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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전KPS비정규직지회 김영훈 지회장 인터뷰] 김충현 협의체 합의 이후에도 발전노동자 직접고용-총고용보장 쟁취투쟁은 계속된다2025년 6월 2일, 서부발전 태안화력발전소에서 선반 작업을 하던 김충현 비정규직 노동자가 사망했다. 그의 죽음은 발전소 내 만연한 위험의 외주화 구조를 드러냈다. 여기에 더해 석탄화력발전소 폐쇄 흐름이 본격화했다. 예고된 화력발전소 폐쇄를 앞두고, 사측은 하청업체 노동자들을 단기계약직으로 전환하는 등 더 손쉬운 해고 방안을 모색하고 있다. 소수 관료가 "전력수급기본계획"이란 이름으로 밀어붙이고 있는 폐쇄 일정과 대체 건설 계획에는 발전소 노동자의 총고용 보장이 들어갈 여지는 없다. 고 김충현 노동자의 죽음을 안고, 한전KPS 비정규직지회를 비롯한 노동자들이 투쟁에 나섰다. "고 김충현 사망사고 재발 방지를 위한 발전산업 고용안전협의체"(아래 협의체)가 구성되었고, 한전KPS 하청노동자 전원 직접고용을 포함한 3가지 합의안을 도출했다. 하지만 정부와 사측은 합의안을 이행하고 있지 않다. 김충현 투쟁이 끝나지 않은 이유다. 다음 투쟁을 준비하고 있는 공공운수노조 한전KPS 비정규직지회 김영훈 지회장을 만나, 현재 상황과 과제를 들어보았다. 사진: 김충현 대책위 김충현 협의체에서 3가지 합의안이 도출되었습니다. 내용에 대해서 어떻게 평가하시나요? 한전KPS 하청노동자 650여 명 전원을 직접고용한다고 합의문에 명시한 건 성과라고 생각합니다. 장례식장에서부터 한전KPS, 정부와 싸운 결과기도 하고요. 현재 발전소 경상정비 분야의 하청업체는 1년짜리 쪼개기 계약을 이어오는 인력파견업체나 다름없어요. 노동자 안전을 담보할 수 있는 역량도 없죠. 한전KPS가 일을 시키면 우리 하청노동자들은 따를 수밖에 없는 구조인데, 한전KPS는 사고가 발생하면 하청업체와 노동자에게 그 책임을 전가해왔죠. 하청업체 역시 사고가 났을 때도 산재 처리 안 하고 숨겨왔고요. 안전과 직접고용이 연결되어야 하는 이유도, 실질적인 업무지시를 하는 원청의 업무 및 안전관리 시스템에 하청노동자들이 포함되어 보호받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청노동자들의 업무가 한전KPS 노동자들의 업무와 동일하기에, 한전KPS의 불법파견을 인정하고 일반직 4직급으로 직접고용하라는 법원 판결을 합의문에 명시하고자 했지만 잘 안되었습니다. 또한 구체적인 처우는 노사전협의체로 이월하게 되었습니다. 한전KPS는 별정직으로 가라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향후 가장 큰 쟁점이 될 거 같습니다. 사진: 김충현 대책위 합의문 두 번째 내용, 석탄화력발전소 폐쇄에 따른 노동자들의 고용 안정성 확보를 위해 노·사·전·정이 참여하는 사회적 논의 기구를 구성하기로 한 점은 직접고용에 비해 그 정도가 낮다고 생각해요. 발전소 폐쇄가 심각한 문제잖아요. 어떻게 보면 서로가 서로의 경쟁 상대가 되는 일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날 텐데, 일단 논의 테이블이라도 만들자 정도인 거죠. 저희를 포함해 많은 현장에서 발전소 비정규직 직접고용을 내걸고 투쟁해왔죠. 하지만 의제의 규모를 생각해보면 더 많은 투쟁이 있어야 했는데 그렇진 못했던 것 같습니다. 민간 경상정비 하청업체의 재공영화도 구호로는 많이 얘기했는데, 현장에서까지 전파되어 자기 요구로 내걸고 있지는 못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세 번째 합의 내용은 연료 환경 운전 분야의 1차 협력업체 노동자들에게 노무비를 전용 계좌로 직접 지급하는 것입니다. 2차 하청노동자들도 합의 대상으로 하려고 했지만 잘 안되었습니다. 이번에 조직화 사업하면서 여러 협력업체 노동자를 만나 직접노무비가 잘 지급되고 있는지 물어봤어요. 관련 내용을 잘 모르시더라고요. 임금산출내역서를 실제로 봤는데, 서인천처럼 시행되고 있지 않은 경우도 있었고요. 합의하고자 했으나 안 된 부분도 있어요. 한전KPS가 불법파견 1심에서 패소했음에도 시정조치를 취하기보다는 항소를 결정했습니다. 협의체에서 항소하지 말라는 권고를 시도했지만 결국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또 한국자유총연맹이 최대주주로 있는 한전산업개발의 주식을 한국전력이 매입하여 한전산업개발을 재공영화하려는 정책이 추진되다가 중단된 상태인데요, 협의체 차원에서 이를 완전히 철회하려고 했으나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사진: 김충현 대책위 한계와 아쉬움이 많은 합의지만, 정부 합의안을 끌어냈던 것에는 노숙농성을 포함한 노동자들의 투쟁이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투쟁을 조직하는 과정에서 어려움도 많으셨을 텐데요, 어떻게 동력을 유지하셨나요? 용산과 청와대 앞 노숙 농성, 타지역 한전KPS 하청노동자 조직화를 위해 저는 서울에 계속 머물러야 했어요. 그럴 때 태안 등 현장과 소통체계를 유지하는 게 가장 어려운 점 중 하나였어요. 농성을 시작하면서 조합원 간담회를 원래는 한 주에 한 번씩은 하자고 했지만 잘 안 되었어요. 정말 중요한 결정을 할 때는 내려가서 얘기하고 결정을 받아오긴 했는데, 그게 일주일에 한 번은 아니었어요. 그래도 현장과 아예 분리된 채 투쟁할 수는 없잖아요. 소통 역할을 정철희 분회장과 조유상 사무장이 주로 해주셨어요. 조합원들이 현장에서 한전KPS랑 같이 일하는 과정에서 압박을 받고 있기도 했는데, 두 분이 현장 의견들을 청취하고 대응했던 과정들이 있었죠. 국현웅 동지도 농성장에 붙박이로 계시면서 역할을 해주셨고요. 물론 투쟁을 조직하고 설득하는 과정이 순탄하지는 않았어요. 이렇게까지 매번 서울 올라가서 집회하고 투쟁하는 걸 조합원들이 힘들어하기도 했고, 불만도 있었죠. 정규직화에 대해서도 ‘별정직 받아야 하는 거 아니냐’는 이야기도 있었고요. 그럼에도 지금 상태에서 관철하지 않으면 예전이랑 똑같을 거라는 공감대가 있었어요. 끝까지 관철해야 한다는 점에 대해서 동의가 돼서 싸웠던 것 같아요. 사진: 김충현 대책위 김충현 투쟁을 겪으면서 조합원들이 가장 크게 바뀌었다고 생각하는 지점은 무엇인가요? 처음에 장례식장에 있을 때는 충격도 컸고 머리가 비어 있었어요. 그런 상태로 있다가 시간이 조금 더 지나면서 상황을 인지했던 것 같아요. 이거 큰 사건이 되겠구나, 직접적으로 삶과 연결이 되는 일이겠구나. 장례식장에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 방법을 잘 몰랐어요. 저도 조합원들도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처음 겪는 일이다 보니까 좀 어려워했던 것 같아요. 노동조합과 단체들에서 지원을 많이 해주셨고, 그 과정에서 현장 사람들이 이제는 싸우는 방법이라든지 이런 것들 이제는 좀 익숙해졌던 것 같아요. 다른 한편으로 트라우마 때문에 고생도 많이 하셨죠. 수개월 동안 아예 밖에 나와서 투쟁한 거잖아요. 그래도 그때 많이 깨달으신 게 있었던 것 같아요. 예전에는 그냥 머리로만 알았다가, 이제 진짜 우리가 스스로 나서지 않는 이상은 쫓겨날 수도 있겠단 점을 체감한 거죠. 조직화 사업 등 투쟁의 결과로 여러 지역에서 노동자들이 조직되는 성과가 있었는데, 그 과정에서 어떤 점을 느끼셨나요? 발전소 하청노동자들이 다 같이 모여서 힘을 합치는 과정이 필요한데 어려움이 많았어요. 물리적으로도 다 떨어져 있다 보니까 연락도 잘 안 되었고, 누가 어떻게 사는지도 몰랐죠. 이번에 협의체 면접조사나 설명회 같은 조직화 사업을 진행하면서 한 번씩 다 만나고 다녔잖아요. 그 사람들이 어떤 삶을 살아왔고 또 어떤 고심을 하고 있는지 등을 알아가는 과정들이 되게 뜻깊었었던 것 같아요. 한전KPS와의 계약 내용이 이상하거나 임금을 제대로 못 받아도 하청노동자들이 목소리를 사실상 못 냈거든요. 그런데 이 투쟁을 하면서 노동자들이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과도기적 단계에 접어들었다고 생각하고, 되게 뜻깊은 것 같습니다. 다른 지역 노동자들도 투쟁을 통해 조직되기 시작했어요. 저렇게 싸울 수 있다는 것도 사회적으로 알려졌고요. 감회가 새롭더라고요. 그런 부분들이 다른 사업소에도 차츰차츰 퍼져 나갔으면 좋겠어요. 사진: 한전KPS비정규직지회 2월 말, 전국의 발전소를 돌아다니면서 노동자들을 만나면서 합의내용을 설명하고 토론하는 자리를 만들었습니다. 진행하면서 느꼈던 소회나, 기억에 남는 사례를 공유해 주신다면? 최근에 쫓겨나신 분들을 보면서 마음이 좋지 않았어요. 한전KPS가 하청노동자를 해고했던 사례들을 협의체 진행하면서 뒤늦게 알게 된 거죠. 미리 알았더라면 대처할 수 있었을 텐데, 커버하지 못했던 게 스스로도 많이 한심스러웠고요. 설명회를 했던 첫 번째 이유는 현장 노동자들에게 합의 내용을 알리는 거였어요. 현재 이런 상황이고 한전KPS가 강제적으로 뭔가 계약을 해지하거나 불합리한 요구를 했을 때 알려주시라, 그래야 이런 상황을 타파할 수 있다는 걸 알리고자 했어요. 하청노동자 스스로 앞으로를 준비할 시간, 노조 가입도 고민하면서 스스로를 보호할 수 있는 자료를 준비하는 등의 시간을 확보하자는 게 두 번째였어요. 저희도 노조 만들기 전에도 자료 모아서 노동청에 신고도 하고 막 그랬거든요. 이런 경험들이 현장에 있는 사람들한테 되게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거든요. 노동조합은 대신 싸워주는 데가 아니잖아요. 스스로 싸우는 사람들이 만들어서 투쟁하는 곳이니까 한편으로는 스스로 싸울 수 있는 조건을 형성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뭘 들고 어떻게 싸워야 할지 모르니까 이런 자료들을 준비해서 들고 싸워야 한다는 거를 얘기하고자 했죠. 저는 제주, 남제주, 일산, 분당, 서울, 안동, 삼척 이렇게 갔다 왔는데요, 삼척 사례가 기억에 남아요. 앞에 안동 설명회가 끝나고 삼척으로 넘어가면서 준비 잘 되고 있냐고 발전소 쪽에 물어봤고, 오면 된다고 해서 갔죠. 그런데 가서 보니까 출입부터 협조가 안 되었어요, 출입 담당자도 나오지 않았고요. 들어보니까 옛날 발전사 부사장이 방문해서 순회하고 있었대요. 그런데 우리가 눈에 거슬리니까 못 들어가게 했던 거였죠. 한전KPS도 담당자를 뺑뺑이 돌리고 있었고요. 하청노동자들은 저희가 온 걸 아예 몰랐대요. 한전KPS 선에서 차단한 것 같더라고요. 그래서 현장 노동자들이 그 사실을 알고 우리는 설명회를 듣고 싶으니 나가겠다 하셨고, 입구에서 저희가 들어오는 걸 도와주려 하셨죠. 그런데 그분들도 발전소 출입 권한이 없어요. 발전소 본사에서 출입을 허가하지 않으면 안 되거든요. 결국 편의점 노상에서 설명회를 했어요. 바닷가 바로 앞이라서 바람도 불고 추웠는데, 거기서라도 하겠다고 해서 1시간가량 설명하고 왔어요. 하동발전소의 경우 한전KPS가 2024년 7월에 하청업체 노동자들을 단기 노무원으로 바꿨던 사례가 있는데요, 관련하여 자세히 설명해 주신다면? 하동화력발전소의 한전KPS 하청노동자들이 예전에는 27명이었어요. 여기도 태안처럼 곧 폐쇄를 앞둔 발전소인데, 그 과정에서 한전KPS가 하청업체를 떨궈내려 했던 거 같아요. 2024년, 한전KPS는 하청노동자들한테 상황이 어려우니 한전KPS의 단기 노무원으로 가는 것을 제안했고, 일부는 수용했고 일부는 거부했어요. 현재는 20여 명이 9개월짜리 단기 노무원으로 계세요. 9개월짜리 단기 노무원하고 3개월 퇴직급여 받으시고 다시 9개월 하고 이렇게 계약을 이어오다가, 하동 발전소가 26년에 폐쇄가 되니까 12월까지만 계약을 유지하고 더 이상 계약을 유지하지 않겠다는 말을 사측이 했나 봐요. 노동자들은 굉장히 억울해하시죠. 소송도 하고 기자회견도 하고 할 거 다 해야 하지 않겠느냐 정도 얘기하고 있어요. 발전소 폐쇄를 대비하는 사측의 자세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협의체 합의문 중에 직접고용이 완료될 때까지 한전KPS는 하청노동자와의 계약을 계속 연장한다는 내용이 있어요. 관련해서 노사전 협의체에서도 얘기해야 할 것 같아요. 현장에서도 싸움도 많이 해야겠죠. 그냥 되는 건 아니니까요. 사진: 김충현 대책위 직접고용을 다룰 노사전협의체가 난항이 예상됩니다. 발전소 폐쇄를 앞두고 한전KPS와 발전 5사를 상대로 투쟁이 필요할 거 같은데요, 이를 위해 현장에서 필요한 과제가 무엇이라 보시나요? 협의체 합의에 따르면 화력발전소의 경우 3월 31일까지 노사전협의체 회의를 완료해야 하는데, 사측에서는 노사전협의체 위원도 내지 않고 있습니다. 노사전협의체 테이블로 풀 수 있는게 맞나는 고민도 들고요. 정규직 내부 반발도 심한 것 같습니다. 발전소 설명회 할 때 한 협력업체 사무실에 방문했었는데요, 사무실 옆에 한전KPS 사내 게시판이 있었는데, 한전KPS 노동조합이 ‘공정’ 운운하면서 정규직화 반대한다는 내용의 성명이 붙어있더라고요. 김충현 중대재해 이전에도 발전소 폐쇄는 계속해서 이슈였습니다. 폐쇄 과정에서 민간 하청업체 노동자들이 희생양이 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 있어요. 그러기 위해선 하청노동자를 계속 규합해서 운동을 확대해야 할 것 같습니다. 결국 2라운드로 넘어가는 상황인 거 같아요. 합의 이후 저희 하청노동자들이 몇 주 투쟁을 쉬었죠. 다시 싸울 때가 된 것 같아요. 일단 직접고용이 전혀 되고 있지 않는 것에 대해 정부의 책임을 물어야 할 것 같아요. 여러 매체를 통해 한전KPS와 정부의 행태도 더 알려야 할 거 같고요. 원자력발전소 쪽에도 한전KPS 하청노동자들이 민주일반연맹 소속으로 조직되어 있는데, 소통을 잘해서 공동전선을 쳐야 할 것 같습니다. 사진: 김충현 대책위 -
[한노운사 연재 10회] 2부 전진과 격돌 (1988-1998) [4] 1996~98년 노동법 대격돌김영삼 정권의 날치기 노동법 개악에 맞서 1996년 12월말부터 한 달 가량 전개된 민주노총 총파업은 매우 위력적이었다. 총파업은 무엇보다 정리해고제와 근로자파견제 도입을 저지하기 위한 것이었다. 일반 여론의 지지도 압도적이었다. 자신감이 넘치던 김영삼 정권은 총파업 한 달 만에 식물정권으로 전락했다. 1987년 노동자대투쟁 이후 축적돼 온 민주노조운동의 역량이 한국 사회를 완전히 뒤흔들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지도부의 역량이 매우 어설펐고 결정적인 순간에 총파업을 중단시켜 버렸다. 역사적인 총파업이 소기의 성과를 거두지 못한 채 소멸한 뒤 여야 보수 정치권의 합의로 다시 통과된 노동법은 개악 조항과 독소 조항 대부분을 그대로 둔 채 정리해고제와 근로자파견제만 2년 유예하는 선에서 그쳤다. 총파업 이후 10개월 만인 1997년 말, 한국은 대통령 선거 한복판에 국제통화기금(IMF)에 긴급지원을 요청해야 하는 외환위기에 빠졌다. 대통령 당선자 김대중은 정리해고제 도입을 관철하기 위해 노사정 대타협을 주문했고, 노사정위원회에 참여한 민주노총 지도부는 정리해고제와 근로자파견제 조기 도입에 합의하고 말았다. 민주노총 대의원대회가 지도부를 불신임하고 합의를 무효화한 뒤 총파업을 결의했지만, 총파업은 실행되지 못했고 노동법 개악안은 그대로 통과됐다. 1996~98년 노동법을 둘러싼 대격돌에서 노동자계급은 패배했다. 그 대가는 엄청났다. IMF 외환위기 이후 이른바 ‘헬조선’이 되어버린 한국 사회, 즉 넘쳐나는 비정규직과 극단적인 저출생으로 가는 길이 활짝 열렸다. 이전 편 보기 2부 전진과 격돌 (1988-1998) [시대배경] 군사파시즘에서 신자유주의 질서로 [1] 1988~89년 민주노조운동의 폭발적 성장 [2] 1990~91년 전노협 건설과 민주주의 투쟁 [3] 민주노총으로 가는 길 [4] 1996~98년 노동법 대격돌 1) 1996~97년 노개투 총파업 1987년 노동자대투쟁 이후 민주노조운동은 ‘노동악법 철폐’를 줄기차게 주장했다. 가장 대표적인 악법은 1980년 신군부의 노동법 개악 때 도입된 이른바 ‘제3자 개입금지’였다. 연대투쟁에 나선 모든 노동자들을 옭아맬 수 있는 이 조항으로 수백 명의 노동자들이 옥고를 치러야 했다. ‘복수노조 금지’도 중요한 문제였다. 단위노조 수준에서의 복수노조 금지는 회사측으로 하여금 어용노조 설립이라는 간편한 수단을 통해 민주노조 설립을 봉쇄할 수 있게 보장했다. 상급단체 수준에서의 복수노조 금지는 어용 한국노총에 맞서는 민주노조운동의 전국적 총결집체인 전노협이나 민주노총 등이 법외노조로 내몰리게 만들었다. ‘교사 노동자와 공무원 노동자에 대한 노동3권(단결권·단체교섭권·단체행동권) 박탈’이나 ‘노동조합의 정치활동 금지’도 민주노조운동의 확대와 성장을 가로막는 중요한 악법 조항들이었다. 이러한 악법들의 철폐를 위해 꾸준히 투쟁해 온 민주노조운동은 1995년 민주노총을 건설해 낸 만큼 이제 더욱 전면적으로 노동악법 철폐 투쟁으로 나아가야 할 참이었다. 반면 자본가들은 민주노조운동을 더욱 옭아매고 무력화하기 위해 노동법의 추가 개악을 원했다. 대법원 판결 확정시까지 인정되던, ‘해고를 다투는 자의 조합원 자격’을 중앙노동위원회 판정까지로 단축시키고자 했다. ‘노조 대표자의 체결권’을 신설해서 노조 대표자가 조합원총회의 민주적 결정 없이 직권조인을 하더라도 법적으로 효력이 인정되게 하고자 했다. 기본적으로 금지돼 있던 ‘파업 대체인력 투입’을 해당 사업장 안에서는 허용하고자 했다. 무노동 무임금 정책을 아예 ‘파업시 임금지급 금지’로 법에 명문화하고자 했다. ‘노조 전임자 임금지급 금지’로 노조 상근자들을 대폭 축소시키고자 했다. 그런데 그게 다가 아니었다. 1990년대에 전 세계가 신자유주의 물결에 휩쓸리고 있었다.[1] 규제완화, 민영화(사유화), 부자감세, 복지축소 등과 함께, 신자유주의가 지닌 또 하나의 중요한 특징은 노동유연화였다. 미국과 유럽에서만 수백만 명의 노동자들이 정리해고를 당하고 있었다. 생산거점을 값싸고 고분고분한 노동자들을 찾아 국경을 가로질러 이동시키는 ‘생산의 세계화’와 기업의 장기적 전망보다 주주의 단기적 이익을 우선시하는 ‘주주 자본주의’가 정리해고 규모를 더욱 확대시키고 있었다. 1990년대 초반 냉전체제의 붕괴와 함께 세계시장의 무한경쟁에 냉혹하게 내던져진 한국의 독점재벌들은 세계를 휩쓰는 노동유연화 물결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자본의 국제경쟁력’을 갖추기 위해 자본가계급은 한국에서도 노동유연화가 도입되기를 원했다. 그것도 가장 고도화된 형태를 갖춤으로써 최고의 경쟁력을 얻고 싶었다. 다시 말해 ‘자유로운 정리해고’에 덧붙여 ‘극도로 유연한 (다시 말해 극도로 노동권이 박탈된) 노동자로서 비정규직의 전면적 확산’을 가능케 하고 싶었다. 자본가들의 욕망은 정리해고제와 근로자파견제 도입 추진으로 구체화됐다. 1996년에는 이렇게 노동법을 둘러싸고 노동자계급과 자본가계급의 이해관계가 서로 정면충돌하는 정세가 만들어졌다. ◎ 김영삼 정권의 신노사관계 구상과 노동법 개악 추진 1996년 4월 24일 대통령 김영삼은 “21세기 세계 일류 국가로의 도약을 위해 참여와 협력의 새로운 노사관계를, 노사간의 사회적 합의와 범국민적 합의를 통해 이루어 나가겠다”면서 이른바 ‘신노사관계 구상’을 발표했다. 신노사관계 구상에 따라 노동계, 재계, 공익 대표자 30명을 포괄하는 ‘노사관계개혁위원회’(노개위)가 대통령 직속으로 5월 9일 출범했다. 특히 노개위는 “투쟁과 분배 우선의 노동운동에서 벗어나 국민경제의 발전과 함께 가는 합리적이고 생산적인 노동운동”을 주문하면서, 아직 법외노조 상태로 있던 민주노총을 한국노총과 함께 노동계 대표로 포괄했다. 김영삼 정권이 추진한 신노사관계 구상의 요지는 노동자들이 줄기차게 요구해 온 △복수노조 허용 △제3자 개입금지 철폐 △교사·공무원의 단결권 허용을 전향적으로 검토할 테니, △정리해고제 △근로자파견제 △변형근로제 도입에 대한 사회적 합의를 이루자는 것이었다. 이와 같은 김영삼 정권의 신노사관계 구상 아래에는 한국 자본가계급의 이해관계가 놓여 있었다. 한국의 자본가계급은 1960년대 이래 장기호황을 가능하게 했던 축적구조가 1987년 노동자대투쟁을 거치면서 근본적으로 흔들린 뒤 자본-노동 관계를 재구축해야 하는 과제에 직면해 있었다. 게다가 1990년대 들어 세계화 흐름을 따라 세계 자본주의 무한경쟁에 더 깊게 편입되면서 그 필요성이 더욱 절박해졌다. 자본가들은 이른바 ‘신경영전략’을 도입하고 체계적인 노무관리를 실시하면서 노조의 현장 기반을 잠식해 들어갔다. 또한 무노동무임금 논리, 노조간부 고소고발, 손해배상 청구소송 등의 공세를 통해 노동조합과 파업의 기세를 일정하게 약화시킬 수 있었다. 하지만 자본가들은 더 나아가고 싶었다. 자본가들은 노동조합의 힘을 무력화하고 노동시장의 유연성을 높여 노동자를 개별화함으로써 완전한 통제권을 얻고자 했다. 그런데 1987년 대투쟁 이후 급속하게 성장한 민주노조운동은 1990년대 들어 지배계급의 공세 강화와 경기침체가 맞물리면서 여러모로 고전하고 있었지만 여전히 상당한 전투력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자본가들은 격렬한 노자대립을 피하고 ‘사회적 합의’라는 형식을 통해 생산성과 경쟁력을 향상시킬 수 있는, 그러면서도 실질적으로는 노동자들을 길들여 장기적인 자본축적에 유리하게 작용하는 틀을 만들어 내고자 했다. 자본가들의 이러한 의도는 처음에는 1993~94년 경총과 한국노총의 임금인상 합의로 나타났다. 그러나 민주노조운동에 대한 통제력을 전혀 갖고 있지 못한 한국노총과의 합의는 아무런 실익이 없었다. 오히려 민주노조운동은 한국노총에 대한 규탄 속에서 민주노총 건설의 동력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자본가들이 ‘사회적 합의’를 이루고자 한다면, 어떤 식으로든 민주노조운동 세력을 끌어들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 분명해졌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김영삼 정권이 ‘참여협력적 신노사관계’ 창출을 위한 사회적 합의 기구를 구상하게 되고, 이로부터 1996년 정권 주도로 ‘불법단체’인 민주노총을 포괄하는 노개위가 출범하게 된 것이었다. 민주노총은 노개위 참여를 둘러싸고 상당한 논란을 겪었다. 지도부를 중심으로 한 타협·개량주의 세력은 “노개위에 참여해서 협상을 벌여보자”, “협상을 통해 지킬 것은 지키고 따낼 것은 따내면 되지 않겠냐”고 주장했다. 반면 현장을 중심으로 한 전투적·변혁적 세력은 “노개위 참여는 민주노총 합법화와 정리해고 도입을 맞바꾸는 것으로 귀결될 것”, “노동법 개악을 저지하고 노동법 개정을 쟁취할 수 있는 길은 노개위 협상이 아니라 총파업 조직”이라고 주장했다. 결국 5월 2일 중앙집행위원회에서 노개위에 참가하기로 결정됐다. 7월 19일 민주노총은 단위노조 대표자수련대회를 열어 하반기 노동법개정투쟁 방안을 논의했는데, 이 자리에서 “(민주노총 합법화 등) 집단적 노동관계법의 개정과 (정리해고제 도입 등) 개별적 노사관계법의 개악을 맞바꿔서는 안 된다”는 단위노조 대표자 다수의 결의가 확인됐다. ◎ 총파업의 준비 과정 노개위는 몇 달 간 논의를 이어갔지만, 복수노조, 교사의 단결권, 쟁의기간 대체근로허용, 정리해고제, 근로자파견제 등 41개 핵심조항에 대해 더 이상 논의를 진척시키지 못하고 교착상태에 빠졌다. 사회적 합의라는 허울 아래 정리해고제와 근로자파견제를 반드시 관철하겠다는 김영삼 정권의 의지가 점점 분명해지자, 현장으로부터 올라오는 비판과 총파업 요구도 더욱 거세졌다. 결국 민주노총 지도부는 10월 2일 노개위에서 철수했다. 이미 9월 21일 ‘노동법개정투쟁 승리 결의대회’를 수도권·충청권·호남권·영남권 등 각 권역별로 개최했던 민주노총은 이제 본격적으로 총파업 준비에 들어갔다. 김영삼 정권의 정리해고·비정규직 도입 시도를 분쇄하기 위해 총파업으로 떨쳐 일어서자는 선동이 전국의 주요 대공장과 공단에서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총파업을 호소하는 유인물이 쏟아지고, 총파업 결의를 다지는 출근투쟁·중식투쟁·현장순회·사업장집회·지역집회가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정리해고제, 근로자파견제, 변형근로제, 파업권 제약에 맞선 투쟁은 생존권을 지키는 결사항전일 수밖에 없었다. 김영삼 정권과 자본가계급도 물러설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노동자계급도 물러설 수 없는 상황이었다. 현대차노조는 9월 18~23일 제10차 정기대의원대회를 열고 1996년 하반기 사업은 노동법개정투쟁에 집중하기로 결정했다. 준비기, 투쟁돌입기, 총력투쟁기 등으로 시기를 구분해 상급단체 및 전국 노동운동 세력과 공동투쟁을 전개하기로 했다. 이를 위해 모든 조직체계를 ‘노동법개정투쟁위원회’로 전환했다. … 노동법개정투쟁의 선봉대로서 노개투 실천단을 구성했다. 노개투 실천단의 역할과 임무는 △투쟁지침 실천 △각 사업부 실정에 맞게 대중적인 사업실천 △대국민 선전활동 적극 참여 △각종 집회에 참여해 조합원 참여를 조직 △정기적이고 지속적인 선전 선동 작업 △사회개혁투쟁의 적극 실천 등으로 부여됐다. 10월 8~14일까지 모집된 실천단은 총 2,424명으로 구성됐다. … 10월 1일부터 12월 12일 사이에 노개투 조합원 교육 및 간담회를 총 79회 조직했는데, 4,530명의 조합원이 참여했다. 10월 26일에는 노개투 마라톤대회를 열었다. 6인 1조로 68팀이 참여했다. 대시민 지역 선전활동을 7차례, 유권자 서명운동을 19차례 진행했다. 노개투 차량스티커 3천장을 제작해 조합원들에게 배부하기도 했다.[2] 10월 9일 울산지역 현장조직대표자회의와 울산해고자협의회는 ‘노동법 개악안 설명회 및 울산지역 노동법 개정 투쟁의 방향’이라는 주제로 토론회를 갖고 ‘노동법 개악 저지 및 개정 투쟁 울산지역 선봉대’ 발대식을 가졌다. 선봉대는 10월 14일부터 11월 8일까지 울산지역의 거의 모든 민주노조 사업장 정문에서 출퇴근 투쟁을 벌였으며 민주당사, 신한국당사, 정몽준 의원 사무실 등에 대한 항의 방문 투쟁을 전개해 나갔다.[3] 현장과 지역에서 전개된 총파업 준비에 발맞춰 권영길 민주노총 위원장은 11월 4일 명동성당에서 삭발과 함께 단식농성에 들어갔다. 현장과 지역에서 축적된 열기는 11월 10일 전국노동자대회로 모아졌다. 10만이 결집한 전국노동자대회에서 권영길 위원장은 “노동법 개악안 강행시 총파업 돌입”을 선언했다. 노동자들이 총파업을 준비하는 동안, 자본가들과 김영삼 정권은 노동법 개악을 향해 한 발 한 발 다가가고 있었다. 11월 12일 전경련은 “복수노조 허용과 제3자 개입금지 철폐에 반대한다”는 입장을 발표했다. 김영삼 정권은 쓸모가 없어진 노개위를 대신해서 14개 부처 장관으로 ‘노사관계개혁추진위원회’(노개추)를 구성하고 독자적인 노동법 개악안을 마련해 나갔다. 12월 3일 확정된 정부안은 “우리가 봐도 심했다. 표정관리 하느라 애먹었다”는 말이 자본가들 측에서 나올 정도로 강경했다. 노동자들도 총파업 준비에 더욱 매진하면서, 노동법 개정을 둘러싸고 자본가계급과 노동자계급 사이에서 팽팽하게 긴장이 고조되고 있었다. 현대차노조는 민주노총 지침에 따라 12월 3일 저녁 5시부터 조합원 결의대회를 열었다. 영하를 오르내리는 매서운 한파 속에 열린 야간집회였으나 1만여 명이 넘는 조합원들이 참여해 임투를 능가하는 열기를 보여주었다. … 이어 12월 4일 민주노총의 모든 단위노조들과 함께 노개투 승리를 위한 쟁의행위 찬반투표를 실시했다. 조합원 34,509명 가운데 31,572명(91%)이 투표해 29,695명이 쟁의행위에 찬성했다. 전체 조합원 대비 86%, 투표자 대비 94%의 높은 찬성률로 쟁의행위가 가결됐다.[4] 12월초에 전국의 현장은 폭발할 것 같은 긴장감으로 가득했다. 그런데 12월 초·중순을 지나가면서 김영삼 정권의 노동법 개악 수순이 착착 진행되는데도 민주노총 지도부는 예정된 총파업 돌입을 거듭 유보하고 있었다. 애초 대의원대회와 중앙위원회를 거치며 결의된 민주노총의 방침은 12월 13일을 기해 총파업에 돌입하되 그 전이라도 국회 상임위에 개악안이 상정된다면 총파업에 돌입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민주노총 지도부는 12월 10일 개악안의 상임위 상정 시점에도, 12월 13일의 총파업 돌입 예정 시점에도 총파업 돌입 지침을 내리지 않고 유보시켰다. 특히 12월 12일 민주노총 지도부는 임원·산별대표자회의를 소집하여 총파업 돌입의 마지노선으로 여겨졌던 13일의 총파업마저 유보하기로 결정해 버렸다. 민주노총 지도부의 ‘13일 총파업 유보’ 결정을 앞장서 이끈 것은 타협·개량주의 세력의 주요 근거지로서 이른바 ‘국민과 함께 하는 노동운동’을 적극 주창하고 있던 ‘현대그룹노동조합총연합’(현총련)이었다. 현총련은 “민주노총의 총파업 결정이 정부의 음모를 제대로 꿰뚫어 보지 못한 부분도 있었다는 것을 솔직히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며 “국회 운영상 연내 법 개정이 사실상 불가능함에도 정부와 여당이 이번 회기 내 처리방침을 밝힌 것은 우리의 파업을 유도해 민주노총을 와해시키려는 고도의 정치적 음모라고 판단한다”고 밝히고 “권영길 위원장의 냉철한 판단으로 13일 파업을 유보할 것”[5]을 공식 제기했다. 민주노총 지도부의 ‘13일 총파업 유보’ 결정이 내려지자, 현장으로부터 강력한 반발이 솟구쳐 올라왔다. 민주노총 총파업에 연대하여 전 민중적 투쟁으로 발전시키려고 준비하던 노동운동 단체들과 민중운동 세력들도 강력하게 문제제기를 하고 나섰다. “정부와 신한국당에서는 공식적으로 이번 정기국회에서 기필코 노동법 개악안을 통과시키겠다고 거듭 밝히고 있고 나아가 이러한 방침에 반대하는 당 소속 국회의원들에게 경고하는 등 아무런 입장의 변화가 없음은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 뿐만 아니라 지난 몇 개월 간 준비한 민주노총의 총파업투쟁을 정부가 유도하면서 조직까지 와해 위축시킬 수 있는 것으로 투쟁을 불신하고 총파업투쟁을 철회함으로써 조직을 보존, 사수한다는 논리까지 들먹이는 데 이르러서는 망연자실할 뿐입니다. … 몇 차례의 과정을 통해 민주노총 지도부에서 김영삼 정권의 노동법 개악 강행구도가 분명함에도 불구하고 전혀 설득력 없는 정세판단에 근거하여 총파업 투쟁 방침을 번복하자 현장단위에서는 민주노총 지도부는 물론 그동안 총파업 투쟁을 독려하고 조직하여 왔던 단위노조 대표자와 간부들조차도 조합원들로부터 불신을 받고 있으며, 이 과정에서 단위노조와 지역의 지도력이 이미 심각하게 타격을 받은 상태라는 것입니다.”[6] “12월 13일 예정했던 총파업을 철회한 민주노총의 결정에 대해 심각한 우려를 금할 수 없다. 이번 총파업투쟁의 목표는 정부의 노동법 개악안 강행 시도를 내년 2월 임시국회로 연기시키는 것이 아니라, 정부의 노동법 개악안을 완전히 철회시키는 것이고 더 나아간다면 그동안 민주노조운동에서 요구해 온 내용으로 노동법을 민주적으로 개정하는 데에 있다. … 노동법 개악을 저지하고 민주적으로 개정해 내는 힘은 40만 민주노총 조합원 동지들의 총파업투쟁과 그에 뒤따르는 민중연대투쟁에 있다. 국회 진행 일정이나 보수 여야 정당들 사이의 이해 다툼은 결코 중요한 변수가 될 수 없다. … 총파업투쟁을 통한 선제공격만이 노동법 개악을 막아 내는 유일한 길이다. … 세계 자본주의의 경쟁이 격화되어 가는 상황에서 한국 자본주의는 노동자와 기층 민중에 대한 착취도를 강화하는 것에서 활로를 찾고 있으며, 김영삼 정권이 앞서서 이를 추진하고 있다. 올해 극심해지고 있는 민중 생존권 압살과 공안탄압 또한 이에 맞서는 투쟁을 억누르려는 시도이다. 이번 총파업투쟁은 노동법 개악 저지를 일차 목표로 하고 있지만, 나아가 한국 사회의 진정한 민주적 개혁을 위한 힘찬 발걸음이기도 하다. … 만약 12월 13일 총파업이 감행되었을 경우 정부와 자본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고 이 땅의 지축을 뒤흔들 대규모 전국 총파업이 충분히 가능했을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다. 자본의 신경영전략 공세, 권력의 생산성 향상 이데올로기 공세와 공안탄압 분위기 조성, 총파업투쟁에 대한 협박, 그리고 촉박한 시일 등 어려운 조건 속에서 이렇듯 힘차게 총파업투쟁을 준비하고 조직해 온 노동형제 동지들의 저력과 추진력을 보면서 진정으로 뜨거운 동지적 신뢰와 경의를 보낸다. 지금은 12월 13일 총파업투쟁을 목표로 준비하고 조직해 온 투쟁동력이 흐트러지지 않고 총파업투쟁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총력 매진해야 할 때다. … 어느 것 하나라도 우리의 힘으로, 우리의 투쟁으로 쟁취해 내지 않으면 안 되며, 또 그러한 투쟁을 통해서만 조직은 강화되고 발전할 수 있다는 지난 10년 동안의 민주노조운동의 교훈을 절대 잊어서는 안 된다.”[7] 민주노총 지도부의 안일한 판단과 달리, 김영삼 정권과 신한국당이 연말연시를 틈타 노동법 개악안을 전격 통과시키려 한다는 게 점점 분명해졌다. 결국 민주노총은 12월 22~23일 전국투쟁본부 대표자회의를 열고 ‘연말 노동법 개악 기도가 포착되는 즉시 권영길 위원장 이름으로 총파업에 돌입한다’고 결정했다. 민주노총 산하 모든 노동조합은 성탄절 연휴가 끝나는 12월 26일부터 비상체계에 들어가기로 했다. ◎ 역사적인 노개투 총파업 1996년 12월 26일 새벽 6시, 마침내 김영삼 정권이 신한국당 의원 154명을 동원해 노동법 개악안을 국회에서 날치기로 통과시켜 버렸다. 이날 통과된 노동법은 △정리해고제 도입 △근로자파견제 도입 △노조전임자 임금지급 금지 △해고자의 조합원 자격 인정 기간을 대법 선고에서 중노위 판정까지로 단축 △조합원 총회와 상관없이 노동조합 대표자의 체결권 인정 △생산시설 점거 쟁의행위 금지 △유니온샵 적용시 쟁의기간 대체인력 채용 허용 △쟁의기간 임금지급 금지 및 요구의 금지 등 노동자의 권리를 억압하는 온갖 독소 조항으로 가득 차 있었다. 반면 노동자들이 줄기차게 요구해 온 사항들에 대해서는 △제3자 개입금지 존속 △복수노조 불인정 △교사·공무원의 노동3권 부정 △공익사업장 직권중재 존속 등으로 철저하게 무시하고 있었다.[8] 노동법 개악안 날치기 통과 직후 민주노총 지도부가 ‘26일 오전부터 무기한 총파업 돌입’을 선언하자 즉시 총파업의 거대한 불길이 전국 방방곡곡에서 솟구쳤다. 현장과 지역에서 수많은 노조간부와 활동가들이 몇 개월 동안 목이 다 쇠도록 총파업을 조직해 왔던 결과가 마침내 솟구치는 용암처럼 터져 올라왔던 것이다. 총파업의 기세는 거대했다. 1987년 노동자대투쟁 이래 성장해 온 한국 노동자계급의 역량을 유감없이 보여준 정말로 위대한 투쟁이었다. 민주노총의 자체 집계에 따르면, 1996년 12월 26일부터 1997년 1월 24일까지 3단계에 걸쳐 모두 531개 노조 40만 4천 54명이 한 번 이상 총파업에 참여했는데, 이는 민주노총 전체 조합원 49만 6천 908명의 81.3%에 이르는 규모였다. 또 이 기간 동안 하루 평균 163개 노조, 18만 4천 498명이 파업에 참가해 파업 참가 누적 규모가 모두 3천 422개 노조, 387만 8천 211명에 이르렀다. 파업 참가 규모를 산업·부문별로 살펴보면, 제조업(금속, 자동차, 현총련, 화학 등)은 169개 노조 19만 9천 932명, 비제조업(건설, 대학, 사무, 전문 등)은 260개 노조 9만 1천 768명, 공공부문(병원, 언론, 의보, 지하철, 화물 등)은 99개 노조, 11만 1천 479명에 이르렀다. 파업참가 총 규모의 산업·부문별 구성비를 살펴보면, 노동조합 수 기준으로 제조업 32%, 비제조업 49.2%, 공공부문은 18.8%였고, 조합원 수 기준으로는 제조업 49.6%, 비제조업 22.8%, 공공부문 27.7%였다. 총파업이 가장 정점에 올랐던 1월 15일에는 388개 노조, 35만 8천여 명이 파업에 참가했다. 전국 각지에서 대규모 집회가 열린 날은 총 30일이었으며, 여기에 참여한 총인원은 150만여 명이었다. 이 기간 민주노총이 제작, 배포한 대국민 선전물은 총 390만 부였다. 1단계 총파업 (12/26~12/31) 1996년 12월 26일 오전 8시 민주노총의 총파업이 선언되자마자 금속연맹, 자동차연맹, 현총련, 대학노련, 전문노련, 화학연맹 등을 중심으로 14만 3천여 명이 총파업에 돌입했다. 27일에는 병원노련 등이 합류하며 20만 6천여 명으로, 28일에는 서울지하철노조 등이 합류하며 22만 3천여 명으로 총파업이 확대됐다. 29일에는 ‘노동법 날치기 통과 규탄 및 김영삼 정권 퇴진 결의대회’가 열렸고, 31일에는 ‘노동자 시민 송년 한마당’이 열렸다.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은 26일 새벽 신한국당이 단독으로 노동법 개악안을 기습 날치기 통과시킨 반민주적 폭거에 대항, 1천 2백만 노동자와 온 국민의 분노를 모아 26일 오전부터 산하 전 단위노조에서 즉각 ‘무기한 총파업’에 돌입한다. 또 민주노총은 노동법, 안기부법 개악안을 날치기 통과시키는 만행을 서슴지 않는 집권여당인 신한국당을 해체시키고 김영삼 정권을 퇴진시키기 위해 각계 민주세력과 함께 범국민적 항쟁을 벌여나갈 것이다. … 이 땅의 양심을 가진 모든 국민들은 민주노총이 전개하는 국민 생존권 및 민주민권 수호를 위한 성전에 동참하기를 간절히 호소한다.[9] 12월 26일 현대차 조합원 1만여 명을 비롯해 현대미포조선, 현대중공업, 현대정공, 현대강관, 한국프랜지 등 울산지역 노동자들이 오후 1시 태화강변으로 집결했다. ‘노동법·안기부법 날치기통과 규탄 및 김영삼 정권 퇴진 노동자 시민 결의대회’에 참여한 대오는 3만여 명에 이르렀다. 12월 27일부터 현대차노조는 오전에 본관 집회 또는 사업부별 집회를 가진 뒤 오후에 태화강 둔치에서 열리는 지역 집회에 참석하는 형태로 투쟁전술을 운용했다. 본관 집회의 경우 12월 27일에는 1만 5천여 명, 12월 31일에는 1만 8천여 명이 모였다. 1차 총파업 기간 동안 울산지역은 거의 매일 계속된 지역 집회에 2~3만 명이 꾸준히 참석해 서울과 함께 전국 투쟁을 선도했다. 거리행진을 하게 되면 대열의 앞을 보아도 끝이 없고 뒤를 보아도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그래서 행진에 참여한 노동자들이 스스로 놀라고 힘을 얻곤 하였다.[10] 12월 26일부터 31일까지 1단계 총파업에 참여한 민주노총 조합원은 연인원 100만여 명에 달했다. 민주노총 총파업이 엄청난 기세로 뻗어나가자 현장으로부터 파업 요구가 빗발치는 것을 견디다 못한 한국노총도 27일부터 파업에 돌입하여 16만여 명이 파업에 나섰다. 그렇게 어느 날 갑자기 대지를 뚫고 솟구치는 용암처럼, 노동자계급의 총파업은 한국 사회 전체를 밑바닥부터 송두리째 뒤흔들기 시작했다. 예상치 못한 사태 전개에 자본가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고, 자신감에 넘쳐 날치기 통과를 강행했던 김영삼 정권은 총파업 투쟁의 위력으로 권력의 기반 자체가 급속히 흔들리기 시작하자 정신없이 허둥대고 있었다. 그런데 그 상황에서 민주노총 지도부가 “연말연시 시민 교통편의를 고려”하여 공공부문 파업을 중단시켰다. “국민의 지지를 이끌어 내고 투쟁동력의 전술적 배치와 운영을 입체적이고도 다양하게 구사”[11]하려는 맥락에서 결정했다는 설명이었다. {1996년 12월 30일} 권영길 민주노총 위원장은 지하철노조에 이어서 내일부터 병원노조들을 업무에 복귀하도록 하는 등 연휴 기간 동안 총파업을 잠정 중단하기로 했다고 밝혔습니다. 이에 따라 나흘째 전면 또는 부분 파업을 벌여온 서울대병원 등 전국 병원 노련 산하 12개 병원노조가 내일부터 업무에 복귀합니다.[12] {1996년 12월 30일} 어젯밤 11시 50분 서울지하철노조가 파업을 풀고 이틀 만에 근무지로 돌아간 데 이어 부산지하철노조도 오늘 오전 11시 정상 근무에 들어갔습니다. 이에 따라 서울과 부산의 지하철은 오늘 정상을 되찾았습니다. 노조 측의 이 같은 결정은 시민들의 교통 편의를 위해 신년 연휴 기간 동안 파업을 중단하기로 한 민주노총의 지침을 수용한 것입니다. 파업을 잠정 중단한 데 대해 일부 노조원들이 반발하기도 했지만 노조 집행부의 결정을 따르는 쪽으로 기울었습니다. (서울지하철노조 선전홍보부장) “조합원들 분위기는 좀 안타깝다. 계속 더 투쟁을 해야 된다라는 그런 분위기였습니다.” 지하철공사 측은 노조의 현업 복귀를 환영하면서 최대한 관대하게 처분하겠다는 뜻을 밝혔습니다. (서울지하철공사 관리이사) “그동안에 이틀 동안 파업을 했지만 자진해서 복귀를 전부 했기 때문에 그러한 점들이 충분히 참작이 될 것입니다.”[13] {1996년 12월 30일} 이수성 국무총리는 오늘 특별담화를 발표하고 … 파업의 자제를 당부하면서 근로자의 생활안정을 위해 특별법을 제정하겠다고 밝혔습니다. … (국무총리 이수성) “오늘 아침 서울 지하철 근로자들이 파업을 자제하기로 한 것은 대단히 감사하고 자랑스러운 결정이었습니다.”[14] 2단계 총파업 (1/3~1/14) 새해가 밝아 왔다. 정권과 자본은 새해 연휴를 기점으로 파업이 잦아들 것이라고 희망 섞인 예측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한번 솟구친 총파업의 열기는 새해 연휴의 공백마저 거뜬히 뛰어 넘었다. 1월 3일 금속연맹과 자동차연맹을 중심으로 파업이 다시 시작되더니, 6일에는 현총련과 전문노련이 다시 파업에 돌입했고, 사무노련과 건설노련이 새로 총파업에 결합했다. 7일에는 병원노련, 방송4사 노조, 의보노조 등이 파업에 돌입했다. 8일부터는 사무노련, 건설노련, 대학노련 등 사무전문직 노동자들이 본격적인 투쟁에 나서기 시작했다. 1단계 총파업의 중심축이 제조업이었다면, 2단계 총파업을 거치면서 사무전문직으로 확대되는 양상이었다. 1월 3일부터 14일까지 2단계 총파업에는 연인원 169만 5천여 명이 참여했다. 이처럼 3주 가까이 위력적인 총파업이 지속되자, 민주노총이 문제해결의 주체라는 대중적 분위기가 조성됐다. 각종 설문조사에서 총파업 지지도가 70%에 이르렀다. 시민들의 격려와 성금, 의견개진 전화가 쇄도했다. 가두행진 때도 시민들의 높은 지지가 표명됐다. 투쟁양상도 집회와 가두홍보의 틀을 벗어나 의료서비스, 차량정비서비스, 공단청소 등 시민과 함께 하기 위한 행동을 모색하며 대시민선전과 서명운동을 광범위하게 진행했다. 매일 전국 20여개 지역에서 집회, 가두행진, 시민홍보·서명이 진행됐다. 참여인원도 하루 평균 10~12만 명에 이르러 시내 중심지에서 위력적인 가두시위를 전개했다. 11개 지역(안양, 안산, 수원, 의정부, 천안, 광주, 대구, 경주, 포항, 울산, 진주)에서는 한국노총과 공동집회가 이뤄졌고, 포항에서는 공동투쟁체를 구성했다. 여론의 지지가 광범하게 표출됨에 따라 민주노총 조합원들은 승리에 대한 자신감 속에 더욱 힘찬 투쟁을 전개할 수 있었다. 반면, 정권은 자제심을 잃고 강경론에서 온건론·회유책을 오고가는 등 일관성 없는 대응으로 좌충우돌하는 양상을 보였다. 울산지역은 새해 연휴가 상대적으로 길어 6일부터 2단계 총파업이 시작됐다. 1월 6일 울산은 지역 집회를 하지 않고, 새해 연휴 이후 향후 투쟁에 대한 결의를 새롭게 다지고 민주노총의 파업 일정 등을 조합원에게 제대로 정리시키는 것이 중요하다고 판단해 각 사업장 집회로 대체했다. 이에 현대차노조는 오전 10시 본관 앞에 8천여 명의 조합원이 모인 가운데 결의대회를 열었고, 1월 7일부터 지역 집회에 참여했다. 지역 집회는 7일 1만 5천명, 8일 2만명, 9일 2만 5천명이 참여하면서 매일 최대 인원을 기록했다. 이때부터 ‘정권 퇴진’ 구호가 자연스럽게 대중적인 중심 구호로 부상했다.[15] 그런데 총파업이 연일 계속되자 준비가 안 됐거나 조직력이 취약한 사업장들은 점점 어려움을 겪게 됐다. 핵심 사업장들 역시 조·반장을 중심으로 부분조업에 들어가면서 마찰이 표면화하기 시작했다. 보수언론은 노동자들의 투쟁열기를 가라앉히기 위해 관리직과 조·반장, 하청 노동자들을 동원한 청소나 기계 정비를 ‘조업재개’라고 과장해서 선전했다. 그러한 상황에 대응하여 민주노총 지도부는 전면파업에서 부분파업으로 파업전술을 전환했다. 총파업의 중심에 있던 현대차노조도 8일부터 부분파업으로 전환하고 조업 시간을 확대하는 조치를 취했다. 그러나 많은 현장활동가들이 우려하며 문제를 제기했다. “한번 동력이 떨어지거나 투쟁 수위를 낮추면 다시 동력을 높이거나 투쟁수위를 높이기는 거의 불가능하다”는 이유였다. {1997년 1월 8일} 전면파업을 계속해온 울산 현대자동차노조가 오늘 밤 근무조부터 조업을 다시 시작하기로 했습니다. … 현대자동차노조는 오늘 오후 6시 대의원 비상간담회에서 야간조의 경우 8시간의 근로 시간 가운데 4시간 동안 조업을 하고, 주간조도 오전 10시부터 2시간 동안 조업을 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이와 함께 현총련 산하 각 노조들도 오는 14일까지 부분파업으로 투쟁 수위를 낮추기로 했습니다. 현대자동차노조는 전면파업에서 부분파업으로 투쟁 수위를 낮춘 것은 민주노총의 투쟁 수위 완급 조절 지침에 따른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그러나 태화강 둔치에서의 규탄 집회는 계속하면서 민주노총의 일정대로 오는 14일까지 노동법 백지화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공공부문 노조와 함께 총파업에 들어가기로 했습니다. 한편 울산지역 현총련 소속 노조 등 8개 노조는 오늘도 태화강변에서 노동법 철폐를 요구하며 규탄 집회를 갖고 오토바이 경적 시위도 벌였습니다.[16] {1997년 1월 9일} 민주노총은 정부에게 노동법을 스스로 처리하는 기회를 주고 수출을 위해 14일까지 파업 강도를 다소 낮추기로 했습니다. 민주노총은 오늘부터 수출산업인 자동차회사 노조들에게 조업에 참여하게 했고, 국민들의 불편을 고려해 병원노련 등의 근무자 수를 늘리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건설, 사무전문 노조는 예정대로 내일 파업에 들어가기로 했고, 명동성당 등에 경찰력을 투입할 경우 즉시 총파업에 들어갈 방침입니다.[17] 민주노총의 전술 전환으로 총파업의 기세가 흔들리는 조짐을 보이자, 김영삼 정권은 물리력으로 진압하려는 의도를 노골화했다. 10일, 정권은 명동성당에서 농성 중인 민주노총 지도부를 검거하겠다며 ‘명동성당 공권력 투입 방침’을 천명했다. 또한 전국 투쟁의 진원지인 울산의 파업대오를 깨뜨리기 위해 전경 병력으로 지역집회 행진대오를 침탈했다. 바로 그 때, 거리행진 도중 전경들과 대치한 상황에서 현대차노조 정재성 조합원이 스스로 몸에 불을 붙였다. 총파업 기간 내내 정재성은 소위원으로서 조합원들에게 집회 참석을 열정적으로 독려하고 있었다. 현장에서 유인물을 배포하기도 하고 “집에 가지 말고 다 참석해라”며 조합원들에게 선동하기도 했다. 현장을 돌아다니며 수시로 호루라기를 불곤 했다. 태화강 둔치 가서는 일일이 출석체크를 했다. 1997년 1월 10일 오전 정재성은 현장에서 만난 동료에게 “오늘 공권력이 치면 가만히 안 있을끼다”고 말했다. 동료는 으레 그런 말로 생각했지만, 정재성은 이미 바나나우유곽에 신나를 담아 둔 상태였다. 오후 2시 태화강 둔치에 1만 3천여 명이 모여 ‘노동악법 안기부법 전면 무효와 김영삼 퇴진을 위한 울산노동자결의대회’를 시작했다. 이어서 ‘민주주의와 국민생존권 사수를 위한 울산 노동자·시민 한마당’ 행사를 열었다. 집회가 끝나갈 무렵인 4시쯤 서울 명동성당에서 농성중인 민주노총 지도부에 대한 사전구속영장 발부 소식이 전해졌다. 4시 15분 집회가 마무리됐을 때 경찰은 이미 중무장을 하고 있었다. 대오는 계획대로 울산시청을 향해 행진을 시작했다. 맨 앞에 깃발과 만장이 가고, 그 뒤로 선봉대 2~3백명, 그 뒤로 본대오가 따라왔다. 이날 집회와 행진은 가족과 함께 하는 행사로 계획된 터라 행진대오 속에는 상당수의 어린이와 가족이 포함돼 있었다. 4시 20분 태화로터리 근처에서 경찰과 대치가 시작됐다. 미리 신고된 집회와 행진인데도 경찰이 막아섰다. 노동자들의 항의가 빗발치자 경찰이 최루탄을 발사했다. 방패와 방망이로 노동자들을 내려치기도 했다. … 7명이 부상을 입었다. 노동조합 방송차량도 파손됐다. 행진대오가 흐트러졌다가 4시 40분 다시 모이자 경찰이 또 최루탄을 쏘았다. 노동자들은 돌을 던지기 시작했다. 정재성이 대치상황 한복판으로 뛰어든 것은 바로 그때였다. 4시 50분 정재성은 미리 준비한 신나를 몸에 붓고 자신의 몸에 불을 당겼다. 주변에 있던 노동자들이 화들짝 놀라 급하게 달려들어 불을 껐다. 정재성은 구급차를 타고 가까운 울산병원으로 긴급후송됐다. 얼굴과 하반신을 중심으로 전신 30%에 2~3도 화상을 입었다. 5시 50분 울산병원이 치료를 못하겠다고 손을 들자 대구 동산병원으로 이송했다. 대구 동산병원에서 응급처치를 마친 뒤 밤 10시에 서울 한강성심병원을 향해 다시 출발했다. 정재성이 구급차로 실려간 뒤에도 행진대오와 경찰의 대치는 계속됐다. 태화강을 등지고 있던 행진대오는 뒤로 돌아 태화강을 건너 주리원백화점을 거쳐 성남동 일대에서 가두행진을 벌였다. 현대차 조합원 3천여 명은 계속 이동해서 공장 안으로 들어갔다. 정재성의 분신 직후인 5시를 기해 회사는 무기한 휴업을 공고했다. 정문이 폐쇄됐지만, 지역집회에 참석했던 조합원들과 야간조 출근한 조합원들이 정문을 뚫고 들어와 9시 노동조합 앞에 모여 집회를 열었다. 간단히 집회를 마치고 노조 지도부가 노개투위원회 회의를 갖는 동안에도 조합원들이 계속 모여들었다. 10시 30분 1만여 명의 조합원이 집결한 가운데 다시 집회를 열었다. ‘노동악법 전면 백지화 및 전 조합원 총력투쟁 결의대회’였다. 회사의 무기한 휴업에 맞서 노조는 전면파업을 선언했다. … 1월 11일 현대차 조합원들은 주야 근무조가 모두 지역집회에 참석했다. 지역집회에 참석한 3만여 명의 노동자들은 대부분 운동화에 마스크를 쓰고 면장갑을 끼고 결연한 표정으로 투쟁 의지를 보여주었다. 노동자들의 투쟁 분위기가 강경하자 정권은 공권력 투입이 또 다른 악수라고 판단해 중단했다. 1월 12일은 일요일인데도 ‘노동법·안기부법 무효화와 정재성 동지 회복 기원대회’에 2만여 명이 참석했고, 1월 13일에는 역대 최고의 인원이 참석했다.[18] 3단계 총파업 (1/15~1/18) 정부와 신한국당이 13일 ‘노동법 재개정 불가’, ‘영수회담 거부’, ‘민주노총 지도부 영장 집행’이라는 강경 일변도의 방침을 재확인하였다. 이는 아직도 민의의 소재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현 사태의 심각성을 애써 외면하는 용납할 수 없는 처사로서 민주노총은 분노에 앞서 과연 정권에게 국가 운영능력이 있는지를 심각하게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이에 민주노총은 오만하고 독선적인 김영삼 정권에게 국민의 뜻을 올바로 전달하기 위해서라도 15일 예정대로 ‘3단계 전면 총파업’을 단행한다. 정부와 신한국당이 노동계와의 TV토론과 대화를 제의하다가 하루도 지나지 않아 강경입장으로 복귀한 것은 그들의 토론과 제의가 얼마나 국민기만적인 것인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지난해 말 KBS 등의 노동법 개정에 관한 노·사·정 간의 토론을 정부여당이 세 번씩이나 방해하여 무산시킨 전례로 볼 때, 이미 많은 국민들은 신한국당의 TV토론 제안의 의도가 무엇인지를 반문하지 않을 수 없다. 민주노총은 현재 국제적 기준에 전혀 부합하지 않는 노동악법의 날치기 처리로 인한 국제적 항의물결이 확산되고, 이것이 우리 상품의 신용도를 떨어뜨리고 국제경쟁력을 약화시킬 수도 있음을 엄중히 경고한다. 아울러 우리는 정부가 날치기 노동악법을 전면 백지화하여 국제 사회와 여러 차례 약속한 국제적 기준과 관행에 맞는 노동법 개정을 단행함으로써 국가위신과 국제적 신뢰를 회복하기를 충심으로 권고하는 바이다. 민주노총은 14~15일 한국노총이 공공부문 주도의 총파업에 돌입한 것에 대해 1천 2백만 노동자의 이름으로 환영하며, 정부당국이 이 총파업을 이유로 노총 지도부를 사법처리한다면 이를 민주노총에 대한 침탈로 간주하고 강력하게 대응할 것임을 밝힌다. 또 한국노총이 국민 절대다수의 요구를 대변하여, 날치기 노동악법의 전면 무효화를 쟁취할 때까지 끝까지 민주노총과 함께 끝까지 투쟁해 나갈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는다.[19] 1997년 1월 15일 다시 무기한 총파업을 선언한 민주노총의 3단계 총파업이 시작됐다. 이날 388개 노조 35만 8천 명이 총파업에 참가하면서 총파업 기간 중 가장 많은 노조와 조합원들이 총파업에 참여했다. 제조업에서 18만 1천 536명, 비제조업에서 9만 1천 569명, 공공부문에서 9만 7천 681명이 참여했다. 서울 5만여 명을 비롯해 전국 20여 개 지역에서 16만여 명이 집회와 시위에 나섰다. 1월 15일 울산에서도 ‘노동법·안기부법 철회를 위한 3단계 총파업 승리결의대회’를 열었는데, 3만여 명이 참여했다. 상황은 정권과 자본이 수세적인 국면이었다. 따라서 투쟁 동력을 최대한 살려내 투쟁을 장기화하는 것이 필요했다. ‘질긴 놈이 승리한다. 끝까지 투쟁하자’라는 구호는 이 시기 상황과 노동자의 입장을 잘 표현해 주었다.[20] 18일까지 지속된 3단계 총파업에는 연인원 90만 5천여 명이 참여했으며, 한국노총도 연인원 42만 2천여 명이 파업에 참여했다. 민주노총의 3단계 총파업은 김영삼 정권에게 정치적 치명타를 안겼다. 드디어 김영삼 정권은 여야 영수회담을 추진하고 날치기 법안의 국회 재논의를 검토하겠다면서, 총파업의 위력에 눌려 궁지로 내몰리고 있음을 스스로 인정했다. 수요파업 전환 그런데 민주노총 지도부가 18일 무기한 총파업을 중단하고 ‘수요파업’으로 전환한다고 선언했다. 수요파업이란 정상조업을 진행하되 매주 수요일만 총파업을 이어나간다는 것이었다. 최근 정치권 등을 중심으로 현 사태 해결의 실마리를 찾아가는 것처럼 알려지고 있으나, 이 시간 현재 가시적인 성과는 전혀 없는 실정이다. 민주노총은 날치기 통과된 악법의 무효화와 노동법 재개정, 그리고 구속·수배 해제, 단위노조 간부들에 대한 고소·고발 철회, 탄압 중지가 없이는 결코 현 사태를 해결할 수 없을 것임을 다시 한 번 분명히 밝힌다. 민주노총은 그동안 국민생활 편의와 어려운 국가경제를 고려하여 공공부문 중심사업장의 파업을 무기한에서 2일간으로 단축, 투쟁의 완급을 조절하고, {신한국당} 이홍구 대표와의 TV토론을 수용하는 등 사태를 원만하게 해결하고자 최선의 노력을 다해 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부 여당은 여론을 호도하여 아직도 본질적 문제를 해결하는 데 전혀 성의를 보이지 않고 임기응변식 술책만 펴고 있다. 이에 민주노총은 정부 여당이 날치기 통과된 노동악법, 안기부악법을 무효화하고 노동법 재개정을 받아들일 것을 다시 한 번 강력히 촉구하며, 만일 이에 응하지 않을 경우 2월 18일부터 4단계 총력투쟁으로서 공공부문을 비롯한 모든 부문 사업장이 무기한 전면 총파업에 돌입키로 한다. … 민주노총은 ‘4단계 총파업투쟁’ 이전에 1월 20일부터 매주 수요일에는 <총파업의 날>로 정해 이날 하루 산하 모든 부문 사업장(공공부문 제외)이 총파업에 들어간다. 또 매주 토요일은 <국민과 함께 하는 날>로서 전국 동시다발로 대규모 범국민대회를 개최한다.[21] {1997년 1월 18일} 민주노총이 총파업을 풀기로 결정했습니다. 민주노총의 권영길 위원장은 정부 여당이 스스로 노동법을 철회하고 재개정할 수 있는 기회를 주기 위해 다음 달 18일까지는 무기한 총파업을 풀고 업무에 복귀하기로 했다고 밝혔습니다. 그러나 하루빨리 노동법을 재개정하도록 촉구하는 뜻에서 매주 수요일에는 파업을 벌이지만 방송사와 지하철 등 공공부문 노조는 제외한다고 밝혔습니다. 국민들의 불편을 최소한으로 줄이기 위해서라는 설명입니다. 주 한 차례 파업과 함께 매주 토요일 오후에는 전국에서 노조원들이 대규모로 참석하는 범국민 결의대회를 열어 투쟁을 계속하기로 했습니다. 민주노총은 다음 달 18일까지 정부가 노동법을 다시 개정하지 않거나 경찰 투입 등 강경 대응에 나설 경우 즉각 4단계 총파업에 들어가겠다고 밝혔습니다.[22] {1997년 1월 18일} 민주노총 지침에 따라서 그동안 가장 큰 규모로 파업을 해왔던 울산지역 현대 계열사 노조원들도 다음 주부터 다시 직장에 복귀하기로 했습니다. … 현총련을 비롯한 울산지역 민주노총 산하 노조들은 오늘 오후 태화강변에서 가진 노동법 반대 투쟁 집회에서 민주노총의 투쟁 지침에 따라서 다음 주부터는 조업에 복귀한다고 밝혔습니다. 이에 따라 현대자동차노조도 지난달 26일부터 계속해 온 파업을 중단하고 조업에 복귀하기로 해서 다음 주부터는 정상조업이 이뤄지게 됐습니다.[23] 민주노총이 ‘수요파업 전환’을 발표하자 19일 검찰은 명동성당 민주노총 지도부에 대한 사전 구속영장 집행을 당분간 유보하겠다고 밝혔다. 명동성당 주변에 포진하고 있던 경찰병력도 철수했다. 민주노총 지도부는 ‘수요파업 전환’의 이유로 ‘투쟁동력이 급격히 떨어진 상황에서 전체 투쟁전선을 일사불란하게 유지하며 장기전에 대비할 필요가 있다’는 판단을 제시했다. ‘금속연맹 대기업 사업장의 동력은 이미 바닥나 부분적으로 조업재개를 한 가운데 간부파업을 하는 정도고, 위력적인 투쟁을 벌이던 기아자동차 등 자동차연맹 사업장도 파업 참여율이 50% 정도로 급격히 떨어졌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수요파업 전환에 대한 강력한 비판이 전국 곳곳의 현장으로부터 제기됐다. ‘투쟁동력은 여전히 상승세이며, 오히려 투쟁수위를 높이는 적극적인 투쟁을 해야 한다’는 주장에서부터 ‘투쟁수위 조절은 필요하지만 정치적으로 중요한 시점이므로 계속 투쟁을 유지해야 한다’는 주장까지 다양한 비판적 의견들이 여러 지역에서 제출됐다. 총파업의 중심이었던 울산지역은 수요파업으로 전환하지 않아도 될 만큼 충분히 동력이 살아 있었다. 16일 지역 집회에는 3만여 명이 참여했다. 17일 현대차노조가 개최한 ‘정재성 동지 쾌유기원 및 노동법·안기부법 개악 무효화 선언대회’에도 1만 8천명의 조합원이 참여했다. 따라서 민주노총의 수요파업 전환 방침에 대해 울산지역 현장활동가들은 더 강력하게 비판적 의견을 냈다. ‘우리가 힘든 만큼 정권과 자본도 힘들다. 힘을 내서 다시 밀어야 된다. 대중동력도 폭발적이다.’ 울산지역의 22일 수요파업은 2만여 명이 참석해서, 파업 참여율과 집회 동원 역량에서 이전과 별 차이를 보이지 않았다. 현대정공의 경우 대의원 선거를 마치고 동력을 되살림으로써 12월 26일 총파업 첫날의 파업 참가율을 복원했다. 그러나 25일 토요일의 지역집회는 현대차의 특근으로 참석 인원이 1만 3천명으로 뚝 떨어졌다. 26일 민주노총과 한국노총의 연대집회는 소수만이 참석한 가운데 이완된 분위기로 진행됐다. 28일 민주노총은 수요파업마저 중단하기로 결정했다. 민주노총의 수요파업 전환은 조합원들에게 사실상의 총파업 중단으로 받아들여졌고 따라서 수요파업 전환 이후 오히려 투쟁동력이 급격히 소멸되고 말았다. 전체 전선이 이완되자 총파업에 참여한 사업장들은 고소고발, 손배가압류, 무노동무임금 등 자본의 반격에 개별로 힘겹게 대응해야 했다. “민주노총의 갑작스런 수요파업 전환 지침(무기한 총파업 철회)으로 조합원들은 총파업이 마무리 단계에 들어섰다고 생각하였으며, 이러한 혼란스러운 상황은 많은 사업장에서 사측의 정리해고, 대체근로, 무노동 무임금 책동에 무방비로 당하게 만들었다.”[24] 민주노총이 수요파업 전환으로 투쟁동력을 상실해 나간 이 시기, 보수 정치권은 노동자들을 배제한 채 ‘노동법 재개정을 통한 정국 수습’을 모색했다. 1월 21일 대통령 김영삼과 국민회의 총재 김대중이 여야 영수회담을 갖고 날치기 통과된 법안의 국회 재논의를 합의했다. 총파업이 중단된 가운데 여야가 임시국회에서 노동법 재논의를 시작하면서 노동법 개정의 주도권은 다시 한 번 노동자들의 손을 떠나 여야 정치권으로 넘어갔다. 4단계 총파업 (2/28) 민주노총은 애초 2월 18일로 예정했던 4단계 총파업을 ‘임시국회 본회의 기간’으로 연기했다가 다시 28일로 최종 결정했다. 28일 4단계 총파업은 전국에서 13만 2천 명이 참여해서 4시간 동안 진행됐다. 참가자 수나 분위기 등 모든 면에서 3단계 총파업까지의 열기와는 확연하게 차이가 났다. 노동법 재개악 신한국당과 국민회의·자민련 등 보수 정치권은 여야 협상을 거쳐 3월 10일 새로운 노동법을 국회에서 통과시켰다. 그런데 여야 합의로 통과된 노동법은 날치기로 통과된 노동법에서 △정리해고제 도입 2년 유예 △근로자파견제 도입 2년 유예 △쟁의기간 대체인력 채용 불허 △상급단체 복수노조 허용 △기업단위 복수노조 허용하되 5년 유예 △노조전임자 임금지급 금지 5년 유예 등 극히 일부 내용만을 수정한 것이었다.[25] 다시 말해서 12월 26일 날치기 통과된 노동법에 새로 담겼던 다수의 독소 조항들, 즉 △노조전임자 임금지급 금지 △해고자의 조합원 자격 인정 기간을 대법 선고에서 중노위 판정까지로 단축 △조합원 총회와 상관없이 노동조합 대표자의 체결권 인정 △생산시설 점거 쟁의행위 금지 △쟁의기간 임금지급 금지 및 요구의 금지 등이 그대로 남았다. 노동자들이 줄기차게 요구해 왔던 △제3자 개입금지 철폐 △복수노조 인정 △교사·공무원의 노동3권 인정 △공익사업장 직권중재 철폐 등은 다시 한 번 철저하게 무시됐다. 신한국당과 국민회의, 자민련 등 여야 국회의원들은 전국 노동자의 역사적인 총파업 투쟁으로 만들어 놓은 재개정 기회를 철저히 정치적 이해득실에 따라 흥정으로 마무리하고 말았다. 우리는 이번에 통과된 노동악법은 여야합의라는 허울을 뒤집어쓴 제2의 날치기였다고 규정하고 악법조항에 대해서는 결코 수용할 수 없다는 사실을 분명히 밝혀둔다.[26] 노동자들이 배제된 가운데 자본가 정치세력들끼리 협상을 벌인 만큼 당연한 결과였다. 특히 ‘강인한 민주투사’ 이미지를 갖고 있던 김대중이 이끌던 국민회의(오늘날의 민주당)는 자본가정당으로서 자신의 계급적 본질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노동법 재개정을 위해 임시국회가 열릴 때 민주노총은 2박 3일 국회 항의방문 투쟁을 조직했지만, 전국에서 400여 명밖에 참석하지 않았다. 투쟁 동력이 바닥난 민주노총은 무기력을 곱씹을 수밖에 없었다. 결국 역사적인 총파업은 노동법 개악을 끝내 막아내지 못한 채 마무리됐다. ◎ 노개투 총파업의 결산 노개투 총파업은 소기의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지만, 노동자들이 총파업을 통해 위력적인 정치투쟁을 벌일 수 있다는 가능성만은 분명히 확인했다. 노개투 총파업은 김영삼 정권에게 정치적 치명상을 안겼다. 김영삼 정권은 총파업 직전까지만 해도 강력한 정국 주도권을 갖고 있었지만, 총파업으로 치명적 타격을 입고 이어 한보철강 사태와 황태자 노릇을 하던 아들 김현철의 구속을 거치면서 식물 정권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노개투 총파업의 위력은 노동자계급은 물론이요, 전체 민중을 결집시켰다. ‘노동법·안기부법 개악철회와 민주기본권 수호를 위한 범국민대책위원회’가 1월 10일 소집한 비상시국 사회단체 연석회의에는 862개 단체가 참여했다. 대학교수들의 시국선언이 잇따랐고, 변호사 554명은 ‘노동법개정은 위법이기 때문에 무효’라고 선언했다. 문화예술계 인사 333명은 ‘노동법·안기부법 개정 백지화’를 요구했고, 여성들도 총파업 지지 선언에 동참했다. 교수와 변호사들이 거리 행진과 항의 농성에 나섰고, 종교인들도 시국 법회·기도회·미사를 통해 신도들과 함께 거리에 나섰다. 1월 16일자 한길리서치의 ‘총파업에 대한 국민여론조사’에서는 65.6%가 민주노총 총파업을 지지하고, 93.8%가 공권력 사용을 반대하며 대화를 통한 해결을 지지했다. 비슷한 시기 한겨레신문 여론조사에서는 75.0%가 총파업을 지지하고, 83.3%가 정부의 강경대응에 반대했다. 74.3%가 노동법 개정이 무효라는 주장에 동의했고, 84.6%가 노동법 재개정 요구에 동의했다. 일부 법학교수들이 노개투 총파업을 ‘헌법질서 수호를 위해 저항권을 행사한 적법한 파업’이라고 규정하자, 창원지방법원과 대전지방법원의 판사들이 노동법·안기부법의 국회 통과절차에 대한 위헌 제청에 나설 정도였다. 그러나 노개투 총파업은 결정적인 순간에 중단됨으로써 그 위력에 걸맞은 성과를 전혀 얻지 못했다. 정리해고제와 근로자파견제를 2년 유예시키고 민주노총 합법화의 근거를 확보하는 초라한 결과만이 남았다. 총파업이 허망하게 중단된 이후 투쟁에 앞장섰던 현장 일선의 노조간부와 활동가들에게 대대적인 탄압이 쏟아졌다. 1월말까지 전국적으로 469명의 노조 간부가 고소고발 당했다. 수많은 노동자들이 징계위원회에 회부됐고, 상당수가 해고됐다. 현대차와 기아차를 비롯한 상당수 사업장에 무노동 무임금이 적용됐고, 손배가압류가 대다수 사업장에서 행해졌다. 그러나 민주노총 지도부에게는 아무 일이 없었다. 1월 21일의 여야 영수회담에서 김영삼은 민주노총 지도부에게 발부된 사전 구속영장을 집행하지 않겠다고 약속했고, 실제로 권영길 위원장을 비롯한 민주노총 지도부는 거대한 총파업을 이끌고서도 아무런 탄압을 받지 않았다. 현장 일선의 수많은 노조간부와 활동가들에게 대대적인 탄압이 퍼부어진 것과 너무나 대조되는 상황이었다. 총파업은 왜 패배했는가? - ‘국민과 함께 하는 노동운동’ 노선의 필연적 귀결 민주노총을 중심으로 전개된 총파업은 김영삼 정권에게 정치적 치명상을 안기는 매우 위력적인 것이었다. 따라서 만일 민주노총이 확고한 의지와 자신감을 갖고 총파업을 끈질기게 지속했다면, 나아가 더욱 확대시켰다면, 얼마든지 민주노총과 정권의 직접 담판을 통해 개악된 노동법의 철회는 물론이요, 노동자들의 노동법 개정 요구까지도 관철시켜 볼 수 있는 가능성이 있었다. 그러나 민주노총 지도부는 결정적인 순간에 총파업을 중단하고 여야 협상에 모든 것을 떠넘겨 버렸다. 결국 역사적인 총파업을 하고서도 노동법 개악을 거의 막아내지 못하는 말도 안 되는 결과가 남았다. 역사적인 총파업의 허망한 패배는, 당시 민주노총 지도부가 주창하고 있던 이른바 ‘국민과 함께 하는 노동운동’ 노선의 필연적 귀결이었다. ‘국민과 함께 하는 노동운동’ 노선을 가진 세력, 즉 ‘국민파’의 기본적인 사고 구조는, 노동자들의 단결된 힘에 의거한 강력한 투쟁을 통해서가 아니라, 국민 여론의 호응에 의거한 대화와 협상을 통해서 노동자들의 요구를 실현해 나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국민파는 ‘노동자계급 총단결 총투쟁’이라는 노동자계급 노선이 아니라, 국가주의·국민주의·민족주의라는 소부르주아 노선에 깊이 함몰돼 있었다. 총파업이 전개되는 동안 민주노총 지도부의 목표는 ‘총파업 위력의 극대화’가 아니라 ‘우호적인 여론 유지’에 있었다. 그래서 총파업 동력을 강고하게 유지·확대해야 할 상황에서 여러 차례 여론의 호응을 끌어내기 위해 일부러 투쟁수위를 낮췄다. 12월 29일 부산교통공단노조가 총파업에 합류하면서 서울과 부산의 지하철이 모두 멈춰 서게 됐을 때, 민주노총 지도부는 “시민에게 불편을 줘서는 안 된다”며 지하철과 병원을 비롯한 공공부문 파업을 중단시켰다. 또한 1997년으로 넘어가는 신정 연휴 기간에는 전체 총파업을 중단시켰다. 새해 들어 총파업이 다시 살아나 광범위하게 확산돼 나갈 때, 민주노총 지도부는 1월 7일 돌입 예정이던 지하철·한국통신·화물 등의 공공부문 파업을 15일로 연기시켰고, “정부에게 노동법을 스스로 처리하는 기회를 주고 수출을 위해” 8일 제조업의 전면파업을 부분파업으로 전환시켰다. 15일 총파업이 최대 규모를 기록하며 다시 한 번 기세등등하게 뻗어나가려 할 때, 민주노총 지도부는 결정적으로 찬물을 끼얹었다. 공공부문 파업을 16일까지로 한정시켰고, 18일에는 “정부 여당이 스스로 노동법을 철회하고 재개정할 수 있는 기회를 주기 위해” 총파업을 중단하고 수요파업으로 전환시켰다. 민주노총 지도부는 수요파업 전환의 이유로 ‘투쟁동력 하강’을 들었지만, 실제로는 총파업 자제를 통해 협상 분위기를 조성하는 게 여론 흐름에 유리할 것이라는 계산으로 내려진 결정이었다. ‘임박한 여야 협상에 대한 기대감이 국민 여론의 흐름’이며 ‘민주노총의 경직된 무효화 요구는 국민정서에 배치된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자본가들의 강력한 영향력 아래서 그때그때 요동치는 여론의 흐름에 끌려 다니느라 민주노총 지도부는 총파업 동력을 계속 약화시켰고, 결국 역사적인 총파업이 허망하게 소멸되도록 결정타를 날려버린 것이었다. 민주노총 지도부의 노선은 투쟁 전술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민주노총의 지침은 평화적인 지역집회와 가두행진으로 일관했다. 노동자대중의 능동성을 드높이고 투쟁동력을 확대하기 위해서는 더 적극적인 실천계획이 필요했다. 그러나 투쟁 전술을 발전시키기 위한 아래로부터의 창의적인 모색과 활발한 시도가 이뤄지지 못했다. 지도부는 협소한 투쟁지침에 입각해서 대중의 행동을 통제하려 했다. 이는 대중의 능동성이 분출하며 더 폭발적인 투쟁으로 전진하는 것을 가로막았다. 현장에서 터져 나온 투쟁동력이 지배계급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긴 했지만, 강력한 투쟁이 언제까지나 계속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선도적으로 치고 나온 대공장을 넘어서서 투쟁동력을 확대하기 위한 실천계획이 있어야 했다. 특히 공단 조직화를 위한 계획과 실천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그러나 시내를 중심으로 한 평화적인 지역집회에 모든 실천계획이 집중됐다. 공단 조직화 사업은 고사하고 자기 사업장 투쟁동력을 강화하는 것조차 지역집회에 가로막힌다는 불만이 나올 지경이었다. 울산지역 투쟁의 성공 이유 … 넷째, 투쟁전술이 지극히 대중적이고 창조적이었다는 점이다. 우선 투쟁이 시작됨과 동시에 대중적으로 천명한 ‘피해의 극소화 원칙’이 갖는 효과이다. 이러한 지도부의 기본 방침은 중간적인 대의원들이 비교적 마음 놓고 활동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피해의 최소화 원칙은 이번 투쟁을 통해 현장의 역량이 초토화되어서는 안 되고 위원장과 현총련 의장, 대의원 대표까지로 구속을 제한한다며 일반 대의원들은 함부로 나서지 말고 조합원들은 이들을 보호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것이 대중 집회에서 천명되자 조합원들이 열광적 지지를 보내주었고 일부 활동가들도 상당히 고무적인 태도를 보였다. 각오와 결의가 떨어지는 활동가들을 투쟁의 시기에 보호하려고 하는 것은 이들의 열의를 불러일으키는 데 상당한 기여를 한다는 것을 잘 말해주는 것이라 하겠다. 다음으로 비폭력 평화전술의 위력이다. 쓸데없는 선제공격을 하지 않고 군중의 위세로 경찰력을 무력화시킨 비폭력 평화전술은 여론을 좋게 만들고 중후진 조합원들의 참여를 보장하는 데 적극 기여하였다. 의식이 높지 않은 조합원들의 경우 공권력과의 충돌은 상당히 부담이 가는 것이다. 울산지역의 경우 대중적인 세를 기반으로 모든 집회를 합법적으로 쟁취함으로써 조합원들이 부담 없이 집회에 참가할 수 있었다. 다음으로 우리가 중요하게 볼 것은 가족들의 참여를 유도한 것과 다양한 쟁의 프로그램 개발이다. 울산지역의 경우 매일 같이 대규모 지역 집회를 개최하다 보니 집회에 식상해 하거나 긴장감이 떨어져 자칫 동력이 떨어질 가능성이 있었다. 이때 제기된 것이 “가족과 함께 하는 노동법 개정투쟁”이었으며, 이 방침이 공표되자 가족 단위의 집회 참석 인원이 많게는 수천 명에 이를 정도였고 조합원 집단 거주지의 가족들이 무료로 커피를 제공하는 등 전폭적 대중적인 지지를 받았다. 가족들의 투쟁 참가는 조합원들에게 자신감과 긍지를 불어넣었고 가족들은 이번 투쟁의 의미를 깊게 새기는 결과를 가져와 투쟁에 대한 전폭적인 지지를 획득하였다. 이는 투쟁의 장기화에 따른 부담을 최소화하는 데 일조하였다. 또한 조합원 가족 노래자랑, 장기자랑, 자녀들의 노래 공연과 우유마시기 대회 등 다양한 가족 참여 행사를 배치함으로써 조합원 가족들에게 집회가 친밀하게 다가서도록 했으며 개사곡 경연대회, 도전 50곡, 구호 경연대회, 3행시 경연대회, 박터뜨리기, 단심줄 꼬기 등의 행사를 통해 조합원들의 자발적인 참여를 유도했다. 또한 오토바이 부대는 기동력을 앞세워 다양한 전술(사업장 내의 투쟁 분위기를 고조시키기 위한 사내 행진, 대중적인 행진이 불가능한 신한국당 당사 항의투쟁이나 시청 항의방문 투쟁, 투쟁기간 중 동구와 남구에 대한 선전, 우리의 위세를 과시하는 가두 오토바이 행진)을 구사했으며 지도부 사수에 커다란 역할을 했다.[27] 이번 총파업투쟁의 두드러진 특징 중의 하나는 민주노총 중앙의 지침에 대해 산하 일선노조에서 잘 지키려 하였고 대중들도 민주노총의 지침이라면 일단은 지키고 따라야 한다는 분위기였다. 이런 모습은 지역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일단 집회가 시작되면 모든 것은 지도부의 지침에 따라 움직이는 분위기였다. 그러나 이것은 양면성을 갖는 것이다. 민주노총의 지도력이 서고 중심이 잡힌다는 것은 기업별노조 체계를 극복하고 투쟁의 집중성을 살릴 수 있다는 긍정적인 측면을 갖는 반면, 지나치게 지도부 중심의 투쟁, 지도부 중심의 집회를 고집할 경우 참여대중의 자발성을 점차 약화시키면서 마침내 대중동력의 침체를 가져올 소지도 다분히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집회 본대회가 시작되기 전에 프로그램의 부족으로 많은 여유시간이 있었다. 그러나 이 여유시간을 활용하여 집회에 참석한 조합원 중에서 이번 총파업 투쟁에 대하여 자신이 갖는 느낌이라거나 제안 등을 자유롭게 발표하도록 하였으면 집회 분위기가 더욱 더 고조되었으리라 믿는다. 그러나 지도부에서는 지도부 외에 사전 계획되지 않은 조합원이 마이크를 잡을 경우 지도부의 방침에 어긋나는 선동을 할 수도 있을 것이라는 우려 때문이라고 짐작이 가고 또 이 점에 대해 지도부의 고민도 이해되지 않는 바도 아니지만, 지나치게 우려했다고 생각한다. 중요한 것은 대중은 확실하게 지도부를 믿고 있기 때문에 그러한 선동을 하는 사람에 대해 대중은 나름대로 정확한 판단을 할 것이라고 믿는 것이다. 또 다른 예로는 지도부는 지나치게 ‘비폭력 평화행진’을 강조했다. 물론 여론이 총파업에 대해 우호적이고 경찰이 의도적으로 폭력사태를 유발하려 하지 않는 상황에서 비폭력 평화집회와 가두행진을 통해 일반 국민을 더욱 더 우호적이게 만들 수도 있지만, “비폭력을 깨고 폭력행위를 유발하려는 자는 적의 프락치로 볼 것이다”는 식의 강요와 억압은 대중의 자발성을 억압하고 지도부의 지시에 무조건 따라하는 맹종자를 만들 뿐이다. 노동운동 내부에서 필요한 것은 주체적으로 판단하고 자발적으로 실천하는 대중이다. 지도부의 지시에 맹종하는 조합원은 언젠가 지도부가 무너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 오면, 그대로 함께 무너지고 만다. 우리는 투쟁을 통해 주체적인 노동자, 미래의 간부를 길러내야 한다. 그러므로 비폭력 평화행진의 필요성을 강조하되, 지나쳐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특히 “지도부의 비폭력 지침을 따르지 않으려면, 필요 없으니 집회에 오지 마라”는 식의 언어폭력은 좋지 않으며 충분한 대화를 통해 설득하고 어느 정도 의견을 진지하게 듣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본다. … 울산지역 총파업투쟁에서의 주력은 현대자동차노조를 중심으로 한 민주노총 진영이었다. 반면 한국노총 내부도 총파업투쟁에 소극적인 지도부(한국노총 울산지부)에 대해 산별연맹 또는 단위노조 대표자들이 회의 석상에서 불만을 터뜨리는 등 내부에 동요가 심했고, 민주노총 지역투본에 대해 기대와 신뢰를 보내는 편이었다. 이런 기회를 살려 한국노총의 주요 지역기반인 남부 화학단지와 효문연암 지역의 자동차 부품단지에 대해 집중적인 선전전이나 가두행진을 벌인다면 지역노동자 전체가 총파업 분위기에 휩쓸릴 수 있고, 민주노총의 영향권 내로 들어올 수 있는 상황이었다. 특히 남부 화학단지 내 민주노총 사업장인 섬유산업의 태광산업노조가 대의원의 총파업 결의에도 불구하고 위원장의 거부로 파업에 돌입하지 못하는 상황이었고, 민주노총 가입을 공언한 역시 섬유산업의 동양나이론(최근 효성티앤씨로 회사이름 바꿈) 노조가 파업열기나 요구에도 불구하고 사측의 탄압으로 어려움을 겪으면서 정문 앞에서 공동집회를 열어 지원을 요청하였는데도 이를 받아주지 못한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현실이었다. 효문연암 지역의 경우 노조의 약 3분의 1이 민주노총에 가입해 있어 지역투본에서 보다 효과적으로 선전전과 시위를 벌였더라면 이후 보다 많은 사업장에서 민주노조를 세울 수 있는 기틀이 되었을 것이다. … 노동법개정 총파업을 예상하면서 민주노총은 노동법 개정투쟁의 선봉부대로서 ‘실천단’을 구성하도록 지침을 내렸다. 실천단은 단위사업장 내에서 노동법 개정투쟁에 조합원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하도록 선전하는 일, 그리고 나아가 지역 또는 연맹별로 공동의 선전과 실천부대로서 중요한 역할을 맡겼다. 그래서 실천단에는 단위사업장의 대의원 또는 소위원을 비롯한 중간 활동가들이 많이 참여했다. 그러나 대개의 지역에서와 마찬가지로 울산지역에서도 실천단은 자기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실천단이 할 수 있고 또 해야 할 일들은 많았다. 취약지역 노동자들에 대한 선전과 설득작업, 지역주민들에 대한 선전과 설득작업, 가두행진 대열에서의 선동, 질서의 유지, 집회에서의 분위기 고조를 위한 선동 등 할 일은 많았다고 본다. 그러나 총파업투쟁이 지도구심이 폭넓게 형성되지 못하고 일부 사업장이 주도하는 식으로 전개되고 또한 완전히 지도부 중심으로 진행되면서 중간활동가 또는 실천단이 제 역할을 제대로 찾지 못했다. … 1월 19일까지 총파업 기간 25일 중 신정연휴 기간과 토요일 혹은 일요일을 제외하고 약 18일간 대규모 집회를 열었다. 이 자리에는 최소한 2만이 넘는 조합원들이 매일 참석하였다. 그래서 이 자리에서 지도부가 계획과 뚜렷한 방향을 갖고 연설을 진행했더라면 엄청난 산교육의 현장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못했다고 본다. 날치기를 주도한 신한국당의 해체를 선동하고 김영삼 정권의 퇴진을 소리높여 외쳤지만 신한국당과 김영삼정권의 배후에 있는 자본에 대한 실체의 폭로와 규탄은 약했다. 그래서 일부 사업장 노조에서는 파업을 하면서도 “이번 싸움은 노사간의 싸움이 아니라 정부와의 싸움이므로 현장에서 충돌하지 말라”는 지시가 내려져 현장관리자들이 조합원들을 개별적으로 각개격파하여 작업에 복귀토록 하는 것을 보고만 있어야 했다. 역으로 현장관리자나 부서장들도 “노사간의 싸움도 아닌데, 왜 우리 회사가 피해를 입어야 하느냐?”며 조합원들을 설득하기도 했다. 또 하나 민주노총이 조직적 목표로 설정한 산별노조의 건설이라는 대과제를 대중들에게 집단적으로 선전할 절호의 기회였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제대로 선전하지 못했다. 지나치게 “신한국당 해체”, “김영삼정권 퇴진”에만 매달려 우리의 중요한 과제 하나를 놓쳐버렸다. “이번 총파업투쟁은 기업별노조임에도 불구하고 민주노총이라는 조직적 무기가 있었기에 가능하였다. 만일 우리에게 산별노조라는 무기까지 있었더라면 얼마나 힘차게 되었겠는가”, “우리는 우리의 이웃 사업장이 사측의 탄압으로 조합원들이 총파업에 동참하고 있지 못해도 아무런 지원을 해주지 못하고 있다. 만일 우리가 지금 산별노조로 같은 노조 조직의 조합원이라면 우리가 기업의 울타리를 넘지 못하고 가만히 있겠는가” 등 충분히 공감이 가는 선동과 선전이 가능하였다고 본다. 바로 이것이 총파업투쟁이 끝난 후 우리 민주노조 진영이 챙겨야 할 소중한 부분임에도 불구하고 거의 전혀 이러한 선전과 선동이 없었던 점은 대단히 아쉬운 대목이다.[28] “민주노총은 … 대중들의 투쟁요구와 투쟁의지 나아가 정세를 역동적으로 변화, 발전시키기 위한 적극적인 노력이 부재하였다. 대부분 지나치게 평화적인 집회와 가두행진을 종용함으로써 조합원 대중을 동원의 대상으로 전락시키기 일쑤였다. 판에 박힌 집회 내용과 가두투쟁 전술은 역사적인 정치 총파업을 자신감 있게 전개하고픈 많은 조합원 대중들을 대단히 실망시켰다. 이것은 뒤늦게 분출하는 대중들의 요구를 통제하지 못해 전개되는 양상으로 나타났고 장기간 현장 총파업 투쟁을 유지하는 사업장의 어려움을 극복하는 좋은 조건과 많은 기회를 잃어버렸다.”[29] 총파업과 노동자 국제연대 세계 각국의 노동자운동은 한국의 노개투 총파업에 큰 의미를 부여했다. 이미 10년 이상 자본의 신자유주의 공세에 밀리면서도 좀처럼 투쟁의 돌파구를 찾지 못하던 세계 노동자들에게 1996~97년 한국의 노개투 총파업은 1995년 프랑스 공공부문 총파업의 맥을 잇는 또 하나의 희망이었다. 따라서 22개 국가에서 총파업 지지 시위가 벌어질 정도로 활발한 국제연대가 이뤄졌다. 특히 호주 운송하역노조는 한국 수출입 선박에 대한 하역거부를 국제적인 투쟁전술로 제안하기도 했다. 그런데 민주노총 지도부는 이 제안을 ‘정중하게 거절’했다. 국가경쟁력에 지장을 주는 행위는 국민 여론에 좋지 않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노동자계급의 국제주의가 아니라 소부르주아적인 국가주의·국민주의·민족주의가 표출되는 또 하나의 지점이었다. 민주노총 지도부는 국제연대에 있어서도 매우 잘못된 태도를 취했다. 총파업과 노동자 정치세력화 1996~97년 노개투 총파업은 노동자 정치세력화에 있어서 일대 전환점이 됐다. 노개투 총파업은 비록 승리하지 못했지만 광범한 노동자들 속에서 노동자계급의 잠재력을 자각하게 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1987년 노동자대투쟁 때에도 노동자계급의 잠재력에 대한 대중적 각성의 기회가 있었지만, 전반적인 대중의식이 너무 초보적이었던 탓에 전노협을 중심으로 한 민주노조 조합원들을 제외하고는 그 경험이 거의 유실돼 버렸다. 그러나 1987년 노동자대투쟁 이후 10여 년에 걸친 민주노조운동의 역사를 거치면서 전반적인 대중의식이 일정하게 성장해 온데다가 한 달 가까이 조직적인 총파업이 갖는 위력을 경험하면서 민주노조운동 안팎의 광범한 노동자들 속에서 노동자계급의 잠재력에 대한 자각이 일어나게 된 것이었다. 그런데 민주노총 지도부는 총파업이 소기의 성과를 얻지 못한 이유가 “단 한 석의 국회의원도 없었기 때문”이라면서, 노동자 정치세력화의 방향을 선거와 의회 중심으로 몰고 나갔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총파업의 힘이 국회의원 수백 명을 합친 것보다 훨씬 더 강력했다는 사실이다. 수백 명의 국회의원을 다 합친 것보다도 훨씬 더 강력했던 총파업의 힘을 스스로 무너뜨린 민주노총 지도부가 “단 한 석의 국회의원”을 거론하는 것은 궤변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혁명적인 대안 지도력을 세워내지 못한 한국의 노동자계급은 개량주의 민주노총 지도부가 이끄는 의회주의 노동자 정치세력화의 길로 이끌려 나아갈 수밖에 없었다. 역사적인 총파업을 허망한 패배로 이끌고서도 총파업의 후광을 화려하게 뒤집어 쓴 권영길 민주노총 위원장은, 1997년 말 대선에서 민주노총 결의로 대통령 후보로 나섰고, 2000년 민주노동당 창당과 함께 당 대표가 됐다. ‘국민과 함께 하는 노동운동’ 세력, 즉 국민파는 역사적인 총파업을 패배로 이끈 과오를 범하고서도 아무런 반성을 하지 않았고, 따라서 아무런 배움도 없었다. 총파업의 소멸 이후 대대적인 탄압으로 현장이 얼어붙었기 때문에, 아래로부터 올라오는 비판과 문제제기도 그들의 주도권을 위협할 만큼 강력하지는 못했다. 불행하게도 그 때문에 여전히 민주노총에서 주도권을 거머쥐고 있던 국민파는 결국 IMF 외환위기가 몰아닥쳤을 때 한국 노동자운동의 역사에서 결코 묻힐 수 없는 역사적 과오를 저지르고 말았다. 2) 1997~98년 IMF 경제위기와 노사정의 정리해고 합의 총파업이 막바지에 이르고 있던 1997년 1월 23일 한보철강이 부도를 냈다. 1991년 수서비리 사태를 통해 부패한 정경유착의 대표주자로 이미 악명을 떨쳤던 한보였다. {1997년 1월 23일} 극심한 자금난에 시달리던 한보 철강이 오늘 끝내 부도로 쓰러졌습니다. 한보 철강이 그동안 얻어 쓴 빚은 4조가 넘습니다. 사회적인 그리고 경제적인 여파가 엄청날 것으로 우려되고 있습니다.[30] 그런데 한보가 무리한 사업 확장을 위해 더 거대한 정치권 로비와 불법 대출로 금융기관 자금을 대규모로 조달해 온 사실이 드러났다. 특히 그 정경유착의 정점에는 대통령 아들로서 황태자 노릇을 하던 김현철이 있었다. 5월 17일 김현철이 구속되면서 김영삼 정권은 식물정권으로 전락했다. 7월 15일 8위 독점재벌 기아가 부도방지협약 대상으로 지정되면서 사실상의 부도를 냈다. 부도방지협약(부도유예협약)은 4월말 금융기관들이 ‘일시적인 자금난을 겪는 대기업들이 금융기관들의 자금회수 공세로 연쇄부도로 치닫는 사태를 막기 위해’ 도입한 협약이었다. 이 협약의 존재 자체가 심각한 경제위기 국면으로의 진입을 뜻했다. {1997년 7월 15일} 재계 서열 8위인 기아그룹이 부도방지협약 대상으로 지정됐습니다. 사실상의 부도인 셈인데 10대 재벌도 안심할 수 없다는 항간의 얘기가 현실로 드러나 충격은 더합니다. 우리 경제에 미치는 영향도 깊고 클 것 같습니다.[31] 기아그룹의 부도는 한국 독점재벌의 위기가 심각한 수준에 이르렀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었다. 1990년대 초반 냉전체제 해체와 함께 세계시장의 무한경쟁에 냉혹하게 내던져진 한국의 독점재벌은 오히려 자신감을 갖고 과거 한국에서 성장하던 방식 그대로 세계무대에서 행동했다. 최대한 많은 빚을 내 최대한 빠르게 사업을 확장함으로써 많은 이윤을 거두고 빚도 갚아나가는 방식이었다. 독점재벌은 국내외 금융기관들로부터 엄청난 부채를 끌어당겼다. 그러나 세계시장은 한국시장처럼 독점재벌의 독무대가 아니었다. 독점재벌의 이윤은 엄청난 부채를 감당하기에 충분치 않았다. 결국 영업으로는 흑자인데 대출 원리금을 상환하고 나면 적자인 상태가 점점 심화됐다. {1997년 7월 15일} 재벌 가운데 부채가 가장 많은 곳은 현대그룹, 무려 43조 3천억 원입니다. 삼성은 37조 원입니다. 다음으로 LG, 대우, 선경의 순위입니다. 빚이 많을수록 재계 서열이 높아집니다. 은행감독원이 밝힌 49개 재벌의 작년 부채 규모는 1년 만에 61조 원이 늘어난 296조 원입니다. 한라와 조양상선은 부채 비율이 2천 퍼센트, 뉴코아는 천 퍼센트를 넘을 정도로 빚더미에 올라 있습니다. 빚더미 경영의 결과는 올해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 부채 비율이 8천 퍼센트가 넘는 진로, 자기자본을 다 까먹은 삼미와 대농은 부도가 났거나 부도방지업체로 선정됐습니다. 제 뒤에 보이는 기아그룹도 10조 원에 가까운 금융권의 빚에 시달리다 결국 부도유예협약의 적용을 받게 됐습니다. 빚으로 덩치만 키웠지 작년에 재벌 그룹들은 천 원어치 물건을 팔아 빚을 갚고 평균 2원밖에 이윤을 남기지 못한 것으로 분석됐습니다. 재벌의 자기자본 비율은 평균 20%. 자산이 100억 원이라면 20억 원만 자기 돈이고 나머지는 빚이라는 얘기입니다.[32] 위기에 빠진 독점재벌이 금융기관의 자금회수 시도로 연쇄도산에 빠지는 것을, 국내에서는 부도유예협약을 통해 막을 수 있었다. 그러나 해외 금융기관의 자금회수에는 속수무책이었다. 독점재벌이 해외 금융기관에게 무차별 자금회수를 당하면서 한국의 외환보유고가 빠르게 사라져 갔다. 마침내 11월 중순을 지나면서 한국의 외환보유고가 바닥나 국가 전체가 대출금 상환에 응할 수 없는 상태, 즉 ‘모라토리엄’ 직전에 내몰렸다. 갚아야 할 외채는 아직도 1천 5백억 달러나 남아 있었다. 모라토리엄을 피하기 위해, 한국 정부는 국제통화기금(IMF)에 긴급 자금지원을 요청했다. {1997년 11월 21일 저녁 10시, 임창용 경제부총리} 정부는 최근 겪고 있는 금융 외환시장에서의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하여 국제통화기금에 유동성 조절 자금을 지원해 줄 것을 요청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33] IMF에게서 자금을 빌려오는 것은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다. IMF는 구제금융을 제공하는 대가로 ‘재정긴축, 금융구조조정, 노동시장 유연성 확보’ 등의 조치를 한국 정부에 요구했다. IMF와 그 뒷배인 미국이 대놓고 한국의 경제주권을 침탈하겠다는 것이었다. 한국 정부는 IMF가 제시한 요구들을 전적으로 수용했다. {1997년 12월 3일} 길고도 험난했던 IMF 자금 지원 협상이 오늘 밤 완전히 타결됐습니다. 오늘 밤 7시 40분쯤 임창열 경제부총리와 깡드시 IMF 총재는 협상을 마치고 세종로 정부종합청사 대회의장으로 나와서 협상의 타결 소식을 전했습니다. 깡드시 총재는 이 자리에서 한국에 지원할 자금 규모는 모두 550억 달러로 결정됐다고 말했습니다.[34] IMF와의 협상 타결은 기업의 연쇄부도를 막지 못했다. ‘극심한 경제위기’를 공식화함으로써 오히려 연쇄부도를 더 촉진했다. 1달러 8백 원 정도 하던 환율이 연일 폭등해 1달러 2천 원을 육박했다. 주식은 폭락했다. {1997년 12월 6일} 기업들이 연쇄부도로 쓰러지고 있습니다. 어제 고려증권에 이어서 오늘은 재계 12위인 한라그룹이 부도를 냈습니다. … 작년 매출액 5조 3천억 원, 재계 서열 12위인 한라는 조선과 자동차부품 산업 등을 주축으로 하고 있어 엄청난 파장이 예상되고 있습니다. 한라그룹의 총 부채는 은행권 3조 원, 제2금융권 3조 4천억 원 등 모두 6조 4천억 원입니다. 이로써 올해 대기업의 부도로 금융기관이 떠안게 된 부실 채권은 30조 원이나 됩니다.[35] 외환위기가 발생하고 IMF 협상이 진행되던 시간은 대통령 선거의 와중이기도 했다. 12월 18일 김대중이 대통령으로 당선됐다. 19일 김대중은 기자회견을 갖고 ‘IMF와 적극적으로 협력해 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1997년 12월 22일} 김대중 대통령 당선자는 오늘 립튼 미국 재무차관과 보스워스 주한 미국 대사가 참석한 가운데 IMF 대책 회의를 갖고 새 정부는 IMF 협약을 100% 준수하겠다고 밝혔습니다. 김대중 당선자는 또 IMF와의 협약을 경제체질 개선의 계기로 삼겠다고 밝혔습니다. 김대중 당선자와 미국 측은 임금 조절을 통해 실업 위기를 넘기지 못할 때는 최소 범위에서 실업이 불가피하다는 데 의견을 같이 했습니다. 정리해고제 도입을 사실상 수용한 셈입니다.[36] 김대중은 ‘IMF협약을 이행하고 외국인 투자를 유치하기 위해선 정리해고제 도입이 불가피하다’고 주장했다. 1997년 3월 10일자로 재개정 노동법이 통과되면서 정리해고제가 2년 유예됐기 때문에 정리해고제는 1999년 3월에 도입되게 돼 있었다. 그런데 김대중은 정리해고제를 바로 도입해야 한다면서 이를 논의하기 위한 틀로 ‘IMF체제 극복을 위한 노사정위원회’를 12월말 제안했다. 1996년 김영삼 정권이 노동법 개악을 위해 노개위를 제안했을 때와 비슷한 모양새였다. 하지만 의도가 더 노골적이었다. 노사정위원회는 IMF 외환위기를 빌미로 자본가들의 신자유주의 공세를 본격화하기 위한 이데올로기적·제도적 기반을 마련하는 수단이었다. 민주노총이 선택해야 할 길은 명확했다. 노사정위원회를 단호히 거부하고 정리해고제 도입에 맞선 총파업 조직화의 길로 나아가야 했다. 그러나 민주노총은 노사정위원회에 들어갔다.[37] 1998년 1월 15일 경제위기 극복을 위한 노·사·정 간의 고통분담을 논의하기 위해 노사정위원회가 구성됐다. 노동자를 대표하는 민주노총과 한국노총, 사용자를 대표하는 전경련과 경총, 정부를 대표하는 재경원과 노동부, 그리고 여야 4당을 포괄했다. {1998년 1월 19일} 노사정위원회는 오늘 전체 회의를 열어 경제난 극복을 위한 합의문과 이를 위한 10개 의제를 발표할 예정이었습니다. 그러나 회의에서는 이른바 고용조정 문제, 즉 정리해고제를 합의문 안에 포함시킬 것인지의 여부가 노사 간의 주요 쟁점으로 부각됐습니다. 사용자 측은 고용조정과 근로자파견제를 합의문 안에 명시할 것을 주장했으나 노동자 측, 특히 민주노총 측이 이를 완강하게 거부했습니다. (배석범 민주노총 위원장 직대) “민주노총은 고용조정, 다시 말해서 정리해고 그건 받아들일 수가 없습니다.” 오늘 회의에서 정부 측은 IMF 협약을 준수한다는 내용으로 타협안을 제시했으나 끝내 의견 절충에 실패했습니다. 합의문 작성에 관해서는 오늘 진전이 없었습니다. 내일 오전 11시에 본 위원회를 다시 개최키로 했습니다.[38] 1998년 1월 20일, 노사정위원회는 ‘경제위기 극복을 위한 노·사·정 간의 고통분담에 관한 공동선언문’을 발표했다. 쟁점이 됐던 정리해고 문제는 ‘해외자본 투자유치를 위한 제반 조건을 마련한다’는 간접적인 표현으로 에둘러졌다. 그러나 노사정위원회 논의가 정리해고 도입 ‘합의’를 강제하기 위해 나아가고 있다는 것은 분명했다. {1998년 2월 1일} 노사정위원회 간사인 국민회의 조성준 의원은 오늘 노사정위원회가 내일까지 쟁점 사항에 대한 일괄 타결을 보지 못할 경우 새 정부의 독자안을 2월 임시국회에 제출해 처리하겠다고 밝혔습니다. … 이 같은 국민회의측의 입장은 노사정의 합의 이후 처리한다는 지금까지의 입장에서 강경 방침으로 선회한 것입니다. 이 같은 국민회의측의 방침이 알려지자 노동계는 강력히 반발하고 나섰습니다. 특히 민주노총 측은 강행 처리할 경우 파업도 불사하겠다는 입장을 정리했습니다. (고영주 노사정위원회 민주노총측 전문위원) “정리해고제나 근로자파견제를 노동계의 동의 없이 국회에서 강행 처리한다면 상당한 저항에 부딪힐 것이고, 민주노총은 즉각적으로 파업에 들어가는 것으로 지금 결정을 해놓고 있는 상황입니다.” 지난달 발족 이래 수차례 회의를 거듭하면서 입장 차이를 좁히지 못했던 노사정위원회는 이로써 중대 전기를 맞이하게 됐습니다.[39] 마침내 2월 6일, 노사정위원회는 ‘경제위기 극복과 재도약을 위한 사회협약’에 합의했다. 사회협약의 핵심 내용은 정리해고제와 근로자파견제를 ‘경제위기 극복’을 위해 즉시 도입한다는 것이었다. 잠정합의의 내용은 노동기본권을 보장(공무원과 교원의 단결권 보장, 정치자금법 개정으로 노조의 정치활동 보장, 실업자의 초기업단위 노조 가입 허용 등)받는 대신 노동계는 정리해고와 근로자파견의 법제화에 동의하고, 기업은 구조조정을 촉진하는 대신 경영투명성 확보에 노력하며, 정부는 고용·실업 대책, 물가안정, 임금안정과 노사협력 증진, 그리고 사회보장제도의 확충(고용보험 1인 이상 확대 실시, 임금채권보장제도 도입)에 노력한다는 것이었습니다.[40] {1998년 2월 6일} 마침내 진통을 거듭하던 노사정위원회가 대타협을 이뤄냈습니다. 노사정위원회는 오늘 아침 본회의를 열어 경제위기 극복과 재도약을 위한 노사정 공동 선언문을 채택했습니다. 무려 18시간의 마라톤협상 결과 우여곡절의 진통 끝에 이뤄낸 대타협이었습니다. 노사정위원회는 선언문에서 근본적인 개혁을 단행하지 않고서는 현재의 경제 위기를 극복할 수 없다는 데 인식을 같이 하고 이를 위한 공정한 고통분담에 협력하기로 합의했다고 밝혔습니다. (한광옥 노사정위원장) “노사정 세 주체의 살을 깎는 살신성인의 결단과 양보, 국가 위기 극복이라고 하는 공동의 절박한 목표를 위해 고통분담을 통한 대타협에 도달하였다는 사실을 강조 드립니다.” 노사정위원회는 먼저 정리해고를 전 산업에 걸쳐 즉각 실시할 수 있도록 하고 기업의 인수·합병 등 긴박한 경영상의 이유를 정리해고의 요건으로 명시하는 데 합의했습니다. 또 근로자파견제는 노사 양측의 입장을 절충해서 예외 대상과 지정 대상을 함께 명시하기로 했습니다. 고용조정에 따른 실업대책 재원은 당초 4조 4천억 원에서 5조 원으로 확충했습니다. 위원회는 또 전교조를 내년 7월부터 합법화해서 허용하고 올해 상반기 안에 노조의 정치활동을 보장하기로 했습니다. 그러나 노조전임자 임금지급 문제와 대기업의 경영 투명성 확보를 위한 재벌개혁 문제 등은 끝내 이견을 좁히지 못해 2차 과제로 넘겼습니다.[41] 민주노총 지도부가 ‘정리해고 도입’을 합의했다는 소식은 전국의 현장을 일거에 뒤흔들었다. ‘노사정 합의는 도저히 인정할 수 없다’, ‘가슴이 너무 답답하다’, ‘민주노총 지도부가 노동자 팔아먹었다고 생각한다’ 등등 격렬한 성토의 목소리가 현장 곳곳에서 터져 나왔다. 각 지역과 연맹, 단위노조에서 노사정 합의를 반대하고 민주노총 지도부를 성토하는 성명이 빗발쳤다. 민주노총 지도부가 7일로 예정됐던 부분파업과 집회를 노사정 합의에 따라 취소했지만, 만도기계 노조가 부분파업을 강행했으며, 대전과 대구지역에서는 집회를 강행하여 노사정 합의 반대를 천명했다. 노사정 합의 보도를 접한 한라중공업노조 조합원 50여 명은 8일 상경하여 민주노총 사무실에서 ‘노사정 합의안 전면거부’를 요구하며 철야농성에 들어갔다. 민주노총 지도부의 노사정 합의에 대한 현장의 강력한 반발은 9일 민주노총 임시대의원대회에서 폭발했다. 이날 대회가 시작되기 전부터 대회 장소인 성균관대 유림회관에서는 1층에서 한라중공업노조, 현장조직 모임, 전해투가 함께 사전 집회를 하고, 다른 한쪽에서는 서울지하철노조가 집회를 하면서 “어용 지도부 물러가라”를 외치는 등 격앙된 분위기로 가득 찼다. 대회는 3시부터 시작될 예정이었다. 그러나 배석범 직무대행 등 민주노총 지도부가 나타나자 조합원들이 분을 못 이겨 야유와 욕설을 퍼부으면서 대회 진행이 30분가량 늦춰졌다. 먼저 노사정 합의안에 대한 설명이 진행됐다. 이어서 오전에 중앙위원회에서 결정한 대로 ‘노사정 합의안 추인 여부와 부결될 경우 지도부가 사퇴하는 안’에 대해 찬반토론을 진행했다. 찬반토론에서 대다수 대의원들은 ‘필요하다면 타협할 수 있지만 절대로 타협할 수 없는 게 있다’, ‘조합원의 목을 치는 정리해고제는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다’며 지도부를 강하게 성토했다. 소수는 ‘나라가 망한다는데 도리가 있느냐’며 현실론을 폈다. 표결이 진행됐다. 노사정 합의안은 찬성 54명, 반대 184명으로 압도적으로 부결됐다. 회계감사를 제외한 민주노총 1기 지도부 전원[42]이 불신임을 받아 총사퇴했다. 민주노총 건설 과정에서 민주노조운동의 주도권을 거머쥔 타협·개량주의 세력, 그 가운데서도 특히 국민파가 숱한 과오를 거듭해 온 끝에 결국 노동자들로부터 준엄하게 심판받는 역사적 순간이었다. {1998년 2월 9일} 민주노총은 오늘 유림회관에서 대의원 대회를 열고 찬반투표를 통해서 노사정위원회의 합의 사항을 부결했습니다. 대의원들은 노사정위원회에서 지도부가 합의해 준 정리해고 도입 등 협약 내용은 무효라고 주장하고 집행부 사퇴 등을 요구했습니다.[43] 노사정 합의 추인을 거부한 민주노총은 임시국회의 노동법 개악을 저지하기 위해 비상대책위원회 체제로 전환하여 13일 총파업 투쟁에 돌입하기로 하고 단병호 금속연맹 위원장을 비상대책위원장으로 만장일치로 추대했다. {1998년 2월 10일} 민주노총이 지난 금요일 타결된 노사정 합의를 사흘 만에 거부하고 총파업을 선언하고 나섰습니다. … 노사정 대타협에 합의한 집행부가 물러나고 비상대책위원회가 구성됐습니다. 노사정 합의의 원천 무효를 확인하고 오는 13일 전국적인 총파업에 들어가겠다고 결의했습니다. (단병호 민주노총 비대위원장) “노사정 합의로 이루어졌던 안은 그것은 안 된다라고 하는 것은 명확합니다.” 일선 노동계의 예기치 않은 거센 반발로 고용조정 관련 법안의 국회 처리가 진통을 겪게 됐습니다. 상설기구인 노사정위원회의 앞날도 불투명합니다. 대규모 총파업으로 이어져 노동계와 정치권의 정면충돌 사태와 함께 경제 살리기에 차질을 빚을까 우려됩니다. 노사정위원회는 긴급 대책회의를 통해 노사정 합의는 여전히 유효하다고 밝히고 고용조정 법안을 예정대로 처리하는 등 정면 대응하기로 했습니다.[44] 그러나 민주노총 비대위는 12일 밤 총파업을 전격 철회했다. 정리해고제와 근로자파견제는 결국 14일 임시국회를 통과하며 법제화 됐다. 정리해고제는 근로기준법 개정을 통해 즉시 도입됐고, 근로자파견제는 ‘파견근로자보호등에관한법률’(파견법) 제정을 통해 1998년 7월 1일부터 효력이 발생했다. {1998년 2월 13일} 오늘 새벽 0시 민주노총의 파업 방침이 극적으로 뒤집히던 순간 민주노총 지도부의 표정은 침통했습니다. 파업 철회 결정을 내리기까지 숱한 우여곡절이 있었음을 암시하는 듯 했습니다. (단병호 민주노총 비대위원장) “13일 오후부터 전개하기로 한 총파업 방침을 철회합니다.” 어제 오전 회의 시작 때만 해도 비상대책위는 정리해고의 입법화를 저지하기 위해서는 파업을 밀어붙여야 한다는 강경파가 주도했습니다. 점심도 거른 채 산별 연맹과 각 지역본부 대표 등 30여 명은 국민회의 당사로 몰려가 파업 결의를 다졌습니다. 그러나 3시에 속개된 오후 회의부터 2선으로 물러나 있던 온건파가 제동을 걸고 나왔습니다. 파업 결의 사업장이 전체의 6분의 1밖에 안 된 데다 지금의 경제 상황이 또다시 파국으로 치달을 경우 국민적 비난은 물론 민주노총 조직마저 와해될 수 있다고 강하게 주장했습니다. 위원장의 굳은 얼굴, 줄담배를 태우는 간부들, 시간이 흐를수록 지도부는 파업을 하루 앞둔 모습이라고 보기엔 몹시 초조했습니다. (민주노총 간부) “총파업이라는 최후 방어수단을 강구할 수밖에 없는 고통스러운 논의이기 때문에 길어지고 있습니다.” 파업 철회는 이때부터 가닥이 잡혀갔습니다. 밤 8시 40분, 비대위 위원 20여 명이 퇴장했고, 핵심 지도부 8명은 막판 조율을 계속했습니다. 최종 결론은 파업 철회. 14시간의 격론과 고심 끝에 내린 한밤의 결단이었습니다. 그러나 민주노총은 파업을 철회했다 하더라도 임시국회에서 정리해고 법안의 처리를 지켜본 뒤 노사정 합의안 반대 투쟁을 계속하겠다는 입장을 강조했습니다.[45] 물론 총파업 동력을 급하게 조직해 내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민주노총 비대위의 총파업 철회는 정리해고제와 근로자파견제 도입이라는 역사적 사건 앞에서 또 한 번 노동자들을 결정적으로 배신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당시까지 그 실체가 충분히 드러나지 않고 있었지만, 1998년을 거치며 국민파에 필적하는 또 하나의 주요한 타협·개량주의 세력으로 가시화하는 이른바 ‘중앙파’가 갖는 한계를 적나라하게 드러낸 최초의 사건이었다. 결국 민주노총 건설 과정에서 민주노조운동의 주도권을 타협·개량주의 세력이 장악한 것은 1996년부터 1998년 2월까지 신자유주의 대공세의 초입부에 벌어진 노동자계급의 총력 방어전이 참담한 패배로 귀결되게 만든 핵심 원인이 되고 말았다. 김대중 정권과 자본가들은 ‘나라가 망하게 생겼으니 고통분담이 불가피하다’며 민주노총 지도부에게 정리해고제와 근로자파견제 수용을 압박했다. ‘지금 대한민국이라는 배가 바다에서 가라앉게 생겼다, 배를 살리려면 잠깐 30%를 내려놓을 수밖에 없다, 먼저 배를 살린 뒤에 배가 안정되면 다시 30%를 구할 수 있다, 그렇게 해야 모두가 산다’ 같은 논리를 사용했다. 노동자계급의 세계관 대신 국가주의·국민주의·민족주의라는 소부르주아적 세계관에 함몰돼 있던 타협·개량주의 세력은 김대중 정권의 그럴싸한 논리를 이겨낼 수 없었다. 하지만 현장 노동자들은 정리해고제와 근로자파견제 도입에 결코 동의하지 않았다. 민주노총이 할 일은 ‘나라 살리기’나 ‘회사 살리기’가 아니라 ‘노동자 살리기’여야 한다는 주장이 크게 인기를 끌었다. 계급적 직관이 반영된 간명한 대안이었다. 이후에 실제로 벌어진 일들은 김대중 정권과 자본가들의 논리가 얼마나 추악한 거짓인지를 여실히 입증했다. 나라가 망할 판이라고 했지만, 노동자들이 정리해고와 비정규직 전환으로 피눈물을 쏟은 IMF 외환위기 동안 자본가계급은 그 어느 때보다 많은 돈을 벌어들였다. 내버려진 ‘30%’는 국가 경제가 회복된 이후에도 결코 구제받지 못했다. 오히려 누군가를 내버려도 된다는 쪽으로 길이 열리고 나니 국가경제가 잘 돌아가는데도 점점 더 많은 이들이 내버려졌다. 다음 편 보기(연재 예정) [1] 세계적인 차원에서 보자면, 자본가계급이 1980년대부터 실행한 신자유주의 공세는 노동자계급에 대한 착취·수탈의 강화를 통해 위기로부터 탈출하려는 전략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의 대량파괴와 대량학살을 통해 그 이전 시기에 누적됐던 모순을 상당 부분 털어낸 세계 자본주의는 새롭게 거대순환을 시작했다. 그러나 자본의 유기적 구성의 고도화와 세계적인 경쟁 격화에 따라 이윤율이 점차 하락한 끝에 1970년대에 극심한 경제위기에 빠져들었다. 바로 이 1970년대 경제위기로부터 벗어나려는 자본가계급의 대응전략이 신자유주의 공세의 출발점이었다. 세계화·금융화와 결합된 신자유주의 공세는 노동자·민중에게 엄청난 희생을 강요한 대신, 자본가들에게는 30년 가까이 장밋빛 미래를 열어주었다. 그러나 2008년 금융위기는 신자유주의·세계화·금융화가 내재한 모순을 폭발시켰다. 이후 세계 자본주의는 갈수록 위기가 더 심화되는 상황 속에서 허우적거리고 있다. [2] 서영호·양봉수 열사회, 2025, 『현대차 열사·희생자 백서』, 정재성 편. [3] 서영호·양봉수 열사회, 2025, 『현대차 열사·희생자 백서』, 정재성 편. [4] 서영호·양봉수 열사회, 2025, 『현대차 열사·희생자 백서』, 정재성 편. [5] 현총련, 1996/12/11, 「엄중한 시기에 즈음한 우리의 제안」. [6] 민주노총 대구·부산양산·대전충남·충북·부천시흥·경기남부 6개 지역 투쟁본부, 1996/12/16, 「민주노총 지도부에 각성을 촉구하며 - 다시 한 번 강고한 노동법개악 저지를 위한 총파업투쟁을 제안합니다」. [7] 민중운동탄압 분쇄와 민주기본권 쟁취를 위한 범국민대책회의, 1996/12/13, 「노동법개악 저지 전국 총파업투쟁의 힘찬 전진을 위해 40만 민주노총 노동형제에게 드리는 글」. [8] 이날 함께 통과된 안기부법 개정안 또한 국가보안법상의 찬양고무죄와 불고지죄에 대한 수사권까지 안기부에 부여하는 등 안기부의 권능을 대폭 강화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9] 민주노총, 1996/12/26, 「총파업 선언 기자회견문」. [10] 서영호·양봉수 열사회, 2025, 『현대차 열사·희생자 백서』, 정재성 편. [11] 민주노총, 1996/12/30, 「권영길 위원장이 조합원 동지들께」. [12] MBC, 1996/12/30, <민주노총 새해 연휴기간 파업중단 발표>. [13] MBC, 1996/12/30, <서울지하철노조와 부산지하철노조, 파업 잠정중단>. [14] MBC, 1996/12/30, <이수성 국무총리 특별담화문 발표, 파업 자제와 협조 당부>. [15] 서영호·양봉수 열사회, 2025, 『현대차 열사·희생자 백서』, 정재성 편. [16] MBC, 1997/01/08, <울산 현대자동차노조, 부분 조업 결정>. [17] MBC, 1997/01/09, <한국노총, 14일부터 시한부 파업 결정>. [18] 서영호·양봉수 열사회, 2025, 『현대차 열사·희생자 백서』, 정재성 편. [19] 민주노총, 1997/01/14, 3단계 전면 총파업 돌입에 관한 기자회견문. [20] 서영호·양봉수 열사회, 2025, 『현대차 열사·희생자 백서』, 정재성 편. [21] 민주노총, 1997/01/18, 「수요파업 전환에 관한 기자회견문」. [22] MBC, 1997/01/18, <민주노총 총파업 중단 결정>. [23] MBC, 1997/01/18, <울산지역 현대계열사 노조, 다음 주부터 조업복귀>. [24] 김남수, 2006, 「노동자 속에 숨어 있는 무서운 힘 - 87년 노동자대투쟁과 96·97년 총파업」. [25] 1997년 재개정 노동법에서 2년 유예됐던 정리해고제와 근로자파견제는 IMF사태 초기인 1998년 2월초 민주노총까지 참여한 노사정위원회에서 조기 도입하기로 합의됐다. 민주노총이 지도부를 불신임하며 합의를 파기했지만 그대로 법제화됐다. 이에 따라 정리해고제는 1998년 2월부터, 근로자파견제는 1998년 7월부터 시행됐다. 5년 유예됐던 기업단위 복수노조 허용과 노조전임자 임금지급 금지 조항은 민주노총을 제외한 노·사·정 합의에 따라 2001년 말 다시 5년 더 유예, 2006년 말 다시 3년 더 유예됐다가 2009년 말 이명박 정권 주도로 더 개악됐다. 이에 따라 노조전임자 임금지급 금지는 타임오프라는 통제 장치를 덧붙여 2010년 7월 1일부터, 기업단위 복수노조 허용은 교섭창구 단일화라는 통제 장치를 덧붙여 2011년 7월 1일부터 시행됐다. [26] 현대차 민주노동자투쟁위원회, 1997/03/14, 「여야합의 노동악법 결코 수용할 수 없다」, <민투위>. [27] 현대차노조, 1997, 『현자노조 사업보고 1996~97』, 461~463쪽. [28] 천창수, 1997/01/20, 「울산지역 총파업투쟁에서 아쉬운 점들」, 영남노동운동연구소, 『연대와 실천』 1월호. [29] 전국 구속·수배·해고노동자 원상회복 투쟁위원회, 1997/01/28, 「민주노총 총파업 투쟁에 대한 전해투 중간 평가서」. [30] MBC, 1997/01/23, <한보철강 부도, 경제계 큰 파문>. [31] MBC, 1997/07/15, <기아 사실상 부도, 부도방지협약 대상 지정>. [32] MBC, 1997/07/15, <기아 부도 위기는 과도한 부채 때문>. [33] KBS, 1997/11/21, <국제통화기금 지원 요청 긴급 기자회견>. [34] MBC, 1997/12/03, <[IMF 협상 타결] IMF, 긴급 자금지원>. [35] MBC, 1997/12/06, <한라그룹 부도>. [36] MBC, 1997/12/22, <김대중 대통령 당선자 IMF 대책회의 정리해고제 수용>. [37] 사실 노사정위원회는 민주노총이 먼저 제안한 것이었다. 1997년 12월초 IMF 외환위기에 따른 경제위기가 가시화하자 민주노총은 이에 대응하기 위한 사회적 합의기구 구성을 먼저 제안했다. 김대중의 노사정위원회 제안은 민주노총의 제안에 대한 화답의 성격을 갖고 있었다. [38] MBC, 1998/01/19, <노사정위원회 첫 회의 결렬, 정리해고 쟁점>. [39] MBC, 1998/02/01, <노사정위원회 고용조정 강행 방침, 노동계 강력 반발>. [40] 이원보, 2005, 「한국노동운동사 8 - 1987년 이후의 노동운동」, 『노동사회』 5월호. [41] MBC, 1998/02/06, <노사정위원회, 국가위기 극복 위한 고통분담 대타협 큰 결실>. [42] 당시 사퇴한 민주노총 1기 지도부는 배석범 위원장 직무대행, 허영구 부위원장, 이영희 부위원장, 배범식 부위원장, 김영대 사무총장이었다. 권영길 위원장은 1997년 12월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면서 먼저 사퇴한 상태였다. [43] MBC, 1998/02/09, <민주노총, 노사정위원회 합의 거부>. [44] MBC, 1998/02/10, <민주노총, 노사정 합의 거부 총파업 선언>. [45] MBC, 1998/02/13, <민주노총 파업 철회, 파국은 피했다>. /* 스크롤 여백만 주고, 화면에는 안 보이게 */ .ftn-target { display: inline-block; /* 줄바꿈 안 생김 */ width: 0; height: 0; scroll-margin-top: 200px; } document.addEventListener("DOMContentLoaded", function () { // name="_ftn1", name="_ftn2", name="_ftnref1" ... 전부 대상 document.querySelectorAll('a[name^="_ftn"]').forEach(function(a) { var idValue = a.getAttribute("name"); // 이미 같은 id의 요소가 있으면 또 만들지 않음 if (!document.getElementById(idValue)) { var span = document.createElement("span"); span.id = idValue; span.className = "ftn-target"; a.parentNode.insertBefore(span, a); } }); }); /* 본문 각주 번호 + 아래쪽 각주 번호 색 지정 */ a[href^="#_ftn"] sup, a[href^="#_ftnref"] sup { color: #BF202D; } /* 밑줄이 보기 싫으면 */ a[href^="#_ftn"], a[href^="#_ftnref"] { text-decoration: none; } /* 마우스 올렸을 때 살짝만 강조하고 싶으면 (선택) */ a[href^="#_ftn"]:hover, a[href^="#_ftnref"]:hover { text-decoration: underline; } /* 페이지 전체가 오른쪽으로 넘치지 않게 */ html, body { max-width: 100%; overflow-x: hidden; } /* 본문 영역 폭 강제 고정 + 긴 단어/문장도 줄바꿈 */ #bo_v_con, .bo_v_con, .cke_editable, article { max-width: 100%; overflow-wrap: break-word; word-wrap: break-word; /* 구형 브라우저용 */ } /* 워드에서 붙은 이미지/표가 화면 밖으로 안 나가게 */ #bo_v_con img, #bo_v_con table, .bo_v_con img, .bo_v_con table, .cke_editable img, .cke_editable table, article img, article table { max-width: 100% !important; height: auto; } /* 워드가 p, span에 폭을 박아놓은 경우 강제로 해제 */ #bo_v_con p[style*="width"], #bo_v_con span[style*="width"], .bo_v_con p[style*="width"], .bo_v_con span[style*="width"], .cke_editable p[style*="width"], .cke_editable span[style*="width"], article p[style*="width"], article span[style*="width"] { width: auto !important; max-width: 100% !important; } /* 기본 blockquote 스타일 */ blockquote { border-left: 4px solid #c0392b; /* 사이트 분위기와 맞는 붉은 계열 */ padding: 12px 18px; margin: 20px 0; background: #fafafa; font-style: normal; color: #333; line-height: 1.6; } /* blockquote 안의 p 태그 정렬 */ blockquote p { margin: 0 0 10px 0; text-align: justify; } /* 마지막 p 태그 여백 제거 */ blockquote p:last-child { margin-bottom: 0; } /* 본문 안 링크 스타일 */ #gpt-article a { color: #cc0000 !important; text-decoration: none !important; } #gpt-article a:hover { color: #990000 !important; } // https://로 시작하는 링크만 target="_blank" 적용 document.addEventListener("DOMContentLoaded", function () { const links = document.querySelectorAll('#gpt-article a[href^="https://"]'); links.forEach(link => { link.setAttribute("target", "_blank"); link.setAttribute("rel", "noopener noreferrer"); }); }); -
빅테크 자본에 투자하는 소로스 펀드는 집단학살에서 자유롭지 않다차별금지법제정연대에서 ‘열린사회재단(Open Society Foundation)’으로부터 사업기금을 지원받을지 여부를 논의하고 있다. 이를 결정하기 위한 26일 전체회의를 앞두고, 차제연 집행위는 “자금의 출처가 중대한 인권 침해에 직접 연루된 경우, 기금 수령 조건이 특정 집단·의제에 대한 침묵을 요구하는 경우, 기금의 운용방식이 포괄적 차별금지법의 제정이라는 차제연의 목적에 명백하게 반하거나 해가 되는 경우에는 연대체 차원의 최소 기준선에 위배된다고 판단하여야”하며, “이러한 기준에 비추어볼 때 OSF가 차제연 차원의 최소 기준선을 위배하는 기금에 해당하지는 않는다고 판단”하였다. 이에 OSF 기금신청 제안을 반대하는 연서명이 진행되고 있다. 필자는 조지 소로스라는 국제 금융자본가와 그 자선사업기구인 열린사회재단이, 오늘날 팔레스타인에서 벌어지는 학살을 포함해, 빅테크 자본들이 세계를 파괴하고 노동자민중을 위기로 몰아넣는 자본주의 체제 지배계급의 불가분한 일부임을 말하고 싶다. 2025년 4분기, '소로스 펀드 매니지먼트'의 포트폴리오를 보여주는 웹사이트 화면 갈무리 열린사회재단의 시초축적은 금융수탈이다 열린사회재단(OSF)의 기금의 원천은 소로스 펀드 매니지먼트로부터 나온다. 소로스 펀드 매니지먼트는 금융자본이다. 금융자본은 어떻게 부를 축적하는가? 금융자본의 이윤은 노동자민중이 창출한 부를 자본이 착취해 강탈한 결과의 일부다. 특히 금융자본은 단지 산업자본의 착취를 지원하는 것을 넘어, 시세차익을 통해 이익을 얻는 고유의 수탈적 방식을 발전시켜왔다. 그래서 우리는 이를 ‘금융수탈’이라 부른다. 금융자본이 천문학적인 이윤을 벌어들이는 만큼, 노동자민중은 상대적으로 가난해진다. 소로스 펀드는 실제로 어떻게 이윤을 획득해왔는가? 예컨대 그는 1973년 4차 중동전쟁 이후, 방산기업에 대한 수요가 늘어날 것이라 예측하며 방위산업체 주식을 쓸어담아 수익을 냈다. 마치 오늘날 이란 침략전쟁으로 한국 방산주들이 뛰고 있는걸 보고, 여기에 투자해 돈을 버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노동자민중이 군축과 평화를 요구로 내걸고 투쟁할 때, 그는 전쟁산업의 성장에 투자하는 댓가로 돈을 벌었다. 소로스 펀드의 가장 유명한 수익창출 일화는 외환투자와 공매도다. 소로스는 1992년 영국 파운드화 공매도를 통해 한 달만에 1조 2천억원 가까운 수익을 올렸다. 그가 벌어들인 천문학적 이윤은 땅에서 솟았는가? 아니다, 영국노동자민중이 노동으로 만들어낸 부를 수탈한 것이다. 마찬가지로 아시아 외환위기 때, 태국, 말레이시아 등 위기에 내몰린 저개발국의 통화를 공격해 돈을 벌었다. 헤지펀드는 위기를 더욱 심화시킴으로써 돈을 번다. 위기가 발생할 것처럼 보이면 위기에 ‘베팅’함으로써, 위기를 더욱 심화시키고 그 과정에서 돈을 번다. 금융투기꾼들이 좋아하는 말처럼 세상에 ‘공짜는 없고’, 그가 수탈한 부 만큼의 손실을 고스란히 노동자민중이 경제위기로 감당해야한다. 그 과정이 직접적으로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복잡한 연쇄과정을 거친다고 해서, “소로스 펀드의 이윤은 노동자민중의 피땀을 강탈한 것”이라는 명제가 거짓이 되지는 않는다. 그가 천문학적 부를 거머쥔 것은, 천문학적인 수탈의 결과다. 노동자민중의 사회적 생산물을 수탈하는 것, 그것 외에 금융자본의 이윤에 다른 원천은 없다. 빅테크 자본의 돈줄인 소로스 펀드, 오늘날 집단학살에서 자유로운가? 이것이 소로스가 ‘자선사업’을 할 수 있게된 과거의 축적에 관한 이야기라면, 오늘날은 어떨까. 2025년 4분기, 소로스 펀드의 포트폴리오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건 소위 AI, 빅테크 기업들이다. 포트폴리오 1위는 아마존, 2위는 구글, 5위는 마이크로소프트 등이다. 소로스 금융자본이 투자하여 이익을 분배받는 이 빅테크 자본들은 어떤 자본들인가? 자연과의 대사를 고려하지 않는 데이터센터의 과잉건설로 지역환경을 파괴하고, 물과 전기를 낭비하며, 천연가스와 원자력 사용을 부활시키는데 앞장서는 기업들이다. 소로스 펀드가 AI를 넘어 ‘우주’ 산업에 투자하려고 한다는 얘기도 나온다. 우주에서 추출산업을 지속하겠다는 허황된 기술절대주의로 세계가 공멸을 향해 나아가는 현실을 덮으려는 게 스페이스X, 아마존, 구글 등 우주 탐사기업이 하고있는 역할이다. 더욱이 소로스 펀드의 투자를 받는 빅테크 자본들은 미국과 이스라엘에게 클라우드 서비스와 AI기술 등 집단학살을 위한 군사기술을 제공하고 있는 기업들이다. 대표로 소로스 펀드의 포트폴리오에서 가장 많은 지분(7.30%)을 차지하는 아마존을 보자. BDS운동이 정리한 자료에 따르면 아마존은 프로젝트 님부스를 통해 구글과 함께 이스라엘 정부와 군에 클라우드 컴퓨팅 서비스와 인프라를 제공한다. 아마존이 제공하는 클라우드는 수만 개의 표적을 실시간으로 업데이트하는 ‘표적 데이터베이스’로 사용된다. 기존에 이스라엘은 자체 클라우드를 운영해왔는데, 2023년 10월 가자지구 침공 이후 ‘전례없는 컴퓨팅 성능’이 필요해 아마존으로부터 클라우드를 구매했다고 한다. 즉 집단학살을 가속할 ‘필요성’이 생겼는데, 아마존이 이를 현실화할 클라우드 기술을 제공해준 덕택에 AI의 지원을 받는 신속한 집단학살이 가능해졌다는 이야기이다. 이스라엘이 라벤더, where’s daddy 등 AI시스템을 활용해 가자지구 주민들의 ‘살해 목록’을 작성하고 공격한다는 이야기를 들어보았을 것이다. 가자지구 언론인 무함마드 알 므하위시는 빅테크가 제공하는 기술이 어떻게 그의 삶의 모든 부분을 감시해왔으며, 학살에 사용되고 있는지, 아래와 같이 증언한다. +972 매거진과 로컬 콜(Local Call)의 보도에 따르면 알고리즘은 사람들을 추측되는 위험도에 따라 분류했다. 분류 점수 한 점 차이로 사람의 생사가 갈릴 수 있었다. 정보기관 관련인들은 기자들에게 이러한 시스템 중 하나는 개인을 팔레스타인 무장 단체와의 연관성에 따라 점수를 매겼으며, 수만 명의 이름을 다루었다. 폭격 승인 명령은 빠르게는 30초 이내에 떨어질 수 있었다. 다른 프로그램은 건물을 유형과 수용 인원에 따라 분류하여 폭격 대상을 선정했다. 뉴욕타임스 보도에 따르면, 8200부대의 현역병과 구글, 마이크로소프트 및 메타와 같은 회사에서 일하는 예비군들의 협력으로 제작된 AI 도구들이 아랍어로 작성된 문자 메시지와 SNS 게시글을 분석했다. 그러한 분류 시스템이 무장 단체와 연관된 것으로 추정되는 인사가 집에서 쉬고 있을 때 표적으로 삼을 수 있는 시스템과 협력하면, 단지 이들과 인접한 곳에 있었다는 것만으로 일가족이 멸절되는 사태로 이어졌다. ... 전쟁이 시작되고부터, 나는 알자지라, The Nation, 그리고 +972 매거진과 같은 언론을 통해 가자지구에 대해 보도해 왔다. 2023년 10월 말 무렵, 내 핸드폰은 내가 작성한 기사를 인용하며 살해 협박을 하는 문자들로 가득했다. … 12월 6일, 나는 가족들의 얼굴을 보기 위해 집에 들렀다. 내가 걸어 들어가는 순간, 누군가 전화를 걸었다. 상대는 아랍어로 말하며 자신을 데이비드로 소개했다. 이스라엘 군 소속이라고 했다. 그는 나를 하비비(아랍어로 “자기야/얘야” 정도의 뜻)로 부르며, 내 가족뿐만 아니라 이웃들로 가득한 삼 층 건물을 대피시킬 시간이 이십 분 정도 있다고 했다. … 달리 갈 곳도 없는 우리들을 억지로 이동시키려는 수작일 수도 있었다. 우리는 머무르기를 택했다. 이튿날 오전 7시 30분, 나는 찻잔으로 손을 가져가며 내 아들의 발소리가 복도를 도드닥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굉음은 경고 없이 날아왔다. 집은 그대로 내려앉았다. 나는 천장이 쪼개지거나 벽이 무너지는 것도 보지 못했다. 그저 갑작스러운 무게, 콘크리트와 쇠가 나를 납작하게 눌렀다. 내 두 팔이 붙박혔고, 두 다리가 갇혔고, 내 입과 폐로 먼지가 들어찼다. 내 아내와 아들을, 부모님을 불렀다. 처음에는, 돌아오는 답이 없었다. 그때 내가 닿을 수 없는 어딘가에서 작은 목소리가 들렸다. “아빠.” 아들이 살아있었다. 하지만 나는 아이에게로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시간이 흐리멍덩해졌다. 어딘가 위에서 돌들이 움직였다. 흐린 음성들. 나는 정신을 잃었던 것 같다. 구조자들이 마침내 잔해를 깨고 들어왔을 때, 빛이 파고들어 왔다. 손들이 잔해를 긁어냈다. 그들은 내가 의식을 되찾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나를 끄집어냈다. 그들은 내 아내와 아들을 꺼냈다. 네 사람이 죽었다. 사촌 둘과 이웃 둘. 이웃 하나는 폭탄이 떨어지는 순간 우리 집 문 앞을 지나가고 있었을 뿐이었다. 그들은 내가 내 집에 있음을 알았다. 아마도 내 핸드폰으로 나를 거기까지 추적했다. 시스템은 내 동선을 먼저 특정했을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나를 기준으로 그 반경 내 모두를 이스라엘군 기준 감수할 만한 부차적 희생으로 집계했다. ... 그는 내 삶을 거슬러 올라가기 시작했다. 나의 학적, 일, 그리고 내가 기사를 작성한 장소들. 앗-쉬파, 알-아우다, 앗-다라즈. 이를 순서대로 읊었다. 그는 내 친척에 관해 물었다. 내가 망설이자, 그가 대신 내 사촌들의 이름을 읊었다. 내 가족들이 피신 중인 대피소가 있는 지역을 특정했다. 내가 답하든 얼버무리든 그의 노트는 이를 모두 기록했다. 심문은 수 시간 이어졌다. 끝도 없이 이어지는 것 같았던 그 시간 중 한 가지는 분명해졌다. 그 심문관 눈앞에 있는 스크린에는 내 삶의 사본이 담겨있었다. 쉼 없는 감시, 수집한 전화 통화, 카메라, 그리고 위성 좌표로 쌓아 올린 판본이. 그리고 그는 내 아들에 대해 말하기 시작했다. “라픽은 아직 잘 있습니까? 가슴은 좀 괜찮고?” 그 순간 나는 정신이 아득해졌다. 그건 내 집안 깊숙한 곳에서 끌어올려진 질문이었다. 이 질문은 나를 2022년으로 돌려보냈다. 라픽은 고작 산후 11달이었고, 우리는 아랍에미리트공화국에 있었다. 라픽은 폐렴에 걸려 두바이 병원에서 이틀을 보내야 했다. 대단한 일은 아니었다. 아이는 괜찮았다. 하지만 여기에, 나는 글에서 다루지도 않았고 언론에 내보내지도 않은 내 삶의 내밀한 사항이, 나타났다. 심문관은 그걸 체크 박스 짚고 넘어가듯 입에 올렸다. 내 아들의 짧은 병원 신세에 대해 어딘가에서 들었을 것이다. 아랍에미리트공화국 병원 기록에서? 내 통화 기록에서? 내 이메일 사본에서? 그들이 내 머릿속에 들어온 것처럼 느껴졌다. 무함마드 알 므하위시의 글 전문을 꼭 읽어보았으면 좋겠다. 이렇게 아마존을 비롯한 미국 빅테크 자본들은 가자주민들에 대한 완전한 감시, 추적, 학살에 필요한 기술을 제공한다. 소로스 펀드는 바로 그 빅테크 자본에 투자해 수익을 내고 있다. 한편 열린사회재단(OSF)은 10월 7일 이후 자행된 집단학살에 대해 언급할 때, ‘하마스의 잔혹한 공격을 규탄‘하고, ‘이스라엘에게는 자위권이 있다’라는 문장을 삽입한 다음, ‘이스라엘이 지나친 복수를 하며 가자의 인도적 위기를 초래하고 있음’을 우려하고 휴전과 두 국가 해법 등등에 대해 얘기한다. 열린사회재단이 팔레스타인 집단학살에 대해 발행한 성명 전반에서 식민지배의 현실을 지우는 양비론적 세계관을 확인할 수 있다. 우리는 이러한 세계관이 어떻게 식민점령의 현실을 가리고 집단학살을 용인하는지, 그래서 조지 소로스가 거액을 후원한 바이든 정부가 어떻게 이스라엘에 대한 실질적 지원을 유지하며 ‘학살자 조’라 불리게 되었는지 지난 몇년 간 목격했다. 양 당사자 간의 문제로 보게 되면 양비론을 피할 수 없다. 양비론은 어느 순간, 이스라엘이 지나치긴 하지만 팔레스타인도 일정한 원인을 제공했다는 원인과 결과를 전도시키는 밑그림으로 작용한다. 팔레스타인이 저항하지 않으면 이스라엘이 식민화를 멈출 것이라는 기이한 논리로 귀결될 수 있는 것이다. 논리적으로도 역사적으로도 틀린 사고지만, 지금은 특히 발화자의 의도와 무관하게도 집단학살 정당화 논리와 일치하기 때문에 한층 위험한 관점이다. 상기하였듯 소로스 펀드는 빅테크 자본에 투자해 돈을 번다. 빅테크 자본은 지구를 파괴하고, 팔레스타인을 파괴한다. 한편 소로스 펀드의 돈에 의해 운영되는 열린 사회 재단은 가자지구의 ‘인도적 위기’를 우려하고, 이스라엘에게 자제를 촉구한다. 그리고 인종정의에, 여성의 권리에, LGBT의 권리에 후원한다고 말한다. 팔레스타인의 여성과 성소수자가 빅테크 자본의 공모에 의해 감시, 추적당해 죽어가는 동안 말이다. 이 현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OSF 자선사업은 조지 소로스의 손에 묻힌 피를 닦아내는 손수건이다”는 말 외에 나는 이 현실을 이해할 말을 찾을 수가 없다. 이것이 총체적 진실이다. 빅테크 자본을 포트폴리오에 담아 돈을 버는 소로스 펀드 매니지먼트와 열린사회재단은 동일한 체제의 앞뒷면이다. 만약 조지 소로스와 유사하게, ‘자선사업’을 많이 해온 빌게이츠가 운영하는 재단으로부터 후원을 받자는 논의가 이뤄졌다면 어땠을까? 빌게이츠는 앱스타인과 직접 연루돼 여성들을 착취했고, 이스라엘과 공모하는 핵심기업인 마이크로소프트의 창립자이다. 그의 자선단체로부터 돈을 받자는 결정은 훨씬 더 쉽게 반대에 부딪혔으리라 상상한다. 그런데 단지 좀 더 교묘하고, 좀 더 연루의 사슬이 길 뿐, 소로스 재단과 빌게이츠 재단이 질적으로 다르다고 말할 수 있을까? 삼성대자본이 비슷한 방식으로 삼성인권재단을 운영한다면 어떨까. (그런 자선사업을 삼성이 하는지는 모르지만 상상해보는 것이다) 삼성이 한편에선 고 김치엽 님을 포함한 반도체 노동자들을 죽음으로 내몰고, 베트남으로 노조파괴를 수출하고 오염, 산재를 외주화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인권을 말하며 시민단체를 후원한다면 우리는 이를 받을 수 있는가. 그리고 그 대답이 ‘아니오’라면, 삼성은 가깝고 소로스는 멀게 느껴진다 하여 소로스 재단의 후원을 받을 수는 없다. 차별금지법 제정을 위한 대중적 노동자운동에 나서자 이 글을 통해 해당 ‘자금의 출처가 중대한 인권 침해에 직접 연루된 경우’인지에 대한 판단을 재고해주실 것을 차별금지법 제정연대에 참여하는 동지들에게 요청드린다. 이 세계에 착취와 차별과 억압이 오늘도 유지될 수 있는 것, 학살과 전쟁이 벌어지고 유지될 수 있는 것은 조지 소로스를 포함한 한 줌의 자본가들이 이 세상에 대한 결정권을 쥐고 좌지우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가 자선사업이라고 내놓는 그의 부는 금융수탈을 통해 노동자민중에게서 강탈해간 부이며, 노동자민중의 운동은 그런 시혜와 동정을 거부하며 여기까지 왔다. 단지 과거의 축적과정만이 아니라, 바로 지금 오늘날에도, 이 금융자본가가 자선사업을 지속할 수 있는 부의 원천은 지구를 파괴하고 팔레스타인인을 학살하는 과정에 적극 연루돼 있으며, 그로부터 수익을 얻고 있다. 사실 차별금지법제정연대에 함께하는 동지들, 차별과 억압에 맞서 함께 싸워온 동지들이 이 정도 사실을 모를 동지들이 아님을 알고 있다. 동지들에게 OSF의 후원을 받지 말자고 호소하는 걸 넘어, 차별금지법 제정을 위한 대중적 노동자운동을 현실로 충분히 만들어내지 못한 것에 대해 필자 또한 크나큰 책임감을 느낀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우리의 운동이 금융투기자본의 후원을 받는 길로 가서는 안된다는 판단을 뒤집을 수는 없다. “상당수 노동자 민중운동 세력은 차별금지법 제정운동을 중요 과제로 여기지 않았거나, 중요 과제로 여기는 경우에도 이를 지역으로, 현장으로 확대하려는 노력을 다 하지 못했습니다. 차별금지법 제정운동 재정이 부족하다면, 바로 이런 이유일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차별금지법제정연대가 OSF 기금을 받는 대신 노동자 민중운동 진영과 함께 더 넓은 운동을 조직하자고 제안합니다. 차별금지법 제정을 위한 공동투쟁을, 재정지원을 모든 노동자 민중운동 진영에 요구합시다. 차별금지법 제정을 위한 대중적인 노동자 운동을, 사회적 총파업을 조직합시다. 이를 통해 정부에 포괄적 차별금지법 제정을 관철해냅시다.” ‘비판의 무기는 무기의 비판을 대신할 수 없다’는 오래된 구절이 뼈아프게 다가온다. 비판에는 책임이 뒤따르는 법이다. “인권운동과 노동자민중운동의 굳건한 연대를 통해 포괄적 차별금지법을 쟁취해 냅시다. 그 길에 사력을 다해 연대하겠습니다.”라는 반대 연명 제안문의 마지막 말을 곱씹어본다. 나 또한 사력을 다할 것임을 다짐한다. 3월 26일, ‘[사회주의를향한전진 정세집담회] 차별금지법 쟁취 노동자 투쟁, 이렇게 하자!’를 진행한다. 해당 정세집담회를 계기로 더 큰 차별금지법 쟁취 노동자 운동을 만들어나가고자 한다. /* 기본 blockquote 스타일 */ blockquote { border-left: 4px solid #c0392b; /* 사이트 분위기와 맞는 붉은 계열 */ padding: 12px 18px; margin: 20px 0; background: #fafafa; font-style: normal; color: #333; line-height: 1.6; } /* blockquote 안의 p 태그 정렬 */ blockquote p { margin: 0 0 10px 0; text-align: justify; } /* 마지막 p 태그 여백 제거 */ blockquote p:last-child { margin-bottom: 0; } /* 본문 안 링크 스타일 */ #gpt-article a { color: #cc0000 !important; text-decoration: none !important; } #gpt-article a:hover { color: #990000 !important; } // https://로 시작하는 링크만 target="_blank" 적용 document.addEventListener("DOMContentLoaded", function () { const links = document.querySelectorAll('#gpt-article a[href^="https://"]'); links.forEach(link => { link.setAttribute("target", "_blank"); link.setAttribute("rel", "noopener noreferrer"); }); }); -
[정세집담회] 차별금지법 쟁취 노동자 투쟁, 이렇게 하자!※자료집은 첨부파일에서 다운받으실 수 있습니다. 전 세계적인 극우화, 제국주의 흐름의 확산과 함께, 소수자를 향한 차별과 억압이 심화하고 있습니다. 트럼프는 성별정정 치료 불법화 및 트랜스젠더의 권리를 억압하는 다양한 법안을 통과시켰고, 독일에서 누구보다 강경한 반이민 정책을 내세우는 극우 정당 AfD의 당수 앨리스 바이델은 레즈비언 정치인이면서 동시에 수많은 이주민 여성과 소수자를 길거리로, 불안정하고 위험한 일자리로, 죽음으로 내몰고 있습니다. '일본 최초의 여성 총리' 다카이치는 부부별성제, 동성혼 법제화에 반대하며 일본 군국주의와 가부장제 강화에 앞장서고 있습니다. 노동자계급이 주체가 되어, 차별과 억압에 맞서는 운동을 확대해야할 때입니다. 한국에서 차별금지법 제정 운동은 내란에 맞선 광장에서 성소수자, 여성, 이주민, 비정규직 등 차별의 굴레에 시달려온 이들을 묶어내는 구호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차별금지법 제정운동이 모든 차별을 철폐하는 투쟁으로 나아가려면, 노동자운동 속에서 차별금지법 제정투쟁을 확대하기 위한 전략과 계획이 필요합니다. 차별금지법 쟁취를 위한 노동자투쟁의 전망을 함께 이야기해봅시다. - 일시: 3월 26일(목) 19:00 - 장소: 민주노총 15층(서울 중구 정동길 3 경향신문사) / ※온라인 Zoom 참가 병행 - 발제: 유지원 (사회주의를향한전진 여성운동위원회) - 토론1: 도명화 (전국민주연합노조 톨게이트지부 조합원) - 토론2: 이예지 (전 단국대 죽전캠퍼스 성소수자모임 아웅다웅 대표, 현 공공운수노조 전국교육공무직본부 경기지부) - 사회: 이청우 (사회주의를향한전진 공동집행위원장) -
바로 지금, 원청에 맞서 싸울 수 있다는 작은 희망이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대대적 진출로 이어질 수 있다비정규직 노동자들은 피땀어린 투쟁으로 노조법 2·3조를 개정해냈다. 그러나 그 이후에도,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자본이 만든 다단계 하청구조를 뚫고 실제 원청에 맞서 노동3권을 행사할 수 있을지는 여전히 투쟁에 달려있다. 하청, 특수고용, 플랫폼, 프리랜서 등 이 땅 모든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게는 켜켜이 쌓인 분노도, 오랜 탄압 속에서 쌓인 체념도 있다. 바로 지금, 노조법 2·3조 개정 이후의 향방을 결정하는 것은 실천이다. 3월 6일, 차별철폐! 원청교섭 쟁취! 민주노총 울산본부 결의대회 노조법 2·3조 개정 이후, 여전히 투쟁 없이는 그 무엇도 바뀌지 않는다 지난 해 8월 24일 노조법 2·3조 개정안이 국회를 통과하며 개정되었고, 2026년 3월 10일부터 시행되었다. 30여년에 걸친 비정규직노동자들의 투쟁 결과로, 부족하게나마 법이 개정되었다.그런데 이재명 정부는 개정된 노조법 시행령을 2025년 12월 24일 발표했다. 그간 민주노조운동은 하청·특수고용·플랫폼·프리랜서 노동자 등 모든 비정규직 노동자가 진짜사장 원청 자본과 교섭을 할 수 있도록 보장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그러나 정부 시행령은 기업별 교섭 구조를 그대로 유지해 교섭창구 단일화를 유지하고 있다. 그리고 원청과 하청 노조 사이에도 교섭창구 단일화를 포함해 사실상 하청·특수고용·플랫폼·프리랜서 등 비정규직 노동자의 교섭권을 박탈하는 조치였다. 비정규직 노동자의 분노와 항의가 반영되어, 지난 2026년 2월 24일 2차 시행령이 발표되었다. 해당 안에서 원청노조와 하청노조 사이의 교섭창구 단일화는 삭제되었다. 노동자 단결로 교섭창구단일화 시행령 폐기하고 비정규직노동자 교섭권 쟁취하자! 발표한 시행령에 따라 하청노조 사이에서는 교섭창구를 단일화해야 하며, 이는 투쟁하는 비정규직노동자들이 그토록 요구해왔던 독자 교섭을 가로막는다. 여러 하청노조가 있을 경우, 공동교섭단 구성에 실패하면 다수노조가 교섭권을 갖고, 소수노조는 노조로서 교섭할 권리를 가지지 못할 가능성이 높다. 하청노동자들이 원청과 교섭하고 투쟁할 권리를 행사하기 위해, 교섭창구단일화를 폐기해야 한다. 돌이켜보자. 노동자들의 투쟁으로 복수노조 시대를 열었다. 그러나 민주당 자본가 정부는 교섭창구단일화 법안으로 교섭할 자유를 가로막았고, 소수노조는 교섭권을 박탈당하고 아무런 권리가 없는 노조로 전락했다. 이렇듯 자본가들은 교섭창구 단일화를 민주노총 소속 민주노조를 탄압하는 수단으로 악용해왔다. 이재명 정부는 폐기해야 할 교섭창구단일화를 비정규직·하청·특수고용·플랫폼·프리랜서 하청노동자들에게까지 적용하려 한다. 교섭창구단일화 시행령은 민주노총 전체 노동자들의 투쟁 대상이다. 노조법 2·3조 개정 이후 새롭게 원청교섭 전망을 만들기 위해 싸우는 비정규직·하청·특수고용·플랫폼·프리랜서 노동자들에게도 마찬가지다. 이런 만큼 전체 노동자들이 교섭창구단일화 시행령 폐기 투쟁에 나서야 한다. 이뿐만이 아니다. 정부는 “하청노동자가 요구한 교섭 의제에서 사용자성이 부족하고, 따라서 노사 의견이 불일치할 경우” 교섭거부를 부당노동행위로 판단하지 않겠다고 한다. 하청노동자들이 진짜 사장, 원청과 교섭할 수 있도록 보장하지는 못할망정, 이재명 정부는 역시나 자본 편에 섰다. 하청노동자들이 교섭을 요구하는 사업장에서 원청 자본은, 실질 지배력을 행사하고 있고, 그래서 하청노동자들이 원청과 교섭을 요구하고 있음에도 말이다. 현대중공업을 비롯한 조선소 하청노동자들을 조직하고 투쟁하자! 다른 비정규직 노동자들과 마찬가지로 현대중공업 하청노동자들 역시 2003년 노조 건설 이후 업체 폐업, 조합원 해고 등 수없이 많은 탄압을 받아왔다. 이런 탄압 속에서 하청노동자들 역시 노조 가입은 곧 업체 폐업과 해고를 뜻한다는 점을 현실로 받아들이도록 강요당해왔다. 그래서 조선소 하청노동자들에게 노조가입은 ‘결단’이 필요한 대단히 어려운 것이 되어왔다. 이런 조건은 노조법 2·3조가 바뀌어도 크게 다르지 않을 수 있다. 다른 점이 있다면, 과거처럼 교섭 대상이 아니라는 이유로 자본이 교섭을 회피할 수는 없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런 변화된 조건을 적극적으로 활용해야 한다. 이런 조건의 변화는 과거처럼 노조 가입했다고 업체를 폐업할 수 없다는 점, 하청업체를 내세워 조합원을 해고할 수는 없다는 점이다. 이를 알려 대대적인 조합 가입으로 조직화하는 것이다. 한화오션 자본이 ‘하청노동자 연말 성과금 정규직과 동일비율 지급’을 발표했고 현대중공업은 ‘업계 최고 수준’을 약속했다. 그리고 실제로 현대중공업 하청노동자들은 한화오션 하청노동자들보다 조금 많은 연말 성과금을 받았다. 이런 자본의 대응은 양날의 칼이다. 많은 하청노동자들은 ‘노조 가입을 하지 않더라도 현대중공업 원청이 과거 보다는 하청노동자들에게 뭔가를 배풀 수 있다’는 안도감을 느낀다. 우리는 이런 하청노동자들에게 노동조합에 가입해 함께 싸우자고 안내하고 설득하고 조직해야 한다. 싸우지 않으면 원청 교섭을 통해 단체협약을 체결할 수 없다는 것을, 현재 보이는 현대중공업 사측의 양보는 하청노동자들의 투쟁을 두려워하고 미연에 방지하기 위한 행보일 뿐, ‘원청이 알아서 주겠지’라는 기대는 결국 허상임을 호소하고 조직하는 길이다. 3월 10일, 현대중공업지부 사내하청지회는 3차 원청 교섭 공문을 보냈고 현대중공업 원청은 3월 13일 교섭요구 공문을 그 거대한 공장에 달랑 3장 붙였다. 그리고 20일까지 교섭을 요구하는 다른 노조가 없어, 3월 21일 현대중공업 사측은 3월 13일 교섭요구 공문을 게시한 곳에 현대중공업지부, 현대중공업지부 사내하청지회 교섭요구 노동조합 확정 공고를 붙였다. 이런 현실을 대대적으로 알려, 오랜 세월 억눌려왔던 하청노동자들이 자신감을 가지고 당차게 일어설 수 있도록 조직하자. 2월 26일 현대중공업지부 사내하청지회 ‘노동자 조직화를 위한 다방’ 모든 노동자들이 함께하는 7월 15일 총파업 투쟁을 조직하자! 원청에 맞서 싸울 수 있다는 작은 희망이라도 만들 수 있다면, 그 희망은 억눌려 있던 하청·특수고용·플랫폼·프리랜서 등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대대적 진출로 이어질 수도 있다. 과거 선배 노동자들이 들불처럼 일어섰듯, 하청노동자들도 억눌린 분노를 폭발시킬 수도 있다. 그런 마음가짐으로 현장을 조직하자. 민주노총 대의원 대회에서 결정한 7월 15일 총파업 투쟁에, 민주노총으로 조직된 노동자들은 물론, 미조직 노동자들 또한 총파업에 함께 할 수 있도록 안내하고 조직하자. 조직된 노동자와 미조직 하청·특수고용·플랫폼·프리랜서 노동자가 연대해 투쟁에 나설 때, 자본이 다단계 하청구조로 박탈한 비정규직 노동자의 노조할 권리를 쟁취하는 길을 열어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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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 노동자의 목숨을 갈아 넣어 이윤을 축적한 자본의 구조적 살인! 안전공업과 원청 현대기아차 자본을 강력히 규탄한다!지난 3월 20일, 대전 대덕구에 위치한 자동차 부품 제조공장 안전공업에서 14명의 노동자가 목숨을 잃고 60명이 다치는 끔찍한 참사가 발생했다. 우리는 자본의 이윤 탐욕 앞에 억울하게 희생된 노동자들의 명복을 빌며, 유가족들에게 깊은 연대와 위로의 마음을 전한다. 아울러 이 참사는 결코 우연한 사고가 아니라, 이윤만을 좇는 자본주의 체제와 이를 용인한 국가 권력이 낳은 명백한 '기업 살인’이다. 안전공업의 손주환 대표는 평소 노동자들에게 "생각이 없으면 죽어버려야지", "나가버려 이 XX들아"라며 노동자들에게 일상적으로 인격 모독과 폭언을 일삼았다. 이처럼 노동자를 비용과 소모품으로만 취급하는 강압적인 통제 속에서 현장의 안전에 대한 요구는 철저히 묵살되었다. 노동조합과 현장 노동자들이 유증기와 집진 설비 기름때의 화재 위험성을 수차례 경고하며 청소와 설비 개선을 요구했지만, 사측은 '비용 부담'을 이유로 이를 묵살했다. 심지어 과거에도 유증기와 슬러지로 인한 소규모 화재가 발생했으나, 관계기관의 감독을 피하기 위해 119에 신고조차 하지 않고 은폐해 온 사실이 드러났다. 노동자들의 생명줄인 비상 대피로는 설계도면에도 없는 불법 복층 휴게실을 만들며 차단되었고, 창문조차 없는 꽉 막힌 구조 탓에 희생자 중 9명이 그곳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질식해야만 했다. 게다가 물과 닿으면 폭발하는 1급 위험물질인 나트륨을 법적 허가 기준(10kg)을 10배나 초과한 101kg이나 불법으로 쌓아두고 있었다. 이윤을 극대화하기 위해 안전 비용을 삭감하고 불법을 자행한 안전공업 자본이 14명의 노동자를 죽음으로 내몰았다. 현대기아차 그룹은 이 피 묻은 이윤의 진짜 수혜자이자 공범이다. 우리는 이번 참사의 책임을 일개 하청업체인 안전공업에만 묻지 않는다. 안전공업은 현대기아차 등 완성차 업체에 엔진밸브를 납품하는 핵심 협력사다. 하이브리드 차량용 중공밸브 국산화 성공으로 연간 1000억 원 이상을 수출해 은탑산업훈장까지 받았다고 하지만, 그 화려한 성과의 이면에는 기름때와 유증기를 마셔가며 샌드위치 패널 아래에서 목숨 걸고 일한 하청 노동자들의 피땀이 있었다. 현대기아차 그룹은 가장 위험하고 유해한 공정을 하청업체에 떠넘기는 '위험의 외주화'를 통해 막대한 초과 이윤을 누리고 있다. 노동자들의 안전은 내팽개친 채 단가 후려치기와 납품 압박으로 하청업체를 쥐어짜는 구조적 착취의 정점에 바로 현대기아차 자본이 있다. 자신들이 판매하는 자동차의 엔진 밸브가 하청 노동자들의 잿더미 위에서 만들어졌음에도, "독립된 법인"이라는 변명 뒤에 숨어 책임을 회피하는 현대기아차의 기만적인 태도를 우리는 결코 좌시할 수 없다. 현대기아차 그룹 역시 이 참사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으며, 마땅히 원청으로서의 법적, 도의적, 사회적 책임을 져야 한다. 23명의 목숨을 앗아간 아리셀 참사가 일어난 지 2년도 되지 않아 똑같은 참사가 반복되었다. 서류상으로만 증축을 허가한 지자체, 오작동하는 소방설비와 과거 화재에도 시정 '권고'에만 그친 소방 당국 등 자본의 이윤 증식을 호위하는 국가권력은 노동자의 생명을 지켜주지 않는다. 하나, 14명의 노동자를 학살한 안전공업 손주환 대표이사를 즉각 구속하고 엄중 처벌하라! 하나, 피 묻은 부품으로 막대한 이윤을 챙긴 원청 현대기아차 그룹은 하청 노동자들의 죽음에 책임을 지고 즉각 사죄하고 배상하라! 하나, 위험의 외주화를 즉각 중단하고 노동자가 안전하게 일할 권리를 보장하라! 하나, 다단계 하청구조 근절하고, 비정규직 노동자 원청교섭권 보장하라! 2026년 3월 23일 사회주의를향한전진 -
[리포트] 미국과 이스라엘은 가자 집단학살, 이란 침략전쟁 당장 중단하라! 한국정부는 파병논의 중단하라!3월 21일, 334개 한국 시민사회단체가 함께하고 있는 <팔레스타인과 연대하는 한국 시민사회 긴급행동> 제63차 집회가 진행되었고, 미국과 이스라엘의 가자 집단학살과 이란 침략전쟁 중단, 한국의 파병 검토 중단을 요구하는 구호들이 울려퍼졌다. 한국은 여전히 트럼프가 요청한 파병에 대해 모호한 입장만 유지하고 있다. 한국 정부의 입장을 강력히 규탄하며, 파병을 결단코 용납할 수 없다. 한국 정부와 대기업들이 이스라엘의 집단학살을 지원하며 이익을 취해왔다. 이미 제국주의 침략세력의 일원인 이 국가에서, 한국정부와 자본의 학살공모, 전쟁장사, 그리고 이제 전쟁동참에 맞서 싸우는 것은 이 땅 노동자계급의 일차적 과제다. 이를 위해 함께 투쟁하자! Instagram에서 이 게시물 보기 사회주의를 향한 전진(@marchtosocialism)님의 공유 게시물 돌멩 _ 사회주의를향한전진 안녕하세요, 돌멩입니다. 저는 미국과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집단학살, 그리고 이란에 대한 제국주의적 침략을 규탄하기 위한 제63차 팔레스타인 긴급행동 집회에 나와있습니다. '예방적 공격'이라는 위선적인 구호 아래 제국주의의 침략으로 이 전쟁이 시작된 지 이제 3주가 넘었습니다. 그동안 이란에서는 498개의 학교와 236개의 의료 시설을 포함해 6만 7천(67,000)여 곳의 민간 시설이 공격을 받았습니다. 트럼프가 초기 예상과 달리 정권 교체에 실패하고 호르무즈 해협 봉쇄에 직면하며 전략적으로 난항을 겪으면서, 더욱 노골적으로 반동적인 행보를 보이고 있습니다. 그 중 하나는 사우스 파르스 같은 산업시설을 공격하기 시작한 것이고, 또 하나는 다른 국가들을 이 전쟁에 직접 끌어들이려 하는 것입니다. 3월 14일에 트럼프는 한국, 일본, 영국, 프랑스, 중국에게 호르무즈 해협에 군함을 파견해 줄 것을 요청했습니다. 한국은 여전히 이에 대해 모호한 입장만 유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한국 정부의 입장을 강력히 규탄하며, 파병을 결단코 용납할 수 없습니다. 한국 정부와 대기업들이 이스라엘의 집단학살을 지원하며 이익을 취해왔습니다. HD현대는 수십 년간 이스라엘에 굴삭기를 판매해 왔고, 이 장비들은 팔레스타인인들의 거주지를 강제철거하는 데 사용되고 있습니다. 또한 HD현대는 최악의 AI 기업인 팔란티어(Palantir)와의 ‘전략적 파트너십’을 강화하고 있습니다. 이 기업은 팔레스타인인들을 표적살해하는 기술을 미국과 이스라엘에 제공한 악명높은 전범기업입니다. 또 다른 대기업인 한화는 엘빗(Elbit) 및 엘타(Elta) 시스템즈와 협력해 왔습니다. 한국항공우주산업(KAI)은 이스라엘 항공우주산업(IAI)과 협력하고 있고, LIG 넥스원은 이스라엘에 군용 로봇을 공급해 온 고스트 로보틱스를 인수했습니다. 현대로템은 이스라엘 군수 기업 라파엘로부터 전차 방어 시스템을 구매했습니다. 이러한 민간 기업들뿐만 아니라 한국석유공사(KNOC)도 여전히 팔레스타인 해역의 가스 수탈 프로젝트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전쟁이 시작된 뒤 많은 한국 방산 기업들의 주가가 상승했습니다. 방산기업들은 자주포, 장갑차, 전투기 등 더 많은 무기를 팔 수 있게 된 사실에 기뻐하고 있습니다. 이재명 정부는 “우리는 위기를 기회로 만들 충분한 역량이 있다”고 말했는데요. 한국 정부와 자본이 유일하게 우려하는 위기는 호르무즈 해협 봉쇄로 인한 경제 위기이고, 특히 ‘코스피 6,000’ 거품이 터지는 것입니다. 한국정부와 자본이 기대하는 기회는 새로운 이윤창출의 기회입니다. 명분없고 더러운 이 제국주의 침략전쟁에 죽어가는 민중들의 삶은 관심사가 아닙니다. 한국은 이제 트럼프가 동맹국으로 제일 먼저 파병을 요구하는 다섯 나라 중 하나가 되었다. 이미 제국주의 침략세력의 일원인 이 국가에서, 한국정부와 자본의 학살공모, 전쟁장사, 그리고 이제 전쟁동참에 맞서 싸우는 것은 이 땅 노동자계급의 일차적 과제입니다. 파병은 ‘국익에 도움이 되지 않아서’가 아니라, 미국과 이스라엘의 중동 제국주의 패권을 강화시키고, 팔레스타인에서의 집단학살과 인종청소를 확대시키는 데 기여할 것이기 때문에 막아야 합니다. 이를 위해 함께 투쟁합시다. 투쟁! [English] Instagram에서 이 게시물 보기 사회주의를 향한 전진(@marchtosocialism)님의 공유 게시물 Hi, I’m dolmeng and I’m here at the 63rd rally to denounce Israel’s Genocide on Palestinians, and also to denonuce imperialist invasion of US and Israel on Iran. Now it’s more than 3 weeks passed since the war began with imperialist aggression, with hypocritic words of ‘preventive attack’. in Iran more than sixty-seven thousands(67000) civilian sites have been struck, including 498 schools and 236 health facilities. but as Trump fails in strategy, failing to change the regime and facing Blockade of the Strait of Hormuz, they’re more blatantly being reactionary, attacking industrial infrastructure, like South Pars, and trying to draw other countries into this war. On March 14, Trump requested South Korea, Japan, UK, France, and China to dispatch warships to the Strait of Hormuz. and still South Korea has maintained an ambiguous stance on it. so we’re here to strongly denounce South Korean government’s position, and to say ‘No military deployment to Iran’. South Korean government and large companies have earned profits by supporting Israel’s genocide. HD Hyundai, has been selling excavators to Israel for decades, which is used to demolish the homes of Palestinians, and now it’s reinforcing ‘strategic partnership’ with Palantir, the worst AI company that has given US and Israel crucial technology for targeted killing of Palestinians, also helping ICE with the same technology. another Large company Hanhwa, has been cooperating with Elbit and Elta systems. the list goes on and among them Korea Aerospace Industries are cooperating with Israel Aerospace Industries, and LIG Nex-one took over the Ghost Robotics, which has supplied military Robot to Israel. Hyundai Rotem has bought tank protection system form Rafael, the israeli military company. and not only those private companies but Korean National Oil Cooperation, KNOC, is still engaging in Gas expropriation project in Palestinian Ocean. as the war begins, the South Korean military companies’ stock prices doubled, and they’re happy with the fact that they can sell more weapons to this war. The only crisis that the Korean government and capital concerns about, is the economic crisis caused by a blockade of the Strait of Hormuz, particularly fearing the “KOSPI 6,000” bubble cracking. They have no interest in the lives of the people crushed by this unjust and dirty imperialist war. South Korea has now become one of the five countries that Trump has asked to send troops first among its allies. In this country, which is already a member of the imperialist aggressor forces, it is the primary task of the working class here to fight against the South Korean government and capital’s complicity in genocide, war profiteering, and now direct participation attempt in the war. [Español] Instagram에서 이 게시물 보기 사회주의를 향한 전진(@marchtosocialism)님의 공유 게시물 Hola, soy dolmeng y estoy aquí en la 63(sesenta y tres) manifestación para denunciar el genocidio que Israel está cometiendo contra los palestinos, así como la invasión imperialista de Estados Unidos e Israel contra Irán. Ya han pasado más de tres semanas desde que comenzó la guerra con la agresión imperialista, con palabras hipócritas de «ataque preventivo». En Irán se han atacado más de sesenta y siete mil (67 000) objetivos civiles, incluyendo 498(cuatro-cinetos noventa y ocho) escuelas y 236(dos-cientos treinta y seis) centros de salud. Pero a medida que Trump fracasa en su estrategia, al no lograr cambiar el régimen y enfrentarse al bloqueo del estrecho de Ormuz, se están volviendo más descaradamente reaccionarios, atacando infraestructura industrial, como South Pars, y tratando de arrastrar a otros países a esta guerra. El 14(catorce) de marzo, Trump solicitó a Corea del Sur, Japón, Reino Unido, Francia y China que enviaran buques de guerra al estrecho de Ormuz. Y, sin embargo, Corea del Sur ha mantenido una postura ambigua al respecto. Por eso estamos aquí para denunciar enérgicamente la posición del gobierno surcoreano y para decir «No al despliegue militar». El gobierno surcoreano y las grandes empresas han obtenido ganancias al apoyar el genocidio de Israel. HD Hyundai lleva décadas vendiendo excavadoras a Israel, que se utilizan para demoler las casas de los palestinos, y ahora está reforzando su «asociación estratégica» con Palantir, la peor empresa de IA que ha proporcionado a EE. UU. e Israel tecnología crucial para el asesinato selectivo de palestinos, además de ayudar al ICE con la misma tecnología. Otra gran empresa, Hanhwa, ha estado cooperando con Elbit y Elta Systems. La lista continúa y, entre ellas, Korea Aerospace Industries está cooperando con Israel Aerospace Industries, y LIG Nex-one se hizo cargo de Ghost Robotics, que ha suministrado robots militares a Israel. Hyundai Rotem ha comprado un sistema de protección para tanques a Rafael, la empresa militar israelí. Y no solo esas empresas privadas, sino que la Corporación Nacional de Petróleo de Corea, KNOC, sigue participando en un proyecto de expropiación de gas en el mar de Palestina. Al comenzar la guerra, los precios de las acciones de las empresas militares surcoreanas se duplicaron, y están contentas con el hecho de poder vender más armas para esta guerra. La única crisis que preocupa al gobierno y al capital coreanos es la crisis económica causada por un bloqueo del estrecho de Ormuz, temiendo particularmente que estalle la burbuja del «KOSPI 6.000(seis mill)». No tienen ningún interés en las vidas de las personas aplastadas por esta guerra imperialista injusta y sucia. Corea del Sur se ha convertido ahora en uno de los cinco países a los que Trump ha pedido que envíen tropas en primer lugar entre sus aliados. En este país, que ya es miembro de las fuerzas imperialistas agresoras, la tarea principal de la clase trabajadora es luchar contra la complicidad del gobierno y el capital surcoreanos en el genocidio, el lucro con la guerra y ahora el intento de participación directa en la guerra. /* 기본 blockquote 스타일 */ blockquote { border-left: 4px solid #c0392b; /* 사이트 분위기와 맞는 붉은 계열 */ padding: 12px 18px; margin: 20px 0; background: #fafafa; font-style: normal; color: #333; line-height: 1.6; } /* blockquote 안의 p 태그 정렬 */ blockquote p { margin: 0 0 10px 0; text-align: justify; } /* 마지막 p 태그 여백 제거 */ blockquote p:last-child { margin-bottom: 0; } -
[국제공동성명] 이란에 대한 제국주의 전쟁에 맞서는 거대한 국제적 운동을 건설하자! 미국과 이스라엘에게 패배를!미국과 이스라엘이 이란을 상대로 벌이는 제국주의적 침략 전쟁이 4주째에 접어들었다. 사반세기 만에 미국이 중동에서 벌인 최대 규모 공세가 된 이번 전쟁에서 트럼프의 목표는 여전히 불분명한 가운데, 유가는 상승하고 국제 무역에는 장애물이 늘어나고 있다. 국제 원유 교역량의 20%가 통과하는 호르무즈 해협의 폐쇄는 1973년 오일 쇼크 이후 최악의 에너지 위기를 촉발했다. 유조선에 대한 군사 공격과 걸프만 해상교통 마비는 세계 경제에 악영향을 미쳐 인플레이션을 심화시키고 유가를 배럴당 100달러 이상으로 끌어올려 스태그플레이션의 위협을 더욱 현실화하고 있다. 트럼프는 미국과 이스라엘의 파괴적인 군사 공격이 아야톨라 정권을 급속하게 붕괴시키거나 (베네수엘라의 델시 로드리게스처럼) 미국에 복종하는 지도부의 등장으로 이어질 것이라는 단순한 가설을 바탕으로 이 새로운 제국주의적 모험에 뛰어든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그는 2003년 이라크 전쟁 같은 지상군 파병은 피하는 작전을 추구했다. 그러나 트럼프는 자신이 원했던 결과를 얻지 못했다. 엄청난 규모의 폭격이 이루어졌지만, 그 결과는 정권 교체도, 베네수엘라 같은 친미굴종 지도부의 수립도 아니었다. 미국·이스라엘 동맹이 군사적 우위를 확보하고 중요한 전술적 승리를 거두었지만, 이란 정권의 항복이나 붕괴를 강요하기에는 충분하지 않았다. (다만, 이란의 국가안보실장 알리 라리자니가 암살당하면서 정권 내부의 분열 위험과 정권의 대응방향에 대한 불확실성이 있기는 하다.) 알리 하메네이 암살 이후 무즈타바 하메네이가 이끌게 된 신정 체제는 워싱턴에 대한 강경한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이란 혁명수비대와 군 최고 사령부는 큰 타격을 입었지만 붕괴되지는 않았다. 테헤란은 계속해서 군사적으로 대응하고 있다. 이란의 목표는 침략자들에게 군사적·정치적·경제적 부담을 가중시켜 결국 포기하고 협상을 모색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이를 위해 이란은 적의 방어 체계를 약화시키고, 페르시아만의 미국 대사관과 트럼프 동맹국들을 폭격하고 있다. 예를 들어 아랍에미리트의 석유 항구인 푸자이라를 폭격한 것은 이란의 핵심 에너지 기반 시설인 하르그 섬에 대한 미국의 공격에 대한 보복이었다. 경제적 압박은 점점 커지고 있다. 정상적인 석유 거래가 재개될 전망은 없고, 유럽의 가스 공급도 위태롭다. 유조선을 군사적으로 호위한다는 발상은 허황된 꿈에 불과하다. 한 번 호위하는 데 드는 비용이 화물 가격보다 더 비쌀 것이기 때문이다. 트럼프 대통령이 호르무즈 해협 개방을 위해 군함을 파견해 줄 것을 요청했던 국가들(프랑스, 영국, 한국, 일본)은 지금까지 이를 거부했거나 명확한 답변을 회피하고 있다. 미국의 제국주의 양당 체제, 특히 트럼프 정부는 여러 모순에 직면해 있는데, 특히 미국의 패권 약화를 보여주는 제국주의적 군사 공세는 더욱 심각한 문제로 대두되고 있다. 국내적으로는 하루 10억 달러라는 막대한 국고 지출을 초래하는 전쟁에 대한 반감이 커지고 있다. 터커 칼슨, 마조리 테일러 그린, 팟캐스터 조 로건 등 트럼프 지지 성향의 우익 인사들이 전쟁에 반대하면서 MAGA 운동 내부에 균열이 심화되고 있다. 이러한 위기의 가장 극적인 표현 가운데 하나는 미국 대테러센터 수장 조 켄트의 사임이었다. 그는 “미국이 이 전쟁을 시작한 것은 명확히 이스라엘로부터의 압력, 그리고 이스라엘이 미국에서 벌인 강력한 로비 때문이었다”고 말했다. NBC 뉴스 여론조사에서는 응답자의 54%가 이란 공격에 반대하는 것으로 나타났는데, 이는 11월 중간선거를 앞두고 하락세를 보이는 트럼프의 지지율을 반영하는 수치다. 게다가 트럼프의 주요 문제 중 하나는 이스라엘과의 동맹 관계이다. 팔레스타인 민중에 대한 집단학살과 인종청소를 이어가려는 네타냐후는 이란 이슬람 공화국을 제거하고 이란을 시리아나 리비아처럼 내전으로 몰아넣어 정치적·종교적·민족적·영토적 분열을 초래하려 한다. 그는 레바논 폭격에서 볼 수 있듯이 중동에서 ‘영구적인 전쟁’을 벌이는 전략을 통해서만 살아남을 수 있다. 하지만 트럼프는 아시아태평양 지역에서 중국을 견제해야 하는 전략적 우선순위에서 벗어나게 하면서 자원을 소진케 하는 또 다른 ‘영원한 전쟁’으로 미국을 몰아넣는 것을 감당할 수 없다. 이것이 바로 그가 전쟁이 4~6주 정도 지속될 것이라고 했다가, (언제 어떻게 끝날 것인지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 없이) 곧 끝날 것이라고 장담하는 모순적인 발언을 하는 이유이다. 미국 제국주의와 이스라엘의 전략적 이해관계 사이의 간극은 점점 더 벌어지고 있으며, 간단한 해결책은 보이지 않는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제국주의 전쟁에 반대하면서 이란에서 미국과 이스라엘의 정치적·군사적 패배를 촉구하는 세계적인 운동을 구축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제국주의에 반대한다면, 사회주의자라면, 혁명적인 좌파라면, 미국과 이스라엘의 패배를 (그리고 그들을 지원하는 유럽 열강들의 패배를) 조건 없이 옹호해야 한다. 다시 말해, 피억압 민족의 편에 서서 억압 국가에 맞서 싸워야 한다. 마찬가지로, 레바논에 대한 시온주의 이스라엘의 군사 공세를 즉시 중단시켜야 한다. 시온주의 테러리즘의 지역 재편 계획을 좌절시키는 것은 트럼프와 네타냐후의 이란 공격을 패퇴시키는 것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이와 관련, 제국주의적 군사 개입을 이란의 반동 정권과 동급으로 놓는 좌파 내의 모든 입장은 잘못된 것이다. 마르크스주의자에게는 정권의 반동적 성격에도 불구하고 억압받는 민족의 편에 서야 할 의무가 있다. 미국과 이스라엘이 목표를 달성한다면, 반제국주의 및 반식민주의 투쟁의 여건은 이란뿐 아니라 전 세계, 특히 중동에서 더욱 악화될 것이다. 이러한 결과는 팔레스타인 민중의 해방 투쟁에 재앙적인 영향을 미칠 것이다. 레바논에서는 네타냐후의 팽창주의적 야욕에 직면하여 국가적 파멸이 가속될 것이다. 라틴아메리카에서 이러한 발전은 ‘돈로 독트린’의 강화, 즉 ‘서반구’에 대한 더욱 폭력적이고 개입적인 지배 조치를 의미할 것이다. 이는 (차베스주의 정권의 협력으로 미국의 보호령으로 전락해가고 있는) 베네수엘라의 신식민주의적 굴복 심화, 쿠바 국민을 괴롭히고 1959년 혁명의 잔재를 파괴하는 경제적 압박 등 이 지역 여러 국가의 정치 상황에 대한 미국의 간섭으로 이어질 것이다. 반대로, 미국 제국주의와 시온주의가 패배한다면, 전 세계적으로 군국주의와 식민주의적 개입에 맞서 정면으로 싸울 수 있는 여건이 개선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워싱턴과 텔아비브가 자신들이 벌인 범죄적인 전쟁에서 패배하도록 공개적으로 옹호하는 제국주의 전쟁 반대 운동을 강력하게 일으켜야 한다. 우리의 이러한 입장은 반노동자적이고 억압적이며 반동적인 아야톨라 정권에 대한 가장 절대적인 계급독립성에 기반을 두고 있다. 우리는 노동자계급, 여성, 그리고 이란 민중을 위한 어떠한 해방이나 자유도 폭탄이나 제국주의 개입, 그리고 이스라엘의 집단학살을 통해서는 이루어질 수 없다고 생각한다. 현재 무즈타바 하메네이가 이끄는 이란의 초보수 신정 체제는 이미 여러 차례 이란의 노동자·민중의 무자비한 적이며, 여성과 쿠르드족을 억압하고 노동자 파업을 진압하는 책임자임을 입증해 왔다. 전쟁이 임박하자, 신정 체제는 주민을 대상으로 한 유혈 사태를 통해 내부 결속을 강화했다. 1월에 경제위기에 대한 항의 시위가 정권을 위협하자 이를 잔혹하게 진압한 것이다. 민중의 불만이 강력하게 표출되었던 이 시위를 트럼프와 네타냐후가 자신들의 ‘정권교체’ 정책에 이용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이러한 행태는 이란의 전쟁 대비 및 반제국주의 저항을 체계적으로 약화시켰다. 하지만 이것이 바로 1979년 이란 혁명을 정치적으로 찬탈하면서 등장한 아야톨라의 신정독재가 작동하는 방식이다. 1979년 이란 혁명은 혁명적, 노동계급적, 반제국주의적 성격이 중동에서 가장 유기적으로 결합된 과정이었지만, 시아파 성직자 기구에 의해 잔혹하게 진압되었다. 게다가, 제국주의 침략에 맞선 자위권 행사라 할지라도, 이란의 전쟁 행위는 모든 형태의 반대 목소리를 탄압하는 것을 포함하며, 이는 미국과 이스라엘에 맞선 투쟁을 약화시키는 악랄한 수단이다. 우리는 이러한 탄압 정책과, 경제위기와 반동 정권에 맞서 싸우는 시위자들을 ‘적’으로 규정하는 행위를 강력히 규탄한다. 바로 이러한 이유로 우리는 포퓰리즘 좌파(그리고 부르주아 중도좌파) 일각에서 나타나는 ‘진영주의’ 입장을 단호히 반대한다. 이들은 정당한 반제국주의 투쟁을, 피에 굶주린 반동적인 정권이나 이른바 ‘다자주의 세력’인 중국과 러시아에 대한 정치적 지지와 동일시하려 한다. 팔레스타인 학살이 진행되는 동안, 중국도 러시아도 가자지구 방어를 위해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중국과 러시아는 미국의 침략 행위를 비난하고 공격받는 정권을 지지한다는 뻔한 성명 외에는 자신들의 동맹국을 방어하기 위한 어떠한 행동도 취하지 않았다. 푸틴은 여전히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최대한의 이득을 얻는 데 집중하고 있으며, 이제 이란 전쟁으로 인한 유가 상승에서 이익을 얻는 데 집중하고 있다. 중국은 에너지 가격 상승으로 전략적 이해관계가 위협받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과의 (또는 사우디아라비아 같은 반동적인 걸프 군주국들과의) 협정을 위태롭게 하지 않기 위해 조심스럽게 행동하고 있다. 실제로 중국과 러시아는 제국주의적 재앙에 비해 ‘진보적인’ 대안이나 ‘차악’이라고 할 수 없는 자본주의 국가(거대한 자본주의 강대국인 중국을 일부 동지들은 제국주의로 규정)이며, 근본적으로 반동적이고 권위주의적이며 반노동자적인 체제를 갖추고 있다. 중국과 러시아는 식민주의적·군국주의적 야만에 맞서는 세계 민중의 투쟁에서 동맹이 될 수 없다. 제국주의적 침략에 맞서는 투쟁은 모든 자본주의 국가들과 (중동에서의 이란과 아랍 부르주아지들과 같은) 반동적 정권들로부터 완전한 정치적 독립을 확보한 상태에서만 수행될 수 있다. 자신의 부르주아적이고 반동적인 성격 때문에, 이란 정권의 전쟁 전략은 해당 지역의 아랍 및 비아랍 무슬림 대중이 자국 정부와 정치 체제, 제국주의 억압에 맞서 결집하도록 촉구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승리의 유일한 가능성이 아랍 및 무슬림 세계의 피억압 대중의 봉기에 달려 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반제국주의 계급투쟁 속에서 이 지역 전반의 노동자, 여성, 청년, 농민, 그리고 (쿠르드족 같은) 피억압 민중이 동맹하는 것만이 미국과 이스라엘의 공세에 (또한 여러 적대 세력이 민중의 불만을 이용하려는 시도에) 맞설 수 있는 유일한 진보적 대안이다. 트럼프는 국내적으로 아무런 신망도 얻을 수 없는 전쟁에 정치적 자산을 낭비하고 있으며, 무엇보다 미니애폴리스에서 노동자와 주민들의 운동에 밀려 이민세관단속국(ICE)의 반이민 공세에서 후퇴하는 참패를 겪었다. 이러한 상황을 기회로 삼아 미국 노동자와 주민들 사이에서 반전 운동을 크게 일으켜야 한다. 제국주의적 침략에 대한 거부는 기본이다. 트럼프와 네타냐후의 군사적 패배라는 슬로건을 함께 내세우고, 2024년 청년과 일부 노동자계급을 휩쓸었던 친팔레스타인 운동의 힘을 활용해야 한다. 제국주의 유럽 국가들에서는 가자지구 학살에 반대하고 극우 세력에 맞서는 세력을 중심으로 강력한 반전 운동을 일으키는 게 최우선 과제이다. 마크롱(프랑스), 스타머(영국), 메르츠(독일)는 이란과 전쟁 중이 아니라고 말하지만, 프랑스는 군함을, 영국은 군사기지를 제공하고 있고, 독일은 트럼프식 군국주의를 지지하고 있다. 스페인의 경우 산체스가 ‘전쟁 반대’를 말하고 있지만, 미국이 이란 공격을 위해 자국 내 군사기지를 계속 사용하도록 허용하고 있다. 한편, 모든 유럽 국가들은 군사 예산을 증액하고 호전적인 수사를 강화하고 있다. 우리는 제노바 항만 노동자들을 비롯한 이탈리아 노동자계급이 팔레스타인을 방어하기 위해 학생들과 함께 대규모 총파업을 벌였던 것처럼, 정면으로 맞서야 한다. 우리는 중대한 기로에 서 있다. 전쟁과 새로운 경제 위기의 조짐이 점점 더 뚜렷하게 나타나고 있다. 트럼프는 미국의 패권적 쇠퇴를 극복하고 패권을 되찾기 위한 ‘무력에 의한 해결’ 시도를 상징한다. 강대국 간의 경쟁, 군국주의, 보호주의적 경향이 만연하고 미국과 중국 간의 패권대결이 전략적 배경으로 깔린 이 세계에서, 전 세계 노동자와 청년들은 우리 계급의 적들이 준비하는 재앙을 막기 위해 스스로 반자본주의적이고 사회주의적인 전략을 갖춰야 한다. 이러한 사회주의 전략을 수립하기 위한 투쟁에서, 1979년 영웅적인 혁명의 역사적 유산과 다시 연결되는 것은 특히 중요하다. 이란의 노동자계급・청년・여성들은 역사에 영웅적인 장을 써 내려갔으며, 그 시절 민주적·사회적 요구로 시작했던 혁명은 노동자계급에게 대중적인 자주적 결정 기관을 발전시킬 기회를 제공했다. 제국주의와 성직자 계급의 결탁, 잔혹한 탄압, 그리고 혁명적 사회주의 지도력의 부재는 세계적인 등불이었던 노동자혁명을 탈취하여 이슬람 반혁명으로 전락시키는 데 성공했다. 오늘 우리는 이란 정권의 매우 반동적이고 억압적인 성격에도 불구하고, 따라서 이란 정권에게 어떠한 정치적 지지도 하지 않으면서, 미국과 이스라엘 및 그 동맹국들의 패배가 전 세계 착취당하고 억압받는 이들에게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 선언문에 서명하는 우리는 반제국주의 좌파의 일원이라고 자처하는 단체들, 특히 전 세계적으로 발전해 온 (1960~70년대의 베트남 전쟁 반대 운동을 떠올리게 하는) 광범위한 친팔레스타인 운동이 동일한 적에 맞서서 현재 진행 중인 투쟁들을 연결하는 게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즉, 미국과 이스라엘의 패배를 위해 싸우는 것, 레바논 폭격 중단을 요구하는 것, 팔레스타인 민중의 해방을 위한 깃발을 굳건히 들어올리는 것이다. 이란에 대한 제국주의 전쟁을 타도하라! 미국과 이스라엘에게 패배를! 노동자계급과 청년이 선두에 서서 제국주의 침략에 맞선 거대한 국제 운동을 건설하자! 레바논에 대한 공격을 중단하라! 팔레스타인 민중에 대한 집단학살을 중단하라! 미군을 중동에서 완전히 철수시켜라! ------ 연속혁명경향–제4인터내셔널 (CPR-FI, 아르헨티나·브라질·칠레·멕시코·베네수엘라·페루·볼리비아·코스타리카·우루과이·미국·프랑스·스페인·독일·이탈리아) 사회주의를 향한 전진 (MTS, 한국) 로자경향-제4인터내셔널 (CR-CI, 스페인) 루즈 (Rouge, 벨기에) 무엇을 할 것인가? (WITBD, 캐나다) -
학살과 전쟁에서 이윤을 얻는 한국은 이미 제국주의 침략세력의 일원이다한국은 이제 트럼프가 동맹국으로 제일 먼저 파병을 요구하는 다섯 나라 중 하나가 되었다. 이미 제국주의 침략세력의 일원인 이 국가에서, 한국정부와 자본의 학살공모, 전쟁장사, 그리고 이제 전쟁동참에 맞서 싸우는 것은 이 땅 노동자계급의 일차적 과제다. 파병은 ‘국익에 도움이 되지 않아서’가 아니라, 미국과 이스라엘의 중동 제국주의 패권을 강화시키고, 팔레스타인에서의 집단학살과 인종청소를 확대시키는 데 기여할 것이기 때문에 막아야 한다. 지금껏 대자본가들에게 이득이 되기 때문에 전쟁무기를 팔고 학살자들과 손잡는 것을 거리낌없이 해왔듯이, 이재명 정부는 계산기를 두드려본 결과가 달라졌을 땐 언제든 파병을 결정할 것이다. 그들은 전쟁과 학살을 행하여 이윤을 얻는 이 체제의 일부다. 그리고 우리에게는 이를 멈출 책임이 있다. 3월 20일, 오전 11시 트럼프의 호르무즈 해협 파병 요구에 대한 검토 즉각 중단을 요구하는 청년학생 기자회견에서 제국주의 침략전쟁에 군함을 보내려는 이재명 정부를 풍자하는 퍼포먼스를 진행했다. 미국과 이스라엘이 이란을 침공하며 시작된 전쟁이 20일 째 이어지고 있다. 트럼프는 이란 침공 이후, 자신을 이란 신정체제에 맞선 구원자처럼 선전했고, 이미 결정적 타격을 가했으며, 전쟁이 곧 끝날 것처럼 언사를 이어갔지만, 전쟁의 진행양상은 트럼프의 의도대로 흘러가지 않고 있다. 오히려 이번 전쟁은 미국의 전략적 오판과 군사적 한계를 노출시키고 있다. 비록 사상자 수나 군사전력에서 열세를 피할 순 없지만, 오랜 시간 미국과의 전쟁을 준비해온 이란은 많은 사상자를 내면서도 군사적 반격을 이어가며 미국을 당혹케하고 있다. 트럼프는 지난 1월 베네수엘라를 침공하고 마두로를 납치한 뒤, ‘델시 로드리게스’를 꼭두각시로 만드는데 성공한 경험에 도취되어 충분한 전략적 고려 없이 이란을 침공했다. 이란의 최고지도자 암살 후, 트럼프는 이란 내 친미 대중시위를 선동하고, 이란의 ‘로드리게스’를 찾았지만, 상황은 뜻대로 흘러가지 않고 있다. 이란은 3월 8일 모즈타바 하메네이를 최고 지도자로 선출하면서 이란 혁명수비대(IRGC) 중심의 강경 대응테세를 견지하고 있다. 미국이 이란의 드론, 미사일 등 군사적 반격 능력에 대해서도 과소평가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이란은 미국과 이스라엘의 방공 요격미사일이 바닥날 때까지 값싼 드론 공격을 지속하는 전략을 썼다. 이란의 샤헤드-136 드론 한 대당 가격은 약 6천만원 수준이지만, 이를 막기 위해 미국 패트리어트 방공 시스템이 사용하는 요격 미사일은 개당 약 60억 원 수준이다. 파괴된 레이더와 소진된 미사일을 보충하기 위해 미국은 한국 등에서 패트리어트와 사드체계를 중동으로 긴급 공수해야했다. 이번 전쟁은 그 시작부터, 미국이 주도해 만든 국제질서에 비춰보아도 매우 정당성을 상실한 전쟁이었다. 미국과 이스라엘은 이란과의 핵협상 도중 선제공격을 하며, ‘임박한 위협’에 대해 ‘예방적 공격’을 했다고 주장했다. 핵 협상 과정에 있던 이란이 미국과 이스라엘에게 ‘임박한 위협’을 가했다는 증거는 당연히 어디에도 없다. 이후 미국은 “이번 작전의 목표는 이란 정권이 핵무기로 세계를 위협할 수 없도록 하는 것”이라고 주장했지만, 이란이 우라늄 농축시설과 핵무장을 추구한다는 것이 예방 공격의 근거가 될 수 있다면, 이미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고 주변국에 미사일 공격을 일삼아온 이스라엘과, 세계 최대의 핵무기를 보유하고 수십차례 타국을 침공해온 미국의 존재 자체도 예방 공격의 근거가 될 수 있다. 이들의 침공은 중동 패권을 위해 제국주의 국가가 억압국을 향해 벌이는 가장 반동적인 전쟁이다. 전쟁에 대한 미국 국내 지지도는 그 어느 때보다 낮다. 개전 직후부터 이란 공격을 지지한다는 응답자는 30% 이하였다. 이는 2차 세계대전 당시 진주만 공습에 대한 대응으로 일본에 선전포고했을 당시(97%), 2001년 아프가니스탄 전쟁(92%), 2003년 이라크전(76%)와 눈에 띄게 차이난다. 국제적 반전운동을 통해 미국과 이스라엘의 제국주의 침략전쟁을 좌절시킬 수 있는 가능성이 그 어느때보다 열려있고, 이를 극대화하기 위한 국제연대 투쟁에 나서야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궁지에 몰린 트럼프의 파병 요구 호르무즈 해협 봉쇄로 전략적 궁지에 내몰린 현 상황이, 네타냐후와 트럼프로 하여금 더욱 노골적으로 반동적인 정책을 취하도록 만들고 있다. 그 중 한가지는 이란의 사우스 파르스 가스전을 공격하며 군사시설을 넘어 주요 산업시설을 타격한 것이고, 또 한가지는 다른 국가들을 직접적으로 이 전쟁에 참전시키려 하는 것이다. 트럼프는 3월 14일 한국, 일본, 영국, 프랑스, 중국 5개국에 대해 호르무즈 해협으로 군함 파견을 요청했다. 영국, 프랑스를 비롯해 캐나다, 호주, 독일 등 주요 동맹국들은 이를 거절했다. 중국도 곧바로 거절 의사를 표명했고, 일본과 한국은 19일까지 분명한 답 없이 모호한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안규백 국방부 장관은 지난 17일 파병에 관해, “SNS 자체를 공식적 요청이라 보지 않는다. 공식 요청을 받은 바 없기에 드릴 말씀이 없다”고 일축했다. 조현 외교부 장관도 “요청이라 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는 상황”이라며 모호한 답변만 내놓았다. 관세협상 과정에서 트럼프에게 왕관까지 선물하며 아부하던 이재명 정부가 현재까지 파병에 이렇듯 모호한 입장을 취하는 것은, 정당성도 없고 전략적으로도 궁지에 몰린 이 더러운 전쟁에 파병함으로써 한국 자본가계급이 당장 얻을 이익이 많지 않다는 계산의 결과다. 그런데 그렇기 때문에, 앞으로의 사태전개에 따라 이재명 정부의 입장은 변할 수도 있다. 미국 제국주의의 적극적 하수인 노릇을 하는 국민의 힘 일각은 이미 호르무즈 해협 파병에 ‘적극 참여’하여, 그 댓가로 미국의 경제, 통상 압박을 피하고 ‘신속한 핵 추진 잠수함 건조와 우라늄 농축 및 사용 후 핵연료 재처리 권한 확대’ 등 ‘안보 전략자산 확보하자’고 주장하고 있다. 트럼프는 파병에 소극적인 나토 동맹국들과 한국, 일본 등을 향해 격노를 쏟아내며 노골적인 불이익을 주겠다며 협박하고 있다. 사태전개에 따라 트럼프가 격한 보복을 현실화하거나, 이 더러운 전쟁의 주도권을 다시 거머쥐게 되었을 때, 이재명 정부는 계산기를 다시 두드려보고 거리낌없이 파병을 결정할 수도 있다. 애초에 이재명 정부가 고려하는 것은 국익, 즉 한국 총자본의 이익에 도움이 되는가 뿐이기 때문이다. 팔레스타인 집단학살에 협력해온 한국 이번 중동 전쟁은 미국과 이스라엘이 그간 자행해 온 팔레스타인 집단학살의 연장선에 있다. 그리고 한국은 그동안 이스라엘에 무기 판매, 굴착기 수출, 가스개발 동참 등을 통해 팔레스타인 학살을 지원해왔다. HD현대는 굴착기 수출을 통해 이스라엘의 식민지 점령을 오랫동안 지원해왔다. 팔레스타인 주민들이 팔레스타인평화연대에 2012년 HD현대의 굴착기가 불법 정착촌 확장에 사용되고 있다는 사실을 처음 제기한지 14년이 지났다. 그 이전부터 십수년 넘는 세월 동안 HD현대의 굴착기 판매는 지속되었고, 마사페르 야타를 포함해 서안지구와 가자지구의 수많은 불법 정착촌 건설에 공병기계로 사용됐다. HD현대는 십수년 동안 이어진 질의와 항의에 한번도 제대로 응답하지 않았다. 현재 이스라엘을 향한 굴착기 수출은 하청업체 에프코 사를 통해 이뤄지고 있다. HD현대는 “주택 철거 현장에 쓰인 장비는 없다” ”이스라엘 철거 업무 등 정부 기관에 판매한 자료가 없다”고 얘기하지만, 팔레스타인 주민들은 최근 몇년 간 가옥파괴에 HD현대 굴착기가 사용되고 있다는 증거사진을 끝없이 제시하고 있다. 국제앰네스티 조사에 따르면, 2019년 9월부터 2024년 7월까지 최소 54건의 건물, 주택, 사업장 철거에 HD현대와 HD현대인프라코어 중장비가 동원되었다. 올해 1월, 휴전안이 발효된 직후에도 이스라엘은 HD현대의 굴착기를 사용해 가자지구 주민들의 주택을 파괴했다. 1월 17일, 이스라엘 군이 두산인프라코어 로고가 새겨진 굴착기를 사용해 가자지구 북가자주 자발리아 민중들의 집을 파괴하고 있다. 두산인프라코어는 지난 2021년 HD현대가 인수 합병한 기업이다. HD현대의 미국, 이스라엘과의 연루는 이뿐만이 아니다. HD현대는 2021년부터 이어온 미국 AI기업 팔란티어와의 전략적 파트너십을 최근 확대강화했다. 팔란티어는 CIA의 투자를 받아 2003년 설립된 이후 미국과 이스라엘의 군사기술에 핵심적인 역할을 해왔다. 유엔 팔레스타인 특별보고관 프란체스카 알바네제는 2025년 7월 1일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가자 집단학살을 지원하고 불법 유대인 정착촌 건설에 관여한 기업 명단이 담긴 보고서에서 팔란티어에 대해 아래와 같이 설명한다. 이스라엘 군은 데이터를 처리하고 표적 목록을 생성하기 위해 “라벤더(Lavender)”, “고스펠(Gospel)”, “Where’s Daddy?”와 같은 인공지능 시스템을 개발했으며, 이는 현대전을 재편하고 인공지능의 이중용도적 성격을 여실히 보여준다. 2023년 10월 이전부터 이스라엘과 기술 협력을 이어온 팔란티어 테크놀로지스(Palantir Technologies Inc.)는 2023년 10월 이후 이스라엘 군에 대한 지원을 확대했다. 팔란티어가 자동 예측 치안 기술, 군사 소프트웨어의 신속하고 대규모 구축 및 배치를 위한 핵심 방위 인프라, 그리고 자동화된 의사결정을 위해 실시간 전장 데이터 통합을 가능하게 하는 인공지능 플랫폼을 제공했다고 믿을 만한 합리적인 근거가 있다. 2024년 1월, 팔란티어는 이스라엘과의 새로운 전략적 파트너십을 발표하고 “연대”를 표명하며 텔아비브에서 이사회 회의를 개최했다. 2025년 4월, 팔란티어의 최고경영자는 팔란티어가 가자지구에서 팔레스타인인을 살해했다는 비난에 대해 “대부분 테러리스트들이 맞다”고 답변했다. 이 두 사건은 이스라엘의 불법적 무력 사용에 대해 경영진이 인지하고 있었으며 이를 의도적으로 용인했음을 시사하며, 이러한 행위를 방지하거나 관여를 철회하지 못한 점을 보여준다. 팔란티어가 만든 ‘고담(Gotham)’ 소프트웨어는 감시 영상과 같은 방대한 데이터 세트를 압축하여 검색 가능한 데이터베이스로 변환하는 기술로,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 전쟁에서 이미 미군의 핵심 도구로 활용됐다. 팔란티어는 미국이민단속국(ICE)과도 협력해 미등록 이주민을 선별, 감시, 추적하는 AI기술을 제공하고 있다. 이렇듯 끔찍한 집단학살 공모기업이기에, 2023년 이후 영국 의료노동자들은 팔란티어가 계약을 통해 국민의료서비스(NHS) 데이터플랫폼을 구축하는 것에 반대하는 운동을 벌이기도 했다. HD현대와 팔란티어의 협력강화는 작년 8월, 이재명 정부와 트럼프가 체결한 마스가 프로젝트와 연결돼있다. 마스가 프로젝트는 미중 패권대결에 있어 미국의 약점인 군함 건조,보수 능력을 보완해주기 위한 전략적 파트너십이다. 즉 이재명 정부와 HD현대 자본은 세계에 더 큰 전쟁을 불러올 미국의 해군력 증강에 적극 협력하고, 이 과정에 집단학살에 AI를 사용해온 군사기업과 협력함을 통해 이윤을 얻고 있다. 방산기업 한화 또한 이스라엘 집단학살에 적극 협력하는 기업이다. 한화는 이스라엘 방산업체인 엘타 시스템즈, 엘빗 시스템즈와 2021년 MOU를 체결했다. 엘타 시스템즈는 킬러 드론을 공급하는 이스라엘 항공우주산업의 자회사이며, 팔레스타인 마을의 조직적 파괴를 위한 무인 불도저를 개발한다. 엘빗 시스템즈는 이스라엘 군이 사용하는 드론과 지상장비의 85%를 생산하고, 서안지구 분리장벽 감시 시스템을 공급했다. 엘빗시스템즈는 백린탄, 집속탄과 같은 대량살상무기 제조 전력도 있다. 이러한 전범기업과 지금도 거래하며 한화는 이윤을 얻고 있다. 이뿐만 아니다. LIG넥스원이 인수한 고스트로보틱스의 군용 로봇은 이스라엘군에 공급되어 그들의 군사작전에 활용되었다. 한국 항공우주산업(KAI)은 이스라엘 항공우주산업(IAI)과 협력하고 있으며, 현대로템은 이스라엘 방산기업 라파엘의 탱크 방호체계를 도입해 자사 전차에 장착·수출하고 있다. 이러한 협력들은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파괴를 효율화하고 폭력을 극대화하는데 기여한다. 민간 대자본 뿐 아니라, 공기업인 한국석유공사도 이스라엘의 집단학살에 연루돼있다. 한국석유공사는 자회사 다나페트롤륨을 통해 가자지구 앞바다의 가스를 수탈하는 식민지 개발 프로젝트에 동참하고 있다. 2023년 10월 이스라엘은 해양가스 탐사권을 다나 페트롤륨을 포함한 컨소시엄에 판매했는데, 이스라엘이 판매한 6개 탐사권 면적의 62%는 팔레스타인의 배타적 경제수역이다. 더욱 끔찍한 사실은 해당 식민지 프로젝트 동참 결정이 이스라엘이 가자에 지상군을 투입한 바로 다음 날 진행됐다는 것이다. 다나 페트롤륨과 함께 해당 컨소시엄을 주도했던 이탈리아 석유기업 에니(Eni)는 작년 12월 “향후 이 지역에서 활동에 참여할 계획이 없다”며 철수 의사를 보였다. 이는 작년 9월부터 팔레스타인과 연대하는 이탈리아의 총파업 투쟁이 만들어낸 성과 중 하나다. 반면 한국석유공사는 작년 11월 26일 국제행동의 날 집회 때 진행된 면담에서 ‘이 프로젝트에 대해 잘 모른다’며 책임을 회피했을 뿐이다. 현재까지도 한국석유공사는 가스전 수탈에 대해 어떤 책임있는 답변도 하지 않고 있다. 한국의 주요 대학들은 이스라엘과 학술 교류 또한 적극적으로 이어왔다. 고려대학교는 십수년 전부터 이스라엘 대사관과 수차례에 걸쳐 관계를 맺으며 이스라엘 정부, 이스라엘 대학과 고려대 간의 학술적 연계를 강화하고, 이를 재정확보의 수단으로 삼아왔다. 고려대학교는 1월에는 집단학살을 정당화하는 논설을 생산해온 시온주의자 유발 샤니 교수를 초청해 ‘국제 AI 인권장전 세미나’를 열었다. 이스라엘이 AI기술을 전면도입해 팔레스타인 민중을 학살하는 일을 가속하는 동안 말이다. 이에 유발 샤니 교수 초청에 항의하는 투쟁이 진행되기도 했다. 이어 3월의 시작과 함께 학살에 공모하는 방산기업들이 버젓이 대학에서 취업박람회를 여는 것에 항의하는 투쟁도 전개되었다. 전쟁장사꾼들의 새로운 기회 한국은 수많은 곳에 무기를 수출하며, 세계의 무기상 역할을 해왔다. 한국이 판매한 무기는 세계 온갖 지역에서 억압자들의 도구로 사용돼왔다. 인도네시아에선 한국산 장갑차와 물대포, 최루탄이 시위진압용으로 사용되었다. 미얀마 군부도 한국산 최루탄을 시위진압을 위해 사용했다. 이번 중동전쟁도 한국의 방산자본들에게 무기수출을 확대할 절호의 기회로 인식되고 있다. LIG넥스원은 중거리 지대공 유도무기 천궁-2를 UAE(2022년), 사우디(2024년), 이라크(2024년)에 판매해왔다. 이번에 천궁-2가 이란 미사일을 요격하는데 우수한 성능을 보이자, 지난 3개월 기준 저점 대비 LIG넥스원(120%), 한국항공우주(68%), 현대로템(23%) 등 방산기업들의 주가가 올랐고, 군수자본은 K9 자주포, 포병전투장갑차 레드백, 전투기 KF-21, K2 전차 등의 전쟁무기 계약 확대를 위해 열을 올리고 있다. 이렇듯 한국은 지난 몇년 간 이어진 학살과 전쟁으로부터 무수한 이득을 얻고 있다. 그런데 한국 정부와 대자본이 특히 가증스러운 점은, 제국주의 세력과 손잡고 웃으면서, 학살에 기술과 자원을 제공해왔으면서도, 마치 자신들은 중동에서 벌어지는 잔혹한 제국주의 학살과 침략과는 아무 관련이 없는 것처럼 말한다는 점이다. 미국과 이스라엘의 일방적 침공이 발생했을 때, 한국 정부가 공식입장을 낸 사안은 오직 ‘중동지역에 있는 한국인들의 신속한 대피’뿐이었다. 해당 침공은 이란과의 핵협상 도중 벌어진 것이었고, 기만적인 부르주아 세계질서의 맥락에서 보더라도 국제법을 버젓이 위반한 행위였음에도, 이에 대해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았다. 미국이 미납 지역 초등학교를 폭격해 초등학생들을 일거에 대량 살해한 사실에 대해서도 침묵했다. 한국에 배치된 미군의 패트리어트 미사일과 사드 체계의 중동 반출을 받아들이며, 미국이 명분없는 반동적 전쟁에 자원을 동원할 자유를 지지했다. 한국 정부가 인권과 평화에 대해 내세우는 모든 법적, 도덕적 기준은 미국과 이스라엘 앞에서 산산히 흩어졌다. 그런 잣대를 정직하게 들이대는 순간, ‘국익’(이라 부르는 총자본의 이익)에는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라 판단한 것이다. 한국 자본주의 체제를 지탱하는 이들에게 도덕과 윤리기준이란 이익 앞에서 얼마든지 휘어질 수 있는 거추장스러운 명분임을 다시 한 번 드러냈다. 중동에서 벌어지는 전쟁이 얼마나 반동적이고 더러운 짓이든, 그 앞에서 침묵하는 게 ‘코스피에 도움이 된다면’ 그렇게 하겠다는 것이다. 이미 민주당 정부는 미국 제국주의의 이익을 옹호하기 위해 중동에 병력을 파견한 전력이 있다. 노무현 정부는 이라크전에 미국과 영국 다음으로 많은 3600여명의 병력을 파견했고, 문재인 정부는 트럼프가 이란 솔레이마니 사령관 암살 뒤 ‘호르무즈 호위 연합’ 참여를 요청한 것에 응답하며 320여 명의 청해부대 병력을 호르무즈 해협에 보냈다. 노무현은 2003년 4월 1일, 취임 1달 만에 이라크전 파병을 결정한 뒤 국정연설에서 이렇게 말했다. 명분은 중요합니다. 앞으로 세계질서도 힘이 아닌 명분에 의해서 움직여져야 합니다. 명분에 의해서 움직여 가는 시대가 와야 합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아직은 명분이 아니라 현실의 힘이 국제정치 질서를 좌우하고 있습니다. 국내정치에서도 명분론보다는 현실론이 더 큰 힘을 발휘하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 저는 생각하고 또 생각했습니다. 많은 전문가들의 조언도 들었습니다. 명분에 발목이 잡혀 한미관계를 갈등관계로 몰아가는 것보다, 오랜 동안의 우호관계와 동맹의 도리를 존중하여 어려울 때 미국을 도와주고 한미관계를 돈독히 하는 것이 북핵 문제를 평화적으로 해결하는 길이 될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 저는 어려운 우리 경제도 생각했습니다. 저는 전쟁 가능성에 대한 불안이 우리 경제를 어렵게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여 미국의 대북 공격을 공개적으로 반대하기도 하고, 한반도에 전쟁이 없을 것임을 국제투자가들에게 누누이 강조했습니다. 그러나 많은 투자자들을 만나본 결과, 그들은 제 생각과는 달랐습니다. 전쟁의 위험에 대한 현실적 가능성보다는 한미관계의 갈등요소를 더 큰 불안 요인으로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우리의 파병 결정은 이들의 불안을 해소하는 데 크게 기여하고 있습니다. 민주당 정부에게 ‘명분’, 즉 도덕과 윤리의 문제는 국익이라는 ‘실리’ 앞에서 언제든 치워질 수 있는 거추장스러운 장애물에 불과하다. 미국이 이라크에서 더러운 전쟁을 수행하는 것을 도와주고, 미국과의 동맹을 굳건히 하여 북핵 문제를 평화적으로 해결하겠다는 발상은 이라크의 노동자민중이 처한 억압에 대해선 일말의 고려도 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철저히 민족적이다. ‘국제 투자자들이 전쟁위험성보다 한미관계 갈등을 불안요인으로 본다’는 사실을 파병을 결정하는 기준점으로 삼는다는 점에서 철저히 계급적이다. ‘한반도의 평화를 위해’ 제국주의와 손잡기를 택한 결과는 무엇인가? 20년이 지난 오늘날, 세계는 더 정직한 야만의 시대가 되었고, 미국 제국주의는 미중 패권대결에서 지지 않겠다는 몸부림으로 세계 곳곳에서 수탈과 침략을 노골화하며 동아시아 미중 간 전면전이라는 암울한 미래를 향해 우리를 끌어가고 있다. 이재명 정부는 “우리는 위기를 기회로 만들 충분한 역량이 있다”며 수출기업 지원 등 전쟁추경 신속 편성을 요구했다. 그에겐 중동전쟁이란 새롭게 제시된 게임의 조건일 뿐이다. 게임의 목표는 국익의 극대화다. 한국정부와 자본이 걱정하는 위기는 오직 호르무즈 해협 봉쇄로 인한 경제적 위기다. 특히 얼마 전 축배를 터뜨린 ‘코스피 6천’ 거품이 흔들리는 것이다. 한국정부와 자본이 기대하는 기회는 새로운 이윤창출의 기회다. 명분없고 더러운 이 제국주의 침략전쟁에 스러져갈 민중들의 삶은 관심사조차 아니다. 한국은 이제 트럼프가 동맹국으로 제일 먼저 파병을 요구하는 다섯 나라 중 하나가 되었다. 이미 제국주의 침략세력의 일원인 이 국가에서, 한국정부와 자본의 학살공모, 전쟁장사, 그리고 이제 전쟁동참에 맞서 싸우는 것은 이 땅 노동자계급의 일차적 과제다. 파병은 ‘국익에 도움이 되지 않아서’가 아니라, 미국과 이스라엘의 중동 제국주의 패권을 강화시키고, 팔레스타인에서의 집단학살과 인종청소를 확대시키는 데 기여할 것이기 때문에 막아야 한다. 지금껏 대자본가들에게 이득이 되기 때문에 전쟁무기를 팔고 학살자들과 손잡는 것을 거리낌없이 해왔듯이, 이재명 정부는 계산기를 두드려본 결과가 달라졌을 땐 언제든 파병을 결정할 것이다. 그들은 전쟁과 학살을 행하여 이윤을 얻는 이 체제의 일부다. 그리고 우리에게는 이를 멈출 책임이 있다. /* 기본 blockquote 스타일 */ blockquote { border-left: 4px solid #c0392b; /* 사이트 분위기와 맞는 붉은 계열 */ padding: 12px 18px; margin: 20px 0; background: #fafafa; font-style: normal; color: #333; line-height: 1.6; } /* blockquote 안의 p 태그 정렬 */ blockquote p { margin: 0 0 10px 0; text-align: justify; } /* 마지막 p 태그 여백 제거 */ blockquote p:last-child { margin-bottom: 0; } /* 본문 안 링크 스타일 */ #gpt-article a { color: #cc0000 !important; text-decoration: none !important; } #gpt-article a:hover { color: #990000 !important; } // https://로 시작하는 링크만 target="_blank" 적용 document.addEventListener("DOMContentLoaded", function () { const links = document.querySelectorAll('#gpt-article a[href^="https://"]'); links.forEach(link => { link.setAttribute("target", "_blank"); link.setAttribute("rel", "noopener noreferrer"); }); }); -
[발언] 故 뚜안 이주노동자 중대재해 사망사고 진상규명, 책임자처벌, 고소고발 기자회견3월 10일, 23살 경기도 이천 자갈공장에서 일하던 베트남 청년노동자 뚜안이 컨베이어 벨트에 끼어 죽었다. 2인 1조 작업은 고사하고, 방호울이나 방호덮개도 없고, 긴급 정지 스위치도 없었다. 2월 24일부터 3월 13일까지 확인된 것만 최소 6명의 이주노동자가 죽었다. 이에 3월 18일(화), 경기지방고용노동청 앞에서 고 뚜안 유족 대리인과 경기이주평등연대 주최로 ‘이천(중앙산업) 이주노동자 중대재해 사망사고 진상규명, 책임자 처벌, 고소고발 기자회견’이 진행됐다. 유족을 대리하고 있는 소금꽃나무 활동가 장혜진 노무사의 발언, 그리고 2018년 12월 10일 유사한 산재사고로 故김용균 노동자를 떠나보낸 김미숙 김용균재단 활동가의 발언을 지면을 통해 전한다. 사진=경기이주평등연대 사진=경기이주평등연대 [장혜진 노무사_이주노동법률지원센터 소금꽃나무] 여전히 돈 때문에 사람을 죽이는 세상입니다. 그것도 모자라 돈으로 사람을 조롱하고 기만하는 세상입니다. 머나먼 타향에서 가족의 행복을 위해 모든 것을 바쳤던 23세 베트남 이주노동자 뚜안님의 사망 앞에서도 살인기업 중앙산업은 탐욕을 멈추지 않고 뚜안씨를 두 번 죽이고 있습니다. 3월 11일 대표이사와 공장장을 처음 만났을 때 그들은 여러차례 고개를 숙였습니다. 2인 1조 근무 수칙도 지키지 않고 혼자 점검하란 지시를 내렸다는 것도 인정했습니다. 컨베이어 가동 중에 점검하라는 지시를 했다는 것도 인정했습니다. 그런데 3월 13일 한국 10대 로펌인 대륙아주 변호사를 데리고 온 날부터는 태도가 확 달라졌습니다. 처음에 뚜안씨 아빠, 엄마의 서명이 담긴 변호사와 노무사의 선임서를 보여줬고 가족관계증명서를 비롯한 서류를 준비했다고 하자, 아무 말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날 저녁에 유족임을 입증하는 서류를 제출하라고, 주베트남 한국대사관 공증을 받은 위임장이 필요하다고 했습니다. 위임장은 베트남 관공서를 거쳐야 하기에 빨라야 2주, 늦으면 한 달이 걸린다고 합니다. 제가 피해자의 대리인이 아니라 가해자의 대리인이 된 것 같습니다. 중앙산업과 법무법인 대륙아주는 고인과 유족, 대리인들을 기만하고 모욕했습니다. 피해자의 대리인을 대하는 태도는 피해자를 대하는 태도입니다. 이 죽음에 대한 그들의 입장이기도 합니다. 눈물을 흘리고 진심으로 사죄해도 모자랄 판에 고개를 빳빳이 세우고 당신들이 진짜 대리인이 맞냐고 따지는 저들의 태도에 정말 분노가 치밉니다. 사실 그 태도가 저는 낯설지 않습니다. 제가 노무사로서 노동청에 가면 목소리 높이고 큰 소리로 호통치는 사람은 대부분 사용자들입니다. 주눅 들어서 죄인처럼 조사받는 노동자를 보는 일은 어렵지 않습니다. 이주노동자들이 겪는 고통은 더합니다. 작년 바로 이곳 경기지방노동청에서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임금을 못 받은 미등록 이주노동자가 근로감독관이 보는 앞에서 경찰 수갑에 채워져 잡혀 갔습니다. 사장이 신고했고, 사장이 경찰을 불렀으며, 근로감독관들은 눈뜨고 지켜만 봤습니다. 작년에도 재작년에도 수없이 이주노동자 산재 사망 때문에 이곳에 왔습니다. 작년 8월 3일 경기 화성에 있는 미정화학에서 네팔 이주노동자 디와즈 타망씨가 플라스틱 압축 롤러 기계에 끼여 사망했습니다. 도대체 얼마나 더 죽어야 노동부는 관리감독을, 처벌을, 재발방지대책을 세운단 말입니까? 산재 감축에 직을 걸겠다는 김영훈 노동부 장관, 이주노동자 사고, 사망은 산재가 아닙니까? 감축 못 시켰으면 물러나야 합니다. 아니 우리가 사퇴시켜야 합니다. 이재명 정부와 노동부의 화려한 말잔치 속에서 이주노동자는 수없이 죽어나가고 있습니다. 싸워야 합니다. 하나라도 제대로 된 처벌, 제대로 된 피해자에 대한 보상, 제대로 된 재발방지대책 만들어내야 합니다. 너무나 죽음이 많다 보니 어느샌가 우리도 익숙해지고 있습니다. 그러면 또 죽어나갈 것입니다. 관성적으로 투쟁하지 말고 몸과 마음을 다 쏟아부어야 합니다. 이주노동자를 살리는 길이 모든 노동자를 살리는 길입니다. 이주노동자와의 단결 없이 정주 노동자들의 단결도 없습니다. 가장 어려운 곳에서, 가장 힘든 일을 하며 죽어나가는 이주노동자를 외면하는 노동운동에서 어떤 희망이 있겠습니까? 국적이 아닌 계급으로 단결하여 사람 목숨을 하찮게 여기는 이 썩어빠진 자본주의 체제를 갈아 엎어야 합니다. 유족의 대리인으로서 동지들에게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부탁드립니다. 잊지 말아 주십시오. 장례가 끝나 시신이 고국으로 돌아가도 이 투쟁은 끝나지 않습니다. 끝날 수 없습니다. 동지들의 끊임없는 관심과 연대를 호소합니다. 사진=경기이주평등연대 [김미숙_김용균재단 활동가] 엊그제 뚜안님 빈소를 다녀왔습니다. 용균이 사고와 흡사하다고 문상가기 전에 얘기를 들었습니다. 언제나 그렇듯 멀리서 사고 소식이 들려올 때와 직접 현장에서 대면할 때는 감정이 완전히 다르게 다가옵니다. 빈소에 놓인 사진은 저의 아들처럼 앳되고 잘생긴 청년이었고 23살 어린 나이에 스러지기엔 짧은 생이 너무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빈소를 지켰던 동지가 사건의 전말과 진행 상태를 얘기하는데 듣기조차 거북했습니다. 당장 그곳을 벗어나고 싶었지만 사건 해결을 위해 제대로 알아야해 마음을 억눌렀습니다. 이른 새벽에 혼자서 컨베이어벨트에 끼인 이물질을 제거하기 위해 일하다 신체가 두 동강이 날 정도로 처참하게 목숨을 잃었던 것도, 회전체에 위험을 막아줄 안전 커버도 없었던 것도, 위험을 감수하고 가동 중에 이물질을 제거해야 했던 것도, 사고 날 때 기계를 멈출 동료도 없던 것도, 제대로 된 안전교육이 없었던 것까지 어쩜 그렇게 아들의 사고와 똑같은 판박이 일 수 있습니까? 저는 아들 사고 때부터 7년이 지난 지금까지 안전을 위해 열심히 싸워왔지만 무엇하나 바뀌지 않은 현장을. 뚜안 사고로 목격하며 너무도 참담한 심정입니다. 특히 유족이 되면 똑같은 사고는 두 번 다시 보고 싶지 않습니다. 아들의 사고 트라우마도 아직까지 감당하기 쉽지 않은데 같은 사고를 거듭 봐야하는 유족에게 사고는, 당시 아픔을 상기시키며 애써 다독이던 속을 다시 헤집어 놓기 때문입니다. 발언문을 쓰며 눈감고 뚜안과 부모님을 생각해봤습니다. 다섯명의 어린 동생들과 아픈 몸이라 돈벌이도 어려운 부모님을 위해 먼 나라 한국까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어린 나이지만 한 집에 가장으로서 얼마나 책임감이 무거웠을 것이며 월급의 대부분을 부모님께 부치며 뿌듯해 했을 뚜안님의 노고와 미소가 그려집니다. 부모님도 그런 아들이 얼마나 안쓰럽고 한편으로는 든든했을지 매일 전화통화 했던 것만으로도 짐작이 갔습니다. 한국에서 일하며 사귄 많은 친구들이 빈소를 지키며 애통해 했던 것만 보더라도 뚜안이 얼마나 좋은 인성으로 사람들과 잘 지냈는지 알 수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멀리 이국땅에서 일하러 간 아들이 하루아침에 죽었다는 소식에 얼마나 정신이 까마득하고 망연자실로 몸부림을 칠 뚜안 부모님을 생각하면 차마 어떠한 말로도 위로를 전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런 아까운 뚜안님을 누가 죽였습니까? 돌아가신 뚜안님의 인생을 보면 우리들과 하나도 다르지 않습니다. 기업주는 안전 때문에 한 가정이 풍비박산 난 것을 알고는 있습니까? 그런데도 저 살자고 책임만 회피하기 위해 온갖 술수를 부리고 싶습니까? 서로 존중하는 기본적 자세를 가져야만이 사람인것입니다. 그런데 뚜안을 죽인 회사는 모든 책임을 인정했던 처음과는 정반대로 대형로펌까지 선임하며 대응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고인에 대한 사람으로서의 가장 기본적 예우와 유족에 대한 사과와 반성조차 없다보니 그런 몰상식한 태도로 나오는 것 아닙니까? 우리나라 기업들의 산재사망사고를 대하는 태도는 그야말로 방자하고 교만하여 사람을 본인과 같은 사람으로 대하지 않는 잣대가 가장 가식적인 태도라는것을 보여줍니다. 혐오의 칼날로 서로를 헤치는 게 가장 무서운 결과가 되는 것 같습니다. 이러함에 우리가 뚜안의 부당한 죽음을 알고도 어찌 분노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고용노동부는 뚜안의 중대재해 구조적 죽임에 대해 피해자의 관점에서 제대로 파헤쳐 수사하고 대응하길 촉구합니다. 국적 차별없이 철저한 조사, 유족에게 진심을 담은 사과, 진상규명 책임자 처벌을 해야만이 멀리 계시는 부모님과 베트남 국민들을 비롯해 지켜보고 있는 고향 주민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대한민국이 될것입니다. 또한 우리는 뚜안의 의문의 죽음이 진상규명 될 때까지 이 싸움을 멈출 수 없음을 고용노동부는 명심하길 바랍니다. /* 기본 blockquote 스타일 */ blockquote { border-left: 4px solid #c0392b; /* 사이트 분위기와 맞는 붉은 계열 */ padding: 12px 18px; margin: 20px 0; background: #fafafa; font-style: normal; color: #333; line-height: 1.6; } /* blockquote 안의 p 태그 정렬 */ blockquote p { margin: 0 0 10px 0; text-align: justify; } /* 마지막 p 태그 여백 제거 */ blockquote p:last-child { margin-bottom: 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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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노운사 연재 9회] 2부 전진과 격돌 (1988-1998) [3] 민주노총으로 가는 길전노협은 애초 민주노조운동의 전국적 총결집체라는 위상을 갖고 건설됐지만 사무전문직과 대기업의 민주노조들이 대거 불참함에 따라 민주노조 총단결을 다시금 추진해야만 하게 됐다. 전노협은 정권과 자본의 탄압에 맞서 조직을 사수해 내긴 했지만, 지속되는 탄압으로 점점 약화됐다. 민주노조 총단결은 전투적·변혁적 노선의 전노협을 강화하는 대신 타협·개량주의 노선에 입각해 새 틀을 짜는 방향으로 현실화했다. 1993년 6월 전노협, 업종회의, 현총련, 대노협 4개 조직이 ‘전국노동조합대표자회의’(전노대)를 결성했다. 이를 토대로 1994년 11월 민주노총 준비위원회가 결성됐다. 마침내 1995년 11월 11일 민주노조운동의 총결집체로서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민주노총)이 창립됐다. 민주노총 건설 과정은 한편으로 민주노조운동이 양적으로 성장하고 확대되는 과정이었지만, 다른 한편으로 타협·개량주의 노선에 의해 주도됨으로써 전노협으로 집약됐던 전투적·변혁적 운동의 성과를 상당 부분 유실하는 과정이었다. 이전 편 보기 2부 전진과 격돌 (1988-1998) [시대배경] 군사파시즘에서 신자유주의 질서로 [1] 1988~89년 민주노조운동의 폭발적 성장 [2] 1990~91년 전노협 건설과 민주주의 투쟁 [3] 민주노총으로 가는 길 [4] 1996~98년 노동법 대격돌 1) 타협·개량주의 세력의 부상 ◎ 정권과 자본의 집요한 공세 전노협은 출발부터 정권과 자본의 극심한 탄압에 맞닥뜨렸지만, 1990년과 1991년 잇따라 전국적인 총파업을 벌이며 조직을 사수해 내고 있었다. 그러나 전노협이 처한 어려움은 결코 만만치 않았다. 정권과 자본은 전노협과 그 가입노조에 엄청난 탄압을 퍼부어 1년 사이에 180여 개 노조가 전노협을 탈퇴하게 만들었다. 그 결과 1990년 1월 19만 3천여 명으로 출발했던 전노협의 조합원 수는 1990년 말에 9만 7천여 명까지 줄어들었다. 특히 현대중공업노조에 대한 극심한 탄압과 현대자동차노조에 대한 치밀한 회유 공작으로 울노협 준비위를 무너뜨림으로써 상당한 전투성과 파괴력을 가진 울산지역 대기업 민주노조들을 전노협으로부터 분리시켜 냈다. 또한 노태우 정권은 1990년 하반기 상당수의 대기업 노조들에서 ‘전노협 가입’을 내건 민주 집행부가 들어서면서 전노협의 조직 확대 가능성이 높아지자, 1991년 2월 전노협 안팎의 대기업 민주노조들이 결집한 ‘대기업 연대회의’ 수련회를 급습하여 69명을 연행, 7명을 구속하면서 대기업 민주노조들이 전노협으로 결합하는 것을 적극 가로막았다. 이 때 구속된 박창수 한진중공업노조 위원장은 노태우 정권의 전노협 탈퇴 공작 과정에서 1991년 5월 옥중 살해를 당하기까지 했다. 그런데 전노협을 붕괴시키려는 노태우 정권의 전략은 전노협을 탄압하는 데에만 머물지 않았다. 노태우 정권은 1990년 5월 출범한 사무전문직 민주노조들의 결집체인 업종회의에 대해서는 별다른 탄압을 하지 않으면서 전노협과 다르게 대응했다. 한편으로 극심한 탄압을 통해 전노협을 최대한 위축시키면서, 다른 한편으로 민주노조운동 속에서도 전투성과 변혁성이 약한 부분에게는 숨통을 터줌으로써, 전노협이 전투적·변혁적 노선을 포기하고 타협·개량주의 노선으로 전환해 나가도록 유도했던 것이다. 업종회의는 전노협에 조직적으로 참여하지 않은 12개 사무·전문·서비스 부문 노조연합단체와 협의체가 구성한 연대조직체로, 조합원 수는 20만여 명이었습니다. 업종회의는 “사무, 전문, 서비스직 노동자의 단결을 바탕으로 노동자의 정치·경제·사회적 지위향상과 권익실현을 위해 공동투쟁을 하며 자주적이고 민주적인 노동조합의 발전과 통일을 목적으로 한다”고 스스로의 위상을 규정했습니다.[1] 자본과 정권의 입장에서 볼 때 전노협은 노동정책의 핵심문제로 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전노협을 ‘정치주의 노동운동의 진원지’로 간주했다. 따라서 전노협에 대한 탄압은 전노협 조직 자체를 와해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이를 위해 노동조합을 전노협 노조와 비(非)전노협 노조로 구분했으며, 양자에 대하여 차별화 정책을 집행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전노협과 조직적으로 연결되어 있거나 그럴 가능성이 있는 모든 움직임을 철저하게 차단하고 통제하는 정책을 구사하고 나섰다.[2] 국가와 자본은 전노협에 대한 탄압을 강화하는 한편, 업종별 노조에 대해서는 합법화 가능성을 열어두는 등 온건하게 대처하였는데, 이는 업종회의로 하여금 전노협과 일정한 거리를 두면서 실리주의로 나아가게 하는 요인이 되었다. … 업종회의에서 실리주의가 강화된 것은 단지 사무직 노조운동 지도부들과 대중들 사이의 간극에 의해 노정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많은 부분은 지도부의 소극적인 태도에 있었다. 사무전문직노조 지도자들은 전노협 건설과정에서 “먼저 가라, 곧 뒤따라가겠다”는 것이었고 “당시에는 실제 그런 생각이었다”고 하지만 이미 전노협 건설과정에서 이들은 소극적이었고 그 노선에 동의하지 않았다.[3] 전노협, 업종회의, 대기업 연대회의 등은 그 이념 그리고 그 기저에 흐르는 물적 기반의 수준에서 차별성을 지니고 있었다. 이를 반영하여 투쟁성을 담보하였던 전노협은 한편으로 국가권력, 자본의 전면적이고도 집중적인 탄압의 대상이 되었고 다른 한편으로 위기논쟁을 매개하면서 노동운동 내부의 일부 활동가 및 이론가들에게조차 비판의 대상이 됨으로써 이러한 상황은 더욱 심화되었다. 이에 반해 대기업노조는 현대그룹 노조 등에서 보이듯 사안별 투쟁, 특히 임금협상을 포함하는 단체협상의 결렬에 따른 쟁의과정에서 단위사업장 중심의 선별적인 탄압을 받았으나 조직의 존립 자체를 위협받지는 않았다. 업종회의의 경우는 자칭 중산층 비제조업 사무전문직 노동대중을 대상으로 하는 조합활동에 치중하여 국가권력과 직접적으로 대결하는 상황이 거의 없었고 따라서 국가권력의 일차적인 탄압의 대상이 되지 않았다. 이 과정에서 오히려 국가는 이들의 합법화 요구를 차례로 승인하였다. 90년 3당 합당 이후 국가권력은 민주노조운동 내부의 이러한 차별적인 조건을 이용하여 전노협에 대한 물리적·이데올로기적 탄압을 강화함으로써 이들과 전노협과의 연대를 차단하는 전략을 구사하였다.[4] ◎ 자본철수와 산업 구조조정 정권과 자본의 방해와 탄압으로 대기업 민주노조들이 대부분 전노협에 결합하지 못하면서, 전노협을 떠받치고 있었던 것은 주로 중소사업장 민주노조들이었다. 그런데 이 중소사업장들 가운데 상당수가 1992~93년의 산업 구조조정 과정에서 폐업되었고, 이로 인해 해당 사업장의 노동조합 자체가 사라졌다. 이 시기의 산업 구조조정은 한국 자본주의의 중심축이 저임금에 기초한 노동집약적 산업에서 기술력에 기초한 자본집약적 산업으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발생했다. 노동자들의 투쟁력이 성장하면서 일정한 경제적 양보가 불가피해지자 저임금에 기초한 노동집약적 산업에 투자했던 자본가들은 줄어든 이윤을 감수하기보다 공장 문을 닫고 새로운 투자처를 찾아 나서거나, 그 무렵 저임금 산업을 한창 빨아들이기 시작하던 동남아시아와 중국으로 공장을 옮기는 것을 선택했다. 이처럼 전노협에 대한 계속된 탄압에 덧붙여 산업 구조조정의 여파가 강력하게 밀려오면서, 1993년 이후 전노협의 조합원 수는 4~5만 명 수준으로 줄어들었다. 이 시기에 폐업에 맞서 투쟁했던 전노협 소속 민주노조들은 결국 존재 기반인 공장을 잃으면서 사라질 수밖에 없었지만, 그들이 펼친 끈질긴 투쟁은 한국 정부가 1995년부터 (최소한의 수준이나마) 고용보험 제도를 도입하도록 강제하는 성과를 남겼다. 정권과 자본에 의해 추진되고 있는 산업구조조정과 관련한 경영합리화, 업종전환, 공장자동화, 해외이전 등이 계속 확대되면서 고용흡수력이 지속적으로 저하되어 중소자본의 휴·폐업, 인원감축, 조업단축, 집단해고 등 다양한 형태의 고용문제가 발생하고 있었다. 그리고 1987년 노동자대투쟁 이후 자주적이고 민주적인 노동조합의 결성과 임금인상 투쟁 및 원화절상 등으로 과거처럼 저임금을 강요할 수 없게 되면서 마산 수출자유지역을 비롯해 전국 곳곳의 외국인 투자업체에서는 감원과 자본철수, 하청으로 물량 빼돌리기, 물량감축, 해고 등이 빠른 속도로 확대되었다. 또한 민주노조가 건설된 사업장에서는 노조를 와해시키거나 투쟁을 파괴하기 위한 위장 휴·폐업과 노조의 힘을 약화시키기 위한 물량의 하청전환, 임시직 채용, 자연감소된 인원 보충 안 하기 등의 현상이 광범위하게 나타났다. 전노협은 1990년 창립 이래 “해고사유 및 절차에 대한 엄격한 제한, 인사이동 및 부서이동시 노동조합과 사전 합의, 임시직의 채용에 대한 제한, 인원정리·정원유지·노동강도 유지에 대한 합의, 하도급시 노동조합과 사전 합의” 등을 내걸고 고용안정 보장투쟁을 전개하였다. 또한 회사의 분할·합병·정리·해산, 사업의 전부 또는 일부 양도시에는 노동조합과의 사전 합의를 거치도록 하고, 회사의 휴·폐업, 공장이전, 자본철수에 따른 해고가 발생할 때는 반드시 노동조합과 사전 합의에 의해 정리해고가 이루어지도록 하였다. 해고대상자에 대해서는 생계비 보전과 직장 이전을 위한 준비금을 확보하는 투쟁을 전개하였다. 더 나아가 정부와 국회에 고용보험제의 즉각 제정과 실시를 요구하는 투쟁도 전개하였으며, 이러한 투쟁은 1991년에도 계속적으로 요구되었다.[5] ◎ 이른바 ‘노동운동 위기론’의 확산 1991년 5월 투쟁의 패배는 민중진영 전반에 큰 타격을 입혔지만, 박창수 열사 투쟁에서 유의미한 성과를 거두지 못한 전노협에게도 상당한 내상을 안겼다. 자연스럽게 ‘전투적·변혁적 노선으로는 유의미한 성과를 얻지 못한 채 막대한 희생만 치르는 것 아니냐’는 회의론이 불거졌다. 그런데 8월 소련의 공산당 정권이 붕괴하더니 12월에는 소련 자체가 해체되는 세계사적 사건이 발생했다. 당시 매우 제한된 정보와 시야에 갇혀 있던 한국의 노동자운동과 민중진영 전반은 소련 붕괴를 노동자계급의 관점에서 인식하고 설명해 낼 능력이 전혀 없었다. 그만큼 충격도 컸다. 이제 전노협이 외치는 ‘노동해방’이 여전히 가능한지, 또는 심지어 여전히 타당한지에 대해서까지 회의론이 확산됐다. 소련 붕괴 이후 (스탈린주의적 한계 속에 그 시야가 갇혀 있던) 대다수 사회주의자들이 극심한 혼란에 빠져 줄줄이 사회주의 운동을 청산하는 사태가 벌어진 것은 노동해방에 대한 회의론을 더욱 증폭시켰다. 전투적·변혁적 노선에 대한, 그리고 노동해방이라는 궁극적 목표에 대한 회의론이 이른바 ‘노동운동 위기론’의 모습을 띠고 대대적으로 표출됐다. 87년 노동자대투쟁 이후 민주노조운동의 노선으로 규정할 수 있는 ‘전투적 노동조합주의’는 87년 이전에 유지되어 왔던 국가의 파시즘적 노동통제와 자본의 병영적 노동통제, 어용 한국노총의 ‘허구적 조합주의’에 비타협적으로 대항하는 ‘자주적 민주적 노동운동’을 추구하는 노조운동노선이라고 할 수 있다. 87년 이전까지의 정세에 비추어 볼 때, 전투적 노동조합주의는 그러한 노동정세를 주체적으로 돌파하고 계급적 노동운동을 대중적으로 전개하는 데 불가피하게 요구되었던 노선이었다. 실제 전투적 노동조합주의는 비록 제한된 범위이긴 하지만 노자관계의 인간화와 민주화에 기여하였고 계급적 노동운동의 대중적 전개에 크게 기여하였다. 그러나 전투적 노동조합주의는 89년 이후 크게 변화된 노동정세에 능동적으로 대처하지 못하고 있다. … 전투적 조합주의 노선은 최근에 두드러지고 있는 노동자계급의 내부구성의 변화, 노동자들 내부의 생활패턴의 다양화, 개인주의적 경향 및 실용주의적 경향의 강화, 의식편차의 확대 등 주목할 만한 현상에 적극적으로 대처하지 못하고 ‘자본의 유연성’에 대응하여 ‘노동의 유연성’을 발휘하지 못하는 무기력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 대체로 최대강령주의에 입각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는 전투적 노동조합주의를 극복하고 ‘최소강령주의’와 민주적 대안론에 기초하여 노동운동 노선을 전환할 것이 절실히 요청되고 있는 시점이다.[6] ◎ 이른바 ‘문민개혁’에 대한 환상 1993년 ‘문민정부’라는 이름을 내걸고 출범한 김영삼 정권은 출범 초기에 군부 내 하나회[7] 세력 제거 등 일정한 자유주의 개혁을 단행하면서 이른바 ‘문민개혁’에 대한 환상을 민중 속에 불러일으켰다. 김영삼 정권은 ‘문민개혁’ 가운데 하나로 무노동 부분임금 적용과 해고자 복직 등을 제시하고 민주노조운동에 대한 탄압을 어느 정도 누그러뜨리면서 민주노조운동 진영을 정권의 의도대로 길들이려는 적극적인 노동포섭 정책을 폈다. 물론 김영삼 정권은 1993년 하반기 이후 문민개혁에 대한 환상이 걷히면서 노동자투쟁이 거세게 올라오자, 파업 사업장 공권력 투입과 대규모 구속 등으로 군사정권과 다를 바 없는 계급적 본질을 스스로 드러냈으며, 시간이 지날수록 노동자들을 점점 더 강하게 탄압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김영삼 정권은 민주노조운동 내부에 타협·개량주의 세력을 확산시키기 위한 공작을 끊임없이 펼쳤다. 특히 ‘정권 내부에 개혁분파와 보수분파 사이에 치열한 다툼이 있으며 개혁분파가 우위를 얻으려면 민주노조운동의 협력이 중요하다’는 식의 논리를 내세우면서, 지난 날 ‘민주화투쟁’ 시기에 형성한 관계 등을 최대한 활용하며 민주노조운동 지도자들을 포섭하려는 작업을 줄기차게 벌였다.[8] 정권과 자본의 집요한 공세, 자본철수와 산업 구조조정, 이른바 ‘노동운동 위기론’의 확산이라는 기존 요소들 위에 문민개혁에 대한 환상이 덧붙여지면서, 전노협 안에서는 전투적·변혁적 노선의 주도권이 점점 약화되고 대신 타협·개량주의 노선이 점점 부상했다. ◎ 전노협 강화론과 전노협 한계론 이런 상황에서 1993년을 거치며 전노협 안에서 전투적·변혁적 노선과 타협·개량주의 노선 사이에 심각한 논쟁이 벌어졌다. 그 논쟁의 중심에는 ‘전노협 강화론’과 ‘전노협 한계론’의 대립이 놓여 있었다. 앞서 보았듯이, 극심한 탄압과 산업 구조조정의 결과 1993년에 전노협 조합원 수는 4~5만 명으로 축소되어 있었다. 그런데 어느덧 전노협 바깥에는 전노협보다 훨씬 더 많은 조합원들이 다양한 형태의 민주노조로 결집해 있었다. 크게 보자면, ‘현대그룹노동조합총연합’(현총련)과 ‘대우그룹노동조합협의회’(대노협)로 결집한 대기업 노조들에 대략 10만 명, 업종회의로 결집한 사무전문직 노조들에 대략 20만 명의 조합원들이 포진해 있었다. 전투적·변혁적 노선이 주도한 전노협과 달리, 이들 전노협 바깥의 민주노조들은 대부분 타협·개량주의 노선이 주도하고 있었다. 이들은 전노협에 결합하지 않음으로써 상대적으로 정권의 탄압을 비켜갈 수 있었고, 그래서 크게 어렵지 않게 조합원 수를 유지하거나 늘릴 수 있었다. 이들은 전노협의 주장과 투쟁이 너무 과격하다면서 전노협과 연대 수준을 높이는 것에 대해서도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었다. 상당수 대기업 민주노조들과 거의 모든 사무전문직 민주노조들이 이러한 상태에 놓여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전노협이 선택할 수 있는 길은 무엇이었을까? 크게 두 개의 길이 전노협 앞에 놓여 있었다. 첫째, 전노협을 사수하고 확대·강화해 나가는 것과 함께 전노협이 앞장서서 대기업과 사무전문직 민주노조를 아우르는 민주노조 총단결 전선을 형성함으로써, 전투적이고 변혁적인 전노협의 정신과 성과를 중심으로 민주노조운동 전체를 통합시켜 나가는 길이었다. 이것은 그동안 전노협이 추구해 온 방향이었으며, 한마디로 ‘전노협 강화론’이었다. 실제로 전노협은 출범 직후부터 민주노조 총단결 전선을 형성하려고 끊임없이 노력했다. 대표적으로 1990년 11월 전국노동자대회를 업종회의와 공동으로 개최하였으며, 1991년 10월 ILO공대위를 업종회의, 전국노운협, 전국노련과 함께 결성하여 활동해 오고 있었다. 둘째, 소수로 내몰린 전노협의 한계를 인정하고 전투적·변혁적 노선이 아니라 타협·개량주의 노선을 대세로 받아들임으로써 민주노조운동 전체를 타협·개량주의 노선에 입각해 새로운 틀로 통합시켜 나가는 길이었다. 새롭게 고개를 치켜세우며 등장한 이 입장은 한마디로 ‘전노협 한계론’이었다. 전노협 탈퇴 공작 속에서 수많은 노동자들이 해고와 구속을 당하고 그 과정에서 박창수 위원장의 옥중 살해까지 겪으면서도 의연하게 전노협을 지켜내고 있던 1991년 무렵만 해도 이러한 주장은 전노협 안에서 입 밖에 꺼내는 것조차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어느덧 전노협 안에서도 타협·개량주의 노선이 크게 세를 불리게 된 1993년에는 사정이 많이 달랐다. 1992~93년 무렵 전노협은 비록 민주노조로 조직된 조합원들 가운데 소수만을 직접 포괄하고 있었지만, 전체 민주노조운동 속에서 확고한 주도성과 대표성을 갖고 있었다. 1987년 노동자대투쟁으로 등장한 민주노조들이 지역적·전국적 결집과 공동투쟁을 통해 건설해 냈으며 이후 정권과 자본의 집요한 탄압을 당당하게 물리치며 천만 노동자 전체를 대표해서 투쟁해 온 전노협의 위상과 정통성을 누구도 감히 부정할 수 없었다. 그래서 전노협에 직접 가입한 노조들보다 훨씬 더 많은 수의 노조들이 각 지노협에 참관 자격으로 결합하여 사실상 전노협과 함께 활동을 펼치고 있었다. 현대중공업을 비롯하여 전투적·변혁적 노선을 견지했던 일부 대기업 노조들도 전노협과 긴밀히 결합하고 있었다. 이들 참관·협력 수준의 노조들까지 포함하면 여전히 20만 명에 가까운 조합원들이 사실상 전노협과 함께 하고 있었다. 그런 만큼 민주노조운동 전체가 어떤 노선 아래 어떤 과정을 거쳐 민주노총 건설로 나아갈 것인지에 대한 결정권은 사실상 전노협 스스로가 갖고 있었다. 전노협 강화론과 전노협 한계론 사이의 대립은 비록 전노협 안에서 벌어진 논쟁이라 하더라도 민주노조운동 전체의 방향을 결정적으로 좌우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매우 치열한 양상을 띨 수밖에 없었던 이 논쟁은 뜻밖에도 싱겁게 끝났다. 애초에 전노협 강화론을 견지했던 세력 가운데 상층 지도부를 중심으로 한 상당수가 1993년을 지나는 동안 전노협 한계론으로 돌아섰기 때문이다. 1993년 가을이 되자 균형추가 확연히 기울면서 전노협 상층부는 사실상 전노협 한계론으로 정리됐다. 전노협 상층부가 전노협 한계론으로 정리되기 전까지 업종회의와 상당수 대기업 노조들은 전노협과 함께 공동투쟁 전선에 나서는 것조차 매우 부담스러워 하고 있었다. 그래서 이들은 1993년 6월 전노협·업종회의·현총련·대노협이 ‘전국노동조합대표자회의’(전노대)를 공동으로 결성한 뒤에도 ‘사안별 공동사업 추진체’라는 전노대의 위상을 가능한 낮추려고 애를 쓰고 있었다. 전노협과 함께 공동투쟁에 나설 때 받게 될 정권과 자본의 탄압이 두려웠기 때문이다. 특히 업종회의는 매우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었다. 그런데 전노협 상층부가 전노협 한계론으로 정리되자 업종회의와 상당수 대기업 노조들의 태도가 얼마 안가서 정반대로 바뀌었다. 사안별 공동사업 추진체라는 전노대의 낮은 연대 수준에도 겨우 동의했던 이전과 다르게, 전노대를 기반으로 민주노총을 서둘러 건설하자는 높은 수준의 조직 전환을 갑자기 주장하고 나선 것이다. 전노협 상층부가 전노협 한계론으로 사실상 정리되면서 타협·개량주의 노선의 주도 아래 민주노총을 건설할 수 있다는 게 분명해진 까닭이었다. 결국 사안별 공동사업 추진체라는 낮은 위상에서 출발했던 전노대는 상층 논의를 중심으로 서둘러 민주노총을 건설하는 길로 나아갔다. 전노대는 1994년 11월 ‘민주노총 준비위원회’로 전환되었고, 1995년 11월 민주노총이 출범하게 됐다. 민주노총의 건설 과정 자체가 전노협 한계론과 타협·개량주의 노선의 주도성을 바탕으로 하고 있었기에 민주노총이 처음부터 전노협의 전투적·변혁적 정신과 성과를 계승하지 않게 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심지어 민주노총 준비위원회가 전국 단위노조에 내려 보낸 <민주노총 건설을 위한 교육자료>에는 전노협이라는 단어 자체가 한 번도 나오지 않는 일마저 있었다. ◎ 주도권을 거머쥔 타협·개량주의 전노협이 노동해방과 평등세상을 추구했던 것과 달리 민주노총은 사회대개혁을 내세우며 출범했다. 전노협이 정권과 자본에 맞서 자주적이고 비타협적인 투쟁을 통해 전진하고자 했다면, 민주노총은 정권·자본과의 협상을 주된 전략으로 채택했다. 전노협 시절에는 기업별 노조의 한계 속에서도 담장의 벽을 뛰어넘는 생동하는 노동자 연대가 넘쳐났다면, 민주노총 시절에는 산업별 노조로의 전환을 부르짖으면서도 담장 안의 노동자 연대조차 감당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민주노총 건설 과정에서 타협·개량주의 세력이 주도권을 거머쥐면서, 민주노총 시기의 민주노조운동은 전노협의 전투적이고 변혁적인 정신과 성과들을 발전적으로 계승하지 못하고 오히려 그 내용과 질에서 퇴보하는 결과를 맞이해야 했다. 그렇다면, 왜 전노협 안에서 타협·개량주의 세력이 차츰 확대되어 마침내 대세를 장악하게 됐을까? 먼저 지적해야 할 것은 전노협이 전투적·변혁적 노선을 일관되게 견지한다는 게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다는 점이다. 1987년부터 정권과 자본의 엄청난 탄압에 맞서 투쟁해 온 5년 남짓 전노협을 중심으로 이미 1,500명이 넘는 구속자와 3,000명이 넘는 해고자가 발생한 상황이었다. 여전히 수많은 노조 간부와 현장 활동가들이 노동해방의 부푼 꿈을 안고 끝없는 열정으로 헌신하고 희생하며 전노협을 지켜내고 있었지만, 몇 년 째 강도 높은 헌신과 희생을 지속하는 것에 따른 조직적 피로의 누적은 결코 만만한 것이 아니었다. 여기에 전노협의 근간을 이루었던 제조업 중소사업장 노조 가운데 상당수가 산업 구조조정의 소용돌이 속에서 폐업으로 내몰리면서 노조 자체가 사라지는 사태를 겪고 있었다. 비록 폐업에 맞서 끈질긴 투쟁을 하고는 있었지만, 잇따른 폐업 사태가 조직력 축소와 사기 저하에 미치는 영향을 부정할 수는 없었다. 또한 이데올로기적 환상들이 노동자들에게, 특히 지도자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한국 자본주의가 계속해서 성장기를 구가할 것이라는 환상, 김영삼 정권의 문민개혁 드라이브에 대한 환상, 노동자들의 기세에 밀려 상당한 경제적 양보를 거듭했던 자본의 수세적 태도가 계속될 것이라는 환상 등이 종합되어 ‘이제 적당히 투쟁해도 그럭저럭 성과를 얻으면서 점점 살 만한 세상이 되지 않겠느냐’는 개량주의적 환상이 노동자들 속에서, 특히 지도자들 사이에서 똬리를 틀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전노협이 전투적·변혁적 노선을 계속 강건하게 견지해 나가는 게 불가능한 것만은 아니었다. 무엇보다 전노협이 수많은 탄압을 뚫고 조직을 사수하고 있는 동안 전노협이 견지하고자 했던 운동의 정신은 전노협에 소속된 노조들만이 아니라 참관·협력 수준으로 결합하고 있던 노조들, 나아가 민주노조운동 대열로 새롭게 (또는 다시) 결합한 민간부문과 공공부문의 대기업 노조들 속으로 꾸준히 뻗어나가고 있었다. 산업 구조조정의 소용돌이 속에서 전노협의 근간이던 제조업 중소사업장 노조들이 상당수 사라져 가는 아픔이 있었지만, 기존의 현대중공업에 덧붙여 현대자동차·철도·한국통신 등 한국 자본주의의 최정점에 자리한 대기업 노동자운동 속에 전투적·변혁적 운동의 새로운 흐름들이 확산되고 있었다. 1990년 5월 현대중공업 골리앗 파업에 대한 전국적인 연대총파업을 이끌어 냄으로써 전노협 출범 직후 노태우 정권의 집중 탄압으로 고사 위기에 내몰렸던 상황을 극복할 수 있었던 것처럼, 새롭게 솟구치는 대기업 노동자들의 투쟁에 전노협이 적극 결합하고 전국 투쟁으로 발전시켜 나감으로써 전노협의 조직적 발전과 전투적·변혁적 운동의 확장을 비약적으로 이끌어 낼 가능성이 충분히 열려 있었다. 또한 노동자들을 흔들고 있던 이데올로기적 환상들의 실체는 매우 허약한 것이었다. 그 시절 한국 자본주의는 30여 년에 걸친 역동적인 성장기를 마감하고서 IMF 외환위기의 충격과 함께 쇠퇴기로 빠져 들어가는 시기를 불과 몇 년 남겨놓고 있을 뿐이었고, 그 조짐이 도처에 드러나고 있었다. 김영삼 정권의 문민개혁 드라이브는 결국 ‘고통분담’을 앞세운 임금 억제와 노동탄압으로 귀결됐고, 이를 지켜 본 노동자들에게서 문민개혁에 대한 환상은 빠르게 거품처럼 사라졌다.[9] 산업 구조조정으로 인한 폐업 사태가 잇따르고 파업 사업장에 대한 공권력 투입과 대량 구속이 여전한 상황에서, 개량주의적 환상은 옳고 그름을 떠나 현실적 기반 자체를 갖고 있지 못했다. 결론적으로 전노협 안에서 타협·개량주의 세력이 차츰 확대되어 마침내 대세를 장악하게 된 것은 객관적 조건의 어려움 때문에 생긴 어쩔 수 없는 결과가 결코 아니었다. 객관적으로 상당한 어려움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결국 사태 전개를 좌우한 것은 노동자운동의 방향에 대한 활동가들의 주체적 선택이었다. 전노협 탈퇴 공작 속에서 박창수 한진중공업노조 위원장이 옥중 살해까지 당한 것은 전노협을 무너뜨리기 위한 정권과 자본의 탄압이 얼마나 극심했던가를 보여주기도 하지만, 뒤집어 보면 그 시절 감옥에 가거나 심지어 목숨을 빼앗기는 한이 있어도 전노협을 사수하고자 했던 선진노동자들의 기개와 자부심이 얼마나 대단했던가를 보여주는 것이기도 했다. 그런데 그들 가운데 상당수가 그처럼 강건했던 기개와 자부심을 불과 몇 년 만에 잃어버린 것이었다. 결국 타협·개량주의 노선이 전노협을 장악하게 된 핵심 원인은 선진노동자들 다수가 사상적 전망에서 큰 좌절을 겪게 되고 그에 따라 변혁적 의식으로부터 개량주의 의식으로 퇴행한 것에서 찾을 수 있다. 이것은 그 시절 전투적·변혁적 선진노동자들에게 영향을 미치던 사회주의 운동 대부분이 다양한 형태의 스탈린주의적 한계에 갇혀 있다가 1991년 소련 붕괴 이후 그 다수가 청산주의에 빠져 운동적으로 해체되거나 개량주의로 돌아서면서 그 영향력 아래 있던 선진노동자들도 다수가 타협·개량주의로 퇴행하는 과정을 통해 이루어졌다. 전투적·변혁적 노선이 다수를 이루던 전노협에서 타협·개량주의 세력이 다수를 이루게 된 핵심 이유는 바로 이것이었다. 2) 1993년 현총련 공동투쟁 1993년 2월말 출범한 김영삼 정권은 집권초기 ‘문민개혁’을 내세우며 과거 군사독재와 차별성을 강조했다. 김영삼은 3월 22일 ‘신경제 100일 계획’을 내놓으면서 경제를 살리기 위한 고통분담을 노동자들에게 요구했다. 노동자들에게 파업을 자제해 달라며 ‘무쟁의 원년’을 강요하고, 사회적 합의라는 이름 아래 경총과 한국노총 간의 임금 합의를 추진했다. 노동부장관 이인제를 내세워 노태우 정권의 ‘무노동 무임금’과 대비되는 ‘무노동 부분임금’ 같은 어설픈 회유책을 잠깐 쓰기도 했지만, 김영삼 정권의 노동정책은 명확하게 ‘친자본 반노동’의 성격이었다. 노·경총 임금합의 추진 또한 공공연한 임금억제 정책이었다. 그러나 문민개혁 드라이브에 올라탄 김영삼 정권의 ‘무쟁의 원년’ 공세는, 노동자들의 투쟁에 의해 보기 좋게 깨져나갔다. 그 선봉에는 울산의 현대계열사 노동조합들을 중심으로 한 현총련의 공동투쟁이 있었다. 1990년 울노협 준비위가 붕괴된 이후 현대자동차, 현대중공업, 현대미포조선, 현대정공, 현대중전기, 현대중장비, 현대종합목재 등 울산의 현대계열사 노동조합들은 현대그룹노동조합총연합(현총련)이라는 다소 느슨한 연대질서를 통해 결집했다. 현총련에는 현대정공(창원)이나 현대자동차서비스 같이 사업장이 울산 바깥에 있거나 전국에 흩어져 있는 노조들도 참여했다. 1993년 현총련은 양대 축이라고 할 수 있는 현대자동차와 현대중공업을 비롯해서 소속 노조 대부분에 민주파 집행부가 들어서면서 어느 때보다 높은 수준의 단결력을 갖게 됐다. 현총련은 4월 11일 대의원대회에서 1993년 임금투쟁을 공동으로 전개하기로 결의했다. 5월 22일에는 ‘93 공동임투 승리를 위한 현총련 임투전진대회’를 5천여 명의 조합원이 참여한 가운데 일산해수욕장에서 열었다. 그런데 현총련 의장을 맡고 있던 현대정공노조 위원장이 6월 5일 새벽 회사측 안에 전격 직권조인하고 잠적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그의 직권조인은 회사측의 납치와 강제에 의한 정황이 농후했다. 오전에 직권조인 소식이 현장에 알려지자 조합원들의 분노가 폭발했다. 12시 ‘강제직권조인 규탄대회’를 가진 현대정공노조는 곧바로 전면파업에 돌입했다. “상의조차도 안 하고 이렇게 조인을 할 수 있단 말입니까? 그래놓고는 뻔뻔스럽게 이렇게 회사가 유인물을 내놓고 노사가 화합해 가지고 타결했다고 이렇게 얘기할 수 있습니까? 여러분 인정할 수 있습니까?”(현대정공노조 간부)[10] 현대정공노조가 직권조인 사태를 순식간에 극복하면서 오히려 단호하게 전면파업으로 반격을 가하자 회사측은 크게 당황했다. 현대정공노조 간부들이 일상적 시기에 대의원 보고회와 분임조 토론 등을 통해 조합원들과 활발하게 소통하면서 축적해 온 노동자 민주주의의 저력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현대정공노조의 직권조인 사태와 그에 맞선 단호한 전면파업은 현총련 전반에 강한 긴장감을 불어넣었고, 공동투쟁의 열기가 빠르게 고조됐다. 김영삼 정권은 현대정공 파업을 노동법상 절차를 무시한 불법파업으로 규정했지만, 공권력 투입이 자칫 현대계열사 전체의 연대파업으로 확산되면서 집권 초기에 변수로 부상하는 것을 염려했다. 결국 22일 노동부장관 이인제가 울산에 내려와 현대정공 노사를 직접 만나며 중재에 나섰다. 7월 5일 현대정공 노사는 상호 고소고발 취하, 파업기간 민형사상 면책, 노조 직무대리의 대표권 인정에 합의하고 임금교섭 재개 여부 등은 추가 협상하기로 합의했다. 한편 현총련은 6월 30일 3만여 명의 조합원이 참여한 가운데 ‘성실교섭 촉구와 93 공동임투 승리를 위한 결의대회’를 일산해수욕장에서 개최했다. 1987년 노동자대투쟁 이후 가장 많은 조합원이 운집한 집회였다. “이제껏 고통 없이 살아온 특권층의 고통분담으로 바로 잡혀야 함을 천명하며 현대 노동자는 진정한 경제개혁을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을 결의한다.”(대회 결의문)[11] 30일 집회에서 현총련은 7월 6일까지 현대그룹 측의 답변이 없을 경우 총파업을 포함한 중대결단을 내리겠다고 천명했다. 이날 집회 이후 김영삼 정권의 태도가 강경 대응으로 선회했다. 집회에서 연대사를 한 단병호 전노협 위원장에게 곧바로 ‘제3자 개입금지 위반’ 혐의로 사전 구속영장이 발부됐다. 7월 3일 노동부장관이 현총련 공동투쟁에 대해 강경조치에 나서겠다는 담화를 발표했다. 노동자들의 파업 열기에 현대그룹 측이 협상의사를 밝히면서 5일 현총련과 현대그룹 측의 협상이 잡혔다. 그러나 직전에 현대그룹은 태도를 바꿨다. “초청되지 않은 다수가 본 면담에 참석하여 오늘 면담이 본래의 목적 취지와 다른 방향으로 전개될 가능성이 있기에 금일의 5개사 위원장 면담 건은 당분간 연기합니다.”(현대그룹 관계자)[12] 검찰은 현총련이 연대파업에 나설 경우 지도부 전원을 사법처리하겠다고 엄포를 놓았다. 6일 현총련 사무실에 대한 압수수색이 진행됐고, 7일 현총련 지도부에 대한 사전 구속영장이 발부됐다. 그러나 현총련은 정권의 압박에 굴하지 않고 7일 총파업을 단행했다. 현대자동차, 현대중공업, 한국프랜지, 현대중전기, 현대미포조선, 현대정공(울산), 현대강관, 현대정공(창원), 현총련 수원·용인협의회가 공동으로 파업에 들어갔다. 10개 노조 6만 3천여 명의 조합원이 참여한 1일 연대 총파업이었다. 김영삼 정권의 무쟁의 원년 추진이 묵사발이 되는 순간이었다. 그럼에도 각 사업장별 임금교섭은 잘 진척되지 않았다. 14일 전노대가 소속 단위노조 대표자들을 소집하여 비상대표자회의를 열고 현총련 공동투쟁을 지지하는 농성에 들어갔다. 각 사업장별 부분파업을 이어가던 현총련은 15일부터 20일까지 성실협상 촉구기간을 설정하고 정상조업에 들어갔다. 이번에도 교섭에 진척이 없으면 21일부터는 전면 총파업에 돌입하려는 수순이었다. 전면 총파업을 촉구하는 조합원들의 열기도 강력했다. 이 상황에서 김영삼 정권이 20일 오전 11시 현총련 공동투쟁의 중심에 있던 현대자동차에 긴급조정권을 발동했다. 긴급조정권이 발동되면 해당 노조는 30일간 파업이 금지되고 중앙노동위원회가 직권중재에 나서게 돼 있었다. 1969년 대한조선공사 파업에 한 번 발동된 이후 사문화돼 있던 조항을 되살린 것이었다. 경찰은 20일 전경 15개 중대 1천 8백 명을 울산에 파견했고, 다음날에도 전경 20개 중대 2천 2백 명을 파견하겠다고 발표했다. 현대자동차에 대한 긴급조정권 발동은 김영삼 정권이 이른바 ‘문민개혁’의 허울을 스스로 벗어던지고 노동자·민중에 대한 탄압을 본격적으로 시작하는 신호탄이었다. 그러나 21일 전면파업 돌입을 예정하고 있던 현대자동차노조는 긴급조정권 발동 소식이 알려진 19일 밤부터 12시간 동안의 마라톤협상을 통해 20일 오전 회사측 최종안을 전격 수용하면서 파업을 철회했다. 잠정합의안에는 징계위 노사동수, 해고자 전원복직, 주 40시간제 등 노조의 핵심 요구가 담겨 있지 않았다. 23일 조합원 찬반투표를 앞두고 정권은 21일 창원 현대정공과 서울 현대자동차서비스에 공권력을 투입함으로써 현대자동차노조에 경고를 보냈다. 결국 조합원 찬반투표는 잠정합의안을 50.1% 찬성으로 가결시켰다. 잠정합의가 가결되긴 했지만, 현대자동차노조의 민주 집행부는 조합원 찬반투표에서 치명상을 입었다. 회사측이 좌우하는 조합원 숫자가 30% 정도로 간주되는 상황에서, 민주 집행부를 지지하는 조합원 가운데 대다수가 부결을 선택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부결을 선택한 조합원들에겐 회사측 최종안의 부족함도 문제였지만, 노조가 정권의 긴급조정권에 정면대결로 맞서지 않고 굴복하는 게 더 큰 문제였다. 민주 집행부에 대한 현대자동차 조합원들의 실망은 한 달 뒤 진행된 집행부 선거에서 어용 집행부가 간발의 차로 당선되는 결과로 이어졌다. 정권의 긴급조정권 앞에서 민주 집행부가 회사측 최종안을 수용한 이유는 ‘긴급조정권에 정면대결로 맞서게 되면 공권력 투입으로 다시 한 번 노조가 사활적 위기에 빠질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현대자동차노조는 1991년 8월 처음으로 민주 집행부가 등장한 이후 1992년 1월 성과분배 요구 파업에 나섰다가 공권력이 투입되면서 6개월가량 노조가 마비되는 사태를 겪었었다. 그런데 그 후 치러진 1992년 8월 보궐선거에서는 61.8% 지지로 민주 집행부를 다시 당선시켰던 조합원들이, 민주 집행부가 긴급조정권에 굴복한 이후 치러진 1993년 8월 선거에서는 어용 집행부를 당선시킨 것이다. 조합원들의 열망을 저버리지 않고 단호하게 투쟁할 때는 설령 공권력에 짓밟힐지라도 조합원들의 신뢰를 통해 민주노조를 굳건히 지켜낼 수 있었지만, 조직을 살리겠다고 투쟁을 회피하면 오히려 조합원들로부터 버림받아 민주노조를 지켜낼 수 없게 됨을 보여주는 뼈아픈 경험이었다. 핵심 주력인 현대자동차노조가 전선에서 이탈하면서 현총련 공동투쟁은 급격히 약화됐다. 23일 현대중공업을 비롯한 7개 노조가 연대 총파업을 벌였지만, 긴급조정권 발동에 맞서 선명한 대응을 하지 못하면서 위력이 반감됐다. 현총련 소속 노조들이 하나의 대오를 형성하며 공동투쟁을 전개해 왔지만 공권력과의 직접 대결로 나아가야 하는 시점에 이르러서는 그 벽을 넘어서지 못한 것이었다. 현총련은 더 이상 공동투쟁을 조직하지 못했고 각 노조가 사업장별로 교섭을 진행한 끝에 8월 20일까지 속속 임금교섭을 타결했다. 그럼에도 현총련 공동투쟁은 김영삼 정권의 ‘무쟁의 원년’ 선언을 노동자대중의 힘으로 돌파해 냈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갖는 투쟁이었다. 현총련 공동투쟁의 성과는 하반기 각 단위노조 선거에서 대우조선, 대우자동차, 아시아자동차, 한진중공업 등 주요 대기업에 민주 집행부가 재건되는 것으로 연결됐다. 3) 1994년 철도·지하철 공동투쟁 1994년 봄 김영삼 정권은 노·경총 임금 합의를 다시 추진했다. 한국노총과 경총은 1993년에 이어 1994년에도 임금 5.0~8.7% 인상에 합의했다. 한국노총은 정권과 자본의 충견 역할을 또 다시 수행했다. 민주노조운동은 노·경총 임금합의 반대투쟁을 더욱 가열차게 전개하면서 이 투쟁을 어용노총 해체 투쟁과 결합시켰다. 5월 14일 ‘전국 구속·수배·해고노동자 원상회복투쟁위원회’(전해투)가 ‘노·경총 임금합의 분쇄와 어용노총 해체’를 내걸고 한국노총 점거농성에 들어갔다. 어용노총 해체 투쟁은 68개 노조가 한국노총을 탈퇴하고 153개 노조가 의무금 납부를 거부하는 성과를 낳으면서 한국노총에 큰 타격을 가했다. 한편 1994년 대중투쟁의 중심에는 철도·지하철 공동투쟁이 있었다. 1994년 3월 서울지하철노조와 부산교통공단노조 그리고 철도노조 내 전국기관차협의회(전기협)가 전국지하철노조협의회(전지협)를 결성하면서 철도·지하철 공동투쟁이 전개된 것이다. 철도노조는 1946년 9월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전평) 총파업의 주역이었지만, 미군정과 우익청년단의 탄압으로 운동 역량이 철저히 파괴된 뒤 오랜 시간 대표적인 어용노조로 유지됐다. 하지만 1987년 노동자대투쟁은 철도 노동자들에게도 희망을 안겼다. 1988년 7월 26일 철도 기관사 평조합원들이 자발적으로 비상총회를 소집한 뒤 전면파업을 벌였다. 전국 철도를 일거에 멈춰 세운 위력적인 파업이었다. 노태우 정권은 파업 10시간 만에 전국 파업농성장에 경찰을 투입해 1천 6백여 명을 연행했다. 조직력과 지도력의 취약함 때문에 파업을 더 이상 이어나갈 수 없었지만, 이 파업을 계기로 철도노조 민주화 투쟁의 주력대오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1989년 상반기 실시된 철도노조 선거에서 파업을 주도한 평조합원들이 대거 기관차 분회장들로 당선됐다. 이들이 1989년 5월 15일 전국기관차분회장협의회를 결성한 게 전기협의 출발이었다. 전기협은 1991년 20개 기관차사무소 조합원 전체를 포괄하는 대중조직인 전국기관차지부협의회로 전환했다. 1994년 전기협은 기관사와 검수원으로 구성된 6천 5백여 명의 조합원을 포괄했는데, 이는 철도노조 전체 조합원의 23%에 해당했다. 전지협은 1994년 ‘변형근로제 철폐, 근로기준법 준수, 공기업 3% 임금억제 정책 철폐, 해고자 원직복직’ 등의 공동요구를 내걸고 공동투쟁을 조직해 나갔다. 5월 24일 서울 서부역 광장에서 약 2,000여 명의 철도노동자가 참석한 가운데 철도원투쟁 전진대회가 열렸다. 1부 문화행사에서 풍물패 공연, 노래패 ‘노래선언’의 공연이 있었고, 2부 전진대회에서는 동지소개, 연대사, 해직동지 인사, 직종별 대표 인사, 경과보고, 전지협 활동보고, 결의, 지도부 구속 결단과 결단문 낭독 및 결단 확인, 집행부 사수 결단, 투쟁방침 및 행동지침 전달, 국민에게 드리는 메시지 등이 진행되었다. 철도노동자들은 집회 내내 결의에 찬 모습을 보였으며, 노래패의 공연시에는 유인물에 적힌 가사를 보면서 열심히 따라하기도 하였다. 이날 집회에는 서울지하철 조합원들도 함께 결합하여 연대의 의지를 확인했다.[13] 6월 2일 전지협은 공동투쟁 결의대회를 가진 뒤, 14일 세 노조가 동시에 쟁의행위 찬반투표에 나섰다. 서울지하철노조 90.7%, 부산교통공단노조 96.2%, 전기협 90.4%로 모두 압도적인 찬성이었다. 그런데 철도·지하철 노동자들이 26일로 예정된 공동파업에 들어가기도 전에 김영삼 정권이 선제공격에 나섰다. 23일 새벽 3시 40분 서울, 부산, 대구 등 전국 14개 전기협 농성장에 일제히 경찰을 투입해 613명을 연행한 것이다. 이에 맞서, 새벽 4시 전기협이 즉각 전면파업에 돌입했다. 24일 새벽에는 서울지하철노조가, 25일 새벽에는 부산교통공단노조가 파업에 돌입했다. 공권력 투입은 철도·지하철 노동자들의 공동파업을 막지 못했다. 오히려 예정보다 하루 일찍 공동파업이 성사되도록 촉발하는 역할만 했다. 하루 간격으로 철도·지하철 노동자들이 공동파업을 성사시켜 내는 모습은 전국의 노동자들에게 큰 감동을 안겼다. 전국의 철도와 서울·부산의 지하철이 거의 마비될 정도로 파업의 위력도 강력했다. 반면 체면을 구긴 김영삼 정권은 광분했다. 25일 서울지하철 노동자들이 집결한 고려대에 공권력을 투입한 정권은 노동자들이 경희대로 옮겨 가자 26일 새벽 다시 경희대에 공권력을 투입했다. 같은 날 오후 3시에는 전기협 농성장인 서울기독교회관에 공권력을 투입했다. 또한 오후 5시에는 부산교통공단 노동자들이 농성 중인 동아대에 공권력을 투입했다. 거듭되는 공권력 투입으로 대규모 연행자가 발생하는 상황에서도 철도·지하철 공동파업은 6월 30일까지 이어졌다. 7월 1일 서울지하철노조, 부산교통공단노조, 전기협이 모두 파업을 종결하고 업무에 복귀했다. 한편 28~29일 김영삼 정권은 최저생계비 보장을 요구한 광주 금호타이어노조의 파업, 해고자복직과 퇴직금 누진제를 요구한 대구 대우기전노조의 파업, 임금인상을 요구한 부산 메리놀병원노조의 파업에 일제히 공권력을 투입했다. 일방 중재 철회를 요구한 부산 한진중공업노조의 파업에도 공권력 투입을 시도했으나 LNG선상 파업이라는 특성 때문에 공권력 투입에 실패했다. 그런데 이처럼 김영삼 정권이 6월말 전국 곳곳에 공권력을 투입했을 때 전노대가 취한 방침은 1990년 4월말 현대중공업 골리앗 파업에 공권력이 투입됐을 때 전노협이 취한 방침과 뚜렷이 대비됐다. 1990년 전노협은 현대중공업 공권력 투입으로 정점에 이른 일련의 노동운동탄압에 맞서 전국 총파업으로 대응했다. 그러나 1994년 전노대는 연쇄적인 공권력 투입에 대해 ‘규탄과 총력투쟁’에만 머물렀을 뿐 전국 총파업을 조직하려는 시도는 전혀 하지 않았다. 그보다 앞선 6월 22일 전기협 농성장에 공권력이 투입되기 바로 전날에는, 전노대의 주요 간부가 전기협 지도부에게 ‘농성을 해제하면 철도청과 교섭을 주선할 수 있다’고 제안했다가 퇴짜를 맞은 사건도 있었다. 6월 22일 밤 전노대 간부를 통해 철도청과 노동부장관이 기만적인 대화를 요구해왔다. 이러한 기만적인 술책을 쓰면서 공권력은 6월 23일 03시 40분경 기습적 침탈을 감행하였던 것이다.[14] 전노대 주요 간부의 논리는 이런 식이었다. ‘지금 정권 내 강경파가 일부러 도발하고 있다. 정권 내 개혁파는 우리를 도와주려 하는데 강경파가 하도 설쳐대서 쉽지 않다고 한다. 공권력 침탈의 명분을 주지 않는 게 현명한 태도다.’ 전노협 한계론에 입각해 졸속으로 민주노총 건설을 주도하던 타협·개량주의 세력의 문제를 여실히 보여주는 한 장면이었다. 그런데 그러한 전노대 주요 간부의 압력을 전기협 지도부가 단호히 물리치면서 철도 파업을 강행하고 철도·지하철 공동투쟁을 성사시켜 냈다는 점 또한 주목할 필요가 있다. 노동자대중의 열망과 결합된 전투적·변혁적 세력 또한 계속 성장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기 때문이다. 4) 1995년 현대차 양봉수 열사투쟁 1995년 5월 12일 현대자동차 울산공장 정문에서 해고자 양봉수가 분신했다. 양봉수는 해고와 분신에 이르는 결연한 투쟁을 통해, 어용노조를 앞세운 자본의 교활한 탄압으로 무기력해진 현장을 뒤흔들었다. 양봉수의 분신은 회사와 어용 집행부에 맞선 비공인파업으로 이어졌고, 현대자동차에서 민주노조의 기반을 확고히 세우는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1987년 노조설립 이후 한동안 현대차노조에는 민주노조가 뿌리를 내리지 못했다. 1987년 9월부터 1989년 8월까지 재임한 1대 이영복 집행부는 노골적인 노사협조주의를 표방한 어용 집행부였다. 1989년 9월부터 1991년 8월까지 2대 이상범 집행부는 1987년 이전 민주노조 준비세력을 대표했지만 1990년 현대중공업 골리앗파업 연대를 배신하고 임금협상에 직권조인하면서 민주 집행부로서의 성격을 상실했다. 1991년 9월 등장한 3대 이헌구 집행부는 현대차노조 최초의 민주집행부였으나 1992년 1월 성과분배 파업으로 공권력이 투입되면서 임기를 마치지 못했다. 1992년 9월 4대 윤성근 집행부로 민주 집행부가 재등장했지만 1993년 7월 현총련 공동투쟁 와중에 김영삼 정권의 긴급조정권에 굴복하여 졸속 노사합의에 나서면서 조합원대중에게 큰 실망을 안겼다. 결국 1993년 9월 현대차노조에는 다시 어용 집행부가 등장했다. 1대 집행부를 이끌었던 이영복이 5대 위원장으로 돌아왔다. 현대차 회사는 1994년과 1995년 민주 집행부가 이끄는 다른 계열사들(현대중공업 등)보다 더 높은 임금인상을 통해 어용 집행부의 입지를 높여주었다. 그 반대급부로 회사는 노동강도와 현장통제를 대폭 강화했고, 어용 집행부는 그에 적극 협력했다. 회사측의 전례없는 임금인상은 노동조합이 ‘생산성 향상을 위해 적극 협력’한다는 반대급부를 전제로 했다. 이영복 집행부는 스스로 장비가동률과 생산량 문제점을 분석하고 대처방안을 마련하는 등 생산관리업무를 진행했다. 노사대표가 직접 라인을 타는 현장체험 행사를 갖기도 하고, 산업평화나 자동차산업 전망 등을 주제로 노사합동세미나도 개최했다. 1994년 이영복 위원장은 생산성 향상에 앞장서며 무분규를 실현한 공로로 김영삼 대통령에게 훈장을 탔다. … 이영복 집행부는 회사와 화합은 강화하면서 노동조합 상급단체와 지역 노동조합과의 연대는 단절했다. “외부와 연계한 공동투쟁이나 연대파업은 절대 안 한다”고 공언했다. 현총련 활동을 비롯한 연대사업 전반에 불참했고, 자연스럽게 민주노총 건설 과정 전반에서 스스로 소외됐다. 이영복 집행부는 출범 직후부터 3, 4대 민주파 집행부를 싸잡아 공격했다. 가장 기본적인 도덕성과 양심에 대한 문제제기를 하면서 ‘민주파 집행부가 노동조합을 망쳤다’는 식으로 몰아갔다. … 노조 소식지에 빠진 날이 거의 없을 정도로 전직 위원장과 민주파 진영 전체를 싸잡아 매도하면서, 조합원들이 노동조합 자체에 대해서 회의를 느끼게 할 정도로 몰아갔다. 가랑비에 속옷 젖는다는 말처럼, 다수의 조합원들도 … 민주파 진영에 대해서 의심을 갖게 됐다. 그 결과 한동안 민주노조운동 진영은 현장에서 고립되는 처지로 내몰렸다. 이영복 집행부는 자신에게 비판적인 입장을 가진 활동을 거세게 탄압했다. 관례화된 것이건 규약이건 홍보활동의 자유마저 무력으로 저지하며 조합원들을 짓눌렀다. 집행부를 비판하는 대자보라도 붙는 날이면 얼마 지나지 않아 대자보가 뜯겨나가고 기명자들이 노동조합에 불려가 폭행과 협박으로 곤욕을 치러야 했다. 그러니 대자보 한 장 붙이는 것조차 집행부 눈치를 봐야 했다. 홍보활동의 보장을 회사가 아닌 노동조합 집행부에 요구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이영복 집행부는 자신에게 비판적인 성향의 대의원들에게는 규약에 규정된 활동비마저 지급하지 않았다. 소위원회는 그 존재 자체를 인정하지 않았다. 집행부를 비판한 대의원대표에겐 차량출입증을 발급해 주지 않았다. 규약은 물론 대의원대회 결의사항도 수시로 무시했다. 이영복 집행부를 거치는 동안 현장의 조직력은 무력화 됐다. 노동조합 전체가 단체행동권을 포기하고 노사협의회 수준으로 전락함에 따라 각 사업부 대의원회 또한 노사협의회 수준으로 전락했다. 1공장과 2공장 등 일부만이 맨아워 협상 과정에서 사측의 일방적인 생산량 증가 계획에 맞서 잔업거부 등 독자적인 단체행동을 일부 시도할 수 있을 뿐이었다. 현장활동이 가라앉으면서 그동안 대의원·소위원에게 있던 권한들이 점점 반장·기사·과장 등 현장관리자들에게 이관되어 갔다. 현장관리자의 위세가 강화되는 만큼 조합원의 권리는 작아졌고, 노동조합의 조직력은 무너졌다. … 이영복 집행부 2년 동안 현대자동차 노동자의 임금은 몇 푼 올랐지만, 정신적·육체적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집행부가 앞장서 독려한 생산성 향상은 현장의 노동강도 강화로 나타났다. 조합원들이 힘들어 하는 것은 당연했다. 어디가나 ‘일이 힘들다’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저 친구 저렇게 일하다가 죽을까봐 겁난다” “87년 이전의 통제가 오늘날 되살아났다” “도대체 어디 가서 하소연할 데가 없다” 등등 현장은 점점 위기의식과 불만으로 가득 채워져 갔다. 회사는 노동조합의 지원을 등에 업고 현장 상황을 고려하지 않은 채 일방적으로 생산량을 결정한 뒤 막무가내로 밀어붙였다. 생산성 증가는 사람을 더 투입하면서 컨베이어 속도를 높이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작업공간은 한정돼 있는데 사람이 늘어나니까 작업공간이 좁아졌다. 어떨 때는 부품을 들고 이동하는 컨베이어를 쫓아가 조립을 해야 할 정도였다. 찰리 채플린의 모던타임즈에 나오는 장면을 연상시킬 정도로 노동강도가 세졌다. 1995년 초에는 지난해 생산실적보다 30%나 늘린 생산계획을 일방적으로 발표했다. 한계에 달한 작업자간의 거리를 무시하고 사람 몇 명(5~10%) 추가하여 30%를 더 생산하겠다는 것이었다. 노동강도의 증가는 전 공장 차원에서 이루어졌다. 과거에는 승용차 조립에 비하자면 상용차 조립에 조금 여유가 있었는데 이제 그런 구분을 할 수 없게 됐다. 상용차 공장에서도 컨베이어 속도가 빨라지고, 공작기계에는 자동화가 이루어지면서, 어디가나 일이 힘들다고 난리였다. ‘조금만 더 빨라지면 돌아버릴 지경’이라는 얘기가 서슴없이 나왔다. 1994년 여름에는 유례없는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면서 현장 온도가 40도를 넘나들며 노동자들의 숨통을 틀어막았다. 노동시간은 평소 주야 2교대에 토요일 철야, 일요일 특근철야까지 덧붙여지면서 무려 주당 70시간 정도로 치달았다. 자연스럽게 산업재해가 급증했다. 1994년 산업재해 건수는 1992년(324건)과 1993년(345건)에 비해 무려 200여 건이 늘어난 559건으로 창사 이래 최고를 기록했다. 그런데 노동조합 조직력이 취약해지면서 산재사고가 발생해도 이를 은폐하거나 산재인정을 거부하는 사례가 비일비재했기 때문에, 실제 산재사고는 그보다 훨씬 더 많았다. 산재인정을 거부당한 사례 가운데는 특히 허리 부상이 많았다. 거의 모든 산재사고가 장시간 노동과 강도 높은 노동에 따른 누적된 피로에서 비롯됐지만, 대부분 ‘본인 과실’로 기록됐다. 권한이 강화된 관리자들은 그렇게 자신들의 책임을 회피했다. 안전문제가 심각한데도 적절한 조치나 대응이 이루어지지 않는 경우도 다반사였다. 불량부품 등의 문제로 생산라인 정지를 요청하면 그냥 작업강행을 지시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이영복 집행부 시절 현장은 완전히 초토화 되어서 거의 숨도 못 쉬고 있었다. 현장 안에서 라인을 조금이라도 벗어나서 어디를 가려면 사전 승인을 받아 패찰을 차야만 했다. ‘나는 이 업무 때문에 다른 공장에 가는 중이다, 그래서 이동하고 있다’ 그런 내용이었다. ‘근무시간 이동인력 절대 없다’는 회사 방침 때문이었다. 은행에 볼 일이 있어도 쉬는 시간에 뛰어가서 해결을 하고 와야 했다. 반장의 허락 없이는 오후 5시 퇴근조차 마음대로 못했고, 조퇴나 월차 사용도 제한됐다. 월차를 쓰려면 과거에는 전화 한 통화면 됐지만, 이제 하루나 이틀 전에 신청하라고 난리였다. 관리자들의 언어폭력이 현장에서 일상화되기 시작했다. 3공장처럼 조직력이 더욱 취약한 곳에서는 일방적 호칭과 반말, 자기 기분대로 모멸감을 주는 농담 등이 예사로 행해졌다. 작업시간에 좀 늦거나 담배를 피우는 것도 눈치를 봐야 했다. 관리자와 다툼이 생겨도 그저 참아야 했다. 몸이 불편해서 쉬려고 해도 관리자에게 싫은 소리 들을까 봐서 참아야 했다. 게다가 어디 가서 그런 불만을 털어놓고 말하기도 어려웠다. 현장에서의 보호막이 사라지고 현장의 주도권이 관리자들과 반장에게로 넘어갔다.[15] 이런 상황에서 승용2공장 대의원이던 양봉수는 1995년 2월 ‘불법선동과 생산라인 임의정지에 따른 취업규칙 위반’으로 해고당했다. 1월 신차 마르샤 투입 관련 맨아워 협의 과정에서 회사측이 대의원회와의 합의를 깨고 일방적으로 더 많은 양의 신차를 생산에 투입하자 이에 항의하며 컨베이어 라인을 정지시킨 게 해고 사유였다. 노조활동으로 두 번째 해고를 당한 양봉수는 2~3월 ‘부당징계 철회, 노동강도 강화 저지, 노조민주화 쟁취’라는 요구를 내걸고 2공장 본관건물 앞 콘크리트 바닥에 텐트를 치고 철야농성 투쟁을 벌였다. 양봉수가 부당해고에 맞서 21일간 펼쳐 낸 현장 철야농성은 활동가들 사이에 팽배해 있던 무력감을 상당 정도 걷어내는 역할을 했다. 1993년 9월 어용 집행부 등장 이후 극도로 침체돼 있던 현장에 정말 오랜만에 노동가가 울려 퍼졌고 조합원들의 동력이 되살아나기 시작했다. 대의원과 소위원을 넘어 승용2공장 조합원 전체가 네 번의 집회와 잔업거부로 투쟁에 동참했다. 다른 사업부에서도 격려 방문이 이어졌다. 경남지방노동위원회에 부당노동행위 및 부당해고 구제신청을 제기함으로써 ‘해고의 효력을 다투는 자’였던 양봉수는 노동조합법과 단체협약에 따라 조합원 자격이 유지되고 있었다. 따라서 회사측은 해고 초기 양봉수의 대의원 자격을 인정하며 양봉수와의 협의를 지속했다. 그러나 돌연 ‘징계면직자’ 양봉수가 참여하면 대의원들과 협의를 할 수 없다는 입장으로 돌아섰다. 3월 29일 회사측은 마르샤 맨아워 협의를 위해 의장2부 사무실에 와 있던 양봉수를 경비 20여 명을 동원해 밖으로 끌어냈다. 경비들은 “양봉수씨는 종업원이 아니기에 출입할 수 없다”며 사무실에서 개 끌듯이 끌고 나가더니 아우성치는 양봉수의 온몸을 들어 올려 정문까지 이동한 뒤 정문 밖 땅바닥에 그대로 패대기쳐 버렸다. 경비들에게 끌려나오며 집단폭행을 당한 양봉수는 전치 2주의 부상을 입고 병원 신세를 져야 했다. 양봉수는 집단폭행의 책임을 물어 사장·부사장·경비과장 등을 고소했다. 그런데 회사측은 오히려 자신들이 피해를 입었다며 양봉수에게 3,100만원의 손해배상을 청구했다.[16] 이제 양봉수는 정문 출입마저 철저히 봉쇄당했다. 회사측은 총무과 소속 경비대와 법규부를 동원해서 양봉수를 24시간 감시·미행했다. 출입문마다 사진을 붙여놓고 경비들로 하여금 양봉수의 출입을 철통같이 차단하게 했다. 그러나 양봉수는 계속 현장출입을 시도했다. 정문 앞에서 막히고 또 막혀도 양봉수는 현장에 가기 위해 또다시 정문 앞으로 나아갔다. 그때마다 경비들과 시비가 붙었다. 양봉수의 현장출입 시도가 계속될수록 경비들의 폭력도 나날이 강도를 더해 갔다. 회사측이 양봉수의 현장출입을 저지한 것은 노동조합법과 단체협약을 명백하게 위반하는 불법행위였다. 그런데도 회사측이 불법을 감행할 수 있었던 데에는 노조 집행부의 협조가 결정적이었다. 집행부는 양봉수에 대한 해고는 사규위반에 대한 정당한 면직처리일 뿐 노조활동 관련 해고가 아니라면서, 따라서 양봉수에겐 조합원 자격이 없다고 주장했다. “현대차에 해고자는 없다. 사규위반 면직자만 있다”, “면직자가 왜 현장에 들어오느냐”며 철저히 회사 편에 선 노조 집행부를 등에 업고, 회사는 양봉수의 현장출입마저 폭력적으로 가로막는 불법행위를 거리낌 없이 자행할 수 있었던 것이다. 양봉수는 정문출입을 줄기차게 시도하는 한편으로 현대자동차, 현총련, 울산 그리고 전국 차원에서 다른 해고자들과 함께 하는 집단적 복직투쟁 또한 성실하게 결합해 나갔다. 현대자동차에서는 5명의 해고자가 해복투를 꾸려 정문에서 함께 투쟁했다. 현총련 산하 37명을 비롯해 울산지역 50여 명의 해고자가 ‘울산해고자협의회’(울해협)로 결집해 순회 정문투쟁을 펼쳤다. 전국의 해고자들은 ‘전국 구속·수배·해고노동자 원상회복투쟁위원회’(전해투)로 결집해 전국을 순회하며 악덕기업주들에 맞선 투쟁사업장 전국순회 지원투쟁을 벌였다. 이 무렵 양봉수는 가장 친했던 활동가들에게 ‘힘들다’는 속내를 털어놓곤 했다.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미행하며 탄압하는 회사 때문만도 아니었고, ‘해고자는 없다’며 회사측의 탄압을 방관하고 방조하는 노조 집행부 때문만도 아니었다. 양봉수를 오히려 더 힘들게 했던 것은 민주파 현장 활동가들마저 눈치를 보며 움츠려 있는 상황이었다. 게다가 시간이 가면 갈수록 더욱 거세지는 회사의 탄압은 양봉수를 도저히 인내할 수 없는 한계상황으로 내몰고 있었다. 양봉수는 절친했던 활동가들을 만나 답답함을 토로했다. ‘해보려고 했지만 혼자서는 역부족이고 선배들은 몸사리는 거 같고 너무 답답하다’는 요지였다. 회사측이 24시간 감시·미행하는 상황도 고통스러워했다. 5월 11일부터 12일 오전까지, 양봉수는 여러 활동가들에게 ‘목소리 듣고 싶었다’며 전화를 걸었다. ‘내일(또는 오후에) 공소위 발대식하니까 정문 앞에서 보자’고 비슷한 약속들을 했다. 전화를 받은 이들은 양봉수가 ‘평소와 뭔가 좀 다르다’고 느끼긴 했으나 그래도 그런 엄청난 일이 벌어질 거라고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5월 12일 ‘현대자동차노조 공동소위원회’(공소위) 2기 출범식이 오후 5시에 본관정문 안쪽 광장에서 열릴 예정이었다. 전날 노조 집행부는 공소위 출범식을 알리는 대자보와 현수막을 강제 철거했다. 현장에는 심상치 않은 분위기가 감돌았다. 5월 12일 오후 4시 45분, 양봉수를 비롯한 해고자 네 명이 공소위 출범식에 참석하기 위해 본관정문으로 들어가고자 했다. 해고의 효력을 다투고 있기에 노동조합법과 단체협약에 따라 조합원의 자격을 갖고 있는 해고자가, 노동조합의 풀뿌리 조직인 공소위 출범식에 참석하겠다는 것은 너무나 정당한 권리였다. 그러나 회사측은 이날도 평소처럼 경비들을 앞세워 폭력적으로 해고자들을 가로막았다. 경비들과 몸싸움을 벌이던 끝에 양봉수는 결국 자신의 몸에 불을 붙이고야 말았다. 경비들은 4~5명씩 조를 이뤄 해고자를 한 명씩 붙들고 정문 밖으로 밀어냈다. 이날도 경비들의 폭력이 반복되자, 양봉수는 미리 준비한 1.8리터짜리 신나통을 왼손에 치켜들고 오른손으로 뚜껑을 열면서 “나를 더 이상 손대지 마라. 손대면 내 몸에 들이 붓겠다”고 경비들에게 큰 소리로 외쳤다. 양봉수는 집회장을 향해 다시 정문을 넘어서려 했다. 그러나 20명가량의 경비들이 몰려들어 양봉수를 붙잡고 막았다. 양봉수는 왼손에 들고 있던 신나를 머리에서부터 온 몸에 들이부은 뒤 오른손에 일회용 라이터를 들고 “가까이 오지 마라! 내 몸에 손대면 불을 붙이겠다!”고 외쳤다. 양봉수는 경비들을 밀고 회사 안으로 몇 발짝 들어갔다. 하지만 경비들이 다시 양봉수를 끌어안고 신나통과 라이터를 뺏으려 하면서 격한 몸싸움이 벌어졌다. 신나가 경비들의 옷에도 튀었다. 몸싸움 끝에 양봉수 왼손에 있던 신나통이 땅바닥으로 떨어졌다. 그러자 경비 한 명이 등 뒤에서 허리를 껴안고 다른 두세 명이 달라붙어 양봉수를 밖으로 끌어내려 했다. 격분한 양봉수는 라이터에 불을 붙였다. 순식간에 양봉수의 온 몸이 불길에 휩싸였다. 양봉수를 붙잡고 있던 경비의 몸에도 불이 붙었다. 양봉수는 얼굴을 감싸고 주저앉았다가 다시 일어나 비틀거리며 몇 발짝 움직였지만 결국 앞으로 쓰러졌다. 옆에서 불길을 잡기 위해 달려든 조합원들이 상의를 벗어 덮고 공동소위원회 깃발로 감쌌지만 불길이 잡히지 않자 경비실에 있던 분말소화기로 겨우 몸에 붙은 불을 껐다.[17] 양봉수는 구급차에 실려 해성병원(현 울산대학교병원)으로 옮겨진 뒤 다시 화상전문병원인 대구 동산병원으로 옮겨졌다. 소식을 전해들은 대구지역노동조합연합(대구노련) 간부들과 대구지역 노동운동단체 회원들이 양봉수를 지키기 위해 동산병원으로 속속 집결했다. 양봉수의 분노에 찬 절규는 깊게 숨죽이고 있던 현대자동차 3만 조합원을 일거에 뒤흔들었다. 그의 몸을 불사른 한줄기 불길은 하늘 높이 솟아올라 모든 노동자들의 가슴으로 거세게 번졌다. 13일 새벽 50여 명의 현장 활동가들이 공장 밖에서 대책위 결성을 위한 회의를 진행하는 동안 현장에서는 조합원들과 상황을 공유하기 위한 활동이 계속됐다. 야간조 야식시간인 새벽 1시부터 2시 사이 각 공장별로 경과보고 및 규탄 집회가 열렸다. 1공장에서는 400여명이 본관정문 앞에서 집회를 열고 대책위가 결성되는 대로 그 결의사항을 끝까지 따르기로 결의했다. 3공장에서도 400여명이 집회를 열었다. 4공장에서는 400여명이 밴 식당 앞에서 집회를 열었다. 연수원 식당과 Y2 식당 앞에서도 엔진과 변속기를 만드는 공작사업부 조합원들이 각 400여 명씩 모여 사측의 부당한 탄압과 폭력, 집행부의 비민주성을 규탄하는 집회를 열었다. 그런데 정작 양봉수가 속한 2공장에서는 야식시간에 아무런 움직임이 만들어지지 못했다. 2공장 대의원들은 12일 저녁 9시 30분부터 회의만 계속 하고 있었다. 2공장 야간조 조합원들은 양봉수의 분신 소식을 출근 전에 뉴스 속보로 다 보고 온 상태였다. ‘봉수 분신해 죽는 상황인데 라인 돌려서 되겠나’ 그렇게 말하는 조합원들이 많았지만 라인은 평소처럼 저녁 9시부터 돌아갔다. 소위원들이 빨리 행동에 나설 것을 요구했지만, 대의원들은 잠시만 기다리라면서 아무런 결정도 하지 못한 채 회의만 계속할 뿐이었다. 새벽 1시부터 2시까지 야식시간조차 아무 것도 못한 채 흘러가 버리자 현장은 술렁거렸다. 휘발유를 끼얹은 것처럼 불만 붙이면 터질 것 같은 분위기였다. 대의원들은 중앙 대책위가 만들어지고 그 지침이 나올 때까지 일단 일하자고 했다. 하지만 현장 조합원들은 모두 말도 안하고 ‘봉수 어떻게 돼 가냐’ 그것만 물었다. 마침내 새벽 4시 휴게시간에 보고대회가 열렸다. 분노로 이글거리는 조합원들이 집회장을 가득 메웠다. 대의원들은 깜짝 놀랐다. 모이는 데 5분, 분신 경과보고를 하고 투쟁발언 하나 하니까 20분이 지나버렸다. 딩동댕~ 작업종이 치고 삐걱삐걱 라인이 다시 돌아가는 소리가 났다. 그러나 조합원들은 아무도 일하러 가지 않았다. 누군가 나섰다. “이 상황에서 어떻게 일을 합니까!” 조합원들은 떠나지 않고 자리를 지켰다. 당황한 대의원들은 소위원 의장단에게 진행을 맡기고 자기들끼리 회의 한다며 사라져 버렸다. 마침내 라인이 끊어졌다. 의장2부에서부터 파업이 시작된 것이다. 조합원들의 자유발언으로 집회가 이어졌다. 5시쯤 현장 집회를 마치고 조합원 7백여 명이 본관으로 이동해서 다시 항의집회를 시작했다. 의장2부의 파업 소식이 전해지자 2공장의 차체, 도장, 프레스에서도 6시부터 시작되는 잔업을 거부하고 조합원 5백여 명이 본관으로 이동해서 집회에 합류했다. 본관 앞 집회에 참석한 2공장 조합원들은 출근하는 주간조 조합원들에게 파업 소식을 알리기 위해 다시 공장으로 들어갔다. 주간조 대의원들은 ‘토요일 4시간 근무인데 파업이 되겠나’ 의구심을 많이 가졌지만, 소위원들이 ‘지금 조합원 동지들이 더 적극적이지 않냐’고 설득했다. 출근길에 소식을 접한 2공장 주간조 조합원들은 자연스럽게 파업대오에 합류했다. 오전 8시 2공장의 모든 라인이 멈춰 섰다. 파업이 2공장 전체로 확산되는 순간이었다. 주간조가 퇴근하는 낮 12시 정문 앞에서 조합원 4천여 명이 참여하는 집회가 열렸다. 정문 바깥쪽에서도 현총련 조합원과 지역단체 회원 5백여 명이 집회에 동참했다. 정문 철제 바리케이드를 사이에 두고 현대자동차 조합원과 현총련 조합원이 서로 마주보며 진행했다. 이 집회를 계기로 대책위가 비공식적 임의기구에서 조합원 대중에게 승인받은 공식적 지도부로 부상했다. ‘반 어용노조 세력’이 모두 결집한 대책위가 노조 집행부를 제치고 조합원 대중에게 인정받는 새로운 투쟁 지도부로 등장한 것이다. 2공장 야간조 조합원들은 오후 5시부터 9시까지 파업을 이어 나갔다. 15일 월요일 오전 8시, 2공장에서 전면 작업거부가 이어졌다. 활동가들은 ‘주말이 끼어서 파업이 이어지겠냐’는 우려를 가졌지만, 월요일 출근한 조합원들이 ‘이런 분위기에서 무슨 일을 하노’, ‘오늘 콘베어 돌리면 안 돼지’ 하며 적극 나서면서 자발적으로 파업을 이어갔다. 2공장 조합원 1천 2백여 명은 12시 45분 노동조합 앞에서 약식 항의집회를 가진 뒤 1공장으로 몰려갔다. 오후 1시 1공장 전체가 전면 파업에 동참했다. 1시 20분 1공장 오케이라인에서 2천 7백여 명이 모여 1공장·2공장 합동 집회를 열었다. ‘양봉수동지 분신대책위 경과보고 및 부당노동행위 3만 조합원 2차 규탄대회’가 비가 오는 가운데서도 4천여 조합원이 참석한 가운데 5시부터 열렸다. “3만 조합원 동지 여러분 반갑습니다. 저는 동지들을 사랑하고 노동조합을 사랑합니다. 빠른 시일 내에 회복되어 3만 조합원 동지들과 함께 하기를 바랍니다. 3만 조합원 동지들의 건승을 빕니다.” 양봉수의 육성이 스피커로 흘러나오자 대회장은 침묵과 분노로 뒤덮였다. 9시에 시작되는 야간조도 1공장과 2공장 모두 파업을 이어갔다. 11시 본관 앞에서 1공장·2공장 합동집회가 2천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열렸다. 16일 화요일 오전 6시, 4공장 야간조 조합원들이 잔업 시간에 집회를 열었다. 오전 8시 4공장 야간조·주간조와 1공장 주간조 조합원들이 정문 앞에 집결한 뒤 공동으로 본관 집회를 열었다. 2공장과 1공장에 이어 4공장도 파업에 돌입하는 순간이었다. 3공장도 8시부터 작업거부에 들어갔으나 대오가 어수선하다는 소식에 9시쯤 2공장 조합원들이 3공장으로 대열을 지어 몰려갔다. 1공장과 4공장에서도 대열이 출발했다. 10시쯤 3공장에서 1공장·2공장·4공장 조합원들까지 합세해서 공동 집회가 열렸다. 오후 5시 정문 앞 집회에 5천여 명의 조합원이 참석했다. 이 자리에서 대책위는 17일부터 울산공장 전체 파업을 선언했다. 17일 수요일, 대책위가 주도하는 울산공장 전체 파업이 현실화됐다. 그러자 오전 9시 30분 울산공장 전체에 전원이 차단됐다. 10시 본관 앞에서 3차 규탄대회가 열렸다. 오후 1시 30분 전경차 9대가 명촌정문에 포진했다. 6대는 사내에 진입했고, 3대는 명촌정문 앞에 대기했다. 효문로터리에도 전경차 3대가 배치됐다. 오후 4시부로 회사측에서 무기한 휴업조치를 발표했다. 대책위 지도부 12명에 대해서는 사전 구속영장이 신청됐다. 사태는 긴박해졌다. 대책위는 출근강행이라는 방침을 세웠다. 18일에도 본관 앞 집회를 강행하기로 했다. 현총련은 지역 운영위를 열어 현대차에 공권력이 투입될 경우 전체 조합원이 잔업거부를 하고 오후 5시까지 현대차 정문 앞으로 집결하기로 결정했다. 휴업조치가 내려졌음에도 조합원 1천 5백여 명이 밤새워 본관 앞 농성장을 사수했다. 18일 목요일, 회사측의 휴업조치를 무시하고 대책위 방침에 따라 출근한 조합원들이 9시 각 공장별로 집회를 갖고 10시 본관 앞으로 집결했다. 오늘도 5천여 명의 조합원이 모였다. 조합원들은 각 공장별로 모여 공권력 투입에 대비했다. 저녁 9시에는 본관 앞에서 5천여 명이 집결해 촛불집회를 열었다. 공권력 투입이 임박했지만, 집회 분위기는 힘이 있었다. 집회 도중에 대책위 공동대표 3명에 대한 사전 구속영장 발부 사실이 확인됐다. 19일 금요일, 마침내 김영삼 정권이 경찰병력을 투입해 철야농성 중이던 조합원들을 무력으로 진압했다. 오전 3시 40분 정문에 백골단 3~4백명을 중심으로 1천 5백여 명의 경찰병력이 투입됐다. 백골단, 노사협력부 직원, 경비들이 함께 본관 앞 농성장으로 달려들어 농성하던 조합원들을 끌어내고 텐트를 짓밟았다. 조합원들은 인간 스크럼을 짜고 버텼지만, 10분 만에 진압이 종결됐다. 연행을 피해 공장을 빠져나온 조합원들은 현장을 침탈한 경찰과 맞서 싸우기 위해 안전모와 마스크를 쓰고 쇠파이프를 들고 거리로 나섰다. 호각 소리와 함께 노동자들이 백골단과 전경을 향해 달려들면 빠바바방 사과탄이 여기저기서 한꺼번에 터졌다. 골목으로 밀린 노동자들은 잠시 숨을 고른 뒤 또 다시 치고나갔다. 그런 공방전이 양정동과 염포동 일대에서 새벽부터 밤까지 하루 종일 계속됐다. 현대정공과 현대중공업을 비롯한 다수의 울산지역 노동자들도 이 투쟁에 함께 했다. 분신 이후 한 달이 지난 6월 13일 오전 7시 45분경 양봉수가 마침내 사망했다. 양봉수의 분신과 조합원들의 비공인파업은 현대차노조를 극적으로 변화시켰다. 조합원대중의 자발적인 비공인파업을 통해 노사협조주의와 실리주의를 극복할 수 있는 민주노조운동의 대의와 동력이 강력하게 만들어졌다. 양봉수의 목숨을 내던진 투쟁과 이에 화답하는 조합원대중의 비공인파업 속에 담긴 진정성은 많은 조합원들이 활동가로 떨쳐 일어서 민주노조운동에 자기 삶을 바치게 했다. 노동조합 공식체계의 한계를 넘어서지 못하거나 집행부의 지침에 의존하는 수동적인 태도에서 벗어나 현장의 자발성에 입각해 아래로부터 의사결정하고 과감하게 행동하는 활동 풍토가 확산됐다. 양봉수는 현대자동차 민주노조의 심장이 됐다. 1995년 9월 19일 현대자동차노조에 민주 집행부가 다시 들어섰다. 비슷한 시기 한국통신 노동자들의 투쟁이 전개됐다. 한국 최대 공기업이던 한국통신에는 조합원 5만 2천 명의 최대 노조가 있었다. 1994년 6월 한국통신노조에 민주 집행부가 들어섰다. 1995년 4월 2일, 한국통신노조는 ‘95 임단투 승리를 위한 한국통신 노동자 전진대회’를 개최했다. 5만의 조합원과 가족들이 모인 이날의 요구는 ‘임금 가이드라인 철폐, 통신 개방 반대, 재벌 특혜 민영화 반대’였다. 한국통신노조가 파업을 예고하자 김영삼 정권은 선제공격에 나섰다. 5월 16일 한국통신노조 간부 64명 전원에 대해 중징계 및 사법처리 방침을 발표했다. 17일 노조는 ‘한국통신 성실교섭 촉구와 노조탄압 규탄대회’를 열고 64명의 노조간부 중징계가 결정되면 전면파업에 돌입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대통령 김영삼은 한국통신노조가 파업을 하면 국가 기간통신망이 마비될 것이라며 노조를 ‘국가전복세력’으로 직접 규정했다. 대통령의 발언과 함께 한국통신 노동자들의 투쟁이 전 사회적 문제로 떠올랐다. 그러나 한국통신노조의 내부 동력은 정권의 가공할 탄압에 맞서 파업을 결행할 정도가 되지 못했다. 결국 22일 한국통신노조 간부들이 명동성당과 조계사에서 무기한 단식농성에 들어갔다. 정권은 6월 6일 공권력을 투입해 노조간부들을 강제 연행했다. 1995년 11월 11일 민주노총 창립대의원대회가 열렸다. 같은 날 열린 전국노동자대회에서 민주노총 창립이 대중적으로 선포됐다. 민주노총 창립에는 862개 노조 41만 8천 1백 명의 조합원이 참여했다. 다음 편 보기 [후주] [1] 이원보, 2013, 『한국노동운동사 100년의 기록』(개정증보판), 한국노동사회연구소, 311~312쪽. [2] 노동사회교육원, 2008, 『금속노동자를 위한 노동운동사』, 전국금속노동조합, 133쪽. [3] 이광일, 2008, 『좌파는 어떻게 좌파가 됐나』, 메이데이, 323~324쪽. [4] 이광일, 2008, 『좌파는 어떻게 좌파가 됐나』, 메이데이, 341~342쪽. [5] 전국노동조합협의회 백서 발간위원회, 2003, 『전노협백서 제4권 1991년 - 죽음으로 사수한다! 전노협』, 논장, 13~14쪽. [6] 김형기, 1992, 「진보적 노동조합주의 논쟁」, 『지역과 노동』 7월호, 25~26쪽. [7] 하나회는 박정희가 집권하고 있던 1970년대 초반 박정희에게 촉망받는 중견 장교였던 전두환과 노태우를 중심으로 결성된 군대 내 사조직으로서, 1979년 12·12 쿠데타와 1980년 5·17 쿠데타를 주도한 뒤 전두환·노태우 정권을 거치는 동안 정권과 군부의 요직을 대물림하면서 군사파시즘 세력의 중추로 기능했던 집단이었다. [8] 전노협의 핵심 기반인 마창노련에서 선도 사업장 역할을 했던 통일중공업노조 위원장이 1993년에 산업평화에 이바지했다는 명목으로 노동부장관상을 받은 것은 전노협 내부에 타협·개량주의 세력이 얼마나 심각하게 확대되었는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9] 1993년과 1994년 김영삼 정권은 경총과 한국노총의 임금인상 합의라는 형식으로 새로운 임금 억제 정책을 시도했다. 그러나 이것은 1994년에 오히려 노·경총 임금합의 분쇄와 한국노총 탈퇴 투쟁이 대대적으로 벌어지는 결과만을 초래했다. 노·경총 임금합의는 노태우 정권 시기에 임금가이드 라인, 총액임금제 등 정부가 직접 나섰던 임금 억제 정책이 사실상 실패했던 것을 감안한 새로운 시도였으나 역시 실패했다. [10] 노동자뉴스제작단, 2011, <한국노동운동사 100년의 기록>(영상) 3부. [11] 노동자뉴스제작단, 2011, <한국노동운동사 100년의 기록>(영상) 3부. [12] 노동자뉴스제작단, 2011, <한국노동운동사 100년의 기록>(영상) 3부. [13] 전국노동조합협의회 백서 발간위원회, 2003, 『전노협백서 제7권 1994년 - 최후의 승리는 우리 것』, 논장, 264쪽. [14] 전국노동조합협의회 백서 발간위원회, 2003, 『전노협백서 제7권 1994년 - 최후의 승리는 우리 것』, 논장, 280쪽. [15] 서영호·양봉수 열사회, 2025, 『현대차 열사·희생자 백서』, 양봉수 편. [16] 서영호·양봉수 열사회, 2025, 『현대차 열사·희생자 백서』, 양봉수 편. [17] 서영호·양봉수 열사회, 2025, 『현대차 열사·희생자 백서』, 양봉수 편. /* 스크롤 여백만 주고, 화면에는 안 보이게 */ .ftn-target { display: inline-block; /* 줄바꿈 안 생김 */ width: 0; height: 0; scroll-margin-top: 200px; } document.addEventListener("DOMContentLoaded", function () { // name="_ftn1", name="_ftn2", name="_ftnref1" ... 전부 대상 document.querySelectorAll('a[name^="_ftn"]').forEach(function(a) { var idValue = a.getAttribute("name"); // 이미 같은 id의 요소가 있으면 또 만들지 않음 if (!document.getElementById(idValue)) { var span = document.createElement("span"); span.id = idValue; span.className = "ftn-target"; a.parentNode.insertBefore(span, a); } }); }); /* 본문 각주 번호 + 아래쪽 각주 번호 색 지정 */ a[href^="#_ftn"] sup, a[href^="#_ftnref"] sup { color: #BF202D; } /* 밑줄이 보기 싫으면 */ a[href^="#_ftn"], a[href^="#_ftnref"] { text-decoration: none; } /* 마우스 올렸을 때 살짝만 강조하고 싶으면 (선택) */ a[href^="#_ftn"]:hover, a[href^="#_ftnref"]:hover { text-decoration: underline; } /* 페이지 전체가 오른쪽으로 넘치지 않게 */ html, body { max-width: 100%; overflow-x: hidden; } /* 본문 영역 폭 강제 고정 + 긴 단어/문장도 줄바꿈 */ #bo_v_con, .bo_v_con, .cke_editable, article { max-width: 100%; overflow-wrap: break-word; word-wrap: break-word; /* 구형 브라우저용 */ } /* 워드에서 붙은 이미지/표가 화면 밖으로 안 나가게 */ #bo_v_con img, #bo_v_con table, .bo_v_con img, .bo_v_con table, .cke_editable img, .cke_editable table, article img, article table { max-width: 100% !important; height: auto; } /* 워드가 p, span에 폭을 박아놓은 경우 강제로 해제 */ #bo_v_con p[style*="width"], #bo_v_con span[style*="width"], .bo_v_con p[style*="width"], .bo_v_con span[style*="width"], .cke_editable p[style*="width"], .cke_editable span[style*="width"], article p[style*="width"], article span[style*="width"] { width: auto !important; max-width: 100% !important; } /* 기본 blockquote 스타일 */ blockquote { border-left: 4px solid #c0392b; /* 사이트 분위기와 맞는 붉은 계열 */ padding: 12px 18px; margin: 20px 0; background: #fafafa; font-style: normal; color: #333; line-height: 1.6; } /* blockquote 안의 p 태그 정렬 */ blockquote p { margin: 0 0 10px 0; text-align: justify; } /* 마지막 p 태그 여백 제거 */ blockquote p:last-child { margin-bottom: 0; } /* 본문 안 링크 스타일 */ #gpt-article a { color: #cc0000 !important; text-decoration: none !important; } #gpt-article a:hover { color: #990000 !important; } // https://로 시작하는 링크만 target="_blank" 적용 document.addEventListener("DOMContentLoaded", function () { const links = document.querySelectorAll('#gpt-article a[href^="https://"]'); links.forEach(link => { link.setAttribute("target", "_blank"); link.setAttribute("rel", "noopener noreferrer"); }); }); -
연차 쓰겠다니 해고! 울산 워릭-덕스 영어강사 이주노동자들의 투쟁울산의 영어학원 워릭프랭클린, 덕스어학원에서 일하던 이주노동자 영어강사들이 연차 사용, 노조 가입, 노동조건 개선 요구를 이유로 계약만료 해고와 협박, 비자 통제 등 탄압에 시달리고 있다. 이는 개별 사업주의 일탈이 아니라, 국가와 자본이 이주노동자를 무권리 상태로 내모는 구조적 차별의 결과다. 정주노동자와 이주노동자의 공동투쟁을 확대하자. 사진: 전국민주일반노조 부산본부 “연차를 자유롭게 쓰고 싶었다. 그러나 사측이 이를 인정하지 않아 원하는 날짜에 휴가를 갈 수 없었다”, “노조에 가입했다”, “돌아온 것은 해고였다” 수십 년 전부터 노동자에게 익숙한 이 이야기가 2026년에도 반복되고 있다. 바로 ‘울산의 대치동’이라 불리는 옥동에 위치한 워릭프랭클린과 덕스어학원 울산캠퍼스 영어강사 이주노동자들의 이야기다. 2026년 3월 11일 오전 고용노동부 울산지청 앞 기자회견장에는 고용노동부를 규탄하는 영어 발언과 구호가 울려 퍼졌다. 정주, 이주노동자들이 “워릭! 덕스! 위아 피플 투!(우리도 인간이다!) 투쟁”을 함께 외쳤다. 이주노동자 중 회화지도(E-2) 비자로 한국에서 일하는 이주노동자들은 일터에서 사용자의 일방적 노동통제에 시달렸다. 연차를 원하는 대로 쓰지 못하고, 노동시간과 일하는 학원이 일방적으로 변경되었다. 평가기준을 알 수 없이 계약갱신 거부에 시달렸다. 그러다 법대로 연차를 쓰고 싶어 노조에 가입했더니, 사용자는 “노조에 가입한 것에 대해 대가를 치르겠다”고 협박했다. 결국 단체교섭이 결렬되자 2026년 3월 1일부로 워릭에서 일하는 조합원 4명을 계약만료로 해고했다. 덕스어학원 분회장도 5월 1일부로 계약만료를 통보했다. 이렇게 노조에 가입한 이주노동자를 모두 부당하게 해고하고 있다. 기자회견에 참가하며 2003년 굴지의 대기업 현대자동차 아산공장에서 월차를 쓰고 싶다던 비정규직 노동자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 소망을 말했다가 폭행당하고, 식칼테러까지 당해야 했던 현장. 23년이 지났는데 현장은 똑같다. 이주노동자들 중에 그나마 노동조건이 낫다는 영어강사 이주노동자들조차 ‘원하는 날짜에 연차를 쓰고 싶다’는 이유로 해고당하고 있다. 이 얼마나 허울 좋은 K-민주주의 대한민국인가! 이주노동자에게 철저히 배제된 노동권, 노동탄압 백화점 워릭프랭클린 옥동원 리아 밀러 해고노동자는 “해고 통보 후 지난달 다시 일을 하라고 계약서를 받아 서명했지만, 아무런 설명도 없이 그 계약서는 다시 회수되고 취소됐다”며, “나는 일을 못한 것도 아니고 학생들을 실망시킨 것도 아니며 우리의 책임을 회피한 것도 아니다”라고 밝혔다. 그러면서 “결국 이유는 단 하나, 우리가 노동조합에 가입하고 더 나은 노동조건을 요구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주노동자에게 연차 사용권도 노조할 권리도 없는 것인가? 덕스어학원 울산캠퍼스에서 5월 1일부 해고 통보를 받은 강사 루시 라워레스는 “우리가 목격한 차별은 조직적이고 잔인하다”며 사측이 “주변 지인과 가족들에게 연락해 노조 탈퇴를 종용하는 파렴치한 짓까지 저질렀”고, “미디어 계정을 샅샅이 뒤져 비자 위반이라는 거짓 주장을 만들어내기 위해 사진들을 왜곡”한 사실을 폭로했다. “계약서는 무기화됐고 노동자들에게 불리한 새 서류에 서명하게 하려고 출입국사무소 신고나 거액의 벌금을 언급하며 협박을 서슴지 않았다”고 밝혔다. 이뿐 아니다. 사측은 정주노동자를 모아 어용노조 설립을 추동했다. 이주노동자들의 정당한 노조 활동을 공격하는 복수노조 탄압까지 자행하고 있다. 이주노동자에게 노조할 권리, 노동기본권을 차별하는 탄압은 사용자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구조적 차별이기도 하다. 한국 자본가계급은 이주노동자를 고용노동부(고용허가제), 법무부 소관으로 구분하고 인권과 노동권 보장 없이 시시때때로 자본이 원하는 인력공급 필요에 따라 주먹구구식으로 ‘사람’을 ‘사용’하고 있다. 기간제법도 취업을 목적으로 하는 이주노동자는 2년을 초과해도 무기계약 노동자로 전환하지 않는다고 서울지방법원이 판정한 것을 대부분 적용하고 있다. 잭 민주일반노조 외국어교육지회 지회장은 이주노동자들에게 고용불안과 사측의 통제를 구조화한 이 점을 비판했다. “2년 넘게 일한 이주노동자들이 있는데, 취업비자 노동자를 ‘소모품’ 취급할 명분은 어디에 있는가” 물으며 “이 판례는 ‘기간제’ 굴레의 법적 필연이 아니라 탐욕스러운 사측이 만든 차별의 산물이라는 증거”라고 꼬집었다. 배성민 민주일반노조 부산본부부장은 “지방노동위원회가 부당해고를 인정하더라도 이주노동자들은 사용자에게 이적동의서를 받아야 퇴사와 복직이 가능하다”며 이주노동자들이 실제로 복직하기 어려운 구조를 비판하며 “기간제법 차별 철폐와 이적동의서 폐지도 함께 싸워야 할 우리의 과제”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E계열 비자를 가진 이주노동자들은 사업장 변경의 자유가 없다. E-2비자 노동자의 경우, 기존 사업주에게 이적동의서를 받도록 강제당하는데 그 과정에서 절반 정도가 작성 대가로 임금삭감, 퇴직금 포기, 금품지급 등의 권리 침해를 겪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답게 살고 싶다! 위아 피플 투! 울산이주민센터 김현주 센터장은 20여년 전과 다르지 않은 현실을 개탄하며 “이주노동자들의 부당한 노동 문제는 한국인들이 똑같이 겪는 억울한 일”이라며 “고용노동부는 법무부 소관(E-2비자) 이주노동자라고 회피하지 말고 책임있게 나서라”고 요구했다. 기자회견 참가자들은 영어강사 이주노동자들의 임금체불과 부당해고 등에 대한 고용노동부의 특별근로감독 실시와 워릭 덕스 사측의 노조탄압 중단과 부당해고 철회를 요구했다. 아울러 이주노동자에게 비자 차별 없는 기간제법 적용을 요구했다. 제조업 현장이든 서비스업 현장이든 교육현장이든 이주노동자는 ‘이주노동자’라는 이유로 차별당하고 있다. ‘글로벌 K’를 강조하는 한국 일터의 이주노동자 차별은 오직 정주노동자와 이주노동자의 단결로만 극복될 수 있다. “위아 피플 투(We are people too)”는 “인간답게 살고 싶다”는 노동자의 오랜 구호와 같다. -
[우리의 투쟁] 열사 정신 계승, 곧 죽은 자의 뒤를 산자가 따른다는 말은 이수 투쟁에 끝까지 함께하는 것어느덧 이수기업 노동자들이 정리해고된 지 528일, 천막농성 328일이 되었다. 오늘도 변함없이 현대자동차 정문 앞에서 “이수기업 정리해고 철회 고용승계 촉구 결의대회”를 진행했다. 현대차 자본은 교섭에 나오지만, 여전히 이수기업 공정 및 1차 업체 고용승계를 거부하고 2차·3차 업체 취업 알선이라는 헛소리를 늘어놓고 있다. 이수기업 해고 동지들도 500일 넘도록 생계 고통을 견디며 노동자의 자존심과 정당성을 놓지 않고 투쟁해 왔다. 로자 룩셈부르크의 말처럼, “골고다 언덕을 오르는 심정과 고통”을 이겨내는 투쟁이 아닐 수 없다. 이수기업 동지들과 여러 장기투쟁 사업장 동지들이 보여주듯이, 고통을 견뎌내는 인내, 정당한 요구 쟁취를 위한 끈질긴 투지, 계급적 연대를 소중히 여기는 관점은 앞으로 모든 노동자가 생존권과 고용안정 투쟁, 부당한 해고에 맞선 투쟁, 노동자가 주인 되는 세상을 위한 투쟁까지 능히 감당해 낼 수 있다는 점을 시사해 준다. 이런 긍정적 시사점을 오늘 이수기업 규탄집회에서 엿볼 수 있다. 이수기업 해고자 김병선 동지의 연설을 사회주의를향한전진 온라인 신문 독자들에게 소개한다. 이수기업 해고자 김병선입니다! 투쟁~~ 우리의 투쟁이 벌써 528일이 되었습니다. 뒤돌아보면 참으로 빠르게 지나간 것 같습니다! 하지만 하루하루 되짚어 보면 참으로 힘들고 답답한 날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처음 해고되고 투쟁에 ‘투’ 자도 모르는 동지들이 뭉쳐서 투쟁을 시작했습니다. 안 대표 이름처럼 미숙한 동지들이었습니다. 하지만 500일 넘게 투쟁하면서 구사대 깡패들과 몸싸움도 하고 여러 투쟁 사업장을 돌면서 보고 듣고 느끼면서, 지금은 안미숙 대표 성명처럼, 또 다른 안 동지로 거듭난 것 같습니다. 그 중심에는 안 대표가 서 있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이 자리를 빌려서 감사함을 전합니다. 지금 현대차 주가가 한주에 50만 원, 시가총액이 100조가 넘는다고 합니다. 그 배경에는 휴머노이드. 아틀라스를 공개한 이후라고 생각합니다. 로봇의 투입은 노동자 노동의 질이나 환경개선이 아닐 것입니다. 자본의 이윤을 극대화하기 위한 현대차의 큰 그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그림에는 이수기업 정리해고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현인 기업, 2.3차 업체 노동자들의 해고가 이어질 것입니다. 해고는 살인입니다. 그리고. 비정규직은 철폐되어야 합니다. 지금 현대차와 교섭이 한 창 진행 중입니다. 그 누가 말합니다. 현대차 교섭이 원활하게 이루어지려면 1차 업체 고용승계가 아닌 다른 방안을 생각하는 게 어떠냐고. 저는 생각합니다. 우리가 1년 넘게 투쟁하면서 1차 업체 고용승계를 외쳐 왔습니다. 지금 와서 1차 업체 고용승계가 아닌 다른 방안을 생각한다는 것은 이수기업 해고가 부당해고가 아닌 정당한 해고라는 걸 우리 입으로 말하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현대차와는 협상이 아닌 투쟁으로. 1차 업체 고용승계를 쟁취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 싸움 힘든 싸움입니다. 그리고 긴 싸움이 될 수 있습니다. 여기 모인 동지들, 투쟁하는 동지들, 우리 이수기업 투쟁, 끝까지 함께 하자고는 말씀드리지 못합니다. 하지만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우리가 목요일마다 현대차 규탄 집회를 엽니다. 그 집회의 시작은 투쟁하다가 산화하신 열사를 기리며 묵상으로 시작합니다. 그 묵상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바로 열사 정신 계승을 외칩니다. 그 정신은. 무엇입니까? 죽은 자의 뒤를 산자가 따른다는 말이 무슨 의미이며, 열사가 꿈꾼 세상이 어떤 세상인지 가슴에 손을 얹고 그 뜨거움을 느끼는 동지들이라면, 우리 이수기업 투쟁, 끝까지 함께할 거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이 투쟁을 하면서 1년이 넘어서 끝까지 몇 명이 남아서 투쟁할까? 걱정이 많았습니다. 하지만 500일 넘은 이 시점에 생계의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10명의 동지가 투쟁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너무나 고마우며 감사합니다! 저는 긍정의 힘이라는 말을 믿습니다. 힘듦을 힘듦으로 받아들이면, 이 투쟁 또한 더 힘들어질 것입니다. 노력하는 자도 즐기는 자를 이기지 못한다는 말처럼 우리의 이 투쟁도 즐기면서 승리하는 그날까지 끝까지 함께 투쟁했으면 좋겠습니다. 투쟁~~ /* 기본 blockquote 스타일 */ blockquote { border-left: 4px solid #c0392b; /* 사이트 분위기와 맞는 붉은 계열 */ padding: 12px 18px; margin: 20px 0; background: #fafafa; font-style: normal; color: #333; line-height: 1.6; } /* blockquote 안의 p 태그 정렬 */ blockquote p { margin: 0 0 10px 0; text-align: justify; } /* 마지막 p 태그 여백 제거 */ blockquote p:last-child { margin-bottom: 0; } -
[번역] 탈성장 및 “화려한” 공산주의에 대한 에코 공산주의 대안아르헨티나의 마르크스주의자 에스테반 메르카탄테는 신간 『불타는 붉은빛 - 생태 위기에 맞선 공산주의적 성찰』에서 자본주의를 “다차원적” 생태 위기의 근본 원인으로 정면 비판하면서, 탈성장과 에코 모더니즘 같은 생태주의의 흐름과 중요한 대화를 전개한다. 이 흐름들에 맞서 메르카탄테는 노동을 자기 해방의 주체이자, 사회와 자연의 관계를 질적으로 전환시키는 행위자로 삼는 “에코 공산주의(Ecommunism)” 전략을 주창하며, 이것만이 재앙을 피할 수 있는 길이라고 역설한다. 이 책이 스페인어로만 출간된 상황에서, 사회주의적 입장의 국제 학술지 『LINKS』의 페데리코 푸엔테스가 『좌파 사상(Ideas de Izquierda)』 편집위원이기도 한 메르카탄테와 만나 책에서 제기된 핵심 논점들을 짚었다. F: 마르크스주의, 생태주의, 기후 위기에 관한 문헌이 이미 존재하고 끊임없이 늘어나는 상황에서, 이 책을 쓰기로 결심한 계기는 무엇인가요? M: 이 문제가 오늘날의 논의에서 그토록 중대한 초점이 되었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입니다. 지금의 생태 위기는 여러 쟁점이 교차하는 문제고, 이 문제와 그에 따른 영향은 다양한 학문 분야에 걸쳐서 고려되어야 합니다. 이 책에서 저는 두 가지를 탐구하고 싶었습니다. 한편으로는 (스페인어 사용자들에게 상대적으로 접근성이 떨어지는) 마르크스주의적 관점을 논의에 도입하고 싶었어요. 특히 이 책이 출간된 아르헨티나에서 그랬죠(지금은 스페인에서도 출간되었습니다). 존 벨러미 포스터의 초기 저작부터 사이토 고헤이와 안드레아스 말름 같은 최근 저자들까지, 지난 수십 년 동안 나온 에코 마르크스주의(ecomarxist) 저작 대부분이 상대적으로 주목받지 못했습니다. 저는 혁명적 좌파 활동가들과 생태 운동가들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대화를 염두에 두고, 생태적 비판을 제시하는 몇 가지 동시대 문헌을 종합해 보려고 했습니다. 그리고 에코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자신의 관점을 발전시키기 위해서 천착해야 할 물음들이 있는데, 그 부분에도 기여하고 싶었습니다. 다른 한편으로, 카를 마르크스의 정치경제학 비판이 자본 축적의 반생태적 성격을 폭로하는 데 어떻게 기여하는지 모든 각도에서 살펴보고 싶었습니다. 이 책의 내용 중에, 자본 생산 및 순환의 여러 국면을 재구성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자본–노동 관계에서 출발해서 점점 가속화되는 상품과 화폐의 흐름에 기반한 세계 시장의 형성에 이르기까지 살펴보는 거죠. 이는 순환의 각 단계에서 이런저런 생태 문제들이 어떻게 발생하는지를 사유할 수 있게 합니다. 마지막으로, 마르크스주의가 그간 제대로 다루지 못했지만 우리가 반드시 토론해야 할 핵심 물음이 또 하나 있습니다. 바로 자본에 대한 생태적 비판과, 자본주의를 넘어서서 자본 이후 사회를 예비하는 혁명적 전략을 서로 어떻게 연결할 것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포스터, 사이토 같은 이들이 중요한 논점을 제시했지만 이 문제는 여전히 중대한 약점으로 남아 있죠. 비교적 최근에 이 문제를 다루려는 시도들이 있었는데, 예컨대 안드레아스 말름의 “생태 레닌주의” 같은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접근이 신선하기는 해도, 사회주의 사회로의 이행을 위한 첫걸음으로서 혁명을 통한 권력 장악은 오늘날 더 이상 의제가 아니라는 말름의 견해는 그의 제안을 다소 허황된 것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이 책은 제가 근본적이라고 믿는 어떤 논의에 기여하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말하자면 생태적 관점에서 인류를 착취로부터 해방시키는 동시에, 서로 구별되면서도 하나의 통일체를 이루는 사회와 자연 사이의 균형 잡힌 대사 작용을 복원하는 공산주의적 전망을 중심으로 혁명 전략을 어떻게 발전시킬까 하는 것입니다. F: 환경주의자들은 흔히 기후 변화에 초점을 맞추는데, 당신의 책은 이 문제를 더 광범위한 “다차원적” 생태 위기 안에 위치시킵니다. 이 부분을 좀 더 자세히 설명해 주시겠습니까? M: 우리가 다차원적 위기에 직면해 있다는 생각은 스톡홀름 회복력 센터의 연구가 잘 보여 줍니다. 이 연구는 여러가지 ‘지구 위험 한계선’을 설정합니다. 온실가스와 지구 온난화에 관한 것뿐만 아니라, 생물 다양성 상실, 삼림 파괴와 토지 이용 변화, 해양 산성화, 대기 오염, 그 밖의 여러 한계선도 포함하고 있어요. 스톡홀름 회복력 센터는 아홉 가지 한계선과 각각에 대한 임계점을 제시하는데, 바람직한 삶은 차치하고 “견딜 수 있는” 삶을 위해서라도 악화가 가속화되는 것을 막고 예측 불가능한 결과가 초래되지 않게 하려면, 이 임계점들을 넘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이 제가 말하는 다차원적 생태 위기입니다. 이 쟁점을 제기하는 것이 중요한 이유는, 녹색 자본주의 옹호자들이 생태 문제에 대처하기 위해 제안하는 해법 상당수가 단일 쟁점, 주로 기후변화에 초점을 맞추는 경향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내놓는 제안에 따르다 보면 하나의 문제를 해결하려다가 결국 다른 문제들에 부정적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예컨대 에너지 전환을 이루려면 축전지 생산의 원료인 리튬 같은 광물을 대규모로 채굴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는 더 많은 자원 채굴로 이어지고 이 과정에서 막대한 양의 물이 사용되며 칠레, 볼리비아, 아르헨티나 같은 종속국들의 생태계가 훼손됩니다. F: 왜 이 위기의 원인이 “자본주의의 DNA”에 있다고 보시나요? M: 자본주의 사회의 특징 중 하나는 자연을 가치 증식 가능한 대상으로 전환시키려는 충동입니다. 노동력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죠. 자본에 종속된 노동은 물리적으로 가능한 최대의 가치를 끊임없이 생산하도록 강제됩니다. 가치 법칙이 자연으로까지 확장되면 농축산업이든 목재 공급용 농장이든 양식업이든 광업이든 간에 최저 비용으로 최대 자원을 추출할 수 있는 기술을 개발하는 것이 우선시됩니다. 자연은 오로지 전유 비용이라는 관점에서만 “가치 평가”가 이루어지죠. 그러면서 특정 지역들은 폐기물 “투기장”으로 지정되는데, 이건 자본이 착취할 수 있는 하나의 “서비스”로 간주됩니다. 역사적으로 자본의 논리는 환경에 대한 영향을 기업의 방정식에 포함시키지 않았습니다. 전통적 경제 이론에서 이 부분은 기업 운영 비용에 내재하지 않는 “외부성”으로 존재합니다. 자본주의 국가들은 세금, 벌금, 탄소 배출권 같은 방식을 포함한 환경 거버넌스를 통해 이것을 “교정”하려고 했죠. 그렇지만 이런 조치들은 자본과 자연의 관계나 각종 생산 활동의 부정적 영향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지 못합니다. 그저 오염에 “가격”을 매겨서 기업이 대가를 지불하게 할 뿐, 생태계를 복원하는 데는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하죠. 자본은 중장기적으로 심각한 결과를 초래하더라도 단기 수익을 우선시합니다. 오늘날 우리는 과거의 행위가 낳은 이런 예기치 못한 결과들을 목도하고 있습니다. 이를테면 이전 세기의 온실가스 배출이 야기한 기후 변화 말이죠. 그렇지만 이런 결과를 알고 있는 지금도, 석유 기업들은 사업을 접어야 할 시점이 가까워 오면서 마지막 한 방울의 석유까지 채굴하려고 서두르며 결과를 더욱 악화시키고 있습니다. 사이토가 마르크스의 표현을 빌려 묘사한 것처럼 “내가 죽은 뒤에 대홍수가 오든 말든” 하는 관점으로 움직이는 이런 행태는 세대 간 지속 가능성이라는 전망을 무너뜨립니다. 많은 기업이 지속 가능성을 주문처럼 되뇌지만 대부분은 순전히 그린 워싱에 불과합니다. 자본주의의 논리는 지리학자 닐 스미스의 표현처럼 “자연의 생산”을 시도하는 것으로 귀결됩니다. 즉 자본이라는 사회적인 것에 의해 전적으로 매개된 자연이죠. 그렇지만 이런 시도는, 스미스는 그 한계를 조금 과소평가하고 있는데, 긴장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자연의 대사 작용은 매우 복잡하기 때문입니다. 이 작용을 포섭하려는 자본의 시도는 예측 불가능한 결과를 낳고, 그 영향의 크기는 자연을 지배하려는 노력에 비례합니다. 자연 법칙이 부과하는 한계를 무시하고 이윤을 위해서 그것을 “비틀려”는 지배 시도에 맞서서 자연이 “복수”한다고 말할 때 엥겔스가 염두에 둔 것이 이 부분입니다. F: 책의 서론에서 당신은 환경이 국가 정책과 기업 관행에 매우 깊이 침투해 있다고 설명합니다. 그렇지만 아자이 싱 초더리(Ajay Singh Chaudhary)의 표현을 빌려서, 당신은 오늘날 지배적인 것은 “우파 기후 현실주의”라고 주장합니다. 이것은 무슨 뜻인가요? M: 초더리는 지배 계급의 상당수가 기후 정책을 겉치레에 불과한 것, 무력한 것으로 만드는 데 일조하고 있음을 정확히 지적합니다. 그들이 기후 변화 부정론자라서가 아니라, 기후 재난이 갈수록 빈번하게 파국적으로 되풀이되고 악화가 가속화되어도 자신들은 살아남을 수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초더리는 “무장한 구명정”이라는 발상을 제시하는데, 충분한 자원을 가진 사람들이 기본 필수품을 모두 갖춘 지하 벙커에 투자하면서, 동시에 언젠가 선택된 소수만 지구를 탈출할 수 있게 해 줄지도 모를 기술에도 투자하는 행태를 말합니다. 이 같은 생각이 얼마나 실현 가능하고 또 얼마나 순전한 공상인가 하는 것이 적어도 현재로서는 명백한 물음이겠죠. 그렇지만 제가 관심을 갖는 것은, 이 세력들이 생태 위기를 인정하면서도 위기와 관련해 무언가 조치에 나서기를 거부하는데 스스로 아무런 모순도 느끼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그들은 우리가 너무 자주 듣는 “우리 모두 한배를 타고 있다”는 생각을 허물어뜨립니다. 생태 위기에 관한 한, 우리는 한배를 타고 있지 않아요. 그렇기 때문에 노동자계급과 빈민이 우리만의 해법을 찾아야 합니다. 부정론자든 아니든 지배 계급의 어떤 분파도 그걸 우리 대신 찾아 주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F: 극우가 세계적으로 영향력을 확대하고 있습니다. 현재 아르헨티나와 미국에 극우 대통령이 있죠. 이 상황 때문에 국가 정책이나 COP(유엔기후변화협약 당사국총회) 같은 국제 포럼의 입장이 부정론 쪽으로 기울었을까요? 이것과 관련해서, 이 광범위한 극우 내부에서 에코 파시즘 경향이 부상하는 현상을 어떻게 해석하십니까? M: 극우가 전 세계적으로 세력을 강화하면서 파리 협정과 2030 의제를 거부하고 COP에서 이탈하려는 부정론의 목소리가 힘을 얻고 있습니다, 이건 의심의 여지가 없어요. 그렇지만 극우 사이에서 분열과 긴장이 발생하고 있기 때문에 상황이 그리 단순하지는 않습니다. 두 달 전까지만 해도 트럼프와 일론 머스크는 동맹이었지만 지금은 정면충돌하고 있습니다. 트럼프는 계속 부정론자였지만 머스크는 전기 자동차를 옹호합니다. 둘의 싸움 때문에 전기 자동차와 관련 기술에 대한 공적 재정 지원이 삭감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다른 결과가 나올 수도 있었죠. 우리가 자주 보았듯이, 매우 강력한 부정론자인 극우가 자기 사상을 언제나 반드시 일관된 정책으로 전환시키지는 않아요. 우리는 각각의 경우마다 어떤 동맹이 형성되는지, 대자본의 어떤 부문들에 어떤 양보가 이루어지는지 살펴봐야 합니다. 또 하나 중요한 점은 부정론자들의 공격이 여러 다자간 포럼에서 의제가 정체된 것을 정당화하는 데 기여했다는 점입니다. 좌파와 진보 진영은 우파의 공격으로부터 이런 포럼을 방어하려고 하는데, 그러다 보니 이런 포럼들이 인색하고 무력하고 냉소적이라는 정당한 비판까지 침묵시키는 경향이 점점 강해지고 있습니다. 부정론자들의 공격이 오히려 기업들의 “녹색 자본주의”와 이 포럼들에 일정한 정당성을 부여한 것이죠. 우리는 이런 위험도 경계해야 합니다. 에코 파시즘의 출현 역시, 아직은 맹아적 단계지만, 주목해야 할 중요한 현상입니다. 생태 위기의 결과가 악화될수록 이른바 “비상 조치”가 점점 더 노골적으로 에코 파시즘의 성격을 띠는데, 이건 놀라울 것도 없죠. 이를테면 극우는 기후 위기 때문에 이주민의 물결이 거세질 위험을 이야기하면서 이걸 외국인 혐오와 연결시킵니다. 분명히 해야 할 점은, 노동자 계급이 사회적 필요에 응답하고 근본 원인인 자본주의에 맞서서 이러한 위기로부터의 출구를 제시하는 독자적·혁명적 정치 전망을 발전시키지 못하면, 반동적 해법이 강제될 가능성이 갈수록 높아진다는 것입니다. F: 에코 파시즘의 성장과 나란히 종말론적 전망이 갈수록 확산되는 것을 목격하고 있습니다. 특히 환경 파국론이나 붕괴 담론이 대중 운동을 이끌어 낼 수 있다고 믿는 일부 좌파 진영에서요. 이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M: 붕괴라는 것도 여러 형태를 취할 수 있습니다. 첫 번째로, 특정 반자본주의 좌파 진영은 경제 위기든 생태 위기든 모든 위기에 대해서 매번 낡은 기계론적 파국론을 가져다 붙입니다. 주체적 지형에서의 어려움, 그러니까 혁명적 사회 세력 건설의 어려움을 보상해 줄 객관적 요인으로 그런 위기를 끌어오는 거죠. 이런 경향은 혁명 운동의 역사 내내 반복적으로 등장했습니다. 그들이 생태 위기를 연료로 쓴다는 점은 놀랍지 않아요. 두 번째 경향은, 희소한 화석 연료에 의존하는 사회 조직은 어떤 유형이든 유지 불가능하다고 믿으면서, 자원 고갈이 사회적 수요의 축소를 필연적으로 강제한다고 봅니다. 그들에게 세계화는 지속 불가능한 것이고, 지역적·공동체적 영역으로의 회귀를 강제합니다. 이런 사고는 흔히 탈성장의 특정 조류와 결부됩니다. 바람직한 탈성장이 아니라 우리에게 불가피하게 부과되는 것으로서의 탈성장 말이죠. 마지막으로, 붕괴라는 관념은 일종의 일반화된 상식 내지 “감정의 구조”의 형태로도 나타날 수 있는데, 이건 기후 재난의 빈도가 높아지면서 강화됩니다. 우리에게는 더 이상 시간이 없고, 이미 불가항력적으로 파국을 향해 가고 있다는 생각이 바로 여기에서 생겨났습니다. 이런 생각은 반체제적 대중 운동을 촉발하기보다는 대중을 마비시키는 비관주의로 이어집니다. 기계론적 사고의 산물이든 비관주의의 산물이든, 붕괴론은 행동을 막는 장애물입니다. 그 대신 우리는 다가오는 파국에 맞서 싸워야 합니다. F: 일부에서는 북반구 국가들이 위기에 대해 주된 책임을 져야 하고, 남반구 국가들은 경제 발전을 위해 천연자원을 원하는 대로 사용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흔히 “공동의 그러나 차별화된 책임”이라고 부르는, 또 가장 급진적인 형태로는 기후정의라고 부르는 이 복잡한 문제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M: 그 관점은 구조적 불평등에 대한 중요한 비판을 담고 있습니다. 국제 거버넌스에서도 공식적으로 인정되는 부분이고, 예를 들면 선진국과 개발도상국에 각각 차별화된 온실가스 배출 목표가 설정되죠. 전 지구적 기후정의 운동은 이러한 쟁점의 상당수를 부각시키는 기여를 했습니다. 생태론의 여러 경향도 불평등한 생태 교환이나 생태 부채 같은 개념들을 발전시켜 왔습니다. 그렇지만 경제가 북반구에 종속되어 있는 국가들에게 문제는 “자본주의적 발전”이 헛된 꿈이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최근의 역사는 제국주의 세계 질서 안에서 이 나라들이 자본주의적 발전을 이룰 수 없다는 점을 보여 줍니다. 저는 『세계적 무질서 시대의 제국주의』에서 전 지구적 가치 사슬의 형성이 어떻게 종속국들을 “바닥을 향한 경쟁”으로 내몰았는지 살펴보았습니다. 각국은 투자를 유치하기 위해 더 유연한 노동 및 환경 규제와 세제 혜택을 경쟁적으로 제공합니다. 그 결과, 기존 가치 사슬의 여러 고리에 편입하는 데 성공한 국가들조차도 자국 경제를 유의미한 방식으로 발전시키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이 사슬을 따라서 점점 더 불평등하게 가치가 분배되고, 부유한 국가들이 대부분의 몫을 가져가죠. 이것이 첫 번째 쟁점입니다. 두 번째 쟁점은, 생태 위기 시대에 발전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분명히 말하지만 비자본주의적 전망만이, 첫째로 종속과 약탈의 사슬을 끊고, 둘째로 인간과 자연의 건강한 대사 작용을 유지하면서 사회적 필요를 온전히 충족시킬 수 있는 사회를 만드는 유일한 길입니다. 자본주의는 이것을 할 수 없습니다. F: 당신은 “비판적 생태론과 에코 사회주의 내의 서로 다른 흐름들이 탈자본주의 사회 조직을 이끄는 중심 좌표가 무엇이어야 하는가에 대해 매우 다른 답을 내놓는다”고 썼습니다. 구체적으로 어떤 흐름들이 있습니까? M: 대체로 이 흐름들은 탈성장 지지자들과 반자본주의적 내지 에코 모더니즘적 가속주의 옹호자들 사이에서 양극화되는 경향을 보입니다. 탈성장의 주요 표적은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경제 성장이고, 경제 성장을 다차원적 생태 위기의 주요 원인으로 지목합니다. 이 계열의 저작 대부분은 성장 “이데올로기”를 설명하는 데 상당한 지면을 할애하죠. 여러 탈성장 문헌은 국내총생산 성장이 경제적 성공의 반박 불가능한 척도가 된 과정, 그리고 1930년대 이래 모든 경제 정책의 목표는 지속적 성장을 자극하는 것임을 한참 설명합니다. 탈성장론자들은 GDP 성장, 더 구체적으로는 1인당 GDP 성장과 삶의 질이 일치하지 않는다고 주장합니다. 그들은 일정 수준을 넘어서면 더 높은 1인당 GDP가 사람들의 삶에서 그만한 개선으로 이어지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이 저자들이 부유한 나라에서 글을 쓰고 상황을 사유한다는 점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가 오늘날 과잉 소비에 직면했고, 지금까지 추출된 것을 보충하는 지구의 역량을 훨씬 초과해서 자원이 채굴되었다는 논변은 선진국에 대해 말할 때는 타당합니다. 그들은 “제국적 생활 양식” 같은 개념을 제기하는데, 말하자면 부유한 사회들이 지속 가능한 한계를 넘어서 살아가고 있으며, 지구의 다른 부분에서 자원을 추출하고 그곳에 환경적 영향의 비용을 전가하면서 그렇게 산다는 것입니다. 이런 주장은 제국주의를 생태 담론에 도입하면서 흥미로운 쟁점을 제기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여러 문제를 내포하죠. 예컨대 이런 논의는 생산 자체보다 소비를 문제 삼는 방향으로 흘러가는 경향이 있고, 의도와 무관하게, 체제에 내재한 문제의 뿌리를 흐릿하게 만듭니다. 또 부유한 국가의 노동자 계급이 “제국적 생활 양식”의 참여자로 여겨지거나 적어도 명시적으로 배제되지는 않는다는 문제가 있습니다. 민영화와 전 지구적 경제 구조조정 때문에 최근 수십 년간 노동자 계급의 생활 수준이 현저히 악화되었음을 보여 주는 여러 지표가 있는데도 말이죠. 이런 사실은 탈성장 관점에 명확히 반영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균등하게 책임을 져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이런 관점을 취할 때는 불평등이라는 측면을 반드시 고려해야 합니다. 전용기와 요트와 저택을 가진 초부유층이 그렇게나 거대한 생태 발자국을 만든 것에 압도적인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이죠. 탈성장론자들이 주장하듯이, 경제 성장 자체를 목적으로 삼는 관념에 의문을 제기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생산주의적 사고가 심지어 일부 반자본주의 진영에서도 뿌리를 내렸지만, 그건 분명 막다른 길입니다. 따라서 그런 경고는 가치가 있습니다. 그렇지만 일관된 대안을 발전시킨다는 측면에서는 탈성장 관점에 큰 약점이 있습니다. 탈성장론자들은 생산 방식에 질적 변화가 있어야 한다고 말하면서도, 구체적 방안을 제시하는 걸 어려워합니다. 그들이 명확하게 주장하는 방법은 생산과 소비의 규모를 줄이는 것 같은 양적 강조뿐이죠. 서로 다른 탈성장 전망들 간의 공통분모는 불분명하고 다의적인 반자본주의적 입장뿐입니다. 경제 성장 자체를 목적으로 삼는 데 의문을 제기한다는 것은 자본주의의 기본적 측면에 반대한다는 뜻입니다. 자원 추출이 함께 증가하지 않으면 가치의 지속적 자본 축적이 없으니까요. 그렇지만 이 부정적 관념을 긍정적 대안으로 전환하는 것은 훨씬 더 어렵습니다. 탈성장의 대표자들 사이에서도 대안에 관해서 차이가 있습니다. 세르주 라투슈 같은 저자들은 관료화된 노동자 국가라는 과거의 경험을 근거로 사회주의 이념에 대놓고 적대적이고, 모든 마르크스주의자를 생산주의자라고 비난합니다. 또 다른 이들은 정상 상태 자본주의 경제(일정한 지속적 조치를 통해 성장을 억제하면서 안정적 비율로 재생산을 보장하는 경제)가 성립 가능하기 때문에 탈성장과 자본주의는 본질적으로 적대적이지 않다고 주장합니다. 제이슨 히켈이나 사이토 고헤이처럼 좀 더 반자본주의적인 견해를 가진 사람들도 있고, 특히 사이토는 명시적으로 탈성장 공산주의를 옹호합니다. 이렇게 미묘한 차이는 있지만, 이 전망들의 공통된 특징은 일종의 최소 강령 내지 당면 강령에 집중한다는 점입니다. 강령의 내용은,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기본적으로 국가에 대한 요구로 이루어지죠. 여기에는 노동시간 단축처럼 우리가 동의할 수 있는 흥미로운 쟁점들도 포함되어 있지만, 이행기적 전망이나 자본주의를 넘어서기 위한 전략에 해당하는 것과 결합되어 있지는 않습니다. 이 입장들에 거의 거울상처럼 맞서는 것이 에코 모더니즘입니다. 이 관점에서 생태 위기의 답은 기술 발전을 가속하는 것입니다. 자본주의 체제에서는 혁신을 수익성 있는 사업 모델로 전환해서 투자를 정당화하기가 점점 어렵기 때문에 혁신의 잠재력이 온전히 실현되지 못한다는 것이 에코 모더니즘의 진단입니다. 아론 바스타니의 책 『완전히 자동화된 화려한 공산주의』가 대표적인 예죠. 바스타니에 따르면, 자본주의적 생산 관계가 부과하는 제약에서 기술 발전을 해방시키면 생산 과정을 완전히 자동화할 수 있습니다. 이 점에서 에코 모더니즘은 대사 작용을 축소하자는 주장에 반대합니다. 오히려 환경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혁신을 낳으려면 성장을 계속 추구해야 한다고, 어쩌면 더 빠르게 성장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합니다. 자본주의가 낳는 문제들은 그저 계획의 부재로 환원됩니다. 에코 모더니즘은 지금의 생산 양식에 고유한 소비 형태가 자본주의 이후에도 지속된다고 상정함으로써 이 소비 형태를 자연화하고 탈역사화합니다. 기술도 물신화하죠. 기술에는 중립성이라는 아우라가 부여되곤 하는데, 사실 모든 새로운 발전과 혁신은 계급 관계에 의해서 형성됩니다. 에코 모더니스트들은 이른바 경제와 환경의 탈동조화, 그러니까 자원 추출과 폐기물 생산이라는 측면에서 영향을 가능한 한 최소화하는 것에는 거의 한계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바스타니가 “완전히 자동화된 화려한 공산주의”라고 정의한 체제는 지속 가능성 문제에 전혀 부딪히지 않고 확장될 수 있을 것처럼 보입니다. 그들이 내세우는 근거는, 발전된 국가들의 자본주의 하에서 이런 과정이 오랫동안 진행되어 왔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물질적 영향 측면에서는 효율성 향상을 부인할 수 없지만, 이른바 탈동조화에 관한 통계 대부분이 한 가지 사실을 빠뜨린다는 점입니다. 그것은 전 지구적 분업의 변화로 인해 발전된 국가들이 자국 국경 밖에서 진행되는 물질적 과정에 훨씬 더 의존하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즉, 제국주의 국가 기반의 다국적 기업이 통제하는 개발도상국의 산업 과정에 발전된 국가들이 의존하고 있는 것이죠. 우리가 처한 상황은 탈동조화라기보다는 생산 과정이 제3국으로 오프쇼어링(offshoring, 해외이전)된 상태고, 이 과정을 따라서 환경에 대한 영향이 “외주화”됩니다. 생태 발자국을 따질 때 이 “오프쇼어링”을 고려하면 탈동조화의 규모는 크게 축소되고, 어쩌면 완전히 사라질지도 모릅니다. 이토록 취약한 가정에 기반한 자동화된 화려한 공산주의를 믿으면 파멸로 이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에코 모더니스트들도 모든 달걀을 한 바구니에 담고 싶지는 않기 때문에, 흔히 양다리를 걸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만약 충분한 탈동조화를 달성하지 못하면 답은 우주 채굴(소행성에서의 금속 추출)에 달려 있고, 지구 곳곳에서 갈수록 지속 불가능한 방식으로 축적되고 있는 쓰레기는 우주 공간에 버리면 된다고 말입니다. 마지막으로, 에코 모더니스트들은 노동의 변혁보다는 노동의 제거를 더 많이 생각합니다. 데이브 비치는 이 경향을 본질적으로 반노동적인 것으로 봅니다. 이런 시각은 자기 해방의 주체, 다른 사회적 대사 작용을 수립하는 과정에서 어떤 역할을 수행하는 주체로서의 노동자 계급이 부재하다는 데서 드러납니다. 에코 모더니스트들은 자기들이 제안하는 가속주의가 체제의 수축(진통 *이유: 출산에의 비유인 것 같아서...)을 심화하고, 그러면 계획 가능한 탈자본주의를 낳을 것이라고 기대합니다. 그리고 부유층의 소비 패턴을 나머지 사회로 “민주화”하고 확장하기를 바라죠. 이런 패턴들이 유한한 지구의 한계 안에서는 보편화될 수 없기 때문에, 에코 모더니스트들이 환경 문제에 대해 우주적 해법을 끌어온다는 사실은 놀랍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남는 것은 바스타니 같은 주장들인데, 말하자면 일론 머스크나 제프 베이조스의 우주적 망상을 (화려한) “공산주의적”으로 변형한 것이죠. F: 이런 경향들에 맞서서 당신은 “에코 공산주의”라는 관점을 주장합니다. 에코 공산주의란 무엇입니까? 에코 사회주의와는 왜, 어떻게 다릅니까? M: 에코 공산주의라는 용어는 아리엘 페트루첼리의 신간 제목에서 따온 것인데, 이 책은 제 책과 거의 동시에 스페인어로 출간되었습니다. 이 용어가 생태 마르크스주의 내지는 에코 사회주의가 강조해야 할 핵심 쟁점을 전면에 부각시키기 때문에 저는 이 용어를 사용합니다. “해법”이 기술에서 나올지 대사 작용 축소에서 나올지 논쟁하는 대신에 우리는 생태 파괴의 초점들, 즉 자본주의와 이 착취적 사회 질서가 낳는 생산 관계를 공격하기 위해 필요한 사회 세력을 조직해야 합니다. 많은 비판적 생태론자들이 보기에, 심지어 일부 에코 사회주의자들에게도, 생산 관계는 일종의 “블랙박스”입니다. 탐구되지 않은 채 방치된 영역, 겨우 주변적으로만 언급되는 영역이죠. 이 사람들은 거대한 생산 계급인 임금 노동력과 생산 수단 사이의 소외 관계를 종식시키는 것이 핵심이라는 사실을 놓치고 있습니다. 에코 모더니스트와 탈성장론자 모두 서로 다른 이유와 논리에 따라 노동 시간 단축을 이야기하지만, 자본에 의해 착취당하는 노동이 자기 해방의 행위자이자 사회–자연 관계의 질적 전환의 행위자로서 주인공 역할을 한다는 사실을 누락합니다. 생산 수단에 대한 사적 소유의 독점을 종식시킨다는 것은 노동자 민주주의, 즉 생산하는 사람들인 동시에 생산된 것의 대부분을 소비하는 사람들의 민주주의를 현재 자본이 지배하는 영역까지 확장한다는 뜻입니다. 자본주의 체제에서 생산–소비는 교환 과정에 의해 매개되는 분화된 전체입니다. 이 안에서 사회적 필요는 재정적으로 타당한 수요로서만 표현될 수 있습니다(그리고 자본가들이 생산해서 판매하기로 사전에 결정한 이런저런 상품의 선택으로서만 나타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생산 수단을 사회화해야만 우리는 두 과정의 진정한 통일을 다시 수립할 수 있고, 이 안에서 생산은 사회적 필요를 충족시키는 데 기반합니다. 이것이 모든 계획을 향한 첫걸음이죠. 에코 사회주의자들의 논의는 “더 많이” 아니면 “더 적게”로 양극화되곤 했는데, 여기서 벗어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는 핵심적 측면이기도 하고요. 어떤 사회적 필요를 우선시해야 하는가에 기초해서 무엇을 생산할지 집단적으로 결정함으로써 사회와 자연의 대사 작용을 합리적으로 통제한다는 것이, 곧 자본주의가 남긴 환경 파괴의 유산과 관련된 어려운 결정을 피할 수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하지만 자본주의적 생산 관계의 재생산을 핵심 기능으로 하는 정부의 지원을 받아서 자본의 사적 권력에 의해 이 결정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생산 수단에 대한 통제권을 되찾은 생산 계급 전체가 이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한 제안을 만들어 낼 것입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세 가지 목표를 충족시킬 것입니다. 바로 근본적인 사회적 필요를 완전히 충족하고, 생산을 민주화하고, 자연과의 합리적 대사 작용을 수립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죠. 더 나아가 우리는 “수탈자를 수탈”함으로써 더 폭넓은 부 개념을 회복할 것입니다. 말하자면 자본주의가 끊임없이 늘어나는 상품을 판매하기 위해 조장해 온 부 관념, 풍요는 곧 무한한 소비주의로 연결되어야 한다는 관념과 단절하는 것입니다. 탈자본주의적 에코 모더니즘의 신기루는 자동화를 통한 노동의 종말을 상상하는데, 여기서 자본의 궁극적 구현체인 기계는 신적 현현으로 등장하지만, 무엇을 생산할지 결정하는 방식과 주체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말하지 않습니다. 그와 반대로, 우리가 이해하는 공산주의는 노동의 변혁, 노동과 자연의 관계를 핵심 물음으로 삼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자본이 강요한 소외 관계 때문에 박탈당한 모든 잠재력을 노동이 회복하고, 동시에 자연의 추상화를 끝내기 위한 초석입니다. 이것이야말로 필연의 영역에서 자유의 영역으로 이행하기 위한 전제 조건이고, 그 자유는 균형 잡힌 사회적 대사 작용을 전제합니다. 저는 자본이 폐지된 이후의 사회가 마주할 위험한 생태 위기에 대처하는 만능 해법을 제안하는 것이 아닙니다. 집단적 의사 결정에 기반한 새로운 생산 관계를 쟁취한다고 해서 자본주의가 초래한 생태 재앙을 하룻밤 사이에 고칠 수는 없습니다. 제가 내놓는 좀 더 냉철한 제안은, “완전히 자동화된 화려한 공산주의”의 기술 낙관주의적 프로메테우스주의로 우리 자신을 현혹할 필요도 없고, 탈성장론자들이 옹호하는 고난 때문에 체념할 필요도 없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모든 노동자와 공동체의 민주적 숙의에 기반한 사회, 소수 착취자의 수중에 있는 생산 수단을 사회화해서 이루어지는 계획적인 사회적 생산에 기반한 사회를 쟁취해야만, 우리는 사회적 필요를 온전히 충족시키는 동시에 균형 잡힌 사회적 대사를 (재)수립해 나갈 조건을 창출할 수 있습니다. Left Vovice에 2025년 8월 1일 실린 기사를 번역함 LINKS에 2025년 7월 21일 처음 게재됨 /* 본문 안 링크 스타일 */ #gpt-article a { color: #cc0000 !important; /* 진한 빨강 */ text-decoration: none !important; /* 밑줄 제거 */ } #gpt-article a:hover { color: #990000 !important; /* hover 시 더 진한 빨강 */ } -
[성명] 이주노동자와 정주노동자의 공동투쟁으로 죽음의 행렬을 멈추자23살 베트남 이주노동자 뚜안님은 3월 10일 새벽 2시 40분쯤 경기도 이천 자갈 가공업체 ‘중앙산업’에서 컨베이어벨트 끼임 사고로 사망했다. 2인 1조 근무원칙은 무시되었고, ‘혼자 점검하라’고 지시받았다. 그것도 컨베이어벨트가 작동하는 상황에서 점검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야간조에 세 명이 일하다 한 명이 그만뒀는데도 인원은 충원되지 않았다. 비상스위치도, 인터록 센서도, 덮개도 없었다. 정말 아무것도 없었다. 대신 이주노동자를 최대한 갈아넣어 이윤을 짜내려는 자본의 착취와 탐욕만 있었다. 고용노동부의 관리감독은 눈 씻고도 찾아볼 수 없었다. 이틀 후인 3월 12일 전북 부안의 플랜트 설비 제조공장에서도 20대 태국 이주노동자가 기계에 목이 끼여 숨졌다. 지난 2월에는 영암 대불산단에서 나흘 새 두 명의 노동자가 선박 블록에 깔리고 아르곤 가스에 노출되어 죽었다. 정말 처참한 죽음의 행렬이다. "산재 사망은 사회적 타살, 미필적 고의에 의한 살인"이라는 이재명과 "산재 감축에 직을 걸겠다"는 고용노동부 장관 김영훈의 화려한 말잔치 속에서 수많은 이주노동자가 비명소리도 지르지 못한 채 죽어가고 있다. 이들은 이주노동자를 사장에 철저히 종속시키는 고용허가제를 그대로 두고, 단속추방을 계속 밀어붙이면서 산재사망을 줄이겠다는 거짓말을 늘어놓고 있다. 사장 동의가 없으면 사업장을 바꿀 수 없는데, 자신의 권리를 말하면 바로 찍어내 추방시킬 수 있는데, 어떤 이주노동자가 자신의 권리를 요구할 수 있고 위험한 작업을 거부할 수 있겠는가? 이주민과 이주노동자의 권리가 없는데, 어떻게 안전이 존재할 수 있는가? 이천병원에 어렵게 차려진 빈소에서, 뚜안님을 추모하는 뚜안님의 동료와 친구들은 베트남 이주노동자들에게 이 억울한 죽음을 알리고 있다. 한국 정주노동자들과의 공동투쟁을 간절히 바라고 있다. 이 참혹한 죽음의 행렬은 이주노동자를 무권리 상태로 방치하며, 바로 그 권리 없는 노동자들에게 위험을 떠넘긴 결과다. 위험의 이주화를 끝내자! 고용허가제 폐지하라! 국적이 아니라 계급으로 단결하자! 이주노동자와 정주노동자의 공동투쟁으로 죽음의 행렬을 끝내자! 2026년 3월 13일 사회주의를향한전진
공지/성명/논평
온라인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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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전KPS비정규직지회 김영훈 지회장 인터뷰] 김충현 협의체 합의 이후에도 발전노동자 직접고용-총고용보장 쟁취투쟁은 계속된다2026-03-24 | 조회 1,296 -
[한노운사 연재 10회] 2부 전진과 격돌 (1988-1998) [4] 1996~98년 노동법 대격돌2026-03-24 | 조회 1,241 -
빅테크 자본에 투자하는 소로스 펀드는 집단학살에서 자유롭지 않다2026-03-24 | 조회 1,630 -
바로 지금, 원청에 맞서 싸울 수 있다는 작은 희망이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대대적 진출로 이어질 수 있다2026-03-24 | 조회 1,183 -
학살과 전쟁에서 이윤을 얻는 한국은 이미 제국주의 침략세력의 일원이다2026-03-20 | 조회 2,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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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노운사 연재 9회] 2부 전진과 격돌 (1988-1998) [3] 민주노총으로 가는 길2026-03-17 | 조회 3,553 -
연차 쓰겠다니 해고! 울산 워릭-덕스 영어강사 이주노동자들의 투쟁2026-03-13 | 조회 5,222 -
[번역] 탈성장 및 “화려한” 공산주의에 대한 에코 공산주의 대안2026-03-13 | 조회 5,142 -
여성대회 축사한 원민경 성평등부장관, 그는 살해된 이란 여아들의 죽음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을까?2026-03-12 | 조회 784 -
[한노운사 연재 8회] 2부 전진과 격돌 (1988-1998) [2] 1990~91년 전노협 건설과 민주주의 투쟁2026-03-09 | 조회 9,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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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Tạm biệt — 뚜안님 100일재에 동행하여 남기는 기록2026-03-09 | 조회 7,503 -
[기고] 3.8 여성의 날을 앞두고 들어본 반도체 노동자들의 목소리2026-03-08 | 조회 409 -
2026년 3.8 여성파업의 요구와 의미2026-03-08 | 조회 700 -
[번역] 국제선언: 미국과 이스라엘의 패배를 위하여! 트럼프와 네타냐후의 이란에 대한 제국주의 전쟁을 타도하라!2026-03-04 | 조회 8,478 -
[사회주의 기초학습#11] 오늘날 세계정세: 위기·파시즘·제국주의·전쟁에 맞선 노동자 국제주의2026-03-02 | 조회 12,416
우리의 투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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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포트] 미국과 이스라엘은 가자 집단학살, 이란 침략전쟁 당장 중단하라! 한국정부는 파병논의 중단하라!2026-03-23 | 조회 1,953 -
[발언] 故 뚜안 이주노동자 중대재해 사망사고 진상규명, 책임자처벌, 고소고발 기자회견2026-03-18 | 조회 3,413 -
[우리의 투쟁] 열사 정신 계승, 곧 죽은 자의 뒤를 산자가 따른다는 말은 이수 투쟁에 끝까지 함께하는 것2026-03-13 | 조회 4,979 -
[발언] 세계 여성의 날, 반제국주의 침략 전쟁에 반대하는 노동자 민중의 국제연대 투쟁이 필요합니다2026-03-10 | 조회 6,585 -
[리포트] 가부장제, 제국주의, 자본주의에 맞선 3.8 여성파업대회2026-03-09 | 조회 7,0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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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언] 3월 6일 오후 12시 반. 서울역 광장에 여성파업의 대오로 모여주십시오! 동지들!2026-03-05 | 조회 452 -
[발언] 저는 이제 동지들과 3.8 여성파업 현장에 서 있겠습니다2026-03-03 | 조회 568 -
[후기] 국민건강보험고객센터지부 단식농성 15일차, 계급적 연대로 직접고용 쟁취하자!2026-02-24 | 조회 10,342 -
[후기] '지혜복 교사는 공익제보자가 맞다' 2년 간의 투쟁과 연대가 만든 승리2026-01-31 | 조회 14,666 -
[후기] 세종호텔 로비농성 2주, 교섭은 바로 결렬, 복직까지 투쟁은 끝나지 않는다.2026-01-31 | 조회 14,93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