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노운사 연재 16회] 3부 패배와 퇴보 (1998-2008) [5] 노동자 정치세력화 열망과 민주노동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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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라인신문

[한노운사 연재 16회] 3부 패배와 퇴보 (1998-2008) [5] 노동자 정치세력화 열망과 민주노동당

  • 양준석
  • 등록 2026.05.05 09:56
  • 조회수 11,459

자본가들의 신자유주의 대공세와 그에 맞선 노동자들의 격렬한 투쟁은 한국 사회 전반에 계급투쟁의 격랑을 몰고 왔다. 노동자들의 투쟁은 성공적인 결과를 얻지는 못했지만, 광범한 계급적 자각을 낳았다. 노동조합에 대해 말하는 것조차 불온하게 간주되던 사회에서 광범한 노동자들이 ‘노동자 정치세력화’라는 구호에 호응하기 시작했다.

 

노동자 정치세력화의 열망은 민주노동당을 탄생, 성장시켰다. 그러나 노동자들의 투쟁을 패배로 귀결시키고, 민주노조운동을 후퇴와 위기로 내몰았던 똑같은 요인이 노동자 정치세력화에도 작용했다. 노동자 정치세력화의 열망은 제대로 뻗어나가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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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부 패배와 퇴보 (1998-2008)

[시대배경] 신자유주의 구조조정

[1] 구조조정과 정리해고에 맞선 투쟁

[2] 민주노조운동의 후퇴와 비정규직 확산

[3] 비정규직 문제를 둘러싼 대결

[4] 민주노조운동의 위기

[5] 노동자 정치세력화 열망과 민주노동당

 

1) 민주노동당 창당에 담긴 이중적 성격

 

2000년 1월 30일 민주노동당이 창당됐다. 민주노동당의 등장은 한국전쟁 이래 극히 우경화된 한국 정치의 지형 속에서 그 자체로 상당한 의미를 갖는 사건이었다. 창당 무렵에 이미 1만 명 이상의 당원을 확보한 민주노동당은 한국전쟁 이래 처음으로 ‘진보적 이념을 표방하면서도 노동자들 속에 상당한 기반을 확보한 정당’으로 등장했다.[1]

 

민주노동당 이전에도 한국 정치에 진보정당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1950년대에는 진보적 민족주의를 표방하며 일정한 대중적 지지를 확보했던 진보당이 있었다. 그러나 진보당은 노동자들 속에서 뚜렷한 기반을 갖지는 못했으며, 이른바 진보당 사건을 통해 당수 조봉암이 1959년에 간첩죄로 사형당하면서 붕괴했다.[2]

 

1990년 11월에 출범한 민중당은 진보적 이념을 내걸긴 했지만 민주노조운동으로 결집한 노동자들 속에서조차 지지 기반을 확장하지 못했으며, 1992년 3월 총선에서 저조한 득표로 법적 해산을 당하면서 해체됐다. 민중당의 좌절은 한편으로 당시 전체 민중운동의 다수파인 민족해방파가 ‘민중의 독자적 정치세력화’를 거부하고 김대중에 대한 비판적 지지로 일관함으로써 야기된 것이기도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스스로 표방한 개량주의 노선 때문이기도 했다.

 

민중당은 저급한 출세주의에 빠진 당권파를 중심으로 소련 붕괴 이전부터 공공연히 개량주의 노선을 표방하였는데, 오히려 이 때문에 변혁적 지향으로 꿈틀대던 전노협으로부터 심한 반발과 견제에 직면할 수밖에 없었으며, 그로 인해 민주노조로 결집한 노동자들 속에서조차 뚜렷한 지지 기반을 확보할 수 없었다.

 

1950년대 진보당과 1990년대 초반 민중당으로 대표되는 진보정당 좌절의 역사와 달리, 민주노동당은 그 출발부터 비교적 순탄한 길을 걸어 나갈 수 있었다. 여기에는 민주노동당 창당이 민주노총의 조직적 결정에 의해 추진됐다는 사실이 결정적 역할을 했다.

 

1997년 7월 민주노총은 대의원대회를 통해 12월 대통령 선거에 후보를 내세우고 향후 진보정당 창당에 나서기로 결의했다.

1. 민주노총은 제 민주세력과 함께 1997년 대선에 국민후보를 추대, 이를 위한 선거대책기구를 구성하고 인적·물적 역량을 동원키로 결의한다.

2. 민주노총은 대중적 합의를 바탕으로 노동자가 적극 참여하고 각계각층의 민주적이고 양심적인 세력과 함께 하는, 우리 사회의 민주적 개혁을 실현하고 노동자의 이익과 요구를 철저히 대변하는 새로운 정당 건설의 토대를 구축한다.[3]

1997년 8월 민주노총은 전국연합·진보정치연합 등과 함께 ‘민주와 진보를 위한 국민승리21’(국민승리21)을 결성하고, 9월에는 권영길 민주노총 위원장을 대통령 후보로 추대하면서 본격적인 선거운동에 돌입했다. 민주노총의 조직력을 총동원했지만, 권영길 후보는 민주노총 조합원 수보다도 적은 30만 표(1.2%)를 얻는데 그쳤다.

 

그런데 득표의 많고 적음을 떠나 정말 심각했던 것은 선거운동의 내용이었다. 권영길 후보의 선거운동 전반을 지배했던 것은 몰계급적 애국주의였다. 국민승리21이 내세운 국민후보 권영길의 핵심 슬로건은 ‘일어나라 코리아!’였다. 노동자는 간 데 없고 그 자리를 온통 ‘국민’과 ‘국가’가 채운 것이다. 민주노총 1기 지도부가 표방하고 있던 ‘국민과 함께 하는 노동운동’ 노선의 정치적 표현이었던 이 몰계급적 애국주의는, 마침 IMF 외환위기 앞에서 자본가들이 ‘국가의 생존’을 명분으로 노동자 생존권에 대한 대규모 공격을 퍼부으려던 상황에서 노동자계급의 사상적 무장해제를 스스로 선언하는 것이나 다름없는 매우 심각한 노선이었다.

 

대통령 선거가 막바지로 치달음과 동시에 IMF 외환위기가 가시화하던 1997년 12월초에 민주노총이 먼저 ‘경제위기 극복을 위한 사회적 합의기구’ 구성을 제안하고 나선 것도, 김대중의 대통령 당선 직후 구성된 노사정위원회를 통해 1998년 2월초 민주노총 지도부가 정리해고 도입에 합의했던 것도 바로 이 몰계급적 애국주의의 연장선에 있었다.

 

몰계급적 애국주의가 지배하는 선거운동에 당연히 현장으로부터 많은 반발이 올라왔다. 특히 ‘일어나라 코리아!’라는 슬로건의 등장은 현장의 반발에 불을 붙였다. 일부 지역에서는 노동자들이 선거운동 거부를 선언하고 길거리에 나붙은 ‘일어나라 코리아!’ 현수막을 제거하러 다니기도 했다.

 

대통령 선거가 끝나고 1998년 5월에 민주노총은 대의원대회를 통해 “국민승리21을 확대 재편하여 노동자 중심의 진보정당 건설을 위해 적극 지원·연대한다”고 진보정당 건설 추진을 다시 한 번 결의했다. 그러나 대통령 선거에서의 몰계급적 애국주의에 대한 현장의 반발에 덧붙여 민주노총 1기 지도부가 정리해고 도입을 합의했다가 불신임당한 것 때문에, 국민승리21을 중심으로 추진되던 진보정당 건설 흐름은 상당한 위기에 빠져 있었다.

 

그런데 1998년 6월 지방선거에서 울산을 중심으로 민주노총 지지 후보들이 상당한 성과를 거두면서 상황이 다시 반전됐다. 1만 명의 정리해고를 강행하겠다는 자본에 맞서 치열한 투쟁을 벌이고 있던 현대차 노동자들을 중심으로 울산 지역의 민주노총 조합원들이 6월 지방선거에서 민주노총 지지 후보들에게 대거 표를 몰아줌으로써 2명의 구청장과 8명의 시·구의원을 당선시킨 것이었다.

 

노동자들의 조직적인 지원을 받은 후보들이 공직 선거에서 대거 당선된 것은 한국전쟁 이래 최초의 사건이었다. ‘노동자 중심의 진보정당이 한국 정치의 척박한 구조 속에서도 현실적으로 성공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최초로 보여준 것이었다. 여기에 ‘정리해고 반대’를 선거운동 전면에 내걸었고 또 그래서 승리했다는 점은 대통령 선거에서의 몰계급적 애국주의가 야기한 현장의 반발을 어느 정도 누그러뜨리는 결과를 가져왔다.

 

하지만 국민승리21을 모태로 한 진보정당 건설은 여전히 창당 동력을 충분히 결집시키지 못한 채 주춤거리고 있었다. 이에 다시 민주노총이 1999년 4월 중앙위원회를 통해 ‘진보정당 창당 추진위원회’를 결성하기로 결의하고, 4월 18일과 6월 13일 두 차례 민주노총·전국빈민연합·국민승리21 등을 중심으로 진보정당 창당 추진대회가 개최됨으로써, 비로소 국민승리21을 넘어선 창당 주체가 형성될 수 있었다.

 

이제 순풍을 타게 된 진보정당 건설 흐름은 이후 8월 29일 ‘(가칭)민주노동당 창당준비위원회’ 결성을 거쳐, 2000년 1월 30일 민주노동당 창당에 이르게 됐다.

 

그런데 민주노동당 창당에는 개량주의 세력이 창당을 주도했다는 하나의 측면과 1996~97년 총파업과 IMF 외환위기를 거치면서 광범한 노동자들의 정치의식이 성장했다는 또 하나의 측면이 모순적으로 결합돼 있었다.

 

◎ 개량주의 세력이 주도한 민주노동당 창당

 

1997년부터 2000년까지 민주노동당 창당 과정을 주도한 것은 명확히 개량주의 세력이었다. 1997년 결성된 국민승리21을 통해 결집한 이들은 다양한 인적 구성을 갖고 있었지만, 그 대표적인 세력은 민주노총의 1기 국민파 지도부와 진보정당추진위원회(진정추) 세력이었다.[4]

 

권영길 위원장으로 대표되는 민주노총의 1기 국민파 지도부는 1996~97년의 역사적인 총파업에서 심각한 과오를 범했다. 그들은 총파업 투쟁의 실질적인 준비와 공세적인 돌입을 회피했을 뿐만 아니라, 총파업 과정에서도 끊임없이 투쟁의 열기를 가라앉히고 결정적인 순간에 총파업을 중단시켜 버림으로써 역사적인 총파업이 소기의 성과를 얻지 못하고 허망하게 소멸되도록 만든 장본인이었다.

 

그런데 그들은 총파업이 소기의 성과를 얻지 못한 이유가 “단 한 석의 국회의원도 없었기 때문”이라고 강변했다. 수백 명의 국회의원을 다 합친 것보다도 훨씬 더 강력했던 총파업의 힘을 스스로 무너뜨려 놓고서, 그들은 겨우 “단 한 석의 국회의원”을 거론하며 궤변을 늘어놓았다.

 

그러나 총파업 이후 권영길 위원장은 국민적 인기를 누리는 유명 스타가 되었다. 비록 소기의 성과를 얻지는 못했지만 총파업이 보여준 위력은 언론과 여론의 시선을 한동안 민주노총에 집중시켰다. 게다가 늘 국민 여론을 고려하며 투쟁의 수위를 낮추고 심지어 결정적인 순간에 총파업을 중단하는 권영길 위원장의 ‘유연한’ 지도력은 부르주아 언론의 구미에 딱 들어맞았다. 부르주아 언론은 연일 그를 최고의 노동운동 지도자라고 칭송했고, 그렇게 해서 그는 대단한 국민적 스타가 되었다.

 

권영길로 대표되는 민주노총 1기 국민파 지도부는 노동자투쟁을 이끌 지도력은 없었지만 정치적 감각과 판단력만큼은 수준급이었다. 그들은 총파업을 거치며 급격히 높아진 노동자들의 정치의식과 부르주아 언론의 환대를 잘 활용하여 대선 참여와 진보정당 건설이라는 새로운 목표를 제시함으로써, 총파업 실패로 인한 대중의 허탈감을 노동자 정치세력화에 대한 기대감으로 전환시키는 데 성공했다.

 

여기에 이러한 사태 전개를 하늘이 준 기회로 여기며 진정추 세력이 온 몸을 던져 뛰어들었다. 진정추 세력의 핵심 인물들은 1996년 4월 총선을 앞두고 노무현이 주도하는 꼬마 민주당에까지 합류해 들어갔다가 총선 이후 파탄지경에 빠져 있었다.

 

1991년 한국 사회주의 운동의 최대 조직이었던 한사노창준위를 건설했다가 소련 붕괴 직후 사회민주주의 노선으로 전환했던 이들은 1992년의 진정추와 1995년의 진보정치연합(진정련)을 거치면서 점점 더 우경화돼 1996년 총선에서는 사회민주주의 노선조차 견지하지 못하고 자유주의 부르주아 정치세력의 품안에 뛰어든 것이었다. 우경화를 거듭하며 노동자계급을 머릿속에서 지워버렸던 이들은, 그러나 총파업을 통해 노동자계급의 위대한 힘을 목도하게 되자, 언제 그랬냐는 듯이 다시 노동자 정치세력화를 외치는 사회민주주의자로 돌아왔다.

 

그런데 1987년과 1992년 대통령 선거에서의 민중후보 운동부터 시작해서 민중당·한국노동당·진정추·진정련·개혁신당·민주당을 거치며 풍부한 실전 경험을 확보한 그들의 뛰어난 정치기술은, 대선 참여와 진보정당 건설을 선언한 민주노총 1기 국민파 지도부에게도 더없이 필요한 것이었다. 그렇게 해서 그 두 세력 간에 강고한 정치적 연합이 이루어졌다.

 

이들을 중심으로 개량주의 세력 전반이 민주노동당 창당에 적극 참여하며 주도적 역할을 했다. 1990년대 중반을 지나며 형성된 그들의 개량주의적 환상은 IMF 외환위기 아래 파상적으로 전개되는 신자유주의 공세 앞에서도 오히려 더욱 고착되는 경향을 보이고 있었다. 개량주의자들은 여전히 정권과 자본에 맞선 치열하고 공세적인 노동자투쟁이 아니라 제도적 타협에 의한 점진적 개량을 간절히 소망했고, 그들에게 ‘노동자 정치세력화’는 그런 제도적 타협의 길로 들어서기 위한 주요한 수단이었다.[5]

 

국민승리21, 국민후보, ‘일어나라 코리아’ 등으로 대표되는, 1997년 대통령 선거에서의 몰계급적 애국주의는 민주노동당 창당을 주도한 개량주의 세력이 가진 사상과 노선의 실체를 유감없이 드러낸 것이었다. 그것은 정확히 따져 보자면 사회민주주의에도 못 미치는 수준이었다.

 

그들이 너무나 사랑했던 ‘국민’이라는 용어는 원래 ‘황국신민(皇國臣民)’의 줄임말로 일제강점기 일본 제국주의자들이 조선 민족을 포섭하여 대동아 전쟁으로 내몰기 위해 사용한 용어였다. 이처럼 국민이라는 용어에 담긴 친일성과 군국주의에 대한 문제제기가 진보적 민족주의자들을 중심으로 꾸준히 지속됐고, 그래서 1995년 8월 김영삼 정권이 광복 50주년을 기념하여 일제 잔재를 청산한다며 1941년부터 사용돼 온 ‘국민학교’라는 초등교육기관의 명칭을 ‘초등학교’로 바꾼 바 있었다.

 

그런 점에서 1995년 11월 출범한 민주노총의 1기 지도부가 표방한 ‘국민과 함께 하는 노동운동’이나 1997년 대통령 선거에서의 ‘국민승리’ ‘국민후보’ 등의 용어는 몰계급적일 뿐만 아니라 진보적 민족주의보다도 못한 지극히 후진적이고 보수적인 것이었다.

 

그러므로 이들 개량주의 세력의 창당 열망과 주도력만으로는 민주노동당은 결코 창당에 이르지 못했거나 창당했더라도 민주노총의 조직적 지원에 힘입은 대중적 기반을 확보하지 못했을 것이다. 실제로 이들 개량주의 세력의 개량주의적·사회민주주의적·애국주의적 환상은 IMF 외환위기라는 객관적 조건과도 너무나 어울리지 않았기에, 만일 그러한 노선만으로 일관되게 나아갔다면 얼마 못가서 노동자들 속에서 차갑게 외면당하고 말았을 것이다.

 

◎ 광범한 노동자들의 정치의식 성장

 

민주노동당이 노동자들 속에서 상당한 대중적 기반을 확보하며 창당될 수 있었던 것은 1996~97년 총파업과 IMF 외환위기를 거치면서 광범한 노동자들의 정치의식이 성장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이 정치의식은 주로 노동자계급의 정체성과 잠재력에 대한 자각에 근거한 것이었으며, 근본적인 사회변혁에 대한 지향은 불투명한 것이었다. 그런 점에서 1990년대 후반에 광범한 노동자들 속에 확산된 이 정치의식은 1990년대 초반에 전노협을 중심으로 한 민주노조 조합원들이 갖고 있었던 정치의식, 즉 ‘천만 노동자 총단결로 노동해방 앞당기자’는 구호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정도로 변혁적 지향성이 강했던 그 정치의식보다는 수준이 낮은 것이었다. 하지만 1990년대 초반의 ‘변혁적’ 정치의식이 전노협을 중심으로 한 민주노조 조합원들 위주로 형성되었던 것과 달리, 1990년대 후반의 ‘계급적’ 정치의식은 광범한 노동자들 속에 형성된 것이었다.

 

광범한 노동자들 속에서 계급적 정치의식이 확산되게 만든 결정적인 계기는 1996~97년 총파업이었다. 김영삼 정권의 날치기 노동법 개악에 맞선 1996~97년 총파업은 비록 승리하지 못했지만 광범한 노동자들 속에서 노동자계급의 잠재력을 자각하게 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1987년 노동자대투쟁 때에도 노동자계급의 잠재력에 대한 대중적 각성의 기회가 있었지만, 전반적인 대중의식이 너무 초보적이었던 탓에 전노협을 중심으로 한 민주노조 조합원들을 제외하고는 그 경험이 거의 유실돼 버렸다. 그러나 1987년 노동자대투쟁 이후 10여 년에 걸친 민주노조운동의 역사를 거치면서 전반적인 대중의식이 일정하게 성장해 온데다가 한 달 가까이 조직적인 총파업이 갖는 위력을 경험함으로써 민주노조운동에 포괄되지 않은 노동자들 속에서조차 노동자계급의 잠재력에 대한 광범한 자각이 일어나게 된 것이었다.

 

여기에 김대중이 이끄는 보수야당이 노동법 재개정 협상에서 애초의 날치기 노동법과 별로 다르지 않은 결과를 만들어 낸 것은 보수야당의 계급적 실체에 대한 광범한 각성을 불러왔다. 또한 이후 IMF 외환위기와 자본가들의 신자유주의 공세를 맞닥뜨린 것은 정권과 자본의 공세에 저항하기 위해 노동자계급의 단결력을 극대화해야 한다는 계급적 방어본능을 광범한 노동자들 속에 불러 일으켰다.

 

그런데 계급적 자각은 있으나 변혁적 지향은 갖추지 못한 이 정치의식, 과학적 신념보다는 계급적 본능이 주도하는 이 정치의식은 양면적 가능성을 갖고 있었다. 한편으로 변혁적 지향을 분명히 하지 못하고 개량주의적 환상에 이끌려 다닐 위험성을 갖고 있다면, 다른 한편으로 실천적 검증을 통해 노동자계급에게 도움이 되는 길과 해악이 되는 길을 뚜렷하게 구분해 낼 수 있는 계급적 직관력을 발휘할 가능성 또한 갖고 있었다.

 

따라서 이 양면적인 계급적 정치의식은 광범한 노동자들이 선거에서 집단투표에 나서는 것을 기본으로 하되, 어떤 정치적 방향으로 이끌리는가에 따라 집단투표가 최대의 실천이  되게 할 수도 있고 대중적 정치투쟁으로 나아가는 출발점이 되게 할 수도 있는 양면적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었다.

 

어쨌든 광범한 노동자들 속에 확산된 이 계급적 정치의식은 자연스럽게 노동자를 대표하는 정당의 출현을 요구하고 기대하는 열망으로 모아졌다. 광범한 노동자들에게 ‘노동자 정치세력화’라는 용어는 바로 그 열망을 표현하는 수단이었다.

 

그 열망은 1997년 대통령 선거에서 민족해방파로 하여금 더 이상 김대중에 대한 비판적 지지를 노골적으로는 지속할 수 없도록 만들었다. 그리고 그 열망을 가장 먼저 위력적으로 표출시킨 것은 1998년 6월 지방선거에서 민주노총이 내세운 후보들에게 그 면면과 실체를 따지지 않고 압도적인 지지를 보낸 울산지역 노동자들이었다.

1998년 무렵의 선거에서 노동자 대중이 폭발적인 열기로 진보 정치세력을 지지했던 것은 무엇보다 민주노조운동에 대한 신뢰, 그리고 민주노조운동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고 인식한 진보 정치세력에 대한 신뢰 때문이었다.

IMF 경제공황이 몰고 온 생존권 위협에 대한 절박한 위기의식도 상당한 작용을 했지만, “정리해고 저지”로 요약되는 민주노조운동과 진보 정치세력의 약속을 굳게 믿었기 때문에, 절박한 위기의식이 진보정치에 대한 폭발적 지지로 연결되는 것도 가능했던 것이다.

당시의 선거들에서 수많은 노동자대중은 나름대로 확신과 자신감을 갖고 누가 특별히 시키지 않아도 스스로 가족과 주변의 이웃·친지들을 설득하고 조직하러 다녔다.

현장의 분위기는 진보 정치세력에 대한 압도적 지지로 자연스럽게 결집되었고, 온갖 수로를 통해 작동하는 밑바닥 노동자들의 설득구조는 지역의 분위기 또한 확연히 휘어잡았다.[6]

이처럼 민주노동당은 개량주의 세력의 주도성과 노동자들의 계급적 정치의식 성장이라는 양 측면이 서로 모순적으로 결합하고 작용하는 과정을 거치며 창당에 이르게 됐다.

 

2) 민주노동당의 약진과 추락

 

IMF 외환위기 이후 극심한 사회 양극화로 표현된 자본주의 모순의 심화는 짧은 시간 동안 민주노동당의 약진과 추락을 차례로 만들어 냈다. 자본주의 모순의 심화로 울부짖는 노동자·민중의 요구를 결집하고 분출시킬 정치적 주체에 대한 노동자·민중의 갈망은 민주노동당의 눈부신 약진을 불러왔다. 그러나 그에 대한 의지와 능력이 없음을 알아챈 노동자·민중의 실망은 다시 민주노동당을 빠르게 추락시켜 버렸다.

 

◎ 민주노동당의 약진

 

민주노동당의 약진은 2002년 6월 지방선거에서부터 시작됐다. 창당 직후 치러진 2000년 4·13 총선에서는 울산 북구와 창원을 선거구에서 접전을 벌이기도 했고, 2001년까지 치러진 각종 보궐선거들에서 이따금 선전하기도 했지만, 민주노동당의 약진은 좀처럼 뚜렷하게 가시화되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2002년 6·13 지방선거에서 민주노동당은 2명의 구청장을 포함한 45명의 당선자를 냈다. 특히 정당명부 비례대표 선거에서 전국적으로 134만여 표(8.1%)를 얻은 것은 약진의 본격적인 신호탄이었다.

 

2002년 12월 대통령 선거에 1997년에 이어 다시 출마한 민주노동당 권영길 후보는 민주당 노무현 후보와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의 막판 대접전 속에서도 96만 표(3.9%)를 얻으면서 1997년 대통령 선거 때의 30만 표(1.2%)에 비해 괄목할 만한 성장을 확인하며 약진의 흐름을 이어갔다.

 

민주노동당의 약진이 최고조에 오른 것은 2004년 4·11 총선 때였다. 민주노동당은 정당명부 비례대표 선거에서 277만 표(13.0%)를 얻으며 단번에 제3당으로 튀어 올랐다. 울산 북구와 창원을 2개의 선거구에서 지역구 당선자를 내고 8명을 비례대표에 당선시켜 10명의 국회의원을 배출함으로써, 민주노동당은 한국전쟁 이래 최초로 국회의원을 배출한, 그것도 한꺼번에 10명이나 배출한 노동자정당이 됐다. 총선에서의 약진은 민주노동당의 주가를 한껏 끌어올렸고, 총선 직후 몇 달 동안은 여론조사 지지율이 20%를 넘어서기까지 했다. 바야흐로 민주노동당의 전성시대가 활짝 열린 셈이었다.

 

◎ 민주노동당의 추락

 

그러나 민주노동당의 약진은 그리 오래 가지 못했다. 조승수 의원이 선거법 위반 대법원 판결로 국회의원직을 상실하면서 치러지게 된 2005년 10·26 울산 북구 재선거에서 정갑득 후보를 내세운 민주노동당은 당력을 총집중하였으나 한나라당 후보에게 패배했다. 민주노동당 입장에서 전국 최고의 아성인 울산 북구에서 당력을 총집중하고도 1천 800여 표(3.6%) 차이로 결국 패배한 것은 2004년 4·11 총선 이후 한껏 들떠 있던 민주노동당에게 큰 충격을 안겨 주었다. 10·26 재선거 패배로 충격에 빠진 민주노동당은 그에 대한 책임을 지고 대표를 포함한 최고위원회가 총사퇴해야 했다.

 

하지만 민주노동당의 추락은 이제 시작일 뿐이었다. 2006년 5·31 지방선거는 민주노동당이 이제 구조적인 위기에 빠져 들었음을 보여주었다. 물론 5·31 지방선거에서 민주노동당이 일방적인 후퇴만을 드러낸 것은 아니었다. 당선자 수가 2002년의 45명에서 81명으로 늘었고, 정당명부 비례대표 선거에서도 210만여 표(12.1%)를 얻으며 2004년 총선 때에 비해 약간 후퇴하는 정도를 기록했다.

 

그러나 수치만으로는 잘 드러나지 않는 중요한 사실이 있었다. 2006년 5월 지방선거는 한국 정치 역사상 가장 충격적인 결과를 만들어 낸 선거였다. 서울·경기·인천의 광역의원 선거구 234곳에서 한나라당이 100% 당선되는 등, 집권당인 열린우리당의 상상하기 힘든 참패와 한나라당의 압도적인 대승이 너무나 뚜렷이 대비되는 선거였다. 특히 2004년 4월 총선에서 열린우리당이 과반수를 장악했던 것을 놓고 보면 겨우 2년 사이에 한국 정치 지형에 엄청난 변화가 일어났음을 보여주는 선거였다.

 

5·31 지방선거 결과는 대통령 노무현을 정점으로 하는 열린우리당에 대한 노동자 민중의 심판이었다.[7] 특히 2002년 대선과 2004년 총선에서 노무현과 열린우리당에게 엄청난 기대와 지지를 보내 주었으나 신자유주의 정책으로 일관함으로써 사상 최악의 사회 양극화라는 참혹한 결과를 안긴 데 대한 준엄한 심판이었다.

 

그런데 심각한 사회 양극화를 초래한 열린우리당에 대한 심판은 민주노동당 같은 노동자 정당의 약진으로 나타난 것이 아니라 또 하나의 자본가정당이며 오히려 더욱 보수적인 한나라당의 압승으로 귀결됐다. 사상 최악의 사회 양극화라는, 즉 어느 때보다 노동자정당의 정치적 기반이 강력하게 확대될 수 있는 사회적 조건 아래 치러진 선거에서, 또한 계급적 문제를 주된 이슈로 하여 한국 정치 역사상 가장 역동적인 지형 변화가 일어난 선거에서, 오히려 민주노동당은 정치적 성장에 결정적인 제동이 걸리는 모순적인 상황이 펼쳐진 것이었다.

 

게다가 선거 결과를 세밀하게 살펴보면 그 의미는 더욱 심각했다. 그동안 민주노동당이 취약했던 여러 지역에서 2002~04년의 전반적 약진이 뒤늦게 반영된 것과 달리, 민주노동당의 가장 강력한 기반인 울산에서는 8년 동안 장악했던 북구·동구 두 곳의 구청장 선거에서 모두 패배하는 등 오히려 노동자들의 지지가 축소됐다. 즉 약진했던 과거와 추락하는 미래의 모순적인 결합이 외관상의 현상유지로 나타났던 것이다.

 

민주노동당의 추락은 2007년 대통령 선거에서 더욱 가속됐다. 세 번째 출마한 권영길 후보는 300만 표를 운운하던 목표치와 달리 71만 표(3.0%)를 얻는 데 그침으로써 2002년 대통령 선거의 96만 표(3.9%)보다 오히려 후퇴했다. 그런데 저조한 득표보다 훨씬 더 심각했던 것은 선거를 치르면서 노동자정치의 최소 원칙마저 저버린 점이었다.

 

9월 20일 권영길 후보가 중소기업협동조합중앙회를 방문해서 중앙회 임원들과 “시종일관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간담회를 진행했다. 여기서 권영길 후보는 “중소기업인 여러분께 항상 존경하는 마음을 가져 왔으며 감사의 인사를 드린다”고 했다. 또한 “민주노동당과 중소기업이 동지적 관계를 가지기를 원한다”고 했다. 민주노동당은 중소기업 자본가들의 동지이면서 동시에 중소기업 노동자들의 동지가 될 수 있다는 말인가?

 

10월 15일 민주노동당 문성현 대표가 한국노총에 보내는 공식 사과문을 김선동 사무총장을 통해 전달했다. 2006년 9월 11일 한국노총이 ‘노사관계 로드맵’ 노사정 야합에 참여한 것을 놓고 문성현 대표가 “한국노총은 이제 노동자의 이름을 버려야 한다”고 했던 발언을 사과한 것이었다. 민주노동당의 사과는 한국노총이 정책연대 대상후보에 민주노동당을 포함시키는 전제 조건으로 사과를 요구했기 때문이었다. 한국노총이 10월 8일자로 사과요구 공문을 보내 16일까지 회신하라고 하자 15일 직접 찾아가서 사과 공문을 전달했다. 한마디로 말해 ‘표’를 얻으려고 민주노동당은 어용 한국노총의 발밑에 납작 엎드렸다.

 

민주노동당의 2007년 대선 참패는 그 본질을 스스로 만천하에 까발리는 기폭제가 됐다. 대선 참패 이후 민주노동당은 시끌벅적한 책임 공방을 벌였지만, 자본주의 모순의 심화로 절규하는 노동자들의 정치적 열망을 배신한 데 대한 어떤 진지한 반성도 찾아볼 수 없었다. 노동자들의 정치적 열망을 똑같이 배신한 자주파(민족주의)와 평등파(사회민주주의) 사이에 반성 없는 추악한 패권 다툼만이 계속됐을 뿐이었다.

 

민주노동당이 개량주의와 의회주의의 길을 걸음으로써 노동자들의 정치적 열망을 배신했던 것은 자주파만의 책임이 아니었다. 대선 참패 이후 목소리를 높인 평등파 또한 개량주의와 의회주의를 주도했던 또 하나의 주역이었다. 대선 참패 이후 평등파가 민주노동당을 집단 탈당하여 진보신당을 창당했지만, 노골적으로 개량주의와 의회주의를 주창한다는 점에서는 다를 게 하나도 없었다. 자주파와 평등파는 자본주의 모순의 심화로 절규하는 노동자들의 정치적 열망을 정면으로 배신한다는 점에서 동전의 양면일 따름이었다.

 

대선 참패와 반성 없는 추악한 패권 다툼 속에서 민주노동당의 위상은 결정적으로 추락했다. 한동안 민주노동당은 노동자들의 정치적 열망을 개량주의와 의회주의라는 잘못된 길로 이끌면서도 마치 노동자 정치세력화의 유력한 희망인 듯 행세했다. 그것은 1987년 노동자대투쟁과 1996~97년 노개투 총파업을 거치며 성장해 온 노동자대중의 정치적 열망을 민주노동당이 상당 부분 흡수해 낸 까닭이었다. 그러나 그동안 민주노동당에 참여하거나 지지했던 수많은 노동자들이 2007년 대선 이후 민주노동당을 박차고 나오거나 지지를 거둬들였다. 10년 가까이 민주노동당이 노동자 정치세력화의 유력한 대안인 것처럼 행세하던 시대는 그렇게 끝났다.

 

◎ 민주노동당은 왜 추락했나?

 

사상 최악의 사회 양극화를 불러온 노무현 정권에 대한 노동자·민중의 분노가 한나라당의 압도적인 승리와 이명박의 집권으로 귀결되는 과정에서 민주노동당이 약진하기는커녕 오히려 추락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단적으로 말해서 민주노동당에 대한 노동자·민중의 실망, 즉 자본주의 모순의 심화로 울부짖는 자신들의 요구를 앞장서 결집하고 분출시킬 의지와 능력을 민주노동당이 갖고 있지 않다고 판단하게 된 노동자·민중의 실망 때문이었다.

 

그러한 노동자·민중의 실망은 민주노동당을 압도적으로 장악하고 있던 사회민주주의·민족주의 노선의 개량주의적이고 의회주의적인 한계로부터 필연적으로 야기된 것이었다. 개량주의 세력의 주도로 창당되고 그 주도권이 날로 강화된 민주노동당은, 자본가들의 신자유주의 공세에 정면으로 맞서는 노동자정치투쟁 전선을 앞장서 구축해내는 역할을 철저히 거부했다. 특히 민주노동당은 1996년 이후 자본가들의 신자유주의 대공세의 핵심이 정리해고·비정규직 제도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정리해고·비정규직 제도의 철폐를 내건 역동적인 대중정치투쟁을 조직하려는 어떤 노력도 하지 않았다.

 

반면에 민주노동당은 노동자 정치세력화를 온갖 개량주의·의회주의 환상 속에 가두어 버렸고, 광범한 노동자들의 성장하는 계급적 정치의식을 그저 선거에서의 집단투표로 제한시켜 버림으로써 그 진정한 분출과 성장을 오히려 가로막았다.

 

한동안 민주노동당은 노동자·민중에게 극심한 사회 양극화를 앞장서 해결할 신선한 정치적 대안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었고 그러한 기대는 지지율의 급격한 상승으로 연결됐다. 하지만 민주노동당의 개량주의적·의회주의적 접근은 오히려 의미 있는 사회적 변화를 전혀 만들어 내지 못하는 무능함만을 노동자·민중에게 보여주게 됐고, 심지어는 자본가 정치세력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는 극심한 배신감마저 들게 만들었다.

 

이를테면 부유세, 무상의료·무상교육, 비정규직 권리보장 입법 등 민주노동당이 신자유주의 공세에 맞서 제출했던 나름의 대안적 전망들은 한때 민주노동당의 약진을 뒷받침하는 데 상당한 역할을 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민주노동당의 핵심의제에서 아예 사라져 버리거나 또는 스스로 후퇴를 거듭하면서 누더기가 돼 버렸다.

 

2004년 총선에서 민주노동당이 국회의원 10명을 당선시킬 때, 민주노동당은 무상의료·무상교육과 부유세를 성공적으로 쟁점화했다.

 

민주노동당이 내건 무상의료·무상교육은 광범한 노동자·민중에게 큰 호응을 받았다. IMF 외환위기 이후 수많은 노동자·민중이 경쟁력과 효율성의 논리에 밀려 삶이 파괴당했다. 그보다 더 많은 노동자·민중이 최소한의 생존조건도 보장되지 않는 ‘불가피한 희생자’로 내밀리지 않으려고 발버둥을 쳐야 했다. 그런 상황에서 무상의료·무상교육은 가뭄에 단비와도 같은 희망으로 다가왔다.

 

무상의료·무상교육의 재원을 마련하겠다며 부유세를 내건 것도 큰 호응을 받았다. 어차피 노동자·민중이 더 낼 수 있는 돈도 없었다. IMF 외환위기를 겪으며 수많은 노동자·민중의 삶이 파괴될 때, 가진 자들의 재산이 엄청나게 불어났다는 사실도 모두가 알고 있었다.

 

무상의료·무상교육과 부유세는 한국 정치의 향방을 가르는 쟁점으로 부상할 가능성을 충분히 갖고 있었다. 그러나 민주노동당은 자신이 던진 이 쟁점을 감당할 능력이 전혀 안 됐다. 무엇보다도 민주노동당의 개량주의 노선 그 자체가 근본적인 걸림돌이었다.

 

민주노동당에게는 지지율을 올리고 그래서 국회의원 수를 늘리는 게 최고의 가치였다. 그런 민주노동당에게 무상의료·무상교육과 부유세가 부메랑이 돼 돌아왔다. 자본가계급이 보수언론을 동원해서 무상의료·무상교육과 부유세에 붉은 이미지를 덧씌우며 집요하게 공격하고 나선 것이다. 온건한 이미지를 지키려고 애를 쓰던 민주노동당은 무상의료·무상교육과 부유세를 구체화하는 과정에서 급진적 성격을 최대한 제거해 나갔다.

 

결국 민주노동당의 무상의료·무상교육과 부유세는 여의주 없는 용이 되고 말았다. 자본의 이윤추구를 절대시하는 자본주의 원리에 정면 도전하지 않으면서, 제대로 된 무상의료·무상교육과 부유세를 도입할 방법은 없었다. 구체화의 과정에서 그 내용이 현저히 약화되자, 무상의료·무상교육과 부유세 자체가 광범한 노동자·민중의 관심으로부터 멀어져 갔다. 정치적 쟁점으로서의 긴장감 또한 사라졌다. 핵심 쟁점을 스스로 포기하면서, 민주노동당의 정치는 정처 없이 표류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2005~06년을 거치며 한국 정치는 일찍이 겪지 못했던 거대한 소용돌이에 휩쓸리고 있었다. IMF 외환위기 이후 견딜 수 없는 삶의 고통과 긴장이 계속되자, 광범한 노동자·민중의 분노가 거대하게 축적됐다. 그 분노는 2006년 5·31 지방선거에서 폭발했다. 노동자·민중은 삶의 고통에 대한 책임을 노무현 정권에게 물었다. 집권여당인 열린우리당은 서울·인천·경기의 수도권 세 지역에서 지역구 광역의원을 단 한 명도 당선시키지 못했다. 한국 정치 역사상 유례를 찾을 수 없을 정도로 충격적인 참패였다.

 

그런데 신자유주의 정책의 집행자 노무현 정권을 심판하면서 노동자·민중이 선택한 새로운 희망은 민주노동당이 아니라 한나라당이었다. 노동자·민중에게 민주노동당은 노무현 정권에 가장 철저하게 맞서는 대안이 아니라, 그 아류로 인식됐다. 심지어 민주노동당 스스로도 그렇게 행동했다.

사회 양극화를 심화시킨 주범으로서 노무현 정권과 열린우리당에 대한 노동자·민중의 분노가 왜 5·31 선거에서는 민주노동당의 약진과 병행되지 않은 채 한나라당의 일방적 승리로 귀결된 것일까?

그 원인은 거의 전적으로 민주노동당 스스로에게 있다. 신자유주의 집행자, 노무현 정권과 열린우리당에 대한 노동자·민중의 분노 앞에서 새로운 전망을 제시하는 대안 주체로 다가서지 못했을 뿐 아니라 심지어 열린우리당과의 차별성을 스스로 애써 부정하기까지 한 까닭이다. …

민주노동당이 선거 기간 중 발표한 ‘진보개혁세력 대표주자 교체론’은 그 전형적 사례다. 열린우리당의 신자유주의 정책이 대다수 노동자·민중을 삶의 벼랑 끝으로 밀어붙이고 있으며 그로 인해 누적된 대중의 분노가 하늘을 찌르려 하는 이 심각한 정세에서, 신자유주의 집행자 열린우리당에 맞선 대중적 항쟁의 주도자로 나서야 할 진보정당이 오히려 ‘진보개혁세력’이라는 범주를 통해 “민주노동당은 결국 열린우리당과 한 묶음”이라고 자기 정체성을 천명한 것이다.

한나라당 서울시장 후보로 오세훈이 전격 등장하는 과정이 상징하듯이, 사회경제적 문제를 담아내지 못하는 형식적인 민주주의와 개혁은 현 시점의 한국 정치에서 이미 주된 쟁점이 아니다. 따라서 열린우리당의 신자유주의를 일정하게 비판한다 하더라도 진보개혁세력이라는 낡은 규정과 어법 속에 빠져 있는 한, 민주노동당은 결코 사회 양극화 속에 절망하고 있는 노동자·민중과 진정어린 상호소통을 확장해 갈 수 없었던 것이다.

문제가 더욱 심각한 것은, 이러한 정체성 혼란이 우발적인 실수가 아니라는 점이다. 2004년 12월에도 국가보안법 철폐 투쟁을 둘러싸고 ‘열린우리당 2중대’ 논란이 벌어졌으며, 국회에서 비정규직법을 둘러싼 치열한 대치가 지속되고 있음에도 열린우리당과의 공조가 수차례 거듭되어 왔기 때문이다. …

2002~04년 민주노동당의 약진을 가능케 했던 … 대중적 약속들이 그동안 민주노동당 내에서 어떻게 취급되어 왔는가? 부유세와 무상의료·무상교육은 어느덧 당의 핵심 의제에서 사실상 사라져 버렸고, 비정규직 권리보장 입법안은 비정규직 법안 처리 공방 속에서 스스로 후퇴를 거듭하면서 반쯤 누더기가 되어버린 것이 냉정한 현실 아닌가!

중간층 눈치 보기와 물타기로 점철된 정책의 구체화 과정, 아래로부터 대중 동력을 형성해 오는 집요한 노력의 부재, 아니 그 이전에 대중과의 약속을 지키겠다는 확고한 의지 자체의 결여 등등. 그 원인을 어떻게 설명하든, 이전에 민주노동당이 가장 그럴싸하게 내걸었던 대중적 약속들은 그간의 과정을 거치며 사실상 공수표가 되어 버린 것이다.[8]

05년에는 비정규직 법 민주노동당 수정안, 그리고 06년에는 로드맵 열우당 수정안 야합. 단병호 의원이 국회에서 원칙을 훼손했던 사례들이다. 하필이면 공교롭게도 날짜가 둘 다 똑같이 12월 8일이다.

05년 비정규직 법 민주노동당 수정안의 경우, 노무현 정권의 비정규직 법 개악 저지 투쟁에서 전선을 교란시켰다. 당시에 사유제한을 확대한 수정안은 추후 개악 시에는 결과적으로 개악에 일정정도 동참한 꼴이 될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 투쟁전선에서 투쟁하고 있는 주체들의 사기를 꺾게 되어, 결국 그 어떤 명분도 실리도 잃어버리는 것이었다.

06년 이번 로드맵 야합의 경우에는, 전선을 교란했을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 환노위 전체회의에서 로드맵 법안 통과에 실질적으로 동의한 것이었고 그 과정에서 자본가계급과 야합이 있었다. 그 결과 06년 투쟁을 패배했어도 아주 굴욕적으로 패배하게 만들었다.

이로써 단병호 의원은 노동자정당에서 국회에 파견한 노동자의원으로서 의회에서 자본가계급과 투쟁하기보다는, 자본가계급과 노동자계급 사이에서 관리자로서 역할을 하고 말았다. 의회주의에 철저히 물들었다고밖에 달리 설명할 길이 없다.[9]

결국 민주노동당의 추락은 자본주의 모순의 심화로 벼랑 끝에 내몰린 노동자들에게 개량주의적이고 의회주의적인 허상만을 제시할 뿐 노동자들을 당당한 투쟁의 주체로 일으켜 세우지 못했던 민주노동당 스스로가 자초한 것이었다. 민주노동당은 자본주의 모순의 심화로 울부짖는 노동자들을 자본가들의 총공세에 맞서 현장과 거리에서의 직접적인 정치투쟁 전선으로 이끌어 내려는 어떤 진지한 시도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노조관료들을 기반으로 개량주의와 의회주의에 철저히 매몰되면서 신자유주의 집행자 노무현 정권의 2중대 역할만을 수행할 뿐이었다. 따라서 민주노동당은 노무현 정권에 대한 노동자·민중의 분노를 앞장서 모아내고 분출하는 주체가 되기는커녕 오히려 노무현 정권과 한 묶음으로 노동자·민중에게 심판당하는 처지가 되고 말았던 것이다.

 

3) 역사적 가설

 

‘노동자 정치세력화를 향한 대중적 열망’으로 뒷받침된 민주노동당이 개량주의 정당으로 고착된 것은, 창당 초기부터 개량주의 세력이 주도권을 장악한 때문이었다. 이것은 악순환을 낳았다. 민주노동당의 개량주의 성격이 노골화할수록 민주노조운동 내부의 타협적·관료적 인물들이 출세의 욕망을 품고 물밀 듯이 민주노동당으로 밀려들어 갔다. 반면 전투적·변혁적 선진노동자들은 점점 더 민주노동당과 거리를 두었다. 그렇게 해서 민주노동당은 개량주의 정당으로 빠르게 고착돼 갔다.

 

전투적·변혁적 선진노동자들은 노동자 정치세력화에 대한 열망이 강했지만 초기부터 다수가 민주노동당에 참여하지 않았다. 한편으로는 개량주의 주도세력에 대한 거부감 때문이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민주노동당이 노동자계급의 정치적 전진에 기여하도록 활용할 방안에 대한 전망 부재 때문이었다. 전투적·변혁적 선진노동자들이 사실상 참여하지 않으면서 민주노동당이 노동자계급의 정치적 전진에 기여할 가능성은 사라졌다.

 

그런데 민주노동당이 노동자계급의 정치적 전진에 기여할 길은 애초부터 없었을까? 개량주의 세력에게서 주도권을 빼앗아, 사회주의자들과 전투적·변혁적 선진노동자들이 민주노동당으로 모여든 ‘노동자 정치세력화를 향한 대중적 열망’을 틀어쥘 길은 없었을까?

 

민주노동당이 역사적 의의를 갖기 위해서는 민주노동당보다 앞선 지점에서 문제가 바로잡혀야 했다. 만일 전투적·변혁적 선진노동자들이 1990년대 초중반 민주노조운동 내부 노선투쟁에서 승리하고 주도권을 장악했다면, 그리고 민주노동당의 역사적 의의를 해명하면서 올바로 활용할 전망을 세울 수 있었다면, 많은 것이 달라졌을 수 있다. 1996~97년 총파업은 훨씬 더 성공적인 투쟁이 될 수 있었고, 민주노동당은 제대로 된 노동자계급정당으로 형성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 그 시기에는 매우 쉽지 않은 일이었다. 1990년대 초중반을 거치면서 민주노조운동의 주도권이 전투적·변혁적 세력에게서 타협·개량주의 세력에게로 이동한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그 배경에는 소련 붕괴라는 세계사적 사건이 몰고 온 극심한 사상적 혼란이 놓여 있었다. 그 시절 거대한 청산주의 물결을 거부하고 간신히 살아남은 극소수 사회주의자들은 사상적·실천적 전망을 근본에서부터 하나씩 다시 세워가야 했다. 또한 선진노동자들은 총체적 전망과 연결되지 못한 막막함 속에서도 전투적·변혁적 지향을 포기하지 않으려 고군분투하고 있었다.

 

4) 대안 지도력으로 서지 못한 사회주의 세력

 

1987년 노동자대투쟁 이후 폭발적으로 성장한 한국의 노동자운동은 세계에서 가장 악랄하게 노동자들을 착취하고 억압하던 한국의 자본가들에게 적지 않은 양보를 강제해 냈다. 1990년대 중반까지 자본가들은 노동자운동에 대한 탄압을 계속 퍼부으면서도 노동자들의 끈질긴 투쟁력에 밀려 경제적으로는 상당한 양보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IMF 외환위기를 계기로 한국 자본주의가 충격적으로 위기에 내몰리면서부터 자본가들의 태도는 완연히 바뀌었다. 자본가들이 정리해고를 앞세워 무자비하게 신자유주의 대공세를 펼치자, 노동자들은 1990년대 중반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매우 치열하게 투쟁으로 맞섰다. 정리해고 법제화에 맞섰던 1996-97년 총파업, 정리해고에 맞섰던 1998년 현대차·만도기계 파업, 1999년 한라중공업 파업, 2001년 대우차·효성·태광 파업, 발전소를 비롯한 국가기간산업 사유화(민영화)에 맞섰던 2002년 발전 파업은 이 시기의 가장 대표적인 투쟁이었다.

 

특히 대기업 정규직이 주를 이뤘던 그러한 투쟁들 속에서, 노동자들은 자본의 당면한 공세를 물리치는 것만이 아니라 노동자의 세상을 향한 거침없는 전진을 노래하고 희망했다. 그러나 그 투쟁들은 줄줄이 패배했다. 노동자들은 생존과 권리를 지키려는 강렬한 열망을 행동으로 보여주었지만, 지도부의 투항과 배신을 이겨내지 못하고 투쟁 전열이 무너지면서 결국 패배하는 양상이 거듭해서 되풀이됐다.

 

1990년대 중반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퍼부어진 자본가들의 신자유주의 대공세는 노동자들에게, 특히 그 지도부에게 이전보다 훨씬 더 큰 용기와 시야, 대담한 전망과 자신감을 요구했다. 나라와 기업의 운명이 경각에 달렸다는 논리로 노동자들에게 희생을 강요하는 것에 맞서, 노동자들의 생존권은 어떤 경우에도 내줄 수 없으며 더 이상 당신들이 우리의 생존권을 책임질 수 없다면 이제 노동자가 나라와 기업을 이끌고 가겠다는 대담한 의지와 자신감이 필요했다. 그러나 그 시절 민주노조운동의 지도부는 전반적으로 엄혹한 사태를 헤치고 나갈 역량을 갖추지 못했으며, 결국 노동자들의 열망을 책임지지 못하고 자본가들에게 투항하며 배신할 수밖에 없었다.

 

1996~97년 총파업 이후 2000년대 초반까지 자본가들의 신자유주의 대공세가 펼쳐진 이 시기는 만일 노동자들이 전열을 추슬러 총반격에 나설 수 있었다면 자본의 공격으로부터 노동자의 생존권을 지켜낼 뿐만 아니라 오히려 노동자운동의 거대한 성장과 사회변혁을 향한 힘찬 전진으로 나아갈 수도 있는 가능성을 가진 시기였다.

 

노동자들은 역사적인 1996~97년 총파업에서 그리고 이후에도 몇 차례 역동적인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노동자들은 이러한 역동적 가능성을 제대로 펼쳐내지 못하고 타협·개량주의 세력의 지도력에 갇혀 거듭되는 투항적 배신에 좌절하며 패배를 되풀이하고 말았다.

 

노동자들의 역동적인 가능성이 힘차게 뻗어나가려면 타협·개량주의 지도력과 달리 전투적·변혁적 전망과 기세를 극대화한 대안 지도력을 중심으로 자본가들의 신자유주의 공세에 정면으로 맞서는 강고한 노동자정치투쟁 전선을 구축하는 것이 절실히 필요했다.

 

이렇게 자본가들의 신자유주의 공세에 정면으로 맞서는 노동자정치투쟁 전선을 앞장서 구축해 냄으로써 타협·개량주의 지도력을 대체하는 대안 지도력으로 스스로 서는 것이 이 시기 사회주의 세력에게 주어진 객관적 과제였다. 그러나 사회주의 세력은 그러한 역할을 수행해 내지 못했다.

 

이 시기에는 민주노총으로 결집한 수십만 조합원들도 상당한 능동성과 건강한 활력을 갖고 있었다.[10] 또한 광범한 노동자들 속에서 계급적 정치의식이 빠르게 성장하고 있었다. 따라서 총자본의 신자유주의 세계화 공세에 정면으로 맞서는 위력적인 노동자정치투쟁 전선을 구축해 낼 가능성이 얼마든지 열려 있었다.

 

IMF 외환위기를 계기로 노동법 개악과 구조조정·정리해고의 공격을 퍼부으며 노동자들을 벼랑으로 내모는 총자본에 맞서, 노동자들이 현장과 거리에서 펼치는 직접적인 정치투쟁을 통해, 정리해고·임금삭감·비정규직화 저지 등 노동자들의 권리를 단호하게 지켜낼 뿐만 아니라, 나아가 △정리해고제 철폐 △비정규직 철폐 △노동시간 단축으로 일자리 나누기 △손배·가압류 폐지 △무상의료·무상교육·부유세 등으로 반격을 전개하여 사회변혁을 향해 역동적으로 전진해 나가는 길도 얼마든지 열려 있었다.

 

그러나 사회주의 세력은 이러한 노동자정치투쟁 전선을 앞장서 구축해 내지 못했다. 타협·개량주의 지도부의 오류와 한계를 비판하는 데서는 날카로웠지만, 그러한 비판을 넘어 스스로를 대안 지도력으로 세워 내지는 못했다. 현장조직 운동을 중심으로 일부 선진노동자들 속에 어느 정도 전투적·변혁적 기세를 불어넣을 수는 있었지만, 타협·개량주의 지도부의 투항적 배신에 분노하는 선진노동자들이 그러한 계급적 본능을 체계적인 사상과 노선으로 발전시켜 내도록 이끌지는 못했다. 또한 일부 선진노동자들을 넘어서서 광범한 노동자들에게 직접 다가가며 공세적인 노동자정치투쟁 전선의 필요성과 전망을 강력하고 끈질기게 제시해 낼 필요가 있었으나, 그러지 못했다.

 

이 시기에 노동자정치투쟁 전선을 앞장서 구축해 내지 못함으로써, 사회주의 세력은 노동자계급 운동의 객관적 요구에 부응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스스로도 부분적인 퇴보를 포함한 전반적인 정체를 피할 수 없었다. 현장의 선진노동자들에게 사상적·실천적 전망을 열어주는 데서도 큰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었고, 그로 인해 현장파의 운동적 몰락에도 중요한 원인을 제공했다. 또한 개량주의 세력의 든든한 근거지가 되어 노동자운동 전반을 정체와 후퇴로 내모는 민주노동당에 대당할 만한 대안 정당이나 정치조직을 세워내지도 못했다.

 

물론 1990년대 초반을 강타한 청산주의의 물결로부터 간신히 살아남아 그 후 어렵게 몇 년을 헤쳐오고 있던 사회주의자들에게 노동자정치투쟁 전선을 앞장서 구축해 낸다는 것은 사실 매우 버거운 일이었다. 가장 현명하게 상황을 대처해 나갔다고 하더라도 그러한 역할을 온전히 수행해 내는 것은 결코 쉽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만일 사회주의 세력 전반이 통일된 대응력을 갖춤으로써 잠재적인 역량을 극대화할 수 있었다면 그러한 역할을 수행해 내는 것도 꼭 불가능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각 세력이 가진 이러저러한 편향과 결함들도 통일된 흐름 속에서는 어느 정도 균형을 이루고 상호 보완되면서 풍부한 요소를 가진 장점으로 승화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시기 사회주의 세력은 공개 영역과 비공개 영역 모두에서 다양한 그룹으로 분열된 상태를 극복하지 못했고, 따라서 중요한 역사적 국면에서 자신의 역할을 제대로 수행해내지 못했다.

 

다만 2000년대 초반 이후 매우 척박한 조건을 뚫고 비정규직 운동이 건설되는 과정에서 사회주의 세력과 사회주의 현장활동가들은 주도적인 역할을 수행해 냈다. 한국 노동자운동이 정규직 운동의 패퇴에 따른 극심한 위기를 딛고 비정규직 운동을 중심으로 재건돼 나갈 수 있도록 소중한 초석을 놓은 셈이었다.

 

※한국노동자운동사 4부(2008~2017, 고난과 재건)와 5부(2017~2024, 폭풍 속의 표류)는 몇 달 간의 휴지기 이후 이어서 연재될 예정입니다.

 

[1] 민주노동당의 당원 수는 창당 이후 꾸준히 늘다가 2004년 4월 총선을 거치면서 비약적으로 늘어나 8만여 명에까지 이르렀다.

[2]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는 2007년 9월 “조봉암이 1956년 대통령 선거에서 이승만 정권에 위협적인 정치인으로 부상하자, 경찰과 군이 정권의 의도에 따라 조봉암 등을 체포해 사형에 이르게 했다”는 조사결과를 의결하고, 조봉암과 유가족에게 국가가 사과하고 피해 구제와 명예 회복을 위한 적절한 조치를 취할 것을 권고했다. 대법원은 2011년 1월 이 사건에 대한 재심을 통해 조봉암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3] 민주노총, 1997/07/24, 제6차 임시대의원대회 결의사항.

[4] 민주노동당 창당 이후 초기 4년 동안, 민주노총의 1기 국민파 지도부를 대표하는 권영길은 당 대표를 역임했고, 진정추 세력을 대표하는 노회찬은 부대표와 사무총장을 역임하며 실권을 행사했다.

[5] 그러나 현실은 자본주의 위기가 깊어짐에 따라 자본가들이 개량주의자들과 타협할 의사와 능력이 더욱 사라지는 상황이었다. 개량주의자들은 자본과의 타협을 추구했지만 ‘개량의 떡고물’조차 얻어올 게 없었으며, 그들에게 강요된 것은 자본가들의 공세를 합리화해 주는 ‘개량 없는’ 개량주의일 뿐이었다. 이러한 딜레마는 2000년대를 지나면서 민주노동당의 진로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6] 양준석, 2006/06/20, 「울산에서 민주노동당은 왜 ‘계급투표’에 실패했는가?」

[7] 한나라당 박근혜 대표의 피습 사건과 같은 우연적 요소들이 사태를 더욱 극적으로 만든 측면도 있었지만, 5·31 지방선거가 드러낸 정치적 의미의 핵심은 대통령 노무현을 정점으로 하는 열린우리당에 대한 노동자·민중의 심판이었다.

[8] 양준석, 2006/06/20, 「울산에서 민주노동당은 왜 ‘계급투표’에 실패했는가?」

[9] 노동해방실천연대, 2007/01/26, 「민주노동당, 노동자 배신 정당으로 전락할 것인가」, 『해방』 20호.

[10] 몇 년 동안 구조조정에 맞선 강력한 투쟁들이 펼쳐졌지만 결국 지도부의 배신으로 패퇴하고 나자, 민주노조 조합원들은 2000년대 초반 이후 심각한 수동성과 보수화에 빠져든다. 하지만 그렇게 되기 전까지 1996~97년 총파업으로부터 몇 년 동안 민주노조 조합원들이 보여준 능동성과 활력은 분명 대단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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