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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주의 기초학습#2] 자본주의의 원리 파헤치기
[편집자 주] 역사적으로 사회주의는 착취와 차별, 억압을 일소하고, 만인이 평등하게 살아가는 세상이 가능하다고, 그런 세상을 만들어야한다고 믿는 사람들의 사상이었다. 인간해방 세상을 꿈꾸며 투쟁하려는 이에게 사회주의는 지금도, 길을 찾도록 도와주는 계급투쟁의 나침반이다.
그러나 오늘날 진짜 사회주의 사상이 무엇인지는 쉽게 알기 어렵다. 역사의 굴절로 인해, 스스로가 '사회주의'라 주장하는 가짜 사회주의가 넘쳐나기 때문이다.
한편에는 반혁명으로 노동자국가를 파괴하고, 국가자본주의로 변질된 소련을 '유일한 사회주의 국가'라 칭한 스탈린주의자들이 있다. 오늘날 '중국특색 사회주의' '우리식 사회주의' 등 다양한 스탈린주의의 변종은 억압적인 자본주의 체제를 '사회주의'라고 포장하면서, 사회주의를 노동자계급의 과학적 자기해방 사상에서 계급지배를 정당화하는 수사적 도구로 바꿔버렸다.
다른 한편에는 제국주의 전쟁을 찬성하고 노동자혁명을 파괴한 개량주의자들이 있다. 오늘날 전통적 개량주의자들은 이미 지배계급의 일부가 되었고, 새로운 개량주의자들은 노동자계급의 혁명적 잠재력을 내부로부터 갉아먹는 의회주의와 관료주의를 '사회주의'와 뒤섞어버린다.
자본주의는 위기와 전쟁의 시대를 다시 불러왔다. 위기와 전쟁에 맞선 계급투쟁이 부활하고 있지만, 계급투쟁의 사상인 사회주의에 대한 정돈된 지식을 얻기는 너무나 어렵다. 위기와 전쟁의 시대를 혁명의 시대로 뒤엎기 위해, 스탈린주의와 개량주의의 혼란을 걷어내고 혁명적 사회주의 사상을 바로 세우는 것이 그 어느때보다 절실하다. 진짜 사회주의가 무엇인지 함께 배우고, 함께 세상을 바꾸는 운동을 만들어가기 위해 '사회주의 기초학습' 시리즈를 연재한다.
[다른 시리즈 읽기]
자본주의의 출현
우리는 자본주의를 자연스럽게 생각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태어난 우리는, 자본가로 태어나지 않은 이상, 특정한 기능과 역량을 습득해서 어딘가에 취업을 하고, 월급을 받아서 그 돈으로 나의 경제 생활에 필요한 재화와 서비스를 시장에서 구매해 생활하는 걸 당연하게 생각한다.
하지만 인류 역사를 길게 놓고 볼 때, 자본주의 생산양식(그리고 이에 뒤따르는 자본주의 생활양식)이 출현한 지는 얼마 되지 않는다. 인류의 역사를 약 2~300만 년이라고 보면, 그 중 자본주의 체제가 들어선 것은,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신대륙을 발견해 본격적인 식민화와 수탈로 상업자본주의의 시초축적을 시작한 시점으로 보더라도 약 500여 년이고, 산업혁명을 거치며 비약적으로 생산력이 발전하기 시작한 무렵부터 보면 대략 300여 년이다.
자본주의 생산양식의 출현은 사람들의 삶을 어떻게 바꿔놓았을까? 1강에서 살펴보았듯, 인류의 생산력 발전과 함께 원시적 공동소유가 사라지고, 국가와 함께 계급사회가 출현했다. 이후 자본주의 생산양식이 보편화되기 전까지 사회는 그 구체적 형태에서는 차이가 있지만 공통적으로 계급사회였다. 그런데 이 계급사회는 오늘날 자본주의적 계급사회와 본질적으로 다른 부분들이 있다. 김홍도가 그린 풍속도를 통해 자본주의 생산양식이 보편화되기 이전의 생활상을 잠시 살펴보자.
<타작>, 김홍도
<타작>을 보면 갓 쓴 양반이 누워 누가 열심히 하고 누가 농땡이를 피우는지, 농민들이 수확하는 걸 감시하고 있다. <타작>에 나오는 양반과 농민은 오늘날 사장과 노동자처럼 자유로운 근로계약을 체결한 관계가 아니다. 태어나 보니 누구는 양반이고, 누구는 상민이며, 계급적 차이는 혈통과 법률 속에 명시적으로 선언됐다. 농민은 양반의 논밭에서 일하고 일한 것 중 일부를 양반에게 갖다바쳐야만 했다. 양반과 농민이 평등한 관계가 아니라는 점은 모두에게 분명했으며, 양반이 생활하는데 필요한 소비수단이 농민의 노동의 일부를 떼어간 것이라는 점은 명확했다.
<길쌈>, 김홍도
<길쌈>을 보면, 아기를 업은 시어머니가 며느리의 길쌈하는 것을 지켜보고 있다. 오늘날 우리는 월급을 벌어서 필요한 옷을 비교해가며 사입는 게 당연하지만, 조선시대 때는 많은 농가에서 직접 길쌈을 하고, 마름질을 해서 옷을 재단해 입었다. 1년에 두 번 어렵게 만든 그 옷감으로 새로 옷을 지은 것을 ‘설빔’과 ‘추석빔’이라 불렀다. 즉 상품판매를 위한 생산이 아니라 자급자족을 위한 생산을 했다. 당시에도 나에게 필요한 재화를 시장에서 구입하는 경우도 있지만, 상품판매는 전면화 되어있지 않았고, 부분적으로만 상품교환이 이뤄졌으며, 핵심적인 경제생활은 자급자족을 통해 이뤄졌다.
<타작>은 당시 조선이 봉건적 신분관계에 기초한 사회였음을, <길쌈>은 아직 상품교환이 전면화되지 않은, 자급자족적 생산관계가 지배적인 사회였음을 보여준다. 자본주의 생산관계는 이러한 ‘전근대적 생산관계’에서 일련의 역사적 과정을 거쳐야만 형성된다.
(1강에서 ‘이중혁명’으로 요약하였듯이) 이런 봉건적 생산관계로부터 자본주의 생산관계가 출현하기 위해서는 첫째로, 노동자들을 ‘신분제로부터’ 자유롭게 만들어야 한다. 다시 말해 부르주아 혁명을 통해 신분제가 타파돼야 한다.
<바스티유 습격(La prise de la Bastille)> - 장 피에르 위엘(Jean-Pierre Houël)
바스티유 감옥 습격 사건은 프랑스 대혁명의 도화선이 되었던 사건으로, 봉건제적 신분관계를 혁명으로 뒤엎은 상징적 사건이다. 세계 곳곳에서 이와 유사한 역사적 과정을 통해, 봉건적 신분관계가 타파되었고, 노동자들은 신분의 구속에 얽메이지 않고 자유롭게 자기 노동력을 판매할 수 있는 상태가 되었다.
두 번째로, 노동자들을 ‘생산수단으로부터 자유롭게’ 만들어야 한다. 이를 대표적으로 드러내는 사건이 영국의 ‘인클로저’ 운동이다. 인클로저란 ‘울타리치기’를 의미하는데, 농사를 짓던 땅에 지주가 울타리를 쳐서 농민들을 쫒아내는 걸 의미한다. 17세기 경 모직물 공업이 발전하면서, 지주는 울타리를 치고 농민을 쫒아낸 뒤 양을 키우기 시작했다. 농민들로부터 잉여농산물을 수취하는 것보다 양털을 깎아 파는 게 더 남는 장사였기 때문이다. 토지로부터 쫒겨난 농민들은 도시로 와서 생산수단으로부터 유리된 ‘노동자계급’이 됐다. 즉 인클로저 운동은 대량의 무산계급(Proletariat, 프롤레타리아)를 낳아 자본주의 생산관계의 발전을 가속화하는 계기였다.
자급자족적 생산이 보편적인 사회에서 노동하는 사람들은 자기 생산수단을 가지고, 자기 노동을 투여해 생산물을 만들어내는 게 일반적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자본주의의 탄생과정과 함께, ‘노동하는 사람들’이 자신의 모든 생산수단을 박탈당하고, 도시로 밀려들어 노동자계급이 됐다. 가내수공업에서 매뉴팩쳐, 기계제 대공업까지 협업과 분업, 노동수단의 발전은 개별 노동자들을 오로지 전체 생산과정에서 부분적 기능만을 반복적으로 수행하는 부품으로 전락시켰다. 이로써 근대의 노동자는 이전 시대 노동자가 갖고 있던, 다양한 생산물을 직접 만들 수 있는 능력을 잃어버리고, 자본에게 고용되어 ‘부속품’으로 역할하지 못하면 스스로 생계수단을 생산할 수 없는 처지로 내몰렸다.
자본주의의 평등하고 불평등한 풍경
이러한 역사적 과정을 거쳐, 자본가와 노동자는 이제 ‘자유로운 계약관계’를 체결하게 된다. 자본가는 생산수단을 소유한 계급이고, 노동자는 노동력을 소유한 계급이다. 둘은 서로 ‘임금’과 ‘노동제공’을 등가물로 교환한다.
노동계약관계가 체결되면 자본가는 노동자에게 일을 시킬 권리가 있지만, 대신 임금을 지급해야하는 의무가 있다. 노동자는 사용자가 시키는 대로 일을 해줘야하는 의무가 있지만, 임금을 요구할 수 있는 권리가 있다. 이는 강제계약이 아닌 ‘자유계약’이다. 다시 말해, 노동자들보고 “너 이 회사에 들어가서 일해야 해”라고 감금하거나, 협박하거나, 납치한게 아니다. 형식상 노동계약은 언제나 노동자들의 자유의사에 의한 것이다.[1]
그러나 노동자라면 노동경험으로부터 자연스레, 이것은 형식적으로만 자유계약이고 실질적으로는 엄청난 불평등계약이라는 걸 체감한다. 노동계약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계약조건은 ‘노동제공과 임금의 교환비율’이다. 다시 말해 ‘일을 얼마나 할지’ ‘댓가를 얼마나 줄지’를 정하는 것이고, 간단히 말하면 ‘임금과 노동시간’의 결정이다.
이것이 실질적으로 대등한 계약이기 위해서는 마치 당근마켓에서 중고물품을 살 때와 같이, 임금과 노동시간에 대해 협상하는 과정이 있어야 한다. 하지만 현실은 어떠한가? 개별 자본가와 노동자의 노동계약 과정에서, 임금과 노동시간은 협상의 대상이 아니다. 매우 특수한 기술적 능력이 있는 일부의 경우를 제외하면, 보편적으로 노동자는 그저 자본가가 시키는 대로 순응해야한다. 자본가가 “얼마 줄테니 와서 일해”라고 하면 노동자는 “네 알겠습니다”라고 답할 뿐이고, “우리는 출근시간이 9시까지야”라고 하면 “네 늦지 않게 나갈게요”라 답하고 출근한다.[2]
자본가는 생산수단이 있지만 노동자는 노동력이 있는데, 왜 협상에서 양자 간 권력관계가 발생할까? 사회의 다수를 점하는 노동자들은 취업하기 위해 다른 노동자들과 경쟁해야하는 관계에 있기 때문이다. 만약 노동자가 어떤 식으로든 협상을 해보려고, 노동조합을 만들거나, 법을 지키라고 요구하거나, 고분고분 말을 듣지 않으면 자본가는 대개 “당장 그만두라”고 한다. 자본가 입장에서 개별 노동자는 대수롭지 않은 존재이기 때문이다. 오늘 당장 이 노동자를 해고해도 노동시장에서 이 노동자의 업무를 대체할 사람을 손쉽게 고용할 수 있다. 반면에 노동자는 취업상태에서 노동계약관계가 단절되면 당장 생존의 위협에 내몰린다.[3] 노동자들이 노동계약관계에서 구조적 약자인 일차적 이유는 바로 이 지점, 노동시장의 수요와 공급의 법칙이 적용되기 때문이며, 노동자는 자기 자신을 판매해야지만 살아남을 수 있는 계급이라는 데 있다.
"At the end of the day it's another day over
하루가 끝날 무렵이면 또 하루가 지나가지
With enough in your pocket to last for a week
일주일 먹고 살 정도의 돈을 주머니에 넣고
Pay the landlord, pay the shop
집세 내고, 외상 갚고
Keep on working as long as you're able
몸이 성할 때 일해
Keep on working till you drop
짤릴 때까지 일을 해
Or it's back to the crumbs off the table그렇지 않으면 빵부스러기나 주우며 살아야 할걸"[4]
영화 『레 미제라블』의 한 장면은 취업노동자와 실업노동자의 상태를 대비해 보여주고 있다. 도시로 밀려든 농민은 노동자가 되었는데, 취업을 하지 못한 노동자는 거리를 방황하며 생존의 벼랑에 내몰려 있다. 반면에 취업을 한 노동자는 관리자가 노골적으로 성추행을 해도, “일할 수 있어 복 받았다”고 이야기한다. 이 구조가 고착화되며 노동자들이 이제는 취업을 해 먹고 살아야만 하는 존재가 된 것이, 자본주의 생산관계다.
지금까지 자본주의가 언제 어떻게 탄생했는지, 그리고 우리에게 익숙한 오늘날 자본주의의 작동모습을 간략히 살펴보았다. 다음으로 겉으로는 ‘임금’과 ‘노동제공’의 평등한 교환관계에 기초해보이는 자본주의 생산과정이, 실제로는 어떻게 노동자를 ‘착취’(exploit)하여, 이윤을 획득하는 과정인지를, 마르크스의 『자본론: 정치경제학 비판』의 논의를 따라 설명하려 한다.
이상향을 계획하는 대신 자본주의의 원리를 밝혀낸 마르크스
산업혁명을 전후한 시기, 노동자와 자본가 사이의 빈부 격차와 사회적 대립이 극심하게 벌어졌다. 기존 인류 역사에선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생산력 발전이 이뤄질 때 자본가들은 천문학적인 부를 축적했지만, 노동자들은 생존의 벼랑으로 내몰렸다.
오늘날은 ‘사회주의자’라고 하면 자연스럽게 마르크스를 떠올리지만, 산업혁명 이후 노동자들의 심각한 생활조건과 자본주의의 폐해를 목격한 많은 사람들이 이를 어떻게 개선할 것인가를 놓고 ‘사회주의’ 또는 ‘공산주의’라는 이름 아래 백가쟁명식 의견을 내고 있었다. (1강에서 살펴보았듯) 대표적으로 생시몽, 푸리에, 오언 같은 이들이 있었는데,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이들을 ‘공상적 사회주의자’라고 불렀다. 이들은 자본주의라는 비인간적인 체제를 철폐하고, “효율적이고 공정하고 계획되는” 사회주의라는 이상향을 실현하겠다는 꿈을 꾸었다. 마르크스도 물론 그랬다. 그러나 그들은 전혀 다른 방법을 택했다. 공상적 사회주의자의 방법은 예컨대 아래와 같았다.
“필요한 모든 것은 이상적인 사회를 계획하고, 권력자들이나 부자들을(또는 둘 다를) 그 계획에 끌어들이고, 소규모로 그것을 실험하고, 그 다음에 그것을 탄생시키기 위해 사람들의 자상한 분별력에 의지하는 것뿐이라고 그들은(공상적 사회주의자들은) 믿었다.
그리하여 유명한 영국 사회주의자 로버트 오웬은 제목만으로도 주제를 짐작할 수 있는 《새로운 도덕적 세계에 관한 책》을 썼다. ... 책의 끝머리에서 오웬은 대영제국의 국왕인 윌리엄 4세에게 편지를 쓴다. 그 편지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본서는 ... 새로운 도덕적 세계의 근본 원리를 제시하고 있으며, 그리하여 사회를 재건하고 인류의 품성을 재창조하기 위한 새로운 토대를 놓고 있습니다. ... 사회는 근본적으로 잘못된 상상력에서 출발했으며, 세계에 관한 인간의 모든 관례와 사회 제도는 이러한 잘못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 폐하, 폐하가 통치하시는 동안, 온갖 사악한 결과를 낳은 이 제도가 자명한 진리에 토대를 두며 모든 사람에게 행복을 보장하는 다른 제도로 반드시 변하리라 믿습니다.”[5]
엥겔스는 공상적 사회주의자들의 한계 또한 유물론적 역사파악을 통해 해석한다. 공상적 사회주의자들이 활동하던 19세기 초까지만 하여도 자본주의적 생산관계는 충분히 발전하지 않았고, 이를 반영하는 노동자의 계급투쟁도 아직 충분히 발전하지 않았다. 계급투쟁이 미발전된 상태였기에, 공상적 사회주의자들이 보기에 노동자는 역사의 주체가 아니라 “자력 갱생의 능력이 없으므로 기껏해야 외부로부터나 위로부터 도움을 받아야 하는 억압받고 고통받는 신분”으로 보였다. 이러한 “자본주의적 생산의 미성숙 상태, 미성숙한 계급 상황에 미성숙한 이론들이 조응”했고, “사회적 과제들의 해결은 발전하지 못한 경제적 관계들 속에 숨어 있었기 때문에 머리 속에서 산출”됐다. 즉 공상적 사회주의자들은 자본주의적 생산관계의 미발전, 그리고 계급투쟁의 미발전이라는 당시의 역사적 조건 때문에, 자본주의적 생산관계를 변혁할 수 있는 수단을 계급투쟁으로부터 찾을 수가 없었고, 그래서 계급투쟁이 들어가야할 자리를 “새롭고도 한층 완전한 사회 질서의 체계를 발명하는 것, 그리고 선전을 통해서, 가능하면 모범적 실험들의 실례를 통해서 그 체계를 외부로부터 사회에 강요”하는 것으로 대체했다.[6]
이런 다양한 사회주의자들과 비견하여,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자신들의 사회주의를 ‘과학적 사회주의’라고 표현했다. (1강에서 살펴보았듯) 마르크스는 ‘인간은 자신에게 주어진 조건 위에서 역사를 만든다’는 유물론적 역사관을 정립했다. 마르크스는 이를 바탕으로 공상적 사회주의자들이 ‘머리로(공상으로)’ 수행했던 과제를, 자본주의라는 특정한 생산체제에 대한 분석으로 대체했다.
자본주의 생산체제에 대한 분석은 왜 중요한가? 노예제와 봉건제 시대에 노동하는 인간(노예와 농노)이 착취당하고 있다는 것(자신의 노동의 일부를 빼앗기고 있다는 것)은 너무 명백했다. 노예는 애초에 인간 취급도 받지 못했고, 농노는 나흘은 자기 토지에서 일하고 이틀은 영주의 토지에서 일하는 등, 지불노동과 불불노동이 분명히 구분됐다.
그러나 노동자는 외견 상 자유롭다. 일을 할지 말지 선택할 수 있고, 일하는 댓가로 약정된 임금을 받는다. 다시 말해 자본주의 사회에서 ‘착취’는 외견 상 드러나지 않고 은폐돼있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 생산체제에 대한 분석을 통해, “착취를 은폐하고 있는 장막을 찢어버렸다.” 마르크스 경제이론의 핵심은 자본주의 체제가 노동에 대한 착취에 바탕을 두고 있다는 것을 밝힌데 있다.[7]
자본주의 생산체제에 대한 마르크스의 분석을 통해, 노동자계급은 자본주의가 체계적인 착취와 수탈에 기반하고 있고, 이윤 축적을 위해 착취와 수탈을 유지하고 강화하려는 자본의 운동이 차별과 혐오, 공황과 전쟁, 기후재난 등을 끊임없이 불러오고 있다는 점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나아가 이는 특히 당시에 노동자계급을 향해 일체의 ‘투쟁무용론’을 제기하던 부르주아 경제학자들의 주장에 맞서, 일차적으로는 노동자가 투쟁을 통해 착취를 제한하고 더 나은 삶의 조건을 쟁취할 수 있다는 사실을 입증했고, 나아가 자본주의 체제의 모순을 끝내는 주체로서 노동자가 스스로를 조직하는 것의 필요성과 가능성, 그리고 정당성을 입증했다.
마르크스가 변증법이란 철학적 개념을 사용해 역사의 유물론적 전개과정을 규명해낸 대표적인 책이 『독일 이데올로기』라면, 『자본론: 정치경제학 비판』은 잉여가치를 매개로 하는 자본주의 생산의 비밀을 폭로해낸 책이다. 2강에서는 자본주의의 원리를 파헤친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을 다룰 것인데, 특히 『자본론』 1권에서 마르크스가 전개한 핵심적인 내용에 대해 자세히 살펴볼 것이다.
『자본론』은 어떤 책인가?
마르크스는 1867년에 독일어로 『자본론』을 처음 발간했다. 마르크스가 『자본론』에서 연구대상으로 삼는 것은 “자본주의적 생산방식, 그것에 대응하는 생산관계와 교환관계”다.
『자본론』은 자본주의 발전에 대한 아주 상세한 자료조사에 기초하고 있다. (1강에서 확인하였듯이) 마르크스는 헤겔의 변증법을 ‘거꾸로 뒤집었고’, “관념적인 것은 물질적인 것이 인간의 두뇌에 반영되어 생각의 형태로 변형된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보았다. 그래서 마르크스는 구체적이고 귀납적인 방대한 조사로 복잡다단한 현실, 즉 “재료의 상이한 발전형태들을 분석”한 뒤, 구체적인 현실에 기반해 이를 추상화한 이론, 즉 “이 형태들의 내적 관련”을 규명했다. 다시 말해 마르크스는 선험적 논리구성을 하고서 이에 현실을 껴맞춘 게 아니라, 반대로 구체적인 사실들을 종합한 결과로서 자본에 관한 이론을 제시했다.
자본주의 생산관계에선 모든 것이 상품으로 자신을 드러낸다. 그래서 『자본론』은 상품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한다. “부르주아 사회에서는 노동생산물의 상품형태 또는 상품의 가치형태가 경제적 세포형태”이기에, 자본주의 사회의 기초를 이루는 이 세포형태에 대해 먼저 탐구하겠다는 것이다. 이는 『자본론』에서 가장 추상적인 부분으로, 마르크스도 서문에서 “제1장, 특히 상품분석이 들어 있는 절을 이해하기가 가장 힘들 것”이라 했다. 이번 강의 또한 이 부분을 이해하는 데 많은 시간을 할애할 것이다.
『자본론』 제1권은 잉여가치가 발생하는 핵심적 과정인 ‘자본의 생산과정’에 대해 다루고, 제2권은 ‘자본의 유통과정’, 제3권은 ‘자본의 총과정의 각종 형태들’을 다룬다. 마르크스가 끝내지 못한 작업을 엥겔스가 마르크스 사후에 편집해 제2권과 제3권을 출판했다. 마르크스는 제4권에서 ‘경제학설사’를 다루고자 했지만, 초고를 작성하는데 그쳤다. 제2권과 제3권을 포함한 『자본론』의 모든 내용을 다루는 것은 너무나 방대하기 때문에, 기초학습 과정에 해당하는 이 교육자료에서는 가장 중요한 제1권 중 자본의 생산과정에 대한 내용을 전하는 것을 주요목표로 하며, 나머지는 추후의 과제로 남겨둘 것이다.
상품의 두 요소: 사용가치와 교환가치
본격적으로 들어가보자. 자본주의에서 부는 ‘방대한 상품더미’로 나타난다. “상품은 부의 기본형태다” 『자본론』을 따라 자본주의를 이루는 ‘세포’라 할 수 있는 ‘상품’을 분석해보자.
모든 상품은 공통적으로 두 가지 요소를 가지고 있다. 첫째, 상품은 인간에게 ‘유용하다’는 특징을 지닌다. 우리가 소비하는 일상적인 상품들을 떠올려보면, 하나같이 어떤 유용성, 즉 쓸모를 갖고 있다. 이 유용성으로 인해 상품은 보편적으로 ‘사용가치’(use-value)를 갖는다. 어떤 물건의 유용성은, “상품의 기하학적, 물리학적, 화학적 또는 기타의 자연적 속성” 때문이다. 예컨대 옷은 인간에게 보온성과 심미성을 제공하고, 자동차는 인간이 빠른 속도로 이동하게 해준다. 사용가치는 “그 유용성을 취득하는 데 인간노동이 많이 드는가 적게 드는가 하고는 관계가 없다.” 예컨대 스마트폰 1개를 만드는 것은 목도리를 하나 만드는 과정에 비해 분명하게 많은 노동을 필요로 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스마트폰과 목도리의 쓸모를 양적으로 비교할 수는 없다. 그 둘의 가치는 질적으로 아예 다르기 때문이다. 각 상품이 가지는 사용가치는 질적으로 모두 다르며, 따라서 사용가치 간의 양적 비교는 불가능하다.
둘째, 모든 상품은 사용가치와 함께 ‘교환가치’(exchange-value)를 지닌다. 교환가치는 “어떤 종류의 사용가치가 다른 종류의 사용가치와 교환되는 비율”이다. 우리는 일상에서 쉽게 이를 이해할 수 있는데, 모든 상품에는 ‘가격’이 붙기 때문이다. 예컨대 옷은 5만원, 핸드폰은 100만원, 자동차는 1000만원에 판매된다. 그렇다면 옷 20벌 = 핸드폰 1개라는 등식이 성립한다. 이렇게 등식을 성립하게 하는, 상품의 내재한 공통의 속성을 ‘교환가치’라고 이야기한다.
그런데 ‘교환가치’는 어떻게 결정될까? 질적으로 서로 다른 물체인 옷과 핸드폰과 자동차 사이에 양적인 비교가 가능하다는 것은, 이 상품들 안에 비교가능한 어떤 ‘공통적인 무엇’이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공통의 무엇’은 “상품의 기하학적, 물리학적, 화학적 또는 기타의 자연적 속성일 수 없다”. 그런 것들은 상품마다 질적으로 다 다르기 때문이다. 이런 속성들은 각각의 상품이 각각의 유용성, 즉 ‘사용가치’를 지니도록 하는 속성이긴 하나, ‘교환가치’를 지니도록 하는 속성이 아니다.
‘사용가치’를 지니도록 하는 온갖 ‘기하학적, 물리학적, 화학적, 기타의 자연적 속성’을 무시한다면, 상품에는 오직 하나의 속성만 남는다. 바로 “그것이 노동생산물이라는 속성”이다. 즉 교환가치는 모든 상품들이 공통적으로 ‘노동생산물’이라는 점에서 기원하며, 그 공통된 속성 덕분에 양적으로 비교가 가능해진다.
좀 더 고찰해보자. 어떤 생산물을 만들어내는 ‘노동’의 질적 형태는 매우 다양하다. 예컨대 ‘휴대폰을 조립하는 노동’과 ‘옷을 재봉하는 노동’은 질적으로 동일하지 않다. 노동은 언제나 이런 “구체화된 노동” 혹은 “노동생산물에 체현된” 노동으로 나타난다. 마르크스는 이런 구체적인 노동을 유용노동(useful labor 또는 concrete labor)이라 불렀다. 예컨대 쌀은 쟁기질을 통해, 저고리는 재봉질을 통해 만들어진다고 할 때, ‘쟁기질’과 ‘재봉질’이라는 각각의 특수하고 구체적인 노동행위는 ‘유용노동’이다. 특정한 사용가치는 특정한 유용노동을 통해 만들어진다.
그런데 질적으로 서로 다른 다양한 유용노동은, “인간의 두뇌, 근육, 신경, 손 등의 생산적 소비이고, 이 의미에서 모두 (공통된) 인간노동이다.” 그래서 “생산활동의 명확한 질, 따라서 노동의 유용한 성격을 무시한다면, 생산활동은 다만 인간노동력의 지출에 지나지 않는다.” 마르크스는 이렇게 각각의 구체적 유용노동의 질적 차별성을 제거한, (인간의 두뇌, 근육, 신경, 손 등을 생산적으로 소비한다는 점에서) 공통된 노동의 속성을 추상노동(abstract labor)이라 불렀다. 바로 이 공통의 요소, “노동의 상이한 구체적 형태”를 제거하고 그 모든 구체적 형태에 보편적으로 존재하는 “추상적 인간노동”이, 모든 종류의 노동생산물(혹은 상품)에 공통적으로 들어가는 유일하게 비교가능한 속성이다. 마르크스는 모든 노동생산물에 공통적으로 “응고되어 있는” 이 인간노동의 양을 ‘가치(value)’라고 불렀다.[8] 그리고 가치가 화폐적 형태로 표현되는 것, 다시 말하면 “어떤 종류의 사용가치가 다른 종류의 사용가치와 교환되는 비율”로 나타나는 것이 ‘교환가치’다.[9]
‘사용가치’와 달리 ‘가치’는 “노동의 양”에 의해 양적으로 비교가능하다. “노동의 양은 노동의 계속시간으로 측정하고, 노동의 계속시간은 시간, 일, 주 등을 기준으로 측정”할 수 있다.
어려운 얘기처럼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질적으로 서로 다른 노동을 비교해, 상품의 양적인 교환비율을 정하는 과정은 관념속에만 존재하는 추론이 아니라, 실제로 인류 역사에 걸쳐 늘상 생산자들이 관습적으로, 경험적으로 해오던 행위다.
우리가 조선시대에 살고 있는 농민이라고 상상해보자. 농민은 농사를 지어서 쌀을 수확한다. 그 중에 우리 가족이 먹을 분량을 빼고, 일부 잉여생산물을 갖고 시장에 나가 교환을 한다. 예컨대 한 말의 쌀을 잉여생산물로 가지고 나갔다고 가정하자. 장터에서 한 말의 쌀을 다른 유용한 상품, 예컨대 농사만 짓느라 옷 지을 시간이 없었기 때문에, 저고리 한 벌을 사려고 한다고 가정하자. 저고리랑 쌀을 교환하려 하는데, 이 때 저고리 한 벌을 사기 위해 얼마만큼의 쌀을 댓가로 줄 것인가, 이것이 교환가치의 문제다.
농민은 손해를 보기 싫기 때문에, 저고리 상인과 흥정하면서 자기가 이 쌀을 만드는데 얼마나 많은 노고가 들었는지를 설명한다. 저고리 상인도 마찬가지로 손해를 보기 싫기 때문에 저고리를 만드는데 한땀한땀 얼마나 많은 수고로움이 있었는지를 설명한다. 이것이 교환가치의 비율을 정하게 되는 관습적 과정이다. 이 때 생산자들은 두 가지 서로 다른 상품을 손해보지 않고 교환하기 위해, 나와 상대방이 생산물에 투입한 ‘노동의 양’을 계속 비교한다. 즉 내가 쌀을 생산하는 데 ‘얼마만큼의 노력과 시간을 들였는지’, 그리고 ‘만약 같은 노력과 시간으로 저고리를 만들었다면 몇 개나 만들었을지’를 생각하며 비교한다. 다시 말해, 농민은 그 상품을 생산하는 데 투여된 자신의 노동의 양을, 저고리를 만드는 노동의 양과 비교한다. 노동의 양을 서로 비교하는 이런 과정을 통해 상품들 간의 교환비율이 결정된다.
그런데 여기서 사회적으로 결정되는 교환비율은, 사람마다 다른 개별적 노동시간에 의해서가 아니라, “사회적으로 필요한 노동시간(Socially necessary labour time)”, 즉 “주어진 사회의 정상적인 생산조건과 그 사회에서 지배적인 평균적 노동숙련도와 노동강도에서 어떤 사용가치를 생산하는데 드는 노동시간”에 의해 결정된다.
예컨대 평균적 숙련과 노동강도로 농사를 지을 때 한 말의 쌀을 만들기 위해 사회적 노동시간이 10시간 소요된다고 하자. 그런데 나는 농사를 처음 지어보는 초보농사꾼이라, 실수도 많이하고 새로운 걸 익히는데 시간도 오래걸려 50시간을 투여해 한 말의 쌀을 지었다고 하자. 내가 50시간을 투여했다고 해도, 시장에 나간 나의 한 말의 쌀은 50시간의 가치를 인정받지 못한다. 쌀을 구매하려는 자는 10시간 분의 가치로 판매하는 다른 쌀을 구입할 수 있으니, 나에게 50시간 어치의 가치를 주며 사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런 교환이 이뤄질 때는 ‘사회적으로 필요한 노동시간’을 따져 교환이 이뤄진다. 다시 말해 어떤 상품의 가치가 ‘사회적으로 필요한 노동시간’에 의해 결정된다.
한가지 짚고 가자면 ‘사용가치’를 지니는 물건이라고 해서, 즉 유용한 물건이라고 해서, 반드시 ‘교환가치’를 지니는 것은 아니다. 예컨대 공기 중 산소는 인간의 생존에 필수적인 엄청난 유용성을 지니고 있지만, 가치가 없고 따라서 가격도 없다. 산소의 유용성을 우리가 소비하는데 노동이 필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반대로 말해, 만약 기후위기와 환경파괴가 지금보다 더 심각해져서, 산소를 획득하기 위해선 공기여과장치를 반드시 사용해야 한다면, 다시 말해 산소가 인간노동의 투입 없이 자연에서 얻을 수 있는 유용성이 아니게 되면, 그 때부터 산소는 ‘상품’이 될 것이다. 또 어떤 생산자가 오로지 자신의 자급자족을 위해 생산한 경우, 즉 시장을 매개해 다른 사람의 필요를 충족시켜주기 위함이 아니라, 자신이 소비하기 위해 생산한 물건 또한 ‘교환가치’를 지니지 않는다. 예컨대 가사노동은 “자신이 수행되는 바로 그 사적영역 안에서 ‘생산적 소비’로 행해진다.” 그래서 “가사노동은 교환가치는 되지 못하지만, 사용가치를 생산한다.[10] ”
화폐의 등장과 일반화
상품은 사용가치와 교환가치를 지니고 있다. 그런데 사용가치와 달리 교환가치는 물질적 실체가 아니기 때문에, “어떤 하나의 상품을 아무리 돌려가며 만지면서 조사해 보더라도 그것이 (교환)가치를 가진 물건이라는 것을 알 수 없다.” 왜냐하면 교환가치는 “순수히 사회적인 것”이고, “오직 상품과 상품 사이의 사회적 관계에서만” 나타날 수 있기 때문이다.
교환가치는 현실에서는 ‘화폐’를 매개해 표현된다. 예컨대 옷과 핸드폰의 교환가치는, 옷은 5만원, 핸드폰은 100만원이란 형태로 표현된다. 마르크스는 원시적 상품거래에서 출발한 단순한 가치형태가 어떻게 오늘날 우리에게 익숙한 화폐형태로 발전했는지에 대해 설명한다. 이를 축약해 설명해보겠다.
아까 우리는 조선시대 농민의 삶을 상상했는데, 그 때 1말의 쌀이 1벌의 저고리와 교환된다고 가정해보자. 우리는 이를 아래와 같이 표현할 수 있다.
●단순한, 개별적 또는 우연적 가치형태(simple form of value)
1말의 쌀 = 1벌의 저고리
이러한 표현을 통해 쌀이라는 상품은 저고리를 통해 자신의 가치를 드러낸다. 저고리와 비교할 수 없다면, 쌀은 자신의 ‘가치’를 표현할 방도가 없었지만, 이제 “상품 A(쌀)는 ... 사용가치 B(저고리)를 자기 자신의 가치의 표현재료로 삼는다.”
그런데 농민인 나는 쌀을 저고리하고만 교환하지 않는다. 점차 상품거래가 발전하면서, 이제 농민은 시장에 나가 쌀을 계란, 고등어, 금 등등 다양한 상품과 교환할 수 있다. 이걸 아래와 같은 도식으로 표현할 수 있다.
●총체적인 또는 전개된 가치형태(Expanded form of value)
1말의 쌀 = 1벌의 저고리
= 30개의 계란
= 5손의 고등어
= 1돈의 금
= 기타 등등
이 관계를 그대로 뒤집어서 표현해보자.
●일반적 가치형태(General form of value)
1벌의 저고리
30개의 계란
5손의 고등어 = 1말의 쌀
1돈의 금
기타 등등
이 때 쌀은 “일반적 등가물(universal equivalent)”의 성격을 가진다. 즉 온갖 상품들이 쌀을 자신의 가치를 표현하는 재료로 삼고 있으며, 온갖 상품들을 비교하는 도구로 사용된다는 뜻이다.
사람들은 교환을 거듭할수록, 교환을 빨리, 용이하게, 편리하게 하기 위해, 다양한 물품의 가치를 하나의 상품으로서 나타내고자 하는 욕구가 생긴다. 그래서 다양한 여러 상품들의 가치를 하나의 특정 상품으로 표현하게 되는데, 바로 그 상품이 ‘화폐’가 된다.[11]
그런데 역사적으로, 대부분의 사회에서 귀금속이 화폐의 자리를 차지한다. 이는 무게만 측정하면 되고, 어느 부분을 떼어내도 질이 동일하다는, 귀금속이 가진 고유한 질적 특성 때문이다.[12]
그래서 예컨대 1말의 쌀이 1돈의 금과 교환된다고 가정하고, 화폐의 자리를 금에게 넘겨주면, 아래와 같은 수식이 나온다.
●화폐 형태(Money form of value)
1벌의 저고리
30개의 계란
5손의 고등어 = 1돈의 금
1말의 쌀
기타 등등
여기서 1돈의 금을, 금본위제[13]에서 10만원이라는 명칭으로 표현한다면, 이 다양한 물품들은 10만원이라는 우리에게 친숙한 ‘가격’을 가지게 된다.
1벌의 저고리
30개의 계란
5손의 고등어 = 100,000원
1말의 쌀
기타 등등
이렇듯 가장 초보적인 교환관계를 드러내는 ‘단순한 가치형태’가 역사적으로 발전해 ‘화폐형태’가 된다.
그런데 이렇게 화폐가 일반적 등가물로서 특수한 기능을 하게 되면서, 화폐에 대한 ‘물신(fetishism)’이 자라난다. “다른 모든 상품들이 자기들의 가치를 하나의 특정한 상품으로 표현하기 때문에 그 특정 상품이 화폐로 되는 것”인데, 마치 “한 상품이 화폐이기 때문에 다른 모든 상품들이 일반적으로 자기들의 가치를 그 상품으로 표현”하는 것처럼 이해된다. 여기서 마치 18세기 계몽주의자들의 사회계약론과 유사하게, 어떤 상품을 화폐로 사용할 것인지를 “인간의 보편적 찬성 아래에서 자의적으로 지어낸 것”으로 인식하게 되는데, 실상은 그렇지 않다. 역사적으로 화폐가 된 물건(주로 금이나 은 등의 귀금속)은 화폐이기 이전에 노동생산물이고 상품이었다.[14]
상품과 화폐는 우리가 조선시대를 예로 들었듯이, 아직 상품생산이 전면화되지 않은 사회에서부터 조금씩 등장하기 시작한다. 상품유통의 발전 초기에는 “사용가치의 잉여분만이 화폐로 전환된다.” 다시 말해 사람들은 자급자족적 생산을 하고 남은 잉여물을 상품으로 내놓으며, 다른 상품을 사기 위해 화폐를 잠깐 활용하고, 곧바로 다른 상품을 취득한다.
그런데 상품생산과 유통이 점차 늘어날수록, 사람들은 자급자족적 생산을 하기보다 더 많은 상품을 시장에서 구매하게 되고, 여러 상품을 언제든 필요할 때 구매할 수 있는 힘을 가진 화폐를 늘 수중에 지니고 있을 필요성이 늘어난다. “상품생산이 더욱 발전함에 따라 상품생산자는 누구나 사회가 제공하는 담보(즉 화폐)를 확보해 두지 않으면 안 된다” “상품유통의 확대에 따라 언제라도 이용할 수 있는, 절대적으로 사회적 형태의 부인 화폐의 권력이 증대한다”
화폐는 갈수록 일반화된다. 상품마다 서로 다른 생산기간의 차이를 조율하기 위해 ‘신용화폐’가 등장하고, 지대나 조세 등도 현물납부로부터 화폐지불로 변한다. 특정한 지불결제일이 생겨나고, 국가수준을 넘어 ‘세계화폐’가 (처음에는 금와 은으로) 등장한다.
화폐의 확대와 함께 점점 유용한 상품을 소비하려는 욕구보다, 화폐를 많이 보유하려는 욕구가 늘어난다. 왜냐하면 “(화폐를 포함한) 상품의 가치는 그 상품이 물질적 부의 모든 요소를 어느 정도 지배하는가를 나타내며, 따라서 그 상품소유자의 사회적 부의 크기를 나타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화폐를 더 많이 축적하기 위해 많이 판매하고 적게 구매하려 하고, “근면과 절약과 탐욕이 그의 주된 덕목”이 된다.[15]
화폐의 자본으로의 전환
지금까지 상품에 내재한 속성(사용가치와 교환가치), 그리고 상품생산과 유통의 발전에 따라 화폐가 등장하는 과정에 대해 설명했다. 그 과정에 우리는 부분적 상품교환이 이뤄지던 조선시대의 농민을 상상했다. 즉 우리는 ‘자본주의’ 사회에 대해서는 아직 고찰하지 않았으며, 이제 자본주의가 탄생하는 출발점에 서있다. “상품생산과 상품유통, 그리고 상품유통의 발달된 형태인 상업은 자본이 성립하기 위한 역사적 전제조건을 이룬다.” “16세기에 세계무역과 세계시장이 형성된 때로부터 자본의 근대사가 시작된다.”
자본은 “언제나 처음에는 화폐의 형태로” 무대에 등장한다. 앞서서 고찰한 화폐가 ‘상품을 구매하려는 목적’을 위해 봉사하는 수단으로서 존재했다면, 자본으로 변화한 화폐는 이제 그 자체가 목적이 된다.[16] ‘상품’은 더 많은 화폐를 축적하기 위한 수단으로 변한다.
마르크스는 이를 도식화해 상품유통의 형태가 ‘상품(C)-화폐(M)-상품(C)에서 화폐(M)-상품(C)-화폐(M)으로 바뀌었다’고 설명한다. ‘C-M-C’에서 나의 목적은 어떤 유용성을 소비하는 것이다. 예컨대 전근대사회의 농사꾼인 내가 쌀(C)을 시장에 팔아 10만원(M)을 얻어 저고리(C)를 살 때, 내 목적은 저고리를 입는 것(사용가치를 소비하는 것)이다.
그러나 상업자본주의의 등장과 함께, 상업자본가가 된 나의 목적은 이제 더 많은 화폐를 갖는 것으로 바뀌었다. 이제 나는 내가 가진 초기자본 10만원(M)을 갖고 쌀(C)을 사서 11만원(M’)에 판매하려고 한다. 바로 이 증가분, “최초의 가치를 넘는 초과분”을 마르크스는 “잉여가치(surplus-value)”라고 부른다. 이 잉여가치 증식이라는 속성이, “이 가치(즉 화폐)를 자본으로 전환”시킨다. 그리고 “이 운동의 의식적 대표자인 화폐소유자는 자본가가 된다.”
자본가는 “끊임없이 화폐를 유통에 투입함으로써” 더 많은 화폐의 획득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단순상품유통 과정에서의 ‘구두쇠’와는 다른 존재가 된다. 구두쇠가 집안 금고에 화폐를 안전히 모아두는 동안, 자본가는 화폐를 끊임없이 투자해 상품으로 바꾸며 화폐의 증식을 꾀한다. “부에 대한 무한한 탐욕, 정열적인 교환가치 추구는 자본가와 구두쇠에게 공통되지만, 구두쇠는 얼빠진 자본가에 지나지 않는 반면, 자본가는 합리적인 구두쇠다. 구두쇠는 화폐를 유통에서 끌어냄으로써 교환가치의 쉴 새 없는 증식을 추구하지만, 더 영리한 자본가는 화폐를 끊임없이 유통에 투입함으로써 그것을 달성한다.”
이윤의 비밀(1): 상품은 각각 그 가치대로 판매된다.
이제 본격적으로 잉여가치(이윤) 창출의 비밀에 대해 탐구해보자. 결론부터 말하자면 자본 운동의 핵심인 잉여가치는 물건을 사고파는 과정에서, 즉 유통과정에서는 발생하지 않는다. 잉여가치는 유통과정이 아니라 생산과정에서 발생한다.
앞서 우리는 16세기 무렵부터 역사에 전면적으로 등장한 상업자본가들의 욕망(더 많은 화폐를 갖고 싶어하는 욕망)에 대해 얘기했다. 이와 함께 이들의 이윤축적을 정당화하기 위한 이데올로기인 중상주의 이론이 발전했다. 마르크스는 이들을 “자본의 최초의 해설자”라 불렀다. 이들은 상인자본이 점점 더 많은 부를 축적하는 이유(즉 M이 C를 거쳐 M보다 많은 M’가 되는 이유)에 대해, ‘상품을 싸게 사서 비싸게 팔았기 때문’이라 설명했다.
그런데 이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물론 현실에서는 독점의 영향이나, 사기를 치는 등 다양한 사유들로 인해 상품을 그 가치(또는 자연적인 가격)보다 비싸게 팔아먹는 일이 존재한다. 그러나 이것들은 모두 “상품교환법칙의 위반”인 특수한 사례일 뿐, 일반적 법칙이 될 수 없다.
이러한 중상주의 관점은 개인의 관점에서 부의 증대를 설명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사회 전체의 부의 증대에 대해서 아무것도 설명하지 못한다. 누군가 교활하게도 어떤 물건을 실제 그 가치보다 비싸게 파는 데 성공했다 치자. 그러면 바로 그만큼 누군가는 손해를 보게 돼있다. 이는 가치가 각각의 사람들에게 분배되는 비율을 바꿀 순 있지만, 사회 전체의 총가치는 하나도 증대시킬 수는 없다.[18]
그리고 상품소유자인 판매자는 다른 관계에선 곧 구매자이며, 구매자는 다른 관계에서 곧 판매자다. 내가 누군가에게 어떤 상품을 그 가치보다 비싸게 팔 수 있다면, 다른 누군가도 나에게 어떤 상품을 그 가치보다 비싸게 팔 수 있다. 마르크스가 볼 때 이러한 이론을 철저하게 주장하려면, “판매하지 않고 구매만 하는, 따라서 생산하지 않고 소비만 하는 계급이 있다고 가정”해야한다. 그런데 이는 공납같이 전근대적인 방식, 즉 서로 자유롭지 않은 신분관계에서나 가능하다.[19] 즉 강압에 의한 수탈을 전제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
그래서 특수한 예외가 아니라, “이윤의 일반적 본성을 설명하려면” “이윤은 상품을 그 가치대로 판매하는 데서, 요컨대 상품에 실현된 노동량에 비례하여 판매하는 데서 생긴다는 정리로부터 출발해야한다.” 다시 말해, ‘상품이 각각 그 가치대로 판매된다’는 것은 유통과정에서 이윤이 발생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물론 이윤이 실현되는 순간, 즉 자본가가 최종적으로 이윤을 획득하는 순간은 상품을 판매해 돈을 거둬들였을 때다. 즉 상품(C)이 화폐(M’)로 전환되는 순간이다. 그러나 이윤(잉여가치)이 처음 ‘탄생’하는 순간은 그곳에 있지 않다. 마르크스는 그 모순을 이렇게 표현한다.
“화폐가 자본으로 전환하는 것은 마땅히 상품교환을 규정하는 법칙의 토대 위에서 전개되어야 할 것이며, 따라서 등가물끼리의 교환이 당연히 출발점으로 되어야 할 것이다. 아직까지는 애벌레 형태의 자본가에 불과한 화폐소유자는 상품을 그 가치대로 사서 그 가치대로 팔아야하는데, 그러면서도 과정의 끝에 가서는 자기가 처음 유통에 던져 넣은 것보다 더 많은 가치를 유통에서 끌어내지 않으면 안 된다. 그가 나비로 성장하는 것, 즉 완전한 자본가로 되는 것은 반드시 유통영역에서 일어나야 하며, 또 그러면서도 유통영역에서 일어나서는 안 된다. 이것이 바로 문제의 조건이다.[20]”
이 문제를 푸는 열쇠는 생산과정에 있다. 이에 대해 잠시 뒤에 살펴보자.
이윤의 비밀(2) : 노동력 상품의 고유한 특성
첫 번째 비밀에서 우리는 이윤창출이 유통과정에서 일어나는 게 아님을 확인했다. 다음으로 더 중요한, 이윤창출의 핵심적인 두 번째 비밀은, 바로 자본가가 생산과정에서 재료로 구매하는 ‘노동력’이란 상품의 고유한 특성에 있다.
노동력이란 상품의 속성에 대해 좀 더 깊이 분석해보자. 앞서 우리는 모든 상품은 ‘사용가치’와 ‘교환가치’를 지니고 있음을 확인했다. ‘노동력’ 또한 상품으로 거래될 때, 고유의 ‘사용가치’와 ‘교환가치’를 지닌다. 노동력의 사용가치는 무엇일까? 물을 사용하면? 마심으로써 인간을 생존하게 한다. 옷을 사용하면? 입음으로써 보온성을 제공한다. 자동차를 사용하면? 빠르게 이동할 수 있게 해준다. 노동력을 사용하면? ‘노동’을 할 수 있다. 노동력은 인간의 노동을 담은 그릇이다. 노동력의 사용가치는 마르크스의 표현을 빌리면 “인간의 신체 속에 있는 육체적, 정신적 능력을 통해 가치(교환가치)를 생산해내는 능력”이다.
앞서 살펴본대로, 모든 상품은 그 속에 체현되어 있는 노동량만큼의 가치(교환가치)를 지니고, 이에 따라 양적으로 비교되고 교환될 수 있다. ‘노동력’이란 상품은, 그것을 사용할 때 새로운 가치(교환가치)를 생산해낼 수 있는 유일무이한 상품이다. 이 점에서 ‘노동력’의 사용가치는 다른 모든 상품과 다른 고유한 특성을 지닌다.
노동력의 ‘사용가치’가 ‘노동제공을 통해 교환가치를 만들어내는 능력’이라면, 노동력의 교환가치는 무엇일까? 노동력도 하나의 ‘상품’이기 때문에, 상품의 교환가치를 규정하는 일반적 법칙이 적용된다. 상품의 교환가치는 그 상품의 생산을 위해 투입된 (사회적으로 필요한) 노동량을 뜻한다. 따라서 “노동력의 가치는 [다른 모든 상품의 가치와 마찬가지로] 이 특수한 상품의 생산과 재생산에 드는 노동량(노동시간)에 의해 규정된다.”
‘노동력이란 상품의 생산과 재생산에 드는 노동시간’이란 무슨 말일까? 한 마디로 노동자가 먹고 자고 내일 다시 노동할 수 있는 상태가 되어야한다는 말이다. “노동력의 발휘인 노동에는 인간의 근육, 신경, 뇌 등의 일정한 양이 지출되는데, 그것은 다시 보충되지 않으면 안 된다. ... 노동력의 소유자가 오늘의 노동을 끝마친다면, 그는 내일도 오늘과 동일한 힘과 건강을 가지고 동일한 과정을 반복할 수 있어야만 한다. 따라서 생활수단의 총량은 노동하는 개인을 정상적인 생활상태로 유지하는 데 충분하지 않으면 안 된다.” 다시 말해 노동력의 가치는, 그 노동자가 필요로 하는 소비수단과 생활수단을 생산하는 데 필요한 노동시간으로 환원될 수 있다.
그리고 노동력의 가치는 노동자가 죽은 뒤 태어난 새로운 노동자가 그 자리를 대체하는 것, 즉 노동자가 아이를 낳아 기르는 것까지 포함한다. 그래야 노동자가 늙어서 죽어도, 노동력의 동일한 양이 유지될테니 말이다. 또 복잡하여 훈련과 숙련이 요구되는 노동의 경우, 필요한 기능을 익히기 위한 훈련비용과 교육비용도 노동력의 가치에 포함된다.
바로 이 노동력의 사용가치(‘노동제공’)와 노동력의 교환가치(‘임금’) 사이의 불일치가, 잉여가치 착취의 핵심적인 비밀이다.
여기서 잠시 노동력의 가치를 결정하는 중요한 한가지 특징을 짚고 넘어가자. 바로 노동력의 가치를 이루는 생활수단의 총액이라는 건, 인간이 죽지 않기 위해 최소한의 영양분을 섭취하고 추위와 더위를 피하기 위해 옷을 입거나 집이 필요하다는, 인간이 생명체이기에 발생하는 자연적 특성뿐만 아니라, 그 사회의 문화적, 역사적 수준과 발전단계에 따라서도 달라진다는 점이다.
“음식물, 의복, 난방, 주택 등과 같은 그의 자연적 욕구는 한 나라의 기후나 기타 자연적 특성에 따라 다르다. 다른 한편으로 이른바 필수적인 욕구의 범위나 그 충족 방식은 그 자체가 하나의 역사적 산물이며, 따라서 대체로 한 나라의 문화수준에 따라 결정되는데, 특히 자유로운 노동자계급이 어떤 조건에서 또 어떤 관습과 기대를 가지고 형성되었는가에 따라 결정된다. 그러므로 다른 상품들의 경우와는 달리 노동력의 가치규정에는 역사적, 도덕적(정신적) 요소가 포함된다.[21]”
이것은 이미 현실에서 직관적으로 관찰할 수 있는 사실이기도 하다. 한국노총, 민주노총, 통계청 등 여러 기관에서 노동자들의 ‘실질 생계비’를 다양한 방식으로 추산하고 있다. 노동자가 하루에 평균적으로 필요한 영양소의 양에 근거한 식료품비, 의료비, 교통비, 통신비, 문화생활비 등 ‘노동자의 생산과 재생산’에 필요한 각종 상품의 양을 통계적 방식으로 추산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노동력에 대한 정당한 댓가(적절한 노동력의 가치)가 얼마냐’라는 물음에 절대적인 답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노동력 가치의 최저치는 있지만 최대치는 없으며, 그 적정수준은 역사적, 도덕적 요소를 포함하기 때문이다. 자본가 입장에서는 노동자가 굶어죽지 않을 만큼만 주는 게 최선일 것이다. 그러나 노동자 입장에선 영화도 보고, 여행도 가고, 아이도 낳아 제대로 기를 수 있어야한다. 자본가와 노동자가 생각하는 ‘적정한 임금수준’에는 늘 간극이 있으며, 이 때 적정한 임금수준을 결정하는 건 결국 계급 간 힘의 관계이다.
잉여가치(이윤)[17]는 생산과정에서 어떻게 창출되는가?
지금까지 노동력이란 상품의 고유한 특징을 고찰했다. 이제 본격적으로, 잉여가치가 만들어지는 과정, 자본이 노동력을 소비해 상품을 생산하는 과정, 즉 ‘생산과정’으로 들어가보자.
“...우리는 화폐소유자, 노동력소유자와 함께, 모든 것이 표면에서 일어나고 또 누구의 눈에나 쉽게 띄는 이 소란스러운 유통영역을 벗어나 이 두 사람을 따라 ‘관계자 외 출입금지’라고 입구에 쓰인 은밀한 생산 장소로 들어가 보도록 하자. 이곳에서 우리는 자본이 어떻게 생산하고 있는가 뿐 아니라 어떻게 자본 그 자체가 생산되고 있는가도 알게 될 것이다. 이윤 창조의 비밀도 드디어 폭로되고 말 것이다.[22]”
생산과정을 쉽게 설명하기 위해, 제빵업을 예로 들어 설명해보겠다. 어느 제빵 자본가가 빵을 만들어서 팔아 돈을 벌려고 한다.
자본가는 먼저 자신의 자본(M)을 사용해, 시장에서 세 가지 재료(C)를 구매해야한다. 실제로는 빵을 만드는데 아주 여러가지 생산요소가 필요하지만, 단순화하여 노동대상(원료)을 대표해 ‘밀가루’, 노동수단(기계)을 대표해 ‘오븐’, 그리고 이 둘을 이용해서 실제로 빵을 만드는 노동자의 ‘노동력’ 세 가지 요소가 필요하다고 치자.
빵을 30개 만드는데 원료인 밀가루는 10kg가 필요하다고 하자. 밀가루 10kg의 가치는 이를 만들기 위해 필요한 사회적 노동시간으로 환원할 수 있다.[23] 그렇게 환원한 밀가루 10kg의 가치가 사회적 노동시간 12시간이라고 가정하자. 이하 계산 상 편의를 위해, 1노동시간이 1만원의 화폐적 가치로 표현된다고 가정하겠다. 즉 밀가루 10kg의 가치는 12만원이다.
빵을 만드는데 오븐이 사용된다. 빵을 굽기 위해 오븐을 사용하면서, 오븐이 일정부분 마모된다. 이 오븐의 감가상각비가, 빵 30개를 굽는다고 할 때 사회적 노동시간 10시간에 해당된다고 가정하자.[24]
우리는 ‘법칙의 교란’을 제거한 정상적 상태에서 이윤의 창출을 고찰하려 하기 때문에, 자본가는 밀가루를 12시간보다 싸게 살 수는 없다. 밀가루 판매자가 손해보려고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밀가루를 비싸게 살 이유도 없다. 밀가루를 정상가격으로 파는 다른 사람에게서 구입하면 되기 때문이다. 오븐도 같은 이유로 그것의 정상가격으로만 구매할 수 있다.
다음으로 빵을 만드는데 필요한 노동력의 하루 임금, 다시 말해 ‘노동자가 노동을 하고서 먹고 자고 자신을 재생산해 다음날에도 출근하기 위해 사회적으로 필요한 비용’, 즉 ‘노동력의 가치’가 (이 예시 속 세계에서 당시 계급투쟁의 역관계를 반영해) 4시간으로 형성돼있다고 하자. 밀가루와 오븐을 구매한 자본가는 제빵노동자를 4만원의 하루 임금을 주고 고용한다.
자본가가 지출한 비용을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
밀가루 10Kg(12노동시간) + 오븐 감가상각비(10노동시간) + 제빵노동자의 하루임금(4노동시간) = 26만원(26노동시간)
그리고 자본가는 빵 30개를 만들기 위해, 노동자에게 일을 시킨다. 주어진 평균적 숙련도로 기계를 작동시켜 원료를 가공해 빵을 만든다고 할 때, 빵 30개를 만드는데에는 8시간이 든다고 하자. 오늘 8시간의 노동을 통해 ‘빵 30개’라는 사용가치가 생산됐고, ‘빵 30개’에는 이를 만드는데 투여된 사회적 노동시간 만큼의 ‘가치’가 포함돼있다. 이를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
밀가루 10Kg(과거의 12노동시간) + 오븐 감가상각비(과거의 10노동시간) + 노동자의 제빵노동(현재의 8노동시간) = 빵 30개(30노동시간)
생산과정을 거치며 자본가는 30만원 어치에 해당하는 상품(빵)을 갖게 되었다. 자본가가 이렇게 만든 빵 30개를 본래 그 가치대로 판매하면, 자본가는 30노동시간에 해당하는 화폐, 즉 30만원을 손에 쥐게 된다. 처음에 자본가가 투자한 자본은 26만원이었는데, 이제 자본가는 30만원을 손에 쥐었으니 4만원의 이윤을 얻게 된다.
잠깐, 이게 어떻게 가능한가? 이 비밀의 핵심은, ‘노동력의 가치’(노동력의 교환가치)와 ‘노동력을 사용함으로써 창출되는 가치’(노동력의 사용가치)가 일치하지 않는다는 점에 있다.
밀가루와 오븐이 빵에다 자신의 가치를 그대로 ‘이전’하기만 한 것과 달리, 노동력은 생산과정에서 임금으로 자신을 보전하기 위해 지출된 가치보다 더 많은 가치를 창출했기 때문이다. 달리 말하면, 노동자의 생명을 24시간 유지하기 위해서 4시간 만큼의 임금이 필요하다는 사정은, 결코 노동자가 4시간을 넘어 일하는 것을, 심지어 하루 종일 노동하는 것을 방해하지 않는다.
이 부분이 아주 중요하기 때문에, 『자본론』의 원문을 조금 더 같이 읽어보자.
“...노동력에 포함되어 있는 과거 노동(past labour)과, 노동력이 제공할 수 있는 살아 있는 노동(living labour)은, 다시 말해 노동력의 매일의 유지비[노동력의 가치]와, 노동력의 매일의 지출[노동력을 사용함으로서 새롭게 창출할 수 있는 가치의 양]은 그 크기가 전혀 다른 두 개의 양이다.”
“... 자본가에게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은 이 상품[노동력]의 독특한 사용가치[가치의 원천일 뿐 아니라 그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보다 더 많은 가치의 원천이라는 것]였다. 이것이야말로 자본가가 노동력으로부터 기대하는 독특한 봉사며, 그는 노동자와의 거래에서 상품교환의 영원한 법칙에 따라 행동한다. 사실상 노동력의 판매자는 [다른 모든 상품의 판매자와 마찬가지로] 노동력의 교환가치를 실현하면서 그 사용가치를 넘겨준다. 그는 사용가치를 넘겨주지 않고서는 교환가치를 받을 수 없다. 노동력의 사용가치, 노동 그 자체는, 팔린 기름의 사용가치가 기름장수의 것이 아닌 것과 마찬가지로, 노동력 판매자의 것이 아니다. 화폐소유자는 이미 노동력의 하루 가치를 지불했다. 그러므로 노동력의 하루 사용, 하루의 노동은 그의 것이다. 노동력은 하루 종일 활동하고 노동할 수 있는데도, 노동력을 하루 동안 유지하는 데는 1/2 노동일밖에 걸리지 않는다는 사정, 따라서 노동력의 하루 사용이 창조하는 가치가 노동력의 하루 가치의 2배가 된다는 사정은, 구매자에게는 물론 특별한 행운이기는 하지만, 결코 판매자를 부당하게 대우하는 것은 아니다.[25]”
다시 한 번 강조하자면 바로 이 지점에서, 노동력이라는 상품은 다른 모든 종류의 상품과 구별되는 특징을 가지며, 그로 인해 잉여가치 창조의 원천이 된다. 다른 상품은 모두 그것이 자본으로 투입됐을 때, 오직 자신이 가지고 있는 가치를 새로운 생산물에 ‘이전’할 수 있을 뿐이지만, 노동력 상품은 그것이 자본으로 투입됐을 때, 자신이 가지고 있는 가치(즉 임금)보다 더 많은 가치를 창출하는 게 가능하다. 그래서 마르크스는 노동력을 ‘가변자본’(variable capital)이라 부르고, 그 밖의 기계나 원료 등을 ‘불변자본’(constant capital)이라 불렀다.
이렇듯 노동자가 자신의 재생산에 필요한 필요노동시간을 넘어 잉여노동을 하고, 그로 인해 생산된 잉여가치를 자본가가 전유하는 것이 ‘착취(exploit)’다. 그리고 앞선 예에서 노동자는 4만원을 받고 8시간 노동을 통해 8만원의 가치를 생산했는데, 따라서 자본가가 노동자가 창출한 총가치(8시간) 중 잉여가치로 가져가는 몫이 4시간임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해 노동자가 투여한 하루 8시간의 노동시간 중 4시간은 노동자의 임금을 재생산하기 위해 쓴 시간이고, 나머지 4시간은 자본가의 이윤을 위해서 쓴 시간이다. 마르크스는 나의 노동력(임금)을 재생산하기 위해 필요한 노동시간을 ‘필요노동시간’, 자본가의 이윤을 생산하기 위해 들어가는 시간을 ‘잉여노동시간’이라고 불렀다. 필요노동시간과 잉여노동시간의 비율로 노동자에 대한 착취율, 또는 ‘잉여가치율’을 계산할 수 있다. 이 경우 잉여가치율(=착취율)은 4시간(잉여노동시간)/4시간(필요노동시간) = 100%이다. 자본가가 생산과정에서 필요노동시간을 넘어 노동을 시킴으로서 획득한 이 잉여가치는, 유통과정에서 완성된 상품을 판매해 화폐로 전환하는 데 성공하면 ‘이윤’이 된다.
절대적 잉여가치 증대: 노동시간 연장
지금까지 노동력의 교환가치(임금)와 노동력의 사용가치(노동제공을 통해 만들어낸 가치) 사이의 차이에 의한 착취의 원리를 설명했다. 이해를 돕기 위해 지금까지 아주 단순화한 예를 들어 설명했다. 그러나 실제 자본주의 생산의 풍경은, 이렇게 단순화한 예시만큼 목가적이지 않다. 자본주의의 풍경은, 자본가는 26만원을 투자해 30만원을 얻어 4만원을 벌고, 노동자도 ‘노동력 재생산에 필요한 수준’인 임금 4만원을 받아서, 열심히 일하면서 일가족이 생계유지가 가능한, 그런 목가적인 풍경이 아니다.
“자본가가 인격화한 자본인 한, 그의 활동 동기는 사용가치의 획득과 향락이 아니라 교환가치의 획득과 증식이다. 그는 가치증식을 열광적으로 추구하며 인류에게 무자비하게 생산을 위한 생산을 강제한다. 이리하여 자본가는 사회 생산력의 발전과, 또 [각 개인의 최대한의 자유로운 발달을 그 기본원칙으로 삼는] 더 높은 사회형태의 유일한 현실적 토대로 될 수 있는 물질적 생산조건의 창조에 박차를 가한다. ... 더욱이 자본주의적 생산의 발전은 한 사업에 투하되는 자본액을 끊임없이 증대시키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들며, 그리고 경쟁은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내재적 법칙을 각 개별 자본가에게 외적인 강제법칙으로써 강요한다. 경쟁은 자본가로 하여금 자기 자본을 유지하기 위해 자본을 끊임없이 확대하지 않을 수 없게 하는데, 그는 누진적 축적에 의해서만 자기 자본을 확대할 수 있다."[26]
"...축적하라, 축적하라! 이것이 모세며 예언자들이다! [가장 중요한 계율이다][27]”
자본은 안정적으로 소소하게 벌면서 자신을 유지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자본은 서로 경쟁하며, 경쟁에서 도태되는 순간 자본은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자본가들은 돈이 생기면 다시 투자를 해서 기업규모를 키우고, 다시 경쟁에서 이겨서 다른 기업을 잡아먹으며 몸집을 무한히 불려야한다. 이윤의 축적이 지상목표가 된 자본, 그리고 그 인격화된 존재인 자본가에게 ‘노동력’의 판매자인 노동자가 ‘인간’이라는 사실은 하나도 중요하지 않게 된다.
자본가는 더 많은 이윤을 얻기 위해 여러 가지 방식을 활용한다. 무엇보다 먼저 직관적으로 활용하는 건, 임금은 더 주지 않으며 노동자가 더 오래 일하게 하는 것이다. 마르크스는 이렇게 노동 시간의 연장으로 만들어진 잉여가치를 ‘절대적 잉여가치’라고 했다. 앞선 제빵 자본의 사례에서, 4만원의 임금을 주고 하루 8시간 노동을 시키면 4만원의 잉여가치가 발생하지만, 같은 임금을 주고 하루 10시간 노동을 시키면 6만원의 잉여가치가 발생한다. 간단히 말해 절대적 잉여가치 증대는 장시간 노동 강요이다.
절대적 잉여가치 증대로 노동자를 쥐어짜려는 시도는 오늘날까지 자본주의 역사의 모든 페이지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리고 노동운동이 아직 조직된 저항에 나서지 못하는 곳에서, 자본의 절대적 잉여가치 증대는 노동자의 생명력을 완전히 파괴하는 수준까지 나아간다.[28] 『자본론』에는 마르크스가 영국의 공장감독관 보고서에서 인용한 자료들이 나오는데, 그 중 당시 아동 노동 상황에 대한 자료를 몇가지 읽어보자.
“이 공장주들 중 일부는 12세 내지 15세의 소년 5명을 금요일 오전 6시부터 다음날인 토요일 오후 4시까지 식사시간과 한밤중의 한 시간의 수면시간 이외에는 조금도 휴식을 주지 않고 혹사시켰다는 이유로 고소당했다. 그런데 이 아동들은 ‘넝마 구덩이’ 속에서 30시간을 쉴 새 없이 일하지 않으면 안 되었는데, 그곳은 모직 누더기를 찢는 곳으로, 그 안의 공기는 성인노동자라도 계속 손수건으로 입을 가려 폐를 보호하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티끌과 털 부스러기 등으로 가득 차 있었다! 피고인들은 ...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즉 그들은 크나큰 자비심을 베풀어 이 불쌍한 아동들에게 4시간의 수면을 허용하려 했으나, 이 완고한 아이들은 아무리 해도 침대에 누우려고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 퀘이커 교도들은 £20의 벌금형을 선고 받았다.”
“이 도시의 주민들 중 레이스 제조에 종사하는 사람들 사이에는 영국의 다른 곳 또는 문명세계에서는 들어보지도 못할 정도의 궁핍과 고통이 지배하고 있다 ... 9세부터 10세까지의 아이들이 새벽 2,3,4시에 그들의 불결한 잠자리에서 끌려나와 겨우 입에 풀칠만이라도 하기 위해 밤 10,11,12시까지 노동하도록 강요당하고 있는데, 그들의 팔다리는 말라비틀어지고 신체는 작아지며 얼굴은 창백해지고, 그들의 인간성은 완전히 목석처럼 무감각상태로 굳어져 보기만 해도 소름이 끼칠 지경이다 ... 성인남자의 노동시간을 하루 18시간으로 제한해 달라고 청원할 목적으로 공청회를 열고 있는 이런 도시를 도대체 어떻게 생각해야 할 것인가!”
“아홉 살 되는 윌리엄 우드가 ”노동하기 시작한 것은 만 7세 10개월 되던 때였다.“ 그는 ”처음부터 그릇 만드는 틀을 날랐다.“ ... 그는 매일 아침 6시에 와서 저녁 9시쯤에 일을 끝마치곤 했다. ”저는 1주에 6일 동안 날마다 저녁 9시까지 일합니다. 나는 최근 7,8주일 동안 그렇게 해왔습니다.“ 일곱 살 난 아이가 15시간 노동을 하는 것이다!
“나는 그릇 만드는 틀을 운반하며 물레를 돌립니다. 내가 일하러 오는 것은 아침 6시인데, 4시에 올 때도 있습니다. 나는 어젯밤 밤을 새워 오늘 아침 6시까지 일했습니다. 그저께 밤부터 자지 못했습니다. 어젯밤은 나와 함께 8, 9명의 다른 소년들도 밤을 새워 일했습니다. 한 아이를 제외하고는 오늘 아침에도 모두 왔습니다. 나는 1주일에 3실링 6페니를 받고 있습니다. 밤을 새워 일해도 그 이상은 받지 못합니다. 지난 주일에 나는 이틀 밤을 새워 일했습니다.”
이것들은 모두 마르크스가 『자본론』 집필을 위해 연구하던 1850년대 무렵에 나온 보고서의 내용들이다. 175년 전 영국 노동자들은 일곱 살 때부터 하루 15시간 노동에 시달렸던 것이다. 당연히 이와 같은 살인적인 노동강도는 노동자의 생명력을 극심하게 갉아먹었고, 노동인구의 정상적 유지가 불가능할 수준에 이르렀다.[29]
그런데 이것은 1850년대 영국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자본은 노동운동의 저항이 분쇄된 곳이라면 어디서든 절대적 잉여가치의 무제한적 증대를 꾀한다. <자본>에 적힌 보고서와 비슷한 이야기를 사실 우리는 가까운 과거, 가까운 장소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평화시장은 약 2만명의 젊은 노동자들이 고용되어 있는 그 중 약 90%가 14세에서 20세 사이의 여성노동자들이며, 의류판매점들과 소규모 봉제공장들이 뒤섞여 있는 4층 짜리 미로로 이루어진 작은 지역이었다. 노동자들은 햇빛이 들지 않고, 환기도 되지 않으며 천장이 1.2m 혹은 1.5m 이하인 비좁은 다락방에서 일했다. 하루 평균 14시간 일하도록 강요받았고, 한달 임금은 평균 3천원(1970년 기준) 미만이었다. 견습공이 전체 노동자의 반수 이상이었고, 그들의 임금은 정규미싱사의 1/5수준 (한달 3천원)에 불과했다. 견습공의 평균연령은 15세였으며, 저임금으로 그들은 제대로 먹지도 못했다.[30]”
“국제상사는 작업시간이 아침 7시 50분부터 저녁 6시 30분까지인데 이것은 형식상의 시간일 뿐이며 책임 작업량이라 하여 목표달성을 못하면 아침조출과 연장근무가 허다하다. 철야만도 일주일에 2~5번 정도를 해야 하는 데 가을에서 봄에 이르는 시기에는 월간 15회 이상의 철야를 강행하는 형편이다. 관리자들의 온갖 폭언도 가관이다. 하루에도 집합이 2~6번 정도 있는데 그럴 때 마다 욕설과 잔소리를 들어야 한다. 어쩌다 몸이 아파 결근이라도 하게 되면 사무실에 불려가 폭행, 구타, 폭언 등의 수모를 당한다. (『민주노동』 제4호에 실린 글을 이태호 1986b, 125면에서 재인용)[31]”
“작업장에 들어오면 가장 먼저 다가오는 것은 냄새다. 원단 더미에서 풍기는 포르말린 냄새가 익숙하게, 그러나 매번 아리게 코를 찌른다. 밖이 환한데도 작업장은 침침하다. 눈앞에 매달린 백열전등이 날카로운 빛을 뿜는다. 이 빛에 익숙해진 사람은 밝은 햇살 아래 눈을 뜨지 못한다. 작업대에 몸을 굽히고 있는 열세 살짜리 시다들의 눈은 핏물이 든 것처럼 빨갛다.
재봉대와 시다판들로 꽉 찬 다락방에서 사이사이 끼어 앉은 여공들이 실밥을 뜯고 자크를 단다. 옷감에서 피어오르는 먼지 때문에 어두운 다락방은 더 어두워 보인다. 재봉틀 소리 사이로 기침소리가 발작처럼 울린다. 퇴근 시간까지 이들은 종일 닭장 같은 곳에서 재봉틀을 밟아대는 것이다.
나이 어린 시다들은 재봉일을 하는 틈틈이 미싱사의 잔심부름까지 해야 한다. 이들은 천정이 낮은 탓에 허리조차 똑바로 펴지 못하고 하루에도 몇십 번씩 다락방을 오간다. 우리 작업장에서 제일 나이가 어린 열세 살 영희가 다락방에서 내려온다. 사다리를 잡은 하얀 팔뚝이 금방이라도 부러질 것 같이 위태롭다. 이 고사리 같은 손으로 먼지구덩이 속에서 애쓰는 것을 보면 인간이 이렇게 살아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든다.[32]”
미군정과 한국전쟁을 거치며 대한민국에서는 반공주의가 득세하고 거의 모든 종류의 좌익운동과 자주적 노동운동이 완전히 파괴됐다. 노동자계급이 스스로를 조직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자본은 120년 전과 같은 무제한적인 착취를 마음껏 누렸다.
그런데 다시 한 번 질문해보자면, 이것이 1850년과 1970년 과거의 이야기이기만 할까? 1990년대부터 섬유산업은 값싼 노동력을 찾아 베트남, 중국, 인도네시아, 방글라데시, 미얀마 등의 나라로 이전했다. 오늘날 방글라데시 섬유공장 노동자들의 노동실태에 관한 기사는 노동운동이 저항을 하지 못하는, 혹은 저항이 약한 곳에서 언제든지 자본은 인간의 생명력을 완전히 갉아먹을 때까지 노동시간을 연장하려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방글라데시에서 Lidl, H&M, Gap을 위해 옷을 만드는 노동자들이 과도한 초과 근무를 하고 있으며, 일부는 하루에 15시간 이상 일하고 있다고 BBC가 월요일에 조사했다고 주장했습니다. 슈퍼마켓 리들(Lidl)을 위해 옷을 만드는 노동자들이 한밤중에 공장에 갇혀 있는 모습을 몰래 촬영했습니다. 노동자들은 오전 7시에 일을 시작해 다음 날 오전 2시 30분까지 공장에서 나오지 못했습니다. 소매업체인 갭(Gap)과 H&M을 위한 의류를 생산하는 공장에서 근무일이 오전 7시에 시작되어 오후 10시 30분에 끝나는 경우도 있었지만, 모든 초과 근무 시간이 근로자의 급여 명세서에 표시되지는 않았습니다.[33]”
“방글라데시의 지역 뉴스 사이트(Textile Today, Apparel Resources)에 최근 게재된 기사들에 따르면, 4월 13일에 발표된 노동고용부(Ministry of Labour and Employment)가 공문을 통해, 의류 수출 공장에서 직원들이 하루에 2시간의 초과 근무를 추가로 할 수 있도록 허용하고 있으며, 총 4시간의 합법적인 초과 근무 시간을 허용합니다. 새로운 초과근무 규정은 4월 17일부터 시행되었으며, 6개월 동안 유지될 예정입니다. 즉, 이제 공장에서 근로자가 하루 12시간, 주 6일, 주당 총 72시간 일하는 것이 합법적이라는 의미입니다. 이 지침이 발표되기 전에는 합법적 한도가 하루 10시간, 주당 총 60시간이었습니다.[34]”
“공장 소유주들은 이익을 극대화하기를 원하기 때문에 안전 문제, 환기, 위생에 관한 부분을 간과합니다. 초과 근무 수당을 지급하지 않거나, 부상 시 도움을 제공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마감 기한을 놓치고 싶지 않아서 노동자들을 강하게 몰아붙입니다… 노동자들은 노동조합이 없기 때문에 그들의 권리를 주장할 수 없습니다… 이 중 일부는 대량 주문을 하고 '대량 주문이기 때문에 생산 라인을 확장하고 수익을 개선하라'고 말하는 브랜드 소매업체의 책임이기도 합니다. 2~3센트 차이로도 큰 차이를 만들 수 있지만, 이런 회사들은 [노동권과 안전] 준수를 비용 산정에 반영하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
이 문장들은 마치 150여 년 전에 쓰인 마르크스의 자본에서 직접 가져온 것 같습니다. 글로벌 상품 체인에 의해 설정된 가혹한 조건 때문에 방글라데시는 세계에서 노동자가 일하기 가장 힘든 나라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2023년 1월에 발표된 연구에 따르면, 팬데믹 기간 동안 다국적 의류 회사들이 하청업체를 압박하여 비용을 절감했고, 그 결과 노동자들의 근무 환경이 더욱 열악해졌습니다.[35]”
같은 국가 내에서도, 노동자를 분열시키는데 성공한 자본은 어떤 노동자에겐 주 40시간 5일제 노동과 연차휴가를 보장하지만, 어떤 노동자에게는 그렇지 않다. 아래는 2019년 한국의 어느 냉장고 생산공장에서 일한 노동자의 수기다.
“결국 탄력근로제를 실시한다고 한다. ... 그날 오후, 발 빠른 친구들이 9~11월 계획표를 알려줬다.
기가 찬다. 이렇게 일하라고? 진심으로? 9월에 추석 연휴인 목, 금, 토요일만 쉬고 모두 출근이다. 평일은 잔업이 일주일에 2~4일이 기본으로 들어간다. 주말에도 출근한다. 10월에도 마찬가지다. 공휴일과 18일과 27일을 제외하고 전부 일주일에 2~4일 모두 잔업에 주말 출근이다. 그러다가 11월 3일부터 일이 없다. 평일 잔업 없이 금, 토, 일요일 출근을 안 한다. 월급이 반의 반토막이 나겠지. 고정적으로 소비해야 하는 주거비, 식비 등을 제때 내려면 똥줄이 좀 탈 것 같다. 그보다 내가 무사히 11월을 맞이할 수 있을까 싶다. 내가 버텨낼 수 있을까? 겁이 너무 많이 난다.
...
산재가 하루가 멀다 하고 일어난다. 다른 라인에서 일어나도 소름 끼치게 무서운데, 이번에는 내가 있는 건물의 내가 보이는 기계에서 일어났다. ... 더 깊게 알라고 하지 말라는 순간 ‘심각한 산재구나’ 싶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고장 난 줄 모르고 설비에 들어가서 작동시키려다 엄지손가락을 제외한 모든 손가락이 잘렸고, 봉합이 잘 안 되었으며 앞으로 손가락을 예전처럼 쓸 수 없을 거라고 진단받았단다.
...
이튿날 아침조회 때 들어 보니 사고 원인을 모른단다. 사고가 일어난 시간에 설비나 파악할 수 있는 기계들이 갑자기 꺼져서 원인 확인이 어렵고 아마 작업자의 변칙이 가장 큰 원인일 거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하지만 작업자는 회사에서 지시한 대로 했을 뿐이라고 강하게 주장한단다. 그 시점에서 반장은 이렇게 말했다. ”회사에서 아무도 책임 안 져주고 돈이나 쥐어주고 산재 신청도 어렵고. 본인 안전은 본인이 책임지는 겁니다. 오늘 하루도 안전한 작업 하시고.[36]”
오늘날 한국에서 윤석열이 주 80시간 노동제를 꺼내들고, 이재명은 반도체특별법으로 주52시간 제외를 얘기한다. 노동시간을 둘러싼 계급의 전쟁은 아마 자본주의의 역사가 끝날 때까지 늘 진행형일 것이다.
상대적 잉여가치 증대: 기술혁신
자본가는 늘 호시탐탐 노동시간의 연장을 꾀하지만, 여기에는 분명한 한계가 있다. 첫째, 노동자의 육체적 한계에 부딪친다. 노동자를 기계처럼 하루 24시간 가동하고 싶어도, 그렇게 하면 노동자는 재생산이 불가능해 죽을 것이기 때문이다.
둘째, 자본가는 필히 계급투쟁의 저항에 부딪친다. 노동자는 사람이기 때문에, 순순히 자본가의 노동시간 연장을 받아들이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본가는 ‘절대적 잉여가치 증대’에 더해, 즉 노동시간을 무조건 늘리는 것 외에, 잉여가치를 늘릴 수 있는 다른 방식을 고민하게 된다. 수학적으로 보자면 이는 필요노동시간에 대한 잉여노동시간의 비중을 늘리는 것으로, 마르크스는 이를 ‘상대적 잉여가치 증대’라고 불렀다.
상대적 잉여가치를 증대시키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다. 가장 간단히 생각할 수 있는 건 다양한 방식으로 노동자에게 주는 임금을 삭감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절대적 잉여가치 증대와 마찬가지의 한계에 부딪친다. 최소한의 생존조차 불가능한 수준으로 임금을 하락시키면 노동자가 굶어죽기 때문에 체제가 유지될 수 없으며, 더군다나 계급투쟁의 역사 속에 노동자는 최소한의 생존 그 이상의 권리를 쟁취해왔기 때문에, 그 도덕적, 역사적 권리를 무시하고 낮은 수준의 임금을 지급하면 노동자의 거센 저항에 직면하게 된다.
또는 노동강도를 높여 같은 시간에 더 많은 양을 생산하도록 만들 수도 있다. 임금으로 지급해야하는 양은 정해져있으므로, 생산량이 늘어나는 만큼 잉여노동시간의 상대적 비중이 늘어나게 된다. 그러나 이 또한 본질적으로 같은 한계에 부딪친다. 먼저 노동자의 육체적, 정신적 한계가 있다. 일정 수준까지는 노동강도를 높여 노동자의 에너지를 더 빨리 고갈시킴으로써 생산성을 증대시킬 수 있겠지만, 일정 수준을 넘어가면 노동자가 극심한 노동강도를 따라갈 수 없어 (불량률이 늘어나고, 품질이 떨어지고, 사고가 발생하는 등) 생산성이 저하된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노동자의 삶의 에너지를 더 빨리 소모시키려는 시도에 대한 노동자의 거센 저항에 직면한다.
임금을 줄이거나 노동강도를 높이는 건 형식은 조금 다르지만, 본질적으로는 정해진 생산조건 아래에서 노동자에 대한 착취의 강도를 높이는 방식이란 점에서 절대적 잉여가치 증대(노동시간 증대)와 유사하다. 그런데 착취도 증가 외에 상대적 잉여가치를 증대시키는 중요한 방법이 있다. 바로 주어진 생산조건 자체를 바꾸는 것, 즉 기술혁신이다.
기술혁신은 질적으로 다른 생산성 향상을 가능케하여, 단지 노동자에 대한 착취율을 늘리는 것과 비교할 수 없는 경쟁력을 개별 자본가에게 부여한다. 그래서 자본주의의 진보성을 찬양하는 이데올로그들은 기술혁신을 무엇보다 강조한다.
특히 1차 산업혁명기에 수공업에서 매뉴팩처로, 기계제 대공업으로 이동하면서 만들어낸 생산성 증대는 가히 혁명적인 것이었다. 자본주의 경제의 시작 이후 생산력 발전 수준은 그 이전의 모든 시기를 압도한다.
“서기 1000년에서 1500년, 중세 서유럽의 1인당 소득은 1년에 0.12%씩 증가했다. 이 말은 서기 1500년에 살던 사람들은 서기 1000년에 살던 사람들보다 수입이 82%밖에 늘지 않았다는 뜻이다. 연평균 성장률이 11퍼센트인 중국이 2002년에서 2008년까지 6년 동안 경험한 성장 수준이라고 말하면 큰 그림을 이해하기가 더 쉬울 것이다. 즉 물질적 발달 정도만 놓고 보면 현재 중국의 1년은 중세 서유럽의 83년과 맞먹는다고 할 수 있겠다. ... 아시아와 동유럽(러시아 포함) 국가들에 비하면 서유럽 국가들의 경제성장은 가히 일취월장이라고 할 수 있었다. 나머지 지역은 그 속도가 3분의 1인 0.04%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1500~1820년 사이 서유럽의 1인당 소득 성장률은 여전히 0.14%에 지나지 않아서 거의 모든 면에서 1000~1500년 기간과 기본적으로 다르지 않았다. ... 1820년경부터 자본주의는 비상을 시작했다. ... 이 50년 동안 서유럽의 1인당 소득은 1퍼센트 성장을 보였다. ... 1500년에서 1820년 사이에 0.14% 성장했다는 것을 감안하면 가히 경제에 터보 엔진을 달고 고속 주행을 한 셈이었다.[37]”
“(자동식 뮬 방추는) 약 366파운드의 면화가 면사로 전환되는 데 불과 150노동시간 또는 15개의 10시간 노동일을 흡수한다. 물레로는 [손방적공이 13온스의 면사를 60시간에 생산한다면] 동일한 양의 면화는 2,700개의 10시간 노동일 또는 27,000노동시간을 흡수하게 될 것이다. 종래의 목판 날염법(손에 의한 날염법)을 기계에 의한 날염이 쫒아낸 곳에서는, 단 한 대의 기계가 1명의 성인노동자[또는 소년공]의 협조로 1시간에 이전에는 200명의 성인노동자가 하던 것과 같은 양의 4색 날염직을 날염한다. 위트니가 1793년에 조면기를 발명하기 전에는 1파운드의 면화에서 씨를 뽑는 데 평균 1노동일이 걸렸다. 그의 발명 덕택으로 흑인여자 1명이 하루에 100파운드의 면화를 처리할 수 있게 되었으며 ... 동력으로 소, 증기, 물을 이용하는 경우에는 기계에 원료를 넣는 사람으로 몇 명의 소년과 소녀가 필요할 뿐이다. 소가 움직이는 기계 16대는 이전에 하루 평균 750명이 하던 작업을 한다.[38]”
기술혁신에 성공한 개별 자본은 일시적으로 시장에서 확실한 우위를 획득한다. 기술혁신에 성공한 자본가는 경쟁하는 다른 자본가에 비해 같은 상품을 훨씬 더 적은 노동시간으로 생산할 수 있게 된다. 기술혁신이 ‘보편화’되기 전에는, 아직 상품 생산에 ‘사회적으로 필요한 노동시간’은 이전의 기술단계에 머물러 있으며, 시장가격도 이에 따라 형성돼있다. 따라서 시장가격으로 상품을 판매할 경우 자본가는, 기술혁신으로 자신이 절약한 노동시간만큼 ‘특별이윤’을 얻을 수 있다. 또는 보다 현실에 가깝게는 시장가격보다 좀 더 낮은 가격에 상품을 판매함으로써, 특별이윤을 획득함과 함께 시장점유율을 확대하고 다른 경쟁자본을 제압할 수 있다.[39]
우리가 아까 살펴본 제빵업의 예를 다시 살펴보자. 예컨대 과거에는 빵 30개를 만들기 위해 사회적 노동시간 8시간이 요구됐는데, 어떤 자본가가 새로운 기계를 도입해, 빵 30개를 만들 때 필요한 노동시간이 4시간으로 단축되면 어떻게 될까? 달리 말하면 8노동시간 동안 이제는 예전보다 2배의 빵, 즉 60개의 빵을 만들 수 있다는 뜻이다.
제빵기술의 혁신과 무관하게 밀가루 10kg과 오븐의 감가상각비는 변동없이 그대로 유지된다고 가정하자. 빵 30개를 만드는데 밀가루는 12만원, 오븐의 감가상각비는 10만원이 든다. 8노동시간을 투여해 빵 60개를 만들기 위해선 밀가루는 24만원, 오븐 감가상각비로는 20만원을 투여해야할 것이다. 노동자에겐 이전과 동일하게 8시간 노동을 시키며, 필요노동시간인 4노동시간 분의 임금을 지급한다.[40]
이 때 자본가가 지출하는 금액은 아래와 같다.
밀가루 20KG(24만원) + 오븐 감가상각비(20만원) + 노동자임금(4만원) = 48만원
이 때 자본가가 생산하는 빵 60개에 대상화된 가치는 다음과 같다.
밀가루 20KG(24만원) + 오븐 감가상각비(20만원) + 노동자의 제빵노동(8만원) = 52만원
즉 자본가는 이제 약 0.86노동시간(52노동시간/빵60개)을 들여 빵 1개를 생산할 수 있다. 기술혁신 이전에 빵 1개의 교환가치는 1노동시간(1만원)이었는데, 기술혁신의 결과로 이 자본가가 만든 빵 1개는 0.86노동시간(0.86만원)의 교환가치를 지니게 됐다.
그런데 아직 기술혁신이 보편화되지 않았기 때문에, 여전히 빵 1개는 시장에서 1만원에 판매되고 있다. 이 자본가가 시장가격(1만원)으로 빵을 판매하면, 빵 1개당 0.14만원의 특별이윤을 얻는 셈이다. 실제로는 예컨대 0.95만원 정도에 빵을 판매해서, 경쟁 자본가의 시장점유율을 빼앗아오면서, 개당 0.09만원의 특별이윤도 챙기는 선택을 할 것이다.
도식적인 예를 들어서 특별이윤을 쉽게 설명했다. 이것은 실제 현실을 매우 단순화한 설명이라, 사실 맞지 않는 부분이 많다. 특히 비현실적인 부분은 오븐의 가치인데, 기술혁신은 일반적으로 기계의 개량과 발전으로 나타나고, 이는 더욱 복잡한 기계의 사용으로, 즉 기계(이 경우 오븐)의 상대적 가치를 증대시키는 방향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이것은 뒤에 설명한 ‘유기적 구성의 고도화’와 연결된다.
그런데 기술혁신으로 얻어진 이런 특별이윤은 영원히 지속되는 게 아니다. 경쟁하는 다른 자본가들도 살아남기 위해 비슷한 기술혁신을 연구하고 도입하게 되며, 따라서 시간이 흐름에 따라 신기술이 보편화된다. 신기술이 보편화되면 기존에 개별 자본가가 얻던 ‘특별이윤’은 사라진다. 그리고 높아진 노동생산성으로 인해 같은 노동시간 동안 더 많은 상품을 만들 수 있기 때문에, 상품 하나에 대상화된 노동시간은 줄어든다. 즉 상품의 가치가 하락한다. 예컨대 앞선 제빵 사례에서는 빵 1개 당 가치가 1만원에서 0.86만원으로 하락한다.
상품(특히 일반적 생활수단)의 가치하락은 임금의 상대적 비중을 줄이는 효과를 낳는다. 예컨대 빵 1개가 1만원이던 때에 자본가가 노동자에게 빵 4개에 해당하는 임금을 줘야했다면, (즉 노동자의 시장임금이 4만원이었다면), 빵 1개의 가치가 0.86만원으로 줄어들게 되면, 자본가가 노동자에게 동일한 양의 생활수단을 지급하더라도 이는 3.44만원의 가치밖에 되지 않는다. 따라서 기술혁신을 통해 자본가는 노동자의 생활조건을 하락시키지 않고서도 잉여가치율을 높일 수 있다.
또 기술혁신은 같은 양의 생산을, 또는 심지어 더 많은 양의 생산을 더 적은 노동력으로, 또 더 단순한 노동으로 가능케 하는 경향이 있다. 이는 숙련노동자를 미숙련노동자로, 더 적은 수의 노동자로 대체할 수 있게 함으로써 가변자본 비율을 낮추며 산업예비군(실업자)을 증대시키는 효과를 낳는다. 산업예비군의 증대는 노동자들 간 경쟁을 강화해 임금을 낮추는 요인이 된다.[41] 이렇듯 기술혁신은 개별 자본가에게 획득하는 ‘특별이윤’ 외에도 다양한 형태로 착취율(잉여가치율)을 높이는데 기여한다.
여기서는 이러한 복잡한 영향을 다 설명하지는 않겠다. 다만 기술혁신을 통해서 착취율 증대, 특별이윤 획득, 시장지배력 증대 등 자본가가 경쟁에서 무수히 많은 이점을 얻을 수 있다는 점을 확인하고 넘어가자.
기술혁신이 낳는 자본의 유기적 구성의 고도화와 평균 이윤율의 장기적 하락경향
기술혁신이 여러 측면에서 자본가를 아주 행복하게 한다는 점, 그래서 자본가들은 경쟁에서 우위를 점하기 위해 기술혁신을 맹렬히 추구하게 된다는 점을 확인했다. 그러나 마치 자본주의가 만들어낸 노동자계급이 자본주의의 무덤을 파는 사회세력이 되듯이, 끊임없는 이윤의 축적을 위해 추구하는 기술혁신, 즉 생산성의 증대는 자본가계급을 해결할 수 없는 모순으로 끌고 들어간다.
기술혁신은 기계의 개량과 발전으로 나타나며, 이전과 비교해 매우 적은 노동력의 투입으로 훨씬 더 많은 생산을 가능케한다. 이는 자본의 ‘기술적 구성의 고도화’로, 즉 더욱 복잡하고 다양한 기계의 사용으로 나타난다. 또한 동일한 노동으로 훨씬 더 많은 양을 생산하기 때문에, 같은 노동량 대비 원료투입량도 늘리게 된다. 기술적 구성이 고도화된다는 것, 즉 기계가 복잡하고 다양해지며, 같은 시간 대비 원료투입량이 늘어난다는 것은, 자본의 총 투자액 중 불변자본(원료와 기계)의 상대적 비중이 가변자본에 비해 늘어난다는 것을 뜻한다. 마르크스는 불변자본의 비중이 가변자본에 비해 늘어나는 것을 ‘가치 구성의 고도화’라 불렀으며, ‘가치 구성의 고도화’가 ‘기술적 구성의 고도화’를 반영하여 나타날 때, 마르크스는 이를 ‘자본의 유기적 구성의 고도화(The rising trend of the organic composition of capital)’라고 불렀다.
그런데 이윤축적의 관점에서 유기적 구성의 고도화는 피할 수 없는 저주와 같다. 유기적 구성이 고도화되면 총 투자액 중 가변자본의 비중이 줄어들게 되는데, 투자액 중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는 부분은 오직 가변자본 뿐이다. 불변자본은 자신이 가진 가치를 이전할 뿐이다. 따라서 착취율이 동일하다면, 유기적 구성의 고도화는 총 투자액 대비 이윤의 비율, 즉 이윤율을 감소시키는 결과를 낳는다.[42] 이것을 유기적 구성의 고도화로 인한 ‘평균이윤율 저하경향’이라고 한다.
그런데 사회적 관점에서 유기적 구성의 고도화는 저주가 아니다. 유기적 구성의 고도화는 이전에 비해 동일한 양의 재화를 생산하기 위해 필요한 노동량이 현저히 감소했음을 의미한다. 즉 사회적 측면에서 유기적 구성의 고도화는 인류가 자신의 생존을 유지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수행하는 필요노동시간이 단축되고, 더 많은 시간을 자유로운 여가와 활동에 투여할 수 있다는 뜻과 같다. 그런 의미에서 유기적 구성의 고도화로 인한 평균이윤율의 저하는 사회적 생산력의 발전과 축적을 위한 축적을 목표로 하는 자본주의 생산관계 사이의 모순을 드러내는 현상일 뿐이다.
그런데 유기적 구성의 고도화로 인한 평균이윤율 저하경향은 아주 긴 시기를 놓고 보지 않으면 분명하게 관찰되지 않는다. 자본이 다양한 층위에서 이윤율 저하경향을 상쇄하려는 필사적인 분투를 하기 때문이다. <자본>에서는 이러한 상쇄요인을 ▲노동착취도의 증가 ▲노동력의 가치 이하로 임금을 인하 ▲불변자본 요소들의 저렴화 ▲상대적 과잉인구 ▲대외무역 ▲주식자본의 증가 등으로 설명하고 있다.
마르크스가 상쇄요인을 위와 같이 분류하긴 했지만, 사실 다양한 상쇄요인에 대해 『자본론』에 충분히 자세하게 서술돼있진 않다. 실제로 오늘날까지 이윤율 저하경향을 상쇄하려는 자본의 주요한 방법은 자본주의 위기의 심화 정도, 착취와 수탈의 결합방식, 노동자계급의 혁명적 역량의 성숙 정도 등 다른 요인들과 상호작용하면서 시대에 따라 다양하게 변화해왔다.
평균이윤율 저하경향과, 이에 저항하려는 자본의 분투라는 관점에서 보면, 자본주의의 큰 역사적 흐름을 잘 이해할 수 있다. 각 시대별로 자본주의가 어떻게 평균이윤율 저하에 저항하며 자신의 위기를 해소하기 위해 분투해왔는지, 그리고 위기해소를 위한 자본의 분투가 어떻게 또 다른 위기 혹은 인류적 재앙을 만들어왔는지, 그럼에도 결국에는 평균이윤율의 장기적 하락이 어떻게 관철돼 왔는지에 대해 이번 교육자료에서는 대략적으로만 설명하고자 한다. 이후 9강과 10강 ‘자본주의 역사 꿰뚫어보기’에서 정치적, 사회적 측면을 포괄해 보다 자세히 보게 될 것이다.
자유경쟁과 부르주아 혁명의 시대(1776~1871년)
식민지 약탈과 노예노동에 기초한 상업자본주의, 그리고 공장제 수공업의 시대를 거쳐, 1700년대 후반 기계제 대공업에 기초한 산업 자본주의 시대가 열렸다. 1776년은 영국의 산업혁명을 상징하는 증기기관이 일반화되고, 미국의 독립혁명이 시작된 해이자, 1789년 프랑스 대혁명을 약 10년 앞둔 해이다. 부르주아 이데올로기를 정립하는 데서 중요한 역할을 한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이 발간된 해이기도 하다.
이때로부터 100여년 동안, 영국과 프랑스를 중심으로 한 유럽 일부와 동부해안 중심의 북미대륙 일부라는 제한된 지역에서 기계제 대공업에 기초한 산업 자본주의가 발전돼 나갔다. 축적된 자본들은 아직 중소규모를 벗어나지 못했고, 산업마다 자본 간의 경쟁이 자유로이 펼쳐졌다. 국가는 경제에 개입하지 않은 채 체제를 수호하는 역할만을 담당했다.
이 당시 서유럽에선 공황이 반복해 나타났는데, 이는 자유경쟁이 지배하는 무정부적 상태에서 주기적으로 벌어진 생산과잉의 결과였다. 그 이전까지 공황은 예컨대 가뭄이 들어 흉작이 드는 등 보통 자연적 재해에 의한 생산의 결핍으로 인해 나타났다. 그러나 기계제 대공업이 본격화된 19세기부터 공황은 생산의 위축이 아니라 생산의 ‘과잉’ 때문에 나타나기 시작했다.
과잉생산과 과잉축적은 왜 발생하는가? 간단히 설명하면 시장에서 판매가 실현되기 전까지는 생산물이 판매될지를 알 수 없다라는 시장의 무정부성과, 경쟁자본을 무너뜨리고 시장점유율 확대를 추구하는 자본주의의 경쟁적 속성이 결합한 결과이다.
과잉생산, 과잉축적이 누적되면 소비와 생산의 격차로 인해 판매되지 않는 재고가 쌓인다. 재고가 쌓이니 자본가는 추가적인 생산을 중단하게 되고, 생산이 위축되면서 필요없는 노동력이 해고된다. 실업자가 늘어나며 소비력은 더욱 떨어지고, 이는 판매부진을 악화시킨다. 과잉생산에서 출발한 악순환이 반복되면서 결국 기업이 파산하는 공황으로까지 나아간다. 19세기에 주기적으로 발발했던 공황에 대해 엥겔스는 이렇게 묘사한다.
“사실, 최초의 전반적 공황이 발발한 1825년 이래로 상공업계 전체는, 즉 모든 문명 민족들과 그 부속물을 이루고 있는 다소 미개한 민족들의 생산과 교환은 대체로 십 년에 한 번씩 엉망진창이 되고 있다. 교류는 정체되고, 시장은 포만 상태가 되고, 생산물은 팔리지 않아서 산더미같이 쌓이게 되고, 현금은 볼 수 없게 되고, 신용은 소멸되고, 공장은 조용히 서 있게 되고, 근로 대중은 생활 수단을 너무 많이 생산한 탓에 생활 수단이 부족하게 되고, 파산이 속출하게 되고, 강제 경매가 속출하게 된다. 마침내 산처럼 쌓여 있던 상품들이 대폭 혹은 소폭 인하되어 팔려 나가게 될 때까지, 생산과 교환이 점차 원래의 걸음을 하게 될 때까지, 이렇게 정체는 몇 년 동안 계속되고 생산력들과 생산물들은 대량으로 허비되고 파괴된다. 이 걸음걸이는 점차 빨라져서 속보로 변하고, 이 산업상의 속보는 구보로 넘어가고, 이 구보는 다시 더욱 속력을 높여 공업, 상업, 신용, 투기의 장을 마구 내달리는 본격적인 장애물 경마의 질주로 변하며, 그러다가 마침내 목숨을 건 도약 끝에 – 파산의 구덩이에 다시 빠지게 된다. 이러한 과정이 끊임없이 되풀이된다. 우리는 1825년 이래로 이러한 과정을 꼭 다섯 번 경험하였으며, 이 순간(1877년) 여섯 번째 경험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공황의 성격은 매우 뚜렷해서, 푸리에는 최초의 공황을 모든 공황에 타당하게도 이렇게 부를 정도였다 : crise pléthorique. 즉 여분에서 오는 공황.[43]”
그런데 이 당시의 공황은 매우 파괴적이었지만, 동시에 한계기업을 파산시키고 임금을 하락시키는 ‘창조적 파괴’를 통해 자본의 이윤율을 급격히 회복시키는 역할을 하기도 했다. 공황의 주기적 격렬성은 역설적으로 성장기 자본주의가 가진 활력의 표현이었다. 공황을 거쳐 살아남은 자본은 파산한 자본의 불변자본을 싼 값에 인수하고, 늘어난 산업예비군 덕택에 착취율을 높이며 새로운 호황으로 나아갔다. 그런 의미에서 이 당시 공황은 자본주의의 위기의 표현이자 동시에 그 위기의 해결책이었다.
그런데 이러한 공황이 무한히 도돌이표로 반복되는 건 아니었다. 10년 주기의 공황을 거칠 때마다, 자본은 경쟁자본을 먹어치우며, 독점자본으로 변모해갔기 때문이다. 주기적 공황을 거치며 자본주의는 점차 ‘자유경쟁시대’에서 ‘독점과 제국주의’의 시대로 변화해갔다.
독점과 제국주의 전면화의 시대(1871~1914년)
“...따라서 독점의 역사를 핵심적으로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1860~70년대: 자유경쟁의 발전이 가장 높이, 정점에 도달한 단계. 독점은 눈에 잘 띄지 않는 맹아에 불과하다. (2) 1873년 공황 이후: 카르텔들은 장기간 발전했지만 아직 예외적이다. 그것들은 아직 견고하지 않으며, 일시적 현상이다. (3) 19세기 끝무렵의 호경기 및 1900~3년의 공황: 카르텔들은 모든 경제활동의 기초들 가운데 하나가 된다. 자본주의는 제국주의로 전화되었다.[44]”
1870년대를 넘어서면서, 집적과 집중의 결과로 등장한 독점자본이 특정 산업을 지배하게 되고, 나아가 이러한 독점자본이 은행자본과 융합돼 금융독점체를 형성하면서 경제와 정치를 지배하게 되는 독점자본주의 시대가 열렸다. 독점자본의 등장은 석유, 철강, 전기 등을 중심으로 시작된 2차 산업혁명과 밀접하게 연결돼 있었으며, 후발주자인 독일과 미국이 영국을 급격히 따라잡는 통로가 되었다.
주요 선진국들 사이에서 카르텔, 신디케이트, 트러스트와 같은 독점체가 발전했고, 독점체들은 큰 영향력을 갖고 국가기구를 직접 좌지우지했다. 자유무역을 장려하며 야경국가에 머무르던 각 국은 이제 자국의 산업을 보호하기 위한 강력한 보호관세 등 자본의 집중과 독점의 형성을 촉진하는 정책들을 펼쳤다.
이 시기 이윤율 저하 경향을 상쇄하기 위한 주요한 해법은 식민지로의 자본 수출이었다. 국내에서 성장할 대로 성장한 독점자본은 국내투자만으로는 만족할 만한 이윤을 거둘 수 없었다. 이러한 ‘잉여자본’을 식민지에 투자하게 되면, 훨씬 더 높은 이윤을 거둘 수 있었다. 일반적으로 산업의 발전단계가 낮은 식민지에서는 자본의 유기적 구성이 훨씬 낮았고, 노동력의 가격이 훨씬 저렴했기 때문이다. 제국주의적 억압을 통해 다양한 수탈을 결합시킬 수 있다는 장점도 있었다.
제국주의 열강들은 이전보다 훨씬 맹렬한 속도로 식민지 확보 경쟁에 뛰어들었다. 영국, 프랑스, 독일, 일본, 미국, 러시아 6대 강국이 확보한 식민지의 인구는 1876년 2억 7,380만 명에서 1914년 5억 2,340만 명으로 늘었다. 1914년 무렵에는 제국주의 열강들이 사실상 나머지 세계 전체를 자신의 지배 아래로 복속시켰다.
그러나 제국주의 정책은 독점자본의 이윤율 저하를 상쇄하기 위한 해법임과 동시에, 식민지 쟁탈을 둘러싼 제국주의 열강들 간의 전면전이라는 새로운 위기의 출발점이었다. 식민지를 나눠먹던 40년 간 ‘평화’를 유지했던 유럽대륙은, 지구를 거의 다 나눠먹은 시점부터 더 이상 평화를 유지할 수 없었다.
“1876년에 그랬던 것처럼, 유럽 열강들이 예를 들어 아프리카의 10분의 1을 그 식민지로 차지하고 있을 뿐이었을 때는 식민정책은 토지를 비독점적으로, 말하자면 ‘선착순’으로 차지하는 방식으로 펼쳐질 수 있었다. 하지만 1910년 무렵 아프리카의 10분의 9가 정복되고 전세계가 분할되었을 때, 독점적인 식민지 보유의 시대가, 따라서 세계의 분할과 재분할을 위한 특히 첨예한 투쟁의 시대가 오는 것은 필연적이었다.[45]”
독점자본의 전횡과 제국주의 열강들 간의 패권대결은 뒤이은 ‘세계전쟁과 대공황’의 시대를 만들어냈다.
세계전쟁과 대공황, 노동자혁명의 시대(1914~1945년)
제국주의 열강들의 식민지 재분할 쟁탈전은 몇 차례 국지전과 첨예한 전쟁 위기를 거친 끝에 마침내 1914년 제국주의 국가들 간의 세계전쟁을 불러일으켰다. 1918년까지 계속된 제1차 세계대전은 세계적으로 1,000만 명을 희생시켰다.
세계대전이 끝나고 불과 11년 만에, 누적된 경제적 모순들 위에 금융투기의 파괴적 결과가 덧붙여지면서 1929년 세계대공황이 시작됐다. 세계 대공황에 대응하는 자본의 해법은 케인스주의였다. 과잉생산과 과잉축적으로 생산과 소비의 간극이 심각하게 벌어진 상황에서, 케인스주의 정책은 정부의 재정확장을 통해 인위적으로 유효수요를 증대시켰고, 이를 통해 생산과 소비의 간극을 줄여나갔다.
1933년부터 미국을 중심으로 한 유효수요 확장 정책으로 대공황이 어느정도 수습되는 듯 보였다. 그러나 1937년부터 다시 급격한 침체가 더욱 가파른 양상으로 전개됐다. 소비가 활성화되자 유효수요 확장분 이상으로 생산이 확장되면서 생산과 소비의 간극이 더 벌어져 버렸기 때문이다.
막대한 생산과잉을 해소하기 위해 자본이 택한 해결책은 전쟁이었다. 전쟁은 어마어마한 인위적 소비와 거대한 생산능력 파괴를 뜻했다. 전쟁은 군비경제로 어마어마한 유효수요를 창출했고, 동시에 어마어마한 생산력 파괴를 일으켰다. 자본주의는 1939~1945년 2차 세계대전을 거치며 5,000만 명을 희생시키는 대량학살과 대량파괴를 통해 대공황에서 벗어나 ‘청춘의 몸으로 회생하여’ 다시 축적을 시작할 수 있게 되었다.
전후호황과 개량주의의 시대(1945~1980년)
자본주의는 두 차례의 세계대전의 폐허 위에서 25년 간 안정된 성장을 이어갔다. 이 때 이윤율 저하를 상쇄하기 위한 자본주의의 핵심 정책은 다시 케인스주의를 통한 유효수요 확장이었다. 유효수요 확장은 한편으로는 임금인상을 허용하고, 복지제도를 도입하는 등 노동자의 구매력을 향상시키는 방식으로, 다른 한편으로는 냉전 체제에서 대규모 군비경쟁을 지속하는 방식으로 이뤄졌다.
그러나 맹렬한 자본의 확대재생산으로 인해 1970년대에 다시 자본의 유기적 구성 고도화에 따른 이윤율 저하 경향이 본격적으로 작동하기 시작했고, 유효수요 확장 정책 자체의 모순은 심각한 불황과 물가상승이 결합된 스태그플레이션으로 나타났다.
위기는 왜 스태그플레이션이란 형태로 나타났을까? 첫째로 유효수요 확장정책의 한계가 불황을 낳았다. 유효수요 확장정책은 생산과 소비의 간극을 줄이는데 그 목표가 있으나, 1930년대의 경험과 유사하게, 시간이 지나며 생산과잉은 오히려 더 심해졌다. 유효수요 확장으로 소비를 늘릴 때마다, 자본가들은 늘어난 소비수준에 생산을 맞추는 게 아니라, 오히려 생산수준을 더욱 끌어올렸기 때문이다. 결국 생산과 소비의 간극은 정부 재정으로 감당할 수 없는 정도로까지 벌어졌다. 더욱 심각한 형태의 생산과잉이 1970년대 극심한 불황으로 연결됐다.
둘째로 유효수요 확장 정책을 위해 재정을 충당하는 방법의 한계가 인플레이션을 낳았다. 전후호황기 초반에는 자본가에게 높은 세금을 부과함으로써 재정확장을 위한 재원을 조달했다. 이는 러시아혁명 이후 계급투쟁의 역관계 변화를 반영한 산물이었다. 그러나 점차적으로 자본가에게 세금을 매기는 대신, 화폐발행량을 확대하는 것으로 주요 재원 조달방안이 대체됐다. 특히 미국은 1960년대 중반 이후 베트남전쟁을 치르며 막대한 양의 달러를 발행하였는데, 이는 달러의 가치를 급격히 하락시켰고, 그 부담을 완화하기 위해 시행한 금태환 폐지는 달러의 가치 하락을 전 세계 화폐의 가치하락으로 확산시켰다. 거기에 오일쇼크라는 공급충격 사건까지 겹쳐, 높은 인플레이션이 불황과 동시에 나타나게 되었다.
전후호황을 통해 빠르게 성장한 자본주의는 다시 평균이윤율 저하경향에 부딪혔고, 케인스식 유효수요 확장 정책은 더 이상 해법을 제시할 수 없었다. 대신 그 자리를 노동자계급의 패배와 함께 ‘신자유주의, 세계화, 금융화’라는 새로운 해법으로 대체했다.
신자유주의, 세계화, 금융화의 시대 (1980~2022)
1970년대 노동자계급의 세계적 반란을 잠재운 자본가계급은 1980년대 이후 특단의 대책을 세웠다. 이는 신자유주의, 세계화, 금융화로 압축할 수 있다.
신자유주의 정책이란 정리해고, 임금삭감, 비정규직화, 복지축소, 노조무력화, 자본가감세, 규제완화, 기간산업사유화 등의 세부정책을 포괄하는 것으로, 착취를 최대한 강화하고 자본가에게 온갖 특혜를 줌으로써 자본의 이윤율을 인위적으로 끌어올리는데 그 목표가 있다. 신자유주의는 1970년대 중후반 칠레 군사정권의 실험을 거쳐, 1980년대 영국과 미국의 보수주의 정권에 의해 본격화하여 1990년대 전 세계로 확산됐다.
그런데 신자유주의 정책으로 개별 기업이 이윤율을 회복할수록 노동자는 더 가난해진다. 이는 생산과 소비의 간극을 심화시켜 다시 이윤율 회복을 가로막는 요인이 된다. 이를 보완하기 위해 신자유주의 정책에 세계화와 금융화가 덧붙여졌다.
세계화는 ‘생산’과 ‘시장’ 양 측면에서 볼 수 있다. 시장의 세계화는 1980년대 중반부터 가속되다가 1995년 세계무역기구(WTO) 출범과 함께 전면화했다. 1980년대 중국의 시장경제 전환, 1989~1991년 동유럽과 소련의 붕괴는 스탈린주의 진영을 소멸시키며 세계를 단일 공급망, 단일 시장으로 통합시켰다. 시장의 세계화는 시장을 획기적으로 확대함으로써 생산과 소비의 간극 확대를 완화했다. 중국산 저렴한 수입품으로 선진국 노동자들이 하락한 임금으로도 생활을 영위할 수 있게 함으로써, 임금하락이 노동자투쟁으로 연결되는 고리도 차단했다.
한편 생산의 세계화는 생산의 거점 전체 또는 일부를 국경을 넘어 세계 곳곳으로 이동시켰다. 저개발국으로의 공장이동은 임금비용을 획기적으로 하락시켰고, 선진국에서 노조를 무력화하는 주요한 전략이 됐다. 미국, 서유럽, 일본에 집중돼있던 공장들은 남미, 동유럽, 동아시아로 빠져나가고, 최종귀착지인 중국으로 몰려들었다. 세계 자본주의는 중국의 생산과 미국의 소비라는 양대 축으로 재편됐다.
금융화를 설명하기 위해 금융자본에 대해 잠시 살펴보자. 금융자본은 본래 산업자본에 대한 대부나 주식투자로 잉여가치의 일부를 이자나 배당의 형태로 나눠받음으로써 수익을 얻는 자본의 한 부류이다. 금융자본은 잉여가치를 직접 생산하지 않지만, 사회의 유휴자본을 수집해 산업자본에게 공급함으로써 산업자본의 가치증식에 간접적으로 기여하기 때문에 그 대가로 이자나 배당을 분배받는다.
그런데 주가가 지속적으로 폭등한다면, 금융자본은 이자나 배당보다 주식 매매차익으로 훨씬 더 큰 수익을 거둘 수 있다. 금융자본은 투기적 불로소득에 대한 환상으로 중간계급과 노동자계급 상층을 주식시장으로 끌어들인다. 이 과정에서 이들에 대한 고금리대출을 통해서도 수익을 올리며, 이후 실질가치를 크게 벗어난 주가가 폭락할 때는 시세차익을 실현하고 개미들에게 손실을 전가한다. 이것이 금융수탈이다. 신자유주의 금융화는 자본이 이러한 금융수탈을 광범위하게 실현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준 것이다.
금융화는 신자유주의 세계화로 인한 노동자계급의 임금하락과 고용감소에 대한 보완책이기도 했다. 신자유주의로 감소한 선진국의 소비를 주식부동산 거품과 막대한 신용대출을 통해 인위적으로 확장시키는 것이다.
그런데 금융수탈은 시세차익으로 이윤율 저하경향을 상쇄할 수 있지만, 매우 큰 부작용이 있다. 주식가격이 폭락할 때 많은 사람들이 파산하고, 그 충격으로 은행들까지 파산하며 경제 전반이 심각한 상황으로 빠져들 수 있다. 1929년 10월 대공황 당시 상황이 그러했다. 그래서 1930년대 대공황을 수습하면서 미국은 은행을 비롯한 금융기관에 여러 가지 규제를 도입했다. 그러나 미국 정부는 이런 규제들을 1999년에 대대적으로 풀어버렸다. 금융수탈의 수단은 주식과 부동산은 물론 기업, 외환, 원자재, 선물, 암호화폐로 확대됐다. 금융부문이 비대하게 팽창했고, 쓸만한 투자처를 찾지 못하던 자본은 가공할 수익률을 제공하는 금융부문에서 새로운 활기를 찾았다. 자본은 점점 더 생산적 투자처가 아니라 금융수탈에 몰두하게 됐다.
그러나 신자유주의 세계화, 금융화는 영원히 지속될 수 없었다. 주식시장 거품이 2000년에 닷컴버블로 터졌고, 이후 주식시장에서 옮겨간 부동산시장의 거품이 2008년 금융위기로 폭발했다. 파생상품을 매개로 미국과 세계 금융기관 다수가 부동산 부실채권과 연결돼있었기에, 파산의 파급효과는 전 세계로 뻗어나갔다. 2008년 9월 5대 투자은행과 최대보험사가 줄줄이 파산 또는 파산국면에 접어들었고, ‘미국발 세계 금융위기’가 전면에 부상했다. 2008년 금융위기는 1930년대 대공황 이후 최대의 사건으로, 금융수탈의 최종결과였다.
이에 대응하기 위해 신자유주의를 집행하던 자본가계급은 천문학적인 구제금융을 금융기관에게 제공했다. 하지만 소비시장이 빠르게 위축됐다. 경기부양을 위해 각국 정부가 엄청난 재정을 투여했다. 주요국 중앙은행은 대규모 양적완화와 초저금리 정책을 장기간 실시했다. 이를 통해 2008년 금융위기가 폭발적인 대공황으로 발전하는 것은 차단했다.
그러나 대신 대불황이 닥쳤다. 2008년부터 2019년까지 12년 동안 세계 경제의 평균 성장률이 2.5%를 기록했다. 극심한 투자기피 현상이 벌어졌다. 대불황은 모순의 해소가 아니라, 모순의 축적과 악화를 통해 대규모 폭발로 나아가는 과정이었다. 세계화는 리쇼어링, 보호주의, 패권대결로 역전됐고, 금융화는 주식시장과 부동산시장의 폭등으로 더욱 거대한 금융위기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 그리고 2022년 우크라이나 전쟁과 기록적인 인플레이션이 강력한 충격을 안기며, 신자유주의 시대를 끝장내고 새로운 시대, ‘위기와 전쟁과 혁명의 시대’의 문을 열었다.
“이 새로운 시대는 어떤 시대인가? 이전 시대 동안 축적된 모순들이 폭발하면서 자본주의 경제 위기가 격렬하게 분출할 시대다. 또한 마찬가지로 이전 시대 동안 축적된 모순들로부터 제국주의 국가들 간의 충돌과 전쟁이 일상화할 시대다. 나아가 경제위기와 전쟁이 서로 맞물리며 상황을 더욱 악화시킴으로써 노동자계급과 인류를 끝없는 고통 속으로 몰고 들어갈 시대다. 하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세계적으로 계급투쟁이 부활하고 전진할 것이며 나아가 자본주의를 철폐하는 노동자혁명의 전망이 다시 한번 미래의 막연한 전망이 아니라 눈앞의 구체적인 과제이자 가능성으로 떠오르게 될 시대다.[46]”
오늘날 자본주의에 대하여는 11강 ‘오늘날 세계정세: 위기, 전쟁, 혁명의 시대’에서 자세히 다루게 될 것이다.
장기적으로 관철되고 있는 평균이윤율 저하경향
지금까지 유기적 구성의 고도화로 인한 평균이윤율 저하경향에 자본이 어떤 주된 전략을 택하며 저항해왔는지를 시대별로 나누어 살펴보았다. 그러나 이런 자본의 분투에도 불구하고, 연구에 따르면 평균이윤율 저하경향이 관철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부에노스아이레스 대학의 에스떼반 에쎄끼엘 마이또는 이와 관련해 의미 있는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1869년부터 2010년까지 미국, 영국, 독일, 일본, 스웨덴, 네덜란드 여섯 개 핵심 국가의 이윤율 평균치를 실제로 계산한 것이다. 그 결과를 보면, 1870년 무렵 40%대에서 출발했던 이윤율은 경향적으로 하락을 거듭한 결과 2010년 무렵 10% 근처에 이르렀음을 알 수 있다. 짧은 기간을 놓고 보자면 등락을 거듭했지만, 긴 시간을 놓고 보자면 이윤율이 큰 폭으로 하락했다. 마르크스가 예견한 그대로 이윤율 저하는 ‘경향적으로’ 관철됐다.[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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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자본주의의 기본 원리, 그리고 경제적 측면에서 오늘날까지 자본주의의 큰 역사적 흐름을 살펴보았다. 마지막으로 오늘 배운 자본주의 착취의 비밀이 의미하는 바에 대해, 어느 책에서 재밌게 읽은 짧은 농담을 통해 짚어보려 한다. 아래의 질문에 답해보자.
질문: “백열전구 하나를 갈아 끼우는 데 자본가가 몇 명 필요할까?”
정답: “한 명(또는 그 이상)이 필요하다. 그들은 노동자를 고용해 전구를 갈아 끼우게 한다.”라고 대답한 학생은 F학점을 받고 이 강좌를 재수강한다. 이번에는 절대 페이지를 건너뛰면 안 된다. “한 명도 필요 없다.”라고 대답한 학생은 전구를 갈아 끼우는 일뿐 아니라 다른 어떤 일을 하는 데도 자본가는 필요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므로, 우등생 표창과 함께 졸업하고 이제 나가서 자신이 배운 것을 다른 사람들과 나누면 된다.[48]”
자본주의 생산의 비밀이 폭로하는 진실은 이러하다. “모든 가치를 생산하는 것은 바로 노동자계급이다.” 자본주의가 발전시켜온 생산력을 유지하고 관리하는 데 자본가는 1명도 필요하지 않다. 여기에 마르크스의 자본주의 생산양식에 대한 분석의 혁명적 의의가 담겨있다.
그러나, 1강에서도 언급하였듯, 자본주의는 절대 자동적으로, 또는 필연적으로 무너지지 않는다. 오직 노동자계급이 자본주의의 반복되는 위기와 전쟁을 중단시키고 자본가계급으로부터 권력을 빼앗아올 때만 새로운 세상을 열 수 있다. 이것이 ‘3강: 사회주의로 가는 길, 개량인가, 혁명인가’에서 다룰 문제이다.
※함께 읽으면 좋을 자료
카를 마르크스. (1997). 임금 노동과 자본. 칼 맑스 프리드리히 엥겔스 저작선집, 1.
카를 마르크스. (1997). 임금, 가격, 이윤. 칼 맑스 프리드리히 엥겔스 저작선집, 3.
카를 마르크스. (2015). 자본론 (김수행, Trans.). 비봉출판사.
블라디미르 일리치 레닌. (2018). 제국주의, 자본주의의 최고 단계. 아고라.
리오 휴버먼. (2000). 자본주의 역사 바로 알기. 책벌레.
프리드리히 엥겔스. (1997). 잉글랜드 노동 계급의 처지(발췌). 칼 맑스 프리드리히 엥겔스 저작선집, 1.
김경민. (2023). 미르의 공장 일지. 숨쉬는책공장.
양준석, & 백종성. (2023). 자본주의 시대전환과 한국 노동운동. 거인의발걸음.
[1] 강제에 의한 노동관계는 자본주의적 규율에서도 금지하고 있다. 법률의 존재가 자본주의 체제에서 강제노동이 존재하지 않음을 뜻하는 건 아니지만 말이다.
‘근로기준법 제7조(강제 근로의 금지) 사용자는 폭행, 협박, 감금, 그 밖에 정신상 또는 신체상의 자유를 부당하게 구속하는 수단으로써 근로자의 자유의사에 어긋나는 근로를 강요하지 못한다.’
‘ILO 강제 또는 의무 노동에 관한 협약 제1조 1. 이 협약을 비준하는 국제노동기구 회원국은 가능한 한 조속히 모든 형태의 강제 또는 의무 노동의 사용을 금지할 것을 약속한다. ... 제2조 1. 이 협약의 목적상 강제 또는 의무 노동은 어떤 사람이 처벌의 위협하에서 강요받았거나 자발적으로 제공하지 않은 모든 노동이나 서비스를 의미한다.’
[2] 노동계약이 형식적으로는 자유롭고 평등한 계약이지만, 실질적으로는 엄청난 불평등계약이라는 사실에 대해 자본론의 한 구절은 이렇게 묘사한다:“노동력의 매매가 진행되는 유통분야 또는 상품교환분야는 사실상 천부인권(innate rights of man)의 참다운 낙원이다. 여기를 지배하고 있는 것은 오로지 자유, 평등, 소유, 벤담(공리주의)이다. 자유! 왜냐하면 하나의 상품, 예컨대 노동력의 구매자와 판매자는 자기들의 자유의지에 의해서만 행동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법적으로 대등한 자유로운 인격으로 계약을 체결한다. 계약이라는 것은 그들의 공동의지가 하나의 공통된 법적 표현을 얻은 최종 결과다. 평등! 왜냐하면 그들은 오직 상품소유자로서만 서로 관계하며 등가물을 등가물과 교환하기 때문이다. 소유! 왜냐하면 각자는 자기 것만을 마음대로 처분하기 때문이다. 벤담! 왜냐하면 각자는 자기 자신의 이익에만 관심을 기울이기 때문이다. 그들을 결합시켜 서로 관계를 맺게 하는 유일한 힘은 각자의 이기주의, 이득, 사적 이익 뿐이다. 각자는 오직 자기 자신에 대해서만 생각하고 타인에 대해서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바로 그렇게 하기 때문에 그들은 모두 사물의 예정조화에 따라 또는 전지전능한 신의 섭리에 따라 그들 상호간의 이익, 공익, 전체의 이익이 되는 일을 수행하는 것이다....이제 이 분야를 떠날 때 우리는 우리의 등장인물들의 면모에 일정한 변화가 일어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전의 화폐소유자는 자본가로서 앞장서 걸어가고, 노동력의 소유자는 그의 노동자로서 그 뒤를 따라간다. 전자는 거만하게 미소를 띠고 사업에 착수할 열의에 차 바삐 걸어가고, 후자는 자기 자신의 가죽을 시장에서 팔아버렸으므로 이제는 무두질만을 기다리는 사람처럼 겁에 질려 주춤주춤 걸어가고 있다.” 마르크스. (2015). 자본론 1 - 상. 비봉출판사. 232p.
[3] “그들은” (12시간 이상 일하기 보다는) “차라리 더 적은 임금을 받고 10시간 일하는 쪽을 훨씬 더 좋아하지만, 그들에게는 선택의 권리가 없다. 그들 중에는 많은 사람이 실업상태에 있기 때문에(방적공들 가운데는 어쩔 수 없이 실이나 잇는 노동자가 되어 아주 낮은 임금을 받고 있는 사람들도 많다), 만약 그들이 노동시간의 연장을 거부한다면 다른 사람들이 즉시 그들의 자리를 차지할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의 선택은 더 장시간 노동하느냐 아니면 해고되느냐다.” 마르크스. (2015). 자본론 1 - 상. 비봉출판사. 387p.
[4] Hooper, T. (Director). (2012). At The End Of The Day. (2012), Les Miserables[Film]. Relativity Media, Working Title Films, and Cameron Mackintosh.
[5] 리오 휴버먼. (2000). 자본주의 역사 바로 알기. 책벌레, 276p.
[6] 엥겔스는 이러한 공상적 사회주의자들의 환상을 비판했으나, 동시에 자본주의의 적나라한 사회적 모순과 부정의, 불평등을 직시하고 바꾸려고 했던 공상적 사회주의자들의 진정성에 대해서 “우리는 오히려, 환상적 껍질 아래 도처에서 분출하고 있으나 저 속물들은 보지 못하는 천재적 사상의 맹아와 천재적 사상을 보고 기쁨을 느낀다.”라며 경의를 표하기도 했다.엥겔스. (1997). 유토피아에서 과학으로의 사회주의의 발전. 칼 맑스 프리드리히 엥겔스 저작선집, 5.
[7] 리오 휴버먼. (2000). 자본주의 역사 바로 알기. 책벌레.
[8] 여기서 잠시 ‘가치’라는 표현이 불러오는 한가지 오해에 대해 짚고 가려한다.“마르크스의 『자본론』에서 ‘생산적’ 또는 ‘가치’라는 표현은 도덕적 가치판단을 의미하는 게 아니다. 어떤 노동이 가치를 창조하지 못한다고 해서 그 노동이 쓸모없는 노동이라는 의미를 갖는다고 해석하면 안 된다. 사실 마르크스는 무역과 금융의 비생산적인, 즉 가치를 창조하지 못하는 속성을 강조했는데, 그것은 자본 순환에 필수적이지만 잉여가치를 창조하지 못하고 따라서 생산적이지도 못하다. 그렇다고 누구도 『자본론』의 저자가 자본주의에서 무역과 금융(이들 부문은 가사노동과 달리 확실히 엄청난 수익을 창출한다)의 필수 역할을 인식하지 못했다고 주장할 수는 없을 것이다.”Celeste murillo, & Andrea d’atri. (2023). 생산과 재생산: 자본주의는 여성을 이중으로 억압한다. 빵과장미의 도전, 138p.
[9] 이 글에서 우리는 가치와 교환가치라는 말 사이에 큰 구별을 두지 않을 것이다.
[10] Celeste murillo, & Andrea d’atri. (2023). 생산과 재생산: 자본주의는 여성을 이중으로 억압한다. 빵과장미의 도전, 138p.
[11] “자기의 현물형태가 사회적 등가형태로 여겨지는 특수한 상품종류(이 경우에는 쌀)는 이제 화폐상품으로 된다. 다시 말해 화폐로 기능한다. 상품세계 안에서 일반적 등가물로 일하는 것이 그 상품의 독특한 사회적 기능으로 되며, 그 상품이 그 일을 사회적으로 독점하게 된다. 제2형태에서 아마포의 특수한 등가물로 기능하고 있던 상품들 중에서, 그리고 제3형태에서 자기들의 상대적 가치를 공통적으로 아마포로 표현하고 있던 상품들 중에서, 어떤 특정한 상품이 이 특권적 지위를 역사적으로 차지했다. 그것은 금이다.” 마르크스. (2015). 자본론 1 - 상. 비봉출판사, 89p.
[12] 엉뚱한 상상을 해보자면, 예컨대 고등어를 화폐로 사용할 수 있을까? 고등어는 고등어마다 크기도 다르고, 모양도 균일하지 않다. 게다가 고등어는 귀금속과 달리 금방 부패한다. 고등어를 화폐로 사용한다면 엄청나게 비효율적인 거래비용이 발생하고, 사회는 혼란에 빠질 것이다. ‘고등어 화폐’는 비역사적인 상상으로나 존재할 수 있을 것 같다.
[13] “통화의 표준 단위가 일정한 무게의 금으로 정해져 있거나 또는 일정량의 금 가치에 연계되어 있는 화폐 제도. 금본위제의 초기 형태는 중앙은행이 화폐를 금화로 발행하여 시장에 실제로 유통시키는 것을 말하였다. 그러나 금속화폐는 운반의 불편성, 도난의 위험성 등 단점이 있다. 이러한 단점을 보완하고자 금지금본위제가 나타났는데, 중앙은행이 금화 대신 금화의 가치와 같은 가치의 지폐와 보조화폐를 발행하는 제도이다. 중앙은행이 발행한 지폐인 은행권을 금으로 교환하는 것을 금태환이라 하고, 이 은행권을 태환 화폐라고 한다.-그러나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 각 국은 전비 조달을 위해 통화를 증발하였고 금태환을 중지할 수밖에 없었으며, 금본위제에서 이탈하게 되었다. 이후 미국, 영국이 다시 금본위제로 복귀하게 되었지만 1929년 세계 대공황으로 인해 각국은 경쟁적으로 자국 무역을 보호하기 위해 평가절하를 하기 시작했고 금본위제에서 이탈하게 되었다.” (기획재정부. (2020, November 3). 금본위제. 시사경제용어사전. https://www.moef.go.kr/sisa/dictionary/detail?idx=666)
[14] 미국이 금태환 폐지를 선언한지 50년 넘게 지난 오늘날의 현실은 우리를 더욱 혼란스럽게 한다. 마르크스가 “지폐의 발행은 실제로 유통될 금량(또는 은량)을 지폐가 상징적으로 대표하는 범위로 제한되어야 한다”고 말한 것으로 미뤄보건대, 금본위제, 금태환제가 폐지된 상황에 대해 가정하지는 않았던 듯 하다. 그러나 ‘금이 아무런 가치도 없는 상징(예컨대 토큰이나 지폐)으로 어떻게 대체될 수 있는가’에 대해 마르크스가 설명한 아래의 구절은 오늘날 미국이 어떻게 금태환제를 폐지한 뒤에도 기축통화로서 달러의 화폐로서의 지위를 유지할 수 있는지에 대한 설명을 제공한다. “화폐의 상징(예컨대 지폐)은 자신의 객관적인 사회적 정당성을 가져야 하는데, 지폐는 이 정당성을 강제통용력에서 얻고 있다. 이런 국가적 강제는 한 공동체의 국내 유통 분야에서만 유효하다”. 이 중 뒷 문장은 오늘날의 현실과는 다르다. 역사는 미국과 같이 세계적 헤게모니를 가지고 있는 국가가 존재하는 경우 이러한 ‘국가적 강제’가 ‘국내 유통’을 넘어 전 세계적으로 적용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보여주었다. 허나 앞 문장은 오늘날에도 사실이다. 오늘날 달러의 ‘사회적 정당성’은 순전히 미국이란 국가의 정치, 경제, 군사적으로 독보적인 지위에 따른 신용이란 점은 명확하다. 이 점에서 마르크스가 “지폐가 자기의 한도[즉 실제로 유통했을 같은 명칭의 금화의 양]를 초과한다면, 지폐의 신용이 일반적으로 손상될 위험”이 있다고 한 것은 옳다. 달러는 금본위제 폐지 후 오로지 미국의 패권이라는 ‘신용’에 의존하고 있고, 2008년 금융위기처럼 달러의 지위가 흔들릴 때마다 금본위제로 돌아가려는 움직임이 강화된다. 오늘날 점차 심화하는 미중 간 패권대결과 다극화로 미국의 헤게모니가 약화된다면, 그래서 ‘국가적 강제’가 더 이상 힘을 발휘하지 못하게 된다면 50년 간 이어져 온 기축통화로서의 ‘달러’의 지위는 무너질 수 있다.
[15] “금은 놀라운 물건이다! 그것을 가진 사람은 자기가 원하는 모든 물건을 지배할 수 있다. 금은 영혼을 천국으로 가게 할 수도 있다.” (콜럼버스, 『자메이카로부터의 편지』) - 마르크스. (2015). 자본론 1 - 상. 비봉출판사. 171p.
[16] “단순상품유통[구매를 위한 판매]은 유통의 외부에 있는 최종목적[사용가치의 취득, 욕구의 충족]을 위한 수단이 된다. 이와는 반대로 자본으로서 화폐의 유통은 그 자체가 목적이다. 왜냐하면 가치의 증식은 끊임없이 갱신되는 이 운동의 내부에서만 일어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자본의 운동에는 한계가 없다.” - 마르크스. (2015). 자본론 1 - 상. 비봉출판사. 198p.
[17] 이 글에서는 잉여가치(surplus-value)와 이윤(profit)을 엄밀히 구별할 필요성이 없으므로, 개념을 특별히 구별하지 않고 사용한다.
[18] “상품소유자 A는 대단히 교활해서 자기 동료인 B 또는 C를 속일 수 있지만, B나 C는 아무리 해도 보복할 수가 없다고 하자. A는 B에게 40원의 가치가 있는 포도주를 팔고 그 대신 50원의 가치가 있는 곡물을 얻었다고 하자. A는 자기의 40원을 50원으로 전환시켰다. 적은 화폐를 많은 화폐로 만들었으며, 자기 상품을 자본으로 전환시켰다. 좀 더 자세히 검토해 보자. 교환이 이루어지기 전 A의 수중에는 40원어치의 포도주가 있었고, B의 수중에는 50원어치의 곡물이 있어, 총가치는 90원이었다. 교환 뒤에도 총가치는 동일한 90원으로 변함이 없다. 유통 중의 가치는 한 푼도 증가하지 않았으나 A와 B 사이에 그 가치의 분배는 변했다. 한 쪽에는 잉여가치로 나타나는 것이 다른 쪽에는 가치손실로 되며, 한 쪽에는 플러스로 되는 것이 다른 쪽에는 마이너스로 된다. 이와 동일한 변동은 A가 [교환이라는 위장된 형태에 의거하지 않고] B로부터 10원을 직접 훔쳤다 하더라도 일어났을 것이다. 유통 중의 가치총액은 그 분배상의 어떤 변화에 의해서도 증가할 수 없는 것이 분명하다. ... 일국의 자본가계급 전체가 서로를 속여서 모두가 부자가 될 수는 없다.” - 마르크스. (2015). 자본론 1 - 상. 비봉출판사. 214p.
[19] 마르크스는 소아시아 도시들이 고대 로마에 매년 화폐공납을 바치고, 로마는 이 화폐로 소아시아의 상품을 구매했던 사례를 든다. 이런 경우 진실은 로마가 소아시아의 생산물을 댓가없이 수탈하는 것에 불과하다.
[20] 마르크스. (2015). 자본론 1 - 상. 비봉출판사, 218p.
[21] 마르크스. (2015). 자본론 1 - 상. 비봉출판사. 226p.
[22] 마르크스. (2015). 자본론 1 - 상. 비봉출판사. 232p.
[23] 밀가루의 생산과정은 원료(밀), 기계(제분기), 노동력의 조합으로 추상화하여 설명할 수 있다. 밀의 생산과정은 원료(밀의 종자), 기계(호미나 낫 등), 노동력의 조합으로 설명할 수 있다. 제분기 또한 제분기를 만들기 위한 원료(철 등), 기계(금속성형기), 노동력의 조합으로 설명할 수 있다. 이렇게 앞선 단계의 원료와 기계에 대한 분석을 이어가면, 인간 노동이 들어가지 않는 어떤 자연적 원료로부터, 최초로 인간 노동을 투여해 생산물을 만들어내는 순간으로 소급할 수 있다. 즉 어떤 생산과정에 사용되는 노동대상(밀가루 등)과 노동수단(오븐 등)은 소급하면 노동이 투여되지 않은 자연적 원료와 이에 더해진 과거의 노동의 합으로 환원할 수 있다. 따라서 밀가루와 오븐의 가치는, 그것을 만들어내기 위해 그동안 사용된 모든 과거의 사회적 노동량의 합이다.
[24] 밀가루 같은 원료는 일반적으로 생산과정에서 빵이 되며 사라진다. 반면 오븐과 같은 기계는 한번에 사라지지 않는다. 대신 조금씩 내구도가 닳아, 언젠가 못쓰게 된다. 이런 경우 오븐은 그 사용으로 인해 잃어버린 내구도만큼의 가치를 생산물에 이전한다. 예컨대 어떤 오븐을 평균적으로 1만 번 돌리면 망가진다고 하고, 오븐의 가치는 1만 시간의 노동량과 같다고 하자. 빵 30개를 만들려면 오븐을 10번 돌려야한다. 이 경우 빵 30개를 만들 때 오븐은 자신이 가진 가치의 10/10000(즉 0.1%) 만큼을 빵에 이전하며, 이 경우 10시간(1만 시간*0.1%)의 가치를 빵에 이전한다.“먼저 말해 두어야 할 것은, 기계는 노동과정에는 언제나 전체로 참가하지만 가치증식과정에는 언제나 일부씩만 참가한다는 사실이다. 기계는 마멸에 의해 평균적으로 상실하는 가치 이상으로는 결코 생산물에 가치를 첨가하지 않는다.” 마르크스. (2015). 자본론 1 - 하. 비봉출판사, 523p.
[25] 마르크스. (2015). 자본론 1 - 상. 비봉출판사. 258p.
[26] 마르크스. (2015). 자본론 1 - 하. 비봉출판사, 807p.
[27] 마르크스. (2015). 자본론 1 - 하. 비봉출판사, 812p.
[28] “자기 주위에 있는 노동자 세대의 고난을 부인하기에 ‘충분한 이유’를 가지고 있는 자본은, 인류는 장차 퇴화할 것이라든가 인류는 결국 사멸해버릴 것이라는 예상에 의해서는 그 실천적 활동에 조금도 영향을 받지 않는데, 그것은 마치 지구가 태양에 떨어질지도 모른다는 예상에 의해서는 자본이 아무런 영향도 받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다. ... 뒷일은 될 대로 되라지! 이것이 모든 자본가와 모든 자본주의국의 표어이다. 그러므로 자본은 사회에 의해 강제되지 않는 한, 노동자의 건강과 수명을 조금도 고려하지 않는다. 육체적, 정신적 퇴화, 조기사망, 과도노동의 고통 등에 관한 불평에 대해 자본은, 그런 것들이 우리의 쾌락(이윤)을 증가시켜 주는데 어째서 우리가 걱정해야 하는가 하고 대답한다. 사태를 전체적으로 보면 이 모든 것은 개별 자본가의 선의나 악의 때문은 아니다. 자유경쟁 아래에서는 자본주의적 생산의 내재적 법칙들이 개별 자본가에 대해 외부적인 강제법칙으로 작용한다.” - 마르크스. (2015). 자본론 1 - 상. 비봉출판사. 365p.
[29] 『자본론』 1권의 제 10장 ‘노동일’부터 제15장 ‘기계와 대공업’까지 당시 자본주의의 추악한 현실에 대한 노동자의 증언과 사례들, 그리고 비용손실을 만회하기 위해 이것이 ‘불가피함’을 주장하는 자본가들의 뻔뻔한 증언들이 빼곡히 적혀있다.
[30] 구해근. (2002). 한국 노동계급의 형성. 창비, 112p.
[31] 구해근. (2002). 한국 노동계급의 형성. 창비, 85p.
[32] 조영래. (2009). 전태일 평전. 아름다운전태일(전태일재단). (정찬일. (2019). 삼순이 - 식모, 버스안내양, 여공. 책과함께, 392p.에서 재인용)
[33] Sarah butler. (2013, September 23). Workers for Lidl, H&M and Gap in Bangladesh Work 15-Hour Shifts. The Guardian. https://www.theguardian.com/fashion/2013/sep/23/workers-in-bangladesh-long-hours
[34] Guy stuart. (2022, June 9). Excess Work Hours, Part One. Global Worker Dialouge. https://workerdiaries.org/excess-work-hours-part-one/
[35] Tricontinental: institute for social research (Ed.). (2023, April 20). The Death of over a Thousand Garment Workers in Bangladesh: The Sixteenth Newsletter (2023). Tricontinental. https://workerdiaries.org/excess-work-hours-part-one/
[36] 김경민. (2023). 미르의 공장 일지. 숨쉬는책공장.
[37] 장하준. (2014). 장하준의 경제학 강의. 부키, 57p.
[38] 마르크스. (2015). 자본론 1 - 하. 비봉출판사, 529p.
[39] “기계가 상대적 잉여가치를 생산하는 것은, 노동력의 가치를 직접적으로 감소시키거나 [아동노동과 여성노동의 사용, 성인 남성노동자의 노동력 가치감소 등에 의해], 또는 노동력의 재생산에 필요한 상품을 싸게 함으로써 간접적으로 노동력을 싸게 하는 것에 의해서뿐 아니라, 기계가 처음에 아직 산발적으로 도입될 때는, 기계 소유자가 고용한 노동은 강화된 그리고 더 효율적인 노동으로 전환되어 생산물의 개별 가치를 그것의 사회적 가치보다 싸게 함으로써, 자본가가 하루의 생산물 가치 중 더 작은 부분으로 하루의 노동력 가치를 보상할 수 있는 것에 의해서다. 그러므로 기계의 사용이 일종의 독점상태에 있는 이 과도기에 이윤은 엄청나게 크며, 자본가는 이 ‘첫사랑의 시기’를 가능한 한 노동일을 연장함으로써 철저히 이용하려고 한다. 많은 이윤은 더 많은 이윤에 대한 갈망을 격화시킨다.” - 마르크스. (2015). 자본론 1 - 하. 비봉출판사, 549p.
[40] 기술혁신이 보편화되면 생필품인 빵의 가치가 낮아지고, 이에 따라 필요노동시간도 줄어들 것이다. 그러나 이 예시는 특별이윤을 설명하기 위함이므로, 편의를 위해 필요노동시간이 동일하다고 가정한다.
[41] “기계는 아동과 여성을 대량으로 노동자계급에 추가함으로써, 성인 남성노동자가 매뉴팩처 시기 전체를 통해 자본의 독재에 대항했던 반항을 드디어 타파하게 된다.” 마르크스. (2015). 자본론 1 - 하. 비봉출판사, 544p. “기계의 자본주의적 사용은 부분적으로는 노동자계급 중 종전에 자본가의 손이 미치지 않았던 층들을 자본가에 복종시킴으로써, 또 부분적으로는 기계가 쫒아낸 노동자들을 하는 일 없게 만듦으로써, 자본의 명령에 복종하지 않을 수 없는 과잉노동인구를 생산한다.” 마르크스. (2015). 자본론 1 - 하. 비봉출판사, 551p.
[42] 예컨대 1000만원 중 500만원은 불변자본, 500만원은 가변자본에 투하되었고 착취율이 100%라면 생산을 통해 자본이 얻는 이윤은 500만원으로 이윤율은 50%(잉여가치 500만원 / 총투자액 1000만원)이다. 반면 유기적 구성의 고도화로 1000만원 중 900만원이 불변자본에 투하되고 100만원만 가변자본으로 투하될 경우, 착취율이 동일할 때 자본이 얻는 이윤은 100만원으로 이윤율은 10% (잉여가치 100만원 / 총투자액 1000만원)에 불과하다.
[43] 엥겔스. (1997). 유토피아에서 과학으로의 사회주의의 발전. 칼 맑스 프리드리히 엥겔스 저작선집, 5.
[44] 블라디미르 일리치 레닌. (2018). 제국주의, 자본주의의 최고 단계. 아고라, 35p.
[45] 블라디미르 일리치 레닌. (2018). 제국주의, 자본주의의 최고 단계. 아고라, 206p.
[46] 양준석, & 백종성. (2023). 자본주의 시대전환과 한국 노동운동. 거인의발걸음.
[47] Esteban Ezequiel Maito. (2014). The Historical Transience of Capital The Downward Trend in the Rate of Profit since XIX Century.
[48] 버텔 올먼. (2012). 마르크스와 함께 A학점을. 모멘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