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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노운사 연재 7회] 2부 전진과 격돌 (1988-1998) [1] 1988~89년 민주노조운동의 폭발적 성장

기사입력 2026.03.02 16:52 | 조회 3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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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7년 대투쟁은 석 달 만에 사그라졌지만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1988~89년 노동자들은 폭발적인 투쟁을 이어가며, 계급의식과 단결을 발전시켜 나갔다. 민주노조가 양적으로 크게 확대됐을 뿐만 아니라, 지역별·업종별 연합조직 건설을 통해 질적으로도 크게 발전했다. 노동자들은 특히 정권과 자본의 탄압에 맞서는 과정에서 지역 차원의 연대투쟁과 정치투쟁을 강력하게 발전시켜 나갔다.

     

    (사진: 1988년 11월 13일 전국노동자대회. 한국전쟁 이후 처음으로 열린 전국노동자대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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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부 전진과 격돌 (1988-1998)

    [시대배경] 군사파시즘에서 신자유주의 질서로
    [1] 1988~89년 민주노조운동의 폭발적 성장
    [2] 1990~91년 전노협 건설과 민주주의 투쟁
    [3] 민주노총으로 가는 길
    [4] 1996~98년 노동법 대격돌

     

    1) 지역별·업종별 민주노조 연합조직 건설

     

    1987년 노동자대투쟁이 수그러든 이후에도 한동안 노동조합과 조합원 수가 크게 늘어났다. 1987년 6월 2,742개이던 노동조합 수는 1987년 말 4,104개, 1989년 말 7,861개까지 늘어났다. 1987년 6월 105만 명이던 조합원 수는 1987년 말 127만 명, 1989년 말 193만 명(조직률 19.8%)까지 늘어났다.[1] 특히 1987년 노동자대투쟁 동안에 상대적으로 대공장에 노동조합 설립이 집중됐던 것과 달리, 1988~89년 동안에는 수많은 중소 사업장에서 노동조합 설립이 봇물처럼 이어졌다.[2]

     

    1987년 6월 이후 1989년 말까지 5천여 개의 노동조합과 88만 명의 조합원이 추가됐지만, 그 모두가 민주노조로 나아가지는 못했다. 1989년 말을 기준으로 민주노조운동은 제조업과 서비스업·사무전문직을 망라할 때 대략 1천 개의 노동조합과 40만 명의 조합원을 포괄하는 것으로 인식됐다.

     

    1987년 노동자대투쟁 이후 민주노조들 사이에 형성된 유대는 1988~89년을 거치면서 지역별 또는 업종별로 민주노조들의 연합조직을 건설하는 흐름으로 이어졌다.

     

    제조업 노동자들을 중심으로 전투적인 지역연대 투쟁을 주도한 민주노조들은 지역별 연합조직으로 결집했다. 1987년 12월 14일 ‘마산창원노동조합총연합’(마창노련)을 시작으로 진주, 서울, 인천, 성남, 전북, 대구, 경기남부, 광주, 부천, 부산·양산, 대전, 동광양, 구미, 울산, 거제 등 모두 16개 지역에서 ‘지역별노동조합협의회’(지노협) 형태의 민주노조 연합조직이 건설됐다. 각 지노협에서는 정권과 자본의 탄압에 맞선 직접적인 연대투쟁이 조직의 결성과 운영에서 중심 역할을 했다.

     

    지노협

    설립일

    마산창원노동조합총연합(마창노련)

    1987년 12월 14일

    진주지역민주노동조합연합(진주노련)

    1988년 4월 16일

    서울지역노동조합협의회(서노협)

    1988년 5월 29일

    인천지역노동조합협의회(인노협)

    1988년 6월 18일

    성남지구노동조합총연합(성남노련)

    1988년 6월 25일

    전라북도노동조합연합회(전북노련)

    1988년 8월 21일

    대구경북지역노동조합연합(대경노련)

    1988년 12월 7일

    경기남부지역노동조합연합(경기노련)

    1988년 12월 28일

    광주지역노동조합협의회(광노협)

    1989년 3월 5일

    부천지역노동조합협의회(부노협)

    1989년 7월 22일

    부산지역노동조합총연합(부산노련)

    1989년 9월 30일

    대전지역민주노조협의회 준비위원회

    1989년 말

    거제지역노조탄압 공동대책위원회

     

    구미지역노동조합대표자회의

     

    동광양시민주노조협의회

     

    울산지역노동조합협의회 준비위원회

     

    실질적 상급단체의 필요성을 인식한 ‘청년노동자회’ 및 7·8월 대투쟁에서 급부상한 몇몇 노조대표자들은 1987년 11월 18일 ‘마창노련 추진위원회’를 구성하고, 민주적 조합운영과 조합활동을 위한 지역 연대조직의 기초를 다져나갔다. …

    추진과정에는 경노협과 같은 노동운동단체나 지역활동가, 해고노동자 등 선진노동자 역량이 알게 모르게 영향을 주었던 것도 사실이었다. 실제 마창노련이 다른 지역보다 빨리 지역연대조직을 결성할 수 있었던 특수성 혹은 유리한 점이라고 한다면, 무엇보다 결성주체들이 대중적 토대를 갖고 있었다는 점과 노동운동 활동가와 연결될 수 있었던 점일 것이다. …

    {1988년 초} 마창노련은 첫 대중 연대사업으로 임투 공동교육을 계획하였다. 하지만 마창노련은 사무실도 없고 상근자도 없는 달랑 이름 하나뿐인 단체였다. … 마창노련은 가입비가 없었기 때문에 위원장들이 각자의 호주머니를 털어 겨우 운영비나 경비를 충당할 정도였다. 이런 악조건 속에서도 마창노련 초기 위원장들은 자발적, 적극적으로 나서 교육을 준비하였다. …

    이러한 교육은 마창노련만이 아니라 마창지역 각종 단체들(경남노동자협의회, 가톨릭노동문제상담소, YMCA, 성공회, 남도민족교육원, JOC, 배움의 집 등)에서도 담당하였고, 어디나 신청자가 쇄도하여 선착순으로 짤라야 할 정도로 호응이 높았다. 단체에서의 노동자교육은 단지 임금교섭에 관한 지식이나 실무역량뿐만 아니라 노동자들의 의식향상에도 많은 공헌을 하였다. …

    공동임투교육이 열화와 같은 성원으로 끝나자 조합원들에게도 광범위한 교육이 실시되어야겠다는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이리하여 1988년 2월 11일 <마창노련신문>이 창간되어 창간호 2만 부가 발행되었다.

    노동자의 투쟁소식을 활자로 전달하는 신문이 거의 없었던 당시, <마창노련신문>은 단연 관심과 주목의 대상이 되었다. 노동자들에게는 가뭄의 단비였고, 특히 마창노련 조합원들에게는 ‘우리 신문’으로서의 자랑과 긍지 그리고 각별한 애정의 대상이었다. …

    마창노련 신문이 발행되자 각 노조에서도 교육지, 노보 및 소식지, 대자보, 속보, 그밖에 ‘부서지’와 ‘현장지’ 등을 잇달아 경쟁적으로 발행하고, 긴급 사안에 따른 유인물도 자체적으로 제작 배포하는 등 교육선전 활동이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이처럼 각 노조마다 경쟁적으로 내용의 질적·양적 수준을 높이기 위한 욕구가 높아짐에 따라 마창노련 편집교류회와 교육선전국 활동도 활성화되어 교육선전과 편집에 관한 정보와 지식을 교환하고 의식 향상을 위한 자체 교육이 날로 확대되었다.[3]

    1989년 8월 마창노련은 39개 노조, 3만 2천 명의 조합원을 포괄하는 조직으로 급성장하였다. … 마창지역 전체 노조의 12.5%에 불과하지만 조합원 수로는 마창지역 전체 조합원 중 약 1/3을 결집하고 있는 높은 수치였다. 나아가 공단에서는 조직노동자의 40% 이상을 포괄하고 있어 마창노련의 조직력은 타 지역 민주노조협의회에 비해 월등히 높았다. 또한 마창노련은 단위조합당 평균 조합원 수 약 800명으로 대공장이 조직의 기본축이었다. … 조합원 1천 명 이상인 노조도 11개(창원공단 4개)에 달했다. 여기에 마산과 창원 두 공단이 산업적 동일성이 뚜렷한 특성을 갖고 있어 공단 내의 광범한 중소부품업체를 하청계열화하고 있는 점을 감안하면 마창노련 가입 노조의 영향력은 엄청나게 컸다.

    마창노련은 마창공투본을 결성하면서 미가입 사업장들까지 견인하여 활동에 참여하게 하였다. 그 결과 공동 임투 기간 동안 공투본 소속 조합원들은 마창투본의 방침을 충실하게 이행하는 경향을 보였고 급기야 마창노련 가입 여부가 노조의 성격을 민주냐 어용이냐로 판가름하는 기준이 되어갔다. 이는 마창노련이 명실상부한 사실상의 마창지역 노동자의 상급단체로 자리를 굳힌 것을 의미하였다.

    이렇듯 창립 이후 2년 사이에 마창노련의 조직확대 기반은 엄청나게 넓어졌다. 이에 따라 조합원들의 연대의식과 투쟁의식도 몰라보게 급성장하였다. 이는 마창공투본 결성으로 선진사업장과 그렇지 못한 사업장 간의 활발한 교류가 이루어지고, 잦은 공동집회와 공동투쟁을 통해 각 노조와 간부들 간의 의식의 편차가 줄고 기본적인 수준에서 공동행동의 근거를 마련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연대활동 자체가 노조의 일상활동의 한 부분으로 자리잡게 되면서 노조간부만이 아니라 일반조합원들까지도 기업별 조합주의를 뛰어넘는 연대의식이 자연스럽게 몸에 배게 되었다. 이로 인해 조합원 중심의 조직력, 투쟁력이 강화되었음은 물론이다.

    또한 공권력을 상대로 한 직접적인 대중투쟁 과정에서 3자 개입 개념이 사실상 무력화되고, ‘공안합수부 해체’나 ‘노태우정권 퇴진’ 요구 등 정치권력의 계급적 속성을 인식하게 되자 조합원들의 정치의식 변화 역시 뚜렷하게 드러났다.[4]

    ‘서울지역노동조합협의회’(서노협)는 1988년 5월 29일 서울지역의 45개 민주노조 1만 8,000여 명의 조직으로 출범하였다. 서노협은 몇몇 선진 운동가들의 논의를 통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맥스테크사 위장폐업 철회투쟁, 청계피복노조, 인쇄노조, 제화노조 등 일련의 지역노조 합법성 쟁취투쟁, 그리고 현대사회연구소 연구원 부당해고 철회에 맞선 지역 연대투쟁을 거치면서 탄생한, 그야말로 ‘투쟁을 통한 대중조직 건설’의 원칙을 성공적으로 관철시킨 조직이었다.[5]

    사무전문직과 서비스업을 기반으로 한 민주노조들은 대체로 업종별 연합조직으로 결집했다. 1987년 11월 27일 ‘전국사무금융노동조합연맹’을 시작으로 출판, 화물, 언론, 병원, 시설관리, 지역의료보험, 교직원, 전문기술, 건설, 대학교직원 등 모두 11개 업종에서 ‘업종별노동조합협의회’(업종협) 형태의 민주노조 연합조직이 건설됐다. 각 업종협에서는 동일 직종의 유대감을 토대로 한 공동의 사업과제 모색이 중심 역할을 했다.

     

    업종협

    설립일

    전국사무금융노동조합연맹

    1987년 11월 27일

    병원노동조합협의회(병원노련)

    1987년 12월 12일

    민주출판노동조합협의회(민출노협)

    1988년 1월 19일

    연구전문기술노동조합협의회

    1988년 7월 16일

    전국언론노동조합연맹(언론노련)

    1988년 11월 26일

    전국건설노동조합협의회

    1988년 12월 10일

    외국인기업노동조합협의회

    1988년 12월 11일

    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

    1989년 5월 28일

    전국대학교직원노동조합협의회

     

    전국화물운송노동조합협의회

     

    시설관리노동조합협의회

     

    1987년 7·8월 이후 불과 1년여 사이에 결성된 180여 개의 병원노조는 신규노조로서의 어려움과 취약성을 공동으로 해결하기 위해 1987년 12월 12일 ‘병원노동조합협의회’(병원노협)를 결성했다. 병원노협은 단위노조 간의 정보와 경험의 교류, 지원활동을 추진하며 전국에 지역협의회를 조직하여 전국적 조직체로 결집되었다. 그러나 탄압에 대한 공동대처와 위장 휴·폐업, 부당노동행위에 대한 연대의 필요성이 높아지면서 협의회에 대한 요구는 커지는 반면 공식적 상급단체가 아닌 점, 단위노조 지원에 대해 외부불순세력 혹은 제3자 개입이라는 탄압을 받고 있었다는 점, 단위노조 간부가 병원노협 임원을 겸임함으로써 집행력이 제대로 확보되지 못한다는 점, 재정적으로 병원노협 분담금으로는 활동이 어려운 점을 들어 ‘병원노동조합연맹’(병원노련)을 건설하게 되었다.[6]

    1987년에 3,749건을 기록한 파업 건수는 1988년에 1,873건, 1989년에 1,616건으로 거센 흐름을 이어갔다. 힘차게 지속된 노동자들의 파업은 대부분 1987년 대투쟁 때처럼 전투적인 공장점거로 시작됐고, 많은 사업장에서 파업의 시작부터 끝까지 총회 민주주의가 실질적으로 작동했다.

    자본가들이 노동조합 지도자를 매수해 직권조인으로 파업을 종결시키려고 자주 시도했는데, 많은 경우 노동자들이 매수된 지도자를 불신임하고 새로운 지도부를 세워 파업을 이어갔고 종종 결국 승리하기도 했다.

     

    또한 자본가들이 구사대와 전투경찰을 동원해 파업을 침탈하고 탄압하는 데 대해, 노동자들은 정당방위대·선봉대 등을 조직하여 맞섰고 나아가 사업장의 경계를 넘어선 연대투쟁을 활발하게 발전시켜 나갔다.

     

    이 시기 가장 대표적인 노동자 투쟁은 1988~89년 현대중공업 128일 파업이었으며, 여기에 현대자동차를 비롯한 울산 지역 노동자들이 적극적으로 연대했다. 마산창원 지역 노동자들이 1988~89년에 벌인 몇 차례의 지역연대 총파업도 두드러진 투쟁이었다. 그 밖에도 부천, 서울, 인천, 경기남부 등에서도 지역 총파업이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2) 1988년 11월 최초의 전국노동자대회

     

    1988년 10월 6일 전국의 민주노조들과 노동단체들은 노동악법 철폐가 노동자계급의 핵심적인 당면 투쟁과제임을 공유하고 ‘전국노동법개정투쟁본부’를 결성했다.

    ‘전국노동법개정투쟁본부’의 결성으로 박차를 가하기 시작한 노동법개정 투쟁의 열기는 드디어 10월 9일 전국의 3대 명산을 노동악법 철폐의 함성으로 뒤덮으며 11월 13일 전국 노동자의 총궐기를 예고하였다. 전국의 1만여 노동형제들이 북한산, 화왕산, 대둔산으로 총집결하여 노동자를 억압하는 현행 노동악법을 완전 철폐하여 노동해방의 그날을 앞당길 것과 이를 위해 전국적인 노동법개정 서명운동에 돌입할 것, 11월 13일 여의도로 진군하여 노동악법을 옹호하는 망국 민정당과 전국경제인연합을 규탄할 것을 결의하였다.

    이어 각 지역에서는 웅변대회, 노래대회 등 다양한 행사로 노동법개정의 열기를 높여나갔으며, 이런 지역단위 활동의 성과를 한데 모아 10월 29~30일 양일에 걸쳐 서울, 인천, 광주 등 전국 6개 지역 5,000여 노동형제들이 노동악법 개정을 요구하며 가두시위 등 과감한 투쟁을 전개하였다.

    한편, 10월 9일 이후 전국적으로 동시에 진행된 노동법개정 서명운동은 서명 개시 불과 한 달 만에 10만 명을 돌파하는 놀라운 성과를 보여주었다. 특히 11월 들어 시작된 가두서명은 전두환·이순자 구속처벌을 위한 서명운동과 결합되면서 폭발적인 대중의 지지를 받아 서울에서만 5일간 14,000여 명의 서명을 받아내는 성과를 이룩했다. 이러한 대중투쟁의 활성화에 힘입어 서울, 인천 등의 의장단은 11월 2~4일 간에 야3당 당사를 순회하며 야3당이 노동법개정 투쟁에 적극 동참해 줄 것을 요구하는 단식농성 투쟁을 벌였으며, 이러한 의장단의 헌신적인 투쟁에 대해 서노협 소속 노동자 2,000여 명이 국회의사당으로 집결, 노동법 개정을 요구하며 야3당의 기회주의적 작태를 규탄함으로써 11월 13일 전국 노동자들의 총투쟁을 향한 디딤돌 역할을 해냈다.[7]

    1988년 11월 13일에는 ‘전태일 열사 정신계승 및 노동법개정 전국노동자대회’가 전국에서 결집한 5만 노동자의 참여 속에 서울에서 열렸다. 한국전쟁 이후 최초의 전국노동자대회였으며, 지금까지 매년 11월 지속되고 있는 전국노동자대회의 출발점이었다.

     

    대회에 참가한 노동자들은 “이렇게 전국의 노동 형제들이 한자리에 모일 수 있었다는 것은 크나 큰 역사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인식했으며, “여기에 있는 우리 노동 형제뿐만 아니라 천만 노동 형제들의 가슴 속에 우리 전태일 선배님은 살아오고”[8] 있다면서 스스로를 전태일의 후예로 규정했다.

    11월 13일 ‘전태일 열사 정신계승, 노동악법 개정 전국노동자대회’는 11월 12일 밤 연세대에서 전야제가 개최되면서 시작되었다. 저녁 8시에는 ‘전태일 노동상’ 시상식이 열려, 수상자인 권용목을 대신해 권처흥 아버님이 수상하였다. 밤 11시에는 조합원 2,000여 명이 참여한 가운데 ‘전태일 열사 정신계승, 노동악법 개정 전국노동자웅변대회’가 개최되었다. 서울, 인천, 부산, 울산, 부천, 전북 등 전국에서 선발된 9명의 연사가 참여한 이 대회에서는 인천지역의 허재호(인천 일용공노조 소속)가 1등인 노동해방상을 수상하였다.

    한편 밤 11시에는 전국노동조합 대표자회의가 개최되어 전국 100여 곳의 단위사업장 위원장들과 20여 명의 노동운동단체 대표가 참여하여 11월 13일 대회전술과 투쟁방침을 확정지었으며, 11월 13일 새벽 2시에는 선봉대 발대식이 진행되었다. 또한 지방에서 상경한 대오가 계속해서 도착했는데, 새벽 3시경에는 마창지역 노동자들 800여 명이, 다음 날 아침 7시경에는 현대중공업 조합원 600여 명 등 각지에서 연세대로 속속 집결하였다. …

    본 대회에 앞서 오전 10시에는 ‘노조탄압분쇄 전국노동자대회’가 사전 결의대회로 연세대 민주광장에서 5,000여 명의 조합원이 참여한 가운데 개최되었다.

    오후 1시부터 시작된 본 대회 입장식은 한 시간 이상 소요되었으며 연세대 노천극장을 완전히 메웠다. 4만 명의 조합원들은 일사불란하게 “노동악법 철폐하여 노동해방 앞당기자” 등의 구호를 외치며 2시간에 걸친 집회를 마쳤다. 또한 집회를 마친 후, 녹십자병원을 비롯한 ‘위장폐업분쇄 공동투쟁위원회’ 소속 노동자들이 ‘노동해방’이라는 혈서를 쓰고, 그 혈서를 앞에 들고 여의도를 향해 진군하기 시작했다. 오후 3시 30분부터 시작된 행진은 “악법철폐”, “민주쟁취”, “노동운동 탄압하는 군부독재 끝장내자”, “구속 전두환, 퇴진 노태우”, “해체 전경련, 타도 민정당”, “악법철폐, 노동해방” 등의 구호를 외치며 여의도 국회의사당까지 2시간 동안 계속되었으며, 오후 6시 국회의사당 앞에서 열린 ‘망국 민정당 규탄 및 노동악법 개정 촉구대회’에는 대오가 더욱 불어나 대략 5만여 명이 참가하였다.

    오후 8시에는 전경련 앞에서 각 대오별로 ‘노동악법 개정 반대하는 독점재벌 규탄대회’가 개최되었고, 귀가하던 노동자들에 대한 백골단의 폭행에 맞서 영등포역 앞에서 가두투쟁이 전개되었다.[9]

    일찍이 그 누가 노동자들의 이 엄청난 힘을 상상이나 했겠는가? 보라, 저 끝없이 출렁이는 노동자의 물결을! …

    전태일 열사의 어머니 이소선 여사의 말씀은 노동자들이 나아갈 길을 밝혀주는 것이었다. “인간답게 살고 싶다! 노동3권 보장하라! 한다고 누가 보장해 줍니까? 야당이 노동3권 보장하지 못해요. 너와 내가 하나가 되어 힘을 가지고 있으면 보장해 달라고 부르짖지 않아도 자연히 이루어진다고. 우리가 모든 것을 우리 힘으로 해야 된다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진짜 위대한 노동자인 것입니다.” …

    연세대 노천극장은 발 디딜 틈이 없었다. 감격! 5만여 노동자들은 서로 부둥켜안은 어깨들에서 자신의 힘을 느꼈다. 민중의례와 대회 경과보고, 전국교사협의회 투쟁보고, 투쟁선언, 지지연설에 이어 선봉대 결의로 이어지는 대회 내내 노동자들은 목이 터져라 ‘계승하자 열사정신! 철폐하자 노동악법!’, ‘노동운동 탄압하는 군부독재 타도하자!’, ‘열사정신 계승하여 노동해방 쟁취하자!’를 외쳐댔다. 두 팔을 치켜 올리고 목이 터져라 부르는 노래, 노동자가 부르는 노래, 노동노래를 처음으로 대중적인 모임에서 부르게 된 것이다. ‘전태일 추모가’, ‘파업가’, ‘동지가’, ‘광주출정가’의 울림은 어느 때보다도 처절하고 힘찼다.

    선봉대 선서 후 선봉대원들과 인천 세창물산 노동자들이 나와서 흰 광목천에 ‘노동해방’ 혈서를 써내려 갔다. 그 숙연했던 분위기, 피로 쓴 ‘노동해방’을 단상 앞에 들고 다함께 노동해방을 외쳤다. 노동자의 단결, 연대, 투쟁. 바로 이것이 노동해방이 아니겠는가? 드디어 행진을 시작했다.[10]

    노동자들은 이날 발표한 투쟁 결의문을 통해 “지난해 7·8·9월 대투쟁 이후 노동자들의 힘에 놀란 독재 정권과 독점 자본의 무자비한 탄압에도 불구하고 전국 각지에서 5백여 개의 민주노조가 건설돼 단위 사업장을 뛰어넘는 강고한 연대가 구축되었다”고 밝히고, “여기 모인 4만여 노동자들은 노동악법을 기필코 개정하고 나아가 모든 노동탄압의 근원인 독재 정권을 타도하라는 1천만 노동자의 준엄한 명령을 받은 선봉으로서 독점재벌, 독재정권과의 투쟁을 가열차게 전개, 기필코 노동해방을 쟁취하고야 말겠다”고 선언하였다.

     

    수만 명의 무장병력으로 연세대를 에워싸고 행진대열이 신촌 로타리에 이르렀을 때 행진 선두를 차단하려고도 했던 경찰은 노동자·시민들의 비장한 분위기와 위세에 눌려 곧바로 길을 열어주었으며, 신촌 로타리에 운집해 있던 시민들은 끝없이 이어지는 행진 대열을 향해 박수와 환호를 보내면서 합세, 선두가 서강대 앞을 지날 때는 행렬이 5만여 명으로 불어났다.[11]

    연세대 본관 앞에서는 밤 11시부터 전야제가 시작되어 노래와 율동이 공연되었다. 그러나 13일 새벽 2시경에서야 연세대에 도착한 마창 노동자들은 애석하게도 공연을 관람하지 못한 채 내일의 집회를 위해 잠을 청해야만 했다.

    연세대는 전국에서 모인 노동자들로 다리 뻗을 공간조차 없을 만큼 초만원이었다. “앉으면 침대요, 누우면 행복이라. 천장이 이불이요, 딱딱한 의자도 탁자도 모두가 잠자리다. 싫은 기색 하나 없이 새우잠을 잔다. 한순간 고통을 영원한 소망의 이불로 감싸고 떠오를 노동해방, 사람 사는 세상을 꿈꾸며 희망에 부풀어 새우잠을 잔다.”(창원 현대정공노조 김종복 홍보부장의 전국노동자대회 참관기)

    새벽 6시에 일어난 마창 노동자들은 일제히 ‘노동악법 철폐’ 머리띠를 두른 뒤 아침 9시부터 구보행진으로 투쟁의 결의를 다졌다. 그리고 마창노련 깃발을 앞세우고 오전 10시부터 연세대 민주광장에서 열린 ‘노조탄압분쇄 전국노동자대회’에 참가하였다. 5천여 명의 조합원들은 어깨를 마주 걸고 주먹을 불끈 쥐면서 힘차게 구호를 외쳤다. …

    노천극장에는 전국에서 4만 명이 넘는 노동자들이 빽빽하게 들어찼다. 한마디로 감격 그 자체였다. … 오후 1시부터 시작된 본대회 입장식은 한 시간 이상이나 걸렸다. 얼굴은 상기되었고 웃음이 가득 번졌다. 깃발이 등장할 때마다 박수가 요란하게 울렸다. “처음 노천극장에 입장할 때 마창노련의 파란 깃발이 맨 앞에 들어가는 걸 보니까 괜히 눈물이 났다. 그때처럼 우리의 깃발이 자랑스럽고 감격스러운 적이 없었다. 그 깃발 아래 머리띠를 매고 입장하는 얼굴들 모두 흥분으로 상기되어 있었다. 순간적으로 머릿속에는 87년 당시 구사대를 물리치고 얼싸안고 울었던 기억이 되살아났다. 그러면서 아 이것이 동지구나 하는 걸 새삼 깨달았다.”

    울긋불긋한 깃발이 나부끼는 가운데, 강철같은 노동자 대오의 위용이 역사 앞에 확실하게 그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이었다.

    이흥석 전국노동법개정투쟁본부 위원장(마창노련 의장)의 추도사가 낭독되는 동안 장내는 숙연한 분위기였고, “전태일 열사의 뜻을 이어받아 2천5백만 우리 노동자와 가족들의 힘으로 노동악법을 뜯어고쳐 노동해방을 기필코 쟁취할 것”을 전국 노동자들 앞에 선언할 때는 뜨거운 박수갈채가 쏟아졌다.

    500여 명의 노동자 선봉대의 출정 선서식이 끝나자 갑자기 40여 명의 노동자들이 연단 위로 뛰어나왔다. 그들은 손가락을 깨물어 혈서를 쓰기 시작했다. 장내는 숨소리도 멈춘 듯 긴장감이 감돌았다. 하얀 광목 위로 붉은 핏방울이 떨어지면서 ‘노·동·해·방’ 네 글자가 선명하게 찍혀 나갔다.

    혈서 쓰기를 마지막으로 대회를 마친 노동자들은 “타도 민정당! 해체 전경련!”, “전두환·이순자 구속!”, “노동악법 철폐!” 등의 구호를 외치며 대열을 가다듬었다. …

    3시 30분경부터 여의도 국회의사당까지의 가두행진이 시작되었다. 행진의 맨 선두에는 붉은 피가 선명하게 찍힌 혈서 깃발을 가슴에 안은 투쟁본부 의장단이 앞장섰다. 그리고 이어서 “노동3권 쟁취하여 노동해방 앞당기자”, “노동악법 개정은 노동자의 힘으로” 등의 현수막과 만장을 든 500여 선봉대가 그 뒤를 따랐다.

    1천여 명의 마창 노동자들은 21개 본대열의 최선두에 서서 마창노련 깃발, 단위노조 깃발, 현수막, 만장 등을 높이 치켜들고 연세대 정문을 향해 진군하였다.

    차도에 나선 노동자들은 “노동악법 철폐”, “노동3권 쟁취”, “해체 전경련, 타도 민정당”, “구속 전두환, 처단 노태우” 등을 외치며 행진하였다. 서강대 앞을 지나 공덕동 로터리와 마포대교를 통과하여 여의도 국회의사당까지 진군하는 데만 2시간이 걸렸다. 연도에 늘어선 시민들은 시위대가 나누어준 선전물을 받아들고, 노동자 대오의 질서정연한 모습에 뜨거운 박수와 환호를 보내주었다.

    연세대 정문을 통과할 때나 국회의사당 정문 앞에서나 마창 노동자들은 대열의 선두에서 저지하는 전투경찰에 맞서 몸싸움을 벌이기도 했다.

    당초 이날 행진을 봉쇄하려던 당국은 전국 노동자들의 엄청난 위력에 놀라 순순히 길을 열어주지 않을 수 없었다. 경찰과 백골단은 시종일관 불안한 기색을 보이며 ‘가재걸음’으로 노동자들의 긴 대열을 뒤따라오다 몇 차례 얻어맞기도 하였다. …

    시민들이 합세하여 5만여 명으로 불어난 강철 노동자 대오는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피곤한 기색 없이 오후 6시경 노동자 대오는 국회의사당 앞에 집결하여 ‘망국 민정당 규탄 및 노동악법 개정 촉구대회’를 거행하였다.

    부산 고려피혁 김준환 위원장은 오늘의 전국노동자대회는 “그동안 죽어가고 구속되고 해고된 선배 동지들이 투쟁한 결과”라고 말해 숙연한 감동을 자아냈고, 양제복 대구 대동공업 위원장은 “이번에 노동법이 개정되지 않으면 국회의원들을 쓸어버리고 우리가 국회에 들어가 노동법을 통과시키자”고 말해 여의도가 흔들릴 정도의 박수와 환호를 받았다.

    이어서 서노협 단병호 의장대행은 “오늘의 집회가 노동해방의 시금석이 될 것이며, 오늘의 집회에도 불구하고 민정당과 야권3당이 우리의 요구를 무시한다면 여당도 야당도 살아남지 못할 것”이라면서 “노동자를 무시하고 천대하고 핍박하는 그 어떠한 세력과도 싸워나가자”는 굳은 결의를 밝혀 열띤 환호를 받았다.

    “야권3당은 개정시안을 타협 없이 관철시킬 것”을 촉구하는 투쟁본부의 야권3당에게 보내는 공개서한이 채택된 뒤 집회는 끝났다. 그러나 지방 노동자들이 귀향을 서두르는 가운데, 7시 30분 전경련회관 앞에서는 “노동악법 옹호하는 독점재벌 규탄대회”가 열려, 권처흥(권용목 현대엔진 위원장의 부친)의 독점재벌 규탄연설이 즉석에서 이어졌다.

    한편 귀가하던 노동자들을 폭행하는 백골단에 맞서 성난 노동자와 학생들은 영등포역 앞에서 격렬한 가두투쟁을 전개하기도 했다.[12]

    현대중공업 민주파들에 있어서 11월 13일 노동법개정 전국노동자대회는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 11월 13일 대회에 452명의 현대중공업 노동자들이 집회에 참여, 그 조직성과 규율성으로 전국의 노동자들에게 깊은 감명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현대중공업 노동자들 자신도 집회에 모인 3만여 노동자들로부터 단결의 위력, 노동자의 전국적 연대에 대한 자각, 노동법개정의 필요성에 대한 자각을 하여 사업장 내에 보고대회를 사업부별로 개최하고 12월 15일에는 현대중공업노조 주최로 태화강 고수부지에서 ‘노동법개정 울산지역 집회’를 개최하기도 했다.[13]

    1988년 4월 총선으로 등장한 여소야대 국회는 1988년 하반기 노동자들의 노동법 개정투쟁 압력을 반영하여 1988년 12월 노동관계법을 개정했다. 6급 이하 공무원의 단결권·단체교섭권을 보장하는 ‘노동조합법 개정안’, 방위산업체 쟁의행위를 공익사업 수준으로 허용하는 ‘노동쟁의조정법 개정안’, 15인 이상에서 5인 이상 사업장으로 근로기준법 적용범위 확대, 부당해고 등에 대한 노동위원회 구제제도 신설, 기준 근로시간을 48시간에서 44시간으로 단축, 연차유급일수 확대 등을 담은 ‘근로기준법 개정안’이 국회를 통과했다. 그러나 1989년 3월 노태우 정권이 노동조합법과 노동쟁의조정법에 대해서는 거부권을 행사하여 폐기되고, 근로기준법만 개정됐다.

     

    한편, 지역별·업종별로 결집한 민주노조들은 11월 13일 전국노동자대회를 계기로 민주노조운동의 전국적 총결집을 향해 나아갔다. 1988년 12월 22일 지역별·업종별 연합조직들이 결집한 ‘지역·업종별 노동조합 전국회의’가 결성됐다.

    그동안 노동조합을 비롯한 노동자 조직의 전국적 결속에 대한 주장은 80년초의 ‘전민노련’ 사건에서부터 서·인노의 ‘전노’ 주장에 이르기까지 나름대로의 강조점을 달리하고 상이한 포괄범위를 가지면서 꾸준히 전개되어 왔다. 하지만 이러한 주장과 시도들은 민주노조의 건설이 허용되지 않았던 당시의 현실 속에서 의도했던 결과를 낳지 못한 채 허망하게 끝나버리고 말았다.

    하지만 87년 7, 8, 9월 이후의 가열찬 대중투쟁과 그 결산으로 이루어진 9개 지역노조협의회와 8개 업종별협의회는 ‘전노협’ 건설의 실질적 토대를 마련해 주었고, 87년 이후의 노동운동탄압분쇄투쟁, 노동법개정투쟁 등의 공동투쟁을 수행해 오면서 연대의 폭과 깊이를 더해갔다. 따라서 88년 하반기에 제기된 ‘전노협’ 논의는 노동대중들의 투쟁과정에서 제기된 실천적 내용을 담고 있었다는 측면에서 이전에 제기된 ‘전노’ 논의와는 그 궤를 달리한다고 할 수 있다.

    전노협 논의가 시작된 것은 88년의 노동법개정투쟁이 한창 진행되던 와중이었다. 노동법개정 투쟁은 지금까지 지노협에서 수행해왔던 사업장 지원활동 등의 연대투쟁과는 달리 비록 낮은 수준이나마 정치투쟁의 영역에 속하는 것이었고 전국적 투쟁의 범주였기 때문에, 지노협의 열성조합원과 간부를 비롯한 지도역량들은 자연스럽게 전국적 조직화의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따라서 11월 13일 ‘전태일 열사 정신계승 및 노동악법개정 전국노동자대회’가 열리기 직전인 12일 밤, 전국에서 모인 100여 명의 노동조합 위원장과 20여 명의 노동운동단체 대표자들의 연석회의 석상에서 최초로 ‘전국노동조합협의회 연락위원회’를 만들자는 제안(서노협)이 나오게 되었다.

    이 제안은 당시 막연하게나마 그 필요성을 피부로 느끼고 있던 노동조합 위원장들 사이에서 깊은 공감을 얻었고, 11월 28일부터 12월 1일까지 계속되었던 민주당사 농성투쟁 과정에서 한 차례 논의를 거친 후, 12월 22일 전주에서 1차 회의를 통하여 구체화되었다. 전주 회의에서는 ‘지역·업종별 노동조합 전국회의’를 상설화하고 그 산하에 노동법개정 및 임금인상 투쟁본부(투본)를 설치하여 노동조합과 전국노운협의 단일대오를 형성하기로 합의함으로써 귀중한 결실을 맺게 되었다.[14]

    3) 1988~89년 현대중공업 128일 파업

     

    1988년 12월 12일 울산 현대중공업에서 노동자들의 파업이 시작돼 1989년 4월 18일까지 128일 동안 전개됐다. 조합원 수가 1만 8천이 넘는 대규모 노동조합에서 벌어진 이 장기간의 공장점거 파업은 1988~89년 민주노조운동의 폭발적 성장을 상징적으로 대표했다.

    128일 투쟁은 20세기 한국사에 등장한 자본과 노동 간의 갈등을 상징하는 거대한 전쟁이었다. 128일 파업이 시작된 피상적 계기는 현대중공업 88년 단체협약 체결투쟁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겉으로 드러난 계기에 불과한 것이었으며, 그 저변에는 87년 이후 현대재벌과 국가권력이 자행한 노동자 탄압에 대한 강렬한 저항이 깊이 자리하고 있었다. …

    현대자본 측의 잔혹한 민주노조 탄압과 국가권력기관의 현대 노동자들에 대한 편파적인 태도는 현대 노동자들로 하여금 돈과 권력이 하나라는 정치적 각성을 분명히 하게 했고, 민주노조 사수를 위해서는 죽음도 불사하는 거대한 투쟁을 준비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다.[15]

    노동자들의 핵심 요구는 주 44시간 근무제 도입, 상여금 600%로 인상, 각종 수당 신설·인상, 퇴직금누진제 실시 등의 단체협약 쟁취와 해고자 원직복직이었다. 특히 해고자 원직복직은 단체협약 못지않은 뜨거운 쟁점이었다. 1987년 노동자대투쟁 이후 현대중공업노조에서는 21명의 해고자가 발생했다. 회사가 일부 해고자들을 개인별로 회유하여 계열사로 선별복직 시켰지만, 10명이 이를 거부하고 원직복직을 주장하며 해고자로 남아 있었다. 특히 김진국 수석부위원장과 정영빈 여성부장은 1987년 대투쟁과 이후 지역연대 투쟁에서의 헌신적인 역할로 가장 상징적인 인물이 돼 있었다.

     

    12월 8일 노동조합은 운동장에서 집회를 열고 파업 찬반투표를 실시했다. 재적 18,693명 중 14,703명이 참가해서 13,425명이 찬성했다. 재적 대비 70.9%, 투표 대비 91.3% 찬성이었다. 12월 12일 파업이 시작됐다.

     

    ◎ 직권조인에 맞선 파업지도부 건설

     

    그런데 파업의 최대 걸림돌은 역설적이게도 노조 위원장 서태수였다. 애초에 그는 1988년 2월 전임 위원장의 추천을 받아 사측 후보들을 물리치고 3대 위원장에 당선됐다. 그러나 직후 교통사고를 당해 병원에 장기간 입원을 했는데, 그동안 회사 중역들이 뻔질나게 병실을 드나든 사실이 알려지면서 조합원들에게 불신을 받고 있었다.

     

    오랫동안 노조를 비우고 있던 위원장은 노조가 파업을 결의하자 부랴부랴 복귀했다. 15일 아침에는 갑자기 회사측 최종안을 총회에 붙이겠다고 공고했다. 조합원들은 분노의 눈길로 위원장의 공고문을 바라보았다. 총회 회부 문제를 토의하기 위해 대의원 간담회가 열렸으나 노조에 몰려온 조합원들의 원성과 흥분된 분위기 때문에 거론조차 못하고 무산됐다. 17일에도 대의원 간담회를 열었지만 다시 무산됐다.

    파업 6일째인 17일은 토요일이었다. 위원장은 15일 간담회 때 조합원 방청을 개방했다가 혼쭐이 난 경험을 살려 방청을 불허한 채 대의원 긴급간담회를 소집하고 회사측 최종안을 총회에 부치는 문제를 다시 들고 나왔다. 회의는 찬반이 팽팽히 맞서다 표결에 부쳐져 묘하게도 71:71 동수가 나왔다. 꼼짝없이 위원장의 캐스팅보트로 총회 회부가 결정될 판이었다. 그런데 어떻게 알았는지 일군의 조합원들이 몰려와 “해고자 복직은 안중에도 없어? 이 ××들” 하며 투표함을 박살냈다.[16]

    총회 회부가 가로막힌 위원장은 18일 호텔에서 회사측 안에 직권조인했다. 19일부터 정상조업에 들어간다는 성명서를 남기고 잠적하기 직전 호텔에서 가진 TV 인터뷰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연말 상여금이라든지 우리가 단체협상에서 따낸 생산 장려금 19만 원, 그다음에 급여, 이런 게 전부 다 못 나간다고 못을 박았습니다. 그랬을 적에 투쟁도 좋고 뭐도 좋지만은, 우리가 지금 먹고 살기 위해서 회사 다니는데, 정말 상여금 안 나오고 격려금 안 나오고 급여 못 받으면, 사실 저희들이 노동운동이라는 건 실리와 권익을 위해서 하는 일인데 실리를 빼놓고 나면 뭐 있습니까?”[17]

    19일 파업집회는 위원장에 대한 격렬한 성토장이 됐다. 대의원 간담회가 즉시 소집돼서 위원장의 잠적에 따른 유고 상태를 확인하고 위원장 권한을 이원건 조선부문 부위원장에게 부여했다. 이원건 위원장 권한대행은 파업계속 여부, 권한대행 체제 신임 여부에 대한 조합원의 뜻을 확인하기 위해 총회를 소집했다.

    20일 실시된 조합원총회 투표에서 13,840명의 조합원이 참가하여 10,716명이 찬성, 77.4%의 찬성으로 파업을 계속할 것을 결의하고, 76%의 찬성으로 권한대행 체제를 인정했다.[18]

    회사측이 20일 협상에서 다시 제시한 최종안에 대해서도 조합원총회에 찬반을 물었다.

    21일 실시된 사측안 수용여부를 묻는 투표에서 15,677명의 조합원이 투표에 참가, 11,834명이 반대표를 던져 회사안을 부결시켰다.[19]

    조합원대중은 자본의 농간을 단호히 분쇄하고 해고자 원직복직과 단체협약 쟁취를 향해 계속 전진하기를 강렬히 원했다. 조합원들의 확고한 뜻을 확인한 이원건 권한대행 체제는 24일 쟁의대책위원회 체계를 비상수습대책위원회(비대위)로 개편·정비했다. 조합원들의 요구와 단결력을 파업지도부를 중심으로 다시 응집시켜 낸 6일간의 과정이었다.

    1만 2천명의 파업노동자들은 현대중공업 사내에 있는 종합운동장에서 농성과 사내 시위를 하면서 ‘원직복직, 단협쟁취’의 투쟁열기를 더욱 더 뜨겁게 달구어갔다. 조합원대중 앞에 수많은 ‘방안’이 제시되었고, 자신의 입장을 해명하고자 하는 수많은 시도가 이루어졌다.

    어제 단상에 올랐던 노동자가 다음날에는 어용으로 몰리고, 오늘 단상에 올랐던 대의원 혹은 집행부가 다음날 다른 노동자에 의해 거부되었다. 조합원 대중들은 어느 누구의 말도 믿으려고 하지 않았다. 파업투쟁의 정당성과 순수성을 행동 속에서 쟁취해 나갈 자신들의 대변자를 요구했다.

    다양한 입장과 인물들이 대중들 앞에서 파업투쟁의 현장에서 검증되어져 갔다. 집행부의 임원이든 대의원이든 조합원이든 모두 ‘파업투쟁전선’에서 조합원대중들에 의해 검증되고 심판되어졌다.

    ‘원직복직, 단협쟁취’의 명제는 그 누구에 의해서도 거부될 수 없는 현대중공업 조합원 전체의 통일된 대의였고 갈망이었다. 이 대의에 한 치의 오차라도 생기면 조합원 대중들에 의해 어용으로 낙인찍혀졌으며, 어떠한 절충도 타협도 용서되지 않았다.

    어떠한 사적인 이해도 불순한 기도도 침투할 틈이 없었으며, 오직 단일한 계급적 이해=대의에 입각한 투쟁만이 조합원 대중들에 의해 승인되어졌다. 이 파업투쟁의 열기를 온 몸으로 안고 지도해 나갈 ‘투쟁지도부’를 노동자 대중들은 강렬하게 원하고 있었다.

    며칠간의 대립과 혼란 끝에 마침내 ‘단협쟁취, 원직복직’의 슬로건하에 현대중공업 내 민주대의원, 민주열성조합원, 민주집행부가 파업투쟁전선의 한복판에서 연합하여 대중적 파업투쟁지도부=비상수습대책위원회를 창출했다.[20]

    조직구성을 완료한 비대위는 26일 <파업투쟁속보> 제1호를 발행했다. 또한 1만 2천 조합원이 참여한 가운데 국회의원 노무현의 초청강연을 운동장에서 열었다.[21] 노무현은 1980년대 초중반 노동인권변호사로 활동하면서 부산에 기반을 두고 울산·창원·거제까지 해고노동자들을 지원한 경력이 있었다. 1988년 4월 총선에서 김영삼의 통일민주당 소속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었고, 11월부터 생방송으로 진행된 5공 청문회에서 정주영을 비롯한 재벌들과 전두환 군사정권의 유착을 거침없이 공략하여 큰 대중적 인기를 얻고 있었다.

    “여러분! 이번 여러분의 파업은 법률상 위법입니다. 그런데 법도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저 산동네의 철거민들을 보십시오. 그 사람들도 하루 종일 일하고 퇴근해서 따뜻하게 등 눕힐 수 있는 구들장이 필요하고 그 사람들 자식들도 밥 먹던 상이나마 행주로 닦아 책 놓고 공부할 수 있는 방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법에 위반되었다고 무허가라고 집을 뜯어 버립니다. 노점상들도 그렇습니다. 입에 풀칠을 하려고 나와 있는 노점상들을 도로교통법에 걸어 목판을 차버립니다. 그들 중 어떤 사람들은 집에 불이 나서 다섯 가구가 몽땅 타버렸는데 피해액이 백만 원도 안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들에게 목판 하나는 전 재산입니다. 밥 못 먹게 하는 법, 그것은 법이 아닙니다.

    여러분! 헌법에도 노동3권을 명시해 놓고 다만 방위산업체는 안 된다고 합니다. 입만 열면 안보, 전쟁 위협을 하면서 비행기로 3분 거리에 있는 서울에 왜 63빌딩을 짓습니까? 방위산업체 쟁의는 안 된다고 하는 말은 대한민국 노동운동을 콱 밟아버려라 이런 뜻입니다. 그러므로 법은 정당할 때 지키고 정당하지 않을 때에는 지키지 않아야 합니다. 또 말로만 하지 말고 악법은 국민의 손으로 철폐시켜야 합니다. …

    노동자가 하루만 놀면 온 세상이 멈춥니다. 그 잘났다는 대학교수, 국회의원, 사장님 전부가 뱃놀이 갔다가 물에 풍덩 빠져 죽으면 남은 노동자들이 어떻게든 세상을 꾸려나갈 것입니다. 그렇지만 어느 날 노동자가 모두 염병을 해서 자빠져 버리면 우리 사회는 그 날로 끝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법률, 경제, 사회관계 등 모든 것을 만들 때 여러분이 만듭니까? 아닙니다. 이제 여러분의 대표가 이런 것을 만들어야 합니다. 그게 바로 오늘 한국의 노동자가 말하는 ‘노동자가 주인되는 세상’입니다. 그런 사회를 위해 우리 다 함께 노력합시다.”[22]

    “이번 현대중공업 파업투쟁은 노동자 개개인이 물질적인 돈 몇 푼을 구걸하기 위한 싸움이 아니라, 현대중공업 2만 4천 노동자의 자존심, 더 나아가 이 땅의 일천만 노동자의 자존심을 건 노동해방, 인간해방, 진심으로 이 땅에서 사람 사는 세상을 만들어 인간적인 대접을 받기 위하여 소수의 독점재벌, 악덕재벌과 맞붙어 싸우는 첫걸음입니다.”[23]

    한편 15일부터 ‘해고자복직 결사대’가 서울 본사 앞에서 상경투쟁을 벌이고 있었다. 16일에는 정주영 명예회장과 면담이 이루어졌지만, ‘개전의 정’과 ‘계열사 재입사’만 되풀이했다. 17일 정몽준 현대중공업 회장과의 면담도 소득이 없었다. 그런데 면담이라도 응해주던 회사측의 태도가 19일부터 강경하게 변했다. 사옥 앞마당에 결사대가 붙여놓은 현수막과 대자보 등을 관리자를 동원해 철거했다. 몸싸움 시비도 빈번해졌다. 울산에서 조합원들이 서태수의 직권조인을 거부하고 파업을 지속하기로 결정한 여파였다. 그러나 결사대는 시민홍보전을 나가고 파업 중인 노조를 격려방문하면서 활발한 활동을 이어 나갔다.

     

    ◎ 현대 자본의 잇따른 테러

     

    바로 그 때 노태우 정권의 태도가 갑자기 공격적으로 선회했다. 노태우 정권은 9~10월 서울올림픽과 11~12월 5공 청문회가 진행되는 동안 상대적으로 유화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었다. 그런데 12월 28일 청와대 당정회의에서 대통령 노태우가 “최근의 법질서 문란행위와 노사문제 민생치안 부재 등에 대한 근본적인 대책을 마련하라”고 지시했다.

    “정부는 각종 흉악범과 폭력 파괴 행동은 법에 의해 엄격히 단속함으로써 선량한 시민이 마음 놓고 살 수 있도록 법과 질서를 확립할 것을 강력히 지시를 합니다.”[24]

    이른바 ‘민생치안 특별지침’이 발표된 바로 다음날인 29일 현대중공업노조 상경 결사대가 공권력에 의해 전원 강제 연행당했다. 1989년 1월 2일에는 파업 중이던 풍산금속 안강공장에 공권력이 투입됐다. 다음 날에는 서울 모토로라코리아에도 공권력이 투입됐다.

     

    현대중공업에도 공권력이 투입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었다. 파업지도부는 조합원 대표성을 강화하고 불법파업 시비를 줄이기 위해 6일 다시 한 번 조합원 총회를 개최했다. 서태수 위원장을 불신임하고 새로운 합법적 노조위원장을 선출하기 위한 총회였다.

    1월 6일, 17,000여 조합원들이 출근(출근율 90%)하였으나, 조합원 중 설계부서와 지원부서를 제외한 대다수의 생산직 노동자들이 투표에 참여(9,500명), 95%의 찬성으로 규약개정 및 서태수 위원장 불신임안을 통과시켰으며, 91%의 찬성으로 이원건 권한대행을 명실상부한 새로운 위원장으로 탄생시켰다.[25]

    그런데 노태우 정권보다 회사측이 먼저 노동자들을 공격했다. 노조파괴 전문가를 고용하고 서태수 측근의 어용 대의원들을 동원해서 8일 현대그룹해고자복직실천협의회(현해협) 사무실 등을 폭력 침탈하는 테러를 벌인 것이다.

    1989년 1월 8일 새벽 3시 20분과 5시 30분 현대중전기 조합원들이 수련회를 하고 있던 석남사 산장과 울산 ‘현대해고자복직실천협의회’(현해협) 사무실에 복면을 하고 무전기·각목 등을 든 50여 명의 괴한이 습격해 권용목을 비롯한 23명의 조합간부 및 조합원, 해고노동자들을 무차별 폭행하고 달아났다.

    석남사 산장, 현해협 사무실 두 곳을 차례로 습격한 괴한들은 고도로 훈련된 듯한 폭력을 사용해, 습격당한 노동자들은 타박상이 심한데도 외상은 별로 나타나지 않았다. 또한 이들은 무전기를 통해 끊임없이 송수신을 하였고, 철수할 때에도 무전기를 든 자의 지휘 하에 미리 대기시켜 놓은 차로 일사불란하게 철수하였다.[26]

    현해협은 1988년 2월 현대엔진과 현대중공업 해고자들을 중심으로 결성됐는데, 형식상으로는 현대그룹 산하 각 사업장에서 쫓겨난 해고자들의 조직에 불과했지만, 실제로는 어용화된 집행부들을 대신하여 각 사업장의 현장 민주세력들을 지원하고 연결하면서 대중운동의 구심으로 기능하고 있었다. 1987년 대투쟁 과정에서 현대엔진, 현대중공업, 현대중전기, 현대미포조선, 현대종합목재, 현대정공, 현대자동차 등 현대그룹 계열사들에 노동조합들이 속속 들어섰으나, 그 집행부 대부분이 회사측의 개량화 공작에 넘어가 몇 달 만에 민주적 성격을 상실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1989년 1월에도 현해협은 현장의 노동자들로부터 강력한 신뢰를 받으면서 현대중공업과 현대엔진의 파업을 왕성하게 지원하고 있었다.

    당시 현해협에는 권용목 엔진 전 위원장과 고세흥 등 엔진 해고자와 김진국 전 중공업 수석부위원장, 정병모 전 쟁의부장 등 중공업 해고자, 천창수 중전기 해고자, 그리고 학생운동 출신 노동운동가 3~4명이 중공업과 엔진 파업을 왕성하게 지원하고 있었다. 87년의 현대그룹노조협의회의 역할을 대신하며 지역 노동운동의 실질적인 구심역할을 하고 있던 현해협은 중공업, 엔진 노동자들로부터 거의 절대적 신뢰를 받고 있었다.[27]

    테러 소식이 알려지자, 8일 현대중공업과 현대엔진 조합원들이 진상규명을 요구하며 울산시내에서 광범한 홍보작업에 나섰다. 9일 오전에는 1만여 명의 조합원이 현대중공업 운동장에서 테러규탄대회를 열었다. 이른바 ‘노조파괴 전문가’ 재미교포 제임스 리(본명 이윤섭)가 배후인물임이 곧 드러났다. 15일에는 울산에서 1·8 테러를 규탄하는 전국노동자대회가 열렸다.

    자본가들의 잔인한 폭력성, 자본과 권력의 추악한 야합의 진면목을 보여준 1·8 테러는 전국 노동자들을 울산으로! 울산으로 몰려오게 하였다. 89년 1월 15일, 테러가 발생한 지 일주일 만에 울산 태화강 고수부지에 전국의 3만 노동자가 집결했다. ‘노동운동탄압 분쇄 및 현대테러 규탄 전국노동자대회’가 충천의 열기를 뿜으며 열리고 있었다. 문익환, 백기완, 이소선, 김근태, 이부영 씨 등 재야원로 및 지도급 인사들과 단병호 서울지역 노조협의회 의장을 비롯한 많은 전국 노조대표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이 대회는 1·8 테러로 부러진 오른팔에 깁스를 한 채 연단에 올라선 권용목 씨가 사람들의 마음을 휘어잡는 탁월한 연설력을 유감없이 보일 때 절정에 달했다.[28]

    파업 노동자들은 매일 운동장에 집결해 ‘폭력테러만행 규탄집회’를 열었다. 사내 시위와 시내 가두행진을 벌였고, 울산경찰서와 검찰청 앞에서 구속자 석방 촉구 항의시위도 조직했다. 규약개정 및 임원선출에 관한 변경신고서를 울산시청에 접수하며 법적 투쟁도 병행해 나갔다.

     

    18~19일 노동조합은 3대 대의원 선거를 실시하여 ‘파업투쟁 대의원’을 선출했다. 조합원들은 상당수의 어용 대의원들이 1·8 테러에 직접 개입한 사실에 경악했다. “폭력대의원 축출하고 민주대의원 선출하자”, “민주대의원 선출하여 민주노조 강화하자”는 게 조합원들의 열화와 같은 목소리였다. 각 부서마다 파업의 선봉에서 열성적으로 활동하던 조합원들이 대거 대의원으로 선출됐다. 어용 대의원들을 축출하고 파업투쟁 대의원들로 대체하면서 노동조합 조직력이 크게 강화됐다.

     

    또한 조직력을 극대화하기 위한 방안으로 소위원 제도를 적극 구축해 나갔다.

    소위원들은 파업투쟁의 혈관과 같은 존재였다. 대의원 한 사람이 100명의 조합원을 일일이 챙기기는 매우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각 반에 소위원을 두고 20명 단위로 추가선출된 소위원들이 대의원을 통해 모든 상황들을 부서 조합원들에게 자세히 알리고 단결을 도모하면서 파업투쟁의 조직력은 급격히 살아났다. 평소 한 작업장에서 십수 년을 함께 일해온 사람들로 조직화된 소위원 조직은 조합원 한 사람 한 사람의 의견이 파업지도부에 전달될 수 있는 민주적 통로 역할을 충실히 했고, 조합원 전체가 파업에 적극 동참하는 고무적인 결과를 낳았다. 대의원들과 마찬가지로 소위원들에게도 소위원 명찰을 달게 하여 책임감을 부여하고, 소위원 자체의 조직화를 꾀해 발대식과 소위원회 임원진도 자체 선출케 했다. 이러한 조치들은 소위원 조직의 자발적 동력을 형성했고 이 소위원 조직의 동력이 이후 구사대 폭력 등 폭력탄압에도 굳건히 파업대오를 유지시킨 128일 파업의 가장 견고한 힘이었다.[29]

    노동조합은 파업기금 마련을 위해 일일찻집 행사를 열었는데, 조합원과 계열사 노동자들이 적극 호응해 약 3백만 원을 모아냈다. 노동조합 정상화 이후 변제한다는 약속 아래 1인당 5천 원짜리 파업채권을 발행해서 약 3천만 원의 재정을 마련했다. 1·8 테러 이후에는 전국의 노동자들이 지원금과 각종 지원물품을 보내왔다.

     

    2월 12일에는 현해협을 중심으로 현대그룹 각 사업장의 현장 민주세력들이 현대중공업과 현대엔진의 파업투쟁을 지원하기 위해 ‘현대계열사 연대투쟁본부’를 결성했다.

     

    그런데 21일 또다시 테러가 발생했다. 이번에는 백주 대낮에 대규모의 구사대가 무차별적으로 자행한 식칼테러였다.

    1월 8일 살인적 폭력테러를 자행한 뒤에도 서태수 전 노조위원장을 계속 감싸고 돌던 현대그룹과 현 정권은 2월 21일 백주 대낮에 또다시 식칼까지 동원하여 현대중공업 노동자들에게 살인적 만행을 저질렀다. 비폭력을 외치는 노동자들에게 회사관리자와 경비대 등 1천여 명은 닥치는 대로 식칼을 휘둘러 박원일, 진재원은 옆구리에 길이 10cm가량 찔려 중태에 빠지고 이우강은 눈을 다쳐 실명 위기에 처했으며, 백골단 등 전경 5개 중대는 회사측의 폭력만행을 지켜보며 방관했다.[30]

    2월 21일, 현대독점재벌의 관리직 사원과 경비대로 구성된 2,000여 명의 구사대는 경찰 10개 중대 1,500여 명이 지켜보는 가운데 현대중공업 정문 앞에서 평화시위를 하고 있는 파업노동자들을 식칼로 찌르고, 쇠파이프로 두들겨 패고, 각목으로 무참하게 짓밟은 ‘식칼테러 만행’을 저질렀다. … 현대독점재벌의 폭력에 대한 분노보다도, 독점재벌에 대한 환상에 사로잡혀 왔었다는 자신들의 삶에 대한 분노가 오히려 더 현대중공업 파업노동자들을 치떨게 했다.[31]

    1·8 테러에 이어 또다시 벌어진, 더 큰 규모의 2·21 식칼테러는 노동자들을 경악하게 했다. 21일 오후에 열린 집회는 사측에 대한 격렬한 분노의 분위기로 휩싸였다. 파업 지도부의 비폭력 원칙을 비판하는 목소리도 여러 차례 터져 나왔다.

     

    그런데 경찰은 이 사건 수사에 전혀 적극성을 띠지 않았다. 식칼이 난무하는 폭력이 자행되고, 사람들이 혼수상태에 빠지고, 옆구리에 칼을 맞아 전치 12주 이상의 중상을 당하는 폭력이 백주 대낮에 벌어졌음에도 경찰은 수사조차 하지 않으려 했다. 언론 또한 사측의 명백한 테러폭력을 이른바 ‘노노싸움’으로 치부할 뿐이었다. 현대중공업 노동자들은 파업 기간의 수많은 사건들을 겪으면서 경찰, 노동부, 시청 등 정부기관과 언론을 철저히 불신하게 됐지만, 특히 2·21 테러 사건에 대한 대응을 지켜보면서 그렇게 됐다.

     

    잔인한 테러 소식은 칼에 난자당한 노동자들의 사진 포스터를 통해 급속히 가족들과 계열사 노동자들에게 번져갔다. 분노한 가족들의 파업집회 참가가 급증해 1천 명에 육박할 정도가 됐다.

    가족들은 사장실로 몰려가 상여금 등 체불임금 지불을 요구하며 농성을 벌이는가 하면 오좌불 숙소 앞에서 빈대떡 장사를 하여 파업기금을 마련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가족들의 적극적인 동참은 이후 공권력이 투입된 이후에 전개된 시가투쟁 때 가족과 주민들이 적극 나서 주먹밥을 만들고 이웃들의 성금을 모금하는가 하면 스스로 화염병을 만들어 노동자들에게 나누어주는 ‘해방구 광주 아낙네’의 면모를 유감없이 보여주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32]

    2·21 테러 직후인 23일 ‘상경 결사대’ 1진 491명이 정주영 명예회장과 담판을 짓기 위해 서울에 도착했다. 계동사옥 앞에 텐트를 치고 농성에 돌입한 상경 결사대는 가두홍보를 통해서 파업투쟁의 정당성을 선전해 나갔다. 서울지하철노조 등을 방문하면서 연대활동도 강화해 나갔다. 서울 지역의 노동조합과 민주단체들의 지지방문도 끊이지 않았다.

    예상했던 대로 정주영 회장은 쉽게 만나주지 않았다. 결사대는 일단 홍보작업에 주력하기로 하였다. 2·21 식칼테러를 알리는 홍보물을 작성하여 시내 곳곳을 헤매 다니며 시민들을 붙잡고 설명도 하고 호소도 하고 모금도 하였다. 갑자기 화려한 서울 시내 한복판에 온몸에 덕지덕지 구호와 사진을 붙인 검푸른 현대작업복의 노동자들 모습을 시민들은 호기심 어린 눈으로 바라보았다. … 울산에서 올라온 2·21 식칼테러 고발 칼라포스터는 시민홍보에 큰 힘이 되었다. ‘국민의 양심으로 폭력테러 추방하자’는 제목의 이 포스터는 현대 구사대의 테러장면을 생생히 보여주는 사진들과 테러에 희생당한 노동자들의 처참한 모습을 담고 있었는데, 시민들은 이 포스터를 몸에 붙이고 다니는 노동자들을 보고 “이것이 사실이냐”고 묻곤 했다.[33]

    비에 흥건히 젖은 텐트에서 새우잠을 자면서, 파업기금이 없어 라면으로 끼니를 때우면서, 철거민들이 정성스럽게 지어준 주먹밥을 눈물겹게 먹으면서, 서울지역의 노동조합과 민주단체의 뜨거운 지원을 보고 겪으면서, 서울 결사대는 자신들의 투쟁이 다만 자신들의 이해만을 위한 투쟁이 아니라 1천만 노동자를 위한 투쟁 그리고 자신들처럼 이 땅의 피억압계급인 도시빈민·농민들을 위한 투쟁이라는 점을 계동사옥 앞 투쟁의 한복판에서 뼈저린 자각에 자각을 거듭해 갔다. 노태우 정권에 의해 억압받고 착취당하는 1천만 노동자의 선봉으로, 민주주의를 수호하고 민중의 이해를 온몸으로 대변하여 투쟁해 나갈 투사로, 노동해방의 전사로 상경결사대 노동자들은 단련되어 갔다. 왜 노동자간의 연대투쟁은 필요하며, 왜 철거민과 농민들과의 연대가 필요하며, 왜 민주세력과 연대하여 노태우 정권과 독점재벌을 타도해야 하는지를 깨달아 갔다. 이는 87년 9월 상경 때에는 체험하지 못했던 자각이었다.

    노태우 정권과 독점재벌에 대항하여, 천만 노동자의 선봉에 서서 투쟁하기에 우리들의 노동자로서의 의식은 얼마나 미약한가? 우리들의 조직은 얼마나 허술한가? 다시는 이러한 미약한 의식과 조직으로 노태우 정권과 독점재벌에 대항해서 투쟁해서는 승리할 수 없다. 투철한 노동자의식, 그리고 강력한 투쟁조직만이 우리 노동자를 승리로 이끌 수 있다는 점을 서울 한복판에서 상경 결사대는 자각해갔다. 이러한 자각만으로도 이미 이번의 파업투쟁은 노동자들의 승리였다.[34]

    마침내 3월 6일 정주영 회장과 면담이 이루어졌다. 오전 10시 강당에 모인 노동자들 앞으로 정주영 명예회장이 정몽준 현대중공업 회장과 이명박 현대건설 회장을 대동하고 나타났다.

    무대 중앙에 마련된 탁자에 앉은 그는 면담이라기보다 훈시에 가까운 자신의 얘기만 했다. 질문하는 노동자들의 이름과 부서를 일일이 확인하며 질문에 대한 답변이 아닌 자신의 방북 얘기와 6·25 얘기로 일관하던 그는 약 1시간이 지나 몸을 일으켰다. 그가 남긴 말 중에 그래도 희망적인 것은 “대화라면 언제든지 하자”라는 것뿐이었다.

    오후 4시에 다시 2차 면담이 성사됐다. 그러나 정주영의 태도는 변함이 없었다.

    “내가 너희들이 내려가라고 해서 내려가고 올라오라고 해서 올라오는 사람이야? 재작년처럼 운동장에 세워놓고 날 능욕하려는 거야 뭐야? 지금 울산에는 사장이 있고 이사와 중역들이 있다. 그 사람들이 현대중공업 파업을 충분히 잘 알고 일을 잘 처리할 수 있다. 내가 그 사람들에게 일임을 다 했는데 내가 다시 내려간다는 것은 그 사람들을 무시하는 것밖에 되지 않아. 난 내려가지 않아. 그리고 너희들이 공산주의를 알아? 단체행동을 하는 건 좋은데 왜 빨간 띠를 매는 거야. 다른 좋은 색깔도 많잖아!”

    면담은 “너희들은 조합원의 대표가 아니다”라는 정주영의 말과 함께 결렬됐다. “앞으로도 계속 얘기하자”는 그의 말이 공허하게 맴돌았다. 그리고 8일과 9일에 걸쳐 1천5백 명이 넘는 전경과 백골단, 관리자들에 의해 농성장이 침탈됐다. 258명이 연행되고 결사대 지도부 6명이 구속됐다. 연행을 피한 100여 명과 2진 결사대 50여 명이 민주당사와 평민당사에서 농성을 계속하며 현대그룹의 잔인한 노동자탄압을 서울 시민들에게 줄기차게 알려나갔다.

     

    ◎ 공권력 투입에 맞선 결사항전

     

    상경 결사대의 정주영 면담이 돌파구를 찾지 못하자, 파업지도부는 공권력 투입을 피하기 위한 최후의 방안으로 ‘임시총회 소집권자 지명요청’을 시청에 내기로 했다. 애초 1월 25일 노동부가 파업지도부를 찾아와 ‘임시총회 소집권자 지명요청’을 하라고 요구했었다. 노동조합이 1월 6일 조합원 총회를 통해 서태수를 불신임하고 이원건을 새 위원장으로 선출했음에도 노동부는 이것을 인정하지 않으면서 노동조합 지도부를 새로 구성하고 싶으면 법에 정한 절차를 밟으라는 논리였다. 그러나 노동조합이 소집권자 지명요청을 한다는 것은 노동조합 스스로 1·6 조합원 총회와 이원건 위원장 체제의 정당성을 부정하는 것이라는 점, 그런 상태에서 (다른 많은 비슷한 사례에서처럼) 울산시가 조속히 소집권자를 지명하지 않을 경우 노동조합이 지도부 없이 표류하게 된다는 점 때문에, 노동조합은 소집권자 지명요청을 거부했었다. 그런데 뚜렷한 협상의 돌파구를 찾지 못하는 가운데 공권력 투입이 임박해 오자 소집권자 지명요청을 내는 쪽으로 파업지도부가 선회한 것이다. 여기에는 울산시가 ‘3일 안으로 소집권자를 지명해 주겠다’고 약속했다는 야당 국회의원들의 전언도 영향을 미쳤다. 3월 13일 노동조합은 11,400명이 서명한 소집권자 지명요청서를 시청에 접수시켰다.

     

    그러나 울산시는 25일에야 답을, 그것도 ‘반려한다’고 주었다. 서태수가 총회를 소집할 의사가 있다고 하니 소집권자가 필요하지 않다는 논리였다. 결국 노동조합이 제대로 농락당한 셈이었다. 회사는 기다렸다는 듯이 “불법지도부가 스스로 불법임을 인정했다”고 대대적으로 선전하면서 파업지도부와 절대로 협상하지 않겠다는 기존 입장을 다시 한 번 되풀이했다. 아울러 조속한 시일 내에 공권력 투입을 요청하겠다고 했다.

     

    이른바 ‘민생치안 특별지침’ 이후 노동자·민중의 투쟁을 강경하게 탄압하는 노태우 정권의 기조는 계속되고 있었다. 3월 16일에는 고건 서울시장의 교섭 거부에 맞서 파업에 돌입한 서울지하철에 바로 공권력이 투입돼 농성 조합원 2천 400명이 연행됐다.

     

    공권력 투입이 임박해 오면서 지도부가 갈피를 못 잡는 것과 다르게, 조합원들은 이미 결사항전을 준비하고 있었다. 이제 남은 것은 공권력에 맞선 장렬한 항전뿐이었다. 이 사회의 모든 지배세력이 시시각각 현대중공업 노동자들의 목을 조여오고 있었다. 전국 각지에서 수천만 원의 성금과 쌀·라면 등 상상도 못한 엄청난 지원을 보내온 것에 눈물겨워 했지만, 그들이 공권력에 맞서 조합원들을 대신해 싸워줄 수는 없는 일이었다.

    3월 21일 공권력 투입이 임박했음을 신문방송이 연일 보도하는 가운데 현대중공업 파업이 100일째를 맞고 있었다. 8천여 명의 노동자들이 모여 ‘공권력 개입 결사반대 및 소집권자 지명 촉구대회’를 열고 있었다. 이날 집회에는 울산대 총학생회와 대구지역 대학생대표자협의회 및 민주단체들이 참여해 열기를 고조시켰고, 이날 성금만도 1천만 원에 가까운 많은 액수였다. 또한 광주 금호고등학교 학생들이 흰 손수건에 ‘노동자 형님들 힘내세요! 쟁취! 승리!’라고 피로 쓴 손수건과 함께 격려편지를 보내와 노동자들의 심금을 울려주기도 했다. 집회하는 동안 중공업 상공에는 몇 번씩 경찰 헬기가 정찰선회하며 공권력 투입이 임박했음을 알려주었다.[35]

    25일을 넘어서자 공권력 투입은 기정사실화되어 초읽기에 들어갔다. 파업노동자들도 이제 남을 사람만 남게 되어 약 3~4천 명만이 집회에 참석하고 있었다. 이들은 평화적 타결의 희망이 사라진 후에도 끝까지 투쟁할 것을 결의한 현대중공업의 진정한 투사들이었다. 그들의 평균 나이는 예상보다 훨씬 많았다. 대부분이 젊은 사람들일 거라는 일반의 예상을 뒤엎고 반수 이상이 40대를 전후한 장기근속자들이었다. 왜 중고등학교 다니는 자식을 둔 한 가정의 가장들이 해고나 구속, 심지어 죽을지도 모르는 최후의 공권력과의 투쟁을 마다하지 않고 떨쳐 일어섰는가.

    이에 대한 답은 그들의 지난날의 삶을 이해하지 않고서는 나올 수가 없다. 갑판 위에서 떨어져 죽어가고, 탱크 안에 갇혀 질식사하고, 대형 블록 밑에 깔려 노동에 찌든 몸이 오징어가 되고, 진폐에 걸렸음에도 회사에 탄로나면 해고될까 봐 눈치보며 생명줄을 이어가고, 여름이면 40도가 훨씬 넘는 철판 위에서 겨울이면 바닷바람 쌩쌩부는 야적장에서 하루를 벌어먹으며 감내해야 했던 천대와 멸시. 현대가 그들에게 남긴 것은 30~40만 원. 임금의 대가치고는 너무나 비인간적인 것이었다.

    그런 그들에게 87년은 다시 태어나는 부활이었고, 민주노조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것이었다. 인간으로서 다시 태어나게 했던 노동조합이 거대한 자본과 권력 앞에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해 있는데 과연 그들의 행동이 무엇이겠는가! 결사항전! 인간으로서의 자존심을 다시는 뺏기지 않기 위해 노동자들은 분연히 일어서 거대한 골리앗과 맞선 것이다.[36]

    파업 109일째인 3월 30일 새벽 5시, 결국 현대중공업에 115개 중대 1만 5천 명의 경찰병력이 투입됐다. 헬리콥터, 해상함정 8대, 화학소방차 6대 등 특수장비까지 동원된 육·해·공 삼면 입체 작전이었다.

     

    공권력 투입 직전 파업지도부가 세운 전술은 조합원들을 현장에서 미리 빼내 가두에서 집요하게 투쟁을 이어간다는 것이었다. 파업대오는 새벽의 공기를 가르며 질서정연하게 전하동의 오좌불 숙소로 이동했다. 1만 5천 명을 투입한 진압작전은 술에 취해 텐트에 쓰러져 자고 있던 단 한 명의 노동자만을 체포한 채 허탈하게 끝났다. 그러나 새벽 라디오뉴스는 ‘현대중공업 파업근로자 전원 연행’이라고 설레발을 치고 있었다.

     

    당황한 경찰은 정오를 기해 오좌불 숙소를 공격했다. 자연스럽게 현대중공업 조합원들의 가두투쟁도 시작됐다. 현대엔진노조가 파업을 단행하면서 1천 5백 명의 조합원들이 가두투쟁에 가세했다. 오후 들어 현대중공업 인근의 간선도로에서는 전경들과 노동자들 사이에 최루탄·투석 공방이 격렬하게 벌어졌다. 경찰이 퇴각하는 노동자들을 쫓아 밀집 주택지인 만세대아파트 깊숙이까지 최루탄을 쉴 새 없이 쏘아대자 주민들도 격렬한 항의에 나섰다.

     

    공권력 투입 첫날부터 5월 광주를 방불케 하는 격렬한 시가전이 완강하게 전개됐다. 한일은행 앞 도로, 중전기 앞 도로, 동울산우체국 앞 도로 등이 노동자들에 의해 점거됐다. 현대계열사 노동자들이 점차 합세하면서 시위대는 점점 더 불어났다.

     

    공권력을 투입하면 파업이 종결될 것으로 기대했던 경찰과 회사는 번져가는 가두투쟁에 당황하기 시작했다. 오후 4시가 되자 시내에서 동구로 들어오는 길목인 성내검문소를 완전 차단하고 모든 차량의 통행을 금지시켰다. 5시 반이 넘어서자 경찰이 대대적인 반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현대중공업 담 안쪽으로 밀려들어갔던 전경병력과 백골단들이 공격을 개시하면서 간선도로 곳곳에서는 양측 간의 밀고 밀리는 공방전이 가열됐다. 날이 어두워지면서 시위는 더욱 격렬해져 전경버스 한 대와 회사차 한 대가 시위대에 의해 전소되었고, 전하파출소도 시위대의 공격으로 직원들이 모두 철수해야 했다.

     

    저녁 8시가 되자 시위대가 만세대아파트 입구의 공터로 모여들었다. 공터 바로 옆에 현해협 사무실과 오좌불 숙소가 있었고, 인근에 동울산시장과 현대 노동자들의 집단거주지인 만세대아파트가 있었기 때문에 집회장소로는 더할 나위 없이 적합한 곳이었다. 누가 먼저였는지는 몰라도 이곳이 ‘민주광장’으로 불리기 시작했다.

    공권력 폭압진압 규탄집회는 곳곳에서 재채기 소리가 난무하는 가운데 뜨거운 열기로 시작되었다. 집회에 참석한 3천여 명의 노동자들의 얼굴엔 뿌듯한 긍지가 넘쳐흘렀다. 1만 5천의 경찰진압에 여지없이 깨질 것만 같던 파업이 오히려 보다 강력하게 가두에서 계속되었던 오늘 하루가 그렇게 자랑스러울 수가 없었던 것이다. 열광적인 분위기 속에서 내일 오전 8시에 만날 것을 약속하고 집회는 끝났다. 이날 하루 동안 연행된 노동자 수만 해도 697명이었다.

    이날의 가두투쟁에는 현대자동차, 중전기, 미포조선, 정공, 종합목재 등 계열사 노동자들도 다수 참가했다. 현대중공업 공권력 투입으로 조업이 자연스럽게 중단되자 각 사의 노조활동가들이 자발적으로 노동자들을 모아 가두투쟁에 동참한 것이다. 비록 각 계열사 노조가 공식적으로 연대투쟁을 선언할 만큼 강력하지 못했지만 대신에 각사의 노조원들이 스스로 대열을 형성하여 중공업 인근의 가두투쟁 현장으로 행진해 와 매일 중공업 노동자들과 함께 공권력 철수투쟁을 전개한 것이다.[37]

    31일 아침 출근시간이 되자 전날 약속한 대로 만세대아파트 민주광장에 노동자들이 모여들었다. 가두투쟁 조직이 놀라운 속도로 형성됐다. 현대중공업 노동자들은 부서별로 인원을 파악했다. 계열사 노동자들도 사업장별로 대열을 정비했다. 노동자들은 현해협 지도부가 지시한 각각의 장소로 신속히 이동해서 오전의 가두투쟁을 전개했다.

     

    현해협은 각 계열사 대표를 뽑아 임시지도부 체제를 갖추고 사무실에 상황실을 설치했다. 오토바이를 동원해 기동반과 연락병을 두었다. 가족들은 시위대의 식사를 담당했다. 지원단체들은 구호약품을 가지고 와 의료반을 만들었다.

    50여 명의 대학생들도 지원투쟁에 나섰다. 영남지역 대학의 학생들이 현대중공업 파업이 공권력에 강제 진압되자 총학생회의 결의 아래 울산 현지에 결사대를 파견했고, 현대영업소를 타격하는 격렬한 양상을 보여주었다. 노동자들은 자신들을 돕기 위해 내려온 학생들을 맞아 자신들의 작업복을 입히고 잠자리를 마련해주는 등 배려를 아끼지 않았다. 만인에 평등해야 할 법도, 경찰도, 언론들도 모두 노동자들을 벼랑으로 내몰고 있는 상황에서 노동자들에게 호의를 베푼 것은 노동자들과 학생들을 위시한 민주화운동세력밖에 없었다. 파업 초기부터 수천만 원에 이르는 성금과 지원물품을 보내주고, 사회 곳곳에서 현대의 잔인한 테러탄압을 국민들에게 알렸던 민주화운동세력들의 도움은 파업을 지탱하는 데 커다란 힘이 되었다.

    가두투쟁 현장에서의 학생들은 매우 용감했다. 비처럼 쏟아지는 최루탄에도 끄떡하지 않고 노동자 시위대를 보호하고 백골단과 맞서 싸우는 모습은 노동자들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다. 그들은 백골단을 결코 겁내지 않았다. 백골단이 움직이기 시작하면 무조건 도망만 하던 노동자들도 학생들을 보고 많은 것을 배웠다. 화염병 던지는 법도 터득했다.[38]

    이틀째 가두투쟁은 전날보다 더 조직적이고 격렬하게 전개됐다. 전경과의 대치선이 한일은행 앞 도로, 동울산우체국 앞 도로, 중전기 앞 도로, 명덕시장 주변 등지에 형성됐다. 오전에 가장 격렬한 시위가 벌어진 곳은 한일은행과 중전기 사이의 간선도로였다. 최루탄과 투석의 공방전이 일진일퇴를 거듭하다 노동자 수가 불어나면서 간선도로 곳곳이 점거됐다.

     

    간선도로의 한편은 약 4km의 현대중공업 담이고, 다른 한편은 주택가였다. 전경들은 시위대의 위세에 밀려 회사 안으로 밀려들어 갔다. 그런데 미처 퇴각하지 못한 전경대가 시위대에 포위됐다. 노동자들은 전경들의 무장을 해제시키고, 그 자리에 있던 전경수송차 2대와 전경 이동에 사용되던 현대 통근버스를 불태우고 현대중공업 정문을 향해 진격했다. 노동자들의 목표는 현장을 되찾는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3~4천의 시위대가 1만 4천여 명에 달하는 전경들을 당할 수는 없었다. 백골단을 앞세우고 반격에 나선 전경들에 의해 시위대는 다시 간선도로 주택가 골목으로 밀렸다.

     

    점심시간이 되자 시위대가 집결지인 민주광장으로 돌아왔다. 점심은 주먹밥이었다. 어느덧 현해협 사무실 앞에는 가마솥이 걸리고 20~30명의 가족들이 주먹밥을 만들기 시작했다. 허기진 배를 주먹밥으로 때우고 노동자들은 다시 오후의 투쟁에 나섰다.

     

    오후가 되자 노동자들의 숫자가 더욱 불어났다. 각 계열사가 동구 일대의 가두시위로 조업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동구의 유일한 입구인 성내삼거리의 교통이 통제되고 있었고, 일대에 깔린 최루가스와 격앙된 분위기로 노동자들은 일손을 잡을 수 없었다. 연대투쟁에 동참하려는 계열사 노동자들이 자발적으로 작업을 거부하고 가두시위에 나섰다. 계열사 노동자들이 합세한 시위대는 중전기 앞 도로를 점거하고 사내진입을 시도하여, 약 100여 미터까지 치고 들어가기도 했다. 이 때 노동자들은 도로를 향해 서 있는 회사 건물의 유리창을 모두 박살내기도 하고 일부는 인근의 민정당사 유리창을 깨기도 했다.

     

    시위가 계속되면서 부상자의 숫자도 늘어만 갔다. 대부분 최루탄 파편 또는 백골단의 집단구타 때문이었다. 이날 가두투쟁에 참여한 인원은 약 8천 명에 이르렀다.

     

    가두시위 3일째인 4월 1일은 토요일이었다. 오전부터 민주광장에 모인 2천여 노동자들이 간단한 출정식을 갖고 가두시위에 나섰다. 오후가 되자 토요일 오후 근무를 거부하고 몰려나온 현대자동차 노동자 3천여 명이 동구를 향해 진출했다. 현대자동차 노동자들이 성내삼거리에서 전경과 대치하다 인근 산을 넘어 동구로 진입한다는 소식은 시위대를 크게 고무시켰다. 대부분의 계열사가 토요일 근무를 휴무하거나 노동자들이 거부했기 때문에 동구 일대는 검푸른 작업복의 현대노동자들로 빽빽이 들어찼다. 30일 공권력 투입으로 시작된 울산 동구의 가두시위가 갈수록 확대되고 있었다.

    현대자동차 조합원들도 ‘민주노조실천노동자회’(민실노), ‘민주노동자실천협의회’(민실협) 소속 노동자들을 중심으로 지원투쟁을 다녔다. 현장조직들은 현대엔진노조 투쟁에 집행부의 동참을 호소하며 소극적으로 대응했던 것에 반성하면서 집행부에 기대하기보다는 조합원들과 함께 거리로 나갔다.

    4월 1일 토요일, 오전 근무를 마친 3천여 명의 조합원이 가두로 진출했다. 염포검문소, 종합목재 앞에서 최루탄을 쏘며 평화행진을 가로막는 경찰과 대치한 후 만세대 시위에 합류했다. 종합목재, 미포조선, 중전기, 엔진 등에서 집단적으로 참여했고, 시위 대열은 2만여 명에 달했다.

    4월 2일 만세대 투쟁 현장에서는 ‘현대자동차노동자협의회’(현자노협)를 결성했다. 현대중공업 연대투쟁에서 승리하고 다가올 임금인상 투쟁을 비롯한 각종 권익투쟁과 현자노조의 민주적 발전을 위해 투쟁할 것을 결의했다. … 현자노협은 현대중공업 노동자들의 파업을 방관하는 이영복 집행부를 비판하면서 7,000여 명의 조합원이 참여하는 ‘노조 비공인 파업’을 벌이는 등 연대 지지 투쟁을 벌였다. …

    현대자동차 노동자들은 현대중공업 투쟁에 참여하면서 연대투쟁의 소중함을 깨달았다. 울산 전역이 전쟁터가 되어 싸움이 계속되는데도 꿈쩍 않고, 오히려 실익 없는 투쟁에 참여할 수 없다는 집행부 입장을 거부하며 투쟁했다. 한편, 연대투쟁을 주도했던 현장조직들은 조합원들의 신뢰를 받는 계기가 되었다.[39]

    도로 곳곳에서 격렬한 가두시위가 계속되다 오후 4시에 8천여 명의 노동자들이 만세대 민주광장에 모여 ‘공권력 격퇴를 위한 현대노동자 출정식’을 가졌다. 이 집회에는 이부영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 의장이 참석해 현대노동자들의 피어린 생존권투쟁을 지지하여 열렬한 박수를 받기도 했다. 집회를 마친 노동자들은 가두로 진출, 밤늦게까지 격렬한 시위를 벌였다.

     

    현대중공업에 대한 공권력 투입은 민주노조운동 전반에 거센 규탄투쟁을 불러일으켰다. 특히 가장 선봉지역으로 꼽히던 마산·창원 지역에서의 규탄투쟁은 울산 못지않은 격렬한 가두투쟁 양상을 보여주었다. 수출자유지역 광장에 모인 5천여 노동자들이 심야까지 화염병을 던지며 경찰과 치열한 공방전을 벌였다.

     

    학생들의 지원투쟁 또한 뜨겁게 달아올랐다. 현지 지원 결사대를 울산에 급파하는가 하면, 전국에서 현대자동차 영업소 타격투쟁을 벌였다.

     

    2일부터 백골단이 적극적인 공세에 나서면서, 가두시위 양상이 복잡해졌다. 이전까지는 주로 도로를 경계로 대치하는 양상이었는데, 이제 백골단이 골목 안까지 진출하면서 소규모 대치전이 골목 여기저기서 전개됐다. 노동자들과 전경, 백골단이 얽히고설키는 산발시위가 시작된 것이다. 백골단들은 시위대를 쫓아 주택가 깊숙이까지 진출하여 주민들이 보는 앞에서 무자비한 폭행을 가하는가 하면 시장 안쪽에 사과탄을 던지는 등 마치 점령지에 주둔한 군인들처럼 행세했다.

     

    백골단들의 잔인한 행동은 지역 주민들을 가두시위에 적극 동참하게 만들었다. 지역 여론도 매우 험악해져 갔다. 백골단의 만행 소식은 동구 전역에 퍼졌고, 이를 분개하는 사람들의 소리도 높아졌다.

     

    동구 전체가 백골단의 만행에 분개하면서 가족들의 참여가 놀랍게 변해갔다. 주로 현대중공업 파업지도부 가족들이 담당하던 시위대 식사를 주민들이 손수 지어 현해협으로 날라 왔다. 동네마다 성금을 모아 직접 현해협에 찾아와 전달했다. 울산 동구는 5월 광주를 급격히 닮아가고 있었다.

    상황실의 전화는 주민들의 지원전화와 경찰병력 이동상황을 알리는 제보전화로 쉴 틈이 없었다.

    “여기 만세대 126동인데요. 지금 전경들이 125동 앞에 있는 시위대를 포위하려고 옆으로 이동하고 있어요. 빨리 도와주세요.”

    “4천세댄데요. 지금 사람들이 밀리고 있어요. 사람들을 빨리 보내세요.”

    “여기 명덕인데요, 빨리 오세요. 우리가 김밥과 돈을 좀 모았어요. 빨리 가져가 먹고 힘내세요.”

    “고생하네요. 학생들이 잠자리가 필요하다고 하던데 우리 집에 보내주세요. 만세대 114동 000호예요.”

    이들 모두가 아주머니들의 목소리였다.

    한번은 명덕에서 급하게 오라는 아주머니의 전화를 받고 기동대가 달려갔더니 여러 명의 아주머니들이 모여 세 상자의 박스를 내왔다. 안을 살펴보니 화염병이었다. 기동대원이 어떻게 만들었냐고 하니까 시위하는 사람 붙잡고 물어서 만들었다는 것이었다. 비록 불량이 많아서 반 이상을 다시 손을 보아야 했지만 주민들의 동참은 이렇듯 시위대의 식사에서부터 성금모금, 빈병 수집, 화염병 제조에 이르기까지 적극적으로 변해갔던 것이다. 어느 아주머니는 ‘우리도 무기를 들어야 한다’는 말까지 하기도 했다. …

    하루의 투쟁일과는 오후 7시경 만세대 민주광장에서 마무리 집회로 끝이 나는데 집회가 끝나기 10분 전부터는 현해협 사무실 앞에는 때아닌 십수 명의 아주머니들로 북적거렸다. 지원 나온 학생들을 자기 집으로 데려가 재우려는 것이었다. 동구 일대는 낮에는 시위대의 수중에 있어 학생들이 안전했으나 밤이 되면 경찰의 통제로 들어가기 때문에 연행될 가능성이 많았다. 따라서 투쟁지도부는 학생들의 안전에 신경을 많이 썼는데 주민들이 나서서 학생들을 재워주고 있었다. 삼삼오오 학생들을 데리고 가는 아주머니들의 모습을 지켜보면서 현해협 간부들은 이 싸움이 비록 힘에 의해 멀지 않아 진압되겠지만 결코 패배한 싸움이 아니라는 확신을 확인하곤 했다.[40]

    한편 회사측은 진압경찰에게 막대한 지원을 제공했다. 외국인 숙소가 경찰의 작전본부로 사용됐다. 1만 4천여 진압병력에게는 최고급 식사를 제공했다. 관리자들을 시위대 속에 침투시켜 정보를 수집한 뒤 경찰에 매일 넘겨주었다. 진압작전을 지휘하는 경찰 고위간부들에게는 수천만 원 대의 수고비를 찔러주었다.

     

    기자들에게도 온갖 편의를 제공하면서 여론을 호도했다. 현대중공업 앞 다이아몬드 호텔의 객실을 기자들에게 제공하고 매일 회사측이 작성한 보도자료를 건네주면서 회사측의 일방적 입장만이 보도되게 했다. 한겨레신문을 제외한 모든 기사들은 회사측이 제공한 자료를 그대로 베껴 작성됐다. 정상조업률이 74%니 80%니 하면서 마치 절대 다수의 노동자들이 조업하고 있는데 일부 극렬세력만 시위하고 있는 것처럼 보도하여 노동자들의 격분을 불러일으켰다.

    언론의 이와 같은 보도 태도를 보고 많은 사람들은 광주 얘기를 꺼냈다. 직접 겪어보니 어떻게 해서 광주 시민들이 ‘폭도’가 되었는지 알겠다는 것이었다. 하루하루의 격렬한 투쟁을 겪으면서 노동자들과 주민들은 80년 광주를 가슴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41]

    2일 마무리 집회에 공권력 투입 이후 처음으로 파업지도부가 모습을 드러냈다. 5천여 명의 노동자와 주민들이 모인 이날 집회는 이원건 위원장의 출현으로 동구가 떠나갈 듯한 열기를 내뿜었다.

    그러나 파업지도부에 대한 비판의 소리도 만만치 않았다. 매일의 투쟁이 많은 부상자를 속출시키며 확대되고 있음에도 파업지도부 간부들의 모습은 극히 소수를 제외하고 거의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지도부로서의 행동지침도 없었다. 정영빈 씨만이 <파업투쟁속보>를 지속적으로 발행하며 고군분투하고 있었다. 파업지도부가 맡아야 할 투쟁지도는 처음부터 권용목 씨 등 현해협 간부들이 대신하고 있었던 것이다.[42]

    공권력을 투입하면 현대중공업 파업이 종결될 것으로 기대했던 노태우 정권과 현대 자본은 투쟁의 양상이 다르게 전개돼 가자 당황했다. 그런 와중에 정국은 다시 한 번 급변하고 있었다. 3월 26일 문익환 목사 방북사건을 단호히 대처한다는 명분 아래 노태우 정권은 대대적인 공안정국을 조성했다.

     

    4월 3일 안기부, 경찰, 보안사를 중심으로 ‘공안합동수사본부’가 설치돼서, 재야 민주인사와 학생운동 지도자 등 민주화 세력을 대대적으로 구속·수배했다. 4월 정국은 계엄령을 방불케 하는 살벌한 분위기로 치달아 갔다.[43]

     

    민주노조운동 또한 핵심 공격대상이었다. 정권은 “전국 각 지역 공안합동수사본부에 불법 노사분규와 배후조종자 신고센터를 설치해 불순배후세력과 파괴행위 주동자를 색출해 엄단”하겠다고 발표했다. 또한 노동자 투쟁을 봉쇄하기 위해 파업과 직장폐쇄 기간 중 임금을 지급하지 못하게 하였고, 이를 따르지 않는 사업주는 지원 혜택을 규제하였다. “방위산업체, 기간산업, 병원, 운수업체 노사분규는 모두 불법”으로 규정했고, “3자 개입, 불법 폭력행위는 엄중 처벌”[44]하겠다고 선언했다.

     

    정권의 공안통치는 울산의 투쟁에도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치안본부는 울산에 대규모 특공조, 체포조 형사대를 급파했다. 또한 울산 투쟁을 재야와 연계된 극렬투쟁으로 규정하고 오좌불 숙소와 현해협, 그리고 울산지역 임투지원본부, 울산사회선교협의회 등에 대한 압수수색을 실시하는 한편, 지원 연설한 이부영 전민련 의장과 권용목 씨 등 울산지역의 핵심적 지도자들 20여 명을 공개수배했다.[45]

    그러나 울산의 투쟁은 여전히 확대되고 있었다. 백골단의 횡포가 이제 전 주민의 저항을 불러일으키며 노동자들은 물론 가족들 심지어 어린 학생들과 노인들까지 손에 돌을 쥐게 만들었다. 연 인원 1만여 명에 가까운 시위대가 간선도로 곳곳에서 도로를 점거하고서 격렬한 시위를 계속했다. 3일 저녁에도 어김없이 민주광장에 5천여 명의 노동자와 주민들이 모여 마무리 집회를 가졌다.

    투쟁지도부는 대규모 특공, 체포조 투입에 대응하여 자체적인 프락치 색출 작업을 실시했다. 우선 시위대 내에 침투한 프락치를 색출하기 시작했다. 최초로 잡힌 프락치는 전하2파출소 소속의 순경 손삼열이었다. … 노동자들이 중년의 사나이를 붙잡고 “이놈은 남부서 형사계장이다…”라며 질질 끌다시피 해 현해협 사무실로 데리고 왔다. … 잠시 후 또 한 사람이 잡혀 왔다. … 백골단 소속 정보원이었다. …

    얼마 후 이번에는 중년의 아저씨가 끌려왔다. … 이번에는 그를 끌고 오는 사람들이 노동자들이 아니라 아주머니들이 다수인 주민들이었다. 이 사람은 낮에 시위대가 백골단에 쫓겨 여기저기 흩어지면 노동자들이 숨어 있는 곳을 백골단에 알려주어 여러 사람이 백골단에게 죽도록 얻어터지며 붙잡히게 한 자였다. 주민들은 이런 광경을 목격하고 시위가 끝나자 그를 붙잡아 현해협까지 끌고 온 것이다. …

    4일 저녁 집회 때에도 프락치 색출은 계속되었다. 30대 후반의 사람이 현해협으로 잡혀왔는데 신원을 확인하니 금강개발 총무과 직원이었다. … 이번에는 놀라운 자가 붙잡혀 왔다. … 몸을 뒤져보니 놀랍게도 그는 안기부 요원이었다.[46]

    4일과 5일의 시위는 더욱 격화됐다. 백골단의 과잉진압은 주민들의 공분을 불러일으키며 투쟁에 기름을 붓고 있었다. 현대중공업에서는 대다수 노동자들이 현장을 빠져나와 조업이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대부분의 계열사들도 조업이 불가능한 상태에 이르렀다.

     

    울산의 시위가 민중항쟁의 양상으로 발전해 나가자 정권은 공안·노동 관계부처 차관회의를 열고 필요할 경우 울산에 위수령을 포함한 강력한 공권력을 행사할 것을 결의했다. 치안본부는 추가적인 공권력 투입을 검토했다.

     

    5일 저녁 전경 병력이 민주광장을 점거하고 집회를 봉쇄했다. 노동자, 가족, 주민, 심지어 어린 학생들과 노인들까지 1만여 명이 밤늦게까지 시위를 벌였다. 동구 일대 곳곳에서 경찰과 시위대가 격돌하면서, 많은 사람들이 다치고 연행됐다.

     

    6일 국무총리, 안기부장, 각 부처장관 전원이 참석한 ‘좌익폭력세력 대책회의’가 열렸다. 이른바 ‘좌익폭력세력’에 대해 범정부적 차원에서 총력을 집중하여 정면대응한다는 강경방침을 세우면서, 울산의 시위에 대해서도 강력 대처하겠다고 발표했다.

     

    이와 때를 같이 하여 경찰의 공격이 더욱 강화됐다. 아침부터 민주광장을 전경병력이 완전히 점령해 버리면서, 사실상 투쟁을 이끌던 현해협 야전사령부가 공간을 잃고 거리를 헤매게 됐다. 구심을 잃은 시위대는 우왕좌왕했다. 시위대의 조직력도 현격히 떨어졌다. 시위현장에서의 자발적 지도에 의해 시위가 전개되는 양상으로 변해갔다.

    이날 이후부터 시위는 화정동 자유광장에서 시작되었다. 민주광장 탈환작전이 전개되기도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만세대 민주광장보다 주택가 안쪽에 위치한 화정동 공터를 ‘자유광장’이라 명명하고 끊임없이 시위를 계속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자유광장마저 경찰에 뺏기고 급기야는 가마터가 있는 일산동 공터까지 밀려갔다. 이곳을 ‘평화광장’이라 이름붙인 노동자들은 최후의 일인까지 용감히 싸웠다.[47]

    4월 10일이 넘어가면서 시위는 소강상태에 빠져들었다. 그동안 약 1천 5백여 명의 열성 노동자들이 연행됐다. 나머지 노동자들도 매우 지쳐 있었다. 시위 참가자 수가 급격히 줄어들었다. 간간이 주민들의 항의농성이 전개되곤 했다. 그러나 현대중공업의 조업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노동자들은 출근부에 사인만 하고 회사를 나오거나 작업장 근처에서 옹기종기 모여 앞으로의 일에 대한 얘기만 나누고 있었다.

     

    그동안 시위에 참여하지 않으면서 기회주의적인 태도를 보이던 대의원들이 모여 ‘수습위원회’란 이름으로 정상조업을 결정했다. 그들의 수습방안은 서태수는 물론 이원건 위원장까지 불신임 처리하고 24일 위원장 선거를 위한 조합원 총회를 개최한다는 것이었다.

     

    4월 18일, 128일 파업의 깃발이 공식적으로 내려졌다. 피신해 있던 이원건 파업지도부 위원장이 ‘이제 조업에 들어가자!’는 성명서를 발표하고 현장조합원들이 지켜보는 현대중공업 정문 앞에서 경찰에 자진출두했다.

    고난의 현대중공업 128일 파업투쟁! 87년 온갖 희생을 무릅쓰고 민주노조의 깃발을 움켜쥐고 달려온 현대중공업 노동자들의 자존심이었던 128일 장기파업은 현대의 잔인한 테러와 가공할 공권력의 힘 앞에 무참히 짓밟히면서 또다시 현대노동자들의 가슴 속에 깊은 한을 남기고 그 막을 내리고 있었다.[48]

    힘에 밀린 조합원들은 현장에 복귀할 수밖에 없었다. 이 파업으로 투쟁 지도부 48명과 학생 8명이 구속되고 55명이 해고됐다. 무엇보다 해고자들을 복직시키려고 시작한 싸움인데, 되려 55명이 추가로 해고됐다. 그러나 현장으로 돌아간 조합원들의 가슴 속은 패배감보다는 자신감으로 흘러넘쳤다. 비록 해고자들은 복직시키지 못했지만, 그들이 발견한 것은 해고당한 동료의 복직을 위해 모든 것을 걸고 싸울 태세가 돼 있는 자신들의 자랑스러운 모습이었다. 아, 우리는 결코 외롭지 않구나. 1만 2천 파업대오가 이토록 서로를 끔찍하게 지켜낸다면, 당장의 승패를 떠나 장차 우리가 무엇인들 못할 게 있겠는가!

     

    지도부를 잃은 상태였지만, 조합원 대중은 기가 죽지 않았다. 파업을 거치는 동안 탄생한 다양한 현장모임을 토대로 수백 명의 선진노동자가 기층 활동가로 성장하고 있었다. 파업대오가 갖고 있던 단결력은, 현장 복귀 이후에도 기층 활동가들을 중심으로 강고하게 유지됐다. 파업 기간 조·반장을 통한 자본의 말단 관리체계는 완전히 붕괴했고, 현장 복귀 이후에도 형식만 복구됐을 뿐 도무지 권위가 먹히지 않아 실제로는 작동불능이나 다름없었다. 생산에 심각한 차질이 지속되자, 결국 자본은 조합원 대중을 달래기 위해 어느 정도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몇 달 뒤 수습 지도부와 단체협약을 타결하면서, 현중 자본은 128일 파업 기간의 임금을 파업 참가일수를 기준으로 차등 지급하는 데 동의해야만 했다. 처절한 패배 속에서도 당당히 쟁취한 값진 승리였다.

    128일 투쟁을 두고 누구도 패배라고 말하지 않았다. 그것은 위대한 승리였다. 이러한 128일 파업투쟁은 많은 것을 남겼다.

    그 중에서 가장 소중한 것은 조합원들의 가슴 속에 민주노조의 정당성을 온몸으로 체득하며 이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깨닫게 된 것이었다. 이러한 각성은 현장조직의 건설로 표출되었다. 거의 모든 부서에 ‘○○부서 동지회’가 조직되었다.

    128일 투쟁이 공권력이라는 물리력에 여지없이 무너졌지만 투쟁이 지나간 현장의 분위기는 위축된 것이 아니라 파업 이전보다 훨씬 관리자들의 통제가 발을 못 붙일 정도로 민주화되어 있었다. 각 부서의 내부 문제는 부서원들과 사전 협의 없이는 거의 해결될 수 없었다. 128일 파업 이전에는 현대중공업에는 이렇다 할 현장조직이 없었다. 그러나 장기파업을 끝낸 현장에는 엄청난 잠재력을 지닌 조직들이 폭넓게 형성되면서 민주노조의 소중한 자양분을 제공하고 있었다. …

    해고자 복직문제는 해고기간의 임금이 전액 지급되고 해고기간도 근속연수에 산입 되었으며 전 조합원에게 지급되었던 파업기간 임금도 지급되면서 일단락 되었다. 87년 첫 해고자들을 계열사에 개별 복직시키고 이를 거부한 해고자에 대해서는 복직불가 원칙을 고수했던 것에 비해 획기적인 조치가 아닐 수 없었다.

    임금인상 역시 … 예년에 비해 많은 인상률을 보이며 총회에서 58.04%의 찬성으로 통과되었다.

    또한 송명주 집행부는 서태수 집행부로부터 어이없게도 조합원 자격을 박탈당했던 파업지도부 간부들을 노조원으로 전원 복귀시키고 조합의 명예를 더럽힌 1·8 테러 가담자, 서태수 3대 집행부 임원 및 측근 상집위원들에 대해 조합원 자격을 박탈했다.

    이러한 민주노조로서의 정상화 작업은 송명주 위원장 개인의 능력이 아니라 128일 투쟁의 성과였다. 투쟁 이전보다 수십 배 배가된 조합원들의 의식과 조직력은 사측으로부터 양보안을 쟁취하는 결정적 힘이 되었던 것이다.[49]

    1988~89년 현대중공업 128일 파업은 현대중공업 내부적으로 민주노조가 조합원대중 속에 확고하게 뿌리내리는 계기가 되면서 거대 현대중공업노조를 반석 위에 올려놓았고, 나아가 전국의 민주노조운동이 폭발적으로 성장하는 기폭제가 됐다.

     

    4) 1989년 마창노련의 창원대로 투쟁

     

    1988~89년 민주노조운동의 폭발적 성장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또 하나의 사례는 1989년 3~4월 마창노련의 지역 연대투쟁이었다.

    마창노련 8년의 역사 가운데 1989년만큼 역동적인 투쟁과 승리로 장식된 해는 없었다. 동시에 1989년만큼 구속, 수배, 해고, 폭력테러, 압수수색 등 탄압이 극심한 해도 없었다. 그만큼 1989년은 마창노련에 있어서 승리와 좌절이 명암처럼 엇갈린 한 해였다.[50]

    창립 1주년을 갓 넘어선 마창노련은 1989년 2월 2일 ‘마산·창원 노동법개정 및 임금인상투쟁본부’를 주도적으로 발족시켰다. 1989년 임금투쟁에서 개별 기업의 고립분산성을 극복하고, 중간노조들을 견인하며, 임금협상과 노동법개정운동을 결합하고, 지역 차원에서 공동활동을 하기 위해서였다. 투쟁본부는 총 65개 노조를 포괄했는데, 마창노련 산하 노조가 38개, 바깥에 있는 노조가 27개였다. 투쟁본부 발대식에는 1만 2천 명이라는 기록적인 숫자의 조합원들이 참여했다.

     

    투쟁본부는 임금인상 공동요구안 마련, 쟁의기금 확보, 정당방위대 구성, 조합간부 공동교육 등 임금투쟁 준비활동을 전개했다. 또한 단위노조들을 수출자유지역은 1·2지구, 창원공단은 3·4·5지구로 편제하여 지구별로도 활동하게 하였다. 그 성과가 3월 24일 ‘노조탄압 분쇄 및 89임투 전진대회’에서 여실히 드러났다.

    마창지역 노동자들은 각 노조별로 집단조퇴를 결행하고 출정식을 거행한 후 전원 머리띠를 묶고 대열을 형성하고 나서 구호를 외치면서 행진을 시작하였다. “같이!” 하고 한 간부가 선창하면 조합원들은 “죽자! 죽자! 죽자!”를 세 번 반복하였다. 그때마다 힘차게 허공을 향해 뻗쳐나간 팔뚝에서는 무쇠와 같은 힘이 넘쳤고 이를 본 시민들은 달리는 차 안에서도 손을 흔들어 주었다. 도도하고 거센 파도를 일으키면서 집회장을 향해 전진하는 노동자의 대열은 끝없이 이어졌다. “마창단결! 완전쟁취!” …

    무엇보다 이날 집회의 특별한 감격은 마창노련 역사상 처음으로 열린 전 조합원총회였다. 이승필 마창노련 조직국장(대림자동차노조 위원장)은 힘차게 조합원총회 성원을 보고하였다. “마창노련 전 조합원 3만 2천 명 중 오늘 참석한 조합원은 2만 5천 명입니다. 따라서 전 조합원 2/3 이상의 출석으로 총회가 성립되었음을 공표합니다!” 우리나라 역사상 최대 규모의 지역 노동자 연대집회이자 조합원총회가 힘차게 성사되는 순간이었다. …

    마창노련 최초의 ‘조합원총회’. 1989년 3월 24일 수출지역 후문 옆 삼각공원에서 임투 전진대회를 겸해서 열린 마창노련 조합원총회, 2만 2천여 명의 노동자들이 모인 이날 집회는 마창지역 노동운동 사상 최대 규모의 연대집회이자 조합원총회였다.[51]

    이렇게 마창노련이 힘차게 임투준비를 진행하고 있을 때, 정권과 자본은 3월 16일 서울지하철노조의 파업투쟁을 공권력으로 짓밟은 데 이어 또다시 3월 30일 현대중공업 파업투쟁에 1만 5천 경찰병력을 투입했다. 울산에서는 연일 가두투쟁이 벌어졌고, 서울과 부산 등 전국 각지에서도 현대중공업 탄압에 대항하는 집회와 가두투쟁이 격렬하게 이어졌다. 마창노련 노동자들도 격렬한 항의 투쟁에 나섰다.

    창원 현대정공 조합원들은 3월 30일 출근과 동시에 파업에 돌입하여 가두진출을 저지하는 300여 명의 백골단과 전경에 맞서 격렬한 투석전을 벌였으며 마창 선봉대는 시내 파출소와 현대자동차 영업소, 리바트가구점 등을 타격하였다. ㈜통일노조 등 마창노련 조합원들도 중식시간을 이용, 규탄집회를 갖고 퇴근 뒤 자발적으로 수출지역 후문 앞 노동자민주광장에 2천여 명이 집결하여 폭력경찰의 무자비한 최루탄 난사에도 불구하고 돌과 화염병을 던지며 전투적인 가두투쟁을 벌였다.[52]

    4월 3일과 4월 7일 이틀 동안 수출지역 후문 노동자민주광장과 창원대에서 각각 ‘마산창원 지역 및 현대중공업노조 탄압분쇄 결의대회’가 열렸다. 집회는 “노동운동 탄압하는 노태우정권 타도하자!”는 구호와 함께 가두투쟁으로 발전하여 돌과 화염병, 그리고 최루탄이 난무하는 공방전 속에서 격렬하게 전개되었다.

    또한 4월 9일 일요일, 창원대 민주광장에서는 ‘현대중공업노조 탄압규탄 및 89 임투승리 전진대회’(전국 동시다발)가 1만여 마창 노동자의 참여 속에 열렸다. 집회를 마친 오후 5시부터 학생 등 1천여 노동자들은 파업 중인 부산산기를 향해 가두행진에 나섰고, 경찰차를 불태우며 투석전을 벌이는 등 격렬한 접전을 벌였다. 19명의 연행자가 발생하자 노동자와 학생 등 500여 명은 재집결하여 창원대 봉림관에서 농성을 벌인 끝에 결국 연행자 전원을 석방시켜 냈다.[53]

    4월 10일에는 세신실업 구사대폭력에 맞선, 나중에 하나의 전설로 회자된 매우 인상적인 연대투쟁이 전개됐다.

     

    세신실업(창원공장)노조는 1월 7일부터 단체협약 투쟁에 들어갔다. 회사측이 교섭요구를 묵살하고 2월 18일 공장폐쇄를 단행하자, 노조는 즉각 직장폐쇄 철회를 요구하며 파업농성을 시작했다. 회사측은 2월 21일 구사대를 투입해 폭력사태를 유발하고 정방대원 2명이 구속되게 했다. 이에 마창투본 제3지구는 2월 25일과 3월 9일, 각 2천여 명이 참석한 연대집회를 열고 세신실업노조의 파업투쟁을 격려·지원했다.

     

    그런 상황에서 4월 10일 구사대가 다시 한 번 대규모로 투입됐다. 새벽 5시, 세신실업 조합원 50여 명이 농성장에서 곤히 자고 있을 때 구사대 200여 명이 농성장 건물 옆 철조망을 뚫고 침입하여 삽시간에 농성장을 아비규환으로 만들어버린 것이었다.

    구사대들은 조합원들이 몸을 일으키기도 전에 무조건 닥치는 대로 개 패듯이 패고, 밧줄로 묶고, 콘크리트 바닥에 엎어놓은 채 워커발과 각목으로 구타하였다. 이들이 미친개마냥 휘두르는 몽둥이에 노조간부와 조합원, 그리고 아주머니까지도 피투성이가 되어 바닥에 나뒹굴게 되었다. … 구사대들은 노조사무실 집기들을 깡그리 부수고 서류를 강탈하거나 불태워버렸고, 조합원들을 강제로 끌고 가 식당에 감금하고, 노조간부 10명을 경찰에 넘겨버렸다. …

    세신실업 구사대 난입 소식은 삽시간에 전 마창지역으로 퍼져나갔다. 부산산기에서 지원농성을 하던 마창노련 선봉대를 비롯하여 타코마노조 정방대가 들이닥쳤고, 대원강업 조합원 300여 명은 통근버스에서 이 소식을 듣자마자 버스를 그대로 돌려 달려왔고, 금성사2공장노조는 총회를 하던 중 소식을 듣자마자 조합원 200명이 달려왔다. 그밖에 대림자동차, ㈜통일, 삼미금속, 부산산기노조 등 순식간에 정방대원 700여 명이 속속 세신실업 앞으로 모여들었다.

    현장은 엉망이었다. 현수막은 갈기갈기 찢겨져 있었고, 구사대 몇 명이 사내를 청소하러 왔다갔다 하는 가운데 본관 앞에는 조합원 몇 명이 무릎을 꿇린 채 각목과 쇠파이프로 계속 난타당하고 있었다.

    이를 지켜본 마창 노동자들의 눈에 불이 번쩍였다. “동지여, 내가 있다!” 700여 정방대원들은 대오를 짜고 ‘퍽!’ 하는 신호음(타코마 정방대가 가투 때 포획한 사과탄 5발을 터뜨리며 정문 돌파함)에 맞춰 정문으로 한꺼번에 돌진해 뛰어 들어갔다. 동시에 측면에서는 준비한 화염병과 돌을 던지며 우레와 같은 함성을 지르며 달려들었다. 순식간에 정방대원들은 정문을 돌파하였다.

    당황한 구사대들은 마치 불을 만난 짐승들처럼 이리저리 흩어져 달아났고 경호대가 새총으로 위협사격을 하자 구사대 몇몇은 두려운 나머지 2미터나 되는 가시철망 담을 뛰어넘으면서 손이 찢기는 줄도 모르고 도망치기에 안간힘을 다했다.

    정방대원들이 50여 명의 구사대를 체포하고 현장을 탈환하는 데는 5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식당에 감금되어 있던 농성 조합원들도 즉시 구출되었다.

    붙잡힌 구사대들이 작성한 진술서를 통해 구사대 조직과 배경, 그리고 침투과정이 낱낱이 폭로되어 회사측의 노조말살 음모공작이 백일하에 드러나게 되었다. (세신실업 구사대는 창원공장 홍두식 공장장 외 20명과 양산 41명, 그리고 서울, 대구, 부산, 대전, 광주, 경기, 제주도 등 영업부 소속 사원과 영업소장 등 61명으로 구성되었다. 이들은 4월 8일 부산 애린 유스호스텔에 집결하여 영업부 교육을 빙자한 창원공장 노조 침탈훈련을 받았다. …)

    구사대에게 구타당해 중경상을 당한 세신실업 조합원들을 생각하면 울분을 식히기 어려웠으나 마창노련 정방대는 훌륭하게 자제력을 보여주었다. 구사대는 지휘계통과 폭력행사에 따라 단순 가담자는 풀어주고 악질 구사대와 지휘자는 구분하여 남겨 두었다.

    어느새 회사의 연락을 받고 전경버스 6대가 달려왔다. 전경들은 모두 진압복으로 갈아입고 세신실업 정문 앞에 도열하기 시작했다. 긴장이 감도는 순간이었다. 마창노련 정방대원들은 여성노동자와 일부를 돌려보낸 뒤 정예부대를 앞세워 경찰과 정면 대치하였다.

    의장단은 경찰서장, 시장과 협상을 벌여 경찰에 강제연행된 세신실업노조 간부 10명과 구사대와의 교환문제를 논의한 끝에 우선 노조간부 6명과 구사대 10명과의 첫 번째 교환을 시도하기로 하였다.

    오후 4시 30분경 먼저 구사대를 내보낸 뒤 노조간부를 기다렸으나 경찰에 대한 불신 때문에 초조감과 불안감은 더했다. 마침내 노조간부 6명이 당당하고 늠름하게 돌아왔다. 그러나 돌아온 간부들의 모습은 말이 아니었다. 옷은 피투성이였고 온 몸은 피멍으로 물들었다. 구사대를 석방하고 싶은 마음이 없었으나 간신히 분노를 참고 나머지 구사대 7명을 또다시 교환조건으로 내보냈다. 오후 7시 30분경 김명길 위원장과 사무장 등 간부 4명이 풀려남으로써 연행자 전원이 석방되었다.

    “다른 때 같았으면, 그대로 구속시켜 버렸을 겁니다. 하지만 우리가 ‘그렇게만 해봐라. 동맹파업도 불사하겠다’며 대의원을 소집하고 그랬죠. 창원경찰서장이랑 한참 고민하더니 저녁때 다 풀어줍디다.”

    이 사건을 계기로 마창지역 노동자는 연대투쟁의 위력과 중요성, 그리고 투쟁에 대한 자신감을 확실하게 깨닫게 되었다. 아울러 마창노련 및 마창공투본을 중심으로 한 지역연대투쟁이 크게 활성화되면서 진짜 임투 분위기가 뜨기 시작했다.

    여담이지만 이 사건 이후 마창 노동자는 “구사대에게는 깨지지 않는다”는 ‘불패의 신화’란 자랑스런 명예를 얻은 대신, 회사측 관리자들 사이에서는 “구사대에 끼었다가 귓방망이나 얻어터지고 불명예나 뒤집어쓰느니 가만히 있으면 중간이나 간다”는 소신론이 파다해졌다는 일화가 전해졌다. 경찰은 세신실업 부위원장과 정방대원이 함께 잡혀오자 부위원장은 풀어주면서도 정방대원으로 밝혀진 일반조합원은 오히려 구속할 정도로 정방대를 두려워하고 경계하였다.[54]

    공안합동수사본부를 앞세운 정권의 공격은 계속됐다. 4월 16일에는 단병호 전국투본 본부장이 구속됐다. 22일에는 (창원 ㈜통일 해고자인) 문성현 전국노운협 공동의장이 구속되고 (마창노련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던) 경남노동자협의회(경노협) 사무실이 압수수색을 당했다.

     

    이런 상황에서 마창노련은 “구속자 석방, 공안합수부 해체, 고문경관 처벌”에서 “노태우 정권 퇴진”까지 정치적 요구를 내걸고 폭발적인 가두투쟁을 줄기차게 전개했다. 그 정점에는 4월 하순 일주일 이상 매일 1만 명 이상의 조합원들이 창원을 가로지르는 창원대로 곳곳에서 전투경찰에 맞서 격렬한 가두투쟁을 전개한 ‘창원대로 대투쟁’이 있었다. 투쟁이 전개되는 동안 언론에서는 연일 마산·창원 지역의 투쟁을 대문짝만하게 보도했고, 항간에는 마산·창원 지역에 위수령이 발효될지 모른다는 유언비어가 퍼지기도 했다. 마창노련 8년 역사에서 가장 역동적이고 규모가 큰 투쟁이었다.

     

    그 전초전은 4월 19일 연행된 금성사 1공장 조합원 6명을 구출하기 위해 시작된 연대 가두투쟁이었다. 연행자가 38명까지 늘어났지만, 노동자들이 보여준 폭발적인 가두투쟁에 깜짝 놀란 경찰은 결국 연행자를 모두 석방할 수밖에 없었다.

    파업 8일째인 4월 18일 금성사 1공장 2천 5백여 조합원은 ‘임금인상투쟁 결의대회’와 ‘구자경 럭키금성그룹회장 모의장례식’을 가진 뒤 만장, 상여, 허수아비 등을 앞세우고 회사 밖으로 진출, 회사 주위를 돌며 1시간 동안 평화적인 시위를 벌이면서, “임금 52.3% 인상”의 구호를 외치며 회사측의 성의있는 협상 자세를 촉구했다.

    그런데 KBS(창원)가 금성사 임투 보도과정에서 회사측 보도자료만 인용하여 왜곡보도한 데 항의하여 다음날 4월 19일 금성사 1공장 조합원들이 KBS를 항의방문하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조합원 6명이 경찰에 불법 연행되자 분노한 금성사 1공장 1천 5백여 조합원은 연행자 구출을 위해 즉각 창원경찰서로 진출하였고 최루탄을 쏘며 저지하는 경찰과 투석전을 벌였다. 경찰의 거친 폭력진압에 밀린 금성사 조합원들은 ㈜통일 1공장 안으로 피신하게 되었고, 경찰은 ㈜통일 작업장 안에까지 들어와 최루탄을 쏘며 과잉진압을 하였다. 작업장에 최루탄 냄새가 진동하자 격분한 ㈜통일 조합원들은 전원 작업을 중단하고 뛰쳐나와 돌과 화염병으로 폭력경찰과 맞서 투석전을 벌이면서 싸움은 격화되었다.

    오후 5시경, 파업 중인 금성사 2공장 2천여 조합원과 인근의 효성기계, 대원강업, 루카스, 램트레이딩, 부산산기 등에서 조합원들이 뛰쳐나와 합세, 내동상가 쪽에서 경찰을 공격하며 치열한 접전을 벌였다.

    이렇듯 내동상가 쪽과 창원대로 쪽 양쪽에서 노동자들이 양동작전으로 경찰에 치명적인 타격을 가하자, 당황한 경찰은 다연발탄 철갑차량 2대를 동원하여 앞이 안 보일 정도로 지랄탄을 난사하고, 30여 명의 노동자를 폭력적으로 연행해 갔다.

    투쟁은 시가전을 방불케 하는 전투로 바뀌었고 퇴근하는 노동자들까지 합세하여 불어난 노동자군단은 더욱 사기가 충천하여 전투는 점차 격렬해져 갔다.

    결국 경찰은 노동자들의 격렬한 저항에 밀려 더 이상 진압능력을 상실한 채 오후 8시경 황급히 철수하게 되었다. 승리한 노동자들은 힘찬 진군가를 부르며 파업사업장으로 돌아갔다.

    한편 경찰의 폭력진압 과정에서 광대뼈와 이빨이 부러지고, 넘어진 여성노동자까지 무참히 짓밟혀 10여 명의 부상자가 발생했으나, 금성사 1공장 조합원 6명을 포함한 연행자 38명은 자정 무렵 창원경찰서장과의 협상으로 전원 석방되었다. 이 투쟁을 통해 완전승리를 쟁취한 마창 노동자들은 끝까지 투쟁하면 승리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게 되었다.[55]

    4월 24일은 창원대로 대투쟁이 시작된 날이었다. 이날 마산수출자유지역 후문 노동자민주광장에서는 ‘마창투본 쟁의결의 및 방산특위 발대식’이 열릴 예정이었다. 그러나 경찰은 창원에서 마산으로 넘어가는 모든 길목을 차단하고서 집회 개최 자체를 방해했다. 경찰에 가로막힌 노동자들은 창원대로 전체를 사이에 두고 콜타르 드럼통에 불을 붙여 굴리면서 격렬한 가두투쟁을 벌였다.

    이날 창원대로에서는 발대식에 참석하기 위해 오전 근무를 마치고 집단조퇴한 노동자들이 정문 밖으로 진출하려다가 행진도 시작하기 전에 경찰과 맞닥뜨려야 했다. 경찰은 아예 마산으로 통하는 모든 길목을 차단하고 이에 저항하는 노동자를 향해 엄청난 양의 최루탄을 마구 난사하였다.

    ㈜통일 조합원들은 창원대로 앞에 있는 한국기계연구소 앞까지 나와 싸웠으나 점차 밀리게 되었다. 그때 마침 도로포장용 콜타르 드럼통을 발견한 몇몇 조합원과 정방대원들은 드럼통에 불을 지르자고 제안하였다. 드럼통에 불을 붙여보니 시키먼 연기가 솟아올랐고 좀 있으려니까 ‘펑’ 하는 엄청난 폭발음과 함께 파편조각들이 사방으로 튀어 솟구쳤다. 방심하고 있던 노동자 몇 명이 엄청난 폭발력으로 인해 화상을 입고 병원으로 실려 갔다. 비록 위험부담이 많긴 하지만 경찰병력과 대항하려면 이 정도의 무기가 필요한 것이 사실이었다.

    콜타르 드럼통의 위력적인 폭발력을 실감한 노동자들은 결국 콜타르 드럼통에 불을 붙인 후 굴리기 시작하였다. 대로를 향해 진군하려던 경찰은 ‘펑’ 하는 폭발음과 함께 시커먼 연기가 하늘 위로 구름처럼 솟아오르자 혼비백산하여 도망쳤고, 이후 감히 창원대로 쪽으로 접근할 엄두도 내지 못한 채 건너편 먼발치에서 대치하게 되었다.

    ‘펑펑펑’ 터지는 폭발음과 시커먼 연기와 함께 치솟는 화염기둥, 거기에다 최루탄의 매운 연기, 화염병과 돌의 난무 등으로 창원대로 전체는 화약과 폭탄으로 뒤덮인 그야말로 전쟁터 그 자체였다. 이날 하루 동안 무려 63개의 드럼통이 폭발하였다.

    이로 인해 유사시 활주로로 활용할 수 있게 포장된 10차선 창원대로 전체가 차량통행이 완전 차단되었다. 차에서 내려 걸어 나온 시민들과 일반노동자들까지 합세하자 시위대는 더욱 불어났다.

    창원대로를 가운데 두고 공단지역 쪽으로는 작업복 차림의 노동자군대가, 일반 주거지역에는 전투복 차림의 경찰군대가 대치하면서 군사분계선을 형성하였다. 이따금 공단지역 안쪽에서 구호와 노랫소리가 간간이 들려오면 곧장 ‘따따따따’ 하면서 다연발 최루탄 터지는 소리가 메아리처럼 대답했다.

    한 정방대원은 그날 가장 기억에 남는 건 “돌”이라고 말할 정도로 창원대로는 아스팔트가 아닌 돌길로 화했다. “돌이 무려 무릎 정도까지 쌓여 있었다. 보도블록은 다 깨뿌아 하나도 남은 게 없었고, 달리기라면 누구보다 자신 있었지만 거기서는 아무도 달리지 못했다. 그 정도로 돌을 많이 던졌다.” 얼마나 격렬한 전투였는지를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이 투쟁은 워낙 투쟁범위가 넓고 광범위해서 한 사람이 보고 겪은 것만으로는 전체를 파악하기 어렵다. 창원대로와 그 이면 도로가 다 전투지역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창원공단 전체 노동자가 거리로 쏟아져 나왔을 정도로 많은 인원이 동원되었으며, 시간 역시 오후 1시경부터 시작된 전투가 밤늦게까지 계속되었다. 경찰은 창원대로가 막히자 바둑판처럼 이어진 공단길로 진입을 시도하였으나 모든 공단길은 파업사업장이 막고 있어 진입조차 할 수 없었다. 이로 인해 경찰은 거의 무장해제 상태나 다름이 없었다.

    특히 내동상가 옆 이면도로에는 예비군 훈련 때 쓰는 모래주머니로 방어벽을 쌓아 진지를 구축해 놓았는데, 방어벽은 하나가 아니라 3, 4단계 정도로 구축하여, 1차선에서 싸우다 밀리면 2차선으로, 3차선으로 계속 옮기면서 싸웠다. 도로가 완전 불바다였기 때문에 경찰은 멀리 창원대로 건너편에서 최루탄만 쏘아대곤 했다. ‘따따따따’ 하는 콩 볶듯한 최루탄 소리가 나면 노동자들은 재빨리 방어벽 밑으로 수그려 피했다가 다시 나와 싸우곤 했다. 완전 전쟁터였다.

    또한 기아기공 앞 쪽은 기아기공, 대림자동차, 금성사 1공장 조합원들이 창원대로를 사이에 두고 경찰과 계속 밀고 밀리는 싸움을 하고 있었다. 워낙 불을 많이 질렀기 때문에 경찰은 도로까지 나오지 못하고 있었는데 노동자들은 베어링이나 볼트를 넣어서 쏘는 새총을 사용하여 멀리 있는 전투경찰에게 위협을 가하기도 하였다.

    또한 금성사 1공장에서는 1987년 대투쟁 때 지게차를 동원한 투쟁 경험을 살려 이번에는 경찰의 지랄탄을 막기 위해 방패용 철판을 부착한 지게차를 동원하기도 하였다. 심지어 현대정공에서는 탱크를 몰고 나가자는 의견도 나왔으나 ‘위수령 발동’ 유언비어 및 경찰에게 빌미를 주지 말자는 점 등을 고려하여 포기하였다는 이야기도 들렸다. 창원경찰서장이 직접 창원대로에서 진두지휘를 할 만큼 정권에게는 심각한 상황이었던 것이다.[56]

    24일 노동자들이 창원대로 가두투쟁에서 보여준 폭발적인 힘에 당황한 경찰은 연행자들을 무차별 구타하고 전자봉으로 고문까지 하는 끔찍한 범죄를 저질렀다.

    4월 24일 콜타르 드럼통 폭발로 부상당한 ㈜통일 조합원과 간호하던 노동자가 응급실에 들이닥친 경찰에 의해 강제연행 되었다. 그 과정에서 중상으로 응급실에 누워 있던 ㈜통일노조의 임종호는 탈출하여 연행을 면하였으나(이후 수배됨) 또 다른 조합원은 도망 중 산에서 연행되었다. 또한 금성사 조합원은 집회에 참석하기 위해 도보행진 중 세신실업 앞에서 전경의 불신검문 끝에 몸수색을 받고 새총 및 수상한 무기를 소지했다는 이유로 경찰에 연행되었다.

    이렇게 연행된 조합원들은 경찰차 안에서부터 전경들에게 안전모, 워커발, 경찰봉 등으로 전신을 무수히 구타당한 뒤 또다시 창원경찰서 지하실에 끌려가 9시간여 동안 전신구타는 물론 전자봉 고문까지 당하게 되었다. 경찰은 창원대로 투쟁에서 받은 수모에 대한 보복으로 이같이 구타와 전기고문을 자행하면서 드럼통에 불을 붙인 사람의 이름과 새총 소지 목적 등을 진술하라며 무고한 노동자를 방화범으로 몰고 가려 했다. 그중 4월 26일 구속영장이 발부된 정택구 ㈜통일 조합원은 경찰이 무릎을 꿇게 한 후 턱과 팔목을 책상 위에 올려놓고 길이 1미터가량 되는 경찰 전자봉으로 팔과 허벅지, 어깨 등 온몸을 지져대 고통과 공포를 참다못해 전자봉을 빼앗아 도망 다니기도 했다.

    불구속으로 석방된 금성사 조합원은 악몽 같은 고문과정을 이렇게 털어놨다. “입안에도 전자봉을 넣어 전신을 사시나무 떨게 하듯 하는 전기고문을 수십 회 반복했습니다. 또한 바늘침으로 등과 허벅지 등 전신을 고문하여 육중한 몸이 견디다 못해 지상에서 30센티씩 펄쩍펄쩍 뛰어오르기도 했습니다. 일행 11명 모두 이렇게 고문을 당해야 했습니다.”

    머리 전체와 목과 손을 흰 붕대로 감싼 처참한 사진과 함께, 전자봉 고문 소식이 퍼지자 마산·창원 노동자들의 분노가 폭발했다. 마창투본 5지구 대표자회의는 ‘시가전적 가투’를 조직하기로 결의했다. 26일 오후부터 격렬한 가두투쟁이 다시 시작됐다.

    마창 노동자들은 폭력경찰을 처단하기 위해 창원경찰서로 향했다. 그러나 경찰서에 도착하기도 전에 금성사 앞, ㈜통일 앞, 현대정공 앞에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고 금성사 1, 2공장, ㈜통일, 대림자동차 등의 노동자 1만 명은 ㈜통일, 한국기계연구소 앞, 창원대로에서 구속자 석방을 요구하며 창원경찰서로 진출을 시도하다 이를 저지하는 경찰에 맞서 격렬한 투쟁을 벌였다. 그러나 경찰은 보복이라도 하듯 오후 5시 반 경부터 무차별적으로 최루탄을 난사했고, 백골단을 앞세워 폭력으로 강제해산을 기도하였다.[57]

    27일 오전 창원호텔에서 전기고문당한 조합원들의 기자회견이 열렸다. 이후 이흥석 본부장 등 마창투본 간부들과 정당방위대 40여 명이 민주당 진상조사단 및 기자들과 함께 창원경찰서로 향했다. 정문을 차단하고 민주당 진상조사단만 들여보낸 경찰은 갑자기 백골단 수십 명을 동원해 이흥석 본부장과 네 명의 간부를 집단폭행하며 연행했다. 노동자들의 투쟁은 마창투본 본부장을 구출하기 위한 투쟁으로 더 크게 불타올랐다.

    이흥석 본부장이 백골단에 의해 강제연행되는 한 장의 사진은 전 마창 노동자를 격분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다. 투쟁의 불길은 급속하게 구속자 석방투쟁으로 옮겨 붙었다.

    4월 27일 마창투본 산하 40여 개 노조는 오후 2시경 임시총회, 집단조퇴, 작업거부 등 형태로 전원 가두로 진출하여 살인정권 타도와 구속자 석방을 요구하며 격렬한 투쟁을 벌였다. 구호는 “공안합수부 해체하고 우리 동지 석방하라”, “전기고문 진상규명하고 책임자를 처벌하라”에서 어느새 “살인마 노태우정권 퇴진하라”는 구호로 바뀌었고 투쟁은 격렬해졌다.

    기아기공 등은 가음정동 일대에서, 5지구 금성사 1공장과 대림자동차 조합원 약 7천 명은 금성사 앞에서, 3지구는 ㈜통일 1공장 정문 앞에서, 그리고 효성기계, 금성사 2공장, 금성산전, 대원강업, 세신실업, 삼미금속 노동자 5천여 명은 내동상가 옆 도로를 완전 점거하였고, 현대정공 노동자 800여 명도 효성중공업 입구까지 가두진출하고, 각각 경찰의 최루탄과 다연발탄 철갑차량에 대항하여 돌과 화염병을 던지며 격렬한 전투를 벌였다. 연일 교통이 막힌 창원대로는 앞이 안 보일 정도로 뿌연 최루탄 가스로 가득 찼다.

    한편 수출지역에서는 타코마노조를 중심으로 한 20개 노조 조합원 4천여 명이 수출지역 정문 쪽으로 진출하면서 저지하는 경찰에 맞서 “구속자 석방”, “공안합수부 해체”, “노동쟁의조정법 철폐” 등을 외치며 격렬한 전투를 벌였다. 정방대를 중심으로 가두로 진출한 노동자들은 노동자탄압에 앞장섰던 민정당 을지구 사무실과 수출 역내 파출소를 타격하고, 이번에는 불법구속에 항의하기 위해 검찰청으로 진출하던 중 또다시 경찰의 저지를 받자 남성동파출소와 자산동파출소에 돌과 화염병을 던져 각 파출소를 박살내기도 했다.

    “씨말리자 씨말리자 폭력경찰 씨말리자!”며 폭력경찰에 대항하는 구호를 외치던 노동자의 입에서는 어느새 “노태우정권 타도!”와 “노동자가 앞장서서 민주사회 앞당기자!”는 정권에 대항하는 구호가 터져 나왔다.

    27일 오후 격렬한 가두투쟁이 벌어지고 있던 그 시각에 공안합동수사본부 요원 20여 명이 마창노련 사무실 압수수색에 나섰다. 그들은 사무실뿐 아니라 개인 소지품까지 낱낱이 수색하여 깡그리 압수해 싣고 갔다. 사무실 칠판에 적힌, “타도 노태우, 축출하자 미일외세” 같은 투쟁 구호들도 베껴 갔다.

     

    이날 밤 늦게 마창투본은 세신실업노조 사무실로 장소를 옮겨 산하 40개 노조 대표자들이 참가한 가운데 긴급 대표자회의를 열었다. 마창투본은 본부장의 구속과 사무실 압수수색에 대응하여 28일부터 각 지구 단위노조별로 시차적 동맹파업에 들어갈 것을 결의했다.

    마창투본 전체 대표자회의의 결의에 따라 마창투본 각 노조는 4월 28일 일제히 동맹파업에 들어간 뒤 곧바로 가두투쟁에 돌입하였다.

    금성사 1공장과 대림자동차 노동자 2천 명은 회사 앞 창원대로를 차단하고 경찰과 대치, 돌과 화염병을 던지며 최루탄에 맞서 투쟁하였다. 또한 효성중공업과 ㈜통일 노동자 4천 명은 회사 주변 일대의 도로를 점거하고 항의 농성하였고, 기아기공, 삼미금속 노동자 3천 명은 창원대로에서 고문경찰관 처벌을 요구하며 창원경찰서 쪽으로 나가려다 경찰이 최루탄을 쏘며 저지하자 돌과 화염병을 던지며 격렬하게 투쟁했다.

    또한 수출지역 내 타코마, 중천, 수미다 등 20여 노조에서 노동자 3천 명이 수출지역을 빠져나와 시내 진출을 시도하다가 경찰의 최루탄에 밀려 민주광장에서 연좌농성을 벌였고, 이 중 300여 명이 수출지역 후문 앞 양덕파출소와 관리사무소에 돌을 던져 유리창과 사무실 집기를 부수었다. …

    4월 29일 총파업 이틀째였다. 수출지역 후문 민주광장에서 열린 ‘노동운동 탄압분쇄 및 노태우정권 퇴진 결의대회’에는 한국중공업 3천여 명과 타코마 1천여 명이 참가하는 등 열기를 더했다. 그러나 집회는 지리멸렬한 연설 일변도로 이어졌고 노동자가 당면한 문제들과는 동떨어진 내용으로 일관하여 많은 노동자들이 집회를 이탈하는 결과를 낳았다.[58]

    28일과 29일 마창투본이 전개한 지역 총파업은 중요한 의의를 갖는 투쟁이었다. 특히 마창노련 미가입 사업장까지 포함된 마창투본 공식회의에서 시가전적 전투가 결의됐다는 점에서 그전의 자연발생적 투쟁과는 분명 다른 의미가 있었다. 그러나 그동안 연일 계속된 가두투쟁으로 인한 부상과 피로 때문에 많은 노동자들이 지쳐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정확한 전술과 올바른 선전선동이 조직되지 못하면서 안타깝게도 투쟁력이 소진되고 말았다.

     

    30일에는 세계노동절 기념 노동자대회가 마산수출자유지역 후문 앞 민주광장과 창원 세신실업에서 각각 열릴 예정이었다. 그러나 경찰은 공안합동수사본부에서 유포한 ‘5월 1일 총파업설’을 토대로 집회를 원천봉쇄했다. 마산·창원 지역 노동자들은 노조별 또는 지구별로 집회를 가진 후 가두로 진출하여 저녁까지 경찰에 맞서 치열한 접전을 벌였다.

     

    이 창원대로 대투쟁을 마창투본은 이렇게 기록했다.

    노동운동 탄압분쇄를 위해 4만여 명의 노동자가 연대하여 4월 24일 이후 1주일이 넘는 동안 실질적인 동맹파업을 결행(각 사업장마다 정상조업이 전혀 안 되는 상태)하고 그중 5천~1만여 명이 필사적인 규탄시위를 갖는 일은 대한민국 정부수립 이후 처음 있는 일이다. 아울러 강제납치, 무더기 구속, 수색, 압수, 전기고문, 살인, 폭행, 대대적 공권력 투입 등 현재와 같은 노동운동의 전국적 탄압 또한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다.[59]

    상반기 투쟁 이후 마창노련은 지도부와 간부 60여 명이 구속·수배당하면서 일시적 마비상태에 빠지기도 했다. 이런 상황에서 구속자 가족들도 구속자석방투쟁의 주체로 나섰다. ‘마산·창원 구속자석방 및 수배조치해제를 위한 가족대책위원회’(마창구가위)에 동참한 가족들은 5월 22일부터 25일까지 민주화가족협의회(민가협)와 함께 서울에서 평민당사 농성투쟁을 전개했다. 동시에 5월 23일부터 29일까지 마산에 있는 민주당 강삼재 의원 사무실에서도 점거농성을 벌였다. 원래 마산 농성은 서울 농성 일정에 맞춰 25일 해산할 예정이었으나 27일에서 다시 29일로 두 차례나 연장할 정도로 가족들의 참여와 호응이 높았다.

    가족들은 점거농성 투쟁을 통해 괄목할 만한 의식의 변화와 발전을 이루게 되었다. 구속자가족위원회 이가숙 회장은 남녀가 함께 ‘노동해방’을 위해 싸워나가야 한다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남편의 구속이 삶의 커다란 전환점이 되었다. 남편 직장(현대정공, ㈜통일, 기아기공, 삼미금속 등)을 견학한 뒤 훨씬 더 남편을 잘 이해하게 되었고 앞으로는 가족협의회를 노조의 한 부서로 만들고, 임금협상 때도 가족의 일원으로서 사장에게 직접 생활의 고충을 털어놓을 수 있도록 발전시켰으면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강제로라도 노조에서 교육을 시켜 아내에 대한 고루하고 편협한 생각들을 남편들 머리에서 싹 없애버렸으면 한다.”[60]

    마창노련이 창원대로 대투쟁을 전개하고 있을 때, 다른 지역에서도 노태우 정권의 노동탄압에 맞선 투쟁이 적극적으로 조직됐다.

     

    부천지역에서는 4월 15일 구속자 석방을 요구하는 지역총파업을 전개했다. 4월 9일 부천지역 노동자 2천여 명이 ‘노동운동탄압분쇄 및 부천지역 임금인상 완전쟁취 전진대회’를 개최한 후 행진하는 과정에서 경찰의 침탈로 20여 명이 연행됐다. 이에 10일과 11일 경찰에게 항의투쟁을 전개하던 부천투본 본부장과 상황실장이 연행·구속되고 많은 노동자가 구타를 당해 크게 다쳤다. 12일 저녁 부천지역 노조 간부 2백여 명이 모여 지역총파업을 결의했다. 15일 ‘구속동지 석방과 노조탄압 분쇄’를 내걸고 총파업을 결행한 49개 노조 4천여 명의 조합원은 백골단을 비롯한 경찰에 맞서 치열한 가두투쟁을 전개했다.

     

    서울지역노동조합협의회(서노협)는 4월 14일 ‘제3자 개입금지 위반’으로 연행돼 16일 구속된 단병호 전국투본 본부장 겸 서노협 의장의 석방을 요구하며 20일 서울지역 총파업을 단행했다. 총파업에는 47개 노조가 파업, 총회, 잔업거부 형태로 가담했다. 저녁에 동아건설 창동공장과 구로공단에서 열린 집회에는 3천 5백여 명이 참여했다.

     

    4월 30일 세계노동절(메이데이) 100주년 기념 전국노동자대회가 전국투본 주도로 준비되고, 진행됐다. 1959년 이승만 정권이 노동절을 메이데이에서 대한노총 결성일인 3월 10일로 바꾸고 1963년 박정희 정권이 그 명칭마저 ‘근로자의 날’로 바꿔버리면서, 한국의 노동자들은 오랫동안 노동절을 빼앗긴 상태였다. 1989년 세계노동절 대회를 통해 노동자들은 41년 만에 노동절을 되찾았다. 정부의 원천봉쇄 방침에 맞서, 노동자들은 연세대, 서강대, 한양대, 동국대 등에 분산 집결한 뒤 서울 시내에서 치열한 가두투쟁을 전개했다.

     

    5월 28일에는 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이 결성됐다. 그러나 노태우 정권의 집요한 탄압으로 교사 1만여 명이 노조탈퇴 각서를 써야 했고, 이를 거부한 교사 1,550명이 해직됐다. 전교조는 치열한 투쟁을 통해 1만 4천여 명의 조합원과 3만여 명의 후원회 조직을 사수해 냈다.

     

    11월 12일, 전노협 건설을 위한 전국노동자대회가 열렸다. ‘천만 노동자 총단결로 전노협을 건설하자!’, ‘악법 철폐! 건설 전노협!’의 구호가 전면에 내걸렸다.

     

    1989년 한 해 동안 602명이라는 사상 최대의 구속 노동자가 발생했지만, 폭발적으로 성장하는 노동자투쟁의 기세는 꺾지 못했다.

     

    1989년 지역·업종별 구속 노동자 수

    서울

    인천

    부천

    성남

    경기

    광주

    전북

    청주

    태백

    전교조

    55

    52

    53

    49

    31

    3

    3

    1

    18

    70

    부산

    울산

    마창

    거제

    진주

    대구

    포항

    구미

    30

    61

    95

    25

    2

    28

    24

    2

    602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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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주]

    [1] 고용노동부 통계에 따르면, 1989년 193만 명(조직률 19.8%)으로 정점에 올랐던 조합원 수는 이후 꾸준히 하락해 1998년 140만 명(조직률 12.6%)까지 떨어졌다. 이후 조합원 수가 점진적으로 회복돼 2015년 194만 명으로 26년 만에 1989년 수치를 넘어섰지만, 그 사이 전체 노동자 수가 크게 늘어 조직률은 10.2%에 불과했다. 박근혜 퇴진 촛불항쟁을 경과하며 2016~21년 조합원 수가 큰 폭으로 늘어 2021년 293만 명(조직률 14.2%)으로 새로운 정점을 찍었다.

    [2] 그럼에도 1991년 기준 노동조합 조직률은 300인 이상 사업장의 경우 60.0%, 100~299인 사업장의 경우 26.3%, 50~99인 사업장의 경우 9.5%, 50인 미만 사업장의 경우 0.1%였다.

    [3] 김하경, 1999, 『내 사랑 마창노련』 상권, 60~71쪽.

    [4] 김하경, 1999, 『내 사랑 마창노련』 상권, 194~195쪽.

    [5] 전국노동조합협의회 백서 발간위원회, 2003, 『전노협백서 제1권 1987~1988 - 기나긴 어둠을 찢어버리고』, 논장, 407쪽.

    [6] 전국노동조합협의회 백서 발간위원회, 2003, 『전노협백서 제1권 1987~1988 - 기나긴 어둠을 찢어버리고』, 논장, 454~455쪽.

    [7] 전국노동조합협의회 백서 발간위원회, 2003, 『전노협백서 제1권 1987~1988 - 기나긴 어둠을 찢어버리고』, 논장, 482쪽.

    [8] 노동자뉴스제작단, 2011, <한국노동운동사 100년의 기록>(영상) 3부.

    [9] 전국노동조합협의회 백서 발간위원회, 2003, 『전노협백서 제1권 1987~1988 - 기나긴 어둠을 찢어버리고』, 논장, 478~480쪽.

    [10] 노동운동역사자료실.

    [11] 박용수, 1989, 사진집 『민중의 길』.

    [12] 김하경, 1999, 『내 사랑 마창노련』 상권, 124~128쪽.

    [13] 울산노동정책교육협회, 1995, 『울산지역 노동운동의 역사 (1987~1995)』 1권, 16쪽.

    [14] 전국노동운동단체협의회, 1989, 「전노협을 어떻게 건설할 것인가?」, 『공장에서 전국으로 전진하는 노동운동』, 61~62쪽.

    [15] 이수원, 1994, 『현대그룹 노동운동, 그 격동의 역사』, 대륙, 145~148쪽.

    [16] 이수원, 1994, 『현대그룹 노동운동, 그 격동의 역사』, 대륙, 158~159쪽.

    [17] 현대중공업노동조합, 1999, 현대중공업노동조합사 3부작 ‘미포만의 붉은 해’ 2부 <두 개의 파업>(영상).

    [18] 이수원, 1994, 『현대그룹 노동운동, 그 격동의 역사』, 대륙, 162쪽.

    [19] 이수원, 1994, 『현대그룹 노동운동, 그 격동의 역사』, 대륙, 162쪽.

    [20] 울산노동정책교육협회, 1995, 『울산지역 노동운동의 역사 (1987~1995)』 1권, 17~18쪽.

    [21] 훗날 대통령 노무현의 언행과 이날 그의 연설은 매우 상반된 관점을 보여준다.

    [22] 이수원, 1994, 『현대그룹 노동운동, 그 격동의 역사』, 대륙, 171~172쪽.

    [23] 울산노동정책교육협회, 1995, 『울산지역 노동운동의 역사 (1987~1995)』 1권, 21쪽.

    [24] MBC, 1988/12/28, <노태우 대통령, 고위 당정회의서 민생치안대책 마련 지시>.

    [25] 울산노동정책교육협회, 1995, 『울산지역 노동운동의 역사 (1987~1995)』 1권, 25쪽.

    [26] 전국노동조합협의회 백서 발간위원회, 2003, 『전노협백서 제2권 1989년 - 이제는 하나다! 전노협』, 논장, 139~140쪽.

    [27] 이수원, 1994, 『현대그룹 노동운동, 그 격동의 역사』, 대륙, 175~178쪽.

    [28] 이수원, 1994, 『현대그룹 노동운동, 그 격동의 역사』, 대륙, 186~187쪽.

    [29] 이수원, 1994, 『현대그룹 노동운동, 그 격동의 역사』, 대륙, 189쪽.

    [30] 전국노동조합협의회 백서 발간위원회, 2003, 『전노협백서 제2권 1989년 - 이제는 하나다! 전노협』, 논장, 140쪽.

    [31] 울산노동정책교육협회, 1995, 『울산지역 노동운동의 역사 (1987~1995)』 1권, 37쪽.

    [32] 이수원, 1994, 『현대그룹 노동운동, 그 격동의 역사』, 대륙, 204쪽.

    [33] 이수원, 1994, 『현대그룹 노동운동, 그 격동의 역사』, 대륙, 206~207쪽.

    [34] 울산노동정책교육협회, 1995, 『울산지역 노동운동의 역사 (1987~1995)』 1권, 40쪽.

    [35] 이수원, 1994, 『현대그룹 노동운동, 그 격동의 역사』, 대륙, 219쪽.

    [36] 이수원, 1994, 『현대그룹 노동운동, 그 격동의 역사』, 대륙, 225~226쪽.

    [37] 이수원, 1994, 『현대그룹 노동운동, 그 격동의 역사』, 대륙, 237쪽.

    [38] 이수원, 1994, 『현대그룹 노동운동, 그 격동의 역사』, 대륙, 239쪽.

    [39] 금속노조현대차지부, 2009, 『현자노조 20년사』, 90~91쪽.

    [40] 이수원, 1994, 『현대그룹 노동운동, 그 격동의 역사』, 대륙, 242~243쪽.

    [41] 이수원, 1994, 『현대그룹 노동운동, 그 격동의 역사』, 대륙, 245쪽.

    [42] 이수원, 1994, 『현대그룹 노동운동, 그 격동의 역사』, 대륙, 245쪽.

    [43] 공안합동수사본부는 6월 19일까지 77일 동안 총 317명을 구속하고 126명을 불구속입건했다.

    [44] 노동자뉴스제작단, 2011, <한국노동운동사 100년의 기록>(영상) 3부.

    [45] 이수원, 1994, 『현대그룹 노동운동, 그 격동의 역사』, 대륙, 245~247쪽.

    [46] 이수원, 1994, 『현대그룹 노동운동, 그 격동의 역사』, 대륙, 246~248쪽.

    [47] 이수원, 1994, 『현대그룹 노동운동, 그 격동의 역사』, 대륙, 253쪽.

    [48] 이수원, 1994, 『현대그룹 노동운동, 그 격동의 역사』, 대륙, 255쪽.

    [49] 이수원, 1994, 『현대그룹 노동운동, 그 격동의 역사』, 대륙, 284~286쪽.

    [50] 김하경, 1999, 『내 사랑 마창노련』 상권, 139쪽.

    [51] 김하경, 1999, 『내 사랑 마창노련』 상권, 148~150쪽.

    [52] 김하경, 1999, 『내 사랑 마창노련』 상권, 154쪽.

    [53] 김하경, 1999, 『내 사랑 마창노련』 상권, 154~155쪽.

    [54] 김하경, 1999, 『내 사랑 마창노련』 상권, 156~159쪽.

    [55] 김하경, 1999, 『내 사랑 마창노련』 상권, 163~165쪽.

    [56] 김하경, 1999, 『내 사랑 마창노련』 상권, 167~170쪽.

    [57] 김하경, 1999, 『내 사랑 마창노련』 상권, 172쪽.

    [58] 김하경, 1999, 『내 사랑 마창노련』 상권, 175~176쪽.

    [59] 마산·창원 노동법개정 및 임금인상투쟁본부, 1989/05/15, <마창투본소식> 제6호. (김하경, 1999, 『내 사랑 마창노련』 상권, 178쪽에서 재인용)

    [60] 김하경, 1999, 『내 사랑 마창노련』 상권, 19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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