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6~97년의 역사적인 총파업으로도 정리해고제와 근로자파견제 도입을 막아내지 못하고 나아가 1998년 이후 구조조정과 정리해고를 앞세운 자본가들의 파상적인 신자유주의 대공세에 패배를 거듭한 결과, 2000년대 초반에 이르러 민주노조운동 전반은 심각한 후퇴와 변질에 직면하게 됐다.
IMF 외환위기 때 펼쳐진 신자유주의 공세로 비정규직 비율이 전체 노동자의 절반 이상으로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비정규직은 1987년 이전 같은 열악한 임금·노동조건과 고용불안에 시달렸다. 민주노조운동의 주력이 된 대기업과 공공부문의 정규직은 전체 노동자의 상위 20% 정도에 불과했다.
비정규직을 대대적으로 노조로 조직하면서 비정규직이 겪는 초과착취와 차별을 타파하고 나아가 비정규직 제도 자체의 철폐를 향해 전진하는 것이 민주노조운동의 결정적인 과제가 됐다. 그러나 민주노조운동은 이 과제를 제대로 수행해 내지 못했다. 이는 다시 민주노조운동의 퇴행과 관료화를 급격히 가속시켰다.

3부 패배와 퇴보 (1998-2008)
[시대배경] 신자유주의 구조조정
[1] 구조조정과 정리해고에 맞선 투쟁
[2] 민주노조운동의 후퇴와 비정규직 확산
[3] 비정규직 문제를 둘러싼 대결
[4] 민주노조운동의 위기
[5] 노동자 정치세력화 열망과 민주노동당
1) 잇따른 패배가 야기한 민주노조운동의 후퇴와 변질
1987년 노동자대투쟁 이후 전노협 건설로 나아갔던 한국의 민주노조운동은 자주성·민주성·전투성·연대성·변혁성에 대한 지향을 실천하면서 어용 한국노총과는 전혀 다른 유형의 노동조합운동을 거대한 대중적 흐름으로 만들어 냈다.
1980년대 후반부터 1990년대 초반까지 전노협으로 대표되는 민주노조운동은 자본의 착취와 탄압에 맞서 노동자의 인간다운 삶을 열어가는 모든 노동자들의 살아있는 희망이었고, 그 자체로 노동해방을 향한 노동자들의 힘찬 전진이었다.
그러나 타협·개량주의 세력의 주도권 아래 민주노총이 건설되고, 곧이어 신자유주의 대공세에 패배를 거듭하면서, 민주노총으로 포괄된 민주노조운동 전반은 심각하게 후퇴했다. 전노협 운동의 특징이었던 자주성·민주성·전투성·연대성·변혁성에 대한 지향은 이제 사실상 껍데기만 남게 됐다.
이처럼 민주노조운동 전반이 심각한 후퇴와 변질을 겪게 된 것은, 무엇보다 자본의 신자유주의 대공세에 패배를 거듭하면서 민주노총으로 포괄된 민주노조들의 구성과 지향이 사실상 구조조정에서 살아남은 대기업 정규직만의 운동으로 축소돼 버렸기 때문이었다. 또한 지도부의 배신을 통해 투쟁이 패배하는 양상을 거듭 되풀이함으로써, 1987년 노동자대투쟁 이래 발전시켜 왔던 민주노조운동의 원칙과 기풍이 심각하게 무너져 내렸기 때문이었다.
◎ 패배의 원인과 결과
맹렬한 성장을 거듭하던 한국 자본주의는 1990년대 중반을 분기점으로 위기와 쇠퇴의 시기로 접어들었다. 그만큼 자본가들의 공격이 더욱 집요하고 악랄해졌다. 물론 그 이전에도 한국의 자본가들은 전 세계에서 가장 끔찍하게 노동자들을 착취하고 억압했으며, 노동자들의 투쟁을 철저하게 탄압했다. 그래서 20세기 후반부에 세계에서 가장 빠른 속도로 자본주의 경제를 발전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1987년 노동자대투쟁 이후 폭발적으로 성장한 민주노조운동은 자본의 탄압을 상당 정도 무력화했으며 자본가들에게 적지 않은 양보를 강제해 냈다.
대략 1980년대 후반부터 1990년대 중반까지 자본가들은 민주노조운동에 대한 탄압을 계속 퍼부으면서도 노동자들의 끈질긴 투쟁력에 밀려 경제적으로는 상당한 양보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과정에서 전노협 소속 노조가 있던 중소자본 가운데 상당수는 아예 공장을 폐업하거나 중국·동남아 등지로 옮기기도 했다. 하지만 막대한 이윤을 거둬들이던 대기업 자본가들은 민주노조의 전투성을 약화시킬 방편으로 상당한 경제적 양보를 하면서 이 시기를 보냈다.
그러나 IMF 외환위기를 계기로 한국 자본주의가 충격적으로 위기에 내몰리면서부터 자본가들의 태도는 완연히 바뀌었다. 구조조정과 정리해고를 앞세운 자본가들의 공격은 그야말로 ‘대공세’였다. 한동안 자본가들의 경제적 양보에 익숙해 있던 노동자들은 갑자기 바뀐 자본가들의 태도에 크게 당황했다. 자본가들의 신자유주의 대공세는 노동자들에게, 특히 그 지도부에게 이전보다 훨씬 더 큰 용기와 시야, 대담한 전망과 자신감을 요구했다. 그러나 엄혹한 사태를 헤치고 나갈 역량을 갖추지 못한 지도부는 결국 노동자들의 열망을 책임지지 못하고 자본가들에게 투항하며 배신하고 말았다.
이러한 사태전개는 민주노총 건설 과정에서 타협·개량주의 노선이 전투적·변혁적 노선을 밀어내고 민주노조운동의 주도권을 장악한 것과 밀접히 관련돼 있었다.
만일 민주노조운동이 민주노총 건설 과정에서 전투적·변혁적 노선을 계승하고 발전시켜 나갔다면, 이후 자본가들의 대공세에 맞설 능력과 태세를 갖춘 지도자들을 상당한 규모로 준비시킬 수 있었을 것이다. 민주노조운동이 타협·개량주의에 흠뻑 젖어 들어가는 대신 전투적·변혁적 노선을 잘 견지했다면, 자본가들의 경제적 양보가 일시적인 후퇴에 불과한 것일 뿐 머지않아 노동자들에게 대공세를 펼칠 것이라는 점을 잊지 않으면서 그에 걸맞은 준비태세를 갖출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현실에서 벌어진 일은 정반대였다. 민주노조운동의 주도권을 장악한 타협·개량주의 노선은 자본가들의 일시적 양보를 확고한 성과이자 엄청난 변화인 것처럼 착각했다. 민주노조운동 지도부 대다수가 ‘이제 굳이 힘들게 싸우지 않아도 자본가들로부터 적당히 양보를 얻어낼 수 있겠다’는 생각에 빠져들며 정신상태가 해이해져 가는 것과 정확히 교차하면서 자본가들의 대공세가 시작됐다. 그래서 민주노조운동 지도부 대다수는 엄혹한 사태를 헤치고 나갈 역량과 태세를 더욱 갖출 수 없었다.
민주노총이 출범하던 1990년대 중반부터 대략 2000년대 초반까지 대기업 정규직 노동자들은 정리해고를 앞세운 자본의 무자비한 공격에 맞서 매우 치열하게 투쟁을 전개했다. 그러한 투쟁들 속에서 노동자들은 자본의 당면한 공세를 물리치는 것만이 아니라 노동자의 세상을 향한 거침없는 전진을 희망하고 노래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 투쟁들은 거의 하나같이 처참하게 패배했다. 노동자대중은 생존과 권리를 지키려는 강렬한 열망을 행동으로 보여주었지만 지도부의 투항과 배신을 이겨내지 못했고 결국 투쟁 전열이 무너지면서 패배하는 양상이 거듭해서 되풀이됐다.
운명적인 투쟁들이 지도부의 거듭된 투항과 배신을 이겨내지 못하고 처참한 패배로 귀결되자, 대기업 정규직의 가슴 속에는 민주노조운동의 대의와 가능성에 대한 극심한 회의와 실망이 깊이 아로새겨졌다. 민주노총 출범 이후 몇 년 동안 자본의 대공세를 둘러싸고 벌어진 치열한 전투에서 노동자들이 처참하게 패배한 결과, 특히 투쟁의 지도부가 대중의 열망을 배신하고 자본가들에게 투항하면서 민주노조운동의 정당성과 기풍이 심각하게 훼손되는 형태로 패배한 결과, 대기업 정규직은 보수화와 개인주의화의 늪에 깊이 빠져들었다.
노동자들의 단결과 투쟁을 통해 노동자의 생존과 권리를 당당하게 지켜내고 나아가 착취와 억압을 타파할 새로운 세상을 향해 뚜벅뚜벅 전진할 수 있다면, 그것을 마다할 노동자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말만 그럴싸할 뿐 실제로는 결코 이루어질 수 없는 꿈에 불과하다면, 더 이상 그 꿈에 노동자들은 매력을 느끼지 못할 것이다. 노동자들의 단결과 투쟁이 불가능하다면, 현실을 살아가는 노동자로서는 치열한 생존경쟁의 한복판에서 스스로 살아남을 길을 찾아야 한다. 동료들을 제쳐서라도 자본가에게 자신의 존재가치와 능력을 인정받아야 하며, 자본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불안한 미래를 지켜줄 것은 돈밖에 없기 때문에 더욱 돈에 집착해야 한다. 바로 이것이 민주노조운동에 실었던 강렬한 열망과 기대가 처참한 회의와 실망으로 되돌아 온 뒤, 대기업 정규직의 마음속에서 펼쳐진 논리구조였다.
대기업 정규직의 보수화와 개인주의화는 단순히 확대된 개량 때문에 벌어진 일이 결코 아니었다. 만일 민주노조운동 지도부가 대기업 정규직 노동자대중의 투쟁 의지를 올곧게 받아 안고 제대로 발전시켜 나갔다면, 확대된 개량은 대기업 정규직의 보수화가 아니라 더욱 확장된 급진화로 또한 개인주의화가 아니라 계급적 단결의 고취로 얼마든지 이어질 수 있었다.
대기업 정규직의 보수화와 개인주의화는 현장에 대한 유형·무형의 통제권이 노동자들로부터 자본가들에게 되돌아간 정도, 다시 말해서 노동자들의 가장 기초적인 단결력이 해체된 정도와 거의 정확하게 비례했다. 그러므로 대기업 정규직의 보수화와 개인주의화는 저항과 투쟁의 상상력마저 거세당한 채 주어진 현실에 무기력하게 적응하게 된 현실의 표현이었다. 한편으로 비정규직보다는 낫다는 안도감과 뒤틀린 우월감에 사로잡혀 있고, 다른 한편으로 정리해고를 당하거나 비정규직으로 전락할까봐 두려움에 시달리고 있을 뿐, 자신의 처지와 운명을 근본적으로 바꾸려는 의지도 열망도 자신감도 다 잃어버린 대기업 정규직의 초라한 자화상이었다.
◎ 자주성의 상실
‘자주성’은 자본과 정권의 지배·개입을 철저히 배격함으로써 오로지 노동자들을 위하고 노동자들의 뜻대로 운영되는 노동조합을 가능케 함으로써 민주노조를 어용노조와 구분시키는 출발점이었다. 그러나 2000년대 초반에 이르러 이른바 ‘민주노조’의 대다수는 자본과 정권의 영향력이 일상적으로 개입하고 작용하는 상태로 전락했다.
무엇보다 개별 단위노조에서부터 자본의 개입과 영향력 행사가 일상화 됐다. 대기업 정규직을 중심으로 이른바 ‘힘 있는 민주노조’가 있는 모든 사업장에는 노동조합 현직 간부들은 물론이요 전직 간부들에 대해서까지 경영진부터 말단 관리자가 총동원된 그물망 같은 담당관리 체계가 작동하게 됐다. 그러한 사업장들에서 자본의 노무관리 부서는 노동조합의 대의원대회·운영위원회 등 주요 논의 내용을 실시간으로 파악하고 나아가 노동조합 논의 과정 자체에 때론 노골적으로 때론 은밀하게 ‘하지만 매우 깊이’ 영향력을 행사했다.
이러한 자본의 일상적인 지배·개입은 노조간부들에 대한 엄청난 특혜·향응·금품 제공으로 지탱됐다.[1] 2000년 현대차노조가 ‘대우자동차 해외매각 반대’를 내건 완성차 노조들의 공동파업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한겨레신문 광고비 3천만 원을 회사에게 받은 돈으로 납부한 사실이 나중에 밝혀지면서 집행부가 중도 사퇴한 사건은 자본으로부터의 자주성이 얼마나 심각하게 무너져 있는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었다.[2]
자본의 지배·개입 아래 놓인 노동조합은 당연히 제 기능을 발휘할 수 없었다. 얼핏 상당한 힘을 가진 것처럼 보이던 대기업 정규직 민주노조들은 비정규직 문제나 지역적·전국적 연대처럼 자본이 쉽게 용납하지 않는 사안 앞에 서면 너무나 초라하고 비겁하게 꼬리를 내렸다. 대부분의 대기업 정규직 민주노조들은 자본이 설정해 준 한계 속에서만 목소리를 높일 수 있는 ‘부처님 손바닥 안의 손오공’이 돼 버렸다.
민주노총에 대한 정권의 개입과 영향력 행사 또한 일반화됐다. 노동운동 경력을 가진 정권 측 인사들이 민주노조운동의 주요 지도자들을 일상적으로 접촉하며 크고 작은 사안들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은 민주노조운동 상층에서 공공연한 일이 됐다.
2001년 10월 민주노총 대의원대회에서 정부 보조금을 받기로 결정한 것은 자주성 상실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건이었다. 당시 정부 보조금을 받자는 주장은 ‘국민들이 낸 세금을 우리가 못 받을 이유가 없다’는 논리를 앞세웠다. 그러나 이는 반노동자적인 정부가 민주노총을 길들이기 위해 얼마든지 보조금 중단 여부를 갖고 장난칠 수 있다는 점을 도외시한 논리였다.[3] 정부 보조금을 받기 시작한 2002년 초, 민주노총은 2001년 김대중 정권 퇴진 투쟁에 대해 부끄러움도 없이 ‘과도한 결정’으로 스스로 평가했다.
◎ 민주성의 상실
‘민주성’은 민주노조가 갖는 힘의 근원이었다. 모든 노동자들을 노동조합으로 단결시키고 전체 조합원의 적극적인 참여로 사업과 투쟁을 전개하면서 노동자 민주주의를 활짝 꽃피움으로써 민주노조는 강력한 힘을 발휘할 수 있었다. 그러나 2000년대 초반에 이르러 이른바 ‘민주노조’ 전반은 배제·차별·무관심·관료주의로 점철된 가운데 노동자 민주주의의 형식적인 잔재들만이 앙상하게 남은 상태로 전락했다.
1987년 노동자대투쟁이 탄생시킨 민주노조는 일반적으로 직종과 지위를 떠나 사업장 안에 있는 모든 노동자들을 단결시켰다. 즉 노동조합이긴 하되, 일종의 노동자평의회와 같은 노동조합이었다. 이를테면 1987년 노동자대투쟁의 진원지 역할을 했던 울산 현대중공업에서 탄생한 민주노조 조합원의 20% 남짓은 당시 사내하청업체에 소속된 이른바 도급 노동자들이었다. 가장 열악한 처지에 있는 도급 노동자들을 포괄했을 뿐만 아니라 이들이 가장 열성적으로 투쟁에 앞장섰기 때문에 당시의 민주노조는 출발과 동시에 다른 많은 부분에서의 성과와 더불어 도급 노동자들을 전원 정규직으로 전환시키는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
그러나 2000년대 초반에 이르러 이른바 ‘민주노조’들의 모습은 완전히 달라졌다.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을 둘러싼 전투에서 패배하고 후퇴한 결과 대기업 정규직 노조들은 같은 사업장 안에서 다수의 비정규직 노동자들과 공존하게 됐다. IMF 외환위기 이후 사회 전체적으로 비정규직이 급속히 확산된 가운데, 사내하청 노동자들은 노동조합이 버티고 있는 제조업 대공장 안에서도 전체 노동자의 30~70%에 이르는 엄청난 비중을 차지하게 됐다.[4] 그런데 대기업 정규직 노조들은 같은 사업장 안에서 공존하게 된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단지 고용형태가 다르다는 이유로 배척했다. 한 사업장 안에서 절반밖에 안 되는 임금으로 더 고되게 일하는 노동자들, 그것도 대체로 더 젊은 노동자들을 배제하는 노동조합은, 너무나 당연하게도 자본을 상대로 제대로 힘을 쓸 수 없었다.
한때 한국 사회에서 가장 높은 수준의 보편성을 구현했던 민주노조운동의 민주주의는, 신분과 재산이 일정 수준 이하에 있는 하층민에게는 선거권도 주지 않던 초기 부르주아 민주주의 같은 저급한 수준으로 후퇴해 버렸다.
더 열악한 노동자들을 구조적으로 배제함으로써 노동자의 정신을 저버린 이른바 ‘민주노조’는 노동조합으로 묶인 노동자들로부터도 더 이상 진정한 활력을 모아낼 수 없었다. 대공장 정규직 노조들은 대부분 조합원들의 차가운 무관심과 수동성에 직면함으로써 노동자 민주주의의 기반 자체를 거의 상실했다. 임원·대의원 선거와 임금·단체협약 찬반투표 등 투표 형태로 이루어지는 조합원 총회에는 조합원 80~90%의 참여를 끌어낼 수 있었지만, 이를 넘어서서 노동조합의 일상적인 사업과 투쟁에 대한 조합원의 참여도는 심각한 수준으로 추락했다.
수백 명 또는 수천 명, 심지어 수만 명이 모이는 집회들을 일상적으로 치러낼 수 있게 했던 조합원의 적극성과 열정은 대부분의 사업장에서 거의 사라졌다. 현장에서 이루어지던 수많은 토론과 대화, 아래로부터 올라오는 비판과 제안으로 넘쳐대던 노동조합들은 이제 현장 조합원들의 무거운 침묵과 냉소에 짓눌리게 됐다.
민주노총과 산하 연맹의 대의원대회가 성원 미달로 유회되거나 간신히 성원을 채웠다가 도중에 성원 부족으로 유회되는 일은 너무나 흔한 일상사가 돼 버렸다.[5]
현장 조합원들의 차가운 무관심과 수동성은 노동자들의 보수화와 개인주의화가 심각하게 진행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창이었다. 그런데 ‘개량의 떡고물’을 일정하게 향유하는 대기업 정규직 노동자들만이 아니라 그로부터 배제되어 있는 중소기업 노동자들과 비정규직 노동자들 또한 보수화와 개인주의화의 양상이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는 노동자들의 보수화와 개인주의화가 (‘확대된 개량’이 아니라) 지도부의 잇따른 배신적 투항으로 패배를 거듭하는 민주노조운동에 대한 노동자들의 극심한 회의와 실망에 그 원인이 있기 때문이었다. 나아가 노동자운동 전반이 민주노조운동에 대한 실망을 극복할 수 있는 새로운 희망을 제시해 내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노동자들 속에서 민주노조운동에 대한 환멸과 회의를 일상적으로 재생산하고 그래서 노동자들의 무관심과 수동성을 더욱 부추긴 것은, 단위노조로부터 상급단체에 이르기까지 노조간부들 전반에 퍼져 나간 관료주의였다.
원래 민주노조운동에서 노조간부가 된다는 것은 구속과 해고를 당연지사로 감수하며 끝없는 헌신과 희생을 각오해야 하는 그런 일이었다. 당연히 상당한 결의가 된 이들만이 노조간부로 나설 수 있었고, 따라서 노조간부들을 바라보는 조합원들의 가장 일차적인 심정은 신뢰와 존경이었다.
그러나 실질적인 투쟁을 회피하게 된 대기업 정규직 노조들에서는 이제 노조간부가 되기 위해 구속과 해고를 각오할 필요가 없어졌다. 오히려 노조간부들 앞에는 일반 조합원들이 누릴 수 없는 온갖 특권이 펼쳐졌으며, 심지어 향응과 금품마저 제공됐다. 물론 그것은 조합원을 팔아먹고 비정규직을 팔아먹고 연대를 거부한 대가들로 주어지는 것이었지만, 민주노조의 세련된 외형은 그러한 본질을 적당히 은폐시켜 주었다.
관료주의에 물든 노조간부들은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 모든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어쨌든 그들의 지위를 좌우하는 것은 노조 선거이므로 그들은 최대한 큰 세력을 형성하여 유리한 입지를 확보하려고 온갖 지저분한 파벌 싸움에 몰두했다. 한편으로는 국민파·중앙파·현장파로 대별되는 운동적 노선의 경계가 작동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운동적 노선보다 선거 이해관계를 앞세우는 이합집산이 끊임없이 되풀이됐다.
◎ 전투성의 상실
‘전투성’은 민주노조가 자본에게 후퇴를 강제하는 위력의 원천이었다. 초창기 민주노조들은 노동자들의 요구를 쟁취하기 위해서라면 어떤 어려움도 마다않고 과감하게 도전했으며, 처절한 패배를 당할지언정 결코 쉽게 물러서지 않았다. 그러나 2000년대 초반에 이르러 이른바 ‘민주노조’들은 수많은 ‘투쟁’으로 뒤덮인 겉포장과 달리 자본의 지배를 위협하는 실질적인 투쟁은 사실상 찾아보기 어려운 상태가 됐다.
2000년대 초반에도 민주노총으로 포괄된 ‘민주노조’들은 수많은 투쟁을 했다. 단위노조는 임금·단체협약 투쟁에서부터 구조조정에 맞선 투쟁으로 정신이 없었고, 민주노총과 각 연맹은 수많은 과제들을 내걸고 몇 달이 멀다 하며 총파업을 벌였다. 그러나 그 무렵 민주노총으로 포괄된 ‘민주노조’들의 투쟁을 바라보면서 현장 노동자들이 느끼던 심정을 압축적으로 드러낸 두 가지 표현이 있었다. ‘짜고 치는 고스톱’과 ‘뻥파업’이었다.
대기업 정규직 노조들이 임금·단체협약 투쟁에 돌입하면 집행부가 어느 즈음에 어떤 내용의 잠정합의를 들고 올 것인지 대다수 조합원들이 구구절절 예언을 했는데, 조합원들의 예언은 신기하게도 십중팔구 족집게처럼 들어맞았다. 그러나 사태의 본질을 알게 되면, 이 놀라운 예지능력은 전혀 신기한 것이 아니었다.
자본의 지배를 위협하는 실질적인 도전은 없이 단지 투쟁했다는 생색을 낼 수 있는 적당한 지점까지 시늉을 내고 자본이 쉽게 양보할 수 있는 지점에서 합의를 도출하는 게 대기업 정규직 노조들의 임금·단체협약 투쟁에 깔려 있는 공식이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투쟁’에서 구조조정, 실질 노동시간, 노동강도, 비정규직 등 자본의 본질적 이해관계들을 침해하는 진정한 쟁점들은 늘 뒤로 밀리다가 어느 순간 흐지부지 사라지기 마련이었고, 그저 몇 푼 더 얹은 돈이 그것들을 대신했다.
이것이 ‘짜고 치는 고스톱’이었다. 이러한 투쟁들에 참여하는 노동자들에게서 어떤 신명이 날 리가 없었다. 집회에 참여한 노동자 수도 적거니와 참여한 노동자들이라고 해봐야 힘차게 팔 흔드는 것조차 곧장 짜증을 냈다. ‘파업은 노동자의 학교’라는 말도 전혀 어울리지 않았으니, 파업을 해봐야 어떤 프로그램도 없고 그저 퇴근하기 바빴기 때문이다.
수많은 투쟁으로 일상이 가득 차 있으나 실질적인 투쟁이 없기는 민주노총 또한 마찬가지였다. 몇 달이 멀다 하고 민주노총은 이러저러한 사안을 내걸고 총파업을 선언했다. 그러나 그러한 총파업의 대부분은 진지하게 조직하고 준비한 투쟁이 아니었으며, 그저 당장의 필요에 따라 이리 붙이고 저리 붙여서 급조된 투쟁일 뿐이었다. 그러한 총파업은 당연히 힘차게 전개될 리가 없었다.
사태를 더욱 악화시킨 것은 아래로부터 진지하게 조직하고 준비했던 1996~97년 총파업을 지도부가 배신했던 경험이었다. 대부분의 현장활동가들은 민주노총의 총파업 계획이 발표돼도 또 배신당할 거라는 불신 때문에 그 준비에 진정으로 몰두하려 하지 않았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민주노총의 총파업은 걸핏하면 유보되거나 실행돼도 실질적인 파괴력이 거의 없는 ‘무늬만 총파업’에 그치고 말았다. 그래서 민주노총의 총파업을 가리켜 실질적인 투쟁은 없이 뻥만 치는 파업이라고 ‘뻥파업’이라 하였던 것이다.
실질적인 투쟁의 실종 때문에 민주노총 등이 주관하는 집회는 재미없고 맥 빠지는 분위기로 가득 찼다. 집회 순서는 대회사·투쟁사·연대사·결의문 등으로 천편일률적으로 이어지고, 이러저러한 직함을 가진 연사들이 다 아는 것 같은 얘기들만 한참 늘어놓다가 내려갔다. 중간 중간 끼어드는 노래와 율동은 잠시 지루함을 덜어줄 뿐이었다.
집회가 시작해서 끝날 때까지 연단에 서는 자들과 노동자들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두터운 벽이 가로놓였다. 노동자들은 그저 연설을 듣고 구호를 따라 외치고 박수만 쳤다. 노동자들의 의견을 발표할 기회는 거의 존재하지 않았고, 노동자들 또한 기대하지 않았다. 다 같이 일어서서 율동이라도 함께 하면 가장 적극적으로 참여한 셈이었다. 집회에서 노동자들은 주체가 아니라 철저히 대상화된 존재일 뿐이었다.
물론 그 시절에도 비정규직 투쟁을 비롯하여 자본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는 실질적인 투쟁들이 없지 않았다. 그러한 투쟁들 속에서 노동자들은 더없이 진지하고 열정에 가득 차 있었다. 최선의 단결력과 투쟁력을 만들어 내기 위해 노동자들은 모든 신경을 집중했다. 그러한 투쟁들이야말로 비록 작은 규모라 하더라도 자본의 지배를 실질적으로 위협하며, 의미 있는 성과를 쟁취할 수 있게 했다. 설령 패배하더라도 더 큰 승리를 향한 자양분이 됐다.
그러나 2000년대 초반 이후 대기업 정규직 노조들에 일반화된 가식적인 투쟁은 자본에게 전혀 실질적인 위협이 되지 않았으며, 따라서 아무 것도 바꿀 수 없었다. ‘투쟁’이라고 다 진짜 투쟁은 아니었다.
◎ 연대성의 상실
‘연대성’은 민주노조운동을 통해 노동자계급을 새로운 역사의 주인으로 형성하는 수단이었다. 민주노조들은 자본에 의해 강요된 분할을 단호히 거부하고 담장을 넘어 지역을 넘어 모든 노동자가 하나임을 살아 움직이는 실천으로 확인해 나갔다. 그러나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에서 살아남은 자들만의 운동으로 쪼그라든 대기업 정규직 노조운동은 담장 밖의 연대는 고사하고 담장 안의 비정규직과의 연대조차 거부하는 비참한 수준으로 전락했다.
대기업 정규직 노조운동의 연대성 상실은 이른바 ‘가장 강력한 민주노조’로 살아남았던 현대차노조에서 가장 극적인 형태로 나타났다.
1998년의 정리해고 사태로부터 1년이 조금 지난 1999년 하반기, 현대차는 전혀 새로운 국면 앞에 섰다. 내수와 수출이 모두 예상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회복됐다. 생산량이 판매량을 따라가지 못하자 현대차 자본은 다급해졌다. 1년 6개월 무급휴직을 받은 2천여 명이 1년여 만에 현장으로 조기 복귀했다. 2000년 3월 결코 인정하지 않을 것 같던 일반 정리해고자들의 복직마저 받아들일 정도로 현대차 자본은 다급했다.[6]
그러나 그것으로는 태부족이었다. IMF 외환위기 이전 수준 이상의 생산인력이 요구되는 상황이었으나, 1997년 말에 2천 7백여 명의 사내하청 노동자들을 쫓아내고 1998년에 희망퇴직으로 8천여 명을 쫓아낸 상태였다. 불과 2년여 만에 1만 명 이상의 노동자들을 다시 충원해야 하는 상황이 왔다.
1998년에 회사가 했던 약속들에 따르면 희망퇴직자를 우선적으로 재고용해야 했다. 그러나 현대차 자본은 정규직을 재고용하는 것이 아니라 값싸고 언제든 다시 정리할 수 있는 비정규직으로 자리를 채우고 싶었다. 현대차 자본에게는 사태가 거기까지 진행돼야 ‘정리해고-비정규직화’라는 1998년의 구상이 완성되는 셈이었다.[7]
그런데 회사가 급격한 생산 확대를 너무나 절실히 필요로 하게 된 상황은, 노동조합의 입장에서 보자면 1998년의 패배를 만회할 수 있는 호조건을 의미했다. 1998년에 정리해고를 강행한 것에 대해 자본으로부터 강도 높은 사과를 받아 내고, 향후 또다시 위기가 오더라도 ‘노동시간 단축과 일자리 나누기에 입각한 고용보장’을 확약하도록 자본을 강제할 수도 있었다. 또한 부족한 인원은 희망퇴직자를 우선 복귀시키고 그래도 부족하면 정규직 신규채용을 하도록 관철시킬 수도 있었다.
그러나 현대차노조는 전혀 다른 길을 선택했다. 노조 위원장은 전체 조합원 집회에서 핏대를 올리며 “내 목에 칼이 들어와도 반드시 사내하청을 들여 놓겠다”는 발언을 서슴없이 내뿜었다.[8] 아직 1998년 정리해고 저지투쟁의 패배가 안겨준 정신적 충격으로부터 헤어나지 못한 조합원들은 ‘앞으로도 노동조합은 정리해고를 막을 수 없을 것’이라는 패배주의에 사로잡혀 있었다. 수동적이고 소극적인 현장 분위기 속에서 소수만이 반대 목소리를 냈을 뿐 다수 조합원들은 집행부의 기조를 수용했다.
결국 2000년 6월 현대차노조는 정규직 조합원의 고용을 보장받는 대신 부족한 생산인력은 사내하청 형태의 비정규직을 대거 투입하여 해결하기로 사측과 합의했다. 이른바 ‘완전고용보장 합의서’라는 어울리지 않은 제목을 단 이 합의서는 향후 고용위기가 발생할 경우 ‘비정규직을 정규직 고용의 방패막이로 사용한다’는 합의를 바탕에 깔고 있었다. 정규직의 완전고용 또한 그런 의미에서 보장한다는 것이었으며, 동시에 희망퇴직으로 밀려나간 옛 동료들의 재고용 가능성을 사실상 차단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해서 투입된 사내하청이 불과 몇 달 만에 전체 생산직의 30%를 넘는 1만여 명으로 급격히 확대됐다. 현대차노조와 회사의 합의는 명목상 IMF 외환위기 이전 사내하청 비율인 16.9%까지 투입을 허용한다는 것이었지만, 실제로는 현장 대의원의 동의 아래 개별 선거구 단위로 물밀 듯이 사내하청이 투입됐다.
그런데 사내하청은 정규직과 같은 사업장에서 같은 일을 하는데도 철저히 차별받았다. 임금은 정규직의 절반밖에 되지 않았다. 작업복이나 안전화는 정규직보다 훨씬 못한 품질로 지급받거나 또는 그마저도 지급받지 못했다. 일하다 다쳐도 산재를 신청할 엄두도 낼 수 없었고, 월차휴가 한 번 마음 놓고 쓸 수 없었다. 작업장에는 욕설과 반말이 서슴없이 날아다녔다. 정규직과 완전히 섞여 일하면서도 상대적으로 힘들고 어려운 공정을 떠맡아야 했다.
자타가 공인하는 가장 강력한 민주노조가 있다는 현대차에서 비정규직은 온갖 차별과 비참한 노동조건을 겪어야 했다. 정규직과 비정규직은 결코 하나의 노동자가 아니었다. 그러나 거의 모든 정규직 활동가들이 이러한 차별에 눈을 감았다. 아직 스스로 조직화하지 못했던 비정규직은 세상을 향해 자신들의 처지를 드러내는 것조차 제대로 할 수 없었다. 그렇게 비정규직의 현실이 방치되고 은폐되는 상태가 비정규직 스스로 노조를 설립하는 2003년까지 3년 가까이 지속됐다.
하청노동자들은 대부분 6개월 단위로 재계약을 했고, 그때마다 고용불안에 시달렸다. 대다수 하청업체가 동일한 양식의 근로계약서를 사용했는데, 거기에는 “관리자의 지시에 절대 따라야 하며 지시불이행 3회시 권고사직”, “퇴사시 7일전에 사직예고 통보의무, 양자 합의 후 결정”, “결근시 최소 전날까지 결근계 제출”, “근태불량, 지시불이행 등으로 시말서 2회 제출시는 스스로 사직”, “소급 1개월 내에 품질문제 3회 발생시는 어떠한 조치에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음”, “입사 3개월 수습기간 중 근무태도 불량과 업무 달성도가 떨어질 경우 어떠한 조치에도 아무런 이의를 제기할 수 없음”, “작업불량 유발자는 징계 해고” 등 사실상 노예계약이라 할 만한 조항들이 버젓이 들어 있었다.
정규직과 사내하청의 임금격차 또한 심각했다. 하청노동자 임금은 비슷한 시기 입사한 정규직에 비해 60% 정도에 머물렀다. 기본시급에서도 차이가 있었지만, 연장·야간·휴일 등 시간외 근로에 적용되는 통상시급에서는 차이가 더 벌어졌다. 하청노동자들은 수당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상여금은 명목상 400~600%를 지급한다고 했지만, 실제로는 그러지 못한 경우가 많았다. 입사 후 1년이 지나야 상여금을 온전히 지급하거나 작업실수를 빌미로 상여금을 삭감하곤 했기 때문이다.
복지 측면에서도 차별이 심각했다. 이를테면 정규직은 통근버스를 이용하고 작업복을 회사에서 세탁해 주었지만, 하청노동자들은 그런 혜택을 누리지 못했다.
1차 하청은 대부분 정규직과 뒤섞여서 작업을 했는데, 그러면서도 공공연한 차별에 시달렸다. 하청노동자는 대부분 더 어렵고 힘든 공정에서 작업해야 했는데, 정규직들은 반 단위로 작업 로테이션을 돌 때 하청노동자가 맡은 더 어렵고 힘든 공정은 빼고 돌았다. 반별로 써클룸·휴게실·탈의실 같은 공간이 배정돼 있었지만, 하청노동자는 이 공간을 쓰지 못하는 경우도 많았다.
2·3차 하청업체들은 대부분 작업공간이 독립돼 있었는데, 과거에 정규직이 일할 때보다 작업자 수가 줄어든 경우도 많았고, 발암물질을 사용하는데도 환풍기 하나 없이 작업을 하기도 했다. 2·3차 하청은 1차 하청에 비해서도 차별 받았다. 야간 근무 때 1차 하청은 정규직과 함께 야식 빵을 지급받았지만, 2·3차 하청은 받지 못했다. 추석 때 1차 하청은 상품권을 받았지만, 2·3차 하청은 소주 2병만 받았다.
하청노동자들에게 법정 최저기준을 지키지 않는 경우도 많았다. 일부 하청업체들은 법정 최저시급에도 못 미치는 임금을 지급하기도 했는데, 주로 여성 노동자들이 그 대상이었다. 4대 보험을 안 들어주는 경우도 꽤 많았다. 일요일 특근의 경우 노동시간의 70%, 토요일 특근의 경우 30%만을 인정해주는 업체도 있었다. 하기휴가를 무급으로 적용하는 업체도 있었고, 월차휴가·생리휴가를 사전에 신청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결근처리하기도 했다. 관리자들과 일부 정규직의 폭언과 폭력에도 시달려야 했다. 고3 실습생들은 허술한 기숙사에 모아놓고 수시로 철야근무를 강요했는데, 그 결과 36시간 내지 그 이상의 연속노동을 강제당하는 경우가 허다했다.
하청노동자는 열악한 작업환경에서 일을 하면서도 안전보호구 하나 제대로 지급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도장공장에서 일하는 하청노동자는 허술한 방진마스크 때문에 공장 안의 모든 유해물질을 들이마셔야 했다. 작업복이나 안전화도 제때에 교체받지 못했다. 안전교육을 채용시 그리고 월 2시간씩 하게 돼 있었지만, 제대로 되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하청업체에는 안전교육 담당자도 따로 없었고, 안전교육이 잔업시간에 배치될 경우 교육은 하지 않은 채 확인서명만 받고 퇴근시켜 버리는 경우가 많았다. 안전교육을 한다 해도 대부분 품질향상이나 불량지적 같은 엉뚱한 내용으로 채워졌다. 결국 하청노동자는 수시로 산업재해 위험 앞에 내몰릴 수밖에 없었다. 2001년 한해에만 현대자동차에서 4명의 하청노동자가 산업재해로 사망했다.[9]
2000년 이후 UPH는 끊임없이 증가하여 2년이 지난 지금 시간당 생산대수가 30% 이상씩 증가한 상황이다. 그동안 사측은 … 일방적으로 UPH 상승을 밀어붙여 보고 현장의 문제제기가 있으면 M/H 협상을 통해 전환배치와 하청투입으로 해결하는 방식으로 대응해왔다. … 문제는 실질 노동강도가 증가되고 있음에도 현장 조합원들은 노동강도 강화를 몸으로 느낄 수 없다는 것이다. 이는 … 정규직 노동자의 체감 노동강도 강화가 비정규직 노동자에게로 이전되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이다. 결국 … 조합원들은 … 노동강도 강화를 적당히 수용하면서 하청투입을 선호하는 현상이 나타나는 것이다.[10]
사측은 하청의 필요성을 현장에서 유포하면서 68차 임시대대의 결정(추가투입 인원은 반드시 정규직으로)을 무력화하기 위한 공작을 진행하고 있다. 최근 현장에서 하청 투입 문제와 관련하여 … 어떤 부서에서는 조합원 서명을 받아 노동조합에 하청 투입을 요구하는 작태가 있는가 하면 … 하청투입을 요구하는 조합원 투표도 추진하고 있다. 또한 일부 대의원들은 하청투입에 반대하는 대의원은 고립시키면서 하청투입을 합의해내는 상황도 나타나고 있다. 사측이 … 현장여론을 조작하면서 하청투입을 요구하게 만들고, 심지어는 대의원까지 그런 요구에 함께 하도록 작업하고 있는 것이다.[11]
현대차에서 벌어진 일들은 거의 모든 사업장에서 비슷한 형태로 되풀이됐다. 현대차처럼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정규직 고용의 방패막이로 쓰겠다며 노동조합이 대놓고 자본과 합의하는 일은 흔하지 않았지만, 본질적으로는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 가운데서도 2000년 말 한국통신계약직노조의 투쟁에 최소한의 연대 집회마저 거부했던 한국통신노조의 배신적 행태, 2001년 5월 캐리어사내하청노조의 조합원들을 직접 폭행하는 구사대 역할마저 서슴지 않았던 캐리어노조의 만행은 두드러진 것이었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게 쏟아지는 차별과 억압에 눈을 감고,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투쟁을 서슴없이 배신하면서도 별다른 죄의식을 느끼지 못할 정도로, 2000년대 초반의 이른바 ‘민주노조’들은 추악하게 변질돼 있었다.
◎ 변혁성의 상실
‘변혁성’은 민주노조운동을 통해 새로운 세상으로 전진하고자 하는 열망의 표현이자 끝없는 헌신과 희생의 원천이었다. 초창기 민주노조들은 (비록 그 개념이 충분히 명료하지는 못했다 하더라도) ‘노동해방’을 거침없이 꿈꾸고 노래했다. 그러나 2000년대 초반에 이르렀을 때 이른바 ‘민주노조’들은 노동해방과 근본적인 사회변혁을 더 이상 꿈꾸거나 노래하지 않았다.
민주노총은 출범 시점부터 전노협이 내걸었던 ‘노동해방’ 대신 ‘사회대개혁’을 내걸었다. 민주노동당이 출범하고 난 뒤에는 ‘세상을 바꾸자’는 구호가 널리 사용됐다. ‘사회대개혁’과 ‘세상을 바꾸자’는 구호 속에 담긴 것은 자본주의 모순에 정면으로 도전하면서 근본적인 사회변혁을 추구하는 대담한 의지가 아니었다. ‘자본주의 틀 안에서 조금씩 세상을 바꿔가는 것만으로 충분하거나 또는 그것만이 가능하고 현실적인 것’이라는 개량주의적인 환상이었다.
1998년부터 한국 사회에 거세게 휘몰아친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광풍은 세계 최장의 노동시간, 세계 최고의 자살률, 세계 최저의 출산율로 대표되는 것처럼 한국 사회를 세계 어느 곳보다 살기 힘든 곳으로 변모시켰다. 급격한 비정규직 확산과 심각한 사회 양극화 속에서 노동자·민중이 처해 있는 현실은 그 어느 때보다 그 어느 곳보다 더욱 더 자본주의 모순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근본적인 사회변혁을 절실히 요구했다. 그러나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광풍을 헤쳐 오면서도 민주노총으로 포괄된 ‘민주노조’ 운동 전반은 그 출범부터 안고 있던 개량주의적 환상 속에 깊이 빠져든 채 좀처럼 헤어나지 못했다.
변혁성을 상실함으로써 자본주의 모순에 정면으로 도전할 의지와 능력을 갖추지 못한 ‘민주노조’ 운동은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광풍 앞에서 근본적인 한계를 드러낼 수밖에 없었다. 구조조정과 정리해고를 앞세운 자본의 공세에 숱한 패배를 거듭할 수밖에 없었다.
‘민주노조’ 운동 전반을 휘감게 된 개량주의적 환상, 즉 변혁성의 상실은 자주성·민주성·전투성·연대성의 상실을 가져온 근본 원인이기도 했다. 또한 ‘민주노조’ 운동이 대기업 정규직 노동자들만의 운동으로 쪼그라든 채 전체 노동자들을 대표하지 못하고 광범한 노동자·민중의 희망으로 서지 못하게 한 근본 원인이기도 했다.
2) 현장조직운동의 가능성과 퇴행
◎ 노조간부와 현장활동가들의 노선 분화
1990년대를 거치면서 민주노조운동 내 노조간부와 현장활동가들 사이에서 뚜렷한 노선 분화가 전개됐다. IMF 외환위기와 신자유주의 공세가 본격화한 1990년대 후반까지, 노조간부와 현장활동가들은 크게 세 개의 경향으로 뚜렷이 분화됐다.
민족해방파를 모태로 한 원조 타협·개량주의 - ‘국민파’
1980년대 중반 학생운동에서 다수를 장악한 민족해방파(NL)는 민주노조운동 안에서도 상당한 세력을 형성했다. 그러나 전노협이 건설되고 강력한 기세를 유지하는 동안 전노협 안에서 민족해방파의 영향력은 그다지 크지 못했다. 전노협 건설 시기에 민족해방파의 상당수가 ‘한국노총 민주화’론을 주장하며 전노협에 결합하지 않은 까닭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전노협을 중심으로 거침없이 성장하는 선진노동자들의 계급의식을 민족해방파의 민족주의 노선으로는 감당해 낼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그 시기에 민족해방파는 전투성·급진성의 강도가 약했던 사무전문직과 일부 대공장을 중심으로 영향력을 유지했다.
1992년 대통령 선거에서 민족해방파는 ‘범민주후보 단일화’라는 명목으로 다시 한 번 ‘김대중에 대한 비판적 지지’를 선언하면서 학생운동과 민중운동의 많은 역량을 김대중 후보 선거운동으로 몰고 들어갔다.[12]
1992년 ‘민주대개혁과 민주정부 수립을 위한 전국노동자선거대책본부’(노동자선대본)가 전노협, 업종회의, 현대자동차·대우자동차·풍산금속 등의 대공장 노조, 수도권 노동단체 연석회의 등 노동단체들의 참여로 구성됐다. 그러나 전노협의 다수는 김대중 후보를 지지하라는 전국연합의 정치방침을 동의할 수 없었고, 따라서 노동자선대본은 전국연합의 결정을 앞장세워 전노협의 이름을 끌어넣긴 했지만, 실제로는 민족해방파의 영향력 아래 있던 노동자들만 모인 선거운동 기구가 됐다.
노동자선대본은 민족해방파의 영향력 아래 있던 노동자들이 전국적으로 세력을 결집시키는 중요한 계기가 됐다. 그 뒤 이들은 전노협 안팎에서 공동 대응을 펼치면서 전노협 한계론을 널리 확산시켜 나가는 주역으로 활약했다.
민족해방파의 영향력 아래 있던 노조간부·현장활동가들은 민주노조운동에서 원조 타협·개량주의 세력이었다. 전노협 안에서는 주도권을 잡아본 적이 없었지만, 민주노총 건설과정에서 민주노조운동의 주도세력으로 부상했다. 이들은 민주노총 출범과 함께 ‘국민과 함께 하는 노동운동’을 적극 주창하게 되는데, 이를 계기로 이른바 ‘국민파’로 널리 알려지게 됐다.
민주노총 1기 국민파 지도부는 1996~97년 노개투 총파업이 초라한 결과만을 남기는 과정에서 결정적 역할을 했다. 스스로를 광범위한 민족주의 운동의 일부로 인식하면서 노동자계급의 단결된 투쟁력보다 국민 여론을 우선했기 때문이다. 민주노총을 계속 이끌던 국민파 지도부는 1998년 2월 노사정위원회에서 정리해고 도입에 합의한 후 대의원대회에서 압도적으로 탄핵 당했다.[13]
청산주의에 휩쓸리며 새로 등장한 타협·개량주의 - ‘중앙파’
전투적·변혁적 노선을 견지하던 노조간부와 현장활동가들 가운데 상당수가 1991년 소련 붕괴와 1993년 ‘문민정부’를 표방한 김영삼 정권의 출범 이후 타협·개량주의 노선으로 전환해 갔다.
1987년 노동자대투쟁 이후 사회주의 운동의 직간접적 영향력 아래서 한창 성장해 가던 선진노동자들에게 소련의 붕괴는 해명할 수 없는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하지만 그들을 더욱 심각한 혼란에 빠뜨린 것은 사회주의 운동을 휩쓴 청산주의 물결이었다. 특히 인민노련·삼민동맹·노동계급 세 정파의 통합으로 1991년 6월 출범한 ‘한국사회주의노동자당창당준비위원회’(한사노창준위)가 8월에 소련 붕괴를 겪은 뒤 하반기 내부 논의를 통해 빠르게 청산주의로 전환한 사건은 가장 직접적인 악영향을 미쳤다. 박노해와 같은 걸출한 인물을 앞세워 시끌벅적하게 사회주의 운동을 주창하고 있던 ‘남한사회주의노동자동맹’(사노맹)이 차츰 청산주의 흐름으로 돌아선 과정도 만만치 않은 악영향을 미쳤다. 이처럼 1992년과 1993년을 거치며 한사노창준위와 사노맹 등 과거 사회주의자들 가운데 다수가 청산주의에 빠져 개량주의 정치노선을 들고 나오자 그 영향력 아래 있던 선진노동자들도 다수가 그들을 따라 타협·개량주의 노선으로 전환했다.
사회주의 운동의 간접적 영향력 아래 있으면서 한동안 전노협의 전투적 노선을 대표했던 상층 노조간부들 또한 타협·개량주의 노선으로 합류했다. 이 흐름은 전노협 초대 위원장 단병호와 걸출한 학생출신 활동가로서 마창노련과 서노협에서 큰 영향력을 갖고 있던 문성현·심상정으로 대표됐다. 이들은 애초 전노협 강화론과 전노협 한계론이 공개적인 논쟁을 시작했을 때 전노협 강화론에 서 있었으나 이후 사실상 전노협 한계론으로 노선을 수정해 나갔다.[14] 이들이 전노협 시기에 선진노동자들 속에 쌓은 두터운 신망 때문에 많은 노동자들은 그들의 타협·개량주의로의 전환을 몇 년 동안 명확히 판단하지 못했다. 이들은 민주노총 건설 이후 정리해고를 비롯한 자본의 신자유주의 공세 앞에서 대중의 투쟁의지를 배신하며 굴욕적인 타협을 주창하고 나섬으로써 자신들의 타협·개량주의 노선으로의 전환을 스스로 입증했다.
이처럼 사회주의 운동의 직간접적인 영향력 아래 있다가 청산주의 흐름을 따라 타협·개량주의로 전환한 노조간부·현장활동가들은 IMF 외환위기를 거치면서 노동조합 중앙의 상층 지도부를 중심으로 한 세력이라는 뜻의 이른바 ‘중앙파’를 형성하게 됐다.
그런데 중앙파를 구성하게 된 여러 작은 흐름들이 중앙파라는 하나의 큰 흐름으로 결집한 것은 1998년에 이르러서였다. 이들은 이미 1993년 무렵에 각기 타협·개량주의 노선으로 전환하였지만, 노동자운동의 핵심 전망으로 진보정당과 산별노조를 각기 배타적으로 주장함으로써 서로 대립하는 등 한동안 분열된 상태에 놓여 있었다. 결국 이들은 진보정당과 산별노조를 동시에 추진하자는 통합된 전망을 통해 하나로 결집할 수 있었다. 실천적으로 볼 때 중앙파를 하나로 묶어세운 결정적 계기는 1998년 현대자동차 정리해고 저지투쟁에서 ‘최소화된 정리해고’라는 배신적 투항을 함께 옹호하고 합리화한 사건이었다.
전투적·변혁적 지향을 가진 선진노동자들 - ‘현장파’
1993년 말에 이르렀을 때, 전노협에서 전투적·변혁적 노선을 견지하는 세력은 상층 지도부에서는 소수파가 됐다. 그러나 현장에서는 전투적·변혁적 세력이 여전히 상당한 기반을 갖고 있었다. 또한 1993년부터 1995년까지 힘차게 뻗어 나간 민간부문과 공공부문 대기업 노동자들의 파업을 거치면서, 이들 대기업 노동자운동 속에서 새롭게 상당한 기반을 구축하게 됐다.
특히 대공장의 전투적인 선진노동자들은 1995년부터 자본의 신경영전략에 맞선 현장투쟁 속에서 현장조직을 건설해 나갔다. 이러한 현장조직은 타협·개량주의 노선이 노동조합 상층부에서 뚜렷하게 주도권을 장악해 가는 데 맞서 ‘현장권력 쟁취! 계급적 연대!’를 기치로 아래로부터 전투적·변혁적 세력이 구축돼 나가는 데서 매우 중요한 기반이 됐다.
이렇게 사회주의자들의 직간접적인 영향력 아래 있으면서 전투적·변혁적 노선을 견지했던 선진노동자들은 현장을 중심으로 아래로부터 투쟁을 조직해 나간다는 의미의 이른바 ‘현장파’를 형성하게 됐다.
현장파는 정리해고를 비롯한 자본의 신자유주의 공세 앞에서 국민파와 중앙파가 배신적 투항을 거듭하자 이를 강력하게 규탄하면서 역동적으로 민주노조운동의 주도권을 획득했다. 특히 1998년 2월 민주노총 대의원대회에서 1기 지도부 탄핵을 주도했다. 그러나 현장파 또한 많은 한계를 드러내면서 얼마 못 가서 주도권을 잃었다. 2000년대에 들어서서 현장파의 다수는 국민파와 중앙파의 뒤를 이어 비슷한 관료적 타락과 변절의 길을 걸었다.
◎ 현장조직운동의 전개
1990년대 중반 이후 민주노조운동 전반이 자본의 신자유주의 공세에 패퇴를 거듭하는 과정에서, 현장조직운동은 노동자들이 아래로부터 결집한 힘으로 타협·개량주의 지도부의 한계와 오류를 질타하고 전투적·변혁적 대안을 모색하던 중요한 수단이었다. 그러나 많은 가능성을 보여주며 등장했던 이 시기 현장조직운동은 오래지 않아 자기 한계를 여실히 드러내며 추락과 변질의 길을 걸었다.
1990년대 초반까지 선진노동자 조직
노동조합 공식 체계로부터 독립된, 선진노동자들의 독자적인 조직 운동은 일찍이 1980년대 말부터 다양한 형태로 등장했다. 선봉대·소위원회 등이 노동조합 체계 안으로 포괄되어 존재했다면, 다양한 수준의 학습모임, 부서별 활동가 모임, 노조민주화추진위원회 등은 노동조합 공식 체계 밖에 존재했다. 1990년대 초반까지 이러한 선진노동자 조직들은 대체로 한 사업장 안에서도 다양한 형태로 복수로 존재하였으며, 연대투쟁이 활성화된 지역에서는 지역 단위로 존재하기도 했다.
이 시기 선진노동자들은 (노동조합 공식 체계에서 어떤 직책을 맡고 있는가와 상관없이) 자발적인 헌신과 실천을 통해 조합원들 속에서 민주노조운동의 실질적인 선봉 대오로 그 역할을 인정받았다. 선봉대와 소위원회 같은 일부 선진노동자 조직이 노동조합 공식 체계 속에 자리를 잡게 된 것도 그 반영이었다.
이 시기에는 노동조합 지도부가 전체 조합원의 뜻과 어긋나거나 배신할 경우 그 지도력이 상대적으로 쉽게 부정당했다. 그런 경우 전투적·변혁적 선진노동자들이 조합원대중 속에서 실질적인 지도력을 인정받으면서 파업을 비롯한 격렬한 투쟁들을 직접 이끄는 사례도 드물지 않았다.[15]
이 시기에 선진노동자 조직에 참여했던 현장활동가들은 대체로 전투적·변혁적 기세로 충만해 있었고, 학습과 실천을 결합시키며 노동자의식을 맹렬하게 발전시켜 나갔다. 그들 가운데 상당수는 사회주의 운동으로부터 직간접적인 영향을 받았으며, 가장 선진적인 노동자들은 스스로 사회주의 운동에 동참하기도 했다.
1990년대 중반 국민파 타협·개량주의에 맞선 현장조직 운동의 본격화
그런데 1990년대 중반에 이르러 상황이 많이 달라졌다. 한편에서 전투적·변혁적 노선이 일부 대기업 노동자운동 속으로 확산되기도 했지만, 민주노조운동 전반으로 보자면 타협·개량주의 세력이 빠르게 확산돼 민주노조운동 전체의 주도권을 거머쥐게 됐다. 특히 타협·개량주의 세력의 주도권 아래 민주노총이 출범해 나가는 과정은 타협·개량주의 세력의 기세를 한껏 부풀리고 있었다.
민주노조운동 전반에서 타협·개량주의 세력이 확장되는 것을 반영하여, 현장활동가들 속에서도 타협·개량주의 세력이 늘어나고 있었다. 이제 현장활동가들의 조직은 더 이상 전투적·변혁적 기세만으로 충만하지 않았고, 전투적·변혁적 기세가 약화되는 것과 비례하여 노동조합 공식 체계를 능가했던 노동자들 속에서의 실질적인 지도력도 약화되거나 소멸돼 갔다.
하지만 여전히 현장활동가들 속에서는 전투적·변혁적 흐름들이 우세했다. 특히 울산을 중심으로 한 일부 제조업 대공장 노동자운동에서 그러한 경향이 강하게 존재했다.[16]
이런 상황에서, 국민파로 대표되는 타협·개량주의 세력이 민주노총과 대다수 대공장 노조들의 집행부를 장악해 나가자, 전투적·변혁적 선진노동자들을 중심으로 한 현장활동가들은 사업장별로 단일조직을 건설하는 흐름으로 나아갔다. 대표적으로 울산에서는 1995년을 거치며 ‘현대자동차 민주노동자투쟁위원회’(민투위), ‘현대중공업 전진하는 노동자회’(전노회), ‘현대정공 부서동지회연합’(동지회), ‘울산남부지역 노동자연합 추진위원회’(남연추) 등이 출현했다. 이른바 현장조직의 본격적인 등장이었다.[17]
현장조직들은 지역과 전국 차원에서 연대 기구 건설로 나아갔다. 가장 먼저 울산에서 1996년을 거치며 ‘울산지역 현장조직대표자회의’가 건설됐다. 1996~97년 노개투 총파업이 민주노총 지도부의 배신적 행태로 허망하게 종결된 직후인 1997년 3월에는 전국의 10여개 현장조직들이 모여 ‘전국현장조직대표자회의’(전국회의)를 건설했다.
이 시기의 현장조직들은 대체로 전투적·변혁적 선진노동자들이 주도했다. 현장조직들은 1996~97년 총파업을 준비하고 실행하는 데서 헌신적으로 앞장섰다. 또한 민주노총 지도부와 현총련 등에 의해 적극적으로 주창되던 ‘국민과 함께 하는 노동운동’, 기아자동차노조 집행부가 회사 부도사태에 직면하여 내세운 ‘회사 살리기’ 등의 투항적인 개량주의 노선을 강력히 비판했다.
위기를 노동자에 대한 공격으로 극복하고자 하는 자본의 계급성에 대해 경제 살리기, 노사화합이라는 몰계급성으로 답하는 민주노총 상층의 태도에서 자본의 승리는 예정된 것이었다. 자본과의 비타협적인 투쟁으로 건설되고 사수된 전노협에 대해 활동가들이 가졌던 ‘내가 곧 전노협이다’라는 일체감은 노사협조주의 세력들이 민주노총 상층의 다수를 차지하면서 약화되고 있다.
기업별로 노조민주화 투쟁과 자본에 맞서는 투쟁을 하면서 활동의 고유영역을 찾았던 현장조직은 이제 전국적인 결집을 도모하면서 남한 노동운동의 계급적 발전을 고민해야 하는 운동의 무게를 하나 더 짊어지게 됐다.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이러한 중차대한 임무를 기꺼이 받아들일 것이다. …
하나, 우리는 자주성, 전투성, 계급성, 연대성으로 대변되는 자랑스러운 민주노조운동의 정신을 되살리고 발전시키기 위해 분투할 것을 결의한다.
하나, 우리는 현장조직운동 세력들의 지속적인 결합을 모색하여 현장조직운동을 확대, 강화, 발전시키기 위해 노력할 것을 결의한다.
하나, 우리는 노사협조주의의 다른 이름인 '국민과 함께 하는 노동운동'을 비판하고 민주노총을 올바르게 세워내기 위해 투쟁할 것을 결의한다.
하나, 우리는 현장에서의 끊임없는 실천투쟁을 통해 노동자의 계급적 단결에 복무하는 아래로부터의 산별노조 건설에 박차를 가할 것을 결의한다.
하나, 우리는 제도권 진출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닌 노동자계급의 완전한 해방을 위한 노동자의 정치세력화를 도모할 것을 결의한다.[18]
그러나 현장조직들 내부에도 타협·개량주의 세력이 이미 상당히 형성돼 있었다. 이로 인해 현장조직들은 일정한 내부 분란을 겪어야 했다. 가장 분란이 심했던 현대자동차 민투위의 경우 1997년 8월에 노조 선거를 앞두고 조직원의 절반가량이 이탈하여 국민파 노선의 새로운 현장조직 ‘실천하는 노동자회’(실노회)를 결성했다.
현장조직의 지역적·전국적 연대 사업 또한 잘 이루어지지 않았다. 전국회의의 경우 참석자가 적어 회의 진행조차 쉽지 않은 경우가 많았다. 성명서 발표, 토론회 개최, 전국노동자대회 전야제에서의 독자집회 정도가 1997년 전국회의 사업의 사실상 전부였다.
1998년 잠시 민주노총의 주도권을 획득한 전투적·변혁적 세력
그런데 IMF 외환위기를 향해 치달아가던 1997년 하반기에, 전국회의에 소속된 현장조직들이 현대자동차, 기아자동차, 대우자동차, 아시아자동차, 현대정공, 한라중공업, 캐리어, 기아정기 등 다수의 대공장에서 대거 노조 집행부를 장악하게 됐다. 대부분 현장조직의 실천력과 조직력을 앞세운 젊은 활동가들이 노사협조주의(타협·개량주의) 성향의 쟁쟁한 명망가들을 제치고 당선되는 양상이었다. 자본의 공격과 생존권 위기를 직감한 노동자들이 노동조합의 대응력을 극대화하기 위해 가장 전투적인 세력을 선택한 결과였다.
이런 기세를 몰아 전국회의 소속 현장조직들은 민주노총 1기 지도부가 노사정위원회에서 정리해고 도입을 합의해 준 데 맞서 1998년 2월 9일 민주노총 대의원대회에서 1기 지도부를 탄핵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국민과 함께 하는 노동운동’을 앞세운 민주노총 지도부의 타협·개량주의 노선이 정리해고 도입 합의라는 참혹한 결과로 귀결된 상황에서, 이와 같은 전국회의 현장조직들의 부상은 매우 신선한 충격이었다. 그 충격은 1998년 3월말에 열린 민주노총 2기 임원 선거에도 그대로 반영됐다. 선거권을 가진 대의원의 다수가 국민파의 영향력 아래 있었으나, 예상을 깨고 전국회의를 중심으로 전투적·변혁적 세력이 주도하여 내세운 이갑용-고영주 후보조가 당선됐다.
위기의 순간에 극적으로 등장함으로써, 전투적·변혁적 세력은 작은 역량을 갖고도 민주노총 전체를 이끌어 나갈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총자본의 신자유주의 공세에 맞서 전투적·변혁적 노선에 입각하여 민주노총의 총반격 투쟁을 주도해 나갈 수 있는 가능성을 획득한 것이었다.
중앙파의 배신적 이탈
그러나 민주노조운동 전반에 대한 전투적·변혁적 세력의 주도권은 형성될 때만큼이나 빠르게 소멸됐다. 먼저 단호한 기세로 5월말 총파업까지 이끌어 나가던 민주노총 2기 지도부가 금속연맹, 공공연맹, 현대차노조 등 주요 단위들을 이끌던 중앙파의 압력에 굴복해 노사정위원회로 복귀하면서 더 이상 전투적·변혁적 노선을 일관되게 실천할 수 없게 됐다.
전국회의 소속 현장조직들도 심각한 문제를 드러냈다. 전국회의 소속 현장조직들이 배출했던 대공장 노조 집행부들이 1998년을 경과하면서 구조조정과 정리해고에 맞선 투쟁 속에서 투항적인 배신을 거듭했다. 현장조직 출신 대공장 집행부들은 중앙파의 논리로 자기 입장을 정리해 나갔다. 이들은 “강력한 투쟁으로 생존권을 사수하겠다”고 약속함으로써 조합원들의 지지를 얻어 집행부를 장악할 수 있었지만, 그러한 투쟁을 실제로 결행할 수 있는 전망과 태세를 제대로 갖추고 있지는 못했다. 따라서 자본의 공격이 점차 구체화되자 노동자의 생존권을 포기하는 투항적인 길로 나아갈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 때 노동자의 생존권을 팔아먹는 굴욕적인 노사협조주의 노선을 그럴싸하게 합리화하는 논리구조가 바로 중앙파의 ‘정리해고 최소화’, ‘현실 가능한 것을 목표로’, ‘정리해고 저지 대신 산별협약 추진’ 노선이었다. 현장조직 출신 대공장 집행부들은 중앙파의 논리를 따라 투항적인 배신의 길을 함께 걸으면서 서로를 합리화해 주었다.
중앙파의 이탈은 현장조직의 분화로 이어졌다. 많은 현장조직에서 중앙파가 이탈해 별도의 현장조직을 만들었다. 한 사업장에서 국민파·중앙파·현장파의 현장조직들이 따로따로 존재하는 경우가 많아졌고, 하나의 조직을 유지하는 경우에도 내부의 경계선이 뚜렷해졌다.
2001년 4월 국민파 경향의 현장조직들이 전국적으로 결집하여 ‘민주노동자 전국회의’를 결성했다. 중앙파 경향의 현장조직들도 자신들만의 전국적 네트워크를 가동해 나갔다. 전국회의는 현장파의 성격을 분명히 하는 조직이 됐다.
현장파의 추락
중앙파 세력과 분리된 현장파 현장조직은 중앙파가 떠나간 빈자리를 새로운 선진노동자들로 채워 넣으면서 빠르게 전열을 재구축했다. 2000년 하반기 현대차노조의 국민파 집행부가 ‘광고비 대납 사건’으로 사퇴한 이후 2001년 현장파 민투위 집행부가 등장한 것은 현장파의 세력 회복을 상징했다. 현장파가 전투적·변혁적 노선을 실천함으로써 타협·개량주의 세력의 배신적 투항과 다른 길이 존재함을 보여줄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다시 한 번 왔다.
그러나 절호의 기회는 현장파의 위상을 결정적으로 추락시키는 참사로 귀결됐다. 현장파의 가장 대표적인 현장조직이던 민투위가 배출한 현대차노조 집행부는 2001년 계급투쟁의 결정적 분기점이었던 7·5 총파업에 불참했다. 신자유주의 구조조정 분쇄와 김대중 정권 퇴진을 내건 전국적인 노동자투쟁 전선에 대한 노골적인 배신이었다. 현장파의 실천은 국민파·중앙파의 타협·개량주의와 구분되지 못했다. 현장파 또한 전투적·변혁적 노선을 감당할 수 없는 세력으로 추락하고 있음을 단적으로 보여준 사건이었다.
현장조직운동의 한계
중앙파의 배신적 이탈이나 현장파의 추락은 무엇보다 이 시기 현장조직 운동이 가진 사상적·실천적 취약함에서 비롯됐다. 현장조직은 노사협조주의(타협·개량주의) 지도부가 저지르는 투항적 배신에 강하게 분노하고 규탄했다. 그러나 지도부의 투항적 배신에 대한 현장조직의 분노는 현장으로부터 올라오는 건강한 감성이긴 했지만, 그러한 분노가 계급적 본능을 넘어 체계적인 사상과 노선으로 나아가 계급적·변혁적 실천으로 정립되지는 못했다. 너무나 명백한 투항적 배신에는 분노하면서도 그러한 투항적 배신의 원인을 체계적으로 규명하고 극복하기 위한 사상적·실천적 노력에는 게을렀다.
현장조직은 (적어도 초기에는) 자기 조직 출신인가에 상관없이 집행부가 투항적인 배신으로 나아가는 것을 강력하게 질타하고 비판했다. 그런데 집행부에 대한 현장조직의 질타와 비판은, 현장조직 자신의 사상적·실천적 한계를 인식하고 이를 극복하려는 도전으로 이어져야 했으나 그러지 못했다. 현장조직은 현장으로부터 올라오는 노동자들의 계급적 본능에 따라 자본주의 위기와 자본가들의 공격에 정면으로 맞서려는 전투적·변혁적 지향으로 출발했지만, 집행부를 장악했을 때는 사상적·실천적 취약함으로 인해 자본주의 위기가 가하는 거대한 압력에 마찬가지로 굴복하면서 투항하고 말았던 것이다.
현장조직운동의 변질
현장파마저 전투적·변혁적 노선으로부터 사실상 이탈해 버리자, 현장조직 전반의 성격은 심각한 변화를 겪게 됐다. 이제 진지한 운동적 지향이 아니라 노조 집행부 장악을 향한 이전투구가 거의 대부분의 현장조직을 지배하게 됐다. 현장파가 보여준 말과 실천의 불일치를 토대로 어지간한 현장조직들마다 거침없이 그럴싸한 말들을 책임질 의사도 없이 내뱉을 수 있게 되면서, 전혀 실천되지 않는 말장난들로 치장한 현장조직들의 위선과 기만이 사업장마다 범람하게 됐다. 국민파·중앙파·현장파 안에서도 다시 두세 개로 현장조직들이 분화돼 나가고 어용 세력들마저 두세 개의 현장조직을 만들고 나오면서, 한 사업장에 10여 개에 가까운 현장조직이 난립하기도 했다.
수많은 말잔치와 달리 대다수 현장조직들은 자본의 신자유주의 공세에 대한 실질적 굴종, 노사협조주의와 관료주의의 확산, 비정규직 등 투쟁하는 노동자들에 대한 연대 방기 등에서 비슷한 모습을 드러냈다. 또한 선거를 둘러싼 파벌적 관계들을 전체 조합원 속으로 확장함으로써 대중을 끊임없이 분열시켜 나갔다. 대다수 현장조직들은 관료주의에 빠진 노조간부들의 근거지로 전락해 버렸고, 이러한 현실은 민주노조운동에 대한 조합원대중의 실망과 냉소를 더욱 부추겨 나갔다.
3) 비정규직의 급격한 확산
IMF 외환위기 이전에도 한국의 비정규직 비율은 꽤 높았다. 1990년대 초중반에 비정규직은 대체로 전체 노동자의 40% 정도를 차지하고 있었다.
IMF 외환위기 이전 비정규직의 주축은 업무 특성상 일일고용이 만연한 건설·항만 노동자들, 근로계약의 과정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던 영세사업장 노동자들이었다. 그런데 상시지속업무를 하는 대규모 제조업체, 즉 대공장에도 비정규직이 존재했다. 특히 조선업과 철강업은 1970년대 초반 산업이 출발할 때부터 직영과 함께 사내하청·외주하청·일용공 등으로 통칭되는 사내 비정규직을 상당한 규모로 운영했다.
이를테면 현대중공업의 경우, 1972년 3월 현대건설 조선사업부 체제로 울산조선소 기공식이 열리고 얼마 지나지 않은 1973년 7월부터 ‘위임관리제’라는 이름으로 사내하청 제도가 도입됐다. 1973년 12월 ‘현대조선중공업’을 정식 설립하기도 전이었다. 사원 대우를 해주겠다며 모집한 직영 기능공의 대다수를 사내하청으로 전환하는 조치에 노동자들은 크게 분노했다. 1974년 9월 19일 현대조선 노동자 3천 명이 참여한 파업에서도 ‘도급제 폐지’가 핵심 요구였다. 그러나 위임관리제 전환은 강행됐고, 전환이 완료된 10월말 전체 기능직 가운데 직영공은 3,929명(26.6%), 사내하청은 10,852명(73.4%)이었다.[19]
현대중공업 사내하청은 1977년 12월 17,500명까지 늘었다가 경제위기를 거치며 1981년 12월 6,000명으로 줄었다. 1980년대 초반 해양부문 합병과 사업 확장으로 직영공이 6,000명에서 17,000명으로 급증했다가, 1985~86년 조선업 불황으로 다시 직영공 2,000명, 사내하청 2,000명이 감원됐다. 그래서 1987년 노동자대투쟁이 터졌을 때 현대중공업에는 직영공 15,000명과 사내하청 4,000명 정도가 일하고 있었다.[20]
그런데 1987년 이전에는 정규직과 비정규직 사이에 임금, 노동조건, 작업장 내 지위 등에서 차이가 크지 않았다. 모든 노동자들이 저임금과 장시간·고강도 노동, 폭력적인 현장통제에 시달리며 극히 열악한 삶을 살아야 했기 때문이다. 비정규직의 고용이 상대적으로 더 불안정하긴 했지만, 정규직이라고 딱히 안정적인 것도 아니었다. 노동자들은 고용안정보다 지옥 같은 현장에서 탈출하기를 원했다. 일자리는 어디를 가나 열악했다. 대신 일자리를 새로 구하는 것은 크게 어렵지 않았다.
그래서 1987년 이전 노동자들은 정규직과 비정규직 사이에서 서로 이질감을 느끼지 않았다. 1987년 노동자대투쟁 때 사내하청 노동자들이 직영 노동자들과 함께 자연스럽게 노동조합 건설에 동참했고, ‘하청 직영화’ 등의 요구를 함께 내걸고 관철했다.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1987년 노동자대투쟁을 선도했던 현대중공업 노동조합이었다.
반면 자동차산업 등에서는 1987년 이전에 사내하청이 비생산 업무에서만 제한적으로 활용됐다. 따라서 1987년 노동조합을 설립할 때 비정규직 의제가 따로 등장하지 않았다.
한국 사회에서 비정규직이 산업 전반으로 본격 확산되기 시작한 것은 1990년대 초반이었다. 노동자들은 1987년 노동자대투쟁과 이후 몇 년 간의 격렬한 파업투쟁을 통해 민주노조를 건설·강화했고, 임금을 획기적으로 인상시켰으며, 노동조건을 개선시켜 나갔다. 전국적으로 수천 명이 해고당하는 등 큰 희생을 치르긴 했지만, 노동자들에게는 위대한 전진의 시간이었다. 몇 년 동안 하염없이 밀리던 자본가들은 마침내 체제를 정비하고 이른바 ‘신경영전략’을 앞세워 1990년대 초반부터 대대적인 반격에 나섰다. 노동조합을 약화시키고 이윤을 회복하기 위한 온갖 대책들이 버무려진 신경영전략의 핵심 가운데 하나가 바로 비정규직의 확산이었다.
1990년대 초반 비정규직은 먼저 사무전문직에서부터 크게 확산됐는데, 흔히 용역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비정규직은 곧바로 제조업 전반으로 확대됐는데, 여기서는 소사장제와 사내하청이라는 이름이 함께 쓰였다. 사내하청은 불과 몇 년 만에 일정 규모 이상의 제조업체 전반에 깊이 파고들었다. 이를테면 1994년 한국중공업에는 사내하청 업체가 500여 개에 이르렀고, 쌍용중공업에는 80여 개, 현대정공 창원공장에는 20여 개의 사내하청 업체가 있었다. 현대중공업에서는 1987년 노동자대투쟁 때의 노사합의에 따라 1989년 하청 직영화가 완료되고 하청업체가 완전히 사라졌지만, 1990년대 들어 하청이 다시 생겨나더니 1996년에는 하청노동자 수가 직영의 31.7%로까지 늘어났다.
1990년대 제조업 사내하청의 확대는 주로 사측의 일방적 방침에 따라 또는 사측의 현장 생산관리 부서와 노조의 현장 대의원들 사이의 합의를 통해 이루어졌다. 사내하청 문제가 노사간의 단체교섭에서 다루어진 경우는 거의 없었다.
사내하청에게 넘어간 자리는 대부분 노동자들이 꺼리는 위험하고 힘든 작업공정이었다. 1987년 노동자대투쟁 이후 노동자들의 의식이 높아지고 안전에 대한 관심이 강화되면서 위험하고 힘든 작업에 대한 기피 현상이 크게 확대됐다. 그런데 자본은 위험하고 힘든 작업공정을 시설투자를 통한 공정개선으로 극복하지 않고 더 취약한 노동자들을 투입하여 해결하려 했다. 대기업의 경우 주로 하청이관을 통해 하청노동자들이 투입됐다면, 중소기업의 경우 주로 산업연수생 제도를 통해 이주노동자들이 투입됐다.
사내하청 노동자들의 임금은 정규직의 6~70% 선에 머물렀다. 이 시기 하청노동자들의 임금을 끌어내린 주역은 하청업자들의 중간착취였다. 1994년 <주간내일신문>이 밝힌 바에 따르면, 어느 제조업체의 사내 하청업자는 하청노동자 1인당 원청으로부터 48만 2,790원을 지급받았지만, 30만 4,170원만을 임금으로 지급함으로써 17만 8,620원을 중간착취하고 있었다. 원청으로부터 받은 금액의 63%만을 임금으로 지급하고 무려 37%를 중간착취한 셈이다.[21] 그 무렵 창원 현대정공의 한 하청 사장은 “하청노동자 한 사람당 10만원으로 보면 된다. 20명 정도면 내 수입이 한 달에 2백만원 되고, 30명 되면 3백만원 된다”고 말했다.
1990년대 제조업 전반으로 확대된 사내하청은 위험하고 힘든 일을 도맡아 하면서도 훨씬 더 적은 임금을 받는 노동자들이 됐다. 1987년 이전과 달리 정규직과 사내하청 사이에는 임금, 노동조건, 작업장 내 지위에서 뚜렷한 차이가 존재했다.
현대자동차는 1990년대 초반부터 생산부문에서도 하청화 및 외주화를 꾸준히 진행했다. 하청이관은 처음에는 서브라인 공정에서부터 시작됐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메인라인 공정 여기저기로 파고들었다. 상대적으로 위험하고 힘들어서 조합원들이 기피하는 작업공정이 하청이관의 우선 대상이었다. 장비 자동화를 명분으로 조합원들을 전출 보낸 뒤 그 자리에 하청을 투입하는 경우도 많았다.
회사는 1990년대 초반 이후 생산직 신규채용을 사실상 중단한 가운데, 현장에서 자연감소·산재·훈련·교육 등으로 결원이 발생해도 보충해 주지 않으면서 그 자리에 사내하청을 투입하도록 종용하고 유도했다. 1990년대 중반 급격히 증가한 사내하청 노동자는 1994년 말 기준으로 3,232명에 이르렀다. 이후 울산공장의 하청노동자 수는 1996년 3월 3,800여 명, 1997년 12월 3,486명으로 IMF 외환위기를 빌미로 대규모 정리해고가 단행될 때까지 비슷한 규모를 유지했다.[22]
노동조합은 사내하청 확대에 대처하는 데서 큰 한계를 드러냈다. 대체로 사내하청 확대가 기존 정규직 조합원들의 고용을 위협하고 노동조합을 약화시킬 거라는 점에서 반대하긴 했지만, 사측의 일방적인 하청이관이나 현장단위 노사담합을 중단시킬 정도로 적극적인 행동에 나서지는 못했다. 기업별 노조의 의식과 형식에 갇힌 까닭에 사내하청 노동자들을 조직하고 대변하려는 노력을 거의 하지 못했다.
결국 사내하청 확대는 가장 위험하고 힘든 일을 하면서도 더 적은 임금을 받지만 노동조합에서는 오히려 배제되고 있는 노동자들을 양산하는 과정이었다. 사내하청 확대는 노동조합을 약화시키고 자본의 이윤을 회복한다는 신경영전략의 목표에 아주 잘 부합하는 수단이었다.
김영삼 정권은 집권 초반인 1993년부터 용역·사내하청의 확대를 제도적으로 뒷받침하기 위해 정리해고 법제화와 근로자파견법 제정을 중심으로 노동법 개정을 추진했다. 1996년 12월 26일 신한국당의 날치기 노동법에 맞선 1996~97년 총파업의 핵심 이슈도 정리해고 법제화와 근로자파견법 제정 문제였다. 1997년 3월 여야합의 노동법 재개정 때 2년 유예됐던 정리해고제와 근로자파견법은, 1998년 2월 IMF 외환위기가 시작되는 충격 속에서 김대중 당선자 주도로 노동법이 재개정될 때 결국 도입됐다. 근로자파견법은 1998년 7월 1일부터 발효됐다.[23]
IMF 외환위기가 한국 사회를 휘몰아친 몇 년 동안, 대규모 정리해고와 맞물려 비정규직이 사회 전반으로 급격하게 확산됐다. 비정규직은 전체 노동자의 절반을 넘어서면서 일반적인 고용형태가 됐다. 특히 새롭게 사회에 뛰어드는 청년들은 대부분 비정규직으로 인생을 시작할 수밖에 없게 됐고, 비정규직에서 벗어나는 게 하늘의 별따기처럼 어려운 일이 됐다.
IMF 외환위기 이후 비정규직 문제의 심각성은 그 이전과 차원이 달랐다. 불과 몇년 사이에 전체 노동자의 15~20% 정도가 정규직에서 비정규직으로 전락하여 비정규직 비율이 55~60% 정도로 치솟았다. 또한 고용안정성·임금·노동조건에서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차이가 매우 크게 벌어졌다.
IMF 외환위기 이후 모든 점에서 심각한 차별을 받는 비정규직의 보편화는 한국의 노동자계급을 정규직과 비정규직이라는 두 개의 서로 다른 집단으로 뚜렷하게 분할시켰다. 비정규직이라는 단어 또한 ‘상당한 임금과 안정된 고용, 일정한 권리를 누리는 소수 노동자들’(정규직)과 달리 ‘구조적인 무권리와 고용불안 아래 신음하는 다수 노동자들’을 가리키는 의미로 사회적으로 통용되기 시작했다.
비정규직은 민간부문과 공공부문을 망라하며 제조업·건설업·서비스업 등 전 산업에 걸쳐 등장했는데, 그 유형이 매우 다양하지만 크게 네 가지 형태로 나타났다.
첫째, ‘직접고용’ 비정규직이다. 이들은 주로 공공부문·금융업·사무전문직에서 나타났는데, 실제 사용자가 직접 고용 당사자로 나서긴 하지만, 계약직·임시직 등으로 고용 기간이 한시적이고 불안정했다. 비정규직 가운데서 가장 많은 숫자를 차지했다.
둘째, ‘간접고용’ 비정규직이다. 이들은 주로 제조업과 건설업에서 나타났는데, 하청업체에 고용돼 있으나 실제 사용자인 원청으로부터 실질적인 업무지시와 노무관리를 받았다. 특히 제조업의 사내하청은 본질적으로 근로자파견제에 입각한 파견노동자들이지만, 제조업 직접생산 공정에 파견근로가 금지된 관계로 도급의 외양으로 위장해서 나타났다.
셋째, ‘특수고용’ 비정규직이다. 이들은 주로 건설·물류·민간서비스 등에서 일정한 자격을 요하는 업무에서 나타났는데. 외견상 자영업자로 돼 있으나 실제로는 특정 사용자와 실질적인 지배종속관계에 있었다. 특수고용 비정규직은 과거 기업에 고용된 노동자들이었으나 1990년대 중후반을 거치면서 외견상 자영업자로 강제 전환된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넷째, ‘일용고용’ 비정규직이다. 이들은 주로 영세한 제조업·건설업·서비스업에서 나타났는데, 정상적인 고용계약을 생략한 채 그날그날 또는 단기간 고용이 이루어지는 형태였다.
비정규직의 임금은 동일한 노동을 하는 정규직에 비해 40~70% 정도였다. 비정규직 다수의 임금은 전체 노동자 임금 평균의 40% 수준인 법정 최저임금에 간신히 턱걸이하거나 심지어 미달했으며, 국민연금·의료보험·산재보험·고용보험 등 4대 사회보험에도 제대로 가입돼 있지 않은 경우가 많았다. 휴일·휴가를 비롯해서 근로기준법에 규정된 최소한의 법적 권리들마저 침해받는 경우도 많았다.
한국노동연구원에 따르면, 상용직 대비 임시직, 일용직, 파견용역직의 임금 수준은 2001년 53.9%, 42.9%, 69.4%에서 2005년 50.7%, 36.9%, 61.5%로 눈에 띄게 하락했다. 이것은 김대중 정권과 노무현 정권을 거치는 동안 자본가계급과 노동자계급 사이의 양극화만이 아니라 노동자계급 내부 정규직과 비정규직 사이의 양극화가 함께 진행됐음을 뜻했다.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임금 격차가 점점 벌어진 것은 자본가들의 공격이 노동자계급 안에서 좀 더 취약한 계층에 집중된 까닭이었다. 자본가들은 노동조합 같은 저항의 무기를 가진 대기업 정규직에게는 고용과 임금을 보장하되 노동강도를 높이는 정도로 착취를 강화했지만, 저항의 무기를 갖지 못한 노동자들은 상시적인 고용불안에 시달리는 비정규직으로 몰아넣고서 극도의 저임금과 고강도 노동을 강요하며 막대한 초과착취에 나섰다.
IMF 외환위기 이후 노동자계급 안에서 일어난 양극화는 노동자계급을 경제적으로뿐만 아니라 사회적으로도 분할시켰다. 노동자계급의 사회적 분할은 자본가들의 분할통치 전략으로 가속됐다. 자본가들과 보수언론 그리고 정부는 비정규직의 열악한 처지가 마치 정규직 때문에 비롯된 것인 양 정규직 노조를 ‘집단이기주의’로 몰아붙이며 이데올로기적으로 융단폭격을 퍼부었다.
노동자계급 내부의 양극화는 훨씬 더 근본적인 자본가계급과 노동자계급 사이의 양극화를 은폐하거나 희석시키기 위한 도구로 사용됐다. 자본가들은 비정규직 임금이 정규직의 절반밖에 안 된다는 사실을 자본가 이윤이 노동자 임금의 수백수천 배에 이른다는 사실을 감추는 수단으로 적극 활용했다. 자본가들의 분할통치 전략은 비정규직의 분노가 자본가가 아닌 정규직을 겨냥하도록 유도하려는 것이었다. 그래서 비정규직이 정규직에 대한 원망과 분노에 사로잡혀 자본주의 본질을 꿰뚫는 계급의식과 자본가들에 맞선 계급투쟁으로 다가서지 못하게 하려 했다.
1990년대 중반 이후 노동유연화 정책은 일자리와 소득 상실 위협으로 노동자의 집단성을 해체하는 방향으로 진행되어왔다. 법령상 보장된 노동기본권을 보장받지 못하는 비정규직의 문제는, 1987년 이후 노동자 투쟁으로 현실적 의미를 얻은 노동기본권을 다시 부정하려는 전략의 결과로 이해되어야 한다. 더욱이 이 과정은 ‘노동시장 양극화’라는 프레임으로 조직 노동자의 노동기본권을 집단 이기주의로 윤색하는 정치 이데올로기와 결합되어 그 파괴적 효과가 증폭되었다.[24]
비정규직의 노동조합 조직률은 매우 낮아서, 노무현 정권 출범 무렵 사실상 0% 수준이었다가, 노무현 정권 시절 상대적으로 활발히 조직화가 진척됐지만 겨우 1% 정도로밖에 올라서지 못했다.[25] 특히 법률적으로 노동자성을 인정받지 못한 특수고용 노동자들과 원청 사용자성을 인정받지 못한 간접고용 노동자들은 노동조합 결성 자체를 인정받지 못하거나 교섭과 파업이라는 가장 기본적인 활동 자체가 사실상 불법으로 취급돼 큰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1990년대 말부터 분출한 비정규직 조직화는 다음과 같은 공통의 어려움에 부딪쳤다. 우선, 노조를 결성하자마자 법제도를 활용한 정부와 사용자의 탄압에 시달렸다. 비정규직들은 대개 근로계약기간이 정해져 있고, 평상시에는 반복적 재계약을 통해 상시 사용하다가도 사용자가 원할 때에는 언제든지 재계약을 거절하는 방식으로 합법적으로 해고할 수 있다는 점을 악용하여, 노조에 가입하면 재계약을 거절하는 것이 사용자들의 대응공식이 되었다.
특수고용 노동자의 경우 노동법상 ‘근로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간접고용 노동자의 경우 실제 사용자인 원청이 노동법상 ‘사용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이들은 노동3권을 보장받지 못했다. 자본은 근로자지위확인의 소·노조 부존재 확인의 소 등 각종 소송, 집회금지·업무방해 금지 가처분 등 각종 가처분 소송, 손해배상 청구·(가)압류 등 사법적 수단을 적극 활용하였다. 정부 역시 노조설립 신고제를 활용한 조직 결성 방해, 단체행동에 대한 공권력 투입, 법제도 개악(화물운송 특수고용노동자에 대한 업무개시명령제 도입 등)으로 노동기본권을 억압했다.[26]
특수고용 노동자의 노동자성 인정 문제나 원청의 사용자성 인정 문제가 아예 논의의 대상조차 되지 못한 데에는, 노사정간의 불리한 역관계도 물론 작용하였겠으나 그보다는 아예 논의의 대상으로도 삼지 않겠다는 정부·자본의 완강한 태도가 자리잡고 있다. 비정규직 관련 법률의 시행과 함께, 비정규직은 주기적인 고용불안을 경험하게 되고 노동조합을 통한 집단적 문제해결보다는 개인적인 경쟁력 확보와 관리자에게 줄서기로 내몰리게 되었다.[27]
4) 현대중공업노조의 침몰
1987년 노동자대투쟁의 진원지였던 현대중공업노조는 1995년 민주노총을 건설할 무렵까지 이 땅 민주노조운동의, 아니 천만 노동자계급의 명실상부한 대표주자였다. 대공장 노조로서는 드물게 전노협의 전투적·변혁적 운동과 강력하게 흐름을 같이 했다. 특히 1990년 현대중공업노조의 골리앗 파업은 노동자들의 가슴속에 뜨거운 감동을 남겼다. 현대중공업노조는 노동자·민중에게 사랑과 존경의 대상이기까지 했다.
사랑한다 현대중공업 노동조합 동지들이여
우리들의 결사투쟁은 이다지도 끝이 없구나
사나이 한 평생 노동자로 태어나
투쟁과 투쟁으로 살아온 우리
이것이 나의 길 노동자의 길
아아아 골리앗이여 서러워 울지 말아라
아아아 골리앗이여 노동자의 깃발이여[28]
그러나 1990년대 중반을 거치며 운명의 저울추가 반대로 넘어갔다. 1987년 이후 매년 이어지던 파업이 1994년을 끝으로 멈췄다. 1995년 어용 세력이 대의원의 절반을 넘기 시작하더니 1990년대 후반이 되자 90% 이상에 이르렀다. 2002년 마침내 집행부가 어용에게 넘어갔고, 2004년 박일수 열사투쟁에서 저지른 만행 때문에 금속연맹에서 제명당했다. 자신감과 활력으로 넘쳐나던 현장은 침묵과 한숨만이 가득했다. 일하다 다쳐도 산재신청조차 못할 정도로 얼어붙었다.
말 그대로 ‘절망의 공장’이었다. 어둠의 세월은 깊고도 길어 마치 영원할 것만 같았다. 한때 한국 노동자운동의 거침없는 전진을 대표했던 현대중공업 노동조합은 이제 노동자운동의 패배와 좌절을 상징했다.
왜 그렇게 되었을까? 여러 이유가 있었다. 먼저 정권과 자본의 집요한 탄압이 있었다. 거듭되는 대규모 구속과 해고는 평범한 가족을 가진 노동자들에게 결코 적지 않은 상처와 피로감을 남겼다. 조폭에 다름없는 대규모 경비대가 현장 안팎에서 활동가들을 감시하고 걸핏하면 폭력을 휘둘렀다. 현중 경비대의 고삐 풀린 사설 폭력에 경찰은 대놓고 눈을 감았다.
어용 세력을 육성하려는 체계적인 시도가 있었다. 다물교육을 활용해서 조장·반장들을 극우 민족주의로 무장시켰다. 회사가 잘 돼야 나라가 잘 되는데, 노조가 회사를 방해하니 악의 무리라는 논리였다. 고된 노동을 하는 현장 활동가에게 편한 외곽 부서로 이동시켜 주겠다고 회유해서 무력화하거나 어용으로 돌려놓았다.
조합원대중과 가족들까지 체계적으로 포섭하고 관리했다. 부서 관리자들은 조합원의 경조사를 꼼꼼히 챙기며 정서적으로 파고들었다. 모든 조합원의 성향을 분석해 투표나 집회 같은 일이 있을 때마다 일일이 점검하고 압박했다. 지역에 문화센터를 건립해서 조합원 가족들의 문화적 욕구를 선점하면서 애사심과 중산층 허위의식을 불어넣었다.
하지만 그 모든 문제의 근원에는 ‘전망 상실’의 문제가 있었다. 1991년 소련 붕괴는 노동자운동 전반에 엄청난 사상적 혼란을 가져왔다. ‘노동해방’ 대신 ‘사회대개혁’을 부르짖는 타협·개량주의가 급격히 득세했다. 노동자를 착취하고 억압하는 또 다른 반동체제로 전락해 온 소련의 역사와 본질을 직시해 내고, 그래서 노동자계급 해방투쟁의 깃발은 소련의 붕괴와 상관없이 더욱 드높이 휘날려야 한다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사상적 힘이 그 시절 한국 노동자운동 속에는 매우 약했던 까닭이었다.
스스로를 “노동해방 선봉”으로 자부하던 현대중공업 선진노동자들도 대다수가 심각한 사상적 혼란에 휩싸였다. ‘노동해방’이라는, 너무나 뚜렷해 보였던 목표가 흐릿해지자 자신감·투지·규율·능동성·적극성 등등 모든 것이 달라져 버렸다. 이전에는 아무 것도 아니었던 자본의 탄압과 회유가 결코 무시할 수 없는 힘으로 다가왔다. 선진노동자들이 능동성을 잃어가는 만큼 자본의 관리체계가 노동자대중에 대한 영향력을 회복해 갔다. 투쟁의 거리에서 함께 했던 노동자의 문화가 생기를 잃어가는 만큼 가족들은 문화센터의 교양강좌로 눈을 돌려갔다.
주도권을 쥐기 시작한 자본이 결정적으로 완승을 거둘 수 있게 한 것은 비정규직, 즉 사내하청 문제였다. 사내하청의 광범한 재확산은 기세가 주춤해진 노동조합의 힘을 결정적으로 약화시키는 카운터펀치였다.
현대중공업에서 사내하청 문제는 오랜 역사를 갖고 있었다. 1973년 7월부터 ‘위임관리제’라는 이름으로 사내하청 제도가 도입됐다. 1987년 노동자대투쟁이 터졌을 때 현대중공업에는 직영공 15,000명과 사내하청 4,000명 정도가 일하고 있었다.
1987년, 56일간 파업을 벌인 현대중공업 노동자들은 사내하청을 직영으로 전환시켰다. 사내하청 노동자들 스스로가 노동자대투쟁에 ‘하도급 철폐, 하청의 직영화’를 요구하며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파업지도부 ‘민주노조개편대책위’는 17개 요구조건 가운데 12번째로 ‘하도급 직영화’를 명시했다. 1973년 위임관리제 전환 이후 14년 만에 거둔 승리였다.
그러나 현대중공업 자본은 1989년 하반기부터 ‘외주업체’라는 이름으로 다시 스멀스멀 사내하청을 들이기 시작했다. 직영공 대비 사내하청 비율은 1991년 8.6%에서 1996년 31.7%, 2000년 50.5%, 2005년 80.3%, 2010년 127.4%로 계속 늘어났다.
1990년대 중반 현장권력을 둘러싸고 노동조합과 자본이 치열하게 각축을 벌이던 시기에, 노동조합은 사내하청 확산에 침묵하고 외면했다. 당장 내 발등에 떨어진 불이 급하다는 식의 태도였다. 1987년 노동자대투쟁의 정신으로부터 명백한 후퇴였다. 노동해방의 원대한 전망을 놓쳐버리고 조합주의의 좁은 시야에 갇힌 결과이기도 했다. 현장의 모든 노동자를 단결시키지 못하고서, 그것도 가장 열악한 노동자를 끌어안지 못하고서, 노동조합이 힘을 가질 수 있기를 기대하는 것은 헛된 욕심이었다. 현장권력을 완전히 상실해 버린 2000년대 초반에 가서야 뒤늦게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지만, 여전히 소극적인 수준을 벗어나지 못했다.
사내하청이 늘어나면서 파업의 파괴력도 크게 제한되었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정규직 조합원의 위축된 심리상태였다. 바로 옆에서 일하는 사내하청 노동자가 ‘정규직’ 되는 것을 소원으로 여기는데, 어찌 정규직 노동자가 자신이 겪는 착취와 억압을 온전히 직시하고 분노할 수 있을 것인가!
현대중공업노조가 노동해방의 전망을 확고하게 견지하지 못했던 것은 불가항력적인 측면이 있었다. 그 시절 노동자운동 전반이 갇힌 한계로부터 현대중공업노조도 자유로울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대중공업노조가 노동자의 분할을 방치한 것은 결정적인 실책이었다. 스스로가 이미 1987년에 실현했던 바를 지켜내지 못하고 후퇴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1990년대 중반 현대중공업에서 노동조합을 넉다운시킨 자본의 ‘신경영전략’ 공세는, 1990년대 후반 전체 자본가계급의 신자유주의 공세를 위한 실용 교본이 되었다. 현대중공업에서 벌어진 자본 대 노동의 전투가, IMF 외환위기를 계기로 전 사회적인 수준에서 자본가계급 대 노동자계급 사이에서 벌어졌다.
현대중공업보다 더 잘 싸운 사업장도 있었다. 공공부문에서는 저항 과정에서 몇 개의 대규모 민주노조가 새로 등장하기도 했다. 어쨌거나 현대중공업처럼 치명적인 패배를 당한 곳은 그리 많지 않았다. 하지만 2000년대 초반까지 벌어진 이 사회적 전투에서 노동자계급은 패배했다. 승리한 자본가계급은 ‘정리해고와 비정규직의 자유 사용권’을 획득했다.
노동자운동 전반이 패배하게 된 방정식은 현대중공업에서와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았다. 1996~97년 총파업과 이후 여러 사업장 투쟁에서, 노동자대중은 생존권을 위협하는 자본의 공세에 맞서 폭발적인 투쟁으로 떨쳐 일어섰다. 하지만 지도부 대다수는 타협·개량주의에 갇혀 ‘기업이 망하고 나라가 망하는 데 방법이 없다’는 자본의 논리를 넘어서지 못하고 자본의 공세를 사실상 수용하고 말았다.
현대중공업처럼 완전히 어용노조로 넘어간 사업장은 많지 않았지만, 대다수 민주노조에서 관료화가 심각하게 진행됐다. 개량주의에 갇힘으로써 전망을 상실한 지도부는 빠르게 관료적으로 타락해 갔다. 희망을 잃은 대중은 계급운동의 대의에 회의를 품고 조합주의·부문주의로 빠르게 퇴행했다. 현장 곳곳에서 그리고 사회 전반에서 비정규직이 엄청난 속도로 확산되는 가운데, 노동자운동은 사실상 상위 20% 대기업 정규직만의 운동으로 쪼그라들고 말았다.
정규직 운동의 후퇴와 교차하면서, 2000년대 초반부터 비정규직 노조들이 여러 곳에서 등장하여 처절한 도전에 나섰다. 하지만 역부족이었다. 비정규직은 대부분 조직화되기도 어렵고 자신감도 부족했다. 정규직의 연대와 엄호도 거의 받지 못했다. 위축된 비정규직 대중은 전망 자체가 ‘정규직화’ 수준을 넘어서지 못했다.
[1] 노조간부들이 입사청탁·금품수수로 저지른 각종 비리가 대대적으로 폭로되면서 세상에 널리 알려진 것은 2005년 이후였다. 그러나 이미 2000년대 초반에 자본이 광범한 수준에서 대기업 정규직 노조 간부들을 특혜·향응·금품으로 포섭하고 있다는 양심고백들을 곳곳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2] 당시 현대차노조는 국민파 집행부가 이끌고 있었다. 국민파 집행부는 광고비 대납 의혹이 제기되자 노조 대의원대회에 상집간부 가족의 전세금을 빌린 것이라는 허위 자료를 제출하기까지 했다.
[3] 민주노총 차원의 결정이 있기 전에 이미 많은 지역본부가 지방자치단체로부터 각종 명목의 재정 지원을 받고 있었다. 그래서 ‘여기저기서 지원금을 받아썼고 지금도 받아쓰고 있는데 민주노총 대의원대회에서 받지 말자고 결정하면 어떻게 하냐’는 논리가 대의원대회를 압도했다. 2002년에 9억 7천만 원으로 시작된 정부 보조금은 2005년에 30억 원으로 늘어나 민주노총과 산하 연맹들이 사용하는 사무실의 전세 보증금으로 사용됐다.
[4] 이 무렵 노동조합이 영향력을 미치지 못하는 곳에서는 현대모비스·동희오토 등을 필두로 생산직 100%가 사내하청 노동자들로 채워진 공장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5] 상급단체 대의원은 대체로 단위노조 간부들이라는 점에서 상급단체 대의원대회의 무산 사태는 일차적으로 단위노조 간부들 전반의 관료화 때문이었지만, 그 배경에는 조합원들의 무관심이 놓여 있었다.
[6] 현대차는 대다수가 여성인 식당 정리해고자들의 복직만큼은 끝내 받아들이지 않으려 했다. 그러나 식당 정리해고자들은 노조의 어정쩡한 태도 또한 강력히 질타하는 처절한 투쟁 끝에 2000년 6월 ‘현장으로 이동시 정규직 복직, 노조식당 잔류시 정규직 수준으로 임금·노동조건 회복과 자녀 중 1명 정규직 추천권’ 등 원직복직에 준하는 성과를 얻었다.
[7] 1998년 7월 1일 근로자파견법이 발효될 때부터 제16조 2항과 시행령 제4조에는 ‘정리해고를 한 후 2년 이내에는 해당 업무에 파견근로자를 사용할 수 없다’는 내용의 조항이 존재했다. 또한 제5조 1항에는 ‘제조업 직접생산공정에는 근로자파견을 할 수 없다’는 내용의 조항이 존재했다. 그러므로 현대차 자본이 2000년에 대규모 사내하청 투입을 추진한 것은 자본을 위해 만들어진 근로자파견법에 입각해 보더라도 명백한 불법이었다.
[8] 1999~2000년 현대차노조는 ‘국민파’인 실노회 집행부가 이끌었다. 실노회 집행부는 몇 달 뒤 이른바 ‘광고비 대납 사건’으로 중도사퇴했다.
[9] 서영호·양봉수 열사회, 2025, 『현대차 열사·희생자 백서』, 류기혁 편.
[10] 현대차 민주노동자투쟁위원회, 2002/05/07, <노동자의길> 신문.
[11] 현대차 민주노동자투쟁위원회, 2002/11/20, <민투위 비정규직 사업팀> 유인물.
[12] 1992년 대선에서 민족해방파의 ‘범민주후보 단일화’ 노선 반대편에는 1987년 민중후보 운동을 계승하는 (백기완을 후보로 내세운) ‘사퇴하지 않는 민중후보’ 노선이 있었다. 전노협은 그 둘을 절충한 ‘민족민주진영의 독자후보를 전제로 한 민주대연합 모색’을 다수 의견으로 정리했다. 그러나 민중운동 전반을 포괄하던 ‘민주주의 민족통일 전국연합’(전국연합)에서 확고한 주도권을 갖고 있던 민족해방파는 전노협의 입장을 묵살하고 전국연합을 통해 ‘범민주후보 단일화’를 대통령 선거 방침으로 결정했다.
[13] 2000년대 이후 ‘국민파’는 민족해방파의 친북적 이념에 대한 수용 여부와 노조 관료화에 대한 태도에 따라 일정한 분화를 겪게 된다. 이 과정에서 민족해방파의 이념에 보다 충실한 현장활동가들은 ‘국민파’ 대신 ‘자주파’로 자신을 규정하고자 했다.
[14] 이들이 전노협 한계론으로 넘어간 것은 1993년을 거치며 전노협 안에서 전노협 한계론이 다수파를 형성하게 되는 결정적인 분기점이 됐다.
[15] 가장 대표적인 사례로는 1988~89년 현대중공업 노동자들이 노조 위원장의 직권조인에 굴복하지 않고 비상대책위원회를 구성하여 128일 동안이나 파업을 이어 나갔던 ‘128일 파업’, 1989년 4월 마창노련 선봉대와 단위노조 정방대를 중심으로 구속노동자 석방 등을 요구하며 창원대로 전역에서 격렬한 가두투쟁을 이어나갔던 ‘창원대로 투쟁’, 1990년 현대중공업 골리앗 파업을 진압하러 가는 전경들에 맞서 현대자동차 노동자들이 심야부터 오전까지 격렬한 가두투쟁을 벌이면서 자발적 비공인파업에 나섰던 ‘4·28 연대투쟁’ 등을 들 수 있다.
[16] 1990년대 초반 이후 전노협의 근간이었던 중소사업장 노조의 다수가 산업 구조조정의 여파 속에서 폐업당하며 사라져 간 점, 전노협 상층의 다수가 타협·개량주의 노선으로 전환한 점 등으로 인해 1990년대 중반에 이르렀을 때 전노협 사업장의 대부분은 침체 상태에 빠져 있었다.
[17] 현장조직 건설은 자본의 신경영전략에 맞서 현장투쟁을 강화하기 위한 것이기도 했다. 이 점에서도 현장조직은 노사협조주의로 치닫는 타협·개량주의 노조 지도부와 충돌할 수밖에 없었다.
[18] 전국현장조직대표자회의, 1997/09/27, 「전국현장조직대표자회의 대중토론회 결의문」.
[19] 신원철, 2003, 「사내하청공 제도의 형성과 전개: 현대중공업 사례」, 『산업노동연구』 제9권 제1호, 120쪽.
[20] 정이환, 1992, 「제조업 내부 노동시장의 변화와 노사관계」, 112쪽.
[21] 현자노동자신문, 1994/06/01, 「불법 파견노동자 대책은」.
[22] 서영호·양봉수 열사회, 2025, 『현대차 열사·희생자 백서』, 류기혁 편.
[23] 근로자파견법이 제정되는 과정에서 노동자들이 끈질기게 저항한 덕분에 노동자들의 반발을 무마하기 위한 조항이 일부 포함됐다. 대표적으로 ‘제조업 직접생산 공정에서는 원칙적으로 파견노동자를 쓸 수 없다’라든가 ‘2년 이상 근무한 파견노동자는 정규직으로 간주한다’(고용의제)는 조항이 있었다. 이러한 조항들은 2000년대 이후 제조업 사내하청 노동자들이 불법파견 판정·판결을 이끌어내고 직접고용·정규직화를 주장하며 투쟁할 수 있는 법률적 기반으로 작용했다. 한편 한국의 근로자파견법 도입은 일본을 본뜬 것이었는데, 일본에서는 1985년에 근로자파견법이 도입됐다. 하지만 일본의 경우 2004년에 파견법이 개정되면서 제조업 파견이 허용되고 파견기간이 최대 3년으로 연장된 것과 달리, 한국에서는 근로자파견법 제정 직후부터 불법파견 투쟁이 광범하게 전개됨으로써 자본가들이 제조업 파견의 합법화를 추진할 동력을 형성하지 못했다.
[24] 윤애림, 2016, 「2000년대 비정규직 연대운동과 노동기본권 쟁취 투쟁- 전국비정규직노조연대회의의 권리입법 투쟁을 중심으로」, 『산업노동연구』 22권 1호, 225쪽.
[25] 같은 시기 전체 노동자의 노동조합 조직률은 10%를 약간 넘었다.
[26] 윤애림, 2016, 「2000년대 비정규직 연대운동과 노동기본권 쟁취 투쟁- 전국비정규직노조연대회의의 권리입법 투쟁을 중심으로」, 『산업노동연구』 22권 1호, 190~191쪽.
[27] 윤애림, 2016, 「2000년대 비정규직 연대운동과 노동기본권 쟁취 투쟁- 전국비정규직노조연대회의의 권리입법 투쟁을 중심으로」, 『산업노동연구』 22권 1호, 224쪽.
[28] 김호철 작사·작곡, 1990, <골리앗의 그림자> 1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