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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자 민주주의의 중요성을 입증한 전국삼성전자노동조합 선거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9월 2일 발표된 전국삼성전자노동조합(이하 전삼노) 선거 경선 결과 기호 1번 한기박·우하경·이윤경 후보조가 득표율 50.48%로 당선했다. 당선한 기호 1번 후보조의 기치는 “민주적 노조, 투쟁하는 노조, 연대하는 노조”였다.
한기박, 우하경 후보는 전 집행부의 전임자 처우 개선에 대한 비공개 이면 합의를 비판했다가 ‘제명 및 피선거권 3년 제한’이라는 보복성 징계를 당했다. 지난 3월 전 집행부는 조합원 평균 인상률보다 높은 수준의 임금 인상률을 노조 전임자에게 적용하는 합의를 사측과 했다. 사전에 이 교섭 내용을 조합원들과 대의원들에게 알리지도 않았으며, 서면 합의도 없이 구두로 합의했고, 조합원 찬반투표도 거치지 않았다.
역동적 결과
현장 밖에서는 많은 활동가가 집행부의 패권적 관료주의를 비판했지만, 현장 안에서는 기호 1번 후보조를 지지하는 흐름이 눈에 띄지 않았다. 이면 합의에 대한 실망과 반발로 조합원 7,000여 명 이상이 탈퇴하기도 했다. 기호 1번을 지지할 가능성이 높은 조합원들이었다. 1번 후보조의 조직력은 사실상 제로에 가까웠다. 확실한 소수파였다. 징계 효력정지 가처분 소송으로 어렵게 조합원 자격을 회복했기에 선거를 준비할 시간도 없었다. 당선보다는 부당징계에 대한 비판, 민주노조로 전진하기 위한 방향성 제시를 위해 출마했다고 바라보는 사람이 많았다.
뜻밖의 결과를 낳은 원인은 여러 개일 수 있다. 성과급 상한을 없애고 영업이익의 10%를 성과급으로 지급하는 내용의 SK하이닉스 임금 및 단체협상 결과가 선거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임단협에서 더 나은 결과를 기대하며 더 투쟁할 것 같은 후보를 선택했을 수 있다. 하지만 당선한 후보조의 투쟁력 역시 검증되지 않았다. 노동조합 민주주의를 원하는 조합원들의 열망이 작용하지 않았더라면 이런 역동적 결과는 나오기 힘들다.
노동자 민주주의의 가치
투쟁은 정당한 방법으로만 온전히 승리할 수 있다. 민주노조운동은 비공개 교섭, 밀실 협상, 이면 합의를 거부하며 ‘공개 교섭’, ‘협의(합의)안 공개’를 교섭의 원칙으로 세워 왔다. 그래야만 조합원들이 교섭 과정 전반에 참여하고 통제함으로써 노동조합의 주인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야만 노동조합의 장기적 생존과 발전이 가능하며, 그 결과 조합원들의 생존권도 보호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당장 소기의 성과를 얻지 못한 채 퇴각하더라도, 온갖 사기저하에 맞서며 현장에서 반격을 준비할 힘도 노동자 민주주의에서 탄생한다. 조합원들이 투쟁의 개시부터 진행, 종결에 이르기까지 전체 과정에 참여할 수 있어야만, 조합원들은 노동조합의 실질적 주인으로 설 수 있다. 그렇게 조합원들을 실질적 주인으로 세우는 것이 최상의 성과다.
조합원들은 작년 파업 과정에서 많은 희생을 겪었고, 고과제도로 인한 극심한 차별과 통제를 받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노동조합 전임자 처우개선을 앞세우는 것은, 집행부 이기주의로 비판받을 수밖에 없다. 집행부 전임자에 대한 고과와 승진 차별은, 조합원들의 지지와 동의를 끌어내는 과정, 공개 교섭을 바탕으로 조합원들의 힘을 결집하는 투쟁 속에서 풀어야 했다.
노동자 대중이 스스로 토론하고 결정하며 책임지는 노동자 민주주의는 노동자들이 상황을 주도하고 스스로 발전하기 위한 가장 기본적인 전제다. 자발성과 지도력이 제대로 결합해야 노동자 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할 수 있는데, 이는 결코 쉽지 않다. 노동자들은 수많은 시행착오와 오류를 겪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 모든 시행착오와 오류에도, 노동자 민주주의를 대체할 수 있는 것은 없다. 노동자 민주주의 없이 위로부터 지시와 명령으로 이뤄지는 성과는 존재하기도 어렵지만, 설사 존재하더라도 노동자 대중의 자주적 발전과정을 봉쇄함으로써, 노동자들의 장기적이고 근본적인 전진을 가로막는다.
금속노조의 심각한 잘못
금속노조는 2021년부터 전삼노와 연대해 왔고, 전삼노와의 연대사업을 중요한 조직화 사업이라고 얘기해 왔다. 그런데 이면 합의 문제가 터지자, 금속노조 상층 일부에서는 이면 합의가 아니라거나 심각한 문제가 아니라는 주장이 제기됐다. 민주노조의 정신이 땅에 추락한 순간이었다.
다행히 여러 활동가가 치열하게 비판했고, 시간이 지나면서 금속노조 내부에서도 원칙을 지켜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졌다. 금속노조는 뒤늦게 이면 합의가 잘못되었다는 평가를 내렸다. 그러나 상황이 너무 악화한 후여서 문제를 제대로 바로 잡기는 어려웠다.
어떻게 민주노조운동의 기본 원칙에 어긋나는 이면 합의를 감싸거나 문제점을 축소하는 주장이 나올 수 있었을까? 집행부와의 좋은 관계에만 집착하는 태도, 조합원 다수의 변화가 아니라 집행부 몇몇을 설득해 ‘속성’으로 한국노총에서 민주노총 금속노조로의 조직형태 변경을 끌어내려는 태도가 아니었다면, 그런 주장이 나올 수는 없었을 것이다.
민주적 조직운영과 투쟁 조직화에 초점을 맞춘다면, 집행부의 잘못된 행동을 정확히 비판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연대를 위해 노력하면서도 비판할 것은 비판하고, 다른 생각을 가진 간부 및 조합원들과 함께 대안을 모색해야 했다. 다시 말하면, ‘전삼노가 금속노조에 가입하느냐 마느냐’가 아니라 ‘전삼노에서 어떻게 투쟁을 강화할 것이냐’가 주된 목적이었다면 다른 상황이 펼쳐졌을 것이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조합원들이 단결과 연대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며 금속노조로의 전환을 위해 크고 작은 행동에 나서야만 제대로 된 조직 전환이 가능하다. 민주노조운동의 진정한 전진은 단순한 ‘쪽수’ 늘리기가 아니라 민주노조다운 정체성 수립과 투쟁 조직화로만 이뤄질 수 있다. 하지만 관료들은 이런 주장을 선언적, 자족적 주장이라 헐뜯으며 비밀스러운 상층 사업에 몰두하고, 자신들과 관계 맺고 있는 집행부가 심각한 오류를 저질러도 합리화하거나 축소하려 한다.
조합주의를 넘어서기 위해
2024년 사실상 최초로 대중파업을 전개하며 자신의 존재를 세상에 널리 알린 전삼노는 조합원 수가 3만 명에 이르는 거대 노조지만, 이제 민주노조를 향한 첫걸음만을 떼었을 뿐이다. 아직은 한국노총 소속이며, 많은 조합원이 자신들만의 고용안정과 임금인상에만 몰두하는 조합주의에 갇혀 있기도 하다. 이번 선거에서 기호 2번 후보조는 연대투쟁, 정치투쟁 배제와 금속노조나 다른 외부(?)단체와 함께하지 않겠다는 노동조합의 ‘독자성’을 주장했다.
어떤 노조도 후퇴와 실패 없이 직선적으로 성장할 수는 없다. 하지만 금속노조 현대차지부, 기아차지부처럼 민주성·자주성·투쟁성을 많이 상실하고 노동귀족적 태도를 보이며, 자신들만의 틀에 갇힌 다른 대공장노조에 비하면 오히려 아직 틀이 굳어지지 않은 전삼노에서 더 많은 가능성, 더 많은 역동성을 볼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이번 선거 결과가 그렇다.
동시에 우리는 민주노조가 가야 할 길을 끊임없이 제기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삼성이 세계적인 독점 대기업으로 성장하면서, 삼성 정규직 노동자들은 평범한 노동자들이 꿈꿀 수 없는 임금(성과급 포함)을 받아왔고 상대적으로 안정적인 고용을 보장받아 왔다. 그런데 삼성 자본의 성장은 비정규직 노동자들, 하청업체와 부품사 노동자들을 초과착취한 결과물이다. 전삼노의 요구가 자신들의 임금인상, 성과 보상, 노동조건 개선에만 머물지 않고 비정규직 노동자, 하청노동자들의 임금인상과 노동조건 개선 요구로까지 뻗어나가야 삼성전자 밖 노동자들로부터 지지를 획득할 수 있다. 반도체산업 노동자들을 단결시키며 성과 경쟁, 해고와 산재 없는 세상으로 나아갈 수 있다. 지금 민주노조운동의 상태와 전삼노의 상황을 보면, 시간이 오래 걸릴 수밖에 없는 일이다. 지금부터 하나하나 이 길을 만들어가야 한다.
그 가장 중요한 수단은 노동자 민주주의다. 노동자 대중이 자기결정권과 주도성에 입각해 움직일 때, 당장의 한계 때문에 일시적 난관에 부딪히더라도 뼈저린 교훈을 되새기며 힘을 더 효과적으로 조직할 수 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사회와 역사의 주인공으로 도약하는 방법을 배우게 된다.
모든 개량주의자의 치명적 약점은 바로 이 같은 노동자운동의 본성에 대한 무시다. 노동자 대중이 사회의 능동적 주체로 도약할 가능성을 불신하고 가로막는 지배계급의 관점에 젖어 있다. 물론 그들도 노동자 대중의 권리를 보호하겠다는 선한 의지를 갖고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은 방법론에서 지배계급의 엘리트주의를 공유한다. 노동자 대중은 자기 운명을 스스로 결정할 능력이 부족하며, 따라서 그들의 운명을 지배계급, 엘리트들, 노동조합 관료들에게 맡길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런 관점을 철저히 배격한다. 노동자들은 책임감 있는 주인으로서 노동조합을 민주적으로 운영할 수 있으며, 나아가 사회도 민주적·계획적으로 운영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이면 합의에 반대하며 노동조합의 민주성·투명성·투쟁성을 내걸고 등장한 전삼노 집행부를 눈여겨보자. 새 집행부는 원칙을 믿고, 노동자들의 잠재력을 믿고 끈기있게 실천해야 살아있는 노동조합을 만들 수 있다는 점을 보여주는 의미 있는 씨앗이다.
노동조합의 전체주의적 운영, 그리고 이 운영을 강제하는 지도자들에 대항해 노동자 대중이 나설 수 있도록, 노동자 민주주의를 지키자! 민주노조운동의 기본 원칙을 움켜쥐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