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있는 동안 단 한 번도 만난 적 없던 뚜안님과 내가 같은 사람이라는 걸 여러 번 깨달을 때마다, 나는 우리 노동자 민중을 하나로 이을 수 있는 어떤 것에 대해 자주 생각했다. 각각의 사람들을 하나로 단결시킬 수 있는, 공통의 감각. 계속 되는 자본의 갈라치기와 대상화의 홍수 속에서, 범람하는 탈인간화에 나는 계속해서 우리가 사람임을 잊지 말자고 말하고 싶다.
두고 가야 하는 기억이 있다. 그런다고 나에게서 온전히 떨어뜨려 놓을 수 있는 순간이 되는 건 아니지만, 전부 짊어지고 살아가기에는 결국 침잠되어버리기에. 상실을 겪으면 나는 특히 그런 강박을 느낀다. 그 순간들을 따로 떼어두고 가지 않으면 내가 잡아먹힐 거라는 걸 알기 때문이다.
지난 2025년 10월 28일, 미등록 이주노동자에 대한 폭력적 단속으로 사랑하는 아이를 잃은 뚜안님의 가족들도 그러한 마음이 아니었을지. 감히 짐작해 본다. 사건이 발생하였던 당시에 나는 개인적으로 두고 가야 할 오래된 기억이 있었을 뿐이었다. 그저 공교롭게 이 일에 함께 하게 되어, 개인 연대 시민의 자격으로 대책위가 주도한 거의 모든 투쟁의 순간에 자리했다. 1인 시위부터 100일재 참여까지 최선을 다한 동지들과 유족들이 있어 나 역시 그들과 심적으로 더 가까워지고 많은 걸 깨달을 수 있었던 것 같다.
사실 내가 영적으로 민감한 편이라 망자와 관련된 일이나 종교 의식과는 거리를 두는 편이었다. 하지만 정리하고자 했던 오래된 기억 또한 망자에 대한 일이었기에, 사건들이 닥친 김에 직면하고자 좀 더 적극적으로 ‘죽음'을 들여다 봤다. 세상을 사랑할 줄 알던 이들의 이른 죽음, 그리고 그들이 살아가고자 열망하던 날들에 대해 생각해 보는 시간을 보냈다.
「나는 당신을 압니다.
살아가는 일조차 허락받아야 하고 숨죽여 떨어야만 하는 삶을 알고 있습니다. 살아서 만난 적이 없어도, 나 또한 당신이었던 적이 있습니다. 오늘의 하늘 아래에는 나만 남아 숨쉬고 있지만, 앞으로의 날들에는 누구도 이런 고통을 다시 겪지 않도록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할게요.
부디 편히 쉬시길.」
— 대구 출입국 사무소 앞의 뚜안님 분향소 방명록에 남긴 말
뚜안 대책위가 서울에서의 농성을 정리하던 날, 뒤풀이 자리에서 활동가인 태은 동지가 2월에 있을 100일재를 지내러 베트남을 가자는 말을 꺼냈다. 분위기에 취해, 그리고 뚜안님이 살던 곳이 궁금하여 같이 가고싶다는 의사를 전했다. 그렇다 해도 나는 대책위의 사람도 아니고 재정이 준비된 상태도 아니라 현실적으론 어려울 거란 걸 알고 있었다. 대구의 분향소를 정리하는 날에 금속노조 성서공단지역지회장 희정 동지에게 동행하고 싶다는 뜻을 내비쳤으나 대책위 사람들 또한 갈 수 있을지가 불분명한 상태였다. 가능하면 좋겠지만 못가더라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던 1월의 어느 날 눈을 뜨기 전 아침, 꿈에 뚜안님이 등장했다. 이렇게 대화하게 되어 너무 좋다고, 소개시켜 줄 사람이 많다며 나를 데리고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다. 꿈에서 본 사람들은 그의 조상들이었던 거 같은데, 일어난 뒤에 신나서 돌아다니던 뚜안님을 떠올리니 아무래도 베트남을 가야할 성 싶어 결심이 섰다. 곧바로 희정 동지에게 동행하겠다 텔레그램 메시지를 보내고 여권을 만들러 밖으로 나갔다. 내란으로 정신없던 시기에 만료됐던, 돈도 시간도 여의찮아 해외 갈 일이 망연하다고 방치해 둔 여권이었다. 그 날이 뚜안님 아버지인 부반숭 동지의 생신이었다는 걸 저녁에 알게 되자, 뚜안님이 이렇게까지 적극적으로 초대를 했는데 안 간다면 정말 속상해 할 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이가 들수록 늘어가는 건 현실성 운운하며 따지고 재는 일과 발 빼는 일이라니 부끄럽다.
뚜안님은 먼저 도전하고 길을 찾아가는 사람이었을 거 같다. 공장에서 일을 하게 된 것도 그랬기 때문이었다고, 중간 보고회에서 그의 친구였던 혜인님이 말했다. 내가 나고 자란 이 대한민국이 그렇게 도전할 만큼의 가치가 있는 곳인지 나는 사실 잘 모르겠지만, 뚜안님을 비롯한 여러 사람들에겐 그랬던 모양이다. ‘어메리칸 드림’에 이은 ‘코리안 드림’이 자본주의 제국주의의 허황된 꼴을 좋게 포장한 거 같아서 그런 표현을 듣는 마음이 불편했다. 호치민에서 만났던 수많은 베트남 사람들이 한국에 호의적이라서 사실 더 괴로웠다. 이렇게 좋은 사람들을 한국인들은 어떻게 취급했는지. 그리고 제국이 되고 싶어하는 한국의 정부와 자본가들이 떠올랐다. 호치민 곳곳에 뿌리내린 한국 자본을 볼 때마다 소름이 끼쳤다. 미국이 한국전쟁 이후 원조한 방식을 그대로 써먹은 게 뻔했다.
베트남도 오래도록 프랑스의 식민지배를 받았으며, 내전으로 끔찍한 날들을 보냈다는 점에서 한국과 유사한 면이 많았다. 곳곳에 서양식의 건물이나 주변의 집들처럼 개방되어 있지 않은 ‘저택’들에서 그 흔적을 볼 수 있었다. 기후가 따뜻해서 그런지 집들도 가게들도 1층은 벽보다 창문이나 문의 면적이 넓은 편이었다. 문이 있어도 대다수가 유리문으로 내부가 잘 보이는데, 저녁에는 대문을 닫는다 쳐도 생활하는 시간에는 대부분 문을 활짝 열어놓는 식이었다.
물론 한국에서는 이제 일제 목조 건물이나 강점기 당시에 지어진 건물을 아직도 쓰는 모습은 보기 어렵다. 박물관이나 특수한 목적의 건물로 거의 보존해 놓는 편이라, 그 시대를 일상과 분리시킨 듯도 하다. 마치 과거의 편린은 박제가 되어야만 의미가 있는 것처럼, 혹은 옛날 일은 남 얘기인 것처럼. 유사한 맥락으로 한국에서는 빈자와 부자가 철저하게 분리되는 게 당연하다.
그런 부분들 때문인지, 나는 베트남 땅에서 어떠한 여유를 느꼈다. ‘사회주의 국가’라기엔 제국의 자본에 의존도가 크고 수도인 호치민시 역시 땅값이 비싼 곳이었지만, 그곳 사람들에게서는 한국에 만연한 조급함이나 짜증을 본 적이 없었다. 고작 며칠 머무른 걸로 하나의 나라를 다 파악했다 할 수는 없겠지만, 언어가 통하지 않아도 소통이 어렵지 않았고 왠지 ‘괜찮다.’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아마 나는 가게와 집집마다 놓인 작은 재단 때문에 초반에 자주 어지러웠지만) 거의 모든 사람들이 종교를 가졌기 때문인지 그들에게서 선함과 거기에서 오는 여유가 느껴졌던 거 같다. 뚜안님이 고향을 그리워 하셨던 이유를 왠지 알 듯도 했다.
나도 그곳에서 어릴 적 살던 동네와 그 시간의 향수를 느꼈다. 단순히 저개발지라서 그렇다기 보다는, 뚜안님이 나고 자랐다는 동네에는 사람들이 서로 용인하고 신뢰하는 분위기가 있었다. 집집마다 걸린 화초나 여기저기 심어져 있는 풀과 나무를 쉽게 볼 수 있었는데, 집을 지을 때 먼저 심어진 나무를 베거나 옮기지 않고 그대로 둔다고 희정 동지가 얘기해 줬다.
이런 걸 비롯해서 한국에선 어림도 없는 일들을 보고 들었더니, 험지에서 도대체 무슨 고생들을 사서 하고 있는 건가 싶었다. 먹고 살기 위해, 살아가기 위해 포기해야 하는 존엄이 그들에겐 더 싼 값이었을지. 아니, 그 누구도 자신의 존엄이 그렇게 싸게 팔릴 거라 예상하며 이주 노동을 선택하지 않았을 거다. 단지 거기까지 왔기에 버티기를 각오했을 뿐. 내가 일을 하기 위해 지역을 옮기며 그런 각오를 해봤어서, 감히 짐작한다. 비록 나에겐 이렇게 아늑해서 그립고 돌아가고픈 고향이 없어도 말이다. 비록 자본의 침식이 많이 진행되었지만, 부디 이 곳의 사람들은 한국이 간 끔찍한 제국의 길을 따라가지 않기를 바랐다.
입국 수속을 마치고 나온 나와 태은 동지를 공항 앞에서 부반숭 동지가 마중 나오셨다. 호치민에는 공항이 하나 뿐이었고, 공항 건물 내에는 공항을 직접 이용하거나 근무 등의 명확한 용건이 있는 사람만 출입이 가능했다. 그래서 몇 겹의 인파 속에서 우리를 기다리다가 먼저 알아보고 손을 흔드셨다. 한국에서 뵀던 때보다 표정이 훨씬 좋아 보였고, 염색도 하셔서 더 젊어 보이셨다. 우리 짐을 계속 들어주려고 하셨어서 말리느라 애썼다. 뚜안님의 어머니 후옌님이 한 시간 뒤쯤 다른 동지들과 함께 도착한대서 공항 밖에 딸린 카페에 앉아 기다렸다. 반숭 동지는 날이 덥고 사람도 많은 데서 기다리게 해 미안하다는 말을 번역기로 써서 전하셨다.
우리 쪽으로 뚜안님의 외숙모 후에님이 오셔서 반숭 동지와 말을 나누시다가, 후에님이 우리를 먼저 숙소에 데려다 주라하여 반숭 동지가 택시를 불러 동행하셨다. 숙소에 도착해 짐을 풀고 나서, 뚜안님의 외할머니와 다른 분들이 계시는 집으로 가서 동지들을 기다렸다. 호치민에서 뚜안님이 지내시던 외할머니 댁이라 들었다.
뚜안님의 외할머니 흐엉님은 딸인 후옌님과 확실히 닮으셨는데, 왠지 세월을 견뎌오신 듯한 무거움이 느껴졌다. 뒤에 동지들과 도착한 후옌님을 7년 만에 만나셨을 때 우는 딸의 손을 잡아주며 조용히 눈물을 훔치셨다. 인자하게 웃는 모습도 자주 보이셨지만 감정 기복이 크지 않으셔서, 집안을 지탱하고 계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중에 뉴스민의 박중엽 기자님 기사에 남편을 일찍 여의고 자식들을 건사하셨다는 인터뷰가 실린 걸 봤다.
반숭 동지는 흐엉님의 집에서 접이식 밥상 상판 두께의 알루미늄 판을 네 개나 들고 나오셨다. 우리와 함께 투쟁했던 모습을 담은 사진 몇 장씩이 출력된 물건이었다. 그 중에 둘은 성서지회 사무실에 걸도록 가져가라 하셨다. 방문하는 많은 사람들과 지인들에게 그 사진을 보여주며 우리를 소개하셨는데, 투쟁의 순간들을 자랑스러워 하시는 듯했다. 유족이 직접 나섰기에 기존과는 다르게 좀 더 나은 결과가 있던 투쟁이라 생각했는데, 그가 투쟁을 함께 할 수 있어서 다행이었던 거 같다. 풀어낼 수 없는 커다란 감정들을 투쟁을 하면서 좀 더 감당하실 수 있게 됐을 지도 모른다.
후옌님은 도착하여 흐엉님을 붙잡고 울며 한참을 말씀하시다가, 2층에 올라가서 뚜안님과 외가 조상님들의 사진이 걸린 곳에서 또 한참을 울며 말씀하셨다. 향을 피우고 초를 켜둔(귀신들을 부르는) 곳이라 나는 가급적 빨리 나오고 싶었는데, 뚜안님의 영정 앞에 합장하고 선 후옌님의 말이 끝날 때까지 자리를 뜰 수 없었다. 베트남어를 거의 모르지만 어떤 말을 했을지 짐작이 갔기 때문이다. 뚜안님을 마음에서 내려놓을 준비가 되었다는 말, 잘 되진 않을 지라도 노력할 거라는 말, 그리고 앞으로 뚜안님처럼 세상을 뜨는 사람이 없도록 할 거라는 말. 북베트남 사람인 다혜 동지가 통역하기로, 후옌님이 이제야 뚜안님을 보낼 마음이 들어 처음으로 편히 쉬라는 말을 꺼냈다고 했다. 그 날은 후옌님의 마음이 충분히 극복할 힘을 낼 수 있어 보이지 않아서 안쓰러웠다.
뚜안님의 남동생인 득안님은 오후 늦은 때 귀가했지만 낯선 손님들이 가득해서 안쪽 부엌에 들어가 혼자 식사했다. 얼굴이 뚜안님과 많이 닮아서 처음에 보고 깜짝 놀랐다. 같은 방을 썼던 태은 동지는 숙소에 돌아와서 그가 뚜안님과 너무 닮아서 속상했다 말했다. 내가 뚜안님의 부모라도 그를 볼 때마다 먼저 세상을 떠난 딸이 떠올라 힘들 거 같아 많이 공감했다.
해가 저물고 어두워지자 득안님은 반숭 동지와 함께 호치민에서 젊은 사람들이 많이 가는 거리로 우리를 안내해 줬다. 도시의 밤이 화려한 불빛으로 밝은 건 어디나 비슷하겠지만, 그곳은 여기저기에 꼬마 전구를 두른 장식이 많은 게 아기자기해서 예뻤다. 도로는 오토바이가 대부분을 차지하고 인도에도 사람들이 많아서 정신없어도, 활기찬 밤거리를 걷는 게 즐거웠다. 개인적으로는 사람이 많은 곳도, 화려하게 밝은 곳도 좋아하지 않는다. 하지만 친구들과 이곳저곳을 누비던 뚜안님이 그 시간의 거리를 활보하던 모습을 상상하자, 마음이 아리면서도 흐뭇했다. 득안님이 뚜안님의 SNS에 게시된 적 있는 응우옌후에 거리로 데려가 줘서 넓은 공터에 멈춰 바람을 쐬었다.
하늘을 올려다 보니 보름달이 밝게 빛나고 있었다. 공교롭게도 100일재를 지내는 날 즈음에 뜬 보름이라 한국 무속에서 보름달의 빛이 망자들을 이끌어 준다 믿는 게 떠올랐다. 휴대폰 카메라로 달 사진을 찍는 나에게 박기자님이 베트남에서 보는 달은 다르냐고 물었다. 별로 다를 게 없다고 대답하면서, 변함없는 어떤 걸 생각했다. 어디에서 보든 같은 달처럼, 어디에서 왔든 모두 소중한 사람이라는 걸. 낯선 거리에 가득 찬 낯선 사람들이 저마다 사랑하는 이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 밤풍경이 새삼 소중했다. 옆에 나란히 선 동지들에게도 고마운 마음이 보름달처럼 차올랐다.
불교의 장례를 잘은 몰라도 49일재면 끝인 셈인데 100일재를 또 지내는 이유를 박기자님이 물어보니 저승에서의 심판을 잘 치르게 부탁드린다는 의미라고 했다. 이게 장례의 진짜 끝이라 앞으로는 기일에 제사를 지내는 일만 있다 들었다. 내가 느낀 바로는 뚜안님을 조상들이 다 잘 데려가셨고 일도 거진 마무리 되었기에, 100일재는 뒤풀이 같은 의식이었다. 그래서 첫 날부터 쏟아진 후옌님의 눈물에 마음이 무거웠지만, 오체투지 날이나 서울 농성 해단식 날처럼 울진 않았던 거 같다.
첫번째 100일재는 유골함이 안치된 린손하이호이 절에서 이튿날에, 두번째 100일재는 그 다음 날 흐엉님의 집에서 치뤄졌다. 이틀에 걸쳐 두 번 하는 이유를 물어보니, 당일에 참여하지 못하는 친척들을 위해 집에서 한 번 더 하는 거라고 들었다. 린손하이호이 절이 숙소에서 3km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해서 동지들이 걸어 가자고 했다.
희정 동지는 가는 길에 뚜안님 영정 앞에 놓을 꽃을 사려고 꽃을 파는 곳이 있나 내내 주변을 두리번 거렸다. 그 전 날에도 두바이 쫀득 쿠키가 한국 젊은 사람들 사이에 유행이란 걸 알고 하노이에서 사온 그 간식을 뚜안님 영정 앞에 올려 놓으셨다. 걸어가는 길은 인도와 도로의 구분이 모호하고 좁은 인도 여기저기의 시멘트가 깨져 있어서, 나는 거의 바닥만 보며 걸었다. 도로에는 쉴새 없이 오토바이가 다니고 가끔 군데군데 도로 보수 공사를 하는 노동자들이 보였다. 신호등은 고사하고 횡단보도 표시도 흐려 도보로 다니는 게 쉽지 않았지만, 한국에서 쉽게 보이는 지하 대공사가 없어서 다행이었다. 한국에서 지하 환풍구를 비롯한, 깊이를 알 수 없는 철망 위를 걸어다닐 때면 발밑의 빈 감각에 불안감을 느끼곤 했다. 그 때문인지 베트남의 길에서 되려 안정감이 느껴졌다.(물론 보도 경사에 미끄러져 한 번 거하게 넘어지긴 했다.)
비록 베트남의 절은 린손하이호이 한 군데 밖에 가보지 못했지만, 한국의 절 대부분이 산에 있거나 납골당의 접근성이 좋지 않은 것과 차이가 있어서 신기했다. 절의 규모가 비교적 작았는데, 바로 앞에 한국 대형 마트가 엄청 큰 부지를 차지하고 있는 게 거슬렸다. 호치민 땅값이 비싸도 거대 자본들은 과세의 치외법권인 거처럼 넓은 면적을 자랑했다. 빨간 바탕에 노란 낫과 망치 그림의 깃발이 황성적기와 함께 거리 곳곳에 나부꼈지만, 그 혁명의 색에 어울리지 않는 모습을 곳곳에서 발견할 때마다 속이 쓰렸다.
뚜안님을 비롯한 망자의 유골함이 봉안된 탑에 올라가 인사를 하고 내려와 법당에서 예불을 드렸다. 한국의 절이 대부분 목재로 지어진 것과 다르게 베트남의 절은 다른 건물들과 비슷한 대리석 바닥에 석조 건물이었다. 더운 지방이라 그런 건지는 몰라도 절에서 맨발로 다니는 게 문제되지 않아서 관대하다고 생각했다. 베트남어는 잘 모르지만 불경을 외는 말에서 익숙한 산스크리트어가 들렸다. 천수경을 읊고 반야심경도 읊고 관세음보살도 찾은 거 같다. 시간마다 드리는 예불과 달리 뚜안님의 가족들이 의뢰한 의식이라 그런지 반숭 동지와 후옌님, 흐엉님에게 스님이 불경을 읽는 도중에 향을 비롯해서 뭔가를 건네셨다. 한국의 절에서보다 사용하는 타악기의 종류가 많았던 거 같고, 금속 악기나 큰 북을 중간중간 자주 쳤던 거 같다. 예불이 끝나고 뒷편의 선대 주지 스님이셨던 것 같은 분들의 영정 앞에서도 인사를 드린 후, 봉안탑으로 올라가 뚜안님의 영정 앞에 차려진 상에서 제를 지냈다.
뚜안님의 유골함은 그곳에 있는 다른 사람들의 유골함과 다르게 생겼다고 태은 동지가 말했다. 둘러보니 정말 다른 유골함들은 연꽃 봉오리처럼 생겨서 녹색이나 흰색, 옥색같은 차분한 색에 사진이 붙어 있었는데 뚜안님의 유골함은 분홍색인 데다 금색 펄이 들어갔는지 상당히 화려해서 눈에 띄었고, 사진이 앞에 놓여 있었다. 한국에서 아끼던 친구의 납골당을 갔을 때 본 바에 의하면, 한국의 유골함에는 가운데 이름만 새기고 이름표나 사진을 붙이지 않는다. 그래서 어디에서 장례를 치렀는지에 따라 유골함의 모습이 다르게 남는 걸 알았다. 뚜안님 부모님이 한국에서 꽤 비싼 돈을 주고 진공 유골함으로 골랐다는 얘길 희정 동지에게서 들었다. 가격을 듣고 판매자가 상당한 바가지를 씌웠다 싶었지만, 자식의 마지막 길에 구태여 돈을 아끼고자 셈을 할 분들은 아니란 생각이 들어 더 마음이 안 좋았다.
처음에 봉안탑에 올라왔을 때부터 눈물을 보이던 후옌님은 결국 의식 내내 우셨고, 뚜안님의 사촌 언니도 울음을 그치지 못했다. 뚜안님보다 나이가 어린 사람이 맨 앞에서 뭔가를 해줘야 했는데 득안님이 참여하지 못해 그 사촌 언니가 자리했다. 염불 외는 스님들 뒤로 두툼한 작업복을 입은 반숭 동지가 보였다. 예복같은 단정한 옷을 입은 다른 가족들과 차이나는 복장을 고집하신 이유는 뚜안님이 사준 옷을 입어서 그렇다고, 희정 동지에게 들어 마음이 아팠다. 제를 지내는 동안 우는 사람들이 늘어가더니 태은 동지도 온통 눈물에 젖은 얼굴로 향을 꽂았다. 참여한 사람들 모두 향을 하나씩 받아 향로에 꽂은 뒤 차려진 상 앞에 서서 음식을 한입 먹고 의식이 끝났다. 나도 마지막에 뚜안님의 사촌 언니와 나란히 서서 용과 한 조각을 뚜안님의 영정을 보며 먹었다. 망자와 함께 하는 마지막 식사라고 했다.
유족들이 우는 모습을 보고 뚜안님도 속상해서 같이 부둥켜 안고 우는 듯하다고 생각했다. 더는 볼 수도, 들을 수도, 만질 수도 없는 대상이 되어버린 사람에 대한 마음은 슬프지만 생자도 망자도 각자가 가야 하는 길이 있다 생각해서 그런지 나도 함께 울지는 않았다. 뚜안님 또한 가족들이 계속 슬픔에 잠기는 걸 바라지 않는다고 느꼈다. 그 마음이 후옌님에게 잘 전달되었을지는 몰라도, 그 이후에는 눈물을 좀 덜 보이셨던 듯도 하다. 두고가야 하는 기억, 감정. 죽은 사람도 남은 사람도 자신 몫의 삶은 계속되는 걸 알고 있어서, 나는 어떻게 살아가면 좋을지 좀 고민되기도 했다.
봉안탑에서 내려와 상에 올렸던 것들을 마당의 소각장에서 태우는 모습을 보다가, 후에님이 안쪽에 상이 차려져 있으니 먹으라 하셔서 식사를 하러 자리에 앉았다. 절에서 마련한 음식이라 모두 채식이라고 했는데 한 상 가득 다양한 종류의 음식이 올라와 있어서 신기했다. 한국의 절 밥이라면 메뉴나 조리 방식이 거의 정해진 편이었지만 베트남의 절에서는 채소 전골에 콩고기조림, 볶음밥, 채소 모듬 무침 등의 여러 요리를 볼 수 있었다. 양도 많았는데 부처님이 주신 음식이라 남은 건 포장해서 가야 한댔다. 식사에 후식으로 수박까지 주셔서 나는 팔레스타인 티셔츠와 함께 사진을 찍었다. 엄청 많이 울던 사람들 모두 다행히 식사는 잘 했다.
반숭 동지는 한국에서의 굳은 얼굴로 돌아와 있었고 후옌님도 슬픈 표정이었다. 희정 동지가 한국에서 그들과의 첫 식사를 했을 때는 사고가 벌어지고 며칠 지나지 않은 때여서 한 숟갈도 뜨지 않고 계속 울었다고 했다. 아무래도 그럴 거 같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베트남에 온 두 분이 잘 먹고, 울더라도 많이 웃고, 가족들도 만나니 좀 나아 보여 마음이 놓인다고 했다. '뚜안님을 잃었지만 수많은 사람들을 알게 되어 감사하다’던 반숭 동지의 말이 생각났다. 우리가 그들의 마음에 난 구멍을 채워줄 수는 없어도, 함께 아파할 줄 아는 인간일 수 있어 정말 다행이었다. 시간이 지나면 그들도 상실을 마음에 품고 살아가는 일에 적응할 거 같아서, 그리고 그 과정에 우리가 조금이라도 도움이 된 거 같아 안심됐다.
그 때문인지는 몰라도, 뚜안님의 가족들은 우리를 엄청 먹이려고 했다. 마치 뚜안님에게 먹이고 싶었던 걸 우리한테 먹이려는 듯이, 계속해서 뭔가를 대접해 주셨다. 한국에 가면 이런 거 못 먹는다며 먹일 수 있는 거의 모든 걸 다 내오신 거 같다. 후에님이 우리 식사를 다 감당하시느라 쉬지 못하시는 거 같아 죄송한 마음이 가득했는데, 가족 분들과 반숭 동지 친구 분들 또한 우리에게 뭐를 먹이는가에 대한 토론을 하는 걸 보고 약간 포기했다. 이 사람들은 지금 우리에게 대접을 하고싶은 마음이 고생스럽고 귀찮은 것보다 큰 거구나. 누군가가 호의를 베풀 때 충분히 감사하며 받아들이는 거도 필요한 일이라 나는 그 뒤로 불편한 마음을 가지지 않기로 했다. 물론 뚜안님이 나와 함께 있는 기분이 들어 그럴 수 있었을 지도 모른다. 마지막 날에 반숭 동지의 친구인 홍님이 우리를 집에 초대해서 식사를 대접하셨는데, 그 날 뚜안님이 본인이 사랑하고 소중히 여기는 사람들을 우리에게 소개시켜 줄 수 있어서 좋았다고 말한 듯한 기분이 들었다. 홍님이 식사를 하기 전에 잔을 들고 이 자리를 마련할 수 있게 되어 기쁘다는 말씀을 하신 때 그런 생각이 들어, 이들의 마음을 받아들이는 거도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이라 느꼈다.
절에서의 일이 다 끝나고 동지들과 앞의 한국 대형 마트를 구경 갔다가 저마다 기념품이나 선물 등을 사서 귀가는 그랩 택시로 했다. 매장 안에는 한국어도 많고 한국에서 파는 물건에 베트남어 라벨만 붙은 채로 판매 되기도 했다. 마시멜로를 쓰지 않은 듯한 두바이 쫀득 모찌도 팔고 있었다. 마치 한국이라는 작은 왕국이 그곳에 있는 듯해서 기분이 묘했다. 게다가 섬유 제품들은 한국 가격의 반도 안되어서 자본이 값싼 노동력 어쩌고를 통해 얼마나 많은 이윤을 또 불리는지만 확인해 분노했다. 국가가 주도하는 자본주의를 눈으로 확인하니 속이 답답했지만, 이 곳의 사람들은 만족하는 낯빛이라 한국어로 판촉 홍보를 하는 직원들에게 애매한 미소만 지어 보였다. K팝을 좋아한다는 뚜안님의 사촌 언니에게 그러했듯, 한국 그렇게 좋아할 만한 나라가 아니라는 말을 몇 번이고 삼켰다.
식당이 많은 거리의 야외 테라스에 저녁식사 자리가 마련됐다. 고깃집이라고 생각했는데 여러 요리가 있었고, 채식을 하는 내가 먹을 수 있는 음식도 있었다. 뚜안님의 가족들은 매 끼니마다 채식하는 나를 먼저 챙겨줬어서 고맙고 미안했다. 그래도 더러 채식하는 사람들이 있는 편이라 한국만큼 비건 음식을 구하기 어렵지는 않았다는 점이 그나마 나았다. 첫날에도 후옌님이 보름 때는 채식을 한다고 해서, 베트남 사람들은 종교적 이유로 채식을 하는 게 자연스럽다는 걸 알았다. 나는 락토오보 비건이라 생선도 먹지 않고, 채식을 하기 전에도 비린내 때문에 생선을 그다지 좋아하는 편이 아니었다. 그런데 가운데 나온 흰 살 생선을 보니 되게 먹음직스럽고 맛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먹고싶은 마음이 든 게 아닌 거 같아 혹시 뚜안님이 생선을 좋아하냐고 후옌님에게 여쭤보니 그렇다고 하셨다. 뚜안님이 나와 함께 있다는 걸 알았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그저 사람도 너무 많고 시끄러워 정신이 혼미했어서 집에 가고 싶었다.
득안님이 내 뒷쪽에 지나가다가 맥주를 쏟으며 잔을 깼는데, 그때 조금 정신이 들어서 옷에 술도 묻었으니 숙소로 돌아가고자 벌떡 일어났지만 반숭 동지는 우릴 보낼 생각이 없었다. 이윽고 비가 쏟아져 우리가 앉아 있던 야외석의 지붕에 굵은 빗방울이 부딪히는 소리가 굉장히 크게 났다. 나는 빗물에다 옷에 묻은 술을 씻길 겸 가겠다 했으나 여전히 그들은 우릴 보내고 싶지 않아 했다. 떨어지는 빗방울에 술 묻은 부분이라도 씻어내려 옷을 지붕 밖에다 휘둘렀다. 반숭 동지는 급기야 뚜안이 우리를 가지 말라고 해서 비가 내리는 거라 했다. 이 시기는 우기가 아니라 비가 오는 일이 흔치 않다는 거다. ‘제발’이라는 감정으로 ‘얼른 각자 자기 자리로 돌아가자’는 생각을 하며 옷에 빗물을 떨구었다. 숙소에 돌아와 태은 동지가 그 모습을 보고 내가 귀신을 쫓는 줄로 알았대서 아니라곤 못하겠다 대답하며 깔깔 웃었다. 하지만 망자가 생자와 너무 오래 어울리는 건 좋지 않고, 나는 그걸 일상적으로 경험하고 있기 때문에 반숭 동지에게 남은 미련이 마음에 걸리긴 했다.
그 다음 날 오전, 스님들이 흐엉님의 집에 오셔서 더 많은 가족들과 2층의 영정이 있는 방에 모두 모였다. 이번에는 득안님도 참여하신 자리라, 그가 맨 앞에 앉아 어제 뚜안님의 사촌 언니가 했듯 뭔가를 받고 그릇에 수저를 꽂기도 했다. 시간이 지나며 한둘씩 훌쩍이는 소리가 들렸지만 한결 나아진 거 같았다. 전날에도 그랬는지는 기억이 잘 안 나지만, 스님들이 읽는 축문에 대구의 주소를 읋는 게 들려서 다혜 동지에게 물어보니 사망한 자리에 대한 주소가 들어간 거라고 했다. 한국에서는 생자의 거주지가 축문에 들어가는 게 생각나서, 이 곳의 사람들도 망자가 자기가 죽은 자리를 떠나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거 같았다. 첫 날에 후옌님이 올라온 때 함께 있었을 때는 어지럽고 눈앞도 깜깜해졌었는데(그날 상당히 피곤했던 것도 맞긴 하지만), 스님들이 와서 제를 지내는 때엔 더 많은 사람들이 왔어도 꽤 괜찮았다. 물론 망자들도 많이 온 거 같았고, 왠지 뚜안님의 조상님들이 안전히 잘 데리고 간 느낌이었다.
다혜 동지에게 베트남에서도 죽은 사람을 조상들이 데려간다고 생각하냐 물으니 중국의 영향을 많이 받은 동아시아 문화권이 대부분 그렇다는 답을 들었다. 그래서인지 언어는 거의 알아들을 수 없지만 제례의 대부분이 낯설지 않았던 듯하다(시작하기 전에 창문을 여는 것도 익숙한 풍경이었다). 축문과 경문을 읊는 일이 끝나고 스님들이 가족들을 위로하는 말을 전하고 떠나셨다. 일어난 일은 돌이킬 수 없고 사람은 모두 죽으니 적당히 슬퍼해야 망자도 자기 갈 길을 잘 간다는 얘기였다. 부처님의 보살핌을 받으며 이제 편안해졌으니 망자를 위해서도, 본인을 위해서도 슬픔을 잘 달래어 이겨내라는 말이 낯설지 않았다. 확실히 장례도 제례도 살아있는 사람을 위로하기 위한 일이라, 가족들에게 이 모든 게 충분히 위로가 되었길 바랐다.
점심 식사는 육수를 쓰는 쌀국수 집에서 먹기로 얘기되어 채식하는 나는 제사 상에 올렸던 음식으로 식사했다. 흐엉님과 후에님과 그 아들인 바오, 딸 아이를 안은 뚜안님의 사촌 언니와 반숭 동지 친구 응우웯님과 함께 집에서 밥을 먹었다. 응우웯님은 한국을 좋아한다고 하셔서 번역기로 베트남어와 한국어를 번갈아 쓰며 단어를 서로 가르쳐 줬다. 나는 사랑하지 않는 내 모국이 그들에겐 좋은 대상이라는 걸 받아들이긴 어려웠지만, 애정하는 마음이 담겨 있어 그에 부정적인 기색을 내비칠 수 없었다. 한국에 자주 간다는 응우웯님이 한국에서도 보자고 하셔서 좋다고 했다(이후 페이스북 메신저로도 서울에서 만나자고 하셨다).
점심을 먹고 좀 쉰 뒤 저녁 식사 때가 되자 출장 식당 업체에서 상과 의자와 필요한 음식에 얼음 일체를 들고 흐엉님의 집에 왔다. 아침에 봤던 사람들보다 더 많은 이들이, 그러니까 일가 친척 식구들이 다 모인 자리가 마련된 거다. 분위기는 잔치 같아서 큰 일을 치르고 난 뒤의 뒤풀이 같은 느낌이었다. 40명이나 되는 사람들을 수용하기 위해 골목에까지 상을 폈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모였는데 다들 데면데면한 게 하나도 없었다. 득안님도 사촌들과 대화를 하며 웃고 즐거워 해서 신기했다. 영어를 할 줄 아는 10살 아이가 나와 대화를 하려 했는데, 네다섯 살인 바오가 이제 낯가림을 안하는지 계속해서 말을 했다. 그 사촌들이 기억하는 뚜안님은 어떨지 물어보고 싶었는데 아쉬웠다. 사건 이후로 어플로 베트남어를 조금씩 배워봤지만 무슨 대화를 하기엔 역부족이었다.
친척 가족들도 다 보내고, 반숭 동지의 친구 분들이 우리와 함께 놀러 나가자 하셨다. 태은 동지는 전날에 후에님한테 받은 아오자이를 입었고, 나도 응우웯님에게서 받은 아오자이의 바지를 입은 상태였다. 희정 동지가 이 사람들이 우리를 갖고 논다고 어처구니 없어 했지만 아무튼 신이 난 베트남 사람들을 막을 수 없었다. 한참 택시를 타고 나가 굉장히 넓은 야외 카페에서 어렵사리 주문을 하고 자리에 앉았다. 예쁜 카페 다니는 걸 좋아하던 뚜안님이 왠지 확실히 좋아했을 거 같은 곳이었다. 연못도 있고 조화 나무도 있고 진짜 나무도 있고 정원 바위들도 있는 광활한 카페였으니, 이제 보니까 호치민은 자본가에게만 후한 거 같았다. 국가 자본주의에 분노하는 것도 잠시, 곧 그들은 한국의 다른 대형마트를 구경 가자고 한다. 나가는 길에 발견한 셀프 포토 스튜디오에서 사진을 찍자고 해서 열몇 명이 옹기종기 모여 어떻게든 네 장에 한 번씩은 다 나오게 만들었다. 홍님이 우리에게 한 장씩 뽑아 주시고 다른 사람들은 사진을 링크로만 가졌다(물론 우리도 링크를 공유 받았다).
또 택시를 타고 가기엔 사람이 너무 많아서, 걸어가기로 했다. 근처에 있으니 가볼만 하다 싶어 가는 길이 전날에 절에 가며 걷던 동네 길이랑 달랐다. 신호등은 여전히 드물었지만 응우옌후에 거리를 다니던 때처럼 잘 닦여진 인도 곳곳에 2주 뒤의 중추절을 축하하는 큰 장식물들이 있어서 포토존 삼아 또 사진을 찍었다. 사실 나는 자본이 사람들이 실제 살아가는 삶보다 포장된 것을 보여주기 좋아하는 게 국가 불문 똑같은 거 같아서 한편으로는 맥 빠졌다.
후에님이 태워주는 오토바이도 타고 하면서 베트남의 번화가를 누볐다. 시간이 지나도 지치지 않는 것 같은 사람들을 진정시키고 숙소로 돌아왔다. 아마 그때부터 그들이 계속 내년(베트남에서는 음력 달력을 써서 아직 2025년이다.) 뚜안님의 기일에도 오라고 했던 거 같다. 홍님이 다음 날에 집으로 초대해서 식사를 대접하겠다는 말을 전하자 희정 동지는 거절할 방법을 찾지 못해 골치 아파 했다. 그러나 ‘배불러서 더는 못 먹겠다’는 말이 가볍게 무시되는 거처럼, 우리의 거부 의사는 애초에 중요하지 않았던 거 같다. 갚을 길 없는 호의와 환대를 받아 부담스러워 하셨지만, 다혜 동지도 사실 베트남 사람들은 다들 정이 많아 이러는 게 보통이라고 말했다. 나도 홍님의 집에서 뚜안님이 우리가 뚜안님의 사랑하는 사람들을 만나서 좋은 시간을 보내도록 하는 걸 원하는 거처럼 느꼈다고 말을 전하긴 했지만, 그의 마음에 쌓이는 부채감을 덜어주진 못했다.
결국 홍님의 동네를 구경 다니고 점심을 대접받은 뒤에야 우리는 풀려날 수 있었다. 희정 동지는 호치민에서 그래도 전쟁기념 박물관에는 한 번 가보는 게 좋다고 해서 마지막으로 동지들과 그곳을 들렀다. 한국에서 동지들이 상경 농성을 한 장소도 전쟁기념 박물관 앞인 게 떠올랐다. 게다가 거기에는 한국이 베트남 전쟁에 가담해서 학살한 주제에, ‘그들을 죽이는 게 당연하고, 절멸시켜야 한다’는 당시의 문구를 베트남어로 기재해놔서 한베 평화 재단이 시정 요청을 한 바가 있다. 도무지가 자랑스러울 법한 게 하나도 생각나지 않는 한국을 베트남의 전쟁 기념관에서는 전쟁을 도와줬다는 거처럼 포장해 놔서 구역질이 났다. 들어가면서 보이는 미군의 탱크나 무기 같은 것들을 전리품처럼 자랑스럽게 전시해 놨지만, 호치민은 전체적으로 사실상 미국의 꼭두각시인 한국을 선망하는 거 같은 느낌이라 비위가 상했다. 북베트남인 하노이 지역은 남베트남인 호치민과 분위기가 다른 편이라고 들어 궁금했다. 그러고 보면 반숭 동지도 흐엉님도 원래는 고향이 하노이 쪽이라고 들었다. 전쟁 이후 호치민이 산업화가 많이 되고 공장이 들어서며 일자리를 찾으러 이쪽으로 이동하는 사례가 흔했던 거 같다.
마지막 전시관이 전쟁의 아픔, 상흔 등의 얘기로 고엽제 피해자들과 그 자손들의 장애를 말하고 있었지만, 나는 베트남의 정부 또한 베트남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관심이 별로 없다고 느꼈다. 그들이 걸어놓은 낫과 망치 깃발이 별 의미 없는 것처럼, 학살당한 사람들을 애매하게 넘긴 그곳이 기묘했다. 그리고 지금 이 글을 쓰는 시점에는, 분명 그런 곳이 전쟁의 잔혹성을 기억하고 다시는 일어나지 않도록 하기 위해 만들어진 걸 텐데 아무도 그런 걸 기억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더더욱 공허하다는 생각이 든다. 방산 산업으로 야금야금 돈을 벌고 있던 한국. 전면적으로 시작된 침공에 치솟는 방산산업 주가. 자본의 개처럼 미쳐버린 제국 꿈나무인 나라를 호치민 사람들은 좋아해줬다. 그런 현실이 너무 끔찍하다.
도로에서 식탁을 펼친 가게의 반쎄오를 마지막 식사로, 우리는 한국으로 돌아왔다. 반숭 동지와 홍님이 함께 나와 태은 동지를 데려다 주시고, 공항 안으로 같이 들어가지 못해 입구에서 사진을 찍었다. 한국에 돌아온 날은 하루 종일 자고, 그 다음 날에도 저녁쯤에야 겨우 밖으로 나왔다. 우리가 베트남 땅을 밟자마자 들은 세종호텔 로비 농성 동지들의 연행 사건이 마무리되고 열린 체크인 집회에 자리했다. 반숭 동지에게 진수 동지가 땅으로 내려왔고 다른 사람들과 경찰에게 단체로 잡혀갔다는 말을 전하지 못했다. 진수 동지가 고공에 있을 때 반숭 동지에게 전화로 인사를 하다가 목이 메여 우시던 날이 생각나서 내내 마음에 걸렸다.
페이스북으로 베트남에서 만났던 사람들을 하나씩 찾아 친구 요청을 했다. 논바이너리 젠더퀴어라서 ‘여성스러운’ 옷을 입지 않는 내가 그들과의 시간이 그리울 때면 응우웯님이 준 아오자이를 입어 본다. 태은 동지는 후옌님의 딸이 되기로 했다고 말했다. 나는 여유가 될 때 베트남어 기초 수업을 들어보기로 결심한다. 잃고 나서 얻게 되는 것, 살아있는 사람으로의 책임, 주어지고 선택할 수 있는 기회들에 대해 생각한다. 희정 동지가 농성 투쟁 때 하셨던 말처럼, 우리 노동자들은 서로 동등한 관계니까 나는 동지도 친구라고 해 본다. 친구의 말과 문화에 대해 알아보고자 어플로 좀 더 열심히 학습해 본다. 뚜안님의 사건을 처음 접했던 날처럼, 그의 이름이 어떤 의미인지 알고 싶어서 베트남어를 공부하고자 했듯.
살아있는 사람이, 혹은 죽어서 떠난 사람이 어떤 존재인지를 알아가고자 그 투쟁에 함께했다. 또한, 애도하는 일의 감각을 알고 싶어서도 매번 자리했다. 그러한 결과로 나는 뉴스나 보도자료에 적히는 글자나 숫자가 아닌, 실재하던 인물을 느끼고 기억하는 일은 소식으로만 접하는 것과 다르다는 걸 알게 됐다. 살아있는 동안 단 한 번도 만난 적 없던 뚜안님과 내가 같은 사람이라는 걸 여러 번 깨달을 때마다, 나는 우리 노동자 민중을 하나로 이을 수 있는 어떤 것에 대해 자주 생각했다. 각각의 사람들을 하나로 단결시킬 수 있는, 공통의 감각. 계속 되는 자본의 갈라치기와 대상화의 홍수 속에서, 범람하는 탈인간화에 나는 계속해서 우리가 사람임을 잊지 말자고 말하고 싶다.
한사람 한사람, 각자의 우주가 더는 무너지지 않길 바라며 우리를 스쳐간 많은 목숨들에 조의를 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