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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가 강요한 정신질환, 각자도생 대신 집단적 변혁을!

넷플릭스 드라마, <정신병동에도 아침이 와요> 후기

기사입력 2023.12.15 14:26 | 조회 1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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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얼마 전 넷플릭스 드라마 <정신병동에도 아침이 와요>가 상당한 인기를 끌었다. 종합병원 정신병동에서 일하는 의료인들의 이야기인데, 사람들의 공감을 자아냈던 것은 정신질환으로 입원한 환자들의 사연이다. 한때는 우리 주변의 평범한 누군가였을 그들을 아프게 한 것은 비인간적 자본주의 체제다. 장시간 노동과 과중한 업무 부담으로 공황장애를 앓는 청년 노동자, 직장 상사의 폭언‧갑질에 불안장애가 생긴 중년 노동자, 취업난에 수년간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다 실패하고 망상 증세를 보이는 청년, 평생 주변의 시선을 의식하며 강요된 삶을 버티다 조울증에 빠진 중년 여성 등의 이야기는 그렇게 낯설지 않은 소재다.

     

    드라마는 각자도생의 자본주의로 극심히 고통받는 사람들을 섬세히 묘사하고, 이를 극복하는 인간의 따뜻한 연대를 낭만적으로 그려낸다. 그러나 공허하다. 남의 처지를 헤아리고 도움의 손길을 보낼 여유가 있는 사람들 자체가 드문 것이 오늘날 우리의 현실이기 때문이다. 드라마에서도 통장 잔고가 아홉 자리이고 당연하듯 수입차를 끌고 다니는 의사들이나 그런 모습을 보여줄 뿐이다. 노동자 대중투쟁의 퇴조는 가장 억압받고 고통받는 사람들이 한데 뭉쳐 비인간적 경쟁체제라는 거악(巨惡)을 뒤엎을 수 있다는 낙관적 열망까지도 함께 앗아가 버렸다. 오늘보다는 내일이 더 나을 것이라는 소박한 희망조차 사라진 시대, 그것이 오늘날의 자본주의다.

     

    집단적 자살, 저출산

     

    11월 30일 한국은행이 발표한 경제전망보고서에는 <초저출산 및 초고령사회: 극단적 인구구조의 원인, 영향, 대책>이라는 제목의 중장기 심층연구 결과가 수록돼 있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초저출생의 원인은 “청년들이 느끼는 ‘경쟁압력’과 고용·주거·양육 측면의 ‘불안’” 때문으로 분석되었다. 양질의 일자리가 부족하고 취업 경쟁이 심화된 상태에서, 경쟁압력 체감도가 높은 청년들일수록 희망 자녀수가 유의하게 낮게 나타났다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취업을 못하거나 취업을 했더라도 비정규직 노동자인 청년들은 결혼 의향이 낮았지만, 공공기관에 취업하거나 공무원인 경우에는 결혼 의향이 높았다. 미혼 사유, 무자녀인 사유를 당사자에게 물어본 결과, ‘취업, 생활안정, 집 문제’ 등 “결혼하고 싶지만 상황이 여의치 않아서”라고 응답한 비율이 가장 높았다.

     

    전국 20~39세 청년 2천 명을 상대로 온라인 설문을 실시한 결과는 미래에 대한 희망이 사라진 청년 세대의 인식을 그대로 드러낸다. 설문 응답자의 84.9%는 지난 10년간 우리 사회의 불평등이 더욱 심각해졌다고 평가했으며, 87.4%는 향후 10년간 불평등이 더욱 심화될 것이라 전망했다. 개인 노력에 의한 계층 이동의 가능성이 낮다고 응답한 비율은 67.8%, 자신의 세대보다 자녀 세대의 사회경제적 지위가 높아질 가능성이 낮다고 응답한 비율은 61.6%에 이르렀다.

     

    국제 금융자본의 두목 가운데 하나인 라가르드 유럽중앙은행 총재가 몇 년 전 한국의 재앙적 저출생을 두고 “한국은 마치 집단적 자살사회와 같다”고 표현한 건 잘 알려진 일이다. 그나마 출산율이 1명을 넘었던 때의 발언이니, 합계출산율이 0.7명(2023년 3분기)까지 떨어진 지금에는 그 표현의 적절성을 더욱 부정할 수 없게 되었다.

     

    자본주의에서 희망을 잃어버린 사람들

     

    한국의 저출생이 미래의 희망을 잃은 사람들의 소극적 자살이라는 점은, 실제 자살자 수 통계를 통해서도 다시 확인된다. 2022년 한국의 자살 사망자 수는 12,906명으로, 인구 10만 명당 자살사망률은 25.2명에 이른다. 10대부터 30대까지의 사망 원인 1위가 자살이라는 점, 한국의 자살률이 OECD에서 단연 1위라는 점은 주지의 사실이다. (국제 비교를 위해 OECD 기준인구로 연령 구조 차이를 제거한 표준화 사망률을 따졌을 때, OECD 평균은 10.6명, 한국은 22.6명이다.)

     

     

    인간은 공동체 속에서 협력하고 연대하며 자신의 장점을 발휘할 때 행복감을 느끼기 마련이다. 비인간적 줄 세우기가 유일한 사회 구성 원리로 받아들여지는 시대, 경쟁의 승자에게는 넘치는 보상이 주어지지만 경쟁의 패자에게는 기초적 권리조차 박탈하는 것이 ‘공정과 정의’로 옹호되는 시대에, 제정신을 부여잡고 살라는 것 자체가 너무도 가혹한 요구일지 모른다.

     

    보건복지부의 ‘2023 고립·은둔 청년 실태조사’에 따르면 전국에 1만 2,105명의 고립·은둔 청년(19세~39세)이 확인된다고 한다. 이 중 504명은 아예 방 밖으로 나오지 않는 고위험군이다. 고립·은둔 청년의 81%는 대학 이상의 고등교육을 받은 사람들이다. 이들이 고립·은둔을 선택하는 첫 번째 이유는 취업 등 직업 관련 어려움(24.1%)이었다. 임금 노동자의 54.7%(2023년 상반기 기준)가 300만 원 미만의 임금을 받는데도 ‘삼백충’이란 비하 표현이 버젓이 통용되는 시대에 청년들이 아프지 않을 도리가 없다.

     

    윤석열 정부의 구역질 나는 ‘정신건강정책’

     

    심각성은 자본가 정부조차 외면할 수 없는 지경이다. 윤석열은 지난 12월 5일 ‘정신건강정책 비전선포대회’라는 것을 주재했다. 윤석열은 “급속한 산업 발전, 1인 가구의 증가, 가족을 비롯한 공동체의 붕괴, 과도한 경쟁 등으로 정신건강 문제가 심각해졌지만 국가 차원의 본격적인 투자가 거의 없었다”며, “정신건강 문제를 중요한 국가 아젠다로 삼고 적극 해결책을 강구”하겠다고 떠벌렸다.

     

    구역질 나는 수작이다. 저들이 저출생의 심각성이나 정신건강 대책의 시급성을 떠드는 것은 어디까지나 자본 축적의 전제가 되는 노동력 인구의 양적·질적 저하를 걱정하는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정신건강정책 비전선포대회’에서 한 참석자가 “직장생활 스트레스가 정신건강을 넘어 생산성에도 문제를 야기하며, 개인의 정신건강은 기업의 경쟁력을 넘어 국가의 경쟁력에도 영향을 미친다”고 발언한 것, 윤석열이 “정신건강 문제는 ‘사회안보’에 해당하는 문제”라고 지껄인 것은 이런 맥락이다.

     

    자본의 이윤을 철두철미하게 수호하는 자본가 정부는 정작 수많은 사람을 병들게 하는 자본의 이윤 질서에 대해서는 털끝만큼도 건드릴 생각이 없다. 오히려 무한경쟁과 부당한 차별을 ‘정의와 공정’으로 포장하며, 성평등의 절박한 요구는 ‘더 이상 구조적 성차별은 없다’는 말로 뭉개버리고, 노동시간 단축과 일자리 나누기 대신 장시간 유연 노동시스템을 강제하는 것이 현 자본가 정부다. 그런 자들이 “일상적 마음돌봄 체계”를 구축해 “예방부터 치료, 회복에 걸친 전 과정의 지원체계를 획기적으로 전환”하겠다고 떠드는 것은 꼴불견이다.

     

    죽지 말고 함께 살자

     

    누군가 아직 이 세상이 살만하다고 느낀다면, 그것은 자신의 계급적 지위 또는 계급 ‘내’에서의 위치를 객관화하지 못한 탓이라 해야 옳다. 경쟁에서 살아남은 소수의 승자를 제외한 나머지 패배자들에게, 한국의 자본주의는 이미 지옥이다. 불안정 고용과 저임금으로 고통받음에도 경쟁의 승자들이 자랑스레 내뿜는 성공 논리 앞에 무력하게 침묵해야 하는 사회에서 불행과 우울은 피할 수 없는 숙명이다.

     

    모두의 ‘정신건강’은 잃어버린 인간다움을 회복하는 것을 통해서만 실현될 것이다. 경쟁에서 살아남은 소수가 사회적 특권을 독점하고 경쟁에서 패배한 절대 다수는 일체의 권리에서 배제된다면, 잘못은 경쟁에서 패배한 사람들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경쟁 질서 그 자체에 있다.

     

    내가 느끼는 고통이 혼자만의 것이 아니라 자기 노동력을 판매해야 생존 가능한 노동자계급 다수의 보편적 고통이라는 것, 노동자계급의 빈곤과 박탈 맞은 편에는 노동자계급으로부터 거대한 부를 앗아간 한 줌의 자본가계급이 있다는 것, 저들 자본가계급이 누리는 무제한적 권력에는 어떠한 정당성도 없다는 것, 노동자계급이 사소한 차이를 넘어 거대한 단결을 실현하면 자본가 세상을 뒤엎고 새로운 사회를 건설할 수 있다는 것, 이것을 인식하고 실천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상실한 인간성을 다시 되찾을 수 있다.

     

    한마디로 노동자 계급투쟁의 복구를 통해서만 한국 사회의 각종 병리 현상은 비로소 치유 가능하다. 미조직 노동자들에게, 그리고 청년 노동자들에게 집단적 노동자투쟁이 하나의 ‘선택지’조차 아닌 시대에 막연한 얘기처럼 들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다른 길도 없다. 세계 곳곳에서 오랜 침묵을 깨뜨리고 노동자 계급투쟁이 진전하고 있는 지금, 한국에서도 그러한 길이 반드시 열릴 것이다. 자본주의에 더 이상 활로가 없다는 점은 명명백백(明明白白)하기 때문이다. 사회주의자들과 전투적 조직노동자 운동이 앞장서 전체 노동자들과 가난한 청년들, 차별과 억압에 고통받는 민중을 대변해 싸워나갈 때 거대한 노동자투쟁의 물결은 기필코 우리 앞에 다시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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