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상세페이지
[정세집담회] 세계적인 극우 정권과 '민주' 정권의 주고받기, 어떻게 깨부술 것인가?
편집자 주: 아래 글은 7월 25일(금) 진행된 '[정세집담회] 세계적인 극우 정권과 ‘민주’ 정권의 주고받기, 어떻게 깨부술 것인가?' 발제문으로 제출되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극우 정권이 세계를 휘젓고 있다. 세계 최강대국을 틀어쥔 트럼프 2기 정권은 야만적인 이민자 단속, 노골적인 부자감세와 복지축소, 무법 무도한 관세 전쟁과 이란 공습을 감행하고 있다. 아르헨티나 밀레이 정권은 보건·교육·과학 등 공공부문에 대한 대규모 예산 삭감과 민영화를 자행하고 있다.
물론 극우세력은 단번에 파시즘으로 전진하지 못하고 있다. 브라질에서 보우소나루 극우 정권에 대한 환멸은 노동자당 룰라의 재집권으로 이어졌다. 한국에서 윤석열의 친위쿠데타 실패는 이재명 민주당 정권의 등장으로 귀결됐다.
그러나 트럼프 2기 집권을 가능하게 했던 것은 바이든 민주당 정권에 대한 환멸이었다. 아르헨티나에서 밀레이 정권을 가능하게 했던 것 역시 키르치네르주의에 대한 환멸이었다. 윤석열 국힘 정권이 문재인 민주당 정권에 대한 환멸 덕분에 등장했던 것과 같은 맥락이다.
최근 세계의 많은 나라에서 극우 세력과 부르주아 민주주의 세력이 서로에 대한 환멸을 토대로 정권을 주고받고 있다. 극우 세력은 파시즘의 공포를 안기지만 그렇게 진화하기에는 아직 대중동원 능력이 부족하다. 부르주아 민주주의 세력은 인간의 얼굴을 앞세우지만 노동자·민중의 고통을 전혀 해결하지 못한 채 오히려 가중시킬 뿐이다.
그런데 세계적인 차원에서 전개되는 극우 정권과 ‘민주’ 정권의 주고받기는 단순히 제자리를 맴돌지 않는다. 극우세력이 파시즘을 향해 성장해 가는 추세 또한 분명히 보여준다.
이러한 상황을 노동자·민중은 어떻게 깨부술 수 있을까? 극우 정권에 맞서서는 어떻게 투쟁해야 할까? 또한 ‘민주’ 정권에 맞서서는 어떻게 투쟁해야 할까? 세계적인 상황을 종합하면서, 윤석열 정권에 맞선 투쟁을 되돌아보고 이재명 정권에 맞선 투쟁의 방향을 모색한다.
지금 이 순간에도 극우 정권이 세계를 휘젓고 있다. 세계 최강대국을 틀어쥔 트럼프 2기 정권은 야만적인 이민자 단속, 노골적인 부자감세와 복지축소, 무법 무도한 관세 전쟁과 이란 공습을 감행하고 있다. 아르헨티나 밀레이 정권은 보건·교육·과학 등 공공부문에 대한 대규모 예산 삭감과 민영화를 자행하고 있다.
물론 극우 세력은 단번에 파시즘으로 전진하지 못하고 있다. 브라질에서 보우소나루 극우 정권에 대한 환멸은 노동자당 룰라의 재집권으로 이어졌다. 한국에서 윤석열의 친위쿠데타 실패는 이재명 민주당 정권의 등장으로 귀결됐다.
그러나 트럼프 2기 집권을 가능하게 했던 것은 바이든 민주당 정권에 대한 환멸이었다. 아르헨티나에서 밀레이 정권을 가능하게 했던 것 역시 키르치네르주의에 대한 환멸이었다. 윤석열 국힘 정권이 문재인 민주당 정권에 대한 환멸 덕분에 등장했던 것과 같은 맥락이다.
|
<미국의 정권 변화> |
|||
|
중도우파 |
우파 |
중도우파 |
극우파 |
|
오바마 (민주당) 2009~2017 |
트럼프 (공화당) 2017~2021 |
바이든 (민주당) 2021~2025 |
트럼프 (공화당) 2025~2029 |
|
<아르헨티나의 정권 변화> |
||||
|
중도좌파 |
중도좌파 |
우파 |
중도좌파 |
극우파 |
|
키르치네르(남) (정의당) 2003~2007 |
키르치네르(여) (정의당) 2007~2015 |
마크리 (공화당) 2015~2019 |
페르난데스 (정의당) 2019~2023 |
밀레이 (자유지상당) 2023~2027 |
|
<브라질의 정권 변화> |
||||
|
중도좌파 |
중도좌파 |
우파 |
극우파 |
중도좌파 |
|
룰라 (노동자당) 2003~2010 |
후세프 (노동자당) 2011~2016 |
테메르 (민주운동당) 2016~2018 |
보우소나루 (사회자유당) 2019~2022 |
룰라 (노동자당) 2023~2026 |
|
<한국의 정권 변화> |
||||
|
우파 |
우파 |
중도우파 |
극우파 |
중도우파 |
|
이명박 (한나라당) 2008~2013 |
박근혜 (새누리당) 2013~2016 |
문재인 (민주당) 2017~2022 |
윤석열 (국민의힘) 2022~2024 |
이재명 (민주당) 2025~2030 |
최근 세계의 많은 나라에서 극우 세력과 부르주아 민주주의 세력이 서로에 대한 환멸을 토대로 정권을 주고받고 있다. 극우 세력은 파시즘의 공포를 안기지만 그렇게 진화하기에는 아직 대중동원 능력이 부족하다. 부르주아 민주주의 세력은 인간의 얼굴을 앞세우지만 노동자·민중의 고통을 전혀 해결하지 못한 채 오히려 가중시킬 뿐이다.
그런데 세계적인 차원에서 전개되는 극우 정권과 ‘민주’ 정권의 주고받기는 단순히 제자리를 맴돌지 않는다. 극우 세력이 파시즘을 향해 성장해 가는 추세 또한 분명히 보여준다.
이러한 상황을 노동자·민중은 어떻게 깨부술 수 있을까? 극우 정권에 맞서서는 어떻게 투쟁해야 할까? 또한 ‘민주’ 정권에 맞서서는 어떻게 투쟁해야 할까? 세계적인 상황을 종합하면서, 윤석열 정권에 맞선 투쟁을 되돌아보고 이재명 정권에 맞선 투쟁의 방향을 모색해 보자.
1) 부르주아 민주주의
오늘날 파시즘으로 나아가는 경향 속에서 극우 정권과 ‘민주’ 정권이 정권을 주고받고 있는 상황을 종합적으로 이해하고 그 대응방향을 올바로 수립하기 위해서는 부르주아 민주주의와 극우·파시즘을 그 개념적 정의에서부터 역사적 맥락까지 정확히 이해하는 게 필수적이다.
개념적으로 극우가 부르주아 민주주의에 대한 부분적인 부정이라면, 파시즘은 전면적인 부정이다. 그렇다면 부르주아 민주주의란 무엇인가?
부르주아 민주주의는 자본주의 체제 위에서 작동하는 하나의 정치형태로서, 자본가계급에게 실질적인 경제적·정치적 권력을 보장하되 외형상 사회구성원 전반에게 민주적 권리를 부여하는 정치형태다.
부르주아 민주주의를 구성하는 가장 기본적인 요소로는 보편적 참정권(보통선거권), 민주적 기본권(사상·표현·결사·집회의 자유), 노동3권(노동조합·교섭·파업), 사회적 기본권(적정노동·적정임금·산업안전·사회보험) 등을 들 수 있다.
2) 부르주아 민주주의는 자본주의의 기본 정치형태가 아니다
흔히 부르주아 민주주의는 자본주의의 기본 정치형태로 인식되고 그렇게 주장된다. 그러한 인식과 주장에 따르면, 자본주의는 기본적으로 부르주아 민주주의로 존재해 왔고, 자본주의가 발전할수록 부르주아 민주주의로 나아간다.
그러나 이는 자본주의와 그 정치형태에 대한 중대한 오해다. 자본주의 역사와 현실을 실제로 들여다보면, 부르주아 민주주의가 자본주의의 기본 정치형태가 아님을 쉽게 알 수 있다. 자본주의는 부르주아 민주주의로 출발하지도 않았고 부르주아 민주주의로 나아가지도 않는다.
17~18세기, 영국·미국·프랑스 등에서 부르주아 혁명을 거쳐 공화정의 형태로 자본주의 정치체제가 처음 등장했을 때, 그 정치형태는 부르주아 민주주의가 아니었다. 성인 남성 인구의 10%도 안 되는 자산가들(자본가+지주)만이 투표권을 갖는 부르주아 공화주의였다.
유럽과 북미에서 시작된 자본주의는 19세기부터 20세기 중반까지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 전반으로 확장되면서 지구를 뒤덮는 체제가 됐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소수의 제국주의 강대국들은 지구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나머지 지역을 식민지·반식민지로 지배했다. 식민지·반식민지 자본주의에 적용된 정치형태 역시 부르주아 민주주의가 아니었다. 제국주의 권력의 직·간접 통치는 피억압 인민에게 민주적 권리를 박탈하는 다양한 유형의 전제적·권위주의적 정치형태로 나타났다.
세계 주요국의 보통선거권 도입년도를 살펴보면,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가장 기초적인 구성요소라고 할 보통선거권조차 대부분의 국가에서 20세기 초중반에 이르러서야 온전한 형태로 도입되었음을 알 수 있다.
|
국가별/성별 보통선거권 도입년도 |
|||
|
<성인 남성 보통선거권 도입년도> |
<성인 여성 보통선거권 도입년도> |
||
|
그리스 |
1844 |
뉴질랜드 |
1893 (피선거권1919) |
|
프랑스 |
1848 (군인1945) |
호주 |
1902 |
|
덴마크 |
1849 |
핀란드 |
1906 |
|
아르헨티나 |
1853 |
노르웨이 |
1913 |
|
미국 |
1856 (흑인1965) |
덴마크 |
1915 |
|
스페인 |
1869 (단절1939~75) |
러시아 |
1917 |
|
독일 |
1871 |
네덜란드 |
1917 |
|
뉴질랜드 |
1879 |
헝가리 |
1918 |
|
칠레 |
1888 (문맹1970) |
폴란드 |
1918 |
|
브라질 |
1891 |
독일 |
1919 |
|
노르웨이 |
1898 |
스웨덴 |
1919 |
|
호주 |
1901 (원주민1965) |
미국 |
1920 |
|
핀란드 |
1906 |
캐나다 |
1920 |
|
이란 |
1906 |
아일랜드 |
1923 |
|
스웨덴 |
1909 |
영국 |
1928 |
|
이탈리아 |
1912 |
스리랑카 |
1931 |
|
러시아 |
1917 |
브라질 |
1932 |
|
네덜란드 |
1917 |
스페인 |
1933 (단절1939~75) |
|
멕시코 |
1917 |
태국 |
1933 |
|
폴란드 |
1918 |
필리핀 |
1937 |
|
헝가리 |
1918 |
레바논 |
1943 |
|
아일랜드 |
1918 |
프랑스 |
1944 |
|
영국 |
1918 |
이탈리아 |
1945 |
|
루마니아 |
1918 |
일본 |
1945 |
|
캐나다 |
1920 (원주민1960) |
한국 |
1948 |
|
일본 |
1925 |
루마니아 |
1948 |
|
스리랑카 |
1931 |
칠레 |
1949 |
|
태국 |
1933 |
인도 |
1950 |
|
필리핀 |
1935 |
그리스 |
1952 |
|
레바논 |
1943 |
아르헨티나 |
1952 |
|
중국 |
1947 |
중국 |
1953 |
|
한국 |
1948 |
멕시코 |
1953 |
|
인도 |
1950 |
인도네시아 |
1955 |
|
파키스탄 |
1951 |
파키스탄 |
1956 |
|
인도네시아 |
1955 |
말레이시아 |
1957 |
|
말레이시아 |
1956 |
이란 |
1963 |
|
쿠웨이트 |
1962 |
포르투갈 |
1974 |
|
포르투갈 |
1974 |
페루 |
1979 |
|
페루 |
1979 |
미얀마 |
1990 |
|
미얀마 |
1990 |
남아공 |
1994 |
|
남아공 |
1994 |
쿠웨이트 |
2005 |
|
사우디 |
2005 |
부탄 |
2008 |
|
부탄 |
2008 |
사우디 |
2015 |
|
분류별 국가 수&비중 |
|||
|
|
국가 수 |
국가 수 비중 |
인구 수 비중 |
|
온전한 민주주의 |
25 |
15.0% |
6.6% |
|
결함 있는 민주주의 |
46 |
27.5% |
38.4% |
|
혼성 체제 |
36 |
21.6% |
15.7% |
|
권위주의 |
60 |
35.9% |
39.2% |
3) 부르주아 민주주의는 노동자투쟁의 성과물이다
부르주아 민주주의는 왜 자본주의의 기본 정치형태가 아닐까? 자본주의 사회의 지배계급인 자본가계급에게 최선의 정치질서는 자본가들이 모든 권력을 움켜쥐고 전횡할 수 있는 전제적 또는 과두지배적 정치형태이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기업에서 자본가들이 배타적으로 권력을 장악하고 행사하는 것을 보면 이 점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정치 영역에서 부르주아 민주주의를 도입한다는 것, 즉 사회구성원 전반에게 형식적으로나마 민주적 권리를 보장한다는 것은 자본가들의 입장에서는 (불가피하지 않다면 굳이 하고 싶지 않은) 피곤한 일일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부르주아 민주주의는 왜 어떻게 도입되었을까? 노동자계급의 엄청난 저항과 투쟁 때문이었다. 자본가계급이 왕과 귀족의 봉건제 정치질서를 타도할 때 주장했던 ‘자유와 평등’을 진정으로 실현하라고, 다시 말해 노동자계급에게도 자유와 평등을 달라고 줄기차게 투쟁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여명기인 17세기부터 20세기 초반까지 세계 곳곳에서 노동자계급은 보통선거권, 노동조합 결성권과 파업권, 흑인노예 해방, 8시간 노동제, 여성 참정권 등을 요구하며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수많은 투쟁을 벌였다. 총파업과 봉기 수준의 투쟁도 수없이 많았다. 그 결과물이 보통선거권 도입에서부터 시작된 부르주아 민주주의였다.
4) 부르주아 민주주의는 자본가계급의 권력을 보장한다
그런데 부르주아 민주주의는 자본가계급의 경제적·정치적 권력을 확고히 보장한다. 그렇기 때문에 자본주의 체제 위에서 작동하는 하나의 정치형태가 될 수 있다.
어떻게 해서 부르주아 민주주의는 사회의 대다수인 노동자·민중에게 보통선거권을 비롯한 민주적 권리를 보장하면서도 사회의 극소수에 불과한 자본가계급의 권력을 확고히 보장할 수 있을까?
첫째, 자본가계급은 지배계급으로서 압도적인 이데올로기적 우위를 갖고 있으며, 이를 언론·학교·종교 등의 이데올로기적 국가기구들을 통해 끊임없이 재생산하기 때문이다.
둘째, 자본가계급은 군대·경찰·사법·행정 등 폭력적 국가기구들에 대한 통제권을 이데올로기적 영향력, 인적 네트워크, 관료적 재생산 체계 등을 통해 확고하게 장악하고 있기 때문이다.
셋째, 부르주아 민주주의 선거로는 자본주의 국가기구 가운데 매우 제한된 부분만을 바꿀 수 있으며, 자본가 이데올로기로 무장한 거대한 관료집단이 국가기구의 대부분을 주민에 의해 선출되거나 통제받지 않으면서 자신들의 의지대로 운영하기 때문이다.
넷째, 부르주아 민주주의는 자본주의 경제제도와 자본가권력의 수호를 명시적·암묵적으로 전제하며, 만일 주민에 의해 선출된 권력이 이것을 위협할 경우 이데올로기적 국가기구와 폭력적 국가기구 모두 선출된 권력을 제압하고 심지어 전복하기 위해 합법성을 개의치 않고 전면전에 나서기 때문이다.
다섯째, 부르주아 민주주의가 일반적으로 채택하는 지역 단위 선거제도는 일반적으로 작업장을 토대로 형성되는 노동자계급의 힘을 효과적으로 무력화하기 때문이다. 노동자대중은 지역 단위 공간에서는 원자화되는 경향이 있고, 결국 부르주아 정치인들 가운데 차악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무기력한 일개 시민으로 전락한다.
5) 부르주아 민주주의는 노동자혁명이 실패한 결과물이기도 했다
1917년 러시아혁명에서 멘셰비키와 1918~19년 독일혁명에서 사회민주당은 노동자혁명으로 전진하는 대신 부르주아 민주주의 공화국 건설을 목표로 삼았다. 멘셰비키는 러시아의 자본주의가 별로 발전하지 않았기에 노동자혁명을 할 수 있는 단계가 아니라고 보았다. 독일 사회민주당은 부르주아 민주주의 안에서의 개량을 통해 사회주의에 도달할 수 있다고 믿었다.
러시아의 멘셰비키는 실패했다. 소비에트가 볼셰비키 주도로 10월 노동자혁명을 성공시켰기 때문이다. 소비에트는 부르주아 민주주의를 넘어서는 노동자권력이 어떻게 가능한가를 보여주었다. 노동자들은 소비에트를 통해 작업장에 토대를 두면서도 세계혁명의 시야를 갖고 전국적으로 결집했다. 주로 농민으로 구성된 병사들 역시 소비에트를 통해 병영을 토대로 전국적으로 결집했다. 노동자들과 병사들은 소비에트의 대표자들을 직접 선출하고 수시로 소환했다. 소비에트를 중심으로 스스로 무장한 노동자들과 무기를 장악한 병사들은 장교들이 지배하던 반동적 군대를 노동자·민중의 군대로 대체했다. 소비에트 권력은 제국주의 전쟁을 중단시키고, 피억압 민족에게 민족자결권을 보장했으며, 지주들의 토지를 몰수하여 농민에게 분배했다. 여성과 성소수자의 해방을 위한 조치들을 도입했으며, 산업을 국유화하고 계획경제를 도입했다.
그런데 러시아의 멘셰비키와 달리 독일 사회민주당은 성공했다. 노동자혁명을 추구하던 세력들과 각 지역의 레테(독일판 소비에트)들을 극우 자유군단과 손잡고 하나하나 분쇄했다. 로자 룩셈부르크와 칼 리프크네히트도 이 과정에서 살해당했다. 노동자혁명을 분쇄한 뒤, 사회민주당 주도로 바이마르 공화국이라는 부르주아 민주주의 체제가 수립됐다. 이 과정에서 원래 노동자혁명을 위한 투쟁 주체로서 노동자권력의 근간이 되고자 했던 노동자평의회(레테)가 부르주아 민주주의 아래서 노사 평화를 유지하기 위한 현장 협의기구로 변질되어 박제됐다.
6) 부르주아 민주주의는 노동자혁명을 가로막는 장애물이기도 하다
지금까지 보았듯이 부르주아 민주주의는 양면적이다. 한편으로 부르주아 민주주의 안에는 노동자투쟁의 오랜 성과가 노동자계급의 정치적·경제적·사회적 권리 및 노동조합·노동자정당 같은 노동자조직의 형태로 응축돼 있다. 다른 한편으로 부르주아 민주주의는 자본가계급의 권력을 확고하게 보장한다.
부르주아 민주주의가 일단 정립되고 나면, 대체로 자본가계급은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유지를 선호한다. 한편으로 자본가계급의 권력 보장이라는 핵심 이익이 관철되기 때문이고, 다른 한편으로 제도적 개량이라는 환상을 잘 관리함으로써 노동자들을 혁명으로 전진하지 못하도록 묶어놓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부르주아 민주주의는 노동자운동이 혁명을 향해 전진하는 것을 가로막는 중대한 장애물이기도 하다.
이와 관련해서 자본가계급이 부르주아 민주주의를 효과적으로 운영하는 일반적인 방법은 보수주의(우파)와 자유주의(중도우파)라는 두 축의 경쟁과 대립을 활용하는 것이다. 보수주의가 노골적으로 자본가계급의 이해관계를 관철한다면, 자유주의는 외견상 개량을 앞세우면서 실제로는 자본가계급의 이해관계를 관철한다. 보수주의와 자유주의가 끝없이 정권을 주고받으면서 노동자·민중을 적당히 분할하고 그 쳇바퀴 속으로 노동자·민중의 희망과 전망을 가두는 것, 바로 그것이 부르주아 민주주의를 통해 노동자혁명을 가로막는 전형적인 방법이다.
7) 파시즘은 사활적 위기로부터 자본주의를 구하기 위해 부르주아 민주주의를 전면 부정했다
그런데 1920년대 이탈리아와 1930년대 독일에서 자본주의 위기가 극단으로 치달았을 때, 자본가계급은 부르주아 민주주의를 전면 부정하는 파시즘에 의존했다. 노동자혁명 직전까지 치달은 계급투쟁을 완전히 잠재우고 노동자계급에 대한 착취·억압을 획기적으로 강화함으로써 자본주의를 사활적 위기로부터 구해내기 위해서였다.
이 때 파시즘이 부르주아 민주주의를 전면 부정한다는 것은 무엇보다도 부르주아 민주주의 속에 응축된 노동자투쟁의 성과들에 대한 전면 부정, 다시 말해 노동자계급의 정치적·경제적·사회적 권리의 전면 박탈과 노동조합·노동자정당 등 모든 노동자조직에 대한 전면 파괴를 뜻했다. 다르게 말하자면, 자본주의 위기가 폭발적으로 전개되면서 노동자혁명을 가로막는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기능이 매우 취약해지자, 자본가계급이 부르주아 민주주의를 가차 없이 버리고 파시즘이라는 정반대의 정치형태를 채택하고서 노동자혁명의 가능성을 진압한 것이었다.
독일의 나치당과 같은 파시즘 정당은 통상적인 부르주아 민주주의 정당과 중대한 차이가 있었다. 나치당도 선거에 나섰고 선거를 통해서 집권했지만, 나치당의 중심에는 선거조직이 아니라 수십만 명의 무장 돌격대가 있었다. 나치당의 주된 기반은 몰락하는 소부르주아 대중이었고, 무장 돌격대의 근간은 갈 곳 없는 퇴역군인들이었다.
나치당은 독일이 처한 위기의 근원으로 유태인과 노동자운동을 지목하고 무장 돌격대의 조직적 폭력을 동원하여 노동자 집회와 노동조합 회관 등을 의도적으로 공격했다. 자신들이야말로 노동자운동을 제압하고 독일 자본주의를 구원할 유일한 대안임을 자본가계급과 소부르주아 대중에게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결국 자본가계급은 파시즘을 체제의 구원자로 선택했고, 생존의 희망을 찾아 절규하던 소부르주아 대중은 파시즘의 포로가 되어 노동자운동을 분쇄하는 망치로 활용되었다.
8) 2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북미에서는 전후호황을 토대로 부르주아 민주주의가 만개했다
제2차 세계대전은 제1차 세계대전과 마찬가지로 제국주의 진영 간의 세계제패를 향한 전면전이었는데, 독일·이탈리아·일본의 파시즘 진영이 몰락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제2차 세계대전의 더 중요한 결과는 어마어마한 대량파괴와 대량살상을 통해 자본주의를 1930년대 대공황으로부터 탈출시켰다는 점이었다. 과잉축적·과잉생산과 이윤율 하락이라는 누적된 모순을 상당 정도 털어낸 자본주의는 일시적으로 청년의 몸으로 돌아가 1940년대 후반부터 1970년대 초반까지 전후호황의 황금기를 구가했다.
이를 토대로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과 북미 지역에서는 한동안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전성기가 펼쳐졌다. 이 시기를 거치며 노동자 정치세력 가운데 개량주의를 뜻하는 중도좌파와 자본가 정치세력 가운데 자유주의를 뜻하는 중도우파가 ‘복지국가 자본주의’라는 전망을 공유하며 매우 가까워졌다. 과거 부르주아 민주주의 안에서의 개량을 통해 사회주의를 추구한다고 했던 개량주의 세력은 이 시기를 거치면서 사회주의라는 목표를 사실상 ‘복지국가 자본주의’로 대체했고, 노동자 정치세력으로서의 정체성을 국민적(=몰계급적) 정치세력으로 바꾸었다.
이 시기에 개량주의(중도좌파)가 자유주의(중도우파)로 거의 수렴하면서, 대부분의 유럽 국가들에서는 ‘보수주의-자유주의’라는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기본 쌍이 ‘보수주의-개량주의’로 대체되었다.
9) 제3세계의 군사파시즘은 친미질서 구축과 국가주도 자본축적을 위해 부르주아 민주주의를 전면 부정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에 걸친 이른바 제3세계의 상황은 유럽·북미 지역과 많이 달랐다. 제국주의 강대국의 식민지·반식민지였던 제3세계 나라들은 세계적인 민족해방 투쟁의 성과로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속속 독립을 쟁취했다. 하지만 오랜 착취와 수탈 때문에 대부분 극심한 저개발 상태에 갇혀 있었다. 식민지·반식민지 시절의 제국주의 지배자들이 토착 지배자들로 대체됐을 뿐, 기존의 전제적·권위주의적 정치형태가 지속되는 경우가 많았다. 제3세계 나라들 가운데 부르주아 민주주의가 정립된 나라는 매우 드물었다.
한편 제2차 세계대전을 거치며 세계 최강대국으로 부상한 미국은 라틴아메리카를 넘어 (국력이 쇠퇴한 영국과 프랑스를 대신하며) 아시아와 아프리카까지 제3세계 전반에 대한 제국주의적 지배력을 구축했다. 미국을 중심으로 재정렬한 자본주의 진영은 소련을 정점으로 하는 이른바 ‘사회주의’ 진영과 냉전을 수행했다.
이 과정에서 미국은 수많은 제3세계 나라들에서 강고한 친미질서를 구축하기 위해 친미반공 쿠데타를 사주했다. 때로는 토착 군부가 먼저 쿠데타에 나서 미국의 지원을 끌어들이기도 했다. 그렇게 등장한 제3세계의 군사정권들은 대체로 군사파시즘의 정치형태를 취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제3세계에서의 군사파시즘은 1930년대 고전적인 파시즘과 비슷한 점도 있고 다른 점도 있었다.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전면 부정, 즉 노동자권리의 박탈과 노동자운동의 말살이라는 점에서는 비슷했다. 하지만 고전적인 파시즘이 자본주의를 사활적 위기로부터 구원하기 위해 혁명적 노동자운동을 진압하고 착취·억압을 획기적으로 강화한 것과 달리, 제3세계의 군사파시즘은 저개발 상태에서 벗어나기 위한 국가주도 자본축적을 위해 허약한 노동자운동조차 진압하며 착취·억압의 극대화를 추구했다. 또한 고전적인 파시즘이 몰락한 소부르주아 대중을 광적으로 동원하면서 무장 돌격대라는 물리력을 활용한 반면, 군사파시즘은 대중의 광적인 동원을 생략한 채 군부의 물리력에 전적으로 의존했다.
1961~1987년 박정희·전두환 군사정권으로 이어진 한국의 군사파시즘은 이와 같은 제3세계 군사파시즘의 한 전형이었다.
10) 냉전 해체 이후 신자유주의 세계화 구조조정: 노동자·민중을 사회경제적으로 공격하는 부르주아 민주주의
1970년대에 세계 자본주의가 다시 심각한 위기에 빠져들면서, 유효수요를 확장하는 케인스주의 국가개입으로 경제위기를 예방·극복할 수 있다는 신화가 처참하게 깨졌다. 정리해고·비정규직화·임금삭감·복지축소 등으로 노동자를 공격하고 규제완화·감세·민영화 등으로 자본가에게 특혜를 줌으로써 자본의 이윤율을 노골적으로 제고하는 신자유주의 정책이 자본주의 위기를 타개하는 유일한 대안으로 부상했다.
신자유주의 정책을 처음 실행에 옮긴 것은 1970년대 칠레의 군사파시즘과 1980년대 영국·미국의 우파 정권이었다. 그런데 소련·동구의 몰락과 중국의 개혁개방으로 냉전이 해체되고 1990년대 들어 신자유주의가 세계화와 결합되어 세계적인 추세가 되었을 때 신자유주의 세계화 구조조정을 전면화한 것은 대부분 중도좌파·중도우파의 중도주의 정권들이었다.
|
<1970~80년대 최초로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을 실행한 정권들> |
||||
|
|
정권수반 |
소속정당 |
정권의 성격 |
|
|
칠레 |
피노체트 (1974~1990) |
군부 |
군사파시즘 |
|
|
영국 |
대처 (1979~1990) |
보수당 |
우파 |
|
|
미국 |
레이건 (1981~1989) |
공화당 |
우파 |
|
|
<냉전해체 이후 1990~2000년대 신자유주의 세계화 구조조정을 전면화한 정권들> |
|||
|
|
정권수반 |
소속정당 |
정권의 성격 |
|
미국 |
클린턴 (1993~2001) |
민주당 |
중도우파 |
|
영국 |
블레어 (1997~2007) |
노동당 |
중도좌파 |
|
프랑스 |
조스팽 (1997~2002) |
사회당 |
중도좌파 |
|
독일 |
슈뢰더 (1998~2005) |
사회민주당 |
중도좌파 |
|
칠레 |
타글레 (1994~2000) 에스코바르 (2000~2006) |
기독민주당 무소속 (구 사회당) |
중도우파 중도좌파 |
|
아르헨티나 |
메넴 (1989~1999) 데라루아 (1999~2001) |
정의당 급진시민연합 |
중도우파 중도우파 |
|
브라질 |
카르도주 (1995~2002) |
사회민주당 |
중도좌파 |
|
남아공 |
음베키 (1999~2008) |
ANC (공산당) |
중도좌파 |
|
한국 |
김대중 (1998~2003) |
민주당 |
중도우파 |
그런데 민주화와 개량을 약속했던 중도주의 정권들은 (한국의 김대중 정권이 잘 보여주었듯이) 부르주아 민주주의를 재건하거나 도입하긴 했지만 사회경제적 개량을 제공하지는 않았다. 정반대였다. 중도주의 정권들은 신자유주의 세계화 구조조정을 통해 노동자·민중을 사회경제적으로 거칠게 공격했다. 제2차 세계대전 직후 전후호황 시기와 달리 자본주의가 다시 심각한 위기에 빠져 있었고, 그런 자본주의를 구할 방법은 신자유주의 세계화 말고는 없었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애초에 자본가 정치세력이었던 중도우파(자유주의)는 물론이요, 노동자 정치세력에서 출발했던 중도좌파(개량주의) 또한 노동자·민중의 삶과 권리보다 자본주의의 위기 탈출을 우선시했다. 20세기 초 혁명 없이 개량의 축적을 통해 사회주의로 나아간다는 노선에서 출발했던 개량주의(사회민주주의)는, 20세기 중반 전후호황 시기를 거치며 사회주의 대신 개량 그 자체(복지국가 자본주의)를 목표로 하는 노선으로 바뀌었는데, 20세기 말과 21세기 초 신자유주의 세계화 구조조정을 집행하면서 이제 개량마저 포기하고 기존의 개량조차 박탈하는 ‘개량 없는 개량주의’가 되었다.
11) 신개량주의의 파산 이후 최근 10여 년 극우 세력의 세계적인 약진
2008년 금융위기는 자본주의 모순을 폭발시켰다. 금융기관의 연쇄파산을 막고 경기를 부양하기 위해 미국을 비롯한 세계 각국은 천문학적인 자금을 퍼부었다. 그 과정에서 폭증한 국가부채를 줄이기 위해 공공부문과 사회복지를 대폭 삭감하는 가혹한 긴축정책이 펼쳐졌다. 이미 정리해고·비정규직화·임금삭감·복지축소라는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이 휩쓸고 지나간 상황에서, 또한 선진국에서는 세계화에 따른 공장이동으로 많은 제조업 일자리가 사라진 상황에서, 그 위에 덧붙여진 가혹한 긴축정책은 세계 곳곳에서 수많은 노동자·민중의 삶을 파탄냈다.
노동자·민중의 거대한 고통은 변화를 향한 강력한 정치적 에너지를 만들어냈다. 신자유주의 세계화 구조조정부터 긴축정책까지 책임이 있는 기존의 집권블록(중도좌파-중도우파-우파) 바깥에서 새로운 대안들이 생겨나 대중의 관심을 끌었다.
먼저 대중의 주목을 끈 것은 집권블록 왼쪽에서 등장한 이른바 신개량주의였다. 기존의 개량주의가 개량마저 포기하고 박탈하는 것에 맞서 개량이라는 목표를 복원하려는 시도였다. 독일의 좌파당, 프랑스의 불복프랑스, 스페인의 포데모스, 그리스의 시리자, 영국 노동당의 코빈, 미국 민주당의 샌더스 등이 이 범주에 포괄될 수 있었다. 라틴아메리카에서는 연성 좌파정권 물결을 뜻하는 핑크타이드로 나타났다. 그러나 신개량주의는 노동자계급이 아닌 고학력 지식인층이라는 소부르주아 대중을 기반으로 했고, 자본주의 철폐를 추구하지 않는 등 이념적 지향도 매우 소심했다. 게다가 신개량주의의 대표격이던 그리스의 시리자가 2015년 집권한 뒤 이른바 트로이카(유럽연합·유럽중앙은행·국제통화기금)의 압력에 굴복하여 긴축정책을 전면적으로 실행하면서, 세계적 차원에서 신개량주의의 기세가 결정적으로 꺾였다.
이후 지난 10여 년 세계 정치를 뒤흔든 것은 집권블록의 오른쪽에서 등장한 극우 세력이었다. 2016년 트럼프의 미국 대통령 당선과 영국의 유럽연합 탈퇴는 결정적인 신호였다. 세계적으로 극우 세력의 핵심 구호는 보호주의와 이민자 추방이었다. 여성과 소수자에 대한 혐오, 기후위기 부정, 부정선거 음모론도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말도 안 되는 거짓 대안을 내밀면서도, 많은 나라에서 극우 세력은 삶의 고통에 시달리는 노동자·민중들 속에서 상당한 기반을 구축해 왔고, 희망을 잃어버린 청년들 속에서도 기반을 확대해 나가고 있다.
|
<최근 유럽 주요국에서 약진하는 극우 정당들> |
||
|
|
대표 극우정당 |
현황 |
|
이탈리아 |
이탈리아의 형제들 (FdI) |
22년 9월 총선 1위(26.0%)로 집권: 멜로니(총리) |
|
스웨덴 |
민주당 (SD) |
22년 9월 총선 2위(20.5%) |
|
스페인 |
목소리 (Vox) |
23년 7월 총선 3위(12.4%) |
|
네덜란드 |
자유당 (PVV) |
23년 11월 총선 1위(23.5%): 연정배제 |
|
프랑스 |
국민연합 (RN) |
24년 6월 총선 1차 1위(33.2%), 2차 3위(의석) |
|
독일 |
독일을 위한 대안 (AfD) |
25년 2월 총선 2위(20.8%) |
|
영국 |
개혁당 (Reform UK) |
25년 6월 여론조사 1위(29%) |
오늘날의 극우 세력은 독일 나치당 같은 고전적인 파시즘 세력과 마찬가지로 자본주의 위기가 극심해진 결과물이며, 몰락하는 대중의 광적인 지지를 바탕에 두고 있다. 그런데 오늘날 극우 세력이 위기와 고통의 주범이라고 지목하는 대상은 외국, 이민자, 자유무역, 세계화, 국제기구, 좌파, 주류 언론, 기성 정치인 등 상당히 혼란스럽다. 나라마다 편차도 크다. 노동자운동을 핵심적으로 겨냥했던 고전적인 파시즘과 크게 대비되는 지점이다. 오늘날 세계적으로 노동자운동이 상당히 취약한 상태에 있다는 점의 반영이기도 하다.
또한 오늘날의 극우 세력은 고전적인 파시즘 세력과 달리 무장 돌격대를 체계적으로 구축해 내지 못하고 있다. 이것은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자본주의 위기 전개가 국가의 총력 개입 때문에 1930년대 대공황과 달리 대불황이라는 슬로우모션의 형태를 띠는 것과 관련이 있어 보인다. 자본주의 위기에 따른 노동자·민중의 고통이 극심하지만 일거에 파산하는 대신 장기화된 불안정에 시달리는 양상을 띠는 것이다. 갈 곳 없는 퇴역군인들이 별로 없다는 점도 중요한 변수다. 극우 세력이 아직까지는 노동자운동을 핵심적으로 겨냥하지 않는 점과도 연결돼 있을 것이다.
그러다 보니 오늘날의 극우 세력은 부르주아 민주주의를 부분적으로 부정하고 위협하는 지점까지는 나아가지만, 정권을 잡아도 부르주아 민주주의를 끝장내지 못한다. 부르주아 민주주의 선거로 집권했다가 그 선거로 정권을 잃고 다시 그 선거로 정권을 되찾는다.
극우 정권이든, 그와 정권을 주고받는 중도좌파-중도우파-우파의 ‘민주’ 정권이든, 그들이 시행하는 정책은 크게 다르지 않다. 세계화와 관련해서는 일정한 차이가 존재하지만, 신자유주의와 긴축의 결합이 결국 그들 모두의 핵심 정책이다. 당연히 노동자·민중의 고통은 해결될 수 없고, 따라서 강한 환멸이 뒤따른다. 상대적으로 극우 정권에게는 파시즘 가능성에 대한 반발이 집중된다면, ‘민주’ 정권에게는 사회경제적 박탈에 대한 분노가 집중된다. 과거 부르주아 민주주의 안에서 중도좌파-중도우파와 우파가 서로 경쟁하고 대립하며 정권을 주고받던 것과 매우 비슷하게 이제 중도좌파-중도우파-우파와 극우가 서로 경쟁하고 대립하며 정권을 주고받는다.
그런데 이와 같은 쳇바퀴는 극우 세력에게 걸맞지 않다. 극우 세력은 ‘화끈한 해결’을 대중에게 약속했고, 실제로도 뭐가 됐든 화끈하게 저질러보려고 한다. 그러나 고전적인 파시즘 세력에게 ‘화끈한 해결’을 가능하게 했던 무장 돌격대가 오늘날의 극우 세력에게는 없다.
여기서 친위쿠데타를 통한 군사파시즘 도입이 이 간극을 메우기 위한 수단으로 시도되고 있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친위쿠데타를 정당화하기 위한 이데올로기적 밑자락으로 부정선거 음모론을 활용하면서 말이다. 2021년 1월 미국의 의사당 폭동을 사주할 때 트럼프는 군부를 동원하지 못했다. 하지만 2023년 1월 브라질에서의 폭동은 쿠데타 요구 시위와 노골적으로 결합됐으며, 실제로 보우소나루-국방부장관-해군총사령관의 지휘 아래 쿠데타를 단행하려 했으나 육군총사령관의 거부로 실패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2025년 미국에서는 트럼프의 친위쿠데타 가능성에 대한 경고가 공공연하게 나오고 있으며, 특히 6월 로스엔젤레스의 이민자단속 항의시위에 주방위군과 해병대가 투입됐을 때는 많은 사람들이 이것을 친위쿠데타 자락 깔기로 인식했다. 2024년 한국에서 발생한 12·3 친위쿠데타도 이러한 세계적 맥락에서 재조명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어쨌든 2023년 브라질의 친위쿠데타도 2024년 한국의 친위쿠데타도 실패했다. 트럼프가 친위쿠데타에 나설 경우 성공할 수 있을지도 의문이다. 2025년 6월 로스엔젤레스 군대 투입 직후 미국에서 500만 명이 반트럼프 시위에 나설 정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분명한 사실이 있다. 세계적으로 극우 세력이 파시즘으로 진화할 방안을 찾기 위해 무척 애를 쓰고 있다는 점이다. 친위쿠데타가 여의치 않으면, 극우 세력은 무장 돌격대를 부활시킬 방법이라도 찾아내려 할 수 있다.
극우 정권과 ‘민주’ 정권의 권력 주고받기는 단순한 반복이 아니다. ‘민주’ 정권이 노동자·민중의 고통을 강화하는 만큼 극우 세력을 더욱 성장시키기 때문이다. 또한 파시즘으로 진화하려는 극우 세력의 시도가 점점 더 강화될 것이기 때문이다.
13) 극우 정권과 ‘민주’ 정권의 주고받기, 노동자계급은 어떻게 깨부술 것인가
오늘날 극우 정권은 물론이요, 중도좌파-중도우파-우파의 ‘민주’ 정권 또한 노동자계급에게는 어떤 희망도 제시하지 않는다. 자본주의 안에서의 소소한 개량조차 제시하지 않으며 기왕에 주어진 작은 개량마저 박탈한다. 천문학적인 국가부채로 대표되는 극심한 자본주의 위기 앞에서, 신자유주의(정리해고·비정규직화·임금삭감·복지축소)와 긴축(공공부문·사회복지 삭감)을 결합한 정책 말고는 자본주의를 지탱할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반대로 자본가계급에게는 규제완화·감세·민영화의 특혜와 주식·부동산·디지털화폐 같은 금융수탈 기회가 끝없이 제공된다.
노동자계급은 극우 정권과 ‘민주’ 정권 모두에 맞서, 또는 극우 세력과 ‘민주’ 세력 모두에 맞서 투쟁해야 한다. 노동자계급의 유일한 희망은 노동자운동이 계급투쟁의 주체로 강력하게 발전하는 것이고 이를 중심으로 억압·차별받는 민중들이 폭넓게 결집하는 것이다. 그러나 많은 나라에서 노동자·민중은 노동자계급의 독립성을 확고하게 견지하지 못하고 중도좌파·중도우파에게 계속해서 헛된 희망을 보내고 있다.
최근 미국 민주당 뉴욕시장 예비선거에서 조란 맘다니의 ‘돌풍’은 그런 헛된 희망이 전개되는 하나의 전형적인 사례다. 조란 맘다니는 (많은 한계가 있긴 하지만) 어느 정도 진지하게 개량을 주장함으로써 청년 세대를 비롯한 노동자·민중으로부터 많은 호응을 받았다. 하지만 맘다니의 선거 캠페인은 그동안 노동자·민중의 삶을 파괴한 한 주역이었던 민주당의 틀 안에서 전개되고 있다. 조란 맘다니의 돌풍은 과거 샌더스 현상이 그러했듯이 민주당에 대한 노동자·민중의 환멸을 새로운 희망으로 갈아치우는 불쏘시개 역할을 한 뒤 민주당 주류에 의해 체계적으로 진압당할 것이다. 그와 같은 돌풍은 민주당과 독립적으로 노동자계급의 독자적인 역량을 바탕으로 전개될 때에만 진정한 태풍이 될 수 있다.
극우나 파시즘에 맞선 투쟁에서 노동자운동이 중도좌파[1]·중도우파의 자본가세력과 연대·연합하는 인민전선은 노동자계급의 독립성을 훼손하는 또 하나의 전형적인 사례다. 인민전선에 찬성하는 이들은 ‘더 많은 세력을 모을수록 극우·파시즘에 맞선 투쟁역량이 강화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노동자계급이 추구하는 방향과 자본가계급이 추구하는 방향은 정반대다. 노동자운동은 부르주아 민주주의에 응축된 노동자의 권리와 조직을 방어하고 개량을 쟁취하며 자본주의 철폐로 전진하기 위해 극우·파시즘에 맞서 투쟁한다. 하지만 중도좌파·중도우파의 자본가세력은 자본주의 체제와 부르주아 민주주의를 사수하면서 자신들이 착취와 억압의 주역으로 올라서기 위해 극우·파시즘에 반대한다. 이렇게 정반대의 지향을 가진 세력이 인민전선에 함께 모이면 투쟁역량은 오히려 약화된다. 중도좌파·중도우파의 자본가세력을 두렵게 할 정도의 폭발적인 투쟁으로는 나아가지 못하도록 노동자계급에게 족쇄가 채워지기 때문이다. 극우·파시즘이 강력한 힘을 갖고 있을 경우 이것을 제압할 유일한 힘은 노동자계급의 폭발적인 투쟁에서 나오는데, 인민전선은 그것을 정면으로 가로막는 것이다. 아직 극우·파시즘이 강하지 못할 경우에는 인민전선이 승리할 수도 있지만 그렇게 해서 등장하는 (중도좌파·중도우파가 중심이거나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될) 인민전선 정부는 1930년대 중후반 프랑스에서 보여주었듯이 노동자·민중의 생존권을 추가로 공격함으로써 극우·파시즘이 더욱 강성해지고 결국 승리하도록 길을 닦게 된다. 2024년 프랑스의 불복프랑스(신개량주의)와 좌파들은 극우 국민전선의 약진에 맞서 집권시 신자유주의·긴축을 집행했던 사회당(중도좌파)과 신인민전선을 결성하고 총선에서 일정한 성공을 거두었지만, 극우 국민전선의 약진을 분쇄할 진정한 대안인 노동자계급의 투쟁역량을 건설하는 데서는 철저히 실패하고 있다.
모든 자본가세력에 맞서 노동자계급의 독립성을 확고하게 견지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과제다. 하지만 그것은 소중한 출발점이기는 하지만 충분하지는 않다. 자본주의 역사는 혁명이라는 어려운 과정을 생략하고 소소한 개량을 축적함으로써 사회주의를 건설하거나 아니면 복지국가라도 만들어 보겠다는 꿈이 얼마나 허망한 것인지를 충분히 보여주었다. 특히 오늘날의 극심한 자본주의 위기 속에서 등장한 신개량주의는 개량주의가 100년에 걸쳐 전개한 진화의 과정을 훨씬 짧은 시간 동안 압축해서 되풀이했다. 자본주의를 철폐하겠다는 혁명적 투쟁만이 이 극심한 위기의 시대에 개량을 지켜내고 조금이나마 개량을 확대함으로써 노동자·민중의 삶과 권리를 지켜낼 유일한 방법이다.
극우 정권과 ‘민주’ 정권 모두에 맞서 혁명적 계급투쟁의 기세로 노동자운동을 강력하게 발전시키면서 이를 중심으로 억압·차별받는 민중들을 폭넓게 결집시켜 나가야 한다. 그러다 보면 언젠가 투쟁하는 노동자·민중의 힘을 기반으로 노동자정부를 건설해 낼 길이 열릴 것이다. 노동자정부는 자본주의 질서에 정면 도전하면서 사회적 필요를 위해 사회적 생산과 재생산을 완전히 새롭게 조직해 나갈 것이다. 노동자계급의 민주적 권력을 아래로부터 구축하고 전면적인 민주적 권리를 보장함으로써, 껍데기뿐인 (부르주아) 민주주의 대신 진정한 (노동자) 민주주의를 실현해 낼 것이다. 이토록 발전한 사회적 생산력이 수많은 노동자·민중의 끝없는 고통으로 귀결되게 하는 계급적 착취를 철폐하고 또한 모든 사회적 억압과 차별을 일소함으로써 모두가 해방될 수 있는 길을 열 것이다.
노동자운동은 자본주의 위기가 극심해진 결과 극우 정권과 ‘민주’ 정권의 권력 주고받기가 통상적인 부르주아 민주주의를 대체해 가고 있는 현 정세의 심각성[2]을 정확히 이해하고 그에 걸맞은 총력전으로 임해야 한다. 특히 자본주의 체제의 구원자가 되고자 하는 극우 세력이 부르주아 민주주의를 전면 부정하는 친위쿠데타를 시도하거나 무장 돌격대 부활을 획책할 경우 노동자운동은 전면전으로 맞서야 한다. 그것은 부르주아 민주주의 그 자체가 아니라 부르주아 민주주의에 응축된 노동자의 권리와 조직을 방어하기 위해서다. 나아가 그러한 방어 투쟁으로부터 획득한 힘을 갖고 개량을 쟁취하고 자본주의 철폐를 향해 전진하기 위해서다.[3] 물론 그러기 위해서는 극우 세력의 파시즘적 시도에 맞선 투쟁 속에서 노동자운동은 ‘민주’ 세력과 철저히 독립성을 견지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윤석열의 12·3 친위쿠데타에 맞선 투쟁 과정을 반성적으로 평가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 민주노총 전반은 물론이요, 대부분의 노동자 정치세력 또한 ‘총파업으로 윤석열을 끝장내자’는 전면전의 기조를 일관되게 가져가지 못했다는 점을 반성적으로 돌아보아야 한다. 민주당과의 독립성 견지라는 측면에서도 많은 한계와 오류를 짚어내면서 비판적 평가를 해야 한다. 일부에서는 ‘극우에 맞선 투쟁은 민주당을 이롭게 할 뿐’이라며 친위쿠데타에 맞선 투쟁을 폄하·기피했는데, 이것은 인민전선에 대한 정당한 경계를 반영하긴 했지만, 결과적으로 노동자운동의 사활이 걸린 투쟁을 회피했다는 점을 돌아보아야 할 것이다.
이제 당분간 이재명 정권에 맞선 투쟁이 한국 노동자운동의 당면 과제가 되었다. 과거 신자유주의 세계화 구조조정을 집행하고 생존권을 공격한 김대중·노무현 정권, 문재인 정권에 맞선 투쟁에서 노동자운동은 많은 한계와 오류를 노정했다. 그 결과 민주당 정권에 대한 노동자·민중의 실망과 환멸이 민주당 정권을 집어삼킬 때 노동자운동은 그 대안이 되어 도약하지 못하고 오히려 민주당 정권의 침몰에 함께 휩쓸려 들어갔다. 다시 한 번 그와 비슷한 일이 벌어진다면, 이번에는 훨씬 더 강력해진 극우 정권의 등장을 보게 될 것이다.
민주노총 출신 고용노동부 장관을 임명하고, 투쟁사업장을 하나둘 정리해 가고 있는 이재명 정권은 머지않아 이른바 ‘사회적 대화’를 본격적으로 요구하고 나설 것이다. 노조법 2·3조 개정조차 그에 연동할 수 있다. 약간의 떡고물을 건네는 대신 노동자 스스로 구조조정에 동의하라고 강력한 압력을 가할 것이다. 설령 ‘사회적 합의’로 묶어세우지 못하더라도 그 과정에서 민주노총을 최대한 혼란에 빠뜨리고 소심한 요구 속에 가두는 것이 이재명 정권의 목표가 될 것이다.
그렇다면 노동자운동은 무엇을 목표로 어떤 길을 가야 하는가? 결국 노동자운동에게 제기되는 핵심은 이것이다. 소심한 요구를 둘러싸고 샅바싸움을 하며 이재명 정권을 견인한다면서 그 부속품으로 전락할 것인가? 아니면 전면적인 요구를 내걸고 이재명 정권에 맞선 대대적인 투쟁을 전개함으로써 극심한 자본주의 위기를 헤쳐 나갈 노동자·민중의 진정한 대안으로 부상할 것인가?
--------
[1] 중도좌파(개량주의)는 세계적인 차원에서 볼 때 100년에 걸친 진화를 통해 20세기 말 자본가 정치세력의 일부로 재편됐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같은 이념을 가진 개량주의 세력이 아직 진화의 초기 단계에 있음으로 인해 노동자 정치세력의 일부로 남아 있으며, 부분적으로는 범국민적(=몰계급적=소부르주아적) 정치세력으로 변질되는 과정이 진행되고 있다.
[2] 현 정세의 다른 측면은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팔레스타인 대량학살, 인도-파키스탄 전쟁, 이스라엘·미국-이란 전쟁, 세계 각국의 경쟁적인 군비확장으로 표현되고 있는, 대량파괴와 대량학살의 대규모 전쟁을 향해 나아가는 경향이다. 사회의 지속가능성 자체를 위협하는 기후 위기와 사회재생산 위기도 현 정세의 또 다른 측면이다.
[3] 노동자계급의 혁명적 투쟁이 높게 솟구치는 상황에서 노동자투쟁의 목표를 부르주아 민주주의로 제한하는 것은 노동자혁명을 가로막는 행위가 된다. 하지만 노동자계급의 계급투쟁 역량을 지켜내고 성장시켜 가는 과정에서는 부르주아 민주주의를 방어하고 확산시켜 내기 위한 투쟁이 매우 필수적이고 중요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