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상세페이지

누구의 자유인가, 누구를 위한 자유인가 - 왜곡되고 박제된 광주를 넘어

기사입력 2026.07.10 12:54 | 조회 837

SNS 공유하기

fa tw
  • ba
  • ka ks url

    최근 배재고 야구부 학생들이 광주일고와의 경기 중 5·18 민주화운동을 조롱하는 구호를 외치는 사건이 발생해 많은 분노를 자아냈다. 그러나 이번 사태의 더 깊은 본질은 이병태 규제합리화위원회 부위원장 발언으로 드러났다.

     

    그는 "5·18이 성역이 되었다"고 주장하며, 나아가 이를 “김일성 사진이 비에 젖는 것을 보고 울부짖는 북한의 모습”에 빗댔다. 비판이 거세지자 그는 ‘표현의 자유’를 내세웠다. 그의 논리대로라면 5·18을 조롱하고 왜곡하는 것 역시 보호받아야 할 자유인 셈이다. 거센 비판 끝에 결국 이병태의 사퇴로 일단락되기는 했으나, 우리는 이 일련의 사건을 한낱 ‘철없는 학생들의 실수’나 ‘고위 공직자의 개인적 망언’ 정도로 치부하고 넘어가서는 안 된다.

     

    이 사건은 1980년 5월 광주 이후 반세기가 다 되어가는 지금까지도 ‘5월 광주’가 왜 끊임없이 논란의 한복판에 서야만 하는지, 그리고 한국 지배계급이 광주의 혁명적 기억을 어떻게 통제하고 억압하려 하는지를 명확하게 보여주는 '계급투쟁'의 단면이다.

     

    극우·보수 국민의힘 세력과 ‘진보’를 자처하는 민주당 세력을 막론하고, 부르주아 정치 세력은 5월 광주가 품은 노동자 민중의 투쟁과 그 폭발력을 두려워하며, 각자의 방식으로 그 혁명정신을 지워나가고 있다.

     

    심지어 극우 세력은 5월 광주를 조롱할 권리마저 ‘표현의 자유’라는 명분으로 포장한다. 이번 논란은 우리에게 묻는다. 우리가 요구하는 자유는 누구의 자유이며, 무엇을 위한 자유인가?

     

    이병태 전 규제합리화위원회 부위원장 사진: 청와대사진기자단

     

    극우 세력의 ‘광주 지우기’와 혐오 비즈니스

     

    국민의힘으로 대변되는 극우·보수 부르주아 세력은 1980년 이후 단 한 번도 광주의 투쟁 자체를 온전히 긍정한 적이 없다. 이들은 끊임없이 5·18의 역사적 정당성을 훼손하고, 항쟁 주체들을 악마화하려 시도해 왔다. 이들이 내세우는 왜곡의 논리는 매우 집요하고 체계적이다.

     

    첫째, 북한군 600명 특수부대 개입이라는 황당무계한 낭설, 둘째, 시민들이 먼저 무기고를 탈취했다는 식의 ‘무장폭동’ 프레임, 셋째, 유공자 명단 비공개를 빌미로 한 가짜 유공자 특혜 논란, 넷째, 신군부 수뇌부의 발포 명령 부인 및 계엄군의 자위권 행사 주장이 그것이다.

     

    이러한 주장들은 이미 수차례의 국가 진상규명위원회 조사, 1997년 대법원 판결, 심지어 미 국무부 기밀해제 문서를 통해 모두 명백한 허위로 판명되었다. 그럼에도 이들이 진실을 외면하고 비난을 멈추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가? 저 사실들을 몰라서일까? 결코 아니다. 이는 지극히 다분한 '계급적 의도'를 품고 있다.

     

    이들의 궁극적인 목적은 국가에 맞서 스스로 총을 들었던 노동자 민중의 ‘무장 항쟁’ 그 자체를 역사에서 지워버리고 싶은 것이다. 피지배계급이 단결하고, 무장해 쿠데타에 맞선 5·18의 선례는 그 자체로 불온하며 영원히 격리해야 할 두려운 기억이다. 이들에게 노동자 민중이란 통제와 착취의 대상일 뿐이며 결코 스스로 역사를 만들어가는 주체가 되어서는 안 되기 때문인데, 5·18은 그에 대항한 너무나도 명확한 예이기 때문이다.

     

    여기에 고도로 발달한 뉴미디어 시대의 자본주의적 수익 구조가 결합하며 상황은 최악으로 치달았다. 유튜브를 비롯한 각종 소셜미디어 플랫폼의 혐오 비즈니스 생태계에서, 5·18에 대한 극단적 조롱과 왜곡은 곧 막대한 후원금과 높은 조회수로 직결된다. 이병태 부위원장의 오만한 태도나 학생들의 ‘탱크 데이’ 조롱은, 역사를 이윤 창출 도구로 전락시킨 이 천박한 혐오산업의 생태계와 이를 통해 강성 지지층을 결집하려는 극우 세력의 노골적인 합작품이다. 진짜 책임은 이 혐오의 구조를 방조하고 이득을 취하는 자들에게 있다.

     

    사진: KBS

     

    누구의, 누구를 위한 자유인가? - 극우세력이 내세우는 자유, 그 계급적 본질

     

    극우 세력과 이병태 등이 5·18 폄훼를 방어하며 내세우는 논리는 다름 아닌 '표현의 자유'다. 이병태는 김수영의 시를 빌려와 "서울 한복판에서 김일성 만세를 외쳐도 허용되어야 한다"며 자신을 원칙적 자유주의자로 포장했다. 그러나 이병태가 표현의 자유를 말하려거든 김수영의 시부터 제대로 읽어야 한다.

     

    1960년, 김수영은 그의 시 ‘김일성 만세’에서 "한국의 언론자유의 출발은 이것을 인정하는 데" 있다고 썼다. 김수영이 요구한 자유는 국가와 지배계급이 금지한 것을 말할 자유, 지배계급의 억압에 맞서 노동자 민중이 말할 자유였다.

     

    우리는 물어야 한다. 김수영이 말하는 ‘자유’와 이병태가 말하는 ‘자유’는 같은가? 민중이 피 흘려 쟁취한 ‘자유’와, 그 자유를 쟁취한 민중을 조롱하고 역사를 왜곡할 ‘자유’는 과연 같은 것인가? 군사 독재시절 표현의 자유가 있었는가?

     

    사태가 드러내는 가장 뼈아픈 모순은, 극우 세력이 말하는 ‘표현의 자유’는 1980년 광주 노동자 민중의 투쟁을 비롯한 숱한 희생으로 쟁취한 권리라는 점이다. 이들이 부르짖는 표현의 자유는 역사적 맥락을 철저히 거세한 기만에 불과하다.

     

    이병태가 말하는 ‘자유’의 본질은 그의 반노동 행보에서도 분명히 드러난다. 그는 기업에 ‘해고의 자유’를 보장해야 한다고 했다. 하청노동자들이 투쟁으로 쟁취한 원청교섭의 권리에 대해서도, ‘계약 자유의 원칙을 정면으로 침해한다’며 비난했다. 그가 원하는 자유는 결국 무제한적 착취의 자유, 지배계급의 자유일 뿐이다.

     

    지금의 극우 세력은 민중이 피흘려 쟁취한 권리에 무임승차한 것도 모자라, 그 자유를 핑계삼아 정작 그 자유를 낳은 위대한 투쟁을 조롱하고 공격한다. 결국 이들은 '왜곡의 자유', ‘노동자 민중을 착취하고 탄압할 자유’를 요구하고 있을 뿐이다.

     

    김수영, 「김일성 만세(1960)」 육필 원고

     

    민주당으로 대표되는 세력은 광주를 진정 계승하고자 할까?

     

    결코 그렇지 않다. 오히려 이들은 더욱 교묘하게 5·18정신을 훼손하고 있다. 이들은 5·18 광주 민주항쟁의 역사적 후광과 도덕적 우위 없이는 자신들의 정치적 존재 이유를 증명하지 못한다. 따라서 이들은 매년 5월이 되면 앞다투어 광주로 내려가 눈물을 흘리며 5·18을 추모하지만, 그 방식과 목적은 철저히 자신들의 계급적 이익에 복무한다.

     

    이들은 광주 민주항쟁을 단순히 ‘군부 독재의 폭압에 희생당한 선량한 시민들의 평화로운 시위와 억울한 죽음’으로만 축소시킨다. 부르주아 정치권은 5·18의 가장 핵심적인 본질인 ‘노동자를 비롯한 기층 민중의 투쟁정신과 자본가계급의 탄압에 맞선 혁명적 투쟁’이라는 정신을 완전히 제거해 버렸다. 그들은 광주를 ‘합법적이고 절차적인 민주주의 회복’(부르주아 민주주의의 회복)이라는, 지배 체제에 가장 안전하고 무해한 틀 안에 가두었다. 5·18을 국가기념일로 만들고 기념비도 세워주었지만, 이는 역설적으로 광주의 혁명성을 영원히 매장하려는 '박제화' 작업에 불과했다.

     

    희생과 민주주의만을 강조할 뿐, 민중항쟁의 폭발적인 혁명 정신을 일상으로 이어가고 싶어 하지 않는 이들의 위선은 어렵지 않게 드러난다. 광주 영령들을 칭송하는 바로 그 입으로, 반도체산업 자본이 이윤을 축적할 ‘자유’, 무제한적으로 환경을 파괴할 ‘자유’를 요구한다. 이렇듯 이들에게 5·18의 민중은 오직 '죽은 민중'일 때만, 민중이 쟁취한 권리는 오직 추상적인 개념으로 남아있을 때에만 가치가 있다. 꿈틀거리며 자본주의 체제의 모순을 타격하는 '살아있는 노동자'의 저항 앞에서는, 보수든 진보든 부르주아 권력이라는 하나의 얼굴로 뭉쳐 탄압의 칼날을 휘두르는 것이다.

     

    5·18은 민중의 투쟁과 노동자계급의 권력을 향해 나아가는 길

     

    우리가 왜곡의 늪과 박제의 틀을 깨고 다시 복원해야 할 광주의 진실은 단 하나다. 그것은 전두환 신군부의 군사반란과 폭력에 맞선, 능동적인 ‘노동자 민중의 투쟁’이었다.

     

    항쟁의 폭발 과정을 복기해 보라. 초기 전남대 학생들과 지식인들의 계엄령 해제 요구 시위로 시작되었으나, 공수부대의 대검과 곤봉이 춤추는 무자비한 유혈 진압이 시작되자 거리로 쏟아져 나와 투쟁의 주도권을 쥔 것은 이 땅의 핍박받던 기층 민중이었다. 택시와 버스 기사들은 200여 대의 차량을 이끌고 계엄군에 맞섰으며 시장 상인과 주부, 여성 노동자들은 골목마다 주먹밥을 만들어 나르며 투쟁에 함께했다.

     

    무엇보다 계엄군의 집단 발포 이후 시 외곽의 예비군 무기고를 열어 ‘시민군’을 결성하고 최전선에 섰던 이들은 누구인가? "우리를 잊지 말아 달라"는 최후의 방송을 들으며 도청에 남아 죽음을 맞이한 지도부의 다수는 식당 종업원, 건설현장 일용직 노동자, 구두닦이, 가구점 직공, 야학 노동자 등 우리 사회 가장 밑바닥에서 멸시받고 착취당하던 평범한 노동자계급이었다. 국가의 무자비한 폭력 앞에 생명의 위협을 느끼면서도 이들은 죽음을 불사하며 연대했고, 스스로 무장했다. 이것이 5·18의 정신이며 진실이다.

     

    5월 광주, 도청광장

     

    과거의 기념일을 넘어, 오늘의 투쟁으로

     

    이재명을 비롯한 정치인들이 이병태 부위원장의 망언을 ‘인사검증 실패’, ‘국민 통합 저해행위’ 정도로 무마하려는 시도는 사태의 본질을 교묘하게 비껴가는 것이다. 이번 논란의 본질은 단순한 ‘통합’ 문제가 아니다. 왜 지금까지도 5월 광주는 조롱과 왜곡의 대상이 되는가? 그 근저에는 국가권력에 맞서 스스로를 조직하고 무장한 혁명적 민중을 지우려는 지배계급의 계급투쟁이 있다. ‘표현의 자유’라는 왜곡의 명분 역시 이 비열한 투쟁의 일환이다. 죽음을 불사하고 쟁취한 자유, 극우 세력은 바로 그 자유를 광주의 투쟁을 조롱하고 왜곡할 권리로 뒤집으려 한다. 이렇듯 문제는 추상적인 자유 일반이 아니라 자유의 계급성이다. 억압받는 자가 싸울 자유인가, 억압하는 자가 더 억압할 자유인가?

     

    극우는 거짓과 조롱으로 광주의 역사를 악마화하여 물리적으로 지우려 하고, 민주당류는 광주를 눈물 없이 볼 수 없는 수동적 희생의 비극으로만 포장하여 체제 내로 흡수하려 한다. 수단과 방법은 다르지만, ‘노동자 민중의 주체적 무장 항쟁’이라는 혁명의 뇌관을 해체하려는 목적에 있어서 두 부르주아 정치세력은 같은 배를 탄 동업자들이다.

     

    그렇기에 노동자계급에게 5·18은 결코 1년에 단 하루, 슬픈 추모가를 부르며 묵념하고 지나가는 과거의 화석화된 기념일이 되어서는 안 된다. 5·18은 착취받는 기층 민중이 스스로 무장하고 단결할 때, 억압적인 국가 기구와 자본주의 체제에 맞서 얼마나 강력하게 싸울 수 있으며, 얼마나 완벽한 대안 공동체를 만들 수 있는가를 증명하는 가장 날카로운 역사적 무기다.

     

    야구장에서 울려 퍼진 혐오 섞인 조롱과 지배계급의 오만함을 영원히 끝장내는 유일한 방법은 광주의 정신을 다시 찾아오는 투쟁이다. 그 투쟁은 1980년 5월, 이름 없는 일용직 노동자들과 구두닦이들이 도청을 사수하며 보여주었던 그 처절한 계급투쟁의 연대와 정신을, 오늘날 비정규직 철폐와 노동 해방을 위해 싸우는 수백만 노동자 속에서 현재진행형의 불꽃으로 되살리는 것이다.

     

    사진: 전병철

    backward top hom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