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 팔레스타인 해방과 연속혁명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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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라인신문

[번역] 팔레스타인 해방과 연속혁명 2

  • 최종현
  • 등록 2025.06.14 10:54
  • 조회수 73

[편집자 주]

2023년 10월 이후 지금까지,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민중을 대량학살하고 있다. 히메나 베르가라의 이 글은 트로츠키의 연속혁명 이론에 입각해 팔레스타인 해방을 위한 계급적·국제주의적 전략을 제시한다. 본 번역은 글의 분량상 총 5회에 걸쳐 연재할 예정이다.

 

[전편 읽기]

팔레스타인 해방과 연속혁명 1

 

 

팔레스타인 공산주의 운동

 

1917년 러시아 혁명은 국제 공산주의 운동을 급격히 확산시켰다. 수십만 명의 노동자와 급진적 청년들이 국제적 혁명 사상 아래 결집하였고, 수백 개의 새로운 공산당이 탄생했다. 1919년 볼셰비키당의 지도 하에 제3인터내셔널(코민테른,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이 설립되었다.

 

1920년, 블라디미르 레닌과 레온 트로츠키가 지도자로 있던 제3인터내셔널은 전 세계 반식민 ·민족해방 투쟁을 극히 진지하고 성실하게 다루었다. 레닌은 1920년 민족·식민지 문제에 대한 테제에서 전 세계의 공산당이 “(식민지에서의) 혁명운동 전반을 물질적·정신적으로 지지해야 한다”고 선언했다. 레닌은 민족해방 운동에 대한 이러한 적극적 지지는 “성직자, 기독교 선교사 및 이와 유사한 요소들의 반동적이고 중세적인 영향력에 맞선 투쟁” 뿐만 아니라 “유럽과 미국 제국주의에 맞선 해방운동을 현지 반동세력의 강화 시도와 결합하려는 범이슬람주의와 유사한 경향에 맞선 투쟁과 결합해야 한다”고 말했다.

 

1920년 볼셰비키는 제2차 코민테른 대회의 일환으로 아제르바이잔에서 동방인민대회(Congress of the Peoples of the East)를 개최했다. 이 대회에는 이란, 이집트, 팔레스타인, 터키, 인도 및 기타 아시아, 중동 국가에서 2,850명의 대표단이 참석했다. 대회의 회의록은 현재 남아 있지 않지만, 역사학자 피에르 브루에의 연구에 따르면 회의 결의안 중 하나는 “동방 민중이 자신의 해방을 위해 프랑스, 영국, 미국 제국주의에 맞서 반식민 투쟁에 나설 붉은 군대(Red Army)와 함께 싸울 것”을 촉구하는 내용이었다.1)

1) Broué, Pierre. Histoire de l’Internationale communiste (1919-1943). Éditions Fayard. 1997

 

동방인민대회는 영국 제국주의가 시온주의 자본가의 이익을 위해 아랍인과 유대인을 분열시켰다고 선언했다.

 

(영국은) 유대인 정착민들에게 땅을 주기 위해 아랍인들을 몰아냈다. 그러고는 아랍인들의 불만을 달래기 위해 바로 그 유대인 정착민들을 적대하도록 아랍인들을 선동해 모든 공동체 사이에 불화와 적대감, 증오를 심어 양측의 관계를 약화시켰다. 이는 (영국이) 이들을 지배하고 통제하기 위해서였다.

 

역사학자 랜 그린스타인(Ran Greenstein)의 설명에 따르면, 동방인민대회의 일반적 입장은 영국의 팔레스타인 지배를 무조건적으로 반대하고, 시온주의를 규탄하며, 제국주의와 협력하는 아랍 및 유대 세력을 비판하는 것이었다. 동방인민대회는 터키, 이란, 이집트, 인도, 팔레스타인에서 새로운 공산당이 설립하는 시발점이 되었다.

 

1920년 아제르바이잔 바쿠에서 열린 동방인민대회

 

팔레스타인 공산당은 1924년 유대인 반시온주의 운동가들과 지식인들의 주도로 설립되었다. 공산당의 전략적 노선은 영국 제국주의와 시온주의에 반대하고 아랍과 유대인 노동자의 단결을 위해 투쟁하는 것으로, 이는 첫 세 차례의 코민테른 대회에 기반을 두고 있었다. 한편, 시온주의 점령에서 비롯되는 긴장이 아랍 대중의 정서에 영향을 미치고, 팔레스타인 민족주의 지도자들이 유대인 노동자와 지식인에 대해 점점 더 적대적 태도를 드러내면서, 팔레스타인 공산당의 정책은 갈수록 당시 흐름과 충돌하게 되었다.

 

팔레스타인 공산당은 식민지와 팔레스타인 문제 전반에 대해 제3인터내셔널의 정치적 무기를 갖추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국 제국주의의 압제와 점증하는 시온주의 식민화로부터 팔레스타인을 해방하는 문제는, 혁명적 마르크스주의에 새롭고도 중요한 이론적 문제를 제기했다. 신생 팔레스타인 공산당의 노선은 미숙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1920년대 내내 전개된 좌익반대파와 스탈린 주도로 나날이 강해지는 소련 관료집단의 정치투쟁으로부터 간접적인 영향을 받고 있었다.

 

창당 초기부터, 팔레스타인 공산당은 급진화된 유대인 청년층 일부에게 중요한 영향력을 행사했지만 팔레스타인 아랍 대중 사이에서는 거의 존재감이 없었다. 공산당은 1920년대 말부터 ‘아랍화’2) 정책이라는 굴곡진 과정을 밟기 시작했다. 이 정책은 한창 스탈린주의화 되어가던 코민테른에 의해 추진되었다.

2) (역자주) 팔레스타인 공산당이 거쳐온 '아랍화'는 창당 시점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팔레스타인 공산당의 전신은 1919년 설립된 '유대 사회주의 노동자당(Jewish Socialist Workers Party)'이었는데, 전 세계 유대인 좌파 노동자 연맹인 ‘시온의 노동자들’(Poalei Zion)에 속하던 이 당은 좌파 시온주의 경향에 의해 주도되었다.

유대 사회주의 노동자당이 코민테른 가입을 신청하자, 코민테른 지도부는 가입 조건으로 '아랍화' 정책을 주문한다. 아랍화는 당내 주류였던 좌파 시온주의와의 단절로, 유대인으로만 구성된 당에 아랍인 당원을 조직·포함하도록 하고, 시온주의적 공동체 및 조직에 기반해온 기존 조직화 범위를 전체 아랍 민중으로 확장하고, 당이 팔레스타인 내 아랍인과 유대인을 모두 포괄할 수 있도록 명칭을 변경하는 조치를 포함했다. 시온주의 경향과 반시온주의 경향 간의 격렬한 당내 대립 하에 1921년 3차 당대회를 거치며 유대 사회주의 노동자당은 팔레스타인의 유대인과 아랍인 모두를 대표하는 공산당의 유대민족 지부를 의미하는 '팔레스타인 공산당 유대공산당 지부(Jewish Communist Party — Poalei Zion, section of the Palestine Communist Party)로 명칭을 변경한다. 그러나 이는 아랍인 당원과 아랍 민족 지부가 부재한 상태에서 상징적인 조치에 불과했다.

유대 사회주의 노동당이 시온주의 경향과 반시온주의 경향으로 분열하며 1923년 팔레스타인 공산당이 설립되었고, 당 지도부가 아랍화 정책을 수용하며 코민테른 지도부는 1924년 팔레스타인 공산당의 코민테른 가입을 승인한다. 공산당의 첫 아랍인 당원 가입은 1924년에 이루어졌으며, 존속 기간 내내 전체 당원수가 1,000명을 넘지 못했다. 영국 경찰 보고서에 따르면, 팔레스타인 공산당원 중 아랍인은 1930년에도 26명에 불과했다.

스탈린 집권 이후 제3인터내셔널 아래 아랍화 정책은 1935년 코민테른 7차 대회 이전의 '초좌파' 노선, 7차 대회 이후의 인민전선 노선 사이에서 혼란스럽게 전개된다. 7차 대회 이전, 코민테른은 팔레스타인 공산당에 '노동자·농민의 정부' 구호와 함께 아랍 민족주의 지도부에 맞서 투쟁하라고 지시하였으나, 7차 대회 이후 팔레스타인 공산당은 '반제국주의 인민전선' 노선에 따라 아랍 민족주의 지도부를 무비판적으로 지지하게 된다.

 

그린스타인의 설명에 따르면, 당시 공산당의 유대인 반시온주의 운동가들은 당내 유대계 주변부의 친시온주의적 편견에 적응하는 경향이 있었다. 이들은 수사적으로는 시온주의를 거부하고 영국의 위임통치에 반대하는 입장을 취했지만, 이와 동시에 ‘이슈브 Yishuv’로 알려진 유대인 정착지를 “이민을 통해 계속 성장할 수 있는” 합법적인 공동체라며 옹호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입장은, 나크바(Nakba) 이전 진행된 가장 중요한 유대인 집단이주 중 하나와 맞물려 있었다. 당시 유럽에서 심해지는 반유대주의를 피해 수천 명의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으로 이주했는데, 이는 각자의 식민주의적 목표를 가진 영국과 시온주의 자본가들의 후원으로 진행되었다. 박해를 피해 유럽에서 탈출한 유대인 난민 대다수는, 가혹한 이민 할당제3)와 강대국들의 정책에 따라 이스라엘로 이주했다. 예컨대, 미국은 유대인 난민 수십만 명의 입국을 막고 팔레스타인으로 피난가도록 압박했다.

3) (역자주) 당시 미국은 이민 할당제를 운용하여 출신 국가에 배당된 할당량(쿼터)에 따라 이민 비자를 신청순대로 발급하였다.

 

이와 동시에 이 지역 전체, 특히 팔레스타인에서 아랍 농민 대중의 불안이 고조되었다. 유대인 식민화에 반대하는 자생적 반란이 여러 촌락 공동체에서 일어나기 시작했다.

 

야파에서 시작된 유대인 시위대 간 충돌이 팔레스타인 전역 아랍인-유대인 유혈사태로 파급된 1921년 야파 사태. 팔레스타인 공산당은 식민에 맞선 아랍 민중의 저항과 충돌에 대해 답해야만 했다.

 

팔레스타인 공산당의 소위 ‘아랍화’ 정책은, 혁명가들이 아랍의 전위적 집단, 특히 농촌에서 봉기하던 대중 속에서 영향력을 확대하는 혁명적 전망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아랍화 정책은 근본적으로 1927년 중국 혁명 당시 스탈린주의가 수립한 “반제국주의 통일전선 anti-imperialist united front” 정책의 연장선상에 있었다. 이 정책은 팔레스타인을 포함한 전 세계에서 재앙적인 결과를 초래했으며, 각국에서 제국주의 세력에 맞서겠다고 자처하는 부르주아 혹은 소부르주아 지도부와의 정치적 동맹을 만들어냈다.

 

이 정책의 이론적 배경은 이오시프 스탈린의 민족해방 투쟁 개념에 뿌리를 두고 있다. 제3인터내셔널의 창립 원칙과 정면으로 모순되는 이 정책은 소련이 관료화 과정을 겪는 동안 코민테른 내에서 헤게모니를 장악하게 된다.

 

스탈린에게 있어 식민지에서의 민족해방 투쟁은 부르주아적 성격을 띤 것으로,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자본주의 국가와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틀 안에서만 실현될 수 있는 것이었다. 이는 오늘날 사회민주주의자들이 민족해방을 생각하는 방식과 마찬가지로, 사회주의 혁명의 문제와는 완전히 분리되어 있었다.

 

이 논리에 따르면, 민족해방 투쟁은 새로운 자본주의적 국민국가의 설립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이러한 투쟁을 주도하는 것은 민족 자본가의 한 부문이며, 그러한 세력이 없다면 자본주의적 관계를 거스르지 않는 강령을 가진 소부르주아 지도부가 이 과정을 주도하게 된다. 이러한 맥락에서 스탈린이 팔레스타인 공산당의 '아랍화' 정책을 추진한 동기는 아랍 지역을 사회주의 혁명으로 이끌기 위해 아랍 대중들 사이에서 더 큰 유기적 영향력을 확보하려던 것이 아니라, 아랍 민족주의 지도부 및 '반제국주의' 아랍 국가들과 기회주의적 협정을 맺어 세계 질서 내에서 소련의 입지를 강화하는 데 있었다.

 

1924년부터 1930년까지 젊은 팔레스타인 공산당은 한편으로는 영국과 점증하는 시온주의의 지배에 맞선 아랍 지도부의 민족주의적 압력에 굴복했다. 다른 한편으로는 시온주의와 완전히 결별하지 못한 청년층과 급진적 유대 지식인층의 초기 민족주의 정서에 굴복했다.

 

1929년, 식민 지배와 점증하는 시온주의자들의 이주가 만들어낸 긴장은 전국적인 충돌로 분출했다. 이는 앞서 언급한 노동자들의 대투쟁과 '대반란'의 서막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 기간 중 팔레스타인 공산당이 배포한 포스터. 히브리어로 '파시즘을 분쇄할 영웅적 붉은 군대 만세!', '소련 인민과 반파시스트 세계 전체의 지도자 스탈린 만세!' 라고 적혀 있다.

 

랜 그린필드는 이러한 (당내) 입장 차이가 계급투쟁의 압력과 아랍 대중 사이에서 증가하는 불만에 의해 어떻게 더욱 공고해졌는지 설명한다.

 

당은 아랍 대중에 대한 노선을 전환할 수밖에 없었다. 국내 민족 갈등의 심화, 특히 1936~39년 아랍 반란은 당원 사이의 긴장을 고조시켰고, 이는 1937년 자율적인 '유대인 분파'의 결성으로 이어졌다. 반란이 끝나고,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고, 1941년 독일이 소련을 침공하자, 소련은 반대 방향, 즉 팔레스타인 내 유대인의 권리를 인정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이로 인해 1930년대 당이 아랍 민족투쟁 편에 섰을 때 당과 가까워졌던 아랍 지식인과 운동가들은 소외되었다. “당이 각자의 (민족:역자) 공동체에게 각자의 정치적 언어로 대화하고, 각자의 민족 감정에 호소하는” 상황에 따라, 민족주의적 긴장이 당 내부에 반영되었다.

 

스탈린주의 정책의 이 명백한 '변화'는 궁극적으로 시온주의 정착민들의 팔레스타인 식민지화를 전폭적으로 지지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1947년 유엔 총회는 소련과 영국 및 미국 제국주의의 열렬한 지지 속에서 이스라엘 국가의 설립을 결의했다.

 

팔레스타인 공산당의 '아랍화'를 권고하고 아랍 민족주의 지도부를 무비판적으로 지지하던 스탈린주의 관료집단은, 어떻게 팔레스타인의 대규모 식민지화를 위해 제국주의 열강과 협정을 맺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는가? 역사학자 가브리엘 고로데츠키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소련의 입장은 특히 놀랍다. 시온주의 체제에 대한 일관된 부정적 태도, 1929년 및 1936년 아랍 반란 당시 크렘린이 이슈브(Yishuv)를 영국 제국주의의 동맹이자 도구로 비난하며 취한 명시적인 친아랍 노선을 고려하면 말이다. 시오니즘에 대한 노골적인 적대에서 열렬한 지지로 소련의 태도가 변화한 것은 종종 1941년 6월 21일 독일의 소련 침공과 관련되어 설명된다. 모스크바가 세계 유대인 및 팔레스타인의 이슈브와 맺은 유대 관계는, 러시아의 전쟁 노력에 세계 유대인 공동체의 지원을 끌어들일 필요성을 우선적으로 반영한 것이라는 해석이다. 이 전쟁은 러시아에게 “나치 독일에 맞선 투쟁에서 최대한의 지지를 얻기 위해, 서방세계에서 광범위한 동맹을 찾을 수 있는” 새로운 기회를 제공했음을 시사한다.

 

히틀러가 스탈린과 체결한 협정을 파기한 제2차 세계대전의 역동4) 앞에서, 관료화된 코민테른은 민족해방 문제에 대한 180도 입장 선회를 “소련 방어”라는 명분으로 정당화했다. 이는 실제로는 소련의 영향권을 보장 받기 위해, 국제 사회주의 혁명의 확장을 억제하는 대가로 제국주의와 협정을 맺는 행위와 다름 없었다. 스탈린은 “일국 사회주의”라는 개념으로 이 정책을 이론적으로 포장했는데, 이는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에 대한 정면 부정이었다. 이는 소련 관료의 이익 증진을 대가로 한 피억압 민중의 투쟁에 대한 배신을 의미했고, 실제로 그런 결과를 낳았기 때문이다. 요약하자면, 스탈린주의 소련은 민족해방의 경로로서 사회주의 혁명을 “반제국주의 통일전선”이라는 계급 화해 정책으로 대체함으로써, 사회주의 혁명을 근본적, 그리고 역사적으로 거부하는 논리를 팔레스타인 정책에 적용했다. 이 점은 스탈린주의 노선이 아랍 국가의 부르주아 계급과 협정을 지향한 데서 명확히 드러났다.

4) (역자주) 나치 독일이 독-소 불가침조약을 2년만에 파기하고 1941년 소련을 침공한 사건

 

1949년 5월 1일 이스라엘 텔아비브에서 열린 노동절 행사에 스탈린 초상화가 걸린 트럭이 행진하고 있다.

 

팔레스타인 억압은 세계 제국주의의 산물이다

 

제국주의는 현대 세계질서를 조직하고 지배하는 자본주의의 한 시대다. 이 시기에 경제, 정치, 군사, 이데올로기적 권력은 제국주의 국민국가가 대표하고 옹호하는 기업들 수중에 집중된다. 그 결과 국경 안에서 이루어지는 인간, 토지, 자연의 착취는 전 세계로 확장되며, 이는 모두 이윤 추구와 자본의 재생산을 위한 것이다. 에스테반 메르카탄테(Esteban Mercatante)는 “세계 무질서 시대의 제국주의(Imperialism in Times of World Disorder)”라는 글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잠재적이든 실제적이든 제국주의 국가 간의 경쟁과 갈등, 그리고 초국적 기업과 세계 금융자본의 지구 약탈은 결코 서로 대립하거나 분리된 것이 아니다. 이들은 현대 제국주의를 이해하기 위해 동시에 접근해야 하는 두 가지 차원이다. 제국주의 이론을 정교화하기 위해 두 차원을 함께 고려해야 한다. 이렇게 정립된 제국주의 이론은, 세계 자본과 가장 강력한 국가들이 유기적으로 결합해 행동한 결과 세계 경제가 위계적 총체로 형성되었는다는 점을 설명한다.

 

제국주의는 정책의 집합이 아니라 하나의 시대다. 이 구분은 중요하다. 제국주의가 역사적으로 결정된 것이며, 역사발전의 결과, 혹은 그 발전 과정에서 등장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 정의는 러시아 볼셰비키 당과 러시아 혁명의 지도자 레닌으로부터 차용한 것이다. 이 역사적 시기는 20세기 초에 시작되었으며, 이 단계의 자본주의는 위기, 전쟁, 혁명 외에는 더 이상 아무것도 제시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자본주의의 반동적 시기를 나타낸다.

 

제1차 세계대전은 제국주의의 기본적 특성에서 비롯된 긴장이 첫 번째 큰 표현이었다. 이 기본적 특성이란, 산업자본과 은행자본의 금융자본으로의 융합, 자본수출을 끊임없이 지속하려는 강박적 욕구, 그리고 정치적·경제적 힘이 불균등한 국가들이 미국, 영국, 독일, 프랑스 등 제국주의 국가, 그리고 다양한 방식으로 제국주의 기업에게 수탈당하며 제국주의 정부에 의해 억압받는 푸에르토리코, 멕시코, 알제리, 시리아 등 식민지 및 반식민지로 나뉘어지는 것을 의미한다.

 

제2차 세계대전은 많은 면에서 제1차 세계대전의 연장선상에 있었다. 영국이 세계적 패권을 상실하자, 다른 제국주의 국가들이 영국을 대신할 새로운 패권국으로 부상하려 시도하였다. 미국과 나치 독일은 그러한 국가 중 하나였다.

 

공식적인 역사는 항상 제2차 세계대전을 민주주의와 파시즘, 인권과 나치즘의 대결로 묘사해 왔다. 그러나 실상은 세계 주요 강대국들이 새로운 세계 질서의 수립을 촉진하고, 시장을 재편하고, 대규모 파괴와 살상을 가능케 하는 힘으로 전 세계 노동계급을 통제하고자 저지른 전 세계적 학살이다. 트로츠키는 제국주의에 대한 레닌의 사상에서 레닌에게 경의를 표하며 제국주의를 다음과 같이 정의했다.

 

제국주의는 식민지, 시장, 원자재 공급원, 세력권 등을 장악하고자 하는 자신의 고유한 목적을  “침략자들에 맞서 평화를 지키기 위해”, “조국을 방어하기 위해”, “민주주의를 사수하기 위해”  등의 이념으로 위장한다. 이러한 이념은 처음부터 끝까지 거짓이다. 모든 사회주의자의 의무는 이를 지지하는 대신, 오히려 인민 앞에 그 본질을 폭로하는 것이다. 1915년 3월, 레닌 다음과 같이 남겼다. “어느 집단이 먼저 군사적 타격을 가했느냐 또는 먼저 전쟁을 선포했느냐의 문제는 사회주의자들의 전술을 결정하는 데 전혀 중요하지 않다”, “조국 방어, 적의 침략 격퇴, 방어 전쟁 수행 등에 관한 문구는 양 모두 인민을 완전히 기만하는 것이다.” 레닌은 또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수십년 간”, “세 강도(영국, 러시아, 프랑스 부르주아지와 정부)가 독일을 약탈하기 위해 무장했다. 세 강도가 주문한 새 칼을 얻기 전에 두 강도(독일과 오스트리아-헝가리)들이 공격을 시작한 것이 놀라운 일인가?"

 

잘 알려진 바와 같이 1945년 8월, 미국이 서명 하나로 원자폭탄을 투하해 히로시마와 나가사키를 파괴하고 226,000명을 살해한 제2차 세계대전 말엽에, 트루먼 대통령은 팔레스타인에 홀로코스트 생존자 10만 명을 수용하도록 촉구했다. 이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 제국주의가, 쇠퇴하는 대영제국의 과제를 이어받아 유대인 국가 건설 프로젝트를 다시 추진하겠다는 명확한 신호였다.

 

1947년 유엔은 (팔레스타인 분할안으로) 팔레스타인 영토의 56%를 시온주의 국가에 할당했다. 이는 유대인들이 전체 팔레스타인 사유지의 약 7%만을 소유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루어진 결정이었다. ‘나크바(Nakba)’, 즉 시온주의 민병대와 신생 이스라엘군이 75만 명의 팔레스타인인을 그들의 집과 땅에서 폭력적으로 추방했을 때, 미 제국주의는 팔레스타인 분할안을 주도한 목적이 유대인에게 홀로코스트의 배상이었다고 주장하며 이를 정당화했다. 홀로코스트는 진주만 공습 이후 미국이 전쟁에 참전할 때까지 의도적으로 묵인되어온 비극이었다. 다시 말해, 미국은 수백만 명의 유대인 학살에 대해 아무런 대책도, 아무런 관심도 없었던 자신들의 지난 행보를 이스라엘 국가 수립을 위해 팔레스타인 인구의 약 4분의 3을 폭력적으로 추방하는 데 자금을 지원하고 지시함으로써 정당화한 것이다.

 

유대인의 팔레스타인 초기 정착기인 신 이슈브(New Yishuv) 시대를 낭만적으로 묘사한 삽화 '어린 정원사들', 1960년대 유대민족기금(JNF) 발행

 

1948년 나크바로 인해 집과 터전을 잃고 피난길에 오른 팔레스타인인 아동과 여성들

 

시온주의 국가(Zionist state)는 그 기원부터 제국주의가 인위적으로 만들어낸 산물이다. 따라서 시온주의 국가는 ‘정착민 식민주의’, 즉 집단학살과 인종청소라는 수단을 동원하는 역사적으로 특정한 형태의 정착민 식민주의를 유지하고, 재생산하며, 실행한다. 이는 팍스 아메리카나(Pax Americana)5) 아래 한 세기 간의 지배가 만들어낸 비정상적인 산물이다.

5) (역자주) 라틴어로 "미국에 의한 평화". 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이 패권국으로 부상하며 형성된 세계 질서를 의미, ‘팍스 로마나(Pax Romana, ’로마에 의한 평화‘, 로마제국의 최전성기인 1~2세기에 걸쳐 지속된 고대 지중해 세계의 상대적 안정기)’에서 차용된 용어.

 

시온주의 국가는 그 식민주의적 확장을 가능하게 한 세계 질서 속에서만 존재할 수 있는 제국주의적 괴물이다.

 

레온 트로츠키는 제2차 세계대전과 관련해 두 가지 다른 미래를 제시했다. 하나는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제국주의의 대학살을 국제 사회주의 혁명으로 전환할 가능성, 다른 하나는 “부르주아 지배체제가 이 전쟁에서 무사히 빠져나오는 것”이다.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전진한다면, 이는 스탈린주의와 같은 지도력의 타락을 막을 터였다. 에밀리오 알바몬테와 마티아스 마이에요는 「“부르주아 복고”의 한계」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제2차 세계대전의 결과는 이 두 가지 변수 중 어느 것도 순수한 형태로 나타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제국주의가 완전히 처벌을 피한 것은 아니었다. 전쟁 후 지구의 3분의 1에서 부르주아지가 축출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프롤레타리아는 권력을 장악하지 못했으며, 퇴보로 이어지는 조건을 제거하지도 못했다. 붉은 군대의 손에 나치즘이 패배하면서 스탈린주의는 새로운 위신을 얻었고, 스탈린주의는 이 위신을 이용해 전후 혁명에 제동을 걸었다(얄타 및 포츠담 협정). 스탈린주의는 프랑스, 이탈리아, 그리스에서 일어난 혁명을 배신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식민지와 반(半)식민지에서의 혁명은 억제할 수 없었다.

 

미국은 제2차 세계대전 직후 새로운 세계 질서를 주도하는 주요 강국으로 부상했다. 그러나 이러한 지배력은 중요한 모순을 안은 채 확립된 것이었다. 소련 역시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강대국으로 부상했다. 그러나 이는 스탈린주의 관료집단의 공로가 아니라, 나치를 피비린내 나는 러시아의 겨울로 몰아넣은 프롤레타리아 군대인 ‘붉은 군대’의 힘에 의한 것이었다.

 

바로 이 특정한 새로운 세계 질서 속에서, 미국은 유엔의 공모와 스탈린주의의 지지를 받아, 이스라엘 국가를 자신의 정치적, 군사적 이익을 위한 거점으로서 인위적으로 관철해냈다. 나크바는 시온주의의 식민주의적 특성을 집약하는 역사적 사건일 뿐만 아니라, 미국이 중동에서 자신의 이익을 확장하고 공고히 하는 과정의 중대한 표현이기도 하다.

 

이러한 역사에 비추어 볼 때, ‘두 국가 해법’을 옹호하는 팔레스타인 연대운동의 일부 세력은, 시온주의 국가의 기원이 드러내는 본질적 측면, 즉 시온주의 국가의 존재 자체가 팔레스타인과 유대인의 해방과 모순된다는 사실을 누락한다. 토지 강탈, 공동체 전체의 추방, 잔혹한 군대와 정착민 무장집단에 의한 인종청소 없이 이스라엘 국가는 존재할 수 없다. 제국주의 없이는 이스라엘 국가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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