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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여성파업 2] 스페인 - 2018년과 2019년, 여성파업이 스페인을 뒤흔들었다[편집자 주] 지난 12월 6일 열린 “여성파업 첫발떼기 토론회”를 비롯해, 2024년 3월 8일 여성파업을 조직하기 위한 활동이 여성파업 조직위원회 주도 아래 진행되고 있다. 사회주의를향한전진은 노동자계급의 여성해방 운동을 건설하기 위한 여성파업 시도에 전폭적인 지지를 보내며, 이 운동의 현황과 과제, 전망을 짚어 보기 위해 세계 여러 나라의 여성파업 사례를 돌아보고자 한다. 1975년 아이슬란드 여성파업에서 시작해 지난 십수 년 사이에 폴란드, 스페인, 아일랜드, 스위스, 아르헨티나 등 곳곳에서 여성파업이 일어났다. 각각의 사례는 그 자체로 세계 여성 노동자의 현실과 투쟁에 대한 우리의 시각을 넓혀 주기에 충분하다. 또한 여성파업의 양상과 결과, 다양한 쟁점을 훑어보면 우리의 과제에 대한 인식도 더 풍부하게 채워 갈 수 있을 것이다. 거리를 가득 메운 2018년 여성파업 참가자들(사진_Lluis Gene) 누군가 주먹을 치켜들고 소리 높여 외친다. “우리가 멈추면 세상이 멈춘다!” 이 함성을 들은 사람들은 어떤 생각을 떠올릴까? “허무맹랑한 소리!”, “농담이 심하군, 당신들이 그런다고 세상이 어떻게 될 것 같아?” 그러나 여기, 그 농담 같은 얘기를 현실로 일궈 낸 사람들이 있다. 그들을 만나기 위해 우리는 2018년 3월 8일 스페인으로 간다. 스페인을 뒤흔든 2018년 3월 8일 여성파업 우리가 멈추면 세상이 멈춘다! 2018년 3월 8일 스페인 여성파업은 이 구호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명실상부하게 증명했다. 전국 120여 개 도시에서 무려 530만 명이 파업에 참여했다. 다수 노동조합이 2시간 파업으로 여성파업에 동참했고, 조직 규모는 작지만 더 활력 있는 일부 노동조합은 24시간 파업을 벌였다. 이 파업으로 300여 편의 열차 운행이 취소됐다. 바르셀로나에서는 이날 출퇴근 피크타임에 교통 부문 전체 운행의 절반가량이 중단됐다. 교육 현장에서도 파업 참여가 두드러졌다. 카탈루냐에서는 사실상 모든 고등학교와 대학교 노동자들이 2시간 파업을 벌였고, 중학교 교사들의 20%가 24시간 파업을 했다. 발렌시아에서는 모든 교사 노동조합의 50%가 파업에 참여했다. 학생들도 동맹휴업에 나섰다. 안달루시아 대학생의 90%, 수도인 마드리드에서는 고등학교 여학생의 90%, 대학교 여학생의 65%가 파업에 동조하며 시위에 합류했다(이 글에서 소개한 스페인 여성파업 참가 규모와 양상은 주로 이 기사를 참조했다). 의료 부문의 경우, 카탈루냐와 발렌시아에서는 80%, 안달루시아에서는 대략 70%의 병원 노동자들이 여성파업에 함께했다. 언론사 노동자, 공장 노동자, 마트 노동자, 청소 노동자, 콜센터 노동자들도 거리로 나왔다. 여성파업 참가자들은 얌전하게 행사를 치르고 귀가하는 식으로 이날을 보내지 않았다. 평화적이고 쾌활하며 힘이 넘치는 분위기 속에서도, 카탈루냐에서는 주요 고속도로를 중심으로 도로봉쇄 시위가 벌어졌다. 전국 곳곳에서 벌어진 시위는 거리와 광장을 점거하는 방식으로 자연스럽게 연결됐다. 철도를 막아선 노동자들(사진_Left Voice) 곳곳에서 도로도 봉쇄됐다.(사진_X_Endavant València) 정부와 자본가들의 여성혐오, 노조혐오 공세가 판을 치는 지금 이곳 한국의 분위기와는 달리, 스페인 일간지 《엘파이스(El Pais)》의 여론 조사에 따르면 응답자의 82%가 여성 차별을 깨부수기 위한 여성파업이 정당하다고 답변했다. 2018년 3월 8일 스페인 여성파업은 성별 임금 격차, 직장 내 성차별, 가정과 거리에서 일어나는 성폭력을 규탄했다. 여성파업을 조직하는 데 앞장선 3.8위원회가 발표한 여성파업 선언문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담겼다. “우리의 목표는 고전적인 노동자 파업을 조직하는 게 아니라 그걸 넘어서는 것이다. 우리는 여성이 수행하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다양한 모든 업무와 활동을 다양한 모든 장소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중단하려 한다. (중략) 오늘 우리는 성차별적 억압, 착취, 폭력이 없는 사회를 요구한다. (중략) 우리에게 순종적이고 고분고분하며 침묵할 것을 요구하는 가부장제와 자본주의의 동맹에 맞서 반란을 일으키고 투쟁하자고 호소한다. 우리는 열악한 노동조건에 순응하지 않을 것이고, 남성과 똑같이 일하고 더 적게 받지도 않을 것이다.” 이렇게 530만 명이 일궈 낸 압도적인 여성파업 행진은 2018년으로 끝나지 않았다. 2019년, 더 넓게 퍼진 물결 1년 뒤인 2019년 3월 8일에도 여성파업이 대규모로 조직됐다. 전국 수많은 도시에 걸쳐 조직된 시위가 1,400여 건에 이르렀다. 여성단체, 노동조합, 좌파 정당 등을 널리 아우르며, 2시간 파업에서 24시간 파업에 이르는 형태로 600만 명이 여성파업에 참여했다. 스페인 여성파업은 두말할 나위 없이 여성 노동자들이 직접 주도한 운동이었을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전체 노동자계급을 이끌고 전진하는 운동으로서 자기 모습을 드러냈다. 시위대는 “우리는 멈출 수 없다”, “거리는 두려운 곳이어서는 안 된다”, “나는 페미니스트다. 나는 남성이 아니라 복스(Vox: 스페인 극우정당) 패거리를 증오한다”는 플래카드를 들고 거리를 행진했다. 위력적으로 전개된 2018년 여성파업 이후 스페인에서는 안티페미니즘을 내세운 복스 같은 극우세력이 힘을 키워 갔다. 이들은 성폭력을 금지하는 법안이 남성에 대한 역차별이라는 식으로 반대 목소리를 내는 세력이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여성파업 시위대의 표적이 될 수밖에 없었다. 마드리드에서 여성파업에 참가한 사람들은 이런 구호를 외쳤다. “마드리드는 마초 근성의 무덤이 될 것이다!” 투쟁의 기본 목표는 2018년과 같았다. 3.8위원회는 “세계 질서와 도처에 만연한 이성애 중심적, 가부장적, 인종차별적, 신자유주의적 헛소리(rhetoric)를 뒤집어엎는 것”이 여성파업의 궁극적인 목표라고 밝혔다. 이러한 목표를 이해하고 표현하는 방식에는 일정한 스펙트럼이 있다. 한편에서는 여성파업을 ‘소비 총파업’ 같은 것으로 해석할 정도로 자본주의에 대한 느슨한 시각이 묻어나기도 한다. 이와 달리 전국노동자연합(CNT)의 경우 “자본주의를 폐지하고자 한다면, 우리 투쟁을 세계로 확산해야 한다”며 반자본주의 계급투쟁 관점을 표출한다. 그들은 이렇게 말한다. “페미니즘이 여성들만의 투쟁을 넘어 확대되면서 혁명이 일어나고 있다.” “이것은 차별받는 여성과 트랜스젠더를 엄호하고 가부장제와 모든 노동자의 불안정한 삶을 끝장내기 위한 계급투쟁이다.” 이런 색조 차이에도 불구하고, 노동조합들이 대규모 파업과 시위의 중심에 서서 이 운동의 전체적인 성격을 결정하는 역할을 했다는 점이야말로 스페인 여성파업이 다른 나라 여성파업과 구별되는 가장 큰 특징이다. 하지만 노동조합 운동 내에서도 역시 색조 차이가 감출 수 없이 드러났다. 노조 관료들의 수동성과 기층 분위기 스페인 양대 노총(CCOO, UGT)은 3.8 여성파업 당일 오전과 오후 근무조가 각각 2시간 파업을 벌이는 것으로 방침을 세웠다. 스페인 노동조합 중 이들의 규모가 가장 크기 때문에, 마치 2시간 파업이 스페인 여성파업의 기본 방침인 것처럼 보이기도 했는데, 이는 여성파업을 오랫동안 준비하고 주도해 온 활동가들의 입장에서는 경멸할 만한 일이라고 한다. 노동조합 운동의 역사가 깊은 스페인에서는 노동조합 관료집단도 두텁게 자리를 잡고 있다. 노동자계급 상층부에 주요 관심사와 기반을 두면서, 상대적으로 취약하고 불안정한 처지에 있는 여성과 청년이 겪는 차별과 고통에 무관심한 게 노조 관료들의 전형적인 모습이다.1) 이런 특성은 여성파업을 조직하는 과정에서도 그대로 드러났다. 노동조합 지도부들은 기본적으로 여성파업이 성공적이지 못할 거라는 분위기에 젖은 채 시큰둥한 태도를 취했다. 심지어 이들 지도부 안에 오랜 운동 경력을 지닌 페미니스트 활동가들이 있었는데도 그 모양이었다. 1) 트로츠키, “이행강령”, 1938. 여기서 트로츠키는 쇠퇴하는 자본주의가 임금 노동자이자 주부인 여성에게 가장 큰 타격을 가한다고 말한다. 2018~2019년의 경험이 명백하게 보여 주듯이, 노조 관료들의 태도는 완전히 틀렸다. 그들은 단지 아래로부터 조직된 여성파업 운동의 열기에 떠밀려 수동적으로 2시간 파업이라는 면피용 방침을 내놨을 뿐이다. 2018년에 여성파업에 참가한 한 마드리드 노동자는 이런 평가를 내렸다. “노동총동맹(CGT), 전국노동자연합(CNT), 평조합원위원회(Co.Bas) 등이 쟁의권을 얻어 줘서 우리가 24시간 파업에 참여할 수 있게 해 줬다. 양대 노총(UGT, CCOO)의 2시간 파업은 우리가 원한 게 아니었지만, 그래도 작년보다는 나은 거라고 본다. 작년엔 아무것도 안 했으니까.” 이 발언은 노조 관료들의 수동성과 대조되는 기층의 분위기를 어느 정도 잘 보여 준다. 스페인 노동조합 운동 내의 전투적인 소수파 노조들은 적극적으로 24시간 파업을 제기했다. 24시간 파업 주장은 노동자계급 내의 다른 부위보다 여성이 다수인 사업장들에서 빠르게 확산됐다. 정부의 긴축 정책으로 예산 삭감이 이뤄지는 상황에서 희생을 감내하며 공공의료와 교육을 지탱해 온 여성 노동자들이 투쟁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카탈루냐 교사 노조가 대표적이다. 경제위기와 함께 임시직이 늘어나면서 고용이 불안정해졌고, 이는 가장 열악한 임금을 받는 민간 부문 여성 노동자들도 마찬가지였다. 이주 여성 노동자가 다수인 호텔 청소 노동자들이 그 대표 사례다. 달리 말하면, 이 시기 스페인에서 여성파업이 대대적인 운동으로 분출할 수 있었던 것은 그럴 만한 경제적, 사회적 배경이 있다는 것이다. 이제 그 점을 살펴보도록 하자. 1,000유로 세대에서 700유로 세대로 2008년 세계 경제위기 이전까지 스페인의 국내총생산(GDP) 성장률은 당시 유럽 평균인 1~1.5%를 웃돌았다. 하지만 2007년에 3.6%였던 스페인의 성장률은 2008년에 0.8%로 추락했고, 2009년에는 –3.6%로 걷잡을 수 없이 무너져 내렸다. 이와 나란히 실업률은 2008년 11%, 2009년 18%, 이후 20~25% 이상으로 치솟았다. 어느 나라에서나 그렇듯이 스페인에서도 청년실업률은 훨씬 높게 나타난다. 2008년 이전의 호황은 껍데기에 지나지 않았다. 건설 산업을 중심으로 부동산 붐을 일으키면서 부동산 거품이 부풀어 올랐다. 그 이면에서 무역수지 적자는 누적되고 외채 의존도가 늘어났는데, 이는 2008년 세계 경제 위기 같은 외부 충격 앞에 스페인 경제를 취약하게 만들었다. 더욱이 위기 이전의 표면적인 호황기에도 젊은 세대는 주로 비정규직 일자리로 내몰렸고, 이미 전체 일자리의 3분의 1이 비정규직으로 채워졌다. 이들은 생활 조건의 하락을 피할 수 없었다. 2005년경부터 스페인, 이탈리아, 그리스 등 남유럽 나라를 중심으로 ‘1,000유로 세대’라는 표현이 사용되기 시작했다. 1,000유로는 원화로 환율에 따라 120~150만 원가량 되는데, 이는 그 정도의 저임금으로 한 달을 살아 내야 하는 젊은 세대 노동자의 열악한 처지를 적나라하게 묘사하는 것이었다. 2008년 무렵이 되자 이를 대신해 ‘700유로 세대’라는 표현까지 등장했다. 이들로서는 부동산 거품으로 조성된 감당할 수 없는 수준의 주택 가격을 보며 절망감을 느끼지 않을 도리가 없다. 경제위기가 가시화하는 국면이 닥치자 비정규직부터 해고되기 시작했다. 정부는 경제위기에 대처한다는 명분으로 노동개악을 추진했고, 한층 더 불안정한 단시간 시간제 근무를 늘렸다. 이제 부동산 거품이 터지며 집값은 폭락하고, 대출 이자는 폭증하며, 해고는 더 늘어나고, 회사는 해고 비용마저 절감하기 위해 퇴직금을 삭감하면서 지옥도가 펼쳐졌다. 그리고 질문이 이어진다. 이렇게 경제위기라는 바윗덩어리가 노동자계급 전체를 짓누를 때, 그 하중과 고통이 누구에게 더 크게 전가될까? 여성 노동자의 상태 노동자계급 내에서 여성의 상대적 저임금은 하나의 보편적 법칙처럼 자리 잡았다. 스페인에서도 이 점은 예외가 아니다. 스페인의 성별 임금 격차는 한국은 물론 OECD 평균보다도 현저히 작은 편인데(여성파업 당시인 2018년 기준 한국 34.1%, OECD 평균 13%, 스페인 8.6%), 그럼에도 전 연령대에서 여성이 남성보다 낮은 임금을 받는다. 연간 성별 임금 격차가 3,000유로에서 10,000유로까지 발생한다. 이는 한화로 대략 400~1,400만 원에 이른다. 성별 임금 격차는 연금 격차로 이어진다. 남성은 은퇴 후 월평균 1,200유로의 연금을 받지만, 여성은 760유로를 받는 데 그친다. 가사와 돌봄 노동에도 남성보다 여성이 더 많이 종사한다. 육아, 요리, 청소, 그 밖의 집안일과 돌봄 등 무급 가사노동에 여성은 주당 평균 26.5시간을 사용하고, 남성은 14시간을 투여한다. 스페인국립통계청(INE)은 하루평균 남성은 2시간, 여성은 4시간을 무급 가사 노동에 사용한다는 통계를 내놨다. 2008년 세계 경제위기 이래 임금 삭감, 해고 등의 타격이 비정규직 노동자에게 집중됐다. 그 비정규직의 다수가 여성이다. 임금을 비롯한 노동조건 격차가 뻔히 보이지만, 생계를 해결하려면 불이익을 감수하며 비정규직으로라도 일을 해야만 하는 상황이었다. 여성이 겪는 성폭력과 그에 따른 사망 사건도 끊이지 않았다. 스페인 정부는 2018년 통계를 발표하면서, 2003년 이래 972명의 여성이 배우자 또는 전 배우자에게 살해됐다고 밝혔다. 2021년에 그 수치는 1,125명으로 늘어났다. 정부는 2022년 1월부터 모든 유형의 여성 살해 사건을 공식적으로 집계하겠다고 발표했다. 2015년 여성 살해 반대 시위에 나선 스페인 여성들(사진_AFP) 이와 같은 여성 살해뿐만 아니라 가정에서 일어나는 폭력, 길거리에서 마주치는 성적 괴롭힘, 여성의 빈곤화와 노동의 불안정화가 스페인 여성 노동자의 삶을 옥죄고 있었다. 이 현실에 더 이상 순응하지 않기로 마음먹은 여성 노동자들이 성별 임금 격차와 여성을 겨냥한 폭력에 맞서 파업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준비 과정 40년 가까이 장기집권하며 독재체제를 유지해 온 프랑코가 사망한 뒤, 민주화를 거치면서 1978년 전국페미니스트단체연합이 결성됐다. 이 연합은 ‘페미니스트조정위원회’라는 이름으로 더 많이 불린다고 한다. 이 연합이 스페인에서 3.8 여성파업을 주도적으로 조직했다. 지역마다 공동 활동을 위한 조정그룹들이 만들어져 함께 토론하며 여성파업 선언에 포함할 요구를 결정하고, 파업 참가자들을 조직했다. 3월 8일이 되기 전부터 다양한 전국 집회와 지역 집회, 총회, 실행위원회 구성, 집담회, 시위, 여러 시설, 현장, 지역에서 여성파업 계획을 알리는 피켓팅 등의 활동이 이어졌다. 아래로부터 자주적인 조직화 활동이 폭넓게 펼쳐지고 공감대를 넓혀가자, 마침내 노동조합들이 동참하기로 결정했다. 이로써 스페인 여성파업은 상징적으로 파업이라는 이름을 내건 시위나 ‘소비 총파업’을 넘어 생산에 직접 타격을 가하는, 다시 말해 착취 구조를 마비시키는 실질적인 파업으로 나아가게 됐다. 여성 노동자들을 옭아매는 ‘이중의 굴레’ 중 어느 한쪽만이 아니라 그 전체에 대항하는 운동으로 발돋움하는 순간이었다. 스페인 여성파업은 가부장적 자본주의를 규탄하는 구호로 가득 채워졌다. “페미니즘 없이 혁명은 없다”, “가부장제와 자본에 맞서 다양성을 인정하며 단결하자”, “우리는 세상을 바꾸기 위해 파업한다”, “가부장제와 자본주의의 범죄 동맹”, “우리는 너희가 불태우지 못한 마녀의 후손이다!” 2011년 광장점거 운동이 남긴 경험 스페인 여성파업이 대대적인 규모로 등장할 수 있었던 경제적, 사회적 배경과 나란히, 대중운동 차원에서 축적된 정치적 경험도 여성파업의 폭발적 진출에 영향을 미쳤다. 2008년 세계 경제위기가 미국을 비롯한 세계 곳곳에서 다양한 형태로 투쟁을 낳았다. 스페인에서는 2011년에 인디그나도스(Indignados), 즉 ‘분노한 사람들’이라고 불린 광장점거 운동이 일어났다. 수도 마드리드의 푸에르테델솔 광장에 수만 명이 모여 천막을 치고, 경제위기의 대가를 노동자 민중에게 떠넘기는 긴축 정책에 대항하는 농성을 시작했다. 이 투쟁은 곧 수백만 명의 시위로 번져 나갔다. 경제가 호황이든 위기 상황이든 언제나 상대적인 차별과 박탈감과 폭력에 노출돼 온 여성들도 이 거대한 대중운동 속에서 자기 목소리를 내고 싶어 했다. 하지만 이때 수많은 여성의 뇌리에 각인될 수밖에 없는 불미스러운 사건이 일어난다. 광장점거 운동에 참여한 일군의 여성들이 긴축 정책에 맞선 투쟁과 여성의 권리를 위한 투쟁이 연결되기를 바라며 플래카드를 내걸었다. “페미니즘과 함께하지 않는다면 혁명은 아무것도 아닐 것이다!” 그런데 일부 농성 참가자들이 이 여성들을 비난하며 “나가라, 나가라!” 하고 야유했다. 급기야 수천 명이 지켜보는 앞에서 누군가 플래카드를 뜯어내 버렸다. 광장점거 운동에 등장한 페미니스트 플래카드(사진_IN THESE TIMES) 이 운동은 부패한 정치를 규탄하며 아래로부터의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운동이기도 했지만, 때로는 이 운동 자체가 민주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이뤄지기도 한 셈이다. 광장점거 운동 참가자들의 민주적 권리를 보장하는 핵심 장치인 대중총회에서는 페미니스트의 질문이나 제안을 거부하는 사례도 생겨났다. 예를 들어 “유럽의 신자유주의 정책이 어떤 성차별 효과를 낳는지” 토론하자는 제안이 있었는데, 이는 “그런 사소한 문제를 토론하고 있을 때가 아니”라는 반응과 함께 기각됐다. 천막농성이 이뤄지고 있는 광장 안에서는 남성 우월주의적이거나 동성애 혐오적인 분위기도 간혹 보였다. 그래서 일부 여성들이 “밤에는 광장에 머무르기 어렵다”며 떠나는 사례도 있었다. 이런 모습 때문에 2011년 스페인 광장점거 운동이 지니는 중대한 진보적 의미가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대중적인 규모의 운동, 이후 포데모스로 수렴되는 ‘좌파’적 흐름이 폭넓게 형성됐지만, 그런 흐름이 만들어졌다고 해서 자동으로 차별받는 여성의 목소리가 온전하게 운동에 반영되지는 않는다는 사실 또한 냉혹하게 드러났다. 세상을 바꾸고자 하는 강렬한 열망을 지닌 여성들은 기존 운동에 안주하지 않으며 스스로를 조직하고 직접 목소리를 내기 위한 전망을 갈구했다. 여성파업이 그 열망에 길을 터줬다. 길을 발견한 여성들이 봇물 터지듯 쏟아져 나왔다. 이처럼 새롭게 생명력을 얻고 성장하는 운동은 새로운 쟁점과 토론 과제를 던져 준다. 2018년과 2019년에 스페인 사회를 뒤흔든 여성파업 역시 운동의 전진을 위해 해결해야 할 쟁점을 동반하며 추진됐다. 아래에서는 스페인 여성파업이 마주친 몇 가지 쟁점을 살펴보도록 하겠다. 쟁점: 계급을 넘어선 모든 여성의 단결? 첫 번째로, 계급 경계선을 넘어 모든 여성의 단결을 추구해야 하는가라는 쟁점이 있다. 생물학적 여성만의 결집과 운동을 지향하는 일부 페미니즘 운동가들은 여성파업에서도 노동자계급의 단결이라는 관점 대신 여성의 단결이라는 관점을 채택하려 했다. 이런 관점은 이미 적대적인 계급 대립으로 갈라진 냉혹한 현실을 자의적으로 외면한다는 점에서 가망 없는 태도였다. 현장에서 조직된 여성파업으로 이윤에 타격을 입게 될 자본자계급 여성들, 그리고 이들과 친화적인 부유한 중간계급 여성들이 노동자계급 여성과 동맹을 맺는 것은 불가능하다. 다행히 이 쟁점은 빠르게 정리됐다. 인민당(Popular Party), 시민당(Ciudadanos), 복스(Vox) 같은 부르주아 우익 집단의 여성들이 여성파업을 맹비난하는 모습을 보여 줬기 때문이다. 현실은 계급 이해관계의 충돌을 등한시하는 느슨한 태도를 용납하지 않았다. 자본 친화적이거나 지배계급 정당에 기대려는 경향이 여성운동 내에 여전히 남아 있는 상황에서, 이 사안은 거듭 곱씹어 볼 필요가 있다. 쟁점: 남성 노동자는 무엇을 할 것인가? 여성파업 운동에 남성 노동자들이 어떻게 기여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여전히 완전히 해소되지 않은 쟁점으로 남았다. 남성 노동자도 전면적으로 함께 파업에 참여해야 한다는 주장, 여성이 파업하는 동안 필수적인 최소한의 업무를 남성 노동자가 담당해야 한다는 주장, 여성의 사회적 역할을 드러내 보일 수 있도록 남성은 나서지 않아야 한다는 주장, 이날만큼은 그간 여성이 가정과 직장에서 해 왔던 업무를 전적으로 남성이 책임져야 한다는 주장 등 다양한 의견이 제시됐다. 여성파업 운동 일각에서는 여성파업의 목적이 “사회의 작동에 여성이 얼마나 기여하는지 가시적으로 보여 주는 것”이기 때문에 남성이 같이 파업하면 안 된다는 주장이 튀어나왔다. 가사, 돌봄 등 여성이 손을 놓은 일을 남성이 대신할 필요가 있으며, 현장에서 여성이 파업할 때 남성이 그 업무를 대신하라는 요구도 제기됐다. 여성의 기여를 가시적으로 보여 줘야 한다는 긍정적인 취지에도 불구하고, 남성이 같이 파업하면 안 되며 여성의 일을 남성이 대신 해야 한다는 주장은 위태롭기 짝이 없다. 사실상 남성에게 파업파괴자 역할을 하라는 것이기 때문이다. 파업을 깨는 행위에 적대감을 느끼는 노동자들은 이런 주장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전투적으로 24시간 파업을 제기했던 노동조합들은 명시적으로 이런 요청을 거부했으며, 남성 노동자에게 여성파업을 지지하며 동참하자고 호소했다. 실제로 파업 집회와 시위가 벌어지는 곳에는 여성과 더불어 수많은 남성 노동자들이 어깨를 나란히 했다. 2019년 6월 14일 여성파업이 조직된 스위스에서도 비슷한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여성 노동자들이 성별 임금 격차 해소, 노동시간 단축과 직장 내 성차별 폐지 등을 내걸고 여성파업에 돌입했다. “이날 여성들은 남성들에게 집에서 아이를 돌보고 음식을 준비하라고 했지만 남성들도 시위에 동참했다. ‘우리가 서로 지지하지 않으면 미래에 누가 남겠는가?’라고 시위에 참여한 한 남성이 BBC와 인터뷰를 했다.” 쟁점: 체제를 유지하는 운동과 그것을 넘어서는 운동 여성파업이 대규모 운동으로 조직되면서 여성해방을 위한 투쟁과 자본주의에 맞선 투쟁의 결합이라는 과제가 전면화됐다. 하지만 그 결합이 어떤 정치 전망으로 나아가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해서는 여러 주장이 엇갈리고 있다. 가사 노동 임금제나 소비 총파업 같은 무력한 주장이 다시 모습을 내비치는가 하면, 좀 더 좌파적인 입장으로는 “새로운 여성운동은 99%를 위한 페미니즘이어야 한다”, “99%를 위한 기층의 반자본주의적 여성주의를 건설하자”는 주장이 제기됐다. 하지만 그 ‘99% 페미니즘’이 내건 반자본주의는 실체가 모호했다. 전면적인 여성해방 정책을 실행할 노동자 정부 수립과 사회주의라는 전망을 명시적으로 제출하는 흐름은 소수에 그쳤다. 최근 몇 년간 크게 확산한 기후정의 운동에서 ‘체제 전환’ 같은 구호가 두드러졌지만, 아직 노동자계급에 기반한 혁명적 사회주의 지향으로 발돋움하지는 못하는 상황과 유사하다고 볼 수 있다. 혁명적, 계급투쟁적 페미니즘을 지향하는 스페인 빵과장미 시위대(사진_Izquierda Diario.es) 혁명적이고 사회주의적이며 계급투쟁적인 페미니즘을 주장하는 스페인 활동가들은 모든 억압을 끝장내기 위해 가부장제에 맞선 투쟁과 자본주의에 맞선 투쟁을 분리하지 않고 그 둘 모두에 도전해야 한다고 말한다. 여성파업 전망은 자본주의 체제 안에서 여성들의 개인적인 라이프 스타일 변화, 문화의 변화에 머물러서는 안 되며, 이 체제를 뒤흔들기 위해 자본가들의 이윤을 직접 침해하는 투쟁으로 나아가야 한다. 그러므로 남성 전체를 적으로 돌리고 다투는 게 아니라 남성 노동자 다수를 여성파업 지지 세력으로 끌어당겨야 한다. 여성파업이 남긴 결과와 과제 2018년 3월 8일 열광적인 여성파업을 경험한 뒤, 산체스 총리는 성평등 문제에 관한 스페인의 역사는 2018년 여성파업 이전과 이후로 구분되며, 자신이 이끄는 사회당 정부는 이 운동을 충실하게 반영한다고 말했다. 물론 이는 위선에 불과하다. 사회당 정부는 경제위기 앞에 긴축 정책을 강행하며 노동자 민중에게 고통을 전가한 장본인이기 때문이다. 산체스 총리의 발언은 여성파업으로 표출된 계급투쟁의 압력을 어떤 세력도 함부로 거스를 수 없다는 현실을 보여 준다. 여성파업은 실제로 위력을 발휘했다. 이후 몇 년간 다양한 ‘개혁’ 조치들이 추진됐다. 여성의 임신중지권을 강화하는 성 및 생식 건강과 자발적 임신 중지에 관한 법안, 성전환자 성별 정정 간소화 법안, 월 최대 3일의 유급 생리휴가 법안 등이 통과됐다. 2018년에 정부는 ‘페미니스트 내각’을 선포하며 17명의 장관 중 11명을 여성으로 채웠다. 2020년 초 사회당과 포데모스가 함께 구성한 연립정부 내각에서는 5명 더 늘어난 22명의 장관 중 11명이 여성이었다. 하지만 스페인 정부는 무엇보다도 다시 여성파업을 매개해 계급투쟁이 올라오는 것을 막으려 했다. 세계적으로 코로나19가 확산하자, 이를 빌미로 집회와 시위를 금지했다. 스페인 일간지 《엘파이스(El Pais)》에는 “수많은 사람이 오가는 시장과 다수의 관중이 몰린 축구 경기장, 지하철 인파는 내버려 둔 채 오직 여성 집회만 통제했다”는 기사가 실렸다. 2020년에는 3.8 여성의 날 집회 때문에 코로나19 감염자가 폭증했다며 비난을 쏟아 낸 반면, 그보다 앞서 열린 우익 집회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었다. 당시 한국의 문재인 정부가 ‘노동 존중 정부’를 자처하면서도 코로나19를 핑계로 노동자 투쟁만 콕 집어 억압했던 것을 빼닮았다. 내각에 다수의 여성이 기용된 것도 ‘페미니스트 정부’라는 포장지를 두르기 위한 수단일 뿐이지, 기층 노동자 민중 여성의 삶을 직접 개선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CEO의 얼굴이 남성에서 여성으로 바뀌더라도 착취는 사라지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와 같은 한계에도, 수백만 대중이 참가한 여성파업이 스페인 사회에 심대한 영향을 미쳤고, 여전히 미치고 있다는 사실은 달라지지 않는다. 스페인 여성파업은 성차별을 깨기 위해 성별을 넘어 단결한 노동자계급의 힘과 가능성을 입증했다. 이제 스페인 여성 노동자들은 지난 여성파업의 성과를 지키고 더 많은 권리를 쟁취하기 위해, 더 나아가 ‘가부장제와 자본주의의 범죄 동맹’을 타도하기 위해 또다시 힘을 모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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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드 반대 투쟁에 함께하는 노동자들노동자투쟁에 함께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 만한 노동조합 중에 아사히비정규직지회가 있다. 노조를 만들자마자 해고된 자신들의 복직을 위해서만이 아니라, 모든 노동자의 단결과 연대에 앞장서는 모습으로 우리 모두에게 귀감이 되는 동지들이다. 아사히비정규직지회의 발걸음이 닿는 곳은 통상적인 ‘노동조합 투쟁’ 범위를 넘어선다. 수년째 사드 반대 투쟁이 벌어지는 소성리도 그중 하나다. 아사히 동지들의 연대 사례를 보면서, 노동자 운동이 사드 반대 투쟁 같은 정치쟁점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지 함께 고민해 보자. 15차 범국민 평화행동 9월 2일 경북 성주군 소성리에서 사드철회평화회의 주최로 15차 범국민 평화행동 집회가 열렸다. 8월 18일 미국 캠프 데이비드에서 한미일 3국 지배계급의 군사적 결속을 다지는 정상회의가 열렸는데, 이를 규탄하듯 집회 무대에는 “사드 철거! 한미일 군사동맹 구축 반대!” 구호가 크게 내걸렸다. 사회주의를향한전진 회원들도 이날 집회에 참여해 한미일 군사동맹 반대 구호를 함께 외쳤다. 2017년 4월 26일 사드 장비가 처음 소성리에 반입된 이래 6년이 지나는 동안, 여러 반전 평화운동 단체, 종교단체, 학생단체, 정당 등이 지역 주민들과 함께 싸워왔다. 투쟁 현장에 나붙은 수많은 현수막을 보면 사드 철거, 평화, 민족자주 등 소성리 투쟁을 지지하는 개인과 단체들의 열망을 읽을 수 있다. 구한말 동학농민운동을 연상시키는 ‘척양척왜(斥洋斥倭)’ 같은 구호도 눈에 띄었다. 그동안 구미 아사히비정규직지회가 꾸준히 소성리 투쟁에 연대해 왔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이날도 역시 아사히 동지들이 자리를 잡고 앉아있었다. 구미에서 노동자 공동투쟁의 기풍을 살려가고 있는 KEC지회, 한국옵티칼하이테크지회 동지들도 함께했다. 옵티칼하이테크 노동자들은 먹튀 자본 닛토덴코를 규탄하며 고용보장을 촉구하는 서명을 받았고, 집회 참가자들이 줄지어 서서 서명에 동참하는 모습도 볼 수 있었다. 사드 반대 투쟁에 함께하는 노동자들 민주노총 통일선봉대처럼 민족주의 지향이 강한 노동자들이 사드 반대 투쟁에 참여하는 장면은 익숙한 편이지만, 아사히비정규직지회 같은 투쟁사업장 노동자들이 이 투쟁에 계속 연대하는 모습은 다소 낯설게 느껴질 수 있다. 그래서 아사히 동지들이 어떤 생각으로 이 투쟁에 연대하게 됐는지, 이곳에서 무엇을 겪었는지 더 들어봤다. 아사히비정규직지회 차헌호 지회장은 국가권력의 가공할 폭력을 첫 번째로 꼽았다. 9년째 투쟁 중인 아사히 노동자들 자신도 자본가들의 악랄한 작태만이 아니라 경찰과 법원을 앞세운 정권의 체계적인 탄압을 겪어왔다. 하지만 그것조차, 소성리 주민들이 겪어온 압도적인 폭력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사드 배치를 강행하는 동안 지역 주민들은 정부로부터 아무런 설명도 듣지 못했다. 지배자들이 떠들어대는 민주주의는 여기에 존재하지 않았다. 저항하면 일방적으로 폭행당하며 끌려 나왔다. 투쟁하는 노동자를 짓밟는 바로 그 국가권력이 이곳에선 주민들의 저항을 짓밟고 있었다. 이 모습을 보며 아사히 노동자들은 소성리 투쟁에 연대하기로 마음먹게 됐다. 그 과정이 마냥 ‘자연스럽게’ 이뤄진 건 아니라고 한다. 차헌호 지회장은 ‘아주 의식적인 노력’이 투여됐다고 강조한다. 지회에서 꼼꼼하게 토론하고 교육을 배치하며 집단적 결의를 만들어가는 과정을 거쳤다. 함께 전진하기 이와 같은 연대는 반대로 소성리 주민들이 노동자투쟁의 현실을 이해하고 노동자 운동을 지지하도록 이끄는 역할을 했다. 주민들이 직접 아사히비정규직지회 결의대회에 참가하기도 했고, 2017년에는 ‘투쟁사업장공동투쟁’의 광화문 고공 농성장을 방문해 힘을 실어줬다. 정리해고, 비정규직 철폐를 위해 목숨을 걸고 싸워야 하는 노동자들의 모습을 보면서, 주민들 사이에서는 “노동자의 권리가 존중되지 않는 대한민국이 민주주의를 온전히 실현할 수 없다”는 얘기가 나돌았다고 한다.(관련 글) 정권이 앞장서서 조장하는 노조혐오 십자포화에 맞서 노동자투쟁에 대한 사회적 지지와 연대를 강화할 수 있는 길이 어디에 있는지 힐끗 보여준 듯하다. 이 사례는 우리에게 다시 한번 중요한 질문을 던져준다. 조합원들만의 임금과 고용을 위한 편협한 요구를 넘어서지 않은 채 노동자 운동이 사회적 고립을 탈피할 수 있을까? 억압받는 민중의 권리를 위해 앞장서서 투쟁하지 않으면서 노동자 운동이 ‘세상을 바꾸는’ 힘을 끌어낼 수 있을까? 소성리 주민들은 힘겹게 투쟁을 이어가고 있다. 투쟁하는 노동자들도 상황이 어려운 건 매한가지다. 하지만 그럴수록 자기 사업장 안으로만 움츠러드는 게 아니라 정반대로, 더 넓은 시각으로 연대운동을 만들어가야 더 강력한 지지를 끌어내며, 더 힘차게 싸울 수 있다. 아사히비정규직지회 동지들이 바로 그 증거다. 방향을 분명하게 소성리 투쟁에 연대하는 노동자들은 두말할 나위 없이 이 투쟁이 승리하기를 바란다. 한반도에서의 제국주의 경쟁과 전쟁 위기 고조는 노동자 민중 모두의 생명과 생존을 위협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지역만의 투쟁으로 승리할 수 없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다. 15차 범국민 평화행동의 대표 구호가 선명하게 제기한 것처럼, 이 사안은 단지 특정 지역에서 사드 장비를 철수시키는 데 그치는 문제가 아니라 한미일 군사동맹 구축 시도 자체를 꺾어야 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노동자계급이 한미일 군사동맹 구축 시도에 제대로 맞서려면, 정치적 방향성을 바로 세우기 위한 토론이 노동자 운동 속에서 활발하게 이뤄져야 한다. 제국주의 패권에 맞선다는 정당한 명분 아래 한미일 군사동맹에는 반대하면서도, 그 맞은편에 제국주의 경쟁의 다른 한 축으로 자리 잡은 중국, 러시아, 북한에 대해서는 명확한 태도를 취하지 못하거나, 심지어 지지하기까지 하는 그릇된 경향이 여전히 강하게 남아 있다. 현실을 제대로 포착하지 못하는 이런 시각으로는 단기적으로든 장기적으로든 대중 속에서 설득력을 얻을 수 없을 것이다. 한미일 군사동맹에 맞선 투쟁은 무엇보다 미국과 중국을 중심으로 줄서기가 이뤄지고 있는 제국주의 패권 경쟁 자체에 맞선 투쟁이어야 한다. 경쟁자를 불리하게 만들면서 자신의 세력권을 확대하려는 지배자들 간의 경쟁에서 우리는 누구 편도 들어서는 안 된다. 실제 힘을 만들기 위해 그와 더불어 노동자 운동이 실제로 국제적인 연대의 힘을 만들어낼 수 있도록 경험과 역량을 키워갈 필요가 있다. 지배계급이 군사동맹을 추진하며 전쟁 위기를 고조시킨다면, 노동자계급은 국경을 넘어 ‘노동자계급끼리’ 손잡고 전쟁 반대 동맹을 추진해야 한다. 전쟁 위기를 부추기는 제국주의 열강 내부에서부터 체제 균열을 일으킬 수 있는 노동자계급의 저항을 조직하는 게 관건이기 때문이다. 아사히비정규직지회의 경우, 한국에서 한창 ‘반일’ 분위기가 고조되던 상황에서 아사히 본사를 겨냥한 일본 원정 투쟁에 나선 바 있다. 이는 ‘일본 놈들 때려잡자’는 식의 민족주의적 행동이 아니라 이 투쟁을 지지하는 일본 노동자와 한국 노동자가 함께 손잡고 자본가에 맞서 시위를 벌이는 국제적, 계급적 연대였다. 또한 그렇게 연대했던 일본 노동자들이 반전 투쟁을 요구로 내걸고 실제로 그런 활동을 조직하는 모습이 아사히 동지들에게도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우리 운동에서 이런 경험은 아직 미약하다. 그러나 노동자 운동이 ‘우리 민족끼리’나 ‘척양척왜’ 같은 협소한 민족주의 전망을 넘어 제국주의 경쟁체제를 근본적으로 뒤엎을 수 있는 노동자계급 국제연대의 가능성을 분명하게 보여준 사례다. 그 가능성을 증폭시키는 데에서 승리의 전망을 찾아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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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는 다른 목소리를 내고, 다른 행동을 조직해야 한다사진: 교육노동자현장실천 빗나간 해결책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내기 위해 8월 18일 “모두를 위협하는 윤석열 정권의 ‘교권’ 대책 어떻게 바뀌어야 하나?” 긴급토론회가 열렸다. 사회주의를향한전진을 포함해 16개 단체가 공동 주최한 토론회였다. 토론회 장소인 민주노총 15층 교육장은 참가자로 가득했고, 준비된 자료집은 금방 동이 났다. 무엇보다도 현시점에 이런 토론회가 개최됐다는 사실 자체가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서이초 교사의 죽음을 계기로 교육 현장에 쌓여 온 숱한 갈등과 모순이 폭발적으로 모습을 드러냈고, 주말마다 수천에서 수만 명의 교사가 모여 분노를 표출했다. 그런데 윤석열 정권과 보수 우익세력은 이 분위기를 활용해 학생인권조례 폐지와 교권 강화라는 권위주의적 퇴행을 일으키려 한다. 불행하게도 교사 상당수가 교권 강화와 아동학대 면책권 같은 빗나간 대안에 이끌리고 있고, 이 점에서 전교조 역시 중대한 한계를 보인다. 이날 토론회는 이 같은 흐름에 명백하게 반대하면서, 실질적인 대안을 마련하기 위한 노력과 행동이 절실함을 보여줬다. “학교가 전쟁터가 됐다” 토론회 발제는 “학교가 전쟁터가 됐다”는 진단으로 시작했다. 정부가 내놓은 대책은 교사와 학생, 양육자를 대결 구도로 몰아가는 정책일 따름이며, 교사의 면책권을 얘기하는 아동학대 관련 법률 개정안으로 실제 면책되는 건 “정부일 뿐”이라는 지적이 이어졌다. 예컨대 발제자와 여러 토론자가 이구동성으로 인원 확충 문제를 제기했다. 학생인권조례에 비난이 쏟아지는 동안 교사 정원은 계속 줄었다. 내년도 전국 공립학교 교사 선발 인원은 올해 선발된 인원보다 13~30% 줄어든다고 한다. 충북에선 무려 58.7%나 감축된다. 교육과 생활 관리를 위해 그 어떤 정책을 도입하더라도, 이를 실행할 인원이 부족하다면 결국 또 다른 폭탄 돌리기로 전락할 수밖에 없다. 자본주의적 비용절감 논리를 내세우는 정부는 교육환경 개선을 위한 인원확충 책임을 철저하게 외면한다. 이래서는 교육노동자의 노동권이 절대 지켜질 수 없다. 교육부가 해결책이라고 내놓은 ‘교권 회복 및 보호 강화 종합방안’도 딱 그런 수준이다. 학교 울타리를 넘어, 투쟁의 범위를 확대하기 인원 확충은 예산 문제와 떼놓을 수 없다. 이날 토론에서도 정부가 “총정원제와 총액인건비제라는 경제적 관점에 메여 있다”는 지적이 나왔다. 공공부문에서 총액인건비제는 노동자의 분열을 강제하는 강력한 도구로 자리 잡았다. 2년 전 건강보험고객센터 투쟁 때에도 총액인건비제를 이유로 비정규직 노동자의 정규직화 요구를 들어주면 안 된다는 정서가 정규직 노동자들 사이에 나돌았다. 정부 예산안이 신성불가침의 가이드라인으로 여겨지는 꼴이다. 이런 현실은 2011년 칠레를 뒤흔든 학생들의 대투쟁 장면과 날카롭게 대비된다. 학생들은 보편적 무상교육을 비롯한 교육 환경 개선을 요구하며 거리로 나섰고, 칠레 최대 산업인 구리산업을 국유화해 재원을 마련하라고 외쳤다. 한국으로 치면 현대기아차를 국유화해 교육예산을 확보하라고 요구한 셈이다. 투쟁의 시야를 학교 울타리 안으로 가두지 않고, 사회 전체로 확장하면서 해법을 모색했다는 점에서 무척 인상적이다. 이 투쟁은 이후 수년간 이어지면서 무상교육 확대 성과를 만들어냈으며, 그 운동의 저력은 2019년 칠레 항쟁으로도 연결됐다. 지금 칠레에서는 구리뿐만 아니라 자동차 배터리 핵심 소재인 리튬 광산 국유화 논의도 함께 이뤄지고 있다. 이 경험을 우리 현실에 접목하려면 더 구체적인 고민과 논의가 필요하다. 그러나 적어도 우리의 시야를 학교 울타리 안에 가두지 않을 때 비로소 교사와 학생, 양육자를 대결 구도로 몰아넣는 윤석열 정권의 ‘대책’을 넘어설 수 있다는 점만큼은 분명할 것이다. 어쩌면 너무나 당연한 얘기다. 사회 전체가 엉망진창인데 그 속에서 학교만 아름답고 조화로운 공간으로 만든다는 게 될 법한 얘기인가. “파업을 할 수 있었더라면…” ‘파업을 할 수 있었더라면’이라는 발제자의 한마디가 기억에 남는다. 노동조합 활동의 자유가 보장됐다면, 단체행동권을 누릴 수 있었다면, 정치적인 목소리를 낼 수 있었다면, 그랬다면 지금보다는 더 나은 교육 현장을 만들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주장에 모든 토론회 참가자가 공감했으리라. 정부나 국회에 기댄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수십 년간 경험해 온 일이다. 누군가 먼저 다른 목소리를 내고, 다른 행동을 조직해야 한다. 퇴행의 물결을 거스르는 다른 운동을 건설해야 한다. 예정된 시간을 30분가량 넘겨 진행된 토론회를 마치며 논의의 성과를 계속 이어가자는 공감대도 확인했다. 저마다의 지역에서 이런 토론회를 열어보자는 제안도 있었다. 이날 토론회는 그렇게 실천을 이어가자고 뜻을 모은 소중한 첫 발걸음이었다. 죽음의 그림자에 뒤덮인 교육 현장을 뒤바꾸기 위해, 교육노동자의 노동권과 정치활동 자유를 위해 함께 싸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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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저임금30%인상 연속기고] 여성 노동자에게 더욱 절박한 최저임금 30% 인상최저임금 인상을 위한 총파업은 여성 노동자에게도 중요하다. 노동계급 전체가 물가 폭등으로 고통을 겪고 있지만, 그중에서도 저임금 부문에 몰려 있는 여성 노동자들은 경제위기의 직격탄을 피할 수 없기 때문이다. 2018년 시점에서 볼 때 최저임금 인상으로 영향을 받는(최저임금 수준에 미달하는) 남성 노동자 비율은 16.1%로 추산됐지만, 여성 노동자 비율은 35.8%에 달했다. 여성 노동자들이 강요당하는 성별 임금 격차는 윤석열 정권이 부정하는 ‘구조적 성차별’을 보여주는 명백한 증거다. 2021년 기준 OECD 국가 성별 임금 격차 그래프. 한국이 변함없이 1위를 차지하고 있다. 성별 임금 격차 한국에서 임금노동자로 일하는 여성이 주로 취업하는 직종은 보건·사회·복지 서비스업, 도소매업, 숙박·음식점업으로, 전형적인 저임금 부문이다. 통계청에 따르면 2021년 기준 여성 노동자의 임금은 남성 노동자의 65.8% 수준이다. 2010년의 61.6%보다는 상승했지만, 그래도 여전히 3분의 2 수준을 맴도는 실정이다. 통계청이 산정한 2019년 기준 여성 무급 가사노동의 가치가 총액 356조 원, 1인당 월평균 115만 원이라고 한다. 무급 가사노동 가치 산정 방식이 논란이 되기도 하지만, 이중의 짐을 지고 있는 여성 노동자의 임금이 ‘노동력 재생산’ 비용에 턱없이 부족하다는 사실을 이 통계가 직설적으로 보여준다. 더욱이 무급 가사노동의 중심에 있는 출산, 육아에 따른 부담으로 여성 노동자는 경력단절을 겪는데, 이는 생애에 걸쳐 성별 임금 격차를 고착화하는 중요한 배경이다. 일각에서는 이른바 ‘누칼협’, 즉 ‘누가 칼 들고 협박했냐’는 말을 들먹이며, 더 나은 임금을 바란다면 본인이 노력해서 좋은 직장으로 옮기라고 냉소한다. 그러나 예컨대 현대·기아차처럼 상대적으로 고임금을 받는 직장은 여성 노동자에게 특히 배타적이다. 2020년에 현대·기아차에서 일하는 여성 노동자 비율은 4.5%에 불과했다. 제조업뿐만 아니라, 그나마 여성 채용 비율이 상대적으로 높은 공공부문에서도 여성이라는 이유로 면접 점수를 조작해 불합격시킨 서울교통공사 사례처럼 여성 노동자에겐 두터운 ‘구조적’ 장벽이 있다. 남성 정규직 → 남성 비정규직 → 여성 정규직 → 여성 비정규직 그 결과는 비정규직 비율에서도 나타난다. 2022년 기준으로 전체 남성 노동자 가운데 비정규직이 30.6%인 데 반해, 여성의 경우에는 전체 여성 노동자의 46%가 비정규직이다. 익히 알려져 있다시피, 이는 곧장 구조적인 임금 격차로 이어진다. 통계청이 발표한 <2021년 통계로 보는 여성의 삶>에 따르면, 남성과 여성, 정규직과 비정규직에 따라 임금 격차가 아래와 같이 나타난다. 남성 정규직 → 남성 비정규직 → 여성 정규직 → 여성 비정규직 순서의 임금은 마치 하나의 ‘질서’처럼 자리 잡았다. 그러다 보니 중위 임금의 3분의 2 미만을 가리키는 저임금 노동자의 비율에서도 여성은 24.1%, 남성은 12%로, 여성이 남성보다 두 배나 많다. 최저임금조차 못 받는 노동자의 상태는 어떨까? 현행법에 따르면 아내 등 동거하는 친족만으로 구성된 사업이나 개인 가정에 고용된 각종 가사담당 노동자는 최저임금 이하 임금 지급이 허용되는 실정이다. 2021년에 최저임금을 못 받는 남성 노동자는 15.3%, 여성 노동자는 21.1%였다. 남성 노동자가 받아 가는 임금에 여성 노동자의 저임금과 무급 가사노동에 대한 보상이 포함돼 있는 것 아니냐는 반론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그런 주장은 남성 노동자의 임금이 단지 여성 노동자보다 상대적으로만 높을 뿐 가족 전체가 인간다운 삶을 지탱하기에 턱없이 부족하다는 점에서 비현실적이고, 또한 남성과 여성으로 구성된 이성애 가족만 전제한다는 점에서 시대에 뒤떨어졌다. 여성이 가구주 역할을 하는 가구 비중이 이미 2019년에 30%를 넘어섰다. 여성 1인 가구의 수도 291만 4천 가구에 이르렀다. 이 숫자는 계속 늘어나고 있다. 이런 상황을 종합하는 결과로서, 한국의 성별 임금 격차는 OECD(경제협력개발기구) 회원국 중 1위를 차지한다. 여성 노동자들이 노동계급 내에서 상대적 저임금층을 이루고 있다는 점에서, 최저임금 인상은 누구보다도 여성 노동자의 처지를 개선하는 데 직접 영향을 미친다. 여성 노동자가 가장 앞장서서 최저임금 인상을 위한 총파업에서 나서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노동계급 분할에 맞선 투쟁 더 중요한 이유가 있다. 여성 노동자의 임금을 높이기 위한 공동의 투쟁은 비단 여성 노동자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성별 임금 격차를 없애기 위한 투쟁은 노동계급을 겨냥한 ‘분할 통치’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것이기도 하다. 자본가계급은 고용형태, 성별, 국적, 인종, 나이, 성정체성, 장애 유무 등 온갖 수단을 이용해 노동계급 속에 장벽을 세우고 분열시키는 방식으로 단결력을 파괴한다. 여성 노동자 전반을 저임금 굴레에 가두는 것은 곧 노동계급 전체의 임금인상 투쟁을 방해하는 납덩이를 노동자 발목에 채우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최저임금 인상이 노동자의 일자리를 빼앗아간다는 자본의 책략에 맞서기 위해서도 노동자의 단결이 필수적이다. 이런 임금 차별을 내버려 두지 않겠다는 방향이 분명해야 모든 노동자의 단결을 끌어낼 수 있고, 그래야 윤석열 정권의 공세에 맞선 반격에 자신감 있게 나설 수 있다. 단결한 노동자는 패배하지 않는다. 노동자를 갈라놓는 모든 장벽을 허물기 위한 투쟁과 함께, 여성 노동자를 에워싼 저임금 굴레를 깨뜨리기 위한 최저임금 인상 총파업에 함께 나서자. 3.8. 여성파업을 여는 비정규직 여성노동자 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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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노동자와 청년들이 점점 더 대담한 시위에 나선다지난해 11월 베이징에서 열린 시위 반중 정서가 그 어느 때보다 높다. 그 배경에는 중국의 제국주의적 야심에 대한 정당한 반감도 뒤섞여 있을 테다. 하지만 ‘반미’라는 구호 아래 미국 노동자들의 투쟁과 사회주의자들의 활동, 미국 내 정치적 급진화 흐름을 지워서는 안 되는 것처럼, ‘반중’ 감정에 휩싸여 중국 내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투쟁과 저항, 그것이 중국 사회에 변화를 일으킬 가능성에 주목하고 연대해야 할 필요성을 놓쳐서는 안 된다. 실제로 중국에서는 많은 시위가 일어나고 있다. 지난해와 올해 초의 이야기다. 2022년의 주요 시위 대출 상환 거부시위: 지난해 6월 허난성 정저우 등에서는 아파트 공사중단과 은행의 대출 상환 압박에 항의하는 시위가 벌어졌다. 있는 돈 없는 돈 끌어모아 집을 마련한 이들에게 아파트 시공이 중단됐다는 소식은 날벼락이 아닐 수 없다. 당장 머물 곳이 없어 전기도 안 들어오는 미완공 아파트에 이불만 갖고 들어가 밤을 보내는 가족들의 모습도 보였다. 그 와중에 은행은 대출금을 갚으라고 독촉했다. 시위에 참여한 수천 명이 “건설 중단에는 대출 상환 중단으로! 집을 내놓고 돈을 갚으라 하라!”고 외쳤다. 또 한 명의 탱크맨: 2022년 10월에는 중국공산당 20차 당 대회를 며칠 앞두고 수도 베이징에서 시진핑을 규탄하는 1인 시위가 있었다. 시진핑의 국가주석 3연임 결정을 앞둔 상황에서 이런 시위가, 그것도 수도에서 일어났다는 건 그 자체로 놀랄 만한 일이었다. 시위자는 고가도로 위에서 현수막을 걸고 불을 피우면서 “독재자, 반역자 시진핑을 파면하라”는 구호를 외쳤다. 그는 금방 경찰에 연행됐지만, 시위를 벌이는 모습이 SNS를 타고 빠르게 전파됐다. 1989년 톈안먼 항쟁 당시 홀로 탱크의 진격을 가로막은 이를 떠올리게 한다며 ‘또 한 명의 탱크맨’이라는 호칭이 붙었다. 폭스콘 공장 시위: 한 달 뒤인 11월에는 세계 최대 규모의 아이폰 생산 공장인 정저우의 폭스콘 공장에서 노동자들이 투쟁을 벌였다. 노동자들은 “임금을 지급하라”, “관리자 나와라” 하고 외치며 공장 집기를 부수고 몽둥이를 휘두르기도 했다. 이 일이 벌어지기 한 달 정도 이전에는 노동자 상당수가 공장에서 ‘탈출’하는 장면이 포착됐다. 코로나19 확산을 이유로 폭압적인 봉쇄조치가 이어지면서 노동자들은 사실상 감금된 상태로 일을 했다. 음식도 제대로 제공되지 않았고, 소량 지급된 도시락을 두고 다툼이 벌어지기도 했다. 공장 안에서 코로나19 확진자가 발생했는데도 적절한 조치 없이 계속 봉쇄하기만 해 노동자들은 불안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일부 노동자들이 몸싸움을 벌이면서 공장 문을 뚫고 탈출했으며, 교통편도 없었던 탓에 걸어서 고향으로 돌아가야 했다. 백지 시위: 그리고 곧바로 2022년 11월 말 중국을 뒤흔든 ‘백지 시위’가 시작됐다. 우루무치의 한 아파트에서 화재 사고가 일어났을 때 거주자들이 빠르게 대피할 수 없었고 화재진압도 어려웠다고 한다. 건물 출입구까지 막아버리는 혹독한 봉쇄조치 때문이었다. 이 화재로 10명이 목숨을 잃자 전국 수십 개 도시와 대학에서 폭압적인 제로 코로나 정책 철회를 요구하는 시위가 번져나갔다. 시위 참가자들은 중국 정부의 검열과 탄압에 항의하면서 백지를 들고 시위를 벌였다. 흰 종이에는 아무것도 적히지 않았지만, 그들이 외치고 싶은 모든 구호가 담겨 있는 것이기도 했다. 때로는 중국공산당을 규탄하며 시진핑은 물러나라는 구호를 외치는 사람도 있었다. 이 투쟁이 현재의 체제를 넘어 새로운 사회를 향한 전망을 뚜렷하게 붙잡지 못한 건 사실이다. 투쟁의 수위를 과장하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 규모에서 1989년 톈안먼 항쟁 이후 최대 시위였다는 점은 분명한 사실이다. 특히 수도 베이징과 상하이, 광저우, 선전 등 중국 주요 대도시 전부가 이 시위의 무대가 됐다. 중국공산당과 시진핑을 비난하는 목소리가 공공연하게 터져 나온 것 역시 그동안 보기 힘들었던 장면이다. 백지 시위는 시진핑 정권을 두려움에 휩싸이게 했으며, 중국은 이 시위 이후 급격하게 그간의 봉쇄조치를 해제하기 시작했다. 2023년에도 계속된 시위 흐름 백지 시위가 사그라든 뒤 시진핑 정권은 적극적인 집회 참가자들을 추적해 은밀하게 체포하고 있다. 지금까지 연행자가 100명 이상이라고 전해진다. 하지만 2023년 들어서도 또 다른 계기를 통해 시위 흐름이 이어지고 있다. 충칭 지바이오 노동자투쟁: 1월에는 충칭에서 노동자들의 시위가 벌어졌다. 코로나19 진단키트를 만드는 제약회사 지바이오(ZYBIO) 공장이 그 현장이다. 2만여 명의 노동자를 고용하고 있는 지바이오 사측은 올해 설을 앞두고 8,000명가량을 해고한다고 발표했다. 임금도 체불됐다. 필요할 때 불려왔다 헌신짝처럼 버려진 노동자들은 그냥 집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시위 장면은 한국에서 노동자 운동이 한창 전투적인 면모를 보였던 시절처럼 격렬했다. 노동자들은 경찰과 충돌하기를 두려워하지 않았고, 여러 대의 경찰 차량을 전복시켰다. 제품을 담는 플라스틱 상자, 의자, 교통통제용 시설물 등 손에 잡히는 대로 내던졌으며, 진압경찰은 이리저리 밀려다녔다. 의료보조금 삭감 항의 시위: 2월이 되자 후베이성 우한에서 의료보조금 삭감에 항의하는 시위가 벌어졌다. 시위 참가자 상당수가 우한제철소 또는 다른 국유기업에서 일하다 은퇴한 고령의 노인들이어서 ‘백발시위’라는 별칭이 붙었다. 우한에서 ‘의료보험 개혁안’을 추진하면서 월급의 6%를 지급해왔던 의료보조금을 기존 대비 70%나 삭감하자 의료보험금을 돌려달라며 시위가 일어난 것이다. 2월 8일 우한 정부청사 앞에 모여 시위를 벌인 사람들이 15일까지 해결책을 내놓으라고 요구했으나, 여전히 제대로 답변이 나오지 않으면서 15일에 또다시 시위가 벌어졌다. 시위가 벌어졌을 때 시내 지하철 역사를 폐쇄하고, 15일에는 우한의 대학들이 봉쇄됐다는 소식도 나돌았다. 비슷한 시위가 우한뿐만 아니라 랴오닝성 다롄 등 다른 몇몇 도시에서도 벌어졌다고 한다. 최근의 여러 시위: 베이징 시진핑 규탄, 광저우 폭스콘, 우한 의료보조금 삭감 항의, 충칭 지바이오 공장(왼쪽 위부터 시계 방향으로). 지난해에서 올해로 이어지는 이런 연쇄적인 투쟁은 계기도 다양하고 참가자들의 면모도 다양하다. 중국 사회에 누적된 모순이 다면적으로 균열을 일으키고 있다는 인상을 준다. 지방정부 차원의 충돌을 넘어 베이징을 포함한 주요 대도시에서 시진핑 정권을 규탄하는 정치 시위가 발생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고, 무엇보다 저항의 전통과 기억에서 완전히 단절된 것처럼 보였던 젊은 세대가 (특히 백지 시위에서) 투쟁의 전면에 나섰다는 점에서도 의미심장하다. 지금 보이는 흐름이 곧장 체제에 도전하는 투쟁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식으로 과장하지는 않더라도, 중국 노동자 민중의 불만이 점점 더 대담하게, 그동안 보지 못했던 양상으로 터져 나오고 있다는 점은 아주 중요하다. 이런 분위기 변화의 배경에 무엇이 있는지 살펴보면서 이후 중국의 동향을 가늠해보도록 하자. 과도한 제로 코로나 정책 탓이었나? 예컨대 지난달 우한에서 의료보조금 삭감에 항의하는 시위가 터져 나오자, 언론이 주로 제시한 설명은 ‘제로 코로나 정책을 강행하면서 막대한 방역 비용을 의료보험 기금에서 충당한 결과 재정 적자를 감당할 수 없게 됐다’는 내용이었다. 여러 지방정부가 심각한 재정 적자를 겪고 있는 건 널리 알려졌다. 헤이룽장성 등 일부 지역은 행정조직을 축소했고, 윈난성에서는 6개월 넘게 공무원 임금을 체불했다고 한다. 이번에 문제가 된 의료보조금 삭감과 마찬가지로 주민 복지혜택이 축소되고 있다거나, 교사 임금의 3분의 1이 삭감됐다는 소식도 들린다. 코로나19를 겪은 몇 년간 도시들에 대한 반복적인 봉쇄가 이뤄지면서 사실상 경제가 마비되고, 그에 따라 세금 수입은 줄어드는 반면 방대하고 반복적으로 이뤄지는 코로나19 검사로 막대한 경제적 지출이 이뤄진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오늘날 중국에서 노동자, 학생, 퇴직자 등 대중 속에서 불만이 자라나고 행동으로 표출되는 이유를 코로나19 사태의 영향으로만 돌릴 수는 없다. 이렇게 비교해 보자. 근래 미국의 젊은 층 사이에서 사회에 대한 불만이 성장하고 정치적 급진화로 연결되며 완곡하게나마 사회주의에 대한 우호적 반응이 늘어나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역사상 처음으로 젊은 세대의 삶이 자기 부모의 삶보다 더 열악해질 거라는 명백한 사실이 그들의 시야를 휘감고 있기 때문이다. 중국에서도 기본적으로 비슷한 패턴이 나타나고 있다. 지난 몇십 년간 중국이 가파르게 성장하는 동안에는 지방 관리들의 부패 같은 불만 사항이 생기더라도 중국 사회를 뒤흔들 정도의 투쟁으로 연결되지 않았다. 중국공산당의 통치가 어쨌든 우리의 삶을 더 낫게 만들어주고 있다는 대중의 기대감이 더 우월했기 때문이다. 10%를 넘나드는 성장률은 다른 어느 나라에서도 보기 힘들었다. 이런 경제 성장은 정권 안정의 물질적 기반이 됐다. 하지만 2010년대 이후 이 추세가 꺾였다. 2008년 세계 경제위기의 파도 앞에서도 큰 틀에서는 중국 경제가 선방한 것처럼 보였지만, 2012년에 7%대로 내려앉은 성장률은 2015년에 6%대로 내려왔고, 계속 하락하는 추세를 보였다. 지난해 성장률은 3%에 불과했다. 2021년 청년(16~24세) 실업률이 국가 통계국 공식 발표로도 19.3%에 이를 정도로 일자리 문제가 암울하다. 사회 전반의 고령화와 한국 못지않은 저출생 양상도 심각하다.(1990년, 2000년, 2010년에 한국의 출생률 추이가 1.6 → 1.7 → 1.23인데 비해 중국은 2.87 → 1.56 → 1.63으로, 이 기간에는 중국의 출생률 낙하폭이 더 크다. 2012 유엔세계인구전망 참조.) 한국과 마찬가지로 중국에서도 저출생은 젊은 세대가 느끼는 현실과 미래에 대한 불안의 증표다. 중국의 경제위기와 재정 적자 이 불안이 어느 정도의 폭발성을 지닐 수 있을 건가와 관련해 가장 큰 관심을 끌어모으는 지점은 정부의 부채 문제다. 2008년 세계 경제위기의 파장으로 중국에서도 공장이 문을 닫고 수백만 노동자가 거리로 내몰리는 상황에서, 중국 지배계급은 과잉자본의 배출구를 찾기 위해 인프라 건설에 투자를 집중했다. 철도, 항만, 고속도로 등을 연결하는 중국의 일대일로 사업도 2013년부터 공식화했다. 중국 내에서는 지방정부를 앞세워 인프라 건설 사업을 부추겼다. 이는 일정 기간 일자리를 창출하고 성장률을 지탱하는 버팀목이 됐다. 그러나 결과적으로는 가공할 만한 부동산 거품을 일으키고 부채를 누적시키며 위기를 초래하는 중심축이 됐다. 스페인에서 장기불황에 대처하기 위해 부동산개발에 자본을 집중한 뒤 그것이 거품을 일으키고 위기를 초래하면서 2011년 광장 점거 운동으로 나아갔던 것을 연상시키는 대목이다. 현재 중국에서 부동산산업의 비중이 전체 GDP의 25%가량 된다. 2018년에 30%까지 치솟은 뒤 부동산 침체와 더불어 하락한 게 그 정도다.(‘부동산 공화국’인 한국의 경우 부동산 및 임대업, 건설업을 합한 비중이 2020년 기준 GDP의 13%가량 된다.) 그런 상황에서 2021년 중국 2위의 부동산 개발기업 헝다그룹이 364조 원의 부채를 짊어지고 채무 불이행 상태에 빠졌다. 364조 원은 한국 박근혜 정부 시절의 연간 정부 예산 규모와 맞먹는다(340조~380조 원). 280개 도시에서 1,300여 개의 건설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으며, 8,400여 개의 연관 기업과 380만 개의 연관 일자리의 중심에 있는 헝다그룹이 파산하면 그 파장은 엄청날 것이다. 공사가 중단돼버린 아파트에 들어와 사는 사람들 더 큰 문제는 이런 상황이 헝다그룹만의 모습이 아니라는 점이다. 2022년 8월 기준으로 30개의 부동산 개발업체가 채무 불이행 상태라고 한다. 이 때문에 지난해 대출 상환 거부시위에서 본 것처럼 전국 각지에서 아파트 시공 중단 사태가 벌어지고 있는데, 전체 미완공 아파트 규모가 200만 채에 이를 것으로 추정된다. 이에 덧붙여 영국의 컨설팅 기업 캐피털이코노믹스는 현재 3,000만 채의 아파트가 미분양 상태이고, 잔금 미지급 등의 이유로 비어있는 아파트가 1억 채에 이른다고 보고했다. 중국 런민대학 원테쥔 교수는 이렇게 말했다. “(은행이) 목숨 걸고 부동산에 투자했다. 사실 부동산은 몇 년 전부터 넘쳐났다. 2018년, 2019년 계산에 따르면 전국적으로 분양주택은 수요의 두 배에 이른다.”(KBS ‘세계는 지금’, 2022년 8월 6일) 그런데 이런 부동산 거품이 정부의 재정 적자와 어떻게 연관되는가? 중국에서는 지방정부가 토지사용권을 부동산 기업들에 판매하면서 재정을 조달했다. 이렇게 벌어들인 수입이 2021년 기준 지방재정의 40%를 차지했고, 전국 재정수입의 25%에 이르렀다. 부동산 경기가 가라앉으면 곧바로 재정에 타격을 줄 수밖에 없는 구조인데, 실제로 그런 일이 벌어진 것이다. 이 과정을 지방정부는 지방정부융자기구(LGFV)라는 일종의 자회사, 페이퍼컴퍼니를 통해 수행한다. 공식적인 정부 기관이 아니라 별도의 기업이다. 그러다 보니 이 기구에서 쌓이는 부채는 ‘공식적’인 정부 부채로 집계되지 않고 ‘숨겨진 부채’가 된다. 그 규모가 얼마나 될까? 지난해 《차이나 쇼크, 한국의 선택》을 출간한 한청훤의 설명에 따르면, 현재 중국 지방정부와 중앙정부의 부채는 ‘공식적’으로는 51조 위안(약 9,732조 원), GDP의 45.8% 수준이어서 양호한 편이다. 하지만 지방정부융자기구의 채무 총액이 2020년 말 기준 약 53조 위안(약 1경 113조 원)이어서, 이를 합하면 국가 부채 규모가 GDP의 100%를 뛰어넘는다. 여기에 더해 중국 국유기업의 부채 규모가 GDP의 140%인데, 이를 모두 합하면 중국 전체 GDP의 240%에 이른다. 2008년 세계 경제위기 이후 최악의 경제 붕괴를 경험한 그리스에서도 그 시기에 정부 부채 규모는 GDP의 170~180% 수준이었다. 시진핑 정권의 발밑이 불안하다 시진핑 정권 입장에서는 이런 불안 요인을 어떻게 연착륙시킬 것인가가 관건일 테다. 상하이방과 공청단 등 권력 기구 내 경쟁 세력을 제압하고 만장일치로 국가주석 3연임에 성공하면서 절대권력을 손에 넣은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시진핑 정권은 자신의 장기집권 정당성을 무슨 재주로 입증할 것인가라는 중대한 시험대에 스스로 몸을 던진 셈이다. 정권 안정성을 흔들 수 있는 모든 요인을 제거하거나 적어도 묶어두기 위해 혈안이 될 것이다. 올해 3월 열린 전국인민대표대회에서 공산당에 금융공작위원회를 20년 만에 부활시켜 금융 영역 전반을 당이 직접 관장하기로 한 것, 내무공작위원회를 신설해 기존 공안부와 국가안전부가 맡은 역할을 당이 직접 관장하기로 한 것도 그 연장선에 있다. 이런 상황이 의미하는 게 무엇일까? 좁게는 시진핑 정권이, 넓게는 중국 사회 전반이 작은 사건에도 크게 흔들릴 만큼 사회 안정성이 약해져 있다는 것이다. 우루무치에서 발생한 화재 사망 참사가 전국을 뒤흔든 백지 시위의 방아쇠를 당긴 것처럼 말이다. 지난해와 올해 초 볼 수 있었던 중국 내의 다양한 시위 흐름은 앞으로도 다양한 계기로 재현될 수 있다. 그런 투쟁이 어디로, 얼마나 전진할 수 있을지 쉽사리 예측할 순 없다. 대규모로 퍼져나간 백지 시위에서 그만큼 더 두드러졌던 것처럼, 저항 운동 자체는 폭발적으로 터져 나올 수 있지만 이 운동을 일관되게 이끌어갈 수 있는 정치 전망과 조직은 아직 준비돼 있지 않은 상태다. 노동자, 학생, 여성 등이 조직을 만들고 연대를 건설하며 투쟁에 나설 수 있는 권리가 심각하게 제약돼 왔기 때문이다. 중국 국가가 근본적으로 ‘인민의 국가’라고 믿거나 마오주의를 혁명적 전통으로 여기는 허구적인 이데올로기의 잔재도 여전히 강력해 보인다. 시진핑 정권은 관료적, 억압적 국가기구를 강화하면서 아래로부터의 저항에 대한 국가적 통제와 탄압을 더욱 촘촘하게 가할 전망이다. 하지만 이런 모습은 결코 시진핑 정권의 ‘자신감’의 표현이 아니다. 최근의 일련의 시위, 특히 백지 시위를 거치면서 중국 민중은 자신들이 집단으로 행동하고 목소리를 낼 수 있으며, 이런 투쟁으로 정권을 움찔하게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을 배웠다. 지금 중국에서 가장 불안감을 느끼는 집단은 다름 아닌 시진핑 정권이다. 이런 상황이 중국에서 급진적 운동이 성장할 가능성을 자동으로 보장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불안한 처지의 시진핑 정권은 탈출구를 찾기 위해 위험한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다. 중국 사회 내에서 갈등이 고조될수록 그 압력을 외부로 배출하려는 시도가 강해질 것이다. 즉 지금껏 부추겨온 애국주의를 한층 더 고조시키며 모험적인 대외정책으로 나아갈 위험을 배제할 수 없다. 미국 제국주의 세력이 자신의 패권을 지키며 중국의 반도체 굴기를 막기 위해 중국 봉쇄정책을 강화할수록 그 위험은 더 커진다. 그래서 불가피하게 조만간 미국과 중국의 전쟁이 발발할 것인가를 따지는 건 이 글의 주제를 벗어난다. 하지만 분명한 건 정세를 뒤흔드는 불안정성은 더욱 커져갈 거라는 점이다. 그 불안정성을 날려버릴 수 있는 유일한 힘은 각 나라 노동자와 민중의 폭발적인 투쟁과 국제적인 연대에서 자라날 수 있다. 중국 내부에서 터져 나오는 투쟁에 계속 주목하고 지지를 보내는 것이 그 출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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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페데리치의 주장에 대한 비판적 토론뉴욕의 빌딩 옥상에서 텃밭을 가꾸는 사람들. 자본주의의 대안이 될 수 있을까? 실비아 페데리치는 <캘리번과 마녀>, <혁명의 영점> 등의 저작으로 국내에도 잘 알려진 이탈리아 페미니스트다. 호세피나 마르티네스는 사회주의 페미니즘의 시각에서 자율주의와 페데리치의 주장을 비판적으로 다룬다. * * * <혁명의 영점>1) 머리말에서 실비아 페데리치는 자신의 작업을 되돌아보며, 1970년대에 정립하기 시작한 이론 그리고 가사노동 임금 지급 운동이 수행한 전략을 부분적으로 재고해보자고 제안한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가사노동 임금 지급 운동은 ‘가사 노동자’를 핵심적인 사회 주체로 간주했다. 그 전제로서, 가사 노동자의 무급 노동을 착취하고 무급이라는 조건 위에 불평등한 권력관계가 세워졌다는 사실이 자본주의적 생산을 조직하는 기둥이라고 봤다. 하지만 세계 노동시장의 엄청난 팽창과 함께 세계 차원에서 ‘시초 축적’이 재개되고, 복합적 형태로 이뤄진 수탈의 결과를 보면서, 나는 1970년대 초에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더이상 가사노동 임금 지급 운동이 페미니즘을 위해서뿐만 아니라 ‘전체 노동자계급을 위한’ 전략이라고 말할 수 없게 됐다. 현실에서는 급격한 평가절하 탓에 모든 민중의 자산 가치가 사실상 사라지고, 토지 사유화 계획이 빠르게 확장되며, 모든 천연자원이 상업화되고 있었다. 이는 생산수단의 환수와 새로운 사회적 협력 형태의 창출이라는 문제를 긴급하게 제기한다. 하지만 이런 목표가 [가사노동] ‘임금’을 위한 투쟁을 대체하는 것이 아니다. 이 문단은 페데리치의 가장 중요한 작업에 포함된 몇 가지 측면과 더불어 그의 시각이 어떻게 바뀌어 왔는지 압축해서 보여준다. 다른 글2)에서 우리는 사회적 재생산 문제, 가사노동에 관한 자율주의 페미니즘과의 논쟁, ‘결정적인 사회 주체’로서 주부의 위치라는 문제를 살펴봤다. 좀 더 최근에 쓴 글3)에서는, 실비아 페데리치에 앞서 나온 마리아 미스의 글에 반론을 제기하면서, 자본주의가 일으키고 있는 강탈과 ‘시초 축적’의 구조를 다뤘다. 우리는 자본주의에 맞선 투쟁의 열쇠를 남반구 여성에게서 찾을 수 있다는 마리아 미스의 주장을 분석했다. 오늘날의 자본주의에 내재한 경향으로서 강탈이라는 현상은 노동자계급 헤게모니 혁명전략의 필요성을 부정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재확인한다고 우리는 설명했다. 오늘날 노동자계급은 더 늘어났고, 인종차별에 더 많이 시달리며, 여성의 비율도 그 어느 때보다 커졌다. 그리고 노동자계급은 모든 억압받는 이들과 동맹을 맺으며 자본주의에 맞서 강력한 사회세력을 형성할 수 있다. 이제 우리는 페데리치가 제시하는 반자본주의 페미니즘의 최종 목표를 살펴보려고 한다. 그가 말하는 공유재란 무엇인가? 왜 페데리치는 그것을 공산주의에 대치시키는가? 자본주의와 단절하는 혁명 없이 생산수단을 되찾고 새로운 사회적 협력 형태를 창출하는 게 가능한가? 이 같은 질문을 바탕으로 우리는 페데리치의 자율주의 페미니즘 사상과 사회주의 페미니즘 간의 또 다른 논점을 다루고자 한다. 공유재란 무엇인가? 실비아 페데리치의 책 <세계를 다시 매혹시키기> 서문에서, 피터 라인보우4)는 공유재에 대한 첫 번째 규정을 내놓는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공유재란 무엇인가? 페데리치는 이에 대해 추상적인 답변을 피하면서, 두 개의 논점 즉 우리가 분열된 과정을 넘어서기 위한 집단적 재전유(reappropriation)와 집단적 투쟁을 주로 다룬다. 여러 가지 사례가 나온다. 때때로 그는 네 개의 요점을 제시한다. 1) 모든 부를 공유해야 한다. 2) 공유재에는 권리뿐만 아니라 의무도 따른다. 3) 돌봄 공유재는 모든 사회적 위계에 반대하는 저항의 공동체이기도 하다. 4) 공유재는 국가형태와는 ‘다른’ 어떤 것이다. 사실 공유재에 관한 논의는 국가의 위기에 근원을 두고 있는데, 국가는 이제 공유재라는 용어를 자신의 목적을 위해 변질시킨다. 이런 정의에 따르면, 공유재는 특히 돌봄을 위한 협력 방식을 우선시하면서, 국가 외부에서 사회적 협력 방식을 만들어내는 시도다. 페데리치는 ‘공유재의 정치’란 사회 운동의 다양한 실천을 가리킨다고 설명한다. 그것은 “사회적 협력을 강화하고, 우리의 삶에 대한 시장과 국가의 통제를 약화시키며, 부의 공유를 촉진하고, 이렇게 해서 자본의 축적에 한계선을 긋는 것을 추구한다.”5) 그의 구상은 존 홀러웨이가 20년 전에 정식화한 “권력 장악 없이 세상을 바꾼다”는 자율주의적 발상에 바탕을 둔다. 이 경향은 국가를 (무너뜨리는 건 불가능하다고 보기 때문에) 회피하면서 이 체제의 변방에 비자본주의적 협력 방식이라는 대안을 건설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일종의 반-전략적인 사고인데, 철학가이자 트로츠키주의 사상가인 다니엘 벤사이드는 이를 신자유주의 공세 기간에 나타난 ‘정치의 쇠락’을 특징짓는 ‘현대의 유토피아’로 묘사했다. 이런 발상이 새롭지는 않다. 이는 마르크스 이전의 유토피아 사회주의나 무정부주의적 상호부조론으로 거슬러 올라가며, 마르크스는 국제노동자협회에서 이런 주장을 논박했다. 프랑스 무정부주의자 프루동의 추종자들은 상호부조를 위한 은행[프루동은 인민은행 설립을 제안했다]의 재정 지원을 받는 생산·소비 협동조합의 확대를 촉구했다. 이렇게 해서 그들은 혁명 없이 자본주의 사회의 가장 ‘부정적’인 측면을 점진적으로 극복하려 했다. 국제노동자협회 창립 연설에서 마르크스는 그런 입장에 반대하면서, “노예나 농노의 노동과 마찬가지로 임금노동은 과도적이고 낮은 단계의 노동 형태일 뿐이며, 연합한 노동 앞에서 사라질 운명”이라고 강조했다. 더 나아가 이렇게 덧붙였다. “노동 대중의 해방을 위해서는 협동조합적 노동을 전국 차원으로 조직해야 하며, 따라서 국가적 수단을 동원해 조성해야 한다.” 이것은 “토지와 자본의 주인들이 그들의 경제적 독점을 영구적으로 수호하기 위해 언제나 그들의 정치적 특권을 사용할 것”이기 때문에, 저항에 부딪힐 것이었다. 그래서 결론은 자본가들의 권력을 깨부수기 위해 노동자계급이 정치 권력을 장악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마르크스의 시대에 상황이 이랬다면, 오늘날에는 얼마나 더 그렇겠는가? 그 시절에는 상상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자본주의적 생산과 유통의 세계화가 확대되면서, 지역 차원의 소규모 공동체를 만들어보려는 그 어떤 발상도 공허한 게 돼버렸다. 게다가 1세기 이상의 계급투쟁 경험을 거치면서, 그들의 특권이 위험에 처할 때마다 자본가들과 그들의 국가가 모든 반혁명적 무기를 들고 대응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마르크스주의자들에게 자본주의적 생산의 사회화와 세계화는 노동자계급과 피억압 민중이 공산주의를 향한 혁명적 투쟁에 나설 수 있는 전제조건이다. 하지만 페데리치에게는 그렇지 않다. 생산자들이 현대 과학과 기술을 손에 넣어야 할 필요를 부정한다는 점에서, 그의 목표는 역사라는 시계를 뒤로 돌리는 것이다. 그는 현대 기술을 포기하고 우리의 삶을 전원생활로 전환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 기술을 비관하며 변방에서 저항하기 이 문제에 대한 페데리치의 관점은 이탈리아 사회학자 토니 네그리가 대표하는 자율주의의 다른 경향과는 180도 다르다. 네그리는 자본주의 경제의 기술-과학적인 발전과 디지털화 덕분에 인지(cognitive) 노동이 최고 지위를 갖게 된다고 본다. 이런 변화가 공산주의를 ‘지금 여기’에서 창조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줄 거라는 생각이다. 페데리치는 두 가지 측면에서 이 가설을 비판한다.6) 첫째, 그는 네그리가 남반구 여성의 가사노동과 비공식 노동을 시야 밖으로 밀어낸다고 논박한다. 만약 네그리가 이 점을 고려했다면 인지 노동의 우위를 주장할 수 없었을 거라는 얘기다. 이런 면에서는 네그리보다 페데리치의 입장이 남반구와 북반구 간에 존재하는, 그리고 가부장제와 인종차별이 빚어내는 자본주의 세계의 뿌리 깊은 불평등을 더 잘 포착하고 있다. 그러나 페데리치가 제기한 비판의 다른 측면에는 문제가 많다. 페데리치가 보기에, 기술은 공산주의 전망의 토대를 형성할 수 없고, 협력의 새로운 형태로 이어질 수도 없다. 기술의 기원과 발전이 자본주의와 연계돼 있으며 그 논리와 떨어질 수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기술 발전의 성격을 지배와 파괴로 규정함으로써 페데리치는 기술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주의로 빠져든다. 페데리치가 마르크스의 주장을 상당히 왜곡하면서 논쟁을 벌이는 방식으로 자기 주장을 펼치고 있으므로, 그 논지를 하나씩 추적해 보도록 하자. 페데리치는 가사노동을 분석하면서 “마르크스 혁명 이론의 주요한 신조, 즉 자본주의가 발전하면서 모든 형태의 노동이 산업화할 것이며, 가장 중요하게는, 자본주의와 현대 산업이 착취로부터 인간이 해방되기 위한 전제조건이라는 가정을 재고하게 됐다”고 말한다. 첫 번째 논점으로서, 그는 모든 노동이 산업화된다는 주장을 마르크스의 신조로 규정했는데, 비공식 노동, 가사노동, 농촌의 생계노동 등 다양한 비임금 노동 형태가 있다는 점을 볼 때 마르크스의 주장은 틀린 것으로 입증된 듯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페데리치는 마르크스가 절대 법칙이 아니라 경향을 설명하고 있다는 점을 무시한다. 그 점을 차치하더라도, 우리는 자본주의 사회관계가 대단히 넓게 확장됐으며, 농촌 지역은 19세기와 비교할 때 (또는 하다못해 30년 전과 비교할 때) 훨씬 더 산업화됐다는 점을 알 수 있다. 현대 산업과 사회주의의 관계에 대해서, 페데리치는 마르크스의 입장을 숙명적으로 공산주의로 이어지는 일종의 ‘기술 결정론’으로 치부한다. 페데리치에 따르면, 마르크스는 일단 이 과정이 종료되면, 일단 현대 산업이 사회적 필요노동을 최소한으로 감소시키면, 마침내 우리가 우리의 존립과 자연환경의 주인이 되는 시대가 시작될 것이며, 우리의 필요를 충족시킬 수 있을 뿐 아니라 우리의 시간을 좀 더 수준 높은 활동을 위해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을 거라고 여겼다. 먼저 우리는, 자동으로 공산주의에 도달하게 될 기술적 필연성 같은 얘기를 마르크스에게 덮어씌우는 것만큼 터무니없는 주장도 없을 거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마르크스와 엥겔스, 그리고 이들을 이어서 혁명적 마르크스주의 전통을 계승한 레닌, 트로츠키, 룩셈부르크, 그람시는 계급투쟁에 초점을 맞추고 노동자계급이 자본가계급으로부터 독립한 정치조직을 건설해야 할 필요성을 강조했다. 다름 아니라 이런 역사적 도약이 그냥 보장되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페데리치는 여기서 더 나아간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생산력 발전이 사회주의를 가능케 해준다고 주장했다는 점에서 마르크스가 틀렸다는 것이다. 그가 보기에 마르크스의 주장이 틀린 이유는 이런 것이다. <자본론> 1권이 출판된 지 150년이 지났고, 마르크스가 사회혁명에 필수적이라고 여긴 객관적 조건은 성숙한 정도를 뛰어넘은 상황인데도, 자본주의는 녹아내릴 조짐을 보여주지 않는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가 ‘녹아내릴’ 거라고 말한 적이 결코 없다는 자잘한 측면은 제쳐놓을 수 있다. 이 문제에서 페데리치는 마르크스보다는 네그리와 더 논쟁을 벌이는 것 같다. 페데리치는 기술 결정론이 마르크스주의의 특성이라고 주장하지만, 기술 결정론에 빠지는 걸 피하고자 한다면, 계급투쟁의 지형 위에서, 착취당하는 사람들의 정치적, 전략적 투쟁이라는 지형 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들여다봐야 한다. 자본주의가 왜 아직 무너지지 않았는지에 대한 진지한 설명을 찾고자 한다면, 최소한 20세기를 관통하며 일어난 혁명과 반혁명이라는 거대한 역사적 경험을 고려해야 한다. 또한 패배와 퇴행을 유발한 노조 관료들의 역할, 사회민주주의에서 스탈린주의에 이르는 정치 관료들의 역할도 고려해야 한다. 그렇지만 페데리치는 그런 노력을 전혀 기울이지 않는다. 사실 그는 러시아혁명이나 20세기에 일어난 노동자계급의 거대한 혁명적 투쟁을 거의 언급하지 않는다. 그 대신 기술 결정론을 둘러싼 논의만 무성하게 이뤄진다. 그는 이런 식으로 설명한다. 자본주의가 발전시킨 생산수단을 우리가 다른 목적을 위해 손쉽게 넘겨받아 사용할 수는 없다는 점을 강조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국가를 장악할 수 없고, 자본주의적인 산업과 과학, 기술을 장악할 수도 없다. 그것은 착취를 목표로 만들어졌고, 그 점이 국가, 산업, 과학, 기술의 구조와 작동방식을 결정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착취당하고 억압받는 사람들이 수탈자를 수탈하고 자신의 목적을 위해 생산수단을 장악하려는 투쟁이 가망 없는 것이라면, 어떤 미래가 가능할까? 기술에 대한 페데리치의 비관은 과거에 결박된 유토피아적 반자본주의로 귀결된다. 마치 21세기 기술 발전 사회에서 멀리 떨어진 피난처가 우리의 유일한 탈출구라도 되는 것처럼 말이다. 좀 더 정확히 말해서 이는 땅, 농촌 지역, 공동의 돌봄노동과 연결된 생존을 위한 공간 만들기를 뜻하는 것일 수 있다. 이런 시각에서 페데리치는 라틴 아메리카의 채굴산업 확장에 저항하는 농민과 원주민 공동체의 투쟁, 빈민가의 비공식 노동 협업기구, 그 밖의 일부 아프리카 나라에서 볼 수 있는 공동체 경험을 바라본다. 문제는 그가 결국 빈곤을 미덕으로 탈바꿈시킨다는 점이다. 그는 에너지 자원에서 식수 공급 시설까지, 농업 기술에서 공공의료까지, 누구나 이용할 수 있어야 할 재화와 기술 자원에 접근할 기회를 박탈당한 공동체의 생존 경험을 하나의 대안으로 제시한다. 중심부 나라들이라면 그의 공유재 구상은 시간은행*, 도시에서 텃밭 가꾸기, 물물교환 경제로 표현될 것이다. [* 시간은행(Time Bank): 타인에게 도움이 되는 일을 하고 그 시간만큼의 ‘시간 화폐’를 적립해, 그것으로 자신이 필요할 때 타인의 도움을 얻는 일종의 마을 공동체 운동.] 이와 같은 기술에 대한 비관과 생활의 농촌화를 지향하는 주장은, 자본주의가 초래한 생태 위기에 관한 논쟁에서 유명해진 탈성장이라는 구상과 겹친다.7) 탈성장 경향의 다수는 기술이 누가 사용하는가에 좌우되는 ‘수단’ 또는 ‘중립적’ 도구가 아니라, 그 자체가 자본주의 지배구조의 ‘흔적’을 담고 있다고 주장한다. 부분적으로는 이 말이 옳다. 자본주의가 기술 발전의 ‘형태’를 규정한다. 독점자본가들에게 이익을 주지 않는다는 이유로 무수히 많은 발견이 폐기되거나 봉인되며, 오직 상품화 가능성을 가진 것만이 개발된다. 팬데믹을 겪는 동안 우리는 이 사실을 입증하는 방대한 증거를 목격했다. 또한 마르크스는 자본가들의 수중에서 과학기술 발전이 노동자를 위해 더 많은 자유시간을 만들어내는 게 아니라 오히려 더 많은 잉여노동을 창출할 뿐이며, 노동자에게서 노동의 짐을 덜어주는 게 아니라 더욱 육중한 쇠사슬로 묶어버리고, 노동자에게 규율을 강제하고 통제하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된다는 점을 분석했다. 자본가들의 수중에서 기술이 끔찍한 파괴력, 대중을 절멸시킬 수단, 생태 위기로 이어지는 모든 추세를 만들어냈다는 점 또한 사실이다. 그러나 자동화가 이뤄지는 과정에서 마치 기계 자체가 일종의 영혼을 지닌 것처럼 이런 추세가 발생하도록 예정된 것은 아니다. 독점자본가들이 인간의 공유자산을 사적으로 전유하면서 이런 문제가 발생한다. 우리가 과학과 기술을 포기해야 한다면, 이는 몇백 년에 걸친 인간 노동의 성과를 포기한다는, 또는 자본가계급에 헌납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기술에 대한 이런 비관적인 생각은 어디까지 뻗어나갈까? 우리는 백신, 암 연구, 인공지능, 태양열 전기에너지, 로봇공학을 내버려야 할까? 페데리치는 공유재의 정치가 “과거로 회귀하자는 불가능한 약속을 하는 게 아니라, 이 세계에서 우리의 운명을 집단적으로 결정하는 힘을 되찾을 수 있는 가능성을 뜻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인간의 공유자산을 부정하는 그의 태도가 이 집단적 가능성을 제약한다. 우리는 그와는 반대되는 입장을 지지한다. 자본주의는 산업 발전 없이 존재할 수 없지만, 우리는 자본가들 없이도 현대 산업과 과학 발전을 지속할 수 있다. 과학 연구의 토대를 새롭게 조성하면서 생산을 재편하는 것도 가능하다. 많은 분야에서 자본주의 경제가 급격하게 축소될 수 있다. 예를 들어 자동차산업은 무공해 대중교통으로 방향을 바꿀 수 있다. 자본주의는 상품생산의 배출구를 마련하기 위해, 광고와 계획적 진부화를 이용해 소비지상주의와 ‘인위적인 수요’를 창출한다. 그 반대편에서 자본주의는 가난의 바다를 만들어낸다. 사적 이윤에 생산이 좌우되는 사회가 아니라면, 어떤 분야에서는 ‘탈성장’을 시도하고 또 다른 분야에서는 새 기술을 적용하며 생산을 확대하는 게 가능할 것이다. 그런 문제는 사회적으로 무엇이 필요한지 판단하고 자연과 공존하는 방식의 민주적 계획에 따라 결정돼야 한다. 사회화와 자동화: 가사노동에 대하여 돌봄노동이나 가사노동의 경우 기계가 제공할 수 없는 스킬, 감정, 애정이 있어야 하기 때문에 완전히 자동화할 수 없다고 페데리치는 주장한다. 모든 사회적 노동이 자동화할 수는 없기 때문에 마르크스의 강령은 쓸모없게 된다는 게 그의 결론이다. 여기에는 두 가지 문제가 있다. 첫째, 페데리치는 우리 마르크스주의 페미니스트들이 요구하는 가사노동의 사회화가 이 업무의 완전한 자동화를 뜻하는 것처럼 그릇되게 가정한다. 그러나 가사노동의 사회화가 반드시 전면적인 자동화를 뜻하는 건 아니다. 그것은 가사노동을 가정이라는 사적 영역에서 떼어내 사회 전체가 떠맡고 조직하는 업무로 전환하는 것을 뜻한다. 다시 말해서, 이는 이들 업무가 노동력 재생산과 사회적 재생산에 기여하는 일이라고 인정하는 것이다. 이 사회화는 물론 여전히 많은 가정에서 손으로 하는 일을 상당 정도로 자동화하는 것을 의미한다. 20세기 초 소련에서 가사노동의 사회화는 공동 빨래방, 어린이집, 공동 식당 등의 형태를 취했다. 오늘날의 세계에서는 이러한 사회적 재생산 업무의 상당 부분이 민간부문(식당, 패스트푸드 체인, 빨래방 등)과 공공부문(병원, 공립학교 등) 모두에서 이미 임금노동이라는 방식으로 사회화됐고, 부분적으로 자동화됐다. 그렇지만 21세기에도 여전히 가사노동의 무거운 짐이 가정 내에 보이지 않는 노동으로 남아 있으며, 당연히 ‘여성의 일’인 것처럼 여겨진다. 이 일의 상당 부분을 공동으로 운영하는 구내식당, 빨래방, 어린이집, 양로원 등의 형태로, 즉 전문 인력을 갖추고 있으며 누구나 무상으로 이용할 수 있는 질 좋은 공공시설의 형태로 사회화할 수 있다. 이렇게 해서 사적 영역에 남아 있는 가사노동을 최소치로 줄일 수 있을 것이다. 둘째, 사적 소유를 기반으로 하지 않는 사회에서는 돌봄노동을 사회 구성원 전체가 자율적으로 조직한 노동으로 전환할 수 있을 것이고, 그러면 돌봄노동은 더이상 짐으로 여겨지지 않을 것이다. 사람들 간의 관계에 수반되는 애정과 감정은 더 이상 돈 문제, 급여를 받아야 할 필요, 불안정한 형편, 가부장적 억압, 인종차별, 자유시간의 부족함 등에 영향받지 않을 것이다. 애정은 새로운 방식으로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상상력의 빗장이 풀릴 것이고, 도시의 재구성, 무공해 에너지 자원 개발, 천문학 연구 같은 다양한 분야에서 엄청난 창의력이 폭발할 것이다. 사회 전체가 그런 사회적 노동의 혜택을 누릴 것이다. 공산주의의 과거와 미래 <독일 이데올로기>에서 마르크스는 이렇게 말한다. 개인들이 자기 활동을 실현하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단지 자신의 생존 자체를 이어가기 위해서라도, 현존하는 생산력의 총체를 전유해야 하는 상황이 됐다. 이 전유는 우선 전유되는 대상 즉 생산력에 의해 결정된다. 그 생산력은 총체로 발전해왔으며, 오직 보편적 교류 속에서만 존재한다. 추정에 따르면, 2022년 말에 이르면 가장 부유한 상위 10%가 모든 사회적 부의 76%를 차지하는 반면, 8억6천만 명이 극빈층으로 살아가게 될 거라고 한다. 다양한 국제단체들이 우크라이나 전쟁, 인플레이션, 식량 부족의 결과로 파국적인 기근 사태를 겪을 거라고 경고한다. 이 같은 조건에서 인류의 상당수는 생존을 장담할 수 없게 된다. 자율주의 페미니즘이 제안한 생존 공동체로는 이 상황에 탈출구를 만들어낼 수 없다. 그들은 “자본의 축적에 한계선을” 긋고 현실의 빈곤을 사회화한다는 유토피아적 발상을 넘어서지 않는다.8) 페데리치는 16세기 독일의 토마스 뮌처와 이단 종파가 이끈 농민 반란과 더불어 전자본주의 사회의 농민 공동체 경험을 예로 든다. 여기에서 그는 공유재의 선례를 찾아낸다. “모든 재산은 공동으로 가져야 한다(Omnia sunt communia)”는 것이 재세례파 농민과 도시 평민이 군주와 로마 교황청에 맞서 치켜든 구호였다. 실제로 여러 차례의 거대한 반란은 계급 사회에 맞선 공동체주의의 씨앗처럼 보일 수 있다. 엥겔스는 뮌처의 발상이 상상 속에서 공산주의를 예견한 거라고 설명했다.9) 그는 [뮌처가 생각한]신의 왕국을 지상에 건설하는 것은, 사적 소유가 없고 사회 구성원 위에 군림하는 국가권력이 없는 사회, 즉 계급 차별이 없는 사회의 건설을 뜻한다고 분석했다. 하지만 그들의 투쟁 의지와 영웅적 행위에도 불구하고, 그 역사적인 시대의 배타적이고 파편화된 운동은 자본주의라는 구조를 깨뜨릴 수 없었으며, 자본주의를 넘어서는 대안 사회를 건설할 수도 없었다. 귀족과 신흥 자본가계급의 무력으로 잔혹하게 진압됐다는 사실이 이 농민 반란의 한계를 보여주는 비극적인 증거다. 어쨌든 페데리치가 공유재의 정치를 위한 선례를 찾기 위해 16세기 농민 투쟁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는 점은 놀라운 일이다. 그와 동시에, 페데리치는 지난 150년간 자본주의에 맞선 투쟁에서 남성과 여성으로 이뤄진 수없이 많은 노동자와 농민이 발산한 거대한 역사적 창조력을 간과하는 듯하다. 거기에는 부르주아적 유럽의 강대국 프랑스를 뒤흔든 파리코뮌 사례가 있다. 러시아혁명에서는 차르 체제를 무너뜨리고 14개국 연합군을 물리친 노동자와 농민이 자신의 국가를 건설하기로 결의했으며, 새로운 토대 위에서 경제를 재편하고 세계혁명의 도약대가 되고자 했다. 스페인혁명, 포르투갈의 카네이션 혁명*, 공장을 비롯한 여러 현장에서 이뤄진 노동자 통제와 자주 관리의 다양한 경험 등 자기조직화의 또 다른 수많은 사례가 자기의 운명을 스스로 거머쥔 노동자계급의 잠재력을 보여준다. 여기에는 최근 아르헨티나와 그리스의 공장 자주 관리 경험도 포함된다. 경제위기 상황에서 노동자들이 지역 주민, 학생, 빈민과 함께 생산 운영을 장악한 사례다. [* 포르투갈 카네이션 혁명: 1974년 4월 25일 좌파 청년 장교들이 독재정권에 반발해 반란을 일으켰다. 시민들이 이 반란을 지지하는 의미로 병사들에게 카네이션을 달아주면서 카네이션 혁명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벤사이드가 ‘현대의 유토피아’라고 표현한 페데리치 식의 관점은 계급과 국가가 없는 사회로 전진하는 수단으로서 노동자계급 사회주의 혁명의 가능성을 부정한다. 이런 경향이 재등장하게 된 역사적 배경에는 신자유주의 공세뿐 아니라 스탈린 관료체제의 지배라는 끔찍한 경험이 있다. 이를 고려할 때, 그 관료체제가 등장한 역사적 조건을 이해하고 ‘일국 사회주의’ 이론의 역사적 실패를 평가하기 위해서는, 혁명적 마르크스주의와 스탈린주의를 명확하게 구분하는 게 필수적이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잘 알려진 문구에서 이렇게 주장했다. 우리에게 공산주의란 조성돼야 할 어떤 상태, 현실이 자신을 꿰맞춰야 할 어떤 이상을 뜻하지 않는다. 우리는 현 상태를 폐지하는 현실의 운동을 공산주의라고 부른다. 페데리치는 이 문구를 언급하면서, 공유재가 바로 현 상태를 폐지하는 현실의 운동과 연계돼 있다고 결론 내린다. 그러나 정말로 현 상태를 넘어서려면 운동은 해방된 사회라는 목표와 분리되면 안 된다. 공유재의 정치는 눈앞의 과제만을 붙들고 이 목표를 거부함으로써, 현존하는 사회의 변방에서 자잘한 개혁을 추구하는 것으로 제한된다. 팬데믹, 경제위기, 환경위기, 거기에 더해 전쟁과 군국주의까지, 이 모든 것은 자본주의의 파괴적 경향이 계속해서 가차 없이 작동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착취당하는 사람들과 억압받는 사람들이 수탈자를 수탈해야 하며, 현존하는 생산력 전체를 장악해야 한다. 오직 이런 방식으로만 ‘모든 재산을 공동으로 갖는’ 사회를 향한 열망을 현실로 만들어낼 수 있다. 주 1) Silvia Federici, Revolution at Point Zero(Oakland, CA: PM Press, 2012). 2) 호세피나 마르티네스, “사회적 재생산 페미니즘인가 사회주의 페미니즘인가?” 3) Josefina L. Martínez, “Patriarcado, acumulación de capital y desposesión,” Contrapunto, May 7, 2022. 4) 미국의 역사가이자 E. P. 톰슨의 제자인 피터 라인보우는 페데리치, 조지 카펜치스와 함께 미드나잇 노트 콜렉티브(Midnight Notes Collective)의 구성원이다. 이 모임은 ‘역사적 공유재’를 연구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5) Silvia Federici, Re-enchanting the World: Feminism and the Politics of the Commons(Oakland: PM Press, 2018). 6) 페데리치에 따르면, 이탈리아 자율주의자들은 마르크스의 <그룬트리세(정치경제학 비판 요강)>에 과도하게 ‘매혹’돼 있다. 7) 최초로 탈성장에 대한 체계적인 설명을 내놓은 사람으로는 프랑스의 세르주 라투슈가 있다. 스페인에서는 카를로스 타이보가 탈성장을 옹호하는 주요 인물이다. 8) 안드레아 다트리도 이 점을 다뤘다. Andrea D’Atri, “El capital nos empuja a la lucha por la subsistencia, pero no puede ser el horizonte estratégico de nuestro feminismo,” La Izquierda Diario, November 13, 2021. 9) Friedrich Engels, The Peasant War in Germany, 1850. 글쓴이 호세피나 마르티네스, 2022년 7월 17일 옮긴이 오연홍 꺾쇠괄호[ ] 안의 문구는 옮긴이가 추가한 것이다. 기사 원문 https://www.leftvoice.org/feminism-and-communism-a-debate-with-silvia-federici/ 연재 소개 페미니즘이라고 하면 ‘남성 혐오’나 ‘갈라치기’부터 떠올리는 사람들이 많다. 자유주의 페미니즘 또는 래디컬 페미니즘이 여전히 주류인 것도 맞다. 하지만 페미니즘에는 다른 길이 있다. 착취, 가난, 전쟁, 기후 위기로 점철된 자본주의라는 체제 안에서 남성과 더 잘 경쟁하기 위한 페미니즘이 아니라 자본주의 자체를 깨뜨려야 한다고 주장하는 페미니즘, 이를 위해 또 다른 누군가를 배제하는 게 아니라 모든 성별, 국적, 인종의 노동자와 청년이 똘똘 뭉쳐 함께 싸워야 한다고 외치는 페미니즘이 있다. 2003년에 아르헨티나에서 만들어지기 시작했고 지금은 독일, 볼리비아, 브라질, 칠레, 코스타리카, 스페인, 미국, 프랑스, 이탈리아, 멕시코, 페루, 우루과이, 베네수엘라에서도 활동하는 국제 ‘빵과 장미’ 네트워크가 그것이다. 한국에서 노동자계급에 기반한 변혁적 여성운동을 건설하려는 우리는 혁명적 페미니즘의 중요한 사례로 ‘빵과 장미’를 주목하면서, 이들의 주장과 실천을 소개하고자 한다. ① 사회주의 페미니즘이란 이런 것이다(타티아나 코차렐리) ② 왜 여성이 사회주의를 위해 투쟁해야 하는가?(안드레아 다트리) ③ 여성 자본가에 맞서는 여성 노동자들(타티아나 코차렐리) ④ 우리는 임신 중지권을 이렇게 쟁취했다(너새니엘 플라킨) ⑤ 혁명은 여성의 삶을 어떻게 바꾸는가?(안드레아 다트리) ⑥ 사회적 재생산과 사회주의 페미니즘(호세피나 마르티네스) ⑦ 페데리치의 주장에 대한 비판적 토론(호세피나 마르티네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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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사회적 재생산 페미니즘인가 사회주의 페미니즘인가?사회적 재생산 페미니즘인가 사회주의 페미니즘인가? 수잔 퍼거슨의 책 <여성과 일: 페미니즘, 노동, 사회적 재생산>에 대하여 2020년 플루토 출판사에서 수잔 퍼거슨의 책 <여성과 일: 페미니즘, 노동, 사회적 재생산>이 발행됐다.1) 이는 억압과 자본주의적 착취에 맞선 투쟁에서 사회주의 페미니즘, 사회적 재생산 페미니즘, 그 밖의 여러 정치전략 간에 벌어진 논쟁을 파헤쳐 볼 수 있는 좋은 기회를 만들어준다. 스페인 <일간 좌파> 편집자인 호세피나 마르티네스가 서평의 형식을 빌려 사회적 재생산 이론을 둘러싼 여러 논점을 살펴본다. * * * 이 책을 펴내면서 퍼거슨은 “사회적 재생산 페미니즘의 쇄신”, “자본에 맞선 투쟁의 중심에 억압에 맞선 투쟁을 배치하는 변혁적 정치를 위해 더욱 탄탄한 이론적 기반을 마련하는 작업”에 기여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이 목표 아래 퍼거슨은 책의 첫 대목에서 역사적 개괄을 시도하면서, 다음의 세 가지 경향이 있다고 규정한다. 평등 페미니즘, 비판적 평등 페미니즘(또는 사회주의 페미니즘), 사회적 재생산 페미니즘. 책의 두 번째 부분에서 그는 사회적 재생산 페미니즘 내에서 진행된 다양한 논쟁을 다루고, 자율주의 페미니즘에 반론을 제기한다. 마지막 대목에선 ‘99%의 페미니즘’이라는 관점을 제시한다. 퍼거슨의 책은 자본주의 내에서 체계적으로 세워진 억압과 착취의 관계에 초점을 맞춘다는 점에서 장점이 있다. 역사를 관통하며 여성의 일에 관한 논쟁을 검토하면서 그간 덜 알려져 왔던 논의 성과들, 예컨대 19세기 유토피아 사회주의자들의 주장을 밝혀낼 수 있었다. 또한 이 책은 가사노동과 가치법칙을 둘러싸고 자율주의 경향과 벌인 일부 중요한 논쟁을 명확하게 하는 데 도움을 준다. 그 점에서 이 책은 추천할 만하다. 퍼거슨은 여성 억압의 문제가 “자본에 맞선 투쟁의 중심에” 있으며, 자본주의에 대항하는 계급투쟁에서 보조적으로 덧붙여지는 요소가 아니라 필수 구성요소라고 주장한다. 우리는 일반적 형태로 서술된 이 명제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하지만 역사적 논쟁과 정치전략을 다룬 이 책의 다른 명제들에는 불분명한 지점이 있다. 궤적과 계보에 관하여 퍼거슨이 제시한 세 갈래의 역사적 궤적을 다루기에 앞서, 그의 책이 개입하고 있는 논쟁을 들여다봐야 한다. 2019년 4월 발행된 이론지 <급진철학>에 사회적 재생산에 관한 자료들이 게재됐다. 여기에는 실비아 페데리치가 쓴 개괄적인 글2)과 알레산드라 메자드리가 쓴 분석적인 글3)이 포함된다. 이 글들에서 그들은 친지아 아루자, 티티 바타차리야, 수잔 퍼거슨 등 자기 입장을 사회적 재생산 이론으로 규정하는 논자들의 주장과 다양한 각도에서 논쟁을 벌인다. 메자드리는 이들의 시도4)가 사회적 재생산 ‘이론’이라고 간주할 수 있는지에 대해 의문을 던진다. 페데리치는 “사회적 재생산이라는 시각에서 사회의 현실을 들여다보는 것 자체로는 마르크스주의적인 또는 일반적으로 말해서 급진적인 입장을 취하는 것이 아니”라고 지적한다. 따라서 “분석을 위한 범주로서 ‘사회적 재생산’은, 자신을 ‘사회적 재생산 이론가’라고 말하는 페미니스트들의 접근과는 달리, 하나의 정치적 정체성으로 채택될 수 없다”는 것이다. 페데리치가 보기에 사회적 재생산을 다루는 논쟁에서 특징적인 것, 1970년대 가사노동 임금 지급 운동5)을 이끈 활동가들이 기여한 것 중 ‘혁명적’이라고 여기는 것은, 가사노동 자체에 초점을 맞추는 게 아니라 그것을 모든 점에서 공장 노동과 똑같이 생산적인 노동 형태로 간주한 것이었다. 다시 말해서 가사노동이라는 영역에서도 자본주의적 착취가 일어나고 있는데, 그들이 보기에 지금껏 마르크스주의자들과 무정부주의자들은 이를 무시해 왔다는 주장이다. 메자드리와 페데리치의 글은 사회적 재생산 이론 내의 ‘이론적-정치적 논쟁’을 자율주의 경향과 ‘마르크스주의자’ 내지 ‘마르크스 진영’으로 거론되는 필자들 사이의 공개적인 논쟁으로 끌어간다.6) 그 논쟁이 펼쳐지는 지형 위에서 퍼거슨은 사회적 재생산 이론 자체의 계보, 즉 그가 자율주의 진영과 주류 사회주의 페미니즘 둘 다와 구별하고자 하는 ‘전통’을 제시하려 한다. 그는 엥겔스 이래로 사회주의 페미니즘이 젠더와 계급의 관계를 개념화하는 데에서 ‘이중체계론’의 오류에 갇혀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 점을 다루기 전에, 그리고 사회적 재생산 이론 내의 공개적인 논쟁의 지도를 완성하기 위해, 사회적 재생산을 다루는 ‘마르크스’ 학파(퍼거슨이 쓰는 표현이다)가 리즈 보걸의 책 <마르크스주의와 여성 억압>7)을 참조 기준으로 인용하기는 하지만 그 관점이 모두 똑같지는 않다는 점을 언급해야겠다. 앞으로 보게 될 것처럼 퍼거슨은 자신의 위치를 주류 사회주의 페미니즘 전통에서 멀리 떼어놓는다. 보걸 자신은 한편으로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작업에서 중요한 오류, 실수, 누락이라고 판단한 것들을 지적하면서도, 더 전반적인 자본주의 사회관계의 일부로서 여성 억압을 이론적으로 파악하고 역사적으로 분석하는 데에서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기여한 바를 옹호한다.8) 자신의 책에서 보걸은 초기 저작을 비롯해 <공산당선언>, <자본론>, <가족, 사유재산, 국가의 기원> 등 젠더와 계급 문제를 다루는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작업에 담긴 다양한 측면을 밝혀낸다.9) 그는 또한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여러 사회주의 조직 내에 여성을 위한 ‘특별지부’를 설립하기 위해 국제노동자협회 내에서 수행한 실천적인 투쟁에도 관심을 쏟는다.10) 이 투쟁은 노동자 운동이 억압에 맞선 투쟁에 나서도록 그들이 전개한 투쟁의 한 부분이었다. 퍼거슨은 이런 측면을 전혀 다루지 않는다. 이제 ‘세 갈래의 궤적’이라는 발상을 살펴보자. 앞서 말했듯이 퍼거슨은 페미니즘 사상의 세 가지 경향을 다음과 같이 제시한다. 평등 페미니즘, 비판적 평등 페미니즘(여기에 주류 사회주의 페미니즘이 포함된다), 사회적 재생산 페미니즘. 평등 페미니즘은 이른바 ‘여성 문제’에 기원을 두고 있으며, 18세기 말 부르주아 혁명이라는 맥락에서 메리 울스턴크래프트와 올랭프 드 구주 등 당시 계몽된 페미니스트들에 대한 고찰과 결부된다. 이 경향은 새로 등장한 사회에서 여성이 겪는 수모에 대한 이성적-도덕적 비판에 바탕을 둔다. 여성은 이성의 왕국에서 여전히 배제된 상태였고, 가사노동이라는 사적 영역으로 밀려났다. 철학적, 법률적, 문화적 논의에서는 여성을 본래부터 남성보다 열등한 존재로 규정하면서 이런 종속을 정당화했다. 평등 페미니즘은 여성이 남성에게서 독립할 수 있도록 일자리를 얻을 기회와 평등한 교육을 받을 기회를 중요하게 여긴다. 이 사상가들은 계몽된 최상류층에 속했기 때문에 계급 불평등에 대한 비판으로 나아가지는 못했다. 퍼거슨의 책에 담긴 명제에 비춰 보면 둘째, 셋째 궤적이 더 중요하다. 퍼거슨은 자신이 말하는 사회주의 페미니즘과 사회적 재생산 페미니즘 간의 차이점을 규정한다.11) 그가 보기에 이 두 개의 궤적 또는 초점 간의 차이는 이론적인 세부 사항의 문제라기보다는, “궁극적으로 사회주의 페미니즘 전통에서 정치적 중점 사항의 차이가 왜, 어떻게 발생하는가에 대한 설명”의 문제다. 이것이 어떤 문제인지 살펴보자. 사회적 재생산 페미니즘의 역사적 뿌리를 추적하기 위해 퍼거슨은 여성의 상황을 다룬 유토피아 사회주의 사상가들의 저작을 재검토한다. 그는 1825년 <인류의 절반, 여성의 호소>라는 제목의 책을 출판한 윌리엄 톰슨과 안나 윌러의 공헌을 강조한다.12) 퍼거슨에게 이들은 최초로 “현대의 정치경제학자들이 자본주의적인 시각에서 ‘생산적’ 노동을 분석할 때 사용한 것과 똑같은 렌즈를 이용해” 집안에서의 여성 노동을 분석한 사람들이다. 그리고 여성 억압을 “재생산노동과 생산적 노동의 역학관계”에 연결함으로써 “페미니즘적인 노동이론의 역사에 ‘전환점’을 찍었다.” 이 ‘혁신’의 파급력이 크지는 않았다는 점을 퍼거슨도 알고 있지만, 그는 이것을 사회적 재생산 페미니즘의 기원으로 간주한다. 사회주의 페미니즘에 대해서 그는 이렇게 주장한다. [사회주의 페미니즘은] 여성의 무급 가사노동을 필수적인 것으로 여기지만 자본의 운동과는 관계가 없는 것으로 다룬다. 가부장적 권력관계는 자본주의 외부에 존재하는데, 이는 그에 맞선 투쟁이 단지 자본주의에 맞선 투쟁에 덧붙여진 것이라는 뜻이다. 그에 따라 페미니즘은 지금까지의 ‘계급’투쟁과 동시에 수행되거나 아니면 그것에 포괄되는 (나중에 회자된 공산당의 어법을 따르자면) ‘별도의 투쟁’이 된다. 이와 같은 정의를 받아들인다면 사람들은 퍼거슨이 (여성들의 투쟁이 노동자계급을 ‘분열’시키며, 따라서 ‘혁명 이후로 미뤄야’ 한다고 주장할 정도로 멀리 가버린) 2차 세계대전 이후 공산당들의 어리석은 입장과, 억압에 맞선 투쟁과 착취에 맞선 투쟁을 결합하려 한 혁명적 전통을 구별하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퍼거슨이 작성하고 있는 계보는 그런 게 아니다. 그가 보기에 사회주의 페미니즘 전통은 플로라 트리스탄에서 출발해 이후 여성 문제에 대한 베벨과 엥겔스의 ‘이중체계론’적 접근과 결합하면서 이와 같은 보수적인 입장으로 귀결됐다. 퍼거슨의 관점에서는, 방금 언급한 인물들이 나중에 ‘계급 환원론’이라고 규정된 이해방식으로 가는 길을 닦았으며, 노동자 운동 내에서 억압에 맞선 투쟁을 무시하는 풍토를 초래했다는 것이다. 이런 관점은 몇 가지 이유에서 주목할 필요가 있다. 한편으로 그는 베벨과 엥겔스를 똑같이 취급한다. 하지만 이는 엥겔스가 여성 억압이 자연적이거나 정신적인 요소의 결과가 아니라 사회적, 역사적 기원이 있다는 점을 보여주기 위해 부분적으로 베벨의 글에 맞대응하는 방식으로 가족에 관한 고전적인 글을 썼다는 사실을 무시하는 것이다.13) 다른 한편으로 사회주의 페미니즘의 기원을 다루는 데에서 퍼거슨의 참조 문헌은 플로라 트리스탄에서 출발해 마르크스를 언급하지 않은 채 엥겔스와 베벨로 건너뛴다. 마르크스는 어느 ‘계보’에 포함되는 것인지 불분명하다. 사회주의 페미니즘의 전개가 이렇게 다뤄지는 이유는 무엇인가? 퍼거슨은 자본주의에서 생산적 노동과 무급 재생산노동의 관계에 대한 적절한 이론화가 이뤄지지 않았다고 지적한다. 엥겔스 이래로, 여성 억압에 대해서는 평등 페미니즘의 입장에 더 가까운 설명 방식이 널리 퍼져있다는 것이다. 비록 그것이 계급적 비판을 수반한 것일지라도 말이다(이 점 때문에 그는 이 경향을 비판적 평등 페미니즘으로 분류한다). 퍼거슨은 사회주의 페미니즘이 가사노동을 단지 성별 노동 분업이라는 토대 위에서만 분석하며, 고립된 개별 가정에서 고단하고 무거운 가사노동의 짐을 짊어져야 하는 여성의 문제로만 여성 억압을 설명한다고 생각한다. 그 결과 자본주의에서 생산적 노동과 재생산노동의 관계를 제대로 이론화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사회주의 페미니스트들은 가사노동과 육아를 필수노동으로 여기지만, 그것은 ‘삶’에 필수적이지 ‘자본’의 운동에 필수적이지는 않다고 본다.” 퍼거슨의 주장은 핵심적으로 사회주의 페미니즘이 생산적 노동과 재생산노동이라는 두 요소를 별개로 분석하면서 그것의 체계적 연관성을 놓치고, 그 결과 계급투쟁을 앞세우면서 여성의 투쟁을 뒤로 미루는 정치적 입장에 길을 터준다는 것이다. 퍼거슨은 알렉산드라 콜론타이와 클라라 체트킨의 작업에서만 약간의 예외를 언급하는데, 그들은 이런 경향을 거부하고 “당원들의 성차별과 안티페미니즘”에 맞서 싸움으로서 오류를 피했다는 것이다. 또한 그는 콜론타이와 체트킨이 “여성해방은 자본주의의 타도를 조건으로 한다고 주장하면서도, 그 투쟁의 한 부분으로 여성 쟁점을 명확하게 다뤄야 하며 나중으로 미뤄서는 안 된다는 점을 비중 있게 내세우고 있다”고 지적한다. 그러나 이 점을 지적한 뒤에 그는 “체트킨과 콜론타이의 이론적인 틀은 그들이 설정한 과제에 충분히 부합한다고 볼 수 없다”고 덧붙인다. 즉 퍼거슨의 관점에서는, 사회주의 페미니즘 전통은 가사노동을 이론적으로 잘못 이해한 탓에 출발점부터 결함이 있었으며, 이 때문에 이후의 ‘이중체계론’ 흐름과 ‘계급 환원론’이 등장하고 결국에는 노동자계급 여성의 투쟁에 완전히 보수적인 스탈린주의 입장으로 귀결됐다는 것이다. 몇 가지 이유에서 그의 명제는 잘못됐다. 첫째, 그것은 마르크스와 엥겔스 이후 사회주의와 공산주의 운동에서 펼쳐진 정치적, 이론적, 전략적 투쟁의 총체적인 역사에서 사회주의 페미니즘 운동의 역사를 추상적으로 떼어낸다.14) 이 일련의 투쟁은 제2인터내셔널과 제3인터내셔널, 스탈린주의의 등장, 그리고 스탈린 반혁명 집단에 맞선 혁명적 마르크스주의의 투쟁에 걸쳐 이어졌다. 퍼거슨은 이 두 개의 역사적 흐름을 서로 무관한 것처럼 보는 듯하다. 평론가들은 사회주의 페미니즘과 자유주의 페미니즘이 각각 혁명 정치와 개량주의 정치에 복무한다는 점을 근거로 이들을 구별하는 경향이 있다. 이런 잣대는 너무 뭉툭하다. 이것으로는 두 전통이 공유하는 가설과 사회주의 페미니즘 전통에 남아 있는 이론적 모호함을 포착할 수 없다. 퍼거슨은 (부르주아) 평등 페미니즘과 비판적 평등 페미니즘 또는 사회주의 페미니즘 사이에 있을 거라고 가정하고 있는 소위 이론적 동의 지점을 강조한다. 자본주의 사회관계를 옹호하는 사람들과 그것에 맞서 투쟁하는 사람들 간의 이론적, 전략적 차이는 내버려 둔 채 말이다. 결국 퍼거슨의 접근법이야말로 너무 뭉툭한 잣대를 들이대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는 여성 억압 문제와 자본주의에 맞선 투쟁에서 마르크스주의, 사회민주주의적 개량주의, 스탈린주의의 차이를 구별할 수 없다. 한편 우리는 잠시 ‘계급 환원론’이라는 관점에 초점을 맞출 필요가 있다. 퍼거슨은 계급 환원론의 책임을 거리낌 없이 엥겔스 이후 사회주의 페미니즘 전통 전체로 돌린다. ‘계급 환원론’이란 무엇인가? 그는 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 공산당 역사에서 가져온 몇 개의 사례로 이를 설명한다. 미국 공산당 지도부는 현장 내에서든 노동자 운동 조직 내에서든 성차별에 맞선 여성의 요구를 막연한 미래의 문제로 돌리려 했다. 그런데 ‘계급 환원론’이라는 용어에는 난점이 있다. 마치 ‘젠더’ 요구를 ‘계급’ 요구에 대립시키는 것처럼 보일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문제가 되는 것은 [젠더냐 계급이냐가 아니라] 노동자계급 내의 경제주의, 부문주의, 조합주의 관점이다. 계급적 관점에서라면, 노동자 운동 내의 분열과 모든 성차별, 인종차별, 그 밖의 억압에 맞서 싸워야 한다고 제기할 것이다. 그렇다면, 여성 억압에 관한 공산당의 경제주의적 입장이 널리 퍼진 이유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퍼거슨이 말하는 것처럼 이것은 이론에서 발생한 ‘근원적인 오류’인가? 아니면 다른 데에서 이유를 찾을 수 있는 문제인가? 우리는 이런 입장의 물질적 기반을 20세기 노동자 운동과 사회주의 운동을 가로지르는 거대한 사회적, 정치적 전개 과정에서 찾을 수 있다고 여긴다. 스탈린주의 공산당들이 옹호한 경제주의적 환원론은 강력한 노동 관료제와 나란히 모습을 드러낸다. 노동 관료제는 여성, 가장 불안정한 처지의 청년, 이주민, 인종차별에 시달리는 사람들 등 노동자계급 내에서 가장 착취당하는 부위의 요구를 무시하면서 자신의 이해관계를 지키려 한다. 퍼거슨은 이러한 사회주의 운동의 (그리고 사회주의 페미니즘의!) 역사가 지닌 전체적인 양상을 생략해버린다. 러시아혁명과 가사노동의 사회화 퍼거슨은 사회주의 페미니즘 전통에서 가사노동의 사회화가 “페미니스트에게든 계급투쟁에서든 목표 또는 궁극의 목적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사실과 아주 다르다. 엥겔스는 생산수단이 사회화되면 “개별 가족은 사회의 경제적 단위이기를 멈춘다. 사적인 가사 업무는 사회적 산업으로 전환된다”고 지적한다. 더 나아가 “아동 돌봄과 교육은 공적인 업무가 된다.”15) 비록 이 지점을 이론적으로 더 진전시키지는 않았지만, 엥겔스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사노동이 가족이라는 사적 영역에 묶여있는 사회적 노동의 일부라는 점을 인식했다. 더욱이 그는 공산주의 사회의 목표 중 하나로 가사노동의 사회화를 꼽는다. 그리고 이런 전망을 물질적인 힘으로 만들어낸 러시아혁명만큼 이 이론을 실천적으로 잘 검증한 사례가 있는가? 놀랍게도 퍼거슨은 이 혁명적 경험에 대해서도, 여성해방을 위한 볼셰비키의 강령에 대해서도 언급하지 않는다. 1919년 8월, 볼셰비키 당의 여성 투사들이 제노텔[여성부]을 설립했다. 제노텔은 여성 노동자, 농민, 주부로 구성됐고, 내전의 고난을 겪는 동안 여성들 사이에서 특별 활동을 수행하고자 했다. 1920년 11월, 임신 중지가 합법화됐고, 동성애가 비범죄화됐으며, 혼외 자녀의 평등한 권리도 인정됐다. 이 기간은 치열한 논쟁과 실험으로 가득 찼고, 여성해방, 성 해방, 개인적인 관계의 변화 등이 사회주의 건설을 위한 투쟁의 필수 요소로 여겨진 시절이었다. 이를 위해서는 무급 재생산노동과 총체적인 생산 사이의 관계를 완전히 탈바꿈시켜야 했다. 이 목표를 염두에 두고 국립 어린이집, 유치원, 공동 식당, 빨래방 등 가사노동을 사회화하기 위한 일련의 조치가 제안됐다. 그 목표는 각 가정에서 가사노동을 최대한 줄이면서, 이런 업무가 사회적 생산의 새로운 부문이 되게 하는 것이었다. 미국 역사학자 웬디 골드먼이 설명하듯이, “가사노동은 공적 영역으로 넘어갈 것이다. 무수히 많은 개별 여성이 각자의 가정에서 무급으로 수행한 업무를 공동 식당, 빨래방, 어린이집에서 일하는 유급 노동자들이 넘겨받을 것이다.”16) 이와 관련해 알렉산드라 콜론타이는 이렇게 주장했다. “사회주의 사회에서는 모든 집안일이 제거될 것이고, 소비는 가족 내의 개인적인 활동이기를 멈출 것이다. 사적인 주방은 공적인 대형 식당으로 대체될 것이다. 광업, 금속 가공업, 제조업과 마찬가지로 바느질, 청소, 세탁이 경제활동으로 재편될 것이다.”17) 이네사 아르망 역시 ‘가내 노예제’를 종식시키기 위해 투쟁했다. 1918년 열린 여성노동자농민대회에서 그는 여성 노동자가 공장과 집에서 이중의 짐을 짊어지고 있는 현실을 규탄했다. 레닌 또한 “‘실질적인 여성해방’을 이루려면 법적 평등만이 아니라 가사노동을 사회화된 노동으로 ‘대대적으로 전환’해야 한다”고 여러 번 지적했다.18) 같은 의미에서 트로츠키는 “세탁은 공공 빨래방에서, 음식 섭취는 공공 식당에서, 바느질은 공공 작업장에서 이뤄져야 한다. … 그러면 남편과 아내의 관계는 모든 외부적이고 비본질적인 것에서 벗어날 것이다.”19) 혁명적 마르크스주의 전통은 여성 억압에 맞선 투쟁과 착취에 맞선 투쟁을 공산주의 사회를 향한 단일한 투쟁으로 결합하려 했다. 이는 그 중심 요소로서 가사노동의 사회화를 포함했다. 그 뒤 스탈린 정권 시기에 이뤄진 (여성의 권리에서 중대한 역행이 포함된) 반혁명적 퇴행을 마치 애초부터 마르크스주의에 내포된 문제인 것처럼 과거로까지 확대 적용할 수는 없다. 사회주의 페미니즘에 관한 자신의 서술을 구성하면서, 퍼거슨은 사회적 재생산 페미니즘 내의 자율주의 진영이 마르크스주의에 가한 공격에는 대응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그런 공격을 정당화시켜준다. 가사노동과 사회적 재생산 사회적 재생산의 궤적에 초점을 맞추면서, 퍼거슨은 1960년대 말 페미니즘 운동의 두 번째 물결과 가사노동에 관한 논쟁으로 돌아간다. 자유주의 페미니즘, 래디컬 페미니즘, 가사노동 임금 지급 운동 등을 포함한 다양한 경향이 이 쟁점을 토론했다. 그는 또한 1969년에 마거릿 벤스턴이 제출한 입장을 강조했는데, 이후에 다른 논자들이 그 입장을 이어갔다.20) 자신의 책 2부에서 퍼거슨은 “가치 창출과 삶의 재생산 간의 모순을 강조하는” 이들 논의의 흐름을 추적한다. 그런데 그의 결론은, 1970년대의 사회적 재생산 페미니즘이 더 넓은 시각으로 사회적 재생산을 살펴보는 대신, 여성의 가정 내 무급 노동에 지나치게 집중했다는 점에서 잘못됐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그는 1983년 출판된 리즈 보걸의 책 <마르크스주의와 여성 억압: 단일 이론을 향하여>가 나올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고 말한다. 리즈 보걸은 무급 노동에 초점을 맞추는 대신, “노동력 재생산이 자본의 축적과 맺는 필수적이지만 모순적인 관계”를 강조한다. 이렇게 해서 사회적 재생산에 관한 작업의 “윤곽이 폭넓게 그려졌다. 아이를 낳고, 기르고, 돌보는 것처럼 전형적으로 여성이 여러 세대에 걸쳐 매일 해온 일이 여기에 포함된다. 또한 자신과 타인들이 인간으로 계속 살아갈 수 있도록 사람들이 하는 노동, 즉 ‘기초적인 생활상의 업무를 해내기 위한 개인적, 집단적인 생존전략’도 여기에 포함된다.” “사회적 재생산노동의 목표가 삶을 지속시키는 것인 한, 동시에 그것은 자본을 지속시키는 데 충분한 노동력을 공급하는 확실한 수단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로부터 질문이 제기된다. 사회적 재생산의 의미가 무급 가사노동으로 제한되는 걸 피하려고 하면서, 이제는 그 의미가 너무 확장되는 건 아닌가? 그 경계선이 다소 모호해진 게 아닌가? 예컨대 친지아 아루자는 맥도널드 같은 패스트푸드 매장 노동자의 일을 사회적 재생산노동에 포함한다.21) 그렇게 본다면, 우리는 가정으로 음식을 배달하는 플랫폼 노동자, 술집과 식당에서 일하는 모든 노동자도 여기에 포함해야 한다. 게다가 가족을 위해 식료품을 구매하는 일을 가능하게 해주는 슈퍼마켓 계산원을 포함하지 말아야 할 이유가 있는가? 그러면 그 식료품을 운송하는 노동자는? 우리는 이렇게 생활의 재생산에 필수적인 일련의 직무를 계속 포함해 나갈 수 있다. 코로나 사태를 겪으며 확인했듯이 세상에 그런 직무는 아주 많다. 그런데 이렇게 그 의미가 끝없이 확장될 수 있다면, 도리어 설명력을 잃어버리는 게 아닌가? 또한 이는 폭넓은 사회적 재생산 범주에 속한 다양한 유형의 노동에 내재한 질적 차이를 다소 흐릿하게 만들 수 있다. 맨 끝에 언급한 문제는 이 책의 마지막 장에서 사회적 재생산 이론 내의 자율주의 진영과 마르크스주의 진영이 가치문제를 둘러싸고 전개한 논쟁과 연관된다. 이어서 그 문제를 다루겠다. 자본주의, 가치, 가사노동 가사노동이 만들어내는 것은 사용가치인가 교환가치인가? 1970년대에 시작한 이 논쟁이 오늘날 다시 논의되고 있다. 퍼거슨은 사회적 재생산 페미니즘이 마르크스 경향과 자율주의 경향이라는 두 개의 사상적 조류로 이뤄져 있으며, 이들은 어떻게 저항을 조직할 것인지 그리고 어떤 전략을 채택할 것인지에서 서로 다르다고 말한다. 그는 이 차이가 “사회적 재생산노동이 가치 창출에 어떻게 연관되는지 이론화하는 데에서 불일치”하기 때문에 발생한다고 생각한다. 책의 마지막 대목에서 그는 자율주의 경향과 논쟁하면서 몇 가지 흥미로운 주장을 제기한다. 가사노동 임금 지급 운동을 벌인 자율주의 이론가들은 가사노동이 노동자의 노동력이라는 상품을 생산하며(이들은 노동자와 그들의 노동력을 구별하지 않는다), 따라서 가치를 생산한다는 입장이다.22) 그러므로 가사노동은 생산적인 노동이며, 자본가들은 주부들을 직접적으로 착취한다.23) 그들은 이것을 가부장적 자본주의의 ‘사회적 공장’의 한 부분이라고 부른다.24) 따라서 가사노동을 거부하는 것은, 그 노동이 가부장적 자본주의의 ‘기둥’으로 여겨지는 한, 공장에서 벌어지는 파업 또는 그 이상으로 가치 창출을 막을 것이다. 그들이 이런 규정에서 끌어내는 전략은, 은폐된 착취관계를 드러내기 위해 주부에게 임금을 지급하라는 요구와 동시에 가사노동을 거부하는 것, 즉 가사파업이다. 퍼거슨은 이 주장을 사회적 재생산 이론 내의 마르크스 경향의 분석과 대조한다. 리즈 보걸과 마르크스의 입장을 따라, 이 경향은 가사노동을 비생산적인 것으로 간주한다. 이 노동의 산물이 시장에서 판매되는 용도가 아니기 때문이다. 사실 가사노동은 생산적인 것도, 비생산적인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이들 범주는 유급 노동에 적용되는 것이고, 자본주의적인 잉여가치 생산에 연관된 문제이기 때문이다. 가사노동은 남녀 노동자들이 소비하는 것들을 생산한다. 그것이 시장에서 비교되지 않는다면, 자본주의 사회에서 상품 가치를 측정하는 데 쓰이는 추상적 노동으로 환원될 수 없다. 가사노동은 사적 영역에서 다양한 형태로 소비되는 유용한 노동이다. 이것은 곧 가사노동의 지속시간, 반복 주기, 구체적인 할 일 등을 자본가들이 직접 통제하지 않는다는 의미다. 여기에서 우리는 사용가치를 생산하는 노동과 가치를 생산하는 노동을 구별해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노동자와 노동력의 차이를 구별해야 한다. [노동자와 달리] 노동력은 시장에서 판매되는 것이다. 이상의 논의에 따를 때, 가사노동은 자본주의 사회관계에 종속돼 있으면서도 자율성을 유지하며, 자본의 통제에 종속돼 있지는 않다. 파울라 바렐라는 다음과 같이 옳게 설명한다. 가정이 정말 문자 그대로 노동력을 생산하는 공장이라면, 여기에서도 상품 생산의 논리가 똑같이 지배할 것이다. [노동력이라는] 상품이 시장에서 쓸만하게 팔릴 수 있도록, 즉 경쟁력을 가질 수 있도록 사회적 필요노동 시간을 줄이는 방법을 강구하는 것 말이다. 하지만 노동력이란 상품에 관해서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시장에서 판매하는 게 어렵거나 불가능한 경우에도 이 상품의 생산은 멈추지 않는다. 실업률이 높을 때에도 아이들은 계속 먹이고, 씻기고, 가르치고, 옷을 입혀야 한다. 의심할 바 없이 그 노동은 더 불안정하고 고통스러운 조건에서 이뤄질 것이다. 그러나 사회적 재생산의 영역에서는 과잉 공급 때문에 ‘해고’되는 일은 없을 것이다.25) 우리는 사회적 재생산노동이 무급 가사노동으로 제한되지 않으며, 다양한 영역의 임금노동을 포함한다는 점을 사회적 재생산 이론의 관점에서 이미 지적했다. 사회적 재생산에 속하면서도 이렇게 그 유형이 구별되는 노동은 자본주의적 잉여가치 생산과도 아주 다른 관계를 맺으며, 따라서 자본가들의 통제에 대한 상대적 자율성에서도 정도의 차이가 발생한다. 한쪽 끝에는 무급 가사노동이 있다. 그것은 유용한 노동이지만, 자본주의 관점에서 볼 때 생산적인지 비생산적인지 따질 수 없는 노동이며,26) 대체로 자본가들의 통제로부터 상당 정도의 자율성을 지닌다. 다른 쪽 끝에는 사회적 재생산에 속하면서 임금노동으로 이뤄지는 일자리가 있다. 개별 가정에서 이뤄지는 유급 가사노동은 가치 창출이라는 관점에서는 비생산적이며, 상당 정도로 (극악한 수준에 이를 수 있을 정도로) 고용주의 통제가 따른다. 가정에 입주해 일하는 노동자라면, 심지어 자기 노동력을 재생산하기 위한 ‘휴식 시간’에까지 통제가 가해진다. 그들이 일하는 집에서 그대로 생활하기 때문에 그들의 자유시간은 퇴근 후 집으로 가는 노동자에 비해 더 많이 규제되고, 제한되고, 강제가 따른다. 공적 영역에서 임금노동을 하는 사회적 재생산 노동자의 상황은 다르다. 그들의 업무에서 ‘자율성의 여지’는 사적 영역에서 같은 일을 하는 노동자의 경우보다 더 클 수 있다. 비교해 보자면, 공공병원보다 민간병원에서 일하는 간호사나 미화원의 경우 업무, 스케줄, 생산성 등에 대한 통제가 더 강한 경향이 있다. 하지만 여기에서 우리는 고려해야 할 또 다른 문제와 부딪힌다. 두 집단의 구체적인 노동이 아주 유사하다고 할 때, 민간병원 노동자들의 업무는 자본가에게 생산적인 반면, 공공병원 노동자들의 업무는 비생산적이라는 점이다. 이 문제는 점점 더 많은 공공병원이 민간업체에 업무를 외주화하고 있으며, 그 결과 노동자들이 더욱더 불안정한 처지와 과중한 업무로 내몰리고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한층 더 복잡해진다. 패스트푸드 식당 노동자의 경우는 또 어떨까? 두말할 나위 없이 이곳 노동자들의 노동 형태, 작업 속도, 강도 등에 대한 통제 수준은 공장 같은 ‘전형적인’ 생산적 부문에 비견할 만하거나 더 심하기까지 하다. 같은 업무를 수행하는 경우에조차 생산적, 비생산적 노동을 구별하는 것은 자의적인 게 아니라 이 업무가 자본과 맺는 관계를 가리키고, 따라서 그것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잉여가치를 창출하는 데 어떤 역할을 맡는지 보여준다. 마지막으로 무급 노동, 개별 가정에서의 유급 노동, 공공이나 민간 영역의 사회화된 유급 노동 등 사회적 재생산 영역으로 간주되는 부문에서 나타나는, 비생산적일 수도 있고 생산적일 수도 있는 직무의 다양성을 보면 다시 다음과 같은 질문을 제기하게 된다. 생산 영역과 무 자르듯 구별되는 사회적 재생산이란 영역이 존재한다고 그렇게 단정적으로 말할 수 있는가, 아니면 어떤 목적으로 어떻게 분석하는가에 따라 그 경계선이 유동적이며 규정하기 어려운 것인가? 이론에서 정치로: 페미니즘 전략 퍼거슨은 자율주의 경향과 마르크스 경향이 “자본에 저항하고 새로운 사회를 구축하는 데에서 사회적 재생산 파업이 중심 역할을 한다는 점에는 동의가 이뤄졌으며, 서로 다른 점은 사회적 재생산 파업을 이해하는 방식”이라고 지적한다. 이를 토대로 그는 실비아 페데리치가 옹호하는 전략을 반박한다. 페데리치는 ‘자본의 논리 바깥에’ 자율적인 공간, ‘혁명적 공유재’의 공간을 창출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여기에는 협동조합, 공동 식당, 그 밖의 여러 유형의 연합체가 포함될 텐데, 이를 통해 자본주의 사회관계 ‘외부’에서 사람들의 질서를 형성하며 자본을 넘어선 사회를 ‘미리 보여줄 수’ 있다는 것이다. 가사노동을 ‘그만두고’ 그런 공간을 만들어내는 것, 때로는 여성을 위한 ‘기본소득’ 요구를 동반하는 것이 사회적 재생산 파업이라고 한다. 퍼거슨은 사회적 재생산 이론 내의 마르크스 경향 역시 사회적 재생산 파업을 중요하게 여길지라도, 문제는 ‘자율적인’ 공간을 만들어내는 것만이 아니라 국가에 보건의료, 교육 등의 개선을 요구해야 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를 위해서는 공공부문에서 사회적 재생산 노동자들의 파업이나 지역 차원의 시위가 필요하다. 그는 파업이 “자본의 영토 안에서 자본에 대항하고, 연대 관계를 구축하기 위한” 도구라고 주장한다. 더 나아가 생산적 노동은 재생산노동과 같은 방식으로 자본과의 관계를 유지하지 않기 때문에, 생산적 부문의 파업도 중요하다고 그는 덧붙인다. “오직 사회적 재생산 노동자 파업을 중심으로 저항을 조직하는 것만으로는 지배계급을 충분히 위협할 수 없다.” 궁극적으로 퍼거슨은 “현장 파업을 향한 길을 찾아내 억압에 저항하는 정치를 세워내고, 억압에 저항하는 파업으로 현장에 기반한 요구를 세워내면서” 여러 전선에서 투쟁을 펼쳐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런 관점에서 그는 “연대를 건설하는 것이 파업의 수단이자 목표”라고 결론 내린다. 퍼거슨이 보기에 협동조합, 공유재, 또는 페미니즘적 기본소득으로 ‘자본에 의한 삶의 지배’를 거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오히려 “삶을 위해 더 많은 재원을 요구하고 자본을 위해서는 더 적게 내주면서, 체제 그 자체 안에서 자본에 의한 삶의 지배에 반격”하는 게 핵심이라는 것이다. 자본주의가 파괴될 때까지 “우리는 자본주의에서 탈출할 수 없다.” 마지막으로 퍼거슨은 이렇게 말한다. “혁명전략은 대중 운동을 건설해 지역과 거리에서의 투쟁을 노동 현장에서 벌어지는 투쟁과 연결하며 자본에 저항하는 복합적인 방식의 수립을 동반한다. 그런 운동은 다양하면서도, 이윤보다 필요를 우선시하며 자본을 위한 노동을 몰아내고 삶을 위한 노동을 수행하는 세계를 창조한다는 목적으로 단결해 있다.” 전략을 둘러싼 이 논쟁에서 퍼거슨은, 이 체제의 변방에서 ‘자본의 논리 바깥에’ 공간을 만들어내자는 자율주의적 제안을 논박한다는 점에서 옳다. 협동조합들은 자본주의 시장에서 계속 상품을 사들여야 하고, 자본주의 기업에 전기료를 내야 하는 등 자본주의 체제 안에서 경쟁을 강요받거나, 그게 아니라면 단명하는 소규모 기획으로 끝날 것이다. 자본주의적 재난의 한복판에서 작은 유토피아적 ‘오아시스’를 유지하는 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으로, 퍼거슨이 제안하고 ‘99%의 페미니즘’과 동일시된 전략은 “체제 그 자체 안에서 자본에 의한 삶의 지배에 반격”하기 위해 자본에 맞선 대중의 저항운동을 창출한다는 구상에 집중한다. 그것은 동시에 ‘연대 관계’를 창출하는 데에도 힘을 쏟는다. 물론 ‘99%의 페미니즘’이 호소하는 내용은 노동자계급의 힘을 산산조각 내는 분열을 극복하기 위해, 억압받는 사람들의 견고한 동맹을 만들어내기 위해, 자본에 도전할 수 있는 사회세력을 건설하기 위해 필요하다. 하지만 지금 제기된 방식으로는 전적으로 불충분하다. 연대와 저항의 운동을 강화하는 것은 자본주의를 깨부수기 위한 전략으로는 부족하다. 이 저항에서 공세로 넘어가는 시점 사이에는 어떤 관계가 세워져 있는가? 더 나은 공공의료와 교육을 위한 요구에 덧붙여 자본가들의 이윤을 문제 삼기 위해 우리는 어떤 강령을 옹호해야 하는가? 노동자 대중의 가장 긴급한 요구와 필요를 어떻게 사회주의를 향한 투쟁과 연결할 것인가? 혁명전략에 관해 얘기해보자면, ‘연대 관계’의 창출은 전략의 기초적인 출발점이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자본주의와 그 국가, 억압적 물리력을 쳐부술 수 있는 물질적인 세력을 창출하기 위해 더 많은 것이 필요하다. 혁명적 마르크스주의의 역사에서는 처음부터 끝까지 전략에 관한 논쟁이 관건이었다. 총파업, 노동자계급의 전략적 지위, 자기조직화를 위한 기구의 필요성, 노동자계급과 동맹 세력의 관계, 공동전선, 승리를 향한 강령을 갖춘 혁명 정당 건설 등의 문제가 여기에 포함된다. 노동자계급이 어떻게 다른 피억압 민중과 동맹을 구축하고 이끌어갈 것인가 하는 ‘헤게모니’ 문제 역시 이 핵심 논쟁에 속한다.27) 제2, 제3인터내셔널에서는 이것이 핵심 쟁점이었다. 러시아혁명에서 농민 문제, 피억압 민족의 권리, 다양한 부문들의 민주적 요구, 여성 억압이나 인종차별에 맞선 투쟁의 문제 등이 그것이다. 억압에 대해 말하자면, 여성 노동자와 인종차별을 겪는 노동자의 구체적인 요구와 나란히 민주적 요구를 (노동자계급만의 요구가 아닌 것으로서) 명료하게 제시해야 한다.28) 마무리를 위해 우리는 두 개의 근본적인 질문을 던질 것이다. 첫째, 아래로부터 연대를 구축하기 위해서는, 노동자 운동과 사회 운동에서 연대를 방해하는 관료집단의 조합주의 정치에 대항해야 한다. 사회 운동이 노조 관료들의 조합주의를 문제 삼는 건 드문 일이 아니다. 하지만 사회 운동 내에도 똑같이 조합주의적이고, 분리주의적이며, 때로는 자본주의 국가에 포섭된 관료집단이 있다. 최근의 사례로 페미니즘 운동을 들 수 있는데, 여러 나라에서 페미니스트들이 거리 시위와 대중적인 여성 파업에 등을 돌리고 자본주의 국가의 내각과 정부 기관에 들어갔다. 둘째, ‘흑인의 생명도 소중하다’ 운동과 페미니즘 운동 같은 최근의 가장 중요한 사회 운동은 우익에 맞서 ‘차악’을 지지하자는 생각 때문에 활력을 잃었다. 그리고 미국에서 민주당을 지지하거나 스페인에서 사회노동당(PSOE)과 포데모스의 연립정부를 지지하는 입장으로 대거 옮겨갔다. 다시 말해서, [퍼거슨이 제시한] ‘연대’ 전략은 계급 독립성을 앞세우며 동시에 관료제에 반대하는 정치가 없다면 제구실을 할 수 없다. 결론을 대신해 리즈 보걸에 이어서 사회적 재생산 문제에 집중한 이론가들의 많은 저작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억압과 착취의 체계적 관계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심화시키는 데 아주 소중하다. 논의를 더 진전시켜야 할 요소들이 이 영역에 많이 남아 있다. 보걸의 작업이 중요하다. 그는 노동력 재생산을 위한 필수 요소로서 가사노동을 자리매김하면서, 마르크스가 전개하지 못한 구체적인 분석 지점을 풀어가기 위해 <자본론>의 범주들을 활용했다. 현재 사회적 재생산 이론가들은 교사, 간호사, 노인 요양보호사 등 다양한 부문이 ‘연대’의 고리를 만들거나, 노동자계급의 다른 부문 및 가난한 민중과 ‘가교’를 놓을 수 있는 잠재력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그들의 노동은 노동자계급의 일상생활을 재생산하는 데에서 한 부분을 차지하며, 계급 전체와 복합적인 경로로 연결돼 있다. 미국의 교사 파업에서 이런 측면을 볼 수 있었고, 팬데믹 기간에 보건의료 노동자들에 대한 사회적 인정과 대중의 지지가 그랬다. 그러나 이 ‘잠재력’이 그런 ‘연대’가 실체를 갖도록 보증하는 건 아니다. 많은 경우에 노조 관료들이 그런 연대가 실현되는 걸 거부하고, 저지한다. 동시에 혁명적 정치는 노동자계급의 다른 부문에서, 심지어 ‘블루칼라’ 노동자들이 일하는 생산적 부분에서 이 잠재적 ‘헤게모니’를 불러낼 수 있다. 그 사례를 프랑스 토탈 그랑퓌 정유공장 노동자들의 해고에 맞선 투쟁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곳 노동자들은 환경운동 단체들과 연대의 고리를 맺었고, 노동자와 민중의 이해관계를 지키며 친환경적 전환 방식을 옹호했다. 또 다른 사례로 아르헨티나 네우켄지역의 세라믹 타일공장 사논이 있다. 노동자들이 공장을 점거하고 학생, 마푸체 원주민, 실업 노동자, 그 밖의 노동자들과 동맹을 구축했다. 궁극적으로 노동자계급의 잠재적인 헤게모니를 현실화할 수 있는가는, 그들의 ‘사회학적’ 구성이나 그들의 노동이 생산적 노동인가 아니면 사회적 재생산노동인가보다는, 노동자들이 채택하는 정치에 더 달려 있다. 여기에서 우리는 분석하는 수준을 넘어 혁명적 정치의 지평으로 나아간다. 마지막으로, 젠더와 계급의 관계를 고찰하기 위해 사회적 재생산 이론 분야에서 이뤄진 많은 저자들의 다양한 공헌을 인정하더라도, 우리는 이 흐름이 마르크스주의와 사회주의 페미니즘 운동에서 펼쳐진 150년 이상의 논쟁과 별개이거나 심지어 능가하는 하나의 전통을 보여준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와는 반대로, 노동자계급의 단결과 모든 피억압 민중과의 동맹을 어떻게 쟁취할 것인가 하는 전략적인 논쟁과 연결하면서 그간의 사회적 재생산 이론에 관한 공헌을 자리매김할 필요가 있다. 연대는 단지 파업과 투쟁의 ‘수단이자 목표’에 그칠 수 없다. 다른 사회 운동과 노동자계급의 연대와 단결은 사회주의를 향한 혁명적 투쟁이라는 더 높은 목표를 위한 수단이 될 때 비로소 전략적 의미를 지닐 수 있다. 그것이 이윤보다 삶을 더 중요시하고, 자본주의 사회가 강제한 폭력에서 생산적 노동과 비생산적 노동 모두를 해방시킬 수 있는 사회로 나아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주 1) Susan Ferguson, Women and Work: Feminism, Labour, and Social Reproduction (Pluto Press, 2019). 2) Silvia Federici, “Social Reproduction Theory: History, Issues and Present Challenges,” Radical Philosophy, no. 2.04, series 2 (Spring 2019). 3) Alessandra Mezzadri, “On the Value of Social Reproduction: Informal Labour, the Majority World and the Need for Inclusive Theories and Politics,” Radical Philosophy, no. 2.04, series 2 (Spring 2019). 4) 친지아 아루자, 티티 바타차리야, 수잔 퍼거슨 등의 주장은 다음의 책에 실려 있다. Tithi Bhattacharya, ed., Social Theory Reproduction: Remapping Class, Recentering Oppression (London: Pluto Press, 2017). 5) 이 운동은 여러 페미니스트와 함께 마리아로사 달라 코스타, 실비아 페데리치, 셀마 제임스가 이끌었으며, 이탈리아 자율주의가 발전시킨 개념에 이론적 기반을 두고 있다. 6) Paula Varela, “La reproducción social en disputa: un debate entre autonomistas y marxistas,” Revista ARCHIVOS de historia del movimiento obrero y la izquierda 8, no. 16 (March–August 2020): 71–92. 7) Lise Vogel, Marxism and the Oppression of Women (New Brunswick, NJ: Rutgers University Press, 1983). 2013년에 헤이마켓북스에서 역사유물론 문고 시리즈로 이 책을 재출간했다. 8) “계속하기에 앞서, 여성 억압 문제를 종합적으로 다룰 때 포함해야 할 항목들을 고려하는 게 중요하다. 첫째, 여성해방과 모든 인간의 실질적인 사회적 평등에 대한 확고한 지향에서 출발해야 한다. 둘째, 여성의 현 상황을 구체적으로 분석해야 하며, 그 현 상황이 어떻게 조성됐는지 연구해야 한다. 셋째, 사회에서 여성의 지위를 다루는 이론을 제시해야 한다. 즉 여성의 지위를 ‘역사적’으로 조망하는 것과 더불어 ‘이론’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넷째, 여성의 상황에 대한 종합적인 논의는, 과거와 현재의 사회에서 여성의 종속을 다루는 이론과 역사에서 일관되게 뻗어 나온 미래 사회 여성해방이라는 시각으로 뒷받침돼야 한다. 마지막으로, 이른바 여성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당연하게도 실천적인 강령과 전략에서 해답을 요구하는 것이기도 하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자신들의 작업에서, 적어도 부분적으로나마 이런 지점들을 다룬다.” 앞의 책. 9) 이에 관해서는 다음을 참조하라. Ariane Díaz, “Economía política de la reproducción social I: trabajo y capital,” Ideas de Izquierda, July 14, 2019; Ariane Díaz, “Economía política de la reproducción social II: patriarcado y capitalismo,” Ideas de Izquierda, July 21, 2019. 10) 이 점에서 리즈 보걸은 친지아 아루자, 티티 바타차리야와 입장이 다르다. 예컨대 다음을 보라. Cinzia Arruzza, Dangerous Liaisons: The Marriages and Divorces of Marxism and Feminism (London: Merlin Press, 2013). 이 책에서 친지아 아루자는 플로라 트리스탄, 마르크스와 엥겔스, 클라라 체트킨, 알렉산드라 콜론타이, 그리고 이후 스탈린 관료체제에서 이뤄진 후퇴와는 구별되는 것으로서 러시아혁명에서 볼셰비키의 해방을 향한 강령 등의 기여를 검토한다. 11) 퍼거슨은 사회적 재생산 페미니즘을 사회주의 페미니즘의 한 부류로 간주하면서도, 이들을 서로 다른 두 개의 궤적으로 다루는 경향이 있다. 12) William Thompson, and Anna Wheeler, Appeal of One Half of the Human Race, Women, against the Pretensions of the Other Half, Men, to Retain Them in Political and Thence in Civil and Domestic Slavery. 13) Josefina L. Martínez, “Engels, Working Women, and Socialist Feminism,” Left Voice, November 28, 2020. 14) 게다가 노동자계급 내의 성차별에 문제 제기했을 뿐 아니라 계급과 젠더의 관계를 사고하는 데 중요한 공헌을 한 트리스탄에 대한 태도는 다소 부당하다. 비록 그가 유토피아 사회주의와 과학적 사회주의 사이에서 과도적 위치에 있었을지라도 말이다. 15) Friedrich Engels, The Origin of the Family, Private Property and the State. 16) Wendy Goldman, The State and Revolution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3), 3. 17) 같은 책. 18) 같은 책. 19) Leon Trotsky, “From the Old Family to the New,” 1923. 20) 마거릿 벤스턴은 가사노동이 교환가치가 아니라 가정에서 직접 소비하는 사용가치를 생산하기 때문에 마르크스주의적인 의미에서 생산적인 게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가 보기에 이것은 자본주의에 필수적이기는 하지만, 전자본주의적(pre-capitalist) 노동이다. 21) Cinzia Arruzza and Tithi Bhattacharya, “Teoría de la Reproducción Social: Elementos fundamentales para un feminismo marxista,” Revista Archivos de historia del movimiento obrero y la izquierda 7, no. 16 (March–August 2020): 48. 22) Andrea D’Atri and Celeste Murillo, “Producing and Reproducing: Capitalism’s Dual Oppression of Women,” Left Voice, no. 4 (February 2019). 23) 마르크스의 용어에서 노동이 생산적이라거나 비생산적이라는 정의는 마치 어느 한쪽이 더 ‘값진’ 것이라거나 더 ‘중요한’ 것이라는 도덕적 의미를 갖지 않는다는 점을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이 정의는 노동이 시장에 팔리기 위한 상품을 생산하는가, 따라서 직접적으로 잉여가치를 생산하는가를 다루는 것과 연관된다. 24) 이탈리아 자율주의자들은 ‘사회적 공장’이라는 개념을 이탈리아 오페라이스모(operaismo: 노동자주의)와 마리오 트론티의 저작들에서 빌려왔다. 25) Paula Varela, “La reproducción social en disputa”. 26) 마르크스의 저작에서 이 구분은 다른 형태의 임금노동을 가리킨다. 27) Matías Maiello and Emilio Albamonte, “Trotsky, Gramsci, and the Emergence of the Working Class as Hegemonic Subject,” Left Voice, March 13, 2021. 28) 혁명전략에 관한 논쟁을 더 깊게 보려면 다음을 참조. Emilio Albamonte and Matías Maiello, Estrategia socialista y arte militar (Buenos Aires: Ediciones IPS, 2019). 곧 영어판이 출간될 예정이다. 글쓴이 호세피나 마르티네스, 2021년 5월 20일 옮긴이 오연홍 꺾쇠괄호[ ] 안의 문구는 옮긴이가 추가한 것이다. 기사 원문 https://www.leftvoice.org/social-reproduction-feminism-or-socialist-feminism/#easy-footnote-bottom-1-24917 연재 소개 페미니즘이라고 하면 ‘남성 혐오’나 ‘갈라치기’부터 떠올리는 사람들이 많다. 자유주의 페미니즘 또는 래디컬 페미니즘이 여전히 주류인 것도 맞다. 하지만 페미니즘에는 다른 길이 있다. 착취, 가난, 전쟁, 기후 위기로 점철된 자본주의라는 체제 안에서 남성과 더 잘 경쟁하기 위한 페미니즘이 아니라 자본주의 자체를 깨뜨려야 한다고 주장하는 페미니즘, 이를 위해 또 다른 누군가를 배제하는 게 아니라 모든 성별, 국적, 인종의 노동자와 청년이 똘똘 뭉쳐 함께 싸워야 한다고 외치는 페미니즘이 있다. 2003년에 아르헨티나에서 만들어지기 시작했고 지금은 독일, 볼리비아, 브라질, 칠레, 코스타리카, 스페인, 미국, 프랑스, 이탈리아, 멕시코, 페루, 우루과이, 베네수엘라에서도 활동하는 국제 ‘빵과 장미’ 네트워크가 그것이다. 한국에서 노동자계급에 기반한 변혁적 여성운동을 건설하려는 우리는 혁명적 페미니즘의 중요한 사례로 ‘빵과 장미’를 주목하면서, 이들의 주장과 실천을 소개하고자 한다. ① 사회주의 페미니즘이란 이런 것이다(타티아나 코차렐리) ② 왜 여성이 사회주의를 위해 투쟁해야 하는가?(안드레아 다트리) ③ 여성 자본가에 맞서는 여성 노동자들(타티아나 코차렐리) ④ 우리는 임신 중지권을 이렇게 쟁취했다(너새니엘 플라킨) ⑤ 혁명은 여성의 삶을 어떻게 바꾸는가?(안드레아 다트리) ⑥ 사회적 재생산과 사회주의 페미니즘(호세피나 마르티네스) ⑦ 페데리치의 주장에 대한 비판적 토론(호세피나 마르티네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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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평등 개혁은 스페인처럼?지난 한 해 동안 스페인에서 추진되고 있는 성평등 개혁 뉴스가 종종 전해졌다. 그중 몇 가지를 살펴보면: • 성 및 생식 건강과 자발적 임신 중지에 관한 법률: 정부 개정안이 2022년 5월 스페인 국무회의에서 승인됐다. 16~17세 여성과 장애가 있는 여성이 법적 보호자의 동의 없이 자발적으로 임신을 중지할 수 있는 권리, 거주지에서 가장 가까운 공공병원에서 시술 지원, 숙려 기간 조항 삭제, 사후 피임약 무료 공급 등 광범한 내용이 포함됐다. • 성전환자 성별 정정 간소화 법안: 16세 이상이면 의학적 소견이 없어도 성별을 바꿀 수 있는 법적 권리를 보장하는 내용으로, 12월 22일 하원을 통과했다. 이 법안이 상원까지 통과하면 성 소수자 정체성을 질병으로 간주하는 ‘전환 치료’가 금지되고, 성 소수자를 겨냥한 공격도 처벌 가능하다고 한다. • 생리휴가 법제화: 한국은 근로기준법에 따라 월 1회 무급 보건휴가가 가능한데, 스페인에서는 월 최대 3일(애초 제안은 5일)의 유급휴가로 추진하고 있다. 12월 15일 하원을 통과했다. • 페미니스트 내각: 2020년 초 사회노동당과 포데모스가 함께 구성한 연립정부 내각에서 22명의 장관 중 11명이 여성이다. 2018년 사회노동당 정부의 내각은 17명 중 11명이 여성이었다. 평등부 장관은 “스페인의 모든 새로운 법안과 정부 지출안은 페미니즘적이어야 한다”고 선포했다. ‘개혁’ 세력에 힘을 실어줘야 한다? 구조적 성차별이라는 현실 자체를 부정하는 윤석열 정부의 행태와 비교해 보면 천지 차이를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연립정부를 구성하고 있는 스페인 사회노동당은 역사가 오래된 사회민주주의 정당이고, 포데모스는 2011년 경제위기와 긴축정책에 항의하며 광장점거 운동이 분출한 이후 2014년에 결성된 느슨한 범좌파 경향의 개량정당이다. 이들이 연립정부를 구성해 추진하는 성평등 조치를 보면서 한편에서는 “불평등을 해소하려면 역시 이런 ‘개혁 세력’에 힘을 실어줘야 하는구나”라는 생각을 떠올릴 수도 있겠다. 하지만 성급하게 그런 결론을 내리기 전에 살펴봐야 할 점들이 있다. 개혁적인 것처럼 보이는 스페인 정부의 조치들은 하늘에서 떨어진 게 아니다. 우선 페드로 산체스 총리 스스로 솔직하게 고백한 비밀이 있다. 2018년 6월 6일자 <가디언 The Guardian> 보도에 따르면, 산체스 총리는 성평등 문제에 관한 한 스페인의 역사는 2018년 여성 파업 이전과 이후로 구분되며, “새 정부는 그 운동을 충실하게 반영한다”고 말했다. 2018년 스페인 여성 파업의 한 장면 스페인 여성 파업에서 노조들은 3.8 여성의 날에 2시간 파업, 24시간 파업, 대규모 집회와 행진 등의 방식으로 투쟁을 조직했고, 그 결과는 2018년과 2019년에 각각 530만 명과 600만 명의 참가자 규모를 기록했을 정도로 압도적이었다(단순 비교는 어렵지만, 박근혜 퇴진 촛불시위 당시 최대 인원이 230만 명이었다고 한다). 학교, 병원, 버스, 철도, 공항, 공장, 언론사, 콜센터 등 다양한 산업에서 노동자들이 파업에 동참했다. 성별 임금 격차를 비롯한 직장에서의 성차별, 가정과 거리에서의 성폭력을 규탄한 이 파업은 “우리가 멈추면 세계가 멈춘다”는 대표 구호의 의미를 있는 그대로 증명해 보였다. 정부 입장에서는 어떤 식으로든 이 거대한 대중적 열망에 응답하는 모양새를 취해야 하는 상황이 된 것이다. 게다가 집권 사회노동당의 처지가 곤란했다. 대중을 들썩거리게 만든 근본적인 경제위기가 해소되지 않고 있는 가운데, 기존의 우익정당들에 더해 복스(VOX) 같은 신생 극우 정당이 포데모스를 제치고 제3당으로 떠오를 만큼 빠르게 성장하는 추세를 보였다. 반면 사회노동당은 포데모스와 손을 잡아야 가까스로 정부를 구성할 수 있을 만큼 취약한 상태였다. 요컨대 개혁적인 성향의 조치를 대거 풀어놓는 방식으로 자신의 권력 기반을 보충하려는 것이다. 기만과 그 결과 ‘그래도 어쨌든 이와 같은 성평등 개혁 조치는 환영할 만한 것 아니냐?’라고 생각할 수 있다. 저런 조치 자체가 끈질기게 이어진 대중 투쟁의 성과인 만큼 이 변화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되, 현 정부를 절대 신뢰하지 않는 태도를 유지하는 게 중요하다. 사회노동당과 포데모스 연립정부를 신뢰할 수 없는 것은, ‘페미니스트 정부’를 자처하면서도 정작 여성들의 투쟁이 다시 터져 나오는 것을 결단코 억누르려는 그들의 기만적인 태도 때문이다. 2021년 3.8 여성의 날을 앞두고 정부는 모든 집회와 시위를 금지했다. 코로나 사태 때문에 위험하다는 게 이유였다. 그다음 날 진보 성향의 스페인 매체 <엘파이스 EL PAÍS>에는 현 정부의 기만성을 비판하는 목소리가 실렸다. “[수많은 사람이 왕래하는] 시장과 다수의 관중이 몰린 축구 경기장, 지하철 인파는 내버려 둔 채 오직 여성 집회만 통제했다”는 얘기다. ‘노동 존중 정부’를 자처했던 문재인 정부가 코로나를 핑계로 ‘핀셋 방역’ 운운하며 노동자 투쟁만 핀셋처럼 콕 집어 억압했던 것을 빼닮았다. 무엇보다, 잊지 말아야 할 사실이 있다. 스페인 사회노동당은 경제위기 상황에서 긴축정책을 밀어붙이며 여성과 청년, 노동자에게 고통을 전가했던, 그래서 2011년 ‘분노한 사람들’이라는 이름의 광장점거 운동이 터져 나오게 만든 바로 그 세력이라는 점이다. 스페인 사회노동당의 정치는 다른 세상을 건설하려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를 관리하는 또 하나의 절충적 방식을 지향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 절충을 허용하지 않을 정도로 자본주의가 극심한 위기에 직면하면 결국 자본가들의 이윤 보호를 1순위에 놓고 노동자, 민중에게 손실을 전가하게 된다. 지금 사회노동당 정부가 보이는 ‘개혁적’인 겉모습은 2018년과 2019년 스페인을 뒤흔든 대규모 여성 파업의 위력에 압박을 느낀 결과일 뿐이다. 여성 장관의 숫자가 늘어나면 자본주의 국가권력의 성격이 달라질까? 이런 성격의 정권이 어떤 말로를 걷게 되는가는 그리스에서 시리자가 먼저 보여줬다. 절망적인 경제위기와 폭발적인 총파업 운동의 분출에 뒤이어 긴축정책 폐기를 내걸고 2015년에 집권한 시리자는 그 이름(‘급진좌파연합’이라는 뜻)과는 달리 자본주의 체제를 넘어서지 못하는 어중간한 정치 전망에 머물렀고, 대중 투쟁의 압력이 가라앉은 상황에서 스스로 긴축정책을 집행하는 자본주의 위기관리 대리인으로 우경화하더니 결국 2019년 기존 지배 세력인 신민주당에 도로 정권을 내줬다. 이런 결말을 피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대중 투쟁의 압력을 끌어올리는 것, 즉 계급투쟁을 조직하는 것이다. 페미니스트 정부를 자처하면서 여성 집회를 봉쇄하는 스페인 사회노동당에 이를 기대할 순 없다. 광장점거 운동의 기세를 이어받아 탄생한 포데모스는 조금 다를까? 애초에 포데모스는 사회노동당 같은 특권 집단과는 손을 잡지 않겠다고 다짐했었다. 그러나 “스페인에서 극우를 저지하는 유일한 방법은 안정적인 정부를 구성하는 것”이라며 대중 투쟁의 힘에 대한 불신을 노골적으로 드러낼 정도로 우경화했다. 그들의 시야가 선거 정치에 완전히 함몰됐기 때문이다. 기만과 자기기만에서 벗어나야 그렇다면 2018~2019년 여성 파업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해온 페미니즘 운동은 어떤 상황일까? 당시 여성 파업을 조직하는 데 적극적으로 참여했던 스페인의 혁명적 사회주의자 호세피나 마르티네스는 이렇게 증언한다. “‘흑인의 생명도 소중하다’ 운동과 페미니즘 운동 같은 최근의 가장 중요한 사회 운동은 우익에 맞서 ‘차악’을 지지하자는 생각 때문에 활력을 잃었다. 그리고 미국에서 민주당을 지지하거나 스페인에서 사회노동당과 포데모스의 연립정부를 지지하는 입장으로 대거 옮겨갔다.” 이 대목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스페인의 거대한 여성 파업 운동이 사그라든 데에는 코로나 사태가 조성한 압력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투쟁이 활력을 잃은 본질적인 원인은 ‘지금은 사회노동당과 포데모스 연립정부에 힘을 실어줘야 한다’는 타협적인 전망에서 찾아야 한다. 여전히 다수 여성이 더 높은 실업률과 임금 차별, 가사노동의 부담과 여성 살해의 위협 속에 살아가고 있으며 더 큰 투쟁을 조직해야 할 이유가 넘쳐나는데도 페미니즘 운동의 주류가 그런 타협적인 생각을 떨쳐내지 못했고, 일부는 정부와 직접 협력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그렇게 대중 투쟁의 고삐를 놓아버리는 방식은 결국 극우세력이 더 기세등등하게 성장할 수 있는 여지를 넓혀준다. 스페인은 위력적인 여성 파업을 일으킴으로써 여성 억압, 성차별에 맞선 투쟁이 어떻게 펼쳐져야 하는지 보여준 중요한 사례다. 또한 그런 투쟁이 활력을 잃지 않으려면 무엇을 경계해야 하는지도 보여준다. 지금 한국에서 여성운동의 주류가 정부의 여성가족부 폐지 시도에 맞서면서 민주당을 기웃거리는 모습을 보면 이 점은 특히 중요하다. 세상을 바꿀 수 있는 혁명적 페미니즘의 힘은, 개혁 간판을 걸고 노동자 민중을 농락하는 민주당 같은 자들과의 제휴가 아니라, 계급투쟁의 물결 속에서만 살아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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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혁명은 여성의 삶을 어떻게 바꾸는가?1917년 여성의 날 시위를 벌이는 러시아 여성 노동자들 1917년 노동자혁명으로 러시아 여성의 삶에 전례 없는 도약이 이뤄졌다는 점에 대해서는 폭넓은 동의가 있다. 이혼할 권리, 임신 중지권, 일자리 보장, 가사노동의 사회화를 위한 조치 등은 볼셰비키 당이 도입한 개혁의 일부 사례일 뿐이다. 소련 여성의 삶에 일어난 거대한 변화가 세계 곳곳에서 반향을 일으켰다. 여성의 권리와 진보적인 공공 정책을 아로새긴 법령에 서프러제트(여성 참정권 운동가), 여성 교육 지지자, 심지어 자유주의 페미니스트와 그 밖의 진보적인 세력까지도 박수갈채를 보냈다. 세계적인 시야에서 이들 진보적인 조치를 볼 때 가장 신기한 점은, 러시아 즉 경제적, 문화적으로 뒤처졌다고 여겨진 나라에서 그런 일이 일어났다는 점이다. 전통적인 가부장과 차르, 보드카에 절어있는 코사크족, 글을 배우지 못한 소작농, 채찍을 휘두르며 부를 쌓은 쿨락[부농]의 나라에서 여성이 반란을 일으켰다. 상황을 더 복잡하게 만든 건, 러시아가 1차 세계대전의 참화로 만신창이가 되고 제국주의 군대에 포위된 상황이었다는 점이다. 가뭄, 질병, 전염병으로 사람들이 떼죽음을 당했다. 누가 보더라도 문화적, 정치적으로 풍성한 진보를 누리기 힘든 불모의 땅에서 남성과 여성의 법적 평등이 확립됐다. 사실혼 관계가 승인받았고, 이혼할 권리와 임신 중지권이 보장됐으며, 어린이집과 공공 빨래방, 공동 식당이 들어섰다. 동성애 처벌과 성매매 여성에 대한 박해가 사라졌다. 러시아 여성, 가정, 가족의 일상을 혁명적으로 뒤집은 이와 같은 혁신은 하늘에서 떨어진 게 아니다. 사회주의 혁명의 열기 속에서 저절로 솟아난 것도 아니다. 레닌이 이끈 정당에서는 여성해방에 관한 논쟁이 끊이지 않았다. 육아가 사회화되고 나면 어머니의 역할은 무엇이어야 할까? 모든 애정 관계에서 국가의 개입을 배제해야 한다고 주장해 왔는데 여전히 사회주의 국가가 결혼증명서를 발행해야 할까? 이런 여러 쟁점에 대해 볼셰비키 내에 통일된 입장은 없었으며, 다양한 입장 간의 개방적인 논쟁이 있었을 뿐이다. 볼셰비키는 고대로까지 거슬러 올라가면서 노예 반란의 오랜 역사에서 영감을 끌어냈다. 그들은 유토피아 사회주의의 발상을 계승했고, 주요 저작인 <공산당선언>에서 부르주아적 결혼과 가족을 가차 없이 비판한 마르크스와 엥겔스에게 영향받았다. 유토피아 사회주의와 역사 유물론에 기원을 둔 이데올로기와, 유럽식 대도시의 산업 중심지에 대규모로 결집한 여성이 연결되면서 중대한 정치적 계기가 마련됐다. 이 새로운 여성 노동자계급이 해방을 지향하는 선진 의식으로 충만한 혁명적 지도력과 결합하면서, 볼셰비키 당이 채택한 대담한 법령, 정부 계획, 사회정책의 기반이 됐다. 자유로운 사랑 중세시대 이래로 사람들은 자유로운 사랑의 방식을 심사숙고해왔다. 계약 결혼, 중매에 의한 결혼, 애정 관계에 교회나 국가가 간섭하는 것을 거부하는 운동이 일어났다. 14세기 이후로는 ‘자유로운 사랑’이라는 발상을 제기하는 집단이 나타났는데, 이들은 결혼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간통에 관한 규범, 피임과 임신 중지 금지에도 이의를 제기했다. 자유로운 사랑에 찬성한 운동이 대부분 남성에 대한 여성의 예속에도 이의를 제기한 건 이 때문이다. 그들은 여성의 자유 박탈에 항의했고, 이에 따라 대개 여성해방을 지지했다. 러시아에서 일어난 노동자혁명을 토론하는 맥락이라면, 아마도 자유로운 사랑보다는 ‘자유결혼’을 거론하는 게 더 적절할 것이다. 볼셰비키 지도자들과 지식인들의 주된 관심사는 애정 관계를 러시아 정교회의 굴레에서 해방시키는 것이었다. 혁명 이전에는, 교회가 승인하지 않은 혼외 자녀는 재산권을 인정받지 못했을 뿐 아니라 사회에서 무시당했다. 볼셰비키는 이에 맞서서 교회의 구속이나 승인을 배제하며, 모든 형태의 결혼을 인정하는 입장을 취했다. 이혼을 허용한 새로운 법령은 자유결혼에도 길을 열어줬다. 하지만 전쟁으로 피폐해진 러시아에서 이런 조치는, 기나긴 세월 남성에게 경제적으로 의존해온 여성의 삶에 부정적 효과도 미쳤다. 많은 여성에게 결혼이란 가부장적 사회에서 일종의 생존방식이었다. 따라서 자유결혼의 정당성을 확립하기 위해서는 여성이 생산적인 노동에 참여하게 하고, 경제적 독립과 법적 평등을 획득하게 함으로써 여성해방을 촉진하는 게 필요했다. 볼셰비키 지도자인 알렉산드라 콜론타이는, 질투와 소유하려는 욕망을 특징으로 하는 ‘낭만적인 사랑’이라는 부르주아적 이상에 대조되는 것으로서, 동지적인 사랑의 성립이 필요하다는 점에 대해 글을 썼다. 그는 ‘낭만적인 사랑’이 자본가계급의 출현과 함께 등장했고, 개인들 간의 관계에 투영된 사적소유의 개념을 구현했다고 주장했다. 이런 뿌리 깊은 소유욕의 강화와 애정 관계에서의 권리는 곧 다양한 형태의 폭력의 원천이 됐다. 권력 장악 이후에 콜론타이와 그 밖의 볼셰비키 혁명가들은 그동안 토론해온 혁명적 구상을 실행할 기회를 얻었다. 불꽃이 튀어 불길로 타오르다 차르 체제하의 여성들은 갓 등장한 러시아 노동자계급 속에서 광범한 투쟁을 벌였다. 그들은 생존권 요구를 걸고 싸웠을 뿐 아니라 공장 내 보육, 유급 출산휴가, 신생아 수유를 위한 휴식 시간 등을 요구하면서도 투쟁했다. 경찰 보고서와 공장 기록에 따르면, 고용주와 같은 화장실을 사용할 수 있는 권리나 관리자의 학대를 중단시킬 것을 요구하는 여성 파업 사례가 많았다. 1910년 8월 26, 27일, 2차 국제 사회주의 여성대회가 코펜하겐에서 열렸다. 주요 토론 의제에는 여성 참정권과 출산휴가, 임신을 이유로 한 해고의 금지 등 어머니의 권리 개선 문제가 포함됐다. 독일 사회민주당을 대표해 참가한 클라라 체트킨과 카테 둥커는 국제 여성의 날 제정을 제안했고, 1913년 러시아에서 처음으로 이를 기념하는 시위가 열렸다. 멘셰비키는 여성의 날 시위에 오직 여성만이 참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반대해 볼셰비키는, 여성해방은 모든 피착취 민중이 함께해야 하기 때문에 노동자계급 전체가 시위에 합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1차 세계대전은 여성에게 또 다른 짐을 짊어지게 했다. 거의 천만 명에 이르는, 대부분 농민인 남성이 징집돼 전쟁터로 보내지자 여성이 농사를 떠맡았고, 농촌 노동인구의 72%를 차지했다. 도시에서도 마찬가지 일이 벌어졌다. 1914년에서 1917년 사이에 공장에서 일하는 여성 노동력이 50% 가까이 늘어났다. 이것은 점점 더 많은 여성이 가사노동과 임금노동을 떠맡으면서 ‘이중 노동’을 하게 된다는 의미였다. 이런 상황을 바탕으로, 볼셰비키는 여성 노동자를 당으로 조직하기 위한 대담한 정책을 펼쳐나갔다. 그와 동시에 이 당은 여성해방을 위해 투쟁해야 할 필요성에 대해 노동자들을 교육했다. 그러는 동안 전쟁은 극심한 식량부족을 낳고 사망자 숫자를 엄청나게 늘리면서 격렬하게 이어졌다. 1915년에는 유럽의 주요 도시들에서 여성이 들고일어나 전쟁에 반대하는 필사적인 사보타주를 벌였다.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는 여성들이 식료품 물가 폭등에 항의해 투쟁하며 상점을 약탈했다. 그 해와 그다음 해에 모스크바에서도 같은 일이 벌어졌다. 차르 경찰은 러시아 민중이 굶주리고 묘지에 시신이 쌓이면서 누적되는 위험을 경고하는 보고서를 썼다. “가게 앞에 늘어선 끝없는 대기 행렬에 지치고, 굶고 병든 자녀를 보며 고통을 겪는 어머니들이 이제는 밀류코프와 로디체프* 일당보다 더 혁명에 우호적이다. 당연하게도 이 여성들이 더 위험한데, 이들은 불길이 타오르게 만들 수 있는 불꽃이기 때문이다.”(1) [* 밀류코프와 로디체프: 러시아 입헌민주당(카데트)의 리더들. 입헌민주당은 러시아의 자유주의적 개혁을 꿈꾸면서 볼셰비키에 반대했다.] 하지만 이 경고는 너무 늦었다. 1917년 국제 여성의 날에 섬유공장 여성 노동자들이 파업에 들어갔다. 그들은 인근 공단을 행진하며, 공장 유리창에 눈덩이와 돌멩이를 던지면서 다른 노동자들에게 동참할 것을 호소했다. 점점 더 많은 남성이 자발적으로 시위에 참여해 평화, 빵, 전제 정치 종식을 외쳤다. 이 요구들은 한 해 전부터 전쟁의 고난 때문에 일어난 시위에서 이미 모습을 드러냈다. 여성 노동자들이 시작한 자발적인 시위는 이틀 뒤 총파업으로 번져나갔다. “2월 23일은 국제 여성의 날이었다. 사회주의 조직들은 집회, 연설, 유인물 같은 통상적인 방식으로 이날을 기리려 했다. 그날이 혁명의 시작점이 될 거라고는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2) 여성해방은 혁명의 기둥 여성의 권리가 그렇게 거대하게 변화한 것은 전적으로 권력 장악 덕분이었다. 이 혁명 자체가 여성들이 불을 붙인 것이었다. 굶주림, 전쟁, 고립 등 이제 갓 태어난 노동자국가를 짓누른 역경보다 더 강력하고 거침없었던 볼셰비키의 상상력 또한 영향을 미쳤다. 혁명이 일어나고 일 년도 채 안 된 1918년, 가족법이 제정됐다. 웬디 골드먼*은 이를 “세상에서 가장 진보적인 가족법”이라고 불렀다. 새 가족법은 결혼을 개인 간의 사안으로 규정하면서 교회가 관여하지 못하게 했다. 이혼이 합법적인 것으로 허용됐을 뿐만 아니라, 국가에 사유서를 제출할 필요 없이 누구나 진행할 수 있도록 절차를 간소화했다. 이 법은 사유재산에 대한 남성의 특권을 보장하는 낡아빠진 규정을 폐기했다. 혼외 자녀를 포함해 모든 자녀가 동등한 권리를 보장받았다. 아이의 아버지가 누구인지 알 수 없는 경우에는, 그 여성의 성적 파트너 모두가 자녀 양육의 책임을 나눠야 했다. 미국에서조차 통과되지 못한 법률개정을 거쳐 남성과 여성이 법적으로 동등해졌다는 점이 중요하다. 새 가족법을 작성한 알렉산드르 고이키바르크는 이 법을 국가나 가족을 강화하기 위한 것이 아닌 일시적인 조치로 여겼다. 오히려 이 법은 가족의 소멸을 향해 나아가기 위한 것이었다. [* 웬디 골드먼: 역사 연구자로서, 러시아혁명 이후 여성의 권리 변화를 포괄적으로 다룬 책 <여성, 국가, 혁명: 1917~1936년 소련의 가족정책과 사회생활>을 썼다.] 그러나 레닌이 주장했듯이 법적인 평등은 시작에 불과했으며, 여성의 권리를 위해 혁명이 이뤄내야 할 최소한의 조치였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지주도, 자본가도, 상인도 없는 곳, 이들 착취자 없이 노동자의 정부가 세워지고 있는 곳, 그곳에 여성과 남성의 평등이 법률적으로 존재한다. 그러나 그것으로는 부족하다. 법적인 평등과 삶에서의 평등은 전혀 다르다. 우리는 여성 노동자가 법적으로만이 아니라 실제 삶에서도 남성 노동자와 평등을 누리기를 원한다.”(3) 혁명은 진정한 평등으로 나아가기 위한 조치를 취해야 했다. 법적인 변화가 효과를 얻으려면, 여성을 혹사시키며 무보수로 이뤄지는 ‘가내 노예제’를 끝장내기 위한 국가 차원의 노력이 대규모로 수반돼야 한다. 볼셰비키는 노동자국가를 활용해 집안일을 남성과 여성 모두가 수행하는 산업화한 임금노동으로 전환하려 했다. ‘가사노동 임금 지급’ 운동이 벌어지기 한참 전에 볼셰비키는 가사노동을 유급 노동으로 전환해야 할 필요뿐 아니라, 여성해방을 위한 필수 요소로서 이 노동을 집단화해야 할 필요에 대해서도 간파했다. 이렇게 전환함으로써, 낡은 가부장적 관계가 강요하는 경제적 압박에서 벗어난 새로운 관계의 발판을 만들었다. 사회복지부 장관이 된 알렉산드라 콜론타이는 여성과 가족에 관한 다양한 개혁의 설계자로 활동했다. 이 노동자국가의 장관이 옹호한 가장 중요한 조치는 소련 여성이 직업 선택의 자유, 모든 공직에 진출할 기회, 동일 노동에 동일 임금을 받을 권리를 누리는 것이었다. 더 나아가 임신 여성 해고가 금지됐다. 또한 여성에게 이혼할 권리와 남녀공학에 입학할 권리가 인정됐다. 혁명 이후 여성부와 사회복지부를 이끈 콜론타이(왼쪽) 이러한 진보적인 변화는 세계 어느 곳에서도 볼 수 없는 것이었지만, 여성에게 진정한 평등을 보증하기에는 여전히 불충분했다. 민법상의 변화가 일어나기 전에 볼셰비키 당내에서, 그리고 폭넓은 사회적 차원에서 여성해방, 사회주의 사회에서 가족의 역할, 여성과 남성이 평등한 사회로 전환하는 방식에 관한 길고 심층적이며 흥미로운 논쟁이 이뤄졌다. 남성과 여성 사이의 역사적인 불평등을 의식하면서 볼셰비키는 전통적인 가족에 훨씬 큰 자유를 도입한 새로운 법률이 여성에게 의도하지 않은 결과를 낳지 않도록 주의했다. 역사가 웬디 골드먼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비교해서 본다면, 1918년의 가족법은 놀라울 정도로 시대를 앞선 것이었다. 성평등, 이혼, 친권, 재산권 등을 다루는 유사한 법령이 미국이나 다수의 유럽 나라에서는 아직 제정되지 않은 상태였다. 새 가족법이 파격적인 혁신을 담고 있는데도 법학자들은 ‘이것은 사회주의 법령이 아니라 과도기의 법령일 뿐’이라고 빠르게 지적했다. 그 가족법이 혼인 신고, 이혼 수당, 자녀 양육과 그 밖의 생계유지를 위한 대비 등 비록 일시적일지라도 가족 단위에 필요한 항목들을 남겨놨기 때문이다. 마르크스주의자로서 법학자들은 그들 스스로 곧 유명무실해질 거라고 여기는 법령을 만들어내는 특이한 처지에 있었다.”(4) 가족법을 둘러싸고 드러난 이러한 새로운 사고방식은, 이 혁명은 이제 1막을 지났을 뿐이며 그것은 수천 년간 재생산된 가치가 근본적으로 변화하는 과정의 출발점에 불과하다는 볼셰비키의 관점을 보여준다. 레온 트로츠키가 그의 책 <연속혁명>에서 지적하듯이, 사회주의 혁명의 본질적인 속성에는 이렇게 모든 사회관계를 집어삼키고 변화시키는 부단한 내부 투쟁을 거쳐 사회가 탈바꿈한다는 점이 포함된다. 몇 세기에 걸쳐 여성을 종속시키고 짓눌러왔던 굴레에서 여성이 해방되는 건 사회관계가 급진적으로 바뀌는 데에서 근본적인 요소다. 볼셰비키는 계급 환원론 관점을 취하기는커녕, 여성해방을 노동자혁명의 중심 과제로 여겼다. 레닌은 “여성의 완전한 자유를 쟁취하지 않는 한 노동자계급은 완전한 자유를 쟁취할 수 없다”고 말했다.(5) 볼셰비키는 한 사회에서 여성의 위치를 그 사회 전체의 수준을 측정하는 척도로 여겼다. 여성이 온전한 평등을 쟁취했을 때 비로소 사회주의 혁명이 진실로 성공했다고 간주할 수 있다는 것이다. 스탈린 반혁명 “모스크바의 테르미도르 반동”(원문 보기)에서 설명하고 있듯이, 혁명과 내전을 거친 후 신생 노동자국가인 소련은 국제적으로 고립됐고, 다수가 목숨을 잃거나 굶주림에 시달렸다. 이 고립 탓에 볼셰비키 당내에서, 그리고 소련 국가 내에서 정치적 특권층이 성장할 수 있었으며, 이들이 국내의 결핍 상황을 관리했다. 여성의 권리 영역에서든 다른 영역에서든, 이는 볼셰비키가 도입한 조치들에 대한 반혁명을 뜻했다. 정치에서 발생한 이런 전환이 쉽게 또는 저항 없이 이뤄진 건 아니다. 볼셰비키 혁명은 스탈린주의에 질식당했고, 1917년 혁명 세대는 궤멸됐다. 1차 세계대전과 내전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은 기아와 질병으로 사망했다. 다른 이들은 추방되고 강제노동수용소에 갇혔으며, 또 다른 이들은 총살당했다. 스탈린은 새로운 세대로 형성된 출세주의자들의 지지를 받으면서 볼셰비키 당과 국가의 지도부를 장악하는 데 성공했다. 출세주의자들은 혁명 이후에 당에 들어왔으며, 가장 낡고 후진적인 사고방식을 같이 끌고 들어왔다. 스탈린의 지휘 아래 가부장적 이해관계와 소부르주아 심성이 당내에 번져나갔다. 가사노동을 대체한 사회 서비스가 기이하게도 사회주의의 이름 아래 제약됐다. 오직 결혼한 부부 관계만 국가가 공식적으로 승인했고, 볼셰비키 당 중앙위원회의 여성부는 해체됐다. 성매매는 범죄화됐으며, 성 소수자들은 박해받으며 감옥에 끌려갔다. 임신 중지는 금지됐다. 혁명 초기 몇 년간 볼셰비키가 그토록 열성적으로 토론했던 여성해방에 관한 모든 논의는 완전히 쓸데없는 것으로 치부됐다. 스탈린주의 반혁명은 부르주아 가족제도와 낡은 모성 관념을 떠받드는 것으로 이어졌다. 스탈린 정권 아래에서 국가는 여성이 오직 어머니, 아내, 주부 같은 모습을 갖춰야 한다는 생각을 주입했다. 1944년에 스탈린은 얼마나 많은 자녀를 낳았는가를 기준으로 여성에게 호칭을 부여했다. ‘명예로운 어머니 훈장’을 제정해 여성을 분류했고, 10명 이상의 자녀를 낳은 여성에겐 ‘어머니 영웅’이란 호칭을 부여했다. 독일과 이탈리아의 파시스트 지도자들이 전통적인 가족을 사회의 기강을 잡는 기본 토대로 간주했는데, 스탈린 치하의 소련에서도 가족이 그런 역할을 맡았다. 혁명 초기 몇 년간 자유로운 사랑과 가족의 소멸에 관한 해방적인 사고가 정점에 달했지만, 이제 그 모든 게 부도덕하고, 무정부주의적이며, 소부르주아적인 선전이라고 매도당했다. 웬디 골드먼이 자신의 책 <여성, 국가, 혁명>에서 거듭 강조했듯이, 스탈린 정권이 저지른 모든 범죄 중 가장 끔찍한 것은 스탈린 관료체제가 ‘현실 사회주의’라고 온 세계가 믿게 만든 것이다. ‘노동자계급 내의 노동자계급’인 여성에게 사회주의 혁명이란 곧 위대한 승리를 뜻했고, 여성은 러시아혁명에서 영웅적인 역할을 해냈다. 그러나 노동자국가의 전면에 스탈린이 등장한 뒤 이 역사가 지워지기까지는 채 반세기도 걸리지 않았다. 1789년 프랑스혁명, 1871년 파리코뮌, 1917년 러시아혁명을 포함해 역사 속의 혁명에서 여성은 없어서는 안 될 역할을 맡아왔다. 이 거대한 격변 속에서 여성은 인내와 용기, 영웅적 행동의 풍부한 사례를 남겼다. 그 뒤 100년 동안에도 노동자계급과 가난한 여성은 혁명적 변화와 거대한 사회적 격변을 이끌어갈 주인공으로서 능력을 지니고 있음을 역사 속에서 끊임없이 보여줬다. 그럴 수 있었던 까닭은, 레온 트로츠키도 지적한 바, “새로운 것을 향해 더 큰 활력과 끈기로 투쟁할 수 있는 사람들은 낡은 것으로부터 가장 큰 고통을 겪어온 사람들”이기 때문이다.(6) 주 1. 바르바라 푸네스, “혁명가”, <투사들 – 역사를 만든 여성 이야기>. 2. 레온 트로츠키, “5일간”, <러시아혁명사> 1권. 3. V. I. 레닌, “여성 노동자에게”, <전집> 30권. 1920년 2월 22일 <프라브다>에 먼저 발표. 4. 웬디 Z. 골드먼, <여성, 국가, 혁명: 1917~1936년 소련의 가족정책과 사회생활> 5. V. I. 레닌, 앞의 글. 6. 레온 트로츠키, “모스크바 여성 노동자 대회에 보낸 편지”, 1923년 11월 28일 <프라브다>에 발표. 글쓴이 안드레아 다트리, 2018년 3월 5일 옮긴이 오연홍 *로 표시한 각주는 옮긴이가 붙인 것이다. 기사 원문 https://www.leftvoice.org/women-in-the-revolution-the-revolution-in-women-s-lives/ 연재 소개 페미니즘이라고 하면 ‘남성 혐오’나 ‘갈라치기’부터 떠올리는 사람들이 많다. 자유주의 페미니즘 또는 래디컬 페미니즘이 여전히 주류인 것도 맞다. 하지만 페미니즘에는 다른 길이 있다. 착취, 가난, 전쟁, 기후 위기로 점철된 자본주의라는 체제 안에서 남성과 더 잘 경쟁하기 위한 페미니즘이 아니라 자본주의 자체를 깨뜨려야 한다고 주장하는 페미니즘, 이를 위해 또 다른 누군가를 배제하는 게 아니라 모든 성별, 국적, 인종의 노동자와 청년이 똘똘 뭉쳐 함께 싸워야 한다고 외치는 페미니즘이 있다. 2003년에 아르헨티나에서 만들어지기 시작했고 지금은 독일, 볼리비아, 브라질, 칠레, 코스타리카, 스페인, 미국, 프랑스, 이탈리아, 멕시코, 페루, 우루과이, 베네수엘라에서도 활동하는 국제 ‘빵과 장미’ 네트워크가 그것이다. 한국에서 노동자계급에 기반한 변혁적 여성운동을 건설하려는 우리는 혁명적 페미니즘의 중요한 사례로 ‘빵과 장미’를 주목하면서, 이들의 주장과 실천을 소개하고자 한다. ① 사회주의 페미니즘이란 이런 것이다(타티아나 코차렐리) ② 왜 여성이 사회주의를 위해 투쟁해야 하는가?(안드레아 다트리) ③ 여성 자본가에 맞서는 여성 노동자들(타티아나 코차렐리) ④ 우리는 임신 중지권을 이렇게 쟁취했다(너새니엘 플라킨) ⑤ 혁명은 여성의 삶을 어떻게 바꾸는가?(안드레아 다트리) ⑥ 사회적 재생산과 사회주의 페미니즘(호세피나 마르티네스) ⑦ 페데리치의 주장에 대한 비판적 토론(호세피나 마르티네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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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우리는 임신 중지권을 이렇게 쟁취했다1973년 ‘로 대(對) 웨이드’ 판결로 임신 중지가 합법화됐던 미국에서, 50년 만에 이를 뒤집는 대법원 판결이 지난해 나왔다. 임신 중지를 선택할 수 있는 헌법상의 권리가 사라져버렸다. 이에 항의하는 시위가 이어졌다. 시민단체들은 캠페인을 벌일 수 있도록 돈을 기부해 달라고 호소하고, 민주당은 선거에서 그들에게 표를 던지는 것이 유일한 해법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중남미 지역에서는 오히려 임신 중지권이 확대되고 있다. 최근 아르헨티나, 멕시코, 칠레에서는 낙태죄가 폐지됐다. 이런 성과는 중도좌파 정부들이 하사해준 선물 같은 게 아니었다. 임신 중지 합법화는 거리에서 펼쳐진 전투적인 운동의 결과이며, 어떤 나라에서는 수십 년간 투쟁이 이어졌다. 국제 사회주의 페미니즘 단체인 ‘빵과 장미’가 이런 운동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레프트 보이스>가 세 나라의 ‘빵과 장미’ 리더들과 인터뷰했다. * * * 아르헨티나_ 안드레아 다트리 안드레아 다트리(Andrea D’Atri)는 사회주의 페미니즘 단체인 아르헨티나 ‘빵과 장미’의 창립자이며 <일간 좌파>의 편집자이기도 하다. 그가 쓴 책 <빵과 장미: 자본주의 사회에서 젠더와 계급>은 6개 국어로 번역됐다. 2019년에 플루토 출판사에서 영어판이 발행됐다. 아르헨티나에서 임신 중지권은 어떻게 쟁취됐는가? 2021년 12월 30일 밤에 법안이 통과됐다. 여성운동의 끈질긴 조직화와 투쟁이 없었다면 그 법안은 여전히 의회 어딘가의 책상 서랍에 처박혀 있었을 것이다. 아르헨티나에서 임신 중지 합법화를 위한 투쟁은 1970년대까지, 그러니까 1976년 군사 쿠데타 이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군부독재가 무너졌을 무렵에 인권을 위한 거대한 투쟁이 있었다. 그래서 1980년대 들어 임신 중지 역시 여성의 인권 문제로 다뤄지기 시작했으며, 나중에는 음성적인 임신 중지도 공공의료 사안으로 여겨졌다. 임신 중지 합법화는 임신한 사람들이 어떻게 할지 결정할 수 있는 개인적 권리뿐만 아니라, 위생과 안전이 담보되지 않는 임신 중지로 사망하지 않을 권리까지 보장하는 것이다. 이 때문에 여성운동은 다음과 같은 구호를 채택했다. “스스로 결정하기 위한 성교육. 임신 중지를 피하기 위한 자유로운 피임. 죽지 않기 위해 합법적이고 안전한 무상 임신 중지.” 다양한 페미니즘 투쟁을 거치며 거의 20년이 지난 2005년에, 300개 이상의 단체가 모인 연합체 ‘전국임신중지권운동’이 결성됐다. 그해 전국임신중지권운동은 수많은 사람이 참여한 시위를 주도했고, 10만 명이 서명한 청원을 의회에 제출했다. 서명을 이렇게 모은 건 중고등학교, 대학교에서 토론과 논쟁을 조직하고 도심에서 시위를 벌여온 역동적인 운동의 결과였다. 2007년 전국임신중지권운동은 임신 중지 합법화를 위한 법안을 제출했다. 그 법안은 좌파 페미니스트 변호사인 도라 콜레데스키가 작성했는데, 그는 우리의 승리를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이 법안은 낙태죄 폐지 요구뿐만 아니라, 임신한 당사자의 요청만으로도 공공 병원에서 합법적으로 임신 중지가 이뤄져야 한다는 요구까지 포함했다. 그러나 네스토르 키르치네르와 크리스티나 키르치네르가 집권했던 중도좌파 정부는 이 법안을 전혀 논의에 부치지 않았다. 법안이 몇 번이고 제출되는 동안 낙태죄는 그대로 유지됐다. 2018년에 일곱 번째로 법안이 제출됐을 때 드디어 국회에서 논의가 시작됐다. 당시 상원의원이었던 크리스티나 키르치네르는 그때 비로소 이 법안을 지지했다. 왜냐하면 그 무렵 그는 야당 신세였고, 마크리가 이끄는 우익 정부가 이 법안의 통과를 막을 거라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같은 해 아르헨티나 여러 도시에서 수많은 사람이 몰려나와 ‘녹색 물결’ 시위를 벌였고, 국회를 에워쌌다. 법안을 투표에 부치라고 요구하며 몇 달간 시위가 이어졌다. 끝없는 시위의 정점이었다. 해마다 아르헨티나에서는 3월 8일(여성의날)과 9월 28일(라틴 아메리카와 카리브해 지역 낙태죄 폐지의 날)이 되면 임신 중지 합법화를 위해 시위를 벌였다. 전국에서 백만 명이 거리로 나와 “한 명도 더 잃을 순 없다!”라고 외치며 여성 살해에 항의했던 2015년도 중요한 시기였다. 2018년에는 국회 논의가 길어지는 동안 30만 명에 이르는 사람들이 국회 밖에서 밤샘 농성을 벌였다. 하원에서는 법안이 통과됐는데, 상원에서 막혀버렸다. 하원에 우리 좌파노동자전선(FIT)은 세 명의 의원이 있는데, 오직 그 세 명만이 법안에 찬성표를 던졌다. ‘빵과 장미’와 사회주의노동자당(PTS)은 국회 밖에서 벌어진 거대한 녹색 물결 시위에 참여했고, 같은 당원이면서 좌파노동자전선 의원인 니콜라스 델 카뇨와 나탈리아 곤살레스 셀리그라는 국회 안에서 법안을 위해 싸웠다. 알베르토 페르난데스, 크리스티나 키르치네르가 이끄는 중도좌파 정부는 어떤 역할을 했는가? 2019년에 알베르토 페르난데스 대통령과 크리스티나 키르치네르 부통령이 이끄는 정부가 들어섰을 때 그들은 이 법안을 통과시키겠다고 공언했다. 거리에서 벌어진 투쟁의 힘이 강력했고, 많은 이들이 새 정부에 기대를 걸었기 때문에 그들은 이 사안을 그들의 정책 의제에 포함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코로나 사태 때문에 여성운동이 흩어져 버렸다. 그러자 페르난데스 정부는 전국임신중지권운동이 몇 번이고 제출했던 법안을 무시하면서 자신의 법안을 따로 제출했다. 그의 법안은 반동 세력과 가톨릭 세력의 표를 끌어오기 위해 이들과 협상하면서 받아들인 규제 조치를 포함했다. 그렇게 해서 그 법안이 최종적으로 통과됐다. 국회에서 논쟁이 벌어졌을 때, 사회주의노동자당 니콜라스 델 카뇨는 먼저 이 법안이 만들어질 수 있게 해준 도라 콜레데스키와 여성운동에 경의를 표했다. 그는 정부가 포함한 규제 조치를 규탄한 단 한 명의 의원이었다. 녹색 물결 시위에서 ‘빵과 장미’는 무엇을 했는가? ‘빵과 장미’는 사회주의노동자당이 만든 사회주의 페미니즘 단체인데, 처음 만들어졌을 때부터 임신 중지 합법화를 위한 투쟁에 참여했다. 수년 동안 사회주의노동자당은 선거 투쟁을 벌이면서 임신 중지 합법화를 요구한 유일한 정당이었다. 우리는 줄곧 임신 중지가 공공병원에서 자유롭고 안전하게 이뤄져야 한다고 요구했다. 금지한다고 해서 임신 중지가 사라지지는 않는다. 금지는 오히려 비밀리에 의료 시술을 받을 수 없는 노동자계급과 가난한 민중에 속한 여성과 임신 가능한 모든 이의 건강과 생명을 위태롭게 할 뿐이다. 우리는 노동자 운동 안에서, 불안정하게 고용된 청년과 학생들 사이에서, 빈민 속에서 전투적으로 활동했고, 덕분에 편견에 맞붙어 싸우면서 광범한 다수가 임신 중지권을 위한 투쟁에 동참하도록 설득할 수 있었다. 우리가 노동자계급의 투쟁을 이끌었을 때는 언제나 거기에서 여성위원회를 건설했다. ‘빵과 장미’는 아르헨티나 곳곳에서 3,000명 넘는 여성을 모아 전국여성대회에 참가했다. 또한 우리는 경찰의 탄압에 맞서 거리에서 싸웠다. 아르헨티나에서 가장 규모 있는 식료품 공장을 다국적 기업이 소유하고 있는데, 어떤 관리자가 여성 노동자를 희롱했을 때 우리는 이에 항의하며 작업을 중단했다. 여성 파업이 진행됐을 때 우리 동지들은 여성 살해를 규탄하며 또 다른 규모 있는 공장들에서 진짜로 파업을 벌였다. ‘부자들을 위한 민주주의’에 대항해 우리는 민주적 권리를 위한 투쟁에서도 최전선에 나선다. 우리는 불안정 노동의 다수를 차지하며 노동자계급 내에서 가장 가난한 층에 속하는 여성 노동자들의 노조 결성권을 위해 싸운다. 그러나 우리 투쟁의 지평은 수많은 인간을 착취하고 억압하는 가부장적인 자본주의 사회의 근본적인 변혁으로 확장된다. 멕시코_ 야라 비야세뇨르 야라 비야세뇨르(Yara Villaseñor)는 사회학자이며 <멕시코 일간 좌파>의 편집자다. 멕시코에서 ‘빵과 장미’ 활동을 이끌고 있다. 멕시코는 상황이 달랐다. 의회가 아니라 대법원의 판결로 임신 중지권이 확정됐다. 어떻게 해서 이런 판결이 나왔나? 안드레스 마누엘 로페스 오브라도르 대통령의 ‘진보적’인 정부는 정치적 지지도가 취약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전임 신자유주의 정부에 대한 광범한 불만을 이용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러려면 여성 살해와 폭력을 끝장내라는 요구, 더 나은 생활 조건을 보장하라는 요구 등 대중 운동의 열망에 응답해야만 한다. 대법원이 낙태죄를 폐지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최근 몇 년 동안 수많은 이들이 거리로 나와 이 요구를 외쳤다. 대법원의 판결은 여성운동을 누그러뜨리면서, 점차 권위를 잃어가던 정부와 국가기구에 대한 신뢰를 끌어올리려는 시도였다. 오브라도르 정부는 어떤 역할을 했는가? 오브라도르 정부는 계속 방관하고 있었다. 상원과 하원 모두에서 여당이 다수를 차지했는데도 그들은 낙태죄 폐지 법안을 통과시키지 않았다. 대법원이 한 지역 차원에서 낙태죄에 위헌 판결을 내린 뒤에야* 여당은 다른 지역에서도 낙태죄를 폐지하겠다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것은 오브라도르 정부 하에서 벌어진 투쟁으로 쟁취한 승리다. 하지만 [여당과 달리] 정부는 대법원 판결이 나온 2021년 9월, 그것을 전국 차원으로 확대 적용하는 대신, 가톨릭 세력이나 보수 우익과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기로 했다. 우리는 또한 오브라도르가 여성운동이 우익의 지시를 받고 있으며 오직 정부를 불안정하게 만드는 목적을 노릴 뿐이라는 식의 적대적인 입장을 여러 차례 발표한 사실을 잊을 수 없다. 임신 중지에 관해 그는 이 기본적인 권리를 국민투표에 부치겠다는 입장을 발표해 크게 원성을 샀다. [* 멕시코 코아우일라주에서는 임신 12주 이내 임신 중지를 범죄행위로 규정하고 최대 징역 3년 형에 처할 수 있게 했는데, 2021년 9월 대법원이 이를 위헌이라고 판결했다.] 정부가 미적거리는 동안 여성운동은 어떻게 투쟁했는가? 멕시코에서 여성운동은 국제 페미니즘 운동에 발맞춰 성장해 왔다. 그중에서도 아르헨티나와 칠레가 특별히 큰 영향을 미쳤다. 멕시코에선 제도권에 합류한 페미니즘의 영향 때문에, 일부 국가기관을 상당히 신뢰하는 개량주의 의식이 압도적이다. 그러나 여성 살해, 성 소수자 혐오범죄, 이주민 납치사건의 90%가 처벌받지 않고 있다. 이런 폭력 때문에 사람들은 정부의 치안 계획을 믿을 수 없게 된다. 그래서 정부는 여성을 겨냥한 범죄를 맡을 새로운 지역 변호인단을 만들겠다는 정책을 세웠다. 이와 같은 처벌과 투옥 정책은 정의를 추구하는 많은 사람에게서 동조를 얻었다. 많은 여성 노동자들이 불안정한 노동조건과 저임금에 맞선 투쟁 그리고 조직화 작업을 주도하고 있다. 그들은 파업과 시위를 조직하고 있지만, 경제에서 그들이 맡은 역할에 비춰 보면, 놀랄 만한 사회적 힘을 가진 정치적 주체로 여전히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실제로 이 지점이 ‘빵과 장미’의 주요한 투쟁 과제의 하나다. 우리는 여성운동이 정말 강력하기 때문에 현재 펼쳐지고 있는 노동자투쟁을 강화할 수 있다고 여긴다. 또한 우리는 노동자계급이 페미니즘적인 요구를 채택하도록 설득하려 한다. 우리는 규모가 큰 노조들이 여성 살해와 폭력의 근절, 임신 중지권을 위한 투쟁에 복무해야 한다고 요청한다. 전체적으로 ‘빵과 장미’는 어떤 활동을 했는가? 우리는 여성운동 내에서 노조 관료, 정부, 보수 우익으로부터 독립적이며, 노동자계급과 동맹을 맺고 우리의 요구 전체를 위해 투쟁하는 진영을 형성하고자 한다. ‘빵과 장미’는 멕시코에서 상당히 큰 페미니즘 단체다. 우리는 시위에 천여 명을 모을 수 있으며, 사회주의 페미니즘 전망으로 현장과 학교에서 사람들을 조직한다. 다른 단체들과 함께 전국적인 임신 중지권 운동을 벌인다. 우리는 여성운동에서 계급투쟁 진영을 건설하려 한다. 해고, 복지 축소, 불안정한 노동조건에 맞서서, 그리고 전국에서 합법적이고 안전한 무상 임신 중지권 쟁취를 내걸고 거리에서 투쟁하기 위해서다. 칠레_ 알레한드라 데캅 알레한드라 데캅(Alejandra Decap)은 칠레대학교에서 언어학을 배우고 있다. 그는 <칠레 일간 좌파>에서 젠더와 섹슈얼리티 섹션의 편집자로 있으면서 ‘빵과 장미 – 테레사 플로레스’를 이끌고 있다. 칠레에서는 최근에 항쟁이 있었다. 2019년 10월부터 신자유주의 정권에 항의하며 수백만 명이 거리로 나왔다. 지금은 학생운동 리더 출신인 가브리엘 보리치가 새로 대통령이 됐고, 9월에 새 헌법 투표가 예정돼 있다. 이런 흐름 속에서 어떻게 임신 중지권을 쟁취했는가? 얘기를 시작하려면 이 점을 아주 분명하게 짚어야 한다. 제헌 절차와 보리치의 당선은 투쟁의 김을 빼고 10월 항쟁의 방향을 틀어버리는 데 기여했다. 보리치는 좌파로서 선거에 나갔지만, 지금은 칠레 자본가들과 미국 제국주의와 손잡고 통치하고 있다. 새 헌법 초안이 일부 권리를 인정하고는 있지만, 그것의 목표는 정치체제를 ‘현대화’하는 것, 지난 항쟁으로 흔들린 통치력을 복원하는 것이다. 이 새 헌법은 자본 축적 구조의 뼈대, 독재를 계승한 체제의 뼈대를 보존할 것이다. 여러 핵심 쟁점이 있는데, 그것은 AFP로 불리는 사적연금 계획을 폐기하지 않을 것이며, 대통령 체제와 특권적인 상원 구조를 유지하고, 천연자원 약탈을 계속 허용할 것이다. 그러면 지금 칠레에서 임신 중지권은 어떤 상태인가? 독재 치하에서 작성된 기존 헌법은 임신 중지를 금지했다. 새 헌법에서는 금지 조항이 삭제됐다. 하지만 여전히 임신 중지권을 보장하기 위한 법률도 없고, 예산도 배정되지 않았다. 그러니까 칠레에서는 아직 임신 중지권이 없는 셈이다. 합법화되지 않았고, 안전하지 않으며, 무상도 아니다. 포괄적인 성교육도 이뤄지지 않는다. 새 헌법은 모두를 위한 성과 재생산 권리를 인정할 것인데, 이는 임신 중지권을 위해 페미니즘 운동이 수년간 투쟁한 성과다. ‘빵과 장미’에서 활동하는 우리는 새 헌법에 대해 환상을 품지 않는다. 그러나 국민투표와 관련해서는, 반대투표를 선동하는 우익과 보수 세력에 맞서자고 사람들에게 호소하며, 새 헌법의 내용을 한층 더 후퇴시키려 골몰하는 기존 중도좌파 정당들에도 맞서야 한다고 호소한다. 임신 중지권에 관해 보리치 정부는 어떤 역할을 하고 있나? 보리치 정부가 페미니즘과 여성 투쟁에 대해 많은 얘기를 하지만, 전반적으로 그들의 입장은 훨씬 더 온건해졌다. 성폭력에 대해 강령적으로는 엄벌 조치를 제시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경찰차에 무지개 깃발을 달아 놓는 수준이다. 정부는 자신의 온건한 정책에 좌파적 색채를 칠하려고 페미니스트의 언어를 사용한다. 정권을 쥔 정치연합 ‘존엄에 찬성한다’(Apruebo Dignidad)는 공산당과 ‘넓은 전선’(Frente Amplio)을 포함하는데, 이들은 자신을 제헌 절차의 수호자로 내세웠다. 하지만 지금 그들의 태도는 어정쩡한 것으로 변했다. 30년간 이 나라를 이끈 뒤 지난 항쟁으로 도전받았던 낡은 중도좌파 연합에 압력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칠레에서 ‘빵과 장미’는 어떤 활동을 하고 있는가? 우리는 여러 현장과 대학에서 사회주의 페미니즘 교육을 벌인다. 공장과 병원, 학교에서 여성위원회를 조직한다. 병원과 어린이집에서 일어난 노동자들의 파업에도 참여해왔다. 또한 우리는 혁명적 사회주의자들의 공동활동으로서 총선에 사회주의 페미니즘 후보를 내세운다. 우리는 억압과 착취에 대항하는 모든 진보적인 투쟁에 개입하면서, 혁명과 사회주의를 위해 투쟁하는 여성과 성 소수자들의 전투적인 운동을 건설하려 한다. 칠레에서는 ‘빵과 장미’에 테레사 플로레스라는 이름이 붙어 있다. 테레사 플로레스는 어떤 사람인가? 테레사 플로레스는 칠레의 노조 지도자로서 페미니스트이자 공산주의자였다. 1912년에 만들어졌고 나중에는 공산당으로 당명을 바꾼 사회주의노동자당(POS)의 창립자 중 유일한 여성이었다. 일생의 동반자인 루이스 에밀리오 레카바렌과 함께 그는 초석 광산 노동자들을 조직했고, 그들에게 자본가들의 착취에 맞선 투쟁을 위한 정치적 수단을 제공하려 했다.* 또한 플로레스는 노동자계급 여성들을 조직했고, 주부위원회도 만들었다. 그는 노동자계급 여성들이 토론하고 스스로 교육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냈다. [* 세계 최대 규모의 초석 생산지가 칠레에 있다. 1차 세계대전 이후 실업과 빈곤이 만연한 상황에서 초석 광산 노동자들도 격렬한 파업을 벌인 바 있다.] 미국에서 임신 중지권을 다시 쟁취하기 위해 싸우고 있는 사람들에게 한 말씀 해달라. 우리의 모든 권리를 쟁취하기 위한 유일한 길은 조직을 만들고 거리에서 투쟁하는 것이다. 2019년 칠레 항쟁에서 배운 주요한 교훈이 있는데, 지난 30년간 우리의 삶보다 이윤을 중시하는 체제를 지키는 데 전념해온 정당들을 신뢰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힘과 투쟁만을 믿어야 한다. 그래야 우리의 요구를 쟁취할 수 있다. 자본주의가 지속되는 한, 그 어떤 승리도 영구적일 수 없다. 바로 이 때문에, 우리 몸을 구속하는 억압에 맞선 투쟁은 고통과 야만으로 가득 찬 이 체제를 끝장내기 위한 투쟁과 직접 연결돼야 한다. 인터뷰 너새니얼 플라킨, 2022년 7월 17일 옮긴이 오연홍 *로 표시한 각주는 옮긴이가 붙인 것이다. 기사 원문 https://www.leftvoice.org/how-we-won-abortion-rights/ 연재 소개 페미니즘이라고 하면 ‘남성 혐오’나 ‘갈라치기’부터 떠올리는 사람들이 많다. 자유주의 페미니즘 또는 래디컬 페미니즘이 여전히 주류인 것도 맞다. 하지만 페미니즘에는 다른 길이 있다. 착취, 가난, 전쟁, 기후 위기로 점철된 자본주의라는 체제 안에서 남성과 더 잘 경쟁하기 위한 페미니즘이 아니라 자본주의 자체를 깨뜨려야 한다고 주장하는 페미니즘, 이를 위해 또 다른 누군가를 배제하는 게 아니라 모든 성별, 국적, 인종의 노동자와 청년이 똘똘 뭉쳐 함께 싸워야 한다고 외치는 페미니즘이 있다. 2003년에 아르헨티나에서 만들어지기 시작했고 지금은 독일, 볼리비아, 브라질, 칠레, 코스타리카, 스페인, 미국, 프랑스, 이탈리아, 멕시코, 페루, 우루과이, 베네수엘라에서도 활동하는 국제 ‘빵과 장미’ 네트워크가 그것이다. 한국에서 노동자계급에 기반한 변혁적 여성운동을 건설하려는 우리는 혁명적 페미니즘의 중요한 사례로 ‘빵과 장미’를 주목하면서, 이들의 주장과 실천을 소개하고자 한다. ① 사회주의 페미니즘이란 이런 것이다(타티아나 코차렐리) ② 왜 여성이 사회주의를 위해 투쟁해야 하는가?(안드레아 다트리) ③ 여성 노동자들이 ‘훌륭한 여성 CEO’에 맞서 싸운 이유(타티아나 코차렐리) ④ 우리는 임신 중지권을 이렇게 쟁취했다(너새니엘 플라킨) ⑤ 혁명은 여성의 삶을 어떻게 바꾸는가?(안드레아 다트리) ⑥ 사회적 재생산과 사회주의 페미니즘(호세피나 마르티네스) ⑦ 페데리치의 주장에 대한 비판적 토론(호세피나 마르티네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