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6년부터 1988년까지 한국 경제는 저유가·저금리·저달러를 기반으로 유례없는 ‘3저 호황’을 누렸다. 1980년 배럴당 40달러 수준이던 유가가 배럴당 12달러까지 하락했다. 국가와 기업 모두 많은 빚을 안고 있던 상황에서 국채·회사채 금리가 공히 절반 이하로 하락했다. 1985년 1달러 260엔이던 엔-달러화 환율이 1달러 150엔 이하로 하락하면서 일본을 대신해 대미 수출이 급증했다.
그런데 3저 호황의 한복판이던 1987년은 한국 현대사에서 중대한 분수령이 됐다. 6월 민중항쟁으로 전국 곳곳에서 거대한 거리시위가 폭발적으로 터져 나온 끝에 마침내 군사정권을 부분적으로나마 무릎 꿇렸다. 7~9월 노동자대투쟁은 화산처럼 폭발한 노동자들의 파업물결을 통해 병영식 노동통제를 일거에 분쇄하면서 대중적인 노동자운동의 힘찬 출발을 선언했다.

1) 1987년 6월 민중항쟁
1961년 5·16 쿠데타로 시작된 박정희 군사정권이 1979년까지 지속됐다. 10·26으로 찾아왔던 서울의 봄은 5·17 쿠데타로 짓밟혔고 1980년부터 다시 전두환 군사정권이 지속됐다. 박정희에서 전두환으로 이어진 군사정권 27년을 끝장내고 민주주의를 쟁취하고자 하는 민중들의 열망이 들끓고 있었다.
1985년 2·12 총선에서 김영삼과 김대중이 이끄는 신한민주당(신민당)이 사실상 승리한 뒤 대통령 직선제 개헌 운동이 대규모로 조직됐다. 민중운동 세력은 (다양한 목소리를 통해) 대통령 직선제를 넘어 광범한 민주적 기본권을 실현하는 민주헌법 쟁취를 내세웠다. 1986년 7월 국회에서 개헌특위가 만들어졌지만, 집권 민주정의당은 내각제 개헌을 주장하고 신민당은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주장하면서 공전됐다.
군사정권은 집권연장을 획책하며 1986년 하반기부터 더욱 광포한 탄압을 퍼부었다. 마침내 1987년 1월 14일 서울대생 박종철이 치안본부(경찰) 대공분실에서 물고문을 받다가 사망했다. 2월 7일과 3월 3일, 박종철을 추모하고 고문을 규탄하는 집회가 조직됐지만 참가자가 아직 제한적이었다. 군사정권에 대한 분노보다 두려움이 민중들을 억누르고 있었다.
자신감을 가진 전두환은 4월 13일 ‘임기 내 개헌이 불가능하다는 판단’을 내세우며 기존 헌법대로 차기 대통령을 간선제로 선출하겠다는 ‘호헌’을 선언했다. 전두환의 후계자 노태우를 다음 대통령으로 만들기 위한 절차가 본격 시작됐다.
그러나 5월 18일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의 진상조작이 폭로됐다. 가증스러운 군사정권에 대한 치 떨리는 분노가 두려움을 넘어서기 시작했다. 민정당이 노태우를 차기 대통령 후보로 지명하기 위해 6월 10일 전당대회를 예고하자, 같은 날 그에 맞선 대규모 거리시위가 예고됐다. 그런 상황에서 6월 9일 연세대생 이한열이 교문시위 과정에서 최루탄에 맞아 중태에 빠졌다. 민중들의 분노에 더욱 불이 붙었다.
6월 10일 민정당이 전당대회를 열고 있을 때, 전국 22개 도시에서는 ‘박종철 고문살인 은폐 규탄대회 및 호헌철폐 국민대회’가 거리에서 개최됐다. 30여만 명이 참여한 이날 거리시위는 군사정권이 시작된 이후 가장 거대한 규모의 대중투쟁이었다. “파쇼타도! 호헌철폐! 독재타도!” 군사정권 타도와 민주헌법 쟁취가 핵심 요구였다. 시위대가 전투경찰에 적극적으로 맞서 싸우면서 경찰버스, 파출소, 민정당사를 습격했다. 수많은 시민들이 학생시위에 호응하고 동참하면서 수만 명의 경찰병력으로도 시위를 감당하지 못했다. 전투경찰이 거꾸로 시위대에 포위돼 무장해제당하는 상황도 속출했다.
10일 거리시위 이후 15일까지 명동성당 농성이 전개되면서, 서울 도심에서 사무직 노동자들이 대거 가두시위에 동참했다. 전국 곳곳에서 매일 같이 거리시위가 계속됐다. 전투경찰을 밀어내고 안전한 공간이 확보되면 거리에서 즉석 시민토론회들이 열렸고, 대중들은 자기 목소리를 쏟아냈다. 16일부터 22일까지 부산에서 가톨릭센터 농성이 전개됐다. 18일에는 ‘최루탄 추방대회’가 전국 곳곳에서 열렸다. 26일에는 ‘국민평화대행진’이 열려 6월 항쟁 기간 최대 규모를 기록했다.
군사정권은 1980년 광주민중항쟁을 피로써 진압한 것처럼 군대를 동원한 시위진압을 검토했으나, 자칫 사태가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되지 않을까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었다. 미국이 군대 안에서의 반란 가능성을 우려하며 군사정권을 만류했다는 설도 있다. 결국 군사정권은 후퇴했다.
29일 노태우 민정당대표가 대통령 직선제 실시, 시국사범 석방, 김대중 사면복권 등을 담은 이른바 6·29선언을 발표했다. 김영삼과 김대중을 비롯한 자유주의 보수야당은 6·29선언을 환영하고 ‘승리’를 선언했다. 시위를 주도한 학생운동도 지도자 대부분이 자유주의 보수야당을 추종했기 때문에 가두시위가 급격히 중단됐다.
결국 6월 민중항쟁은 껍데기뿐인 ‘민주화’만을 쟁취한 채 멈춰서고 말았다. 완고하던 군사정권을 굴복시켰다는 점에서 민중의 승리이긴 했지만, 내용적으로는 빈약한 절반의 승리일 뿐이었다.
1987년 5월 27일, 노동·농민·빈민·청년·여성·교육 등 각계 대표 80여 명이 참여한 가운데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국본)의 발기인대회 및 결성식이 개최되었다. 이 대회에서 국본은 6월 투쟁의 성격을 ‘개헌투쟁’으로 못박고 ‘4·13 헌법개정 반대조치’ 이후 전개되어 온 ‘민주헌법 쟁취운동’의 대중적 구심체로서의 역할을 담당하기 시작했다. 이어 1987년 6월 10일, ‘고 박종철군 고문살인 은폐조작 규탄 범국민대회 준비위원회’는 ‘고문살인 은폐조작 규탄 및 민주헌법 범국민대회’를 개최함으로써 6월 항쟁의 포문을 열었다.
1987년 6월 10일의 ‘국민대회’는 전국 22개 도시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진행되었는데 가두시위는 물론이고, 연좌농성, 정치집회, 야간시위, 철야농성 투쟁 등 다양한 형태로 진행되었으며, 대부분의 지역에서 광범위한 대중들이 참여함으로써 시위대들이 경찰을 역포위하고 경찰력을 무력화시켜 무장해제 시키는 사태가 발생하기도 하였다. 이로써 사실상 군부정권을 지탱해 온 물리적 힘으로서의 경찰력은 통제를 잃기 시작하였다.
특히, 서울에서는 6월 10일 대회 이후 명동성당을 근거지로 한 철야농성을 6월 15일까지 계속함으로써 6월 항쟁을 지속시켜 나갔다. …
‘국민대회’ 이후 경찰력은 사실상 무력화된 상태에서 그 이전처럼 공격적인 진압보다는 무자비하게 최루탄을 쏘아대어 해산시키는 전술을 선택함으로써 서울의 종로·을지로·광화문 일대는 말할 것도 없고, 전국의 주요 도시는 날마다 최루탄 가스 속에 뒤덮이게 되어 최루탄에 대한 국민들의 불만이 점차 고조되어 갔다. 게다가 6월 9일 연세대에서 시위 중이던 이한열이 최루탄에 맞아 사경을 헤매는 등 최루탄에 의한 부상자가 속출하자 국본은 6월 18일을 ‘최루탄 추방의 날’로 정하고 전국 16개 도시와 247개 지역에서 약 150만여 명 이상이 참여하는 대규모 시위를 펼치기도 했다. …
한편, 서울에서 촉발된 국민저항운동은 호남과 사북탄광의 강원 산간지역에까지 확산되어 갔고, 노동자·농민·도시빈민 등이 서서히 시위대의 중심을 형성하기 시작하였다. 또한 연일 경찰서·관공서·민정당사가 화염병에 의해 파괴되는 등 투쟁양상은 좀 더 적극적이고 과격한 양상을 띠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개최된 6월 26일의 ‘국민평화대행진’에는 택시 노동자와 사무직 노동자들이 조직적으로 참여하였고, 생산직 노동자들도 차츰 개별적으로 참여하기 시작하였다.
이렇게 대중들의 투쟁이 점차 고조되어 가자 6월 25일, 미국은 ‘한국의 최근 사태에 대한 군부개입과 폭력시위 모두를 반대한다’는 기회주의적인 성명을 발표했고, 6월 28일에는 슐츠 미 국무장관이 “그동안의 미국 입장을 정리하여 전달하였으며, 한국정부는 정치적 고립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미국의 제안을 받아들여 중요한 사항에 대한 한국정부의 입장변경이 있을 것”임을 발표했다. 그리하여 전두환 군부파쇼정권은 마지막 정치적 선택으로 ‘6·29 선언’을 발표하기에 이르렀다.[1]
6·29 선언에는 군사파시즘[2]을 끝장내고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데서 필수적인 요소들, 다시 말해 광주학살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 12·12와 5·17 쿠데타 세력에 대한 단죄 그리고 무엇보다 노동자·민중의 광범한 권리 실현이 포함되지 않았다. 선언의 주체가 군사정권이라는 점에서 포함될 수도 없었다. 군사정권의 철권통치는 매우 심대한 타격을 받았지만 그렇다고 타도되거나 해체된 것은 아니었다.
6월 민중항쟁의 최대 수혜자는 김영삼과 김대중으로 대표되는 자유주의 보수야당이었다. 이후 그들은 한발 후퇴한 군사파시즘 세력과 연합하면서 새로운 지배체제의 주역으로 올라섰다. 1987년 12월 직선제로 치러진 대통령 선거에서 자유주의 보수야당을 이끌던 김영삼과 김대중이 분열함으로써 노태우가 35.9%의 낮은 득표를 하고도 당선됐다. 이후 김영삼과 김대중은 권력을 손에 넣기 위해 군사파시즘 세력과 서슴없이 손을 잡았다. 김영삼은 1990년 노태우와 김종필로 대표되는 군사파시즘 세력과 연합하는 ‘3당 합당’으로 민주자유당을 결성한 뒤 1992년 12월 대통령에 당선됐고, 김대중 또한 김종필과 이종찬을 비롯한 군사파시즘 세력 상당수와 손을 잡고 1997년 12월 대통령에 당선됐다.
6월 민중항쟁이 절반의 승리에 그칠 수밖에 없었던 것은 학생운동을 비롯한 민중항쟁 지도부 가운데 다수가 자유주의 보수야당을 추종했기 때문이었다. 1980년 5월 광주 민중항쟁의 혁명적 패배는 1980년대 초반 학생운동을 중심으로 거대한 혁명적 민주주의 운동을 태동시켰으며, 그 가운데 가장 급진적인 부분들은 사회주의 운동으로까지 나아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1960~70년대 민주화 투쟁을 이끌었던 자유주의 보수야당은 학생운동과 민중운동에 여전히 상당한 영향력을 갖고 있었다. 학생운동을 비롯한 민중항쟁의 지도부 다수가 겉으로는 혁명적 민주주의 운동을 내걸고 있었지만, 실제로는 자유주의 보수야당의 영향력 아래에 머무르면서 민중항쟁의 혁명적 발전을 가로막았던 것이다. 당시 학생운동과 민중항쟁의 지도부로서 자유주의 보수야당을 추종하며 민중항쟁의 혁명적 발전을 가로막았던 자들은 대부분 이후 순차적으로 김대중과 김영삼의 정치세력 휘하로 편입되어 전형적인 부르주아 정치인이 됐다.
그러나 비록 절반의 승리였지만, 6월 민중항쟁의 승리가 한국 사회에 미친 영향은 결코 적지 않았다. 어쨌든 승리감에 힘을 얻은 민중들에게서 정치적·경제적·사회적·문화적 측면에서 더 많은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투쟁들이 끊임없이 솟구쳐 올라왔다. 이것은 1987년 6월 이후 20여 년 동안 한국 사회 전반이 역동적인 변화를 거듭하게 하는 아래로부터의 동력으로 작용했다.
1987년 6월 이후 한국 정치의 형식적 민주주의는 제법 확대됐다. 철권통치로 한국 정치를 지배했던 군사파시즘 세력은 1996년 전두환과 노태우가 쿠데타와 광주학살을 이유로 중형을 선고받으면서 사실상 허물어졌다. 2000년대 이후에는 한국 정치의 오랜 특징이던 1인 지배 체제가 무너지면서 자본가정당들 내부에서조차 실질적인 경선이 대세로 자리 잡았다.
또한 조선 시대로부터 이어지는 유교 전통에 덧붙여 군사파시즘을 거치면서 극단화됐던 권위주의 문화가 한국 사회 전반에서 꾸준히 약화됐다. 한국전쟁 이후 극단적인 수준으로 유지되던 레드 콤플렉스[3] 또한 제법 약화됐다. 나아가 여성, 성소수자, 장애인 등 다양한 사회적 억압과 차별에 대한 문제제기와 저항이 사회 전반에서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그러나 국가보안법·안기부(국정원)·보안사(기무사·방첩사) 등의 잔존이 상징하듯이 군사파시즘은 완전히 청산되지 않았고, 형식적인 민주화 속에 스며든 채 언제라도 부활할 수 있는 상태로 지속됐다.
6월 민중항쟁에서는 노동자가 조직된 힘으로서 모습을 드러내지 못했다. 계속되는 거리시위에 많은 노동자들이 참여했지만, 조직되지 않은 개인으로서였다. 6월 민중항쟁에 적극 참여했던 노동자들은 큰 자신감을 얻고 7월부터 전국을 뒤흔든 거센 노동자투쟁의 물결을 만들어냈다. 6월 민중항쟁은 몇십 년 동안 숨죽여 지내던 노동자계급이 역사의 무대로 성큼 뛰어올라 자신의 혁명적 잠재력을 유감없이 보여줄 수 있는 ‘정치적 공간’을 열어주었다.
6월 18일 이후 울산, 부산, 마산, 인천, 성남, 안양 등 노동자 밀집지역의 생산직 노동자들은 시위에 대거 참여하였으며, 운수노동자들 또한 시위를 확대·발전시키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한 예로 경기도 성남시청에서 작성한 「6월 20일~21일 가두시위 종합보고서」에 따르면, 6월 19일에는 연행자 80명 중 근로자 34명(42.5%), 대학생 8명(10%), 막노동자 6명(7.5%)이었으며, 근로자·막노동자·실업자 등이 다수 가담하기 시작하였다. 6월 20일부터 근로자들이 주동이 되었으며, 검거자 66명 중 68.8%가 근로자·막노동자·무직자들이었다.[4]
특히 남부 지방에서 노동자들은 더 큰 자신감을 얻을 수 있었다. 전투경찰이 정권 핵심부를 방어하기 위해 서울에 집중되면서 남부 지방에서는 진압 경찰이 부족해 시위가 더욱 격렬하게 분출했기 때문이다. 6월의 거리에서 상당한 자신감과 용기를 얻은 노동자들은 7월부터 현장을 바꾸기 위한 대투쟁에 본격적으로 나서기 시작했다.
2) 1987년 7·8·9월 노동자대투쟁
6·29 선언이 발표되자 거리에서의 민중항쟁은 빠르게 가라앉았다. 그러나 7월 중화학공업의 중심지 울산에서 시작된 노동자들의 파업 물결이 부산과 창원으로 퍼지더니 마침내 8월에 이르러 전국의 모든 지역으로 확산됐다. 1987년 7월부터 9월까지 세 달 동안 전국적으로 3,337건(하루 평균 40건)의 파업이 일어났으며, 최고조에 이르렀던 8월 29일에는 하루 동안에 무려 743건의 파업이 벌어졌다.
1987년 노동자대투쟁은 한국전쟁으로 궤멸됐다가 1970년부터 서서히 되살아나던 노동자 대중운동이 걷잡을 수 없이 솟아오른 역사적 사건이었다. 파업에 참여한 노동자는 122만여 명에 이르렀는데, 이는 종업원 10명 이상 사업체 노동자 333만여 명의 37%에 해당하는 수치였다. 특히 종업원 1,000명 이상의 대규모 사업장 가운데 75.5%에서 파업이 일어났다. 세 달 동안 일어난 파업 건수는 이전 10년 동안 일어난 전체 파업 건수의 2배를 넘었고, 파업 참가자 수는 이전 10년 동안 전체 참가자 수의 5배였다.
1987년 노동자대투쟁은 1960년대 이래 노동자를 강도 높게 착취해 온 한국 자본주의의 필연적 산물이었다. 1970년 전태일 열사의 분신과 함께 등장한 민주노조운동은 가혹한 탄압과 처절한 패배들을 딛고 끈질기게 명맥을 이으며 성장해 온 끝에 마침내 거대한 대중투쟁으로 찬란히 꽃을 피웠다.
이전 시기의 노동자 투쟁이 주로 경공업(중소기업) 여성 노동자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데 반해, 1987년 노동자대투쟁에서는 중화학공업(대기업) 남성 노동자들의 주도 아래 모든 산업의 노동자들이 투쟁에 나서게 됐다.
거대한 파업물결은 노동조합의 폭발적 증가로 이어졌다. 1987년 6월 이전까지 2,742개의 노조가 있었으나 그 대부분은 노동조합이라기보다 특수한 노무관리 부서에 가까운 이른바 어용노조였다. 그러나 세 달 동안 파업이 일어난 사업장의 55%에서 노조가 결성되어 1,162개의 노조가 새로 만들어지고 기존 어용노조들의 상당수도 민주화되어, 마침내 자주적이고 민주적인 진정한 노동조합, 즉 민주노조가 비로소 대중화되는 시대가 열리게 됐다.
파업은 특정 직종이나 고용 형태에 관계없이 사업장의 모든 노동자가 참여했기 때문에 파업의 결과로 건설된 민주노조에는 사업장 내 모든 노동자가 포함됐다. 따라서 1987년 대파업 물결은 군사정권과 자본가에 맞서, 또한 어용노조에 맞서 민주노조를 건설한 노동자들의 자기조직화 물결이었다고 할 수 있다.
1987년 노동자대투쟁 속에서 노동자들은 노동자 민주주의를 전면에 등장시켰다. 노동조합의 모든 주요 사안을 전체 조합원이 결정했다. 노동조합의 모든 활동을 조합원대중의 참여로 진행했다. 한국노총으로 대표되는 어용노조의 철저한 관료주의는 한국전쟁 이후 아래로부터의 노동자투쟁을 효과적으로 잠재우는 유력한 수단이었다. 하지만 거대한 파업물결 속에서 총회 민주주의를 근간으로 하는 노동자 민주주의의 전면적인 실현은 아래로부터 솟구치는 노동자들의 힘을 폭발적으로 분출시키며 40년 어용노조의 굴레를 한 방에 날려 버렸다.
1987년 노동자대투쟁에서 노동자들이 주로 내건 요구는 인간적 대우, 임금인상, 차별적 임금제도 폐지, 민주노조 인정 등이었다.
1987년 노동자대투쟁에서 벌어진 파업은 대부분 노동법상의 절차를 무시한 ‘불법파업’이었다. 일부 노동자들이 파업을 선동하면서 공장을 순회하면 대다수 노동자들이 호응하면서 자연스럽게 공장이 멈춰 섰다. 노동자들은 본관 앞에 모여 대표를 선출하고 토론을 통해 요구 사항을 채택한 뒤 회사측에 전달했다. 회사측이 요구사항을 수용할 때까지 공장을 계속 점거했다. 교섭이 진행되면 노동자들이 그 건물 앞을 지키고 있었고, 종종 노동자들이 직접 지켜보는 상황에서 교섭이 진행되기도 했다. 노동자들은 규찰대나 선봉대를 조직해서 구사대나 전투경찰·백골단 등과 싸우기도 했다. 때때로 파업 노동자들이 거리로 진출하기도 했다. 전반적으로 파업은 매우 전투적인 양상을 띠었다.
◎ 울산에서 불붙은 1987년 대투쟁
울산은 조선, 자동차, 기계, 석유화학, 화학섬유 부문의 대규모 사업장들, 특히 현대중공업과 현대자동차를 비롯한 현대그룹의 주력 기업들이 밀집해 있는 곳이었다. 살인적인 노동 강도와 열악한 작업조건, 심각한 산업재해 속에서도 울산은 오랫동안 민주노조운동의 무풍지대로 머물러 있었다.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는 노조를 인정할 수 없다”는 현대그룹의 무노조 방침과 머리·복장까지 철저히 규제하는 군사적 노동통제 때문이었다.
그런데 1987년 7월 5일 현대엔진에서 현대 계열사 최초로 노조가 만들어졌다. 노동자대투쟁의 시작을 알리는 봉화가 솟구쳐 오른 것이었다. 현대엔진노조의 결성은 단지 6월 항쟁 이후의 좋은 정세 때문만은 아니었다. 권용목을 비롯한 선진노동자들의 몇 년간에 걸친 피나는 노력이 있었다.
권용목은 1980년대 초에 고적답사회를 꾸려 매주 토요일 1박 2일의 야간 산행을 하면서 동료들 간의 우애를 다졌다. 그러다가 1986년 4월에 6인을 독서회로 따로 조직해 현장문제를 토론하면서 6개월간 노동법을 공부했다. 이들은 1987년 1월에 상여금 차등지급에 항의하는 몸벽보 시위에 500여 명을 조직할 수 있었다. 그리고 4월에는 노사협의회를 이용해 대중적인 임금인상 투쟁을 전개했다.
이런 투쟁성과를 바탕으로 이들은 ‘노조설립추진위’를 비밀리에 꾸리고 2개월 동안 준비를 하다가 6월 항쟁의 여운이 전국을 휘감고 있던 7월 5일 101명이 참가한 노조 결성대회를 성사시켰다. 노동자들은 뜨겁게 환영했다. 다음날 점심시간에 식당에서 열린 노조결성 보고대회에는 1천여 노동자들이 참석했고, 노조 설립 5일 만에 생산직 노동자 1천 500여 명 거의 전원이 노조에 가입했다.
7월 5일, 드디어 운명의 날이 다가왔다. ‘과연 우리가 해낼 수 있을까?’ 까닭 모를 불안감이 온몸을 휘감는 것을 느끼며 현대엔진 노동자들이 울산시 옥교동 모 디스코텍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철저한 보안 덕분으로 오후 3시가 되자 101명의 노동자들이 사고 없이 도착했다. 더 기다릴 필요가 없었다. 한시라도 늦게 되면 그만큼 회사가 정보를 입수할 가능성은 높아지는 것이다. 문을 걸어 잠그고 결성대회가 시작되었다. 홀 중앙에는 ‘경축 현대엔진(주) 노동조합 결성대회’라는 커다란 글씨가 노동자들의 떨리는 가슴을 사정없이 두드리고 있었다.
오종쇄 씨의 결성선언과 애국가 합창 순으로 시작된 결성대회는 위원장 권용목, 부위원장 신환영, 이재홍, 사무국장 사영운, 회계감사 장호철, 정흥룡 등을 임원으로 선출하고 2시간 만에 끝이 났다. 저 골리앗 현대에 맞서 노동자의 인간적 삶을 쟁취하기 위한 험난한 첫발을 내딛는 순간, 노동자들의 두 주먹은 불끈 쥐어져 있었다. …
결성대회를 무사히 마친 추진위 멤버들은 다음 날 보고대회에 사용할 유인물과 농성에 필요한 식량 등을 챙겼다. 이들은 야밤의 어둠을 틈타 미리 현장 안에 들어가기로 한 계획대로 회사 앞에 도착했다. … 출근시간이 되었는데도 회사는 조용했다. … 시청 신고서류접수 소식을 속타게 기다리던 이들에게 접수가 완료되었다는 반가운 소식이 날아든 것은 오전 10시 30분.
점심시간이 다가왔다. 사전에 연락해 둔 까닭에 약 1,000여 명의 노동자들이 보고대회에 참석했다. 사회를 맡은 장호철 회계감사가 전날의 노조결성대회 경과를 보고하자 장내는 떠나갈 듯한 함성으로 뒤덮였다. 권용목 위원장이 연단에 올랐다. 대회장은 흥분의 도가니 바로 그것이었다. 어디 감히 현대에서 노조를 만들 생각을 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우리는 해냈다. 모두의 가슴에 격정의 파도가 몰아치고 얼굴들은 붉게 상기되어 있었다.
“이제 일한 만큼 정당한 대가를 받게 된다는 자부심을 가져도 좋습니다. 상여금 차등제가 없어지고 공해수당을 받는다는 기대를 가져도 좋습니다. 이제 사람답게 살 수 있다는 자부심을 가져도 좋습니다.” … 깊이 잠든 노동자의 침묵을 단박에 깨뜨리는 그의 목소리가 원한 서린 노동자의 가슴에 불을 지피며 미포만에 쩌렁쩌렁 울리고 있었다. …
현대엔진노조의 첫 홍보물은 그들의 노동조합 결성을 이렇게 말하고 있다.
“강도 높은 장시간 노동, 열악한 근로조건, 산업재해 속에서 이기적인 욕망에 사로잡혀 인간을 인간으로 보지 않고 이윤추구의 도구로만 보는 가진 자의 온갖 횡포와 사회적 멸시 속에서 소외된 삶을 살아온 우리 노동자들은 이러한 악조건을 더 이상 방관할 수 없었으며 또한 다음 세대가 우리의 전철을 되밟지 않게 하고 정당한 노동의 대가와 인간성 회복을 위해 전 근로자가 일치단결하여 현대엔진 노동조합을 탄생시켰다.” …
예상했던 사용자측의 대응은 의외로 강하지 않았다. 아니 노동자들이 너무 강력했다고 하는 것이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노동조합은 매일 점심시간을 이용하여 보고집회를 열면서 노동자들의 단결력을 하루가 다르게 고취시켰으며, 시간이 흐를수록 그것은 흔들리지 않는 큰 산이 되어갔다.
사측이 노조임원과 결성 발기인들에 대해 온갖 회유와 협박을 가하며 노조탈퇴를 강요했지만 단 한 사람도 노조를 탈퇴하지 않았으며, 그러한 사측의 행동은 오히려 노동자들을 격분시킬 뿐이었다. 노조설립 5일 만에 조합원 가입이 현장생산직 전원인 1,500명으로 늘어났다.
점심시간의 보고대회는 해방의 공간이었다. 그동안 억눌려왔던 억압의 굴레를 훨훨 벗어던지고 인간답게 살고 싶다는 절규가 현대조선소 담안을 온통 휘젓고 있었다. 1,500여 명의 노동자들이 중공업 쪽을 향해 진군을 시작하자 회사가 발칵 뒤집혔다. “제발 그것만은 참아달라”며 애걸하다시피 하는 사용자들의 모습에서는 이전의 노예사냥꾼의 모습은 어디에도 없었다. 회사는 엔진의 이 파고가 중공업으로 옮겨갈까 봐 안절부절하고 있었다. 현대엔진의 노조결성 바람이 24,000명의 주력기업 현대중공업으로 옮겨지는 날엔 그들의 목이 열 개라도 남아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정주영 회장의 결정이었는지는 확인할 수 없으나 결국 회사측은 노조를 인정하겠다는 태도로 변하였다. 매일 여는 보고대회를 중지하면 노조설립 신고필증이 빨리 나오도록 사측도 힘쓰겠다는 약조를 했다. 드디어 7월 14일, 노심초사하던 노조설립 신고필증이 나왔다. 꿈에도 그리던 노동조합이 드디어 합법적으로 쟁취되는 감격의 날이었다.[5]
87년 노동자대투쟁 이후 비로소 대중운동으로서 본궤도에 오른 한국 노동운동의 비약적 발전이 어디에서 비롯되었는가를 실증적으로 보여준 현대엔진 노동조합 결성과정의 중요한 요소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첫째, 현대엔진 노동자들은 일상투쟁을 통해 역량을 축적하고 역량에 맞는 싸움을 집요하게 전개했으며, 대중투쟁의 기반 위에서 합법투쟁을 정력적으로 벌여왔다는 사실이다.
둘째, 부서별 모임, 취미모임, 친목회, 기별 모임 등 노동현장의 기본적 조직형태를 생산조직의 기본틀 속에서 강력히 조직, 대중의 단결을 강화하고 조직했다는 사실이다.
셋째, 창의적인 단체행동, 즉 몸벽보, 축구대회, 한 식당 이용 등을 통해 대중의 참여와 지지를 이끌어내고 대중 스스로 투쟁의 주인으로 삼았다는 사실이다.
넷째, 사용자의 아성인 노사협의회를 적극 노동자의 단결의 장으로 활용했다는 사실이다.
다섯째, 모든 협상과 상황진행에 대해 노동자들에게 전면적으로 공개하고 부서 단위의 직접토론을 조직하는 민주적 방식에 철저했다는 사실이다.
이렇게 대중투쟁 원칙에 철저한 지도부의 존재는 87년 7·8·9월의 현대 노동자 대투쟁을 끌어내며 현대그룹의 노동운동이 한국 노동운동의 메카로 일약 성장하는 데 결정적인 요인이었다.[6]
7월 15일에는 현대미포조선 노동자들이 노조 결성대회를 갖고 다음 날 보고대회를 열었다. 그런데 노조 설립신고서를 시청에 접수하려는 순간 회사 측이 이를 빼앗아 가버렸다. 비난여론이 빗발쳤고 결국 시청은 3일 만에 노조설립 신고필증을 내주었다. 이 ‘탈취사건’을 계기로 노조 결성이 전국적인 관심사로 떠올랐다. 노동자들의 자신감과 열기가 전국으로 빠르게 확산됐다.
현대엔진과 현대미포조선에서 쓰라린 패배를 맛보았던 현대자본은 이번에는 어용 한국노총 산하 금속노련과 한통속이 되어 21일과 24일 현대중공업과 현대자동차에 어용노조를 결성했다. 그러나 25일, 전날 결성된 어용노조가 결성 보고대회를 갖는 자리에서 현대자동차 노동자들이 분노의 함성을 터뜨렸다. ‘어용노조 물러가라’며 자발적으로 형성된 시위대열이 공장을 한 바퀴 돌자 8천여 명으로 불어났고, 일시에 공장 전체를 마비시켰다. 이들은 폭우가 쏟아지던 상황에서도 농성을 계속하면서 임시총회를 열어 새로운 민주노조 집행부를 세우고 자본으로부터 ‘민주노조를 인정한다’는 각서를 받아냈다.
현대자동차에서도 어용노조가 만들어졌는데 … 이튿날 7월 25일 어용노조 집행부 30여 명이 점심시간을 이용해 본관식당에서 노조결성보고대회를 갖기 위해 현수막을 들고 나오는 것을 보고 분노가 폭발했다. 대다수 노동자들이 어용노조라는 것을 알고 지켜보고 있었는데, 한 노동자가 “어용노조 타도하자”라고 외치며 몸싸움을 벌였다. 이를 지켜보던 많은 노동자들이 가세하여 몸싸움을 벌여서 결국 이들을 쫓아냈다. 1,200여 명으로 불어난 노동자들이 어깨동무와 스크럼을 짜고 본관 앞을 출발해 대형→소형→주·단조→제2공장→공작생산부를 돌면서 시위를 벌이자 시위대는 불어났고 공장은 마비되었다.
오후 3시 15분경. 5~6,000으로 불어난 노동자들이 폭우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마이크와 앰프를 확보하여 농성을 계속하였다. 오후 4시 35분경 전체공장의 작업이 중단된 가운데 파업농성을 계속하면서 임시총회를 열어 민주노조위원장으로 이상범을 선출하였다.
파업농성 중에 자연스럽게 수많은 구호가 나왔는데 ‘한국노총 해체하라’ ‘어용노조위원장 정성규는 사퇴하라’ ‘유급휴가 실시하라’ ‘임금인상 실시하라’ ‘콘베어 속도 늦춰라’ 등의 구호에 노동자들의 속내가 드러나 있다.
이에 놀란 회사는 야간조에게 비상연락망을 통해 휴무를 통고했고 정문에 공고도 붙였다. 본관에서 농성 중이던 노동자들은 야간조와 합치기 위해 정문으로 이동해 정문에서 농성을 이어갔다. 농성 소식을 들은 현대엔진노조 간부와 미포조선노조 간부가 농성장을 찾아와 민주노조를 위해 투쟁하는 현자노동자들에게 격려를 보내는 농성장은 연대의 기운이 넘치면서 활기에 넘쳤다.
오후 7시부터 시작된 어용노조 퇴진문제를 포함한 협상에서 회사가 불성실한 태도를 보이자 순조롭게 진행되던 농성이 오후 10시경, 몇몇 분노한 노동자들에 의해 유리창 몇 장이 깨지고 회사 중역의 승용차를 뒤집어버리는 불상사도 생겼다.
밤 11시경 본관 앞에서 농성을 계속하던 3,000명의 노동자들의 “부사장 나와라”는 항의에 부사장이 마지못해 나왔는데 “노조는 노동자들의 문제이니 당신들이 알아서 해야 한다. 자동차는 계속 만들어야 한다. 만들면서 노조도 만들어야 한다.”고 말해 노동자들의 염장을 지르다 노동자들에게 사과하는 일도 있었다.
협상에는 현대자동차 이상범과 현대엔진 위원장, 현대 미포조선 위원장이 참석한 가운데 진행되었는데 긴 시간 협상 끝에 다음날 0시 20분에 합의서를 겨우 작성했다. 합의 내용의 큰 골자는 이렇다.
△회사는 임원진의 사퇴를 종용하고 민주노조를 인정한다. △현 집행부의 신분을 보장하고 민형사상의 책임을 묻지 않는다. △회사는 어용노조의 사퇴를 받아낸다. △오늘 근무 시간을 인정한다. △1개월 내에 총회를 소집하여 임원을 민주적으로 재선출한다.
합의서를 받아낸 민주노조 진영은 기다리고 있던 노동자에게 합의내용을 설명하고 회사측이 약속을 어기면 7월 29일부터 시작되는 휴가를 거부하고 투쟁하자고 제안하고 농성을 마쳤다. 하지만 회사는 어용집행부를 제대로 설득하지 못해 몇 차례 협상이 결렬되는 우여곡절 끝에 7월 28일 04시에 어용노조집행부의 사퇴서를 받아내면서 마무리되었다.[7]
현대중공업에서는 노조결성을 준비해 오던 노동자들이 어용노조 설립 소식을 듣고 ‘현대중공업노조 개편대책위원회’를 결성했다. 대책위는 25일 중식시간에 노조의 어용성을 묻는 서명을 실시하여 3천 125명의 서명을 받아냈다. 28일 대책위 주도 아래 1만 7천여 노동자들이 어용노조 퇴진과 임금인상을 요구하며 파업을 단행했다. 29일부터는 2만여 노동자들로 파업대오가 확대됐다. 31일 대책위와 회사 간에 협상이 일차 타결돼 상여금 차등제 폐지, 하도급 직영화, 4일간의 파업에 대한 민형사상 면책 등을 쟁취했으나, 임금인상에 대해서는 민주적인 집행부가 정식 구성된 뒤로 미뤄졌다.
27일 밤, … 대책위원들이 정병모 씨의 집으로 속속 모여들어 내일의 결전을 위해 준비물을 챙겼다. … 조마조마한 마음을 다잡고 28일의 새벽 출근길을 향했다. 온몸에 플랭카드를 칭칭 감고 여기저기 유인물을 숨긴 채 드디어 정문 앞에 당도했다. 사전의 계획대로 3개 정문 바로 안쪽에서 플랭카드를 펼치고 목이 터져라 외치기 시작했다. “어용노조 물러가라”, “임금 인상하라”, “상여금 차등지급 철폐하라.”
아! 그런데 어찌된 일인가. 일거에 합세해야 될 동료들이 힐끗힐끗 눈치만 보며 그들을 지나치고 있지 않은가. 대책위원들의 뇌리에 순간적으로 ‘끝장이다’라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그러나 그것은 오판이었다. 대책위원들이 방향을 틀어 현장 안으로 플랭카드를 앞세우고 걸어나가자 삽시간에 노동자들이 대열에 합세하기 시작했다. 몇 분 만에 수천 명으로 불어난 대열은 다시 돌이킬 수 없는 노도로 변했다. 선두에 선 대책위원들의 눈가에 감격의 눈물이 맺혔다.
3개 정문에서 모여들기 시작한 노동자들의 대열은 1만 명을 넘어섰다. 자연스럽게 사내행진이 시작되었다. 거대한 노동자 대열이 한을 품고 죽어간 동료들의 원혼을 달래기라도 하듯 굴종의 작업장 원한 서린 곳곳을 돌았다. 사내행진을 마친 노동자들은 운동장에 집결했다. 이미 17,000명이 넘는 노동자들이 운집했다. 그들은 죽어간 동료들을 위한 묵념을 빼놓지 않았다. …
한순간에 터져 나온 노동자들의 분노를 식힐 필요를 느낀 회사는 대책위와의 협상을 통해 몇 가지 사항에 합의했다. 28일의 합의사항은 다음과 같다.
“1. 오늘 발생된 모든 사태에 대한 책임을 묻지 않는다.
2. 이 보고대회에 대한 관계당국(경찰서, 보안대)은 절대 개입을 금한다.
3. 오늘 집회시간을 근무시간으로 인정한다.
4. 현 노조의 신고필증은 울산시에서 금일(28일) 오전 11시에 조합장과 회사측에 발송했다고 하니 접수 즉시 현 대책위원회에 준다.
5. 현 대책위원회 임원(11명)은 새로운 집행부를 구성하고 제반 업무를 보도록 한다.”
그러나 한번 움직이기 시작한 군중은 그동안 억눌려왔던 한을 풀기라도 하듯이 격동하기 시작했다. 전날의 합의는 그들의 기대에 턱없이 부족한 것이었다. 미흡한 합의사항에 불만을 품은 노동자들이 지도부의 지침이 없었는데도 불구하고 2만여 명이 출근과 동시에 운동장에 집결했다. 한번 움직이기 시작한 노동자들은 스스로의 동력에 의해 거침없이 흐르기 시작했다. … 노동자들은 어용노조 퇴진은 기정사실화하고 한발 더 나아가 임금인상을 강력히 요구하고 있었다. …
2만여 노동자들이 임금인상 25%를 내걸고 땡볕 운동장에서 불을 뿜고 있었다. 대책위와 회사 간에 협상이 재개되었다. 대책위는 임금 및 상여금 차등제 철폐를 포함한 17개 항의 요구조건을 제시했다. 두 차례의 연속된 협상은 부수적인 10개 항에는 쉽게 합의했으나 임금과 상여금차등제 문제에는 이견이 좁혀지지 않았다. 다음날 회사는 이춘림 회장의 명의로 배포된 유인물을 통해 노동자의 요구사항을 다음과 같이 수용한다고 발표하였다.
“… 6. 하도급제는 현재도 직영화시키고 있으나 남은 부분도 점차 직영화한다. …
* 임금조정 문제에 관해서는 앞으로 결성될 민주노조와 단체협약을 체결하는 과정에서 노조대표자와 진지한 대화를 통하여 결정토록 한다.
* 인사고과 철폐문제는 등급단계를 완화하는 등 제도적으로 보완 개선해 나간다.”
협상이 난항을 겪자, 30일에도 2만 노동자들이 변함없이 운동장에 집결하여 파업농성을 계속했고, 대책위는 다음과 같은 내용의 경과보고 유인물을 통해 입장을 천명하고 무기한 단식농성에 돌입하였다.
“현중노조 개편대책위 경과보고
7월 28일(화)부터 뜨겁게 달아오른 민주노조의 열망이 전 노동자의 피끓는 함성으로 천지를 뒤흔든다. … 29일 19시 1차 협상에 들어갔으나 결렬되고 22시 2차 협상에서도 시간을 두고 해결하자는 회사측의 요구로 끝내 합의에 이르지 못하였다. 이에 본 대책위원회에서는 전 노동자의 소원이 이루어지는 날까지 집회를 계속할 것이며 대책위원 전원은 무기한 단식투쟁에 들어갈 것을 천명하는 바이다 …”
이제 투쟁은 전면전 양상으로 치닫고 있었다. 다시 ‘시작하는 마음’으로 전열을 가다듬은 노동자들의 대오는 어느덧 사무직과 여사원들마저 동참하고 있었다. 확대일로의 사태에 심각성을 느꼈는지 회사가 협상에 적극성을 띠고 나왔다. 31일 11인 대책위 전원과 회사측 회장 이하 10명의 중역들이 협상테이블에 마주 앉았다. 이 자리에서 진일보된 합의가 이루어졌다.
“1. 연말상여금 차등지급제를 없앤다.
2. 임금인상에 대하여(전 종업원)
1) 실시시기 : 1987년 9월 1일 (9월분 급료)
2) 인상률 : 현중노조 설립이 정식으로 구성된 후 상호 결정한다.
3. 현중노조를 가장 민주적인 방식에 따라 새 집행부를 구성하기 위한 특별위원회를 둔다. …
4. 단 금일(31일)의 집회를 본 합의 후 16시까지 종료하고 향후 이와 유사한 집회가 재발한 경우에는 상기 합의사항 및 7월 29일의 이춘림 회장이 약속한 10개 사항은 무효이며 단위 부서별 소규모 집회는 특별위원회가 구성될 때까지 현 대책위원회가 막는다.
5. 이번 4일간의 집회에 관련된 모든 사람에게는 민·형사상의 책임을 묻지 않는다.”
… 노동자들은 ‘마음속에 무엇인가 허전함’을 떨치지 못하고 일단 대책위의 조업방침에 따랐다. 그러나 내면에는 미흡한 합의에 대한 불만이 충만해 … 있었다.
민주노조 건설과 파업의 불길은 울산 현대 계열사 전체로, 울산지역 전체로 번져갔다. 26일 현대중전기노조가 건설됐다. 27일 태광산업과 동양나일론[훗날 효성] 노동자들이 파업에 나섰다. 30일 현대중공업과 현대중전기 노동자들이 연합 가두시위를 벌였다. 31일 이후 6개 버스업체 노동자들이 파업을 벌였다. 8월 1일 현대정공과 현대종합목재에 노조가 건설됐다. 8월 초 석유화학단지와 온산공단으로 파업농성이 확산됐다.
현대계열사 가운데 가장 열악한 노동조건에 허덕이던 현대정공 노동자들은 가장 폭발적으로 투쟁을 전개했다. 1천 200여 현대정공 노동자들은 붉은 페인트로 ‘민주노조 결성’이라고 쓴 회사버스를 타고 시가지를 누볐다. 사무실의 유리창을 박살내고 거리로 나아가 전투경찰에 맞서 간선도로를 4개의 컨테이너로 차단하고 시위를 전개했다. 파업파괴자들에 대해서 단호하게 응징했다. 요구사항을 민주적으로 토론해서 결정했다.
현대중공업에서는 조업재개 후 회사의 민주노조 보장 약속이 유야무야 되려 하자 6일 울산을 방문한 정주영 회장을 운동장으로 끌어냈지만 확답을 듣지 못했다. 7일 회사는 전면 휴업조치를 단행했고, 정주영은 ‘외부 세력’을 들먹이며 대책위와 대화 단절을 선언했다. 대책위는 노동자 스스로의 힘으로 민주노조를 건설하기로 방향을 잡았다.
8월 1일부터 정상조업에 들어간 현장은 그러나 ‘정상’일 수 없었다. 모든 노동자들이 민주노조 탄생을 갈망하며 약속된 회사의 후속조치를 기다리고 있는데도 회사는 아무런 움직임도 보이질 않았다. 약속이 기만일 가능성이 높아가고 있었다.
술렁이는 현장 분위기가 무르익어갈 즈음인 8월 6일, 정주영 회장이 울산에 내려왔다. 6일 오전, 체육관에 조장급 이상의 관리자들을 모아놓고 정 회장의 훈시가 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대책위는 정 회장과의 담판을 시도하기로 하고 집회를 열었다. 유야무야 안개에 싸여가는 회사의 민주노조 보장 약속을 현실화시키기 위해서 정 회장과의 담판이 더 빠른 길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정 회장이 훈시하고 있는 체육관 주위를 500여 명의 노동자들이 에워싸고 “임금 25% 인상, 어용노조 퇴진” 등을 외치며 농성을 벌였다. 이 광경을 목격한 정 회장이 “11명도 감당 못하느냐”며 격노하면서 후문으로 빠져나가려 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노동자들에게 저지당했다. 현대왕국의 절대군주 정주영 회장과 현대노동자들의 숙명적인 만남이 팽팽한 긴장감 속에 이루어지고 있었다.
노동자들은 관리자만 만날 것이 아니라 직접 배를 만들고 현대를 국내 최대기업으로 키워온 현장 노동자들 앞에서 당당히 입장을 밝힐 것을 요구했다. 어느새 주위에는 2만여 노동자들이 운집해 있었다. 노동자들은 운동장으로 향하는 방향으로 길게 길을 터놓고 그룹총수의 결단을 촉구했다. “회장님 운동장으로 가십시오! 회장님의 분명한 입장을 듣고 싶습니다.” 그러나 그는 좀체로 움직이려 하지 않았다. …
이때 누군가 정 회장을 향해 흙을 뿌렸다. 마치 정 회장의 눈에 흙이 들어가게 만들어 민주노조를 인정하게 만들겠다는 심정으로! 상황이 다급해져 가는 것을 깨달았는지 무려 1시간의 실갱이 끝에 그가 서서히 운동장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운동장으로 향하던 정주영 회장도, 2만 노동자들도 대조립공장 벽에 커다랗게 박혀 있는 글귀를 읽었다. ‘회사가 잘 되는 것이 나라가 잘 되는 길이며 나라가 잘 되는 것이 우리가 잘 될 수 있는 길이다.’ 현대 노동자들이 15년 동안 매일같이 보아온 이 글귀가 오늘따라 가슴에 한이 되어 박혀온다. 허허뻘밭 백만 평의 대지에 조선소가 들어선 이래 회사는 얼마나 성장했는가. 중화학공업의 선두주자로 일취월장 성장한 회사로 말미암아 나라는 또 얼마나 크게 성장했는가. 그런데 노동자들은 어떠한가. 잘 되었는가? 그것은 정녕 ‘잘 될 수 있는’ 가능성에 불과하지 않는가. 자고 나면 누군가 탱크 안에서 죽어갔다는 끔찍한 소식에 치를 떨어야 했던 나날이 지금도 계속되고 있지 않은가.
그러나 노동자들은 이 말을 끝까지 믿고 싶었다. 그래서 운동장에 모인 2만 노동자들은 힘차게 현대사가를 부르고 애국가도 불렀다.
연단에 올라선 정 회장은 “세계에서 가장 훌륭한 민주노조를 만드는 것이 여러분과 회사의 공동 목표”라고 호언하며 “그러나 합법성 있는 노조와 대화할 것임을 잊지 말라”고 천명하고 급하게 운동장을 빠져 나갔다. 담판은 이렇게 소득 없이 끝났다.
현대왕국을 맨손으로 건설한 살아있는 신화 그룹 총수를 운동장까지 모신 대가는 엄청난 것이었다. 이미 계획된 수순이었는지도 몰랐다. 오후 4시가 되자 회사는 전면 휴업조치를 단행했다. 이어 다음날인 8월 7일에는 정주영 회장이 서울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현대중공업 사태가 ‘외부 불순세력’의 조종을 받고 있다고 매도하면서 대책위와는 절대 대화하지 않겠다는 강경태도로 돌변했다.
…
전면휴업을 내린 회사는 대책위와 전혀 대화할 태도를 보이지 않았다. 이제 대책위가 선택할 길은 오직 한 가지뿐이었다. “스스로의 힘으로 건설하자.” … 전열을 가다듬고 8월 14일 총선을 결정했다.[8]
8월 14일 현대중공업 노동자 1만 5천여 명이 임시총회를 갖고 어용 집행부를 99%의 불신임으로 몰아내고 직접 선거로 민주노조를 세웠다.
14일의 총선은 회사도 놀랄 만큼 질서정연하게 치러졌다. 사측이 불법집회라며 투표장인 운동장 입구에 포크레인과 관리자들을 동원하여 바리케이드를 쳤지만, 민주노조에 대한 노동자들의 열망 앞에 허망하게 무너졌다. 총선은 장대비 속에서도 투표장을 여러 번 옮기면서 열화와 같은 참여 속에 진행되었다. 비난의 표적 권오성 집행부를 99%의 찬성으로 불신임시키고 위원장 간선제의 노조규약을 직선제로 개정하였다.
이어 진행된 위원장 선거는 그동안 헌신적으로 투쟁을 이끌어온 11인 대책위 위원들이 출마를 포기한 상태에서 치러졌다. 대책위는 출범 당시 어용진영의 ‘위원장 야심에 불타는 작자’들이란 악의적 매도를 불식시키고 노동자들의 단결을 도모하기 위해 위원장 불출마 선언을 한 바 있었기 때문에 이 확약을 굳건히 지키는 대신 대책위와 함께 열심히 투쟁하던 이형건 씨를 위원장 후보로 추천, 당당히 당선시켰다.[9]
자본가들의 번영을 상징하던 공업도시 울산은 이제 노동자들의 투쟁을 상징하는 도시로 탈바꿈해 갔다.
◎ 부산에서 불붙은 1987년 대투쟁
7월 중순에 벌어진 동아건설과 풍영 노동자들의 파업농성은 부산지역 노동자투쟁의 전초전이었다. 25일 시작된 대한조선공사[훗날 한진중공업] 노동자들의 투쟁, 그리고 28일 시작된 국제상사의 나이 어린 여성노동자들의 투쟁은 부산의 공장지대를 투쟁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다. 현대엔진에서처럼 대한조선공사에서도 선진노동자들이 있었고, 1987년 투쟁의 불길을 지피는 예열 과정이 있었다.
박창수는 1986년 여름 ‘우리는 개밥을 먹을 수 없다’는 내용의 유인물을 안전모 속에 숨기고 들어가 공장에 뿌리고 ‘도시락 거부투쟁’을 주도했다. 나흘간 벌인 이 투쟁으로 대한조선공사 노동자들은 최초의 승리를 맛보았다.[10] 김진숙은 고등학교를 다니다가 그만두고 버스안내양을 거쳐 고무공장과 신발공장을 전전하다가 사내 직업훈련소를 거쳐 용접공으로 입사했다. 김진숙은 야학을 통해 민주노조를 알고 1987년 3월 ‘조공 노동자신문’이라는 필사본 유인물을 두 차례 만들어 탈의실 등에 뿌렸다가 발각돼 다른 3명의 동료와 함께 해고당했다. 그러나 현장 노동자들은 유인물에 실린 내용을 서로 이야기하며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해고자들의 지속적인 투쟁은 노동자들을 뜨겁게 달구어 결국 1987년 7월의 폭발적 투쟁을 이끌어냈다.
마침내 내 운명의 기수를 ‘노동해방’으로 돌려놓은 한진중공업(당시 대한조선공사)의 용접공 생활이 1981년 7월 1일부터 시작된다. 용접불똥에 군데군데 타 들어간 작업복에 누런 테이프를 붙여 넝마가 된 누더기를 걸친 스물둘의 내 청춘도 산재에 작업에 그렇게 누더기가 되어가고 있었다. …
그러다 마침내 1984년쯤 근로야학이라는 델 찾아가게 되고, … 나한테 절실했던 영어단어나 수학공식보다는 근로기준법이 어떠니 노조가 어떠니 하는 일에 더 열을 올리던 … 강학 하나가 책 한 권을 건네줬다. 진숙 씨가 읽어보면 참 많은 도움이 될 거라면서. 사실 내 이름 뒤에 ‘씨’ 자를 붙여서 불러준 건 야학에서가 처음이었고 나한테 존댓말을 해 주는 최초의 사람들이 야학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야학을 의미 있게 만드는 경이로운 경험이었다.
『어느 청년 노동자의 삶과 죽음 : 전태일 평전』이라는 책이었다. … 그 책을 끝내 들추지 말았어야 했을까.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 난 처음으로 스스로에게 부끄럽다는 생각을 했다. 다른 누구도 아닌 나 자신에게 부끄러워 꺼이꺼이 지리산 계곡처럼 울었다.
가슴에 큰 산 하나가 들어앉아 그 산에서 돌덩이가 와르르 쏟아져 양심에 돌팔매질을 해대는 그런 느낌이었다. 내가 살아온 삶과 별로 다르지 않은 삶을 산 사람. 그러나 그 삶을 피하거나 외면하지 않고 온몸으로 끌어안고 뒹굴었던 사람.
난 뭘까. 그의 삶에 비한다면 내 삶은 뭘까. … 나와 함께 일하고 나와 같이 뒹굴며 그러나 끝내 내가 되지 못하고, 내가 그들이 되지도 못한 채 흘러갔던 수많은 아이들. 그리고 지금 나와 함께 뒹구는 아무 데서나 오줌 누고 욕을 달아야만 말이 되는 이 아저씨들.
세상을 새롭게 보게 되었다. 내가 곧 그들이라는 사실이 이제 더 이상 부끄럽지도 치욕스럽지도 않았다. 같이 살아야 된다는 생각. 내가 달라져야 그들이 달라진다는 생각. 그들이 딛고 선 땅이 변해야 내가 딛고 선 땅도 변한다는 생각.
눈물은 곧 다짐이 되었고 가슴 벅찬 환희가 되었다. 인간이 참 고귀한 존재라는 생각이 처음으로 들었다.[11]
조선공사 노동자들은 처음부터 거리로 진출했다. 1천 500여 노동자들은 태종로 거리를 완전히 차단하고 노동조건 개선, 어용노조 퇴진 등 20여 가지의 요구조건을 외쳤다. 경찰과 구사대가 계속 폭력침탈하자 파업자위대를 구성해 맞서 싸웠다. 28일 자본과의 협상이 결렬된 다음에는 3천여 명이 지게차와 물탱크차를 앞세우고 쇠파이프와 쇠망치로 무장한 채 거리시위를 벌였다. 결국 연 300%의 상여금 지급, 어용노조 퇴진 등 요구조건을 관철시켰다.
‘휴가비 100% 확보’를 내걸고 시작된 국제상사 노동자들의 투쟁은 700명의 깡패가 휘두르는 쇠파이프와 각목 앞에 내던져졌다. 학생들과 시민들의 지원에 힘입어 깡패들과 맞서 보기도 했으나, 투쟁 대열은 무자비한 폭력 앞에서 주춤거릴 수밖에 없었고, 투쟁 공간도 회사 운동장에서 기숙사로, 다시 근처 성당으로 밀려나게 됐다. 하지만 국제상사 여성노동자들은 거리시위를 벌이기도 하고 연일 거리집회를 개최함으로써 부산지역 노동자들의 투쟁을 더욱 고무시켰고, 특히 부산에 밀집해 있는 화학, 신발업계 노동자투쟁에 커다란 자극을 주었다.
◎ 마산·창원에서 불붙은 1987년 대투쟁
이미 1980년대 초부터 투쟁 전통을 갖고 있었던 마산·창원 지역 노동자들도 투쟁에 떨쳐 일어섰다. 여기서도 의식적인 활동가들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문성현은 1980년에 영등포청소년직업학교를 거쳐 선반공으로 동양기계에 입사해서 차돌회라는 소모임에서 활동하다가 회사가 1982년 창원으로 이전하여 (주)통일로 합병될 때 창원으로 내려왔다. 문성현은 1983년 말 노조 사무장으로 당선돼 1984년 단협투쟁에서 유급휴일 확대 투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이를 계기로 500여 명에 불과하던 조합원이 2천여 명으로 급속히 불어났다.
자본이 단협 투쟁에 대한 보복으로 문성현을 대학생 출신이라는 이유로 징계하려 하자 조합원 전체가 들고 일어나 징계를 철회시켰다. 노조는 1985년 임금투쟁에서 협상이 한 달 넘게 진행되는 동안 매일 출근시간과 점심시간에 집회를 열며 투쟁을 병행했다. 2천여 명의 조합원들은 마산·창원 지역 최초로 ‘단결’이라고 쓴 머리띠를 두르고 매일 빠짐없이 집회에 참가했다. 이런 투쟁 과정에서 소모임이 늘어나 1987년 초에는 통일에 소모임이 10개 정도 만들어졌다. 이런 굳건한 토대가 있었기에 마산·창원 노동자운동은 1987년 대투쟁에서 울산·부산 노동자운동에 이어 또 하나의 선봉이 될 수 있었다.
울산 현대정공 노동자들의 투쟁에 고무된 창원 현대정공 노동자들이 7월 30일 노조를 결성했다. 같은 날 한국중공업에서는 노동자들이 어용노조 성토대회를 열었다. 31일 효성중공업에서는 500여 노동자들이 농성에 들어가며 어용노조 집행부 퇴진, 상여금 인상 등을 요구했다. 8월 6일과 7일에는 기아기공과 (주)통일의 노동자들이 어용노조를 통한 자본가들의 분열책동을 폭로하면서 농성투쟁을 전개했다.
노동자투쟁을 파괴하려는 자본가들의 음모는 끊이지 않았다. 하지만 노동자들은 규찰대 조직을 비롯해 다양한 방법으로 자본의 음모를 분쇄했다. 대부분의 파괴공작은 오히려 노동자들의 단결을 더욱 강화해 줄 뿐이었다. 특히 통일 노동자들은 ‘해고노동자 복직’을 으뜸 구호로 내세워 지도자를 되찾겠다는 강한 결의를 보여주었으며, ‘민주노조 쟁취 시범업체’라는 구호를 정문에 내걸어 민주노조운동의 선봉에 서겠다는 의지를 분명하게 밝혔다. 실제로 통일 노동자들은 치밀하고 다양한 농성프로그램을 진행해 이 지역 노동자투쟁의 모범이 되었으며, 다른 노동자투쟁들을 적극 지지·지원함으로써 마산·창원 지역 노동자운동을 선두에서 이끌어 나갔다.
회사 안에서만 투쟁하던 노동자들은 8월 11일 금성사 노동자들이 가두시위를 벌인 다음 가두로 진출하기 시작했다. 대림자동차와 창원기화기 노동자들도 가두시위를 벌였고, 풍성전기 노동자들은 8대의 통근버스를 동원해 차량가두시위를 벌였다. 이때부터 창원 노동자들의 연대의식은 더욱 고양됐다. 창원 공단 안의 모든 노동자들은 동지였다. 다른 공장 노동자들의 투쟁에 박수로만 연대의지를 표명했던 노동자들은 이제 폭력경찰에 맞서 같이 싸우며 강철 ‘계급’으로 단련되어갔다.
8월 11일에는 각 사업장에서만 투쟁을 전개하던 노동자 수만 명이 지게차를 앞세우고 창원대로로 뛰쳐나와 돌과 화염병을 던지며 최루탄 속을 돌진하였다.
8월 11일 금성사에서는 철야농성 노동자 중 200여 명이 지게차 25대에 분승하여 공장주변 도로를 돌며 1시간 동안 가두시위를 벌였다.
이에 대림자동차에서도 500여 노동자들이 정문을 박차고 나와 “인간답게 살고 싶다. 생활임금 보장하라”는 현수막을 들고 2시간 동안 가두시위를 벌였고 여기에 창원기화기 300여 노동자들도 가두시위를 전개하고 창원시청 앞에서 연좌농성을 벌였다. 그러자 풍성전기 400여 노동자들도 회사 통근버스 8대에 분승하여 창원 전 지역을 돌며 차량 가두시위를 벌였다.
오후 5시경이 되자 또다시 금성사 노동자 250여 명이 지게차에 분승하여 가두로 진출하였고, 뿌연 최루탄 연기 속에서 노동자들과 경찰과의 격렬한 충돌이 일어나게 되었다. (경찰의 최루탄 난사로 금성사 조합원 이상영이 머리에 부상을 입고 뇌수술을 받는 등 노동자 3명이 크게 다쳤다.)
금성사 노동자들의 가두 진출에 인근의 창원기화기 노동자 200명, 동우정기 노동자 100명, 풍성전기, 오성사, 동환산업 등 노동자들이 동조하면서 박수를 보냈다.[12]
◎ 전국을 투쟁의 불바다로 만든 8월
남부지방에서 집중적으로 타올랐던 투쟁의 불길은 8월 초순을 고비로 전국으로, 노동자가 있는 모든 곳으로 번져 나갔다. 창원공단 금성사 노동자들의 투쟁은 같은 업종의 전자업체가 몰려 있는 구미공단으로 옮겨 붙었으며, 일시에 구미공단의 중심적인 공장들이 투쟁의 불길에 휩싸였다. 특히 독점자본의 각 계열사들이 투쟁에 합류했고, 동종 업종의 노동자들은 경쟁적으로 투쟁의 불꽃을 당겼다.
인천, 서울, 성남 등 수도권지역 노동자들도 비로소 본격적인 투쟁에 나서기 시작했다. 8월 4일 창원공장 대우중공업 노동자들의 파업에 고무된 인천공장 대우중공업 1천 500여 노동자들이 8일 파업투쟁에 나섰고, 이어 인천지역 대우 계열사인 대우자동차, 대우전자 노동자들이 투쟁에 가세했다. 이런 방식으로 남부 중공업지대에서 수도권과 전라도, 충청도, 제주도에 이르기까지 전국에 걸쳐 투쟁이 거세게 확산됐다. 또한 업종별로는 이미 투쟁의 열기로 가득 찬 중화학공업 노동자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여성중심 제조업인 전자, 섬유부문의 노동자들도 투쟁에 떨쳐 일어섰다.
운수노동자들의 투쟁은 8월 7일 전주 택시기사의 총파업을 시발로, 9일에는 광주 시내버스 총파업, 12일에는 전주, 군산, 김제 시내·시외버스 총파업, 14일에는 대전의 버스·택시 총파업이 잇달아 전라도와 충청도 일대를 뒤흔들었다. 또 부산, 포항, 성남, 춘천, 인천 등지의 운수노동자들도 운수노동자 전국 총파업의 기세로 전국을 굽이쳐 대중교통이 거의 마비상태에 이르렀다. 운수업은 공공서비스업이라는 이유로 언론의 집중공격을 받았으나, 운수노동자들은 무임승차와 같은 다양한 투쟁방식을 개발하고 다른 산업노동자들과 연대투쟁을 벌이면서 투쟁의 고삐를 늦추지 않았다.
광산노동자들의 투쟁은 8월에 들어서면서부터 전면화하고 전국으로 확산되기 시작했다. 8월 7일 석탄공사 함백광업소 노동자들의 투쟁을 기점으로 대성탄좌 문경광업소 노동자 1천 400여 명이 파업농성에 들어갔고, 동원탄좌 사북광업소, 석탄공사 도계·장성광업소 등 주요 탄광의 노동자들이 투쟁에 합류했다. 언제나 그렇듯 광산노동자들의 투쟁은 초기부터 격렬한 양상을 보였다. 경찰과 대치한 상태에서도 거리투쟁을 계속 벌였고, 철도와 국도도 여러 번 점거했다. 특히 동원탄좌 사북광업소와 석탄공사 장성광업소 노동자들의 투쟁은 흡사 전투를 방불케 하고 지역 봉기의 맹아를 보여줄 정도로 규모가 컸다.
1980년 4월에 사북 항쟁을 벌였던 광산노동자들은 전두환 군사정권의 폭압에 잠시 움츠렸지만, 자신의 힘을 다시 한 번 유감없이 보여주었다. 과거로부터 배워 일보 전진했다. 요구 측면에서 과거에 주로 제기했던 임금과 상여금 인상 등에서 전근대적 임금제도인 도급제 폐지, 어용노조 퇴진, 위원장 직선제 등으로 한발 더 나아갔다. 투쟁방식도 광업소 내 점거농성에서 거리진출과 철도·도로점거 등으로까지 전진했고, 더 장기간, 더 치열하게 투쟁했다.
바야흐로 전국은 노동자 파업투쟁의 불길에 휩싸였다. 이제 노동자투쟁은 남부지역의 몇몇 대기업에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전국에 걸쳐, 중소규모·대규모 공장을 막론하고 어디서나 머리띠를 두르고 대열을 지어 움직이는 노동자들의 모습을 찾아볼 수 있었다. 한 공장에서 승리의 소식이 들리면 바로 옆 공장으로 투쟁이 번지고, 나아가 그 지역 일대가 투쟁의 불길로 휩싸이게 됐다. 대부분의 노동자들이 ‘바로 지금이 나설 때’임을 직감했고 그것을 실행에 옮겼다.
이렇듯 노동자투쟁은 발전을 거듭해 나가 8월 중순에 이르러서는 하루 평균 쟁의건수가 급증하기 시작했다. 현대그룹 노동자들의 연합가두시위가 본격화된 17일부터 29일까지의 기간에는 전국적으로 하루 평균 150개의 공장에서 새롭게 투쟁이 벌어졌다. 1985, 86년의 각 1년 동안 일어났던 투쟁의 절반 이상이 단 하루 사이에 일어났다. 20일에는 하루 500건, 29일에는 743건이 되면서 노동자투쟁은 절정을 이루었다. 이 보름 동안 노동자들의 투쟁은 지칠 줄 모르고 거세게 타올랐다. 한편 이 기간 400여 개의 노동조합이 새로 결성됐다. 이는 비교적 노동운동이 고양되었던 1984년 한해 250개 노조설립과 비교해도 엄청난 것이었다.
투쟁의 양상은 더욱 폭발적이고 조직적인 형태로 발전해 나갔다. 파업농성 시 규찰대를 조직하고 구사대의 폭력에 대응해 각목과 쇠파이프로 무장하여 투쟁하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투쟁방식이 됐다. 나아가 지게차와 같은 중장비를 앞세우고 가두시위를 벌여 자본가들에게 위력을 과시하고, 협상에서 유리한 고지를 차지하는 것이 점차 일반화돼갔다.
이러한 전투적이고 공격적인 투쟁방식은 예전에는 지역적으로 고립돼 있고 협상 상대인 자본가가 서울에 거주하는 경우가 대부분인 광산지역 노동자들의 투쟁에서 전형적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이번에는 특히 중공업부문 노동자들의 투쟁에서 일반적인 양상으로 나타났다. 거제 대우조선에서는 협상에 무성의한 그룹 측에 맞서 노동자들이 거제도 일부를 장악하고 거리시위를 벌였으며 전투경찰과는 투석으로 맞섰다. 인천에서 경동산업 노동자들은 깡패들로 구성된 구사대를 격파한 다음 수차례에 걸쳐 거리시위에 나서 단결력을 과시하면서 인근 공장 노동자들의 투쟁을 고무했다. 부천의 경원세기 노동자들도 회사 앞 고속도로를 점거하는 등 격렬한 투쟁을 벌임으로써 요구조건을 완전히 쟁취했다.
이 시기에 발생한 파업은 모두 불법파업이었다. “노동위원회가 적법성을 심사한 뒤 일반사업장은 30일, 공익사업장은 40일이 지나야 파업을 할 수 있다”는 규정을 완전히 무시했기 때문이다. 노동자들은 폭발적인 투쟁으로 악법을 날려버렸으며 ‘선파업 후교섭’을 통해 민주노조 건설, 노조 민주화, 생존권을 당당하게 쟁취했다.
이런 투쟁양상은 1980년 광주민중항쟁 이후 노동자들의 계급의식이 꾸준히 발전해왔음을 반영하는 것이었다. 타협이나 소극적인 청원이 아니라 오로지 비타협적인 투쟁을 통해서만 승리할 수 있다는 점을 노동자들은 이미 경험을 통해 자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 울산 현대노동자들의 연합거리시위
노동자투쟁의 거센 불길은 8월 17~18일 현대그룹노동조합협의회(현노협)가 주도했던 현대그룹 노동자들의 연합거리시위에서 절정에 달했다.
8월 들어 단위공장별로 임금협상을 벌이던 현대계열사 노동자대표들은 한결같이 ‘임금 결정은 그룹 차원의 문제’라는 자본의 태도에 부딪혔다. 이에 현대그룹 노동자들은 노동자도 그룹 차원의 노조협의회를 결성해 그룹 차원에서 해결하는 게 효과적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8월 8일 10만 현대그룹 노동자를 대표하는 현노협이 탄생했다.
그러나 현대 자본은 현노협이 불법단체라고 주장하면서 현노협이 제안한 세 차례의 협상에 모두 응하지 않았다. 현대자본의 응답은 16일의 현대중공업 폐쇄, 독신자 숙소 단전·단수 및 식사제공 중단, 17일의 그룹 전체 공장에 대한 무기한 휴업조치였다. 이제 한국 최대 재벌 현대자본과 10만 현대 노동자들의 정면대결은 피할 수 없는 상황이 됐다.
17일 장대비가 쏟아지는 가운데 3~4만에 달하는 현대그룹 노동자들이 현대중공업 운동장에 모였다. 그들은 ‘정주영 회장 화형식’을 가진 뒤, 대형 철구조물을 앞세우고 정문을 나와 길을 가로막는 전투경찰에 맞서 돌을 던지며 싸우다가 남목까지 행진했다.
18일 다시 6만여 노동자와 가족들이 모여 공설운동장까지 5시간에 걸쳐 거리시위를 벌였다. 시위대열 선두에서 오토바이 15대와 마이크를 장치한 1톤 트럭이 대열을 이끌었으며, 그 뒤에는 헬멧, 방진마스크를 착용한 500여 명의 선봉대가 따랐다. 또 샌딩머신, 덤프트럭, 소방차, 지게차 등 중장비 10대가 동원됐다. 6만의 노동자부대는 4Km나 되는 끝도 없이 긴 행렬을 이루며 분노의 행진을 벌였다. 마치 잘 훈련된 노동자군대의 행진연습을 보는 듯했다.
노동자 시위대의 당당한 시가행진 모습은 전국 노동자들에게는 가슴 벅찬 기쁨을, 자본가들에게는 몸서리 처지는 공포를 선사했다. 이런 대부대의 진군은 경찰도 감히 막을 수 없었다. 사태 전개에 경악한 정권은 18일 오후 노동부차관을 현지로 급파했다. 그리고 “현대중공업 이형건 집행부가 회사측과 공식적으로 단체협약에 임할 수 있도록 보장”, “임금인상은 9월 1일까지 타결될 수 있도록 정부가 보장” 등을 서둘러 합의하고 일단 투쟁을 수습했다.
출근시간이 되자 노동자들이 중공업 운동장으로 구름떼처럼 몰려들기 시작했다. 4만 명이 넘는 현대 노동자들이 운동장을 꽉 메우고도 모자라 운동장 주위를 에워쌌다. 전날처럼 정문 앞에서 “시내로!”를 외치며 서성이던 노동자들도 보이질 않았다. 전날의 유인물 사건으로 분위기가 더욱 고양된 때문인지 3,000여 명의 가족들도 운동장으로 열을 지어 들어오자 집회의 열기는 하늘을 찌를 듯 고조되었다. …
지도부는 가두시위의 분명한 원칙을 세웠다. 첫째는 무저항 비폭력 행진, 즉 경찰의 제지로 행진이 막히면 공격하지 말고 그 자리에 주저앉아 연좌시위를 벌이고, 둘째는 질서 있는 평화행진을 하며 대오를 이탈, 질서를 문란케 하는 자는 행진을 파괴하려는 프락치로 간주, 엄단한다는 것이었다. 출정을 앞둔 집회의 마지막 순서는 정주영 회장 및 족벌체제 타도 화형식이었다.
지도부는 어제의 경험을 살려 보다 조직적이고 질서 있는 시위를 위해 본대를 2,000명 단위로 15개 대열로 나누고 사이사이에 질서대원을 배치시키는 한편, 대열의 선두에는 중장비 부대와 방진마스크 및 화이버로 자체 무장한 선봉대를 배치했다. 대열 최선두 중장비 대열 바로 뒤에 의장단 등 각사 노조 위원장들이 섰다.
회사가 오늘의 시위에 대비하여 중장비의 바람을 빼고 키를 회수했지만 노동자들은 솜씨 좋게도 덤프트럭, 소방차, 카고트럭, 지게차, 심지어 샌딩머신까지 끌어내 대열의 선두에 앞세웠다. … 이렇게 4만 가까운 노동자들이 중장비 수십 대를 앞세우고 질서정연하게 거리에 도열하자 노동자들은 사기충천했다. 이 순간, 자본가들은 ‘폭도’로 변한 노동자들의 무질서한 과격투쟁으로 매도하겠지만 그러나 노동자들은 온몸을 휘감는 분노 속에서도 그동안 현대에 빼앗긴 것들과 거꾸로 된 현실을 향해 보다 진지한 모습으로 전진하는 살아있는 인간으로 부활하고픈 강한 열망에 젖어 있었다. …
오전 11시 30분. 드디어 시위대가 거대한 용이 되어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약 4킬로미터의 행진대열이 서서히 인간다운 삶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현대중공업 민주노조 인정”, “임금인상 즉각 실시”, “휴업철회”의 함성이 천지를 흔들고 ‘아리랑목동’의 노래가락이 너울너울 춤을 추면서 4만의 노동자들이 끝이 보이지 않는 대열들 속에서 하늘을 향해 포효하는 장관을 만들고 있었다.
12개사 현대계열사 노동자들이 지나는 연도에는 시민들이 나와 열렬한 박수와 성원을 아끼지 않았다. 물을 떠다주고 수건을 건네주는 등 그들도 하나의 흐름 속에 일부가 되어 행진에 동참하기 시작했다. 이 도도한 흐름을 누가 막을 것인가!
대열의 선두가 남목고개 마루에 이르렀을 때 저만치 4,500여 명의 전경들이 닭장차로 도로를 차단한 채 포진한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대열이 전경과 약 100미터의 거리에 이르렀을 때 지도부가 시위대를 정지시켰다.
100미터를 사이에 두고 경찰과 노동자 시위대가 맞포진하고 정중앙 노상에서 시위대와 경찰 간의 협상이 이루어졌다. 도경국장과 안기부 소장, 그리고 권용목 의장이 고갯마루 대로 한복판에서 대좌했다.
“권 의장 : 경찰병력을 철수하라!
도경국장 : 안 된다. 다시 회사로 철수해 회사 안에서 하라!
권 의장 : 이 상황에서는 대열에 연락하기도 힘들다. 그리고 사람들은 절대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집회를 갖고 해산할 수 있는 명분과 공간을 달라. 병력이 철수하면 편도를 이용하여 평화행진을 한 다음 공설운동장에서 반드시 해산하겠다.
도경국장 : 10분만 기다려 달라.
권 의장 : 좋다. 기다리겠다.”
권 의장은 협상결과를 시위대에 전달하고 결과가 나올 때까지 쉬도록 했다. 그런데 10분이 지나도 도경국장으로부터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시위대는 10분이 지났으니 밀어붙이자고 아우성이었다. 시위대는 고개까지 행진해 오는 동안 더욱 늘어 어느덧 5만 대군을 이루고 있었다. 노동부 등 여러 관계기관에서 중재를 시도했으나 상황은 중재가 필요한 것이 아니었다. 성난 파도처럼 밀려오는 5만 군중의 힘, 그것이 발산될 수 있는 돌파구가 필요할 뿐이었다. 앞에는 전경과 백골단, 뒤에는 성난 시위대, 그 중간 노상에서는 국내외 보도진 수십 명이 취재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뒤에서 밀고 나오겠다고 아우성치는 긴박한 상황의 10여 분이 그렇게 길게 느껴질 수가 없었다.
충돌은 엄청난 사상자만 낼 것이었다. 시위대를 진정시키기 위해 지도부는 목이 터져라 설득하고 밀고 나가려는 시위차량 앞에서 가로막고 드러눕기까지 했다. 하지만 시위대는 그들을 깔아뭉갤 기세로 밀고 나오고 있었다. 참으로 피가 마르는 순간이었다. 중장비 경적 소리가 빵빵거리고 의장단이 “밀고 가려면 우리를 넘어서 가라”는 필사적인 설득의 일분 일분이 흐르고 있었다. 권 의장이 도경국장에게 어떻게 되었는지를 따져 묻자 국장은 “이 사람아! 그것을 내가 결정하나? 높은 데에 알아봐야 될 것이 아닌가”라며 허둥댔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협상이 아니라 담판이 필요했다. 권 의장은 철수요구를 다시 한 번 전하고 가부만을 묻기로 했다. 이 최후통첩이 내려진 5분 후 드디어 ‘높은 곳’에서 재가가 떨어졌다. 도로를 차단했던 전경차들이 방향을 돌리고 전경들이 철수를 서두르기 시작했다. 권 의장이 경찰병력이 철수할 것이라고 발표하자 갑자기 거대한 시위대의 함성이 울려 퍼졌다. 경찰병력이 채 철수하기도 전에 노동자들이 앞으로 밀고 나갔다. 순간적으로 지도부의 통제가 무너졌다. 봇물이 터진 듯 밀고 나가는 노동자들의 눈에는 광채가 빛나고 있었다. 미처 차에 오르지 못한 전경들이 노동자들의 함성에 기겁하고 산으로 내달리고 시위대는 경주라도 하듯이 경찰의 뒤꽁무니를 쫓고 있었다.
시위대는 안전모, 각목, 방진마스크 등 경찰의 공격에 대비해 무장했던 것들을 거추장스럽다는 듯이 길가에 휙휙 날리고 한 걸음이라도 앞서가겠다는 일념으로 내닫고 있었다. 왜 가야 되는지,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지, 그렇게 물밀듯 쏟아져 가는 것이 그들의 목표인 양 앞으로 내달을 뿐이었다. 지도부가 인간 사슬을 하고 막아보았지만 추풍낙엽이었다. 마침내 성내삼거리 평지에 다다르면서 시위대의 걸음이 잦아들고 대열이 질서를 잡기 시작했다.
고갯마루에서 성내삼거리 평지에 이르는 약 10분간의 시간은 지도부와 경호대가 질서를 잃고 쏟아져 내려가는 시위대와 철수하는 경찰과의 충돌을 막기 위해 진땀을 흘린 숨가쁜 시간이었다. …
성내삼거리부터는 왼편에 8km에 이르는 현대자동차 담과 오른편에 염포, 양정동의 주택가를 끼고 4차선의 평탄한 도로가 펼쳐져 있다. 지도부는 방송차량을 선두로 빼서 시위대열을 정비하고 질서를 잡아갔다. 연도의 주민들이 놀라움을 금치 못하며 길가로 나와 시위대를 격려하고 더위에 지친 시위대에게 물과 수건을 건네주는 등 환호하였다. 시위대가 강관, 정공, 자동차를 지날 즈음에는 약 6만여 명으로 불어났다. 시위대는 간간이 휴식을 취하면서 행진을 계속해 단 한 건의 사고도 없이 공설운동장에 이르렀다. 맨 선두의 선봉대열과 맨 마지막 가족부대까지 총 4km의 행렬이 16km의 대장정을 끝내고 공설운동장에 이르렀을 때의 시각은 오후 4시 25분. 중공업을 출발한 지 약 5시간만의 일이었다. …
운동장에 집결한 6만의 노동자들은 완전히 축제의 분위기에 휩싸였다. “정주영은 물러가라”, “현중노조 인정하라”, “임금인상 단행하라.” 노동자들의 요구가 거대한 함성이 되어 울산을 뒤흔들고, 가족들이 나와 부르는 노랫가락은 노동에 지친 노동자들의 시름을 말끔히 씻어주고 있었다. 재주있는 노동자가 나와 솜씨를 보인 즉흥 원맨쇼는 6만 군중을 웃음바다로 만들었다.
고조되어 가는 것과는 별도로 노동부 소장, 안기부 소장 등 관계기관과 막후협상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책임성 있는 현대 측의 관계자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시간이 흘러도 이렇다 할 결과가 나오지 않자 노동자들은 정주영 회장이 직접 내려와 책임 있는 답변을 할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그는 서울에 발이 묶여 있었다.
해결의 실마리는 의외의 곳에서 풀리기 시작했다. 현대그룹의 책임자가 아니라 정부의 책임자가 등장하면서 교섭은 급진전되었다. 한진희 노동부 차관이 비행기를 타고 급파되어 현장에 나타났다. 정부가 직접 중재에 나선 것이다.
실무협상은 권용목 의장과 노동부 소장 사이에 이루어졌다. 협상진행 내용은 중간 중간 한진희 차관에게 보고되었고, 대강의 구두합의가 이루어졌다. 합의내용 발표는 차관이 직접 하기로 합의했다.
권용목 의장은 협상을 하면서 중요하게 두 가지 사항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하나는 당시 전국적으로 어용노조 민주화투쟁이 격화되고 있던 상황을 고려해 정부가 현대측이 부인하고 있는 현대중공업노조를 인정하여 노조민주화 투쟁의 중대한 선례를 남김으로써 어용노조 시비에 돌파구를 여는 것이었으며, 다른 하나는 실질적 사주인 정주영 회장의 경영일선 퇴진을 명백히 함으로써 전문경영인 체제를 현대에 정착시켜 각 단사의 협상력을 높이는 것이었다.
이러한 고려에 의해 차관과의 합의가 이루어져 합의서에 양측이 서명했다. 현대 초유의 정부와 노동자 간의 역사적 합의내용은 다음과 같다.
“합의서
1. 노동부 장관은 현대중공업 이형건 위원장이 이끄는 집행부가 회사측과 공식적으로 단체협약에 임할 수 있도록 보장한다. (즉 현중 민주노조를 인정한다.)
2. 임금인상은 9월 1일까지 타결될 수 있도록 정부가 보장한다.
3. 정주영 회장이 기자회견을 통해 각 계열사 사장들에게 전권을 위임했다는 내용을 보장한다.
4. 위 사항(세 가지)은 정부의 공식적인 입장이다.
울산시장 윤세달
노동부 소장 옥치현
안전기획부 소장 이찬희
노동부 차관 한진희
추서 : 지금까지의 모든 사태는 그 어떠한 책임도 묻지 않을 것이며 8·17 발생한 최루탄에 의한 부상자는 정부 측이 책임을 보장한다.”
그러나 합의내용이 발표되자 노동자들은 강한 불만을 표시하고 야유를 퍼부었다. 합의내용이 두루뭉술하고 분명한 임금인상률이 없다는 것이었다. 이때 권용목 의장이 마이크를 잡고 노동자들 앞에 섰다. 집회 도중에도 간간히 연단에 서서 노동자들의 열띤 호응을 받으며 감동적인 연설을 한 바 있는 그는 17일과 18일 양일간의 대투쟁을 뛰어난 지도력과 결단력으로 승리로 이끈 장본인이었다. 이미 그는 현대 노동자들의 위대한 지도자로 인정받고 있었다.
그가 연단에 서서 “이 자리에서 경영실적이 사별마다 다른 실정에서 구체적인 인상률을 정부와 합의하는 것은 무리이다. 더구나 이제 정부가 현중노조를 인정하고 9월 1일까지 임금인상을 보장했으니 남은 것은 우리가 현대그룹과 투쟁을 통해 우리의 정당한 요구를 쟁취하는 것이다. 정부로부터 이러한 보장을 쟁취한 오늘의 투쟁은 우리가 이룩해낸 위대한 승리다”라는 취지의 연설을 하자 분위기는 일변하였다.
작은 몸집에서 우러나오는 그의 확신에 찬 목소리는 6만 현대 노동자들을 감동시키기에 충분했다. … 어느덧 집회는 승리의 함성으로 밤늦은 울산을 뒤흔들고 있었다. 해산도 질서정연하게 이루어졌다. 사위는 이미 어둠이 깔리고 천지를 뒤흔들던 6만 대군의 물결이 서서히 운동장을 빠져나가고 있었다.
인간답게 살고자 열망하는 노동자들의 강렬한 투쟁과 죽음을 무릅쓰고 투쟁의 선두에 섰던 지도부가 이룩해낸 장엄한 투쟁의 하루가 저물어가고 있었다. 8월 18일은 현대 노동자들이, 아니 이 땅의 노동자들이 한을 딛고 오늘 이 땅의 주인으로 새롭게 태어나는 위대한 탄생이었으며, 인간다운 삶을 누리는 내일을 향한 장엄한 진군이었다.[13]
현대그룹 노동자들의 연합거리시위는 독점자본과 정권의 심장부를 강타했고 엄청난 파급효과를 가져왔다. 하지만 현노협은 10만 현대그룹 노동자들의 진정한 대표기구로 정착되지 못했다. ‘각 계열사별 임금교섭’이 합의의 기본 방향이었기 때문이다. 현노협은 점차 힘을 잃어갔다. 하지만 현대그룹 노동자들의 8월 대행진에 대한 감격은 오래도록 잊히지 않았다.
◎ 정권과 자본의 반격
파업이 사업장 경계를 넘어서는 전환점이 될 수 있었던 8월 18일 울산 현대 노동자들의 총파업과 연합거리시위 직후, 정권은 파업을 탄압하기 시작했다. 전투경찰이 전국 각지의 사업장에 파견돼 파업을 진압했다. 수백 명의 노동자가 체포되고 투옥됐다. 자본가들도 노동자들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기업 내부에서 자본가들이 조직한 구사대들은 전투경찰의 도움을 받으면서 파업 노동자들을 폭력적으로 공격했다. 파업을 주도하던 많은 노동자들이 해고됐다. 반격을 위한 정치파업으로 발전하지 못한 파업 물결은 빠르게 약화됐다.
노사 자율원칙에 입각해 개입을 억제하겠다던 전두환 정권은 현대그룹 노동자들의 연대거리시위를 계기로, 거리시위 초동 진압과 불순세력 개입 색출을 공언했다. 이에 따라 8월 19일 금성사 평택공장의 해고노동자 5명을 구속시켰고, 20일에는 마산·창원 지역 투쟁을 이끌던 경남지역노동자협의회(경노협) 의장 등 2명을 ‘제3자 개입금지 위반’으로 구속했다.
자본가계급의 반격은 노동자투쟁의 대의와 정당성을 훼손하는 데 일차적으로 초점이 맞추어졌다. 언론은 노동자투쟁의 정당성을 훼손하기 위해 길길이 날뛰었다. ‘외부 불순세력이 개입하고 있다’, ‘파업이 과격 난동으로 번지고 있다’, ‘수출경제가 파괴되고 있다’, ‘실업자 대량발생 위험이 다가오고 있다’, ‘서민생계를 위협하고 있다’ 등등. 언론은 새빨간 거짓말도 서슴지 않았다. 전경련의 한 자본가가 “기아기공 근로자들이 부사장을 포클레인 삽에 싣고 올렸다 내렸다 하면서 위협했다”, “영창악기에서는 사장을 드럼통에 넣고 굴렸다”고 얘기하자 언론이 이를 대서특필했다. 하지만 기아기공 사측은 사실이 아님을 밝혔고, 영창악기에는 애당초 사람을 넣을 수 있는 드럼통이 있지도 않았다. 그러나 노동자계급이 이런 이데올로기 공세에 제때에 정확하고 강력하게 대처하지 못하면서 자본가계급의 의도대로 노동자들의 자신감과 투쟁력이 점차 떨어졌다.
언론의 이데올로기 공세와 함께, 정권은 물리적 탄압을 강화했다. 8월 22일 거리시위를 벌이던 대우조선 노동자 이석규가 가슴에 최루탄 파편들이 박혀 사망했다. 이석규 열사의 죽음은 투쟁에 떨쳐 일어섰던 노동자계급 전체에 대한 자본가정권의 도발이었다. 이제 사태는 자본가정권 대 노동자계급의 전면 대결로 나아갈 수도 있었다. 안양지역에서는 민주노조들이 파업 중인 한국제지 공장으로 결집해 7~800명 규모로 공동추모제를 지내면서 계급적 연대투쟁의 모범을 보였다. 하지만 울산을 비롯한 여러 지역에서는 이석규 열사의 죽음을 자본가정권에 맞선 노동자계급의 강력한 반격으로 전환시켜 내는 데 실패했다. 정권은 28일 이석규 열사의 시신을 탈취하고, 18개 도시에서 예정된 추모집회와 시위를 원천봉쇄했다. 933명을 연행하여 64명을 구속시켰다.
정권은 이석규 열사 장례투쟁을 계기로 폭력탄압을 전면화했다. 강원도 삼척탄좌 정암광업소에서는 완전무장한 경찰 700여 명이 가스차를 앞세워 최루탄을 뿜어대며 파업농성장을 덮쳤다. 노동자들뿐만 아니라 같이 농성 중이던 여성과 어린이까지 마구 짓이기고 연행해갔다. 인천 한영알미늄의 100여 농성노동자들도 폭력 탄압의 제물이 됐다. 9월 2일 경찰까지 포함된 구사대가 최루탄을 쏘아대며 농성장에 난입했고 노동자들은 몰매를 맞고 짓밟히며 공장을 빼앗겼다. 열흘째 파업 중이던 대우자동차 노동자들도 4일 경찰에 의해 강제 해산됐다. 이 과정에서 수십 명이 부상을 입었고 135명이 연행됐다.
울산 현대중공업 노동자들이 9월 2일 울산시와 현중자본의 약속파기에 분노해 시청을 점거하고 항의시위를 벌였으며, 럭키 울산공장 노동자들이 재파업에 돌입하기도 했지만 이런 투쟁기운은 부분적일 뿐 전체적인 하강세에 밀려 예전처럼 파급력을 가질 수 없었다. 4일 정권은 현대중공업에 공권력을 투입했고, 회사는 무기한 휴업조치를 내렸다.
정권과 자본가들 그리고 이에 편승한 어용노조들의 파업 진화작업이 눈부시게 이루어졌다. 정권은 공권력을 마구 휘둘러대며 노동자투사들을 짓밟았다. 자본가들은 구사대를 동원해 정권과 보조를 맞추는 한편, 온갖 회유와 협박도 서슴지 않았다. 어용노조를 부추기고 투쟁의 주역들을 해고·전출시켰으며, 감시망을 튼튼히 짜 다음 투쟁을 대비했다. 안절부절 못하던 어용노조들은 두드러진 활약을 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정권·자본가·어용노조가 맹렬하게 쏟아 붓는 합동 융단폭격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면서 투쟁이 급격하게 식어갔다. 9월 1일 하루 쟁의발생건수 233건을 정점으로 하루하루 쟁의발생건수가 줄어들었다. 9월 20일을 전후해서는 불과 몇몇 공장에서, 그것도 아주 소극적인 방식으로 투쟁이 벌어지고 있을 뿐이었다.
◎ 1987년 노동자대투쟁의 의의
첫째, 1987년 노동자대투쟁은 한국전쟁 이후 30여 년 동안 숨죽이고 있던 한국의 노동자계급이 다시금 역사의 전면으로 일거에 떠오르는 극적인 전환점이었다.
노동자계급은 1987년 대투쟁을 통해 세상의 주인이 노동자임을 보여주었다. 노동자들이 전국적으로 일손을 놓자 공장이 멈추고 세상이 마비됐다. 노동자들이 움직이지 않으면 단 한 대의 차도, 단 한 대의 배도 만들어질 수 없다는 것이 분명해졌다. 자본가들이나 정부 관료들이 없어도 세상은 잘 굴러갈 수 있지만 노동자들이 없으면 세상은 죽은 것이나 다름없게 된다는 게 분명해졌다. 이렇게 1987년 대투쟁은 ‘역사의 주인은 노동자’란 책의 문구를 살아있는 현실로 만들어냈다. 1987년 대투쟁을 통해 노동자계급은 역사의 무대에 당당히 주인공으로 등장하게 됐다.
1987년 대투쟁은 노동자들의 자신감을 반영했고, 또한 그것을 한층 강화시켰다. 노동자들은 1980년 광주항쟁 이후 1987년까지 여러 투쟁을 통해 자신감을 키워왔고, 이것은 1987년 대투쟁을 가능케 한 중요한 주체적 조건이었다. 그런데 1987년 대투쟁은 다시 노동자들의 자신감과 의식을 비약적으로 키웠다. 노동자들은 대투쟁을 통해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거대한 힘을 확실히 느꼈으며, ‘투쟁하면 쟁취할 수 있다’는 것을 경험으로 체득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렇게 투쟁을 통해 승리한 경험은 노동자들을 한없이 고무시켜 1987년 이후 수년간 계급투쟁이 왕성하게 벌어지도록 만든 원동력이 됐다.
노동자들은 1987년 대투쟁 이후 공장 안에서만이 아니라 바깥에서도 작업복을 자랑스럽게 입고 다녔는데, 이것은 노동자들이 1987년 대투쟁을 계기로 자기 계급에 대해 자부심을 갖게 됐다는 사실을 상징적으로 잘 보여주었다.
둘째, 1987년 노동자대투쟁은 전투적이고 폭발적인 투쟁을 통해 노동자계급의 혁명적 잠재력을 유감없이 보여주었다.
한국 자본주의는 자본주의 후발주자로서 자본의 집중성과 응집력이 대단히 강했다. 이것은 1960~70년대에 대규모 공업단지가 조성된 울산·창원·포항·구미 등에서 특히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그리고 이런 자본의 높은 집중성과 응집력은 노동자투쟁의 폭발력을 그만큼 증폭시켰다. 그 결과 1987년 대투쟁은 세계를 놀라게 할 만큼 노동자계급의 감추어진 ‘혁명적 잠재력’을 만천하에 과시했다.
노동자들은 대부분의 사업장에서 법 테두리를 뛰어넘어 공장을 점거하는 과감한 파업을 전개했다. 노동자들은 생산을 멈춰야 자본가들을 제압할 수 있다는 걸 잘 알았기 때문에 단호하게 공장을 멈춰 세우고 점거농성을 전개했다. 이런 공장점거파업은 “공장의 주인이 누구인가?”라는 문제를 전면에 제기했다. 이것은 조금만 더 전진하면 “이 사회의 주인이 누구여야 하는가?”로 상승할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노동자들은 파업대오를 견결하게 유지하고 구사대·용역깡패나 폭력경찰의 침탈을 막기 위해 대부분의 사업장에서 선봉대·규찰대·정당방위대를 조직했다. 이것은 노동자들이 자신의 힘으로 자본가권력의 폭력에 맞서 싸우고 결국 노동자 자신의 권력을 건설할 풍부한 잠재력을 갖고 있음을 맹아적으로 보여준 것이었다.
노동자들은 투쟁에서 이기기 위해 강력한 전술을 구사했다. 대기업의 제조업 노동자들은 거리낌 없이 중장비를 앞세우고 거리로 진출했는데, 조직된 부대의 투쟁대열이라는 점에서 노동자투쟁이 얼마나 위력적으로 전개될 수 있는지 중요한 단서를 보여주었다. 또한 이러한 거리시위 등의 전술구사가 지도부와 대중이 함께 호흡하면서 창의적이고 조직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커다란 발전이 있었다. 그리고 울산 등 여러 곳에서 노동자들은 시청 등 관공서를 타격하고 점거하기도 했으며, 철도와 고속도로를 점거하기도 했다.
셋째, 1987년 노동자대투쟁은 오랜 기간 노동자들의 투쟁을 가로막아온 노조관료제를 과감하게 무너뜨리고 대신 민주노조를 대규모로 건설해 냈다.
1987년 대투쟁에서 노동자들은 투쟁이 일어난 곳이라면 어디에서든지 그동안 자본과 정권의 지원을 받아 존재해온 한국노총이라는 어용 관료기구를 과감히 거부하고 새로운 노동조합들을 수립했다. 바로 민주노조였다. 민주노조는 총회민주주의로 표현되는 노동자 민주주의의 전통을 기반으로 했다. 현장의 전체 노동자들을 하나로 단결시켰고, 이런 단결을 통해 형성된 노동자의 힘을 과감한 투쟁으로 남김없이 쏟아 부었다. 노동조합의 모든 활동이 철저하게 조합원대중의 참가와 결정에 의지해서 진행됐다.
1987년 대투쟁 이전에 민주노조는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열 손가락으로 꼽을 수 있었던 1970년대 민주노조들은 1981~82년 전두환 신군부에게 각개격파당해 사라졌다. 1984~85년에 세워진 소수 민주노조들도 정권의 집중적인 탄압을 받아 1986년이면 거의 작동불능 상태에 있었다.
그런데 민주노조는 사실상 존재하지 못했지만, 민주노조라는 개념은 노동자대중 속에 퍼져나가고 있었다. 적지 않은 노동자들이, 정권의 탄압 때문에 도저히 잡을 수 없는 어떤 것이긴 하지만, 어쨌든 잡을 수만 있다면 ‘공돌이·공순이’로 멸시받는 노동자에게 새로운 삶을 열어줄 무엇으로 민주노조를 어렴풋하게나마 인식해 가고 있었다. 1979년 YH 농성과 1985년 구로동맹파업 같은 사건들을 지켜보면서, 수백수천의 노동자가 저렇게 얻어터지면서도 미친 듯이 달려드는 데는 분명 뭔가가 있기 때문이라고 본능적으로 느껴가고 있었다.
그래서 1987년 대투쟁에 나선 노동자들은 공장을 멈춘 뒤 가장 먼저 총회를 열어 ‘민주노조’를 건설했다. 1987년 대투쟁의 주요 요구 가운데 하나는 노동자 단결투쟁의 조직적 구심인 ‘민주노조의 건설·사수’였다. 물론 노동자들이 세운 노동조합이 다 민주노조가 되지는 못했다. 1987년에 1천 5백 개, 1989년까지 5천 개의 노동조합이 새로 건설되었지만, 그 가운데 민주노조로 자리 잡은 것은 대략 1천 개 정도였다.
‘민주노조’는 빠르게 대중적인 용어가 됐다. 민주노조는 기본적으로 어용 한국노총과 달리 민주적으로 운영되는 노조를 뜻했다. 종종 군사독재에 맞서 민주화투쟁에 동참하는 노조로 받아들여지기도 했다. 하지만 역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빼앗긴 우리 피땀을 투쟁으로 되찾아’ 노동자에게 새로운 삶을 열어줄 노조라는 의미였다.
1987년 대투쟁이 민주노조라는 조직적 성과를 남긴 것은 그 투쟁이 일회성 분출로 끝나지 않고 거대한 사회적 변화로 이어지는 데서 결정적 역할을 했다. 노동자 민주주의를 실행함으로써 노동자를 단결시켜 내고 그래서 노동자에게 새로운 삶을 열어주는 민주노조를, 수많은 노동자들은 목숨처럼 사랑했다. 그래서 전노협과 민주노총으로 이어지는 민주노조운동의 시대를 열어낼 수 있었다.
1987년 대투쟁의 역사적 경험은 노동자 민주주의를 획득함으로써 노동자의 운명이 어떻게 달라질 수 있는가를 극적으로 보여주었다. 시키면 시키는 대로 주면 주는 대로 죽음의 고역 같은 노동을 감당하면서도 비천한 존재로 무시당하던 ‘공돌이·공순이’들은 1987년 대투쟁 속에서 노동자 민주주의를 움켜쥠으로써 당당한 역사의 주역 ‘노동자’로 거듭날 수 있었다.
1987년 이후 몇 년간의 계급투쟁이 보여주듯이 한국 노동자계급은 민주노조를 발판으로 삼아 경제적·정치적 이익을 위한 투쟁으로 전진해 갔다. 1987년 대투쟁을 통한 민주노조 건설은 노동자계급이 본격적으로 단결해 투쟁하기 시작했음을, 앞으로 경제투쟁 수준에서만이 아니라 정치투쟁 수준에서도 계급적으로 단결하고 투쟁할 수 있으며, 반드시 그렇게 나아갈 것임을 강력하게 예고한 것이었다.
넷째, 1987년 노동자대투쟁은 자본가정권, 자본가언론, 보수야당, 중간계급의 계급적 본질을 낱낱이 폭로했다.
1987년 대투쟁은 초기에 ‘불개입’과 ‘중립’이란 위선의 장막을 쓰고 있던 자본가정권의 본질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6월 항쟁으로 입지가 약해진 정권은 노동자투쟁이 불붙기 시작한 직후에는 잠시 사태를 관망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노동자투쟁이 거세게 타오르자 숨겨둔 사나운 발톱을 휘두르지 않을 수 없었다. 가만히 놔둘 경우 노동자투쟁의 불길이 점점 더 자본주의 체제의 존립을 뒤흔들 게 분명했기 때문이다. 정권은 맹렬하게 이데올로기 공세를 퍼붓고, 폭력적으로 경찰을 투입해 노동자파업을 짓밟았다. 이를 통해 정부가 ‘자본가들의 이익을 관철시키는 자본가들의 집행위원회’라는 것을 만천하에 극명하게 드러냈다.
언론의 본질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노동자투쟁이 불붙기 시작한 처음에는 언론도 ‘노동자들의 처지가 그동안 너무 열악했으며 이런 조건에서 투쟁하는 것은 어느 정도 정당하다’는 식으로 보도했다. 하지만 노동자투쟁이 예상을 넘어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매우 완강하게 진행되자 자본가계급의 스피커라는 본색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전경련으로 대표되는 자본가와 정부, 경찰이 조작해낸 기사를 사실 확인 없이 그대로 보도했다. 온갖 특집·해설·사설 등을 통해 노동자들의 투쟁을 매도하는 이데올로기 폭격을 퍼부어댐으로써 노동자투쟁의 정당성을 훼손하고, 노동자들의 사기를 꺾으며, 분열을 조장하고, 고립을 획책했다.
1987년 대투쟁은 김영삼과 김대중이 주도하던 자유주의 보수야당의 실체도 폭로했다. 이들은 군사정권 아래서 ‘야당’으로서 반독재 민주화운동을 전개하는 척했지만, 실제로는 노동자계급에 대한 착취와 억압에 기생해서 살아가는 자본가계급의 한 분파임을 드러냈다. 이들은 ‘과격시위 자제’ 운운하면서 여당과 협력했고, 군사정권에 맞선 노동자투쟁 국면을 서둘러 대통령선거 국면으로 바꾸는 데 앞장섰다.
대투쟁은 1987년 6월 항쟁을 주도했던 국민운동본부의 상층 중간계급 지도부의 계급적 한계도 폭로했다. 그들 역시 ‘선거혁명으로 민주사회를 건설하자’고 하면서 대파업에 대해 ‘과격 자제’ 운운했다. 그들은 군사정권이 대통령 직선제라는 떡고물을 던지자 사실상 투쟁을 포기하고 거리 청소 등 자본주의 질서를 깨끗하게 정돈하는 데 앞장서고 있었다. 그들은 결국 자본주의 체제를 그대로 둔 채, 선거를 통한 자신들의 지위 향상만을 희망했던 것이다.
이렇게 1987년 대투쟁이 각 계급의 본질을 선명하게 드러냄으로써 노동자계급은 독자적인 정치세력으로 성장할 수 있는 소중한 경험을 확보할 수 있었다.
다섯째, 노동자가 역사의 주체로 다시 등장한 1987년 노동자대투쟁은, 비정규직과 정규직이 함께 싸운 투쟁이기도 했다.
1987년 대투쟁이 터졌을 때 현대중공업에는 직영공 1만 5천 명과 사내하청 4천 명이 일하고 있었다. 현대중공업에서 사내하청이 시작된 것은 1973~74년 ‘위임관리제’라는 이름 아래 직영 기능공 73%가 사내하청으로 전환 당하면서였다.
1987년, 56일간 파업을 벌인 현대중공업 노동자들은 사내하청의 직영 전환을 쟁취했다. 사내하청 노동자들 스스로가 노동자대투쟁에 ‘하도급 철폐, 하청의 직영화’를 요구하며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파업지도부 ‘민주노조개편대책위’는 17개 요구조건 가운데 12번째로 ‘하도급 직영화’를 명시했다.
1987년 이후 현대중공업은 하도급업체들을 정리하기 시작하여 1989년 5월 21일부로 모두 정리하였다. 이때 하도급 노동자들 중 끝까지 퇴사를 하지 않으려고 한 노동자들은 대체로 직영으로 전환되었다. 현대중공업이 하도급을 정리하고 노동자들을 직영으로 전환시킨 가장 중요한 이유는 노동조합의 등장 때문이다. 1987년 현대중공업에 노동조합이 결성된 이후 직영노동자 뿐만 아니라 하도급업체의 노동자들도 모두 하나의 노동조합에 가입하였다. 이들은 조합비도 내면서 하도급 노동자와 직영 노동자의 노동조건의 {차별} 축소, 나아가 하도급 노동자의 직영으로의 전환을 강력하게 요구하였다. 회사로서도 한편으로 하도급을 이용하는 이점이 감소하고 다른 한편 당시 조선산업이 심한 불황에 허덕여 인원을 감축해야 할 필요를 느끼고 있었으므로 신규채용을 중지하면서 하도급업체를 모두 정리한 것이다.
현재 전체 생산직 노동자 중 약 30~40%가 하도급 출신이다. 이런 점에서 현대중공업에서는 노동운동의 발전이 노동자에 대한 분할지배 제도를 폐지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고 말할 수 있다.[14]
현대종합목재에서는 직영공 60%, 사내하청(8개 업체) 40%가 일하고 있었다. 직영공과 사내하청이 하나의 노조를 건설했고, 초대 위원장으로 사내하청 노동자가 선출됐다. 현대종합목재에서도 사내하청이 직영으로 전환됐다.
현대종합목재에서는 1987년 당시 8개의 하도급업체를 운영하고 있었다. 이 하도급업체는 현대중공업의 하도급업체와 성격이 거의 같은 것으로 현대종합목재에서 설립한 것이었다. 하도급을 운영한 이유는 노무비를 절감하고 인원정리를 쉽게 하기 위해서였다. 당시 하도급업체에 고용된 노동자의 전체 수는 현대종합목재에 직접 고용된 노동자의 약 2/3 정도였다.
그런데 1987년 이후 노동조합이 결성되면서 하도급업체의 노동자들이 모두 본사 노동자들과 함께 하나의 노동조합에 가입하였다. 회사에서는 우리나라의 노동조합은 기업별 노조이고 하도급업체 노동자는 별도의 법인체에 소속해 있으므로 하나의 노동조합에 가입할 수 없다고 말했다. 이에 대한 노사 간의 의견이 대립되자 노동조합은 노동부에 유권해석을 요청했다. 노동부의 답변은 직영노동자와 하도급업체의 노동자가 동일한 장소에서 동일한 노동을 하므로 하나의 노동조합을 결성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이었다. 더욱이 제1대 노동조합 위원장이 하도급업체에 고용된 노동자 중에서 선출되었다.
하도급업체의 노동자들은 노동조합을 통해 직영으로의 전환을 강력히 요구했다. 회사에서는 더 이상 하도급을 이용하는 이점이 없어지리라고 생각하고 점차 하도급업체를 정리하여 1990년 미주가구의 통합을 마지막으로 하도급업체는 모두 없어졌다. 현재는 식당과 청소를 하청회사에 용역을 주고 있는데 하청 소속으로 일하는 노동자의 수는 23명이다. 그리고 임시 및 일용노동자는 거의 고용하지 않아 1991년 6월 현재 일용공만이 2명 있다.
이처럼 현대종합목재는 현대중공업과 마찬가지로 노동운동의 발전이 회사에 의한 노동력의 분할지배제도를 철폐시켜 노동자의 기업 내의 동질화를 촉진시킨 사례라고 볼 수 있다.[15]
◎ 1987년 노동자대투쟁의 한계
첫째, 1987년 노동자대투쟁은 격렬한 전투성에도 불구하고 노동자대중의 낮은 계급의식과 노동자정치의 공백이라는 점에서 결정적 한계를 드러냈다.
1987년 대투쟁은 평범한 노동자들이 아래로부터 자연발생적으로 일으킨 동시다발적인 파업 투쟁을 특징으로 했다. 그런데 이것은 자본가들을 섬뜩한 공포 속으로 몰아넣은 거대한 파괴력의 원천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투쟁이 더 발전하지 못하게 만든 본원적 한계이기도 했다.
이것은 한국의 역사에서 비롯된 약점이었다. 세계에서 유례가 없는 자본의 급속한 축적에는 군대 같은 작업장에서 가혹한 착취와 억압에 시달리는 노동자들의 고통이 수반됐다. 이렇게 누적된 노동자들의 고통은 파업의 폭발성과 전투성을 높였다. 그러나 한국전쟁 이후 각종 혁명 운동과 좌파 운동이 사실상 전멸한 상태였기 때문에 노동자들의 주체적인 계급의식은 매우 낮았다.
거대한 파업물결 한복판에서 노동자대중을 이끌 능력을 갖춘 노동자정치세력 또한 존재하지 않았다. 사회주의 그룹들은 1980년대 중반을 거치며 이제 막 태동하고 있던 상황이라, 이 거대한 파업물결을 상대하기에는 사상적으로나 실천적으로나 아직 그 역량이 너무 미약했다.
1987년 노동자대투쟁은 의식적·조직적·정치적 측면에서 뚜렷한 한계를 안고 있었고, 그 때문에 더욱 거센 기세로 뻗어나가지 못한 채 전두환 정권과 자본의 대대적인 이데올로기 공세와 폭력적 탄압에 밀려 수그러들게 됐다.
1987년 대파업 당시 투쟁에 참여한 노동자들은 전반적으로 임금인상, 민주노조 건설 등 경제적 이익을 위한 투쟁, 즉 자본주의를 그대로 둔 채 임금노예의 노동조건을 개선하기 위한 투쟁에만 아직 머물러 있었다. 이런 자생적 경제투쟁을 목적의식적 정치투쟁으로 이끌 수 있는 준비된 전략적 지도부도 없었다. 그 결과 1987년 대파업은 자본가계급의 이데올로기 공세를 정면으로 비판하면서 노동자계급을 정치적으로 날카롭게 각성시키고 반격을 끌어내는 데로까지 나아가지 못했다. 이데올로기 투쟁에서 패배하고 절실했던 정치투쟁을 성공적으로 전개할 수 없게 되자 경제투쟁조차도 더 이상 제대로 밀고나갈 수 없었다.
둘째, 1987년 노동자대투쟁에서 노동자들은 자본가언론과 정권의 이데올로기 공격을 정면으로 맞받아치지 못했다.
자본가계급은 물리적 탄압을 본격화하기 전에 먼저 이데올로기 공세에 주력했다. 원기왕성하게 전진하던 파업물결은 이데올로기 집중포화를 맞자 기세가 꺾여갔다.
자본가계급은 ‘국민경제 파탄’을 위협했다. 그런데 자본주의 사회에서 국민이란 크게 자본가계급과 노동자계급으로 쪼개져 있고, 자본가계급은 노동자계급을 착취하며 경제와 사회의 주인으로 군림한다. 따라서 자본주의 사회에서 국민경제란 실제로는 자본가들만을 위한 경제, 한마디로 자본가들의 이윤체제일 뿐이다. 한국에서 자본주의가 고속 성장했지만, 그 성장의 결실은 모두 자본가들에게 돌아갔고, 노동자들에게는 저임금, 장시간 노동, 산재의 고통만 쌓여갔다. 따라서 노동자들이 임금인상을 위해 투쟁하는 것은 정확히 말해 자본가들이 강탈해간 노동자의 몫을 되찾기 위한 정당한 투쟁이었다. 파탄에 직면한 것은 자본가들의 경제일 뿐이었다.
자본가계급은 노동자들의 투쟁을 ‘불법폭력, 과격난동’이라고 비난했다. 그런데 자본주의 사회에서 법이란 경제적 강자인 자본가계급의 이해관계를 표현할 뿐이다. 특히 한국 자본주의를 국가 주도로 고속 성장시키는 것이 자신의 과제였던 군사정권 아래에서는 더욱 그랬다. 자본가들의 법은 아주 초보적인 노동권조차도 철통같이 봉쇄하면서 노동자들의 손발과 입을 꽁꽁 묶어두고 있었다. 따라서 법에 충실하겠다는 것은 곧 자본가계급의 이해관계에 충실하겠다는 것, 다시 말해 저항을 포기하고 순종하는 노예로 살겠다는 것을 뜻했다. 노동자계급이 단호한 투쟁으로 자본가법의 족쇄를 깨뜨리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했다. 자본가들이 노동자들을 혹사시킬 때, 자본가정권이 선봉에 선 노동자투사들을 수배하고 잡아 가두며 고문할 때, 파업현장에 폭력경찰을 투입할 때, 노동자들이 자기방어를 위해 물리력을 사용하는 것은 너무나도 정의로운 정당방위 행위였다. 또한 노동자들의 폭력은 본질적으로 파괴적인 것이 아니라 건설적인 것이었다. 노동자투쟁을 파괴하기 위해 구사대의 각목과 쇠파이프, 경찰의 곤봉과 최루탄이 미친 듯이 쏟아져 들어올 때, 결코 물러서지 않고 굳세게 단결해 투쟁한 것, 포크레인과 지게차를 이끌고 노동자들의 거대한 힘을 과시한 것은 ‘낡아서 사라져야 할 것에 대한 단호한 저항’이자 ‘새로운 노동자들의 질서를 세우겠다는 강한 의지의 표출’이었다.
자본가계급은 ‘외부 불순세력’과 ‘제3자 개입’을 운운하며 노동자계급을 분열시키고, 피억압 민중들로부터 고립시키려 했다. 하지만 노동자는 하나이기에 내부 따로 외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노동자끼리 제3자가 될 수도 없다. 자본가들이 분열시키려 하면 할수록 노동자계급은 더욱 굳게 하나로 결합해야 했다. 특히 자본가계급이 떠들어대는 ‘외부 불순세력’이란 사실은 가장 선봉에서 싸우다 해고된 노동자들이거나 헌신적으로 현장투쟁을 지원하는 노동단체들이었다. 또한 노동자계급은 피억압 민중들을 자본주의에 맞선 투쟁에 동참시키기 위해 헌신적으로 노력하고, 그 투쟁의 선두에 설 때에만 완전한 승리를 쟁취할 수 있다. 따라서 자본가계급이 하지 말라고 하는 것을 맹렬하게 전개하는 것이 노동자계급이 해야 할 일이었다.
셋째, 1987년 노동자대투쟁에서 노동자들은 정권과 자본의 탄압에 맞서 계급적 정치투쟁으로 과감하게 나아가지 못했다.
정권은 6월 항쟁으로 위축돼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7, 8월 노동자대투쟁이 폭발적으로 전개되는 동안 일정 시점까지는 전면에 나설 수 없었다. 정권은 노사 문제에는 개입하지 않겠다고 했다. 물론 정권은 노동자투쟁을 거꾸러뜨릴 기회를 호시탐탐 엿보고 있었다.
이석규 열사 장례투쟁을 계기로 정권은 자신의 야수적 본질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자본가언론을 통한 이데올로기 공격을 대폭 강화했으며, 파업현장에 전투경찰을 무자비하게 투입했고, 노동자투사들을 대거 연행하고 구속했다. 이제 노동자계급은 자본가정권과 전면전을 벌이느냐 아니면 꺾이느냐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
노동자들은 정권이 전면에 나서기 전까지는 개별 자본에 맞선 개별 사업장 차원의 경제투쟁에서 거의 매번 승리했다. 이것은 1987년 6월 항쟁 직후 총노동에게 유리한 정세였기 때문에 가능했다. 하지만 이제 총자본으로서 정권이 전면에 나서 탄압을 시작했기 때문에 노동자계급은 하나로 굳게 결집해 이에 대항해야 했다. 하지만 노동자운동은 아직 계급적으로 단결해 ‘계급 대 계급’의 전면 대결로 나아갈 만한 의식적·조직적 준비가 돼 있지 않았다.
그 결과 자본가정권은 이데올로기 투쟁에서만이 아니라 정치투쟁에서도 유리한 고지를 차지하고, 노동자운동을 강하게 찍어 눌러서 제압해버렸다.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위협을 절대 용납할 수 없다는 굳센 각오로 단결해 일어선 총자본 앞에서 단순히 같은 시기에 비슷한 요구를 내걸고 싸웠을 뿐 사실상 개별적으로 주로 개별 자본가들에 맞서 싸웠던 파업물결은 점차 격파될 수밖에 없었다.
넷째, 1987년 노동자대투쟁에서 단사주의 경향이 연대투쟁의 발전을 가로막는 주요한 족쇄로 나타났다.
1987년 대투쟁의 한계는 특히 조합주의의 한 변종인 ‘단위사업장주의’(단사주의)라는 형태로 나타났다. 단사주의는 ‘제3자 개입’, ‘불순좌경세력의 개입’ 같은 정권과 언론의 선전공세를 극복하지 못하고 다른 공장 노동자들과의 연대투쟁이나 지역 노동단체의 지원을 회피하는 방식으로 나타났다. 또한 이석규 열사 추모투쟁은 계급적 연대의식을 형성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는데도, 당시 파업 중이던 사업장에서조차 파업농성 과정에서 이석규 열사 추모 프로그램을 진행시키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파업물결 속에서 만들어진 민주노조들은 울산의 현대계열사 노조들을 빼면 1987년 대투쟁 동안에는 조직적 결집을 거의 이루지 못했다. 파업에 참여한 평범한 노동자들의 의식 수준이 초보적인 권리의식과 연대의식을 넘어서지 못하여 ‘외부세력의 개입’, 즉 노동자들이 사업장의 울타리를 넘어서서 계급적으로 단결하고 투쟁하는 것을 불온시하는 정권과 자본의 논리를 과감하게 떨쳐내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이런 단사주의는 자본가정권이 의도적으로 조장하고 강제한 것이었다. 특히 전두환 정권은 1980년 노동법을 개악하면서 기업별 노조만을 허용해 노동자들이 기업의 장벽을 뛰어넘어 계급적으로 단결하는 것을 가로막았다. 1985년 정권의 탄압에 맞선 구로동맹파업을 잔인하게 진압했다. 1987년 대투쟁 당시에도 이데올로기 공세를 통해 노동자들을 기업의 울타리 안에 가둬두려 했다.
1987년 대투쟁 이후 단사주의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노력이 맹렬하게 전개됐다. 1985년 구로동맹파업이 추구했던 방향이 훨씬 거대한 규모로 추진된 것이다. 지역 차원의 치열한 연대투쟁을 바탕으로 지역노동조합협의회(지노협)들이 건설되고, 나아가 전국노동조합협의회(전노협)가 건설됐다. 반면 이런 단사주의의 한계를 더 강화하고 고착화하기 위한 자본과 정권의 노력도 집요하게 이루어졌다. 그들은 선봉에 서서 싸웠던 지도자들을 구속·해고하듯이 선봉 사업장들을 집중적으로 공격해 “선봉에 서면 피 본다”, “우리 조합원들의 실리나 챙기자”는 단사주의 의식을 노동자들의 뇌리에 각인시키려고 혈안이 됐다.
[1] 전국노동조합협의회 백서 발간위원회, 2003, 『전노협백서 제2권 1989년 - 이제는 하나다! 전노협』, 논장, 210~212쪽.
[2] 파시즘은 부르주아 민주주의가 보장하는 민주적 기본권(사상·양심·표현·신체·결사·집회·시위 등의 정치적 자유권과 사회적 생존권)과 형식(선거·다당제·삼권분립·자유언론 등)을 철저히 부정하면서, 지배세력의 입장과 이해관계만을 사회 전체에 폭력적으로 관철한다. 특히 노동자계급의 관점에서 볼 때, 파시즘은 노동자들이 투쟁으로 쟁취해 온 조직(노동조합·노동자정당)과 권리(노조결성권·파업권·생존권) 등 노동자운동의 모든 성과를 파괴하여 노동자계급을 원자화된 무기력 상태로 되돌리는 것을 뜻한다. 군사정권(군부독재)이 파시즘의 한 형태인가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부르주아 민주주의에 대한 전면적 부정과 노동자운동에 대한 전면적 억압이라는 측면에서 보자면, 군사정권을 파시즘의 한 형태로 간주할 수 있다. 그런데 고전적인 파시즘은 노동자계급의 역량이 혁명 근처까지 다다른 상황에서 이를 제압하기 위한 수단으로 등장하며 몰락하는 소부르주아 대중의 야수적 능동성을 전면적으로 동원해 낸다는 특징이 있다. 즉 단지 폭력을 통한 강제만이 아니라 광기에 찬 대중의 동의를 통해 파시즘을 성립시키고 유지해 나간다는 것이다. 이와 달리 군사정권은 노동자계급의 역량이 미약한 상황에서도 노동자계급에 대한 억압과 착취를 극대화하기 위한 수단으로 등장하며 군홧발의 폭력에 주로 의지하는 특징이 있다. 이런 측면에서는 군사정권을 파시즘의 한 형태로 간주하기 어렵다. ‘군사파시즘’은 군사정권이 고전적인 파시즘과 같은 점도 있고 다른 점도 있음을 내포하는 개념이다.
[3] 레드 콤플렉스는 사회주의·공산주의에 대한 과장되고 왜곡된 공포심과 거부감을 말하며, 또한 그를 근거로 무자비한 인권 탄압을 정당화하거나 용인하는 사회적 심리를 말한다.
[4] 김영수, 1999, 『한국 노동자 계급정치운동』, 현장에서미래를, 207쪽.
[5] 이수원, 1994, 『현대그룹 노동운동, 그 격동의 역사』, 대륙, 48~53쪽.
[6] 이수원, 1994, 『현대그룹 노동운동, 그 격동의 역사』, 대륙, 53~54쪽.
[7] 정병모, 2005, 「조선소 노동자 정병모의 노동운동 야사」.
[8] 이수원, 1994, 『현대그룹 노동운동, 그 격동의 역사』, 대륙, 63~71쪽.
[9] 이수원, 1994, 『현대그룹 노동운동, 그 격동의 역사』, 대륙, 71쪽.
[10] 박창수는 1990년에 한진중공업노조 위원장이 됐다가 다음 해 옥중에서 안기부의 전노협 탈퇴 공작에 시달리던 중 의문사했다.
[11] 김진숙, 2007, 『소금꽃나무』, 44~48쪽.
[12] 김하경, 1999, 『내 사랑 마창노련』 상권, 46~48쪽.
[13] 이수원, 1994, 『현대그룹 노동운동, 그 격동의 역사』, 대륙, 94~103쪽.
[14] 정이환, 1992, 「제조업 내부노동시장의 변화와 노사관계」,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11~112쪽.
[15] 정이환, 1992, 「제조업 내부노동시장의 변화와 노사관계」,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13~114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