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노운사 연재 8회] 2부 전진과 격돌 (1988-1998) [2] 1990~91년 전노협 건설과 민주주의 투쟁
  • 해당된 기사를 공유합니다

온라인신문

[한노운사 연재 8회] 2부 전진과 격돌 (1988-1998) [2] 1990~91년 전노협 건설과 민주주의 투쟁

  • 양준석
  • 등록 2026.03.09 11:39
  • 조회수 2,370

1988~89년 민주노조운동의 폭발적 성장을 토대로 전투적·변혁적 민주노조운동의 전국적 총결집체로서 전노협이 1990년 건설됐다. 전노협을 와해시키려는 정권과 자본의 가공할 탄압에 맞서 노동자들은 1990년 5월 한국전쟁 이후 최초로 전국 총파업을 조직해 냄으로써 전노협을 사수해 냈다.

 

1991년 5월 군사파시즘의 부활을 모색하는 노태우 정권에 맞서 전 민중의 민주주의 투쟁이 1987년 6월 이후 최대 규모로 터져 나왔을 때, 노동자들은 조직적 대오로 참여해 주도적 역할을 수행했다.

 

 

이전 편 보기

 

2부 전진과 격돌 (1988-1998)

[시대배경] 군사파시즘에서 신자유주의 질서로
[1] 1988~89년 민주노조운동의 폭발적 성장
[2] 1990~91년 전노협 건설과 민주주의 투쟁
[3] 민주노총으로 가는 길
[4] 1996~98년 노동법 대격돌

 

1) 1990년 전노협 건설과 파상적 탄압

 

1989년이 지나는 동안 ‘지역·업종별 노동조합 전국회의’는 전국 단일조직 건설을 위한 논의를 꾸준히 진척시켰다. 마침내 1990년 1월 22일 민주노조운동의 전국적 구심으로서 ‘전국노동조합협의회’(전노협)가 건설됐다. 전노협 건설에는 지노협 14개와 업종협 1개가 참여했다. 전노협은 600여 개 단위노조, 19만 3천여 명의 조합원을 포괄하며 출범했다.[1]

서울대에서 열릴 예정이었던 전노협 창립대회는 대회장 주변을 중심으로 서울지역에 2만 5천여 명의 경찰이 원천봉쇄한 상황이었으며 시내 곳곳은 수시로 검문검색이 이루어졌다.

이에 따라 전국노동조합협의회 창립준비위원회는 사전에 비밀연락체계를 구축하고 제2, 제3의 창립대회 장소를 선정하고 동시 준비를 진행했다. 또한 하루 전날부터 상경한 대의원들은 10~15명 단위의 조로 편제되어 엄격한 행동통일을 이루어냈다. 조별로 편제된 대의원들은 보통 두세 차례 수도권 일대를 돌면서 경찰의 미행을 따돌렸다.

그리하여 경찰의 추적을 완전히 따돌렸다는 판단이 선 전노협 창립준비위원회에서는 1월 22일 당일 아침 서울대에서 성균관대학교 수원캠퍼스 학생회관으로 장소를 변경하였고, 대기하고 있던 대회 참가자들도 일사분란하게 수원 성균관대학교로 오전 11시 50분경부터 속속 도착하기 시작해 1시간 만에 1,500여 명이 결집하였다.

12시 45분 인노협 조직국장의 개회선언으로 시작된 창립대회는 … 8백여 명의 대의원들이 참가한 가운데 1시간 동안 진행되었다.

참가자들은 창립선언문에서 “한국노총으로 대표되는 노사협조주의와 어용적, 비민주적 노동조합운동을 극복하고 자주적이고 민주적인 노동운동을 전개해 나갈 수 있는 한국노동조합운동의 새로운 조직적 주체가 탄생”되었음을 밝히고 “노동자의 인간다운 삶과 국민의 자유와 행복을 실현하기 위해 민주노조운동의 역량을 강화하고 자주적 산별노조 건설에 매진할 것”을 결의하였다.

이어 대의원들은 단병호 전노협 창립준비위원회 위원장을 전노협의 초대 위원장으로 추대하고 전노협 강령 및 규약을 제정하였다.[2]

1987년 대투쟁 이후 노동자들의 기세에 당황하며 일정한 전략적 후퇴를 감수했던 자본가계급은, 전노협 건설만큼은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심각한 사태로 받아들였다. 정권과 자본의 탄압이 나날이 강도를 높여가면서 사무전문직과 대기업을 중심으로 절반 가까운 민주노조가 전노협 건설 과정에서 떨어져 나갔다.

 

지역별 연합조직들이 전체적으로 전노협에 참여한 것과 달리 업종별 연합조직 가운데 다수는 조합원들의 낮은 의식수준을 이유로 전노협에 참여하지 않았다. 대신 5월 30일 ‘전국업종노동조합회의’(업종회의)를 따로 결성했다. 또한 지역별 연합조직 가운데 대공장 노조가 밀집된 울산은 처음에 ‘울노협 준비위’로 참여했으나 정권의 탄압과 회유로 울노협 준비위가 무너지면서 실질적인 참여로는 이어지지 못했다.

 

그럼에도 전노협은 1987년 이후 거대한 규모로 성장한 민주노조들의 전국적 구심이자 총단결체였다. 노태우 정권이 엄청난 탄압을 퍼붓는 상황을 뚫고, 40여 년 동안 이어진 한국노총의 관료적 통제를 단호히 거부하면서, 20만 노동자를 포괄하는 600개의 민주노조들이 결집하여 전노협을 건설한 것은 그 자체로 엄청난 사건이었다.

 

전노협이 결성된 바로 그날, 대통령 노태우가 이끄는 민주정의당과 김영삼의 통일민주당, 김종필의 신민주공화당이 이른바 ‘3당 합당’을 통해 국회의원 2/3 이상을 포괄하는 거대 보수대연합에 합의하며 민주자유당을 창당하기로 선언했다. 노태우 정권의 정치적 기반을 안정화하기 위한 이 정계개편의 동기 가운데 하나는 전노협 건설로 대표되는 노동자계급의 거침없는 성장에 놀란 자본가계급의 위기의식이었다. 전노협에 강력한 탄압을 퍼부어 와해시킬 수 있도록 노태우 정권에 힘을 실어줘야 한다고 자본가계급은 공감하고 있었다.

 

실제로 3당 합당으로 권력을 집중시킨 노태우 정권은 전노협 건설에 나선 노동자들에게 박정희·전두환 군사정권 시절에 버금가는 맹렬한 탄압을 퍼부었다. 전노협 건설 세 달 만에 중앙위원 51명 가운데 17명이 구속되고 12명이 수배되어 29명이 정상적 업무를 볼 수 없는 상태가 됐다. 전노협 사업장에 대한 공권력 투입이 18차례나 이루어졌고, 전노협 탄압으로 구속된 노동자만 334명이나 됐다. 노동부는 전노협에 가입한 모든 노조를 상대로 업무조사에 나섰다. 안기부는 전노협 가입 노조 임원들을 상대로 전노협 탈퇴 공작을 집요하게 진행했다. 저렇게 전면적인 탄압을 뚫고 과연 전노협이 지탱될 수 있을 것인지 누구도 장담할 수 없었다.

 

2) 1990년 전노협 사수 전국 총파업

 

1990년 봄, 전노협의 운명이 바람 앞의 등불처럼 위태롭던 상황에서 노동자들의 투쟁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첫 포문을 연 것은 한국방송공사(KBS) 노동자들의 방송민주화 투쟁이었다. 불길은 울산 현대중공업으로 옮겨 붙었다. 정권이 현대중공업 파업에 즉각적으로 공권력을 투입하자 현대중공업노조가 골리앗 크레인을 점거하고 현대자동차 노동자들이 자발적인 비공인파업에 나서면서 전국적인 연대투쟁이 솟구쳤다. 그 기세를 타고 전노협이 한국전쟁 이후 최초로 전국 총파업을 사흘 동안 조직했다.

 

◎ KBS 방송민주화 투쟁

 

KBS에 노동조합이 결성된 것은 1988년 5월이었다. 노동조합은 군사정권의 관제언론으로 기능해 왔던 KBS의 역사를 반성하며 권력에 대한 비판과 금기에 대한 도전을 확대해 나갔다. 1988년 11월 KBS 사장으로 선임된 서영훈은 이러한 노조의 노력에 비교적 협조적이었다.

 

1990년 1월 3당 합당으로 정치적 기반을 강화한 노태우 정권은 KBS에 대해서도 통제의 고삐를 죄기 시작했다. 2월부터 감사원이 KBS 특별감사를 진행한 뒤, 노사합의로 지급한 수당이 잘못됐다면서 서영훈 등 KBS 고위 간부에 대한 후속 조치를 공보처에 요구했다. 결국 KBS 이사회가 3월 8일 서영훈의 면직을 결정했다. KBS 노동조합은 이에 강하게 반발하며 비상대책위원회를 조직하고 집회와 농성을 이어나갔다.

 

4월 3일 KBS 이사회가 서기원 서울신문 사장을 신임 사장으로 선출했다. 서기원은 정부기관지 사장으로서 노조 파업을 진압한 전력이 있었다. KBS 노동조합은 더욱 거세게 반발했다. 노동조합은 비상대책위원회를 확대 개편하고 ‘서기원 출근저지 특별감시조’를 편성해 11일 서기원의 출근을 저지했다.

 

12일 서기원은 실국장, 청원경찰, 백골단 등을 동원해 사장실로 진입했다. 이 과정에서 조합원 117명이 경찰에 연행됐다. 공권력 난입에 맞서 KBS 노동조합은 13일 조합원 4천여 명이 참여한 비상총회를 개최하고 방송제작 거부에 들어갔다.

4월 13일, 남한강연수원에서 연수중이던 70여 명의 11기 사원들이 연수를 중단하고 조합원총회에 참석하는 등 총 4천여 명의 조합원들이 참석한 가운데 ‘전국비상사원총회’가 개최되었다. 총회 진행 중에도 백골단 220여 명이 5, 6층에 상주하고 있었지만 조합원들을 서기원이 퇴진할 때까지 무기한 제작거부와 농성투쟁을 벌이기로 결의했으며, 교양국, 기획제작국, 라디오국 등을 비롯 당일 오후 6시를 기해 송출기술부를 제외한 제작자 전원이 ‘서기원 퇴진 및 구속자 전원 석방’이 이루어질 때까지 제작을 거부키로 결의했다. … 제작거부에 돌입한 조합원과 집행간부들 약 1천여 명이 철야농성에 참여했다.

30일 전경 3천여 명이 KBS 본관에 투입돼 조합원 333명을 연행했다. 5월 1일 문화방송(MBC) 노동조합이 KBS 공권력 투입에 항의하며 연대 제작거부에 돌입했다. CBS노조도 제작거부에 동참했다. KBS노조 비상대책위원회도 거점을 MBC노조로 이동했다. 2일 KBS와 MBC 양 노조가 MBC에서 함께 ‘구속동지 석방 촉구 및 노태우 정권 규탄대회’를 개최했다. 4일 밤 MBC에도 경찰병력이 투입됐다.

 

결국 MBC노조가 7일에, KBS노조가 18일에 방송제작에 복귀했다. KBS노조원 11명이 해직됐다.

 

◎ 현대중공업 골리앗 파업

 

1990년 1월 19일 현대중공업노조는 128일 파업 이후 수습지도부 체제를 마감하고 새로운 민주집행부를 출범시켰다. 그런데 전노협에 대한 정권의 파상적 탄압이 현대중공업노조에도 거칠게 퍼부어졌다.

 

2월 5일 128일 파업지도부에 대한 부산고등법원의 항소심 공판에서 검찰이 1심보다 더 높은 형량을 구형했다. 현대중공업노조는 6일 긴급대의원대회를 거쳐 7일 오전 10시 전 조합원 조퇴 후 집회를 갖고 8일 선고공판에 전 조합원이 월차를 내고 참가하기로 결의했다. 그러자 경찰이 7일 밤 이영현 위원장을 전격 체포하고 우기하 수석부위원장을 수배했다. 노동조합이 8일 방청투쟁을 강행하자 9일 이영현 위원장이 구속됐고, 10일에는 완전무장한 사복경찰 200여 명이 노조 사무실에 난입해 압수수색을 벌였다.

 

대응방향을 둘러싸고 현대중공업노조는 혼란에 휩싸였다. 한편에는 총자본의 공세에 맞서 강도 높은 구속자 석방투쟁으로 민주노조를 사수해야 한다는 주장이 있었다. 다른 한편에는 더 이상 희생을 자초하지 말고 임금인상·단체협약 투쟁을 통해 노동조합을 안정시켜야 한다는 주장이 있었다.

 

정권의 탄압은 계속됐다. 권용목 현해협 의장, 윤재건 조직부장, 설남종 기획실장, 김남석 대의원 등이 계속 구속됐다. 4월 20일에는 우기하 수석부위원장마저 구속됐다. 마침내 21일 조선사업부 5분과에서 분노한 조합원들이 아래로부터 파업을 시작하면서 논쟁은 잠재워졌다. 22일 긴급히 소집된 대의원 간담회는 25일부터 전면파업 돌입을 결의했다.

 

23일 비상대책위원회(비대위)가 구성되고, 24일부터 대의원, 소위원, 선봉대, 기동대, 정당방위대 등 2천여 명이 텐트 철야농성에 들어갔다. 농성자들은 투쟁의 의의와 방향에 대해 텐트별로 토론을 조직하는 한편, 공권력 투입에 대비해 무장을 갖추기 시작했다. 정문 앞에 바리케이드를 치고, 텐트 주변에 ‘민주박격포’를 설치했다. 화염병을 제작하고 볼트·너트 등을 준비했다.

 

그런데 현장 노동자들의 투쟁열기가 치솟는 것과 반대로 비대위 지도부가 극심하게 동요했다. 24일 진민복 비대위 의장이 잠적하면서 김영환 부위원장이 비대위 의장이 됐다. 그러나 26일 김영환 의장도 ‘정치파업은 못 하겠다’며 사퇴했다. 결국 이갑용 사무국장이 비대위 의장을 맡고서야 지도부가 안정됐다.

 

노태우 정권은 속전속결로 현대중공업 파업을 진압하고자 했다. 공권력 투입이 확실시되자 비대위 지도부는 82미터 높이의 골리앗 크레인 점거농성에 돌입했다. 파업돌입 사흘 만인 28일 새벽 경찰병력 1만여 명이 다시 현대중공업에 투입됐다.

4월 28일 오전 6시 정각, 페퍼포그가 앞을 식별할 수 없도록 최루탄을 퍼붓는 속에서 이에 맞선 현대중공업 노동자들의 민주박격포가 발사되었다. 정문 앞 바리케이드와 담장을 불도저로 밀어붙이고 백골단이 뛰어들기 시작했다. 73개 중대 1만여 명의 병력이 하늘(헬기를 통한 사전정찰, 상황지시, 선무방송)과 땅 그리고 바다(미포만에 군함을 상륙시킴)를 통해 달려들었다. 새벽 5시부터 헬기가 울산만 상공을 분주하게 날아다니더니 이윽고 6시가 되면서 불도저가 중공업 정문을 두드렸다. 그 뒤에는 페퍼포그차가 숨어서 수백 발의 지랄탄을 쏘아댔다. 구토나는 최루가스 속에서도 이들 침입자들을 저지하기 위한 필사의 노력이 전개되었다. 또다시 민주박격포가 작렬하였다. 그리고 화염병이 날았다. 그러나 역부족이었다. 또다시 지랄탄을 퍼붓는 페퍼포그와 함께 돌진해 오는 전경들에 의해 공격개시 7분 만에 3차 바리케이드까지 무너졌다. 30여 대의 민주박격포가 불을 뿜었지만 전경들을 잠시 우왕좌왕하게 하는 정도였다.

삽시간에 대오가 쪼개지고 아수라장이 되었다. 눈물을 삼키며 조금씩 물러서고 있을 때, 골리앗 투쟁지도부의 지침이 확성기를 통해 울려 퍼졌다. 골리앗 지도부가 가동되기 시작한 것이다. “동지들! 현 위치를 사수하라. 여기가 누구의 일터인가? 여기서 나가야 할 놈들은 바로 저들이다. 우리가 엄호할 테니 아래의 동지들은 마음껏 공격하라!” 그리고 함성소리와 함께 수백 개의 볼트가 날랐다. 전경의 방패가 깨지고 머뭇거리던 동지들이 대오를 갖추었다. 그러나 중장비까지 동원하고 조직된 무력 앞에서 더 이상 버틸 수가 없었다. 골리앗 지도부에서 새로운 지침이 떨어졌다. “동지들! 투쟁하면서 퇴각하라! 공장을 빠져나가 야전지도부의 지도 아래 가두투쟁을 전개하라! 우리는 골리앗으로 간다. 골리앗은 결코 점령당하지 않는다. 투쟁하면서 퇴각하라! 동지들! 승리하는 그날에 만나자!”

조직적인 퇴각이 시작되었다. 마지막으로 8시 35분, 4도크와 5도크에서 항전하던 노동자들이 무장해제당했다. 그리고 용접봉, 장작, 볼트가 널부러진 도로 위를 따라 사복조들이 도열한 틈을 눈물을 삼키며 빠져나와야 했다.[3]

 

◎ 현대자동차 4·28 연대투쟁

 

현대중공업 파업 직후 공권력을 투입하겠다는 정부 방침이 발표되자마자 전국적인 연대총파업으로 맞서자는 논의가 마창노련과 서노협 등 전노협 일부에서 시작됐다. 노태우 정권의 광포한 노동운동탄압을 중단시키고 또한 전노협을 사수해 내려면 이제 전국적인 연대총파업으로 대응해야만 한다는 문제의식이었다. 그러나 전노협 차원에서 미처 결론을 내리기도 전에 현대중공업에 공권력이 투입돼 버렸다.

 

바로 그 상황에서, 28일 새벽 공권력이 투입되는 길목에 있는 현대자동차 노동자들이 머뭇거리는 노조 집행부의 지침을 기다리지 않고 아래로부터 스스로 파업에 들어가 전투경찰과 대대적인 가두전투를 펼치는 일이 벌어졌다.

 

철야농성 중이던 선봉대와 대의원이 시작한 싸움에 야간 조합원 전체가 공장을 멈추고 거리로 달려 나왔다. 돌과 화염병 그리고 최루탄이 새벽 공기를 가르며 격렬하게 날아다녔다. 몇 시간 동안 어쩔 줄 몰라 하던 노조 집행부가 뒤늦게 파업을 선언했을 때 이미 조합원들은 모두 거리에 나가 있었다. 날이 밝자 출근하는 주간 조합원까지 가세했다. 현대자동차 담벼락을 따라 4km 대로에서 기습을 당한 전투경찰은 발이 묶이고 심지어 무장해제까지 당했다.

새벽 4시경 어둠을 뚫고 경찰병력이 현대자동차 앞을 지날 때였다. 비상상황에 대비해 각 정문에 규찰을 서던 선봉대와 대의원들이 현대중공업 공권력 투입에 항의하며 지나가던 전경병력을 바리케이드로 가로막고 투석전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무거운 판스프링 등으로 도로가 차단되자 경찰은 야간작업 중인 현대자동차 공장 안을 향해 무차별적으로 최루탄을 쏘아대기 시작했다. 삽시간에 100만 평의 현대자동차 공장이 최루가스로 뒤덮였다. 여기저기서 돌과 화염병이 날고 최루탄이 쉬지 않고 현장 안으로 날아들었다. …

노조의 공식 결정은 좀체로 내려지지 않고 있었다. 오히려 조합의 방침과 관계없이 현장은 이미 조업이 중단되어 있었다. 자연스럽게 정문 쪽으로 몰려나가 경찰과 투석전을 벌이고 있었던 것이다. 도로 쪽에 가까이 인접해 있던 노조 사무실에도 최루탄이 날아들어 사무실 안이 최루탄 가스로 꽉 차 있었다.

새벽의 미명이 뿌옇게 밝아왔을 때도 곳곳에서 공방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노조사무실에는 조합이 왜 지금까지 방침을 내리지 않느냐는 격렬한 항의가 잇따랐다. 주간근무자가 출근할 때가 다 되어서야 사무국장이 조업중지 결정을 내렸다. 위원장은 묵묵부답인 상태에서 할 수 없이 사무국장이 지침을 내린 것이었다. 그러나 그 결정은 의미가 없었다. 이미 조업은 중지되어 있었던 것이다.

주간조가 출근하기 시작하면서 노동자의 숫자는 훨씬 많이 불어나 정문을 중심으로 도로를 점거하고 경찰과 계속 투석전을 벌이며 싸우고 있었다. 회사 앞 도로가 희뿌연 최루가스와 깨진 보도블록으로 엉망이 되어 있었다. 경찰이 회사 안으로 최루탄을 쏘면서 허물어진 회사 담의 일그러진 모습이 격렬한 상황을 웅변해주고 있었다.

해가 중천에 이르러서야 중앙대책위원회가 소집되어 조합원들을 회사 안으로 철수한다는 결정을 내리고 조합원들을 회사 안으로 철수시켰다. 그러나 경찰과 격렬히 싸우던 상당수의 조합원들은 이를 거부하고 계속 도로에서 싸웠다. 집행부의 통제력은 상황이 벌어진 순간부터 존재하지 않았다. 반가량 회사 안으로 들어오던 노동자들도 일시에 대열을 잃어버리고 밖의 상황으로 빨려들어 갔다. 이제 노조 집행부는 통제력을 완전히 잃어버린 것이다.

투쟁은 오후 내내 계속되었다. 일단의 전경들은 노동자 시위대에 포위당한 채 무장해제 당하고 방패, 철모 등은 모두 불태워졌다. 최루탄차와 페퍼포그차 등이 화염에 휩싸였다. 백골단에 쫓기던 노동자들이 부상당하고 정문 앞 신호등은 화염병에 맞아 오래도록 불타고 있었다.[4]

새벽 4시, 끝이 보이지 않는 경찰병력이 현대자동차 출고정문 앞을 통과하기 시작했다. … 철야농성을 전개하던 현대자동차 대의원, 선봉대, 야근조 조합원 등이 가세해 2천여 명으로 불어난 대오가 경찰병력을 막아섰다. 이들은 처음에는 야유와 돌 몇 개를 던지다가 경찰들이 최루탄을 쏘기 시작하자 본격적으로 대오를 가로막고 현장의 작업물품인 쇳덩이들을 지게차로 옮겨다가 도로를 차단하기까지 했다. 당황한 경찰병력은 최루탄과 지랄탄을 무차별로 발사했다. 최루탄 소리에 숙소에서 잠들어 있던 현대자동차 노동자들이 달려와 가세하면서 후미의 경찰차 30여 대가 완전히 무장해제 당했고, 이로써 육·해·공 입체작전으로 현대중공업 노동자들을 도망갈 구멍 없이 완전 봉쇄하려던 경찰측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공권력 투입도 한 시간 이상 지체됨으로써 불충분한 포위망을 돌파하고 조합원들이 안전하게 퇴각할 수 있었던 것이다. …

경찰의 새벽진압 작전을 두 시간 연기시키며 치열하게 싸웠던 현대자동차는 아침 출근시간이 되면서 자연스럽게 파업으로 이어졌고 전체 노동자가 투쟁에 동참하기 시작했다. 1만여 명의 가두투쟁 대오가 형성되어 현대자동차 앞 도로를 3~4km 점거한 채 경찰병력을 포위해 들어갔다. 워낙 대규모 인원인지라 한쪽에서는 싸우고, 한쪽에서는 구호를 외치며, 또 한쪽에서는 약식 집회가 열렸다. 10시 30분경 앞 대오가 150여 명의 전경을 무장해제 시키고 현대자동차 앞 주택가까지 무차별 최루탄을 쏘아대던 페퍼포그를 불태웠다.[5]

 

◎ 전노협 5월 총파업

 

현대중공업노조의 골리앗 파업과 현대자동차 노동자들의 4·28 연대투쟁은 전국적인 연대파업 열기에 불을 붙였다.

4월 28일 … 현대중공업 공권력 진압 소식에 분노한 ㈜통일과 대림자동차 등 마창투본 노조들은 중식시간에 일제히 규탄대회를 열고 퇴근 후 경남대에서 약 3천여 명이 모여 집회를 가진 후 교문 밖으로 진출하여 노동부 마산지방사무소 내부를 불태우고, 유리창을 모두 깨버렸다.[6]

서울에서는 4월 29일 경찰의 폭력적 원천봉쇄를 뚫고 ‘현대중공업 경찰폭력난입 규탄과 세계노동절 쟁취를 위한 수도권 노동자 결의대회’가 열렸다. 집회가 끝난 후 참석자들은 청량리, 신촌, 영등포, 종로 등지에서 격렬한 가두투쟁을 전개, 현대중공업노조 투쟁에 대한 전국 노동자의 지지연대를 과시했다. 또한 같은 날 부산(부산대)과 대구(경북대)에서도 노동자와 학생 1~2천 명이 현대중공업노조 연대투쟁을 전개하였다.[7]

4월 29일 … 오후 2시 53분경 종로3가 피카디리 극장 앞에서 기습적인 가두시위를 시작으로 약 5~6천 명이 노동부사무소 앞 종로대로를 완전히 점거하고 ‘해체! 민자당, 사수! 전노협, 퇴진! 노태우’를 외치며 시위를 계속했다. 피카디리 앞에서 경찰차 3대를 화염병으로 공격해 전소시킨 시위대는 단성사 옆 파출소 1층을 불태웠으며, 노동부사무소 간판도 화염병에 맞아 불타올랐다. 약 30분간 피카디리 앞 사거리를 완전히 장악했던 시위대는 백골단에 의해 … 세운상가 쪽으로 밀려났다. … 밀려가던 시위대는 동대문 앞에서 2차 가두집회를 6천여 명이 참가한 가운데 열고 백골단과 공방전을 주고받으며 골목골목에서 가두시위를 계속했다.[8]

울산에서는 현대중공업과 현대자동차 외에도 현대중장비, 현대종합목재, 현대정공이 28일부터 동맹파업에 들어간 가운데, 가두투쟁이 매일 전개됐다.

4월 29일부터 매일 부서별로 출근체크를 마친 노동자들은 다시 부서별로 나뉘어 동구 전역에서 치열한 가투를 전개했다. 가투가 시작되기 전 동구 일대의 작은 골목마다 가족들이 합동으로 쓰레기를 모은 바리케이드를 설치하고, 최루탄을 씻어낼 고무호스를 준비했다. 특히 128일 파업의 경험을 살려 가족 스스로가 팀을 짜 물품보급조, 구급조를 편성, 조직적으로 투쟁에 동참했다. 29일 현대중장비 앞에서는 최루탄이 다 떨어진 전경들이 시위대열에 밀려 현대중장비로 쫓겨 갔다가 점심도 못 먹고 하루 종일 갇혀 있기도 했다. 중학생들로 꾸려진 가투부대가 나타났고, 유치원에 다니는 아이들까지 돌을 나르고 있었다. 비록 끊임없이 밀리고는 있었지만 전선이 여기저기에서 형성되어 쫓고 쫓기는 투쟁이 쉴 새 없이 계속되고 있었던 것이다.[9]

이런 상황에서 29일 전노협이 비상 중앙위원회를 열고 “전체 노동자의 생존권 수호와 노조활동의 자유를 위해” 5월 1일부터 전국 총파업에 돌입하기로 결정했다. 총파업의 요구는 크게 전노협 사수, 노동운동탄압 분쇄, 구속자 석방 등을 포함한 노동운동탄압 중지 요구와 민자당 해체, 노태우정권 퇴진 등의 정치적 요구, 그리고 물가폭등, 집값·전세값 안정 등 경제개혁 관련 요구들로 이루어졌다.

 

5월 1일, 전국 59개 노조 12만여 노동자가 총파업에 돌입했다. 한국전쟁 이후 최초의 전국 총파업이었다. 서울지하철노조는 무임승차를 실시했고, MBC노조는 KBS 공권력 투입에 항의하며 연대 제작거부에 나섰다.

5월 1일에는 현대자동차노조가 효문로타리와 염포검문소 등 2개 방향으로 평화대행진을 벌였고, 현대중공업노조도 조합원 참여율이 95%에 육박하는 투쟁을 전개했다. 그리하여 오후 3시에는 만세대 민주광장을 전경들 손에서 완전히 탈환해 오후 5시 노동절 기념집회를 갖기도 했다. 현대종합목재, 현대정공노조 등도 1,500~2,000여 명씩 참여하는 대규모 가두시위를 계속했다.[10]

4월 30일, 전노협에서 선포한 총파업 투쟁을 불과 몇 시간 앞두고 정부는 투쟁의 확산을 차단하기 위해 마침내 KBS에 공권력을 투입했다. 이날 밤 11시 15분경 이종국 서울시경 국장의 진두지휘에 따라 19개 중대 3천여 명의 병력을 동원 본관에 진입해 농성 중이던 333명의 조합원들을 강제연행했다. … KBS에 대한 제2차 경찰투입 직후 MBC노조는 비대위의 결의에 따라 5월 1일 10시 사원 비상총회를 열고 전면 제작거부에 돌입했다. … 19개 지방 MBC도 비대위의 결의에 따라 이날 오전부터 비상총회를 개최하고 제작거부에 돌입, 전국 MBC가 일사불란하게 연대 제작거부에 참여했다. 한편 4월 23일부터 무기한 철야농성을 벌여왔던 CBS노조도 같은 날 MBC노조와 동시에 제작거부에 돌입, 정규방송을 중단하고 음악만을 내보내기 시작했다.[11]

부처님 오신 날로 휴일인 2일을 건너뛰고 3일 총파업이 재개돼 전국 104개 노조 10만여 노동자가 파업에 나섰다. 4일에는 전국 149개 노조 12만여 노동자가 총파업에 참여해 최대 규모를 기록했다.

당시 전노협은 정권의 집중탄압 대상이 되었고, ‘전노협 사수’는 전노협만의 문제가 아닌 정권과 전 민중이 대결하는 투쟁전선이었다. 전노협 소속 사업장들은 탄압을 각오하고 3일간 312개 노조 (연 인원) 34만 명이 참여하는 파업 투쟁을 벌였다.[12]

전국 총파업 투쟁에서 일반 국민의 묵시적 동의, 지지를 확보할 수 있었던 요인은 무엇인가? 물론 그 첫째는 투쟁의 정당성을 그 어느 누구도 부정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현대중공업 2만여 명의 노동자는 부당하게 구속된 동지의 석방을 요구하며 투쟁을 전개했고, 전노협은 경찰의 폭력진압에 맞서 총파업 투쟁을 전개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이 전부는 아니었다. 노태우 정권의 언론장악 음모에 맞서 전개된 KBS 방송민주화 투쟁이 일반 국민의 묵시적 동의를 불러일으킬 수 있었던 커다란 요인이었음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KBS의 방송민주화 투쟁을 폭력으로 진압한 데 대한 대중적 반발이, 이른바 중산층까지도 5월 총파업을 지지하게 되는 주요한 계기가 되었다. 또한 민자당 출범 이후 일반 국민 사이에 팽배해진 실망감과 민자당 내부의 파벌싸움에 대한 염증도 노동자투쟁을 지지하는 데 커다란 역할을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중요한 요인은 전·월세값 폭등과 물가폭등에 의해 날로 가중되는 일반 국민들의 생활난이었다.[13]

갑자기 치솟은 총파업에, 자본가계급은 당황했다. 예측 불가능한 상황으로 빠져들지 않으려면, 민주노조운동과 전노협을 일단 현실적 실체로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총파업을 해체시키기 위해 인천지역 민주노조들에겐 요구안 100%를 수용한 제시안이 일시에 쏟아지기도 했다. 총파업 이후 노동운동 탄압의 기세는 잠시나마 눈에 띄게 약화됐다.

5월 총파업 투쟁으로 교착상태에 빠져 있던 임금인상·단체협약갱신 투쟁을 승리로 이끌 수 있는 유리한 돌파구가 마련되기 시작했다. 5월 총파업 투쟁의 와중에서 자본가들의 담합이 하나둘 무너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총파업 투쟁을 전개하며 가두로 진출하는 노동자들을 붙잡고 “제발 지금 당장이라도 교섭하자”면서 교섭을 애걸하는 자본가들이 하나둘 눈에 띄기 시작했고, 자기 사업장에도 총파업 투쟁의 물결이 밀려올 것을 우려한 자본가들이 노동조합의 요구를 거의 100% 받아들이는 선에서 서둘러 교섭을 타결짓는 모습 또한 곳곳에서 눈에 띄기 시작했다. 인천 지역에서는 총파업 투쟁을 전개했던 5월 4일 하루 동안 남일금속 1,800원, 경일화학 1,700원, 동신공업 1,800원 등 최초의 요구를 거의 100% 관철시키는 선에서 임금인상 투쟁을 마무리 짓기도 했다. …

5월 총파업 투쟁을 통해 자신감을 회복하고 투쟁의지를 강화한 것은 단지 우리 노동조합운동만이 아니었다. 전체 민족민주운동이 빠른 속도로 자신감을 회복했고, 투쟁의지를 강화했다. 그 결과 5월 9일에는 많은 학생과 시민이 운집하여 6월 항쟁 이후 최대의 가두집회와 가두시위를 조직해 내기에 이르렀다. 이로써 그동안의 탄압 일변도의 정세는 다소 유화되었고, 학생을 비롯한 제 민중들의 대중투쟁도 활성화되기 시작했다.[14]

총파업을 통해 노동자들은 전노협 사수를 둘러싼 계급투쟁에서 결정적 승기를 잡을 수 있었다. 1980년 광주민중항쟁 패배 이후 1981~82년 전두환 신군부에게 몰살당했던 민주노조는 불과 10년 만에 통쾌한 반격을 조직해 내면서 스스로의 힘으로 시민권을 확고히 구축했다. 이제 정권이 물리적 탄압을 퍼붓는다 해도 민주노조운동의 전국적 결집체가 쉽사리 무너지지 않을 수준까지 노동자가 올라섰음을 만천하에 선포하는 역사적 사건이었다. 그렇게 해서 전노협이 지켜졌고, 그 연장선에서 1995년 민주노총도 건설될 수 있었다. 계급적 연대투쟁으로 다부지게 전진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자주적이고 민주적인 노동조합운동의 성장과 발전은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정부와 자본가들의 집중공격으로 많은 노동조합이 무력화되기도 했으며, 노동운동가들이 구속, 수배되기도 했다. 이러한 탄압에 맞서 민주노조 진영은 노동조합을 지키고 노동자의 생활과 권리를 지키기 위해 1987년 말 마창노련을 시작으로 지역별·업종별 협의회를 속속 건설, 이를 토대로 공동투쟁과 공동활동을 강화하여 기업별 노조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노력을 끊임없이 기울였다. 그리고 지역과 업종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1990년 1월 22일 전국노동조합협의회를 결성하였으며, 전노협은 출범한지 불과 100여 일만에 5월 전국 총파업 투쟁의 주체로 나서게 되었던 것이다.

전국 총파업 투쟁은 민주노조의 상징이자 투쟁구심인 현대중공업 노동자들의 강고한 투쟁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또한 전노협 중앙위원회에서 총파업을 선언하기 전에 이미 현총련과 마창노련, 서노협에 의해 현대중공업 공권력 투입 시 연대파업에 돌입하겠다는 사전 결의가 있었기에 총파업이 가능했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 투쟁들을 전국 총파업 투쟁으로 발전시켜 낼 수 있었던 것은 전노협이라는 전국 조직이 있었기에 가능했음은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

100여 년에 걸친 우리나라 노동운동사 속에서 전국적 총파업은 해방 직후인 1946년 9월 총파업과 1947년의 3월 총파업 이외에는 아예 존재하지 않았다. 무려 40여 년 만에 다시 전국적 총파업 투쟁의 기치를 높이 들었고, 결국 성공적으로 수행해 냈다. 이것은 길게는 1950년 이후, 짧게는 1987년 7월, 8월, 9월 투쟁 이후 수많은 선배, 동지들이 온갖 탄압 속에서도 굽히지 않고 싸워 온 투쟁의 산물이며, 자주적이고 민주적인 노동조합운동의 성장, 발전의 결과물이기도 한 것이었다. …

우리 노동조합운동은 1980년대 초반의 극심한 탄압을 뚫어내고 마침내 7월, 8월, 9월 노동자대투쟁을 맞이할 수 있었으며, 그 이후 꾸준히 성장, 강화되어 이제는 어떠한 탄압이 있다 해도 과거 1980년대 초반처럼 자주적이고 민주적인 노동조합운동의 싹까지 말살당하지 않을 정도의 충분한 역량을 갖춰 왔다. … 1990년 5월 총파업 투쟁은 “탄압은 더욱 강력한 투쟁을 예고할 뿐이다”라는 역사적 진실과 수많은 선배 노동자들이 200여 년에 걸친 투쟁 속에서 체득해 온 경험적 진실을 재확인시켜 주었다. …

5월 전국 총파업 투쟁을 통해 우리는 비약적인 노동자 의식의 성장과 강화를 경험하기도 했다. 현대중공업노조의 파업투쟁에 대한 경찰의 폭력적 진압에 항의하여 지역과 산업의 울타리를 뛰어넘어 … 동일한 요구를 내걸고 전국적 총파업 투쟁을 전개해 나가는 속에서 우리는 ‘노동자는 하나’라는 강한 연대의식을 온몸으로 체험했다. 나아가 이번 투쟁의 성격이 정권의 노동운동 탄압에 맞선 ‘노동자의 항쟁’이었다는 점에서, 그리고 ‘노동운동 탄압하는 민자당정권 타도하자’라는 구호가 전국의 사업장과 거리 곳곳에서 울려 퍼졌다는 점에서, ‘노동해방! 인간해방!’이라는 노동운동의 궁극적 과제를 달성하기 위해 앞으로 해야 할 일과 싸워야 할 상대를 뚜렷하게 깨닫게 되었다.[15]

 

◎ 골리앗 파업의 마무리

 

현대중공업 골리앗 파업은 전노협의 5월 총파업을 촉발했지만, 총파업이 끝난 뒤 홀로 남겨졌다. 특히 울산지역 연대투쟁의 주축이었던 현대자동차노조가 5월 3일 ‘7일부터 정상조업’ 방침을 결정하면서 연대투쟁의 흐름이 결정적으로 약화됐다. 연대투쟁에 적극 나섰던 현대종합목재, 현대정공 노동자들의 참여도 현대자동차노조의 연대파업이 중단되면서 급격히 줄어들었다.

5월 3일 {현대자동차노조} 중앙대책위원회 회의에서는 5월 4일로 시한부파업을 종료하고 단협, 임투로 총매진하기로 결정했다. 대책위원들의 의견이 팽팽히 맞섰으나 이상범 위원장이 전술 변경을 결정함으로써 11:12로 임단협 투쟁으로 전환하기로 결정했다. 다음날 본관 앞 잔디밭에서 열린 조합원 비상총회에서 5월 7일부터 정상조업 하겠다고 발표했다. 이상범 위원장은 “단협과 임투를 무기한 연기할 수 없다. 5월 5~6일 휴무로 투쟁열기가 저하될 수 있으므로 투쟁목표를 재정립해야 할 시점이며, 중공업 사태가 장기화 조짐을 보이므로 현대자동차도 장기투쟁 전술로 전환”한다는 생각으로 ‘노동조합의 장래’를 위한 결정을 내렸다. …

그러나 노조의 결정과 무관하게 민실노를 중심으로 한 현장조직이 주도하여 ‘현대자동차비상대책투쟁위원회’를 구성하고 현장 파업을 계속해 나갔다. 민실노는 전국 총파업 상황이 아직 사그라진 것이 아니며, 5월 9일 민자당 창당일에 맞춰 대규모 투쟁이 준비되고 있는 마당에 현자노조에서 깃발을 내린다면 투쟁전선에 찬물을 끼얹는 것이라 보았다.[16]

울산지역 연대투쟁이 위축돼 가던 5일과 6일, 그러나 울산 동구에는 전국 각지에서 소중한 연대대오가 와서 가두투쟁에 동참했다. 전노협 선봉대였다.

1990년 4월 29일의 비상중앙위원회에서 결의한 ‘전노협 선봉대를 울산에 무제한 파견하겠다’는 방침과 함께 현대중공업노조에서도 전노협에 선봉대를 파견해 줄 것을 공식 요청했다. 즉, 현대중공업노조는 “인원수는 상관없다. 전노협에서 선봉대를 파견하여 울산의 조합원들이 전노협을 피부로 느낄 수 있도록 해달라”는 요청을 해왔던 것이다. 이에 ‘전노협 선봉대 울산파견 지침’을 곧바로 결정했다. …

전노협 선봉대는 총 6개 지역에서 114명이 파견되었다. 그러나 각 지노협에서 파견한 선봉대 외에 공개모집에 참가한 학생들을 포함하면 대략 200여 명가량이었다. 파견된 전노협 선봉대는 5월 5일에 이어 5월 6일 사천세대에서 전노협 깃발을 들고 투쟁을 전개했다. 특히 이들은 현대중공업 경찰 봉쇄선을 물리력으로 뚫고 전노협 깃발을 휘날림으로써 골리앗 농성자들에게 깊은 감명을 주었으며, “역시 전노협”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이러한 전노협 선봉대의 투쟁은 이후 울산 지역에서 전노협의 살아있는 연대정신의 표본으로 기록되었다. 다음은 전노협 선봉대가 울산 사천세대 앞에서 배포한 「골리앗은 결코 외로운 늑대가 아니다」라는 투쟁유인물의 일부이다.

“오늘 이 자리에서 동지들과 함께 투쟁하고자 전국 각지에서 모여든 전노협 선봉대원들은 각 지역 노동자들의 투쟁의지를 모아 힘차게 투쟁할 것이며, 이후 각 지역으로 투쟁의 불씨를 안고 돌아가 오는 9일 민자당 창당일에 전 민중과 함께 투쟁의 불길을 지펴 올릴 것이다. 그리하여 마침내 천만 노동자는 전노협의 기치 아래 굳건히 서고 노동해방을 향해 진군해 나갈 것이다.”[17]

9일 ‘민자당 해체, 노태우 퇴진 촉구 국민궐기대회’가 전국 곳곳에서 10만여 명이 참여한 가운데 열렸다. 1987년 6월 항쟁 이후 최대 규모의 가두투쟁이었다. 이날 대회에서는 ‘골리앗 투쟁 계승하여 노동운동탄압 분쇄하고 민자당을 박살내자!’, ‘민주압살 민중탄압 민자당을 해체하라!’, ‘물가폭등 집값폭등 노태우 정권 퇴진하라!’ 같은 구호들이 널리 외쳐졌다.

 

10일 오후 2시, 51명의 ‘외로운 늑대’ 골리앗 대원들이 82미터 골리앗 크레인의 계단을 타고 한 명씩 내려왔다. 파업과 가두투쟁이 모두 중단된 상황에서 골리앗 농성만을 더 지속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골리앗에서 내려왔다. 14일 만에 자기 아이도 아버지를 몰라보고 아버지가 아니라며 울 정도의 처참한 몰골로 골리앗을 내려오던 날, 엔진부의 최성국 동지는 계단을 부여잡고 주저앉아 죽어도 못 내려간다고 마침내 울음을 터뜨렸다. 참고 참았던 우리도 울었다. 차라리 산소통을 끌어안고 죽자는 생각이 치밀어 올랐다.

그때 내 머리를 스친 것은 내려오기 직전에 보았던 미포만의 일출이었다. 바다가 마치 태양을 가슴에 품은 것처럼 발그스레 물들고 나서도 한참이 지나야 비로소 태양은 뜬다. 지금 노동해방의 저 드넓은 바다에 미명이 돋기 시작하는데 곧바로 태양이 뜨지 않는다고 절망할 수야 없지 않은가.

골리앗 위에서 나는 하루에도 몇 번씩 바다를 보았고 하늘을 보았다. 야외 작업을 많이 하는 부서에 있으면서도 정작 눈앞의 바다를 눈으로라도 즐긴 기억이 별로 없었다. 바다를 보면 골리앗 크레인 작업 중에 떨어져 죽은 내 친구가, 또 이름은 모르지만 수많은 나와 같은 노동자들의 얼굴이 눈앞에 떠올랐다. 그리고 우리가 골리앗에 있는 동안 또 하나의 불길로 타오른 이영일 열사의 남긴 말이 떠올랐다.

“어머니. 세상은 왜 우리를 조용히 살게 내버려두지 않습니까?”

그렇다! 우리 노동자들 가슴에는 세상이 만들어준 응어리가 있다. 용암처럼 터져 나올 분노가 끝도 보이지 않게 잠겨 있다.

골리앗의 외로운 늑대라고 불리며 전국의 관심을 집중시켰던 우리들은 주변의 어떤 노동자와도 다를 바 없이 자라고 살아왔다. 집안은 가난했고 자기 인생을 마음대로 설계하고 의지대로 만들어갈 어떤 기회도 주어지지 않았다. 우리는 노동자가 될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우리는 단 하나뿐인 삶을 사랑한다. 우리도 일한 만큼 얻고, 이웃을 사랑하고, 착한 자식, 좋은 남편, 훌륭한 아빠이고 싶다. 무엇이 그것을 가로막는가! 단 하나뿐인 우리의 삶을 피투성이로 만드는가!

나는 골리앗 위에서 그것을 명확하게 깨달았다. 우리를 착취했던 그 거대한 착취도구 골리앗 위에 서서 우리를 바라보는 전국의 수많은 노동자, 자본가, 노태우 정권을 보면서 나는 드디어 알아차렸다.

천만 노동자의 삶을 움켜쥔 자본가와 그들의 하수인인 국가권력을 타도하기 전에 우리 노동자의 삶은 결코 풍부하고 아름다워질 수 없다는 것! 뭔가 막연하게 뒤엎어지기를 바라며 골리앗에 올라갔던 나는 목이 터져라 외치면서도 무슨 말인지 잘 몰랐던 ‘노동해방!’의 깃발을, 그 붉은 깃발을 확실히 움켜쥐고 내려왔다.

물론 우리는 패배했다. 인정한다. 그러나 아직 미포만에 태양은 뜨지 않았다. 최초의 정치투쟁의 깃발을 치켜 올리고도 우리가 끝내 골리앗을 울면서 내려올 수밖에 없었던 것이 바로 울산 노동해방투쟁의 현주소이다.

우리 노동자는 백무산 동지의 시처럼 여기까지 왔으나 아직 여기까지밖에 오지 못했다. 우리는 일단 평가부터 하려고 한다. 작년보다 더 높이 서서 올해 우리가 달려온 지점이 어딘지, 더 높은 곳으로 가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그리고 새로운 일을 찾겠다. 어둠을 뚫고 솟구치는 저 드넓은 노동해방의 바다로 거침없이 달려가겠다.

감히 전국의 노동해방을 위해 싸우는 동지들에게 약속드린다. 다음에 우리는 분명히 더 높은 곳에 서 있을 것이다. 저 미포만에 붉은 태양이 바다 위로 솟구쳐서 허리 잘린 이 땅, 사천만 민중이 온통 그 붉은 햇살에 적실 때까지 나는, 우리 현대 노동자는 거침없이 달려갈 것이다.

동지들! 전국에서 우리 골리앗 투쟁을 이어 달라! 민자당 타도! 노태우 타도를 외치며 영웅적으로 투쟁했던 우리 현대 노동자의 투쟁을 이어 달라! 이번 파업투쟁 때 물결쳤던 노래가사처럼 우리가 저 자본가들의 국회를, 권력을 장악해야 하지 않는가![18]

한국전쟁 이후 처음으로 전국 총파업을 실현시킨 노동자들은 1990년에 많은 성과를 이루었다. 특히 하반기에 대우조선, 포항제철, 만도기계, 대림통상, 아시아자동차 등 다수의 대기업 노조에서 새롭게 민주 집행부가 건설됐다. 전노협에 소속돼 있던 기존 대기업 노조들과 새롭게 민주집행부를 구축하게 된 대기업 노조들 16개가 모여 12월 9일 ‘연대를 위한 대기업 노조회의’(대기업 연대회의)를 출범시켰다.[19] 전노협과 대공장 노조가 실질적인 연대를 발전시켜 가기 위한 모색이었다. 또한 1990년 11월 전국노동자대회를 전노협과 업종회의가 공동으로 치르면서 민주노조 총단결로 나아가는 발판을 마련했다.

 

3) 1991년 5월 민중투쟁과 박창수 열사 투쟁

 

1991년 경기침체와 물가폭등으로 노동자·민중의 생활고가 가중된 반면, 재벌들은 독점지배력을 더욱 강화하고 있었다. 또한 땅값 폭등으로 대토지소유자들이 엄청난 불로소득을 챙겼다. 1990년 전체 노동자들의 임금인상 총액이 9조 1천억 원인데, 땅값인상 총액은 50조 7천억 원으로 다섯 배에 달했다.

 

한편 3당 합당으로 안정적 기반을 확보한 노태우 정권은 1990년 12월 27일 대통령 비서실장을 역임한 강경우파 노재봉을 총리로 임명해 내각제 개헌 등을 통한 정권 재창출을 목표로 학생운동과 노동운동을 강도 높게 탄압하며 공안정국을 조성했다.

 

이런 상황에서 2월 22일 수서주택지구 개발비리 사건이 터지면서 노동자·민중의 분노가 폭발 지경에 이르렀다. 한보그룹이 정부에게서 받은 기업정상화 자금 418억 원을 수서주택지구 개발에 투입해 427억 원이라는 엄청난 이득을 챙겼으며, 이를 위해 광범한 정치권 인사들에게 로비자금을 살포한 사실이 드러났다.

 

그러던 4월 26일, 집회 후 교문으로 진출하던 명지대생 강경대가 백골단이 휘두른 곤봉에 맞아 사망했다. 강경대의 비통한 죽음은 노태우 정권의 살인적인 공안 통치에 대한 분노와 더불어 1987년 이후의 부분적인 민주화조차 되돌려질 수 있다는 위기감을 고조시켰다. ‘공안통치 종식’과 ‘노태우 정권 퇴진’을 요구하는 대규모의 대중투쟁이 전개되는 것과 함께 학생과 노동자 11명의 분신이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20]

 

27일 제 민주단체들이 ‘고 강경대 열사 폭력살인 규탄 및 공안통치 종식을 위한 범국민대책회의’(범국민대책회의)를 구성했다. 29일 연세대에서 열린 ‘국민 결의대회’에는 7만여 명의 군중이 운집했다. 5월 1일, 전노협이 주도하는 ‘임금인상과 물가폭등 저지 및 노동기본권 수호를 위한 전국 노동조합 공동투쟁본부’(전국투본) 산하 188개 노조 9만 5,663명이 전면 휴무에 돌입했다. 세계노동절 기념대회에는 수도권 3만 명 등 전국 6만여 명의 노동자들이 참가했다. 4일 ‘백골단·전경 해체 및 공안통치 종식을 위한 범국민 결의대회’가 열렸는데, 전국에서 20만 명이 참가하여 반민자당 투쟁이 절정을 향해 치달았다.

 

그런데 6일 전노협 중앙위원이자 부산 한진중공업노조 위원장이던 박창수가 안양병원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박창수는 2월 9~10일 대기업 연대회의 수련회를 경찰이 폭력침탈했을 때 다른 6명과 함께 구속된 뒤 안기부의 집요한 전노협 탈퇴 공작에 시달리고 있었다. 4일 ‘운동시간에 부상을 입어 안양병원으로 후송됐다’는 연락을 받고 가족이 달려갔을 때 박창수는 이마 34바늘을 꿰맨 뒤 중환자실에 누워 있었다. 그런데 6일 새벽 5시경 병원 건물 뒤쪽 어린이놀이터 시멘트 바닥에서 숨진 채 발견된 것이었다. 정황상 안기부에 의한 타살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 그러나 검찰은 7일 백골단을 투입해 영안실 벽을 부수고 시신을 탈취하여 강제부검을 실시한 뒤 투신자살로 몰고 갔다.

“7층에서 떨어졌다 하면 온몸에 상처가 다 났을 겁니다. 그런데 외상이라는 건 하나도 없고. 슬리퍼는 얇은 거. 그것이 떨어졌다면 사방으로 다 퍼졌을 겁니다. 근데 고거 한 1m 간격밖에 없는 거예요. 도저히 이것은 자살로 몬다는 건 우리는 조금도 용납 못해요.”(부친) … “내 아들은 자살이 아니고 요놈들이 죽여서 해 놓은 거니까 이걸 절대적으로 밝혀야 되고예. 밝혀야 우리 아들도 눈 감고 가고, 우리 아들이 눈을 못 감고 있습니다. 지금예.”(모친)[21]

노동운동 진영은 박창수 위원장의 죽음을 ‘노동운동 탄압의 집약적 표현’이라고 규정했다. 6일 한진중공업노조, 전노협, 대기업 연대회의, 업종회의, 전국노운협, 전국노련의 6개 노동단체가 ‘고 박창수 위원장 옥중살인 규탄 및 노동운동탄압분쇄를 위한 전국노동자대책위원회’(전국노대위)를 구성하였다. 한진중공업노조가 소속된 부산노련을 시작으로 6일부터 각 지노협들이 농성 투쟁에 들어갔다.

 

9일 전국 87개 도시에서 50만 명의 시민과 노동자들이 길거리를 메우고 ‘해체 민자당, 퇴진 노태우’를 외치며 노태우 정권 출범 이후 최대 규모의 반정부 시위를 벌였다. 서울, 부산, 광주 등 대도시에서는 수만 명의 노동자, 학생, 재야단체 등이 조직대오를 갖춰 도심을 완전 점령하고 최루탄과 물대포로 맞서는 경찰을 포위, 곳곳에서 무장해제시키며 밤늦게까지 투쟁을 벌였다.

 

이날 전노협이 주도하는 전국투본은 ‘고 박창수 위원장 옥중살해 규탄, 폭력통치 종식, 노태우 정권 퇴진’을 내걸고 총파업에 돌입했다. 이 총파업에는 98개 노조 4만 8천 노동자가 참여했는데, 오후 3시 30분부터 2시간 파업을 단행하고 총회를 연 뒤 집단적으로 범국민 결의대회에 참가하는 형태로 진행됐다. 또한 360개 노조 18만 노동자가 중식집회, 잔업거부, 동시퇴근 형태로 투쟁에 동참했다.

 

9일을 기점으로 노동자들이 투쟁의 전면에 나서게 되자, 그동안 학생들이 중심일 때 ‘백골단 해체, 노재봉 내각 사퇴’에 머물렀던 투쟁 요구가 ‘노태우 퇴진’으로 발전했다. 또한 사안별 대책기구로서의 범국민대책회의가 투쟁의 전국적·조직적 구심으로 강화되기 시작했다.

강경대 열사 장례 전후로 전개된 5, 6월 투쟁은 각 부문의 투쟁을 하나의 흐름으로 모아내면서 지역적, 전국적 공동투쟁을 통해 민족민주운동 진영에게는 모처럼 맞은 귀중한 정치적 공세기이기도 했다. 그중에서도 옥중에서 억울하게 살해당한 박창수 한진중공업 위원장의 의문사로 인해 전국 노동자들은 조직적으로 정치적 파업투쟁을 전개하여 새로운 역사의 장을 열어젖혔다. 5월 한 달 집회와 가투는 평균 5일마다 한 번씩 전개되었으며, 마창지역에서는 5월 9일 1989년 이후 최대 규모인 1만 5천여 명이 모여 반민자당 투쟁을 광범위하게 벌였다.[22]

5월 9일 울산에서도 ‘살인정권 민자당 1년 학정 심판 및 백골단 해체, 공안내각 총사퇴를 위한 울산시민 궐기대회’가 열렸다. 정공에서는 1공장에서 400여 명이 출정식을 마친 후 도보로 KBS방송국 앞을 지나 고수부지로 향했고, 2공장 인원 700여 명은 현대자동차 5,000여 명과 합류하여 학성공원을 거쳐 고수부지에 도착해 1만 5천 명의 울산시민들로부터 열렬한 박수를 받았다.[23]

서울에서는 구로공단의 9개 노조가 파업에 돌입하고 오후 2시 가리봉역에서 800여 명의 노동자가 가두집회를 갖고 시청 앞 국민대회에 참가하였다.[24]

11일에는 전국 14개 도시에서 5만여 노동자가 참여한 가운데 ‘박창수 위원장 옥중살인 규탄 및 노태우정권 퇴진 결의대회’를 개최했다. 서울지역의 노동자들은 건국대에서 3천여 명이 모인 가운데 집회를 개최하고 6시 30분경부터 종로·을지로·명동 일대에서 격렬한 가두투쟁을 전개했다. ‘천만 노동자 총단결로 폭력정권 살인정권 노태우 정권 타도하자!’, ‘해체 백골단! 타도 노태우!’, ‘전 민중의 연대투쟁, 타도 노태우!’ 같은 구호들이 외쳐졌다.

 

15일 전국투본은 업종회의, 대기업 연대회의와 함께 ‘고 박창수 위원장 옥중살인 규탄 및 폭력통치 종식을 위한 전국노동조합 비상대표자회의’를 열어 18일 총파업을 결의했다. 이날 현주억 전노협 위원장 직무대행은 ‘전국 노동조합 대표자들에게 드리는 긴급 제안서’를 통해 “4천만 국민이 퇴진을 요구하며 싸우고 있는데도 노태우 정권은 반동적인 탄압을 계속하고 있다”면서 “이 시점에서 노동자들이 투쟁의 중심에 서지 않는다면 현재 노태우 정권이 부딪히고 있는 위기는 곧바로 노동운동을 비롯한 민중운동 진영의 위기로 돌아올 것”이라며 노동자들의 총파업을 호소했다. 비상대표자회의에 참여한 350여 개 사업장 5백여 명의 대표자 및 간부들은 “노태우를 몰아내는 것만이 노동자가 갈 길”이라며 우레와 같은 박수로 18일 총파업 제안을 통과시키고 각 지역과 단위사업장별로 총파업의 결의를 밝혔다.

 

18일 ‘고 박창수 위원장 옥중살인 규탄 및 폭력통치 종식을 위한 전국노동조합 총력투쟁’이란 이름 아래 전개된 총파업에는 156개 노조 9만 1천 400명의 노동자가 참여했다. 파업에 돌입하지 못한 많은 노조들도 중식시간 집회 또는 잔업거부 후 동시 퇴근 형태로 총력투쟁에 나섰다. 이날 총파업 총력투쟁에 1,250개 노조 39만 명(전국공투본 산하 450개 노조 21만 명, 업종회의 800개 노조 18만 명)이 동참했다. 노동자들은 단위노조별로 가두행진을 벌여 ‘광주항쟁 계승 및 폭력살인, 민생파탄 노태우정권 퇴진 제2차 국민대회’에 조직적으로 참가했다.

강경대 열사의 장례식이자 광주 민중항쟁 11돌인 5월 18일, 현대자동차에서는 하루 휴무조치를 내렸으며 정공과 중공업에서는 점심시간에 규탄집회를 가진 뒤 성내삼거리에 모여 대회장소인 태화강 고수부지 쪽으로 거리행진을 벌이다 동천교와 명촌교 입구에서 최루탄을 쏘며 저지하는 경찰에 맞서 돌과 보도블록을 던지며 격렬한 투쟁을 전개하였다.[25]

강경대 학생의 죽음과 박창수 위원장의 의문사를 계기로 폭발한 5월 투쟁은 노동자들의 임금인상 투쟁과 결합하여 그 구호가 ‘노동운동 탄압분쇄’와 ‘노태우정권 타도’로 발전되어 갔다. 5월 투쟁에서의 광범위하고 폭넓은 정치폭로는 조합원들의 정치적 경험과 정치의식을 높여 그동안 갖고 있던 연대투쟁에 대한 회의를 적지 않게 해소하는 계기가 되었다.

당시 5월 투쟁은 주로 시내 중심에서 가두시위로 진행되고 있었다. 이때 구로공단에서는 지역 내 노동조합의 수천 명 노동자들이 5월 14일, 18일 2, 3공단과 가리봉 오거리를 중심으로 가두투쟁을 전개하였다. 페퍼포그와 전경들의 최루탄 공격에 노동자들은 투석전으로 맞섰다. 그야말로 공단 가두투쟁은 지역 내 노동조합 간의 연대의 힘과 필요성을 가르쳐주는 공단 정치학교와 같았다.[26]

강경대 열사의 장례식을 겸한 제2차 국민대회에는 전국적으로 40만 명이 참가했다. ‘시민학생 연대투쟁 노태우정권 타도하자!’, ‘민자당을 박살내자! 애국시민 일어섰다!’, ‘노동자가 앞장서서 노동해방 쟁취하자!’, ‘해체 민자당! 타도 노태우!’, ‘천만 노동자 총단결로 폭력정권 살인정권 노태우정권 타도하자!’ 같은 구호들이 외쳐졌다.

 

이날 집회를 계기로 범국민대책회의는 명칭을 ‘공안통치 종식과 민주정부 수립을 위한 범국민대책회의’로 바꾸고 10대 투쟁과제를 선포한 뒤 명동성당 농성에 들어갔다. 그러나 투쟁은 하강국면으로 접어들었다. 18일 집회 이후 김대중이 이끄는 평화민주당을 비롯한 보수야당이 제도권 의회정치로의 복귀를 선언하며 전선에서 철수하고, 그 영향을 강하게 받던 학생운동 세력 또한 상당 부분 철수한 때문이었다. 보수야당을 전선에서 이탈시키기 위해 노태우 정권이 던진 미끼는 노재봉 총리 사퇴(23일)를 비롯한 부분 개각과 광역의원 선거 실시였다.

 

25일 제3차 국민대회가 전국 19개 도시에서 17만 명이 참가한 가운데 진행됐다. 이날 서울대회 진행 도중 경찰의 폭력진압으로 성균관대생 김귀정이 최루탄에 질식해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6월 2일 제4차 국민대회가 서울, 부산, 광주를 중심으로 5만 명이 참가한 가운데 진행됐다. 이날 투쟁은 특히 부산을 중심으로 전개됐다.

6월 2일 부산에서는 부산지역 노동자들뿐만 아니라 마산·창원·울산·대구·구미 등지에서 모여든 노동자들이 부산대 운동장에서 ‘고 박창수 위원장 옥중살해 주범 안기부 해체, 91년 임금인상·단체협약 갱신 투쟁 승리, 노태우정권 타도 전국노동자학생 결의대회’를 가졌다. 대회에 참석한 3만여 명의 노동자와 학생들은 집회를 마친 후 동래구 내성로타리에서 부산진구 하마정까지 ‘박창수 위원장 공작살해 안기부를 해체하라!’, ‘민생파탄 폭력살인 노태우정권 타도하자!’, ‘노동운동 탄압하는 노태우정권 타도하자!’ 등의 구호를 외치며 밤늦게까지 가두투쟁을 전개하였다.[27]

그런데 3일 정원식 국무총리에 대한 밀가루 세례 사건이 외국어대학교에서 발생하면서 정세가 급격히 가라앉았다. 문교부장관 시절 1천 5백여 명의 교사를 해고하는 등 전교조 탄압을 진두지휘했던 정원식이 외국어대학교를 방문하자 대학생들이 밀가루와 달걀 세례를 퍼부었는데, 밀가루와 달걀을 뒤집어 쓴 정원식 총리의 모습이 언론에 대대적으로 보도되면서 학생운동에 대한 여론이 급격히 악화된 것이다.

 

노태우 정권은 기다렸다는 듯 즉각 범국민대책회의와 전대협, 전노협 등 지도부 80여 명에 대한 사전 구속영장을 발부했다. 또한 대우정밀, 태평양화학, 세원, 동신공업, 제일교통, 파티마병원 등 파업사업장에 잇따라 공권력을 투입했다.

 

전국의 투쟁 열기는 급속히 냉각됐다. 8일 ‘공안통치 분쇄와 노태우 정권 퇴진을 위한 제5차 국민대회’는 서울 1만 명을 비롯해 인천, 성남, 안양 등 전국적으로 3만 명이 참가했다. 이날 전체적인 참여 인원은 줄었지만, 노동자들의 조직적인 참여는 오히려 두드러졌다.

서울에서 노동자들은 오후 4시 청계6가 홍인상가 앞에서 2,500여 명이 모여 전노협 깃발과 ‘박창수 살해주범 노태우 타도’ 등의 내용을 새긴 현수막을 선두로 동대문운동장, 퇴계로를 거쳐 대한극장 앞까지 가두시위를 벌였다. 노동자들은 이후 동대문 근처에서 시위를 벌이던 학생들과 오후 6시 서울역에서 만나 충정로, 아현동 일대를 휩쓸고 신촌로터리에서 대회 원천봉쇄 규탄대회를 가진 뒤 다시 시내로 진출, 신세계 백화점 앞에서 투쟁을 전개하였다.[28]

29일 ‘6·29선언 파산선고와 노동운동 탄압 규탄 제6차 국민대회’가 전국 주요 도시에서 열렸다. 동시에 29~30일 ‘고 박창수 위원장 전국 노동자장’이 안양과 부산에서 거행됐다. 정세가 가라앉고 노동자들만 전선에 남아 노태우 정권의 빗발치는 탄압을 견뎌내야 하는 상황이었기에, 안타깝게도 박창수 열사 죽음에 대한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에서 뚜렷한 성과를 얻지 못한 채 장례를 치를 수밖에 없었다.

 

1991년 5월 투쟁은 3당 합당 이후 일방적으로 탄압받던 민중진영이 1987년 6월 이후 최대 규모의 반격을 조직해 내면서 노태우 정권의 전면적 공안통치와 정권 재창출 구상에 파열구를 냈다는 점에서 일정한 성과를 남겼다. 노동자계급이 1987년 6월과 달리 민주주의 투쟁 전선에 조직된 대오로 참가하면서 민중진영을 주도하고 요구 수준을 정권 퇴진으로 끌어올렸다는 점에서도 의의가 컸다. 그러나 학생운동을 비롯한 민중진영 상당수가 보수야당에게 이끌리며 전선에서 중도 철수하면서 5월 투쟁은 노태우 정권 퇴진을 관철하지 못한 채 패배로 끝나고 말았다.

 

한편 1991년 5월 투쟁에서 공동 활동을 벌인 전노협과 업종회의는 그 성과를 토대로 전국노운협 및 전국노련과 함께 10월 9일 ‘ILO 기본조약 비준 및 노동법 개정을 위한 전국노동자공동대책위원회’(ILO공대위)를 결성했다. ILO공대위는 한국 정부의 국제노동기구(ILO) 가입 추진을 계기로 ‘자주적 단결권 확보를 중심으로 한 노동법의 실질적 개정’과 ‘민주노조 총단결 투쟁을 통한 민주노조운동의 조직발전’을 목표로 내건 한시적 공동투쟁체였다. ILO공대위는 11월 10일 서울 여의도 둔치에서 6만 명의 노동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전태일 정신계승과 노동법 개정을 위한 전국노동자대회’를 개최했다. 또한 ILO에 한국 정부를 제소하여 민주노조 진영이 한국 노동조합의 일각을 대표하고 있음을 국제적으로 인정받고, 노동법을 개정하라는 권고를 이끌어 냈다.

 

4) 전노협 정신과 선진노동자들의 형성

 

1987년 노동자대투쟁 이후 민주노조운동의 폭발적 성장을 토대로 1990~91년의 전노협은 한국 노동자계급 대중운동의 한 정점을 찍고 있었다. 전노협으로 결집한 민주노조운동을 꿰뚫은 정신은 한마디로 자주성·민주성·전투성·연대성·변혁성에 대한 지향이었다.

 

전노협은 수많은 노동자들이 구속과 해고의 아픔을 겪으면서도, 노태우 정권의 입체적인 탄압을 전국 총파업으로 맞받아치며, 말 그대로 “투쟁을 통해 조직을 사수”해 냈다. 이처럼 단호한 기세를 바탕으로 전노협에 소속된 단위노조들은 임금인상·단체협약 투쟁에서도 두드러진 성과들을 쟁취해 냈다.

 

전노협은 그 깃발에 “평등사회 앞당기는 전노협”을 새겨 넣었으며, 산하 지노협 가운데 핵심이었던 마창노련의 강령은 “노동해방의 그 날까지 끝까지 투쟁”을 명시했다. 전노협 건설과 사수에서 결정적 역할을 했던 현대중공업노조의 노동조합가는 “노동해방 선봉에 선 현대중공업 노동조합”을 후렴구로 가졌다. 전노협을 대표하는 구호는 “천만 노동자 총단결로 노동해방 앞당기자!”였다.

민주노조 운동 역사상 87년 노동자 대투쟁 이후 전노협 시대만큼 현장이 살아 움직이고 연대의 정신이 넘쳐나는 시기는 없었다. 지금 보면 꿈같은 이야기이지만, 구사대들의 공격을 막기 위해 여성 노동자들만이 있는 사업장에 수백 명의 지역 노동자들이 교대로 출퇴근하면서 함께 철야농성 하는 것은 흔한 일이었다. 옆 사업장에서 구사대 침탈 소식이 들려오면 일하다가도 바로 일손을 놓고 수백 명이 달려가서 구사대를 격퇴하기도 했다. 마창노련의 경우 조합원 27,000명 정원에 25,000명이 운동장에 모여서 조합원 총회를 했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도 있다. 지역 집회를 하면 수천 명이 모이는 것은 보통이었다.[29]

동지들! 지난 시절 우리가 건설하고 지금까지 사수해 온 전노협은 자본과 권력에 야합함으로써 건설된 것이 아닙니다. 전노협에 가입했다는 이유만으로 해마다 500여 명의 조합원이 구속당하고, 3,000여 명의 조합원들이 강제로 일자리에서 쫓겨날 때도, 전노협만 탈퇴한다면 수천만 원, 수억 원이라도 기꺼이 내놓겠다던 자본과 정권 측의 매수공작에 맞서, 전세금을 뽑고 적금을 해약하면서 지켜온 것이 전노협입니다. …

동지들! 동지들도 91년 5월, 전노협 탈퇴 공작에 끝까지 저항하다 싸늘한 시체로 우리 곁에 돌아온 전노협 부위원장 박창수 동지를 기억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죽음을 딛고, 수많은 구속과 수배, 해고를 딛고 쓰러지지 않고 되살아났습니다. 우리는 되살아나 육해공군 4만의 군대가 물샐틈없이 봉쇄한 울산과 거제의 골리앗으로, 우리의 깃발과 우리의 선봉대를 실어 날랐고, 남은 모두가 그들이 되어 함께 싸웠습니다. 그리하여 전노협은 소외와 무권리에 의해 고통 받는 천만 노동자의 조직으로 우뚝 설 수 있었던 것입니다.[30]

(1절)

폭력과 탄압의 굴레를 뚫고 우뚝 선 현중의 형제여

가자, 가자, 달려 나가자! 노동자 해방으로!

가진 자들의 폭력이 판친다 해도 우리는 목숨 바쳐 싸워나가리!

해방 해방을 위해, 투쟁 투쟁을 위해

노동해방 선봉에 선 현대중공업 노동조합!

(2절)

미포만에 떠오른 태양, 어머님의 뜨거운 눈물,

가자, 가자, 달려 나가자! 민중의 해방으로!

동지여 기억하는가 89년도 우리는 목숨 바쳐 싸워나가리!

해방 해방을 위해, 투쟁 투쟁을 위해

노동해방 선봉에 선 현대중공업 노동조합![31]

 

◎ 전투적·변혁적 선진노동자들의 형성

 

1988년 이후 선진적인 현장 노동자들의 의식이 엄청난 속도로 성장해 나갔다. 1987년 노동자대투쟁의 자연발생적 성격과 달리 1988년을 경과하면서 ‘노동해방’이 민주노조들의 보편적인 구호로 자리 잡게 된 것은 그 직접적인 반영이었다.

‘노동해방’이라는 피로 쓴 플래카드를 내걸고 연세대에서부터 여의도까지 이어진 노동자의 행진대열은 끝이 보이지 않았다. 특히 울산, 마산창원 지역에서 올라온 노동형제들의 일사불란한 행진은 눈을 끌고도 남았다. 붉은 머리띠를 질끈 동여매고 보도가 쾅쾅 울리도록 발을 맞추어 나가는 노동형제들의 모습은 해방군대 바로 그것이었다.

“노동해방사상이나 단체, 나라에 관련한 책을 읽고 싶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이 금서라 접할 기회가 없었습니다.”

“빨갱이가 되라면 돼야죠, 잘살아 보겠다는 것이 빨갱이라면 우리 모두가 빨갱이 아닙니까?”

“아직 생각해 보지 않았습니다. 저는 노동해방이 북한이나 소련과 같은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저번 투쟁 때 사장이 빨갱이라고 그러더라구요. 그러니까 할 말이 없대요. 그땐 정말 어떻게 말해야 합니까?”

“노동자들의 정당이 필요합니다. 민주당이나 평민당이나 그놈이 그놈입니다. 우리 후보가 나서야 합니다.”

“전노협이 결성되면 아마 더욱 힘차게 싸울 수 있겠지요. 이제는 연대하지 않으면 이길 수가 없어요. 자본가들은 경찰까지 동원하여 우리를 탄압하고 있지 않습니까?”

“복수노조는 인정돼야 합니다. 물론 회사 내에 두 개의 노조가 있으면 힘이 더 약해지는 것이 아니냐고 걱정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사실 저희 회사에서는 그놈의 유령노조 때문에 계속해서 노조건설이 막히고 있습니다. 다른 현장 동지들의 이야기를 들어 보아도 유령노조나 어용노조로 고생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지금 복수노조가 인정되면 우리가 더 유리하다고 생각합니다.”

“지노협만으로는 안됩니다. 지역적으로 대응해서는 결코 이길 수가 없습니다.”

나는 집회가 어떻게 진행되는지를 알 수 없을 정도로 바쁘게 인터뷰에 매달렸다. 노동해방의 항목에 대한 노동형제들의 반응을 들으면서 빨갱이 공포증이 많이 녹아 내렸다는 것을 다시금 확인할 수 있었다. 1~2년 전만 해도 노동해방의 붉은 기치를 공공연하게 들어 올린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었다는 점에 비추어 볼 때 엄청난 발전이었다.[32]

또한 노동자 계급의식을 갖춘 현장 활동가들이 엄청난 기세와 규모로 성장하면서, 집행부와 대의원이라는 노동조합 공식 체계를 넘어선 다양한 현장의 조직형태들이 노동조합 체계 안팎에 등장한다. 정당방위대·선봉대·결사대 등 다양한 명칭을 가졌던 행동대, 대우조선·현대중공업 등 대공장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던 소위원회 등이 노동조합 체계 안에 형성됐다면, 다양한 수준의 학습모임, 부서별 활동가 모임, 어용노조가 지배하는 다수의 대공장에서 등장했던 노조민주화 추진체 등이 노동조합 체계 밖에 형성된다.[33]

마창지역에서는 정방대란 이름으로 더 많이 알려진 선봉대는 1989년 벽두부터 피의 탄압이 가중되면서 그 역할이 더욱 강조되었다.

선봉대는 각 노조별 정방대와 마창노련 선봉대로 나뉘어졌는데, 정방대가 단위노조를 사수하는 단위노조 내 조직이라면, 선봉대는 마창노련을 사수하기 위한 마창노련 차원의 조직인 셈이다.

따라서 선봉대는 공권력이나 구사대로부터 마창노련을 사수하기 위해 지역 공동대처에 나서거나 점거농성 및 대외투쟁의 역할을 담당하는 타격대로 기능하였기 때문에 자연히 연대의식과 정치의식, 그리고 정치투쟁력을 발전시키는 데 그 목적을 두게 되었다.

선봉대는 각 노조의 정방대원 중 10% 인원(단사별 80명당 1명꼴)으로 선발되어 주로 상집간부, 대의원, 핵심조합원으로 구성되었다. (선봉대와 정방대는 조직적으로 이원화됨으로써 통제되지 못하였다. 특히 선봉대원 대다수가 단위노조 간부로 구성되었기 때문에 선봉대 활동은 어려움에 처하게 되었다. 결국 나중에 가서 선봉대와 정방대는 일원화되어, 각 노조별 정방대 안에 선봉대, 규찰대, 경호대, 경비대로 재편성하였다.)

그에 비해 정방대원(약 1,500여 명)은 전체 조합원 중 10%의 조합원과 대의원들로 구성하였는데, 각 노조마다 지원자가 하도 많아 선발해야 할 정도로 정방대에 대한 대중적 참여는 아주 높았다.

각 노조는 규약을 통해 집행부는 바뀌어도 정방대는 상설기구로서 기능하도록 규정함으로써 정방대는 노조 안의 확고한 대중조직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각 조합은 규약에 “구속자 적립금은 쟁의기금 중 30%로 항상 예치할 것, 생계비 지급할 것, 석방 후 완전복직” 등을 명시하여 정방대원들의 부담 및 걱정을 덜어주었다.)

이는 ‘정방대’가 흔히 알려져 있듯이 단순히 싸움만 하는 부대가 아니라 노조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는 중추조직임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실제로 정방대원은 준간부로서 현장에서는 비조합원들 앞에 모범을 보이고 투쟁의 정당성을 설명하고 설득하며 강화해 나가는 사람들, 뭔가 이론적으로도 더 알고 있는 사람들로 알려져 있었다. (허상식 마창노련 선봉대장(타코마노조 조직부장)은 “정방대는 노동자의식이 투철하고 선진적인 노동자들로 구성된다. 노조 집행부와는 별도로 노동자들 속에 존재하면서 노동조합의 민주성, 대중성을 유지하게 하는 역할을 담당하기 때문에 노동조합의 튼튼한 중간 허리라고 할 수 있다”라고 말했다.)

정방대의 핵심 업무는 노조사수이며 구사대와 공권력 격퇴, 의장단 경호와 단상보호, 집회규찰, 가두행진 시의 선봉 역할, 그리고 인근 사업장의 투쟁을 지원 연대하는 임무도 수행하였다.

각 노조는 임투를 앞둔 수련회나 교육 등을 통해 정방대의 취지와 목적, 임무와 역할 등에 대한 교육과 피티체조, 화염병 투척 연습, 구보 등의 체력단련과 무술훈련, 전략과 전술에 대한 훈련 점검을 실시하였다. 실례로 금성사노조는 꽃병투척 대회를 열어 사기를 높이는가 하면, 대림자동차노조는 정방대 안에 화염병투척반, 봉술훈련반을 따로 조직하고 회사 본관 앞에서 기합소리와 함께 쇠파이프를 휘두르며 봉술훈련을 하는가 하면 호를 파놓고 그 안에 들어가 사과탄을 투척하는 훈련을 감행하여 회사의 간담을 서늘케 하였다.

특히 5지구 정방대는 금성사 1공장, 대림자동차, ㈜통일 등 17개 노조에서 400여 명이 정방대로 조직될 정도로 숫자로 보나 투쟁력으로 보나 단연 우세하였는데, 그 중 과반수인 200여 명을 거느린 ㈜통일노조 정방대는 마창노련을 살렸다고 할 정도로 가장 모범적이었다.

정방대원들은 가두집회와 타격전에 나갈 때마다 화염병, 각목, 마스크, 물안경 등을 준비하였으며 수출 1, 2지구의 여성 정방대원들은 망치 등을 가지고 보도블록을 깨거나 돌을 날라주기도 했다. 여성노동자들이 가두에서 남자들과 함께 경찰과 몸싸움을 벌이거나 경찰을 향해 돌을 깨서 던지는 모습은 아마도 세계 어느 노동운동의 역사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광경일 것이다. …

마창노련 정방대는 구사대와 공권력으로부터 민주노조와 마창노련을 사수하고 이를 통해 마창노련의 연대의식, 정치의식과 투쟁력을 발전시키는 데 목적을 두었다.[34]

91년 투쟁 과정에서 지도부와 조합원들이 일치단결한 것은 현장토론의 활성화에 있었다. ‘임금인상투쟁 준비기-준법투쟁 및 부분파업 투쟁기-투쟁 마무리기-투쟁평가기’에 이르기까지 조합원 토론회에서 항상 의견을 통일하고 결의를 모아갔다. 이로써, 간부들의 조합원에 대한 지도력을 높이고, 동시에 조합원들의 적극적인 참여를 이끌어낼 수 있었다.

현장토론의 조직화 과정은 ‘구체적인 조합원의 실태파악 - 집행부의 토론안 수립 - 집행부의 조합원들의 문제의식 및 토론의제 공유 - 현장지도부(대별 소위원회)가 현장토론 실시 - 반론이 제기될 경우 집행부 재토론 - 조합원 재토론’의 수순을 밟아 진행하였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간부들은 스스로의 투쟁결의를 높임과 동시에, 밑으로부터 조합원들의 참여와 의견수렴을 통해 투쟁방향을 구체적으로 확보해 나갈 수 있었다.

조합원 토론의 활성화에 일등 공신은 91년 도입한 소위원제도였다. 해마다 나우정밀 노동조합은 투쟁 시기에 ‘임금인상투쟁 대책위원회’ 산하 현장조직을 대대별 체계로 운영해 왔다. 1공장은 1대대에서 5대대로 편제되어 있었고, 2공장은 6대대로 편제되어 있었다. 그래서 현장은 모두 6대대로 구성되어 모든 조합원이 각 대대에 소속되었다. 하나의 대대는 2~3개 라인으로 구성되고, 약 100명의 조합원들로 편성되었다. 각 라인에는 라인대표가 있었다. 각 대대장은 라인대표와 함께 활동했다. 91년 이전까지는 대대장의 책임하에 라인대표가 현장토론과 투쟁을 이끌어 왔다. 그러나 91년 투쟁에서는 현장대대의 활동과 투쟁을 활성화하기 위해 대대별 체계 내에 소위원 제도를 도입하였다. 4월 7일 소위원 선출을 하였다. 소위원 제도는 대대별 각 라인에 3~4명의 소위원을 선출하여 만든 것이다.

90년까지 현장의 모든 활동은 대대별로 대대장과 라인대표가 총괄해 왔다. 그래서 대대장과 라인대표가 수십 명의 조합원을 지도하는 것은 그렇게 쉬운 문제가 아니었다. 91년 투쟁에서 소위원제도를 도입함으로써, 현장지도력의 공백이 보강되어 보다 치밀하고 보다 민주주의적 현장지도를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소위원회의 활성화는 일상적 시기의 대의원의 역할을 맡을 선진적인 조합원을 배출하는 저수지와 같은 역할을 하였다.

대대별 소위원들의 선출로 대대장은 라인대표와 소위원들을 근간으로 현장조합원의 토론과 투쟁을 주도해 나갔다. 대대장을 중심으로 한 현장지도력의 강화는 조합원들과 투쟁지도부 간의 결합력을 높여 일사불란한 투쟁을 전개하는 밑거름이 되었다.

소위원을 선출할 당시 경험 있는 조합원이 많지 않아 투쟁을 진행하는 데 적지않은 어려움이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약점은 전화위복이 되어 결과적으로 노동조합 활동의 새로운 지도력을 훈련시킴으로써, 노동조합의 조직력을 강화하는 길을 열어 놓았다.

소위원제도가 그 힘을 발휘한 것은 5월 3일 쟁의발생신고 찬반에 관한 토론이었다. 라인별 토론이 시작되었을 때, 소위원들은 조합원들의 밑으로부터 제출된 다양한 의견을 수렴하여 토론을 활성화시켰다. 따라서 조합원들 모두가 쟁의발생신고를 흔쾌히 동의하고 힘있게 결의할 수 있는 동력이 되었다. 이런 과정을 거침으로써, 조합원들이 스스로 선택하고 결의한 투쟁에 조금도 주저함이 없이 참여할 수 있었다.[35]

가. 부서별로 산개되어 활동하거나 소모임의 형태로 활동하던 모임들이 모두 결집하여, 민주노조 건설을 위한 전 공장 현장조직의 형태인 ‘노조민주화 추진위원회’(노민추)를 건설하였다. 이들의 과감하고 헌신적인 투쟁은 조합원들의 광범위한 지지 기반을 형성해 냈다.

이 시기에 ‘노민추운동의 대중화’가 일어난다. 민주적 활동가들이 대의원에 대거 진출하거나 소위원회가 광범위하게 구성됐다. 이로써 노조민주화 투쟁은 집행부 장악에만 한정된 민주파들의 선거투쟁이 아니라 민주노조운동의 대중적 저변을 확대하면서 활성화된다.

나. ‘노민추’ 건설

△기아자동차 : 대량해고와 구속 사태로 현장 내 활동력의 부재라는 공동의 과제를 껴안게 됨에 따라 현장 내 활동기반 복원 과제를 효율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현장 내 다양한 소모임과 해고자들이 모여 결성함.

△현대자동차 : 2대 집행부의 개량화에 대한 불신임투쟁을 통해 민주세력의 단일대오에 대한 고민을 현실화시켜 결성함.

△현대중공업 : 128일 투쟁과 골리앗투쟁을 통해 현장이 공백상태를 맞자 새로운 지도력 구축의 필요성과 정치성과 계급성, 전국성을 갖추어야 한다는 각성을 통해 결성함.

△대우조선 : 삼성중공업, 거제조선소 노조건설 공동대책위원회 활동에 대한 평가가 지역 내 중소사업장 노조와 민협위, 해대위 등에서 이루어지면서, 지역노조 활동의 핵심적 열쇠는 대우조선노조의 역할에 있다는 결론에 이르러 준비모임을 거쳐 결성하게 됨.

다. ‘노민추’ 활동의 성과와 한계

이러한 ‘노민추’ 활동의 성과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는 민주세력이 주도하여 세워낸 초기 집행부의 한계를 극복하고, 노조민주화 투쟁과 해고자복직 투쟁을 중심으로 비타협적 투쟁을 전개하여 민주집행부를 탄생시켰다는 것이다.

둘째로는 당시 내용적 분화보다는 분열의 상태로 존재했던 각종 민주세력의 소모임들과 민주 대의원(소위원)들이 결합하여 단결된 조직활동을 하였다는 것이다.

셋째로는 민주노조에 대한 대중적 열망의 수렴을 기반으로 대중과 결합하여 활동을 하였다는 것이다. 대의원 선거에 단일한 공약과 선전과 선동으로 공동의 대응을 하고, ‘노민추’ 신문을 통하여 ‘노민추’ 활동내용을 선전하는 등의 활동을 통해 대중과 결합해 갔다.

이러한 활동의 성과에 반해 ‘노민추’ 활동의 한계를 살펴보자. 그것은 노조 수준을 넘는 활동 전망이 미약했다는 것이다. 이는 ‘노민추’ 조직의 존재조건으로부터 기인한다. 즉 ‘노민추’ 활동의 최대 목표와 활동의 중심은 노조 집행부 장악이었기에, 단사 내 노조문제 중심의 활동이 이루어졌던 것이다. 이러한 한계로 민주노조 장악 이후 활동 방향을 발전적으로 바로 전환하지 못하며, 그리하여 활동의 공백이 생기게 된다.[36]

1987년 이전까지 국가보안법으로 구속된 현장 노동자가 소수의 조직사건 관련자를 제외하면 거의 없었던 것과 달리, 1990년에는 6월까지 구속된 노동자 437명 가운데 국가보안법 관련자가 101명으로 23%를 차지하였으며 그 가운데 대부분이 이적표현물 제작·소지로 구속되었던 것 또한 그 무렵 선진적인 현장 노동자들 전반의 급격한 정치의식 성장을 보여주는 한 단면이었다.

 

◎ 선진노동자들의 형성과 전노협 건설에서 사회주의자들의 역할

 

1987년 노동자대투쟁 이후 민주노조운동이 폭발적으로 성장하는 데서 사회주의 운동은 결정적 역할을 했다. 하지만 그 이전에 먼저 1987년 노동자대투쟁이 사회주의 운동의 비약적 성장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

 

1980년대 중반, 혁명적 민주주의 운동이 가장 급진적인 흐름들로부터 사회주의 운동을 향해 전진하기 시작할 때, 북한의 주체사상을 추종하는 흐름이 혁명적 민주주의 운동 안에 나타나 엄청난 해악을 끼쳤다.[37]

 

사회주의 운동이 초보적인 형성 과정에 있었기에 사상적으로나 실천적으로나 유아적인 상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던 시기에, 주체사상은 혁명적 민주주의 운동 안에 존재하던 민족주의적 한계를 효과적으로 파고들었다. 1985년 하반기부터 등장한 주체사상파 흐름은 1986년을 거치면서 혁명적 민주주의 운동에서 다수를 장악했으며, 특히 학생운동에서는 강력한 주도권을 확보하게 됐다.

 

주체사상파는 이미 급속한 자본주의 발전을 이루고 있던 한국 사회를 북한의 주장대로 ‘식민지 반봉건 사회’로 규정했고 그에 따라 ‘민족해방 민중민주주의 혁명’(NL-PDR)을 당면 혁명의 과제로 설정했다. 또한 노동자계급을 혁명의 주체로 보지 않고 보수야당 즉 자유주의 부르주아 정치세력을 포괄하는 민족통일전선을 혁명의 주체로 보았다. 나아가 남한의 혁명은 북한을 포함한 전 민족적 관점에서 접근해야 한다면서, 혁명을 지도할 정당이 이미 북한에 있기 때문에 남한에서 독자적인 노동자계급 정당을 건설할 필요가 없고, 남한 노동자들은 북한 전위당의 영도에 따라 자주·민주·통일을 기치로 민족통일전선을 형성하는 데 복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주체사상파가 미친 악영향은 매우 컸다. 이들의 민족통일전선 노선은, 혁명적 민주주의 운동이 노동자·민중에 근거하여 민주화 투쟁을 혁명적으로 발전시키고 나아가 노동자계급에 근거하는 사회주의 운동으로 성장해 나가는 것을 적극적으로 가로막았다. 대신 혁명적 민주주의 운동을, 군사파시즘 세력과 끊임없이 타협하고 동요하면서 자신들의 집권 기회만 노리고 있는 자유주의 부르주아 세력의 영향력 아래로 끌고 들어갔다.

 

실제로 1987년 6월 민중항쟁에서 주체사상파는 노동자·민중의 혁명적 요구인 ‘군사파쇼 타도와 민주주의 쟁취’가 아니라 자유주의 부르주아 세력의 요구인 ‘대통령 직선제 쟁취’를 구호로 내걸었다. 주체사상파의 노선은 6월 민중항쟁에서 가장 조직적인 세력이었던 학생운동의 대다수가 ‘직선제 쟁취’와 ‘비폭력’을 주장하게 함으로써, 6월 민중항쟁의 혁명적 발전을 가로막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또한 혁명운동에서 노동자들의 역할을 결정적으로 축소시킨 주체사상파는 ‘노동자들도 민족자본과는 단결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등 노동자들이 명확한 계급의식을 갖고 성장하는 데 심각한 악영향을 미쳤다.

 

사회주의 운동은 주체사상파 등장 이후 성장이 심각하게 지체된 까닭에 1987년 6월 민중항쟁에서 항쟁의 혁명적 발전을 추동해 낼 역량을 갖추지 못했다. 그러나 곧이어 터진 1987년 노동자대투쟁은 사회주의자들에게 강력한 확신과 영감을 불어 넣었다. 이제 현실의 노동자들 속에서 혁명적 운동의 가능성을 직접 확인한 사회주의 운동은 비약적인 성장을 하기 시작했다.

 

1988년을 경과하면서 마르크스와 레닌의 원전을 비롯한 각종 사회주의 서적들이 쏟아져 나왔다. 다양한 수준의 사회주의 학습모임들이 대학생들과 지식인들 사이에 빠르게 만들어졌다. 상당수의 학생출신 사회주의 활동가들이 현장 노동자로 투신해 들어갔으며, 노동운동 경력이 많은 활동가들을 중심으로 공개적인 노동운동 단체들이 전국 곳곳에 설립됐다.

 

이러한 사상 학습과 실천 활동의 성장을 토대로 크고 작은 다양한 사회주의 조직들이 잇달아 등장했다. 현장 노동자들의 의식이 엄청난 속도로 성장하는 것을 반영하여, 상당수 현장 노동자들이 사회주의 조직들 속으로 결합해 들어왔다. 비밀리에 또는 공개적으로 발행되는 수많은 정치신문과 이론지들이 넘쳐흘렀다.

 

사회주의 조직들 사이에 통합 작업도 활발히 진행되었고, 그 과정에서 수백 명의 규모를 갖는 조직들도 등장했다. 다양한 사상적·실천적 경향을 가진, 크고 작은 사회주의 조직들이 십여 개 정도 형성됐다.

 

이렇게 성장해 간 사회주의 운동이 결정적 역할을 수행하면서, 노동자대중의 자연발생적 분출이었던 1987년 노동자대투쟁으로부터 불과 몇 년 만에 전투적·변혁적 선진노동자들이 대규모로 형성되고 전투적·변혁적 민주노조운동의 전국적 총단결체로서 전노협이 건설·사수되는 도약이 이루어질 수 있었다.

 

1987년 노동자대투쟁 이후 사회주의 운동은 민주노조운동에 뛰어든 현장 노동자들과 다양한 경로를 통해 성공적으로 결합했고, 이를 통해 계급의식을 가진 현장 활동가들을 빠른 시간 안에 엄청난 수로 배출시켜 냈다.

 

무엇보다 상당수의 학생운동 출신 사회주의 활동가들이 제조업 현장 노동자로 투신해 들어갔다. 자본가들이 ‘위장취업’이라고 공격했던 이 현장투신의 흐름은 1980년대 중반부터 대규모로 이루어지고 있었는데, 1980년대 후반까지 적어도 천 명 이상의 사회주의 활동가들이 현장 노동자로 들어갔다.

 

이들은 1987년 노동자대투쟁 이전까지는 노동자들의 투쟁을 이끌어 내고 선진노동자들을 발굴하는 데서 몇몇 경우를 제외하곤 뚜렷한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1987년 노동자대투쟁 이후 노동자들의 급격한 성장은 이들에게 풍성한 활동 공간을 열어 주었다. 파업 투쟁과 일상적인 노동조합 활동 속에서 현장 노동자들과 날마다 부대끼면서, 이들은 현장 노동자들의 의식 발전과 민주노조 운동의 성장을 촉진하는 데서 매우 직접적이고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대학생 등 지식인들이 노동현장 속으로 들어오면서 ‘활동가’니 ‘운동권’이니 하는 새로운 용어가 등장했는가 하면, 노동현장에 취업한 지식인들을 지칭하는 ‘위장취업자’라는 신조어가 등장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현장운동은 지금까지의 노동운동에 새로운 전환점을 마련한 수혈운동으로까지 불렸다. 이들은 현장에서 노동자들과 함께 노동하고, 소모임을 만들어 학습과 실천활동을 통해 이 땅에 진정한 변혁을 도모하기 위해 온몸을 다 바쳤다. 감시와 고문, 투옥과 폭력을 두려워하지 않는 이들의 헌신과 학습지도 등으로 노동자들은 점차 사회현실에 눈을 뜨고 새롭게 인식을 전환하면서, 현실을 변혁하기 위한 현장모임을 만들거나 조직과 투쟁에 나서게 되었다.[38]

{현대자동차} 노민추는 {1990년} 위원장 불신임 투쟁을 전개하면서 전 공장 조직을 포괄하게 되었다. 조직원도 150여 명에 이를 정도로 확대되었고, 2개월 정도 활동을 거치면서 250명으로 늘었다. 당시 현장에는 70여 개에 달하는 소모임들이 있었는데, 그 구성원들이 공공연하게 조직원으로 참여했다.

1989년경 울산은 노동운동 진영의 관심대상으로 급부상하면서 학생출신 노동운동가들이 대거 이전했고, 1987년 대투쟁 이후 자생적으로 생겨난 여러 소모임들이 이들과 연결되기 시작했다. 초기에는 학습했던 선들이 달랐어도 노조민주화라는 단일한 목적 아래 이견 없이 행동할 수 있었다. 조합원들도 민주와 어용이라는 두 개 흐름 외에는 구분 짓지 않았던 시기다.[39]

현장 밖에는 공개적으로 활동하는 다양한 수준의 노동운동 단체들이 있었다. 임금·해고·산재 등 노동기본권에 관하여 일반 노동자들을 상대로 상담하는 단체, 노동조합 설립과 활동에 대한 지원이나 다양한 수준의 노동자 교육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단체, 노동법 개정이나 사회 민주화 등 기초 수준의 정치적 목표를 추구하는 현장 노동자들로 구성된 회원 단체, 노래·풍물·연극·글쓰기 등 문예 활동에 주력하는 단체 등 다양한 단체들이 전국 각 지역에 수백 개가 설립되어 운영됐다.

 

이들 노동운동 단체들은 각 단체의 고유한 역할 수행에 덧붙여 1988년 6월 3일 ‘전국노동운동단체협의회’(전국노운협)[40]를 결성하여 민주노조 운동과 공식적 관계를 갖고 지원과 견인의 역할을 수행하기도 했다. 노동운동 단체들은 군사정권 아래서 공개적으로 활동한다는 제약 때문에 정치적 표현 수준에 상당한 한계를 둘 수밖에 없었지만, 그 속에 있는 활동가 가운데 상당수가 사회주의 활동가들이었다.

 

또한 군사정권의 엄혹한 탄압 때문에 철저히 비공개로 활동할 수밖에 없었던 크고 작은 사회주의 조직들이 있었다. 사회주의 조직들은 현장에 투신한 사회주의 활동가들, 공개 노동운동 단체에서 활동하는 사회주의 활동가들 대다수와 직·간접으로 연결되어 있었으며, 비밀리에 정치신문을 발행하거나 소규모 학습모임을 운영하면서 가장 선진적인 현장 노동자들을 직접 이끌고 있었다.

독재와 자본에 맞선 비타협 투쟁의 시기에 현장은 비합 사회주의 운동 세력에 의해 체계적으로 학습받고 훈련된 상당수의 활동가들이 배출되었다. … 지노협, 지역 노동단체에서 진행한 활동가 프로그램, 조합원 교육 등은 공개적으로 사회주의라는 말은 사용하지 못했지만 사회주의적 기초를 놓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노동조합조차 정권과 자본과의 전면전을 위해 임금은 노동의 대가가 아니라 노동력의 대가라는 점, 교섭은 힘의 논리라는 점, 교섭으로 쟁취할 것이 거의 없으며 교섭은 투쟁에 종속돼야 한다는 점, 투쟁으로 쟁취한 작은 개량조차 노동해방 사회를 건설하지 못하면 자본의 공격에 의해 빼앗긴다는 점 등을 일상적으로 교육했고, 현장조직력과 투쟁력을 극대화하기 위해 분임토론 등 다양한 노동자 직접참여 노동자민주주의를 개발·강화했다.

정권과 자본에 맞선 연대투쟁은 활동가들을 성장시키는 자양분이었다. 자본은 달라도 노동자들은 공장의 장벽을 넘어 하나였다. 정권의 노동운동에 대한 태도는 선동하지 않아도 스스로 총자본의 집행위원회임을 몸으로 보여주었다.

중앙, 지역, 대공장들은 언제나 정세분석에 민감해야 했고 무엇을 할 것인지 결의해야만 했다. 노동3권 특히 파업과 연대투쟁을 가로막는 노동악법 철폐투쟁은 언제나 어겨서 깨뜨리는 것으로 나아갔다. 자기 사업장 현장에서부터 자본에 맞선 일상적인 투쟁을 전개하고 현장을 자본의 통제로부터 해방시키는 것이 일상 사업을 배우는 기초였다. 이렇게 활동가들은 몸으로 배우고 학습했다. 이렇게 활동가들이 배출되었다.[41]

 

다음 편 보기(연재예정)

 

[1] 전노협 결성에 참여한 지노협 14개는 서울, 인천, 부천, 성남, 경기남부, 대전, 전북, 광주, 마산·창원, 부산·양산, 대구, 진주, 포항, 울산이며, 업종협 1개는 민주출판노협이었다. 업종협 4개(전교조, 전문노련, 시설관리노협, 화물운송노련)는 전노협 중앙위원회에 참관하면서 전노협 사업에 사안별로 협력·연대하기로 했다. (전국노동조합협의회 백서 발간위원회, 2003, 『전노협백서 제2권 1989년 - 이제는 하나다! 전노협』, 논장, 187쪽)

[2] 전국노동조합협의회 백서 발간위원회, 2003, 『전노협백서 제2권 1989년 - 이제는 하나다! 전노협』, 논장, 190~191쪽.

[3] 전국노동조합협의회 백서 발간위원회, 2003, 『전노협백서 제3권 1990년 - 전노협 깃발 아래 총진군』, 논장, 213~214쪽.

[4] 이수원, 1994, 『현대그룹 노동운동, 그 격동의 역사』, 대륙, 267~269쪽.

[5] 전국노동조합협의회 백서 발간위원회, 2003, 『전노협백서 제3권 1990년 - 전노협 깃발 아래 총진군』, 논장, 212~214쪽.

[6] 김하경, 1999, 『내 사랑 마창노련』 상권, 281쪽.

[7] 김하경, 1999, 『내 사랑 마창노련』 상권, 280~281쪽.

[8] 전국노동조합협의회 백서 발간위원회, 2003, 『전노협백서 제3권 1990년 - 전노협 깃발 아래 총진군』, 논장, 229쪽.

[9] 전국노동조합협의회 백서 발간위원회, 2003, 『전노협백서 제3권 1990년 - 전노협 깃발 아래 총진군』, 논장, 219쪽.

[10] 전국노동조합협의회 백서 발간위원회, 2003, 『전노협백서 제3권 1990년 - 전노협 깃발 아래 총진군』, 논장, 219쪽.

[11] 전국노동조합협의회 백서 발간위원회, 2003, 『전노협백서 제3권 1990년 - 전노협 깃발 아래 총진군』, 논장, 193쪽.

[12] 금속노조현대차지부, 2009, 『현자노조 20년사』, 114~115쪽.

[13] 전국노동조합협의회 백서 발간위원회, 2003, 『전노협백서 제3권 1990년 - 전노협 깃발 아래 총진군』, 논장, 247쪽.

[14] 전국노동조합협의회 백서 발간위원회, 2003, 『전노협백서 제3권 1990년 - 전노협 깃발 아래 총진군』, 논장, 250~251쪽.

[15] 전국노동조합협의회 백서 발간위원회, 2003, 『전노협백서 제3권 1990년 - 전노협 깃발 아래 총진군』, 논장, 245~249쪽.

[16] 금속노조현대차지부, 2009, 『현자노조 20년사』, 115~116쪽.

[17] 전국노동조합협의회 백서 발간위원회, 2003, 『전노협백서 제3권 1990년 - 전노협 깃발 아래 총진군』, 논장, 226~227쪽

[18] 김현종, 1990, 『골리앗 상공에서 쓴 비밀일기』, 노동문학사, 165~166쪽.

[19] 대기업 연대회의에 참가한 16개 대기업 노조는 다음과 같다: 현대중공업, 현대정공(울산), 현대정공(창원), 현대중전기, 한진중공업, 대우조선, 대우자동차, 대우정밀, 포항제철, 풍산금속, 금호타이어, 아세아자동차, 기아기공, ㈜통일, 태평양화학, 서울지하철.

[20] 4월 29일 전남대 박승희, 5월 1일 안동대 김영균, 3일 경원대 천세용, 8일 전민련 김기설, 10일 노동자 윤용하, 18일 천주교신자 이정순, 보성고생 김철수, 택시노동자 차태권, 22일 청년 정상순, 6월 8일 노동자 이진희, 15일 택시노동자 석광수가 ‘노태우 퇴진’을 요구하며 분신했다.

[21] 노동자뉴스제작단, 2011, <한국노동운동사 100년의 기록>(영상) 3부.

[22] 김하경, 1999, 『내 사랑 마창노련』 상권, 358쪽.

[23] 현대차노조정공본부, 2001, 『정공노조 15년』, 91~92쪽.

[24] 전국노동조합협의회 백서 발간위원회, 2003, 『전노협백서 제4권 1991년 - 죽음으로 사수한다! 전노협』, 논장, 172쪽.

[25] 현대차노조정공본부, 2001, 『정공노조 15년』, 91~92쪽.

[26] 나우정밀노동조합사 발간위원회, 1998, 『나우정밀 노동조합 10년사 - 영원히 꺼지지 않는 희망의 횃불로!』, 103~104쪽.

[27] 전국노동조합협의회 백서 발간위원회, 2003, 『전노협백서 제4권 1991년 - 죽음으로 사수한다! 전노협』, 논장, 182~183쪽.

[28] 전국노동조합협의회 백서 발간위원회, 2003, 『전노협백서 제4권 1991년 - 죽음으로 사수한다! 전노협』, 논장, 520쪽.

[29] 김창우, 2006, 「전노협 청산에 관한 연구」.

[30] 전노협, 1995, 『1995년도 사업보고』, 발간사.

[31] 1989년 제정된 <현대중공업 노동조합가>.

[32] 김미영, 1990, 『마침내 전선에 서다』, 노동문학사, 312~313쪽.

[33] 대표적으로 1989년 128일 파업을 통해 막강한 현장조직력을 구축하며 민주노조 운동의 최선봉으로 우뚝 섰던 현대중공업노조는 파업 기간 동안에 소위원회를 노동조합의 공식체계로 신설하고, 상경투쟁을 벌였던 노동자들이 ‘자생란’과 ‘한목소리’를, 가장 전투적으로 싸웠던 특례보충역들이 ‘새벽깃발’을, 투쟁이 끝나고는 활동가들이 각 부서별로 ‘부서동지회’를 만든다.

[34] 김하경, 1999, 『내 사랑 마창노련』 상권, 141~143쪽.

[35] 나우정밀노동조합사 발간위원회, 1998, 『나우정밀 노동조합 10년사 - 영원히 꺼지지 않는 희망의 횃불로!』, 106~107쪽.

[36] 울산노동정책교육협회, 1997, 『현장조직운동의 과거·현재·미래』, 18~20쪽.

[37] 특권 관료집단이 노동자계급 위에 군림하는 스탈린주의 체제가 북한에서는 더욱 극악한 모습으로 펼쳐졌다. 소련군의 무력을 등에 업고 북한의 권력을 장악한 김일성 세력은 모든 경쟁 세력을 숙청한 뒤, ‘김일성 수령’에 대한 우상숭배를 강요했다. 심지어 ‘백두혈통’을 운운하며 봉건왕조를 연상케 하는 권력 세습으로까지 치달았다. 북한 사회가 철저한 가짜 사회주의인 것처럼, 수령에 대한 절대적 충성을 근간으로 하는 주체사상은 마르크스주의와 전혀 상관없는 반동적 사상이었다.

[38] 김하경, 1999, 『내 사랑 마창노련』 상권, 25쪽.

[39] 금속노조현대차지부, 2009, 『현자노조 20년사』, 129쪽.

[40] 나중에 전국노운협은 노선 차이로 내부 갈등을 겪게 되며, 전국노운협을 이탈한 단체들이 1991년 7월 14일 ‘전국노동단체연합’(전국노련)을 출범시킨다.

[41] 정원현, 2006, 「현장파의 몰락 이후 전국 선진노동자들의 전국운동 조직화 과제와 임무」.

관련기사






모바일 버전으로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