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월 19일 거통고 조선하청지회 김형수 지회장 고공농성 해제 사진: 노동과세계
노란봉투법의 주요 내용
글로벌 스탠더드에 한참 못 미치는 후진적 내용으로 악명 높았던 한국의 노조법이 드디어 개정됐다. 지난해 윤석열이 두 차례 거부권을 행사했던 바로 그 법이다. 노조법 개정을 이끈 것은 물론 비정규직 하청노동자들의 오랜 투쟁이다. “진짜 사장이 책임져라!”, “죽음의 손배가압류 철폐하라!”고 외쳤던 노동자 투사들이 없었더라면 개정법은 결코 통과되지 않았을 것이다.
2025년 9월 9일 공포된 개정 노조법은 2026년 3월 10일부터 시행될 예정이다. 개정법의 주요 내용은 크게 세 가지다. 첫째, 비정규직 하청 노동자들과 직접적인 계약관계가 없더라도, 원청 자본가가 하청 노동자들의 노동조건을 실질적‧구체적으로 지배‧결정하고 있다면 노조법상 사용자가 된다. 하청 노동자들이 원청 자본가에게 단체교섭을 요구하면 이에 응해야 하는 것이다.
둘째, 협소하기 짝이 없던 쟁의행위의 목적이 확대됐다. 기존의 한국 노조법은 임금, 노동시간 등 조합주의적 이익에 대해서만 ‘합법’ 쟁의행위를 허용하고 있었다. 개정 노조법은 “노동조건에 영향을 미치는 사업경영상의 결정”과 “사용자의 명백한 단체협약 위반”에 대해서도 ‘합법’ 쟁의행위가 가능하도록 했다. 즉 정리해고나 구조조정에 맞서는 파업, 임금체불에 항의하는 파업이 정당한 쟁의행위로 인정된다.
셋째, 노조 파괴 목적으로 행해지는 손배 가압류를 부분적이나마 제한했다. 본래 노조법상 ‘합법’ 쟁의행위에 해당하면 일체의 민형사 책임이 면제된다. 그러나 한국에선 ‘합법파업’으로 인정받기 위한 요건 자체가 매우 엄격했다. 자본가들은 손쉽게 ‘불법파업’ 딱지를 붙일 수 있었고, 이어 노동조합을 파괴하기 위한 천문학적 손배 가압류를 제기하기 일쑤였다. 개정법은 여전히 조합원 개인에 대한 손해배상 청구를 허용하고 있지만, 이 경우에도 조합원의 임금 수준 등을 고려해 손해배상책임을 제한하도록 한다.
노조법 때문에 나라가 망한다고?
노조법 개정 직후, 자본이 벌이는 꼴값을 보면 정말 역겨울 정도다. 자본가 언론에 따르면, 개정 노조법과는 별다른 관계도 없는 ‘귀족노조’ 현대차지부가 파업을 하는 것도 노란봉투법 때문이며, 본래부터 글로벌 먹튀로 악명 높은 GM 자본이 한국 철수 움직임을 보이는 것 역시 노란봉투법 때문이란다. 압권은 경총이 주한유럽상공회의소를 부추겨 ‘노란봉투법 때문에 한국에서 철수한다’는 입장을 보도하게 한 대목이었다. 이후 언론 취재로 밝혀진 사실에 따르면, 유럽상공회의소는 “최악의 상황을 가정해 예시로 든 것인데”, “경총이 이니셔티브를 가져가면서 ‘철수’ 표현이 강조됐다”는 것이었다.
이에 질세라 자본가 정치인들도 입에서 나오는 대로 지껄여 대고 있다. 내란 중요 임무에 종사하는 것으로 보이는 나경원은 “하청노조의 원청 교섭을 허용하는 사용자 범위 확대(제2조)는 세계에 유례가 없다”, “선진국 어디에도 없는 법”이라고 떠들었다. 팩트와는 완전히 상반되는 얘기다. 하기야 윤석열의 내란을 옹호하며 부르주아 사법 질서도 부정했던 이들에게 팩트가 무슨 상관이 있겠냐마는.
자본가 언론과 자본가 정치인들의 악질 선동 모두 허무맹랑한 헛소리다. 한국의 개정 노조법은 노동권의 글로벌 스탠더드, ILO협약 기준을 겨우 쫓아가는 수준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거슬러 올라가면, 이번의 개정 노조법은 2021년 문재인 정부가 ILO 핵심협약을 비준한 것과 맥락이 닿아 있다. 문재인 정부는 ‘결사의 자유 및 단결권 보호에 관한 협약(제87호)’과 ‘단결권 및 단체교섭권에 관한 협약(제98호)’을 비준했는데, 이건 문재인 정부가 딱히 ‘노동존중’ 정부였기 때문이 아니다. 당시 EU가 한국이 ILO 핵심협약을 비준하지 않는 것이 한-EU FTA 협정 위반이라며 무역 보복을 공언했기 때문이다.
물론 이것은 EU자본이 특별히 문명 개화한 자본이어서가 아니다. 마르크스는 <자본> 1권에서 “자본은 타고난 평등주의자이기 때문에, 즉 모든 생산영역에서 노동의 착취조건이 똑같아야 한다는 것을 자신의 천부인권으로 요구하기 때문에” 이런 일을 벌인다고 썼다. “평등한 노동력 착취는 자본의 제1의 인권”이라는 것이다. 유럽에선 노조할 권리를 보장하며 사업해야 하는데, 왜 너희 한국 자본가들은 하청노조를 짓밟으며 불공정 경쟁을 하고 있느냐, 이것이 EU자본이 항의에 나선 이유였다.
그간 ILO 결사의 자유 위원회는 한국 정부에 후진적 노조법을 국제 기준에 맞춰 개정하라고 지속적으로 요구하고 있었다. “(하청 노조가) 원청에 대하여 단체교섭 목적의 인정을 주장하는 파업은 불법이 아니어야 한다”, “파업권이 단체협약의 체결을 통해 해결될 수 있는 노동분쟁에만 한정돼서는 안 되며, 조합원의 이익에 영향을 주는 경제·사회적 사안에 대한 불만을 표출할 수 있어야 한다”는 등의 권고가 그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2021년 비준된 ILO 핵심협약이 2022년부터 헌법1)에 따라 국내법과 동일한 효력을 가지게 되었다. ILO 핵심협약이 발효된 것 등과 맞물려, 법원과 노동위원회도 하청노조가 원청 사용자를 상대로 교섭할 권리를 제한적이나마 인정하고 있는 형편이었다.
1) “헌법에 의하여 체결·공포된 조약과 일반적으로 승인된 국제법규는 국내법과 같은 효력을 가진다.” (헌법 6조 1항)
악마는 매뉴얼에 있다
노동자계급이 이재명 정부에 환상을 가질 필요가 없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노조법 개정은 변화된 상황에 맞춰 자본의 이윤 창출 질서의 안정성을 담보하려는 것이기 때문이다. 자본이 법 제도를 유지하는 이유, 그 중에서도 자본의 무제한적 착취에 방해가 되는 노동법까지 운용하는 이유는 그것이 궁극적으로 계급지배에 유리하기 때문이다. 물론 계급투쟁이 격화될 경우 부르주아계급은 언제라도 ‘부르주아적 합리성’을 내팽개칠 준비가 돼 있지만, 계급투쟁이 관리 가능한 수준이라면 자본가계급은 늘 법과 제도를 지고지순한 불가침의 가치로 내세운다. 그리고 이때 중요한 것이 법률적 예측 가능성, 또는 안정성이다.
9월 2일 생중계된 국무회의에서 김정관 산업통상부 장관이 개정 노조법을 두고 “기업은 성장과 투자의 주체이자 불확실성을 해소해야 하는 주체이기도 하다”, “경제계는 합리적으로 예측할 수 있는 상황을 원한다”고 발언한 것은 이런 맥락이다. 자본가 정치인으로서의 본색을 드러낸 김영훈 노동부 장관은 곧바로 “산업부 장관의 말을 충분히 이해하고 공감한다”고 답했다. 김영훈은 기회만 있으면 “(기업들의) 노란봉투법 우려를 이해한다”, “노동조합법 개정으로 인한 불확실성을 해소하기 위해 6개월 동안 구체적인 지침, 매뉴얼 등도 마련해 원·하청이 협력과 상생을 통해 함께 성장할 수 있도록 철저히 준비하겠다”고 공언한다.
노동부가 자본의 의견을 수렴해 만들겠다는 이 매뉴얼이 앞으로 무엇보다 문제가 될 것이다. 유럽에서 하청노동자, 플랫폼 노동자들의 단체교섭권 문제가 첨예한 투쟁이 되지 않았던 이유는 이미 초기업별 단체교섭이 제도화돼 있다는 사정이 있다. 그러나 한국의 노조법은 기업별 칸막이를 쳐놓은 채 기업별 창구단일화 절차를 강제한다. 이런 상황에서 하청노조가 개정법에 따라 원청에 단체교섭을 요구할 때 창구단일화를 어떻게 해야 할지를 두고 각양각색의 의견이 제기되는 상황이다. 어떠한 경우든 정부와 자본은 하청노조의 노동3권을 최대한 제한하고 원하청 노동자계급의 계급적 연대와 단결을 가로막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 분명하다.
2025년 9월 3일 주요기업 인사노무담당 임원(CHO) 간담회 사진: 연합뉴스
또한 이 매뉴얼에서 정부와 자본은 하청노동자의 노조법상 사용자가 되는 원청 자본가의 범위를 최대한 좁히려 들 것이다. 현재 법원은 ‘사내’ 하청인 경우에도 원청의 노조법상 사용자 지위를 제한적으로 인정한다. 최근 판결에 따르면, ① 모든 노동조건에 대해서가 아니라 원청이 실질적이고 구체적으로 지배·결정할 수 있는 의제에 대해서, ② 하청 노동자들의 노동이 원청의 사업 수행에 필수적이며 사업체계에 편입돼 있을 때, ③ 하청노동자들의 노동조건을 원청과의 단체교섭에 의해 집단적으로 결정할 필요성이 인정되는 경우에 원청의 사용자성이 인정돼야 한다는 것이다. 벌써 어떤 자본가들은 하청 노동자들의 노동조건을 실질적‧구체적으로 지배‧결정하는지를 판단하는 기준이 파견근로관계 성립의 판단 기준과 일치해야 한다고 떠들고 있다. 이는 원청의 노조법상 사용자 지위를 현재 법원의 기준보다도 훨씬 더 좁히라는 주장이다.
더욱이 한국 노동법에는 하청(용역)업체가 변경될 때, 다시 말해 원청 자본가가 노조가 생긴 하청업체를 폐업시키고 새로운 하청업체를 끌어들였을 때 노동자들의 고용이 승계돼야 한다는 내용이 없다. 물론 이러한 짓거리는 현행법상 노조 파괴 목적의 부당노동행위에 해당하지만, 부당노동행위로 인한 불이익이 크지 않은 상황에서 자본은 손익계산을 하며 하청업체 폐업 카드를 만지작거릴 것이 뻔하다.
8월 19일 경제6단체 노조법 개정 반대 결의대회 사진: 경총
첫째도, 둘째도, 셋째도 아래로부터의 투쟁!
당분간 자본가계급은 원청의 사용자 지위를 두고 지루한 법률 분쟁을 마다하지 않을 것이다. 금력(金力)을 넘치게 가진 저들은 오랜 법률 분쟁이 노동자들을 지치게 한다는 점, 사법부의 판사들이 자기 계급의 일원이란 점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그뿐인가. 자본주의의 위기로 인한 평범한 민중의 고통이 터져 나올 때마다, 이게 다 노란봉투법과 조직 노동자들 때문이라는 저질 악선동도 멈추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노동자계급은 기본으로 돌아가야 한다. 노동법은 그 제정은 물론, 해석과 운용 역시 전적으로 노동자계급과 자본가계급의 힘 대결에 따라 좌우된다는 기본으로 말이다. 한 가지 예를 들어보자. 한국의 파견법은 ‘합법파견’인 경우 2년까지 파견근로를 사용할 수 있도록 한다. 왜 하필 ‘2년’일까? 1998년 파견법 제정 당시 노동부 장관은 국회에서 그 ‘비밀’(?)을 밝혔다. ‘한국노총은 1년을, 경총은 3년을 주장했기 때문에 절충해 2년이 되었다’고 말이다. 이런 게 노동법이다. 노동자계급의 총단결이 실현되면 중간착취를 합법화하는 파견법을 아예 철폐할 수도 있지만, 노동자계급이 자기 잠재력을 펼치지 못하면 ‘합법파견’의 기간이 2년 이상으로 늘어날 수도 있게 되는 것이다.
15대 국회 188회 3차 환경노동위원회 회의록
개정 노조법이 하청 노동자들의 노동3권을 실질적으로 보장하자면, 더 나아가 하청 노동자들의 투쟁이 원하청 공동투쟁을 촉발하는 마중물이 되게 하자면, 바로 이런 관점에서의 투쟁이 필요하다. 이재명 정부와 민주당에 기대는 방식이 아니라, 아래로부터의 계급적 단결을 조직해야 한다. 이 과정에서 일부 상층 노동자 부문이 자신들의 협소한 조합주의적 이익을 내세우며 계급적 단결을 저해하는 일이 충분히 벌어질 수 있다. ‘하청에 단체교섭권을 주면, 파이는 고정돼 있으니 우리 성과급이 줄어드는 게 아니냐’는 식의 반발이 그것이다. 노동자 투사들은 그런 식의 노동조합 운동으로는 결코 사회적 정당성을 가질 수 없다는 점을 명확히 하고, 후진적 조합주의 의식에 맞선 투쟁을 회피하지 말아야 한다.
노동자계급이 가진 가장 큰 무기는 이 계급이 사회의 압도적 다수라는 점이다. 똑같은 일을 하면서도 비정규직, 하청 노동자로서의 설움을 견뎌야 했던 수백만 노동자계급의 삶이 노조법 개정의 정당성을 웅변한다. 노동3권이 비정규직 하청 노동자들에게도 차별 없이 보장되어야 한다는 것에 타협의 여지가 있을 수 없다. 노동자계급이 넘치게 가진 자주적 역량으로, 계급적 연대와 단결을 통해, 노조법 개정을 발판으로 삼아 비정규직 하청 노동자들의 대중적 투쟁을 불러일으키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