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8년부터 2002년까지 구조조정과 정리해고를 앞세운 자본가들의 신자유주의 대공세에 맞서 노동자들이 거센 반격에 나섰다. 노동자들은 아래로부터 역동적인 투쟁들을 만들어냈지만, 취약한 지도력을 극복하지 못하고 패배했다. 투쟁의 패배와 민주노조운동의 후퇴는 비정규직의 대대적인 확산으로 이어졌다. 그런데 자본가들의 계획과 달리 비정규직에서도 민주노조운동이 시작됐고, 2003~07년 비정규직 투쟁이 거세게 타올랐다. 2004~06년에는 비정규직 입법을 둘러싼 대회전이 펼쳐지기도 했다. 그러나 민주노총의 주력인 대기업 정규직이 계급적 전망을 상실하고 타협적·관료적 경향에 깊이 빠져들면서 계급적 단결투쟁으로 뒷받침되지 못한 비정규직의 도전은 패배를 거듭해야 했다. 자본가들의 대공세에 맞선 노동자들의 대대적인 반격은 광범한 노동자들 속에서 노동자 정치세력화의 열망을 불러일으켰고 민주노동당을 등장시켰다. 하지만 민주노조운동의 위기를 정치적인 영역에서 확대재생산한 민주노동당은 노동자계급의 미래를 열 수 없었다.

3부 패배와 퇴보 (1998-2008)
[시대배경] 신자유주의 구조조정
[1] 구조조정과 정리해고에 맞선 투쟁
[2] 민주노조운동의 후퇴와 비정규직 확산
[3] 비정규직 문제를 둘러싼 대결
[4] 민주노조운동의 위기
[5] 노동자 정치세력화 열망과 민주노동당
IMF 외환위기는 한국 자본주의 전체를 뒤흔든 큰 충격이었다. IMF를 배후에 둔 초국적 금융자본은 한국 자본주의의 전면적인 구조조정을 요구했다. 한국 자본가들은 신자유주의 세계 질서를 헤쳐 나갈 경쟁력을 획득하기 위해 고강도 착취체제를 구축하는 데 이 압력을 이용했다. 대량 정리해고와 비정규직의 급격한 확산이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의 핵심 수단이었다.
1)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을 이끈 김대중 정권
김대중 정권은 1998년 이후 5년 동안 금융 개혁, 기업 개혁, 공공부문 개혁, 노사관계 개혁 등의 이름 아래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을 거침없이 단행했다. 김대중 정권에 의한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은, 한편으로 국가와 독점재벌 주도 아래 발전해 온 한국 자본주의를 초국적 자본이 주도하는 신자유주의 세계 질서의 유기적인 일부로 재편하는 것이면서, 동시에 노동시장 유연화와 노조 무력화를 통해 노동자계급에 대한 착취와 억압을 새롭게 강화하는 것이었다. 그 결과, 한국의 경제와 사회 전반은 불과 몇 년 사이에 이전에 경험하지 못한 엄청난 변화를 겪게 됐다.
김대중은 IMF를 앞세운 초국적 금융자본에게 한국의 금융시장을 개방하겠다고 취임 전부터 약속했다. 외국 금융기관이 국내 금융기관을 인수할 수 있도록 법을 개정했다. 외국 자본을 끌어들이기 위해 각종 규제를 철폐하고 외국인투자촉진법을 제정했다.
시중은행 8개 가운데 한미은행, 외환은행, 서울은행, 제일은행 4개를 외국 자본에 팔아 넘겼다. 정부가 공적 자금을 쏟아 부어 살려 놓은 은행 지분을 싼 값에 사들인 외국 자본은 이후 주가 시세 차익으로 엄청난 돈을 챙겼다. 외환은행을 인수한 론스타는 2년 만에 5조 원, 제일은행을 인수한 뉴브리지캐피탈은 5년 만에 1조 2천억 원, 한미은행을 인수한 칼라일은 3년 만에 7천억 원을 벌어들였다.
외국인의 상장주식 투자한도를 폐지하고 기업 인수·합병을 허용했다. 그 결과 상장주식에 대한 외국 자본의 보유 지분이 1991년 3.3%, 1997년 14.6%에서 2004년 말에 42%로 증가했다. 한국은 헝가리(73%)와 멕시코(46%)에 이어 세계에서 세 번째로 외국 자본의 주식보유 비중이 높은 나라가 됐다. 2005년 4월 기준 삼성전자(54%), 포스코(66%), 국민은행(78%), SK텔레콤(48%), 현대자동차(48%), KT(49%), 에스오일(48%) 등 한국의 주요 대기업에서 외국 자본이 주도적 지위를 점하게 됐다.
김대중 정권은 부실 금융기관 구조조정도 대대적으로 단행했다. 시중은행 3개, 지방은행 2개, 종금사 17개, 증권사 7개, 보험사 4개가 퇴출됐다. 퇴출된 금융기관들은 대부분 다른 금융기관들에 의해 인수·합병됐다.
김대중 정권은 ‘부실기업 정리’ 명목으로 대대적인 기업 구조조정 또한 단행했다. 30대 재벌 가운데 16개가 무너졌다. 쓰러진 기업을 다른 기업이 헐값에 인수하면서, 5대 재벌이 더욱 비대해졌다. 상당수 기업은 외국 자본의 먹이가 됐다. 인수·합병 과정에서는 통상 20~30%의 인력감축이 진행됐다. 쓰러지지 않은 기업들도 일시적인 경영위기가 발생했다거나 또는 경영위기가 예상된다는 이유만으로도 대규모 정리해고를 속속 단행했다.
부실 금융기관과 부실기업 구조조정 과정에서 155조 원의 ‘공적자금’이 투입됐다. 이것은 해당 금융기관과 기업을 인수한 측에게 천문학적인 특혜가 주어졌음을 뜻했다.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의 결과 주주 자본주의, 즉 주식 가치를 높이기 위해 단기 수익을 극대화하는 경영 시스템이 일반화했다. 이것은 인수·합병과 구조조정의 일상화를 뜻했다. 정리해고, 외주화, 분사, 비정규직화, 연봉계약제 등으로 노동자들이 극심한 고용불안과 임금저하로 내몰리는 동안, 구조조정을 진두지휘한 경영진들은 연봉 인상과 스톡옵션으로 떼돈을 버는 일들이 자연스러운 일상이 됐다.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은 세계화의 전면적 수용을 뜻했다. 세계시장의 피 말리는 생존경쟁이 강요되면서 기업들 사이의 명암도 극명하게 갈라졌다. 삼성전자와 현대자동차처럼 세계적 경쟁력을 가진 대기업들은 세계 자본주의 질서 속에서 또 하나의 초국적 자본으로 성장하며 마음껏 세계를 질주하게 됐다. 반면 내수에 의존하거나 부품을 생산하는 중소기업들은 세계화의 그늘로 전락하여 대기업에게 수직 하청계열화하지 않고서는 생존을 도모하기 어렵게 됐다.
김대중 정권은 공공부문 구조조정도 대대적으로 단행했다. 한국통신, 포항제철, 한국중공업, 담배인삼공사 같은 공기업들을 매각하여 민영화(사유화)했다. 전력산업과 철도산업은 분할매각 방식이 추진됐다. 전력산업의 경우 화력발전 부문을 6개 발전회사로 재편한 뒤 분할매각을 추진했고, 철도산업의 경우 철도운영을 시설관리와 분리하여 분할매각을 추진했다. 그러나 두 경우 모두 노조의 반대 투쟁에 가로막혀 ‘시장형·준시장형 공기업’ 상태에서 멈춰 섰다. 가스와 공항관리 부문도 비슷하게 멈춰 섰다. 지방자치단체들은 상하수도, 도로유지보수, 공원관리, 환경미화 등의 업무를 대대적으로 민간에 위탁하고 용역업체로 전환했다. 이와 같은 민영화(사유화) 과정에서 공공부문 노동자들이 대규모로 정리해고 당했다. 1998~2000년에만 공공부문 노동자 13만 1천 명이 감축됐다.
김대중 정권은 노동시장 유연화도 대대적으로 추진했다. 1998년 2월 정식 출범 이전에 노사정위원회를 통해 정리해고제와 근로자파견제의 조기 도입을 관철시켰다. 정리해고제 도입 직후이자 IMF 외환위기의 충격이 가장 컸던 1998년에는 1년 동안 직·간접 형태의 정리해고가 334만 6천 건 발생했다. 세부적으로 살펴보면, ‘경영상 해고’ 즉 직접적인 정리해고에 따른 실업이 85만 건, ‘직장의 휴·폐업’에 따른 실업이 65만 2천 건, ‘일거리가 없어서 및 사업경영 악화’에 따른 실업이 184만 4천 건이었다.[1]
직·간접적 정리해고로 쫓겨난 노동자들은 대부분 고용불안과 저임금에 시달리는 비정규직이 됐다. IMF 외환위기를 거치는 3~4년 동안 전체 노동자 가운데 비정규직이 차지하는 비율이 40%에서 56%로 급증했다. 비정규직 가운데 70%는 여성이었다. 정규직과 비정규직을 망라하여 세계 최장의 노동시간이 유지되는 가운데, 노동강도가 더 증가했고, 현장통제도 더 심해졌다. 현장에 버티고 있는 노동자들도 일상적인 고용불안에 시달렸다. 노조탄압이 심해지면서 노동자들이 투쟁으로 획득한 단체협약이 휴지조각이 되는 사례도 적지 않았다. 신종 노조탄압 수단으로서 손해배상·가압류가 김대중 정권의 독려 속에서 널리 사용돼 나갔다.[2]
청년들의 취업 환경도 급격히 악화됐다. 외환위기 직후 청년 취업인구의 77%가 비정규직이 됐고, 청년실업자가 전체 실업자의 43%를 차지하게 됐다. 1997년 211조 원이던 가계부채가 2002년 424조 원으로 급증했다. 인위적인 내수 확대를 위해 김대중 정권이 추진한 신용카드 남발 정책까지 겹치면서 2004년 신용불량자 수가 400만 명에 이르렀다. 신용불량자, 비정규직, 실업자, 조기 퇴직자, 장애인, 영세상인 등을 중심으로 극빈층이 크게 증가했으며, 중간계급의 몰락이 빠르게 전개됐다.
1998년 이후 김대중 정권이 밀어붙인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으로 노동자·민중의 삶은 벼랑으로 내몰렸다. 노동자·민중이 IMF 외환위기의 부담을 고스란히 짊어지는 동안, 정작 그 위기를 불러온 자본가계급은 어느 때보다 막대한 부를 거머쥐었고 세계적 수준의 고강도 착취체제를 구축해 냈다.
2) 신자유주의 질서를 안착시킨 노무현 정권
2003년 이후 노무현 정권 시기에도 신자유주의 공세가 거침없이 계속됐다. 한국 자본주의가 1990년대 중반을 분기점으로 이전의 성장기를 지나 세계 자본주의 전반의 흐름과 마찬가지로 위기와 쇠퇴로 허덕이게 되자, 한국 자본가들은 전 세계 자본가들과 마찬가지로 정리해고, 비정규직화, 임금복지삭감, 노동권축소 등의 파상적인 공세를 노동자들에게 계속해서, 아니 시간이 갈수록 더욱 거세게 퍼부었다.
그런데 김대중 정권 시기 대량 정리해고 물결이 여러 차례 한국 사회를 격렬하게 뒤흔들었던 것과 달리, 노무현 정권 시절에는 대부분의 구조조정이 일상적인 형태로 잘게 쪼개져 상시적으로 진행됐다. 그래서 겉으로는 큰 이슈로 잘 드러나지 않았지만, 실제로는 김대중 정권 시기 이상으로 신자유주의 공세가 더욱 날카롭고 집요하게 펼쳐졌다.
노무현 정권은 신자유주의 공세를 더욱 진전시킬 수 있도록 법률과 제도를 보완했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것으로는 △비정규직 관련법 제정·개정 △이른바 ‘노사관계 선진화’ 로드맵에 입각한 노동관계법 개정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협상 추진과 타결이 있었다.
IMF 외환위기 이후 모든 산업에서 자본가들은 엄청난 숫자의 일자리를 하청화(분사화)하거나 계약직·임시직 등으로 대체했다. IMF 외환위기 이전에 전체 노동자의 40% 정도였던 비정규직 비율은 노무현 정권이 들어설 무렵 60% 수준으로 치솟았다. 심각한 차별과 초과착취로 고통당하는 비정규직의 문제가 불과 몇 년 만에 가장 심각한 사회적 의제로 떠오른 상황에서 노무현 정권이 출범했다. 대통령 선거 때 “비정규직의 눈물을 닦아주겠다”던 노무현의 공약은 2004년 시작된 비정규직 관련 입법 논의로 이어졌고, 2006년 11월 30일 비정규직 관련 3개 법안이 국회를 통과하는 것으로 마무리됐다. 그런데 이렇게 통과된 법안들은 △2년 이내 계약직 사용을 광범하게 허용하는 기간제법 제정 △2년 초과 파견노동자에 대해 ‘직접고용 간주’에서 ‘직접고용 의무’로 그 권리를 약화시키는 파견법 개정 △관련 노동위원회법 개정 등이 주요 골격이었다. 노무현 정권은 비정규직 입법의 추진 목적으로 ‘차별 시정’을 내세웠지만, 실제로는 자본가들이 더욱 자유롭고 광범하게 비정규직을 사용할 수 있도록 법적 기반을 마련해 주는 것이었다. 결과적으로 노무현 정권을 거치는 동안 비정규직의 처지는 전혀 개선되지 않았고, 오히려 더욱 암울해졌다.
2003년 이른바 ‘사용자 대항권’ 논란으로부터 시작된 ‘노사관계 선진화’ 로드맵 논의는 2006년 9월 11일 한국노총·경총·대한상의·노동부·노사정위원회 5개 기관 대표자들의 ‘노사관계 선진화를 위한 노사정 대타협 선언’으로 이어졌다. 노사정 대표 5자가 합의한 주요 내용은 △복수노조 허용과 전임자임금지급 금지 3년 유예 △필수공익사업장에 대해 직권중재제도를 폐지하는 대신 필수유지업무제도를 도입하여 50%까지 대체근로 허용 △부당해고 처벌 조항 삭제 △정리해고 사전 협의기간을 60일에서 50일로 단축 등이었다. 이 합의에 따라, 2006년 12월 30일 관련 노동관계법이 개정됐다.
2006년 1월 한미 FTA 협상의 본격 추진을 선언한 노무현 정권은 1년 남짓한 협상을 거쳐 2007년 4월 2일 타결에 이르렀다. 한미 FTA 협상의 본질은 한국의 재벌들이 미국 시장에 보다 자유롭게 접근할 수 있는 기회를 얻는 대신, 의료민영화 등 미국 자본이 자신의 돈벌이를 위해 한국의 법과 제도를 마음껏 유린할 수 있도록 제도적 기반을 열어주는 데 있었다.[3]
IMF 외환위기로 30대 재벌 가운데 16개가 쓰러질 정도로 위기를 겪었던 한국 재벌들은 김대중 정권 시기를 지나는 동안 정권의 도움 아래 노동자에게 고통을 전가함으로써 위기를 수습할 수 있었다. 그렇게 전열을 정비한 한국 재벌들은 노무현 정권 시기 동안 삼성전자와 현대자동차를 앞세워 세계적인 초국적 기업으로 발돋움했다. 이들의 눈부신 약진은 무엇보다 비정규직에 대한 초과착취와 수직 종속된 납품업체 노동자들에 대한 초과착취[4]를 통해 엄청난 이윤을 뽑아낸 데서 비롯됐다.
재벌들은 세계화의 흐름을 타고 해외시장을 겨냥하며 세계 곳곳으로 진출해서 값싸고 고분고분한 노동력을 끌어 모아 현지공장을 설립했다. 재벌들의 신규 투자는 해외로 집중됐다. 일부 재벌 계열사들과 상당수 중소기업은 싼 임금을 찾아 국내 공장을 폐쇄하고 중국과 동남아시아로 빠져 나갔다. 여기에 중국이 초국적 자본의 해외직접투자를 독보적으로 빨아들이면서 한국에는 초국적 자본의 신규 투자가 거의 사라졌다. 이 모든 과정은 노무현 정권 시절 ‘제조업 공동화’ 문제가 사회적 의제로 떠오르게 했다.[5]
한국 기업은 생산 비용을 줄이고 소비 시장을 개척하기 위해 아시아, 북미, 특히 중국으로 생산기지를 이전하고 있다. 투자는 주로 제조업과 도소매업에 집중돼 있고, 투자 방식은 독자(獨資)나 지분통제를 선호한다. 최근 몇 년간 한국 삼성전자, LG전자, 현대자동차 등 유명 기업이 대(對) 중국 투자를 늘리면서 한국의 대중 투자액은 어느 정도 확대됐지만 기술 양도에서는 여전히 유보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다.
현재, 정부, 기업, 경제단체, 연구기관, 국민 등 한국의 각계각층에서는 한국 산업, 주로 제조업이 해외, 특히 중국으로 대거 이전하는 ‘제조업 공동화’를 걱정하고 있다. 수많은 기업의 해외 이전으로 국내 고용 기회가 줄어들 뿐 아니라 한국의 선진기술이 다른 나라, 특히 중국으로 유출될 것을 우려하고 있다.
한국 정부는 ‘제조업 공동화’ 대응 방안을 적극적으로 모색하고 있다. 그러나 기업은 노사관계, 생산 원가, 시장 용량 등 각종 객관적인 여건의 제약과 시장경제 원리에 따라 경제적 이익을 고려한 선택이기 때문에 생산지 이전 추세는 줄지 않고 있다.
과거 한국 대기업이 중국으로 제조업을 이전한 것은 단순히 생산 원가를 줄이려는 목적에서였지만 지금은 중국의 거대한 소비 시장을 겨냥해서다. 또한 세계 500대 기업 대부분이 이미 중국에 진출해 중국을 기점으로 전 세계 마케팅과 R&D 네트워크를 구축했다. … 한국 기업의 해외투자는 당분간 중국에 몰리겠지만 중국이 거시조정 정책을 시행하고 에너지/자원 부족이 심화되며 동부지역 인건비가 상승하게 되면 한국 기업은 향후 중국을 기점으로 남아시아, 동남아시아로 생산시설을 이전할 것이다.[6]
이렇게 제조업 고용이 상대적으로 감소한 대신, 서비스 부문의 고용은 조금씩 늘어났다. 그런데 서비스 부문의 일자리는 제조업보다 비정규직 비율이 더 높았다. 결국 모든 산업을 통틀어 볼 때, 노무현 정권 시기 일자리가 거의 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새롭게 만들어진 일자리의 대부분은 비정규직이었다.
비정규직의 급격한 확산이 불러온 노동자계급의 구매력 감소와 그에 따른 소비위축, 그리고 국내 신규투자 부진으로 내수경기는 김대중 정권 시기 후반부터 구조적인 침체에 빠져들었다. 내수경기를 일으키려고 부양책이 사용됐지만, 일시적인 효과에 그칠 뿐 그 후유증이 더 컸다. 특히 김대중 정권 후반기에 내수 진작책으로 사용된 신용카드 남발 정책은 일시적으로 소비 붐을 일으켰을 뿐 결국 400만의 신용불량자를 일거에 양산하면서 노무현 정권으로 하여금 더 큰 소비위축 위기와 씨름하도록 만들었다.
노무현 정권은 공식적으로는 인위적인 내수 진작책을 사용하지 않는다고 했지만, 실제로는 ‘국토 균형발전’을 앞세운 경제특구·혁신도시·기업도시·행정도시 등의 온갖 개발 사업을 추진하면서 이를 내수 진작책으로 사용했다. 내수 위축 속에서 신규투자를 꺼리던 유휴자본들은 전국 곳곳에 개발 붐을 일으키며 부동산 거품으로 상당한 수익을 챙겼다. 부동산 거품으로 벼락부자들이 속출하면서 고급 소비시장을 중심으로 내수 경기가 어느 정도 활성화되기도 했다. 그러나 부동산 개발로는 내수 위축을 해결할 수 없었다. 무분별한 난개발은 환경파괴와 민중생존권 박탈을 초래했다.
이처럼 노무현 정권이 말로는 부동산 가격을 잡겠다고 하면서 실제로는 대대적인 부동산 개발에 나선 결과 수도권을 중심으로 땅값·집값이 엄청난 규모로 상승했다. 노무현 정권은 뒤늦게 종합부동산세, 분양가상한제, 투기과열지구 등 규제정책을 실시했지만 부동산 폭등을 진정시킬 수 없었다. 그 와중에 고위공직자 대다수가 부동산 차익으로 재산을 크게 불린 것까지 폭로됐다. 노무현 정권 시기 부동산 가격 폭등과 그 과정에서 보여준 정권의 무능과 위선은 정권의 지지 기반을 무너뜨리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2005년, 전체 토지의 31%를 상위 1%가, 59%를 상위 5%가 독점했다. 2006년 서울 강남에는 한 채에 수십억 원씩 하는 아파트가 즐비하고 심지어 평당 5천만 원이 넘는 아파트가 등장하는데, 다른 한편에서는 움막, 동굴, 판잣집, 공사장 임시막사 등 주택의 요건을 갖추지 못한 거주 공간에 전국적으로 무려 11만 명이 살고 있었다.
노무현 정권 시기 한국 노동자들의 삶은 OECD에서 가장 열악한 수준이었다. 세계 최장의 노동시간, 세계 최고의 자살률, 세계 최저의 출산율이라는 세 가지 통계는 노동자들의 삶을 압축해서 보여주었다.
2005년 한국 노동자들의 연간 실질 노동시간은 2,351시간(주당 45.21시간)으로 OECD 국가들 가운데 여전히 단연 최장시간을 기록했다. 한국 노동자들은 OECD 평균인 1,670시간보다 무려 40%나 더 일했으며, 2위 폴란드의 1,970시간보다도 381시간이나 더 일했다.[7]
한국의 자살률은 1994년 인구 10만 명 가운데 11.9명에 불과했으나, 1998년 22.7명으로 급증했다가, 2000년 17.5명으로 소폭 하락한 뒤, 2002년 23.9명, 2003년 29.7명, 2004년 31.2명, 2005년 31.6명으로 정점을 찍으면서 OECD 1위를 기록했다.
불과 한 세대 전까지 ‘둘만 낳아 잘 기르자’는 가족계획운동을 정부가 벌일 만큼 고출생 사회였던 한국은 IMF 외환위기 이후 급격히 저출생 사회로 변모했다. 1995년 72만 명을 기록했던 한국의 출생아 수는 이후 몇 년 사이에 빠르게 줄어들어 2001년 56만 명, 2002년 50만 명을 기록한 뒤, 2005년 44만 명으로 급감했다.[8] 2007년 한국의 합계출산율은 1.19명으로, 전 세계 155개 국가 가운데 홍콩(0.95명), 우크라이나(1.14명), 슬로바키아(1.14명)에 이어 4위를 기록했다.[9]
IMF 경제위기 이후 자살률과 출산율의 급격한 변화는 신자유주의 공세를 통해 한국 사회가 얼마나 빨리 ‘살고 싶지 않은 사회’로 치달아 갔는가를 단적으로 보여주었다.
이처럼 노동자들의 삶이 급격히 악화된 반면 자본가들은 더욱 엄청난 부를 누렸다. 한국의 자본소득분배율은 1980년대 18.1%, 1990~96년 18.4%를 기록했으나 IMF 외환위기를 거치며 엄청난 속도로 늘어나 2004년에 31.6%를 기록했다.[10] 반면 1980년대 81.9%, 1990~96년 81.6%였던 노동소득분배율은 2004년 68.4%에 그쳤다. 2000년부터 2004년까지 5년 동안 노동자들의 임금과 소규모 자영업자들의 소득증가율은 2.4%로 평균 경제성장률 5.6%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한 반면, 자본의 소득증가율은 무려 18.9%로 경제성장률의 세 배를 웃돌았다.
그 결과 최상위 계층 10%와 최하위 계층 10%의 소득격차는 2001년 8.2배에서 2005년 9.5배로 크게 벌어졌다. 2006년 사교육비를 포함하여 상위 10%가 지출하는 교육비는 하위 10%가 지출하는 교육비의 10배에 달하게 됐다. 사망위험·사망확률·평균수명 등에서 학력간·지역간·계급간 격차 또한 나날이 벌어졌다.
노무현 정권은 노동자·민중의 저항에 매우 폭력적으로 대응했다. 노무현 정권 시기에 구속된 노동자 수는 1,052명으로 노태우 정권 시기(1,973명)보다는 적었지만, 김영삼 정권 시기(632명)와 김대중 정권 시기(892명)보다 많았다.
2005년 11월 노무현 정권의 이중곡가제 폐지 추진에 맞서 서울 여의도에서 열린 농민시위 과정에서 두 명의 농민이 경찰의 방패에 맞아 목숨을 잃었다. 2006년 7월에는 포항에서 열린 노동탄압 규탄대회에서 한 노동자가 경찰의 진압봉과 방패에 맞아 사망했다. 2006년 5월 용산 미군기지를 평택으로 이전하는 과정에서 땅과 집을 강제수용 당하게 된 대추리 주민들의 반대시위에 1만 4천 명의 군대와 경찰이 투입돼 1천 명의 시위대를 폭력적으로 진압했다. 시위 진압에 군대를 동원한 것은 1980년 광주민중항쟁 이후 처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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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최강식, 1999, 「우리나라 기업의 고용조정 실태 - 1998년 하반기 실태조사를 중심으로」, 4쪽.
[2] 손배·가압류는 이전 시기에도 노동자를 탄압하는 수단으로 활용됐다. 하지만 김대중 정권은 손배·가압류를 노동자 탄압 수단으로 활용하라고 대대적으로 자본가들을 독려하고 나섰다는 점에서 이전 정권들과 달랐다. 이것은 김대중이 1980년대 초반 미국에 망명해 있는 동안 한창 신자유주의 공세의 초입부에 있던 미국 자본가계급이 어떻게 손배·가압류를 활용해 노동자를 탄압하는가를 보고 배운 데서 연유했다. 노동자들이 감옥 가는 것보다 손배·가압류로 집이 날아가고 주변의 삶이 파탄나는 것을 더 힘들어 한다는 걸 포착해서 악랄하게 활용한 것이었다.
[3] 한미 FTA는 이후 2007년 6월 29일 1차 추가협상, 2010년 12월 4일 2차 추가협상을 타결한 뒤, 2011년 10월 21일 미국측 비준, 11월 22일 한국측 비준을 거쳐 2012년 3월 15일에 발효됐다. 그런데 2025년 4월 미국의 트럼프 행정부가 전 세계를 상대로 ‘보복관세’를 발표하면서 한국에는 25%를 적용하겠다고 했는데, 이는 사실상 한미 FTA를 파기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4] 1990년대 중반을 분기점으로 한국 자본주의가 쇠퇴기에 접어들면서 이윤율이 전반적으로 하락하자, 재벌들은 대다수 중소기업들을 이전보다 훨씬 더 심하게 수직하청계열구조 속으로 밀어 넣고서 거듭되는 납품단가인하 등을 통해 그들의 작은 이윤마저 점점 더 강하게 쥐어짜 강탈했다. 이것은 산업 전반에서 거의 모든 중소기업들이 비정규직 비율을 점점 더 심하게 늘리거나 중국 등으로 공장을 이동하도록 강제했다.
[5] 노무현 정권 시기 자본가들은 ‘너무 강력하고 전투적인 노조’ 때문에 ‘제조업 공동화’가 발생했다고 주장했다. 자본가들은 제조업 위축의 실체를 과장하며 ‘제조업 공동화 노조 책임론’을 유포했다. 하지만 한국의 제조업이 위축된 것은 노조가 아니라 자본가들의 세계화 전략에 그 책임이 있었다.
[6] 중국 신화사(新華社), 2007/05/18, 「韓 기업 해외투자, 당분간은 중국에 집중될 것」, <중국전문가포럼(CSF)>.
[7]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2006/07/21, 「고용전망 보고서」.
[8] 이후 한국의 출생아 수는 2015년까지 44만~50만을 오르내리다가 2016년부터 다시 급감하기 시작해 2017년 36만, 2020년 27만, 2023년 23만, 2024년 24만을 기록했다.
[9] 유엔인구기금(UNFPA), 2007/06/27, 「세계인구 현황보고서」. 합계출산율은 ‘가임 여성이 평생 낳는 아이 수’를 뜻하며, 2007년 전 세계 평균은 2.56명, 선진국은 1.58명, 개발도상국은 2.79명, 저개발국은 4.80명을 기록했다. 한국의 합계출산율은 2018년 이후 1.0 미만으로 떨어졌으며, 2023년 0.72, 2024년 0.75로 세계 최저를 기록했다.
[10] 한국은행, 2005/01/20, 「가계와 기업의 성장양극화 현상 : 현황·원인·대책」. 자본소득분배율은 국내총생산(GDP)에서 자본 소유자가 가져가는 배당·이자 등이 차지하는 비중을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