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 페미니즘, 교차성, 그리고 마르크스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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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라인신문

[번역] 페미니즘, 교차성, 그리고 마르크스주의

젠더, 인종, 계급에 관한 논쟁들: 노동자계급은 억압에 맞선 투쟁에서 어떻게 헤게모니를 쥘 수 있는가?

  • 해인
  • 등록 2026.03.31 1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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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차성(Intersectionality)'은 학계, 페미니스트 활동가, 그리고 사회운동에서 빈번하게 사용되는 단어다. 테리 이글턴(Terry Eagleton)이 지적했듯이, "계급, 인종, 성별"은 "현대의 성 삼위일체"다.[1] 교차성에 대한 담론은 많지만, 그 용어의 정의는 종종 불분명하다. 그것은 이론인가, 아니면 경험적인 묘사인가? 그것은 개인적 주체성의 영역에서 작동하는가, 아니면 지배 시스템을 분석하는가? 그리고 궁극적으로, 이 개념은 교차하는 억압의 원인에 대해 무엇이라 설명하고 있으며, 무엇보다 해방을 향한 경로에 대해서는 무엇을 말하는가?

 

젠더, 인종, 계급 사이의 관계에 대한 고찰은 마르크스주의 논쟁과 좌파 사이에서 오래전부터 존재해 왔지만, 교차성이라는 개념이 오늘날의 개념으로 처음 정의된 것은 1989년 흑인 법률가이자 페미니스트인 킴벌리 크렌쇼(Kimberlé Crenshaw)[2]의 기사에서였다. 그 기사에서 그녀는 미국의 차별금지법(anti-discrimination law)과 관련해 이러한 질문들에 답하고자 했다. 이 시작은 의심할 여지 없이 이 개념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는데, 이는 나중에 살펴볼 것이다. 그러나 이 개념의 가장 중요한 전례는 ‘콤바히 리버 컬렉티브(Combahee River Collective)'와 같은 1970년대 흑인 페미니스트들의 작업에 있는데, 이들은 당대의 정치적 급진화와 제2차 페미니즘 물결 속에서 해방 운동에 대한 "교차적" 비판을 제기했다.

 

이 글에서 나는 교차성 개념의 역사적 배경, 초기의 정식화, 그리고 포스트모더니즘의 부상과 함께 개념이 변화한 과정, 그리고 오늘날 이 개념을 둘러싸고 사회 운동 내에서 진행 중인 논쟁을 간략하게 요약할 것이다. 또한 교차성 이론을 마르크스주의와 비판적으로 대조할 것이다.

 

1. 콤바히 리버 컬렉티브와 흑인 페미니스트들

 

1977년에 발표된 '콤바히 리버 컬렉티브 선언문'은 노예로 태어나 노예제 폐지론자로 살아온 해리엇 터브먼(Harriet Tubman)이 1863년 적들의 포화 속에서 750명의 노예를 해방시키는 용맹한 군사 작전을 지휘한 것에 대한 헌사의 의미를 담은 명칭이다. 그녀는 미국 남북 전쟁 중 군사 작전을 지휘한 유일한 여성이었다.

 

1970년대 흑인 페미니스트들은 자신들을 19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흑인 여성 투쟁의 역사적 일부라고 생각했다. 안젤라 데이비스(Angela Davis)는 그녀의 저서 『여성, 인종, 계급』[3]에서 미국 노예제 폐지 운동 당시 흑인 여성 투쟁의 역할을 언급했다. 1851년 오하이오 여성 대회에서 여성 참정권을 위해 싸운 소저너 트루스(Sojourner Truth)의 연설은 역사의 한 장으로 남았다. 한 남자가 여성이 "약한 성별"이기 때문에 투표할 수 없다고 주장하자, 소저너 트루스는 강렬한 답변을 내놓았다:

나는 쟁기질을 하고, 씨를 뿌리고, 곳간에 작물을 쌓아올릴 때 어떤 남자에게도 뒤지지 않았소! 그런데도 나는 여성이 아니오? 나는 남자만큼 일할 수 있었고, (먹을것이 있기만 하다면) 남자만큼 먹을 수 있었고, 채찍질도 똑같이 견뎌낼 수 있었소! 그런데도 나는 여성이 아니오? 나는 열세 명의 아이를 낳았고, 그들 대부분이 노예로 팔려 나가는 것을 보았소... 그래도 나는 여성이 아니오?

그녀의 대답은 여성이 약하고, 정치적 시민권을 행사할 수 없는 "천성적으로" 열등한 존재라는 관념에 기초해 "여성성(femininity)"을 구축한 가부장적 서사에 대한 반박이었다. 동시에 그것은 흑인이고 노동자인 여성의 요구를 무시한 많은 백인 여성 참정권론자들에 대한 도전이기도 했다.

 

1970년대 중반, 백인 페미니즘 운동과 흑인 해방 조직에서 부정적인 경험을 한 일단의 흑인 여성들은 이러한 전통을 되살려 자신들만의 투쟁 집단을 형성하기로 결정했다. '콤바히 리버 컬렉티브 선언문'의 발표와 함께, 흑인 페미니스트들은 백인 페미니즘, 흑인 운동, 그리고 '전국 흑인 페미니스트 기구(NBFO)'의 부르주아 흑인 페미니즘에 동시에 의문을 제기했다.

 

그들의 출발점은 계급, 인종, 젠더라는 세 요소에 뿌리를 둔 '동시적인 억압'에 대한 공통된 경험이었다. 여기에 그들은 ‘성적 억압’(sexual oppression)을 추가했다. 이로부터 그들은 급진적 페미니즘이 헤게모니를 쥐고 있던 페미니즘 운동을 향해 비판의 날을 세웠다. 이러한 페미니즘 조류는 사회적 모순을 "성적 계급(sexual classes)"[4] 간의 대립으로 해석하고, 다른 모든 구조보다[5] 가부장제(patriarchy)라는 지배 구조를 우선시했다. 흑인 페미니스트들은 인종과 계급보다 성적 억압 또는 젠더 억압을 우위에 두는 것에 의문을 제기하면서, "성별 전쟁"을 조장하는 노골적인 분리주의 경향에 대해서도 논쟁을 벌였다. 이 분리주의 경향은 1970년대 후반 페미니즘 운동에서 힘을 얻었다. 흑인 페미니스트들은 이러한 유형의 페미니즘을 백인 중산층 여성의 이익에 따라 움직이는 운동으로 정의했다. 그들은 또한 정체성에 대한 어떤 종류의 생물학적 결정론도 반동적인 입장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주장했다.

우리는 페미니스트이자 레즈비언이지만, 진보적인 흑인 남성들과 연대감을 느끼며, 분리주의자인 백인 여성들이 요구하는 분열을 지지하지 않는다.

벨 훅스(bell hooks)는 저서 『모두를 위한 페미니즘』에서 그 시절 "자매애의 유토피아적 비전"과 가부장제에 대한 비역사적 정의가 인종 및 계급에 관한 논쟁에 의해 도전받았다고 주장한다. 그녀는 이 시기를 평가하며 "여성이 하나의 성적 계급/카스트를 구성한다는 개념을 불러일으키며 공통의 억압이라는 기치 아래 운동을 조직하려 했던 백인 여성들이, 여성들 사이의 차이를 인정하는 것을 가장 꺼려했다"고 단언한다. 그녀는 또한 운동 내 분리주의 조류와의 논쟁을 강조한다.

그들은 모든 여성을 피해자로 나타내기 위해 모든 남성을 적으로 묘사했다. 남성들에 대한 이러한 주목은 개별 페미니스트 활동가들의 계급적 특권과, 계급 권력을 증대시키려는 그들의 욕망으로부터 주의를 돌리게 했다.[6]

'콤바히 리버 컬렉티브 선언문'은 흑인 여성과 흑인들의 해방을 위한 투쟁을 자본주의 체제에 대항하는 투쟁과 분리될 수 없는 것으로 특징지었다. 그렇기에 저자들은 사회주의를 위한 투쟁을 명시적으로 지지했다:

우리는 모든 억압받는 인민의 해방이 가부장제뿐만 아니라 자본주의와 제국주의라는 정치-경제 체제의 파괴를 필요로 한다는 것을 인식한다. 우리가 사회주의자인 이유는 노동이 노동을 수행하고 제품을 만드는 사람들의 집단적 이익을 위해 조직되어야 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페미니즘 혁명과 반인종주의 혁명이 동반되지 않는 사회주의 혁명이 우리의 해방을 보장해 줄 것이라고는 믿지 않는다.

마르크스주의와 관련하여 그들은 "특정한 경제적 관계"에 관한 마르크스의 이론에 근본적으로 동의한다고 주장했지만, "흑인 여성으로서의 우리의 구체적인 경제적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서 그 분석이 더 확장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비록 그들이 사회주의 혁명의 필요성을 표명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집단으로서 제안한 실천적 과제는 주로 자기 인식 워크숍과 그들 지역사회 내 흑인 여성들의 구체적인 권리를 위한 투쟁에 국한되었다는 점을 유의해야 한다.

 

'정체성 정치'라는 개념은 흑인 여성들이 억압을 경험하는 구체적인 방식에 대한 대응으로서 선언문에 등장한다. 자신의 정체성을 인식하는 것은 이후 다른 해방 운동과 결합하기 위해 필요한 단계로 간주된다. 경제적, 성적, 인종적 지배가 결합된 체제에 맞서 싸우기 위해, 독자적인 정체성을 형성하는 것과 다른 억압받는 이들과 연대하는 일 사이에는 긴장이 존재한다.

 

그러나 몇 년 후, 신자유주의와 포스트모더니즘의 부상으로 사회적, 정치적, 사상적 맥락이 급격하게 변화하면서 '교차성(intersectionality)'이라는 개념은 새로운 의미를 띠게 되었다. 사회의 근본적인 변혁이 전망에서 사라지면서, 집단적 행동의 기회는 흩어지는 경향을 보였고, 대신 차별화된 '정체성'과 자본주의 사회 내에서 이를 인정받으려는 정책적 요구가 늘어나기 시작했다.

 

2. 차별의 범주로서의 교차성

 

킴벌리 크렌쇼는 1989년에 교차성 개념을 처음 정의했다. 그녀는 인종 차별과 성 차별을 '경험과 분석의 상호 배타적인 범주'로 분리해서 취급하는 것이 법리, 페미니즘 이론, 그리고 반인종주의 정치에 문제적인 결과를 초래했다는 점을 강조했다." 따라서 그녀는 "흑인 여성 경험의 다차원성과 이러한 경험을 왜곡하는 일차원적 분석”을 대비시켜야 한다고 제안했다.

 

그녀는 (인종, 젠더, 성적 지향, 계급 중 무엇이든 간에) 단일한 차별 축에 기반한 개념화는 흑인 여성을 정체화와 차별 종식의 가능성으로부터 지워버리며, 분석을 각 집단의 특권적인 구성원들의 경험으로 제한한다고 지적했다. 인종 차별은 성별이나 계급적 특권을 가진 흑인들의 관점에서 보여지는 경향이 있고, 반면 성 차별을 다룰 땐 경제적 자원을 가진 백인 여성에게 초점이 맞춰진다. "교차적 경험은 인종차별과 성차별의 합보다 크기 때문에, 교차성을 고려하지 않는 어떤 분석도 흑인 여성이 종속되는 특정한 방식을 충분히 다룰 수 없다."

 

그녀의 분석에서 크렌쇼는 흑인 여성들이 제기한 여러 소송이 사법부에 의해 어떻게 간단히 기각되었는지 검토한다. '드그라펜리드 대 제너럴 모터스(DeGraffenreid v. General Motors)' 사건에서 다섯 명의 여성은 다국적 기업인 GM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는데, 이들은 흑인 여성으로서 더 나은 직책으로의 승진이 거부되었기 때문에 고용 차별을 받았다고 주장했다. 법원은 그들이 "흑인 여성"이라는 이유로 차별받았음을 입증할 수 없다고 주장하며 소송을 기각했다. 그들이 특별한 차별을 받은 집단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대신 법원은 인종적 혹은 성별적 차별이 발생했는지에 대한 조사에는 동의했다. 그러나 "두 요소의 결합"은 인정하지 않았다. 결국 법원은 GM이 여성을 —백인 여성을— 고용했기 때문에 젠더 차별이 없다고 판단했고, 회사가 흑인을 —흑인 남성을— 고용했기 때문에 인종 차별도 없었다고 판단했다.

 

흑인 여성들의 소송은 실패했다. 법원은 이 소송을 인정하는 것이 "판도라의 상자"를 여는 일이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크렌쇼는 교차성 개념의 목적이 흑인 여성들이 단일 축 개념 틀로는 다루지 못하는 복잡한 형태의 차별을 경험할 수 있다는 점을 인식하는 데 있다고 지적한다. 1980년대 후반, 교차성 개념은 "차별" 경험의 복잡성을 다루기 위한 범주로 등장하였으며, 이는 국가가 "다양성 정책"을 규제할 수 있도록 하는 새로운 판례법 확립을 목적으로 했다.

 

나중에 미국 사회학자이자 흑인 페미니즘 학자인 패트리샤 힐 콜린스(Patricia Hill Collins)는 교차성을 "교차하는 억압들에 의해 특징지어지는, 역사적으로 특정한 지배 구조 내에서 구축되는 것"으로 정의했다.[7] 그녀의 견해에 따르면, 교차성은 다른 "사회 정의 프로젝트들”과의 결합(convergence)이나 연합(coalition)을 추구하는 사회 정의 프로젝트를 의미한다.

 

교차성 개념은 이후 학계 내에서 "여성학"의 틀이 확장되는 과정 속에서, 많은 흑인, 라틴계, 아시아계 페미니스트 지식인들에 의해 발전되었다. 교차성은 컨퍼런스와 심포지엄, 연구 부서에서 유행어가 되었다. 경제, 법률, 사회, 문화 및 공공 정책 분야에서 교차성 연구를 발전시키기 위한 NGO(비정부기구)들이 만들어졌다. 젠더, 인종, 계급이라는 세 요소에 성적 취향, 국적, 연령, 기능적 다양성과 같은 다른 억압의 축이 추가되었다. 이는 여러 집단과 공동체가 직면한 구체적인 억압의 가시성을 높여주었다. 그러나 이는 역설적으로 자본주의 사회 구조에 대한 체념의 분위기 속에서 발전했다. 자본주의 사회 구조는 도전할 수 없는 것으로 여겨지게 되었다.

 

3. 교차성, 정체성 정치, 그리고 다중적 차이

 

학계에서 교차성 연구의 부상은 신자유주의 하에서 지적, 정치적 기류를 완전히 뒤바꾼 새로운 역사적 단계의 시작과 함께 진행됐다. "부르주아 복고"[8] 또는 신자유주의 호황기로 불리는 이 시기는, 전 세계적으로 노동자들이 쟁취한 결실에 대한 전방위적인 공격이 자행된 시기였다. 노동조합 및 노동계급 정치 지도부의 변절(이탈) 아래, 민영화와 규제 완화 정책이 맹렬하게 추진됐다. 이는 노동계급 내부의 파편화를 심화시켰고 계급 주체성의 거대한 상실로 이어졌다.

 

이 새로운 맥락 속에서, 콤바히 리버 컬렉티브의 흑인 페미니스트들과 사회주의자들이 견지했던 급진주의는, 포스트모더니즘적 관점에 따라 주체의 분절화를 심화시키는 틀 속에서 교차성을 정식화하는 방향에 자리를 내주게 되었다. 교차성이라는 아이디어는 "다양성(diversity)" 및 "정체성 정치(identity politics)"와 더욱 유사해졌다. 이러한 정식화는 지배 관계를 "문화화"하는 과정 속에서, 초점을 집단에서 개인으로, 물질에서 주체로 이동시켰다. 그것은 억압받는 집단의 투쟁이 근본적으로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자기 인식— "맥락적 지식" —을 획득하는 것 을 포함하며, 이를 통해 특권 집단(남성, 백인 여성, 이성애 여성 등)이 자신의 특권을 "해체"하고 다양성을 인정하도록 한다는 개념을 일반화한다. 포스트모더니즘의 "문화적 전환"의 틀 속에서, 정체성은 오직 담론 속에서만 구축되고, 저항의 가능성은 대항 서사를 확립하는 일에만 제한된다.

 

그러나 이러한 관점은 계급 착취에는 적용될 수 없다. 생산 수단을 소유한 자들 —은행가와 자본가들— 이 자기 성찰을 통해 그들의 권력을 "해체"할 것이라고 기대할 수 있는가? 실제로는 이 제안은 인종차별, 이성애 중심주의, 성차별을 종식시키기 위한 전략으로서 무용하다. 이러한 "지배의 축"들은 자본주의의 물질적, 구조적 관계와 얽혀 있지 않은, 문화적 또는 이데올로기적 영역에서만 작동하는 별개의 실체가 아니기 때문이다.

 

반대로, 이러한 억압의 토대가 되는 자본주의적 사회 관계를 근본적으로 변혁할 가능성을 고려하지 않은 채, 억압받는 정체성들만을 끊임없이 늘려나가는 방식은 활동에서 "게토화"와 분열의 관행을 낳았다. 프라티바 파마르(Pratibha Parmar)는 그녀의 저작에서 이 문제를 경고했다:

억압받는 정체성들을 모아서 쌓아올리는데 치중한 결과, 이는 결국 억압의 위계를 낳게 되었다. 이러한 줄 세우기는 파괴적일 뿐만 아니라 분열적이었으며 운동을 마비시키는 것이었다. ... 많은 여성이 게토화된 "라이프스타일 정치"로 후퇴했으며 사적이고 개인적인 경험을 넘어서지 못하고 있다.[9]

이러한 무력함의 상응물로서, 자본주의 체제는 '다양성'의 폭발적 증가를 정체성의 시장으로 이용하였다. 그리고 그 정체성들이 총체로서의 사회 구조에 도전하지 않는 한 그들을 동화시킬 수 있었다. 테리 이글턴은 포스트모더니즘에 관해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포스트모더니즘의 유일하고 가장 오래남을 성과— 성적 취향, 젠더, 민족성 문제를 정치적 의제에 확고히 자리매김시켜, 강력한 노력 없이는 이 문제들을 지워버리는 것을 상상조차 불가능하게 만들었다는 점—는, 계급, 국가, 이데올로기, 혁명, 물질적 생산양식을 다루는 더 고전적인 형태의 정치적 급진주의를 대체한 것에 불과했다.[10]

그러나 이글턴은 각주에서 이러한 이슈들을 정치적 의제에 올려놓은 것은 포스트모더니즘 지식인들이 아니라, 그 이전에 1960년대와 70년대의 투쟁을 통해 전개된 사회 운동의 실천이었다고 분명히 했다. 이 정치적 급진화의 물결이 좌절되자, 인종, 젠더, 섹슈얼리티 담론은 전면에 등장한 반면, 계급은 점점 더 비가시화되었다(일부 저자들은 노동계급 그 자체의 소멸에 대해 쓸 정도였다).

 

4. 계급 정치로부터의 후퇴

 

계급/인종/젠더 세 요소에서 계급은 희석되거나, 마치 소득에 따른 사회적 계층이나 직업 유형처럼 단지 또 하나의 정체성이 되어버리는 경향이 있었다. 마르타 E. 히메네스(Marta E. Giménez)[11]는 콜린스를 인용하며, '교차성 이론의 특징적인 요소 중 하나는 "이러한 연결 고리들을 이론화하기 위해서는 ‘억압들 사이의 동일함이라는 잠정적 가설을 지지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추정'인데, 이는 계급 관계의 특수성을 제거하는 결과로 이어진다고 언급한다.

 

이러한 견해에 반해, 인종, 젠더, 계급은 직접적으로 비교할 수 있는 범주가 아니라는 점을 지적할 필요가 있다. 이것이 우리가 고통에 위계를 세워야 한다거나, 사람들의 주관적 경험에 무엇이 가장 중요한지 결정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목표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억압과 착취 사이의 관계에 대한 더 깊은 이해를 얻는 것이다.

 

예를 들어 계급, 인종, 젠더는 "평등"과 "차이"와 관련하여 매우 다르게 작동한다. 역사적으로 부르주아지는 계급의 "사회적 차이"를 "자유 계약"이라는 "평등주의" 이데올로기 뒤에 가능한 한 숨기려 해왔다. 그러나 그들은 ‘차이’를 확고히 하기 위해 인종차별과 성차별을 이용한다. 이 “차이”는 생물학적 또는 '자연적'인 조건의 결과라고 여겨진다. 이러한 논리는 자원 배분과 권리 접근의 불평등을 정당화하고, 특정한 노동 분업의 지속, 또는 간단히 말해 수백만 명의 사람들을 비인간화하여 노예화하는 것을 옹호하기 위해 사용된다.

 

해방적 관점에서, 목표는 피부색, 출생지, 생물학적 성별, 또는 성적 선택의 어떠한 차이도 억압, 모욕, 또는 불평등의 근거로 사용될 수 없도록 하고, 동시에 다양성을 인정하고 사회적 협력의 틀 안에서 모든 개인의 창조적 잠재력의 발전을 촉진하는 것이다. 그러나 계급 차이의 경우, 목표는 계급 자체를 완전히 제거하는 것이다. 노동계급은 자본주의 사회 관계에 맞선 투쟁을 통해 생산 수단의 사적 소유를 철폐하고자 하며, 이는 계급으로서 부르주아의 소멸, 그리고 모든 계급 사회를 종식시킬 가능성을 수반한다.

 

자본주의 사회를 구조화하는 것은, 이러한 모순을 보이지 않게 만들려는 시도 너머에 있는, 생산 수단의 소유자와 임금을 대가로 자신의 노동력을 팔 수밖에 없는 자들 사이의 사회적 차이다. 가부장적 관계—자본주의보다 수천 년 전에 등장한—와 인종차별은 비역사적인 실체가 아니라, 자본주의 사회 관계의 틀 안에서 새로운 형태와 특정한 사회적 내용을 갖게 되었다.

 

자본주의는 가부장적 편견을 활용하여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 사이, 즉 생산 영역과 가정 영역 사이의 전례 없는 차별화를 확립한다. 가정에서 여성은 보이지 않는 노동을 통해, 노동력의 사회적 재생산이란 과업의 큰 부분을 지속적으로 수행한다. 자본의 재생산을 위해서 말이다. 새로운 사회 관계 아래 재편된 가족, 결혼, 이성애 규범성과 같은 제도들은 여성의 이러한 역할을 사회화하고 자연스러운 것으로 만든다. 성별 억압의 다양한 양상과, 수백만 명의 여성이 겪는 폭력과 여성 살해 등의 고통스러운 현실은 단순히 계급 관계로만 “환원”될 수는 없다. 하지만 억압과 착취라는 범주를 연결하지 않고서는, 이를 제대로 설명해낼 수도 없다.

 

인종차별은 수백만 명의 인간을 노예로 만드는 것을 이데올로기적으로 정당화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계몽주의가 "인간의 권리"의 기초로서 "자유", "평등", "박애”라는 사상을 드높인 것과 같은 시기에 말이다. 인종차별은 제국주의 국가들의 거대한 식민주의 사업, 그리고 미국에서 원주민들을 상대로 자행된 것과 같은 내부적 대량 학살을 동반하고 강화했다. 미국 남북 전쟁과 노예제 폐지 이후에도, 인종주의는 나라 인구의 상당수를 "2등 시민"이자 "2등 노동자"로 취급하여 배제하는 데 활용되어왔다. 이는 미국 노동계급 내부의 분열을 조장한다. 결과적으로 흑인 페미니스트들이 지적했듯이, 인종 억압과 성별 억압은 자본주의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절묘하게 결합된다. 미국 내 흑인 및 라틴계 여성 노동자들의 임금 격차가 더 크다는 점이나, 흑인 청년들에 대해 압도적으로 높은 수위의 제도적·경찰 폭력이 존재하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것은 또한 유럽 내 이주민들에 대한 인종차별적이고 외국인 혐오적인 정책들을 옹호하는 데 이용된다. 유럽에서 이주민들은 2등 노동자로 취급받으며 기본적인 사회적, 민주적 권리를 박탈당하고 있다.

 

5. 마르크스주의와 교차성

 

『자본론』에서 마르크스는 "검은 피부의 노동자에게 낙인을 찍고 있는 곳에서는 흰 피부의 노동자도 해방될 수 없다"고 썼다. 그 이전 작업에서 그와 프리드리히 엥겔스는 유토피아 사회주의자 푸리에의 말을 살짝 바꾸어 "사회적 진보, 역사적 시기의 변화는 여성이 자유를 향해 나아가는 정도에 비례하여 일어나며, 사회 질서의 쇠퇴는 여성의 자유가 감소하는 정도에 비례하여 일어난다"고 지적했다. 『영국 노동계급의 상태』에서 엥겔스는 대규모로 자본주의 생산 영역에 진입해 억압과 착취라는 이중의 고통을 경험하고 있던 노동자 여성들의 현실을 구체적으로 분석했다. 『가족, 사유재산, 국가의 기원』에서 엥겔스는 친구(마르크스)가 수행한 미완의 인류학 연구를 이어받아 역사 속의 가족 제도와 여성 억압에 대한 분석을 발전시켰다.

 

혁명적 마르크스주의는 착취와 억압 사이의 관계를 다른 방식으로도 분석해 왔다. 예를 들어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영국 프롤레타리아트의 권리가 아일랜드 노동자들의 억압에 기초한다면 그들은 해방될 수 없다고 주장했다. 나중에 레닌은 다른 민중을 억압하는 민중은 해방될 수 없다고 주장하며 식민지 억압에 맞선 투쟁뿐만 아니라 민족자결권을 옹호했다.

 

교차성 이론에 대한 비판에서, 리즈 보걸은 '교차성'이라는 용어가 대중화되기 전부터 1960년대와 70년대의 사회주의 페미니스트들이 이미 가부장제, 인종차별, 그리고 자본주의 사이의 교차 지점을 강조해 왔다고 옳게 주장한다. 그러나 플로라 트리스탄, 엥겔스, 클라라 체트킨, 그리고 러시아 혁명가들과 다른 많은 이들에 이르기까지, 그 시기보다 훨씬 전부터 사회주의 페미니즘 사상의 오랜 전통이 발전해 왔다는 점에 주목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는 중요한 국제 사회주의 여성 회의와 농민 및 노동자 여성 조직과 강령으로 이어졌다. 1938년 레온 트로츠키가 작성하고 제4인터내셔널이 채택한 '이행 강령'의 구호에는 "여성 노동자와 청년에게 길을 열어야”하며, "노동계급의 가장 착취받는 층 사이에서 지지"를 구해야 한다는 과제가 포함되어 있다.

 

교차성 이론가들은 종종 마르크스주의를 "계급 환원주의"로 간주하며 비판한다. 그러나 "계급 분석"의 중심성을 옹호하는 것은, 단순히 노동조합의 임금 인상 투쟁 같은 활동에만 스스로를 제한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계급에 대한 조합주의적(corporatist), 경제주의적, 혹은 좁은 의미의 전투적 조합주의(syndicalism)적 관점이다. 20세기의 많은 스탈린화된 공산당들과 노동조합 관료들의 관행이 이러한 좁은 조합주의 정치에 기반하여, "계급 정치"와 억압에 맞선 운동 사이의 골을 깊게 만든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마르크스주의가 계급 착취와 성별 억압, 인종차별, 식민지 억압, 그리고 이성애 중심주의의 '교차'를 고려하지 않았다는 주장은, 스탈린주의와 마르크스주의를 억지로 동일시할 때에나 가능한 일이다.

 

계급 분석은 자본주의 사회를 구조화하는 관계들을 드러내는 것을 목표로 한다. 그런데 이는 자본 축적을 위한 잉여 가치 추출(Extraccion)뿐만 아니라, 가정 내 여성 재생산 노동의 전유, 거대 독점 기업으로의 자본 집중, 금융 자본의 확장, 그리고 세계대전과 약탈로 이어지는 제국주의 국가 간의 경쟁에도 기반한다. 또한 자본이 어떻게 착취를 극대화하고 노동계급 대열 내의 분열을 유발하기 위해 인종차별적, 여성혐오적, 외국인혐오적 이데올로기를 부추기면서, "차이"를 활용하고 확립하는지 분석한다. 이러한 계급 분석은 "경제 환원주의적" 관점을 표현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정치적, 사회적 요소들의 상호작용을 포함하며 계급 관계와 인종차별, 가부장제, 이성애 중심주의 사이의 연결에 대한 더 깊은 이해를 가능하게 한다.

 

동시에 이 계급 분석은 21세기에 그 어느 때보다 다양하고, 인종화되고, 여성화된 노동계급이 내부 분열과 파편화를 극복해낸다면, 자본주의를 철폐하고 자유로운 생산자들의 새로운 사회를 조직하기 위한 기초로서 경제, 산업, 운송 및 통신 시스템 전체를 통제 아래 둘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음을 시사한다. "계급 정치"로부터의 후퇴는 사실상 자본주의 체제에 맞선 투쟁을 포기하는 것을 의미하며, 그것 없이는 인종, 젠더, 또는 섹슈얼리티에 기초한 착취와 억압으로 인한 끔찍한 불의를 끝내는 것이 불가능하다.

 

2008년 자본주의 위기 이후, 신자유주의 정책에 맞선 새로운 저항 운동의 출현과 함께, 페미니스트 활동가들, 반인종주의자들, 그리고 청년 운동의 일부 부문들은 다양한 억압받는 집단들 사이의 연합을 형성하기 위해 새로운 의미에서 "교차성" 개념을 옹호해 왔다. 예를 들어 2018년 3월 8일 스페인에서 파업을 조직한 여성 운동은 스스로를 "반자본주의, 반인종주의, 반식민주의, 그리고 반파시즘" 운동으로 규정했다. 이는 여러 갈래의 투쟁을 하나로 모으는 계기가 된 중요한 진전이었으며, 노동자 민중을 뿔뿔이 흩어놓으려는 파편화의 논리에 정면으로 맞선 커다란 흐름이었다. 그러나 자본주의를 타도하기 위한 공통의 전략과 연결되지 않는다면 저항 운동들의 합이나 "교차"만으로는 불충분하다. 자본주의를 타도하기 위한 공통의 전략 없이는 인종차별이나 가부장적 억압을 끝내는 것이 불가능하다.

 

이것은 다양한 "운동"이나 "정체성"을, 성별이 거세된 추상화된 노동계급과 서로 대치시키려는 것이 아니다. 역사상 노동계급이 젠더와 인종 측면에서 지금처럼 다양했던 적은 없었다. 여성은 이미 노동계급의 50%를 차지하고 있으며, 그중 흑인, 라틴계, 아시아계 여성이 다수이다. 그렇다면 헤게모니 전략의 핵심은 젠더, 인종, 섹슈얼리티에 기초한 모든 억압에 맞선 투쟁을 단호하게 통합하는 계급 정치의 중심성을 회복하는 것이다. 이는 자본주의가 분열시킨 것들을 결합하고, 노동계급 내부의 단결을 공고히 하며, 특정한 억압에 맞서 싸우는 운동들과의 연대를 강화하는 정책을 펴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관점은, 수탈자를 수탈하기 위한 투쟁과 함께, 비로소 진정한 해방사회로 전진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2019년 2월 24일, 스페인어판 콘트라푼토(Contrapunto)에 최초 게재.

2023년 7월 11일, 레프트보이스(Left Voice)에 번역된 글을 재번역.

영어 번역: 마리셀라 트레빈(Marisela Trevin)

한국어 번역: 해인

 

[1] Terry Eagleton, Against the Grain: Essays 1975–1985 (London, UK: Verso, 1986).

[2] Kimberlé Crenshaw, “Demarginalizing the Intersection of Race and Sex: A Black Feminist Critique of Antidiscrimination Doctrine, Feminist Theory, and Antiracist Politics,” in Feminist Legal Theory: Readings in Law and Gender, ed. by Katharine T. Bartlett and Rosanne Kennedy (New York, NY: Routledge, 1991).

[3] 앤절라 Y.데이비스, 『여성, 인종, 계급』, (황성원 역, 아르테, 2016)

[4] 1970년 수라미스 파이어스톤의 급진적 페미니즘이든, 1980년 크리스틴 델피의 물질주의적 페미니즘이든 마찬가지이다. 슐라미스 파이어스톤, 1970, “성의 변증법”, (김민예숙, 유숙열 역, 꾸리에, 2016). 크리스틴 델피, 1980, “주적”, (이민경, 김다봄 역, 봄알람, 2022)

[5] 케이트 밀렛이 『성 정치학』, 1970, (김유경 역, 쌤앤파커스, 2020)에서 제시한 개념.

[6] 벨 훅스, 2000, 『모두를 위한 페미니즘』, (이경아 역, 문학동네, 2017)

[7] Patricia Hill Collins, Black Feminist Thought: Knowledge, Consciousness and the Politics of Empowerment (New York, NY: Routledge, 1990), 127.

[8] Emilio Albamonte and Matías Maiello, “At the Limits of the ‘Bourgeois Restoration,’” Left Voice, December 24, 2019. First published in Spanish in 2011.

[9] Pratibha Parmar, “Black Feminism: The Politics of Articulation,” in Identity: Community, Culture, Difference, ed. by Jonathan Rutherford (London, UK: Lawrence & Wishart, 1990), 107.

[10] 테리 이글턴, 1996, 『포스트 모더니즘의 환상』, (김준환 역, 실천문학사, 2000)

[11] Marta E. Giménez, Marx, Women, and Capitalist Social Reproduction: Marxist Feminist Essays: (Leiden, Netherlands: Brill Publishers,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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