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노운사 연재 12회] 3부 패배와 퇴보 (1998-2008) [1] 구조조정과 정리해고에 맞선 투쟁
  • 해당된 기사를 공유합니다

온라인신문

[한노운사 연재 12회] 3부 패배와 퇴보 (1998-2008) [1] 구조조정과 정리해고에 맞선 투쟁

  • 양준석
  • 등록 2026.04.07 10:13
  • 조회수 19,559

1998년 2월 정리해고제와 근로자파견제 도입을 막지 못하면서 신자유주의 대공세에 맞서는 전체 노동자계급의 총력 방어선이 일단 무너지자, 거대한 해일이 휘몰아치듯 구조조정과 정리해고를 앞세운 자본가들의 대공세가 이후 몇 년 동안 전국의 수많은 사업장에서 파상적으로 전개됐다.

 

자본가들의 대공세에 맞서 노동자들은 처절한 저항을 거듭했다. 저항조차 해보지 못하고 삶의 터전을 송두리째 빼앗긴 노동자들도 무수히 많았지만, 가진 힘을 다 소진할 때까지 끈질기게 저항한 노동자들도 결코 적지 않았다.

 

 

이전 편 보기

 

3부 패배와 퇴보 (1998-2008)

[시대배경] 신자유주의 구조조정

[1] 구조조정과 정리해고에 맞선 투쟁

[2] 민주노조운동의 후퇴와 비정규직 확산

[3] 비정규직 문제를 둘러싼 대결

[4] 민주노조운동의 위기

[5] 노동자 정치세력화 열망과 민주노동당

 

1997년 2월 포항제철이 삼미특수강을 자산양도 방식으로 인수하면서 삼미특수강 노동자 2천 342명 가운데 587명이 고용승계에서 제외됐다. 포항제철은 영업양도가 아닌 자산양도 방식 인수이기 때문에 고용승계 의무가 없다고 주장했다. 고용승계에서 배제된 삼미특수강 노동자 182명이 1998년 5월부터 서울역 광장에서 노숙투쟁에 나섰고, 1999년 1월 서울고등법원에서 전원 원직복직 판결을 받았다. 그러나 2001년 7월 대법원은 ‘영업양도에 해당하지 않는다’며 포항제철 손을 들어주었다.

 

1998년 7월초 정부로부터 퇴출대상으로 지목된 금융기관 노동자들이 한국노총 금융노련 깃발 아래 보름 동안 여러 차례 대규모 집회를 열며 투쟁에 나섰다. 그러나 금융노련은 연대파업 돌입을 유보하고 △퇴직위로금 3개월치 △25% 미만의 고용승계를 요지로 하는 정부 제시안을 수용했다.

 

1998년 7월 20일, 현대자동차 노동자들이 회사의 1만 명 정리해고에 맞서 무기한 전면파업에 돌입했다. 8월 17일에는 만도기계 노동자들이 1천 160명 정리해고에 맞서 무기한 전면파업에 들어갔다. 현대자동차 파업은 8월 24일 △정리해고 277명 △무급휴직 2천여 명 △희망퇴직 8천여 명 △임금동결 △상여금 반납 등을 골자로 하는 노사 잠정합의와 함께 마무리됐다. 현대자동차 노사의 잠정합의는 9월 1일 조합원 총회에서 부결됐지만, 실질적인 효력을 갖고 집행됐다. 만도기계 파업에는 9월 3일 전국 7개 사업장에 1만 4천 명의 경찰병력이 투입됐다. 9월 11일 조업에 복귀한 만도기계노조는 10월 2일 △정리해고 철회 △임금동결 △상여금 반납 △무급휴직 실시 등을 사측과 합의했다.

 

1999년 4월 19일 서울지하철노조가 2천 78명 감원 등 구조조정에 맞서 전면파업에 돌입했다. 조합원의 90%가 넘는 8천 917명으로 시작한 파업대오는 정권과 언론의 온갖 협박을 이겨내며 대부분의 대오를 유지한 채 무단결근 7일을 넘어섰다. 공권력 투입 위협으로 대오가 급격히 흔들리자 26일 조직적으로 복귀를 선언했지만, 마지막 순간에도 파업대오가 4천 78명을 유지했다. 그러나 파업 이후 노조 내부의 혼란 끝에 노사협조 집행부가 등장하면서 결국 1천 621명의 감원을 수용하고 말았다.

 

1999년 8월 18일 한라중공업 노동자들이 전체 인원의 50% 정리해고에 맞서 전면파업에 들어갔다. 1997년 12월 부도처리된 한라중공업은 대규모 희망퇴직으로 4천 명이던 조합원이 1천 300명으로 줄었다. 사내하청 노동자도 4천 명에서 4백 명으로 줄었다. 노조는 임금 24% 삭감과 단체협약 후퇴까지 받아들였다. 그러나 사측이 공세를 멈추지 않고 대규모 정리해고에 나서자 단호한 점거파업으로 맞선 것이었다. 72일 동안 지속된 파업으로 노동자들은 ‘현대중공업 위탁경영 기간 동안 고용보장’을 쟁취했다. 그러나 빼앗긴 임금과 단체협약은 되돌리지 못했고, 해고자 복직도 이루지 못했다.

 

2000년 4월 6일부터 12일까지 완성차4사 노조(대우·쌍용·현대·기아)가 대우자동차 해외매각 반대와 공기업화를 요구하며 공동파업을 전개했다. 2001년 2월 16일 대우자동차 노동자들이 1천 725명 정리해고에 맞서 전면파업에 들어갔다. 2월 19일 부평공장에 경찰병력이 투입되면서 현장에서 밀려났지만 노동자들은 끈질기게 투쟁을 이어나갔다.[1]

 

2001년 5월 민주노총이 신자유주의 구조조정 분쇄와 김대중 정권 퇴진을 전면에 내걸었다. 그런 상황에서 5월 하순부터 울산지역 화섬3사(효성·고합·태광) 노조가 하청화와 정리해고에 맞서 연쇄적으로 파업에 들어갔다. 6월 5일 효성에 대한 공권력 투입에 맞서 울산지역의 연대투쟁이 강력하게 분출했다. 연일 전투적인 가두시위가 지속되는 상황에서 6월 중순에는 다수의 중소규모 금속 사업장들까지 파업에 가세했다. 이제 대공장 노조들까지 파업에 가세함으로써 지역·전국 총파업을 실현하자는 흐름이 울산지역에서 강력하게 형성됐다. 이에 호응하여 민주노총에서도 7월 5일 전국 총파업에 돌입하기로 했다. 그러나 대공장 노조의 대표 격이던 현대차노조가 총파업 합류를 끝내 거부했다. 김대중 정권 퇴진 투쟁의 분수령이 될 수도 있었던 7·5 총파업은 그 위력이 크게 제한됐고, 투쟁 전선에는 찬물이 끼얹어졌다. 이후 고립된 투쟁을 이어가던 화섬3사 노조들은 치명적 패배를 당했고, 모두 민주노조가 파괴됐다.

 

2002년 2월 25일 철도·발전·가스 공공3사 노조가 국가기간산업 민영화(사유화)에 반대하며 공동파업에 돌입했다. 핵심 쟁점은 한국전력에서 분리된 5개 화력발전 자회사의 민영화 문제였다. 조기에 파업을 마무리한 철도노조·가스노조와 달리 발전노조는 완강한 조직력으로 36일 동안 산개파업을 전개하면서 민영화 반대 여론을 대세로 만들어냈다. 민주노총이 임시대의원대회를 열어 연대총파업까지 결의했다. 그러나 4월 2일 연대총파업 직전에 민주노총 지도부가 ‘민영화 추후 논의’를 골자로 정부와 합의하면서 뚜렷한 성과 없이 파업이 마무리됐다. 현장으로부터 민주노총 지도부에 강력한 비판이 쏟아졌고, 결국 총사퇴했다.

 

안타깝게도 이 시기 구조조정과 정리해고에 맞선 노동자의 투쟁들은 사실상 모두 패배했다. 아니 패배할 수밖에 없었다. 자본가들의 공격이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거대한 흐름을 등에 업고 총체적으로 펼쳐지는데, 개별 사업장 또는 그것을 조금 뛰어넘는 수준의 연대로는 기본적으로 상대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태를 반전시킬 가능성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절박한 생존권 위기에 내몰린 노동자들로부터 종종 놀랄 만한 잠재력이 튀어 올라왔고, 결사적인 기세와 생동하는 연대의 확장은 새로운 총력 방어선을 구축해 낼 수도 있는 가능성들을 만들어 냈다. 그러나 민주노조운동 지도부가 드러낸 한계와 거듭된 배신은 투쟁을 참담한 패배로 내몰았다.

 

1998년부터 2002년까지 전체 노동자계급의 총력 방어선을 다시금 구축해 낼 수도 있었으나 결국 실패한 투쟁이 크게 세 번 있었다. 1998년 현대자동차 정리해고 저지투쟁, 2001년 울산총력투쟁과 민주노총 7월 총력투쟁, 2002년 국가기간산업 사유화 저지 투쟁이 바로 그것이었다.

 

1) 1998년 현대차 정리해고 저지투쟁

 

1998년 봄 현대차 자본은 종업원 4만 6천명 (조합원 3만 4천명) 가운데 1만 명을 정리해고 하겠다고 나섰다. 그에 맞서 현대차노조는 ‘노동시간 단축과 일자리 나누기에 입각한 고용보장’을 대안으로 제시하며 “단 한 명의 정리해고도 용납할 수 없다”는 단호한 투쟁 방침을 수립했다.

 

회사는 경영 악화에 따른 인건비 절감의 필요성을 정리해고의 명분으로 내세웠다. 그러나 경영 악화는 철저히 자본의 경영 실패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1997년 자동차의 생산·판매로 8천억 원의 영업이익을 거뒀지만, 보유주식 평가하락으로 7천 500억 원을 까먹은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경영진은 방송국과 백화점을 인수했고, 부도가 난 기아자동차 인수까지 추진했다. 자신들의 잘못으로 발생한 경영악화에 대한 부담을 스스로는 전혀 감당하지 않으면서 노동자에게 모든 책임을 떠넘기려고 했다.

 

회사가 정리해고를 강행한 또 다른 이유는 현장 노동력의 하청화(비정규직화)라는 전략적인 목표 때문이었다. 회사는 판매 부진으로 가동률이 40% 저하될 예정이어서 이에 비례해 40%의 ‘여유인력’을 고용조정해야 한다고 했다. 사람의 목숨 줄이 달려 있는 고용의 규모를, 마치 생산에 투입되는 부품 소요량처럼 다루었다. 이것은 앞으로 단순부품의 공급 수량을 조정하듯이 현장 생산인력의 고용 규모를 취급하려는 회사의 전략적 태도를 드러내는 것이었다. 정리해고는 생산 수요에 따라 고용 규모를 고무줄처럼 변동시킬 수 있는 체제, 즉 현장 하청화를 추구하는 회사의 전략적 목표에 따라 강행됐다.

 

회사는 정리해고를 치밀한 계획에 입각해 단호하게 밀어붙였다. 애초부터 노동조합의 동의를 얻을 생각도, 설득하려는 의사도 없었다. 다만 정해진 수순에 따라 일방적인 계획을 밀어붙일 뿐이었다. 정리해고 관철에 장기적인 이익이 걸려 있다고 보고,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정리해고를 반드시 관철하겠다는 전략적 판단 때문이었다.

 

이에 맞서는 현대차노조의 정리해고 저지투쟁은 그야말로 조합원의 생존권을 사수하기 위한 투쟁이었다. IMF 외환위기로 실직자가 수백만에 달하고 재취업이 사실상 불가능하던 상황에서, 아울러 실직자에 대한 사회보장이 너무나 보잘 것 없던 상황에서, 정리해고는 개인과 가정의 파탄을 의미할 뿐이었다. 정리해고를 당하지 않는 조합원의 삶 또한 추가 정리해고 위협과 하청 확대라는 조건 아래서 임금과 노동조건이 심각하게 곤두박질칠 수밖에 없었다. 그러므로 정리해고 저지투쟁은 이전 시기의 일반적인 임단협 투쟁과 달리 조합원의 생존권을 사수하는 차원의 투쟁이었다.

 

또한 정리해고 저지투쟁은 민주노조를 사수하기 위한 투쟁이었다. 회사의 정리해고 시도는 이중적인 의미에서 노동조합 무력화의 시도라고 할 수 있었다. 만일 노동조합이 생존권이 걸린 정리해고 위협으로부터 조합원을 지켜내지 못한다면, 노동조합 자체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와 불신이 초래될 수밖에 없었다. 또한 정리해고 대상자에는 주요 현장 활동가들 대다수가 포함돼 있었다. 1987년 이후 10년 동안 축적돼 온 노동조합 역량이 일거에 쓸려나갈 판이었다. 그러므로 정리해고 저지투쟁은 민주노조를 사수하기 위한 투쟁이기도 했다.

 

정리해고가 눈앞의 현실로 다가오자, 현대차 노동자들은 어느 때보다 높은 긴장감과 집중력을 갖고 노조를 중심으로 단결해 나갔다. 연일 이어지는 집회에 역대 최대 규모로 조합원들이 집결하면서 “노동조합을 중심으로 일치단결하여 정리해고를 기필코 저지하자”는 희망을 만들어 나갔다.

 

한국 최대의 기업이면서 동시에 가장 강력한 민주노조가 버티고 있던 현대차에서의 정리해고는 자본가들에게나 노동자들에게나 단지 현대차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었다.

 

자본가들의 입장에서 현대차의 정리해고는 1998년 2월 법제화된 정리해고가 공문구가 아니며 실제로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일종의 시금석이었다. 여전히 강력한 조직력과 전투성을 가진 민주노조들의 저항을 뚫고 개별 기업에서 실제로 정리해고를 관철한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문제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현대차 자본만이 아니라 김대중 정권 또한 초국적 자본의 높은 관심을 의식하며 현대차에서의 정리해고를 성공시키기 위해 모든 노력을 다하고 있었다. 한국 자본주의를 초국적 자본이 주도하는 세계 자본주의 체제의 유기적인 구성 부분으로 재편해 나가는 데 있어서, 현대차의 정리해고는 반드시 거쳐야 하는 첫 관문이라고 보았던 것이다.[2]

 

반면 노동자들의 입장에서 현대차의 정리해고는 새로운 저지선이었다. 비록 정리해고 법제화를 저지하려던 방어선이 민주노총 지도부의 배신으로 무너지긴 했지만, 가장 강력한 힘을 가진 현대차노조를 중심으로 전국 노동자들이 연대하여 정리해고의 실제 단행을 막아낸다면, 법제화된 정리해고는 공문구나 다름없게 만들 수 있다고 여겨졌다. 실제로 파업에 참여한 많은 현대차 노동자들은 단지 현대차에서 정리해고를 철회시키는 차원을 넘어서서 이 투쟁의 승리를 통해 정리해고제 자체를 무력화시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 정리해고 추진에 맞선 총파업

 

한국사회 전체가 IMF 외환위기로 치닫던 1997년 말, 현대차 회사는 경영위기를 공론화하며 사내하청 노동자 2천 700여 명을 먼저 쫓아냈다. 1998년 들어와서는 연초부터 “경영위기에 따른 1만명 정리해고설”을 유포하면서 임원과 과장급 이상 관리자들에게 명예퇴직을 실시해 800명 이상을 정리했다.

 

현대차노조는 1998년 1월 13일 임시대의원대회를 열어 ‘단체협약 사수, 고용 안정, 민중생존권 사수를 위한 중앙비상대책위원회’를 구성하고 만장일치로 쟁의행위를 결의했다. 15일 조합원 찬반투표에서 83.8%의 찬성으로 쟁의행위를 결의했다. IMF 외환위기를 틈탄 정리해고제 조기 도입 시도[3]를 막기 위한 민주노총 총파업에 동참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민주노총은 정리해고제 조기 도입과 관련하여 큰 혼란을 겪었다. 2월 6일, 민주노총 지도부가 노사정위원회에서 정리해고제를 조기 도입하는 노사정 합의안에 동의했다. 9일, 민주노총 임시대의원대회가 노사정 합의안을 부결시키고 지도부를 불신임한 뒤 비상대책위원회를 구성했다. 10일, 비상대책위원회가 13~14일 총파업을 결정했으나, 이틀 뒤 8시간 회의 끝에 철회했다. 이날 대우조선 조합원 최대림은 “정리해고 반대 총파업투쟁에 전 조합원이 동참해줄 것”을 호소하며 분신했다. 민주노총의 총파업 철회로 전국적 투쟁전선이 무너진 가운데, 14일 임시국회에서 정리해고제와 근로자파견제의 조기 도입이 통과됐다.

 

IMF 외환위기가 깊어지면서 극심한 내수불황으로 공장 가동률이 뚝 떨어졌다. 3월 23일 노조는 회사와 실무협의를 갖고 △가동률 저하에 따른 집단 순환휴가 실시 △집단휴가 시 통상임금 70% 지급 △‘고용안정 노사공동위원회’ 구성에 합의했다.

 

4월 들어 승용2공장 아토스(경차) 라인을 제외한 모든 라인에서 야간작업이 없어졌다. 회사는 본격적으로 정리해고 추진 분위기를 잡아나갔다. 4월 9일자 <조선일보>에는 ‘현대자동차 생산직 9,200명, 과장급 이상 300명 감원’이라는 기사가 실렸다.

{현대차 회사 관계자} 금년도 생산이 90만 대 선을 밑돈다면 여유 인력이 1만 5천 명 이상 발생할 것으로 보고 있고, 지금 이 순간에도 일거리가 없어서 집에서 쉬고 있는 직원들이 1만 명이 넘습니다. 이런 추세로 계속 진행이 된다면 회사의 생존 자체가 위협받을 정도로 아주 심각한 국면이 초래될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부득이하게 고용조정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이렇게 말씀드립니다.[4]

조합원들 사이에서 일자리에 대한 불안감이 극도로 높아져 갔다.

{조합원1} 당장 나가며는 뭐 할 건데 할 게 없잖아요. 지금 노가다를 할라 해도 노가다도 할 수 없고 …

{조합원2} 언제 우리가 뭐 허리띠를 안 졸라매고 그랬습니까? 우리가 뭐 과소비해가지고 나라가 이 지경이 된 건 아니잖소. 그렇다고 우리가 뭐 호화 사치 골프를 한번 쳐봤습니까? 백화점 가가지고 옷을 한번 사봤습니까? 만날 회사에서 주는 옷 이런 것만 입고 어쩌다가 명절 때 갈 때 넥타이 한 번 매지. 그러다 양주 한번 먹어봤습니까? 안 먹어봤거든.

{조합원3} 옆에 마누라 누워 있는 것도 한번 쳐다보고 자식 누워 있는 것도 쳐다보고 그럴 때 과연 내가 실직했을 때 과연 저 사람들을 내가 책임질 수 있나 한번 그래 생각해 보면 참말로 잠도 안 오고[5]

노조는 4월 7일부터 매곡현대아파트를 시작으로 ‘조합원 밀집지역 순회간담회’에 들어갔다.

{현대차노조 위원장} 정말 이 사회 대한민국 각 사업장에서 고용의 한파가 우리를 목 졸라 옵니다. 노동자가 정치에 참여를 했습니까? 노동자가 경영에 참여를 했습니까? 노동자는 정치에 경영에 정말 아주 바늘만한 구멍이라도 들어갈 수 있는 틈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경제가 이렇게 어려운 모든 책임을 노동자들한테 전담하고 있습니다. 허리띠를 졸라매라, 더욱 더 절약하자, 정말 분통 터지고 안타까운 일입니다.[6]

8일, 노조 주최로 현장조직들이 참여한 2차 현장토론회가 열렸다. 민투위, 실노회, 현노신, 노연투 등 현장조직들은 ‘노동시간 단축과 근무형태 개선을 통한 일자리 나누기’에서부터 ‘현실적 양보교섭’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입장을 제출했다. 10일 ‘고용안정 쟁취 결의대회’에 1만 2천여 명의 조합원들이 참여해 높은 투쟁 결의를 보여주었다.

 

17일, 노조가 기자회견을 열고 ‘고용안정’ 방안으로 △주당 38시간으로 근무시간 단축 △주간연속2교대제로 근무형태 변경 △배치전환을 통한 일자리 나누기를 제안했다.

{현대차노조 위원장} 우리가 주 38시간을 하면은 90만 대의 생산 능력을 가질 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해서라도 일자리를 나눠 갖고 우리의 동지들과 함께 살겠다는 겁니다.[7]

그러나 회사는 노조의 제안을 무시하고 “4월 17일부터 1주일 동안 1차 희망퇴직 모집에 들어간다”고 일방적으로 발표했다. 노조는 희망퇴직을 반대하며 “개별 서명을 거부하고 노조의 지침을 따르라”고 했다. 1차 희망퇴직자는 1천 119명이었다. 통상급 4~6개월 치가 위로금으로 주어졌다.

 

23일, 회사가 노조에 공문을 보내 ‘정리해고 회피 노력 방안 및 해고 규모와 기준에 대한 노사협의’를 의제로 노사협의회를 30일에 개최하자고 요구했다. 마침내 정리해고 방침을 공식화한 것이었다.

- 여유인원 40% 초과

- 해고 회피 노력 방안 협의 요구: 근무시간 단축, 희망퇴직자 모집, 무급휴직, 기본급 및 상여금 지급률 조정, 제반 복리후생 제도의 축소, 연·월차휴가 적극 사용, 월급제 O/T 수당 조정, 기타 불합리한 수당 조정과 제도의 변경

- 정리해고 규모 협의 요구

- 정리해고 선정 기준 제시: 근속년수, 인사고과, 승진 누락정도, 판매실적, 상벌, 근태 등 근무성적, 기능보유도, 경쟁력 없는 주변업무 종사 등의 요소

노조는 회사의 제안을 일단 무시하기로 했다. 대신 25일 ‘일자리 지키기 조합원 가족 한마당’을 열었다. 27일 휴가 조합원 3천여 명이 태화강 둔치에서 집회를 갖고 시청을 항의 방문했다. 같은 날 울산광역시 의원 17명이 ‘정리해고 반대’ 기자회견을 했다.

 

5월 1일, 서울 종묘공원에서 3만여 명의 민주노총 조합원, 학생, 빈민, 사회단체 등이 참가한 가운데 세계노동절 기념대회가 열렸다. 이갑용 위원장이 이끄는 민주노총 2기 지도부는 △정리해고제·근로자파견제 철폐 및 부당노동행위 근절 △고용안정과 생존권 보장, 고용·실업 대책을 위한 제도적 장치 마련 △정경유착 근절과 재벌 해체 △노동3권 보장과 노동자 경영참가 △IMF 재협상 등 5대 요구를 내걸고 ‘5월말부터 6월초까지의 총력투쟁’을 선포했다. 집회 후 행진 과정에서 격렬한 가두투쟁이 벌어졌다.

 

9일 노사협의회가 열렸다. 회사는 ‘경영위기 극복 및 여유인원 문제에 대한 해결방안’을 제시했다. 생산량 감소분 40.6%를 해결하기 위해 1만 5천 명의 인원을 정리하고 임금을 23% 삭감하자는 요지였다. 노조는 △인건비·인원 감축에 대해서는 노조가 제출한 ‘근로시간 단축, 근무시간 변경, 일자리 나누기’ 방안을 노사공동위원회에서 연구·검토 후 논의 △희망퇴직자 모집은 해고 회피 위한 갖가지 고용안정 정책 실시 후 최후 수단으로 검토 등의 입장을 제시했다. 논의는 아무런 접점을 찾지 못했다.

 

회사는 14일부터 1주일 동안 2차 희망퇴직을 강행했다. 회사는 조합원들에게 ‘지방선거 끝나면 정리해고 할 텐데 지금 나가는 게 이익이다’며 노골적으로 희망퇴직을 강요했다. 회사의 정리해고 협박에 위로금이라도 받아야겠다는 희망퇴직자가 속출했다. 다시 1천 430명이 공장을 떠났다.

 

18일, 6·4 지자체 선거에서 북구지역에 출마한 민주노총 추천후보 일동이 ‘현대자동차의 대량해고 방침을 철회하라’는 기자회견을 했다. 19일 노조가 임시대의원대회를 열어 만장일치로 쟁의발생을 결의했다. 20일 노조 집행부와 대의원들이 본관 건물 로비에서 ‘강제 희망퇴직 중단’을 요구하며 농성에 들어갔다. 이 자리에서 강제 희망퇴직 당한 52세의 한 여성 조합원이 “나 혼자서 4명 가족 먹여 살리는데 퇴직금 2천만 원으로 어떻게 살아가나? 이래도 죽고 저래도 죽는다. 차라리 회사에서 죽고 말겠다”며 대성통곡하기도 했다.

 

20일 회사가 ‘경영위기 극복 및 여유인원 문제에 대한 해결방안 수정안’을 제시했다. 총 여유인원이 1만 8천 730명(전체 종업원 4만 6천 132명의 40.6%)인데 지금까지 3천 699명이 퇴직해서 실제 여유인원이 1만 5천 31명이 됐으니, 여기서 8천 189명은 정리해고하고 6천 842명은 전 조합원 통상임금 23.8% 삭감으로 해결하자는 요지였다.

 

25일 노조가 조합원총회에서 89.4%라는 압도적인 찬성으로 파업을 결의했다. 27일 민주노총의 1차 총파업이 시작됐다. 현대차노조를 비롯해 128개 노조 11만 3천 825명이 총파업에 참여했다. 현대차노조는 오후 1시부터 파업에 들어갔다. 2만 명의 조합원들이 본관 앞에서 투쟁결의대회를 갖고 오토바이 수천 대를 앞세워 태화강 둔치까지 두 시간을 행진하며 지역 집회에 참석했다. 일자리를 지키겠다는 조합원들의 투쟁의지와 열기가 매우 강렬했다. 28일에도 총파업이 계속돼 109개 노조 11만 1천 632명이 참여했다.

 

현대차노조의 투쟁력을 핵심 동력으로 하여, 민주노총 총파업이 5월 27~28일 힘차게 전개된 것이었다. 바야흐로 현대차노조를 중심으로 ‘정리해고 저지’의 총력 방어선이 전국적으로 형성되어 나가는 순간이었다. 1차 총파업을 성공리에 마친 민주노총은 ‘6월 10일 정리해고제·근로자파견제 철회를 요구하는 2차 전면 총파업’을 선언했다.

 

6월 4일 지자체 선거에서 울산지역의 민주노총 추천후보 16명 가운데 구청장 2명, 광역의원 3명, 기초의원 5명 등 10명이 당선됐다. 시장 후보를 비롯한 나머지 6명도 근소한 차로 낙선했다. 울산지역에서는 과거에도 노동자들이 일정한 표 결집력을 보여주었지만, 이렇게 두드러진 결과는 처음이었다. 현대차노조를 중심으로 정리해고 저지투쟁이 강력하게 전개되는 상황에서 민주노총 추천후보들도 ‘정리해고 반대’를 핵심 이슈로 내건 게 결정적이었다.

 

◎ 회사의 정리해고 강행과 노조의 거듭된 양보

 

그런데 6월 5일 민주노총 중앙위원회가 ‘6·10 2차 총파업’을 철회하고 노사정위원회에 참가하기로 결정했다. 10일 열린 민주노총 대의원대회는 이 결정을 추인했다. 민주노총이 이와 같은 결정을 내리기까지 주요한 역할을 한 사람들 가운데 하나는 현대차노조 김광식 위원장이었다. 이후 3개월 동안 김광식 위원장은 단호하게 투쟁을 발전시켜 나가는 대신 어떻게든 타협점을 찾겠다며 수차례 양보에 양보를 거듭했다.

 

13일 회사가 3차 희망퇴직을 실시하겠다고 노조에 공문을 보냈다. 15일 노조가 대의원 비상간담회를 열었다. 주요 토론내용은 희망퇴직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였다. 일부 대의원들은 조합원 정서를 거론하며 희망퇴직을 받아들이자고 주장했다. 다른 대의원들은 절대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노조 집행부는 희망퇴직에 대한 현장 여론을 파악하겠다며 운영위원회, 현장제조직 대표자 간담회, 전 현직 위원장 간담회도 진행했다. 집행부에 따르면, 취합된 의견의 대다수는 ‘희망퇴직에 대한 협상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이를 바탕으로 노조는 상무집행위와 중앙비대위 회의를 거쳐 희망퇴직 관련 요구를 정리했다. 희망퇴직 자체를 반대하던 기존의 태도에서 크게 선회한 것이었다.

 

19일 현대차 노사는 임금과 고용조정 문제를 함께 교섭해 나가는 틀로서 ‘임금 및 고용조정 대책위원회’를 구성하기로 합의했다. 22일 대책위원회의 첫 실무협상에서 노사가 희망퇴직 문제를 협상하기 시작했다. 24일 대책위원회의 첫 공식 교섭에서 3차 희망퇴직에 대해 노사가 합의했다. ‘희망퇴직을 6월 24일부터 29일까지 실시하되 희망퇴직을 진행하는 동안은 정리해고를 추진하지 않고, 위로금은 10년 이상 12개월, 5~10년 11개월, 5년 미만 10개월 치 지급한다’는 내용이었다.

 

노사가 합의한 3차 희망퇴직으로 다시 1천 361명이 회사를 떠났다. 노조는 “조합원의 여론을 수렴한 어려운 결단이었다”며, “혼란은 일체 중단돼야 한다”고 했다.

 

그러나 현장에서는 상당한 비판이 제기됐다. “희망퇴직은 위장된 정리해고로 정리해고 도입을 합의한 것과 다를 바 없다”, “정리해고 철회를 전제로 노동시간 단축과 근무형태 변동 등을 회사가 받아들일 때 (희망퇴직 협의를) 할 수 있었던 것”, “아무것도 쟁취하지 못한 상태에서 희망퇴직을 합의한 것은 조합원들을 기만한 행동” 등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일부 조합원들은 ‘6월 24일부터 29일까지 희망퇴직을 진행하는 동안 정리해고를 추진하지 않는다’는 노사합의 사항은 6월 30일 이후에는 정리해고를 하겠다는 최후통첩이라고 주장했다.

 

26일 노조는 대책위원회 교섭에서 주 35시간으로 노동시간 단축을 공식 제안했다. 1일 7시간씩 주간연속2교대로 주 5일 근무를 하자는 것이었다. 노동시간 단축에 따른 임금은 ‘기본급과 통상급을 기존대로 유지하되 연장근로수당 등 변동수당에 대한 문제는 노사간에 협상을 통해서 충분히 조정할 수 있다’고 했다.

 

정리해고 대신 ‘노동시간 단축과 근무형태 변경으로 일자리를 나누어서 모든 조합원의 고용을 보장하자’는 노조의 대안은 당연하게도 조합원의 압도적인 동의와 지지가 있었다. 하지만 회사는 이를 전혀 진지하게 검토하지 않았다. 회사는 평균 실제 근로시간이 주 30시간 이하로 떨어져 있는 상황에서 주 35시간제를 도입한다고 여유인원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는 논리를 폈다. 그러나 노조는 주 35시간제를 도입하고도 여유인원이 발생한다면 순환휴가제를 실시하자는 방안을 덧붙이고 있었다. 중요한 것은 논리의 타당성이 아니었다. 회사는 무조건 정리해고를 강행하겠다는 확고한 의지를 갖고 있었다.

 

30일 오전 회사가 조합원 4천 830명의 정리해고 계획을 노동부에 신고했다. 신고서에는 ‘임금을 22% 삭감하지 않으면 6천 842명을 추가로 정리해야 한다’는 내용이 포함됐다. 분노한 노조는 ‘정리해고 철회’를 내걸고 곧바로 오후 3시부터 ‘26시간 1차 경고 파업’을 벌였다.

사측은 민주노총, 정부, 자본 등 3자 간에 맺은 약속 사항을 한순간에 위반하고 어제(6/30) 오전 11시 45분경 정리해고 신고서를 접수하는 파렴치한 행위를 스스럼없이 자행했다. 이에 대해 현대차노조는 극도의 분노를 느끼며 어제 15시를 기해 정리해고 철회를 요구하며 26시간 총파업에 돌입했다. 이 자리에서 김광식 위원장은 7월 4일까지 정리해고를 철회하지 않을 경우 전면투쟁에 돌입할 것을 밝혔다.[8]

7월 2일 노조는 임시대의원대회를 열고 정리해고가 현실화하는 상황에 대비하기 위한 조치들을 했다. 정리해고를 당하더라도 조합원 자격을 유지할 수 있도록 규약을 개정했다. 정리해고 당하는 조합원들의 투쟁기금을 조성하기 위한 특별모금을 결의했다.

 

노조는 6일 오전 10시부터 8일 오전 10시까지 ‘48시간 2차 경고파업’을 벌였다. 2차 경고파업이 끝난 뒤, 노조 지도부에게 더 확실한 결단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현장에서 강하게 대두되기 시작했다.

우리는 이번 6월 30일~7월 1일 26시간 파업, 7월 6일~7일 48시간 시한부 파업을 통해서 조합원의 투쟁의지를 확인했다. 조합원의 투쟁의지가 확인되고, 사측의 도발 책동이 분명하게 예상되는 현실에서 이제 더 이상 투쟁 전술을 시한부 파업으로 한정하거나 협상에 기대를 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정리해고 방침을 분명히 한 채 기만적인 협상을 하면서 시간 벌기 책동을 벌이고 있는 사측의 전술에 말려들고 있는 것이다. 조합원들은 강력한 투쟁을 원한다. 그 길만이 사측의 의도를 박살낼 수 있다는 확신을 갖고 있다. … 이렇듯 사측의 의도는 전면적인 대결도 불사하면서 정리해고를 강행하겠다는 것이다. … 노조 지도부의 단호한 결단을 다시 한 번 촉구한다.[9]

회사 측은 이미 정리해고 명단을 발표하는 날짜만을 남겨둔 지금 오판하고 있다. 사측의 협박으로 조합원은 분열할 것이고, 명단만 발표하면 시간이 지남에 따라 모든 것이 사측의 의도대로 진행될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그러나 아무리 작성된 명단이 있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강력하게 투쟁한다면 결코 쉽게 발표하지 못할 것이다. 그것은 곧 파국을 가져온다는 것을 사측이 너무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강력한 총파업투쟁으로 노동자의 분노를 똑똑하게 보여줌으로써 사측이 오판하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 … 7월말 정리해고 발표를 앞둔 지금, 7월 14일 전면적인 총파업투쟁은 100여 일 넘게 투쟁해온 정리해고 분쇄 투쟁의 가장 중요한 길목이다. 더 이상 협상용의 시한부 파업이나 정리해고 철회를 전제로 하지 않는 사측과의 협상은 온갖 유언비어만 유포시켜 조합원을 분열시키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다. 따라서 7월 14일 돌입하는 전면적인 총파업투쟁은 정리해고 철회가 분명하게 발표되지 않는 한 어떤 이유로도 결코 멈춰서는 안 된다.[10]

노조가 무기한 파업에 돌입하겠다고 설정한 14일을 앞두고 긴장이 매우 고조됐다. 회사는 10일, 11일, 13일에 1공장 의장부, 4공장, 2공장 차체부 등의 일부 부서에서 정리해고 대상자 명단을 기습 발표했다. 이에 대항해 10일 1공장 의장부 야간조 조합원들이 생산라인을 중단시켰고, 13일 1공장, 2공장, 4공장에서 2시간씩 부분파업이 벌어졌다. 일부 정리해고 대상자 명단 발표로 공포심을 극대화했다고 판단한 회사는 13일 4차 희망퇴직을 발표했다. 파업 동력을 흔들기 위한 입체적인 공격이었다.

 

그러나 파업 동력에는 이상이 없었다. 노조는 14일 무기한 파업에 돌입했다. 15일에도 파업을 이어갔다. 현대차노조의 파업은 14일 금속산업연맹을 시작으로 16일까지 총 68개 노조 15만 명이 참여한 민주노총 총파업의 일부이기도 했다.

{현대차노조 위원장 성명서} 저는 더 이상 망설이지 않겠습니다, 장렬한 싸움을 전개하겠습니다. 이번 싸움에서 패하게 되면 노동조합은 끝장나고 우리의 삶은 파탄에 빠질 것임은 물론 대폭적인 임금삭감과 노동강도 강화가 현실적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명심하고 투쟁대열에 적극적으로 합류합시다.[11]

노동조합은 정리해고 철회와 고용안정 쟁취를 위해 오늘부터 무기한 총파업에 돌입한다. 이제 앉아서 죽느냐, 싸움을 통해서 사느냐는 것만이 남았다. 결연한 의지를 가지고 투쟁에 돌입하자.[12]

우리들의 고용안정 쟁취와 생존권을 지키기 위해 질기고도 긴 투쟁이 시작되었다. 이제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다. 마지막 골목까지 몰린 것이다. 한 발만 더 밀리면 낭떠러지뿐이다. 즉 죽음을 각오하고 싸워야만이 우리들의 생존권을 지킬 수가 있다.[13]

그런데 15일 밤, 노조 중앙비대위가 6시간의 토론 끝에 전면파업을 유보하고 16일 오전 10시부터 정상조업에 임하기로 결정했다. 중앙비대위는 고용조정과 임금 관련 교섭 폭에 대한 권한을 위원장에게 위임하는 한편, 16일 오전 11시부터 협상 전술과 관련해 대의원 비상간담회를 열기로 했다.

 

16일 11시, 대의원 비상간담회에서 김광식 위원장은 회사에게 제시할 대폭적인 양보안을 설명했다. 대의원들의 반발이 있었지만 무시됐다. 12시, 위원장은 기자회견을 열고 ‘마지막 협상에 임하는 노조 입장’이라는 이름으로 양보안을 발표했다.

- 인건비 중 97년 성과금 미지급분, 휴가비, 선물비, 공정 O/T, 직책수당 등을 포함 1년간 약 2,500억 원 규모를 지급중단토록 고통분담안 제출

- 정리해고 규모인 4,830명 중 4차 희망퇴직자 500명을 제외한 4,300명에 대해서 △하도급 전환대상(식당, 출고, 시설 등)으로 포함된 938명은 직영으로 고용 유지 △1,800명에 대해서는 근로시간 단축과 일자리 나누기로 일자리 유지 △나머지 1,500명에 대해서는 6개월 순환휴가제를 도입하며 휴가 임금은 회사측이 통상금의 50%를 지급하고 노동조합은 자체 기금으로 30%를 지원

그러나 회사는 노조의 대대적 양보에도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다. 연휴 기간인 17일부터 19일까지 정리해고 대상자 전체에게 정리해고 통보서가 전달됐다. 최종 고용조정 대상자는 3천 578명이었다. 정리해고 대상자가 2천 678명, 무급휴직(2년) 대상자가 900명이었다.[14] 회사는 정리해고 효력이 발생하는 7월 31일까지 정리해고 대상자를 상대로 5차 희망퇴직을 실시한다고 발표했다.

 

회사는 집행부의 유약한 모습과 그에 따른 노조의 혼란에 자신감을 가지며 17~19일의 연휴 동안 정리해고를 개별 통보함으로써 결정적인 승기를 잡으려고 했다. 그러나 회사는 조합원 대중의 연대 정신과 자발적 투쟁 역량을 과소평가했다.

 

정리해고를 통보하면 정리해고 당하는 자와 살아남는 자 사이의 분열로 투쟁동력이 급격히 와해될 것이라는 자본의 계산은 완전히 빗나갔다. 17일부터 19일까지 연휴 동안 이어진 정리해고 통보는 조합원들의 분노에 불을 질렀다. 현장 사무실이 수없이 박살났다. 정리해고를 통보하러 다니던 관리자들이 떼거리로 몰려온 부서 조합원들에게 붙잡혀 곤욕을 치르는 일들이 속출했다. 분위기가 얼마나 험악해졌는지 대부분의 관리자들이 가족을 데리고 울산에서 몰래 빠져나갔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정리해고 개별 통보에 대해 조합원들은 의리와 연대로 분노를 폭발시켰다. 회사는 예상을 완전히 빗나간 조합원들의 거대한 자발적 투쟁을 바라보며 극도의 공포와 두려움을 느껴야 했다. 3일간의 연휴 동안 현장 곳곳에서는 자발적인 투쟁대오가 강력하게 형성됐고, 이러한 아래로부터의 힘을 바탕으로 비로소 7월 20일 전면투쟁이 시작될 수 있었다.

명단 나와서 노란 봉투를 집으로 보냈고. 보내기 전에 대의원은 알았지요. 그래 식칼 들고 가 “도장1부 대의원이다. 나를 먼저 집어넣지 않으면 네가 죽을 줄 알아라” 하고 나왔죠. 분신한다는 거 말리느라고 힘들었어요. 내가 도장부라서 조합원들이 신나는 쉽게 구해요. 오히려 순했던 사람들이 더 그랬어요. 제 후배 하나가 그래서 모질게 팼지요. 그때 참 가슴이 아팠지요. 개인적으로는 집사람이 임신을 했었는데 애 떨어지고 그때 다섯 번째 유산을 한 것이었죠.[15]

◎ 완강하고 결사적인 점거파업

 

7월 20일, 예상치 못한 사태 전개에 당황한 회사가 임시휴업을 선언했지만, 많은 수의 조합원들이 출근해서 노조 건물 앞으로 모여들었다. 정리해고 통보를 받았는가와 상관없이 민주노조로 단결하여 기필코 정리해고를 분쇄하겠다는 결의로 가득 찬 노동자들이었다. 노동조합 사수대가 출근하는 조합원들에게 전면파업을 호소하며 선전물 <사생결단>을 배포했다.

노조는 그동안 협상을 통해 해결하겠다는 의지로 3차 희망퇴직을 합의해주고, 시한부 파업으로 협상의 여지를 갖고 임했다. 또한 최종적으로 무기한 총파업까지 유보하고 대폭적인 양보안을 내면서까지 교섭을 요구했지만, 그 결과는 어떠했는가? 결국 회사 측이 일방적으로 정리해고를 통보하는 사태를 맞게 되었다. 이것은 그동안 노조에서 어떻게 하든 협상을 통해서 해결해보겠다는 의지가 헛된 것이었음이 명백하게 드러난 것이다. …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이제 2,678명의 정리해고 명단이 통보되고, 900명이 2년간 무급휴가라는 실질적인 정리해고 통보를 받은 상황에서 노조는 죽음을 불사한 강력한 투쟁방침을 내려야 한다. 노동조합은 조합원의 생존권을 사수하기 위한 총력투쟁을 분명하게 선언해야 한다. 그리고 즉각 총파업 투쟁에 돌입해야 한다. 만약 지금에 와서도 머뭇거린다면 노조를 불신하게 되고 정리해고에 대한 분노가 모두 노동조합으로 향할 것이라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16]

5천여 명의 조합원들이 노조 건물을 중심으로 4공장부터 2공장까지 각 선거구별로 수백 개의 천막을 설치했다. 오전 노사협상은 1시간 만에 결렬됐다. 노조는 무기한 점거파업을 선언했다.

{현대차노조 사무국장} 오늘 협상에서 회사는 정리해고를 끝까지 하겠답니다. 노동조합은 끝까지 맞서서 정리해고를 단호히 분쇄하겠습니다.[17]

결사항전 결의대회에서 김광식 위원장은 삭발식을 가진 뒤 자른 머리를 관 속에 집어넣으면서 “이 관에 묻히는 한이 있더라도 정리해고는 반드시 철회시키겠다”고 선언했다. 중앙비대위원들과 대의원들도 삭발에 나섰다. 세 명의 전직 위원장들은 45m 굴뚝농성에 들어갔다. 울산 북구의회 의원 8명 전원이 ‘현대자동차의 대량 정리해고 반대’ 성명서를 발표했다.

 

21일, 6·4 지방선거에서 민주노총 추천후보로 나서 당선된 북구청장과 동구청장이 기자회견을 열어 정리해고 중단을 요구했다. 역시 6·4 지방선거에서 민주노총 추천후보로 나서 당선된 시의원과 구의원 전원이 울산시청 의원회관 4층에서 ‘정리해고 저지’를 위한 기자회견을 갖고 무기한 농성에 들어갔다. 오후 5시에는 민주노총 울산본부 산하 노조들이 현대차 본관정문 앞에서 ‘정리해고 결사저지, 민중생존권 사수 결의대회’를 열었다.

 

22일 금속산업연맹 15개 노조 6만 8천여 명이 총파업에 들어갔다. 현대차노조의 점거파업이 전국 노동자들의 공동투쟁으로 확산될 기회였다. 그러나 23일 민주노총 산별대표자회의가 총파업 방침 철회와 2기 노사정위원회 참여를 결정했다. 전국 공동투쟁 전선은 형성되지 못했다.

 

24일 부산지방경찰청이 울산의 노조 상급단체 상근자들과 노동단체·사회단체 활동가 16명을 이른바 ‘영남위원회’ 조직 활동을 이유로 국가보안법을 위반했다며 전격 연행, 구속했다. 또 울산노동정책교육협회 사무실을 압수 수색했다. 25일 민투위와 실노회 현장조직 의장단에 대한 체포영장이 발부됐다.

 

26일 300명의 현대차노조 조합원들이 서울 상경투쟁에 들어갔다. 상경투쟁단은 오후 3시 서울역 광장에 모여 집회를 갖고 현대그룹 본사와 노사정위원회, 경총, 전경련 등을 항의 방문하며 정리해고 철회를 요구했다.

 

27일 회사가 노조간부 12명을 고소고발하고 49명을 징계위에 회부했다. 28일 회사가 조업재개를 시도했지만 노조의 파업동력만 늘어나고 조업에는 실패했다. 회사는 정리해고 대상자 전원에게 해고수당을 입금했다. 경찰 병력 23개 중대가 울산공장 인근에 배치됐다. 29일 가족대책위원회가 시청에 행정자치부 장관 면담을 요구하러 갔다가 전경들과 격렬한 몸싸움이 벌어져 가족 6명이 부상을 입는 사태가 발생했다.

 

31일 회사가 1천 538명에 대해 정리해고를 단행했다. 700명에겐 무급휴직을 통보했다.[18] 정리해고 대상에는 노조 상무집행위원 15명과 현직 대의원 89명 등 총 115명의 노동조합 간부가 포함돼 있었다. 민투위 120여 명, 실노회 70여 명 등 현장활동가 대다수도 포함돼 있었다.[19]

 

8월 2일부터 9일까지 휴가 기간 동안 3천여 조합원들이 휴가를 반납하고 농성투쟁을 계속 이어나갔다. 노조는 이 기간 동안 어린이 여름학교, 노동영화제, 특별강좌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마련해 가족들의 참여를 이끌어 냈고, 매일 저녁 집회를 통해 투쟁 결의를 다져나갔다. 파업 중이던 태광산업에 구사대가 난입해 위원장을 비롯한 노조 간부를 폭행하는 사태가 발생하자, 즉시 200명의 오토바이 기동대를 파견해 연대투쟁을 벌이기도 했다.

 

3일, 의장1부에서 한 조합원이 분신을 시도하자 노조 위원장과 임원들이 달려가 간신히 설득했다. 4일 회사에서 고용한 용역 깡패들이 울산에 도착해 배치되기 시작했고, 가족대책위 회장과 부회장에게 긴급 체포영장이 발부됐다.

 

5일 김광식 집행부가 또다시 추가 양보안을 언론을 통해 발표했다.

- 사회적 상식이 통하는 수준에서 추가 임금삭감

- 임원 5명에 대한 상징적 정리해고 수용 용의

- 노사 평화선언 및 2000년까지 정리해고를 유보하는 고용안정 협정서 체결

- 회사관리체계 회복을 위한 ‘노사화합 한마당’과 ‘재도약을 위한 원년 선포식’

이에 대해 현장에서는 ‘상징적 정리해고 수용과 정리해고 유보는 정리해고를 인정하는 것이다’, ‘추가 임금삭감하면 정상적인 생활이 불가능하다’, ‘노사 평화선언은 이후 투쟁을 포기하는 항복 선언이다’ 등의 비판이 제기됐다. 휴가 마지막 날인 9일 저녁, 조합원들이 농성장으로 복귀하면서 오랜만에 대규모 집회가 열렸다.

 

휴가 이후 첫 출근인 10일 회사가 조업을 시도했으나 실패하고 노조 동력만 증가했다. 이날 저녁 7시 집회 시작부터 비가 오기 시작해서 끝날 즈음에는 마치 물을 들이붓는 것처럼 심하게 내렸다. 집회장에 물이 흥건히 고일 정도로 비가 쏟아졌지만 조합원과 가족들은 대오를 흩트리지 않은 채 집회를 사수했다.

그날은 공연단이 와서 공연을 했어요. 비가 많이 왔었죠. … 비가 갑자기 와서 무릎 밑까지 차 있었어요. 그때 사람들이 흩어지지 않고 어깨동무하고 춤추고 했던 … 저는 그때 그렇게 시원할 수가 없었어요. … 결과야 어찌됐던 이길 수 있다는, 동지들과 함께 있으면서 외롭지 않다는 것을 강하게 느끼면서 상당히 편했었죠.[20]

저녁에 집회를 하는 데 비가 억수로 쏟아졌어요. … 우리 사수대가 앞에 앉아서 의연한 의지를 보였고, 조합원들도 한 사람 움직이는 사람이 없는 거야. 비가 억수같이 내리붓는데 … 전 간부가 앉아 있는데 물이 위에까지 차더라고 … 사람들이 감동해서 이번 싸움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기면서, 그때 앉아 있던 사람들이 울고 했었죠.[21]

11일, 7월 20일 이후 중단 상태였던 임금 및 고용조정 협상이 재개됐다. 노사협상의 재개를 앞두고 노조 중앙비대위는 협상에 관한 전권을 위원장에게 위임했다. 회사는 새로운 안을 제시했다.

- 정리해고 대상자 1,538명 중 923명(60%)은 2년간 무급휴직으로 전환하여, 정리해고 인원을 615명(40%)으로 축소

- 정리해고 대상자 중 식당 종사자 167명에 대해서는 고용 승계를 전제로 외주 하청화하고 나머지 인원은 희망퇴직을 모집해서 정리해고 최소화

- 노조의 2,500억 원 임금 삭감안은 수용

노조는 ‘정리해고 및 무급휴가 수용불가, 임금삭감 고통분담, 순환휴가제’라는 기존 입장을 고수했다.

 

12일 오전 노조가 협상 중단을 선언하자 정세영(명예회장), 정몽규(회장), 김판곤(사장), 정달옥(공장장) 등 회사의 핵심 인물들이 예고도 없이 노조 사무실을 찾아 위원장과 면담했다. 회사의 ‘식당 여성조합원 하청화 방침’을 반대하는 여성조합원들이 노조 건물 앞에서 긴급 집회를 열었다. 여성조합원들은 본관으로 복귀하는 회사 핵심 인물들을 따라가며 강력히 항의했다. 김광식 위원장이 노조 건물 옥상 위에 지어놓은 철탑 위로 올라가 농성투쟁에 들어갔다.

지난 7월 20일 우리는 세 사람의 전직 위원장을 고공으로 올려 보냈고, 노조 지도부는 삭발을 하면서 ‘정리해고가 철회되지 않는 한 살아서 나가지 않겠다’고 결심했었습니다. … 이제 모든 것은 원점으로 돌아왔습니다. 우리가 선택할 길은 한 가지뿐입니다. 우리의 마지막 목표는 정리해고 철회인 것입니다. 우리의 명분은 너무나도 당연하기 때문에 위원장인 저는 노동조합 위 철탑으로 올라가면서 투쟁의 대오를 새롭게 하고자 합니다.[22]

농성대오는 휴가 이후 다시 5천여 명으로 불어났다. 매일 저녁 집회에는 1만여 명의 조합원과 가족들이 결합하면서 열기가 더욱 높아져갔다. 정문 앞 육교와 맞은편 건물들에는 지역 주민들이 가득 모여들어 집회를 지켜보면서 호응을 보냈다.

 

13일 회사가 1공장과 3공장에서 관리자들을 투입해 조업을 시도했다. 정몽규 회장이 직접 현장에 나와 독려했다. 정몽규 면전에 항의하는 노조 대의원을 관리자들이 폭행하는 일도 발생했다. 사수대를 비롯한 조합원들의 저지로 조업은 전혀 이루어지지 못했다. 실제 조업이 목표라기보다는 공권력 투입의 명분을 쌓는 과정이었다. 노조는 회사가 용역깡패 수백 명을 모집해 사택과 경주 등지에 대기시켜 놓은 전모를 폭로했다. 회사의 조업 시도를 둘러싸고 긴장감이 높아지면서 저녁 촛불집회에 점거파업 중 최대 인원이 참여했다.

 

14일 민주노총이 ‘현대차 정리해고 반대’ 전국노동자대회를 사택 운동장에서 열었다. 회사가 2공장 아토스 라인에 조업을 시도했다가 노조의 저지로 실패한 뒤, 오후 3시를 기해 무기한 휴업을 선언했다. 대검찰청이 기다렸다는 듯이 현대차 울산공장에 공권력 투입 방침을 밝혔다.

 

15일 경찰병력 100여 개 중대 1만 2천여 명이 현대차 울산공장 주변에 배치됐다. 노조는 기자회견을 열어 ‘공권력 투입시 결사항전’을 선언했다. 회사의 식당 여성조합원 하청화 방침에 맞서 여성부장·여성대의원의 삭발식이 예정됐으나 중앙비대위의 반대로 진행되지 않았다.

 

16일 안영수 노동부차관이 노조를 방문했다. 언론은 경남경찰청이 공권력 투입 계획을 수립하고 도상 훈련을 실시했다고 보도했다.

 

17일 사수대 17명에 대해 체포영장이 발부됐다. 이기호 노동부장관이 내려와 중재를 시도했으나 성과 없이 끝났다. 회사는 관리자와 하청업체 직원 1만여 명을 동원해 공설운동장에서 ‘정상조업 촉구 결의대회’를 가졌다. 노조는 노조 건물을 중심으로 4공장부터 2공장까지 일렬로 죽 늘어져 있던 농성 천막들을 1공장을 빙 둘러싸는 형태로 재배치했다. 공권력 투입시 1공장을 배후 삼아 결사항전에 나서겠다는 진형이었다. 곳곳에 바리케이드도 쌓았다. 공권력 투입 긴장감이 최고조에 달한 상황에서, 저녁 집회에는 평소보다 더 많은 대오가 결집했다. 1만여 명의 조합원과 가족들이 공권력에 맞서 끝까지 투쟁할 것을 결의했다.

공권력이 임박했다는 소리를 듣고 오히려 바깥에서 조합원들이 들어왔죠. … 조합원들에게 감동받았어요.[23]

조합원들이 경찰들이 들어온다고 하니까 문을 봉쇄했으니까 오히려 담 넘어서 들어왔었어요. 사람들이 없는데 집회하면 모이는 거야. 선거구 반별로 조별로 조합원들이 안 나오는 사람 집에 찾아가요. 가서 데리고 오는 거죠.[24]

18일 새벽, 페퍼포그와 포크레인을 동원한 진압 병력이 정문 앞에 집결했다. 공장 안으로 곧 진입하려는 태세였다. 현장에 비상이 걸렸다. 순식간에 1천여 명이 쇠파이프로 무장하고 구호를 외치며 출동해 정문을 마주보고 대치에 들어갔다. 어느새 나타난 가족대책위가 무장한 대오 앞으로 나가서 전경을 마주보며 진을 쳤다.

{가족대책위 정문 앞 선동} 들어올 테면 들어오십시오. 국민의 정부, 누구의 정부인지, 우리가 여기서 죽으면, 우리 가족들이 여기서 죽으면 아무도 당신네들 정부 지지해 주지 않습니다.[25]

김대중 정권에게 정치적 치명상을 안길 상당수의 사상자 없이는 물리적 진압이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결사항전의 태세로 버티고 선 노동자와 가족의 기세에 눌려 경찰병력이 물러갔다. 민주노총과 금속연맹 중앙 간부들이 현대차노조를 긴급 방문했다. ‘고용·실업대책과 재벌개혁 및 IMF 대응을 위한 범국민 운동본부’의 각계 인사 40여명이 서울에서 현대차 공권력 투입을 반대하는 기자회견을 가진 후 오후에 노조를 방문했다. 울산의 시·구의원 26명이 “공권력 투입은 절대 안 된다”며 기자회견을 가졌다.

 

오후에 정문 앞에서 민주노총 울산본부 주최 지역 집회를 경찰이 봉쇄하려 했지만 몸싸움 끝에 공간을 확보하고 집회를 진행했다. 건물 위의 주민들도 경찰에 야유를 보내고 집회 대오에는 박수와 환호성을 보냈다. 저녁 파업 집회에도 역시 1만여 명의 대오가 참가해 고조된 분위기가 계속됐다.

 

조합원 대중

 

회사의 예상과 달리 정리해고 대상자에 대한 개별 통보 이후, 오히려 조합원 대중은 폭발적인 투쟁으로 일어섰다. 수천 명의 조합원들이 희망퇴직으로 공장을 나가고 또 상당수 조합원들이 자포자기·두려움·이기심 등에 빠져 파업에 참여하지 않고 있었지만, 공장점거 전면파업에 결합한 5천여 조합원의 기세는 하늘을 찌를 듯 높았다.

 

파업 노동자들 가운데 절반 이상이 정리해고 비대상자였다. 점거파업 기간 내내 대상자와 비대상자의 큰 구분 없이 정리해고를 저지하려는 하나된 마음으로 수천의 조합원이 함께 투쟁을 만들어 냈다. 자본이 강요하는 개인주의의 분열된 삶을 거부하고, 더불어 함께 살아가는 노동자의 의리와 연대를 당당하게 실천해 냈다. 광범한 노동자들이, 자본이 강요하는 억압과 분열의 삶을 거부하고 인간다운 삶과 새로운 사회의 실현을 향해 전진해 나갈 수 있음을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조합원 대중이 이렇듯 위대한 각성과 실천에 나설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 1987년 이후 10여 년 동안 민주노조운동을 통해 축적한 성과 때문이었다. 또한 정리해고 도입으로 시작되는 자본의 장기적인 전략과 음모가 눈앞의 대상자만이 아니라 대다수 조합원의 삶을 파괴해 나갈 것임을 조합원 대중이 널리 간파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점거파업 기간 내내 조합원 대중은 자발적이고 헌신적으로 투쟁에 참여하면서 스스로의 힘을 자각하고 단련시켜 나갔다. 일부 선거구에서는 조합원들이 스스로 파업 참석 출결 상황을 점검하고 비참여자를 조직하러 뛰어 다녔다. 사업부에 따라, 선거구에 따라, 대의원과 소위원 등 현장 활동가들의 노력 정도에 따라 일정한 차이들이 있었지만, 하루하루 지나갈수록 조합원 대중들은 투쟁의 일상에 익숙해져 갔고, 스스로의 투쟁이 연일 언론을 장식하며 전국의 관심을 집중시켜 내고 자본과 정권을 초조하게 몰아치고 있음을 당당하게 확인해 갔다.

 

회사는 파업불참 조합원들을 매일같이 울산 인근 피서지로 불러내 야유회를 가지면서 일당을 주었다. 파업에 불참하면서도 회사 지시 또한 따르지 않는 조합원도 많았다. 회사가 조직하는 야유회에 관한 제보가 수시로 대의원들이나 집행부에 접수됐다. 대의원들이나 사수대가 야유회 장소에 출동해 조합원들을 질책하는 일도 자주 있었다. 파업불참 조합원들은 자신들을 질책하는 대의원이나 사수대원 앞에서 고개도 잘 들지 못했다.

조합원들을 회사가 불러서 임금까지 줘가면서 들로 산으로 데리고 다녔죠. 여름에 비가 엄청 왔죠. 조합원에게 전화가 왔는데, 비가 오는데 산에 간다고 조합원을 집결시켜놨다고 해요. 제가 그 비를 맞고 오토바이를 타고 갔죠. 자기들도 미안했겠죠. 제가 이야기를 했는데 갑자기 회사측이 호루라기를 불며 산행을 시작한다고 하니까 돌아서서 그 장대 같은 비를 맞으며 산에 올라갑디다. 타고 갔던 오토바이 헬멧을 집어 던지고 욕을 했더니 돌아온 사람이 7명이었어요. 그 7명하고 종일 술을 먹었어요.[26]

조합원들이 개 삶아 먹고 그런 거 타격 갔었거든요. 갔는데 참 슬프더라고요. 사람들이 참 불쌍하더라고요. 우리 사업부 조장 반장 등 가동시킬 수 있는 인원을 다 모아놨는데. 내가 기습해서 30분 정도 선동했는데 다 숨더라고. 그래서 ‘내일 집회는 꼭 오라’고 하니까 ‘미안하다’고 하면서 오데요. 이야기했던 것은 ‘도대체 이게 스스로 생각했을 때 이해가 되는 거냐, 한 번 자신을 돌아봐라. 이러고 있는 나와 거기 숨어 있는 당신들과 뭐가 다르겠느냐’고.[27]

전면투쟁 기간 내내, 투쟁에 참여한 조합원 대중의 자신감과 힘은 회사의 관리체계와 힘을 압도했다. 8월 중순경에는 회사의 지침과 비용을 받고 울산 근교에서 중간 관리자 중심으로 야유회 등이 열리고 있었는데, 그 동향이 속속 첩보로 각 선거구 대의원들에게 전달되었고, 이런 모임들을 해산시키려고 파견된 수명의 조합원에 의해 수십명의 중간 관리자들이 무기력하게 쫓겨가는 상황이 곳곳에서 벌어지기도 하였다. 만일 공권력의 개입 없이 회사와 노동조합만의 싸움이었다면 노동조합은 충분히 완승을 거두고도 남았을 것이다.[28]

5천여 조합원들은 자동차 공장으로는 세계 최대 규모라는 그 넓은 현대차 울산공장을 완전히 장악했다. 생산직 남성조합원들이 주축을 이뤘지만, 전원 정리해고 대상자가 된 식당의 여성조합원들도 3백여 명 대오를 꾸려 가장 열성적으로 파업에 참여했다.

 

그해따라 장마철 폭우와 태풍이 유난히 심했지만, 파업대오를 흩트려 놓지 못했다. 1만 2천 전경병력이 울산을 새까맣게 물들였지만, 오히려 파업대오 전체가 쇠파이프와 온갖 비장의 무기들로 무장하게 하는 역효과를 낳을 뿐이었다.

수천의 조합원 대중은 공권력에 대한 두려움조차 떨쳐 버리고 현장 사수를 위해 결사항전 하겠다는 단호한 결의 아래 실제 준비에 들어갔다. 수도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방어용 장비들이 순식간에 준비되었다. 방진 마스크와 수경은 기본이었고, 쇠파이프도 농성 조합원 숫자에 맞먹을 만큼 준비되었다. 상당한 파괴력을 갖는 몇몇 무기들도 비밀리에 적지 않게 준비된 것으로 알려졌다. ‘공권력 투입 초읽기’라고 언론에서 정신없이 떠들어 대던 순간에 마스크와 수경을 쓰고 한손에 쇠파이프를 들고 대오를 지어 노동가를 부르며 규찰에 나가는 모습은 당시 현장을 지키던 수천 조합원의 가장 평범한 모습이었다.[29]

현대차라는 거대 자본에 맞서, 아니 총자본에 맞서 정리해고를 저지하는 것이 결코 쉽지 않은 일임을 조합원들은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파업 조합원들의 가슴 속에는 정리해고를 저지할 수 있다는 희망이 불타고 있었다. 그 희망의 중심에는 노동조합이 우뚝 자리하고 있었다.

 

녹색 사수대

 

점거파업에 돌입하기 직전 노조 상무집행위원회는 정리해고 대상자를 중심으로 사수대를 결성하기로 결정했다. 파업 투쟁 시 회사와 경찰의 물리력으로부터 투쟁 대오와 지도부를 사수하기 위해서였다. 정리해고 통보를 받은 조합원들의 분노를 투쟁 대오로 모아 ‘통제’할 필요도 있었다.

당시 무급휴직과 정리해고자들의 분노는 대단했습니다. 그때 노동조합에서 지불했던 선물이 있었어요. 정리해고 시점에 노조에서 지급했던 선물이 주방 세트였어요. 수저, 칼. 이런 것이 들어갔었는데, 이때 지급했던 주방 기구를 무급휴직, 정리해고 대상자들이 집으로 안 가져가고 몸에 품고 있는 사람이 많을 정도로 분노가 극에 달했어요.

사실 그때 정리해고 대상자들은 현장에서 막무가내였죠. 반장 책상에 칼 꽂고, 그것을 시작으로 보이는 대로 기물 파손부터 시작해서, 우리가 만들어놓은 생산 차에 테러를 가하고 그런 기억들, 공구를 다 갖다 버리고. 어쨌든 통보를 받은 조합원들은 포기하고 나가는 사람들이 있는 반면, ‘내가 왜 나가야 되냐? 왜 하필 나냐?’ 이런 것이지요. 그런 동지들은 사수대로 공장점거로 결합을 하는 거죠.[30]

정리해고 명단을 회사가 뿌리고 나서 통제가 안 될 정도로 현장이 혼란스러웠거든요. 집행부에서 봤을 때 정리해고 반대 투쟁을 준비해왔기 때문에 투쟁은 하게 되는데, 그렇다면 이 조합원들을 통제할 수단이 필요했던 거죠. 또 한편, 공권력에 대비하는 노동자 내부의 어떤 조직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던 시기였거든요. 예로 도끼 사건 같은 것도 있었거든요. 회사 앞에서 회사 관리자들 ‘다 때려죽이겠다!’ 이런 경우도 있었고, 칼도 들고 다녔고, 또 노조위원장한테 항의하러 오면서 기물 파손하는 경우도 허다했고. 그래 조직이라는 규율 속에다 넣어서 조합원 개인적으로 하는 행동을 막을 수가 있고. 그것을 집단화해서 그 힘으로 공권력을 상대로, 사측을 상대로 싸울 수 있도록 힘을 결집시키기 위한 것이었죠.[31]

사수대원은 공개적으로 모집했다. 다수의 정리해고·무급휴직 대상자들과 일반 조합원 그리고 활동가들이 참여했다. 규모는 대략 3~400명 선이었다. 사수대 총대장과 사수대장을 두고 대오를 3개 지단으로 나누어 세 명의 지단장을 두었다. 사수대는 점거파업의 선봉에 섰다.

정리해고나 무급휴직 통보받은 동지들이 흥분해서 대거 결합했죠. … 이 사람들은 내가 나가서 이 상황에서 어디 가서 어떻게 벌어먹고 살 것인가가 지배적이었죠. ‘그래 개새끼들! 내가 죽더라도 느그 한 놈은 더 죽이고 간다’ 이런 마음이었죠.[32]

참여하신 분들이 정리해고 받은 분들은 물론, 그렇지 않은 일반 조합원들이 많이 참여했어요. 그러니까 회사의 정리해고 통보에 대한 분노, 그 다음에 해고 명단을 받은 조합원들과 같이 함께 해야 한다는 그런 어떤 노동자적 의리, 이런 것들이 굉장히 강했던 것 같아요. 그때는 ‘사수대 할 사람 다 모여라’ 해서 옷 나눠주고, 모자 나눠주고, 그때 곤색 모자에 녹색 티! 노래도 ‘녹색 사수대’라고 그렇게 만들었잖아요. 천막농성 막 돌입하고 사수대 활동을 시작했어요.[33]

점거파업 과정 내내 사수대는 일상적 파업대오 사수의 역할을 맡으면서 자체 훈련을 받기도 했다. 공장 가동을 시도하는 회사에 맞서 일하는 관리자들을 끌어내거나 ‘공장타격투쟁’을 벌여 생산을 방해하기도 했다. 사수대의 선도적 투쟁은 조합원들의 투쟁 속으로 녹아들어가 36일간 일사불란한 투쟁을 전개하는 중요한 힘이 되었다.

일과가 아침에 조회를 하고 구보하고, 그렇게 해서 사측한테 엄청난 압력을 가하고 … 낮에는 해당 사업부 가서 활동을 했고요. 저녁에는 순찰 활동하고. 그 다음에는 중요한 집회라든지 협상이라든지 이런 게 있을 때 사수대가 소위 비대위나 집행부 호위대로 활동을 했어요. 거기에 훈련은 공권력이 들어올 때를 가정하고 스크럼 짜고 몸싸움하는 거, 그 다음에 화염병 투척하는 거까지 준비는 했었죠. 민주노총의 간부가 와서 직접 가르쳤죠.[34]

출동을 많이 했어요. 예를 들어, 3공장에 사측 관리자들이 공장에 들어와 있다고 하면, 대의원들이 요청을 많이 했어요. 자기들이 직접 관리자를 못 몰아내니까. 부담스러우니까 노동조합에 전화해서 ‘사수대 좀 보내 달라’ 그러고 연락이 오는 거야. … 해당 공장에 지단장을 통해서, 지단장이 다시 밑에 지대장들을 소집해서 대의원들을 각 천막에 다 있으니까 해당 사업부 대의원들을 몇 십 명 오토바이에 쫙 태워 가지고 그 공장에 보냈어요. 몽둥이 가지고 가 휘저어버리고. 관리자들을 다 몰아내고. 거의 기동 타격대 역할을 했죠.[35]

사수대의 위상이 굉장히 높았어요. 공권력이 우리를 두려워했고 그러니까 언론에서 완전히 조직폭력 집단이라고 계속 매도를 했으니까. 우리 내부적으로도 조합원들 보기에 굉장히 믿음직하다 그래요. 일사불란하게 움직였거든. 공권력이 주변에 이제 배치되고 그랬는데도 우리 해방구에서 조합원들이 생기발랄할 수 있었죠.[36]

사수대가 중요한 역할을 했는데, 의지가 대단히 강했죠. 이 사람들의 의지가 현장에 녹아들어간 것이죠. 현장에서 조합원들은 참 미안한 거야. 전에 안 나왔던 사람은 미안하니까 와서 불러서 ‘먹고 해라’ 하기도 했어요. 또 ‘우리가 힘이 되지 않으면 우째 하노. 밥이라도 해서 주라’ 이러면서. 그렇게 사수대 활동이 조합원들에게 흘러 들어갔죠.[37]

정리해고 대상자를 위주로 구성된 노동조합 사수대는 이번 투쟁의 선봉 대오로서 기능했다. 비장한 긴장감과 규율잡힌 행동들은 이번 투쟁의 절박함을 늘 대중 속에 환기시키는 역할을 했다. 그러나 투쟁 전반을 놓고 볼 때, 사수대는 ‘지도부 사수’라는 형식에 지나치게 얽매이며 투쟁의 선봉대오로서의 독자적인 자기 역할을 별 달리 해내지 못하는 한계를 보였다. 여기에는 투쟁력에 의거하기보다 협상에 매달린 집행부의 기조가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사수대는 투쟁력을 극대화하는 뇌관과도 같은 존재였는데, 투쟁력 극대화에 대한 적극적인 의지가 없었던 집행부는 사수대의 활동에 큰 의미를 두지 않았다. 나아가서는 사수대의 제한된 활동에 불만을 표출하는 일부 사수대원들과 집행부 구성원들이 충돌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사수대가 이번 투쟁의 처음부터 끝까지 가장 헌신적이고 모범적으로 활동했던 선봉 단위였다는 사실은 분명히 높게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38]

가족대책위원회

 

노조가 무기한 점거파업을 시작하자 가족대책위원회가 7월 23일부터 천막농성을 시작했다. 가대위는 1996~97년 노개투 총파업 때 지원활동을 한 가족들이 가족모임 ‘두레’로 모여 있다가 정리해고 투쟁이 일어나자 앞장서서 조합원 가족들을 조직한 것이었다. 가족들은 대부분 임산부거나 어린 아이들이 있는 젊은 ‘새댁’들이었다. 지속적으로 참여한 인원은 100여 명 정도였고, 잠깐씩 오갔던 이들을 포함하면 200명이 넘었다. 천막농성을 하며 밤낮으로 상주한 이들은 20여 명이었다.

노개투 때 가족이 ‘두레’ 이름으로 지원을 좀 했었어요. 우리 두레 회원은 한 20명 정도. 그러다가 정리해고 들어오면서 ‘우리도 이렇게 있으면 안 되겠다’ 해서 우리가 집행부를 만났죠. 그래서 집행부에게 ‘우리가 같이 싸울 테니 가족들을 소개해 달라’ 해서 각 아파트의 동장을 한다거나 하는 사람들을 소개해 준 거죠. 그래서 모아서 … 집회하고 아줌마들이 많이 왔어요. 한 100여 명. 이후에 이름 올려놓고 오가고 한 사람들 하면 한 200~230명 정도 돼요. 무급 당한 사람들도 있고, 좀 열성적이고 그리고 남편들이 어느 정도 설득력 있게 해오던 사람들이지.

가대위하면서 바로 정문 밖에 텐트를 쳤어요. 거기서 우리가 한 일주일 정도 있었나? 근데 굉장히 위험한 상황이야. 아이들이 어리니까 도로로 막 나가고 이러니까 집행부에서 ‘위험하다 안으로 들어와라’ 그래서 정문 안으로 가서 처음에는 입구 쪽에 있다가 또 안쪽으로 옮겼어요. 한 20명이 자면서, 가족들 텐트가 따로 있었어요.[39]

가대위는 회장, 부회장을 중심으로 조직, 선전, 홍보로 체계를 나누어서, 가족 동원과 조직, 선전물 작성, 지역 홍보 활동을 전개했다. 노조의 체계와는 독립된 ‘별동부대’로 지역을 돌아다니며 현대차 조합원 가족만이 아니라 지역 주민들에게 고용안정투쟁의 필요성을 알리고 동참과 지지를 호소했다.

가대위는 회장이 있고, 부회장 있었고, 홍보, 선전, 조직 이렇게 있었어요. 아파트에 대부분 자동차 사람들이 밀집해서 사는 데는 동별로 책임자를 정하고, 선전물을 내는 사람들이 있었고, 주로 현장 밖으로 나가서 지역에 알리는 팀이 있었고.

특히 우리가 차량 선전을 많이 했거든요. 노동조합에서 운전해주고, 우리는 마이크 잡고 다니고 그리고 선전물 나눠주고 그랬었죠. 차량을 각 구별로 쫙 나눠서 나가서 선전을 하는 거지. 가족대책위 이름으로 해서, ‘언제 몇 시에 무슨 일 있으면 나와라.’ 반응은 아파트별로 달랐어요. 자동차 가족들이 밀집해 사는 데는 굉장히 좋았지. 사람들이 나와서 음식 같은 것도 해서 주고, ‘나도 나가겠다’ 이런 게 많이 있었고. 그래서 사람들이 많이 늘었죠. … 반대로 괜찮은 아파트들, 그 당시 평수 넓고 큰 데는 주로 다른 관리자들이 살거든. 여기 가면 ‘시끄럽다’고 시비 걸고 그래요. ‘조용히 좀 해라’ 이러고.[40]

아이를 데리고 자는 가족의 고통은 말할 수 없었다. 이들을 가장 힘들게 하는 것은 천막에서 자는 아이들이 아플 때였다. 또 가대위 성원들은 회사에게 사주받은 폭력배들에게 폭력을 당해 부상자가 속출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가대위 성원들은 점거파업 기간 내내 조합원들과 같이 천막을 지키며 끝까지 투쟁을 벌여나갔다.

그해에 비가 엄청 많이 왔어요. 뭐 차가 둥둥 떠다닐 정도니까. 텐트에 애들 자고 있는데 막 빗물 새고, 한번은 한 애가 갑자기 아파 가지고. 그래 병원에 갔더니만 그 은박지 깔판에서 나오는 독성이 아이를 중독시켜요. 아이가 마비가 오고 막 틀어지고, 눈 까고, 아이 죽이는 줄 알았지. 한바탕 난리가 났어요.[41]

24일 오전 11시, 항의 집회 후 회사에 들어가려고 할 때 용역 깡패 경비 30여 명이 동원돼 폭력적으로 가족들을 몸으로 가로막기도 했다. 항의하는 가족들을 무자비하게 밀어붙여 가족 한 명이 안경이 부서지는 등 10여 명이 타박상과 팔이 찢어지는 부상을 당했다. 임산부가 충격을 받아 몸살을 앓기도 했다.[42]

우리 모두는 정리해고에 분통을 터뜨리며 남편들이 싸우고 있는 현대자동차 텐트농성장으로 달려갔다. 우리 모두는 새 생명을 잉태한 임산부(7~8명)와, 세상을 본지 2달도 안 된 아기를 데리고 온 엄마들을 포함하여 살림밖에 몰랐던 애 키우는 평범한 아줌마였다. 평소에는 남편이 집회라도 갈라치면 가지 말라고 말리고, 차 안에서 무시무시한(?) 노동가요 좀 틀면 못 틀게 바가지를 긁고, 갓 태어난 애기가 예뻐서 어쩔 줄 몰라 했던 순한 아줌마였다. 하지만 일자리에서 쫓겨난다는 말에, 생존의 위협을 느끼며 현대자동차 정리해고를 막아야 한다는 일념으로 회사 안 농성장으로 달려갔던 것이다.

그늘도 없는 땡볕 아래서 아이들을 보채고 달래면서, 밤에는 모기에게 온몸이 뜯겨가면서, 새벽에는 애기에게 우유를 줘가면서, 임산부들이 잦은 소변욕에 시달리며 밤새도록 멀리 떨어진 화장실을 다니느라 밤잠을 설치면서도 우린 한마음으로 정리해고 반대를 외쳤었다.

이것뿐이었나... 천둥, 번개를 동반한 폭우가 일주일간 쏟아질 때도 텐트 안으로 몰아치는 빗줄기가 행여 아이를 깨울까 싶어, 청테이프를 찾아 찢어진 텐트를 이어 붙이고, 아이 얼굴에 빗물을 닦아주면서 밤을 지샌 날도 참으로 많았었다. 갑자기 바뀐 환경 때문에 아이들이 코피를 흘리고, 결혼 후 4년 만에 얻은 귀한 아이가 경기를 일으키며 거품을 물고 쓰러져 혓바닥이 말려들어가는 것을 발을 동동 구르고 애를 태우며 지켜보기도 했다. 그런 고통 속에서도 우리는 농성장을 지키며 우리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던 것이다.

우리는 남편들의 일자리 지키기 투쟁을 함께 하기 위해서 그 불편한 잠자리를 감수하며 한 달 넘게 그 자리를 지켰다. 처음에는 남편에 대한 지원자로 시작했지만 우리 모두는 남편들의 정리해고 투쟁에 당당한 주체로 나서게 되었다. 정리해고 대상자에는 식당아줌마들이 모두 포함되어 있어서 밥주걱투쟁에 지지를 표하며 실제 집안 가장인 고령의 식당아줌마들과도 동지가 되었다.

우리 모두 여기서 죽자고 했다. 처음에는 낯설었던 사람들도 한 달 가량 텐트에서 먹고 자고 하면서 혈육 이상의 끈끈한 정을 나누게 되었다. 전 위원장 세 분은 정리해고가 철회될 때까지 투쟁하겠노라며 굴뚝으로 올라갔다. 사수대를 위시한 남성 조합원들은 부인들의 지칠 줄 모르는 투쟁에 더욱 감화되어 사측과 공권력에 맞서 더욱 눈빛을 반짝이고 주먹을 움켜쥐었다.

현대자동차 노동운동사에 이토록 준비된 싸움이 있었던가? 우리 모두는 공권력에 대비한 준비를 완벽하게 끝냈다. 더군다나 주변 여건도 우리에게 유리하게 조성되었다. 각계에서는 현대자동차 공권력 투입을 결사반대 한다는 성명도 발표했다. 그즈음 김대중 대통령도 제2의 건국을 천명하면서 신노사관계 정립을 운운하고, 보수정치인 김종필 총리서리까지도 나서서 “공권력 투입은 절대 안 된다”는 입장까지 밝혔었다. 이제 우리에게 남은 것은 우리의 흔들리지 않는 의지를 더욱 분명히 밝혀 승리의 깃발을 꽂는 것이었다.[43]

정문 앞 집회, 천막 농성, 각 지역에의 선무방송, 가족투쟁 속보 발행 등 가족대책위원회의 눈물겨운 활동은 조합원들에게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강력한 자극과 힘을 주었다. 과거 투쟁이 있을 때마다 꾸준히 축적되어 온 가족들의 결합이 이번에는 100여 명의 기본 대오를 구축하는 수준에까지 올라섰다. ‘누구도 통제할 수 없는 가장 무서운 조직’으로서의 면모를 유감없이 보여준 가대위의 활동은 특히 공권력 투입이 초읽기에 들어간 상황에서 조합원들보다 더욱 적극적으로 결사항전의 의지와 태세로 임했던 대목에서 바라보는 사람들의 고개를 숙연해지게 만들었다.[44]

◎ ‘최소화된 정리해고’ 수용과 패배적 종결

 

그런데 18일 새벽 1만 2천 전경병력을 되돌려 세울 만큼 완강했던 파업이 그로부터 불과 일주일도 채 되지 않아 처참한 모습으로 붕괴했다.

 

18일 밤 전경병력이 정문 앞에 대기하고 있는 상황에서, 노무현 부총재를 중심으로 한 국민회의 중재단이 울산에 급파됐다. 중재단은 밤 11시경 노조 임원들과 면담을 가졌다.

 

19일 민주노총과 금속연맹이 현대차노조 사무실에 임시 상황실을 설치했다. 금속연맹 비상단위노조대표자회의가 “현대차 공권력 투입시 총파업”을 결의했다. 국제금속노련 동아시아 대표가 현대차 파업에 대한 ‘지지·연대’ 기자회견을 했다.

 

20일 국민회의 중재단과 현대차 노사의 합동회의에서 정부여당의 중재안이 나왔다.

- 정리해고 대상자 1,538명 중 정리해고 인원을 식당 여성조합원을 포함해 250~300명으로 최소화

- 1,200여 명 무급휴직과 순환휴가

- 고용안정기금 설치와 운영

- 민형사상 고소고발과 손해배상·가압류 취하와 징계 철회

- 노사 평화 선언

21일 저녁 노조 집회에서 김광식 위원장이 정부 중재안을 받아들이겠다고 선언했다.

어저께 3시부터 회사 측과 정부 중재단과 노조 측이 협상에 들어갔습니다. 어저께 중재단이 중재안을 낸 것이 바로 이겁니다. 여기 제 손 안에 있습니다. 중재안이 배포가 됐고 그 순간은 만약에 회사 측이 이 안을 받지 않으면 회사 측이 몰리는 거고 노동조합 측이 이 안을 받지 않으면 사회적으로 또 노동조합이 몰리는 그런 조건들로 취하고 있었습니다.[45]

김광식 위원장이 연설하는 동안 야유와 함성이 계속 터져 나와 제대로 말을 끝내지 못했다. 무대 뒤편에서는 식당 여성조합원들의 고함 소리가 들려왔다. 집회가 어수선하게 끝나고 대열이 반쯤 빠지고 있을 때 식당 여성대의원이 마이크를 잡고 오전에 위원장과 있었던 간담회 내용을 폭로했다. 식당 조합원들에게 정리해고를 수용하라고 했다는 것이었다. 문선대가 마이크를 잡고 ‘우리 투쟁의 목표는 정리해고 철회다. 정리해고가 철회될 때까지 끝까지 투쟁하자’고 선동했다.

 

집회가 끝난 뒤 가족대책위가 농성 천막들을 순회하며 선동과 함께 구호를 외쳤다.

“정리해고가 철회되지 않는 한, 정리해고가 철회되지 않는 한, 절대로 못 나갑니다. 정리해고 철회 없이 절대로 못 나간다!”[46]

얼마 후 사수대를 중심으로 1천여 명의 조합원이 노조 건물 앞에 모여 김광식 위원장을 불러낸 가운데 항의집회를 열었다. 김광식 위원장은 다시 마이크를 잡고 자신의 고민과 어려움을 설명했다. 분노한 조합원들의 즉석 발언이 이어졌다.

“공권력이 무서웠으면 벌써 투쟁을 그만두었을 것이다. 우리는 공권력에 맞서 싸워 이길 자신이 있다”, “위원장이 투쟁할 자신이 있다면 지금 이 자리에서 모든 양보안과 중재안을 철회하라. 만약 그럴 자신이 없으면 노동조합 위에 매달아놓은 관을 불태워버려라”, “지금 이렇게 투쟁하고 있는 사람들과 회사가 시켜서 일당받고 놀러 다니는 사람들과 같은 투표권을 줘서 투표로 심판받겠다는 게 말이 되는가?”, “협상 때 회사는 당당한데 위원장은 왜 그렇게 힘이 없느냐? 힘내라. 표정 관리해라!”[47]

준비가 덜 됐습니까? 아니면 아이들 때문에 그렇다면 가족대책위 내 보내십시오. 저희들은 준비 다 됐습니다. 뭐 지도부에서 준비 덜 됐습니까? 저희들은 공권력에 대한 준비 다 돼 있습니다. 그런데 왜 이런 식으로 합니까? 저희들은 공권력에 의해 나가면 나갔지 지도부 이런 식으로 하면 저희는 못 나갑니다. 거기에 관해 확실하게 이야기 해 주십시오. 저희들은 준비가 다 돼 있습니다.[48]

조합원들이 김광식 위원장의 입장을 다시 요구하자 위원장은 “조합원들의 뜻을 충분히 알겠다”고 말했다.

 

김광식 위원장의 중재안 수용에 대해 민투위가 긴급 운영위원회를 열어 △기만적 중재안 반대 △전직 위원장들의 입장을 서면으로 확인 △현장조직들 간의 입장을 통일해 유인물 제작을 결정했다. 그러나 실노회가 조직원 총회에서 입장을 정리하지 못하면서 현장조직들 간의 입장을 통일하지 못했다. 전직 위원장들의 입장도 정리되지 않았다. 윤성근 전 위원장만이 ‘정리해고는 저지해야 하며 무급휴직도 수용할 수 없다’는 내용의 서신을 내려 보내 22일 민투위 유인물에 실렸다.

1. 우리의 목표는 생존권 사수와 노조 사수입니다. 생존권 사수는 정리해고 철회를 통한 일자리를 지키는 것에서부터 출발합니다. 노동조합 사수는 생존권 사수투쟁에서 승리하는 결과물인 것입니다. 그럴 때만이 제2, 제3의 정리해고를 막는 유일한 방법이며, 일방적인 배치전환과 각종 불법, 부당한 횡포를 막아낼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정리해고 수용은 생존권과 노동조합 모두를 심각하게 위협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 6. 결론적으로 정리해고는 저지해야 하며 무급휴직도 수용할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최고조에 달해 있는 조합원들의 동력과 투쟁의지, 그리고 외부적 조건 등은 우리에게 유리한 것이 현실입니다.[49]

22일, 노사 협상이 진행 중인 본관 건물 앞에서 가족대책위, 식당 여성조합원, 민투위, 사수대가 합동으로 항의집회를 가졌다. 항의집회 대오는 저녁 무렵 500여 명으로까지 불어났다. 저녁 집회에는 점거파업 시작 이후 가장 적은 3천여 명이 참여했다. 김광식 위원장은 ‘앞으로 협상에 목매달지 않겠다. 지금까지 노조에서 밝혔던 임금삭감안을 철회한다. 더 이상 비굴하게 머리 숙여 협상에 임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다시 힘 있는 투쟁을 조직하자’고 입장을 밝혔다. 그러나 이러한 위원장의 입장 발표에도 언론에서는 계속 타결이 임박했다는 보도가 나오고 있었다.

 

23일, 정부여당이 회사의 완강한 입장을 반영해 새로 중재안을 제시했다. 오후 2시 태화강 둔치에서 민주노총 주최로 ‘정리해고 저지와 민주노조 사수 전국노동자대회’가 열렸고, 집회 참가자 3천여 명이 현대차 울산공장까지 거리 행진을 벌였다. 이날 집회에서 권영길 민주노총 전 위원장이 ‘현대차 협상이 불만족스러운 내용으로 타결되더라도 인정해주자’고 얘기해 집회 참가자들을 당황하게 했다.

 

이틀째 문선대가 문화선동 활동을 거부하는 가운데 저녁 집회가 열렸다. 김광식 위원장은 ‘언론에 현혹되지 말라. 조합원이 수용할 수 있는 안이 나오면 도장을 찍기 전에 조합원들에게 먼저 의견을 묻겠다’라고 입장을 밝혔다.

 

그러나 24일 새벽 2시 30분, 노사합의 소식이 TV 자막을 통해 발표됐다. 오전 6시, 잠정합의 기자회견문을 노사가 발표했다. ‘△277명 정리해고[50] △나머지 1,261명 1년 6개월 무급휴직[51] △정상조업을 위한 노력이 있을 때 재산가압류와 고소고발 등에 대한 부분 철회 △노사화합 및 무분규 선언’ 등이 주요 합의 내용이었다.

<현대자동차 고용조정과 노사화합을 위한 잠정합의문>

1. 고용조정방안

(1) 노사는 회사 측이 통보한 1,538명의 고용조정 대상자 중 277명을 경영상 해고한다.

(2) 경영상 해고 대상자에 대해서는 근속기간 5년 미만은 7개월, 5년 이상 10년 미만은 8개월, 10년 이상은 9개월의 위로금 지급을 원칙으로 한다.

(2-1) 대상자 선정이 공정하고 합리적인 기준이 아니라고 인정하는 경우에는 법적 절차에 의한 결정에 따른다.

(2-2) 위로금 지급 계산방법은 5차 희망퇴직과 동일하며 기 지급된 평균임금 45일 분의 해고예고 수당은 차감 지급한다.

(3) 경영상 해고 대상자를 제외한 나머지 인원 1,261명에 대해서는 1년 6개월간의 무급휴직을 실시한다. 단 1년 경과 후 6개월 간 외부 기관 등에 의한 교육훈련을 실시한다.

(4) 노사는 정부에 대하여 근로기준법 제31조에 의거해 경영상 해고된 근로자에 대해 생계안정, 재취업, 직업훈련 등 필요한 조치를 우선적으로 취할 것을 요청하고, 회사 측은 해당 근로자들이 계열사 등으로 재취업할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노력한다.

(4-1) 그리고 회사는 해고 등 퇴직자들이 원하는 경우 퇴직 전의 직책 등을 감안하여 2년 이내에 그 근로자를 우선적으로 고용하는 노력의무를 다하도록 한다.

2. 노사화합 조치

(1) 노사는 근로자의 후생증진, 교육훈련, 취업알선 사업 등을 적극적으로 추진한다.

(2) 회사는 노사 간의 원만한 합의와 조업재개가 이루어지고, 장기간의 노사분규 사태로 인한 회사의 손실을 조속히 만회하기 위해 노동조합이 생산성 향상에 최선을 다하는 경우 손해배상소송과 재산가압류 조치를 취하토록 한다.

(2-1) 아울러 노사분규 과정에서 생긴 불법행위의 처리는 사직당국에 맡기되, 노조의 조직적 활동으로부터 현저히 일탈하여 이루어진 심각한 인명, 재산상 피해를 제외하고는 회사는 노사화합과 조업정상화가 이루어질 때, 고소 고발과 징계를 선처토록 한다.

(3) 노사 양측은 상호신뢰를 바탕으로 노사관계 안정을 통한 산업평화와 생산성 향상, 관리체계 정상화 및 개선을 위해 노사합의를 통하여 앞으로 2년간 경영상 해고를 하지 않으며, 노동조합은 노사관계 평화유지를 주된 내용으로 하는 ‘노사화합 및 무분규선언’을 추진한다.[52]

<부속 합의서>

1. 고용조정 관련

(1) 경영상 해고되는 식당 근로자에 대해서는 하도급 전환시까지 회사에서 기존의 임금을 지급한다.

(2) 회사는 생산부문의 전부 또는 일부를 외주처리, 하도급 또는 용역으로 전환하고자 할 때 경영상 해고자 등의 우선 재고용을 위하여 계약 이전에 노조와 협의하며, 노사 합의 없는 하도급 전출을 제한한다.

(3) 회사는 식당의 경영상 해고자 또는 관련 배우자 등의 고용이 보장될 수 있도록 이를 흡수할 수 있는 규모의 식당 운영권을 노조로 이관한다. 단, 계약은 현행 규정에 따른다.

2. 기타 사항

(1) 노조는 1998년도 임금인상 요구를 철회하고 기 제시한 급여 및 제비용 삭감안의 유효를 확인하며, 노사는 이후 '98년 임금협약 기간 중의 임금을 동결한다.

(2) 회사는 직업훈련 등 근로자 복지 향상을 위하여 합의일자 이후 3개월 이내에 85억 원을 지원한다. 이 자금은 노사협의로 공동운영한다.[53]

파업농성 천막을 지키고 있던 조합원들은 아침 뉴스를 통해 협상 타결 소식이 전해지자 망연자실했다. 조합원들은 황망한 모습으로 천막을 떠나기 시작했다. 몇몇 분노한 조합원들이 노조 건물 앞으로 몰려가 노동조합 유리창과 집기들을 부수었다. 사수대 조합원들이 사수대 티를 벗어 불태우고, 김광식 위원장이 죽을 각오로 투쟁하겠다며 노조 건물 위에 올려놓았던 관도 끌어내려 불태웠다. 여성노동자들과 가족대책위는 절규를 쏟아냈다. 문화회관에는 농성 천막을 철거하러 가기 위해 관리자들이 대기했다. 정문에서는 경비들이 물품 수색을 했다. 오후가 되자 거의 모든 조합원이 울산공장을 빠져나갔다.

{현대차노조 대의원} 착잡한 심정입니다. 이게 한계인 모양입니다. 싸울 능력이 있었는데 집행부에서 접으니까 할 수 없는 거 아닙니까? 현장에서 아무리 일어나도 집행부에서 접으면 할 수 없는 거 아닙니까? 저 같은 경우는 그렇습니다. 일개 대의원이 이만큼 이렇게 하는데 위원장은 얼마나 참 힘들었겠나 한편으로는 이해도 가고, 한편으로는 이게 아닌데.[54]

그때 정리해고 받아들이고 난 뒤에 새벽에 현장에서는 난리가 났습니다. 다시 반석 위에 올려놨던 노동조합이 엄청난 혼란과 기반이 흔들렸죠. 집으로 가버린다고 가버리고. ‘더 이상 기댈 것도 믿을 것도 없다’하면서 많이 울었죠.

어쨌든 한 500 대오 정도 남아 있었는데, 이 조합원들이라도 추슬러야지. 제 개인적으로 만약에 조합원들이 실망감과 배신감, 상실감이 커서 그냥 흩어지고, 정리해고, 무급휴직이 현실로 다가왔는데 그대로 물러섰을 때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거라, 의미조차 남길 수 없는 거잖아요? 집행부가 무너지더라도. 또 다른 싸움을 준비하고 또 다른 불씨를 만들어야 된다.

그래서 남아 있는 조합원들 마이크로 ‘식당에 다 모여라’ 하고 김광식 위원장을 제가 데리고 가서 ‘당신이 하고 싶은 말 솔직하게 다 해라’, 그때 분위기가 하도 험해서 다들 안 갈라 하더라고요. 김광식 위원장이 ‘죄송합니다’ 하면서 사과하고 하더라고요. 우리도 수배받고 있으니까 다 빠져나갔죠.[55]

26일, 회사가 식당 조합원 144명을 포함한 총 277명의 정리해고 명단을 일방적으로 작성해서 배포했다. 회사는 정리해고 대상자였다가 무급휴직자로 바뀐 조합원들에게 31일까지 무급휴직자 각서를 쓰라고 요구했다. 24일 잠정합의 이후 세부사항에 대한 실무협상이 열리지 않자, 노조는 29일로 예정된 조합원총회를 9월 1일로 연기했다. 잠정합의를 강력히 규탄하는 내용으로 27일 민투위 선전물, 28일 사수대 지도부 주축의 활동가들이 발행한 <다시 머리띠를 묶으며>가 현장에 배포됐다.

우리는 한 달이 넘는 기간을 ‘정리해고 철회’라는 확실한 목표를 갖고 싸워왔다. 그 거대하고 완강한 투쟁을 벌이면서 누구도 공권력을 두려워하지 않았고, 승리에 대한 믿음을 버리지 않았다. 노동조합이 정부 중재안을 받아들였다고 밝힌 21일에도 조합원들은 노동조합 앞으로 몰려가 거세게 항의하면서도 위원장을 비롯한 집행부에 대한 믿음을 버리지 않고 앞으로 제대로 투쟁할 것을 간절히 요구하였다.

그러나 24일 노동조합은 정리해고를 수용하고 말았다. 흥분한 조합원들은 노동조합 앞으로 몰려가 사수대 옷을 벗어던지고, 관과 노동조합 깃발을 불태웠다. 조합원들은 이렇게 노동조합의 배신행위에 대해 항의한 것이다.

이번 잠정합의가 현장 안팎에 미칠 영향은 너무나 크다. 사측은 대규모 배치전환, 노동강도 강화, 활동가와 열성 조합원들에 대한 각종 탄압 등으로 현장을 무력화시킬 것이 뻔하다. 또한 이제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대기업과 공공부문 구조조정에서 현대자동차의 합의는 선례가 되어 수많은 노동자들이 길거리로 내몰릴 수 있는 상황이다. …

집회 때마다 위원장은 “혼자서는 결정하지 않는다”며 조합원들의 총의를 모아서 결정할 것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다음날 새벽 위원장은 277명 정리해고에 합의하면서 조합원들을 기만하였다. … 집행부는 농성하는 조합원의 총의를 모아낸 것이 아니라 정부의 중재에 목을 매달았다. 중재안이 나왔을 때 각 사업부별 간담회나 토론회를 통해 의견을 수렴해 노동조합으로 집중하지 않고 정부 중재안에 일방적으로 동의했다.[56]

백 번을 양보해 다시 한 번 물어보자. 과연 실리라도 챙긴 것이 있는가? 지금까지 노조가 앞장서서 제시한 임금삭감액이 1인당 750만 원이 넘는다. 또한 긴급 체포영장 발부자 64명, 100명이 훨씬 넘는 고소고발자, 수십억 원의 재산가압류 조치, 어느 것 하나 해결된 것이 없다. … 가장 앞장서서 투쟁했던 수십 명의 동지들이 기약 없이 수배생활을 해야 하고, 가압류를 해제하고 징계를 최소화하기 위해 사측에 싹싹 빌어야 한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폭력경찰에 짓밟히지 않았다고 어떻게 잘된 협상인가? …

사측, 정부 중재단, 기자들 모두가 협상과정을 훤히 알고 있는데, 노동조합은 조합원, 활동가, 심지어는 상무집행위원들조차 제대로 알고 있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우리는 위원장의 얼굴과 입만 쳐다보고 있어야 했다. 이렇듯 공개적이고 민주적이지 못했던 밀실협상으로 인해 투쟁동력은 급격히 떨어지고 모든 조합원들은 들러리로 전락하면서 노동조합의 조직력을 무기력하게 만들어버렸다. 이런 상황에서 누가 누구를 믿고 노동조합 활동에 적극적일 수 있으며, 앞장서서 투쟁할 수 있겠는가? 이제 분명하다. 제2, 제3의 또 다른 이런 사태를 막기 위해 이 사태에 대한 책임을 지고 김광식 위원장은 퇴진해야 한다.[57]

실노회, 현노신, 노연투 등 다른 현장조직들도 합의 결과에 반대하는 선전물을 발행했다. 2대 위원장만이 합의안에 지지해줄 것을 요청하는 선전물을 발행했다. 집행부는 선전물을 통해 ‘부결 투쟁을 선동하는 세력은 분열주의자’라고 주장했다.

 

9월 1일 ‘8·24 잠정합의안’이 조합원 찬반투표에서 찬성 34.7%(반대 63.6%)로 부결됐다. 노동부와 회사는 ‘이미 노사 대표가 합의한 사항이므로 법적 효력이 있어 재협상이 필요 없다’고 주장했다. 파업이 처참하게 붕괴한 터라 조합원 총회 이후에도 투쟁은 재건되지 못했다. 재협상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정리해고를 수용한 8·24 잠정합의는 조합원 총회에서 압도적으로 부결됐지만, 실질적인 효력을 갖고 집행됐다.

 

결국 1998년 현대차에서는 과장급 이상 명예퇴직 1천 371명, 희망퇴직 6천 502명, 정리해고 277명, 무급휴직 1천 961명 등 모두 1만 111명이 ‘고용조정’됐다. 여기에 1997년 말 먼저 정리해고당한 하청노동자 2천 700여 명을 합하면 모두 1만 3천여 명이 ‘구조조정’됐다.

 

1998년 현대차 정리해고 저지투쟁은 그렇게 패배했다. 5천여 명의 현대차 노동자들과 가족들이 인생을 걸고 치열한 투쟁을 전개했고, 그래서 공권력으로도 사실상 무너뜨릴 수 없는 막강한 파업대오를 구축해 냈지만, 노조 지도부의 결정적 배신으로 허망하게 내부로부터 무너지며 패배했다. 막강한 위력을 발휘했던 현대차노조의 조직력과 투쟁력을 중심으로 총자본의 신자유주의 공세에 맞선 전국 노동자들의 총력 방어선을 구축해 낼 수 있었던 가능성은 그렇게 사라졌다.

 

정리해고를 수용함으로써 스스로 자신의 존재 이유를 부정해 버린 노동조합에 대한 현대차 노동자들의 깊은 실망감은 쉽게 회복할 수 없는 회의와 환멸로 가슴 깊이 아로새겨졌다. 1998년의 패배와 배신으로 점철된 경험은 언젠가 다시 다가올 정리해고를 노동조합은 막지 못할 것이라는 뿌리 깊은 불신과 상처로 현대차 노동자들의 가슴 속에 새겨지고 말았다.[58]

 

현대차노조 지도부가 정리해고 수용이라는 잘못된 길로 빠져든 것은 단순한 개인적 실수가 아니었다. 그것은 타협·개량주의 세력의 또 다른 주축으로 등장한 ‘중앙파’ 노선의 필연적 귀결이었다. 현대차노조 위원장, 금속연맹 위원장 등 이 투쟁에서 핵심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던 중앙파 활동가들은 대중을 기만하는 이중적 태도를 보였다. 집회장에서는 정리해고를 강력히 규탄하는 연설을 했지만, 자기들끼리는 ‘정리해고 최소화’ 수용이 현실적 대안이라는 생각을 공유하면서 투쟁을 그 방향으로 이끌고 갔다.

 

중앙파 활동가들은 한때 상당히 전투적이었지만 개량주의 전망에 갇혀 있거나 소련 붕괴 이후 개량주의 노선으로 전환한 이들로서, 원래는 다양한 경향으로 흩어져 있었다. 그런데 IMF 외환위기 앞에서 공통적인 한계에 봉착하며 비슷한 노선을 취하게 되자 하나의 세력으로 결집하게 됐다.

 

당시 중앙파의 노선은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은 어쩔 수 없는 대세이니 이를 수용하면서 노동자들의 피해를 줄일 현실적인 방안을 모색하자’로 요약됐다. 다시 말하자면 이들은 ‘현대차노조의 투쟁을 중심으로 정리해고 저지를 위한 전국 노동자들의 총력 방어선을 재구축하자’ 같은 주장을 불가능하다고 치부하며 거부했다.

 

중앙파의 시각에서 볼 때, IMF 경제공황 국면에서는 ‘정리해고 최소화’만이 현실적으로 가능한 방안이었다. 이들은 또한 독일의 금속노조(IG Metall)를 신비화하면서 그와 같은 산별노조 건설로 나아가는 게 정리해고 문제의 진정한 해결방안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정리해고를 당하더라도 산별협약을 통해 사회적 안전망과 직업훈련을 제공하여 해고된 조합원의 재취업을 지원하면 된다’, ‘구조조정 앞에 선 노조운동의 핵심과제는 정리해고 저지가 아니라 시급히 산별노조로 전환하고 이를 토대로 산별 교섭과 사회적 교섭에 나서는 것이다’, ‘산별 교섭과 사회적 교섭을 성사시키려면 정권·자본 측과 대립적 관계로만 갈 것이 아니라 어느 정도 대화와 타협이 필요하다’ 등의 정세판단과 노선을 갖고 있었다.

 

독일에서 금속노조가 노동자들에게 진정한 희망을 열고 있는가는 정보의 불충분 때문에 판단하기 어려운 문제였을 수 있다.[59] 하지만 당시 한국 상황에서 ‘산별협약을 통한 사회적 안전망’ 같은 것들이 노동자의 치열한 계급투쟁이 아니라 정권·자본과의 대화·타협으로 실현될 수 있으리라 생각한 것은 명백한 오판이 아닐 수 없었다. ‘산별협약을 통한 사회적 안전망’ 역시 정리해고 최소화 수용을 통한 굴욕적 대화·타협이 아니라 정리해고 저지를 위한 전국 투쟁전선의 단호한 재구축을 통해서만 실현될 수 있었을 것이다.

“단 1명의 정리해고도 있을 수 없다”는 투쟁의지의 천명은 대단히 선동적이었다. 그리고 정리해고가 한 번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계속 이어질 것이란 두려움을 갖고 있던 많은 조합원들로 하여금 투쟁에 동참하게 하는 요인이 되었다. 그래서 이러한 선동이 초기 조합원들을 투쟁대열에 과감하게 참여케 하는 유효한 전술적 선택이었다는 측면은 대부분 인정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전술적 선동의 차원을 넘어 우리가 마침내 이루어야 할 전략적 목표인가 하는 점에서는 상반된 의견이 있다. …

첫 번째 흐름은 정리해고를 절대 수용하거나 인정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민주노총의 핵심 사업장인 현대자동차노조의 정리해고 수용은 나머지 사업장에서 정리해고를 막아낼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고 이는 곧 많은 노동자들의 생활의 파탄을 가져오고 노동운동의 심각한 후퇴를 초래할 것이라는 주장이다. 그리고 도저히 힘의 관계상 정리해고를 막지 못한다 하더라도 결사항전을 통해 자본측에 심각한 타격을 줌으로써 정리해고를 시행하려면 엄청난 피해를 당한다는 것이라도 보여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두 번째 흐름은 노사간의 힘의 관계상 도저히 정리해고를 막아낼 수 없다면 정리해고의 규모를 최소화하고 정리해고 대상자의 선정기준에 대한 개입, 정리해고 대상자에 대한 생계 지원이나 리콜(재취업)에 대한 요구 등 자본과의 적극적인 교섭을 통해 정리해고 문제에 대한 노조의 개입력을 최대한 높여야 한다는 주장이다. 섣불리 공권력의 투입을 초래하는 것은 정리해고는 정리해고대로 당하고 노조간부와 대다수 활동가의 대량구속으로 이어져 회복하기 어려울 정도로 노동조합의 파괴와 현장조직력의 손실을 가져와 최악의 결과가 될 가능성이 높다는 주장이다. …

두 흐름의 차이에는 정세에 대한 인식과 노동운동의 노선에 대한 일정한 차이가 흐르고 있다. … 노조 집행부는 후자의 입장을 선택, 각계각층의 연대와 지원으로 공권력 투입을 저지해 나가면서 결정적으로 8월 19일 방문한 국민회의 중재단(단장 노무현 부총재)과의 간담회를 통해 정리해고의 규모를 최소화하고 정리해고 대상자들의 이후 생계와 고용승계 및 리콜(재취업)이 보장된다면 정리해고를 수용할 수 있다는 입장을 피력하였고, 이를 계기로 국면은 급속히 협상국면으로 전환되어 갔다. …

비록 ‘정리해고 철회’라는 애초의 목표를 달성하지는 못했지만, 그 규모를 1,538명에서 277명으로 줄였고, 이중 144명의 식당 조합원에 대해서는 식당을 노조에서 운영하는 것으로 하여 고용을 승계하도록 하고 나머지 133명의 조합원에 대해서는 고용안정기금의 확보를 통해 어느 정도의 생계보장 장치를 했다는 점에서 집행부는 최선을 다했다고 본다. … 막바지 교섭에 여유를 가지면서 집행부의 투쟁방향을 충분히 조합원들에게 알려주고 토론을 하게 했더라면 정리해고 수용이라는 같은 결과를 두고서도 조합원들은 다른 반응을 보였을 것이다. 그리고 급격한 반전에서 오는 상실감, 허탈감, 그리고 배신감을 느끼지 않았을 것이다.[60]

현대차 정리해고 저지투쟁이 충격적으로 붕괴한 이후 중앙파는 ‘정리해고 수용 자체는 잘한 일이지만 그것을 민주적으로 토론하지 않은 게 문제’라는 식의 주장을 폈다. 말도 안 되는 궤변이다. 만일 현대차노조 위원장이 정리해고 수용 여부를 토론에 붙였다면 조합원들은 압도적으로 거부했을 것이다. 바로 그것이 수차례 ‘조합원의 동의 없는 결정은 하지 않겠다’고 공언해 놓고서도 위원장이 독단적으로 정리해고를 수용했던 이유였다.

우리의 투쟁대오가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하였다. 그것은 공권력 투입에 대한 불안이 아니라 언론에서 조금씩 흘러나오는 ‘현대자동차노조가 정리해고 수용의 뜻을 비쳤다’라는 뉴스 때문이었다.

현대자동차노조 비상대책위원회는 김광식 노조위원장에게 전권을 위임한 상태였다. 이런 사실에 대하여 노조 사무실에서 일하는 누구에게 물어봐도 대답을 해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뒤통수를 맞고 가슴이 터져나갈 것 같은 순간이었다. 아줌마들은 삼삼오오 흩어져서 자신들의 남편을 찾아 사실 확인을 하러 다녔고, 알 수 없는 안개정국에 대해 답답함을 느꼈다. 결사투쟁을 외치며 당당해 하던 우리는 조금씩 서로에 대해 불신하고, 자고 일어나면 비어있는 잠자리를 확인하면서 허탈감에 빠지기 시작했다.

우리는 위원장이 참석한 집회에서 모든 것을 확인받고 싶었다. 그렇지만 위원장은 애매모호한 말로 우리를 헷갈리게 만들었다. 우리는 또 그것을 해석하느라 서로 싸우는, 웃지 못 할 해프닝도 있었음을 부끄럽지만 털어놓는다. …

사수대는 자발적으로 집회를 열어 위원장님에게 ‘싸우겠노라고, 정리해고 한 명도 받아들이지 않겠노라’ 하는 강력한 답변을 요구했다. 평범한 조합원들이 위원장 앞에서 울며 호소를 했다. “우리는 싸울 준비가 다 됐습니다. 위원장님만 준비 되시면 됩니다.” “위원장님 결사항전 하겠다며 관까지 짜셨는데 그 관이 부끄럽지도 않으십니까? 싸울 생각이 없으시다면 차라리 그 관을 불태우십시오.”

굴뚝에서는 이러한 움직임을 감지하고서 정리해고는 물론이고 (유급이 아닌) 무급휴직조차도 절대로 받아들여서는 안된다는 윤성근 전 위원장의 간곡한 서한도 내려왔다. 그렇지만 위원장은 분명한 대답도, 입장표명도 하지 않았다.

그 다음날 5시에 철회하겠다는 협상안도 없던 이야기로 접고, 노조는 회사의 강경한(?) 태도에 더욱 더 양보를 하면서 절대 해서는 안 될 협상을 늦게까지 계속했다.

정리해고 수용안이 거의 가시화되는 8월 23일(일) 저녁 8시 위원장님은 대오가 많이 빠져나간 썰렁한 집회에서 조합원들 앞에서 약속을 했다. “제가 어떠한 결정을 하더라도 저 혼자 결정하지 않겠습니다.” “조합원 여러분 앞에서 의견을 묻고 협상장에 들어가겠습니다. 조합원 여러분들이 원하지 않는 것은 제가 하지 않습니다.”

그 다음날 8월 24일 일요일 우리는 봐서는 안 될, 들어서도 안 될 것을 TV를 통하여 확인해야만 했다. 노조 대표자들은 우리가 그토록 우려했던 그 모든 것을 다 받아들이고 언론의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면서 처절하게 우리의 투쟁을 끝내버렸다. 더군다나 노조위원장은 대국민 사과성명까지 함으로써 우리들의 목숨 건 투쟁을 가치 없는 것으로 결론지어 주셨다.

투쟁에 동참하였던 조합원들은 김광식 위원장의 배신행위에 치를 떨면서 분노하였다. ‘더 이상 협상에 매몰되지 않고 조합원 뜻에 따라 투쟁하겠다’는 전체 집회 때의 위원장 발언은 강경(?) 조합원들을 무마시키고 속이기 위한 거짓이었다는 것을 확인해 준 것이다. 손을 잡고 초라한 뒷모습을 보이지 않으려고 조용히 농성장을 빠져나갔다. 노조 사무실 앞에서 성난 조합원들은 항의의 뜻으로 ‘고용안정 쟁취’라는 빨간색 머리띠와 초록색 사수대 옷을 불태웠다. 한 조합원은 위원장님께서 올라가서 투쟁하시려고 했던 노조 건물 위에 설치한 철탑 위로 올라가 눈물을 흘리며 관을 땅에 떨어뜨렸다. 그리고 불태웠다. 투쟁의 결과를 보여주듯 퀘퀘한 냄새와 검은 연기를 내며 노조 사무실 앞에서 불꽃이 치솟았던 것이다.

대국민사과성명을 마친 노조위원장은 본관에서 나와 자신의 관과 성난 조합원들의 머리띠가 불타고 있는 광경을 무표정하게 보고 지나치면서 사무실로 올라갔다. 굴뚝으로 올라갔던 전 위원장님 세 분께서는 남은 조합원들의 박수를 받으며 어색하게 내려왔다.

그리고 우리의 투쟁은 이렇다 할 말 한마디 남기지 못한 채 초라한 모습으로 끝나고 말았다. 우리 가족들도 따뜻한 인사말 한 마디도 제대로 나누지 못한 채, 긴급체포영장이 발부되어 도망자의 신세가 되어버린 회장, 부회장에 대한 뾰족한 대책 하나 마련하지 못한 채 농성장을 떠나야 했다. …

농성장을 떠나던 날 우리의 가슴은 갈갈이 찢겨나갔다. … 우리도 공권력을 두려워했다. 세상에 경찰의 폭력이 두렵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리고 자식의 안전을 걱정하지 않는 사람이 과연 어디에 있겠는가?

그러나 우리는 어린 아이와 임산부를 볼모로 한다는 졸렬하고도 악의에 찬 언론의 비난 앞에서도 스스로 자식들의 손을 이끌고 부른 배를 부여안고 눈물을 흘리며 페퍼포그 앞에 당당히 맞섰다. 그것은 소위 강경파(?) 남편들의 사주도 아니었으며 노동조합의 요청도 아니었다. 남편과 가족의 생존권을 지키지 못하는 것보다 더 불행한 상황은 없다는 본능적인 믿음과 굳은 결의에서 이루어진 순수한 가족들의 결정이었다.

정작 우리가 두려웠던 것은 무엇이었던가? 언제부터인가 교섭상황과 투쟁계획이 투명하게 전달되지 않으면서 우리 노동자들에게 가장 중요한 민주적 절차가 무시되고 위원장과 몇몇의 독단적인 결정에 의해 이 절박한 투쟁이 회피되고 정리해고가 인정되지는 않을까 하는 것이었다.

마침내 우려는 현실로 드러났고 우리는 공권력 몽둥이보다 더 아프고 참혹한 현실 앞에 마주서야 했다. 노조를 불신하고, 동지를 불신하고, 서로를 불신하도록 찢겨버린 동지애![61]

2) 2001년 김대중 정권 퇴진 투쟁과 울산총력투쟁

 

1998년 이후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이 파상적으로 전개됐지만, 그에 맞선 노동자들의 투쟁은 좀처럼 전국적인 총력전선으로 결집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다 2001년에 이르러 마침내 기회가 왔다.

 

2000년 중반부터 2001년 초반까지 롯데호텔노조, 이랜드노조, 한국통신계약직노조, 캐리어사내하청노조, 건설운송노조 등 비정규직 투쟁이 꼬리를 물고 터졌다. 여기에 2001년 초 대우차 정리해고 저지투쟁이 비록 대중적 동력은 크지 못했지만 그 기세만은 완강하게 펼쳐졌다. 한편으로 IMF 외환위기 이후 급격히 확산된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투쟁에 나서고 다른 한편으로 자본의 구조조정 공세가 다시금 거세게 몰아치면서, 민주노조운동 전반에는 새로운 활력과 긴장이 감돌았다.

 

그런 가운데 대우차의 정리해고 명단 통보 직후 김대중 정권이 전격 공권력을 투입하고 인천 지역에 마치 위수령을 선포한 듯 광포한 탄압을 퍼붓자, 3월 6일 민주노총 중앙위원회가 ‘신자유주의 구조조정 저지, 김대중 정권 퇴진’ 슬로건을 공식 채택했다. 민주노총이 정권 퇴진 슬로건을 공식화한 것은 김대중 정권 출범 이후 처음이었다.

 

그러나 김대중 정권의 노동자 탄압은 더욱 극렬하게 펼쳐졌다. 4월 10일 노조 사무실로 향하는 대우차 정리해고자들을 경찰이 잔인하게 폭행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지난 10일 대우자동차 부평공장 앞에서 경찰들은 노조 사무실로 향하는 대우자동차 조합원 400여명을 법적 근거도 없이 가로막고 무차별 폭력만행을 저질렀다.

이날 경찰들은 맨손에 무방비 상태에 있는 노동자들을 방패로 찍고 곤봉으로 두들겨 팼다. 머리가 깨지거나 얼굴에 살점이 뜯겨져 나가 붉은 피가 흘러내리는 모습, 갈비뼈가 부러지거나 허리를 맞아 고통으로 울먹이는 모습. 손가락이 부러지고 허벅지가 부러지고 그 비참함은 어떻게 말로 다할 수 없는 것이었다.

이날 대우자동차 조합원들이 노조사무실로 가고자 한 것은, 지난 6일 인천지방법원이 해고 효력을 다투고 있는 대우자동차 조합원의 노조 사무실 이용은 정당한 권리이므로 누구도 방해해서는 안 된다는 당연한 판결을 내린 데서도 확인되듯이 지극히 정당한 합법적 권리행사였다.

그러나 법원의 판결로까지 확인된 합법적인 권리행사를 경찰은 아무런 법적 근거도 없이 가로막았을 뿐만 아니라 거기에 무차별 폭력만행까지 저지른 것이다. 심지어 법원의 판결 집행을 위해 나섰던 박훈 변호사가 경찰의 위법행위를 지적하며 무슨 근거로 가로막느냐고 묻자 부평경찰서장은 “정권은 법에 우선한다”며 우겼다는 것이다. 박 변호사 또한 무차별 폭력을 당해 골반뼈가 부러지는 중상을 입고 병원에 입원해야만 했다. …

이날 경찰의 폭력만행이 담긴 동영상을 보면서 우리는 지난 시절 광주학살 비디오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노동자의 생존권을 무참히 짓밟으면서도 인권과 민주주의를 운운하며 진실을 기만해 왔던 김대중 정권의 적나라한 참모습을 우리는 보았다.[62]

민주노총은 이 사건을 경찰폭력 차원을 넘어선 ‘김대중 정권의 살인적 폭력만행’으로 규정했다. 신자유주의 구조조정 저지와 김대중 정권 퇴진을 목표로 단호한 반격에 나서자는 주장들이 민주노총 상층과 현장에서 동시에 강력하게 터져 나왔다.

“신자유주의라는 이름하에 노동자 민중들에게 할퀴고 간 그 숱한 상처를 안고 민주노총은 신자유주의 분쇄를 모토로 김대중 정권 퇴진 투쟁의 길을 공식적으로 선언합니다.”[63]

그러한 전국적 분위기 아래서, 울산에서부터 과감한 대중투쟁 물결이 솟구쳐 올라와 전국으로 퍼져 나갔다. 1998년 이래 지속적인 패배를 겪어야만 했던 노동자들이 이제 마침내 전국적인 총반격 전선을 형성해 낼 가능성이 하루가 다르게 구체화돼 나갔다.

 

2001년 울산지역 노동자들의 총력투쟁, 즉 ‘2001년 울산총력투쟁’이라고 이름 붙여진 이 투쟁은 울산지역 노동자들이 IMF 외환위기 이후 파상적으로 전개된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에 맞서 마침내 하나의 전선으로 떨쳐 일어선 투쟁이었다.

 

2001년 울산총력투쟁이 만들어진 계기는 화섬산업의 구조조정이었지만, 효성 파업에 대한 연대를 중심으로 10여년 만에 되살아 난 울산지역 노동자운동의 ‘살아 움직이는 연대’야말로 핵심 동력이었다. 또한 IMF 외환위기 이후 몇 년을 지나오면서 모든 노동자들이 사업장의 울타리를 과감하게 뛰어넘어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에 맞선 총반격에 나서야 한다는 대중적 공감대가 현장 활동가들을 중심으로 광범하게 형성된 결과이기도 했다.

 

◎ 암흑의 세월을 딛고 하청화에 맞선 효성노조 파업

 

2000년 말 효성노조에 민주집행부가 등장한 이후 탄압의 강도를 높이고 있던 효성 자본과 경찰은 2001년 5월 6일 위원장을 비롯한 핵심 간부 3명을 전격 구속함으로써 파업을 사전에 봉쇄하고자 했다. 그러나 비상대책위원회로 전환한 효성노조는 회사의 방해로 파업 찬반투표조차 제대로 되지 않자 25일 새벽에 전격 파업에 돌입했다. 파업의 핵심 목표는 ‘하청화 저지와 노조탄압 분쇄’였다. 파업 노동자들은 25일 새벽과 28일 낮 두 차례에 걸쳐 효성 자본이 투입한 용역깡패들과 치열한 접전을 벌인 끝에 공장을 장악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자 김대중 정권이 6월 5일 새벽 공권력을 투입하여 파업 노동자들을 공장에서 몰아냈다.

1. 무쟁의 13년에 억눌린 암흑의 세월 - 하청화, 현장통제, 노조활동 탄압

효성노조는 지난 89년 파업투쟁을 전개한 이후 지금까지 단 한 차례도 파업에 돌입하지 못했다. 13년 무쟁의. 사측의 극악한 조합원 총회(쟁의행위 찬반투표) 방해가 낳은 결과다.

사측은 총회가 열리는 날이면 어김없이 조합원들에게 얼마간의 돈까지 쥐어주며 휴가를 보내주었다. 그것도 안심이 안되던지 아예 조합원을 한데 모아놓고 술과 고기를 대접하며 혹시나 있을 ‘이탈자’ 방지에 최선의 노력을 기울이기도 했다. 

이러한 방식으로 총회를 무산시키고는 노조의 투쟁을 불법으로 몰아갔고 노조는 번번이 총회 무산이라는 암초에 걸려 좌초하고 말았다.

반복되는 무쟁의를 통해 노조의 힘은 약화돼 갈 수밖에 없었고 사측은 현장을 마음껏 유린해 왔다. 대표적인 것이 하청의 급속한 확대. 93년 효성 울산공장의 조합원 수는 1600여명에 이르렀지만, 현재 울산공장 조합원 수는 900여명에 불과하다. 나머지는 하청 노동자로 채워진 것이다.

사측은 자연감원 인원과 기계 증설에 따른 필요인원을 보강하면서 정규직을 신규 채용하지 않고 철저히 하청 인원으로 대체해 왔다. 심지어는 조합원을 마음대로 배치전환시켜 코드3과(타이어에 들어가는 코드)의 경우 부서 전체가 하청 노동자로 메워진 상태다.

잦은 배치전환과 하청 확대는 조합원들의 고용불안을 가중시킬 뿐만 아니라 조합원 수의 감소를 통해 노조를 무력화시킬 수 있으며 저임금으로 기계를 돌릴 수 있어 사측으로선 필사적으로 이를 강행해 왔다.

무쟁의 13년의 어두운 그림자에 휩싸여 노조는 무력화되고 현장에는 고용불안과 현장 통제만이 조합원들의 가슴을 짓누르고 있었다.

2. 마침내 투쟁이 시작되다 - 하청화 저지 투쟁, 반장교육 저지 투쟁

작년 11월 현장 내 민주세력이 총결집된 노조가 들어섰다. 이대로 가다가는 효성의 민주노조 역사가 끝장날 뿐만 아니라 조합원의 생존권도 말살되고 말 것이라는데 모든 현장 활동가들이 생각을 같이하면서 함께 노조 선거를 준비했고, 조합원들도 이러한 모습에 기대를 갖고 당선이란 선물을 안겨주었다.

노조는 출범과 동시에 하청화 반대 투쟁을 시작했다. 우선 작년 12월 노조는 사직 3명, 정년퇴직 7명으로 자연감원 된 인원에 대해 정규직으로 채용할 것을 요구했다. 사측은 비정규직으로의 대체를 완강하게 주장했고 노조는 즉시 점심시간 피켓팅과 항의 집회로 맞섰다. 하지만 사측은 물러서지 않았다. 2월에는 연신과 조합원 9명을 방사 3과로 배치전환 하겠다고 일방적으로 통보했다. 연신과는 이미 66%가 하청화된 상황이었다.

노조는 3월 1일부로 간부 비상대기에 돌입하며 연신과 하청화 반대 투쟁의 막을 올렸다. 평균 5일 간격으로 조합원 200여명과 함께 집회를 열어 배치전환 철회와 신규채용(비정규직 정규직화)을 강력히 요구했다.

또 지난 3월 노조는 회사의 논리를 주입하여 조합원간의 갈등과 분열을 획책하는 조·반장교육 저지 투쟁을 벌였다. 노조와의 사전협의를 거부한 조·반장 교육은 단협 위반임에도 회사가 강행한 것이다. 노조간부들은 교육장이 있는 경주와 창녕까지 달려가 조·반장들에게 교육 불참을 호소하며 교육진행을 저지하다 관리자들에게 폭행을 당하기도 했다.

노조는 또 사측이 작년 임단협에서 이덕호 전 지부장에 대한 복직합의를 하고도 이를 이행치 않는 것에 항의해 울산공장과 언양공장을 번갈아가며 이덕호 해고자와 함께 출근투쟁을 진행해 왔다. 

3. 온갖 탄압을 돌파하고 총파업으로 - 징계해고, 위원장 구속, 총회방해, 용역깡패

노조가 활발하게 움직이고 조합원들 또한 적극적으로 이에 호응하는 양상을 띠자 당황한 사측은 광적인 탄압을 자행했다.

연신과 하청화 반대 투쟁, 조·반장교육 저지 투쟁과 관련해 총 21명의 노조간부와 조합원에게 해고, 정직 등의 중징계를 단행했다. 또 17명을 고소·고발했으며, 조합비 임의적립금 쟁의기금과 6명의 개인임금까지 압류해 노조의 발목을 묶어버리려 했다.

급기야 5월 6일에는 철야농성이 진행되고 있던 노조사무실을 사측의 사주를 받은 형사 20여명이 급습하여 박현정 위원장과 수석부위원장, 부위원장을 연행·구속하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예상치 못한 침탈에 노조는 잠시 혼란에 빠지기도 했으나 즉시 최만식 사무국장, 정기애 교선부장 공동 직무대행 체제를 꾸리고 총파업 채비를 갖추기 시작했다. 구속자, 징계자 가족을 중심으로 가족대책위원회도 구성돼 출퇴근 피켓팅, 서울 본사 항의 방문 등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5월 12일 대의원대회를 열어 쟁의대책위원회로 전환하는 한편, 16일부터 22일까지 일주일간 쟁의행위 찬반을 묻는 조합원 총회에 돌입하기로 결정했다.

총회 돌입이 결정되자 사측은 또다시 총회무산을 통해 투쟁의 예봉을 꺾고자 달려들었다. 우선 노조임원 구속 사태 이후 급격히 달아오르고 있던 연대투쟁의 열기를 차단하기 위해 용역깡패와 구사대 3백여 명을 동원하는가 하면, 정문을 철구조물로 봉쇄하고 컨테이너로 공장 진입 도로를 막았다.

그러나 이러한 사측의 탄압은 오히려 연대투쟁의 불길을 지펴준 꼴이 되었다. 매일 평균 3백여 명의 울산지역 노동자들이 연대를 위해 효성으로 모여들었고 용역깡패와 구사대를 물리치고 공장내로 진입하여 효성 조합원들과 함께 연대집회를 가졌다.

사측은 총회 무산이 어렵게 되자 총회 부결로 전략을 수정했다. 반대를 찍겠다는 각서를 받거나 투표용지를 찢게 해 무효표가 되게 하는 등의 행위로 찬성이 과반수에 미치지 않도록 하는 것이었다.

결국 노조는 사측의 방해로 인해 더 이상의 총회 진행은 의미가 없다고 판단하여 총회 중단을 선언하고 5월 25일 0시부로 총파업에 돌입했다.

4. 뜨거운 연대 속에 강력한 총파업투쟁 - 식칼, 가스총, 용역깡패 분쇄, 투쟁열기 폭발

25일 0시부로 총파업 돌입이 선언된 후 효성 조합원들과 총파업 엄호를 위해 달려온 울산지역 노동자 500여명은 조합원들을 파업에 참여시키기 위해 새벽 2시 경부터 현장순회 투쟁에 돌입하려 했다.

그러나 구사대와 용역깡패가 이를 막아섰고 곧바로 충돌 사태가 빚어졌다. 용역깡패들은 최루가스를 뿌리고 쇠파이프를 휘두르는 등 무자비한 공격을 해왔지만, 얼마가지 않아 파업대오의 가열찬 반격에 당황하며 사분오열 되었고 후퇴하고 말았다.

노조의 파업 선언 이후 사측은 작업장의 문을 용접한 채 조합원들을 퇴근시키지 않고 공장 안에서 숙식하게 하는 등 파업 참여를 막고 공장을 계속 가동하기 위해 필사적인 노력을 기울였다. 하지만 기세는 이미 파업 대오로 기울어진 상태였고, 파업 대오는 갈수록 확대되어 갔다.

28일 오전 용역깡패는 다시 한 번 도발을 감행했지만 완강하게 저항하는 파업 대오의 기세에 눌려 허망하게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이날 용역깡패들이 몸에 지니고 있던 식칼과 가스총, 사제총 등이 발각된 데다 서울역 등지에 있던 노숙자들이 무슨 일인지도 모른 채 일당 4만원을 약속받고 동원된 사실까지 밝혀져 사측의 타락한 도덕성이 다시 한 번 폭로됐다. 이날 용역깡패로는 어쩔 수 없음을 깨달은 사측은 깡패들을 철수시켰고 마침내 노동조합이 전 공장을 장악하면서 파업 참가 조합원이 700여명에 이르게 되었다.

총파업 중 사측과 여러 차례 교섭이 진행되기도 했으나 사측은 단지 폭력경찰 투입을 위한 명분 쌓기 용으로 교섭에 임할 뿐이어서 어떠한 진전도 없었다.

결국 총파업 돌입 13일 차인 6월 5일 새벽, 김대중 정권은 효성 사측과 전경련·경총 등의 요구를 받아 들여 6천여 명의 폭력경찰 투입을 강행했다.[64]

김대중 정권의 공권력 투입은 울산지역 노동자들의 연대투쟁을 폭발시키는 뇌관이 됐다. 공권력 투입을 눈앞에 둔 4일 밤부터 울산지역 노동자 700여 명이 효성 공장 입구에서 밤을 새어 공권력 투입에 맞섰다. 공권력 투입 직후인 5일 새벽 7시부터는 2천여 명으로 불어난 노동자들이 공권력 투입에 항의하며 가두투쟁에 나섰다. 노동자들은 울산 시내 곳곳에서 하루 종일 돌과 화염병을 던지며 격렬하게 전투경찰과 맞섰다.

지난 4일 오후 6시 경, 폭력경찰 3천여 명이 효성 울산공장 각 문으로 통하는 진입로를 겹겹이 서서 봉쇄하기 시작했다. 공장 내부와 외부는 폭력 경찰에 의해 완전히 격리됐다. 폭력경찰 투입이 확실시되자 정기애 쟁대위 공동의장을 비롯한 6명은 주변전실을 점거했다. 또 최만식 공동의장을 비롯한 8명은 방사1과 옥탑으로 올라갔다.

전경들에 의해 효성 공장 정문으로 들어가는 도로부터 진입을 차단당한 울산 노동자 1천여 명은 “폭력경찰 물러가라”며 4일 오후 6시 30분경부터 5일 새벽 3시경까지 항의집회와 돌파 투쟁을 전개했다.

5일 오전 5시반, 마침내 폭력경찰의 '울산만 작전'이 시작됐다. 폭력경찰 3천여 명은 사측이 설치한 바리케이트를 중장비로 뜯어내고 공장 내로 진입해 조합원 전원을 토끼몰이식으로 진압하고 이 중 다수를 연행한 후 석방했다. 주변전실을 점거하고 있던 6명은 벽을 뚫고 진입한 폭력경찰에 의해 전원 연행됐다.

폭력경찰 투입이 단행되자 울산지역 노동자들은 즉각 이에 항의하는 가두투쟁에 돌입했다. 우선 효성 진입로에 모여 있던 울산 노동자들은 곧바로 야음 사거리로 이동해 도로를 점거했다.

오전 8시경에는 공장에서 밀려난 효성 조합원들이 가두투쟁에 합류했다. 오전 11시경 가두투쟁 대오는 공업탑 로터리로 이동해 도로를 점거하고 집회를 연 후 다시 시청으로 이동했다. 시청에 다다르자 마침내 수천명의 폭력경찰이 모습을 드러냈다.

오후 1시경 가두 투쟁 대오는 시청 앞에서 규탄집회를 진행한 후 오후 5시 30분 현대백화점 삼산점에 다시 만날 것을 약속하며 해산하려 했다. 그런데 바로 이때 폭력경찰들이 방패와 곤봉을 휘두르며 대오를 공격했다. 곧바로 격렬한 투석전이 벌어졌다. 시청 앞 사거리를 중심으로 골목 곳곳에서 공방전은 한시간 가량 치열하게 전개됐다.

당일 저녁 5시 30분 현대백화점 삼산점 앞에서 다시 울산 노동자 1천여 명이 모여 집회를 연 후 도로 전 차선을 점거하고 가두 투쟁에 나섰다. 이때도 경찰의 폭력은 어김없이 자행됐다.

5일 투쟁으로 총 86명의 노동자와 학생들이 연행됐고, 부상자도 뇌출혈이라는 중상을 입은 정은희 조합원을 비롯 효성 조합원만 21명에 달했다.

가두 투쟁은 6일과 7일에도 이어졌는데 이틀간은 폭력경찰이 첫 집회 장소만 원천봉쇄 했을 뿐 이동한 장소에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아 투석전은 벌어지지 않았다.

효성 조합원들은 공장에서 나온 후 복산성당에 거점을 마련하고 파업을 이어가고 있다. 그리고 옥탑 농성조 또한 헬기 진압 시도에도 흔들림 없이 농성장을 지키고 있다. 최만식 쟁대위 공동의장은 조합원에게 보내는 글을 통해 “힘찬 장외 투쟁으로 빠른 시간 내에 공장을 탈환해 달라”면서 조합원들이 끝까지 투쟁해 줄 것을 촉구했다.[65]

5일부터 시작된 폭발적인 가두투쟁은 영남권 노동자대회가 열린 9일까지 이어져, 날마다 2천에서 5천에 이르는 노동자들이 울산 시내 전역을 투쟁의 함성으로 채워 나갔다. 효성노조 파업에 대한 연대투쟁이 어느덧 울산지역 노동자들의 총력투쟁으로 발전하고 있었다.

9일 오후 3시, ‘효성 공권력 투입 규탄 김대중 정권 퇴진 영남노동자대회’가 1만여 명의 노동자들이 태화강 둔치에 집결한 가운데 열렸다. 집회 참가자들은 30여 분간의 간략한 집회를 통해 효성 폭력경찰 투입을 강력히 규탄하고 사전에 예고했던 대로 곧장 효성공장 진격투쟁에 들어갔다.

5백여 대의 오토바이 부대를 앞세운 대오는 시청과 마그넷, 야음사거리를 거쳐 효성공장 입구 사거리까지 무려 2시간에 걸쳐 도로 전 차선을 가득 메운 채 거리행진을 전개했다.

오후 5시 40분, 효성공장 입구 사거리에 도착하자 마침내 5천명 이상의 폭력경찰과 맞닥뜨렸다. 사거리에서 효성공장 정문으로 가는 도로는 컨테이너에 의해 좁혀져 있고 그 뒤로 엄청난 병력이 길을 봉쇄하고 있었다.

오후 6시 30분, 5백여 명의 효성 조합원들이 먼저 공장 진입 투쟁을 시작했지만 이내 포위되고 말았고 다시 본대오로 합류했다. 오후 7시 10분, 효성 조합원들이 다시 진입을 시도하며 전경들과 격렬한 몸싸움을 벌이기 시작하자 오후 7시 30분 마침내 전경들이 대오를 향해 공격해 들어왔다.

이때부터 사수대 6백여 명을 중심으로 폭력경찰과 격렬한 투석전이 벌어졌고, 화염병 1백여 개가 투척되기도 했다. 화염병에 놀란 폭력경찰은 잠시 주춤하다 오후 8시 30분쯤부터 다시 전면 해산 작전에 돌입했고 곧이어 무차별 폭력과 연행사태가 벌어졌다. 이 과정에서 약 50여명이 연행됐으며 수십명의 부상자가 생겼다.

흩어진 대오는 오후 9시쯤 야음 사거리에 집결한 후 정리집회를 갖고 오후 10시쯤 이날 투쟁을 모두 정리했다.

이날 수도권 노동자 1천여 명도 여의도 전경련 회관 앞에 모여 집회를 갖고 효성 폭력경찰투입을 강력히 규탄하며 건물 입구에 계란과 페인트를 투척했다.[66]

한편 12일 민주노총은 △정리해고 중심의 구조조정 저지 △비정규직 차별철폐와 정규직화 △주5일 근무제 도입 △공공의료 확대 △모성보호법·사립학교법·언론개혁법 개정 △국가보안법 철폐 △김대중 정권 퇴진을 주요 요구로 내걸고 10만여 명이 참여하는 총파업을 전개했다.

 

12일 민주노총 총파업에 맞추어 울산의 태광노조와 고합노조가 구조조정 저지파업에 들어가면서 이미 파업 중인 효성노조와 함께 울산의 화섬3사 노조가 공동파업을 시작했다. 금속노조에 속한 중소규모 노조들도 파업에 돌입했다.

효성 폭력경찰 투입에 대한 울산 그리고 전국 연대투쟁의 불길이 치솟고 있고 화섬사 노조 또한 그 중심에 있다. 고합, 태광, 구미 코오롱, 한국합섬 등은 지금까지 효성 총파업 투쟁에 적극적으로 함께 해 온 것은 물론 조만간 줄줄이 총파업에 돌입할 예정이다.

화섬사의 연대투쟁이 전에 없이 활기차게 전개되는 원인은, 화섬사 전 사업장에 걸쳐 구조조정이 가속화되고 있기 때문이다. 화섬업계는 99년부터 수요부진과 가격하락으로 인해 대거 적자를 기록하면서 불황의 늪에 빠져 들기 시작했고 곧바로 구조조정에 돌입했다. 화섬업계 구조조정 역시 다른 부문과 마찬가지로 철저히 노동자의 희생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

효성은 화섬업계 중 가장 빨리 구조조정을 단행했다. 98년 4개 계열사(효성생활산업, 효성TNC, 효성중공업, 효성물산)를 합병하여 1개 법인체로 단일화하고 자산매각 등을 통해 재무구조를 개선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생산직·관리직 노동자가 무려 2,300여명이나 잘려 나갔다.

사측은 구조개편 이후에도 잇따라 부서 통폐합, 설비 합리화, 공정 외주화, 설비 이전 등을 진행했고 이를 통해 정규직 감원과 비정규직 확대를 꾀해 왔다. 결국 현재 효성 울산공장의 비정규직 숫자는 정규직 숫자(9백여명)를 넘어서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고합 울산공장의 구조조정은 설비의 해외 이전 매각이라는 방식으로 진행되고 있다. 정부와 채권단은 지난 4월 30일 이미 원사 설비의 중국 매각을 통보한 상태이며, 궁극적으로는 울산공장 전체를 매각할 것이 예상되고 있다.

IMF 이후 엄청난 흑자 행진을 자랑하고 있는 태광산업․대한화섬의 경우도 예외 없이 구조조정의 속도를 높여가고 있다. 태광에서는 주로 수익성이 떨어지는 부서의 정리와 기계가동 중단 등으로 휴직자를 대거 만들고 있다. 지난달 22일에는 대한화섬 조합원 232명에 대해 무기한 휴직 방침을 통고하기도 했다. 사측은 올해 임협에서 태광과 대한의 분리 교섭을 요구하며 교섭을 지연시킨 바 있는데, 이것은 수익이 감소하고 있는 대한을 정리하기 위한 작업이 수순밟기에 들어간 것으로 분석되었다. …

효성노조의 총파업 투쟁은 그래서 한 사업장의 투쟁을 넘어 화섬사 구조조정 저지, 신자유주의 반대 노동자 대투쟁으로 확산돼 가고 있는 것이다.[67]

◎ 효성 연대투쟁에서 울산지역 총파업으로의 발전

 

5일 공권력 투입 이후 솟구치던 가두투쟁 열기가 12일을 계기로 연쇄적인 파업 확산으로 발전하자, 14일 무렵부터 이제 남아 있는 대공장마저 파업에 돌입하여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에 맞선 울산 노동자 총파업을 전개하자는 주장이 울산지역 현장 활동가들 사이에서 적극적으로 제기되기 시작했다. 연일 열리는 지역 집회에서도 이 투쟁을 울산 노동자 총파업으로 발전시키자는 주장과 호소가 줄을 이었다.

총파업 확대, 위력적인 가두시위로써 투쟁을 전면전으로 발전시켜야 한다!

1. 울산 노동운동의 새 역사를 만들어 왔다.

울산 노동자들은 이번 효성투쟁에서 노동자의 연대가 어떤 것인지를 실천으로 보여주며, 노동운동의 역사를 새로 써나가고 있다.

또한 울산 노동자들은 효성연대투쟁 속에서 이제 의연히 투쟁의 주체로 떨쳐 일어섰다. 이제 전선은 단지 효성을 둘러싸고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신자유주의 구조조정 분쇄, 현장하청화 저지와 비정규직 정규직화, 폭력탄압 분쇄와 김대중 정권 퇴진을 내건 울산의 모든 노동자들과 이것을 무너뜨리려는 정권과 자본 간의 전선으로 확대되었다.

효성연대투쟁에서 출발한 전선이 이처럼 울산노동자 모두의 투쟁전선으로 확대되어 온 것은 필연적인 일이었다. 효성 노동자들이 투쟁해야 했던 이유가 바로 울산 노동자 모두의 자기 문제였기 때문이다.

효성 노동자들을 마침내 떨쳐 일어서게 만들었던 일방적 전환배치와 현장 하청화, 노조활동 탄압, 정리해고와 그것을 무기로 한 강제 희망퇴직 등 지난 몇 년간 거침없이 진행되어 온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으로 인해 모든 노동자들의 삶이 유린당하며 절망만을 강요당해 왔던 것이다.

따라서 효성 노동자들이 내건 요구들이 바로 울산 노동자 모두의 요구일 수밖에 없었고, 효성 투쟁의 승리가 바로 울산 노동자 모두의 승리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2. 급박한 사태전개와 상황의 심각성

그런데 울산을 중심으로 연일 가두와 공장에서 대중들의 자발적인 투쟁이 격렬하게 전개되어 나가자 이미 그 폭력성이 극에 달해 있는 김대중 정권은 대통령이 직접 나서서 노동운동을 전면적으로 탄압하겠다고 공언하고 나섰다.

12일 민주노총 총력투쟁 결의대회를 열고 있는 시점에 옥탑의 효성 지도부를 폭력진압하였고, 여천 NCC에도 폭력경찰을 투입하였으며, 광주전남지역에서는 119명의 노동자들에게 구속영장, 체포영장, 출두요구서를 발부하고 있는 상황이다.

민주노총 중앙에서도 13일 밤 8시 비상 중앙집행위원회를 열어 정권의 전면적 노동운동탄압이 눈앞에 있다고 판단하고 민주노총 산하 모든 조직의 전면적 파업 돌입을 포함한 비상대책을 수립하였다.

지금의 정세는 총파업을 확대하고 위력적인 가두시위를 지속적으로 전개함으로써 전면전으로 발전시켜 가지 않는다면, 이제 정권과 자본의 전면적인 탄압으로 저항의 싹조차 뿌리뽑히게 될 상황임을 직시해야 한다.

그런가 하면 노동자들이 당면 투쟁을 전면적인 투쟁으로 발전시켜 나갈 때 96~97총파업 이상으로 충분히 승리할 수 있다는 점을 동시에 꿰뚫어 보아야 할 것이다. 지금 가두와 공장에서 터져 나오는 대중의 열기를 볼 때 전면적인 투쟁으로 이 투쟁을 확대 발전시키는 것이 충분히 가능한 일이며, 또한 김대중 정권이 비록 광적인 탄압의 칼날을 휘두르고 있지만 심각한 민심이반과 내분으로 사실은 대단히 허약한 상태에 있기 때문이다.

3. 안일한 인식, 소극적인 투쟁자세를 혁파하자.

그러나 지금까지 숱한 문제제기와 동지적인 비판에도 불구하고 현 정세와 투쟁의 성격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는 안타까운 모습이 일부에 엄연히 존재하고 있음을 우리는 대단히 가슴아픈 일로 받아들이며, 다시 한 번 현 정세와 투쟁의 성격을 올바로 인식하고 실천에 옮겨낼 것을 간곡히 호소한다.

지금 우리는 당면 투쟁을 효성노조의 투쟁과 그에 대한 연대투쟁의 수준으로 좁혀서 바라보는 사고를 혁파해야 한다. 당면 투쟁은 이미 신자유주의 구조조정 분쇄, 현장 하청화 저지와 비정규직 정규직화, 폭력탄압 분쇄와 김대중 정권 퇴진을 요구하며 울산의 모든 노동자가 그간의 억눌린 분노를 폭발시키며 떨쳐 일어선 투쟁으로 발전해 있다. 효성노조의 투쟁과 그에 대한 연대투쟁은 울산 노동자 전체의 투쟁을 촉발시킨 계기였을 뿐이다.

그런데 만일 이 투쟁을 전면전으로 확대시키지 않고 굴욕적인 협상을 마다않으며 효성파업을 서둘러 마무리하는 것에 매달린다면, 효성투쟁도 패배할 뿐만 아니라 곧이어 울산 노동운동 전체가 정권의 전면적인 탄압 앞에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결과를 빚고 말 것이다.

또한 울산의 모든 노동운동 주체들이 이 투쟁을 전면전으로 확대시키기 위해 가장 적극적인 의지로 달려들지 않는다면, 결국 이 투쟁이 패배로 귀결된 이후 조성될 엄혹한 역관계 속에서 당분간 어떤 주체도 자기 투쟁을 제대로 해낼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자본의 대공세 앞에 각개격파당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현 정세와 투쟁의 성격을 올바로 인식하고 적극적으로 실천에 옮겨낼 것을, 우리는 울산의 모든 노동자들에게 다시 한 번 간곡히 호소한다.

4. 투쟁을 확대 발전시키기 위한 우리의 제안

- 총파업을 울산지역 모든 단위노조로 확대해 나가자!

- 지금 당장 총파업에 돌입할 수 없는 단위노조는 잔업거부 이상의 투쟁에 돌입하자!

- 위력적인 가두시위를 지속적으로 전개하자!

- 당면 투쟁의 중요성과 현 정세의 심각성을 알리는 대대적인 선전활동을 펼치자!

- 울산의 모든 현장조직과 노동사회단체를 중심으로 실천단을 결성하여 투쟁의 선봉주체로 나서자!

2001년 6월 14일

노동자의 힘 울산준비모임, 울산노동자운동연대, 울산평등연대, 울산해고자협의회, 전태일을 따르는 노동자대학 울산모임, 청년진보당 울산시지부 (이상 가나다순)[68]

지난 16일 민중대회 정리집회에서 이영도 민주노총 울산투쟁본부 집행위원장은 “지금은 울산 전 노동자가 총파업으로 일어서야 할 때다. 혹 노조 집행부가 주저하더라도 현장에서 파업을 준비하고 조직해 달라”며 투쟁의 열기가 한껏 달아올라 있는 울산에서부터 민주노총 전면탄압에 맞서는 연대 총파업을 반드시 성사시키자고 힘주어 말했다.[69]

효성노조에 경찰력을 투입하던 그날부터 울산 노동운동의 역사는 새롭게 시작되었다. 그동안 울산은 현자, 현중 등 대공장 중심의 투쟁이 노동운동의 핵이었고, 대공장 경찰력 투입으로 울산 노동자 모두가 움직이는 투쟁이었다. 하지만 이번 효성투쟁에는 몇가지 중요한 변화가 있었다.

울산에 존재하는 여러 운동단체 그리고 단위 노조의 각종 조직들이 노선과 지향점에 관계없이 효성 동지들 투쟁에 모두 모여들었다. 나아가 함께 고민했고 어떻게든 함께 투쟁하자고 결의를 다졌다.

또한 화학섬유 사업장이 울산 노동운동에서 미쳐왔던 지금까지의 영향력과 울산에서 차지한 비중 모두가 바뀌었다. 그것은 화섬 3사의 연대투쟁이 증명해 주었고, 화섬에 이어서 금속노조 파업과 대공장 잔업거부투쟁 돌입에서도 드러났다.

그리고 몇 년만에 일어난 경찰과의 충돌에서 누구할 것 없이 폭력경찰에 대한 두려움이 깨지고 있다. 돌과 화염병을 던지며 싸우는 노동자, 구속을 두려워하지 않는 노동자들의 모습에서 희망을 본다.

누구나 알듯이 이 투쟁은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에 노동자를 희생양으로 삼으려는 김대중 정권에 대한 저항이며, 생존권의 위기를 느낀 노동자의 분출구였다. 이제 효성 투쟁으로 울산이 변하고 있는데, 이 변화에 과거 투쟁의 모든 경험을 쏟아부어야 한다. …

수십만 노동자가 힘으로 밀어도 경찰 병력 수천을 뚫기는  힘들다. 그러나 격렬한 대중투쟁이 연일 계속되는데 부담을 느낄 수밖에 없는 정권 또한 경찰병력을 몇 달이고 주둔시킬 수는 없기에 격렬한 투쟁을 지속할 때 그들은 스스로 물러설 수밖에 없다. …

투쟁하는 노동자는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자. 이것을 해내는 것이 2001년 투쟁의 완성을 보는 것이며 울산 노동운동의 새로운 역사를 만드는 것이기 때문이다.[70]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열린 21일의 현대차노조 임시대의원대회는 ‘구조조정 분쇄, 김대중 정권 퇴진, 민주노조 공안탄압 분쇄’ 쟁의발생 결의안을 만장일치로 통과시켰다. 현대차노조도 울산지역 총파업에 합류하겠다는 입장의 천명이었다.

현대자동차노조 임시대의원대회가 19일부터 21일까지 사흘간 열렸다. … 이번 임대에서는 마지막 날 기타 안건 토론에서 ‘구조조정 분쇄, 김대중 정권 퇴진, 민주노조 공안탄압 분쇄’를 위한 쟁의발생결의가 상정되어 대의원들의 만장일치 박수로 통과되었다.

이번 쟁발결의는 파업사업장에 대한 경찰력 투입, 민주노총 지도부 구속·수배 등 강경으로 치닫는 정부의 무차별적인 탄압에 대한 강력한 연대투쟁 선언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즉, 정권과 자본의 공세가 노동자들을 벼랑으로 모는 현 정세에서 민주노총 차원의 총력투쟁에 현대자동차노조가 적극적으로 앞장서야 한다는 인식이 대의원들의 만장일치 쟁발결의를 이끌어 냈다고 할 수 있다.

이와 관련 23일 경총은 ‘현대자동차 파업가능성에 대한 분석자료’를 통해 “현대자동차 임시대의원대회의 결정사항인 연대파업 동참을 위한 쟁의발생 결의는 일부 강성 대의원들의 선동에 의한 것일 뿐이고, 조합원들의 정서와 유리된 것이기에 실제로는 불가능하다”고 주장하였다.

하지만 정권의 무차별 폭력진압과 경제단체들의 노동자는 안중에도 없는 돈의 이데올로기에 노동자의 분노는 단결을 선택할 것이다. “실제로 힘들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지금 저들이 하는 방식으로 볼 때 우리에게 선택의 여지는 없고, 우리가 믿는 것은 조합원들 뿐입니다.”

임시대의원대회 장소를 떠나며 한 대의원이 남긴 말이다. 지금의 긴박한 정세 속에서 노동자의 태도가 무엇이어야 하는지를 함축해서 표현해주고 있다.[71]

5월 하순 효성노조 파업에 대한 연대로부터 시작된 투쟁이 6월 하순에 이르자 이제 ‘신자유주의 구조조정 분쇄와 김대중 정권 퇴진’을 내건 울산노동자 총파업을 향해 발전해 가고 있었다.

불과 한달전만 하더라도 꿈같은 얘기로만 여겨지던 '울산노동자 총파업'이 이제 눈앞의 현실로 다가오고 있다. …

남구에서는 이미 5월 25일 파업에 돌입한 효성, 6월 12일 파업에 돌입한 태광, 고합, 경기화학 등 화섬4사 공동파업이 거센 기세로 진행되어 왔다. 여기에 세종공업, 대덕사, 태성공업, 트리메탈코리아 등 금속노조 울산지부 4사가 6월 12일부터 7일간 파업을 전개했다. …

그리고 이제 효성투쟁에서 촉발된 울산 노동자들의 연대투쟁이 정권의 전면적인 노동탄압으로 이어지고, 이에 대해 민주노총이 산하 조직의 전면 총파업으로 정면대결하기로 방침을 정하면서, 마침내 파업의 불길이 동구와 북구의 금속 대공장으로 옮겨붙고 있다. …

현대자동차 노동조합은 21일 임시대의원대회에서 긴급동의안으로 상정된 ‘구조조정 분쇄, 김대중 정권 퇴진, 민주노조 공안탄압 분쇄’를 위한 쟁의발생 결의안을 대의원 만장일치로 가결시켰다.

현대자동차 노동조합은 그동안 8일, 12일, 20일 세차례 잔업거부를 조직하는 등 민주노총 집회와 가두시위에 적극 참여하는 수준에서 이번 투쟁에 결합해 왔다. 그런데 막강한 조직력과 투쟁력을 갖춘 현대자동차 노동조합이 이제 민주노총의 총파업 지침을 실행하기 위한 준비작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고 나섬에 따라 이번 투쟁의 양상이 더욱 폭발적인 형태로 발전해 나갈 가능성이 대단히 높아지게 되었다. …

현대중공업 노동조합은 19일 민주노총의 지침이 떨어지는 대로 총파업 투쟁에 적극 참가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또한 21일에는 사측의 불성실한 교섭태도로 인한 2001년 임금 교섭 결렬을 선언하고, 쟁의 절차를 진행하기 위한 수순을 밟아나가겠다고 선언했다.

지난날 128일 파업과 골리앗 파업 등을 거치며 전국 노동자 투쟁의 선봉에 서 왔던 현대중공업 노동조합은 지난 몇 년 동안 현장조직력이 무너진 가운데 대단히 무기력한 상태에 놓여 있었다. 그러나 지난 8일의 산별노조 전환 총회에서 사측의 집요한 방해공작에도 불구하고 60% 이상의 찬성표가 나오는 등, 최근 들어 현장이 다시 활력을 회복해 가는 기미가 뚜렷이 나타나고 있다.

따라서 총파업을 적극 실천하겠다는 현대중공업 노동조합의 의지는 몇 년 동안 억눌리며 심각하게 누적되어 있는 현대중공업 노동자들의 분노가 폭발하는 대투쟁의 계기가 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는 상황이다. …

현대미포조선 노동조합 또한 20일 대의원대회에서 위원장이 민주노총의 지침에 따라 총파업 투쟁을 적극 실천하겠다는 의지를 밝혔다. …

한편 현대자동차, 현대중공업, 현대미포조선 공히 노동조합 집행부뿐만 아니라 내부 현장조직들 또한 총파업을 성사시켜 내는 데 적극 나서기로 의견이 모아지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이번 총파업 투쟁의 성사 가능성이 대단히 높은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

울산 노동자 총파업의 거대한 불기둥이 막 치솟으려 하고 있다. 신자유주의 구조조정 분쇄, 현장 하청화 저지와 비정규직 정규직화 쟁취, 노동탄압 분쇄와 김대중정권 퇴진의 목표를 향한 울산 노동자들의 2001년 6월 투쟁은 이제 새로이 중대한 고비를 넘고 있다.

효성 투쟁으로부터 터져 나온 이번 투쟁은 지난 몇 년간 절망만을 강요당해 온 노동자들이 인간다운 삶과 희망을 되찾고자 떨쳐나선 처절한 몸부림이요, 투쟁 속에서 스스로의 힘과 전망을 만들어 나가는 노동자의 위대한 진군이다.[72]

◎ 반격의 기회를 만들지 못한 민주노총 7·5 총파업

 

울산지역의 투쟁 열기가 뜨겁게 달아오르자 22일 민주노총 중앙위원회는 이를 전국적 투쟁으로 발전시키기 위해 7월 5일 ‘노동탄압 분쇄, 신자유주의 구조조정 저지, 김대중 정권 퇴진’을 내건 정치총파업을 단행하고 이를 시작으로 ‘7월 총력투쟁’을 전개하기로 결의했다.

지금 김대중 정권은 민주노조운동의 구심인 민주노총에 전면적인 탄압을 가해오고 있습니다. 김대중 정권은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을 위해 생존권을 지키고 민주노조를 사수하고자 하는 모든 투쟁에 경찰병력을 앞세운 폭력적인 방법으로 일관되게 대응해 왔습니다. 특히 올해 들어 그 폭력성은 더욱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있습니다.

이러한 탄압은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진행되고 있으며, 또 오래 전부터 치밀하게 준비되어 온 것으로 판단됩니다. 이는 개혁과 경제정책의 실패를 노동자에게 떠넘기며 정권재창출을 위한 보수 기득권 세력과의 영합을 이루기 위한 시도로 분석됩니다.

김대중 정권은 국내 자본가와 미국의 초국적 자본에 완전히 굴복했습니다. 재계의 규제완화를 수용하였을 뿐 아니라 노동계에 대한 강력대응 요구를 전면적으로 받아 들였습니다.

김대중 정권은 하반기 공기업 구조조정을 강행할 계획을 포기하지 않고 있습니다. 철도 전기 통신 에너지 등 핵심적인 공기업의 민영화와 정리해고로 이어질 구조조정이 한국경제의 회복과 경쟁력 강화의 핵심이라는 잘못된 철학과 초국적 자본의 요구에 부응해 하반기에 반드시 구조조정을 완성하겠다는 것입니다.

김대중 정권은 하반기 정기국회를 통해서 신자유주의 노동유연화 정책을 제도적으로 완비하겠다는 계획을 가지고 있습니다. 철도 기본법과 구조조정 특별법 제정, 노동시간 단축과 연관시킨 노동관계법 개악(변형근로시간 확대, 초과근로 수당 인하, 휴일 휴가일수 축소 및 폐지 등), 비정규직 관련 보호법(가칭) 제정과 연관한 법 개악(연속근로에 따른 정규직화의 기간 연장, 파견근로 대상의 확대 등), 모성보호 관련 법 개정과 연관한 법 개악(여성 노동자의 야간, 휴일근로의 금지의 폐지 내지는 개악 등) 등을 통해 노동유연화를 확실하게 제도화하기 위한 전면적인 법 개악을 시도하고 있습니다.

김대중 정권은 신노사문화 정착이라는 이름 아래 노동계 재편을 통한 지배적인 노정관계를 만들겠다는 음모를 가지고 있습니다. 김대중 정권의 신자유주의 구조조정 3년은 국가권력에 의해 통제될 수 있었던 지배적인 노정관계의 파탄을 예고하고 있습니다. 강력한 노동조합, 자주적이고 민주적인 노동조합, 투쟁하는 노동조합이 아니면 권리를 지키기 어려울 뿐 아니라 생존자체도 어렵다는 것이 노동자들의 보편적인 인식입니다. 노동자들의 이러한 일반적인 인식은 노동계 전반의 운동기조의 전환을 의미하는 것이고 이는 민주노조운동의 구심인 민주노총의 확대강화로 연결된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따라서 민주노총을 무력화시켜 체제내의 순응하는 노조 즉, 신노사문화를 정착시키겠다는 것이 폭력적인 탄압으로 나타나게 된 것입니다.

현재 자행되고 있는 폭력적인 탄압은 여론을 의식한 일시적 대응이 아니라 국가권력과 자본 그리고 언론이 삼위일체가 된 준비된 반격, 조직적인 대반격의 성격을 띠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민주노조운동을 말살하기 위한 보수 기득권 세력의 대연합을 이룬 공격인 것입니다.

따라서 지금의 정세를 민주노조운동의 사수와 수구보수세력 대 진보세력의 피할 수 없는 전면전이라는 인식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우리는 3년 동안 분명하게 확인한 것이 있습니다. 김대중 정권의 신자유주의 구조조정 정책에 어떠한 타협의 지점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저항하고 투쟁하는 만큼, 갖고 있는 힘만큼 지켜질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타협과 양보는 유지와 확보가 아니라 끝없는 양보와 후퇴를 강요받게 되고 민주노조운동의 포기와 투항을 예고하는 것에 불과하다는 점을 직시해야 합니다.

신자유주의는 기본적으로 노동운동의 무력화를 통해서 만이 자신의 정책을 실현해 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상황을 함께 토론하고 공유하도록 합시다. 아래로부터 대중적 저항을 조직합시다. 오늘의 탄압을 돌파하고 힘찬 진전을 이루어 나갈 저력을 우리는 가지고 있다고 확신합니다. 김대중 정권은 집권말기의 불안정한 권력유지를 위해 검찰, 경찰병력 등 공안 폭력집단에 의존하고 있습니다. 이는 노동자들만이 아니라 양심적이고 민주적이고 진보적인 모든 세력으로부터 배척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민주노총이 확고히 중심에 서서 탄압에 맞서 나간다면 우리는 새로운 전기를 만들어 나갈 수 있다고 저는 확신하고 있습니다.[73]

민주노총 지도부 검거령과 잇단 파업현장 경찰투입으로 노동운동에 대한 전면탄압이 자행되고 있는 가운데 22일 열린 민주노총 비상중앙위원회는 “7월 5일 하루 △노동운동탄압 분쇄 △신자유주의 구조조정 저지 △김대중정권 퇴진을 내걸고 민주노총 60만 전 조합원이 참가하는 총파업을 벌인다”는 결정을 만장일치로 내렸다.

이날 회의는 경찰이 예정된 회의장소였던 한양대 동문회관에 압력을 넣어 장소대여가 취소되고 급히 이촌동 농업진흥회관으로 옮겼으나 수십명의 사복경찰들이 수배자를 찾기 위해 건물을 에워싸는 긴박한 분위기 속에서 열렸다.

허영구 수석부위원장의 사회로 진행된 이날 비상 중앙위원회는 김예준 부위원장의 정세보고와 투쟁현황보고를 듣고 바로 7월초 2차 총력투쟁 논의로 들어갔다.

첫 발언자로 문성현 금속산업연맹 위원장이 나섰다. “금속산업연맹은 6월 20일 중앙집행위원회와 22일 오전 주요사업장 회의를 통해 모든 문제에 대해 신중히 검토한 결과 7월 5일 민주노총은 총파업에 돌입한다는 안을 제시하기로 결정했다.”

‘전 조합원 총파업’이라는 유례없이 강도 높은 투쟁방안이 제시되었지만, 중앙위원 전원은 만장일치로 동의하였다. 후속토론에서 5일 파업의 성격은 ‘하루 정치 총파업’임을 분명히 한 중앙위원들은 5일과 7일 지역별 대규모 집회 개최도 결정하였다.

민주노총에 대한 탄압이 계속될 경우 ‘민주노총 조합원 10만명 상경 전국노동자대회’를 추진하며, 그 세부방안을 결정하기 위해 13일 임시대의원대회를 열기로 했다. 또한 보수언론의 ‘민주노총 죽이기’에 대해서도 강력 대응하고, 국제사회에 김대중 정권의 노동운동탄압을 폭로하는 투쟁도 함께 벌여나가기로 했다.[74]

울산에서부터 솟구쳐 올라온 대중투쟁의 열기가 전국으로 확산되면서, 마침내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에 맞선 전국 노동자들의 총반격 전선 형성을 눈앞에 두는 데까지 나아가게 된 것이었다.

지난 23일 현대중공업 중전기 정문 앞 복개천에서는 울산지역 노동자 2천5백여명이 모인 가운데 ‘민주노총 탄압 분쇄 김대중 정권 퇴진 울산노동자대회’가 열렸다. …

이날 동구 집회는 울산노동자 총파업을 현실화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라 할 수 있다. 울산 동구는 87년 노동자대투쟁의 발흥지요, 남한 노동운동의 거점지역이었다. 하지만 동구의 핵심노조인 현중노조가 지난 몇 년간 현장을 회사에 빼앗긴 채 침체에 빠져 들면서 동구지역 또한 함께 무기력한 상태에 놓여 있었다. 그러나 올해 현중노조는 지난 21일 교섭결렬을 선언한 후 23일에는 조정신청을 하면서 민주노총의 총파업 투쟁에 함께 하기 위해 전력을 기울이고 있다.

이날 발언에 나선 현중노조 위원장은 “87년 노동자 대투쟁이 이곳 동구에서 시작됐지만 정권과 자본의 악랄한 탄압으로 인해 노동자들이 많이 움츠려 있는 게 사실이다. 이제 울산지역 노동자들의 투쟁 열기, 그리고 전국 노동자들의 투쟁 열기에 힘입어 다시 전국 총파업의 구심으로 일어설 수 있도록 하겠다”며 강력한 투쟁의지를 천명했다. …

집회를 마친 후 대오는 중전기 앞 복개천을 출발, 평강교회, 만세대 아파트, 현대백화점, 서부아파트, 한국프랜지를 거쳐 동부아파트까지 동구지역 구석구석을 누비며 5km에 이르는 가두행진을 진행했다. 가두행진을 진행하는 동안 힘찬 선동과 선전전을 함께 벌였는데, 이에 동구주민들도 아파트 창문 밖으로 얼굴을 내밀고 박수를 치는 등 적극적인 지지를 보내주었다.[75]

‘노동운동 탄압분쇄! 신자유주의 구조조정 저지! 김대중정권 퇴진!’을 내건 민주노총의 5일 총파업이 눈앞에 다가오면서, 울산 지역 단위노조들도 총파업 동참 결의를 다지고 있다. … 특히 현대자동차 노동조합과 현대중공업 노동조합이 공히 이번 총파업에 참여하겠다는 결의를 분명히 확인하고 있다.

현대자동차 노동조합은 지난달 29일 확대운영위원회(간담회)를 열고 5일 총파업 동참을 확인하고, 2일부터 6일까지 상집간부 철야농성, 대소위원 출근투쟁, 임원 현장순회, 사업부별 교육홍보 및 보고대회 등에 나서기로 했다. 5일 총파업의 세부 실천지침은 3일 확대운영위원회를 소집하여 결정할 계획이다.

현대중공업 노동조합은 2001년 임투와 총파업 투쟁을 결합시킨다는 방침이다. 지난달 27일부터 해복투, 전노회, 현노회 등의 현장활동가들이 5개 정문을 번갈아 가며 매일 아침 출근투쟁으로 집행부와 함께 총파업 투쟁을 준비하고 있다. 2일부터 4일까지 쟁의행위 찬반투표를 앞두고 조합원총회 방해금지 가처분 신청을 내는 한편 또다시 사측의 총회 방해가 있을 경우 강력히 대응할 태세다. …

30일 태화강 궁도장 옆에서는 민주노총 울산투쟁본부 총파업 결의대회가 2,500여명의 조합원이 참여한 가운데 열렸다. 이날 대회에서는 울산지역 단위노조 대표자들이 총파업 약속을 반드시 지키자는 뜻으로 대형 깃발에 혈서로 결의를 모으기도 했다. … 또한 사수대, 선동대, 정찰대, 기동대 등으로 구성된 울산투본 연대투쟁 실천단이 정식으로 발족식을 갖고 총파업 투쟁과 7월 대투쟁에 앞장설 것을 힘차게 결의했다.[76]

그런데 7·5 총파업을 눈앞에 두고 가장 강력한 조직력과 투쟁력을 가진 현대차노조가 총파업 참여 결정을 전격 철회해 버렸다. 3일과 4일 잇달아 열린 운영위원회를 통해 현대차노조 집행부가 5일 총파업 지침을 ‘간부파업’으로 축소함으로써 사실상 총파업 불참 결정을 내린 것이었다. 10여 개 이상의 항의 대자보와 유인물이 현장에 쏟아지고, 인터넷 게시판에 400개 이상의 항의 글이 올라왔지만, 노조 지도부가 철회해 버린 총파업을 되살리는 것으로까지는 나아가지 못했다.

7․5 민주노총 총파업의 핵심 동력으로 주목받던 현대자동차 노동조합은 4일 확대운영위원회 결정으로 총파업 참여를 철회했다. 민주노총 총파업에 막판 찬물을 끼얹는 효과를 내며 전국적으로 큰 파장을 가져온 현대자동차 노동조합의 총파업 철회 결정. 그 배경과 반응을 긴급 점검해 본다. …

6월 22일 민주노총 중앙위원회는 ‘노동탄압 분쇄, 신자유주의 구조조정 저지, 김대중 정권 퇴진’을 내건 7월 5일 정치총파업을 결의했다. 이날 민주노총의 결정에는 전날 현대자동차 노동조합의 만장일치 쟁발결의가 많은 영향을 미쳤다.

6월 29일 현대자동차 노동조합은 확대운영위를 열어 7월 5일 총파업 돌입을 확인하고 세부방침은 3일 확대운영위를 다시 열어 결정하기로 했다. … 그러나 이 시기 확대운영위에서 총파업 돌입이 확인되는 ‘공식적인’ 상황과 달리 과연 총파업 돌입이 결행될 수 있을지 우려를 갖게 하는 사건들이 발생했다.

외주 모듈화로 인한 고용불안 때문에 합리화 공사 저지 투쟁을 전개하던 승용1공장 대의원회가 27일, 7월 1일부터 17일까지 물량조절 및 합리화공사를 위한 휴가를 가기로 회사와 전격 합의한 것은 그 대표적인 경우에 해당한다. 27일과 30일에 있었던 지역 집회에 참여한 현대자동차 본조 조합원들의 수가 100명 이하로 급격히 떨어진 점도 예사롭지 않았다. …

7월 3일 열린 확대운영위원회는 한차례 정회를 거치며 격론을 벌인 끝에 총파업 결행에 대한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다음날 다시 회의를 갖게 되었다. 확대운영위 논의 내용이 알려지면서 현장은 술렁거리기 시작했고, 4일 아침에는 △4공장 소위원회 “대의원 만장일치 쟁발결의, 운영위는 번복할 수 없다” △자주노동자회 “확대운영위는 총파업을 결행하라” 등의 대자보가 나붙었다.

4일 10시부터 시작된 확대운영위는 여전히 논란을 거듭하다가 오후 1시경 마침내 총파업을 철회하고 간부파업으로 전환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 확대운영위 결정 직후 현자노조 인터넷 자유게시판은 뜨겁게 달아올랐다. 4일 자정까지 12시간 동안 무려 400개가 넘는 글이 쏟아져 올라왔다. 확대운영위 결정을 성토하는 내용이 주를 이뤘다.

5일 아침 상집간부들은 ‘위원장이 조합원 동지들께 드리는 글’을 배포했다. “이 투쟁을 우리가 전부 떠안고 가기에는 노동조합 공백기가 또다시 올 수도 있다는 것” 때문에 위원장의 결단이 있었다는 요지였다.

그러나 5일과 6일 확대운영위 결정을 성토하는 유인물과 대자보가 쏟아졌다. △민투위(5일) “7월 5일 총파업을 성사시키지 못한 결과와 조합원 대중에 대한 약속을 지키지 못한 점에 대해 9대 집행부를 출범시킨 조직으로서 책임” △민주노동자투쟁연대(5일) “약속을 저버리면 신뢰는 없다” △다시 머리띠를 묶으며(5일) “운영위 결정 무효화하고 총력투쟁에 적극 참여해야 한다. 새로운 투쟁지도부 구축을 위해 집행부 총사퇴를 충심으로 촉구” △2공장 대의원회(6일) “전국 노동형제에 대한 배신행위 … 7월 총력투쟁에 현자노조는 전면에 나서야” △현장 활동가들 기명(6일) “집행부 운영위원 총사퇴와 7월 민주노총 총력투쟁 책임질 비대위 구성”.[77]

7·5 총파업의 핵심 동력이었던 현대차노조가 전선에서 이탈해 버리자 총파업의 규모와 위력은 결정적으로 약화됐다. 7월 5일 민주노총은 ‘노동운동 탄압 분쇄, 신자유주의 구조조정 분쇄, 김대중 정권 퇴진’을 내걸고 7만여 명이 참여한 총파업을 전개했다.

현대자동차 노동조합의 예상밖 총파업 철회로 그 기세가 약화되긴 했지만, ‘노동운동 탄압분쇄! 신자유주의 구조조정 저지! 김대중정권 퇴진!’을 내건 민주노총의 5일 총파업과 6~7일 집중투쟁이 전국에서 힘차게 치러졌다.

특히 5일에는 금속산업연맹에서 기아자동차, 한국중공업, 오리온전기, KEC, 대우정밀 등 44개 사업장, 화학섬유연맹에서 태광, 효성, 고합 등 12개 사업장, 기타 21개 사업장이 전면 혹은 부분파업으로 총파업에 참여했다.

또한 서울 종묘공원 1만 명을 비롯하여 부산, 창원, 광주, 대전, 원주, 제주, 울산 등 전국 20곳에서 열린 집회에 5만여 명이 참여했다. 6~7일 집회도 전국에서 예정대로 열렸으며, 대부분 5일 집회에 참여한 수가 유지되었다. …

그러나 정권과 자본은 더욱 맹렬한 기세로 구조조정과 노동탄압에 나서고 있다. 5일 총파업의 기세가 예상보다 약화되면서 자신감을 얻은 듯한 태세다. … 민주노총은 5일 총파업이 예상보다 저조했지만 기세를 되살려 ‘22일 10만 명 상경투쟁’ 등 7월 투쟁을 계획대로 밀고 나간다는 방침이다. 더욱 거세지는 구조조정과 노동탄압 앞에 다른 길은 없기 때문이다.[78]

22일의 10만 조합원 상경투쟁, 28일의 시·군·구별 전 조합원 궐기대회 등 민주노총의 7월 총력투쟁 일정은 계속됐지만, 전국적인 총반격 전선의 출발점이었던 총파업이 큰 타격을 받은 뒤에 전개되는 투쟁은 날카로운 역동성을 전혀 갖지 못했으며 시간이 지나면서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결국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에 맞서 전국적인 총반격 전선을 형성하려 했던 도전은 다시 한 번 실패하고 말았다.

 

한편 7월 총력투쟁의 실패 이후에도 울산지역에서는 효성·태광·민주버스 등의 파업이 길게 이어졌지만, 한 번 무너진 연대투쟁의 전선은 끝내 복구되지 않았다. 결국 효성과 태광은 수백 명의 해고자가 수백억 원의 손배가압류를 얻어맞고 민주노조의 뿌리가 뽑히는 비참한 패배를 맞이했다.

 

IMF 외환위기 이후 몇 년 만에 결정적인 기회로 다가왔던 ‘2001년 울산총력투쟁’은, 만일 성공했다면 울산 노동자운동, 나아가 한국 노동자운동의 역동적인 전진으로 연결될 가능성이 있었지만, 실패한 결과 효성·태광 등 주요한 노조들을 붕괴시키며 울산 노동자운동을 매우 위축시키고 말았다.

 

그런데 7·5 총파업을 철회한 현대차노조 집행부가 그때까지만 해도 이른바 ‘현장파’의 전국적 대표주자로 간주되던 ‘현대차 민투위’에서 배출한 집행부였다는 점은 또 다른 충격을 던졌다.

 

국민파와 중앙파를 비롯한 타협·개량주의 세력과 달리 현장파는 전투적·변혁적 노선을 견지하면서 노동자 민주주의와 노동자계급의 연대를 적극적으로 강조했다. 그런데 현장파의 대표주자인 민투위 집행부의 7·5 총파업 철회는 현장파의 행동이 그 주장에 미치지 못함을 만천하에 드러내는 계기가 됐다. 7·5 총파업 철회를 계기로 현장파의 실체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기 시작했다.

 

불행하게도 시간이 지날수록 7·5 총파업 철회는 우발적 실수가 아니라 필연적 결과였음이 드러났다. 현장파의 다수는 참된 전투적·변혁적 세력으로 정립하지 못하고 그저 좌파적 수사를 즐겨 사용할 뿐 본질은 국민파나 중앙파와 별로 다르지 않은 또 다른 개량주의·관료주의 세력임이 드러났고, 더욱 더 그렇게 전락해 나갔다. 현장파 다수의 추락은 한때 건강했던 현장활동가들이 IMF 외환위기 이후 훨씬 더 복잡하고 심각해진 계급투쟁의 양상을 따라잡으며 사상적·실천적 전망을 치열하게 발전시켜 가야 했지만 그렇게 하지 못한 결과였다.

 

3) 2002년 발전 민영화 반대투쟁

 

국가기간산업 민영화(사유화)는 김대중 정권의 신자유주의 공세에서 중요한 한 축이었다. 국가기간산업 민영화는 국가기간산업에 시장 원리를 전면화함으로써, 해당 노동자들에게는 대규모 정리해고와 비정규직화를 가져오고, 전체 노동자·민중들에게는 요금인상과 공공서비스의 축소를 야기할 수밖에 없었다. 반면 국가기간산업을 인수하게 될 자본가들에게는 거대한 이윤을 보장해 주는 황금 같은 기회였다.

 

김대중 정권은 2000년 포항제철(현 포스코)과 한국중공업(현 두산중공업), 2002년 한국통신(현 KT)과 한국담배인삼공사(현 KT&G) 등 총 8개 기업을 정부 지분 매각을 통해 완전 민영화했다. 한국중공업과 한국통신 등의 민영화 진행 과정에서 노조의 반대 투쟁이 있긴 했지만, 민영화를 막아내지 못했다.

 

그런 가운데 2001년 김대중 정권은 철도청, 한국전력공사, 한국가스공사에 대한 민영화를 본격적으로 추진하고 나섰다. 철도는 시설관리와 운영을 분리해 시설관리는 공기업으로 전환하고 운영은 민영화하는 계획이 수립됐다. 전력은 발전자회사 분할·매각, 송전 민영화, 배전 민영화 순으로 3단계 민영화 계획이 수립됐다. 가스는 가스도입 업무를 3개사로 분할한 뒤 2개사를 매각할 계획이었다.

 

◎ 철도노조 민주화와 발전산업노조 건설

 

김대중 정권이 민영화를 밀어붙이자, 철도·발전·가스 노동자들의 위기의식이 민주노조에 대한 열망으로 표출됐다. 2001년 5월 21일 철도노조에 54년 만에 민주집행부가 들어섰다. 7월 19일에는 한국전력에서 분사된 화력발전 5개사에 속한 노동자들이 56년 어용 한전노조를 떠나 발전산업노조를 건설하면서 민주집행부를 수립했다.[79] 한국가스공사노조는 한국노총 소속이었지만 민영화 저지를 위해 민주노총과 긴밀히 협력하기 시작했다.

1946년 10월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전평)를 중심으로 전개된 전국 총파업의 시작은 철도 노동자들의 파업이었다. 47년 단정수립 반대 파업까지 두 번의 전국 총파업을 이끈 전평이 와해되면서 당시 중심축이었던 철도노조는 미군정, 우익청년단, 대한노총에 의해 장악됐다. 이 때부터 철도노조는 대한노총(현 한국노총)의 어용성을 대표하는 노조로 자리를 굳혔다. …

4·19 혁명이 일어났던 1960년에 설립된 기관사노조는 철도노조보다 훨씬 높은 현실적인 임금인상안을 주장하고 강력한 준법운행을 결행하는 등 왕성한 활동을 벌였지만 5·16 군사 쿠데타로 인해 해산당하고 말았다.

1988년 다시 기관사들에 의해 투쟁의 깃발이 나부꼈다. 월 250~300시간에 달하는 살인적인 노동시간과 폭염·혹한에 그대로 노출되는 비참한 노동조건에 맞서 올림픽을 50여일 앞둔 7월 26일 전면 총파업에 돌입했다. 당시 노조는 파업을 불법으로 매도하고 진압 전경들에게 거액의 조합비를 지출하는 등 반노동자적 작태를 서슴지 않았다.

기관사들의 총파업 투쟁은 불과 10여시간만에 공권력이 투입되고 1,653명이 연행되면서 붕괴됐지만, 현장에서 자연발생적으로 터져 올라온 최초의 대중투쟁으로서 철도 노동자들에게 민주노조건설에 대한 자각을 불러일으키는 중요한 계기가 됐다. 88년 기관사 파업투쟁은 패배했지만, 당시 노조집행부의 반노동자적 작태로 인해 노동자들은 새로운 조직적 대안을 모색하게 됐다. …

1989년 노조총선거에서 투쟁에 대한 배신자를 심판하고 분위기를 일신한 기관사들은 전국기관차분회장협의회(전기협)를 발족시키면서 본격적인 노조민주화 투쟁의 막을 올렸다. 분회장 모임에서 대중조직(지부협의회)으로 전환하며 조직을 강화한 전기협은 90년 순직조합원 장례투쟁, 93년 노동조건개선투쟁 등에서 성과를 올려 대중적 지도력을 확보했다.

1994년 6월 23일 마침내 전기협은 전체 철도노동자의 절박한 요구인 근로기준법 준수와 8시간 노동제를 내걸고 파업에 돌입했다. 이번엔 서울·부산 지하철노조와 함께 하는 공동투쟁이었다. 파업 투쟁 4일째 공권력이 투입되면서 대오가 무너지고 일주일만에 눈물을 머금은 채 현장으로 복귀할 수밖에 없었지만, 당시의 파업 투쟁은 한층 강화된 조직력과 단결력을 보여주었다. …

94년 파업 투쟁의 패배로 인해 활동가들이 대거 중징계를 당하면서 현장은 한동안 침체기를 겪어야 했다. 한편 96년 철도 민영화 방침이 나오고 7,307명의 인원감축계획에 따른 조치로 인해 노동강도는 하루가 다르게 강화되고 있었다.

그러던 중 2000년 1월 14일 대법원으로부터 “3중 간선제는 무효”라는 판결을 얻어내면서 현장에는 새로 활기가 돌기 시작했다. 민주세력은 ‘전면적 직선제 쟁취를 위한 공동투쟁본부’(공투본)를 결성하고 규약개정 없이 대의원 선거를 진행하려던 본조방침에 항의하여 66일간 본조사무실 점거농성을 진행했다. 당시 노조 집행부는 대의원 불법선거 감행과 공투본 간부 44명 제명 처분으로 버텼지만, 결국 광범위한 대중적 요구에 밀려 직선제를 수용할 수밖에 없었다.

2001년 2월 8일, 3월부터 진행될 노조총선거에 대응하기 위해 민주세력이 총망라된 ‘생존권 사수와 민주노조 건설을 위한 철도노동자 투쟁본부’(민주철도투본)가 결성됐다. 그리고 마침내 지난 21일 민주철도투본 김재길 후보가 압도적 득표로 본조위원장에 당선됨으로써, 민주노조의 깃발을 꽂았다.[80]

한국발전산업노조 초대 위원장에 민주파 현장조직인 ‘현장에서 미래를 열어가는 전력노조민주화 투쟁연대(전민투련)’ 소속 이호동 후보가 당선되었다.

한국발전산업노조는 전력산업 구조개편 법률에 의해 지난 4월 1일 한전에서 분리돼 민영화를 앞두고 5개의 자회사(서부, 남동, 남부, 중부, 동서발전주식회사)로 편입된 화력발전 부문이 포괄된 산별노조다. 수력과 원자력 부문은 일단 민영화 대상에서 제외된 가운데 한국수력원자력주식회사로 편입되었는데, 여기에는 한국수력원자력노조(위원장 김병기)가 결성되었다.

한국발전산업노조가 출범하기까지는 우여곡절이 많았다. 초기에는 특별지부 형태로 전력노조에 남아 있는 방안도 거론되었으나 민영화 반대투쟁을 앞두고 어용 전력노조에서는 아무 일도 할 수 없다는 공감대가 워낙 강해서 일단 ‘전력노조 탈퇴’는 쉽게 결론이 났다.

그런데 5개 자회사별로 기업별 노조를 설립할 것인지, 5개 모두를 포괄하는 산별노조를 설립할 것인지를 두고 논란이 격심했던 것이다. 기업별 노조를 주장한 측에서 실제 노조설립 신고서를 몇 차례 접수시켰다 반려되는 등 우여곡절을 거친 끝에 산별노조를 건설하기로 의견을 통일하고 6월 28일 조합원 투표로 규약을 확정하게 되었다. …

7월 19일 실시된 위원장 선거에는 세 팀이 나섰으나 이호동 후보팀이 1차 투표에 총 5,660명 투표자 5,459명(투표율 96.4%) 가운데 3,336명(61.1%)의 압도적 지지를 모아내면서 싱겁게 끝났다.

이호동 신임 위원장은 지난 해 12월 3일 전력노조 파업 철회 이후 오경호 위원장 불신임 투쟁을 전개했던 한전노조민주화추진위원회(한전노민추) 출신이다. 올해 초 전력노조의 분사 합의안과 전적조건 부결투쟁을 벌인 전력노조민주화투쟁연대(전민투련) 결성을 주도했다.

이호동 위원장은 △민영화 반대 △고용안정(노동조합이 감원을 인정한다는 조항 삭제, 배치전환은 조합원들의 고충처리 요구가 있고 본인이 합의할 때만 가능) △실질임금 쟁취 △조합활동으로 인해 해고·징계·부당전출된 조합원 원상복귀 △민주노총 가입 추진 등을 공약으로 내세웠다.

선거결과가 나오자 이호동 위원장은 “이번 선거과정과 결과는 조합원들의 발전소 매각저지 투쟁명령”이라면서, 전민투련에 압도적인 지지를 보내준 것은 “민영화 저지투쟁을 위한 강력한 집행부를 원했기 때문”이라고 투쟁의지를 밝혔다.[81]

◎ 발전노조 조합원들의 영웅적인 투쟁

 

철도·발전·가스 산업을 민영화하려는 김대중 정권의 작업이 착착 진행돼 나가자, 이를 저지하려는 노동자들의 투쟁도 점차 강도를 높여 나갔다. 마침내 김대중 정권의 취임 4주년 기념일인 2002년 2월 25일, 국가기간산업 사유화 저지를 위한 철도노조·발전노조·가스노조의 공동파업이 시작됐다. 하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이렇게 시작된 발전노조의 파업이 한 달 후에 한국 사회를 완전히 뒤흔들어 놓는 초유의 사태로 발전할 것이라고는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공동파업 돌입 직후 가스노조가 파업을 중단하고 현장에 복귀했다. 가스노조는 25일 12시, 파업 돌입 8시간 만에 민영화 저지에 대해서는 아무 내용도 없이 파업 종결을 전격 선언했다. 서울대에 집결한 2천여 명의 조합원들로부터 “합의무효, 파업지속”을 요구하는 고함이 빗발치자, 결국 가스노조 집행부는 총사퇴를 선언했다.

 

26일 민주노총이 ‘중소·영세·비정규직 희생 없는 주5일 근무제 도입’과 ‘국가기간산업 사유화 저지’를 핵심 요구로 해서 10만여 명이 참여하는 총파업을 전개했다. 그러나 2·26 민주노총 총파업은, 몇 년 동안 구조조정과 정리해고에 맞선 투쟁에서 줄줄이 패배한 탓에 이제 긴장과 열기라곤 전혀 찾아볼 수 없게 된 ‘맥 빠진 총파업’의 한 전형이었다.

 

철도노조 또한 27일 새벽 파업을 종결했는데, 합의서에는 “노사가 철도산업의 공공적 발전에 대해 공동 노력한다”는 추상적 문구만 담겼다. 당장의 민영화 법안 상정은 유보시켰지만, 민영화 추진방침은 되돌리지 못했다. 철도노조 위원장은 건국대에 모인 수천 여 조합원들에게 거센 항의를 받아야 했다. “발전노조만 남겨놓고 파업을 끝낼 수 없다”는 조합원들의 눈물어린 외침 속에 철도노조 파업이 끝났다.

 

이제 홀로 남은 발전노조 파업이 며칠이나 더 지속될 것인지 회의하는 시각이 지배적이었다. 신생 노조인 발전노조 조합원들은 전력노조 시절을 포함해서 단 한 번도 파업을 경험해 보지 못한 상태였다.

 

26일 밤 조합원 5천여 명이 집결해 있던 서울대에 공권력 투입이 유력해지자, 발전노조는 파업 조합원을 500개조로 나눈 산개파업을 시작했다. 산개파업은 공공부문 노동조합들이 공권력 투입을 피하여 이전에도 몇 차례 시도해 본 적이 있었으나, 1주일을 넘겨본 적이 없었다. 10여 명 내외로 대오를 분산하여 벌이는 산개파업은 파업에 함께 나선 노동자들의 힘을 직접 느끼지 못함에 따라 오래지 않아 노동자들이 급격한 심리적 동요에 빠져들면서 한꺼번에 둑이 터지듯 무너지는 것이 대체적인 경험이었다. TV방송 등 언론을 총동원한 정권의 심리전은 산개파업을 무력화하는 주요한 수단이었다.

 

따라서 발전노조 파업 또한 며칠 가지 않아 스스로 무너질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게 거의 모든 사람들의 예상이었다. 하지만 이런 예상은 완전히 빗나갔다.

 

파업돌입 1주일이 지나갔지만 전체 조합원 5,606명 가운데 5,270명(94.0%)이 여전히 산개파업에 참여하고 있었다. 파업돌입 2주일이 지나가자 파업 노동자 수가 5,392명(96.2%)으로 오히려 늘어났다. 파업 돌입 14일차인 3월 10일 오후 2시에 전국 6개 지역에서 동시적으로 이루어진 번개집회에는 순식간에 4천여 명이 집결했다가 경찰이 도착하기 전에 해산함으로써, 산개파업이 대단히 조직적으로 진행되고 있음을 확인시켜 주었다.

산개투쟁 중인 발전노조 조합원들은 10일 오후 2시 전국 6곳에서 번개집회를 열었다. 이날 번개집회는 11일 오전 9시로 설정한 회사의 업무복귀 시한에 맞서 조합원들의 자신감을 끌어올리기 위해 기획되었는데, 대단히 성공적으로 치러졌다.

경찰의 엄중한 감시망을 따돌리며 휴대폰 문자메시지 등을 이용한 연락체계로 △동국대 1,300명 △연세대 1,200명 △서대전공원 700명 △청주서원대 400명 △인천대 200명 △조계사 200명 등 4천여 명이 집결한 것이다. 일부 조합원들이 미처 집결지에 도착하지 못한 가운데 경찰 도착 전에 서둘러 집회를 끝낸 점을 감안하면, 사실상 산개파업 참여자 전원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고 있음을 확인한 셈이다. …

발전노조 가족대책위도 전국적으로 활발하게 활동에 나서고 있다. 6일 서울 훈련원공원에서는 전국의 발전 노조원 가족 700여명이 모여 집회를 가졌다. 울산에서도 가족대책위가 연일 발전노조 파업의 정당성을 주장하고 지지를 호소하며 선전활동을 펴고 있다. …

발전노조 파업이 강고하게 전개되고 있지만, 정부는 여전히 민영화를 철회할 수 없다며 교섭 자체를 거부하고 있다. 8일에는 중앙노동위원회가 직권중재 결정을 내리기도 했다. 경찰 및 행정력을 총동원하여 수배중인 노조간부 검거 및 산개파업 중인 발전노조 조합원들을 찾고 있다. 회사 또한 가족들에 대한 개별접촉과 면담을 시도하며 업무복귀를 종용하고 있다. 하지만 발전노조의 파업동력이 워낙 강고하여 정부와 회사의 온갖 탄압과 회유가 전혀 먹혀들지 않고 있다. …

파업이 장기화되면서 전력사고에 대한 우려도 높아지고 있다. … 정부가 끝내 민영화만을 고집한다면 대형 전력사고로 이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지금이라도 정부는 잘못을 인정하고 국가기간산업 사유화 중단과 발전소 민영화·해외매각 결사반대를 외치는 발전노조의 주장을 수용해야 할 것이다.[82]

마치 대지를 뚫고 치솟은 용암처럼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발전노조 파업투쟁이 바위처럼 흔들리지 않는 단단함으로 벌써 2주를 넘어 가열차게 전개되고 있다. 이제 발전노조의 투쟁은 전국 노동자들에게 가슴 깊은 감동으로 다가서 있다.

2월 25일 공동파업이 시작된 직후 가스와 철도 파업이 무기력하게 끝나던 무렵만 해도, 이번 투쟁 또한 그렇게 사그라들고 마는구나 하는 게 대다수의 인식이었다. 하지만 노동운동 역사상 유례가 없을 만큼 강력한 조직력으로 산개파업-번개집회-산개파업을 이어가는 모습은 오랜 패배감과 무기력에 지친 한국 노동운동에 새로운 자신감과 희망을 불어넣고 있다.

발전노조의 강고한 조직력 앞에 정부의 강경탄압 기조도, 회사의 업무복귀 지침도, 경찰의 그물망 검문검색도 모두 속수무책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오히려 늘어난 파업 참여자들은 파업 2주가 지나가도록 끄떡도 하지 않으며 명동성당에 농성중인 지도부의 지침에 따라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고 있다. 파업이라곤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는 노동조합에서 어찌 이토록 강력한 투쟁이 가능하리라 생각이나 할 수 있었단 말인가!

그들은 발전소의 특성상 시내에서 떨어진 오지 근무를 감수해야 했고, 발전기가 고장이라도 나는 날이면 쉬는 날도 마다않고 현장으로 뛰어가는 생활에 묵묵하게 임해 왔다. 국가기간산업을 지켜내고 있다는 자부심으로 자신의 일터를 사랑하며 너무나 평범하게 살아왔던 것이다.

그런데 발전 노동자들이 이토록 강고한 투사들로 변신한 것은 도대체 무엇 때문일까? 그것은 한마디로 정부가 추진해 온 발전소 매각 정책이 너무나 잘못되었다는 분명한 확신을 갖고 있음에도 지금껏 그들의 주장을 조금도 펼칠 수 없었던 과정에서 맺힌 ‘한’ 때문이다.

그들이 그토록 반대하였건만 정부는 민영화에 대한 종교적 신념으로 일방적으로 밀어붙여 왔다. 한전노조 시절 어용 위원장의 직권조인과 뒤이은 분사, 노조와 단협조차 승계해 주지 않은 노동탄압을 겪으며 그들의 가슴속엔 피멍이 들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 그토록 평범한 노동자였던 발전 노동자들이 이토록 거대한 분노를 표출할 수밖에 없도록 만든 것은 바로 김대중 정부가 지난 4년 동안 지속해 온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인 것이다.[83]

파업돌입 3주일이 지나가도 파업 대오가 5,295명(94.5%)을 유지하자, 초조해진 정부는 초강수를 꺼내 들었다. 3월 19일 대통령 김대중은 국무회의에서 “불법 파업을 조속한 시일 내에 해결하라”고 다그쳤다. 이에 20일 5개 발전회사 사장단이 “25일 오전 9시까지 복귀하지 않는 자는 전원 해고”라는 최후통첩을 선언했다. 23일에는 국무총리 이한동이 “민영화 철회문제는 노조가 요구할 수 있는 대상도 아니고, 법에 의해 이미 발전소 매각단계에까지 와 있으므로 이제 되돌릴 수도 없는 일”이라며 “직무에 복귀하지 않는 노조원들은 그 수가 얼마일지라도 모두 해고조치 한다는 게 정부의 방침”이라고 밝혔다.

발전노조 이호동 위원장은 24일 오후 3시 반 긴급 기자회견을 갖고 “합리적인 사태 해결을 위한 노력에 대해 오로지 공권력을 동원한 폭력 진압으로 일관할 경우 우리는 지금까지와는 다른 중대한 전술적 변화를 통해 결사적인 투쟁을 지속해 나갈 것”이라는 결연한 의지를 밝혔다. 또한 조합원에게 △사측의 복귀명령 단호히 거부 △투쟁승리 그날까지 결사항전 △단호한 투쟁의지 천명 위해 전 조합원 3월 25일자 사직서 작성을 투쟁지침으로 명했다. …

기자회견 후 3시간이 채 안된 오후 6시부터 수도권에 산개해 있던 조합원들이 연세대로 모여들었다. 처음 서울대에서 파업을 선언한 이후 신출귀몰 번개집회와 산개투쟁을 벌여온 조합원들은 이날도 멋지게 경찰 추적을 따돌리고 삽시간에 2천 5백여 조합원이 집결했다.

학생들이 진입을 돕기 위해 6시부터 30여분 동안 연세대 앞 삼거리 도로를 점거하고 시위를 벌였다. 뒤늦게 출동한 경찰이 연세대 모든 정문을 틀어막아 진입하지 못한 조합원이 1천여 명. 결국 3천 5백여 조합원이 전원해고 협박에 굴하지 않고 위원장 지침에 따라 번개처럼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단결력을 과시한 것이다. …

7시경 경찰이 정문 진입을 시도하자 사수대는 화염병을 던지며 격렬하게 저항, 2시간 전투 끝에 전투경찰을 물리치기도 했다. … 자정 무렵 김대중 정부는 전투경찰 4천 5백 명을 투입, 연세대 침탈을 강행했다. 이 과정에서 조합원, 상급단체 간부, 학생, 노동단체 회원 등 300여명이 연행되기도 했으나, 침탈 직전 지도부의 산개 지침에 따라 나머지 조합원들 대다수는 안전한 장소로 피신, 다시 산개투쟁에 돌입했다. …

이번 투쟁의 또 다른 선봉장 가족대책위는 25일 09시 복귀시한에 맞추어 전국 각지에서 발전소 앞 복귀저지투쟁을 벌였다. 파업 분쇄에 혈안이 된 경찰들은 가대위의 합법 집회를 가로막으며 온갖 폭력만행을 저질렀다. 삼천포에서 200여 가족 전원을 연행했으며 폭력연행 과정에서 다친 가족들이 119 구조대에 실려 가기도 했다. 서인천에서는 집회 참여를 위해 대절한 버스 출입문을 봉쇄했으며 동해화력 앞 항의시위를 벌이던 상급단체 간부와 학생들을 전원 연행했다.

그러나 영동, 하동, 여수, 평택, 울산, 태안, 보령, 당진 등 전국 각지에서 가대위는 탄압을 뚫고 힘찬 투쟁을 전개하며 일부 복귀하는 조합원을 저지하는 데 성공했다.

김대중 정부에 맞서 한 치도 물러섬 없이 결사항전을 벌이는 발전노조와 가족대책위는 한목소리로 외치고 있다. “전원이 해고되는 한이 있어도 민영화 철회 없이는 절대로 복귀할 수 없다!”[84]

3월 24일 오후 6시 50분 즈음 연세대 정문 앞, 화염병이 날아다녔다. 6시 전후부터 조합원들이 연세대로 모였다. 한 시간쯤 지났을까. 경찰은 상황을 전혀 모르다가 그때서야 연세대 정문 앞으로 집결했다. 학생들은 발전노동자가 무사히 들어올 수 있도록 정문 앞에서 화염병을 든 것이다. … 경찰이 백양로까지 들어왔다. 도서관 앞에서 학생들과 대치했다. … 경찰들은 뒷걸음질쳐 교문 밖으로 나갔다. 다시 진입하려 하자 학생들이 교문 앞을 불바다로 만들었다. 경찰은 밖으로 빠져나가 정문을 봉쇄했다. 조합원들이 연세대로 들어오기 시작한 지 1시간만인 7시 조금 넘어 정문을 봉쇄했다. 병원쪽 출입구도 막았다. 교문 앞은 학생들을 비롯한 사수대가 지키고 있었다.

7시 30분부터 사전대회를 시작했다. 노천극장은 투쟁가와 구호로 가득찼다. 조합원들은 계속 들어오고 있고, 연세대 주변에서는 아직 들어오지 못한 조합원들이 틈을 보고 있었다. 경찰은 병력을 늘리고, 물대포까지 배치했다. 8시 30분경이 되자 조합원들 수는 어느새 2,800여 명으로 불어났다. 그동안 보지 못했던 얼굴을 확인하며 투쟁의 함성을 질렀다. …

서울대에 집결했을 때 조직적 결의로 현장에 복귀한다는 ‘발전노동자와 위원장의 약속’을 한 적이 있다. 명동성당 지도부는 25일 복귀시한에 대해서도 조합원의 의사를 수렴하려 했다. 누군가 ‘복귀를 할 것인가, 계속 투쟁할 것인가’를 묻는 조합원 찬반투표를 진행하기 위해 투표용지를 가지고 왔다. 그러나 경찰의 침탈이 예상되는 긴급한 상황에서 투표를 진행할 수 없었다. 무엇보다 조합원들의 열기는 집단적 의사를 물어볼 필요가 없을 정도로 높았다. 현장지도부는 조합원들에게 25일을 돌파하자는 입장을 밝히며 조합원들의 의사를 물었다.

“정부가 발표한 복귀시한 3월 25일 9시를 무시하고 끝까지 단결하여 투쟁할 수 있겠습니까? 그럴 수 있는 조합원은 일어나 서로에게 각오를 밝힙시다!”

2,800명이 넘는 조합원들이 한꺼번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투쟁!” 와~~ 와~~ 파업파도가 물결쳤다. 발전노동자들은 흔들리지 않았다. 밤하늘이 쩌렁쩌렁 울렸다.[85]

25일 오전 11시 발전회사 사장단이 발표한 미복귀 조합원 수는 여전히 3,912명(69.8%)이나 됐다. 노조가 자체 집계한 파업 노동자 수는 4천 명이 훨씬 넘었다. “전원 해고”라는 압박 때문에 일부 노동자들이 파업에서 이탈하긴 했지만, 여전히 대다수 노동자들이 파업을 굳건히 지켜내고 있었다.

 

◎ 무산된 4·2 총파업과 굴욕적 합의

 

이런 상황에서 3월 26일 민주노총 임시대의원대회가 긴급하게 열렸다. 이 날 대의원대회는 발전소 매각을 비롯한 국가기간산업 사유화 중단과 발전노조 탄압을 비롯한 노동운동탄압 중단을 위해 4월 2일 연대총파업에 돌입하기로 만장일치로 결의했다.

민주노총은 3월 26일 오후 2시 서울 올림픽공원 역도경기장에서 임시대의원 대회를 갖고 △발전소매각 등 국가기간산업 사유화 중단 △발전노조탄압 등 노동운동탄압 중단을 위한 총파업 돌입을 참석대의원 535명 만장일치 찬성으로 결의했다. 이로써 발전노조 파업은 노동과 자본의 일대격돌로 확대되고, 김대중 정권은 김영상 정권의 임기 말과 같은 노동자들의 강력한 저항에 직면하게 되었다.

이날 민주노총 대의원들은 중앙집행위원회에서 4월 2일 13시 총파업 돌입을 요지로 상정한 민주노총 총파업 투쟁계획 원안을 힘차게 만장일치로 통과시킨 후, 이어 총파업 투쟁을 보다 힘차게 조직하기 위한 추가 투쟁계획을 논의했다.

대의원들은 원안에 덧붙여 △총연맹과 산별연맹 임원 5만원, 단위노조대표자 3만원의 발전 투쟁기금 모금 △28·29일 잔업과 30일 특근거부 및 지역별 총력 집회 △현재 진행되고 있는 지원모금 적극 전개 등의 방침을 정했다.

이날 대의원대회에 앞서 발전노조 가족대책위 한 분이 아이를 등에 업고 연단에 나서 대의원들에게 총파업 돌입을 눈물로 호소하여 많은 박수를 받기도 했다. 또한 발전노조 소속 김광철 대의원은 “이 싸움은 반드시 승리할 것이며, 소수 복귀한 조합원들도 다시 파업현장으로 돌아올 것”이라며 연대총파업을 호소했다.

민주노총이 이날 만장일치로 총파업을 결의하게 된 것은, 발전노조의 투쟁이 단지 그들만의 투쟁이 아니라 전체 노동자·민중의 생존권과 직결되는 신자유주의 구조조정 분쇄 투쟁의 핵심이라는 데 모두가 동의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86]

한 달 전에 발전노조 등이 파업을 시작할 때만 해도 국가기간산업 사유화 저지는 형식적인 2차적 과제일 뿐이었지만, 불과 한 달 만에 국가기간산업 사유화 저지가 민주노총의 절대적인 최우선 과제로 등장하여 만장일치로 총파업 결의를 하게 된 것이었다.

 

민주노총의 방향이 한 달 만에 완전히 바뀐 것은 파업이라고는 생전 처음 해보는 발전노조 조합원들이 보여준 영웅적인 투쟁 때문이었다. 그들의 투쟁은 민주노총 조합원들, 특히 현장 활동가들의 가슴 속에 뜨거운 감동을 불러 일으켰다.

 

많은 현장 활동가들에게 그것은 1987년 노동자 대투쟁 이후 거침없이 전진하던 무렵의 자기 경험을 되돌아보게 하는 가슴 뭉클한 호소였다. 또한 총자본의 신자유주의 공세에 밀려 몇 년 동안 패배만을 거듭해 왔지만, 이제 내면화된 패배주의를 떨쳐 버리고 발전노조 조합원들과 같은 기세로 전국의 노동자들이 반격에 나선다면 얼마든지 신자유주의 공세에 맞선 투쟁도 승리할 수 있다는 새로운 기대와 자신감을 갖게 만드는 자극제이기도 했다.

 

발전노조의 영웅적인 파업은 여론의 흐름도 완전히 바꿔 놓고 있었다. 강도 높은 파업을 계기로 발전소 매각이 야기할 공공성 상실의 위험이 널리 알려지자, 발전소 매각에 반대하는 입장이 모든 여론조사에서 80%를 넘기고 있었다. 야당은 물론이고 여당의 국회의원들조차 발전소 매각을 재고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나섰다. 김대중 정권과 가깝게 지내던 사회원로나 시민단체들도 발전노조 파업을 지지하고 나섰다. 오직 김대중 정권만이 발전소 매각을 고집하는 것 같은 양상이 됐다.

 

스스로 받은 감동에 덧붙여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를 배경으로, 3월 하순에 이르자 정치적 입장을 떠나 모든 현장 활동가들이 발전노조 파업에 대한 연대를 절대적인 지상과제로 동의하게 됐던 것이다. 민주노총 임시대의원대회의 만장일치 총파업 결의는 이렇게 아래로부터 만들어진 거대한 연대 흐름을 표현하고 있었다.

지난달 30일 여수화력 사택에서 32명의 여천산업단지 노동자들이 경찰에 의해 강제연행되는 사태가 벌어지면서, 여천산업단지 18개 노동조합이 4월 2일 민주노총 총파업에 결합하기로 선언했다.

30일 밤 전남동부지역 민중대회를 마친 여천산업단지 노동자들은 발전노조 가족들의 다급한 지원 요청을 받고 여수화력 사택으로 달려갔다. 도착해 보니 부녀자들과 아이들만이 남아 있는 사택에는 30여명의 건장한 용역깡패와 경찰들이 돌아다니며 파업 중인 남편의 행방을 대라고 가족들을 협박하고 있었다. 가족들이 두려움과 공포에 떨고 있었던 것은 당연했다.

노동자들이 몰려들자 용역깡패들은 부리나케 꽁무니를 뺐는데, 곧바로 전경 수개 중대가 사택으로 들이닥쳤다. 경찰병력 투입과 동시에 무차별 연행 사태가 벌어져 … 32명의 노동자들이 강제연행 되었다.

즉각 여천산업단지 노동자 300여 명이 여수경찰서로 달려가 연행자 석방을 요구하며 다음날 새벽 3시까지 항의투쟁을 벌였다. 일요일인 31일 오후에도 2천여 명이 모여 여수경찰서 앞에서 연행된 노동자 석방과 폭력경찰 규탄 집회를 가졌다.[87]

민주노총의 이번 총파업은 어느 때보다 높은 참여열기를 보여주고 있어 지난 96~97 총파업에 못지않은 위력을 보여줄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먼저 금속연맹은 현대·기아·쌍용 등 자동차 완성 3사 노조와 금속노조 등 100여개 사업장, 13만여 명이 파업에 돌입하여 이번 총파업의 주력 역할을 하게 된다. 공공연맹은 30개 노조, 2만여 명이 파업에 동참한다. 민주택시는 150개 사업장 1만 5천여 명, 보건의료노조는 50개 지부 1만여 명, 화학섬유연맹은 여수 등 20여개 노조 5천여 명이 파업에 돌입한다.

아직 법적으로 파업권을 갖고 있지 못한 전교조도 2일 13시에 전 조합원(최소 1만 명 이상)이 조퇴투쟁으로 파업 집회에 동참할 계획이다. 발전소 매각반대 공동수업도 병행한다. 나머지 연맹들도 사무금융노조가 조합원총회 형식으로 16시 파업집회에 결합하는 등 총파업 일정에 최대한 결합하려는 방침이다. 또한 철도노조와 가스노조가 31일 연대총파업 합류를 선언했다. …

민주노총은 정부가 여전히 발전소 매각 동의를 강요하고 있기 때문에 교섭타결의 가능성이 낮다고 보고, 2일부터 4일까지 1단계 투쟁을 거친 후, 9일부터 총파업 2단계 투쟁을 벌일 방침이다. 이번 총파업 투쟁은 신자유주의 구조조정 저지를 비롯해 향후 민주노조운동의 전망에 지대한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88]

총자본의 신자유주의 공세에 맞선 전국 노동자들의 총력 전선을 형성할 수 있었던 또 한 번의 기회는 이렇게 발전노조 조합원들이 너무나도 영웅적인 한 달 간의 파업을 전개해 내는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계기를 통해 만들어졌다.

지난 5년여 동안 민주노총이 수도 없이 많은 총파업을 시도해야 했던 것은 그만큼 파상적인 구조조정 속에 노동자 민중의 생존권 박탈과 고통이 극에 달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투쟁은 계속해서 수세적인 양상을 벗어나지 못했고 결과적으로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을 막아내지 못했다.

어느덧 정리해고와 비정규직화는 우리의 노동 현실 전반을 강력하게 뒤흔들기에 이르렀다. 만성적인 고용불안으로 현장은 숨죽여 신음하고 있고, 비정규직이 절반을 훨씬 넘어 보편적인 고용형태가 되어버렸다.

이렇게 되기까지 한편으로는 정권과 자본의 집요하고 무자비한 구조조정 공세가 있었기 때문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어느 투쟁도 지금의 발전노조 파업투쟁처럼 강력하고 끈질긴 투쟁이 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사실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의 대공세는 이미 많은 부분에서 대세를 장악했다. 대표적으로 금융산업, 자동차산업, 화학산업 등에서는 통틀어 수십만의 노동자들이 구조조정의 이름 아래 길거리로 내몰려야 했다. 구조조정 이후 생산을 회복한 현장에는 비정규직이 넘실대고 있다.

국가기간산업 사유화 저지 투쟁은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에 맞서는 사실상 마지막 싸움이다. 만일 이 투쟁에서마저 패배한다면 노동운동은 신자유주의가 전면화된 새로운 조건 속에서 밑바닥에서부터 다시 일어서기 위해 최소 몇 년 동안은 심각한 침체기를 겪을 수밖에 없다. 그만큼 노동자의 삶에는 암흑의 시기가 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이번 총파업 투쟁의 가장 중요한 의미는 ‘신자유주의 분쇄’ 대반격의 희망을 새롭게 되찾는 데 있는 것이다. 모두가 떨쳐 일어서자![89]

그러나 총자본의 신자유주의 공세에 맞선 전국적인 총력 전선을 구축하는 데 마지막 기회가 될 수 있었던 4·2 총파업마저 민주노총 지도부의 배신으로 너무나 참담하게 무산되고 말았다. 14만여 명의 민주노총 조합원들이 뜨거운 열기 속에 총파업에 돌입하고 있던 4월 2일, 민주노총 지도부는 정부와 굴욕적 합의를 하며 총파업을 전격 철회했다.

 

총파업 돌입을 눈앞에 둔 1일 오후 7시부터 민주노총과 산하 공공연맹 지도부가 정부와 교섭에 들어갔다. 그러나 정부 측이 “민영화를 인정하라”며 노조의 백기투항을 요구해 교섭이 결렬됐다.

 

그런데 2일 오전 11시부터 “노·정 간 의견접근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말이 흘러나오더니, 급기야 오후 1시 20분경 민주노총이 단위노조에 “교섭이 진전되어 극적 타결 가능성 있으니 각 조직은 파업 돌입 시간을 늦추고 대기할 것”이라는 지침을 내렸다. 기다렸다는 듯이 각 언론사는 “발전노조 극적 타결 임박” “노조 민영화 수용으로 파업 일단락”이란 속보를 내보내기 시작했다.

 

1시부터 이미 총파업에 돌입했던 단위노조들은 갑자기 대기명령이 떨어지자 큰 혼란에 빠졌다. 교섭 내용이 정확히 알려지지 않은 상태에서 단위노조 지도부들은 “정부가 총파업 열기에 놀라 마침내 발전노조가 승리의 순간을 눈앞에 두고 있다”고 조합원들에게 사태를 설명하기도 했다.

 

그러나 “발전소 민영화 관련 교섭은 논의대상에서 제외한다”는 것을 핵심으로 한 민주노총과 정부의 합의 내용이 알려지자 전국 곳곳의 현장에서 엄청난 분노와 항의가 솟구쳐 올라왔다. 발전소 매각을 비롯한 국가기간산업 사유화 저지야말로 4·2 총파업의 핵심 요구였는데, 발전소 매각 문제를 제외한 채 총파업을 철회한 민주노총 지도부의 결정은 말도 안 되는 굴욕적 투항이었고 당연히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이다.

노사는 이번 파업으로 인해 국민에게 끼친 피해에 대해 정중하게 사과드리며, 앞으로 이와 같은 불행한 사태가 다시 발생하지 않도록 법과 원칙을 준수하고, 노사화합을 바탕으로 발전산업의 미래를 위해 공동으로 노력하기로 약속하며 다음과 같이 합의한다.

1. 노조는 2002년 3월 8일자 중앙노동위원회 중재 재정을 존중하여, 발전소 민영화 관련 교섭은 논의대상에서 제외한다.

2. 회사는 조합원에 대한 민·형사상 책임과 징계가 적정한 수준에서 해결되도록 노력하며 필요한 경우 이를 관계당국에 건의한다.

3. 노조는 파업을 중단하고 즉각 회사에 복귀한다.

처음에 민주노총 지도부는 자신의 잘못을 전혀 인정하지 않으려 했다. 총파업 철회 직후인 2일 오후 서울에서 열린 민주노총 집회에서 지도부는 “총파업 승리”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민주노총 조합원들의 울분에 찬 항의가 빗발치고 언론에서 민주노총이 민영화를 수용했다는 보도가 이어지자 “합의문 해석을 왜곡하지 말라”며 보도자료를 배포하고 3일 오전에는 기자회견을 열기도 했다.

 

그러나 3일 오전 민주노총 지도부는 결국 4·2 합의를 폐기하고, 민주노총과 산하 공공연맹 지도부가 총사퇴하기로 결정했다. 현장으로부터 거세게 올라오는 반발을 더 이상 감당할 수 없었던 것이다.[90]

 

지도부가 사퇴했지만, 민주노총 조합원들의 허탈함과 분노는 쉽게 수그러들지 않았다. 민주노총 홈페이지 게시판에는 그로부터 며칠 동안 수도 없는 항의 글이 끝없이 올라왔다. 금속노조 대구지부 동원지회 노동자들은 “조합원의 분노에 귀 기울이지 않고 관료주의와 노사협조주의에 찌든 지도부를 규탄한다”면서 민주노총 임원실에서 농성을 벌이기도 했다. 전북본부, 충남서부협의회 등 민주노총의 일부 지역조직들도 “민주노조운동의 대의와 원칙을 심각하게 훼손한 사건”으로 규정하며 규탄 성명을 냈다.

‘파업으로 인해 국민에게 끼친 피해에 대한 사과라니 이것이 무슨 말입니까!’

파업이 일어나면 당연히 생산은 멈추고 손해는 발생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자본가의 손해이며 파업권 행사로 인한 손해는 당연히 감수하도록 노조법 제3조는 명시하고 있습니다. 나아가 파업권을 노동자의 권리로 인정하는 국민들이라면 당연히 파업으로 인한 불편을 인내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발전노조 파업으로 국민에게 끼친 피해가 도대체 무엇입니까? 발전노조 파업은 발전소 매각을 막아 국민에게 피해가 전가되는 것을 막고자 파업을 전개하였습니다. … 우리가 언제 우리 조합원들만 잘 먹고 잘 살자고 해서 파업을 하였습니까? 아니지요. 발전소 매각으로 인해 국민에게 돌아갈 뻔한 재앙을 막자고 죽자 살자 싸웠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송두리째 부정을 하고 있으니 참으로 있을 수가 없는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법과 원칙을 준수한다니 이것은 또 무슨 이야기입니까!’

발전이나 가스, 철도 등 이른바 필수공익사업장의 파업권을 현저히 제한하고 있는 악법을 준수하겠다는 것입니까? 악법은 결단코 스스로 깨지지 않습니다. 악법은 악법이다라고 말을 하면서 동시에 그 악법을 깨기 위한 지난한 행동을 통해서만 악법이 깨진다는 것을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수많은 동지들이 ‘제3자 개입금지’ 규정과 ‘노조의 정치활동금지’, ‘냉각기간 준수’ 등 파렴치한 악법규정에 걸려서 감옥에 가고 항거를 하였기 때문에 악법 규정들이 사라진 것입니다. 그러니 악법은 준수하지 않아야 하지요.

원칙을 준수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공기업 사유화 문제는 경영권 문제이므로 노동자들은 이에 간섭하여서는 안 된다는 원칙을 말하는 것입니까? 그것이 아니면 그냥 해본 소리입니까? 원래 합의안을 쓸 때는 전문은 중요하지 않으므로 그냥 무심결에 쓴 것입니까? 차라리 그렇다면 쓰지를 마십시오. 왜 괜히 열심히 파업하고 연대 파업을 했던 조합원들을 이상한 불법 집단으로 만들면서 쓸 필요는 없지요.

‘발전소 민영화 관련 교섭은 논의 대상에서 제외한다.’

이것이 도대체 무슨 의미입니까? ‘발전소 사유화 문제는 어느 정도 국민적 공감을 얻었으니 이를 기반으로 파업을 푼 뒤에 광범위한 국민적 합의, 즉 발전소 사유화 반대 합의를 이끌어 낼 수 있다는 자신감의 표현이다.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최소한 발전소 매각의 부당성을 알리는 데 투쟁목표를 집중하였고 상당히 성공을 하였으므로 교섭 논의 대상에서 제외를 한다고 합의를 하더라도 무리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고 강변하시는 분들이 있다면 그렇게 하는 것을 말릴 수는 없지만 전 전혀 동의할 수가 없습니다. …

우리가 총파업을 전개하고 (2·26 파업) 조직하고 (4·2 파업) 발전노조 조합원들이 고통스럽기 그지없는 산개투쟁을 전개하였던 것은 발전소 사유화·매각을 ‘저지’ 하려고 하였기 때문에 즉 그것을 현실적인 목표로 삼았기 때문이지 단순히 매각의 부당성을 ‘선전’하려고 하였던 것은 아닙니다. 이런 투쟁의 과정에서 국민적인 공감대가 형성되기 시작하였던 것이고 이를 기반으로 우리는 발전소 사유화를 저지하려고 하였던 것입니다.

제가 보기에는 참으로 좋은 기회였다고 봅니다. 설사 우리가 총파업에서 그리고 발전노조 파업이 정권의 탄압으로 깨져 나갔다 하더라도 그것은 발전소 사유화 저지의 커다란 밑거름이 되었지 결단코 조직의 약화나 국민적 공감대 약화로 나아가지 않았을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이런 합의를 함으로써 공기업 사유화에 대한 국민적 공감대는 약화되고 이를 저지하기 위해 싸워도 얻을 것이 없다는 패배의식만 심어줄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이 문제와 관련하여 한 가지 더 짚을 것이 있습니다. 2002년 4월 2일에 작성된 민주노총 교선실 명의의 ‘발전 파업이 남긴 것’이라는 제하의 인터넷 문서에 의하면 ‘타결 내용은 어차피 민영화 봉합-징계최소화로 일찍부터 정해져 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내용이 있는데 이것은 도덕적으로 도저히 용서할 수가 없는 내용입니다. 그렇다면 민주노총과 발전노조 지도부는 극단적으로 말하면 민주노총 조합원들에게 사기를 친 것입니다.

‘발전소 매각 저지’를 위해 총파업을 하여야 한다고, 발전소가 매각되면 우리 국민 다 죽고 공적 사업들 모두 재벌이나 외국에 넘겨져 나라 경제 망치니 반드시 싸워서 이겨야 한다고 하면서 파업을 독려하였습니다. 그런데 ‘민영화 봉합’(저지가 절대로 아닌!)이 목표였다니 이런 세상에!

조합원들이 지도부가 내심 가지고 있는 목표를 모르고 그런 멍청한 짓을 하였다니 어처구니가 없습니다. 조합원들이 아무 생각 없이 동원되는 군대 병력이나 된다는 것입니까? 아예 그러면 처음부터 말씀을 하셨어야 합니다. 발전소 매각 저지가 아니고 민영화 봉합이라고 말입니다. 그러면 조합원들은 우리는 발전소 매각 저지를 하겠으니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으면 지도부는 나가라고 하였을 것이든지 아니면 그 정도 목표를 가지고 무슨 총파업을 할 것이 있냐고 하면서 다른 방도를 알려드렸을 것입니다.

‘민․형사상 책임과 징계가 적정한 수준에서 해결되도록 노력하며 필요한 경우 이를 관계당국에 건의한다.’

참 이런 합의를 왜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왜 민주노총 지도부가 조합원들의 징계를 합의하여 주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우리 조합원들은 잘못한 것이 없습니다. 악법이 우리 조합원들을 불법으로 내몰았을 뿐입니다. 따라서 무슨 책임이나 징계를 한다는 것은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본가나 정권이 책임이나 징계를 하려고 하면 싸워야 하는 것이지 … 어느 정도 선에서 책임을 지겠다고 자인을 하는 것은 동지들의 목을 지도부가 스스로 자르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적정한 수준’이 어떤 수준이 되어야 적정한지 알 수가 없고 관계당국에 ‘건의’가 무슨 효력이 있는 것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이런 합의는 아예 하지 않는 것만 못합니다. 이런 합의를 해서 얻을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4,000명 자를 것을 500명 아니면 1,000명으로 하고 손해배상액이 400억 되는 것을 100억 아니면 10억으로 막아보겠다는 것입니까? 그래서 징계나 손해배상, 형사 기소된 사람들이 ‘적정한 수준’에서 된 것이다고 판단하면 합의정신을 살려 지도부는 수수방관하겠다는 것입니까? 이것이 조합원들의 피해를 최소화하는 최선책이었다고 강변하신다면 그만 지도부 자리에서 내려 오셔야 할 것입니다.

‘노조는 파업을 중단하고 즉각 회사에 복귀한다’

복귀하면 그냥 조용히 우리끼리 하면 되지 이런 것을 문서화해서 어쩌겠다는 것입니까? 도대체 무엇을 얻자고 이런 말도 안되는 문구를 써서 자본과 정권의 기를 살려주고 조합원들과 민중들에게 우리는 패배자라는 인식을 심어주는 것인지 정말로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이제 결론을 이야기하여야 할 때가 된 것 같습니다.

민주노총 지도부는 ‘현실에 존재하고 있는 운동에너지’를 과소평가하고 이를 현실적 힘으로 전환시킬 의지와 능력도 없이 자본과 정권에 ‘항복’을 하였던 것입니다. 조합원들의 동력이 어땠으니 지도부의 입장에서는 어쩔 수 없는 현실적 판단이었다느니 하는 이야기는 이제 그만 하였으면 합니다.

제가 본 민주노총 조합원들이 이번 파업에 임하는 자세는 그 어느 때보다도 진지하고 열심이었으며 발전소 사유화는 반드시 저지하겠다는 의지가 강고하였습니다. 나아가 시민사회의 지지도 매우 높았습니다. 따라서 여기에 적절한 지도만 있었다면 더욱 강력한 힘으로 한판 맞짱을 뜰 수가 있었다고 봅니다.

설사 이 싸움에서 노동자들이 처절하게 깨져 나간다 하더라도 그것은 우리의 조직의 강화로 민중의 희망의 불씨로 강력히 살아남았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노동자들이 자신들의 기업 내의 자신들 문제만을 가지고 싸우지 않고 전체 노동자의 입장, 전 민중적 입장에서 연대파업을 한다는 것은 그것 자체로서 중대한 역사적 진보였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러한 합의안을 도출하고 총파업을 스스로 무산시킨 지도부는 이에 대하여 응분의 책임을 져야 할 것입니다. 이제 새롭고 강력한 투쟁을 다시 준비하여야 합니다!!!!![91]

민주노총 지도부는 사퇴했지만, 무너진 총파업을 다시 일으켜 세울 방법은 없었다. 굴욕적 합의와 총파업 무산으로 결정적 혼란에 빠진 발전노조는 파업대오가 붕괴할 조짐을 보이자 조직적 퇴각을 위해 현장 복귀를 선언해야 했다.

 

총자본의 신자유주의 공세에 맞서 전국적인 총력 전선을 구축할 수 있었던 마지막 기회마저 그렇게 사라져 버렸다.

 

4) 2003년 주5일제 도입

 

한국의 법정 노동시간은 1953년 근로기준법 제정 이후 하루 8시간, 주 48시간을 유지하다가 1989년 근로기준법 개정으로 주 44시간으로 단축됐다.

 

1996년 노사관계개혁위원회에서 노동계가 주 40시간 단축을 주장했으나 경영계가 반대했다. 1998년 2월 노사정위원회에서 정리해고제와 근로자파견제 도입을 합의할 때 합의내용 가운데 ‘근로시간 단축을 위한 근로시간위원회’ 구성이 있었다.

 

2000년 5월 노사정위원회가 민주노총의 불참 속에 ‘근로시간 단축 특별위원회’를 구성했다.[92] 5월 31일, 민주노총은 주5일 근무제 도입, 자동차산업 매각 재검토, 비정규직 차별 철폐를 내걸고 총파업을 단행했다. 7만 명이 참여했다. 민주노총이 주5일(주 40시간) 근무제를 내걸고 단행한 첫 번째 총파업이었다.

 

민주노총이 불참한 상태에서도 노사정 합의는 실패했다. 임금보전, 휴가·휴일제도 개편, 근로시간 단축일정 등에서 이견을 좁히지 못했기 때문이다. 결국 김대중 정권이 2002년 10월 독자적으로 정부 안을 마련했다.

 

10월 15일 국무회의를 통과한 김대중 정권의 근로기준법 개정안은 주5일제 도입을 빌미로 기존의 노동조건을 악화시키는 개악안이었다. 월차휴가를 없애고 연차휴가에 통합함으로써 기존에 기본 12+10일에 근속 1년당 1일이 추가되던 것을 기본 15일에 근속 2년당 1일이 추가되는 것(최대 25일)으로 했다.[93] 생리휴가는 무급으로 전환하고, 초과노동 한도를 주당 12시간에서 16시간으로 확대하되 최초 4시간은 25%의 할증률만 적용하게 했다. 게다가 단체협약 및 취업규칙을 개정 법률에 맞추어 강제 개정하게 한다는 내용도 담겼다.

 

더욱 심각한 것은 시행시기를 기업 규모별로 차등화한 것이었다. 공공부문, 금융·보험업, 1000인 이상 사업장은 2003년 7월 실시하고, 나머지 사업장은 기업 규모에 따라 2010년까지 단계적으로 확대 실시한다고 했다.

 

11월 5일, 정부가 제출한 근로기준법 개악안의 국회 처리를 막기 위해 민주노총이 총파업을 단행했다. 12만 명이 참여했다. 국회는 근로기준법 개악안의 처리를 연기했다. 여기에는 전경련과 경총 등 자본가단체들이 주5일제 자체를 시기상조로 여기며 어떤 형태의 주5일제도 달가워하지 않았던 점도 작용했다.

 

2003년 노무현 정권이 출범했다. 7월 16일, 자동차 부품사를 비롯한 중소사업장으로 구성된 금속노조가 100개 업체를 상대로 한 중앙교섭에서 ‘기존 임금을 삭감하지 않는 주5일 40시간 근무제’를 10월부터 실시하기로 합의했다. 8월 8일, 현대차노조가 임단협에서 ‘기득권 저하 없는 주5일제’를 9월부터 실시하기로 합의했다.

 

개별 사업장에서 ‘노동조건 저하 없는 주5일제’가 합의되기 시작하자, 전경련과 경총은 마음이 급해졌다. 시기상조라는 기존 입장을 뒤집어서 김대중 정권이 제출했던 근로기준법 개악안을 빨리 처리해 달라고 노무현 정권과 여야 보수정당을 압박하고 나섰다. 한나라당이 이에 적극 동조하면서 법안 처리가 급물살을 탔다.

 

8월 21일, 국회 환경노동위원회가 김대중 정권이 제출했던 근로기준법 개악안을 시행시기만 1년씩 늦춰 통과시켰다.

한나라당이 재벌 ‘핫바지’를 자처하며 사실상 재계안인 주5일 정부안 강행처리에 앞장서고 있는 지금 집권당인 정부와 민주당은 뭘 하고 있나. 한마디로 정부와 민주당은 자신들이 불과 몇 달 전에 내세운 대통령 선거 공약도 팽개친 채 재벌 ‘거수기’로 전락해버렸다.

노무현 후보는 대선 당시 주5일제와 관련해 국회에 계류 중인 정부입법안을 수정하겠다, 임기 안에 시행 완료하겠다, 비정규직 노동자의 월평균 1.5일 휴일을 보장하겠다는 공약을 내걸고 당선됐다. 그러나 민주당과 정부는 정부입법안을 수정하기는커녕 시행시기를 정부안보다 더 늦췄으며, 비정규직 노동자 월평균 1.5일 휴일 보장 약속도 다 팽개쳤다. 재계가 찬성한 정부안도 모자라 시행시기를 더 늦춰 재벌 기분을 한껏 맞춰주는 ‘거사’에 한 패가 돼버린 것이다. …

국회가 개정하려는 주5일제 관련 근로기준법의 혜택을 받아야 할 사람들은 바로 노조도 없어 법의 이름으로만 주5일 근무를 할 수 있는 영세업체 노동자와 비정규직 노동자들이다. 대기업 정규직 노동자는 이미 주5일 시대로 접어들었고 노조가 있어 단체협약으로 얼마든지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작 이 법의 혜택을 받아야 할 전체 노동자의 56%에 해당하는 760만 20인 미만 영세업체 노동자들의 시행 시기는 2011년으로 미뤄버렸으며, 월차와 생리휴가밖에 없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휴가를 생리휴가 무급화로 사실상 줄이고 여러 가지 방법으로 임금을 삭감하는 등 피해만 고스란히 안기고 있다.[94]

23일, 민주노총이 전국 15개 도시에서 2만여 명이 참가한 가운데 ‘국회가 추진 중인 주5일제 관련 근로기준법 개정안을 중소영세 비정규직 노동자의 희생 없는 방향으로 대폭 수정할 것’을 강력히 촉구했다.

 

그러나 근로기준법 개악안은 25일 국회 법사위를 통과하고 29일 본회의를 통과했다. 민주노총은 28~29일 한국노총과 함께 국회 앞에서 집회와 노숙농성을 전개했다. 두 노총 합쳐 최대 1만 명이 참석했다. 2002년 11월에 개악안의 국회 처리를 막기 위해 12만 명이 참여한 총파업을 단행했던 것과 비교했을 때, 매우 소극적인 대응이었다.

주5일제 도입과 관련한 근로기준법 개정 과정에서 재계의 요구가 큰 폭으로 반영돼 중소영세업체 노동자, 비정규직 노동자, 여성 노동자 등 사회적 약자를 소외시키고 노동조건을 후퇴시키는 중대한 문제점을 남겼기 때문에 이 문제는 반드시 바로잡아 나가야 합니다. 특히 근로기준법이 노동자 보호를 위한 최소 노동기준이지만 노조도 없는 영세업체나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노동조건을 사실상 규정하기 때문에 문제는 더욱 심각합니다. …

주5일 관련 근로기준법의 문제점을 극복하기 위해 민주노총은 법 자체의 재개정을 추진함과 동시에 사업장별 단협을 통해 노동조건 후퇴 없는 주5일 근무제 도입을 실현하기 위해 힘쓰겠습니다.

이미 단협으로 노동조건 후퇴 없는 주5일 근무제를 도입한 현대·기아차, 금속노조 100개 사업장에 대해 재협상을 추진하라는 경총의 주장은 상식 이하이기에 검토할 가치조차 없습니다. 민주노총은 아직 주5일 근무제 관련해 단협을 체결하지 않은 사업장들도 금속노조와 현대·기아차를 본보기 삼아 반드시 노동조건 후퇴 없는 주5일 근무제를 도입하도록 힘써나갈 것입니다.[95]

근로기준법 개악안이 국회를 통과한 직후, 민주노총은 ‘노동조건 후퇴 없는 주5일제’ 도입을 위해 “법 자체의 재개정”과 “사업장별 단협”이라는 두 가지 방안을 제시했다. 그런데 이후 민주노총의 대응에서 근로기준법 재개정을 위한 투쟁은 사실상 사라졌다.

 

민주노총에 속한 많은 단위노조들이 단체협약 투쟁을 통해 근로기준법보다 나은 조건에서 주5일제를 시행하게 된 것은 분명 의미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주5일제 도입이 대기업 정규직과 중소영세 비정규직 사이에 차별의 골을 더욱 깊게 하는 상황에서 민주노총이 근로기준법 재개정 투쟁을 방기한 것은 결코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다.

 

주5일제 시행이 법정 휴가·수당 축소와 병행되면서 중소영세 비정규직은 임금을 삭감당한 반면, 대기업 정규직은 단체협약을 통해 임금을 보전할 수 있었다. 주5일제 실시 시기에 기업 규모별로 차이를 둠으로써 주5일제 시행 자체가 차별의 온상지 역할을 했다.

 

그 책임은 일차적으로 근로기준법 개악을 주도한 노무현 정권과 여야 보수정당 그리고 자본가들에게 있었다. 하지만 2003년의 근로기준법 개악 과정에 매우 형식적인 저항에 그쳤을 뿐만 아니라 이후 근로기준법 재개정 투쟁을 방기했던 민주노총도 결코 그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주5일제 도입을 둘러싼 민주노총의 대응 과정은 민주노총이 어떻게 해서 구조조정과 정리해고에서 살아남은 대기업 정규직만의 노동조합처럼 사회적으로 인식되고 또 실제로도 그렇게 기능하게 됐는가를 보여주는 한 단면이었다.

 

5) 2003년 열사투쟁

 

구조조정과 정리해고에 맞선 노동자들의 투쟁에 자본은 가공할 탄압을 퍼부었다. 손배가압류는 그 핵심 수단이었다.[96] 삶의 근거를 빼앗긴 노동자들은 죽음으로 항거했다. 비정규직으로서의 처절한 삶을 견딜 수 없던 노동자들도 죽음으로 항거했다. 특히 2003년에는 이들 열사들의 죽음이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1월 9일, 두산중공업 노동자 배달호가 회사 안 민주광장에서 분신 자결했다. 2000년에 한국중공업을 헐값에 인수받은 두산 자본은 두산중공업으로 이름을 바꾼 뒤 1,124명을 명예퇴직으로 내쫓았다. 2002년 노조가 47일간 파업을 벌이자, 노조간부 89명을 징계해고하고 78억 원의 손배가압류를 제기했다. 소사장제를 대거 도입하고 단체협약도 해지했다. 배달호는 2002년 파업으로 구속됐다가 집행유예로 풀려난 뒤 모든 재산과 임금을 가압류당하고 있었다. 현장에서는 엄청난 감시 통제에 시달렸고, 노조 활동을 중단하겠다는 각서를 요구받았다. 몇 달 동안 집에 생활비 한 푼 가져가지 못한 절망적인 상황에 맞서 배달호는 죽음으로 항거했다.

출근을 해도 재미가 없다. 해고자 모습을 볼 때 가슴이 뭉클해지고 가족들은 어떻게 지내는지? 두산이 해도 너무 한다. 해고자 19명, 징계자 90명 정도. 재산가압류, 급여가압류, 노동조합 말살. 악랄한 정책에 우리가 여기서 밀려난다면 전 사원의 고용을 보장받지 못할 것이다. 지금 두산이 사택매각, 식당 하도급화, 노동조합과 합의사항인데도 불구하고 일방적으로 시행한다고 하니 어처구니가 없다. 얼마 전 징계자들이 출근정지가 끝나고 현장에 복귀하였지만 무슨 재미로 생산에 열심히 하겠는가. 이제 이틀 후면 급여 받는 날이다. 약 6개월 이상 급여받은 적이 없지만 이틀 후 역시 나에게 들어오는 돈 없을 것이다. 두산은 피도 눈물도 없는 악랄한 인간들이 아닌가. 나는 매일같이 고민을 해본다. 두산의 노동조합 말살정책 분명히 드러나 있다. 얼마 전 구속자 선고재판 어처구니없이 실형 2년이라니, 두산은 사법부까지 개입하고 있다는 것이 눈에 보인다. … 두산은 피도 눈물도 없는 악랄한 인간들이 아닌가. 더러운 세상, 악랄한 두산. 동지들이여 끝까지 투쟁해서 승리해 주기 바란다. 나는 항상 우리 민주광장에서 지켜볼 것이다.[97]

배달호 열사 분신 이후 두산 자본을 상대로 열사투쟁이 전개됐다. 민주노총 주도로 두산제품 불매운동도 벌어졌다. 62일 만에 손배가압류를 철회시키면서 투쟁이 마무리됐다.

 

10월 17일, 금속노조 한진중공업지회 지회장 김주익이 고공크레인 농성 129일 만에 85호 크레인에서 목을 매 자결했다.

동지들, 나의 주검이 있을 곳은 85호기 크레인입니다. 이 투쟁이 승리할 때까지 나의 무덤은 크레인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나는 죽어서라도 투쟁의 광장을 지킬 것이며, 조합원의 승리를 지킬 것입니다.[98]

한진중공업은 2002년 650명을 정리해고하면서 그에 맞서 투쟁한 노조에 손배가압류를 걸었다. 2002년도 임단협이 2003년으로 넘어가서도 전혀 해결될 기미를 보이지 않자 김주익은 6월 11일 85호 크레인에 올라 고공농성을 시작했다. 7월 22일부터 전면파업이 시작돼 조합원 600여 명이 함께 투쟁했으나 회사가 손배가압류를 협박하자 200여 명으로 줄어들었다. 노동조합을 지켜낼 일념으로 김주익은 최후의 선택을 했다. 30일에는 누구보다 김주익의 죽음에 가슴아파하고 자책감에 괴로워하던 곽재규가 김주익을 따라 투신 자결했다.

작년에 한진중공업에서 밀려난 아저씨를 우연히 길에서 만난 적이 있었습니다. 30년 일해 온 일터에서 명퇴란 이름으로 강제로 밀려난 아저씨는 술이 한 잔 들어가자 박창수 위원장 이야기를 하며, 아무 것도 잘못한 게 없는 아저씨가 자꾸 미안하다며 울었습니다.

50이 넘은 사내가 10년도 더 지난 일로 술잔에 눈물 콧물을 빠뜨리는 걸 보면서 우리 모두에게 박창수란 이름은 세월의 무게로도 덮을 수 없는 아픔이구나 생각했습니다. 박창수 하나만으로도 우린 아프고 무겁습니다.

두번쨉니다. 대한조선공사를 한진중공업이 인수한 이후 여섯 명의 위원장 중 두 명은 구속 이후 해고되고, 한 명은 고성으로, 율도로 하루가 멀다 하고 쫓겨나고, 두 명은 죽었습니다.

지난 번 위원장 선거가 끝나고 어떤 아저씨가 그러셨습니다. “내는 김주익이 안 찍었다. 똑똑하고 아까운 사람들, 위원장 뽑아놓으면 다 짤리고 감방가고 죽어삐는데, 내가 진짜로 좋아하는 김주익이를 우째 또 사지로 몰아넣겠노?”

우리가 뭘 그렇게 잘못했습니까? 뭘 그렇게 죽을 죄를 저질렀습니까? 조양호 회장님, 조남호 부회장님, 얼마나 더 하실 겁니까? 이 소름끼치는 살인게임이 몇 판이 더 남았습니까? 노동자의 목에 빨대를 꽂고 더운 피를 마시는 이 흡혈게임이 얼마나 더 남았습니까?

LNG선상 파업으로 김주익 지회장이 구속됐을 때 인권 변호사의 이름을 팔아 그를 변호했던 노무현 대통령 각하! 노동자의 가련한 처지를 팔아 따낸 권력의 맛이 꿀맛입디까? 조중동 찌라시들의 꼬붕 노릇이 그렇게 안락하더이까?

대기업 노조가 나라를 망친다 했습니까? 21년차 노동자 기본급 105만원, 손에 쥐는 건 80만원, 그마저도 가압류로 12만원, 129일을 크레인에 매달려 절규를 해도 청와대 노동부 국회의원 누구하나 코빼기도 내미는 놈이 없었습니다.

동지 여러분 죄송합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이렇게 될 줄 알았다면, 민주노조 하지 말걸 그랬습니다. 교도소 짬밥보다 못한 냄새나는 깡보리밥에 쥐똥이 섞여 나오던 도시락 그냥 물 말아 먹고, 불똥 맞아 타들어간 작업복 테이프 덕지덕지 넝마처럼 기워 입고, 한 겨울에도 찬물로 고양이 세수해가며, 쥐새끼가 버글거리던 생활관에서 그냥 쥐새끼들처럼 뒹굴며 살걸 그랬습니다.

한여름 감전사고로 혈관이 다 터져 죽어도, 비오는 날 족장에서 미끄러져 라면발같은 뇌수가 산산이 흩어져 죽어도, 바다에 빠져 퉁퉁 불어 죽어도, 인명은 재천이라던데 그냥 못 본 척 못 들은 척 살걸 그랬습니다.

노동력에 대한 정당한 대가도, 내일에 대한 희망도, 새끼들에 대한 미래 따위 같은 건 언감생심 꿈도 꾸지 말며, 조선소 짬밥 20년에 100만원을 받아도, ‘회장님, 오늘도 일용할 양식을 주셔서 얼마나 고마운지 모르겠습니다’ 그냥 그렇게 감지덕지 살걸 그랬습니다.

노예가 품었던 인간의 꿈. 그 꿈을 포기해서 박창수 동지가, 김주익 동지가, 그 천금같은, 그 억만금 같은 사람들이 되돌아 올 수 있다면, 그 억센 어깨를, 그 순박하던 웃음을 단 한 번이라도 좋으니 다시 볼 수만 있다면, 용찬이, 예란이에게, 준엽이, 혜민이, 준하에게 아빠를 다시 되돌려 줄 수만 있다면, 그렇게라도 하고 싶습니다.

자본이 주인인 나라에서, 자본의 천국인 나라에서, 어쩌자고 인간답게 살고 싶다는 꿈을 감히 품었단 말입니까?

애비 잘 만난 조양호, 조남호, 조수호는 태어날 때부터 회장님, 부회장님으로 세자책봉 받는 나라. 이병철 회장님의 아들이 이건희 회장님으로 부자 1위가 되고, 또 그 아들 이재용 상무님이 부자 2위가 되는 나라. 정주영 회장님의 아들이 정몽구 회장님이 되고 또 그 아들 정의선 부회장님이 재계순위 4위가 되는 나라.

태어날 때부터 그 순서는 이미 다 점지되고, 골프나 치고 해외로 수백억씩 빼돌리고, 사교육비로 한 달 수천만 원을 써도 재산은 오히려 늘어나는 그들이 보기에는 한 달 100만원을 벌겠다고 숨도 쉴 수 없고 언제 폭발할지도 모르는 탱크 안에서 벌레처럼 기어 다니는 우리가 얼마나 우스웠겠습니까?

순이익 수백억이 나고 주식만 가지고 있으면 수십억이 배당금으로 저절로 굴러들어오는데, 2년치 임금 7만5천 원 올리겠다고 크레인까지 기어 올라간 사내가 얼마나 불가사의 했겠습니까? 비자금으로 탈세로 감방을 살고도, 징계는커녕 여전히 회장님인 그들이 보기에 동료들 정리해고 막겠다고 직장에게 맞서다 해고된 노동자가 징계철회를 주장하는 게 얼마나 가소로웠겠습니까?

100만원 주던 노동자 짤라내면 70만원만 줘도 하청으로 줄줄이 들어오는 게 얼마나 신통했겠습니까? 철의 노동자를 외치며 수백 명이 달라 들어도 고작해야 석 달만 버티면 한결 순해져서 다시 그들의 품으로 돌아오는 게 또 얼마나 같잖았겠습니까?

조선강국을 위해 한 해 수십 명의 노동자가 골반압착으로, 두부협착으로, 추락사고, 감전사고로 죽어가는 나라. 물류강국을 위해 또 수십 명의 화물 노동자가 길바닥에 사자밥을 깔아야 하는 나라. 섬유도시 대구, 전자도시 구미, 자동차 도시 울산, 화학의 도시 여수 온산. 그 허황한 이름을 위해 노동자의 목숨들이 바쳐지고 그들의 뼈가 쌓여갈수록 자본의 아성이 점점 높아지는 나라.

50이 넘은 농민은 남의 나라에 가서 제 심장에 칼을 꽂고 마지막 유언마저 영어로 남겨야 하는 세계화된 나라.

전 자본주의가 정말 싫습니다. 이제 정말 소름이 끼칩니다.

1970년에 죽은 전태일의 유서와 세기를 건너 뛴 2003년 김주익의 유서가 같은 나라. 두산중공업 배달호의 유서와 지역을 건너뛴 한진중공업 김주익의 유서가 같은 나라. 민주당사에서 농성을 하던 조수원과 크레인 위에서 농성을 하던 김주익의 죽음의 방식이 같은 나라.

세기를 넘어, 지역을 넘어, 업종을 넘어, 국경을 넘어 자자손손 대물림하는 자본의 연대는 이렇게 강고한데 우린 얼마나 연대하고 있습니까? 우리들의 연대는 얼마나 강고합니까? 비정규직을, 장애인을, 농민을, 여성을, 이주노동자를 외면한 채 우린 자본을 이길 수 없습니다. 아무리 소름 끼치고, 아무리 치가 떨려도 우린 단 하루도 그들을 이길 수 없습니다.

저들이 옳아서 이기는 게 아니라 우리가 연대하지 않음으로 깨지는 겁니다. 맨날 우리만 죽고 천날 우리만 패배하는 겁니다. 아무리 통곡을 하고 몸부림을 쳐도 그들의 손아귀에서 한시도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이 억장 무너지는 분노를, 피가 거꾸로 솟구치는 이 억울함을 언젠가는 갚아줘야 하지 않겠습니까?

어버이날 요구르트 병에 카네이션을 꽂아놓고 아빠를 기다린 용찬이. 아빠 얼굴을 그려보며 일자리 구해줄 테니 사랑하는 아빠 빨리 오라던 혜민이. 그 아이들이 살아갈 세상은 좀 달라져야 하지 않겠습니까?[99]

10월 23일, 금속노조 세원테크지회 지회장 이해남이 분신했다. 2001년 10월 결성된 세원테크지회는 민주노조 사수를 위해 154일간 파업을 해야 했다. 2002년 8월 공장진입 투쟁을 하던 중 조합원 이현중이 구사대 폭력에 의해 두개골이 함몰되고 안면뼈가 부러지는 중상을 입었는데, 결국 2003년 8월 26일 사망했다. 이후 두 달 동안 세원테크지회는 간부 세 명이 구속되고 수십억 원의 손배가압류를 당하면서 이현중의 장례식조차 치르지 못했다. 한진중공업 김주익을 죽음으로 내몰았고 세원테크지회가 겪어 온 노동탄압에 분노하며, 이해남은 분신을 결행했다.

 

10월 26일, 근로복지공단 비정규직노조 광주본부장 이용석이 전국비정규직노동자대회에서 ‘비정규직 철폐’를 외치며 분신했다. 계약직으로 일해 온 이용석은 주변 동료들이 비정규직이라는 이유로 차별당하며 고통받는 모습을 무수히 지켜봐야 했다. 인간 취급을 받지 못하는 비정규직의 삶을 바꾸기 위해 비정규직노조를 건설하고 6개월 동안 열정을 쏟아 부었지만, 그에게 돌아온 것은 자본의 논리와 차별을 당연시하는 정부의 냉담한 반응이었다. 이용석은 파업을 앞두고 조합원들이 깨어나 함께 하길 바라며 분신을 결행했다.

 

이렇게 노동자들의 분신이 잇따르는 상황에서, 대통령 노무현은 국무회의를 주재하며 “분신을 투쟁수단으로 삼는 시대는 지났다”는 폭언을 퍼부었다.

노대통령의 노동자 분신 관련 발언을 듣고

1. 한겨레 11월 6일치에 따르면 노무현 대통령은 “분신을 투쟁수단으로 삼는 시대는 지났다”며, “지금과 같이 민주화된 시대에 노동자들의 분신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투쟁수단으로 사용되어서는 안 되며, 자살로 인해 목적이 달성되는 일은 없어야 한다”고 말했다 한다. 대통령은 또 지난 29일 3부 장관 담화문이 자신의 이런 뜻을 담지 못했다며 장관들을 심하게 질책했다고 한다.

2. 만약 이 보도가 사실이라면 충격을 넘어 절망이다. 앞뒤좌우가 없는 짧은 보도내용을 가지고 지나치게 확대 해석할 생각은 없으나, 적어도 노동자들이 왜 이렇게 줄지어 분신하고 목매달아 항거하는지에 대한 진지한 성찰을 읽기는 어렵다. 심지어 듣기에 따라서는 영등포경찰서장의 기획분신 발언과 다를 게 없다는 생각까지 고개를 든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노대통령이 노동자들이 왜 죽음으로 내몰렸으며 죽음으로 무엇을 말하려 했는지에 대해 귀 기울여 들으려 하지 않는다는 멀기만 한 거리감을 숨길 수 없다.

도대체 노동자들은 왜 하나 뿐인 목숨을 던졌는가. 그 이유는 그들 자신이 대통령에게 직접 유서를 남기며 설명하고 있다. 최근 자살한 노동자들은 노무현 대통령에게 직접 보내는 유서를 남기거나 항변하는 글을 남겼다. 생을 마감하는 마지막 순간에 대통령에게 남긴 유서는 대통령의 노동문제에 대한 잘못된 인식에 항의하고 문제해결을 촉구하면서도 대통령 건강을 걱정하며 숨길 수 없는 기대를 담고 있다.

“대통령께서 예전에 변호사 시절 우리 노동자들을 위해 헌신적으로 노력하셨던 때도 있었지요? … 노무현 대통령님! 얼마나 많은 노동자들이 죽어야 이 나라의 노동정책이 바뀔 수 있겠습니까? 더 이상은 안 됩니다. 제가 마지막 희생자가 돼야 합니다. 노동자들과 대화는 외면한 채 오로지 노동자 죽이기로 일관하고 있는 악질 기업주들에 대해서 반드시 정부 차원의 대응이 있어야 합니다. 그것만이 이 나라의 경제를 살리는 길이란 것을 아셔야 합니다. 내내 건강하십시오.” (10.23 분신해 사경을 헤매고 있는 세원테크 이해남 지회장이 남긴 유서 ‘노무현 대통령께’ 중에서)

“전 공부방을 갈 수가 없었습니다. 인간의 평등함과 더불어 살아가야 한다는 걸 가르쳐온 내가 이런 현실에 복종하여 참아왔습니다. 인간대접도 받지 못하는 처지에 어찌 학생들에게 인간답게 사는 것을 가르치겠습니까? 노무현 대통령님 제발 저의 고민을 들어주십시오. 현실을 참고 묵묵히 학생들에게 남아있어야 합니까? 아님 우리도 인간임을 외치며 우리의 얘기를 들어달라고 말해야 합니까?” (10.26 분신해 10.31 사망한 근로복지공단 비정규직 노동자 이용석 씨가 노트북에 남긴 ‘노무현 대통령님께’)

“노동자가 한 사람의 인간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목숨을 걸어야 하는 나라, 그런데도 자본가들과 썩어빠진 정치꾼들은 강성노조 때문에 나라가 망한다고 아우성이다. … 이 회사에 들어온 지 만 21년, 그런데 한 달 기본급 105만원. 그중 세금들을 공제하고 나면 남는 것은 팔십 몇 만원. 근속 년수가 많아질수록 생활이 조금씩이라도 나아져야 할 텐데 햇수가 더할수록 더욱 더 쪼들리고 앞날이 막막한데, 이놈의 보수언론들은 입만 열면 노동조합 때문에 나라가 망한다고 난리니 노동자는 다 굶어죽어야 한단 말인가.” (10.17 한진중공업 김주익 지회장 유서 중에서)

3. 그러나 죽어간 노동자들의 심정은 아는지 모르는지 분신자살 사태 이후 노동문제에 대한 발언을 자제해오던 노무현 대통령이 첫 말문을 열고 쏟아낸 발언내용은 과연 이들이 죽어가면서 남긴 유서를 읽어보기나 했는지 의아스럽다.

우리는 이 마당에 그 동안 노무현 대통령이 쏟아냈던 노동자들의 노조활동을 매도하고 막다른 골목으로 몰아붙이는 모질고 가혹한 발언들을 다시 거론할 생각은 없다. 다만 분명히 하고픈 것은 노무현 대통령의 노동문제에 대한 인식과 그에 기초해 펼친 8개월 동안의 노동정책이 노동자들을 잇단 분신자살과 죽음의 행렬로 몰아간 원인 중 가장 중요한 원인이라는 점이다.

비정규직 노동자에 대한 차별을 없애라고 절규하며 분신자살한 이용석 씨는 다름 아닌 정부 노동정책을 총괄하는 노동부 산하 근로복지공단이 고용한 비정규직 노동자이다. 비정규직 차별을 개선하겠다는 공약은 노무현 정권 노동정책의 처음이고 끝이다. 정부기관 내 비정규직 노동자가 분신자살하는 상황까지 이르도록 도대체 뭘 했는가 말이다. 산하기관장이 비정규직노조를 어떻게 대했는지에 대해 조사나 해봤는가 말이다. 8개월 동안 이틀에 한 명씩 144명의 노동자를 구속하고, 철도파업에 대해 대한민국 정부 이름으로 75억의 손해배상청구소송을 내고 씻을 수 없는 노동자 매도 발언 쏟아내고….

4. 지금도 35m 크레인 위에서 싸늘한 시신으로 누워있는 한진중공업 김주익 지회장을 노무현 대통령과 문재인 민정수석은 개인적으로도 모르지 않을 것이다. ‘부산 한진중공업노조’라는 존재 자체가 노대통령이나 문수석의 이른바 ‘노동운동과 연관된 경력’에서 빠질 수 없기 때문이다.

노무현 대통령이 ‘지금과 같이 민주화된 시대에 노동자들의 분신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투쟁수단으로 사용되어서는 안 된다’고 했을 때 어쩌면 1991년을 떠올렸을지도 모를 일이다. 노태우 군사독재 정권 시절 폭압에 맞서 잇단 분신과 죽음의 행렬로 아픈 기억이 돼 남아 있는 1991년 바로 그 해 말이다. 그 해에 한진중공업노조 박창수 위원장이 노태우 정권의 전노협 탈퇴 공작 과정에서 의문의 죽음을 당했을 때 노대통령은 당시 민주당 국회의원 자격으로 진상조사단 위원으로 활동했다. 1994년 한진중공업 노조원들이 LNG선 위에서 선상파업을 벌였을 때 고인이 된 김주익 지회장은 당시 노조 사무국장으로 이 파업을 주도한 뒤 구속됐고 그 변호인이 바로 문재인 수석이었다. 왜 그 상황을 모르겠으며 한진재벌의 모진 탄압을 모르겠는가.

그런데 문제는 당시 적어도 재벌과 독재정권의 노동탄압에 맞서 함께 발을 맞췄던 노무현 변호사가 대통령이 돼 ‘지금은 민주화됐는데 웬 분신자살이냐, 자살해도 요구를 들어줘선 안 된다’는 극단의 인식에 도달해 있다는 점이다. 그 때 그 김주익은 아직도 노동현장에 가해지는 손배가압류와 노동탄압을 못 견디다 하나 뿐인 목숨을 던지며 자살했는데 말이다.

노대통령과 문재인 수석의 정치적 고향 부산에서 한진중공업은 부산을 대표하는 대기업이다. 노대통령이 집권 초기 내세웠던 이른바 대화와 타협의 사회통합적 노사관계를 뒤집고 대기업 노동자가 문제다, 비정규직 노동자를 고통스럽게 하는 것도 대기업 노동자고, 정치화돼 사회를 혼란스럽게 하는 것도 대기업노조이고, 외국투자가를 내쫓아 경제를 어렵게 하는 것도 대기업노조라 공격하기 시작하던 6월 11일, 김 지회장은 35m 크레인에 오른다.

한진재벌의 오기에 찬 노동탄압이 멈추지 않아 김 지회장이 크레인에서 내려오지 못하던 129일 동안 노무현 대통령은 더 강하고 더 모질고 더 가혹하게 대기업노동자를 공격했고, ‘21년 근속에 기본급 105만원’ 받던 대기업 노동자 김주익 지회장은 “노동자가 한 사람의 인간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목숨을 걸어야 하는 나라, 그런데도 자본가들과 썩어빠진 정치꾼들은 강성노조 때문에 나라가 망한다고 아우성이다”고 절규하며 끝내 크레인에서 목을 매고 말았다.

인권변호사 노무현은 대통령이 됐으니 ‘민주화된 세상’에서 산다고 느낄지 모르나, 엄청난 당기 순이익을 내고도 임원들만 배당받고 직원들 임금은 동결한 것도 모자라 600여 명을 내쫓는 재벌, 이에 저항했다고 손배가압류를 비롯한 끝도 없는 노동탄압에 시달려야 하는 김주익에게 ‘민주화된 세상’은 아직 오지 않았다.

5. 노무현 대통령이 한겨레 보도대로 말하고 생각한다면 노동문제 인식의 문제를 넘어 심하게 말하면 노동자 주검에 소금을 뿌리는 격이다. 지난 29일 노동·법무·행자 3부장관의 노동자 분신 관련 담화문에 대해 우리는 당장 노동자를 죽음으로 내모는 1천400억대 손배가압류와 비정규직 차별에 대한 가시적인 조치 없이 공허한 제도개선 추진만 되풀이 해 실망했다. 그런데 노무현 대통령은 3부 담화문조차 너무 노동자에게 온정을 베푼 것이라며 장관들을 질책했다니, 도대체 노동자가 사회적 타살로 내몰리는 노동현실과 대통령의 인식 사이에는 얼마나 넓고 넓은 구만리장천의 바다가 있는 것이란 말인가. 우리는 노무현 정권의 노동정책에 다시 한 번 절망하고 통탄한다. 그리고 분노한다.[100]

노동자들의 잇단 자결로 열사정국이 만들어졌다. 민주노총은 11월 6일 12만 명이 참여하는 총파업을 단행했다. 9일 10만 명이 참여한 전국노동자대회에서는 서울 한복판에서 전투경찰과 치열한 가두투쟁을 벌였다. 12일 다시 총파업을 단행해 15만 명이 참가했다.

 

14일 한진중공업 사측이 금속노조에게 손배가압류 철회와 해고자 복직을 약속했다. 12월 5일 근로복지공단이 비정규직노조에게 노조 인정과 비정규직 정규직화를 약속했다. 10일 세원테크 사측이 노조파괴자 3인 퇴진과 금속노조 기본협약 수용을 약속했다.

 

다음 편 보기(연재 예정)

 

[1] 대우자동차는 2002년 8월 GM에 매각됐다. 이후 대우차 정리해고자 1천 725명 가운데 복직을 희망한 1천 609명이 2002년 12월부터 2006년 5월까지 단계적으로 복직됐다.

[2] 김대중 정권은 현대자동차에 정리해고를 관철하기 위한 최후 보루였다. 김대중은 ‘경제를 살리려면 정리해고가 불가피하다’는 여론 작업에 앞장섰다. 노동부는 ‘단체협약 상의 노사협의와 상관없이 법에 정해진 수순만 밟으면 정리해고를 할 수 있다’고 했다. 검찰은 ‘정리해고는 쟁의행위의 대상이 아닌 경영행위이므로 이에 맞선 파업은 불법’이라고 했다.

[3] 1996~97년 총파업 이후 1997년 3월 10일 재개정된 노동법에 따르면 정리해고제와 근로자파견제는 2년 동안 도입을 유보하도록 돼 있었다. 즉 1999년 3월까지는 도입하지 않기로 돼 있었다. 그러나 1997년 12월 한국에 긴급자금을 지원하게 된 IMF가 정리해고제 조기 도입을 요구했고, 대통령에 당선된 김대중도 조기 도입을 적극 추진하고 나섰다.

[4] 현대차노조 영상패, 1998, <98 현대자동차 고용안정투쟁기 - 아직 끝나지 않은 싸움>(영상).

[5] 양봉수 열사 추모사업회 & Labor Art Network, 1998, <우리들의 사랑 우리들의 분노>(영상).

[6] 현대차노조 영상패, 1998, <98 현대자동차 고용안정투쟁기 - 아직 끝나지 않은 싸움>(영상).

[7] 현대차노조 영상패, 1998, <98 현대자동차 고용안정투쟁기 - 아직 끝나지 않은 싸움>(영상).

[8] 현대차노조, 1998/07/01, <비대위 속보> 42호.

[9] 현대차 승용1공장 민주노동자투쟁위원회, 1998/07/09, <승용1민투위>.

[10] 현대차노조 공동소위원회, 1998/07/13, <공동소위원회>.

[11] 현대차노조, 1998/07/13, <비대위 속보> 51호.

[12] 현대차노조, 1998/07/14, <비대위 속보> 52호.

[13] 현대차노조, 1998/07/15, <비대위 속보> 53호.

[14] 3천 578명은 6월 30일 신고한 정리해고 계획 인원 4천 830명에서 4차 희망퇴직자 1천 252명을 뺀 수치였다. 이 시점에 회사는 과장급 이상 명예퇴직자 1천 371명에 1차부터 4차까지 희망퇴직자 5천 162명을 더한 6천 533명의 감원을 이미 실현하고 있었다. 이 상황에서 회사가 3천 578명의 추가 고용조정을 강행하겠다고 나선 것은 총 1만 111명을 ‘고용조정’함으로써 연초부터 추진한 ‘1만 명 감원’을 반드시 실현하겠다는 뜻이었다.

[15] 금속노조현대차지부, 2009, 『현자노조 20년사』, 293쪽.

[16] 현대차노조 사수대, 1998/07/20, <사생결단> 제1호.

[17] 현대차노조 영상패, 1998, <98 현대자동차 고용안정투쟁기 - 아직 끝나지 않은 싸움>(영상).

[18] 7월 17일 회사가 지정한 최종 고용조정 대상자 3천 578명 가운데 1천 340명이 31일까지 5차 희망퇴직을 신청하면서, 2천 238명이 고용조정 대상자로 남았는데, 그 가운데 1천 538명에게는 정리해고, 700명에게는 무급휴직을 통보한 것이었다. 1차부터 5차까지 희망퇴직자 수는 총 6천 502명이었다.

[19] 7월 31일 2천 238명이 정리해고·무급휴직 대상자였지만, 파업농성에는 5천여 명이 계속 참여했다. 따라서 점거파업 조합원 가운데 60% 정도는 정리해고·무급휴직 대상자가 아니었다. 이들이 파업에 동참한 것은 고용조정 대상자가 된 동료들에 대한 의리 때문이기도 했지만, 정리해고를 막지 못할 경우 민주노조가 무너지고 1987년 이전의 지옥 같은 현장으로 되돌아갈 것이라는 판단 때문이기도 했다.

[20] 금속노조현대차지부, 2009, 『현자노조 20년사』, 302쪽.

[21] 금속노조현대차지부, 2009, 『현자노조 20년사』, 302쪽.

[22] 현대차노조, 1998/08/13, <비대위 속보> 76호.

[23] 금속노조현대차지부, 2009, 『현자노조 20년사』, 304쪽.

[24] 금속노조현대차지부, 2009, 『현자노조 20년사』, 304~305쪽.

[25] 현대차노조 영상패, 1998, <98 현대자동차 고용안정투쟁기 - 아직 끝나지 않은 싸움>(영상).

[26] 금속노조현대차지부, 2009, 『현자노조 20년사』, 304쪽.

[27] 금속노조현대차지부, 2009, 『현자노조 20년사』, 304쪽.

[28] 양준석, 1998, 「현대자동차 노동조합 98 고용안정투쟁 평가」.

[29] 양준석, 1998, 「현대자동차 노동조합 98 고용안정투쟁 평가」.

[30] 금속노조현대차지부, 2009, 『현자노조 20년사』, 293쪽.

[31] 금속노조현대차지부, 2009, 『현자노조 20년사』, 299쪽.

[32] 금속노조현대차지부, 2009, 『현자노조 20년사』, 299~300쪽.

[33] 금속노조현대차지부, 2009, 『현자노조 20년사』, 300쪽.

[34] 금속노조현대차지부, 2009, 『현자노조 20년사』, 300~301쪽.

[35] 금속노조현대차지부, 2009, 『현자노조 20년사』, 301쪽.

[36] 금속노조현대차지부, 2009, 『현자노조 20년사』, 301쪽.

[37] 금속노조현대차지부, 2009, 『현자노조 20년사』, 301쪽.

[38] 양준석, 1998, 「현대자동차 노동조합 98 고용안정투쟁 평가」.

[39] 금속노조현대차지부, 2009, 『현자노조 20년사』, 294~295쪽.

[40] 금속노조현대차지부, 2009, 『현자노조 20년사』, 295~296쪽.

[41] 금속노조현대차지부, 2009, 『현자노조 20년사』, 296쪽.

[42] 현대차노조 가족대책위원회, 1998/07/28, <가족투쟁속보> 5호.

[43] 현대차노조 가족, 1998/09/18, 「현자가족투쟁참가기 - 우리의 투쟁을 왜곡시키지 마라!」, 민주노총 통신 게시판.

[44] 양준석, 1998, 「현대자동차 노동조합 98 고용안정투쟁 평가」.

[45] 현대차노조 영상패, 1998, <98 현대자동차 고용안정투쟁기 - 아직 끝나지 않은 싸움>(영상).

[46] 현대차노조 영상패, 1998, <98 현대자동차 고용안정투쟁기 - 아직 끝나지 않은 싸움>(영상).

[47] 금속노조현대차지부, 2009, 『현자노조 20년사』, 307쪽.

[48] 현대차노조 영상패, 1998, <98 현대자동차 고용안정투쟁기 - 아직 끝나지 않은 싸움>(영상).

[49] 현대차 민주노동자투쟁위원회, 1998/08/22, 「윤성근이 드립니다」, <민투위>.

[50] 정리해고자 277명은 절대다수가 여성인 식당 정리해고자 144명, 일반 정리해고자 133명으로 구성됐다. ‘277명’이라는 숫자는 8월 11일 회사가 마지막으로 제시했던 정리해고 숫자 615명의 45%였다.

[51] 정리해고 대상자였다가 이날 무급휴직으로 분류된 1천 261명과 별도로 7월 31일 이미 무급휴직을 통보받은 700명이 있었다. 따라서 무급휴직자는 총 1천 961명이었다.

[52] 현대차 노사, 1998/08/24, 「현대자동차 고용조정과 노사화합을 위한 잠정합의문」 (현대자동차주식회사 대표이사 정몽규와 현대차노조 위원장 김광식 명의).

[53] 현대차 노사, 1998/08/24, 「부속 합의서」 (현대자동차주식회사 대표이사 정몽규와 현대차노조 위원장 김광식 명의).

[54] 현대차노조 영상패, 1998, <98 현대자동차 고용안정투쟁기 - 아직 끝나지 않은 싸움>(영상).

[55] 금속노조현대차지부, 2009, 『현자노조 20년사』, 310~311쪽.

[56] 현대차 민주노동자투쟁위원회, 1998/08/27, <민투위>.

[57] 현대차노조 활동가들, 1998/08/28, <다시 머리띠를 묶으며> 제1호.

[58] 이러한 불신과 상처는 이후 현대차노조가 노동자계급의 단결을 저버리고 ‘고용의 방패막이’로 대규모 사내하청 투입을 동의하는 잘못된 길로 나아가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게 된다.

[59] 1990년대 이후 독일에서도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이 본격화했는데, 이 과정에서 독일 금속노조는 타협적인 태도로 일관하며 신자유주의 공세를 수용했다. 그 결과 임금수준의 하락, 불안정노동의 확대, 사회적 안전망의 약화, 일부 사업장에서의 대규모 정리해고 등을 통해 노동자들의 삶이 지속적으로 악화됐다. 이는 오늘날 독일에서 극우세력이 강력하게 부상할 수 있게 한 요인 가운데 하나가 됐다.

[60] 천창수, 1998/09/17, 「현대자동차 정리해고 반대투쟁이 남긴 과제」, 영남노동운동연구소, 『연대와 실천』 9월호.

[61] 현대차노조 가족, 1998/09/18, 「현자가족투쟁참가기 - 우리의 투쟁을 왜곡시키지 마라!」, 민주노총 통신 게시판.

[62] 울산노동자신문, 2001/04/16, 「용서 못할 정권의 폭력만행 - 노동자의 분노를 행동으로 보여줄 때다」.

[63] 민주노총, 2001/05/01, 「세계노동절 제111주년 기념 민주노총 노동자대회 단병호 위원장 대회사」.

[64] 울산노동자신문, 2001/06/08, 「굴종의 세월 깨뜨린 효성 파업 투쟁」.

[65] 울산노동자신문, 2001/06/08, 「폭력경찰 투입에 효성투쟁 오히려 확산」.

[66] 울산노동자신문, 2001/06/11, 「효성연대투쟁, 갈수록 강력하게 확산」.

[67] 울산노동자신문, 2001/06/11, 「노동자 생존권 말살하는 화섬 구조조정」.

[68] 울산노동단체연석회의, 2001/06/14, 「전면적인 노동운동탄압이 예고되는 긴박한 정세를 돌파하기 위한 우리의 제안」.

[69] 울산노동자신문, 2001/06/18, 「민주노총 울산투본, 전면 총파업 선포」.

[70] 울산노동자신문, 2001/06/18, 「울노신 초대석(이갑용 민주노총 지도위원) - 울산 노동운동의 새로운 기운이 시작된다!」.

[71] 울산노동자신문, 2001/06/25, 「현자노조 임대, 통합임단협 요구안 확정」.

[72] 울산노동자신문, 2001/06/22, 「울산노동자 총파업, 눈앞에 다가왔다」.

[73] 민주노총, 2001/06/22, 비상 중앙위원회에 수배 상태의 단병호 위원장이 보낸 서신.

[74] 울산노동자신문, 2001/06/25, 「민주노총, 7월 5일 60만 조합원 총파업 - 22일 긴급 중앙위원회서 만장일치로 결정」.

[75] 울산노동자신문, 2001/06/25, 「움츠린 동구, 투쟁으로 다시 일어선다」.

[76] 울산노동자신문, 2001/07/02, 「7·5 총파업, 7월 대투쟁의 포문을 연다」.

[77] 울산노동자신문, 2001/07/09, 「긴급점검 - ‘현자 7·5 총파업 철회’ 배경과 반응」.

[78] 울산노동자신문, 2001/07/09, 「“구조조정·노동탄압 분쇄” 당당히 간다」.

[79] 앞서 7월 3일에는 민영화 대상에서 제외된 한국수력원자력노조에서도 민주노총 가입을 공약으로 내건 후보가 위원장에 당선됐다.

[80] 울산노동자신문, 2001/05/28, 「오욕의 세월 마침내 끊어낸 철도노조」.

[81] 울산노동자신문, 2001/08/06, 「발전산업노조 이호동 초대 위원장 당선 - ‘민영화 반대, 민주노총 가입’ 공약」.

[82] 울산노동자신문, 2002/03/11, 「바위처럼 흔들림 없는 발전노조 파업투쟁」.

[83] 울산노동자신문, 2002/03/11, 「가슴깊이 다가오는 발전 노동자들의 투쟁, 민주노총 3월 총력투쟁으로 결판내자!」.

[84] 울산노동자신문, 2002/03/25, 「결사항전으로 나아가는 발전 노동자들」.

[85] 한국발전산업노동조합 투쟁백서발간위원회, 2003, 『한국발전산업노동조합 발전소매각 저지투쟁 - 가자! 총파업투쟁으로』, 191~194쪽.

[86] 울산노동자신문, 2002/04/01, 「‘노동자라면 떨쳐 일어나자’ - 4·2 총파업 열기」.

[87] 울산노동자신문, 2002/04/02, 「지역 연대투쟁이 지역 총파업으로!」.

[88] 울산노동자신문, 2002/04/01, 「‘노동자라면 떨쳐 일어나자’ - 4·2 총파업 열기」.

[89] 울산노동자신문, 2002/04/01, 「총파업 투쟁으로 모두 떨쳐 일어나 ‘신자유주의 분쇄’ 희망을 쟁취하자!」.

[90] 당시 사퇴한 주요 지도부는 민주노총의 허영구 위원장 직무대행과 이홍우 사무총장, 공공연맹의 양경규 위원장이었다. 구속 중이던 단병호 민주노총 위원장은 사퇴하지 않았다.

[91] 박훈(금속산업연맹 법률원 변호사), 2002/04/03, 「이것은 절대 아니다 - 발전노조 합의안을 보며」, 민주노총 홈페이지 게시판.

[92] 1998년 6·5 노정합의와 6·10 대의원대회를 통해 민주노총이 노사정위원회에 복귀하면서 제2기 노사정위원회가 출범했다. 그러나 교원노조 법제화 등 합의사항이 이행되지 않자 민주노총이 1999년 2월 24일 대의원대회를 통해 노사정위원회 탈퇴를 결정했다. 김대중 정권은 민주노총이 불참한 가운데 한국노총만을 포괄하여 제3기 노사정위원회를 운영했다.

[93] 전체 노동자 평균 근속년수 5.6년을 기준으로 할 때 연간 10일의 휴가가 축소되는 안이었다.

[94] 민주노총, 2003/08/21, 「[성명] 대선공약도 팽개치고 재벌 거수기 된 민주당 - 주5일제 환노위 전체회의도 통과」.

[95] 민주노총, 2003/08/29, 「[성명] 주5일법 국회통과에 즈음하여」.

[96] 2003년 1월, 민주노총 사업장 50곳에 2천 2백억 원, 비민주노총 사업장 2곳에 5억 4천만 원의 손배가압류가 걸려 있었다.

[97] 배달호(두산중공업 노동자), 2003/01/09, 「유서」.

[98] 김주익(한진중공업 지회장), 2003/10/17, 「유서」.

[99] 김진숙, 2003/10/22, 「자본의 연대는 이렇게 강고한데 우린 얼마나 연대하고 있습니까?」, 부산역에서 열린 김주익 열사 추모집회 추모사.

[100] 민주노총, 2003/11/06, 「[성명] 노대통령 ‘분신 투쟁수단 삼는 시대 지났다’ 발언에 대해」.

관련기사






모바일 버전으로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