회귀를 강제합니다. 이런 사고는 흔히 탈성장의 특정 조류와 결부됩니다. 바람직한 탈성장이 아니라 우리에게 불가피하게 부과되는 것으로서의 탈성장 말이죠. 마지막으로, 붕괴라는 관념은 일종의 일반화된 상식 내지 “감정의 구조”의 형태로도 나타날 수 있는데, 이건 기후 재난의 빈도가 높아지면서 강화됩니다. 우리에게는 더 이상 시간이 없고, 이미 불가항력적으로 파국을 향해 가고 있다는 생각이 바로 여기에서 생겨났습니다. 이런 생각은 반체제적 대중 운동을 촉발하기보다는 대중을 마비시키는 비관주의로 이어집니다. 기계론적 사고의 산물이든 비관주의의 산물이든, 붕괴론은 행동을 막는 장애물입니다. 그 대신 우리는 다가오는 파국에 맞서 싸워야 합니다. F: 일부에서는 북반구 국가들이 위기에 대해 주된 책임을 져야 하고, 남반구 국가들은 경제 발전을 위해 천연자원을 원하는 대로 사용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흔히 “공동의 그러나 차별화된 책임”이라고 부르는, 또 가장 급진적인 형태로는 기후정의라고 부르는 이 복잡한 문제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M: 그 관점은 구조적 불평등에 대한 중요한 비판을 담고 있습니다. 국제 거버넌스에서도 공식적으로 인정되는 부분이고, 예를 들면 선진국과 개발도상국에 각각 차별화된 온실가스 배출 목표가 설정되죠. 전 지구적 기후정의 운동은 이러한 쟁점의 상당수를 부각시키는 기여를 했습니다. 생태론의 여러 경향도 불평등한 생태 교환이나 생태 부채 같은 개념들을 발전시켜 왔습니다. 그렇지만 경제가 북반구에 종속되어 있는 국가들에게 문제는 “자본주의적 발전”이 헛된 꿈이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최근의 역사는 제국주의 세계 질서 안에서 이 나라들이 자본주의적 발전을 이룰 수 없다는 점을 보여 줍니다. 저는 『세계적 무질서 시대의 제국주의』에서 전 지구적 가치 사슬의 형성이 어떻게 종속국들을 “바닥을 향한 경쟁”으로 내몰았는지 살펴보았습니다. 각국은 투자를 유치하기 위해 더 유연한 노동 및 환경 규제와 세제 혜택을 경쟁적으로 제공합니다. 그 결과, 기존 가치 사슬의 여러 고리에 편입하는 데 성공한 국가들조차도 자국 경제를 유의미한 방식으로 발전시키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이 사슬을 따라서 점점 더 불평등하게 가치가 분배되고, 부유한 국가들이 대부분의 몫을 가져가죠. 이것이 첫 번째 쟁점입니다. 두 번째 쟁점은, 생태 위기 시대에 발전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분명히 말하지만 비자본주의적 전망만이, 첫째로 종속과 약탈의 사슬을 끊고, 둘째로 인간과 자연의 건강한 대사 작용을 유지하면서 사회적 필요를 온전히 충족시킬 수 있는 사회를 만드는 유일한 길입니다. 자본주의는 이것을 할 수 없습니다. F: 당신은 “비판적 생태론과 에코 사회주의 내의 서로 다른 흐름들이 탈자본주의 사회 조직을 이끄는 중심 좌표가 무엇이어야 하는가에 대해 매우 다른 답을 내놓는다”고 썼습니다. 구체적으로 어떤 흐름들이 있습니까? M: 대체로 이 흐름들은 탈성장 지지자들과 반자본주의적 내지 에코 모더니즘적 가속주의 옹호자들 사이에서 양극화되는 경향을 보입니다. 탈성장의 주요 표적은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경제 성장이고, 경제 성장을 다차원적 생태 위기의 주요 원인으로 지목합니다. 이 계열의 저작 대부분은 성장 “이데올로기”를 설명하는 데 상당한 지면을 할애하죠. 여러 탈성장 문헌은 국내총생산 성장이 경제적 성공의 반박 불가능한 척도가 된 과정, 그리고 1930년대 이래 모든 경제 정책의 목표는 지속적 성장을 자극하는 것임을 한참 설명합니다. 탈성장론자들은 GDP 성장, 더 구체적으로는 1인당 GDP 성장과 삶의 질이 일치하지 않는다고 주장합니다. 그들은 일정 수준을 넘어서면 더 높은 1인당 GDP가 사람들의 삶에서 그만한 개선으로 이어지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이 저자들이 부유한 나라에서 글을 쓰고 상황을 사유한다는 점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가 오늘날 과잉 소비에 직면했고, 지금까지 추출된 것을 보충하는 지구의 역량을 훨씬 초과해서 자원이 채굴되었다는 논변은 선진국에 대해 말할 때는 타당합니다. 그들은 “제국적 생활 양식” 같은 개념을 제기하는데, 말하자면 부유한 사회들이 지속 가능한 한계를 넘어서 살아가고 있으며, 지구의 다른 부분에서 자원을 추출하고 그곳에 환경적 영향의 비용을 전가하면서 그렇게 산다는 것입니다. 이런 주장은 제국주의를 생태 담론에 도입하면서 흥미로운 쟁점을 제기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여러 문제를 내포하죠. 예컨대 이런 논의는 생산 자체보다 소비를 문제 삼는 방향으로 흘러가는 경향이 있고, 의도와 무관하게, 체제에 내재한 문제의 뿌리를 흐릿하게 만듭니다. 또 부유한 국가의 노동자 계급이 “제국적 생활 양식”의 참여자로 여겨지거나 적어도 명시적으로 배제되지는 않는다는 문제가 있습니다. 민영화와 전 지구적 경제 구조조정 때문에 최근 수십 년간 노동자 계급의 생활 수준이 현저히 악화되었음을 보여 주는 여러 지표가 있는데도 말이죠. 이런 사실은 탈성장 관점에 명확히 반영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균등하게 책임을 져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이런 관점을 취할 때는 불평등이라는 측면을 반드시 고려해야 합니다. 전용기와 요트와 저택을 가진 초부유층이 그렇게나 거대한 생태 발자국을 만든 것에 압도적인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이죠. 탈성장론자들이 주장하듯이, 경제 성장 자체를 목적으로 삼는 관념에 의문을 제기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생산주의적 사고가 심지어 일부 반자본주의 진영에서도 뿌리를 내렸지만, 그건 분명 막다른 길입니다. 따라서 그런 경고는 가치가 있습니다. 그렇지만 일관된 대안을 발전시킨다는 측면에서는 탈성장 관점에 큰 약점이 있습니다. 탈성장론자들은 생산 방식에 질적 변화가 있어야 한다고 말하면서도, 구체적 방안을 제시하는 걸 어려워합니다. 그들이 명확하게 주장하는 방법은 생산과 소비의 규모를 줄이는 것 같은 양적 강조뿐이죠. 서로 다른 탈성장 전망들 간의 공통분모는 불분명하고 다의적인 반자본주의적 입장뿐입니다. 경제 성장 자체를 목적으로 삼는 데 의문을 제기한다는 것은 자본주의의 기본적 측면에 반대한다는 뜻입니다. 자원 추출이 함께 증가하지 않으면 가치의 지속적 자본 축적이 없으니까요. 그렇지만 이 부정적 관념을 긍정적 대안으로 전환하는 것은 훨씬 더 어렵습니다. 탈성장의 대표자들 사이에서도 대안에 관해서 차이가 있습니다. 세르주 라투슈 같은 저자들은 관료화된 노동자 국가라는 과거의 경험을 근거로 사회주의 이념에 대놓고 적대적이고, 모든 마르크스주의자를 생산주의자라고 비난합니다. 또 다른 이들은 정상 상태 자본주의 경제(일정한 지속적 조치를 통해 성장을 억제하면서 안정적 비율로 재생산을 보장하는 경제)가 성립 가능하기 때문에 탈성장과 자본주의는 본질적으로 적대적이지 않다고 주장합니다. 제이슨 히켈이나 사이토 고헤이처럼 좀 더 반자본주의적인 견해를 가진 사람들도 있고, 특히 사이토는 명시적으로 탈성장 공산주의를 옹호합니다. 이렇게 미묘한 차이는 있지만, 이 전망들의 공통된 특징은 일종의 최소 강령 내지 당면 강령에 집중한다는 점입니다. 강령의 내용은,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기본적으로 국가에 대한 요구로 이루어지죠. 여기에는 노동시간 단축처럼 우리가 동의할 수 있는 흥미로운 쟁점들도 포함되어 있지만, 이행기적 전망이나 자본주의를 넘어서기 위한 전략에 해당하는 것과 결합되어 있지는 않습니다. 이 입장들에 거의 거울상처럼 맞서는 것이 에코 모더니즘입니다. 이 관점에서 생태 위기의 답은 기술 발전을 가속하는 것입니다. 자본주의 체제에서는 혁신을 수익성 있는 사업 모델로 전환해서 투자를 정당화하기가 점점 어렵기 때문에 혁신의 잠재력이 온전히 실현되지 못한다는 것이 에코 모더니즘의 진단입니다. 아론 바스타니의 책 『완전히 자동화된 화려한 공산주의』가 대표적인 예죠. 바스타니에 따르면, 자본주의적 생산 관계가 부과하는 제약에서 기술 발전을 해방시키면 생산 과정을 완전히 자동화할 수 있습니다. 이 점에서 에코 모더니즘은 대사 작용을 축소하자는 주장에 반대합니다. 오히려 환경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혁신을 낳으려면 성장을 계속 추구해야 한다고, 어쩌면 더 빠르게 성장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합니다. 자본주의가 낳는 문제들은 그저 계획의 부재로 환원됩니다. 에코 모더니즘은 지금의 생산 양식에 고유한 소비 형태가 자본주의 이후에도 지속된다고 상정함으로써 이 소비 형태를 자연화하고 탈역사화합니다. 기술도 물신화하죠. 기술에는 중립성이라는 아우라가 부여되곤 하는데, 사실 모든 새로운 발전과 혁신은 계급 관계에 의해서 형성됩니다. 에코 모더니스트들은 이른바 경제와 환경의 탈동조화, 그러니까 자원 추출과 폐기물 생산이라는 측면에서 영향을 가능한 한 최소화하는 것에는 거의 한계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바스타니가 “완전히 자동화된 화려한 공산주의”라고 정의한 체제는 지속 가능성 문제에 전혀 부딪히지 않고 확장될 수 있을 것처럼 보입니다. 그들이 내세우는 근거는, 발전된 국가들의 자본주의 하에서 이런 과정이 오랫동안 진행되어 왔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물질적 영향 측면에서는 효율성 향상을 부인할 수 없지만, 이른바 탈동조화에 관한 통계 대부분이 한 가지 사실을 빠뜨린다는 점입니다. 그것은 전 지구적 분업의 변화로 인해 발전된 국가들이 자국 국경 밖에서 진행되는 물질적 과정에 훨씬 더 의존하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즉, 제국주의 국가 기반의 다국적 기업이 통제하는 개발도상국의 산업 과정에 발전된 국가들이 의존하고 있는 것이죠. 우리가 처한 상황은 탈동조화라기보다는 생산 과정이 제3국으로 오프쇼어링(offshoring, 해외이전)된 상태고, 이 과정을 따라서 환경에 대한 영향이 “외주화”됩니다. 생태 발자국을 따질 때 이 “오프쇼어링”을 고려하면 탈동조화의 규모는 크게 축소되고, 어쩌면 완전히 사라질지도 모릅니다. 이토록 취약한 가정에 기반한 자동화된 화려한 공산주의를 믿으면 파멸로 이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에코 모더니스트들도 모든 달걀을 한 바구니에 담고 싶지는 않기 때문에, 흔히 양다리를 걸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만약 충분한 탈동조화를 달성하지 못하면 답은 우주 채굴(소행성에서의 금속 추출)에 달려 있고, 지구 곳곳에서 갈수록 지속 불가능한 방식으로 축적되고 있는 쓰레기는 우주 공간에 버리면 된다고 말입니다. 마지막으로, 에코 모더니스트들은 노동의 변혁보다는 노동의 제거를 더 많이 생각합니다. 데이브 비치는 이 경향을 본질적으로 반노동적인 것으로 봅니다. 이런 시각은 자기 해방의 주체, 다른 사회적 대사 작용을 수립하는 과정에서 어떤 역할을 수행하는 주체로서의 노동자 계급이 부재하다는 데서 드러납니다. 에코 모더니스트들은 자기들이 제안하는 가속주의가 체제의 수축(진통 *이유: 출산에의 비유인 것 같아서...)을 심화하고, 그러면 계획 가능한 탈자본주의를 낳을 것이라고 기대합니다. 그리고 부유층의 소비 패턴을 나머지 사회로 “민주화”하고 확장하기를 바라죠. 이런 패턴들이 유한한 지구의 한계 안에서는 보편화될 수 없기 때문에, 에코 모더니스트들이 환경 문제에 대해 우주적 해법을 끌어온다는 사실은 놀랍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남는 것은 바스타니 같은 주장들인데, 말하자면 일론 머스크나 제프 베이조스의 우주적 망상을 (화려한) “공산주의적”으로 변형한 것이죠. F: 이런 경향들에 맞서서 당신은 “에코 공산주의”라는 관점을 주장합니다. 에코 공산주의란 무엇입니까? 에코 사회주의와는 왜, 어떻게 다릅니까? M: 에코 공산주의라는 용어는 아리엘 페트루첼리의 신간 제목에서 따온 것인데, 이 책은 제 책과 거의 동시에 스페인어로 출간되었습니다. 이 용어가 생태 마르크스주의 내지는 에코 사회주의가 강조해야 할 핵심 쟁점을 전면에 부각시키기 때문에 저는 이 용어를 사용합니다. “해법”이 기술에서 나올지 대사 작용 축소에서 나올지 논쟁하는 대신에 우리는 생태 파괴의 초점들, 즉 자본주의와 이 착취적 사회 질서가 낳는 생산 관계를 공격하기 위해 필요한 사회 세력을 조직해야 합니다. 많은 비판적 생태론자들이 보기에, 심지어 일부 에코 사회주의자들에게도, 생산 관계는 일종의 “블랙박스”입니다. 탐구되지 않은 채 방치된 영역, 겨우 주변적으로만 언급되는 영역이죠. 이 사람들은 거대한 생산 계급인 임금 노동력과 생산 수단 사이의 소외 관계를 종식시키는 것이 핵심이라는 사실을 놓치고 있습니다. 에코 모더니스트와 탈성장론자 모두 서로 다른 이유와 논리에 따라 노동 시간 단축을 이야기하지만, 자본에 의해 착취당하는 노동이 자기 해방의 행위자이자 사회–자연 관계의 질적 전환의 행위자로서 주인공 역할을 한다는 사실을 누락합니다. 생산 수단에 대한 사적 소유의 독점을 종식시킨다는 것은 노동자 민주주의, 즉 생산하는 사람들인 동시에 생산된 것의 대부분을 소비하는 사람들의 민주주의를 현재 자본이 지배하는 영역까지 확장한다는 뜻입니다. 자본주의 체제에서 생산–소비는 교환 과정에 의해 매개되는 분화된 전체입니다. 이 안에서 사회적 필요는 재정적으로 타당한 수요로서만 표현될 수 있습니다(그리고 자본가들이 생산해서 판매하기로 사전에 결정한 이런저런 상품의 선택으로서만 나타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생산 수단을 사회화해야만 우리는 두 과정의 진정한 통일을 다시 수립할 수 있고, 이 안에서 생산은 사회적 필요를 충족시키는 데 기반합니다. 이것이 모든 계획을 향한 첫걸음이죠. 에코 사회주의자들의 논의는 “더 많이” 아니면 “더 적게”로 양극화되곤 했는데, 여기서 벗어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는 핵심적 측면이기도 하고요. 어떤 사회적 필요를 우선시해야 하는가에 기초해서 무엇을 생산할지 집단적으로 결정함으로써 사회와 자연의 대사 작용을 합리적으로 통제한다는 것이, 곧 자본주의가 남긴 환경 파괴의 유산과 관련된 어려운 결정을 피할 수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하지만 자본주의적 생산 관계의 재생산을 핵심 기능으로 하는 정부의 지원을 받아서 자본의 사적 권력에 의해 이 결정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생산 수단에 대한 통제권을 되찾은 생산 계급 전체가 이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한 제안을 만들어 낼 것입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세 가지 목표를 충족시킬 것입니다. 바로 근본적인 사회적 필요를 완전히 충족하고, 생산을 민주화하고, 자연과의 합리적 대사 작용을 수립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죠. 더 나아가 우리는 “수탈자를 수탈”함으로써 더 폭넓은 부 개념을 회복할 것입니다. 말하자면 자본주의가 끊임없이 늘어나는 상품을 판매하기 위해 조장해 온 부 관념, 풍요는 곧 무한한 소비주의로 연결되어야 한다는 관념과 단절하는 것입니다. 탈자본주의적 에코 모더니즘의 신기루는 자동화를 통한 노동의 종말을 상상하는데, 여기서 자본의 궁극적 구현체인 기계는 신적 현현으로 등장하지만, 무엇을 생산할지 결정하는 방식과 주체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말하지 않습니다. 그와 반대로, 우리가 이해하는 공산주의는 노동의 변혁, 노동과 자연의 관계를 핵심 물음으로 삼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자본이 강요한 소외 관계 때문에 박탈당한 모든 잠재력을 노동이 회복하고, 동시에 자연의 추상화를 끝내기 위한 초석입니다. 이것이야말로 필연의 영역에서 자유의 영역으로 이행하기 위한 전제 조건이고, 그 자유는 균형 잡힌 사회적 대사 작용을 전제합니다. 저는 자본이 폐지된 이후의 사회가 마주할 위험한 생태 위기에 대처하는 만능 해법을 제안하는 것이 아닙니다. 집단적 의사 결정에 기반한 새로운 생산 관계를 쟁취한다고 해서 자본주의가 초래한 생태 재앙을 하룻밤 사이에 고칠 수는 없습니다. 제가 내놓는 좀 더 냉철한 제안은, “완전히 자동화된 화려한 공산주의”의 기술 낙관주의적 프로메테우스주의로 우리 자신을 현혹할 필요도 없고, 탈성장론자들이 옹호하는 고난 때문에 체념할 필요도 없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모든 노동자와 공동체의 민주적 숙의에 기반한 사회, 소수 착취자의 수중에 있는 생산 수단을 사회화해서 이루어지는 계획적인 사회적 생산에 기반한 사회를 쟁취해야만, 우리는 사회적 필요를 온전히 충족시키는 동시에 균형 잡힌 사회적 대사를 (재)수립해 나갈 조건을 창출할 수 있습니다. Left Vovice에 2025년 8월 1일 실린 기사를 번역함 LINKS에 2025년 7월 21일 처음 게재됨 /* 본문 안 링크 스타일 */ #gpt-article a { color: #cc0000 !important; /* 진한 빨강 */ text-decoration: none !important; /* 밑줄 제거 */ } #gpt-article a:hover { color: #990000 !important; /* hover 시 더 진한 빨강 */ } -
[성명] 이주노동자와 정주노동자의 공동투쟁으로 죽음의 행렬을 멈추자23살 베트남 이주노동자 뚜안님은 3월 10일 새벽 2시 40분쯤 경기도 이천 자갈 가공업체 ‘중앙산업’에서 컨베이어벨트 끼임 사고로 사망했다. 2인 1조 근무원칙은 무시되었고, ‘혼자 점검하라’고 지시받았다. 그것도 컨베이어벨트가 작동하는 상황에서 점검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야간조에 세 명이 일하다 한 명이 그만뒀는데도 인원은 충원되지 않았다. 비상스위치도, 인터록 센서도, 덮개도 없었다. 정말 아무것도 없었다. 대신 이주노동자를 최대한 갈아넣어 이윤을 짜내려는 자본의 착취와 탐욕만 있었다. 고용노동부의 관리감독은 눈 씻고도 찾아볼 수 없었다. 이틀 후인 3월 12일 전북 부안의 플랜트 설비 제조공장에서도 20대 태국 이주노동자가 기계에 목이 끼여 숨졌다. 지난 2월에는 영암 대불산단에서 나흘 새 두 명의 노동자가 선박 블록에 깔리고 아르곤 가스에 노출되어 죽었다. 정말 처참한 죽음의 행렬이다. "산재 사망은 사회적 타살, 미필적 고의에 의한 살인"이라는 이재명과 "산재 감축에 직을 걸겠다"는 고용노동부 장관 김영훈의 화려한 말잔치 속에서 수많은 이주노동자가 비명소리도 지르지 못한 채 죽어가고 있다. 이들은 이주노동자를 사장에 철저히 종속시키는 고용허가제를 그대로 두고, 단속추방을 계속 밀어붙이면서 산재사망을 줄이겠다는 거짓말을 늘어놓고 있다. 사장 동의가 없으면 사업장을 바꿀 수 없는데, 자신의 권리를 말하면 바로 찍어내 추방시킬 수 있는데, 어떤 이주노동자가 자신의 권리를 요구할 수 있고 위험한 작업을 거부할 수 있겠는가? 이주민과 이주노동자의 권리가 없는데, 어떻게 안전이 존재할 수 있는가? 이천병원에 어렵게 차려진 빈소에서, 뚜안님을 추모하는 뚜안님의 동료와 친구들은 베트남 이주노동자들에게 이 억울한 죽음을 알리고 있다. 한국 정주노동자들과의 공동투쟁을 간절히 바라고 있다. 이 참혹한 죽음의 행렬은 이주노동자를 무권리 상태로 방치하며, 바로 그 권리 없는 노동자들에게 위험을 떠넘긴 결과다. 위험의 이주화를 끝내자! 고용허가제 폐지하라! 국적이 아니라 계급으로 단결하자! 이주노동자와 정주노동자의 공동투쟁으로 죽음의 행렬을 끝내자! 2026년 3월 13일 사회주의를향한전진 -
여성대회 축사한 원민경 성평등부장관, 그는 살해된 이란 여아들의 죽음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을까?한국여성단체연합이 주관한 여성대회 부스에는 ‘1366서울센터’가, 대회에는 원청 사용자 원민경 성평등가족부장관이 참가했지만, 그 사측에 맞서 1년째 싸우고 있는 ‘1366서울센터분회’는 부분파업을 하고 3.8 여성파업에 참가했다. 성평등한 임금과 승급 체계를 위해 투쟁해 온 KEC지회는 간부파업을 하고 참가했다. 여성억압과 착취에 맞선다면, 분명 어깨를 걸어야 할 이는 현장에서 투쟁하고 있는 여성 노동자들이다. 가부장적 자본주의 체제를 떠받치며 여성운동이라 할 수 없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노동자계급 페미니즘이며, 계급투쟁이다. 한국여성단체연합 | 3월 7일 열린 제41회 한국여성대회 장면 2026년 3·8 국제여성의날을 기념하는 제41회 한국여성대회가 7일 서울 광화문 일대에서 개최됐다. 참가자들은 ‘빛의 혁명을 완수하라! 성평등이 민주주의의 완성이다’라는 슬로건 하에 성평등, 젠더 폭력 근절, 정치적 성별 균형 등을 촉구했다. 50여 개의 시민참여부스가 마련되고, 수천 명의 참여자와 수백 개의 깃발이 대회장을 가득 메웠다. 한국여성단체연합이 주관한 이날 대회에는 전국 여성단체들이 총집결했고, 부스를 비롯해 다양한 성소수자 인권 단체도 참여했다. 팔레스타인긴급행동도 집회를 앞당겨 진행하고 여성대회로 행진했다. 그만큼 이번 여성대회는 구조적 성차별에 맞서 싸운 사람들의 발언대가 되었다. 한국여성단체연합은 윤석열은 감옥에 갔지만, 구조적 성차별은 여전하며 성평등을 위해 싸우겠다는 의지를 다시 표명했고, 이에 참가자들은 기꺼이 동참했다. 그런데 52개의 부스 운영 주체 중에는 더불어민주당 전국여성위원회와 조국혁신당 성평등위원회도 있었다. 지난 선거에서 민주당과 선거연합한 진보당, 기본소득당도 있었고, 기후운동 판이었다면 다시 논란이 됐을 만하지만, 이 얘기는 꺼내지도 못할 정도다. 뿐만 아니라 주한캐나다대사관에, 대회에는 원민경 성평등가족부 장관의 축사도 이어졌다. 이 외에도 유한킴벌리, 아모레 퍼시픽, KPX전력거래소와 같은 기업도 후원 주체로 등장했다. 노동자들이 살인적인 교대근무제 등을 문제로 현재 투쟁하고 있는 1366센터도 부스를 차렸다. 그런데 과연 3.8 국제여성의날을 기념하는 여성대회에 이들의 자리를 마련한 것이 맞았을까? 제41회 한국여성대회 후원에 성평등가족부, 협찬에 여러 기업명을 확인할 수 있다. 민주당은 3.8 국제여성의날을 기념할 자격이 없다 물론 그렇지 않다. 민주당이나 자본은 3.8 국제여성의날을 기념할 자격이 없다. 민주당 정부는 국내서는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으로 여성 노동자들을 길거리로 가장 먼저 밀어낸 장본인이자, 국제적으로는 해외 여성과 어린이의 목숨을 가장 먼저 빼앗고 짓밟은 미국 제국주의의 동맹으로 과거 이라크 전쟁부터 최근 팔레스타인 집단학살까지 후원하고 있는 살인마 정권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1997년 외환위기를 계기로 김대중 민주당 정부가 밀어붙인 정리해고제와 파견제에 거리로 밀려난 다수 노동자의 성별은 여성이었고, 이때부터 구조화된 비정규직 제도로 인하여 여성은 단기계약제, 시간제, 특수고용, 프리랜서, 플랫폼 노동 등 각종 불안정 일자리를 전전해야 했다. 노무현 정부 때도 비정규직법(기간제법)을 도입했고, 문재인 정부는 탄력근로제를 확대하고 최저임금 산입범위를 개악했다. 그 결과 현재 여성 비정규직은 남성보다 131만 명이나 많은 처지가 됐다. 그리고 이 비정규직이란 신분은 여성에게 납덩이처럼 들러붙어 임금과 노동조건 전반에 걸쳐 구조적 성차별을 더욱 공고히 한다. 가령, 여성 비정규직의 월평균 임금만 해도 남성 정규직의 40% 수준일 뿐이다. 이재명 정부 역시 기간제 노동자 사용기한 2년에서 3년 이상으로 연장, 직무급제 확대, 전략산업 특별연장근로 확대 등 노동유연화 드라이브를 본격화하고 있다. 그런데 민주당 전국여성위원회가 무슨 자격으로 여성대회에 참석할 수 있단 말인가. 미 제국주의 패권 전략에 한반도 편입시킨 민주당 민주당 정권은 국제적으로는 직접 손에 피를 묻혔다. 노무현 정권은 2004년 이라크 침략 전쟁에 3천6백 병력을 파병해 참수 사건까지 빚었다. 나아가 2006년에는 미국의 군사패권주의 강화하기 위한 ‘전략적 유연성’에 합의하고 주한미군의 역할변경을 뒷받침했다. 이에 따라 주한미군의 작전 상대는 북한에서 동아시아로 확대되어 한반도 전쟁위기도 가중했다. 촛불시위의 여파로 집권한 문재인 정부는 박근혜 정부가 몰래 도입한 사드를 소성리에서 빼겠다고 약속했지만, 그와는 다르게 사드 체계를 고착했고, 한미군사동맹 기조 속에서 대미군사협력을 강화했다. 물론 민주당 정부가 미국의 제국주의 패권 전략에 편입되어 있던 바로 그때 이스라엘은 미국으로부터 한해에도 수백억 달러씩의 군사지원금을 받으며 팔레스타인을 침략했다. 특히 문재인 정권 때는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에 대한 군사 공격을 심화했지만, 그런 이스라엘과 오히려 경제, 군사 협력을 확대했다. 예컨대, 문재인 정권은 2021년에는 한-이스라엘FTA를 체결하고, 과학기술, 스타트업 협력 등 방산 협력을 확대했다. 결국 그 사이 한국은 유엔 특별보고관도 인정한 ‘가자 학살 공모국’이 됐다. 한국에서는 매년 수백억 달러에 달하는 무기가 이스라엘로 팔려 갔고, 한국이 판 부품으로 조립된 F-35기는 팔레스타인 가자 상공을 날며 민중을 학살했다. 그렇게 학살된 사망자 중 여성과 아동·청소년이 70%에 달한다. 이재명 정부 들어서도 이스라엘에 대한 무기수출은 계속되고 있다. 최근 미국이 이란을 침략한 후 사드를 비롯해 주한미군 일부 전력이 중동으로 차출될 수 있었던 것도 바로 당시 노무현이 맺은 협약 덕택이다. 이재명 정부는 입 뻥긋도 못하고 있다. 이재명 정부가 허락하는 ‘페미니즘’ 이 같은 민주당에서 전국여성위원회가 ‘여성’들의 위원회라고 해서 유별난 것은 아니다. 그들 역시 현 체제를 아낌없는 지원하는 인물들로 구성돼 있다. 이를테면, 이수진 민주당 전국여성위원장은 대기업 특혜지원과 노동시간 규제 완화, 기후 위기 심화로 논란을 빚은 반도체특별법안에 찬성표를 던졌다. 여성대회 무대에 올라간 원민경 장관은 또 어떤가? 그는 여성 인권 변호사로 알려졌지만, 과연 이 이력을 현 정부에도 이어가고 있는가? 원 장관이 여성의날, 기지촌 피해 여성들에게 정부의 사과를 전했지만, 지금도 여성빈곤을 야기해 성노동을 강요하는 자본주의 체제에는 아무런 말이 없다. 오히려 그는 비동의 강간죄나 포괄적 차별금지법에 대해, 민주당의 기존 태도인 ‘사회적 합의’를 다시 읊으며 면죄부를 주고 있다. 여성 노동자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칠 이재명 정부의 노동유연화 정책은 그에게는 타 부처 소관 정책일 뿐이다. 결국 원민경 장관은 이재명 정부가 ‘허락’하는 ‘페미니즘’만 할 수 있다. 원 장관 역시 아무런 갈등 없이 민주당의 노선을 추종한다. 결과적으로 현 성평등가족부의 정책이란 자본가 편에서 선 이재명 정부의, 그리고 미국 제국주의 패권을 추종하는 이재명 정부가 허락하는 여성 정책일 수밖에 없다. 그러니까 현 성평등가족부는 여성들이 투잡, 쓰리잡을 전전하도록 하는 비정규직을 줄일 수도, 팔레스타인 여아의 머리에 꽂힐 무기 판매를 막을 수도 없다. 물론 지금도 이재명 정부가 미국이 이란을 타격하며 무자비하게 살해한 여성 아동들의 죽음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듯, 원민경 장관 역시 그러하다. 실패한 성주류화 정책 그러면 한국여성단체연합은 왜 이 같은 인물과 조직에 부스를 허락하고 무대에 올린 것일까? 주류 여성운동에 국회나 정부는 ‘성평등’ 관점에서 개입/협력해야 할 대상이기 때문이다. 이미 김대중 정부 시절부터 여성운동은 ‘성주류화’ 전략을 채택하고 국회와 정부에 진출했다. 공공기관 단체장을 맡고, 잘되면 국회의원까지 될 수 있었다. 정부의 각종 사업을 민간위탁해 진행하고도 있다. 즉, ‘성주류화 정책’ 하에 ‘거버넌스’(정부, 기업, 시민사회 등 다양한 주체가 협력하여 의사결정한다는 지배 구조) 체제를 구성해 왔다. 이것은 김대중 정부 때 최초로 설립된 여성부부터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는 관행이다. 물론 기존 권력에 대한 개입은 필요하다. 그러나 이러한 ‘거버넌스’ 체제는 전체 노동자계급운동과는 유리된 채 부문운동만의 창구로 기능했다. 결국 각종 시민단체가 아무리 ‘진보적’ 전문성을 토대로 정부에 개입한들 그것은 현 정부가 그려놓은 선을 넘지 못했다. 결과적으로 ‘거버넌스’란 자본가정부가 계급운동으로부터 여성, 시민운동을 갈라치고 포섭하는 수단이 되었다. 1366서울센터 노동자들이 살인적인 교대근무제를 바꾸기 위해 1년 가까이 투쟁하는데도 여성대회에 1366서울센터 부스가 설치될 수 있던 것도 다른 이유가 아니다. 그런데도 주류 여성운동이 거버넌스 체제의 일 주체로서 기능하는 이유는 그들이 바로 자유주의 페미니즘을 추종하기 때문이다. 자유주의 페미니즘은 자유, 평등, 정의라는 자유주의 가치에 근거하여 여성의 권리를 옹호하지만, 이들이 성차별을 폐지하려는 이유는 남성과 공정하게 경쟁하려는 데 있을 뿐이다. 때문에 그들에게는 가부장제만이 문제지 계급은 중요하지 않다. 결국 그들이 지향하는 체제는 ‘성평등한 자본주의’ 또는 ‘성인지적 자본주의’라고 부를 수 있다. 하지만 자본주의는 애초 여성억압적이기 때문에 이것은 실현 불가능한 희망 사항이다. 주류 여성운동이 지지하는 ‘정체성 정치’의 관점에서도 마찬가지다. 이들은 ‘여성’이라는 정체성에 기초하여 여성을 약자화할 뿐, 계급적 당파성과는 무관하다. 스튜디오 알 | 3월 6일 서울역 광장에서 열린 3.8 여성파업대회 장면. 전국학습지산업노동자, KEC지회, 톨게이트지부, 1366서울센터분회를 비롯한 노동자들이 참가해 구조적 성차별, 여성억압과 착취에 맞선 투쟁을 결의하고 있다. 노동자계급의 페미니즘, 3.8 여성파업 운동을 조직하자 그런데 3.8 국제여성의날이 과연 어떤 날인가? 자본주의 초기 살인적인 노동조건에 떨쳐 일어난 여성 노동자들의 절박한 투쟁을 기리기 위한 날이다. 혁명적 여성 사회주의자들이 제안한 날이다. 자본주의 여성억압에 맞서 여성 노동자들의 선구적인 투쟁을 지지하며 기념하고 다시 싸우겠다고 다짐하는 날이다. 그런 자리에 자본가 정부의 관료를 세운 것은 역사를 우롱하는 처사나 다름없다. 3.8 국제여성의날은 노동자계급의 날이다. 그리고 우리가 3.8 여성파업을 조직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구조적 성차별에 맞서, 여성 억압과 착취에 맞서 생산과 재생산을 중단하는 정치총파업으로서의 여성파업 조직은 여성 노동자들의 땀과 눈물과 뼈로 만들어진 3.8 국제여성의날을 제대로 기념하기 위한 운동이다. 한국여성단체연합이 주관한 여성대회 부스에는 ‘1366서울센터’가, 대회에는 원청 사용자 원민경 성평등가족부장관이 참가지만, 그 사측에 맞서 1년째 싸우고 있는 ‘1366서울센터분회’는 부분파업을 하고 3.8 여성파업에 참가했다. 성평등한 임금과 승급 체계를 위해 투쟁해 온 KEC지회는 간부파업을 하고 참가했다. 여성억압과 착취에 맞선다면, 분명 어깨를 걸어야 할 이는 현장에서 투쟁하고 있는 여성 노동자들이다. 가부장적 자본주의 체제를 떠받치며 여성운동이라 할 수 없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노동자계급 페미니즘이며, 계급투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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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언] 세계 여성의 날, 반제국주의 침략 전쟁에 반대하는 노동자 민중의 국제연대 투쟁이 필요합니다118주년 3.8 세계여성의날 울산여성대회와 함께, 팔레스타인 평화를 위한 울산 51차 긴급행동이 진행되었다. 민주노총 울산지역본부, 금속노조 울산지부, 현대글로비스 울산지회, 이수기업 해고자 동지들, 진보당, 노동자혁명당(준), 사회주의를향한전진 등 여러 동지들이 집회에 참여했다. 특히 민주노총 울산지역본부에서 미국과 이스라엘의 이란 침공을 규탄하는 현수막을 준비해 선전전이 빛을 발했다. 울산여성대회 내내 ‘팔레스타인 평화를 위한 울산긴급행동’ 참가단위들은 현수막과 피켓을 들고 이스라엘의 가자지구 집단학살, 미국과 이스라엘의 이란 침략과 학살을 규탄하는 캠페인을 진행했다. 또한 ‘팔레스타인 평화를 위한 울산긴급행동’을 대표해, 현대글로비스 울산지회 김미옥 지회장이 미국과 이스라엘의 제국주의 전쟁 규탄, 이스라엘 집단학살에 공모하는 한국 대자본과 이재명 정부를 규탄하는 발언을 했다. 이후 행진까지 함께하며, 팔레스타인 평화를 위한 울산 51차 긴급행동을 마쳤다. 아래는 현대글로비스 울산지회 김미옥 동지의 발언문 전문이다. 오늘 118주년 세계여성의날을 맞아 울산여성대회에 참가하신 여러분! 현대글로비스 울산지회 지회장 김미옥입니다. 제가 지회 간부들과 함께 팔레스타인 평화를 위한 울산 긴급행동 선전전에 꾸준히 함께하였기에, 오늘 여러분 앞에 서게 된 것 같습니다. 여러분! “좋은 나무 초등학교”를 들어보셨습니까? “좋은 나무 초등학교”, 얼마나 멋지고 예쁜 이름입니까? 저는 미국과 이스라엘이 이란을 침공하면서 알게 되었습니다. “좋은 나무 초등학교”는 이란 미나브 지역에 있는 학교입니다. 미나브 지역에는 여성과 남성 초등학교가 하나씩 있다는데, 그중에 “좋은 나무 초등학교”는 여성 어린이가 다니는 학교랍니다. 미국 트럼프와 이스라엘 네타냐후가 “좋은 나무 초등학교”를 두 번 연속 폭격하여 168명을 학살했습니다. 12세 이하 이란 어린이들은 한국 어린이와 친구가 되어 더 아름다운 세상과 미래를 꿈꾸며 만들어 갈 인류의 소중한 보물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전쟁과 피에 굶주린 야수와 같은, 미국과 이스라엘의 제국주의 침공과 민간인 학살을 강력히 규탄합니다. 또한 제국주의 미국과 이스라엘의 참혹한 패배와 이란 노동 민중의 승리를 간절히 간절히 바랍니다. 여러분들도 동의하십니까? 미국과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가자지구에서도 집단학살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미국의 지원 아래 가자지구를 침공해서 약 80% 지역을 폐허로 만들었습니다. 2023년 10월 7일 이후, 이스라엘과 미국은 가자지구 8만여 명을 학살했으며, 20만 명을 다치게 했습니다. 이스라엘이 학살한 8만여 명 중에 약 70%가 어린이, 여성, 고령자들입니다. 이스라엘은 2025년 10월 휴전이 시행된 이후에도 가자지구 60% 지역을 점령한 상태에서 500명 넘게 학살했습니다. 또한 식료품과 의료품 등 생존을 위한 물품 차량을 봉쇄하며 가자지구 주민들을 고통과 죽음으로 내몰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집단학살을 강력히 규탄하며, 이스라엘 군대는 가자지구 즉각 철수해야 합니다. 여러분들도 동의하십니까? 한국은 이미 다양한 형태로 전쟁과 집단학살에 깊숙이 개입해 있습니다. 한국 한화그룹의 무기 수출, 한국석유공사의 가자지구 해역 천연가스 수탈, 현대건설기계의 굴착기 수출 등 대자본이 이스라엘 집단학살에 공모하고 있습니다. 이재명 정부는 트럼프의 평화위원회 참여를 검토하고 있습니다. 트럼프는 가자지구 평화위원회에서 ‘가자’라는 말은 삭제했습니다. 평화위원회는 가자지구를 영원히 식민 통치하는 기구임이 분명해지고 있습니다. 이재명 정부가 아무리 외교적 언사라도 전쟁광 트럼프의 평화 노력을 지지한다고 발표하는 게 말이 됩니까? 민주노총은 어제 성명에서 ‘한국 정부는 미국의 패권 전략에 부화뇌동하며 한국을 전쟁의 발진기지로 내어주는 모든 행위를 즉각 중단해야 하며, 미국의 침략 전쟁에 어떠한 협조나 방조해서는 안 된다’라는 점을 분명히 밝혔습니다. 제국주의 침략 전쟁에 다양한 형태로 관여하고 있는 상황에서 한반도와 동아시아의 평화가 과연 가능한 일입니까? 한국을 비롯해 세계 노동자 민중이 우크라이나 전쟁을 멈추지 못했기에, 팔레스타인 가자지구의 집단학살이 계속되고 있으며, 가자지구 집단학살을 멈추지 못했기에 이란 전쟁과 학살로 이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제국주의 침략 전쟁은 자본가들에게는 이윤을 축적하는 기회이지만, 어린이, 여성, 장애인, 고령자에게는 재앙입니다. 118주년 세계여성의날을 맞아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반제국주의 침략 전쟁에 반대하는 노동자 민중의 국제연대 투쟁입니다. 우리 다 같이 힘차게 외쳐보겠습니다! - 이재명 정부는 포괄적 차별금지법을 즉각 제정하라! - 이스라엘은 가자지구에서 지금 당장 철수하라! - 미국과 이스라엘은 제국주의 침략 전쟁을 즉각 중단하라! - Free Free Palestine! [English] Today, on the 118th anniversary of International Women’s Day, I would like to welcome everyone participating in the Ulsan Women’s Rally. I am the leader of the Ulsan branch of Hyundai Glovis within the Korean Metal Workers Union, Kim Mi-ok. Nice to meet you. I believe I am standing before you today because I have consistently participated in the “Emergency Action for Peace in Palestine” campaign alongside the branch executives. Have you ever heard of “Sacred Tree Elementary School”? Isn’t it a really beautiful name? I learned about it when the United States and Israel invaded Iran this time. Shajareh Tayyebeh (“Sacred Tree”) Elementary School is located in the Minab region of Iran. In Minab, there is one elementary school for girls and one for boys, and Sacred Tree Elementary School is the one attended by girls. The U.S. administration under Trump and the Israeli government led by Netanyahu bombed Sacred Tree Elementary School twice in a row, killing 168 people. I believe that children in Iran under the age of 12 are precious treasures of humanity who will grow up to become friends with Korean children and help create a more beautiful world and future. I strongly condemn the imperialist invasion and civilian massacres carried out by the United States and Israel, which behave like beasts starving for war and blood. I sincerely hope for the defeat of imperialist U.S. and Israeli aggression and for the victory of the Iranian working people. Do you all agree? (Yes) The United States and Israel continue to commit genocide in the Gaza Strip of Palestine. With U.S. support, Israel invaded Gaza and turned about 80% of the area into ruins. Since October 7, 2023, Israel and the United States have killed at least 80,000 people in Gaza and injured at least 200,000. Of those killed, about 70% are children, women, and the elderly. Since the ceasefire implemented in October 2025, Israel has occupied 60% of the Gaza Strip and has killed more than 500 people. They are also blocking aid vehicles carrying essential supplies such as food and medical goods, pushing Gaza residents into suffering and death. We strongly condemn Israel’s actions, and the Israeli military must withdraw immediately from the Gaza Strip. Do you all agree? (Yes) Korea is already deeply involved in wars and genocides in various forms. Hanwha Group’s arms exports, the Korea National Oil Corporation’s natural gas extraction in the Gaza Strip, and Hyundai Construction Equipment’s excavator exports are all contributing to Israel’s actions. The Lee Jae-myeong government is reportedly considering participation in Trump’s “peace board,” which is becoming an organization for the permanent colonial rule of the Gaza Strip. Does it make sense for the Lee Jae-myeong government to announce support for the peace efforts of Trump, who is widely criticized as a warmonger, no matter how diplomatic the language may be? The Korean Confederation of Trade Unions stated yesterday that “the Korean government must immediately cease all actions that align with the U.S. hegemonic strategy and turn Korea into a launchpad for war,” and that "it must not provide any cooperation or connivance to the U.S. invasion." While Korea is involved in imperialist wars in various forms, can peace on the Korean Peninsula and in East Asia truly be possible? Because workers and people around the world, including in Korea, have not been able to stop the war in Ukraine, it has led to the genocide in Palestine and Gaza, and because we have not been able to stop the genocide in Gaza, it is now leading to war and slaughter in Iran. Imperialist wars are opportunities for capitalists to accumulate profits, but they are disasters for children, women, the disabled, and the elderly. On the occasion of the 118th International Women’s Day, what we need is the international solidarity struggle of working people against imperialist wars. Let’s all shout together. Please repeat the final lines: “The Lee Jae-myeong government must immediately enact a comprehensive anti-discrimination law!” “Israel must withdraw from the Gaza Strip right now!” “The United States and Israel must immediately stop their imperialist wars!” Free Free Palestine! Thank you. Instagram에서 이 게시물 보기 사회주의를 향한 전진(@marchtosocialism)님의 공유 게시물 /* 기본 blockquote 스타일 */ blockquote { border-left: 4px solid #c0392b; /* 사이트 분위기와 맞는 붉은 계열 */ padding: 12px 18px; margin: 20px 0; background: #fafafa; font-style: normal; color: #333; line-height: 1.6; } /* blockquote 안의 p 태그 정렬 */ blockquote p { margin: 0 0 10px 0; text-align: justify; } /* 마지막 p 태그 여백 제거 */ blockquote p:last-child { margin-bottom: 0; } -
[후원의 밤] "다음 투쟁을 위하여"노동해방과 인간해방을 위해 싸워온 동지들께 인사드립니다. 사회주의를향한전진은 2022년 창립 이후, 4년 간 △계급적 생존권 쟁취투쟁 △여성과 소수자 억압에 맞선 여성파업 △기후정의 계급투쟁 △반제반전 국제연대라는 4대 과제에 근거해 활동해왔습니다. 당면 세종호텔 투쟁, A학교 공대위 투쟁, 3.8여성파업 투쟁, 팔레스타인 해방투쟁 등에 적극 결합하여 함께 투쟁하고 있기도 합니다. 투쟁 과정에서 직면한 재정난을 타개하기 위해, 사회주의를향한전진이 2026년 3월 28일(토) 14시부터 22시까지 “다음 투쟁을 위하여 – 사회주의를향한전진 후원의 밤” 행사를 태성골뱅이신사 본점(을지로3길 35)에서 진행합니다. 동지들과 함께 다음 투쟁을 준비하고자 합니다. 많은 동지들의 참여와 후원을 부탁드립니다. - 티켓구매: https://forms.gle/xiY8nhvB7qoogYTL8 - 일시 : 3월 28일(토) 오후 2시~밤 10시 - 장소 : 태성골뱅이신사 본점 (중구 을지로3길 35, 3층) - 후원계좌 : 하나은행 217-910309-50807 임용현 -
[한노운사 연재 8회] 2부 전진과 격돌 (1988-1998) [2] 1990~91년 전노협 건설과 민주주의 투쟁1988~89년 민주노조운동의 폭발적 성장을 토대로 전투적·변혁적 민주노조운동의 전국적 총결집체로서 전노협이 1990년 건설됐다. 전노협을 와해시키려는 정권과 자본의 가공할 탄압에 맞서 노동자들은 1990년 5월 한국전쟁 이후 최초로 전국 총파업을 조직해 냄으로써 전노협을 사수해 냈다. 1991년 5월 군사파시즘의 부활을 모색하는 노태우 정권에 맞서 전 민중의 민주주의 투쟁이 1987년 6월 이후 최대 규모로 터져 나왔을 때, 노동자들은 조직적 대오로 참여해 주도적 역할을 수행했다. 이전 편 보기 2부 전진과 격돌 (1988-1998) [시대배경] 군사파시즘에서 신자유주의 질서로 [1] 1988~89년 민주노조운동의 폭발적 성장 [2] 1990~91년 전노협 건설과 민주주의 투쟁 [3] 민주노총으로 가는 길 [4] 1996~98년 노동법 대격돌 1) 1990년 전노협 건설과 파상적 탄압 1989년이 지나는 동안 ‘지역·업종별 노동조합 전국회의’는 전국 단일조직 건설을 위한 논의를 꾸준히 진척시켰다. 마침내 1990년 1월 22일 민주노조운동의 전국적 구심으로서 ‘전국노동조합협의회’(전노협)가 건설됐다. 전노협 건설에는 지노협 14개와 업종협 1개가 참여했다. 전노협은 600여 개 단위노조, 19만 3천여 명의 조합원을 포괄하며 출범했다.[1] 서울대에서 열릴 예정이었던 전노협 창립대회는 대회장 주변을 중심으로 서울지역에 2만 5천여 명의 경찰이 원천봉쇄한 상황이었으며 시내 곳곳은 수시로 검문검색이 이루어졌다. 이에 따라 전국노동조합협의회 창립준비위원회는 사전에 비밀연락체계를 구축하고 제2, 제3의 창립대회 장소를 선정하고 동시 준비를 진행했다. 또한 하루 전날부터 상경한 대의원들은 10~15명 단위의 조로 편제되어 엄격한 행동통일을 이루어냈다. 조별로 편제된 대의원들은 보통 두세 차례 수도권 일대를 돌면서 경찰의 미행을 따돌렸다. 그리하여 경찰의 추적을 완전히 따돌렸다는 판단이 선 전노협 창립준비위원회에서는 1월 22일 당일 아침 서울대에서 성균관대학교 수원캠퍼스 학생회관으로 장소를 변경하였고, 대기하고 있던 대회 참가자들도 일사분란하게 수원 성균관대학교로 오전 11시 50분경부터 속속 도착하기 시작해 1시간 만에 1,500여 명이 결집하였다. 12시 45분 인노협 조직국장의 개회선언으로 시작된 창립대회는 … 8백여 명의 대의원들이 참가한 가운데 1시간 동안 진행되었다. 참가자들은 창립선언문에서 “한국노총으로 대표되는 노사협조주의와 어용적, 비민주적 노동조합운동을 극복하고 자주적이고 민주적인 노동운동을 전개해 나갈 수 있는 한국노동조합운동의 새로운 조직적 주체가 탄생”되었음을 밝히고 “노동자의 인간다운 삶과 국민의 자유와 행복을 실현하기 위해 민주노조운동의 역량을 강화하고 자주적 산별노조 건설에 매진할 것”을 결의하였다. 이어 대의원들은 단병호 전노협 창립준비위원회 위원장을 전노협의 초대 위원장으로 추대하고 전노협 강령 및 규약을 제정하였다.[2] 1987년 대투쟁 이후 노동자들의 기세에 당황하며 일정한 전략적 후퇴를 감수했던 자본가계급은, 전노협 건설만큼은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심각한 사태로 받아들였다. 정권과 자본의 탄압이 나날이 강도를 높여가면서 사무전문직과 대기업을 중심으로 절반 가까운 민주노조가 전노협 건설 과정에서 떨어져 나갔다. 지역별 연합조직들이 전체적으로 전노협에 참여한 것과 달리 업종별 연합조직 가운데 다수는 조합원들의 낮은 의식수준을 이유로 전노협에 참여하지 않았다. 대신 5월 30일 ‘전국업종노동조합회의’(업종회의)를 따로 결성했다. 또한 지역별 연합조직 가운데 대공장 노조가 밀집된 울산은 처음에 ‘울노협 준비위’로 참여했으나 정권의 탄압과 회유로 울노협 준비위가 무너지면서 실질적인 참여로는 이어지지 못했다. 그럼에도 전노협은 1987년 이후 거대한 규모로 성장한 민주노조들의 전국적 구심이자 총단결체였다. 노태우 정권이 엄청난 탄압을 퍼붓는 상황을 뚫고, 40여 년 동안 이어진 한국노총의 관료적 통제를 단호히 거부하면서, 20만 노동자를 포괄하는 600개의 민주노조들이 결집하여 전노협을 건설한 것은 그 자체로 엄청난 사건이었다. 전노협이 결성된 바로 그날, 대통령 노태우가 이끄는 민주정의당과 김영삼의 통일민주당, 김종필의 신민주공화당이 이른바 ‘3당 합당’을 통해 국회의원 2/3 이상을 포괄하는 거대 보수대연합에 합의하며 민주자유당을 창당하기로 선언했다. 노태우 정권의 정치적 기반을 안정화하기 위한 이 정계개편의 동기 가운데 하나는 전노협 건설로 대표되는 노동자계급의 거침없는 성장에 놀란 자본가계급의 위기의식이었다. 전노협에 강력한 탄압을 퍼부어 와해시킬 수 있도록 노태우 정권에 힘을 실어줘야 한다고 자본가계급은 공감하고 있었다. 실제로 3당 합당으로 권력을 집중시킨 노태우 정권은 전노협 건설에 나선 노동자들에게 박정희·전두환 군사정권 시절에 버금가는 맹렬한 탄압을 퍼부었다. 전노협 건설 세 달 만에 중앙위원 51명 가운데 17명이 구속되고 12명이 수배되어 29명이 정상적 업무를 볼 수 없는 상태가 됐다. 전노협 사업장에 대한 공권력 투입이 18차례나 이루어졌고, 전노협 탄압으로 구속된 노동자만 334명이나 됐다. 노동부는 전노협에 가입한 모든 노조를 상대로 업무조사에 나섰다. 안기부는 전노협 가입 노조 임원들을 상대로 전노협 탈퇴 공작을 집요하게 진행했다. 저렇게 전면적인 탄압을 뚫고 과연 전노협이 지탱될 수 있을 것인지 누구도 장담할 수 없었다. 2) 1990년 전노협 사수 전국 총파업 1990년 봄, 전노협의 운명이 바람 앞의 등불처럼 위태롭던 상황에서 노동자들의 투쟁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첫 포문을 연 것은 한국방송공사(KBS) 노동자들의 방송민주화 투쟁이었다. 불길은 울산 현대중공업으로 옮겨 붙었다. 정권이 현대중공업 파업에 즉각적으로 공권력을 투입하자 현대중공업노조가 골리앗 크레인을 점거하고 현대자동차 노동자들이 자발적인 비공인파업에 나서면서 전국적인 연대투쟁이 솟구쳤다. 그 기세를 타고 전노협이 한국전쟁 이후 최초로 전국 총파업을 사흘 동안 조직했다. ◎ KBS 방송민주화 투쟁 KBS에 노동조합이 결성된 것은 1988년 5월이었다. 노동조합은 군사정권의 관제언론으로 기능해 왔던 KBS의 역사를 반성하며 권력에 대한 비판과 금기에 대한 도전을 확대해 나갔다. 1988년 11월 KBS 사장으로 선임된 서영훈은 이러한 노조의 노력에 비교적 협조적이었다. 1990년 1월 3당 합당으로 정치적 기반을 강화한 노태우 정권은 KBS에 대해서도 통제의 고삐를 죄기 시작했다. 2월부터 감사원이 KBS 특별감사를 진행한 뒤, 노사합의로 지급한 수당이 잘못됐다면서 서영훈 등 KBS 고위 간부에 대한 후속 조치를 공보처에 요구했다. 결국 KBS 이사회가 3월 8일 서영훈의 면직을 결정했다. KBS 노동조합은 이에 강하게 반발하며 비상대책위원회를 조직하고 집회와 농성을 이어나갔다. 4월 3일 KBS 이사회가 서기원 서울신문 사장을 신임 사장으로 선출했다. 서기원은 정부기관지 사장으로서 노조 파업을 진압한 전력이 있었다. KBS 노동조합은 더욱 거세게 반발했다. 노동조합은 비상대책위원회를 확대 개편하고 ‘서기원 출근저지 특별감시조’를 편성해 11일 서기원의 출근을 저지했다. 12일 서기원은 실국장, 청원경찰, 백골단 등을 동원해 사장실로 진입했다. 이 과정에서 조합원 117명이 경찰에 연행됐다. 공권력 난입에 맞서 KBS 노동조합은 13일 조합원 4천여 명이 참여한 비상총회를 개최하고 방송제작 거부에 들어갔다. 4월 13일, 남한강연수원에서 연수중이던 70여 명의 11기 사원들이 연수를 중단하고 조합원총회에 참석하는 등 총 4천여 명의 조합원들이 참석한 가운데 ‘전국비상사원총회’가 개최되었다. 총회 진행 중에도 백골단 220여 명이 5, 6층에 상주하고 있었지만 조합원들을 서기원이 퇴진할 때까지 무기한 제작거부와 농성투쟁을 벌이기로 결의했으며, 교양국, 기획제작국, 라디오국 등을 비롯 당일 오후 6시를 기해 송출기술부를 제외한 제작자 전원이 ‘서기원 퇴진 및 구속자 전원 석방’이 이루어질 때까지 제작을 거부키로 결의했다. … 제작거부에 돌입한 조합원과 집행간부들 약 1천여 명이 철야농성에 참여했다. 30일 전경 3천여 명이 KBS 본관에 투입돼 조합원 333명을 연행했다. 5월 1일 문화방송(MBC) 노동조합이 KBS 공권력 투입에 항의하며 연대 제작거부에 돌입했다. CBS노조도 제작거부에 동참했다. KBS노조 비상대책위원회도 거점을 MBC노조로 이동했다. 2일 KBS와 MBC 양 노조가 MBC에서 함께 ‘구속동지 석방 촉구 및 노태우 정권 규탄대회’를 개최했다. 4일 밤 MBC에도 경찰병력이 투입됐다. 결국 MBC노조가 7일에, KBS노조가 18일에 방송제작에 복귀했다. KBS노조원 11명이 해직됐다. ◎ 현대중공업 골리앗 파업 1990년 1월 19일 현대중공업노조는 128일 파업 이후 수습지도부 체제를 마감하고 새로운 민주집행부를 출범시켰다. 그런데 전노협에 대한 정권의 파상적 탄압이 현대중공업노조에도 거칠게 퍼부어졌다. 2월 5일 128일 파업지도부에 대한 부산고등법원의 항소심 공판에서 검찰이 1심보다 더 높은 형량을 구형했다. 현대중공업노조는 6일 긴급대의원대회를 거쳐 7일 오전 10시 전 조합원 조퇴 후 집회를 갖고 8일 선고공판에 전 조합원이 월차를 내고 참가하기로 결의했다. 그러자 경찰이 7일 밤 이영현 위원장을 전격 체포하고 우기하 수석부위원장을 수배했다. 노동조합이 8일 방청투쟁을 강행하자 9일 이영현 위원장이 구속됐고, 10일에는 완전무장한 사복경찰 200여 명이 노조 사무실에 난입해 압수수색을 벌였다. 대응방향을 둘러싸고 현대중공업노조는 혼란에 휩싸였다. 한편에는 총자본의 공세에 맞서 강도 높은 구속자 석방투쟁으로 민주노조를 사수해야 한다는 주장이 있었다. 다른 한편에는 더 이상 희생을 자초하지 말고 임금인상·단체협약 투쟁을 통해 노동조합을 안정시켜야 한다는 주장이 있었다. 정권의 탄압은 계속됐다. 권용목 현해협 의장, 윤재건 조직부장, 설남종 기획실장, 김남석 대의원 등이 계속 구속됐다. 4월 20일에는 우기하 수석부위원장마저 구속됐다. 마침내 21일 조선사업부 5분과에서 분노한 조합원들이 아래로부터 파업을 시작하면서 논쟁은 잠재워졌다. 22일 긴급히 소집된 대의원 간담회는 25일부터 전면파업 돌입을 결의했다. 23일 비상대책위원회(비대위)가 구성되고, 24일부터 대의원, 소위원, 선봉대, 기동대, 정당방위대 등 2천여 명이 텐트 철야농성에 들어갔다. 농성자들은 투쟁의 의의와 방향에 대해 텐트별로 토론을 조직하는 한편, 공권력 투입에 대비해 무장을 갖추기 시작했다. 정문 앞에 바리케이드를 치고, 텐트 주변에 ‘민주박격포’를 설치했다. 화염병을 제작하고 볼트·너트 등을 준비했다. 그런데 현장 노동자들의 투쟁열기가 치솟는 것과 반대로 비대위 지도부가 극심하게 동요했다. 24일 진민복 비대위 의장이 잠적하면서 김영환 부위원장이 비대위 의장이 됐다. 그러나 26일 김영환 의장도 ‘정치파업은 못 하겠다’며 사퇴했다. 결국 이갑용 사무국장이 비대위 의장을 맡고서야 지도부가 안정됐다. 노태우 정권은 속전속결로 현대중공업 파업을 진압하고자 했다. 공권력 투입이 확실시되자 비대위 지도부는 82미터 높이의 골리앗 크레인 점거농성에 돌입했다. 파업돌입 사흘 만인 28일 새벽 경찰병력 1만여 명이 다시 현대중공업에 투입됐다. 4월 28일 오전 6시 정각, 페퍼포그가 앞을 식별할 수 없도록 최루탄을 퍼붓는 속에서 이에 맞선 현대중공업 노동자들의 민주박격포가 발사되었다. 정문 앞 바리케이드와 담장을 불도저로 밀어붙이고 백골단이 뛰어들기 시작했다. 73개 중대 1만여 명의 병력이 하늘(헬기를 통한 사전정찰, 상황지시, 선무방송)과 땅 그리고 바다(미포만에 군함을 상륙시킴)를 통해 달려들었다. 새벽 5시부터 헬기가 울산만 상공을 분주하게 날아다니더니 이윽고 6시가 되면서 불도저가 중공업 정문을 두드렸다. 그 뒤에는 페퍼포그차가 숨어서 수백 발의 지랄탄을 쏘아댔다. 구토나는 최루가스 속에서도 이들 침입자들을 저지하기 위한 필사의 노력이 전개되었다. 또다시 민주박격포가 작렬하였다. 그리고 화염병이 날았다. 그러나 역부족이었다. 또다시 지랄탄을 퍼붓는 페퍼포그와 함께 돌진해 오는 전경들에 의해 공격개시 7분 만에 3차 바리케이드까지 무너졌다. 30여 대의 민주박격포가 불을 뿜었지만 전경들을 잠시 우왕좌왕하게 하는 정도였다. 삽시간에 대오가 쪼개지고 아수라장이 되었다. 눈물을 삼키며 조금씩 물러서고 있을 때, 골리앗 투쟁지도부의 지침이 확성기를 통해 울려 퍼졌다. 골리앗 지도부가 가동되기 시작한 것이다. “동지들! 현 위치를 사수하라. 여기가 누구의 일터인가? 여기서 나가야 할 놈들은 바로 저들이다. 우리가 엄호할 테니 아래의 동지들은 마음껏 공격하라!” 그리고 함성소리와 함께 수백 개의 볼트가 날랐다. 전경의 방패가 깨지고 머뭇거리던 동지들이 대오를 갖추었다. 그러나 중장비까지 동원하고 조직된 무력 앞에서 더 이상 버틸 수가 없었다. 골리앗 지도부에서 새로운 지침이 떨어졌다. “동지들! 투쟁하면서 퇴각하라! 공장을 빠져나가 야전지도부의 지도 아래 가두투쟁을 전개하라! 우리는 골리앗으로 간다. 골리앗은 결코 점령당하지 않는다. 투쟁하면서 퇴각하라! 동지들! 승리하는 그날에 만나자!” 조직적인 퇴각이 시작되었다. 마지막으로 8시 35분, 4도크와 5도크에서 항전하던 노동자들이 무장해제당했다. 그리고 용접봉, 장작, 볼트가 널부러진 도로 위를 따라 사복조들이 도열한 틈을 눈물을 삼키며 빠져나와야 했다.[3] ◎ 현대자동차 4·28 연대투쟁 현대중공업 파업 직후 공권력을 투입하겠다는 정부 방침이 발표되자마자 전국적인 연대총파업으로 맞서자는 논의가 마창노련과 서노협 등 전노협 일부에서 시작됐다. 노태우 정권의 광포한 노동운동탄압을 중단시키고 또한 전노협을 사수해 내려면 이제 전국적인 연대총파업으로 대응해야만 한다는 문제의식이었다. 그러나 전노협 차원에서 미처 결론을 내리기도 전에 현대중공업에 공권력이 투입돼 버렸다. 바로 그 상황에서, 28일 새벽 공권력이 투입되는 길목에 있는 현대자동차 노동자들이 머뭇거리는 노조 집행부의 지침을 기다리지 않고 아래로부터 스스로 파업에 들어가 전투경찰과 대대적인 가두전투를 펼치는 일이 벌어졌다. 철야농성 중이던 선봉대와 대의원이 시작한 싸움에 야간 조합원 전체가 공장을 멈추고 거리로 달려 나왔다. 돌과 화염병 그리고 최루탄이 새벽 공기를 가르며 격렬하게 날아다녔다. 몇 시간 동안 어쩔 줄 몰라 하던 노조 집행부가 뒤늦게 파업을 선언했을 때 이미 조합원들은 모두 거리에 나가 있었다. 날이 밝자 출근하는 주간 조합원까지 가세했다. 현대자동차 담벼락을 따라 4km 대로에서 기습을 당한 전투경찰은 발이 묶이고 심지어 무장해제까지 당했다. 새벽 4시경 어둠을 뚫고 경찰병력이 현대자동차 앞을 지날 때였다. 비상상황에 대비해 각 정문에 규찰을 서던 선봉대와 대의원들이 현대중공업 공권력 투입에 항의하며 지나가던 전경병력을 바리케이드로 가로막고 투석전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무거운 판스프링 등으로 도로가 차단되자 경찰은 야간작업 중인 현대자동차 공장 안을 향해 무차별적으로 최루탄을 쏘아대기 시작했다. 삽시간에 100만 평의 현대자동차 공장이 최루가스로 뒤덮였다. 여기저기서 돌과 화염병이 날고 최루탄이 쉬지 않고 현장 안으로 날아들었다. … 노조의 공식 결정은 좀체로 내려지지 않고 있었다. 오히려 조합의 방침과 관계없이 현장은 이미 조업이 중단되어 있었다. 자연스럽게 정문 쪽으로 몰려나가 경찰과 투석전을 벌이고 있었던 것이다. 도로 쪽에 가까이 인접해 있던 노조 사무실에도 최루탄이 날아들어 사무실 안이 최루탄 가스로 꽉 차 있었다. 새벽의 미명이 뿌옇게 밝아왔을 때도 곳곳에서 공방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노조사무실에는 조합이 왜 지금까지 방침을 내리지 않느냐는 격렬한 항의가 잇따랐다. 주간근무자가 출근할 때가 다 되어서야 사무국장이 조업중지 결정을 내렸다. 위원장은 묵묵부답인 상태에서 할 수 없이 사무국장이 지침을 내린 것이었다. 그러나 그 결정은 의미가 없었다. 이미 조업은 중지되어 있었던 것이다. 주간조가 출근하기 시작하면서 노동자의 숫자는 훨씬 많이 불어나 정문을 중심으로 도로를 점거하고 경찰과 계속 투석전을 벌이며 싸우고 있었다. 회사 앞 도로가 희뿌연 최루가스와 깨진 보도블록으로 엉망이 되어 있었다. 경찰이 회사 안으로 최루탄을 쏘면서 허물어진 회사 담의 일그러진 모습이 격렬한 상황을 웅변해주고 있었다. 해가 중천에 이르러서야 중앙대책위원회가 소집되어 조합원들을 회사 안으로 철수한다는 결정을 내리고 조합원들을 회사 안으로 철수시켰다. 그러나 경찰과 격렬히 싸우던 상당수의 조합원들은 이를 거부하고 계속 도로에서 싸웠다. 집행부의 통제력은 상황이 벌어진 순간부터 존재하지 않았다. 반가량 회사 안으로 들어오던 노동자들도 일시에 대열을 잃어버리고 밖의 상황으로 빨려들어 갔다. 이제 노조 집행부는 통제력을 완전히 잃어버린 것이다. 투쟁은 오후 내내 계속되었다. 일단의 전경들은 노동자 시위대에 포위당한 채 무장해제 당하고 방패, 철모 등은 모두 불태워졌다. 최루탄차와 페퍼포그차 등이 화염에 휩싸였다. 백골단에 쫓기던 노동자들이 부상당하고 정문 앞 신호등은 화염병에 맞아 오래도록 불타고 있었다.[4] 새벽 4시, 끝이 보이지 않는 경찰병력이 현대자동차 출고정문 앞을 통과하기 시작했다. … 철야농성을 전개하던 현대자동차 대의원, 선봉대, 야근조 조합원 등이 가세해 2천여 명으로 불어난 대오가 경찰병력을 막아섰다. 이들은 처음에는 야유와 돌 몇 개를 던지다가 경찰들이 최루탄을 쏘기 시작하자 본격적으로 대오를 가로막고 현장의 작업물품인 쇳덩이들을 지게차로 옮겨다가 도로를 차단하기까지 했다. 당황한 경찰병력은 최루탄과 지랄탄을 무차별로 발사했다. 최루탄 소리에 숙소에서 잠들어 있던 현대자동차 노동자들이 달려와 가세하면서 후미의 경찰차 30여 대가 완전히 무장해제 당했고, 이로써 육·해·공 입체작전으로 현대중공업 노동자들을 도망갈 구멍 없이 완전 봉쇄하려던 경찰측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공권력 투입도 한 시간 이상 지체됨으로써 불충분한 포위망을 돌파하고 조합원들이 안전하게 퇴각할 수 있었던 것이다. … 경찰의 새벽진압 작전을 두 시간 연기시키며 치열하게 싸웠던 현대자동차는 아침 출근시간이 되면서 자연스럽게 파업으로 이어졌고 전체 노동자가 투쟁에 동참하기 시작했다. 1만여 명의 가두투쟁 대오가 형성되어 현대자동차 앞 도로를 3~4km 점거한 채 경찰병력을 포위해 들어갔다. 워낙 대규모 인원인지라 한쪽에서는 싸우고, 한쪽에서는 구호를 외치며, 또 한쪽에서는 약식 집회가 열렸다. 10시 30분경 앞 대오가 150여 명의 전경을 무장해제 시키고 현대자동차 앞 주택가까지 무차별 최루탄을 쏘아대던 페퍼포그를 불태웠다.[5] ◎ 전노협 5월 총파업 현대중공업노조의 골리앗 파업과 현대자동차 노동자들의 4·28 연대투쟁은 전국적인 연대파업 열기에 불을 붙였다. 4월 28일 … 현대중공업 공권력 진압 소식에 분노한 ㈜통일과 대림자동차 등 마창투본 노조들은 중식시간에 일제히 규탄대회를 열고 퇴근 후 경남대에서 약 3천여 명이 모여 집회를 가진 후 교문 밖으로 진출하여 노동부 마산지방사무소 내부를 불태우고, 유리창을 모두 깨버렸다.[6] 서울에서는 4월 29일 경찰의 폭력적 원천봉쇄를 뚫고 ‘현대중공업 경찰폭력난입 규탄과 세계노동절 쟁취를 위한 수도권 노동자 결의대회’가 열렸다. 집회가 끝난 후 참석자들은 청량리, 신촌, 영등포, 종로 등지에서 격렬한 가두투쟁을 전개, 현대중공업노조 투쟁에 대한 전국 노동자의 지지연대를 과시했다. 또한 같은 날 부산(부산대)과 대구(경북대)에서도 노동자와 학생 1~2천 명이 현대중공업노조 연대투쟁을 전개하였다.[7] 4월 29일 … 오후 2시 53분경 종로3가 피카디리 극장 앞에서 기습적인 가두시위를 시작으로 약 5~6천 명이 노동부사무소 앞 종로대로를 완전히 점거하고 ‘해체! 민자당, 사수! 전노협, 퇴진! 노태우’를 외치며 시위를 계속했다. 피카디리 앞에서 경찰차 3대를 화염병으로 공격해 전소시킨 시위대는 단성사 옆 파출소 1층을 불태웠으며, 노동부사무소 간판도 화염병에 맞아 불타올랐다. 약 30분간 피카디리 앞 사거리를 완전히 장악했던 시위대는 백골단에 의해 … 세운상가 쪽으로 밀려났다. … 밀려가던 시위대는 동대문 앞에서 2차 가두집회를 6천여 명이 참가한 가운데 열고 백골단과 공방전을 주고받으며 골목골목에서 가두시위를 계속했다.[8] 울산에서는 현대중공업과 현대자동차 외에도 현대중장비, 현대종합목재, 현대정공이 28일부터 동맹파업에 들어간 가운데, 가두투쟁이 매일 전개됐다. 4월 29일부터 매일 부서별로 출근체크를 마친 노동자들은 다시 부서별로 나뉘어 동구 전역에서 치열한 가투를 전개했다. 가투가 시작되기 전 동구 일대의 작은 골목마다 가족들이 합동으로 쓰레기를 모은 바리케이드를 설치하고, 최루탄을 씻어낼 고무호스를 준비했다. 특히 128일 파업의 경험을 살려 가족 스스로가 팀을 짜 물품보급조, 구급조를 편성, 조직적으로 투쟁에 동참했다. 29일 현대중장비 앞에서는 최루탄이 다 떨어진 전경들이 시위대열에 밀려 현대중장비로 쫓겨 갔다가 점심도 못 먹고 하루 종일 갇혀 있기도 했다. 중학생들로 꾸려진 가투부대가 나타났고, 유치원에 다니는 아이들까지 돌을 나르고 있었다. 비록 끊임없이 밀리고는 있었지만 전선이 여기저기에서 형성되어 쫓고 쫓기는 투쟁이 쉴 새 없이 계속되고 있었던 것이다.[9] 이런 상황에서 29일 전노협이 비상 중앙위원회를 열고 “전체 노동자의 생존권 수호와 노조활동의 자유를 위해” 5월 1일부터 전국 총파업에 돌입하기로 결정했다. 총파업의 요구는 크게 전노협 사수, 노동운동탄압 분쇄, 구속자 석방 등을 포함한 노동운동탄압 중지 요구와 민자당 해체, 노태우정권 퇴진 등의 정치적 요구, 그리고 물가폭등, 집값·전세값 안정 등 경제개혁 관련 요구들로 이루어졌다. 5월 1일, 전국 59개 노조 12만여 노동자가 총파업에 돌입했다. 한국전쟁 이후 최초의 전국 총파업이었다. 서울지하철노조는 무임승차를 실시했고, MBC노조는 KBS 공권력 투입에 항의하며 연대 제작거부에 나섰다. 5월 1일에는 현대자동차노조가 효문로타리와 염포검문소 등 2개 방향으로 평화대행진을 벌였고, 현대중공업노조도 조합원 참여율이 95%에 육박하는 투쟁을 전개했다. 그리하여 오후 3시에는 만세대 민주광장을 전경들 손에서 완전히 탈환해 오후 5시 노동절 기념집회를 갖기도 했다. 현대종합목재, 현대정공노조 등도 1,500~2,000여 명씩 참여하는 대규모 가두시위를 계속했다.[10] 4월 30일, 전노협에서 선포한 총파업 투쟁을 불과 몇 시간 앞두고 정부는 투쟁의 확산을 차단하기 위해 마침내 KBS에 공권력을 투입했다. 이날 밤 11시 15분경 이종국 서울시경 국장의 진두지휘에 따라 19개 중대 3천여 명의 병력을 동원 본관에 진입해 농성 중이던 333명의 조합원들을 강제연행했다. … KBS에 대한 제2차 경찰투입 직후 MBC노조는 비대위의 결의에 따라 5월 1일 10시 사원 비상총회를 열고 전면 제작거부에 돌입했다. … 19개 지방 MBC도 비대위의 결의에 따라 이날 오전부터 비상총회를 개최하고 제작거부에 돌입, 전국 MBC가 일사불란하게 연대 제작거부에 참여했다. 한편 4월 23일부터 무기한 철야농성을 벌여왔던 CBS노조도 같은 날 MBC노조와 동시에 제작거부에 돌입, 정규방송을 중단하고 음악만을 내보내기 시작했다.[11] 부처님 오신 날로 휴일인 2일을 건너뛰고 3일 총파업이 재개돼 전국 104개 노조 10만여 노동자가 파업에 나섰다. 4일에는 전국 149개 노조 12만여 노동자가 총파업에 참여해 최대 규모를 기록했다. 당시 전노협은 정권의 집중탄압 대상이 되었고, ‘전노협 사수’는 전노협만의 문제가 아닌 정권과 전 민중이 대결하는 투쟁전선이었다. 전노협 소속 사업장들은 탄압을 각오하고 3일간 312개 노조 (연 인원) 34만 명이 참여하는 파업 투쟁을 벌였다.[12] 전국 총파업 투쟁에서 일반 국민의 묵시적 동의, 지지를 확보할 수 있었던 요인은 무엇인가? 물론 그 첫째는 투쟁의 정당성을 그 어느 누구도 부정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현대중공업 2만여 명의 노동자는 부당하게 구속된 동지의 석방을 요구하며 투쟁을 전개했고, 전노협은 경찰의 폭력진압에 맞서 총파업 투쟁을 전개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이 전부는 아니었다. 노태우 정권의 언론장악 음모에 맞서 전개된 KBS 방송민주화 투쟁이 일반 국민의 묵시적 동의를 불러일으킬 수 있었던 커다란 요인이었음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KBS의 방송민주화 투쟁을 폭력으로 진압한 데 대한 대중적 반발이, 이른바 중산층까지도 5월 총파업을 지지하게 되는 주요한 계기가 되었다. 또한 민자당 출범 이후 일반 국민 사이에 팽배해진 실망감과 민자당 내부의 파벌싸움에 대한 염증도 노동자투쟁을 지지하는 데 커다란 역할을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중요한 요인은 전·월세값 폭등과 물가폭등에 의해 날로 가중되는 일반 국민들의 생활난이었다.[13] 갑자기 치솟은 총파업에, 자본가계급은 당황했다. 예측 불가능한 상황으로 빠져들지 않으려면, 민주노조운동과 전노협을 일단 현실적 실체로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총파업을 해체시키기 위해 인천지역 민주노조들에겐 요구안 100%를 수용한 제시안이 일시에 쏟아지기도 했다. 총파업 이후 노동운동 탄압의 기세는 잠시나마 눈에 띄게 약화됐다. 5월 총파업 투쟁으로 교착상태에 빠져 있던 임금인상·단체협약갱신 투쟁을 승리로 이끌 수 있는 유리한 돌파구가 마련되기 시작했다. 5월 총파업 투쟁의 와중에서 자본가들의 담합이 하나둘 무너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총파업 투쟁을 전개하며 가두로 진출하는 노동자들을 붙잡고 “제발 지금 당장이라도 교섭하자”면서 교섭을 애걸하는 자본가들이 하나둘 눈에 띄기 시작했고, 자기 사업장에도 총파업 투쟁의 물결이 밀려올 것을 우려한 자본가들이 노동조합의 요구를 거의 100% 받아들이는 선에서 서둘러 교섭을 타결짓는 모습 또한 곳곳에서 눈에 띄기 시작했다. 인천 지역에서는 총파업 투쟁을 전개했던 5월 4일 하루 동안 남일금속 1,800원, 경일화학 1,700원, 동신공업 1,800원 등 최초의 요구를 거의 100% 관철시키는 선에서 임금인상 투쟁을 마무리 짓기도 했다. … 5월 총파업 투쟁을 통해 자신감을 회복하고 투쟁의지를 강화한 것은 단지 우리 노동조합운동만이 아니었다. 전체 민족민주운동이 빠른 속도로 자신감을 회복했고, 투쟁의지를 강화했다. 그 결과 5월 9일에는 많은 학생과 시민이 운집하여 6월 항쟁 이후 최대의 가두집회와 가두시위를 조직해 내기에 이르렀다. 이로써 그동안의 탄압 일변도의 정세는 다소 유화되었고, 학생을 비롯한 제 민중들의 대중투쟁도 활성화되기 시작했다.[14] 총파업을 통해 노동자들은 전노협 사수를 둘러싼 계급투쟁에서 결정적 승기를 잡을 수 있었다. 1980년 광주민중항쟁 패배 이후 1981~82년 전두환 신군부에게 몰살당했던 민주노조는 불과 10년 만에 통쾌한 반격을 조직해 내면서 스스로의 힘으로 시민권을 확고히 구축했다. 이제 정권이 물리적 탄압을 퍼붓는다 해도 민주노조운동의 전국적 결집체가 쉽사리 무너지지 않을 수준까지 노동자가 올라섰음을 만천하에 선포하는 역사적 사건이었다. 그렇게 해서 전노협이 지켜졌고, 그 연장선에서 1995년 민주노총도 건설될 수 있었다. 계급적 연대투쟁으로 다부지게 전진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자주적이고 민주적인 노동조합운동의 성장과 발전은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정부와 자본가들의 집중공격으로 많은 노동조합이 무력화되기도 했으며, 노동운동가들이 구속, 수배되기도 했다. 이러한 탄압에 맞서 민주노조 진영은 노동조합을 지키고 노동자의 생활과 권리를 지키기 위해 1987년 말 마창노련을 시작으로 지역별·업종별 협의회를 속속 건설, 이를 토대로 공동투쟁과 공동활동을 강화하여 기업별 노조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노력을 끊임없이 기울였다. 그리고 지역과 업종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1990년 1월 22일 전국노동조합협의회를 결성하였으며, 전노협은 출범한지 불과 100여 일만에 5월 전국 총파업 투쟁의 주체로 나서게 되었던 것이다. 전국 총파업 투쟁은 민주노조의 상징이자 투쟁구심인 현대중공업 노동자들의 강고한 투쟁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또한 전노협 중앙위원회에서 총파업을 선언하기 전에 이미 현총련과 마창노련, 서노협에 의해 현대중공업 공권력 투입 시 연대파업에 돌입하겠다는 사전 결의가 있었기에 총파업이 가능했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 투쟁들을 전국 총파업 투쟁으로 발전시켜 낼 수 있었던 것은 전노협이라는 전국 조직이 있었기에 가능했음은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 100여 년에 걸친 우리나라 노동운동사 속에서 전국적 총파업은 해방 직후인 1946년 9월 총파업과 1947년의 3월 총파업 이외에는 아예 존재하지 않았다. 무려 40여 년 만에 다시 전국적 총파업 투쟁의 기치를 높이 들었고, 결국 성공적으로 수행해 냈다. 이것은 길게는 1950년 이후, 짧게는 1987년 7월, 8월, 9월 투쟁 이후 수많은 선배, 동지들이 온갖 탄압 속에서도 굽히지 않고 싸워 온 투쟁의 산물이며, 자주적이고 민주적인 노동조합운동의 성장, 발전의 결과물이기도 한 것이었다. … 우리 노동조합운동은 1980년대 초반의 극심한 탄압을 뚫어내고 마침내 7월, 8월, 9월 노동자대투쟁을 맞이할 수 있었으며, 그 이후 꾸준히 성장, 강화되어 이제는 어떠한 탄압이 있다 해도 과거 1980년대 초반처럼 자주적이고 민주적인 노동조합운동의 싹까지 말살당하지 않을 정도의 충분한 역량을 갖춰 왔다. … 1990년 5월 총파업 투쟁은 “탄압은 더욱 강력한 투쟁을 예고할 뿐이다”라는 역사적 진실과 수많은 선배 노동자들이 200여 년에 걸친 투쟁 속에서 체득해 온 경험적 진실을 재확인시켜 주었다. … 5월 전국 총파업 투쟁을 통해 우리는 비약적인 노동자 의식의 성장과 강화를 경험하기도 했다. 현대중공업노조의 파업투쟁에 대한 경찰의 폭력적 진압에 항의하여 지역과 산업의 울타리를 뛰어넘어 … 동일한 요구를 내걸고 전국적 총파업 투쟁을 전개해 나가는 속에서 우리는 ‘노동자는 하나’라는 강한 연대의식을 온몸으로 체험했다. 나아가 이번 투쟁의 성격이 정권의 노동운동 탄압에 맞선 ‘노동자의 항쟁’이었다는 점에서, 그리고 ‘노동운동 탄압하는 민자당정권 타도하자’라는 구호가 전국의 사업장과 거리 곳곳에서 울려 퍼졌다는 점에서, ‘노동해방! 인간해방!’이라는 노동운동의 궁극적 과제를 달성하기 위해 앞으로 해야 할 일과 싸워야 할 상대를 뚜렷하게 깨닫게 되었다.[15] ◎ 골리앗 파업의 마무리 현대중공업 골리앗 파업은 전노협의 5월 총파업을 촉발했지만, 총파업이 끝난 뒤 홀로 남겨졌다. 특히 울산지역 연대투쟁의 주축이었던 현대자동차노조가 5월 3일 ‘7일부터 정상조업’ 방침을 결정하면서 연대투쟁의 흐름이 결정적으로 약화됐다. 연대투쟁에 적극 나섰던 현대종합목재, 현대정공 노동자들의 참여도 현대자동차노조의 연대파업이 중단되면서 급격히 줄어들었다. 5월 3일 {현대자동차노조} 중앙대책위원회 회의에서는 5월 4일로 시한부파업을 종료하고 단협, 임투로 총매진하기로 결정했다. 대책위원들의 의견이 팽팽히 맞섰으나 이상범 위원장이 전술 변경을 결정함으로써 11:12로 임단협 투쟁으로 전환하기로 결정했다. 다음날 본관 앞 잔디밭에서 열린 조합원 비상총회에서 5월 7일부터 정상조업 하겠다고 발표했다. 이상범 위원장은 “단협과 임투를 무기한 연기할 수 없다. 5월 5~6일 휴무로 투쟁열기가 저하될 수 있으므로 투쟁목표를 재정립해야 할 시점이며, 중공업 사태가 장기화 조짐을 보이므로 현대자동차도 장기투쟁 전술로 전환”한다는 생각으로 ‘노동조합의 장래’를 위한 결정을 내렸다. … 그러나 노조의 결정과 무관하게 민실노를 중심으로 한 현장조직이 주도하여 ‘현대자동차비상대책투쟁위원회’를 구성하고 현장 파업을 계속해 나갔다. 민실노는 전국 총파업 상황이 아직 사그라진 것이 아니며, 5월 9일 민자당 창당일에 맞춰 대규모 투쟁이 준비되고 있는 마당에 현자노조에서 깃발을 내린다면 투쟁전선에 찬물을 끼얹는 것이라 보았다.[16] 울산지역 연대투쟁이 위축돼 가던 5일과 6일, 그러나 울산 동구에는 전국 각지에서 소중한 연대대오가 와서 가두투쟁에 동참했다. 전노협 선봉대였다. 1990년 4월 29일의 비상중앙위원회에서 결의한 ‘전노협 선봉대를 울산에 무제한 파견하겠다’는 방침과 함께 현대중공업노조에서도 전노협에 선봉대를 파견해 줄 것을 공식 요청했다. 즉, 현대중공업노조는 “인원수는 상관없다. 전노협에서 선봉대를 파견하여 울산의 조합원들이 전노협을 피부로 느낄 수 있도록 해달라”는 요청을 해왔던 것이다. 이에 ‘전노협 선봉대 울산파견 지침’을 곧바로 결정했다. … 전노협 선봉대는 총 6개 지역에서 114명이 파견되었다. 그러나 각 지노협에서 파견한 선봉대 외에 공개모집에 참가한 학생들을 포함하면 대략 200여 명가량이었다. 파견된 전노협 선봉대는 5월 5일에 이어 5월 6일 사천세대에서 전노협 깃발을 들고 투쟁을 전개했다. 특히 이들은 현대중공업 경찰 봉쇄선을 물리력으로 뚫고 전노협 깃발을 휘날림으로써 골리앗 농성자들에게 깊은 감명을 주었으며, “역시 전노협”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이러한 전노협 선봉대의 투쟁은 이후 울산 지역에서 전노협의 살아있는 연대정신의 표본으로 기록되었다. 다음은 전노협 선봉대가 울산 사천세대 앞에서 배포한 「골리앗은 결코 외로운 늑대가 아니다」라는 투쟁유인물의 일부이다. “오늘 이 자리에서 동지들과 함께 투쟁하고자 전국 각지에서 모여든 전노협 선봉대원들은 각 지역 노동자들의 투쟁의지를 모아 힘차게 투쟁할 것이며, 이후 각 지역으로 투쟁의 불씨를 안고 돌아가 오는 9일 민자당 창당일에 전 민중과 함께 투쟁의 불길을 지펴 올릴 것이다. 그리하여 마침내 천만 노동자는 전노협의 기치 아래 굳건히 서고 노동해방을 향해 진군해 나갈 것이다.”[17] 9일 ‘민자당 해체, 노태우 퇴진 촉구 국민궐기대회’가 전국 곳곳에서 10만여 명이 참여한 가운데 열렸다. 1987년 6월 항쟁 이후 최대 규모의 가두투쟁이었다. 이날 대회에서는 ‘골리앗 투쟁 계승하여 노동운동탄압 분쇄하고 민자당을 박살내자!’, ‘민주압살 민중탄압 민자당을 해체하라!’, ‘물가폭등 집값폭등 노태우 정권 퇴진하라!’ 같은 구호들이 널리 외쳐졌다. 10일 오후 2시, 51명의 ‘외로운 늑대’ 골리앗 대원들이 82미터 골리앗 크레인의 계단을 타고 한 명씩 내려왔다. 파업과 가두투쟁이 모두 중단된 상황에서 골리앗 농성만을 더 지속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골리앗에서 내려왔다. 14일 만에 자기 아이도 아버지를 몰라보고 아버지가 아니라며 울 정도의 처참한 몰골로 골리앗을 내려오던 날, 엔진부의 최성국 동지는 계단을 부여잡고 주저앉아 죽어도 못 내려간다고 마침내 울음을 터뜨렸다. 참고 참았던 우리도 울었다. 차라리 산소통을 끌어안고 죽자는 생각이 치밀어 올랐다. 그때 내 머리를 스친 것은 내려오기 직전에 보았던 미포만의 일출이었다. 바다가 마치 태양을 가슴에 품은 것처럼 발그스레 물들고 나서도 한참이 지나야 비로소 태양은 뜬다. 지금 노동해방의 저 드넓은 바다에 미명이 돋기 시작하는데 곧바로 태양이 뜨지 않는다고 절망할 수야 없지 않은가. 골리앗 위에서 나는 하루에도 몇 번씩 바다를 보았고 하늘을 보았다. 야외 작업을 많이 하는 부서에 있으면서도 정작 눈앞의 바다를 눈으로라도 즐긴 기억이 별로 없었다. 바다를 보면 골리앗 크레인 작업 중에 떨어져 죽은 내 친구가, 또 이름은 모르지만 수많은 나와 같은 노동자들의 얼굴이 눈앞에 떠올랐다. 그리고 우리가 골리앗에 있는 동안 또 하나의 불길로 타오른 이영일 열사의 남긴 말이 떠올랐다. “어머니. 세상은 왜 우리를 조용히 살게 내버려두지 않습니까?” 그렇다! 우리 노동자들 가슴에는 세상이 만들어준 응어리가 있다. 용암처럼 터져 나올 분노가 끝도 보이지 않게 잠겨 있다. 골리앗의 외로운 늑대라고 불리며 전국의 관심을 집중시켰던 우리들은 주변의 어떤 노동자와도 다를 바 없이 자라고 살아왔다. 집안은 가난했고 자기 인생을 마음대로 설계하고 의지대로 만들어갈 어떤 기회도 주어지지 않았다. 우리는 노동자가 될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우리는 단 하나뿐인 삶을 사랑한다. 우리도 일한 만큼 얻고, 이웃을 사랑하고, 착한 자식, 좋은 남편, 훌륭한 아빠이고 싶다. 무엇이 그것을 가로막는가! 단 하나뿐인 우리의 삶을 피투성이로 만드는가! 나는 골리앗 위에서 그것을 명확하게 깨달았다. 우리를 착취했던 그 거대한 착취도구 골리앗 위에 서서 우리를 바라보는 전국의 수많은 노동자, 자본가, 노태우 정권을 보면서 나는 드디어 알아차렸다. 천만 노동자의 삶을 움켜쥔 자본가와 그들의 하수인인 국가권력을 타도하기 전에 우리 노동자의 삶은 결코 풍부하고 아름다워질 수 없다는 것! 뭔가 막연하게 뒤엎어지기를 바라며 골리앗에 올라갔던 나는 목이 터져라 외치면서도 무슨 말인지 잘 몰랐던 ‘노동해방!’의 깃발을, 그 붉은 깃발을 확실히 움켜쥐고 내려왔다. 물론 우리는 패배했다. 인정한다. 그러나 아직 미포만에 태양은 뜨지 않았다. 최초의 정치투쟁의 깃발을 치켜 올리고도 우리가 끝내 골리앗을 울면서 내려올 수밖에 없었던 것이 바로 울산 노동해방투쟁의 현주소이다. 우리 노동자는 백무산 동지의 시처럼 여기까지 왔으나 아직 여기까지밖에 오지 못했다. 우리는 일단 평가부터 하려고 한다. 작년보다 더 높이 서서 올해 우리가 달려온 지점이 어딘지, 더 높은 곳으로 가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그리고 새로운 일을 찾겠다. 어둠을 뚫고 솟구치는 저 드넓은 노동해방의 바다로 거침없이 달려가겠다. 감히 전국의 노동해방을 위해 싸우는 동지들에게 약속드린다. 다음에 우리는 분명히 더 높은 곳에 서 있을 것이다. 저 미포만에 붉은 태양이 바다 위로 솟구쳐서 허리 잘린 이 땅, 사천만 민중이 온통 그 붉은 햇살에 적실 때까지 나는, 우리 현대 노동자는 거침없이 달려갈 것이다. 동지들! 전국에서 우리 골리앗 투쟁을 이어 달라! 민자당 타도! 노태우 타도를 외치며 영웅적으로 투쟁했던 우리 현대 노동자의 투쟁을 이어 달라! 이번 파업투쟁 때 물결쳤던 노래가사처럼 우리가 저 자본가들의 국회를, 권력을 장악해야 하지 않는가![18] 한국전쟁 이후 처음으로 전국 총파업을 실현시킨 노동자들은 1990년에 많은 성과를 이루었다. 특히 하반기에 대우조선, 포항제철, 만도기계, 대림통상, 아시아자동차 등 다수의 대기업 노조에서 새롭게 민주 집행부가 건설됐다. 전노협에 소속돼 있던 기존 대기업 노조들과 새롭게 민주집행부를 구축하게 된 대기업 노조들 16개가 모여 12월 9일 ‘연대를 위한 대기업 노조회의’(대기업 연대회의)를 출범시켰다.[19] 전노협과 대공장 노조가 실질적인 연대를 발전시켜 가기 위한 모색이었다. 또한 1990년 11월 전국노동자대회를 전노협과 업종회의가 공동으로 치르면서 민주노조 총단결로 나아가는 발판을 마련했다. 3) 1991년 5월 민중투쟁과 박창수 열사 투쟁 1991년 경기침체와 물가폭등으로 노동자·민중의 생활고가 가중된 반면, 재벌들은 독점지배력을 더욱 강화하고 있었다. 또한 땅값 폭등으로 대토지소유자들이 엄청난 불로소득을 챙겼다. 1990년 전체 노동자들의 임금인상 총액이 9조 1천억 원인데, 땅값인상 총액은 50조 7천억 원으로 다섯 배에 달했다. 한편 3당 합당으로 안정적 기반을 확보한 노태우 정권은 1990년 12월 27일 대통령 비서실장을 역임한 강경우파 노재봉을 총리로 임명해 내각제 개헌 등을 통한 정권 재창출을 목표로 학생운동과 노동운동을 강도 높게 탄압하며 공안정국을 조성했다. 이런 상황에서 2월 22일 수서주택지구 개발비리 사건이 터지면서 노동자·민중의 분노가 폭발 지경에 이르렀다. 한보그룹이 정부에게서 받은 기업정상화 자금 418억 원을 수서주택지구 개발에 투입해 427억 원이라는 엄청난 이득을 챙겼으며, 이를 위해 광범한 정치권 인사들에게 로비자금을 살포한 사실이 드러났다. 그러던 4월 26일, 집회 후 교문으로 진출하던 명지대생 강경대가 백골단이 휘두른 곤봉에 맞아 사망했다. 강경대의 비통한 죽음은 노태우 정권의 살인적인 공안 통치에 대한 분노와 더불어 1987년 이후의 부분적인 민주화조차 되돌려질 수 있다는 위기감을 고조시켰다. ‘공안통치 종식’과 ‘노태우 정권 퇴진’을 요구하는 대규모의 대중투쟁이 전개되는 것과 함께 학생과 노동자 11명의 분신이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20] 27일 제 민주단체들이 ‘고 강경대 열사 폭력살인 규탄 및 공안통치 종식을 위한 범국민대책회의’(범국민대책회의)를 구성했다. 29일 연세대에서 열린 ‘국민 결의대회’에는 7만여 명의 군중이 운집했다. 5월 1일, 전노협이 주도하는 ‘임금인상과 물가폭등 저지 및 노동기본권 수호를 위한 전국 노동조합 공동투쟁본부’(전국투본) 산하 188개 노조 9만 5,663명이 전면 휴무에 돌입했다. 세계노동절 기념대회에는 수도권 3만 명 등 전국 6만여 명의 노동자들이 참가했다. 4일 ‘백골단·전경 해체 및 공안통치 종식을 위한 범국민 결의대회’가 열렸는데, 전국에서 20만 명이 참가하여 반민자당 투쟁이 절정을 향해 치달았다. 그런데 6일 전노협 중앙위원이자 부산 한진중공업노조 위원장이던 박창수가 안양병원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박창수는 2월 9~10일 대기업 연대회의 수련회를 경찰이 폭력침탈했을 때 다른 6명과 함께 구속된 뒤 안기부의 집요한 전노협 탈퇴 공작에 시달리고 있었다. 4일 ‘운동시간에 부상을 입어 안양병원으로 후송됐다’는 연락을 받고 가족이 달려갔을 때 박창수는 이마 34바늘을 꿰맨 뒤 중환자실에 누워 있었다. 그런데 6일 새벽 5시경 병원 건물 뒤쪽 어린이놀이터 시멘트 바닥에서 숨진 채 발견된 것이었다. 정황상 안기부에 의한 타살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 그러나 검찰은 7일 백골단을 투입해 영안실 벽을 부수고 시신을 탈취하여 강제부검을 실시한 뒤 투신자살로 몰고 갔다. “7층에서 떨어졌다 하면 온몸에 상처가 다 났을 겁니다. 그런데 외상이라는 건 하나도 없고. 슬리퍼는 얇은 거. 그것이 떨어졌다면 사방으로 다 퍼졌을 겁니다. 근데 고거 한 1m 간격밖에 없는 거예요. 도저히 이것은 자살로 몬다는 건 우리는 조금도 용납 못해요.”(부친) … “내 아들은 자살이 아니고 요놈들이 죽여서 해 놓은 거니까 이걸 절대적으로 밝혀야 되고예. 밝혀야 우리 아들도 눈 감고 가고, 우리 아들이 눈을 못 감고 있습니다. 지금예.”(모친)[21] 노동운동 진영은 박창수 위원장의 죽음을 ‘노동운동 탄압의 집약적 표현’이라고 규정했다. 6일 한진중공업노조, 전노협, 대기업 연대회의, 업종회의, 전국노운협, 전국노련의 6개 노동단체가 ‘고 박창수 위원장 옥중살인 규탄 및 노동운동탄압분쇄를 위한 전국노동자대책위원회’(전국노대위)를 구성하였다. 한진중공업노조가 소속된 부산노련을 시작으로 6일부터 각 지노협들이 농성 투쟁에 들어갔다. 9일 전국 87개 도시에서 50만 명의 시민과 노동자들이 길거리를 메우고 ‘해체 민자당, 퇴진 노태우’를 외치며 노태우 정권 출범 이후 최대 규모의 반정부 시위를 벌였다. 서울, 부산, 광주 등 대도시에서는 수만 명의 노동자, 학생, 재야단체 등이 조직대오를 갖춰 도심을 완전 점령하고 최루탄과 물대포로 맞서는 경찰을 포위, 곳곳에서 무장해제시키며 밤늦게까지 투쟁을 벌였다. 이날 전노협이 주도하는 전국투본은 ‘고 박창수 위원장 옥중살해 규탄, 폭력통치 종식, 노태우 정권 퇴진’을 내걸고 총파업에 돌입했다. 이 총파업에는 98개 노조 4만 8천 노동자가 참여했는데, 오후 3시 30분부터 2시간 파업을 단행하고 총회를 연 뒤 집단적으로 범국민 결의대회에 참가하는 형태로 진행됐다. 또한 360개 노조 18만 노동자가 중식집회, 잔업거부, 동시퇴근 형태로 투쟁에 동참했다. 9일을 기점으로 노동자들이 투쟁의 전면에 나서게 되자, 그동안 학생들이 중심일 때 ‘백골단 해체, 노재봉 내각 사퇴’에 머물렀던 투쟁 요구가 ‘노태우 퇴진’으로 발전했다. 또한 사안별 대책기구로서의 범국민대책회의가 투쟁의 전국적·조직적 구심으로 강화되기 시작했다. 강경대 열사 장례 전후로 전개된 5, 6월 투쟁은 각 부문의 투쟁을 하나의 흐름으로 모아내면서 지역적, 전국적 공동투쟁을 통해 민족민주운동 진영에게는 모처럼 맞은 귀중한 정치적 공세기이기도 했다. 그중에서도 옥중에서 억울하게 살해당한 박창수 한진중공업 위원장의 의문사로 인해 전국 노동자들은 조직적으로 정치적 파업투쟁을 전개하여 새로운 역사의 장을 열어젖혔다. 5월 한 달 집회와 가투는 평균 5일마다 한 번씩 전개되었으며, 마창지역에서는 5월 9일 1989년 이후 최대 규모인 1만 5천여 명이 모여 반민자당 투쟁을 광범위하게 벌였다.[22] 5월 9일 울산에서도 ‘살인정권 민자당 1년 학정 심판 및 백골단 해체, 공안내각 총사퇴를 위한 울산시민 궐기대회’가 열렸다. 정공에서는 1공장에서 400여 명이 출정식을 마친 후 도보로 KBS방송국 앞을 지나 고수부지로 향했고, 2공장 인원 700여 명은 현대자동차 5,000여 명과 합류하여 학성공원을 거쳐 고수부지에 도착해 1만 5천 명의 울산시민들로부터 열렬한 박수를 받았다.[23] 서울에서는 구로공단의 9개 노조가 파업에 돌입하고 오후 2시 가리봉역에서 800여 명의 노동자가 가두집회를 갖고 시청 앞 국민대회에 참가하였다.[24] 11일에는 전국 14개 도시에서 5만여 노동자가 참여한 가운데 ‘박창수 위원장 옥중살인 규탄 및 노태우정권 퇴진 결의대회’를 개최했다. 서울지역의 노동자들은 건국대에서 3천여 명이 모인 가운데 집회를 개최하고 6시 30분경부터 종로·을지로·명동 일대에서 격렬한 가두투쟁을 전개했다. ‘천만 노동자 총단결로 폭력정권 살인정권 노태우 정권 타도하자!’, ‘해체 백골단! 타도 노태우!’, ‘전 민중의 연대투쟁, 타도 노태우!’ 같은 구호들이 외쳐졌다. 15일 전국투본은 업종회의, 대기업 연대회의와 함께 ‘고 박창수 위원장 옥중살인 규탄 및 폭력통치 종식을 위한 전국노동조합 비상대표자회의’를 열어 18일 총파업을 결의했다. 이날 현주억 전노협 위원장 직무대행은 ‘전국 노동조합 대표자들에게 드리는 긴급 제안서’를 통해 “4천만 국민이 퇴진을 요구하며 싸우고 있는데도 노태우 정권은 반동적인 탄압을 계속하고 있다”면서 “이 시점에서 노동자들이 투쟁의 중심에 서지 않는다면 현재 노태우 정권이 부딪히고 있는 위기는 곧바로 노동운동을 비롯한 민중운동 진영의 위기로 돌아올 것”이라며 노동자들의 총파업을 호소했다. 비상대표자회의에 참여한 350여 개 사업장 5백여 명의 대표자 및 간부들은 “노태우를 몰아내는 것만이 노동자가 갈 길”이라며 우레와 같은 박수로 18일 총파업 제안을 통과시키고 각 지역과 단위사업장별로 총파업의 결의를 밝혔다. 18일 ‘고 박창수 위원장 옥중살인 규탄 및 폭력통치 종식을 위한 전국노동조합 총력투쟁’이란 이름 아래 전개된 총파업에는 156개 노조 9만 1천 400명의 노동자가 참여했다. 파업에 돌입하지 못한 많은 노조들도 중식시간 집회 또는 잔업거부 후 동시 퇴근 형태로 총력투쟁에 나섰다. 이날 총파업 총력투쟁에 1,250개 노조 39만 명(전국공투본 산하 450개 노조 21만 명, 업종회의 800개 노조 18만 명)이 동참했다. 노동자들은 단위노조별로 가두행진을 벌여 ‘광주항쟁 계승 및 폭력살인, 민생파탄 노태우정권 퇴진 제2차 국민대회’에 조직적으로 참가했다. 강경대 열사의 장례식이자 광주 민중항쟁 11돌인 5월 18일, 현대자동차에서는 하루 휴무조치를 내렸으며 정공과 중공업에서는 점심시간에 규탄집회를 가진 뒤 성내삼거리에 모여 대회장소인 태화강 고수부지 쪽으로 거리행진을 벌이다 동천교와 명촌교 입구에서 최루탄을 쏘며 저지하는 경찰에 맞서 돌과 보도블록을 던지며 격렬한 투쟁을 전개하였다.[25] 강경대 학생의 죽음과 박창수 위원장의 의문사를 계기로 폭발한 5월 투쟁은 노동자들의 임금인상 투쟁과 결합하여 그 구호가 ‘노동운동 탄압분쇄’와 ‘노태우정권 타도’로 발전되어 갔다. 5월 투쟁에서의 광범위하고 폭넓은 정치폭로는 조합원들의 정치적 경험과 정치의식을 높여 그동안 갖고 있던 연대투쟁에 대한 회의를 적지 않게 해소하는 계기가 되었다. 당시 5월 투쟁은 주로 시내 중심에서 가두시위로 진행되고 있었다. 이때 구로공단에서는 지역 내 노동조합의 수천 명 노동자들이 5월 14일, 18일 2, 3공단과 가리봉 오거리를 중심으로 가두투쟁을 전개하였다. 페퍼포그와 전경들의 최루탄 공격에 노동자들은 투석전으로 맞섰다. 그야말로 공단 가두투쟁은 지역 내 노동조합 간의 연대의 힘과 필요성을 가르쳐주는 공단 정치학교와 같았다.[26] 강경대 열사의 장례식을 겸한 제2차 국민대회에는 전국적으로 40만 명이 참가했다. ‘시민학생 연대투쟁 노태우정권 타도하자!’, ‘민자당을 박살내자! 애국시민 일어섰다!’, ‘노동자가 앞장서서 노동해방 쟁취하자!’, ‘해체 민자당! 타도 노태우!’, ‘천만 노동자 총단결로 폭력정권 살인정권 노태우정권 타도하자!’ 같은 구호들이 외쳐졌다. 이날 집회를 계기로 범국민대책회의는 명칭을 ‘공안통치 종식과 민주정부 수립을 위한 범국민대책회의’로 바꾸고 10대 투쟁과제를 선포한 뒤 명동성당 농성에 들어갔다. 그러나 투쟁은 하강국면으로 접어들었다. 18일 집회 이후 김대중이 이끄는 평화민주당을 비롯한 보수야당이 제도권 의회정치로의 복귀를 선언하며 전선에서 철수하고, 그 영향을 강하게 받던 학생운동 세력 또한 상당 부분 철수한 때문이었다. 보수야당을 전선에서 이탈시키기 위해 노태우 정권이 던진 미끼는 노재봉 총리 사퇴(23일)를 비롯한 부분 개각과 광역의원 선거 실시였다. 25일 제3차 국민대회가 전국 19개 도시에서 17만 명이 참가한 가운데 진행됐다. 이날 서울대회 진행 도중 경찰의 폭력진압으로 성균관대생 김귀정이 최루탄에 질식해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6월 2일 제4차 국민대회가 서울, 부산, 광주를 중심으로 5만 명이 참가한 가운데 진행됐다. 이날 투쟁은 특히 부산을 중심으로 전개됐다. 6월 2일 부산에서는 부산지역 노동자들뿐만 아니라 마산·창원·울산·대구·구미 등지에서 모여든 노동자들이 부산대 운동장에서 ‘고 박창수 위원장 옥중살해 주범 안기부 해체, 91년 임금인상·단체협약 갱신 투쟁 승리, 노태우정권 타도 전국노동자학생 결의대회’를 가졌다. 대회에 참석한 3만여 명의 노동자와 학생들은 집회를 마친 후 동래구 내성로타리에서 부산진구 하마정까지 ‘박창수 위원장 공작살해 안기부를 해체하라!’, ‘민생파탄 폭력살인 노태우정권 타도하자!’, ‘노동운동 탄압하는 노태우정권 타도하자!’ 등의 구호를 외치며 밤늦게까지 가두투쟁을 전개하였다.[27] 그런데 3일 정원식 국무총리에 대한 밀가루 세례 사건이 외국어대학교에서 발생하면서 정세가 급격히 가라앉았다. 문교부장관 시절 1천 5백여 명의 교사를 해고하는 등 전교조 탄압을 진두지휘했던 정원식이 외국어대학교를 방문하자 대학생들이 밀가루와 달걀 세례를 퍼부었는데, 밀가루와 달걀을 뒤집어 쓴 정원식 총리의 모습이 언론에 대대적으로 보도되면서 학생운동에 대한 여론이 급격히 악화된 것이다. 노태우 정권은 기다렸다는 듯 즉각 범국민대책회의와 전대협, 전노협 등 지도부 80여 명에 대한 사전 구속영장을 발부했다. 또한 대우정밀, 태평양화학, 세원, 동신공업, 제일교통, 파티마병원 등 파업사업장에 잇따라 공권력을 투입했다. 전국의 투쟁 열기는 급속히 냉각됐다. 8일 ‘공안통치 분쇄와 노태우 정권 퇴진을 위한 제5차 국민대회’는 서울 1만 명을 비롯해 인천, 성남, 안양 등 전국적으로 3만 명이 참가했다. 이날 전체적인 참여 인원은 줄었지만, 노동자들의 조직적인 참여는 오히려 두드러졌다. 서울에서 노동자들은 오후 4시 청계6가 홍인상가 앞에서 2,500여 명이 모여 전노협 깃발과 ‘박창수 살해주범 노태우 타도’ 등의 내용을 새긴 현수막을 선두로 동대문운동장, 퇴계로를 거쳐 대한극장 앞까지 가두시위를 벌였다. 노동자들은 이후 동대문 근처에서 시위를 벌이던 학생들과 오후 6시 서울역에서 만나 충정로, 아현동 일대를 휩쓸고 신촌로터리에서 대회 원천봉쇄 규탄대회를 가진 뒤 다시 시내로 진출, 신세계 백화점 앞에서 투쟁을 전개하였다.[28] 29일 ‘6·29선언 파산선고와 노동운동 탄압 규탄 제6차 국민대회’가 전국 주요 도시에서 열렸다. 동시에 29~30일 ‘고 박창수 위원장 전국 노동자장’이 안양과 부산에서 거행됐다. 정세가 가라앉고 노동자들만 전선에 남아 노태우 정권의 빗발치는 탄압을 견뎌내야 하는 상황이었기에, 안타깝게도 박창수 열사 죽음에 대한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에서 뚜렷한 성과를 얻지 못한 채 장례를 치를 수밖에 없었다. 1991년 5월 투쟁은 3당 합당 이후 일방적으로 탄압받던 민중진영이 1987년 6월 이후 최대 규모의 반격을 조직해 내면서 노태우 정권의 전면적 공안통치와 정권 재창출 구상에 파열구를 냈다는 점에서 일정한 성과를 남겼다. 노동자계급이 1987년 6월과 달리 민주주의 투쟁 전선에 조직된 대오로 참가하면서 민중진영을 주도하고 요구 수준을 정권 퇴진으로 끌어올렸다는 점에서도 의의가 컸다. 그러나 학생운동을 비롯한 민중진영 상당수가 보수야당에게 이끌리며 전선에서 중도 철수하면서 5월 투쟁은 노태우 정권 퇴진을 관철하지 못한 채 패배로 끝나고 말았다. 한편 1991년 5월 투쟁에서 공동 활동을 벌인 전노협과 업종회의는 그 성과를 토대로 전국노운협 및 전국노련과 함께 10월 9일 ‘ILO 기본조약 비준 및 노동법 개정을 위한 전국노동자공동대책위원회’(ILO공대위)를 결성했다. ILO공대위는 한국 정부의 국제노동기구(ILO) 가입 추진을 계기로 ‘자주적 단결권 확보를 중심으로 한 노동법의 실질적 개정’과 ‘민주노조 총단결 투쟁을 통한 민주노조운동의 조직발전’을 목표로 내건 한시적 공동투쟁체였다. ILO공대위는 11월 10일 서울 여의도 둔치에서 6만 명의 노동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전태일 정신계승과 노동법 개정을 위한 전국노동자대회’를 개최했다. 또한 ILO에 한국 정부를 제소하여 민주노조 진영이 한국 노동조합의 일각을 대표하고 있음을 국제적으로 인정받고, 노동법을 개정하라는 권고를 이끌어 냈다. 4) 전노협 정신과 선진노동자들의 형성 1987년 노동자대투쟁 이후 민주노조운동의 폭발적 성장을 토대로 1990~91년의 전노협은 한국 노동자계급 대중운동의 한 정점을 찍고 있었다. 전노협으로 결집한 민주노조운동을 꿰뚫은 정신은 한마디로 자주성·민주성·전투성·연대성·변혁성에 대한 지향이었다. 전노협은 수많은 노동자들이 구속과 해고의 아픔을 겪으면서도, 노태우 정권의 입체적인 탄압을 전국 총파업으로 맞받아치며, 말 그대로 “투쟁을 통해 조직을 사수”해 냈다. 이처럼 단호한 기세를 바탕으로 전노협에 소속된 단위노조들은 임금인상·단체협약 투쟁에서도 두드러진 성과들을 쟁취해 냈다. 전노협은 그 깃발에 “평등사회 앞당기는 전노협”을 새겨 넣었으며, 산하 지노협 가운데 핵심이었던 마창노련의 강령은 “노동해방의 그 날까지 끝까지 투쟁”을 명시했다. 전노협 건설과 사수에서 결정적 역할을 했던 현대중공업노조의 노동조합가는 “노동해방 선봉에 선 현대중공업 노동조합”을 후렴구로 가졌다. 전노협을 대표하는 구호는 “천만 노동자 총단결로 노동해방 앞당기자!”였다. 민주노조 운동 역사상 87년 노동자 대투쟁 이후 전노협 시대만큼 현장이 살아 움직이고 연대의 정신이 넘쳐나는 시기는 없었다. 지금 보면 꿈같은 이야기이지만, 구사대들의 공격을 막기 위해 여성 노동자들만이 있는 사업장에 수백 명의 지역 노동자들이 교대로 출퇴근하면서 함께 철야농성 하는 것은 흔한 일이었다. 옆 사업장에서 구사대 침탈 소식이 들려오면 일하다가도 바로 일손을 놓고 수백 명이 달려가서 구사대를 격퇴하기도 했다. 마창노련의 경우 조합원 27,000명 정원에 25,000명이 운동장에 모여서 조합원 총회를 했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도 있다. 지역 집회를 하면 수천 명이 모이는 것은 보통이었다.[29] 동지들! 지난 시절 우리가 건설하고 지금까지 사수해 온 전노협은 자본과 권력에 야합함으로써 건설된 것이 아닙니다. 전노협에 가입했다는 이유만으로 해마다 500여 명의 조합원이 구속당하고, 3,000여 명의 조합원들이 강제로 일자리에서 쫓겨날 때도, 전노협만 탈퇴한다면 수천만 원, 수억 원이라도 기꺼이 내놓겠다던 자본과 정권 측의 매수공작에 맞서, 전세금을 뽑고 적금을 해약하면서 지켜온 것이 전노협입니다. … 동지들! 동지들도 91년 5월, 전노협 탈퇴 공작에 끝까지 저항하다 싸늘한 시체로 우리 곁에 돌아온 전노협 부위원장 박창수 동지를 기억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죽음을 딛고, 수많은 구속과 수배, 해고를 딛고 쓰러지지 않고 되살아났습니다. 우리는 되살아나 육해공군 4만의 군대가 물샐틈없이 봉쇄한 울산과 거제의 골리앗으로, 우리의 깃발과 우리의 선봉대를 실어 날랐고, 남은 모두가 그들이 되어 함께 싸웠습니다. 그리하여 전노협은 소외와 무권리에 의해 고통 받는 천만 노동자의 조직으로 우뚝 설 수 있었던 것입니다.[30] (1절) 폭력과 탄압의 굴레를 뚫고 우뚝 선 현중의 형제여 가자, 가자, 달려 나가자! 노동자 해방으로! 가진 자들의 폭력이 판친다 해도 우리는 목숨 바쳐 싸워나가리! 해방 해방을 위해, 투쟁 투쟁을 위해 노동해방 선봉에 선 현대중공업 노동조합! (2절) 미포만에 떠오른 태양, 어머님의 뜨거운 눈물, 가자, 가자, 달려 나가자! 민중의 해방으로! 동지여 기억하는가 89년도 우리는 목숨 바쳐 싸워나가리! 해방 해방을 위해, 투쟁 투쟁을 위해 노동해방 선봉에 선 현대중공업 노동조합![31] ◎ 전투적·변혁적 선진노동자들의 형성 1988년 이후 선진적인 현장 노동자들의 의식이 엄청난 속도로 성장해 나갔다. 1987년 노동자대투쟁의 자연발생적 성격과 달리 1988년을 경과하면서 ‘노동해방’이 민주노조들의 보편적인 구호로 자리 잡게 된 것은 그 직접적인 반영이었다. ‘노동해방’이라는 피로 쓴 플래카드를 내걸고 연세대에서부터 여의도까지 이어진 노동자의 행진대열은 끝이 보이지 않았다. 특히 울산, 마산창원 지역에서 올라온 노동형제들의 일사불란한 행진은 눈을 끌고도 남았다. 붉은 머리띠를 질끈 동여매고 보도가 쾅쾅 울리도록 발을 맞추어 나가는 노동형제들의 모습은 해방군대 바로 그것이었다. “노동해방사상이나 단체, 나라에 관련한 책을 읽고 싶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이 금서라 접할 기회가 없었습니다.” “빨갱이가 되라면 돼야죠, 잘살아 보겠다는 것이 빨갱이라면 우리 모두가 빨갱이 아닙니까?” “아직 생각해 보지 않았습니다. 저는 노동해방이 북한이나 소련과 같은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저번 투쟁 때 사장이 빨갱이라고 그러더라구요. 그러니까 할 말이 없대요. 그땐 정말 어떻게 말해야 합니까?” “노동자들의 정당이 필요합니다. 민주당이나 평민당이나 그놈이 그놈입니다. 우리 후보가 나서야 합니다.” “전노협이 결성되면 아마 더욱 힘차게 싸울 수 있겠지요. 이제는 연대하지 않으면 이길 수가 없어요. 자본가들은 경찰까지 동원하여 우리를 탄압하고 있지 않습니까?” “복수노조는 인정돼야 합니다. 물론 회사 내에 두 개의 노조가 있으면 힘이 더 약해지는 것이 아니냐고 걱정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사실 저희 회사에서는 그놈의 유령노조 때문에 계속해서 노조건설이 막히고 있습니다. 다른 현장 동지들의 이야기를 들어 보아도 유령노조나 어용노조로 고생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지금 복수노조가 인정되면 우리가 더 유리하다고 생각합니다.” “지노협만으로는 안됩니다. 지역적으로 대응해서는 결코 이길 수가 없습니다.” 나는 집회가 어떻게 진행되는지를 알 수 없을 정도로 바쁘게 인터뷰에 매달렸다. 노동해방의 항목에 대한 노동형제들의 반응을 들으면서 빨갱이 공포증이 많이 녹아 내렸다는 것을 다시금 확인할 수 있었다. 1~2년 전만 해도 노동해방의 붉은 기치를 공공연하게 들어 올린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었다는 점에 비추어 볼 때 엄청난 발전이었다.[32] 또한 노동자 계급의식을 갖춘 현장 활동가들이 엄청난 기세와 규모로 성장하면서, 집행부와 대의원이라는 노동조합 공식 체계를 넘어선 다양한 현장의 조직형태들이 노동조합 체계 안팎에 등장한다. 정당방위대·선봉대·결사대 등 다양한 명칭을 가졌던 행동대, 대우조선·현대중공업 등 대공장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던 소위원회 등이 노동조합 체계 안에 형성됐다면, 다양한 수준의 학습모임, 부서별 활동가 모임, 어용노조가 지배하는 다수의 대공장에서 등장했던 노조민주화 추진체 등이 노동조합 체계 밖에 형성된다.[33] 마창지역에서는 정방대란 이름으로 더 많이 알려진 선봉대는 1989년 벽두부터 피의 탄압이 가중되면서 그 역할이 더욱 강조되었다. 선봉대는 각 노조별 정방대와 마창노련 선봉대로 나뉘어졌는데, 정방대가 단위노조를 사수하는 단위노조 내 조직이라면, 선봉대는 마창노련을 사수하기 위한 마창노련 차원의 조직인 셈이다. 따라서 선봉대는 공권력이나 구사대로부터 마창노련을 사수하기 위해 지역 공동대처에 나서거나 점거농성 및 대외투쟁의 역할을 담당하는 타격대로 기능하였기 때문에 자연히 연대의식과 정치의식, 그리고 정치투쟁력을 발전시키는 데 그 목적을 두게 되었다. 선봉대는 각 노조의 정방대원 중 10% 인원(단사별 80명당 1명꼴)으로 선발되어 주로 상집간부, 대의원, 핵심조합원으로 구성되었다. (선봉대와 정방대는 조직적으로 이원화됨으로써 통제되지 못하였다. 특히 선봉대원 대다수가 단위노조 간부로 구성되었기 때문에 선봉대 활동은 어려움에 처하게 되었다. 결국 나중에 가서 선봉대와 정방대는 일원화되어, 각 노조별 정방대 안에 선봉대, 규찰대, 경호대, 경비대로 재편성하였다.) 그에 비해 정방대원(약 1,500여 명)은 전체 조합원 중 10%의 조합원과 대의원들로 구성하였는데, 각 노조마다 지원자가 하도 많아 선발해야 할 정도로 정방대에 대한 대중적 참여는 아주 높았다. 각 노조는 규약을 통해 집행부는 바뀌어도 정방대는 상설기구로서 기능하도록 규정함으로써 정방대는 노조 안의 확고한 대중조직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각 조합은 규약에 “구속자 적립금은 쟁의기금 중 30%로 항상 예치할 것, 생계비 지급할 것, 석방 후 완전복직” 등을 명시하여 정방대원들의 부담 및 걱정을 덜어주었다.) 이는 ‘정방대’가 흔히 알려져 있듯이 단순히 싸움만 하는 부대가 아니라 노조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는 중추조직임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실제로 정방대원은 준간부로서 현장에서는 비조합원들 앞에 모범을 보이고 투쟁의 정당성을 설명하고 설득하며 강화해 나가는 사람들, 뭔가 이론적으로도 더 알고 있는 사람들로 알려져 있었다. (허상식 마창노련 선봉대장(타코마노조 조직부장)은 “정방대는 노동자의식이 투철하고 선진적인 노동자들로 구성된다. 노조 집행부와는 별도로 노동자들 속에 존재하면서 노동조합의 민주성, 대중성을 유지하게 하는 역할을 담당하기 때문에 노동조합의 튼튼한 중간 허리라고 할 수 있다”라고 말했다.) 정방대의 핵심 업무는 노조사수이며 구사대와 공권력 격퇴, 의장단 경호와 단상보호, 집회규찰, 가두행진 시의 선봉 역할, 그리고 인근 사업장의 투쟁을 지원 연대하는 임무도 수행하였다. 각 노조는 임투를 앞둔 수련회나 교육 등을 통해 정방대의 취지와 목적, 임무와 역할 등에 대한 교육과 피티체조, 화염병 투척 연습, 구보 등의 체력단련과 무술훈련, 전략과 전술에 대한 훈련 점검을 실시하였다. 실례로 금성사노조는 꽃병투척 대회를 열어 사기를 높이는가 하면, 대림자동차노조는 정방대 안에 화염병투척반, 봉술훈련반을 따로 조직하고 회사 본관 앞에서 기합소리와 함께 쇠파이프를 휘두르며 봉술훈련을 하는가 하면 호를 파놓고 그 안에 들어가 사과탄을 투척하는 훈련을 감행하여 회사의 간담을 서늘케 하였다. 특히 5지구 정방대는 금성사 1공장, 대림자동차, ㈜통일 등 17개 노조에서 400여 명이 정방대로 조직될 정도로 숫자로 보나 투쟁력으로 보나 단연 우세하였는데, 그 중 과반수인 200여 명을 거느린 ㈜통일노조 정방대는 마창노련을 살렸다고 할 정도로 가장 모범적이었다. 정방대원들은 가두집회와 타격전에 나갈 때마다 화염병, 각목, 마스크, 물안경 등을 준비하였으며 수출 1, 2지구의 여성 정방대원들은 망치 등을 가지고 보도블록을 깨거나 돌을 날라주기도 했다. 여성노동자들이 가두에서 남자들과 함께 경찰과 몸싸움을 벌이거나 경찰을 향해 돌을 깨서 던지는 모습은 아마도 세계 어느 노동운동의 역사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광경일 것이다. … 마창노련 정방대는 구사대와 공권력으로부터 민주노조와 마창노련을 사수하고 이를 통해 마창노련의 연대의식, 정치의식과 투쟁력을 발전시키는 데 목적을 두었다.[34] 91년 투쟁 과정에서 지도부와 조합원들이 일치단결한 것은 현장토론의 활성화에 있었다. ‘임금인상투쟁 준비기-준법투쟁 및 부분파업 투쟁기-투쟁 마무리기-투쟁평가기’에 이르기까지 조합원 토론회에서 항상 의견을 통일하고 결의를 모아갔다. 이로써, 간부들의 조합원에 대한 지도력을 높이고, 동시에 조합원들의 적극적인 참여를 이끌어낼 수 있었다. 현장토론의 조직화 과정은 ‘구체적인 조합원의 실태파악 - 집행부의 토론안 수립 - 집행부의 조합원들의 문제의식 및 토론의제 공유 - 현장지도부(대별 소위원회)가 현장토론 실시 - 반론이 제기될 경우 집행부 재토론 - 조합원 재토론’의 수순을 밟아 진행하였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간부들은 스스로의 투쟁결의를 높임과 동시에, 밑으로부터 조합원들의 참여와 의견수렴을 통해 투쟁방향을 구체적으로 확보해 나갈 수 있었다. 조합원 토론의 활성화에 일등 공신은 91년 도입한 소위원제도였다. 해마다 나우정밀 노동조합은 투쟁 시기에 ‘임금인상투쟁 대책위원회’ 산하 현장조직을 대대별 체계로 운영해 왔다. 1공장은 1대대에서 5대대로 편제되어 있었고, 2공장은 6대대로 편제되어 있었다. 그래서 현장은 모두 6대대로 구성되어 모든 조합원이 각 대대에 소속되었다. 하나의 대대는 2~3개 라인으로 구성되고, 약 100명의 조합원들로 편성되었다. 각 라인에는 라인대표가 있었다. 각 대대장은 라인대표와 함께 활동했다. 91년 이전까지는 대대장의 책임하에 라인대표가 현장토론과 투쟁을 이끌어 왔다. 그러나 91년 투쟁에서는 현장대대의 활동과 투쟁을 활성화하기 위해 대대별 체계 내에 소위원 제도를 도입하였다. 4월 7일 소위원 선출을 하였다. 소위원 제도는 대대별 각 라인에 3~4명의 소위원을 선출하여 만든 것이다. 90년까지 현장의 모든 활동은 대대별로 대대장과 라인대표가 총괄해 왔다. 그래서 대대장과 라인대표가 수십 명의 조합원을 지도하는 것은 그렇게 쉬운 문제가 아니었다. 91년 투쟁에서 소위원제도를 도입함으로써, 현장지도력의 공백이 보강되어 보다 치밀하고 보다 민주주의적 현장지도를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소위원회의 활성화는 일상적 시기의 대의원의 역할을 맡을 선진적인 조합원을 배출하는 저수지와 같은 역할을 하였다. 대대별 소위원들의 선출로 대대장은 라인대표와 소위원들을 근간으로 현장조합원의 토론과 투쟁을 주도해 나갔다. 대대장을 중심으로 한 현장지도력의 강화는 조합원들과 투쟁지도부 간의 결합력을 높여 일사불란한 투쟁을 전개하는 밑거름이 되었다. 소위원을 선출할 당시 경험 있는 조합원이 많지 않아 투쟁을 진행하는 데 적지않은 어려움이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약점은 전화위복이 되어 결과적으로 노동조합 활동의 새로운 지도력을 훈련시킴으로써, 노동조합의 조직력을 강화하는 길을 열어 놓았다. 소위원제도가 그 힘을 발휘한 것은 5월 3일 쟁의발생신고 찬반에 관한 토론이었다. 라인별 토론이 시작되었을 때, 소위원들은 조합원들의 밑으로부터 제출된 다양한 의견을 수렴하여 토론을 활성화시켰다. 따라서 조합원들 모두가 쟁의발생신고를 흔쾌히 동의하고 힘있게 결의할 수 있는 동력이 되었다. 이런 과정을 거침으로써, 조합원들이 스스로 선택하고 결의한 투쟁에 조금도 주저함이 없이 참여할 수 있었다.[35] 가. 부서별로 산개되어 활동하거나 소모임의 형태로 활동하던 모임들이 모두 결집하여, 민주노조 건설을 위한 전 공장 현장조직의 형태인 ‘노조민주화 추진위원회’(노민추)를 건설하였다. 이들의 과감하고 헌신적인 투쟁은 조합원들의 광범위한 지지 기반을 형성해 냈다. 이 시기에 ‘노민추운동의 대중화’가 일어난다. 민주적 활동가들이 대의원에 대거 진출하거나 소위원회가 광범위하게 구성됐다. 이로써 노조민주화 투쟁은 집행부 장악에만 한정된 민주파들의 선거투쟁이 아니라 민주노조운동의 대중적 저변을 확대하면서 활성화된다. 나. ‘노민추’ 건설 △기아자동차 : 대량해고와 구속 사태로 현장 내 활동력의 부재라는 공동의 과제를 껴안게 됨에 따라 현장 내 활동기반 복원 과제를 효율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현장 내 다양한 소모임과 해고자들이 모여 결성함. △현대자동차 : 2대 집행부의 개량화에 대한 불신임투쟁을 통해 민주세력의 단일대오에 대한 고민을 현실화시켜 결성함. △현대중공업 : 128일 투쟁과 골리앗투쟁을 통해 현장이 공백상태를 맞자 새로운 지도력 구축의 필요성과 정치성과 계급성, 전국성을 갖추어야 한다는 각성을 통해 결성함. △대우조선 : 삼성중공업, 거제조선소 노조건설 공동대책위원회 활동에 대한 평가가 지역 내 중소사업장 노조와 민협위, 해대위 등에서 이루어지면서, 지역노조 활동의 핵심적 열쇠는 대우조선노조의 역할에 있다는 결론에 이르러 준비모임을 거쳐 결성하게 됨. 다. ‘노민추’ 활동의 성과와 한계 이러한 ‘노민추’ 활동의 성과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는 민주세력이 주도하여 세워낸 초기 집행부의 한계를 극복하고, 노조민주화 투쟁과 해고자복직 투쟁을 중심으로 비타협적 투쟁을 전개하여 민주집행부를 탄생시켰다는 것이다. 둘째로는 당시 내용적 분화보다는 분열의 상태로 존재했던 각종 민주세력의 소모임들과 민주 대의원(소위원)들이 결합하여 단결된 조직활동을 하였다는 것이다. 셋째로는 민주노조에 대한 대중적 열망의 수렴을 기반으로 대중과 결합하여 활동을 하였다는 것이다. 대의원 선거에 단일한 공약과 선전과 선동으로 공동의 대응을 하고, ‘노민추’ 신문을 통하여 ‘노민추’ 활동내용을 선전하는 등의 활동을 통해 대중과 결합해 갔다. 이러한 활동의 성과에 반해 ‘노민추’ 활동의 한계를 살펴보자. 그것은 노조 수준을 넘는 활동 전망이 미약했다는 것이다. 이는 ‘노민추’ 조직의 존재조건으로부터 기인한다. 즉 ‘노민추’ 활동의 최대 목표와 활동의 중심은 노조 집행부 장악이었기에, 단사 내 노조문제 중심의 활동이 이루어졌던 것이다. 이러한 한계로 민주노조 장악 이후 활동 방향을 발전적으로 바로 전환하지 못하며, 그리하여 활동의 공백이 생기게 된다.[36] 1987년 이전까지 국가보안법으로 구속된 현장 노동자가 소수의 조직사건 관련자를 제외하면 거의 없었던 것과 달리, 1990년에는 6월까지 구속된 노동자 437명 가운데 국가보안법 관련자가 101명으로 23%를 차지하였으며 그 가운데 대부분이 이적표현물 제작·소지로 구속되었던 것 또한 그 무렵 선진적인 현장 노동자들 전반의 급격한 정치의식 성장을 보여주는 한 단면이었다. ◎ 선진노동자들의 형성과 전노협 건설에서 사회주의자들의 역할 1987년 노동자대투쟁 이후 민주노조운동이 폭발적으로 성장하는 데서 사회주의 운동은 결정적 역할을 했다. 하지만 그 이전에 먼저 1987년 노동자대투쟁이 사회주의 운동의 비약적 성장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 1980년대 중반, 혁명적 민주주의 운동이 가장 급진적인 흐름들로부터 사회주의 운동을 향해 전진하기 시작할 때, 북한의 주체사상을 추종하는 흐름이 혁명적 민주주의 운동 안에 나타나 엄청난 해악을 끼쳤다.[37] 사회주의 운동이 초보적인 형성 과정에 있었기에 사상적으로나 실천적으로나 유아적인 상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던 시기에, 주체사상은 혁명적 민주주의 운동 안에 존재하던 민족주의적 한계를 효과적으로 파고들었다. 1985년 하반기부터 등장한 주체사상파 흐름은 1986년을 거치면서 혁명적 민주주의 운동에서 다수를 장악했으며, 특히 학생운동에서는 강력한 주도권을 확보하게 됐다. 주체사상파는 이미 급속한 자본주의 발전을 이루고 있던 한국 사회를 북한의 주장대로 ‘식민지 반봉건 사회’로 규정했고 그에 따라 ‘민족해방 민중민주주의 혁명’(NL-PDR)을 당면 혁명의 과제로 설정했다. 또한 노동자계급을 혁명의 주체로 보지 않고 보수야당 즉 자유주의 부르주아 정치세력을 포괄하는 민족통일전선을 혁명의 주체로 보았다. 나아가 남한의 혁명은 북한을 포함한 전 민족적 관점에서 접근해야 한다면서, 혁명을 지도할 정당이 이미 북한에 있기 때문에 남한에서 독자적인 노동자계급 정당을 건설할 필요가 없고, 남한 노동자들은 북한 전위당의 영도에 따라 자주·민주·통일을 기치로 민족통일전선을 형성하는 데 복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주체사상파가 미친 악영향은 매우 컸다. 이들의 민족통일전선 노선은, 혁명적 민주주의 운동이 노동자·민중에 근거하여 민주화 투쟁을 혁명적으로 발전시키고 나아가 노동자계급에 근거하는 사회주의 운동으로 성장해 나가는 것을 적극적으로 가로막았다. 대신 혁명적 민주주의 운동을, 군사파시즘 세력과 끊임없이 타협하고 동요하면서 자신들의 집권 기회만 노리고 있는 자유주의 부르주아 세력의 영향력 아래로 끌고 들어갔다. 실제로 1987년 6월 민중항쟁에서 주체사상파는 노동자·민중의 혁명적 요구인 ‘군사파쇼 타도와 민주주의 쟁취’가 아니라 자유주의 부르주아 세력의 요구인 ‘대통령 직선제 쟁취’를 구호로 내걸었다. 주체사상파의 노선은 6월 민중항쟁에서 가장 조직적인 세력이었던 학생운동의 대다수가 ‘직선제 쟁취’와 ‘비폭력’을 주장하게 함으로써, 6월 민중항쟁의 혁명적 발전을 가로막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또한 혁명운동에서 노동자들의 역할을 결정적으로 축소시킨 주체사상파는 ‘노동자들도 민족자본과는 단결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등 노동자들이 명확한 계급의식을 갖고 성장하는 데 심각한 악영향을 미쳤다. 사회주의 운동은 주체사상파 등장 이후 성장이 심각하게 지체된 까닭에 1987년 6월 민중항쟁에서 항쟁의 혁명적 발전을 추동해 낼 역량을 갖추지 못했다. 그러나 곧이어 터진 1987년 노동자대투쟁은 사회주의자들에게 강력한 확신과 영감을 불어 넣었다. 이제 현실의 노동자들 속에서 혁명적 운동의 가능성을 직접 확인한 사회주의 운동은 비약적인 성장을 하기 시작했다. 1988년을 경과하면서 마르크스와 레닌의 원전을 비롯한 각종 사회주의 서적들이 쏟아져 나왔다. 다양한 수준의 사회주의 학습모임들이 대학생들과 지식인들 사이에 빠르게 만들어졌다. 상당수의 학생출신 사회주의 활동가들이 현장 노동자로 투신해 들어갔으며, 노동운동 경력이 많은 활동가들을 중심으로 공개적인 노동운동 단체들이 전국 곳곳에 설립됐다. 이러한 사상 학습과 실천 활동의 성장을 토대로 크고 작은 다양한 사회주의 조직들이 잇달아 등장했다. 현장 노동자들의 의식이 엄청난 속도로 성장하는 것을 반영하여, 상당수 현장 노동자들이 사회주의 조직들 속으로 결합해 들어왔다. 비밀리에 또는 공개적으로 발행되는 수많은 정치신문과 이론지들이 넘쳐흘렀다. 사회주의 조직들 사이에 통합 작업도 활발히 진행되었고, 그 과정에서 수백 명의 규모를 갖는 조직들도 등장했다. 다양한 사상적·실천적 경향을 가진, 크고 작은 사회주의 조직들이 십여 개 정도 형성됐다. 이렇게 성장해 간 사회주의 운동이 결정적 역할을 수행하면서, 노동자대중의 자연발생적 분출이었던 1987년 노동자대투쟁으로부터 불과 몇 년 만에 전투적·변혁적 선진노동자들이 대규모로 형성되고 전투적·변혁적 민주노조운동의 전국적 총단결체로서 전노협이 건설·사수되는 도약이 이루어질 수 있었다. 1987년 노동자대투쟁 이후 사회주의 운동은 민주노조운동에 뛰어든 현장 노동자들과 다양한 경로를 통해 성공적으로 결합했고, 이를 통해 계급의식을 가진 현장 활동가들을 빠른 시간 안에 엄청난 수로 배출시켜 냈다. 무엇보다 상당수의 학생운동 출신 사회주의 활동가들이 제조업 현장 노동자로 투신해 들어갔다. 자본가들이 ‘위장취업’이라고 공격했던 이 현장투신의 흐름은 1980년대 중반부터 대규모로 이루어지고 있었는데, 1980년대 후반까지 적어도 천 명 이상의 사회주의 활동가들이 현장 노동자로 들어갔다. 이들은 1987년 노동자대투쟁 이전까지는 노동자들의 투쟁을 이끌어 내고 선진노동자들을 발굴하는 데서 몇몇 경우를 제외하곤 뚜렷한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1987년 노동자대투쟁 이후 노동자들의 급격한 성장은 이들에게 풍성한 활동 공간을 열어 주었다. 파업 투쟁과 일상적인 노동조합 활동 속에서 현장 노동자들과 날마다 부대끼면서, 이들은 현장 노동자들의 의식 발전과 민주노조 운동의 성장을 촉진하는 데서 매우 직접적이고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대학생 등 지식인들이 노동현장 속으로 들어오면서 ‘활동가’니 ‘운동권’이니 하는 새로운 용어가 등장했는가 하면, 노동현장에 취업한 지식인들을 지칭하는 ‘위장취업자’라는 신조어가 등장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현장운동은 지금까지의 노동운동에 새로운 전환점을 마련한 수혈운동으로까지 불렸다. 이들은 현장에서 노동자들과 함께 노동하고, 소모임을 만들어 학습과 실천활동을 통해 이 땅에 진정한 변혁을 도모하기 위해 온몸을 다 바쳤다. 감시와 고문, 투옥과 폭력을 두려워하지 않는 이들의 헌신과 학습지도 등으로 노동자들은 점차 사회현실에 눈을 뜨고 새롭게 인식을 전환하면서, 현실을 변혁하기 위한 현장모임을 만들거나 조직과 투쟁에 나서게 되었다.[38] {현대자동차} 노민추는 {1990년} 위원장 불신임 투쟁을 전개하면서 전 공장 조직을 포괄하게 되었다. 조직원도 150여 명에 이를 정도로 확대되었고, 2개월 정도 활동을 거치면서 250명으로 늘었다. 당시 현장에는 70여 개에 달하는 소모임들이 있었는데, 그 구성원들이 공공연하게 조직원으로 참여했다. 1989년경 울산은 노동운동 진영의 관심대상으로 급부상하면서 학생출신 노동운동가들이 대거 이전했고, 1987년 대투쟁 이후 자생적으로 생겨난 여러 소모임들이 이들과 연결되기 시작했다. 초기에는 학습했던 선들이 달랐어도 노조민주화라는 단일한 목적 아래 이견 없이 행동할 수 있었다. 조합원들도 민주와 어용이라는 두 개 흐름 외에는 구분 짓지 않았던 시기다.[39] 현장 밖에는 공개적으로 활동하는 다양한 수준의 노동운동 단체들이 있었다. 임금·해고·산재 등 노동기본권에 관하여 일반 노동자들을 상대로 상담하는 단체, 노동조합 설립과 활동에 대한 지원이나 다양한 수준의 노동자 교육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단체, 노동법 개정이나 사회 민주화 등 기초 수준의 정치적 목표를 추구하는 현장 노동자들로 구성된 회원 단체, 노래·풍물·연극·글쓰기 등 문예 활동에 주력하는 단체 등 다양한 단체들이 전국 각 지역에 수백 개가 설립되어 운영됐다. 이들 노동운동 단체들은 각 단체의 고유한 역할 수행에 덧붙여 1988년 6월 3일 ‘전국노동운동단체협의회’(전국노운협)[40]를 결성하여 민주노조 운동과 공식적 관계를 갖고 지원과 견인의 역할을 수행하기도 했다. 노동운동 단체들은 군사정권 아래서 공개적으로 활동한다는 제약 때문에 정치적 표현 수준에 상당한 한계를 둘 수밖에 없었지만, 그 속에 있는 활동가 가운데 상당수가 사회주의 활동가들이었다. 또한 군사정권의 엄혹한 탄압 때문에 철저히 비공개로 활동할 수밖에 없었던 크고 작은 사회주의 조직들이 있었다. 사회주의 조직들은 현장에 투신한 사회주의 활동가들, 공개 노동운동 단체에서 활동하는 사회주의 활동가들 대다수와 직·간접으로 연결되어 있었으며, 비밀리에 정치신문을 발행하거나 소규모 학습모임을 운영하면서 가장 선진적인 현장 노동자들을 직접 이끌고 있었다. 독재와 자본에 맞선 비타협 투쟁의 시기에 현장은 비합 사회주의 운동 세력에 의해 체계적으로 학습받고 훈련된 상당수의 활동가들이 배출되었다. … 지노협, 지역 노동단체에서 진행한 활동가 프로그램, 조합원 교육 등은 공개적으로 사회주의라는 말은 사용하지 못했지만 사회주의적 기초를 놓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노동조합조차 정권과 자본과의 전면전을 위해 임금은 노동의 대가가 아니라 노동력의 대가라는 점, 교섭은 힘의 논리라는 점, 교섭으로 쟁취할 것이 거의 없으며 교섭은 투쟁에 종속돼야 한다는 점, 투쟁으로 쟁취한 작은 개량조차 노동해방 사회를 건설하지 못하면 자본의 공격에 의해 빼앗긴다는 점 등을 일상적으로 교육했고, 현장조직력과 투쟁력을 극대화하기 위해 분임토론 등 다양한 노동자 직접참여 노동자민주주의를 개발·강화했다. 정권과 자본에 맞선 연대투쟁은 활동가들을 성장시키는 자양분이었다. 자본은 달라도 노동자들은 공장의 장벽을 넘어 하나였다. 정권의 노동운동에 대한 태도는 선동하지 않아도 스스로 총자본의 집행위원회임을 몸으로 보여주었다. 중앙, 지역, 대공장들은 언제나 정세분석에 민감해야 했고 무엇을 할 것인지 결의해야만 했다. 노동3권 특히 파업과 연대투쟁을 가로막는 노동악법 철폐투쟁은 언제나 어겨서 깨뜨리는 것으로 나아갔다. 자기 사업장 현장에서부터 자본에 맞선 일상적인 투쟁을 전개하고 현장을 자본의 통제로부터 해방시키는 것이 일상 사업을 배우는 기초였다. 이렇게 활동가들은 몸으로 배우고 학습했다. 이렇게 활동가들이 배출되었다.[41] 다음 편 보기(연재예정) [1] 전노협 결성에 참여한 지노협 14개는 서울, 인천, 부천, 성남, 경기남부, 대전, 전북, 광주, 마산·창원, 부산·양산, 대구, 진주, 포항, 울산이며, 업종협 1개는 민주출판노협이었다. 업종협 4개(전교조, 전문노련, 시설관리노협, 화물운송노련)는 전노협 중앙위원회에 참관하면서 전노협 사업에 사안별로 협력·연대하기로 했다. (전국노동조합협의회 백서 발간위원회, 2003, 『전노협백서 제2권 1989년 - 이제는 하나다! 전노협』, 논장, 187쪽) [2] 전국노동조합협의회 백서 발간위원회, 2003, 『전노협백서 제2권 1989년 - 이제는 하나다! 전노협』, 논장, 190~191쪽. [3] 전국노동조합협의회 백서 발간위원회, 2003, 『전노협백서 제3권 1990년 - 전노협 깃발 아래 총진군』, 논장, 213~214쪽. [4] 이수원, 1994, 『현대그룹 노동운동, 그 격동의 역사』, 대륙, 267~269쪽. [5] 전국노동조합협의회 백서 발간위원회, 2003, 『전노협백서 제3권 1990년 - 전노협 깃발 아래 총진군』, 논장, 212~214쪽. [6] 김하경, 1999, 『내 사랑 마창노련』 상권, 281쪽. [7] 김하경, 1999, 『내 사랑 마창노련』 상권, 280~281쪽. [8] 전국노동조합협의회 백서 발간위원회, 2003, 『전노협백서 제3권 1990년 - 전노협 깃발 아래 총진군』, 논장, 229쪽. [9] 전국노동조합협의회 백서 발간위원회, 2003, 『전노협백서 제3권 1990년 - 전노협 깃발 아래 총진군』, 논장, 219쪽. [10] 전국노동조합협의회 백서 발간위원회, 2003, 『전노협백서 제3권 1990년 - 전노협 깃발 아래 총진군』, 논장, 219쪽. [11] 전국노동조합협의회 백서 발간위원회, 2003, 『전노협백서 제3권 1990년 - 전노협 깃발 아래 총진군』, 논장, 193쪽. [12] 금속노조현대차지부, 2009, 『현자노조 20년사』, 114~115쪽. [13] 전국노동조합협의회 백서 발간위원회, 2003, 『전노협백서 제3권 1990년 - 전노협 깃발 아래 총진군』, 논장, 247쪽. [14] 전국노동조합협의회 백서 발간위원회, 2003, 『전노협백서 제3권 1990년 - 전노협 깃발 아래 총진군』, 논장, 250~251쪽. [15] 전국노동조합협의회 백서 발간위원회, 2003, 『전노협백서 제3권 1990년 - 전노협 깃발 아래 총진군』, 논장, 245~249쪽. [16] 금속노조현대차지부, 2009, 『현자노조 20년사』, 115~116쪽. [17] 전국노동조합협의회 백서 발간위원회, 2003, 『전노협백서 제3권 1990년 - 전노협 깃발 아래 총진군』, 논장, 226~227쪽 [18] 김현종, 1990, 『골리앗 상공에서 쓴 비밀일기』, 노동문학사, 165~166쪽. [19] 대기업 연대회의에 참가한 16개 대기업 노조는 다음과 같다: 현대중공업, 현대정공(울산), 현대정공(창원), 현대중전기, 한진중공업, 대우조선, 대우자동차, 대우정밀, 포항제철, 풍산금속, 금호타이어, 아세아자동차, 기아기공, ㈜통일, 태평양화학, 서울지하철. [20] 4월 29일 전남대 박승희, 5월 1일 안동대 김영균, 3일 경원대 천세용, 8일 전민련 김기설, 10일 노동자 윤용하, 18일 천주교신자 이정순, 보성고생 김철수, 택시노동자 차태권, 22일 청년 정상순, 6월 8일 노동자 이진희, 15일 택시노동자 석광수가 ‘노태우 퇴진’을 요구하며 분신했다. [21] 노동자뉴스제작단, 2011, <한국노동운동사 100년의 기록>(영상) 3부. [22] 김하경, 1999, 『내 사랑 마창노련』 상권, 358쪽. [23] 현대차노조정공본부, 2001, 『정공노조 15년』, 91~92쪽. [24] 전국노동조합협의회 백서 발간위원회, 2003, 『전노협백서 제4권 1991년 - 죽음으로 사수한다! 전노협』, 논장, 172쪽. [25] 현대차노조정공본부, 2001, 『정공노조 15년』, 91~92쪽. [26] 나우정밀노동조합사 발간위원회, 1998, 『나우정밀 노동조합 10년사 - 영원히 꺼지지 않는 희망의 횃불로!』, 103~104쪽. [27] 전국노동조합협의회 백서 발간위원회, 2003, 『전노협백서 제4권 1991년 - 죽음으로 사수한다! 전노협』, 논장, 182~183쪽. [28] 전국노동조합협의회 백서 발간위원회, 2003, 『전노협백서 제4권 1991년 - 죽음으로 사수한다! 전노협』, 논장, 520쪽. [29] 김창우, 2006, 「전노협 청산에 관한 연구」. [30] 전노협, 1995, 『1995년도 사업보고』, 발간사. [31] 1989년 제정된 <현대중공업 노동조합가>. [32] 김미영, 1990, 『마침내 전선에 서다』, 노동문학사, 312~313쪽. [33] 대표적으로 1989년 128일 파업을 통해 막강한 현장조직력을 구축하며 민주노조 운동의 최선봉으로 우뚝 섰던 현대중공업노조는 파업 기간 동안에 소위원회를 노동조합의 공식체계로 신설하고, 상경투쟁을 벌였던 노동자들이 ‘자생란’과 ‘한목소리’를, 가장 전투적으로 싸웠던 특례보충역들이 ‘새벽깃발’을, 투쟁이 끝나고는 활동가들이 각 부서별로 ‘부서동지회’를 만든다. [34] 김하경, 1999, 『내 사랑 마창노련』 상권, 141~143쪽. [35] 나우정밀노동조합사 발간위원회, 1998, 『나우정밀 노동조합 10년사 - 영원히 꺼지지 않는 희망의 횃불로!』, 106~107쪽. [36] 울산노동정책교육협회, 1997, 『현장조직운동의 과거·현재·미래』, 18~20쪽. [37] 특권 관료집단이 노동자계급 위에 군림하는 스탈린주의 체제가 북한에서는 더욱 극악한 모습으로 펼쳐졌다. 소련군의 무력을 등에 업고 북한의 권력을 장악한 김일성 세력은 모든 경쟁 세력을 숙청한 뒤, ‘김일성 수령’에 대한 우상숭배를 강요했다. 심지어 ‘백두혈통’을 운운하며 봉건왕조를 연상케 하는 권력 세습으로까지 치달았다. 북한 사회가 철저한 가짜 사회주의인 것처럼, 수령에 대한 절대적 충성을 근간으로 하는 주체사상은 마르크스주의와 전혀 상관없는 반동적 사상이었다. [38] 김하경, 1999, 『내 사랑 마창노련』 상권, 25쪽. [39] 금속노조현대차지부, 2009, 『현자노조 20년사』, 129쪽. [40] 나중에 전국노운협은 노선 차이로 내부 갈등을 겪게 되며, 전국노운협을 이탈한 단체들이 1991년 7월 14일 ‘전국노동단체연합’(전국노련)을 출범시킨다. [41] 정원현, 2006, 「현장파의 몰락 이후 전국 선진노동자들의 전국운동 조직화 과제와 임무」. /* 스크롤 여백만 주고, 화면에는 안 보이게 */ .ftn-target { display: inline-block; /* 줄바꿈 안 생김 */ width: 0; height: 0; scroll-margin-top: 200px; } document.addEventListener("DOMContentLoaded", function () { // name="_ftn1", name="_ftn2", name="_ftnref1" ... 전부 대상 document.querySelectorAll('a[name^="_ftn"]').forEach(function(a) { var idValue = a.getAttribute("name"); // 이미 같은 id의 요소가 있으면 또 만들지 않음 if (!document.getElementById(idValue)) { var span = document.createElement("span"); span.id = idValue; span.className = "ftn-target"; a.parentNode.insertBefore(span, a); } }); }); /* 본문 각주 번호 + 아래쪽 각주 번호 색 지정 */ a[href^="#_ftn"] sup, a[href^="#_ftnref"] sup { color: #BF202D; } /* 밑줄이 보기 싫으면 */ a[href^="#_ftn"], a[href^="#_ftnref"] { text-decoration: none; } /* 마우스 올렸을 때 살짝만 강조하고 싶으면 (선택) */ a[href^="#_ftn"]:hover, a[href^="#_ftnref"]:hover { text-decoration: underline; } /* 페이지 전체가 오른쪽으로 넘치지 않게 */ html, body { max-width: 100%; overflow-x: hidden; } /* 본문 영역 폭 강제 고정 + 긴 단어/문장도 줄바꿈 */ #bo_v_con, .bo_v_con, .cke_editable, article { max-width: 100%; overflow-wrap: break-word; word-wrap: break-word; /* 구형 브라우저용 */ } /* 워드에서 붙은 이미지/표가 화면 밖으로 안 나가게 */ #bo_v_con img, #bo_v_con table, .bo_v_con img, .bo_v_con table, .cke_editable img, .cke_editable table, article img, article table { max-width: 100% !important; height: auto; } /* 워드가 p, span에 폭을 박아놓은 경우 강제로 해제 */ #bo_v_con p[style*="width"], #bo_v_con span[style*="width"], .bo_v_con p[style*="width"], .bo_v_con span[style*="width"], .cke_editable p[style*="width"], .cke_editable span[style*="width"], article p[style*="width"], article span[style*="width"] { width: auto !important; max-width: 100% !important; } /* 기본 blockquote 스타일 */ blockquote { border-left: 4px solid #c0392b; /* 사이트 분위기와 맞는 붉은 계열 */ padding: 12px 18px; margin: 20px 0; background: #fafafa; font-style: normal; color: #333; line-height: 1.6; } /* blockquote 안의 p 태그 정렬 */ blockquote p { margin: 0 0 10px 0; text-align: justify; } /* 마지막 p 태그 여백 제거 */ blockquote p:last-child { margin-bottom: 0; } -
[기고] Tạm biệt — 뚜안님 100일재에 동행하여 남기는 기록살아있는 동안 단 한 번도 만난 적 없던 뚜안님과 내가 같은 사람이라는 걸 여러 번 깨달을 때마다, 나는 우리 노동자 민중을 하나로 이을 수 있는 어떤 것에 대해 자주 생각했다. 각각의 사람들을 하나로 단결시킬 수 있는, 공통의 감각. 계속 되는 자본의 갈라치기와 대상화의 홍수 속에서, 범람하는 탈인간화에 나는 계속해서 우리가 사람임을 잊지 말자고 말하고 싶다. 두고 가야 하는 기억이 있다. 그런다고 나에게서 온전히 떨어뜨려 놓을 수 있는 순간이 되는 건 아니지만, 전부 짊어지고 살아가기에는 결국 침잠되어버리기에. 상실을 겪으면 나는 특히 그런 강박을 느낀다. 그 순간들을 따로 떼어두고 가지 않으면 내가 잡아먹힐 거라는 걸 알기 때문이다. 지난 2025년 10월 28일, 미등록 이주노동자에 대한 폭력적 단속으로 사랑하는 아이를 잃은 뚜안님의 가족들도 그러한 마음이 아니었을지. 감히 짐작해 본다. 사건이 발생하였던 당시에 나는 개인적으로 두고 가야 할 오래된 기억이 있었을 뿐이었다. 그저 공교롭게 이 일에 함께 하게 되어, 개인 연대 시민의 자격으로 대책위가 주도한 거의 모든 투쟁의 순간에 자리했다. 1인 시위부터 100일재 참여까지 최선을 다한 동지들과 유족들이 있어 나 역시 그들과 심적으로 더 가까워지고 많은 걸 깨달을 수 있었던 것 같다. 사실 내가 영적으로 민감한 편이라 망자와 관련된 일이나 종교 의식과는 거리를 두는 편이었다. 하지만 정리하고자 했던 오래된 기억 또한 망자에 대한 일이었기에, 사건들이 닥친 김에 직면하고자 좀 더 적극적으로 ‘죽음'을 들여다 봤다. 세상을 사랑할 줄 알던 이들의 이른 죽음, 그리고 그들이 살아가고자 열망하던 날들에 대해 생각해 보는 시간을 보냈다. 「나는 당신을 압니다. 살아가는 일조차 허락받아야 하고 숨죽여 떨어야만 하는 삶을 알고 있습니다. 살아서 만난 적이 없어도, 나 또한 당신이었던 적이 있습니다. 오늘의 하늘 아래에는 나만 남아 숨쉬고 있지만, 앞으로의 날들에는 누구도 이런 고통을 다시 겪지 않도록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할게요. 부디 편히 쉬시길.」 — 대구 출입국 사무소 앞의 뚜안님 분향소 방명록에 남긴 말 뚜안 대책위가 서울에서의 농성을 정리하던 날, 뒤풀이 자리에서 활동가인 태은 동지가 2월에 있을 100일재를 지내러 베트남을 가자는 말을 꺼냈다. 분위기에 취해, 그리고 뚜안님이 살던 곳이 궁금하여 같이 가고싶다는 의사를 전했다. 그렇다 해도 나는 대책위의 사람도 아니고 재정이 준비된 상태도 아니라 현실적으론 어려울 거란 걸 알고 있었다. 대구의 분향소를 정리하는 날에 금속노조 성서공단지역지회장 희정 동지에게 동행하고 싶다는 뜻을 내비쳤으나 대책위 사람들 또한 갈 수 있을지가 불분명한 상태였다. 가능하면 좋겠지만 못가더라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던 1월의 어느 날 눈을 뜨기 전 아침, 꿈에 뚜안님이 등장했다. 이렇게 대화하게 되어 너무 좋다고, 소개시켜 줄 사람이 많다며 나를 데리고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다. 꿈에서 본 사람들은 그의 조상들이었던 거 같은데, 일어난 뒤에 신나서 돌아다니던 뚜안님을 떠올리니 아무래도 베트남을 가야할 성 싶어 결심이 섰다. 곧바로 희정 동지에게 동행하겠다 텔레그램 메시지를 보내고 여권을 만들러 밖으로 나갔다. 내란으로 정신없던 시기에 만료됐던, 돈도 시간도 여의찮아 해외 갈 일이 망연하다고 방치해 둔 여권이었다. 그 날이 뚜안님 아버지인 부반숭 동지의 생신이었다는 걸 저녁에 알게 되자, 뚜안님이 이렇게까지 적극적으로 초대를 했는데 안 간다면 정말 속상해 할 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이가 들수록 늘어가는 건 현실성 운운하며 따지고 재는 일과 발 빼는 일이라니 부끄럽다. 뚜안님은 먼저 도전하고 길을 찾아가는 사람이었을 거 같다. 공장에서 일을 하게 된 것도 그랬기 때문이었다고, 중간 보고회에서 그의 친구였던 혜인님이 말했다. 내가 나고 자란 이 대한민국이 그렇게 도전할 만큼의 가치가 있는 곳인지 나는 사실 잘 모르겠지만, 뚜안님을 비롯한 여러 사람들에겐 그랬던 모양이다. ‘어메리칸 드림’에 이은 ‘코리안 드림’이 자본주의 제국주의의 허황된 꼴을 좋게 포장한 거 같아서 그런 표현을 듣는 마음이 불편했다. 호치민에서 만났던 수많은 베트남 사람들이 한국에 호의적이라서 사실 더 괴로웠다. 이렇게 좋은 사람들을 한국인들은 어떻게 취급했는지. 그리고 제국이 되고 싶어하는 한국의 정부와 자본가들이 떠올랐다. 호치민 곳곳에 뿌리내린 한국 자본을 볼 때마다 소름이 끼쳤다. 미국이 한국전쟁 이후 원조한 방식을 그대로 써먹은 게 뻔했다. 베트남도 오래도록 프랑스의 식민지배를 받았으며, 내전으로 끔찍한 날들을 보냈다는 점에서 한국과 유사한 면이 많았다. 곳곳에 서양식의 건물이나 주변의 집들처럼 개방되어 있지 않은 ‘저택’들에서 그 흔적을 볼 수 있었다. 기후가 따뜻해서 그런지 집들도 가게들도 1층은 벽보다 창문이나 문의 면적이 넓은 편이었다. 문이 있어도 대다수가 유리문으로 내부가 잘 보이는데, 저녁에는 대문을 닫는다 쳐도 생활하는 시간에는 대부분 문을 활짝 열어놓는 식이었다. 물론 한국에서는 이제 일제 목조 건물이나 강점기 당시에 지어진 건물을 아직도 쓰는 모습은 보기 어렵다. 박물관이나 특수한 목적의 건물로 거의 보존해 놓는 편이라, 그 시대를 일상과 분리시킨 듯도 하다. 마치 과거의 편린은 박제가 되어야만 의미가 있는 것처럼, 혹은 옛날 일은 남 얘기인 것처럼. 유사한 맥락으로 한국에서는 빈자와 부자가 철저하게 분리되는 게 당연하다. 그런 부분들 때문인지, 나는 베트남 땅에서 어떠한 여유를 느꼈다. ‘사회주의 국가’라기엔 제국의 자본에 의존도가 크고 수도인 호치민시 역시 땅값이 비싼 곳이었지만, 그곳 사람들에게서는 한국에 만연한 조급함이나 짜증을 본 적이 없었다. 고작 며칠 머무른 걸로 하나의 나라를 다 파악했다 할 수는 없겠지만, 언어가 통하지 않아도 소통이 어렵지 않았고 왠지 ‘괜찮다.’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아마 나는 가게와 집집마다 놓인 작은 재단 때문에 초반에 자주 어지러웠지만) 거의 모든 사람들이 종교를 가졌기 때문인지 그들에게서 선함과 거기에서 오는 여유가 느껴졌던 거 같다. 뚜안님이 고향을 그리워 하셨던 이유를 왠지 알 듯도 했다. 나도 그곳에서 어릴 적 살던 동네와 그 시간의 향수를 느꼈다. 단순히 저개발지라서 그렇다기 보다는, 뚜안님이 나고 자랐다는 동네에는 사람들이 서로 용인하고 신뢰하는 분위기가 있었다. 집집마다 걸린 화초나 여기저기 심어져 있는 풀과 나무를 쉽게 볼 수 있었는데, 집을 지을 때 먼저 심어진 나무를 베거나 옮기지 않고 그대로 둔다고 희정 동지가 얘기해 줬다. 이런 걸 비롯해서 한국에선 어림도 없는 일들을 보고 들었더니, 험지에서 도대체 무슨 고생들을 사서 하고 있는 건가 싶었다. 먹고 살기 위해, 살아가기 위해 포기해야 하는 존엄이 그들에겐 더 싼 값이었을지. 아니, 그 누구도 자신의 존엄이 그렇게 싸게 팔릴 거라 예상하며 이주 노동을 선택하지 않았을 거다. 단지 거기까지 왔기에 버티기를 각오했을 뿐. 내가 일을 하기 위해 지역을 옮기며 그런 각오를 해봤어서, 감히 짐작한다. 비록 나에겐 이렇게 아늑해서 그립고 돌아가고픈 고향이 없어도 말이다. 비록 자본의 침식이 많이 진행되었지만, 부디 이 곳의 사람들은 한국이 간 끔찍한 제국의 길을 따라가지 않기를 바랐다. 입국 수속을 마치고 나온 나와 태은 동지를 공항 앞에서 부반숭 동지가 마중 나오셨다. 호치민에는 공항이 하나 뿐이었고, 공항 건물 내에는 공항을 직접 이용하거나 근무 등의 명확한 용건이 있는 사람만 출입이 가능했다. 그래서 몇 겹의 인파 속에서 우리를 기다리다가 먼저 알아보고 손을 흔드셨다. 한국에서 뵀던 때보다 표정이 훨씬 좋아 보였고, 염색도 하셔서 더 젊어 보이셨다. 우리 짐을 계속 들어주려고 하셨어서 말리느라 애썼다. 뚜안님의 어머니 후옌님이 한 시간 뒤쯤 다른 동지들과 함께 도착한대서 공항 밖에 딸린 카페에 앉아 기다렸다. 반숭 동지는 날이 덥고 사람도 많은 데서 기다리게 해 미안하다는 말을 번역기로 써서 전하셨다. 우리 쪽으로 뚜안님의 외숙모 후에님이 오셔서 반숭 동지와 말을 나누시다가, 후에님이 우리를 먼저 숙소에 데려다 주라하여 반숭 동지가 택시를 불러 동행하셨다. 숙소에 도착해 짐을 풀고 나서, 뚜안님의 외할머니와 다른 분들이 계시는 집으로 가서 동지들을 기다렸다. 호치민에서 뚜안님이 지내시던 외할머니 댁이라 들었다. 뚜안님의 외할머니 흐엉님은 딸인 후옌님과 확실히 닮으셨는데, 왠지 세월을 견뎌오신 듯한 무거움이 느껴졌다. 뒤에 동지들과 도착한 후옌님을 7년 만에 만나셨을 때 우는 딸의 손을 잡아주며 조용히 눈물을 훔치셨다. 인자하게 웃는 모습도 자주 보이셨지만 감정 기복이 크지 않으셔서, 집안을 지탱하고 계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중에 뉴스민의 박중엽 기자님 기사에 남편을 일찍 여의고 자식들을 건사하셨다는 인터뷰가 실린 걸 봤다. 반숭 동지는 흐엉님의 집에서 접이식 밥상 상판 두께의 알루미늄 판을 네 개나 들고 나오셨다. 우리와 함께 투쟁했던 모습을 담은 사진 몇 장씩이 출력된 물건이었다. 그 중에 둘은 성서지회 사무실에 걸도록 가져가라 하셨다. 방문하는 많은 사람들과 지인들에게 그 사진을 보여주며 우리를 소개하셨는데, 투쟁의 순간들을 자랑스러워 하시는 듯했다. 유족이 직접 나섰기에 기존과는 다르게 좀 더 나은 결과가 있던 투쟁이라 생각했는데, 그가 투쟁을 함께 할 수 있어서 다행이었던 거 같다. 풀어낼 수 없는 커다란 감정들을 투쟁을 하면서 좀 더 감당하실 수 있게 됐을 지도 모른다. 후옌님은 도착하여 흐엉님을 붙잡고 울며 한참을 말씀하시다가, 2층에 올라가서 뚜안님과 외가 조상님들의 사진이 걸린 곳에서 또 한참을 울며 말씀하셨다. 향을 피우고 초를 켜둔(귀신들을 부르는) 곳이라 나는 가급적 빨리 나오고 싶었는데, 뚜안님의 영정 앞에 합장하고 선 후옌님의 말이 끝날 때까지 자리를 뜰 수 없었다. 베트남어를 거의 모르지만 어떤 말을 했을지 짐작이 갔기 때문이다. 뚜안님을 마음에서 내려놓을 준비가 되었다는 말, 잘 되진 않을 지라도 노력할 거라는 말, 그리고 앞으로 뚜안님처럼 세상을 뜨는 사람이 없도록 할 거라는 말. 북베트남 사람인 다혜 동지가 통역하기로, 후옌님이 이제야 뚜안님을 보낼 마음이 들어 처음으로 편히 쉬라는 말을 꺼냈다고 했다. 그 날은 후옌님의 마음이 충분히 극복할 힘을 낼 수 있어 보이지 않아서 안쓰러웠다. 뚜안님의 남동생인 득안님은 오후 늦은 때 귀가했지만 낯선 손님들이 가득해서 안쪽 부엌에 들어가 혼자 식사했다. 얼굴이 뚜안님과 많이 닮아서 처음에 보고 깜짝 놀랐다. 같은 방을 썼던 태은 동지는 숙소에 돌아와서 그가 뚜안님과 너무 닮아서 속상했다 말했다. 내가 뚜안님의 부모라도 그를 볼 때마다 먼저 세상을 떠난 딸이 떠올라 힘들 거 같아 많이 공감했다. 해가 저물고 어두워지자 득안님은 반숭 동지와 함께 호치민에서 젊은 사람들이 많이 가는 거리로 우리를 안내해 줬다. 도시의 밤이 화려한 불빛으로 밝은 건 어디나 비슷하겠지만, 그곳은 여기저기에 꼬마 전구를 두른 장식이 많은 게 아기자기해서 예뻤다. 도로는 오토바이가 대부분을 차지하고 인도에도 사람들이 많아서 정신없어도, 활기찬 밤거리를 걷는 게 즐거웠다. 개인적으로는 사람이 많은 곳도, 화려하게 밝은 곳도 좋아하지 않는다. 하지만 친구들과 이곳저곳을 누비던 뚜안님이 그 시간의 거리를 활보하던 모습을 상상하자, 마음이 아리면서도 흐뭇했다. 득안님이 뚜안님의 SNS에 게시된 적 있는 응우옌후에 거리로 데려가 줘서 넓은 공터에 멈춰 바람을 쐬었다. 하늘을 올려다 보니 보름달이 밝게 빛나고 있었다. 공교롭게도 100일재를 지내는 날 즈음에 뜬 보름이라 한국 무속에서 보름달의 빛이 망자들을 이끌어 준다 믿는 게 떠올랐다. 휴대폰 카메라로 달 사진을 찍는 나에게 박기자님이 베트남에서 보는 달은 다르냐고 물었다. 별로 다를 게 없다고 대답하면서, 변함없는 어떤 걸 생각했다. 어디에서 보든 같은 달처럼, 어디에서 왔든 모두 소중한 사람이라는 걸. 낯선 거리에 가득 찬 낯선 사람들이 저마다 사랑하는 이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 밤풍경이 새삼 소중했다. 옆에 나란히 선 동지들에게도 고마운 마음이 보름달처럼 차올랐다. 불교의 장례를 잘은 몰라도 49일재면 끝인 셈인데 100일재를 또 지내는 이유를 박기자님이 물어보니 저승에서의 심판을 잘 치르게 부탁드린다는 의미라고 했다. 이게 장례의 진짜 끝이라 앞으로는 기일에 제사를 지내는 일만 있다 들었다. 내가 느낀 바로는 뚜안님을 조상들이 다 잘 데려가셨고 일도 거진 마무리 되었기에, 100일재는 뒤풀이 같은 의식이었다. 그래서 첫 날부터 쏟아진 후옌님의 눈물에 마음이 무거웠지만, 오체투지 날이나 서울 농성 해단식 날처럼 울진 않았던 거 같다. 첫번째 100일재는 유골함이 안치된 린손하이호이 절에서 이튿날에, 두번째 100일재는 그 다음 날 흐엉님의 집에서 치뤄졌다. 이틀에 걸쳐 두 번 하는 이유를 물어보니, 당일에 참여하지 못하는 친척들을 위해 집에서 한 번 더 하는 거라고 들었다. 린손하이호이 절이 숙소에서 3km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해서 동지들이 걸어 가자고 했다. 희정 동지는 가는 길에 뚜안님 영정 앞에 놓을 꽃을 사려고 꽃을 파는 곳이 있나 내내 주변을 두리번 거렸다. 그 전 날에도 두바이 쫀득 쿠키가 한국 젊은 사람들 사이에 유행이란 걸 알고 하노이에서 사온 그 간식을 뚜안님 영정 앞에 올려 놓으셨다. 걸어가는 길은 인도와 도로의 구분이 모호하고 좁은 인도 여기저기의 시멘트가 깨져 있어서, 나는 거의 바닥만 보며 걸었다. 도로에는 쉴새 없이 오토바이가 다니고 가끔 군데군데 도로 보수 공사를 하는 노동자들이 보였다. 신호등은 고사하고 횡단보도 표시도 흐려 도보로 다니는 게 쉽지 않았지만, 한국에서 쉽게 보이는 지하 대공사가 없어서 다행이었다. 한국에서 지하 환풍구를 비롯한, 깊이를 알 수 없는 철망 위를 걸어다닐 때면 발밑의 빈 감각에 불안감을 느끼곤 했다. 그 때문인지 베트남의 길에서 되려 안정감이 느껴졌다.(물론 보도 경사에 미끄러져 한 번 거하게 넘어지긴 했다.) 비록 베트남의 절은 린손하이호이 한 군데 밖에 가보지 못했지만, 한국의 절 대부분이 산에 있거나 납골당의 접근성이 좋지 않은 것과 차이가 있어서 신기했다. 절의 규모가 비교적 작았는데, 바로 앞에 한국 대형 마트가 엄청 큰 부지를 차지하고 있는 게 거슬렸다. 호치민 땅값이 비싸도 거대 자본들은 과세의 치외법권인 거처럼 넓은 면적을 자랑했다. 빨간 바탕에 노란 낫과 망치 그림의 깃발이 황성적기와 함께 거리 곳곳에 나부꼈지만, 그 혁명의 색에 어울리지 않는 모습을 곳곳에서 발견할 때마다 속이 쓰렸다. 뚜안님을 비롯한 망자의 유골함이 봉안된 탑에 올라가 인사를 하고 내려와 법당에서 예불을 드렸다. 한국의 절이 대부분 목재로 지어진 것과 다르게 베트남의 절은 다른 건물들과 비슷한 대리석 바닥에 석조 건물이었다. 더운 지방이라 그런 건지는 몰라도 절에서 맨발로 다니는 게 문제되지 않아서 관대하다고 생각했다. 베트남어는 잘 모르지만 불경을 외는 말에서 익숙한 산스크리트어가 들렸다. 천수경을 읊고 반야심경도 읊고 관세음보살도 찾은 거 같다. 시간마다 드리는 예불과 달리 뚜안님의 가족들이 의뢰한 의식이라 그런지 반숭 동지와 후옌님, 흐엉님에게 스님이 불경을 읽는 도중에 향을 비롯해서 뭔가를 건네셨다. 한국의 절에서보다 사용하는 타악기의 종류가 많았던 거 같고, 금속 악기나 큰 북을 중간중간 자주 쳤던 거 같다. 예불이 끝나고 뒷편의 선대 주지 스님이셨던 것 같은 분들의 영정 앞에서도 인사를 드린 후, 봉안탑으로 올라가 뚜안님의 영정 앞에 차려진 상에서 제를 지냈다. 뚜안님의 유골함은 그곳에 있는 다른 사람들의 유골함과 다르게 생겼다고 태은 동지가 말했다. 둘러보니 정말 다른 유골함들은 연꽃 봉오리처럼 생겨서 녹색이나 흰색, 옥색같은 차분한 색에 사진이 붙어 있었는데 뚜안님의 유골함은 분홍색인 데다 금색 펄이 들어갔는지 상당히 화려해서 눈에 띄었고, 사진이 앞에 놓여 있었다. 한국에서 아끼던 친구의 납골당을 갔을 때 본 바에 의하면, 한국의 유골함에는 가운데 이름만 새기고 이름표나 사진을 붙이지 않는다. 그래서 어디에서 장례를 치렀는지에 따라 유골함의 모습이 다르게 남는 걸 알았다. 뚜안님 부모님이 한국에서 꽤 비싼 돈을 주고 진공 유골함으로 골랐다는 얘길 희정 동지에게서 들었다. 가격을 듣고 판매자가 상당한 바가지를 씌웠다 싶었지만, 자식의 마지막 길에 구태여 돈을 아끼고자 셈을 할 분들은 아니란 생각이 들어 더 마음이 안 좋았다. 처음에 봉안탑에 올라왔을 때부터 눈물을 보이던 후옌님은 결국 의식 내내 우셨고, 뚜안님의 사촌 언니도 울음을 그치지 못했다. 뚜안님보다 나이가 어린 사람이 맨 앞에서 뭔가를 해줘야 했는데 득안님이 참여하지 못해 그 사촌 언니가 자리했다. 염불 외는 스님들 뒤로 두툼한 작업복을 입은 반숭 동지가 보였다. 예복같은 단정한 옷을 입은 다른 가족들과 차이나는 복장을 고집하신 이유는 뚜안님이 사준 옷을 입어서 그렇다고, 희정 동지에게 들어 마음이 아팠다. 제를 지내는 동안 우는 사람들이 늘어가더니 태은 동지도 온통 눈물에 젖은 얼굴로 향을 꽂았다. 참여한 사람들 모두 향을 하나씩 받아 향로에 꽂은 뒤 차려진 상 앞에 서서 음식을 한입 먹고 의식이 끝났다. 나도 마지막에 뚜안님의 사촌 언니와 나란히 서서 용과 한 조각을 뚜안님의 영정을 보며 먹었다. 망자와 함께 하는 마지막 식사라고 했다. 유족들이 우는 모습을 보고 뚜안님도 속상해서 같이 부둥켜 안고 우는 듯하다고 생각했다. 더는 볼 수도, 들을 수도, 만질 수도 없는 대상이 되어버린 사람에 대한 마음은 슬프지만 생자도 망자도 각자가 가야 하는 길이 있다 생각해서 그런지 나도 함께 울지는 않았다. 뚜안님 또한 가족들이 계속 슬픔에 잠기는 걸 바라지 않는다고 느꼈다. 그 마음이 후옌님에게 잘 전달되었을지는 몰라도, 그 이후에는 눈물을 좀 덜 보이셨던 듯도 하다. 두고가야 하는 기억, 감정. 죽은 사람도 남은 사람도 자신 몫의 삶은 계속되는 걸 알고 있어서, 나는 어떻게 살아가면 좋을지 좀 고민되기도 했다. 봉안탑에서 내려와 상에 올렸던 것들을 마당의 소각장에서 태우는 모습을 보다가, 후에님이 안쪽에 상이 차려져 있으니 먹으라 하셔서 식사를 하러 자리에 앉았다. 절에서 마련한 음식이라 모두 채식이라고 했는데 한 상 가득 다양한 종류의 음식이 올라와 있어서 신기했다. 한국의 절 밥이라면 메뉴나 조리 방식이 거의 정해진 편이었지만 베트남의 절에서는 채소 전골에 콩고기조림, 볶음밥, 채소 모듬 무침 등의 여러 요리를 볼 수 있었다. 양도 많았는데 부처님이 주신 음식이라 남은 건 포장해서 가야 한댔다. 식사에 후식으로 수박까지 주셔서 나는 팔레스타인 티셔츠와 함께 사진을 찍었다. 엄청 많이 울던 사람들 모두 다행히 식사는 잘 했다. 반숭 동지는 한국에서의 굳은 얼굴로 돌아와 있었고 후옌님도 슬픈 표정이었다. 희정 동지가 한국에서 그들과의 첫 식사를 했을 때는 사고가 벌어지고 며칠 지나지 않은 때여서 한 숟갈도 뜨지 않고 계속 울었다고 했다. 아무래도 그럴 거 같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베트남에 온 두 분이 잘 먹고, 울더라도 많이 웃고, 가족들도 만나니 좀 나아 보여 마음이 놓인다고 했다. '뚜안님을 잃었지만 수많은 사람들을 알게 되어 감사하다’던 반숭 동지의 말이 생각났다. 우리가 그들의 마음에 난 구멍을 채워줄 수는 없어도, 함께 아파할 줄 아는 인간일 수 있어 정말 다행이었다. 시간이 지나면 그들도 상실을 마음에 품고 살아가는 일에 적응할 거 같아서, 그리고 그 과정에 우리가 조금이라도 도움이 된 거 같아 안심됐다. 그 때문인지는 몰라도, 뚜안님의 가족들은 우리를 엄청 먹이려고 했다. 마치 뚜안님에게 먹이고 싶었던 걸 우리한테 먹이려는 듯이, 계속해서 뭔가를 대접해 주셨다. 한국에 가면 이런 거 못 먹는다며 먹일 수 있는 거의 모든 걸 다 내오신 거 같다. 후에님이 우리 식사를 다 감당하시느라 쉬지 못하시는 거 같아 죄송한 마음이 가득했는데, 가족 분들과 반숭 동지 친구 분들 또한 우리에게 뭐를 먹이는가에 대한 토론을 하는 걸 보고 약간 포기했다. 이 사람들은 지금 우리에게 대접을 하고싶은 마음이 고생스럽고 귀찮은 것보다 큰 거구나. 누군가가 호의를 베풀 때 충분히 감사하며 받아들이는 거도 필요한 일이라 나는 그 뒤로 불편한 마음을 가지지 않기로 했다. 물론 뚜안님이 나와 함께 있는 기분이 들어 그럴 수 있었을 지도 모른다. 마지막 날에 반숭 동지의 친구인 홍님이 우리를 집에 초대해서 식사를 대접하셨는데, 그 날 뚜안님이 본인이 사랑하고 소중히 여기는 사람들을 우리에게 소개시켜 줄 수 있어서 좋았다고 말한 듯한 기분이 들었다. 홍님이 식사를 하기 전에 잔을 들고 이 자리를 마련할 수 있게 되어 기쁘다는 말씀을 하신 때 그런 생각이 들어, 이들의 마음을 받아들이는 거도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이라 느꼈다. 절에서의 일이 다 끝나고 동지들과 앞의 한국 대형 마트를 구경 갔다가 저마다 기념품이나 선물 등을 사서 귀가는 그랩 택시로 했다. 매장 안에는 한국어도 많고 한국에서 파는 물건에 베트남어 라벨만 붙은 채로 판매 되기도 했다. 마시멜로를 쓰지 않은 듯한 두바이 쫀득 모찌도 팔고 있었다. 마치 한국이라는 작은 왕국이 그곳에 있는 듯해서 기분이 묘했다. 게다가 섬유 제품들은 한국 가격의 반도 안되어서 자본이 값싼 노동력 어쩌고를 통해 얼마나 많은 이윤을 또 불리는지만 확인해 분노했다. 국가가 주도하는 자본주의를 눈으로 확인하니 속이 답답했지만, 이 곳의 사람들은 만족하는 낯빛이라 한국어로 판촉 홍보를 하는 직원들에게 애매한 미소만 지어 보였다. K팝을 좋아한다는 뚜안님의 사촌 언니에게 그러했듯, 한국 그렇게 좋아할 만한 나라가 아니라는 말을 몇 번이고 삼켰다. 식당이 많은 거리의 야외 테라스에 저녁식사 자리가 마련됐다. 고깃집이라고 생각했는데 여러 요리가 있었고, 채식을 하는 내가 먹을 수 있는 음식도 있었다. 뚜안님의 가족들은 매 끼니마다 채식하는 나를 먼저 챙겨줬어서 고맙고 미안했다. 그래도 더러 채식하는 사람들이 있는 편이라 한국만큼 비건 음식을 구하기 어렵지는 않았다는 점이 그나마 나았다. 첫날에도 후옌님이 보름 때는 채식을 한다고 해서, 베트남 사람들은 종교적 이유로 채식을 하는 게 자연스럽다는 걸 알았다. 나는 락토오보 비건이라 생선도 먹지 않고, 채식을 하기 전에도 비린내 때문에 생선을 그다지 좋아하는 편이 아니었다. 그런데 가운데 나온 흰 살 생선을 보니 되게 먹음직스럽고 맛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먹고싶은 마음이 든 게 아닌 거 같아 혹시 뚜안님이 생선을 좋아하냐고 후옌님에게 여쭤보니 그렇다고 하셨다. 뚜안님이 나와 함께 있다는 걸 알았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그저 사람도 너무 많고 시끄러워 정신이 혼미했어서 집에 가고 싶었다. 득안님이 내 뒷쪽에 지나가다가 맥주를 쏟으며 잔을 깼는데, 그때 조금 정신이 들어서 옷에 술도 묻었으니 숙소로 돌아가고자 벌떡 일어났지만 반숭 동지는 우릴 보낼 생각이 없었다. 이윽고 비가 쏟아져 우리가 앉아 있던 야외석의 지붕에 굵은 빗방울이 부딪히는 소리가 굉장히 크게 났다. 나는 빗물에다 옷에 묻은 술을 씻길 겸 가겠다 했으나 여전히 그들은 우릴 보내고 싶지 않아 했다. 떨어지는 빗방울에 술 묻은 부분이라도 씻어내려 옷을 지붕 밖에다 휘둘렀다. 반숭 동지는 급기야 뚜안이 우리를 가지 말라고 해서 비가 내리는 거라 했다. 이 시기는 우기가 아니라 비가 오는 일이 흔치 않다는 거다. ‘제발’이라는 감정으로 ‘얼른 각자 자기 자리로 돌아가자’는 생각을 하며 옷에 빗물을 떨구었다. 숙소에 돌아와 태은 동지가 그 모습을 보고 내가 귀신을 쫓는 줄로 알았대서 아니라곤 못하겠다 대답하며 깔깔 웃었다. 하지만 망자가 생자와 너무 오래 어울리는 건 좋지 않고, 나는 그걸 일상적으로 경험하고 있기 때문에 반숭 동지에게 남은 미련이 마음에 걸리긴 했다. 그 다음 날 오전, 스님들이 흐엉님의 집에 오셔서 더 많은 가족들과 2층의 영정이 있는 방에 모두 모였다. 이번에는 득안님도 참여하신 자리라, 그가 맨 앞에 앉아 어제 뚜안님의 사촌 언니가 했듯 뭔가를 받고 그릇에 수저를 꽂기도 했다. 시간이 지나며 한둘씩 훌쩍이는 소리가 들렸지만 한결 나아진 거 같았다. 전날에도 그랬는지는 기억이 잘 안 나지만, 스님들이 읽는 축문에 대구의 주소를 읋는 게 들려서 다혜 동지에게 물어보니 사망한 자리에 대한 주소가 들어간 거라고 했다. 한국에서는 생자의 거주지가 축문에 들어가는 게 생각나서, 이 곳의 사람들도 망자가 자기가 죽은 자리를 떠나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거 같았다. 첫 날에 후옌님이 올라온 때 함께 있었을 때는 어지럽고 눈앞도 깜깜해졌었는데(그날 상당히 피곤했던 것도 맞긴 하지만), 스님들이 와서 제를 지내는 때엔 더 많은 사람들이 왔어도 꽤 괜찮았다. 물론 망자들도 많이 온 거 같았고, 왠지 뚜안님의 조상님들이 안전히 잘 데리고 간 느낌이었다. 다혜 동지에게 베트남에서도 죽은 사람을 조상들이 데려간다고 생각하냐 물으니 중국의 영향을 많이 받은 동아시아 문화권이 대부분 그렇다는 답을 들었다. 그래서인지 언어는 거의 알아들을 수 없지만 제례의 대부분이 낯설지 않았던 듯하다(시작하기 전에 창문을 여는 것도 익숙한 풍경이었다). 축문과 경문을 읊는 일이 끝나고 스님들이 가족들을 위로하는 말을 전하고 떠나셨다. 일어난 일은 돌이킬 수 없고 사람은 모두 죽으니 적당히 슬퍼해야 망자도 자기 갈 길을 잘 간다는 얘기였다. 부처님의 보살핌을 받으며 이제 편안해졌으니 망자를 위해서도, 본인을 위해서도 슬픔을 잘 달래어 이겨내라는 말이 낯설지 않았다. 확실히 장례도 제례도 살아있는 사람을 위로하기 위한 일이라, 가족들에게 이 모든 게 충분히 위로가 되었길 바랐다. 점심 식사는 육수를 쓰는 쌀국수 집에서 먹기로 얘기되어 채식하는 나는 제사 상에 올렸던 음식으로 식사했다. 흐엉님과 후에님과 그 아들인 바오, 딸 아이를 안은 뚜안님의 사촌 언니와 반숭 동지 친구 응우웯님과 함께 집에서 밥을 먹었다. 응우웯님은 한국을 좋아한다고 하셔서 번역기로 베트남어와 한국어를 번갈아 쓰며 단어를 서로 가르쳐 줬다. 나는 사랑하지 않는 내 모국이 그들에겐 좋은 대상이라는 걸 받아들이긴 어려웠지만, 애정하는 마음이 담겨 있어 그에 부정적인 기색을 내비칠 수 없었다. 한국에 자주 간다는 응우웯님이 한국에서도 보자고 하셔서 좋다고 했다(이후 페이스북 메신저로도 서울에서 만나자고 하셨다). 점심을 먹고 좀 쉰 뒤 저녁 식사 때가 되자 출장 식당 업체에서 상과 의자와 필요한 음식에 얼음 일체를 들고 흐엉님의 집에 왔다. 아침에 봤던 사람들보다 더 많은 이들이, 그러니까 일가 친척 식구들이 다 모인 자리가 마련된 거다. 분위기는 잔치 같아서 큰 일을 치르고 난 뒤의 뒤풀이 같은 느낌이었다. 40명이나 되는 사람들을 수용하기 위해 골목에까지 상을 폈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모였는데 다들 데면데면한 게 하나도 없었다. 득안님도 사촌들과 대화를 하며 웃고 즐거워 해서 신기했다. 영어를 할 줄 아는 10살 아이가 나와 대화를 하려 했는데, 네다섯 살인 바오가 이제 낯가림을 안하는지 계속해서 말을 했다. 그 사촌들이 기억하는 뚜안님은 어떨지 물어보고 싶었는데 아쉬웠다. 사건 이후로 어플로 베트남어를 조금씩 배워봤지만 무슨 대화를 하기엔 역부족이었다. 친척 가족들도 다 보내고, 반숭 동지의 친구 분들이 우리와 함께 놀러 나가자 하셨다. 태은 동지는 전날에 후에님한테 받은 아오자이를 입었고, 나도 응우웯님에게서 받은 아오자이의 바지를 입은 상태였다. 희정 동지가 이 사람들이 우리를 갖고 논다고 어처구니 없어 했지만 아무튼 신이 난 베트남 사람들을 막을 수 없었다. 한참 택시를 타고 나가 굉장히 넓은 야외 카페에서 어렵사리 주문을 하고 자리에 앉았다. 예쁜 카페 다니는 걸 좋아하던 뚜안님이 왠지 확실히 좋아했을 거 같은 곳이었다. 연못도 있고 조화 나무도 있고 진짜 나무도 있고 정원 바위들도 있는 광활한 카페였으니, 이제 보니까 호치민은 자본가에게만 후한 거 같았다. 국가 자본주의에 분노하는 것도 잠시, 곧 그들은 한국의 다른 대형마트를 구경 가자고 한다. 나가는 길에 발견한 셀프 포토 스튜디오에서 사진을 찍자고 해서 열몇 명이 옹기종기 모여 어떻게든 네 장에 한 번씩은 다 나오게 만들었다. 홍님이 우리에게 한 장씩 뽑아 주시고 다른 사람들은 사진을 링크로만 가졌다(물론 우리도 링크를 공유 받았다). 또 택시를 타고 가기엔 사람이 너무 많아서, 걸어가기로 했다. 근처에 있으니 가볼만 하다 싶어 가는 길이 전날에 절에 가며 걷던 동네 길이랑 달랐다. 신호등은 여전히 드물었지만 응우옌후에 거리를 다니던 때처럼 잘 닦여진 인도 곳곳에 2주 뒤의 중추절을 축하하는 큰 장식물들이 있어서 포토존 삼아 또 사진을 찍었다. 사실 나는 자본이 사람들이 실제 살아가는 삶보다 포장된 것을 보여주기 좋아하는 게 국가 불문 똑같은 거 같아서 한편으로는 맥 빠졌다. 후에님이 태워주는 오토바이도 타고 하면서 베트남의 번화가를 누볐다. 시간이 지나도 지치지 않는 것 같은 사람들을 진정시키고 숙소로 돌아왔다. 아마 그때부터 그들이 계속 내년(베트남에서는 음력 달력을 써서 아직 2025년이다.) 뚜안님의 기일에도 오라고 했던 거 같다. 홍님이 다음 날에 집으로 초대해서 식사를 대접하겠다는 말을 전하자 희정 동지는 거절할 방법을 찾지 못해 골치 아파 했다. 그러나 ‘배불러서 더는 못 먹겠다’는 말이 가볍게 무시되는 거처럼, 우리의 거부 의사는 애초에 중요하지 않았던 거 같다. 갚을 길 없는 호의와 환대를 받아 부담스러워 하셨지만, 다혜 동지도 사실 베트남 사람들은 다들 정이 많아 이러는 게 보통이라고 말했다. 나도 홍님의 집에서 뚜안님이 우리가 뚜안님의 사랑하는 사람들을 만나서 좋은 시간을 보내도록 하는 걸 원하는 거처럼 느꼈다고 말을 전하긴 했지만, 그의 마음에 쌓이는 부채감을 덜어주진 못했다. 결국 홍님의 동네를 구경 다니고 점심을 대접받은 뒤에야 우리는 풀려날 수 있었다. 희정 동지는 호치민에서 그래도 전쟁기념 박물관에는 한 번 가보는 게 좋다고 해서 마지막으로 동지들과 그곳을 들렀다. 한국에서 동지들이 상경 농성을 한 장소도 전쟁기념 박물관 앞인 게 떠올랐다. 게다가 거기에는 한국이 베트남 전쟁에 가담해서 학살한 주제에, ‘그들을 죽이는 게 당연하고, 절멸시켜야 한다’는 당시의 문구를 베트남어로 기재해놔서 한베 평화 재단이 시정 요청을 한 바가 있다. 도무지가 자랑스러울 법한 게 하나도 생각나지 않는 한국을 베트남의 전쟁 기념관에서는 전쟁을 도와줬다는 거처럼 포장해 놔서 구역질이 났다. 들어가면서 보이는 미군의 탱크나 무기 같은 것들을 전리품처럼 자랑스럽게 전시해 놨지만, 호치민은 전체적으로 사실상 미국의 꼭두각시인 한국을 선망하는 거 같은 느낌이라 비위가 상했다. 북베트남인 하노이 지역은 남베트남인 호치민과 분위기가 다른 편이라고 들어 궁금했다. 그러고 보면 반숭 동지도 흐엉님도 원래는 고향이 하노이 쪽이라고 들었다. 전쟁 이후 호치민이 산업화가 많이 되고 공장이 들어서며 일자리를 찾으러 이쪽으로 이동하는 사례가 흔했던 거 같다. 마지막 전시관이 전쟁의 아픔, 상흔 등의 얘기로 고엽제 피해자들과 그 자손들의 장애를 말하고 있었지만, 나는 베트남의 정부 또한 베트남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관심이 별로 없다고 느꼈다. 그들이 걸어놓은 낫과 망치 깃발이 별 의미 없는 것처럼, 학살당한 사람들을 애매하게 넘긴 그곳이 기묘했다. 그리고 지금 이 글을 쓰는 시점에는, 분명 그런 곳이 전쟁의 잔혹성을 기억하고 다시는 일어나지 않도록 하기 위해 만들어진 걸 텐데 아무도 그런 걸 기억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더더욱 공허하다는 생각이 든다. 방산 산업으로 야금야금 돈을 벌고 있던 한국. 전면적으로 시작된 침공에 치솟는 방산산업 주가. 자본의 개처럼 미쳐버린 제국 꿈나무인 나라를 호치민 사람들은 좋아해줬다. 그런 현실이 너무 끔찍하다. 도로에서 식탁을 펼친 가게의 반쎄오를 마지막 식사로, 우리는 한국으로 돌아왔다. 반숭 동지와 홍님이 함께 나와 태은 동지를 데려다 주시고, 공항 안으로 같이 들어가지 못해 입구에서 사진을 찍었다. 한국에 돌아온 날은 하루 종일 자고, 그 다음 날에도 저녁쯤에야 겨우 밖으로 나왔다. 우리가 베트남 땅을 밟자마자 들은 세종호텔 로비 농성 동지들의 연행 사건이 마무리되고 열린 체크인 집회에 자리했다. 반숭 동지에게 진수 동지가 땅으로 내려왔고 다른 사람들과 경찰에게 단체로 잡혀갔다는 말을 전하지 못했다. 진수 동지가 고공에 있을 때 반숭 동지에게 전화로 인사를 하다가 목이 메여 우시던 날이 생각나서 내내 마음에 걸렸다. 페이스북으로 베트남에서 만났던 사람들을 하나씩 찾아 친구 요청을 했다. 논바이너리 젠더퀴어라서 ‘여성스러운’ 옷을 입지 않는 내가 그들과의 시간이 그리울 때면 응우웯님이 준 아오자이를 입어 본다. 태은 동지는 후옌님의 딸이 되기로 했다고 말했다. 나는 여유가 될 때 베트남어 기초 수업을 들어보기로 결심한다. 잃고 나서 얻게 되는 것, 살아있는 사람으로의 책임, 주어지고 선택할 수 있는 기회들에 대해 생각한다. 희정 동지가 농성 투쟁 때 하셨던 말처럼, 우리 노동자들은 서로 동등한 관계니까 나는 동지도 친구라고 해 본다. 친구의 말과 문화에 대해 알아보고자 어플로 좀 더 열심히 학습해 본다. 뚜안님의 사건을 처음 접했던 날처럼, 그의 이름이 어떤 의미인지 알고 싶어서 베트남어를 공부하고자 했듯. 살아있는 사람이, 혹은 죽어서 떠난 사람이 어떤 존재인지를 알아가고자 그 투쟁에 함께했다. 또한, 애도하는 일의 감각을 알고 싶어서도 매번 자리했다. 그러한 결과로 나는 뉴스나 보도자료에 적히는 글자나 숫자가 아닌, 실재하던 인물을 느끼고 기억하는 일은 소식으로만 접하는 것과 다르다는 걸 알게 됐다. 살아있는 동안 단 한 번도 만난 적 없던 뚜안님과 내가 같은 사람이라는 걸 여러 번 깨달을 때마다, 나는 우리 노동자 민중을 하나로 이을 수 있는 어떤 것에 대해 자주 생각했다. 각각의 사람들을 하나로 단결시킬 수 있는, 공통의 감각. 계속 되는 자본의 갈라치기와 대상화의 홍수 속에서, 범람하는 탈인간화에 나는 계속해서 우리가 사람임을 잊지 말자고 말하고 싶다. 한사람 한사람, 각자의 우주가 더는 무너지지 않길 바라며 우리를 스쳐간 많은 목숨들에 조의를 표한다. /* 기본 blockquote 스타일 */ blockquote { border-left: 4px solid #c0392b; /* 사이트 분위기와 맞는 붉은 계열 */ padding: 12px 18px; margin: 20px 0; background: #fafafa; font-style: normal; color: #333; line-height: 1.6; } /* blockquote 안의 p 태그 정렬 */ blockquote p { margin: 0 0 10px 0; text-align: justify; } /* 마지막 p 태그 여백 제거 */ blockquote p:last-child { margin-bottom: 0; } -
[리포트] 가부장제, 제국주의, 자본주의에 맞선 3.8 여성파업대회3월 6일 여성 총파업 집회에서 수많은 노동자와 청년, 특히 여성과 성소수자들이 모여 성차별을 당장 중단할 것을 요구하며, 여성을 착취하고 억압하며 학살하는 가부장제, 제국주의, 자본주의에 맞서 싸우기로 결의했다. 3월 8일 여성의 날을 맞아 열린 여성파업 집회에 나와있습니다. 오늘은 파업을 하고 참여한 반도체 생산기업 KEC지회를 비롯해, 1366서울센터, 톨게이트지부, 학습지노조 등 다양한 노동조합의 여성노동자들, 그리고 수많은 노동자와 민중들, 특히 여성과 성소수자들이 모였습니다. 연차 휴가를 내거나 가사 노동, 교육을 중단하고 집회에 참여한 노동자와 학생들도 참여했습니다. 지난해 여성과 성소수자들은 “구조적 성차별은 없다”고 주장한 극우 윤석열 정부에 맞선 투쟁의 최전선에 섰습니다. 그러나 윤석열 정부를 끌어내린 후에도 억압받는 이들의 삶은 여전히 변하지 않았습니다. 이재명의 민주당 정부 아래서도 여성들은 여전히 저임금과 불안정한 노동 조건에 시달리고 있으며, 정부는 노동유연화 확대를 추구하는 노동개악을 추진 중입니다. 이는 여성, LGBT, 이주노동자에 대한 차별과 불안정성을 심화시킬 것입니다. 또한 미국의 이란, 베네수엘라 공격과, 팔레스타인에 대한 지속적인 집단학살에서 볼 수 있듯 제국주의적 침략이 고조되는 가운데, 한국 정부는 제국주의 국가들과 적극적으로 공모하며 전쟁 산업을 확대하고 이윤을 챙기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현대중공업, 한화 등 한국 대기업의 기술과 장비를 이용해 팔레스타인 여성과 미성년자에 대한 학살을 지속하고 있습니다. 한국 정부는 트럼프가 제안한 위선적인 ‘평화위원회’ 참여도 적극적으로 검토 중입니다. 이 모든 행위는 팔레스타인 여성과 미성년자를 죽이고 있으며, 중국과의 제국주의적 패권대권 아래 동아시아 전쟁의 미래를 열 것입니다. 여성과 성소수자를 착취·차별·억압·학살하는 이러한 가부장제, 제국주의, 자본주의에 맞서기 위해, ‘3.8 여성파업 조직위원회’는 일곱 가지 요구를 제기합니다. 1. 일터의 성차별 금지, 진짜 사장 책임 강화 2. 가사사용인/특수고용/프리랜서/플랫폼/장애인/이주 노동자의 노동기본권 전면 쟁취 3. 돌봄 공공성, 돌봄 일자리 확대 4. 이주노동자 사업장 이동의 자유 보장, 강제단속/추방 금지 5. 포괄적 차별금지법 즉각 제정과 젠더차별 금지 6. 비동의강간죄 도입/포괄적 성교육 의무화/임신중지에 건강보험 적용 7. 팔레스타인 학살 지원 중단, 제국주의 전쟁 반대. 이러한 요구를 바탕으로 우리는 모든 여성과 LGBT, 억압받는 이들을 위해 계속해서 싸울 것입니다. 이를 위해 모든 노동자의 여성 파업을 계속 조직해 나갑시다. 투쟁! Instagram에서 이 게시물 보기 스튜디오알(@studior2468)님의 공유 게시물 [English] Hi, I’m Dolmeng and I’m here at the rally of women’s strike, in the anniversary of 8 March. Today more than hundreds of workers and people, especially women, and LGBTs gathered, including many women workers on strike, from various unions, such as the union of KEC corporation, the semicondutor company, and also the unions such as call center, tollgate, and tutoring industry. There are also many workers and students, who participated the rally, using annual leave or stopping the domestic labor, or the education. Last year, women and the LGBTs were at the forefront against the far right Yoon government, which insisted that “there’s no systematic gender discrimination”. but after overthrowing the Yoon government, the life of the oppressed is still the same. in the new democratic party government of Lee jae-myeong, women are still suffering from low wage and precarious conditions, and the government is pushing the labor reform, which seeks to expand the so-called ‘flexibility’ of labor, which means the aggravation of the discrimination and precarity of the women, LGBT, and migrant workers. Also with the rising imperialist aggression, as we can see from United States’ attack on Iran, Venezuela, and ongoing Genocide on Palestine, the Korean government is actively being complicit with the imperialist countries, expanding and profiteering from war industry. Israel is sustaining the Genocide on Palestinian women and minors, using technologies and equipment of Korean large companies like HD Hyundai, and Hanhwa. and Korean government is now positively considering to join the hypocritic “Peace Board” proposed by Trump. All these acts are killing women and minors in Palestine, and will open the future of the war on East Asia, as a result of the imperialist confrontation with China. so to confront all these patriarchy, imperialism, and capitalism, that exploit, discriminate, oppress, and massacre women and minors, the women’s strike organizing committee has seven demands. 1. No sexual discrimination in the workplace 2. full labor right for all workers, including domestic worker, self-employed, Freelancer, gig worker, disabled, and migrants. 3. Full Public care system 4. Freedom of changing workplace for migrant workers, and No crackdown and deportation 5. ‘comprehensive anti-discrimination law’ right now, including such as healthcare for the gender transition 6. criminalizing the ‘rape without consent’, comprehensive sexual education and healthcare for abortion right 7. Stop complicit on Genocide on Palestine, No more imperialist war. with these demands, we will keep fight for all women and LGBT, and the oppressed. for that, Let’s keep organize the women’s strike of all workers. 투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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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3.8 여성의 날을 앞두고 들어본 반도체 노동자들의 목소리반올림·빵과장미의 ‘찾아가는 집담회’ 현장 스케치 2026년 2월 21일. 여성의 날을 앞둔 토요일 오후, 설 연휴의 들뜬 기운이 가시지 않은 거리와 달리 내가 향한 곳에는 조금 특별한 긴장감이 흐르고 있었다. 매년 3월 8일 여성의 날을 앞두고 우리는 분노와 결의를 다지곤 하지만, 올해 내 마음 한구석은 유독 무거웠다. 초부터 화려한 AI 호황과 반도체 산업의 장밋빛 전망이 쏟아졌지만, 그 화려함 뒤에 더욱 잔혹하게 가려진 노동자들의 현실을 외면하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문득 작년 9월 27일, 기후정의행진 현장에서 반올림 부스를 도우며 마주했던 영정사진 속 얼굴들이 떠올랐다. 그 생생한 모습들을 기억하며 묻고 싶었다. 모두가 찬양하는 반도체 산업의 그늘 아래, 여성 노동자들의 '오늘'은 과연 어떤 모습일까. 여성과 성소수자 노동자들의 진짜 목소리를 세상에 꺼내 놓기 위한 우리의 간절한 시도가 이곳에서 시작되었다. 반도체 자본과 성장을 강조하는 정부, 이들은 현장에서 일하고 퇴근해 다시 집으로 출근하는 여성 노동자의 이중굴레를 걷어내고 있을까? 더는 일터에서 아프지 않고 죽지 않는 노동안전의 성장이 찾아온다는 것일까? 오히려 경제, 전쟁, 체제 위기가 더해져 잘나가는 때에 저들은 여성 노동자의 이중굴레를 더 옥죄고 있기에, 여성 노동자들이 파업으로, 투쟁으로 일어서는 것 아닐까. 1부: 왜 ‘여성파업’을 고민할까? 집담회는 '빵과장미’의 정은희 동지의 사회로 시작되었다. 사전 신청을 한 동지들이 하나둘 도착하며 반올림 사무실을 채웠다. 1부, 나는 발제자로서 사람들 앞에 섰다. 준비한 원고를 넘기며 내가 가장 깊게 고민하고 함께 나누고 싶었던 지점은 바로 ‘여성파업을 조직해야 하는 이유’를 되짚어 보는 것이었다. 다크램 인형권익위원회 동지의 발표 장면 빵과장미의 활동명 '광고판' 동지가 준비해 준 슬라이드를 보며 발제문을 준비할 때, 나는 밀려오는 분노로 마음이 힘들었다. 이재명 정부에서도 노동 탄압의 칼날은 멈추지 않았고, 그 칼날은 늘 가장 약한 곳부터 파고들었기 때문이다. 노동자의 건강권을 보장하지 않는 반도체특별법은 지난 1월 본회의를 통과했고, 2월 2일에는 세종호텔에서 농성하던 동지들이 폭력적으로 연행되는 사건도 발생했다. 여전히 노동자를 탄압하는 분위기 속에서 여성과 성소수자 노동자들은 존재 자체를 부정당하거나 더욱 깊은 소외로 내몰리고 있었다. 나는 이 비참한 현실을 단순히 '힘들다'는 하소연으로 끝내고 싶지 않았다. 우리가 겪는 이 부당함을 하나로 모아, 세상을 멈추는 강력한 힘인 ‘여성파업’으로 조직해 보자는 제안을 던졌다. 2부: 화려한 AI 호황 속 더욱 숨겨지는 노동자들의 현실 2부가 시작되기 전, 동지들이 함께 만든 반올림 마스코트 ‘진복이’ 영상을 보았다. 인형 진복이는 반도체 노동자들의 현실을 간결하면서도 날카롭게 짚어주었다. 짧은 영상이었지만 모두에게 울림을 주기에 충분했다. 이어 반올림의 상임활동가 이종란 노무사님이 마이크를 잡았다. 슬라이드에는 그동안 외면당했던 산재 피해자들의 모습이 하나하나 지나갔고, 이종란 노무사님은 눈물을 참으며 AI 산업의 화려한 전망이나 반도체 특별법 같은 이야기들이 정작 현장 노동자들의 생명과 얼마나 동떨어져 있는지 조목조목 짚어주었다. 이종란 노무사의 발표 장면 [이종란 노무사 발제문 발췌] “조혈기, 생식기, 정신질환 문제가 심각하다는 것이 이미 2020년 정부실태조사로 밝혀졌음에도 예방대책은 마련되지 않았다. 생식독성 피해로 인한 2세 질환 피해자들이 용기내어 산재신청을 했지만 정부와 국회의 외면속에 자녀산재법 개정이 계속 미뤄지고 있고, 우울, 수면장애, 아파도 출근하는 프리젠티즘 등의 정신건강 악화의 문제도 지속되거나 악화되었다. 2025년 3월 26일 삼성반도체 연구개발노동자 고 김치엽 님은 인력부족 속에 성과를 내기 위한 프로젝트팀에서 우울, 수면장애를 견디며 일하다 결국 자살로 생을 마감하는 비극이 초래되었다.” 국가가 경제 성장을 말할 때, 그 성장의 밑바탕이 된 노동자, 특히 여성 노동자들의 건강은 철저히 지워졌다. 특히 반도체 고등학교까지 만들며 아이들을 현장으로 밀어 넣으려는 정부가 정작 그 아이들이 마주할 위험은 감추고 있다는 사실에 주먹이 쥐어졌다. 발제 내용 중 반도체 산업에 여성 노동자가 유독 많은 이유가 기억에 남는다. 아시아의 기업주들이 여성 노동자를 선호해온 이유는 ‘손이 날래고 참을성이 있어 단순 조립 업무에 적합하다’는 성별 고정관념 때문이었다. 임금이나 노동조건에 대한 기대 수준이 낮고 통제가 쉽다는 이유로 젊은 여성들을 채용해왔다는 사실을 마주하며, 지금의 반도체 호황이 얼마나 많은 생명을 짓밟고 일어선 것인지 다시 한번 깨달았다. 이어서 전 삼성전자 노동자이자 산재 피해 당사자인 정향숙 활동가님의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활동가님이 직접 겪은 현장의 모습은 내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차별적이고 참담했다. 정향숙 활동가의 발표 장면 [정향숙 활동가 발제문 발췌] “개인적으로는 한 번의 계류 유산*을 경험했습니다. 당시에는 유산을 하게 되면 개인 월차를 사용해서 쉬는 것이 일반적이었습니다. 그 일을 일과 연결해서 생각하지는 못했습니다. 그리고 지금 돌아보면 유산이나 여성 질환을 겪는 동료들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을 일과 연결해서 생각하지는 않았습니다. 우리가 어떤 환경에서 어떤 물질을 다루고 있었는지, 그것이 몸에 어떤 영향을 줄 수 있는지 깊이 이야기하는 분위기는 아니었습니다. 산재라는 개념 자체가 저희가 일하는 곳엔 없었습니다. 저 역시 나중에 중재 협약에 유산이 포함된다는 사실을 알고 신청을 했고 보상을 받긴 했으나, ‘이러한 것도 보상을 해주는구나’였지 ‘내가 일하고 있는 곳의 어떠한 문제 때문에 이런 걸 보상해 주지?’라는 생각은 못 했었습니다. 여성 노동자가 많았던 곳이었기 때문에 임신과 출산하는 여사원들이 많았습니다. 관리자였기 때문에 임신과 출산 그리고 복직 계획까지 관리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막연하게 미디어를 통해서만 접했던 ‘산재’는 누군가의 고통스러운 삶 그 자체였다. 발제 중 “왜 여성의 몸에서 일어나는 일은 개인의 문제로만 남았는지, 왜 그때는 질문하지 않았는지” 라는 발언에 특히 마음이 무거워졌다. 노동자들은 현장에서 남성 엔지니어들이 가진 ‘환경수첩’조차 지급받지 못했다고 한다. 사측은 이미 알고 있는 위험 속에 뻔뻔하게도 노동자들을 갈아 넣고 있었다. 3부: 남아있는 이야기 모든 발제가 끝나고, 3부는 참가자들의 소감과 질문으로 이어졌다. 이미 현실을 어느 정도 알고 온 참가자들이었음에도, 생생한 증언 앞에서 더욱 뜨겁게 끓어오르는 분노가 느껴졌다. 특히 이주노동자가 반도체 산업 현장에서 겪는 차별을 묻는 한 참가자의 질문을 들으며, 우리가 가진 연대의 마음이 얼마나 더 넓어져야 하는지를 다시금 깨달았다. 아픈 이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것, 그리고 그 너머의 아픔까지 먼저 들여다보고 힘을 합쳐 차별을 넘어서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오늘 이곳에 모인 이유가 아닐까. 집담회는 마무리되었지만, 현장의 열기는 여전히 생생하다. 3월 6일 3.8 여성파업대회와 고 황유미 님의 19주기 추모제에 이어 이 불꽃이 세상으로 나와 더욱 타오르기를 기대하며, 다시 한번 여성의 날의 의미를 가슴 깊이 되새겨본다. *임신 20주 이내에 태아가 사망하고, 자궁 경부가 닫힌 채로 사망한 태아가 자중 내에 수일에서 수주 동안 배출되지 않고 머물러 있는 상태를 말한다. -
2026년 3.8 여성파업의 요구와 의미2026년, 우리에게는 노동자민중의 페미니즘이 필요하다 2026년은 격동하는 세계정세가 전쟁과 위기의 시대로 명확한 다음 발을 내딛는 해였다. 가부장적 자본주의는 쇠퇴하는 자신을 연명하기 위해 유사한 위기마다 반복해 온 필승의 카드, 즉 전쟁을 꺼냈다. 어느 나라의 어떤 노동자민중도 이 거대한 체제의 리듬 속에서 자유로울 수 없어졌다. 1985년 출간된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의 소설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는 발행 이후 숱한 세월 동안 제국주의의 가부장적 성격을 폭로하며 여성 운동의 주요한 관용구로 쓰였다. 그러나 작금의 세계를 둘러보자. 독일에서 누구보다 강경한 반이민 정책을 내세우고 있는 극우 정당 AfD(독일을 위한 대안)의 당수 앨리스 바이델은 레즈비언 여성이다. 유색인종 동성 파트너를 둔 레즈비언 여성 정치인에 의해 독일의 수많은 이주민 여성들은 길거리로, 더 불안정하고 위험한 일자리로, 때로는 죽음으로 내몰리고 있다. 극우 정당 이탈리아의 형제들 당수이며 우익 학생 운동가로 활동했던 19살부터 인터뷰지에 “무솔리니를 존경한다”고 답해 논란을 빚었던 조르자 멜로니는 이탈리아 최초의 여성 총리다. “난민을 막기 위해 군대로 해상을 봉쇄하겠다”, “동성애자와 악수를 하든 토사물에 키스를 하든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면 토사물에 키스를 하겠다”, “이슬람 광신도와 테러리스트를 폭행하고 살해하는 시민에게 훈장을 수여할 것”이라는 발언 모두 이탈리아 최초의 여성 총리가 공식 석방에서 발언한 말이다. 프랑스 극우 정당 국민연합(RN)의 원내대표 마린 르펜 역시 마찬가지다. ‘프랑스 퍼스트’를 핵심 정신으로 내세운 마린 르펜은 누구보다 우익적 민족주의의 전면에 서서 프랑스 전역을 극우화의 파랑에 내던지고 있다. 가까운 일본에서도 비슷한 현상은 목격된다. 당선 후 초기에 일본 의회의 여남동수 내각 의지를 밝혀 한국 여성의당으로부터 환영사를 듣기도 했던 다카이치 사나에는 “유사시 대만에 적극 개입하겠다”는 발언으로 아슬아슬하던 동아시아 정세를 제3차 세계대전 위기의 복판에 못 박았다. 뿐만 아니라 2026년 일본 중의원 선거에서 자민당이 압승을 거두며 방위비 국내총생산(GDP) 2% 이상 증액, 장거리 미사일과 핵추진 잠수함 도입, 자위대의 사실상 군대화 등과 같은 다카이치식 안보 청사진은 더욱 전면화하는 중이다. 그런가 하면 한쪽에서, 가부장적 자본주의의 억압과 차별은 노동자계급 여성을 더욱 가혹하게 강타하기 시작했다. 가부장적 자본주의가 세계에 전쟁을 다시 호출했을 때 가장 먼저, 가장 잔혹하게 살해당하는 것은 태반이 민간인 여성이었다. 팔레스타인에서 학살당한 수만 명의 민간인 사망자 중 2024년 UN 집계 기준 여성과 어린이는 무려 70%다. 학살이 1년 더 지속된 2026년 2월에는 얼마나 많은 여성이 가자지구를 비롯한 팔레스타인 땅에서 전쟁 범죄에 의해 살해당했을지 차마 헤아릴 수도 없다. 일자리 측면에서도 유사하다. 한국 국가데이터처 보고에 따르면 2025년 3/4분기 기준 국내 노동시장에서 남성 일자리가 4만개 감소한 반면, 여성 일자리는 17만9000개 증가했다. 연령대별로는 60대 이상에서 22만 3천개가 증가하며 가장 큰 폭의 상승을 보인 데 반해 20대 이하(20대 포함)에서는 고작 12만 7천개, 30대는 8만 5천개였다. 왜 경제가 어려워졌는데. 노동자민중을 향한 자본주의의 착취가 심화하고만 있는데 여성 일자리는 늘어났을까? 지난 2월 26일 옥스팜코리아가 발표한 '2026 옥스팜 도넛 리포트'는 국내 여성 일자리의 확대가 임금 상승으로 직결되지 않았다고 밝혔다. 한국에서 여성은 남성과 같은 연봉을 벌기 위해 130일을 더 일해야 한다는 사실. 결혼 후 여성 노동자의 임금은 남성 노동자보다 평균 8.9% 감소했고 첫 자녀 출산 후 10년이 지나면 임금 격차가 33.4%까지 확대됐다는 사실을 담은 이 보고는 짐짓 섬뜩하기까지 하다. 한국 자본주의는 위기를 전가할 대상으로 청년보다는 중/장년의, 남성보다는 여성의 노동자를 선택했다. 지난 세계대전 당시 미국이 리벳공 로지를 전면에 내세웠던, 수많은 여성 노동자들을 전례 없는 헐값의 장시간 노동으로 군수, 농업, 운송 산업 등에 대거 인입했던 방식과 하나 다를 게 없는 상황이다. 2026 3.8 여성파업 요구안, 무엇을 다루는가 일터의 성차별 금지, 진짜 사장 책임 강화 : 세계1위 K-성별임금격차, 진짜 사장이 책임지고 채용부터 임금/업무/고용형태 등 여성과 성소수자 장애인 이주노동자의 일터의 성차별 금지 : 저임금/비정규직노동자에게 고용불안 및 임금격차 ‘보상수당’ 지급 : 성인지적 노동환경 조성과 노동재해 기준 개선 : 국제노동기구(ILO)의 ‘폭력과 괴롭힘 근절’ 190호 협약 즉각 비준 한국의 성별임금 격차는 집계를 시작한 이래 꾸준히 OECD 평균 하위권이었다. 한국의 끈질긴 노동자 투쟁으로 개정된 노조법 2·3조가 3월부터 실 시행에 들어간다. 2026년에는 임금 수준과 업무 내용, 고용 형태에 관계없이 원청 사장이 우리의 노동을 책임져야 한다. 왜 비정규직 노동자의 노동을 원청 사장이 책임지라는 구호가 무엇보다 여성 의제의 요구여야만 할까? 여성 노동자의 대부분은 비정규직 저임금 고용 관계에 얽매여 있다. 한국노동사회연구소가 ‘경제활동인구조사 부가조사’를 분석한 결과 2025년 8월 기준으로는 임금노동자 2241만 명 중 여성 비정규직(530만 명·50.7%)은 정규직(516만 명·49.3%)을 웃도는 수준이었다. 심지어 여성 비정규직 비율은 2022~2023년 49.7%에서 2024~2025년 50.7%로 꾸준한 상승세를 보여왔다. 보고는 아예 기간을 정한 일자리와 단시간 일자리가 여성 노동을 흡수하는 주요 통로가 되고 있다는 의미로 이 현상을 진단하기도 했다. 임금 격차 역시 어마어마했다. 남성 정규직 임금을 100으로 볼 때 남성 비정규직은 60.5%, 여성 정규직은 75.1%, 여성 비정규직은 39.0% 수준에 그쳤다. 여성의 노동은 한국에서 가장 밑바닥 노동 취급을 받고 있다. 계약 체결 당사자가 아니더라도 하청 노동자의 근로조건에 대해 실질적·구체적인 지배·결정권이 있는 자(원청)를 사용자로 인정하여 교섭 의무를 부여하는 것으로 노조법 2조가 개정된 지금, 필요한 것은 일터의 성차별 금지로 평등한 노동 환경을 조성할 의무와 고용불안 및 성별 임금 격차 등의 억압을 진짜 사장 원청이 해결할 책임을 부과하는 일이다. 가사사용인/특수고용/프리랜서/플랫폼/장애인/이주 노동자의 노동기본권 전면 쟁취 -모든 노동자에게 근로기준법 전면 적용 : 여성노동자의 이름을 빼앗긴 가사사용인, 특고, 플랫폼, 프리랜서, 5인미만 사업장, 장애인에게 근로기준법 전면 적용 -돌봄 공공성, 돌봄 일자리 확대 : 모든 가사돌봄 분야 국가 책임, 공공성 강화, 돌봄 일자리 대폭 창출 : 임금삭감/업무과중/야간노동 없는 노동시간 단축으로 청년 일자리 확충하고 저녁있는 삶 보장 한국 사회에서 가사사용인·특수고용·프리랜서·플랫폼·장애인·이주 노동자는 여전히 ‘노동자’로 불리지 못한 채 법의 바깥에 방치돼 있다. 여성노동자의 이름을 빼앗긴 채 계약서 한 장으로, 사업자등록증 하나로, 플랫폼 앱 하나로 권리를 박탈당했다. 가사사용인과 돌봄 노동자, 특수고용·플랫폼·프리랜서 노동자 다수는 여성이다. 5인 미만 사업장, 호출형 플랫폼, 개인 위탁 계약이라는 이름 아래 장시간 노동과 저임금, 무권리 상태가 구조화되어 왔다. 근로기준법의 적용 제외는 곧 여성 노동을 ‘보조적’, ‘부차적’ 노동으로 취급해 온 역사와 맞닿아 있다. 그러므로 모든 노동자에게 근로기준법을 전면 적용하라는 요구는 단지 법 조항의 문제가 아니라, 성별에 따라 위계화된 노동구조를 해체하라는 요구다. 가사사용인·특수고용·플랫폼·프리랜서·장애인·이주 노동자의 노동기본권 전면 쟁취는 여성 의제의 중심이어야 한다. 한국의 장시간 노동 구조 속에서 여성 노동자들은 유급 노동만으로도 하루가 모자라다. 그 위에 가사와 돌봄이라는 무급 노동이 겹겹이 얹힌다. 쓰레기를 대신 분리수거해 주는 서비스, 새벽 배송, 세탁 대행, 방문 돌봄 서비스가 ‘라이징 산업’으로 성장했지만, 이는 여성의 이중 노동을 시장으로 전가한 결과일 뿐이다. 가정을 유지하기 위해 여성 노동자는 원치 않는 소비를 감내해야 하고, 그 산업에서 일하는 또 다른 여성 노동자는 플랫폼에 종속되어 헐값 장시간 노동에 내몰린다. 무급이던 가사·돌봄 노동은 값싼 외주 노동으로 전환되었을 뿐, 억압의 구조는 달라지지 않았다. 그렇기에 이제 필요한 가사 및 돌봄 노동은 국가가 책임져야 한다. 사회를 유지하는 데 필수적인 노동이라면, 그것은 개인 여성의 희생이 아니라 공적 책임이어야 한다. 공공 돌봄 인프라의 대폭 확충, 가사·돌봄 노동자의 직접 고용과 안정적 임금 보장, 플랫폼 종속 구조의 규제와 노동자성 인정이 즉각 시행되어야 한다.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가사와 돌봄이 필요하다면, 그 책임은 여성에게 전가될 것이 아니라 자본과 정부에 부과되어야 한다. 모든 노동자에게 근로기준법을 전면 적용하라. 가사사용인·특수고용·프리랜서·플랫폼·장애인·이주 노동자의 노동기본권을 전면 보장하라. 가사와 돌봄을 시장에 떠넘기지 말고 국가가 책임져라. 여성 노동을 가장 밑바닥으로 밀어 넣는 구조를 해체하는 것, 그것이 올해 여성파업이 요구하는 최소한의 정의 중 하나이다. 최저임금 확대 적용과 대폭 인상 : 특고 플랫폼 프리랜서 가사사용인 장애인 등 모든 노동자에게 최저임금법 적용 : 최저임금 ‘비혼단신노동자실태생계비’의 100%로 최저금액 적용, 물가연동제 시행 : 최저임금법 위반 사용자에게는 노동자에게 체불/위반임금 30배 보상 지급 및 벌금 부과 2025년 3월 30일 한국노동연구원의 ‘고령 저소득 노동 실태와 정책 대응’ 보고서를 보자. 이 보고는 55살 이상 고령 임금노동자 가운데 저임금 노동자 비중은 2019년 30.9%, 2021년 30.2%, 2023년 33.0%로 나타났다고 밝혔다. 고령 노동자 10명이 있으면 3명 조금 넘게 최저임금 미만 노동자인 셈이다. 개중에서도 성별로는 55살 이상 여성 노동자의 저임금 비중은 남성보다 2배 더 높았다고 보고는 나타낸다. 여성 고령 노동자 중 저임금 비중은 2019년 44.4%, 2021년 44.5%, 2023년 47.6%로 40%대를 유지했다. 한국의 여성 고령 노동자 10명이 있다고 다시 가정할 때, 그중 네 명은 무조건 최저임금 미만 노동자라는 뜻이다. 고령 여성이 과거 결혼 또는 임신, 출산으로 인해 경력이 단절되어 현행 연금 제도에서 소외되는 경우도 부지기수임을 고려할 때, 이들은 “강제할 방법이 없다”는 이재명 정부의 핑계 이면에서 죽어가고 있다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청년 여성 역시 특수고용, 플랫폼, 프리랜서 등 고용 형태의 불안정 속에서 최저임금조차 보장받지 못하기는 매한가지다. 2024년 10월 발표된 국세청 자료에 따르면 병의원 종사자를 제외한 특수고용/플랫폼/프리랜서 노동자 등 소위 ‘비임금 노동자’는 2018년 604만2천288명에서 2022년 837만7천56명으로 233만4천768명이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중에서도 성별로 보면 전체 31.3%라는 적지 않은 수가 여성이었으나, 2022년 기준 남성 비임금 노동자의 연봉은 평균 1천312만원, 여성 비임금 노동자의 연봉은 평균 944만원이었다. 2021년 발표된 한국노동사회연구소의 연구는 이와 같은 특수고용, 플랫폼, 프리랜서 노동자의 증가세 속에서 여성 노동자에게 어떤 억압과 차별이 가해지는지를 빠르게 직관했다. 총 1015명을 대답으로 한 2021년 연구에서부터 이미 프리랜서 계약 미체결 비율은 전체 응답자의 절반(49.2%) 정도였고, 그중 노동시장에서 저소득 여성 노동자일수록 계약 체결 확률이 낮았다고 밝혔다. 여성에게는 최저임금이 필요하다. 이재명 정부는 한국의 저임금 현상을 어떻게 해결할 것이냐는 질문에 “최저임금을 급격하게 올리는 대신 사업장별로 적정임금을 받도록”하겠다며 “정부가 제도적으로 (적정임금 지급을) 강제할 방법은 없다”고 변명했지만. 여성 노동자들에게는 더 이상 그 변명을 들어줄 여유조차 없다. 한국의 여성 노동자에게 최저임금 확대 고용과 인상은 표현 그대로 생존의 문제다. 이주노동자 사업장 이동의 자유 보장, 강제단속/추방 금지 : 속헹와 뚜완에게 정의를! Free Job Change(프리 잡 체인지, 이주노동자 사업장 이동의 자유 보장) : 이주노동자 강제노동 금지, 미등록 강제단속 및 추방 금지 한국의 이주노동 정책은 오랫동안 통제와 단속을 중심에 두어 왔다. 노동은 필요로 하면서도, 그 노동을 수행하는 사람의 권리는 체류 자격과 고용주에게 종속시켰다. 사용자를 떠날 자유가 없는 고용 구조는 사실상 복종을 강제하는 장치로 기능해 왔다. 이제는 방향을 바꿔야 한다. 노동을 제공하는 사람에게 선택권과 이동권을 보장하는 것이 출발점이어야 한다. 임금체불과 폭언, 산업재해가 발생해도 쉽게 벗어날 수 없다면, 그 임노동 관계는 계약이 아니라 구속에 불과하다. 저임금·고위험 업종에 집중된 이주 여성 노동자들은 체류 불안을 빌미로 한 위협에 특히 더 취약하다. 신고하지 못하고, 옮기지 못하고, 침묵을 강요당하는 구조 속에서 권리는 공백이 된다. 이동의 자유는 단순한 편의가 아니라 인권의 최소선이다. 최근 이재명 정부 주도 아래 APEC 맞이 이주민 단속 과정에서 발생한 고 뚜완의 사망은 결코 개인의 불운이 아니라 제도의 귀결이다. 강제 단속과 추방을 전면에 세운 정책은 노동자를 지하로 밀어 넣고, 그 결과 더 위험한 현장과 더 긴 노동시간, 더 낮은 임금으로 내몬다. 반이민 담론은 ‘치안’과 ‘보호’를 말하지만, 실제로는 가장 취약한 이들을 국가 폭력의 전면에 세운다. 그 과정에서 이주 여성들은 생계와 안전 사이에서 선택을 강요받는다. 요구는 분명하다. 이주노동자의 사업장 이동 자유화. 고용주에 종속된 허가 구조 개편. 체류 자격을 이유로 한 강제단속과 추방의 중단. 강제노동을 낳는 제도적 장치의 폐기. 미등록 여부와 무관한 기본적 노동권 보장은 이제 선택이 아니라 정부의 의무가 됐다. 국제적으로 극우는 이주민 남성이 정주민 여성의 안전을 위협한다고 적극 선전한다. 하지만 그들의 선전은 그 이주민 추방의 과정 속에서 이주민 여성들이 죽음과 공포로 내몰린다는 사실, 국가 폭력에 적극적으로 노출된다는 사실, 탄압을 피하기 위해 더 불안하고 위험한 노동으로 내몰린다는 사실을 철저히 배제한다. 국적과 성별은 권리의 조건이 될 수 없다. 일할 권리, 부당한 일터를 떠날 권리, 폭력과 공포로부터 보호받을 권리는 모두에게 동일해야 한다. 통제가 아니라 권리로, 추방이 아니라 존엄으로 정책의 기준을 다시 세우는 것. 그것이 지금 우리가 제기하는 요구다. 포괄적 차별금지법 즉각 제정과 젠더차별 금지 : 성별정체성과 성적지향, 장애, 국적과 인종 등 차별 금지 : 성별정정수술 건강 보험 적용 : 비수술 성별정정 제도화 세계 곳곳에서 성별을 둘로만 고정하려는 정치가 힘을 얻고 있다. 특히 트럼프 현 미국 대통령의 “내 정부가 인정하는 성별은 두 가지뿐”이라는 선언 이후 그 여파 속에서 트랜스 혐오는 국제 정세의 주요 쟁점으로 부상했다. 한국 사회 역시 그 흐름과 무관하지 않다. 차별은 말의 문제가 아니라 생존의 문제가 되고 있다. 성별정체성과 성적지향, 장애, 국적과 인종을 이유로 한 차별을 방치하는 것은 또 다른 배제를 제도화하는 일이다. 일터와 학교, 의료와 주거에서 반복되는 배제는 개인의 ‘선택’이나 ‘도덕’의 문제가 아니다. 지금 포괄적 차별금지법의 제정은 선택이 아니라 최소한의 안전망이다. 정부와 국회가 책임지고 제정해야 하고, 나아가 아래로부터 조직한 우리 노동자민중의 힘으로 그들이 더 이상 미룰 수 없도록 만들어야 한다. 이제는 조금도 더 미룰 수 없다. 성별정체성과 성적지향을 이유로 한 고용·의료·교육 차별을 명시적으로 금지하고, 실효성 있는 구제 절차를 마련해야 한다. 특히 트랜스젠더 당사자의 삶을 가로막는 의료·법적 장벽을 제거하고, 성별정정수술에 건강보험을 적용하여 과도한 비용이 개인에게 전가되지 않도록 하는 것. 무엇보다 트랜스젠더의 의료 접근성 불평등을 해소하는 것이 시급하다. 비수술 성별정정 제도의 도입 역시 같다. 경제적 사정, 건강 상태, 개인적 신념 등 다양한 이유로 수술을 선택하지 않는 사람도 자신의 성별정체성을 법적으로 인정받을 권리가 있다. 특정한 의료 행위를 거쳐야만 법적 성별을 인정받는 구조는 또 다른 강제다. 누구나 자신이 인지하는 성별로 호명되고 기록될 권리를 가져야 한다. 2026 3.8 여성파업의 요구는 분명하다. 포괄적 차별금지법을 즉각 제정하라. 성별정체성과 성적지향, 장애, 국적과 인종 등을 이유로 한 차별을 전면 금지하라. 성별정정수술에 건강보험을 적용하라. 비수술 성별정정 제도를 제도화하라. 존재를 부정하는 정치에 맞서, 모든 사람이 존엄하게 살아갈 수 있는 최소한의 법적 토대를 지금 당장 마련해야 한다. 비동의강간죄 도입/포괄적 성교육 의무화/임신중지에 건강보험 적용 : 비동의강간죄 도입 : 학교와 일터, 군대 등 모든 사회기관에 포괄적 성교육 의무 도입 : 임신중지에 건강보험 적용, 유산유도제 도입 해마다 반복되는 성폭력 통계는 이 사회가 무엇을 외면해 왔는지를 보여준다. 2024년 한 해에만 3만 건이 넘는 성범죄가 접수되었고, 피해자의 대다수는 여성이다. 그러나 법은 여전히 ‘폭행과 협박’의 존재를 중심에 두고 판단한다. 저항의 흔적이 없으면 의심받고, 관계가 있었으면 축소 해석된다. 동의하지 않았다는 사실보다 피해자가 얼마나 버텼는지가 더 크게 다뤄지는 구조는 정의와 거리가 멀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비동의강간죄다. 핵심은 단순하다. 상대방의 명시적이고 자발적인 동의가 없는 성적 행위는 범죄라는 원칙을 법에 분명히 새기는 것이다. 관계의 지속 여부, 사적 공간인지 공적 공간인지, 이전의 친밀성 여부와 무관하게 동의가 기준이 되어야 한다. 피해자가 “왜 저항하지 못했는가”를 설명해야 하는 현실을 끝내야 한다. 동의의 부재를 중심에 두는 법 개정은 피해자를 의심하는 문화를 바꾸는 첫걸음이다. 그러나 2024년 3월 총선 과정에서 비동의강간죄를 공약으로 제시했다가 당원의 항의가 제기되자 슬그머니 철회한 민주당의 태도는 이 문제가 얼마나 가볍게 취급되어 왔는지를 드러낸다. 성폭력은 선거용 문구가 아니라 생존의 문제다. 2024년 한 해에만 3만 명으로 매해 늘어가는 성폭력 피해 여성들의 "인정받지 못하는 고통", 그 고통을 조금이나마 해소할 수 있는 최소한의 법안 입법마저 민주당은 고작 실무적 실수로 압축하는 실정이다. 법 개정과 함께 반드시 병행되어야 할 과제는 포괄적 성교육의 제도화다. 동의의 의미, 성적 자기결정권, 젠더 권력 구조에 대한 이해를 학교에서부터 직장, 군대 등 모든 사회 영역에서 체계적으로 다루어야 한다. 성교육을 단편적인 생물학 지식 전달로 축소하는 한, 왜곡된 성 인식은 유지된다. 성폭력 가해 이후 엄벌만이 아니라 인식 형성 단계에서부터 우리 사회의 젠더 평등은 시작되어야 한다. 또 임신중지가 비범죄화된 지 7년이 지났는데도, 정부나 국회가 대체입법을 외면하며 권리공백 사태가 지속되고 있다. 정부와 국회의 직접적인 권리 침해로 인하여 원치 않는 임신을 한 여성들의 고통이 이어지고 있고, 영아살해로도 내몰리고 있다. 최근에는 후기 임신중지를 했다는 이유로 살인죄로 기소된 권모씨가 미필적 고의가 있다는 이유로 징역3년, 집행유예 5년의 처벌을 받았을 만큼 입법공백 속에서 사법적 제재까지 받고 있고 있다. 그러나 임신중지는보편적 권리다. 정부는 더 이상 임신중지를 외면하지 말고 건강보험을 받을 수 있도록 적용하고 유산유도제를 도입하라. 팔레스타인 학살 지원 중단, 제국주의 전쟁 반대 : 한국석유공사, HD건설기계, 한화 등 정부와 기업의 전쟁 산업과 협력 반대 : 국방비 예산 축소 가자 지구에서 이어지는 파괴와 학살은 단지 한 지역의 분쟁이 아니다. 무장한 하마스 전사들의 잔혹함을 매일같이 떠들어대는 이스라엘 매체들과 달리, 실상 팔레스타인 여성과 아이들이 가자지구 및 팔레스타인 일대 희생자의 다수를 이루고 있다는 사실은 이스라엘이 자행하는 전쟁범죄의 파렴치한 민낯을 드러낸다. 이스라엘의 허약한 핑크워싱과 제반 논리들이 가리지 못하는 것은 무고한 팔레스타인 노동자민중의 죽음과 삶의 터전이 제국주의에 의해 짓밟힌 현실이다. 한국은 더 이상 중립적 관찰자가 아니다. 폐허가 된 땅을 사업 구상으로 바라보는 것도 모자라 아예 적극적으로 고통 위에 이윤을 설계하겠다는 트럼프의 발상에 이재명 정부는 관찰이 아닌 동조를 택했다. 전쟁 범죄의 책임이 제대로 규명되지도 않은 상황에서 ‘평화’의 이름으로 참여하는 것은 사실상 질서 재편에 동참하겠다는 선언이나 마찬가지기 때문이다. 국내 기업들 또한 군수·에너지·건설 부문에서 전쟁 경제와 맞물려 있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한국석유공사, HD현대건설기계, 한화 등은 글로벌 방산·중장비·에너지 시장과 연결되어 있다. 이스라엘군이 팔레스타인 노동자민중을 살해할 때 쓰는 무기가 생산되고, 팔레스타인 노동자민중의 밭을 불태우고 집을 무너뜨릴 장비가 수출되는 동안 한국 기업들은 막대한 수익을 벌어들였다. 수익의 전제는 파괴였다. 한국석유공사, HD현대건설기계, 한화 모두 학살의 동조자였다. 여성파업의 정신은 제국주의자들의 총칼로 노동자민중의 삶을 파괴한 뒤 자본가계급이 그 위에 부를 쌓는 질서에 동의하지 않는다. 전쟁 경제에 복무하지 않겠다는 선언, 군사적 팽창이 아니라 인간의 존엄을 우선에 두겠다는 선택. 그것이 지금 2026 여성파업이 내놓는 분명한 입장이다. 싸우는 여성 노동자가 세상을 바꾼다! 2026 3.8 여성파업으로 모이자 2026년의 상황은 몇 가지 사실을 시사한다. 가부장적 자본주의 체제 아래에서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한다. 정확히는, 전쟁은 자본가계급을 지키고 가부장적 자본주의 체제를 수호하기 위해서라면 그 누구의 얼굴이라도 불사한다. 여성, 남성, 노인, 중년, 청년, 백인, 비백인 유색인종, 게이, 레즈비언, 바이섹슈얼, 에이 스펙트럼, 젠더퀴어 등 누구라도 적극적으로 파시스트가 될 수 있는 시대를 우리는 살고 있다. 하지만 외려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우리에게는 노동자민중의 페미니즘이 필요해졌다. 다카이치 사나에가 내세운 일본 의원의 여남동수 내각 선언이나 마린 르펜이 내세운 '내셔널 페미니즘'(자국의 여성 보호 및 권리 증진이 최우선이어야 한다는 기조)는 마치 가부장적 자본주의 질서 속에서 모든 여성이 겪는 억압과 차별의 경험이 단일하며, 심지어는 자본가계급의 여성과도 그가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노동자계급 여성과 정치적/실천적 연대를 형성할 수 있을 것처럼 꼬드긴다. 그러나 현실은 전혀 다르다. 한국 구미의 반도체 공장 KEC에서 수십 년을 근속하고도 단지 여자라는 이유 때문에 승진이 가로막혀야 했던 여성 노동자가 살아온 삶과 다카이치 사나에가 살아온 삶은 당연히 다르다. 현장에서의 안정이 보장되고 업무 중 성별/적 정체성을 인정받을 수 있는 일자리를 찾지 못해 불안정 노동으로 내몰리고, 심지어는 통계로 세어지지도 않는 죽음의 위기에 노출되어야 했던 한국의 2030 여성-성소수자 청년들과 앨리스 바이델의 경험은 당연히 다르다. 핵심은 결국 가부장적 자본주의 체제다. 저들의 목숨을, 저들의 배를 불리는 체제를 하루 더 연명하기 위해 노동자민중을 갖가지 조건으로 세분화해 다양한 굴레를 매기는 시대. 우리는 그렇기에 가부장적 자본주의 체제에서 가장 무거운 쇠사슬 중 하나를 차고 있는 여성 노동자, 성소수자 노동자의 이름으로 뭉쳐야만 한다. 이제 우리는 노동자계급 여성과 성소수자의 이름으로 이 가혹한 억압과 차별에 저항하고, 전쟁 위기의 복판으로 우리의 목숨을 갈아 넣으려 하는 자본가들과 싸워야 한다. 가부장적 자본주의의 가장 근원적 작동. 유급 노동(임노동)과 무급 노동(가사, 돌봄, 재생산 등)을 모두 멈춰 세우는 여성파업으로 말이다. 2026년의 여성파업의 수많은 의미 가운데 중요한 한 가지를 고르자면. 아마도 그런 의미일 것이다. [참조자료] 『급부상 중인 독일 AFD 총리 후보 알리체 바이델은 누구?』, 주간조선, 김택환, 25년 1월 26일. 『이탈리아 첫 여성 총리, 멜로니가 연 극우의 시대』, 한겨레, 김도훈, 24년 6월 22일. 『멜로니·르펜 이어 다카이치…'우파 스트롱우먼' 열풍 왜』, 중앙일보, 위문희, 25년 10월 9일. 『다카이치 ‘보통국가 일본’ 가속 페달…역대급 압승이 여는 군사대국의 문』, 아시아투데이, 구필현, 26년 2월 10일. 『2025년 3분기 임금근로 일자리 2,092만개…전년 대비 13만9천개 증가, 보건·사회복지 견인』, 데일리365, 김형근, 26년 2월 24일. 『'165년' 일해야 상위 0.1%의 연봉 번다…여성은 남성보다 '130일' 더 일해야』, 뉴시스, 정우영, 26년 2월 26일. 『프리랜서 노동실태와 특징Ⅱ - 일의 형태와 불안정성 -』, 김종진, 박관성, 21년 9월 15일. 『"특수고용·프리랜서 5년간 233만명↑…청·노년 증가율 커"』, 연합뉴스, 김치연, 24년 10월 1일. 『55살 이상 노동자, 열 중 셋은 최저임금도 못 받아…여성은 더 열악』, 한겨레, 김혜정, 25년 3월 30일. 『여성 비정규직 530만명… 남성보다 131만명 더 많아』, 서울EN, 이현정, 25년 12월 1일. 『경찰청_성범죄 발생 및 검거 현황』, 경찰청, 25년 11월 03일 갱신 자료 기준 참조하였음. -
[발언] 3월 6일 오후 12시 반. 서울역 광장에 여성파업의 대오로 모여주십시오! 동지들!안녕하세요. 2026 3.8 여성파업조직위원회에 소속되어있는 유지원이라고 합니다. 어제 여성파업을 앞두고 저희 학교에서 수다회라는 걸 열었습니다. 여성파업에 대해서, 혹은 여성의 날에 대해서 각자 기억을 꺼내보고 하고 싶은 말을 돌아가며 하는 자리였다고 생각해보시면 되겠는데요. 지금이 2026년이고, 저희의 나이가 이제 20대 초반에서 중반까지인데도 수많은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학교에서 여성 인권에 대해서, 나 페미니스트라고 말했다는 이유로 학교폭력의 피해자가 되어 갖은 폭언과 폭력을 견뎌야 했다는 이야기, 82년생 김지영을 너무 읽고 싶어서 집에서 부모님 몰래 몰래 조금씩 다 읽었다는 이야기, 딸로 태어났다는 이유로 가정폭력을 당하는데 아무도 구해주지 않았던 이야기. 어쩌면 이렇게 똑같나 싶었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가진 20대의 여자들이 30대가 되면 자본주의 시장에 진출해 저임금 불안정 비정규직이 되고 결혼해서는 경력 단절을 맞게 됩니다. 2025년 3/4분기에 여성 일자리 17만 9000개 상당이 증가했지만 여전히 여성 노동자가 남성 노동자만큼의 돈을 벌기 위해서는 1년에 130일만큼 더 일해야 한다고 합니다. 여성은 자본주의가 양산하는 값싼 불안정 일자리의 담당자 취급을 받고 있습니다. 저는 여기서 벗어나고 싶습니다. 정말 간절히, 제 친구들에게는 늘 돈이 없고. 우리는 같이 밥을 먹으러 가서 자리에 앉자마자 제일 먼저 하는 소리가 돈이 없어서 무슨 메뉴를 먹어야 할 지 모르겠어. 여야 하고. 대학을 졸업해서도 어디서 일해야 될지 모르겠다고 하고. 일 년에 몇 명의 친구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어 장례식에 가야 하는 이 굴레에서 제발 벗어나고 싶습니다. 하지만 저는 동시에 이런 생각도 합니다. 만약 제가 벗어날 방법을 찾는다면, 동지들. 그 방법을 노동자를 폭력연행한 이재명 정부와 함께 찾을 수 있겠습니까? 여당이 되자마자 포괄적 차별금지법에 입을 싹 닫은 민주당과 함께 찾겠습니까? 일본 자위대를 사실상 군대로 만들겠다는 일본 최초의 여성총리 다카이치, 이민자를 살해한 시민에게 직접 훈장을 주겠다는 이탈리아 최초의 여성 총리 멜로니, 그 외에도 여성의 얼굴을 하고 손을 내밀면서 여성 노동자들을 제국주의 전쟁의 초석으로 소모하려고 하는 자본가, 정치가들과 찾겠습니까. 아닙니다. 저는 그 길을 세종호텔에서 피땀 흘려 일하고도 짐짝처럼 내쳐진 여성노동자 허지희 김난희 동지, 일터로 돌아가기 위해 고공에까지 올라야 했던 박정혜 동지, 지혜복 동지, 톨게이트지부, KEC지회, 학습지노조, 1366서울센터분회의 동지들과 찾고 싶습니다. 제가 동지라는 말도 그저 어색했고 파업가 가사도 제대로 몰라서 아는 척 해가며 부르던 23년 2월에 정확히 이 세종호텔 앞 문화제에 왔었는데요. 그날부터 지금까지 배운 게 하나 있다면. 노동자가 싸우면 반드시 이긴다는 것입니다. 자본가 정부가, 민주당이든 국힘이든 상관 없습니다. 천 번을 두드리면 우리가 만 번 강해지면서. 해방과 전진의 길로 갈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계속 그렇게 믿어도 되겠습니까. 제가 그렇게 믿어도 된다고 생각하신다면, 여성해방 노동해방을 향한 제 믿음의 실체로 내일 나타나주십시오 동지들. 3월 6일 오후 12시 반. 서울역 광장에 여성파업의 대오로 모여주십시오 동지들. 하실 수 있겠습니까. 감사합니다. 구호 하나 하겠습니다. 노동자 총단결로 여성해방 쟁취하자! -
[번역] 국제선언: 미국과 이스라엘의 패배를 위하여! 트럼프와 네타냐후의 이란에 대한 제국주의 전쟁을 타도하라!트럼프와 네타냐후가 자행하는 제국주의 전쟁행위에 대한 연속혁명경향(CPR)의 국제선언을 소개한다. 노동자계급과 반제국주의 운동은 미국과 이스라엘의 제국주의적 군사침략을 패배시키기 위해 싸워야 한다. Left Voice에 3월 3일 게재된 영문판을 번역함. 미국과 이스라엘이 이란을 상대로 벌이는 (공습과 여러 도시에 대한 공격을 포함하는) 합동 군사 공격은 제국주의 침략전쟁이다. 우리는 트럼프의 전략 변화를 목격하고 있다. 트럼프 정부는 과거에 이란 핵 프로그램과 관련된 제한적인 목표에 집중했으나 이제 이란 민중을 완전히 패배시켜 백악관의 지시에 복종케 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다. 가자지구 팔레스타인 집단학살의 공동 책임자들인 워싱턴과 텔아비브가 벌인 합동 공격으로 이미 수백 명의 이란 민간인(이란 남부의 한 학교에서 사망한 수십 명의 여학생 포함)이 사망했고, 테헤란과 이란 전역의 기반 시설이 파괴되었으며, 아야톨라(최고 성직자) 겸 최고 지도자 알리 하메네이가 암살당했다. 또한 하메네이의 고문 알리 샴카니, 군 최고사령관 압돌라힘 무사비, 국방부 장관 아지즈 나시르자데, 혁명수비대 사령관 모하마드 파크푸르 등 정권의 정치·군사 지도부 일부도 제거되었다. 이는 예측 불가능한 사태 전개의 문을 열었다. 중동 전체를 잠재적 불안정으로 몰아넣는 심대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지역 전쟁으로 이어질 가능성도 충분히 있다. 피트 헤그세스 미 국방장관의 ‘공격이 언제 끝날지 모른다’는 발언은 이러한 가능성을 더욱 뒷받침한다. 이스라엘은 레바논과 수도 베이루트에 대한 공격을 시작하여 불과 몇 시간 만에 수십 명의 사상자를 냈다. 한편, 헤즈볼라는 하메네이 암살에 대한 보복으로 이스라엘을 향해 미사일을 발사하고 있다. 경제적으로는 유가가 10% 이상 상승함으로써 이 전쟁이 광범한 사회적 영향을 미칠 것임을 보여준다. 이번 공격의 초기부터 트럼프가 공언한 목표 가운데 하나는 군사적 수단을 통해 정권 교체를 시도하는 것이었다. 이는 2000년대 초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을 상대로 한 제국주의 전쟁에서 사용된 파괴적인 신보수주의 정책의 요소들을 차용한 것이다. 프랑스, 영국, 독일을 포함한 유럽 제국주의 국가들은 종속적인 입장에 서서 트럼프를 지원하여 이란 공격에 참여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이번 제국주의 침략은 미국의 무조건적 지원을 받는 네타냐후가 팔레스타인 민중에게 자행해 온 집단학살 및 민족청소 정책의 직접적인 연장선에 있다. 이란에 대한 공격은 2003년 이라크 전쟁 이후 최대 규모의 해군을 배치한 위협 속에서 몇 주간의 협상을 벌인 끝에 단행되었는데, 그 명분은 이란이 완전한 군축을 거부했다는 것이다. 미국은 이란의 핵 프로그램 해체뿐 아니라 이란의 유일한 실질적 방어수단인 탄도미사일 포기까지 요구했다. 이는 수십 년간 워싱턴의 가혹한 경제 제재로 억압받아 온 이란에게 완전히 항복하라는 요구였으며, 테러 국가인 이스라엘이 중동에서 군사적 지배력을 공고히 할 수 있게 하려는 것이었다. 가자지구에서 팔레스타인을 집단학살하고 서안지구에서 정착촌 확장을 통해 팔레스타인 토지를 강탈하고 있는 이스라엘은 자신들 뜻대로 지역 지도를 재편하기 위해 이란을 약화시키고 통제할 필요가 있다. 친제국주의적인 우호 정부를 수립하는 방식으로든 또는 시리아처럼 국가를 분열시키는 과정을 통해서든 말이다. 이란에 대한 제국주의 침략은 미국이 ‘서반구’에 대한 절대 지배라는 새로운 국가 안보 교리에 따라 베네수엘라를 상대로 벌이고 있는 식민주의적 자원착취 전쟁과 맥을 같이 한다. 이와 같은 제국주의적 호전성의 표현들은 기존의 자유주의 질서와 이른바 규칙기반 국제질서의 붕괴 속에서 가속화되는 미국의 패권적 쇠퇴를 되돌리려는 반동적 시도를 그 배경에 두고 있다. 이는 워싱턴의 명령에 도전하려는 세계 모든 이들에게 경고를 보내는 것을 목표로 한다. 트럼프가 쿠바 경제를 압박하는 것 또한 우연이 아니다. 쿠바에 대한 석유 보이콧을 선언한 미국은 이미 베네수엘라산 원유의 쿠바 수출을 금지하였고, 쿠바에 석유를 수출하는 국가들에 제재를 가했다. 이제는 이란산 원유의 쿠바 수출까지 줄이려 시도하고 있는데, 이는 1959년 쿠바 혁명의 성과 가운데 남아있는 부분마저 소멸시키려는 의도이다. 트럼프는 또한 중국의 석유 공급망을 차단하여 아야톨라 정권과의 특별한 관계를 깨뜨리려 하고 있다. 이러한 모든 이유로, 이란에서 미국과 이스라엘의 정치적·군사적 패배를 위해 싸우는 것이 필수적이다. 제국주의에 반대한다면, 사회주의자라면, 혁명적인 좌파라면, 미국과 이스라엘의 패배를 (그리고 그들을 지원하는 유럽 열강들의 패배를) 조건 없이 지지해야 한다. 다시 말해, 우리는 피억압 국가의 편에 서서 억압 국가에 맞서 싸워야 한다. 연속혁명경향(CPR)은 아야톨라 정권의 반노동자적이고 억압적이며 반동적인 체제로부터 절대적인 계급독립성을 유지하면서 이러한 반제국주의 입장을 옹호한다. 노동자계급, 여성, 그리고 이란 민중의 해방과 자유는 제국주의 국가인 미국과 여전히 집단학살을 자행하는 이스라엘의 폭격과 개입으로부터는 결코 얻을 수 없다. 지금까지 알리 하메네이가 이끌어온 신정적이고 초보수적인 정치체제는 이란의 노동자와 빈민 대중에게 가차 없는 적이다. 이 체제는 (2022년 젊은 쿠르드족 여성 마흐사 아미니 살해 사건으로 상징적으로 드러났던) 여성 박해, 쿠르드족 탄압, 그리고 노동자 파업 탄압에 책임이 있다. 지난 1월, 하메네이는 빈곤, 기아, 그리고 국가 경제위기의 결과에 맞서 정당한 요구를 내걸고 시위하던 수천 명의 시위대를 학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사실, 아야톨라의 신정 독재는 1979년 이란 혁명을 정치적으로 찬탈한 데서 비롯되었다. 이 혁명은 레자 팔라비와 미국을 몰아내고 노동자 평의회(쇼라)의 급속한 성장을 가져왔다. 이 평의회들이 더욱 발전했더라면 이 지역에서 아래로부터의 노동자계급 권력이라는 새로운 동력을 창출할 수 있었겠지만, 성직자 정권에 의해 잔혹하게 진압되었다. 이것이 바로 이 정권이 권력 유지를 위해 대중을 억압하는 근본적인 이유이다. 이러한 행태는 이란 내에서 제국주의에 맞선 저항과 투쟁을 위한 준비를 체계적으로 방해해 왔다. 이란의 노동자, 여성, 청년들이 아야톨라 정권의 반동적인 탄압에 직면하면서 (우리 시대의 가장 반혁명적인 세력들인) 미국 제국주의와 식민주의적 시온주의에 맞서는 것은 훨씬 더 어려운 일이다. 따라서 미국과 이스라엘의 패배는 이란 정부와 자본가계급으로부터 완전한 정치적 독립성을 가질 때만 실현될 수 있다. 여러 분석가들이 지적했듯이, 이란은 베네수엘라와 다르다. 이란이 위치한 중동 지역은 미국, 이스라엘, 그리고 유럽 제국주의(프랑스, 영국, 독일, 이탈리아, 스페인)가 자행한 수십 년간의 파괴로 황폐해진 불안정한 지역이고, 난민 위기로 에워싸인 지역이며, 오랫동안 제국주의적 개입에 맞서 싸워온 역사를 가진 지역이다. 더욱이, 1979년 혁명 이후 미국의 가혹한 경제 제재로 압박받아 온 이란은 비록 2023년 이후 (특히 친이란 민병대의 경우) 약화되기는 했지만, 베네수엘라보다 더 큰 군사적, 지정학적 자원을 보유하고 있다. 미국과 이스라엘의 공격에 대한 대응으로 이란은 이스라엘과 (카타르의 알 우데이드, 아랍에미리트의 알 다프라, 쿠웨이트의 알리 알 살렘, 이라크의 에르빌, 바레인의 제5함대 사령부 등) 여러 미군기지를 향해 탄도미사일을 발사했으며, 걸프만 원유 수송의 전략적 통로인 호르무즈 해협의 선박들을 공격했다. 이란의 미사일은 텔아비브의 건물들을 파괴하고 베이트 셰메시의 이스라엘인들과 미군 병사들을 사망에 이르게 했다. 이란에서는 수천 명의 시위대가 거리로 나와 제국주의적 공격에 항의했고, 파키스탄, 이라크, 인도에서는 민간인들이 미국 대사관과 영사관을 공격했다. 다시 말해, 전쟁의 양상과 결과는 이란의 저항 수준과 지속적인 보복 여부에 달려 있다. 트럼프는 위험한 도박을 감행했다. 전 세계 어느 곳에서도, 특히 중동에서는, 미국이 공습에만 의존해서 정권 교체 작전을 성공적으로 수행한 사례가 없다.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처럼 지상군을 투입한 곳에서도 역사적인 패배를 겪었고, 미국 주둔에 적대적인 세력을 만들어냈다. 이란에 대한 군사적 침공은 트럼프에게 간단한 선택지가 아니다. 그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 없지만, 이란의 광활한 영토, 전략적 요충지인 호르무즈 해협 봉쇄 가능성, 내부 자원 접근에 대한 제한, 그리고 미국에 대한 지역적 적대감은 군사적 침공을 더욱 어렵게 한다. 미국 안에서도 공화당 지지층을 포함한 미국인 대다수가 군사적 침공을 강력하게 반대한다. 게다가 트럼프의 국내 입지는 약화되었다. 경제는 예상보다 부진한 성과를 보이고 있으며, 행정부는 이민세관집행국(ICE)에 반대하는 전국적인 시위에 직면해 있다. 특히 미니애폴리스에서 일어난 경제적 셧다운은 트럼프 정부가 계급투쟁 영역에서 처음으로 패배를 겪게 만들었다. 트럼프가 ‘모든 전쟁을 끝내겠다’고 약속해 놓고서 중동에서의 대규모 전쟁에 개입하는 방향으로 입장을 바꾼 것은 이러한 모순을 더욱 심화시킬 수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일부 좌파 세력(예를 들어 프랑스의 NPA-L'Anticapitaliste)은 제국주의 개입과 이란의 반동 정권을 동렬에 놓는다. 이러한 입장은 억압국과 피억압국의 차이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의 기본 원칙을 이해하지 못한 것일 뿐만 아니라, 혁명가들은 그 지도부의 반동적 성격과 관계없이 피억압국의 편에 서야 한다는 의무 또한 간과하고 있다. 한편 미국의 민주사회주의자(DSA)와 같은 단체는 자국의 제국주의 정부와 이스라엘의 패배 필요성을 제기하지 않고 단순히 전쟁 종식만을 요구한다. 더 나아가, 그들은 마치 트럼프의 제도적 갈취와 협박이 (워싱턴이 펼쳐 온 동일한 경제·정치 외교로 이미 수십 년간 억압받아 온) 이란 민중의 고통을 해결할 수 있는 방안인 것처럼 미국이 ‘외교’의 길로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미국과 이스라엘의 패배를 위해, 피억압 이란의 승리를 위해, 이란 정권으로부터 완전한 정치적 독립성이라는 기초 위에서, 중동과 전 세계의 노동자와 피억압 민중의 국제적 운동을 시급히 발전시켜야 한다. 전 세계의 사회주의 좌파, 팔레스타인 연대운동, 그리고 반제국주의 운동은 이 과제를 수행하기 위해 행동으로 단결해야 한다. 이는 특히 (민중들이 트럼프에게 반이민 정책을 철회하도록 압력을 가한) 미국과 모든 핵심 국가들에서 더욱 중요하다. 이러한 정책은 미국을 베네수엘라와 쿠바에서 축출하고 팔레스타인에서 자행되는 집단학살을 종식시키기 위한 투쟁에서 필수적인 부분이다. 이란에 대한 제국주의 전쟁을 타도하라! 미국과 이스라엘의 패배를! 미군은 중동에서 철수하라! 팔레스타인 민중에 대한 집단학살을 타도하라! 전 세계 노동자계급과 청년이 주도하는, 제국주의 침략에 맞선 대규모 운동을 건설하라! 2026년 3월 2일 연속혁명경향-제4인터내셔널(CPR-FI) -
[발언] 저는 이제 동지들과 3.8 여성파업 현장에 서 있겠습니다[사진] 스튜디오 알 안녕하세요. 침묵보다 저항을 선택하며 오늘로 서울시교육청 앞 773일째 투쟁 중인 지혜복 교사입니다. A학교 성폭력 사안은 피해를 신고한 여학생들뿐만 아니라 가해자인 학생들까지 포함하여 성평등한 사회적 주체로 성장하는 과정이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런 계기로 만들어지지 못했습니다. 하여 저는 이 학교 성폭력 사안이 온전히 해결되어 학교 안 성평등 문화가 구축이 되고 포괄적 성교육 교육 과정이 도입되어야 한다고 요구하며 지금까지 싸우고 있습니다. 이 투쟁의 과정은 참여한 동지들의 개개인의 피해 경험을 털어놓고 울고 웃으며 각각이 주체가 되어 나선 모두의 투쟁이었습니다.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다’라는 의미를 다시 한 번 확인하고 새기는 시간이었습니다. 1969년 캐롤 하니쉬의 글 제목에서 알려진 이 문장은 1960년~70년대 여성 운동에 등장한 핵심 구호입니다. 당시 사회의 분위기는 성폭력이 개인 탓, 집안 문제, 성차별은 개인 능력 문제, 우울, 좌절은 개인 성격 문제 등 여성들의 문제는 사적 영역의 일로 치부되었습니다. 지금도 그런 경향은 여전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겪는 성차별과 성폭력의 문제는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 구조와 권력 관계의 문제라는 것을 우리 모두는 알고 있습니다. 불안정한 일자리, 성별 임금 차별, 가사, 육아 등 이중 노동의 부담, 여성과 성소수자, 트랜스젠더의 성차별과 성폭력, 임신중지권 제한 등은 가부장적 자본주의 체제가 만든 구조적 문제입니다. 학교와 가정, 일터 등 권력 관계가 작동하는 공간에서 개개인이 겪는 특수한 문제가 아니라 각각의 구조적 특성이라는 것이 드러났습니다. 개인의 삶에서 벌어지는 일은 사회적 권력 구조와 연결되어 있으며, 따라서 변화는 정치적 행동을 통해 가능합니다. 하여 우리는 정치적 행동을 통해 우리 삶을 바꾸기 위해서 여성 파업에 나섭니다. 개인적 경험으로 가두지 않고 사회의 구조적 변화를 만들기 위해 일손을 멈추고 38 여성 파업에 나섭니다. 3.8 여성파업을 통해 우리 존재의 사회적 역할을 드러내고 우리의 정치적 힘을 보여줄 것입니다. 역사 속에서 여성은 가부장제와 지배 계급이 강요한 차별과 불평등에 저항해 왔습니다. 여성과 성소수자의 권리를 외면하고 노동자 계급의 단결을 도모하는 것은 모순이며, 진정한 평등을 이룰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불가능합니다. 여성 의제가 곧 노동자 계급 의제이며, 여성 억압에 맞선 투쟁은 자본주의에 맞선 투쟁과 분리될 수 없습니다. 이윤을 위해 자본주의 체제는 성별마저 노동자 계급을 분열시키기 위한 또 하나의 방법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자본의 분열과 착취, 억압에 맞서 노동자 계급 전체가 성차별에 맞선 단결 투쟁에 나섭시다. 여성들 간 또한 남성이 여성 억압에 맞서 투쟁하지 못하도록 가로막는 자본주의가 만들어낸 균열을 우리 모두가 막아내고 함께 승리합시다. 여성 해방을 위한 투쟁은 전 세계 모든 나라에서 자본주의 모든 형태의 착취와 억압을 끝장내기 위한 것입니다. 자본주의 최고 단계인 제국주의 군사적 팽창은 여성에 대한 노동력 통제와 재생산 통제의 문제로 연결됩니다. 제국주의 체제에서 여성은 인질, 인구 재생산 통제, 전복된 집단의 상징, 성폭력을 포함한 폭력을 과시하는 대상으로 간주됩니다. 여성은 제국주의 권력과 자국의 가부장제 체계 사이에서 침묵당하고, 결국 여성 대상 잔혹 행위는 공동체 전체를 굴복시키고자 행해집니다. 3.8 세계 여성의 날은 모든 여성이 평등하고 안전하게 살 수 있는 사회를 만들기 위한 국제적 기념일입니다. 팔레스타인 전쟁뿐만 아니라 최근 미국의 이란 침공 등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전쟁, 앞으로 벌어질 전쟁 속에서 나타나는 여성 폭력은 개인이 아닌 사회 정치적 문제입니다. 3월 8일에 우리는 이 또한 조명하고 국제적 행동을 촉구하는 날이 되기를 바랍니다. 저는 이제 동지들과 3.8 여성파업 현장에 서 있겠습니다. 시교육청에 찾아온 연대 동지가 건넨 메리골드의 꽃말. 찾아올 행복은 반드시 오고야 만다는, 이 말은 우리에게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믿음으로 연결되는 꽃말입니다. 낙관적 전망을 가지고 동지들과 함께 거리에서 싸우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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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3.8 여성파업의 요구와 의미2026-03-08 | 조회 340 -
[번역] 국제선언: 미국과 이스라엘의 패배를 위하여! 트럼프와 네타냐후의 이란에 대한 제국주의 전쟁을 타도하라!2026-03-04 | 조회 4,225 -
[사회주의 기초학습#11] 오늘날 세계정세: 위기·파시즘·제국주의·전쟁에 맞선 노동자 국제주의2026-03-02 | 조회 5,001 -
[한노운사 연재 7회] 2부 전진과 격돌 (1988-1998) [1] 1988~89년 민주노조운동의 폭발적 성장2026-03-02 | 조회 4,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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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 여성파업 정세와 투쟁방향, 윤석열에 이은 이재명 정부의 구조적 착취와 억압2026-03-01 | 조회 5,023 -
[기고] ‘노동자는 혼자가 아니라 하나다’ GM부품물류센터 부당해고 철회 투쟁의 기억2026-02-23 | 조회 6,587 -
[한노운사 연재 6회] 2부 전진과 격돌 (1988-1998) [시대배경] 군사파시즘에서 신자유주의 질서로2026-02-22 | 조회 6,639 -
[번역] 마르크스주의와 여성 억압2026-02-21 | 조회 6,495 -
노동개악 앞에서 노정협의체 참여, 민주노총 양경수 집행부는 스스로 무장해제하는가?2026-02-19 | 조회 7,246
우리의 투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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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투쟁] 열사 정신 계승, 곧 죽은 자의 뒤를 산자가 따른다는 말은 이수 투쟁에 끝까지 함께하는 것2026-03-13 | 조회 516 -
[발언] 세계 여성의 날, 반제국주의 침략 전쟁에 반대하는 노동자 민중의 국제연대 투쟁이 필요합니다2026-03-10 | 조회 1,802 -
[리포트] 가부장제, 제국주의, 자본주의에 맞선 3.8 여성파업대회2026-03-09 | 조회 2,422 -
[발언] 3월 6일 오후 12시 반. 서울역 광장에 여성파업의 대오로 모여주십시오! 동지들!2026-03-05 | 조회 296 -
[발언] 저는 이제 동지들과 3.8 여성파업 현장에 서 있겠습니다2026-03-03 | 조회 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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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기] 국민건강보험고객센터지부 단식농성 15일차, 계급적 연대로 직접고용 쟁취하자!2026-02-24 | 조회 6,074 -
[후기] '지혜복 교사는 공익제보자가 맞다' 2년 간의 투쟁과 연대가 만든 승리2026-01-31 | 조회 10,640 -
[후기] 세종호텔 로비농성 2주, 교섭은 바로 결렬, 복직까지 투쟁은 끝나지 않는다.2026-01-31 | 조회 10,850 -
세종호텔 로비농성장에서 미국 셧다운 연대 구호를 외치다2026-01-31 | 조회 10,587 -
지엠부품물류지회 투쟁승리를 위한 비정규직 이제그만 공동투쟁 1박2일 연대한마당2026-01-19 | 조회 11,74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