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10월, 팔레스타인 가자지구 집단학살에 맞선 총파업과 항만 봉쇄로 이탈리아 전역이 멈춘 바로 그 달에, 이탈리아 최대의 에너지 자본 에니(Eni)는 팔레스타인 해역 가스전 탐사 컨소시엄에서 탈퇴하겠다고 이스라엘 에너지인프라부 석유국장에게 조용히 통보했다. 보도자료나 해명은 없었다. 이 사실은 2026년 3월 말에야 컨소시엄 파트너 라티오(Ratio Energies)의 투자자 공시를 통해 알려졌다. 서방의 메이저 에너지 기업이 팔레스타인 해역에서 물러난 첫 사례다. 에니는 집단학살과 아무 관련이 없다고 주장하지만, 이는 명백히 2년에 걸쳐 에니를 추격해 온 팔레스타인 인권 단체들과 이탈리아 노동자 민중의 성취다.
학살 3주차에 빼앗긴 바다
2022년 12월, 이스라엘 에너지부는 동지중해의 배타적경제수역 20개 광구를 4개 구역(E, B, G, I)으로 묶은 다음 제4차 해상 가스 탐사권 입찰을 개시했다. 낙찰 결과가 발표된 것은 2023년 10월 29일, 이스라엘이 가자지구 전면 공격을 개시한 지 3주째 되던 날이었다. 에니가 주도하는 컨소시엄은 레비아탄 가스전 서쪽의 6개 광구로 이루어진 G구역을 손에 넣었고, 에니가 운영권자로서 지분의 75%, 한국석유공사의 영국 자회사 다나 페트롤리엄(Dana Petroleum)이 15%, 이스라엘 기업 라티오가 10%를 나누어 가졌다. 이스라엘 에너지부 장관은 전쟁 중 면허 입찰을 두고 국제 메이저 에너지 자본이 이스라엘을 신뢰한다는 증거라며 학살을 투자 홍보의 기회로 삼기도 했다.
문제의 핵심은 G구역의 위치다. 팔레스타인 인권 단체들에 따르면 G구역 면적의 62%는 2019년 유엔해양법협약(UNCLOS)에 따른 팔레스타인의 해양 경계 안에 있다. 이스라엘은 UNCLOS에 가입하지 않고 팔레스타인을 국가로 인정하지도 않은 채, 폭격당하는 가자의 바다를 이탈리아·한국·이스라엘 자본에 나눠 준 것이다. 점령국 이스라엘이 피점령지 팔레스타인의 유한한 천연자원을 상업적 이익을 위해 처분하는 것은 헤이그 육전규칙이 금지하는 ‘약탈(pillage)’에 해당하며, 여기에 가담하는 기업 역시 국제법 위반의 공모자가 된다는 것이 팔레스타인 인권 단체들의 일관된 법적 판단이다.
법정 투쟁의 시작
2024년 2월 5일, 이스라엘 내 팔레스타인 인권 단체 아달라(Adalah)는 이스라엘 에너지부 장관과 법무부 장관에게 보낸 서한에서 G구역 탐사 면허 취소, 팔레스타인 해역이 포함된 모든 입찰 중단, 팔레스타인 해역 가스 자원에 대한 일체의 개발 행위 중지 등을 요구했다. 다음 날인 2월 6일에는 국제 로펌 폴리 호그(Foley Hoag)가 팔레스타인 인권단체 알하끄(Al-Haq)·알메잔(Al Mezan)·팔레스타인인권센터(PCHR)를 대리해 에니, 다나, 라티오 앞으로 발송한 공식 통지서에서, 팔레스타인 해역인 G구역에서의 어떤 활동이든 중대한 국제법 위반임을 경고하고 활동 중단을 요구했다. 2024년 7월 19일 국제사법재판소가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점령 자체를 불법으로 판단하고 각국과 기업에 점령을 공고히 하는 거래를 삼가라고 권고하면서 압박에 더 큰 무게가 실렸다.
이탈리아 정부는 자국 자본을 감쌌다. 2024년 9월 12일 안토니오 타야니 외교부 장관은 의회 질의 답변에서 에니의 입찰이 “규정을 준수한 것”이었다고 두둔했다. 이탈리아 정부는 경제재무부가 보유한 지분 2%와 재무부 산하 투자은행(CDP)이 보유한 지분 29.8%를 통해 에니를 통제한다. 에니의 팔레스타인해역 진출은 처음부터 멜로니 정부의 비호 아래 있었고, 에니를 겨눈 투쟁은 곧 이탈리아 정부를 향한 투쟁일 수밖에 없었다.
항만 노동자들의 국제 연대
법정 투쟁이 자본을 압박하는 동안, 거리와 항만에서는 이탈리아 노동자 민중이 학살의 물류를 직접 끊어 내는 투쟁을 벌였다. 그 선두에는 제노바의 자율항만노동자조합(CALP)이 있었다. 제노바 항구를 통해 매년 수천 톤의 무기가 이스라엘로 향하며, 이스라엘 해운사 ZIM뿐 아니라 이스라엘 하이파 직항로를 운행하는 세계 최대 해운사 MSC 역시 막대한 군수품을 운송하며 이스라엘의 전쟁 수행 능력을 뒷받침하고 있다는 사실은 이미 널리 알려져 있다.
이 투쟁은 처음부터 국경을 넘었다. 2025년 2월 28일 기층노조(USB) 항만 부문과 그리스 피레우스 항만노조의 주도로 유럽·북아프리카·서아시아 항만노조들의 회의가 열렸고, 이들은 곧 위력을 증명했다. 6월에는 마르세유 인근 포쉬르메르의 항만 노동자들이 ZIM의 선박에 하이파로 가는 기관총 부품과 포신 컨테이너를 선적하기를 거부했다. 그 배는 제노바로 향했지만, 제노바의 항만 노동자들도 무기를 싣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7월 말에는 피레우스 항만 노동자들이 무기 컨테이너 하역을 거부하고 그 정보를 이탈리아의 동지들에게 알렸으며, 세계 5위권의 선사 COSCO가 무기 컨테이너 하역을 포기하기에 이르렀다. CALP는 이것이 노동자들의 압박에 선사가 화물을 포기한 첫 사례이며 “위대한 승리”라고 선언했다.
“전부 봉쇄하라!” - 총파업으로 확대된 투쟁

2025년 9월 11일 USB는 CALP, 글로벌 수무드 선단 등과 함께 제노바에서 총회를 열어 9월 22일에 공공·민간 전 부문이 총파업에 나서기로 결의했다. 슬로건은 “전부 봉쇄하라(Blocchiamo tutto)”였다. 프란체스카 알바네제 유엔 팔레스타인 인권 특별보고관은 영상 메시지를 보내 항만노동자들에게 전적인 연대를 표하면서, 학살을 지탱하는 시스템을 봉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피레우스를 비롯한 각국 항만 노동자들이 동참 의사를 밝혔고, 마르세유·제노바·탕헤르·아테네 등지에서 무기 하역을 봉쇄해 온 유럽의 항만노조 대표들이 제노바에서 국제 회의를 소집했다. 9월 19일에는 이탈리아 최대 노총인 이탈리아노동총연맹(CGIL)이 전국의 조합원을 소집해 제노바에서 8시간 총파업을 벌였다.
9월 22일, 이탈리아가 멈췄다. 제노바에서는 알베르타치 항만 게이트가 봉쇄되었고, 밀라노·로마·토리노·볼로냐·리보르노 등 전국에서 학생 행진과 시위, 고속도로 점거가 이어졌으며, 철도·대중교통·학교가 마비되었다. 파업 전야에 USB는 이스라엘로 가는 군수품을 실을 것으로 의심되는 선박이 그날 제노바에 입항 예정이라는 사실을 폭로함으로써 봉쇄의 표적을 명시했다.
10월 1일, 이스라엘 해군이 공해상에서 글로벌 수무드 선단을 나포했다. 배에는 이탈리아 노동자와 노조 활동가들이 타고 있었다. 로마에서만 1만 명 이상이 즉각 거리로 쏟아져 나왔고, 로마·나폴리·파도바의 대학들이 점거되었으며, 리보르노에서는 노동자들이 이스라엘 선박을 돌려보냈다. 나포 직후 CGIL과 USB는 노동자의 안전에 중대한 위해가 가해졌을 때 사전 예고 없이 파업할 수 있도록 한 공공부문 파업규제법 조항(146/90 제2조 제7항)을 원용해 전 부문 총파업을 선포했고, 다른 기층노조들도 가세하면서 10월 3일은 이탈리아 노동운동 전체의 공동 전선이 됐다.
10월 3일 총파업은 이탈리아 현대사에서 손꼽히는 규모였다. 전국 100여 개 도시에서 집회와 행진이 벌어졌고, CGIL은 200만 명이 거리로 나왔다고 발표했다(내무부 집계 40~50만 명). 멜로니 총리는 총파업이 “연휴 즐기기”라고 조롱했고 살비니 부총리는 “불법 파업”이라며 위협했지만 기세는 꺾이지 않았다. USB가 제시한 파업의 요구 사항은 간단했다. 이탈리아 정부의 공모를 규탄하며 이스라엘과의 모든 경제적·군사적 협력을 끝내라는 것이었다. 바로 이 국면에 이르러 에니는 G구역 컨소시엄에서 탈퇴했다.
무엇이 에니를 물러서게 했는가
압박은 세 방향에서 동시에 이루어졌다. 헤이그 육전규칙상 ‘약탈’ 공모라는 위험 부담을 비롯한 법적 리스크, 국가를 최대 주주로 둔 기업으로서 정부를 직격한 총파업이 청구한 정치적 비용, 보이콧 운동과 언론을 통한 평판 하락이 그것이다. 팔레스타인 단체들과 이탈리아 활동가들은 에니의 철수가 이 같은 압박의 결과라 주장하고, 에니는 부인한다. 그러나 우리는 물어야 한다. 거리와 항만을 봉쇄한 수백만 노동자 민중의 투쟁이 없었다면 국가가 비호하는 에너지 자본을 고작 로펌의 통지서 몇 장으로 팔레스타인의 바다에서 밀어낼 수 있었겠는가.
이 투쟁이 에니 사업장 내부의 파업이 아니라 이탈리아 사회 전체를 관통한 정치 총파업이었다는 사실은 이 성취의 성격을 잘 보여 준다. 무기 선적을 거부한 항만 노동자들, 물류의 결절점을 봉쇄한 기층 노조들, 헌정 질서 방어를 명분으로 정치 파업의 권리를 행사한 노총들까지, 이탈리아 노동자 계급은 작업장의 경계를 넘어 제국주의 전쟁 경제 그 자체를 겨냥했고 국영 자본 에니의 후퇴는 이 전선에서 떨어진 전리품이다.
에니가 떠난 자리에 이재명 정부가 서 있다
에니가 떠났다고 약탈이 끝난 것은 아니다. 다나 페트롤리엄과 라티오는 컨소시엄에 잔류해 지분 구조를 재편하고 다나를 운영권자로 삼아 면허 절차를 마무리하려 하고 있다. 이스라엘을 빼면, 팔레스타인의 바다를 노리는 약탈 사업에 연루된 나라는 이제 대한민국이 유일하다. 다나는 한국석유공사가 지분 100%를 쥔 자회사이고, 한국석유공사는 국가가 소유하며 대통령이 사장을 임명하는 공기업이다. 이것은 일개 기업의 일탈이 아니라 이재명 정부의 사업이다.
이재명 정부는 말로는 국제법을 이야기한다. 2026년 5월 20일, 한국인 활동가가 탑승한 가자 구호 선박을 이스라엘군이 공해상에서 나포하자, 이재명 대통령은 국무회의에서 나포의 법적 근거를 추궁하고 가자 학살을 국제법상 불법 침략으로 규정하는가 하면 네타냐후에게 발부된 ICC 체포영장의 국내 집행 검토까지 지시했다. 지난 4월에는 각국의 주권과 보편적 인권의 존중, 침략 전쟁의 부인이 우리 헌법 정신이자 국제적 상식이라고 적었다. 옳은 말이다. 그렇다면 물어야 한다. 대통령 스스로 이스라엘의 영해가 아니라고 못 박은 바로 그 바다에서, 학살 국가가 발급한 약탈 면허의 운영권을 넘겨받으려는 것은 누구의 공기업인가.
행동은 말과 정반대다. 정부는 지금껏 한국석유공사에 철수를 명령하지 않았고, 이 사업이 대통령 자신의 외교 기조에 어긋나지 않는지 조사하라는 공개 요구에도 답하지 않고 있다. 외교부는 팔레스타인 정부가 수립된 지 30년이 넘도록 이스라엘의 합의 없이는 팔레스타인을 국가로 인정할 수 없다는 입장을 고수한다. 2025년 9월 이스라엘의 오랜 우방인 영국·프랑스·캐나다·오스트레일리아까지 팔레스타인을 승인하고 유엔 회원국 193개국 가운데 157개국이 승인을 마쳤을 때도, 한국은 미국·독일·이탈리아·일본과 나란히 승인 거부국으로 남았다.
한국의 노동자 민중은 이미 싸움을 시작했다. 2025년 11월 26일 울산 한국석유공사 본사 앞에서 민주노총 울산지역본부·기후정의동맹 등이 함께 연 ‘한국석유공사 규탄 국제행동의 날’에 이어, 2026년 5월 13일 울산에서는 60여 명이 모여 한국석유공사 본사 앞 기자회견과 항의 면담으로 컨소시엄 즉각 철수를 촉구했고, 서울·부산·대구·춘천·전주와 영국 스코틀랜드로 이어지는 동시다발 공동행동이 조직됐다. 투쟁의 요구는 이제 다나의 소유자, 이재명 정부를 정면으로 향한다. 한국석유공사에 컨소시엄 즉각 철수를 명령하라. 이탈리아의 노동자들이 자국 정부에 제시했던 요구 그대로, 이스라엘과의 모든 경제적·군사적 협력을 중단하라. 팔레스타인을 국가로 승인하라.
에니의 후퇴는 끝이 아니다. 초국적 에너지 자본도, 그것을 비호하는 제국주의 국가도, 조직된 노동자 민중의 투쟁과 국경을 넘는 연대 앞에서는 계산을 바꾼다는 증명이다. 제국주의 질서에 편승해 학살 면허를 ‘국익’으로 계산하는 정부라면, 그 계산을 바꾸게 만드는 것 역시 조직된 힘뿐이다. 이탈리아의 항만 노동자들이 연 길을 따라, 한국의 노동자 민중이 이재명 정부의 학살 공모를 실력으로 끝장낼 차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