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2023 청년학생 노동해방 순회투쟁단을 다녀오고 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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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라인신문

[기고] 2023 청년학생 노동해방 순회투쟁단을 다녀오고 나서

[편집자 주] 지난 8월 23일~25일 2박 3일간 여름방학을 맞이하여 ‘2023 청년학생 노동해방 순회투쟁단’ 활동이 진행되었다. 위기의 시대에 세상을 바꾸는 노학연대를 실천하기 위해 다양한 학생들이 여러 지역과 사업장을 방문하고 함께 투쟁하는 시간이었다. 본 글은 순회투쟁단에 참가했던 한 동지의 활동 후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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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시작하기에 앞서, 나는 이번 순회투쟁단이 처음으로 경험한 현장이었다는 사실부터 밝혀야 할 것 같다. 순회투쟁단의 구호인 “세상을 바꾸는 노학연대”가 제시하고 있는 노학연대뿐만 아니라, 환경 운동이나 여성 운동, 성소수자 운동까지 모조리 포함해서 나는 이제까지 어떤 현장에도 참여한 적이 없었다. 촛불시위나 강남역 여성살인사건 등에는 연대했지만 그때는 거의 지나가는 행인에 불과했고, 지금과 같은 의식적인 자각과 참여가 없었기 때문에 나에게는 이번 경험이 처음으로 제대로 실천한 ‘참여’였다.

 

소식뿐일지언정 기사라도 열심히 찾아 읽고 있으니 아주 무지하지는 않을 거라는, 어느 정도 간접적인 경험은 되어 있는 상태일 거라는 스스로의 판단은 착각이었다. 이번 순회투쟁단에 참여하면서 나는 비로소 운동의 당위성과 의미를 체감할 수 있었다. 나는 여태껏 수도권 내에서만 자랐고 아직 취업 같은 문제와도 인연이 없는 대학생 1학년이기에, 부끄럽게도 일자리가 무엇인지 제대로 실감하지도 못했고 해고와 이직에 대해서 쉽게만 생각하고 있었다. 복직 투쟁 등에 있어서 노동자 동지들에 대한 막연한 지지는 있었지만 왜 굳이 그렇게까지 하는가 하는 의문이 마음 한 켠에 늘 있었다. 모두가 알다시피 서울에는 유동성이 넘치고, 열악할지언정 일자리 자체는 널렸다. 그런 환경 속에서만 평생을 지내다 보니 해고자 동지들이 마땅한 수입원조차 없이 복직 투쟁에 임하는 결의의 전제가 짐작이 가지 않았다. 그 일자리를 그 정도로, 일생의 일정 기간을 통째로 갈아넣어 투쟁하면서까지 지키고 싶은가. 그걸 납득할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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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번 순회투쟁단을 통해서 방문하게 된 현장은 단순한 일자리 그 이상이었다. 특히 한국옵티칼하이테크 투쟁현장에서 나는 한때 공장에 수많은 사람들이 살았음을, 그저 노동하고 임금을 받는 것 이상으로 이곳을 삶의 터전으로 삼아 거주해 왔음을 깨달았다. 화재로 훼손된 공장 현장에는 여전히 화재 이전 업무 담당자들의 성함과 연락처가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공장은 단순한 일자리가 아니라 기숙사가 존재하는 생활의 터전이었고, 그곳에서 투쟁하는 동지들 다수는 10여 년 이상을 공장에서 일하며 공장과 함께 성장하고 발전해 온 직원들이었다. 그들 중에는 공장 건물이 세워지기도 전에 채용되어 십수 년을 노동해 온 동지도 있었다.

 

전국 방방곡곡을 누비는 순회투쟁단의 동선에서 나는 이제까지 서울이라는 공간이 유동성으로 은폐해 온 각종 외주화와 산업의 실태를 맞닥뜨렸다. 건물은 물론이고 식사와 조경, 도시 구성까지 무엇 하나 새롭지 않은 것이 없었고 모든 것이 의미 있게 다가왔다. 성서공단노조의 사무실에서 만난 이주노동자 조합원들 또한 그랬다. 서울의 길가에서 만나는 외국인들은 관광객으로만 보였지만 노동의 현장에서 그들은 우리 사회를 이루는 구성원이었고 노동조합의 공식적인 일원이었다. 어쩌면 나는 이제까지 그들의 노동자 정체성에 대해서 무의식적으로 외면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들을 막상 노조 사무실에서 동지로서 맞닥뜨리고 나니, 그들에게도 나름의 이해관계와 요구사항이 있다는 것을, 단순히 ‘농촌에서 착취당하다 죽는 이주노동자’ 기사 보도 이상으로 그들이 살아 있고 활동하고 있으며 환경을 개선할 수 있는 실체이며 주체임을 감각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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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진 울산 버스노동자 투쟁 현장에서도 비슷한 충격이 이어졌다. 민주버스본부 울산지부의 집중집회는 꽃바위 차고지에서 이루어졌는데, 순회투쟁단이 그곳에 방문하였을 당시 차고지 정류장에는 교복 차림의 학생들이 저들끼리 신나게 떠들며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학생들의 웃음소리와 집중집회의 선전전 발언이 한 공간에 공존하고 있었다. 일찍이 겪은 적 없는 현장이었다. 수도권 버스들의 차고지는 멀리 인적 드문 단지에 숨겨져 있곤 했고, 언제 가든 조용했다. 나는 종종 버스를 타고 차고지까지 쭉 가 보곤 하는 취미가 있어 그곳들에 자주 들렀는데도 이런 활기를 느낀 적은 없었다. 왜 내가 이전까지 갔던 차고지들은 그토록 조용했을까? 혹은 ‘조용해야만’ 했을까? 내가 주로 가곤 했던, 신성교하차고지의 주변에는 고가도로의 소음방지벽이 차갑고 길게 늘어서 있고 갈대와 잡초들만 무성하게 자라 있었다. 그것이 바로 어떤 외주화의 상징이었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자본이 낳는 정적과 공백이었을 수도 있음을 이제 와서 돌이켜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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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들이 매섭게 지나다니고, 모두가 바쁘게 퇴근하는 사거리에서 유일하게 색채를 띤 것은 투쟁하는 노동자들의 구호와 연설뿐이었다. 현대중공업 선전전에서도, 경동도시가스 노동자들의 출근선전전에서도 그랬다. 나는 현대중공업 퇴근선전전에서 피켓을 들고 가만히 서 있다가, 퇴근하는 노동자들이 이쪽을 힐끔거리시는 것을 느끼고 간간이 손을 흔들거나 손으로 브이자 모양을 그려 보이거나 하고는 했다. 그러자 신호만 보고 앞만 달리던 노동자들과 행인들도 한 번씩 나를 쳐다보는 것이 느껴졌다. 그때 비로소 나도 저 사람들도 살아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정의로운에너지전환을위한태안화력노동자모임’(정태모)과의 간담회에서도 화력발전소의 노동자인 동시에 기후정의운동에 연대하려는 동지들의 주체적인 의견 표명을 들으며 비슷한 감상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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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자들이야말로 살아 있었고, 자본이야말로 죽어 있었다. 현대중공업 회사 건물은 노동자들의 퇴근 행렬이 멈추고 인적이 끊겼을 때면 거대한 콘크리트 구조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노래하고 말하고 소리치는 것은 노동자들이었다. 노동자들은 끊임없이 민중가요를 부르고 춤을 추고 발언을 하고 요구를 하며 생존하고 투쟁했다. 자본은 계속해서 침묵할 뿐이었다. 그럼에도 국가는 어째서 늘 자본에게만 협조하는가?

 

구미 한국옵티칼하이테크 공장 뒤편의 펜스는 사측에서 공장을 철거하고자 장비 반입을 시도한 탓에 특정 부분만 늘어져 안쪽을 향해 누워 있었다. 그러나 구미시는 자본의 폭력을 말리긴커녕 이러한 현장에 경찰까지 파견하며 노동자 탄압에 나섰다. 노동자들의 요구가 그렇게 행정력까지 동원해서 억압해야 할 것이었나? 노동자 동지들은 반사회적인 행동은커녕 다시 일상으로 복귀하기 위해 투쟁하고 있었다. 노동자들은 스스로 노동하겠다 말하고 있는데, 오히려 공권력 쪽에서 선제적으로 폭력을 휘두르며 노동자들을 탄압하고 있었다.

 

순회투쟁단이 다녀가고 며칠 뒤 구미시 측에서는 한국 옵티칼하이테크지회 건물의 수도 공급을 끊었다. 이것이 자본과 정부의 현 주소다. 노동자라는 계급이 국가를 초월하듯, 자본 또한 국가를 초월하고 결탁한다. 한국 정부는 외국 자본의 무책임한 철수와 노동자 탄압을 제지하긴커녕 그들에게 협조했다. 노동자들의 문제 제기에 공감하고 공장 지역과 노동자들을 보호할 방편을 제도적으로 마련해 주려는 움직임 따위는 없었다. 국가라는 이데올로기와 자본주의는 서로 공모하며 노동자들을 착취했다.

 

나는 순회투쟁단 참가 이후, 순회를 조직한 주최단체인 학생사회주의자연대에 가입했다. 이제까지 막연한 두려움과 단편적인 이미지만으로 거부해 왔던 참여와 연대가, 순회투쟁 일정을 소화하면서 더이상은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초청으로서 내 앞에 나타났던 까닭이다. 순회투쟁단에서 만난 노동자 동지들은 노동자라는 하나의 공통점과 그보다 훨씬 많은 수십, 수백 개의 차이점을 갖고서도 함께 투쟁하고 연대하며 서로를 동지라고 부르고 있었다. 학생이라는 존재는 아직 사회에 직접적으로 뛰어들지 않은 유보적인 신분인 동시에 언젠가는 반드시 사회 내에서 무언가가 될 것을 요구받는 신분이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바로, 내가 학생인 이 순간이야말로 노동자들과 연대하고 투쟁에 나설 적기라고, 나는 그렇게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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