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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세집담회] 613 발전노동자 대행진, 무엇을 내걸고 어떻게 싸울 것인가기후위기 대응을 명목으로 석탄발전소 폐쇄가 본격화하고 있습니다. 정부와 자본이 전력수급기본계획을 앞세워 발전소를 일방적으로 폐쇄한 결과 고용불안은 발전소 노동자들에게 집중됩니다. 김충현 협의체 설문조사(2025) 결과, 발전소 폐쇄 이후 본인이 고용을 유지하지 못할 것이라는 답변은 자회사와 협력업체를 가리지 않고 매우 높았습니다. 발전소 현장 다단계 하청 구조도 여전히 공고합니다. 위험작업은 계속 외주화, 음지화되었습니다. 이는 김충현 노동자의 죽음을 비롯한 발전소 중대재해 재발로 이어집니다. 기후위기 시대, 발전소 노동자들은 공공재생에너지 확대와 총고용 보장을 요구하며 싸우고 있습니다. 2024년 태안 330 발전노동자대행진, 2025년 창원·태안 531 발전노동자대행진에 이어, 올해 6월 13일 창원에서 다시 투쟁을 조직하고 있습니다. 노조법 2·3조가 개정된 지금, ‘진짜 사장’ 국가와 발전 5사에 맞서 모든 노동자 고용보장을 걸고 싸워야 합니다. 나아가 재생에너지 민영화를 막고, 에너지를 얼마나, 어떻게 생산할 것인지 노동자들이 결정해야 합니다. 613 발전노동자대행진을 앞두고, 이러한 투쟁을 함께 만들 방안을 토론해봅시다. - 사회 : 이재백 (발전노조 서부본부장) - 발제 : 조건희 (사회주의를향한전진 투쟁위원회) - 지정토론 : 김영훈 (공공운수노조 한전KPS비정규직지회) - 시간 장소 : 5월 22일 금요일 19시 민주노총 15층(서울 중구 정동길 3) (※온라인 줌 병행) ※아래 첨부파일에서 발제자료를 다운받을 수 있습니다. -
국민배당금 논쟁은 무엇을 드러내는가‘국민배당금’ 제안은 반도체산업 초과이윤이 누구의 것이며 이를 어떻게 통제할 것인가에 관한 논쟁을 촉발했다. 보수세력은 노동자 파업에는 국가 개입을 요구하면서도, 기업 이윤과 주주 권리는 성역으로 놓으며 색깔론 공세를 폈다. 그러나 국민배당금 제안은 다단계 하청구조, 만연한 노동재해, 기후·환경파괴, 반도체산업의 전쟁산업화 경향을 건드리지 않는다. 반도체산업의 막대한 호황 앞에, 우리는 국민국가 내 분배론을 넘어 생산수단 소유와 통제에 대한 문제제기로, 노동자계급의 국제연대로 나아가야 한다. 이른바 국민배당금 제안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한국 자본주의 역사상 유례없는 이윤을 축적하고 있다. 삼성전자는 2026년 1분기 영업이익 약 57조 원, SK하이닉스는 영업이익 37조 원을 기록했다. 이 막대한 이윤은 AI 인프라 구축과 연동된 수요 폭증의 결과다. 일부는 2026년 두 기업이 합산 600조 원에 달하는 영업이익을 올릴 것으로 본다. 이 거대한 이윤은 AI산업의 ‘병목’으로 부각되는 메모리 공급에서 우월한 지위를 점한 결과다. 초기 AI 인프라 투자는 그래픽처리장치(GPU)에 집중되었으나, 최근에는 AI 추론기능 부각에 따라 이를 처리할 메모리 반도체 수요가 폭증하고 있고, 이에 따라 병목, 즉 메모리 반도체 공급 부족과 가격 폭등이 나타나고 있다. 5월 11일, 김용범 청와대 정책실장은 ‘차원이 다른 나라: AI 시대 한국의 장기 전략’이라는 제목의 글을 SNS에 게재했다. 요지는 AI 인프라 시대의 과실은 특정 기업만의 결과가 아니라 반세기에 걸쳐 전 국민이 함께 쌓은 산업 기반의 결과이며, 그렇기에 그 과실 일부는 전 국민에게 환원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소위 ‘국민배당금’ 제안이다. 국민배당금의 토대는 지속적 초과이윤에서 나오는 초과세수인데, 김용범의 글은 반도체산업의 초과이윤이 지속적으로 창출된다는 전제를 담고 있다. 다음날인 5월 12일 코스피가 장중 5% 폭락했고, 보수언론은 이를 김용범 정책실장의 국민배당금 제안 때문이라고 보도했다. 국민의힘은 ‘공산당 본색’, ‘사회주의 급행열차’, ‘기업이익 배급제’ 등 색깔론 공세를 폈다. 청와대는 서둘러 진화에 나섰다. 5월 13일, 이재명이 직접 김용범의 국민배당금 제안은 개인의견이고, 배당 제안은 초과이윤이 아니라 초과세수에 대한 것이며, “기업의 초과이윤을 국민배당하는 방안”이라는 보도는 “음해성 가짜뉴스”라는 입장을 밝혔다. 보수언론과 국민의힘 모두 노사관계라는 ‘사적 문제’인 삼성전자 파업에 대해서는 긴급조정권을 통한 국가 개입을 요구하면서도, 이윤에 대한 국가 개입은 비난한다. 양자를 관통하는 믿음은 분명하다. 기업 이윤은 불가침이라는 것이다. 이윤을 위협하는 노동자의 파업권은 국가가 제한할 수 있지만, 기업 이윤과 주주 권리는 국가가 건드릴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런 믿음에 따르면 노동자의 요구는 국민경제를 위협하는 집단 이기주의이나, 기업이 얻은 이윤은 사적 소유라는 성역으로 남아야 한다. 그 이윤이 국가의 공공재정 투입, 세제 혜택과 인허가 혜택, 연구개발 지원, 전력망 구축, 용수·토지 제공 등으로 이루어졌다고 해도, 국가는 이윤에 대해 개입해서는 안된다. 보수세력의 발작적 반응은 그야말로 시대착오적이다. 자유주의 경제지 <이코노미스트>조차 AI가 만들어낼 지대(rent)와 초과이윤의 집중을 그대로 둘 수 없으며 정상적인 자본수익률을 초과하는 이윤에 대한 과세와 토지·자연자원에 대한 부담금으로 초과이윤을 환수할 수 있다고 제기한다. 나아가 AI 기업의 부분적 국유화, 모두에게 AI기업 주식을 나눠주는 방안까지 거론한다. 물론 이코노미스트의 제안에 담긴 문제의식은 체제 변혁이 아니라 자본주의 체제의 안정화에 있다. 그러나 자유주의 경제지조차 초과이윤의 환수를 논하는 상황은, 한국 보수세력의 낡은 반공주의와 자본의 소유권에 대한 물신숭배를 드러내기에는 충분하다. 국민배당금, 어떻게 볼 것인가 첫째, 국민배당금은 이런저런 기본소득론과 마찬가지로 산업의 소유와 통제에 대해, 생산과정에 대해 침묵한다.[1] 국민배당금은 삼성전자와 하이닉스 같은 대기업이 구축한 다단계 하청과 비정규직 양산, 반도체산업에 대한 국가적 자원 집중과 특혜, 기후·환경파괴적 생산은 하등 건드리지 않는다. 배당금은 반도체산업의 실태는 그대로 둔 채, 그 불평등을 수용하라고 요구한다. 더군다나 반도체산업의 초과이윤은 제국주의 패권경쟁과 군사AI 경쟁 속에서 전략물자로 격상된 반도체의 지위와도 결부되어 있다. 이렇듯 반도체산업의 초과이윤은 전쟁산업 확대의 결과이기도 하나, 국민배당금은 반도체산업의 군사화 문제를 조금도 건드리지 않는다. AI산업과 반도체산업을 둘러싼 제국주의 열강 사이의 경쟁이 전쟁 위험을 높이더라도, 그렇게 발생한 초과이윤을 배당하면 된다는 식이다. 둘째, 국민배당금은 한국 반도체산업의 막대한 초과이윤이 오로지 한국이라는 국민국가에 속한다고 규정한다. 그러나 반도체산업은 국민경제 안에서 완결되는 산업이 아니며, 전 세계에 걸친 노동분업과 공동노동의 결과다. 한국 반도체 대기업이 초과이윤을 취한다면, 그것은 ‘한국인’만의 몫이 아니다. 반도체산업의 초과이윤은 원료 광물을 채굴하는 저임금 위험 노동, 공급망 하단에 위치한 각국 노동자들의 저임금 장시간 노동 등, 세계 노동자 민중에 대한 착취와 자연자원 수탈의 결과다. 삼성전자와 하이닉스는 AI 인프라의 핵심을 장악한 초국적 자본이며, 한국은 더 이상 세계 자본주의의 주변부에 위치한 하청 생산기지가 아니다. 그러나 국민배당금은 세계적 착취와 수탈의 산물을 국민국가 내부 분배 문제로 축소한다. 필요한 것은 ‘한국 국민에게 얼마를 나눌 것인가’가 아니라, 한국은 물론 세계 노동자들이 함께 만든 부를 왜 특정 자본이 전용하는지에 대한 근본적 의문을 제기하는 것이다. 앞서 말했듯, <이코노미스트>조차 ‘부분적 국유화’를 거론하는 형국이다. 셋째, 국민배당금 구상은 반도체산업의 초과이윤이 지속적이라는 가정에 근거한다. 그러나 이 가정은 허술하다. AI 인프라 투자는 폭발적으로 늘고 있지만, 이 투자가 실제로 그만큼의 이윤을 지속적으로 창출할 수 있는지는 입증되지 않았다. AI 기술이 쓸모없다는 뜻이 아니라, 막대한 설비투자가 이윤의 실현을 훨씬 앞서 나가고 있다는 것이다. 지금 반도체산업 초과이윤은 빅테크 기업의 선점 경쟁에 따른 공급 병목의 결과이며, 그 배경에는 격화하는 제국주의 열강투쟁이 있다. 물론 이런 이윤은 당분간 지속될 수 있다. 그러나 공급이 확대되고, AI산업에서 나오는 이윤이 기대치에 미치지 못해 빅테크의 투자 조정이 시작되면, 반도체산업 초과이윤은 급격히 축소될 수 있다. 자본주의에서 이런 현상은 낯설지 않다. 19세기 철도산업, 20세기 초반 자동차산업, 1990년대 말에서 2000년대 초까지의 닷컴 열풍 등은 모두 광기어린 투자에 필연적으로 뒤따르는 연쇄적 파산과 거품 붕괴를 겪었다. 반도체산업 국유화와 노동자 통제를 제기한다 그럼에도 국민배당금 논쟁은 중요한 균열을 드러냈다. 반도체산업에서 나오는 이윤은 더 이상 ‘특정 기업의 뛰어난 경영 성과’만으로 포장될 수 없으며, 이윤에 대한 처분권은 총수와 주주에게 독점적으로 귀속되어서는 안 된다는 문제제기는 정당하다. 그러나 국민배당금은 이 정당한 문제의식을 협소한 분배론으로 가둔다. 그 결과 국내 반도체산업 속에서 발생하는 노동 재해와 다단계 하청구조를 통한 초과착취, 노동자계급 내 불평등 심화는 물론 세계적 노동분업 속에서 이루어지는 착취와 수탈, 환경파괴는 건드리지 않은 채, 이를 용인하는 대가로 소액의 금전을 건넨다. 필요한 것은 국민배당금이 아니라 반도체산업의 국유화와 노동자 민중의 통제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같은 ‘전략산업’은 사회 전체의 필요에 따라 운영되어야 한다. 국제연대 강화와 함께 AI·반도체산업의 전쟁산업화 중단, 반도체산업 다단계 하청구조 철폐, 하청노동자 직접고용, 노동시간 단축, 노동안전보건조치 강화, 전력과 물 사용에 대한 사회적 통제, 기후위기 대응을 추진해야 한다. 문제는 누가 생산수단을 소유하고, 누구의 필요를 위해 무엇을 얼마나 생산할 것인가다. 해답은 반도체산업의 국유화와 노동자계급의 산업통제, 그리고 노동자계급의 국제연대에 있다. [각주] [1] “분배를 가지고 야단법석을 떨고 거기에 중점을 두는 것은 도대체 잘못된 것이다. 소비수단의 그때그때의 분배는 생산조건 자체의 분배의 귀결일 뿐이다 … 물적 생산조건들이 노동자들 자신의 조합적 소유가 되면, 오늘날과는 다른 소비수단의 분배가 나타난다.” 맑스, 「고타 강령 초안비판」 -
[성명] 이것은 현대중공업 자본을 대리한 사법부의 계급투쟁이다2026년 5월 21일,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금속노조 현대중공업지부 사내하청지회가 HD현대중공업을 상대로 제기한 단체교섭 청구소송에서 원고 패소를 확정했다. 사내하청지회는 2016년 원청에 단체교섭을 요구했고, 현대중공업이 이를 거부하자 2017년 소송을 제기했다. 사건은 2018년 12월 대법원에 올라간 뒤 무려 7년 6개월 동안 계류됐다. 그러나 대법원이 내놓은 결론은 ‘구 노동조합법이 적용되는 이 사안에서는, 하청노동자와 근로계약관계를 맺지 않은 현대중공업에 단체교섭 의무가 없다’는 것이었다. 대법원은 누가 노동조건과 노동과정을 지배하는지, 그렇게 만들어진 이윤을 누가 취하는지에 대해 철저히 침묵했다. HD현대중공업 원청은 출퇴근, 휴식시간, 인원 활용과 작업배치, 잔업과 특근, 안전 문제까지 생산과정 전반을 지배한다. 그런데도 대법원 다수의견은 누가 실제로 노동조건을 지배하는지가 아니라, 원청자본과 하청노동자 사이에 형식적 근로계약관계가 있는지를 중심으로 판단함으로써 다단계 하청구조의 본질을 철저히 외면했다. 현대중공업 전체 노동자 4만여 명 중 2만 5천여 명이 하청노동자다. 원청은 생산과정을 지배하지만 다단계 하청구조 뒤에 숨어 사용자로서의 모든 의무를 회피한다. 하청노동자들이 만든 이윤은 가져가지만, 위험과 비용은 떠넘긴다. 대법원은 단체교섭 요구가 2016년경 이루어졌고, 개정 노조법에 경과규정이 없다는 명분으로 구법을 적용했다. 이런 점에서 이번 판결은 얼핏 ‘소급적용 불가’라는 일반적 기준을 적용한 결과로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문제의 본질은, 대법원이 개정되기 전 법으로도 노동3권 보장을 위해 사용자 개념을 확장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실제로 반대의견을 낸 대법관 4명은 ‘구법을 기준으로 보아도, 현대중공업이 하청노동자의 노동조건을 실질적·구체적으로 지배·결정할 수 있다면 사용자로서 단체교섭 의무가 있다’고 밝혔다. 즉, 이번 판결은 노동자들이 노조법 2조 개정 전에 단체교섭을 요구했다는 이유로, 개정 노조법을 소급적용하지 않아서 내려진 필연적 결론이 아니다. 이는 대법원이 자본가들을 대리해 이 땅 모든 비정규직 노동자를 상대로 수행한 ‘계급투쟁’이다. 우리는 그간 깨닫고 또 깨달아온 교훈을 다시 확인하고 있다. 원청교섭은 힘으로 쟁취할 수밖에 없다. 돌아보자. 현대중공업 하청노동자들은 지난 23년간 쏟아진 그 무수한 탄압 속에서도 노동조합을 지켜 왔다. 노조법 2·3조 개정도 정부나 국회의 선물이 아니라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숱한 직접고용 쟁취투쟁, 원청교섭 투쟁, 손배가압류 철폐투쟁이 만들어낸 성과였다. 지금 필요한 것은 더 많은 비정규직 노동자들과 함께, 현대중공업을 비롯한 모든 원청자본에 맞선 투쟁을 조직하는 것이다. 사법부가 원청자본의 책임을 지웠다. 노동자는 투쟁으로 그 책임을 다시 새겨 넣어야 한다. 현대중공업 하청·이주노동자의 원청교섭 쟁취투쟁을 엄호하며 진짜 사장에게 책임을 묻는 투쟁, 다단계 하청구조를 깨는 투쟁을 조직하자. 가자! 7월 총파업! 2026년 5월 22일 사회주의를향한전진 -
사회적 대화, ‘들어가서 할 말은 하자’는 논리가 남긴 것은 무엇인가예나 지금이나 사회적 대화가 필요하다는 근거는 비슷하다. ‘들어가서 할 말은 해야 한다.’ 그러나 1998년 이후 사회적 대화의 역사는 분명하다. 그간 노사정 대화는 정리해고제와 파견제 도입, 기간제 고용 일반화, 파견 확대, 직권중재 폐지와 맞바꾼 필수유지업무제도 도입과 대체근로 허용 등 무더기 노동개악으로 이어졌다. 1998년 같은 합의 형식을 취하건 2006년 같은 배제 형식을 취하건, 사회적 대화의 끝에는 노동개악이 있었다. 이재명 정부가 내세우는 ‘사회적 대화 2.0’ 역시 전혀 새롭지 않다. 노동운동을 대화라는 허울로 묶어두고 투쟁의 칼날을 무디게 만들며, 결국 자본이 요구하는 노동개악을 관철하려는 시도의 반복일 뿐이다. 사진: 뉴스1 사회적 대화, 노동개악의 통로 김영삼 정권 이후, 정부와 자본은 종종 ‘경제위기 극복’, ‘고통분담’, ‘사회적 대타협’이라는 이름으로 노동조합 지도부를 노사정 대화 테이블로 불러들였다. 그리고 이는 노동자의 요구를 관철하는 장이 아니라, 자본과 정부가 구조조정과 노동개악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노동운동의 동의를 확보하는 수단으로 작용했다. 1998년 IMF 외환위기 당시 노사정위원회가 대표적이다. 예나 지금이나 사회적 대화가 필요하다는 근거는 비슷하다. ‘들어가서 막아야 한다’, ‘할 말은 해야 한다’, ‘대화를 거부하면 노동운동이 고립된다’ 등등. 그러나 노사정위원회의 결과는 정리해고제와 근로자파견제 법제화였고, 이 합의는 오늘날 한국 자본주의의 기틀을 만든 분기점이었다. 결국 1999년 2월, 민주노총은 노사정위원회에서 탈퇴했다. 2005-2006년 민주노총의 사회적 교섭 추진도 마찬가지였다. 당시 이수호 집행부는 출범 때부터 사회적 교섭을 강조했다. 그러나 화물연대 파업 탄압, 철도노조 파업 3시간 만에 공권력 투입, 2005년 울산건설플랜트 파업 탄압, 아시아나항공·대한항공 조종사 파업 긴급조정권 발동 등 노무현 정부가 파업을 철저히 탄압하고, ‘비정규직 보호입법’이라는 이름으로 기간제법 제정과 파견법 개악을 추진하는 상황에서 노사정 대화는 비정규직 권리보장 입법을 관철하는 공간이 아니라 노동개악을 둘러싼 협의 틀로 작동했다. 2005년 1월과 2월, 이수호 집행부는 대의원대회에 ‘사회적 교섭방침’을 상정했지만 격렬한 반대로 통과시키지 못했다. 3월 15일 대의원대회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럼에도 3월 17일 중앙집행위원회는 대의원대회를 거치지 않은 채 노사정 교섭 추진을 결정했다. 노무현 정부는 2004년 11월 비정규직 관련 개악 법안을 국회에 제출한 뒤, 2005-2006년 내내 비정규직법과 노사관계로드맵을 노동개악 두 축으로 병행 추진했다. 비정규직법이 기간제·파견 노동을 확산하는 법안이었다면, 노사관계로드맵은 파업권과 노조 활동을 위축시키는 법안이었다. 민주노총과 비정규직 운동진영이 요구한 것은 상시업무 정규직화, 비정규직 사용사유 제한, 파견법 폐지, 불법파견 시 직접고용, 특수고용노동자 노동3권 보장이었다. 그러나 정부가 ‘비정규직 보호’라는 이름을 붙여 추진한 법안은 정반대 내용을 담고 있었다. 기간제노동을 일반화하고, 파견노동을 확대하는 것이 핵심이었다. 이 법안은 2006년 11월 30일 국회를 통과했고, 비정규직을 줄이기는커녕 기간제·파견 노동을 합법적 고용형태로 고착시키는 결과로 이어졌다. 2006년에는 노사관계로드맵을 둘러싼 사회적 대화가 이어졌다. 민주노총은 2006년 6월 노사정대표자회의에 복귀했지만, 정부가 내놓은 노사관계선진화방안, 즉 노사관계로드맵은 노동개악 종합 패키지였다. 2006년 9월, 정부는 민주노총의 뒤통수를 치며 민주노총을 배제하고 긴급 노사정대표자회의를 열어 로드맵에 합의했고, 이날 합의된 내용은 △기업단위 복수노조 허용 3년 유예 △노조전임자 임금지급 금지 3년 유예 △기존 필수공익사업장 직권중재를 폐지하되 필수유지업무제도 운용 및 쟁의기간 대체인력의 채용·하도급 허용 △필수공익사업장 확대(혈액공급, 항공, 폐·하수처리, 증기·온수공급업) △부당해고 벌칙조항 삭제 △정리해고 사전통보기간을 60일에서 50일로 단축 등이었다. 1998년과 2006년 모두 사회적 대화가 노동개악으로 이어졌으나, 같은 방식으로 진행된 것은 아니었다. 1998년 노사정위에서는 민주노총 지도부가 정리해고제와 근로자파견제 도입에 합의했으나 2006년 노사관계로드맵 합의는 민주노총이 노사정대표자회의에 복귀했음에도 정부가 민주노총을 배제한 채 한국노총·경총과 전격 합의한 사건이었다. ‘개악안에 합의하지 않겠다’, ‘할 말은 하겠다’는 방침으로 참여한다고 해도, 정부와 자본은 사회적 대화라는 틀로 노동운동을 묶어두고, 합의든 배제든 노동개악을 관철했을 뿐이다. 사진: 매일노동뉴스 청와대 노동절 기념식, 어떤 요구를 말해도 그 본질은 노사정 화해의 장이다 결국 1998년 이후 사회적 대화의 역사에서 반복적으로 드러난 결과는 분명하다. 그간 노사정 대화는 정리해고제와 파견제 도입, 기간제 고용 일반화, 파견 확대, 직권중재 폐지와 맞바꾼 필수유지업무제도 도입과 대체근로 허용 등 무더기 노동개악으로 이어졌다. 합의건 배제건 사회적 대화의 끝에는 노동개악이 있었다. 우리는 이런 경험 위에서 2026년 노동절을 관통하는 정세를 봐야 한다. 이재명 정부는 노동절을 계기로 ‘노동존중’ 외양을 강화하고, 민주노총을 사회적 대화의 틀로 끌어들이려 한다. 5월 1일 청와대 영빈관에서 열린 정부 노동절 기념식에 관한 언론 보도에는 대통령, 민주노총과 한국노총 위원장, 경총 회장이 나란히 선 장면이 담겼다. 일부 동지들은 정부 행사 참여가 옳은 일이었다고 한다. ‘노동조합은 투쟁만 하는 조직이 아니라 교섭도 해야 한다. 민주노총 위원장은 오전에는 대통령 앞에서 노동자의 요구를 말했고, 노동절 집회에서는 광화문에서 7월 총파업을 선언했다. 정부 행사에 가서는 축사뿐만 아니라 서광석 열사 사망, 특수고용·플랫폼노동자 노동권, 자본의 원청교섭 거부 실태를 고발하고 중대재해처벌법 무력화를 비판했다.’ 물론 양경수 민주노총 위원장은 실제로 그런 말들을 했다. 그러나 이런 반론 역시 새롭지 않다. 앞서 말했듯 예나 지금이나 사회적 대화를 정당화하는 논리는 비슷하다. 핵심은 사회적 대화의 결과는 모두 노동개악이었다는 점이다. 당연히 노동조합은 정부와 만날 수 있다. 그러나 핵심은 노동조합 대표자가 ‘요구를 말했느냐’가 아니다. 문제는 그 말이 어떤 자리에서 이루어졌는가, 어떤 정치적 맥락 속에 배치되었는가다. 정부가 노동자계급과 자본가계급, 적대하는 계급 대표자들을 모아놓고 노사화해주의를 설파하는 자리에 노동조합 대표자가 참여했다는 것이 문제의 본질이다. 그것도 불과 11일 전 열사가 목숨을 잃은 상황에서 말이다. 1998년 노사정위원회에 참여해야 한다는 주된 논리도 ‘들어가서 할 말은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결과는 무엇이었나? 정리해고와 파견제 도입이었다. 1998년 2월 7일자 조선일보 청와대 노동절 기념식은, 국가가 ‘노동절’을 자신의 정치적 성과로 포섭해 재구성하는 자리였다. 언론은 대통령과 경총 회장, 한국노총 위원장과 함께 민주노총 위원장이 나란히 선 장면을 담았다. 바로 이 장면이 정부가 의도한 정치적 효과였다. 정부는 노사정이 함께 박수치는 장면을 연출하며, 불과 11일 전 서광석 열사의 죽음에 대한 국가의 책임을 지우고 자본에 대한 분노를 희석했으며, 열사의 죽음이 만든 계급투쟁 격화 소지를 제어했다. 물론 앞서 말했듯, 민주노총 위원장은 그 자리에서 노동자의 요구 또한 말했다. 그러나 청와대 영빈관에서 대통령을 만나 ‘원청자본의 교섭해태 실태’, 심지어 ‘파견법·기간제법 폐기’를 말한다고 해도 본질은 달라지지 않는다. 정부가 노사정 대화를 강조하는 이유는 노동개악을 준비하고 있기 때문이다. 노동개악과 노동탄압은 사회적 대화와 함께 온다 윤석열 정부가 건설노조 탄압, 주 69시간제 추진, 노조법 2·3조 개정 거부권 행사 등으로 노동운동을 정면 공격했다면, 이재명 정부는 노동운동 상층을 대화의 장으로 불러들여 상생의 이름 아래 노동개악을 추진한다. 2026년 1월, 정부는 청와대와 고용노동부·재정경제부·중소벤처기업부 등이 참여하는 범부처 ‘노동구조개혁TF’를 출범하며 전체 노동자를 대상으로 한 노동개악에 나섰다. 언론에 따르면 노동구조개혁TF가 주도하는 노동개악 추진방향은 △기간제 비정규직 노동자 사용기한 3년 이상으로 연장 △직무·성과급제 확대 △전략산업 특별연장근로 확대 △지역 메가특구 노동시간 규제완화 등이다. 이어 3월 19일, 이재명은 정부 1기 경제사회노동위원회 출범식에서 “노동자들이 기업이 원하는 고용유연성을 수용할 수 있는 상황을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동시에 ‘노동자들의 일방적 희생을 요구하는 방식은 옳지 않다’고 덧붙였다. ‘해고가 죽음이 아닌 사회’, ‘전환의 시대에 맞는 노동시장’ 등 정부의 언사는 부드럽지만, 그 방향은 지난 정부와 하등 다르지 않다. 이재명 정부도 지난 정부와 마찬가지로 ‘유연안정성’이라는 이름 아래 해고와 전환배치, 직무·성과급을 확대하는 대가로 사회안전망을 일부 제공하겠다는 것이다. 본질은 더 쉬운 해고와 더 많은 비정규직이고, ‘사회안전망’은 이를 위한 부가조치일 뿐이다. 2026년 3월 19일 이재명 정부 1기 경사노위 출범식 이런 거시적 흐름은 주요 노동자 투쟁에 대한 태도들에서도 여실히 드러나고 있다. 노동부 장관과 집권여당 대표 등이 요란하게 장기투쟁 사업장들을 방문했을 뿐, 문제해결은커녕 장기투쟁을 낳은 악질자본가들에 대한 그 어떤 제재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심지어 노동조합 회계공시제도조차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 이렇듯 이재명 정권은 한편에서는 ‘노동운동 열심히 하라’는 덕담과 함께 노동자 민중운동 세력을 향해 ‘대화’를 제의하면서도, 다른 한편에서는 자본에 맞서는 전투적 투쟁을 탄압한다. 어디 화물연대 투쟁뿐인가. 2026년 2월, 세종호텔 로비농성을 이재명 정부가 지휘하는 공권력이 침탈했고, 4월에는 지혜복 교사의 고공농성에 연대했다는 죄목으로 고진수 동지가 구속당했다. 유예되고 또 유예된 택시월급제 즉각 시행을 요구하며 공공운수노조 택시지부 고영기 동지가 고공에 오른 상황에서조차, 민주당은 택시자본가들을 위해 월급제 유예법안을 통과시켰고 이재명은 거부권을 행사하라는 요구까지 짓밟으며 택시노동자들을 외면했다. 이렇듯 이재명 정부의 허울뿐인 ‘노동 존중’을 떠받치는 것이 사회적 합의주의다. 일터기본법의 실체도 마찬가지다. 정부와 여당은 이 법을 노동법 밖에 놓인 특수고용·플랫폼·프리랜서 등을 보호하는 법이라고 설명한다. 그러나 불안정노동자에게 필요한 것은 ‘일하는 사람’이라는 모호한 범주가 아니라 노동자성 인정이고, 근로기준법과 노조법의 전면 적용이다. ‘그래도 이전보다 나아지지 않느냐’고 반박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일터기본법은 노동권의 보편화가 아니라 차등화다. 이재명 정부 계획에 따르면, 한쪽에는 근로기준법과 노조법을 적용받는 ‘진짜 노동자’가 있고, 다른 한쪽에는 일터기본법을 적용받는 ‘일하는 사람’이라는 이름의 2등 노동자들이 양산된다. 결국 정규직-비정규직-일하는 사람 사이의 위계, 노동자계급 내 위계를 더 촘촘히 제도화할 뿐이다. 사회적 대화 2.0은 조금도 새롭지 않다 사회적 합의주의는 노사정이 대등한 대화를 할 수 있다는 환상을 유포하며 투쟁 대상을 흐린다. 노동자들이 원청자본을 향한 분노와 함께 ‘진짜 사장 나오라’라고 외칠 때, 사회적 대화는 ‘노사정이 함께 허심탄회하게 이야기하며 해결하자’고 말한다. 그러나 지금 필요한 것은 원청교섭을 요구하는 노동자를 죽음으로 몬 자본에 맞선 투쟁이다. 대통령이 직접 ‘모범 사용자가 되겠다’고 말한 공공부문 원청조차 비정규직 노동자와의 교섭을 거부하고 있음을 드러내며 투쟁을 확대하는 것이다. 누가 비정규직을 양산했는가? 누가 그 노동자의 임금과 노동조건을 지배하면서도 사용자가 아니라며 교섭을 거부하다 죽음으로 몰았는가? 누가 노동자를 자영업자로 위장해 권리를 박탈했는가? 국가와 자본이다. 물론 노동자는 국가·자본과 대면할 수 있다. 그 대면은 계급투쟁을 배경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노사정은 애초 대등한 힘을 가진 주체가 아니다. 경사노위 내 노동자 대표가 그 어떤 논리와 당위로 국가와 자본을 설득해도, 결국 문제를 결정하는 것은 힘이다. 기억하자. 1998년 당시 노사정 합의에는 △실업대책기금 조성 △해고회피 노력 △해고자 우선채용 같은 완충 조항도 포함됐지만, 정세를 규정한 것은 자본이 요구한 정리해고제와 파견제 도입이었다. 2006년 노사관계로드맵도 마찬가지였다. ‘직권중재제도 폐지’를 명분으로 내세웠지만, 그 실상은 ‘필수유지업무제도’를 통한 파업 무력화였다. 노동자 대표가 회의장 안에서 아무리 효과적인 논리를 역설한다고 해도, 그것은 그저 말이다. 그 말에 힘을 부여하는 것은 결국 계급투쟁이다. 민주노총은 2026년을 원청교섭 원년으로 만들겠다고 했다. 이는 곧 한국 자본이 수십 년간 공들여 구축한 다단계 하도급체계를 계급투쟁으로 뚫어내겠다는 뜻이다. 사회적 합의주의와 단절하지 않고 원청교섭 쟁취, 특수고용·플랫폼노동자 노동자성 인정, 모든 노동자의 노동기본권 확대는 불가하다. 이재명 정부가 내세우는 ‘사회적 대화 2.0’은 조금도 새롭지 않다. 남은 과제는 분명하다. 거듭 파국을 낳아온 사회적 대화를 중단하고 △원청교섭 쟁취 △팔레스타인 학살과 제국주의 전쟁 반대 △차별금지법 쟁취 △물가임금연동제와 실질임금 보장 △청년일자리 창출 등 절박한 요구를 걸고 7월 총파업을 조직하는 것이다. -
[성명] 오늘 삼성 노동자를 향한 칼날은 내일 다른 노동자를 향한다이재명은 오늘(5월 18일) 삼성 파업을 두고 "모든 국민의 기본권은 보장되지만, 본질적 내용을 침해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공공복리 등을 위해 제한될 수 있다", "노동권만큼 기업경영권도 존중되어야 한다"라고 말했다. 결국 긴급조정권으로 파업권을 봉쇄하겠다는 협박이다. 삼성전자 노동자들의 요구가 한계를 지님은 분명하나, 삼성전자 노동자들이 파업할 권리는 정당하다. '노동권만큼 기업경영권도 존중해달라'고? 마치 기업이 피해자라는 투다. 실상은 정반대다. 이재명 정부는 1년 365일 기업경영권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파업권 행사 자체를 봉쇄하는 극악한 시도로 노동자들을 협박한다. 재벌의 이익과 경영권을 공공복리로 둔갑시키면서 말이다. 법원도 "노조가 쟁의 행위 기간에도 평상시와 동일한 수준의 인력, 가동 시간 등에 대한 의무를 준수해야 한다"라며 파업권 짓밟기에 나섰다. 그동안 이건희, 이재용을 비롯한 경영진들은 자신들만의 막대한 부를 위해 온갖 비리와 부패를 저질렀다. 무노조 경영으로 노동자들의 저항을 참혹히 짓밟았고, 수많은 백혈병 피해자의 절규를 무시했다. 온갖 유해물질에 대한 정보는 '영업비밀'이란 명분으로 감춰왔고, 지금도 감추고 있다. 비정규직에 대한 초과 착취 역시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그들은 적자일 때도 자신들 배를 충분히 불렸다. 예를 들어 2023년 노동자들은 적자로 인센티브를 전혀 받지 못했지만, 등기이사 1인당 평균 보수는 상여금 포함 44억 2백만원에 이르렀다. 그뿐인가? 천문학적인 노동자 민중의 혈세를 삼성과 SK하이닉스에 몰아주고, 물과 전기 등 공공자원을 반도체산업 자본이 마음대로 쓰게 만드는 반도체특별법을 통과시켰다. 이렇게 그들의 경영권은 365일 내내, 아니 수십 년 내내 100%가 아니라 1000% 존중되고 있다. 삼성의 막대한 이윤은 노동자들의 피와 땀 위에 세워졌다. 노동자계급의 공동노동이 만든 사회적 부다. 노동자들은 부의 분배를 요구할 정당할 권리를 가지고 있다. 물론 삼성전자 노동자들의 투쟁은 큰 한계와 약점을 가지고 있다. 정규직만의, 그것도 반도체 부문 노동자의 권리와 이익에만 힘을 쏟고 있다. 수많은 하청·비정규직의 권리와 이익을 외면하고 있다. 하지만 하청·비정규직에 대한 초과 착취에 앞장섰던 자본가들, 그들 편에서 법과 제도를 설계했던 정치인들은 노동자들을 비난할 자격이 없다. 긴급조정권은 공공 복리가 아닌 재벌 이익을 위한 노동권 압살일 뿐이다. 노동자들은 긴급조정권 카드를 들이밀며 노동권을 압살하려는 이재명 정부와 투쟁해야 한다. 또한 이 투쟁의 한계와 약점을 극복해 가야 한다. 이 길을 위해 힘을 모으고, 또 모으자! 2026년 5월 18일 사회주의를향한전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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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투쟁] 이스라엘의 가자지구 가스전 개발사업에 참여하는 한국석유공사 규탄 기자회견이 열리다.이스라엘과 미국 제국주의 열강은 950일째 팔레스타인 가자지구 주민을 집단학살하고, 중동으로 전쟁과 학살을 확대하고 있다. 팔레스타인 집단학살에 반대해 온 울산의 노동자 민중은 5월 13일, 11시 40분 한국석유공사 앞에 모여 한국석유공사가 이스라엘의 가자지구 가스전 개발사업 참여를 통해 집단학살과 자원 수탈에 공모함을 규탄하며 기자회견을 개최하고 항의면담을 진행했다. 약 60여 명이 이번 기자회견에 참여했다. 이번 기자회견은 지난 2025년 11월 26일 “팔레스타인 집단학살 공모기업 한국석유공사 규탄 국제행동의 날” 집회 후 6개월 만에 이뤄졌다. 기자회견 참가자들은 노동자민중의 세금으로 운영되는 한국석유공사가 여전히 가자지구 영해 가스전 컨소시엄 사업에 참여하며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집단학살 비용을 대주고 있음을 규탄했다. 특히 이탈리아 에너지기업 에니(Eni)가 자국 노동자들의 반대와 파업에 부딪쳐 컨소시엄에서 전면 철수한 반면, 한국석유공사는 에니의 컨소시엄 지분까지 흡수하며 이스라엘 기업과 단 둘이 자원수탈 프로젝트를 유지하고 있는 것을 강하게 규탄했다. 서울에서 온 팔레스타인평화연대 눈보라 활동가는 “한국석유공사가 자회사를 통해 집단학살이 자행되는 전범국과 거래하면서 한국 국민의 세금을 낭비하는 게 말이 됩니까?”라고 꼬집으며,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집단학살이 인류의 존엄을 위협하고 국제법마저 위반하고 있는 현실을 지적했다. 민주노총 최용규 울산지역본부장은 “전쟁과 제재의 피해는 권력자가 아니라 평범한 시민들에게 돌아간다. 병원에는 약이 부족해지고, 아이들의 일상은 무너지고, 노동자와 서민들의 삶은 벼랑 끝으로 내몰린다”며 팔레스타인에서 쿠바, 중동으로 번지는 미 제국주의와 이스라엘의 침략과 전쟁, 경제봉쇄를 강력히 규탄했다. 이어 ‘울산 노동자가 앞장서서 전쟁과 침략, 제재와 학살에 반대하며 민중의 생명과 존엄, 자주와 평화를 지키기 위해 끝까지 연대할것’을 강조했다. 금속노조 현대자동차비정규직지회 이수기업 해고노동자로 현대자동차와 투쟁중인 정성훈 노동자는 “팔레스타인 집단학살보다 더 참담한 건, 공기업인 '한국석유공사'가 이 비극의 현장에서 이스라엘과 손을 잡고 자원약탈에 가담하고 있다는 사실”이라고 성토했다. “일제강점기의 아픈 역사를 가진 우리가, 이제는 가해자의 편에 서서 다른 나라의 영토를 침범하고 자원을 약탈하는 일에 동조한다는 것은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며, “죽음의 땅에서 퍼 올리는 가스가 아니라, 평화와 인권이라는 인류 보편 가치를 지키는 길을 택하라”고 촉구했다. 이어 금속노조 현대글로비스울산지회 김미옥지회장과 정의당 박민자 사무국장이 기자회견문을 낭독했다. 기자회견문은 한국석유공사의 책임회피와 기만을 낱낱이 드러냈다. “지난 6개월 동안 한국석유공사는 ‘지분(15%)이 적은 만큼 책임도 적다’며 집단학살 공모 책임을 회피했다. 또한 산업통상부는 ‘좋은 소식 기다려 보자’며 시간을 끌었다. 그러나 한국석유공사와 산업통상부의 대답은 순간을 모면하려는 거짓과 기만이었다” “한국석유공사는 철수는커녕, ENI가 포기한 운영권을 갖고, 올해 2/4분기부터 본격적으로 탐사를 추진할 예정이다. 이스라엘 집단학살 공모 책임이 더 커진 만큼 한국석유공사에 대한 규탄과 컨소시엄 철수 요구를 더 키울 수밖에 없다” 팔레스타인 평화를 위한 울산긴급행동은 서울, 부산, 대구, 춘천, 전주, 영국 스코틀랜드 등 팔레스타인에 연대하는 단체들과 함께 한국석유공사의 집단학살 공모 규탄과 컨소시엄 철수를 촉구하는 전국 동시다발 공동행동을 진행하고, 영국 스코틀랜드 등지의 국제연대 활동과도 함께함을 알렸다. 자원약탈 컨소시엄 즉각 철수 요구와 함께, 팔레스타인의 평화와 해방을 위해 자유선단연합(FFC)을 통해 가자지구로 항해하는 배에 탑승한 김아현(해초), 승준, 김동현 활동가의 투혼을 지지하며 무사 귀환할 때까지 함께할 것임을 선언했다. 기자회견 후 한국석유공사 측과의 항의면담이 진행됐다. 항의면담에는 해외팀장 등 한국석유공사 측과, 민주노총 최용규 울산지역본부장, 조시형 노동안건보건국장, 뎡야핑과 눈보라 팔레스타인평화연대 활동가, 팔레스타인평화를위한울산긴급행동 강진관 활동가가 참여했다. 면담에 참여한 활동가들은 한국석유공사의 컨소시엄 참여의 부당성을 짚으며, 사업 철수를 강력히 촉구했다. 한국석유공사 측은 사업강행 의사를 피력하지 않은 상태로 항의를 경청했다. 이어 기자회견 참가자들은 “울산 노동자 앞장서서 팔레스타인에 평화를”, “한국석유공사는 가자지구 바다에서 손 떼라”, “한국은 팔레스타인 자원 약탈 중단하라”, “KNOC DANA You Can’t Hide. Stop Fueling Genocide(한국석유공사-다나는 숨지 마라, 집단학살에 연료를 대지 말라)” 등의 구호를 외쳤다. 마지막에는 영국 스코틀랜드에서 한국으로 원어민 영어강사로 일하러 온 이주노동자가 “Free, Free, Palestine”을 선창하고, 60여 명의 노동자민중이 이를 함께 외치며 전 세계로 연대의 목소리를 타전했다. 노동자민중이 피땀 흘려 일한 돈으로 낸 세금을 학살과 수탈에 사용할 수는 없다. 우리는 팔레스타인의 집단학살, 제국주의 식민지배와 점령, 수탈, 인권 유린, 국제법 위반 행위에 한국정부와 한국석유공사, 그리고 여러 한국기업이 공모, 협력하는 것을 가만히 둘 수 없다. 이번 기자회견과 항의면담에 뒤이은 실천투쟁으로, 5월 14일부터 5월 22일까지 울산의 한국석유공사 본사 앞에서 7일간 1인 시위를 진행할 예정이다. [팔레스타인 집단학살 이스라엘의 가자지구 해역자원 약탈 공모기업 한국석유공사 규탄 기자회견문] 미국과 이스라엘의 패권과 자원약탈을 위한 침략전쟁은 집단학살, 테러와 살인, 삶의 터전과 문명 파괴, 굶주림과 질병, 공포와 절망, 혐오와 배제로 전 세계를 야만의 시대로 내몰고 있다. 전 세계 노동자 민중이 미국과 이스라엘의 야욕과 침략전쟁을 멈추지 못한다면, 전쟁과 집단학살, 무기 수출과 문명 파괴를 이윤 추구의 기회로 삼는 기업들의 야만적인 폭주를 멈추지 못한다면, 과연 인류가 희망과 미래를 기약할 수 있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중동지역 전쟁은 한국을 포함한 동아시아의 정세와 절대 무관하지 않다.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집단학살을 아직도 멈추지 못했기에, 미국과 이스라엘의 이란침략, 이스라엘의 레바논 침략으로 이어져 중동지역은 전쟁의 참화를 겪고 있다. 미국과 이스라엘의 이란침략과 호르무즈 해역 무력 봉쇄에 따른 전쟁 양상을 봤을 때, 한국, 일본, 필리핀 등 미군이 주둔한 동아시아와 남중국해 주변 나라에서 전쟁 발발 시, 그 전쟁의 전개 양상과 참상을 충분히 예측할 수 있다.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집단학살과 중동지역 전쟁은 한국기업들과 절대 무관하지 않다. 한국 국가방위산업, 민간방산기업, AI 기업, 건설기계 기업, 에너지기업, 식품기업 등은 이스라엘의 전쟁 수행과 집단학살을 지속시키는 지렛대로 역할하고 있다. 이들은 살상 무기와 군수물자 수출, 방위산업 협력, 팔레스타인을 파괴하는 건설기계 수출 등 다양한 형태로 전쟁에 연루되어 있다. 한국석유공사는 팔레스타인 집단학살 이스라엘의 가자지구 자원약탈에 공모하는 대표적 기업이다. 한국석유공사는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가자지구 영해 가스전을 약탈하는 컨소시엄에 참여하여 팔레스타인에 연대하는 한국을 비롯한 국제 사회로부터 지탄받고 있다. 한국석유공사는 팔레스타인 가자지구 영해 자원약탈 컨소시엄 - 이탈리아 기업 ENI 지분 70%, 한국석유공사 다나 페트롤리엄 지분 15%, 이스라엘 기업 Ratio 지분 15% - 에 참여해 집단학살에 공모해 왔다. 팔레스타인에 연대하는 한국 단체와 국제단체들은 2025년 11월 “팔레스타인 집단학살 공모기업 한국석유공사 규탄 국제행동의 날” 집회를 열어 한국석유공사의 컨소시엄 철수를 촉구하는 항의서한을 전달했다. 그 후에도 팔레스타인에 연대하는 한국 단체들은 국민 감사청구인 서명운동, 산업통상부 항의 전화, 국민신문고, 국민 감사 청구 기자회견 등 한국석유공사의 컨소시엄 철수를 거듭 촉구해 왔다. 지난 6개월 동안 한국석유공사는 ‘지분(15%)이 적은 만큼 책임도 적다’며 집단학살 공모 책임을 회피했다. 또한 산업통상부는 ‘좋은 소식 기다려 보자’며 시간을 끌었다. 그러나 한국석유공사와 산업통상부의 대답은 순간을 모면하려는 거짓과 기만임이 밝혀졌다. 이탈리아 기업 ENI가 자국 노동자 민중의 강력한 투쟁에 압박받아 2025년 12월 컨소시엄에서 최종 철수했다. 이제 팔레스타인 영해 자원약탈 컨소시엄에 남은 기업은 한국석유공사와 이스라엘 Ratio뿐이다. 그러나 한국석유공사는 컨소시엄 철수는커녕, ENI가 포기한 운영권을 갖고 Ratio와 함께 이스라엘 정부로부터 가스전 탐사권을 획득해 올해 2/4분기부터 본격적으로 탐사를 추진할 예정이라고 한다. 지난 2025년 12월, 이스라엘 정부가 2026년 10월 탐사권 만료 후, 다음 라운드인 5번째 가스전 탐사권 입찰을 발표했으며, 이번 입찰에는 가스전 탐사권 해당 해역에서 팔레스타인 영해가 더 늘어난 게 확인되었다. 한국석유공사의 이스라엘 집단학살 공모 책임은 더 커졌다. 그런 만큼 한국석유공사에 대한 규탄과 컨소시엄 철수 요구도 더 커질 수밖에 없다. 팔레스타인 평화를 위한 울산 긴급행동은 서울, 부산, 대구, 춘천, 전주, 영국 스코틀랜드 등 팔레스타인에 연대하는 단체들과 함께 한국석유공사의 집단학살 공모 규탄과 컨소시엄 철수를 촉구하는 전국 동시다발 공동행동을 전개하고자 한다. 우리는 2025년 10월, 유엔 팔레스타인 인권 특별보고관이 한국을 ‘가자지구 집단학살 공모 국가’로 지명한 사실을 기억한다. 국제법을 위반하면서 팔레스타인 영해 자원약탈로 이윤을 추구하는 한국석유공사에 수치심과 분노를 느낀다. 우리는 한국 정부와 한국석유공사에 강력히 촉구한다. 팔레스타인 집단학살 이스라엘의 가자지구 자원약탈 컨소시엄에서 지금 당장 철수하라! 또한 우리는 이스라엘의 집단학살 중단, 팔레스타인의 평화와 자유, 해방을 위해 가자지구 항해 선단에 오른 김아현(해초), 승준, 김동현 활동가의 투혼을 지지하며 무사 귀환할 때까지 함께할 것이다. ▸이스라엘은 가자지구 집단학살 지금 당장 멈춰라! ▸이스라엘 점령군은 가자지구에서 즉각 철수하라! ▸이스라엘은 레바논 점령과 학살을 즉각 중단하라! ▸미국은 이란침략 중단하고 중동지역에서 즉각 철수하라! ▸미국은 쿠바 봉쇄를 즉각 해제하라! ▸한국석유공사는 가자지구 영해 자원약탈 컨소시엄에서 즉각 철수하라! ▸HD현대, 한화 등은 이스라엘 집단학살 공모를 즉각 중단하라! ▸제국주의 침략전쟁에 맞서 반제반전 국제연대를 강화하자! 2026년 5월 13일 팔레스타인 평화를 위한 울산긴급행동 /* 스크롤 여백만 주고, 화면에는 안 보이게 */ .ftn-target { display: inline-block; /* 줄바꿈 안 생김 */ width: 0; height: 0; scroll-margin-top: 200px; } document.addEventListener("DOMContentLoaded", function () { // name="_ftn1", name="_ftn2", name="_ftnref1" ... 전부 대상 document.querySelectorAll('a[name^="_ftn"]').forEach(function(a) { var idValue = a.getAttribute("name"); // 이미 같은 id의 요소가 있으면 또 만들지 않음 if (!document.getElementById(idValue)) { var span = document.createElement("span"); span.id = idValue; span.className = "ftn-target"; a.parentNode.insertBefore(span, a); } }); }); /* 본문 각주 번호 + 아래쪽 각주 번호 색 지정 */ a[href^="#_ftn"] sup, a[href^="#_ftnref"] sup { color: #BF202D; } /* 밑줄이 보기 싫으면 */ a[href^="#_ftn"], a[href^="#_ftnref"] { text-decoration: none; } /* 마우스 올렸을 때 살짝만 강조하고 싶으면 (선택) */ a[href^="#_ftn"]:hover, a[href^="#_ftnref"]:hover { text-decoration: underline; } /* 페이지 전체가 오른쪽으로 넘치지 않게 */ html, body { max-width: 100%; overflow-x: hidden; } /* 본문 영역 폭 강제 고정 + 긴 단어/문장도 줄바꿈 */ #bo_v_con, .bo_v_con, .cke_editable, article { max-width: 100%; overflow-wrap: break-word; word-wrap: break-word; /* 구형 브라우저용 */ } /* 워드에서 붙은 이미지/표가 화면 밖으로 안 나가게 */ #bo_v_con img, #bo_v_con table, .bo_v_con img, .bo_v_con table, .cke_editable img, .cke_editable table, article img, article table { max-width: 100% !important; height: auto; } /* 워드가 p, span에 폭을 박아놓은 경우 강제로 해제 */ #bo_v_con p[style*="width"], #bo_v_con span[style*="width"], .bo_v_con p[style*="width"], .bo_v_con span[style*="width"], .cke_editable p[style*="width"], .cke_editable span[style*="width"], article p[style*="width"], article span[style*="width"] { width: auto !important; max-width: 100% !important; } /* 기본 blockquote 스타일 */ blockquote { border-left: 4px solid #c0392b; /* 사이트 분위기와 맞는 붉은 계열 */ padding: 12px 18px; margin: 20px 0; background: #fafafa; font-style: normal; color: #333; line-height: 1.6; } /* blockquote 안의 p 태그 정렬 */ blockquote p { margin: 0 0 10px 0; text-align: justify; } /* 마지막 p 태그 여백 제거 */ blockquote p:last-child { margin-bottom: 0; } -
[원청교섭 쟁취! 이재명 정부에 맞선 7월 총파업 조직하자! - Ⅱ] 근로기준법·노조법이 '기본법'이다! - 일터기본법 제정에 반대한다‘일터기본법’은 권리의 보장이 아니라 권리의 그림자다. 사각지대 해소가 아니라 사각지대의 법제화다. 노동법을 확장하는 기본법이 아니라 노동자를 차별하는 기본법이다. 자본의 책임 회피에 국가가 합법의 도장을 찍어 주는 흐름에 맞서, 우리는 일터기본법 제정에 단호히 반대한다. 사진: 참여와 혁신 1. “새로운 노동”이라는 거짓말 「일하는 사람의 권리에 관한 기본법안」(이하 ‘일터기본법’)을 밀어붙이는 이재명 정부와 민주당은 이렇게 읊는다. “세상이 변했다. 플랫폼이 등장했고 ‘긱 이코노미’가 확산됐다. 프리랜서가 늘었다. 기존 노동법으로는 이 새로운 노동 형태를 포괄하기 어렵다. 그래서 새로운 법이 필요하다.” 그럴듯하지만, 자본의 책임을 가리려고 정성스럽게 만든 알리바이다. 특수고용노동자는 하늘에서 떨어진 ‘새로운 존재’가 아니다. 근로계약 관계로 일하던 노동자를 자본이 ‘외부화’해 만들어 낸 가짜 개인사업자다. 자본은 종속 관계라는 실질을 그대로 둔 채 형식만 바꿔치기했고, 노동법은 그 술수에 끌려다니며 노동자를 근로기준법 바깥에 내다 버렸다. 플랫폼노동자 역시 마찬가지다. 기존 노동법의 허술한 틈을 비집고 들어가, 처음부터 노동자성을 지워 버리는 방식으로 조직된 노동일 뿐이다. 기술은 그 은폐를 한층 매끄럽게 다듬어 주었을 따름이다. 본질은 똑같다. 노동자를 ‘사업자’로 위장시키는 낡은 수법이다. 프리랜서노동은 또 어떤가. 더 이상 “자유로운 일”이라는 환상으로 포장되지 않는다. 이들도 노동조합을 만들고 노동권을 외친다. 어째서인가? 그 영역이 산업화되고, 자본의 맨얼굴이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종속성이 더는 감출 수 없을 만큼 선명해졌기 때문이다. 결론은 분명하다. “새로운 노동 형태”라는 말 뒤에 숨은 실체는, 노동자성을 박탈하려는 자본의 집요한 시도가 빚어낸 ‘불안정 노동의 전면화’다. 노동자가 노동자인지 아닌지가 모호해서가 아니라, 자본이 노동자를 노동자가 아닌 것처럼 둔갑시키려 획책한 결과다. 이 구조를 그대로 둔 채 “새로운 법”을 만들어 “별도로 보호하겠다”고 하는 것은 자본의 공작을 국가가 승인하는 행위다. 2. 노동법 적용을 회피하는 네 가지 핑계 노동법으로 이들을 포괄할 수 없다는 주장은 네 가지 핑계 위에 위태롭게 서 있다. “사용자를 특정하기 어렵다.” 누가 이들의 노동으로 배를 불리는가? 특수고용·프리랜서노동자에게는 그들과 직접 계약을 맺은 기업이 사용자다. 플랫폼 노동자에게는 플랫폼 기업과 그 플랫폼을 이용하는 사용업체가 사용자다. 이윤이 흐르는 길을 따라가면 사용자는 반드시 드러난다. ‘사용자가 보이지 않는’ 것이 아니라, ‘사용자로 보지 않으려는’ 의지가 있을 뿐이다. 심지어 일터기본법조차 ‘사업자’라는 이름으로 상대방을 지목하고 있지 않은가. 이름 한 번 바꿔 부른다고 책임이 증발하지는 않는다. “노동시간을 획정할 수 없다.” 그렇다면 기준을 만드는 일이야말로 정부와 입법기관의 책무다. 획정이 어렵다면 노동의 양태에 맞는 규율 방식을 법에 담으면 될 일이다. ‘기준 설정이 어려우니 노동법 밖으로 나가라’는 말은 국가의 직무유기이자 노동자에 대한 배신이다. “지휘·감독 관계가 불분명하다.” 낡아빠진 인식이다. 오늘, 자본은 단지 작업반장이 옆에서 지시하는 방식으로만 노동자를 통제하는 것이 아니다. 자본은 이미 오래전 공장형 직접 통제는 물론 노동과정 전반에 대한 유연한 통제를 도입했다. 건당 임금체계는 노동자가 스스로 채찍질하도록 강제하고, 알고리즘은 ‘자유롭게’ 일하는 노동자를 24시간 감시하고 평가한다. 낡은 지휘·감독 개념으로 세상을 들여다보는 것은 자본의 진화를 따라잡지 못하는 무능이거나, 따라잡지 않으려는 회피다. “프리랜서들은 자유롭게 일하고 싶어서 스스로 선택한 것이다.” 가장 악질적인 거짓말이다. 지금의 특수고용·플랫폼·프리랜서노동은 정규직 고용과 나란히 놓인 대등한 선택지였던 적이 없다. 해당 직종 자체가 불안정 노동으로 통째로 메워져 있어, 그 직업을 갖는 순간 권리 없는 노동을 강제로 떠안게 되는 구조다. “자유”의 이면에 “권리 없음”이라는 형벌을 묶어 노동자에게 들이미는 이 이데올로기를 우리는 단호히 거부한다. 결국 특수고용·플랫폼·프리랜서노동자들의 노동법 적용을 가로막는 것은 노동의 형태가 아니라, 노동법 밖으로 이 노동자들을 내몰며 책임 회피를 제도화하는 국가와 자본의 의지와 기획이다. 3. 권리 차별의 제도화 - 근로기준법 바깥에 쌓는 장벽 일터기본법은 근로기준법상 ‘근로자’와 그 외의 노동자를 노골적으로 ‘갈라놓는다’. 근로기준법을 적용받는 노동자에게는 근로기준법·최저임금법·남녀고용평등법·퇴직급여보장법이라는 보호가, ‘일하는 사람’에게는 종이우산 같은 선언적 보호가 차등 분배된다. 법을 통해 노동시장을 ‘근로자’와 ‘노무제공자’라는 두 계층으로 갈라놓는 차별의 고착화다. 머지않아 이 법은 근로기준법으로 진입하려는 노동자들 앞에 가로놓인 벽이 될 것이다. 법원과 행정기관은 ‘기본법이 적용되는 일하는 사람’과 ‘근로기준법이 적용되는 근로자’를 갈라놓는 해석 기준을 신나게 쌓아 갈 것이고, 지금이라면 근로자로 인정받았을 노동자들이 ‘기본법 적용 대상’이라는 옆길로 밀려날 것이다. 판관들은 ‘어차피 일하는 사람 기본법이 있지 않느냐’는 구실로 노동자성을 부정할 것이다. 분기의 조짐은 이미 곳곳에서 확인된다. 골프장 경기보조원이 겪는 괴롭힘에 대해 근로기준법상 괴롭힘 규정 적용은 부정하면서, 산업안전보건법상 ‘노무제공자’로 분리해 보호한 사례가 있다. 택배기사에 대해 근로기준법상 근로자임은 부정하면서, 산재보험법상 ‘특수고용 특례’로 산재보상만 시혜처럼 인정한 사례가 있다. 노동자성의 본체는 끝까지 인정하지 않으면서 곁가지 권리만 부분 배급하는 이 흐름이, 일터기본법을 통해 전국적·전면적으로 확장될 것이다. 이 법은 기본법의 원칙과도 정면으로 충돌한다. 본래 기본법이란 개별법의 확장과 발전을 견인하는 등대다. 그러나 이 법은 거꾸로 개별법의 확장을 가로막는 방파제다. 일터기본법 제3조 제2항이 “다른 법률에서 규정하고 있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이 법을 적용한다”고 정한 것은, 개별법 우선·기본법 보충이라는 전도된 구조다. 범위 설정도 기만적이다. “모든 일하는 사람”을 말하면서도 정작 본문에서는 “다른 사람의 사업을 위하여 자신이 직접 일하고 보수를 받는 사람”(노무제공자)으로 대상을 좁힌다. 경제적 종속성을 핵심 개념으로 삼는 노조법상 근로자보다도 협소한 범위이며, ILO 결사의 자유 협약이 보장하는 자영노동자와 자유직업인을 아우르는 ‘노동자(Worker)’ 개념과는 한참 동떨어져 있다. 헌법상 노동기본권을 내걸고 실상은 대상을 배제하는 명백한 입법적 기만이다. 사진: 민주노총 4. 실효성 없는 선언 일터기본법이 외치는 권리 보장은 껍데기뿐이다. 직장 내 괴롭힘 금지를 규정하지만 사업주는 “예방 조치를 취하도록 노력하여야 한다”는 가벼운 권고만 받는다. 근로기준법이 괴롭힘 발생 시 사업주에게 조사·징계·피해자 보호 의무를 강제하고 위반 시 형사처벌까지 부과하는 것과는 비교 자체가 무색할 정도다. 보수지급, 계약변경·해지 제한, 불이익취급 금지 등 모든 권리조항에 벌칙도, 과태료도, 강제도 없다. 분쟁 해결은 ‘조정’이라는 가장 느슨한 방식에 의지하는데, 사용자가 조정을 거부하면 절차는 그대로 종결된다. 강제이행 수단 없는 권리선언은 법이 아니라 정부와 국회의 기만이며, 노동자에게는 차라리 모욕이다. 이에 대해 정부와 국회는 “기본법이기 때문에 처벌조항이나 강제조항을 넣기 어렵다”고 둘러댄다. 그렇다면 묻자. 기본법과 함께 개별법 개정안을 묶어 패키지로 내놓으면 될 일 아닌가? 돌아오는 답은 한결같다. “나중에.” 5. "선언이라도 하면 낫다"? - 2020년 산안법의 교훈 “일단 선언이라도 해 두면 개별법도 따라서 개정되겠지.” 안이한 낙관은 아무것도 보장할 수 없음을 우리는 이미 똑똑히 목격했다. 2020년 산업안전보건법 전부개정 당시, 제1조 ‘목적’ 조항은 ‘근로자의 안전 및 보건’을 ‘노무를 제공하는 사람의 안전 및 보건’으로 바꿔 달았다. 특수고용·플랫폼노동자까지 빠짐없이 보호하겠다는 거창한 선언이었다. 언론은 ‘일하는 모든 사람의 안전이 지켜진다’고 일제히 박수를 쳤다. 6년 동안 무엇이 달라졌는가? 특수고용·플랫폼노동자에게 실제로 적용되는 조항은 단 4개다. 제5조, 제6조, 제77조, 제78조. 모두 선언적이고 추상적이다. 취객을 응대하고 고객의 욕설을 온몸으로 받아 내지만 감정노동자 건강장해 예방조치(제41조)는 그들에게 닿지 않는다. 위험한 작업 앞에서 멈춰 설 권리, 작업중지권(제52조)도 그들에게는 허락되지 않는다. ‘전속성 기준’에 따르면 앱을 두 개 사용하는 순간 산안법의 어떤 조항도 적용되지 않는 무권리 상태로 추락한다. 법의 ‘목적’을 바꿔 보호 범위를 ‘선언’했지만, 지난 6년 동안 플랫폼·특수고용노동자의 안전과 생명을 지키기 위한 실질적 제도 개선은 단 한 글자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 사이 죽고 다친 노동자의 이름만 차곡차곡 쌓여 갔다. 선언은 노동자의 무덤 위에 세워진 비석에 불과했다. 아픈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위로’가 아니라 ‘치료’다. 빈껍데기 입법을 성과로 포장하고, 그 가짜 성과를 명분 삼아 진짜 개혁을 무한정 미루는 패턴이 다시 반복되려 한다. 우리는 이 잔인한 동어반복을 더는 용인하지 않을 것이다. 6. 반복되는 역사 - 제2의 비정규직법 파견법은 중간착취 금지와 직접고용 원칙에 구멍을 뚫고 간접고용을 합법화하는 통로가 되었다. 도입 당시 ‘한정적·예외적’ 활용을 약속했으나, 결과는 제조업 사내하청과 간접고용의 일상화, 원청 책임의 증발이었다. 기간제법은 또 어떤가. 노동자들은 근로기준법 안에 ‘기간의 정함이 없는 상시고용’을 원칙화하고 비정규직은 예외적으로만 허용되도록 규율할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정부와 국회는 근로기준법은 건드리지 않은 채 별도의 ‘기간제법’을 만들었다. “2년이 지나면 무기계약 전환”과 “차별시정제도”를 선전했다. 결과는? 2년이 차기 직전에 계약을 끊고 새로 뽑는 초단기계약의 전면화, 직접고용을 회피하기 위한 간접고용의 폭발적 확산, 해소되기는커녕 고착된 임금 차별이었다. 두 법의 공통점은 명백하다. 근로기준법의 원칙은 손도 대지 않은 채 그 바깥에 따로 법을 만들어, 자본의 책임 완화 통로를 제도화한 것이다. 지금의 일터기본법은 그 길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 ‘일하는 사람’이라는 새 범주를 마련해 한 단계 낮은 권리를 배급하려 한다. 근로기준법 바깥으로 밀려난 노동자는 또 한 번 시험대에 오를 것이다. “당신은 일하는 사람 기본법의 대상인가, 아니면 그냥 자영업자인가.” 노동자, 일하는 사람, 순수 자영업자로 이어지는 단계적 탈락의 경로가 만들어진다. 일터기본법은 이 ‘강등의 기제’가 되어 자본의 책임을 완화한다. 사진: 오마이뉴스 7. ‘추정 조항’이라는 허울 함께 발의되는 근로기준법 개정안에는 다음 조항이 포함되어 있다. “다른 사람의 사업을 위하여 자신이 직접 노무를 제공하는 사람은 이 법과 관련한 분쟁해결에서 근로자로 추정한다.” 정부는 이를 두고 노동자성 판단의 일대 진보라며 자화자찬한다. 그러나 이 조문은 근로기준법 제104조(감독 기관에 대한 신고) 바로 다음에 온다. 근로자 정의(제2조)는 손대지 않고, 분쟁이 발생한 뒤에야 입증책임을 사용자에게 맡기는 장치다. 게다가 정부는 이 추정 제도의 적용 범위를 “민사소송”으로 한정한다. 노동 사건의 절대다수가 노동청·노동위 단계에서 종결되는 현실에서 이 추정은 사실상 실효성이 없다. 임금체불 한 건 이기려고 변호사를 선임해 민사소송까지 밀고 갈 수 있는 노동자가 도대체 몇 명이나 되겠는가. 임금을 다툴 때만 임금에 관하여, 노동시간을 다툴 때만 노동시간에 관하여, 해고를 다툴 때만 해고에 관하여 근로자로 ‘추정’되는 것이 도대체 무슨 노동권 보장인가? 권리는 분쟁 앞에서 마지못해 인정받는 것이 아니라 평상시에, 일터에서, 매일 작동해야 한다. 8. 근로기준법과 노조법이 기본법이다 노동관계의 기본법은 이미 우리에게 있다. 근로기준법과 노조법이 그것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새 이름표를 단 또 하나의 법이 아니라, 이 두 기본법을 현대화해 모든 일하는 사람을 정면으로 끌어안도록 만드는 일이다. 일터기본법 제정을 당장 중단하라. 이 법은 노동법의 확장이 아니라 노동법의 후퇴이며, 노동자에 대한 배반이다. 근로기준법 제2조가 규정하는 노동자 개념을 확장하고, 제대로 된 노동자 추정 조항을 정의 자체에 새겨 넣어야 한다. 분쟁 단계에서 뒤늦게 작동하는 절차적 추정이 아니라, 일터에서 매일 작동하는 실체적 추정이어야 한다. 자본의 비노동자화 시도를 적극적으로 규율해야 한다. 이미 시행 중인 미국 캘리포니아의 ABC 테스트처럼, 고용관계를 추정하는 명확하고 강력한 법적 지표를 법령에 담아야 한다. 이 기준의 경우 기업이 노동자를 ‘독립 계약자’로 분류하려면, △업무 수행에서 기업의 통제와 지시로부터 자유롭고(A) △기업의 통상적인 사업 범위 밖의 일을 수행하며(B) △독립적으로 해당 직업 또는 사업을 영위한다는 점(C)을 기업이 모두 입증해야 한다. 변덕스러운 개별 판결에 노동자의 운명을 맡길 수는 없다. 자본이 계약 형식을 왜곡하여 노동자성을 박탈하려 한다면 법이 단호히 막아야 한다. 근로기준법 자체의 보완도 미룰 수 없다. 초단시간 노동, 초단기 계약, 5인 미만 사업장에 대한 차별 구조, 다양한 고용형태에서 벌어지는 권리의 구멍 등에 대처할 수 있도록, 근기법을 더 촘촘하고 더 단단한 법, 모든 일하는 사람을 한 사람도 빠짐없이 끌어안는 법으로 다시 써야 한다. 이는 ‘임금노동관계’라는 낡은 틀에 갇혀 있는 노동권 개념 자체를 새롭게 벼리는 작업이기도 하다. 자유롭게 일한다는 것이 권리를 반납한다는 뜻이 되지 않도록, 노동권의 외연 자체가 확장되어야 한다. 노조법 또한 마찬가지다. 노조법상 근로자 개념을 ILO 결사의 자유 협약의 ‘노동자(Worker)’ 수준으로 활짝 열어, 모든 일하는 사람이 단결하고 교섭하고 행동할 권리를 누리도록 해야 한다. 사용자 개념 또한 실질적 지배력을 휘두르는 자본을 빠짐없이 포착하도록 다시 정의되어야 한다. 노동권의 진짜 보장은 제도적 시혜에서 오지 않는다. 단결과 투쟁의 권리를 누가 어디까지 행사할 수 있는가에서 온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새로운 법이 아니다. 노동자의 이름을 ‘일하는 사람’으로 바꾸어 변두리로 밀어내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일하는 사람을 ‘노동자’로 호명해야 한다. 노동자 정의를 그대로 좁게 유지하며 그 노동자가 아닌 이에게 권리의 부스러기를 적선하는 것이 아니라, 일하는 모든 이에게 노동자라는 이름과 그 이름에 따라붙는 온전한 권리를 되돌려 주어야 한다. 사진: 노동과 세계 -
[사회주의 기초학습#12] 사회주의 정당의 기본노선착취 당하는 모든 노동자가 날카로운 계급의식을 가진다면 자본주의는 단 하루도 지속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노동자계급의 의식은 불균등하며 정세에 따라 진동한다. 때로는 비약적으로 발전하기도 하고, 때로는 엄청나게 퇴보하기도 한다. 바로 그렇기에, 노동자계급의 선진적 일부로서의 ‘사회주의 노동자당’과 ‘노동자계급’ 그 자체는 구분된다. 특정한 노동자가 아니라 노동자계급 전체의 이익을 위해 투쟁하는 집단, 운동 전체의 이익을 위해 투쟁하며 노동자계급을 이끄는 의식적 집단이 바로 당이다. [목차] 1. 노동자계급에게는 왜 사회주의 정당이 필요한가 1) 노동조합 투쟁, 끝없이 굴러떨어지는 바위를 밀어 올리는 시시포스의 노동 2) 노동조합과 노동조합주의 3) 전 계급의 단결에 기초한 대중권력기관, 노동자평의회 4) 사회주의 정당의 존재 이유, 계급의식의 불균등성 5) 노동자평의회와 사회주의 정당 2. 전위정당에 대한 이해 1) 누가 당원인가? - 러시아사회민주주의노동자당 규약 1조 논쟁 2) 당과 대중의 관계 3) 사회주의 정당의 기본조직 4) 사회민주주의(개량주의) 진보정당의 ‘양날개론’ 비판 3. 사회주의 정당의 노선 1) 노동자계급 혁명을 통한 자본주의 철폐 - 칠레와 그리스의 경험이 말하는 것 2) 노동자계급 자신의 과업으로서의 노동자 혁명 3) 노동자계급 국제주의 – 국적이 아니라 계급으로 단결하자 4) 노동자계급 공동전선 추동 5) 노동자계급 헤게모니 형성 1. 노동자계급에게는 왜 사회주의 정당이 필요한가 1) 노동조합 투쟁, 끝없이 굴러떨어지는 바위를 밀어 올리는 시시포스의 노동 자본주의가 존재하는 한, 자본가계급은 착취강화 시도를 멈추지 않는다. 자본가계급은 더 많은 이윤을 축적하고자 가능한 한 임금을 줄이고, 노동시간과 노동강도를 늘리고, 더 많은 노동자를 기계설비로 대체하려는 시도를 지속한다. 많은 경우, 조직되어 있지 않은 다수의 노동자들은 자본가의 착취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며 저항하지 않는다. 그러나 자본가의 착취 강화시도는 생존을 위한 노동자들의 집단적 저항, 곧 계급투쟁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투쟁은 단지 경제적 문제에 머무르지도 않는다. 1838년부터 10여 년간 이어진 영국노동자들의 인민헌장 제정운동, 프랑스 노동자들의 1848년 2월혁명과 6월 봉기, 그리고 1871년 파리코뮌, 1905년과 1917년 러시아혁명, 1918년 독일혁명, 1936년 스페인혁명, 1968년 프랑스 5월혁명, 1987년 한국 노동자대투쟁 등등. 자본주의의 역사는 거대한 계급투쟁의 역사이기도 하다. 크고 작은 계급투쟁 속에서, 노동자는 자본가와의 적대적 이해관계에 대한 스스로의 인식, 즉 계급의식을 형성한다.[1] 노동자계급은 이런 각성과 함께 계급조직을 건설해왔다. 계급투쟁의 경험이 조직이라는 물질적 형태로 축적되지 않는다면, 그 성과는 자본의 반격과 함께 형체 없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이중 노동조합은 가장 보편적인 계급조직이다. 그러나 노동조합은 자본주의 철폐를 목표로 하지 않는다. 오히려 노동조합의 작동 원리는 자본주의적 임노동관계, 즉 노동력 상품화를 전제한다. 자본주의 속에서, 노동자는 자신이 가진 ‘노동력’이라는 ‘상품’을 자본가에게 판매해야 생존할 수 있다. 노동조합의 본질적 기능은 노동력 상품을 자본가에게 더 높은 가격, 즉 더 높은 임금에 판매하는 것이다. 그런데 노동조합이 노동력 상품을 (자본가의 의도에 비해) 보다 높은 가격으로 판매할 수 있는 이유는, 노동조합이 노동력을 ‘집단적으로’[2] 판매하기 때문이다. 가장 기본적인 노동조합 활동인 ‘단체’교섭(collective bargaining)의 본질은, 조합원집단의 노동력 판매 조건을 둘러싼 자본가와의 흥정[3]과 투쟁이다. 미조직 노동자는 자신의 노동력을 개별로 판매해야 하나, 조직노동자는 단결권·단체교섭권·단체행동권을 행사할 수 있다. 이를 통해 노동조합은, 임금을 노동력의 가치 이하로 떨어뜨려 더 많은 이윤을 쌓으려는 자본의 공세에 맞서 조합원의 생존권을 방어한다. 이렇듯 노동조합은 착취가 이루어지는 조건을 개선하고, 착취의 결과를 완화하기 위해 투쟁하는 조직이다. 바로 그렇기에, 노동조합이 조합원들에게 줄 수 있는 성과는 자본의 안정적인 이윤축적과 직결되어 있다. 전반적인 이윤축적의 위기가 도래하거나, 한 자본이 다른 자본과의 경쟁에 뒤처져 지불능력이 부족할 경우, 노동자는 자신이 가진 노동력을 높은 값에는커녕 노동력 재생산비용 이하로 판매해야 하는 처지로 내몰린다. 그렇기에 불황이 도래하면 상당수 노동조합은 임금삭감, 노동조건 후퇴, 해고를 용인하기도 한다. 호황기에도 마찬가지다. 대부분의 노동조합은 더 많은 임금과 복지를 요구하며 불황기에 겪은 고통에 대한 보상을 요구한다. 그러나 그 이상의 요구로 나아가지는 않는다. 적어도 일상적 시기에는 그러하다. 이런 점에서 ‘회사가 있어야 근로자도 있다’는 인식이 많은 노동자들에게 존재하는 이유는, 단지 자본가의 선동 때문이 아니라 노동력을 팔아야 생존할 수 있는 노동자계급의 상황, 또한 혁명적 노동자조직을 가지지 못한 노동자계급의 상황에 기인한다. 앞서 설명했듯, 노동조합은 착취의 원인인 ‘생산수단의 사적소유’와 ‘노동력 상품화’ 그 자체에는 맞서 싸우지 않는다. 그저 자본가의 공격에 맞서 방어하고 또 방어할 수 있을 뿐이다. 그래서 로자 룩셈부르크는 노동조합 투쟁을 ‘시시포스의 노동’이라고 설명했다. 노동조합은 바로 이윤의 공격에 대항하려는 노동자 계급의 조직된 방어, 다시 말하면 자본주의 경제가 가지고 있는 임금률을 아래로 억누르는 경향에 직면하여 노동자 계급을 보호하려는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두 가지 이유에서 그렇다 첫째, 노동조합의 과제는 자신의 조직을 통해 노동력이라는 상품의 시장 상황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조직은 중산계층이 프롤레타리아화되면서 끊임없이 노동시장에 새로운 상품을 제공하기 때문에 계속 파괴된다. 둘째, 노동조합의 목적은 노동자 계급의 생활 수준을 향상시키는 것, 즉 사회적 부에 대한 노동자 계급의 몫을 확대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몫은 노동 생산성이 향상함에 따라서 자연적인 과정처럼 숙명적으로 계속 낮아진다. … 노동조합을 통한 투쟁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진행하고 있는 객관적인 사실들로 인해 일종의 시시포스 노동으로 바뀐다.[4] 2) 노동조합과 노동조합주의 통상 자신의 활동을 소속 ‘조합원’의 권익 실현에 한정한다는 점 역시 노동조합의 주요한 특징이다. 현실의 노동자들은 수많은 업종과 고용형태로 분리되어 있기에, 특정 노동자의 당면 이해와 전체 노동자들의 장기적 이해는 때때로 충돌한다. ‘조합원’의 이해를 우선하는 노동조합의 동학상, 노동조합에 속하지 않은 미조직 노동자들을 포함한 전체 노동자계급의 이해는 종종 노동조합의 투쟁 과제에서 배제된다. 비정규직 투쟁을 외면하고 파괴하기까지 하는 정규직 이기주의, 여성노동자 차별을 구조화하는 성별임금 이데올로기, 이주노동자에 대한 차별을 당연시하는 민족주의와 인종주의 등이 그 예다. 이런 과정을 통해 전체 노동자계급과 무관하게 자신만의 이익을 추구하는 집단이 형성되기도 한다. 특정 산업의 호황과 해당 산업 노동조합이 보유한 교섭력을 바탕으로 자신들만의 이해관계를 배타적으로 추구하는 집단, 소위 ‘노동귀족’이라고 불리는 집단이다.[5] 이들이 문제가 되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윤율 저하에 따라 자본주의의 위기가 만성화한 상황에서, 자본가들은 노동자계급의 생존권을 더욱 가혹하게 공격할 수밖에 없다. 안정적인 이윤축적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군부독재에서 신자유주의로 이행하며 케인즈주의 계급타협 체제를 한 번도 경험한 적 없는 이 나라의 조건에서는 두말할 것도 없다. 대다수 노동자계급이 생존에 허덕이는 상황에서, 극히 일부 노동자들이 고임금과 기업복지를 누리며 자신들만의 이해관계를 추구하는 상황은 그 자체로 노동자계급의 단결을 심각하게 훼손하며, 노동자계급운동에 대한 미조직 대중의 반동적 정서를 강화한다. 앞서 말한 대로 미조직 대중은 자신의 노동력을 개별로 판매해야 하는 처지다. 지배계급은 미조직 대중의 분노를 십분 활용해 조직노동자운동을 탄압한다. 노동조합은 이런 한계들을 가진다. 이렇듯 노동조합은 보편적이고 필수적인 조직이나, 그 자체만으로는 전체 노동자계급의 장기적이고 근본적인 이익을 위한 투쟁을 조직할 수 없다. 특정한 조직은 특정한 의식을 낳는다. 혁명조직은 혁명적 의식을, 조합조직은 조합적 의식을 낳는다. 단기적이고 부문적인 이해관계에 종속된 노동자 의식, 노동조합으로 조직된 특정 집단의 이해관계에 종속된 노동자 의식을 ‘조합주의’라고 한다. 이렇듯 노동자계급에게는 조합주의를 넘어 노동자계급 전체의 단결을 추동할 조직이 필요하다. 노동자계급 전체의 단결을 추동하고 실현하며, 자본주의 국가권력을 타도하고, 나아가 사회주의 권력기관 그 자체로서 노동자계급을 지배계급으로 조직할 전체 노동자계급의 투쟁조직이 바로 노동자평의회다. 또한 노동자평의회가 창출되기까지 노동조합을 포함한 계급조직 안에서 노동자운동의 발전을 이끌고, 노동자평의회 내부의 한 경향으로서 활동하며, 노동자평의회를 노동자 권력으로 이끄는 의식적 지도조직이 바로 사회주의 노동자당이다. 3) 전 계급의 단결에 기초한 대중권력기관, 노동자평의회 자본가계급의 착취와 억압을 분쇄하기 위해서는 자본주의적 사적소유의 폐지가 필수적이다. 사적소유는 자본가들의 개별적 생산수단 소유에서, 주식회사나 국유기업 같은 집단적 소유까지 다양한 형식을 취하지만, 자본가계급이 생산수단과 노동과정에 대한 지배력을 독점한다는 점은 다양한 형식을 관통해 동일하다. 이러한 자본주의적 사적소유의 폐지, 즉 사회적으로 연합한 노동자들이 생산수단을 공동으로 소유하고 통제하며, 따라서 무엇을 얼마나 어떻게 생산하고 분배할 것인지 스스로 결정하는 힘을 쟁취하는 것은 착취와 억압을 끝장내고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는 데에서 핵심적인 토대다. 이 토대는 개별 기업이나 특정 산업부문, 일부 지역에서 마련될 수 없다. 전국적이고 전면적인, 모든 산업에 걸친 변혁이 이뤄져야 생산수단 사적소유를 폐지할 수 있다. 이 과정을 일관되게 추진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노동자계급의 권력 장악이 필요하다. 자본주의적 사적소유를 폐지하고 노동자계급의 공동체적 소유를 전면적으로 확립하기 위해, 그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부딪힐 자본가계급의 공공연한 저항을 분쇄하기 위해, 여전히 남아 있을 노동자계급 내 의식 편차를 극복하고 다른 피억압 민중과의 동맹을 성공적으로 이끌어가기 위해 노동자계급은 국가권력을 활용해야 한다. 그러나 자본주의 국가권력을 재생산하는 선거, 그 선거로 만들어지는 의회를 바탕으로 노동자 권력을 세울 수는 없다. 노동자계급은 자본주의가 남긴 억압적, 관료적 국가기구를 그대로 물려받아 사용할 수 없다. 기존의 국가 질서는 자본가계급의 착취와 억압을 유지하고 혁명을 차단하기 위한 용도로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사회혁명에 나선 노동자들은 낡은 억압적, 관료적 국가기구를 해체하고, 작업장에 바탕을 둔 대중적, 민주적 평의회 권력기구를 새롭게 창조해내야 한다.[6] 4) 사회주의 정당의 존재 이유, 계급의식의 불균등성 착취 당하는 모든 노동자가 날카로운 계급의식을 가진다면 자본주의는 단 하루도 지속될 수 없을 것이다. 모든 노동자가 노동조합을 결성할 것이고, 전투적 임금·단체협상 투쟁은 물론 계급적 연대투쟁에 나설 것이며, 노동자평의회와 사회주의 노동자정당 건설을 통해 국가권력 장악으로 나아갈 것이기 때문이다.[7] 그러나 노동자계급의 의식은 불균등하며 정세에 따라 진동한다. 때로는 비약적으로 발전하기도 하고, 때로는 엄청나게 퇴보하기도 한다. 10% 남짓한 한국 노동조합 조직률이 드러내듯, 일상적 시기에는 사회주의를 지향하는 노동자는 물론이고 노동조합에서 투쟁하는 노동자조차 소수일 수밖에 없다. 일상적 시기에 다수 노동자는 자본가계급의 이데올로기에 잠식되어 있는 것이 현실이다. 지배계급은 피지배계급의 단결을 막고자 부단한 노력을 기울인다. 이것이 능력주의, 성차별주의, 민족주의, 인종주의 등이 물질적 힘으로서 존재하는 이유, 노동자계급의 다수가 가장 보편적인 계급조직인 노동조합으로조차 조직되지 못하고 있는 이유다. “사회의 물질적 힘을 지배하는 계급은 사회의 정신적 힘도 지배한다”는 맑스의 말마따나, 피지배계급을 분열시킬 수 있는 이데올로기를 끊임없이 생산하고 유포할 수 있다는 것이 지배계급의 힘이다. 운동의 퇴조기에는 많은 노동자가 자본가계급의 이데올로기에 휩쓸린다. 그러나 사회주의 정당은 일상적 시기와 운동의 퇴조기에도 끊임없이 자본주의에 맞선 투쟁을 전개하며 노동자계급을 이끌고자 노력한다. 당의 입장이 당장 큰 반향을 얻기 어려운 상황일지라도, 당은 대중 속에서 호흡하며 노동자계급의 단결을 추동하고, 정세에 대한 대응방향을 제시하며 자본주의에 맞선 투쟁을 조직하고 이끌어야 한다. 이렇듯 노동자계급의 의식은 불균등하다. 투쟁하지 않던 노동자들이 자본주의 발전에 따라 자연히 투쟁대열로 들어오는 것도 아니다. 경제위기가 저절로 계급투쟁 격화를 낳는 것도 아니다. 바로 그렇기에, 노동자계급의 선진적 일부로서의 ‘사회주의 노동자당’과 ‘노동자계급’ 그 자체는 구분된다. 맑스와 엥겔스에 따르면, 공산주의자들은 그들이 한편으로 프롤레타리아의 다양한 일국적 투쟁들에 있어서 국적에 상관없는, 프롤레타리아트 전체의 공동 이해를 내세우고 주장한다는 점에서만, 다른 한편으로 프롤레타리아트와 부르주아지 사이의 투쟁이 경과하는 다양한 발전 단계들에 있어서 항상 운동 전체의 이해를 대변한다는 점에서만 다른 프롤레타리아 정당들과 구별된다. 따라서 공산주의자들은 실천적으로는 모든 나라의 노동자 정당들 중에서 가장 단호한 부분, 언제나 운동을 추동적으로 이끌어나가는 부분이다 : 그들은 이론적으로는 프롤레타리아 운동의 조건들, 진행 및 일반적 결과들에 대한 통찰을 여타 프롤레타리아트 대중에 앞서서 가진다.[8] 위 글에서 추론되는 점은 다음과 같다. 첫째, 노동자 계급에게는 다수의 당이 존재한다. 하나의 계급에게는 하나의 당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9] 둘째, ‘공산당’은 다른 프롤레타리아 정당과 대립되는 당은 아니지만 구별되는 당이다. 즉, 공산주의자들은 전체 프롤레타리아의 ‘일부’이다. 셋째, 공산주의자들은 전체 프롤레타리아의 이해를 대변한다. 즉, 특정 프롤레타리아의 단기적 이해는 전체 프롤레타리아의 이해와 항상 일치하는 것은 아니며, 공산주의자들은 양자가 충돌할 경우 단호하게 전체 프롤레타리아의 이해를 대변한다. 넷째, 공산주의자들은 운동의 조건들, 진행 및 일반적 결과들에 대한 통찰을 대중에 앞서서 가진다는 점에서 선진적 집단이다. 이렇듯 특정한 노동자가 아니라 노동자계급 전체의 이익을 위해 투쟁하는 집단, 운동 전체의 이익을 위해 투쟁하며 노동자계급을 이끄는 의식적 집단이 바로 당이다. 앞서 살폈듯, 노동조합으로 조직된 노동자들조차 자신이 속한 산업과 고용형태에서 유래하는 부문적 이익으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당의 주요 과제는 대중의 계급의식을 끌어올리기 위한 투쟁, 전체 노동자계급의 단결을 추동하는 투쟁이다. 당은 그 과정에서 노동자계급을 이끈다. 5) 노동자평의회와 사회주의 정당 그렇다면 앞서 살핀 노동자평의회가 존재하는 상황에서도 사회주의 노동자당이 필요한가? 그렇다. 계급의식의 불균등성은 노동자평의회 내에서도 마찬가지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혁명은 사회주의 정당과 노동자평의회, 두 조직의 상호작용 속에서만 가능하다. 노동자평의회는 대중의 권력기관이며 사회주의 정당은 노동자 평의회 내에서 다른 정치적 경향과 경쟁하며 대중을 혁명으로 이끌고자 분투한다. 러시아혁명 당시를 살펴보자. 혁명의 과정 속에서 당(볼셰비키)과 평의회(소비에트)의 관계는 매우 역동적이며, 사건의 흐름은 노동자평의회가 대중의 요구를 왜곡하고 굴절시키는 경우도 얼마든지 드러낸다. 1917년 2월 혁명으로 등장한 자본가들의 권력기관, 임시정부는 즉각 전쟁을 끝내라는 대중의 요구를 결코 수용하지 않았으나, 소비에트는 10월 혁명 직전까지도 임시정부의 권위를 인정했다. 이는 당면 혁명을 ‘부르주아 혁명’으로 못 박은 소비에트 다수파의 정치적 입장에 근거했다. 각 당파는 소비에트에 대한 정치력 영향력을 분점하고 있었고, 볼셰비키를 제외한 정치세력은 소비에트를 그저 임시정부를 지키기 위한 수단 정도로 생각했다. 그랬기에 소비에트를 누가 주도하느냐의 문제가 곧 소비에트가 권력기관이 될 수 있느냐, 혁명이 전진할 수 있느냐의 문제와 직결되었다. 혁명 초기 소비에트에 대한 볼셰비키의 영향력은 미미했다. 1917년 4월, 전쟁 중인 독일과 즉각 종전협상을 요구하는 대중투쟁이 정치적 위기로 번지자, 임시정부는 소비에트 내 온건 사회주의자들을 임시정부 장관으로 임명해 소비에트를 통제한다. 6월, 임시정부는 ‘전쟁 종식’이라는 대중의 요구를 받아들이기는커녕 러시아군에게 공세를 명령했다. 이에 충실하게 협조하던 소비에트 지도부의 입장으로, 즉각 종전을 원하는 대중의 정서는 소비에트와 더욱 멀어진다. 7월에는 러시아 수도 페트로그라드 수비대 병사들, 크론슈타트 수병들, 그리고 노동자들이 일으킨 봉기로 임시정부-소비에트-대중 사이의 균열은 더욱 명확해진다. 그런데도 소비에트 내 멘셰비키와 사회혁명당 지도자들은 임시정부에 대거 입각해 자유주의자들과 연립정부를 구성하며 볼셰비키를 불법화한다. 자본가의 권력기관인 임시정부와 노동자의 권력기관인 소비에트가, 서로 대립하기는커녕 화해하고 융합하는 상황에까지 이른 것이다. 그러나 소비에트가 볼셰비키를 불법화한 절망적인 상황에서조차, 볼셰비키는 민주적 소비에트 권력의 가능성을 놓지 않았다. “이 새로운 혁명에서 소비에트가 나타날 수도 있다. 아니, 나타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 소비에트는 현재의 소비에트, 즉 부르주아와 협력하는 기관이 아니라, 부르주아에 대당하는 혁명적 투쟁기관일 것이다. 그때에도 물론 우리는 소비에트를 모범으로 삼아 국가 전체를 건설하는 노선을 지지할 것이다. 일반적인 소비에트가 문제가 아니라, 현재의 반혁명 또 현재의 소비에트의 배신과 싸우는 것이 문제이기 때문이다.”[10] 볼셰비키의 불법화 이후에도 볼셰비키는 대중 속에서 영향력을 넓혀 갔고, 결국 10월,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라는 구호를 현실로 만들었다. 러시아 10월 혁명의 성공은 난관 속에서도 노동자평의회를 권력의 주체로 세우려는 볼셰비키의 지도력 없이는 불가능했다. 이렇듯 사회주의 정당만으로도, 노동자평의회 만으로도 혁명은 불가능하다. 양자의 유기적 결합이 혁명을 가능케한다. 2. 전위정당에 대한 이해 1) 누가 당원인가? - 러시아사회민주주의노동자당 규약 1조 논쟁 전위정당 개념은 이념적으로는 대중의 ‘자생성’에 대비해 당의 ‘의식성’을 강조한 1902년 레닌의 소책자 『무엇을 할 것인가』에서 처음 제기되었고, 이념과 조직적 측면을 포함한 총체적 제기는 1903년 러시아사회민주주의노동자당 2차 당대회에서 벌어진 규약 1조, 즉 <당원 자격에 관한 논쟁>에서 비롯되었다. 1903년 2차 당대회 당시 레닌이 제출한 규약 1조 초안은 다음과 같다. “당원은 당의 강령을 받아들이고, 물질적 수단으로 당을 지지하며, 당의 한 기구에 속해 활동하는 사람이다.” 이에 반해 마르토프가 제출한 초안은 다음과 같다. “당원은 당의 강령을 받아들이고, 물질적 수단으로 당을 지지하며, 당의 한 기구의 지도 아래 정기적으로 당을 지원하는 사람이다.” 레닌에게 당원은 당기구에서 활동하는 사람이었으며, 마르토프에게 당원은 당을 돕는 사람이었다. 전자는 당원 자격을 당에서 활동하는 사람으로 제한하자는 주장이고, 후자는 지지자도 당원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주장이다. 앞서 살폈듯 사회주의 노동자당은 노동자계급의 의식적 일부, 즉 ‘전위’[11]다. 그렇기에 사회주의 노동자당은 모든 노동자가 아니라 자본주의에 맞서 투쟁하는 노동자, 계급적 노동자를 조직대상으로 삼는다. “당 조직으로 공인된 조직의 성원만을 당원으로 인정한다고 할지라도, 특정의 당 조직에 ‘직접’ 가입할 수 없는 사람들은, 당 조직이 아니지만 당과 관련된 조직 속에서 여전히 활동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운동에의 참가와 활동으로부터 제외한다는 의미로서 방기한다는 말은 언어도단이다. 반대로 참된 사회민주주의자로 이루어진 우리의 당 조직이 강고하게 되면 될수록, 또 당내의 동요와 불안정성이 적으면 적을수록, 당을 둘러싸고 있으며 당에 의해 지도되는 노동자 대중의 분자들에 대한 당의 영향력은 더욱 넓어질 것이며, 더욱 다면적으로, 더욱 풍부하게, 더욱 성공적으로 될 것이다. 요컨대 노동자계급의 전위로서 당은 계급 전체와 혼동되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계급의 당이다. 그러므로 계급의 거의 전체가 (그리고 전시나 내란 시에는 완전히 계급 전체가) 당의 지도하에 행동해야 하며, 가능한 한 긴밀하게 우리 당에 동조하여야 한다. 그러나 자본주의하에서 계급 전체가 또는 거의 전체가 그들의 전위나 사회민주당의 의식성과 적극성의 수준까지 고양되리라고 생각하는 것은 바로 마닐로프주의거나 ‘추수주의’인 것이다. 현명한 사회민주주의자라면, 자본주의하에서는 노동조합 조직조차도 모든 또는 거의 모든 노동대중을 망라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의심하지 않는다. 전위와 전위에 이끌리는 모든 대중과의 차이를 망각하고, 광범한 층을 점차로 선진 수준까지 끌어올리는 전위의 항상적 임무를 망각하는 것은 단지 자신을 기만하는 것이며, 우리 임무의 위대성을 외면하는 것이며, 우리 임무를 축소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당에 동조하는 자와 당에 소속하는 자의 차이, 자각된 적극적인 자와 원조하는 자의 차이를 말살하는 것이야말로 이와 같은 외면이고 망각이다.”[12] 레닌의 강조점은 명확하다. ‘당’은 ‘계급의 당’이지만, 계급 그 자체와는 다른 것이다. 당은 계급 전체를 망라할 수 없으며, 그러려고 해서도 안된다. 당은 계급의 의식적이고 선진적인 부분이어야 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당은 끊임없는 계급투쟁의 부침 속에서도 중핵을 보존하고 확장함으로써 노동자계급을 권력으로 이끄는 투쟁조직이어야 한다. 혹자는 ‘전위당’의 필요가 러시아 전제정의 혹독한 공안탄압에서 기인했으며, 오늘날 전위당은 시대착오적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주목해야 할 점은, 위 인용문에서 레닌은 ‘러시아 상황’이 아니라 ‘자본주의 사회’의 계급과 계급조직의 관계에 대해 논하고 있다는 점이다.[13] 전위는 정세적으로 끊임없이 진동하는 계급을, 단기적인 경제적 이해를 넘어 권력의 주체로 형성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는 노동자계급의 선진층이며, 이 선진 부위의 축적과 단결이 곧 당의 건설이다. 자본주의체제를 변혁할 당을 만들고자 한다면 그 당의 성격은 당연히 전위적일 수 밖에 없다. 이런 점에서 ‘전위’를 무엇인가 신비한 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오류다. 사실 ‘당원은 당기구에서 활동하는 사람이다’라는 레닌의 주장은 매우 소탈한 것으로 들리기도 한다. 앞서 살핀 것처럼 계급의식의 불균등성에 따라 당원 자격을 한정하는 것은 불가피하며 이는 음모주의, 엘리트주의와 하등 관계가 없다. 그럼에도 전위정당은 종종 음모가 집단, 직업적 혁명가들만 가입할 수 있는 집단, 엘리트주의적 집단이라는 오해를 받아왔다. 레닌 자신이 한 번도 당원 자격을 음모에 능한 직업적 혁명가들로 제한해야 한다고 주장한 적이 없음에도 이런 오해는 널리 퍼져있다. 이를 더 자세히 살펴보자. 논쟁 당시 레닌에 따르면, 당을 구성하는 범주는 다음과 같다. 당 조직은 오직 직업적 활동가로만 구성되어야 한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극히 제한되고 비밀스러운 조직으로부터 매우 광범하고 자유로운 느슨한 조직에 이르기까지 모든 종류, 모든 등급, 모든 색채의 다양한 조직이 필요하다. … 마르토프 동지의 정식 초안이 당과 조직 간의 관계에 대해 전혀 언급조차 하지 않았음에 반해, 나는 대회가 소집되기 1년 전에 이미 어떤 조직이 당에 가입해야 하고 어떤 조직은 그렇지 않은가에 대해 지적하였다. … 1) 혁명가의 조직, 2) 가능한 한 다양하고 광범한 노동자 조직 (나는 이 말을 노동자계급에 한정하고 있지만 다른 계급의 일정한 분자도 일정한 조건에서는 여기에 들어올 수 있다는 것을 자명한 사실로 전제하고 있다). 이 두 범주가 당을 구성한다. 다음으로 3) 당에 동조하는 노동자 조직, 4) 당에 동조하지는 않으나 실제로는 당의 지도와 통제 하에 있는 노동자 조직, 5) 적어도 계급투쟁의 대발현의 시기에 부분적으로 사회민주당의 지도에 복종하는 노동자계급의 미조직 분자. … 마르토프 동지의 견해를 보면 당의 경계가 완전히 불분명하다. … 이러한 느슨함으로부터 어떠한 이로움이 생기는가? ‘명칭’이 널리 퍼져나가는 것이다. 그 해악은, 계급과 당의 혼동이라는 조직 해체의 사상을 가져오는 것이다.[14] 레닌은 ‘혁명가의 조직’만으로 당을 구성해야 한다는 사고를 명시적으로 부정하며, ‘가능한 한 다양하고 광범한 노동자 조직’도 당을 구성한다고 말한다. 즉, ‘당의 한 기구에 속해 활동하는 사회주의자’로 구성된 당은 노동자계급의 일원으로서, 노동자계급과 가장 넓은 접촉면을 유지하며, 노동자계급의 운동을 추동하고 조직하는 과정에서 종국적 승리로 이끌고자 분투한다. 전위당은 대중 속에서 행동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이는 당연하다. 이렇듯 전위당의 본래적 의미, 그 어디에도 엘리트주의와 음모주의는 존재하지 않는다. 물론 의문은 남는다. ‘대중 속에서 활동하더라도, 전위당은 당원 자격을 엄격히 제한하므로, 결국 사회주의 정당은 늘 소수일 수밖에 없지 않느냐’는 질문이 있을 수 있다. 실제로 운동의 침체기와 일상적 시기에 사회주의 정당은 소수일 가능성이 높다. 자본주의 철폐를 지향하는 사회주의 정치의 대중화는, 그 본질상 언제 어디서나 가능한 것이 아니다. 사회주의 대중화는 자본주의 사회의 위기와 계급투쟁 확대를 그 필요조건으로 한다. 그리고 자본주의의 위기와 함께 벌어지는 파업을 비롯한 노동자투쟁 확대는 급진적 노동자들의 비약적 확대로 이어지기도 한다. 1905년 1차 러시아 혁명 이후의 공세기에, 레닌은 혁명이 배출한 급진적 노동자들을 당에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이 위험을 과장하지 말자, 동지들. 사회민주주의는 이미 자기 이름을 확립했고, 하나의 경향을 만들어냈으며, 사회민주주의적 노동자 간부들을 형성해 냈다. 그리고 이제 영웅적인 프롤레타리아가 실천으로, 명확히 인식된 목표를 위해, 순수한 사회민주주의 정신으로, 일관되고 집단적으로 싸울 준비와 능력이 있음을 입증했으니, 우리 당 소속 노동자나 중앙위원회의 초청으로 내일 당에 가입할 노동자 백에 아흔아홉은 사회민주주의자일 것임을 의심하는 것은 그저 터무니없는 일일 것이다. 노동자계급은 본능적으로, 자발적으로 사회민주주의적이며, 사회민주주의가 지난 10년 넘게 기울인 활동은 이러한 자발성을 의식성으로 전환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허수아비를 때리지 말자, 동지들! 모든 살아 있고 성장하는 정당에는 언제나 불안정, 동요, 흔들림의 요소가 있게 마련이다. 그러나 이러한 요소는 영향받을 수 있으며, 굳건하고 확고한 사회민주주의 중핵의 영향에 따를 것이다.[15] 2) 당과 대중의 관계 계급투쟁 확대는 전위와 대중의 간격을 급격히 좁힌다. 격화하는 계급투쟁 속에서 대중은 자본주의 그 자체에 대해 집단적 의문을 제기하며, 이는 사회주의 정치가 급진화된 노동자 대중 속으로 뻗어나갈 계기를 형성한다. 이것이 사회주의 대중화의 조건이다. 물론 위기가 사회주의 대중화 자체를 보장하지는 않는다. 중요한 것은 위기에 조응하는 과제를 제시하고 선도할 사회주의 정당의 주체적 능력이며, 이러한 능력은 일상적 시기에 준비된다. 해당 준비의 핵심은 혁명적 강령, 노동자계급과의 일상적 결합, 그리고 당원의 주체화를 추동할 당내 민주주의다.[16] 당은 노동자계급의 유기적 일원이어야 한다. 당원은 당의 제반 문제를 자유롭게 토론할 수 있어야 하고, 이를 통해 당론 결정에 참여할 수 있어야 한다. 일상적 시기에 살아있는 당이 아니라면, 그 당은 혁명적 시기에도 살아있을 수 없다. 전위는 대중과 호흡하며 대중을 올바른 길로 이끌고자 노력하며, 성공과 실패 속에서 스스로를 교정한다. 1917년 러시아혁명 당시를 반추하며, 레온 트로츠키는 당과 대중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서술한다. “대중은 사회재구성에 관한 준비된 계획을 가지고 혁명에 돌입하지 않는다. 다만, 구체제를 더 이상 견딜 수 없다는 격렬한 감정으로 혁명에 돌입할 뿐이다. 계급대중의 지도적 부위만이 정치강령을 가지고 있는데, 이것도 혁명의 시험과 대중의 승인을 거쳐야 한다. … 지도조직이 없다면 대중의 혁명에너지는 피스톤 실린더 안에 들어가지 않은 증기처럼 사방으로 흩어질 뿐이다. 그러나 역시 원동력은 피스톤이나 실린더가 아니고 증기에 있듯이 혁명의 원동력은 대중에게서 나온다.” “소비에트는 공장위원회에 뒤처졌다. 공장위원회는 대중에게 뒤처졌다. 병사들은 노동자들에 뒤처졌다. 더욱이 지방은 수도에 뒤처졌다. 이것이 혁명의 불가피한 역동성이다. … 볼셰비키 역시 혁명의 역동성을 따라잡지 못하고 뒤처졌다. … 대중은 균일하지 않을뿐더러 손을 데이고 소스라치게 놀라자빠진 다음에야 혁명의 불길을 다루는 법을 배운다. 볼셰비키는 경험을 통해서만 배우는 대중의 각성 과정을 가속할 수 있을 뿐이었다. 이들은 참을성 있게 설명했다. 그리고 이번에 역사는 이들의 참을성에 보답해 주었다.”[17] 트로츠키의 서술은 대중의 자발성과 당의 의식적 지도 사이의 변증법을 보여준다. 전위는 대중의 에너지를 조직하고 방향을 부여하는 피스톤이다. 그러나 계급투쟁의 역동성은 언제나 대중으로부터 솟아나며, 당은 이를 선도하기도 하고 뒤따르기도 한다. 살아있는 당은 바로 이 흐름을 이해하고 그 흐름 속에서 자신을 갱신할 수 있는 조직이다. 당은 토론의 자유와 행동의 통일을 결합해, 대중의 경험을 의식적 전술로 만들며, 이를 통해 전위와 대중의 간극을 실천으로 메운다. 혁명적 강령, 노동자계급 속에서 활동하는 실천적 당원, 토론의 자유와 행동의 통일을 보장하는 민주집중제, 이 총체가 ‘인민의 호민관’으로서의 당을, 또한 혁명을 가능케 한다. 3) 사회주의 정당의 기본조직 사회주의 정당은 기초조직을 노동현장에 둔다. 노동자가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공간, 생산과 착취가 일어나는 공간, 계급투쟁이 벌어지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사회주의 노동자당은 노동현장으로부터 계급투쟁을 조직하고, 지원하며, 개입하고, 이끈다. 노동현장에 존재하는 당의 기초조직, 노동현장에 뿌리박은 ‘당의 한 기구’, 이를 ‘현장분회’라고 부른다. 현장분회는 생산현장에서 투쟁을 조직하고 이끌며, 사회주의 정당의 이념과 강령을 알리며 대중을 조직한다. 이를 통해 일터에 당의 존재를 드러내고, 일터의 투쟁과 전체 노동자투쟁을 잇는 선전·선동을 수행한다. 앞서 살폈듯 노동조합은 조합원에 대한 분배의 확대를 중심 목표로 활동하며, 이는 때로 사회주의 정당의 노선과 충돌하기도 한다. 그렇기에 사회주의 정치운동을 노동현장에서 전개하기 위해서는, 노동조합과 독립적인 당의 기구가 생산현장에 존재해야 한다. 즉, 사회주의 정당의 당원은 그저 당원증을 가진 노동조합원이 아니라, 일터에 포진한 사회주의 정치활동가를 지향한다. 현장분회는 대규모 제조업 생산현장으로 한정되지 않으며, 소규모 공장이 모인 공단, 서비스 노동 등 당원의 구체적 노동형태에 따라 지역적 형태 등 유연한 조직형태에 기반할 수 있다. 이에 반해 통상적인 사회민주주의(개량주의) 진보정당의 기본조직은 ‘지역구’다. 지역구 단위로 선거가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진보정당의 목적은 의회진출이며, 이에 중요한 것은 선거에 필요한 재정과 표의 확보다. 그렇기에 대다수 진보정당은 선거 단위에 조응해 당원을 편재한다. 양자의 차이는 현장분회가 노동자를 ‘계급’이라는 집단으로 조직하고자 하는 데 반해, 지역구 체제는 노동자계급을 자본주의 선거제도 아래 ‘유권자’로 조직한다는 것이다. 지역구 체제 아래 진보정당에 속한 노동자들은 ‘시민’으로서, 한 사람의 유권자로서 편재되고, 해당 노동자들 또한 시민적 정체성으로 지역구민을 만나며 당의 득표 확대를 위해 활동한다. 진보정당의 당원은 동료 노동자들에게 국가와 자본에 맞선 계급투쟁을 선동하는 노동자 정치운동가로서가 아니라, 최대한 온건한 모습을 요구받는 한 사람의 시민으로 정체화되는 것이다. 선거 중심 활동과 조직체계는 사회민주주의 진보정당에 내재한 국민정당화 경향[18]을 증폭시킨다. 사회민주주의 진보정당은 애초 노동자계급정당으로 출발했더라도, 결국 전 국민을 조직대상으로 삼는 국민정당으로 귀결해왔다. 그 동학은 다음과 같다. 선거에서는 투쟁하는 노동자도 1표, 투쟁하지 않는 노동자도 1표, 교수와 변호사도 1표, 자본가도 1표를 행사한다. 그렇기에 투쟁하는 노동자의 목소리는, 선거에서 1/N에 지나지 않는다. 선거 중심 활동과 선거대응에 초점을 맞춘 조직체계 아래, 노동자계급은 당의 핵심 주체가 아니라 일부가 될 수 있을뿐이다. 이렇듯 현장정치활동이 존재하지 않는 통상적 사회민주주의 정당의 구조상, 노동자는 일터 바깥에서만 당원이 될 수 있으며, 그것도 한 사람의 시민으로서 그러할 뿐이다. 이에 따라 일터의 투쟁은 오로지 노동조합에 맡겨지며, 정당의 활동은 현장투쟁과의 결합력을 잃고 의석 확대를 위한 표와 재정의 조직화로 축소된다. 한국에서 이런 모델, 즉 노동조합은 경제투쟁을 하고 진보정당은 정치투쟁을 한다는 역할분담론은 ‘양날개론’으로 제시되어 왔다. 4) 사회민주주의(개량주의) 진보정당의 ‘양날개론’ 비판 운동진영에 이른바 ‘양날개론’이 처음 제시된 시기는 1990년대 중반이며, 민주노총의 정치세력화 역시 이런 모델에 근거했다.[19] 그렇다면 노동조합의 경제투쟁과 진보정당의 정치투쟁이라는 역할분담론은 어떤 문제를 가지는가? 경제투쟁과 정치투쟁의 분리를 전제로 하는 양날개론은 그 자체로 오류다. 정치투쟁은 진보정당이, 경제투쟁은 산별노조가 한다는 역할분담론에 따라, 정치의 공간과 경제의 공간은 무 자르듯 분할된다. ‘현장’은 ‘노동조합 임단협투쟁’을 하는 곳으로, ‘의회’는 더욱 중요하고 거시적인 ‘정치’가 행해지는 것으로 표상되는 것이다. 경제투쟁과 정치투쟁이 분리될 경우, 경제투쟁은 그야말로 조합주의적 이해관계에 한정된다. 노동조합 밖에서 사회적 격변이 벌어지건 말건 노동조합은 소속 조합원들의 임금과 노동조건을 개선하면 그만이다. 또한 양날개론 역할분담론에 따라 정치는 현장의 외부, 까마득히 먼 의회에서 직업정치인들이 하는 것이 된다. 정치가 이렇게 정의되는 순간, 노동자계급의 정치적 임무는 전적으로 진보정당의 의회진출 확대에 맞추어진다. 이에 따라 노동자들이 할 수 있는 ‘정치’는 진보정당 후원사업과 투표 조직으로 한정되며 노동현장 안에서의 정치활동은 텅 비게된다. 이는 정치운동과 노조운동 양자 모두의 후퇴를 결과한다. 그러나 계급투쟁은 그 자체가 경제투쟁과 정치투쟁의 융합이다. 1987년 노동자대투쟁은 경제투쟁인가, 정치투쟁인가? 1996-97 총파업 투쟁은 경제투쟁인가, 정치투쟁인가? 모든 거대한 계급투쟁에서 경제투쟁과 정치투쟁은 뒤섞이며 상호 발전한다. 또한 양날개론은 필연적으로 관료주의와 노동자정치의 왜곡으로 이어진다. 양날개론자들에게 ‘정당’이란 의회에 진출하기 위한 도구이며, ‘정치’란 의회에서 노동자계급을 대표하는 행위이다. 그렇기에 양날개론자들에게 현장투쟁은 고될 뿐 별 성과가 없는 것이며, 의회에 진출하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한 임무다. 이에 따라 노동조합의 인적·재정적 자원을 진보정당으로 동원하는 것이 노동자 정치세력화의 첩경으로 놓인다. ‘진보정당에 의한 노동조합의 안정적 동원’[20]이 목적이 되는 순간, 노동조합 내에는 ‘묻지마 단결’이 최우선 과제로 놓인다. 노동조합 내 다양한 정치적 경향의 존재에 ‘분열’이라는 딱지가 붙고, 정치적 소수파를 노동조합 밖으로 내모는 행위가 단결의 이름으로 행해진다. 논쟁과 토론을 통해 이루어지는 조합원의 정치의식 발전은 봉쇄된다. 정치의 목적이 선거와 의회진출로 놓임에 따라, 당은 계급투쟁이 배출한 전투적 노동자들이 아니라 선거기술자, 출세주의자로 채워진다. 심지어 ‘진보정당도 의석확대를 위해 자본가정당의 정치기술을 구사할 수 있어야 한다’, ‘진보정당도 협상에 능해야한다’는 투의 이데올로기가 일종의 교훈처럼 유포된다. 이를 통해 당은 노동자계급의 통제를 벗어나며, ‘국민정당’으로 귀결한다. 이러한 한국 양날개론의 원형은 독일 사회민주주의자들에게서 유래했다. 로자 룩셈부르크는 ‘당의 정치투쟁과 노동조합의 경제투쟁’이라는 역할분담론을 다음과 같이 비판한다. 노동조합과 사회민주당이 “병행 행동”(parallel action)을 하며 “동등한 권위”를 지닌다는 이론은 전적으로 근거 없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역사적 뿌리를 갖고 있다. 이 이론은 부르주아 사회의 평화롭고 “정상적인” 시기라는 환상에 기초해 있다. 이 시기에는 사회민주당의 정치투쟁이 의회투쟁으로만 소모되어버리는 듯 보인다. 그러나 노동조합 투쟁과 마찬가지로 의회투쟁도, 부르주아 사회 질서라는 토대 위에서만 수행되는 투쟁이다. 노동조합의 활동이 경제개혁 작업인 것과 마찬가지로, 그것은 본질상 정치개혁 작업이다. … 최종 목표는 의회투쟁이나 노동조합 투쟁 그 너머에 있다. … 노동조합과 사회민주주의의 “동등한 권위”라는 이론은 단순한 이론적 오해나 혼동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잘 알려진 기회주의적 사회민주주의 경향의 표현이다. 이 경향은 노동계급의 정치투쟁을 의회투쟁으로 축소시키고, 사회민주당을 혁명적 프롤레타리아 정당에서 소부르주아적 개혁정당으로 바꾸려 한다. … 물론 이것은 노동조합 조직을 정당에 흡수시킨다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노동운동 전체와 그 일부인 노동조합 간의 실제 관계에 상응하는, 사회민주주의와 노동조합 간의 통일을 회복하는 것이 목적이다.[21] 3. 사회주의 정당의 노선 1) 노동자계급 혁명을 통한 자본주의 철폐 - 칠레와 그리스의 경험이 말하는 것 곳곳에서 제국주의 전쟁위기가 심화하고 있다. 미국과 유럽 ‘민주주의’ 국가들조차 극우세력이 발호하고 있으며 그 배경에는 이윤율 저하에 따른 자본의 이윤축적 위기가 있다. 일반화한 저출생 문제가 드러내듯 현 시기 자본주의는 전체 노동자계급의 가장 기본적인 생존조차 보장할 수 없다. 자본가계급은 체제를 지배할 능력이 없음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다.[22] 그러나 문제는 어떤 지배계급도 스스로 권력을 내려놓지 않는다는 것이다. 노동자계급이 혁명을 지향하건 평화적 이행을 지향하건, 지배계급은 평화적 이행을 허용하지 않는다. 그 과정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지배계급의 조직된 폭력, 국가권력이다. 칠레와 그리스의 사례는 자본주의 국가권력에 맞선 결정적 투쟁 없이 이행은 불가능하다는 점을 여실히 드러낸다. 레닌이 말했듯, 혁명의 문제는 곧 국가권력의 문제다. (1) 1973년 칠레의 경험 1970년 9월, 칠레 노동자 민중은 살바도르 아옌데를 대통령으로 선출했다. 아옌데는 사회당, 공산당, 급진당 등 좌파와 중도좌파 정당이 결성한 ‘인민연합’(Unidad Popular, UP) 소속으로 출마하여 토지개혁, 대외 종속 탈피, 기간산업 국유화, 교육·보건 공공성 강화 등 개혁 프로그램을 공약으로 제시했다. 아옌데 정부는 집권 이후 미국 자본이 장악하고 있던 구리 산업을 비롯해 은행, 석유, 통신, 제약 등 주요 부문 국유화 조치를 단행했다. 이는 1971년 7월 11일 의회가 만장일치로 의결한 헌법 개정에 기초한 것으로, ‘초과이윤 조항’을 통해 미국 자본에 대한 보상을 최소화했다. ‘사회주의로 가는 칠레의 길’을 내건 아옌데 정부는 이러한 개혁을 자본주의 체제를 유지한 채 합법적으로, 즉 기존 헌정질서의 틀 내에서 추진하려 했다. 사실 인민연합정부는 출범부터 의회제도를 비롯한 기존질서 유지를 ‘보장법’으로 약속했다.[23] 현존 정치체제와 사법체제, 교육제도·노동조합·사회조직의 사회주의 지향으로부터의 독립, 출판과 대중매체에 대한 국가로부터의 독립 등을 서약하며 제도 내에 존재할 것을 다짐하고서야 출범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처럼 자본주의 국가의 골격을 건드리지 않았음에도, 자본은 아옌데 정부에 극렬한 반격을 개시한다. 칠레 자본가계급은 보수 언론과 정당, 교회, 자본가 단체들을 통해 조직적으로 아옌데 정부를 흔들었다. 특히 1972년 10월에 발생한 '트럭 소유주 연맹'의 대규모 파업은 결정적인 전환점이었다. 이 파업은 CIA가 수백만 달러를 투입해 기획한 것으로, 물류망을 마비시켜 아옌데 정권을 흔들기 위함이었다. 더욱이, 의회 다수와 사법부는 인민연합 정부의 경제 개입 조치를 '합법성 결여'라 비판하며 사보타주에 나섰고, 1973년 8월 22일에는 하원이 아옌데 정부가 '헌법을 위반했다'는 결의안을 채택했다. 이는 군부의 정치 개입을 정당화하는 명분으로 작용했다. 이미 그 무렵 칠레 군대는 우익 쿠데타 세력으로 기울고 있었다. 그러나 칠레 노동자 민중은 자본주의가 정한 틀 내에 머무르려 하지 않았다. 경제를 마비시키려는 자본의 사보타주와 군부의 쿠데타 위협 속에서, 1972년부터 1973년까지 노동자 민중은 공장과 지역에서 자발적이고 수평적인 권력기구를 형성하기 시작했다. 바로 산업조정위원회(cordones industriales, 직역하면 ‘산업 벨트’)이었다. 산업코르돈(산업조정위원회)은 작업장과 지역 단위를 잇는 노동자 조직으로 공장점거, 생산통제, 분배 조정, 쿠데타에 맞선 방어조직 형성 등을 수행했다. 유통부문에서는 노동자와 주부, 학생들이 '민중공급위원회'(공급과 물가위원회)를 구성하고 식량과 필수재의 배급을 자율적으로 조정했다. 산업조정위원회와 민중공급위원회처럼 노동자 민중이 자본가들의 공격에 맞서고자 자발적으로 만든 조직들이 전국으로 확장되고 이것이 정부의 지지, 지원과 결합할 경우, 이것이 ‘이중권력’으로 발전할 가능성은 충분했다. 아옌데 정부는 이런 조직을 잠재적 권력기구가 아니라 자본가들을 놀라게하는 성가신 존재들로 취급했다. 1973년 6월, 군부가 쿠데타를 시도하자 산업코르돈은 수십 개의 공장을 접수하고 생산과 물자 이동을 자체적으로 통제하며 반격했다. 하지만 아옌데 정부는 이 흐름을 지지하지 않고 오히려 사회화된 기업을 자본가에게 돌려주는 조치를 취했고, 위기 타개를 위해 피노체트를 내무장관으로 기용하는 타협을 선택했다. 이는 치명적인 선택이었다. 결국 1973년 9월 11일, 피노체트를 중심으로 한 군부는 쿠데타를 단행했고, 아옌데는 대통령궁에서 자결했다. 칠레 군부는 대대적 학살을 자행했고, 정치적 억압뿐 아니라 경제 구조의 근본적 재편을 추진했다. 그 중심에 미국 시카고대학 경제학과에서 밀턴 프리드먼에게 학습한 신자유주의 교리로 무장한 경제학자 집단, 이른바 ‘시카고 보이즈’가 있었다. 이들은 피노체트 정권 하에서 고삐 풀린 시장 개방, 국영기업의 민영화, 노동권 축소, 복지 철폐 등 신자유주의 정책을 대대적으로 도입했다. 이는 이후 IMF가 세계 곳곳에 강요할 ‘구조조정 프로그램’의 원형이었다. 아옌데 정부가 추구한 ‘사회주의로 가는 평화로운 길’은 무참히 짓밟혔고, 군부와 자본의 연합은 칠레 노동자 민중의 삶을 벼랑으로 몰았다. 칠레의 비극은 단지 민중연합의 적들이 악랄해서가 아니었다. 자본주의 국가기구의 ‘중립성’에 대한 환상, 부르주아 헌정질서 내에서의 점진적 개혁에 대한 집착, 그리고 노동자 민중이 아래로부터 만들어낸 투쟁과 기구에 대한 방기. 이것이야말로 ‘체제 내 사회주의’가 가진 구조적 한계를 드러낸다. 혁명이 배제된 사회주의는, 자본이 허용하는 만큼만 존재할 수 있을 뿐이다. (2) 2015년 그리스의 경험 2008년 세계 금융위기와 이어진 유럽 재정위기는 남유럽 국가들에게 심각한 타격을 안겨줬다. 그리스는 가장 큰 피해를 입은 나라 중 하나였다. 유럽연합(EU), 유럽중앙은행(ECB), 국제통화기금(IMF)으로 구성된 ‘트로이카’는 그리스 정부에 퇴직연령 상향, 연금 삭감, 최저임금 삭감, 단체교섭 제한, 해고 요건 완화, 공공부문 축소 등 가혹한 긴축정책을 요구했다. 그리스 실업률은 30%에 가깝게 치솟았고, 청년실업률은 50%를 넘겼다. 분노한 대중은 기존과는 다른 대안을 찾기 시작했다.[24] 이런 상황에서 ‘시리자’(SYRIZA)와 같은 급진 좌파 정당들이 대안으로 떠올랐다. ‘급진좌파연합’ 이라는 뜻의 시리자는 2004년 여러 좌파정당의 연합체로 결성되었고, 이후 2012년에 하나의 통합 정당으로 재편되었다. 시리자는 긴축정책에 맞선 대중운동을 정치적으로 대변하면서 지지층을 빠르게 넓혀갔다. 시리자는 2012년 5월 1차 선거에서 16.8%, 6월 2차 선거에서 26.9%를 얻어 범그리스사회주의운동당(PASOK)를 제치고 제2당으로 부상했다. 2009년 선거에서 4.6%를 획득했음을 감안하면 놀라운 성장이었다. 결국 시리자는 2015년 1월 총선에서 36.3%를 득표하며 집권에 성공하게 된다. 트로이카가 강요하는 긴축안에 맞선 대중투쟁이 시리자의 집권 배경이었다. 긴축을 둘러싼 협상이 시작되었다. 트로이카는 강경하게 가혹한 조건을 강요했고, 그 강경함 뒤에는 다른 채무국에 대한 경고도 포함하고 있었다. 그리고 2015년 7월 9일, 시리자는 굴욕적 긴축안을 트로이카에 제출한다. 2015년 7월 5일 긴축 찬반을 둘러싼 국민투표에서 압도적 다수가 '긴축 반대'를 결정하고 단 4일이 지난 뒤였다. 7월 12일, 그리스와 트로이카가 합의한 긴축안은 △연금 삭감 △노동유연화 △해고 공무원 재고용조치 등 구제금융 합의에 위배되는 법률 철회 △500억 유로 규모 국유자산 민영화 등을 포괄하고 있었다. 이렇게 대중의 기대를 품고 집권한 시리자는 트로이카의 긴축안 집행자로 전락했다. 시리자의 몰락은 통상적인 사회민주주의(개량주의) 정당의 몰락 경로와 전혀 다르지 않았다. 물론 2008년 금융위기 이후 계급투쟁의 발전 전망에 중대한 타격을 주었다는 점에서, 시리자의 굴복이 남긴 상처는 더 컸다. ᅠ 명백히 드러났듯, 긴축의 중단은 열강의 대리자들과 한 테이블에 앉아 입씨름하는 것으로 이루어질 수 없었다. 시리자는 트로이카와의 협상 테이블을 박차고 나와 그리스 노동자 민중의 힘에 호소했어야 한다. 또한, 유럽노동자계급의 연대를 구하며 트로이카의 악랄한ᅠ강요에 맞서 함께 싸우자고 호소했어야 했다. 그 힘과 함께 ‘유로존 탈퇴’라는 도약을 감행하지 않고, ‘긴축의 거부’는 불가능했다. 시리자가 부상하던 당시, ‘혁명과 개량의 이분법을 넘어서자’는 말장난을 하는 사람들은 한국에도 많았다. 자본주의 위기가 심화하는 지금, 시리자의 몰락이 남긴 역사적 교훈을 상기하는 것은 중요하다. 자본주의 국가권력에 맞선 결정적 계급투쟁 없이 이행은 불가능하다. 2) 노동자계급 자신의 과업으로서의 노동자 혁명 사회주의 혁명은 한 유형의 착취자를 좀 더 진보적인 다른 유형의 착취자로 대체하는 지난날의 혁명이 아니라, 모든 착취자의 손아귀에서 생산수단을 빼앗아 전체 사회의 공동 소유물로 만들고 생산자들 자신이 운영함으로써 계급 그 자체를 철폐하는 혁명이다. 따라서 사회주의 혁명은 노동자계급이 전면적이고 능동적으로 참여하며, 노동자계급의 주도권과 능동성에 바탕을 두어야 비로소 승리할 수 있다. 이렇듯 혁명은 노동자계급이 사회의 운명에 직접 개입하며 자신의 억눌린 잠재력을 해방하는 과정이다. 이탈리아 혁명가 안토니오 그람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첫째, 혁명이 부르주아 국가를 전복하는 데 착수하고 그러한 전복에 성공한다고 해서 반드시 프롤레타리아적인 것은 아니다. 둘째, 또한, 혁명이 중앙정부가 부르주아 정치권력을 집행하는 수단인 대의제도와 행정조직을 제거하는 데 착수하고 실제로 그렇게 한다고 해도 그 혁명이 반드시 프롤레타리아적이고 공산주의적인 것도 아니다. 셋째, 민중봉기가 자신을 공산주의자라 부르는 자들(또한, 실제로 신실한 공산주의자들)의 수중에 권력을 쥐여준다고 해서, 그것이 프롤레타리아적이고 공산주의적인 것도 아니다. 혁명은, 자본가계급이 지배하는 사회의 깊은 곳에서 발전하는 프롤레타리아와 공산주의의 생산적 힘을 해방하는 정도만큼만 프롤레타리아적이고 공산주의적이다.”[25] 노동자계급의 힘을 해방하는 과정이 사회주의 혁명이라고 할 때, ‘평의회’는 단지 자본주의 타도를 위한 수단에 그치지 않는다. 평의회는 혁명의 발발, 확산, 승리에 있어 결정적 역할을 하는 투쟁기구일 뿐만 아니라 혁명 이후에도 노동자권력의 핵심을 구성한다. 역사적 계급투쟁은 평의회 형태의 권력을 창출해왔다. 1871년 파리코뮌, 1917년 러시아혁명 과정에서 나타난 노동자·병사·농민 소비에트(평의회), 1918-19년 독일혁명 과정에서 나타난 노동자·병사평의회, 1919-1920 이탈리아의 ‘붉은 2년’ 당시 금속산업 노동자들이 주축으로 건설한 공장평의회, 1972-73년 칠레 인민연합 정부 당시 산업코르돈(산업벨트, 산업조정위원회), 1979년 팔레비 왕조를 타도한 이란혁명 과정에서 나타난 쇼라(평의회), 1980-81년 폴란드 국가자본주의에 맞선 ‘연대노조’ 등이다. 계급투쟁 격화와 노동자계급의 자기권력으로서의 평의회 형성이라는 흐름은 한국에서도 드러난다. ‘민주노조’는 고유명사다. 1987년 7·8·9 노동자대투쟁 이후 민주노조운동의 흐름은 국제 노동운동사에서 손꼽힐 정도로 역동적인 것이었다. 한국 민주노조운동은 △생산현장에 기반해 사업장 모든 노동자를 조직했다는 점에서 △총회 민주주의 등 아래로부터의 노동조합 민주주의를 구현했다는 점에서 △생산현장 점거파업으로 자본가의 소유·경영권에 균열을 내며 이를 일상의 ‘현장권력 쟁취투쟁’으로 확장했다는 점에서 △사업장 담장을 넘어 연대투쟁의 전통을 만들었다는 점에서 평의회적인 것이었다. 주체들이 그것을 노동조합이라 불렀건, 평의회라 불렀건 간에 말이다. 이는 서구 노동조합의 전통과는 판이하게 다른 것이었다. 19세기 말 영국·독일 등 서유럽 노동조합들이 구성한 노동조합은 숙련노동자 중심의 직종·직능별 조합체제였다. 이는 특정 노동자 부문의 고용안정과 임금인상에는 기여했지만, 비숙련 노동자와 여성노동자 등을 배제하며 전체 노동자의 단결과 계급적 연대를 제약했다. 이후 서유럽 노동조합들은 산업별 체계로 전환했으나, 이는 생산현장에 기초한 투쟁기관이 아니라 상층 중심의 관료적 협상체계였다. 반면 1987년 노동자대투쟁 이후 한국 노동조합은 단지 임금교섭의 수단이 아니라, 생산현장에서 자본의 독재에 맞서 싸우는 노동자계급의 투쟁기관이었다. 이런 민주노조운동의 변혁적 지향을 집약하는 구호가 바로 ‘노동해방’이었다. 사회주의 정당은 노동자계급의 자기해방을 위한 투쟁의 일부로서, 노동자계급과 함께 투쟁하며 노동자계급을 이끈다. 사회주의 정당은 노동자계급의 대리자가 아니다. ‘전지전능한 유일당’은 더더욱 아니다. 사회주의 노동자당은 노동자계급의 자기 해방운동의 역사적 과정을 안내하고 촉진하는 촉매 역할을 담당할 뿐이다. 사회주의로 나아갈 수 있는 혁명적 상황을 낳는 것은 노동자들의 집단적 행동이다. 사회주의 노동자당이 하고자 하는 것은 이러한 노동자대중의 운동을 의식적인 것으로 만드는 것이다. 그리고 이 운동의 에너지를 자본가계급으로부터 정치적, 경제적 권력을 빼앗아 노동자 자신의 권력으로 대체한다는 궁극적 목표로 향하게 하는 것이다. 바로 이렇게 대중의 에너지가 모이고, 그 에너지가 혁명의 기관차를 움직일 수 있는 올바른 방향을 찾게 안내하고 앞장서 이끄는 것이 진정한 사회주의 노동자당의 역할이다. 우리가 추구하는 사회주의 노동자당은 이러한 자주적 운동을 가로막는 온갖 유형의 관료주의적 질서와 통제, 억압에 맞서 투쟁하면서 노동자 스스로의 운동, 즉 노동자계급의 의식과 조직, 노동자민주주의를 발전시키는 당이다.[26] 3) 노동자계급 국제주의 – 국적이 아니라 계급으로 단결하자 사회주의 혁명은 근본적으로 세계혁명의 성격을 지닌다. 자본주의 자체가 생산과 분배를 국제적으로 실행하는 세계체제인 한, 이로부터 단절한 채 한 나라에서 노동자계급 해방을 달성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어느 한 곳에서 혁명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사회 위기가 표면화한다는 것은 곧 지구적인 차원에서 위기가 누적됐다는 것을 의미한다. 경제위기만이 아니라 기후 위기 같은 재난 상황 역시 일국의 경계를 넘어 전 지구적 범위에서 다가오고 있다. 또한 어느 나라에서 노동자혁명이 일어나든, 반드시 세계 자본가계급이 연합해 이 혁명을 진압하려 정치적, 군사적으로 간섭할 것이다. 궁극적으로 사회주의는 자본주의의 무정부적 경쟁이 초래하는 낭비와 자연 파괴를 막기 위해 전 지구 차원에서 의식적, 계획적으로 생산과 분배를 조직해야 실현할 수 있다. 따라서 노동자혁명의 시작은 일국적일지라도, 세계혁명의 전망 아래 여러 나라로 확산하며 노동자계급의 국제적 협력을 성취했을 때 비로소 완전한 승리를 기대할 수 있다. 그 점에서 노동자 국제주의를 구현하는 것은 단지 고귀한 이상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노동자계급의 해방을 실현하기 위한 현실적이고 필수적인 과제다.[27] 20세기 식민지 재분할과 대공황 극복을 둘러싸고 벌어진 두 차례 세계대전은 자본주의가 인류를 절멸할 수 있음을 드러냈다. 그리고 오늘날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대만과 남중국해를 둘러싼 미·중 대결, 그리고 팔레스타인 학살은 또 다른 세계대전의 전조다. 지금, 미국 헤게모니의 쇠퇴 속에서 제국주의 전쟁위기가 확산하고 있다. 2차대전 직후 세계 GDP의 50%에 달하던 미국 GDP 규모는 1985년 플라자합의 당시 35%로 줄어들었고, 이제는 세계 GDP의 24-25% 가량에 불과하다. 이에 반해 중국은 무서운 속도로 부상했으며[28] 브릭스를 축으로 세력 확장을 꾀하고 있다. 균열하는 세계 자본주의라는 조건 속에서 군비지출 확대는 당연한 일이다. 2025년 4월 28일 스톡홀름국제평화연구소에 따르면. 2024년 세계 각국 군사비 지출은 2023년보다 총 9.4% 증가했다. 미국 군사비 지출 5.7% 증가, 중국 7% 증가, 러시아 38% 증가, 독일 28% 증가. 일본 21% 증가. 열강은 직접 전쟁을 치르고 있거나, 대리전에 참여하고 있거나, 전쟁을 준비하고 있다. 자유무역 시대 종말과 보호주의 전면화, 급증하는 군비, 우크라이나를 무대로 장기화하는 대리전. 이런 열강투쟁을 조건으로 극우세력이 득세하고, 극우세력 득세가 다시 열강투쟁 격화로 이어지는 형국이다. 노동자계급 국제주의는 자본주의 태동 이래 변함없는 과제였지만, 다시 세계대전의 위기 앞에 놓인 오늘날 그 중요성은 그야말로 막중하다. 오늘의 한국 노동자계급의 국제주의 연대투쟁 주요 과제는 다음과 같다. 첫째, 보호주의 관세전쟁과 함께 확산하는 민족주의와 애국주의에 맞선 투쟁. 둘째, 군비증강, 한·미·일 군사동맹 강화, 무기수출 확대 등 군사화와 제국주의 전쟁에 반대하는 투쟁. 셋째, 팔레스타인 학살에 맞선 연대투쟁, 넷째, 이주노동자 탄압과 이주민 혐오조장에 맞선 투쟁이 그것이다. 첫째, 보호주의 관세전쟁이 촉발한 애국주의 이데올로기에 맞서야 한다. 이윤축적의 위기 앞에 국가와 자본가계급은 끊임없이 애국주의를 부추긴다. “한국 산업을 살리자”는 선동 뒤에는 보호주의 심화에 따른 경제위기를 명분으로 한 착취강화 시도가 담겨있음은 물론, 자본가들 사이의 투쟁에 노동자계급을 동원하며 ‘타국 노동자계급을 억압해야만 한국 노동자계급이 생존할 수 있다’는 분열 조장이 담겨있다. 사회주의 운동은 국가와 자본의 애국주의 선동에 맞서 세계 노동자계급 공동의 이해를 내세운다.[29] 둘째, 제국주의 전쟁과 군비증강, 전쟁산업 확대에 반대하는 투쟁이다. 세계 곳곳에 전운이 깔린 지금, 각국 지배계급은 급격한 군비 확대에 나서고 있다. 2023년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발발 전까지만 해도 유럽 각국 방위비는 나토 가이드라인인 2% 이하였다. 최근 방위비를 5%까지 올리겠다는 유럽 각국의 결의는 노동권에 대한 전면 공격과 복지 축소를 동반한다. 전쟁산업 확대 역시 노동자계급의 투쟁 대상이다. ‘K-방산’은 한국을 제국주의 열강의 보급기지로 만들고 있으며, 이는 그 자체로 한반도 전쟁위기를 고조시킨다. 이미 한국은 모든 유럽 국가를 합친 것보다 더 많은 포탄을 우크라이나에 공급했으며[30], 마스가(MASGA, 미국 조선업을 다시 위대하게) 프로젝트는 한국 조선산업 노동자들을 미 해군력 증강의 도구로 만들고 있다. 셋째, 팔레스타인 학살에 맞선 국제연대를 확대해야 한다. 이스라엘 지배계급이 서방 제국주의의 지원과 묵인 아래 자행하는 팔레스타인 학살에 맞선 투쟁은 이미 세계정세의 핵심축이다. 이탈리아 노동자들이 9월 팔레스타인 연대총파업으로 길을 보여주었듯, 한국 노동자계급 역시 일터와 지역에서 팔레스타인 연대운동을 확대해야 한다. 넷째, 이주노동자 탄압과 강제추방에 맞서는 연대가 필요하다. 9월 4일 미국 현대차-LG에너지솔루션 합작공장에서 이루어진 한국노동자 대규모 체포 구금사태에 분노했다면, 한국에서 이루어지는 이주노동자 단속 추방에도 분노해야 한다. 노동조합은 이주민에 대한 혐오선동, 이주노동자 단속 추방에 맞서 지역과 사업장 모든 노동자들을 보호하는 구심으로 서야한다. 4) 노동자계급 공동전선 추동 노동자계급의 의식은 불균등하다. 산업, 고용형태, 지역, 조직화 수준의 차이에 따라 노동자들은 서로 다른 경험과 의식을 가진다. 따라서 사회주의 정당은 노동자계급 전체의 단결을 추동하기 위해 공동전선(United Front)에 주목한다. 공동전선은 자본가계급의 공격에 맞선 투쟁, 제국주의 전쟁에 맞선 투쟁, 소수자 차별에 맞선 투쟁 등에 있어 광범하게 적용될 수 있다. 사회주의자들은 공동전선 속에서 △공동전선이 내건 요구의 쟁취 △대중의 계급의식 고양 △투쟁조직 확대를 추동한다. 또한, 그 과정 속에서 사회주의 세력의 영향력 확대를 도모한다. 공동전선 내에는 투쟁하는 노동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개량주의 정당을 지지하는 노동자도 있을 수 있고, 개량주의 정당 자체도 있을 수 있다. 이렇듯 다양한 대중의 공동행동 속에서 대중의 혁명적 능력을 확대하고, 노동자계급의 투쟁 진지를 확대하며, 사회주의자 노선과 개량주의 노선의 차이를 실천적으로 드러내어 혁명적 정치세력을 확대하는 과정 없이 혁명은 불가능하다. 공동전선의 필요성을 여실히 드러내는 대표적 사례가 바로 1930년대 초 독일에서 히틀러가 집권하게 된 과정이다. 1차 세계대전 패전 후, 바이마르 공화국 하의 독일 자본주의는 심각한 경제위기와 사회적 혼란을 겪고 있었다. 대공황의 충격 속에서 실업자는 1932년 2월 600만 명에 달했고, 중간계급이 몰락하면서 나치당이 급부상했다. 이 시기 노동자계급은 독일공산당(KPD)과 사회민주당(SPD)으로 나뉘어 있었고, 공산당은 1928년 코민테른 제6차 대회가 채택한 ‘사회파시즘론’에 따라 사회민주주의를 파시즘과 동일한 기능을 수행하는 부르주아 지배의 한 형태로 규정했다. 사회민주당이 저지른 역사적 배신[31]이 이러한 인식을 강화시켰다. ‘사회민주주의 주적론’에 따라 독일공산당은 당원들에게 “사회파시스트를 공장과 노조에서 몰아내자”고 선동했고, 1931년 프로이센 사회민주당 주정부 해산을 위한 국민투표에 나치와 함께 참여했으며(소위 적색 국민투표), 1년 뒤 나치세력에 의해 프로이센 주정부가 해산될 때 공산당은 이를 기뻐할 정도였다. 이러한 사회파시즘론이 파시즘 부상과 나치 집권의 길을 열었다. 1933년 1월 히틀러가 합법적으로 총리에 임명되고 나치가 정권을 장악했다. 나치는 집권 직후 공산당과 사회민주당을 동시에 불법화했고, 독일 노동조합총연맹을 해체했다. 단결하지 못한 독일 노동자운동은 파시즘에 의해 철저히 분쇄되었다. 공산당과 사회민주당이 공동전선을 구성할 수 있었다면 나치를 막을 수 있었다. 이는 전혀 과장이 아니다. 히틀러가 권력을 잡기 전 마지막 선거 결과는 다음과 같다.[32] 사회민주당과 공산당의 합산 득표는 나치보다 많았다. 정당 득표수 비율 나치당 11,737,021 33.1% 사회민주당 7,247,901 20.4% 공산당 5,980,239 16.9% 중앙당 4,230,545 11.9% 국민당 2,959,053 8.3% 바이에른인민당 1,094,597 3.1% 기타 - 6.3% 이러한 공동전선은 단순한 전술적 연합이 아니라, 공동투쟁으로 노동자들의 계급의식을 고양하고 혁명적 실천으로 나아가게 하는 가교다. 바로 그러하기에, 사회주의자들은 공동투쟁 속에서도 자신의 주장을 알리고 논쟁할 권리를 보유해야 하며, ‘대중투쟁강령’은 이러한 실천의 매개다. 오늘날 한국의 노동자계급과 피억압 민중은 오랜 침체기를 겪고 있다. 개량주의 정당들은 선거와 의회주의를 통해 노동자들을 체제 내로 끌어들이고 있으며, 민주노총 상층의 노조 관료들은 민주당에 의존해 노동자투쟁을 통제하고 있다. 이런 조건 속에서도 대중투쟁강령을 매개로 한 공동전선의 적극적 운용은 필수적이다. 개량주의 정당과 노조 관료들이 장악한 현실 속에서도 노동조합은 여전히 중요하며, 노동자평의회 정신에 입각한 공동전선은 노동조합운동의 민주적·전투적·계급적 재편에 있어 핵심적 과제다. 사회주의 정당은 노동자평의회가 어느날 갑자기 나타나기를 고대하며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노동조합 내에서 활동하며, 또한 다양한 노동자 투쟁조직 내에서 활동하며 노동조합운동의 평의회적 발전을 추동한다. 중요한 것은 공동전선과 인민전선의 차이다. 공동전선은 노동자계급을 중심으로 피지배계급의 공동투쟁을 조직하기 위한 전술이다. 즉, 공동전선은 노동자계급의 독립성을 전제하며 이에 지배계급 분파와의 공조를 배제한다. 그러하기에 공동전선은 자본가 정당과의 연합을 포괄하는 인민전선(Popular Front)과는 완전히 다르다. 이른바 ‘민주대연합’은 자유주의 정당과 민주당을 포괄하는 전형적인 인민전선으로, 노동자계급을 자본가 정당의 하위 파트너로 전락시킨다. 인민전선은 노동자운동을 체제 내로 포섭하는 지배계급의 수단일 뿐이다. 5) 노동자계급 헤게모니 형성 모든 혁명은 억압받는 민중의 혁명이다. 그러나 그 혁명의 본질을 결정하는 것은 어떤 계급이 민중을 이끄는가, 어떤 계급이 혁명을 주도하는가다. 노동자계급이 주도적으로 제반 사회적 의제에 개입하며 해당 의제의 계급적 본질을 드러내고, 피억압 민중을 자본주의에 맞선 투쟁대열로 이끌 때 사회주의는 가능하다. 이것이 노동자계급 헤게모니다. 그러나 노동자계급의 헤게모니는 노동자가 이런저런 민중의 투쟁에 단지 연대하는 것으로, 노동자의 요구와 다종다기한 민중의 요구를 기계적으로 조합하고 절충하는 것으로 형성되지 않는다. 노동자계급 헤게모니는 사회적 억압 자체가 자본주의 계급사회의 산물이며, 따라서 계급투쟁의 영역임을 실천으로 드러낼 때 형성된다. 예를 들어, 가부장제 아래 고통받는 여성의 해방은 기업과 정부에서 여성 고위직을 늘리는 것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성별분업과 여성노동에 대한 체계적 저평가는, 자본에 맞선 남성노동자와 여성노동자의 단결 투쟁을 통해서만 해소된다. 해방은 착취자와 억압자의 성별을 바꾸는 과정이 아니다. 기후위기 역시 마찬가지다. 일상이 된 기후재난은 ‘탄소배출권 거래제’, ‘탄소세’와 같이 탄소에 시장가격을 매기는 방식으로 해결되지 않는다. 이윤을 위한 기후파국을 불사하는 자본주의 생산체제 자체를 바꾸지 않는 한 기후위기의 해결은 불가능하다. 청년취업난은 중장년층 노동자 퇴출로 해결되지 않는다. 청년실업은 노동시간을 단축으로 일자리를 나누고, 이윤이 아니라 공공복리를 위한 일자리를 창출하는 과정을 통해 가능하다. 이 모든 투쟁이 자본가계급에 대한 투쟁과 직결되어 있다. 노동자계급은 이에 대한 총체적 투쟁 전망을 제시함으로써 헤게모니를 형성할 수 있다. 만약 노동자들이 조각조각 쪼개져 모두 단기적 이해관계에 함몰되어 있다면, 노동자계급 헤게모니 형성은 불가능하다. 예를 들어, 어떤 강력한 노동조합이 소속 조합원들의 단기적 이해관계에 종속되어 잔업과 특근을 늘리고, 조합원 자녀에 대한 우선 채용을 요구하며, 기후파국이 오건말건 탄소 다배출 공정 확대를 요구한다고 가정해보자. 이런 노동조합은 결코 전체 운동을 주도할 수 없다. 노동자계급의 헤게모니는 사회 각 부문에서 벌어지는 투쟁들을 단순히 병렬적으로 나열하지 않고, 계급투쟁의 보편적 관점으로 재조직하는 과정이다. 노동자계급이 여성운동, 성소수자운동, 기후정의운동 등 다양한 운동을 ‘계급 적대’라는 관점으로 해석하고, 운동의 목표 쟁취를 위해 계급투쟁이라는 투쟁 수단을 제시할 때, 그 투쟁들은 자본주의 체제 전체를 겨누는 변혁적 실천으로 발전한다. 바로 그렇기에 노동자 ‘계급’의 관점으로 세상에 대한 해석을 제시하는 과정, ‘계급’의 관점으로 제반 투쟁에 대한 총체적 관점을 제시하는 것이 필요하다. 노동자계급은 협소한 단기적 이익을 넘어, 피억압 민중 전체의 해방을 자신의 과제로 내걸 때 비로소 사회변혁의 주도 세력으로 올라설 수 있다. 그것이 노동자계급 헤게모니이며, 그 헤게모니 형성을 주도하는 구심이 사회주의 정당이다. ----- [1] “개인들은 다른 한 계급에 맞서 공동의 투쟁을 수행해야 하는 한에서만 하나의 계급을 이룬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은 경쟁자로서 서로 적대적 관계에 있다.” - 칽 맑스 · 프리드리히 엥겔스. 『독일 이데올로기』, 1845-46년. [2] 신자유주의 이론가들이 임금에 대한 시장결정 메커니즘을 왜곡한다는 이유로 노동조합에 반대하는 이유다. 그들에게 노동자는 항상 개별적인 노동시장 참여자여야 한다. [3] 노동조합 관료층의 존재는 노동력 상품의 판매 조건에 대한 흥정이라는 노동조합의 기능 그 자체에서 비롯된다. 따라서 노동조합의 자주성·민주성·연대성·투쟁성·변혁지향성을 강화해 노동조합을 노동자계급의 투쟁기관으로 세우기 위한 노력이 필수적이다. [4] 로자 룩셈부르크, 『사회개혁이냐 혁명이냐』, 1899년. [5] 노동귀족의 역사는 자본주의의 역사만큼이나 길다. 엥겔스의 다음 언급을 보자. “노동조합들은, 자본이 노동자계급을 붙잡아 매는 속박으로부터 노동자계급을 자유롭게 하는 데 성공했는가? … 노동조합들이 그렇게 해오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시도하지조차 않았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그것을 해오지 않았기 때문에 노동조합이 쓸모없다고 말하는 것은 우리와는 거리가 멀다. 반대로, 영국에서도 다른 모든 공업국에서도 노동조합은 자본에 맞선 투쟁에서 노동자계급을 위해 필수적인 것이다. …… 노동조합들이라는 저항 수단이 없다면, 노동자는 임금 제도의 기준에 따르면 자신의 몫인 것조차 받지 못한다.” - 엥겔스, 「임금제도」, 1881년. [6] 사회주의를향한전진, 「기본강령」 [7] 경험과 역사를 통해 우리는 이런 관점이 틀렸다는 점을 잘 안다. 그러나 2인터내셔널의 사회민주주의 정당들은 이런 진화론적 낙관론을 공유하고 있었다. 그 결과는 1914년 1차 세계대전 발발이라는 초유의 위기에 직면한 2인터내셔널의 파산이었다. [8] 칼 맑스 · 프리드리히 엥겔스, 『공산당 선언』, 1847년. [9] 따라서 스탈린주의 ‘유일당’ 이론은 맑스주의와 아무런 관련이 없다. 유일당 이론은 그 자체로 노동자 민주주와 양립할 수 없으며, 따라서 ‘프롤레타리아 독재’와도 아무런 상관이 없다. [10] 레닌, 「슬로건에 관하여」, 1917년 7월. [11] 전위(vanguard)는 본래 군사 용어로, 선두 부대를 뜻한다. [12] 레닌, 『일보전인 이보후퇴』, 1904년. [13] 물론, 레닌은 러시아의 극심한 공안탄압을 들어 전위당의 필요를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는 ‘자본주의 사회’라는 조건에 더해 ‘러시아 상황’을 함께 들어 이루어진 논증이었다. 즉, 러시아의 구체적 상황에서 더더욱 당은 전위적이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14] 레닌, 『일보전인 이보후퇴』, 1904년. [15] 레닌, 「당의 재편」, 1905년. [16] “볼셰비키의 경이로운 성공은 적잖이 1917년에 당이 띤 성격 덕택으로 돌릴 수 있다. … 1917년에 모든 수준의 볼셰비키 페트로그라드 조직 안에서 가장 기본적인 이론과 전술상의 쟁점을 둘러싸고 자유롭고 활기찬 토론과 논쟁이 계속 벌어졌다. 다수파와 의견이 다른 지도자들이 자유롭게 자기 견해를 위해 싸웠으며, 이 싸움에서 레닌이 패하는 경우도 드물지 않았다. … 가장 중요한 것은 상황이 급변하는 와중에 이들이 각 기구 나름의 특정한 지지층에 알맞은 전술과 호소를 재단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엄청난 수의 새로운 당원이 충원되었으며 이들도 볼셰비키의 행동 방식을 형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 알렉산더 라비노비치, 『혁명의 시간』, 1976년. [17] 레온 트로츠키, 『러시아 혁명사』, 1930년. [18] 숱한 서유럽 사회민주주의 정당, 유로코뮤니즘 정당들이 국민정당화되어갔다. 독일 사민당은 1959년 고데스베르크 강령을 통해 마르크스주의와 결별했고, 기간산업 국유화 강령 등을 폐기하며 스스로를 국민정당으로 선언했다. 이탈리아 공산당은 1973년 ‘역사적 타협’을 선언하며 기독교민주당과의 협력에 나섰다. 영국 노동당 역시 1950년대 중반 국민정당화를 택했다. 1978-79년 노동당 정부의 임금인상률 제한에 맞선 노동자 총파업(불만의 겨울)으로 인한 노동당 정부 몰락 이후, 대처가 주도하는 신자유주의 시대가 열렸다. 프랑스 사회당과 스페인 사회노동당은 집권 이후 민영화와 긴축으로 전환했다. 스웨덴 사회민주당은 1980년대 이후 복지 축소를 주도했다. [19] 민주노총은 1995년 출범부터 산별노조 건설을 내걸었고, 1996-97 총파업 이후에는 노동자 정치세력화를 본격적인 자신의 과제로 삼았다. 2000년 창당한 민주노동당은 산별노조-진보정당의 양날개론 모델에 근거했다. [20] 이것이 과거 민주노총의 민주노동당에 대한 ‘배타적 지지방침’의 본질이었다. [21] 로자 룩셈부르크, 『대중파업, 정당, 노동조합』, 8장 「노동조합과 사회민주당의 단결」, 1906년. [22] “부르주아지는 자신의 노예들에게서 노예 상태에서의 생존조차 보장해 줄 수 없기 때문에 노예들에 의해 부르주아지가 부양되는 대신에 부르주아지가 노예를 부양해야 하는 그런 처지에 노예를 빠뜨리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부르주아지는 지배할 능력이 없는 것이다.” - 칼 맑스 · 프리드리히 엥겔스, 『공산당 선언』 [23] 1970년 9월 4일, 아옌데는 36.6%의 득표율로 대통령 선거에서 1위를 차지했지만 과반수를 넘지 못했다. 당시 칠레 헌법에 따라, 과반 득표자가 없을 경우 국회가 상위 두 후보 중 한 명을 대통령으로 선출해야 했다. 아옌데의 인준을 위해서는 기독교민주당(PDC)의 지지가 필요했고, 이들은 아옌데 정부가 현행 제도를 유지할 것이라는 보장을 요구했다. [24] 기존 그리스 정치 판도는 중도우파 신민주주의당(ND)과 중도좌파 범그리스사회주의운동당 (PASOK)이 번갈아가며 집권하던 구조였다. [25] 그람시, 「두 혁명」, 『신질서』 1920년 7월 3일자. [26] 사회주의를향한전진, 「기본강령」 [27] 사회주의를향한전진, 「기본강령」 [28] 최근 중국의 경제위기로 미·중 경제력 격차가 확대되고 있다는 인식이 있으나, 이는 상당 부분 착시다. 첫째, 미국은 인플레이션을 겪고 있고, 중국은 디플레이션을 겪고 있다. 이 때문에 달러 기준으로 본 미국 경제 규모는 실제보다 부풀려지고, 중국은 실제보다 과소평가된다. 둘째, 최근 3년 사이 위안화 가치는 달러보다 15%가량 하락했다. 이에 따라 같은 양을 생산하더라도, 달러 기준으로 본 중국 산출량은 15% 과소평가 된다. 2024년 기준으로 미국의 명목 GDP는 28조 달러, 중국은 18조 달러이나, 세계은행의 구매력 평가(PPP) 기준에서는 이미 2014년 중국 경제가 미국 경제를 앞질렀다. [29] “공산주의자들은 … 국적에 상관없는, 프롤레타리아트 전체의 공동 이해를 내세우고 주장한다” - 칼 맑스 · 프리드리히 엥겔스, 『공산당 선언』, 1847년. [30]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 제이크 설리번이 선택지를 제시했다. 한국법은 교전지역 무기수출을 금지한다. 미 국방부는 한국을 설득할 수 있다면, 41일 안에 155mm 포탄 약 33만 발을 항공과 해상으로 수송할 수 있다고 계산했다. … 한국 측은 간접지원이라면 수용 가능하다는 태도를 취했다. 연초부터 포탄이 쏟아지기 시작했고, 결국 한국은 모든 유럽 국가를 합친 것보다 더 많은 포탄을 우크라이나에 공급하는 국가가 되었다.” - 2023.12. 04. 워싱턴포스트 [31] 독일 사회민주당은 1919년 로자룩셈부르크와 칼 리프크네히트를 살해하고 독일혁명을 진압한 주역이었다. 1932년 파시즘 부당 당시 독일 공산당의 지도자인 에른스트 텔만은 공동전선을 거부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히틀러-파시즘’에 대한 기회주의자들의 과대평가보다 더 재앙적인 것은 없다”, “우리의 전략은 공격의 주요 방향을 사민주의에 돌리는 것이다.” (텔만, 독일공산당 중앙위원회 연설, 1932년 2월), “트로츠키는 진심으로 공산주의자들이 리프크네히트와 로자의 살인자들과 … 공동행동을 하자고 한다. 트로츠키는 여러 글에서 독일공산당과 사회민주당 지도자들 사이의 협상을 요구함으로써 노동계급을 길에서 벗어나게 하려 했다.” (텔만, 코민테른집행위원회 12차 전원회의 폐회 연설, 1932년 9월), [32] https://en.wikipedia.org/wiki/November_1932_German_federal_election /* 스크롤 여백만 주고, 화면에는 안 보이게 */ .ftn-target { display: inline-block; /* 줄바꿈 안 생김 */ width: 0; height: 0; scroll-margin-top: 200px; } document.addEventListener("DOMContentLoaded", function () { // name="_ftn1", name="_ftn2", name="_ftnref1" ... 전부 대상 document.querySelectorAll('a[name^="_ftn"]').forEach(function(a) { var idValue = a.getAttribute("name"); // 이미 같은 id의 요소가 있으면 또 만들지 않음 if (!document.getElementById(idValue)) { var span = document.createElement("span"); span.id = idValue; span.className = "ftn-target"; a.parentNode.insertBefore(span, a); } }); }); /* 본문 각주 번호 + 아래쪽 각주 번호 색 지정 */ a[href^="#_ftn"] sup, a[href^="#_ftnref"] sup { color: #BF202D; } /* 밑줄이 보기 싫으면 */ a[href^="#_ftn"], a[href^="#_ftnref"] { text-decoration: none; } /* 마우스 올렸을 때 살짝만 강조하고 싶으면 (선택) */ a[href^="#_ftn"]:hover, a[href^="#_ftnref"]:hover { text-decoration: underline; } /* 페이지 전체가 오른쪽으로 넘치지 않게 */ html, body { max-width: 100%; overflow-x: hidden; } /* 본문 영역 폭 강제 고정 + 긴 단어/문장도 줄바꿈 */ #bo_v_con, .bo_v_con, .cke_editable, article { max-width: 100%; overflow-wrap: break-word; word-wrap: break-word; /* 구형 브라우저용 */ } /* 워드에서 붙은 이미지/표가 화면 밖으로 안 나가게 */ #bo_v_con img, #bo_v_con table, .bo_v_con img, .bo_v_con table, .cke_editable img, .cke_editable table, article img, article table { max-width: 100% !important; height: auto; } /* 워드가 p, span에 폭을 박아놓은 경우 강제로 해제 */ #bo_v_con p[style*="width"], #bo_v_con span[style*="width"], .bo_v_con p[style*="width"], .bo_v_con span[style*="width"], .cke_editable p[style*="width"], .cke_editable span[style*="width"], article p[style*="width"], article span[style*="width"] { width: auto !important; max-width: 100% !important; } /* 기본 blockquote 스타일 */ blockquote { border-left: 4px solid #c0392b; /* 사이트 분위기와 맞는 붉은 계열 */ padding: 12px 18px; margin: 20px 0; background: #fafafa; font-style: normal; color: #333; line-height: 1.6; } /* blockquote 안의 p 태그 정렬 */ blockquote p { margin: 0 0 10px 0; text-align: justify; } /* 마지막 p 태그 여백 제거 */ blockquote p:last-child { margin-bottom: 0; } -
[원청교섭 쟁취! 이재명 정부에 맞선 7월 총파업 조직하자! - Ⅰ] 2026년 원청교섭 투쟁의 조건과 과제노조법 2조가 개정되었음에도, 하청노동자들은 다단계 하청구조 뒤에 숨은 '진짜 사장'을 상대로 노동3권을 행사하기 위해 처절하게 투쟁해야 한다. 이번 연속기고 <원청교섭 쟁취! 이재명 정부에 맞선 7월 총파업 조직하자!>는 순서대로 △개정 노조법 시행 이후 원청교섭 투쟁의 조건과 과제 △일터기본법의 본질 △7월 총파업을 조직하기 위한 투쟁방향을 살피고자 한다. 사진: 공공운수노조 화물연대본부 1. 개정 노조법의 성과와 한계 2025년 개정 노조법의 성과를 살펴보자. 첫째, 노동조건을 실질적으로 지배하는 자를 사용자로 규정하는 '사용자 개념 확대'다. 개정안은 노조법 2조 2호, 사용자 정의에 “근로계약 체결 당사자가 아니더라도 근로자의 근로조건에 대하여 실질적이고 구체적으로 지배 결정할 수 있는 지위에 있는 자도 그 범위에 있어서는 사용자로 본다”는 조항을 신설했다. 이에 따라 형식적으로는 ‘가짜 사장’과 근로계약을 체결한 비정규직노동자들도 원청에 단체교섭을 요구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둘째, 노동쟁의 대상 일부 확대다. 노조법 2조 5호 개정에 따라 노동자들은 △노동자의 지위 △노동조건에 영향을 미치는 경영상 결정 △사용자의 단체협약 위반 등에 대해서도 파업권을 행사할 수 있게 되었다. 기존 노동법은 노동쟁의를 “근로조건의 ‘결정’에 관한 주장의 불일치”로 인한 분쟁상태로 규정했다. 이 정의에 따르면 법률이나 단체협약에 따라 이미 결정된 권리의 이행을 둘러싼 분쟁, 즉 '권리분쟁'은 파업권 행사 대상이 될 수 없었다. 노조법 개정은 기존 노조법이 쟁의행위 대상에서 배제해왔던 특정 권리분쟁 사안을 일부 포함해 노동쟁의 범위를 소폭 확장했다. 즉, “근로조건 ‘결정’에 관한 주장의 불일치”시 쟁의권을 행사할 수 있다는 한계를 그대로 유지하면서 일부 사안을 명시해 쟁의대상을 소폭 확대한 것이다. 셋째, 노조법 2조 4호 라목 삭제를 통한 특수고용·플랫폼·프리랜서노동자의 노동조합 결성권 확대, 해고자와 퇴직자 등을 조합원으로 포괄할 단결권 확대다. 현행 노조법은 '근로자가 아닌 자의 가입을 허용하는 경우'에는 이를 노조법상 노동조합으로 보지 않았다. 이 조항이 노조법 2조 4호 라목이다. 윤석열 정권이 '화물연대는 노조가 아니'라며 공정거래법을 동원해 화물연대 파업을 탄압했듯, 노조법 2조 4호 라목은 특수고용·플랫폼·프리랜서 노동자의 노동3권 행사를 막아왔다. 또한 박근혜 정권의 전교조 탄압에서 드러난 것처럼 해고자, 퇴직자의 노동조합 가입을 사유로 한 탄압의 근거 조항이었다. 노조법 2조 4호 라목 삭제로 더 넓은 단결권 행사가 가능해졌다. 2022년 7월 23일, 옥포조선소 앞 하청노동자 희망버스 사진: 노동과 세계 그러나 그 한계 또한 분명하다. 첫째, 개정 노조법은 노동자 정의를 확대하지 못했다. 또한 노동조합을 조직하거나 노조에 가입한 사람은 노동자로 보는 '노동자 추정조항' 명문화에ᅠ실패했다. 주지하듯 화물노동자, 학습지교사, 택배노동자, 배달라이더, 대리운전노동자 등 특수고용노동자들과 플랫폼노동자들은 사용자에게 종속되어 일하면서도 법적 신분은 '개인사업자'로 취급되었다. 윤석열 정권의 화물연대 탄압처럼, 국가와 자본은 특수고용노동자들의 노동조합을 불법으로 규정했고, 교섭을 요청해도 자본가는 '당신들은 노동자가 아니'라며 교섭을 거부했다. 이런 현실을 바꾸기 위한 요구가 노동자 추정조항 신설이었다. '일단 원청이 고용한 노동자로 보고, 자본이 노동자성을 부정할 경우 이를 증명할 책임을 자본에 지우자'는 요구였다. 이 조항이 빠짐에 따라, '나는 원청자본에 고용된 노동자'임을 입증할 책임은 여전히 노동자에게 남았다. 더욱 근본적인 지점으로, 현행 근로기준법은 노동자를 너무 좁게 정의하고 있다. 자본은 오래전부터 ‘근로계약’이라는 형식을 우회해 노동자를 외부화해 왔다. △도급 △용역 △위탁 △플랫폼 이용계약 △프리랜서 계약 등 다종다기한 이름과 함께 노동자는 법적으로는 ‘개인사업자’가 되었지만, 실제로는 원청자본이 만든 업무체계 안에서 일하고, ‘운임’, ‘수수료’ 등 이름이 붙은 임금을 받는다. 문제는 이들에게 노동자성이 없는 것이 아니다. 자본이 엄연한 노동자를 노동자 아닌 존재로 규정하고 국가는 그 형식적 계약관계를 핑계로 노동법 적용을 미뤄왔다는 데 있다. 따라서 필요한 것은 특수고용·플랫폼·프리랜서노동자를 ‘별도 보호대상’으로 분리하는 것이 아니라, 노동자 정의 자체를 넓혀 이들을 노동법의 주체로 명시하는 것이다. 둘째, 사용자 정의 확대는 한계적이다. 개정 노조법은 사용자 범위를 '노동조건에 대한 실질적 지배력' 개념에 따라 확대했으나, 명시적으로 '원청'을 '사용자'로 본다는 규정은 빠졌다. 이에 따라 '누가 실질적 지배력을 행사하는 사용자인가'를 둘러싼 공방은 필연이며, CU-BGF자본의 행태에서 보이듯 원청은 자신이 실질적 지배력을 행사하는 사용자임을 부인하고자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고 있다. 이미 그래왔듯, 원청은 하청구조를 더욱 복잡하게 만들고, 지휘-명령 체계를 은폐하며, 책임을 하청업체에 전가하는 방식으로 사용자성을 조직적으로 회피할 것이다. 개정 노조법은 '실질적 지배력'이라는 올바르나 여전히 추상적 기준만을 제시했다. 현장에서는 여전히 "누가 실질적 지배력을 행사하는 사용자냐"를 두고 끝없는 공방이 반복될 수밖에 없다. 실제로 교섭을 요구받은 자본가들 대부분이 교섭을 거부하고 있다. 사진: 금속노조 2. 원청교섭은 법리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2026년 3월 10일, 개정 노조법 시행 이후 원청자본의 행보는 대략 세 가지로 나타난다. 첫째, 사용자성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다. 둘째, 교섭요구 사실공고를 거부하거나 지연하는 것이다. 셋째, 교섭에 응하더라도 의제를 좁혀 투쟁을 제어하는 것이다. 만천하에 드러난 노골적인 사례가 서광석 열사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BGF자본이다. BGF리테일은 CU편의점에 물류를 배송하는 화물노동자들의 운송료, 배송시간, 배송체계, 업무량과 노동조건을 실질적으로 지배하면서도 자신은 사용자가 아니라고 강변했다. 화물노동자들은 일곱 차례 교섭을 요구했지만, 원청은 계속 교섭요구를 무시했을 뿐이다. 심지어 서광석 열사 사망 이후에도 BGF 자본은 사과조차 하지 않았고, 열사 사망 이후 진행한 교섭조차 “긴급 협의”일 뿐이라며 원청책임을 회피했다. 현대자동차그룹도 마찬가지다. 금속노조는 3월 10일부로 69개 산하 지회가 22개 원청자본을 상대로 교섭공문을 발송했으나, 교섭노조를 확정해 공고한 사업장은 한화오션과 HD현대중공업 두 곳뿐이었다. 금속노조 원청교섭 사업장 중 현대자동차그룹 산하 노조들이 다수를 차지하지만, 현대자동차그룹은 자신이 교섭요구 사업장 노동자의 사용자에 해당하지 않는다며 교섭에 응할 수 없다고 통보했다. 사진: 금속노조 원청자본가들의 전략은 단지 ‘거부’에 그치지 않는다. 법 규정상 비정규직노동자와의 교섭을 완전히 거부하기 어려운 경우에는 노동·안전·보건 등 법이 강제하는 문제로 교섭의제를 제한한다. 원청자본이 생산과정, 임금, 고용, 노동시간 등 제반 문제를 지배하고 결정한다는 점은 원청노동자와 하청노동자, 진짜 사장과 가짜 사장 모두가 안다. 그런데도 원청자본은 법이 강제하는 최소한의 의제로 교섭을 축소하며 자신은 사용자가 아니라고 강변한다. 비정규직노동자들의 악전고투로 법이 바뀌었고, 최소한의 경로가 열렸다. 그러나 여전히 원청과 교섭할 수 있는 비정규직노동자는 극소수다. 이렇듯 현 조건에서 원청자본에 대한 교섭의무 강제는 바뀐 법조문이 이루어주지 않는다. 결국 오늘의 투쟁이 노조법 2·3조 개정 이후 실제로 무엇이 바뀔 것인지를 결정한다. 3. ‘악질사용자’ 이재명 정부는 하청노동자들의 원청교섭을 보장할 의사가 없다 서광석 열사가 사망한 4월 20일 당일, 고용노동부는 “노조법 제2조에 따른 교섭문제를 넘어선 상황”이라며 화물노동자를 ‘개인사업자’로 규정하고 화물노동자들의 노동자성을 부정했다. 이는 화물노동자들의 쟁의행위를 ‘파업’이 아니라 ‘집단운송 거부’, ‘개인사업자들의 담합’이라고 규정하며 공정거래법을 동원해 화물노동자들을 탄압한 윤석열 정권과 하등 다르지 않은 입장이다. 이재명 정권은 그 한계가 분명한 노조법 2조 개정안의 테두리를 넘어 비정규직노동자들의 진출을 용인할 의사가 없다. 민주노총이 집계한 원청교섭 현황은 이를 분명히 보여준다. 4월 15일 기준, 민주노총 산하 단위노조 558곳이 원청 425곳을 대상으로 교섭을 요구했지만 교섭요구 사실공고를 이행한 곳은 30곳에 불과했다. 그마저도 상당수는 노조가 노동위원회에 시정신청을 제기해 사용자성이 인정된 이후에야 공고에 나선 곳들이었다. 4월 23일 기준으로는 571곳 원청 회사에 교섭요구 공문을 보냈지만 교섭요구 사실을 공고한 곳은 46곳에 그쳤다. 이재명 정부와 고용노동부는 원청사용자성을 적극적으로 인정하고 교섭을 강제하기는커녕, 복잡한 절차와 소극적 해석으로 자본가들의 교섭 해태를 부추기고 있다. 교섭요구, 교섭요구 사실공고, 교섭노조 확정공고, 교섭단위 분리, 노동위원회 시정신청, 노동부 판단지원위원회 검토 등으로 이어지는 절차는 노동자들에게는 끝없는 관문이다. 반면 원청자본에게는 책임을 부정하고, 교섭을 지연하고, 현장투쟁을 소진시키는 수단이다. 정부가 지배하는 공공부문에서도 이재명 정부는 악질사용자일 뿐이다. “공공부문 모범사용자가 되겠다”는 이재명 정부의 약속이 무색하게, 공기업 중 교섭요구를 공고한 기관은 두 곳에 불과하다. 정부가 지배하는 공공부문에서조차, 원청자본은 비정규직노동자와의 교섭의무 부정으로 일관한다. 이런 정부와 ‘대화’하는 방법이 있다면, 그것은 오직 계급투쟁일 뿐이다. 사진: 공공운수노조, 매일노동뉴스 4. 지금, 왜 이 험난한 투쟁을 해야 하는가 원청 대자본은 국가권력의 협력과 함께 위험과 부담을 하청자본으로 전가하고, 하청자본은 재하청자본으로, 특수고용노동자에게로 책임을 떠넘긴다. 원청 자본은 납품단가와 계약조건을 통제하면서도 실질 사용자로서의 책임은 부정한다. 노동자는 원청이 만든 생산과 유통체계 안에서 일하지만, 법적으로는 하청업체 직원이거나 개인사업자로 취급된다. 이 구조에서 원청 대자본의 이윤은 늘어나고, 공급망 하단 노동자의 임금과 권리는 굶어 죽지 않을 정도의 임금노예 상태로 한정된다. 서광석 열사의 죽음은 이 구조가 낳은 참혹한 결과다. 열사의 죽음은 BGF라는 악질기업의 일탈이 아니라 한국 대자본의 보편적 행위가 낳은 결과다. 서광석 열사의 죽음에 대한 분노는 단지 BGF 자본에 대한 분노가 아니라, 다단계 하청구조 뒤에 숨어 나 자신의 고혈을 빠는 이 땅 자본가들에 대한 분노다. 그 분노를 모아낼 수 있다면, 비정규직노동자들의 대대적 진출 역시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그 모든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사진: 노동과 세계 그렇기에 원청교섭 투쟁은 단지 개정노조법을 현장에 적용하는 문제가 아니다. 원청교섭을 요구한다는 것은 다음 의문을 동반한다. 누가 내 임금을, 운임을, 수수료를 결정하는가? 누가 내 업무량을 정하는가? 누가 인력배치를 결정하는가? 누가 계약해지 여부를 결정하는가? 이 모든 과정 뒤에서 결국 누가 이익을 보는가? 이렇듯 원청교섭 쟁취 투쟁은 자본이 수십 년 동안 구축한 다단계 하청구조, 그 속에 숨긴 산업과 생산에 대한 지배력, 생산현장 내 권력관계를 드러내고 집단적 힘으로 강제하기 위한 투쟁이다. 원청교섭 투쟁은 자본이 공들여 구축한 이윤축적 체제에 대한 집단적 의문으로 이어질 수 있다. 원청자본가들이 교섭을 완강히 거부하며 여지조차 주지 않으려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렇기에 어렵고 험난하다. 그러나 투쟁으로 희망을 만들고 그 희망을 확장할 수 있다면, 그 파괴력은 우리의 예상을 뛰어넘는 거대한 계급투쟁으로 발전할 수도 있다. 바로 지금, 목적의식적으로 원청교섭 쟁취 투쟁을 조직해야 하는 이유다. -
사업장을 떠나면 한국에서 안녕이라 그랬어최근 잇따르는 이주노동자의 죽음, 그리고 이주노동자들에 대한 폭행과 괴롭힘 사건은 이주노동자를 한 사업장에 묶어 두고, 사장 동의 없이는 떠날 수도 없게 만드는 한국 이주노동제도의 필연적 결과다. 폭행을 당해도, 임금을 떼여도, 위험한 작업장에서 다쳐도 마음대로 사업장을 옮길 수 없다면, 이는 노예노동과 다르지 않다. 이주노동자가 사업장을 바꿀 권리를 보장하지 않고, 이주노동자 인권을 개선하겠다는 정부의 말은 철저한 기만이다. 사진: 노동과 세계 이곳에서는 더 이상 인간으로 살 수 없다 에어건으로 장기가 파열돼 응급수술을 받고, 기숙사를 비웠다며 뺨을 맞고, 술 취한 관리자에게 박치기까지 당하는 이주노동자들의 현실이 잇따라 보도되고 있다. 한국의 이주노동자 제도가 이주노동자의 자유와 권리를 제한하는 사이, 이주노동자들은 괴롭힘과 폭행의 표적이 되고 있다. 이주노동자들은 아무리 심한 괴롭힘과 폭행을 당해도 사업장을 떠날 자유가 없다. 고용허가제를 통해 발급되는 E-9 비자로 들어오는 이주노동자는 사장의 동의 아래 최초 3년 취업 기간 중 3회, 사장의 추천으로 재고용된 기간 1년 10개월 중 2회만 사업장 변경이 가능하다. 임금체불, 휴·폐업, 성희롱·성폭력, 근로조건 위반 등은 횟수에 포함되지 않지만, 이주노동자가 스스로 입증해야 한다. 입증하는 동안 계속 그 사업장에 머물러야 한다. 엄청난 부담이 노동자에게 전가된다. 임금체불도 ‘월 임금의 30% 이상을 두 달 이상 지급하지 않은 경우’ 등 피해자 누적될 때까지 참아야 하고 복잡한 요건을 충족해야 한다. 이러니 온갖 불이익을 당하고도 사업장을 쉽게 떠날 수 없다. 계절노동(E-8), 일반기능인력(E7-3), 숙련기능인력(E7-4), 회화강사(E—2) 등도 사업장 변경 제한은 마찬가지며, 고용허가제보다 훨씬 어렵다. 물론 사업장을 떠나도 어려움이 없어지지는 않는다. 사업장을 떠나는 순간, 이주노동자는 곧바로 체류 자격 박탈의 위험 앞에 놓이고 3개월 안에 고용노동부가 알선하는 사업장과 매칭되지 못하면 출국해야 한다. 생존의 위험, 체류 자격 박탈의 위험, 강제 출국의 위험이 이주노동자를 계속 쫓아다닌다. 고용노동부가 알선하는 사업장이 지금의 사업장보다 더 나으리라는 보장도 없다. 이주노동자들은 스스로 사업장을 선택해 들어갈 수 없고, 고용센터에서 소개한 사업장만 들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모든 위험을 감수하고 사업장을 떠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그것은 단순한 이직이 아닙니다. 그것은 절규입니다. ‘이곳에서는 더 이상 인간으로 살 수 없다”라는 절규입니다.”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이주노동팀 최정규 변호사, 노동절 맞이 긴급 이주인권딴체 기자회견, 2026년 4월 30일) "베트남으로 돌아가, 집에 가, 한국에서 안녕, 바이 바이" 최근 내가 일하고 있는 ‘이주노동법률지원센터 소금꽃나무’는 3월 10일 이천 중앙산업에서 야간 노동을 하다가 컨베이어벨트에 끼여 숨진 베트남 23세 이주노동자 응웬반뚜안님의 유족 위임을 받아 투쟁했다. 동생이 입국한 끝에 고인이 숨진 지 38일 만인 4월 17일 정주노동자와 차별 없는 배·보상, 공식 사과, 재발 방지대책 마련에 합의했다. 응웬반뚜안님은 평소에 야간노동이 힘들다고 말했는데, 아무리 힘들어도 사업장을 떠날 수는 없는 게 바로 이주노동자의 현실이다. 사업장 변경 자유를 가로막는 고용허가제는 수많은 이주노동자가 위험한 현장 상황을 인식해도 위험하다고 말할 수 없게 만드는 구조적 요인이다. 파주 식육가공업체 태운푸드에 다녔던 베트남 이주노동자 응웬꽁투씨는 지난 2월 11일 저녁 7시 반 영하 8도의 날씨에 공장 정문 앞에서 이유도 모른 채 벌을 섰다. 이유도 모른 채 반성을 쓰라고 해서 ‘직원은 거절하거나 불만을 표현할 권리가 없다’라고 썼다. 그 이후 발가락을 다쳐 절뚝거리며 일을 했는데 “두 달 동안 쉬라”라는 말을 들었다. 사업장 변경을 요구했지만 “베트남으로 돌아가, 집에 가, 한국에서 안녕, 바이 바이”라는 말을 들었다. 사장은 이주노동자가 자유롭게 사업장을 옮길 수 없다는 점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베트남 이주노동자 응웬꽁투 반성문 사진: 소금꽃나무 언론에 많이 보도된 박치기 사건(술 취한 관리자가 4분 동안 22번 박치기를 한 사건)의 피해자도 상담하고 함께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노동자는 사장의 추천을 받아 재고용 되기 위해 60만 원만 지급하겠다는 관리자의 합의서에 서명했다. 당사자의 신청만으로도 기간 연장과 재입국이 보장되어야 하는데, 사장의 추천이 없으면 불가능하기에 이주노동자는 회사에 찍히지 않기 위해 눈치만 보게 된다. 사진: 이주노동법률지원센터 소금꽃나무 자유로운 사업장 변경이 중요한 이유는, 이것이 가능해야 괴롭힘과 폭행뿐만 아니라, 임금체불, 노동안전, 열악한 숙소, 차별 문제 앞에서도 자신을 보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지독한 위선 아래 계속 쓰러지는 노동자들 사업장 변경 자유 없이 이주노동자의 권리보장은 불가능하다. 폭행을 당해도 떠날 수 없다면, 위험한 작업장에서 다쳐도 떠날 수 없다면, 그 노동은 자유로운 노동이 아니다. 그런데 이재명 정부는 고용허가제를 폐지할 생각이 전혀 없다. 지난 4월 22일 민주노총 ‘한국 이주노동제도 진단과 대안 토론회’에서 한은숙 노동부 외국인력담당관(과장)은 “이주노동자는 내국인보다 임금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해 잔업이 많은 고임금 사업장으로 이동하려는 경향이 있다”며 “이에 따른 갑작스러운 이동 증가는 사업주 인력 운용에 어려움을 주고 장기적으로 노동자 숙련 형성에도 도움이 되지 않을 수 있다”고 말했다. (“노동부, 이주노동자 사업장 이동 완전 자유화 어려워”, 매일노동뉴스, 4월 23일) 고용허가제를 폐지하지 않겠다는 분명한 입장이다. 노동부가 주도하는 ‘외국인력 통합지원 TF’에서는 ‘1년간 1회만 제한 후 자유화’와 ‘2년간 2회 제한 후 자유화’ 등이 논의되고 있다고 한다. 1년간은 한 번만 사업장 바꿀 수 있고, 2년간은 두 번만 바꿀 수 있다는 것인데, 결국 1년이든 2년이든 강제노동을 하라는 뜻이다. 여전히 노동자를 특정 사업장에 묶어 두는 족쇄를 그대로 두겠다는 것으로, ‘눈 가리고 아웅’하는 꼴이다. 다음 사업장이 어떨지 알 수 없고, 고용센터가 알선한 사업장, 즉 정부가 고용허가를 내준 사업장에서만 일할 수 있으며, 이주노동자 고용 업종과 규모는 일정하게 제한되어 있는데, ‘갑작스러운 이동 증가’라는 핑계를 대고 있다. 애초 고임금 사업장으로의 이동을 문제로 보는 것 자체가 노동권과 인권의 말살이다. 이주노동자를 저임금의 값싼 노동력으로만 바라보는 시각이다. ‘규모는 많이, 권리는 적게’라는 기조 아래 권리 없는 노동자를 확대하겠다는 정책이다. 사업장 변경 제한은 누구에게 이익이 되는지는 분명하다. 바로 자본가들이다. 이 정부는 자본가들의 이익을 조금도 침해할 생각이 없다. 이주노동자의 열악한 현실은 한국 사회 인권과 노동권을 아래로 계속 끌어내린다. 정주노동자의 권리는 이주노동자와 경쟁한다고 향상되는 것이 아니라, 이주노동자의 열악한 노동현실을 바꾸면서, 전체 노동자들의 노동조건을 상향평준화 하는 것에 있다. 이재명은 작년 스리랑카 노동자 지게차 학대 사건 이후 “이주노동자들의 기본적 인권도 지켜져야 한다”라고 말했다. 고용허가제를 폐지하지 않고 기본적 인권을 지킬 수 있는가? 이 지독한 위선 아래 이주노동자들은 지금도 수없이 괴롭힘을 당하고, 다치고, 죽고 있다. 이러한 위선에 맞서야 하지 않는가? 이주노동자들과의 연대를 다짐하고 이재명 정부와의 투쟁을 다짐해도 모자랄 판에 양경수 민주노총 위원장은 국제연대의 상징인 5월 1일, 메이데이 날 청와대에 가서 이재명의 손을 맞잡았다. 이주노동자의 현실을 생각하면 너무나 비통하다. * 제목의 '안녕이라 그랬어'는 소설가 김애란의 소설집 제목에서 끌어왔다. 작가는 소설에서 우리말의 '안녕'에는 '반갑다'라는 뜻과 '잘 가'라는 뜻 말고도 '평안하시냐'는 혹은 '평안하시라'라는 뜻이 있다고 했다. 글에도 썼지만, 사장들은 자신들의 동의 없이 이주노동자가 사업장을 떠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협박한다. 이때 안녕(바이)은 이주노동자에게 대한 협박과 조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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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당한 출발, 분명한 한계, 잘못된 노선삼성의 막대한 이윤은 노동자들의 피와 땀 위에 세워졌다. 보수 언론은 ‘긴급조정권’ 발동까지 언급하며 삼성전자 노동자들을 공격하고, 정부 역시 "일부 노동자의 과도한 요구"라며 삼성전자 노동자들을 압박한다. 노동자들의 파업권 행사는 정당하다. 그러나 이 투쟁이 전체 노동자계급의 지지를 얻고 반도체사업의 진정한 변화를 도모하려면, 투쟁의 한계도 직시해야 한다. 반도체산업 노동자들의 투쟁은 정규직 노동자의 성과급 분배 요구의 한계를 넘어 나아가야 한다. 삼성의 이윤은 노동자계급의 공동노동이 만든 사회적 부다. 바로 그 부를, 또한 그 부를 만들어내는 생산수단을 누가 통제하고 누구를 위해 사용할 것인가? 사진: 경향신문 삼성전자 노동조합 공동투쟁본부는 성과급 제도 투명화와 성과급 상한제 폐지, 영업이익 15% 성과급 지급을 요구하고 있다. 삼성전자가 발표한 1분기 영업이익은 57조 2,000억원이며, 올해 전체 영업이익은 270조를 훌쩍 넘어 300조원에 이를 거라는 예측이 많다. 인공지능(AI) 산업의 급격한 성장에 따라 AI 서버에 필수적인 고대역폭 메모리(HBM)와 고용량 DRAM, SSD 수요가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있기 때문이다. 수많은 보수 언론은 영업이익의 15%면 대략 40조 원이 넘고 1인당 5~6억 원이나 되는 관계로 노동자들의 요구가 반도체산업 경쟁력을 약화할 것이며, 경제 전반에 타격을 가져올 것이라며 연일 삼성전자 노동자들을 공격한다. 반도체산업 비정규직 노동자의 열악한 현실이 마치 정규직 노동자들의 고임금과 무리한 요구 때문이라는 거짓 선동을 맘껏 펼치고 있다. 최근에는 이재명도 나서 “일부 노동자의 과도한 요구, 부당한 요구가 다른 노동자에게 피해를 준다”라고 했다. 보수 언론들은 긴급조정권을 발동하라고 요구하고 있다. 이재명의 발언은 이런 요구에 응답하기 위한, 파업권을 짓밟기 위한 사전 포석일 수 있다. 정당한 출발 노동자들은 그동안 흘린 피와 땀의 가치를 인정받고 싶어 한다. 삼성은 아주 오랫동안 ‘무노조경영’으로 노동자들의 저항을 짓밟아왔다. 자본의 잔인한 독재 아래 수많은 노동자가 온갖 유해 물질에 중독되어 백혈병과 각종 희귀암에 걸렸다. 주말과 밤낮을 가리지 않고 생체리듬이 파괴되는 야간·교대 근무와 고강도 반복 작업으로 크나큰 육체적·정신적 고통을 겪어 왔고, 지금도 겪고 있다. 반도체산업 노동자들은 각종 재해와 질병에 시달린다 사진: 전국삼성전자노동조합(전삼노) 2024년 3월, 반올림이 전국삼성전자노조와 함께 발표한 건강실태 조사에 따르면, 삼성전자 노동자의 정신건강 문제는 아주 심각한 수준이다. 수면장애 비율은 일반 임금노동자에 비해 최대 3.7배 높았고, 우울증상 역시 약 2.5배에 달했다. 무엇보다 자살충동은 7배, 자살시도는 10배에 이르는 것으로 보고됐다. 2024년 4월 삼성전자 메모리사업부 화성사업장에 입사한 고 김치엽씨의 자살은 삼성의 성과 압박이 낳은 비극이었다. 그의 SNS와 진료기록 등에는 ‘잘해보려는데 일그러진다’, ‘파트장 기대에 미치지 못한다’, ‘입사 1년도 안 돼 정신건강 휴직을 할 것 같다’, ‘다른 사람만큼 해야 하는데, 실행 능력이 밑바닥이다’ 등의 내용이 있었다. 삼성의 실적은 이런 노동자들, 또한 삼성전자 정규직 노동자들만이 아니라 수많은 하청·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노력과 희생으로 이뤄졌다. 그런데 지난 4월 29일 삼성에서 제기한 쟁의행위금지 가처분신청 심문회의에서 사측 대리인단은 "영업이익은 원래 주주와 회사의 것"이라며 노동자들의 노력과 기여를 철저히 부정했다. 이런 태도를 보이며, 파업을 봉쇄하려는 회사에 맞선 투쟁은 정당하다. 삼성은 2023년 반도체(DS) 부문이 대규모 적자를 기록했다는 이유로, 2024년 초에 지급된 초과이익성과급(OPI)을 0%로 책정하면서도 경영진 1,000여 명에게는 총 1,752억 원 규모의 자사주를 성과급으로 지급했다. 노동자들은 경영진의 이런 비열한 행동에 분노했고, 노동조합으로 가입해 목소리를 내야만 회사를 바꿀 수 있음을 깨달았다. 적자일 때도 자기 잇속은 절대 포기하지 않는 자들이, 흑자가 났다고 노동자들의 몫을 순순히 인정할 리는 없다. 영업이익이 천문학적 액수여서 그렇지, 영업이익의 15% 성과급 지급 요구 자체는 결코 과도한 요구로 볼 수 없다. 무엇보다 노동자들이 투쟁하지 않는다면 경영진이 이익 대부분을 차지할 것이란 점에서 투쟁은 꼭 필요하다. SK하이닉스는 지난해 성과급 상한(기본급 1,000%)을 없애고, 영업이익의 10%를 성과급으로 지급했다. 고대역폭 메모리(HBM) 분야에서 삼성을 제쳐 나가는 시점에 노사관계 안정이 필요하다고 판단했을 수 있고, 2024년 삼성전자 노동자들의 첫 파업을 보며 노동자투쟁을 초기에 통제할 필요도 느꼈을 것이다.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SK하이닉스 자본이 물러선 이유는 파업까지는 가지 않았음에도 노동자들이 대규모로 결집하며 힘을 보여줬기 때문이다. 2025년 8월 14일에는 만 명이 넘는 SK하이닉스 노동자들이 집회를 열며 자신들의 분노와 요구를 드러냈기에 회사는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삼성 자본이 드러내는 위기의식도 현장을 멈춰 세울 수 있는 노동자들의 잠재력에 대한 두려움의 표현이다. 분명한 한계 그런데 삼성전자 정규직 노동조합들은 수십만 명이 넘는 하청·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이해를 적극 수렴하고 대변하려 하지 않는다. 정규직의 이해와 요구만을 관철하는 데 관심이 있을 뿐이다. 삼성전자 노동자들의 투쟁을 전면적으로, 무조건적으로 지지할 수 없는 핵심 이유다. 삼성전자 초기업노조 최승호 위원장은 이재명의 경고와 비난을 ‘LG유플러스를 두고 한 얘기’라고 했는데, 이렇게 다른 노조에 책임을 전가하는 모습은 이 투쟁의 한계와 약점을 분명히 보여 준다. 이런 모습이 나타나는 이유는 무엇일까? 단지 노동조합 지도부가 계급적 관점, 연대의 관점을 갖지 못하고 있기 때문인가? 단지 투쟁 경험이 부족해서인가? 그것만이 아니다. 삼성전자 노동자들 스스로 자신의 투쟁을 전체 노동자와 연결된 투쟁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 투쟁은 우리들에게만 국한된 투쟁’이라고 느끼고 있으며, 따라서 연대를 추동해야 할 필요도 거의 느끼지 못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파업이 단호하게 뻗어나갈 수는 없다. 여론의 압박이 세질수록, 파업의 심리적 기초는 더 약화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대사업장 노조들의 투쟁에서, 노동부의 압박이나 중재를 받고 지도부가 한순간에 뒤로 물러서는 일은 흔하게 발생한다. 이것은 이미 원청 대기업과 하청, 정규직과 비정규직이 깊게 분열된 현실을 반영한다. 이미 상당수 노동자가 보통 노동자는 꿈도 꿀 수 없는 성과급과 복지, 상대적 고용안정에 안주하면서 나타나는 모습이다. 이런 모습이 고착되면 이른바 ‘노동귀족’이라 불릴 정도로 특권화된 일부 집단이 형성된다. 상대적 고임금과 복지에 길들여진 노동귀족적 정서를 표현하는 실리주의는 더 강하게 성장한다. 물론 이것은 절대불변의 법칙이 아니다. 경제위기가 깊어지면 대기업도 노동자들에게 양보할 여유가 없다. 이에 따라 기존 지위를 잃지 않기 위한 노동자들의 저항은 거세질 수 있다. 후퇴의 역사가 오래된 만큼 관료주의가 깊게 자리잡힌 현대·기아 등 다른 대공장 노조보다, 이제 막 투쟁에 나선 삼성전자 노동조합들이 더 역동적 모습을 보여 줄 가능성도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현 투쟁의 한계와 약점을 직시해야 한다. 우리는 비정규직을 확대해 막대한 초과이윤을 거둬들이는 자본가들이, 지금도 그들의 편에서 법과 제도를 설계하는 정치인들이, 경찰을 동원해 화물연대 투쟁을 짓밟고 서광석 열사의 목숨을 빼앗은 정부가 오히려 노동자들에게 ‘비정규직을 대변하라’고 지껄이는 치 떨리는 위선과 기만을 바라보고 있다. 그러나 일종의 ‘사회공헌기금’을 회사에 요구해 하청·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게 주는 방식으로 사회적 고립을 벗어날 수는 없다. 이는 따가운 비난을 벗어나기 위해 하청·비정규직 노동자들을 들러리로 세우는 또 다른 기만에 불과하다. 또한 ‘노사 상생’이라는 기조 아래 만들어지는 기금은 하청노동자들의 투쟁력과 단결력을 약화하고, 하청노동자를 평생 비정규직 신세에 가둔 채 던져주는 작은 시혜에 불과하다. 그것이 아무리 ‘사회적 책임’이라는 포장을 두르고 있더라도, 이는 자본이 거대하게 양산한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존재와 그로부터 나오는 막대한 이윤에 대한 묵인을 전제한다. 이 점에서, 제반 사회공헌기금 또한 다단계 하청구조 속에서 고통받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에 대한 배신임은 매한가지다. 물론 하청노동자들이 투쟁하기 위해서라도 돈이 필요하다. 그러나 그 기금은 원청자본이 ‘고달픈 현재에 만족하라’며 건네는 돈이 아니라, 노동자 자신의 연대의식에서 나와야 한다. 아무리 적은 액수라도 하청노동자들의 조직화와 투쟁에 연대하고자 노동자가 모은 기금, 반도체산업 노동자가 안전할 권리를 위해 노동자 자신이 모은 기금은 비정규직 넘쳐나는 반도체산업, 일하다 죽고 다치는 반도체산업을 바꾸기 위한 투쟁의 일부다. 이는 노사가 협조해 조성한 기금, 즉 현상태를 유지하기 위한 기금과 질적으로 다르다. 무엇보다 하청노동자들에 대한 성과급 동일 지급 요구, 기본급 동일 인상을 내걸고 투쟁에 나설 준비를 해야 한다. 예전엔 성과급만이 아니라 기본급 동일 인상이 금속노조 정규직 노조들의 기본 요구였다. 하지만 노동운동 후퇴에 따라 연대 정신은 약화했다. 자동차 하청노조들은 “성과급이 완성차 정규직의 전유물이 아니”라고 외치며 싸웠다. 작년 현대·기아차 사내하청 노조들이 성과급 삭감에 반대하고 나섰지만, 큰 투쟁을 만들지는 못했다. 2024년 12월, 한화오션이 협력회사에도 같은 비율의 성과급을 지급하기로 약속했다. 실제로는 근속 및 국적에 따라 성과급을 차등 지급했고, 사외업체 노동자, 물량팀 노동자 등은 성과급 지급에서 제외했다. 한화오션이 하청노동자에게 성과급을 지급한 이유는, 470억 손해배상·가압류 청구로 하청노동자들을 잔인하게 탄압했던 악덕기업 이미지를 바꾸고, 정부의 원하청 상생모델 구축에 협조하는 모습을 보여 이후 정부 지원을 더 많이 받으려는 의도에서 비롯되었다. 물론 하청노동자들의 끈질긴 투쟁이 뒷받침되지 않았다면 이마저도 불가능했을 것이다. 당장 삼성전자 정규직 노동자들이 계급적 행동에 나서리라고 기대할 수는 없다. 단지 노동조합 역사가 짧아서가 아니라 현장이 조합주의, 실리주의에 매몰되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청·비정규직의 상황은 다르다. 그들은 초과착취 속에서 열악한 노동조건에 맞서 하나 둘 저항의 길을 찾고 있다. “명일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은 삼성전자 화성·기흥·온양 사업장에서 반도체 운송 업무를 위해 하루 12시간 교대근무와 3만 보를 초과하는 ‘과도한 걷는 노동’을 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각종 근골격계 질환이 속출하고 있으나, 1년 단위로 도급계약이 갱신되는 상황에 고용상 불이익을 우려해 산재 신청을 하지 못하고 있다. 2024년 말 명일은 126명의 노동자를 일방적으로 해고했다. 단체협약에 따라 감원 시 사전 통보 및 협의를 거쳐야 하지만, 이를 무시했다” (서비스일반노조 명일지회 기자회견, 2025년 8월 6일) 사진: 참여와 혁신 수년째 부당해고 및 노조탄압에 맞서고 있는 서비스연맹 명일지회, 작년 통상임금 투쟁을 벌였던 금속노조 이엔에스지회는 하청노동자들의 열악한 현실을 드러냈을 뿐만 아니라, 투쟁의 잠재력도 보여 줬다. 하청·비정규직 주체들의 능동적 개입은 반도체산업에서 원·하청 연대의 길을 실질적으로 만들어내는 가장 주요한 통로가 될 수 있다. 초호황 국면에서도 지독한 차별과 소외에 짓눌리는 하청·비정규직의 분노는 지금도 산처럼 쌓이고 있다. 따라서 이 지점에 운동 역량을 집중할 필요가 있다. 높은 성과급 비중의 위험성 삼성전자, SK하이닉스, 현대차, 기아차 등에서 ‘영업이익의 몇 %’를 성과급으로 지급할 것인가를 둘러싼 논쟁이 격렬해지고 있다. 그런데 노동조합운동이 기본급 대폭 인상에 중심을 두고 성과급 비중은 보조적으로 놓지 않는다면, 나아가 성과급제 철폐를 위해 싸우지지 않는다면 성과급 요구는 오히려 노동자들을 분열시키는 도구가 될 수 있다. 성과급에 모든 힘을 쏟아붓는 투쟁은 자본의 이윤 논리에 노동자들을 종속시키는 부메랑이 되어 돌아올 가능성이 아주 크다. 왜냐하면 성과급제 자체가 노동자를 통제하는 관리자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두 번째로 성과급제는 노동자를 경쟁시키고 분열시키는 데 적합한 제도다. 세 번째로 성과급제는 노사협조주의를 확산하는 수단이다. 이윤이 많이 남을 때는 특별성과급을 지급하고, 이윤이 적어지면 성과급을 지급하지 않는 논리는 결국 회사가 어려우면 임금삭감을 감내해야 한다, 회사가 어려우면 누군가는 해고되어야 한다는 말과 같다. 이에 따라 노동자는 등골이 휘게 일하며 회사가 번창하기를 바라게 된다. 이런 식으로 성과급제는 노동자의 투쟁의식을 마비시켜 노동자들을 노사협조주의의 포로로 묶어두는 장치로 둔갑한다. 지금 성과급 투쟁에서도 삼성전자 반도체를 담당하는 부문(DS)과 모바일, TV 등 가전을 담당하는 부문(DX) 노동자들 사이의 갈등이 깊어지고 있다. 반도체 부문 노동자만 챙긴다는 비판을 제기하며 많은 조합원이 노조를 탈퇴하고 있다. 반도체 부문에서도 메모리 사업부와 파운드리(위탁생산), 시스템 설계(LSI) 사업부의 차이도 있다. 메모리 부문은 엄청난 흑자를 기록하고 있지만 TV와 생활가전 사업은 적자가 예상되는데, 이에 따라 자본은 ‘성과 없는 곳에 보상 없다’는 논리를 들이대며 노동자들을 갈라치고 있다. 자본은 DS의 초과 성과 영업이익을 DX에 분배하려 하지 않는다. ‘다른 사업부가 반도체에 무슨 기여를 했길래 내가 받아야 할 성과급을 가져가느냐’고 반발하는 노동자들도 있다. 삼성은 DS부문에서도 메모리, 반도체연구소, TSP사업부 공통조직, 파운드리와 LSI, CSS(LED·전력반도체 등 개발) 등 부문별로 성과급을 차별하겠다고 한다. 입만 열면 반도체가 모든 기술과 모든 노동의 총합이라고 말하면서도 말이다. 이런 갈라치기에 노동조합이 정면으로 반박하며 힘으로 맞서지 못하고, 이에 따라 정규직 내에서도 성과급을 받지 못하는 노동자가 생기니, 하청·비정규직 노동조건 개선은 얘기도 꺼내기 힘든 분위기다. 적자의 책임은 노동자들에게 있지 않은데도 말이다. 하청·비정규직에 대한 초과착취가 아주 오랫동안 변하지 않고 있는데도 말이다. ‘성과를 내면 보상받을 수 있고, 성과를 내지 못하면 희생을 감수해야 한다’라는 논리를 받아들이면, 희망퇴직, 정리해고 등 노동자 죽이기 구조조정 앞에서도 무력할 수밖에 없다. 노동자의 생존이 기업의 이윤에 달려 있다는 자본가들의 논리에 맞설 수 없기 때문이다. 노동자의 생존을 기업의 이윤과 상관없이 보장하라는 요구로 나아가지 못한 채, 임금 삭감 없는 노동시간 단축, 정리해고 폐지, 비정규직 철폐, 모든 노동자 민중의 생존권 보장 투쟁으로 나아가지 못한 채 구조조정을 수용하며 노동자 일부를 희생양으로 만드는 비극을 맞이하게 된다. 하지만 적자와 부실의 책임은 노동자들에게 있지 않다. 전 사회적, 전 세계적 계획화와 민주적 협동를 가로막고 이윤을 위해 무정부적 생산을 지속하는 자본주의 체제 자체에 있다. 따라서 자본주의 질서를 근본적으로 문제 삼으며 자본주의 이윤 논리에 도전하는 투쟁을 향해 대담하게 나아가야 한다. 그런데 성과급제 논리에 노동자도 박자를 맞추면, 이런 투쟁은 엄두조차 낼 수 없다. 노동자들은 영원히 자본가들의 노예로 살아갈 수밖에 없다. 따라서 임금인상 투쟁은 투쟁에 족쇄를 채우는 성과급제 논리를 되짚어봐야 하며, 기본급 대폭 인상 기조를 세우고 그에 따른 장기적 투쟁계획을 마련해야 한다. 이 방향은 삼성전자 노동자들의 운명과도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반도체산업의 초호황은 영원히 지속될 수 없다. 빅테크 기업들이 AI 인프라에 천문학적인 비용을 쏟아붓고 있지만, 이를 통한 직접적인 매출이나 수익 창출은 아직 불투명하다. AI 기반 서비스의 수익화가 지연될 경우, 빅테크 기업들이 AI 데이터센터 투자를 축소할 수 있으며, 이는 반도체 수요 급감으로 이어질 수 있다. 또한 고대역폭 메모리(HBM) 과잉생산 가능성도 꾸준히 제기되고 있다. 곳곳에서 터져 나오는 전쟁은 핵심 원자재 공급 차질과 물류 및 생산 불안정성을 키우고 있다. 무정부적 과잉생산과 전 세계 경제위기로 반도체산업 초호황이 끝나거나, 대규모 적자가 발생하면 자본가들은 임금 삭감, 구조조정 공격에 나설 수밖에 없다. 성과급제 논리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면, 노동자들은 자본가들이 만든 과잉생산의 후폭풍을 뒤집어쓰게 된다. 노동자 스스로 고용·임금·노동조건을 희생해야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논리와 제대로 맞설 수 없다. 근본 대안을 향해 정의당 등 일각은 노사정 대타협을 통한 초과이윤 환수를 제기한다. 그러나 재벌대기업의 초과이윤에 대한 환수는 어디까지나 계급투쟁의 결과일뿐, '사회적 대타협'으로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박근혜 국정농단의 본질은 이재용 3세 승계 작업을 위해 삼성이 국가권력을 매수해 국민연금을 동원한 사건이었다. 이 엄청난 범죄를 저지르고도 이재용은 건재하다. 이렇듯 삼성은 총수 일가의 세습경영을 위해 온갖 불법과 탈세를 저지르면서도, 백혈병에 걸린 노동자들에 대한 제대로 된 보상은 거부했다. 지금도 영업비밀이라는 이유로 노동자들의 건강을 망가뜨리는 유해물질 정보를 공개하지 않는다. 국회는 온갖 규제 완화와 재벌 특혜를 선사하며 공적재정을 자본의 이윤으로 바꾸는 반도체특별법을 통과시켰다. 노동자 민중은 특정 기업에 물, 전기 같은 공적 자원을 마음대로 처분할 수 있는 권한을 양도하지 않았는데도, 정부는 삼성과 SK하이닉스가 이 자원을 마음대로 쓰도록 허용했다. 이윤에 혈안인 자본주의체제는, 심화하는 기후위기는 안중에도 없다. 이렇듯 이윤 논리에 따라 움직이는 자본과 그들의 정부는 결코 생산력 발전의 성과, 수십만 노동자의 공동노동으로 만들어지는 성과를 사회 전체를 위해 활용하기는커녕 이를 억압한다. 따라서 그 성과를 사회 전체의 이익을 위해 활용하기 위해서는 그들과 단절해야 한다. 이윤 논리와 단절해야 한다. 특정 산업에서 창출되는 막대한 이윤은, 해당 산업 자본가의 경영능력이 특출나서가 아니다. 이재용의 경영능력이 뛰어나 삼성전자가 호황을 누리는 것이 아닌 것처럼 말이다. 또한 해당 산업의 노동자들만 열심히 일한 결과도 아니다. 적자기업, 혹은 파산기업 노동자들이 게으르게 일해 적자나 파산 상태에 처한 것이 아닌 것처럼 말이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생산을 통해 만들어지는 부, 나아가 사회에 막대한 영향을 미치는 기간산업 자체를 전체 노동자 민중이 공유해야 한다. 그 일차적 경로가 산업 국유화와 산업에 대한 노동자 민중의 통제다. 산업을 국유화하고, 해당 산업 노동자 전체가 구성하는 ‘노동자 통제위원회’, 노동자 민중의 자주적 기구들이 만드는 ‘사회적 통제위원회’를 떠올려 볼 수 있다. 물론 누군가는 물을 것이다. ‘아무리 삼성과 하이닉스라도 이윤을 비정규직 노동자 정규직 전환과 중대재해 예방에 사용한다면, 국제 경쟁력이 약화되지 않겠는가?’, ‘TSMC 노동자보다 덜 일한다면 한국 반도체산업이 망하지 않겠는가?’ 바로 그래서 노동자의 국제연대가 중요하다. 국적으로, 산업으로, 사업장으로, 고용형태로, 심지어 사업부서로 노동자들이 쪼개질수록, 자본가들은 웃는다. 전 세계 노동자들의 협력으로 반도체산업을 노동자 민중에게 이롭고 안전한 사업으로 재편하기 위한 국제연대에 나서야 한다. 생산의 사회화는 사업장, 업종, 지역과 국경을 뛰어넘어 급격히 확대되고 있다. 이에 따라 생산과 소비를 균형 있게 조절하고, 각종 생산부문을 세계적 차원의 계획으로 통합하는 새로운 사회질서가 절실히 필요하다. 사회적 생산력의 발전은 공동체주의에 입각한 새로운 사회질서를 절실히 갈구한다. 결국, 자본주의를 변혁할 노동자 ‘계급’의 힘이 이 문제를 풀 수 있다. 이 거대한 힘을 조직하는 것은 가장 느린 길처럼 보일 수 있지만, 가장 확실한 길이며, 유일한 길이다. 엄청난 탄압과 고립 속에서도, 노동자계급 전체의 해방이라는 기준으로 투쟁하는 노동자들은 늘 탄생했다. 노동자들은 자신의 강점만이 아니라 약점도 살필 줄 안다. 그래서 더 단단해지고, 깊어진다. 삼성전자 노동자들의 성과급 투쟁은 많은 악선동에 시달리고 있다. 그러나 문제는 악선동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투쟁 자체의 약점에도 있다. 약점을 돌아보고, 극복하자. 그렇게 전체 노동자계급과 함께 한발 더 나아가자. -
[발언] 노동절, 우리는 끓어오르는 분노를 안고 이 자리에 섰습니다정권은 바뀌었지만 노동자의 삶은 바뀌지 않았다. 화물연대 서광석 열사가 목숨을 잃었다. 고진수 동지가 구속당했다. A학교 투쟁, 세종호텔 투쟁, 울산 워릭·덕스 어학원 원어민 강사 노동자들의 투쟁, 그리고 현대차 자본과 경찰 폭력에 맞서 이수기업 해고노동자들이 싸우고 있다. 자본이 요구하면 공권력이 집행하고, 노동자가 희생당하는 현실을 끝장내기 위해 노동자들은 함께 싸워야 한다. 지난 노동절, 현대차 비정규직지회 이수기업 해고자 정성훈 동지의 사전 발언을 소개한다. 우리는 오늘, 희망이 아닌 참담한 배신감과 끓어오르는 분노를 안고 이 자리에 섰습니다. 또 한 명의 동지가 우리 곁을 떠났습니다. BGF자본과 이를 비호하는 공권력의 추악한 결탁이 화물노동자의 소중한 목숨을 앗아갔습니다. 자본의 탐욕이 노동자를 사지로 내몰 때, 국가는 어디에 있었습니까? 정권이 바뀌면 노동자의 삶도 바뀔 것이라 믿었던 우리의 기대는 이제 처절한 절망과 분노로 돌아왔습니다. 민주당과 이재명 정부는 출범 당시 노동자의 눈물을 닦아주겠다며 온갖 달콤한 약속을 쏟아냈습니다. 하지만 지금 무엇이 변했습니까? 간판만 바뀌었을 뿐, 자본과 결탁한 공권력의 칼날은 조금도 무뎌지지 않았습니다. 지금도 노동자의 삶은 여전히 벼랑 끝 낭떠러지입니다. 서울에서 성폭력 피해학생을 보호하려다 억울하게 해임되시고 부당전보 승소판결을 받고도 교육감과 경찰에 의해 무자비하게 진압당하고 연행되신 지혜복 선생님과 연대시민들, 세종호텔 자본과 사법부에 낙인찍혀 아무 죄도 없이 구속까지 당한 고진수 지부장 동지도 있습니다. 울산에선 비자제도의 허점을 이용해 연차 사용을 못하게 막고 수당도 떼어먹고, 이에 저항하여 노조를 결성하자 보복해고시킨 워릭·덕스 어학원 원어민 강사 동지들, 전혀 법의 보호를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 이수기업 해고노동자들도 똑똑히 기억합니다. 현대차 자본의 구사대와 울산 북부서 경찰의 폭력 앞에 무자비하게 짓밟히고 폭행당했던 야만적인 순간들을 우리는 절대 잊지 않습니다. 전 국민이 지켜보는 국정감사장에서 김영훈 노동부 장관은 책임지고 현대차 구사대 폭력사건을 조사하고 국회에 보고하겠다고 호언장담했습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어떻습니까? 자본의 폭력 앞엔 무기력하고, 노동자의 절규 앞엔 오만한 '말뿐인 행정'입니다. 우리를 폭력으로 짓밟았던 구사대와 경찰들 그 누구도 책임지지 않았고, 처벌받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이재명 정부가 말하는 정의입니까? 권력의 자리에 앉아 '노동 존중'을 입에 담으면서도, 정작 자본의 폭거 앞에서는 눈을 감는 비겁한 행태를 이제는 끝장내야 합니다! 우리가 목격하고 있는 현실은 여전히 자본이 명령하고 공권력이 집행하며 노동자가 희생당하는 야만의 연속일 뿐입니다. 정치권이 자본의 눈치를 보며 노동자의 삶을 정치적 소모품으로 이용하는 한, 이 땅의 민주주의는 한 발짝도 나아갈 수 없습니다. 우리는 구걸하지 않습니다. 빼앗긴 권리를, 기만당한 우리의 삶을 투쟁의 이름으로 다시 쟁취할 것입니다. 더 이상 억울하게 죽는 노동자가 없어야 합니다. 더 이상 우리의 권리를 빼앗길 수 없습니다. 단결된 노동자의 힘만이 이 추악한 결탁의 고리를 끊어낼 수 있습니다. 우리가 뭉치면 세상이 멈추고, 우리가 싸우면 세상이 바뀝니다. 승리할 때까지 끝까지 함께 싸웁시다! -
[한노운사 연재 16회] 3부 패배와 퇴보 (1998-2008) [5] 노동자 정치세력화 열망과 민주노동당자본가들의 신자유주의 대공세와 그에 맞선 노동자들의 격렬한 투쟁은 한국 사회 전반에 계급투쟁의 격랑을 몰고 왔다. 노동자들의 투쟁은 성공적인 결과를 얻지는 못했지만, 광범한 계급적 자각을 낳았다. 노동조합에 대해 말하는 것조차 불온하게 간주되던 사회에서 광범한 노동자들이 ‘노동자 정치세력화’라는 구호에 호응하기 시작했다. 노동자 정치세력화의 열망은 민주노동당을 탄생, 성장시켰다. 그러나 노동자들의 투쟁을 패배로 귀결시키고, 민주노조운동을 후퇴와 위기로 내몰았던 똑같은 요인이 노동자 정치세력화에도 작용했다. 노동자 정치세력화의 열망은 제대로 뻗어나가지 못했다. 이전 편 보기 3부 패배와 퇴보 (1998-2008) [시대배경] 신자유주의 구조조정 [1] 구조조정과 정리해고에 맞선 투쟁 [2] 민주노조운동의 후퇴와 비정규직 확산 [3] 비정규직 문제를 둘러싼 대결 [4] 민주노조운동의 위기 [5] 노동자 정치세력화 열망과 민주노동당 1) 민주노동당 창당에 담긴 이중적 성격 2000년 1월 30일 민주노동당이 창당됐다. 민주노동당의 등장은 한국전쟁 이래 극히 우경화된 한국 정치의 지형 속에서 그 자체로 상당한 의미를 갖는 사건이었다. 창당 무렵에 이미 1만 명 이상의 당원을 확보한 민주노동당은 한국전쟁 이래 처음으로 ‘진보적 이념을 표방하면서도 노동자들 속에 상당한 기반을 확보한 정당’으로 등장했다.[1] 민주노동당 이전에도 한국 정치에 진보정당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1950년대에는 진보적 민족주의를 표방하며 일정한 대중적 지지를 확보했던 진보당이 있었다. 그러나 진보당은 노동자들 속에서 뚜렷한 기반을 갖지는 못했으며, 이른바 진보당 사건을 통해 당수 조봉암이 1959년에 간첩죄로 사형당하면서 붕괴했다.[2] 1990년 11월에 출범한 민중당은 진보적 이념을 내걸긴 했지만 민주노조운동으로 결집한 노동자들 속에서조차 지지 기반을 확장하지 못했으며, 1992년 3월 총선에서 저조한 득표로 법적 해산을 당하면서 해체됐다. 민중당의 좌절은 한편으로 당시 전체 민중운동의 다수파인 민족해방파가 ‘민중의 독자적 정치세력화’를 거부하고 김대중에 대한 비판적 지지로 일관함으로써 야기된 것이기도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스스로 표방한 개량주의 노선 때문이기도 했다. 민중당은 저급한 출세주의에 빠진 당권파를 중심으로 소련 붕괴 이전부터 공공연히 개량주의 노선을 표방하였는데, 오히려 이 때문에 변혁적 지향으로 꿈틀대던 전노협으로부터 심한 반발과 견제에 직면할 수밖에 없었으며, 그로 인해 민주노조로 결집한 노동자들 속에서조차 뚜렷한 지지 기반을 확보할 수 없었다. 1950년대 진보당과 1990년대 초반 민중당으로 대표되는 진보정당 좌절의 역사와 달리, 민주노동당은 그 출발부터 비교적 순탄한 길을 걸어 나갈 수 있었다. 여기에는 민주노동당 창당이 민주노총의 조직적 결정에 의해 추진됐다는 사실이 결정적 역할을 했다. 1997년 7월 민주노총은 대의원대회를 통해 12월 대통령 선거에 후보를 내세우고 향후 진보정당 창당에 나서기로 결의했다. 1. 민주노총은 제 민주세력과 함께 1997년 대선에 국민후보를 추대, 이를 위한 선거대책기구를 구성하고 인적·물적 역량을 동원키로 결의한다. 2. 민주노총은 대중적 합의를 바탕으로 노동자가 적극 참여하고 각계각층의 민주적이고 양심적인 세력과 함께 하는, 우리 사회의 민주적 개혁을 실현하고 노동자의 이익과 요구를 철저히 대변하는 새로운 정당 건설의 토대를 구축한다.[3] 1997년 8월 민주노총은 전국연합·진보정치연합 등과 함께 ‘민주와 진보를 위한 국민승리21’(국민승리21)을 결성하고, 9월에는 권영길 민주노총 위원장을 대통령 후보로 추대하면서 본격적인 선거운동에 돌입했다. 민주노총의 조직력을 총동원했지만, 권영길 후보는 민주노총 조합원 수보다도 적은 30만 표(1.2%)를 얻는데 그쳤다. 그런데 득표의 많고 적음을 떠나 정말 심각했던 것은 선거운동의 내용이었다. 권영길 후보의 선거운동 전반을 지배했던 것은 몰계급적 애국주의였다. 국민승리21이 내세운 국민후보 권영길의 핵심 슬로건은 ‘일어나라 코리아!’였다. 노동자는 간 데 없고 그 자리를 온통 ‘국민’과 ‘국가’가 채운 것이다. 민주노총 1기 지도부가 표방하고 있던 ‘국민과 함께 하는 노동운동’ 노선의 정치적 표현이었던 이 몰계급적 애국주의는, 마침 IMF 외환위기 앞에서 자본가들이 ‘국가의 생존’을 명분으로 노동자 생존권에 대한 대규모 공격을 퍼부으려던 상황에서 노동자계급의 사상적 무장해제를 스스로 선언하는 것이나 다름없는 매우 심각한 노선이었다. 대통령 선거가 막바지로 치달음과 동시에 IMF 외환위기가 가시화하던 1997년 12월초에 민주노총이 먼저 ‘경제위기 극복을 위한 사회적 합의기구’ 구성을 제안하고 나선 것도, 김대중의 대통령 당선 직후 구성된 노사정위원회를 통해 1998년 2월초 민주노총 지도부가 정리해고 도입에 합의했던 것도 바로 이 몰계급적 애국주의의 연장선에 있었다. 몰계급적 애국주의가 지배하는 선거운동에 당연히 현장으로부터 많은 반발이 올라왔다. 특히 ‘일어나라 코리아!’라는 슬로건의 등장은 현장의 반발에 불을 붙였다. 일부 지역에서는 노동자들이 선거운동 거부를 선언하고 길거리에 나붙은 ‘일어나라 코리아!’ 현수막을 제거하러 다니기도 했다. 대통령 선거가 끝나고 1998년 5월에 민주노총은 대의원대회를 통해 “국민승리21을 확대 재편하여 노동자 중심의 진보정당 건설을 위해 적극 지원·연대한다”고 진보정당 건설 추진을 다시 한 번 결의했다. 그러나 대통령 선거에서의 몰계급적 애국주의에 대한 현장의 반발에 덧붙여 민주노총 1기 지도부가 정리해고 도입을 합의했다가 불신임당한 것 때문에, 국민승리21을 중심으로 추진되던 진보정당 건설 흐름은 상당한 위기에 빠져 있었다. 그런데 1998년 6월 지방선거에서 울산을 중심으로 민주노총 지지 후보들이 상당한 성과를 거두면서 상황이 다시 반전됐다. 1만 명의 정리해고를 강행하겠다는 자본에 맞서 치열한 투쟁을 벌이고 있던 현대차 노동자들을 중심으로 울산 지역의 민주노총 조합원들이 6월 지방선거에서 민주노총 지지 후보들에게 대거 표를 몰아줌으로써 2명의 구청장과 8명의 시·구의원을 당선시킨 것이었다. 노동자들의 조직적인 지원을 받은 후보들이 공직 선거에서 대거 당선된 것은 한국전쟁 이래 최초의 사건이었다. ‘노동자 중심의 진보정당이 한국 정치의 척박한 구조 속에서도 현실적으로 성공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최초로 보여준 것이었다. 여기에 ‘정리해고 반대’를 선거운동 전면에 내걸었고 또 그래서 승리했다는 점은 대통령 선거에서의 몰계급적 애국주의가 야기한 현장의 반발을 어느 정도 누그러뜨리는 결과를 가져왔다. 하지만 국민승리21을 모태로 한 진보정당 건설은 여전히 창당 동력을 충분히 결집시키지 못한 채 주춤거리고 있었다. 이에 다시 민주노총이 1999년 4월 중앙위원회를 통해 ‘진보정당 창당 추진위원회’를 결성하기로 결의하고, 4월 18일과 6월 13일 두 차례 민주노총·전국빈민연합·국민승리21 등을 중심으로 진보정당 창당 추진대회가 개최됨으로써, 비로소 국민승리21을 넘어선 창당 주체가 형성될 수 있었다. 이제 순풍을 타게 된 진보정당 건설 흐름은 이후 8월 29일 ‘(가칭)민주노동당 창당준비위원회’ 결성을 거쳐, 2000년 1월 30일 민주노동당 창당에 이르게 됐다. 그런데 민주노동당 창당에는 개량주의 세력이 창당을 주도했다는 하나의 측면과 1996~97년 총파업과 IMF 외환위기를 거치면서 광범한 노동자들의 정치의식이 성장했다는 또 하나의 측면이 모순적으로 결합돼 있었다. ◎ 개량주의 세력이 주도한 민주노동당 창당 1997년부터 2000년까지 민주노동당 창당 과정을 주도한 것은 명확히 개량주의 세력이었다. 1997년 결성된 국민승리21을 통해 결집한 이들은 다양한 인적 구성을 갖고 있었지만, 그 대표적인 세력은 민주노총의 1기 국민파 지도부와 진보정당추진위원회(진정추) 세력이었다.[4] 권영길 위원장으로 대표되는 민주노총의 1기 국민파 지도부는 1996~97년의 역사적인 총파업에서 심각한 과오를 범했다. 그들은 총파업 투쟁의 실질적인 준비와 공세적인 돌입을 회피했을 뿐만 아니라, 총파업 과정에서도 끊임없이 투쟁의 열기를 가라앉히고 결정적인 순간에 총파업을 중단시켜 버림으로써 역사적인 총파업이 소기의 성과를 얻지 못하고 허망하게 소멸되도록 만든 장본인이었다. 그런데 그들은 총파업이 소기의 성과를 얻지 못한 이유가 “단 한 석의 국회의원도 없었기 때문”이라고 강변했다. 수백 명의 국회의원을 다 합친 것보다도 훨씬 더 강력했던 총파업의 힘을 스스로 무너뜨려 놓고서, 그들은 겨우 “단 한 석의 국회의원”을 거론하며 궤변을 늘어놓았다. 그러나 총파업 이후 권영길 위원장은 국민적 인기를 누리는 유명 스타가 되었다. 비록 소기의 성과를 얻지는 못했지만 총파업이 보여준 위력은 언론과 여론의 시선을 한동안 민주노총에 집중시켰다. 게다가 늘 국민 여론을 고려하며 투쟁의 수위를 낮추고 심지어 결정적인 순간에 총파업을 중단하는 권영길 위원장의 ‘유연한’ 지도력은 부르주아 언론의 구미에 딱 들어맞았다. 부르주아 언론은 연일 그를 최고의 노동운동 지도자라고 칭송했고, 그렇게 해서 그는 대단한 국민적 스타가 되었다. 권영길로 대표되는 민주노총 1기 국민파 지도부는 노동자투쟁을 이끌 지도력은 없었지만 정치적 감각과 판단력만큼은 수준급이었다. 그들은 총파업을 거치며 급격히 높아진 노동자들의 정치의식과 부르주아 언론의 환대를 잘 활용하여 대선 참여와 진보정당 건설이라는 새로운 목표를 제시함으로써, 총파업 실패로 인한 대중의 허탈감을 노동자 정치세력화에 대한 기대감으로 전환시키는 데 성공했다. 여기에 이러한 사태 전개를 하늘이 준 기회로 여기며 진정추 세력이 온 몸을 던져 뛰어들었다. 진정추 세력의 핵심 인물들은 1996년 4월 총선을 앞두고 노무현이 주도하는 꼬마 민주당에까지 합류해 들어갔다가 총선 이후 파탄지경에 빠져 있었다. 1991년 한국 사회주의 운동의 최대 조직이었던 한사노창준위를 건설했다가 소련 붕괴 직후 사회민주주의 노선으로 전환했던 이들은 1992년의 진정추와 1995년의 진보정치연합(진정련)을 거치면서 점점 더 우경화돼 1996년 총선에서는 사회민주주의 노선조차 견지하지 못하고 자유주의 부르주아 정치세력의 품안에 뛰어든 것이었다. 우경화를 거듭하며 노동자계급을 머릿속에서 지워버렸던 이들은, 그러나 총파업을 통해 노동자계급의 위대한 힘을 목도하게 되자, 언제 그랬냐는 듯이 다시 노동자 정치세력화를 외치는 사회민주주의자로 돌아왔다. 그런데 1987년과 1992년 대통령 선거에서의 민중후보 운동부터 시작해서 민중당·한국노동당·진정추·진정련·개혁신당·민주당을 거치며 풍부한 실전 경험을 확보한 그들의 뛰어난 정치기술은, 대선 참여와 진보정당 건설을 선언한 민주노총 1기 국민파 지도부에게도 더없이 필요한 것이었다. 그렇게 해서 그 두 세력 간에 강고한 정치적 연합이 이루어졌다. 이들을 중심으로 개량주의 세력 전반이 민주노동당 창당에 적극 참여하며 주도적 역할을 했다. 1990년대 중반을 지나며 형성된 그들의 개량주의적 환상은 IMF 외환위기 아래 파상적으로 전개되는 신자유주의 공세 앞에서도 오히려 더욱 고착되는 경향을 보이고 있었다. 개량주의자들은 여전히 정권과 자본에 맞선 치열하고 공세적인 노동자투쟁이 아니라 제도적 타협에 의한 점진적 개량을 간절히 소망했고, 그들에게 ‘노동자 정치세력화’는 그런 제도적 타협의 길로 들어서기 위한 주요한 수단이었다.[5] 국민승리21, 국민후보, ‘일어나라 코리아’ 등으로 대표되는, 1997년 대통령 선거에서의 몰계급적 애국주의는 민주노동당 창당을 주도한 개량주의 세력이 가진 사상과 노선의 실체를 유감없이 드러낸 것이었다. 그것은 정확히 따져 보자면 사회민주주의에도 못 미치는 수준이었다. 그들이 너무나 사랑했던 ‘국민’이라는 용어는 원래 ‘황국신민(皇國臣民)’의 줄임말로 일제강점기 일본 제국주의자들이 조선 민족을 포섭하여 대동아 전쟁으로 내몰기 위해 사용한 용어였다. 이처럼 국민이라는 용어에 담긴 친일성과 군국주의에 대한 문제제기가 진보적 민족주의자들을 중심으로 꾸준히 지속됐고, 그래서 1995년 8월 김영삼 정권이 광복 50주년을 기념하여 일제 잔재를 청산한다며 1941년부터 사용돼 온 ‘국민학교’라는 초등교육기관의 명칭을 ‘초등학교’로 바꾼 바 있었다. 그런 점에서 1995년 11월 출범한 민주노총의 1기 지도부가 표방한 ‘국민과 함께 하는 노동운동’이나 1997년 대통령 선거에서의 ‘국민승리’ ‘국민후보’ 등의 용어는 몰계급적일 뿐만 아니라 진보적 민족주의보다도 못한 지극히 후진적이고 보수적인 것이었다. 그러므로 이들 개량주의 세력의 창당 열망과 주도력만으로는 민주노동당은 결코 창당에 이르지 못했거나 창당했더라도 민주노총의 조직적 지원에 힘입은 대중적 기반을 확보하지 못했을 것이다. 실제로 이들 개량주의 세력의 개량주의적·사회민주주의적·애국주의적 환상은 IMF 외환위기라는 객관적 조건과도 너무나 어울리지 않았기에, 만일 그러한 노선만으로 일관되게 나아갔다면 얼마 못가서 노동자들 속에서 차갑게 외면당하고 말았을 것이다. ◎ 광범한 노동자들의 정치의식 성장 민주노동당이 노동자들 속에서 상당한 대중적 기반을 확보하며 창당될 수 있었던 것은 1996~97년 총파업과 IMF 외환위기를 거치면서 광범한 노동자들의 정치의식이 성장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이 정치의식은 주로 노동자계급의 정체성과 잠재력에 대한 자각에 근거한 것이었으며, 근본적인 사회변혁에 대한 지향은 불투명한 것이었다. 그런 점에서 1990년대 후반에 광범한 노동자들 속에 확산된 이 정치의식은 1990년대 초반에 전노협을 중심으로 한 민주노조 조합원들이 갖고 있었던 정치의식, 즉 ‘천만 노동자 총단결로 노동해방 앞당기자’는 구호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정도로 변혁적 지향성이 강했던 그 정치의식보다는 수준이 낮은 것이었다. 하지만 1990년대 초반의 ‘변혁적’ 정치의식이 전노협을 중심으로 한 민주노조 조합원들 위주로 형성되었던 것과 달리, 1990년대 후반의 ‘계급적’ 정치의식은 광범한 노동자들 속에 형성된 것이었다. 광범한 노동자들 속에서 계급적 정치의식이 확산되게 만든 결정적인 계기는 1996~97년 총파업이었다. 김영삼 정권의 날치기 노동법 개악에 맞선 1996~97년 총파업은 비록 승리하지 못했지만 광범한 노동자들 속에서 노동자계급의 잠재력을 자각하게 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1987년 노동자대투쟁 때에도 노동자계급의 잠재력에 대한 대중적 각성의 기회가 있었지만, 전반적인 대중의식이 너무 초보적이었던 탓에 전노협을 중심으로 한 민주노조 조합원들을 제외하고는 그 경험이 거의 유실돼 버렸다. 그러나 1987년 노동자대투쟁 이후 10여 년에 걸친 민주노조운동의 역사를 거치면서 전반적인 대중의식이 일정하게 성장해 온데다가 한 달 가까이 조직적인 총파업이 갖는 위력을 경험함으로써 민주노조운동에 포괄되지 않은 노동자들 속에서조차 노동자계급의 잠재력에 대한 광범한 자각이 일어나게 된 것이었다. 여기에 김대중이 이끄는 보수야당이 노동법 재개정 협상에서 애초의 날치기 노동법과 별로 다르지 않은 결과를 만들어 낸 것은 보수야당의 계급적 실체에 대한 광범한 각성을 불러왔다. 또한 이후 IMF 외환위기와 자본가들의 신자유주의 공세를 맞닥뜨린 것은 정권과 자본의 공세에 저항하기 위해 노동자계급의 단결력을 극대화해야 한다는 계급적 방어본능을 광범한 노동자들 속에 불러 일으켰다. 그런데 계급적 자각은 있으나 변혁적 지향은 갖추지 못한 이 정치의식, 과학적 신념보다는 계급적 본능이 주도하는 이 정치의식은 양면적 가능성을 갖고 있었다. 한편으로 변혁적 지향을 분명히 하지 못하고 개량주의적 환상에 이끌려 다닐 위험성을 갖고 있다면, 다른 한편으로 실천적 검증을 통해 노동자계급에게 도움이 되는 길과 해악이 되는 길을 뚜렷하게 구분해 낼 수 있는 계급적 직관력을 발휘할 가능성 또한 갖고 있었다. 따라서 이 양면적인 계급적 정치의식은 광범한 노동자들이 선거에서 집단투표에 나서는 것을 기본으로 하되, 어떤 정치적 방향으로 이끌리는가에 따라 집단투표가 최대의 실천이 되게 할 수도 있고 대중적 정치투쟁으로 나아가는 출발점이 되게 할 수도 있는 양면적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었다. 어쨌든 광범한 노동자들 속에 확산된 이 계급적 정치의식은 자연스럽게 노동자를 대표하는 정당의 출현을 요구하고 기대하는 열망으로 모아졌다. 광범한 노동자들에게 ‘노동자 정치세력화’라는 용어는 바로 그 열망을 표현하는 수단이었다. 그 열망은 1997년 대통령 선거에서 민족해방파로 하여금 더 이상 김대중에 대한 비판적 지지를 노골적으로는 지속할 수 없도록 만들었다. 그리고 그 열망을 가장 먼저 위력적으로 표출시킨 것은 1998년 6월 지방선거에서 민주노총이 내세운 후보들에게 그 면면과 실체를 따지지 않고 압도적인 지지를 보낸 울산지역 노동자들이었다. 1998년 무렵의 선거에서 노동자 대중이 폭발적인 열기로 진보 정치세력을 지지했던 것은 무엇보다 민주노조운동에 대한 신뢰, 그리고 민주노조운동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고 인식한 진보 정치세력에 대한 신뢰 때문이었다. IMF 경제공황이 몰고 온 생존권 위협에 대한 절박한 위기의식도 상당한 작용을 했지만, “정리해고 저지”로 요약되는 민주노조운동과 진보 정치세력의 약속을 굳게 믿었기 때문에, 절박한 위기의식이 진보정치에 대한 폭발적 지지로 연결되는 것도 가능했던 것이다. 당시의 선거들에서 수많은 노동자대중은 나름대로 확신과 자신감을 갖고 누가 특별히 시키지 않아도 스스로 가족과 주변의 이웃·친지들을 설득하고 조직하러 다녔다. 현장의 분위기는 진보 정치세력에 대한 압도적 지지로 자연스럽게 결집되었고, 온갖 수로를 통해 작동하는 밑바닥 노동자들의 설득구조는 지역의 분위기 또한 확연히 휘어잡았다.[6] 이처럼 민주노동당은 개량주의 세력의 주도성과 노동자들의 계급적 정치의식 성장이라는 양 측면이 서로 모순적으로 결합하고 작용하는 과정을 거치며 창당에 이르게 됐다. 2) 민주노동당의 약진과 추락 IMF 외환위기 이후 극심한 사회 양극화로 표현된 자본주의 모순의 심화는 짧은 시간 동안 민주노동당의 약진과 추락을 차례로 만들어 냈다. 자본주의 모순의 심화로 울부짖는 노동자·민중의 요구를 결집하고 분출시킬 정치적 주체에 대한 노동자·민중의 갈망은 민주노동당의 눈부신 약진을 불러왔다. 그러나 그에 대한 의지와 능력이 없음을 알아챈 노동자·민중의 실망은 다시 민주노동당을 빠르게 추락시켜 버렸다. ◎ 민주노동당의 약진 민주노동당의 약진은 2002년 6월 지방선거에서부터 시작됐다. 창당 직후 치러진 2000년 4·13 총선에서는 울산 북구와 창원을 선거구에서 접전을 벌이기도 했고, 2001년까지 치러진 각종 보궐선거들에서 이따금 선전하기도 했지만, 민주노동당의 약진은 좀처럼 뚜렷하게 가시화되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2002년 6·13 지방선거에서 민주노동당은 2명의 구청장을 포함한 45명의 당선자를 냈다. 특히 정당명부 비례대표 선거에서 전국적으로 134만여 표(8.1%)를 얻은 것은 약진의 본격적인 신호탄이었다. 2002년 12월 대통령 선거에 1997년에 이어 다시 출마한 민주노동당 권영길 후보는 민주당 노무현 후보와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의 막판 대접전 속에서도 96만 표(3.9%)를 얻으면서 1997년 대통령 선거 때의 30만 표(1.2%)에 비해 괄목할 만한 성장을 확인하며 약진의 흐름을 이어갔다. 민주노동당의 약진이 최고조에 오른 것은 2004년 4·11 총선 때였다. 민주노동당은 정당명부 비례대표 선거에서 277만 표(13.0%)를 얻으며 단번에 제3당으로 튀어 올랐다. 울산 북구와 창원을 2개의 선거구에서 지역구 당선자를 내고 8명을 비례대표에 당선시켜 10명의 국회의원을 배출함으로써, 민주노동당은 한국전쟁 이래 최초로 국회의원을 배출한, 그것도 한꺼번에 10명이나 배출한 노동자정당이 됐다. 총선에서의 약진은 민주노동당의 주가를 한껏 끌어올렸고, 총선 직후 몇 달 동안은 여론조사 지지율이 20%를 넘어서기까지 했다. 바야흐로 민주노동당의 전성시대가 활짝 열린 셈이었다. ◎ 민주노동당의 추락 그러나 민주노동당의 약진은 그리 오래 가지 못했다. 조승수 의원이 선거법 위반 대법원 판결로 국회의원직을 상실하면서 치러지게 된 2005년 10·26 울산 북구 재선거에서 정갑득 후보를 내세운 민주노동당은 당력을 총집중하였으나 한나라당 후보에게 패배했다. 민주노동당 입장에서 전국 최고의 아성인 울산 북구에서 당력을 총집중하고도 1천 800여 표(3.6%) 차이로 결국 패배한 것은 2004년 4·11 총선 이후 한껏 들떠 있던 민주노동당에게 큰 충격을 안겨 주었다. 10·26 재선거 패배로 충격에 빠진 민주노동당은 그에 대한 책임을 지고 대표를 포함한 최고위원회가 총사퇴해야 했다. 하지만 민주노동당의 추락은 이제 시작일 뿐이었다. 2006년 5·31 지방선거는 민주노동당이 이제 구조적인 위기에 빠져 들었음을 보여주었다. 물론 5·31 지방선거에서 민주노동당이 일방적인 후퇴만을 드러낸 것은 아니었다. 당선자 수가 2002년의 45명에서 81명으로 늘었고, 정당명부 비례대표 선거에서도 210만여 표(12.1%)를 얻으며 2004년 총선 때에 비해 약간 후퇴하는 정도를 기록했다. 그러나 수치만으로는 잘 드러나지 않는 중요한 사실이 있었다. 2006년 5월 지방선거는 한국 정치 역사상 가장 충격적인 결과를 만들어 낸 선거였다. 서울·경기·인천의 광역의원 선거구 234곳에서 한나라당이 100% 당선되는 등, 집권당인 열린우리당의 상상하기 힘든 참패와 한나라당의 압도적인 대승이 너무나 뚜렷이 대비되는 선거였다. 특히 2004년 4월 총선에서 열린우리당이 과반수를 장악했던 것을 놓고 보면 겨우 2년 사이에 한국 정치 지형에 엄청난 변화가 일어났음을 보여주는 선거였다. 5·31 지방선거 결과는 대통령 노무현을 정점으로 하는 열린우리당에 대한 노동자 민중의 심판이었다.[7] 특히 2002년 대선과 2004년 총선에서 노무현과 열린우리당에게 엄청난 기대와 지지를 보내 주었으나 신자유주의 정책으로 일관함으로써 사상 최악의 사회 양극화라는 참혹한 결과를 안긴 데 대한 준엄한 심판이었다. 그런데 심각한 사회 양극화를 초래한 열린우리당에 대한 심판은 민주노동당 같은 노동자 정당의 약진으로 나타난 것이 아니라 또 하나의 자본가정당이며 오히려 더욱 보수적인 한나라당의 압승으로 귀결됐다. 사상 최악의 사회 양극화라는, 즉 어느 때보다 노동자정당의 정치적 기반이 강력하게 확대될 수 있는 사회적 조건 아래 치러진 선거에서, 또한 계급적 문제를 주된 이슈로 하여 한국 정치 역사상 가장 역동적인 지형 변화가 일어난 선거에서, 오히려 민주노동당은 정치적 성장에 결정적인 제동이 걸리는 모순적인 상황이 펼쳐진 것이었다. 게다가 선거 결과를 세밀하게 살펴보면 그 의미는 더욱 심각했다. 그동안 민주노동당이 취약했던 여러 지역에서 2002~04년의 전반적 약진이 뒤늦게 반영된 것과 달리, 민주노동당의 가장 강력한 기반인 울산에서는 8년 동안 장악했던 북구·동구 두 곳의 구청장 선거에서 모두 패배하는 등 오히려 노동자들의 지지가 축소됐다. 즉 약진했던 과거와 추락하는 미래의 모순적인 결합이 외관상의 현상유지로 나타났던 것이다. 민주노동당의 추락은 2007년 대통령 선거에서 더욱 가속됐다. 세 번째 출마한 권영길 후보는 300만 표를 운운하던 목표치와 달리 71만 표(3.0%)를 얻는 데 그침으로써 2002년 대통령 선거의 96만 표(3.9%)보다 오히려 후퇴했다. 그런데 저조한 득표보다 훨씬 더 심각했던 것은 선거를 치르면서 노동자정치의 최소 원칙마저 저버린 점이었다. 9월 20일 권영길 후보가 중소기업협동조합중앙회를 방문해서 중앙회 임원들과 “시종일관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간담회를 진행했다. 여기서 권영길 후보는 “중소기업인 여러분께 항상 존경하는 마음을 가져 왔으며 감사의 인사를 드린다”고 했다. 또한 “민주노동당과 중소기업이 동지적 관계를 가지기를 원한다”고 했다. 민주노동당은 중소기업 자본가들의 동지이면서 동시에 중소기업 노동자들의 동지가 될 수 있다는 말인가? 10월 15일 민주노동당 문성현 대표가 한국노총에 보내는 공식 사과문을 김선동 사무총장을 통해 전달했다. 2006년 9월 11일 한국노총이 ‘노사관계 로드맵’ 노사정 야합에 참여한 것을 놓고 문성현 대표가 “한국노총은 이제 노동자의 이름을 버려야 한다”고 했던 발언을 사과한 것이었다. 민주노동당의 사과는 한국노총이 정책연대 대상후보에 민주노동당을 포함시키는 전제 조건으로 사과를 요구했기 때문이었다. 한국노총이 10월 8일자로 사과요구 공문을 보내 16일까지 회신하라고 하자 15일 직접 찾아가서 사과 공문을 전달했다. 한마디로 말해 ‘표’를 얻으려고 민주노동당은 어용 한국노총의 발밑에 납작 엎드렸다. 민주노동당의 2007년 대선 참패는 그 본질을 스스로 만천하에 까발리는 기폭제가 됐다. 대선 참패 이후 민주노동당은 시끌벅적한 책임 공방을 벌였지만, 자본주의 모순의 심화로 절규하는 노동자들의 정치적 열망을 배신한 데 대한 어떤 진지한 반성도 찾아볼 수 없었다. 노동자들의 정치적 열망을 똑같이 배신한 자주파(민족주의)와 평등파(사회민주주의) 사이에 반성 없는 추악한 패권 다툼만이 계속됐을 뿐이었다. 민주노동당이 개량주의와 의회주의의 길을 걸음으로써 노동자들의 정치적 열망을 배신했던 것은 자주파만의 책임이 아니었다. 대선 참패 이후 목소리를 높인 평등파 또한 개량주의와 의회주의를 주도했던 또 하나의 주역이었다. 대선 참패 이후 평등파가 민주노동당을 집단 탈당하여 진보신당을 창당했지만, 노골적으로 개량주의와 의회주의를 주창한다는 점에서는 다를 게 하나도 없었다. 자주파와 평등파는 자본주의 모순의 심화로 절규하는 노동자들의 정치적 열망을 정면으로 배신한다는 점에서 동전의 양면일 따름이었다. 대선 참패와 반성 없는 추악한 패권 다툼 속에서 민주노동당의 위상은 결정적으로 추락했다. 한동안 민주노동당은 노동자들의 정치적 열망을 개량주의와 의회주의라는 잘못된 길로 이끌면서도 마치 노동자 정치세력화의 유력한 희망인 듯 행세했다. 그것은 1987년 노동자대투쟁과 1996~97년 노개투 총파업을 거치며 성장해 온 노동자대중의 정치적 열망을 민주노동당이 상당 부분 흡수해 낸 까닭이었다. 그러나 그동안 민주노동당에 참여하거나 지지했던 수많은 노동자들이 2007년 대선 이후 민주노동당을 박차고 나오거나 지지를 거둬들였다. 10년 가까이 민주노동당이 노동자 정치세력화의 유력한 대안인 것처럼 행세하던 시대는 그렇게 끝났다. ◎ 민주노동당은 왜 추락했나? 사상 최악의 사회 양극화를 불러온 노무현 정권에 대한 노동자·민중의 분노가 한나라당의 압도적인 승리와 이명박의 집권으로 귀결되는 과정에서 민주노동당이 약진하기는커녕 오히려 추락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단적으로 말해서 민주노동당에 대한 노동자·민중의 실망, 즉 자본주의 모순의 심화로 울부짖는 자신들의 요구를 앞장서 결집하고 분출시킬 의지와 능력을 민주노동당이 갖고 있지 않다고 판단하게 된 노동자·민중의 실망 때문이었다. 그러한 노동자·민중의 실망은 민주노동당을 압도적으로 장악하고 있던 사회민주주의·민족주의 노선의 개량주의적이고 의회주의적인 한계로부터 필연적으로 야기된 것이었다. 개량주의 세력의 주도로 창당되고 그 주도권이 날로 강화된 민주노동당은, 자본가들의 신자유주의 공세에 정면으로 맞서는 노동자정치투쟁 전선을 앞장서 구축해내는 역할을 철저히 거부했다. 특히 민주노동당은 1996년 이후 자본가들의 신자유주의 대공세의 핵심이 정리해고·비정규직 제도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정리해고·비정규직 제도의 철폐를 내건 역동적인 대중정치투쟁을 조직하려는 어떤 노력도 하지 않았다. 반면에 민주노동당은 노동자 정치세력화를 온갖 개량주의·의회주의 환상 속에 가두어 버렸고, 광범한 노동자들의 성장하는 계급적 정치의식을 그저 선거에서의 집단투표로 제한시켜 버림으로써 그 진정한 분출과 성장을 오히려 가로막았다. 한동안 민주노동당은 노동자·민중에게 극심한 사회 양극화를 앞장서 해결할 신선한 정치적 대안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었고 그러한 기대는 지지율의 급격한 상승으로 연결됐다. 하지만 민주노동당의 개량주의적·의회주의적 접근은 오히려 의미 있는 사회적 변화를 전혀 만들어 내지 못하는 무능함만을 노동자·민중에게 보여주게 됐고, 심지어는 자본가 정치세력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는 극심한 배신감마저 들게 만들었다. 이를테면 부유세, 무상의료·무상교육, 비정규직 권리보장 입법 등 민주노동당이 신자유주의 공세에 맞서 제출했던 나름의 대안적 전망들은 한때 민주노동당의 약진을 뒷받침하는 데 상당한 역할을 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민주노동당의 핵심의제에서 아예 사라져 버리거나 또는 스스로 후퇴를 거듭하면서 누더기가 돼 버렸다. 2004년 총선에서 민주노동당이 국회의원 10명을 당선시킬 때, 민주노동당은 무상의료·무상교육과 부유세를 성공적으로 쟁점화했다. 민주노동당이 내건 무상의료·무상교육은 광범한 노동자·민중에게 큰 호응을 받았다. IMF 외환위기 이후 수많은 노동자·민중이 경쟁력과 효율성의 논리에 밀려 삶이 파괴당했다. 그보다 더 많은 노동자·민중이 최소한의 생존조건도 보장되지 않는 ‘불가피한 희생자’로 내밀리지 않으려고 발버둥을 쳐야 했다. 그런 상황에서 무상의료·무상교육은 가뭄에 단비와도 같은 희망으로 다가왔다. 무상의료·무상교육의 재원을 마련하겠다며 부유세를 내건 것도 큰 호응을 받았다. 어차피 노동자·민중이 더 낼 수 있는 돈도 없었다. IMF 외환위기를 겪으며 수많은 노동자·민중의 삶이 파괴될 때, 가진 자들의 재산이 엄청나게 불어났다는 사실도 모두가 알고 있었다. 무상의료·무상교육과 부유세는 한국 정치의 향방을 가르는 쟁점으로 부상할 가능성을 충분히 갖고 있었다. 그러나 민주노동당은 자신이 던진 이 쟁점을 감당할 능력이 전혀 안 됐다. 무엇보다도 민주노동당의 개량주의 노선 그 자체가 근본적인 걸림돌이었다. 민주노동당에게는 지지율을 올리고 그래서 국회의원 수를 늘리는 게 최고의 가치였다. 그런 민주노동당에게 무상의료·무상교육과 부유세가 부메랑이 돼 돌아왔다. 자본가계급이 보수언론을 동원해서 무상의료·무상교육과 부유세에 붉은 이미지를 덧씌우며 집요하게 공격하고 나선 것이다. 온건한 이미지를 지키려고 애를 쓰던 민주노동당은 무상의료·무상교육과 부유세를 구체화하는 과정에서 급진적 성격을 최대한 제거해 나갔다. 결국 민주노동당의 무상의료·무상교육과 부유세는 여의주 없는 용이 되고 말았다. 자본의 이윤추구를 절대시하는 자본주의 원리에 정면 도전하지 않으면서, 제대로 된 무상의료·무상교육과 부유세를 도입할 방법은 없었다. 구체화의 과정에서 그 내용이 현저히 약화되자, 무상의료·무상교육과 부유세 자체가 광범한 노동자·민중의 관심으로부터 멀어져 갔다. 정치적 쟁점으로서의 긴장감 또한 사라졌다. 핵심 쟁점을 스스로 포기하면서, 민주노동당의 정치는 정처 없이 표류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2005~06년을 거치며 한국 정치는 일찍이 겪지 못했던 거대한 소용돌이에 휩쓸리고 있었다. IMF 외환위기 이후 견딜 수 없는 삶의 고통과 긴장이 계속되자, 광범한 노동자·민중의 분노가 거대하게 축적됐다. 그 분노는 2006년 5·31 지방선거에서 폭발했다. 노동자·민중은 삶의 고통에 대한 책임을 노무현 정권에게 물었다. 집권여당인 열린우리당은 서울·인천·경기의 수도권 세 지역에서 지역구 광역의원을 단 한 명도 당선시키지 못했다. 한국 정치 역사상 유례를 찾을 수 없을 정도로 충격적인 참패였다. 그런데 신자유주의 정책의 집행자 노무현 정권을 심판하면서 노동자·민중이 선택한 새로운 희망은 민주노동당이 아니라 한나라당이었다. 노동자·민중에게 민주노동당은 노무현 정권에 가장 철저하게 맞서는 대안이 아니라, 그 아류로 인식됐다. 심지어 민주노동당 스스로도 그렇게 행동했다. 사회 양극화를 심화시킨 주범으로서 노무현 정권과 열린우리당에 대한 노동자·민중의 분노가 왜 5·31 선거에서는 민주노동당의 약진과 병행되지 않은 채 한나라당의 일방적 승리로 귀결된 것일까? 그 원인은 거의 전적으로 민주노동당 스스로에게 있다. 신자유주의 집행자, 노무현 정권과 열린우리당에 대한 노동자·민중의 분노 앞에서 새로운 전망을 제시하는 대안 주체로 다가서지 못했을 뿐 아니라 심지어 열린우리당과의 차별성을 스스로 애써 부정하기까지 한 까닭이다. … 민주노동당이 선거 기간 중 발표한 ‘진보개혁세력 대표주자 교체론’은 그 전형적 사례다. 열린우리당의 신자유주의 정책이 대다수 노동자·민중을 삶의 벼랑 끝으로 밀어붙이고 있으며 그로 인해 누적된 대중의 분노가 하늘을 찌르려 하는 이 심각한 정세에서, 신자유주의 집행자 열린우리당에 맞선 대중적 항쟁의 주도자로 나서야 할 진보정당이 오히려 ‘진보개혁세력’이라는 범주를 통해 “민주노동당은 결국 열린우리당과 한 묶음”이라고 자기 정체성을 천명한 것이다. 한나라당 서울시장 후보로 오세훈이 전격 등장하는 과정이 상징하듯이, 사회경제적 문제를 담아내지 못하는 형식적인 민주주의와 개혁은 현 시점의 한국 정치에서 이미 주된 쟁점이 아니다. 따라서 열린우리당의 신자유주의를 일정하게 비판한다 하더라도 진보개혁세력이라는 낡은 규정과 어법 속에 빠져 있는 한, 민주노동당은 결코 사회 양극화 속에 절망하고 있는 노동자·민중과 진정어린 상호소통을 확장해 갈 수 없었던 것이다. 문제가 더욱 심각한 것은, 이러한 정체성 혼란이 우발적인 실수가 아니라는 점이다. 2004년 12월에도 국가보안법 철폐 투쟁을 둘러싸고 ‘열린우리당 2중대’ 논란이 벌어졌으며, 국회에서 비정규직법을 둘러싼 치열한 대치가 지속되고 있음에도 열린우리당과의 공조가 수차례 거듭되어 왔기 때문이다. … 2002~04년 민주노동당의 약진을 가능케 했던 … 대중적 약속들이 그동안 민주노동당 내에서 어떻게 취급되어 왔는가? 부유세와 무상의료·무상교육은 어느덧 당의 핵심 의제에서 사실상 사라져 버렸고, 비정규직 권리보장 입법안은 비정규직 법안 처리 공방 속에서 스스로 후퇴를 거듭하면서 반쯤 누더기가 되어버린 것이 냉정한 현실 아닌가! 중간층 눈치 보기와 물타기로 점철된 정책의 구체화 과정, 아래로부터 대중 동력을 형성해 오는 집요한 노력의 부재, 아니 그 이전에 대중과의 약속을 지키겠다는 확고한 의지 자체의 결여 등등. 그 원인을 어떻게 설명하든, 이전에 민주노동당이 가장 그럴싸하게 내걸었던 대중적 약속들은 그간의 과정을 거치며 사실상 공수표가 되어 버린 것이다.[8] 05년에는 비정규직 법 민주노동당 수정안, 그리고 06년에는 로드맵 열우당 수정안 야합. 단병호 의원이 국회에서 원칙을 훼손했던 사례들이다. 하필이면 공교롭게도 날짜가 둘 다 똑같이 12월 8일이다. 05년 비정규직 법 민주노동당 수정안의 경우, 노무현 정권의 비정규직 법 개악 저지 투쟁에서 전선을 교란시켰다. 당시에 사유제한을 확대한 수정안은 추후 개악 시에는 결과적으로 개악에 일정정도 동참한 꼴이 될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 투쟁전선에서 투쟁하고 있는 주체들의 사기를 꺾게 되어, 결국 그 어떤 명분도 실리도 잃어버리는 것이었다. 06년 이번 로드맵 야합의 경우에는, 전선을 교란했을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 환노위 전체회의에서 로드맵 법안 통과에 실질적으로 동의한 것이었고 그 과정에서 자본가계급과 야합이 있었다. 그 결과 06년 투쟁을 패배했어도 아주 굴욕적으로 패배하게 만들었다. 이로써 단병호 의원은 노동자정당에서 국회에 파견한 노동자의원으로서 의회에서 자본가계급과 투쟁하기보다는, 자본가계급과 노동자계급 사이에서 관리자로서 역할을 하고 말았다. 의회주의에 철저히 물들었다고밖에 달리 설명할 길이 없다.[9] 결국 민주노동당의 추락은 자본주의 모순의 심화로 벼랑 끝에 내몰린 노동자들에게 개량주의적이고 의회주의적인 허상만을 제시할 뿐 노동자들을 당당한 투쟁의 주체로 일으켜 세우지 못했던 민주노동당 스스로가 자초한 것이었다. 민주노동당은 자본주의 모순의 심화로 울부짖는 노동자들을 자본가들의 총공세에 맞서 현장과 거리에서의 직접적인 정치투쟁 전선으로 이끌어 내려는 어떤 진지한 시도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노조관료들을 기반으로 개량주의와 의회주의에 철저히 매몰되면서 신자유주의 집행자 노무현 정권의 2중대 역할만을 수행할 뿐이었다. 따라서 민주노동당은 노무현 정권에 대한 노동자·민중의 분노를 앞장서 모아내고 분출하는 주체가 되기는커녕 오히려 노무현 정권과 한 묶음으로 노동자·민중에게 심판당하는 처지가 되고 말았던 것이다. 3) 역사적 가설 ‘노동자 정치세력화를 향한 대중적 열망’으로 뒷받침된 민주노동당이 개량주의 정당으로 고착된 것은, 창당 초기부터 개량주의 세력이 주도권을 장악한 때문이었다. 이것은 악순환을 낳았다. 민주노동당의 개량주의 성격이 노골화할수록 민주노조운동 내부의 타협적·관료적 인물들이 출세의 욕망을 품고 물밀 듯이 민주노동당으로 밀려들어 갔다. 반면 전투적·변혁적 선진노동자들은 점점 더 민주노동당과 거리를 두었다. 그렇게 해서 민주노동당은 개량주의 정당으로 빠르게 고착돼 갔다. 전투적·변혁적 선진노동자들은 노동자 정치세력화에 대한 열망이 강했지만 초기부터 다수가 민주노동당에 참여하지 않았다. 한편으로는 개량주의 주도세력에 대한 거부감 때문이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민주노동당이 노동자계급의 정치적 전진에 기여하도록 활용할 방안에 대한 전망 부재 때문이었다. 전투적·변혁적 선진노동자들이 사실상 참여하지 않으면서 민주노동당이 노동자계급의 정치적 전진에 기여할 가능성은 사라졌다. 그런데 민주노동당이 노동자계급의 정치적 전진에 기여할 길은 애초부터 없었을까? 개량주의 세력에게서 주도권을 빼앗아, 사회주의자들과 전투적·변혁적 선진노동자들이 민주노동당으로 모여든 ‘노동자 정치세력화를 향한 대중적 열망’을 틀어쥘 길은 없었을까? 민주노동당이 역사적 의의를 갖기 위해서는 민주노동당보다 앞선 지점에서 문제가 바로잡혀야 했다. 만일 전투적·변혁적 선진노동자들이 1990년대 초중반 민주노조운동 내부 노선투쟁에서 승리하고 주도권을 장악했다면, 그리고 민주노동당의 역사적 의의를 해명하면서 올바로 활용할 전망을 세울 수 있었다면, 많은 것이 달라졌을 수 있다. 1996~97년 총파업은 훨씬 더 성공적인 투쟁이 될 수 있었고, 민주노동당은 제대로 된 노동자계급정당으로 형성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 그 시기에는 매우 쉽지 않은 일이었다. 1990년대 초중반을 거치면서 민주노조운동의 주도권이 전투적·변혁적 세력에게서 타협·개량주의 세력에게로 이동한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그 배경에는 소련 붕괴라는 세계사적 사건이 몰고 온 극심한 사상적 혼란이 놓여 있었다. 그 시절 거대한 청산주의 물결을 거부하고 간신히 살아남은 극소수 사회주의자들은 사상적·실천적 전망을 근본에서부터 하나씩 다시 세워가야 했다. 또한 선진노동자들은 총체적 전망과 연결되지 못한 막막함 속에서도 전투적·변혁적 지향을 포기하지 않으려 고군분투하고 있었다. 4) 대안 지도력으로 서지 못한 사회주의 세력 1987년 노동자대투쟁 이후 폭발적으로 성장한 한국의 노동자운동은 세계에서 가장 악랄하게 노동자들을 착취하고 억압하던 한국의 자본가들에게 적지 않은 양보를 강제해 냈다. 1990년대 중반까지 자본가들은 노동자운동에 대한 탄압을 계속 퍼부으면서도 노동자들의 끈질긴 투쟁력에 밀려 경제적으로는 상당한 양보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IMF 외환위기를 계기로 한국 자본주의가 충격적으로 위기에 내몰리면서부터 자본가들의 태도는 완연히 바뀌었다. 자본가들이 정리해고를 앞세워 무자비하게 신자유주의 대공세를 펼치자, 노동자들은 1990년대 중반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매우 치열하게 투쟁으로 맞섰다. 정리해고 법제화에 맞섰던 1996-97년 총파업, 정리해고에 맞섰던 1998년 현대차·만도기계 파업, 1999년 한라중공업 파업, 2001년 대우차·효성·태광 파업, 발전소를 비롯한 국가기간산업 사유화(민영화)에 맞섰던 2002년 발전 파업은 이 시기의 가장 대표적인 투쟁이었다. 특히 대기업 정규직이 주를 이뤘던 그러한 투쟁들 속에서, 노동자들은 자본의 당면한 공세를 물리치는 것만이 아니라 노동자의 세상을 향한 거침없는 전진을 노래하고 희망했다. 그러나 그 투쟁들은 줄줄이 패배했다. 노동자들은 생존과 권리를 지키려는 강렬한 열망을 행동으로 보여주었지만, 지도부의 투항과 배신을 이겨내지 못하고 투쟁 전열이 무너지면서 결국 패배하는 양상이 거듭해서 되풀이됐다. 1990년대 중반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퍼부어진 자본가들의 신자유주의 대공세는 노동자들에게, 특히 그 지도부에게 이전보다 훨씬 더 큰 용기와 시야, 대담한 전망과 자신감을 요구했다. 나라와 기업의 운명이 경각에 달렸다는 논리로 노동자들에게 희생을 강요하는 것에 맞서, 노동자들의 생존권은 어떤 경우에도 내줄 수 없으며 더 이상 당신들이 우리의 생존권을 책임질 수 없다면 이제 노동자가 나라와 기업을 이끌고 가겠다는 대담한 의지와 자신감이 필요했다. 그러나 그 시절 민주노조운동의 지도부는 전반적으로 엄혹한 사태를 헤치고 나갈 역량을 갖추지 못했으며, 결국 노동자들의 열망을 책임지지 못하고 자본가들에게 투항하며 배신할 수밖에 없었다. 1996~97년 총파업 이후 2000년대 초반까지 자본가들의 신자유주의 대공세가 펼쳐진 이 시기는 만일 노동자들이 전열을 추슬러 총반격에 나설 수 있었다면 자본의 공격으로부터 노동자의 생존권을 지켜낼 뿐만 아니라 오히려 노동자운동의 거대한 성장과 사회변혁을 향한 힘찬 전진으로 나아갈 수도 있는 가능성을 가진 시기였다. 노동자들은 역사적인 1996~97년 총파업에서 그리고 이후에도 몇 차례 역동적인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노동자들은 이러한 역동적 가능성을 제대로 펼쳐내지 못하고 타협·개량주의 세력의 지도력에 갇혀 거듭되는 투항적 배신에 좌절하며 패배를 되풀이하고 말았다. 노동자들의 역동적인 가능성이 힘차게 뻗어나가려면 타협·개량주의 지도력과 달리 전투적·변혁적 전망과 기세를 극대화한 대안 지도력을 중심으로 자본가들의 신자유주의 공세에 정면으로 맞서는 강고한 노동자정치투쟁 전선을 구축하는 것이 절실히 필요했다. 이렇게 자본가들의 신자유주의 공세에 정면으로 맞서는 노동자정치투쟁 전선을 앞장서 구축해 냄으로써 타협·개량주의 지도력을 대체하는 대안 지도력으로 스스로 서는 것이 이 시기 사회주의 세력에게 주어진 객관적 과제였다. 그러나 사회주의 세력은 그러한 역할을 수행해 내지 못했다. 이 시기에는 민주노총으로 결집한 수십만 조합원들도 상당한 능동성과 건강한 활력을 갖고 있었다.[10] 또한 광범한 노동자들 속에서 계급적 정치의식이 빠르게 성장하고 있었다. 따라서 총자본의 신자유주의 세계화 공세에 정면으로 맞서는 위력적인 노동자정치투쟁 전선을 구축해 낼 가능성이 얼마든지 열려 있었다. IMF 외환위기를 계기로 노동법 개악과 구조조정·정리해고의 공격을 퍼부으며 노동자들을 벼랑으로 내모는 총자본에 맞서, 노동자들이 현장과 거리에서 펼치는 직접적인 정치투쟁을 통해, 정리해고·임금삭감·비정규직화 저지 등 노동자들의 권리를 단호하게 지켜낼 뿐만 아니라, 나아가 △정리해고제 철폐 △비정규직 철폐 △노동시간 단축으로 일자리 나누기 △손배·가압류 폐지 △무상의료·무상교육·부유세 등으로 반격을 전개하여 사회변혁을 향해 역동적으로 전진해 나가는 길도 얼마든지 열려 있었다. 그러나 사회주의 세력은 이러한 노동자정치투쟁 전선을 앞장서 구축해 내지 못했다. 타협·개량주의 지도부의 오류와 한계를 비판하는 데서는 날카로웠지만, 그러한 비판을 넘어 스스로를 대안 지도력으로 세워 내지는 못했다. 현장조직 운동을 중심으로 일부 선진노동자들 속에 어느 정도 전투적·변혁적 기세를 불어넣을 수는 있었지만, 타협·개량주의 지도부의 투항적 배신에 분노하는 선진노동자들이 그러한 계급적 본능을 체계적인 사상과 노선으로 발전시켜 내도록 이끌지는 못했다. 또한 일부 선진노동자들을 넘어서서 광범한 노동자들에게 직접 다가가며 공세적인 노동자정치투쟁 전선의 필요성과 전망을 강력하고 끈질기게 제시해 낼 필요가 있었으나, 그러지 못했다. 이 시기에 노동자정치투쟁 전선을 앞장서 구축해 내지 못함으로써, 사회주의 세력은 노동자계급 운동의 객관적 요구에 부응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스스로도 부분적인 퇴보를 포함한 전반적인 정체를 피할 수 없었다. 현장의 선진노동자들에게 사상적·실천적 전망을 열어주는 데서도 큰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었고, 그로 인해 현장파의 운동적 몰락에도 중요한 원인을 제공했다. 또한 개량주의 세력의 든든한 근거지가 되어 노동자운동 전반을 정체와 후퇴로 내모는 민주노동당에 대당할 만한 대안 정당이나 정치조직을 세워내지도 못했다. 물론 1990년대 초반을 강타한 청산주의의 물결로부터 간신히 살아남아 그 후 어렵게 몇 년을 헤쳐오고 있던 사회주의자들에게 노동자정치투쟁 전선을 앞장서 구축해 낸다는 것은 사실 매우 버거운 일이었다. 가장 현명하게 상황을 대처해 나갔다고 하더라도 그러한 역할을 온전히 수행해 내는 것은 결코 쉽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만일 사회주의 세력 전반이 통일된 대응력을 갖춤으로써 잠재적인 역량을 극대화할 수 있었다면 그러한 역할을 수행해 내는 것도 꼭 불가능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각 세력이 가진 이러저러한 편향과 결함들도 통일된 흐름 속에서는 어느 정도 균형을 이루고 상호 보완되면서 풍부한 요소를 가진 장점으로 승화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시기 사회주의 세력은 공개 영역과 비공개 영역 모두에서 다양한 그룹으로 분열된 상태를 극복하지 못했고, 따라서 중요한 역사적 국면에서 자신의 역할을 제대로 수행해내지 못했다. 다만 2000년대 초반 이후 매우 척박한 조건을 뚫고 비정규직 운동이 건설되는 과정에서 사회주의 세력과 사회주의 현장활동가들은 주도적인 역할을 수행해 냈다. 한국 노동자운동이 정규직 운동의 패퇴에 따른 극심한 위기를 딛고 비정규직 운동을 중심으로 재건돼 나갈 수 있도록 소중한 초석을 놓은 셈이었다. ※한국노동자운동사 4부(2008~2017, 고난과 재건)와 5부(2017~2024, 폭풍 속의 표류)는 몇 달 간의 휴지기 이후 이어서 연재될 예정입니다. [1] 민주노동당의 당원 수는 창당 이후 꾸준히 늘다가 2004년 4월 총선을 거치면서 비약적으로 늘어나 8만여 명에까지 이르렀다. [2]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는 2007년 9월 “조봉암이 1956년 대통령 선거에서 이승만 정권에 위협적인 정치인으로 부상하자, 경찰과 군이 정권의 의도에 따라 조봉암 등을 체포해 사형에 이르게 했다”는 조사결과를 의결하고, 조봉암과 유가족에게 국가가 사과하고 피해 구제와 명예 회복을 위한 적절한 조치를 취할 것을 권고했다. 대법원은 2011년 1월 이 사건에 대한 재심을 통해 조봉암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3] 민주노총, 1997/07/24, 제6차 임시대의원대회 결의사항. [4] 민주노동당 창당 이후 초기 4년 동안, 민주노총의 1기 국민파 지도부를 대표하는 권영길은 당 대표를 역임했고, 진정추 세력을 대표하는 노회찬은 부대표와 사무총장을 역임하며 실권을 행사했다. [5] 그러나 현실은 자본주의 위기가 깊어짐에 따라 자본가들이 개량주의자들과 타협할 의사와 능력이 더욱 사라지는 상황이었다. 개량주의자들은 자본과의 타협을 추구했지만 ‘개량의 떡고물’조차 얻어올 게 없었으며, 그들에게 강요된 것은 자본가들의 공세를 합리화해 주는 ‘개량 없는’ 개량주의일 뿐이었다. 이러한 딜레마는 2000년대를 지나면서 민주노동당의 진로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6] 양준석, 2006/06/20, 「울산에서 민주노동당은 왜 ‘계급투표’에 실패했는가?」 [7] 한나라당 박근혜 대표의 피습 사건과 같은 우연적 요소들이 사태를 더욱 극적으로 만든 측면도 있었지만, 5·31 지방선거가 드러낸 정치적 의미의 핵심은 대통령 노무현을 정점으로 하는 열린우리당에 대한 노동자·민중의 심판이었다. [8] 양준석, 2006/06/20, 「울산에서 민주노동당은 왜 ‘계급투표’에 실패했는가?」 [9] 노동해방실천연대, 2007/01/26, 「민주노동당, 노동자 배신 정당으로 전락할 것인가」, 『해방』 20호. [10] 몇 년 동안 구조조정에 맞선 강력한 투쟁들이 펼쳐졌지만 결국 지도부의 배신으로 패퇴하고 나자, 민주노조 조합원들은 2000년대 초반 이후 심각한 수동성과 보수화에 빠져든다. 하지만 그렇게 되기 전까지 1996~97년 총파업으로부터 몇 년 동안 민주노조 조합원들이 보여준 능동성과 활력은 분명 대단한 것이었다 /* 스크롤 여백만 주고, 화면에는 안 보이게 */ .ftn-target { display: inline-block; /* 줄바꿈 안 생김 */ width: 0; height: 0; scroll-margin-top: 200px; } document.addEventListener("DOMContentLoaded", function () { // name="_ftn1", name="_ftn2", name="_ftnref1" ... 전부 대상 document.querySelectorAll('a[name^="_ftn"]').forEach(function(a) { var idValue = a.getAttribute("name"); // 이미 같은 id의 요소가 있으면 또 만들지 않음 if (!document.getElementById(idValue)) { var span = document.createElement("span"); span.id = idValue; span.className = "ftn-target"; a.parentNode.insertBefore(span, a); } }); }); /* 본문 각주 번호 + 아래쪽 각주 번호 색 지정 */ a[href^="#_ftn"] sup, a[href^="#_ftnref"] sup { color: #BF202D; } /* 밑줄이 보기 싫으면 */ a[href^="#_ftn"], a[href^="#_ftnref"] { text-decoration: none; } /* 마우스 올렸을 때 살짝만 강조하고 싶으면 (선택) */ a[href^="#_ftn"]:hover, a[href^="#_ftnref"]:hover { text-decoration: underline; } /* 페이지 전체가 오른쪽으로 넘치지 않게 */ html, body { max-width: 100%; overflow-x: hidden; } /* 본문 영역 폭 강제 고정 + 긴 단어/문장도 줄바꿈 */ #bo_v_con, .bo_v_con, .cke_editable, article { max-width: 100%; overflow-wrap: break-word; word-wrap: break-word; /* 구형 브라우저용 */ } /* 워드에서 붙은 이미지/표가 화면 밖으로 안 나가게 */ #bo_v_con img, #bo_v_con table, .bo_v_con img, .bo_v_con table, .cke_editable img, .cke_editable table, article img, article table { max-width: 100% !important; height: auto; } /* 워드가 p, span에 폭을 박아놓은 경우 강제로 해제 */ #bo_v_con p[style*="width"], #bo_v_con span[style*="width"], .bo_v_con p[style*="width"], .bo_v_con span[style*="width"], .cke_editable p[style*="width"], .cke_editable span[style*="width"], article p[style*="width"], article span[style*="width"] { width: auto !important; max-width: 100% !important; } /* 기본 blockquote 스타일 */ blockquote { border-left: 4px solid #c0392b; /* 사이트 분위기와 맞는 붉은 계열 */ padding: 12px 18px; margin: 20px 0; background: #fafafa; font-style: normal; color: #333; line-height: 1.6; } /* blockquote 안의 p 태그 정렬 */ blockquote p { margin: 0 0 10px 0; text-align: justify; } /* 마지막 p 태그 여백 제거 */ blockquote p:last-child { margin-bottom: 0; } -
[136주년 세계 노동절 유인물] 서광석 열사 정신 계승! 원청교섭 쟁취! 가자, 7월 총파업![1면] 서광석 열사 정신 계승! 원청교섭 쟁취! 가자, 7월 총파업! 열사의 죽음, 특정 악질기업의 일탈이 아니다 2026년 4월 20일, 화물노동자 서광석 열사가 진주 CU물류센터 앞 원청교섭 투쟁 중 사망했다. CU편의점에 물류를 배송하는 화물노동자들은 하루 13시간, 월 325시간에 달하는 과로와 심야노동에 시달려왔다. 휴가 때조차 대체차량 비용을 노동자 개인이 부담해야 했다. 그런데도 BGF자본은 자신이 원청사용자가 아니라며 교섭을 거부했다. 원청교섭을 요구한 노동자들에게는 2억 원대 손해배상 청구까지 들이밀었고, 비조합원을 동원해 투쟁을 파괴하려 했다. CU편의점으로 들어가는 물류는 BGF리테일 → BGF로지스 → 지역물류센터 → 하청운송사 → 화물노동자로 이어지는 5단계 하도급 구조로 운영된다. 노동부 장관조차 사건의 본질이 ‘다단계 구조’에 있다고 말할 정도다. 다단계로 착취당하던 화물노동자들은, 노동과정과 노동조건을 실제 결정하는 BGF리테일에 교섭을 요구했지만, BGF리테일은 계약당사자가 아니라며 교섭을 거부했다. 이에 맞서다 산화한 서광석 열사의 죽음은, 단지 BGF라는 일개 악질기업의 일탈이 아니라, 한국 원청자본의 보편적 행위가 낳은 참사다. 생산과정과 노동조건을 지배·결정하면서도, 다단계 하청구조 뒤에 숨어 사용자 책임을 부정해온 원청자본의 살인이다. 원청자본은 거부하고, 정부는 방조한다 개정 노조법 시행 이후 원청자본의 행보는 분명하다. 첫째, 사용자성 자체를 부정한다. 둘째, 교섭요구 사실공고를 거부하거나 지연한다. 셋째, 교섭에 응하더라도 의제를 노동·안전·보건 등 최소한으로 좁혀 투쟁을 제어하려 한다. 4월 23일 기준, 민주노총 소속 노동조합들은 원청사업장 571곳에 교섭요구 공문을 발송했지만, 교섭요구 사실을 공고한 사업장은 46곳에 그쳤다. 이재명 정부가 ‘사용자’인 공공부문도 민간부문과 하등 다르지 않다. 이재명 정부는 “공공부문 모범사용자”가 되겠다고 말했지만, 공기업 중 교섭요구를 공고한 기관은 두 곳에 불과하다. 정부와 고용노동부는 원청자본의 교섭의무를 강제하기는커녕, 복잡한 절차와 의도적인 소극적 해석으로 원청자본의 교섭해태를 부추긴다. △교섭요구 △교섭요구 사실공고 △교섭노조 확정공고 △교섭단위 분리신청 △노동위원회 시정신청 △노동부 판단지원위원회 검토 등 원청교섭 절차는 원청자본의 책임을 부정하고, 교섭을 지연하며, 현장투쟁을 소진시키는 수단이다. 왜 자본은 원청교섭을 이토록 철저하게 탄압하는가 비정규직노동자들의 악전고투로 법이 바뀌었고, 최소한의 경로가 열렸다. 그러나 하청노동자들은 여전히 ‘진짜 사장’과 교섭하기 위해 목숨걸고 싸워야 한다. 그 과정에서 국가와 자본이 열사를 죽였다. 왜 자본은 원청교섭을 완강히 거부하며 철저히 탄압하는가? 그것은 원청교섭 투쟁이 발전할 경우 자본이 공들여 구축한 다단계 하청구조, 오늘도 무수한 비정규직을 양산하는 한국 자본가들의 이윤축적 구조에 대한 집단적 분노로 번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원청교섭 쟁취투쟁은 험난하다. 그러나 바로 그렇기에 싸워야 한다. 실제로는 원청자본이 지배하는 노동자를 다단계 하청노동자로, 특수고용노동자로, 프리랜서로, ‘개인사업자’로 규정하며 그저 굶어죽지 않을 정도로, 심지어 실제로 굶어죽을 정도로 착취해온 한국 자본주의의 다단계 착취구조 자체를 바꾸는 투쟁으로 나아가자. 7월 총파업으로 진짜 사장을 교섭장에 세우자 민간부문과 공공부문 하청노동자, 특수고용·플랫폼·프리랜서노동자 모두가 함께 요구해야 한다. 모든 노동자의 노동자성을 인정하라! 모든 노동자의 노동기본권을 보장하라! 원청은 교섭에 나와라! 정부와 공공기관은 사용자 책임을 인정하라! ‘2등 노동자’ 양산하는 일터기본법이 아니라 근로기준법과 노조법을 모든 노동자에게 전면 적용하라! 서광석 열사의 죽음에 대한 분노를 원청교섭 쟁취투쟁으로 모으자. 현장과 지역에서 원청자본의 책임 회피를 폭로하자. 원청교섭 사업장 공동투쟁을 조직하자. 7월 15일 총파업으로 진짜 사장을 교섭장으로 끌어내자. `※화물연대 투쟁기금 모금에 함께해주세요 국민은행 028001-04-290833 (전국공공운수사회서비스노조 화물) [2면] 차별에 맞서 싸워 온 노동자가 차별금지법 제정에 앞장서자! ‘노동자니까’, ‘장애인·성소수자·이주노동자니까’ 136주년 국제노동절은 구조적으로 차별을 양산하는 자본주의 체제에 맞서 노동자가 부탁이 아닌 ‘투쟁으로’ 현장을, 법을, 사회를 바꿔온 역사를 증명한다. 자본과 정부는 우리 머리 꼭대기에서 ‘노동자니까’라는 이유로 착취와 억압을 일삼고 일터를 근간으로 사회 모든 영역에서 노동자민중을 갈라놓지만, 노동자는 단결을 위해 노력한다. ‘비정규직’은 고용과 임금만이 아니라 출산·육아, 돌봄 환경과 인간적인 존엄성까지 차별받는다. 그런데도 저들은 ‘플랫폼노동자니까’, ‘장애인이니까’, ‘이주노동자니까’, ‘여성이니까’, ‘성소수자니까’, ‘고졸이니까’, ‘어린 친구니까’라며 다양한 모습으로 살아가는 노동자민중을 손가락질하게 만들며 단결을 가로막아왔다. 성별, 인종, 성적 지향, 성 정체성, 장애, 나이 등은 개인의 취사선택이 아니다. 그러나 이를 이유로 교육, 일자리, 의료, 가족·인간관계, 의식주, 이동, 각종 사회서비스 등 모든 삶의 권리를 차별하고 있다. ‘차이’가 아닌 ‘차별’의 심화 인구 20명 중의 1명인 성소수자의 95%가 직장에서 일상적 무시나 모욕을 겪었다. 트랜스젠더라는 이유로 채용이 취소된 사례나 “게이 같다”는 말을 듣는 경우도 부지기수다. 중증장애인에게는 법적으로 최저임금을 안 줘도 되고, 장애 여성의 임금은 남성 장애인의 53% 수준에 불과하다. 색동원 사건처럼 성폭력에 무방비로 노출되는 일도 반복되고 있다. 산재사망률 OECD 1위의 한국에서 이주노동자 산재 사망은 정주노동자의 3배다. 반말과 욕설은 기본이고 임금을 떼이고 매를 맞는다. 조선소 대기업에서도 밥값을 차별당하고 강제노동에 시달린다. 청소년이 일터에서 노동인권을 침해당한 경험은 약 50%, 5명 중 1명은 임금체불을 당했다. 성별임금격차가 OECD 압도적 1위(29%)인 한국에서 비정규직으로 일하는 여성은 남성보다 131만 명이나 많다. 가사노동을 여성이 도맡는 비율은 73.3%로 3년 전보다 증가했다. 비정규직 임금은 정규직 대비 53.6%로 그 격차가 역대 최대로 벌어졌다. 특수고용·플랫폼·프리랜서 노동자는 노동절이 공휴일로 지정되어도 유급휴가가 없고, 출산·육아휴가도 꿈같은 얘기다. 심화하는 자본주의 체제의 위기에 사회적 약자, 소수자들은 가장 먼저 삶의 벼랑에 내몰리고 있다. ‘차별 대우’ 없애려 노조하듯, 차별금지법 제정에 노동자가 앞장서자! 특수고용 화물노동자 서광석 열사, 트랜스젠더 군인 변희수 하사, 이주노동자 뚜안 님, 폐암으로 쓰러진 급식노동자, 태안화력 김충현 비정규직 노동자, 사장의 성폭력과 경찰의 면죄부에 죽음으로 내몰린 여성청소년노동자, 시설과 집에 고립돼 사망한 장애인....이 모든 죽음에 자본주의 사회의 차별과 억압이 놓여있다. 이 죽음들은 정부와 자본의 악랄함을 보여주는 동시에, 노동자투쟁이 부족했음을 말해준다. 많은 노동자가 현장의 ‘차별 대우’를 없애려 노조하듯, 이제는 차별을 강요하는 사회의 구석구석을 바꾸기 위해 나서야 한다. 이재명 정권은 자본과 혐오세력의 눈치를 보며 광장의 1호 의제인 ‘차별금지법 제정’을 외면하고 있다. 투쟁보다 자본과 정부에 의탁하고, 전체 노동자민중보다 자신의 사업장 위주로 생각하는 노동운동 경향은 차별사회를 강요하는 저들의 생각과 다를 바 없다. '노동절'이란 이름만 되찾아선 안 된다. 집을 나서 이동하고, 이력서를 작성하고, 동료에게 나에 대해 솔직하게 말하고, 가족·지인과 저녁 식사 약속을 잡고, 아플 때 보호자와 입원 수속을 밟을 수 있는 소소한 일상조차 빼앗긴, 차별의 최전선에 있는 노동자들의 권리를 되찾아야 한다. "부당한 차별 대우를 하지 말라"는 ‘포괄적 차별금지법’ 제정에 노동자가 앞장서자. 일터와 사회에서 ‘인간답게 살아보자’는 투쟁을 확장하자. 노동해방은 모든 차별과 억압, 착취를 없애는 그 끝에 있다 ※차별금지법 제정 투쟁에 앞장서온 '차별금지법제정연대'를 후원해주세요 우리은행 1006-201-507617 차별금지법제정연대 [광장에서 펼쳐보는 차별금지법 Q&A] (2025) 소책자 보기: https://equalityact.kr/2025qna/ 제작: 차별금지법제정연대 ※미국과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에 대한 집단학살, 이란에 대한 침략전쟁이 지속되고 있습니다. 전쟁과 학살, 제국주의에 맞서 HD현대, 한화, 한국석유공사의 집단학살 공모를 끝내기 위해 투쟁합시다! -
[한노운사 연재 15회] 3부 패배와 퇴보 (1998-2008) [4] 민주노조운동의 위기한국 자본주의가 1990년대 중반을 분기점으로 쇠퇴기에 접어들자 자본가들은 IMF 외환위기를 계기로 정리해고 도입과 비정규직 확산으로 대표되는 신자유주의 공세를 전면화했다. 그로부터 몇 년 만에 비정규직은 전체 노동자계급의 절반을 훌쩍 넘어서게 됐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민주노조운동은 정리해고 도입을 막아내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비정규직 확산과 비정규직에 대한 착취·억압·차별의 심화를 방치했다. 이는 민주노조운동에도 심각한 위기와 퇴보로 되돌아갔다. 대기업 정규직만의 운동으로 쪼그라든 ‘민주노조운동’은 가장 착취당하고 억압받을 뿐만 아니라 노동자계급의 다수를 차지하게 된 비정규직들을 외면한 채 어느 정도 살 만한 소수만을 위하는 ‘집단이기주의’ 운동으로 사회적으로 취급받게 됐고, 스스로도 그렇게 빠져들었다. ‘민주노조운동’의 계급적 대표성 상실과 사회적 정당성 약화는 조직력 약화로 이어졌다. ‘민주노조운동’의 한계를 절감한 데 따른 패배주의와, 비정규직으로 굴러 떨어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결합하면서 대기업 정규직 속에는 보수적인 개인주의가 팽배해졌다. 대기업 정규직 ‘민주노조운동’의 대중적 기반은 빠르게 무너져 내렸다. ‘민주노조운동’의 약화는 대기업 정규직에도 자본의 더 강화된 공세를 가능케 했고, 이는 ‘민주노조운동’을 더욱 약화시켰다. 이전 편 보기 3부 패배와 퇴보 (1998-2008) [시대배경] 신자유주의 구조조정 [1] 구조조정과 정리해고에 맞선 투쟁 [2] 민주노조운동의 후퇴와 비정규직 확산 [3] 비정규직 문제를 둘러싼 대결 [4] 민주노조운동의 위기 [5] 노동자 정치세력화 열망과 민주노동당 2005년 10월 20일 강승규 수석부위원장 비리사태에 따른 민주노총 집행부 총사퇴 기자회견이 열린 서울 영등포 민주노총 기자회견장에서 피켓시위를 벌이던 반대파 조합원이 기자회견장에서 밀려나와 부숴진 피켓과 함께 복도에 서 있다. © 시민의신문 양계탁 1) 정규직과 비정규직으로 분할돼 자본주의에 사로잡힌 노동자들 IMF 외환위기 이후 한국의 노동자들은 정규직과 비정규직으로 분할됐다. 비정규직이 최저생활로 내쫓기며 ‘빈곤화’하는 동안, 대기업 정규직은 ‘개량화’하는 역설적인 과정이 동시에 일어났다. 노동자들의 분할은 경제적 분할을 넘어 사회적 분할로 발전했다. 이는 정규직과 비정규직 모두가 자본주의 체제에 고통스럽게 사로잡혀 있으면서도 쉽사리 사태의 본질을 인식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대기업 정규직들은 대체로 1987년 노동자대투쟁 이후 민주노조운동의 성장과 쇠락이라는 경험을 집단적으로 함께 했다. 1987년 이후 한동안 대기업 정규직들은 ‘노동자들이 단결하고 투쟁하면 많은 것을 성취할 수 있으며 나아가 세상을 송두리째 바꿀 수도 있다’는 희망과 자신감을 공유했다. 그러나 IMF 외환위기 시기 대규모 정리해고 공세 앞에서 한편으로 민주노조가 갖는 힘의 한계를 절감하고 다른 한편으로 지도자들의 배신에 절망하거나 길들여졌다. 대기업 정규직들의 의식에는 결정적인 변화가 일어났다. 대기업 정규직들의 뇌리 깊숙이에는 ‘신자유주의 세계화라는 거대한 흐름 속에서 자본이 무자비한 공세로 나오는데 노동자들이 아무리 노동조합으로 단결하고 투쟁하더라도 이겨낼 수 없다’는 패배적인 의식이 강하게 자리 잡혔다. 하지만 대기업 정규직들은 자본의 대규모 정리해고 공세에 맞서 만만치 않은 저항력을 보여주기도 했다. 이 때문에 일상적 구조조정의 시기로 넘어온 이후 자본의 공세는 주로 비정규직에 집중됐으며, 정규직에 대한 공세는 임금과 고용을 보장하는 대신 노동강도를 높이는 형태로 펼쳐졌다. 상대적으로 높은 임금을 받음으로써 일정한 여유자금까지 굴릴 수 있게 된 다수 대기업 정규직들은 2000년대 초반 이후 금융자본이 주도한 부동산·주식 거품 팽창에 합류하면서 덩달아 명목상 자산가치가 급등했다. 처음에는 주식에 손대다가 낭패를 보는 경우도 많았지만, 나중에는 거품이 워낙 팽창한 탓에 부동산과 주식에 뛰어들어 번 돈이 임금 소득과 엇비슷한 경우도 그리 드물지만은 않게 됐다. 다수의 대기업 정규직들은 갑자기 많은 돈을 만지게 되자 씀씀이가 크게 늘어났고 그럴수록 물질적 과시욕과 더 많은 소비에 빠져들었다. 노동자들이 정규직과 비정규직으로 분할된 현실은 대기업 정규직의 의식에 큰 영향을 미쳤다. 다수의 대기업 정규직들은 비정규직의 비참한 삶을 바라보며 연민이나 연대의식을 느끼는 것 이상으로 상대적으로 나은 노동조건과 소비능력을 가진 자신에 대한 우월감과 안도감을 느꼈다. IMF 외환위기의 충격적인 경험을 잊지 못하는 대기업 정규직들은 어느 날 갑자기 정리해고 위협 앞에 다시 서게 될지 모른다는 두려움을 늘 떨치지 못했다. 그런데 그럴수록 다수의 대기업 정규직들은 정리해고 당할 가능성을 줄이고 정리해고 당하기 전까지 최대한 벌어두기 위하여 회사가 잘 나가고 우리 부서에 보다 많은 일감을 끌어올 수 있도록 적극 협력해야 한다는 ‘노사협조주의’와 ‘물량지상주의’에 빠져들었다. IMF 외환위기 이후 대기업 정규직들의 의식은 과거의 상당히 선명했던 노동자 의식과 매우 다르게 뒤죽박죽 완전히 헝클어져 버렸다. 나날이 강화되는 노동 강도는 그들의 삶을 더욱 지치게 만들었지만, 갈수록 비인간적인 노동으로 내모는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의식은 좀처럼 성장하지 못했다. 한 때 초보적인 수준이나마 어느 정도 형성됐던 정규직의 계급의식은 ‘해 봤지만 안 되더라’는 패배주의, ‘돈 쓰는 재미’에 허우적거리는 소비주의, ‘비정규직에 비하자면 이게 어디냐’는 배부른 노예의 심리, ‘벌 수 있을 때 악착같이 벌어야 한다’는 초조함 따위에 갉아 먹히며 왜곡과 타락, 나아가 해체의 과정을 밟아갔다. IMF 외환위기 이후 1500만 노동자의 절반을 넘어 850만에 이른 비정규직은 정규직에 비해 상대적으로 다양한 사회적 구성을 가졌다. 처음부터 비정규직으로 일한 젊은 노동자들, 정규직으로 있다가 비정규직으로 밀려난 나이든 노동자들, 정년퇴직 이후에 다시 비정규직으로 일하는 늙은 노동자들, 가사노동의 부담까지 이중으로 안고 사는 여성 노동자들, 학비나 용돈을 마련하려는 학생 노동자들, 높은 학력에도 안정된 일자리를 구하지 못하는 지식인 노동자들, 소규모 자영업을 하다 몰락한 노동자들, 농사를 짓다 망한 노동자들, 머나먼 한국으로 돈 벌러 온 이주 노동자들 등등. 그 고용형태 또한 가지각색이었지만, 비정규직은 늘 고용불안에 시달려야 했다. 대다수 비정규직의 임금은 법정 최저임금을 넘나들거나 그보다 약간 높은 수준에 걸쳤다. 노동 강도 또한 매우 높았다. 갈수록 인간 이하의 삶으로 내몰리지만, 비정규직의 굴레를 벗어날 길이 도무지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비정규직이 놓여 있는 비참한 조건이 곧 선명한 노동자 의식을 만들어 주지는 않았다. 비정규직은 대체로 1987년 이후 펼쳐진 민주노조운동을 경험하지 못했다. 대다수 비정규직은 노동자들의 단결과 투쟁이 만들어 내는 힘을 최소한의 수준에서도 경험하지 못했다. 이질적인 사회적 구성과 불안한 고용 그리고 작업장의 분산 등은 초보적인 단결마저 더욱 어렵게 했다. 그래서 비정규직은 초보적인 노동자 의식조차 쉽사리 세우지 못했다. 노동자들이 정규직과 비정규직으로 분할된 현실은 비정규직의 의식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정규직을 ‘마녀사냥’하는 자본가들의 이데올로기 융단폭격 속에서, 상당수 비정규직은 자신들이 처한 비참한 현실의 책임이 자본주의 체제나 자본가가 아니라 ‘집단이기주의에 빠진’ 정규직에게 있다고 여겼다. 정규직에 대한 부러움과 원망 그리고 분노는 비정규직이 자본주의 본질을 꿰뚫는 계급의식의 형성으로 좀처럼 나아가지 못하도록 방해했다. 오늘날 민주노조운동은 심각하게 병들어 있다. ‘노동계급의 단결’을 실현하려는 정신은 심각하게 퇴행하여 대중운동 자체가 사업장·고용형태 등 갖가지 울타리 속에 갇힌 채 분열되어 있다. 외형적으로는 산별연맹을 넘어 산별노조 건설이 대세로 되는 시대지만, 민주노조운동이 폭발적으로 터져 나오던 80년대 후반 대중적으로 실현되었던 계급적 연대의 수준은 흘러간 옛이야기가 되어버렸다. 여기에 기아·현대자동차노조 일부 타락한 간부들의 취업비리와 민주노총 전 수석부위원장의 비리 사건이 겹쳐져, 민주노조운동의 위기는 더욱 깊은 수렁으로 빠져들고 있다. 마치 망망대해에 떠있는 난파선처럼 방향을 잃어버린 노동자들은 어디에서 희망을 찾아야 할지 고통스러워하고 있다. 노동자계급의 단결과 연대, 투쟁의 정신이 심각하게 후퇴한 현실의 민주노조운동 속에서 비정규직노동자투쟁은 심각한 고립과 박탈의 장벽에 부딪혀야 했고 자본과 정권에 의해 각개격파 당해야 했다.[1] 비정규직 노조운동은 도덕적 우위는 갖고 있되 대중적 힘은 아직 갖고 있지 못했다. 자본가들이 노동조합 건설과 활동이 거의 불가능하도록 설계하여 법과 제도로 옭아매고 있는 비정규직들 속에서 노동조합의 뿌리를 내려간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다. 비정규직 대다수가 정규직에 대한 부러움과 원망 그리고 분노에 사로잡힌 채 자본주의 본질을 꿰뚫는 계급의식으로까지 나아가지 못함으로써, 비정규직 운동은 스스로 큰 힘을 만들어 내지 못했고 정규직 운동의 한계를 넘어 노동자계급 전체를 결집시키는 구심점으로도 서지 못했다. 2) 현대차노조의 위기 현대차노조는 1995년 양봉수 열사 분신투쟁을 계기로 민주노조를 재건하여 1996~97년의 노개투 총파업에서 핵심 투쟁동력으로 역할하면서 민주노조운동의 중심으로 부상했다. 여기에 1999년 현대자동차서비스와 현대정공 자동차생산부문의 현대자동차 통합을 계기로, 현대자동차서비스노조와 현대정공노조까지 통합되면서 더욱 덩치가 커졌다. 현대차노조는 조합원 수가 3만에서 4~5만으로 늘었고, 울산공장·아산공장·전주공장의 생산직·사무직에 판매·정비·연구 분야까지 다양한 직군들을 망라하게 됐다. 단일 자동차공장으로는 세계 최대 규모인 울산공장을 주된 기반으로 하면서도 ‘한라에서 설악까지’라는 노보 이름처럼 전국적 조직망을 갖게 됐다. 현대차노조는 민주노조 재건 이후 1996년부터 2008년까지 매년 임금·단체협약·고용을 둘러싸고 파업을 전개했다.[2] 현대차노조의 파업은 노조의 조직력과 컨베이어 작업의 특성이 결부되면서 거대한 공장의 생산을 확실히 중단시키는 힘을 갖고 있었다. 또한 5~6천 명에서 1~2만 명 정도가 모이는 자체 조합원 집회를 수시로 개최할 수 있는 힘도 갖고 있었다. 2000년대 초중반 현대차노조가 가진 투쟁력은, 민주노총 산하 제조업 단위노조 대다수의 투쟁력이 부실해진 상황과 맞물리면서 상대적으로 더욱 돋보였다. 따라서 그 시기 현대차노조는 민주노총과 금속연맹이 전개하는 다양한 총파업에서 핵심 동력 역할을 했다. 현대차노조의 중심적 위치를 뒷받침하는 또 하나의 요소는 ‘노동자 정치세력화’였다. 2000년대 초중반 현대차노조 조합원들이 밀집 거주하는 울산 북구는, 민주노총의 후원을 받은 민주노동당이 국회의원, 구청장, 시의원, 구의원을 절반 이상 휩쓸었다.[3] 그러나 2000년대 중반 현대차노조는 여러 측면에서 위기에 직면했다. ‘현대차의 내부 상황을 들여다보면 현대중공업 못지않게 무너졌다’는 목소리도 심심치 않게 나왔다. 현장 노동운동이 거의 초토화되고 수십 명의 고립된 활동가들만이 남은 채 노동조합 자체가 완전한 노사협조주의로 전락한 현대중공업의 노동운동과, 민주노총의 중심 사업장으로 여전히 역할하고 있는 강력한(?) 노동조합을 가진 현대자동차의 노동운동은, 적어도 현 시점에서는 분명히 큰 차이가 있다. 그러나 “이미 중공업 못지않게 다 무너졌다”는 탄식을 근거 없는 비관주의로만 몰아붙이기에는 사태의 전개가 그리 단순하지 않아 보인다. 전·현직 노조간부들이 채용비리에 연루되어 줄줄이 구속되고, 조합원의 2/3가 노조간부들의 ‘빨간 조끼’를 특권과 관료주의의 부정적인 상징으로 인식하며, 비정규직과 현장 활동가들에 대한 관리자·경비들의 폭력이 일상화되고 있는 최근의 상황 전개는 현대자동차노조가 겪고 있는 ‘위기’의 폭과 깊이가 결코 간단치 않음을 보여준다. 현대자동차노조가 만만치 않은 위기를 겪고 있다는 것은, 노조 스스로가 혁신위원회 구성에 나설 만큼 이미 ‘공식적이고 공공연한’ 사실이다.[4] ◎ 위기의 근원 - 1998년의 패배와 대안의 부재 1998년 이전에 현대차노조 조합원들은 여러 차례 ‘가장 전투적인 노선과 세력’을 선택했다. 그 시기에는 ‘전투적이고 계급적일수록 대중적인’ 상황이 흔하게 벌어졌다. 조합원들은 기존 집행부의 직권조인, 노사협조주의, 투쟁회피를 단호하게 비판하며 점점 더 전투적인 세력을 집행부로 밀어 올렸다. 상당한 명망을 가진 이들도 조합원들의 투쟁의지를 제대로 받아 안지 못하면 한 번에 무너지는 것을 자주 볼 수 있었다. 도중에 조합원들이 어용 집행부를 다시 선택하는 일이 있었지만, 그것은 민주 집행부의 투쟁회피에 대한 실망 때문이었다. 비 온 뒤에 땅이 더 굳어지는 것처럼, 1995년 어용 집행부 아래서 벌어진 양봉수 분신과 비공인파업을 거치면서 조합원들의 마음에는 민주노조가 더 굳세게 뿌리내렸다. 1996~97년 노개투 총파업과 1998년 정리해고 저지투쟁에 열성적으로 참여하던 조합원들의 가슴 속에는 민주노조를 통해 세상과 삶을 바꿔내겠다는 열망과 자신감이 가득했다. 그러나 1998년의 패배는 조합원들의 의식에 큰 타격을 가했다. 조합원들은 1998년의 패배를 ‘노동조합은 앞으로도 정리해고를 막아내지 못할 것’이라는 의미로 받아들였다. 그렇게 열심히 잘 싸웠는데도 패배했는데, 앞으로는 패배의 경험 때문에 그만한 투쟁도 만들어지지 않을 것이고 따라서 패배가 더욱 불가피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민주노조로 단결한다면 세상을 바꿔내고 우리의 삶을 지켜낼 수 있으리라는 믿음이 깨져 나갔다. 이제 민주노조를 믿을 수 없다면, 각자가 살 길을 찾아야 했다. ‘일상적인 고용불안’에 시달리게 된 조합원들은 머지않아 회사가 다시 정리해고의 칼날을 겨누기까지 최대한 많은 돈을 벌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제 노동조합에게 바라는 것은 과거와 같은 ‘민주노조를 통한 위대한 투쟁과 변화’가 아니라 (어떤 방법을 써서든) 당장 한 푼이라도 더 벌게 도와달라는 것이었다. 조합원들이 이렇게 냉소적인 태도를 굳히게 된 데에는 패배의 상처를 극복할 진정한 대안을 제시하는 활동가들이 현대차노조 안에 사실상 부재했다는 점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1998년의 패배는 정리해고를 결코 받아들일 수 없다는 조합원들의 투쟁의지를 지도부가 배신하는 형태로 전개됐다. 만일 현대차노조 안에서 전투적·변혁적 활동가들이 1998년의 노조 지도부가 가졌던 투항적 노선을 단호하게 비판하면서 강고한 계급적 단결투쟁의 건설이라는 대안을 명확히 제시하고 일관되게 실천해 나갔다면, 상황은 많이 달랐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되지 못했다. 현대차노조 안에도 전투적·변혁적 지향을 가진 활동가들이 상당한 규모로 존재했다. 1995년 현장조직 민투위로 결집한 이들 현장파 활동가들은 1996~97년 노개투 총파업과 1998년 정리해고 저지투쟁을 아래로부터 주도했다.[5] 그러나 2001년 민투위 집행부는 김대중 정권의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에 맞선 대반격의 분수령이 될 수도 있었던 7·5 총파업에 불참하여 사실상 무산시킴으로써 계급적 단결투쟁의 대의를 정면으로 배신했다. 2004~05년의 민투위 집행부는 비정규직 노조가 100여 명의 해고자를 내며 처절한 투쟁을 이어가는 데도 사실상 외면했는데, 역시 계급적 단결투쟁의 대의에 대한 정면 배신이었다.[6] 민투위 활동가들은 왜 자신의 주장을 일관되게 실천하지 못했을까? 그 핵심 원인은 사상적으로 견결하게 단련되고 무장하지 못한 점에 있었다. 현장 조합원들 사이에서 전투적인 분위기를 주도하면서 투항적이고 타협적인 지도부를 비판하는 것과 노동조합 집행부를 맡아 정권과 자본의 십자포화를 뚫고 전투적·변혁적 노선을 관철해 나간다는 것은 차원이 다른 문제였다. 민투위 활동가들은 비판적 현장활동에는 능숙했지만, 계급적 단결투쟁을 과감하고 단호하게 이끌고 나갈 준비는 돼 있지 않았다. 물론 민주노조에 큰 희망을 걸었던 조합원들에게 결정적인 좌절감을 안긴 책임이 현장파 활동가들에게만 있지는 않았다. 중앙파 집행부는 1998년 정리해고 저지투쟁에서 투항적 노선을 고집함으로써 자멸적 패배를 초래했다. 국민파 집행부는 2000년 사내하청 대규모 투입을 주도했고, 한겨레신문 광고비 대납 사건을 일으켰다.[7] 그런 점에서 현대차노조 조합원들에게 ‘1998년의 패배’란 1998년 정리해고 저지투쟁에서의 패배를 정점으로 하되, 1996~97년 노개투 총파업의 패배, 1998년 2월 민주노총의 정리해고 노사정 합의, 2000년 사내하청 대규모 투입과 광고비 대납 사건, 2001년 현대차노조의 7·5 총파업 불참 등 일련의 사건들로 이어진 복합적이고 총체적인 패배였다. 조합원들의 의식을 변화시킨 또 하나의 변수는 회사의 집요하고 치밀한 이데올로기 공세였다. 회사는 1998년 투쟁 이후 다양한 사내 언론 매체를 구축하고 일상적 이데올로기 공세를 지속적으로 전개했다. 회사가 펼친 이데올로기 공세의 핵심은 고용불안을 조장하는 것이었다. 국내외 경제사정이 어려워서 회사 전망이 불투명하다는 선전은 수시로 되풀이되는 단골 메뉴였다. 조합원들이 갖게 된 두려움, 즉 회사가 어려워지면 머지않아 또 정리해고가 올 것이고 그 때는 노조가 더 형편없이 막지 못할 것이라는 두려움을 회사는 십분 활용했다. 회사가 어렵다는 분위기가 확산될수록 조합원들은 고용불안에 시달렸고 악착같이 돈을 벌어야겠다는 심리 상태로 빠져들었다. 2000년대 초중반 현대차는 창사 이래 최대 매출, 최대 순익의 기록을 거듭 갈아치우면서 초국적 자본으로 도약[8]하고 있었지만, ‘회사 전망이 불투명하다’는 집요한 선전은 조합원들 사이에서 상당한 효과를 보았다. 회사의 이데올로기 공세는 종업원 의식을 강화하고 계급적 단결투쟁을 차단하기 위한 것이기도 했다. 고용이 안정되려면 회사가 잘 나가야 하니, 회사의 경쟁력을 위해 조합원이 양보하고 협력해야 한다고 선전했다. 현대차의 울타리를 벗어난 연대투쟁이나 총파업 참여는 조합원(종업원)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남의 일 관여’나 ‘정치투쟁’일 뿐이라고 규정하면서 회사의 경쟁력을 약화시켜 고용불안을 초래할 것이라고 공격했다. 비정규직 투쟁이 시작된 이후에는 사내하청을 집요하게 ‘다른 회사 사람’으로 규정하며 정규직 사이에서 단결과 연대 의식이 성장하지 못하도록 방해했다. ◎ 위기의 양태 - 계급적 전망을 상실한 채 물량확보에 몰두 현대차노조 조합원들이 빠져든 ‘일상적인 고용불안’ 정서는 ‘물량을 확보해야만 고용을 지킬 수 있다’는 생각으로 이어졌다. 대다수 활동가들 역시 조합원들의 고용을 보장해주기 위해서는 물량을 확보하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활동가들이 점점 더 물량확보 투쟁과 신차확보 투쟁에 집중하면서 ‘물량이 곧 고용’이라는 왜곡된 논리가 확대재생산 됐다. 당장 한 푼이라도 더 많은 임금을 중요시하게 된 조합원들은 1998년 이전과 달리 잔업과 특근을 선호하게 됐다. 조합원들은 ‘벌 수 있을 때 최대한 벌기 위해’ 최대한의 잔업과 특근을 원했다. 잔업과 특근을 할 만큼 충분한 물량이 있는 한 자신이 ‘잘릴’ 염려는 없다고 위안할 수 있다는 점에서도 잔업과 특근을 원했다. 요즘 … 어느 사업부 할 것 없이 … 빨간 날짜는 빈틈없이 공장을 가동시키고 있다. 이런 실정이다 보니 한 달 특근이 5~8개는 우습게 넘고 있다. … 현장의 대·소위원들도 특근에 있어 어떠한 큰 사안이나 큰 명분 없이 특근거부가 조직되는 것은 예전처럼 쉬운 일이 아니라서 원칙적 문제제기에 맴돌고 있는 실정이다. 특근을 희망하는 현장의 요구 또한 만만치 않아 현장의 대소위원들의 입장이 곤란한 지경까지 온 것이다.[9] 대의원대회에서 일요 특근을 안 하기로 결의했지만 일부 공장에 특근이 이루어지면서 일어나는 불협화음이 조직력 훼손을 우려할 만큼 심각한 수준으로 확대되고 있다. … 조합원들은 특정사업부나 부서의 특근 소식에 예민하게 반응하고 집행부나 대의원, 활동가를 대상으로 불만을 토로한다. 심지어는 급여수준은 노동조합 지침에 따르는 정도에 반비례한다는 자조적인 비난이 … 고개를 들고 있고, 특근하지 말자는 대의원에게 ‘왜 우리만 희생양이 되어야 하냐’고 따지는 조합원도 많다고 한다.[10] 계속되는 철야 특근은 시급제 노동자들의 육체만이 아니라 정신까지 갉아먹어 이제는 ‘내 철야 내가 하는데 노동조합이 뭔 상관이냐’, ‘너거 마음대로 철야 거부하냐’는 등의 반발 때문에 현장의 간부와 노동조합은 철야를 함부로 제한하지 못한다.[11] 2003년 주5일제(주40시간제)가 도입됐지만, 실제로는 연간 3,000시간에 육박하는 노동시간이 2000년대 초중반 내내 현대차에서 계속됐다. 주야맞교대를 하면서 주당 60~70시간의 장시간 노동을 하는 게 일반적이었다. 그러다 보니 현대차에서만 매년 10명을 넘나드는 과로사가 계속 발생했다. 지금 전 공장이 철야 특근으로 밤을 새고 있다. … 각 사업부별 공장장에게 경쟁 심리를 조장하여 생산량 달성에 순위를 매겨 미달성 사업부 공장장은 잘라버리겠다는 협박을 서슴지 않는다. … 집행부에서는 각 사업부 특성에 맡겨 사업부 대의원회에서 알아서 하라는 입장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노동조합이 조합원의 건강권을 포기하고 과로에 목숨을 걸도록 하는 아주 무책임한 일이 아닐 수 없다. … 노동조합이 이렇게 휴일 특근 철야를 부추기는 양상은 절대 바람직하지 못하다. 01년 울산공장에서는 총 19명의 과로사가 발생하였다. … 올해도 벌써 7명의 조합원이 과로사로 목숨을 잃었다.[12] 물량확보에 대한 조합원의 몰두는 생산계획 달성이라는 자본의 이해관계와 정확히 일치했다. 현대차 자본은 생산계획 달성을 최우선의 목표로 삼았는데, 생산계획은 생산설비가 허용하는 최대치로 설정됐다. 이런 사측의 생산계획을 노동자들이 스스로 달성하기 위해 노력하고, 나아가 더 많이 생산할 것을 요구하게 된 것이었다. 당연히 그 과정에서 신규인원 충원, 노동시간 단축, 휴식시간 확보, 노동강도 저하 같은 요구들은 제대로 제기될 수 없었다. 노조가 물량확보에 몰두하면서, ‘투쟁’을 하면서도 잔업·특근을 계속하거나 회사의 생산계획을 모두 달성하는 어처구니없는 모습도 나타났다. 역으로 회사는 잔업·특근을 시혜적으로 베풀거나 또는 뺏어버림으로써 물량을 갖고 노동자들을 통제할 수 있게 됐다. 작년 12월 회사 측은 3공장 대의원회에 8개의 토·일 철야생산을 요청하였고, 성탄절도 철야생산을 요청하였다. … 올해 1월에는 내수시장 위축으로 철야생산을 할 수 없다고 한다. … 문제는 갑작스레 철야생산이 없어지다 보니 현장조합원들이 고용불안을 심각하게 생각한다는 것이다. … 현장조합원들은 물량감소로 또다시 고용위기가 오는 것 아니냐며 불안해한다. … 현장에서는 ‘일 없을 때는 알아서 조심해야 한다’는 말이 공공연하게 나돌고 있다.[13] 작년 3공장 조합원들은 주말에도 … 몸이 부서지도록 일을 했다. 또한 일이 많을 때 한 푼이라도 벌어놔야, 나중에 일거리가 없고 회사에서 내팽개치더라도 최소한의 준비를 위해 죽을 둥 일을 했다. 사측은 조합원들의 불안한 심리와 주말 특근에 맞춰진 생활임금을 이용하여 생산물량이 없다는 핑계로 17대 대의원들을 시험하면서 현장을 사측이 원하는 대로 만들려 하고 있다. … 조합원들의 불안감을 이용하여 사측이 물량을 조절할 경우 파업 한 번 할 수 있을지 걱정이 된다. … 이대로라면 사측에 의하여 눈치도 채지 못하고 현장권력이 잠식당할 것만 같다.[14] 4공장 조합원들이 … 수개월째 8+10 근무형태가 계속되고 있다. … 4공장 고용안정대책위가 구성되어 단협을 준수할 것을 요구하며 철야농성에 돌입한 바 있다. … 4공장 물량부족 사건의 발단을 보면, 지난 2000년 그레이스 차종을 기아 광주공장으로 이관할 당시 사측은 … 신규모델 투입을 약속했으나 일방적으로 신차 개발을 취소하였고, 02년에는 수출물량을 … 일방적으로 터키로 이관했다. … 사측이 이 문제에 대해 진정 책임지는 자세라면 8+10의 근무형태가 계속 이어져서는 안 된다. … 사측은 … 타 사업부에 대해 … ‘4공장을 봐라. 일이 있을 때 특근 등 열심히 일을 하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15] 지난주 3공장 대의원회는 치열한 논쟁 끝에 철야근무를 하기로 결정했다. … 잔업을 끊은 사업부 대표가 고소고발 되고 강병태 소위원이 해고가 결정되었음에도 철야를 강행한다니 이해가 되지 않는다. 더구나 이번 철야는 재고비축 철야로서 … 투쟁해야 할 시기에 철야를 하는 것은 옳은 일이라 할 수 없다.[16] 불과 한 달 전까지만 하더라도 2공장에 대해 10-10 근무에 철야를 강요하던 사측이 갑자기 4월 생산계획 설명회에서는 … 재고가 쌓여 8-8근무를 시킬 수밖에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 이는 사측의 고도화된 술수로 조합원의 생존권을 유린하는 작태이자 기만행위이다. … 이는 사측이 … 전반적인 물량 축소를 통해 현장을 혼란에 빠뜨리고 불파 문제를 비롯한 모듈 협상과 CM카 조기투입을 위한 각종 협상에서 우위를 점하기 위한 얄팍한 술수이다.[17] 사측은 안전사고로 인한 라인 정지에 대한 어떠한 면책합의도 없다며, 5명의 대·소위원들이 고소고발, 손해배상, 징계를 받아들이지 않을 경우, 5공장 전체 조합원들에 대해 잔업과 특근을 취소하겠다며 협박했다.[18] 노조가 물량에 몰두하며 생산에 적극 협조한 것은 회사에 큰 이득을 안겨 주었지만, 회사의 욕심은 그에 그치지 않았다. 회사가 보기에 현대차노조 조합원들의 임금은 너무 높았다. 회사는 노조의 힘이 미치지 않는 공간으로 생산을 최대한 이동시키고자 했다. 사내하청을 확대하거나, 사외에서 제작되는 모듈의 비율을 확대하는 게 그 방안이었는데, 비정규직 노조가 2003년에 출범한 이후로는 모듈외주화 확대가 주된 방안이 됐다.[19] 회사는 각 사업부에 신차가 투입될 때마다 모듈외주화 비율을 점점 높여 나갔다. 회사는 각 사업부에 신차를 배정해서 물량을 보장해 주는 대가로 그와 같은 일상적 구조조정을 관철시켰다. 신차가 투입될 때마다 모듈외주화 확대에 맞선 투쟁이 사업부별로 진행됐지만, 회사의 의도가 거의 그대로 관철됐다. 회사는 종종 복수의 사업부에 동일한 물량 배정을 약속함으로써 사업부 간 물량경쟁을 유도했는데, 노조 내부의 분열을 조장하여 더욱 용이하게 구조조정을 관철하기 위해서였다. 신차 JM카 투입을 앞두고 사측의 일방적 합의사항 파기로 인해 2공장 대의원회가 2주째 천막 철야농성을 벌이고 있다. 문제는 회사가 JM카 생산을 2공장 물량으로 합의해 놓고, 뒤로는 5공장에 20만대 생산설비 체제를 갖추는 식으로 이중 합의를 통해 물량을 가지고 노노 분열을 조장하고 있다는 것이다. 회사는 그동안 물량 이관이 있을 때마다 해당 사업부에 선 물량보장 후 약속파기를 하는 수법으로 장난을 쳐왔다. 이것은 2공장 트라제, 3공장 라비타, 4공장 그레이스 물량이전에서 잘 말해주고 있다.[20] 모듈외주화로 현대차에서 일감이 빠져 나간 곳은 현대모비스와 현대글로비스를 중심으로 철저히 수직계열화 돼 있는 소규모 부품하청업체이거나 또는 비정규직으로만 구성된 현대모비스 모듈조립공장이었다. 이런 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은 대체로 법정 최저임금에 턱걸이하는 수준이었으며, 열악한 근로조건과 높은 노동강도 때문에 6개월 근속이면 왕고참 취급을 받을 정도로 유동성이 심했다. 동일한 물량을 놓고 현대차 안에서 정규직이 작업하는 경우와 부품하청업체에서 비정규직이 작업하는 경우를 비교하면, 노무비가 두세 배 정도 차이가 났다. 그러나 모듈외주화 확대에 대한 현대차노조의 대응은 사실상 무대책이었다. 신차투입 협상이 시작될 때마다 ‘모듈외주화 저지’의 목소리들이 쏟아지지만, 머지않아 결국 현재의 고용을 (그것도 대개 사내하청을 제외한 정규직만의 고용을) 보장받는 선에서 회사의 모듈외주화 계획을 거의 그대로 수용하며 타결됐다. 그리곤 무관심이었다. 모듈외주화로 빠져 나간 일감이 어떤 조건의 노동자들에 의해 만들어지는지, 그들이 처한 열악한 노동조건이 자신들의 미래와 어떤 상관이 있을 것인지 최소한의 관심도 없었다. 이미 절반 가까운 물량이 모듈 작업으로 처리되는 상황에서, ‘모듈외주화 저지’만으로 사태에 대처할 수는 없었다. 모듈 작업이 이루어지는 공정의 노동자들을 노동조합으로 조직해 내고 그들의 노동조건이 현대차 내부의 노동조건과 유사한 수준까지 개선될 수 있게 하는데, 현대차노조는 누구보다 사활적인 이해관계를 갖고 달려들어야 했다. 그러나 2000년 무렵 현대차에서 모듈화가 공론화되기 시작한 뒤 자본은 생산과정에 엄청난 변화를 만들어 갔지만, 모듈공정 노동자 조직화 등에 대한 현대차노조의 대응은 거의 아무 것도 진전된 게 없었다. 현대차노조 전반이 계급적 전망을 상실한 채 눈앞의 물량확보에만 몰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정규직 임금의 60%밖에 받지 못하는 사내하청, 강제적인 단가인하의 부담을 고스란히 떠안는 부품하청업체 노동자들에 대한 초과착취를 성공적으로 관철시키며, 현대자동차 자본은 엄청난 이윤을 챙겼다. 그러나 현대차노조는 계급적 전망의 부재를 고스란히 드러냈다. 사내하청의 임금 인상을 생색내기 수준에서 건드렸을 뿐, 부품하청업체 노동자들이 강요당하던 초과착취 문제에 대해서는 거의 무대책으로 일관했다. 현대차노조의 계급적 전망 상실은 사회적 고립의 위기로 돌아왔다. 특히 총자본과 보수언론의 이데올로기 공세를 넘어 광범한 노동자·민중으로부터 고립돼 가는 위기였다. 현대차노조 조합원들은 2000년대 초반을 경과하면서부터 명절에 고향 가는 발걸음이 예전 같지 않아졌다. 고향에 가서 친척·친구들과 나누는 이야기들이 결코 즐겁지 않았기 때문이다. 예전에는 현대차노조가 정권과 자본의 무수한 탄압에 맞서 노동자·민중의 선봉에서 투쟁하는 존재로 간주됐기에 고향의 친척·친구들로부터 격려를 받았고, 투쟁의 무용담을 늘어놓기도 했다. 하지만 상황이 달라졌다. 현대차노조의 권리 향상은 전체 노동자·민중의 권리 향상과 별 상관이 없으며, 심지어 전체 노동자·민중의 권리를 침해한다는 비난까지 받게 됐다. 예전에는 선봉 투사로 추켜세우던 고향의 친척·친구들이 이제는 보수언론의 논리들을 줄줄 읊어대며 냉소적인 비난을 퍼붓기 시작했다. 현대차노조 조합원들이 가까운 친지들에게까지 느끼게 된 ‘사회적 고립’은 일차적으로 ‘현대차노조를 비롯한 대기업 노조의 이기적인 행동이 경제를 망친다’는 보수언론의 집중적인 이데올로기 공세 때문이었다. 하지만 과거에 안 먹히던 이데올로기 공세가 먹히게 된 이유가 있었다. 노동자계급 내부의 양극화였다. 정규직과 비정규직, 대기업과 중소영세기업 노동자들 사이의 격차가 IMF 외환위기 이후 갈수록 벌어졌다. 실업과 개인파산도 만만치 않은 수준이었다. 물론 그러한 양극화를 불러온 것은 일차적으로 자본의 책임이었다. 하지만 민주노조운동 또한 그러한 양극화를 해결하기 위해 어떤 식으로든 자기 역할을 요구받았다. 자본가계급은 보수언론을 앞세워 중소영세 비정규직을 위해 대기업 노조가 양보하라고 공격했다. 하지만 그것은 자본가계급에게만 좋은 일이기에 민주노조운동이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방향이었다. 민주노조운동이 가야 할 길은 중소영세 비정규직의 요구를 전면적으로 함께 내걸고 제대로 투쟁하는 것이었다. 현대차노조가 1998년의 패배를 올바로 극복하고자 했다면 그와 같은 계급적 단결투쟁에서 전망을 찾았을 것이다. 그러나 계급적 전망을 상실한 현대차노조는, 다른 대기업 노조들과 마찬가지로 그렇게 하지 않았다. 2000년대 초중반 현대차노조는 민주노총과 금속연맹이 조직한 수많은 총파업의 핵심 동력이었으며 그러한 총파업에는 중소영세 비정규직의 요구 또한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현대차노조는 민주노총과 금속연맹의 총파업 지침에 따라 형식적으로 파업에 임할 뿐 실제 총파업 요구에 대해서는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조합원들을 진지하게 설득해 나가지 않았기에 총파업에 참여한 조합원의 대다수가 집회에 참여하지 않고 그냥 퇴근했다. 이것은 대다수 조합원이 강렬한 의지를 갖고 지역 집회와 가두시위에 열성적으로 참여했던 1996~97년 총파업과 매우 달랐다. 11월 30일 비정규직 법안이 국회에서 통과되었다. 모든 것은 예상했던 바대로 진행되었다. 서로 죽일 듯이 물어뜯던 자본가 정당들은 이 법안이 통과되는 과정에서는 아주 조용했고, 형제처럼 평온했다. 법안의 내용은 이미 오래 전에 공지되었던 것 그대로였다. 부르주아 언론의 기만적인 대응도 마찬가지였다. 법안 통과시 총파업 투쟁을 경고했던 민주노총 지도부의 대응도 예상했던 바대로 진행되었다. ‘엄포용 기자회견’이 있고, 몇몇 사업장이 시한부 파업에 돌입했다. 현대차, 기아차 등 그나마 현장조직력이 살아 있다고 하는 극소수 사업장이 이른바 ‘정치파업’에 돌입한다. 그러나 파업의 열기는 낮고 그것마저도 생산타격과는 거리가 멀다. 한두 번의 시한부 투쟁이 끝나자 총파업 투쟁은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진다. 일부 비정규직 노조들이 분노에 찬 투쟁을 펼치지만, 그 힘은 아직 대단히 제한적이다. … 이런 상황이 민주노총의 꼭대기에 있는 조준호 국민파 기회주의 지도자들 때문이라고는 더 이상 말할 수 없다. … 현대차, 기아차와 같은 핵심 대공장 집행부에게 책임을 돌리는 것도 원인을 정확히 진단하는 것이 아니다. … 그 원인은 훨씬 더 깊은 곳에 있다. 조직 노동자들 속에서, 특히 조직 노동자의 중핵인 대기업 정규직 노동자들 속에서 ‘노동자 계급의식’이 실종되어 있다. 다수 노동자의 단결을 위해 헌신하고, 바로 이 단결의 확대 여부에 입각해 투쟁의 성패를 판단하는 노동자계급의 정신으로 이들이 무장해있지 않은 것이다. 이처럼 노동자계급의 단결을 이룩할 구심이 작동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는, 비정규직 법안 통과 정도가 아니라 그 이상의 공세 앞에서도 한국 노동운동이 결코 현 상황 이상의 모습을 보일 수 없다. 조금씩 움터 나오는 비정규직 노동자투쟁에서 실종된 구심을 대체할 희망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인가? 이것 또한 장담할 수 없다. … 97년 노개투 총파업의 패배, 그리고 연이어 일어난 대량의 정리해고에 무너져 내리면서 대기업 정규직 노동자 의식의 퇴행은 더욱 본격화되었다. … 단사 내의 이익, 혹은 일부 부서의 이익과 같은 조합주의적이고 실리주의적인 이익에만 갇혀버린 운동은 백년 천년이 지나도, 아무리 거대한 탄압이 휘몰아쳐도, 아무리 전국적이고 계급적인 쟁점이 부상하더라도 결코 노동계급적 운동으로 전진하지 못한다. 오히려 진실을 말하자면, 노동자계급의 정신이 실종된 운동은 그 본성상 지속적인 분열을 확대재생산할 수밖에 없다. 처음에는 단사 내의 단결에만 머물지만, 이어지는 시기에는 단사 내 정규직과 비정규직으로 분할되고, 다음으로는 정규직 내에서 부서별, 직종별 분열로 나아가며, 최종적으로는 개별화된 상태로 이행한다. … 당장 실제로 전개할 수 있는 투쟁의 범위와 무관하게, 노동자들이 스스로를 조직하고 투쟁에 나서는 정신이 ‘노동자계급의 단결 정신’에 얼마나 부합하는가에 의해서만 현재의 상황과는 다른 모습을 기대할 수 있다. 당장 힘이 부쳐서 커다란 투쟁으로 전진하지는 못하더라도, 그래서 단 4시간짜리 부분파업 심지어는 총회투쟁에 머물지라도, 여기에 합류하는 노동자들을 실질적으로 지배하는 정신이 무엇인가에 의해 그 투쟁의 성격은 달라진다. 노동자대중이 자기 투쟁을 전체 노동자계급 투쟁의 일부로 간주하는 법을 배우게 될 때, 그리고 다른 모든 곳에서 일어나는 노동자투쟁들을 전체 노동자계급 투쟁의 한 부분으로 받아들이고 최선을 다해 지지하고 지원해야 한다는 숭고한 책임감을 발전시킬 수 있을 때에만 노동운동은 비로소 계급적 방향으로 전진할 수 있다. 이것은 노동대중의 한복판에서 실천하면서 노동대중의 삶과 정신을 장악해가는 현장 활동가들의 계급적 의식이 없다면 결코 실현될 수 없다. … 모든 분열에 반대하고, 노동자계급 전체의 관점에서 대중이 사고하고 투쟁하며 매일의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일관되게 지도할 뿐만 아니라, 스스로 바로 그러한 행동의 모범을 모든 삶에서 실천해나가는 노동자의식으로 무장한 활동가들 없이는 이 상황을 결코 타개할 수 없다.[21] 현대차노조 집행부가 집중한 것은 자체 임금·단체협약 투쟁이었고, 실제 현장에서 조합원들과 활동가들이 몰두한 것은 물량확보였다. 당연하게도 광범한 노동자·민중에게 현대차노조는 양극화를 해결하기 위해 어떤 실질적인 노력도 하지 않는 것으로 인식됐고, 따라서 현대차노조의 ‘강력한’ 투쟁은 ‘그들만의 배부른’ 투쟁이라는 보수언론의 공격이 그대로 먹혀들었던 것이다. ◎ 위기의 고착 - 노조의 관료화와 부실화 2000년대 초중반 현대차노조 활동가들 전반은 관료주의적 타성에 깊이 빠져들었다. 현대차 노사 간의 교섭구조를 통해 해결될 전망이 보이지 않는 일들은 아예 손을 대려고 하질 않았다. 노사 간의 교섭구조를 통한 해결 가능성 여부가 실질적인 활동의 기준이 되어 버리자, 암묵적으로 자본이 설정한 반경 안으로 활동의 폭이 철저히 갇혀 버렸다.[22] 흐르지 않는 물은 썩기 마련이듯이, 정체된 노동조합 내부에 관료주의적 특권이 만연하고 심지어 부패와 비리마저 스며드는 것은 필연적인 경과였다. 현대차노조는 사회적으로 ‘그들만의 배부른’ 투쟁을 하고 있다고 비난받았지만, 정작 조합원들로부터도 갈수록 신뢰를 상실해 가고 있었다. 조합원들의 화살은 일차적으로 노조간부들의 특권과 관료주의, 나아가 부패와 비리에 대한 질타로 모아졌다. 특히 2005년 전·현직 노조 간부들이 채용비리로 줄줄이 구속되자, 노조간부들에 대한 조합원들의 실망감이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가 됐다.[23] 특권과 관료주의에 대한 조합원들의 질타는, 노동조합이 투쟁을 통해 확보한 권리나 투쟁의 상징물이라 하더라도 노조간부들이 전용해 온 것들에 대해서는 강한 거부감을 드러내는 양상으로 나타났다. 근무시간 중 대의원 활동에 대한 근태 인정, 전·현직 주요 노조간부들의 개인차량 사내 출입, 노조간부들이 착용해 온 ‘빨간 조끼’ 등이 특히 문제가 됐다.[24] 지금 노동조합 간부들의 모습은 어떠한가! 각종 선거에서 표를 구걸하고 당선만 되면 임기 동안 회사와 조합원 사이를 오가며 … 좋은 게 좋다는 식으로 적당히 해결한다. 노동조합의 각종 의결기구에서 의결된 사항이 마치 누가 보고라도 한 듯 금방 정보가 회사 측에 누출되고 … 빨간 조끼만 입으면 정문은 아무 때나 통과할 수 있도록 회사 측은 방치하고 있고 … 조합원들도 이젠 활동가를 존경하지 않는다.[25] 언제부터인가 대의원은 야간 근무를 하지 않고 특혜를 누리는 자리로 전락하고 있다. … 모 사업부는 … 대의원 당선되고 장갑 끼는 것 못 봤다는 소리가 나오는 실정이다.[26] 윤리강령 제정으로 대의원들의 특혜를 차단하고 현장활동을 혁신하는 계기로 만들어야 한다. 대의원 야간 근무하기, 회사와 술 안 마시기, 각종 회의결과 조합원 보고하기 등 하나씩 바꾸어야 한다.[27] 대의원들은 선거 때에만 투사가 되고 … 당선되면 작업장에도 투쟁 현장에도 보이지 않는다. … 기본적인 근태 문제를 확실하게 해야 한다. 각종 합의를 소위원, 조합원의 참여 속에서 합의하고 합의서는 공개해야 한다.[28] 노조 간부들의 특권과 관료주의에 대한 조합원들의 질타는 조합원들의 근본적 요구를 해결하는 데 노조가 상당히 무능력하거나 무관심하다고 여기는 가슴 깊은 실망감과 연결돼 있었다. 이를테면 조합원들은 잠재적인 고용불안으로 연결되는 해외공장 건설이나 모듈화 확대 등에 대해 노조가 뾰족한 대책 없이 끝없이 밀리고 있다고 여겼다. 수천 명에 달하는 근골격계 환자가 발생하고 1년에 10여명이 과로사로 죽어 나가는 데도 주5일제 도입 이후에도 주당 실질노동시간이 60~70시간에 달하는 것, 40대 이상의 조합원이 절반을 넘어섰는데도 생명을 갉아먹는 야간노동이 주야맞교대를 통해 계속되는 것에도 불만이 컸다. 현장에서의 선전문과 노동조합의 목소리는 점점 조합원들이 실리만 원한다라고 하면서 … 조합원들이 가지는 서글픔과 비참한 마음을 모르고 조합원들을 돈만 밝히는 실리주의자로 왜곡하고 있다. … 조합원들을 과로사로 내몰고 특근으로 내몬 것은 활동가들의 지도력 부재와 미래가 없는 정체된 활동 때문이다. 조합원들이 돈만 밝히는 실리주의자가 아니라 활동가들이 나태해진 것이다.[29] 조합원들이 ‘고용안정’에 매몰되면서 스스로 발목을 잡히자, 회사는 조합원들의 고용불안 의식을 더욱 부추기고 이용해, 물량조절·물량이동·외주화 등의 ‘생산유연화’와 비정규직화 등의 ‘고용유연화’를 가속시켰다. 이를 통해 생산성을 극대화하고, 이윤을 극대화했다. 물론 생산유연화와 고용유연화에 맞선 투쟁이 없지 않았다. 일상적 구조조정에 맞선 투쟁이 여기저기서 이어졌고, 비정규직도 투쟁에 나서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러한 투쟁들은 고용불안에 매몰된 노조의 전체 상황을 바꿔내지 못했고, 따라서 고립돼 각개격파됐다. 회사의 자신감이 커질수록 회사의 의도대로 순순히 따르지 않는 노동자들을 대하는 회사의 태도는 점점 더 거칠어졌다. 자신감을 갖게 된 회사는 생산 우선주의를 앞세워 목표한 생산량에 타격을 주는 행위에 대해 공격적으로 대응하기 시작했다. 현장투쟁을 수행한 활동가들을 징계하거나 해고하는 한편, 적극적으로 고소고발 및 손배가압류를 걸었다. 또한 경비대를 동원하고 첨단장비를 이용해 활동가들의 동향을 파악했다. 소지품 검사 등을 통해 일상적 통제를 하고 나아가 물리적 폭력을 가함으로써 활동가들을 위축시켰다. 이러한 현상은 시간이 갈수록 더욱 심해졌다. 4공장에서 노동조합 사찰 문건 및 노동조합 활동 개입에 대한 문건이 발견됐다. … 전 사업부에서 과장급 이상이 선무활동을 했다는 증거가 드러나고 있다. … 조합원 사찰내용은 충격적이다. 누구랑 어디서 무엇을 어떻게 왜 했는지에 대해 상세히 기록되었다. ‘가정방문 해서 협조 확약’, ‘경비 지원하면 협조 의사’, ‘가정방문 했으나 불투명’, ‘등산 함께 간 뒤 협조 확약’ 등의 사례들은 부당노동행위를 조직적으로 자행하고 있는 것과 같다.[30] 아산공장은 노동조합 간부와 하청지회 간부들에 대한 미행, 감시, 사찰 업무를 보는 경비대를 설치 운영하였다. … 또한 출퇴근시 정문과 쪽문에 검사대를 설치하고 소지품 검사를 실시했다. … 더 나아가 식당입구에 사측의 무인카메라가 24시간 작동되고 있다. … 노동조합 간부들의 식당 홍보 투쟁에서 하청지회의 중식투쟁, 일상적으로 식사하는 조합원까지 사측의 감시사찰 대상이었던 것이다.[31] 최근 1,2,3,4,5공장에 지원실이라는 것이 생겼는데 지원실장으로 발령받은 자들의 면면이 기가 막힌다. 판매본부에서 노동조합 탄압의 선두에 섰던 사람들이 졸지에 임원으로 승진되어 전진배치된 것이다. 이들 중에는 무술유단자와 폭력전과자까지 있다. 지원팀은 현장을 탄압하고 활동가들을 감시하고 사찰하던 곳이었다. 그런 지원팀을 지원실로 강화하여 본격적인 현장탄압을 시작하려는 것이다.[32] 또한 회사는 관리자들을 동원해 조합원들을 개별 접촉하여 인간관계를 쌓아 나갔다. 관리자들은 회식자리와 향우회·동호회 등을 적극 활용했다. 이렇게 확보한 영향력을 바탕으로 회사는 노조의 선거나 총회에 개입했다. 이러한 개입은 실제로 많은 효과를 거두었다. 회사 관리자들이 요즘 들어 부쩍 현장조합원들과 친한 척 하면서 현장의 동향을 파악하기 위해 밤낮을 가리지 않고 현장을 돌고 있다. … 회사 관리자들은 불파 투쟁과 05년 임단투에서 노동조합을 무력화시키기 위해 현장을 누비고 있는데 정작 노동조합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안타깝다. … 모두들 현장이 힘들다 하고 현장이 어용화가 되었다고 하지만 이것의 원인은 사측 관리자들이 밤낮을 설치며 현장을 뒤집고 다닌 탓일 것이다.[33] ◎ 2007년 성과금 공방 2007년 1월, 회사의 성과금 미지급을 계기로 현대차 노사 간에 전례 없는 충돌이 발생했다. 이 사건은 끝없는 위기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노조를 결정적으로 약화시켜 보고자 한 회사의 도발이었다. 노조가 가진 치명적인 약점들이 드러났지만, 현대차노조 조합원들은 강력한 단결력을 발휘하며 노조를 지켜냈다. 그러나 노조는 깊은 내상을 입었다. 2006년 7월 26일, 현대차 노사가 임금협약을 타결하면서 연말 성과금을 생산목표 달성과 연계하여 ‘목표 달성시 150%, 95% 이상시 100%, 90% 이상시 50%를 지급’하기로 했다. 그런데 공식 발표와 달리 노사협상 과정에서 회사가 ‘합의서 내용은 대외용이고 성과금은 생산실적과 상관없이 150%를 주겠다’고 구두로 약속했다.[34] 12월 28일, 회사가 생산목표 달성에 실패했다며 연말 성과금을 100%만 지급하겠다고 노조에 전달했고, 29일 실제로 100%만 지급했다.[35] 연말 성과금의 생산성 연동을 관철함으로써 ‘생산성 연동임금제’로 가는 길을 확실히 열겠다는 의지의 표명이었다. 노조 집행부가 ‘조합원 선물비리’로 조기 사퇴하게 된 어수선한 노조 상황을 틈탄 기습이기도 했다. 2007년 1월 3일 노조간부 80여 명이 회사의 울산공장 시무식장에서 분말소화기를 분사하며 행사를 방해했다. 노조는 성과금 특별교섭을 요구하며 잔업거부에 들어갔다. 4일 회사는 노조의 성과금 특별교섭을 거부하고, 시무식 폭력사태와 관련해 노조간부 22명을 고소했다. 노조는 즉각 본관로비 철야농성에 돌입했다. 5일 노조가 성과금 보충교섭을 요구했지만, 8일 회사가 보충교섭을 거부하고 노조를 상대로 10억 원의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제기했다. 노조는 10일 노조간부 1천 5백 명이 양재동 현대차 본사 상경투쟁을 벌인 뒤, 12일 임시대의원대회를 열어 ‘15일부터 파업 돌입’을 결의했다. 그런데 15일 오전 노조의 파업돌입을 몇 시간 앞두고 전직 노조 위원장이 배임수재 혐의로 검찰에 긴급체포 됐다. 2003년 7월 하순 임단협 협상을 잘 진행해 달라는 요청과 함께 회사 부회장에게서 2억 원을 받은 혐의였다. 현대차 비자금 조성 건으로 검찰 수사를 받은 부회장이 검찰에게 정보를 넘긴 것인데, 돈을 건넨 회사 임원은 공소시효가 만료됐지만 돈을 받은 노조 위원장은 공소시효가 남아 있는 상태였다. 현 노조 위원장은 2003년 당시 노조 사무국장이어서 같이 의심을 받을 수 있는 상황이었다. 노조의 파업을 와해시켜 보려는 회사의 치명적인 노림수였다. 그러나 15일 현대차노조는 주간조와 야간조 모두 4시간 파업을 성공적으로 치러냈다. 회사의 의도를 읽어낸 조합원들은 ‘어쨌거나 노조는 지켜내야 한다’는 위기의식으로 똘똘 뭉쳐 평소보다 더 강한 기세로 파업에 합류했다. 16일 노사협상이 시작됐다. 17일 주간조가 6시간 파업을 벌인 뒤, 오후에 노사가 합의에 이르렀다. 노조가 생산목표 미달분 만회에 협력하는 조건으로 회사가 50% 성과금을 지급하기로 하면서 사태가 일단락됐다. 2006년 성과금 50% 지급문제로 불거진 현대자동차 노사대결은 한국 노동운동의 현주소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모든 부르주아 언론의 맹폭격 앞에서 현자 노동조합은 사회적으로 고립되었다. 다행히도 노동조합이 와해되는 것을 어떻게든 막고자 했던 현자 노동자들의 분투에 의해 최악의 상황은 피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런 상황이 지속된다면, 한국 노동운동의 상징적 구심인 현대차에서도 현중과 같은 일이 전개되지 않으리라 장담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더욱 중요한 사실은 현대차 노동조합이 겨우 위기를 넘겼지만, 한국 노동운동의 상징으로 부각되고 있는 현자 노동조합의 도덕적 권위가 전체 노동자 앞에서 무너짐으로써 한국 노동운동이 거대한 상처를 입었다는 점이다. 이것은 노사협조주의 노선, 그리고 조합주의 노선의 필연적 결과물이다. 우선 현자를 비롯한 대개의 대기업 사업장들에서 독버섯처럼 번져나가고 있는 ‘생산 성과와 연동된 특별성과금 관행’을 지적해야 한다. ‘타결장려금’과 함께 이것은 노사협조주의를 조장하는 대표적인 도구다. 사실상 임금의 한 부분에 지나지 않지만, 기본급이나 정기상여금이 아니라 생산 성과와 연동된 특별성과금을 위해서 노동자들은 자발적으로 생산에 협력해야만 한다. 관행적으로 전부를 지급해왔다는 사실이 이러한 본질을 조금이라도 희석시키는 것은 아니다. 이번에도 분명히 드러났지만, 특별성과금 형태의 임금구조는 언제든지 자본이 명분을 가지고 노동자의 임금을 도둑질할 수 있도록 허용할 뿐만 아니라 회사의 번영이 노동자의 더 나은 조건 획득과 연결될 수 있다는 환상을 노동자들 속에서 조장한다. 만약 이러한 노사협조주의적 발상이 만들어낸 특별성과금 따위의 임금구조를 허락하지 않았다면, 자본이 ‘성과미달’이라는 이유로 노동자의 노동의 대가를 갈취하려는 짓거리 따위는 일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최소한 노동자들은 누구라도 부정할 수 없는 명백한 근거, 즉 정당한 노동에 대한 최소한의 합법적 대가라는 관점에서 공세적으로 투쟁에 나설 수 있었을 것이다. 다음으로 ‘구두합의’와 같은 ‘비공식적인 밀실협상의 전통’을 거론해야 한다. 모든 합의내용은 조합원대중에게 공개되어야 하고, 이 합의는 명백히 ‘서면합의’ 형식을 취해야 한다. 법률적 구속력이 없고, 언제든지 손바닥 뒤집듯이 철회할 수 있는 구두합의는 노동자투쟁의 성과를 무로 돌릴 수 있으며, 자본이 필요한 시기에는 언제든지 활용할 수 있는 수단을 제공하는 것이다. 나아가서 이 구두합의는 밀실협상의 관행과 떼려야 뗄 수 없이 연결되어 있다. 이러한 노사협조주의적 약점과 함께 이번 공방전을 좌우했던 결정적인 요소로 지적해야 할 부분은 바로 ‘계급적 관점’이다. 현대차노조가 전체 사회적으로 고립되었던 것(즉 다수의 노동자 민중으로부터 지지를 받지 못했던 것), 심지어는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연대에 나섰던 현대차 비정규직 노동자들로부터도 진심어린 지지를 끌어내지 못했던 것은 현대차 정규직 노동운동이 이제껏 취했던 조합주의 노선이 초래한 비극이었다. 이것은 현대차 정규직 노동자들의 자신감에도 영향을 미쳐, 겉보기와는 달리 이번 공방전 내내 현대차 노동자들은 주도권을 발휘하지 못했고 충분히 당당한 모습을 보이지 못했다. 오직 이번 공방전에서 일방적으로 밀린다면 노조 파괴로 연결되고, 이것은 노동자의 생존권을 지키는 마지막 보루가 붕괴될 수밖에 없었기에 현대차 노동자들은 투쟁에 힘을 실었던 것이다. 투쟁에 나선 노동자들이 도덕적 주도권을 확실히 움켜쥐지 못하는 것, 그것도 한국 노동운동의 상징적 구심인 현대차 노동자들이 자신들의 투쟁이 전체 노동자로부터 지지를 끌어내지 못하고 오히려 의혹의 눈초리에 직면하고 있다는 것은 한국 노동운동의 거대한 비극이 아닐 수 없다. 이것이 갖는 의미는 만약 현대차 노동조합이 다르게 행동해왔고 다른 쟁점으로 전투를 치렀을 경우를 가정한다면 더욱 분명해진다. 현대차 불법파견 판정이 내려졌을 때, 그리고 올해 현대차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향해 울산공장에서 고용불안 공격이 덮쳤을 때, 현대차 정규직 노동조합이 전면적인 총파업을 전개하면서 비정규직 노동자의 요구를 대변했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비정규직 개악법안에 맞서 전체 노동자의 요구를 내건 단호한 총파업투쟁을 지속했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만약 노사협조주의적인 특별성과금 따위를 위해서가 아니라 기본급으로 임금인상을 확고히 쟁취하고, 임금인상분의 일부를 투쟁사업장 연대기금으로 내고자 했다면, 그런데 이것에 대해 자본이 전면적인 공격을 가했다면 과연 어땠을까? 그것은 모든 자본가 언론의 주둥아리를 닫게 만들었을 것이다. 모든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현대차 노동조합의 투쟁을 통해 한국 노동운동에서 희망을 발견하게 되었을 것이다. 현대차 정규직 노동자들의 자부심은 얼마나 높았을 것이며, 여기에 연대하는 현대차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얼마나 숭고한 의무감에 불탔을 것인가! 그 대신 한국 노동운동의 상징적 구심이 다수 노동자의 의혹에 찬 눈초리와 마주치고, 한줌 착취자들의 언론과 정부에 의해 마구 난도질당하면서 고립되는 이 참혹한 현실만큼 비참한 현실이 어디에 있겠는가? 현대차의 노사협조주의적 지도부는 50%의 특별상여금 지급, 그것도 생산 차질분을 전부 만회하겠다는 약속의 대가로 얻어진 그 성과 앞에 승리라고 박수칠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그들이 잊고 있는 것은 그 표면적인 성과의 뒷면에서 한국 노동자계급 전체가 입은 거대한 피해이다. 장기적으로 볼 때, 이것은 현대차 정규직 노동자들까지도 혹독한 대가를 치르도록 강요할 것이다. 현대차 자본이 위기에 직면해 더욱 포악해지고, 그래서 공장을 상당히 오랜 시간 정지시키더라도 경찰과 검찰, 정부의 힘을 동원해 노동자들을 공격해야만 하는 결정적인 상황이 도래하게 될 때, 이 같은 고립은 현대차 노동자들을 덮치는 재앙의 진원지가 될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오직 썩어문드러진 조합주의 지도자들만이 이것을 승리 혹은 무승부라고 부를 수 있다. 이런 식으로, 아직 충분히 투쟁할 수 있는 여력이 있고, 아직 노동조합에 대한 신뢰를 거두지 않았으며, 게다가 전직 위원장이 수억 원을 받아 처먹는 통탄할 만한 사건에 직면해서도 노동조합을 사수하기 위해 파업지침을 사수하는 현대차 노동자대중을 가장 불리한 조건에서 전면전을 치르도록 몰아붙이는 개량주의 지도자들의 범죄행위가 지속된다면 아무리 강철 같은 노동대중도 장기적으로는 결국 분쇄될 수밖에 없다. 노동운동의 선봉장이 다수의 노동자대중으로부터 지탄의 대상이 되고, 오히려 다수 노동대중이 노동운동의 선봉장에 대한 정부의 공세를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는, 이 비통한 현실이 지속된다면 한국 노동운동이 약 20년간 쌓아올린 성과의 마지막 한 부분까지 결국 무너져 내릴 수밖에 없다.[36] 3) 산별노조 전환과 1사1조직 타협·개량주의 세력의 주도권 아래 민주노총이 건설되고, 곧이어 자본가들의 신자유주의 대공세에 패배를 거듭하면서, 민주노총으로 포괄된 민주노조운동 전반은 심각하게 후퇴했다. 전노협 운동의 특징이던 자주성·민주성·전투성·연대성·변혁성에 대한 지향은 2000년대 초반 이후 민주노조운동 안에서 매우 약화됐다. 민주노총으로 포괄된 민주노조운동 전반의 후퇴는 2000년대 중반에 이르러 심각한 수준의 관료화와 타락으로 나아갔다. 그러나 단위노조부터 상급단체까지 광범하게 포진한 노조관료들은 위기의 총체성을 인정하고 그 원인을 근본적으로 파악하려는 진솔한 노력 없이 끝없는 이전투구와 관성적 대응에 머물렀다. 민주노조운동의 위기를 극복할 핵심 방안이라고 노조관료들이 오랜 시간 주장했던 것은 이른바 ‘산별노조 전환’이었다. 몇 년 동안 거듭된 시도 끝에 2006년 6월 금속산업에서 현대차·기아차·대우차 등 핵심 대기업 노조들의 산별노조 전환 투표가 성공함으로써, 산별노조 전환은 큰 고비를 넘게 됐다.[37] 그러나 민주노총이 추진한 산별노조 전환은 민주노조운동의 위기를 극복하는 데 전혀 도움이 되지 못했다. ‘산별노조 전환’ 논리 속에는 민주노조운동이 대기업 정규직만의 노동조합을 넘어서서 광범한 미조직 노동자들을 포괄해 나가야 한다는 정당한 문제의식이 들어 있었다. 그러나 민주노총의 산별노조 전환에는 그 의미를 전혀 살릴 수 없는 온갖 함정들, 나아가 위기를 더욱 심화시킬 함정들로 가득 차 있었다. 민주노총의 산별노조 전환은 대기업 정규직의 협소한 이해관계를 전혀 떨쳐버리지 못한 채 오히려 그러한 협소한 이해관계가 지배하는 형태로 이루어졌다. 이를테면 금속산업의 산별노조인 금속노조는 규모가 큰 대기업의 경우 지역지부에 속하지 않고 별도의 기업지부를 구성하도록 인정함으로써 조합원들을 통일된 기준으로 편제하는 것도 못하는 우스꽝스러운 조직형태를 갖게 됐다.[38] 말이 산별노조 전환이지 실제로는 기업별노조 체계가 그대로 유지되는 것이었다. 한 사업장 안에 있는 같은 산별노조 조합원인데도 정규직과 비정규직 사이의 차별이 산별노조 전환 이후에도 여전히 계속되고 당연시됐다. 많은 경우 한 사업장의 정규직과 비정규직을 하나의 조직체계로 통합하는 것조차 이루어지지 않았다. 해당 사업장의 비정규직 다수가 여전히 미조직 상태인데도 그냥 방치됐다. 그러니 정규직과 비정규직 사이에 존재하는 임금과 단체협약에서의 차이를 해소하기 위한 도전은 거의 시도조차 되지 못했다. 같은 사업장 안에 있는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차별조차 극복하려 하지 않는 노동조합이 광범한 미조직 노동자들을 조합원으로 조직해 나간다는 것은 당연히 불가능한 일이었다. 결국 민주노총이 추진한 산별노조 전환은, 광범한 미조직 노동자들의 조직화를 위해 전진하는 진정한 의미의 산별노조 건설과는 전혀 거리가 먼 것이었다. 대기업 정규직의 기업별노조들을 형식적으로 묶어놓고서 ‘산별노조’라는 허울을 내거는 우스꽝스런 조직을 만들어냈을 뿐이었다. 2006년 금속산업 대기업 노조들의 산별노조 전환으로 거대 산별노조가 된 금속노조는 민주노총을 대표하는 산별노조가 됐다. 금속노조는 2006년 12월 통합대의원대회에서 한 사업장 안의 모든 조합원을 직종이나 고용형태 등을 가리지 않고 단일한 조직체계로 통합한다는 ‘1사1조직’을 조직편제 원칙으로 확정했다. 그러나 1사1조직의 추진과정은 ‘산별노조’로서 금속노조가 가진 허구성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물론 일부 사업장에서는 1사1조직을 통해 사내 비정규직을 새롭게 조직하는 모범적인 모습이 나타나기도 했다. 하지만 금속노조를 좌지우지하는 대기업 지부들에서의 상황은 매우 달랐다. 금속노조 현대차지부의 대의원대회는 2007년 1월과 6월, 2008년 10월 세 번에 걸쳐 1사1조직 규칙개정을 모두 부결시켰다. 2007년 1월 현대차지부의 임시대의원대회는 비정규직 3주체(울산·아산·전주)가 1사1조직 관련 단일안을 만들지 못하고 △비정규직의 별도 집행기구를 두는 안 △비정규직을 정규직과 같은 선거구로 편제하는 안 △확대운영위원회로 위임하는 안 등 복수안을 가져오자 ‘비정규직 3주체의 단일안을 가져오라’며 세 안을 모두 부결시켰다. 2007년 6월 임시대의원대회는 가입대상 중 2·3차 사내하청 포함 여부, 판매부문 딜러와 정비부문 그린서비스 종사자 포함 여부 등을 놓고 격론을 벌인 끝에 부결시켰다. 2008년 10월 임시대의원대회는 비정규직의 별도 집행기구 없이 정규직과 같은 선거구로 편제하는 안이 상정됐지만, 가입대상 범위에 대한 질의, 준비부족과 선거권·피선거권 부여에 따른 혼란 등을 우려하는 반대발언이 이어진 끝에 또다시 부결시켰다. 이와 달리 기아차지부는 2008년 4월 1사1조직을 가결시켰다. 그러나 그 실내용은 계급적 단결이라는 산별노조의 정신과는 거리가 멀었다. 기아차지부에서 1사1조직의 실제 의미는 정규직 노조의 통제권 밖에서 독자적인 투쟁을 이어가던 사내하청 노조를 무력화하는 과정이었기 때문이다. 기아차에서도 비정규직 조직화가 2003년부터 시작됐다. 다만 사내하청 노동자들이 메인라인보다 서브라인에 집중돼 있는 사업장 특성에 따라 활동 초점이 불법파견 정규직화 투쟁보다 업체투쟁과 임단투에 집중됐다. 2003년 4월 기아차 화성공장의 비정규직 활동가 4명과 정규직 활동가 2명이 ‘노동해방을 위한 기아자동차 비정규직 현장투쟁단’을 결성하고, 업체별 회원조직화에 나섰다. 회원조직화의 기제는 고용·노동조건과 관련된 다양한 업체별 사안들을 둘러싼 업체투쟁이었다. 2003년에는 기광, 성원실업, 신성물류에서, 2004년에는 세화실업, 보성에서 업체투쟁이 조직됐다. 2년 동안 현장투쟁단은 5개 업체 350여 명을 회원으로 조직했다. 2005년 6월 4일 현장투쟁단을 토대로 금속노조 기아자동차비정규직지회가 설립됐다. 450여 명으로 출발한 조합원 수가 설립 직후 19개 업체 1천여 명으로 급격히 증가했다. 임단투에 들어간 비정규직지회는 여러 차례 독자파업을 성사시켰다. 그런데 기아차노조의 임투가 종결되자 9월 28일 400여 명의 용역깡패가 비정규직지회 파업을 공격했다. 회사의 파업파괴 공작에 맞서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연대투쟁이 전개됐고 비정규직지회의 투쟁은 오히려 상승세를 탔다. 하지만 10월 7일 노동탄압 분쇄와 원하청 공동투쟁 승리를 위한 기아차노조의 파업찬반투표가 부결됐다. 회사의 분열 공세와 비정규직지회의 독자파업을 부담스러워 하는 기아차노조의 태도 때문이었다. 비정규직지회의 투쟁은 하강세를 타기 시작했다. 20일 비정규직지회의 핵심동력이던 신성물류를 시작으로 7개 업체에 도급계약 해지가 공고됐다. 비정규직지회 조합원들이 노조를 탈퇴하기 시작됐다. 25일 비정규직지회 간부들과 선봉대 20여 명이 조립1공장을 기습점거하고 파업을 전개했으나 기아차노조가 비정규직지회의 투쟁을 ‘일방적인 투쟁’이라며 비판했다. 투쟁력이 고갈된 비정규직지회는 기아차노조의 중재를 받아들여 하청업체들과 집단교섭을 체결했다. 2006년, 비정규직지회는 원청 사용자성 쟁취를 내걸고 임단투를 준비했다. 7월 20일 이후 주2회 이상 독자파업으로 생산을 타격하며 사측을 압박했다. 투쟁이 최고조에 이르렀을 때 조합원 수가 1천 300여명으로 늘어나기도 했다. 그러나 기아차노조가 2005년과 마찬가지로 비정규직지회의 독자파업과 투쟁 장기화에 불만을 표시했다. 어쨌든 정규직노조의 중재로 9월 18~19일 비정규직지회, 기아차노조, 기아차가 참여한 교섭테이블이 열렸고, 비정규직지회는 회의록 형태의 고용보장합의서를 얻어냈다. 2005년과 2006년의 임단투를 거치며 기아차 화성공장에서는 비정규직지회의 주체성과 독자적 전술구사를 둘러싼 기아차노조와 비정규직지회 간의 긴장과 갈등이 점차 깊어졌다. 회사는 비정규직지회를 대대적으로 탄압하는 한편, 정규직에게 고용불안 이데올로기 공세를 폈다. 이런 상황에서 산별노조로 전환한 금속노조 기아차지부가 2007년 2월 비정규직지회와 통합방침을 일방적으로 발표하고 4월 30일부터 사내하청 노동자들을 상대로 개별적으로 직가입 신청을 받기 시작했다. 비정규직지회는 이에 대해 지회의 투쟁을 통제하려는 의도라고 비판하며 강력히 반발했다. 비정규직지회는 사내하청의 개별 가입 방식으로 비정규직지회가 기아차지부에 흡수될 경우 비정규직지회가 가진 기존의 조직력과 투쟁력을 상실할 것이라고 봤다. 5월 29일 금속노조 중앙집행위원회가 비정규직지회 조합원을 포함하는 직가입 사업을 중단하라고 결정했으나, 기아차지부는 개별 직가입을 이어갔다. 6월 12일 비정규직지회가 총회를 열어 ‘지회의 자주적 요구안 수립 보장, 현장파업권 인정, 2‧3차 하청 가입 보장, 지회의 자주적 조직체계 인정, 지부단위에서 비정규할당제 30% 보장’을 조건으로 하는 계급적 조직통합안을 결의하고 기아차지부에 제안했다. 그러나 기아차지부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비정규직지회는 독자 임단투를 전개하는 동시에 기아차지부의 일방적 직가입 추진에 항의하는 활동을 이어나갔다. 기아차지부와 비정규직지회 간의 긴장과 갈등이 고조되는 가운데, 8월 23일 비정규직지회가 도장공장 점거파업을 시작했다. 그런데 점거파업 9일째인 31일, 기아차지부의 어용 성향 조합원들이 구사대로 돌변해 비정규직지회의 파업현장에 난입하여 비정규직지회와 현장조직의 천막을 불태우는 등 폭력을 행사했다. 8·31 사태 이후 긴장은 극에 달하고 현장은 얼어붙었다. 기아차지부 조합원들의 분위기가 크게 경직됐고, 활동가들의 연대도 위축됐다. 비정규직지회는 금속노조의 중재를 받아들여 기아차지부와 ‘선통합 후논의’에 합의했다. 2008년 4월 기아차지부, 5월 비정규직지회 대의원대회에서 각각 규칙개정이 통과되면서 1사1조직 통합이 완료됐다. 기아자동차지부는 1사1조직으로의 전환은 이루어냈으나 그 과정에서 정규직지부와 비정규직지회 간의 갈등이 극단적으로 고조되어 여러 가지 문제점을 드러내기도 했다. … 1사1조직화가 강한 자체 투쟁역량을 보유하고 있는 사내하청 단위에 대한 통제기제로 활용될 수 있는 여지가 있다는 점이 확인되었다. 실제로 조직통합 전 기아자동차비정규직지회는 독자파업을 통해 원청사의 생산에 타격을 줄 정도의 상당한 조직력과 투쟁력을 갖추고 있었으며, 그렇기 때문에 1사1조직 논의가 지속되는 내내 사내하청 단위의 독자적인 조직과 쟁의권을 보장할 것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요구는 받아들여지지 않았으며, 정규직 노조의 강도 높은 개별가입 캠페인과 1사1조직으로의 전환 드라이브 하에서 결국 조직통합은 지회해체 후 사내하청 노동자들의 개별적인 지부가입의 형태로 이루어졌다. 하기에 1사1조직화 자체의 일정한 의의와 성과에도 불구하고, 기아자동차의 사례는 “지회의 조직력과 투쟁력을 깨”고 “단체행동권을 제한하”며 “비지회만으로 라인 못 세우게 하기 위해서” 정규직 노조가 조직통합을 주도했다는 혐의를 완전히 부정할 수만은 없는 것이다.[39] 2000년대 초중반을 지나면서 대기업 정규직을 중심으로 ‘민주노조운동’의 위기와 추락이 계속됐지만, 민주노조운동을 재건해 내려는 노력 또한 지속됐다. 특히 계급적 전망을 상실한 대기업 정규직 운동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을 바탕으로 비정규직 투쟁에 헌신적으로 결합하려는 정규직 활동가들이 전국의 여러 사업장에서 나타났다. 관료화된 ‘민주노조운동’의 실상을 폭로하고 상층 노조관료들에 도전하며 노동자 민주주의를 회복하려는 여러 노력들도 나타났다.[40] 하지만 이런 노력들은 안타깝게도 ‘민주노조운동’ 전반의 위기와 추락을 되돌려 놓을 수 있을 만큼 강력한 힘을 만들어 내지는 못했다. 다음 편 보기 [1] 전국비정규직노조연대회의(전비연), 2005/10/16, 「출범선언문」. [2] 현대차노조는 1987년 노조설립 이후 2008년까지 1994년을 제외하고는 모두 파업을 전개했다. 2009~11년 무파업을 기록한 뒤, 2012~17년 연속해서 파업을 전개했고, 2018~24년 다시 무파업을 기록했다. [3] 현대중공업노조 조합원들을 기반으로 하는 울산 동구, 창원공단의 금속노조 조합원들을 기반으로 하는 창원(을)도 노동자들의 지지 기반이 상당한 지역이었지만 울산 북구만큼은 아니었다. [4] 양준석, 2005/08/27, 「현대자동차노조의 노동운동 내 위상과 현재적 과제」. [5] 민투위 활동가들은 다수가 1998년 구조조정에서 정리해고·무급휴직 대상자가 됨으로써 1998년 투쟁 패배 이후 1년 남짓 현장을 떠나 있어야 했지만, 복귀 이후 빠르게 현장 기반을 재건했다. [6] 민투위는 산별노조 전환 뒤인 2007~09년 금속노조 현대차지부 집행부를 다시 배출하는데, 이번에는 ‘실질임금 삭감, 노동강도 강화, 고용 불안 없는’ 주간연속2교대를 실현하겠다는 공약과 달리 노동자의 권리를 대폭 하락시키는 주간연속2교대 도입을 합의함으로써 끝내 정규직마저 배신했다. [7] 2000년 생산이 회복됨에 따라 노조가 유리해진 국면에서, 노조 집행부가 1998년의 구조조정을 되돌리는 단호한 투쟁에 나서는 대신 고용불안 논리에 따라 사내하청 대규모 투입에 앞장선 것은 조합원들의 ‘일상화된 고용불안’ 정서를 더욱 고착화하는 결과를 낳았다. [8] 현대차는 1997년 튀르키예 공장, 1998년 인도 공장, 2002년 중국 베이징 공장, 2005년 미국 앨라배마 공장, 2007년 체코 공장을 속속 준공하며, 세계 곳곳으로 생산 기지를 확대해 나갔다. 이후에도 현대차는 2010년 러시아 공장, 2012년 브라질 공장, 2017년 베트남 공장, 2022년 인도네시아 공장 등을 준공하며 해외 생산거점을 계속해서 확대시켰다. 현대차는 해외 생산거점 확대 과정에서 부품하청업체들의 중국 동반 진출을 독려하기 위해 2005년 납품물량의 40%를 중국에서 역수입해 공급하라는 ‘바이백’ 지침을 내리기도 했다. [9] 현대차 자주노동자회, 2002/09/04, <자주노동자> 신문. [10] 현대차 실천하는노동자회, 2003/02/26, <실노회> 신문. [11] 현대차 자주노동자회, 2003/10/22, <자주노동자> 신문. [12] 현대차 민주노동자투쟁위원회, 2002/08/14, <노동자의길> 신문. [13] 현대차 자주노동자회, 2004/01/27, <자주노동자> 신문. [14] 현대차 민주노동자투쟁위원회, 2004/04/14, <노동자의길> 신문. [15] 현대차 민주노동자투쟁연대, 2004/09/08, <민노투> 신문. [16] 현대차 민주노동자투쟁위원회, 2005/03/22, <노동자의길> 신문. [17] 현대차 민주노동자투쟁연대, 2005/04/20, <민노투> 신문. [18] 현대차노조 5공장 대의원회, 2005/07/05, <5공장 대의원회> 유인물. [19] 모듈이란 작은 부품들을 하나의 덩어리로 묶은 조립단위를 말한다. 이를테면 칵핏모듈은 인판넬, 계기판, 오디오, 공조시스템, 스위치, 에어백 등을 하나로 묶어 구성된 조립단위다. 과거에는 각각의 부품이 완성차 조립라인에서 조립됐지만, 모듈외주화가 되면 사외 부품사가 조립한 모듈을 공급받기 때문에 완성차 조립라인의 작업량이 그만큼 줄어든다. [20] 현대차 민주노동자투쟁연대, 2003/04/29, <민노투> 신문. [21] 최영익, 2007/02/01, 「한발 한발, 그러나 고지를 향해 똑바로!」, 『노동해방』 53호. [22] 현대차노조의 활동이 자본이 설정한 반경 안으로 갇혀 버렸음을 보여주는 하나의 사례로 경영권 세습에 대한 무대응이 있었다. 2000년대 초중반 현대차 그룹은 정몽구에서 정의선으로 경영권 부자세습을 준비했다. 2001년 물류업체 글로비스(정의선 지분 60%)를 설립하고, 2002년 건설업체 엠코(글로비스 지분 60%)를 설립하여 현대차 일감을 떼거지로 몰아주었다. 글로비스 등의 회사 가치 극대화로 주식 가격이 몇십 배로 폭등하면서, 정의선은 경영권 세습에 필요한 비용을 손쉽게 확보해 나갔다. 그런데 이것을 문제 삼는 현대차노조의 목소리는 거의 없었다. 실제로 현대차 그룹의 경영권 세습은 소액주주의 권리 침해라는 측면에서 참여연대 등으로부터 일정한 공격을 받기는 했을지언정, 정작 현대차노조로부터는 사실상 어떤 제동도 걸리지 않았다. 2006년 정몽구 회장이 비자금 문제로 구속됐을 때도 노조는 별다른 대응을 하지 않았다. [23] 일부 노조간부들이 회사의 생산직 채용과정에 영향력을 행사하면서 채용희망자들로부터 금품을 수수한 ‘채용비리’는 2005년 1월 기아차에서부터 불거져 5월에는 현대차로 번졌다. 10월에는 민주노총 수석부위원장이 택시운송사업조합연합회로부터 수천만원의 금품을 수수한 게 드러나 구속되고 민주노총 지도부가 총사퇴하는 사건까지 터졌다. [24] 2000년대 중반 현대차노조에서는 ‘빨간 조끼’를 착용하고 다니는 노조간부들이 조합원들 사이에서 ‘빨조’라는 이름으로 공공연히 지칭됐다. 원래 노조간부들이 일상적으로 빨간 조끼를 착용하고 다니는 것은 민주노조의 힘과 투쟁의지를 상징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제 그 빨간 조끼를 착용한 노조간부들이 온갖 특권과 향응을 게걸스럽게 빨아먹는다며 비아냥대는 의미의 ‘빨조’로 불리게 됐던 것이다. [25] 현대차 실천하는노동자회, 2003/02/26, <실노회> 신문. [26] 현대차노조 공동소위원회, 2005/04/13, <공동소위원회> 유인물. [27] 현대차 자주노동자회, 2005/06/02, <자주노동자회> 유인물. [28] 현대차노조 공동소위원회, 2005/06/08, <공동소위원회> 유인물. [29] 현대차 자주노동자회, 2003/11/05, <자주노동자> 신문. [30] 현대차노조 4공장 소위원회, 2003/08/21, <4공장 소위원회> 유인물. [31] 현대차 자주노동자회, 2004/05/04, <자주노동자> 신문. [32] 현대차 민주노동자투쟁위원회, 2005/03/22, <노동자의 길> 신문. [33] 현대차 민주노동자투쟁위원회, 2005/03/22, <노동자의 길> 신문. [34] 현대차는 1991년 이후 생산목표 달성 여부와 상관없이 성과금을 지급했고, 생산실적과 연동한 성과금 지급 합의는 2006년이 처음이었다. [35] 현대차는 2006년 161만 8천 268대를 생산하여, 생산목표인 164만 7천대의 98.3%를 달성했다. [36] 최영익, 2007/02/01, 「한발 한발, 그러나 고지를 향해 똑바로!」, 『노동해방』 53호. [37] 대표적으로 2006년 6월 28~29일 실시된 현대차노조의 산별노조 전환투표는 71.5% 찬성으로 3분의 2를 넘겨 가결됐다. 2003년 6월에 실시된 1차 산별노조 전환투표는 62.1% 찬성에 그쳤었다. [38] 기업지부는 처음에 3년 동안만 시행하는 한시적 조치로 도입됐지만, 2009년과 2011년 두 차례 연장된 끝에 기본 조직체계로 굳어졌다. [39] 김보성, 2011, 「자동차업종 사내하청 조직화투쟁의 쟁점과 평가」 [40] 이러한 노력은 민주노총 위원장 직선제와 대의원대회 비정규직 할당제 도입 등 제도혁신 운동으로도 나타났다. /* 스크롤 여백만 주고, 화면에는 안 보이게 */ .ftn-target { display: inline-block; /* 줄바꿈 안 생김 */ width: 0; height: 0; scroll-margin-top: 200px; } document.addEventListener("DOMContentLoaded", function () { // name="_ftn1", name="_ftn2", name="_ftnref1" ... 전부 대상 document.querySelectorAll('a[name^="_ftn"]').forEach(function(a) { var idValue = a.getAttribute("name"); // 이미 같은 id의 요소가 있으면 또 만들지 않음 if (!document.getElementById(idValue)) { var span = document.createElement("span"); span.id = idValue; span.className = "ftn-target"; a.parentNode.insertBefore(span, a); } }); }); /* 본문 각주 번호 + 아래쪽 각주 번호 색 지정 */ a[href^="#_ftn"] sup, a[href^="#_ftnref"] sup { color: #BF202D; } /* 밑줄이 보기 싫으면 */ a[href^="#_ftn"], a[href^="#_ftnref"] { text-decoration: none; } /* 마우스 올렸을 때 살짝만 강조하고 싶으면 (선택) */ a[href^="#_ftn"]:hover, a[href^="#_ftnref"]:hover { text-decoration: underline; } /* 페이지 전체가 오른쪽으로 넘치지 않게 */ html, body { max-width: 100%; overflow-x: hidden; } /* 본문 영역 폭 강제 고정 + 긴 단어/문장도 줄바꿈 */ #bo_v_con, .bo_v_con, .cke_editable, article { max-width: 100%; overflow-wrap: break-word; word-wrap: break-word; /* 구형 브라우저용 */ } /* 워드에서 붙은 이미지/표가 화면 밖으로 안 나가게 */ #bo_v_con img, #bo_v_con table, .bo_v_con img, .bo_v_con table, .cke_editable img, .cke_editable table, article img, article table { max-width: 100% !important; height: auto; } /* 워드가 p, span에 폭을 박아놓은 경우 강제로 해제 */ #bo_v_con p[style*="width"], #bo_v_con span[style*="width"], .bo_v_con p[style*="width"], .bo_v_con span[style*="width"], .cke_editable p[style*="width"], .cke_editable span[style*="width"], article p[style*="width"], article span[style*="width"] { width: auto !important; max-width: 100% !important; } /* 기본 blockquote 스타일 */ blockquote { border-left: 4px solid #c0392b; /* 사이트 분위기와 맞는 붉은 계열 */ padding: 12px 18px; margin: 20px 0; background: #fafafa; font-style: normal; color: #333; line-height: 1.6; } /* blockquote 안의 p 태그 정렬 */ blockquote p { margin: 0 0 10px 0; text-align: justify; } /* 마지막 p 태그 여백 제거 */ blockquote p:last-child { margin-bottom: 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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