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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노운사 연재 9회] 2부 전진과 격돌 (1988-1998) [3] 민주노총으로 가는 길

기사입력 2026.03.17 11:16 | 조회 4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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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노협은 애초 민주노조운동의 전국적 총결집체라는 위상을 갖고 건설됐지만 사무전문직과 대기업의 민주노조들이 대거 불참함에 따라 민주노조 총단결을 다시금 추진해야만 하게 됐다.

     

    전노협은 정권과 자본의 탄압에 맞서 조직을 사수해 내긴 했지만, 지속되는 탄압으로 점점 약화됐다. 민주노조 총단결은 전투적·변혁적 노선의 전노협을 강화하는 대신 타협·개량주의 노선에 입각해 새 틀을 짜는 방향으로 현실화했다.

     

    1993년 6월 전노협, 업종회의, 현총련, 대노협 4개 조직이 ‘전국노동조합대표자회의’(전노대)를 결성했다. 이를 토대로 1994년 11월 민주노총 준비위원회가 결성됐다. 마침내 1995년 11월 11일 민주노조운동의 총결집체로서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민주노총)이 창립됐다.

     

    민주노총 건설 과정은 한편으로 민주노조운동이 양적으로 성장하고 확대되는 과정이었지만, 다른 한편으로 타협·개량주의 노선에 의해 주도됨으로써 전노협으로 집약됐던 전투적·변혁적 운동의 성과를 상당 부분 유실하는 과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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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부 전진과 격돌 (1988-1998)

    [시대배경] 군사파시즘에서 신자유주의 질서로
    [1] 1988~89년 민주노조운동의 폭발적 성장
    [2] 1990~91년 전노협 건설과 민주주의 투쟁
    [3] 민주노총으로 가는 길
    [4] 1996~98년 노동법 대격돌

     

    1) 타협·개량주의 세력의 부상

     

    ◎ 정권과 자본의 집요한 공세

     

    전노협은 출발부터 정권과 자본의 극심한 탄압에 맞닥뜨렸지만, 1990년과 1991년 잇따라 전국적인 총파업을 벌이며 조직을 사수해 내고 있었다. 그러나 전노협이 처한 어려움은 결코 만만치 않았다.

     

    정권과 자본은 전노협과 그 가입노조에 엄청난 탄압을 퍼부어 1년 사이에 180여 개 노조가 전노협을 탈퇴하게 만들었다. 그 결과 1990년 1월 19만 3천여 명으로 출발했던 전노협의 조합원 수는 1990년 말에 9만 7천여 명까지 줄어들었다. 특히 현대중공업노조에 대한 극심한 탄압과 현대자동차노조에 대한 치밀한 회유 공작으로 울노협 준비위를 무너뜨림으로써 상당한 전투성과 파괴력을 가진 울산지역 대기업 민주노조들을 전노협으로부터 분리시켜 냈다.

     

    또한 노태우 정권은 1990년 하반기 상당수의 대기업 노조들에서 ‘전노협 가입’을 내건 민주 집행부가 들어서면서 전노협의 조직 확대 가능성이 높아지자, 1991년 2월 전노협 안팎의 대기업 민주노조들이 결집한 ‘대기업 연대회의’ 수련회를 급습하여 69명을 연행, 7명을 구속하면서 대기업 민주노조들이 전노협으로 결합하는 것을 적극 가로막았다. 이 때 구속된 박창수 한진중공업노조 위원장은 노태우 정권의 전노협 탈퇴 공작 과정에서 1991년 5월 옥중 살해를 당하기까지 했다.

     

    그런데 전노협을 붕괴시키려는 노태우 정권의 전략은 전노협을 탄압하는 데에만 머물지 않았다. 노태우 정권은 1990년 5월 출범한 사무전문직 민주노조들의 결집체인 업종회의에 대해서는 별다른 탄압을 하지 않으면서 전노협과 다르게 대응했다. 한편으로 극심한 탄압을 통해 전노협을 최대한 위축시키면서, 다른 한편으로 민주노조운동 속에서도 전투성과 변혁성이 약한 부분에게는 숨통을 터줌으로써, 전노협이 전투적·변혁적 노선을 포기하고 타협·개량주의 노선으로 전환해 나가도록 유도했던 것이다.

    업종회의는 전노협에 조직적으로 참여하지 않은 12개 사무·전문·서비스 부문 노조연합단체와 협의체가 구성한 연대조직체로, 조합원 수는 20만여 명이었습니다. 업종회의는 “사무, 전문, 서비스직 노동자의 단결을 바탕으로 노동자의 정치·경제·사회적 지위향상과 권익실현을 위해 공동투쟁을 하며 자주적이고 민주적인 노동조합의 발전과 통일을 목적으로 한다”고 스스로의 위상을 규정했습니다.[1]

    자본과 정권의 입장에서 볼 때 전노협은 노동정책의 핵심문제로 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전노협을 ‘정치주의 노동운동의 진원지’로 간주했다. 따라서 전노협에 대한 탄압은 전노협 조직 자체를 와해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이를 위해 노동조합을 전노협 노조와 비(非)전노협 노조로 구분했으며, 양자에 대하여 차별화 정책을 집행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전노협과 조직적으로 연결되어 있거나 그럴 가능성이 있는 모든 움직임을 철저하게 차단하고 통제하는 정책을 구사하고 나섰다.[2]

    국가와 자본은 전노협에 대한 탄압을 강화하는 한편, 업종별 노조에 대해서는 합법화 가능성을 열어두는 등 온건하게 대처하였는데, 이는 업종회의로 하여금 전노협과 일정한 거리를 두면서 실리주의로 나아가게 하는 요인이 되었다. …

    업종회의에서 실리주의가 강화된 것은 단지 사무직 노조운동 지도부들과 대중들 사이의 간극에 의해 노정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많은 부분은 지도부의 소극적인 태도에 있었다. 사무전문직노조 지도자들은 전노협 건설과정에서 “먼저 가라, 곧 뒤따라가겠다”는 것이었고 “당시에는 실제 그런 생각이었다”고 하지만 이미 전노협 건설과정에서 이들은 소극적이었고 그 노선에 동의하지 않았다.[3]

    전노협, 업종회의, 대기업 연대회의 등은 그 이념 그리고 그 기저에 흐르는 물적 기반의 수준에서 차별성을 지니고 있었다. 이를 반영하여 투쟁성을 담보하였던 전노협은 한편으로 국가권력, 자본의 전면적이고도 집중적인 탄압의 대상이 되었고 다른 한편으로 위기논쟁을 매개하면서 노동운동 내부의 일부 활동가 및 이론가들에게조차 비판의 대상이 됨으로써 이러한 상황은 더욱 심화되었다. 이에 반해 대기업노조는 현대그룹 노조 등에서 보이듯 사안별 투쟁, 특히 임금협상을 포함하는 단체협상의 결렬에 따른 쟁의과정에서 단위사업장 중심의 선별적인 탄압을 받았으나 조직의 존립 자체를 위협받지는 않았다. 업종회의의 경우는 자칭 중산층 비제조업 사무전문직 노동대중을 대상으로 하는 조합활동에 치중하여 국가권력과 직접적으로 대결하는 상황이 거의 없었고 따라서 국가권력의 일차적인 탄압의 대상이 되지 않았다. 이 과정에서 오히려 국가는 이들의 합법화 요구를 차례로 승인하였다.

    90년 3당 합당 이후 국가권력은 민주노조운동 내부의 이러한 차별적인 조건을 이용하여 전노협에 대한 물리적·이데올로기적 탄압을 강화함으로써 이들과 전노협과의 연대를 차단하는 전략을 구사하였다.[4]

     

    ◎ 자본철수와 산업 구조조정

     

    정권과 자본의 방해와 탄압으로 대기업 민주노조들이 대부분 전노협에 결합하지 못하면서, 전노협을 떠받치고 있었던 것은 주로 중소사업장 민주노조들이었다. 그런데 이 중소사업장들 가운데 상당수가 1992~93년의 산업 구조조정 과정에서 폐업되었고, 이로 인해 해당 사업장의 노동조합 자체가 사라졌다.

     

    이 시기의 산업 구조조정은 한국 자본주의의 중심축이 저임금에 기초한 노동집약적 산업에서 기술력에 기초한 자본집약적 산업으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발생했다. 노동자들의 투쟁력이 성장하면서 일정한 경제적 양보가 불가피해지자 저임금에 기초한 노동집약적 산업에 투자했던 자본가들은 줄어든 이윤을 감수하기보다 공장 문을 닫고 새로운 투자처를 찾아 나서거나, 그 무렵 저임금 산업을 한창 빨아들이기 시작하던 동남아시아와 중국으로 공장을 옮기는 것을 선택했다.

     

    이처럼 전노협에 대한 계속된 탄압에 덧붙여 산업 구조조정의 여파가 강력하게 밀려오면서, 1993년 이후 전노협의 조합원 수는 4~5만 명 수준으로 줄어들었다. 이 시기에 폐업에 맞서 투쟁했던 전노협 소속 민주노조들은 결국 존재 기반인 공장을 잃으면서 사라질 수밖에 없었지만, 그들이 펼친 끈질긴 투쟁은 한국 정부가 1995년부터 (최소한의 수준이나마) 고용보험 제도를 도입하도록 강제하는 성과를 남겼다.

    정권과 자본에 의해 추진되고 있는 산업구조조정과 관련한 경영합리화, 업종전환, 공장자동화, 해외이전 등이 계속 확대되면서 고용흡수력이 지속적으로 저하되어 중소자본의 휴·폐업, 인원감축, 조업단축, 집단해고 등 다양한 형태의 고용문제가 발생하고 있었다. 그리고 1987년 노동자대투쟁 이후 자주적이고 민주적인 노동조합의 결성과 임금인상 투쟁 및 원화절상 등으로 과거처럼 저임금을 강요할 수 없게 되면서 마산 수출자유지역을 비롯해 전국 곳곳의 외국인 투자업체에서는 감원과 자본철수, 하청으로 물량 빼돌리기, 물량감축, 해고 등이 빠른 속도로 확대되었다. 또한 민주노조가 건설된 사업장에서는 노조를 와해시키거나 투쟁을 파괴하기 위한 위장 휴·폐업과 노조의 힘을 약화시키기 위한 물량의 하청전환, 임시직 채용, 자연감소된 인원 보충 안 하기 등의 현상이 광범위하게 나타났다.

    전노협은 1990년 창립 이래 “해고사유 및 절차에 대한 엄격한 제한, 인사이동 및 부서이동시 노동조합과 사전 합의, 임시직의 채용에 대한 제한, 인원정리·정원유지·노동강도 유지에 대한 합의, 하도급시 노동조합과 사전 합의” 등을 내걸고 고용안정 보장투쟁을 전개하였다. 또한 회사의 분할·합병·정리·해산, 사업의 전부 또는 일부 양도시에는 노동조합과의 사전 합의를 거치도록 하고, 회사의 휴·폐업, 공장이전, 자본철수에 따른 해고가 발생할 때는 반드시 노동조합과 사전 합의에 의해 정리해고가 이루어지도록 하였다. 해고대상자에 대해서는 생계비 보전과 직장 이전을 위한 준비금을 확보하는 투쟁을 전개하였다. 더 나아가 정부와 국회에 고용보험제의 즉각 제정과 실시를 요구하는 투쟁도 전개하였으며, 이러한 투쟁은 1991년에도 계속적으로 요구되었다.[5]

     

    ◎ 이른바 ‘노동운동 위기론’의 확산

     

    1991년 5월 투쟁의 패배는 민중진영 전반에 큰 타격을 입혔지만, 박창수 열사 투쟁에서 유의미한 성과를 거두지 못한 전노협에게도 상당한 내상을 안겼다. 자연스럽게 ‘전투적·변혁적 노선으로는 유의미한 성과를 얻지 못한 채 막대한 희생만 치르는 것 아니냐’는 회의론이 불거졌다.

     

    그런데 8월 소련의 공산당 정권이 붕괴하더니 12월에는 소련 자체가 해체되는 세계사적 사건이 발생했다. 당시 매우 제한된 정보와 시야에 갇혀 있던 한국의 노동자운동과 민중진영 전반은 소련 붕괴를 노동자계급의 관점에서 인식하고 설명해 낼 능력이 전혀 없었다. 그만큼 충격도 컸다. 이제 전노협이 외치는 ‘노동해방’이 여전히 가능한지, 또는 심지어 여전히 타당한지에 대해서까지 회의론이 확산됐다. 소련 붕괴 이후 (스탈린주의적 한계 속에 그 시야가 갇혀 있던) 대다수 사회주의자들이 극심한 혼란에 빠져 줄줄이 사회주의 운동을 청산하는 사태가 벌어진 것은 노동해방에 대한 회의론을 더욱 증폭시켰다.

     

    전투적·변혁적 노선에 대한, 그리고 노동해방이라는 궁극적 목표에 대한 회의론이 이른바 ‘노동운동 위기론’의 모습을 띠고 대대적으로 표출됐다.

    87년 노동자대투쟁 이후 민주노조운동의 노선으로 규정할 수 있는 ‘전투적 노동조합주의’는 87년 이전에 유지되어 왔던 국가의 파시즘적 노동통제와 자본의 병영적 노동통제, 어용 한국노총의 ‘허구적 조합주의’에 비타협적으로 대항하는 ‘자주적 민주적 노동운동’을 추구하는 노조운동노선이라고 할 수 있다. 87년 이전까지의 정세에 비추어 볼 때, 전투적 노동조합주의는 그러한 노동정세를 주체적으로 돌파하고 계급적 노동운동을 대중적으로 전개하는 데 불가피하게 요구되었던 노선이었다. 실제 전투적 노동조합주의는 비록 제한된 범위이긴 하지만 노자관계의 인간화와 민주화에 기여하였고 계급적 노동운동의 대중적 전개에 크게 기여하였다.

    그러나 전투적 노동조합주의는 89년 이후 크게 변화된 노동정세에 능동적으로 대처하지 못하고 있다. … 전투적 조합주의 노선은 최근에 두드러지고 있는 노동자계급의 내부구성의 변화, 노동자들 내부의 생활패턴의 다양화, 개인주의적 경향 및 실용주의적 경향의 강화, 의식편차의 확대 등 주목할 만한 현상에 적극적으로 대처하지 못하고 ‘자본의 유연성’에 대응하여 ‘노동의 유연성’을 발휘하지 못하는 무기력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 대체로 최대강령주의에 입각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는 전투적 노동조합주의를 극복하고 ‘최소강령주의’와 민주적 대안론에 기초하여 노동운동 노선을 전환할 것이 절실히 요청되고 있는 시점이다.[6]

     

    ◎ 이른바 ‘문민개혁’에 대한 환상

     

    1993년 ‘문민정부’라는 이름을 내걸고 출범한 김영삼 정권은 출범 초기에 군부 내 하나회[7] 세력 제거 등 일정한 자유주의 개혁을 단행하면서 이른바 ‘문민개혁’에 대한 환상을 민중 속에 불러일으켰다. 김영삼 정권은 ‘문민개혁’ 가운데 하나로 무노동 부분임금 적용과 해고자 복직 등을 제시하고 민주노조운동에 대한 탄압을 어느 정도 누그러뜨리면서 민주노조운동 진영을 정권의 의도대로 길들이려는 적극적인 노동포섭 정책을 폈다.

     

    물론 김영삼 정권은 1993년 하반기 이후 문민개혁에 대한 환상이 걷히면서 노동자투쟁이 거세게 올라오자, 파업 사업장 공권력 투입과 대규모 구속 등으로 군사정권과 다를 바 없는 계급적 본질을 스스로 드러냈으며, 시간이 지날수록 노동자들을 점점 더 강하게 탄압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김영삼 정권은 민주노조운동 내부에 타협·개량주의 세력을 확산시키기 위한 공작을 끊임없이 펼쳤다. 특히 ‘정권 내부에 개혁분파와 보수분파 사이에 치열한 다툼이 있으며 개혁분파가 우위를 얻으려면 민주노조운동의 협력이 중요하다’는 식의 논리를 내세우면서, 지난 날 ‘민주화투쟁’ 시기에 형성한 관계 등을 최대한 활용하며 민주노조운동 지도자들을 포섭하려는 작업을 줄기차게 벌였다.[8]

     

    정권과 자본의 집요한 공세, 자본철수와 산업 구조조정, 이른바 ‘노동운동 위기론’의 확산이라는 기존 요소들 위에 문민개혁에 대한 환상이 덧붙여지면서, 전노협 안에서는 전투적·변혁적 노선의 주도권이 점점 약화되고 대신 타협·개량주의 노선이 점점 부상했다.

     

    ◎ 전노협 강화론과 전노협 한계론

     

    이런 상황에서 1993년을 거치며 전노협 안에서 전투적·변혁적 노선과 타협·개량주의 노선 사이에 심각한 논쟁이 벌어졌다. 그 논쟁의 중심에는 ‘전노협 강화론’과 ‘전노협 한계론’의 대립이 놓여 있었다.

     

    앞서 보았듯이, 극심한 탄압과 산업 구조조정의 결과 1993년에 전노협 조합원 수는 4~5만 명으로 축소되어 있었다. 그런데 어느덧 전노협 바깥에는 전노협보다 훨씬 더 많은 조합원들이 다양한 형태의 민주노조로 결집해 있었다. 크게 보자면, ‘현대그룹노동조합총연합’(현총련)과 ‘대우그룹노동조합협의회’(대노협)로 결집한 대기업 노조들에 대략 10만 명, 업종회의로 결집한 사무전문직 노조들에 대략 20만 명의 조합원들이 포진해 있었다.

     

    전투적·변혁적 노선이 주도한 전노협과 달리, 이들 전노협 바깥의 민주노조들은 대부분 타협·개량주의 노선이 주도하고 있었다. 이들은 전노협에 결합하지 않음으로써 상대적으로 정권의 탄압을 비켜갈 수 있었고, 그래서 크게 어렵지 않게 조합원 수를 유지하거나 늘릴 수 있었다. 이들은 전노협의 주장과 투쟁이 너무 과격하다면서 전노협과 연대 수준을 높이는 것에 대해서도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었다. 상당수 대기업 민주노조들과 거의 모든 사무전문직 민주노조들이 이러한 상태에 놓여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전노협이 선택할 수 있는 길은 무엇이었을까? 크게 두 개의 길이 전노협 앞에 놓여 있었다.

     

    첫째, 전노협을 사수하고 확대·강화해 나가는 것과 함께 전노협이 앞장서서 대기업과 사무전문직 민주노조를 아우르는 민주노조 총단결 전선을 형성함으로써, 전투적이고 변혁적인 전노협의 정신과 성과를 중심으로 민주노조운동 전체를 통합시켜 나가는 길이었다. 이것은 그동안 전노협이 추구해 온 방향이었으며, 한마디로 ‘전노협 강화론’이었다.

     

    실제로 전노협은 출범 직후부터 민주노조 총단결 전선을 형성하려고 끊임없이 노력했다. 대표적으로 1990년 11월 전국노동자대회를 업종회의와 공동으로 개최하였으며, 1991년 10월 ILO공대위를 업종회의, 전국노운협, 전국노련과 함께 결성하여 활동해 오고 있었다.

     

    둘째, 소수로 내몰린 전노협의 한계를 인정하고 전투적·변혁적 노선이 아니라 타협·개량주의 노선을 대세로 받아들임으로써 민주노조운동 전체를 타협·개량주의 노선에 입각해 새로운 틀로 통합시켜 나가는 길이었다. 새롭게 고개를 치켜세우며 등장한 이 입장은 한마디로 ‘전노협 한계론’이었다.

     

    전노협 탈퇴 공작 속에서 수많은 노동자들이 해고와 구속을 당하고 그 과정에서 박창수 위원장의 옥중 살해까지 겪으면서도 의연하게 전노협을 지켜내고 있던 1991년 무렵만 해도 이러한 주장은 전노협 안에서 입 밖에 꺼내는 것조차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어느덧 전노협 안에서도 타협·개량주의 노선이 크게 세를 불리게 된 1993년에는 사정이 많이 달랐다.

     

    1992~93년 무렵 전노협은 비록 민주노조로 조직된 조합원들 가운데 소수만을 직접 포괄하고 있었지만, 전체 민주노조운동 속에서 확고한 주도성과 대표성을 갖고 있었다. 1987년 노동자대투쟁으로 등장한 민주노조들이 지역적·전국적 결집과 공동투쟁을 통해 건설해 냈으며 이후 정권과 자본의 집요한 탄압을 당당하게 물리치며 천만 노동자 전체를 대표해서 투쟁해 온 전노협의 위상과 정통성을 누구도 감히 부정할 수 없었다.

     

    그래서 전노협에 직접 가입한 노조들보다 훨씬 더 많은 수의 노조들이 각 지노협에 참관 자격으로 결합하여 사실상 전노협과 함께 활동을 펼치고 있었다. 현대중공업을 비롯하여 전투적·변혁적 노선을 견지했던 일부 대기업 노조들도 전노협과 긴밀히 결합하고 있었다. 이들 참관·협력 수준의 노조들까지 포함하면 여전히 20만 명에 가까운 조합원들이 사실상 전노협과 함께 하고 있었다.

     

    그런 만큼 민주노조운동 전체가 어떤 노선 아래 어떤 과정을 거쳐 민주노총 건설로 나아갈 것인지에 대한 결정권은 사실상 전노협 스스로가 갖고 있었다. 전노협 강화론과 전노협 한계론 사이의 대립은 비록 전노협 안에서 벌어진 논쟁이라 하더라도 민주노조운동 전체의 방향을 결정적으로 좌우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매우 치열한 양상을 띨 수밖에 없었던 이 논쟁은 뜻밖에도 싱겁게 끝났다. 애초에 전노협 강화론을 견지했던 세력 가운데 상층 지도부를 중심으로 한 상당수가 1993년을 지나는 동안 전노협 한계론으로 돌아섰기 때문이다. 1993년 가을이 되자 균형추가 확연히 기울면서 전노협 상층부는 사실상 전노협 한계론으로 정리됐다.

     

    전노협 상층부가 전노협 한계론으로 정리되기 전까지 업종회의와 상당수 대기업 노조들은 전노협과 함께 공동투쟁 전선에 나서는 것조차 매우 부담스러워 하고 있었다. 그래서 이들은 1993년 6월 전노협·업종회의·현총련·대노협이 ‘전국노동조합대표자회의’(전노대)를 공동으로 결성한 뒤에도 ‘사안별 공동사업 추진체’라는 전노대의 위상을 가능한 낮추려고 애를 쓰고 있었다. 전노협과 함께 공동투쟁에 나설 때 받게 될 정권과 자본의 탄압이 두려웠기 때문이다. 특히 업종회의는 매우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었다.

     

    그런데 전노협 상층부가 전노협 한계론으로 정리되자 업종회의와 상당수 대기업 노조들의 태도가 얼마 안가서 정반대로 바뀌었다. 사안별 공동사업 추진체라는 전노대의 낮은 연대 수준에도 겨우 동의했던 이전과 다르게, 전노대를 기반으로 민주노총을 서둘러 건설하자는 높은 수준의 조직 전환을 갑자기 주장하고 나선 것이다. 전노협 상층부가 전노협 한계론으로 사실상 정리되면서 타협·개량주의 노선의 주도 아래 민주노총을 건설할 수 있다는 게 분명해진 까닭이었다.

     

    결국 사안별 공동사업 추진체라는 낮은 위상에서 출발했던 전노대는 상층 논의를 중심으로 서둘러 민주노총을 건설하는 길로 나아갔다. 전노대는 1994년 11월 ‘민주노총 준비위원회’로 전환되었고, 1995년 11월 민주노총이 출범하게 됐다.

     

    민주노총의 건설 과정 자체가 전노협 한계론과 타협·개량주의 노선의 주도성을 바탕으로 하고 있었기에 민주노총이 처음부터 전노협의 전투적·변혁적 정신과 성과를 계승하지 않게 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심지어 민주노총 준비위원회가 전국 단위노조에 내려 보낸 <민주노총 건설을 위한 교육자료>에는 전노협이라는 단어 자체가 한 번도 나오지 않는 일마저 있었다.

     

    ◎ 주도권을 거머쥔 타협·개량주의

     

    전노협이 노동해방과 평등세상을 추구했던 것과 달리 민주노총은 사회대개혁을 내세우며 출범했다. 전노협이 정권과 자본에 맞서 자주적이고 비타협적인 투쟁을 통해 전진하고자 했다면, 민주노총은 정권·자본과의 협상을 주된 전략으로 채택했다. 전노협 시절에는 기업별 노조의 한계 속에서도 담장의 벽을 뛰어넘는 생동하는 노동자 연대가 넘쳐났다면, 민주노총 시절에는 산업별 노조로의 전환을 부르짖으면서도 담장 안의 노동자 연대조차 감당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민주노총 건설 과정에서 타협·개량주의 세력이 주도권을 거머쥐면서, 민주노총 시기의 민주노조운동은 전노협의 전투적이고 변혁적인 정신과 성과들을 발전적으로 계승하지 못하고 오히려 그 내용과 질에서 퇴보하는 결과를 맞이해야 했다.

     

    그렇다면, 왜 전노협 안에서 타협·개량주의 세력이 차츰 확대되어 마침내 대세를 장악하게 됐을까?

     

    먼저 지적해야 할 것은 전노협이 전투적·변혁적 노선을 일관되게 견지한다는 게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다는 점이다. 1987년부터 정권과 자본의 엄청난 탄압에 맞서 투쟁해 온 5년 남짓 전노협을 중심으로 이미 1,500명이 넘는 구속자와 3,000명이 넘는 해고자가 발생한 상황이었다. 여전히 수많은 노조 간부와 현장 활동가들이 노동해방의 부푼 꿈을 안고 끝없는 열정으로 헌신하고 희생하며 전노협을 지켜내고 있었지만, 몇 년 째 강도 높은 헌신과 희생을 지속하는 것에 따른 조직적 피로의 누적은 결코 만만한 것이 아니었다.

     

    여기에 전노협의 근간을 이루었던 제조업 중소사업장 노조 가운데 상당수가 산업 구조조정의 소용돌이 속에서 폐업으로 내몰리면서 노조 자체가 사라지는 사태를 겪고 있었다. 비록 폐업에 맞서 끈질긴 투쟁을 하고는 있었지만, 잇따른 폐업 사태가 조직력 축소와 사기 저하에 미치는 영향을 부정할 수는 없었다.

     

    또한 이데올로기적 환상들이 노동자들에게, 특히 지도자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한국 자본주의가 계속해서 성장기를 구가할 것이라는 환상, 김영삼 정권의 문민개혁 드라이브에 대한 환상, 노동자들의 기세에 밀려 상당한 경제적 양보를 거듭했던 자본의 수세적 태도가 계속될 것이라는 환상 등이 종합되어 ‘이제 적당히 투쟁해도 그럭저럭 성과를 얻으면서 점점 살 만한 세상이 되지 않겠느냐’는 개량주의적 환상이 노동자들 속에서, 특히 지도자들 사이에서 똬리를 틀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전노협이 전투적·변혁적 노선을 계속 강건하게 견지해 나가는 게 불가능한 것만은 아니었다. 무엇보다 전노협이 수많은 탄압을 뚫고 조직을 사수하고 있는 동안 전노협이 견지하고자 했던 운동의 정신은 전노협에 소속된 노조들만이 아니라 참관·협력 수준으로 결합하고 있던 노조들, 나아가 민주노조운동 대열로 새롭게 (또는 다시) 결합한 민간부문과 공공부문의 대기업 노조들 속으로 꾸준히 뻗어나가고 있었다.

     

    산업 구조조정의 소용돌이 속에서 전노협의 근간이던 제조업 중소사업장 노조들이 상당수 사라져 가는 아픔이 있었지만, 기존의 현대중공업에 덧붙여 현대자동차·철도·한국통신 등 한국 자본주의의 최정점에 자리한 대기업 노동자운동 속에 전투적·변혁적 운동의 새로운 흐름들이 확산되고 있었다.

     

    1990년 5월 현대중공업 골리앗 파업에 대한 전국적인 연대총파업을 이끌어 냄으로써 전노협 출범 직후 노태우 정권의 집중 탄압으로 고사 위기에 내몰렸던 상황을 극복할 수 있었던 것처럼, 새롭게 솟구치는 대기업 노동자들의 투쟁에 전노협이 적극 결합하고 전국 투쟁으로 발전시켜 나감으로써 전노협의 조직적 발전과 전투적·변혁적 운동의 확장을 비약적으로 이끌어 낼 가능성이 충분히 열려 있었다.

     

    또한 노동자들을 흔들고 있던 이데올로기적 환상들의 실체는 매우 허약한 것이었다. 그 시절 한국 자본주의는 30여 년에 걸친 역동적인 성장기를 마감하고서 IMF 외환위기의 충격과 함께 쇠퇴기로 빠져 들어가는 시기를 불과 몇 년 남겨놓고 있을 뿐이었고, 그 조짐이 도처에 드러나고 있었다. 김영삼 정권의 문민개혁 드라이브는 결국 ‘고통분담’을 앞세운 임금 억제와 노동탄압으로 귀결됐고, 이를 지켜 본 노동자들에게서 문민개혁에 대한 환상은 빠르게 거품처럼 사라졌다.[9] 산업 구조조정으로 인한 폐업 사태가 잇따르고 파업 사업장에 대한 공권력 투입과 대량 구속이 여전한 상황에서, 개량주의적 환상은 옳고 그름을 떠나 현실적 기반 자체를 갖고 있지 못했다.

     

    결론적으로 전노협 안에서 타협·개량주의 세력이 차츰 확대되어 마침내 대세를 장악하게 된 것은 객관적 조건의 어려움 때문에 생긴 어쩔 수 없는 결과가 결코 아니었다. 객관적으로 상당한 어려움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결국 사태 전개를 좌우한 것은 노동자운동의 방향에 대한 활동가들의 주체적 선택이었다.

     

    전노협 탈퇴 공작 속에서 박창수 한진중공업노조 위원장이 옥중 살해까지 당한 것은 전노협을 무너뜨리기 위한 정권과 자본의 탄압이 얼마나 극심했던가를 보여주기도 하지만, 뒤집어 보면 그 시절 감옥에 가거나 심지어 목숨을 빼앗기는 한이 있어도 전노협을 사수하고자 했던 선진노동자들의 기개와 자부심이 얼마나 대단했던가를 보여주는 것이기도 했다. 그런데 그들 가운데 상당수가 그처럼 강건했던 기개와 자부심을 불과 몇 년 만에 잃어버린 것이었다.

     

    결국 타협·개량주의 노선이 전노협을 장악하게 된 핵심 원인은 선진노동자들 다수가 사상적 전망에서 큰 좌절을 겪게 되고 그에 따라 변혁적 의식으로부터 개량주의 의식으로 퇴행한 것에서 찾을 수 있다. 이것은 그 시절 전투적·변혁적 선진노동자들에게 영향을 미치던 사회주의 운동 대부분이 다양한 형태의 스탈린주의적 한계에 갇혀 있다가 1991년 소련 붕괴 이후 그 다수가 청산주의에 빠져 운동적으로 해체되거나 개량주의로 돌아서면서 그 영향력 아래 있던 선진노동자들도 다수가 타협·개량주의로 퇴행하는 과정을 통해 이루어졌다. 전투적·변혁적 노선이 다수를 이루던 전노협에서 타협·개량주의 세력이 다수를 이루게 된 핵심 이유는 바로 이것이었다.

     

    2) 1993년 현총련 공동투쟁

     

    1993년 2월말 출범한 김영삼 정권은 집권초기 ‘문민개혁’을 내세우며 과거 군사독재와 차별성을 강조했다. 김영삼은 3월 22일 ‘신경제 100일 계획’을 내놓으면서 경제를 살리기 위한 고통분담을 노동자들에게 요구했다. 노동자들에게 파업을 자제해 달라며 ‘무쟁의 원년’을 강요하고, 사회적 합의라는 이름 아래 경총과 한국노총 간의 임금 합의를 추진했다. 노동부장관 이인제를 내세워 노태우 정권의 ‘무노동 무임금’과 대비되는 ‘무노동 부분임금’ 같은 어설픈 회유책을 잠깐 쓰기도 했지만, 김영삼 정권의 노동정책은 명확하게 ‘친자본 반노동’의 성격이었다. 노·경총 임금합의 추진 또한 공공연한 임금억제 정책이었다.

     

    그러나 문민개혁 드라이브에 올라탄 김영삼 정권의 ‘무쟁의 원년’ 공세는, 노동자들의 투쟁에 의해 보기 좋게 깨져나갔다. 그 선봉에는 울산의 현대계열사 노동조합들을 중심으로 한 현총련의 공동투쟁이 있었다.

     

    1990년 울노협 준비위가 붕괴된 이후 현대자동차, 현대중공업, 현대미포조선, 현대정공, 현대중전기, 현대중장비, 현대종합목재 등 울산의 현대계열사 노동조합들은 현대그룹노동조합총연합(현총련)이라는 다소 느슨한 연대질서를 통해 결집했다. 현총련에는 현대정공(창원)이나 현대자동차서비스 같이 사업장이 울산 바깥에 있거나 전국에 흩어져 있는 노조들도 참여했다.

     

    1993년 현총련은 양대 축이라고 할 수 있는 현대자동차와 현대중공업을 비롯해서 소속 노조 대부분에 민주파 집행부가 들어서면서 어느 때보다 높은 수준의 단결력을 갖게 됐다. 현총련은 4월 11일 대의원대회에서 1993년 임금투쟁을 공동으로 전개하기로 결의했다. 5월 22일에는 ‘93 공동임투 승리를 위한 현총련 임투전진대회’를 5천여 명의 조합원이 참여한 가운데 일산해수욕장에서 열었다.

     

    그런데 현총련 의장을 맡고 있던 현대정공노조 위원장이 6월 5일 새벽 회사측 안에 전격 직권조인하고 잠적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그의 직권조인은 회사측의 납치와 강제에 의한 정황이 농후했다. 오전에 직권조인 소식이 현장에 알려지자 조합원들의 분노가 폭발했다. 12시 ‘강제직권조인 규탄대회’를 가진 현대정공노조는 곧바로 전면파업에 돌입했다.

    “상의조차도 안 하고 이렇게 조인을 할 수 있단 말입니까? 그래놓고는 뻔뻔스럽게 이렇게 회사가 유인물을 내놓고 노사가 화합해 가지고 타결했다고 이렇게 얘기할 수 있습니까? 여러분 인정할 수 있습니까?”(현대정공노조 간부)[10]

    현대정공노조가 직권조인 사태를 순식간에 극복하면서 오히려 단호하게 전면파업으로 반격을 가하자 회사측은 크게 당황했다. 현대정공노조 간부들이 일상적 시기에 대의원 보고회와 분임조 토론 등을 통해 조합원들과 활발하게 소통하면서 축적해 온 노동자 민주주의의 저력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현대정공노조의 직권조인 사태와 그에 맞선 단호한 전면파업은 현총련 전반에 강한 긴장감을 불어넣었고, 공동투쟁의 열기가 빠르게 고조됐다.

     

    김영삼 정권은 현대정공 파업을 노동법상 절차를 무시한 불법파업으로 규정했지만, 공권력 투입이 자칫 현대계열사 전체의 연대파업으로 확산되면서 집권 초기에 변수로 부상하는 것을 염려했다. 결국 22일 노동부장관 이인제가 울산에 내려와 현대정공 노사를 직접 만나며 중재에 나섰다. 7월 5일 현대정공 노사는 상호 고소고발 취하, 파업기간 민형사상 면책, 노조 직무대리의 대표권 인정에 합의하고 임금교섭 재개 여부 등은 추가 협상하기로 합의했다.

     

    한편 현총련은 6월 30일 3만여 명의 조합원이 참여한 가운데 ‘성실교섭 촉구와 93 공동임투 승리를 위한 결의대회’를 일산해수욕장에서 개최했다. 1987년 노동자대투쟁 이후 가장 많은 조합원이 운집한 집회였다.

    “이제껏 고통 없이 살아온 특권층의 고통분담으로 바로 잡혀야 함을 천명하며 현대 노동자는 진정한 경제개혁을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을 결의한다.”(대회 결의문)[11]

    30일 집회에서 현총련은 7월 6일까지 현대그룹 측의 답변이 없을 경우 총파업을 포함한 중대결단을 내리겠다고 천명했다. 이날 집회 이후 김영삼 정권의 태도가 강경 대응으로 선회했다. 집회에서 연대사를 한 단병호 전노협 위원장에게 곧바로 ‘제3자 개입금지 위반’ 혐의로 사전 구속영장이 발부됐다. 7월 3일 노동부장관이 현총련 공동투쟁에 대해 강경조치에 나서겠다는 담화를 발표했다.

     

    노동자들의 파업 열기에 현대그룹 측이 협상의사를 밝히면서 5일 현총련과 현대그룹 측의 협상이 잡혔다. 그러나 직전에 현대그룹은 태도를 바꿨다.

    “초청되지 않은 다수가 본 면담에 참석하여 오늘 면담이 본래의 목적 취지와 다른 방향으로 전개될 가능성이 있기에 금일의 5개사 위원장 면담 건은 당분간 연기합니다.”(현대그룹 관계자)[12]

    검찰은 현총련이 연대파업에 나설 경우 지도부 전원을 사법처리하겠다고 엄포를 놓았다. 6일 현총련 사무실에 대한 압수수색이 진행됐고, 7일 현총련 지도부에 대한 사전 구속영장이 발부됐다.

     

    그러나 현총련은 정권의 압박에 굴하지 않고 7일 총파업을 단행했다. 현대자동차, 현대중공업, 한국프랜지, 현대중전기, 현대미포조선, 현대정공(울산), 현대강관, 현대정공(창원), 현총련 수원·용인협의회가 공동으로 파업에 들어갔다. 10개 노조 6만 3천여 명의 조합원이 참여한 1일 연대 총파업이었다. 김영삼 정권의 무쟁의 원년 추진이 묵사발이 되는 순간이었다.

     

    그럼에도 각 사업장별 임금교섭은 잘 진척되지 않았다. 14일 전노대가 소속 단위노조 대표자들을 소집하여 비상대표자회의를 열고 현총련 공동투쟁을 지지하는 농성에 들어갔다.

     

    각 사업장별 부분파업을 이어가던 현총련은 15일부터 20일까지 성실협상 촉구기간을 설정하고 정상조업에 들어갔다. 이번에도 교섭에 진척이 없으면 21일부터는 전면 총파업에 돌입하려는 수순이었다. 전면 총파업을 촉구하는 조합원들의 열기도 강력했다.

     

    이 상황에서 김영삼 정권이 20일 오전 11시 현총련 공동투쟁의 중심에 있던 현대자동차에 긴급조정권을 발동했다. 긴급조정권이 발동되면 해당 노조는 30일간 파업이 금지되고 중앙노동위원회가 직권중재에 나서게 돼 있었다. 1969년 대한조선공사 파업에 한 번 발동된 이후 사문화돼 있던 조항을 되살린 것이었다. 경찰은 20일 전경 15개 중대 1천 8백 명을 울산에 파견했고, 다음날에도 전경 20개 중대 2천 2백 명을 파견하겠다고 발표했다.

     

    현대자동차에 대한 긴급조정권 발동은 김영삼 정권이 이른바 ‘문민개혁’의 허울을 스스로 벗어던지고 노동자·민중에 대한 탄압을 본격적으로 시작하는 신호탄이었다. 그러나 21일 전면파업 돌입을 예정하고 있던 현대자동차노조는 긴급조정권 발동 소식이 알려진 19일 밤부터 12시간 동안의 마라톤협상을 통해 20일 오전 회사측 최종안을 전격 수용하면서 파업을 철회했다. 잠정합의안에는 징계위 노사동수, 해고자 전원복직, 주 40시간제 등 노조의 핵심 요구가 담겨 있지 않았다. 23일 조합원 찬반투표를 앞두고 정권은 21일 창원 현대정공과 서울 현대자동차서비스에 공권력을 투입함으로써 현대자동차노조에 경고를 보냈다. 결국 조합원 찬반투표는 잠정합의안을 50.1% 찬성으로 가결시켰다.

     

    잠정합의가 가결되긴 했지만, 현대자동차노조의 민주 집행부는 조합원 찬반투표에서 치명상을 입었다. 회사측이 좌우하는 조합원 숫자가 30% 정도로 간주되는 상황에서, 민주 집행부를 지지하는 조합원 가운데 대다수가 부결을 선택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부결을 선택한 조합원들에겐 회사측 최종안의 부족함도 문제였지만, 노조가 정권의 긴급조정권에 정면대결로 맞서지 않고 굴복하는 게 더 큰 문제였다. 민주 집행부에 대한 현대자동차 조합원들의 실망은 한 달 뒤 진행된 집행부 선거에서 어용 집행부가 간발의 차로 당선되는 결과로 이어졌다.

     

    정권의 긴급조정권 앞에서 민주 집행부가 회사측 최종안을 수용한 이유는 ‘긴급조정권에 정면대결로 맞서게 되면 공권력 투입으로 다시 한 번 노조가 사활적 위기에 빠질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현대자동차노조는 1991년 8월 처음으로 민주 집행부가 등장한 이후 1992년 1월 성과분배 요구 파업에 나섰다가 공권력이 투입되면서 6개월가량 노조가 마비되는 사태를 겪었었다. 그런데 그 후 치러진 1992년 8월 보궐선거에서는 61.8% 지지로 민주 집행부를 다시 당선시켰던 조합원들이, 민주 집행부가 긴급조정권에 굴복한 이후 치러진 1993년 8월 선거에서는 어용 집행부를 당선시킨 것이다. 조합원들의 열망을 저버리지 않고 단호하게 투쟁할 때는 설령 공권력에 짓밟힐지라도 조합원들의 신뢰를 통해 민주노조를 굳건히 지켜낼 수 있었지만, 조직을 살리겠다고 투쟁을 회피하면 오히려 조합원들로부터 버림받아 민주노조를 지켜낼 수 없게 됨을 보여주는 뼈아픈 경험이었다.

     

    핵심 주력인 현대자동차노조가 전선에서 이탈하면서 현총련 공동투쟁은 급격히 약화됐다. 23일 현대중공업을 비롯한 7개 노조가 연대 총파업을 벌였지만, 긴급조정권 발동에 맞서 선명한 대응을 하지 못하면서 위력이 반감됐다. 현총련 소속 노조들이 하나의 대오를 형성하며 공동투쟁을 전개해 왔지만 공권력과의 직접 대결로 나아가야 하는 시점에 이르러서는 그 벽을 넘어서지 못한 것이었다. 현총련은 더 이상 공동투쟁을 조직하지 못했고 각 노조가 사업장별로 교섭을 진행한 끝에 8월 20일까지 속속 임금교섭을 타결했다.

     

    그럼에도 현총련 공동투쟁은 김영삼 정권의 ‘무쟁의 원년’ 선언을 노동자대중의 힘으로 돌파해 냈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갖는 투쟁이었다. 현총련 공동투쟁의 성과는 하반기 각 단위노조 선거에서 대우조선, 대우자동차, 아시아자동차, 한진중공업 등 주요 대기업에 민주 집행부가 재건되는 것으로 연결됐다.

     

    3) 1994년 철도·지하철 공동투쟁

     

    1994년 봄 김영삼 정권은 노·경총 임금 합의를 다시 추진했다. 한국노총과 경총은 1993년에 이어 1994년에도 임금 5.0~8.7% 인상에 합의했다. 한국노총은 정권과 자본의 충견 역할을 또 다시 수행했다.

     

    민주노조운동은 노·경총 임금합의 반대투쟁을 더욱 가열차게 전개하면서 이 투쟁을 어용노총 해체 투쟁과 결합시켰다. 5월 14일 ‘전국 구속·수배·해고노동자 원상회복투쟁위원회’(전해투)가 ‘노·경총 임금합의 분쇄와 어용노총 해체’를 내걸고 한국노총 점거농성에 들어갔다. 어용노총 해체 투쟁은 68개 노조가 한국노총을 탈퇴하고 153개 노조가 의무금 납부를 거부하는 성과를 낳으면서 한국노총에 큰 타격을 가했다.

     

    한편 1994년 대중투쟁의 중심에는 철도·지하철 공동투쟁이 있었다. 1994년 3월 서울지하철노조와 부산교통공단노조 그리고 철도노조 내 전국기관차협의회(전기협)가 전국지하철노조협의회(전지협)를 결성하면서 철도·지하철 공동투쟁이 전개된 것이다.

     

    철도노조는 1946년 9월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전평) 총파업의 주역이었지만, 미군정과 우익청년단의 탄압으로 운동 역량이 철저히 파괴된 뒤 오랜 시간 대표적인 어용노조로 유지됐다. 하지만 1987년 노동자대투쟁은 철도 노동자들에게도 희망을 안겼다. 1988년 7월 26일 철도 기관사 평조합원들이 자발적으로 비상총회를 소집한 뒤 전면파업을 벌였다. 전국 철도를 일거에 멈춰 세운 위력적인 파업이었다. 노태우 정권은 파업 10시간 만에 전국 파업농성장에 경찰을 투입해 1천 6백여 명을 연행했다. 조직력과 지도력의 취약함 때문에 파업을 더 이상 이어나갈 수 없었지만, 이 파업을 계기로 철도노조 민주화 투쟁의 주력대오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1989년 상반기 실시된 철도노조 선거에서 파업을 주도한 평조합원들이 대거 기관차 분회장들로 당선됐다. 이들이 1989년 5월 15일 전국기관차분회장협의회를 결성한 게 전기협의 출발이었다. 전기협은 1991년 20개 기관차사무소 조합원 전체를 포괄하는 대중조직인 전국기관차지부협의회로 전환했다. 1994년 전기협은 기관사와 검수원으로 구성된 6천 5백여 명의 조합원을 포괄했는데, 이는 철도노조 전체 조합원의 23%에 해당했다.

     

    전지협은 1994년 ‘변형근로제 철폐, 근로기준법 준수, 공기업 3% 임금억제 정책 철폐, 해고자 원직복직’ 등의 공동요구를 내걸고 공동투쟁을 조직해 나갔다.

    5월 24일 서울 서부역 광장에서 약 2,000여 명의 철도노동자가 참석한 가운데 철도원투쟁 전진대회가 열렸다. 1부 문화행사에서 풍물패 공연, 노래패 ‘노래선언’의 공연이 있었고, 2부 전진대회에서는 동지소개, 연대사, 해직동지 인사, 직종별 대표 인사, 경과보고, 전지협 활동보고, 결의, 지도부 구속 결단과 결단문 낭독 및 결단 확인, 집행부 사수 결단, 투쟁방침 및 행동지침 전달, 국민에게 드리는 메시지 등이 진행되었다.

    철도노동자들은 집회 내내 결의에 찬 모습을 보였으며, 노래패의 공연시에는 유인물에 적힌 가사를 보면서 열심히 따라하기도 하였다. 이날 집회에는 서울지하철 조합원들도 함께 결합하여 연대의 의지를 확인했다.[13]

    6월 2일 전지협은 공동투쟁 결의대회를 가진 뒤, 14일 세 노조가 동시에 쟁의행위 찬반투표에 나섰다. 서울지하철노조 90.7%, 부산교통공단노조 96.2%, 전기협 90.4%로 모두 압도적인 찬성이었다.

     

    그런데 철도·지하철 노동자들이 26일로 예정된 공동파업에 들어가기도 전에 김영삼 정권이 선제공격에 나섰다. 23일 새벽 3시 40분 서울, 부산, 대구 등 전국 14개 전기협 농성장에 일제히 경찰을 투입해 613명을 연행한 것이다. 이에 맞서, 새벽 4시 전기협이 즉각 전면파업에 돌입했다. 24일 새벽에는 서울지하철노조가, 25일 새벽에는 부산교통공단노조가 파업에 돌입했다. 공권력 투입은 철도·지하철 노동자들의 공동파업을 막지 못했다. 오히려 예정보다 하루 일찍 공동파업이 성사되도록 촉발하는 역할만 했다.

     

    하루 간격으로 철도·지하철 노동자들이 공동파업을 성사시켜 내는 모습은 전국의 노동자들에게 큰 감동을 안겼다. 전국의 철도와 서울·부산의 지하철이 거의 마비될 정도로 파업의 위력도 강력했다. 반면 체면을 구긴 김영삼 정권은 광분했다. 25일 서울지하철 노동자들이 집결한 고려대에 공권력을 투입한 정권은 노동자들이 경희대로 옮겨 가자 26일 새벽 다시 경희대에 공권력을 투입했다. 같은 날 오후 3시에는 전기협 농성장인 서울기독교회관에 공권력을 투입했다. 또한 오후 5시에는 부산교통공단 노동자들이 농성 중인 동아대에 공권력을 투입했다.

     

    거듭되는 공권력 투입으로 대규모 연행자가 발생하는 상황에서도 철도·지하철 공동파업은 6월 30일까지 이어졌다. 7월 1일 서울지하철노조, 부산교통공단노조, 전기협이 모두 파업을 종결하고 업무에 복귀했다.

     

    한편 28~29일 김영삼 정권은 최저생계비 보장을 요구한 광주 금호타이어노조의 파업, 해고자복직과 퇴직금 누진제를 요구한 대구 대우기전노조의 파업, 임금인상을 요구한 부산 메리놀병원노조의 파업에 일제히 공권력을 투입했다. 일방 중재 철회를 요구한 부산 한진중공업노조의 파업에도 공권력 투입을 시도했으나 LNG선상 파업이라는 특성 때문에 공권력 투입에 실패했다.

     

    그런데 이처럼 김영삼 정권이 6월말 전국 곳곳에 공권력을 투입했을 때 전노대가 취한 방침은 1990년 4월말 현대중공업 골리앗 파업에 공권력이 투입됐을 때 전노협이 취한 방침과 뚜렷이 대비됐다. 1990년 전노협은 현대중공업 공권력 투입으로 정점에 이른 일련의 노동운동탄압에 맞서 전국 총파업으로 대응했다. 그러나 1994년 전노대는 연쇄적인 공권력 투입에 대해 ‘규탄과 총력투쟁’에만 머물렀을 뿐 전국 총파업을 조직하려는 시도는 전혀 하지 않았다.

     

    그보다 앞선 6월 22일 전기협 농성장에 공권력이 투입되기 바로 전날에는, 전노대의 주요 간부가 전기협 지도부에게 ‘농성을 해제하면 철도청과 교섭을 주선할 수 있다’고 제안했다가 퇴짜를 맞은 사건도 있었다.

    6월 22일 밤 전노대 간부를 통해 철도청과 노동부장관이 기만적인 대화를 요구해왔다. 이러한 기만적인 술책을 쓰면서 공권력은 6월 23일 03시 40분경 기습적 침탈을 감행하였던 것이다.[14]

    전노대 주요 간부의 논리는 이런 식이었다. ‘지금 정권 내 강경파가 일부러 도발하고 있다. 정권 내 개혁파는 우리를 도와주려 하는데 강경파가 하도 설쳐대서 쉽지 않다고 한다. 공권력 침탈의 명분을 주지 않는 게 현명한 태도다.’ 전노협 한계론에 입각해 졸속으로 민주노총 건설을 주도하던 타협·개량주의 세력의 문제를 여실히 보여주는 한 장면이었다.

     

    그런데 그러한 전노대 주요 간부의 압력을 전기협 지도부가 단호히 물리치면서 철도 파업을 강행하고 철도·지하철 공동투쟁을 성사시켜 냈다는 점 또한 주목할 필요가 있다. 노동자대중의 열망과 결합된 전투적·변혁적 세력 또한 계속 성장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기 때문이다.

     

    4) 1995년 현대차 양봉수 열사투쟁

     

    1995년 5월 12일 현대자동차 울산공장 정문에서 해고자 양봉수가 분신했다. 양봉수는 해고와 분신에 이르는 결연한 투쟁을 통해, 어용노조를 앞세운 자본의 교활한 탄압으로 무기력해진 현장을 뒤흔들었다. 양봉수의 분신은 회사와 어용 집행부에 맞선 비공인파업으로 이어졌고, 현대자동차에서 민주노조의 기반을 확고히 세우는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1987년 노조설립 이후 한동안 현대차노조에는 민주노조가 뿌리를 내리지 못했다. 1987년 9월부터 1989년 8월까지 재임한 1대 이영복 집행부는 노골적인 노사협조주의를 표방한 어용 집행부였다. 1989년 9월부터 1991년 8월까지 2대 이상범 집행부는 1987년 이전 민주노조 준비세력을 대표했지만 1990년 현대중공업 골리앗파업 연대를 배신하고 임금협상에 직권조인하면서 민주 집행부로서의 성격을 상실했다.

     

    1991년 9월 등장한 3대 이헌구 집행부는 현대차노조 최초의 민주집행부였으나 1992년 1월 성과분배 파업으로 공권력이 투입되면서 임기를 마치지 못했다. 1992년 9월 4대 윤성근 집행부로 민주 집행부가 재등장했지만 1993년 7월 현총련 공동투쟁 와중에 김영삼 정권의 긴급조정권에 굴복하여 졸속 노사합의에 나서면서 조합원대중에게 큰 실망을 안겼다. 결국 1993년 9월 현대차노조에는 다시 어용 집행부가 등장했다. 1대 집행부를 이끌었던 이영복이 5대 위원장으로 돌아왔다.

     

    현대차 회사는 1994년과 1995년 민주 집행부가 이끄는 다른 계열사들(현대중공업 등)보다 더 높은 임금인상을 통해 어용 집행부의 입지를 높여주었다. 그 반대급부로 회사는 노동강도와 현장통제를 대폭 강화했고, 어용 집행부는 그에 적극 협력했다.

    회사측의 전례없는 임금인상은 노동조합이 ‘생산성 향상을 위해 적극 협력’한다는 반대급부를 전제로 했다. 이영복 집행부는 스스로 장비가동률과 생산량 문제점을 분석하고 대처방안을 마련하는 등 생산관리업무를 진행했다. 노사대표가 직접 라인을 타는 현장체험 행사를 갖기도 하고, 산업평화나 자동차산업 전망 등을 주제로 노사합동세미나도 개최했다. 1994년 이영복 위원장은 생산성 향상에 앞장서며 무분규를 실현한 공로로 김영삼 대통령에게 훈장을 탔다. …

    이영복 집행부는 회사와 화합은 강화하면서 노동조합 상급단체와 지역 노동조합과의 연대는 단절했다. “외부와 연계한 공동투쟁이나 연대파업은 절대 안 한다”고 공언했다. 현총련 활동을 비롯한 연대사업 전반에 불참했고, 자연스럽게 민주노총 건설 과정 전반에서 스스로 소외됐다.

    이영복 집행부는 출범 직후부터 3, 4대 민주파 집행부를 싸잡아 공격했다. 가장 기본적인 도덕성과 양심에 대한 문제제기를 하면서 ‘민주파 집행부가 노동조합을 망쳤다’는 식으로 몰아갔다. … 노조 소식지에 빠진 날이 거의 없을 정도로 전직 위원장과 민주파 진영 전체를 싸잡아 매도하면서, 조합원들이 노동조합 자체에 대해서 회의를 느끼게 할 정도로 몰아갔다. 가랑비에 속옷 젖는다는 말처럼, 다수의 조합원들도 … 민주파 진영에 대해서 의심을 갖게 됐다. 그 결과 한동안 민주노조운동 진영은 현장에서 고립되는 처지로 내몰렸다.

    이영복 집행부는 자신에게 비판적인 입장을 가진 활동을 거세게 탄압했다. 관례화된 것이건 규약이건 홍보활동의 자유마저 무력으로 저지하며 조합원들을 짓눌렀다. 집행부를 비판하는 대자보라도 붙는 날이면 얼마 지나지 않아 대자보가 뜯겨나가고 기명자들이 노동조합에 불려가 폭행과 협박으로 곤욕을 치러야 했다. 그러니 대자보 한 장 붙이는 것조차 집행부 눈치를 봐야 했다. 홍보활동의 보장을 회사가 아닌 노동조합 집행부에 요구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이영복 집행부는 자신에게 비판적인 성향의 대의원들에게는 규약에 규정된 활동비마저 지급하지 않았다. 소위원회는 그 존재 자체를 인정하지 않았다. 집행부를 비판한 대의원대표에겐 차량출입증을 발급해 주지 않았다. 규약은 물론 대의원대회 결의사항도 수시로 무시했다.

    이영복 집행부를 거치는 동안 현장의 조직력은 무력화 됐다. 노동조합 전체가 단체행동권을 포기하고 노사협의회 수준으로 전락함에 따라 각 사업부 대의원회 또한 노사협의회 수준으로 전락했다. 1공장과 2공장 등 일부만이 맨아워 협상 과정에서 사측의 일방적인 생산량 증가 계획에 맞서 잔업거부 등 독자적인 단체행동을 일부 시도할 수 있을 뿐이었다.

    현장활동이 가라앉으면서 그동안 대의원·소위원에게 있던 권한들이 점점 반장·기사·과장 등 현장관리자들에게 이관되어 갔다. 현장관리자의 위세가 강화되는 만큼 조합원의 권리는 작아졌고, 노동조합의 조직력은 무너졌다. …

    이영복 집행부 2년 동안 현대자동차 노동자의 임금은 몇 푼 올랐지만, 정신적·육체적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집행부가 앞장서 독려한 생산성 향상은 현장의 노동강도 강화로 나타났다. 조합원들이 힘들어 하는 것은 당연했다. 어디가나 ‘일이 힘들다’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저 친구 저렇게 일하다가 죽을까봐 겁난다” “87년 이전의 통제가 오늘날 되살아났다” “도대체 어디 가서 하소연할 데가 없다” 등등 현장은 점점 위기의식과 불만으로 가득 채워져 갔다.

    회사는 노동조합의 지원을 등에 업고 현장 상황을 고려하지 않은 채 일방적으로 생산량을 결정한 뒤 막무가내로 밀어붙였다. 생산성 증가는 사람을 더 투입하면서 컨베이어 속도를 높이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작업공간은 한정돼 있는데 사람이 늘어나니까 작업공간이 좁아졌다. 어떨 때는 부품을 들고 이동하는 컨베이어를 쫓아가 조립을 해야 할 정도였다. 찰리 채플린의 모던타임즈에 나오는 장면을 연상시킬 정도로 노동강도가 세졌다.

    1995년 초에는 지난해 생산실적보다 30%나 늘린 생산계획을 일방적으로 발표했다. 한계에 달한 작업자간의 거리를 무시하고 사람 몇 명(5~10%) 추가하여 30%를 더 생산하겠다는 것이었다.

    노동강도의 증가는 전 공장 차원에서 이루어졌다. 과거에는 승용차 조립에 비하자면 상용차 조립에 조금 여유가 있었는데 이제 그런 구분을 할 수 없게 됐다. 상용차 공장에서도 컨베이어 속도가 빨라지고, 공작기계에는 자동화가 이루어지면서, 어디가나 일이 힘들다고 난리였다.

    ‘조금만 더 빨라지면 돌아버릴 지경’이라는 얘기가 서슴없이 나왔다. 1994년 여름에는 유례없는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면서 현장 온도가 40도를 넘나들며 노동자들의 숨통을 틀어막았다. 노동시간은 평소 주야 2교대에 토요일 철야, 일요일 특근철야까지 덧붙여지면서 무려 주당 70시간 정도로 치달았다.

    자연스럽게 산업재해가 급증했다. 1994년 산업재해 건수는 1992년(324건)과 1993년(345건)에 비해 무려 200여 건이 늘어난 559건으로 창사 이래 최고를 기록했다. 그런데 노동조합 조직력이 취약해지면서 산재사고가 발생해도 이를 은폐하거나 산재인정을 거부하는 사례가 비일비재했기 때문에, 실제 산재사고는 그보다 훨씬 더 많았다. 산재인정을 거부당한 사례 가운데는 특히 허리 부상이 많았다.

    거의 모든 산재사고가 장시간 노동과 강도 높은 노동에 따른 누적된 피로에서 비롯됐지만, 대부분 ‘본인 과실’로 기록됐다. 권한이 강화된 관리자들은 그렇게 자신들의 책임을 회피했다. 안전문제가 심각한데도 적절한 조치나 대응이 이루어지지 않는 경우도 다반사였다. 불량부품 등의 문제로 생산라인 정지를 요청하면 그냥 작업강행을 지시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이영복 집행부 시절 현장은 완전히 초토화 되어서 거의 숨도 못 쉬고 있었다. 현장 안에서 라인을 조금이라도 벗어나서 어디를 가려면 사전 승인을 받아 패찰을 차야만 했다. ‘나는 이 업무 때문에 다른 공장에 가는 중이다, 그래서 이동하고 있다’ 그런 내용이었다. ‘근무시간 이동인력 절대 없다’는 회사 방침 때문이었다. 은행에 볼 일이 있어도 쉬는 시간에 뛰어가서 해결을 하고 와야 했다.

    반장의 허락 없이는 오후 5시 퇴근조차 마음대로 못했고, 조퇴나 월차 사용도 제한됐다. 월차를 쓰려면 과거에는 전화 한 통화면 됐지만, 이제 하루나 이틀 전에 신청하라고 난리였다. 관리자들의 언어폭력이 현장에서 일상화되기 시작했다. 3공장처럼 조직력이 더욱 취약한 곳에서는 일방적 호칭과 반말, 자기 기분대로 모멸감을 주는 농담 등이 예사로 행해졌다.

    작업시간에 좀 늦거나 담배를 피우는 것도 눈치를 봐야 했다. 관리자와 다툼이 생겨도 그저 참아야 했다. 몸이 불편해서 쉬려고 해도 관리자에게 싫은 소리 들을까 봐서 참아야 했다. 게다가 어디 가서 그런 불만을 털어놓고 말하기도 어려웠다. 현장에서의 보호막이 사라지고 현장의 주도권이 관리자들과 반장에게로 넘어갔다.[15]

    이런 상황에서 승용2공장 대의원이던 양봉수는 1995년 2월 ‘불법선동과 생산라인 임의정지에 따른 취업규칙 위반’으로 해고당했다. 1월 신차 마르샤 투입 관련 맨아워 협의 과정에서 회사측이 대의원회와의 합의를 깨고 일방적으로 더 많은 양의 신차를 생산에 투입하자 이에 항의하며 컨베이어 라인을 정지시킨 게 해고 사유였다.

     

    노조활동으로 두 번째 해고를 당한 양봉수는 2~3월 ‘부당징계 철회, 노동강도 강화 저지, 노조민주화 쟁취’라는 요구를 내걸고 2공장 본관건물 앞 콘크리트 바닥에 텐트를 치고 철야농성 투쟁을 벌였다. 양봉수가 부당해고에 맞서 21일간 펼쳐 낸 현장 철야농성은 활동가들 사이에 팽배해 있던 무력감을 상당 정도 걷어내는 역할을 했다. 1993년 9월 어용 집행부 등장 이후 극도로 침체돼 있던 현장에 정말 오랜만에 노동가가 울려 퍼졌고 조합원들의 동력이 되살아나기 시작했다. 대의원과 소위원을 넘어 승용2공장 조합원 전체가 네 번의 집회와 잔업거부로 투쟁에 동참했다. 다른 사업부에서도 격려 방문이 이어졌다.

     

    경남지방노동위원회에 부당노동행위 및 부당해고 구제신청을 제기함으로써 ‘해고의 효력을 다투는 자’였던 양봉수는 노동조합법과 단체협약에 따라 조합원 자격이 유지되고 있었다. 따라서 회사측은 해고 초기 양봉수의 대의원 자격을 인정하며 양봉수와의 협의를 지속했다. 그러나 돌연 ‘징계면직자’ 양봉수가 참여하면 대의원들과 협의를 할 수 없다는 입장으로 돌아섰다. 3월 29일 회사측은 마르샤 맨아워 협의를 위해 의장2부 사무실에 와 있던 양봉수를 경비 20여 명을 동원해 밖으로 끌어냈다.

    경비들은 “양봉수씨는 종업원이 아니기에 출입할 수 없다”며 사무실에서 개 끌듯이 끌고 나가더니 아우성치는 양봉수의 온몸을 들어 올려 정문까지 이동한 뒤 정문 밖 땅바닥에 그대로 패대기쳐 버렸다. 경비들에게 끌려나오며 집단폭행을 당한 양봉수는 전치 2주의 부상을 입고 병원 신세를 져야 했다. 양봉수는 집단폭행의 책임을 물어 사장·부사장·경비과장 등을 고소했다. 그런데 회사측은 오히려 자신들이 피해를 입었다며 양봉수에게 3,100만원의 손해배상을 청구했다.[16]

    이제 양봉수는 정문 출입마저 철저히 봉쇄당했다. 회사측은 총무과 소속 경비대와 법규부를 동원해서 양봉수를 24시간 감시·미행했다. 출입문마다 사진을 붙여놓고 경비들로 하여금 양봉수의 출입을 철통같이 차단하게 했다. 그러나 양봉수는 계속 현장출입을 시도했다. 정문 앞에서 막히고 또 막혀도 양봉수는 현장에 가기 위해 또다시 정문 앞으로 나아갔다. 그때마다 경비들과 시비가 붙었다. 양봉수의 현장출입 시도가 계속될수록 경비들의 폭력도 나날이 강도를 더해 갔다.

     

    회사측이 양봉수의 현장출입을 저지한 것은 노동조합법과 단체협약을 명백하게 위반하는 불법행위였다. 그런데도 회사측이 불법을 감행할 수 있었던 데에는 노조 집행부의 협조가 결정적이었다. 집행부는 양봉수에 대한 해고는 사규위반에 대한 정당한 면직처리일 뿐 노조활동 관련 해고가 아니라면서, 따라서 양봉수에겐 조합원 자격이 없다고 주장했다. “현대차에 해고자는 없다. 사규위반 면직자만 있다”, “면직자가 왜 현장에 들어오느냐”며 철저히 회사 편에 선 노조 집행부를 등에 업고, 회사는 양봉수의 현장출입마저 폭력적으로 가로막는 불법행위를 거리낌 없이 자행할 수 있었던 것이다.

     

    양봉수는 정문출입을 줄기차게 시도하는 한편으로 현대자동차, 현총련, 울산 그리고 전국 차원에서 다른 해고자들과 함께 하는 집단적 복직투쟁 또한 성실하게 결합해 나갔다. 현대자동차에서는 5명의 해고자가 해복투를 꾸려 정문에서 함께 투쟁했다. 현총련 산하 37명을 비롯해 울산지역 50여 명의 해고자가 ‘울산해고자협의회’(울해협)로 결집해 순회 정문투쟁을 펼쳤다. 전국의 해고자들은 ‘전국 구속·수배·해고노동자 원상회복투쟁위원회’(전해투)로 결집해 전국을 순회하며 악덕기업주들에 맞선 투쟁사업장 전국순회 지원투쟁을 벌였다.

     

    이 무렵 양봉수는 가장 친했던 활동가들에게 ‘힘들다’는 속내를 털어놓곤 했다.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미행하며 탄압하는 회사 때문만도 아니었고, ‘해고자는 없다’며 회사측의 탄압을 방관하고 방조하는 노조 집행부 때문만도 아니었다. 양봉수를 오히려 더 힘들게 했던 것은 민주파 현장 활동가들마저 눈치를 보며 움츠려 있는 상황이었다. 게다가 시간이 가면 갈수록 더욱 거세지는 회사의 탄압은 양봉수를 도저히 인내할 수 없는 한계상황으로 내몰고 있었다.

     

    양봉수는 절친했던 활동가들을 만나 답답함을 토로했다. ‘해보려고 했지만 혼자서는 역부족이고 선배들은 몸사리는 거 같고 너무 답답하다’는 요지였다. 회사측이 24시간 감시·미행하는 상황도 고통스러워했다. 5월 11일부터 12일 오전까지, 양봉수는 여러 활동가들에게 ‘목소리 듣고 싶었다’며 전화를 걸었다. ‘내일(또는 오후에) 공소위 발대식하니까 정문 앞에서 보자’고 비슷한 약속들을 했다. 전화를 받은 이들은 양봉수가 ‘평소와 뭔가 좀 다르다’고 느끼긴 했으나 그래도 그런 엄청난 일이 벌어질 거라고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5월 12일 ‘현대자동차노조 공동소위원회’(공소위) 2기 출범식이 오후 5시에 본관정문 안쪽 광장에서 열릴 예정이었다. 전날 노조 집행부는 공소위 출범식을 알리는 대자보와 현수막을 강제 철거했다. 현장에는 심상치 않은 분위기가 감돌았다.

     

    5월 12일 오후 4시 45분, 양봉수를 비롯한 해고자 네 명이 공소위 출범식에 참석하기 위해 본관정문으로 들어가고자 했다. 해고의 효력을 다투고 있기에 노동조합법과 단체협약에 따라 조합원의 자격을 갖고 있는 해고자가, 노동조합의 풀뿌리 조직인 공소위 출범식에 참석하겠다는 것은 너무나 정당한 권리였다. 그러나 회사측은 이날도 평소처럼 경비들을 앞세워 폭력적으로 해고자들을 가로막았다. 경비들과 몸싸움을 벌이던 끝에 양봉수는 결국 자신의 몸에 불을 붙이고야 말았다.

    경비들은 4~5명씩 조를 이뤄 해고자를 한 명씩 붙들고 정문 밖으로 밀어냈다. 이날도 경비들의 폭력이 반복되자, 양봉수는 미리 준비한 1.8리터짜리 신나통을 왼손에 치켜들고 오른손으로 뚜껑을 열면서 “나를 더 이상 손대지 마라. 손대면 내 몸에 들이 붓겠다”고 경비들에게 큰 소리로 외쳤다. 양봉수는 집회장을 향해 다시 정문을 넘어서려 했다. 그러나 20명가량의 경비들이 몰려들어 양봉수를 붙잡고 막았다. 양봉수는 왼손에 들고 있던 신나를 머리에서부터 온 몸에 들이부은 뒤 오른손에 일회용 라이터를 들고 “가까이 오지 마라! 내 몸에 손대면 불을 붙이겠다!”고 외쳤다.

    양봉수는 경비들을 밀고 회사 안으로 몇 발짝 들어갔다. 하지만 경비들이 다시 양봉수를 끌어안고 신나통과 라이터를 뺏으려 하면서 격한 몸싸움이 벌어졌다. 신나가 경비들의 옷에도 튀었다. 몸싸움 끝에 양봉수 왼손에 있던 신나통이 땅바닥으로 떨어졌다. 그러자 경비 한 명이 등 뒤에서 허리를 껴안고 다른 두세 명이 달라붙어 양봉수를 밖으로 끌어내려 했다. 격분한 양봉수는 라이터에 불을 붙였다. 순식간에 양봉수의 온 몸이 불길에 휩싸였다. 양봉수를 붙잡고 있던 경비의 몸에도 불이 붙었다.

    양봉수는 얼굴을 감싸고 주저앉았다가 다시 일어나 비틀거리며 몇 발짝 움직였지만 결국 앞으로 쓰러졌다. 옆에서 불길을 잡기 위해 달려든 조합원들이 상의를 벗어 덮고 공동소위원회 깃발로 감쌌지만 불길이 잡히지 않자 경비실에 있던 분말소화기로 겨우 몸에 붙은 불을 껐다.[17]

    양봉수는 구급차에 실려 해성병원(현 울산대학교병원)으로 옮겨진 뒤 다시 화상전문병원인 대구 동산병원으로 옮겨졌다. 소식을 전해들은 대구지역노동조합연합(대구노련) 간부들과 대구지역 노동운동단체 회원들이 양봉수를 지키기 위해 동산병원으로 속속 집결했다.

     

    양봉수의 분노에 찬 절규는 깊게 숨죽이고 있던 현대자동차 3만 조합원을 일거에 뒤흔들었다. 그의 몸을 불사른 한줄기 불길은 하늘 높이 솟아올라 모든 노동자들의 가슴으로 거세게 번졌다.

     

    13일 새벽 50여 명의 현장 활동가들이 공장 밖에서 대책위 결성을 위한 회의를 진행하는 동안 현장에서는 조합원들과 상황을 공유하기 위한 활동이 계속됐다. 야간조 야식시간인 새벽 1시부터 2시 사이 각 공장별로 경과보고 및 규탄 집회가 열렸다. 1공장에서는 400여명이 본관정문 앞에서 집회를 열고 대책위가 결성되는 대로 그 결의사항을 끝까지 따르기로 결의했다. 3공장에서도 400여명이 집회를 열었다. 4공장에서는 400여명이 밴 식당 앞에서 집회를 열었다. 연수원 식당과 Y2 식당 앞에서도 엔진과 변속기를 만드는 공작사업부 조합원들이 각 400여 명씩 모여 사측의 부당한 탄압과 폭력, 집행부의 비민주성을 규탄하는 집회를 열었다.

     

    그런데 정작 양봉수가 속한 2공장에서는 야식시간에 아무런 움직임이 만들어지지 못했다. 2공장 대의원들은 12일 저녁 9시 30분부터 회의만 계속 하고 있었다. 2공장 야간조 조합원들은 양봉수의 분신 소식을 출근 전에 뉴스 속보로 다 보고 온 상태였다. ‘봉수 분신해 죽는 상황인데 라인 돌려서 되겠나’ 그렇게 말하는 조합원들이 많았지만 라인은 평소처럼 저녁 9시부터 돌아갔다. 소위원들이 빨리 행동에 나설 것을 요구했지만, 대의원들은 잠시만 기다리라면서 아무런 결정도 하지 못한 채 회의만 계속할 뿐이었다.

     

    새벽 1시부터 2시까지 야식시간조차 아무 것도 못한 채 흘러가 버리자 현장은 술렁거렸다. 휘발유를 끼얹은 것처럼 불만 붙이면 터질 것 같은 분위기였다. 대의원들은 중앙 대책위가 만들어지고 그 지침이 나올 때까지 일단 일하자고 했다. 하지만 현장 조합원들은 모두 말도 안하고 ‘봉수 어떻게 돼 가냐’ 그것만 물었다.

     

    마침내 새벽 4시 휴게시간에 보고대회가 열렸다. 분노로 이글거리는 조합원들이 집회장을 가득 메웠다. 대의원들은 깜짝 놀랐다. 모이는 데 5분, 분신 경과보고를 하고 투쟁발언 하나 하니까 20분이 지나버렸다. 딩동댕~ 작업종이 치고 삐걱삐걱 라인이 다시 돌아가는 소리가 났다. 그러나 조합원들은 아무도 일하러 가지 않았다. 누군가 나섰다. “이 상황에서 어떻게 일을 합니까!” 조합원들은 떠나지 않고 자리를 지켰다. 당황한 대의원들은 소위원 의장단에게 진행을 맡기고 자기들끼리 회의 한다며 사라져 버렸다.

     

    마침내 라인이 끊어졌다. 의장2부에서부터 파업이 시작된 것이다. 조합원들의 자유발언으로 집회가 이어졌다. 5시쯤 현장 집회를 마치고 조합원 7백여 명이 본관으로 이동해서 다시 항의집회를 시작했다. 의장2부의 파업 소식이 전해지자 2공장의 차체, 도장, 프레스에서도 6시부터 시작되는 잔업을 거부하고 조합원 5백여 명이 본관으로 이동해서 집회에 합류했다.

     

    본관 앞 집회에 참석한 2공장 조합원들은 출근하는 주간조 조합원들에게 파업 소식을 알리기 위해 다시 공장으로 들어갔다. 주간조 대의원들은 ‘토요일 4시간 근무인데 파업이 되겠나’ 의구심을 많이 가졌지만, 소위원들이 ‘지금 조합원 동지들이 더 적극적이지 않냐’고 설득했다. 출근길에 소식을 접한 2공장 주간조 조합원들은 자연스럽게 파업대오에 합류했다. 오전 8시 2공장의 모든 라인이 멈춰 섰다. 파업이 2공장 전체로 확산되는 순간이었다.

     

    주간조가 퇴근하는 낮 12시 정문 앞에서 조합원 4천여 명이 참여하는 집회가 열렸다. 정문 바깥쪽에서도 현총련 조합원과 지역단체 회원 5백여 명이 집회에 동참했다. 정문 철제 바리케이드를 사이에 두고 현대자동차 조합원과 현총련 조합원이 서로 마주보며 진행했다. 이 집회를 계기로 대책위가 비공식적 임의기구에서 조합원 대중에게 승인받은 공식적 지도부로 부상했다. ‘반 어용노조 세력’이 모두 결집한 대책위가 노조 집행부를 제치고 조합원 대중에게 인정받는 새로운 투쟁 지도부로 등장한 것이다. 2공장 야간조 조합원들은 오후 5시부터 9시까지 파업을 이어 나갔다.

     

    15일 월요일 오전 8시, 2공장에서 전면 작업거부가 이어졌다. 활동가들은 ‘주말이 끼어서 파업이 이어지겠냐’는 우려를 가졌지만, 월요일 출근한 조합원들이 ‘이런 분위기에서 무슨 일을 하노’, ‘오늘 콘베어 돌리면 안 돼지’ 하며 적극 나서면서 자발적으로 파업을 이어갔다.

     

    2공장 조합원 1천 2백여 명은 12시 45분 노동조합 앞에서 약식 항의집회를 가진 뒤 1공장으로 몰려갔다. 오후 1시 1공장 전체가 전면 파업에 동참했다. 1시 20분 1공장 오케이라인에서 2천 7백여 명이 모여 1공장·2공장 합동 집회를 열었다.

     

    ‘양봉수동지 분신대책위 경과보고 및 부당노동행위 3만 조합원 2차 규탄대회’가 비가 오는 가운데서도 4천여 조합원이 참석한 가운데 5시부터 열렸다. “3만 조합원 동지 여러분 반갑습니다. 저는 동지들을 사랑하고 노동조합을 사랑합니다. 빠른 시일 내에 회복되어 3만 조합원 동지들과 함께 하기를 바랍니다. 3만 조합원 동지들의 건승을 빕니다.” 양봉수의 육성이 스피커로 흘러나오자 대회장은 침묵과 분노로 뒤덮였다.

     

    9시에 시작되는 야간조도 1공장과 2공장 모두 파업을 이어갔다. 11시 본관 앞에서 1공장·2공장 합동집회가 2천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열렸다.

     

    16일 화요일 오전 6시, 4공장 야간조 조합원들이 잔업 시간에 집회를 열었다. 오전 8시 4공장 야간조·주간조와 1공장 주간조 조합원들이 정문 앞에 집결한 뒤 공동으로 본관 집회를 열었다. 2공장과 1공장에 이어 4공장도 파업에 돌입하는 순간이었다.

     

    3공장도 8시부터 작업거부에 들어갔으나 대오가 어수선하다는 소식에 9시쯤 2공장 조합원들이 3공장으로 대열을 지어 몰려갔다. 1공장과 4공장에서도 대열이 출발했다. 10시쯤 3공장에서 1공장·2공장·4공장 조합원들까지 합세해서 공동 집회가 열렸다.

     

    오후 5시 정문 앞 집회에 5천여 명의 조합원이 참석했다. 이 자리에서 대책위는 17일부터 울산공장 전체 파업을 선언했다.

     

    17일 수요일, 대책위가 주도하는 울산공장 전체 파업이 현실화됐다. 그러자 오전 9시 30분 울산공장 전체에 전원이 차단됐다. 10시 본관 앞에서 3차 규탄대회가 열렸다. 오후 1시 30분 전경차 9대가 명촌정문에 포진했다. 6대는 사내에 진입했고, 3대는 명촌정문 앞에 대기했다. 효문로터리에도 전경차 3대가 배치됐다. 오후 4시부로 회사측에서 무기한 휴업조치를 발표했다. 대책위 지도부 12명에 대해서는 사전 구속영장이 신청됐다. 사태는 긴박해졌다.

     

    대책위는 출근강행이라는 방침을 세웠다. 18일에도 본관 앞 집회를 강행하기로 했다. 현총련은 지역 운영위를 열어 현대차에 공권력이 투입될 경우 전체 조합원이 잔업거부를 하고 오후 5시까지 현대차 정문 앞으로 집결하기로 결정했다. 휴업조치가 내려졌음에도 조합원 1천 5백여 명이 밤새워 본관 앞 농성장을 사수했다.

     

    18일 목요일, 회사측의 휴업조치를 무시하고 대책위 방침에 따라 출근한 조합원들이 9시 각 공장별로 집회를 갖고 10시 본관 앞으로 집결했다. 오늘도 5천여 명의 조합원이 모였다. 조합원들은 각 공장별로 모여 공권력 투입에 대비했다.

     

    저녁 9시에는 본관 앞에서 5천여 명이 집결해 촛불집회를 열었다. 공권력 투입이 임박했지만, 집회 분위기는 힘이 있었다. 집회 도중에 대책위 공동대표 3명에 대한 사전 구속영장 발부 사실이 확인됐다.

     

    19일 금요일, 마침내 김영삼 정권이 경찰병력을 투입해 철야농성 중이던 조합원들을 무력으로 진압했다. 오전 3시 40분 정문에 백골단 3~4백명을 중심으로 1천 5백여 명의 경찰병력이 투입됐다. 백골단, 노사협력부 직원, 경비들이 함께 본관 앞 농성장으로 달려들어 농성하던 조합원들을 끌어내고 텐트를 짓밟았다. 조합원들은 인간 스크럼을 짜고 버텼지만, 10분 만에 진압이 종결됐다.

     

    연행을 피해 공장을 빠져나온 조합원들은 현장을 침탈한 경찰과 맞서 싸우기 위해 안전모와 마스크를 쓰고 쇠파이프를 들고 거리로 나섰다. 호각 소리와 함께 노동자들이 백골단과 전경을 향해 달려들면 빠바바방 사과탄이 여기저기서 한꺼번에 터졌다. 골목으로 밀린 노동자들은 잠시 숨을 고른 뒤 또 다시 치고나갔다. 그런 공방전이 양정동과 염포동 일대에서 새벽부터 밤까지 하루 종일 계속됐다. 현대정공과 현대중공업을 비롯한 다수의 울산지역 노동자들도 이 투쟁에 함께 했다.

     

    분신 이후 한 달이 지난 6월 13일 오전 7시 45분경 양봉수가 마침내 사망했다. 양봉수의 분신과 조합원들의 비공인파업은 현대차노조를 극적으로 변화시켰다. 조합원대중의 자발적인 비공인파업을 통해 노사협조주의와 실리주의를 극복할 수 있는 민주노조운동의 대의와 동력이 강력하게 만들어졌다. 양봉수의 목숨을 내던진 투쟁과 이에 화답하는 조합원대중의 비공인파업 속에 담긴 진정성은 많은 조합원들이 활동가로 떨쳐 일어서 민주노조운동에 자기 삶을 바치게 했다. 노동조합 공식체계의 한계를 넘어서지 못하거나 집행부의 지침에 의존하는 수동적인 태도에서 벗어나 현장의 자발성에 입각해 아래로부터 의사결정하고 과감하게 행동하는 활동 풍토가 확산됐다. 양봉수는 현대자동차 민주노조의 심장이 됐다. 1995년 9월 19일 현대자동차노조에 민주 집행부가 다시 들어섰다.

     

    비슷한 시기 한국통신 노동자들의 투쟁이 전개됐다. 한국 최대 공기업이던 한국통신에는 조합원 5만 2천 명의 최대 노조가 있었다. 1994년 6월 한국통신노조에 민주 집행부가 들어섰다. 1995년 4월 2일, 한국통신노조는 ‘95 임단투 승리를 위한 한국통신 노동자 전진대회’를 개최했다. 5만의 조합원과 가족들이 모인 이날의 요구는 ‘임금 가이드라인 철폐, 통신 개방 반대, 재벌 특혜 민영화 반대’였다.

     

    한국통신노조가 파업을 예고하자 김영삼 정권은 선제공격에 나섰다. 5월 16일 한국통신노조 간부 64명 전원에 대해 중징계 및 사법처리 방침을 발표했다. 17일 노조는 ‘한국통신 성실교섭 촉구와 노조탄압 규탄대회’를 열고 64명의 노조간부 중징계가 결정되면 전면파업에 돌입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대통령 김영삼은 한국통신노조가 파업을 하면 국가 기간통신망이 마비될 것이라며 노조를 ‘국가전복세력’으로 직접 규정했다. 대통령의 발언과 함께 한국통신 노동자들의 투쟁이 전 사회적 문제로 떠올랐다.

     

    그러나 한국통신노조의 내부 동력은 정권의 가공할 탄압에 맞서 파업을 결행할 정도가 되지 못했다. 결국 22일 한국통신노조 간부들이 명동성당과 조계사에서 무기한 단식농성에 들어갔다. 정권은 6월 6일 공권력을 투입해 노조간부들을 강제 연행했다.

     

    1995년 11월 11일 민주노총 창립대의원대회가 열렸다. 같은 날 열린 전국노동자대회에서 민주노총 창립이 대중적으로 선포됐다. 민주노총 창립에는 862개 노조 41만 8천 1백 명의 조합원이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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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후주]

     

    [1] 이원보, 2013, 『한국노동운동사 100년의 기록』(개정증보판), 한국노동사회연구소, 311~312쪽.

    [2] 노동사회교육원, 2008, 『금속노동자를 위한 노동운동사』, 전국금속노동조합, 133쪽.

    [3] 이광일, 2008, 『좌파는 어떻게 좌파가 됐나』, 메이데이, 323~324쪽.

    [4] 이광일, 2008, 『좌파는 어떻게 좌파가 됐나』, 메이데이, 341~342쪽.

    [5] 전국노동조합협의회 백서 발간위원회, 2003, 『전노협백서 제4권 1991년 - 죽음으로 사수한다! 전노협』, 논장, 13~14쪽.

    [6] 김형기, 1992, 「진보적 노동조합주의 논쟁」, 『지역과 노동』 7월호, 25~26쪽.

    [7] 하나회는 박정희가 집권하고 있던 1970년대 초반 박정희에게 촉망받는 중견 장교였던 전두환과 노태우를 중심으로 결성된 군대 내 사조직으로서, 1979년 12·12 쿠데타와 1980년 5·17 쿠데타를 주도한 뒤 전두환·노태우 정권을 거치는 동안 정권과 군부의 요직을 대물림하면서 군사파시즘 세력의 중추로 기능했던 집단이었다.

    [8] 전노협의 핵심 기반인 마창노련에서 선도 사업장 역할을 했던 통일중공업노조 위원장이 1993년에 산업평화에 이바지했다는 명목으로 노동부장관상을 받은 것은 전노협 내부에 타협·개량주의 세력이 얼마나 심각하게 확대되었는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9] 1993년과 1994년 김영삼 정권은 경총과 한국노총의 임금인상 합의라는 형식으로 새로운 임금 억제 정책을 시도했다. 그러나 이것은 1994년에 오히려 노·경총 임금합의 분쇄와 한국노총 탈퇴 투쟁이 대대적으로 벌어지는 결과만을 초래했다. 노·경총 임금합의는 노태우 정권 시기에 임금가이드 라인, 총액임금제 등 정부가 직접 나섰던 임금 억제 정책이 사실상 실패했던 것을 감안한 새로운 시도였으나 역시 실패했다.

    [10] 노동자뉴스제작단, 2011, <한국노동운동사 100년의 기록>(영상) 3부.

    [11] 노동자뉴스제작단, 2011, <한국노동운동사 100년의 기록>(영상) 3부.

    [12] 노동자뉴스제작단, 2011, <한국노동운동사 100년의 기록>(영상) 3부.

    [13] 전국노동조합협의회 백서 발간위원회, 2003, 『전노협백서 제7권 1994년 - 최후의 승리는 우리 것』, 논장, 264쪽.

    [14] 전국노동조합협의회 백서 발간위원회, 2003, 『전노협백서 제7권 1994년 - 최후의 승리는 우리 것』, 논장, 280쪽.

    [15] 서영호·양봉수 열사회, 2025, 『현대차 열사·희생자 백서』, 양봉수 편.

    [16] 서영호·양봉수 열사회, 2025, 『현대차 열사·희생자 백서』, 양봉수 편.

    [17] 서영호·양봉수 열사회, 2025, 『현대차 열사·희생자 백서』, 양봉수 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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