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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노운사 연재 2회] 1부 폭압과 저항(1970~1987) [1] 민주노조운동의 태동

기사입력 2026.01.26 10:20 | 조회 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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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차]

    1부 폭압과 저항 (1970-1987)

    [시대배경] 군사정권이 주도한 산업화

    [1] 민주노조운동의 태동

    [2] 1980년의 분출

    [3] 민주노조운동의 파괴와 재건

    [4] 1987년의 대폭발

     

    일제강점기에 줄기차게 전개된 투쟁과 조직화를 토대로 해방공간에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전평)가 최대 50만의 조합원을 포괄하며 등장했지만, 미군정의 거센 탄압과 한국전쟁으로 인해 절멸됐다. 이후 20여 년의 공백을 건너뛰어 1970년 전태일 열사로부터 민주노조운동이 다시 시작됐다. 1970년대 민주노조운동은 섬유·전자 등 경공업에서 일하는 여성노동자들을 중심으로 진행됐다. 1979년 YH노조 투쟁이 보여준 결기는 강고해 보이던 유신체제가 내부로부터 허물어지게 하는 기폭제가 됐다.

     

    1) 아름다운 청년노동자, 전태일

     

    전태일은 1948년 9월 대구에서 가난한 봉제노동자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가난 때문에 초등학교도 3년밖에 다니지 못했고, 항상 굶주림을 떨치지 못했다. 1964년 서울로 올라와 구두닦이, 신문팔이, 우산장사, 리어카 뒤밀이 등을 하며 떠돌이 노동자로 살다가 1965년 가을 평화시장의 한 작업장에서 시다(보조원)가 됐다. 그런데 전태일이 마주친 평화시장은 한마디로 노동지옥이었다.

     

    대부분이 여성인 2만여 노동자들이 먼지와 소음으로 가득 차고, 햇빛 한 줌 들지 않는 곳에서 아침 6시부터 밤 9시까지 15시간 동안 허리 한 번 제대로 펴지 못하고 일했다. 사장들은 수시로 철야작업까지 강요하며 노동자들을 짐승처럼 부려먹었다. 여름에는 찜통 같은 더위에, 겨울에는 살을 에는 추위에 시달려야 했다. 영양실조, 만성 소화불량, 신경성 위장병, 만성 피로, 진폐, 기관지염, 폐결핵, 눈병, 신경통 등에 걸리지 않은 노동자가 없었다. 어느 날 전태일과 같이 일하던 여성 미싱사가 새빨간 핏덩이를 왈칵 토해내며 쓰러졌다. 급하게 돈을 걷어 병원에 데려가 보니 폐병 3기라는 것이었다. 그 여성노동자는 곧바로 해고당했다.

     

    전태일은 이 끔찍한 노동지옥을 바꿔보기 위해 몇 년 동안 피나는 노력을 했다. 점심을 굶고 있는 시다들에게 버스비를 털어서 풀빵을 사주고 집까지 두세 시간 걸어가기를 예사로 했다. 재단사가 된 뒤에는 여공들을 일찍 퇴근시키고 혼자 남아서 시다들의 일까지 대신하기도 했다. 그러나 상황은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

     

    전태일은 아버지와 얘기하던 도중에 우연히 근로기준법의 존재와 그 내용을 알게 됐다. 어머니를 졸라 근로기준법 해설서를 샀는데, 한자로 쓰인 법률 용어들이 수두룩해 답답하기 짝이 없었다. 그래서 “대학생 친구라도 있었으면” 하는 말을 입버릇처럼 했다. 전태일은 포기하지 않고 밤낮을 안 가리며 노력한 끝에 근로기준법의 내용을 터득했다. 암흑의 동굴 속에서 한 줄기 광명을 발견한 듯 희망과 환희를 느꼈다. 이렇게 좋은 규정들이 있는 줄도 모르고 그저 사장이 시키는 대로 찍소리 한번 못하고 살아온 자신이 정말 너무나도 ‘바보’ 같았다.

     

    전태일은 젊은 재단사들을 모아 ‘바보회’를 만들었다. 바보회는 평화시장 일대 3만 노동자들의 노동조건이 근로기준법대로 준수되도록 하기 위해, 평화시장 노동자들의 노동실태를 조사했다. 설문지가 곳곳에서 업주들에게 발각되고 회원들이 탄압을 받았다. 전태일은 회수된 설문지를 모아 결과를 분석하고 이를 근거로 근로기준법상의 감독권 행사를 요구하기 위해 서울시청 근로감독관실을 찾아갔다. 하지만 성의 없이 ‘서류를 두고 가라’는 말만 내뱉는 근로감독관 앞에서 전태일은 깊은 실의와 낙담에 빠졌다.

     

    바보회는 탄압으로 큰 타격을 받았고, 전태일 자신도 해고당했다. 그동안 바보회를 꾸려 나가느라 상당한 빚도 졌다. 지친 전태일은 평화시장을 떠나 막노동판에서 일하면서 고뇌와 좌절과 자학에 빠져들었다. 하지만 이 혹독한 시련의 시기는 전태일의 ‘사상’이 벼려지는 시기가 됐다. 전태일은 오랜 시간을 망설이고 괴로워하다가, 돈 많은 독지가의 투자를 받아서 평화시장 안에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는 모범업체를 하나 만들어 노동자들에게 사람대접해 주고도 얼마든지 사업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겠다는 꿈을 품고 평화시장으로 돌아갔다.

     

    전태일은 바보회를 삼동회로 바꾸고 이를 ‘근로조건 개선을 위해 공동으로 행동하는 조직’으로 강화했다. 삼동회는 지난해의 경험을 살려 설문지의 배포와 회수를 성공적으로 마치고 이를 근거로 ‘평화시장 피복제품상 종업원 근로개선 진정서’를 노동청장에게 제출했다. 다음날 <경향신문>에 평화시장 노동자의 참상에 관한 보도가 실렸다. 삼동회 회원들은 기쁨에 겨워 신문사로 달려가 신문 300부를 사서 팔았는데, 삽시간에 다 팔렸다.

     

    허리조차 마음대로 펼 수 없는 2층 다락방, 뿌연 먼지 날리는 작업장, 커피 한 잔 값의 임금을 받고 10대의 어린 여공들이 하루 14시간에서 16시간 철야 노동을 하고 있었다.[1]

     

    다음날 전태일 등 세 사람이 삼동회를 대표하여 요구조건을 적은 건의서를 갖고 평화시장 주식회사 사무실을 찾았다. 사기가 충천한 삼동회와 달리, 사장들과 노동청은 안절부절못했지만, 적당히 회유하면서 삼동회를 깨려고만 할 뿐 문제를 해결할 자세를 보이지는 않았다. 결국 진정과 호소만으로는 아무것도 이룰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삼동회는 시위를 계획했다. 애초에 10월 24일로 계획했던 시위는 11월 7일까지 해결해 주겠다는 정보과 형사의 회유로 무산됐다. 약속이 지켜지지 않자, 삼동회는 11월 13일에 다시 시위를 벌이기로 계획했다. 전태일은 “이번만은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결단코 물러서지 말고 싸우자”고 힘주어 말했다. 목숨을 건 결연한 투쟁만이 유일한 활로라고 생각했다.

     

    1970년 11월 13일 오후 1시 40분경, 서울 평화시장 앞에서는 시위를 위해 모인 노동자 500여 명이 경찰과 경비원들의 방해에 가로막혀 시위를 벌이지 못한 채 웅성거리고 있었다. 그 순간 스물두 살의 청년노동자 전태일이 근로기준법이 담긴 법전을 가슴에 안고 기름을 뒤집어 쓴 자신의 몸에 불을 붙인 채 달려 나갔다. 화염에 휩싸인 전태일은 타들어 가는 목소리로 외쳤다.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일요일은 쉬게 하라! 노동자들을 혹사하지 마라! 나의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마라!”

     

    전태일의 분신은 강렬한 충격이 되어 노동자들의 굴종과 지식인들의 침묵을 흔들어 일깨웠다. 전태일의 동료들은 11월 27일 최초의 민주노조인 ‘전국연합노동조합 청계피복지부’를 건설했다. 이어 대학생들의 농성과 시위, 종교인들의 각성과 지지, 노동자들의 죽음을 불사하는 격렬한 투쟁이 잇따라 일어났다. 전태일이 분신한 1970년은 민주노조운동의 원년이 됐다.

    전태일에서 시작된 결연한 투쟁은 전투적 기풍을 형성하며 민주노조운동의 전통이 됐다. 민주노조운동은 전태일 열사의 정신을 계승하기 위해 1988년 이후 매년 11월 13일 전후에 전국노동자대회를 열고 있다.

     

    전태일은 불쌍한 사람을 보면 마음이 언짢아지는 심성을 가졌고 모두가 용해되어 있는 상태의 참된 공동체를 꿈꾸었다. 그러나 전태일의 눈에 비친 사회 현실은 노동자들이 단지 생존을 위해 노동하고, … 어린 소녀들이 … 더러운 부자의 거름이 되는 비참한 것이었다. 전태일은 인간이 인간으로서 살아갈 수 없는 이 참혹한 세상에 대하여 분노했고, 이 분노 때문에 삶에 대한 온갖 미련을 떨쳐버리고 죽음을 각오한 투쟁을 결단할 수 있었다.

     

    “쉽다면 누군들 안 하겠나? 어려울 때 어려운 일 하는 것이 진짜 사람일세”라며, 전태일이 승리의 환희보다도 오늘의 헌신을 선택할 수 있었던 것은 인간에 대한 믿음이 아주 컸기 때문이다. 전태일은 일기에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겼다. “나를 버리고, 나를 죽이고 가마. 너희들의 곁을 떠나지 않기 위하여 나약한 나를 다 바치마. 그대들이 아는, 그대들의 전체의 일부인 나, 힘에 겨워 힘에 겨워 굴리다 다 못 굴린, 그리고 또 굴려야 할 덩이를 나의 나인 그대들에게 맡긴 채, 잠시 다니러 간다네, 잠시 쉬러 간다네. 내가 앞장설 테니 뒤따라오게.” 전태일은 ‘나의 일부인 너’가 자신의 뒤를 따를 것임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다. 전태일은 서로를 아끼고 배려하는 참다운 공동체에 대한 열망, 자신의 모든 것을 아낌없이 바치는 무한한 헌신, 남은 사람들이 자신이 못다 한 일을 이루리라는 인간에 대한 완전한 믿음을 우리에게 소중한 자산으로 물려주었다.[2]

     

    2) 1970년대 민주노조운동

     

    1970년 11월 13일 전태일 열사의 분신 항거는 노동자운동의 부활을 알리는 위대한 외침이었다. 11월 27일 전태일 열사의 피를 머금고 평화시장에서 청계피복노조(전국연합노동조합 청계피복지부)가 탄생했다. 청계피복노조는 1970년대 암흑의 시대에 세상을 밝히는 등불과도 같았다. 경찰의 감시, 연행, 구속, 고문 등 온갖 탄압이 빗발쳤지만, 청계피복노조는 목숨을 건 투쟁들로 스스로를 지켜내면서 노동자운동을 선봉에서 이끄는 ‘불굴의 결사대’ 역할을 했다.

     

    전태일의 죽음이 한국 사회에 던진 충격과 함께 1971년 들어 급속한 경제침체로 기업의 도산과 임금체불이 급증했다. 1971년 내내 노동자와 도시빈민의 생존권 투쟁, 중간계급의 민주화 투쟁이 터져 나왔다.

     

    4월 연세대와 고려대를 시작으로 전국의 대학생들이 교련반대 투쟁을 격렬하게 전개했다. 4월과 5월 동아일보를 비롯한 14개 언론기관에서 언론자유수호 선언운동이 벌어졌다. 6월부터 9월 국립의료원을 시작으로 서울대병원을 비롯한 전국 국립대병원에서 수련의들이 처우개선과 신분보장을 요구하며 파업을 벌였다. 7월 전국 판사의 36%에 해당하는 지방법원 판사 153명이 시국사건 무죄판결 판사 구속영장 청구에 맞서 사법부 독립을 주장하며 집단사표를 제출했다. 8월 서울에서 경기도 광주대단지 판자촌으로 쫓겨난 도시빈민 수만 명이 부동산 투기와 살인적인 불하가격에 맞서 격렬한 시위를 벌였다. 8월과 9월 서울대를 시작으로 전국의 국공립대학들과 사립대학들에서 교수들이 학생들의 교련반대투쟁을 지지하며 대학 자치를 위한 대학 자주화 선언에 나섰다. 9월 한진상사 베트남 파견노동자들이 체불임금 지급을 요구하며 대한항공 빌딩에 불을 지르면서 시위를 벌였다. 10월 전국의 대학생 5만 명이 고려대에 난입해 학생을 연행·구타한 군인들의 처벌을 요구하며 거리시위를 벌였다.

     

    이러한 일련의 투쟁들에 박정희 정권은 강력한 탄압으로 대응했다. 10월 서울 전역에 위수령을 발동하고 ‘학원질서 확립을 위한 특별명령’을 발표했다. 12월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하고 ‘국가보위에관한특별조치법’을 제정했다. 특히 그 법에 ‘근로자의 단체교섭권 또는 단체행동권의 행사는 미리 주무관청에 조정을 신청하고 그 조정결정에 따라야 한다’고 규정함으로써 노동자들로부터 단체교섭권과 단체행동권을 사실상 박탈했다. 1972년 10월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유신헌법을 제정하며 박정희 종신집권을 위한 유신체제를 수립했다. 그러나 이 엄혹한 상황에서도 노동자들의 투쟁과 민주노조 건설이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1972년 4월부터 8월까지 원풍모방 노동자 600여 명이 명동성당 농성 등의 조직적 투쟁을 통해 어용노조 민주화를 쟁취했다. 1972년 5월 동일방직노조 정기대의원대회에서 어용 남성 지부장을 물리치고 한국 최초로 여성 지부장이 당선되면서, 선거를 통해 노조민주화를 이뤄냈다. 인천도시산업선교회가 1966년부터 진행한 소그룹 활동의 결실이었다.

     

    1973년 9월 서울 영등포 삼립식품 노동자 1천여 명이 8시간 노동, 임금인상, 주1일 휴무 등을 요구하며 어용노조 집행부의 통제를 벗어나 사흘간 비공인파업을 벌였다. 1973년 10월과 12월 인천 부평4공단 삼원섬유 노동자 120명이 노동조건 개선을 요구하며 파업을 벌인 뒤 민주노조를 건설했다. 1973년 12월 컴퓨터 기억장치를 생산하는 미국계 기업 콘트롤데이타 노동자 600명이 민주노조를 건설했다.

     

    1974년 2월 반도상사 노동자들이 노동조건 개선 파업을 벌인 뒤 4월 민주노조를 건설했다. 1974년 10월 <동아일보> 기자 2백여 명이 ‘언론자유 실천’을 선언하고 ‘외부간섭 배격, 기관원 출입 거부, 언론인 불법연행 거부’를 결의하자 35개 언론사 기자들이 선언에 동참했다. 언론자유 실천운동으로 기자 146명이 해고됐다. 1975년 5~6월 YH무역 노동자 2천 명이 민주노조를 건설한 뒤 지부장·부지부장 해고 등 사측 탄압을 이겨내고 노조를 안착시켰다.

     

    이렇게 속속 등장한 1970년대 민주노조들은 대체로 섬유·전자·가발 등 노동집약적인 경공업에 속해 있었고, 대부분의 조합원이 여성이었다. 이들은 장시간 노동, 저임금, 열악한 작업환경에 시달렸을 뿐만 아니라, 남성 관리자들에 의한 성희롱과 성폭력까지 겪어야 했기 때문에 그만큼 분노가 응어리져 있었다.

     

    1970년대 민주노조들은 형성과정과 일상활동, 투쟁과정에서 도시산업선교회·가톨릭노동청년회 등 기독교 단체들과 학생운동 출신 지식인 운동가들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았다. 기독교 단체들의 지원은 특히 소그룹 활동과 노동자교육에서 큰 역할을 했다.

     

    노동운동을 위하여 교회단체들이 지원한 가장 중요한 사업은 소그룹활동이었다. 교회의 지붕 아래에서 서로 접촉하게 된 6~8명의 노동자들이 샛별, 소나무, 청년클럽, 승리, 다이아몬드, 소띠모임 등의 이름을 가진 소규모 비공식집단들을 결성했다. 소모임 참가자들은 신부, 목사, 혹은 대학생교사의 지도를 받으며 정기적으로 만나서 다양한 레크리에이션 활동과 문화 활동에 참여하였고, 자신들의 공장생활과 현장의 문제들을 토론하였다. 이런 활동을 통하여 노동자들은 더 예리한 사회의식을 얻었고, 노동자의 권리와 노동조합의 중요성을 각성해나갔다. 70년대 민주노조운동은 대개 이런 소모임 활동의 산물이었다.[3]

     

    “70년대 초중반기 처음 활동을 시작하는 모임들은 주로 취미활동 … 교양문제를 많이 취급하였으나 70년대 중반기 이후에는 그룹을 시작한 지 3~4개월이 지나면 이런 것들보다는 자기들 회사의 노동문제, 노동법, 정치, 경제 등의 토픽을 스스로 선택하게 됨을 볼 수 있다. 이것은 처음에 산업선교는 노동자를 위해 무엇을 가르쳐 주는 곳으로 알고 무엇인가 자기들 생활에 보탬이 되는 것을 얻으러 왔다가 그런 것이 문제가 아니라 자기가 처해 있는 열악한 상황이 더 큰 문제라는 것을 발견하고 충격을 받고 이에 분노하는 ‘노동자 의식’이 생기게 된 결과에서 비롯된 것이다. … 대부분의 노동자들의 경우, 노동자 스스로 힘을 만들어 해결해야 함을 깨닫고 같은 회사의 다른 동료노동자를 조직하여 산업선교에 오게 하는 일에 열심하게 되곤 하였다. 어떤 노동자의 경우, 저 사람이 돈을 벌려고 공장에 다니나 아니면 그룹 조직하러 공장에 다니나 할 정도로 조직활동에 열심을 다하는 경우가 있었다. 어떤 그룹은 그룹 확장을 위해 아예 그룹원 전원(7~9명)이 흩어져서 각기 한 그룹을 조직하는 일도 있었다. 노동자들과 산업선교는 조심스럽게 그 회사에서 최우선적으로 개선해야 할 노동자들의 문제가 무엇인지를 의논하고 … 때가 이르렀다고 판단되면 그 회사에 속해 있는 전체 그룹들이 함께 모여(예, 수련회) 이 문제를 집중적으로 토의하고 행동에 대한 최종 결정을 하였다.” (「70년대 영등포산업선교회 전략」)[4]

     

    1970년대 후반에는 대학교의 이념서클이 급성장하면서 사회과학 이론으로 의식화된 지식인 운동가들이 많이 배출됐다. 이들이 야학에 참여하면서 시혜 차원의 검정고시야학이 사회운동을 목적으로 하는 노동야학으로 바뀌어 갔다.

     

    노동야학은 영어와 수학보다는 국어, 사회, 역사를 중심으로 교과목을 편성하고 사회과학의 기초를 가르친다. 사회의식이 깃든 노래를 가르치기도 하고, 어떻게 사는 것이 정말 인간답게 사는 것일까, 인생이란 무엇일까 등을 주제로 토론하기도 한다.

     

    일부 노동야학에서는 졸업 후에 후속 모임을 만들어 더 높은 의식화 교육을 실시한다. 이렇게 하여 노동야학은 의식화된 노동자들을 배출한다. 학생운동가들은 야학에서 노동자들을 만나며 현장감을 익히고 노동자운동에 투신할 준비를 한다.

     

    노동야학은 노동자들의 초기 의식화를 담당하고 노조 교육을 보완해 주는 역할을 해 민주노조의 발전에 도움을 준다.[5]

     

    민주노조는 기독교 단체들 및 지식인 운동가들과 협력하면서 조합원을 상대로 다양한 교육활동을 전개했다. 교육 내용은 주로 노동자의 기본적인 권리의식과 단결의 필요성을 일깨우는 것들이었다. 강의 외에도 토론, 노래, 율동, 연극, 촛불의식 등 다양한 교육방식을 활용했다.

     

    민주노조들은 조직적인 투쟁을 통해 임금인상과 노동조건 개선에 성공했다. 단체교섭권과 단체행동권이 사실상 금지되어 있었지만, 결연하게 단체행동을 조직해 요구조건을 쟁취해냄으로써 조합원들의 지지와 신뢰를 강화해 나갔다.

     

    이를테면, 청계피복노조는 1975년 12월 주휴제 철저 이행과 저녁 8시 작업 종료 등을 요구하며 ‘시간 단축 투쟁’에 들어갔다. 50여 명이 무기한 단식투쟁에 돌입하는 등 노조원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투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1978년 추석을 앞두고 원풍모방노조는 사측의 신입사원 상여금 체불 방침을 전면파업으로 철회시켰다. 이 투쟁으로 노조에 대한 조합원들의 절대적 신뢰가 형성됐다. 노조는 막강한 조직력을 토대로 매년 임금인상 때마다 인상액의 일주일분을 적립하고 상여금이 나오면 특별조합비를 내서 파업기금을 조성했다. 1982년 신군부에게 강제해산 당할 무렵 파업기금이 1억 5천만 원 넘게 적립돼 있었다.

     

    민주노조들의 앞길은 순탄치 않았다. 정권과 자본에다가 어용 상급단체까지 나서서 전방위적인 민주노조 파괴공작을 펼쳤기 때문이다. 수많은 노조간부들과 조합원들이 권력기관에 연행·구속되거나 수배되었고 회사로부터 해고당하면서 숱한 고초를 겪었다. 한국노총과 산하 산별노조들도 극심한 견제와 탄압을 가했다. 민주노조 조합원들은 대부분 어린 나이에도 권리의식과 주체의식에 스스로 눈을 떠 국가와 자본의 탄압에 맞서 강인한 투쟁을 벌였다.

     

    활동에 참가한 노동자들이 구사대나 회사에 고용된 깡패들에게 매를 맞는 것은 흔하게 있는 일이고, 여성 노동자는 성폭행의 위협에 떨어야 하고, 심지어는 살의를 띤 폭력에 죽음까지 각오해야 한다. 사소한 일을 빌미로 해고하고 회사측만의 진술로 구속해도 어쩔 도리가 없다. 이런 상황에서는 합법적인 활동조차 폭력에 굴하지 않는 용기와 자신의 희생을 각오하는 헌신적인 의지를 필요로 한다. ‘악으로 깡으로’ 민주노조를 건설하고 지킨다는 자세로 싸운다.[6]

     

    정권·자본·한국노총이 합작하여 획책한 노조파괴 공작에 정면으로 대항한 대표적인 사례는 1976~78년 동일방직노조(전국섬유노조 동일방직지부) 투쟁이었다. 1976년 7월 동일방직지부의 지부장 등 노조간부 10명을 경찰이 연행한 가운데 회사측 대의원들만 참석해서 어용 지부장을 선출했다. 이에 분노한 노동자들은 지부장 석방, 노조활동 보장, 대의원대회 무효 등을 주장하며 단식농성에 들어갔다. 경찰이 농성 조합원 연행에 나서자 여성노동자들이 속옷까지 벗어던지며 저항했다. 결국 노동자들이 승리하여 3대째 민주파 여성지부장이 탄생할 수 있었다. 1978년 2월 동일방직지부 총회가 예정된 날 조합원들의 선거 참여를 막기 위해 회사측 노동자 6명이 여성노동자들의 얼굴과 옷에 닥치는 대로 똥을 바르고 심지어 여자 기숙사까지 쫓아가 똥이 든 양동이를 머리에 뒤집어씌우는 만행을 저질렀다. 전국섬유노조는 조직행동대를 보내 지부 사무실을 점거하여 총회를 방해한 뒤 동일방직지부를 ‘사고지부’로 규정하고 집행부를 해산시켰다. 회사는 124명을 해고했다. 노동자들은 1980년 5월까지 줄기차게 현장복귀 투쟁을 전개했다. 전국섬유노조 본조는 해고자들의 명단을 블랙리스트로 만들어 전국 사업장에 배포하여 이들의 취업을 막았다.

     

    1976년 11월에는 원풍모방 지부장이 ‘국가원수 모독죄’를 이유로 치안본부 대공분실로 끌려갔다. 조합원 1,500여 명이 지부장 석방을 요구하며 농성을 벌인 끝에, 결국 7일 만에 석방되어 지부장으로 복귀했다.

     

    1977년 7월 경찰이 전태일의 어머니 이소선 여사를 법정모독으로 구속하고 청계피복노조의 평화시장 노동교실을 폐쇄하려 시도했다. 노동자 2천여 명이 경찰을 쫓아내고 교실을 장악했다. 경찰이 진압을 시작하자 청계피복노조 조합원들이 창문에서 뛰어내리고 팔목의 동맥을 끊고 유리로 배를 가르는 등 극렬하게 저항한 끝에 노동교실을 지켜냈다.

     

    민주노조 간부들은 기업과 지역을 넘어 서로 교류하면서 긴밀한 인간관계를 형성했다. 한 조직에서 문제가 발생하면 서로 의논하여 문제의식을 공유하고 해결책을 찾고자 함께 노력하기도 했다. 그러나 민주노조 간의 연대보다는 종교계 및 자유주의 보수야당의 보호·지원과 사회 여론의 지지에 기대어 문제를 해결하려는 경향이 더 강했다. ‘독재정권이 강요한 희생 때문에 노동자들이 궁핍해졌다’는 사회적 인식이 있어서 노동자들의 투쟁이 사회적 쟁점으로 부각되면 여론이 노동자들에게 유리하게 작용했다.

     

    1970년대 후반에는 개별노조 차원을 넘어서는 연대투쟁과 정치투쟁을 초보적인 수준에서 시도했다. 1977년 7월 10일 협신피혁 노동자 민종진의 가스 질식사에 항의하는 연대시위, 1978년 3월 20일 기독교방송국 점거시위, 1978년 3월 26일 여의도 부활절 연합예배장 시위 등이 그 사례였다.

     

    민주노조의 등장은 한국노동조합총연맹(한국노총)의 통제를 벗어난 새로운 노조운동이 시작되었음을 의미했다.

     

    한국노총은 박정희의 철권통치 아래서 정부 정책에 적극 협력하며 어용성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중앙정보부에 의해 조종되던 한국노총은 박정희 정권의 ‘10월 유신’이 선포되자 즉각 지지 성명을 발표했다.

     

    한국노총은 1973년 “국가 이익 우선주의에 입각하여 계급투쟁적인 극렬한 운동 방향을 배제하고 임금인상 일변도의 활동노선을 지양하고 생산성 향상 운동을 통한 분배원천의 증대라는 노사 공동 이익의 영역을 찾아 서로 협력”하기로 운동 방침을 정했다.

     

    한국노총 위원장은 1974년 1월 ‘한국노총 산별 위원장 및 시도협의회 연석회의 개회사’에서 “도시산업선교회 같은 불순분자의 조직침투행위에 대해서 전체 조직력을 총동원하여 지난날 전평을 타도한 그 기개로써 단호히 분쇄할 것을 다짐”했다.

     

    노사협조주의를 선언한 한국노총은 노동자의 단결된 투쟁을 포기하고 정부와 기업에 건의하거나 진정하는 방식으로 1970년대를 일관했다. 뿐만 아니라 유령노조 설립, 민주노조에 대한 사고지부 처리, 노조파괴 등으로써 자본가에게 적극 협력했다.

     

    한국노총 간부들은 자리를 지키기 위해 지부장 선거에서 부정을 저지르는 등의 비민주적 행위를 자행하고, 이권이 큰 좋은 자리를 차지하려고 자리다툼을 벌였다. 그러나 이들은 한국노총의 재원을 확보하고 직위 상승에 필요한 자기 패거리를 늘리기 위해 신규노조 결성을 지원하기도 했다. 이러한 사정으로 1970년대 초반 60만이었던 조합원 수가 후반에는 115만으로 급증했다.

     

    1970년대 민주노조의 수는 10여개에 불과했으며, 대부분 서울, 인천 등 경인지역에 몰려 있었다. 그러나 민주노조는 사용자와 대등하게 마주서서 자신들의 요구를 당당하게 주장함으로써 사용자의 말 한마디에도 오금 저리던 노동자들에게 희망이 됐다.

     

    민주노조들이 지향한 것은 인간답게 살고 싶다는 것이었다. 민주노조들은 현장에 뿌리를 둔 조직적 역량을 구축하여 지속적인 투쟁을 전개함으로써, 노동조건을 개선하고 노동조합운동의 자주성과 민주성의 원칙을 관철하고자 했다.

     

    민주노조는 권력과 자본의 탄압 실태를 폭로했고, 노동자로서의 권리를 주장했다. 그럼으로써 사회 전반에 노동문제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확산시켰고, 또한 기층 노동자들의 의식이 변화하는 과정에 불을 지폈다.

     

    민주노조들은 재야 민주화운동 세력과도 연대했다. 민주노조운동은 민주화운동의 폭을 넓히고 심화시키는 역할을 했다. 민주화운동은 1960년대 말까지만 해도 반독재라는 자유화운동을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그런데 민주노조운동이 그 자체의 존재를 통해서, 또한 다른 민중운동의 선구가 됨으로써, 민주화운동에 계급적 성격을 부여하기 시작했다. 민주노조운동은 유신체제에 끊임없이 타격을 가했고, 마침내 붕괴로 나아가는 중요한 계기를 만들어냈다.

     

    1970년대 민주노조운동에는 전태일의 헌신성과 치열함, 인간에 대한 믿음이 짙게 배어 있었다. 1970년대의 노조 활동가들은 인간을 신뢰하며 시대 상황의 어려움을 자기 것으로 받아들였고, 참담한 현실을 바꾸기 위해 헌신적으로 활동했다. 이런 전통은 전태일에서 시작했고 1990년대 초반의 전국노동조합협의회(전노협)까지 이어졌다.

     

    하지만 1970년대 민주노조운동은 분명한 약점을 안고 있었다. 무엇보다 자유주의 보수야당의 계급적 성격에 대한 과학적 인식이 부족했다. 또한 고립분산적 활동을 넘어 확고한 계급적 연대투쟁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 1974년 현대조선 파업

     

    1970년대 민주노조운동이 경공업의 여성노동자들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동안, 남성 위주의 중화학공업 노동자들의 투쟁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1970년대 중화학공업 대기업들이 형성되면서 젊은 남성노동자들을 집중시키고 있었다. 중화학공업 대기업 자본가들은 안정적인 인력 관리를 위해 상대적으로 높은 임금을 지급했다. 하지만 그만큼 높은 노동강도로 일을 했다. 중소사업장에서의 노동자통제가 대체로 가부장적이었다면 대기업에서의 통제는 군대처럼 강압적이었다. 당연히 불만을 가진 사람이 많았지만 이직률이 매우 높아서 불만 세력이 축적되지 않았다. 또한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는 노조는 절대 안 된다’는 대자본가들의 완고한 태도와 대기업 노동자의 조직화를 우려하는 국가기관의 통제정책 때문에 대기업에서의 민주노조 결성은 대단히 어려웠다.

     

    그러나 그 불만이 투쟁으로 표출될 때에는 아주 격렬한 양상을 띠었다. 1971년 9월 한진상사 베트남 파견노동자들의 대한항공 빌딩 방화사건, 1974년 9월 울산 현대조선(훗날 현대중공업) 노동자들의 파업, 1977년 현대건설 사우디아라비아 파견노동자들의 현지 파업시위 등이 그 대표적 투쟁들이었다. 신진자동차(훗날 대우자동차-한국GM) 부평공장에서는 1967년, 1969년, 1971년 세 차례나 노조결성 시도가 실패했다. 1971년 4월에 노조가 결성되기는 했지만 열성조합원 208명이 무더기로 해고당하면서 흐지부지됐다.

     

    1974년 9월 19일, 울산 현대조선에서 발생한 파업은 1970년대 최대 규모의 노동쟁의였다. 노동조합도 없고 합법적인 단체행동권도 없었지만, 노동자들은 자신의 요구를 내걸고 격렬하게 투쟁에 나섰다.

     

    1972년 3월 기공식을 가진 현대조선은 세계 처음으로 조선소를 건설하면서 동시에 유조선을 건조하는 ‘신화’를 만들어 나갔다. 하지만 그 신화의 실체는 지옥 같은 작업환경이었다. 현대조선에서 1973년 한 해에만 34명의 노동자가 중대재해 사고로 사망했다.

     

    1973년 7월 회사는 ‘위임관리제’라는 이름으로 사내하청 제도를 도입했다. 사원 대우를 해주겠다며 모집한 직영 기능공의 대다수를 사내하청으로 전환하는 조치였다. 1974년 10월까지 순차적으로 위임관리제 전환이 진행된 결과, 전체 기능직 가운데 직영공은 3,929명(26.6%), 사내하청은 10,852명(73.4%)이 됐다.

     

    1974년 9월 선각부 직영공 2,400명을 위임관리제로 전환한다는 회사의 방침이 발표되었을 때, 19일 오전 8시부터 노동자들이 신분보장과 처우개선 등의 요구조건을 내걸고 농성을 시작했다. “도급제 폐지하라” “사원과 기능공의 차별대우를 철폐하라” “시간당 임금을 100% 인상하라” “노동조합 결성을 보장하라” 등의 투쟁구호를 외치며 시작한 집단적 항의는 한 회사간부의 자극적인 발언에 의해 파업시위로 진화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상황이 급변하자 중심에 섰던 조장급들이 집단행동에서 빠져나가고 일반 노동자들이 시위를 주도하기 시작했다. 야간 작업조와 건조부 이외 노동자들이 합세하면서 파업 분위기를 고조시켰다.

     

    경찰과 노동청의 중재 아래 오전 10시부터 노사 간의 ‘협상’이 시작됐다. 형식을 갖춘 정식 협상이 아니라 회사를 대표하는 일부 간부가 메가폰을 들고 노동자들을 설득하려 하고, 노동자들은 그를 둘러싸고 중구난방으로 불평·불만을 터트리며, 경찰과 노동청 관료들은 회사와 노동자 사이에서 절충을 시도하는 식의 난상토론이었다. 협상은 순조롭지 않았다. 회사 측이 노조결성, 위임관리제 폐지 등 일부 사항에 대해 완강하게 수용을 거부하였기 때문이었다.

     

    오후 5시 30분경 노동자들과 정주영 그룹회장이 만났다. 하지만 정주영 회장이 위임관리제 만큼은 들어줄 수 없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특히 이 요구를 거부하는 극단적인 발표를 하며 노동자들을 자극했고 이것이 폭동으로 전환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3천여 명의 노동자들이 1,200여 명 경찰 저지선을 뚫고 정문 경비실에 걸려 있는 사기(社旗)를 불지른 후, 구내식당, 5층 본관건물 유리창 200여 장을 부수고 사무실 집기를 파괴하였다. ‘회사기물은 말할 것도 없고 생산시설인 철판절단기 1백여 대가 망가지고 경영진들의 승용차가 불타는가 하면 외국인 기술자 숙소에서는 TV, 라디오, 심지어 바르던 로숀까지 없어졌다.’ … 이날 오후 6시부터 다음 날 새벽까지 경남도경찰국장의 지휘로 진압이 시작되어 노동자 총 877명이 연행되고, 이중 20명은 구속, 21명은 불구속 기소되고 나머지 인원은 훈방되었다.[7]

     

    정부는 9월 21일 관계기관대책회의를 열고 노동자들의 요구사항을 분석한 후 회사에게 노사협의회 조직을 명령했다. 노사협의회(최초 명칭은 새마을협의회)를 통해 위임관리제 철폐와 노동조합 결성을 제외한 나머지 요구사항을 회사가 받아들이는 선에서 사태를 봉합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1974년 10월 5일 결성된 현대조선 노사협의회는 1987년 노동자대투쟁 직전까지 유지되면서 현대중공업에서 노동자들의 불만의 폭발을 지연시키는 고충처리기구로서의 역할을 수행했을 뿐 노동자들의 근본적인 문제는 해결하지 못했다.[8]

     

    1974년 현대조선 투쟁은 중화학공업 대기업 노동자들의 폭발력을 보여주었지만, 비조직적이고 자연발생적인 폭동의 한계를 드러냈다.

     

    ◎ 1979년 YH투쟁에서 유신붕괴까지

     

    1979년 8월 YH노조의 신민당사 농성투쟁은, 박정희 유신철권통치가 그 잔인함과 모순을 만천하에 드러낸 끝에 마침내 스스로 붕괴하도록 몰고 간 결정적 사건이었다.

     

    ‘YH무역’은 설립자 장용호의 이름을 따 만들어진 가발업체로 1966년에 창설됐다. 1970년대 초에는 4천여 명의 노동자가 일하면서 수출 순위 15위를 기록하는 한국 최대 가발업체로 성장했다. 그러나 노동자들은 도급제와 저임금, 장시간 노동, 비인간적인 대우에 시달렸다. 결국 1975년 민주노조를 결성했다.

     

    장용호는 미국에서 백화점과 호텔을 설립해 외화를 빼돌렸다. 뒤를 이은 경영진들도 회사 자금을 빼돌리고 은행 빚을 얻어 무리하게 사업을 확장했다. 1977년부터 재무구조가 극도로 악화된 회사는 1978년 말 도산 위기에 직면했다. 회사는 노동자를 500여 명으로 축소하더니, 마침내 1979년 3월 30일 일방적으로 폐업을 공고했다.

     

    YH노조는 부채상환 연기를 통한 회사 정상화나 3자 인수를 통한 고용승계를 목표로 끈질기게 투쟁을 이어갔다. 네 달 동안 노동청을 비롯한 관계기관을 찾아다니며 필사적으로 대책을 호소하고 항의했으나 아무런 성과가 없었다.

     

    8월 1일부터 기숙사에서 무기한 농성에 들어갔던 YH 노동자들은 8월 9일 새벽 삼삼오오 짝을 지어 회사 기숙사를 빠져 나와 신민당사로 농성장을 옮겼다. 오전 9시 30분 YH노조 187명의 여성노동자들이 신민당사에서 농성을 시작했다. 정상화가 아니면 죽음이다’는 각오로 택한 마지막 방법이었다. 아울러 “동일방직이 처참하게 깨지는 것을 보면서, 이왕 깨질 거라면 확실하게 왕창 깨져서 다시는 당국이 민주노조에 손댈 엄두를 못 내게 하겠다는 결심”이었다.

     

    10일 밤, YH 노동자들은 ‘우리를 나가라면 어디로 가란 말인가!’라는 현수막을 앞세우고 마치 유서를 쓰듯 ‘노조 종결대회’라는 이름의 총회를 열었다. 경찰이 진입하기 몇 시간 전이었다. 고향에 계신 부모형제를 향해 마지막 인사를 올린 뒤, “이제부터 어머님의 약값은 누가 댈 것이며, 동생의 학비는 누가 보탤 것입니까?”라며 오열했다.[9]

     

    11일 새벽 2시, 기동경찰과 폭력배 2천여 명이 신민당사에 투입됐다. 4층 강당 농성장에서 노동자들을 곤봉으로 무차별 구타하며 끌어냈다. 격앙된 몇몇 노동자들이 깨진 유리조각으로 자살을 기도했으나 10여 분 만에 모두 당사 밖으로 끌려 나갔다. YH 노동자 김경숙이 당사 뒷마당에서 왼팔 동맥이 끊긴 채로 발견돼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숨졌다. 항의의 뜻으로 동맥을 끊었다가 진압 도중 추락한 것으로 추정됐다. 2층 회의실에서는 신민당 총재 김영삼과 10여 명의 국회의원, 기자, 당원들이 폭력배들에게 무차별로 구타당했다.

     

    9월 들어 대학교가 개강하자 학생들이 연일 군부독재 퇴진을 외치며 거리로 나섰다. 16일 김영삼은 외신 인터뷰에서 “이 암흑적인 정치, 살인 정치를 감행하는 이 정권은 필연코 멀지 않아서 반드시 쓰러질 것이다, 쓰러지는 방법도 무참히 쓰러질 것이다”라고 규탄했다. 10월 4일 박정희 정권은 공화당과 유정회를 동원하여 제1야당 총재 김영삼을 의원직에서 제명시켰다.

     

    10월 16일 부산과 마산에서 시민들까지 합세한 대규모 시위가 벌어져 경찰력이 무력화됐다. 박정희 정권은 18일 부산에 계엄령을 발동하여 군대를 투입했다. 20일에는 마산에 위수령을 발동했다. 그러나 24일 대구에서도 수천 명이 시위를 벌이는 등 사태가 계속 확산됐다.

     

    위기를 맞은 지배세력은 강경파와 온건파로 분열됐다. 중앙정보부장 김재규는 ‘이대로 계속 가면 4·19 이상의 사태가 발생할 수 있다’면서 ‘하루빨리 수습책을 발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대통령 경호실장 차지철은 ‘캄보디아에선 300만 명을 죽여도 끄떡없다’며 ‘우리도 100만 명 정도 죽여 버리면 잠잠해질 것’이라면서 ‘버러지 같은 것들이 각하가 무서운 줄 알고 더 이상 대들지 못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박정희는 ‘시위가 확산되면 내가 직접 발포명령을 내리겠다’면서 차지철을 옹호했다. 결국 26일 김재규가 궁정동 안가에서 박정희와 차지철을 권총으로 살해했다. 1961년 이후 18년 이상 지속된 박정희 군사정권, 특히 1972년 이후 7년 동안 지속된 유신체제가 스스로 막을 내렸다.

     

    1979년 박정희 유신통치를 자기붕괴로 몰고 간 YH노조의 투쟁은 어떻게 가능했을까? YH 노동자들의 그 목숨 건 결기는 어디서 비롯된 것이었을까? 그것도 지도자 한 두 사람이 아니라, 180여 명이나 되는 농성대오가 그런 결기를 가질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민주노조’였다. 열서너 살에 고향을 떠나와 ‘공순이’의 서러운 삶을 살아가던 YH 노동자들은 민주노조와 함께 새로운 삶을 꿈꾸고 시작할 수 있었다. 유신의 엄혹한 철권통치 아래서도 민주노조로 단결한 노동자들은 감히 임금인상투쟁이란 것도 할 수 있었고, 그래서 사장의 오만한 콧대를 납작 찌그러뜨릴 수도 있었다. ‘단 하루를 살아도 인간답게 살고 싶은’ 욕구가 인간이 가진 다른 어떤 욕구나 두려움보다 소중하고 강력할 수 있다는 것을 몸소 깨달을 수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무릎을 꿇고 사느니, 차라리 민주노조와 함께 장렬하게 산화하고 싶었던 것이다.

     

    YH 노동자들에게 민주노조가 자기 목숨과도 바꿀 만큼 소중할 수 있었다는 것은, 민주노조를 통해서 그야말로 진정한 단결을 이뤄냈기 때문일 것이다. 진정한 소통과 우애를 통한 하나됨이 노동자들에게 삶을 송두리째 던질 만한 감동과 희열로 다가갔기 때문일 것이다.

     

    YH노조 조직체계는 조합원 의견을 늘 듣기 위해 [의장단 논의·대책마련 → 상집위원 논의 → 대의원 그룹토론 → 대의원과 상집위원 중 그룹진행위원을 선발(16명)하여 조합원을 16개 소그룹으로 나눈 뒤 모든 그룹에 참가하여 토론을 주도(나머지 대의원과 상집위원들은 보조역할) → 모임 뒤 그룹진행위원이 평가회를 통해 조합원의 반응·결정사항·요구내용 등 종합토론]하는 5단계 토의방식체계를 운영했다. 이는 조합원들이 차례로 그룹토의에 참가하여 참여의식을 높이며, 함께 문제를 발굴하여 해결방법을 모색하기 위한 것이었다.[10]

     

    YH노조는 노조원을 대상으로 모집 인원 60명인 녹지중학교를 설립하여 1984년까지 운영한다. 신민당사 농성 투쟁 중 사망한 김경숙은 이 학교 출신이다. 녹지중학교 졸업생을 상대로 비공개로 운영되는 동일교회 야학에서는 노동, 사회, 정치, 경제를 교육한다. 주1회 소그룹으로 운영되는 영클럽은 월 1회 교양강좌, 연 4회 역사공부, 연 6회 타 노조와의 연합모임을 가진다. 노조는 월 1회 대의원 모임을 열고 분반토론으로 논의를 활성화하고, 합창단과 탈춤반을 운영하며 노조원들이 노조에 쉽게 친근감을 가지게 하고, 상조회를 설립하여 우애를 돈독하게 한다. 이런 활동들에서 대학생 출신의 활동가가 상당한 역할을 담당하고 노동자들은 이들과 연계하여 헌신적으로 모범적인 활동을 펼친다. 이런 활동의 성과는 1979년의 일사불란한 신민당사 농성 투쟁으로 나타난다.[11]

     

    [미주]


    [1] 경향신문, 1970/10/07, 「골방서 하루 16시간 노동」.

    [2] 안승천, 2002, 『한국노동자운동, 투쟁의 기록』, 박종철출판사, 22~23쪽.

    [3] 노동사회교육원, 2008, 『금속노동자를 위한 노동운동사』, 전국금속노동조합, 93쪽.

    [4] 이광일, 2008, 『좌파는 어떻게 좌파가 됐나』, 메이데이, 122~123쪽.

    [5] 안승천, 2002, 『한국노동자운동, 투쟁의 기록』, 박종철출판사, 49~50쪽.

    [6] 안승천, 2002, 『한국노동자운동, 투쟁의 기록』, 박종철출판사, 26~27쪽.

    [7] 신원철, 2003, 「사내하청공 제도의 형성과 전개: 현대중공업 사례」, 『산업노동연구』 제9권 제1호, 111쪽.

    [8] 현대중공업노동조합, 2007, 『현중노조 20년』, 59쪽.

    [9] 경향신문, 2003, 「실록 민주화 운동 (24) YH노조 신민당사 농성사건」.

    [10] 유경순, 2012, 「1980년대 변혁적 노동운동의 형성과 분화에 관한 연구」, 65쪽.

    [11] 안승천, 2002, 『한국노동자운동, 투쟁의 기록』, 박종철출판사, 5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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