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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쟁에서 승리할 수 없다면 결혼도 출산도 꿈꾸지 말라? 3·8 여성파업으로 미친 세상에 파열구를!

기사입력 2024.02.29 17:24 | 조회 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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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결혼은 상위 20%의 전유물?

     

    결혼과 출산은 온전히 개인의 자유로운 선택에 따른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렇지 않다. 사회적 관계 속에 놓이지 않은 추상적 개인은 없기 때문이다. 2022년 12월 한국노동연구원은 <노동과 출산 의향의 동태적 분석>이라는 보고서를 발간했다. 누구나 직감하겠지만 결혼도 우선 먹고살 만해야 할 수 있다.

     

    결혼 의향을 통계적으로 분석한 결과, 정규직 청년의 결혼 계획 승산이 비정규직 청년보다 37% 높았다. 또한 사업체 규모가 클수록, 월평균 임금이 300만 원을 초과했을 때, 3년 내 결혼 계획 승산이 반대의 경우보다 유의미하게 증가하는 것이 확인된다. 결혼 여부가 개인의 경제적 상태에 따라 좌우된다는 것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통계는 남성의 임금 수준별 혼인율 통계다. (이 연구는 남성에 한해 임금 수준과 혼인율을 조사했는데, 성별분업 체계에서 남성은 결혼 이후 노동시장에서 경쟁력이 높아지는 ‘혼인 프리미엄’을 갖기 때문이다.)

     

    2017~2019년 기준, 31세~35세 남성 노동자 중 임금 수준 상위 10%의 혼인율은 76%, 하위 10%의 혼인율은 31%에 그친다. 36~40세의 경우, 상위 10%의 혼인율은 91%, 하위 10%의 혼인율은 47%에 불과하다. 아래 그래프는 임금 수준과 혼인율이 정비례 관계임을 나타내고 있다.

     

    출처 : 한국노동연구원, <노동과 출산 의향의 동태적 분석> 2022. 12.

     

    지난해 말 통계청이 행정자료를 분석해 내놓은 ‘2022년 신혼부부통계 결과’도 마찬가지다. 초혼 신혼부부의 2022년 연간 평균소득은 6,790만 원에 이르며, 특히 맞벌이 부부의 평균소득은 8,433만 원이다. 맞벌이 부부의 경우 연간 평균소득이 1억 원 이상인 경우가 27.1%, 7천만 원 이상~1억 원 미만인 경우가 28.6%에 이른다. 가구소득이 7천만 원 이상인 경우가 55.7%로 절반을 넘는 것이다.

     

    이를 다음과 비교해 보자. 통계청의 소득 10분위별 가구당 가계수지(2022년 4분기 기준)에 따르면, 전체 평균 가구소득은 연 5,800만 원에 그친다. 소득 8분위 가구에 이르러서야 연 7,745만 원, 소득 9분위는 연 9,668만 원을 기록한다. (최상위 10분위 가구는 1억 5,344만 원에 이른다.) 즉 2022년 신혼부부의 절반 이상은 소득 상위 2~30% 가구에 소속된 셈이다.

     

    결국 각자도생의 자본주의 경쟁에서 승자의 지위를 차지한 상위 2~30%에게나 결혼의 자유가 허락됐다고 말해도 지나치지 않다. 다 떠나서 주택가격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는데, 미래를 담보할 수 없는 불안정 저임금 노동자들은 신혼집 장만부터가 실현 불가능한 미션이다.

     

    내 자식을 경쟁에서 승리시킬 수 없다면 출산은 무책임한 짓?

     

    MZ세대들이 주된 이용자인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가난하면서 애를 낳는 것은 무책임하다’는 논리가 득세한 것은 하루이틀 된 얘기가 아니다. ‘낳음 당했다’라는 신조어는 이 정서를 그대로 드러낸다. 오늘날의 쇠퇴하는 자본주의 체제에서 경쟁의 승자는 각종 혜택을 만끽하고 사회적 자원을 독점하지만, 경쟁의 패배자는 최소한의 권리조차 박탈된 채 사회 바깥으로 내몰린다. 하루하루 이를 폭력적으로 체험하는 이들은 ‘낳음 당했다’란 표현으로, 무한경쟁에서 자식을 지원할 재력도 능력도 없으면서 나를 낳아버린 부모에게 원망을 드러낸다. 이들에게 출산과 양육은 삶의 기쁨일 수 없으며, 자신의 고통을 대물림한다는 죄책감과 공포를 불러일으킬 뿐이다.

     

    올해 초 글로벌 가구업체 이케아가 2023년 한 해 동안 38개국 소비자를 대상으로 한 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물론 가구를 더 팔아치우기 위한 목적에서 이뤄진 조사다.) ‘식구들과 함께 웃는 시간이 즐겁다’는 문항에 긍정적으로 대답한 비율은 전체 평균이 33%인데 비해 한국은 14%로 최하위로 그쳤다. ‘집에서 자녀·손주를 키우는 게 기쁘다’는 문항에 대한 긍정 비율도 8%로 역시 세계 최하위를 기록했다(전체 평균은 22%).

     

    한국의 노동자 민중에게 출산과 양육은 막대한 고통을 감수하며 굳이 선택할 이유가 없는, ‘비합리적’이고 ‘무모한’ 짓이 된 것이다. 특히 한국 특유의 입시 사교육 경쟁은 고통을 극대화한다. 2022년 기준 가구 월평균 사교육비는 41만 원이다. 그런데 이는 평균의 함정에 불과한데, 가구 소득별로 사교육비는 엄청난 편차를 보이기 때문이다. 월 소득이 800만 원 이상인 가구의 평균 사교육비는 64.8만 원으로, 200만 원 미만 가구의 평균 사교육비 12.4만 원의 6배가 넘는다. 입시 경쟁에서 투자액(?)만큼 성과가 산출된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일이다. 2020년 기준, 월평균 가구소득 700~1,000만 원 가정 학생의 특목고 진학 비율은 100~300만 원 가정 학생의 특목고 진학 비율보다 2.5배 높다. 반대로 월평균 가구소득 1,000만 원 이상 가정의 학생 중 전문계고 진학 비율은 4.1%에 그치지만, 100만 원 미만 가정 학생의 전문계고 진학 비율은 10배인 43.7%다.

     

    사회적으로는 소수에 불과한 부유층과 경쟁의 승자들이 SNS 등에서 자랑스레 휘두르는 ‘공정 경쟁’의 깃발을 바라보며 대다수의 노동자 민중은 이렇게 생각한다. 저들과 경쟁할 만큼 내 자식을 지원해 줄 수 없다면 아예 출산을 포기하는 것이 최소한의 책임감이라고. 이 엄혹한 경쟁 질서에서 내 자식이 경쟁의 승자가 되고 행복할 가능성은, 내 자식이 ‘루저’가 되고 ‘삼백충’이 돼 혐오와 멸시의 대상이 될 가능성보다 결코 높지 않으니까.

     

    약자들이 서로를 비난하고 멸시하는 사회

     

    2023년 합계출산율은 0.72명을 기록했다. 특히 전년도 4분기 합계출산율은 0.65명으로, 올해 합계출산율은 0.68명으로 예상된다. 바야흐로 “투쟁하는 계급들이 함께 몰락”(마르크스·엥겔스, <공산당 선언>)하는 단계로 접어들었다고 해야 할까? 저출생으로 인한 인구구조의 격변이 불러일으킬 사회적 파장을 누구도 부인하지 못한다. 특히 이주민에 대한 혐오와 차별이 공공연해질 것이며, 이는 노동자의 국제적 단결이라는 원칙을 심각하게 훼손할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혐오와 차별이 우선 여성들에게 가해졌다는 점은 주목해야 할 일이다. 몇 년 전부터 횡행하는 ‘맘충’이란 표현이 단적인 예다. 저출생으로 나라가 망하게 된 판국에도, 아이가 식당에서 음식물을 흘렸다는 이유로, 아이를 어린이집에 보내놓고 카페에 갔다는 이유로, 여성은 남편에 기생하는 ‘맘충’으로 비하된다. 임신과 육아를 이유로 경력이 단절되는 여성이 부지기수인데도, 생애주기 내내 여성 노동자가 남성 노동자보다 적은 임금을 받는데도, 무급 가사노동과 육아 책임이 여성에게 전가되는데도, 가장 약자인 여성이 오히려 혐오와 멸시의 대상이 된다.

     

    공동체적 연대와 협력이 완전히 해체된 사회, 각자도생이 유일무이한 생존 방식이 된 사회에서 약자들은 이렇게 서로의 살을 물어 뜯으며 고통을 견딘다. 소비자의 권리, 승자의 권리만이 절대적 권리다. 마치 자신은 어릴 적 누군가에게 한 번도 피해를 주지 않았던 것처럼, ‘노키즈존’은 제값을 지불한 소비자가 마땅히 누려야 할 권리로 치부된다. 내가 낸 세금으로 월급을 받는 보육교사들이 노조를 만드는 건 내 자식의 돌봄을 내팽개치는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

     

    또 수년 간 자신을 희생(?)한 대가로 얻어낸 각종 자격증과 정규직의 훈장은 승자가 누려야 할 불가침의 특권이다. 그래서 비정규직 노동자가 정규직이 되겠다는 것은 자신의 성취에 무임승차하겠다는 반사회적 떼쓰기다. 의대 정원 증원은 전공의 시절 주 80시간 노동을 견디면서도 승자의 특권을 수호해 온 의사들에게 감히(!) 사회가 도전하는 일이다.

     

    저출생을 해결할 수 없는 자본가 정부, 3·8 여성파업으로 미친 세상에 파열구를 내자!

     

    이런 미친 세상에서 저출생이 필연이 아닐 리 있겠는가? 까딱하면 비난과 혐오의 대상으로 굴러떨어질지 모르는 살얼음판 같은 세상에서 누가 행복한 미래를 꿈꾸며 아이를 낳을 수 있겠는가. 자본가 정치세력은 틈만 나면 저출생 문제를 해결하겠다 떠들지만, 저들은 이 아비규환과 각자도생의 각축장에서 벌어진 저출생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윤석열 정부나 민주당이 저출생 대책이라고 내놓는 정책들은 자본가 계급에게 이 사회를 운영할 역량이 없음을 증명하는 수백 가지 사례 중 하나에 불과하다.

     

    저출생을 해결하기 위한 정답이 멀리 있나? 그렇지 않다. 간단하다. 한마디로 모든 노동자가 미래를 꿈꿀 수 있어야 한다. 고용형태가 안정적이어야 하며, 노동시간은 규칙적이며 짧아야 하고, 충분한 생활임금을 벌 수 있어야 한다. 강요된 성별분업 없이 남녀 양육자 모두가 경력단절과 소득의 손실 없이 육아에 전념할 수 있어야 한다. 또한 이 사회에서 성장하는 후세대 모두가 인간으로서 누려야 할 기본권을 예외없이 보장받아야 한다. 내 자식이 살아가는 인생이 냉혹한 경쟁의 승패로 점철되는 것이 아니라, 연대와 협력 속에 느끼는 기쁨으로 충만할 것이란 확신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자본가 정부는 이것을 할 수 없다. 노동자 민중에게 인간다운 삶을 보장하는 것은, 자본의 이윤을 침해한다는 것과 동의어이기 때문이다. 자본의 이윤 질서를 수호하는 것이 존재 목적인 자본가 정부로서는 수용 불가능한 얘기다. ‘지방 발전으로 경쟁을 완화하겠다’, ‘셋째를 낳으면 1억 원을 주겠다’ 등 변죽만 울려대는 이유다.

     

    진짜 희망은 노동자들 스스로에게 있다. 약자에 대한 멸시와 혐오가 아니라 연대와 협력이 넘치는 사회, 누구라도 인간인 이상 단 한 명의 예외도 없이 존엄성을 보장받는 사회, 노동자가 실업과 저임금의 공포 대신 안정된 고용과 생활임금을 보장받을 수 있는 사회, 이로써 출산과 양육의 결정이 온전히 개인의 자유로운 선택에 따르게 되는 사회, 출산과 양육을 결정한 노동자들이 죄책감과 공포를 느끼는 대신 충만한 삶의 기쁨을 누릴 수 있는 사회는 바로 노동자들이 만들 수 있다.

     

    3월 8일, 이 사회에서 가장 고통받는 여성 노동자들이 파업에 나선다. 여성은 일터에서 여성이라는 이유로 채용 경쟁에서 밀려나고, 저임금에 고통받고, 임신·출산을 이유로 해고되고, 승진 대상에서 제외된다. 여성은 무급 가사노동, 육아 책임을 온전히 부담하면서도 ‘맘충’이란 비난과 혐오의 대상이 된다. 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장 열악한 지위를 가진 노동자들이 파업에 나서는 것이다.

     

    노동자들 개개인이 서로를 물어뜯는 경쟁에 몰두함으로써 이득을 얻는 것은 자본가 계급뿐이다. 그 대신 노동자들이 하나의 계급으로서 단결하고 투쟁할 때 이 미친 세상을 대신할 완전히 새로운 세상을 만들 수 있다는 점을 역사는 몇 번이나 보여주었다. 3·8 여성파업은 이 미친 세상에 파열구를 내고 새로운 세상으로 진군하는 위대한 출발점이 될 것이다. 그 길에 모두 함께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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