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리는 거의 다 제가 해요. 제 처는 요리 졸업했어요, 부엌에서 은퇴! 주부니까 요리해야 한다는 죄책감이 있더라고요.” 한 예능프로그램에서 소설가 김영하가 한 말이다. ‘우와 멋지다, 이 사람!’
‘신부수업’을 위해 제과제빵을 배우거나 요리학원에 다니는 여성을 가끔 보게 된다. 결혼해서 주부가 되면 어쩔 수 없이 요리를 해야 하니까 아예 이해가 안 되는 건 아니다. 한데 왠지 씁쓸하다. 김영하 말대로 ‘주부니까 요리해야 한다는 죄책감’ 내지 의무감을 지니게 되는 건 당연한 듯 여겨지기도 한다. 하지만 어째서 그게 당연한 걸까?
“너 집에서 논다며?”
정아은의 <당신이 집에서 논다는 거짓말>은 제목이 잘 드러내듯 여성들의 가사노동에 대해서, 특히 주부의 가사노동이 ‘집에서 노는’ 것으로 가치 폄하되는 것에 대해서 살펴보는 책이다.
육아를 위해 어쩔 수 없이 직장을 그만두게 된 저자에게 주변의 누군가 말한다. “너 요즘 집에서 논다며?” 혼자 살거나 남성인 경우에는 정말로 집에서 놀 수도 있다. 그러나 남편이나 아이가 있는 기혼여성은 직장을 안 다닌다고 해서 결코 집에서 놀지 않는다, 아니 놀 수 없다. 가족을 돌보고 집안 살림을 꾸려가야 하기 때문이다. 누가 그에 대해 돈 한 푼 대가를 지불하지도, 수고했다고 인정해주지도 않고, 동료도 없이 고립되어 출퇴근 시간조차 없이, 휴식시간과 가사노동시간의 구분도 모호한 채 놀지 못하고 ‘집안일’을 한다.
저자는 전업주부가 노는 사람 취급을 받는 것에 대해서, 어째서 여성의 가사노동은 이렇게 사회적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것일까에 대해 여러 책을 살펴보며 하나씩 그 이유를 파헤쳐나간다. 이윤만을 위해 모든 것이 굴러가는 자본주의 체제가 문제임을 인식하게 되고, 성별분업에 대해서도 되짚어본다. 때로는 반페미니즘 이론가의 책을 보고 성별임금격차에 대해서 성찰하는 시간을 갖기도 하고 자본주의 사회의 결혼제도와 가족제도에 문제를 제기하며 답을 찾아 나간다.
여성도, 남성도 ‘균질한 단일한 그룹’은 없다
저자는 ‘세상 모든 남성은 여성의 적’이라 여기는 페미니스트였던 듯하다. 그런데 전업주부의 삶에 대해 깊이 있게 사유하면서 이런 편협한 시각이 차츰 깨져나가고 좀 더 확장된, 바람직한 페미니즘 관점으로 성장해가는 모습이 재미있다. “세상에는 엄마들이 힘들다고 말하면 적대감을 보이는 ‘남성들’은 없었던 것이다. 내가 생각했던 균질하고 단일한 하나의 그룹, 여성의 애환을 말하면 쌍심지를 켜고 달려드는 적대적인 단일종의 인간들은 없었다.”
박가분의 <포비아 페미니즘>(‘공존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가’)을 보며 “남녀 간 임금격차가, 가부장제가 여성을 억압하기 위해 만들어낸 게 아니라 역사적‧사회적 상황에서 나온 산물이라는 설명에는 완전히는 아니어도 상당 부분 동의할 수 있었”다고 한다. “성별 임금격차를 사회구조와 역사적 맥락에서 들여다 볼 기회를 가지면서 알게 된 또 하나의 사실은 하나의 성별에게 과도한 부담이 지워지면 그것이 그 반대편의 성에게도 영향을 미치게 된다는 점이었다. 성별에 따른 차별임금이 남성에게도 부담과 고통으로 기능했다는 사실을 조명하면 성차별적인 임금체계를 무너뜨리는 일이 남녀 모두에게 이롭다는 주장에 설득력이 생기기 때문이다.”
특히 이런 반페미니즘 관점에서 쓰인 책을 비판적으로 검토하면서 남성 노동계급의 현실을 주목한 저자의 태도가 인상적이었다.
“남성이라고 해서 다 지배자이고 특권층이 아니라는 주장. 흔히 여성들은 남성들이 모두 여성 위에 군림하면서 편하게 살아간다고 착각하는데, 실제로 그렇게 사는 남성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나머지 대다수 남성들은 사회가 요구하는 거칠고 위험한 일을 하면서 자신을 소모한다. 그동안 나는 남자=특권층이라 생각하면서 남자라면 무조건 적대시하는 경향이 있었는데, 이 부분을 읽으면서 그 생각이 오류였음을 알았다. 남자도 남자 나름이라는 생각. 남자를 분류해서 나누어 보아야겠다는 생각.”(‘내 몸 안에 갇힌 나를 어떻게 들여다볼 것인가 - 로이 F. 바우마이스터, <소모되는 남자>’)
이건 너무 당연한 거 아닌가 싶다가도 여전히 많은 페미니스트가 대립구도를 단순히 남성과 여성으로만 볼 뿐, 그 남성과 여성 내에도 엄연히 계급구분이 있다는 점, 소수의 권력층, 상층과 절대다수의 피지배계급, 하층이 있다는 객관적 사실에 눈감고 있는 현실에서, 저자가 뒤늦은 깨달음을 솔직하게 고백하는 점이 와 닿았다. 어떤 주의주장에 대한 강한 신념은 때론 확증편향을 낳고 비과학적이고 비이성적인 경향으로 굳어지기도 하니까. 더 많은 페미니스트들이, 더 많은 노동자가 분리주의 페미니즘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여성해방을 위해 모든 성별의 노동자가 함께 단결하고 연대해서 투쟁해야 한다'는 변혁적 지향의 페미니스트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본다. 분리주의 페미니즘과 다른 변혁적 페미니즘적 실천을 차곡차곡 쌓아가야 이 바람은 현실이 될 수 있으리라.
법륜스님의 인기에는 이유가 있다
법륜스님의 <엄마수업>에 대한 저자의 검토(‘비구니가 <아빠 수업>이라는 책을 낸다면 어떤 반응을 받을까’)도 흥미롭다. 법륜스님은 책에서 나이 많은 아들을 장가보내려면 집에서 내쫓아라, 그럼 밥 해주고 빨래 해 줄 사람 찾아 결혼한다, 딸도 마찬가지로 내쫓고 돈을 안 주면 결혼하게 된다고 말한다. “어쩌면 이렇게도 확고한 성별 분업 논리를 가질 수 있을까.” 저자의 기함에 백번 공감. 그럼에도 법륜스님이 주부들에게 인기 있는 이유(내 주변에도 스님 팬이 몇 있다)를 알게 되면 괜히 짠해진다.
“스님의 영상을 볼수록 호감도가 상승했는데, 그것은 스님이 주부라 불리는 일군의 사람들을 대하는 태도 때문. 지루하게 느껴질 수도 있는 천편일률적인 이야기들(아이 교육, 남편이나 시가와의 갈등이 주를 이루는) 하나하나에 귀 기울이고, 그에 대해 질문으로 응수했다. 연속질문을 통해 질문자 스스로 자신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게 만드는 것. 어디에 가서도 자신의 말에 온전히 귀 기울여주는 사람을 만나기 힘든 주부들에게, 그것은 값진 경험이었으리라.”
주부로서의 여성들이 사회에서 존재가치를 인정받지 못하고 하소연할 곳 없어 속앓이 하는 안타까운 현실이 잘 드러난다. 비록 스님의 편견과 관점은 완전히 잘못된 것이지만 그 태도만큼은 페미니스트들이, 사회주의자들이 배워야 한다. 운동의 주체를 세우고 저변을 넓히는 것은 빠삭한 이론으로 가득한 논리정연하고 무미건조한 선전이나 목에 핏대 세운 선동, 힘 뻗치는 투쟁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하고 싶은 주의주장만 쏟아내기보다는 주변의 노동자, 여성들의 고통과 고민에 대해 열린 마음으로 다가가고 그들의 말에 귀 기울이면서 진솔하고 깊이 있게 대화하는 것이 먼저일 것이다. 그런 대화를 통해 우리가 현재 발 딛고 있는 자본주의 체제의 본질에 대해 이해하고 자신에게 주어진 사회적 역할과 역사적 사명을 깨닫도록 하는 것, 포용력, 설득력과 끈기를 가지고 변혁운동에 한 걸음 다가오도록 손잡아주는 것, 이런 잔잔하고 감성적인 과정도 반드시 함께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잘은 모르지만 머리 위에 물음표가 두둥실~
저자는 실비아 페데리치와 마리아 미즈의 관점도 상당부분 받아들이고 있는데 한편으론 동의되면서도 어떤 점에선 거부감이 들기도 했다. 나는 아직 이 책들을 읽어본 적이 없어 섣부르게 판단하긴 이르다. 그러나 이들이 여성의 가사노동, 재생산노동의 중요성을 재조명한 것은 객관적 사실이지만, 그것의 강조가 자칫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자계급의 혁명적 역할과 중요성을 부정하거나 가치절하는 하는 듯한 뉘앙스가 느껴져서이다.
“마르크스가 자본주의를 노동자와 자본가라는 두 개의 요소로 구성되어 있다고 잘못 이해하는 바람에 마르크스 이후 모든 사상의 흐름이 이 양대 범주를 벗어나지 못했다는 것이다. 저자에 따르면 자본주의는 노동자와 자본가라는 양대 축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노동자와 자본가와 재생산자(여성, 자연, 식민지)라는 세 개의 축으로 이루어져 있다. 노동자와 자본가는 여성과 자연과 식민지라는 거대한 빙산의 맨 위 지점에 자리한 지극히 작은 부분일 뿐이며, 여성과 자연과 식민지라는 비자본적 재생산의 축들이 무너지면 노동자와 자본가도 더 이상 존속할 수 없다.”(‘누가 누구에게 의지하는가 - 마리아 미즈의 <가부장제와 자본주의>’)
“세상에 ‘아내’라 불리는 주부가 없다면, 자본주의는 일거에 무너질 것이다. 주부가 남편인 노동자에게 해주던 온갖 종류의 무상 재생산 서비스가 사라지면 노동자는 그 모든 서비스를 돈을 주고 구매해야 할 테고, 그런 상황은 필연적으로 임금인상이라는 결과를 낳을 테니. 그렇게 되면 자본이 어떻게 이윤을 취할 수 있겠는가. 그러니 자본주의라는 거대한 마차가 굴러가게 하는 것은 ‘노동자’가 아니라 노동자를 무상으로 재생산해주는 ‘주부’이다.”(‘왜 가사노동에 임금을 지불해야 하는가 - 실비아 페데리치의 <혁명의 영점>’)
주부는 결코 단일한 계급이 아니다. 부유한 이들을 제외한 대부분의 기혼여성은 노동자와 전업주부 사이를 오간다. 결혼, 출산, 육아 등으로 경력단절이 되는 경우가 있지만 대부분의 노동자부부는 맞벌이를 한다. 주부라는 하나의 정체성만 지닌 기혼여성은 소수에 지나지 않는다. 자본주의 체제의 핵심동력으로 주부를 상정하고 이로부터 ‘주부파업’ 등의 투쟁전술이 나온다. 그러나 주부파업은 현실적으로 무엇을 공격목표로 삼는가? 노동자의 파업은, 자본의 이윤에 직접 타격을 준다. 그런데 주부파업은? 남편과 자녀의 직장과 학교에 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칠 수는 있겠지만 물음표가 그려지는 건 어쩔 수 없다.
가사노동 = 주부 + 가사돌봄노동자
그리고 가사노동 임금 지불 얘기를 하자면, 전업주부에 대해서보다는 가사돌봄서비스를 업으로 삼는 노동자들의 열악한 권리를 어떻게 향상시킬 것인가로 논점이 옮아가야 한다고 본다. 저자는 이 책에서 주로 집안일을 하는 전업주부에 한정해서 이야기를 풀어갈 뿐 가사돌봄노동을 하는 여성노동자들의 권리에 대해선 거의 말하지 않는다. 여성억압과 차별에 대해서 끊임없이 ‘자본주의 체제가 원인이고 문제’라고 진단하면서도 정작 노동자계급, 노동자투쟁에 대해서는 말을 아낀다. 페미니스트라고 해서, 자본주의를 반대한다고 해서 모두가 곧 사회주의를 지향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자본주의 체제가 문제라는 것을 인식했다면 보다 근본적으로 노동자계급의 투쟁으로 눈을 돌려야 하지 않을까? 노동자운동과의 연결고리를 생각지 않은 채 자본주의의 모순을 해결할 수는 없지 않은가. 어쩌면 저자는 여러 책을 보며 자신의 사고를 확장해나가고 있지만 페데리치와 마리아 미즈가 제시하는 세계관에 갇혀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짐작을 해 볼 뿐이다.
사진: 공공운수노조
우리는 혁명을 꿈꾼다. 노동자를, 여성을, 자연을 억압하고 착취하는 자본주의 체제를 확 뒤집어엎어 전혀 새로운 평등과 연대의 공동체로, 해방사회를 건설하려 한다. 그렇다면 자본주의 체제를 깨뜨릴 수 있는 핵심 혁명주체가 누구인가를 명확히 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런데 노동자계급 ‘대신에’ 주부를 그 자리에 대체하는 것은 지나치게 나아간 것으로 보인다. 가사노동의 가치를 논하는 것은 의미 있고 필요하며 중요하다. 하지만 그것이 노동자계급의 혁명성과 헤게모니를 부정하는 것이 되어선 안 된다는 게 내 생각이다. 이는 페미니즘운동과 노동운동의 관계, 페미니즘과 사회주의와의 관계설정에서 꽤나 중요한 문제다. 페미니즘운동만이 아니라 기후, 청년, 소수자운동 등 사회주의가 함께해야 할 여러 운동과 관계맺음에 있어 서로 존중하고 가치를 인정하되 노동자계급의 헤게모니를 분명히 하지 않은 채 여러 운동 가운데 하나로 노동운동을 나란히 놓아버리면 사회주의혁명, 여성해방운동을 어떻게 조직해나갈 것인가에서 우선순위가 뒤죽박죽되어버릴 것이다. 차별과 억압, 착취, 반동과 탐욕의 자본주의 체제를 그 뿌리에서부터 확실하게 숨통을 조이지 않은 채 변죽만 울리는 운동으로는 결코 혁명은 제 흐름을 타지 못할 것이다.
대안사회 상상하기
마지막 장에서 자본주의적 가족에 대해서 비판적으로 검토하며 시민결합 제도에 대한 이야기엔 꽤 공감이 갔다.
“최근 들어 결혼으로 맺은 가족 관계가 아니어도 2인 이상이 주거를 함께하면 기존 법적 가족에게 허용되던 복지혜택을 누릴 수 있게 해주는 ‘시민결합’ 제도에 관한 논의가 활발하게 펼쳐지고 있다. 1인 가구나 동성친구끼리 같이 사는 가구, 혹은 혈연관계가 아닌 여러 나이대의 사람들이 함께 사는 가구 등 다양한 형태의 가구가 이미 '법적 가족'의 비율을 넘어선 상황에서, 시민결합제도의 도입은 지금 당장 시행해도 너무 늦은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시급해 보인다. 가족이란 핏줄이라는 우연을 매개로 이루어진 공동체이다. 혈연을 이유로 누군가는 삶에 필요한 물질적 정서적 재화가 전무한 상태에서 생활하고 누군가는 모든 종류의 재화가 넘쳐나는 상태에서 평생을 살아가는 사회구조는, 인류가 지금까지 이루어온 사회적 문화적 진보를 무색하게 만드는 퇴행적 구조가 아닐까. 가족에게 생존과 교육과 복지를 일괄적으로 책임지게 한다는 것은 사람이라는 존귀한 존재를 우연과 운에 내맡기는 원시적 행태이다. 시민결합을 인정하는 것은 자연적이고 우연적인 요소보다 인간의 노력과 의지에 힘을 실어주는 진일보한 발걸음이 될 것이다.” 동의하는 분 손? 하면 너도나도 저요, 저요! 할 것 같은 느낌.
갈수록 1인 가구 비중이 늘고 결혼 등의 법적인 관계가 아니어도 실제 가족을 꾸리고 살아가는 관계도 다양하다. 이런 변화를 반영하지 못한 법, 제도로 피해를 보는 노동자도 아주 많다. 더 이상 낡아빠진 ‘정상가족’ 구도로 여성은 물론 남성까지 옭아매는 불합리한 현실은 반드시 달라져야 하리라. 변혁을 추구하는 페미니즘운동과 노동자운동이 이에 대해 더 관심을 기울이고 목소리를 높여 대안을 찾아나가야 할 것이다.
“나는 상상한다. 혈연으로 맺은 인연들과 시민 개개인의 의지로 맺은 인연들이 대등하게 인정받고 다양한 종류의 결합 공동체가 합의와 지지를 나누며 살아가는 사회를. 그런 날이 오기를 바란다. 인간이 인간에게 압박으로 작용하지 않고, 다양한 사람들과 삶을 나누며, 새로운 만남을 통해 자신을 쇄신할 기회를 충분히 가지는 열린사회가 도래하는 날을. 주부인 내가, 내가 지닌 소소한 재화와 능력을 가족이 아닌 타인을 위해서도 쓰며 살아가는 날을. 내 아이의 위장과 내 아이의 미래뿐 아니라 다른 이들의 위장과 미래를 생각하는 데도 상당한 시간을 들이며 사는 날을.”
저자의 생각에 이따금 고개를 갸우뚱한 적도 있지만 결론부의 이 문장들은 참 좋다. 저자와 같은 상상과 바람을 가슴속에 품은 이들이 더 많아졌으면, 그리고 그런 이들이 함께 손잡고 작은 실천을 해 나가면서 차츰 그 몸집을 불려나가고 연대의 장으로, 투쟁의 전선으로 발걸음을 내딛었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 본다. 노동운동과 페미니즘이 함께 발전해 나아갈 방향을 머리 맞대고 토론하고 합의해서 서로 굳건히 결합하여 변혁적 페미니즘을 위해 투쟁하는 날을 위해, 변혁을 꿈꾸는 노동자라면, 여성해방을 꿈꾸는 여성이라면 우리는 모두 변혁적 페미니스트로 하나가 되어야 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