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노운사 연재 15회] 3부 패배와 퇴보 (1998-2008) [4] 민주노조운동의 위기
  • 해당된 기사를 공유합니다

온라인신문

[한노운사 연재 15회] 3부 패배와 퇴보 (1998-2008) [4] 민주노조운동의 위기

  • 양준석
  • 등록 2026.04.27 19:20
  • 조회수 17,399

한국 자본주의가 1990년대 중반을 분기점으로 쇠퇴기에 접어들자 자본가들은 IMF 외환위기를 계기로 정리해고 도입과 비정규직 확산으로 대표되는 신자유주의 공세를 전면화했다. 그로부터 몇 년 만에 비정규직은 전체 노동자계급의 절반을 훌쩍 넘어서게 됐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민주노조운동은 정리해고 도입을 막아내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비정규직 확산과 비정규직에 대한 착취·억압·차별의 심화를 방치했다.

 

이는 민주노조운동에도 심각한 위기와 퇴보로 되돌아갔다. 대기업 정규직만의 운동으로 쪼그라든 ‘민주노조운동’은 가장 착취당하고 억압받을 뿐만 아니라 노동자계급의 다수를 차지하게 된 비정규직들을 외면한 채 어느 정도 살 만한 소수만을 위하는 ‘집단이기주의’ 운동으로 사회적으로 취급받게 됐고, 스스로도 그렇게 빠져들었다.

 

‘민주노조운동’의 계급적 대표성 상실과 사회적 정당성 약화는 조직력 약화로 이어졌다. ‘민주노조운동’의 한계를 절감한 데 따른 패배주의와, 비정규직으로 굴러 떨어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결합하면서 대기업 정규직 속에는 보수적인 개인주의가 팽배해졌다. 대기업 정규직 ‘민주노조운동’의 대중적 기반은 빠르게 무너져 내렸다. ‘민주노조운동’의 약화는 대기업 정규직에도 자본의 더 강화된 공세를 가능케 했고, 이는 ‘민주노조운동’을 더욱 약화시켰다.

 

이전 편 보기

 

3부 패배와 퇴보 (1998-2008)

[시대배경] 신자유주의 구조조정

[1] 구조조정과 정리해고에 맞선 투쟁

[2] 민주노조운동의 후퇴와 비정규직 확산

[3] 비정규직 문제를 둘러싼 대결

[4] 민주노조운동의 위기

[5] 노동자 정치세력화 열망과 민주노동당

 

2005년 10월 20일 강승규 수석부위원장 비리사태에 따른 민주노총 집행부 총사퇴 기자회견이 열린 서울 영등포 민주노총 기자회견장에서 피켓시위를 벌이던 반대파 조합원이 기자회견장에서 밀려나와 부숴진 피켓과 함께 복도에 서 있다. © 시민의신문 양계탁

 

1) 정규직과 비정규직으로 분할돼 자본주의에 사로잡힌 노동자들

 

IMF 외환위기 이후 한국의 노동자들은 정규직과 비정규직으로 분할됐다. 비정규직이 최저생활로 내쫓기며 ‘빈곤화’하는 동안, 대기업 정규직은 ‘개량화’하는 역설적인 과정이 동시에 일어났다. 노동자들의 분할은 경제적 분할을 넘어 사회적 분할로 발전했다. 이는 정규직과 비정규직 모두가 자본주의 체제에 고통스럽게 사로잡혀 있으면서도 쉽사리 사태의 본질을 인식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대기업 정규직들은 대체로 1987년 노동자대투쟁 이후 민주노조운동의 성장과 쇠락이라는 경험을 집단적으로 함께 했다. 1987년 이후 한동안 대기업 정규직들은 ‘노동자들이 단결하고 투쟁하면 많은 것을 성취할 수 있으며 나아가 세상을 송두리째 바꿀 수도 있다’는 희망과 자신감을 공유했다. 그러나 IMF 외환위기 시기 대규모 정리해고 공세 앞에서 한편으로 민주노조가 갖는 힘의 한계를 절감하고 다른 한편으로 지도자들의 배신에 절망하거나 길들여졌다. 대기업 정규직들의 의식에는 결정적인 변화가 일어났다. 대기업 정규직들의 뇌리 깊숙이에는 ‘신자유주의 세계화라는 거대한 흐름 속에서 자본이 무자비한 공세로 나오는데 노동자들이 아무리 노동조합으로 단결하고 투쟁하더라도 이겨낼 수 없다’는 패배적인 의식이 강하게 자리 잡혔다.

 

하지만 대기업 정규직들은 자본의 대규모 정리해고 공세에 맞서 만만치 않은 저항력을 보여주기도 했다. 이 때문에 일상적 구조조정의 시기로 넘어온 이후 자본의 공세는 주로 비정규직에 집중됐으며, 정규직에 대한 공세는 임금과 고용을 보장하는 대신 노동강도를 높이는 형태로 펼쳐졌다.

 

상대적으로 높은 임금을 받음으로써 일정한 여유자금까지 굴릴 수 있게 된 다수 대기업 정규직들은 2000년대 초반 이후 금융자본이 주도한 부동산·주식 거품 팽창에 합류하면서 덩달아 명목상 자산가치가 급등했다. 처음에는 주식에 손대다가 낭패를 보는 경우도 많았지만, 나중에는 거품이 워낙 팽창한 탓에 부동산과 주식에 뛰어들어 번 돈이 임금 소득과 엇비슷한 경우도 그리 드물지만은 않게 됐다. 다수의 대기업 정규직들은 갑자기 많은 돈을 만지게 되자 씀씀이가 크게 늘어났고 그럴수록 물질적 과시욕과 더 많은 소비에 빠져들었다.

 

노동자들이 정규직과 비정규직으로 분할된 현실은 대기업 정규직의 의식에 큰 영향을 미쳤다. 다수의 대기업 정규직들은 비정규직의 비참한 삶을 바라보며 연민이나 연대의식을 느끼는 것 이상으로 상대적으로 나은 노동조건과 소비능력을 가진 자신에 대한 우월감과 안도감을 느꼈다.

 

IMF 외환위기의 충격적인 경험을 잊지 못하는 대기업 정규직들은 어느 날 갑자기 정리해고 위협 앞에 다시 서게 될지 모른다는 두려움을 늘 떨치지 못했다. 그런데 그럴수록 다수의 대기업 정규직들은 정리해고 당할 가능성을 줄이고 정리해고 당하기 전까지 최대한 벌어두기 위하여 회사가 잘 나가고 우리 부서에 보다 많은 일감을 끌어올 수 있도록 적극 협력해야 한다는 ‘노사협조주의’와 ‘물량지상주의’에 빠져들었다.

 

IMF 외환위기 이후 대기업 정규직들의 의식은 과거의 상당히 선명했던 노동자 의식과 매우 다르게 뒤죽박죽 완전히 헝클어져 버렸다. 나날이 강화되는 노동 강도는 그들의 삶을 더욱 지치게 만들었지만, 갈수록 비인간적인 노동으로 내모는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의식은 좀처럼 성장하지 못했다.

 

한 때 초보적인 수준이나마 어느 정도 형성됐던 정규직의 계급의식은 ‘해 봤지만 안 되더라’는 패배주의, ‘돈 쓰는 재미’에 허우적거리는 소비주의, ‘비정규직에 비하자면 이게 어디냐’는 배부른 노예의 심리, ‘벌 수 있을 때 악착같이 벌어야 한다’는 초조함 따위에 갉아 먹히며 왜곡과 타락, 나아가 해체의 과정을 밟아갔다.

 

IMF 외환위기 이후 1500만 노동자의 절반을 넘어 850만에 이른 비정규직은 정규직에 비해 상대적으로 다양한 사회적 구성을 가졌다. 처음부터 비정규직으로 일한 젊은 노동자들, 정규직으로 있다가 비정규직으로 밀려난 나이든 노동자들, 정년퇴직 이후에 다시 비정규직으로 일하는 늙은 노동자들, 가사노동의 부담까지 이중으로 안고 사는 여성 노동자들, 학비나 용돈을 마련하려는 학생 노동자들, 높은 학력에도 안정된 일자리를 구하지 못하는 지식인 노동자들, 소규모 자영업을 하다 몰락한 노동자들, 농사를 짓다 망한 노동자들, 머나먼 한국으로 돈 벌러 온 이주 노동자들 등등.

 

그 고용형태 또한 가지각색이었지만, 비정규직은 늘 고용불안에 시달려야 했다. 대다수 비정규직의 임금은 법정 최저임금을 넘나들거나 그보다 약간 높은 수준에 걸쳤다. 노동 강도 또한 매우 높았다. 갈수록 인간 이하의 삶으로 내몰리지만, 비정규직의 굴레를 벗어날 길이 도무지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비정규직이 놓여 있는 비참한 조건이 곧 선명한 노동자 의식을 만들어 주지는 않았다.

 

비정규직은 대체로 1987년 이후 펼쳐진 민주노조운동을 경험하지 못했다. 대다수 비정규직은 노동자들의 단결과 투쟁이 만들어 내는 힘을 최소한의 수준에서도 경험하지 못했다. 이질적인 사회적 구성과 불안한 고용 그리고 작업장의 분산 등은 초보적인 단결마저 더욱 어렵게 했다. 그래서 비정규직은 초보적인 노동자 의식조차 쉽사리 세우지 못했다.

 

노동자들이 정규직과 비정규직으로 분할된 현실은 비정규직의 의식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정규직을 ‘마녀사냥’하는 자본가들의 이데올로기 융단폭격 속에서, 상당수 비정규직은 자신들이 처한 비참한 현실의 책임이 자본주의 체제나 자본가가 아니라 ‘집단이기주의에 빠진’ 정규직에게 있다고 여겼다. 정규직에 대한 부러움과 원망 그리고 분노는 비정규직이 자본주의 본질을 꿰뚫는 계급의식의 형성으로 좀처럼 나아가지 못하도록 방해했다.

오늘날 민주노조운동은 심각하게 병들어 있다. ‘노동계급의 단결’을 실현하려는 정신은 심각하게 퇴행하여 대중운동 자체가 사업장·고용형태 등 갖가지 울타리 속에 갇힌 채 분열되어 있다. 외형적으로는 산별연맹을 넘어 산별노조 건설이 대세로 되는 시대지만, 민주노조운동이 폭발적으로 터져 나오던 80년대 후반 대중적으로 실현되었던 계급적 연대의 수준은 흘러간 옛이야기가 되어버렸다.

여기에 기아·현대자동차노조 일부 타락한 간부들의 취업비리와 민주노총 전 수석부위원장의 비리 사건이 겹쳐져, 민주노조운동의 위기는 더욱 깊은 수렁으로 빠져들고 있다. 마치 망망대해에 떠있는 난파선처럼 방향을 잃어버린 노동자들은 어디에서 희망을 찾아야 할지 고통스러워하고 있다. 노동자계급의 단결과 연대, 투쟁의 정신이 심각하게 후퇴한 현실의 민주노조운동 속에서 비정규직노동자투쟁은 심각한 고립과 박탈의 장벽에 부딪혀야 했고 자본과 정권에 의해 각개격파 당해야 했다.[1]

비정규직 노조운동은 도덕적 우위는 갖고 있되 대중적 힘은 아직 갖고 있지 못했다. 자본가들이 노동조합 건설과 활동이 거의 불가능하도록 설계하여 법과 제도로 옭아매고 있는 비정규직들 속에서 노동조합의 뿌리를 내려간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다. 비정규직 대다수가 정규직에 대한 부러움과 원망 그리고 분노에 사로잡힌 채 자본주의 본질을 꿰뚫는 계급의식으로까지 나아가지 못함으로써, 비정규직 운동은 스스로 큰 힘을 만들어 내지 못했고 정규직 운동의 한계를 넘어 노동자계급 전체를 결집시키는 구심점으로도 서지 못했다.

 

2) 현대차노조의 위기

 

현대차노조는 1995년 양봉수 열사 분신투쟁을 계기로 민주노조를 재건하여 1996~97년의 노개투 총파업에서 핵심 투쟁동력으로 역할하면서 민주노조운동의 중심으로 부상했다. 여기에 1999년 현대자동차서비스와 현대정공 자동차생산부문의 현대자동차 통합을 계기로, 현대자동차서비스노조와 현대정공노조까지 통합되면서 더욱 덩치가 커졌다. 현대차노조는 조합원 수가 3만에서 4~5만으로 늘었고, 울산공장·아산공장·전주공장의 생산직·사무직에 판매·정비·연구 분야까지 다양한 직군들을 망라하게 됐다. 단일 자동차공장으로는 세계 최대 규모인 울산공장을 주된 기반으로 하면서도 ‘한라에서 설악까지’라는 노보 이름처럼 전국적 조직망을 갖게 됐다.

 

현대차노조는 민주노조 재건 이후 1996년부터 2008년까지 매년 임금·단체협약·고용을 둘러싸고 파업을 전개했다.[2] 현대차노조의 파업은 노조의 조직력과 컨베이어 작업의 특성이 결부되면서 거대한 공장의 생산을 확실히 중단시키는 힘을 갖고 있었다. 또한 5~6천 명에서 1~2만 명 정도가 모이는 자체 조합원 집회를 수시로 개최할 수 있는 힘도 갖고 있었다.

 

2000년대 초중반 현대차노조가 가진 투쟁력은, 민주노총 산하 제조업 단위노조 대다수의 투쟁력이 부실해진 상황과 맞물리면서 상대적으로 더욱 돋보였다. 따라서 그 시기 현대차노조는 민주노총과 금속연맹이 전개하는 다양한 총파업에서 핵심 동력 역할을 했다.

 

현대차노조의 중심적 위치를 뒷받침하는 또 하나의 요소는 ‘노동자 정치세력화’였다. 2000년대 초중반 현대차노조 조합원들이 밀집 거주하는 울산 북구는, 민주노총의 후원을 받은 민주노동당이 국회의원, 구청장, 시의원, 구의원을 절반 이상 휩쓸었다.[3]

 

그러나 2000년대 중반 현대차노조는 여러 측면에서 위기에 직면했다. ‘현대차의 내부 상황을 들여다보면 현대중공업 못지않게 무너졌다’는 목소리도 심심치 않게 나왔다.

현장 노동운동이 거의 초토화되고 수십 명의 고립된 활동가들만이 남은 채 노동조합 자체가 완전한 노사협조주의로 전락한 현대중공업의 노동운동과, 민주노총의 중심 사업장으로 여전히 역할하고 있는 강력한(?) 노동조합을 가진 현대자동차의 노동운동은, 적어도 현 시점에서는 분명히 큰 차이가 있다.

그러나 “이미 중공업 못지않게 다 무너졌다”는 탄식을 근거 없는 비관주의로만 몰아붙이기에는 사태의 전개가 그리 단순하지 않아 보인다. 전·현직 노조간부들이 채용비리에 연루되어 줄줄이 구속되고, 조합원의 2/3가 노조간부들의 ‘빨간 조끼’를 특권과 관료주의의 부정적인 상징으로 인식하며, 비정규직과 현장 활동가들에 대한 관리자·경비들의 폭력이 일상화되고 있는 최근의 상황 전개는 현대자동차노조가 겪고 있는 ‘위기’의 폭과 깊이가 결코 간단치 않음을 보여준다.

현대자동차노조가 만만치 않은 위기를 겪고 있다는 것은, 노조 스스로가 혁신위원회 구성에 나설 만큼 이미 ‘공식적이고 공공연한’ 사실이다.[4]

◎ 위기의 근원 - 1998년의 패배와 대안의 부재

 

1998년 이전에 현대차노조 조합원들은 여러 차례 ‘가장 전투적인 노선과 세력’을 선택했다. 그 시기에는 ‘전투적이고 계급적일수록 대중적인’ 상황이 흔하게 벌어졌다. 조합원들은 기존 집행부의 직권조인, 노사협조주의, 투쟁회피를 단호하게 비판하며 점점 더 전투적인 세력을 집행부로 밀어 올렸다. 상당한 명망을 가진 이들도 조합원들의 투쟁의지를 제대로 받아 안지 못하면 한 번에 무너지는 것을 자주 볼 수 있었다. 도중에 조합원들이 어용 집행부를 다시 선택하는 일이 있었지만, 그것은 민주 집행부의 투쟁회피에 대한 실망 때문이었다.

 

비 온 뒤에 땅이 더 굳어지는 것처럼, 1995년 어용 집행부 아래서 벌어진 양봉수 분신과 비공인파업을 거치면서 조합원들의 마음에는 민주노조가 더 굳세게 뿌리내렸다. 1996~97년 노개투 총파업과 1998년 정리해고 저지투쟁에 열성적으로 참여하던 조합원들의 가슴 속에는 민주노조를 통해 세상과 삶을 바꿔내겠다는 열망과 자신감이 가득했다. 그러나 1998년의 패배는 조합원들의 의식에 큰 타격을 가했다.

 

조합원들은 1998년의 패배를 ‘노동조합은 앞으로도 정리해고를 막아내지 못할 것’이라는 의미로 받아들였다. 그렇게 열심히 잘 싸웠는데도 패배했는데, 앞으로는 패배의 경험 때문에 그만한 투쟁도 만들어지지 않을 것이고 따라서 패배가 더욱 불가피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민주노조로 단결한다면 세상을 바꿔내고 우리의 삶을 지켜낼 수 있으리라는 믿음이 깨져 나갔다. 이제 민주노조를 믿을 수 없다면, 각자가 살 길을 찾아야 했다. ‘일상적인 고용불안’에 시달리게 된 조합원들은 머지않아 회사가 다시 정리해고의 칼날을 겨누기까지 최대한 많은 돈을 벌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제 노동조합에게 바라는 것은 과거와 같은 ‘민주노조를 통한 위대한 투쟁과 변화’가 아니라 (어떤 방법을 써서든) 당장 한 푼이라도 더 벌게 도와달라는 것이었다.

 

조합원들이 이렇게 냉소적인 태도를 굳히게 된 데에는 패배의 상처를 극복할 진정한 대안을 제시하는 활동가들이 현대차노조 안에 사실상 부재했다는 점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1998년의 패배는 정리해고를 결코 받아들일 수 없다는 조합원들의 투쟁의지를 지도부가 배신하는 형태로 전개됐다. 만일 현대차노조 안에서 전투적·변혁적 활동가들이 1998년의 노조 지도부가 가졌던 투항적 노선을 단호하게 비판하면서 강고한 계급적 단결투쟁의 건설이라는 대안을 명확히 제시하고 일관되게 실천해 나갔다면, 상황은 많이 달랐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되지 못했다.

 

현대차노조 안에도 전투적·변혁적 지향을 가진 활동가들이 상당한 규모로 존재했다. 1995년 현장조직 민투위로 결집한 이들 현장파 활동가들은 1996~97년 노개투 총파업과 1998년 정리해고 저지투쟁을 아래로부터 주도했다.[5] 그러나 2001년 민투위 집행부는 김대중 정권의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에 맞선 대반격의 분수령이 될 수도 있었던 7·5 총파업에 불참하여 사실상 무산시킴으로써 계급적 단결투쟁의 대의를 정면으로 배신했다. 2004~05년의 민투위 집행부는 비정규직 노조가 100여 명의 해고자를 내며 처절한 투쟁을 이어가는 데도 사실상 외면했는데, 역시 계급적 단결투쟁의 대의에 대한 정면 배신이었다.[6]

 

민투위 활동가들은 왜 자신의 주장을 일관되게 실천하지 못했을까? 그 핵심 원인은 사상적으로 견결하게 단련되고 무장하지 못한 점에 있었다. 현장 조합원들 사이에서 전투적인 분위기를 주도하면서 투항적이고 타협적인 지도부를 비판하는 것과 노동조합 집행부를 맡아 정권과 자본의 십자포화를 뚫고 전투적·변혁적 노선을 관철해 나간다는 것은 차원이 다른 문제였다. 민투위 활동가들은 비판적 현장활동에는 능숙했지만, 계급적 단결투쟁을 과감하고 단호하게 이끌고 나갈 준비는 돼 있지 않았다.

물론 민주노조에 큰 희망을 걸었던 조합원들에게 결정적인 좌절감을 안긴 책임이 현장파 활동가들에게만 있지는 않았다. 중앙파 집행부는 1998년 정리해고 저지투쟁에서 투항적 노선을 고집함으로써 자멸적 패배를 초래했다. 국민파 집행부는 2000년 사내하청 대규모 투입을 주도했고, 한겨레신문 광고비 대납 사건을 일으켰다.[7]

 

그런 점에서 현대차노조 조합원들에게 ‘1998년의 패배’란 1998년 정리해고 저지투쟁에서의 패배를 정점으로 하되, 1996~97년 노개투 총파업의 패배, 1998년 2월 민주노총의 정리해고 노사정 합의, 2000년 사내하청 대규모 투입과 광고비 대납 사건, 2001년 현대차노조의 7·5 총파업 불참 등 일련의 사건들로 이어진 복합적이고 총체적인 패배였다.

 

조합원들의 의식을 변화시킨 또 하나의 변수는 회사의 집요하고 치밀한 이데올로기 공세였다. 회사는 1998년 투쟁 이후 다양한 사내 언론 매체를 구축하고 일상적 이데올로기 공세를 지속적으로 전개했다.

 

회사가 펼친 이데올로기 공세의 핵심은 고용불안을 조장하는 것이었다. 국내외 경제사정이 어려워서 회사 전망이 불투명하다는 선전은 수시로 되풀이되는 단골 메뉴였다. 조합원들이 갖게 된 두려움, 즉 회사가 어려워지면 머지않아 또 정리해고가 올 것이고 그 때는 노조가 더 형편없이 막지 못할 것이라는 두려움을 회사는 십분 활용했다. 회사가 어렵다는 분위기가 확산될수록 조합원들은 고용불안에 시달렸고 악착같이 돈을 벌어야겠다는 심리 상태로 빠져들었다. 2000년대 초중반 현대차는 창사 이래 최대 매출, 최대 순익의 기록을 거듭 갈아치우면서 초국적 자본으로 도약[8]하고 있었지만, ‘회사 전망이 불투명하다’는 집요한 선전은 조합원들 사이에서 상당한 효과를 보았다.

 

회사의 이데올로기 공세는 종업원 의식을 강화하고 계급적 단결투쟁을 차단하기 위한 것이기도 했다. 고용이 안정되려면 회사가 잘 나가야 하니, 회사의 경쟁력을 위해 조합원이 양보하고 협력해야 한다고 선전했다. 현대차의 울타리를 벗어난 연대투쟁이나 총파업 참여는 조합원(종업원)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남의 일 관여’나 ‘정치투쟁’일 뿐이라고 규정하면서 회사의 경쟁력을 약화시켜 고용불안을 초래할 것이라고 공격했다. 비정규직 투쟁이 시작된 이후에는 사내하청을 집요하게 ‘다른 회사 사람’으로 규정하며 정규직 사이에서 단결과 연대 의식이 성장하지 못하도록 방해했다.

 

◎ 위기의 양태 - 계급적 전망을 상실한 채 물량확보에 몰두

 

현대차노조 조합원들이 빠져든 ‘일상적인 고용불안’ 정서는 ‘물량을 확보해야만 고용을 지킬 수 있다’는 생각으로 이어졌다. 대다수 활동가들 역시 조합원들의 고용을 보장해주기 위해서는 물량을 확보하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활동가들이 점점 더 물량확보 투쟁과 신차확보 투쟁에 집중하면서 ‘물량이 곧 고용’이라는 왜곡된 논리가 확대재생산 됐다.

 

당장 한 푼이라도 더 많은 임금을 중요시하게 된 조합원들은 1998년 이전과 달리 잔업과 특근을 선호하게 됐다. 조합원들은 ‘벌 수 있을 때 최대한 벌기 위해’ 최대한의 잔업과 특근을 원했다. 잔업과 특근을 할 만큼 충분한 물량이 있는 한 자신이 ‘잘릴’ 염려는 없다고 위안할 수 있다는 점에서도 잔업과 특근을 원했다.

요즘 … 어느 사업부 할 것 없이 … 빨간 날짜는 빈틈없이 공장을 가동시키고 있다. 이런 실정이다 보니 한 달 특근이 5~8개는 우습게 넘고 있다. … 현장의 대·소위원들도 특근에 있어 어떠한 큰 사안이나 큰 명분 없이 특근거부가 조직되는 것은 예전처럼 쉬운 일이 아니라서 원칙적 문제제기에 맴돌고 있는 실정이다. 특근을 희망하는 현장의 요구 또한 만만치 않아 현장의 대소위원들의 입장이 곤란한 지경까지 온 것이다.[9]

대의원대회에서 일요 특근을 안 하기로 결의했지만 일부 공장에 특근이 이루어지면서 일어나는 불협화음이 조직력 훼손을 우려할 만큼 심각한 수준으로 확대되고 있다. … 조합원들은 특정사업부나 부서의 특근 소식에 예민하게 반응하고 집행부나 대의원, 활동가를 대상으로 불만을 토로한다. 심지어는 급여수준은 노동조합 지침에 따르는 정도에 반비례한다는 자조적인 비난이 … 고개를 들고 있고, 특근하지 말자는 대의원에게 ‘왜 우리만 희생양이 되어야 하냐’고 따지는 조합원도 많다고 한다.[10]

계속되는 철야 특근은 시급제 노동자들의 육체만이 아니라 정신까지 갉아먹어 이제는 ‘내 철야 내가 하는데 노동조합이 뭔 상관이냐’, ‘너거 마음대로 철야 거부하냐’는 등의 반발 때문에 현장의 간부와 노동조합은 철야를 함부로 제한하지 못한다.[11]

2003년 주5일제(주40시간제)가 도입됐지만, 실제로는 연간 3,000시간에 육박하는 노동시간이 2000년대 초중반 내내 현대차에서 계속됐다. 주야맞교대를 하면서 주당 60~70시간의 장시간 노동을 하는 게 일반적이었다. 그러다 보니 현대차에서만 매년 10명을 넘나드는 과로사가 계속 발생했다.

지금 전 공장이 철야 특근으로 밤을 새고 있다. … 각 사업부별 공장장에게 경쟁 심리를 조장하여 생산량 달성에 순위를 매겨 미달성 사업부 공장장은 잘라버리겠다는 협박을 서슴지 않는다. … 집행부에서는 각 사업부 특성에 맡겨 사업부 대의원회에서 알아서 하라는 입장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노동조합이 조합원의 건강권을 포기하고 과로에 목숨을 걸도록 하는 아주 무책임한 일이 아닐 수 없다. … 노동조합이 이렇게 휴일 특근 철야를 부추기는 양상은 절대 바람직하지 못하다. 01년 울산공장에서는 총 19명의 과로사가 발생하였다. … 올해도 벌써 7명의 조합원이 과로사로 목숨을 잃었다.[12]

물량확보에 대한 조합원의 몰두는 생산계획 달성이라는 자본의 이해관계와 정확히 일치했다. 현대차 자본은 생산계획 달성을 최우선의 목표로 삼았는데, 생산계획은 생산설비가 허용하는 최대치로 설정됐다. 이런 사측의 생산계획을 노동자들이 스스로 달성하기 위해 노력하고, 나아가 더 많이 생산할 것을 요구하게 된 것이었다. 당연히 그 과정에서 신규인원 충원, 노동시간 단축, 휴식시간 확보, 노동강도 저하 같은 요구들은 제대로 제기될 수 없었다.

 

노조가 물량확보에 몰두하면서, ‘투쟁’을 하면서도 잔업·특근을 계속하거나 회사의 생산계획을 모두 달성하는 어처구니없는 모습도 나타났다. 역으로 회사는 잔업·특근을 시혜적으로 베풀거나 또는 뺏어버림으로써 물량을 갖고 노동자들을 통제할 수 있게 됐다.

작년 12월 회사 측은 3공장 대의원회에 8개의 토·일 철야생산을 요청하였고, 성탄절도 철야생산을 요청하였다. … 올해 1월에는 내수시장 위축으로 철야생산을 할 수 없다고 한다. … 문제는 갑작스레 철야생산이 없어지다 보니 현장조합원들이 고용불안을 심각하게 생각한다는 것이다. … 현장조합원들은 물량감소로 또다시 고용위기가 오는 것 아니냐며 불안해한다. … 현장에서는 ‘일 없을 때는 알아서 조심해야 한다’는 말이 공공연하게 나돌고 있다.[13]

작년 3공장 조합원들은 주말에도 … 몸이 부서지도록 일을 했다. 또한 일이 많을 때 한 푼이라도 벌어놔야, 나중에 일거리가 없고 회사에서 내팽개치더라도 최소한의 준비를 위해 죽을 둥 일을 했다. 사측은 조합원들의 불안한 심리와 주말 특근에 맞춰진 생활임금을 이용하여 생산물량이 없다는 핑계로 17대 대의원들을 시험하면서 현장을 사측이 원하는 대로 만들려 하고 있다. … 조합원들의 불안감을 이용하여 사측이 물량을 조절할 경우 파업 한 번 할 수 있을지 걱정이 된다. … 이대로라면 사측에 의하여 눈치도 채지 못하고 현장권력이 잠식당할 것만 같다.[14]

4공장 조합원들이 … 수개월째 8+10 근무형태가 계속되고 있다. … 4공장 고용안정대책위가 구성되어 단협을 준수할 것을 요구하며 철야농성에 돌입한 바 있다. … 4공장 물량부족 사건의 발단을 보면, 지난 2000년 그레이스 차종을 기아 광주공장으로 이관할 당시 사측은 … 신규모델 투입을 약속했으나 일방적으로 신차 개발을 취소하였고, 02년에는 수출물량을 … 일방적으로 터키로 이관했다. … 사측이 이 문제에 대해 진정 책임지는 자세라면 8+10의 근무형태가 계속 이어져서는 안 된다. … 사측은 … 타 사업부에 대해 … ‘4공장을 봐라. 일이 있을 때 특근 등 열심히 일을 하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15]

지난주 3공장 대의원회는 치열한 논쟁 끝에 철야근무를 하기로 결정했다. … 잔업을 끊은 사업부 대표가 고소고발 되고 강병태 소위원이 해고가 결정되었음에도 철야를 강행한다니 이해가 되지 않는다. 더구나 이번 철야는 재고비축 철야로서 … 투쟁해야 할 시기에 철야를 하는 것은 옳은 일이라 할 수 없다.[16]

불과 한 달 전까지만 하더라도 2공장에 대해 10-10 근무에 철야를 강요하던 사측이 갑자기 4월 생산계획 설명회에서는 … 재고가 쌓여 8-8근무를 시킬 수밖에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 이는 사측의 고도화된 술수로 조합원의 생존권을 유린하는 작태이자 기만행위이다. … 이는 사측이 … 전반적인 물량 축소를 통해 현장을 혼란에 빠뜨리고 불파 문제를 비롯한 모듈 협상과 CM카 조기투입을 위한 각종 협상에서 우위를 점하기 위한 얄팍한 술수이다.[17]

사측은 안전사고로 인한 라인 정지에 대한 어떠한 면책합의도 없다며, 5명의 대·소위원들이 고소고발, 손해배상, 징계를 받아들이지 않을 경우, 5공장 전체 조합원들에 대해 잔업과 특근을 취소하겠다며 협박했다.[18]

노조가 물량에 몰두하며 생산에 적극 협조한 것은 회사에 큰 이득을 안겨 주었지만, 회사의 욕심은 그에 그치지 않았다. 회사가 보기에 현대차노조 조합원들의 임금은 너무 높았다. 회사는 노조의 힘이 미치지 않는 공간으로 생산을 최대한 이동시키고자 했다. 사내하청을 확대하거나, 사외에서 제작되는 모듈의 비율을 확대하는 게 그 방안이었는데, 비정규직 노조가 2003년에 출범한 이후로는 모듈외주화 확대가 주된 방안이 됐다.[19]

 

회사는 각 사업부에 신차가 투입될 때마다 모듈외주화 비율을 점점 높여 나갔다. 회사는 각 사업부에 신차를 배정해서 물량을 보장해 주는 대가로 그와 같은 일상적 구조조정을 관철시켰다. 신차가 투입될 때마다 모듈외주화 확대에 맞선 투쟁이 사업부별로 진행됐지만, 회사의 의도가 거의 그대로 관철됐다.

 

회사는 종종 복수의 사업부에 동일한 물량 배정을 약속함으로써 사업부 간 물량경쟁을 유도했는데, 노조 내부의 분열을 조장하여 더욱 용이하게 구조조정을 관철하기 위해서였다.

신차 JM카 투입을 앞두고 사측의 일방적 합의사항 파기로 인해 2공장 대의원회가 2주째 천막 철야농성을 벌이고 있다. 문제는 회사가 JM카 생산을 2공장 물량으로 합의해 놓고, 뒤로는 5공장에 20만대 생산설비 체제를 갖추는 식으로 이중 합의를 통해 물량을 가지고 노노 분열을 조장하고 있다는 것이다. 회사는 그동안 물량 이관이 있을 때마다 해당 사업부에 선 물량보장 후 약속파기를 하는 수법으로 장난을 쳐왔다. 이것은 2공장 트라제, 3공장 라비타, 4공장 그레이스 물량이전에서 잘 말해주고 있다.[20]

모듈외주화로 현대차에서 일감이 빠져 나간 곳은 현대모비스와 현대글로비스를 중심으로 철저히 수직계열화 돼 있는 소규모 부품하청업체이거나 또는 비정규직으로만 구성된 현대모비스 모듈조립공장이었다. 이런 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은 대체로 법정 최저임금에 턱걸이하는 수준이었으며, 열악한 근로조건과 높은 노동강도 때문에 6개월 근속이면 왕고참 취급을 받을 정도로 유동성이 심했다. 동일한 물량을 놓고 현대차 안에서 정규직이 작업하는 경우와 부품하청업체에서 비정규직이 작업하는 경우를 비교하면, 노무비가 두세 배 정도 차이가 났다.

 

그러나 모듈외주화 확대에 대한 현대차노조의 대응은 사실상 무대책이었다. 신차투입 협상이 시작될 때마다 ‘모듈외주화 저지’의 목소리들이 쏟아지지만, 머지않아 결국 현재의 고용을 (그것도 대개 사내하청을 제외한 정규직만의 고용을) 보장받는 선에서 회사의 모듈외주화 계획을 거의 그대로 수용하며 타결됐다. 그리곤 무관심이었다. 모듈외주화로 빠져 나간 일감이 어떤 조건의 노동자들에 의해 만들어지는지, 그들이 처한 열악한 노동조건이 자신들의 미래와 어떤 상관이 있을 것인지 최소한의 관심도 없었다.

 

이미 절반 가까운 물량이 모듈 작업으로 처리되는 상황에서, ‘모듈외주화 저지’만으로 사태에 대처할 수는 없었다. 모듈 작업이 이루어지는 공정의 노동자들을 노동조합으로 조직해 내고 그들의 노동조건이 현대차 내부의 노동조건과 유사한 수준까지 개선될 수 있게 하는데, 현대차노조는 누구보다 사활적인 이해관계를 갖고 달려들어야 했다.

 

그러나 2000년 무렵 현대차에서 모듈화가 공론화되기 시작한 뒤 자본은 생산과정에 엄청난 변화를 만들어 갔지만, 모듈공정 노동자 조직화 등에 대한 현대차노조의 대응은 거의 아무 것도 진전된 게 없었다. 현대차노조 전반이 계급적 전망을 상실한 채 눈앞의 물량확보에만 몰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정규직 임금의 60%밖에 받지 못하는 사내하청, 강제적인 단가인하의 부담을 고스란히 떠안는 부품하청업체 노동자들에 대한 초과착취를 성공적으로 관철시키며, 현대자동차 자본은 엄청난 이윤을 챙겼다. 그러나 현대차노조는 계급적 전망의 부재를 고스란히 드러냈다. 사내하청의 임금 인상을 생색내기 수준에서 건드렸을 뿐, 부품하청업체 노동자들이 강요당하던 초과착취 문제에 대해서는 거의 무대책으로 일관했다.

 

현대차노조의 계급적 전망 상실은 사회적 고립의 위기로 돌아왔다. 특히 총자본과 보수언론의 이데올로기 공세를 넘어 광범한 노동자·민중으로부터 고립돼 가는 위기였다.

 

현대차노조 조합원들은 2000년대 초반을 경과하면서부터 명절에 고향 가는 발걸음이 예전 같지 않아졌다. 고향에 가서 친척·친구들과 나누는 이야기들이 결코 즐겁지 않았기 때문이다. 예전에는 현대차노조가 정권과 자본의 무수한 탄압에 맞서 노동자·민중의 선봉에서 투쟁하는 존재로 간주됐기에 고향의 친척·친구들로부터 격려를 받았고, 투쟁의 무용담을 늘어놓기도 했다. 하지만 상황이 달라졌다. 현대차노조의 권리 향상은 전체 노동자·민중의 권리 향상과 별 상관이 없으며, 심지어 전체 노동자·민중의 권리를 침해한다는 비난까지 받게 됐다. 예전에는 선봉 투사로 추켜세우던 고향의 친척·친구들이 이제는 보수언론의 논리들을 줄줄 읊어대며 냉소적인 비난을 퍼붓기 시작했다.

 

현대차노조 조합원들이 가까운 친지들에게까지 느끼게 된 ‘사회적 고립’은 일차적으로 ‘현대차노조를 비롯한 대기업 노조의 이기적인 행동이 경제를 망친다’는 보수언론의 집중적인 이데올로기 공세 때문이었다. 하지만 과거에 안 먹히던 이데올로기 공세가 먹히게 된 이유가 있었다. 노동자계급 내부의 양극화였다. 정규직과 비정규직, 대기업과 중소영세기업 노동자들 사이의 격차가 IMF 외환위기 이후 갈수록 벌어졌다. 실업과 개인파산도 만만치 않은 수준이었다.

 

물론 그러한 양극화를 불러온 것은 일차적으로 자본의 책임이었다. 하지만 민주노조운동 또한 그러한 양극화를 해결하기 위해 어떤 식으로든 자기 역할을 요구받았다. 자본가계급은 보수언론을 앞세워 중소영세 비정규직을 위해 대기업 노조가 양보하라고 공격했다. 하지만 그것은 자본가계급에게만 좋은 일이기에 민주노조운동이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방향이었다. 민주노조운동이 가야 할 길은 중소영세 비정규직의 요구를 전면적으로 함께 내걸고 제대로 투쟁하는 것이었다. 현대차노조가 1998년의 패배를 올바로 극복하고자 했다면 그와 같은 계급적 단결투쟁에서 전망을 찾았을 것이다. 그러나 계급적 전망을 상실한 현대차노조는, 다른 대기업 노조들과 마찬가지로 그렇게 하지 않았다.

 

2000년대 초중반 현대차노조는 민주노총과 금속연맹이 조직한 수많은 총파업의 핵심 동력이었으며 그러한 총파업에는 중소영세 비정규직의 요구 또한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현대차노조는 민주노총과 금속연맹의 총파업 지침에 따라 형식적으로 파업에 임할 뿐 실제 총파업 요구에 대해서는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조합원들을 진지하게 설득해 나가지 않았기에 총파업에 참여한 조합원의 대다수가 집회에 참여하지 않고 그냥 퇴근했다. 이것은 대다수 조합원이 강렬한 의지를 갖고 지역 집회와 가두시위에 열성적으로 참여했던 1996~97년 총파업과 매우 달랐다.

11월 30일 비정규직 법안이 국회에서 통과되었다. 모든 것은 예상했던 바대로 진행되었다. 서로 죽일 듯이 물어뜯던 자본가 정당들은 이 법안이 통과되는 과정에서는 아주 조용했고, 형제처럼 평온했다. 법안의 내용은 이미 오래 전에 공지되었던 것 그대로였다. 부르주아 언론의 기만적인 대응도 마찬가지였다. 법안 통과시 총파업 투쟁을 경고했던 민주노총 지도부의 대응도 예상했던 바대로 진행되었다. ‘엄포용 기자회견’이 있고, 몇몇 사업장이 시한부 파업에 돌입했다. 현대차, 기아차 등 그나마 현장조직력이 살아 있다고 하는 극소수 사업장이 이른바 ‘정치파업’에 돌입한다. 그러나 파업의 열기는 낮고 그것마저도 생산타격과는 거리가 멀다. 한두 번의 시한부 투쟁이 끝나자 총파업 투쟁은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진다. 일부 비정규직 노조들이 분노에 찬 투쟁을 펼치지만, 그 힘은 아직 대단히 제한적이다. …

이런 상황이 민주노총의 꼭대기에 있는 조준호 국민파 기회주의 지도자들 때문이라고는 더 이상 말할 수 없다. … 현대차, 기아차와 같은 핵심 대공장 집행부에게 책임을 돌리는 것도 원인을 정확히 진단하는 것이 아니다. …

그 원인은 훨씬 더 깊은 곳에 있다. 조직 노동자들 속에서, 특히 조직 노동자의 중핵인 대기업 정규직 노동자들 속에서 ‘노동자 계급의식’이 실종되어 있다. 다수 노동자의 단결을 위해 헌신하고, 바로 이 단결의 확대 여부에 입각해 투쟁의 성패를 판단하는 노동자계급의 정신으로 이들이 무장해있지 않은 것이다. 이처럼 노동자계급의 단결을 이룩할 구심이 작동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는, 비정규직 법안 통과 정도가 아니라 그 이상의 공세 앞에서도 한국 노동운동이 결코 현 상황 이상의 모습을 보일 수 없다.

조금씩 움터 나오는 비정규직 노동자투쟁에서 실종된 구심을 대체할 희망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인가? 이것 또한 장담할 수 없다. … 97년 노개투 총파업의 패배, 그리고 연이어 일어난 대량의 정리해고에 무너져 내리면서 대기업 정규직 노동자 의식의 퇴행은 더욱 본격화되었다. …

단사 내의 이익, 혹은 일부 부서의 이익과 같은 조합주의적이고 실리주의적인 이익에만 갇혀버린 운동은 백년 천년이 지나도, 아무리 거대한 탄압이 휘몰아쳐도, 아무리 전국적이고 계급적인 쟁점이 부상하더라도 결코 노동계급적 운동으로 전진하지 못한다. 오히려 진실을 말하자면, 노동자계급의 정신이 실종된 운동은 그 본성상 지속적인 분열을 확대재생산할 수밖에 없다. 처음에는 단사 내의 단결에만 머물지만, 이어지는 시기에는 단사 내 정규직과 비정규직으로 분할되고, 다음으로는 정규직 내에서 부서별, 직종별 분열로 나아가며, 최종적으로는 개별화된 상태로 이행한다. …

당장 실제로 전개할 수 있는 투쟁의 범위와 무관하게, 노동자들이 스스로를 조직하고 투쟁에 나서는 정신이 ‘노동자계급의 단결 정신’에 얼마나 부합하는가에 의해서만 현재의 상황과는 다른 모습을 기대할 수 있다. 당장 힘이 부쳐서 커다란 투쟁으로 전진하지는 못하더라도, 그래서 단 4시간짜리 부분파업 심지어는 총회투쟁에 머물지라도, 여기에 합류하는 노동자들을 실질적으로 지배하는 정신이 무엇인가에 의해 그 투쟁의 성격은 달라진다. 노동자대중이 자기 투쟁을 전체 노동자계급 투쟁의 일부로 간주하는 법을 배우게 될 때, 그리고 다른 모든 곳에서 일어나는 노동자투쟁들을 전체 노동자계급 투쟁의 한 부분으로 받아들이고 최선을 다해 지지하고 지원해야 한다는 숭고한 책임감을 발전시킬 수 있을 때에만 노동운동은 비로소 계급적 방향으로 전진할 수 있다.

이것은 노동대중의 한복판에서 실천하면서 노동대중의 삶과 정신을 장악해가는 현장 활동가들의 계급적 의식이 없다면 결코 실현될 수 없다. … 모든 분열에 반대하고, 노동자계급 전체의 관점에서 대중이 사고하고 투쟁하며 매일의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일관되게 지도할 뿐만 아니라, 스스로 바로 그러한 행동의 모범을 모든 삶에서 실천해나가는 노동자의식으로 무장한 활동가들 없이는 이 상황을 결코 타개할 수 없다.[21]

현대차노조 집행부가 집중한 것은 자체 임금·단체협약 투쟁이었고, 실제 현장에서 조합원들과 활동가들이 몰두한 것은 물량확보였다. 당연하게도 광범한 노동자·민중에게 현대차노조는 양극화를 해결하기 위해 어떤 실질적인 노력도 하지 않는 것으로 인식됐고, 따라서 현대차노조의 ‘강력한’ 투쟁은 ‘그들만의 배부른’ 투쟁이라는 보수언론의 공격이 그대로 먹혀들었던 것이다.

 

◎ 위기의 고착 - 노조의 관료화와 부실화

 

2000년대 초중반 현대차노조 활동가들 전반은 관료주의적 타성에 깊이 빠져들었다. 현대차 노사 간의 교섭구조를 통해 해결될 전망이 보이지 않는 일들은 아예 손을 대려고 하질 않았다. 노사 간의 교섭구조를 통한 해결 가능성 여부가 실질적인 활동의 기준이 되어 버리자, 암묵적으로 자본이 설정한 반경 안으로 활동의 폭이 철저히 갇혀 버렸다.[22] 흐르지 않는 물은 썩기 마련이듯이, 정체된 노동조합 내부에 관료주의적 특권이 만연하고 심지어 부패와 비리마저 스며드는 것은 필연적인 경과였다.

 

현대차노조는 사회적으로 ‘그들만의 배부른’ 투쟁을 하고 있다고 비난받았지만, 정작 조합원들로부터도 갈수록 신뢰를 상실해 가고 있었다. 조합원들의 화살은 일차적으로 노조간부들의 특권과 관료주의, 나아가 부패와 비리에 대한 질타로 모아졌다. 특히 2005년 전·현직 노조 간부들이 채용비리로 줄줄이 구속되자, 노조간부들에 대한 조합원들의 실망감이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가 됐다.[23]

 

특권과 관료주의에 대한 조합원들의 질타는, 노동조합이 투쟁을 통해 확보한 권리나 투쟁의 상징물이라 하더라도 노조간부들이 전용해 온 것들에 대해서는 강한 거부감을 드러내는 양상으로 나타났다. 근무시간 중 대의원 활동에 대한 근태 인정, 전·현직 주요 노조간부들의 개인차량 사내 출입, 노조간부들이 착용해 온 ‘빨간 조끼’ 등이 특히 문제가 됐다.[24]

지금 노동조합 간부들의 모습은 어떠한가! 각종 선거에서 표를 구걸하고 당선만 되면 임기 동안 회사와 조합원 사이를 오가며 … 좋은 게 좋다는 식으로 적당히 해결한다. 노동조합의 각종 의결기구에서 의결된 사항이 마치 누가 보고라도 한 듯 금방 정보가 회사 측에 누출되고 … 빨간 조끼만 입으면 정문은 아무 때나 통과할 수 있도록 회사 측은 방치하고 있고 … 조합원들도 이젠 활동가를 존경하지 않는다.[25]

언제부터인가 대의원은 야간 근무를 하지 않고 특혜를 누리는 자리로 전락하고 있다. … 모 사업부는 … 대의원 당선되고 장갑 끼는 것 못 봤다는 소리가 나오는 실정이다.[26]

윤리강령 제정으로 대의원들의 특혜를 차단하고 현장활동을 혁신하는 계기로 만들어야 한다. 대의원 야간 근무하기, 회사와 술 안 마시기, 각종 회의결과 조합원 보고하기 등 하나씩 바꾸어야 한다.[27]

대의원들은 선거 때에만 투사가 되고 … 당선되면 작업장에도 투쟁 현장에도 보이지 않는다. … 기본적인 근태 문제를 확실하게 해야 한다. 각종 합의를 소위원, 조합원의 참여 속에서 합의하고 합의서는 공개해야 한다.[28]

노조 간부들의 특권과 관료주의에 대한 조합원들의 질타는 조합원들의 근본적 요구를 해결하는 데 노조가 상당히 무능력하거나 무관심하다고 여기는 가슴 깊은 실망감과 연결돼 있었다. 이를테면 조합원들은 잠재적인 고용불안으로 연결되는 해외공장 건설이나 모듈화 확대 등에 대해 노조가 뾰족한 대책 없이 끝없이 밀리고 있다고 여겼다. 수천 명에 달하는 근골격계 환자가 발생하고 1년에 10여명이 과로사로 죽어 나가는 데도 주5일제 도입 이후에도 주당 실질노동시간이 60~70시간에 달하는 것, 40대 이상의 조합원이 절반을 넘어섰는데도 생명을 갉아먹는 야간노동이 주야맞교대를 통해 계속되는 것에도 불만이 컸다.

현장에서의 선전문과 노동조합의 목소리는 점점 조합원들이 실리만 원한다라고 하면서 … 조합원들이 가지는 서글픔과 비참한 마음을 모르고 조합원들을 돈만 밝히는 실리주의자로 왜곡하고 있다. … 조합원들을 과로사로 내몰고 특근으로 내몬 것은 활동가들의 지도력 부재와 미래가 없는 정체된 활동 때문이다. 조합원들이 돈만 밝히는 실리주의자가 아니라 활동가들이 나태해진 것이다.[29]

조합원들이 ‘고용안정’에 매몰되면서 스스로 발목을 잡히자, 회사는 조합원들의 고용불안 의식을 더욱 부추기고 이용해, 물량조절·물량이동·외주화 등의 ‘생산유연화’와 비정규직화 등의 ‘고용유연화’를 가속시켰다. 이를 통해 생산성을 극대화하고, 이윤을 극대화했다.

 

물론 생산유연화와 고용유연화에 맞선 투쟁이 없지 않았다. 일상적 구조조정에 맞선 투쟁이 여기저기서 이어졌고, 비정규직도 투쟁에 나서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러한 투쟁들은 고용불안에 매몰된 노조의 전체 상황을 바꿔내지 못했고, 따라서 고립돼 각개격파됐다. 회사의 자신감이 커질수록 회사의 의도대로 순순히 따르지 않는 노동자들을 대하는 회사의 태도는 점점 더 거칠어졌다.

 

자신감을 갖게 된 회사는 생산 우선주의를 앞세워 목표한 생산량에 타격을 주는 행위에 대해 공격적으로 대응하기 시작했다. 현장투쟁을 수행한 활동가들을 징계하거나 해고하는 한편, 적극적으로 고소고발 및 손배가압류를 걸었다. 또한 경비대를 동원하고 첨단장비를 이용해 활동가들의 동향을 파악했다. 소지품 검사 등을 통해 일상적 통제를 하고 나아가 물리적 폭력을 가함으로써 활동가들을 위축시켰다. 이러한 현상은 시간이 갈수록 더욱 심해졌다.

4공장에서 노동조합 사찰 문건 및 노동조합 활동 개입에 대한 문건이 발견됐다. … 전 사업부에서 과장급 이상이 선무활동을 했다는 증거가 드러나고 있다. … 조합원 사찰내용은 충격적이다. 누구랑 어디서 무엇을 어떻게 왜 했는지에 대해 상세히 기록되었다. ‘가정방문 해서 협조 확약’, ‘경비 지원하면 협조 의사’, ‘가정방문 했으나 불투명’, ‘등산 함께 간 뒤 협조 확약’ 등의 사례들은 부당노동행위를 조직적으로 자행하고 있는 것과 같다.[30]

아산공장은 노동조합 간부와 하청지회 간부들에 대한 미행, 감시, 사찰 업무를 보는 경비대를 설치 운영하였다. … 또한 출퇴근시 정문과 쪽문에 검사대를 설치하고 소지품 검사를 실시했다. … 더 나아가 식당입구에 사측의 무인카메라가 24시간 작동되고 있다. … 노동조합 간부들의 식당 홍보 투쟁에서 하청지회의 중식투쟁, 일상적으로 식사하는 조합원까지 사측의 감시사찰 대상이었던 것이다.[31]

최근 1,2,3,4,5공장에 지원실이라는 것이 생겼는데 지원실장으로 발령받은 자들의 면면이 기가 막힌다. 판매본부에서 노동조합 탄압의 선두에 섰던 사람들이 졸지에 임원으로 승진되어 전진배치된 것이다. 이들 중에는 무술유단자와 폭력전과자까지 있다. 지원팀은 현장을 탄압하고 활동가들을 감시하고 사찰하던 곳이었다. 그런 지원팀을 지원실로 강화하여 본격적인 현장탄압을 시작하려는 것이다.[32]

또한 회사는 관리자들을 동원해 조합원들을 개별 접촉하여 인간관계를 쌓아 나갔다. 관리자들은 회식자리와 향우회·동호회 등을 적극 활용했다. 이렇게 확보한 영향력을 바탕으로 회사는 노조의 선거나 총회에 개입했다. 이러한 개입은 실제로 많은 효과를 거두었다.

회사 관리자들이 요즘 들어 부쩍 현장조합원들과 친한 척 하면서 현장의 동향을 파악하기 위해 밤낮을 가리지 않고 현장을 돌고 있다. … 회사 관리자들은 불파 투쟁과 05년 임단투에서 노동조합을 무력화시키기 위해 현장을 누비고 있는데 정작 노동조합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안타깝다. … 모두들 현장이 힘들다 하고 현장이 어용화가 되었다고 하지만 이것의 원인은 사측 관리자들이 밤낮을 설치며 현장을 뒤집고 다닌 탓일 것이다.[33]

 

◎ 2007년 성과금 공방

 

2007년 1월, 회사의 성과금 미지급을 계기로 현대차 노사 간에 전례 없는 충돌이 발생했다. 이 사건은 끝없는 위기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노조를 결정적으로 약화시켜 보고자 한 회사의 도발이었다. 노조가 가진 치명적인 약점들이 드러났지만, 현대차노조 조합원들은 강력한 단결력을 발휘하며 노조를 지켜냈다. 그러나 노조는 깊은 내상을 입었다.

 

2006년 7월 26일, 현대차 노사가 임금협약을 타결하면서 연말 성과금을 생산목표 달성과 연계하여 ‘목표 달성시 150%, 95% 이상시 100%, 90% 이상시 50%를 지급’하기로 했다. 그런데 공식 발표와 달리 노사협상 과정에서 회사가 ‘합의서 내용은 대외용이고 성과금은 생산실적과 상관없이 150%를 주겠다’고 구두로 약속했다.[34]

 

12월 28일, 회사가 생산목표 달성에 실패했다며 연말 성과금을 100%만 지급하겠다고 노조에 전달했고, 29일 실제로 100%만 지급했다.[35] 연말 성과금의 생산성 연동을 관철함으로써 ‘생산성 연동임금제’로 가는 길을 확실히 열겠다는 의지의 표명이었다. 노조 집행부가 ‘조합원 선물비리’로 조기 사퇴하게 된 어수선한 노조 상황을 틈탄 기습이기도 했다.

 

2007년 1월 3일 노조간부 80여 명이 회사의 울산공장 시무식장에서 분말소화기를 분사하며 행사를 방해했다. 노조는 성과금 특별교섭을 요구하며 잔업거부에 들어갔다. 4일 회사는 노조의 성과금 특별교섭을 거부하고, 시무식 폭력사태와 관련해 노조간부 22명을 고소했다. 노조는 즉각 본관로비 철야농성에 돌입했다. 5일 노조가 성과금 보충교섭을 요구했지만, 8일 회사가 보충교섭을 거부하고 노조를 상대로 10억 원의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제기했다.

 

노조는 10일 노조간부 1천 5백 명이 양재동 현대차 본사 상경투쟁을 벌인 뒤, 12일 임시대의원대회를 열어 ‘15일부터 파업 돌입’을 결의했다. 그런데 15일 오전 노조의 파업돌입을 몇 시간 앞두고 전직 노조 위원장이 배임수재 혐의로 검찰에 긴급체포 됐다. 2003년 7월 하순 임단협 협상을 잘 진행해 달라는 요청과 함께 회사 부회장에게서 2억 원을 받은 혐의였다. 현대차 비자금 조성 건으로 검찰 수사를 받은 부회장이 검찰에게 정보를 넘긴 것인데, 돈을 건넨 회사 임원은 공소시효가 만료됐지만 돈을 받은 노조 위원장은 공소시효가 남아 있는 상태였다. 현 노조 위원장은 2003년 당시 노조 사무국장이어서 같이 의심을 받을 수 있는 상황이었다. 노조의 파업을 와해시켜 보려는 회사의 치명적인 노림수였다.

 

그러나 15일 현대차노조는 주간조와 야간조 모두 4시간 파업을 성공적으로 치러냈다. 회사의 의도를 읽어낸 조합원들은 ‘어쨌거나 노조는 지켜내야 한다’는 위기의식으로 똘똘 뭉쳐 평소보다 더 강한 기세로 파업에 합류했다. 16일 노사협상이 시작됐다. 17일 주간조가 6시간 파업을 벌인 뒤, 오후에 노사가 합의에 이르렀다. 노조가 생산목표 미달분 만회에 협력하는 조건으로 회사가 50% 성과금을 지급하기로 하면서 사태가 일단락됐다.

2006년 성과금 50% 지급문제로 불거진 현대자동차 노사대결은 한국 노동운동의 현주소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모든 부르주아 언론의 맹폭격 앞에서 현자 노동조합은 사회적으로 고립되었다. 다행히도 노동조합이 와해되는 것을 어떻게든 막고자 했던 현자 노동자들의 분투에 의해 최악의 상황은 피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런 상황이 지속된다면, 한국 노동운동의 상징적 구심인 현대차에서도 현중과 같은 일이 전개되지 않으리라 장담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더욱 중요한 사실은 현대차 노동조합이 겨우 위기를 넘겼지만, 한국 노동운동의 상징으로 부각되고 있는 현자 노동조합의 도덕적 권위가 전체 노동자 앞에서 무너짐으로써 한국 노동운동이 거대한 상처를 입었다는 점이다. 이것은 노사협조주의 노선, 그리고 조합주의 노선의 필연적 결과물이다.

우선 현자를 비롯한 대개의 대기업 사업장들에서 독버섯처럼 번져나가고 있는 ‘생산 성과와 연동된 특별성과금 관행’을 지적해야 한다. ‘타결장려금’과 함께 이것은 노사협조주의를 조장하는 대표적인 도구다. 사실상 임금의 한 부분에 지나지 않지만, 기본급이나 정기상여금이 아니라 생산 성과와 연동된 특별성과금을 위해서 노동자들은 자발적으로 생산에 협력해야만 한다. 관행적으로 전부를 지급해왔다는 사실이 이러한 본질을 조금이라도 희석시키는 것은 아니다.

이번에도 분명히 드러났지만, 특별성과금 형태의 임금구조는 언제든지 자본이 명분을 가지고 노동자의 임금을 도둑질할 수 있도록 허용할 뿐만 아니라 회사의 번영이 노동자의 더 나은 조건 획득과 연결될 수 있다는 환상을 노동자들 속에서 조장한다. 만약 이러한 노사협조주의적 발상이 만들어낸 특별성과금 따위의 임금구조를 허락하지 않았다면, 자본이 ‘성과미달’이라는 이유로 노동자의 노동의 대가를 갈취하려는 짓거리 따위는 일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최소한 노동자들은 누구라도 부정할 수 없는 명백한 근거, 즉 정당한 노동에 대한 최소한의 합법적 대가라는 관점에서 공세적으로 투쟁에 나설 수 있었을 것이다.

다음으로 ‘구두합의’와 같은 ‘비공식적인 밀실협상의 전통’을 거론해야 한다. 모든 합의내용은 조합원대중에게 공개되어야 하고, 이 합의는 명백히 ‘서면합의’ 형식을 취해야 한다. 법률적 구속력이 없고, 언제든지 손바닥 뒤집듯이 철회할 수 있는 구두합의는 노동자투쟁의 성과를 무로 돌릴 수 있으며, 자본이 필요한 시기에는 언제든지 활용할 수 있는 수단을 제공하는 것이다. 나아가서 이 구두합의는 밀실협상의 관행과 떼려야 뗄 수 없이 연결되어 있다.

이러한 노사협조주의적 약점과 함께 이번 공방전을 좌우했던 결정적인 요소로 지적해야 할 부분은 바로 ‘계급적 관점’이다. 현대차노조가 전체 사회적으로 고립되었던 것(즉 다수의 노동자 민중으로부터 지지를 받지 못했던 것), 심지어는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연대에 나섰던 현대차 비정규직 노동자들로부터도 진심어린 지지를 끌어내지 못했던 것은 현대차 정규직 노동운동이 이제껏 취했던 조합주의 노선이 초래한 비극이었다. 이것은 현대차 정규직 노동자들의 자신감에도 영향을 미쳐, 겉보기와는 달리 이번 공방전 내내 현대차 노동자들은 주도권을 발휘하지 못했고 충분히 당당한 모습을 보이지 못했다. 오직 이번 공방전에서 일방적으로 밀린다면 노조 파괴로 연결되고, 이것은 노동자의 생존권을 지키는 마지막 보루가 붕괴될 수밖에 없었기에 현대차 노동자들은 투쟁에 힘을 실었던 것이다.

투쟁에 나선 노동자들이 도덕적 주도권을 확실히 움켜쥐지 못하는 것, 그것도 한국 노동운동의 상징적 구심인 현대차 노동자들이 자신들의 투쟁이 전체 노동자로부터 지지를 끌어내지 못하고 오히려 의혹의 눈초리에 직면하고 있다는 것은 한국 노동운동의 거대한 비극이 아닐 수 없다. 이것이 갖는 의미는 만약 현대차 노동조합이 다르게 행동해왔고 다른 쟁점으로 전투를 치렀을 경우를 가정한다면 더욱 분명해진다.

현대차 불법파견 판정이 내려졌을 때, 그리고 올해 현대차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향해 울산공장에서 고용불안 공격이 덮쳤을 때, 현대차 정규직 노동조합이 전면적인 총파업을 전개하면서 비정규직 노동자의 요구를 대변했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비정규직 개악법안에 맞서 전체 노동자의 요구를 내건 단호한 총파업투쟁을 지속했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만약 노사협조주의적인 특별성과금 따위를 위해서가 아니라 기본급으로 임금인상을 확고히 쟁취하고, 임금인상분의 일부를 투쟁사업장 연대기금으로 내고자 했다면, 그런데 이것에 대해 자본이 전면적인 공격을 가했다면 과연 어땠을까?

그것은 모든 자본가 언론의 주둥아리를 닫게 만들었을 것이다. 모든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현대차 노동조합의 투쟁을 통해 한국 노동운동에서 희망을 발견하게 되었을 것이다. 현대차 정규직 노동자들의 자부심은 얼마나 높았을 것이며, 여기에 연대하는 현대차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얼마나 숭고한 의무감에 불탔을 것인가!

그 대신 한국 노동운동의 상징적 구심이 다수 노동자의 의혹에 찬 눈초리와 마주치고, 한줌 착취자들의 언론과 정부에 의해 마구 난도질당하면서 고립되는 이 참혹한 현실만큼 비참한 현실이 어디에 있겠는가? 현대차의 노사협조주의적 지도부는 50%의 특별상여금 지급, 그것도 생산 차질분을 전부 만회하겠다는 약속의 대가로 얻어진 그 성과 앞에 승리라고 박수칠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그들이 잊고 있는 것은 그 표면적인 성과의 뒷면에서 한국 노동자계급 전체가 입은 거대한 피해이다. 장기적으로 볼 때, 이것은 현대차 정규직 노동자들까지도 혹독한 대가를 치르도록 강요할 것이다. 현대차 자본이 위기에 직면해 더욱 포악해지고, 그래서 공장을 상당히 오랜 시간 정지시키더라도 경찰과 검찰, 정부의 힘을 동원해 노동자들을 공격해야만 하는 결정적인 상황이 도래하게 될 때, 이 같은 고립은 현대차 노동자들을 덮치는 재앙의 진원지가 될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오직 썩어문드러진 조합주의 지도자들만이 이것을 승리 혹은 무승부라고 부를 수 있다.

이런 식으로, 아직 충분히 투쟁할 수 있는 여력이 있고, 아직 노동조합에 대한 신뢰를 거두지 않았으며, 게다가 전직 위원장이 수억 원을 받아 처먹는 통탄할 만한 사건에 직면해서도 노동조합을 사수하기 위해 파업지침을 사수하는 현대차 노동자대중을 가장 불리한 조건에서 전면전을 치르도록 몰아붙이는 개량주의 지도자들의 범죄행위가 지속된다면 아무리 강철 같은 노동대중도 장기적으로는 결국 분쇄될 수밖에 없다. 노동운동의 선봉장이 다수의 노동자대중으로부터 지탄의 대상이 되고, 오히려 다수 노동대중이 노동운동의 선봉장에 대한 정부의 공세를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는, 이 비통한 현실이 지속된다면 한국 노동운동이 약 20년간 쌓아올린 성과의 마지막 한 부분까지 결국 무너져 내릴 수밖에 없다.[36]

3) 산별노조 전환과 1사1조직

 

타협·개량주의 세력의 주도권 아래 민주노총이 건설되고, 곧이어 자본가들의 신자유주의 대공세에 패배를 거듭하면서, 민주노총으로 포괄된 민주노조운동 전반은 심각하게 후퇴했다. 전노협 운동의 특징이던 자주성·민주성·전투성·연대성·변혁성에 대한 지향은 2000년대 초반 이후 민주노조운동 안에서 매우 약화됐다. 민주노총으로 포괄된 민주노조운동 전반의 후퇴는 2000년대 중반에 이르러 심각한 수준의 관료화와 타락으로 나아갔다.

 

그러나 단위노조부터 상급단체까지 광범하게 포진한 노조관료들은 위기의 총체성을 인정하고 그 원인을 근본적으로 파악하려는 진솔한 노력 없이 끝없는 이전투구와 관성적 대응에 머물렀다.

 

민주노조운동의 위기를 극복할 핵심 방안이라고 노조관료들이 오랜 시간 주장했던 것은 이른바 ‘산별노조 전환’이었다. 몇 년 동안 거듭된 시도 끝에 2006년 6월 금속산업에서 현대차·기아차·대우차 등 핵심 대기업 노조들의 산별노조 전환 투표가 성공함으로써, 산별노조 전환은 큰 고비를 넘게 됐다.[37] 그러나 민주노총이 추진한 산별노조 전환은 민주노조운동의 위기를 극복하는 데 전혀 도움이 되지 못했다.

 

‘산별노조 전환’ 논리 속에는 민주노조운동이 대기업 정규직만의 노동조합을 넘어서서 광범한 미조직 노동자들을 포괄해 나가야 한다는 정당한 문제의식이 들어 있었다. 그러나 민주노총의 산별노조 전환에는 그 의미를 전혀 살릴 수 없는 온갖 함정들, 나아가 위기를 더욱 심화시킬 함정들로 가득 차 있었다.

 

민주노총의 산별노조 전환은 대기업 정규직의 협소한 이해관계를 전혀 떨쳐버리지 못한 채 오히려 그러한 협소한 이해관계가 지배하는 형태로 이루어졌다. 이를테면 금속산업의 산별노조인 금속노조는 규모가 큰 대기업의 경우 지역지부에 속하지 않고 별도의 기업지부를 구성하도록 인정함으로써 조합원들을 통일된 기준으로 편제하는 것도 못하는 우스꽝스러운 조직형태를 갖게 됐다.[38] 말이 산별노조 전환이지 실제로는 기업별노조 체계가 그대로 유지되는 것이었다.

 

한 사업장 안에 있는 같은 산별노조 조합원인데도 정규직과 비정규직 사이의 차별이 산별노조 전환 이후에도 여전히 계속되고 당연시됐다. 많은 경우 한 사업장의 정규직과 비정규직을 하나의 조직체계로 통합하는 것조차 이루어지지 않았다. 해당 사업장의 비정규직 다수가 여전히 미조직 상태인데도 그냥 방치됐다. 그러니 정규직과 비정규직 사이에 존재하는 임금과 단체협약에서의 차이를 해소하기 위한 도전은 거의 시도조차 되지 못했다.

 

같은 사업장 안에 있는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차별조차 극복하려 하지 않는 노동조합이 광범한 미조직 노동자들을 조합원으로 조직해 나간다는 것은 당연히 불가능한 일이었다.

 

결국 민주노총이 추진한 산별노조 전환은, 광범한 미조직 노동자들의 조직화를 위해 전진하는 진정한 의미의 산별노조 건설과는 전혀 거리가 먼 것이었다. 대기업 정규직의 기업별노조들을 형식적으로 묶어놓고서 ‘산별노조’라는 허울을 내거는 우스꽝스런 조직을 만들어냈을 뿐이었다.

 

2006년 금속산업 대기업 노조들의 산별노조 전환으로 거대 산별노조가 된 금속노조는 민주노총을 대표하는 산별노조가 됐다. 금속노조는 2006년 12월 통합대의원대회에서 한 사업장 안의 모든 조합원을 직종이나 고용형태 등을 가리지 않고 단일한 조직체계로 통합한다는 ‘1사1조직’을 조직편제 원칙으로 확정했다. 그러나 1사1조직의 추진과정은 ‘산별노조’로서 금속노조가 가진 허구성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물론 일부 사업장에서는 1사1조직을 통해 사내 비정규직을 새롭게 조직하는 모범적인 모습이 나타나기도 했다. 하지만 금속노조를 좌지우지하는 대기업 지부들에서의 상황은 매우 달랐다.

 

금속노조 현대차지부의 대의원대회는 2007년 1월과 6월, 2008년 10월 세 번에 걸쳐 1사1조직 규칙개정을 모두 부결시켰다. 2007년 1월 현대차지부의 임시대의원대회는 비정규직 3주체(울산·아산·전주)가 1사1조직 관련 단일안을 만들지 못하고 △비정규직의 별도 집행기구를 두는 안 △비정규직을 정규직과 같은 선거구로 편제하는 안 △확대운영위원회로 위임하는 안 등 복수안을 가져오자 ‘비정규직 3주체의 단일안을 가져오라’며 세 안을 모두 부결시켰다. 2007년 6월 임시대의원대회는 가입대상 중 2·3차 사내하청 포함 여부, 판매부문 딜러와 정비부문 그린서비스 종사자 포함 여부 등을 놓고 격론을 벌인 끝에 부결시켰다. 2008년 10월 임시대의원대회는 비정규직의 별도 집행기구 없이 정규직과 같은 선거구로 편제하는 안이 상정됐지만, 가입대상 범위에 대한 질의, 준비부족과 선거권·피선거권 부여에 따른 혼란 등을 우려하는 반대발언이 이어진 끝에 또다시 부결시켰다.

 

이와 달리 기아차지부는 2008년 4월 1사1조직을 가결시켰다. 그러나 그 실내용은 계급적 단결이라는 산별노조의 정신과는 거리가 멀었다. 기아차지부에서 1사1조직의 실제 의미는 정규직 노조의 통제권 밖에서 독자적인 투쟁을 이어가던 사내하청 노조를 무력화하는 과정이었기 때문이다.

 

기아차에서도 비정규직 조직화가 2003년부터 시작됐다. 다만 사내하청 노동자들이 메인라인보다 서브라인에 집중돼 있는 사업장 특성에 따라 활동 초점이 불법파견 정규직화 투쟁보다 업체투쟁과 임단투에 집중됐다.

 

2003년 4월 기아차 화성공장의 비정규직 활동가 4명과 정규직 활동가 2명이 ‘노동해방을 위한 기아자동차 비정규직 현장투쟁단’을 결성하고, 업체별 회원조직화에 나섰다. 회원조직화의 기제는 고용·노동조건과 관련된 다양한 업체별 사안들을 둘러싼 업체투쟁이었다. 2003년에는 기광, 성원실업, 신성물류에서, 2004년에는 세화실업, 보성에서 업체투쟁이 조직됐다. 2년 동안 현장투쟁단은 5개 업체 350여 명을 회원으로 조직했다.

 

2005년 6월 4일 현장투쟁단을 토대로 금속노조 기아자동차비정규직지회가 설립됐다. 450여 명으로 출발한 조합원 수가 설립 직후 19개 업체 1천여 명으로 급격히 증가했다. 임단투에 들어간 비정규직지회는 여러 차례 독자파업을 성사시켰다. 그런데 기아차노조의 임투가 종결되자 9월 28일 400여 명의 용역깡패가 비정규직지회 파업을 공격했다. 회사의 파업파괴 공작에 맞서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연대투쟁이 전개됐고 비정규직지회의 투쟁은 오히려 상승세를 탔다. 하지만 10월 7일 노동탄압 분쇄와 원하청 공동투쟁 승리를 위한 기아차노조의 파업찬반투표가 부결됐다. 회사의 분열 공세와 비정규직지회의 독자파업을 부담스러워 하는 기아차노조의 태도 때문이었다. 비정규직지회의 투쟁은 하강세를 타기 시작했다. 20일 비정규직지회의 핵심동력이던 신성물류를 시작으로 7개 업체에 도급계약 해지가 공고됐다. 비정규직지회 조합원들이 노조를 탈퇴하기 시작됐다. 25일 비정규직지회 간부들과 선봉대 20여 명이 조립1공장을 기습점거하고 파업을 전개했으나 기아차노조가 비정규직지회의 투쟁을 ‘일방적인 투쟁’이라며 비판했다. 투쟁력이 고갈된 비정규직지회는 기아차노조의 중재를 받아들여 하청업체들과 집단교섭을 체결했다.

 

2006년, 비정규직지회는 원청 사용자성 쟁취를 내걸고 임단투를 준비했다. 7월 20일 이후 주2회 이상 독자파업으로 생산을 타격하며 사측을 압박했다. 투쟁이 최고조에 이르렀을 때 조합원 수가 1천 300여명으로 늘어나기도 했다. 그러나 기아차노조가 2005년과 마찬가지로 비정규직지회의 독자파업과 투쟁 장기화에 불만을 표시했다. 어쨌든 정규직노조의 중재로 9월 18~19일 비정규직지회, 기아차노조, 기아차가 참여한 교섭테이블이 열렸고, 비정규직지회는 회의록 형태의 고용보장합의서를 얻어냈다.

2005년과 2006년의 임단투를 거치며 기아차 화성공장에서는 비정규직지회의 주체성과 독자적 전술구사를 둘러싼 기아차노조와 비정규직지회 간의 긴장과 갈등이 점차 깊어졌다. 회사는 비정규직지회를 대대적으로 탄압하는 한편, 정규직에게 고용불안 이데올로기 공세를 폈다.

 

이런 상황에서 산별노조로 전환한 금속노조 기아차지부가 2007년 2월 비정규직지회와 통합방침을 일방적으로 발표하고 4월 30일부터 사내하청 노동자들을 상대로 개별적으로 직가입 신청을 받기 시작했다. 비정규직지회는 이에 대해 지회의 투쟁을 통제하려는 의도라고 비판하며 강력히 반발했다. 비정규직지회는 사내하청의 개별 가입 방식으로 비정규직지회가 기아차지부에 흡수될 경우 비정규직지회가 가진 기존의 조직력과 투쟁력을 상실할 것이라고 봤다.

 

5월 29일 금속노조 중앙집행위원회가 비정규직지회 조합원을 포함하는 직가입 사업을 중단하라고 결정했으나, 기아차지부는 개별 직가입을 이어갔다. 6월 12일 비정규직지회가 총회를 열어 ‘지회의 자주적 요구안 수립 보장, 현장파업권 인정, 2‧3차 하청 가입 보장, 지회의 자주적 조직체계 인정, 지부단위에서 비정규할당제 30% 보장’을 조건으로 하는 계급적 조직통합안을 결의하고 기아차지부에 제안했다. 그러나 기아차지부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비정규직지회는 독자 임단투를 전개하는 동시에 기아차지부의 일방적 직가입 추진에 항의하는 활동을 이어나갔다. 기아차지부와 비정규직지회 간의 긴장과 갈등이 고조되는 가운데, 8월 23일 비정규직지회가 도장공장 점거파업을 시작했다. 그런데 점거파업 9일째인 31일, 기아차지부의 어용 성향 조합원들이 구사대로 돌변해 비정규직지회의 파업현장에 난입하여 비정규직지회와 현장조직의 천막을 불태우는 등 폭력을 행사했다.

 

8·31 사태 이후 긴장은 극에 달하고 현장은 얼어붙었다. 기아차지부 조합원들의 분위기가 크게 경직됐고, 활동가들의 연대도 위축됐다. 비정규직지회는 금속노조의 중재를 받아들여 기아차지부와 ‘선통합 후논의’에 합의했다. 2008년 4월 기아차지부, 5월 비정규직지회 대의원대회에서 각각 규칙개정이 통과되면서 1사1조직 통합이 완료됐다.

기아자동차지부는 1사1조직으로의 전환은 이루어냈으나 그 과정에서 정규직지부와 비정규직지회 간의 갈등이 극단적으로 고조되어 여러 가지 문제점을 드러내기도 했다. … 1사1조직화가 강한 자체 투쟁역량을 보유하고 있는 사내하청 단위에 대한 통제기제로 활용될 수 있는 여지가 있다는 점이 확인되었다. 실제로 조직통합 전 기아자동차비정규직지회는 독자파업을 통해 원청사의 생산에 타격을 줄 정도의 상당한 조직력과 투쟁력을 갖추고 있었으며, 그렇기 때문에 1사1조직 논의가 지속되는 내내 사내하청 단위의 독자적인 조직과 쟁의권을 보장할 것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요구는 받아들여지지 않았으며, 정규직 노조의 강도 높은 개별가입 캠페인과 1사1조직으로의 전환 드라이브 하에서 결국 조직통합은 지회해체 후 사내하청 노동자들의 개별적인 지부가입의 형태로 이루어졌다. 하기에 1사1조직화 자체의 일정한 의의와 성과에도 불구하고, 기아자동차의 사례는 “지회의 조직력과 투쟁력을 깨”고 “단체행동권을 제한하”며 “비지회만으로 라인 못 세우게 하기 위해서” 정규직 노조가 조직통합을 주도했다는 혐의를 완전히 부정할 수만은 없는 것이다.[39]

2000년대 초중반을 지나면서 대기업 정규직을 중심으로 ‘민주노조운동’의 위기와 추락이 계속됐지만, 민주노조운동을 재건해 내려는 노력 또한 지속됐다.

 

특히 계급적 전망을 상실한 대기업 정규직 운동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을 바탕으로 비정규직 투쟁에 헌신적으로 결합하려는 정규직 활동가들이 전국의 여러 사업장에서 나타났다. 관료화된 ‘민주노조운동’의 실상을 폭로하고 상층 노조관료들에 도전하며 노동자 민주주의를 회복하려는 여러 노력들도 나타났다.[40]

 

하지만 이런 노력들은 안타깝게도 ‘민주노조운동’ 전반의 위기와 추락을 되돌려 놓을 수 있을 만큼 강력한 힘을 만들어 내지는 못했다.

 

다음 편 보기

 


[1] 전국비정규직노조연대회의(전비연), 2005/10/16, 「출범선언문」.

[2] 현대차노조는 1987년 노조설립 이후 2008년까지 1994년을 제외하고는 모두 파업을 전개했다. 2009~11년 무파업을 기록한 뒤, 2012~17년 연속해서 파업을 전개했고, 2018~24년 다시 무파업을 기록했다.

[3] 현대중공업노조 조합원들을 기반으로 하는 울산 동구, 창원공단의 금속노조 조합원들을 기반으로 하는 창원(을)도 노동자들의 지지 기반이 상당한 지역이었지만 울산 북구만큼은 아니었다.

[4] 양준석, 2005/08/27, 「현대자동차노조의 노동운동 내 위상과 현재적 과제」.

[5] 민투위 활동가들은 다수가 1998년 구조조정에서 정리해고·무급휴직 대상자가 됨으로써 1998년 투쟁 패배 이후 1년 남짓 현장을 떠나 있어야 했지만, 복귀 이후 빠르게 현장 기반을 재건했다.

[6] 민투위는 산별노조 전환 뒤인 2007~09년 금속노조 현대차지부 집행부를 다시 배출하는데, 이번에는 ‘실질임금 삭감, 노동강도 강화, 고용 불안 없는’ 주간연속2교대를 실현하겠다는 공약과 달리 노동자의 권리를 대폭 하락시키는 주간연속2교대 도입을 합의함으로써 끝내 정규직마저 배신했다.

[7] 2000년 생산이 회복됨에 따라 노조가 유리해진 국면에서, 노조 집행부가 1998년의 구조조정을 되돌리는 단호한 투쟁에 나서는 대신 고용불안 논리에 따라 사내하청 대규모 투입에 앞장선 것은 조합원들의 ‘일상화된 고용불안’ 정서를 더욱 고착화하는 결과를 낳았다.

[8] 현대차는 1997년 튀르키예 공장, 1998년 인도 공장, 2002년 중국 베이징 공장, 2005년 미국 앨라배마 공장, 2007년 체코 공장을 속속 준공하며, 세계 곳곳으로 생산 기지를 확대해 나갔다. 이후에도 현대차는 2010년 러시아 공장, 2012년 브라질 공장, 2017년 베트남 공장, 2022년 인도네시아 공장 등을 준공하며 해외 생산거점을 계속해서 확대시켰다. 현대차는 해외 생산거점 확대 과정에서 부품하청업체들의 중국 동반 진출을 독려하기 위해 2005년 납품물량의 40%를 중국에서 역수입해 공급하라는 ‘바이백’ 지침을 내리기도 했다.

[9] 현대차 자주노동자회, 2002/09/04, <자주노동자> 신문.

[10] 현대차 실천하는노동자회, 2003/02/26, <실노회> 신문.

[11] 현대차 자주노동자회, 2003/10/22, <자주노동자> 신문.

[12] 현대차 민주노동자투쟁위원회, 2002/08/14, <노동자의길> 신문.

[13] 현대차 자주노동자회, 2004/01/27, <자주노동자> 신문.

[14] 현대차 민주노동자투쟁위원회, 2004/04/14, <노동자의길> 신문.

[15] 현대차 민주노동자투쟁연대, 2004/09/08, <민노투> 신문.

[16] 현대차 민주노동자투쟁위원회, 2005/03/22, <노동자의길> 신문.

[17] 현대차 민주노동자투쟁연대, 2005/04/20, <민노투> 신문.

[18] 현대차노조 5공장 대의원회, 2005/07/05, <5공장 대의원회> 유인물.

[19] 모듈이란 작은 부품들을 하나의 덩어리로 묶은 조립단위를 말한다. 이를테면 칵핏모듈은 인판넬, 계기판, 오디오, 공조시스템, 스위치, 에어백 등을 하나로 묶어 구성된 조립단위다. 과거에는 각각의 부품이 완성차 조립라인에서 조립됐지만, 모듈외주화가 되면 사외 부품사가 조립한 모듈을 공급받기 때문에 완성차 조립라인의 작업량이 그만큼 줄어든다.

[20] 현대차 민주노동자투쟁연대, 2003/04/29, <민노투> 신문.

[21] 최영익, 2007/02/01, 「한발 한발, 그러나 고지를 향해 똑바로!」, 『노동해방』 53호.

[22] 현대차노조의 활동이 자본이 설정한 반경 안으로 갇혀 버렸음을 보여주는 하나의 사례로 경영권 세습에 대한 무대응이 있었다. 2000년대 초중반 현대차 그룹은 정몽구에서 정의선으로 경영권 부자세습을 준비했다. 2001년 물류업체 글로비스(정의선 지분 60%)를 설립하고, 2002년 건설업체 엠코(글로비스 지분 60%)를 설립하여 현대차 일감을 떼거지로 몰아주었다. 글로비스 등의 회사 가치 극대화로 주식 가격이 몇십 배로 폭등하면서, 정의선은 경영권 세습에 필요한 비용을 손쉽게 확보해 나갔다. 그런데 이것을 문제 삼는 현대차노조의 목소리는 거의 없었다. 실제로 현대차 그룹의 경영권 세습은 소액주주의 권리 침해라는 측면에서 참여연대 등으로부터 일정한 공격을 받기는 했을지언정, 정작 현대차노조로부터는 사실상 어떤 제동도 걸리지 않았다. 2006년 정몽구 회장이 비자금 문제로 구속됐을 때도 노조는 별다른 대응을 하지 않았다.

[23] 일부 노조간부들이 회사의 생산직 채용과정에 영향력을 행사하면서 채용희망자들로부터 금품을 수수한 ‘채용비리’는 2005년 1월 기아차에서부터 불거져 5월에는 현대차로 번졌다. 10월에는 민주노총 수석부위원장이 택시운송사업조합연합회로부터 수천만원의 금품을 수수한 게 드러나 구속되고 민주노총 지도부가 총사퇴하는 사건까지 터졌다.

[24] 2000년대 중반 현대차노조에서는 ‘빨간 조끼’를 착용하고 다니는 노조간부들이 조합원들 사이에서 ‘빨조’라는 이름으로 공공연히 지칭됐다. 원래 노조간부들이 일상적으로 빨간 조끼를 착용하고 다니는 것은 민주노조의 힘과 투쟁의지를 상징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제 그 빨간 조끼를 착용한 노조간부들이 온갖 특권과 향응을 게걸스럽게 빨아먹는다며 비아냥대는 의미의 ‘빨조’로 불리게 됐던 것이다.

[25] 현대차 실천하는노동자회, 2003/02/26, <실노회> 신문.

[26] 현대차노조 공동소위원회, 2005/04/13, <공동소위원회> 유인물.

[27] 현대차 자주노동자회, 2005/06/02, <자주노동자회> 유인물.

[28] 현대차노조 공동소위원회, 2005/06/08, <공동소위원회> 유인물.

[29] 현대차 자주노동자회, 2003/11/05, <자주노동자> 신문.

[30] 현대차노조 4공장 소위원회, 2003/08/21, <4공장 소위원회> 유인물.

[31] 현대차 자주노동자회, 2004/05/04, <자주노동자> 신문.

[32] 현대차 민주노동자투쟁위원회, 2005/03/22, <노동자의 길> 신문.

[33] 현대차 민주노동자투쟁위원회, 2005/03/22, <노동자의 길> 신문.

[34] 현대차는 1991년 이후 생산목표 달성 여부와 상관없이 성과금을 지급했고, 생산실적과 연동한 성과금 지급 합의는 2006년이 처음이었다.

[35] 현대차는 2006년 161만 8천 268대를 생산하여, 생산목표인 164만 7천대의 98.3%를 달성했다.

[36] 최영익, 2007/02/01, 「한발 한발, 그러나 고지를 향해 똑바로!」, 『노동해방』 53호.

[37] 대표적으로 2006년 6월 28~29일 실시된 현대차노조의 산별노조 전환투표는 71.5% 찬성으로 3분의 2를 넘겨 가결됐다. 2003년 6월에 실시된 1차 산별노조 전환투표는 62.1% 찬성에 그쳤었다.

[38] 기업지부는 처음에 3년 동안만 시행하는 한시적 조치로 도입됐지만, 2009년과 2011년 두 차례 연장된 끝에 기본 조직체계로 굳어졌다.

[39] 김보성, 2011, 「자동차업종 사내하청 조직화투쟁의 쟁점과 평가」

[40] 이러한 노력은 민주노총 위원장 직선제와 대의원대회 비정규직 할당제 도입 등 제도혁신 운동으로도 나타났다.

관련기사






모바일 버전으로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