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쟁과 아름다움' - 1박2일 한국옵티칼하이테크 투쟁문화제 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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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라인신문

'투쟁과 아름다움' - 1박2일 한국옵티칼하이테크 투쟁문화제 후기

내가 처음으로 옵티칼하이테크 투쟁 현장을 방문했던 것은 지난 8월 말이다. 당시에는 학생사회주의자연대의 도움을 받아 ‘세상을 바꾸는 노학연대’라는 이름으로 옵티칼하이테크 투쟁 현장을 방문해 동지들과 결합하고 소통간담회를 했다. 그때 구미시를 떠날 때만 하더라도 언제 다시 이곳에 올 수 있겠냐는 생각이 들어 아쉬움이 컸다. 그러나 방문할 기회는 생각보다 빠르게 돌아왔다. 옵티칼하이테크 투쟁 현장에서 1박2일 투쟁문화제가 계획되어 있다는 소식을 전달받자마자 나는 반가운 마음으로 곧장 참석 의향을 밝혔다.


약 한 달이 지나 다시 방문하게 된 투쟁 현장은 겉으로 보기에는 크게 달라진 것이 없었다. 구미시와 한국옵티칼하이테크 사측에서 철거를 강행하고자 위협하고 있는 상황인 만큼, 달라진 것이 없다는 말은 서글프지만 좋은 의미일 것이다. 공장은 변함없이 제자리에 서 있었다. 그동안 구미시 측에서 단수를 집행하고 단전 또한 시도하는 등의 악재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옵티칼하이테크 동지들은 환한 낯이었다. 동지들은 그새 몰라보게 쌀쌀해진 날씨에 모자를 벗고, 허연 햇살을 맨얼굴로 맞으며 타지에서 온 동지들을 마중하러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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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엽 작가의 작품 앞에서 김계월 아시아나케이오지부장과 변주현 현대중공업사내하청지회 서진 해고노동자가 함께 포즈를 취했다. 사진=신유아


공장 건물은 달라진 것이 없었지만, 공장의 외견에는 변화가 있었다. 공장 내부로 진입하는 입구 쪽에 이전에는 없던 새로운 그림이 걸려 있었다. 변화가 눈에 띄어 물어보니 동지들이 당일 아침에 막 게시한, 이윤엽 작가의 작품이라고 설명해 주었다. 기사의 이미지가 바로 그 작품이다. 해당 작품 말고도 우측 하단에 노란 꽃이 예쁘게 그려진 ‘질라라비 훨훨’ 문구 현수막이 사무실 외벽에 걸려 있기도 했고, 공장 지부 내 아스팔트 바닥 일부분이 밝은 원색 페인트와 형광색 테이프로 꾸며져 있기도 했다. 가까이 다가가서 보니 형광색 테이프는 ‘일본기업 니또는 고용승계 보장하라’는 문구였다. 페인트는 투쟁하는 옵티칼 동지들의 모습을 실루엣 테두리만 따서 바닥에 옮겨 그린 것인 듯했다. 밝은 원색 페인트는 카메라를 들고 있는 동지의 모습, 웅크리고 앉은 동지의 모습, 서로 어깨동무를 하고 있는 세 명의 동지의 모습 등을 그리고 있었다. 모두 뜻밖에도 아름다운 이미지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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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화는 건물 바깥에만 그치지 않았다. 노조 건물 내부로 들어서자마자 이전에는 없었던 빵과장미의 응원 문구가 벽에 알록달록하게 붙어 있는 것이 보였다. 문구를 읽어 나가면서 사무실 내부로 들어서자 이전에 보았던 사무실 풍경이 다시 한번 보였다. 하지만 두 번째 와서야 새삼스럽게 눈에 보이는 것들이 있었다. 그새 새로 만들어진 것인지 원래도 있었던 건지는 모르겠지만, 연한 초록빛 무늬가 들어간 미색의 천 위에 빨간 원단으로 ‘공장의 주인은 노동자다’라는 문구가 바느질된 퀼트 작품이 사무실 창문 옆에 걸려 있었다. 화이트보드 뒤편에는 캘리그라피로 ‘당신의 오늘을 응원합니다’ 등의 문장이 써진 종이가 이런저런 잎사귀나 나비 그림과 함께 예쁘게 장식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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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사무실 창가에 다가갔다가 거기에 비치된 간단한 장난감들을 보았다. 하나는 링을 던져 고리에 거는 방식으로 노는 장난감이었고 하나는 골프공만 한 작은 플라스틱 공을 던져 림에 통과시키면 반 바퀴 간격으로 낙차를 두고 설치된 미끄럼틀을 따라 공이 툭 툭 툭 떨어지면서 내려오는 장난감이었다. 나는 그 장난감의 공을 집어 세 번 정도 림에 넣어, 공이 미끄럼틀을 따라 툭 툭 툭 소리 내어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

 

어떻게 보면 이것들은 모두 사소하기 짝이 없는 것들이다. 후기 기사로 쓰기에는 지나치게 하찮고 무의미한 오브제들만 쭉 나열한 것처럼 읽힐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멀리서, 투쟁하지 않는 자들의 입장에서, 자본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노동자들만큼 하찮고 무의미한 존재가 또 있는가? 나에게 투쟁과 아름다움은 그다지 멀리 떨어져 있는 개념이 아니다. 다른 사람들이라면 잊고 무심하게 흘려보냈을 경험을 내 안에 차곡차곡 쌓고 잊지 않는 것. 그것은 아름다움과 투쟁이 모두 공통적으로 가진 특성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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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쟁하는 한국옵티칼하이테크지회 조합원을 상징하는 그림자에 알록달록한 학이 놓여있다. 그 앞에서 한국옵티칼하이테크지회 이지영 조합원이 포즈를 취하고 있다.

 

1박2일 투쟁문화제가 진행된 첫째 날인 10월 6일 금요일은 택시 노동자 방영환 열사께서 영면에 든 당일이기도 했다. 나는 바쁜 일정 탓에 그날 아침에 인터넷에서 소식을 보곤 겨우 10초 남짓한 시간만큼만 관심을 할애했다. 21세기에 이러한 일이 일어난다는 사실에 입이 쓰긴 했지만 그 이상 무언가를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내가 아직 투쟁 경험이 부족하기에 당위적인 추모 외의 감상을 느낄 능력도 없었고, 당장 일어나자마자 번개같이 씻고 약속한 대로 동지들을 만나러 가기에 바빴다.

 

그러나 투쟁문화제의 첫 번째 발언자로 나선 민주노총 경북지역본부 김태영 본부장께서는 곧바로 방영환 열사의 소식을 거론했다. 내가 그날 아침 무심하게 흘려보냈던 소식이 흘려보내선 안 되는 이야기, 기억해야만 하는 이야기로 돌아온 순간이었다.

 

방영환 열사의 이름이 거론되는 순간 나는 내 가슴속에 들어 있던 비석처럼 견고한 무관심을 보았고, 그 아득한 차가움에 살짝 몸을 떨었다. 아무리 투쟁에 결합하기 위해서였다지만 그렇게 쉽게 그 소식을 넘겨 버렸다는 사실이 새삼스럽게 두려웠다. 날씨는 냉랭했고, 마음은 쉽게 식었다. 투쟁의 현장에 오기까지 했는데도 다른 현장의 소식에 대해서는 이토록 간단하게 무관심을 내세웠다니? 그러나 김태영 본부장을 비롯하여 다른 동지들은 그 소식을 잊지 않고 나에게, 다른 동지들에게 재차 부고를 알렸다. 그리고 우리가 그 죽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다시금 일깨웠다.

 

투쟁문화제가 한창 진행되고 있을 때, 나는 후드 집업 하나로만 버티며 추위에 몸을 둥글게 말았다가 펴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그러자 옆에 계시던 동지께서 그런 나를 눈여겨보시곤 조끼와 푸른 폴라티를 건네주셨다. 그러면서 괜찮냐고, 머리칼도 이렇게 차갑게 식었는데 계속 바깥에 있어도 되는 거냐고 말씀하셨다. 달리 드릴 말씀이 없어 감사하다는 말과 괜찮다는 말만 번갈아 주워섬겼지만 그 순간 나는 모종의 깊은 신뢰가 마음을 스치는 것을 느꼈다. 발언을 통해서 방영환 열사의 이름을 재차 일깨우는 것도 나에게 옷을 나눠 주는 것도 모두 나 자신이 아니라 다른 동지가 나에게 해 준 일이었다. 내가 잊어도, 내가 소홀해져도 동지들은 그렇게 되지 않는다. 혼자서는 개인적인 흥망성쇠를 볼지라도 연대한다면 구호대로다. “단결하는 노동자는 반드시 승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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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제에서 벌어지는 몸짓패와 노래패의 퍼포먼스는 단순히 개인이 아니라 이 공간에 있는 모두를 대상으로, 감각과 기억을 공유하기 위한 것이고 그렇기에 언제나 유의미하고 아름답다. 으레 유튜브 등지에서 연예인이나 프로들의 공연을 보면서는 저게 그렇게까지 열광할 일인가, 생각하곤 했지만 투쟁문화제의 공연들에 대해서는 단 한 번도 그런 의혹을 품은 적이 없다. 현대 사회에서 순식간에 잊히는 부고와 비보를 간직하고 연대와 주체의 감각을 촉발하려는 시도에 대해서 가치를 의심할 여지는 없다. 앞에서 쭉 거론한 사소하고 하찮은 소품들을 비롯해 몸짓패, 노래패의 퍼포먼스들은 결국 무언가를 잊지 않고 조금이라도 더 선명하게 간직하려는 시도고 그것은 곧 아름다움이다.

 

구태를 떨쳐 일어서고 주체를 일깨우는 것만큼 예술적이고 투쟁적인 일은 없다. 그날 문화제에서 내 마음속에 가장 깊게 박힌 한 마디는 「투쟁을 멈추지 않으리」의 “우리가 잃을 것은 비참한 어제의 날들일 뿐”이라는 구절이었다. 그렇다. 투쟁으로써 잃을 것은 비참과 망각뿐이고 얻을 것은 기억과 영혼이다.

 

문화제 발언 자리에서 옵티칼하이테크 투쟁 당사자인 소현숙 동지는 설움에 발언을 채 잇지 못하고 연거푸 중단하면서도, 떨리는 목소리로 근무 당시 옵티칼하이테크가 내세웠던 회사 정신을 이야기했다. 다른 무엇보다 사람이 소중하다고, 우리는 사람을 소중하게 생각한다고. 그런데 회사가 했던 그 말이 다 거짓말이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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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측은 자본 특유의 허위를 내세웠지만 듣는 노동자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허위를 진실로 믿고 받아들였고 그 배반에 상처받아 지금의 투쟁 현장까지 왔다. 자본주의가 아무리 세계를 은폐하며 인간성을 말살하려 시도하더라도 사람의 본성은 잊지 않고 기억한다. 자본의 허위를 진심으로 받아들이고 살아 나가다가 결국에는 자본 이상의 세계로 나아가게 된다. 이제까지 무수한 사람들이 그랬고, 옵티칼하이테크의 사람들이 그렇고, 앞으로도 미래의 많은 사람들이 그럴 것처럼.

 

인간이 인간인 이상, 자본주의는 결코 인간의 의지를 감당하지 못하고 종국에는 패배할 것이다. 「투쟁을 멈추지 않으리」의 마지막 가사대로 “나의 피, 피 끓는 나의 영혼은 투쟁을 멈추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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