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노운사 연재 14회] 3부 패배와 퇴보 (1998-2008) [3] 비정규직 문제를 둘러싼 대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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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라인신문

[한노운사 연재 14회] 3부 패배와 퇴보 (1998-2008) [3] 비정규직 문제를 둘러싼 대결

  • 양준석
  • 등록 2026.04.19 23:08
  • 조회수 18,257

비정규직은 악조건 속에서도 스스로 노조를 결성하고 투쟁에 나섰다. 1999년부터 2002년까지 예열기를 거친 뒤 2003년부터 2007년까지 비정규직 투쟁이 본격적으로 분출했다. 수백, 수천, 때때로 수만 단위의 대중투쟁이 곳곳에서 끈질기게 펼쳐졌다. 비정규직 문제를 둘러싼 사회적 이데올로기 전선에서도 비정규직 노조운동은 도덕적 우위를 갖고 상당한 대치전선을 형성해 냈다.

 

2004년부터 2006년까지 비정규직 제도를 둘러싼 정치투쟁이 치열하게 전개됐다. 민주노총은 비정규직 노조운동이 투쟁을 통해 만들어낸 요구들을 집약하여 ‘비정규직 권리보장 입법안’을 제출했다. 노무현 정권은 한나라당과 손잡고 ‘비정규직 보호입법’이라는 허울 아래 기간제법을 제정하고 파견법을 개악했다. 민주노총은 수차례의 총파업을 조직했지만 진정한 투쟁동력을 건설해내지는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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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부 패배와 퇴보 (1998-2008)

[시대배경] 신자유주의 구조조정

[1] 구조조정과 정리해고에 맞선 투쟁

[2] 민주노조운동의 후퇴와 비정규직 확산

[3] 비정규직 문제를 둘러싼 대결

[4] 민주노조운동의 위기

[5] 노동자 정치세력화 열망과 민주노동당

 

 

1) 1999~2002년 비정규직 투쟁

 

비정규직이 빠르게 늘던 1990년대 후반부터 비정규직 노조운동이 시작됐다. 1999~2001년 사이에 한라중공업 사내하청, 학습지교사, 골프장 경기보조원, 방송사 비정규직, 한국통신 계약직, 캐리어 사내하청 등에서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노동조합을 결성하여 투쟁에 나섰다.

 

이 시기에는 아직 사회적으로 비정규직 문제의 심각성이 공론화되지 못했고, 운동 주체들의 준비 또한 많이 부족했다. 정규직 노조운동은 노동자계급의 대의에 반하는 태도들을 곳곳에서 서슴없이 드러냈다. 비정규직 주체들은 활동가들의 역량도 부족했고 대중적으로도 아직 자기 투쟁에 대한 자신감을 충분히 갖지 못했다. 이 시기에 등장한 비정규직 노조들은 대다수가 현실의 벽을 넘지 못한 채 역사 속으로 사라져야만 했다.

 

1999년 3월 사내하청 대량해고에 맞서 급하게 결성된 한라중공업사내하청노조는 최초로 등장한 비정규직 노조였다. 사내하청 대량해고는 정규직에 대한 대량 정리해고로 이어졌다. 8월 10일부터 72일간 한라중공업 정규직 노조가 정리해고에 맞서 파업을 전개했다. 사내하청 노조는 정규직 노조의 파업에 연대하며 사내하청 노조의 요구(노조간부 현장출입, 고소고발·손배 취하, 사내하청 직영화 등)를 파업 요구로 포함시켜 달라고 요청했지만, 정규직 노조는 받아들이지 못했다. 정규직 노조의 파업이 9월 7일부터 점거파업으로 발전했지만, 사내하청 노조는 정규직 노조의 만류로 점거파업에 합류하지 못했다.

옥쇄파업을 진행하면서 한라중공업 노동조합은 매일 야간집회와 조합원 교육프로그램을 통해 현장노동자를 단련시켰지만, 하청이나 비정규직 문제는 한 번도 다루지 않았다. … 민주노총 광주전남지역본부가 중심이 된 한라중공업 파업지지와 경찰투입 저지를 위한 목포역 천막농성 기자회견문과 민주노총 기자회견문에 ‘하청노조의 활동보장과 하청의 직영화’라는 문구가 들어갔을 뿐이고, 현장 안에서 개최된 민주노총 집회 때 했던 한 번의 발언만이 하청노조가 한라중공업노조 파업투쟁에 공식적으로 참여한 유일한 경우였다.[1]

1999년 11월 재능교육 학습지교사들이 노동조합을 건설했다. 재능교육교사노조는 설립 후 3주 만에 1천2백여 명을 조직해서 32일간 파업을 전개함으로써, 비정규직의 대중적 조직화가 가능함을 확인한 첫 사례가 됐다. 2000년 7월에는 특수고용 노동자 최초로 단체협약을 쟁취했다.[2]

 

2000년 4월 부산지역일반노조가 ‘노동자는 하나다’라는 슬로건 아래 결성됐다. 기존 산별노조의 한계를 넘어서서 업종·사업장·고용형태에 상관없이 지역을 기반으로 중소·영세·비정규직 노동자들을 조직하는 새로운 형태의 노동운동을 표방했다. 2001년에는 창원, 진주, 서울 등에도 일반노조 설립이 이어졌다.

우리에게 노동조합은 그림의 떡이었다. 중소 영세·하청기업 노동자 및 임시·계약직, 파견·용역노동자에게 정규직노동자들의 노조활동은 아무런 관련이 없었다. 그러나 우리에게도 노조는 이제 더 이상 남의 이야기가 아니다.[3]

KBS 등 방송사의 파견노동자들이 파견법 시행 2주년을 앞둔 2000년 5월 해고예고통보를 받고 방송사비정규노조를 결성했다. 방송사들은 2년마다 파견노동자를 교체했지만, 노조가 끈질기게 싸운 결과 2004년 KBS의 운전직 파견노동자를 KBS 자회사에 직접고용하게 했다. 방송사비정규노조의 투쟁은 파견법의 실태를 폭로하고 파견법 철폐의 요구를 대중화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2000년 6월 롯데호텔노조가 ‘일방중재조항 폐지, 임금 인상, 계약직 정규직화’를 요구하며 파업에 돌입했다. 김대중 정권은 술을 마신 전경들을 투입해 롯데호텔 농성장을 강제진압 했는데, 임산부에게까지 무차별적인 폭력을 휘둘렀다. 74일 동안 파업을 이어간 롯데호텔노조는 ‘3년 이상 근속한 계약직의 정규직화’를 쟁취했다.

 

역시 2000년 6월 물류센터의 파견노동자를 조직한 이랜드노조가 ‘불법도급전환 반대, 임금 인상, 근무조건 개선, 비정규직 정규직화’를 요구하며 파업에 돌입했다. 2001년까지 265일 동안 파업을 이어간 이랜드노조는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끈질긴 연대투쟁을 통해 ‘3년 이상 근속한 비정규직의 정규직화’를 쟁취했다.

 

2000년 9월 전국건설운송노조가 설립돼 레미콘 노동자 2천8백 명이 가입했다. 2001년 4월부터 12월까지 여의도에 레미콘 차량 수백 대를 집결시켜 놓고 노조 인정 및 단체협약 체결, 매주 일요일 휴무 등을 요구하며 전면파업을 전개했다. 파업을 통해 사업장마다 상당한 운송비 인상의 성과를 거뒀지만, 수십억의 손배가압류를 짊어져야 했다.

 

2000년 11월 ㈜SK의 저유소에서 인력파견업체 인사이트코리아 소속으로 2년 동안 일해 온 노동자들이 ‘계약직으로 신규채용’하겠다는 SK측 제의를 거부했다가 해고되자 노조를 결성하고 소송을 제기했다. 인사이트코리아 노동자들은 끈질긴 투쟁 끝에 2003년 대법원에서 위장도급이기에 실제로는 ㈜SK가 직접 고용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판결을 통해 승리했다.

 

1998년부터 정규직 1만여 명을 강제 명예퇴직으로 내몬 한국통신은 2000년 6월부터 11월까지 전국의 계약직 7천 명 전원에게 해고를 통보했다. 오랫동안 정규직이 될 희망을 안고 저임금과 차별을 견뎌 온 계약직 노동자들은 2000년 6월 한국통신계약직노조를 설립한 뒤, 12월 13일부터 원직복직과 임금 현실화를 내걸고 파업투쟁에 나섰다.

 

정규직으로 구성된 한국통신노조가 18일부터 강제 명예퇴직 철회와 민영화 중단을 요구하며 사흘 동안 파업에 나섰을 때 계약직 노조는 당연히 연대투쟁을 기대했지만 정규직 노조는 연대를 거부했다.

 

계약직 노조는 28일 한국통신 본사 2층 로비를 점거했다. 2001년 1월 16일에는 한강철교 고공농성에 나섰다. 2월 1일에는 정규직화 쟁취로 파업의 목표를 올렸다. 3월 9일 새벽 목동전화국을 점거했다.

 

5월 8일 114를 담당하는 정규직들이 분사화에 맞서 파업에 돌입했다. 계약직 노조는 각 지역에서 114를 담당하는 계약직들을 조직했다. 6월 11일 114를 담당하는 계약직도 파업에 돌입했다. 그러나 16일 114 정규직들은 집단적 전환배치와 징계 최소화를 조건으로 분사화를 수용하면서 파업을 끝냈다. 공동투쟁을 해왔던 계약직들과 아무런 상의도 없었고, 합의안에 114 계약직들에 대한 어떤 언급도 없었다.

 

8월 28일 계약직 노조는 국회 의원회관 옥상에서 기습농성을 벌였다. 10월 28일에는 국회 본회의장에 진입해서 ‘한국통신 계약직 문제 해결하라’고 절규했다. 한국통신 계약직 노동자들은 처절한 투쟁을 전개했지만 돌파구를 찾지 못했다. 2002년 5월 12일, 노조 해산을 조건으로 도급업체 취업 알선을 수용하며 517일간의 투쟁을 마무리했다.

 

2001년 캐리어사내하청노조는 사내하청 600명 가운데 450명을 조직한 뒤 정규직 전환을 내걸고 투쟁에 나섰다. 애초 사내하청 노조의 조직화를 적극 지원했던 정규직 노조는 회사가 자본을 철수하겠다고 위협하자 고용불안 위기의식에 빠져 태도를 정반대로 뒤집어 사내하청 노동자들을 탄압했다. 4월 26일 투쟁하는 사내하청들을 정규직들이 회사 밖으로 내쫓았다. 5월 1일에는 농성중인 사내하청들에게 정규직 구사대가 심각한 폭력을 행사했다. 캐리어는 구사대 폭력, 파견법 위반, 블랙리스트 작성 등으로 사회적 질타를 받게 되자 7월에 사내하청 74명의 정규직화를 발표했다. 그러나 정규직화 명단에서 노조활동 적극 가담자 30여 명을 제외하고 하청업체 관리자를 포함하는 등 사내하청 노조를 부정하는 성격의 조치였다.

 

비정규직 노조운동을 태동시켰던 치열한 투쟁들이 2001년까지 대부분 패배한 가운데 2002년에는 이렇다 할 투쟁들이 거의 진행되지 않는 소강상태를 보였다. 그러나 2002년은 사회적으로 비정규직 문제의 심각성이 본격적으로 공론화되는 시기였다. 특히 12월 치러진 대통령 선거 공간에서 ‘동일노동 동일임금’ 등 비정규직 문제 해결 방안에 대한 논란이 주요한 정치적·사회적 의제로 등장했다. 비록 조직적인 저항이 잠시 주춤해졌지만, 비정규직의 급격한 확산과 극심한 차별·억압에 대한 대중적인 분노가 밑바닥부터 들끓고 있었다.

 

많은 비정규직 활동가들은 지난 투쟁의 패배로부터 교훈을 끌어내고 새로운 대중적 분출을 준비하면서 여러 비정규직 현장에서 수면 아래의 조직화 작업을 진행하고 있었다. 2002년에 비정규직 노조운동은 겉으로는 소강상태를 보였지만, 사회적 조건 성숙이나 주체적 준비라는 측면에서 속으로는 발전을 이어가고 있었다.

 

2) 2003~07년 비정규직 투쟁

 

2003년 이후 비정규직 노조운동은 한국 사회에 뚜렷이 모습을 드러냈다. 제조업과 건설업을 비롯한 여러 영역에서 새로 비정규직 노조들이 결성됐고 대중적인 투쟁들이 펼쳐졌다. 새롭게 등장한 비정규직 주체들은 그 규모와 범위, 파급력에서 이전 시기를 훨씬 뛰어넘었다. 새로운 주체들이 나타나자 그동안 힘겹게 조직을 유지해 왔던, 주로 특수고용과 공공부문의 직접고용 노동자들로 이루어진 기존의 비정규직 노조들도 새롭게 활기를 띠었다.

 

지입제 차주로서 화물차를 운행하는 특수고용 노동자들이 2002년 전국운송하역노조 산하 화물연대를 결성한 뒤 2003년 5월 도로비 인하, 유가 인하, 지입제와 다단계 알선 폐지 등을 요구하며 파업에 나섰다. 화물연대 파업은 전국의 물류시스템을 마비시키며 사회적으로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고, 노정 합의를 이끌어냈다. 화물연대는 하반기에도 다시 파업에 나섰지만 노무현 정권의 집중적인 탄압을 받고 패배했다. 2003년 11월 노무현 정권이 화물연대 파업에 대처할 방안으로 화물자동차운수사업법에 업무개시명령 제도 도입 안을 제출하자 여야 합의로 신속히 법제화됐다.[4]

 

2003년에는 현대자동차 아산공장과 울산공장, 금호타이어, 현대중공업 등 대공장 사내하청 노조들이 속속 건설됐다. 현대자동차 전주공장과 기아자동차 화성공장 등에는 사내하청 노동자들의 모임이 만들어졌다.

 

2004년 2월 현대중공업 사내하청 노동자 박일수의 분신자결은 그가 남긴 생생한 유서와 함께 사회적으로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하청노동자도 인간이다. 사람답게 살고 싶다.

어차피 하청비정규직 노동자일 수밖에 없는 나의 신분에 한 점 부끄럽지 않다. 노동자신분에 보람과 긍지, 자부심도 있었다. 하지만 한 인간으로서 이 사회에 또는 현대 ××공장에 하청 비정규직 노동자로 산다는 것은 인간임을 포기해야 하는 것이며, 현대판 노예로 살아가야 하는 것이며, 기득권 가진 놈들의 배를 불려주기 위해 제물로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

나는 더 이상 참을 수 없다. 현대 ××공장에서 벌어지고 있는 부정과 부패, 착취, 비리. 직영 노동자들이 하청 비정규직 노동자에게 대하는 행패와 멸시. 고위관리직 이사부터 하위관리직 팀장 반장까지 안 썩은 곳이 없고 상납이라는 추악한 고리에 향락접대에 연결 안 된 ××들 없다. 윗물이 그러하다 보니 협력업체 총무경리까지 노동자임금 도둑질하기에 혈안이 되어 있다. 이런 현실 피해자는 하청노동자다. 상납되는 검은 돈은 하청 비정규직 노동자의 피를 빨고 돈 잔치를 하고 있고, 향락 접대비도 하청 비정규직 노동자 땀과 피로 술 퍼마시고 ××하는 것이다. …

대한민국 노동법은 자본을 위한 법이고 하청 비정규에게 생색만 내는 노동법이다. 현대 어용 노동조합은 그네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한 노동조합이고 노동자는 하나다는 원칙은 말장난일 뿐 열악한 하청 비정규직 노동자는 안중에도 없다. 태어나면서 귀족노동자 하청노동자로 태어나지 않았고 어떡하다보니 직영노동자 하청 비정규직 노동자로 살 뿐인데 직영노동자라 하여 하청 비정규직 노동자를 기만하고 멸시할 자격은 없다. 이런 현대 ××같은 풍토가 개선되어야 한다. …

이런 현실이 세상에 밝혀지고 대수술이 없는 한 하청 비정규직 노동자는 희망과 발전은 기대할 수 없다. 하청 비정규직 노동자에게는 손가락이나 빨아라라는 차별경영을 비통한 마음으로 당하면서 또 한 번 상대적 빈곤감과 박탈감을 피눈물 나는 심정으로 울분을 달랬어야 했다. …

현대 ××공장 사내 복지시설을 하청 비정규직 노동자가 사용할 수 있는 곳은 식당, 샤워실, 화장실, 커피자판기다. 그 많은 복지시설은 직영노동자만 사용한다. 직영노동자 탈의실과 하청노동자 탈의실에서부터 소외감을 갖는다. 하청노동자는 컨테이너 박스에서 옷을 갈아입고 한여름 점심시간 쉴 곳이 없어 그늘 찾아 헤맨다. 한겨울 점심시간 쉴 곳이 없어 바람피할 곳을 찾아 헤맨다. 직영노동자는 시설 잘되어있는 건물내부에 휴식을 취한다. 이렇듯 직영노동자에 비해 하청 비정규직 노동자는 차별을 받는다. 직영노동조합 단체협약을 보면 백가지도 넘는 복지혜택, 문화의료혜택, 자녀교육혜택, 주거혜택 헤아릴 수 없이 많지만 하청 비정규직 노동자는 정해진 시급, 일급 이외에는 아무 것도 없다.

하청 비정규직 노동자 90%가 불법파견근로현장에 투입되다 보면 직영노동자에게 작업지시 받는다. 작업하기 더럽고 어렵고 힘든 곳은 하청노동자에게 투입시킨다. 이토록 비인간적이고 불합리적인 대우를 받고 있는 것이 현대 ××공장 현실이다. 직영노동자 몇백명 중에 한두 사람은 인간적인 사고와 공동체의식, 인격적으로 노동자는 하나라는 생각, 측은지심 시각으로 하청 비정규직 노동자의 현실을 가슴 아프게 바라보는 직영노동자 없지는 않다. 그러나 그것은 빙산의 일각이다. 그리고 하청 비정규직 현실이 변하는 데에는 도움이 안 된다.

그리고 현대 ××공장 외부 일반적인 사람들, … 이 나라 지도자들, 법을 집행하는 고급공무원들, 노동자 바람박이를 해줘야할 노동부 공무원들도 몰라서 안하고 알아도 안한다. 이것이 대한민국 현실이다.

그렇다고 하여 세상이 이렇다 하여 나도 그렇게 살 수는 없다. 이 나라가 요만큼이나 민주화가 된 것은, 세상이 쥐꼬리만큼 변하게 된 것은, 이 사회 구조를 아파하고 정직한 노동의 대가가 안 주어지는 이 현실에 약자가 보호받아야 되는 법이 외면한 현실에 … 그럼에도 약해지지 않고 타협하지 않고 모순된 현실을 개선하고자 개혁하고자 사랑하는 처자식 남겨두고 홀로 외롭게 세상을 고통스럽게 떠나버린 열사들이 있었기에 쥐꼬리만큼이나마 이 사회가 노동자의 환경이 변한 것이다.

나도 앞서간 열사들의 고뇌와 희생에 같은 심정이다. 나의 한 몸 불태워 하청 비정규직 노동자의 열악한 환경이 착취당하는 구조가 개선되길 바란다. 악질 협력업체 사장 박진용 같은 사람이 이 사회에 발붙일 곳 없어야 한다. 부디 하청 비정규직 노동자도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진실된 노동의 대가가 보장되는 일터가 되기를 간절히 소망한다.[5]

2004년 노동부로부터 1만여 공정 전체 불법파견 판정을 끌어낸 현대차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2005년 불법파견 정규직화와 노동조합 인정을 요구하며 전면적인 투쟁에 나섰다. 1월 울산공장의 파업과 잔업거부 투쟁으로 100여명이 해고당하고 납치·폭행과 구속이 줄을 잇는 상황에서도 울산·아산·전주를 합쳐 3천여 명의 조합원을 조직하여 9월까지 현대자동차를 상대로 장기간의 대중적 투쟁을 펼쳤다.

 

2005년 기아자동차 화성공장의 사내하청 노동자 1천여 명은 정규직 노조의 임단협 투쟁이 마무리된 뒤에도 몇 차례 독자파업을 벌인 끝에 사내하청 노조로서는 처음으로 단체협약을 체결해 냈다. 현대하이스코 사내하청 노동자 1백여 명은 노조 결성 뒤 폐업을 빌미로 대량해고가 자행되자 집단 크레인 농성과 지역연대를 통해 해고자 전원복직, 72억 손해배상 청구 철회, 비정규직 노조활동 보장을 쟁취했다. 하이닉스매그나칩 사내하청 노동자 1백여 명은 노조 결성을 이유로 집단해고를 당한 뒤에도 불법파견 판정을 얻어내며 강고한 장외 파업투쟁을 벌였다. 현대자동차 전주공장, 동희오토, 기륭전자, GM창원공장 등에서도 사내하청 노조가 속속 결성되어 투쟁에 나섰다.

 

2004년 노조를 건설한 울산의 건설플랜트 노동자 1천여 명이 2005년 단체협약 체결과 노동조건 개선을 요구하며 다단계 하도급 구조에 맞서 원청 SK자본을 상대로 전투적인 가두시위, 고공 점거농성, 집단 상경투쟁 등 강고한 파업투쟁을 76일 동안 벌였다. 울산 건설플랜트 노동자들은 탄압을 이겨냈고, 노동조합은 뿌리를 내렸다.

울산건설플랜트노조는 울산 지역 석유화학 단지의 여천, 온산, 용연 공단 등지의 공장 건설 현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이다. 이들은 배관, 용접, 제관, 비계, 기계, 계전, 보온 등의 직종을 가지고 주로 정유공장과 석유화학 공장, 발전소나 제철소, 조선소 등 국가기관 사업 설비의 건설과 유지 보수를 담당하는 일을 한다.

대부분의 건설플랜트 노동자들은 30년이 넘게 산업 역군으로 불리며 이 나라 경제 성장의 동력으로 일해 왔다. 그렇지만 이들의 근무 조건은 아직도 30년 전과 별반 다를 바가 없다.

새벽밥을 먹고 현장에 오면 탈의실조차 없어 도로에서 옷을 갈아입고, 쇳가루와 시멘트, 가루가 날리는 난장에서 비가와도 피할 곳 없이 밥을 먹고 일했다. 그것도 자기 돈 내서 먹는 도시락이다. 하루 일 마치고도 땀에 젖은 몸 씻을 샤워장은 고사하고 세면장 하나 없이 살았다. 세면장은커녕 화장실마저도 제대로 없는 상황이었다.

상황이 이러하니 근로계약서를 본 사람도 제대로 없고, 퇴직금을 제대로 받아본 이도 드물었다. 근로기준법상의 주휴나 연차, 휴가, 각종 수당 등은 꿈도 꾸지 못하는 실정이었다. 간혹 작업 중에 사고로 다치거나 죽게 되어도 제대로 된 산재 보상을 기대할 수도 없었다. …

계속되는 단체 협상 요구를 무시하고, 업체들은 오히려 사찰과 해고, 노조 탈퇴서 등을 요구하면서 노동조합의 활동을 막고 있었다.

2005년 들어 노동조합은 업체들의 교섭 해태에 대응하기 위해 총파업을 결의하게 된다. 그러나 총파업 첫날부터 조합원에 대한 홍보 활동조차 할 수 없었다. 첫날부터 회사 출입문 앞에서 기다리는 것은 완전 무장한 전투 경찰들이었다. 전투 경찰의 비호 아래 업체들은 파업이 이루어질 수 없도록 대체인력을 투입시키고 있었다. 대체인력 투입에 항의하는 조합원을 경찰들이 막고 있었다. …

계속되는 대체인력 투입과 이를 오히려 보호하고 있는 공권력의 폭력에 나날이 긴장감은 높아갔다. 법에 정해진 노동자의 정당한 단체 행동권마저 가로막고 있는 공권력에 대한 분노가 날이 갈수록 높아졌다. 그리고 파업 대오로 모여드는 조합원들은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다. 오히려 파업이 계속될수록 조합원들의 눈빛과 각오도 결연해져 갔다. …

플랜트 노동자들의 요구는 교섭을 하자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교섭 대상인 업체는 자신들이 교섭 대상이라는 것조차 인정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런 상황을 지도해야 할 노동부와 시청은 플랜트 노동자들의 목소리를 철저히 외면하고 있었다. 교섭이 이루어지지 않는 근본적인 이유는 국내 거대 그룹인 SK의 압력과 건설노조를 무력화하려는 폭력적 공권력에 있었다. …

공권력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조합원들은 더욱 강한 단결력으로 파업 대오를 유지하고 있었다. 공권력은 초반부터 물리력을 통한 파업 와해 작전을 폈으나 이것이 여의치 않자 노골적인 폭력으로 노동조합을 죽이려 들었다. …

계속되는 SK의 교섭 해태와 본질을 왜곡하는 언론의 호도 속에 파업의 정당성을 알리기 위한 결단이 필요한 상황이었다. SK 본사 앞으로 두 차례에 걸친 상경 투쟁을 진행하며 SK의 노동 탄압을 알려내고 있던 노동조합은 마침내 서울 마포 SK건설 타워크레인에 점거 농성을 들어가게 된다. 이것은 전국적인 여론 형성을 위한 결단이었다. 그리고 다음 날인 5월 1일 울산 SK 공장 내 베셀 타워를 다시 점거하게 된다. …

연이은 4월 1일 남부서 폭력 사태, 4월 8일 전 조합원에 대한 시청 폭력 연행, 4월 28일 노동부 앞 폭력 진압, 그리고 5월 5일 남부서에서의 가대위에 대한 폭력 행위까지 노동조합은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계속되는 탄압 속에 살아남기 위해서는 무장을 하고 거리로 나서지 않을 수 없었다. …

5월 17일 단위 노조의 어려운 한계 속에서도 울산 플랜트 노동자들의 파업을 엄호하기 위해 현장의 작업을 멈추고 달려온 여수와 포항, 전남동부경남서부 플랜트 노동자들의 눈물겨운 연대는 지역과 단위노조의 한계를 뛰어넘는 실질적인 연대파업을 만들어냈다.[6]

덤프트럭을 운전하는 특수고용 노동자들이 2004년 건설운송노조 산하 덤프연대를 결성하여 2005년 최대 1만여 명이 참여한 파업투쟁을 세 차례나 벌였다. 산업인력공단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2005년 정규직 전환 및 차별 시정을 요구하며 66일 동안 파업을 벌였다.

 

철도공사의 자회사에 고용돼있던 KTX 승무원들이 2005년 철도노조에 가입한 뒤 2006년 3월부터 철도공사 직접고용과 정규직 전환을 요구하며 파업을 벌였다. 철도공사, 국회, 국가인권위원회, 서울시장 후보 선거사무소들에 대한 점거농성, 서울역 단식농성, 서울역 고공농성 등 다양한 형태의 투쟁을 이어나간 KTX 승무원들은 2008년 9월 서울역 연좌시위를 마지막으로 대중투쟁을 마무리하고 법률투쟁으로 전환했다.[7]

 

대구경북건설노조는 2006년 적정임금 지급, 불법 다단계 하도급 철폐, 상습 임금체불 근절 등을 요구하며 6월부터 35일간 파업을 벌였다. 포항건설노조는 주5일제 시행과 불법 다단계 하도급 철폐를 요구하며 7월부터 83일간 파업을 벌였다. 이 과정에서 포스코의 대체인력 투입에 반발하며 8일 동안 포스코 본사 점거농성을 벌였다.

 

2007년 7월 1일 기간제법 시행을 앞두고 이랜드그룹이 계약직의 외주화를 추진하자, 그에 맞서 이랜드일반노조가 6월 30일 홈에버 상암점 점거를 시작으로 510일간 파업을 이어나갔다. 같은 이랜드그룹에 맞선 뉴코아노조는 뉴코아 강남점을 점거하면서 이랜드·뉴코아 공동투쟁을 만들어 나갔다.

 

기아자동차 비정규직지회는 원청과의 단체교섭을 요구하며 8월말 9일간의 공장점거 파업을 전개했다.

 

비정규직 노조들은 ‘전국비정규직노동조합연대회의’(전비연)라는 전국 조직으로 결집하여 단위노조의 투쟁을 넘어 사회정치적 투쟁에 나섰다.

비정규직들은 열악한 노동조건의 개선을 위해, 그리고 노조를 유지하기 위해 ‘비정규직 고용’ 자체의 문제점을 부각시켜야 한다는 점을 배우게 되었다. 처음에는 자연발생적으로 시작된 비정규직 노조 간 ‘품앗이 투쟁’이 차츰 목적의식적으로 법제도적 탄압 돌파를 위한 ‘비정규직 공동투쟁’을 조직하려는 노력으로 발전해갔다. 이런 노력으로 2000년 민주노총 서울본부에 서울지역비정규직노조연대회의가 구성되었고, 2002년 민주노총에 특수고용대책회의가 구성되었다. … 2003년 8월 전국비정규직노조대표자연대회의 구성을 위한 첫모임이 진행되었다. … 2003년 9월 27일 ‘전국비정규직노조대표자연대회의(준)’가 발족했고, 첫 번째 주요 사업으로 전국비정규직노동자대회를 개최하기로 하였다. … 2003년 10월 26일 열린 전국비정규직노동자대회에서 당시 근로복지공단 비정규직노조 이용석 광주본부장이 분신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

이렇게 하여 노동법상 근로자성 인정을 공동요구로 하는 특수고용 노조, 원청의 사용자책임 인정을 공동요구로 하는 간접고용 노조, 올바른 공공부문 비정규직 대책을 공동요구로 하는 공공부문 노조 등 법제도 개선 요구를 중심으로 하는 비정규직노조 연대운동의 질서가 형성되고, 느슨한 네트워크를 구성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2004년 1월 30~31일 열린 비정규직 간부수련회를 통해 전국비정규직노동조합연대회의(준)이 출범하였다.[8]

전비연을 중심으로 한 비정규직 주체들은 2004년 9월 열린우리당 점거농성, 11월 국회 타워크레인 점거농성 등 ‘비정규직 관련 개악법안 저지와 비정규직 권리보장 법안 쟁취를 위한 투쟁’을 앞장서 이끌면서, 2004년 11월 민주노총이 비정규직 법안 관련 총파업에 나서도록 끌어내는 등 사회적 영향력과 운동적 위상을 빠른 속도로 강화해 나갔다.

 

2005년 10월 16일, 6만여 명의 조합원을 포괄하는 비정규직 노조들의 연대체인 ‘전국비정규직노동조합연대회의’가 정식 발족했다. 전비연은 2006년 8월 25일 사내하청노조 공동 파업을 조직하는 등 비정규직 공동투쟁을 조직하기 위해 노력했다.

 

3) 2003~06년 현대차 비정규직의 불법파견 정규직화 투쟁

 

2003년, 현대차에서 비정규직이 스스로 노조를 설립했다. 발단은 3월 19일 현대차 아산공장에서 한 사내하청 노동자가 월차를 쓰려고 했다가 하청업체 관리자에게 식칼로 아킬레스건을 공격당하는 식칼테러를 당한 사건이었다. 같은 업체 노동자들로부터 시작된 비공인파업으로 아산공장이 중단됐고, 28일 금속노조 현대자동차아산공장사내하청지회가 결성됐다.

 

아산공장의 불길은 생산의 주력인 울산공장으로 넘어왔다. 4월 28일 울산공장의 한 사내하청 노동자가 ‘현대자동차 비정규직 인간선언’이라는 유인물을 뿌리면서 사내하청 노동자들의 주체적 단결을 호소한 게 출발점이 됐다.

세계 초일류 기업, 그러나 기계만도 못한 하청 노동자!

세계 초일류 기업을 자처하고 나선 현대자동차는 사상 최대의 흑자를 기록하며 눈부신 질주를 하고 있다. 그러나 몇 십억의 흑자를 내는 현대자동차 내에는 언제 짤릴지 모르는 고용불안과 비인간적 대우에 시달리며 하루하루 고통과 절망 속에 살아가는 하청 노동자들이 있다.

하청이기 때문에 법에 다 나와 있는 노동자의 권리조차도 무시된다. 연차 사용은 그저 꿈이나 꿀 수 있는 것이고 월차 하나 쓰는데도 아쉬운 소리에 온갖 눈치 봐야 한다. 똑같은 공정에서 일한다 하더라도 직영 노동자들에게 지급되는 안전장비를 지급받지 못한다. 작업 중에 다쳐도 쉽게 산재신청을 내야겠다는 하청 노동자는 찾아보기 어렵고 업체와 싸워 산재를 신청했다 하더라도 미운 털 박혀 해고 대상이 되거나 어디 구석으로 전환배치되기 십상이다. 하다못해 기계도 고장나면 기름칠하고 보수하는데 우리 하청 노동자는 쓰다가 고장나면 버리는 소모품과 다름없는 취급을 당한다. 명절에는 그저 불효자가 되어 고향길에 오르고, 더럽고 힘들고 어려운 공정에서 뼈 빠지게 일해도 임금은 정규직 노동자들의 40%도 되지 않는다.

2·3차 업체 하청 노동자들의 상황은 더 열악하다. 석면을 다루는 공정에서 일을 하더라도 환풍시설 하나, 몸을 씻을 시설 하나 없다. 딱 최저생계비만큼 지급되는 임금은 근속연수가 2년이 되어도 인상될 줄 모르며, 일년 전에 지급한다던 안전화는 아직까지도 소식이 없다. 말만 만근이지 만근수당은 어느새 철야만근수당이 되어 정취를 하더라도 철야를 하지 않으면 지급되지 않는다. 법에도 나와 있다는 취업규칙은 구경조차 한 일이 없다.

왜 우리가 죄인처럼 머리를 조아려야 하는가?

명절 때면 고향에서 만난 선후배나 어르신들이 “어디에 다니냐”고 물으면 아주 자랑스럽고 당당하게 “저는 현대자동차 사내하청에 다닙니다”라고 자신있게 대답할 하청 노동자가 과연 얼마나 되겠는가? 대부분이 적당한 말로 얼버무리거나 그도 아니면 현대자동차에 다닌다고 할 것이다. 왜 이렇게밖에 대답할 수 없는 걸까? 그것은 우리 스스로가 비참함을 느끼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우리 하청 노동자의 비참한 현실은 로또복권 당첨률에 맞먹는 본청의 신규사원 채용공고에 대한 실낱같은 희망으로, 정규직 노동조합에 대한 막연한 기대만으로 바꾸어 낼 수 없다.

비정규직 노동자여, 이제 우리도 인간임을 선언하자!

하청노동자에게 가해지는 부당함, 죄인 아닌 죄인으로 숨죽이고 고개 숙이며 살아온 많은 날들. 이러한 굴레들은 그저 앉아서 기다린다고 바뀌지 않는다. 하청 노동자 스스로 우리의 권익확보와 노조건설의 일념으로 일어설 때만 우리는 당당한 인간으로, 당당한 노동자로 살아갈 수 있다.

한 사람 한 사람 개개인은 힘이 없다. 그러나 이 한 사람 한 사람이 모여 목소리를 높이고 싸워 나간다면 하청 노동자에게 가해지는 그 어떤 부당함에도 맞설 수 있다.

아산 하청 노동자들은 당당하게 노동조합을 만들었다!

지난 3월 19일, 현대자동차 아산공장에서는 월차 한 번 쓰겠다던 하청 노동자에게 폭행이 가해지더니 급기야는 발목을 칼로 긋는 천인공노할 식칼테러가 발생하였다. 이것이 단순히 어느 또라이같은 관리자의 행패가 아님을 우리는 분명하게 알고 있다. 아산의 하청 노동자들은 월차라도 한 번 쓰려면 병원 진단서에 시말서·반성문에 온갖 아쉬운 소리를 해야만 했다. ‘하청’이라는 이유만으로 당연한 권리들도 행사하지 못한 채 죄인처럼 머리를 조아려야 했다.

세화산업 노동자들은 동료에게 가해진 테러에 분노하며 하나 둘 모여들었다. 어떻게 하면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해야만 죄인처럼 살아야 하는 지금의 현실을 바꿀 수 있을까? 답은 하나였다. 모두들 일손을 놓고 우리도 인간이라며 목청을 돋구어 부당함에 맞서기 시작했다. 하나의 업체에서 끊긴 컨베이어는 서서히 멈추어 갔고 아산공장 전체 가동이 중단되었다.

그리고 3월 28일 이 하나하나의 힘들이 모이고 모여 ‘아산 하청 노조’(금속노조 현대아산사내하청지회)가 만들어졌다. 사측에서는 온갖 협박, 공갈로 하청노조를 말살하려 하지만 아산의 하청 노동자들은 스스로의 피와 땀으로 만든 노동조합을 지켜내기 위해 죽을힘을 다하고 있다.

아산에서의 하청노조 건설은 우리 하청 노동자들도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이제 아산 하청 노동자들이 보여준 그 희망을 우리의 것으로 만들어 나가자! …

비정규직도 인간이라고 우리의 목소리를 외칠 수 있기까지 우리는 얼마나 숨죽여 기다려 왔는가! 바로 지금이야말로 현대자동차 하청 노동자들이 인간다운 삶을 위해 떨쳐 일어설 때이다.

앞장서 나서는 것은 늘 외롭고 두려운 것이다. 그러나 동료들의 눈빛 속에 이글거리는 분노의 불길들을 보라! 87년 희생을 각오하고 앞장서 투쟁하는 자들이 있음으로써 오늘날의 정규직 노조가 설 수 있었다.

우리의 힘을 모아 하청 노동자들의 자주적인 조직 ‘현대자동차 비정규직 투쟁위원회’를 결성하여 이제 더 이상 하청 노동자들이 노예가 아님을, 기계에 속한 부품이 아님을 당당하게 보여주자![9]

5월 2일, 80여 명의 사내하청 노동자들이 모여 ‘현대자동차 비정규직투쟁위원회’(비투위)를 결성했다. 비투위 결성 두 달 만인 7월 8일, 127명의 발기인이 모여 ‘현대자동차 비정규직노동조합’을 설립했다. 설립총회를 마친 비정규직노조는 일부 정규직 활동가들의 도움을 받으며 조합원 가입을 받았는데, 24시간 만에 약 500여명이 조합원으로 가입했다.

 

그러나 노조 건설에 나선 비정규직에게 현대차노조가 준 선물은 비정규직 노조 건설이 “현자노조 결정에 반하는 사항”이므로 “심각한 우려와 함께 … 재고해 줄 것을 강력 희망하며 요구한다”는 내용을 담은 노조홍보물의 배포였다.[10] 현대차노조의 입장이 현장에 알려지자 비정규직노조 가입 흐름은 바로 중단됐다.

 

현대차노조가 내세운 명분은 노조 규약을 개정해서 비정규직이 현대차노조에 ‘직가입’할 수 있게 하겠으니 기다려 달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비정규직의 독자노조 결성을 방해하는 데 무게가 실린 무책임한 약속이었다. 실제로 비정규직노조는 현대차 단일노조 건설을 추구하는 한시적인 노조임을 규약에 명시하여, 비정규직노조 건설이 ‘직가입’과 상충되지 않음을 분명히 했다. 반대로 현대차노조는 2006년 6월 산별노조 전환 전까지 ‘직가입’을 위한 규약 개정을 시도조차 하지 않았으며, 산별노조로 전환한 뒤에도 금속노조의 공식 방침인 ‘1사1조직’에 따른 조직편제(비정규직지회와의 통합)를 세 차례나 부결시켰다.

 

현대차노조는 비정규직의 독자적인 대규모 조직화를 두려워했다. 언제든 비정규직을 정규직 고용의 방패막이로 사용할 수 있으려면, 비정규직이 무기력하게 미조직 상태로 있어야 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현대차에서는 신차 투입으로 사업부 차원에서 맨아워 협상을 할 때마다 거의 매번 수십에서 수백 명의 사내하청이 정규직 노사의 합의에 의해 정리해고 당해야 했다.[11] 이런 일이 사내하청 대규모 투입 이후 사업부를 번갈아 가며 1년에 한두 차례씩 꾸준히 발생했으며, 심지어 2010년 대법원의 불법파견 판결 이후인 2011년에도 발생했다.

 

어려운 조건에서 활동을 이어가던 비정규직노조는 2004년 불법파견 진정을 주요 사업의 하나로 추진했다. 2003년 12월 금속연맹 정기대의원대회에서 2004년 상반기 주력사업으로 결의된 ‘릴레이식 불법파견 진정사업’의 일환이기도 했다. 비정규직노조는 불법파견을 진정한 이후 이를 입증하기 위해 현장 자료들을 광범하게 수집, 제출하는 등 치열한 노력을 펼쳤다. 현대차노조도 나중에 불법파견 진정에 합류했다.

비정규직노조가 제기한 불법파견 판정이 유력해지자 회사는 다시 한 번 비정규직노조의 주력을 현장에서 제거하려는 계략에 나섰다. 2004년 7월 회사와 5공장 대의원회는 42개 공정을 직영화하기로 합의했다. 이 과정에서 비정규직에 대한 고용보장 또한 합의했지만, 회사는 이를 악용했다. 42명 정리해고자 명단에 안기호 위원장을 비롯한 핵심 활동가들을 다수 포함시킨 것이다.

7월 23~24일 결국 정리해고가 단행되자, 해고당한 조합원 11명은 7월 27일부터 산타모 식당 앞에서 무기한 철야농성에 돌입했다. … 5공장 비정규직 정리해고가 불법파견 판정을 눈앞에 두고 비정규직노조의 주력을 제거하려는 회사의 계략임이 널리 알려지면서, 정규직 활동가들도 이 투쟁에 점점 공감하고 나섰다. …

기나긴 추석휴가를 무사히 돌파해 냄으로써, 5공장 비정규직 해고자들의 투쟁은 승기를 잡았다. 5공장 비정규직 정리해고 철회투쟁은 어느덧 민주노총과 민주노동당을 비롯하여 전국의 수많은 노동자들의 시선을 모으는 투쟁이 되었다. 10월 5일에는 이수호 민주노총 위원장이 직접 지지 방문에 나서기도 했다.

마침내 10월 7일, 회사와 현대차노조 사이에 합의가 이뤄지면서 5공장 정리해고 철회 투쟁은 승리로 끝났다. 비정규직노조 안기호 위원장의 단식투쟁이 38일차에 이른 날이었다.

5공장 비정규직 정리해고 철회 투쟁은, 불법파견 판정 앞에서 비정규직노조의 주력을 지켜냈다는 의미도 있지만, 사실 그 이상의 의미를 갖고 있었다. 만일 5공장 비정규직 정리해고가 통용됐다면, 회사는 이후 불법파견 해법이랍시고 소수 공정의 정규직화를 내걸고 수시로 비정규직 노조간부들을 정리해고하는 탄압을 자행할 수 있었을 것이다. 5공장 비정규직 정리해고 철회 투쟁은 회사가 더 이상 그런 술책을 쓸 수 없게 차단해 냈다는 의미가 있었다.[12]

결국 12월 16일, 노동부가 현대차 울산공장 101개 업체 7천 175명, 아산공장 12개 업체 1천 109명, 전주공장 12개 업체 950명 등 현대차 국내 생산공장 세 곳 모두에서 125개 업체 9천 234명이 불법파견이라고 판정했다.[13]

거대 자본인 ‘현대’가 현대자동차 산하 하청업체 노동자들을 전원 불법파견 형태로 고용하고 있었던 사실이 드러났다. … 이번 판정결과는 민주노총에서 주장해온 제조업 사내하청은 곧 불법파견이라는 사실을 입증해준 것이며, 현대자동차가 정규직으로 고용해야 할 노동자 1만여 명을 불법적인 파견근로 형태로 사용함으로써 엄청난 초과착취와 차별을 자행해왔음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는 사례이다. …

민주노총은 지난 1998년 이른바 ‘파견법’이 시행된 이후 현장에서 도급을 위장한 무수한 불법파견이 발생하고 있다고 제기해왔다. 우리는 그동안 이를 모르쇠 해오던 행정관청이 뒤늦게 불법의 확인과 시정에 나서고 있는 사실을 주목하고 있다. 행여 이러한 노동부의 움직임이 파견업종 전면 확대를 핵심으로 하고 있는 파견법 개정안의 정당성을 확보하려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지울 수 없다. … 파견업종 전면 확대와 불법파견에 면죄부를 주는 정부의 비정규 관련 법안은 즉시 폐기되어야 한다. …

민주노총은 다음과 같이 요구한다. … 현대자동차는 이미 법적인 지위는 사실상 정규직이고, 현대자동차의 노동자인, 불법파견으로 판정 난 전원을 즉각 직접고용·정규직화 하라![14]

현대차 비정규직노조는 2005년 불법파견 정규직화 투쟁을 대대적으로 전개해나감으로써 비정규직 조직화의 물꼬를 새롭게 트고자 했다. 불법파견 철폐와 정규직화를 내걸고 1월 18일부터 파업농성을 벌이며 처절한 투쟁을 전개했다.

1월 18일 5공장 원·하청 노동자 200여 명이 출근투쟁에 참여했다. 출근투쟁을 마친 비정규직 대오는 의장52부 대흥기업·평원산업 탈의실로 이동하여 파업동참을 설득했다. 의장52부 비정규직들은 이미 그 전날 방문 때부터 파업에 합류할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었다. 결국 도장5부 50여 명, 의장52부 50여 명, 의장51부 중심의 기존 선봉대 20여 명 등 총 120여 명이 파업을 결행하기로 결의가 모아졌다. 탈의실에서 농성투쟁이 시작됐다. 처음에 합류하지 못했던 노동자들이 원·하청 관리자의 탄압을 뚫고 속속 결합하면서 파업대오는 150여 명으로 늘어났다. 비정규직 150여 명이 전격 파업에 들어가자 52라인은 가다서다 하다가 10시경 완전히 멈춰 섰다. …

5공장이 전격 파업에 돌입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1·2·3공장 비정규직들은 20일로 예정됐던 잔업거부를 이틀 앞당겨 18일부터 바로 돌입했다. 1·2·3공장을 망라해서 주간조 420명이 잔업거부에 동참했다. 잔업시간에 1·2·3공장 라인 또한 끊어졌다. 오후 6시 5공장 정문 앞에서 잔업을 거부한 비정규직 대오들이 집결하여 집회를 열었다. 집회를 마친 대오는 5공장 농성장으로 합류하여 전체 결의대회를 가졌다.[15]

18일 오전 8시부터 5공장 의장부 업체 탈의실에서 시작된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파업투쟁은 뜨거운 열기로 가득 차 있었다. 처음에 80~90명으로 시작된 파업결의대회가, 원하청 관리자의 탄압을 뚫고 속속 결합하는 주간조 동지들로 결국 150여 대오로 불어났을 때, “우리 비정규직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과 투쟁의지로 탈의실 전체가 후끈 달아올랐다.

곧이어 150여 노동자들은 4개 조로 나뉘어 이번 파업투쟁의 규율을 스스로 정하고 파업투쟁 승리를 위한 실천방침 토론을 전개했다. 각자 자신의 조에 명칭을 정했는데, 이름하여 ‘불사조’, ‘사생결단조’, ‘무적탱크조’, ‘천하무적조’!

“바지사장 찢어놓고 우리 권리 우리가 찾자!”

“빡씨게 싸워서 우리 모두 승리하자! 무임승차 하지말자!”

“눈치 보지 말자! 싸울 땐 싸우자! 정정당당하자!”

각자 특색 있는 구호로 무장하고 조별 깃발을 제작하며 ‘이런 게 바로 노동자들의 힘이구나!’ 하는 것을 배우기 시작했다. 정규직 대소위원들 또한 5공장 비정규직 동지들의 투쟁에 지지엄호를 결정하고 ‘노동자는 하나’라는 원칙을 말이 아니라 실천으로 옮기고 있었다.

이제 시작이다! 5공장 파업을 선봉으로 전 공장으로 확산시키고 원하청 공동투쟁으로 기필코 전원 정규직화 쟁취하자!![16]

그러나 현대차노조는 비정규직노조의 투쟁을 외면했다. 대체인력 투입을 용인하여 비정규직 파업이 무력화되는 것을 방치했고, 관리자·경비들이 수백 명씩 공장 안에 몰려다니며 비정규직에게 집단 폭행을 하는 것도 방치했다.

 

현대차노조와 비정규직노조가 일시적으로 관계를 개선하고 원하청 연대회의를 결성하여 6월에 공동의 조직화 사업을 진행함으로써 울산·아산·전주 비정규직노조들의 조합원수가 울산 2천 명 등 전체 3천 명 수준으로 확대되기도 했다. 그러나 8월에 비정규직노조가 투쟁에 나섰을 때 현대차노조는 다시 회사의 폭력적 탄압을 방치했다.

2005년 1월 비정규직노조가 5공장 농성투쟁을 시작한 직후부터 회사는 거침없이 폭력을 행사해 왔다. 3월부터는 정규직에게까지 폭력적 노무관리를 확대해 왔다. 회사의 폭력은 너무 심각한 사건이 발생하면 잠시 주춤해졌지만, 얼마 못 가서 바로 재개되는 양상을 되풀이하고 있었다.

회사가 전례 없이 폭력적 노무관리를 전개하자, 정규직 현장 활동가들은 이를 강력히 규탄했다. 다양한 단위에서 출근투쟁을 조직했고, 천막농성을 전개했다. 본관 앞 열사광장에 농성천막 6동이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진풍경이 펼쳐지기도 했다.

그런데 회사의 폭력은 8월 25일 비정규직노조의 파업 직전에 극점에 이르렀다. 비정규직노조 파업의 기세를 꺾기 위한 의도된 폭력이었다. 8월 24일 밤 9시부터 25일 새벽 7시까지 3공장의 2차 하청업체 현대세신과 신한·계림 조합원들 그리고 노조간부들에게 회사는 관리자들을 통해 집단폭행·성추행·납치 등 일련의 폭력을 자행했다. 회사는 그 와중에 비정규직노조 사무국장을 납치하여 집단폭행하고 경찰에 넘기기도 했다. 회사의 극악한 폭력은 다시 한 번 사회적으로 파장을 일으켰다.[17]

마침내 불법파견 철폐 투쟁 과정에서 해고당한 비정규직(류기혁)이 자결하는 극단적인 사태가 벌어졌으나, 그 상황에서조차 현대차노조는 열사니 아니니 하는 논쟁을 일으키며 비정규직 투쟁에 대한 연대를 거부했다.[18] 비정규직노조는 100명 이상의 해고자가 발생한 2005년 투쟁에서 아무 성과를 얻지 못하면서 큰 타격을 입었다.

 

현대차 비정규직노조는 2006년에도 투쟁을 이어갔다. 비정규직노조는 불법파견 철폐와 단체협약 쟁취를 내걸고 독자적인 임단협 투쟁에 나서 생산라인을 멈춰 세우는 파업을 여러 차례 펼쳤다. 그러나 중재를 하겠다고 나선 현대차노조는 비정규직노조 지도부가 투쟁을 유보한 채 스스로 요구안을 대폭 삭감하고 결국 알맹이 없는 합의에 이르도록 유도했다. 비정규직노조 조합원들이 강력 반발했고, 비정규직노조 위원장의 사퇴와 비상대책위 구성으로 이어졌다. 그런데 비정규직노조 비대위가 재파업을 추진하자 현대차노조가 이를 주저앉히기 위해 모든 영향력을 행사했다. 결국 허리가 꺾인 비정규직노조의 파업은 성사되지 못했다.[19]

 

2005년의 불법파견 철폐투쟁과 2006년의 독자 임단투가 모두 실패로 끝난 상황에서, 2007년 1월 검찰이 현대차의 불법파견에 대해 무혐의 처분을 내렸다.[20] 많은 조합원들이 노조를 떠나 다시 500명 수준으로 돌아갔다. 현대차 비정규직노조는 대중투쟁 동력을 상실한 가운데 최소한의 집행력도 유지하기 어려운, 깊은 침체 상태에 빠져들었다.

비정규직은 1987년 이전 노동조합이 없던 시절 노동자의 모습을 고스란히 재현하고 있었다. 그런 비정규직이 급격히 증가하여 노동자의 과반수를 차지하게 된 2000년대 초반은 민주노조운동에게 중요한 갈림길이었다. 한편에는 노동조합의 문호를 비정규직에게 과감히 개방하는 길, 다시 말해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노동조합을 위해 기존의 민주노조운동이 역량을 집중하여 적극 지원하고 엄호하는 길이 있었다. 다른 한편에는 기존 조합원의 지위를 지키는 데 몰두하는 길, 다시 말해 비정규직에 대한 자본의 초과착취에 눈감는 또는 심지어 협력하고 담합하는 길이 있었다.

불행히도 후자의 길이 더 일반적인 양상으로 전개됐다. 현대차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전자의 길을 열고자 하는 흐름이 없지는 않았지만, 후자의 힘에 크게 밀렸다. 다만 그 과정은 단순하지 않았다. 노동자 총단결의 길을 열고자 하는 흐름은 비록 세가 밀리긴 했지만 끊임없이 노력했고 도전했다. 덕분에 노동조합은 일방적으로 후자의 길만을 걷지는 않을 수 있었다.

그러나 한계 또한 분명했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투쟁에 정규직노조는 늘 어정쩡한 모습으로 서 있었다. 노골적으로 연대를 저버리지는 않았지만, 진정으로 함께 피땀 흘리고 눈물 적시는 공동의 투쟁 주체이지는 못했다.

2003년부터 본격화된 현대차 비정규직의 단결과 투쟁은 바로 그런 조건 위에서 전개됐다. 노동조합에 가입했다는 이유만으로 하루하루를 사측의 협박과 조롱 속에서 보내야 했던 류기혁의 모습은 대량해고, 징계, 고소고발, 손배가압류, 각종 폭력에 직면해야 했던 비정규직 모두의 모습이기도 했다.

한 때 민주노조운동 전반에서 큰 주목을 받기도 했지만, 그 시절 현대차 비정규직의 투쟁은 결국 패배했다. 류기혁의 죽음은 그 고통스런 패배의 표현이자 상징이었다. 비정규직노조는 점점 사그라졌고 100명에 가까운 해고자를 남긴 채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21]

현대차에서 비정규직 운동은 정규직 운동의 15년 역사를 이어받지 못한 채 밑바닥에서부터 다시 시작해야 했다. 다수의 비정규직은 초보적인 계급의식도 갖추지 못한 채 한 발 떨어져 눈치만 살폈다. 비정규직 운동은 비정규직의 절실한 염원을 담아내긴 했지만, 정규직의 한계를 딛고 넘어설 만큼은 성장하지 못했다. 계급적 단결의 대의를 저버린 정규직의 모습이 튀어나올 때마다 비정규직은 결정적으로 흔들렸고, 결국엔 다시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4) 2004~06년 비정규직 입법과 노사관계 로드맵을 둘러싼 대결

 

2004년부터 2006년까지 비정규직 입법과 노사관계 로드맵을 둘러싸고 치열한 계급 간 정치투쟁이 전개됐다. 한편에는 노동자들을 대표하여 비정규직 권리보장과 전체 노동자의 온전한 노동3권을 요구하는 민주노총이 있었다. 반대편에는 자본가들을 대표하여 비정규직 확산과 전체 노동자의 노동권 약화를 도모하는 노무현 정권이 있었다.

 

2003년 노무현 정권은 출범 직후부터 ‘국제기준에 부합하는 방향으로 노사관계제도 개선’을 국정과제로 제시했다. 5월 노동부가 노사관계학자 15명을 위촉해서 ‘노사관계제도 선진화 연구위원회’를 구성했다. 연구위원회는 9월 중간보고와 12월 최종보고를 통해 ‘노사관계 법·제도 선진화방안’(노사관계 로드맵)을 내놓았다. 노사관계 로드맵은 노동관계법 전반에 걸친 34개 과제로 구성됐는데, △노동자 파업권 약화 △사용자 대항권 강화 △정리해고 요건 완화 △부당해고 금전보상 허용 등이 그 요지였다.

 

9월 중간보고가 나오자 노사정위원회가 10월부터 민주노총의 불참 속에 노사관계 로드맵을 논의했다.[22] 그러나 2004년 4월 한국노총 지도부가 자신들이 지지한 녹색사민당의 총선 패배에 대한 책임을 지고 사퇴하면서 논의가 중단됐다.

 

◎ 2004년 비정규직 입법 전선의 형성

 

2004년 2월 출범한 민주노총 이수호 집행부는 노사정 대화를 통한 사회적 교섭에 처음부터 적극적이었다. 다만 이수호 집행부는 기존 노사정위원회를 대체하는 새로운 사회적 교섭기구를 추진하겠다는 방침이었다. 그러면서 △노사정 대등 운영 △기구의 독립성과 합의사항 이행 △산업·업종별 협의 틀 마련을 새로운 사회적 교섭기구의 원칙으로 제시했다.

 

6월 4일 민주노총, 한국노총, 경총, 대한상의, 노동부, 노사정위원회의 대표자가 참여하는 1차 노사정대표자회의가 열렸다. 7월 6일 2차 노사정대표자회의는 노사정위원회 개편방안에 대해 △노사정위원회 성격 △논의의제 △명칭 △참여주체 △업종별 협의회 등 5개 핵심 쟁점을 놓고 집중 논의를 진행하기로 했다.

 

한편 7월 12일, 민주노총은 △상시업무 정규직화와 비정규직 사용 제한 △동일노동 동일임금 보장 △파견법 폐지와 불법파견 근절 △특수고용 노동자의 노동권 보장 등을 요지로 ‘비정규직 권리보장 입법안’을 민주노동당[23]을 통해 국회에 제출했다.

이번 입법안은 사회적으로 심각한 비정규노동자 문제 해결을 위해 무분별하게 확산되고 있는 비정규 사용의 억제와, 부당한 차별의 철폐, 권리보장의 방향을 제시하고 있음. …

1) 상시업무 정규직화와 비정규직 사용제한 …

2003년 현재 전체 노동자의 55.4%에 이르는 782만명이 비정규직임 … OECD 국가 중에서도 가장 높은 수준 … 따라서 비정규직 고용을 엄격하게 제한해야 함. 이를 위해서는 ‘상시적으로 필요한 업무’는 정규직으로 고용하고, 객관적이고 합리적인 이유가 있을 경우에만 비정규직을 사용하도록 제한해야 함. 즉, △출산·육아 또는 질병·부상 등으로 발생한 결원을 대체할 경우 △계절적 사업의 경우 △일시적, 임시적 고용의 필요성이 있는 경우 등으로 비정규직(임시직) 고용의 이유를 근로기준법에 명문화 함. [근로기준법 제23조(근로계약기간) 개정]

2) 동일노동 동일임금 보장과 최저임금 현실화 …

2003년 현재 비정규직의 임금은 정규직의 51%임. 다른 노동조건의 차별은 더욱 심해 퇴직금, 상여금, 연장근로수당 등이 적용되는 비정규직은 10~16%에 불과함. 나아가 국민연금, 건강보험, 고용보험 등 사회보험의 경우도 30% 미만의 비정규직만 적용되고 있음. 비정규직이 당하는 이러한 부당한 차별을 없애기 위해서는 동일노동 동일임금을 법적으로 보장하는 것이 절실함. 구체적으로는 △근로형태의 차이를 이유로 고용 및 근로조건상 차별대우 금지 △동일 사업(사업장) 내의 동일가치 노동에 대하여 동일임금 지급 등을 명문화함. [근로기준법 제5조(균등처우) 개정]

3) 파견법 폐지와 불법파견 근절 …

1998년에 제정된 파견법에 따라 그 이전까지 불법이었던 파견용역업체나 도급업체 등에 의한 중간착취를 합법화하고, 도급·사내하청 등의 이름으로 불법파견을 양산하고 있음. 또한 사용자들이 노동법상 사용자의 책임을 결정권한이 없는 파견업체에 떠넘겨 회피함으로써 파견업체(하청업체) 노동자들은 노동법상 권리를 보장받지 못하고 있음. 따라서 파견제를 폐지하고 불법파견을 근절하고 사용사업주가 노동법상 사용자 책임을 질 수 있도록 제도가 개선되어야 함. 이를 위해서 △현행 파견법의 폐지 △불법파견 시 해당 노동자 직접고용 △파견과 도급의 구분 기준 강화 △사용사업자의 노동법상 사용자 책임 명시함. [파견근로자보호등에관한법률 폐지 및 직업안정법 개정]

4) 특수고용 노동자 노동권 보장 …

특수고용 노동자들에게는 노동조합이 인정되지 않거나, 노동조합이 있더라도 사용자들이 노동조합 활동과 단체협약을 부정하는 사례가 빈발하고 있음. 임금·노동조건의 보호와 단결권·단체교섭권·쟁의권 등 노동3권이 부정되어 열악한 노동조건과 사용자의 부당노동행위에 그대로 노출되어 있음. … 따라서 근로기준법과 노동조합법의 ‘근로자 정의’ 규정에서 독립사업장 형태의 노동자를 추가해 명문으로 규정함. 아울러 … 노조활동 등을 이유로 한 ‘도급계약 해지’를 부당노동행위로 규정함. [근로기준법과 노동조합및노동관계조정법 개정][24]

7월 중순, 노동위원회가 서울지하철, 도시철도, 인천지하철, LG정유 등에 잇따라 직권중재를 결정하면서 파업을 불법으로 내몰았다. 21일, 민주노총 이수호 위원장이 “직권중재와 구속 위협에 처해 있는 조합원들과 이라크 파병강행을 막아내지 못한 상황에 대해 책임을 통감”한다며 삭발을 하고 단식농성을 시작했다. 30일 민주노총은 8월 6일로 예정됐던 3차 노사정대표자회의를 “무기한 유보하자”고 각 단위에 통보했다.

 

8월 17일, 열린우리당 원내대표 천정배가 노사정위원회를 방문해 “노사정위에서 결정된 사안은 국민적 합의로 인식해 최대한 존중하겠다”고 밝혔다. 25일, 민주노총이 중앙집행위원회를 열어 노사정대표자회의를 조속히 재개하고 9월 21일 임시대의원대회에 ‘사회적 교섭방침’ 안건을 상정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31일 열린 민주노총 중앙위원회는 ‘사회적 교섭방침’ 안건의 상정 시기를 2005년 1월 정기대의원대회로 연기했다.

 

한편, 2004년 9월 10일 노무현 정권이 이른바 ‘비정규직 보호입법’이라는 이름 아래 기간제법 제정안과 파견법 개정안을 입법예고했다. 기간제법 제정안은 기간제 노동자를 3년 이내의 범위에서 보편적으로 사용할 수 있게 허용하는 내용이었다. 파견법 개정안은 파견 기간을 초과한 파견노동자는 직접 고용된 것으로 간주한다는 기존 ‘고용의제’ 조항을 직접 고용해야 한다는 ‘고용의무’로 완화하는 내용이었다.

기간제 근로자 사용기간을 3년 이내로 제한하고, 3년을 초과하여 사용할 경우에는 정당한 이유 없이 계약기간 만료만을 이유로 고용종료 금지 … 파견기간을 기간제 근로 사용기간에 맞추어 최장 2년에서 최장 3년으로 연장 … 현행 고용의제 규정을 고용의무 방식으로 전환하되 불법파견에 대해서도 고용의무 적용[25]

16일, 전국비정규직노조연대회의(전비연) 대표자 15명이 집권여당인 열린우리당 의장실 점거농성에 들어갔다. 전비연 대표자들은 노무현 정권이 제출한 이른바 ‘비정규직 보호입법’을 ‘비정규직 확산법안’이라고 규정했다. 비정규직 당사자들이 법안을 반대하며 열린우리당 점거농성에 들어간 것은, ‘비정규직 보호입법’이라는 그럴싸한 이름을 내걸고 실제로는 비정규직을 대폭 확대하려던 노무현 정권의 위선적 구상에 상당한 타격을 안겼다.

 

1주일 동안 점거농성을 이어간 전비연 대표자들은 ‘비정규직 확산법안 철회와 비정규직 권리입법 쟁취’를 주장하며 △파견법 철폐와 불법파견 정규직화 △비정규직 사용제한과 상시고용 비정규직 정규직화 △특수고용 노동자에게 노동법·노동3권 보장 △원청 사용자성 인정 △이주노동자 노동허가제 실시를 5대 입법요구로 내걸었다.

 

전비연 대표자들의 열린우리당 점거농성이 계속되는 가운데 21일 열린 민주노총 대의원대회는 노무현 정권의 비정규직 확산법안 철폐를 위해 11월 하순에 총파업에 돌입하기로 결의했다.

심상치 않다. 11월 노동계 총파업을 앞둔 지금 숨 막히는 긴장감이 흐르고 있다. 10월 10일 전국비정규노동자대회에서 양대노총 위원장은 분노로 치를 떨며 ‘결사투쟁’을 외쳤다. 바로 다음날, 김대환 노동부 장관은 기다렸다는 듯 맞받아쳤다. “총파업은 실정법 위반이다.”

이대로 가면 노사정 대타협은 고사하고 ‘대파국’이 불을 보듯 뻔하다. 으레 그렇듯이 경고도 없이 ‘선제공격’을 날린 건 정부였다. 그런데 그 ‘한방’이 예사롭지가 않았다. 9월 10일 노동부가 발표한 소위 ‘비정규보호법안’이 그것이다.

이 ‘판도라의 상자’가 열리자 사람들의 입이 딱, 벌어지고 말았다. 파견근로의 규제를 사실상 모두 풀어버리고 기간제 근로의 독소조항들도 가득 품고 있었기 때문이다. 법안은 순식간에 노동계를 발칵 뒤집어놓았다. 양대노총은 “말이 비정규직 ‘보호’ 법안이지 비정규직을 일상화하고 정규직 노동자들을 비정규직화 하겠다는 의도”라며 총파업을 선언했다. ‘타협’을 말하던 이들의 입은 얼어붙었다. 말이 필요 없었다. 법안의 문구 하나 하나가 정부의 의지를 대변해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

민주노총 이수호 집행부는 출범 당시부터 사회적 교섭을 강조해왔다. “노무현 정부에게는 최상의 노동계 파트너”라는 평가도 받았다. 그러나 올 초부터 정부의 잇따른 직권중재와 파업에 대한 강경대응이 이어지면서, 분위기는 급속히 냉각되었다. 급기야 8월 31일 민주노총 중앙위원회는 노사정대표자회의에 다시 참석키로 한 중앙집행위의 결정을 뒤집는 일이 벌어졌다. 올 10월 노사정위 복귀가 점쳐지던 이수호 체제는 불과 몇 달 사이 총파업을 결의하는 ‘초강성노조’가 됐다. 사실 9월 초만 하더라도 정부가 민주노총의 노사정위 복귀를 간절히 바라기 때문에 어떤 식으로든 ‘유화 제스처’가 나올 것으로 기대됐었다. 하지만 이제 민주노총은 노사정위에 참여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상황이다. 이번 비정규법안으로 퇴로마저 차단당한 것이다.[26]

11월 26일, 노무현 정권의 비정규직 확산법안이 국회 환경노동위원회에 상정되는 데 맞서 민주노총이 6시간 총파업을 전개했다. 전국에서 15만 7천 명의 조합원이 참여했다. 민주노총은 법안 통과 강행시 12월 2일부터 무기한 총파업에 돌입하겠다고 선언했다. 전비연은 국회 앞 타워크레인 점거농성에 들어갔다. 긴장이 고조된 상황에서 29일, 국회 환경노동위원회가 비정규직 확산법안을 정기국회에서 통과시키지 않기로 결정했다. 민주노총은 12월 2일로 예정했던 총파업을 유보했다. 전비연의 국회 앞 타워크레인 점거농성도 종료됐다.

 

◎ 2005년 사회적 교섭과 어설픈 타협안

 

2005년 1월 20일, 민주노총 이수호 집행부는 예정대로 정기대의원대회에 ‘사회적 교섭방침’ 안건을 상정했다. 1998년 민주노총 지도부가 노사정위원회에서 정리해고 도입을 합의해 준 쓰라린 역사를 갖고 있는 상황에서, 게다가 노무현 정권의 반노동자적 성격이 명확하게 드러난 상황에서, 사회적 교섭은 당연하게도 격렬한 반대에 부딪쳤다. 다음날 새벽까지 이어진 대의원대회는 결국 유회됐다.

 

이수호 집행부는 2월 1일 대의원대회를 재소집해 같은 안건을 다뤘다. 격렬한 논쟁 끝에 토론을 종결하고 표결을 선언한 순간, 대회장은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사회적 합의주의·노사정 담합 분쇄 전국노동자투쟁위원회’(전노투)가 단상을 점거하고 시너를 뿌렸다. 소화기 분말 가루가 자욱하게 분사됐고, 철제의자가 날아다녔다. 몸싸움도 벌어졌다. 언론은 민주노총 대의원대회가 폭력으로 얼룩졌다고 대문짝만하게 보도했다.

 

이수호 집행부는 3월 15일 대의원대회를 다시 소집했다. 이번에는 개회를 선언하기도 전에 물리적 충돌이 발생했다. 이수호 집행부가 배치한 질서유지대와 전노투를 중심으로 한 사회적 교섭 반대파가 집단 몸싸움을 벌였다. ‘사회적 교섭 폐기’, ‘총파업 조직’, ‘이수호 위원장 사퇴’ 같은 구호들이 대회장에 울려 퍼졌다.

 

결국 이수호 집행부는 대의원대회를 생략한 채 3월 17일 중앙집행위원회를 통해 노사정 교섭 추진을 결정했다.

1. 대대무산에 대하여

- 대의원대회를 물리력으로 무산시키려는 행동은 어떠한 명분과 정당성으로도 합리화될 수 없는 행위이다. 민주노총의 지도집행력 회복을 위한 강력한 조치가 필요하다.

2. 중집 결정사항

1) 민주노총은 비정규직 보호를 위하여 총파업에 돌입한다. 비정규 개악안 저지와 권리보장 입법쟁취를 위한 4.1 총파업 및 투쟁에 총력 집중한다.

2) 위원장의 책임 하에 비정규관련 노·사·정 교섭틀을 확보하고 전조직적 논의와 의견수렴을 통해 지도집행력을 회복한다.

3) 위원장의 책임 하에 노사정대표자회의를 통해 비정규직 보호법안을 최우선과제로 논의한다. 노사정교섭방침과 관련하여는 추후 적절한 시점에 대의원대회를 소집하여 승인여부를 결정한다.[27]

4월 1일, 민주노총이 비정규 개악안 폐기와 권리보장 입법 쟁취, 불법파견 정규직화를 요구하며 총파업을 전개했다. 13만 조합원이 참여했다. 그리고 6일, 국회 환경노동위원회를 매개로 노사정 교섭이 재개됐다.

노·사·정 대표자회의 결정사항

1. 노사정은 오늘부터 시작된 국회 환노위 주관의 대화가 비정규직 보호입법을 위한 실질적인 논의의 장이 될 수 있도록 한다.

2. 앞으로 실무대화 진행은 환노위 법안심사소위원장이 주관한다.

3. 국회 환노위는 노사정 대화를 최대한 존중한다.

2005년 4월 6일

국회환경노동위원장 이경재,

한국노동조합총연맹 위원장 이용득,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 위원장 이수호,

한국경영자총협회 회장 이수영,

대한상공회의소 회장 박용성,

노동부장관 김대환[28]

이런 상황에서 4월 11일 국가인권위원회가 비정규직 관련 입법안에 대해 의견서를 발표했다. 국가인권위원회 의견서는 노무현 정권이 발표한 비정규직 확산법안과 민주노총이 제출한 비정규직 권리보장 법안의 중간에 위치해 있었다.

그런데 민주노총은 환영의 뜻과 함께 “이번 국가인권위원회의 의견이 현재 노사정대표자회의에서 논의되고 있는 비정규입법안 논의 과정에도 적극적으로 수용되어 비정규노동자의 진정한 보호와 권리보장을 {위한} 제대로 된 법안이 마련되길 기대한다”고 밝혔다.

그동안 특히 사회적 약자의 인권과 관련해 의미 있는 의견을 내온 국가인권위원회가 현재 쟁점이 되고 있는 비정규직 관련 입법안에 대한 의견서를 내놓았다. 우리는 이번 의견서가 비정규직 문제해결에 대하여 핵심적이고 중요한 방향을 제시했다는 점에 주목하고 이를 환영한다.

이번 의견서는 △임시계약직의 사유제한으로 비정규직의 무분별한 사용을 제한하고, △동일가치노동 동일임금 규정으로 차별을 폐지하라는 것이 그 핵심이라 할 수 있다. 중간착취와 불법파견을 낳고 있는 파견제의 폐지안을 내지 않은 점이나 정부가 안을 제출하지 않은 특수고용노동자 노동권 보장에 대한 언급이 없는 등 아쉬운 부분도 없지 않으나 전체적으로 중요한 방향을 제시했다고 할 수 있다. …

정부가 국회에 제출한 안은 국가인권위원회의 이런 권고안의 방향과는 사뭇 다르다. ‘보호’를 위한 법안이라는 겉 표현과는 달리, △임시계약직(기간제) 사용 사유의 무제한 허용 △파견 비정규직의 전면 허용 △동일가치노동 동일임금 규정 없는 실효성 없는 차별해소 방안 △비정규직 노동3권 외면 등을 기조로 하고 있어 비정규직을 더욱 확산하고 차별해소 효과는 미미할 뿐만 아니라, 비정규직의 노동권을 박탈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이번 국가인권위원회의 의견이 현재 노사정대표자회의에서 논의되고 있는 비정규입법안 논의 과정에도 적극적으로 수용되어 비정규노동자의 진정한 보호와 권리보장을 {위한} 제대로 된 법안이 마련되길 기대한다.[29]

이렇듯 ‘환영’과 ‘기대’의 입장을 표명함으로써, 민주노총은 자신의 입법요구를 국가인권위원회 의견서 수준으로 사실상 축소했다. 국가인권위원회 의견서가 배제한 파견법 폐지와 특수고용 노동자 노동권 보장은, 이후 민주노총의 요구에서 사실상 사라졌다.[30]

 

6월까지 진행된 노사정대표자 교섭은 아무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종결됐다. 8월 26일, 금속연맹이 불법파견 정규직화, 성실교섭, 비정규직 노동기본권 보장을 요구하며 6시간 정치총파업을 단행했다. 9만여 명의 조합원이 참여했다.

 

10월 6일, 민주노총·한국노총과 경총이 노사정 교섭의 불씨를 다시 살려 보려고 ‘노사 대토론회’를 사상 처음으로 열었다.

한국 경제는 1997년 말 발생한 외환위기를 성공적으로 극복했으나, 최근 수년간 불균형 성장의 또 다른 문제점으로 대기업과 중소기업, 수출부문과 내수부문, 성장산업과 사양산업 등 경제전반에서 양극화가 심화되고 있는 가운데, 노동시장 영역에서도 정규직-비정규직간 격차 확대 등으로 실업자와 근로빈곤층(working poor)의 고통이 심화되는 등 구조적인 취약성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여기에 과거 수십 년 간 정부 주도의 경제성장 정책이 시행되는 과정에서 노사관계 영역에서도 ‘관 주도’의 관행과 문화가 깊이 뿌리내린 가운데 사회적 대화 영역에서 노사 간의 자율적이고 직접적인 노력은 전무한 형편이었습니다. 이것은 우리나라 시민사회의 성숙도와 기업 및 노동운동의 성장과 조응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에서 노사 모두에게 하나의 숙제로 인식되어 왔습니다.

특히 이 같은 주체적 측면의 취약성은 최근 노-정 관계가 깊은 갈등 국면에 빠지면서 사회통합의 주체 구실을 해야 할 노사정이 오히려 갈등과 대립의 문화를 반복하고 있다는 국민들의 비판에 직면하고 있으며, 이로 인해 올해 6월 이후 사회적 대화가 전면 중단되는 등 안타까운 현실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에 양대노총과 경총은 생산과 대화의 실질적인 핵심 주체로서의 자신의 역할을 반성적으로 재인식하면서 우리 사회의 핵심적인 과제들을 놓고 노(勞)와 사(使)가 직접 만나 해법을 찾아보자는 데 뜻을 같이 했고, 이 같은 취지에서 <노사 대토론회>를 개최하게 되었습니다.[31]

그런데 6일, 민주노총 강승규 수석부위원장이 택시운송사업조합연합회로부터 5천만 원 금품을 수수한 게 드러나 긴급체포돼 7일 구속됐다. 이수호 위원장은 11일 ‘하반기 투쟁을 책임진 뒤 조기 선거를 실시하겠다’고 했으나 현장으로부터 강력한 비판과 질타가 줄을 잇자 20일 위원장직을 사퇴했다. 민주노총은 전재환 금속연맹 위원장을 중심으로 한 비상대책위 체제로 전환됐다.

 

11월 10일, 열린우리당 초청 노사대표자 간담회를 시작으로 민주노총·한국노총과 경총 사이에서 실무급 노사교섭이 진행됐다. 30일 마지막 노사교섭까지 결렬된 날, 한국노총이 정부 법안의 골격을 수용하는 최종안을 발표했다.

1안) 기간제 근로를 1년간 사용한 이후에 갱신되는 1년간은 사용사유를 제한하여 기간제 근로를 2년으로 제한하고 계속 근로기간이 2년을 초과하여 지속된 경우에는 즉시 고용의무를 부과함.

2안) 기간제 근로 계약이 반복갱신된 기간을 포함하여 계속근로기간이 2년을 초과하여 지속된 경우 그 근로 계약은 기간을 정하지 않은 무기근로계약으로 간주함.[32]

민주노총의 비정규직 권리보장 입법안과 노무현 정권의 비정규직 확산법안에서 기간제 관련 핵심 쟁점은 ‘사용사유 제한’이냐, ‘사용기간 제한’이냐에 있었다. 민주노총은 엄격히 제한된 경우에만 기간제 사용을 허용하자는 것이었고, 노무현 정권은 보편적인 기간제 사용을 허용하되 사용기간을 3년 이내로 제한하자는 것이었다. 두 입장은 비정규직의 대대적 확산을 차단할 것이냐 아니면 촉진할 것이냐 하는 점에서 큰 차이가 있었고, 따라서 노·사·정의 사회적 교섭으로는 결코 좁혀질 수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한국노총이 내놓은 1안은 민주노총이 주장하는 사용사유 제한에 입각하되 그 적용을 첫 번째 1년에는 하지 않고 두 번째 1년에만 하자는 것이었다. 2안은 정부가 주장하는 사용기간 제한에 입각하되 그 시기를 3년에서 2년으로 단축하자는 것이었다.

 

한국노총의 최종안은 형식적으로는 민주노총 안과 정부 안을 절충한 것이었지만 실제로는 정부 안의 손을 들어주면서 민주노총을 고립시키기 위한 안이었다. 1안은 사용사유 제한의 취지를 전혀 살릴 수 없는데다가 현실적이지도 않은 안이었기 때문이다.

 

다음날인 12월 1일, 녹색연합, 민주언론운동시민연합, 환경운동연합, 참여연대, 한국YMCA전국연맹, 한국여성단체연합, 함께하는시민행동의 7개 시민단체가 ‘기간제 고용을 2년 한도로 허용하고 2년 후 무기계약으로 전환’하는 방안을 ‘비정규직법안 핵심쟁점에 대한 7개 시민단체 조정안’으로 발표했다. 한국노총 최종안의 2안과 같은 것이었다. 역시 민주노총을 고립시키기 위한 행보였다.

 

지난 1년 동안 민주노총은 투쟁동력을 단호하게 건설해 내는 대신 합리적 타협을 기대하며 사회적 교섭에 매달렸다. 그런데 민주노총이 맞닥뜨린 것은 사회적 교섭 테이블에서 민주노총의 고립이었다. 민주노총은 다시 한 번 민주노총의 입장을 분명히 했다.

우리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절박한 상황을 고려하여 조속한 입법화가 필요하다고 보지만 그 내용 역시 올바른 원칙하에 처리되어야 한다고 본다. 그런 의미에서 다음과 같은 입법 원칙 및 방향을 밝힌다.

1. 정부의 기간제 법안 폐기 및 기간제 엄격 사유제한 …

2. 동일노동 동일임금의 원칙 …

3. 파견법 철폐 및 불법파견 정규직화 …

4. 특수고용 노동자성 인정, 노동3권의 보장 …

5. 간접고용에서 원청의 사용자책임 인정 …

지금 한국노총이 제안하는 수정안은 이러한 원칙에서 벗어나 있기 때문에 비정규직문제의 해결에 실질적인 도움이 되기 어렵다고 판단한다. 현 국면에서 민주노총과의 합의 없이 수정안을 제출하는 것은 공조파기를 의미한다. …

민주노총은 이번 국회에서 비정규권리보장입법을 반드시 쟁취하기 위해 12월 1일부터 진행되는 총파업을 포함하여 모든 노력을 다할 것이다.[33]

12월 1일과 2일, 민주노총은 노사교섭 결렬에 항의하며 총파업을 단행했다. 1일에는 6만 명, 2일에는 2만 명이 참여했다. 5일부터 7일까지는 확대간부 파업을 하면서 3천 명의 상경대오를 조직하여 국회·경총·전경련 앞에서 ‘비정규 악법 국회통과 저지 및 비정규 입법 쟁취를 위한 상경투쟁’을 전개했다. 8일, 다시 총파업을 단행해 6만7천 명이 참여했다.

 

그런데 8일 국회 환경노동위원회 법안심사소위 논의 과정에서 민주노동당 단병호 의원이 기간제 사용사유를 기존 4개에서 10개로 대폭 확대한 수정안을 제출했다.

1. 출산 육아 또는 질병 부상 등으로 인해 발생한 결원을 대체할 경우

2. 계절적 사업의 경우

3. 사업의 완료 또는 특정한 업무의 완성에 필요한 기간을 정한 경우

4. 그 밖에 일시적·임시적 고용의 필요성이 객관적으로 인정되는 경우

5. 휴직·파견 등으로 결원이 발생해 당해 근로자가 복귀할 때까지 그 업무를 대신할 필요가 있는 경우

6. 학업·직업훈련 등을 이수함에 따라 그 이수에 필요한 기간을 정한 경우

7. 전문적 지식·기술의 활용이 필요한 경우와 정부의 복지정책·실업대책 등에 의해 일자리를 제공하는 경우로서 대통령령이 정하는 경우

8. 수출 주문의 예외적 급증이 발생한 경우

9. 기업의 일시적 업무량이 증가한 경우

10. 안전조치를 위한 긴급한 작업을 위하여 필요한 경우[34]

단병호 의원의 수정안 제출은 민주노총 지도부와 긴밀히 교감한 결과였으며, 한국노총과 사전 조율을 거친 것이었다.

비정규직권리보장입법을 둘러싸고 막바지 교섭이 진행 중이다. 민주노총은 그동안 비정규직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조항으로 기간제 사용시 사유제한과 불법파견 고용의제 등을 계속 주장해왔다.

이번에 입법을 하기 위한 시한이 얼마 남지 않은 상태에서 8일 오전 8시 30분 민주노동당 권영길 대표의 초청으로 양대노총 위원장은 간담회를 갖고 사용사유 제한에 대해 논의하였다. 민주노동당은 사용사유 제한의 원칙은 지키되 그 범위를 10가지로 제한하는 수정안을 제안하였다. 한국노총은 이에 환영의 의사를 표하였고 민주노총 역시 민주노동당과 양노총의 동일한 입장으로 제시되는 것이 현 시기 필요하다고 판단한다.

이제 정치권에서 답할 차례이다. 한나라당과 열린우리당은 어렵게 의견을 단일화해서 제안한 만큼 비정규직 문제의 진정한 해결을 위한다면 당리당략에 의한 접근이 아니라 진정성을 가지고 민생을 위한 정치적 판단을 해야 할 것이다.[35]

사회적 교섭 테이블에서 궁지에 몰린 민주노총은 총파업을 하겠다고 뛰쳐나갔다. 하지만 총파업은 누구도 위협할 수 없는 초라한 수준이었다. 국회라는 교섭 테이블에 다시 돌아온 민주노총은 민주노동당 단병호 의원의 수정안을 통해 어설픈 타협안을 내밀었다. 그러나 민주노총의 의지박약과 무기력을 자인하는 어설픈 타협안은, 노무현 정권도 자본가들도 받아들일 이유가 없었다. 민주노총의 어설픈 타협안은 그동안 주장해 온 사용사유 제한의 정당성을 스스로 약화시켰고, 결과적으로 노무현 정권의 사용기간 제한(보편적인 기간제 사용) 입장을 사실상 수용한 것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8일 환경노동위원회 법안심사소위는 단병호 의원의 협조 아래 한국노총 등의 수정안을 반영한 정부 안을 통과시켰다.

비정규직법이 국회에서 심의 중인 가운데 민주노동당 내부에서 수정안을 둘러싼 논란이 벌어졌다. 수정안 철회를 요구하는 이들은 지난 15일 토론회를 연 데 이어 18일 중앙위에서 결의문 채택을 요구하고 나섰다.

이들은 기간제 노동과 관련해서는 당초 근기법 개정을 통한 엄격한 비정규직 사유제한 도입 등 비정규직 철폐안을 제출했으나 법안 심사과정에서 정부가 제출한 기간제법 형식에 따른 일부 조항 의결에 참여했고, 사유제한의 폭도 기존 4가지에서 10가지로 확대하는 등 양보했다고 지적했다. 또 당초 파견법 폐지를 내건 민주노동당이 환노위 법안심의 과정에서 사실상 파견법 존치를 전제로 불법파견 적발시 고용의제 확보 등을 제시했다고 비판했다.[36]

이제 비정규직 확산법안(기간제법 제정안과 파견법 개정안)은 국회 환경노동위원회, 법사위원회, 본회의를 속속 통과하며 입법 처리를 완료할 수순만 남아 있었다.

 

◎ 2006년 비정규직 확산법과 노사관계 로드맵의 통과

 

2006년 2월 21일 민주노총 조준호 보궐 집행부가 당선됐다. 그런데 그 직후인 27일, 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이 국회 경위권을 발동한 가운데 환경노동위원회를 개최하여 비정규직 확산법안을 통과시켰다. 민주노총의 허를 찌른 기습처리였다. 민주노총은 즉각 총파업에 돌입했다. 28일 10만3천 명이 참여했다.

<비정규법안의 문제점>

1. 날치기 과정 : 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이 야합하여 통과시킴

- 2. 22. 한나라당, 민주노동당, 민주당, 국민중심당 등 야4당은 국회에서 원내대표회담을 열고 비정규직법 처리를 차기 임시국회로 미루기로 합의함

- 그런데, 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은 밀실에서 야합하여 2. 27. 국회 환경노동위원회 전체회의를 전격적으로 개최하여 통과시킴

- 사상 유례가 없는 환노위 질서유지권을 발동하고 항의하는 민주노동당 의원들을 폭력적으로 끌어내고 강행하였음

- 환노위 국회의원인 단병호 의원마저도 국회 경위를 동원하여 자리에서 끌어내고는 이를 임의로 무효표로 처리함

2. 기간제 비정규직의 무제한 사용·확대를 초래하는 내용의 법안이 통과 …

- 결국, 이제 2년 이내의 계약직은 우리 사회에서 상징적이고 정상적인 고용형태가 될 것임

3. 파견노동이 사실상 전면 확대하고 불법파견에 면죄부를 주는 법안이 통과됨 …

- 불법파견에 면죄부를 주고 있는 법안임. 즉, 불법파견을 해도 2년까지는 봐주고 반드시 2년이 지나야 고용의제도 아니고 고용의무를 지도록 하였음. 고용의무는 안 따르면 그만이고 과태료 3000만원만 내면 되도록 해버렸음. 사용자들은 마음 놓고 불법파견을 사용할 수 있게 되었음. …

4. 오히려 차별을 용인하고 실효성 없는 차별시정절차를 담고 있을 뿐임[37]

민주노총은 3월 2일에도 총파업을 이어가 18만 명이 참여했다. 1996~97년 총파업 이후 최대 규모의 조합원이 참여한 총파업이었다. 3일, 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이 비정규직 법안의 후속 처리를 4월 임시국회로 연기했다. 민주노총 총파업도 4월로 유보됐다.

 

3월 15일, 4차 노사정대표자회의가 재개돼 노사관계 로드맵을 논의했다.[38] 민주노총은 비정규직 법안 재논의와 장기투쟁사업장 문제해결 등을 전제조건으로 요구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불참했다.

 

4월 10일부터 14일까지 민주노총이 비정규직 법안 강행처리 저지, 노사관계 로드맵 폐기, 무상교육·무상의료 쟁취, 한미FTA 협상 중단을 내걸고 산하 연맹별 순환파업을 전개했다. 특히 14일 금속연맹 총파업에는 12만 조합원이 참여했다.

 

21일, 국회 법사위원회가 비정규직 법안을 처리하려 하자 민주노총이 총파업을 단행해 10만5천 명이 참여했다. 법사위원회의 비정규직 법안 처리가 27일로 연기되자 민주노총은 총파업을 유보했다. 대신 국회 법사위에서 비정규직 법안이 처리되면 그 다음날부터 무기한 전면 총파업에 들어가기로 했다.

 

27일, 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의 관계 악화 때문에 법사위원회가 열리지 못했다. 대신 5차 노사정대표자회의가 열려 노사정위원회 명칭을 ‘경제사회발전노사정위원회’로 개정하는 등의 노사정위원회 개편방안과 노사관계 로드맵의 첫 번째 합의사항으로서 노동위원회 개편방안을 발표했다.

 

5월 16일, 민주노총 중앙집행위원회에 조준호 집행부가 노사정대표자회의 복귀 문제를 논의에 부쳤다. 격론 끝에 23일 속개된 중앙집행위원회는 집행부가 제출한 사업계획에서 “노사정대표자회의 참여를 통해 노사관계 로드맵의 반노동자성을 폭로하고, 노사관계 민주화 방안과 특수고용 노동기본권 등을 쟁점화 한다”는 부분을 삭제했다. 금속, 공무원, 공공, 전교조, 사무금융 등 대규모 연맹들이 줄줄이 노사정대표자회의 복귀에 대해 반대 또는 회의적이라는 입장을 냈기 때문이다. 대신 민주노총 중집은 ‘노사관계 로드맵 저지를 위한 6월 21일 총파업’을 결의했다.

 

그러나 6월 13일 열린 중앙위원회는, 6월 21일 총파업이 각 산별연맹의 자체 일정 때문에 사실상 불가능함을 확인했다. 그러자 노사정대표자회의 불참 방침을 전면 재검토하자는 주장이 강하게 제기됐고 찬반 논쟁 끝에 19일 중집에 결정을 위임했다. 19일 열린 중집은 노사정대표자회의 복귀를 10분 만에 만장일치로 결정했다.

 

민주노총이 노사정대표자회의 복귀를 결정하기까지 노무현 정권은 ‘민주노총의 사회적 교섭 참여를 기다린다’는 메시지를 여러 차례 내보내고 있었다. 민주노총이 복귀하자마자 노사관계 로드맵 논의가 빠르게 진행됐다. 21일 실무회의를 거쳐 7월 6일 6차 노사정대표자회의가 열렸다.

 

7월 12일, 민주노총이 한미FTA 협상 저지, 노사관계 로드맵 저지, 특수고용 노동권 보장을 요구하며 총파업을 벌였다. 9만4천 명이 참여했다.

 

21일, 민주노총이 노무현 정권의 노사관계 로드맵에 대응하여 대안적 노사관계 구축을 위해 ‘민주적 노사관계 구축의 4대 방향, 8대 핵심요구안’을 제출했다.

민주적 노사관계의 4대 방향

1. 국제적 노동기준의 보장 …

2. 비정규 노동자와 산별노조의 노동기본권 보장 …

3. 노사자치의 보장 …

4. 고용안정의 보장 …

8대 핵심요구안 요지

1. 공무원·교수·교사의 노동3권 보장 …

2. 비정규 노동자 노동3권 보장 …

3. 산별교섭 보장과 산별협약의 제도화 …

4. 복수노조하 자율교섭 보장 …

5. 직권중재조항 폐지와 긴급조정제도 요건 강화 …

6. 손배가압류 및 업무방해죄 적용 금지 …

7. 노조전임자 임금지급 금지조항 폐지 …

8. 고용안정 보장[39]

8월 10일, 8차 노사정대표자회의가 열렸다. 이 날까지 전체 논의과제 40개 가운데 23개에 대해 의견일치를 봤고, 나머지 17개는 9월 4일까지 논의하기로 했다. 26일, 9차 노사정대표자회의에서 복수노조와 노조 전임자 문제가 처음으로 다뤄졌다. 9월 2일, 한국노총과 경총이 복수노조 허용과 노조 전임자 임금지급 금지를 5년 유예하자고 사전 합의하여 의견을 냈다.

 

9월 11일, 민주노총을 제외하고 한국노총, 경총, 대한상의, 노동부, 노사정위원회 대표자들이 긴급 노사정대표자회의를 열어 이른바 ‘노사관계 선진화 방안’에 전격 합의했다. 그 내용은 △기업단위 복수노조 허용 3년 유예 △노조전임자 임금지급 금지 3년 유예 △필수공익사업장에 직권중재를 폐지하되 필수유지업무제도 운용 및 쟁의기간 대체인력의 채용·하도급 허용 △필수공익사업장 확대(혈액공급, 항공, 폐․하수처리, 증기·온수공급업) △부당해고 벌칙조항 삭제 △정리해고 사전통보기간을 60일에서 50일로 단축 등이었다.

 

단호하게 투쟁동력을 건설하는 대신 노사정 교섭을 통한 사회적 합의를 모색해 온 민주노총은 다시 한 번 결정적으로 뒤통수를 얻어맞았다.

11일 오후 4시 서울 여의도 동양증권 빌딩 21층 노사정위원회. 한국노총과 정부, 사용자단체가 수십 명의 기자들 앞에서 로드맵에 대한 노사정 합의 결과를 발표하며 서로 손을 굳게 잡고 미소를 짓고 있었다.

같은 시간 동양증권 빌딩 앞에는 20명도 안 되는 사람들이 초라한 모습으로 앉아 있었다. 마이크 소리는 제대로 들리지도 않았고, 맥 빠진 구호와 힘없는 투쟁가가 건물 안팎을 가득 메운 경찰들 사이로 맥없이 울려 퍼지고 있었다.

노사정 합의 소식을 뒤늦게 전해들은 금속연맹과 금속노조 간부들 30여 명이 회의를 중단하고 달려왔지만 초라한 풍경은 그대로였다. “한국노총과 자본의 야합을 결코 좌시하지 않고 투쟁해 나가겠다”는 연설자들의 외침은 공허하게 메아리칠 뿐이었다.

노동조합이 없는 89%, 1천3백만 노동자들의 노동조합 선택권을 또 다시 유린하고, 정리해고 사전 통보기간을 단축해 해고를 쉽게 만들고, 필수공익사업장 확대와 대체근로 인정으로 파업을 어렵게 만드는 법안과 노조간부 임금을 맞바꾼 ‘희대의 야합’이 벌어진 날, 그 많은 민주노총 간부들은 어디에 있었을까? …

한국노총 야합보다 더 절망스런 일이 민주노총의 무기력이다. 민주노총은 지난 주 한국노총과 사용자단체에게 ‘5년 유예 합의’라는 뒤통수를 맞고도 아무런 준비를 하지 않았을 뿐더러, 주말에 벌어진 노사정의 ‘음모’에 아무런 대비도 하지 않았고, 이날 오후 2시 매우 ‘형식적인 집회’를 잡아놓았을 뿐이었다. …

“천만노동자 팔아먹은 밀실야합 박살내자” 민주노총 간부들이 길을 가로막으며 ‘노사정야합’을 규탄했고, 일부 간부들은 이용득 위원장 앞에 드러누워 “나를 밟고 가라”고 외쳤지만, 한국노총 간부들과 이용득 위원장은 경찰의 호위를 받으며 ‘당당하게’ 정부가 지어준 한국노총 건물로 들어갔다.

민주노총이 이런 사태를 막기 위해 전국노동자대회를 열고 강력하게 저항했다면, 최소한  가까운 지역의 간부들을 비상소집해 노사정 야합을 막는 투쟁을 했다면, 한국노총처럼 비상대표자회의를 열어 농성을 벌이면서 ‘야합’에 대비했다면 한국노총이 ‘부끄러운 합의’를 하고도 떳떳하게 걸어 나오는 사태를 목도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허탈하고 참담하고 부끄러운 9월 11일이었다.[40]

11월 15일, 민주노총이 노동법 개악 저지와 노사관계 민주화 입법 쟁취, 비정규 권리보장 입법 쟁취, 한미FTA 협상 저지, 산재보험법 전면 개혁을 내걸고 총파업을 벌였다. 13만 8천 명이 참여했다. 22일에도 총파업을 벌여서 14만 4천 명이 참여했다.

 

29일, 국회 법사위원회가 비정규직 법안을 강행 처리하려 하자 민주노총이 다시 총파업에 나섰다. 16만이 참여했다. 민주노동당 의원들과 당직자들은 법안 처리를 물리적으로 저지하기 위해 법사위원회를 점거했다.

 

30일, 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이 국회 본회의를 열어 기간제법 제정안과 파견법 개정안을 통과시켰다. 민주노동당이 농성 중인 법사위원회를 건너뛰어 의장 직권으로 본회의에 상정해 표결 처리한 것이었다. 30일에도 민주노총은 총파업을 이어갔다. 12만 2천 명이 참여했다.

이번에 날치기 통과된 비정규법은 △임시계약직(기간제) 사용 사유의 무제한 허용 △파견 비정규직의 전면 허용 △실효성 없는 차별해소 방안 △비정규직 노동3권 외면 등을 기조로 하고 있어 비정규직을 더욱 확산하고 차별해소 효과는 미미할 뿐만 아니라, 비정규직의 노동권을 박탈하는 법이다.

정부와 양당은 이제 모든 노동자를 비정규화하여 빈곤과 고용불안의 수렁으로 몰아넣은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우리는 이번 비정규악법을 절대로 인정할 수 없으며 줄기찬 개정투쟁을 지속적으로 전개할 것이고 곧 국회에서 심의에 들어갈 노동법 개악안 저지를 위한 총력투쟁을 강력하게 전개할 것이다.[41]

12월 6일, 민주노총이 노동법 개악저지와 날치기 비정규법 전면무효를 내걸고 총파업에 들어갔다. 15만 명이 참여했다. 7일과 8일에는 국회 환경노동위원회에서 노사관계 로드맵 법안을 다루는 데 맞서 1박 2일 전 간부 상경투쟁을 전개했다. 그러나 법안은 통과됐다.

노무현 정부와 보수양당은 우리가 주장한 민주적 노사관계방안을 끝내 수용하지 않고 노동법개악을 자행하였다. 1500만 노동자의 간절한 염원을 저버리고 오늘 노동법 개악안을 국회환경노동위원회 전체회의에서 강행처리했다. 지난 11월 30일 국회 본회의에서 비정규 확산법 날치기통과에 이어 또 다시 노사관계 법·제도 선진화 방안이라는 기만적인 이름으로 노동법을 개악한 것이다.

이로써 우리나라의 신자유주의 노동유연화제도는 법적으로 완비된 것과 다름없다. 비정규악법으로 비정규노동자를 무제한 확산시키는 길을 열었으며 노동법 개악으로 정규직노동자의 비정규직화를 가속화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이번 통과된 노동법 개악안은 복수노조를 3년 동안 금지하여 노동자의 자주적 단결권을 침해하고, 비정규노동자의 교섭권확보를 봉쇄하였으며, 부당해고의 벌칙조항을 삭제하고, 정리해고 통보일을 60일에서 50일로 축소하여 부당해고를 남발할 수 있게 하였다.

여기에 혈액공급과 항공운수를 포함하여 필수공익사업장을 확대하고, 필수공익사업장의 직권중재제도를 폐지하는 대신에 파업참가자 1/2에 대하여 대체근로를 허용하여 파업권을 제한하였으며, 결국 필수공익사업장노동자의 노동유연화 장치를 만든 것이다. 따라서 앞으로 사용자들의 전횡과 독단이 무소불위로 자행될 것이며 노동자들의 권리는 심각하게 무력화될 것이다.

또한 노조전임자 임금지급금지 조항을 노사자율로 하자는  상식적이고 보편타당한 우리의 주장을 무시하고 3년 동안만 유예하였으며, 공무원노동자의 노동기본권은 거론조차 되지 않았다. 그리고 산별교섭 제도화와 특수고용 노동자의 노동권 보장 문제도 추후 논의하는 것으로 정리하여 이후 노사관계의 갈등과 혼란이 극심해질 가능성을 남겨놓았다. …

우리는 이번에 환경노동위원회 전체회의에서 통과된 노동법 개악안을 절대로 용납할 수 없으며, 본회의 통과를 저지하기 위한 총력투쟁을 진행할 것이며 비정규악법철폐투쟁을 줄기차게 전개해 나갈 것이다.[42]

그런데 8일 민주노총이 국회 환경노동위원회의 노사관계 로드맵 법안 처리를 저지하기 위해 전 간부 상경투쟁을 진행하던 바로 그 시각에, 환경노동위원회 소속 단병호 의원은 법안 처리에 협력하고 있었다.

민주노총 조합원들이 비정규직 법안 통과에 항의하면서 국회 진격투쟁에 돌입하고 있던 바로 그 순간, 국회 환노위에서는 놀랄만한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민주노동당 단병호 의원이 환노위에서 로드맵 법안 처리에 합의하고 있었던 것이다. 열린우리당 의원인 우원식 법안소위장은 “오늘 합의는 역사적으로 대단히 큰 의미가 있다. 여야 노동계가 최초로 합의해서 통과시킨 것이다. 오늘 합의는 끝없이 벌어지는 (노사)갈등을 대화를 통해 해결할 수 있다는 근거를 마련했다”고 평가했다. 이른바 노동자들을 대표한다는 민주노동당이 비정규직 법안 통과에 맞서 노동자투쟁을 조직하는 선봉에 서기는커녕, 비정규직 법안 이상으로 노동운동을 공격하는 악법인 로드맵 법안을 암묵적으로 추인해주는 범죄를 저지르고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한국노동운동을 정치적으로 대표한다고 하는 민주노동당이 노동자계급의 힘을 얼마만큼 싹둑 잘라내고 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다. … 민주노동당은 “반대를 명확히 하되 일부 완화된 수정안이 통과되는 것이 더 낫다”는 판단 하에 환노위 통과를 인정했다. 이것은 애초부터 노동자의 투쟁을 조직해서 자본의 공세에 저항하는 노선 대신 ‘일부 완화된 수정안’을 받아들이는 것이 더 낫다는 실리주의적 투항노선을 민주노동당이 채택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 노동자들을 선거 때 표를 던지는 정도의 힘을 가진 존재 이상으로는 여기지 않는 의회주의 노선의 필연적인 결정판이다.

물론 이것은 민주노동당의 단독 범죄는 아니다. 민주노총의 노조관료들이 공범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했다. 보건의료산업노조 지도부는 노조의 합법적 쟁의권을 조금이라도 보호하기 위해서 ‘파업참가자의 50%까지 대체근로 허용, 정리해고제 사전통보기간 현행 60일에서 50일로 단축, 필수공익사업장 항공사 포함 등’의 독소 조항들이 담긴 로드맵 법안 통과를 ‘양해’하도록 민주노동당 지도부에 종용했다.

결국 민주노동당과 민주노총 관료들 사이의 분업구조가 적나라하게 모습을 드러냈다. 노동조합 관료층은 노동자의 힘을 조직하는 대신 의회주의 정당의 국회의원들에게 의지하고, 이 의회주의 정당의 이른바 노동자들을 대표한다는 국회의원들은 자본가 정당들과의 밀실협약과 거래에 의지하여 노동자의 절박한 생존권과 권리들을 헌납하는 전 세계적으로 악명 높은 분업구조가 나타난 것이다. … 노동자의 힘의 원천인 단결투쟁력을 파괴하거나 그것을 아주 제한적 수준(이른바 교섭을 위한 압력 수단)에만 묶어둔 채 모든 것을 교섭장에서의 자본과의 협상에만 의존하는 노조관료층의 노선을 민주노동당은 의회 차원에서 확대재생산하고 있을 뿐이다. …

이제 막 등장해서, 기껏해야 국회의원 몇 명 정도 배출한 것에 지나지 않은 민주노동당이 벌써부터 이런 모습을 보인다면 미래에 그들이 취할 모습은 더욱 명확해진다. 이런 상황에서는 노동자들을 계급적으로 결집시키는 그릇인 노동자의 정치적 성장은 가로막힐 뿐만 아니라 해체될 수밖에 없다. 문제는 이것이 단순히 민주노동당의 성장가능성을 제거해버린다는 차원을 넘어서서 한국 노동자계급의 잠재력을 무참히 매장해버리는 결과로 이어진다는 것이다.[43]

11일, 민주노총 조준호 위원장이 노동법 개악안 저지를 위해 단식농성에 돌입했다. 12일부터 14일까지 연맹별로 총파업을 포함한 총력투쟁을 전개하고, 본회의가 예정된 15일에는 민주노총 차원의 총파업을 단행하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실제로는 12일부터 14일까지 연맹별 간부상경투쟁 정도가 진행됐고, 15일 총파업도 연기됐다. 민주노총은 다시 19일부터 22일까지 연맹별 간부상경투쟁을 진행했다. 민주노총의 무기력한 투쟁을 비웃듯이, 22일 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은 국회 본회의에서 노사관계 로드맵 법안을 통과시켰다.

오늘 국회 본회의에서 노동법 개악안을 처리할 예정이다. 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은 지난 8일 상임위에서 강행처리한 노동법 개악안을 법사위 통과와 함께 본 회의까지 초고속 통과시키려 하고 있다. 그동안 한나라당이 개방형 이사제 폐지를 위해 사학법 재개정 주장으로 국회파행을 유도하는 몽니를 부리다가 가까스로 본회의를 열기로 합의한 결과가 노동법 개악안과 파병연장안을 처리하는 것이다.

한해를 마무리하고 새해 희망을 염원하는 지금 또 다시 보수양당의 반노동 만행은 우리 사회를 절망에 빠뜨리고 있다. 사용자의 불법적 노조파괴와 노동탄압은 기승을 부리고 있는데 이를 통제할 제도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측의 불법횡포를 합법화해주려는 부정의에 앞장서고 있는 것이 현 국회의 자화상이다.

노무현 신자유주의 노동착취 정부는 거대 재벌들과 외국자본의 배만 불리고 노동자는 사지로 내몰고 있다. 전체 노동자의 절반도 안 되는 정규직을 눈엣가시처럼 못 마땅히 여기며 어떻게든 비정규직화 시키고 비정규직노동자의 차별과 빈곤을 고착시키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다. 뿐만 아니라 시위에 참여한 노동자를 때려죽이고도 5개월이 지나도록 책임은커녕 사과조차 하지 않는 인면수심을 보여주고 있다. 그런데도 보수 정치판은 정치모리배 속성에서 한 발짝도 벗어나지 못하고 당리당략에만 몰두하며 민생은 안중에도 없고 빈곤과 차별, 속박과 불안으로 온 사회가 멍들어 가는 속에서 부패정치만 일삼고 노동악법만 생산하고 있다.[44]

비정규직 확산법안 저지와 비정규직 권리보장입법 쟁취를 위해, 그리고 노사관계 로드맵 저지와 민주적 노사관계 쟁취를 위해 1996~97년 총파업 이후 최대 규모로 전개됐던 민주노총의 2004~06년 총파업은 결국 소기의 성과를 얻지 못했다.

 

그동안 민주노총은 열 번이 훨씬 넘는 총파업을 전개했다. 그러나 비정규직 확산법과 노사관계 로드맵의 통과를 끝내 막지 못했다. 왜 그랬을까? 형식적으로는 많은 총파업을 했지만, 1996~97년 총파업과 달리 실제로는 위력적인 총파업이 전혀 아니었기 때문이다. 총파업을 하는 시늉만 했을 뿐, 악법을 꼭 막아내고 노동자의 요구를 반드시 쟁취하겠다는 확고한 의지를 갖고 총파업을 전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건 왜 그렇게 됐을까?

 

첫째, 민주노총의 중핵인 대기업 정규직 노조들이 단위사업장 차원의 임금·단체협약에만 함몰돼 있었기 때문이다. 대기업 정규직 노조들은 광범한 미조직·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삶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될 비정규직 법안에 대해서도 노동법의 변화에 대해서도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민주노총의 총파업 지침에 따라 형식적으로 파업에 임할 뿐 절실하게 조합원들을 설득해 나가지 않았고, 따라서 파업참여 조합원의 대다수는 집회에 참여하지 않고 그냥 퇴근했다.

 

둘째, 총연맹으로서 민주노총은 비정규직 입법과 노동법 개정에 대해 신경을 쓸 수밖에 없었지만, 단호한 투쟁에 근거한 해법을 추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민주노총 지도부가 추구한 해법은 노무현 정권과의 ‘적절한 타협’이었다.[45] 총파업은 협상의 수단일 뿐이었기에 노무현 정권과의 관계나 국회 상황에 따라 걸핏하면 유보됐다. 산하 노조들을 독려하여 위력적인 총파업을 건설함으로써 노동자의 요구를 반드시 관철시키겠다는 단호한 의지를 민주노총 지도부는 갖고 있지 않았다.

2004년 9월 노무현 정부가 이른바 ‘비정규직 보호법안’을 입법예고한 후 민주노총은 2006년 한 해에만 총파업 돌입 총 14회, 연인원 181만4천368명이 참가한 것으로 보고됐다. 하지만 96~97년 총파업 투쟁 이후 최대라는 2006년 총파업 투쟁은 정부 법안의 골자를 바꾸지도 못했고, 비정규직 고용에 관한 민주노총 소속 노조의 태도를 변화시키지도 못했다. … 2000년대 이후 민주노총 조합원들은 자신의 임금을 방어하거나 혹은 개선할 수 있었지만, 90%의 미조직 노동자들과의 격차가 확대되는 것은 사실상 방관했다. 그 결과 임금과 고용을 방어하는 노동조합 본연의 역할이, 정권과 자본에 의해 집단이기주의로 몰렸는데도 뾰족한 대책이 없는 것이 지금의 상황이다.[46]

비정규직 보호입법이 국회에서 논란이 되었던 2004~06년 동안만 보더라도, 하이닉스매그나칩 사내하청 투쟁, 울산플랜트노조의 투쟁, 완성차 사내하청노조들의 투쟁, 덤프연대의 투쟁 등 비정규직 노동자 투쟁이 폭발하였으나 이것과 권리입법 쟁취투쟁이 결합되지 못했다. 2005년 ‘비정규직 보호입법’과 ‘사회적 교섭’이 논란이 되는 와중에도 비정규직 노조들은 92명의 구속자, 1362명의 해고자(계약만료통보로 인한 해고 제외), 1498억 원의 손해배상·가압류(하이스코의 72억원 제외) 등 무자비한 탄압을 받았으나, 민주노총은 비정규직 노동기본권 문제를 쟁점으로 만들고 권리입법투쟁과 연결시키지 못했다.

비정규직 노조조차도 권리입법 투쟁에 매진하였다고 볼 수는 없다. 비정규직노조 대표자 수준에서는 정세에 대한 공유나 어느 정도의 공동실천이 이루어졌으나, 대표자를 넘어 해당 노조에까지 긴장감이 형성되지는 못했다. 단위 사업장의 현안을 놓고서는 그야말로 치열한 투쟁을 전개하였으나, 권리입법투쟁에 있어서는 그만큼 적극적으로 임하지 않았다. 노동조합 유지 자체가 어렵고 사용할 수 있는 전술이 극히 제한되어 있는 비정규직노조의 조건을 고려한다 하여도, 비정규직 노조마저도 자신의 현안과 권리입법 투쟁을 별개의 것으로 바라보았던 것이다.[47]

5) 2007~08년 이랜드일반노조의 계약직 정규직화 투쟁

 

2006년 말에 제정된 기간제법은 2007년 7월 1일부터 시행됐다. 기간제법 시행을 앞두고 전국 곳곳에서 수많은 계약직 노동자들이 해고당했다. “2년을 초과하여 기간제 근로자로 사용하는 경우에는 그 기간제 근로자는 기간의 정함이 없는 근로계약을 체결한 근로자로 본다”는 기간제법 제4조 2항 때문이었다.

 

기간제법 시행을 앞둔 자본가들의 대응은 크게 두 방향에서 이루어졌다. 대세를 이룬 대응방안은 계약직이 수행하던 업무를 용역·도급 등의 간접고용으로 대체(외주화)하는 것이었다. 기존의 계약직이 용역·도급으로 전환되기도 했고, 아예 새로운 노동자로 대체되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2년 이상 경력자를 포함해 많은 계약직이 해고당했다. 이와 관련 경총은 2007년 5월 「비정규 인력의 합리적 활용과 법적 대응방안」이라는 문서를 통해 “비정규 인력이 담당하는 업무를 도급화해서 해결하는 방법이 가장 현실적”이라고 방향을 제시했다.

 

또 하나의 방향은 직군분리를 통한 무기계약직 도입이었다. 기간제법 제정을 둘러싸고 사회적 논란이 벌어지는 동안 “기간의 정함이 없는 근로계약을 체결한 근로자”는 사실상 정규직을 뜻하는 것이라고 많은 이들이 받아들였다. 그러나 자본가들은 무기계약직이라는 새로운 직군을 도입해서 (기간제법의 차별금지 조항을 비껴갈 수 있는) ‘합리적 차별’의 근거를 마련했다. 통상 무기계약직은 임금과 처우는 계약직과 같고 고용만 보장되는 것으로 설계됐다. 그 무기계약직조차 2년 이상 일한 계약직 가운데 소수만이 될 수 있었다.

 

그런데 기간제법 시행을 하루 앞둔 6월 30일, 이랜드일반노조 조합원들이 계약직 정규직화와 고용보장을 핵심 요구로 내걸고 홈에버 월드컵점에서 점거농성을 시작했다. 7월 20일까지 이어진 이 점거농성은 사회적으로 뜨거운 관심을 받았다. 언론보도가 집중됐고, 노동자·민중의 지지와 연대가 쏟아졌다. 특히 2006년 말 비정규직 확산법안의 통과를 막아내지 못하고서 의기소침해 있던 민주노총이 이 투쟁에서 새로운 희망을 발견하고 달라붙었다.

 

1980년 이랜드라는 패션브랜드로 시작하여 급성장을 거듭한 이랜드그룹은 2006년 프랑스계 대형할인매장 까르푸를 인수하여 홈에버로 이름을 바꾸면서 뉴코아·홈에버·2001아울렛 등을 거느린 거대 유통그룹이 됐다. 까르푸가 이랜드그룹으로 인수합병되면서 이랜드노조와 까르푸노조가 통합하여 2006년 12월 이랜드일반노조를 결성했다. 이랜드그룹에는 뉴코아노조가 또 있었지만, 역사와 조건의 차이 때문에 노조를 통합하지는 않고 공동투쟁을 진행하기로 했다.

 

이랜드일반노조로 통합된 이랜드노조와 까르푸노조는 정규직 중심의 노조가 계약직에게도 문호를 열고 계약직의 노동조건 개선과 정규직화를 위해 투쟁해 온 공통의 역사를 갖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2006년 까르푸 매각과 비정규직법 개악을 겪고 2007년 기간제법 시행이 다가오자 계약직들이 고용불안을 느끼고 노조에 대거 가입했다.

 

이랜드그룹은 기간제법 시행을 앞두고 산하 기업들에서 1천여 명의 계약직을 해고하고 용역으로 전환했다. 한편 홈에버가 6월 15일 “3천여 명의 비정규직 중 2년 이상 된 1천여 명을 직무급제 정규직으로 전환한다”고 발표했는데, 직무급제 정규직은 무기계약직을 뜻했다. 그런데 까르푸 시절 노조가 쟁취한 단체협약에는 “18개월 이상 근무한 계약직은 계약기간 만료 때 계약을 해지하지 못한다”는 조항이 있었다. 즉 18개월 이상이면 자동으로 무기계약직이 되는 것인데, 2년 이상 경력자를 채용 절차를 거쳐 무기계약직으로 전환하겠다는 것이었다. 노조는 회사 방침에 대해 “노조파업을 무력화시키고 노동자를 분열시키기 위한 악질 사기극”이라고 비판했다.

 

이랜드일반노조와 뉴코아노조는 기간제법 시행을 앞둔 이랜드그룹의 계약직 대량해고와 외주화(아웃소싱), 분리직군제 도입에 맞서 공동투쟁을 시작했다. 두 노조는 6월 10일, 17일, 23일 공동파업을 전개했다. 특히 23일에는 이랜드그룹에서 가장 많은 매출을 기록하는 홈에버 월드컵점을 점거했다. 1층은 이랜드일반노조가, 2층은 뉴코아노조가 계산대를 점거하고 고객들에게 양해를 구했다. 24일에는 뉴코아 강남점에서 매장 진입을 시도했다. 26일에는 뉴코아 야탑점과 홈에버 야탑점, 27일에는 뉴코아 일산점과 홈에버 일산점에서 파업을 벌였다. 뉴코아노조는 조합원 대다수가 정규직이었지만, 이랜드일반노조는 조합원 다수가 고용불안에 쫓겨 막 노조에 가입한 계약직들이었다. 파업도 집회도 처음이었다. 아직 별다른 교육도 받지 못한 상태였다.

 

기간제법의 시행을 하루 앞둔 30일 오후 12시 30분, 이랜드일반노조 조합원 600여 명이 홈에버 월드컵점 점거농성에 들어갔다. 노조의 핵심 요구는 3개월 이상 근무자 고용보장, 2년 이상 근무자 정규직 전환, 사내도급 중단, 민형사징계 면제 등 네 가지였다.

매장을 점거하고 앉은 여성노동자들은 “우리가 언제 그런 법을 만들어 달랬다고 비정규직법을 만들어서 우리를 길거리로 내쫓냐”고 분노했다. … 대부분의 여성노동자들은 기혼이었다. 특히, 캐셔들 가운데는 40대 이상이 많았다. 이들 중에는 이혼하거나 사별해서, 또는 홀로 벌어서 생활하는 여성 가장으로 생계를 책임지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들에게는 한 달 일해 받는 80만 원이 유일한 생계비였다. 그런데 갑자기 회사가 계약을 중단하고 퇴사시키면서 생계를 위협받고 있었다.[48]

오후 4시, 민주노총·민주노동당·학생 등 연대대오 100여 명이 결합했다. 오후 9시, 뉴코아 강남점의 킴스클럽을 봉쇄하다 온 뉴코아노조 조합원 700여 명이 합류했다.

 

애초 이랜드일반노조 지도부의 계획은 1박2일 점거농성이었다. 그러나 점거 첫날부터 조합원들은 ‘힘들게 들어왔는데 이대로 나갈 수 없다’는 입장을 보였다. 지도부는 고심하다가 분회토론과 전체 토론을 통해 결정하기로 했다. 분회 토론과 전체 토론에서는 ‘무기한 점거’ 의견이 쏟아졌다. 결국 조합원 투표에서 압도적으로 무기한 점거농성을 결정했다. 조합원 스스로의 결정이었다.

 

조합원들은 이후 경찰병력에 의해 끌려나오기까지 21일 동안 힘차게 점거농성을 이어갔다.

투쟁 주체는 다수가 당시 ‘아줌마’, ‘주부사원’으로 불리던 40대 전후의 기혼 여성노동자들이었다. … 이들 대부분은 510일 투쟁 이전에는 노조활동의 경험이 없었고, 작업장 안에서도 일에 쫓겨 몇몇 자신의 주변 동료 이외의 사람들과는 서로 얼굴만 아는 정도였다. 또 일자리를 지키기 위해 관리자들이 시키면 시키는 대로 일해 왔다. 그런데 월드컵점 점거농성장에서 이들은 자신들의 요구와 결의로 지도부의 1박2일 계획을 전복시켜서 진행한 20일 투쟁과정에서 새로운 경험을 하였다. 매장의 주인이 자신들이라는 것을 확인한 것이다. 거대한 매장이 여성노동자들이 손을 놓는 순간 멈춰 섰고, 스스로가 꾸려 나가는 공간이 된 것이다.

그 과정에서 이들은 다양한 연대세력들을 만났고 이들의 발언과 여러 강의를 통해 노동자의 권리를 이해했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이들이 같이 일했던 동료인 여성노동자들을 알아갔다는 것이다. 교대해서 집에 가면 냉장고를 털어 농성하는 동료를 위해 음식을 만들어 바리바리 싸왔다. 농성장에서는 자발적으로 나선 이들이 매끼 수백 명의 밥과 국을 하면서도, 그것이 동료들을 위한 투쟁이라며 기꺼이 했다. 그렇게 만들어진 음식으로 수십 끼를 같이 먹으며 이들은 ‘식구’가 되어 갔다. 무엇보다 이들에게는 서로 이야기를 나눈 밤이 있었다. 20일 밤을 계산대 사이사이에 모여 서로 살아온 이야기와 현실 문제, 현장 문제와 위축되어 대응하지 못했던 자신들의 모습 등 수년을 같이 일해도 나누지 못했던 삶과 현장의 이야기를 쏟아냈다. 그 과정에서 여성노동자들은 서로에게 ‘또 다른 나’를 발견했고, 진한 동료애로 서로를 껴안을 수 있었다. 이들은 ‘여성’으로 그리고 ‘노동자’로 일과 가사노동·돌봄노동을 병행해야 하는 조건에 있는 동료들의 상황을 누구보다도 잘 이해할 수 있었다.[49]

7월 8일, 이랜드일반노조와 뉴코아노조 그리고 민주노총이 오전 10시부터 오후 10시까지 이랜드계열 전국 유통매장에 대한 매출타격투쟁을 벌였다. 전국적으로 5천여 명이 연대투쟁에 나서면서, 애초 계획한 12개를 넘어 20개 매장에서 점거농성을 벌였다. 회사는 점거농성이 벌어지면 매장을 닫는 것으로 대응했다. 뉴코아노조는 이날 회사와 경찰의 대응이 전국적으로 분산된 틈을 활용하여 뉴코아 강남점을 점거하고 농성을 시작했다.

 

민주노총은 11일부터 20일까지를 전국 불매운동 1차 집중시기로 정하고 80만 조합원에게 뉴코아 아울렛, 뉴코아 백화점, 킴스클럽, 홈에버, 2001아울렛 등 이랜드그룹 5개사에 대한 불매운동에 참여할 것을 지침으로 내렸다.

 

13일, CBS가 홈에버 월드컵점 점거농성에 대한 여론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비정규직 파업 사태의 책임이 정부에 있다는 의견은 31.9%, 사업주에 책임이 있다는 의견은 24.4%였다. 정부와 사업주의 책임이라는 의견이 절반을 넘어 55.3%에 이른 반면 노조에 책임이 있다는 의견은 23.2%였다.

 

16일, 민주노총과 민주노동당을 중심으로 시작된 이랜드 불매운동에 참여연대, 한국여성단체연합, 녹색연합 등 57개 시민사회단체가 합류했다.

 

20일, 경찰병력이 홈에버 월드컵점과 뉴코아 강남점의 농성장을 침탈해서 농성자들을 모두 연행했다. 점거농성을 시작한 지 월드컵점은 21일, 강남점은 13일만이었다.

9시 50분, 조합원들이 앉은 곳을 제외한 전 매장 안에 들어온 경찰이 경고방송을 시작했다. 경찰의 방송 소리에 모두 입에 호루라기를 꺼내 물고 불어대기 시작했다. 그러고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구호를 외쳤다.

“일하게 해달라는데 공권력투입 웬 말이냐.”

“비정규직도 사람이다. 노무현 정권 물러나라.” …

국회의원들은 체포영장이 발부된 김경욱 위원장을 가운데 두고 경찰의 강제연행에 항의했다. … 경찰은 5~6명씩 달려들어 남성조합원들을 먼저 연행하기 시작했고, 여경들은 여성조합원들을 한 명씩 끌어냈다. 조합원들은 뿔뿔이 끌려 나가기 직전 “경찰 조사 받고 나오는 대로 다시 싸우자”고 서로의 손을 움켜쥐었다. …

연행 시작 1시간도 채 못 된 10시 55분, 강제해산을 위한 경찰의 진압작전은 위원장의 연행으로 종료됐다. 위원장은 끝까지 놓지 않았던 조합원과 마지막 포옹을 하고 경찰에 검거됐다.[50]

이날 민주노총은 농성장 공권력 침탈에 항의하며 전국 12개 이랜드계열 유통매장에서 항의투쟁을 전개했다. 각 매장마다 수백여 명의 민주노총 조합원들이 항의투쟁에 동참해서 산발적인 매장 진입과 점거, 결의대회, 기자회견 등을 진행했다.

 

21일, 민주노총이 이랜드계열 전국 유통매장에 대한 2차 매출제로투쟁을 벌였다. 오전 10시부터 오후 10시까지 전국 33개 매장 앞에서 집회와 기자회견을 했고, 다른 28개 매장에서도 1인 시위와 불매운동을 벌였다.

 

22일, 이랜드일반노조가 홈에버 중동점을 기습 점거했다가 철수했다. 20일 연행됐다 석방된 조합원들까지 300여 명의 조합원들이 참여했다. 23일에는 뉴코아 강남점 앞 시위, 24일에는 홈에버 월드컵점 타격투쟁이 전개됐다.

 

27일, 홈에버 월드컵점 앞에서 ‘비정규 노동자 대량해고 이랜드규탄 민주노총 총력결의대회’가 열렸다. 3천여 명이 참여했다. 집회를 마친 노동자들은 매장 진입을 시도하다 이를 가로막는 경찰들과 격렬한 몸싸움을 벌였다. 월드컵점의 셔터가 20일 공권력 투입 이후 처음으로 다시 내려졌다.

 

29일, 뉴코아노조와 이랜드일반노조 조합원 600여 명이 뉴코아 강남점을 다시 점거하고 점거농성을 이어갔다. 31일 새벽, 경찰이 투입돼 농성 조합원들을 모두 연행했다. 이날 민주노총은 이랜드-뉴코아 투쟁과 관련해서 긴급 산별대표자회의를 열고 투쟁수위를 높이기로 결정했다. 8월 13일부터 문제해결 때까지 1천여 명의 ‘이랜드 타격투쟁 중앙선봉대’를 운영하기로 했다. 18일에는 5만여 명이 참가하는 노동자대회를 전국동시다발로 개최하고 21일에는 이랜드-뉴코아 투쟁을 단일 안건으로 임시대의원대회를 개최하기로 했다.

 

8월 5일, 민주노총이 이랜드계열 전국 유통매장에 대한 3차 매출타격투쟁을 벌였다. 전국 12개 매장에서 타격투쟁이 전개됐는데, 홈에버 전주점을 200여 명의 조합원이 일시 점거했다. 노동자의힘, 다함께, 문화연대, 민교협, 인권단체연석회의, 이윤보다인간을 등 노동사회단체들이 ‘비정규직법 폐기와 뉴코아-이랜드투쟁 승리’를 위해 세종로 소공원에서 시국농성에 돌입했다. 9일, 민주노동당이 당의 사활을 걸고 이랜드사태 해결, 비정규악법 재개정 및 비정규 노동자들의 권리보장을 위한 투쟁에 나서겠다고 선언했다.

 

16일, 민주노총의 1천인 선봉대 발대식이 홈에버 목동점에서 열렸다. 700여 명이 참석했다. 17일, 민주노총 선봉대 400여 명이 비정규악법 전면 재개정과 이랜드그룹 박성수 회장 구속을 요구하는 항의서한을 대통령에게 전달하기 위해 청와대를 향했으나 광화문 인근에서 경찰에게 저지당했다.

 

18일, 민주노총이 전국동시다발 노동자대회를 열어 전국 11개 지역에서 이랜드계열 유통매장 12곳을 봉쇄했다. 서울역에 모인 3천 명은 둘로 나뉘어 홈에버 월드컵점과 뉴코아 강남점을 봉쇄했다. 전국적으로 9천 7백 명이 참여했다.

 

21일, 민주노총 임시대의원대회가 열렸다. 민주노총은 이랜드일반노조와 뉴코아노조 조합원들의 투쟁에 전 조직 역량을 모으기로 했다. 우선 이랜드일반노조와 뉴코아노조 조합원 800여 명에게 1인당 월 50만원씩의 생계비를 9월부터 12월까지 지원하기로 했다. 이에 필요한 월 4억 원의 투쟁기금은 민주노총과 산하조직의 모금 등으로 충당하기로 했다. 또한 추석 직전인 9월 15일부터 21일까지를 집중타격투쟁 기간으로 잡고 단위노조 대의원 이상 2만여 명이 참석하는 전국동시다발 매장봉쇄투쟁을 진행하기로 했다. 특히 9월 18일과 19일은 전 간부가 서울로 상경해 수도권 12개 매장을 전면 봉쇄하는 투쟁을 벌이기로 했다.

민주노총 80만 조합원의 힘으로 860만 비정규 문제를 해결하자!

오늘 우리는 80만 조합원의 대표자격으로서 이랜드 투쟁의 승리를 위한 총력투쟁에 나설 것을 힘차게 결의하였다.

이랜드 문제는 이 땅 860만 비정규직 문제 그 자체이다. 우리는 민주노총의 이름으로 이랜드 투쟁의 승리를 위해 강력한 지지연대투쟁에 나서 비정규직 완전철폐를 위한 승리의 대항쟁에 불을 지펴 갈 것이다. 오늘의 결의를 시작으로 지난 두 달여간 보여 왔던 계급적 단결과 연대정신 그 이상의 투쟁력을 발휘하여 승부를 내야 할 때다.

지금부터 9월말까지 한 달 간의 기간이 이랜드 투쟁의 최대 승부처이며 분수령이다. 바로 이 기간에 투쟁에 최대 집중하여 비정규직을 탄압하는 악덕기업이 이 땅에 설 자리가 없도록 바로 우리 손으로 바꿔나가자.

이에 우리는 이랜드 투쟁의 완전승리를 위해 다음과 같이 힘차게 결의한다.

하나, 우리는 비정규직 철폐를 위해 이랜드투쟁이 승리할 때까지 지역별 매장봉쇄투쟁을 비롯한 모든 투쟁에 전조직적으로 나설 것을 힘차게 결의한다.

하나, 우리는 전조직적인 이랜드 불매운동을 확산하며 전 국민적인 불매운동으로 발전시켜 나갈 것을 힘차게 결의한다.

하나, 우리는 9월말 추석 전 매출봉쇄 집중투쟁, 불매운동 강화, 이랜드 투쟁기금 조성 등 대의원대회 결의사항을 가맹산하조직, 단위노조 등에 이르기까지 철저히 사수해 나갈 것을 힘차게 결의한다.

하나, 우리는 이랜드뿐만 아니라 비정규 투쟁사업장 문제 해결을 위한 적극적인 연대투쟁을 조직하고 860만 비정규 노동자 조직화를 위한 사업에 박차를 가해 나갈 것을 힘차게 결의한다.

하나, 우리는 이랜드 지지투쟁에 머물지 않고 하반기 비정규법 전면 재개정 쟁취투쟁을 전개하며, 노무현정권의 비정규정책과 신자유주의 세계화정책 폐기를 위해 강력한 하반기 투쟁을 전개해 나갈 것을 힘차게 결의한다.[51]

22일, 전북 농민들이 쌀 27가마를 이랜드일반노조와 뉴코아노조에 전달했다. 29일에는 전국농민회총연맹이 쌀 50여 포대를 두 노조에 전달했다.

 

24일, 이랜드일반노조, 뉴코아노조, 철도노조 KTX 승무원지부, 금속노조 기륭전자분회의 조합원 1천여 명이 기륭전자 정문 앞에 모여 ‘비정규 여성노동자 공동투쟁 연대결의대회’를 가졌다.

 

25일, 민주노총이 전국 11개 이랜드계열 유통매장에서 6차 매출제로투쟁을 벌였다. 26일, 이랜드일반노조 조합원 250여 명이 홈에버 월드컵점을 기습 점거했다가 철수했다.

 

31일, 민주노총이 16일부터 활동한 1천인 선봉대의 해산식을 가졌다. 매일 두 곳씩 이랜드계열 매장의 봉쇄를 목표로 했던 선봉대 활동은 나름 의미가 있었지만, 한계도 분명했다. 선봉대 1천 명을 각 연맹별로 할당했지만, 실제로 선봉대에 참여한 숫자는 평균 478명에 그쳤다. 각 연맹에서는 연맹 간부들을 선봉대에 배치하는 방식으로 대응했다. 현장 조합원들 속으로는 전혀 파고들지 못했다. 민주노총 1천인 선봉대가 운영되는 동안 이랜드일반노조와 뉴코아노조의 파업참여 조합원은 평균 494명이었다.

 

9월 3~4일, 민주노총이 중앙집행위원회를 갖고 이랜드계열 전국 유통매장에 대한 추석기간 집중타격투쟁을 12일과 13일, 15일과 16일 두 차례 진행하기로 결정했다.

 

8일, 민주노총과 이랜드-뉴코아 노조가 국회 앞에서 1천3백여 명이 참가한 가운데 집회를 가진 뒤 홈에버 월드컵점과 뉴코아 강남점으로 이동해 봉쇄투쟁을 전개했다. 이랜드그룹은 민주노총의 추석기간 집중투쟁을 앞두고 교섭에 나섰는데, 뉴코아에 대해서는 외주화 철회 등의 진전된 안을 낸 반면 홈에버에 대해서는 완강한 태도를 고수하면서 두 노조를 분리하려는 술책을 썼다. 결국 11일 두 노조는 각각 노조 총회를 갖고 교섭을 분리하기로 결정했다. 뉴코아노조는 민주노총의 추석기간 집중투쟁이 예정된 12일부터 14일까지 매장타격투쟁을 유보하고 교섭에 집중하기로 했다. 반면 이랜드일반노조는 매장타격투쟁에 집중하기로 했다. 뉴코아노조의 교섭 타결 가능성이 회자되면서 민주노총의 추석기간 집중투쟁 동력은 크게 이완됐다.

 

12일부터 14일까지 이랜드일반노조는 민주노총과 함께 매장타격투쟁을 전개했다. 12일에는 중계점, 13일에는 일산점·중동점·병점점, 14일에는 목동점과 시흥점에 집중했다. 그 기간 교섭에 집중하기로 했던 뉴코아노조는 타결에 이르지 못했다.

 

15일, 민주노총이 1박2일로 예정된 이랜드-뉴코아 2차 집중타격 상경투쟁 일정을 시작했다. 여의도에 1천여 명이 모여 결의대회를 가진 뒤 홈에버 월드컵점으로 이동해 봉쇄투쟁을 전개했다. 16일 새벽 1시, 이랜드일반노조 조합원 200여 명이 홈에버 면목점을 기습 점거했다. 소식을 전해들은 연대 대오 100여 명이 농성현장에 합류했다. 새벽 4시경 경찰병력이 투입돼 조합원들을 폭력적으로 연행했다.

대오를 이끌던 홍윤경 직무대행이 맨 먼저 끌려 나왔다. 홍윤경 직무대행은 연행되기 직전 “경찰의 군홧발이 여성노동자를 짓밟을 수는 있지만 우리는 짓밟혀 쓰러지지 않는다”고 외쳤다. … 뒤이어 조합원들이 줄줄이 전투경찰들과 긴급히 투입된 100여 명의 여경들에 의해 폭력적으로 연행됐다. 경찰 투입 20여 분만에 상황은 끝났다. 조합원들이 앉았던 자리에는 깔고 앉았던 박스만이 남아 있었다.[52]

추석 대목은 이랜드그룹 전체 매출의 30% 이상을 차지하고 있었다. 따라서 민주노총의 이랜드계열 전국유통매장에 대한 추석기간 집중타격투쟁은 결정적인 승부처였다. 만일 민주노총이 8월 21일 임시대의원대회에서 결의한 대로 9월 15일부터 21일까지 2만여 명이 참석하는 전국동시다발 매장봉쇄투쟁을 전개했다면 이랜드 자본에게는 엄청난 압박이 됐을 것이다. 그러나 이 결정적인 승부처에서 민주노총은 전혀 총력을 집중하지 않았다. 이랜드그룹이 흘리는 교섭타결 가능성에 현혹돼서, 또는 스스로 한 대의원대회 결의조차 우습게 여기는 잘못된 관행에 빠져서 투쟁동력 건설을 방기했다. 실제로 진행된 집중타격투쟁은 애초의 결의와는 너무나 달랐다. 이랜드 자본을 전혀 압박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민주노총은 8월 21일 임시대의원대회에서 “지금부터 9월말까지 한 달 간의 기간이 이랜드 투쟁의 최대 승부처”라면서 “지난 두 달여간 보여 왔던 계급적 단결과 연대정신 그 이상의 투쟁력을 발휘하여 승부를 내야 할 때”라고 했다. 따라서 “대의원대회 결의사항을 가맹산하조직, 단위노조 등에 이르기까지 철저히 사수해 나갈 것을 힘차게 결의”했다. 그러나 결과는 그와 전혀 달랐다. 민주노총 스스로 “이 땅 860만 비정규직 문제 그 자체”라고 했던 이랜드-뉴코아 투쟁을 패배로 몰고 간 결정적인 지점이었다.

 

이후에도 이랜드일반노조와 뉴코아노조의 파업투쟁은 계속 됐다. 그러나 결정적인 승부처를 놓치고 난 뒤, 두 노조의 투쟁은 하염없는 장기전으로 빠져들었다. 민주노총의 연대 동력은 크게 가라앉았다. 상황을 반전시킬 계기도 만들어내지 못했다.

 

승리의 전망을 놓쳐버린 힘든 싸움이었지만, 이랜드일반노조 조합원들은 2008년 11월 13일까지 총 510일 동안 끈질기게 투쟁을 이어 나갔다.

여성노동자들은 아이들을 챙기고 가사노동을 하면서 또 나이 든 부모의 병간호를 맡아 하면서도 510일을 견디고 저항했다. 남편과 갈등하거나 시부모의 비난을 받으면서도 ‘노동자’인 자신의 위치를 지키기 위해 투쟁의 현장으로 나왔다. 더욱이 가장으로서 가정의 경제를 책임져야 했기에 투쟁이 길어지자 밤에는 아르바이트를 하고 낮에는 투쟁의 자리를 지켰다. 이들은 자신의 일자리를 지키기 위한 것만이 아니라, 자식의 세대, 다음 세대까지 비정규직을 물려줄 수 없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

여성노동자들은 월드컵점 점거농성에서 쌓인 ‘동료애’를 바탕으로 서로 의지하기도 하고, 동료에게 의리를 지키기 위해 긴 투쟁을 이어 나갔다. 이들은 노동자로서 안정된 조건에서 일하고 싶다는 기본적인 요구를 하던 동료들을 끌고 간 이랜드자본과 정부의 탄압에 분노했다. 즉, 동료애와 분노는 동전의 양면처럼 여성노동자들이 강하고 질기게 510일을 거리에서 저항하게 했던 힘이었다.[53]

2008년 8월 29일 뉴코아노조가 파업 434일 만에 회사와 합의하고 현장으로 복귀했다. 계약만료된 계약직 36명의 재고용, 노조간부 18명의 해고 수용, 노조간부 대상 손해배상소송 철회(노조와 민주노총 등 연대단위를 대상으로 한 손해배상소송은 유지), 2010년까지 무파업이 요지였다.

노조 간부를 포함해 조합원 대부분이 정규직인 뉴코아노조가 500일 가까이 비정규직 문제를 놓고 벌였던 ‘아름다운 투쟁’은 결국 뉴코아 사측의 완승으로 끝난 셈이다. 이번 합의로 뉴코아 노사의 극단적 갈등은 종료됐지만, 같은 이랜드그룹의 홈에버를 상대로 아직 파업을 이어가고 있는 이랜드일반노조는 큰 부담을 안게 됐다. … 뉴코아노조가 이 같은 합의안에 도장을 찍은 배경과 관련해 경제적 문제 등의 현실적 어려움이 작용한 것으로 알려졌다.

김형근 민주노총 서비스연맹 위원장은 “더 연대가 붙기도 어렵고 사회적 이슈로 주목 받는 것도 한계가 온 상황에서 시간만 보내는 것은 한계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또 다른 노동계 관계자는 “정규직인 뉴코아 간부들이 오랜 파업에서 비롯된 경제적 어려움과 각종 손배소로 인해 아파트까지 가압류되는 등 어려움을 많이 겪었다”며 “그런 환경들이 노조 간부들로 하여금 ‘어떻게든 이 상황을 정리하고 싶은’ 마음으로 내몬 것 같다”고 말했다.

결국 최근 유행처럼 번지고 있는 파업 중인 노동자에 대한 수십억 대의 손해배상 소송이 노조를 무릎 꿇게 한 셈이다.[54]

11월 13일 이랜드일반노조도 회사와 합의하고 현장으로 복귀했다. 끝까지 투쟁한 조합원 180여 명의 현장 복귀, 16개월 이상 근무한 계약직의 무기계약직 전환이라는 성과를 얻었다. 그러나 노조간부 12명의 해고를 노조와 당사자가 수용한다는 참혹한 내용이 포함됐다.

총회 때 찬반투표를 했는데, 전 반대했죠. … 투쟁이 패배할 수는 있는데, 사직서를 받는 대신에 돈을 받는 거잖아요? … 투쟁을 마무리하면서 실력이 안 되면 해고자들을 복직 못 시키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거지. 나머지 조합원들이 현장에 복직해서 추후를 도모할 수는 있잖아요? 그렇게라도 들어가야지요. 그런데 그걸 넘어서서 사직서를 받는 방식은 아예 해고자들을 내치는 거잖아요. 회사는 “해고자들을 잘라내라. 이 강성들을”, 거기에 동의해 준 거지요. 그러니까 단순히 사직서 쓰는 차원이 아니죠. 그런데도 통과됐죠. 조합원들이 경제적 어려움이 극에 달하고 있었기 때문에 끝내는 게 중요했어요. “이후를 도모하자” 이런 것도 없어요. 솔직히 말하면 “무조건 끝내자” …

합의 없이 투쟁을 마무리하고 싶으면 비해고자들을 복귀 전술을 쓰고 해고자들은 남아서 이 비해고자들이 적응할 수 있게 도와주고, 조직을 복원하는 데 활동가로서 충분히 할 수 있어요. 그런 전술을 쓸 수 있는데, 이 전술을 안 쓰고 임금인상을 받아 복직자들한테 명분을 준다는 의미죠. 대신에 … 해고자를 내친다는 거예요. … (서형태, 병점)[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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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김기일(비정규직전국모임 대표), 1999, 「비정규직 노동자의 입장에서 본 한라중공업 파업투쟁」, 『민주노동과 대안』 12월호.

[2] 대법원은 일찍이 1996년 4월 판결을 통해 학습지교사의 근로기준법상 노동자성을 부정했다. 학습지교사의 노동조합법상 노동자성은 오랜 투쟁과 법적 다툼 끝에 2018년 6월 대법원 판결을 통해 인정됐다.

[3] 부산지역일반노동조합, 2000/04/01, 「창립결의문」.

[4] 화물연대 파업에 대한 업무개시명령은 2022년 11월 윤석열 정권에 의해 처음 발동됐다.

[5] 박일수(현대중공업 사내하청 노동자), 2004/02/14, 「유서」

[6] 울산건설플랜트 노조, 2005, <2005 울산건설플랜트 파업투쟁 때려! - 76일간의 파업일지>(영상)

[7] KTX 승무원들은 2010년 1심과 2011년 2심에서 ‘철도공사와 직접 근로관계가 인정된다’고 하여 승리했으나 2015년 대법원이 직접 근로관계를 인정하지 않으면서 최종 패소했다. 그런데 2018년 ‘양승태 대법원 사법농단’ 사건이 터지면서 KTX 대법 판결이 박근혜 정권 청와대와 대법원이 협조한 사례 가운데 하나였던 것으로 밝혀진다. 2018년 철도공사가 철도노조와 KTX 해고 승무원 복직을 합의했다.

[8] 윤애림, 2016, 「2000년대 비정규직 연대운동과 노동기본권 쟁취 투쟁- 전국비정규직노조연대회의의 권리입법 투쟁을 중심으로」, 『산업노동연구』 22권 1호, 191~192쪽.

[9] 안기호(현대자동차 사내하청 노동자), 2003/04/28, 「비정규직도 인간이다! 인간답게 살아보자! - 현대자동차 비정규직 인간선언」.

[10] 현대차노조, 2003/07/08, 「비정규직 독자노조 추진에 대한 우리의 입장 - 현대자동차노동조합 상무집행위원 일동」, <중앙쟁대위 속보>. 2002~03년 현대차노조는 ‘중앙파’인 민노투 집행부가 이끌었다. 한편 2003년 7월 하순 현대차노조 위원장이 사측에게 파업중단 요청과 함께 2억 원을 받은 사실이 2007년 1월 사측에 의해 폭로됐다. 그가 사측에게 돈을 받은 시점은 정규직 노조의 방해를 딛고 비정규직 노조가 설립된 지 불과 보름 정도 뒤였다. 뇌물 수수 사실이 폭로되면서 구속된 그는 징역 2년을 선고받아 복역했다.

[11] 맨아워(Man-Hour)는 한 사람이 한 시간에 하는 일의 양이다. 완성차 조립공정에 신차가 들어오면 전체 작업공정이 달라지는데, 이에 따라 맨아워 조정이 이뤄진다. 통상 자본은 신차 투입을 계기로 자동화, 외주모듈화, 노동강도의 수준을 높임으로써 작업에 투입되는 노동자의 숫자를 줄이려고 했다. 맨아워 협의에 임한 정규직 대의원들이 줄어드는 작업자의 수를 사측과 합의하면, 사측은 그 수만큼 사내하청 노동자를 정리해고 했다.

[12] 서영호·양봉수 열사회, 2025, 『현대차 열사·희생자 백서』, 류기혁 편.

[13] 이 때 생산공정 비정규직의 8~90%를 차지하는 1차 하청 전체가 불법파견 판정을 받았다. 현대차에는 이들 말고도 생산공정에 2·3차 하청이 존재했으며, 그밖에도 식당·청소·통근버스·조경·경비 등 다양한 분야에 사내하청이 존재했다.

[14] 민주노총, 2004/12/09, 「현대자동차 사내하청 노동자 전원 불법파견 확인... 즉각 정규직화 해야」.

[15] 서영호·양봉수 열사회, 2025, 『현대차 열사·희생자 백서』, 류기혁 편.

[16] 현대차 비정규직노조, 2005/01/18, 「생산을 멈춘 5공장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파업현장」, <현자비정규직노조>.

[17] 서영호·양봉수 열사회, 2025, 『현대차 열사·희생자 백서』, 류기혁 편.

[18] 2004~05년 현대차노조는 다시 ‘현장파’인 민투위 집행부가 이끌었다. 민투위 집행부는 2001년에 7·5 총파업에 불참한 데 이어 2004~05년에는 비정규직의 불법파견 철폐 투쟁을 배신했다.

[19] 2006년 현대차노조는 ‘중앙파’인 민노회 집행부가 이끌었다. 결과적으로 현대차에서 국민파·중앙파·현장파는 번갈아 가며 비정규직을 배신했다.

[20] 이후 2005년 비정규직 해고자들이 현대차를 상대로 근로자지위를 확인해 달라며 제기한 민사소송에서도 지방법원과 고등법원은 자본의 손을 들어주었다. 그러나 2010년 7월 대법원은 ‘현대차 사내하청은 불법파견’이라는 취지로 사건을 파기환송했다.

[21] 서영호·양봉수 열사회, 2025, 『현대차 열사·희생자 백서』, 류기혁 편.

[22] 노무현 정권은 정권 초기인 2003년 3월, 민주노총 지도위원을 역임한 김금수를 노사정위원장으로 임명하면서 민주노총을 노사정위원회에 다시 끌어들이고자 했으나 민주노총은 여전히 불참하고 있었다. 민주노총 안에는 사회적 교섭에 찬성하는 세력이 많았지만, 1998년 2·6 정리해고 도입 합의 같은 쓰라린 경험 때문에 노사정위원회 복귀를 쉽사리 밀어붙일 수 없었다.

[23] 2004년 4월 총선에서 민주노총의 전폭적 지지를 받은 민주노동당은 국회의원 10명을 당선시켰다. 진보정당에서 국회의원 당선자가 나온 것은 1961년 박정희 군사쿠데타 이후 처음이었다.

[24] 민주노총·민주노동당, 2004/07/07, 「비정규 노동자 보호와 권리보장을 위한 입법안 주요 요지」.

[25] 노동부, 2004/09/16, 「비정규직 입법안의 주요 내용」.

[26] 박권일, 2004/11/15, 「노무현은 왜 비정규직을 버렸나」, <월간 말>.

[27] 민주노총, 2005/03/17, 「[보도] 민주노총 중집 결정사항에 대하여」.

[28] 민주노총, 2005/04/06, 「[보도] 노·사·정, 정당 대표자회의 결정사항」.

[29] 민주노총, 2005/04/14, 「[논평] 비정규입법 관련 국가인권위원회 의견을 환영한다」.

[30] 특히 노무현 정권의 파견법 개정안이 파견기간 초과시 ‘고용의제’를 ‘고용의무’로 완화하는 내용을 담고 있던 상황에서, 민주노총은 공식 입장(권리보장 입법안)으로는 파견법 폐지를 주장했지만, 실제 행동에서는 파견법 개악을 반대하는 수준, 즉 기존 파견법의 ‘고용의제’를 방어하는 수준에 머물렀다.

[31] 민주노총, 2005/10/05, 「[보도자료] 사상 첫 ‘노사 대토론회’ 개최」.

[32] 한국노총, 2005/11/30, 「비정규직 관련법 제·개정을 위한 최종안」.

[33] 민주노총, 2005/11/30, 「[기자회견] 노사교섭 결렬에 깊은 유감을 표한다」.

[34] 민주노동당 단병호 의원이 2005년 12월 8일 국회 환경노동위원회 법안심사소위에 제출한 수정안. 1번부터 4번까지는 2004년 7월 제출한 비정규직 권리보장 입법안에 담긴 내용이고, 5번부터 10번까지가 새로 추가된 내용이었다.

[35] 민주노총, 2005/12/08, 「[논평] 이제 정치권이 답할 차례이다」.

[36] 매일노동뉴스, 2005/12/19, 「민주노동당, ‘비정규직법 수정안’ 놓고 논란」.

[37] 민주노총, 2006/02/28, 「[보도자료] 비정규법안의 문제점과 총파업의 정당성」.

[38] 노사관계 로드맵은 2003년 12월 최종보고가 제출된 이후 2년 넘게 사회적 교섭에서 논의되지 못했다. 노무현 정권은 2006년 1월 당정 협의를 통해 노사관계 로드맵을 24개 과제로 압축한 뒤, 4월 임시국회 상정을 추진하고 있었다.

[39] 민주노총, 2006/07/21, 「민주적 노사관계 구축의 4대 방향, 8대 핵심요구안」.

[40] 박점규, 2006/09/12, 「한국노총 야합보다 더 절망스런 민주노총의 무기력」, <레디앙>.

[41] 민주노총, 2006/11/30, 「[성명] 보수양당의 반노동 비정규악법 날치기처리는 역사적 심판을 받을 것이다」.

[42] 민주노총, 2006/12/08, 「[성명] 노동자의 기본권을 무력화하는 노동법 개악안 통과를 규탄한다」.

[43] 노동해방연대, 2007/02/01, 「한발 한발, 그러나 고지를 향해 똑바로!」, 『노동해방』 53호.

[44] 민주노총, 2006/12/22, 「[기자회견문] 1500만 노동자는 보수양당을 반드시 심판할 것이다」.

[45] 김대중 정권 시절을 거치는 동안 자주성이 심각하게 훼손됐던 ‘민주노조운동’은 노무현 정권 시절 동안 자주성을 더욱 상실했다. 김금수·박태주·김영대 등 노무현 정권에는 민주노총에 더욱 직접적인 영향력을 가진 노동운동 출신 인사들이 포진한 까닭이기도 했지만, 정부 측 인사들의 일상적인 개입과 영향력 행사를 너무나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된 민주노총의 주체적 상태 때문이기도 했다.

[46] 윤애림, 2015/01/29, 「2015년 민주노총 총파업은 2006년과 어떻게 다른가」, <매일노동뉴스>.

[47] 윤애림, 2016, 「2000년대 비정규직 연대운동과 노동기본권 쟁취 투쟁- 전국비정규직노조연대회의의 권리입법 투쟁을 중심으로」, 『산업노동연구』 22권 1호, 224쪽.

[48] 유경순, 2020, 『2007~2008년 이랜드홈에버 여성노동자들의 저항과 연대 - 510일』 1권, 봄날의박씨, 296~298쪽.

[49] 유경순, 2020, 『2007~2008년 이랜드홈에버 여성노동자들의 저항과 연대 - 510일』 1권, 봄날의박씨, 18~20쪽.

[50] 유경순, 2020, 『2007~2008년 이랜드홈에버 여성노동자들의 저항과 연대 - 510일』 1권, 봄날의박씨, 398~399쪽.

[51] 민주노총, 2007/08/21, 「제41차 임시대의원대회 결의문」.

[52] 유경순, 2020, 『2007~2008년 이랜드홈에버 여성노동자들의 저항과 연대 - 510일』 1권, 봄날의박씨, 514쪽.

[53] 유경순, 2020, 『2007~2008년 이랜드홈에버 여성노동자들의 저항과 연대 - 510일』 1권, 봄날의박씨, 18~20쪽.

[54] 프레시안, 2008/08/31, 「‘434일 만의 타결’ 뉴코아 노사, 이면 합의 있었다」.

[55] 유경순, 2020, 『2007~2008년 이랜드홈에버 여성노동자들의 저항과 연대 - 510일』 2권, 봄날의박씨, 392~393쪽. 병점 분회장이던 서형태는 애초 사직서 제출자 12명에 포함됐지만 이를 거부하고 유일한 해고자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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