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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대 총선, 왜 청년은 정권심판론에 반응하지 않았는가청년층, 낮은 투표율과 높은 무당층 비율이 드러내는 것 2024년 22대 총선이 끝났다. 야당에 비례정당 포함 175석이라는 압승을 안기면서다. 정부와 여당은 ‘주 69시간제’, 민주노조에 대한 ‘반 카르텔 투쟁’, ‘최저임금 적용 제외 이주노동자 고용 확대’, ‘최저임금 230원 인상’ 등 노동자 생존권을 위협하는 조치를 쏟아내왔고, 이를 심판하려는 대중의 열망도 뜨거웠다. 이번 총선 투표율은 67.0%로 1992년 14대 총선 이후 가장 높은 수치를 기록했다. 그러나 청년층 투표율은 낮았다. 아직 연령대별 투표율 집계가 나오지 않았으나, 매우 저조한 청년층 사전투표율에서 드러나듯, 청년층 투표율은 저조했을 것으로 예상된다. 대학가에 회자했던 “지겨운 절망을 넘어, 내일을 위해 투표합시다”라 는 대자보 제목이 무색하게도, 청년 대중이 고른 대답은 투표가 아닌 것으로 보인다. 한창 달아올랐던 총선 분위기 가운데서도, 많은 2030 유권자들은 선거장에 가야 할 이유를 찾지 못했다. 즉, 투표한 청년 중 다수는 정권 심판론을 지지했으나, 애초 정권 심판론을 비롯한 총선 담론 자체에 냉소하며 투표하지 않은 청년들도 다수다. 30대 이하 유권자수 비중은 32%이나 사전투표자 중 30대 이하의 비중은 24%에 불과했다. 출처: 슬로우뉴스 상황을 보자. 4월 4일 공개된 한국갤럽 3월 4주 여론조사 결과에 따르면 전국 18~29세 유권자 중 38%는 특정 정당을 지지하지 않는 무당층이었다. 같은 연령대의 더불어민주당 지지율인 27%, 국민의힘 25%보다 훨씬 높다. 30대 유권자로 범위를 넓혀도 무당층 다수 경향은 줄어들지 않았다. 30대 중 29%가 그 어떤 정당도 지지하지 않았다. 이 또한 양당 지지도보다 10%가량 높은 수치였다. 4050의 무당층 비율이 10%를 겨우 웃돌고 6070의 무당층 비율은 6-7%에 불과한 상황에서, 전체 무당층의 70%에 달하는 비율이 청년이라는 점은 유독 눈에 띈다. 이어 중앙선거관리위원회가 한국갤럽을 통해 지난 3월 31일과 4월 1일 전국 유권자를 조사한 결과 적극적으로 투표에 참여하겠다는 20대 응답자는 50.3%에 불과했다. 4년 전 총선 당시 ‘적극적 투표’에 응답한 20대 응답자 비율 74.1%에 비하면 현저히 낮은 수치다. 30대 유권자 또한 별반 다르지 않았다. 4년 전에는 82.2%의 응답자가 ‘적극적으로 투표하겠다’고 밝혔으나 올해는 겨우 68.8%의 응답자만 같은 의사를 밝혔다. 이 같은 수치는 결국 동 여론조사에서 응답자가 밝힌 가장 큰 더불어민주당 지지 이유 ‘정권 심판을 위해서’(63.7%)와 국민의힘 지지 이유 ‘국정안정을 위해서’(46%)가 청년 대중을 흔들지는 못했다는 뜻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매 선거 반복되는 공허한 심판론에 청년 대중은 충분히 지쳤다. 과거를 돌이켜보자. 청년 대중은 과거 문재인 정부나 윤석열 정부처럼 이전 정부를 ‘심판’하겠다 나선 정권에 표를 실어주었던 당사자였다. 19대 대선 당시 문재인 후보의 20·30대 여성 지지율은 각각 47.6%, 56.9%로 타 세대보다 월등히 높았고, 20대 대선의 윤석열 후보의 20·30대 남성 지지율 역시 58%, 46%로 상당히 높았다. 그렇다면 이들이 건넨 열렬한 지지의 결과는 어땠는가? 자칭 타칭 촛불 정부로 불린 문재인 정부 재임 중에도 생명안전법을 비롯한 각종 진보적 법안들은 통과되지 못했고, 그런 문재인 정부 심판을 외치며 당선된 윤석열 정부는 각종 사회적 참사를 유발해왔다. 위협받는 생존권에 투표용지를 들어도 청년 대중의 삶에는 일절 변화가 없었다. 그 결과 청년층 다수는 선거에 관심이 없거나, 선거에 참여하는 경우에도 고정된 지지 정당 없이 ‘현 정권’을 번갈아가며 심판할 뿐이다. 그간 청년의 탈정치화와 냉소주의에 대한 비판은 손쉽게 쏟아져왔다. 조국 조국혁신당 당대표는 지난 3월 10일 당의 20대 지지율이 유독 낮은 까닭을 묻는 자리에서 “조국혁신당 뿐 아니라 정치 자체에도 관심이 없는 것 같다”며 발언하기도 했다. 물론 이를 뒷받침하는 조사 또한 있는 것이 사실이다. 한국행정연구원이 2022년 9월부터 10월까지 진행한 ‘사회통합실태조사’에 따르면 20대 연령층의 정치 무관심 비율은 77%에 달했다. 그러나 생각해보자. 현재의 20대, 30대가 정치에 관심이 없어 투표소로 향하지 않았다는 진단은 선후관계가 바뀌어있다. 투표소로 향했으나 바뀌지 않았던 것이고, 바뀌지 않으니 관심 또한 없어진 것이다. 청년은 정치를 버린 적이 없다. 다만 한국 자본주의 정치가 먼저 청년을 버렸다. 세분된 억압과 착취로 청년 대중이 그 어느 때보다 위기를 겪는 지금. 청년 대중이 맞이한 위기의 종류와 총선에서 내놓은 정당들의 공약을 돌이켜보고, 비판하고자 한다. 선거 일주일 전 기준, 청년 무당층 비율 추이. 사진 아시아경제 증가하는 플랫폼노동, ‘N잡러’라니 지난 3월 17일 통계청에서 발표된 <경제활동인구조사 마이크로데이터>에 따르면 2023년 월평균 청년층 취업자는 389만 9천 명이다. 언론은 ‘역대 최고 고용률’이라며 연일 청년 고용 증가를 보도했다. 389만이라는 숫자는 얼핏 보기에 분명 낙관적으로 보인다. 그러나 ‘역대 최고 청년 고용률’에는 함정이 숨겨졌다. 청년 인구 감소로 2018년에 대비해 전체 취업자가 5,000명 줄었음에도 개중 단순노무직 등 불안정노동자 비율은 약 2만 명이나 증가했기 때문이다. 포장·운반·청소 등 대부분 단순노무직이 플랫폼 업체에 의해 외주화된 오늘날, 이와 같은 비율의 증가는 다수 청년이 비정규직, 특수고용·플랫폼 일자리로 첫 노동을 시작한다는 뜻과도 일맥상통한다. IMF 경제위기 이후 노동시장에 나온 2000년대 초반 청년층이 ‘88세대’가 될 것이라는 진단으로부터 무려 20년에 가까운 시간이 흘렀지만, 청년 노동자에 대한 억압은 갈수록 세분된 형태로 발전하고 있다. 이번 총선에 억눌린 청년을 대변하는 정당은 없었다. 국민의힘은 10대 총선 슬로건 중 하나로 ‘청년 모두 행복한 대한민국’을 내걸었지만 실상 세부 방안은 △출산 가구 주택 지원 △미래세대 문화생활 지원 △청년이 당당하고 행복하게 일할 수 있는 여건 조성 △학자금/주거비 지원으로, 극히 일부의 경제적 부담 경감에 지나지 않았다. 국민의힘이 총선 공약집을 통해 내건 청년 공약 가운데 그나마 노동과 관계있는 부분은 △인턴 기간이 부당하게 길어져 채용 ‘희망고문’이 되지 않도록 정확한 근무기간 명기 및 무분별한 인턴기간 연장 등 금지에 불과했다. 나머지 공약으로 △해외연수 기회 확대 △친환경 차 구입 시 신혼부부 특별공제 등이 있기는 했지만, 청년 노동자 중 비정규직/특수고용직 비율이 늘어나는 현실과 한참 동떨어져 있다. 국민의힘은 주4일제 도입 및 장시간 압축노동 근절에 공식적으로 반대했다. 또한 최저임금 인상과 플랫폼노동 중간착취 근절은 공약집 어디서도 거론되지 않았다. 더불어민주당 10대 공약 중에는 아예 ‘청년’, ‘노동’이라는 단어가 등장하지 않았다. 잘 보이지도 않는 세부 항목에 들어가서야 △동일노동 동일임금 제도화, 플랫폼노동 최소보수 도입, 중간착취 근절로 비정규직·특고·플랫폼 노동자 등 차별 해소를 언급하고 있을 뿐이다. △특수고용‧플랫폼노동자 보호 제도화 등은 결국 특고·플랫폼노동자의 노동자성을 인정하지 않는 선심성 보호조치에 불과하며, △간접고용노동자 보호 패키지 입법 제도화 등 또한 원하청 이중착취 확대라는 현실에 대한 인정에 불과하다. 대부분 정책이 지원금 보장이나 상담센터 운영에 그친다는 점도 문제다. 비정규노동자의 노동권은 ‘정규직 전환 지원금’이나 ‘노동자 대표 참여 보장’으로 지켜지지 않는다. 비정규직 철폐와 플랫폼 노동자 직고용, 노조법 2·3조의 온전한 개정, 최저임금 인상을 비롯한 삶의 권리를 논해야 할 시점에 ‘억압을 조금 덜어주겠다’고 외쳐봐야 청년 노동자를 구원할 수 없다. 그 밖에도 녹색정의당 △15시간 미만 초단시간 노동자 대상 근로기준법 전면 적용 △플랫폼에서 일하는 N잡러를 위한 플랫폼 수수료 5% 상한제를 도입 등이 눈에 띄었지만. 노동 외주화로 인한 장시간 노동, 야간 노동, 이른바 ‘파트타임’ 노동의 심화 앞에 놓인 청년 노동자에게 ‘N잡러’ 운운하는 것은 좀처럼 이해하기 힘든 모양새였다. 무기계약직으로 전환해줄지 모른다는 희망을 안고 무리한 야간 노동을 지속하던 20대 노동자가 사망한 지 겨우 4년이 지났다. 해당 노동자는 쿠팡 물류센터에서 1년 4개월을 일했지만 서류상으로 여전히 일용직이었다. 1일 단위 고용계약을 다시 맺는 기형적인 형태의 비정규노동자였기 때문이다. 이런 문제가 비단 쿠팡에서만 벌어지는 것은 아니다. 편의점, 술집, 물류, 배달 등 초단시간 노동은 숱한 직종에서 청년 노동자의 수명을 갉아먹고 있다. 현행법상 근로기준법에서조차 배제되는 초단시간 노동자를 근로기준법 적용 대상에 포함하겠다는 것은 듣던 중 반가운 소식이지만, 노동의 ‘파트타임’화를 저지할 대안은 수수료 상한이 아니다. 노동자를 죽음으로 몰아넣는 건당 수수료제는 폐지하고 원청에 의한 직고용, 건수에 관계없는 전면 월급제가 필요하다. 녹색정의당이 일하는 청년들의 삶을 말하고자 한다면, 목표는 ‘N잡러’ 보호가 아니라 불안정노동철폐를 통한 ‘1인 1잡’ 시대여야 했다. 치솟는 청년 여성 자살률, ‘인구부’라니 20대 여성 자살률은 2019년 16.5명, 2020년 19.4명, 2021년 20.2명으로 꾸준히 증가해왔다. 30∼34세 여성 자살률 역시 비슷한 상승세를 보였다. 30대 여성 자살률도 마찬가지로 2018년 18.6명에서 2019년 19.5명, 2020년 19.4명, 2021년 21.6명으로 올랐다. 이 같은 청년 여성 자살 급증의 원인으로는 ‘여성의 노동시장 주변화’가 주 원인으로 지목됐다. 생계 위기가 심화하면서 결혼이나 출산보다는 노동 중심의 생애 계획을 꾸리는 여성이 늘었는데, 여성노동자의 인식과 요구가 바뀐 데에 비해 고용주 측은 여전히 ‘가장이 아닌’ 생계보조자 여성 노동자만을 고려한다는 것이다. 한국여성학회 학술지 ‘한국여성학’ 호를 통해 '노동시장에서의 위기심화와 청년여성 자살률' 논문을 발표한 중앙대학교 사회학과 이민아 교수는 사회적 관심도 대책도 없는 여성노동의 현실을 ‘조용한 학살’로 진단하고 성인지적 일자리 대책 마련을 촉구한 바 있다. 그렇지만 관련 상황은 꽤나 처참하다. 국민의힘 총선 공약집의 ‘여성’ 파트는 고작 단면 두 장, 양면으로 한 장짜리였다. 그마저도 노동 주체로서의 여성은 거의 소실됐다. 국민의힘은 여성을 위한 공약으로 △생애주기별 여성 3대 질환 비용 지원 △미혼 여성 난자동결 시술비용 지원을 들었으나, 이 두 공약 모두 여성을 인구 재생산의 도구로서 한정하고 있을 뿐이다. 한편 국민의힘이 앞서 분류한 여성의 ‘생애주기’라는 기준조차 가임기, 월경기, 폐경기로 나뉘었다. 여성을 철저히 가부장적 자본주의의 객체로 취급하는 시선이 총선 공약집에 그대로 투영되어 있는 것이다. 더불어민주당의 경우 △여성노동자들에게 차별 없는 평등한 노동환경 조성 △여성청년 채용 과정에서의 성차별 관행 근절 △실질적 성평등 사회 실현을 위한 구조적 변화 주도 등을 내걸었으나, 한동훈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이 더불어민주당 공약 중 일부였던 ‘비동의 간음죄’를 비판하며 “억울한 사람만 대거 생기는” 법이라 언급한 뒤 바로 해당 공약을 정정하면서 퇴행적인 민주당의 본질을 드러냈다. 비동의 간음죄란 강간죄의 구성 요건을 ‘폭행 또는 협박’에서 ‘상대방의 동의 여부’로 바꾸는 내용을 핵심 기조로 하며, 국제적으로 가시화된 ‘NO MEANS NO’ 구호가 의미하듯 젠더폭력 피해자에 있어서는 반드시 필요한 법안이다. 이토록 중요한 법안 공약조차 “실무적 착오”라는 터무니없는 변명과 함께 삭제된 일은 민주당표 ‘여성 친화’가 그저 선거철 유세에 불과함을 입증했다. 지난 대선에서 수많은 언론은 20대 여성층을 이재명의 핵심 지지층으로 언급했다. 20대 대선 당시 지상파방송 3사 출구조사 결과에 따르면 20대 여성 58.0%가 이재명을 뽑은 것으로 나타나기도 했다. 그러나 과연 20대 청년 여성의 지지가 민주당에게 보답받은 적 있었나? 그 선택 또한 “착오”에 불과하지는 않았던가? 조국 조국혁신당 대표가 지난 25일 경향신문사와의 인터뷰에서 “페미니즘이라는 단어를 쓰지 않으려 한다”면서도 “젠더불평등 문제에 대해서 저 역시 관심이 있다. 당이 아직 완비된 여성 정책을 갖고 있지는 않으나 당연히 추후 합당한 정책을 만들 것이다”라 밝힌 것 또한 2030 청년 여성을 외면하려는 조국혁신당의 노골적인 행보였다. 조국혁신당은 2일 4050세대 지원 공약을 발표하며 “정치권이 지금껏 청년, 여성, 아동 등을 대상으로 정책을 추진했지만 4050세대는 늘 소외돼 왔다”는 4050 소외론을 부상시켰다. ‘아직 완비되지 않았다’는 표현은 핑계일 뿐이다. 조국혁신당 10대 공약 중 네 번째는 △담대한 저출생 정책, 성평등·돌봄 정책 추진이지만, 조국혁신당이 담대한” 성평등·돌봄 정책을 만들 날은 정당 해산의 날까지 요원해 보인다. 조국혁신당이 주장하는 ‘제7공화국’ 어디에도 청년, 여성, 노동자의 자리는 없기 때문이다. 조국혁신당 강경숙 후보는 노조법 2‧3조 개정안을 ‘민주노총 구제법’이라고 칭했다 허울뿐인 공약, 그런데도 투표가 전부라니 지금의 2030은 구조적 문제를 민감하게 감각하는 세대다. 청소년기 – 청년기에 걸쳐 세월호 참사, 이태원 참사처럼 대중이 희생되는 장면을 목격해왔기 때문이다. 이들은 “가만히 있으라”는 국가와 체제가 개인의 안전을 보장해주지 않는다는 트라우마를 가지고 있다. 그뿐인가. 나날이 치솟는 취업난 그래프와 물가상승에 턱없이 못 미치는 임금은 과거 학교에서 가르쳤던 ‘노력에 의한 계층 이동’의 꿈을 처절하게 박살냈다. 오늘날 청년 대중은 말 그대로 죽느냐 사느냐의 위기 앞에 놓였다. 그리고 그 위기의 해결책을, 선거에 출마한 어떤 정당도 제대로 진단해내지 못했다. 비단 이번 총선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이번에도’의 이야기다. 총선은 끝났지만 청년 대중은 여전히 사회적 죽음 앞에 몰려있다. 착취체제는 모든 청년 대중을 조금씩 죽음으로 몰아넣고 있다. ‘이번에도’를 깨달았다면 ‘이제는’ 달라야 한다. 스스로 주체가 되어야 한다. 영구히 반복되는 보수 여야 간 권력 주고받기를 끝내야 한다. 청년 대중은 삶을 개선할 수 없는 정치, 기실 '정치'라고 부를 수도 없는 체제 재생산 과정으로서의 선거에서 객체 역할을 강요받는다. 물론 노동자 민중의 삶을 개선하는 과정과 하등 무관한 보수여야의 '청년정치'에 그 어떤 쓸모도 없다는 점 역시 지적해야겠다. 지금은 정권 견제냐 정권 지지냐를 두고 갑론을박하는 공허한 안티테제의 시대를 깨부숴야 할 때다. △비정규직 철폐 △최저임금 인상 △노동 현장에서의 젠더 불평등 해결 △플랫폼/특수고용/간접고용 노동자 직고용 등의 의제로 스스로 주먹을 쥐자. 국회의원 누구의 지지자가 아니라, 직접 변혁의 주체가 되어야 한다. 투표를 통한 기간제 구원이 아닌 진정한 해방으로 가는 그 길에 앞장서, 6월 최저임금 투쟁에서부터 청년 대중의 힘을 보여주자. 투쟁으로부터, 삶을 바꾸는 정치세력화, 끝없는 고통과 자기학대를 강요하는 자본주의를 철폐하는 정치세력화의 토대를 새롭게 만들자.2024-05-05 | 조회 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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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0 사전결의대회]노동자와 연대하여 자본주의와 싸우는 것이 기후정의입니다정의로운 전환을 위한 330 충남노동자행진, 사회주의를향한전진은 교육노동자현장실천, 변혁적여성운동네트워크 빵과장미, 학생사회주의자연대와 함께 <노동자 산업통제운동을 위한 330 충남노동자행진 사전결의대회>를 개최했습니다. 단국대학교 학생 이주헌 동지의 발언 내용을 공유합니다. 안녕하십니까 동지들! 저는 단국대학교 비정규직 노동자와 함께하는 학생모임 새벽에서 활동하고 있는 이주헌입니다. 투쟁으로 인사드리겠습니다. 투쟁! 우리는 파국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자본주의는 그 자신이 만들어낸 위기를 한없이 드러내고 있는데 반하여 우리는 자본에서 벗어나 있는 사회는 꿈꾸기 힘들고, 이제는 자본주의가 만들어낸 기후위기까지 나타나 우리의 삶을, 그리고 지구를 위협하고 있습니다. 기후위기에 대해서 우리는 해수면 상승, 지구 온도의 상승 등의 말들은 옛날부터 많이 들어왔습니다. 이는 모두 사실입니다. 그러나 기후위기의 중요한 결과는 과학적 데이터로는 설명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중요합니까? 기후위기는 불평등하게 작용한다는 점입니다. 기후위기는 거대 자본보다는 노동자-민중의 삶에 보다 큰 영향을 미친다는 점입니다. 날씨가 더워지면 누구에게 직접적인 영향이 끼쳐집니까? 실외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에게 직격탄입니다. 단국대학교의 경우에는 여전히 냉방 시설이 설치되어 있지 않거나 몇 년째 보수가 이루어지지 않은 휴게실들이 존재합니다. 한 휴게실에는 창문도, 환풍기도, 냉방장치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한여름에는 휴게실이 너무 더워서, 휴게실 안에서 쉬지 못하고 밖으로 나가서 휴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또한 작년에 폭염 속에서 일하던 마트 노동자분이 사망하셨다는 소식을 듣기도 하였습니다. 이처럼 기후위기가 불평등하게 작용한다는 점, 특히나 노동자-민중에게 기후위기가 전가된다는 점, 나아가 이 불평등이 생명에 대한 위협으로까지 나타난다는 점은 자명해보입니다. 오늘 저희는 충남의 발전 노동자들과 연대하기 위해 이곳에 왔습니다. 기후위기 해결을 위해 산업전환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나 산업 전환의 책임은 누가 지고 있습니까? 자본주의가 만들어낸 기후위기의 책임은 누가 지고 있습니까? 모두 발전 노동자들에게 전가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기후위기가 노동자들의 노동의 결과입니까? 아니면 자본주의가 자본의 끝없는 성장을 위하여 인간과 자연을 착취하고 약탈한 결과입니까? 당연하게도 자본주의가 만들어낸 결과입니다. 그럼에도 자본은 불평등하게 책임을 전가하고 자신은 슬쩍 빠져나갑니다. 우리는 자본의 책임 전가를 거부하고 노동자와 연대하여 노동자와 지구를 착취하는 자본주의에 대항하여 싸워야 합니다. 자본에게 기후위기의 책임을 묻는 것이 기후정의이고, 자본주의를 끝내는 것이 기후정의 아니겠습니까? 오늘 충남행진처럼 노동자계급이 자본과 맞서 싸울 때, 저희 학생들 또한 연대하여 투쟁하겠습니다. 함께 자본주의에 대항합시다. 감사합니다.2024-04-13 | 조회 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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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쟁과 아름다움' - 1박2일 한국옵티칼하이테크 투쟁문화제 후기내가 처음으로 옵티칼하이테크 투쟁 현장을 방문했던 것은 지난 8월 말이다. 당시에는 학생사회주의자연대의 도움을 받아 ‘세상을 바꾸는 노학연대’라는 이름으로 옵티칼하이테크 투쟁 현장을 방문해 동지들과 결합하고 소통간담회를 했다. 그때 구미시를 떠날 때만 하더라도 언제 다시 이곳에 올 수 있겠냐는 생각이 들어 아쉬움이 컸다. 그러나 방문할 기회는 생각보다 빠르게 돌아왔다. 옵티칼하이테크 투쟁 현장에서 1박2일 투쟁문화제가 계획되어 있다는 소식을 전달받자마자 나는 반가운 마음으로 곧장 참석 의향을 밝혔다. 약 한 달이 지나 다시 방문하게 된 투쟁 현장은 겉으로 보기에는 크게 달라진 것이 없었다. 구미시와 한국옵티칼하이테크 사측에서 철거를 강행하고자 위협하고 있는 상황인 만큼, 달라진 것이 없다는 말은 서글프지만 좋은 의미일 것이다. 공장은 변함없이 제자리에 서 있었다. 그동안 구미시 측에서 단수를 집행하고 단전 또한 시도하는 등의 악재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옵티칼하이테크 동지들은 환한 낯이었다. 동지들은 그새 몰라보게 쌀쌀해진 날씨에 모자를 벗고, 허연 햇살을 맨얼굴로 맞으며 타지에서 온 동지들을 마중하러 나왔다. 이윤엽 작가의 작품 앞에서 김계월 아시아나케이오지부장과 변주현 현대중공업사내하청지회 서진 해고노동자가 함께 포즈를 취했다. 사진=신유아 공장 건물은 달라진 것이 없었지만, 공장의 외견에는 변화가 있었다. 공장 내부로 진입하는 입구 쪽에 이전에는 없던 새로운 그림이 걸려 있었다. 변화가 눈에 띄어 물어보니 동지들이 당일 아침에 막 게시한, 이윤엽 작가의 작품이라고 설명해 주었다. 기사의 이미지가 바로 그 작품이다. 해당 작품 말고도 우측 하단에 노란 꽃이 예쁘게 그려진 ‘질라라비 훨훨’ 문구 현수막이 사무실 외벽에 걸려 있기도 했고, 공장 지부 내 아스팔트 바닥 일부분이 밝은 원색 페인트와 형광색 테이프로 꾸며져 있기도 했다. 가까이 다가가서 보니 형광색 테이프는 ‘일본기업 니또는 고용승계 보장하라’는 문구였다. 페인트는 투쟁하는 옵티칼 동지들의 모습을 실루엣 테두리만 따서 바닥에 옮겨 그린 것인 듯했다. 밝은 원색 페인트는 카메라를 들고 있는 동지의 모습, 웅크리고 앉은 동지의 모습, 서로 어깨동무를 하고 있는 세 명의 동지의 모습 등을 그리고 있었다. 모두 뜻밖에도 아름다운 이미지들이었다. 변화는 건물 바깥에만 그치지 않았다. 노조 건물 내부로 들어서자마자 이전에는 없었던 빵과장미의 응원 문구가 벽에 알록달록하게 붙어 있는 것이 보였다. 문구를 읽어 나가면서 사무실 내부로 들어서자 이전에 보았던 사무실 풍경이 다시 한번 보였다. 하지만 두 번째 와서야 새삼스럽게 눈에 보이는 것들이 있었다. 그새 새로 만들어진 것인지 원래도 있었던 건지는 모르겠지만, 연한 초록빛 무늬가 들어간 미색의 천 위에 빨간 원단으로 ‘공장의 주인은 노동자다’라는 문구가 바느질된 퀼트 작품이 사무실 창문 옆에 걸려 있었다. 화이트보드 뒤편에는 캘리그라피로 ‘당신의 오늘을 응원합니다’ 등의 문장이 써진 종이가 이런저런 잎사귀나 나비 그림과 함께 예쁘게 장식되어 있었다. 나는 사무실 창가에 다가갔다가 거기에 비치된 간단한 장난감들을 보았다. 하나는 링을 던져 고리에 거는 방식으로 노는 장난감이었고 하나는 골프공만 한 작은 플라스틱 공을 던져 림에 통과시키면 반 바퀴 간격으로 낙차를 두고 설치된 미끄럼틀을 따라 공이 툭 툭 툭 떨어지면서 내려오는 장난감이었다. 나는 그 장난감의 공을 집어 세 번 정도 림에 넣어, 공이 미끄럼틀을 따라 툭 툭 툭 소리 내어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 어떻게 보면 이것들은 모두 사소하기 짝이 없는 것들이다. 후기 기사로 쓰기에는 지나치게 하찮고 무의미한 오브제들만 쭉 나열한 것처럼 읽힐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멀리서, 투쟁하지 않는 자들의 입장에서, 자본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노동자들만큼 하찮고 무의미한 존재가 또 있는가? 나에게 투쟁과 아름다움은 그다지 멀리 떨어져 있는 개념이 아니다. 다른 사람들이라면 잊고 무심하게 흘려보냈을 경험을 내 안에 차곡차곡 쌓고 잊지 않는 것. 그것은 아름다움과 투쟁이 모두 공통적으로 가진 특성이 아닌가. 투쟁하는 한국옵티칼하이테크지회 조합원을 상징하는 그림자에 알록달록한 학이 놓여있다. 그 앞에서 한국옵티칼하이테크지회 이지영 조합원이 포즈를 취하고 있다. 1박2일 투쟁문화제가 진행된 첫째 날인 10월 6일 금요일은 택시 노동자 방영환 열사께서 영면에 든 당일이기도 했다. 나는 바쁜 일정 탓에 그날 아침에 인터넷에서 소식을 보곤 겨우 10초 남짓한 시간만큼만 관심을 할애했다. 21세기에 이러한 일이 일어난다는 사실에 입이 쓰긴 했지만 그 이상 무언가를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내가 아직 투쟁 경험이 부족하기에 당위적인 추모 외의 감상을 느낄 능력도 없었고, 당장 일어나자마자 번개같이 씻고 약속한 대로 동지들을 만나러 가기에 바빴다. 그러나 투쟁문화제의 첫 번째 발언자로 나선 민주노총 경북지역본부 김태영 본부장께서는 곧바로 방영환 열사의 소식을 거론했다. 내가 그날 아침 무심하게 흘려보냈던 소식이 흘려보내선 안 되는 이야기, 기억해야만 하는 이야기로 돌아온 순간이었다. 방영환 열사의 이름이 거론되는 순간 나는 내 가슴속에 들어 있던 비석처럼 견고한 무관심을 보았고, 그 아득한 차가움에 살짝 몸을 떨었다. 아무리 투쟁에 결합하기 위해서였다지만 그렇게 쉽게 그 소식을 넘겨 버렸다는 사실이 새삼스럽게 두려웠다. 날씨는 냉랭했고, 마음은 쉽게 식었다. 투쟁의 현장에 오기까지 했는데도 다른 현장의 소식에 대해서는 이토록 간단하게 무관심을 내세웠다니? 그러나 김태영 본부장을 비롯하여 다른 동지들은 그 소식을 잊지 않고 나에게, 다른 동지들에게 재차 부고를 알렸다. 그리고 우리가 그 죽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다시금 일깨웠다. 투쟁문화제가 한창 진행되고 있을 때, 나는 후드 집업 하나로만 버티며 추위에 몸을 둥글게 말았다가 펴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그러자 옆에 계시던 동지께서 그런 나를 눈여겨보시곤 조끼와 푸른 폴라티를 건네주셨다. 그러면서 괜찮냐고, 머리칼도 이렇게 차갑게 식었는데 계속 바깥에 있어도 되는 거냐고 말씀하셨다. 달리 드릴 말씀이 없어 감사하다는 말과 괜찮다는 말만 번갈아 주워섬겼지만 그 순간 나는 모종의 깊은 신뢰가 마음을 스치는 것을 느꼈다. 발언을 통해서 방영환 열사의 이름을 재차 일깨우는 것도 나에게 옷을 나눠 주는 것도 모두 나 자신이 아니라 다른 동지가 나에게 해 준 일이었다. 내가 잊어도, 내가 소홀해져도 동지들은 그렇게 되지 않는다. 혼자서는 개인적인 흥망성쇠를 볼지라도 연대한다면 구호대로다. “단결하는 노동자는 반드시 승리한다.” 문화제에서 벌어지는 몸짓패와 노래패의 퍼포먼스는 단순히 개인이 아니라 이 공간에 있는 모두를 대상으로, 감각과 기억을 공유하기 위한 것이고 그렇기에 언제나 유의미하고 아름답다. 으레 유튜브 등지에서 연예인이나 프로들의 공연을 보면서는 저게 그렇게까지 열광할 일인가, 생각하곤 했지만 투쟁문화제의 공연들에 대해서는 단 한 번도 그런 의혹을 품은 적이 없다. 현대 사회에서 순식간에 잊히는 부고와 비보를 간직하고 연대와 주체의 감각을 촉발하려는 시도에 대해서 가치를 의심할 여지는 없다. 앞에서 쭉 거론한 사소하고 하찮은 소품들을 비롯해 몸짓패, 노래패의 퍼포먼스들은 결국 무언가를 잊지 않고 조금이라도 더 선명하게 간직하려는 시도고 그것은 곧 아름다움이다. 구태를 떨쳐 일어서고 주체를 일깨우는 것만큼 예술적이고 투쟁적인 일은 없다. 그날 문화제에서 내 마음속에 가장 깊게 박힌 한 마디는 「투쟁을 멈추지 않으리」의 “우리가 잃을 것은 비참한 어제의 날들일 뿐”이라는 구절이었다. 그렇다. 투쟁으로써 잃을 것은 비참과 망각뿐이고 얻을 것은 기억과 영혼이다. 문화제 발언 자리에서 옵티칼하이테크 투쟁 당사자인 소현숙 동지는 설움에 발언을 채 잇지 못하고 연거푸 중단하면서도, 떨리는 목소리로 근무 당시 옵티칼하이테크가 내세웠던 회사 정신을 이야기했다. 다른 무엇보다 사람이 소중하다고, 우리는 사람을 소중하게 생각한다고. 그런데 회사가 했던 그 말이 다 거짓말이었다고. 사측은 자본 특유의 허위를 내세웠지만 듣는 노동자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허위를 진실로 믿고 받아들였고 그 배반에 상처받아 지금의 투쟁 현장까지 왔다. 자본주의가 아무리 세계를 은폐하며 인간성을 말살하려 시도하더라도 사람의 본성은 잊지 않고 기억한다. 자본의 허위를 진심으로 받아들이고 살아 나가다가 결국에는 자본 이상의 세계로 나아가게 된다. 이제까지 무수한 사람들이 그랬고, 옵티칼하이테크의 사람들이 그렇고, 앞으로도 미래의 많은 사람들이 그럴 것처럼. 인간이 인간인 이상, 자본주의는 결코 인간의 의지를 감당하지 못하고 종국에는 패배할 것이다. 「투쟁을 멈추지 않으리」의 마지막 가사대로 “나의 피, 피 끓는 나의 영혼은 투쟁을 멈추지 않”는다.2023-10-12 | 조회 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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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2023 청년학생 노동해방 순회투쟁단을 다녀오고 나서[편집자 주] 지난 8월 23일~25일 2박 3일간 여름방학을 맞이하여 ‘2023 청년학생 노동해방 순회투쟁단’ 활동이 진행되었다. 위기의 시대에 세상을 바꾸는 노학연대를 실천하기 위해 다양한 학생들이 여러 지역과 사업장을 방문하고 함께 투쟁하는 시간이었다. 본 글은 순회투쟁단에 참가했던 한 동지의 활동 후기이다. 글을 시작하기에 앞서, 나는 이번 순회투쟁단이 처음으로 경험한 현장이었다는 사실부터 밝혀야 할 것 같다. 순회투쟁단의 구호인 “세상을 바꾸는 노학연대”가 제시하고 있는 노학연대뿐만 아니라, 환경 운동이나 여성 운동, 성소수자 운동까지 모조리 포함해서 나는 이제까지 어떤 현장에도 참여한 적이 없었다. 촛불시위나 강남역 여성살인사건 등에는 연대했지만 그때는 거의 지나가는 행인에 불과했고, 지금과 같은 의식적인 자각과 참여가 없었기 때문에 나에게는 이번 경험이 처음으로 제대로 실천한 ‘참여’였다. 소식뿐일지언정 기사라도 열심히 찾아 읽고 있으니 아주 무지하지는 않을 거라는, 어느 정도 간접적인 경험은 되어 있는 상태일 거라는 스스로의 판단은 착각이었다. 이번 순회투쟁단에 참여하면서 나는 비로소 운동의 당위성과 의미를 체감할 수 있었다. 나는 여태껏 수도권 내에서만 자랐고 아직 취업 같은 문제와도 인연이 없는 대학생 1학년이기에, 부끄럽게도 일자리가 무엇인지 제대로 실감하지도 못했고 해고와 이직에 대해서 쉽게만 생각하고 있었다. 복직 투쟁 등에 있어서 노동자 동지들에 대한 막연한 지지는 있었지만 왜 굳이 그렇게까지 하는가 하는 의문이 마음 한 켠에 늘 있었다. 모두가 알다시피 서울에는 유동성이 넘치고, 열악할지언정 일자리 자체는 널렸다. 그런 환경 속에서만 평생을 지내다 보니 해고자 동지들이 마땅한 수입원조차 없이 복직 투쟁에 임하는 결의의 전제가 짐작이 가지 않았다. 그 일자리를 그 정도로, 일생의 일정 기간을 통째로 갈아넣어 투쟁하면서까지 지키고 싶은가. 그걸 납득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이번 순회투쟁단을 통해서 방문하게 된 현장은 단순한 일자리 그 이상이었다. 특히 한국옵티칼하이테크 투쟁현장에서 나는 한때 공장에 수많은 사람들이 살았음을, 그저 노동하고 임금을 받는 것 이상으로 이곳을 삶의 터전으로 삼아 거주해 왔음을 깨달았다. 화재로 훼손된 공장 현장에는 여전히 화재 이전 업무 담당자들의 성함과 연락처가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공장은 단순한 일자리가 아니라 기숙사가 존재하는 생활의 터전이었고, 그곳에서 투쟁하는 동지들 다수는 10여 년 이상을 공장에서 일하며 공장과 함께 성장하고 발전해 온 직원들이었다. 그들 중에는 공장 건물이 세워지기도 전에 채용되어 십수 년을 노동해 온 동지도 있었다. 전국 방방곡곡을 누비는 순회투쟁단의 동선에서 나는 이제까지 서울이라는 공간이 유동성으로 은폐해 온 각종 외주화와 산업의 실태를 맞닥뜨렸다. 건물은 물론이고 식사와 조경, 도시 구성까지 무엇 하나 새롭지 않은 것이 없었고 모든 것이 의미 있게 다가왔다. 성서공단노조의 사무실에서 만난 이주노동자 조합원들 또한 그랬다. 서울의 길가에서 만나는 외국인들은 관광객으로만 보였지만 노동의 현장에서 그들은 우리 사회를 이루는 구성원이었고 노동조합의 공식적인 일원이었다. 어쩌면 나는 이제까지 그들의 노동자 정체성에 대해서 무의식적으로 외면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들을 막상 노조 사무실에서 동지로서 맞닥뜨리고 나니, 그들에게도 나름의 이해관계와 요구사항이 있다는 것을, 단순히 ‘농촌에서 착취당하다 죽는 이주노동자’ 기사 보도 이상으로 그들이 살아 있고 활동하고 있으며 환경을 개선할 수 있는 실체이며 주체임을 감각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이어진 울산 버스노동자 투쟁 현장에서도 비슷한 충격이 이어졌다. 민주버스본부 울산지부의 집중집회는 꽃바위 차고지에서 이루어졌는데, 순회투쟁단이 그곳에 방문하였을 당시 차고지 정류장에는 교복 차림의 학생들이 저들끼리 신나게 떠들며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학생들의 웃음소리와 집중집회의 선전전 발언이 한 공간에 공존하고 있었다. 일찍이 겪은 적 없는 현장이었다. 수도권 버스들의 차고지는 멀리 인적 드문 단지에 숨겨져 있곤 했고, 언제 가든 조용했다. 나는 종종 버스를 타고 차고지까지 쭉 가 보곤 하는 취미가 있어 그곳들에 자주 들렀는데도 이런 활기를 느낀 적은 없었다. 왜 내가 이전까지 갔던 차고지들은 그토록 조용했을까? 혹은 ‘조용해야만’ 했을까? 내가 주로 가곤 했던, 신성교하차고지의 주변에는 고가도로의 소음방지벽이 차갑고 길게 늘어서 있고 갈대와 잡초들만 무성하게 자라 있었다. 그것이 바로 어떤 외주화의 상징이었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자본이 낳는 정적과 공백이었을 수도 있음을 이제 와서 돌이켜본다. 차들이 매섭게 지나다니고, 모두가 바쁘게 퇴근하는 사거리에서 유일하게 색채를 띤 것은 투쟁하는 노동자들의 구호와 연설뿐이었다. 현대중공업 선전전에서도, 경동도시가스 노동자들의 출근선전전에서도 그랬다. 나는 현대중공업 퇴근선전전에서 피켓을 들고 가만히 서 있다가, 퇴근하는 노동자들이 이쪽을 힐끔거리시는 것을 느끼고 간간이 손을 흔들거나 손으로 브이자 모양을 그려 보이거나 하고는 했다. 그러자 신호만 보고 앞만 달리던 노동자들과 행인들도 한 번씩 나를 쳐다보는 것이 느껴졌다. 그때 비로소 나도 저 사람들도 살아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정의로운에너지전환을위한태안화력노동자모임’(정태모)과의 간담회에서도 화력발전소의 노동자인 동시에 기후정의운동에 연대하려는 동지들의 주체적인 의견 표명을 들으며 비슷한 감상을 느꼈다. 노동자들이야말로 살아 있었고, 자본이야말로 죽어 있었다. 현대중공업 회사 건물은 노동자들의 퇴근 행렬이 멈추고 인적이 끊겼을 때면 거대한 콘크리트 구조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노래하고 말하고 소리치는 것은 노동자들이었다. 노동자들은 끊임없이 민중가요를 부르고 춤을 추고 발언을 하고 요구를 하며 생존하고 투쟁했다. 자본은 계속해서 침묵할 뿐이었다. 그럼에도 국가는 어째서 늘 자본에게만 협조하는가? 구미 한국옵티칼하이테크 공장 뒤편의 펜스는 사측에서 공장을 철거하고자 장비 반입을 시도한 탓에 특정 부분만 늘어져 안쪽을 향해 누워 있었다. 그러나 구미시는 자본의 폭력을 말리긴커녕 이러한 현장에 경찰까지 파견하며 노동자 탄압에 나섰다. 노동자들의 요구가 그렇게 행정력까지 동원해서 억압해야 할 것이었나? 노동자 동지들은 반사회적인 행동은커녕 다시 일상으로 복귀하기 위해 투쟁하고 있었다. 노동자들은 스스로 노동하겠다 말하고 있는데, 오히려 공권력 쪽에서 선제적으로 폭력을 휘두르며 노동자들을 탄압하고 있었다. 순회투쟁단이 다녀가고 며칠 뒤 구미시 측에서는 한국 옵티칼하이테크지회 건물의 수도 공급을 끊었다. 이것이 자본과 정부의 현 주소다. 노동자라는 계급이 국가를 초월하듯, 자본 또한 국가를 초월하고 결탁한다. 한국 정부는 외국 자본의 무책임한 철수와 노동자 탄압을 제지하긴커녕 그들에게 협조했다. 노동자들의 문제 제기에 공감하고 공장 지역과 노동자들을 보호할 방편을 제도적으로 마련해 주려는 움직임 따위는 없었다. 국가라는 이데올로기와 자본주의는 서로 공모하며 노동자들을 착취했다. 나는 순회투쟁단 참가 이후, 순회를 조직한 주최단체인 학생사회주의자연대에 가입했다. 이제까지 막연한 두려움과 단편적인 이미지만으로 거부해 왔던 참여와 연대가, 순회투쟁 일정을 소화하면서 더이상은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초청으로서 내 앞에 나타났던 까닭이다. 순회투쟁단에서 만난 노동자 동지들은 노동자라는 하나의 공통점과 그보다 훨씬 많은 수십, 수백 개의 차이점을 갖고서도 함께 투쟁하고 연대하며 서로를 동지라고 부르고 있었다. 학생이라는 존재는 아직 사회에 직접적으로 뛰어들지 않은 유보적인 신분인 동시에 언젠가는 반드시 사회 내에서 무언가가 될 것을 요구받는 신분이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바로, 내가 학생인 이 순간이야말로 노동자들과 연대하고 투쟁에 나설 적기라고, 나는 그렇게 믿는다. [출처] 2023 청년학생 노동해방 순회투쟁단을 다녀오고 나서2023-10-10 | 조회 5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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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학생운동의 정치와 전략 다시 쓰기”, 학생운동의 새로운 돌파구를 모색하다지난 8월 12일, 각자 캠퍼스에서 활동을 모색해오던 학생운동가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사회주의를향한전진 주최의 정치캠프 1일차 “학생운동의 정치와 전략 다시 쓰기” 세션을 통해서였다. 발제자로는 조형우 (사회주의를향한전진 학생위원회), 토론자로는 김다희 (고려대 소수자인권위원회), 이은세 (비정규직없는서울대만들기공동행동) 활동가가 참여해 학생운동의 위기를 진단하고 대응책을 제안했다. 참여 활동가들이 가장 먼저 공통의 문제점으로 꼽은 것은 조직의 재생산 비활성화였다. 조형우 활동가는 “특히 2010년대 후반을 잠식했던 각종 백래시와 청년층의 반동적 정서, 이어진 코로나19로 인한 학생사회의 단절은 학생운동의 위기를 더욱 강화하고 있다”며 코로나19가 조성한 비대면/비집합 문화가 학생운동의 축소를 더욱 가속화했다는 점을 지적했다. 더 이상 코로나 이전의 세계는 없다는 유명한 문구가 증명하듯 코로나19 유행으로 대학가 역시 큰 변화를 맞닥뜨리게 된 것이 사실이다. 우선 완전 비대면 시기였던 20~22학번과 비교적 자유로운 거취를 허용받은 23학번 사이를 이을 활동가층이 무너진 탓에, 대부분의 학내 조직은 고학번이 졸업까지 유예해가며 막 운동을 시작한 저학번 활동가에게 인수인계해야 하는 상황에 부닥친 것으로 드러났다. 이마저도 고학번 운동가들이 졸업을 택한 경우 이런 형식의 유지조차 어려워 그대로 사장된 조직 또한 많았다. 마스크 착용 의무화와 공공장소 비대면이 해제된 2023년 상반기에 들어 삼엄한 분위기는 완화되었을지언정, 학내 운동단위 가입에 대한 인식은 여전히 코로나 이전과 상반된 채라는 것 역시 문제였다. 취업 스펙 쌓기에 도움을 나누는 스터디형 동아리에 대한 학생들의 선호도는 훨씬 늘어났고, 구직활동 시 전면에 내세우기 어려운 운동권 동아리/학회의 가입률은 현저히 낮아졌다. 참여자들은 이러한 학내 사회에서의 운동조직 고립이 각 조직들의 목표를, 투쟁을 전개하기보다 단순히 조직 보존으로 바꾸게 했다고 입을 모았다. 뒤따라 문제로 제기된 것은 역시 비대면 시기 이후 더욱 강화된 학생사회 내 백래시 문화였다. 오프라인 공간에서 얼굴을 맞대 의견을 교류할 기회가 적어지자 학생들은 자연스레 온라인으로 거처를 옮겼다. 간단한 재학 정보만 입력하면 누구나 게시글을 기고할 수 있는 에브리타임 (일명 에타) 등의 어플이 학생사회의 공론장을 잠식하게 되었다. 어디서나 필요한 것을 질문할 수 있다는 점, 익명이기 때문에 실제 오프라인에 비해 부담감 없이 대화를 나눌 수 있다는 점은 온라인 교류의 장점이었지만, 반대로 이 장점들은 혐오의 간편한 전시라는 커다란 문제점을 캠퍼스 사회에 끌고 왔다. 언제 어디서 누구나 쓸 수 있기 때문에, 오프라인 공간에서라면 큰 조명을 받지 못했을 혐오 여론이 금세 학생사회의 주류 의견으로 탈바꿈되는 현상도 일어났다. 학생운동가들의 신상이 온라인상에 노출되거나 심각한 인신공격으로 이어지는 경우에도 학생운동가들은 발 빠른 대처를 하기 어려웠다. 일단 차별과 혐오를 내세운 글이 ‘핫 게시판’으로 올라가고 나면 하루 종일 대표 게시물로 지정되어 전교 학생에게 보이는 데다, 단시간에 수많은 익명 댓글이 달리는 구조상 개인이 다수와 상대해야 하는 상황이 되었기 때문이다. 어떻게 운영되는지조차 알 수 없는 에브리타임의 불분명한 신고 방식과 검열 역시 한몫 거들었다. 차별과 혐오를 조장하는 게시물은 신고가 누적되어도 존치되지만, 학생운동 관련 게시물은 검열 시스템에 의해 삭제되거나 계정 정지를 당하는 일이 반복되고 있다. 결국 학내 조직에는 온오프라인을 막론한 혐오를 ‘견딘’ 자와 그러지 못해 ‘떠난’ 자의 그림자 두 가지만 남게 되었다. 그러나 애써 폭력을 견디고 남은 활동가 역시 번아웃과 여러 심리적 어려움 같은 고난에 시달리게 된 것은 매한가지였다. 하지만 이러한 고난을 타개할 방안 역시 이날 세션 속에서 쏟아져 나왔다. 김다희 활동가는 “단절되지 않고 흩어져 있는 학생 단체가 네트워크를 구축하여 지속적으로 행동해야 한다”며 조직의 경계 없는 캠퍼스 내 연대체를 건설할 것을 제안했다. 학생운동에서 대두되는 문제점이 인력 부족인 만큼, 서로의 투쟁에 힘을 보태 “인력 부족 문제를 보완하거나 고민을 나눌 자리”를 마련하자는 것이었다. 김다희 활동가는 운동 네트워크 구축이 단발적인 친목 다지기에 그쳐선 안 된다는 점 또한 명시하며 “집회나 행진에 단발적으로 참여하는 것에서 더 나아가 후속 사업을 제안 및 기획”하는 등 여러 실질적 투쟁으로까지 이어질 것을 강조했다. 이어 조형우 활동가는 보다 첨예한 정치적 실천을 제안했다. 그간 여러 학내 조직이 대중적 여론을 이유로 정치성을 약화하며 활동했던 것과 달리, 오히려 조직이 지향하는 정치성을 분명히 보여주고 그 방향에 공감하는 이들과 함께 실천할 때 재생산의 활로를 찾을 수 있다는 주장이었다. 앞서 차별과 혐오로 점철된 에브리타임을 언급하며 “혐오 세력의 위세에 눌려 있어서 가시화되지는 않을 뿐, 다수는 아니더라도 적지 않은 우리의 지지자들 역시 분명히 존재한다” 밝힌 조형우 활동가는 눈에 띄지 않는 지지자들을 찾아내기 위해 “더욱 당당하고 과감하게 활동할 필요가 있다”는 뜻을 밝혔다. 또 거의 사장 상태에 가까운 노학연대 활동에 대해서도 지금 같은 시기일수록 ‘계급적 노학연대’에 대한 질문을 던져 학생운동이 주체적으로 노동자들과의 연대에 나설 것을 제안했다. 근래 학생운동이 유례없는 위기에 직면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모든 위기는 위기 자신을 파괴할 하나의 문을 함께 가지고 태어난다. 물론 그 문을 무엇으로 열지는 온전히 현시기 학생운동의 몫이 될 것이다. 날카로운 정치성의 부각, 캠퍼스 안팎의 연대체 구성 등 어떤 실천이든 지금 당장 부딪히는 것이 절박하다. 여러 고민과 투쟁이 모이게 된다면, 현 국면의 학생운동도 반드시 위기를 넘어 “학생운동 리부트”와 변혁의 시대로 나아갈 것이다.2023-09-05 | 조회 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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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기] 끔찍한 위기와 전쟁의 시대, 이제는 뛰쳐나갈 때!지난 2월 15일 오후 7시 사회주의를향한전진 주최 “자본주의 시대전환 : 다시 위기·전쟁·혁명의 시대로 나아가는 세계 자본주의” 강연이 진행되었다. 강사로는 양준석 전진 국제연대위원장이 나섰다. 지난 2월 15일, 양준석 전진 국제연대위원장이 '다시 위기, 전쟁, 혁명의 시대로 나아가는 세계 자본주의'를 강연했다. 이날 강연은 지난 30여 년 동안 세계 자본주의의 ‘상대적 안정과 평화’를 가능케 한 ‘세계화’와 ‘금융화’가 그 모순과 한계로 작동하지 않게 되며, 자본주의가 무너져가는 새 시대로 진입하고 있음을 주제로 하였다. 더하여, 그러한 새 시대가 전쟁과 위기의 시대이지만, 동시에 혁명의 시대로의 전환이 가능함도 볼 수 있었다. 그러한 ‘시대’들을 보여주기 위하여, 지난 300여년간의 자본주의 역사 전체의 변화와 그 시대 구분의 요인들이 체계적으로 제시되었다. 강연을 들으며, 단순한 느낌으로만 체감하고 있던, 1930년대와 같은 전쟁과 위기의 시대가 실제로 되돌아왔다는 것을 명확한 수치와 논리를 통해 이해할 수 있었다. 모순이 가득한 경제상황, 강대국들의 패권대결과 재무장, 군비증강, 전쟁… 이들은 새 시대가 열리고 있음을 보여주는 서막과도 같은 것이었다. 또한, 이러한 사항을 자본주의 역사 전반에 대한 폭넓고도 정밀한 내용과 함께 접하며 더욱 명료하게 이해할 수 있었다. 한마디로, 노동자계급의 논리와 과학을 전달받게 된 것이다. 특히, “그렇다면 학생으로서, 이러한 상황에서의 역할은 무엇인가?”하는 고민을 깊이 할 수 있었다. 학생은 변혁의 주체는 아닐지라도 과학을 제공받고 또 제공하며, 열렬히 논쟁하고 투쟁할 수 있는 존재이다. 학생 사회, 나아가 사회 전체에 토론과 설득으로 노동자계급의 과학을 제공하는 것이 학생운동의 임무라고 생각한다. 그러한 학생의 역할에 걸맞게, 정말 귀중한 노동자계급의 ‘과학’을 제공해 주는 강연이었다. 이에 입각하여 더욱 굳건하며 건설적인 토론과 설득이 가능해진 것이다. 더욱 확고한 과학을, 더욱 넓게 제시해 보일 수 있게 된 것이다. 반복되어 이전보다도 더욱 끔찍한 형태로 나타나게 될지도 모르는 위기·전쟁의 시대는 정말 두려운 법이다. 이윤율은 계속 경향적으로 저하해 왔고, 착취할 곳과 수탈할 곳은 계속해서 줄어들어 왔다. 자본은 스스로의 모순에 깊이 빠졌다. 과거와는 비교할 수 없는, 모순의 대폭발이 머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러한 위기가, 현재진행형인 탓에, 그 속에서 관찰하고 있는 오늘날의 세대에 있어서는 잘 드러나지 않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마치 뜨거워지는 냄비 속 개구리처럼 말이다. 이제는 이러한 문제를 깨닫고, 끓어오르는 냄비를 뒤엎고, 뛰쳐나와야 할 때이다. 맑스는 “역사는 반복된다, 한 번은 비극으로, 한 번은 희극으로”라고 말했었다. 과거 가장 어두웠던 시기 속, 혁명의 불길은 가장 크게 타올랐다. 그럼에도, 그러한 운동들은 결과적으로 퇴보하고 실패하는 비극의 역사가 되고 말았다. 반복될 역사는 또 한 번의 실패로 점철된 우스꽝스러운 희극이 아니어야 한다. 이전 시기의 교훈을 바탕으로, 모순의 극대화로 더욱 어두워지는 이 시기 속에서 어둠을 뚫고 붉게, 아름답게 타오르는 해방의 미래로 나아가는, 모두 함께 써 나가는 ‘서사’의 역사가 될 수 있도록 노력하여야 할 것이다. ※편집자 주: 공개강연회는 아래 유튜브 영상을 통해 다시 볼 수 있다.2023-02-28 | 조회 8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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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위원회 기획연재 - 노동자의 삶과 철학 3] 능력(경쟁)주의, 어떻게 넘어설 수 있을까?소위 ‘인국공 사태’라고 일컬어진 인천국제공항 비정규직 정규직화와 관련된 논쟁을 기점으로 ‘공정성’을 기치로 내세운 능력주의·경쟁주의 담론이 오랫동안 한국 사회를 강타했다. 국민건강보험공단 고객센터 노동자 직접고용 투쟁에서 나타난 정규직의 격렬한 반발에서 시작해, 능력주의를 전면에 내세운 이준석의 국민의힘 대표 당선과 차별과 혐오를 앞세운 윤석열 정부 출범까지의 기간 동안 능력주의·경쟁주의 담론은 말 그대로 절정에 달했었다. 윤석열 정부 출범 이후 지배계급의 이전투구로 인해 우익 포퓰리즘의 형편없는 실체가 드러나고 계급투쟁에 대한 이데올로기적 공격 양태가 변화하면서 능력주의 이데올로기의 사회적 파급력이 다소 약화된 것이 사실이긴 하다. 그렇지만 현재 노동자와 청년학생 사이에 뿌리 깊게 자리 잡은 능력주의 이데올로기가 계급적 단결과 운동의 전망을 열어내는 데 있어서 강력한 방해요소로 작동하고 있다는 점은 여전히 심각한 문제다. ‘비정규직의 정규직화’ 반대한 능력주의 이데올로기 문재인 정부 동안 인천국제공항에서 건보공단에 이르기까지 ‘공정성’을 앞세운 능력주의 이데올로기는 비정규직 투쟁을 공격하는 강력한 논리로 작동해왔고 이에 대응하기는 쉽지 않은 일이었다. 박근혜 퇴진 촛불을 촉발시킨 정유라 사태에서 등장했던 ‘불공정’이 투쟁하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향하게 되자 많은 이들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도 부르주아 정치권이나 언론뿐만 아니라 민주노조운동 내에서(특히나 청년 정규직 조합원 중심으로) 이런 목소리가 터져 나왔고, 언론과 정치권에서는 능력(경쟁)주의가 청년들의 시대정신인 것처럼 재생산했다. 최근 몇 년간 논쟁이 되었던 능력(경쟁)주의 담론은 사실상 비정규직 정규직화를 반대하기 위한 이데올로기였다. 능력주의·경쟁주의 이데올로기는 흔히 채용 과정에서의 공정을 주장한다. 즉 기존 정규직과는 다른 채용 과정을 거친 비정규직이 정규직 전환되는 것은 공정하지 않은 ‘무임승차’라는 것이다. 채용 시험을 골자로 한 공정성 시비는 교육공무직 법안 때부터 본격화되었다. 2016년 말 교육현장에서의 비정규직 차별 해소를 위해 발의되었던 ‘교육공무직원의 채용 및 처우에 관한 법률안’에 대해 현직 공무원과 교사, 사범대생들과 고시준비생들은 ‘공정하지 않다’는 이유로 강력하게 반대하였다. 발의 배경과 내용은 논의되지 않은 채 ‘정유라 법’이라는 등의 음해만 난무했고, 결국 박근혜 퇴진 촛불이 한창이었던 2016년 12월 해당 법안은 철회된다. 이후에도 기간제교사 등 교육현장 비정규직 노동자에 대한 공격은 더 격화되었고, 2017년 9월 2일 전교조 대의원대회에서는 ‘현재 근무 중인 기간제 교원의 일괄적이고 즉각적인 정규직 전환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다’는 공식 결정을 내린다. 이 전교조 대의원대회의 결정은 민주노조운동에서 비정규직 투쟁에 대한 세력화된 반대를 표출하는 것에 정당성을 제공하게 되었고, 그간 민주노조운동이 그나마 지켜왔던 계급적 연대와 단결의 전통을 한순간에 무너뜨리는 일이었다. 2017년 7월 <공공부문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 가이드라인>과 함께 시작된 문재인 정부의 공공부문 정규직화 정책은 공정성 담론의 장이었다. 인천국제공항, 서울교통공사, 한국도로공사, 국민건강보험공단 등 정규직 전환이 추진되는 곳마다 공정성 논란이 벌어졌다. 많은 노동자와 활동가들은 비정규직 투쟁이 능력주의·경쟁주의 이데올로기에 가로막히고 같은 사업장의 노동자들끼리 분열하고 싸우는 것을 보며 계급적 연대와 단결의 전망을 고민하게 되었다. 그렇다면 능력주의·경쟁주의 이데올로기에 어떻게 맞서야 할까? 청년들의 능력(경쟁)주의 현실에서 능력주의·경쟁주의 이데올로기는 비정규직, 여성, 장애인, 이주민 등 사회적 약자·소수자와 저임금-불안정 노동자들을 공격하는 야만적인 형태로 작동한다. 이러한 야만적인 이데올로기가 사회적 정당성을 확보할 수 있었던 가장 큰 배경에는 능력주의가 청년·학생들을 대변하는 목소리인 것처럼 유포되었던 것이 크다. 소위 ‘공정성’은 정유라 사태와 조국 사태에서 나타난 대학생들의 외침에서 시작되고 사회적으로 주목을 받게 되었다. 대학생들의 사회적 지위가 이전에 비해 달라진 것은 사실이지만, 여전히 대학생들의 주장과 담론은 시대정신인 것처럼 여겨지고 사회에서는 청년의 목소리에 주목한다. 극한의 능력주의 경쟁구조 속에서 내몰리고 있는 지금의 청년들이 능력주의·경쟁주의 이데올로기의 첨병과 같은 존재가 되어버린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하다. 대학에 들어오기까지는 입시 경쟁에 시달려야 했고, 대학에 들어온 이후에도 취업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온갖 노력을 해야만 한다. 이러한 처지에 있는 많은 대학생들은 경쟁 과정에서의 공정함에 극도로 예민할 수밖에 없다. 더욱이 이와 같은 입시 경쟁과 취업 경쟁에서 승리해 정규직 일자리에 진입하는 데 성공한 청년층 정규직 노동자들은 경쟁에서 승리한 것에 대한 보상에 집착하게 된다. 체제가 강요하는 능력주의 경쟁구조로 인해 능력(경쟁)주의 이데올로기에 자연스럽게 체화된 청년들은 ‘경쟁에서 앞선 자와 뒤처진 자를 가르고, 승자는 노력을 보상받아야 하고 패자보다 더 많은 것을 누려야 한다’라고 생각하게 된다. 청년층 정규직 노동자들이 비정규직 정규직화에 반대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즉 자신보다 경쟁에서 뒤처진 이들이 자신과 같은 처우를 누린다는 것에 대한 불만과 그동안의 노력에 대한 억울함이 밑바탕에 깔린 것이다. 여기서 질문해야 하는 지점이 생긴다. 능력주의 경쟁구조 속에서 살아온 청년들이 능력주의·경쟁주의 이데올로기의 화신이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필연인가라는 물음이다. 한동안 청년들 사이에서 ‘헬조선’과 ‘노오력’ 등의 말이 유행했었다. 이러한 단어들은 아무리 노력을 해도 안정적인 삶을 보장받기 힘든 한국 사회의 지옥 같은 능력주의 경쟁구조에 대한 청년 세대의 불만과 비판의식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었다. 즉 능력주의 경쟁구조에 대한 청년들의 인식은 모순적인 성격을 갖고 있다. 한편으로는 경쟁 체제 자체에 대한 신물이 났고 많은 불만을 품고 있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어떻게든 그 경쟁에서 이겨보고자 몸부림친다. 이는 체제의 입장에서 능력주의 경쟁구조가 양날의 검일 수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능력주의 경쟁구조 속에서 청년들이 ‘공정성’ 같은 기치를 내세우며 능력주의·경쟁주의 이데올로기를 앞장서서 실천할 수도 있지만, 반대로 경쟁 시스템 자체에 대한 불만이 폭발해 체제 변혁적인 전망을 택할 수도 있다. ‘공정성’이라는 개념과 ‘헬조선’, ‘노오력’등의 유행어는 그러한 상반된 두 가능성에 대한 청년 세대의 복잡한 인식을 대표한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현재의 청년들은 왜 능력주의 경쟁 체제 자체를 철폐하는 입장이 아니라 능력주의·경쟁주의 이데올로기에 앞장서는 방향을 선택하게 되는지를 고민해 보아야 한다. 이는 우선 전체 사회의 이데올로기적 지형 그리고 현재 운동의 주체적 조건 및 전망의 수준과 연관지어 분석해볼 수 있다. 청년학생사회의 이데올로기 지형과 전체 사회의 이데올로기 지형은 서로 상보적인 성격의 관계를 갖는다. 청년학생층의 이데올로기 지형이 전체 사회의 이데올로기 지형을 좌우하기도 하고, 반대로 전체 사회의 이데올로기 지형에 청년학생층의 이데올로기가 종속되기도 한다. 운동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때로는 청년학생들의 운동이 전체 운동을 선도하는 역할을 하기도 하지만, 많은 경우 청년학생들의 운동의 전망은 해당 시기 전체 계급의 역관계와 운동의 수준에 의해 규정된다. 결국 현재 한국 사회의 이데올로기 지형과 계급투쟁의 상태가 청년학생들이 경쟁구조 자체를 거부하고 과감하게 체제를 변혁하기 위한 투쟁에 나서기 힘들게 만들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비정규직 투쟁에서 전체 민주노조운동이 보여준 모습을 생각해보자. 비정규직 당사자들의 절박한 투쟁에 대해 많은 정규직 노동자들은 조합주의적이거나 반계급적인 행동을 일삼았고, 민주노조 운동 상층의 관료주의 세력은 대사업장 정규직 노조의 눈치를 보는 데 급급했다. 이러한 계급적 단결의 전망을 세워내지 못하는 노동운동의 상태를 이용해 지배계급과 부르주아 언론은 노노갈등 등을 운운하며 능력주의·경쟁주의 이데올로기를 효과적으로 전파하고 저임금-불안정 노동체제를 더욱 공고히 했다. 이렇듯 전체 계급투쟁에서 능력주의·경쟁주의 이데올로기에 맞서는 전망이 부재한 상황 속에서 청년학생들은 체제에 맞서는 길과 체제에 복종하여 살아가는 길 중에 후자를 선택하게 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또 학생운동이 위축된 상황 속에서 반동적인 일부 상위권 대학생들의 목소리가 더욱 큰 힘을 얻게 되었고, 이를 지배계급과 부르주아 언론이 전체 청년들의 공통된 주장인양 전파하면서 능력주의·경쟁주의 이데올로기는 끊임없이 재생산되었다. 이와 함께 능력주의·경쟁주의 이데올로기를 공고하게 만들고 있는 물적 토대의 측면도 중요하다. 능력주의·경쟁주의 이데올로기 핵심은 극심한 일자리 경쟁이다. 턱없이 부족한 양질의 일자리 속에서 더 나은 일자리에 진입하기 위한 경쟁에 몸을 내던져야 하는 취업 준비 청년들의 조건은 경쟁을 강요하는 체제 자체에 맞설 여유와 전망을 갖는 것을 갈수록 어렵게 만들고 있다. 결국 체제를 깨뜨리고 모두가 함께 잘 사는 사회를 만드는 길이 쉽지 않다고 판단한 청년들은 취업 경쟁을 통해 당장 자신이 경제적으로 더 나은 삶을 살 최소한의 가능성에 모든 것을 걸고 있는 상황이다. 민주노조운동의 국가책임일자리 운동으로 능력(경쟁)주의를 뚫고 나가야 능력주의·경쟁주의 이데올로기에 맞서는 투쟁이 만만치 않은 것은 사실이지만, 투쟁의 방법과 나아가야 할 방향 자체는 분명하고 간단하다. 우선 비정규직 투쟁의 확대와 조합주의를 뛰어넘는 계급적 단결과 연대를 통해 능력주의·경쟁주의 이데올로기에 맞서는 투쟁의 전망을 분명히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이는 능력주의·경쟁주의에 맞서는 투쟁을 전개할 최소한의 조건이다. 지금의 청년들은 체제에 맞서는 투쟁의 전망에 자신감과 확신을 갖지 않는 이상 능력주의·경쟁주의 이데올로기에 맞서 투쟁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민주노조운동이 비정규직 철폐 투쟁을 선도하면서 경쟁주의에 맞선 계급단결을 주도하고 청년층의 안정된 일자리를 보장하기 위해 노동시간 단축을 통한 일자리 확대 투쟁을 전개하는 등 다수 청년들을 대변하는 확실한 전망을 보여준다면, 청년들이 지금까지 능력주의 경쟁구조 아래에서 쌓아왔던 불만은 투쟁으로 폭발할 수 있다. 청년층의 대다수가 능력주의·경쟁주의 이데올로기에 맞서 투쟁을 벌이게 된다면 전체 사회의 이데올로기적 지형은 급변하고, 능력주의·경쟁주의 이데올로기는 점차 힘을 잃게 될 것이다. 능력주의·경쟁주의에 맞서기 위한 핵심적인 지점은 노동운동과 청년학생운동이 공통으로 능력주의·경쟁주의 이데올로기의 물적 토대로 작동하는 일자리에 대한 요구를 전면에 내세워야 한다는 것이다. 양질의 일자리가 부족한 상황 속에서 취업 경쟁이 지속된다면, 능력주의·경쟁주의 이데올로기 자체는 여전히 강력하게 작동될 것이다. 이에 맞서기 위해 양질의 일자리는 경쟁의 산물이 아니라 모두가 누려야 할 기본적인 권리이고 이를 국가가 책임지라는 요구가 필요하다. 노동자와 청년학생들이 일자리를 기본권으로 보장하라며 자본과 국가를 상대로 함께 투쟁해서 일자리 경쟁을 없앨 수 있다면 능력주의·경쟁주의 이데올로기의 핵심적인 물적 토대도 무너뜨릴 수 있다. 더욱이 국가책임일자리운동은 취업 준비 청년들이 안정된 삶을 쟁취하고, 자본주의 위기와 산업전환 앞에서 고용불안정에 시달리는 노동자들의 총고용을 쟁취할 수 있는 공통의 핵심적인 요구라는 측면에서 그 중요성과 투쟁의 확장 가능성은 매우 클 것이다. 이러한 능력주의·경쟁주의에 맞선 투쟁은 결국 자본주의 철폐라는 결론으로 갈 수밖에 없고, 또 그래야만 한다. 능력주의·경쟁주의 이데올로기는 자본주의 체제를 움직이는 핵심적인 원동력이다. 이데올로기 투쟁과 일자리 등의 요구를 내건 운동을 통해 능력주의·경쟁주의 이데올로기의 영향력을 제어할 수는 있으나, 자본주의 사회에서 능력주의·경쟁주의 이데올로기를 완전히 뿌리 뽑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렇기에 능력주의·경쟁주의에 맞선 투쟁은 그 자체로 자본주의에 맞선 투쟁이다. 능력주의·경쟁주의 이데올로기에 대한 문제점을 인식하고 이에 맞설 수 있다는 투쟁의 자신감이 생겼다면, 이는 자본주의 체제 자체를 철폐하는 방향으로 발전되어야 한다. 능력주의·경쟁주의 이데올로기에서 해방되어 모두가 함께 잘 사는 사회는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불가능하고 사회주의 사회에서만 가능하다. 이러한 점에서 능력주의·경쟁주의에 맞선 투쟁은 곧 사회주의 사회 건설의 필요성을 제기하는 투쟁이기도 하다. 현시기 능력주의·경쟁주의에 맞선 투쟁이 사회주의 운동의 핵심적인 당면 과제인 이유이다.2023-01-26 | 조회 7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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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지엠 행동하는 노동자들이 공장에 이태원 참사를 애도하는 대자보를 붙였다편집자 주) 지난 11월 2일 한국지엠의 원하청 공동투쟁 연대를 위한 모임인 '한국지엠 행동하는 노동자‘에서 한국지엠 1•2공장•복지관에 이태원 참사 관련 대자보를 수기로 써 붙였습니다. 해당 대자보의 내용을 기사로 전합니다. 침묵이 아니라 참사의 책임을 물어야 한다 10.29 참사가 벌어져 156명이 희생됐다. 이런 와중에 정부는 뭘 했는가? 자신의 책임이 아니라고 거짓말하기에 급급했다. 행정안전부 장관은 진상조사를 요구하는 시민들의 목소리를 "선동성 정치적 주장"이라 매도했다. 그런데 행정안전부 장관 이상민, 경찰청장 윤희근, 용산구청장 박희영이 갑자기 태로를 바꿨다. 사과를 한 것이다. 알고보니 그 이유는 무려 열 한 차례의 시민들의 112 구조 요청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시민들은 참사 발생 4시간 전부터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구조를 호소했다. 그러나 그 현장에 경찰은 출동하지 않았고, 생명과 안전은 방치됐다. 결국 수백 명의 사상자가 발생하는 비극적 참사로 이어졌다. 2014년 세월호에서 희생된 어린 학생들도 구조를 요청했지만 국가는 차가운 바닷속으로 배가 가라앉을 때까지 방치했다. 이번에도 달라진 건 없었다. 이태원의 젊은이들은 구조를 요청했지만 묵살됐고 희생됐다. 정권 지지율만 걱정하는 그들에게 이제 우리는 참사의 책임을 물어야 한다. 참사 책임자 처벌 이태원 골목길 참혹한 현장에서 살려달라 절규하는 희생자들에게 국가는 아무것도 해주지 않았습니다. 밤낮으로 술만 처먹었지 ‘사전준비’도 ‘현장통제’도 ‘비상 시 계획’도 없었습니다. 애도를 강요하는 애도기간 지정과 면피를 위한 ‘쉴드 매뉴얼’ 시전에만 급급해 하고 있습니다. 참사라 부르지 말고 사고라 해라. 희생자라 하지 말고 사망자라 해라. 근조리본에 근조를 쓰지 마라. 이런 해괴망측한 지침만 있고 진정성 있는 사과나 반성은 없습니다. 이미 수많은 희생자가 발생했음에도 이번 참사가 발생하지 않은 것 마냥 안전과 국가의 무한책임을 떠벌리고 있습니다. 장례비 줄 테니 빨리 장례나 치르고 이번 참사는 없었던 일로 하자는 식입니다. 각자도생하라는 말인 것 같습니다. 우리 모두가 살기 위해, 젊은이들이 더 이상 죽지 않는 세상을 위해, 노동자가 안전하게 일할 수 있는 세상을 위해 싸워야 합니다. 우리는 개돼지가 아닙니다. 이태원 참사에 분노해 야합니다. 희생자 분들을 잊지도 말아야 합니다. 이제는 행동해야 합니다. 이태원 참사 희생자분들의 명복을 빌며 잊지 않겠다 다짐합니다! 누군가의 이익을 위해 강요된 슬픔에 내몰리고 싶지 않다 이태원 참사와 관련해서 국민의 안전과 생명을 지켜야 할 책무가 있는 사람의 일성이 국가애도기간 지정이었다. 사과, 책임통감이라는 말 대신 애도기간을 설정한 것은 철저히 집권 세력의 책임 회피를 위한 정치행위였으나, 도리어 참사의 원인을 물으면 정치병 환자라고 몰아세웠다. 축제의 주최가 없다하여도 수년째 수십만의 인파가 몰리는 상황에서 적절한 공권력의 투입으로 동선만 통제했더라면, 일어나지 않았을 참사였고, 국가는 이를 위해 존재하는데, 그 의미를 스스로 부정했다. 그리고 더 최악인 것은 참사 초기, 이유를 막론하고, 사과했어야 하는데 그 누구도 사과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사과에는 책임이 따른다는 사실을 그들은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다 112 신고내역이 공개되고, 여론이 자신들이 원하는 대로 형성되지 않자 그제서야 억지 사과에 이르렀다. 이 참사가 어디서부터 무엇이 왜 잘못되었는지 밝히지 않으면 국민의 생명은 계속 위협받을 것이다. 위정자는 돌을 맞을 때 맞아야 하나 현 집권 세력은 그럴 생각이 없어 보인다. 비정하나, 각자도생의 시대다. 참사로 희생된 이들의 명복을 빈다.2022-11-16 | 조회 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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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C그룹 허영인 회장은 응답하라” - 안전한 일터를 위한 청년들의 외침지난 1일, 양재동 SPC그룹 본사 앞에서 파리바게트 노동자 힘내라 청년공동행동과 학생사회주의자연대(준)을 비롯한 42개 청년·학생단체가 허영인 회장과의 면담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진행했다. 이들은 면담을 통해 허영인 회장에게 SPL 산재사고 진상규명과 책임자처벌은 물론 SPC그룹 모든 작업장에서 △노동자 휴식권·작업중지권 보장 △과로노동 철폐 △노조 할 권리 보장을 요구하겠다고 밝혔다. 세월호부터 이태원까지, 이제 안전할 권리가 생존권 기자회견은 SPL 산재 희생자와 이틀 전 발생한 이태원 참사 희생자를 추모하는 묵념으로 시작했다. 기자회견 참석자를 비롯한 지금의 20대에게 청소년, 청년기는 참사의 연속이다. 이태원의 20대가 세월호 당시의 10대였고, 구의역과 태안화력, SPL과 이태원에서 발생한 참사로 연거푸 또래의 노동자, 시민을 잃었다. 이들에게 일터와 일상의 안전은 있으면 좋은 것이 아니라 이제 생존의 문제가 되었다. 문제는 이윤을 위해 노동자의 안전을 포기한 자본과 안전에 대한 책임을 회피한 국가다. 기자회견에 참석한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에서 활동하는 조건희 활동가는 “5년간 SPL 공장에서 발생한 산재사고는 △2018년 1건 △2019년 6건 △2020년 14건 △2021년 7건 △2022년(1~8월) 10건이며, 이는 기본적인 안전장치와 인력이 보장되지 않아서 발생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이번 SPL 사고에서도 “희생자는 2인 1조 매뉴얼을 보지 못했고 교육받지 못했다. 15kg가량의 중량물을 계속 취급해야 했으며, 속도를 높이기 위해 교반기에 손을 넣는 작업을 해야 했다는 점이 드러났다”고 비판했다. 이들은 주야 맞교대와 같은 SPC의 장시간, 과로 문제도 지적했다. “주야 맞교대를 하는 노동자의 수면시간, 수면의 질, 생체리듬의 혼란, 야간노동으로 인한 호흡기계, 당뇨, 소화기계 등의 질환, 장시간 노동으로 인한 뇌심혈관계질환의 위험성은 이미 알려져 있다”며 “‘끊임없이 굴러가는 쳇바퀴’를 위해, 노동자의 건강과 삶을 갈아 넣는다는 점이, 비유가 아닌 실제 상황이라는 것이 참담하다”고 밝혔다. SPC와 같은 위험한 일터가 나의 직장이 될 수 있다는 막막함도 적지 않다. 성공회대 노학연대모임 가시의 기민형 활동가는 “대학교를 졸업하면 취직을 해야 하는데, SPC의 노동환경을 보면 앞날이 막막하다. SPC 그룹의 산재사고는 일주일에 1번씩 일어난다고 한다. 끼임 사고로 죽은 노동자는 5년간 6명”이라고 밝혔다. 지금 SPC를 안전한 일터로 바꾸지 않으면, 나의 생존권도 지키기 어려운 상황이라는 뜻이다. 안전한 일터와 일상, 우리가 만들자 SPC와 이태원을 비롯한 일련의 참사로, 자본과 국가가 우리의 안전을 책임져주지 않는다는 절망감이 젊은 세대에 확산하고 있다. 그러나 이제는 살아남기 위해서라도 절망만 하고 있을 순 없다는 문제의식도 적지 않다. 우리가 직접 나서서 안전한 일터와 일상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번 기자회견에 주말 포함 불과 사흘 만에 42개 청년·학생단체가 동참한 이유기도 하다. “절망할 바에야 희망을” 현실로 만들어야만 한다. 이들은 특히 안전한 일터를 위해서는 노동자의 현장통제가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위험을 감지했을 때 기계를 멈출 수 있는 작업중지권이 온전히 보장되어야 하고, 위험한 작업방식을 노동자가 바꿀 수 있어야 하며, 과도한 노동시간과 노동량을 노동자가 조절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선 노동자의 조직된 힘이 있어야 하므로 노조 할 권리 또한 보장되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것이 청년들이 허영인을 꼭 만나고자 하는 이유다. 그간의 불매운동과 대자보 작성을 넘어, 안전한 일터와 사회를 만들 힘을 모으자는 것이다. SPC에만 국한된 실천도 아닐 것이다. 안전에 대한 자본과 국가의 책임을 제대로 물을 수 있도록 제대로 된 중대재해기업처벌법을 다시 만들어야 한다. 제2의 김용균과 같은 죽음을 막기 위한 비정규직 철폐, 발전산업의 국유화도 이제 청년 세대의 과제가 될 것이다. 이날 기자회견을 마치고 참석자들은 SPC 허영인 회장에게 면담요청서를 전달했다. 이제 우리가 만나야 할 대상은 허영인만이 아니다. 이태원의 구조 신호를 외면한 경찰, 이태원의 안전은 자기 책임이 아니라는 정부, 노동자의 안전을 이윤과 바꾼 모든 자본과 싸우고 안전한 사회를 함께 요구해야 할 것이다.2022-11-02 | 조회 3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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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로윈 참사의 희생자에겐 죄가 없다할로윈 압사사고 10월 31일 할로윈 데이를 앞두고, 10월 29일 금요일 밤 이태원에서 대규모 압사 사고가 발생했다. 할로윈 행사를 즐기기 위해 이태원에 10만여 명의 인파가 몰렸다. 이태원의 좁은 골목에 사람들이 가득찼다. 2층 테라스에서 내려다 본 이의 증언으로는 “사람들이 걷는 게 아니라 휩쓸려가는 것 같았다”고 한다. 아직 자세한 사고경위는 조사중이나, 유명인을 보기 위해 사람들이 한쪽으로 쏠리면서 인파의 일부가 무너지기 시작했고, 사람들이 도미노처럼 넘어졌다는 이야기가 있다. 바닥에 깔린 사람들은 밀려들어온 인파에 압사당했다. 오전 7시 현재까지 149명이 죽고 76명이 부상을 당했다고 한다. 부상자 가운데 심정지로 병원에 이송된 이들이 많아, 사망자는 더 늘어날 것이라 한다. 죽은 이들은 대부분 20대라 하며, 그 중에서도 키가 작은 여성들이 더 많다고 한다. 아침에 일어나 소식을 듣는 순간 할로윈 파티에 갔을법한 아는 사람들의 얼굴이 머릿속에 스쳐지나갔다. 그들의 인스타그램을 확인해보고, 오늘 어떤 소식을 올린 게 있는지 확인했다. 아직 아무 게시글이 없는 이들은 ‘자느라 그런 거겠지’ 생각하며 그들이 무사하기를 바라고 있다. 10만 명 모일 건 알았지만, 압사사고 대응 계획은 없었다 이렇게 인파가 몰리는 행사라면 정부 차원에서 적절한 인파 통제와 관리가 필요했다. 집회, 시위에는 그렇게 많은 경찰이 나와 통제를 하는데, 왜 정작 이런 행사에 필요한 대중의 안전을 위한 공적 준비는 하지 않았을까? 기사에 따르면 용산구에서는 27일 오후 핼러윈데이 대비 긴급 대책회의를 개최해 방역, 안전사고예방, 청소대책을 논의했다고 한다. 세 업무별로 각각 방역추진반, 행정지원반, 민원대응반으로 나눠 업무를 분장한 것 같은데, 방역추진반은 ‘이태원 일대 방역·소독을 실시, 이태원 일대 식품접객업소 지도점검, 세계음식거리, 클럽거리, 지하철 역사 등 주요 시설물 안전점검’을 하고, 민원대응반은 ‘이태원관광특구 및 문화유통시설 방역관리, 소음 특별점검, 가로정비, 불법 주·정차단속, 이태원 일대 청소대책’를 추진한다고 나와있다. 하지만 ‘안전사고 예방’을 주 목적으로 하는 듯한 ‘행정지원반’의 업무는 ‘‘핼러윈데이’ 대비 종합상황실을 운영’한다는 한 가지 항목밖에 찾아볼 수 없다. 대규모 인파 집결이 예상됨에 따른 안전대응계획 마련에 대한 항목은 찾아볼 수 없었다. 다른 기사에 따르면 경찰 또한 행사 이전에 용산경찰서를 중심으로 대책을 논의했다. 경찰은 금요일 오후부터 일요일까지 매일 10만 명의 사람들이 이태원을 찾을 것이라 예측했다고 한다. 그러나 경찰의 안전대책에는 ‘불법 촬영이나 강제추행, 절도 등의 범죄 가능성에 대비해 200명 이상의 경찰력을 이태원 거리 곳곳에 투입한다’, ‘클럽과 유흥주점 등을 중심으로, 최근 늘고 있는 마약범죄 관련 단속도 강화한다’는 내용은 있었지만 대규모 인파 결집에 따른 압사사고 가능성에 대한 대비책은 없었다. 대규모 집회 시위를 할 때 집회시위의 조직위원회는 안전스태프를 두고 경찰을 대신해 대오를 안내하고 통제하여 안전사고를 대비하고는 한다. 지방자치단체와 경찰은 3년 만에 열리는 행사에 수용가능한 수준을 넘는 수많은 인파가 모일 것임을 충분히 예상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그에 따른 안전관리 대책도 공적으로 계획되고 집행되었어야 했다. 그러나 안전한 행사를 위한 공적인 조정이 필요한 그 순간에 국가는 제 역할을 하지 못했다. 희생자에겐 죄가 없다 뉴스에는 ‘그러게 왜 서양명절을 챙기냐’, ‘귀신놀이 하다 귀신됐다’며 죽은 이들을 조롱하는 댓글들이 달리고 있다. 어떻게 하루 아침에 이 수많은 무고한 사람들이 죽었는데, 그런 조롱을 할 수 있는가? ‘외래명절 할로윈을 기념하러 모인 게 잘못’이라며 ‘할로윈이 문제’라는 주장은 논할 가치도 없다. 전통명절이든 외래명절이든 그게 뭐가 중요한가. 추석 때 인파가 몰려 사고가 나면 애도할 일이고 할로윈에 사고가 나면 희생자의 잘못인가? 사고의 원인을 죽은 사람들의 탓으로 돌리고, 할로윈데이를 즐기려했다는 이유로 그들을 조롱하는 모든 언행에 맞서야 한다. 그들은 놀고 싶었을 뿐이고 인생을 즐기려했을 뿐이고 그것은 잘못도 죄도 아니다. 이태원에 10만에 가까운 인파가 몰린 것은 코로나 이후 더욱 더 불안정하고 불평등해진 현실에 대한 우리 세대의 억눌린 마음이 폭발한 것이기도 하다. 거리두기와 봉쇄조치가 문제라는 말이 아니다. 코로나 위기는 더 낮고 열악한 곳으로 흘러, 불안정한 지위에 있는 청년들을 더욱 사회적으로 고립시켜왔다. 봉쇄되고 고립된 불안정한 청년들을 위해 국가는 무엇을 보장했는가? 단지 코로나뿐만이 아니다. ‘이대로 살 수 없다’라는 대우조선 하청노동자의 절규는 기후정의행진의 구호가 됐고 우리 시대의 일반적 상태를 나타내는 표현이 됐다. 극심한 불평등과 차별 속에 숨막히는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청년들이 축제와 파티로 그 분노와 절망을 잠시나마 잊고싶다는 욕망을 품는 게 무엇이 잘못되었는가? 사람을 만나고 싶고, 축제를 즐기고 싶다는 그 마음은 지극히 정당한 인간의 욕망이다. 그 당연한 욕망을 그저 억누르기만 하는데, 어떻게 축제에 나온 청년들에게 그 잘못을 물을 수 있는가? 나 또한 친구들과 할로윈 파티를 즐기려했다. 며칠 전 친구에게 “우리도 31일 저녁에 이태원 가볼까?”라고 묻기도 했다. 만약 그날 내가 놀러갔다 생각지도 못한 인파에 깔려 죽는다면, 그 죽음은 할로윈이든 뭐든, 숨막히는 이 사회에서 잠시나마 기념일을 맞아 놀고싶다는 마음을 가졌던 내 잘못인가? 최근에 올해 겨울은 코로나 이후 회복된 세상이 올거라 기대하는 이들에게, 에너지위기와 인플레이션, 전쟁이란 형태로 자본주의의 위기가 전면화되는, 참혹한 겨울이 될 가능성이 높다는 얘길 들었었다. 그 겨울의 초입부에, 숨막히고 미래도 보이지 않는 사회 속에서 잠시라도 해방감을 느끼고 싶어 나온 우리 세대의 사람들이 집단으로 죽음을 맞이하는 사건을 접하니, 할로윈에 머리를 식히고 놀고 싶었던 내 마음에 이 세상이 찬물을 들이붓는 것만 같다. 차고 참혹한 겨울 속에서 절망하지 않고 살아남는 방법은 오직 공적 안전관리 체계를 가동하지 못하는 이 무능한 시스템을 갈아엎기 위해 노력하는 길뿐이다. 그리고 죽은 이들을 조롱하고, 놀고싶고 자유를 누리고 싶었던 너무나 정당한 내 세대의 그들에게 잘못을 덮어씌우려는 모든 언행에 맞서야 한다. 최근 나에게 이란의 상황을 전해준 익명의 20대 청년은 ’우리는 자유를 원하고, 예배를 하는 대신 파티를 하고 싶을 뿐이다‘고 얘기했다. 할로윈을 즐기고자 이태원에 간 이들에게 방종의 죄를 묻는 일은 히잡을 벗어던지고 자유를 찾겠다는 여성들에게 총칼을 들이미는 이란 정권과 다르지 않은 행동이다. 이번 참사로 죽은 모든 이들을 애도한다.2022-10-30 | 조회 1,05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