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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팔레스타인 해방과 연속혁명 1

기사입력 2025.06.08 09:48 | 조회 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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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편집자 주]

    2023년 10월 이후 지금까지,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민중을 대량학살하고 있다. 히메나 베르가라의 이 글은 트로츠키의 연속혁명 이론에 입각해 팔레스타인 해방을 위한 계급적·국제주의적 전략을 제시한다. 본 번역은 글의 분량상 총 5회에 걸쳐 연재할 예정이다.

     

    히메나 베르가라, 2024년 4월 19일

     

    시온주의의 억압에 맞선 투쟁은 국제 정치와 국내 정치의 중심에 있다. 요르단 강에서 지중해까지, 아랍인과 유대인이 평화롭게 살 수 있는 자유롭고 사회주의적인 노동자의 팔레스타인을 위한 투쟁이 우리가 앞으로 나아갈 길이다.

     

    뉴욕 팔레스타인 연대시위 사진: Eduardo Munoz / Reuters

     

    팔레스타인 해방투쟁의 방향을 집단적으로 결정하는 것은 가자지구와 그 주변 지역의 아랍 대중은 물론, 미국 등 여러 제국주의 국가들에서도 피어나기 시작한 집단학살에 반대하는 전 세계 운동에 있어서도 매우 중요한 과제다.

     

    이 과제에서 필수적인 것은 팔레스타인에서 작동하는 거대한 사회적 힘들을 이해하는 것이다. 이 힘들은 아랍 세계의 이 지역(팔레스타인)을 세계적 위기, 즉 지구적 제국주의의 새로운 위기의 진원지로 만들었다. 팔레스타인에서 벌어지는 이스라엘의 잔혹한 식민 프로젝트의 비극은, 한편으로는 제국주의 쇠퇴가 낳은 가장 피비린내 나는 결과를 표현한다. 다른 한편으로, 이 비극은 제국주의·인종주의·식민주의에 아래로부터 맞서는 팔레스타인 민중의 영웅적 저항이 자신을 대변한다고 느끼는 전 세계의 착취당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결집하는 외침이 되었다. 이스라엘 국가(The state of Israel)는 아르헨티나에서 미국에 이르는 모든 곳에서 노동자계급과 억압받는 사람들의 적인 괴물 같은 국제 극우세력을 대표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팔레스타인 해방은 전 세계 곳곳에서 착취당하고 억압받는 수십억 민중에게 이롭다.

     

    팔레스타인 해방을 향한 승리의 길을 찾으려면 국제적, 지역적(regional), 국지적(local) 차원에서 거대한 사회적 힘들이 어떻게 충돌하는지, 그리고 가자지구에서 벌어지는 대량학살의 맥락이 어떤 계급적 역학을 나타내는지 이해해야 한다. 이를 통해 우리는 팔레스타인 민중의 절박한 자결권 쟁취투쟁과 이 지역 사회주의 혁명을 결합하며, 누가 동지이고 누가 적인지 구분할 수 있는 해방 전략을 수립할 수 있다. 이러한 전략은 중동 전역의 민중이 단결하여 제국주의의 멍에와 자국 자본가·권위주의 정권의 족쇄를 벗어던지고, 이스라엘 노동자계급이 시온주의 및 식민정책과 단절하는 데 기여할 것이다.

     

    우리의 관점에서, 팔레스타인의 자결권을 위한 투쟁과 이 지역의 사회주의를 위한 투쟁 사이의 연관성은 레온 트로츠키의 연속혁명 이론에 분명히 새겨져 있다. 이 이론을 팔레스타인 해방 투쟁에 가장 체계적으로 적용한 사람은 아마도 팔레스타인 트로츠키주의자 자브라 니콜라(Jabra Nicola)일 것이다. 그는 이스라엘이라는 시온주의 국가를 계급적, 반제국주의적 관점에서 규정하였으며, 지역의 계급 역학을 분석하여 팔레스타인 주변 아랍 프롤레타리아의 혁명적 잠재력을 보여주었다.

     

    역사학자 호세피나 L. 마르티네즈는 다음과 같이 썼다:

     

    트로츠키는 생전에 자신의 연속혁명 이론이 세 가지 개념을 통합한 것이라고 언급하였다. 첫째는 민주주의 혁명에서 사회주의 혁명으로의 이행이다. 둘째는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사이의 이행기로서의 혁명 그 자체이며, 이 이행기는 “복잡한 상호작용 속에서 발전하여 사회가 평형을 이루지 못하게 하는 경제, 기술, 과학, 가족, 도덕, 일상생활의 혁명”을 수반한다. 셋째는 사회주의 혁명의 국제적 성격이다. 그리고 이 세 가지 차원의 상호작용이야말로 오늘날 이 이론에 지대한 의미를 부여한다.

     

    이 글은 팔레스타인 해방에 대한 전략적 관점을 정교화하기 위해 이 일련의 개념들의 타당성과 연관성을 입증하는 것을 목표로 하며, 레온 트로츠키, 자브라 니콜라, 그리고 일란 파페(Ilan Pappé), 우사마 막디시(Ussama Makdisi), 란 그린스타인(Ran Greenstein), 재커리 록맨(Zachary Lockman), 가브리엘 고도레스키(Gabriel Godorezky), 피에르 브루에(Pierre Broué) 같은 역사가들의 논의를 바탕에 둔다. 우리는 연속혁명 이론의 기본 원리를 교조적으로 반복하지 않을 것이며, 그 대신 세계 제국주의 위기를 배경으로 한 팔레스타인의 최근 역사와 현재 상황에 비추어 연속혁명 이론의 구체화를 시도할 것이다. 우리는 트로츠키 연속혁명론의 핵심을 이루는 세 가지 개념을 활용해 팔레스타인 역사의 근본적인 순간을 탐색하고 혁명적 좌파의 사상과 강령의 역사를 복원할 것이다. 우리는 이를, 특히 팔레스타인의 사회주의적 미래는 물론, 보다 일반적으로는 아랍 프롤레타리아의 사회주의적 미래에 대한 구상을 철저히 거부해 온 팔레스타인 해방운동 지도자들의 사상과 대조할 것이다.

     

    팔레스타인은 빈 땅이 아니었다

     

    이스라엘 역사학자 일란 파페의 설명처럼, 팔레스타인은 1948년 나크바 이전에도 결코 빈 땅이 아니었다:

     

    팔레스타인은 빌라드 알 샴(‘북쪽의 땅’ Bilad al-Sham), 즉 당시 레반트 지역의 일부로 번성했던 땅이다. 풍요로운 농업, 작은 마을들과 역사적인 도시들은 시온주의자들이 도래하기 직전까지 50만명에 달하는 인구를 지탱하고 있었다.1)

    1) Pappé, Ilan. Ten Myths About Israel. Verso Books, 2017. (국역: 이스라엘에 대한 열 가지 신화, 틈새책방, 2024)

     

    19세기 말, 팔레스타인의 적지 않은 인구 중 유대인 비중은 미미했다. 오늘날 흔히 '글로벌 사우스'라고 불리는 여러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팔레스타인 사람 대다수는 많게는 1,000명이 거주하는 촌락에 속한 농민들이었다. 새로 생겨난 도시들에는 교육받은 엘리트들이 몰려들었으며, 이들은 해안가와 고지대에 정착하는 경향이 있었다. 한편, 20세기 초가 되면 제국주의의 침투로 초기 형태의 팔레스타인 도시 노동자계급이 서서히 만들어지고 있었다.

     

    파페는 오스만 제국의 역사 기록물을 인용하여 19세기 팔레스타인의 사회구조를 간략하게 설명한다:

     

    시온주의가 부상하기 전의 유대인 비율은 알려진 바가 없다. 그러나 약 2~5% 수준이었을 것이다. 오스만 제국의 기록에 따르면 1878년에는 오늘날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지역에 총 46만 2,465명이 살았다. 이 중 40만 3,795명(87%)은 이슬람교도였고, 4만 3,659명(10%)이 기독교인, 1만 5,011명(3%)은 유대인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영국이 팔레스타인을 위임통치 하기 전, 오스만 제국은 자신의 지배와 제국 자체에 대한 더 노골적인 인종주의를 발전시켰다. 19세기 중후반에는 ‘터키인’이 “오스만주의”와 동일시될 수 있다는 신념으로까지 이르렀고, 이는 팔레스타인의 부유하고 교육 수준이 높은 엘리트들이 자신들의 국가 정체성과 정치적 소속감에 의문을 품게 만들었다.

     

    역사학자 우사마 막디시(Ussama Makdisi)가 “오스만 오리엔탈리즘”에서 설명한 것처럼, 오스만 제국에 봉사하던 지식인들은 제국 내 터키인들을 아랍인, 특히 팔레스타인인 등 다른 민족 집단과 차별하고자 인종적 서열체계를 개발했다.

     

    이러한 맥락 속에서 민족주의 정서는 팔레스타인과 중동 전역으로 확산되었으며, 이러한 흐름은 부르주아 혁명과 이전 식민지의 재편 아래 지정학을 재구성하던 강력한 개념인 ‘국민국가’(the nation)에 의해 더욱 강화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 중 영국은 중동 각지에서 오스만 제국의 압제에 대항하는 민족운동을 독려했다. 이는 중동 지역에서 오스만 제국의 영향력을 약화시키고 영국 제국주의의 입지를 확대하기 위해서였다. 이러한 정책의 일환으로, 영국은 아랍 민중에게 오스만 제국의 지배에서 벗어나면 자결권을 주겠다고 약속했고, 이로 인해 중동 전역에서 민족주의 정서가 고조되었다. 다른 한편, 영국은 전쟁이 끝난 후 오스만 제국을 어떻게 분할할지를 프랑스 및 다른 열강과 비밀리에 거래하며 이 지역 주민들을 새로운 제국주의 압제자들의 지배 아래로 몰아넣었다.

     

    오스만 제국 붕괴 이후 영국이 팔레스타인을 지배하게 되면서, 이러한 초기 단계의 민족자결 사상은 발전하거나 실현될 수 없었다. 영국은 당시 중동 지역에서 프랑스 다음으로 강력한 제국주의 세력으로 중동 지역의 정치를 지배하고 있으며, 영국과 프랑스는 팔레스타인에 전략적 이해관계를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자국 내 시온주의 세력과도 강한 유대를 맺고 있었다.

     

    20세기 초 30여 년간 이루어진 제국주의의 초기 개입은 팔레스타인의 복잡한 사회구조를 형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역사학자 엔조 달 피토(Enzo Dal Fitto)는 팔레스타인 트로츠키주의자 자브라 니콜라의 연구를 토대로 이러한 동학을 설명한다.

     

    1917년부터 1939년 사이, 팔레스타인 위임통치령에서 이루어진 시온주의 경제 부문의 발전은 아랍 봉건제를 파괴하고 자본주의적 부르주아 계급의 형성을 저지하여 해당 지역의 경제적 발전 조건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그 결과 역사 발전은 정체되었고, 반제국주의 세력의 역사적 활력도 고갈되었다.

     

    1917년 영국이 팔레스타인 영토를 장악하기 전, 영국 외무장관 아서 밸푸어(Arthur Balfour)는 영국 시온주의 지도자 월터 로스차일드 경에게 공식 서한을 보내, 영국 정부가 유대인 디아스포라2)의 팔레스타인 점령을 지지한다고 선언하였다.

    2) (편집자 주) 세계 곳곳에 사는 유대인 집단

     

    1917년 11월 2일, 아서 밸푸어 영국 외무장관이 로스차일드 경에게 보낸 서한 

     

    1918년 영국 정부는 국제 열강과 국제연맹과 함께 이 지역의 경계를 재협상해, 자신들의 목적에 맞게 보다 명확히 정의된 지리적 공간을 창출했다. 이 과정에서 영국 경계제국주의는 팔레스타인 원주민과 새로운 유대인 정착민 중 누가 팔레스타인을 통치해야 하는지를 고민해야 했다. 일란 파페에 따르면, 영국은 팔레스타인의 경계를 재편함으로써 시온주의자들이 에레츠 이스라엘(Eretz Israel, 이스라엘의 땅)을 지리적으로 개념화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이 땅에서는 유대인만이 땅과 자원에 대한 권리를 가질 수 있었다.

     

    이 서사에서 분명히 드러나는 것은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에 팔레스타인은 이스라엘의 공식 역사가 주장하는 것처럼 빈 땅이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팔레스타인은 역사적 분쟁의 대상이 된 땅이었으며, 그 중심에는 다모클레스의 칼날3)처럼 다가오는 신흥 열강에 맞서, 새로운 제국주의적 열망을 품고 세계를 자신의 상상대로 재구축하고자 했던 구 식민 열강이 있었다. 제1차 세계대전은 이러한 “재편” 과정의 다음 단계인 제2차 세계대전의 피비린내 나는 예행연습이었다.

    3) (편집자 주) 고대 그리스의 일화로, 권력과 영광 뒤에 도사린 위험과 불안을 상징한다. 본문에서는 힝싱 팔레스타인에 드리워진 제국주의 전쟁의 위협을 뜻한다.

     

    시온주의자들이 제안한 팔레스타인 식민화는 영국 제국주의에 의해 의도적으로 도구화되고, 물질적으로 지원되었다. 영국 자체는 쇠퇴하는 제국이었지만, 이 지역의 전략적 중요성은 중동에서의 서방 제국주의 발전에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영국의 팔레스타인 지배는 제1차 세계대전 후 오스만 제국 분할의 일환으로 1923년 국제연맹에 의해 공식화되었다. 팔레스타인인들은 이에 맞서 강력하게 저항했고, 이 저항은 영국 점령 기간 동안, 특히 1929년부터 1939년 사이에 더욱 확산되고 강화되었다. 이 반란의 절정은 1936년 총파업으로 나타났다. 아랍 노동자계급이 총파업을 주도했으며, 노동조건 개선과 민족 독립이 주요 요구였다.

     

    1936년부터 1939년까지 “대반란(The Great Revolt)”으로 알려진 격렬한 계급투쟁의 시기 동안, 농촌의 농민 대중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농민들은 유대인 정착민과 영국의 점증하는 침탈에 맞서 조직적으로 저항했다. 역사학자 재커리 록맨(Zachary Lockman)은 「동지와 적」(Comrades and Eenemies)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1936년 4월 15일, 샤이크 ‘이즈 알딘 알카삼(Izz al-Din al-Qassam)’이 창립한 게릴라 부대원들이 나블루스 인근에서 차량과 버스를 습격해 유대인 승객 2명을 살해했다. 이틀 후 우익 유대인 준군사 조직이 아랍인 2명을 살해하며 보복했다. 아랍인들의 시위가 곧 전국적으로 확산되었고, 점차 광범위한 반식민주의 및 반시온주의 민중봉기의 성격을 띠게 되었다. 폭력을 억제하고 아래로부터의 분노를 제어하기 위해, 아랍 민족주의 운동가들은 재빨리 전국적인 총파업을 촉구했다. 파업은 빠르게 확산되었고, 모든 주요 도시에서 투쟁을 주도하기 위해 새로운 “민족위원회”(national committees)가 생겨났다. 깜짝 놀란 엘리트 정치인들은 대중적 저항의 물결에 편승하고자 파업 요구를 지지하는 한편, 아민 알후사이니(Amin al-Husayni)를 위원장으로 모든 주요 정당을 대표하는 새로운 아랍고등위원회(AHC)를 구성했다. 총파업은 1936년 10월까지 6개월간 계속되어 역사상 가장 긴 총파업으로 기록되었다. 이는 영국 통치와 시온주의에 반대하는 전국적인 아랍 민족주의 반란의 첫 단계로, 1939년 여름에야 끝이 났다.

     

    1936년 4월 팔레스타인 야파에서 영국 경찰이 시위 중인 아랍 군중을 해산하고 있다

     

    팔레스타인 노동자계급의 대반란 참여는 지역 노동운동 역사상 가장 전투적인 장(章) 중 하나일 것이다. 록먼은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썼다.

     

    팔레스타인 도시의 아랍 인구 대부분이 총파업에 참여했으며, 도시 노동자들이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하산 시드키 알다자니(Hasan Sidqi al-Dajani)의 운전사 노조는 아랍의 자동차 운송을 마비시켰고, 야파 항구 노동자들은 항구를 폐쇄했다. 파업을 지속하기 위해 전국위원회는 부유한 팔레스타인인들과 주변 국가의 동조자들로부터 기부금을 모금했고, 야파 부두 노동자를 포함해 파업으로 휴업중인 사람들에게 파업 수당을 분배했다.

     

    이 반란은 탄압에 의해, 그리고 ‘히스타드루트’(Histadrut, 1920년 영국의 팔레스타인 위임통치령에서 설립된 이스라엘 최대 노동조합 연맹)가 이끄는 유대인 노조 지도부의 의식적인 행동에 의해 진압되었다. 히스타드루트는 시온주의의 이익을 위해 활동하며 식민점령을 옹호했다.

     

    한편, 과거 대지주로서 부유하고 영향력 있는 팔레스타인 가문들은 반란의 주도권을 장악하고  운동의 지도부로 자리 잡았으며, 점령 세력과의 협조적 역할을 수행했다. 이들은 영국과 시온주의 정착민들에게 토지를 빼앗겼지만, 시온주의 세력으로부터 상당한 보상과 막대한 혜택을 받아 당시 식민체제의 부유층을 형성했다. 이 가문들은 오스만 제국의 통치 시절 수십 년 간 이 지역을 관리했으며,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영국이 이 땅을 점령했을 때도 점령군을 위해 계속 일을 했다. 팔레스타인 대중의 고통과는 완전히 동떨어진 이들 가문은 주로 압드 알카디르 알후사이니(Abd al-Qadir al-Husayni)가 이끄는 아랍-팔레스타인 당(Arab-Palestinian Party))과 정치적으로 연계되어 있었다. 이와 관련해 엔조 달 피토(Enzo Dal Fitto)는 팔레스타인 대반란 당시 지도부에 대해 아래와 같이 썼다:

     

    그들의 부는 시온주의자들의 점령에 의존했기에, 그들의 반대는 그저 피상적인 수준에 그쳤다. 그들은 아랍의 반시온주의 의식 형성을 지연시켰으며, 밸푸어 선언 역시 늦게서야 규탄했다. 알-카삼 저항과, 이후의 아랍 저항운동을 고무하고 강화한 시리아의 거대한 총파업 여파에 압도된 그들은, 1936년 “대반란”에 참여했다. 대반란은 거대한 파업운동으로 전개되었으며, 납세 거부와 같은 시민불복종 행동과 반란 민병대 결성을 동반했다. 그러나 이 운동은 시온주의 민병대의 지원을 받은 영국 식민지 군대에 의해 진압되었다. 한편 유럽 파시즘의 확산과 히틀러의 집권, 동유럽에서 발생한 수많은 유대인 학살(포그롬, Pogrom), 그리고 유럽에 내재하던 반유대주의가 강화되는 상황에 따라 유대인 이민이 증가했다. 결과적으로 아랍 경제의 폐쇄되면서, 시온주의 세력의 경제는 유럽에서 대규모로 유입된 유대 자본에 힘입어 그 영향력을 강화하고 확장할 수 있었다.

     

    영국은 반란에 대응하기 위해 구체적인 임무를 부여받은 필 위원회(Peel commission)를 설립했다. 위원회의 임무는 이 지역을 아랍 국가와 유대 국가로 분할하라고 권고하는 것이었으며, 그 분할의 목적은 어떤 수단을 동원해서라도 아랍과 유대 프롤레타리아가 단결해 영국 제국주의와 시온주의에 맞서는 계급투쟁을 차단하는 데 있었다.

     

    2차 세계대전이 임박했다. 세계적 대재앙을 목전에 둔 영국의 정책은, 해당 지역 정부의 지지가 필요한 상황에서 아랍의 봉기를 방지하려는 목적에 따라, 그리고 새로운 유대인 정착민들의 유입과 잠재적인 유대 국가 설립으로 지역 통제력을 강화하려는 욕망에 따라 수립되었다.

     

    팔레스타인의 운명은 제2차 세계대전의 시작될 무렵 이미 결정되어 있었다. 국제 사회주의 혁명이 패배한 상황에서, 이 전쟁은 결국 팔레스타인을 짓누를 새로운 압제자의 형태와 성격을 결정짓는 계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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