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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청교섭 쟁취! 이재명 정부에 맞선 7월 총파업 조직하자! - Ⅲ] 2026년 7월 노동자 총파업, 물러설 수 없는 투쟁이다!'사회적 대화'는 자본과 정부의 질서 안에 노동자운동을 묶어두는 장치다. 이재명 정부는 한편에서는 ‘노동운동 열심히 하라’는 덕담과 함께 ‘대화’를 말하면서도, 다른 한편에서는 폭력 경찰을 투입해 자본에 맞서는 전투적 노동자들의 투쟁을 탄압한다. 노동자 운동 상층과 이재명 정부의 관계가 긴밀해지는 만큼, 절대다수 하층 노동자와 사회적 약자의 생존권과 기본권은 억눌린다. 자본과 정부가 노동자를 가르려 한다면, 노동자는 총단결과 총파업으로 맞서야 한다. △원청교섭 쟁취 △모든 노동자의 노동기본권과 총고용 보장 △미국과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학살과 제국주의 침략전쟁 반대 △차별금지법 쟁취 △물가임금연동제 도입 △청년고용 창출 등 요구를 건 2026년 7월 노동자 총파업은 물러설 수 없는 투쟁이다. 사진: 노동과 세계 1. 반노동 이재명 정부 - ‘사회적 대화’ 제의와 함께 벌어지는 거침없는 노동 탄압 이재명은 2024년 3월, 총선을 앞두고 한국노총을 방문했다. 그 자리에서 윤석열의 노동정책은 “반노동 그 자체”이며 “거꾸로 가는 노동 시계를 바로 잡을 것”이라고 했다. 이때 이재명이 언급한 윤석열의 반노동 정책은 ‘건설노조 탄압, 현행 주 52시간제를 주 69시간까지 연장하려는 시도, 노조법 2·3조 개정안 거부권 행사, 중대재해처벌법 적용 유예와 법 내용 왜곡’이었다. 당시 이재명은 “노동자의 안전한 삶이 곧 민생”이라고 말했고, 민주당은 “민생을 살리고, 노동 존중 사회를 만들기 위해 힘차게 전진하겠다”라며 노동자 대변인인 양 행세했다. 그러나 이재명의 ‘친노동’ 행세는 오래가지 않았다. 2025년 2월 20일, 내란 우두머리 혐의로 구속된 윤석열의 첫 형사재판이 열린 날, 이재명은 현대자동차 아산공장을 방문했다. 이날 이재명은 현대자동차 사장 등에게 “기업 성장이 그 나라 경제성장의 전부다. 기업 성장을 통해 일자리가 만들어진다”라며 노골적인 친자본 언사를 늘어놓았다. 이후 대통령 취임 연설에서는 자본의 대변자로서의 본심을 드러냈다. 이재명 정부는 “실용적 시장주의 정부가 될 것”이며, ‘법과 정책이 금지하지 않는 행위는 모두 허용할 것’이라며 친자본 본색을 숨기지 않았다. 이재명은 연설 내내 ‘노동’은 단지 2번 언급했을 뿐이다. 반면 ‘성장’은 23번, ‘경제’는 12번, ‘기업’은 6번을 말하며 앞으로 어떤 길을 갈 것인지를 보여줬다. 이재명 집권 이후인 2025년 6월, 태안화력발전소 김충현 노동자가 중대재해로 사망했다. 이재명은 이에 대해 “사람보다 이윤이 앞서는 사회에서 안전은 가장 먼저 무너진다”라며 “기업의 책임 회피와 정부의 무관심 속에, 노동자의 생명은 점점 가벼워지고 있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김충현 사망 책임자인 서부발전과 한전KPS 원청 대표는 검찰에 송치되지도 않았다. 더 안전한 일터를 위해 한전KPS 하청노동자를 직접 고용한다는 고 김충현 대책위원회와의 약속도 이행하지 않고 있다. 심지어, 고 김충현 노동자와 그 동료들의 원청공기업인 한전KPS는 법원의 불법파견 인정과 비정규직 노동자 직접고용 판결에 불복하며 항소하기까지 했다. 이재명 정부는 공공부문 기업들을 지배하고 있음에도 한전KPS의 항소 포기를 강제하기는커녕 자본의 이해를 철저히 대변했다. 2026년 5월 30일 고 김충현 노동자 1주기 추모대회 사진: 공공운수노조 2025년 7월, 이재명 정부 첫해 2026년 최저임금 인상률은 고작 2.9%에 불과했다. 역대 정부 첫해 인상률 중 두 번째로 낮은 수치다. 이재명 정부는 반도체, 자동차, 조선, 방위산업 등 독점자본을 ‘전략산업’으로 격상시켜 천문학적인 재정을 지원하는 반면, 열악한 노동자들의 최저임금을 인상해야 할 정부의 책임은 방기했다. 마찬가지로 노동부 장관과 민주당 대표 등이 장기투쟁 사업장들을 방문해 투쟁을 잠재웠을 뿐, 문제 해결을 위한 악질 자본가들에 대한 그 어떤 제재도 가하지 않았다. 심지어 민주노조의 독립성을 훼손하는 윤석열 정부의 노동 탄압 수단인 노동조합 회계공시제도는 이재명 정부에서도 폐기하지 않았다. 이재명은 중대한 사건과 문제가 발생할 때마다 현란한 수사를 늘어놓는다. 그러나 아무리 그럴듯한 말을 앞세워도, 이재명 정부가 자본가계급의 이익과 부를 대변한다는 사실은 조금도 달라지지 않는다. 차이가 있다면 지배 방식뿐이다. 윤석열 정부가 노동자 민중 전반을 노골적으로 억압했다면, 이재명 정부는 더 교묘하고 세련된 방식으로 노동자 민중을 분할하고 탄압한다. 이재명 정부의 허울뿐인 ‘노동 존중’을 떠받치는 것이 사회적 합의주의다. 2024년 총선에서 이재명의 민주당은 일부 개량주의 진보정당과 자유주의 시민사회를 동원해 위성정당 ‘더불어민주연합’을 만들었고, 진보당은 위성정당에 참여했다. 윤석열 정권에 대한 대중의 분노를 흡수한 민주당은 총선에서 압승했다. 윤석열 친위쿠데타에 맞선 투쟁과 대선을 경유하며, 민주당과 노동자 운동 상층의 밀착은 더욱 강화됐다. 민주노총 위원장이 이재명 지지 대선 방침을 제출했고, 진보당은 이재명 지지를 선언하며 대선에서 사퇴했다. 노동자 운동 일부와의 밀착을 끌어낸 민주당은 노동자 민중운동에 대한 영향력 확대를 지속하고자 한다. 이것은 이재명 집권 이후 ‘사회적 대화’로 표현된다. 이재명 정부는 노동자 운동 상층과 동반자적 관계를 형성하며 민주당에 대한 대중적 지지를 확산하려 한다. 반면 최저임금·비정규직·이주노동자, 5인 미만 사업장 노동자 등 절대다수 하층 노동자의 생존권과 노동기본권 확대는 말 잔치에 그칠 뿐이다. 또한 윤석열 친위쿠데타에 맞서 싸운 여성·성소수자·장애인 등 소수자의 생존권과 평등권은 외면하며 짓누른다. 그 많은 노동자 민중이 광장에서 차별금지법 제정을 외쳤음에도, 정부는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다’는 말을 반복할 뿐이다. 심지어 국무총리 김민석은 “동성애를 모든 인간이 택했을 때 인류는 지속 가능하지 않다”라는 혐오 발언을 서슴지 않았으나, 이에 대해 사과도, 반성도 하지 않았다. 이렇듯 이재명 정부는 한편에서는 ‘노동운동 열심히 하라’는 덕담과 함께 노동자 민중운동 세력을 향해 ‘대화’를 말하면서도, 다른 한편에서는 폭력 경찰을 투입해 자본에 맞서는 전투적 노동자들의 투쟁을 탄압한다. 노동자 운동 상층과 이재명 정부의 관계가 긴밀해지는 만큼, 절대다수 하층 노동자와 사회적 약자의 생존권과 기본권은 억눌린다. 또한 투쟁하는 노동자들이 노동자 운동 상층 관료들에게 외면받으면 받을수록, 이재명 정부는 전투적으로 싸우는 노동자들을 혹독하게 탄압한다. 이런 조건에서 투쟁하는 노동자들의 절박한 문제가 풀리지 않는 것은 당연하다. 자본가들은 이런 노동자 운동 상층의 상태와 행보를 보며 투쟁의 장기화를 유도하고, 노동자들을 고사시키려 한다. 사회적 대화를 종용하는 이재명 정부 아래 서광석 열사가 목숨을 잃었다. BGF리테일은 자신이 원청 사용자임을 부정하며 화물연대와의 교섭을 모조리 거부했고, 폭력 경찰을 앞세워 무리한 대체 수송을 강행하다 결국 4월 20일 열사를 죽였다. 이런 폭력 경찰에 의한 참변은 우연이 아니다. 2026년 2월, 세종호텔 로비농성을 이재명 정부가 지휘하는 폭력 경찰이 침탈했고, 4월에는 지혜복 교사의 고공농성에 연대한 고진수 동지를 구속했다. 유예되고 또 유예된 택시월급제의 즉각 시행을 요구하며 공공운수노조 택시지부 고영기 동지가 고공에 오른 상황에서조차, 민주당은 택시자본가들을 위해 월급제 유예법안을 통과시켰다. 우리는 민주당 노무현 정권 당시 가장 많은 열사가 목숨을 잃었음을 기억해야 한다. 이재명 정부의 분할 지배에 흔들리는 노동자 운동의 현 상황은 노무현 정권 당시와 비슷하다. 노동자 운동이 이재명 정부에 대한 환상과 기대를 떨치고, 자본과 정부에 대한 독립성과 투쟁성을 복원해야 한다. 노동자 운동이 가난한 하층 노동자와 사회적 소수자의 기본권리를 위한 계급단결 투쟁을 조직할 때, 이재명 정부에 맞선 정치투쟁에 나설 때, 또 다른 노동자 민중의 희생을 막을 수 있다. 2. 2026년 노동자 투쟁의 핵심 - 원청교섭 쟁취 투쟁을 자본과 정부에 맞선 정치투쟁으로 이재명 정부는 노조법 2·3조 개정을 치적으로 포장한다. 그러나 이는 이재명 정부와 민주당의 치적이 아니라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수십 년간 쌓은 투쟁 성과와 판례를 반영한 결과이다. 개정 노조법 제2조 제2호는 “근로계약 체결의 당사자가 아니더라도 해당 노동자의 근로조건 등에 대하여 실질적이고 구체적인 지배력 또는 영향력이 있는 자”를 사용자로 규정했다. 그러나 이 규정은 원청자본가들에게 교섭 의무를 강제하지 못한다. 2026년 4월 24일 현재, 민주노총 산하 575개 노동조합이 원청자본에 교섭 요구 공문을 발송했다. 그러나 원청자본가들은 개정 노조법 제2조 제2호가 규정하는 하청노동자의 사용자가 아니라며 교섭을 거부하고 있다. 교섭노조 확정을 공고한 원청자본은 고작 21개에 불과하다. 노동자 정의를 확대하지 못한 점, ‘원청’을 ‘사용자’라고 명시하지 못한 점 등 개정 노조법 자체의 한계는 이미 드러났다. 원청자본가들은 이 한계를 활용해 교섭을 회피·거부하고 있으며, 노동위원회 역시 원청사용자성을 부정하고 있다. 이로써 개정 노조법 2조가 원청교섭을 보장하지 못한다는 점은 분명해졌다. 그럼에도 올해 투쟁 정세의 초점은 개정 노조법에 따른 하청노동자들의 원청교섭 쟁취 투쟁이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수십 년 동안 투쟁한 성과인 노조법 개정 이후, 그 개정을 토대로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도약할 수 있느냐를 결정할 것이기 때문이다. 민주노총과 금속노조 등 산별 연맹은 올해 원청교섭을 핵심 투쟁으로 결정했다. 또한 올해 정기대의원대회에서 원청교섭과 모든 노동자의 노동기본권 쟁취를 위한 7월 총파업을 확정한 상황이다. 2026년 4월 24일 현재, 민주노총이 종합한 원청교섭 상황은 다음 표와 같다. 교섭 요구 공문을 발송한 575개 사업장 중 교섭 요구 사실을 공고한 곳은 46개로 8%에 불과하다. 교섭노조를 확정 공고한 사업장은 21개로 3.7%에 불과하다. 원청자본가들은 하나로 단합해 교섭을 거부하며 2026년 노동자 투쟁에 대한 저지선을 치고 있다. 게다가, 고용노동부는 교섭 요구부터 교섭노조 확정 공고까지 약 45일에 달하는 복잡한 절차에 노동조합을 묶어놓고 자본가들의 원청교섭 무력화 책략을 지원하고 있다. 금속노조의 경우, 지난 3월 10일부로 69개 금속노조 산하 지회가 22개 원청자본을 상대로 교섭공문을 발송했다. 그중 교섭노조를 확정 공고한 사업장은 한화오션과 HD현대중공업뿐이다. 금속노조 69개 지회 중 현대자동차그룹 산하 노조들이 약 80%를 차지한다. 그러나 현대자동차그룹은 4월 20일 대표이사 김영일 명의로 노조법 제2조 제2호에 따르면 자신은 교섭 요구 사업장 노동자의 사용자에 해당하지 않는다며 “교섭에 응할 수 없음”을 금속노조에 통보했다. 현대자동차그룹이 교섭 거부를 통보함으로써 금속노조 원청교섭 투쟁은 답보상태에 빠졌다. 이미 금속노조는 조선산업을 제외하면 개정 노조법 시행령 절차에 따른 쟁의권 확보가 어렵다고 예측하고 산하 지회 보충 교섭을 병행해 쟁의권을 확보한다는 방향을 세웠다. 원청자본의 교섭 해태와 거부에 따른 난관은 이미 예상됐던 일이다. 2026년 원청교섭 투쟁은 개정 노조법 자체의 허점과 교섭 창구 단일화 시행령의 반노동자적 본질 때문에, 법적 교섭 절차에 얽매여서는 쉽게 돌파할 수 없다. 강력한 총파업 없이 완고하게 교섭을 거부하는 원청자본의 책략을 돌파하기 어렵다는 것이 엄중한 현실이다. 올해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원청교섭 투쟁에 대한 원청자본과 정부의 대응 전략은 다음과 같다. 첫째, 가능한 한 교섭을 거부한다. 둘째, 교섭을 거부할 수 없는 의제가 존재하는 노조는 교섭에 응하되, 교섭을 해당 의제만으로 한정해 비정규직 노조의 요구와 투쟁을 제한한다. 셋째, 교섭 단위를 분리하여 원청에 맞서 독자적 투쟁을 전개하려는 비정규직 노조들을 상대로, 자회사 등 중간 업체를 앞세워 노동·안전·보건 등 법이 강제하는 최소한의 요구를 협의한다. 넷째, 금속노조 등 상급단체 방침에 따라 공동투쟁·공동파업 가능성이 있는 사업장들에 대한 교섭을 완고하게 거부하며, 투쟁의 파급력에 따라 개별 교섭의 외양을 취한다. 원청자본과 정부의 전략을 분쇄하고 원청교섭을 쟁취하기 위해서는 노동자의 계급단결이 필수다. 올해 원청교섭 쟁취, 7월 총파업은 모든 노동자에게 막중한 투쟁이다. 산업 호황은 반도체와 방위산업 등 극히 일부 산업, 그것도 해당 산업 공급망 내 상위 독점기업에 한정됨에 따라 노동자계급 내 격차는 더욱 커지고 있다. 2025년 8월 기준, 노동자 상위 10%와 하위 10% 사이의 임금 격차는 월 임금 기준 5.52배에서 6.11배로 확대되었다. 중위 임금의 2/3 미만을 받는 저임금 노동자는 시급 기준 329만 명으로 전년보다 14만 명 증가했고, 월급 기준 450만 명으로 37만 명 증가했다(한국노동사회연구소, 2025년 11월 30일). 일부 대기업에 한정된 이윤 축적은 노동자 내부의 분절과 격차 확대로 이어지고 있다. 이재명 정부 주도로 본격화하는 노동개악에 대한 대응, 그리고 AI 도입 대응 역시 마찬가지다. 이재명 정부는 1월 청와대와 고용노동부·재정경제부·중소벤처기업부 등이 참여하는 범부처 ‘노동구조개혁 TF’를 출범하며 전체 노동자를 대상으로 한 노동개악에 나섰다. 언론에 따르면 노동구조개혁 TF가 주도하는 노동개악 추진 방향은 △기간제 비정규직 노동자 사용기한 3년 이상으로 연장 △직무·성과급제 확대 △전략산업 특별연장근로 확대 △지역 메가특구 노동시간 규제완화 등이다. 소위 ‘K자 양극화’로 일부 전략산업을 제외한 대부분 산업이 이윤 축적 위기를 겪는 지금, 원청자본은 정부 정책 방향을 지렛대로 구조조정을 본격화할 수밖에 없다. 경총과 한경협 등 자본가단체 역시 정부 노동시장 구조개편 논의에 발맞춰 기간제 사용기간 연장, 파견허용 범위 확대, 직무·성과 중심 임금체계 전환, 노동시간 규제 완화, 특별연장근로 확대와 규제 특례 확대를 요구하고 있다. AI 도입에 대한 이재명 정부 대응 역시 마찬가지다. 자본과 정부는 전 산업에 걸쳐 AI 기반 산업로봇, 협동로봇, 자율이동로봇, 자율운반로봇, 피지컬AI 등으로 모든 업종과 산업, 생산직과 사무직 일자리를 대체하려 한다. 이제 자본과 정부는 제조업 전반에 피지컬AI 도입을 본격화했다. 2026년 4월, 산업통상부는 ‘제조암묵지기반 AI모델개발사업’을 공고하고, 자동차·조선·철강·기계·전자·반도체·디스플레이·바이오·화학·방산·뿌리산업 등 10대 제조 분야에서 숙련노동자의 경험과 노하우, 곧 '암묵지'를 수집·정제해 AI가 학습할 수 있는 모델을 개발하겠다고 밝혔다. 이는 노동자가 오랜 시간 축적한 숙련과 판단력을 자본이 데이터로 수집해 사유화하고, 이를 노동자 대체와 노동 통제를 획기적으로 강화하려는 시도다. 정부와 자본은 노동자의 동의권, 보상권, 데이터 소유·통제권, 고용보장 방안은 제시하지 않고 있다. 이미 지식노동자들이 저항조차 하지 못한 채 AI로 대체되고 있다. 향후 AI 도입이 노동자들의 투쟁 없이 자본가들의 의도대로 추진된다면, 수년 내 모든 산업에서 대량 해고, 노동강도 강화, 노동 통제 강화가 진행될 것이다. 그야말로 전체 노동자에 대한 대대적 공격이 펼쳐질 것이다. 1998년 IMF 경제위기 당시 정리해고 공세를 기억하자. 당시 자본은 이윤 축적의 위기 앞에 정규직과 비정규직을 가리지 않고 대규모 정리해고를 강행했다. 자본은 간접고용 하청노동자와 기간제 직접고용 노동자들을 우선 해고한 후 정규직까지 정리해고했다. 비정규직과 정규직을 분할하며 결국 모든 노동자를 공격한 것이다. 지금 자본의 전략 또한 마찬가지다. 다만 이번에는 순차적으로 공장과 사업장을 폐쇄한 후 최첨단 자동화와 로봇 공장으로 재건축하면서, 우선 정규직의 고용은 보장하되 모든 비정규직을 정리해고하는 것이다. 그다음 소수화된 노조 정규직들의 노동강도와 통제를 강화하고 인원을 계속 축소하려는 게 자본의 전략이다. 또다시 패배하지 않는 길은 자본과 이재명 정부의 분할 전략에 맞선 노동자 총단결 대안을 구축하는 것이다. 이것이 2026년 원청교섭 투쟁, 그리고 모든 노동자의 생존권 쟁취를 위한 7월 총파업 투쟁의 막대한 중요성이다. 3. 7월 노동자 총파업 - 전체 노동자의 총단결·총파업으로 사회대변혁의 길을 열자 지금은 엄중한 시기다. 그러나 민주노총과 주요 산별노조 지도부 일부는 이재명 정부와 유대에 골몰한다. 6월 지자체 선거를 앞두고 가시화하는 민주당과 진보정당의 후보단일화 역시 민주노조운동에 대한 민주당의 영향력을 확대하는 기제다. 따라서 올해 민주노총 지도부가 이재명 정부와 자본에 맞서 실질적인 총파업을 조직할 것이라고 기대하기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그럼에도 △원청교섭 쟁취 △특고·플랫폼·프리랜서 노동자 등 모든 노동자의 노동기본권 확대 △미국·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학살과 제국주의 전쟁 반대 △차별금지법 쟁취 △물가임금연동제 도입 △청년고용 창출 등 노동자 민중의 절박한 요구 쟁취를 위한 총파업의 가능성이 닫혀 있다고 예단할 순 없다. 분명한 것은 자신의 절박한 요구를 쟁취하고자 원청교섭 투쟁에 나선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7월 총파업 선봉에 서야 한다는 사실이다. 바로 민주노총 산하 원청교섭 사업장 노동자, 이재명 정부를 사용자로 둔 공공부문 비정규직 노동자, 현대자동차그룹과 싸우는 금속노조 원청교섭 노동자들이 총파업을 촉발할 수 있느냐가 관건이다. 7·8·9월 3차례 총파업을 결의한 금속노조의 경우 6월 지자체 선거, 7월 총파업, 하계휴가, 8~9월 총파업, 민주노총 선거로 이어지는 흐름과 일정은 총파업의 원심력을 높이는 난관으로 작용할 수 있다. 또한 금속노조 안에서도 원청교섭에 나선 사업장과 그렇지 않은 사업장이 나뉘어 있고, 원청교섭을 요구하는 사내하청 노조와 그렇지 않은 정규직 노조가 나뉘어 있다. 또한 7월 총파업을 시작으로 8~9월 총파업을 조직할 계획과 준비 정도에서 금속노조 18만 조합원 내 상당한 온도 차이도 존재하는 상황이다. 결국 관건은 생존권과 고용 위기에 직면한 노동자들이 주도하는 원청교섭 투쟁을 전 사회적으로 확대하는 데 있다. 원청교섭 투쟁은 현장의 힘으로 가능하되, 특정 현장 노동자들의 힘만으로 돌파할 수 없다는 게 분명해졌다. 거의 모든 자본가가 하청노동자들의 교섭 요구를 거부하는 지금, 원청교섭 쟁취 요구를 들고 전체 자본가와 이재명 정부에 맞선 투쟁을 벌여야 한다. 심지어 “공공부문 모범사용자가 되겠다”는 이재명 정부의 약속이 허구였음을 드러내듯, 공기업 중 교섭 요구를 공고한 기관은 두 곳에 불과하다. 민간 자본이건 공기업 자본이건, 자본가들은 합심해 비정규직 노동자들과의 교섭을 거부하며 하청노동자들의 노동3권을 부정하고 있다. 어느새 870만 명으로 폭증한 특수고용·플랫폼·프리랜서 노동자를 포함한 모든 노동자의 노동기본권 보장, 하청노동자의 생존권과 총고용 보장을 위한 원청교섭 쟁취를 목표로 노동자 총단결·총파업의 길로 전진해야 한다. 올해 노동자 총파업의 요구는 전체 노동자의 요구를 대변한다. 그렇기에 이 투쟁은 더 단호할수록, 정치투쟁의 성격을 강화할수록 사회적 쟁점으로 떠오를 것이며, 절대다수 미조직 노동자들의 지지 속에 펼쳐질 수 있다. 사진: 노동과 세계 원청교섭 쟁취 투쟁은 BGF 자본에 맞선 화물연대 노동자들의 투쟁을 시작으로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다. 금속산업 사업장, 공공부문 사업장, 대학 사업장 등 개별사업장 교섭을 넘어 공동투쟁·공동파업의 흐름으로 확장해야 길을 열 수 있다. 이것이 전국적 연대로 확장된 서광석 열사 투쟁이 보여준 교훈이다. 6월 발전 노동자 행진과 최저임금 투쟁은 총파업의 흐름을 형성하는 계기다. 6월 13일, 발전산업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공공재생에너지 확대! 발전노동자 총고용 보장! 2026 정의로운 전환 노동자 시민 대행진>을 준비하고 있다. 고 김충현 노동자 사망에도 여전히 발전산업 다단계 하청구조를 유지하는 이재명 정부, 석탄화력발전소 폐쇄에도 고용보장 대책은 없는 발전소 원청자본과 이재명 정부에 맞선 투쟁에 함께하자. 공공재생에너지 확대로 총고용 보장을 요구하는 발전산업 비정규직 노동자들과 함께 7월 총파업으로 가는 길을 다지자. 또한 6월 최저임금 투쟁 시기에는 870만 특수고용·플랫폼·프리랜서 노동자를 비롯한 모든 노동자에게 최저임금 적용과 노동자성 인정을 요구하며 일터기본법의 허구를 드러내고, 모든 노동자에 대한 근로기준법 적용, 진짜 사장 책임 요구를 사회적으로 확대하자. 원청교섭을 거부하며 개정 노조법을 무력화하는 원청자본가들과 친자본·반노동 정책을 쏟아내는 이재명 정부에 맞서 △원청교섭 쟁취 △모든 노동자의 노동기본권과 총고용 보장 △미국과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학살과 제국주의 침략전쟁 반대 △차별금지법 쟁취 △물가임금연동제 도입 △청년고용 창출 등 노동자 민중의 절박한 요구를 걸고 7월 총파업을 조직하기 위한 준비와 결의로서 아래를 제안한다. ▸ 모든 노동조합 내에서 ‘일터기본법’을 비롯한 이재명 정부의 가짜 노동권 확대정책, 모든 노동자 원청교섭권 보장은커녕 공공부문 악질사용자로 역할하는 이재명 정부를 규탄하는 목소리를 조직하자. ▸ 금속산업과 공공부문 원청교섭 비정규직 사업장들이 원청 대자본과 이재명 정부에 맞선 7월 총파업 투쟁에서 선봉에 서자. ▸ 원청교섭 사업장 지도부는 7월 총파업 조직화를 위한 현장 순회, 전체 조합원의 총파업 참여를 위한 교육·선전을 배치하자. ▸ 원청교섭 사업장들은 전체 조합원 임단투 결의대회를 열어 올해 임단투 승리와 원청교섭 쟁취를 위한 7월 총파업 참여를 결의하자. 임금과 노동조건 개선 요구, 고용 보장 요구, 원청교섭 쟁취 요구를 분리하지 말고 하나의 투쟁으로 결합해야 한다. ▸ 원청교섭 사업장들은 업종과 산업별로 원청자본을 압박하는 공동투쟁 결의대회를 배치하고, 연대투쟁 확대 속에서 7월 총파업으로 가는 조직력과 투쟁력을 강화하자. ▸ 금속노조 임시대의원대회 교섭 방침 - “모든 단위 조직은 18만 공동 요구 중 '비정규직 고용과 원청교섭권 보장' 요구의 최소 쟁취 없이 의견 접근할 수 없음” - 을 반드시 사수하자. 이 방침은 원청교섭 투쟁을 일부 비정규직 사업장의 요구로 밀어내지 않고, 금속노조의 공동 투쟁으로 세우기 위한 최소한의 조치다. ▸ 금속노조 원청교섭 사업장 중 현대차그룹 계열 서열 물류사·모듈 부품사·제철소·조선소 지회들에서 원하청 노동자 공동투쟁·공동파업을 조직하자. 원청 대자본은 다단계 하청 구조로 노동자를 분할하고 사용자 책임을 회피해 왔다. 이에 맞서 원하청 노동자가 공동 요구를 세우고 함께 투쟁해야 한다. ▸ 미국-이란 전쟁과 팔레스타인 학살 반대를 7월 총파업의 요구로 세우자. 전쟁은 노동자계급의 삶과 직결되어 있다. 팔레스타인 학살과 중동 전쟁 확대는 한국 노동자에게도 군비 증강, 물가 상승, 노동권 후퇴, 민주주의 억압으로 되돌아온다. ▸ 전쟁으로 인한 에너지 가격 폭등과 인플레이션 고통 전가에 맞서, 물가상승분을 임금에 자동 반영하는 물가임금연동제 도입과 실질임금 보장을 요구하자. ▸ 차별금지법 제정을 7월 총파업의 요구로 세우자. 차별금지법은 노동자계급의 단결을 가로막는 차별, 혐오와 배제에 맞선 최소한의 평등권 요구다. 여성·성소수자·장애인·이주민·비정규직·특수고용·플랫폼노동자 등 모든 노동자의 권리를 함께 내걸고, 7월 총파업을 차별과 배제에 맞선 계급투쟁으로 확대하자. ▸ ‘쉬었음’ 청년과 은둔고립 청년의 증가는 개인의 의지 부족이 아니라, 자본주의가 만든 문제다. 공공부문부터 청년 일자리 창출, 생활임금 보장, 임금 삭감 없는 노동시간 단축을 통한 일자리 나누기를 요구하자. ▸ 올해 노동자 총파업의 성과를 바탕으로 △비정규직 철폐 △특고·플랫폼·프리랜서 노동자 등 모든 노동자의 노동기본권 보장 △5인 미만 사업장 근로기준법 전면 적용 △AI 도입에 대한 노동자 통제 △임금 삭감 없는 노동시간 단축으로 모든 노동자 총고용 보장 △팔레스타인 학살과 제국주의 침략전쟁 중단 △차별금지법 쟁취 등 사회변혁을 위한 정치투쟁 전선을 열어가자.2026-06-02 | 조회 2,941 -
스페인: 미등록 이주민 50만 합법화 - 투쟁은 계속된다지난 1월 27일 스페인 정부는 50만 명이 넘는 미등록 이주민에 대한 합법화 계획을 발표했다. 2025년 12월 31일 이전에 스페인에 도착했고, 최소 5개월 이상 스페인에 실제로 거주했으며 범죄 경력이 없는 이주민이 합법화 대상에 포함된다. 4월 15일 칙령이 승인됐고, 합법화 신청 절차가 진행되고 있다. 사회주의를향한전진은 ‘연속혁명경향-제4인터내셔널’(CRP) 소속의 스페인 혁명적 사회주의 조직 ‘혁명적노동자경향’(CRT) 동지들에게 합법화 정책의 배경을 들었다. 사회당 주도 연립정부가 다음 선거에서 우파가 승리할 가능성에 대응하여, 좌파 내 ‘선거 기반’을 공고히 하려는 의도가 작용했다. 다른 측면으로 이 정책은 ‘이민자 단체들과 좌파 사회운동의 승리’라는 의미를 갖는데, 이민자 단체들과 좌파 사회운동은 ‘지금 당장 합법화(Regularización Ya)’ 운동을 대대적으로 펼쳤다. 2021년부터 합법화 ‘입법 발의안’을 위해 약 70만 명의 서명과 900여 개 단체의 지지를 끌어냈다. 현재 ‘혁명적노동자경향’ 동지들은 합법화를 가로막는 수많은 장애물을 걷어내기 위해 투쟁하고 있다. 서류 제출 기한 연장, 범죄경력 조회 면제, 그리고 서류 처리를 위한 인력 확충을 요구하며 노동자 시위를 조직하고 있다. 스페인 상황은 이주민에 대한 강력한 단속추방과 통제 정책이 시행되고 있는 여러 나라에 시사하는 점이 크다. 스페인 ‘혁명적노동자경향’의 기관지 <일간좌파>의 글 두 개를 소개한다. 이 동지들은 “권리는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쟁취하는 것”임을 강조한다. 합법화 정책의 의미와 한계, 최근 상황을 알 수 있는 글이다. 특별 합법화: 수년간의 배제 정책 끝에 이주민 운동이 쟁취한 성과 (2026년 1월 28일) 수천 명의 이주민이 수년 동안 거리에서, 동네에서, 일터에서 요구해 온 끝에 스페인 정부가 한 걸음을 내딛었다. 행정상 미등록 상태인 약 70만 명에게 효력이 미칠 특별 합법화 조치가 예고되었다. 외국인법 시행령 개정에 관한 칙령을 국무회의에서 승인함으로써 시행될 이 정책은 하늘에서 떨어진 것도 아니고, 제도권의 관대한 시혜도 아니다. 이는 조직된 이주민 운동의 지속적 투쟁의 성과이며, 사람들을 비가시화하여 불안정 상태로 내모는 이주민 관리 체제에 맞선 오랜 투쟁이 직접 만들어 낸 성취다. 스페인사회노동당(PSOE)과 포데모스(Podemos) 사이의 합의가 수십 년 동안 쌓아 온 장벽에 생긴 하나의 균열임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국경을 폐쇄하고, 이주 통제를 외주화하며, 이주민을 체계적으로 범죄자 취급하는 유럽의 분위기를 감안하면, 이미 이곳에서 생활하고 노동하고 경제의 모든 부문을 떠받치는 사람들을 행정적으로 인정한다는 결정은 늦었지만, 희망을 엿보게 해 준다. ‘지금 당장 합법화(Regularización Ya)’ 운동은 분명하게 주장한다. “합법화는 자선이 아니라 사회 정의다.” 이들은 오늘의 진전이 지금까지 회합과 제안과 조직화를 통해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해 온 활동의 직접적 결실이라고 자축한다. 이들의 활동은 수년간의 제도적 봉쇄를 무너뜨리는 데 성공했다. ‘지금 당장 합법화’ 운동은 “합법화는 충분히 실현가능한 일이었고, 마침내 현실이 되었다”라고 강조하면서, 불확실하기만 한 의회의 셈법을 기다리지 않고 정부의 행동을 이끌어낸 것은 바로 민중의 압력이었음을 상기시킨다. 그러나 정치적 논쟁이란 얼마나 잔혹한 것인지 칙령 승인 과정에서 다시 한번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우파인 인민당(PP)과 극우 정당 복스(Vox)는 경고하고 낙인 찍는 담론을 펴면서 반응했고, 인종주의라는 낡은 망령을 자극하면서 합법화는 커다란 위협이라고 주장했다. 놀랍지는 않다. 두 정당 모두 수년간 이주민을 표적으로 삼아 정치적 자본을 축적했으며, 이주민을 추방하고 구금 시설에 감금하고 기본권까지 체계적으로 부정하는 징벌적 정책을 옹호해 왔다. 그들의 목표는 정주민과 이주민이 공존하도록 환경을 개선하거나 이주민의 권리를 보장하는 것이 아니라, 1등 시민과 2등 시민을 가르는 사회적 국경을 강화하는 것이다. 하지만 아무런 설명 없이 오늘의 성취를 역사적 전환점이라 주장한다면 이 또한 오류일 것이다. PSOE 정부마저도 오랫동안 “강경 노선”을 고수한 이력이 있다. 즉각적 강제 송환(약식 추방), 입국을 막기 위한 제3국과의 협정, 구금 시설 유지, 체류 자격 및 권리를 얻는 과정을 더욱 가혹하게 만든 법 개정 등이 그것이다. 여전히 심각하게 부당한 이주민 관리 체제가 특별 합법화와 공존하고 있으며, 생명과 존엄보다 통제와 안보를 우선시하는 유럽의 정책도 변하지 않았다. 정치적 권리나 노동권 같은 권리들은 얼마든지 박탈당할 수 있고, 합법화가 이 같은 권리를 자동으로 부여하지는 않는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이주민이야말로 불안정화와 비정규 노동 때문에 가장 큰 타격을 입는 이들이다. 따라서 오늘의 한 걸음은 중요하지만 그만큼 불충분하다. 중요한 이유는, 수십만 명의 사람들이 행정의 그늘에서 벗어나 노동 계약과 의료를 보장받고 덜 두려운 삶을 누릴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불충분한 이유는, 미등록 이주민을 구조적으로 양산하는 체제는 해체되지 않았으며, 동일한 배제의 악순환이 반복되지 않으리라는 보장도 없기 때문이다. 이 합법화의 역사는 분명한 교훈을 준다. 권리는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쟁취하는 것이다. 조직된 이주민 운동이 없었다면, 운동이 영향력을 행사하고 제도적 무관심에 끈질기게 저항하지 않았다면 이 칙령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아직 갈 길은 멀다. 규율을 목적으로 고안된 외국인법을 폐지하고, 구금 시설을 폐쇄하고, 인종주의적인 단속을 끝내고, 안전한 합법적 경로를 보장하고, 이미 우리 사회의 일부인 사람들을 온전히 인정하는 일이 남아 있다. 오늘, 부분적 승리를 축하한다. 내일, 투쟁은 계속된다. 다른 곳에서 태어났다는 이유로 단죄당하는 사람들이 존재하는 한 정의는 미완의 과제로 남기 때문이다. 원문: https://www.izquierdadiario.es/Regularizacion-extraordinaria-una-conquista-del-movimiento-migrante-despues-de-anos-de-politicas-de 50만 이주민 특별 합법화의 첫걸음이 관료적 장애물에 가로막히다 (2026년 4월 23일) 지난 4월 15일, 페드로 산체스 정부는 인종주의적인 제도로 인해 미등록 상태에 놓인 50만 명 이상의 이주민을 합법화하는 출발점이 되어야 할 칙령을 승인했다. 신청서 제출 기한은 6월 30일로 빠듯하고, 혼란스러운 가운데 신청 절차가 시작되었다. 관청 앞에 늘어선 줄, 밤샘 대기, 방해물을 세우거나 아예 협조를 거부하는 시청, 무엇보다 이주민 운동이 막아내기 위해 투쟁해 온 문서, 바로 “취약성 증명서”가 혼란을 가중한다. 이번 조치는 위대한 사회적 진전으로 포장되었지만, 국가의 이주 관리 체제에 스며든 제도적 인종주의 때문에 또 하나의 장애물로 변질될 위기에 처했다. 신청서 제출이 시작된 4월 16일 이후 언론을 통해 퍼진 사진들은 거리에서 잠을 자는 사람들과 카스텔로·발렌시아·만레사·세비야·팔마 데 마요르카 등 전국의 도시에 늘어선 줄을 보여준다. 이전의 칙령 초안 중 어디에도 등장하지 않았던 “취약성 증명서”를 구하는 줄이다. ‘지금 당장 합법화(Regularización Ya)’ 운동의 연대 단위들은 증명서 요건을 칙령에서 삭제하기 위해 투쟁했지만, 결국 정부가 포함시켰다. 칙령 본문 초안은 미등록 지위에 놓인 모든 사람이 취약한 상태에 있다고 추정했지만, 국가평의회가 이러한 추정에 반대하는 권고안을 내놓았고, 결국 증명서 제출 요건이 삽입되었다. 그 결과, 합법적 지위를 얻기 위해 수년간 기다려 온 사람들을 정면으로 강타하는 관료적 병목이 생겨났다. 사회 복지 담당 부서들은 마비 상태다. 사회복지사들은 취약성 보고서를 발급해야 한다는 사실을 4월 15일 칙령 공표 전까지 알지 못했으며, 아침에 출근하고 보니 이미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었다고 비판한다. 이메일로 하달되는 지침은 분 단위로 바뀌었고, 직원들은 몰려드는 민원인들에게 무어라 답해야 할지 알지 못했다. 이를테면 지난 4월 21일 수요일 오전, 바르셀로나의 이민자·이주자·난민 지원 서비스(SAIER)는 기나긴 줄에 압도되었고 사회 복지 제도가 구조적으로 붕괴했음을 다시 한번 여실히 드러냈다. 수백 명의 군중이 새벽부터 기다렸고, 몇몇 돌발 상황 때문에 몇 시간 동안 민원 접수가 중단되어 대기자의 상당수를 응대하지 못했다. 이것은 예외적인 사태가 전혀 아니며, 일상적으로 포화 상태인 사회 복지 현실을 반영한다. 절차를 예측 가능했음에도 시청의 인력 보강 등은 분명 불충분했고, 이주민들이 그 자체로 이미 겪고 있는 장벽과 제도적 폭력은 이렇게 지속된다. 한편, 마드리드에서는 칙령이 승인되기 한참 전에도 사회복지사 면담 예약은 6월부터나 가능했고, 이렇게 대기 명단이 길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정부가 정한 두 달 반 이내에 증명서를 발급받는 것이 불가능하다. 제도적 인종주의라는 말은 은유가 아니다. 그것은 잘못된 정보, 정치적 의지의 부재, (그리고 일부 경우에는) 행정 당국의 노골적인 인종주의적 태도와 마주하는 수천 명 이주민의 일상적 삶이라고 활동가들은 고발한다. 마드리드 시장 호세 루이스 마르티네스–알메이다는 벌써 이 기회를 틈타 정부를 공격했다. 그는 정부가 “엉터리 짓”을 하고 있다며 비난하고, 시 당국은 그 대가를 치를 생각이 없다고 경고했으며, 이주민을 범죄자 취급하는 메시지를 퍼뜨렸다. 명백한 위선이다. 그는 수년간 사회 복지 제도를 해체하여 최저 수준으로 방치해 온 장본인이면서, 이제 자신이 일조한 그 혼란의 뒤편에 숨어 있는 것이다. ‘온두라스 이주 여성 네트워크’의 카렌 로드리게스는 이토록 적대적인 정치 환경에서 취약성 증명서를 요구하는 것은, 합법화 정책 자체를 훼손하며, 수년 전부터 기다려 온 이주민들의 정신 건강에도 악영향을 미친다고 경고한다. ‘지금 당장 합법화’ 운동의 일원이자 ‘능동적 가사노동자 협회(SEDOAC)’ 활동가인 실바나 카브레라는 들쭉날쭉한 기준과 신청 절차 지원을 거부하는 일부 지역 관청이 전진의 실질적 장애물이 되고 있으며,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부담은 협력 단체들에게 떠넘겨질 것이라고 경고한다. 이 모든 혼란스러운 상황은 70만 명 넘는 서명에 힘입은 시민 사회의 압력과 투쟁에도 불구하고 심층 원인을 문제 삼지 않는 합법화 조치의 구조적 한계를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그것은 바로 외국인법이다. 외국인법은 수천 명을 미등록으로 단죄하여 끌고 가서 기본권을 침해하는 행정 감옥인 이주민 수용소를 매년 가득 채운다. 정부가 “성공적인 절차”와 기록적인 신청 건수를 이야기하는 동안, 활동가들은 미등록이라는 사실 자체가 이미 취약성의 한 형태임을, 그리고 그 어떤 관료적 절차도 한 사람이 자신의 삶을 일구기로 결정한 곳에서 권리를 지니고 생활하고 일하지 못하도록 막아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외국인법을 폐지하지 않고 이주민 수용소를 해체하지 않는 한 스페인은 언제까지나 이주민에게 적대적인 땅으로 남을 것이다. 원문: https://www.izquierdadiario.es/La-regularizacion-extraordinaria-de-medio-millon-de-personas-migrantes-comienza-llena-de-trabas2026-05-27 | 조회 6,497 -
일상으로 스며든 극우와 자본의 민낯, 그리고 정치적 위선최근 온 사회를 충격에 빠뜨린 스타벅스의 이른바 ‘탱크데이’ 사태는 단순한 기업 마케팅 부서의 실무적 일탈이나 ‘윤리적 감수성 부재’로 치부될 수 없는 중대한 사회적 징후다. 5·18 민주화운동 기념일 당일에 ‘탱크’라는 단어를 전면에 내세운 텀블러 할인 행사를 진행하고, 1987년 박종철 열사 고문치사 사건을 조롱하는 “책상을 탁 치니 억”이라는 망언을 마케팅 카피로 사용한 것은 우리 사회의 역사적 합의(노동자·민중의 역사적 투쟁성과)에 대한 도발이다. 이 사태는 단순히 자본이 돈벌이를 위해 선을 넘은 것을 뛰어넘는다. 첫째, 온라인 커뮤니티의 음지에 머물던 극우적 혐오 밈이 주류 사회와 일상으로 깊숙이 침투했다는 점. 둘째, 이러한 일상화의 배경에는 ‘멸공’ 등을 부르짖어 온 정용진 신세계그룹 회장의 그간 행보가 만들어낸 조직 문화적 토양이 자리하고 있다는 점. 셋째, 이 참담한 비극을 오직 다가올 선거와 진영 결집을 위한 정쟁의 도구로 전락시킨 부르주아 정치권의 위선이다. 극우적 밈의 일상화와 주류화 과거 5·18 광주 민주화운동을 북한군의 폭동으로 매도하거나, 국가 폭력에 의한 희생자를 조롱하는 행위는 일베와 같은 극우 성향 커뮤니티 내부에서나 통용되는 그들만의 놀이(?)였다. 그러나 스타벅스 사태는 이러한 극우적 문화가 ‘트렌디한 밈’이라는 외피를 두르고 대기업의 공식적인 업무까지도 침투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신세계그룹의 자체 진상조사 결과에서 “고의성을 입증할 명확한 근거를 찾지 못했다.”거나 “AI에 물어본 문구”라는 식의 해명이 흘러나오는 것은 사태의 심각성을 더욱 잘 보여준다. 만약 이것이 일부 직원의 의도적인 ‘도그휘슬(Dog-whistling, 특정 집단만 알아들을 수 있는 은밀한 메시지)’이었다면 기업 내부에 극우적 가치관이 중심을 잡고 있다는 증거이며, 반대로 아무런 의도 없이 이루어진 일이라면 행사가 진행되기까지 여러 단계의 검토 과정에서 역사적 비극을 희화화하는 폭력성을 인지한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다는 뜻이 된다. 그게 어느 것이든 둘 다 노동자계급의 가치기준과는 거리가 먼 것일 뿐이다. 정용진 회장의 이념적 행보와 그 결과일 뿐이다 이러한 극우적 일상화가 대기업 내부에서 버젓이 통과될 수 있었던 배경은 신세계그룹 정용진 회장이 가지고 있는 극우적 사고방식 때문이다. 정 회장은 5월 26일 대국민 사과를 통해 “모든 책임은 저에게 있다.”며 고개를 숙였으나 과연 그 말을 얼마나 믿을 수 있을까? 해당 부서 5명 중에 3명이 핸드폰을 제출하지 않았는데 저 조사가 사실인지는 어떻게 확신할 수 있을까? 오히려 제출한 2명의 핸드폰이 이후 경찰조사에서 문제되지 않도록 손봐 준 것은 아닐까? 정용진 회장이 이번 사태에 그나마 반응을 보이는 이유는 자본의 이윤 앞에 선 자본가의 모습을 보여줄 뿐이다. 스타벅스코리아는 미국 스타벅스 본사와 콜옵션 조항이 있는데, 현재 이마트가 가지고 있는 지분 67.5%를 이마트(스타벅스 코리아)의 귀책사유로 인한 브랜드 명성의 훼손이 있을 경우 스타벅스 본사가 35%할인된 금액으로 이마트의 지분을 회수할 수 있는 조항이 있다. 정용진의 사과는 거센 불매운동과 주가 하락이라는 자본의 ‘손익계산’에 따른 위기탈출용 사과라는 것이 누가 봐도 알 수 있는 사실이다. 그래서 사과 발표에도 대중의 시선은 싸늘하기만 하다. 그는 과거 자신의 소셜미디어를 통해 ‘멸공’ 논란을 일으키며 낡은 색깔론을 자극했고, 특정 정치적 진영에 편향된 행보를 가져갔다. 기업의 총수가 공공연하게 우편향적이고 배타적인 정치적 의사표현을 즐기는 상황에서, 그룹 산하 조직의 문화 역시 알게 모르게 그 눈높이에 맞춰지거나 보수화·우경화될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최고 경영자가 사회적 갈등을 유발하는 발언을 가볍게 사용하거나 표현의 자유 정도로 취급하는 조직에서, 실무진들이 민주화 역사를 다루는 태도 역시 가벼워지는 것은 필연적일 것이다. 그래서 이번 사태는 실무진뿐만 아니라 그러한 조직문화를 만든 정용진에게 최대의 책임이 있는 것이다. 역사적 상흔을 정쟁의 도구로만 보는 부르주아 정치 우리를 더욱 분노하게 하는 것은, 이 사태를 대하는 정치권의 위선적인 태도다. 다가올 2026년 지방선거를 의식한 여야 정치권은 사태의 본질적인 원인인 ‘사회의 극우화’를 진단하고 치유하기보다는, 이를 상대 진영을 공격하기 위한 수단으로만 삼고 있다. 이재명 대통령과 더불어민주당 등 여권 진영은 이번 사태를 맹폭하며 자신들이 민주주의와 역사의 유일한 수호자인 양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심지어 7년 전 무신사의 유사한 광고 사태까지 다시 소환하며 여론전에 열을 올리고 있다. 그러나 이들의 분노는 선택적이다. 현실에서 하청 노동자들이 죽어 나가고 노란봉투법이 유명무실하게 되고 있는 상황 앞에서는 자본의 편을 들면서, 선거판을 유리하게 이끌 수 있는 과거의 역사적 상징 앞에서는 투사로 돌변한다. 이들에게 광주와 87년의 피는 지지층을 결집하기 위한 정치적 수단일 뿐인 것이다. 이와 상반되는 자세로 국민의 힘은 스타벅스 불매운동에 맞서 오히려 스타벅스 구매운동을 벌이며 극우와 결합하는 방식으로 나아가고 있다. 5월 26일 사과발표가 나자마자 민주당은 이를 진정성있는 사과라고 포장을 하고, 국민의 힘은 민주당의 공세에 어쩔 수 없이 한 사과라고 하고 있다. 그러나 오월단체(5·18민주유공자유족회, 5·18민주화운동부상자회, 5·18민주화운동공로자회, 5·18기념재단)에선 “정용진의 사과에 대해 강한 유감을 표한다”며 “진정한 반성과 책임 없는 형식적 사과는 상처받은 시민과 오월 영령들에 대한 또 다른 모욕이며 기만일 뿐”이라고 비판했다. 5.18을 제대로 기리는 것은 노동자의 힘으로만 가능하다. 결론적으로 스타벅스 ‘탱크데이’ 사태는 이윤 창출이라는 명목 아래 극우적 혐오와 역사 왜곡마저 ‘노이즈 마케팅’으로 승인해 버리는 자본의 야만성, 그리고 총수의 그릇된 이념적 편향이 기업 문화를 어떻게 만들어 가는지를 보여주는 사례다. 또한 이를 구조적으로 바로잡을 의지와 능력 없이 정치적 계산에만 몰두하는 부르주아 정치권의 현실을 보여준다. 우리는 이 사태를 특정 기업의 제품을 불매하고 경영진을 해임하는 선에서 마무리 지어서는 안 된다. 온라인에서 만들어지고 있는 이러한 혐오의 언어가 오프라인의 일상과 자본의 권력을 타고 번져나가는 것을 막기 위해서는 이러한 문제에 노동자들이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 노동자·민중의 숭고한 민주화 투쟁의 역사가 자본의 이윤을 위한 상품이나 정치인들의 선거용 도구로 모욕당하지 않도록 그에 맞서는 노동자들의 투쟁이 필요하다.2026-05-27 | 조회 6,428 -
삼성전자 파업을 노란봉투법 탓으로 돌리는 자들이 두려워하는 것은 비정규직노동자들의 각성삼성전자 파업을 노란봉투법 탓으로 돌리는 자들이 있다. 이는 사실관계부터 틀린, 의도적 왜곡이다. 그러나 이들이 노리는 것은 분명하다. “그 전엔 삼성전자 파업이 없었는데, 왜 지금 노조 파업이 생길까? 뭐라고 답변하시겠습니까?”_김성원 국민의힘 국회의원 “(2차 조정이 진행되고 있는 만큼) 그 답변은 일단 유보했으면 좋겠습니다”_김정관 산업통상부 장관 “뭘 유보해요? 노란봉투법 때문에 그런 거지 그거 알면서 그럽니까? 그것 때문에 지금 성과급까지 논의 테이블에 올라온 것 아닙니까?”_김성원 국민의힘 국회의원 - 5월 19일, 국회 산업통상자원중소벤처기업위원회 전체회의 의도적 왜곡 김성원 얘기는 모두 틀렸다. 그전에 파업이 없었던 게 아니다. 2024년 전국삼성전자노동조합의 파업이 있었는데, 이때 핵심 요구도 불투명한 성과급 개선과 투명한 보상 체계 확립이었다. 과거에는 임금·노동시간만 쟁의 대상이었으나, 노란봉투법(노동조합법 2·3조 개정안) 이후 성과급과 경영 판단까지 파업 대상이 된 게 아니다. 성과급 보상은 대표적인 노동조건으로, 기존 노조법에서도 쟁의행위 대상이다. 2024년 삼성전자 파업 웹자보 지난 1월 대법원이 삼성전자의 성과급(OPI)은 퇴직금 산정의 기초가 되는 평균임금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판단했지만, 평균임금에 해당하든 말든, 중요한 노동조건이기 때문에 당연히 합법 파업 대상에 포함된다. 물론 대법원 판단은 자본의 이해에 종속된 판단, 자본에 유리한 판단일 뿐이며, 성과급은 노동력의 대가로 분명 임금의 일부다. 노란봉투법은 노동쟁의 대상을 소폭 확대하긴 했다. △체불임금 청산 △해고자 복직 △부당노동행위 구제 등 ‘권리분쟁’ 사항을 노동쟁의 대상으로 포함했다. 노동쟁의 대상에 ‘근로조건에 영향을 미치는 사업경영상의 결정’을 포함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 결정이 노동쟁의 대상이 되려면 정리해고, 구조조정처럼 근로조건에 실질적·구체적 변동을 초래해야 한다는 제한을 덧붙였다. 노란봉투법 이후 모든 경영 판단이 파업 대상이 됐다는 주장은 과장과 왜곡일 뿐이다. 노란봉투법으로 자본가들이 손해배상을 할 수 없게 됐다는 주장도 거짓말이다. 자본가들은 여전히 △노동조합 내 지위와 역할 △쟁의행위 참여 정도 △손해에 대한 관여 정도 등으로 따져 노동자들에게 손해배상 책임을 물을 수 있으며, 이것이 노란봉투법의 큰 한계다. 더군다나 삼성전자 파업은 삼성전자 정규직 노동자들의 파업으로, 노란봉투법의 주요 내용인 원청 사용자성 확대, 사용자 정의 확대와 관련이 없다. 그러나 이들에게 개정 노조법과 삼성전자 파업이 실제로 관련 있는지는 하등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점은, 거짓 선동으로 노동자를 공격할 수 있으며, 이를 통해 원청에 맞서 투쟁하는 노동자들까지 위축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이렇듯 국민의힘이 삼성전자 파업과 노란봉투법을 억지로 연관시키는 이유는 오랜 투쟁으로 쟁취한 노동자의 성과를 무력화시키기 위해서다. 이재명 정부보다 자신들이 자본의 이해를 더 철저히 보호할 수 있다는 정치적 공세를 펼 수도 있으니, 일거양득이다. 이재명 정부의 태도는? 그렇다면 이재명 정부는 국민의힘과 본질적으로 다른 모습을 보였는가? 김정관 장관은 정부 내에서 긴급조정권 발동을 가장 강력하게 주문했다. 이재명 역시 “노동권만큼 기업경영권도 존중되어야 한다”면서 자본의 피해자 코스프레에 힘을 싣고 긴급조정권 발동을 내비치며 노동자들을 압박했다. 이런 압박에 밀려 삼성전자 노조는 특별성과급 재원의 70%를 DS부문 전체에 배정하고, 30%는 메모리, 시스템 LSI(Large-Scale Integration), 파운드리 등 DS부문 산하 각 사업부에 사업부별 실적에 비례해 배정하라는 애초의 요구를 포기하고, 자본의 입장인 40% 대 60%를 수용했다. 노조는 애초부터 수많은 하청·비정규직 노동자에게 동일한 성과급을 지급하라는 요구를 꺼내지도 않았다. 하청·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이해와 권리를 대변할 생각이 없었다. 영업실적이 부진한 DX(스마트폰, TV, 가전제품) 부문의 성과급 요구도 배제했다. 사회적 고립과 정부의 압박에 밀린 노조는 DS 내부에서도 영업실적에 따른 격차를 최대한 벌리려는 자본의 의도를 뚫지 못했다. 노동자계급의 관점을 상실한 삼성전자 노조들의 전략 부재는 노동자들 사이의 극심한 분열과 갈등을 낳고 있으며 사회적 고립을 자초하고 있다. 이렇듯 이번 투쟁의 약점과 한계는 분명하지만, 삼성전자 파업을 노란봉투법과 엮으려는 시도나 긴급조정권 협박은 삼성전자 노동자들만이 아니라 전체 노동자의 권리를 약화하려는 공격으로 국민의힘과 정부의 본질을 보여준다. 그림자가 아니다 노란봉투법 이전에도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원청을 상대로 끊임없이 투쟁했다. 노란봉투법이 생겼기 때문에 원청과 투쟁하는 게 전혀 아니다. 노란봉투법이 있건 없건, 하청 노동자들의 노동조건을 실질적·구체적으로 지배·결정하는 것은 원청이다. 노동부가 원청 사용자성을 인정하지 않더라도, 교섭 의제를 산업안전 문제로 축소하더라도, 수용할 이유가 전혀 없다. 노란봉투법 이전에도 그랬듯 말이다. SK하이닉스 하청 물류업체 금속노조 대전충북지부 피앤에스로지스지회는 4월 30일 하이닉스 청주공장 3캠퍼스 앞에서 “하청노동자는 그림자가 아니다! 여기 사람 있다! SK하이닉스! 대화 좀 합시다!” 기자회견을 열었다. 사진: 연합뉴스 지회는 “사내 하청 노동자들도 원청과 함께 반도체 생산의 찬란한 성과를 만들어낸 주역”이라고 주장하며 직접적인 성과 차별 개선과 생존권 보장을 요구하고 있다. 너무나 정당한 요구다. 삼성전자의 막대한 이윤은 노동자계급의 사회적 공동노동이 만든 사회적 부다. 삼성전자 정규직 노동자들만이 아니라 가치사슬에 포함된 전 세계 모든 노동자의 사회적 공동노동이 만들어낸 결과물이다. 따라서 당연히 하청 노동자들도 분배를 요구할 권리를 가지고 있다. 그동안 모든 정부는 어떠한 사회적 환수 방안도 없이 천문학적인 노동자 민중의 혈세를 삼성과 SK하이닉스에 투입했다. 2월 국무회의를 통과한 반도체특별법 역시 △전력·용수·도로 등 기반시설 조성에 관한 정부 지원 의무화 △RE100 실행을 위한 신재생에너지 설비공급 및 설치비용 지원 △산업인프라 조성, 보조금 지급, 조세 감면 등 세제 지원, 예비타당성조사 신속처리 및 면제 등의 내용을 담고 있다. 이제야말로 노동자계급 주도로, 막대한 이윤을 환수하고 이를 노동자 민중을 위해 사용하기 위한 투쟁을 시작해야 한다. 반도체 하청·비정규직 노동자의 잠재력 이번 파업 과정에서 반도체 하청·비정규직의 열악한 현실이 꽤 많이 알려졌다. 일부 보수언론은 하청 노동자를 위해서가 아니라 삼성전자 정규직 파업을 비난하기 위해서 하청 노동자의 현실을 알렸다. 세정, 유지보수, 폐기물 처리와 같은 업무들이 하청 노동자에게 전가되었다. 수많은 비정규직 노동자는 1년짜리 소모품 신세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하청·비정규직에 대한 초과착취 없이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거대한 이윤은 불가능하다. 지금 반도체 하청·비정규직들은 상대적 박탈감과 소외감에 분노하지 않을 수 없다. 가진 자들도 이 점을 느끼고 있다. 국힘과 보수언론이 개정노조법과 삼성전자 파업을 연계하는 것은, 그 자체로는 뜬금없지만, 더 큰 저항, 하청 노동자들의 저항을 최대한 차단하려는 계급적 목적이 깔려 있기에, 그들은 맹렬하게 거짓 이데올로기를 퍼붓고 있다. 하지만, 노동자들은 충분히 반격할 수 있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막대한 이윤은 하청·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게 투쟁의 명분과 자신감을 준다. 비록 지금 반도체 하청·비정규직의 노조 조직률은 대단히 낮고, 민주노총 소속 노조는 열 손가락에 꼽을 정도지만, 이번 삼성전자 파업은 수많은 하청 노동자에게 “이제는 우리도 싸워볼 만한 때가 됐다”라는 자각을 심어줄 것이다. 모두 합해 40만 명이 넘는 사내하청 노동자와 사외 협력업체 노동자들이 뭉칠 수 있다면, 그 위력은 정규직들의 힘을 훨씬 뛰어넘을 것이다. 그 투쟁을 만들기 위해, 나아가 그 투쟁이 정규직 파업이 지녔던 약점과 한계를 뛰어넘어 전체 노동자의 단결로 나아갈 수 있도록 모든 힘을 쏟아붓자.2026-05-26 | 조회 6,743 -
[번역] 마르크스주의, 트랜스 해방, 그리고 젠더의 사회적 구성새로운 세대의 퀴어 활동가들이 논쟁을 벌이고 있다: 마르크스주의가 트랜스 및 퀴어 해방을 위한 전략이 될 수 있는가? 2020년은 미국 역사상 트랜스젠더 살해 사건이 가장 많았던 해였다. 미국 전역의 주 정부들은 현재 트랜스 청소년의 권리를 대폭 축소할지 여부를 논의 중이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지배계급 내 자유주의와 보수주의 세력은 “트랜스젠더 문제”에 대해 손만 비비며 고민하고 있다. 하지만 지난 몇 년간 퀴어 활동가 청년층은 점점 더 부상하고 있다. 이들 청년들—그중 다수가 트랜스젠더이다—은 ‘흑인의 생명은 소중하다(Black Lives Matter)’ 운동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맡았으며, 특히 흑인 트랜스젠더 여성들의 요구를 운동의 의제로 포함시키도록 이끌었다. 이를 위해 브룩클린을 비롯한 여러 곳에서 흑인 트랜스젠더의 생명을 지키기 위한 대규모 시위를 조직했다. 그러나 그들의 모든 진보적인 본능과 자본주의 국가에 대한 태동하는 의문에도 불구하고, 많은 젊은 퀴어 활동가들이 마르크스주의를 불신한다. 이는 주로 수십 년에 걸친 자본주의의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비방 캠페인의 결과다. 활동가들의 살해나 투옥 같은 극단적인 사례부터, 퀴어 권리의 일부 진전과 같이 부르주아 이데올로기가 특정 요구를 신자유주의에 편입시킨 방식에 이르기까지, 자본가 계급은 오랫동안 이데올로기로서 마르크스주의의 신뢰를 떨어뜨리고, 마르크스주의의 지지자들을 스탈린주의와 연관시키며, 억압받는 집단의 해방 투쟁을 마르크스주의 운동과 분리시키려 해왔다. 이러한 자본주의의 비방 캠페인은 — 주로 스탈린주의의 영향으로 인한 — 공산주의 운동의 역사적 실패와 결합되어, 많은 활동가들로 하여금, 마르크스가 단지 자신의 경험 바깥을 바라볼 수 없었던 이성애자, 백인, 유럽인, 시스젠더 남성에 불과했기 때문에, 마르크스를 버려야 한다고 주장하게 만들었다. 이러한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마르크스를 의심하는 이들은 동성애 해방 문제에서 마르크스주의 단체들의 역사적 실패와 트랜스 해방 문제에서 일부 단체들의 현재의 실패를 모두 지적할 수 있다. 그러나 트랜스 해방 지지를 반대하고자 일부 소위 마르크스주의 단체들이 사용하는 논리를 분석해 보면, 그들이 마르크스주의자라고 할 수 없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오히려 그들은 정체성과 욕망의 해방을 반대하는, 인종차별적이고 가부장적이며 억압적인 자본주의 국가 편에 서기 위해, 마르크스주의의 핵심이 되는 철학적 원칙을 거부한 반동주의자들이다. 이러한 가짜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진지하게 받아들여져서는 안 되며, 우리는 그들로부터 마르크스를 구출하고, 마르크스주의가 억압받는 자들을 위한 유일하게 진정한 해방 전략이라 주장해야 한다. 트랜스혐오적 “좌파”의 실패 이러한 마르크스주의의 왜곡을 반박하기 위해, 유감스럽게도 그들 중 일부와 논쟁을 벌여야 한다. 20세기 이래 자칭 좌파 내에서 게이 및 트랜스 해방을 반대하는 가장 큰 세력은 스탈린주의였다. 스탈린과 그의 동맹자들은 동성애 합법화와 같은 러시아 혁명의 수많은 사회적 성취를 배신했다. 스탈린과 스탈린주의는 보수적인 사회적 세력이 되어, 노동계급의 전체 부문이 제기한 요구들을 진정한 사회주의를 방해하는 소부르주아적 혼란으로 치부해버렸다. 이는 러시아, 쿠바, 그리고 20세기 수많은 변형된 노동자 국가들*에서의 반퀴어 정책으로 이어졌으며, 미국과 그 밖의 지역에서 공산당 내 퀴어 당원들을 제명하는 사태를 초래했다. 이러한 사회적 보수주의는 오늘날에도 많은 스탈린주의 분파들 사이에서 계속되고 있다. 예를 들어, 이 기사에서 다루기에는 너무 심각한 정치적 문제들로 가득 찬 영국 공산당은, 2019년에 “‘성별 유동성’이라는 반동적 악몽”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발표했는데, 이 글은 트랜스젠더들과 우리의 동맹들이 “성별의 물질적 현실”을 부정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 글에서 그들이 성(sex)과 젠더(gender)가 동의어라고 주장한다(두 개념은 동의어가 아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1] 이것이 반反-트랜스 “좌파” 대다수의 주된 논리다. 하지만 트랜스혐오적인 “좌파”는 스탈린주의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트랜스 해방을 가치 있는 투쟁으로 인정하지 않는 다양한 절충적인 성향의 집단들도 존재한다. 어떤 이들은 트랜스해방투쟁이 다른 투쟁들로부터 주의를 분산시킨다고 주장하는데, 이는 모든 억압을 무시하고 착취에만 집중하는 계급 환원주의적 전략을 함의한다. “젠더 이데올로기에 대한 사회주의적 비판”을 표방하는 블로그 Freer Lives와 같은 다른 이들은 더 나아가 트랜스 정체성이 근본적으로 부르주아적이라고 주장한다. Freer Lives가 2020년에 발표한 “모든 좌파는 여성 권리에 관하여 J.K. 롤링을 지지해야 한다”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주장했듯이, 젠더 이데올로기의 성차별주의에 맞서 여성을 옹호하는 롤링의 입장은, 실제로 오늘날의 세계에서 이 새로운 성차별주의를 이용해 여성 억압을 유지하려 해온 자본가 계급과 그 엘리트 하수인들의 이익과 대립하는 것이다. 이 문제에서 좌파-자유주의자들(left-liberals)과 극좌파들은 바리케이드의 잘못된 편에 서 있다. 안타깝게도, 퀴어성에 대한 이러한 사회적 보수주의는 20세기 일부 트로츠키주의 정당들 속으로도 스며들었다. 트로츠키주의자들 중에는 게이 해방 운동에 동참한 이들도 있었지만, 그렇지 않은 이들도 있었다. 예를 들어, 트로츠키의 제4인터내셔널 내 최대 정당인 사회주의노동자당(SWP)은 스톤월 사건 전후로 급속히 성장하던 게이 권리 운동에 용납할 수 없을 정도로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으며, 퀴어 민중들에 대해 매우 억압적인 정책을 펼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쿠바의 카스트로가 이끄는 관료 체제에 무조건적인 정치적 지지를 보냈다. SWP는 오랫동안 공개적으로 퀴어임을 드러낸 사람들을 당원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1976년, CWI(또 다른 트로츠키주의 경향)의 당원들은 팸플릿에서 다음과 같이 밝혔다. 진지한 사회주의자들은 “게이 해방”이 노동 운동에 독립적인 기여를 할 수 있는 사회적 토대를 조금도 제공할 수 없다는 점을 인정할 것이다. 그 반대를 증명하기 위해 때때로 제시되는 온갖 기이한 이론과 감성적인 주장들은 순수한 학생 정치에 여전히 만연한 극심한 혼란과 전망 부재의 증상일 뿐이다. 이러한 사례들에서 우리는 퀴어 정체성에 대한 “이론적” 반대가 퀴어 민중들의 삶과 퀴어 해방 운동에 대한 정치적·물질적 반대로 빠르게 변화될 수 있음을 볼 수 있다. 이는 노동계급 내 퀴어 구성원들과 정치적 경향으로서 마르크스주의 사이의 분열을 야기하는 결과를 낳았는데, 왜냐하면 노동계급 내 퀴어 구성원들은 마르크스주의 정당 지도자들이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싸워줄 것이라고 항상 신뢰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론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우리는 이 점에 대해 매우 명확해야 한다. 퀴어 및 트랜스 노동자에 대한 지지는 어떤 사회주의 단체에게 있어서도 절대 타협할 수 없는 요소여야 한다. 그러나 퀴어 및 트랜스젠더에 대한 이러한 노선의 문제는 단순히 억압받는 집단의 해방 투쟁을 거부하는 것을 훨씬 넘어선다. 이 입장은 또한 변증법과 역사적 유물론 모두에 대한 중대한 거부를 의미한다. 즉, 트랜스젠더 해방을 거부하는 사회주의 운동의 세력들은 부르주아 도덕에 적응하며 마르크스주의의 이론적 토대마저 거부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노선을 취하는 집단들은 사회 통제를 유지하려는 자본주의 국가의 편에 서고 있다. 그들은 우리의 신체와 욕망이 온전히 발전하는 것을 계속 부정하는 사회의 가장 우익적인 세력들과 동맹을 맺고 있다. 이 집단들은 사실상 퀴어 해방 운동을 신자유주의에 넘겨주어, 운동이 포섭되도록 방치하고 국가에 대한 어떠한 도전도 제기하지 않고 있다. 이론보다 더 깊은 차원에서, 이 소위 좌파 집단들은 모든 좌파 정치의 근본적 목표인 인간 해방을 거부하고 있다. 그들은 역사의 잘못된 편에 서서 반동 세력의 대열에 합류했다. 그들은 우리의 동지가 아니며, 좌파들 속에서 패배시키고 사라지게 만들기 위한 측면에서만 그들을 진지하게 고려해야 한다. 젠더는 사회적 구성물이다 젠더는, 이 트랜스혐오자들이 주장하듯이, 생물학적으로 미리 정해진 것이 아니다. 오히려 젠더는 사회적으로 구성된 것이다. 현대적 형태에서, 젠더는 자본주의 체제를 유지하는 기능을 한다. 젠더와 섹슈얼리티의 현대적 형성에 이르게 된 역사적 과정이 있다. 예를 들어, 존 디에밀리오(John D’Emilio)가 『자본주의와 게이 정체성』(Capitalism and Gay Identity)에서 쓴 바와 같이, 게이와 레즈비언은 항상 존재해 온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들은 역사의 산물이며, 특정한 역사적 시기에 등장했다. 그들의 출현은 자본주의의 관계와 연관되어 있다. 20세기 후반에 수많은 남성과 여성이 스스로를 게이(gay)라고 칭하고, 비슷한 성향의 남성과 여성으로 구성된 공동체의 일원으로 인식하며, 그 정체성을 바탕으로 정치적으로 조직화할 수 있게 한 것은 바로 자본주의의 역사적 발전, 더 구체적으로는 자유로운 노동 체제 덕분이었다.[2] 디에밀리오(D’Emilio)는 본질적으로 자본주의의 부상이 정체성(identity)의 발명에 물질적 조건을 제공했다고 주장한다. 생산이 가정 밖—공장 및 여타 작업장—으로 점점 더 이동함에 따라, 사람들은 가족 밖에서 삶을 꾸릴 자유를 점점 더 많이 얻게 되었다. 이것이 정체성의 부상으로 이어졌다. 그 이전에는 남성과 성관계를 갖는 남성이 있을 수는 있었지만, ‘게이’라는 정치적·개인적 범주는 존재하지 않았다. 젠더의 경우에도 유사한 과정을 볼 수 있다. 젠더화된 관계는 수천 년 동안 존재해 왔지만, 현재 이해되는 바와 같은 젠더의 구체화는 자본주의의 부상과 함께 일어났다. 많은 전(前)자본주의 문화는 성별에 대해 비이분법적인(nonbinary) 이해를 가지고 있었는데, 이는 유럽 식민주의자들에 의해 원주민 문화에서 특별히 말살됐다. 역사적으로 여성은 자본주의 생산 체계에서 매우 특정한 역할을 수행해 왔는데, 바로 전형적인 무급 재생산 노동을 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자본주의적 관계에서 핵가족에 대한 현대적 이해가 등장했으며, 이는 젠더에 대한 이분법적 이해를 재확인하고 강화했다. 핵가족이라는 매우 귀중한 자본주의적 도구를 보호하기 위해, 이 이성애규범적 가족 단위에 도전하는 젠더 표현들은 억압당하고 가혹하게 처벌받았다. 실제로 젠더 구조는 항상 지배와 폭력의 기반 위에 있었다. 엥겔스가 『가족, 사유재산 및 국가의 기원』에서 쓴 바와 같이, [어머니]의 전복은 여성 성별의 세계사적 패배였다. 남성은 가정에서도 지휘권을 장악했고, 여성은 격하되어 노예 상태로 전락했으며, 남성의 정욕의 노예이자 단순히 산아도구로 전락했다. 여성의 이러한 격하된 지위는 … 점차 완화되고 미화되었으며, 때로는 더 온화한 형태로 포장되기도 했지만, 결코 폐지된 적은 없었다. 젠더의 형성 젠더 비규범성에 대한 억압은 문화의 거의 모든 요소에 스며들어 젠더와 섹슈얼리티에 대한 헤게모니적 이해를 형성했다. 이 과정은 “젠더 규율”(disciplining gender)이라고 불려왔다.[3] 이를 통해 우리는 젠더가 결코 생물학적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오히려 그것은 역사적 시기에 따라 변화하는 사회학적 범주이다. 영국 공산당의 횡설수설로 돌아가 보자면, 그들은 앞서 인용한 같은 기사에서 아래와 같이 썼다. (트랜스 권리를 위해 투쟁하는 이들은 성별이) 일종의 의학적 음모라고 주장한다. 즉, 출생 시 의사들이 모여서 의논한 뒤 당신에게 “젠더 역할(gender role)을 할당”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임산부 여러분: 20주 초음파 검사를 받을 때, 여러분은 아기가 남자아이인지 여자아이인지 확인하기 위해 검사를 받는 것이 아니다(‘레드 파이트백’(Red Fightback)은 이렇게 말한다.)[4] 그건 전부 의학적 음모일 뿐이다! 그리고 아기가 태어나면, 그들이 아기를 검사하고 말한다, 남자아이라고, 또는 여자아이라고 —그것도 전부 의학적 음모다! 이런 것들(남자아이와 여자아이, 남성과 여성)은 실재하지 않는다 — 모르겠는가?? 간성(인터섹스) 아기들의 존재는 차치하고라도 — 그들은 자신들 주장의 전체적인 유사과학적 근거를 무너뜨릴까 봐 이 문제를 신중하게 회피하고 있지만 — 아기가 태어날 때 우리가 그들에게 정체성과 특성을 부여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은 터무니없이 공상적인 입장이다. 갓 태어난 ‘남아’에게는 파란 담요를, ‘여아’에게는 분홍 담요를 사준다. 최근 잇따른 지독한 젠더-리빌(성별공개) 파티 사례만 봐도, 아이가 태어나기도 전에 아이의 젠더에 얼마나 큰 의미가 부여되는지 알 수 있다. 이는 그 자체로 의학적 음모는 아니다 — 비록 우리가 간성인 사람들의 입장을 고려한다면, 아기의 동의 없이 규범적인 신체상을 강요하는 것은 분명히 의학적 음모이지만 — 오히려 출생 전부터 자아를 형성하기 시작하는 사회정치적 맥락이다.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자칭 마르크스주의 단체가, 사회가 아이들에게 출생 시 젠더 역할을 부여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것은 사실상 현대 사회 전체를 외면하는 것이며, 마르크스의 역사유물론적 분석을 거부하는 것이다. 게다가 젠더를 구성하는 요소의 상당 부분은 생물학적 성이 아니라 소위 ‘젠더 표지(gender markers)’에 있다. 예를 들어, 드레스는 여성적이고 정장은 남성적이다. 하지만 그것 또한 역사적으로 변하지 않는 상수는 아니다. 비교적 최근의 역사 속에서 하이힐이 남성의 것으로 여겨지거나 소년들이 종종 드레스를 입던 시절도 있었다. 시아라 크레민이 저서 『남성화된 여성: 크로스드레싱의 변증법』(Man-Made Woman: The Dialectics of Cross-Dressing)에서 설명하듯이, 서구화되거나 유럽적인 여성적 스타일의 즐거움은 그 무엇보다도 미학적이다. 우리는 차려입는 것을 좋아한다. 우리는 비단 같은 원단, 반짝이는 것들, 그리고 생생한 색상을 즐긴다. 역사의 우연이 파란색을 남성적인 상징으로 만들었다. 남성에게 있어 면 양말은 좋고, 팬티스타킹은 나쁘도록 만들었다. 이러한 비합리성이 제2의 본성이 되었다.[5] 무엇이 여성에게는 하이힐이, 남성에게는 부츠가 어울리도록 만들었을까? 과학적인 근거는 없다. 오히려 젠더는 사회적 지위와 다양한 젠더 표지들로 구성되며, 크레민의 말대로 “역사의 우연”에 의해 의미를 부여받는다. 그러나 젠더 자체가 사회적 구성물인 반면, 젠더화(gendering) 행위 자체는 매우 물질적인 과정이다. 특정 방식으로 젠더화된다는 것은 당신이 해야 하거나 하지 말아야 할 매우 현실적이고 물질적인 것들이 있다는 것을 의미하며, 이러한 젠더화에 저항하는 것은 종종 사회적 고립과 심지어 폭력에 직면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모순은 트랜스 경험을 이해하는 데 있어 핵심적인 요소이다. 젠더는 끊임없이 변화하는 개별화된 범주들의 집합이자, 억압과 종종 폭력까지 수반하는 매우 실체적이고 물질적인 과정이다. 이는 두 가지 결론으로 이어진다. 첫째, 젠더화 과정이 자본주의 체제의 일부이기 때문에, 개별화된 관점에서는 트랜스 해방이 불가능하다는 점이다. 이는 해방이 개인 단위의 과정(person-by-person process)이라고 주장하는 이 글 후반부에서 논의할 이들과는 대조적으로, 젠더화는 그 어떤 개인적인 행동이나 개인보다 더 큰 것이기 때문에, 해방은 반드시 집단적인 반자본주의 투쟁(mass anti-capitalist struggle)이어야 함을 의미한다. 둘째, “젠더의 물질적 현실”을 거부하는 것은 트랜스젠더들이 아니라, 오히려 젠더에 대한 비역사적인 생물학적 정의를 고수하며 젠더의 역사적 현실과 젠더화의 물질적 현실을 모두 거부하는 바로 이 “젠더 비판적 좌파들”이다. 영국 공산당과 그 일당이 음모론으로 치부하려는 것은 사실 자본주의 하에서 가장 쉽게 관찰되고 기록된 사회적 통제 과정 중 하나이다. 변증법적 젠더 이 혁명가 행세를 하는 트랜스혐오자들은 젠더의 역사적 현실을 거부할 뿐만 아니라, 자신들의 공인된 정치적 입장과 반동적인 정서 사이의 모순을 해결할 방법을 고집스럽게 찾으려 하면서 변증법 자체도 거부한다. 젠더가 생물학적으로 정해져 있어, 결코 변하지 않거나 새로운 형태를 취하지 않는다는 생각은 근본적으로 비변증법적이다. 이는 출생 시 부여받은, 삶의 물질적 현실과 무관하게 결코 변할 수 없는 불변의 정체성을 전제한다. 그러나 마르크스주의자로서 우리는 우리 자신이 위에서부터(*역주: 신이나 어떤 초월적 존재로부터) 내려받은 존재라는 관점을 거부한다. 이러한 반反-트랜스 가짜 마르크스주의를 받아들이려면, 젠더는 변할 수 없다는 그들의 노선에 동의해야만 한다. 하지만 설령 젠더가 생물학적이라는 그들의 잘못된 주장을 받아들인다 해도, 그것이 젠더가 변할 수 없다는 뜻은 아니다. 예를 들어, 눈과 머리카락은 (대부분의) 인간이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는 것이지만, 눈동자와 머리카락 색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자연스럽게 변할 수 있으며, 사람들은 머리카락을 염색하거나 컬러 렌즈를 착용할 수도 있다(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한다!). 그들이 “머리카락 색깔의 물질적 현실”을 거부하는 것인가? 태어날 때 사지를 모두 가지고 있다가 사고로 한쪽을 잃은 사람은 자신의 신체에 대한 물질적 현실을 배반하는 것인가? 변화하는 조건 때문에 시간이 지남에 따라 변하는 생물학적으로 미리 정해진 속성들은 수없이 많다. 그리고 설령 젠더를 생물학적 성별(Sex)과 동의어로 보는 과학적으로 부정확한 정의를 받아들인다 해도, 그렇다면 간성인 사람들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간성인 영아들에게 그들의 동의 없이 성별의 규범적 범주에 맞추기 위해 수술을 시행하는 의사들은, 이 간성인 아이들의 물질적 현실을 부정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소부르주아와 포스트모더니즘의 젠더 거부 행위에 대해 그토록 분노하는 이 사회주의자들은, 왜 이러한 비동의적 성전환 수술에 대해서는 똑같이 분노하지 않는가? 이 모든 주장은 과학적으로 전혀 타당하지 않다. 그렇다면 우리는 과학적 문제를 다루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진리’를 다루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젠더는 물질적 조건이나 개인의 신체적 속성을 초월하는 무엇이어야 한다. 그것은 우리를 정의하는 더 높은 차원의, 일종의 도덕적 진리여야 한다. 그러나 영원한 진리에 대한 이러한 믿음은 반反변증법적이며, 따라서 반反마르크스주의적이다. 엥겔스가 그의 기념비적인 저서 반뒤링에서 썼듯이, 우리는 따라서 도덕 세계에도 역사와 민족 간의 차이를 초월하는 영구적인 원리들이 있다는 구실을 들어, 어떤 도덕적 교리를 영구적이고 궁극적이며 영원히 불변하는 윤리 법칙으로서 우리에게 강요하려는 모든 시도를 거부한다. 우리는 반대로, 모든 도덕 이론은 궁극적으로 당시 사회의 경제적 조건의 산물이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사회가 지금까지 계급 대립 속에서 움직여 왔듯이, 도덕은 언제나 계급의 도덕이었다. 그것은 지배 계급의 지배와 이익을 정당화해 왔거나, 억압받는 계급이 충분히 강력해진 이후로는 이러한 지배에 대한 피억압자의 분노와 미래의 이익을 대변해 왔다. 이 과정에서 인간 지식의 다른 모든 분야와 마찬가지로 도덕에서도 전반적으로 진보가 있었다는 점은 누구도 의심하지 않을 것이다. 다시 말해, 도덕적 교리를 “영원하고, 궁극적이며, 영원히 불변하는 윤리법”으로 믿는 것은 지배 계급의 도덕, 즉 노동계급을 억압하고 통제하는 데 이용되는 도덕에 대한 묵인에 지나지 않는다. 이 소위 “젠더 이데올로기”에 맞선 전사들은 의도적이든 아니든, 우리를 억압하고 있는 부르주아 도덕에 좌파적인 위장을 제공해 주고 있다. 트랜스 마르크스주의의 향방은? 그렇다면, 마르크스주의 운동의 일부 세력이 퀴어와 트랜스 해방 투쟁을 항상 지지해 온 것은 아니라는 점을 감안할 때, 반反마르크스주의자들의 주장이 옳은 것일까? 우리 퀴어와 트랜스 사람들은 마르크스주의를 우리 해방과 양립할 수 없는 이론으로 치부하고 버려야 하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은 단호한 ‘아니오’이다. 우선, 마르크스주의 운동과 퀴어 해방 운동의 역사를 살펴보면, 퀴어 해방이라는 과제가 제시되었을 때 많은 마르크스주의 단체들이 이를 강력히 지지했음을 알 수 있다. 오스카 와일드가 퀴어라는 이유로 재판을 받았을 때 그를 변호한 것은 초기 공산주의자들이었다. 많은 제국주의 국가들이 그렇게 하기 수십 년 전에 볼셰비키는 러시아에서 동성애를 합법화했다. 그리고 현재도 많은 마르크스주의자들이 투쟁의 최전선에 서 있다. 이러한 단체들은 마르크스주의 이론의 결함을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 20세기와 21세기에 걸쳐 좌파의 상당 부분의 퇴보를 보여주고 있다. 이 점은 1970년대 아르헨티나의 동성애자 해방 전선 전 멤버였던 마르셀로 베니테스(Marcelo Benítez)가, ‘레프트 보이스(Left Voice)’의 아르헨티나 자매 사이트와의 인터뷰에서 지적한 바 있다. 1970년대 퀴어 마르크스주의자로서의 경험을 회고하며 그는 “나는 마르크스주의가 아니라 좌파와 갈등을 겪고 있었다. … 좌파 내에서 동성애자로 살아가는 것은 매우 힘들었다”고 말했다. 우리는 퀴어 문제와 관련하여 좌파 일부 세력의 실패를 바라볼 때 매우 비판적이어야 하지만, 그 실패를 마르크스주의 탓으로 돌려서는 안 된다. 스탈린주의자 및 기타 집단이 퀴어 해방 투쟁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 것은 마르크스주의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마르크스주의의 부재 때문이었다. 마르크스주의는 우리에게 해방을 위한 필수 조건을 확보할 수 있는 길을 제시할 뿐만 아니라, 현재 운동 내의 잘못된 지도부에 맞서 싸울 수 있는 도구도 제공한다. 마르크스주의를 배반한 이들이 마르크스주의자라는 칭호를 차지하는 것을 허용하기보다는, 우리는 그들을 트랜스 배제적 급진 페미니스트들, 심지어 종교적 우파의 일부보다 나을 바 없는 존재로 규정하고 거부해야 한다. 영국 공산당은 그들의 모든 주장과 구호에도 불구하고, 마르크스와 레닌이 정의한 방식의 공산주의자가 아니다. 이러한 마르크스주의 왜곡자들은 이론적·정치적 영향력이나 지도력을 가져서는 안 된다. 마르크스가 저술하고 레닌과 트로츠키가 발전시킨 마르크스주의의 근본으로 돌아감으로써, 우리는 마르크스주의가 트랜스 해방을 쟁취하기 위한 명확한 전략을 제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트랜스 여성이자 레프트보이스의 브라질 자매 단체 회원인 버지니아 기첼(본 호의 다른 기사에서 인터뷰됨)의 말을 인용하자면, 분명히, [책 트랜스젠더 마르크스주의의 출간은] 삶의 모든 영역에 걸친 완전한 해방에 관심이 없으며 트랜스 해방 논의에 아무런 기여도 할 수 없는, 백인, 유럽인, 이성애자, 시스젠더 마르크스에 대한 관점에 반박한다. 혹은 마르크스가 여성 해방에 대한 해답으로 제시한 것이 단지 여성의 경제적 자립을 보장하기 위한 노동시장 진입뿐이었다는 관점에도 반박한다. 사실 러시아 혁명에서 마르크스주의 사상의 실현은 삶의 모든 영역을 변혁하려는 시도의 정점이었으며, 러시아는 임신중단을 합법화하고 동성애를 비범죄화하며 공공 구내식당, 세탁소, 어린이집을 보장한 세계 최초의 국가가 되었다. 이는 오늘날에도 많은 자본주의 민주주의 국가들이 제공하지 못하는 것들이다. 그러나 혁명기 러시아에서 벌어진 혁명과 반혁명의 과정은 또한 20세기 가장 중요한 지도자 중 한 명인 레온 트로츠키가 발전시킨 ‘연속혁명론’의 과학적 토대를 제공했다. 이것이 바로 나에게 있어 21세기를 위한 마르크스주의의 모습이다… 즉, 계급 투쟁은 권력 장악으로 끝나지 않고, 오히려 더욱 격화된다는 결론이다. 혁명은 해방의 과정을 끝내는 것이 아니라, 단지 시작할 뿐이라는 트로츠키의 연속혁명론은, 개인적 해방에 대한 포스트모던적 사상이나, 혁명이 자동적으로 해방을 가져올 것이니 더 이상 할 일이 없다는 계급 환원주의 단체들의 뻔한 주장보다 훨씬 더 명확한 트랜스 해방으로 가는 길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심도 있는 연구를 통해서만 우리는 이 전략을 트랜스 해방 과제에 어떻게 적용할지, 그리고 트랜스 해방 운동의 주도권을 위해 어떻게 투쟁할지 발견할 수 있다. 트랜스 해방 운동 지도부의 실패 조직화된 좌파의 상당 부분이 퀴어 해방 운동에 대한 주도권과 관심을 포기한 상황에서, 현재 이 운동의 지도부는 불균형적으로 포스트모더니즘적이고 자유주의적이다. 이들은 계급 정치를 거부하고, 대신 정체성 중심적(identitarian)이고 개인주의적인 정치를 채택한다. 이 중 한 부류는 케이틀린 제너나 피트 부티지지 같은 인물들을 대두시키는 대표성 정치(representational politics)에 매몰되어 있다. 이런 인물들은 자신의 정체성을 무기화하여 퀴어 공동체에 해를 끼치는 자신들의 정치적 행보를 은폐한다. 또 다른 부류는 선거 정치에 지나치게 얽매여 있어, 트랜스 억압을 지속시키는 국가의 역할을 간과하고 있다. 이 세력은 진보 성향의 인사나 퀴어 및 트랜스젠더 인사들이 의회에 충분히 당선되기만 하면, 그들이 트랜스젠더 억압을 종식시킬 법안을 통과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 듯하다. 그러나 트랜스젠더 억압은 이 글의 다른 부분에서 다룬 모든 이유들로 인해, 자본주의 체제가 스스로를 유지하는 방식의 일부다. 이를 고려할 때, 트랜스젠더 억압은 단순히 법적인 문제가 아니라 구조적인 문제이므로 국가가 이를 종식시킬 수는 없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반反트랜스 법안의 폐지와 트랜스 커뮤니티를 위한 중요한 개량을 위해 싸워서는 안 된다는 뜻은 아니다. 우리는 반드시 그렇게 싸워야 한다. 하지만 우리는 그러한 타협책을 자본주의의 현실을 바꾸는 것과 혼동해서는 안 된다. 트랜스 활동가들에게 민주당에 대한 믿음을 가지라고 권유하는 것에서부터 동화(assimilation)를 궁극적인 목표로 삼는 것에 이르기까지, 퀴어 운동의 이러한 자유주의 지도자들은 일관되게 급진성을 약화시키는 세력이 되어 왔다. 트랜스 해방 운동의 또 다른 부류는 접근 방식은 더 급진적이지만 정치적으로는 마찬가지로 개량주의적이다. 보통 스스로를 급진주의자라고 칭하는 이 세력은, 마르크스주의와 모든 총체적·보편적 이데올로기의 가치를 모두 거부한다. 대신 그들은 퀴어 이론의 영향을 받은 전략을 따르는데, 이는 결국 해방 투쟁을 개인화하는 결과를 낳는다. 다시 말해, 이 전략은 사고방식을 바꾸는 것을 세상을 바꾸는 수단으로 본다. 이 전략의 핵심은, 트랜스혐오를 극복하는 길은 먼저 자신의 내면화된 편견을 인식하고 변화시킨 다음, 다른 이들도 그렇게 하도록 돕는 데 있다는 것이다. 이 전략을 신봉하는 이들은 또한 정치 자체를 거부하는 경향이 있는데, 동성 결혼 합법화와 같은 성과는 단지 동화주의에 불과하며, 현 체제 내에서 결혼이 주는 실질적 혜택과 무관하게 “체제”에 굴복하는 것일 뿐이므로, 어떤 개량도 싸워 얻을 가치가 없다고 주장한다. 이 전략은 체제에 어떻게 “저항”하거나 싸울지에 대한 많은 길을 제시하지만, 궁극적인 승리와 퀴어 해방으로 향하는 길은 제시하지 않는다. 그 결과는 아무런 진전도 없이 영원히 저항하는 것에 불과하다. 이러한 틀 안에서, 중간적인 “승리”조차도 승리가 아니다. 왜냐하면 국가로부터 얻은 것은 무엇이든 쟁취할 가치가 있는 것으로 간주되지 않기 때문이다. 트랜스젠더에 대한 억압은 단순히 이데올로기적인 것이 아니라 물질적인 것이기도 하다. 달리 말해, 트랜스젠더들이 심각한 억압에 직면하는 것은 단지 트랜스혐오자들 때문만이 아니라, 자본주의 체제가 그들을 착취하고 비하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따라서 트랜스젠더들의 물질적 조건을 바꾸기 위해서는 물질적 해결책이 필요하다. 대표성(representation)은 물질적 해결책이 아니다. 아무리 선의가 가득한 트랜스젠더라 해도 혼자서 자본주의 체제를 내부에서 바꿀 수는 없다. 실제로 “권력 구조를 내부에서 변화시키려는” 모든 시도는 거의 전적으로 실패로 돌아갔다. 우리는 흑인 대통령이 인종차별을 끝내지 못했고, 여성 부통령이 성차별을 끝내지 못했으며, 게이 CEO들이 동성애 혐오를 끝내지 못했다는 사실을 목격했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또다시 그 거짓말에 완전히 속아 넘어가야 하는가? “우리는 대표성 정치가 과거에 실패했음을 알고 있습니다,” 자본의 홍보 담당자들은 우리가 이렇게 믿게 만들고 싶어 한다. “하지만 이번에는 다를 것입니다. 이제 트랜스 CEO가 더 많아지면 실제로 뭔가 달라질 것입니다.” 더 많은 트랜스 CEO를 고용하고 더 많은 트랜스 정치인을 선출함으로써 체제가 스스로 바로잡을 것이라고 믿는 것은 패배가 확실한 내기이며, 현재 많은 주에서 역사적인 수준의 억압에 직면해 있는 트랜스 아이들을 버리는 행위다. 이는 매일 살해당하는 트랜스 여성들(대부분이 흑인 및 유색인종(brown)이다)을 버리는 것이다. 이는 자신들을 위해 만들어지지 않은 세상에 억지로 적응해야 하는 트랜스 성노동자들과 논바이너리 사람들을 버리는 것이다. 자유주의자들은 우리에게 인내심을 가지라고 말하려 하지만, 우리는 그 인내심이 희생자를 낳는다는 것을 이미 목격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정치를 단순히 거부할 수는 없다. 우리를 억압하는 자들은 조직화되어 있으니, 우리도 그래야 한다. 우리의 목표는 단순히 억압에서 벗어날 수 있는 몇 군데의 공간을 확보하는 것이 아니라, 억압을 종식시키는 것이어야 한다. 우리는 승리하기 위해 싸워야 한다. 승리하기 위해서는 승리할 수 있는 전략이 필요하다. 포스트모더니즘과 퀴어 이론은 승리가 가능하다는 전제를 거부하기 때문에 승리할 수 있는 이론이 아니다. 대신, 우리는 트랜스 및 퀴어 해방을 위한 투쟁에 마르크스주의적 접근을 채택해야 한다. 트랜스 해방에 대한 사회주의적 관점 진정한 마르크스주의자들은 트랜스젠더와 다른 특별하게 억압받는 집단을 해방시킬 수 있는 것은 오직 노동계급뿐임을 인식한다. 이는 어떤 도덕적 우월성 때문이 아니다. (거의 모든 퀴어들이 알고 있듯이, 노동계급 구성원들도 신념은 매우 반동적일 수 있다.) 이는 오직 노동계급만이 자본주의 체제를 무너뜨릴 전략적 힘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모든 것을 움직이는 것은 노동계급, 오직 노동계급뿐이기 때문이다. 노동자들은 경제 전체를 움직이는 원동력이므로, 오직 그들만이 경제를 멈출 힘을 가지고 있다. 물론 이는, 자본주의를 종식시키는 것이 트랜스 억압의 모든 사례도 즉각적으로 종식시킬 것이라는 뜻이 아니다. 그러나 연속혁명 이론이 보여주듯이, 사회주의의 수립은 트랜스 해방을 위한 필수적인 전제 조건이다. 그러나 우리가 “노동계급”이라고 말할 때,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분명히 강조하고 또 강조해야 한다. 오랫동안 노동계급은 안전모를 쓴 시스이성애자 백인 남성이라는 이미지로 그려져 왔다. 물론 그 남성들도 노동계급이지만, 웨이터와 성노동자, 교사, 택배 기사, 개인 비서, 그리고 온갖 직종에서 일하는 사람들, 즉 우리가 전통적으로 “노동계급”이라고 생각할 때 떠올리지 않을 수도 있는 사람들 역시 노동계급이다. 게다가 미국의 노동계급은 인종적 측면은 물론 젠더와 성적지향의 측면에서도 그 어느 때보다 다양해졌다. 트랜스젠더와 퀴어의 압도적 다수는 노동계급에 속한다. 따라서 우리가 “노동계급이 특히 더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킬 것”이라고 말할 때, 이는 백인 구세주들이 가난하고 억압받는 대중을 구하러 날아와 구원한다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가난하고 억압받는 대중이 스스로 일어나, 노동자로서의 자신의 지위를 활용하여, 스스로를 해방시킬 것이라는 의미다. 이 점을 보여주는 가장 훌륭한 사례 중 하나는 아르헨티나의 마디그라프(Madygraf) 공장에서 시스젠더 노동자들이 트랜스젠더 동료의 더 나은 근무 조건을 요구하며 파업에 돌입했던 사건이다. 그 파업은 마디그라프에서 진행 중이던 운동의 핵심적인 부분이었으며, 결국 노동자들은 공장을 점거했다. 오늘날까지도 그 공장은 노동자 소유로 운영되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이에 대해 공상적인 환상을 품고, 언젠가 노동계급이 트랜스포괄적인 혁명적 강령을 가지고 깨어날 것이라고 가정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우리는 트랜스 해방에 대한 사회주의적 관점에서 가장 시급한 필요 중 하나를 매우 명확히 인식해야한다. 바로 급진적이고 혁명적인 지도력(leadership)이다. 이러한 지도력은 노동계급과 특히 억압받는 이들로부터 건설되어야 하는 전위당(vanguard party) 형태를 띠며, 이 당은 혁명의 순간을 위해 구체적으로 스스로를 준비해야 한다. 트로츠키의 말처럼, 혁명은 하늘에서 떨어지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조직된 당만이 수행할 수 있는 준비 작업이 승패를 가를 것이다. 물론 이는 당연히 전위당의 당원들이 혁명을 기다리며 한가롭게 손가락만 비비고 있어야 한다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그들은 자신의 작업장과 지역사회에서 투쟁에 참여하며, 끊임없이 반자본주의적 관점을 위해 싸우고, 운동이 억압받는 이들의 요구를 받아들일 것을 요구해야 한다. 트랜스 해방을 위한 투쟁은 자본주의를 종식시키기 위한 투쟁이다. 오직 자본주의의 몰락과 사회주의 사회의 도래만이 트랜스 민중들을 해방시키고 우리가 삶을 온전히 누릴 수 있게 할 것이다. 2021년 6월 6일 Left Voice에 게재된 기사를 번역함. 글쓴이: 시빌 데이비스 번역: 돌멩 [1] 성(sex)은 태어날 때 부여받는 생물학적 특성이다. 이를 이해하는 한 가지 방법은 성을 대략 네 가지로 구분하는 것이다: 음경이 있는 사람, 질이 있는 사람, 둘 다 있는 사람, 그리고 둘 다 없는 사람이다. 반면 젠더(gender)는 개인적 정체성, 사회적 관계, 외모가 복합적으로 작용하는 더 복잡한 사회정치적 과정이다. 젠더를 결정하는 과정이 이토록 복잡하기 때문에, 사람이 될 수 있는 젠더의 수는 사실상 무한하다. [2] John D’Emilio, “Capitalism and Gay Identity,” in Powers of Desire: The Politics of Sexuality, ed. Ann Barr Snitow, Christine Stansell, and Sharon Thompson (New York: Aakar Books, 2009), 100–113. [3] John M. Sloop, Disciplining Gender: Rhetorics of Sex Identity in Contemporary U.S. Culture (Amherst: University of Massachusetts, 2004.) [4] 역주: 영국의 마르크스-레닌주의 조직을 표방하던 레드 파이트백은 2020년에 『마르크스주의와 트랜스 해방: 영국 좌파 내 트랜스혐오에 맞서다』라는 책을 썼다. 저자가 인용한 영국공산당의 구절은 레드 파이트백의 주장을 ‘의학적 음모’를 주장하는 것이라며 비꼬고 있다. 레드 파이트백은 현재는 조직 내부 균열로 해체된 것으로 보인다. [5] Ciara Cremin, Man Made Woman: The Dialectics of Cross-Dressing (London: Pluto Press, 2017). /* 스크롤 여백만 주고, 화면에는 안 보이게 */ .ftn-target { display: inline-block; /* 줄바꿈 안 생김 */ width: 0; height: 0; scroll-margin-top: 200px; } document.addEventListener("DOMContentLoaded", function () { // name="_ftn1", name="_ftn2", name="_ftnref1" ... 전부 대상 document.querySelectorAll('a[name^="_ftn"]').forEach(function(a) { var idValue = a.getAttribute("name"); // 이미 같은 id의 요소가 있으면 또 만들지 않음 if (!document.getElementById(idValue)) { var span = document.createElement("span"); span.id = idValue; span.className = "ftn-target"; a.parentNode.insertBefore(span, a); } }); }); /* 본문 각주 번호 + 아래쪽 각주 번호 색 지정 */ a[href^="#_ftn"] sup, a[href^="#_ftnref"] sup { color: #BF202D; } /* 밑줄이 보기 싫으면 */ a[href^="#_ftn"], a[href^="#_ftnref"] { text-decoration: none; } /* 마우스 올렸을 때 살짝만 강조하고 싶으면 (선택) */ a[href^="#_ftn"]:hover, a[href^="#_ftnref"]:hover { text-decoration: underline; } /* 페이지 전체가 오른쪽으로 넘치지 않게 */ html, body { max-width: 100%; overflow-x: hidden; } /* 본문 영역 폭 강제 고정 + 긴 단어/문장도 줄바꿈 */ #bo_v_con, .bo_v_con, .cke_editable, article { max-width: 100%; overflow-wrap: break-word; word-wrap: break-word; /* 구형 브라우저용 */ } /* 워드에서 붙은 이미지/표가 화면 밖으로 안 나가게 */ #bo_v_con img, #bo_v_con table, .bo_v_con img, .bo_v_con table, .cke_editable img, .cke_editable table, article img, article table { max-width: 100% !important; height: auto; } /* 워드가 p, span에 폭을 박아놓은 경우 강제로 해제 */ #bo_v_con p[style*="width"], #bo_v_con span[style*="width"], .bo_v_con p[style*="width"], .bo_v_con span[style*="width"], .cke_editable p[style*="width"], .cke_editable span[style*="width"], article p[style*="width"], article span[style*="width"] { width: auto !important; max-width: 100% !important; } /* 기본 blockquote 스타일 */ blockquote { border-left: 4px solid #c0392b; /* 사이트 분위기와 맞는 붉은 계열 */ padding: 12px 18px; margin: 20px 0; background: #fafafa; font-style: normal; color: #333; line-height: 1.6; } /* blockquote 안의 p 태그 정렬 */ blockquote p { margin: 0 0 10px 0; text-align: justify; } /* 마지막 p 태그 여백 제거 */ blockquote p:last-child { margin-bottom: 0; } /* 본문 안 링크 스타일 */ #gpt-article a { color: #cc0000 !important; text-decoration: none !important; } #gpt-article a:hover { color: #990000 !important; } // https://로 시작하는 링크만 target="_blank" 적용 document.addEventListener("DOMContentLoaded", function () { const links = document.querySelectorAll('#gpt-article a[href^="https://"]'); links.forEach(link => { link.setAttribute("target", "_blank"); link.setAttribute("rel", "noopener noreferrer"); }); });2026-05-25 | 조회 7,593 -
[번역] ICE반대운동을 이끄는 디트로이트 ‘민중총회’디트로이트에서 수백 명이 모인 ‘민중 총회(People's Assembly)’가 결성되어 이민세관단속국(ICE)과 트럼프 행정부에 맞설 전략을 토론하고 행동에 나서고 있다. 이들이 보여 준 민주적·독립적인 자기조직화 모델은 다른 도시에서도 본받을 만한 유용한 사례다. 트럼프 행정부의 이민자 공동체 공격이 갈수록 거세지면서, 전국 각지의 주민들은 어떻게 이웃을 지켜낼지, 어떻게 ICE의 단속에 맞서 방어할지 자문하고 있다. 교사, 간호사, 동네 주민들은 ICE가 들이닥칠 때 어떻게 대응할지 논의하기 위해 위원회를 꾸리고 있다. 학생들은 반ICE 집회에서 ‘권리 알기’(Know Your Rights) 전단지를 돌린다. 시카고에서는 ICE가 학교에 진입하려 한다고 판단한 교사들이 그들의 출입을 금지했다. 시카고 교원 노조는 이민 단속에 협조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표명하고 ‘생추어리 팀(sanctuary teams)’을 만들어 ICE 대응 체계를 구축했으며, 학생들을 보호하기 위해 학교 앞 집회 참여자들이 다 함께 학교로 걸어 들어가는 워크인(walk-in)에 동참해 줄 것을 호소했다. 세인트루이스와 인디애나폴리스에서 댈러스와 LA에 이르기까지 대규모 반ICE 집회가 잇따랐다. 이런 저항과 항의 행동이 중요한 까닭은, 반동 정치가 아직 이 나라를 통째로 삼키지는 못했다는 분명한 신호이기 때문이다. 트럼프가 끊임없는 행정 조치로 우리를 짓누르려 들지만, 평범한 사람들은 스스로를 조직해 맞받아칠 길을 찾아내고 있다. 디트로이트에서는 수백 명이 모여 ICE에 어떻게 맞설지 논의하는 ‘민중 총회’(People’s Assembly)를 결성했다. 이 자리에는 이민자, 교사, 학생, 각계각층의 노동자, 다양한 좌파 그룹이 함께했다. 이들은 ICE를 어떻게 밀어낼 것인가를 두고 여러 전략을 토론한 끝에 행동에 나서기로 결정했다. 그 후로 수백 명이 계속 모여서 합의된 전략과 전술들을 민주적인 방식으로 실행에 옮기고 있다. 이 공동전선 성격의 총회는 자기조직화가 실제로 작동하고 있음을 보여 주는 중요한 사례다. 이 경험에서 무엇보다 주목할 만한 점은 총회의 민주적이고 독립적인 성격을 지키기 위해 헌신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이다. 이들은 좌파, 노동조합 운동, 공동체 세력이라는 서로 다른 경향을 하나로 묶는 일의 힘을 이해할 뿐 아니라, 그 힘이 지속되려면 운동이 스스로 힘을 통제해야 한다는 점까지 알고 있다. 우리는 민주당과 그들에게 종속된 제도권 비영리 단체 관료 및 노조 관료들의 포섭 전술을 경계하고 그에 맞서야 한다. 지금 토론 중인 핵심 사안 중 하나는 ICE와 트럼프 행정부에 맞설 구체적 전략을 어떻게 발전시킬 것인가이다. 단속이 벌어질 때 활동가들을 신속하게 소집하는 대응 네트워크를 어떻게 꾸릴 것인가, 광범위한 정치 투쟁을 통해 예방에 주력할 것인가, 사람들이 자기 일터에서 조직될 수 있도록 어떻게 도울 것인가, 트럼프 행정부가 부추기는 공포의 문화와 서사에 맞서 선전과 정치 교육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 등이 문제다. 이 총회의 인상적인 특징 중 하나는, 정치적으로 조율하여 여러 전략을 동시에 실행하기 위해 다수의 실행 그룹을 만들어 냈다는 점이다. 이는 토론 자체가 민주적이고 열려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ICE가 우리 공동체에서 누군가를 끌어내려 할 때 이에 맞서기 위해 가능한 한 많은 사람을 모을 방법을 모색하는 것은 절대적으로 중요하다. 그러나 우리는 전술적으로는 유연하되, 민중의 저항과 대응을 지원하고 그 역량을 키우는 데 전략적으로 집중해야 한다. ICE를 감시하는 순찰대에만 집중할 것이 아니라, ICE에 맞선 집단적 대응을 스스로 조직하는 노동자와 공동체 구성원들을 전략적으로 뒷받침하고 그들의 힘을 키워 주는 방향으로 우리의 노력을 쏟아야 한다. 이것의 한 예가 바로 교사들이 학교에서 만들고 있는 생추어리 팀이다. 교사들의 사례는 병원과 그 밖의 일터에도 널리 알려져야 한다. 이런 위원회를 어떤 모습으로 구성할 수 있고 또 어떻게 만들 수 있는지에 관해서, 한 고등학교 교사와 한 임상의의 설명이 최근 『레프트보이스』에 실렸다. 또한 운동은 공동체가 ICE에 대한 집단적 대응을 함께 구체화할 수 있는 장소로서의 지역 총회(neighborhood assemblies)를 적극 홍보해야 한다. 단속이 벌어질 때 1선 방어선은 언제나 그 현장에 있는 사람들, 말하자면 이웃, 동료, 학교 직원, 병원 직원, 교회 신자들이다. ICE가 들이닥치면 우리 모두가 대응할 책임이 있다. 예를 들어 어느 식당이 단속을 앞두고 문을 걸어 잠그면, 이 식당은 함께 나서서 자신을 지지해 줄 공동체를 필요로 한다. “민중 총회”는 바로 이렇게 서로 다른 집단이 한자리에서 조율하는 장이 되어야 하며, 그래야만 ICE에 가장 큰 타격을 입고 그에 맞서 싸우는 이들의 요구를 더 광범위한 운동이 더 구체적으로 뒷받침할 수 있다. 일부 학교와 병원 행정처는 본인이 미등록 이주민이거나 미등록 가족을 둔 학생을 지지한다고 나서기도 한다. 이 같은 노력도 뒷받침되어야 한다. 하지만 우리는 사장과 선출직 공직자들이 움직이기를 마냥 기다리거나 거기에 기댈 수 없다. 결국 학생, 환자, 이웃의 안전을 지키는 최전선은 다름 아닌 일선 직원들이다. 당신이 ICE의 표적이 될 위험이 있는 이들과 같은 일터에서 일한다면, 사장이 입을 열 때까지 기다리지 말자! 동료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ICE가 문을 두드릴 때 어떻게 할지 계획을 세우자. 동료들이 다 함께 입장을 밝히는 공동 성명을 작성하자. 다른 일터와 손을 맞잡고 민중 총회에 함께하자. 거듭 강조하지만, ICE를 밀어내고 우리 공동체를 안전하게 지키는 싸움은 여러 층위가 얽힌 투쟁이고, 전국 각지에서 시기와 장소에 따라 그 양상을 달리한다. 그러나 절대적으로 중요한 것은 거리에서, 학교에서, 우리의 일터에서 대중 운동과 집단 행동이 펼쳐져야 한다는 것이다. 예전에 피하지 못했던 함정을 피하는 것도 중요하다. 절박한 마음이 짙어지고 당장 행동해야 한다는 압박이 거센 지금과 같은 시기에는 ‘효율’을 극대화한다는 명목으로 토론을 건너뛰고 행정적 구조나 막후 조직을 세우고 싶은 유혹이 강하게 작용한다. 하지만 이런 발상이 놓치는 것은, 대중 총회와 노동자 위원회의 힘이 민주적 과정을 통해 쌓인 신뢰와 동의에서 비롯된다는 사실이다. 이 길은 더디고 어수선할지도 모르지만 바로 이 지점에서 힘이 생겨나며, 이 힘이야말로 가장 많은 사람들이 운동의 주인이 되고 총회의 결정을 직접 실행하게 만드는 주체성의 토대가 된다. 따라서 활동가와 조직가들은 무엇이든 ‘시스템화’하려는 본능에 저항해야 한다. 그렇다고 해서 구조나 절차 자체를 내다 버려야 한다는 말은 아니다. 그러나 이런 방법을 민주적 과정을 건너뛰기 위한 ‘지름길’로 써먹는 순간, 우리는 정작 위원회나 총회가 가진 잠재력의 발목을 잡게 된다. 우리는 새롭게 등장한 사람들을 진행 중인 운동에 끼워 넣을 부속품 정도로 여기는 본능에서도 벗어나야 한다. 오히려 새로운 모임 자체를 활동가들이 참여하고 있는 하나의 독자적인 단위로 대해야 한다. 이민자를 향한 공격에 새로운 입법으로 응수하자는 압력도 만만치 않다. 이민자의 권리를 제도적으로 다지기 위한 입법 조치는 분명 중요하다. 이민자를 지지한다고 자처하는 지방 정부와 주 정부는 말뿐 아니라 행동으로 보호 입법을 통과시키고 ICE에 맞서야 한다. 그러나 지금까지 그런 입법 활동조차 없는 민주당 의원들에게 우리의 희망을 걸 수는 없다. 더 중요한 점은, 의원들에게 전화를 거는 방향으로 운동을 전환하는 순간 우리의 힘은 거리에서 멀어진다는 사실이다. 안타깝지만 ICE도, 그리고 지금 이 순간 위험에 처한 우리 이웃들도 다름 아닌 거리에 있다. 다시 말하건대 디트로이트 민중 총회의 사례는 전국 각지의 운동이 발전시켜 나가야 할 값진 경험이다. 계급 독립성을 위해 싸우는 자기조직화 단위들을 통해서만 우리는 운동을 강화할 수 있고 포섭으로부터 지켜낼 수 있다. 2025년 2월 7일 Left Voice에 게재된 기사를 번역함. 글쓴이: Brian H. Silverstein and Tristan Taylor 번역: 강성윤 /* 스크롤 여백만 주고, 화면에는 안 보이게 */ .ftn-target { display: inline-block; /* 줄바꿈 안 생김 */ width: 0; height: 0; scroll-margin-top: 200px; } document.addEventListener("DOMContentLoaded", function () { // name="_ftn1", name="_ftn2", name="_ftnref1" ... 전부 대상 document.querySelectorAll('a[name^="_ftn"]').forEach(function(a) { var idValue = a.getAttribute("name"); // 이미 같은 id의 요소가 있으면 또 만들지 않음 if (!document.getElementById(idValue)) { var span = document.createElement("span"); span.id = idValue; span.className = "ftn-target"; a.parentNode.insertBefore(span, a); } }); }); /* 본문 각주 번호 + 아래쪽 각주 번호 색 지정 */ a[href^="#_ftn"] sup, a[href^="#_ftnref"] sup { color: #BF202D; } /* 밑줄이 보기 싫으면 */ a[href^="#_ftn"], a[href^="#_ftnref"] { text-decoration: none; } /* 마우스 올렸을 때 살짝만 강조하고 싶으면 (선택) */ a[href^="#_ftn"]:hover, a[href^="#_ftnref"]:hover { text-decoration: underline; } /* 페이지 전체가 오른쪽으로 넘치지 않게 */ html, body { max-width: 100%; overflow-x: hidden; } /* 본문 영역 폭 강제 고정 + 긴 단어/문장도 줄바꿈 */ #bo_v_con, .bo_v_con, .cke_editable, article { max-width: 100%; overflow-wrap: break-word; word-wrap: break-word; /* 구형 브라우저용 */ } /* 워드에서 붙은 이미지/표가 화면 밖으로 안 나가게 */ #bo_v_con img, #bo_v_con table, .bo_v_con img, .bo_v_con table, .cke_editable img, .cke_editable table, article img, article table { max-width: 100% !important; height: auto; } /* 워드가 p, span에 폭을 박아놓은 경우 강제로 해제 */ #bo_v_con p[style*="width"], #bo_v_con span[style*="width"], .bo_v_con p[style*="width"], .bo_v_con span[style*="width"], .cke_editable p[style*="width"], .cke_editable span[style*="width"], article p[style*="width"], article span[style*="width"] { width: auto !important; max-width: 100% !important; } /* 기본 blockquote 스타일 */ blockquote { border-left: 4px solid #c0392b; /* 사이트 분위기와 맞는 붉은 계열 */ padding: 12px 18px; margin: 20px 0; background: #fafafa; font-style: normal; color: #333; line-height: 1.6; } /* blockquote 안의 p 태그 정렬 */ blockquote p { margin: 0 0 10px 0; text-align: justify; } /* 마지막 p 태그 여백 제거 */ blockquote p:last-child { margin-bottom: 0; } /* 본문 안 링크 스타일 */ #gpt-article a { color: #cc0000 !important; text-decoration: none !important; } #gpt-article a:hover { color: #990000 !important; } // https://로 시작하는 링크만 target="_blank" 적용 document.addEventListener("DOMContentLoaded", function () { const links = document.querySelectorAll('#gpt-article a[href^="https://"]'); links.forEach(link => { link.setAttribute("target", "_blank"); link.setAttribute("rel", "noopener noreferrer"); }); });2026-05-25 | 조회 6,951 -
613 발전노동자 대행진, 무엇을 내걸고 어떻게 싸울 것인가1. 들어가며 기후위기 대응을 명목으로 한 석탄화력발전소 폐쇄가 본격화되었다. 현재까지 서천 1·2호기, 영동 1·2호기, 보령 1·2호기, 삼천포 1·2호기, 태안 1호기가 폐쇄되었다. 2026년 태안 2호기·하동 1호기·보령 5호기 폐쇄가 예고 되었지만, 대체 발전소 건설 지연이나 중동전쟁 등을 이유로 순연된 상황이다. 11차 전력수급기본계획(2025.02)에 따르면, 2038년까지 태안과 당진, 하동 1~6호기, 보령 5·6호기, 삼천포 3~6호기, 동해와 영흥 1·2호기 등 총 37기를 폐지하고 LNG 발전소로 전환하겠다고 하고 있다. 시기는 상이할 수 있으나, 발전소의 순차적·단계적·일방적 폐쇄 국면은 지속될 예정이다. 자본의 시간표는 매우 빠르고 또 일방적이다. 자본은 기후위기를 해결할 수 있을 것처럼 굴지만, 노동자에게 그 책임과 비용을 전가한다. 석탄화력발전소 폐쇄와 전기차로의 전환 등은 매우 빠르게 추진되고 있지만, 이윤 극대화를 위한 다단계 하도급 구조와 불안정한 노동 환경은 여전히 공고하다. 발전소 폐쇄 국면, 노동자들은 “석탄화력발전소는 멈춰도 우리 삶은 멈출 수 없다,”라는 기치 아래 여러 투쟁을 이어왔다. “414기후정의파업”(2023), “정의로운 전환을 위한 330 충남노동자 행진(2024)”, “발전HPS지부 파업 투쟁”(2024), “정의로운 전환을 위한 531 대행진(2025), “고(故) 김충현 비정규직 노동자 중대재해 대응 투쟁”(2025) 등이 그 예시다. 그 결과 매년 9월 기후정의행진에는 “공공재생에너지로의 전환, 발전 노동자 총고용보장”이 핵심 요구안으로 제시되고 있다. 작년에는 공공재생에너지법 5만 입법 청원이 성사되기도 했다. 그리고 올해 6월 13일, 경남도청이 있는 창원에서, 발전노동자 총고용 보장과 공공재생에너지 전환을 내걸고 발전노동자 대행진이 조직되고 있다. 여기서는 석탄화력발전소 폐쇄 과정과 반복되는 발전소 노동자의 중대재해가 드러낸 다단계 원하청의 구조를 살펴본다. 이는 결국 비용 절감과 이윤 확보만을 핵심 목표로 작동하는 자본주의가 만든 결과임을 다시 확인하고자 한다. 원청교섭 쟁취 국면에서 613 대행진을 위치지어야 할 필요 역시 강조하고자 한다. 2. “저들의 계획 속에 너와 나의 미랜 없지” 석탄화력발전소 폐쇄 흐름은 순차적이고 연속적이다. 특정 시기에 모든 호기를 한 번에 폐기하는 것이 아니라, 한 발전소의 일부씩을 꾸준히, 수년간 폐쇄한다. 고용불안과 해고의 결과는 당연히 누적되겠지만, 동시에 이를 노동자들이 피할 수 없는 현실로 수용하게 할 우려도 크다. 예를 들어 "이번에 몇 호기가 폐쇄되지만, 나는 다행히 해당하지 않는다."라는 식으로 안도하면서, 노동자들을 개별적이고 수동적인 위치에 머물게 할 가능성이 크다. 또한 발전소 폐쇄 흐름은 그 자체로 매우 일방적이다. 석탄화력발전소 폐쇄 일정 및 대체 건설 계획과 전망을, 소수의 국가 관료가 “전력수급기본계획”이라는 이름으로 밀어붙이고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저들의 계획 속에 너와 나의 미랜 없지.”라는 한 민중가요의 가사가 현 상황을 정확히 보여준다. 노동자들은 철저히 배제되었고, 변화에 적응할 여지조차 없었다. [그림 1] 전쟁, 대체건설 등의 명목으로 일방 순연된 발전소 폐쇄의 시간표 정부입장은 뚜렷하다. 첫째, 정부는 석탄화력발전소 폐쇄에 따라 발생하는 유휴 인력을 한편으론 과소평가하면서도[1] 마지못해 인정하고 있다. 당시 산업통상자원부의 보고서(2021)[2]에 따르면 석탄화력발전소가 폐쇄되고 LNG 발전소로 전환되는 과정에서 약 5,000명의 전환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있다. 둘째, 발전소 폐쇄가 되더라도 발전소 내외부로 전환 배치가 될 것이란 기만을 펼치고 있다. 2025년 10월 태안화력발전소를 방문한 김성환 기후부 장관의 발언이 이를 대표적으로 드러낸다. 당시 김성환 장관은 태안 석탄화력발전소 1호기 폐지를 “기후위기에 대응한 녹색 대전환의 신호탄”이라고 평가하며 1호기 노동자 129명 전원을 다른 사업장으로 전환 배치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하지만 이는 임시적인 처방에 불과할 뿐 아니라, 발전소 대부분이 부족한 인원 속에서 정년퇴직자 재계약을 통해 버티고 있는 상황을 무시한 발언이다. 더욱이 2026년부터 폐쇄 예정인 다른 호기들의 인력 재배치 방안을 전혀 고민하지 않고 있다. 셋째, LNG뿐 아니라 풍력 및 태양광 같은 재생에너지 투자와 개발을 공공부문이 주도하고 이를 통해 창출되는 일자리에 노동자들을 전환 배치해야 한다는 요구에 정부는 민간 기업과의 경쟁이나 공정거래법 위반 가능성을 이유로 반대하거나 수동적으로 대응하고 있다. 에너지 생산과 분배에 대한 결정권을 틀어진 자본과 정부는 이윤만을 위해 파괴적 생산을 몰아붙이고 있다. 이미 동서, 서부, 남부발전은 "미래 먹거리 반도체 산업"을 위한 LNG 발전소 건설 입찰에 뛰어들었다. 제반 비용은 국가와 지자체가 부담하는 반면 세제 혜택과 보조금 등의 혜택은 SK나 삼성 같은 기업에 집중되어 재벌 특혜의 성격을 띠는, 그 자체로도 막대한 물과 전기를 소비하는 그 클러스터에 말이다. 3. 반복되는 발전소 비정규직 노동자의 죽음이 드러낸 발전소 위험 현장 발전소 노동자들의 작업복은 상이하다. 꾸준했던 민영화와 외주화로 인한 결과다. 노동자들의 작업복에 적힌 회사명도 다르고 운영 인원 자체도 매우 적다. 형식적·징벌적 안전 체계는 마련되어 있지만, 부족한 인원과 쪼개진 고용 형태는 강한 노동강도와 위험 환경으로 노동자를 내몰고 있다. 그 결과 발전소는 중대재해와 산업재해가 반복되는 일터가 되었다. 2025년 6월 2일, 서부발전 태안화력발전소에서 선반 작업을 하던 김충현 비정규직 노동자가 사망했다. 그가 작업하던 선반에 방호덮개는 설치되지 않았다. 2018년 컨베이어벨트에 감겨 사망한 김용균 노동자의 중대재해 이후 태안화력발전소의 컨베이어벨트에는 근접 작업 예방을 위한 방호 장치가 빠짐없이 설치되었지만, 감김 사고가 발생하는 선반 전체에 대해서는 어떠한 안전장치도 마련되지 않았다. 그 와중에 TBM(Tool Box Meeting, 작업 전 안전 점검 회의) 이나 위험성 평가 등 안전보건 관리 체계는 매우 형식적, 징벌적으로 운영되고 있었다. 도급계약이라지만 원청 한전KPS의 구두 작업 지시는 일상이었고, 하청의 하청으로 내려갈수록 위험한 작업이 전가되며 음지화되었다. 2018년 12월 김용균 노동자의 죽음 이후에도 발전소 중대재해는 반복되고 있다. 2026년에만 벌써 두 건이 발생했다.[3] 쪼개기 계약으로 인한 인원의 부족, 위험의 전가, 사업주 책임 공백의 결과를 그대로 반영하듯, 사망자 절대다수는 하청 비정규직 노동자였다. 특히 올해 3월 23일 영덕 풍력발전소에서 발생한 화재 참사는 다단계 하청 구조 아래에서 중대재해가 발전소 유형에 국한되지 않음을 여실히 드러냈다. 당시 사망자들은 모두 운영사인 ㈜영덕풍력발전에 고용되어 있지 않았다. 3명 모두 유지보수를 담당하는 외부 위탁업체 소속이었고, 이중 2명은 계약직(일용직) 노동자였다. 당시 작업 현장에 원청인 ㈜영덕풍력발전 소속 직원은 없었다. 육상 풍력발전소 시공을 했던 회사(유니슨)와도 직접적인 관련이 없었다. 석탄화력발전소 폐쇄되고 모든 노동자가 재생에너지 일자리로 전환된다 하더라도, 그 전환될 일자리가 불안정하면 안 된다는 점을 뼈아프게 보여준 사례기도 하다. 한편, 발전소가 곧 문을 닫는다는 명분은, 필요 인력을 충원하지 않는 명분으로 활용되고 있었다. 일례로 고(故) 김충현 비정규직 노동자가 속해있던 하청업체 ㈜한국파워O&M의 정원은 27명이지만, 현재 25명만 일하고 있다. 정원에도 미달하는 적은 수의 노동자가 불안정하게 일한다는 점은 사고의 위험을 높일 수밖에 없다. 이처럼 발전소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죽음은 이러한 쪼개기 계약 구조를, 설비나 안전 관련 문제가 있어도 의견을 개진하지 못하게 하는 구조를 여실히 드러냈다. 이는 고(故) 김충현 사망사고 이후 구성된 정부와의 협의체 (“고 김충현 사망사고 재발방지를 위한 발전산업 고용안전 협의체”, 이하 협의체) 주관으로 17,000여 명의 발전소 노동자를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2025) 결과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발전 공기업에 비해 1차 협력업체 노동자들의 경우 3.73배, 2차 협력업체 노동자들의 경우 3.86배 더 많은 업무 중 사고를 경험했다고 응답했다. 또한 사고가 발생해도 보고하지 않았다고 응답한 경우가 32.3%로 상당히 높았으며, 특히 발전 공기업(40.2%), 1차 하청업체(31.6%), 2차 하청업체(42.2%) 노동자에서 두드러졌다. 이는 현장에서 위험을 자유롭게 발언하고 개선하기 어려운 분위기가 조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위험을 느껴 작업을 멈추면 계약이 끊길까 봐 두렵다"라고, "그래서 작업을 계속 진행하게 된다"라는 한 하청 노동자의 말은 이러한 상황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또한 원하청 등 위계화된 고용구조가 발전소 폐쇄 흐름에서 더욱 극적으로 작동한다는 점은 이미 알려져 있다. 심지어 노동부도 "(발전소 폐쇄 국면) 인력 감축은 발전공기업에서는 발생하지 않았고, 특히 협력업체(특히 2차)와 자회사 중심으로 발생. 발전공기업 – 자회사 - 1차 협력사 - 2차 협력사(때론 3차까지 포함) 등으로 중층화된 발전사의 고용구조는 석탄화력발전소 폐쇄에 따른 고용 충격의 차별성으로 이어짐"[4]이라며, 이를 인정하고 있다. 실제로 그동안 폐쇄된 석탄화력발전소 8기에서 일하던 정규직 601명은 전원 재배치됐지만, 하청 노동자 667명 중 39명은 일자리를 잃었다. 발전소 폐쇄로 인해 노동자들이 겪어야 하는 고용불안은 현재진행형이다. 앞서 언급한 협의체 설문조사에 따르면, 2차 하청 노동자의 68.1%가 현재 고용불안을 느낀다고 답변했다. 발전소 폐쇄가 예정되어 있기 때문이라는 점이 44.7%로 가장 높은 비중을 차지했다. 또한 발전소 폐쇄 이후 본인의 고용을 유지하지 못할 거라는 답변이 자회사 66.4%, 1차 협력업체 85.8%, 2차 협력업체 89%로 매우 높았다. 실제로 1년 단위로 재계약을 반복해 온 발전소 하청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경우, 폐쇄가 곧 회사 정원의 감소를 의미한다고 인식하고 있다. “서로 눈치만 보는 거야. 누가 먼저 나가는지. 이게 어떻게 보면 잔인하죠. 같이 일했던 사람끼리 싸움 붙이는 거”라는 한전KPS 하청 노동자의 발언은, 발전소 폐쇄가 노동자 내부의 의자 뺏기 싸움을 유도할 수 있단 우려를 정확하게 표현하고 있다. 고용불안은 단순히 불안감으로 그치지 않는다. 쌍용자동차 정리해고로 인해 수십 명의 노동자들이 죽음으로 내몰렸던 사례, 한국GM 공장 폐쇄로 2명의 노동자가 죽음으로 내몰렸던 사례, 폐쇄를 앞둔 삼천포발전소 노동자의 자살 사례 등, 일방적 폐쇄와 해고가 노동자를 (가장 극적인 형태인) 죽음으로 내몰았던 사례를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앞서 발전소 폐쇄가 만성적, 순차적, 일방적 성격을 가지며, 이로 인한 불안과 해고는 누적된다고 언급한 바 있다. 이미 폐쇄를 경험한 주체들이 확인되고 있다. 예를 들어 보령발전소의 경우 2026년 6월 30일과 12월 30일 폐쇄가 예고된 상황에서 (그 일정이 변경되었더라도) 인원이 절반으로 줄어들게 되면, 그 대상이 본인들이 될 수 있단 있다는 불안감이 현장에 상존하고 있었다. 발전 5사 등 원청은 하청 노동자에 대해 자기는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면서 책임을 지고 있지 않다.[5] 당진 1호기 폐쇄를 경험한 당진발전소 노동자들의 경우 언더-티오로 2~3년째 유지되고 있다. 호남발전소 폐쇄 당시 하청 노동자들은 개별 자구책을 모색해야 했고, 그중 일부는 여수발전소의 2차 하청 노동자로 들어와 매년 계약을 갱신하며 일하고 있다. 한전KPS 하동사업소의 경우 하청업체 노동자들의 고용 형태를 단기노무원으로 일방적으로 변경했고, 폐쇄를 명목으로 26년 12월 31일까지만 계약 연장하겠다고 한 상황이다. 2024년 발전HPS 지부의 파업 투쟁 결과 지자체와 발전 5사, 노동조합이 참여하는 고용보장 협의체가 구성되었다. 그러나 협의체 논의는 폐쇄 연기와 맞물려 올해 12월로 미뤄진 상황이다. 김영구 발전HPS지부 하동지회장은 폐쇄가 예고되었다가 연기되는 반복되는 상황 속 현장이 "희망고문"과 같은 상태에 놓여있다고 말했다. 이러한 사례들은 고용과 안전을 책임지는 주체가 다층적 구조를 이루고 있는 상황에서, 폐쇄로 인한 대응이 개인적인 자구책 수준으로 축소되는 현실을 여실히 보여준다. 4. 비용 절감 자본주의, 심화하는 기후위기 발전소를 포함, 다단계 하도급 구조는 수많은 현장에 뿌리 깊게 정착했다. 이는 그 자체로 불안정한 노동 형태를 양산해 왔을 뿐 아니라, 노동자들이 위험 작업을 거부하지 못하게 만드는 결과도 초래하고 있다. 일례로 성동조선, 현대중공업의 표준도급계약서(2021)에 따르면, 하청 노동자의 단체행동, 작업거부, 작업 태만으로 원청에 손해를 끼칠 경우 “즉시 계약 해지”를 할 수 있다. 또한 안전관리 등의 벌점 관리에도 중대재해나 산재 은폐로 인한 벌점뿐만 아니라 일반 안전사고(산재)와 작업 중지 건수에도 벌점을 매기고 있기도 하다. 징벌적이고 통제적인 안전이 원·하청 구조에서 강화될 뿐만 아니라, 작업중지권을 포함한 노동권 침해가 ‘계약’을 통해 관행적으로 이어지고 있다는 뜻이며, 이는 하청 노동자에게 작업중지권을 사용하면 위험이 해결될 거라는 기대 대신 불이익이 따라올 거라는 불신을 가져오는 핵심적인 기제다.[6] 케이블 통신 노동자 역시 그렇다. SK브로드밴드의 통신망을 유지, 보수하는 노동자들은 20여 개의 2차 하청업체로 쪼개져 고용되어 있고, 계약을 매년 갱신하고 있다. 이들을 대상으로 한 안전보건 실태 조사에 따르면,[7] 폭염경보가 발현되었음에도 작업을 한다는 응답이 70%에 달했다. 작업 중지를 하지 못한 이유로 절차가 복잡하거나 사측의 보복이 두려워서 행사할 수 없다는 응답이 80%로 압도적이었다. 이처럼 용역, 외주, 아웃소싱, 도급, 사내하청, 파견…. 온갖 불안정 노동 구조의 양산은 이윤만을 위한 자본의 전략이었다. 그 결과 불안정 노동과 사회적 불평등은 심화했다. 다른 한편, 이윤만을 바라보는 자본의 멈출 줄 모르는 과잉 생산은 그 자체로 지구를 파괴해 왔다. 한쪽에서는 경제적 가치가 없다며 대량으로 폐기되는 물품들이 쏟아지지만, 동시에 다른 지역에서는 식량과 물 부족에 시달리고 있다. 새벽배송이니 로켓배송이니 하며 24시간 돌아가는 생산과 소비, 유통 시스템이 구축되었다. 공장식 축산과 반도체 클러스터와 같은 지구 파괴적 산업의 집약화, 비트코인 채굴로 인한 자원 파괴도 일상적이다. 하지만 자본은 기후위기를 초래한 책임은 교묘하게 가린 채, 마치 기후위기의 해결사인 척 행동하고 있다. 정의선 현대차 회장은 친환경 전기차 생산을 통해 미래를 돌파하겠다는 계획을 밝히고 있다. HD 현대건설은 2024년 "기후변화 완화"를 재무적 중대이슈 1위 및 환경 · 사회적 중대이슈 2위로 꼽기도 했다. 이것이 기만이자 일종의 그린워싱임을 우리는 잘 안다. 이윤 창출에 도움이 될 때는 ‘녹색 자본주의’를 이야기할 수도 있겠으나, 자본의 초점은 “기후위기 해결”이 아닌 “이윤 창출”이기 때문이다. 이를 보여주는 사례는 매우 많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취임 첫날 파리 기후협약 재탈퇴를 비롯한 행정명령에 서명했다. 그는 취임 전부터 기후위기를 ‘사기’라고 주장하며 화석연료 생산을 확대하겠다는 공약을 내세웠고 이를 단행했다. 트럼프는 또한 자신의 패권 유지를 위해 스스로 초래한 전쟁 위기를 기후 규제 완화를 위해 활용하고 있다. 2026년 4월 6일, 미국 환경보호청(EPA)은 석유 및 천연가스 채굴 과정에서 발생하는 ‘천연가스 플레어링(Flaring, 가스 연소 배출)’ 규제를 대폭 완화하는 최종안을 발표했다. 강경한 대이란 노선이 호르무즈 해협 봉쇄 위기와 에너지 수급 불안을 심화시켰고, 이를 다시 "미국의 에너지 지배력 강화"라는 명분으로 환경 규제를 철폐하는 근거로 활용하는 것이다. 2025년 초 프리드리히 메르츠 독일 총리는 “조기 총선에서 승리하면 가스 화력발전소 50개를 짓겠다”라고 공언했다. 윤석열 전 대통령은 24년 11월 7일 기자회견에서 “24조 원 규모의 체코 원전 건설 사업 계약이 마무리되면, 원전 산업을 비롯한 우리 산업 전반에도 더 큰 활력이 불어넣어질 것”이라고 말했다. 이재명 현 대통령 역시 고리 2호기 원전 수명연장을 승인했고, ‘현실적’, ‘기술적 한계’ 등의 이유를 들며 온실가스 감축목표를 터무니없이 낮게 설정하고 있다. 가덕도신공항을 비롯한 파괴적 개발도 밀어붙이고 있다. HD 건설이 이스라엘에 수출한 굴착기 등 중장비는 "어떠한 굴착 환경이나 작업조건에서도 최고의 생산성을 약속하며" 10년이 넘는 시간 동안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터전을 파괴하는 데 사용되었다. HD현대를 비롯한 수많은 기업이 이스라엘의 학살을 뒷받침하는 동안 어마어마한 양의 온실가스가 배출되었고, 수많은 팔레스타인 사람이 살해당했으며, 지구생태계는 파괴되었다. 자본주의는 또한 현장 노동자 안전 체계 마련을 비용의 문제로 치부하며 비극을 가속했다. 여기서 멈추지 않고 기후위기와 관련한 책임과 비용을 노동자에게 전가하고 있다. 이윤 생산 체제인 자본주의에서 “무엇을, 얼마나, 어떻게 생산할 것인가.”는 모두 개별 자본이 결정한다. 그리고 이는 매우 기후부정의하다. 앞선 발전소 사례에서 단적으로 확인할 수 있듯, 자본은 비정규직 하청 구조를 활용해 에너지 전환의 책임과 비용을 노동자들에게 떠넘기고 있다. 언제든지 자를 수 있다는 점을 빌미 삼아, 노동자의 협상력과 힘을 봉쇄하려고도 하고 있다. 공동체의 안전보다 이윤 생산을 우선시하는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제기가 필요하다. 우리는 충분히 질문을 던질 수 있다. 석탄화력발전소 폐쇄 후 대체 건설될 발전소는 왜 반도체 클러스터에 투입되어야 하나? 석탄화력발전소의 폐쇄 시점, 노동자의 총고용 보장 및 에너지 전환에 대한 전망을 노동자 스스로 결정하고 집행할 수는 없나? 공백을 최소화하면서 효율적인 대중교통 노선을 우리가 직접 설계하고 운영할 순 없나? 무기 생산에 쓰일 기술력을 의료기기 생산으로 전환할 순 없나? 우리는 위법하고 부당한 생산을 거부하면 안 되나? 결국 자본의 과잉 생산에 제동을 걸고, 사회적 필요에 따른 생산을 조직할 수 있어야 한다. 생산이 주체가 된 노동자가 기후정의를 실현한다는 건 '언제', '어디서', '얼마나' 생산하느냐를 포함해 “왜”, “어떻게”까지 나아갈 수 있을 때 가능하다. 이는 자본 중심의 권력관계가 바뀌어야 한다는 점에서 정치의 문제기도 하며, 자본주의를 넘어서야 가능한 문제기도 하다. 5. 613 대행진을 원청교섭과 사회적 총파업 조직의 교두보로! 상황이 낙관적이지만은 않다. 정부는 정규직 노동자들이 반대한다는 핑계를 대면서 비정규직 정규직화, 위험의 외주화 철폐, 공공재생에너지로의 이행 등의 책임을 의도적으로 회피하고 있다. 불안정 노동의 구조, 위험을 노동자가 말하지 못하는 일터도 여전히 공고하다. 김충현을 비롯한 수많은 노동자의 죽음과 부상, 질병을 반복 목도하는 현실이 아프기도, 또 무력하게 다가오기도 한다. 그럴수록 확고해지는 점들도 있다. 자본과 정부로부터 독립된, 확고한 노동자 투쟁이 필요하다. 정부 논의나 협의체 결과 등을 바라보거나 따라가는 수준으로 우리 역할이 한정될 수 없다. 폐쇄 일정에 시차가 발생하고 분절적 대응 양상이 굳어질수록 힘을 모으기 어렵기에, 원하청 노동자들이 공동으로, 사업장 담벼락을 넘는 활동을 함께 만들어야 한다. 장기적으로 실제 파업을 만들어내고 사회적 힘을 갖게 만들어내야 한다. 어렵더라도 진짜 사장 국가와 발전 5사를 앉혀야 한다. 613 대행진을 비롯한 집회와 투쟁이, 이러한 투쟁을 건설해 가는 데 교두보로서 역할해야 한다. 이러한 기조 아래, 아래를 강조한다. △ 비정규직 철폐가 곧 기후정의다! 현장 안전장치의 미비·노동자 참여권의 박탈· 인력 부족과 강한 노동강도의 강요·반복되는 쪼개기 계약과 만성적 고용불안·위험 작업의 외주화(이주화) 등은 자본의 비용 절감 기조 아래 자행되고 있다. 고용구조의 더 아래로 내려갈수록 위험 작업을 거부하기는 어렵다. 과잉 생산에, 지구에 해로운 생산에 문제 제기하기도 어렵다. 관련된 정보조차 알 수 없는 경우도 허다하다. “노동자들이 현장 통제력을 확보하지 못한 채 자본의 계획에 종속되도록 만드는 이 비정규직 시스템이, 자본의 맹목적 과잉 생산을 막을 수 있는 가능성을 봉쇄”[8]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쪼개지고 불안정한 고용구조가, 기후위기 대응과 완화를 위한 노동자들의 집단적인 활동에 방해로 작동하는 사례 역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특수고용노동자라서 작업중지권 발휘가 어렵다.”, “일용직이라서 안전보다 고용을 신경 쓸 수밖에 없다,” “발전소 폐쇄 등 산업전환 과정에서 특히 하청 노동자들은 심각한 피해를 입는다” 등등. 자본이 노동자를 저비용(저임금) 고위험 노동으로 내몰고, 필요할 때 쓰다가 손쉽게 내버리기 위한 수단으로 활용했던 메커니즘, 과잉·파괴적 생산을 지속시켰던 이러한 구조가 기후위기를 초래한 근본 원인이다. 그렇기에 누구도 배제하지 않는 정의로운 전환은 비정규직 철폐이며, 비정규직 철폐가 곧 기후정의다. 이러한 요구를 내걸고 총노동 차원에서의 싸움을 조직하자. △ 원청교섭 투쟁 국면, 7월 총파업의 교두보로서 613 대행진을 조직하자 오랜 투쟁 끝에 노조법이 개정되었다. 원청교섭을 쟁취하여 진짜 사장을 교섭장에 앉혀야 한다는 투쟁 국면이 열렸다. 개정 노조법에 의하면 직접적인 계약관계가 없더라도 하청 노동자의 노동조건을 실질적‧구체적으로 지배‧결정하고 있다면 원청은 하청 노동자와의 단체교섭에 응해야 한다. 정리해고나 구조조정에 맞서는 파업, 임금체불에 항의하는 파업이 “정당한” 쟁의행위로 인정될 수 있다. 하지만 정부는 시행령 등을 통해 하청노조들의 원청 사용자성에 대한 적법성 입증과 판단부터 교섭 창구 단일화 및 분리 절차[9]등 전체 45일간 절차를 밟도록 강제함으로써 원청자본가들이 교섭을 지연, 회피, 거부할 수 있게 했다. 그 결과 많은 자본은 여전히 자신의 사용자성을 거부하고, 교섭에조차 나오지 않고 있다. 그러나 원청자본가들의 교섭 무력화 시도는 이곳저곳에서 무너지고 있다. 2026년 화물연대본부는 서광석 열사의 죽음을 안고, CU 원청을 교섭장에 끌어냈다. 현대IHL지회도 램프 사업 매각 투쟁을 통해 현대모비스 원청 대표를 합의 주체로 끌어냈다. 이들 사례가 보여준 건 명확하다. △개별사업장 투쟁으로만 머물지 않고 전국과 지역 노동자들의 연대와 공동 투쟁을 조직하면 가능하다는 것 △물류 봉쇄나 10일 넘는 파업을 통해 그들의 이윤이 압박받을 때 움직인다는 것이다. 한전KPS비정규직지회의 경우 한전KPS의 사용자성을 지방노동위원회로부터 인정받았다. 2024년 발전HPS지부는 진짜 사장 한국남부발전을 상대로 파업 투쟁을 전개했고, 소기의 성과를 거뒀다. 발전노동자들도 불가능하지 않다. 이러한 선례들을 조합원들에게 더욱 선전하고 토론해 나가자. 물론 다단계 하청 구조 속 나의 원청을 어디까지 설정할 것인가는 쟁점으로 남아있다. 발전소 폐쇄 국면이기에 더더욱, 발전 5사와 국가가 모든 노동자의 고용과 안전을 일차적으로 책임져야 한다. 수의계약 확보나 고용유지 등의 수세적 요구는 자본의 단계적, 분열적 폐쇄 전략 앞에서 쉽게 무너질 가능성이 크기에, 이를 더욱 강조해야 한다. 민주노총은 2026년 핵심 요구 중 하나를 “원청교섭 원년! 초기업 교섭 돌파”로 결정했다. 올해 정기대의원대회에서도 원청교섭 사업장의 공동 투쟁과 공동 파업을 통해 원청교섭과 7월 총파업의 사회적 파급력을 확대·확장하고, 산별 임단협 투쟁도 총파업 투쟁을 엄호, 지원하는 방향을 결의했다. 금속노조 역시 7 ~ 9월 (원청교섭 사업장 7월 총파업 복무, 8말 9초 총파업) 시기 집중 공동 파업을 원청노조와 공동으로 전개한다고 결의한 바 있다. 613 발전노동자 대행진을 7월 총파업 투쟁을 촉발하는 계기로 활용하자. 대행진을 계기로 만나는 노동자들에게, 7월 위력 있는 총파업을 통한 원청교섭 쟁취 투쟁의 주체가 되자고 조직하고, 설득해 나가자. 발전소 폐쇄 계획도, 발전사 통합 계획도 정의로운 에너지 전환과는 거리가 멀다. 정부의 시간표와 계획에 대응하는 정도를 넘어서자. 이러한 행진과 집회를 전국적으로 조직하여, 현장 노동자의 파업을 넘어 전 사회적인 투쟁으로 확장할 수 있는 기반으로 만들어 나가자. [1] 기후부(산자부)는 발전소 폐쇄에 따른 유휴 인력 수를 계산할 때, 단 한 명도 신규 채용하지 않은, 퇴직자 정원을 메꾸지 않았을 때를 가정한 수치를 제시하기도 했다. [2] “(2034년까지) 폐지되는 30기 인원 모두가 일자리 전환이 되지 않는다고 가정하면, 최대 7,935명의 일자리가 없어질 것으로 추정된다. (중략) 폐쇄되는 석탄발전소 30기 중 24기는 LNG 발전으로 전환되면 7,935명 중 LNG 발전소 필요한 인원은 3,024명에 불과. 일대일 전환을 가정했을 때, 전환 불가 인원은 4,911명” - 산자부 ‘정의로운 에너지 전환을 위한 폐지 석탄발전소 활용 방안 연구’ 용역 보고서, 2021 [3] 2018년 김용균 사망 이후 발전소 사망 현황 (14건 사고 사망, 폐쇄 비관 1명 자살) 1. 2019년 5월 중부발전 신서천화력발전소 37미터 높이 크레인에서 떨어진 부품에 일용노동자(50대)가 맞아 사망 2. 2020년 9월, 서부발전 태안화력발전소 1부두 화물노동자(60대)가 화물차에 적재된 컨베이어스크루장비(석탄하역기)가 떨어지면서 이에 깔려 사망 3. 2020년 11월 28일 남동발전 영흥화력발전소 화물노동자 심장선 씨가 3.5미터 화물차 상부에서 석탄회를 싣다 떨어져 사망 4. 2021년 7월 중부발전 신서천화력발전소 하청 노동자 이**(40대)가 전신 화상 치료 중 사망 (2020년 4월 발전소 공사 현장에서 전기설비 폭발 사고로 화상) 5. 2021년 8월 동서발전 당진화력발전소 3부두 선박, 이산화탄소 용기호스 고체적압을 하던 하청 소속 노동자 4명이 질식, 이중 1명(40대) 사망 ○ 2021년 8월 21일 새벽, 남부발전 부산LNG발전소에서 원청 갑질에 항의하며 투신, 자살 시도 6. 2021년 10월 15일 폐쇄를 앞둔 남동발전 삼천포발전소에서 일하던 하청 노동자(30대) 자살 7. 2022년 3월 폐쇄를 앞둔 남동발전 삼천포발전소에서 하청노동자(40대)가 3호기 보일러 건물 5층에서 추락사고 8. 2022년 7월 21일, 동서발전 당진화력발전소 내 신축공사현장, 40대 노동자 쓰러짐(폭염으로 당시 34도) 9. 2023년 2월 9일, 중부발전 보령발전소, 1부두 하역기에서 낙탄 청소를 하던 하청 노동자 이**(50대)가 15미터 높이에서 발판(그레이팅)이 떨어지며 함께 추락 10. 2023년 11일 중부발전 신서천화력발전소 본관 5층 보일러실 배관에서 밸브가 폭발해 고압 수증기 누출로, 정비작업 중이던 한전KPS 소속 노동자 1명 사망, 중부발전 소속 노동자 2명 중화상 11. 2025년 6월 2일, 서부발전 태안화력 2차 하청노동자 김충현 사망 12. 2025년 7월 28일, 동서발전 동해화력발전소 환경설비개선공사 비계 해체 작업 중 30대 노동자 추락 사망 13. 2025년 11월 6일, 동서발전 울산화력발전소 해체 작업 중 붕괴 사고로 9명의 노동자 매몰. 1명은 HJ중공업의 하도급업체 코리아카코 직원, 8명은 코리아카코의 일용직 14. 2026년 3월 17일, 한전KPS 인도사업소에서 석탄재 저장 호퍼 내부 점검 중 잿더미 매몰로 노동자 1명 사망 15. 2026년 3월 23일, 영덕 풍력발전소 날개 균열 수리 중 화재로 인해 하청업체 노동자 3명이 사망, 이중 2명은 일용직 [4] 산업통상자원부, 고용노동부, “석탄화력발전소 폐지가 고용에 미치는 영향” (2022) [5] 이러한 불안감이 만성화되면서 무뎌지는 분위기 역시 존재했다. [6]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금속노동조합. “금속노조 작업중지권 실태와 과제”(2024) [7] SK브로드밴드 전송망 유지보수 하청노동자 노동안전보건 실태 토론회. 2024.10.16 [8]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기후정의팀 3차 워크숍 토론문 중 [9] 교섭 창구 단일화 대상 확정→자율적 단일화 시도 14일→과반수 노동조합에 의한 단일화→자율적 공동교섭대표단 구성 5일→공동대표단 구성하지 못할 시 노동위원회의 결정→하청노조 사이의 교섭 단위 분리 /* 스크롤 여백만 주고, 화면에는 안 보이게 */ .ftn-target { display: inline-block; /* 줄바꿈 안 생김 */ width: 0; height: 0; scroll-margin-top: 200px; } document.addEventListener("DOMContentLoaded", function () { // name="_ftn1", name="_ftn2", name="_ftnref1" ... 전부 대상 document.querySelectorAll('a[name^="_ftn"]').forEach(function(a) { var idValue = a.getAttribute("name"); // 이미 같은 id의 요소가 있으면 또 만들지 않음 if (!document.getElementById(idValue)) { var span = document.createElement("span"); span.id = idValue; span.className = "ftn-target"; a.parentNode.insertBefore(span, a); } }); }); /* 본문 각주 번호 + 아래쪽 각주 번호 색 지정 */ a[href^="#_ftn"] sup, a[href^="#_ftnref"] sup { color: #BF202D; } /* 밑줄이 보기 싫으면 */ a[href^="#_ftn"], a[href^="#_ftnref"] { text-decoration: none; } /* 마우스 올렸을 때 살짝만 강조하고 싶으면 (선택) */ a[href^="#_ftn"]:hover, a[href^="#_ftnref"]:hover { text-decoration: underline; } /* 페이지 전체가 오른쪽으로 넘치지 않게 */ html, body { max-width: 100%; overflow-x: hidden; } /* 본문 영역 폭 강제 고정 + 긴 단어/문장도 줄바꿈 */ #bo_v_con, .bo_v_con, .cke_editable, article { max-width: 100%; overflow-wrap: break-word; word-wrap: break-word; /* 구형 브라우저용 */ } /* 워드에서 붙은 이미지/표가 화면 밖으로 안 나가게 */ #bo_v_con img, #bo_v_con table, .bo_v_con img, .bo_v_con table, .cke_editable img, .cke_editable table, article img, article table { max-width: 100% !important; height: auto; } /* 워드가 p, span에 폭을 박아놓은 경우 강제로 해제 */ #bo_v_con p[style*="width"], #bo_v_con span[style*="width"], .bo_v_con p[style*="width"], .bo_v_con span[style*="width"], .cke_editable p[style*="width"], .cke_editable span[style*="width"], article p[style*="width"], article span[style*="width"] { width: auto !important; max-width: 100% !important; } /* 기본 blockquote 스타일 */ blockquote { border-left: 4px solid #c0392b; /* 사이트 분위기와 맞는 붉은 계열 */ padding: 12px 18px; margin: 20px 0; background: #fafafa; font-style: normal; color: #333; line-height: 1.6; } /* blockquote 안의 p 태그 정렬 */ blockquote p { margin: 0 0 10px 0; text-align: justify; } /* 마지막 p 태그 여백 제거 */ blockquote p:last-child { margin-bottom: 0; }2026-05-22 | 조회 7,437 -
국민배당금 논쟁은 무엇을 드러내는가‘국민배당금’ 제안은 반도체산업 초과이윤이 누구의 것이며 이를 어떻게 통제할 것인가에 관한 논쟁을 촉발했다. 보수세력은 노동자 파업에는 국가 개입을 요구하면서도, 기업 이윤과 주주 권리는 성역으로 놓으며 색깔론 공세를 폈다. 그러나 국민배당금 제안은 다단계 하청구조, 만연한 노동재해, 기후·환경파괴, 반도체산업의 전쟁산업화 경향을 건드리지 않는다. 반도체산업의 막대한 호황 앞에, 우리는 국민국가 내 분배론을 넘어 생산수단 소유와 통제에 대한 문제제기로, 노동자계급의 국제연대로 나아가야 한다. 이른바 국민배당금 제안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한국 자본주의 역사상 유례없는 이윤을 축적하고 있다. 삼성전자는 2026년 1분기 영업이익 약 57조 원, SK하이닉스는 영업이익 37조 원을 기록했다. 이 막대한 이윤은 AI 인프라 구축과 연동된 수요 폭증의 결과다. 일부는 2026년 두 기업이 합산 600조 원에 달하는 영업이익을 올릴 것으로 본다. 이 거대한 이윤은 AI산업의 ‘병목’으로 부각되는 메모리 공급에서 우월한 지위를 점한 결과다. 초기 AI 인프라 투자는 그래픽처리장치(GPU)에 집중되었으나, 최근에는 AI 추론기능 부각에 따라 이를 처리할 메모리 반도체 수요가 폭증하고 있고, 이에 따라 병목, 즉 메모리 반도체 공급 부족과 가격 폭등이 나타나고 있다. 5월 11일, 김용범 청와대 정책실장은 ‘차원이 다른 나라: AI 시대 한국의 장기 전략’이라는 제목의 글을 SNS에 게재했다. 요지는 AI 인프라 시대의 과실은 특정 기업만의 결과가 아니라 반세기에 걸쳐 전 국민이 함께 쌓은 산업 기반의 결과이며, 그렇기에 그 과실 일부는 전 국민에게 환원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소위 ‘국민배당금’ 제안이다. 국민배당금의 토대는 지속적 초과이윤에서 나오는 초과세수인데, 김용범의 글은 반도체산업의 초과이윤이 지속적으로 창출된다는 전제를 담고 있다. 다음날인 5월 12일 코스피가 장중 5% 폭락했고, 보수언론은 이를 김용범 정책실장의 국민배당금 제안 때문이라고 보도했다. 국민의힘은 ‘공산당 본색’, ‘사회주의 급행열차’, ‘기업이익 배급제’ 등 색깔론 공세를 폈다. 청와대는 서둘러 진화에 나섰다. 5월 13일, 이재명이 직접 김용범의 국민배당금 제안은 개인의견이고, 배당 제안은 초과이윤이 아니라 초과세수에 대한 것이며, “기업의 초과이윤을 국민배당하는 방안”이라는 보도는 “음해성 가짜뉴스”라는 입장을 밝혔다. 보수언론과 국민의힘 모두 노사관계라는 ‘사적 문제’인 삼성전자 파업에 대해서는 긴급조정권을 통한 국가 개입을 요구하면서도, 이윤에 대한 국가 개입은 비난한다. 양자를 관통하는 믿음은 분명하다. 기업 이윤은 불가침이라는 것이다. 이윤을 위협하는 노동자의 파업권은 국가가 제한할 수 있지만, 기업 이윤과 주주 권리는 국가가 건드릴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런 믿음에 따르면 노동자의 요구는 국민경제를 위협하는 집단 이기주의이나, 기업이 얻은 이윤은 사적 소유라는 성역으로 남아야 한다. 그 이윤이 국가의 공공재정 투입, 세제 혜택과 인허가 혜택, 연구개발 지원, 전력망 구축, 용수·토지 제공 등으로 이루어졌다고 해도, 국가는 이윤에 대해 개입해서는 안된다. 보수세력의 발작적 반응은 그야말로 시대착오적이다. 자유주의 경제지 <이코노미스트>조차 AI가 만들어낼 지대(rent)와 초과이윤의 집중을 그대로 둘 수 없으며 정상적인 자본수익률을 초과하는 이윤에 대한 과세와 토지·자연자원에 대한 부담금으로 초과이윤을 환수할 수 있다고 제기한다. 나아가 AI 기업의 부분적 국유화, 모두에게 AI기업 주식을 나눠주는 방안까지 거론한다. 물론 이코노미스트의 제안에 담긴 문제의식은 체제 변혁이 아니라 자본주의 체제의 안정화에 있다. 그러나 자유주의 경제지조차 초과이윤의 환수를 논하는 상황은, 한국 보수세력의 낡은 반공주의와 자본의 소유권에 대한 물신숭배를 드러내기에는 충분하다. 국민배당금, 어떻게 볼 것인가 첫째, 국민배당금은 이런저런 기본소득론과 마찬가지로 산업의 소유와 통제에 대해, 생산과정에 대해 침묵한다.[1] 국민배당금은 삼성전자와 하이닉스 같은 대기업이 구축한 다단계 하청과 비정규직 양산, 반도체산업에 대한 국가적 자원 집중과 특혜, 기후·환경파괴적 생산은 하등 건드리지 않는다. 배당금은 반도체산업의 실태는 그대로 둔 채, 그 불평등을 수용하라고 요구한다. 더군다나 반도체산업의 초과이윤은 제국주의 패권경쟁과 군사AI 경쟁 속에서 전략물자로 격상된 반도체의 지위와도 결부되어 있다. 이렇듯 반도체산업의 초과이윤은 전쟁산업 확대의 결과이기도 하나, 국민배당금은 반도체산업의 군사화 문제를 조금도 건드리지 않는다. AI산업과 반도체산업을 둘러싼 제국주의 열강 사이의 경쟁이 전쟁 위험을 높이더라도, 그렇게 발생한 초과이윤을 배당하면 된다는 식이다. 둘째, 국민배당금은 한국 반도체산업의 막대한 초과이윤이 오로지 한국이라는 국민국가에 속한다고 규정한다. 그러나 반도체산업은 국민경제 안에서 완결되는 산업이 아니며, 전 세계에 걸친 노동분업과 공동노동의 결과다. 한국 반도체 대기업이 초과이윤을 취한다면, 그것은 ‘한국인’만의 몫이 아니다. 반도체산업의 초과이윤은 원료 광물을 채굴하는 저임금 위험 노동, 공급망 하단에 위치한 각국 노동자들의 저임금 장시간 노동 등, 세계 노동자 민중에 대한 착취와 자연자원 수탈의 결과다. 삼성전자와 하이닉스는 AI 인프라의 핵심을 장악한 초국적 자본이며, 한국은 더 이상 세계 자본주의의 주변부에 위치한 하청 생산기지가 아니다. 그러나 국민배당금은 세계적 착취와 수탈의 산물을 국민국가 내부 분배 문제로 축소한다. 필요한 것은 ‘한국 국민에게 얼마를 나눌 것인가’가 아니라, 한국은 물론 세계 노동자들이 함께 만든 부를 왜 특정 자본이 전용하는지에 대한 근본적 의문을 제기하는 것이다. 앞서 말했듯, <이코노미스트>조차 ‘부분적 국유화’를 거론하는 형국이다. 셋째, 국민배당금 구상은 반도체산업의 초과이윤이 지속적이라는 가정에 근거한다. 그러나 이 가정은 허술하다. AI 인프라 투자는 폭발적으로 늘고 있지만, 이 투자가 실제로 그만큼의 이윤을 지속적으로 창출할 수 있는지는 입증되지 않았다. AI 기술이 쓸모없다는 뜻이 아니라, 막대한 설비투자가 이윤의 실현을 훨씬 앞서 나가고 있다는 것이다. 지금 반도체산업 초과이윤은 빅테크 기업의 선점 경쟁에 따른 공급 병목의 결과이며, 그 배경에는 격화하는 제국주의 열강투쟁이 있다. 물론 이런 이윤은 당분간 지속될 수 있다. 그러나 공급이 확대되고, AI산업에서 나오는 이윤이 기대치에 미치지 못해 빅테크의 투자 조정이 시작되면, 반도체산업 초과이윤은 급격히 축소될 수 있다. 자본주의에서 이런 현상은 낯설지 않다. 19세기 철도산업, 20세기 초반 자동차산업, 1990년대 말에서 2000년대 초까지의 닷컴 열풍 등은 모두 광기어린 투자에 필연적으로 뒤따르는 연쇄적 파산과 거품 붕괴를 겪었다. 반도체산업 국유화와 노동자 통제를 제기한다 그럼에도 국민배당금 논쟁은 중요한 균열을 드러냈다. 반도체산업에서 나오는 이윤은 더 이상 ‘특정 기업의 뛰어난 경영 성과’만으로 포장될 수 없으며, 이윤에 대한 처분권은 총수와 주주에게 독점적으로 귀속되어서는 안 된다는 문제제기는 정당하다. 그러나 국민배당금은 이 정당한 문제의식을 협소한 분배론으로 가둔다. 그 결과 국내 반도체산업 속에서 발생하는 노동 재해와 다단계 하청구조를 통한 초과착취, 노동자계급 내 불평등 심화는 물론 세계적 노동분업 속에서 이루어지는 착취와 수탈, 환경파괴는 건드리지 않은 채, 이를 용인하는 대가로 소액의 금전을 건넨다. 필요한 것은 국민배당금이 아니라 반도체산업의 국유화와 노동자 민중의 통제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같은 ‘전략산업’은 사회 전체의 필요에 따라 운영되어야 한다. 국제연대 강화와 함께 AI·반도체산업의 전쟁산업화 중단, 반도체산업 다단계 하청구조 철폐, 하청노동자 직접고용, 노동시간 단축, 노동안전보건조치 강화, 전력과 물 사용에 대한 사회적 통제, 기후위기 대응을 추진해야 한다. 문제는 누가 생산수단을 소유하고, 누구의 필요를 위해 무엇을 얼마나 생산할 것인가다. 해답은 반도체산업의 국유화와 노동자계급의 산업통제, 그리고 노동자계급의 국제연대에 있다. [각주] [1] “분배를 가지고 야단법석을 떨고 거기에 중점을 두는 것은 도대체 잘못된 것이다. 소비수단의 그때그때의 분배는 생산조건 자체의 분배의 귀결일 뿐이다 … 물적 생산조건들이 노동자들 자신의 조합적 소유가 되면, 오늘날과는 다른 소비수단의 분배가 나타난다.” 맑스, 「고타 강령 초안비판」2026-05-22 | 조회 8,036 -
사회적 대화, ‘들어가서 할 말은 하자’는 논리가 남긴 것은 무엇인가예나 지금이나 사회적 대화가 필요하다는 근거는 비슷하다. ‘들어가서 할 말은 해야 한다.’ 그러나 1998년 이후 사회적 대화의 역사는 분명하다. 그간 노사정 대화는 정리해고제와 파견제 도입, 기간제 고용 일반화, 파견 확대, 직권중재 폐지와 맞바꾼 필수유지업무제도 도입과 대체근로 허용 등 무더기 노동개악으로 이어졌다. 1998년 같은 합의 형식을 취하건 2006년 같은 배제 형식을 취하건, 사회적 대화의 끝에는 노동개악이 있었다. 이재명 정부가 내세우는 ‘사회적 대화 2.0’ 역시 전혀 새롭지 않다. 노동운동을 대화라는 허울로 묶어두고 투쟁의 칼날을 무디게 만들며, 결국 자본이 요구하는 노동개악을 관철하려는 시도의 반복일 뿐이다. 사진: 뉴스1 사회적 대화, 노동개악의 통로 김영삼 정권 이후, 정부와 자본은 종종 ‘경제위기 극복’, ‘고통분담’, ‘사회적 대타협’이라는 이름으로 노동조합 지도부를 노사정 대화 테이블로 불러들였다. 그리고 이는 노동자의 요구를 관철하는 장이 아니라, 자본과 정부가 구조조정과 노동개악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노동운동의 동의를 확보하는 수단으로 작용했다. 1998년 IMF 외환위기 당시 노사정위원회가 대표적이다. 예나 지금이나 사회적 대화가 필요하다는 근거는 비슷하다. ‘들어가서 막아야 한다’, ‘할 말은 해야 한다’, ‘대화를 거부하면 노동운동이 고립된다’ 등등. 그러나 노사정위원회의 결과는 정리해고제와 근로자파견제 법제화였고, 이 합의는 오늘날 한국 자본주의의 기틀을 만든 분기점이었다. 결국 1999년 2월, 민주노총은 노사정위원회에서 탈퇴했다. 2005-2006년 민주노총의 사회적 교섭 추진도 마찬가지였다. 당시 이수호 집행부는 출범 때부터 사회적 교섭을 강조했다. 그러나 화물연대 파업 탄압, 철도노조 파업 3시간 만에 공권력 투입, 2005년 울산건설플랜트 파업 탄압, 아시아나항공·대한항공 조종사 파업 긴급조정권 발동 등 노무현 정부가 파업을 철저히 탄압하고, ‘비정규직 보호입법’이라는 이름으로 기간제법 제정과 파견법 개악을 추진하는 상황에서 노사정 대화는 비정규직 권리보장 입법을 관철하는 공간이 아니라 노동개악을 둘러싼 협의 틀로 작동했다. 2005년 1월과 2월, 이수호 집행부는 대의원대회에 ‘사회적 교섭방침’을 상정했지만 격렬한 반대로 통과시키지 못했다. 3월 15일 대의원대회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럼에도 3월 17일 중앙집행위원회는 대의원대회를 거치지 않은 채 노사정 교섭 추진을 결정했다. 노무현 정부는 2004년 11월 비정규직 관련 개악 법안을 국회에 제출한 뒤, 2005-2006년 내내 비정규직법과 노사관계로드맵을 노동개악 두 축으로 병행 추진했다. 비정규직법이 기간제·파견 노동을 확산하는 법안이었다면, 노사관계로드맵은 파업권과 노조 활동을 위축시키는 법안이었다. 민주노총과 비정규직 운동진영이 요구한 것은 상시업무 정규직화, 비정규직 사용사유 제한, 파견법 폐지, 불법파견 시 직접고용, 특수고용노동자 노동3권 보장이었다. 그러나 정부가 ‘비정규직 보호’라는 이름을 붙여 추진한 법안은 정반대 내용을 담고 있었다. 기간제노동을 일반화하고, 파견노동을 확대하는 것이 핵심이었다. 이 법안은 2006년 11월 30일 국회를 통과했고, 비정규직을 줄이기는커녕 기간제·파견 노동을 합법적 고용형태로 고착시키는 결과로 이어졌다. 2006년에는 노사관계로드맵을 둘러싼 사회적 대화가 이어졌다. 민주노총은 2006년 6월 노사정대표자회의에 복귀했지만, 정부가 내놓은 노사관계선진화방안, 즉 노사관계로드맵은 노동개악 종합 패키지였다. 2006년 9월, 정부는 민주노총의 뒤통수를 치며 민주노총을 배제하고 긴급 노사정대표자회의를 열어 로드맵에 합의했고, 이날 합의된 내용은 △기업단위 복수노조 허용 3년 유예 △노조전임자 임금지급 금지 3년 유예 △기존 필수공익사업장 직권중재를 폐지하되 필수유지업무제도 운용 및 쟁의기간 대체인력의 채용·하도급 허용 △필수공익사업장 확대(혈액공급, 항공, 폐·하수처리, 증기·온수공급업) △부당해고 벌칙조항 삭제 △정리해고 사전통보기간을 60일에서 50일로 단축 등이었다. 1998년과 2006년 모두 사회적 대화가 노동개악으로 이어졌으나, 같은 방식으로 진행된 것은 아니었다. 1998년 노사정위에서는 민주노총 지도부가 정리해고제와 근로자파견제 도입에 합의했으나 2006년 노사관계로드맵 합의는 민주노총이 노사정대표자회의에 복귀했음에도 정부가 민주노총을 배제한 채 한국노총·경총과 전격 합의한 사건이었다. ‘개악안에 합의하지 않겠다’, ‘할 말은 하겠다’는 방침으로 참여한다고 해도, 정부와 자본은 사회적 대화라는 틀로 노동운동을 묶어두고, 합의든 배제든 노동개악을 관철했을 뿐이다. 사진: 매일노동뉴스 청와대 노동절 기념식, 어떤 요구를 말해도 그 본질은 노사정 화해의 장이다 결국 1998년 이후 사회적 대화의 역사에서 반복적으로 드러난 결과는 분명하다. 그간 노사정 대화는 정리해고제와 파견제 도입, 기간제 고용 일반화, 파견 확대, 직권중재 폐지와 맞바꾼 필수유지업무제도 도입과 대체근로 허용 등 무더기 노동개악으로 이어졌다. 합의건 배제건 사회적 대화의 끝에는 노동개악이 있었다. 우리는 이런 경험 위에서 2026년 노동절을 관통하는 정세를 봐야 한다. 이재명 정부는 노동절을 계기로 ‘노동존중’ 외양을 강화하고, 민주노총을 사회적 대화의 틀로 끌어들이려 한다. 5월 1일 청와대 영빈관에서 열린 정부 노동절 기념식에 관한 언론 보도에는 대통령, 민주노총과 한국노총 위원장, 경총 회장이 나란히 선 장면이 담겼다. 일부 동지들은 정부 행사 참여가 옳은 일이었다고 한다. ‘노동조합은 투쟁만 하는 조직이 아니라 교섭도 해야 한다. 민주노총 위원장은 오전에는 대통령 앞에서 노동자의 요구를 말했고, 노동절 집회에서는 광화문에서 7월 총파업을 선언했다. 정부 행사에 가서는 축사뿐만 아니라 서광석 열사 사망, 특수고용·플랫폼노동자 노동권, 자본의 원청교섭 거부 실태를 고발하고 중대재해처벌법 무력화를 비판했다.’ 물론 양경수 민주노총 위원장은 실제로 그런 말들을 했다. 그러나 이런 반론 역시 새롭지 않다. 앞서 말했듯 예나 지금이나 사회적 대화를 정당화하는 논리는 비슷하다. 핵심은 사회적 대화의 결과는 모두 노동개악이었다는 점이다. 당연히 노동조합은 정부와 만날 수 있다. 그러나 핵심은 노동조합 대표자가 ‘요구를 말했느냐’가 아니다. 문제는 그 말이 어떤 자리에서 이루어졌는가, 어떤 정치적 맥락 속에 배치되었는가다. 정부가 노동자계급과 자본가계급, 적대하는 계급 대표자들을 모아놓고 노사화해주의를 설파하는 자리에 노동조합 대표자가 참여했다는 것이 문제의 본질이다. 그것도 불과 11일 전 열사가 목숨을 잃은 상황에서 말이다. 1998년 노사정위원회에 참여해야 한다는 주된 논리도 ‘들어가서 할 말은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결과는 무엇이었나? 정리해고와 파견제 도입이었다. 1998년 2월 7일자 조선일보 청와대 노동절 기념식은, 국가가 ‘노동절’을 자신의 정치적 성과로 포섭해 재구성하는 자리였다. 언론은 대통령과 경총 회장, 한국노총 위원장과 함께 민주노총 위원장이 나란히 선 장면을 담았다. 바로 이 장면이 정부가 의도한 정치적 효과였다. 정부는 노사정이 함께 박수치는 장면을 연출하며, 불과 11일 전 서광석 열사의 죽음에 대한 국가의 책임을 지우고 자본에 대한 분노를 희석했으며, 열사의 죽음이 만든 계급투쟁 격화 소지를 제어했다. 물론 앞서 말했듯, 민주노총 위원장은 그 자리에서 노동자의 요구 또한 말했다. 그러나 청와대 영빈관에서 대통령을 만나 ‘원청자본의 교섭해태 실태’, 심지어 ‘파견법·기간제법 폐기’를 말한다고 해도 본질은 달라지지 않는다. 정부가 노사정 대화를 강조하는 이유는 노동개악을 준비하고 있기 때문이다. 노동개악과 노동탄압은 사회적 대화와 함께 온다 윤석열 정부가 건설노조 탄압, 주 69시간제 추진, 노조법 2·3조 개정 거부권 행사 등으로 노동운동을 정면 공격했다면, 이재명 정부는 노동운동 상층을 대화의 장으로 불러들여 상생의 이름 아래 노동개악을 추진한다. 2026년 1월, 정부는 청와대와 고용노동부·재정경제부·중소벤처기업부 등이 참여하는 범부처 ‘노동구조개혁TF’를 출범하며 전체 노동자를 대상으로 한 노동개악에 나섰다. 언론에 따르면 노동구조개혁TF가 주도하는 노동개악 추진방향은 △기간제 비정규직 노동자 사용기한 3년 이상으로 연장 △직무·성과급제 확대 △전략산업 특별연장근로 확대 △지역 메가특구 노동시간 규제완화 등이다. 이어 3월 19일, 이재명은 정부 1기 경제사회노동위원회 출범식에서 “노동자들이 기업이 원하는 고용유연성을 수용할 수 있는 상황을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동시에 ‘노동자들의 일방적 희생을 요구하는 방식은 옳지 않다’고 덧붙였다. ‘해고가 죽음이 아닌 사회’, ‘전환의 시대에 맞는 노동시장’ 등 정부의 언사는 부드럽지만, 그 방향은 지난 정부와 하등 다르지 않다. 이재명 정부도 지난 정부와 마찬가지로 ‘유연안정성’이라는 이름 아래 해고와 전환배치, 직무·성과급을 확대하는 대가로 사회안전망을 일부 제공하겠다는 것이다. 본질은 더 쉬운 해고와 더 많은 비정규직이고, ‘사회안전망’은 이를 위한 부가조치일 뿐이다. 2026년 3월 19일 이재명 정부 1기 경사노위 출범식 이런 거시적 흐름은 주요 노동자 투쟁에 대한 태도들에서도 여실히 드러나고 있다. 노동부 장관과 집권여당 대표 등이 요란하게 장기투쟁 사업장들을 방문했을 뿐, 문제해결은커녕 장기투쟁을 낳은 악질자본가들에 대한 그 어떤 제재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심지어 노동조합 회계공시제도조차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 이렇듯 이재명 정권은 한편에서는 ‘노동운동 열심히 하라’는 덕담과 함께 노동자 민중운동 세력을 향해 ‘대화’를 제의하면서도, 다른 한편에서는 자본에 맞서는 전투적 투쟁을 탄압한다. 어디 화물연대 투쟁뿐인가. 2026년 2월, 세종호텔 로비농성을 이재명 정부가 지휘하는 공권력이 침탈했고, 4월에는 지혜복 교사의 고공농성에 연대했다는 죄목으로 고진수 동지가 구속당했다. 유예되고 또 유예된 택시월급제 즉각 시행을 요구하며 공공운수노조 택시지부 고영기 동지가 고공에 오른 상황에서조차, 민주당은 택시자본가들을 위해 월급제 유예법안을 통과시켰고 이재명은 거부권을 행사하라는 요구까지 짓밟으며 택시노동자들을 외면했다. 이렇듯 이재명 정부의 허울뿐인 ‘노동 존중’을 떠받치는 것이 사회적 합의주의다. 일터기본법의 실체도 마찬가지다. 정부와 여당은 이 법을 노동법 밖에 놓인 특수고용·플랫폼·프리랜서 등을 보호하는 법이라고 설명한다. 그러나 불안정노동자에게 필요한 것은 ‘일하는 사람’이라는 모호한 범주가 아니라 노동자성 인정이고, 근로기준법과 노조법의 전면 적용이다. ‘그래도 이전보다 나아지지 않느냐’고 반박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일터기본법은 노동권의 보편화가 아니라 차등화다. 이재명 정부 계획에 따르면, 한쪽에는 근로기준법과 노조법을 적용받는 ‘진짜 노동자’가 있고, 다른 한쪽에는 일터기본법을 적용받는 ‘일하는 사람’이라는 이름의 2등 노동자들이 양산된다. 결국 정규직-비정규직-일하는 사람 사이의 위계, 노동자계급 내 위계를 더 촘촘히 제도화할 뿐이다. 사회적 대화 2.0은 조금도 새롭지 않다 사회적 합의주의는 노사정이 대등한 대화를 할 수 있다는 환상을 유포하며 투쟁 대상을 흐린다. 노동자들이 원청자본을 향한 분노와 함께 ‘진짜 사장 나오라’라고 외칠 때, 사회적 대화는 ‘노사정이 함께 허심탄회하게 이야기하며 해결하자’고 말한다. 그러나 지금 필요한 것은 원청교섭을 요구하는 노동자를 죽음으로 몬 자본에 맞선 투쟁이다. 대통령이 직접 ‘모범 사용자가 되겠다’고 말한 공공부문 원청조차 비정규직 노동자와의 교섭을 거부하고 있음을 드러내며 투쟁을 확대하는 것이다. 누가 비정규직을 양산했는가? 누가 그 노동자의 임금과 노동조건을 지배하면서도 사용자가 아니라며 교섭을 거부하다 죽음으로 몰았는가? 누가 노동자를 자영업자로 위장해 권리를 박탈했는가? 국가와 자본이다. 물론 노동자는 국가·자본과 대면할 수 있다. 그 대면은 계급투쟁을 배경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노사정은 애초 대등한 힘을 가진 주체가 아니다. 경사노위 내 노동자 대표가 그 어떤 논리와 당위로 국가와 자본을 설득해도, 결국 문제를 결정하는 것은 힘이다. 기억하자. 1998년 당시 노사정 합의에는 △실업대책기금 조성 △해고회피 노력 △해고자 우선채용 같은 완충 조항도 포함됐지만, 정세를 규정한 것은 자본이 요구한 정리해고제와 파견제 도입이었다. 2006년 노사관계로드맵도 마찬가지였다. ‘직권중재제도 폐지’를 명분으로 내세웠지만, 그 실상은 ‘필수유지업무제도’를 통한 파업 무력화였다. 노동자 대표가 회의장 안에서 아무리 효과적인 논리를 역설한다고 해도, 그것은 그저 말이다. 그 말에 힘을 부여하는 것은 결국 계급투쟁이다. 민주노총은 2026년을 원청교섭 원년으로 만들겠다고 했다. 이는 곧 한국 자본이 수십 년간 공들여 구축한 다단계 하도급체계를 계급투쟁으로 뚫어내겠다는 뜻이다. 사회적 합의주의와 단절하지 않고 원청교섭 쟁취, 특수고용·플랫폼노동자 노동자성 인정, 모든 노동자의 노동기본권 확대는 불가하다. 이재명 정부가 내세우는 ‘사회적 대화 2.0’은 조금도 새롭지 않다. 남은 과제는 분명하다. 거듭 파국을 낳아온 사회적 대화를 중단하고 △원청교섭 쟁취 △팔레스타인 학살과 제국주의 전쟁 반대 △차별금지법 쟁취 △물가임금연동제와 실질임금 보장 △청년일자리 창출 등 절박한 요구를 걸고 7월 총파업을 조직하는 것이다.2026-05-19 | 조회 9,617 -
[원청교섭 쟁취! 이재명 정부에 맞선 7월 총파업 조직하자! - Ⅱ] 근로기준법·노조법이 '기본법'이다! - 일터기본법 제정에 반대한다‘일터기본법’은 권리의 보장이 아니라 권리의 그림자다. 사각지대 해소가 아니라 사각지대의 법제화다. 노동법을 확장하는 기본법이 아니라 노동자를 차별하는 기본법이다. 자본의 책임 회피에 국가가 합법의 도장을 찍어 주는 흐름에 맞서, 우리는 일터기본법 제정에 단호히 반대한다. 사진: 참여와 혁신 1. “새로운 노동”이라는 거짓말 「일하는 사람의 권리에 관한 기본법안」(이하 ‘일터기본법’)을 밀어붙이는 이재명 정부와 민주당은 이렇게 읊는다. “세상이 변했다. 플랫폼이 등장했고 ‘긱 이코노미’가 확산됐다. 프리랜서가 늘었다. 기존 노동법으로는 이 새로운 노동 형태를 포괄하기 어렵다. 그래서 새로운 법이 필요하다.” 그럴듯하지만, 자본의 책임을 가리려고 정성스럽게 만든 알리바이다. 특수고용노동자는 하늘에서 떨어진 ‘새로운 존재’가 아니다. 근로계약 관계로 일하던 노동자를 자본이 ‘외부화’해 만들어 낸 가짜 개인사업자다. 자본은 종속 관계라는 실질을 그대로 둔 채 형식만 바꿔치기했고, 노동법은 그 술수에 끌려다니며 노동자를 근로기준법 바깥에 내다 버렸다. 플랫폼노동자 역시 마찬가지다. 기존 노동법의 허술한 틈을 비집고 들어가, 처음부터 노동자성을 지워 버리는 방식으로 조직된 노동일 뿐이다. 기술은 그 은폐를 한층 매끄럽게 다듬어 주었을 따름이다. 본질은 똑같다. 노동자를 ‘사업자’로 위장시키는 낡은 수법이다. 프리랜서노동은 또 어떤가. 더 이상 “자유로운 일”이라는 환상으로 포장되지 않는다. 이들도 노동조합을 만들고 노동권을 외친다. 어째서인가? 그 영역이 산업화되고, 자본의 맨얼굴이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종속성이 더는 감출 수 없을 만큼 선명해졌기 때문이다. 결론은 분명하다. “새로운 노동 형태”라는 말 뒤에 숨은 실체는, 노동자성을 박탈하려는 자본의 집요한 시도가 빚어낸 ‘불안정 노동의 전면화’다. 노동자가 노동자인지 아닌지가 모호해서가 아니라, 자본이 노동자를 노동자가 아닌 것처럼 둔갑시키려 획책한 결과다. 이 구조를 그대로 둔 채 “새로운 법”을 만들어 “별도로 보호하겠다”고 하는 것은 자본의 공작을 국가가 승인하는 행위다. 2. 노동법 적용을 회피하는 네 가지 핑계 노동법으로 이들을 포괄할 수 없다는 주장은 네 가지 핑계 위에 위태롭게 서 있다. “사용자를 특정하기 어렵다.” 누가 이들의 노동으로 배를 불리는가? 특수고용·프리랜서노동자에게는 그들과 직접 계약을 맺은 기업이 사용자다. 플랫폼 노동자에게는 플랫폼 기업과 그 플랫폼을 이용하는 사용업체가 사용자다. 이윤이 흐르는 길을 따라가면 사용자는 반드시 드러난다. ‘사용자가 보이지 않는’ 것이 아니라, ‘사용자로 보지 않으려는’ 의지가 있을 뿐이다. 심지어 일터기본법조차 ‘사업자’라는 이름으로 상대방을 지목하고 있지 않은가. 이름 한 번 바꿔 부른다고 책임이 증발하지는 않는다. “노동시간을 획정할 수 없다.” 그렇다면 기준을 만드는 일이야말로 정부와 입법기관의 책무다. 획정이 어렵다면 노동의 양태에 맞는 규율 방식을 법에 담으면 될 일이다. ‘기준 설정이 어려우니 노동법 밖으로 나가라’는 말은 국가의 직무유기이자 노동자에 대한 배신이다. “지휘·감독 관계가 불분명하다.” 낡아빠진 인식이다. 오늘, 자본은 단지 작업반장이 옆에서 지시하는 방식으로만 노동자를 통제하는 것이 아니다. 자본은 이미 오래전 공장형 직접 통제는 물론 노동과정 전반에 대한 유연한 통제를 도입했다. 건당 임금체계는 노동자가 스스로 채찍질하도록 강제하고, 알고리즘은 ‘자유롭게’ 일하는 노동자를 24시간 감시하고 평가한다. 낡은 지휘·감독 개념으로 세상을 들여다보는 것은 자본의 진화를 따라잡지 못하는 무능이거나, 따라잡지 않으려는 회피다. “프리랜서들은 자유롭게 일하고 싶어서 스스로 선택한 것이다.” 가장 악질적인 거짓말이다. 지금의 특수고용·플랫폼·프리랜서노동은 정규직 고용과 나란히 놓인 대등한 선택지였던 적이 없다. 해당 직종 자체가 불안정 노동으로 통째로 메워져 있어, 그 직업을 갖는 순간 권리 없는 노동을 강제로 떠안게 되는 구조다. “자유”의 이면에 “권리 없음”이라는 형벌을 묶어 노동자에게 들이미는 이 이데올로기를 우리는 단호히 거부한다. 결국 특수고용·플랫폼·프리랜서노동자들의 노동법 적용을 가로막는 것은 노동의 형태가 아니라, 노동법 밖으로 이 노동자들을 내몰며 책임 회피를 제도화하는 국가와 자본의 의지와 기획이다. 3. 권리 차별의 제도화 - 근로기준법 바깥에 쌓는 장벽 일터기본법은 근로기준법상 ‘근로자’와 그 외의 노동자를 노골적으로 ‘갈라놓는다’. 근로기준법을 적용받는 노동자에게는 근로기준법·최저임금법·남녀고용평등법·퇴직급여보장법이라는 보호가, ‘일하는 사람’에게는 종이우산 같은 선언적 보호가 차등 분배된다. 법을 통해 노동시장을 ‘근로자’와 ‘노무제공자’라는 두 계층으로 갈라놓는 차별의 고착화다. 머지않아 이 법은 근로기준법으로 진입하려는 노동자들 앞에 가로놓인 벽이 될 것이다. 법원과 행정기관은 ‘기본법이 적용되는 일하는 사람’과 ‘근로기준법이 적용되는 근로자’를 갈라놓는 해석 기준을 신나게 쌓아 갈 것이고, 지금이라면 근로자로 인정받았을 노동자들이 ‘기본법 적용 대상’이라는 옆길로 밀려날 것이다. 판관들은 ‘어차피 일하는 사람 기본법이 있지 않느냐’는 구실로 노동자성을 부정할 것이다. 분기의 조짐은 이미 곳곳에서 확인된다. 골프장 경기보조원이 겪는 괴롭힘에 대해 근로기준법상 괴롭힘 규정 적용은 부정하면서, 산업안전보건법상 ‘노무제공자’로 분리해 보호한 사례가 있다. 택배기사에 대해 근로기준법상 근로자임은 부정하면서, 산재보험법상 ‘특수고용 특례’로 산재보상만 시혜처럼 인정한 사례가 있다. 노동자성의 본체는 끝까지 인정하지 않으면서 곁가지 권리만 부분 배급하는 이 흐름이, 일터기본법을 통해 전국적·전면적으로 확장될 것이다. 이 법은 기본법의 원칙과도 정면으로 충돌한다. 본래 기본법이란 개별법의 확장과 발전을 견인하는 등대다. 그러나 이 법은 거꾸로 개별법의 확장을 가로막는 방파제다. 일터기본법 제3조 제2항이 “다른 법률에서 규정하고 있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이 법을 적용한다”고 정한 것은, 개별법 우선·기본법 보충이라는 전도된 구조다. 범위 설정도 기만적이다. “모든 일하는 사람”을 말하면서도 정작 본문에서는 “다른 사람의 사업을 위하여 자신이 직접 일하고 보수를 받는 사람”(노무제공자)으로 대상을 좁힌다. 경제적 종속성을 핵심 개념으로 삼는 노조법상 근로자보다도 협소한 범위이며, ILO 결사의 자유 협약이 보장하는 자영노동자와 자유직업인을 아우르는 ‘노동자(Worker)’ 개념과는 한참 동떨어져 있다. 헌법상 노동기본권을 내걸고 실상은 대상을 배제하는 명백한 입법적 기만이다. 사진: 민주노총 4. 실효성 없는 선언 일터기본법이 외치는 권리 보장은 껍데기뿐이다. 직장 내 괴롭힘 금지를 규정하지만 사업주는 “예방 조치를 취하도록 노력하여야 한다”는 가벼운 권고만 받는다. 근로기준법이 괴롭힘 발생 시 사업주에게 조사·징계·피해자 보호 의무를 강제하고 위반 시 형사처벌까지 부과하는 것과는 비교 자체가 무색할 정도다. 보수지급, 계약변경·해지 제한, 불이익취급 금지 등 모든 권리조항에 벌칙도, 과태료도, 강제도 없다. 분쟁 해결은 ‘조정’이라는 가장 느슨한 방식에 의지하는데, 사용자가 조정을 거부하면 절차는 그대로 종결된다. 강제이행 수단 없는 권리선언은 법이 아니라 정부와 국회의 기만이며, 노동자에게는 차라리 모욕이다. 이에 대해 정부와 국회는 “기본법이기 때문에 처벌조항이나 강제조항을 넣기 어렵다”고 둘러댄다. 그렇다면 묻자. 기본법과 함께 개별법 개정안을 묶어 패키지로 내놓으면 될 일 아닌가? 돌아오는 답은 한결같다. “나중에.” 5. "선언이라도 하면 낫다"? - 2020년 산안법의 교훈 “일단 선언이라도 해 두면 개별법도 따라서 개정되겠지.” 안이한 낙관은 아무것도 보장할 수 없음을 우리는 이미 똑똑히 목격했다. 2020년 산업안전보건법 전부개정 당시, 제1조 ‘목적’ 조항은 ‘근로자의 안전 및 보건’을 ‘노무를 제공하는 사람의 안전 및 보건’으로 바꿔 달았다. 특수고용·플랫폼노동자까지 빠짐없이 보호하겠다는 거창한 선언이었다. 언론은 ‘일하는 모든 사람의 안전이 지켜진다’고 일제히 박수를 쳤다. 6년 동안 무엇이 달라졌는가? 특수고용·플랫폼노동자에게 실제로 적용되는 조항은 단 4개다. 제5조, 제6조, 제77조, 제78조. 모두 선언적이고 추상적이다. 취객을 응대하고 고객의 욕설을 온몸으로 받아 내지만 감정노동자 건강장해 예방조치(제41조)는 그들에게 닿지 않는다. 위험한 작업 앞에서 멈춰 설 권리, 작업중지권(제52조)도 그들에게는 허락되지 않는다. ‘전속성 기준’에 따르면 앱을 두 개 사용하는 순간 산안법의 어떤 조항도 적용되지 않는 무권리 상태로 추락한다. 법의 ‘목적’을 바꿔 보호 범위를 ‘선언’했지만, 지난 6년 동안 플랫폼·특수고용노동자의 안전과 생명을 지키기 위한 실질적 제도 개선은 단 한 글자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 사이 죽고 다친 노동자의 이름만 차곡차곡 쌓여 갔다. 선언은 노동자의 무덤 위에 세워진 비석에 불과했다. 아픈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위로’가 아니라 ‘치료’다. 빈껍데기 입법을 성과로 포장하고, 그 가짜 성과를 명분 삼아 진짜 개혁을 무한정 미루는 패턴이 다시 반복되려 한다. 우리는 이 잔인한 동어반복을 더는 용인하지 않을 것이다. 6. 반복되는 역사 - 제2의 비정규직법 파견법은 중간착취 금지와 직접고용 원칙에 구멍을 뚫고 간접고용을 합법화하는 통로가 되었다. 도입 당시 ‘한정적·예외적’ 활용을 약속했으나, 결과는 제조업 사내하청과 간접고용의 일상화, 원청 책임의 증발이었다. 기간제법은 또 어떤가. 노동자들은 근로기준법 안에 ‘기간의 정함이 없는 상시고용’을 원칙화하고 비정규직은 예외적으로만 허용되도록 규율할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정부와 국회는 근로기준법은 건드리지 않은 채 별도의 ‘기간제법’을 만들었다. “2년이 지나면 무기계약 전환”과 “차별시정제도”를 선전했다. 결과는? 2년이 차기 직전에 계약을 끊고 새로 뽑는 초단기계약의 전면화, 직접고용을 회피하기 위한 간접고용의 폭발적 확산, 해소되기는커녕 고착된 임금 차별이었다. 두 법의 공통점은 명백하다. 근로기준법의 원칙은 손도 대지 않은 채 그 바깥에 따로 법을 만들어, 자본의 책임 완화 통로를 제도화한 것이다. 지금의 일터기본법은 그 길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 ‘일하는 사람’이라는 새 범주를 마련해 한 단계 낮은 권리를 배급하려 한다. 근로기준법 바깥으로 밀려난 노동자는 또 한 번 시험대에 오를 것이다. “당신은 일하는 사람 기본법의 대상인가, 아니면 그냥 자영업자인가.” 노동자, 일하는 사람, 순수 자영업자로 이어지는 단계적 탈락의 경로가 만들어진다. 일터기본법은 이 ‘강등의 기제’가 되어 자본의 책임을 완화한다. 사진: 오마이뉴스 7. ‘추정 조항’이라는 허울 함께 발의되는 근로기준법 개정안에는 다음 조항이 포함되어 있다. “다른 사람의 사업을 위하여 자신이 직접 노무를 제공하는 사람은 이 법과 관련한 분쟁해결에서 근로자로 추정한다.” 정부는 이를 두고 노동자성 판단의 일대 진보라며 자화자찬한다. 그러나 이 조문은 근로기준법 제104조(감독 기관에 대한 신고) 바로 다음에 온다. 근로자 정의(제2조)는 손대지 않고, 분쟁이 발생한 뒤에야 입증책임을 사용자에게 맡기는 장치다. 게다가 정부는 이 추정 제도의 적용 범위를 “민사소송”으로 한정한다. 노동 사건의 절대다수가 노동청·노동위 단계에서 종결되는 현실에서 이 추정은 사실상 실효성이 없다. 임금체불 한 건 이기려고 변호사를 선임해 민사소송까지 밀고 갈 수 있는 노동자가 도대체 몇 명이나 되겠는가. 임금을 다툴 때만 임금에 관하여, 노동시간을 다툴 때만 노동시간에 관하여, 해고를 다툴 때만 해고에 관하여 근로자로 ‘추정’되는 것이 도대체 무슨 노동권 보장인가? 권리는 분쟁 앞에서 마지못해 인정받는 것이 아니라 평상시에, 일터에서, 매일 작동해야 한다. 8. 근로기준법과 노조법이 기본법이다 노동관계의 기본법은 이미 우리에게 있다. 근로기준법과 노조법이 그것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새 이름표를 단 또 하나의 법이 아니라, 이 두 기본법을 현대화해 모든 일하는 사람을 정면으로 끌어안도록 만드는 일이다. 일터기본법 제정을 당장 중단하라. 이 법은 노동법의 확장이 아니라 노동법의 후퇴이며, 노동자에 대한 배반이다. 근로기준법 제2조가 규정하는 노동자 개념을 확장하고, 제대로 된 노동자 추정 조항을 정의 자체에 새겨 넣어야 한다. 분쟁 단계에서 뒤늦게 작동하는 절차적 추정이 아니라, 일터에서 매일 작동하는 실체적 추정이어야 한다. 자본의 비노동자화 시도를 적극적으로 규율해야 한다. 이미 시행 중인 미국 캘리포니아의 ABC 테스트처럼, 고용관계를 추정하는 명확하고 강력한 법적 지표를 법령에 담아야 한다. 이 기준의 경우 기업이 노동자를 ‘독립 계약자’로 분류하려면, △업무 수행에서 기업의 통제와 지시로부터 자유롭고(A) △기업의 통상적인 사업 범위 밖의 일을 수행하며(B) △독립적으로 해당 직업 또는 사업을 영위한다는 점(C)을 기업이 모두 입증해야 한다. 변덕스러운 개별 판결에 노동자의 운명을 맡길 수는 없다. 자본이 계약 형식을 왜곡하여 노동자성을 박탈하려 한다면 법이 단호히 막아야 한다. 근로기준법 자체의 보완도 미룰 수 없다. 초단시간 노동, 초단기 계약, 5인 미만 사업장에 대한 차별 구조, 다양한 고용형태에서 벌어지는 권리의 구멍 등에 대처할 수 있도록, 근기법을 더 촘촘하고 더 단단한 법, 모든 일하는 사람을 한 사람도 빠짐없이 끌어안는 법으로 다시 써야 한다. 이는 ‘임금노동관계’라는 낡은 틀에 갇혀 있는 노동권 개념 자체를 새롭게 벼리는 작업이기도 하다. 자유롭게 일한다는 것이 권리를 반납한다는 뜻이 되지 않도록, 노동권의 외연 자체가 확장되어야 한다. 노조법 또한 마찬가지다. 노조법상 근로자 개념을 ILO 결사의 자유 협약의 ‘노동자(Worker)’ 수준으로 활짝 열어, 모든 일하는 사람이 단결하고 교섭하고 행동할 권리를 누리도록 해야 한다. 사용자 개념 또한 실질적 지배력을 휘두르는 자본을 빠짐없이 포착하도록 다시 정의되어야 한다. 노동권의 진짜 보장은 제도적 시혜에서 오지 않는다. 단결과 투쟁의 권리를 누가 어디까지 행사할 수 있는가에서 온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새로운 법이 아니다. 노동자의 이름을 ‘일하는 사람’으로 바꾸어 변두리로 밀어내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일하는 사람을 ‘노동자’로 호명해야 한다. 노동자 정의를 그대로 좁게 유지하며 그 노동자가 아닌 이에게 권리의 부스러기를 적선하는 것이 아니라, 일하는 모든 이에게 노동자라는 이름과 그 이름에 따라붙는 온전한 권리를 되돌려 주어야 한다. 사진: 노동과 세계2026-05-13 | 조회 12,87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