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삼 정권의 날치기 노동법 개악에 맞서 1996년 12월말부터 한 달 가량 전개된 민주노총 총파업은 매우 위력적이었다. 총파업은 무엇보다 정리해고제와 근로자파견제 도입을 저지하기 위한 것이었다. 일반 여론의 지지도 압도적이었다. 자신감이 넘치던 김영삼 정권은 총파업 한 달 만에 식물정권으로 전락했다. 1987년 노동자대투쟁 이후 축적돼 온 민주노조운동의 역량이 한국 사회를 완전히 뒤흔들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지도부의 역량이 매우 어설펐고 결정적인 순간에 총파업을 중단시켜 버렸다. 역사적인 총파업이 소기의 성과를 거두지 못한 채 소멸한 뒤 여야 보수 정치권의 합의로 다시 통과된 노동법은 개악 조항과 독소 조항 대부분을 그대로 둔 채 정리해고제와 근로자파견제만 2년 유예하는 선에서 그쳤다.
총파업 이후 10개월 만인 1997년 말, 한국은 대통령 선거 한복판에 국제통화기금(IMF)에 긴급지원을 요청해야 하는 외환위기에 빠졌다. 대통령 당선자 김대중은 정리해고제 도입을 관철하기 위해 노사정 대타협을 주문했고, 노사정위원회에 참여한 민주노총 지도부는 정리해고제와 근로자파견제 조기 도입에 합의하고 말았다. 민주노총 대의원대회가 지도부를 불신임하고 합의를 무효화한 뒤 총파업을 결의했지만, 총파업은 실행되지 못했고 노동법 개악안은 그대로 통과됐다.
1996~98년 노동법을 둘러싼 대격돌에서 노동자계급은 패배했다. 그 대가는 엄청났다. IMF 외환위기 이후 이른바 ‘헬조선’이 되어버린 한국 사회, 즉 넘쳐나는 비정규직과 극단적인 저출생으로 가는 길이 활짝 열렸다.

2부 전진과 격돌 (1988-1998)
[시대배경] 군사파시즘에서 신자유주의 질서로
[1] 1988~89년 민주노조운동의 폭발적 성장
[2] 1990~91년 전노협 건설과 민주주의 투쟁
[3] 민주노총으로 가는 길
[4] 1996~98년 노동법 대격돌
1) 1996~97년 노개투 총파업
1987년 노동자대투쟁 이후 민주노조운동은 ‘노동악법 철폐’를 줄기차게 주장했다. 가장 대표적인 악법은 1980년 신군부의 노동법 개악 때 도입된 이른바 ‘제3자 개입금지’였다. 연대투쟁에 나선 모든 노동자들을 옭아맬 수 있는 이 조항으로 수백 명의 노동자들이 옥고를 치러야 했다.
‘복수노조 금지’도 중요한 문제였다. 단위노조 수준에서의 복수노조 금지는 회사측으로 하여금 어용노조 설립이라는 간편한 수단을 통해 민주노조 설립을 봉쇄할 수 있게 보장했다. 상급단체 수준에서의 복수노조 금지는 어용 한국노총에 맞서는 민주노조운동의 전국적 총결집체인 전노협이나 민주노총 등이 법외노조로 내몰리게 만들었다.
‘교사 노동자와 공무원 노동자에 대한 노동3권(단결권·단체교섭권·단체행동권) 박탈’이나 ‘노동조합의 정치활동 금지’도 민주노조운동의 확대와 성장을 가로막는 중요한 악법 조항들이었다. 이러한 악법들의 철폐를 위해 꾸준히 투쟁해 온 민주노조운동은 1995년 민주노총을 건설해 낸 만큼 이제 더욱 전면적으로 노동악법 철폐 투쟁으로 나아가야 할 참이었다.
반면 자본가들은 민주노조운동을 더욱 옭아매고 무력화하기 위해 노동법의 추가 개악을 원했다. 대법원 판결 확정시까지 인정되던, ‘해고를 다투는 자의 조합원 자격’을 중앙노동위원회 판정까지로 단축시키고자 했다. ‘노조 대표자의 체결권’을 신설해서 노조 대표자가 조합원총회의 민주적 결정 없이 직권조인을 하더라도 법적으로 효력이 인정되게 하고자 했다. 기본적으로 금지돼 있던 ‘파업 대체인력 투입’을 해당 사업장 안에서는 허용하고자 했다. 무노동 무임금 정책을 아예 ‘파업시 임금지급 금지’로 법에 명문화하고자 했다. ‘노조 전임자 임금지급 금지’로 노조 상근자들을 대폭 축소시키고자 했다.
그런데 그게 다가 아니었다. 1990년대에 전 세계가 신자유주의 물결에 휩쓸리고 있었다.[1] 규제완화, 민영화(사유화), 부자감세, 복지축소 등과 함께, 신자유주의가 지닌 또 하나의 중요한 특징은 노동유연화였다. 미국과 유럽에서만 수백만 명의 노동자들이 정리해고를 당하고 있었다. 생산거점을 값싸고 고분고분한 노동자들을 찾아 국경을 가로질러 이동시키는 ‘생산의 세계화’와 기업의 장기적 전망보다 주주의 단기적 이익을 우선시하는 ‘주주 자본주의’가 정리해고 규모를 더욱 확대시키고 있었다.
1990년대 초반 냉전체제의 붕괴와 함께 세계시장의 무한경쟁에 냉혹하게 내던져진 한국의 독점재벌들은 세계를 휩쓰는 노동유연화 물결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자본의 국제경쟁력’을 갖추기 위해 자본가계급은 한국에서도 노동유연화가 도입되기를 원했다. 그것도 가장 고도화된 형태를 갖춤으로써 최고의 경쟁력을 얻고 싶었다. 다시 말해 ‘자유로운 정리해고’에 덧붙여 ‘극도로 유연한 (다시 말해 극도로 노동권이 박탈된) 노동자로서 비정규직의 전면적 확산’을 가능케 하고 싶었다. 자본가들의 욕망은 정리해고제와 근로자파견제 도입 추진으로 구체화됐다.
1996년에는 이렇게 노동법을 둘러싸고 노동자계급과 자본가계급의 이해관계가 서로 정면충돌하는 정세가 만들어졌다.
◎ 김영삼 정권의 신노사관계 구상과 노동법 개악 추진
1996년 4월 24일 대통령 김영삼은 “21세기 세계 일류 국가로의 도약을 위해 참여와 협력의 새로운 노사관계를, 노사간의 사회적 합의와 범국민적 합의를 통해 이루어 나가겠다”면서 이른바 ‘신노사관계 구상’을 발표했다. 신노사관계 구상에 따라 노동계, 재계, 공익 대표자 30명을 포괄하는 ‘노사관계개혁위원회’(노개위)가 대통령 직속으로 5월 9일 출범했다. 특히 노개위는 “투쟁과 분배 우선의 노동운동에서 벗어나 국민경제의 발전과 함께 가는 합리적이고 생산적인 노동운동”을 주문하면서, 아직 법외노조 상태로 있던 민주노총을 한국노총과 함께 노동계 대표로 포괄했다.
김영삼 정권이 추진한 신노사관계 구상의 요지는 노동자들이 줄기차게 요구해 온 △복수노조 허용 △제3자 개입금지 철폐 △교사·공무원의 단결권 허용을 전향적으로 검토할 테니, △정리해고제 △근로자파견제 △변형근로제 도입에 대한 사회적 합의를 이루자는 것이었다.
이와 같은 김영삼 정권의 신노사관계 구상 아래에는 한국 자본가계급의 이해관계가 놓여 있었다. 한국의 자본가계급은 1960년대 이래 장기호황을 가능하게 했던 축적구조가 1987년 노동자대투쟁을 거치면서 근본적으로 흔들린 뒤 자본-노동 관계를 재구축해야 하는 과제에 직면해 있었다. 게다가 1990년대 들어 세계화 흐름을 따라 세계 자본주의 무한경쟁에 더 깊게 편입되면서 그 필요성이 더욱 절박해졌다.
자본가들은 이른바 ‘신경영전략’을 도입하고 체계적인 노무관리를 실시하면서 노조의 현장 기반을 잠식해 들어갔다. 또한 무노동무임금 논리, 노조간부 고소고발, 손해배상 청구소송 등의 공세를 통해 노동조합과 파업의 기세를 일정하게 약화시킬 수 있었다. 하지만 자본가들은 더 나아가고 싶었다. 자본가들은 노동조합의 힘을 무력화하고 노동시장의 유연성을 높여 노동자를 개별화함으로써 완전한 통제권을 얻고자 했다.
그런데 1987년 대투쟁 이후 급속하게 성장한 민주노조운동은 1990년대 들어 지배계급의 공세 강화와 경기침체가 맞물리면서 여러모로 고전하고 있었지만 여전히 상당한 전투력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자본가들은 격렬한 노자대립을 피하고 ‘사회적 합의’라는 형식을 통해 생산성과 경쟁력을 향상시킬 수 있는, 그러면서도 실질적으로는 노동자들을 길들여 장기적인 자본축적에 유리하게 작용하는 틀을 만들어 내고자 했다.
자본가들의 이러한 의도는 처음에는 1993~94년 경총과 한국노총의 임금인상 합의로 나타났다. 그러나 민주노조운동에 대한 통제력을 전혀 갖고 있지 못한 한국노총과의 합의는 아무런 실익이 없었다. 오히려 민주노조운동은 한국노총에 대한 규탄 속에서 민주노총 건설의 동력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자본가들이 ‘사회적 합의’를 이루고자 한다면, 어떤 식으로든 민주노조운동 세력을 끌어들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 분명해졌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김영삼 정권이 ‘참여협력적 신노사관계’ 창출을 위한 사회적 합의 기구를 구상하게 되고, 이로부터 1996년 정권 주도로 ‘불법단체’인 민주노총을 포괄하는 노개위가 출범하게 된 것이었다.
민주노총은 노개위 참여를 둘러싸고 상당한 논란을 겪었다. 지도부를 중심으로 한 타협·개량주의 세력은 “노개위에 참여해서 협상을 벌여보자”, “협상을 통해 지킬 것은 지키고 따낼 것은 따내면 되지 않겠냐”고 주장했다. 반면 현장을 중심으로 한 전투적·변혁적 세력은 “노개위 참여는 민주노총 합법화와 정리해고 도입을 맞바꾸는 것으로 귀결될 것”, “노동법 개악을 저지하고 노동법 개정을 쟁취할 수 있는 길은 노개위 협상이 아니라 총파업 조직”이라고 주장했다. 결국 5월 2일 중앙집행위원회에서 노개위에 참가하기로 결정됐다.
7월 19일 민주노총은 단위노조 대표자수련대회를 열어 하반기 노동법개정투쟁 방안을 논의했는데, 이 자리에서 “(민주노총 합법화 등) 집단적 노동관계법의 개정과 (정리해고제 도입 등) 개별적 노사관계법의 개악을 맞바꿔서는 안 된다”는 단위노조 대표자 다수의 결의가 확인됐다.
◎ 총파업의 준비 과정
노개위는 몇 달 간 논의를 이어갔지만, 복수노조, 교사의 단결권, 쟁의기간 대체근로허용, 정리해고제, 근로자파견제 등 41개 핵심조항에 대해 더 이상 논의를 진척시키지 못하고 교착상태에 빠졌다. 사회적 합의라는 허울 아래 정리해고제와 근로자파견제를 반드시 관철하겠다는 김영삼 정권의 의지가 점점 분명해지자, 현장으로부터 올라오는 비판과 총파업 요구도 더욱 거세졌다.
결국 민주노총 지도부는 10월 2일 노개위에서 철수했다. 이미 9월 21일 ‘노동법개정투쟁 승리 결의대회’를 수도권·충청권·호남권·영남권 등 각 권역별로 개최했던 민주노총은 이제 본격적으로 총파업 준비에 들어갔다.
김영삼 정권의 정리해고·비정규직 도입 시도를 분쇄하기 위해 총파업으로 떨쳐 일어서자는 선동이 전국의 주요 대공장과 공단에서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총파업을 호소하는 유인물이 쏟아지고, 총파업 결의를 다지는 출근투쟁·중식투쟁·현장순회·사업장집회·지역집회가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정리해고제, 근로자파견제, 변형근로제, 파업권 제약에 맞선 투쟁은 생존권을 지키는 결사항전일 수밖에 없었다. 김영삼 정권과 자본가계급도 물러설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노동자계급도 물러설 수 없는 상황이었다.
현대차노조는 9월 18~23일 제10차 정기대의원대회를 열고 1996년 하반기 사업은 노동법개정투쟁에 집중하기로 결정했다. 준비기, 투쟁돌입기, 총력투쟁기 등으로 시기를 구분해 상급단체 및 전국 노동운동 세력과 공동투쟁을 전개하기로 했다. 이를 위해 모든 조직체계를 ‘노동법개정투쟁위원회’로 전환했다. …
노동법개정투쟁의 선봉대로서 노개투 실천단을 구성했다. 노개투 실천단의 역할과 임무는 △투쟁지침 실천 △각 사업부 실정에 맞게 대중적인 사업실천 △대국민 선전활동 적극 참여 △각종 집회에 참여해 조합원 참여를 조직 △정기적이고 지속적인 선전 선동 작업 △사회개혁투쟁의 적극 실천 등으로 부여됐다. 10월 8~14일까지 모집된 실천단은 총 2,424명으로 구성됐다. …
10월 1일부터 12월 12일 사이에 노개투 조합원 교육 및 간담회를 총 79회 조직했는데, 4,530명의 조합원이 참여했다. 10월 26일에는 노개투 마라톤대회를 열었다. 6인 1조로 68팀이 참여했다. 대시민 지역 선전활동을 7차례, 유권자 서명운동을 19차례 진행했다. 노개투 차량스티커 3천장을 제작해 조합원들에게 배부하기도 했다.[2]
10월 9일 울산지역 현장조직대표자회의와 울산해고자협의회는 ‘노동법 개악안 설명회 및 울산지역 노동법 개정 투쟁의 방향’이라는 주제로 토론회를 갖고 ‘노동법 개악 저지 및 개정 투쟁 울산지역 선봉대’ 발대식을 가졌다. 선봉대는 10월 14일부터 11월 8일까지 울산지역의 거의 모든 민주노조 사업장 정문에서 출퇴근 투쟁을 벌였으며 민주당사, 신한국당사, 정몽준 의원 사무실 등에 대한 항의 방문 투쟁을 전개해 나갔다.[3]
현장과 지역에서 전개된 총파업 준비에 발맞춰 권영길 민주노총 위원장은 11월 4일 명동성당에서 삭발과 함께 단식농성에 들어갔다. 현장과 지역에서 축적된 열기는 11월 10일 전국노동자대회로 모아졌다. 10만이 결집한 전국노동자대회에서 권영길 위원장은 “노동법 개악안 강행시 총파업 돌입”을 선언했다.
노동자들이 총파업을 준비하는 동안, 자본가들과 김영삼 정권은 노동법 개악을 향해 한 발 한 발 다가가고 있었다. 11월 12일 전경련은 “복수노조 허용과 제3자 개입금지 철폐에 반대한다”는 입장을 발표했다. 김영삼 정권은 쓸모가 없어진 노개위를 대신해서 14개 부처 장관으로 ‘노사관계개혁추진위원회’(노개추)를 구성하고 독자적인 노동법 개악안을 마련해 나갔다. 12월 3일 확정된 정부안은 “우리가 봐도 심했다. 표정관리 하느라 애먹었다”는 말이 자본가들 측에서 나올 정도로 강경했다.
노동자들도 총파업 준비에 더욱 매진하면서, 노동법 개정을 둘러싸고 자본가계급과 노동자계급 사이에서 팽팽하게 긴장이 고조되고 있었다.
현대차노조는 민주노총 지침에 따라 12월 3일 저녁 5시부터 조합원 결의대회를 열었다. 영하를 오르내리는 매서운 한파 속에 열린 야간집회였으나 1만여 명이 넘는 조합원들이 참여해 임투를 능가하는 열기를 보여주었다. …
이어 12월 4일 민주노총의 모든 단위노조들과 함께 노개투 승리를 위한 쟁의행위 찬반투표를 실시했다. 조합원 34,509명 가운데 31,572명(91%)이 투표해 29,695명이 쟁의행위에 찬성했다. 전체 조합원 대비 86%, 투표자 대비 94%의 높은 찬성률로 쟁의행위가 가결됐다.[4]
12월초에 전국의 현장은 폭발할 것 같은 긴장감으로 가득했다. 그런데 12월 초·중순을 지나가면서 김영삼 정권의 노동법 개악 수순이 착착 진행되는데도 민주노총 지도부는 예정된 총파업 돌입을 거듭 유보하고 있었다.
애초 대의원대회와 중앙위원회를 거치며 결의된 민주노총의 방침은 12월 13일을 기해 총파업에 돌입하되 그 전이라도 국회 상임위에 개악안이 상정된다면 총파업에 돌입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민주노총 지도부는 12월 10일 개악안의 상임위 상정 시점에도, 12월 13일의 총파업 돌입 예정 시점에도 총파업 돌입 지침을 내리지 않고 유보시켰다. 특히 12월 12일 민주노총 지도부는 임원·산별대표자회의를 소집하여 총파업 돌입의 마지노선으로 여겨졌던 13일의 총파업마저 유보하기로 결정해 버렸다.
민주노총 지도부의 ‘13일 총파업 유보’ 결정을 앞장서 이끈 것은 타협·개량주의 세력의 주요 근거지로서 이른바 ‘국민과 함께 하는 노동운동’을 적극 주창하고 있던 ‘현대그룹노동조합총연합’(현총련)이었다. 현총련은 “민주노총의 총파업 결정이 정부의 음모를 제대로 꿰뚫어 보지 못한 부분도 있었다는 것을 솔직히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며 “국회 운영상 연내 법 개정이 사실상 불가능함에도 정부와 여당이 이번 회기 내 처리방침을 밝힌 것은 우리의 파업을 유도해 민주노총을 와해시키려는 고도의 정치적 음모라고 판단한다”고 밝히고 “권영길 위원장의 냉철한 판단으로 13일 파업을 유보할 것”[5]을 공식 제기했다.
민주노총 지도부의 ‘13일 총파업 유보’ 결정이 내려지자, 현장으로부터 강력한 반발이 솟구쳐 올라왔다. 민주노총 총파업에 연대하여 전 민중적 투쟁으로 발전시키려고 준비하던 노동운동 단체들과 민중운동 세력들도 강력하게 문제제기를 하고 나섰다.
“정부와 신한국당에서는 공식적으로 이번 정기국회에서 기필코 노동법 개악안을 통과시키겠다고 거듭 밝히고 있고 나아가 이러한 방침에 반대하는 당 소속 국회의원들에게 경고하는 등 아무런 입장의 변화가 없음은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 뿐만 아니라 지난 몇 개월 간 준비한 민주노총의 총파업투쟁을 정부가 유도하면서 조직까지 와해 위축시킬 수 있는 것으로 투쟁을 불신하고 총파업투쟁을 철회함으로써 조직을 보존, 사수한다는 논리까지 들먹이는 데 이르러서는 망연자실할 뿐입니다. … 몇 차례의 과정을 통해 민주노총 지도부에서 김영삼 정권의 노동법 개악 강행구도가 분명함에도 불구하고 전혀 설득력 없는 정세판단에 근거하여 총파업 투쟁 방침을 번복하자 현장단위에서는 민주노총 지도부는 물론 그동안 총파업 투쟁을 독려하고 조직하여 왔던 단위노조 대표자와 간부들조차도 조합원들로부터 불신을 받고 있으며, 이 과정에서 단위노조와 지역의 지도력이 이미 심각하게 타격을 받은 상태라는 것입니다.”[6]
“12월 13일 예정했던 총파업을 철회한 민주노총의 결정에 대해 심각한 우려를 금할 수 없다. 이번 총파업투쟁의 목표는 정부의 노동법 개악안 강행 시도를 내년 2월 임시국회로 연기시키는 것이 아니라, 정부의 노동법 개악안을 완전히 철회시키는 것이고 더 나아간다면 그동안 민주노조운동에서 요구해 온 내용으로 노동법을 민주적으로 개정하는 데에 있다. … 노동법 개악을 저지하고 민주적으로 개정해 내는 힘은 40만 민주노총 조합원 동지들의 총파업투쟁과 그에 뒤따르는 민중연대투쟁에 있다. 국회 진행 일정이나 보수 여야 정당들 사이의 이해 다툼은 결코 중요한 변수가 될 수 없다. … 총파업투쟁을 통한 선제공격만이 노동법 개악을 막아 내는 유일한 길이다. …
세계 자본주의의 경쟁이 격화되어 가는 상황에서 한국 자본주의는 노동자와 기층 민중에 대한 착취도를 강화하는 것에서 활로를 찾고 있으며, 김영삼 정권이 앞서서 이를 추진하고 있다. 올해 극심해지고 있는 민중 생존권 압살과 공안탄압 또한 이에 맞서는 투쟁을 억누르려는 시도이다. 이번 총파업투쟁은 노동법 개악 저지를 일차 목표로 하고 있지만, 나아가 한국 사회의 진정한 민주적 개혁을 위한 힘찬 발걸음이기도 하다. …
만약 12월 13일 총파업이 감행되었을 경우 정부와 자본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고 이 땅의 지축을 뒤흔들 대규모 전국 총파업이 충분히 가능했을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다. 자본의 신경영전략 공세, 권력의 생산성 향상 이데올로기 공세와 공안탄압 분위기 조성, 총파업투쟁에 대한 협박, 그리고 촉박한 시일 등 어려운 조건 속에서 이렇듯 힘차게 총파업투쟁을 준비하고 조직해 온 노동형제 동지들의 저력과 추진력을 보면서 진정으로 뜨거운 동지적 신뢰와 경의를 보낸다.
지금은 12월 13일 총파업투쟁을 목표로 준비하고 조직해 온 투쟁동력이 흐트러지지 않고 총파업투쟁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총력 매진해야 할 때다. … 어느 것 하나라도 우리의 힘으로, 우리의 투쟁으로 쟁취해 내지 않으면 안 되며, 또 그러한 투쟁을 통해서만 조직은 강화되고 발전할 수 있다는 지난 10년 동안의 민주노조운동의 교훈을 절대 잊어서는 안 된다.”[7]
민주노총 지도부의 안일한 판단과 달리, 김영삼 정권과 신한국당이 연말연시를 틈타 노동법 개악안을 전격 통과시키려 한다는 게 점점 분명해졌다. 결국 민주노총은 12월 22~23일 전국투쟁본부 대표자회의를 열고 ‘연말 노동법 개악 기도가 포착되는 즉시 권영길 위원장 이름으로 총파업에 돌입한다’고 결정했다. 민주노총 산하 모든 노동조합은 성탄절 연휴가 끝나는 12월 26일부터 비상체계에 들어가기로 했다.
◎ 역사적인 노개투 총파업
1996년 12월 26일 새벽 6시, 마침내 김영삼 정권이 신한국당 의원 154명을 동원해 노동법 개악안을 국회에서 날치기로 통과시켜 버렸다.
이날 통과된 노동법은 △정리해고제 도입 △근로자파견제 도입 △노조전임자 임금지급 금지 △해고자의 조합원 자격 인정 기간을 대법 선고에서 중노위 판정까지로 단축 △조합원 총회와 상관없이 노동조합 대표자의 체결권 인정 △생산시설 점거 쟁의행위 금지 △유니온샵 적용시 쟁의기간 대체인력 채용 허용 △쟁의기간 임금지급 금지 및 요구의 금지 등 노동자의 권리를 억압하는 온갖 독소 조항으로 가득 차 있었다. 반면 노동자들이 줄기차게 요구해 온 사항들에 대해서는 △제3자 개입금지 존속 △복수노조 불인정 △교사·공무원의 노동3권 부정 △공익사업장 직권중재 존속 등으로 철저하게 무시하고 있었다.[8]
노동법 개악안 날치기 통과 직후 민주노총 지도부가 ‘26일 오전부터 무기한 총파업 돌입’을 선언하자 즉시 총파업의 거대한 불길이 전국 방방곡곡에서 솟구쳤다. 현장과 지역에서 수많은 노조간부와 활동가들이 몇 개월 동안 목이 다 쇠도록 총파업을 조직해 왔던 결과가 마침내 솟구치는 용암처럼 터져 올라왔던 것이다.
총파업의 기세는 거대했다. 1987년 노동자대투쟁 이래 성장해 온 한국 노동자계급의 역량을 유감없이 보여준 정말로 위대한 투쟁이었다. 민주노총의 자체 집계에 따르면, 1996년 12월 26일부터 1997년 1월 24일까지 3단계에 걸쳐 모두 531개 노조 40만 4천 54명이 한 번 이상 총파업에 참여했는데, 이는 민주노총 전체 조합원 49만 6천 908명의 81.3%에 이르는 규모였다. 또 이 기간 동안 하루 평균 163개 노조, 18만 4천 498명이 파업에 참가해 파업 참가 누적 규모가 모두 3천 422개 노조, 387만 8천 211명에 이르렀다.
파업 참가 규모를 산업·부문별로 살펴보면, 제조업(금속, 자동차, 현총련, 화학 등)은 169개 노조 19만 9천 932명, 비제조업(건설, 대학, 사무, 전문 등)은 260개 노조 9만 1천 768명, 공공부문(병원, 언론, 의보, 지하철, 화물 등)은 99개 노조, 11만 1천 479명에 이르렀다. 파업참가 총 규모의 산업·부문별 구성비를 살펴보면, 노동조합 수 기준으로 제조업 32%, 비제조업 49.2%, 공공부문은 18.8%였고, 조합원 수 기준으로는 제조업 49.6%, 비제조업 22.8%, 공공부문 27.7%였다.
총파업이 가장 정점에 올랐던 1월 15일에는 388개 노조, 35만 8천여 명이 파업에 참가했다. 전국 각지에서 대규모 집회가 열린 날은 총 30일이었으며, 여기에 참여한 총인원은 150만여 명이었다. 이 기간 민주노총이 제작, 배포한 대국민 선전물은 총 390만 부였다.
1단계 총파업 (12/26~12/31)
1996년 12월 26일 오전 8시 민주노총의 총파업이 선언되자마자 금속연맹, 자동차연맹, 현총련, 대학노련, 전문노련, 화학연맹 등을 중심으로 14만 3천여 명이 총파업에 돌입했다. 27일에는 병원노련 등이 합류하며 20만 6천여 명으로, 28일에는 서울지하철노조 등이 합류하며 22만 3천여 명으로 총파업이 확대됐다. 29일에는 ‘노동법 날치기 통과 규탄 및 김영삼 정권 퇴진 결의대회’가 열렸고, 31일에는 ‘노동자 시민 송년 한마당’이 열렸다.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은 26일 새벽 신한국당이 단독으로 노동법 개악안을 기습 날치기 통과시킨 반민주적 폭거에 대항, 1천 2백만 노동자와 온 국민의 분노를 모아 26일 오전부터 산하 전 단위노조에서 즉각 ‘무기한 총파업’에 돌입한다. 또 민주노총은 노동법, 안기부법 개악안을 날치기 통과시키는 만행을 서슴지 않는 집권여당인 신한국당을 해체시키고 김영삼 정권을 퇴진시키기 위해 각계 민주세력과 함께 범국민적 항쟁을 벌여나갈 것이다. … 이 땅의 양심을 가진 모든 국민들은 민주노총이 전개하는 국민 생존권 및 민주민권 수호를 위한 성전에 동참하기를 간절히 호소한다.[9]
12월 26일 현대차 조합원 1만여 명을 비롯해 현대미포조선, 현대중공업, 현대정공, 현대강관, 한국프랜지 등 울산지역 노동자들이 오후 1시 태화강변으로 집결했다. ‘노동법·안기부법 날치기통과 규탄 및 김영삼 정권 퇴진 노동자 시민 결의대회’에 참여한 대오는 3만여 명에 이르렀다.
12월 27일부터 현대차노조는 오전에 본관 집회 또는 사업부별 집회를 가진 뒤 오후에 태화강 둔치에서 열리는 지역 집회에 참석하는 형태로 투쟁전술을 운용했다. 본관 집회의 경우 12월 27일에는 1만 5천여 명, 12월 31일에는 1만 8천여 명이 모였다.
1차 총파업 기간 동안 울산지역은 거의 매일 계속된 지역 집회에 2~3만 명이 꾸준히 참석해 서울과 함께 전국 투쟁을 선도했다. 거리행진을 하게 되면 대열의 앞을 보아도 끝이 없고 뒤를 보아도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그래서 행진에 참여한 노동자들이 스스로 놀라고 힘을 얻곤 하였다.[10]
12월 26일부터 31일까지 1단계 총파업에 참여한 민주노총 조합원은 연인원 100만여 명에 달했다. 민주노총 총파업이 엄청난 기세로 뻗어나가자 현장으로부터 파업 요구가 빗발치는 것을 견디다 못한 한국노총도 27일부터 파업에 돌입하여 16만여 명이 파업에 나섰다.
그렇게 어느 날 갑자기 대지를 뚫고 솟구치는 용암처럼, 노동자계급의 총파업은 한국 사회 전체를 밑바닥부터 송두리째 뒤흔들기 시작했다. 예상치 못한 사태 전개에 자본가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고, 자신감에 넘쳐 날치기 통과를 강행했던 김영삼 정권은 총파업 투쟁의 위력으로 권력의 기반 자체가 급속히 흔들리기 시작하자 정신없이 허둥대고 있었다.
그런데 그 상황에서 민주노총 지도부가 “연말연시 시민 교통편의를 고려”하여 공공부문 파업을 중단시켰다. “국민의 지지를 이끌어 내고 투쟁동력의 전술적 배치와 운영을 입체적이고도 다양하게 구사”[11]하려는 맥락에서 결정했다는 설명이었다.
{1996년 12월 30일} 권영길 민주노총 위원장은 지하철노조에 이어서 내일부터 병원노조들을 업무에 복귀하도록 하는 등 연휴 기간 동안 총파업을 잠정 중단하기로 했다고 밝혔습니다. 이에 따라 나흘째 전면 또는 부분 파업을 벌여온 서울대병원 등 전국 병원 노련 산하 12개 병원노조가 내일부터 업무에 복귀합니다.[12]
{1996년 12월 30일} 어젯밤 11시 50분 서울지하철노조가 파업을 풀고 이틀 만에 근무지로 돌아간 데 이어 부산지하철노조도 오늘 오전 11시 정상 근무에 들어갔습니다. 이에 따라 서울과 부산의 지하철은 오늘 정상을 되찾았습니다.
노조 측의 이 같은 결정은 시민들의 교통 편의를 위해 신년 연휴 기간 동안 파업을 중단하기로 한 민주노총의 지침을 수용한 것입니다. 파업을 잠정 중단한 데 대해 일부 노조원들이 반발하기도 했지만 노조 집행부의 결정을 따르는 쪽으로 기울었습니다.
(서울지하철노조 선전홍보부장) “조합원들 분위기는 좀 안타깝다. 계속 더 투쟁을 해야 된다라는 그런 분위기였습니다.”
지하철공사 측은 노조의 현업 복귀를 환영하면서 최대한 관대하게 처분하겠다는 뜻을 밝혔습니다.
(서울지하철공사 관리이사) “그동안에 이틀 동안 파업을 했지만 자진해서 복귀를 전부 했기 때문에 그러한 점들이 충분히 참작이 될 것입니다.”[13]
{1996년 12월 30일} 이수성 국무총리는 오늘 특별담화를 발표하고 … 파업의 자제를 당부하면서 근로자의 생활안정을 위해 특별법을 제정하겠다고 밝혔습니다. …
(국무총리 이수성) “오늘 아침 서울 지하철 근로자들이 파업을 자제하기로 한 것은 대단히 감사하고 자랑스러운 결정이었습니다.”[14]
2단계 총파업 (1/3~1/14)
새해가 밝아 왔다. 정권과 자본은 새해 연휴를 기점으로 파업이 잦아들 것이라고 희망 섞인 예측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한번 솟구친 총파업의 열기는 새해 연휴의 공백마저 거뜬히 뛰어 넘었다.
1월 3일 금속연맹과 자동차연맹을 중심으로 파업이 다시 시작되더니, 6일에는 현총련과 전문노련이 다시 파업에 돌입했고, 사무노련과 건설노련이 새로 총파업에 결합했다. 7일에는 병원노련, 방송4사 노조, 의보노조 등이 파업에 돌입했다. 8일부터는 사무노련, 건설노련, 대학노련 등 사무전문직 노동자들이 본격적인 투쟁에 나서기 시작했다. 1단계 총파업의 중심축이 제조업이었다면, 2단계 총파업을 거치면서 사무전문직으로 확대되는 양상이었다. 1월 3일부터 14일까지 2단계 총파업에는 연인원 169만 5천여 명이 참여했다.
이처럼 3주 가까이 위력적인 총파업이 지속되자, 민주노총이 문제해결의 주체라는 대중적 분위기가 조성됐다. 각종 설문조사에서 총파업 지지도가 70%에 이르렀다. 시민들의 격려와 성금, 의견개진 전화가 쇄도했다. 가두행진 때도 시민들의 높은 지지가 표명됐다.
투쟁양상도 집회와 가두홍보의 틀을 벗어나 의료서비스, 차량정비서비스, 공단청소 등 시민과 함께 하기 위한 행동을 모색하며 대시민선전과 서명운동을 광범위하게 진행했다.
매일 전국 20여개 지역에서 집회, 가두행진, 시민홍보·서명이 진행됐다. 참여인원도 하루 평균 10~12만 명에 이르러 시내 중심지에서 위력적인 가두시위를 전개했다. 11개 지역(안양, 안산, 수원, 의정부, 천안, 광주, 대구, 경주, 포항, 울산, 진주)에서는 한국노총과 공동집회가 이뤄졌고, 포항에서는 공동투쟁체를 구성했다.
여론의 지지가 광범하게 표출됨에 따라 민주노총 조합원들은 승리에 대한 자신감 속에 더욱 힘찬 투쟁을 전개할 수 있었다. 반면, 정권은 자제심을 잃고 강경론에서 온건론·회유책을 오고가는 등 일관성 없는 대응으로 좌충우돌하는 양상을 보였다.
울산지역은 새해 연휴가 상대적으로 길어 6일부터 2단계 총파업이 시작됐다. 1월 6일 울산은 지역 집회를 하지 않고, 새해 연휴 이후 향후 투쟁에 대한 결의를 새롭게 다지고 민주노총의 파업 일정 등을 조합원에게 제대로 정리시키는 것이 중요하다고 판단해 각 사업장 집회로 대체했다. 이에 현대차노조는 오전 10시 본관 앞에 8천여 명의 조합원이 모인 가운데 결의대회를 열었고, 1월 7일부터 지역 집회에 참여했다. 지역 집회는 7일 1만 5천명, 8일 2만명, 9일 2만 5천명이 참여하면서 매일 최대 인원을 기록했다. 이때부터 ‘정권 퇴진’ 구호가 자연스럽게 대중적인 중심 구호로 부상했다.[15]
그런데 총파업이 연일 계속되자 준비가 안 됐거나 조직력이 취약한 사업장들은 점점 어려움을 겪게 됐다. 핵심 사업장들 역시 조·반장을 중심으로 부분조업에 들어가면서 마찰이 표면화하기 시작했다. 보수언론은 노동자들의 투쟁열기를 가라앉히기 위해 관리직과 조·반장, 하청 노동자들을 동원한 청소나 기계 정비를 ‘조업재개’라고 과장해서 선전했다.
그러한 상황에 대응하여 민주노총 지도부는 전면파업에서 부분파업으로 파업전술을 전환했다. 총파업의 중심에 있던 현대차노조도 8일부터 부분파업으로 전환하고 조업 시간을 확대하는 조치를 취했다. 그러나 많은 현장활동가들이 우려하며 문제를 제기했다. “한번 동력이 떨어지거나 투쟁 수위를 낮추면 다시 동력을 높이거나 투쟁수위를 높이기는 거의 불가능하다”는 이유였다.
{1997년 1월 8일} 전면파업을 계속해온 울산 현대자동차노조가 오늘 밤 근무조부터 조업을 다시 시작하기로 했습니다. … 현대자동차노조는 오늘 오후 6시 대의원 비상간담회에서 야간조의 경우 8시간의 근로 시간 가운데 4시간 동안 조업을 하고, 주간조도 오전 10시부터 2시간 동안 조업을 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이와 함께 현총련 산하 각 노조들도 오는 14일까지 부분파업으로 투쟁 수위를 낮추기로 했습니다.
현대자동차노조는 전면파업에서 부분파업으로 투쟁 수위를 낮춘 것은 민주노총의 투쟁 수위 완급 조절 지침에 따른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그러나 태화강 둔치에서의 규탄 집회는 계속하면서 민주노총의 일정대로 오는 14일까지 노동법 백지화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공공부문 노조와 함께 총파업에 들어가기로 했습니다.
한편 울산지역 현총련 소속 노조 등 8개 노조는 오늘도 태화강변에서 노동법 철폐를 요구하며 규탄 집회를 갖고 오토바이 경적 시위도 벌였습니다.[16]
{1997년 1월 9일} 민주노총은 정부에게 노동법을 스스로 처리하는 기회를 주고 수출을 위해 14일까지 파업 강도를 다소 낮추기로 했습니다. 민주노총은 오늘부터 수출산업인 자동차회사 노조들에게 조업에 참여하게 했고, 국민들의 불편을 고려해 병원노련 등의 근무자 수를 늘리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건설, 사무전문 노조는 예정대로 내일 파업에 들어가기로 했고, 명동성당 등에 경찰력을 투입할 경우 즉시 총파업에 들어갈 방침입니다.[17]
민주노총의 전술 전환으로 총파업의 기세가 흔들리는 조짐을 보이자, 김영삼 정권은 물리력으로 진압하려는 의도를 노골화했다. 10일, 정권은 명동성당에서 농성 중인 민주노총 지도부를 검거하겠다며 ‘명동성당 공권력 투입 방침’을 천명했다. 또한 전국 투쟁의 진원지인 울산의 파업대오를 깨뜨리기 위해 전경 병력으로 지역집회 행진대오를 침탈했다. 바로 그 때, 거리행진 도중 전경들과 대치한 상황에서 현대차노조 정재성 조합원이 스스로 몸에 불을 붙였다.
총파업 기간 내내 정재성은 소위원으로서 조합원들에게 집회 참석을 열정적으로 독려하고 있었다. 현장에서 유인물을 배포하기도 하고 “집에 가지 말고 다 참석해라”며 조합원들에게 선동하기도 했다. 현장을 돌아다니며 수시로 호루라기를 불곤 했다. 태화강 둔치 가서는 일일이 출석체크를 했다.
1997년 1월 10일 오전 정재성은 현장에서 만난 동료에게 “오늘 공권력이 치면 가만히 안 있을끼다”고 말했다. 동료는 으레 그런 말로 생각했지만, 정재성은 이미 바나나우유곽에 신나를 담아 둔 상태였다.
오후 2시 태화강 둔치에 1만 3천여 명이 모여 ‘노동악법 안기부법 전면 무효와 김영삼 퇴진을 위한 울산노동자결의대회’를 시작했다. 이어서 ‘민주주의와 국민생존권 사수를 위한 울산 노동자·시민 한마당’ 행사를 열었다.
집회가 끝나갈 무렵인 4시쯤 서울 명동성당에서 농성중인 민주노총 지도부에 대한 사전구속영장 발부 소식이 전해졌다. 4시 15분 집회가 마무리됐을 때 경찰은 이미 중무장을 하고 있었다. 대오는 계획대로 울산시청을 향해 행진을 시작했다. 맨 앞에 깃발과 만장이 가고, 그 뒤로 선봉대 2~3백명, 그 뒤로 본대오가 따라왔다. 이날 집회와 행진은 가족과 함께 하는 행사로 계획된 터라 행진대오 속에는 상당수의 어린이와 가족이 포함돼 있었다.
4시 20분 태화로터리 근처에서 경찰과 대치가 시작됐다. 미리 신고된 집회와 행진인데도 경찰이 막아섰다. 노동자들의 항의가 빗발치자 경찰이 최루탄을 발사했다. 방패와 방망이로 노동자들을 내려치기도 했다. … 7명이 부상을 입었다. 노동조합 방송차량도 파손됐다. 행진대오가 흐트러졌다가 4시 40분 다시 모이자 경찰이 또 최루탄을 쏘았다. 노동자들은 돌을 던지기 시작했다.
정재성이 대치상황 한복판으로 뛰어든 것은 바로 그때였다. 4시 50분 정재성은 미리 준비한 신나를 몸에 붓고 자신의 몸에 불을 당겼다. 주변에 있던 노동자들이 화들짝 놀라 급하게 달려들어 불을 껐다.
정재성은 구급차를 타고 가까운 울산병원으로 긴급후송됐다. 얼굴과 하반신을 중심으로 전신 30%에 2~3도 화상을 입었다. 5시 50분 울산병원이 치료를 못하겠다고 손을 들자 대구 동산병원으로 이송했다. 대구 동산병원에서 응급처치를 마친 뒤 밤 10시에 서울 한강성심병원을 향해 다시 출발했다.
정재성이 구급차로 실려간 뒤에도 행진대오와 경찰의 대치는 계속됐다. 태화강을 등지고 있던 행진대오는 뒤로 돌아 태화강을 건너 주리원백화점을 거쳐 성남동 일대에서 가두행진을 벌였다. 현대차 조합원 3천여 명은 계속 이동해서 공장 안으로 들어갔다.
정재성의 분신 직후인 5시를 기해 회사는 무기한 휴업을 공고했다. 정문이 폐쇄됐지만, 지역집회에 참석했던 조합원들과 야간조 출근한 조합원들이 정문을 뚫고 들어와 9시 노동조합 앞에 모여 집회를 열었다. 간단히 집회를 마치고 노조 지도부가 노개투위원회 회의를 갖는 동안에도 조합원들이 계속 모여들었다. 10시 30분 1만여 명의 조합원이 집결한 가운데 다시 집회를 열었다. ‘노동악법 전면 백지화 및 전 조합원 총력투쟁 결의대회’였다. 회사의 무기한 휴업에 맞서 노조는 전면파업을 선언했다. …
1월 11일 현대차 조합원들은 주야 근무조가 모두 지역집회에 참석했다. 지역집회에 참석한 3만여 명의 노동자들은 대부분 운동화에 마스크를 쓰고 면장갑을 끼고 결연한 표정으로 투쟁 의지를 보여주었다. 노동자들의 투쟁 분위기가 강경하자 정권은 공권력 투입이 또 다른 악수라고 판단해 중단했다. 1월 12일은 일요일인데도 ‘노동법·안기부법 무효화와 정재성 동지 회복 기원대회’에 2만여 명이 참석했고, 1월 13일에는 역대 최고의 인원이 참석했다.[18]
3단계 총파업 (1/15~1/18)
정부와 신한국당이 13일 ‘노동법 재개정 불가’, ‘영수회담 거부’, ‘민주노총 지도부 영장 집행’이라는 강경 일변도의 방침을 재확인하였다. 이는 아직도 민의의 소재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현 사태의 심각성을 애써 외면하는 용납할 수 없는 처사로서 민주노총은 분노에 앞서 과연 정권에게 국가 운영능력이 있는지를 심각하게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이에 민주노총은 오만하고 독선적인 김영삼 정권에게 국민의 뜻을 올바로 전달하기 위해서라도 15일 예정대로 ‘3단계 전면 총파업’을 단행한다.
정부와 신한국당이 노동계와의 TV토론과 대화를 제의하다가 하루도 지나지 않아 강경입장으로 복귀한 것은 그들의 토론과 제의가 얼마나 국민기만적인 것인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지난해 말 KBS 등의 노동법 개정에 관한 노·사·정 간의 토론을 정부여당이 세 번씩이나 방해하여 무산시킨 전례로 볼 때, 이미 많은 국민들은 신한국당의 TV토론 제안의 의도가 무엇인지를 반문하지 않을 수 없다.
민주노총은 현재 국제적 기준에 전혀 부합하지 않는 노동악법의 날치기 처리로 인한 국제적 항의물결이 확산되고, 이것이 우리 상품의 신용도를 떨어뜨리고 국제경쟁력을 약화시킬 수도 있음을 엄중히 경고한다. 아울러 우리는 정부가 날치기 노동악법을 전면 백지화하여 국제 사회와 여러 차례 약속한 국제적 기준과 관행에 맞는 노동법 개정을 단행함으로써 국가위신과 국제적 신뢰를 회복하기를 충심으로 권고하는 바이다.
민주노총은 14~15일 한국노총이 공공부문 주도의 총파업에 돌입한 것에 대해 1천 2백만 노동자의 이름으로 환영하며, 정부당국이 이 총파업을 이유로 노총 지도부를 사법처리한다면 이를 민주노총에 대한 침탈로 간주하고 강력하게 대응할 것임을 밝힌다. 또 한국노총이 국민 절대다수의 요구를 대변하여, 날치기 노동악법의 전면 무효화를 쟁취할 때까지 끝까지 민주노총과 함께 끝까지 투쟁해 나갈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는다.[19]
1997년 1월 15일 다시 무기한 총파업을 선언한 민주노총의 3단계 총파업이 시작됐다. 이날 388개 노조 35만 8천 명이 총파업에 참가하면서 총파업 기간 중 가장 많은 노조와 조합원들이 총파업에 참여했다. 제조업에서 18만 1천 536명, 비제조업에서 9만 1천 569명, 공공부문에서 9만 7천 681명이 참여했다. 서울 5만여 명을 비롯해 전국 20여 개 지역에서 16만여 명이 집회와 시위에 나섰다.
1월 15일 울산에서도 ‘노동법·안기부법 철회를 위한 3단계 총파업 승리결의대회’를 열었는데, 3만여 명이 참여했다. 상황은 정권과 자본이 수세적인 국면이었다. 따라서 투쟁 동력을 최대한 살려내 투쟁을 장기화하는 것이 필요했다. ‘질긴 놈이 승리한다. 끝까지 투쟁하자’라는 구호는 이 시기 상황과 노동자의 입장을 잘 표현해 주었다.[20]
18일까지 지속된 3단계 총파업에는 연인원 90만 5천여 명이 참여했으며, 한국노총도 연인원 42만 2천여 명이 파업에 참여했다.
민주노총의 3단계 총파업은 김영삼 정권에게 정치적 치명타를 안겼다. 드디어 김영삼 정권은 여야 영수회담을 추진하고 날치기 법안의 국회 재논의를 검토하겠다면서, 총파업의 위력에 눌려 궁지로 내몰리고 있음을 스스로 인정했다.
수요파업 전환
그런데 민주노총 지도부가 18일 무기한 총파업을 중단하고 ‘수요파업’으로 전환한다고 선언했다. 수요파업이란 정상조업을 진행하되 매주 수요일만 총파업을 이어나간다는 것이었다.
최근 정치권 등을 중심으로 현 사태 해결의 실마리를 찾아가는 것처럼 알려지고 있으나, 이 시간 현재 가시적인 성과는 전혀 없는 실정이다. 민주노총은 날치기 통과된 악법의 무효화와 노동법 재개정, 그리고 구속·수배 해제, 단위노조 간부들에 대한 고소·고발 철회, 탄압 중지가 없이는 결코 현 사태를 해결할 수 없을 것임을 다시 한 번 분명히 밝힌다.
민주노총은 그동안 국민생활 편의와 어려운 국가경제를 고려하여 공공부문 중심사업장의 파업을 무기한에서 2일간으로 단축, 투쟁의 완급을 조절하고, {신한국당} 이홍구 대표와의 TV토론을 수용하는 등 사태를 원만하게 해결하고자 최선의 노력을 다해 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부 여당은 여론을 호도하여 아직도 본질적 문제를 해결하는 데 전혀 성의를 보이지 않고 임기응변식 술책만 펴고 있다.
이에 민주노총은 정부 여당이 날치기 통과된 노동악법, 안기부악법을 무효화하고 노동법 재개정을 받아들일 것을 다시 한 번 강력히 촉구하며, 만일 이에 응하지 않을 경우 2월 18일부터 4단계 총력투쟁으로서 공공부문을 비롯한 모든 부문 사업장이 무기한 전면 총파업에 돌입키로 한다. …
민주노총은 ‘4단계 총파업투쟁’ 이전에 1월 20일부터 매주 수요일에는 <총파업의 날>로 정해 이날 하루 산하 모든 부문 사업장(공공부문 제외)이 총파업에 들어간다. 또 매주 토요일은 <국민과 함께 하는 날>로서 전국 동시다발로 대규모 범국민대회를 개최한다.[21]
{1997년 1월 18일} 민주노총이 총파업을 풀기로 결정했습니다. 민주노총의 권영길 위원장은 정부 여당이 스스로 노동법을 철회하고 재개정할 수 있는 기회를 주기 위해 다음 달 18일까지는 무기한 총파업을 풀고 업무에 복귀하기로 했다고 밝혔습니다. 그러나 하루빨리 노동법을 재개정하도록 촉구하는 뜻에서 매주 수요일에는 파업을 벌이지만 방송사와 지하철 등 공공부문 노조는 제외한다고 밝혔습니다.
국민들의 불편을 최소한으로 줄이기 위해서라는 설명입니다. 주 한 차례 파업과 함께 매주 토요일 오후에는 전국에서 노조원들이 대규모로 참석하는 범국민 결의대회를 열어 투쟁을 계속하기로 했습니다. 민주노총은 다음 달 18일까지 정부가 노동법을 다시 개정하지 않거나 경찰 투입 등 강경 대응에 나설 경우 즉각 4단계 총파업에 들어가겠다고 밝혔습니다.[22]
{1997년 1월 18일} 민주노총 지침에 따라서 그동안 가장 큰 규모로 파업을 해왔던 울산지역 현대 계열사 노조원들도 다음 주부터 다시 직장에 복귀하기로 했습니다. … 현총련을 비롯한 울산지역 민주노총 산하 노조들은 오늘 오후 태화강변에서 가진 노동법 반대 투쟁 집회에서 민주노총의 투쟁 지침에 따라서 다음 주부터는 조업에 복귀한다고 밝혔습니다. 이에 따라 현대자동차노조도 지난달 26일부터 계속해 온 파업을 중단하고 조업에 복귀하기로 해서 다음 주부터는 정상조업이 이뤄지게 됐습니다.[23]
민주노총이 ‘수요파업 전환’을 발표하자 19일 검찰은 명동성당 민주노총 지도부에 대한 사전 구속영장 집행을 당분간 유보하겠다고 밝혔다. 명동성당 주변에 포진하고 있던 경찰병력도 철수했다.
민주노총 지도부는 ‘수요파업 전환’의 이유로 ‘투쟁동력이 급격히 떨어진 상황에서 전체 투쟁전선을 일사불란하게 유지하며 장기전에 대비할 필요가 있다’는 판단을 제시했다. ‘금속연맹 대기업 사업장의 동력은 이미 바닥나 부분적으로 조업재개를 한 가운데 간부파업을 하는 정도고, 위력적인 투쟁을 벌이던 기아자동차 등 자동차연맹 사업장도 파업 참여율이 50% 정도로 급격히 떨어졌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수요파업 전환에 대한 강력한 비판이 전국 곳곳의 현장으로부터 제기됐다. ‘투쟁동력은 여전히 상승세이며, 오히려 투쟁수위를 높이는 적극적인 투쟁을 해야 한다’는 주장에서부터 ‘투쟁수위 조절은 필요하지만 정치적으로 중요한 시점이므로 계속 투쟁을 유지해야 한다’는 주장까지 다양한 비판적 의견들이 여러 지역에서 제출됐다.
총파업의 중심이었던 울산지역은 수요파업으로 전환하지 않아도 될 만큼 충분히 동력이 살아 있었다. 16일 지역 집회에는 3만여 명이 참여했다. 17일 현대차노조가 개최한 ‘정재성 동지 쾌유기원 및 노동법·안기부법 개악 무효화 선언대회’에도 1만 8천명의 조합원이 참여했다. 따라서 민주노총의 수요파업 전환 방침에 대해 울산지역 현장활동가들은 더 강력하게 비판적 의견을 냈다. ‘우리가 힘든 만큼 정권과 자본도 힘들다. 힘을 내서 다시 밀어야 된다. 대중동력도 폭발적이다.’
울산지역의 22일 수요파업은 2만여 명이 참석해서, 파업 참여율과 집회 동원 역량에서 이전과 별 차이를 보이지 않았다. 현대정공의 경우 대의원 선거를 마치고 동력을 되살림으로써 12월 26일 총파업 첫날의 파업 참가율을 복원했다. 그러나 25일 토요일의 지역집회는 현대차의 특근으로 참석 인원이 1만 3천명으로 뚝 떨어졌다. 26일 민주노총과 한국노총의 연대집회는 소수만이 참석한 가운데 이완된 분위기로 진행됐다. 28일 민주노총은 수요파업마저 중단하기로 결정했다.
민주노총의 수요파업 전환은 조합원들에게 사실상의 총파업 중단으로 받아들여졌고 따라서 수요파업 전환 이후 오히려 투쟁동력이 급격히 소멸되고 말았다. 전체 전선이 이완되자 총파업에 참여한 사업장들은 고소고발, 손배가압류, 무노동무임금 등 자본의 반격에 개별로 힘겹게 대응해야 했다.
“민주노총의 갑작스런 수요파업 전환 지침(무기한 총파업 철회)으로 조합원들은 총파업이 마무리 단계에 들어섰다고 생각하였으며, 이러한 혼란스러운 상황은 많은 사업장에서 사측의 정리해고, 대체근로, 무노동 무임금 책동에 무방비로 당하게 만들었다.”[24]
민주노총이 수요파업 전환으로 투쟁동력을 상실해 나간 이 시기, 보수 정치권은 노동자들을 배제한 채 ‘노동법 재개정을 통한 정국 수습’을 모색했다. 1월 21일 대통령 김영삼과 국민회의 총재 김대중이 여야 영수회담을 갖고 날치기 통과된 법안의 국회 재논의를 합의했다. 총파업이 중단된 가운데 여야가 임시국회에서 노동법 재논의를 시작하면서 노동법 개정의 주도권은 다시 한 번 노동자들의 손을 떠나 여야 정치권으로 넘어갔다.
4단계 총파업 (2/28)
민주노총은 애초 2월 18일로 예정했던 4단계 총파업을 ‘임시국회 본회의 기간’으로 연기했다가 다시 28일로 최종 결정했다. 28일 4단계 총파업은 전국에서 13만 2천 명이 참여해서 4시간 동안 진행됐다. 참가자 수나 분위기 등 모든 면에서 3단계 총파업까지의 열기와는 확연하게 차이가 났다.
노동법 재개악
신한국당과 국민회의·자민련 등 보수 정치권은 여야 협상을 거쳐 3월 10일 새로운 노동법을 국회에서 통과시켰다.
그런데 여야 합의로 통과된 노동법은 날치기로 통과된 노동법에서 △정리해고제 도입 2년 유예 △근로자파견제 도입 2년 유예 △쟁의기간 대체인력 채용 불허 △상급단체 복수노조 허용 △기업단위 복수노조 허용하되 5년 유예 △노조전임자 임금지급 금지 5년 유예 등 극히 일부 내용만을 수정한 것이었다.[25]
다시 말해서 12월 26일 날치기 통과된 노동법에 새로 담겼던 다수의 독소 조항들, 즉 △노조전임자 임금지급 금지 △해고자의 조합원 자격 인정 기간을 대법 선고에서 중노위 판정까지로 단축 △조합원 총회와 상관없이 노동조합 대표자의 체결권 인정 △생산시설 점거 쟁의행위 금지 △쟁의기간 임금지급 금지 및 요구의 금지 등이 그대로 남았다. 노동자들이 줄기차게 요구해 왔던 △제3자 개입금지 철폐 △복수노조 인정 △교사·공무원의 노동3권 인정 △공익사업장 직권중재 철폐 등은 다시 한 번 철저하게 무시됐다.
신한국당과 국민회의, 자민련 등 여야 국회의원들은 전국 노동자의 역사적인 총파업 투쟁으로 만들어 놓은 재개정 기회를 철저히 정치적 이해득실에 따라 흥정으로 마무리하고 말았다. 우리는 이번에 통과된 노동악법은 여야합의라는 허울을 뒤집어쓴 제2의 날치기였다고 규정하고 악법조항에 대해서는 결코 수용할 수 없다는 사실을 분명히 밝혀둔다.[26]
노동자들이 배제된 가운데 자본가 정치세력들끼리 협상을 벌인 만큼 당연한 결과였다. 특히 ‘강인한 민주투사’ 이미지를 갖고 있던 김대중이 이끌던 국민회의(오늘날의 민주당)는 자본가정당으로서 자신의 계급적 본질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노동법 재개정을 위해 임시국회가 열릴 때 민주노총은 2박 3일 국회 항의방문 투쟁을 조직했지만, 전국에서 400여 명밖에 참석하지 않았다. 투쟁 동력이 바닥난 민주노총은 무기력을 곱씹을 수밖에 없었다. 결국 역사적인 총파업은 노동법 개악을 끝내 막아내지 못한 채 마무리됐다.
◎ 노개투 총파업의 결산
노개투 총파업은 소기의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지만, 노동자들이 총파업을 통해 위력적인 정치투쟁을 벌일 수 있다는 가능성만은 분명히 확인했다.
노개투 총파업은 김영삼 정권에게 정치적 치명상을 안겼다. 김영삼 정권은 총파업 직전까지만 해도 강력한 정국 주도권을 갖고 있었지만, 총파업으로 치명적 타격을 입고 이어 한보철강 사태와 황태자 노릇을 하던 아들 김현철의 구속을 거치면서 식물 정권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노개투 총파업의 위력은 노동자계급은 물론이요, 전체 민중을 결집시켰다. ‘노동법·안기부법 개악철회와 민주기본권 수호를 위한 범국민대책위원회’가 1월 10일 소집한 비상시국 사회단체 연석회의에는 862개 단체가 참여했다. 대학교수들의 시국선언이 잇따랐고, 변호사 554명은 ‘노동법개정은 위법이기 때문에 무효’라고 선언했다. 문화예술계 인사 333명은 ‘노동법·안기부법 개정 백지화’를 요구했고, 여성들도 총파업 지지 선언에 동참했다. 교수와 변호사들이 거리 행진과 항의 농성에 나섰고, 종교인들도 시국 법회·기도회·미사를 통해 신도들과 함께 거리에 나섰다.
1월 16일자 한길리서치의 ‘총파업에 대한 국민여론조사’에서는 65.6%가 민주노총 총파업을 지지하고, 93.8%가 공권력 사용을 반대하며 대화를 통한 해결을 지지했다. 비슷한 시기 한겨레신문 여론조사에서는 75.0%가 총파업을 지지하고, 83.3%가 정부의 강경대응에 반대했다. 74.3%가 노동법 개정이 무효라는 주장에 동의했고, 84.6%가 노동법 재개정 요구에 동의했다.
일부 법학교수들이 노개투 총파업을 ‘헌법질서 수호를 위해 저항권을 행사한 적법한 파업’이라고 규정하자, 창원지방법원과 대전지방법원의 판사들이 노동법·안기부법의 국회 통과절차에 대한 위헌 제청에 나설 정도였다.
그러나 노개투 총파업은 결정적인 순간에 중단됨으로써 그 위력에 걸맞은 성과를 전혀 얻지 못했다. 정리해고제와 근로자파견제를 2년 유예시키고 민주노총 합법화의 근거를 확보하는 초라한 결과만이 남았다.
총파업이 허망하게 중단된 이후 투쟁에 앞장섰던 현장 일선의 노조간부와 활동가들에게 대대적인 탄압이 쏟아졌다. 1월말까지 전국적으로 469명의 노조 간부가 고소고발 당했다. 수많은 노동자들이 징계위원회에 회부됐고, 상당수가 해고됐다. 현대차와 기아차를 비롯한 상당수 사업장에 무노동 무임금이 적용됐고, 손배가압류가 대다수 사업장에서 행해졌다.
그러나 민주노총 지도부에게는 아무 일이 없었다. 1월 21일의 여야 영수회담에서 김영삼은 민주노총 지도부에게 발부된 사전 구속영장을 집행하지 않겠다고 약속했고, 실제로 권영길 위원장을 비롯한 민주노총 지도부는 거대한 총파업을 이끌고서도 아무런 탄압을 받지 않았다. 현장 일선의 수많은 노조간부와 활동가들에게 대대적인 탄압이 퍼부어진 것과 너무나 대조되는 상황이었다.
총파업은 왜 패배했는가? - ‘국민과 함께 하는 노동운동’ 노선의 필연적 귀결
민주노총을 중심으로 전개된 총파업은 김영삼 정권에게 정치적 치명상을 안기는 매우 위력적인 것이었다. 따라서 만일 민주노총이 확고한 의지와 자신감을 갖고 총파업을 끈질기게 지속했다면, 나아가 더욱 확대시켰다면, 얼마든지 민주노총과 정권의 직접 담판을 통해 개악된 노동법의 철회는 물론이요, 노동자들의 노동법 개정 요구까지도 관철시켜 볼 수 있는 가능성이 있었다.
그러나 민주노총 지도부는 결정적인 순간에 총파업을 중단하고 여야 협상에 모든 것을 떠넘겨 버렸다. 결국 역사적인 총파업을 하고서도 노동법 개악을 거의 막아내지 못하는 말도 안 되는 결과가 남았다.
역사적인 총파업의 허망한 패배는, 당시 민주노총 지도부가 주창하고 있던 이른바 ‘국민과 함께 하는 노동운동’ 노선의 필연적 귀결이었다.
‘국민과 함께 하는 노동운동’ 노선을 가진 세력, 즉 ‘국민파’의 기본적인 사고 구조는, 노동자들의 단결된 힘에 의거한 강력한 투쟁을 통해서가 아니라, 국민 여론의 호응에 의거한 대화와 협상을 통해서 노동자들의 요구를 실현해 나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국민파는 ‘노동자계급 총단결 총투쟁’이라는 노동자계급 노선이 아니라, 국가주의·국민주의·민족주의라는 소부르주아 노선에 깊이 함몰돼 있었다.
총파업이 전개되는 동안 민주노총 지도부의 목표는 ‘총파업 위력의 극대화’가 아니라 ‘우호적인 여론 유지’에 있었다. 그래서 총파업 동력을 강고하게 유지·확대해야 할 상황에서 여러 차례 여론의 호응을 끌어내기 위해 일부러 투쟁수위를 낮췄다.
12월 29일 부산교통공단노조가 총파업에 합류하면서 서울과 부산의 지하철이 모두 멈춰 서게 됐을 때, 민주노총 지도부는 “시민에게 불편을 줘서는 안 된다”며 지하철과 병원을 비롯한 공공부문 파업을 중단시켰다. 또한 1997년으로 넘어가는 신정 연휴 기간에는 전체 총파업을 중단시켰다.
새해 들어 총파업이 다시 살아나 광범위하게 확산돼 나갈 때, 민주노총 지도부는 1월 7일 돌입 예정이던 지하철·한국통신·화물 등의 공공부문 파업을 15일로 연기시켰고, “정부에게 노동법을 스스로 처리하는 기회를 주고 수출을 위해” 8일 제조업의 전면파업을 부분파업으로 전환시켰다.
15일 총파업이 최대 규모를 기록하며 다시 한 번 기세등등하게 뻗어나가려 할 때, 민주노총 지도부는 결정적으로 찬물을 끼얹었다. 공공부문 파업을 16일까지로 한정시켰고, 18일에는 “정부 여당이 스스로 노동법을 철회하고 재개정할 수 있는 기회를 주기 위해” 총파업을 중단하고 수요파업으로 전환시켰다.
민주노총 지도부는 수요파업 전환의 이유로 ‘투쟁동력 하강’을 들었지만, 실제로는 총파업 자제를 통해 협상 분위기를 조성하는 게 여론 흐름에 유리할 것이라는 계산으로 내려진 결정이었다. ‘임박한 여야 협상에 대한 기대감이 국민 여론의 흐름’이며 ‘민주노총의 경직된 무효화 요구는 국민정서에 배치된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자본가들의 강력한 영향력 아래서 그때그때 요동치는 여론의 흐름에 끌려 다니느라 민주노총 지도부는 총파업 동력을 계속 약화시켰고, 결국 역사적인 총파업이 허망하게 소멸되도록 결정타를 날려버린 것이었다.
민주노총 지도부의 노선은 투쟁 전술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민주노총의 지침은 평화적인 지역집회와 가두행진으로 일관했다. 노동자대중의 능동성을 드높이고 투쟁동력을 확대하기 위해서는 더 적극적인 실천계획이 필요했다. 그러나 투쟁 전술을 발전시키기 위한 아래로부터의 창의적인 모색과 활발한 시도가 이뤄지지 못했다. 지도부는 협소한 투쟁지침에 입각해서 대중의 행동을 통제하려 했다. 이는 대중의 능동성이 분출하며 더 폭발적인 투쟁으로 전진하는 것을 가로막았다.
현장에서 터져 나온 투쟁동력이 지배계급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긴 했지만, 강력한 투쟁이 언제까지나 계속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선도적으로 치고 나온 대공장을 넘어서서 투쟁동력을 확대하기 위한 실천계획이 있어야 했다. 특히 공단 조직화를 위한 계획과 실천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그러나 시내를 중심으로 한 평화적인 지역집회에 모든 실천계획이 집중됐다. 공단 조직화 사업은 고사하고 자기 사업장 투쟁동력을 강화하는 것조차 지역집회에 가로막힌다는 불만이 나올 지경이었다.
울산지역 투쟁의 성공 이유 …
넷째, 투쟁전술이 지극히 대중적이고 창조적이었다는 점이다. 우선 투쟁이 시작됨과 동시에 대중적으로 천명한 ‘피해의 극소화 원칙’이 갖는 효과이다. 이러한 지도부의 기본 방침은 중간적인 대의원들이 비교적 마음 놓고 활동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피해의 최소화 원칙은 이번 투쟁을 통해 현장의 역량이 초토화되어서는 안 되고 위원장과 현총련 의장, 대의원 대표까지로 구속을 제한한다며 일반 대의원들은 함부로 나서지 말고 조합원들은 이들을 보호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것이 대중 집회에서 천명되자 조합원들이 열광적 지지를 보내주었고 일부 활동가들도 상당히 고무적인 태도를 보였다. 각오와 결의가 떨어지는 활동가들을 투쟁의 시기에 보호하려고 하는 것은 이들의 열의를 불러일으키는 데 상당한 기여를 한다는 것을 잘 말해주는 것이라 하겠다.
다음으로 비폭력 평화전술의 위력이다. 쓸데없는 선제공격을 하지 않고 군중의 위세로 경찰력을 무력화시킨 비폭력 평화전술은 여론을 좋게 만들고 중후진 조합원들의 참여를 보장하는 데 적극 기여하였다. 의식이 높지 않은 조합원들의 경우 공권력과의 충돌은 상당히 부담이 가는 것이다. 울산지역의 경우 대중적인 세를 기반으로 모든 집회를 합법적으로 쟁취함으로써 조합원들이 부담 없이 집회에 참가할 수 있었다.
다음으로 우리가 중요하게 볼 것은 가족들의 참여를 유도한 것과 다양한 쟁의 프로그램 개발이다. 울산지역의 경우 매일 같이 대규모 지역 집회를 개최하다 보니 집회에 식상해 하거나 긴장감이 떨어져 자칫 동력이 떨어질 가능성이 있었다. 이때 제기된 것이 “가족과 함께 하는 노동법 개정투쟁”이었으며, 이 방침이 공표되자 가족 단위의 집회 참석 인원이 많게는 수천 명에 이를 정도였고 조합원 집단 거주지의 가족들이 무료로 커피를 제공하는 등 전폭적 대중적인 지지를 받았다.
가족들의 투쟁 참가는 조합원들에게 자신감과 긍지를 불어넣었고 가족들은 이번 투쟁의 의미를 깊게 새기는 결과를 가져와 투쟁에 대한 전폭적인 지지를 획득하였다. 이는 투쟁의 장기화에 따른 부담을 최소화하는 데 일조하였다. 또한 조합원 가족 노래자랑, 장기자랑, 자녀들의 노래 공연과 우유마시기 대회 등 다양한 가족 참여 행사를 배치함으로써 조합원 가족들에게 집회가 친밀하게 다가서도록 했으며 개사곡 경연대회, 도전 50곡, 구호 경연대회, 3행시 경연대회, 박터뜨리기, 단심줄 꼬기 등의 행사를 통해 조합원들의 자발적인 참여를 유도했다.
또한 오토바이 부대는 기동력을 앞세워 다양한 전술(사업장 내의 투쟁 분위기를 고조시키기 위한 사내 행진, 대중적인 행진이 불가능한 신한국당 당사 항의투쟁이나 시청 항의방문 투쟁, 투쟁기간 중 동구와 남구에 대한 선전, 우리의 위세를 과시하는 가두 오토바이 행진)을 구사했으며 지도부 사수에 커다란 역할을 했다.[27]
이번 총파업투쟁의 두드러진 특징 중의 하나는 민주노총 중앙의 지침에 대해 산하 일선노조에서 잘 지키려 하였고 대중들도 민주노총의 지침이라면 일단은 지키고 따라야 한다는 분위기였다. 이런 모습은 지역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일단 집회가 시작되면 모든 것은 지도부의 지침에 따라 움직이는 분위기였다. 그러나 이것은 양면성을 갖는 것이다.
민주노총의 지도력이 서고 중심이 잡힌다는 것은 기업별노조 체계를 극복하고 투쟁의 집중성을 살릴 수 있다는 긍정적인 측면을 갖는 반면, 지나치게 지도부 중심의 투쟁, 지도부 중심의 집회를 고집할 경우 참여대중의 자발성을 점차 약화시키면서 마침내 대중동력의 침체를 가져올 소지도 다분히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집회 본대회가 시작되기 전에 프로그램의 부족으로 많은 여유시간이 있었다. 그러나 이 여유시간을 활용하여 집회에 참석한 조합원 중에서 이번 총파업 투쟁에 대하여 자신이 갖는 느낌이라거나 제안 등을 자유롭게 발표하도록 하였으면 집회 분위기가 더욱 더 고조되었으리라 믿는다. 그러나 지도부에서는 지도부 외에 사전 계획되지 않은 조합원이 마이크를 잡을 경우 지도부의 방침에 어긋나는 선동을 할 수도 있을 것이라는 우려 때문이라고 짐작이 가고 또 이 점에 대해 지도부의 고민도 이해되지 않는 바도 아니지만, 지나치게 우려했다고 생각한다. 중요한 것은 대중은 확실하게 지도부를 믿고 있기 때문에 그러한 선동을 하는 사람에 대해 대중은 나름대로 정확한 판단을 할 것이라고 믿는 것이다.
또 다른 예로는 지도부는 지나치게 ‘비폭력 평화행진’을 강조했다. 물론 여론이 총파업에 대해 우호적이고 경찰이 의도적으로 폭력사태를 유발하려 하지 않는 상황에서 비폭력 평화집회와 가두행진을 통해 일반 국민을 더욱 더 우호적이게 만들 수도 있지만, “비폭력을 깨고 폭력행위를 유발하려는 자는 적의 프락치로 볼 것이다”는 식의 강요와 억압은 대중의 자발성을 억압하고 지도부의 지시에 무조건 따라하는 맹종자를 만들 뿐이다.
노동운동 내부에서 필요한 것은 주체적으로 판단하고 자발적으로 실천하는 대중이다. 지도부의 지시에 맹종하는 조합원은 언젠가 지도부가 무너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 오면, 그대로 함께 무너지고 만다. 우리는 투쟁을 통해 주체적인 노동자, 미래의 간부를 길러내야 한다. 그러므로 비폭력 평화행진의 필요성을 강조하되, 지나쳐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특히 “지도부의 비폭력 지침을 따르지 않으려면, 필요 없으니 집회에 오지 마라”는 식의 언어폭력은 좋지 않으며 충분한 대화를 통해 설득하고 어느 정도 의견을 진지하게 듣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본다. …
울산지역 총파업투쟁에서의 주력은 현대자동차노조를 중심으로 한 민주노총 진영이었다. 반면 한국노총 내부도 총파업투쟁에 소극적인 지도부(한국노총 울산지부)에 대해 산별연맹 또는 단위노조 대표자들이 회의 석상에서 불만을 터뜨리는 등 내부에 동요가 심했고, 민주노총 지역투본에 대해 기대와 신뢰를 보내는 편이었다.
이런 기회를 살려 한국노총의 주요 지역기반인 남부 화학단지와 효문연암 지역의 자동차 부품단지에 대해 집중적인 선전전이나 가두행진을 벌인다면 지역노동자 전체가 총파업 분위기에 휩쓸릴 수 있고, 민주노총의 영향권 내로 들어올 수 있는 상황이었다. 특히 남부 화학단지 내 민주노총 사업장인 섬유산업의 태광산업노조가 대의원의 총파업 결의에도 불구하고 위원장의 거부로 파업에 돌입하지 못하는 상황이었고, 민주노총 가입을 공언한 역시 섬유산업의 동양나이론(최근 효성티앤씨로 회사이름 바꿈) 노조가 파업열기나 요구에도 불구하고 사측의 탄압으로 어려움을 겪으면서 정문 앞에서 공동집회를 열어 지원을 요청하였는데도 이를 받아주지 못한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현실이었다.
효문연암 지역의 경우 노조의 약 3분의 1이 민주노총에 가입해 있어 지역투본에서 보다 효과적으로 선전전과 시위를 벌였더라면 이후 보다 많은 사업장에서 민주노조를 세울 수 있는 기틀이 되었을 것이다. …
노동법개정 총파업을 예상하면서 민주노총은 노동법 개정투쟁의 선봉부대로서 ‘실천단’을 구성하도록 지침을 내렸다. 실천단은 단위사업장 내에서 노동법 개정투쟁에 조합원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하도록 선전하는 일, 그리고 나아가 지역 또는 연맹별로 공동의 선전과 실천부대로서 중요한 역할을 맡겼다. 그래서 실천단에는 단위사업장의 대의원 또는 소위원을 비롯한 중간 활동가들이 많이 참여했다.
그러나 대개의 지역에서와 마찬가지로 울산지역에서도 실천단은 자기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실천단이 할 수 있고 또 해야 할 일들은 많았다. 취약지역 노동자들에 대한 선전과 설득작업, 지역주민들에 대한 선전과 설득작업, 가두행진 대열에서의 선동, 질서의 유지, 집회에서의 분위기 고조를 위한 선동 등 할 일은 많았다고 본다.
그러나 총파업투쟁이 지도구심이 폭넓게 형성되지 못하고 일부 사업장이 주도하는 식으로 전개되고 또한 완전히 지도부 중심으로 진행되면서 중간활동가 또는 실천단이 제 역할을 제대로 찾지 못했다. …
1월 19일까지 총파업 기간 25일 중 신정연휴 기간과 토요일 혹은 일요일을 제외하고 약 18일간 대규모 집회를 열었다. 이 자리에는 최소한 2만이 넘는 조합원들이 매일 참석하였다. 그래서 이 자리에서 지도부가 계획과 뚜렷한 방향을 갖고 연설을 진행했더라면 엄청난 산교육의 현장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못했다고 본다. 날치기를 주도한 신한국당의 해체를 선동하고 김영삼 정권의 퇴진을 소리높여 외쳤지만 신한국당과 김영삼정권의 배후에 있는 자본에 대한 실체의 폭로와 규탄은 약했다. 그래서 일부 사업장 노조에서는 파업을 하면서도 “이번 싸움은 노사간의 싸움이 아니라 정부와의 싸움이므로 현장에서 충돌하지 말라”는 지시가 내려져 현장관리자들이 조합원들을 개별적으로 각개격파하여 작업에 복귀토록 하는 것을 보고만 있어야 했다. 역으로 현장관리자나 부서장들도 “노사간의 싸움도 아닌데, 왜 우리 회사가 피해를 입어야 하느냐?”며 조합원들을 설득하기도 했다.
또 하나 민주노총이 조직적 목표로 설정한 산별노조의 건설이라는 대과제를 대중들에게 집단적으로 선전할 절호의 기회였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제대로 선전하지 못했다. 지나치게 “신한국당 해체”, “김영삼정권 퇴진”에만 매달려 우리의 중요한 과제 하나를 놓쳐버렸다.
“이번 총파업투쟁은 기업별노조임에도 불구하고 민주노총이라는 조직적 무기가 있었기에 가능하였다. 만일 우리에게 산별노조라는 무기까지 있었더라면 얼마나 힘차게 되었겠는가”, “우리는 우리의 이웃 사업장이 사측의 탄압으로 조합원들이 총파업에 동참하고 있지 못해도 아무런 지원을 해주지 못하고 있다. 만일 우리가 지금 산별노조로 같은 노조 조직의 조합원이라면 우리가 기업의 울타리를 넘지 못하고 가만히 있겠는가” 등 충분히 공감이 가는 선동과 선전이 가능하였다고 본다. 바로 이것이 총파업투쟁이 끝난 후 우리 민주노조 진영이 챙겨야 할 소중한 부분임에도 불구하고 거의 전혀 이러한 선전과 선동이 없었던 점은 대단히 아쉬운 대목이다.[28]
“민주노총은 … 대중들의 투쟁요구와 투쟁의지 나아가 정세를 역동적으로 변화, 발전시키기 위한 적극적인 노력이 부재하였다. 대부분 지나치게 평화적인 집회와 가두행진을 종용함으로써 조합원 대중을 동원의 대상으로 전락시키기 일쑤였다.
판에 박힌 집회 내용과 가두투쟁 전술은 역사적인 정치 총파업을 자신감 있게 전개하고픈 많은 조합원 대중들을 대단히 실망시켰다. 이것은 뒤늦게 분출하는 대중들의 요구를 통제하지 못해 전개되는 양상으로 나타났고 장기간 현장 총파업 투쟁을 유지하는 사업장의 어려움을 극복하는 좋은 조건과 많은 기회를 잃어버렸다.”[29]
총파업과 노동자 국제연대
세계 각국의 노동자운동은 한국의 노개투 총파업에 큰 의미를 부여했다. 이미 10년 이상 자본의 신자유주의 공세에 밀리면서도 좀처럼 투쟁의 돌파구를 찾지 못하던 세계 노동자들에게 1996~97년 한국의 노개투 총파업은 1995년 프랑스 공공부문 총파업의 맥을 잇는 또 하나의 희망이었다. 따라서 22개 국가에서 총파업 지지 시위가 벌어질 정도로 활발한 국제연대가 이뤄졌다. 특히 호주 운송하역노조는 한국 수출입 선박에 대한 하역거부를 국제적인 투쟁전술로 제안하기도 했다. 그런데 민주노총 지도부는 이 제안을 ‘정중하게 거절’했다. 국가경쟁력에 지장을 주는 행위는 국민 여론에 좋지 않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노동자계급의 국제주의가 아니라 소부르주아적인 국가주의·국민주의·민족주의가 표출되는 또 하나의 지점이었다. 민주노총 지도부는 국제연대에 있어서도 매우 잘못된 태도를 취했다.
총파업과 노동자 정치세력화
1996~97년 노개투 총파업은 노동자 정치세력화에 있어서 일대 전환점이 됐다. 노개투 총파업은 비록 승리하지 못했지만 광범한 노동자들 속에서 노동자계급의 잠재력을 자각하게 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1987년 노동자대투쟁 때에도 노동자계급의 잠재력에 대한 대중적 각성의 기회가 있었지만, 전반적인 대중의식이 너무 초보적이었던 탓에 전노협을 중심으로 한 민주노조 조합원들을 제외하고는 그 경험이 거의 유실돼 버렸다. 그러나 1987년 노동자대투쟁 이후 10여 년에 걸친 민주노조운동의 역사를 거치면서 전반적인 대중의식이 일정하게 성장해 온데다가 한 달 가까이 조직적인 총파업이 갖는 위력을 경험하면서 민주노조운동 안팎의 광범한 노동자들 속에서 노동자계급의 잠재력에 대한 자각이 일어나게 된 것이었다.
그런데 민주노총 지도부는 총파업이 소기의 성과를 얻지 못한 이유가 “단 한 석의 국회의원도 없었기 때문”이라면서, 노동자 정치세력화의 방향을 선거와 의회 중심으로 몰고 나갔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총파업의 힘이 국회의원 수백 명을 합친 것보다 훨씬 더 강력했다는 사실이다. 수백 명의 국회의원을 다 합친 것보다도 훨씬 더 강력했던 총파업의 힘을 스스로 무너뜨린 민주노총 지도부가 “단 한 석의 국회의원”을 거론하는 것은 궤변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혁명적인 대안 지도력을 세워내지 못한 한국의 노동자계급은 개량주의 민주노총 지도부가 이끄는 의회주의 노동자 정치세력화의 길로 이끌려 나아갈 수밖에 없었다.
역사적인 총파업을 허망한 패배로 이끌고서도 총파업의 후광을 화려하게 뒤집어 쓴 권영길 민주노총 위원장은, 1997년 말 대선에서 민주노총 결의로 대통령 후보로 나섰고, 2000년 민주노동당 창당과 함께 당 대표가 됐다.
‘국민과 함께 하는 노동운동’ 세력, 즉 국민파는 역사적인 총파업을 패배로 이끈 과오를 범하고서도 아무런 반성을 하지 않았고, 따라서 아무런 배움도 없었다. 총파업의 소멸 이후 대대적인 탄압으로 현장이 얼어붙었기 때문에, 아래로부터 올라오는 비판과 문제제기도 그들의 주도권을 위협할 만큼 강력하지는 못했다.
불행하게도 그 때문에 여전히 민주노총에서 주도권을 거머쥐고 있던 국민파는 결국 IMF 외환위기가 몰아닥쳤을 때 한국 노동자운동의 역사에서 결코 묻힐 수 없는 역사적 과오를 저지르고 말았다.
2) 1997~98년 IMF 경제위기와 노사정의 정리해고 합의
총파업이 막바지에 이르고 있던 1997년 1월 23일 한보철강이 부도를 냈다. 1991년 수서비리 사태를 통해 부패한 정경유착의 대표주자로 이미 악명을 떨쳤던 한보였다.
{1997년 1월 23일} 극심한 자금난에 시달리던 한보 철강이 오늘 끝내 부도로 쓰러졌습니다. 한보 철강이 그동안 얻어 쓴 빚은 4조가 넘습니다. 사회적인 그리고 경제적인 여파가 엄청날 것으로 우려되고 있습니다.[30]
그런데 한보가 무리한 사업 확장을 위해 더 거대한 정치권 로비와 불법 대출로 금융기관 자금을 대규모로 조달해 온 사실이 드러났다. 특히 그 정경유착의 정점에는 대통령 아들로서 황태자 노릇을 하던 김현철이 있었다. 5월 17일 김현철이 구속되면서 김영삼 정권은 식물정권으로 전락했다.
7월 15일 8위 독점재벌 기아가 부도방지협약 대상으로 지정되면서 사실상의 부도를 냈다. 부도방지협약(부도유예협약)은 4월말 금융기관들이 ‘일시적인 자금난을 겪는 대기업들이 금융기관들의 자금회수 공세로 연쇄부도로 치닫는 사태를 막기 위해’ 도입한 협약이었다. 이 협약의 존재 자체가 심각한 경제위기 국면으로의 진입을 뜻했다.
{1997년 7월 15일} 재계 서열 8위인 기아그룹이 부도방지협약 대상으로 지정됐습니다. 사실상의 부도인 셈인데 10대 재벌도 안심할 수 없다는 항간의 얘기가 현실로 드러나 충격은 더합니다. 우리 경제에 미치는 영향도 깊고 클 것 같습니다.[31]
기아그룹의 부도는 한국 독점재벌의 위기가 심각한 수준에 이르렀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었다. 1990년대 초반 냉전체제 해체와 함께 세계시장의 무한경쟁에 냉혹하게 내던져진 한국의 독점재벌은 오히려 자신감을 갖고 과거 한국에서 성장하던 방식 그대로 세계무대에서 행동했다. 최대한 많은 빚을 내 최대한 빠르게 사업을 확장함으로써 많은 이윤을 거두고 빚도 갚아나가는 방식이었다. 독점재벌은 국내외 금융기관들로부터 엄청난 부채를 끌어당겼다. 그러나 세계시장은 한국시장처럼 독점재벌의 독무대가 아니었다. 독점재벌의 이윤은 엄청난 부채를 감당하기에 충분치 않았다. 결국 영업으로는 흑자인데 대출 원리금을 상환하고 나면 적자인 상태가 점점 심화됐다.
{1997년 7월 15일} 재벌 가운데 부채가 가장 많은 곳은 현대그룹, 무려 43조 3천억 원입니다. 삼성은 37조 원입니다. 다음으로 LG, 대우, 선경의 순위입니다. 빚이 많을수록 재계 서열이 높아집니다. 은행감독원이 밝힌 49개 재벌의 작년 부채 규모는 1년 만에 61조 원이 늘어난 296조 원입니다. 한라와 조양상선은 부채 비율이 2천 퍼센트, 뉴코아는 천 퍼센트를 넘을 정도로 빚더미에 올라 있습니다.
빚더미 경영의 결과는 올해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 부채 비율이 8천 퍼센트가 넘는 진로, 자기자본을 다 까먹은 삼미와 대농은 부도가 났거나 부도방지업체로 선정됐습니다. 제 뒤에 보이는 기아그룹도 10조 원에 가까운 금융권의 빚에 시달리다 결국 부도유예협약의 적용을 받게 됐습니다.
빚으로 덩치만 키웠지 작년에 재벌 그룹들은 천 원어치 물건을 팔아 빚을 갚고 평균 2원밖에 이윤을 남기지 못한 것으로 분석됐습니다. 재벌의 자기자본 비율은 평균 20%. 자산이 100억 원이라면 20억 원만 자기 돈이고 나머지는 빚이라는 얘기입니다.[32]
위기에 빠진 독점재벌이 금융기관의 자금회수 시도로 연쇄도산에 빠지는 것을, 국내에서는 부도유예협약을 통해 막을 수 있었다. 그러나 해외 금융기관의 자금회수에는 속수무책이었다. 독점재벌이 해외 금융기관에게 무차별 자금회수를 당하면서 한국의 외환보유고가 빠르게 사라져 갔다.
마침내 11월 중순을 지나면서 한국의 외환보유고가 바닥나 국가 전체가 대출금 상환에 응할 수 없는 상태, 즉 ‘모라토리엄’ 직전에 내몰렸다. 갚아야 할 외채는 아직도 1천 5백억 달러나 남아 있었다. 모라토리엄을 피하기 위해, 한국 정부는 국제통화기금(IMF)에 긴급 자금지원을 요청했다.
{1997년 11월 21일 저녁 10시, 임창용 경제부총리} 정부는 최근 겪고 있는 금융 외환시장에서의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하여 국제통화기금에 유동성 조절 자금을 지원해 줄 것을 요청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33]
IMF에게서 자금을 빌려오는 것은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다. IMF는 구제금융을 제공하는 대가로 ‘재정긴축, 금융구조조정, 노동시장 유연성 확보’ 등의 조치를 한국 정부에 요구했다. IMF와 그 뒷배인 미국이 대놓고 한국의 경제주권을 침탈하겠다는 것이었다. 한국 정부는 IMF가 제시한 요구들을 전적으로 수용했다.
{1997년 12월 3일} 길고도 험난했던 IMF 자금 지원 협상이 오늘 밤 완전히 타결됐습니다. 오늘 밤 7시 40분쯤 임창열 경제부총리와 깡드시 IMF 총재는 협상을 마치고 세종로 정부종합청사 대회의장으로 나와서 협상의 타결 소식을 전했습니다. 깡드시 총재는 이 자리에서 한국에 지원할 자금 규모는 모두 550억 달러로 결정됐다고 말했습니다.[34]
IMF와의 협상 타결은 기업의 연쇄부도를 막지 못했다. ‘극심한 경제위기’를 공식화함으로써 오히려 연쇄부도를 더 촉진했다. 1달러 8백 원 정도 하던 환율이 연일 폭등해 1달러 2천 원을 육박했다. 주식은 폭락했다.
{1997년 12월 6일} 기업들이 연쇄부도로 쓰러지고 있습니다. 어제 고려증권에 이어서 오늘은 재계 12위인 한라그룹이 부도를 냈습니다. … 작년 매출액 5조 3천억 원, 재계 서열 12위인 한라는 조선과 자동차부품 산업 등을 주축으로 하고 있어 엄청난 파장이 예상되고 있습니다. 한라그룹의 총 부채는 은행권 3조 원, 제2금융권 3조 4천억 원 등 모두 6조 4천억 원입니다. 이로써 올해 대기업의 부도로 금융기관이 떠안게 된 부실 채권은 30조 원이나 됩니다.[35]
외환위기가 발생하고 IMF 협상이 진행되던 시간은 대통령 선거의 와중이기도 했다. 12월 18일 김대중이 대통령으로 당선됐다. 19일 김대중은 기자회견을 갖고 ‘IMF와 적극적으로 협력해 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1997년 12월 22일} 김대중 대통령 당선자는 오늘 립튼 미국 재무차관과 보스워스 주한 미국 대사가 참석한 가운데 IMF 대책 회의를 갖고 새 정부는 IMF 협약을 100% 준수하겠다고 밝혔습니다. 김대중 당선자는 또 IMF와의 협약을 경제체질 개선의 계기로 삼겠다고 밝혔습니다. 김대중 당선자와 미국 측은 임금 조절을 통해 실업 위기를 넘기지 못할 때는 최소 범위에서 실업이 불가피하다는 데 의견을 같이 했습니다. 정리해고제 도입을 사실상 수용한 셈입니다.[36]
김대중은 ‘IMF협약을 이행하고 외국인 투자를 유치하기 위해선 정리해고제 도입이 불가피하다’고 주장했다. 1997년 3월 10일자로 재개정 노동법이 통과되면서 정리해고제가 2년 유예됐기 때문에 정리해고제는 1999년 3월에 도입되게 돼 있었다. 그런데 김대중은 정리해고제를 바로 도입해야 한다면서 이를 논의하기 위한 틀로 ‘IMF체제 극복을 위한 노사정위원회’를 12월말 제안했다.
1996년 김영삼 정권이 노동법 개악을 위해 노개위를 제안했을 때와 비슷한 모양새였다. 하지만 의도가 더 노골적이었다. 노사정위원회는 IMF 외환위기를 빌미로 자본가들의 신자유주의 공세를 본격화하기 위한 이데올로기적·제도적 기반을 마련하는 수단이었다.
민주노총이 선택해야 할 길은 명확했다. 노사정위원회를 단호히 거부하고 정리해고제 도입에 맞선 총파업 조직화의 길로 나아가야 했다. 그러나 민주노총은 노사정위원회에 들어갔다.[37] 1998년 1월 15일 경제위기 극복을 위한 노·사·정 간의 고통분담을 논의하기 위해 노사정위원회가 구성됐다. 노동자를 대표하는 민주노총과 한국노총, 사용자를 대표하는 전경련과 경총, 정부를 대표하는 재경원과 노동부, 그리고 여야 4당을 포괄했다.
{1998년 1월 19일} 노사정위원회는 오늘 전체 회의를 열어 경제난 극복을 위한 합의문과 이를 위한 10개 의제를 발표할 예정이었습니다. 그러나 회의에서는 이른바 고용조정 문제, 즉 정리해고제를 합의문 안에 포함시킬 것인지의 여부가 노사 간의 주요 쟁점으로 부각됐습니다. 사용자 측은 고용조정과 근로자파견제를 합의문 안에 명시할 것을 주장했으나 노동자 측, 특히 민주노총 측이 이를 완강하게 거부했습니다.
(배석범 민주노총 위원장 직대) “민주노총은 고용조정, 다시 말해서 정리해고 그건 받아들일 수가 없습니다.”
오늘 회의에서 정부 측은 IMF 협약을 준수한다는 내용으로 타협안을 제시했으나 끝내 의견 절충에 실패했습니다. 합의문 작성에 관해서는 오늘 진전이 없었습니다. 내일 오전 11시에 본 위원회를 다시 개최키로 했습니다.[38]
1998년 1월 20일, 노사정위원회는 ‘경제위기 극복을 위한 노·사·정 간의 고통분담에 관한 공동선언문’을 발표했다. 쟁점이 됐던 정리해고 문제는 ‘해외자본 투자유치를 위한 제반 조건을 마련한다’는 간접적인 표현으로 에둘러졌다. 그러나 노사정위원회 논의가 정리해고 도입 ‘합의’를 강제하기 위해 나아가고 있다는 것은 분명했다.
{1998년 2월 1일} 노사정위원회 간사인 국민회의 조성준 의원은 오늘 노사정위원회가 내일까지 쟁점 사항에 대한 일괄 타결을 보지 못할 경우 새 정부의 독자안을 2월 임시국회에 제출해 처리하겠다고 밝혔습니다. … 이 같은 국민회의측의 입장은 노사정의 합의 이후 처리한다는 지금까지의 입장에서 강경 방침으로 선회한 것입니다.
이 같은 국민회의측의 방침이 알려지자 노동계는 강력히 반발하고 나섰습니다. 특히 민주노총 측은 강행 처리할 경우 파업도 불사하겠다는 입장을 정리했습니다.
(고영주 노사정위원회 민주노총측 전문위원) “정리해고제나 근로자파견제를 노동계의 동의 없이 국회에서 강행 처리한다면 상당한 저항에 부딪힐 것이고, 민주노총은 즉각적으로 파업에 들어가는 것으로 지금 결정을 해놓고 있는 상황입니다.”
지난달 발족 이래 수차례 회의를 거듭하면서 입장 차이를 좁히지 못했던 노사정위원회는 이로써 중대 전기를 맞이하게 됐습니다.[39]
마침내 2월 6일, 노사정위원회는 ‘경제위기 극복과 재도약을 위한 사회협약’에 합의했다. 사회협약의 핵심 내용은 정리해고제와 근로자파견제를 ‘경제위기 극복’을 위해 즉시 도입한다는 것이었다.
잠정합의의 내용은 노동기본권을 보장(공무원과 교원의 단결권 보장, 정치자금법 개정으로 노조의 정치활동 보장, 실업자의 초기업단위 노조 가입 허용 등)받는 대신 노동계는 정리해고와 근로자파견의 법제화에 동의하고, 기업은 구조조정을 촉진하는 대신 경영투명성 확보에 노력하며, 정부는 고용·실업 대책, 물가안정, 임금안정과 노사협력 증진, 그리고 사회보장제도의 확충(고용보험 1인 이상 확대 실시, 임금채권보장제도 도입)에 노력한다는 것이었습니다.[40]
{1998년 2월 6일} 마침내 진통을 거듭하던 노사정위원회가 대타협을 이뤄냈습니다. 노사정위원회는 오늘 아침 본회의를 열어 경제위기 극복과 재도약을 위한 노사정 공동 선언문을 채택했습니다. 무려 18시간의 마라톤협상 결과 우여곡절의 진통 끝에 이뤄낸 대타협이었습니다.
노사정위원회는 선언문에서 근본적인 개혁을 단행하지 않고서는 현재의 경제 위기를 극복할 수 없다는 데 인식을 같이 하고 이를 위한 공정한 고통분담에 협력하기로 합의했다고 밝혔습니다.
(한광옥 노사정위원장) “노사정 세 주체의 살을 깎는 살신성인의 결단과 양보, 국가 위기 극복이라고 하는 공동의 절박한 목표를 위해 고통분담을 통한 대타협에 도달하였다는 사실을 강조 드립니다.”
노사정위원회는 먼저 정리해고를 전 산업에 걸쳐 즉각 실시할 수 있도록 하고 기업의 인수·합병 등 긴박한 경영상의 이유를 정리해고의 요건으로 명시하는 데 합의했습니다. 또 근로자파견제는 노사 양측의 입장을 절충해서 예외 대상과 지정 대상을 함께 명시하기로 했습니다. 고용조정에 따른 실업대책 재원은 당초 4조 4천억 원에서 5조 원으로 확충했습니다.
위원회는 또 전교조를 내년 7월부터 합법화해서 허용하고 올해 상반기 안에 노조의 정치활동을 보장하기로 했습니다. 그러나 노조전임자 임금지급 문제와 대기업의 경영 투명성 확보를 위한 재벌개혁 문제 등은 끝내 이견을 좁히지 못해 2차 과제로 넘겼습니다.[41]
민주노총 지도부가 ‘정리해고 도입’을 합의했다는 소식은 전국의 현장을 일거에 뒤흔들었다. ‘노사정 합의는 도저히 인정할 수 없다’, ‘가슴이 너무 답답하다’, ‘민주노총 지도부가 노동자 팔아먹었다고 생각한다’ 등등 격렬한 성토의 목소리가 현장 곳곳에서 터져 나왔다.
각 지역과 연맹, 단위노조에서 노사정 합의를 반대하고 민주노총 지도부를 성토하는 성명이 빗발쳤다. 민주노총 지도부가 7일로 예정됐던 부분파업과 집회를 노사정 합의에 따라 취소했지만, 만도기계 노조가 부분파업을 강행했으며, 대전과 대구지역에서는 집회를 강행하여 노사정 합의 반대를 천명했다. 노사정 합의 보도를 접한 한라중공업노조 조합원 50여 명은 8일 상경하여 민주노총 사무실에서 ‘노사정 합의안 전면거부’를 요구하며 철야농성에 들어갔다.
민주노총 지도부의 노사정 합의에 대한 현장의 강력한 반발은 9일 민주노총 임시대의원대회에서 폭발했다. 이날 대회가 시작되기 전부터 대회 장소인 성균관대 유림회관에서는 1층에서 한라중공업노조, 현장조직 모임, 전해투가 함께 사전 집회를 하고, 다른 한쪽에서는 서울지하철노조가 집회를 하면서 “어용 지도부 물러가라”를 외치는 등 격앙된 분위기로 가득 찼다. 대회는 3시부터 시작될 예정이었다. 그러나 배석범 직무대행 등 민주노총 지도부가 나타나자 조합원들이 분을 못 이겨 야유와 욕설을 퍼부으면서 대회 진행이 30분가량 늦춰졌다.
먼저 노사정 합의안에 대한 설명이 진행됐다. 이어서 오전에 중앙위원회에서 결정한 대로 ‘노사정 합의안 추인 여부와 부결될 경우 지도부가 사퇴하는 안’에 대해 찬반토론을 진행했다. 찬반토론에서 대다수 대의원들은 ‘필요하다면 타협할 수 있지만 절대로 타협할 수 없는 게 있다’, ‘조합원의 목을 치는 정리해고제는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다’며 지도부를 강하게 성토했다. 소수는 ‘나라가 망한다는데 도리가 있느냐’며 현실론을 폈다.
표결이 진행됐다. 노사정 합의안은 찬성 54명, 반대 184명으로 압도적으로 부결됐다. 회계감사를 제외한 민주노총 1기 지도부 전원[42]이 불신임을 받아 총사퇴했다. 민주노총 건설 과정에서 민주노조운동의 주도권을 거머쥔 타협·개량주의 세력, 그 가운데서도 특히 국민파가 숱한 과오를 거듭해 온 끝에 결국 노동자들로부터 준엄하게 심판받는 역사적 순간이었다.
{1998년 2월 9일} 민주노총은 오늘 유림회관에서 대의원 대회를 열고 찬반투표를 통해서 노사정위원회의 합의 사항을 부결했습니다. 대의원들은 노사정위원회에서 지도부가 합의해 준 정리해고 도입 등 협약 내용은 무효라고 주장하고 집행부 사퇴 등을 요구했습니다.[43]
노사정 합의 추인을 거부한 민주노총은 임시국회의 노동법 개악을 저지하기 위해 비상대책위원회 체제로 전환하여 13일 총파업 투쟁에 돌입하기로 하고 단병호 금속연맹 위원장을 비상대책위원장으로 만장일치로 추대했다.
{1998년 2월 10일} 민주노총이 지난 금요일 타결된 노사정 합의를 사흘 만에 거부하고 총파업을 선언하고 나섰습니다. … 노사정 대타협에 합의한 집행부가 물러나고 비상대책위원회가 구성됐습니다. 노사정 합의의 원천 무효를 확인하고 오는 13일 전국적인 총파업에 들어가겠다고 결의했습니다.
(단병호 민주노총 비대위원장) “노사정 합의로 이루어졌던 안은 그것은 안 된다라고 하는 것은 명확합니다.”
일선 노동계의 예기치 않은 거센 반발로 고용조정 관련 법안의 국회 처리가 진통을 겪게 됐습니다. 상설기구인 노사정위원회의 앞날도 불투명합니다. 대규모 총파업으로 이어져 노동계와 정치권의 정면충돌 사태와 함께 경제 살리기에 차질을 빚을까 우려됩니다.
노사정위원회는 긴급 대책회의를 통해 노사정 합의는 여전히 유효하다고 밝히고 고용조정 법안을 예정대로 처리하는 등 정면 대응하기로 했습니다.[44]
그러나 민주노총 비대위는 12일 밤 총파업을 전격 철회했다. 정리해고제와 근로자파견제는 결국 14일 임시국회를 통과하며 법제화 됐다. 정리해고제는 근로기준법 개정을 통해 즉시 도입됐고, 근로자파견제는 ‘파견근로자보호등에관한법률’(파견법) 제정을 통해 1998년 7월 1일부터 효력이 발생했다.
{1998년 2월 13일} 오늘 새벽 0시 민주노총의 파업 방침이 극적으로 뒤집히던 순간 민주노총 지도부의 표정은 침통했습니다. 파업 철회 결정을 내리기까지 숱한 우여곡절이 있었음을 암시하는 듯 했습니다.
(단병호 민주노총 비대위원장) “13일 오후부터 전개하기로 한 총파업 방침을 철회합니다.”
어제 오전 회의 시작 때만 해도 비상대책위는 정리해고의 입법화를 저지하기 위해서는 파업을 밀어붙여야 한다는 강경파가 주도했습니다. 점심도 거른 채 산별 연맹과 각 지역본부 대표 등 30여 명은 국민회의 당사로 몰려가 파업 결의를 다졌습니다.
그러나 3시에 속개된 오후 회의부터 2선으로 물러나 있던 온건파가 제동을 걸고 나왔습니다. 파업 결의 사업장이 전체의 6분의 1밖에 안 된 데다 지금의 경제 상황이 또다시 파국으로 치달을 경우 국민적 비난은 물론 민주노총 조직마저 와해될 수 있다고 강하게 주장했습니다. 위원장의 굳은 얼굴, 줄담배를 태우는 간부들, 시간이 흐를수록 지도부는 파업을 하루 앞둔 모습이라고 보기엔 몹시 초조했습니다.
(민주노총 간부) “총파업이라는 최후 방어수단을 강구할 수밖에 없는 고통스러운 논의이기 때문에 길어지고 있습니다.”
파업 철회는 이때부터 가닥이 잡혀갔습니다. 밤 8시 40분, 비대위 위원 20여 명이 퇴장했고, 핵심 지도부 8명은 막판 조율을 계속했습니다. 최종 결론은 파업 철회. 14시간의 격론과 고심 끝에 내린 한밤의 결단이었습니다.
그러나 민주노총은 파업을 철회했다 하더라도 임시국회에서 정리해고 법안의 처리를 지켜본 뒤 노사정 합의안 반대 투쟁을 계속하겠다는 입장을 강조했습니다.[45]
물론 총파업 동력을 급하게 조직해 내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민주노총 비대위의 총파업 철회는 정리해고제와 근로자파견제 도입이라는 역사적 사건 앞에서 또 한 번 노동자들을 결정적으로 배신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당시까지 그 실체가 충분히 드러나지 않고 있었지만, 1998년을 거치며 국민파에 필적하는 또 하나의 주요한 타협·개량주의 세력으로 가시화하는 이른바 ‘중앙파’가 갖는 한계를 적나라하게 드러낸 최초의 사건이었다.
결국 민주노총 건설 과정에서 민주노조운동의 주도권을 타협·개량주의 세력이 장악한 것은 1996년부터 1998년 2월까지 신자유주의 대공세의 초입부에 벌어진 노동자계급의 총력 방어전이 참담한 패배로 귀결되게 만든 핵심 원인이 되고 말았다.
김대중 정권과 자본가들은 ‘나라가 망하게 생겼으니 고통분담이 불가피하다’며 민주노총 지도부에게 정리해고제와 근로자파견제 수용을 압박했다. ‘지금 대한민국이라는 배가 바다에서 가라앉게 생겼다, 배를 살리려면 잠깐 30%를 내려놓을 수밖에 없다, 먼저 배를 살린 뒤에 배가 안정되면 다시 30%를 구할 수 있다, 그렇게 해야 모두가 산다’ 같은 논리를 사용했다.
노동자계급의 세계관 대신 국가주의·국민주의·민족주의라는 소부르주아적 세계관에 함몰돼 있던 타협·개량주의 세력은 김대중 정권의 그럴싸한 논리를 이겨낼 수 없었다. 하지만 현장 노동자들은 정리해고제와 근로자파견제 도입에 결코 동의하지 않았다. 민주노총이 할 일은 ‘나라 살리기’나 ‘회사 살리기’가 아니라 ‘노동자 살리기’여야 한다는 주장이 크게 인기를 끌었다. 계급적 직관이 반영된 간명한 대안이었다.
이후에 실제로 벌어진 일들은 김대중 정권과 자본가들의 논리가 얼마나 추악한 거짓인지를 여실히 입증했다. 나라가 망할 판이라고 했지만, 노동자들이 정리해고와 비정규직 전환으로 피눈물을 쏟은 IMF 외환위기 동안 자본가계급은 그 어느 때보다 많은 돈을 벌어들였다. 내버려진 ‘30%’는 국가 경제가 회복된 이후에도 결코 구제받지 못했다. 오히려 누군가를 내버려도 된다는 쪽으로 길이 열리고 나니 국가경제가 잘 돌아가는데도 점점 더 많은 이들이 내버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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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세계적인 차원에서 보자면, 자본가계급이 1980년대부터 실행한 신자유주의 공세는 노동자계급에 대한 착취·수탈의 강화를 통해 위기로부터 탈출하려는 전략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의 대량파괴와 대량학살을 통해 그 이전 시기에 누적됐던 모순을 상당 부분 털어낸 세계 자본주의는 새롭게 거대순환을 시작했다. 그러나 자본의 유기적 구성의 고도화와 세계적인 경쟁 격화에 따라 이윤율이 점차 하락한 끝에 1970년대에 극심한 경제위기에 빠져들었다. 바로 이 1970년대 경제위기로부터 벗어나려는 자본가계급의 대응전략이 신자유주의 공세의 출발점이었다. 세계화·금융화와 결합된 신자유주의 공세는 노동자·민중에게 엄청난 희생을 강요한 대신, 자본가들에게는 30년 가까이 장밋빛 미래를 열어주었다. 그러나 2008년 금융위기는 신자유주의·세계화·금융화가 내재한 모순을 폭발시켰다. 이후 세계 자본주의는 갈수록 위기가 더 심화되는 상황 속에서 허우적거리고 있다.
[2] 서영호·양봉수 열사회, 2025, 『현대차 열사·희생자 백서』, 정재성 편.
[3] 서영호·양봉수 열사회, 2025, 『현대차 열사·희생자 백서』, 정재성 편.
[4] 서영호·양봉수 열사회, 2025, 『현대차 열사·희생자 백서』, 정재성 편.
[5] 현총련, 1996/12/11, 「엄중한 시기에 즈음한 우리의 제안」.
[6] 민주노총 대구·부산양산·대전충남·충북·부천시흥·경기남부 6개 지역 투쟁본부, 1996/12/16, 「민주노총 지도부에 각성을 촉구하며 - 다시 한 번 강고한 노동법개악 저지를 위한 총파업투쟁을 제안합니다」.
[7] 민중운동탄압 분쇄와 민주기본권 쟁취를 위한 범국민대책회의, 1996/12/13, 「노동법개악 저지 전국 총파업투쟁의 힘찬 전진을 위해 40만 민주노총 노동형제에게 드리는 글」.
[8] 이날 함께 통과된 안기부법 개정안 또한 국가보안법상의 찬양고무죄와 불고지죄에 대한 수사권까지 안기부에 부여하는 등 안기부의 권능을 대폭 강화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9] 민주노총, 1996/12/26, 「총파업 선언 기자회견문」.
[10] 서영호·양봉수 열사회, 2025, 『현대차 열사·희생자 백서』, 정재성 편.
[11] 민주노총, 1996/12/30, 「권영길 위원장이 조합원 동지들께」.
[12] MBC, 1996/12/30, <민주노총 새해 연휴기간 파업중단 발표>.
[13] MBC, 1996/12/30, <서울지하철노조와 부산지하철노조, 파업 잠정중단>.
[14] MBC, 1996/12/30, <이수성 국무총리 특별담화문 발표, 파업 자제와 협조 당부>.
[15] 서영호·양봉수 열사회, 2025, 『현대차 열사·희생자 백서』, 정재성 편.
[16] MBC, 1997/01/08, <울산 현대자동차노조, 부분 조업 결정>.
[17] MBC, 1997/01/09, <한국노총, 14일부터 시한부 파업 결정>.
[18] 서영호·양봉수 열사회, 2025, 『현대차 열사·희생자 백서』, 정재성 편.
[19] 민주노총, 1997/01/14, 3단계 전면 총파업 돌입에 관한 기자회견문.
[20] 서영호·양봉수 열사회, 2025, 『현대차 열사·희생자 백서』, 정재성 편.
[21] 민주노총, 1997/01/18, 「수요파업 전환에 관한 기자회견문」.
[22] MBC, 1997/01/18, <민주노총 총파업 중단 결정>.
[23] MBC, 1997/01/18, <울산지역 현대계열사 노조, 다음 주부터 조업복귀>.
[24] 김남수, 2006, 「노동자 속에 숨어 있는 무서운 힘 - 87년 노동자대투쟁과 96·97년 총파업」.
[25] 1997년 재개정 노동법에서 2년 유예됐던 정리해고제와 근로자파견제는 IMF사태 초기인 1998년 2월초 민주노총까지 참여한 노사정위원회에서 조기 도입하기로 합의됐다. 민주노총이 지도부를 불신임하며 합의를 파기했지만 그대로 법제화됐다. 이에 따라 정리해고제는 1998년 2월부터, 근로자파견제는 1998년 7월부터 시행됐다. 5년 유예됐던 기업단위 복수노조 허용과 노조전임자 임금지급 금지 조항은 민주노총을 제외한 노·사·정 합의에 따라 2001년 말 다시 5년 더 유예, 2006년 말 다시 3년 더 유예됐다가 2009년 말 이명박 정권 주도로 더 개악됐다. 이에 따라 노조전임자 임금지급 금지는 타임오프라는 통제 장치를 덧붙여 2010년 7월 1일부터, 기업단위 복수노조 허용은 교섭창구 단일화라는 통제 장치를 덧붙여 2011년 7월 1일부터 시행됐다.
[26] 현대차 민주노동자투쟁위원회, 1997/03/14, 「여야합의 노동악법 결코 수용할 수 없다」, <민투위>.
[27] 현대차노조, 1997, 『현자노조 사업보고 1996~97』, 461~463쪽.
[28] 천창수, 1997/01/20, 「울산지역 총파업투쟁에서 아쉬운 점들」, 영남노동운동연구소, 『연대와 실천』 1월호.
[29] 전국 구속·수배·해고노동자 원상회복 투쟁위원회, 1997/01/28, 「민주노총 총파업 투쟁에 대한 전해투 중간 평가서」.
[30] MBC, 1997/01/23, <한보철강 부도, 경제계 큰 파문>.
[31] MBC, 1997/07/15, <기아 사실상 부도, 부도방지협약 대상 지정>.
[32] MBC, 1997/07/15, <기아 부도 위기는 과도한 부채 때문>.
[33] KBS, 1997/11/21, <국제통화기금 지원 요청 긴급 기자회견>.
[34] MBC, 1997/12/03, <[IMF 협상 타결] IMF, 긴급 자금지원>.
[35] MBC, 1997/12/06, <한라그룹 부도>.
[36] MBC, 1997/12/22, <김대중 대통령 당선자 IMF 대책회의 정리해고제 수용>.
[37] 사실 노사정위원회는 민주노총이 먼저 제안한 것이었다. 1997년 12월초 IMF 외환위기에 따른 경제위기가 가시화하자 민주노총은 이에 대응하기 위한 사회적 합의기구 구성을 먼저 제안했다. 김대중의 노사정위원회 제안은 민주노총의 제안에 대한 화답의 성격을 갖고 있었다.
[38] MBC, 1998/01/19, <노사정위원회 첫 회의 결렬, 정리해고 쟁점>.
[39] MBC, 1998/02/01, <노사정위원회 고용조정 강행 방침, 노동계 강력 반발>.
[40] 이원보, 2005, 「한국노동운동사 8 - 1987년 이후의 노동운동」, 『노동사회』 5월호.
[41] MBC, 1998/02/06, <노사정위원회, 국가위기 극복 위한 고통분담 대타협 큰 결실>.
[42] 당시 사퇴한 민주노총 1기 지도부는 배석범 위원장 직무대행, 허영구 부위원장, 이영희 부위원장, 배범식 부위원장, 김영대 사무총장이었다. 권영길 위원장은 1997년 12월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면서 먼저 사퇴한 상태였다.
[43] MBC, 1998/02/09, <민주노총, 노사정위원회 합의 거부>.
[44] MBC, 1998/02/10, <민주노총, 노사정 합의 거부 총파업 선언>.
[45] MBC, 1998/02/13, <민주노총 파업 철회, 파국은 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