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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여성파업 1] 아이슬란드 - 여성이 멈추면 세상이 멈춘다!

기사입력 2023.12.21 00:46 | 조회 7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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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편집자 주]

    지난 12월 6일 열린 “여성파업 첫발떼기 토론회”를 비롯해, 2024년 3월 8일 여성파업을 조직하기 위한 활동이 여성파업조직위원회 주도로 진행되고 있다. 사회주의를향한전진은 노동자계급의 여성해방 운동을 건설하기 위한 여성파업 시도에 전폭적인 지지를 보내며, 이 운동의 현황과 과제, 전망을 짚어 보기 위해 세계 여러 나라 여성파업 사례를 돌아보고자 한다. 1975년 아이슬란드 여성파업에서 시작해 지난 십수 년 사이에 폴란드, 스페인, 아일랜드, 스위스, 아르헨티나 등 곳곳에서 여성파업이 일어났다. 각각의 사례는 그 자체로 세계 여성 노동자의 현실과 투쟁에 대한 우리의 시각을 넓혀 주기에 충분하다. 또한 여성파업의 양상과 결과, 다양한 쟁점을 훑어보면 우리의 과제에 대한 인식도 더 풍부하게 채워 갈 수 있을 것이다.

     

    오로라와 화산, 빙하의 나라 아이슬란드. 아이슬란드에 여행을 간 사람들은 ‘마치 다른 행성에 온 듯한 기분’을 느낀다고 한다. 한국과 비슷한 면적의 아이슬란드는 천혜의 자연이 있고 1인당 GDP가 세계 8위인 부유한 나라다. 이보다 더 유명한 점은 ‘세계에서 가장 평등한 나라’라는 것이다.

     

    2006년부터 세계경제포럼(WEF)이 발표한 ‘글로벌 젠더 격차 보고서’를 보면 아이슬란드는 2023년까지 14년 연속 성평등 국가 세계 1위1)를 차지했다. 그런가 하면 여성과 관련해 아이슬란드에 붙는 ‘세계 최초’의 수식어가 한둘이 아니다. ‘세계 최초로 민주적으로 선출된 여성 대통령(1980년)’, ‘세계 최초로 의석을 얻은 여성정당(1983년)’, ‘세계 최초로 커밍아웃한 레즈비언 대통령(2009년)’ 등이 있다. 한국이 OECD 국가 중 27년째 여성의 저임금으로 성별 임금 격차 1위를 차지하고 있는 현실과 견주어 보면 아이슬란드는 마치 다른 행성인 듯하다.

    1) Global Gender Gap Report. 남성과 여성의 권익을 비교하는 통계로 임금, 교육, 의료 등 분야를 기준으로 남성의 권익을 1로 두고 여성의 권익을 계산한 지수. 조사대상 146개국 중 0.9를 넘는 나라는 0.912를 기록한 아이슬란드 하나뿐이었다. 한국은 105위로 0.680.

     

    이러한 나라에서 최근 국제적으로 떠들썩한 사건이 있었다. 2023년 10월 24일, 성인 여성의 90%가 온종일 ‘여성파업’을 벌인 일이다. 성평등 모범 국가로 국제적 부러움을 사는 아이슬란드에서 거의 모든 여성이 파업했다니 놀라운 뉴스다. 무엇 때문일까? 아이슬란드는 여성의 파라다이스라 불리지 않는가? 파업 참가 여성들은 1975년으로 거슬러 올라가 여성파업의 역사를 이야기했다. 아이슬란드 여성의 차별과 억압, 저항의 역사를 살펴보자.

     

    사회를 뒤흔든 1975년 10월 24일

    여성이 멈추면, 세상이 멈춘다

     

    2023년 현재 인구 약 39만 명인 섬나라 아이슬란드는 무인도였던 시기를 지나 870년경 바이킹이 세운 나라다. 과거부터 남성이 바다에 한참 동안 나가 고기를 잡고 여성은 사냥부터 농사일, 모든 집안 살림과 육아를 도맡아 하는 삶을 살았다고 한다. 오늘날 정치적으로는 의원내각제를 채택하고 있으며 다른 북유럽 국가들과 달리 보수 우파(우파 연정)가 정권을 잡아 왔다. 경제는 척박한 환경 탓에 비교적 더디게 성장했다. 여성들이 다닐 수 있는 일터는 생선 공장 정도였다.

     

    아이슬란드에서는 1915년부터 여성의 참정권이 보장되었고, 1931년에는 강간, 근친상간, 산모의 건강에 위협이 되는 경우에 임신중지가 합법화됐다. 국제노동기구(ILO)의 8대 기본협약 중 하나인 ‘동일 가치 노동에 대한 남녀근로자의 동일보수에 관한 협약(1951년)’을 비교적 빠른 시기인 1958년에 비준했다. 1961년에는 평등임금법(Equal Pay Act)을 제정했다. 겉으로 보면 여성의 권리가 점진적으로 확대되었고 그만큼 차별이 없어 보인다. 그러나 현실은 달랐다.

     

    1915년부터 여성 참정권이 보장되었지만 60년간 의회에 진출한 여성은 단 9명에 불과했다2). 무엇보다 생산과 재생산 노동영역에서 여성에 대한 차별이 심했다. 1960년대 여성 노동자의 임금은 남성 노동자 대비 60% 미만으로 많은 여성들이 저임금에 시달렸다. 특히 여성이 많은 직종의 임금이 낮고 고용이 불안정했다. 가사와 돌봄 노동은 순전히 여성의 몫이었다. 여성의 노동시장 참여율은 34%에 수준에 그쳤다. 여성은 집 안에서 온갖 무급 재생산 노동을 하느라 직장에서 일할 수 없었고, 일해도 남성보다 적은 임금과 나쁜 노동조건에서 차별당하며 일하다 퇴근해서 다시 가사돌봄 노동에 시달리는 게 대부분 여성의 일상이었다. 여성은 법과 다른 현실에서 살아갔다.

    2) 1975년 기준 여성 하원의원은 전체 의석의 5%인 3명이었다.

     

    그러다 68혁명으로 대표되는 1960년대 국제적 저항 운동의 물결이 아이슬란드의 여성운동에 영향을 미쳤다. 여성들은 다른 나라에서 벌어진 거대한 노동자 투쟁, 학생운동, 사회운동과 더불어 여성운동의 성장과 여성해방 사상 등에 영향을 받으며 여성운동을 성장시켜 갔다. 여성 차별과 억압의 현실로 인해 점점 더 많은 여성이 문제의식을 갖고 저항을 통한 변화를 꾀했다. 1970년대가 되자 5대 여성단체의 회원 수가 전체 여성의 3분의 1에 이르렀다.

     

    ‘레드스타킹스(Redstockings)’는 여성단체 중 하나였다. 레드스타킹스는 1970년에 결성된 페미니스트 단체로 노동절인 5월 1일 빨간 스타킹을 신고 ‘인간이다! 상품이 아니다!’라는 슬로건으로 행진하며 대중 앞에 등장했다. 레드스타킹스는 20~30대 여성 사회주의자들이 주축이었으며 자본주의에 맞서는 계급투쟁과 여성해방의 과제가 연결되어 있다는 정치적 입장을 채택하고 있었다. 이들은 성별 임금 격차 해소, 직장 내 젠더평등 등 노동의 권리와 임신중지권, 유치원 돌봄의 확장 등 재생산권을 위해 투쟁했다. 1970년 첫 총회에서부터 ‘아이슬란드 여성 총파업’을 안건으로 제출했는데 이는 자본주의에서 벌어지는 여성에 대한 차별과 억압을 여성의 주체적 파업투쟁으로 깨뜨리자는 정치적 표현이었다. 그리고 5년 후 그 목표는 현실이 되었다.

     

    UN은 1975년을 세계 여성의 해(International Women’s Year)3)로 지정했다. 이를 준비하는 1974년 6월 여성단체 간담회에 초대받은 레드스타킹스는 그 자리에서 ‘여성파업’을 제안했다. 하지만 이 제안은 거절당했고 그 후 이들은 노동자에게 다가갔다. 1975년 1월에 최저임금을 받는 여성 노동자들이 가입한 노동조합을 찾았다. “여성이 일터에서의 노동력과 가정에서의 재생산 노동의 힘을 세상에 보여 주기 위해 1년에 하루, 모든 여성이 파업을 벌이자!” 레드스타킹스의 제안에 여성 노동자들이 열광했다.

    3) 유엔은 1975년 '세계 여성의 해' 기간의 3월 8일을 세계 여성의 날(International Women's Day)로 기념하기 시작했다.

     

    레드스타킹스와 노동조합은 더 많은 여성 노동자를 만나며 여성파업을 조직했고 아래로부터 긍정적이고 상당한 여론과 지지를 만들어 갔다. 5월 총리실 주관으로 열린 세계 여성의 해 운영위원회는 그 구성에 노동조합과 레드스타킹스를 포함시켰다. 이 기구는 다양한 계급과 계층, 정치적 입장의 참여와 합의를 우선해 여성파업 제안을 수용하면서 그룹별 대표자, 교사 노동자, 미혼모 등 8명의 이름으로 여성파업을 정식 상정했다. 노동자는 일터에서 일손을 놓거나 휴가를 쓰고, 자영업자는 문을 닫거나 가게에서 나서고, 전업주부는 집안일에 손을 떼기로 했다.

     

    그러자 일부 우파 여성과 여성단체가 반발했다. 이들은 여성 노동자들이 파업 행동으로 사업주에게 해고될까 봐 걱정된다는 핑계를 대며 ‘파업’의 급진성에 반대했고 결국 위원회는 ‘파업(Strike)’ 대신 ‘휴일(Day Off)’로 변경해 합의에 이르렀다. 모든 노동조합이 협력해 날짜를 10월 24일로 정했다. 6월 20일과 21일 레이캬비크(Reykjavik)에서 열린 여성회의에서 아이슬란드 말로 '크베나프리(Kvennafri)'라고 부르는 10월 24일의 선언문4)을 채택하며 아이슬란드의 첫 여성파업이 결정됐다. 이날을 주도한 세력이 모두 페미니스트도 아니고 급진적이지도 않았지만, 모든 세력이 결집하면서 더 많은 여성이 이날을 기다렸다. 사람들은 홍보물에 실린 ‘여성 휴일(Women's Day Off)’을 ‘여성파업(Women's Strike)’이라고 불렀다.

    4) [전문] 1975년 10월 24일 선언문

    1975년 6월 20일과 21일 레이캬비크에서 열린 여성 회의(Women's Congress)는 여성이 해온 일의 중요함을 보여주기 위해, 다가오는 유엔의 날인 10월 24일 하루 '데이 오프'를 실시할 것을 촉구하는 바입니다. 왜 이러한 제안이 모든 연령의 여성들과 정당들이 모인 의회에서 발의되고 가결되었을까요. 그 이유는 많지만 여기에 먼저 몇 가지를 말하겠습니다.

     

    · 누군가가 형편없을 정도로 보수가 적은 직업을 필요로 할 때, 그 구직 광고는 여성을 대상으로 하기 때문입니다.

    · 왜냐하면 통상과 무역에서 여성의 평균 임금은 같은 직종의 일을 하는 남성의 평균 임금의 75%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 왜냐하면 아이슬란드 노총(Icelandic Trades Union Congress) 산하의 주요 노동조합에는 여성 대표가 없기 때문입니다.

    · 왜냐하면 여성 노동자와 남성 노동자의 월평균 소득 차이가 아이슬란드 크로나로 30,000(한화 약 270,000원) 정도이기 때문입니다.

    · 왜냐하면 농부의 아내들은 농부 노조의 정식 회원으로 받아들여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 왜냐하면 주부인 여성들에게 흔히 "가사노동은 일이 아니라 그저 하우스키핑(가사유지)에 불과"라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 왜냐하면 보육원이 현대사회에서 필수적인 부분이라는 것을 이해할 수 없거나 이해하지 않으려는 권위 있는 남성들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 왜냐하면 농장에서 농부 부인의 노동 기여도는 아이슬란드 크로나로 1년에 175,000(한화 약 1,600,000원) 이상으로는 인정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 왜냐하면 취업지원자가 남성인지 여성인지가 개인의 교육 수준이나 역량보다 더 중요하다고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 왜냐하면 주부의 가사노동 경력은 노동 시장에서 그 어떠한 가치로도 고려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내린 결론은, 지역사회에 대한 여성의 기여도가 과소평가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다가오는 10월 24일에 '데이 오프'함으로써 여성들과 다른 사람들에게 사회에서 우리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주자는 것입니다. 국제 여성의 해에 이 '데이 오프'의 날을 기념할 만한 날로 만들기 위해 함께 연대합시다.
    평등, 발전, 평화

     

    1975년 10월 24일, 직장에서 집에서 여성들이 일제히 일손을 놓았다. 여성의 90%가 파업에 참여했다. 여성이 멈추자 사회가 멈췄다. 거의 모든 교사가 여성인 보육원이 문을 닫았다. 마찬가지로 교사의 65%가 여성인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가 휴교했다. 주로 아이들이 이용하는 기관도 문을 닫았다. 각종 상점과 가게가 문을 닫았다. 생산가공 공장이 멈췄다. 전화 서비스가 중단됐다. 우체국 업무가 멈췄다. 남성 항공기 조종사는 있었지만, 승무원이 없어 항공사 여객기 운항이 중단됐다. 은행원이 없어 임원들이 커피를 직접 끓이고 창구업무를 봤다. 조판공이 대부분 여성이라 신문이 발행되지 않았다. 방송국에서는 남성 아나운서와 스태프가 남아 여성파업을 보도했다. 남성 디제이가 진행하는 라디오에서는 여성이 작곡했거나 여성을 위한 음악 사이로 어린아이가 노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농촌의 여성파업 상황을 묻기 위해 디제이가 시골 마을 청취자의 집에 전화를 걸자 아이를 돌보던 남성들이 전화를 받았다. 여성 공연자가 없어 공연도 줄줄이 취소됐다. 여성이 멈추자 세상이 멈췄다.

     

    [사진: 1975년 아이슬란드 여성파업]

     

    집에서도 여성이 일을 멈추니 남성들이 집안일과 육아, 가족 돌보기를 해야 했다. 남성 노동자들은 아이를 데리고 출근하거나 아예 직장에 나가지 못했다. 고용주들은 아이들에게 제공할 과자와 사탕, 연필과 종이를 사다 날랐다. 끼니를 해결하기 위해 남성들은 문을 연 가게를 찾아다녔다. 마트에는 조리가 편리한 소시지와 과자가 일찌감치 품절됐다. 저녁이 되자 주택가 거리마다 연기와 타는 냄새가 진동했다. 남성들이 식사를 준비하며 음식을 태운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첫 여성파업 집회는 오후 2시 5분에 시작됐다. 2시 5분은 당시 일터에서 남성과의 임금 격차를 비교해 여성 노동자의 유급노동이 끝나는 시간을 계산한 것이었다. 여성들은 광장으로 뛰쳐나왔다. 수도 레이캬비크에 있는 렉자르토르그 광장은 발 디딜 틈도 없이 여성 인파로 가득 찼다. 광장 인근 거리와 골목까지 여성들이 가득 메웠다. 처음 열린 여성파업 집회에 참여한 인원은 2만 5,000명에서 3만 명으로 당시 인구의 무려 10%가 넘는 규모였다. 다른 주요 도시에서도 많은 여성이 같은 시간에 여성파업 집회를 열었다. “여성이 멈추면 세상이 멈춘다”, “유치원을 늘려라”, “임금을 평등하게 지급하라”, “성폭력을 멈춰라” 등 여성들은 사회를 향해 누구보다도 힘차게 구호를 외치고 피켓을 들어 올렸다. 여성단체 활동가, 여성 노동자, 전업주부 등이 마이크를 잡고 그동안 억눌려 온 현실과 권리를 주장했다. 마지막 연사는 54세의 비정규직 가사 노동자 아달헤이두르 비얀프레드스도티르(Aðalheiður Bjarnfreðsdóttir)였다. 그는“여성들이 깨어나고 있다. 여성은 먼 옛날부터 남성이 세상을 지배해 왔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 세상은 어땠을까?”라고 말문을 열었다. “우리는 여성과 남성이 긴밀하게 협력해 여성 차별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걸 명확히 알고 있다. 여성이 남성과 동등한 권리를 요구할 때 세상은 바뀔 것이다5)”라는 연설에 수많은 사람이 감명받았다. 참가자들은 여성 노동의 거대한 힘을 공감하며 여성 차별과 억압을 없애기 위한 평등과 권리를 당당히 외쳤다. 파업은 자정까지 이어졌다. 남성들은 이날이 하도 길게 느껴져 ‘긴 금요일’이라고 불렀다.

    5) https://kvennasogusafn.is/ 아이슬란드 여성파업 역사기록보관소

     

    여성파업이 일으킨 물결

     

    단 하루였지만 여성파업은 여성 노동이 얼마나 크고 강력한 것인지를 사회에 선명히 각인시켰다. 남성의 눈을 뜨게 했다. 특히 여성파업의 조직 과정에서부터 여성 노동자가 중심 역할을 하며 힘을 그대로 드러냈기 때문에 기업의 자본가들이 휴가나 파업을 이유로 여성 노동자를 해고하거나, 임금을 삭감할 수 없었다.

     

    사회 구성원의 절반인 여성이 노동을 멈추자 사회가 덜커덕 멈추는 장면을 보면서 아이슬란드 여성들이 느꼈을 감격과 자신감은 실로 엄청났을 것이다. 여성들은 파업을 통해 자신이 수행하는 노동의 가치와 힘을 스스로 발견했고 여성이 직접 나서서 차별과 억압에 맞서 저항해야 한다는 것을 인식했다. 여성파업의 대오를 함께 이룬 세력들은 정치적 성향이 달라도 연대를 바탕으로 앞으로도 같이 싸워 갈 힘을 얻었다. 사회는 여성파업에 응답해야만 했다.

     

    여성파업이 있기 전 정치인들은 여성 노동자가 요구하는 하루 8시간 공공보육 시스템에 대해 ‘어리석은 일’이라고 비웃었다. 하지만 여성파업의 힘을 경험한 후 정부는 2세부터 미취학 아동의 보육을 8시간 담당하는 유치원법을 제정했다. 1976년에는 직장과 학교에서 성차별을 금지하는 최초의 성평등법(Gender Equality Act)6)이 제정됐고 성평등위원회가 구성됐다. 법 조항 중 하나에는 남성과 여성이 동일 가치의 노동에 대해 동일 임금을 받는다고 명시되어 있었다. 유급 출산휴가가 보장되고, 제한적이던 임신중지권이 확대됐다.

    6) 아이슬란드정부 자료 https://www.government.is/

     

    8시간 공공보육이 시작되자 육아를 떠맡던 여성이 유치원에 아이를 맡길 수 있었고 가사도 남성과 함께하는 분위기가 조성되기 시작했다. 여성이 집안에서 벗어나 노동자로 일하는 경우가 조금씩 늘어났고 다양한 사회진출이 가능했다. 단 하루 파업으로 여성 차별과 억압으로 가득 찬 사회를 한꺼번에 바꿀 수는 없었지만, 젠더평등으로 나아가는 ‘분수령’이 된 것임은 틀림없었다.

     

    여성파업의 파장은 아이슬란드 국경 밖으로도 퍼져 나갔다. 북미와 유럽의 언론들은 스포츠 중계를 하듯 10월 24일 여성파업을 보도했는데 수많은 여성이 이 소식에 감격했다. 아이슬란드 여성파업은 여성이 겪는 억압과 차별의 문제를 파업이라는 방식으로 폭로하고 저항한 운동이라는 점에서 국제 여성운동에 큰 영감을 주었다. 미국에서 1975년 10월 29일, 전미여성기구가 주도한 미국 여성파업이 벌어졌다. 일본에서도 1975년 11월 3일, 여성들이 파업위원회를 조직했다.

     

    1991년 6월 14일, 스위스에서는 여성들이 불평등에 항의하며 첫 여성파업을 벌였다. 폴란드에서 2016년 10월 3일, 여성들이 임신중지를 전면 금지하는 법안을 막기 위해 ‘검은 월요일’이란 이름으로 파업에 나섰고 노동조합과 남성들도 파업에 동참했다. 아르헨티나에서 10월 19일 임신중지권 보장과 페미사이드에 맞서는 여성파업이 벌어졌다. 2017년 3월 8일 세계 여성의 날에는 한국을 포함한 세계 약 50개 국가 여성들이 아이슬란드 여성 총파업에 영감을 얻은 국제 여성파업을 개최했다.

     

    1970년대까지만 해도 아이슬란드는 가부장적이고 보수적 분위기가 강했던 탓에 성소수자에 대한 혐오도 심했다. 유명한 가수가 커밍아웃한 후에 이민을 떠나야 했을 정도다. 하지만 여성파업 운동 이후 변화한 젠더평등 인식을 따라 성소수자 운동도 성장했다. 사회적으로 점차 성소수자에 대한 혐오와 차별 대신 인권과 평등의 가치가 더 크게 여겨졌다.

     

    사회 제도적 변화도 가져왔다. 1996년 동성 간 결혼과 권리에 대한 법이 제정되어 동성 파트너의 제반 권리가 인정됐고 2006년 자녀양육 등에 이성결혼과 동일한 권리를 부여했다. 2010년 6월 27일에는 동성결혼을 합법화하며 모든 결혼법에 성 중립성을 확대했다. 2009년에는 커밍아웃한 레즈비언 요한나 시귀르다르도티르를 총리로 선출하기도 했으며 아이슬란드 도시 곳곳에 성소수자의 인권 존중과 평등을 의미하는 무지개 거리가 조성됐다. 2019년에는 ‘성적자율성법’을 제정해 제3의 성으로 ‘간성’을 인정했고, 트랜스젠더의 성별 정정 절차를 간소화했다.

     

    하나씩 오르는 ‘젠더평등’의 계단과 정체된 일터

     

    여성파업은 여성의 시선을 정치로 이끌었다. 여성 차별을 없애기 위한 여성의 발언권이 높아지고 여성이 정치 참여의 평등한 주체로 나서야 한다는 인식이 강화되면서 1980년에는 비그디스 핀보가도티르(Vigdís Finnbogadóttir)가 대통령에 당선됐다. 그는 여성으로서는 세계 최초로 직접 선거로 선출된 대통령이었다. 1981년 창당한 우먼스리스트당(여성의당)은 1983년 선거에서 지지율 5.5%를 기록하고 국회의원 의석 3석을 차지하며 여성정당으로 의회에 처음 진출할 수 있게 했다.

     

    1980년대 여성의 노동시장 참여율은 65.2%로 1960년대 34.3%이었던 것에 비해 2배 가까이 늘어났다. 돌봄 노동 사회화의 일부로서 공공 유치원이 확대하면서 만들어진 급진적 효과였다. 그러나 노동 현장에서 여성의 임금 차별은 나아진 게 없었다. 오일쇼크 영향으로 발생한 심각한 인플레이션7)으로 노동자의 실질임금도 하락한 상태여서 아이슬란드 여성들은 첫 여성파업이 10년째를 맞았던 1985년 10월 24일, 다시 파업을 벌여야 했다.

    7) 오일쇼크 등의 영향으로 주요 소비재와 산업재를 수입에 의존하는 아이슬란드의 인플레이션이 심화됨. 1983년 84%를 기록

     

    성별 임금 격차를 나타내는 파업 돌입 시간은 2시 5분으로 10년 전과 같았다. 1983년 기준으로 여성의 연간 평균임금은 전체 평균 임금의 65%에 그쳤다. 다시 광장을 가득 메운 여성들은 성별 임금 격차와 성차별 해소를 강력히 요구했다. 정부는 10년 만에 다시 거대한 여성파업에 직면하면서 1985년부터 5년 단위의 ‘젠더평등실행계획’을 세워 집행했다. 정부는 아이슬란드 자본주의를 안정적으로 관리, 성장시키기 위한 수단으로 ‘젠더평등’노선을 실행해 갔다.

    [이미지: 여성파업 연도별 임금 격차]

     

    1990년대로 접어들면서 육아휴직 사용이 여전히 여성 노동자에게 편중된 문제를 개선하기 위한 고민이 일었다. 여성의 노동시장 참여율이 75%대로 높아진 가운데 여성 노동자들은 일터에서 일하고 집에 돌아와 다시 가사·돌봄 노동을 해야 했다. 특히 0세부터 1세의 자녀를 돌보는 육아휴직은 대부분 여성이 사용하고 있었다. 1997년부터 남성에게 유급 육아휴직 2주간의 사용 권리가 생겼지만 2000년대 초까지 남성의 실제 육아휴직 사용은 3%대에 불과했다.

     

    1999년 국회의원의 3분의 1 이상이 여성이었는데, 이들이 여성 대중의 요구를 대변했다. 그로 인해 2000년에는 아이 돌봄 노동의 성별 편중을 해결하기 위해 양육자 남성에 대해서도 육아휴직 사용을 의무화하는 유급 육아휴직 할당제가 도입됐다. 단계적으로 범위를 늘리다 2003년에는 전면화됐다. 총 9개월의 육아휴직 기간 중 남녀가 3개월씩을 의무적으로 사용하고 남은 3개월은 서로가 자유롭게 나눠서 사용하는 방식이었다. 임금은 80%의 평균임금이 보장됐다.

     

    이 제도가 도입되면서 큰 변화가 생겼다. 남성의 90%가 육아휴직을 사용하기에 이르렀고 전체 육아휴직자 중 남성의 비율이 약 45%까지 높아졌다. 남성의 가사 분담률도 동반 상승했다. 남성의 가사·돌봄 노동에 대한 참여와 책임감이 커지면서 아이와의 유대감도 전보다 커졌다. 기업에서의 자본의 통제와 가부장적 문화로 인해 남성의 육아휴직이 쉽지 않았던 현실에 맞서, 투쟁으로 사회적 압력을 조성하고 제도 변화를 강제함으로써 바꿔 낸 결과였다. 여성의 독박육아 해소는 기업 자본가들에게 결코 손해가 아니었다. 노동시장에서 여성 노동의 착취량이 증가하고 경력단절 없이 높아진 여성 노동의 생산성 또한 자본이 착취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아이슬란드 경제는 자본의 성장과 거품, 노동조합의 양보로 표현할 수 있다. 1980년대 후반과 1990년 초반, 신자유주의와 세계화 물결 속에서 아이슬란드 정부와 자본은 시장 자유화 정책과 각종 규제 완화, 민영화, 구조조정, 부유층 감세 등을 빠르게 시행했다. 금융업이 크게 활성화됐고 2006년 1인당 GDP가 세계 5위를 차지할 정도로 호황을 누렸다. 금융 부문을 포함해 자본가들은 1990년대 후반부터 10년간 전례 없는 성장과 이윤 축적을 누렸다. 여기에 노동조합은 1990년대 초부터 인플레이션을 낮추는 전제로 낮은 임금인상을 수용했다. 생활비보다 높은 임금이 유지되면 기꺼이 만족한다는 분위기가 형성됐다. 예를 들면 전기기술 노동자의 임금은 실질임금 수준이 물가상승에 비례해 충분하다는 이유로 1990년부터 2000년까지 연간 1.4%씩만 증가했다.

     

    하지만 상대적으로 더 차별받는 여성 노동자의 입장은 달랐다. 최초의 여성파업에서 30년이 지난 2005년 10월 24일, 여성들은 세 번째 여성파업에 나서야 했다. 신자유주의 공세가 강화되면서 여성파업을 시작한 시간은 2시 8분. 30년간 임금 차별은 단 3분밖에 단축되지 않았다. 2시 8분 이후 여성 노동자가 일하는 시간은 여전히 공짜였다. 여성들은 임금 격차 폐지를 강력히 요구했다. 이후 인플레이션이 점차 상승하며 노동조합은 물가를 따라잡기 위해 더 높은 임금인상을 요구해야 했다.

     

    [사진: 2005년 아이슬란드 여성파업]

     

    2008년 금융위기에 따른 항쟁, 사회를 바꾼 두 번째 계기

    신자유주의 정책을 펼치며 금융과 부동산 거품으로 아이슬란드 경제가 일시 호황을 누렸지만, 2008년 미국발 금융위기의 영향으로 해외투자자들이 자본금을 회수하면서 금융거품이 붕괴하고 말았다. 아이슬란드는 2008년 10월 6일 국가 부도를 선언하고 IMF 구제금융 시기를 맞이했다. 70%에 이르는 기업이 법적 파산 상태에 처하고 실업률이 10%로 껑충 뛰어올랐다. 국민 1인당 갚아야 할 채무가 약 5억 원 규모나 됐다. 정부와 자본은 경제위기 책임을 스스럼없이 노동자에게 전가했고, 성난 노동자 민중은 가만있지 않았다. 16주간의 ‘프라이팬혁명’이라고도 불리는 항쟁이 일어났다.

     

    항쟁은 매주 토요일 국회 앞에서 연속 16주간 최대규모의 시위를 벌이는 방식이었다. 노동자의 90%가 노동조합에 가입해 있었는데, 이들은 적극적으로 항쟁에 참여했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성난 노동자 민중은 국회를 포위하고 요구르트 통과 돌을 던졌으며 냄비와 프라이팬을 들고 나와 큰 소리로 두들겼다. 경찰은 처음으로 시위 진압용 최루탄과 최루액을 사용하며 사람들을 폭력적으로 연행했다. 하지만 사람들은 연행자가 속출해도 계속 싸웠다.

     

    노동자 민중은 자본가들이 자신의 탐욕을 위해 투기를 벌여서 만든 부채를 우리가 대신 갚을 수 없다는 입장을 명확히 했다. “미래세대를 제물로 삼지 마라”고 외쳤다. 이들은 파산 기업에 대한 공적 자금 투여 금지, 정부 총리 사임과 새로운 총선, 모든 책임자 처벌 등을 요구하며 타협하지 않고 싸웠다. 그리고 마침내 승리했다. 아이슬란드 사회는 투기 자본가들이 스스로 위기의 책임을 지도록 결정했고 대중 투쟁으로 정부를 몰아내고 자본가들을 구속시켰다. 철저한 수사를 통해 구속된 자본가와 총리 등 경제위기 책임자는 총 90명에 이르렀다.

     

    이후 출범한 중도좌파 연정은 항쟁의 압력에 밀려 대중의 요구를 이행하는 역할을 맡았다. 정부는 저소득층 복지와 사회안전망 강화에 예산을 전년 대비 36%를 더 사용하고 청년 일자리 제공과 직장 내 성평등 정책을 강화했다. 민영화했던 모든 은행과 공기업을 다시 국유화했다. 주택 가격의 110%가 넘는 가계부채는 모두 탕감했다. 부유세가 인상됐다. 국회 특별조사위원회를 가동해 금융위기의 원인 진단과 해법을 도출했다.

     

    “당시 금융위기의 주체는 남성이었고 이 기간 동안 특정 성에 기반한 사회문화적 담론과 고정관념이 지배적이었다는 것을 보여 준다. 당시 금융위기를 초래했던 큰 규모의 경제 관련 프로젝트 중에서 산업 프로젝트, 감세 정책, 그리고 주택 단지 개발 등은 여성보다 남성에게 고용 기회를 제공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애초에 금융 부문이 소수의 남성에 의해 운영됐고, 성 고정관념과 남성들의 문화에 기반한 사업 계획과 운영이 진행됐다는 것이다.

    정부는 소수 집단이 너무 많은 권력을 갖지 못하도록 주요 기업들을 체계적으로 감시해야 하고, 성인지 예산과 성인지 조세정책(여성에게 미치는 영향을 평가하고 반영하여 국가 예산을 배분하는 정책)을 수립하고 시행해야 한다. 노동 및 지역 정책을 개발할 때 성 주류화8) 원칙을 사용해야 한다.(2012년 국회 특별조사위원회)”

    8) 성주류화는 정책을 수립하고 시행함에 있어 성인지 관점을 통합하여 정책을 재구조화하는 일련의 과정을 의미

     

    아이슬란드 정부는 경제위기 원인 중 하나로 ‘남성 중심 경영’을 지목했다. 소수 상층 남성들의 이윤 추구와 그들 사이의 부정부패, 정경유착이라는 권력자 남성의 카르텔이 문제라 지적하고 이를 깨뜨리기 위한 경제, 노동시장 분야의 ‘젠더평등’을 해법으로 제출했다. 1975년 여성파업이 정치 분야에서 여성을 평등한 참여자로 만들었다면, 2008년 금융위기에 따른 항쟁은 경제 분야에서 여성 참여를 강화하는 발판을 만들었다. 50인 이상 기업임원 40% 여성할당제(2013년 시행)와 같이 여성이 유리천장을 깨고 경제, 정치적 측면에서 지도력을 발휘하도록 하는 전환을 주되게 시행했다. 이렇게 2008년 항쟁은 1975년 여성파업 이후 아이슬란드 사회를 다시 한 번 뒤흔든 두 번째 계기가 됐다. 이 계기를 거치며 ‘젠더평등’이 더욱 강력한 국가 정책으로 등장했는데, 사실 이는 아이슬란드 자본주의의 위기를 해소하기 위한 방안에 불과했다.

     

    2010년대 이후 여성파업 2시 25분, 38분, 55분

     

    2009년부터 아이슬란드는 세계경제포럼의 글로벌 젠더 격차 지수(Global Gender Gap Index) 순위에서 젠더평등 수준 1위를 차지했다. 금융위기에 맞선 항쟁 이후 복지와 조세제도가 노동자에게 좀 더 나은 방식으로 바뀌면서 성별 임금 격차의 완충 역할도 했다. 의회가 2008년 통과시킨 법에는 남성과 여성이 동일 노동에 대하여 동일 임금을 받는다는 조항이 포함됐다. 항쟁 이후 첫 선거에서는 여성 국회의원 비율이 42.9%로 급증했다. 하지만 여전히 남성이 여성보다 더 많은 임금을 받고 있었고 사회의 불평등은 해소되지 않았다.

     

    2010년 10월 24일, 여성의 절반이 모여 공짜 노동이 시작되는 2시 25분 여성파업에 참여해야 했다. 2010년을 기준으로 공식 노동자의 45.5%가 여성이었고, 동일 수준의 남녀 노동자를 비교한 성별 임금 격차는 17.5%였다. 그러나 노동시간, 고용형태, 산업과 학력 등의 요인을 고려하지 않은 남성과 여성의 임금을 비교해 보면 그 격차는 32.9%9)나 됐다. 2008년을 기준으로 정규직 일자리에서 일하는 남성은 90%인데 반해 여성은 65%에 그쳤다. 여성 노동자는 더 유연하고, 더 불안정하고, 더 임금이 낮은 노동조건에 처해 있었다.

    9) 아이슬란드 통계청 https://www.statice.is/

     

    [사진: 2010년 아이슬란드 여성파업]

     

    2015년은 계급투쟁의 해라고 불릴 만큼 수많은 노동조합이 임금인상과 인력 충원 등을 위한 투쟁에 나서 곳곳에서 파업이 벌어졌다. 금융위기 이후에도 커다란 빈부격차, 그리고 낮은 임금인상률로 노동자의 삶이 제대로 나아지지 않은 채 노동조합 지도부는 낮은 임금인상률 합의서에 도장을 찍어 왔다. 아래로부터 분노가 커지면서 공공 부문과 민간 부분 노동조합은 실질최저임금 50% 인상을 요구하는 총파업을 준비했다. 4월 말에 실시된 갤럽 여론조사에 따르면 아이슬란드 국민의 90% 이상이 노동조합의 요구를 지지했다. 당시 아이슬란드에서는 여성 인구의 73%가 노동자로 일했는데, 여성 노동자가 많은 의료, 교육, 청소 등 직종이 속한 노동조합이나 여러 산업 부문의 여성 노동자도 주요한 파업 대오였다.

     

    총파업을 거치며 여성운동 진영과 노동운동 진영이 함께 다시 여성파업을 준비했다. 2016년 의무할당제를 적용받는 상장기업 이사회의 거의 절반이 여성이고, 국회의원 41%가 여성이었는데 일부 여성이 유리천장을 깨고 정치와 경제의 상층 요직에 올라가는 것으로 줄인 성별 임금 격차는 시간으로 계산할 때 6년간 단 13분이었다. 성별 임금 격차 27.5%, 자본의 통치가 강력한 기업 안에서 여성 노동자에 대한 상대적 차별은 굳건했다. 2016년 10월 24일 2시 38분, 여성들은 다섯 번째 여성파업을 힘차게 펼쳤다.

     

    정부는 앞으로 2022년까지 성별 임금 격차를 해소하겠다고 약속했다. 이듬해 2017년 6월 1일 임금 차별을 금지하는 동일임금인증제를 세계 최초로 도입하는 새로운 법을 제정했다. 1961년 처음으로 제정한 평등임금법이 남녀 임금 차별 금지를 ‘권고’하는 내용이었고, 1976년 성평등법 도입, 2008년 남녀평등지위권익법은 노동자가 성별로 인한 부당한 대우를 받았음을 ‘스스로 입증’해야 하는 것이었다면 이번에 도입한 법은 기업이 성별 임금 격차가 없음을 입증해야 하고 이를 정부가 관리하는 내용이었다. 이유 없는 임금 차별이 있을 경우에는 약 50만 원씩 시정될 때까지 누적되는 벌금을 부과하기로 했다.

     

    사실 이러한 내용의 임금평등법 개정안이 제출된 것은 2010년이었는데 사회적 합의에 이르고 적용 기준을 정해 2018년 본격적 시행에 이르기까지 무려 8년이 넘게 소요됐다. 이제까지 자본가들은 줄곧 여성의 저임금에 대하여 법 위반이나 초과 착취를 반성하기는커녕 ‘노동자들이 임금협상을 제대로 하지 못한 탓’이라면서 노동자에게 책임을 돌려 왔다. 그런 상황에서 동일임금제가 시행되면 ‘남성들의 임금이 깎일 것’이라는 가짜뉴스가 돌며 백래시 분위기가 생기기도 했다. 자본가연합단체와 노동조합연합단체가 합의에 이르기 위해 긴 시간이 필요했다.

     

    그리고 유럽 전반에서는 노동자들이 ‘임금삭감 없는 노동시간 단축’을 요구하며 관철해 왔는데 아이슬란드의 경우 2018년 기준 정규직 노동자의 평균 노동시간은 주 44.4시간으로 유럽에서는 긴 편이었다. 노동조합은 오랜 요구인 노동시간 단축을 전면에 내세우며 2015년부터 주4일제 도입 실험을 시작했다.

     

    변화된 상황에서 2018년 10월 24일 여성들은 여섯 번째 여성파업에 나섰다. 불평등을 양산하는 자본주의 체제를 그대로 둔 채 법과 제도의 변화만으로 노동 착취, 여성 노동에 가중된 초과 착취가 사라질 리 없었기 때문이다. 특히 여성들은 상대적 고용불안, 성별 직종 분리, 여성 노동자의 저임금, 가사돌봄 노동의 차별에 분노했다. 여성 노동자가 남성 노동자보다 28% 낮은 임금을 받고 있었다. 그에 따라 2시 55분에 다시 파업의 광장에 모인 여성들은 “여성을 바꾸려 하지 말고 세상을 바꿔라”, “모든 여성이 직장에서의 정의와 평등한 권리를 위해 함께 싸워야 한다”고 외쳤다.

     

    2023년까지 여성파업이 만들어 낸 성과

     

    2023년 국제 사회의 시선이 다시 아이슬란드의 여성에게 향했다. 글로벌 젠더 격차 지수가 91.2%인 아이슬란드에서 다시 48년 만에 여성의 90%가 참여하는 24시간 여성파업이 일어난 것이다. 성별이분법에 따른 여성만이 아니라 성소수자(non-binary)가 함께 참여했다. 여성파업이 진행된 하루 동안 사람들은 남성들만 보도하는 뉴스를 들으면서 잠을 깼고 대중교통이 지연되는 하루를 맞았다. 유치원과 학교가 문을 닫았다. 공공시설과 많은 상점, 식당이 문을 닫았다. 은행은 한 곳만 문을 열었고, 병원은 응급실만 열렸다. 방송사들은 프로그램을 줄였다. 국영항공사는 항공편을 취소했다. 사무실과 호텔 객실 등은 청소되지 않았다. 총리인 카트린 야콥스도티르도 여성 공무원 노동자들과 함께 파업에 참여했다.

     

    [사진: 2023년 아이슬란드 여성파업]

     

    이날 여성파업은 성별 임금 격차와 여성 직종 저임금, 성에 기반한 젠더폭력의 현실을 규탄하며 평등을 요구했다. 역사상 최대 규모인 10만 명이 수도 레이캬비크에서 열린 집회에 모였다. 후사비크, 아쿠레이리, 사우다르크로쿠르 등 10개의 도시에서 파업 집회가 개최됐다. 친구, 가족, 동료들과 함께 참석한 여성과 성소수자들은 ‘여성의 임금은 여전히 남성보다 21%나 낮다! 이게 평등이라고?’, ‘1975년부터 2023년 여성의 투쟁’ 등이 쓰인 피켓, 플래카드 등을 들고 파업의 요구를 힘껏 소리쳤다. 레드스타킹스가 불러 1975년부터 여성파업의 노래가 된 ‘여성이여, 앞으로!(Onward Girls, 아이슬란드어로 Áfram Stelpur)’, 칠레의 여성투쟁가 ‘강간범은 바로 너다! (A Rapist in your Path, Un Violador en Tu Camino)’ 등을 힘차게 불렀다. 발언자들은 경제적 불평등과 젠더폭력의 현실을 규탄하며 물었다. “이것을 평등이라고 부를 것인가?” 참가자들은 “아니다”라고 외치며 집회를 마무리했다.

     

    이번 파업은 노동조합이 최대의 조직자였는데 공공노조의 프레야 스테인그림스도티르(Freyja Steingrimsdottir)는 “우리는 평등의 파라다이스라 불리는 아이슬란드에 여전히 성별 격차가 존재하고 시급한 조치가 필요하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의료 서비스나 보육과 같이 여성이 주도하는 직업은 여전히 저평가되어 있고 임금도 훨씬 낮다고 말했다. 파업에 참여한 유치원 노동자 스타눈 시구르게르스도티르는 “아이슬란드에는 여성에게 여성이 최고라는 속담이 있다”며 “여성이 함께 뭉치는 것이 중요하다. 유치원 노동자의 임금은 낮아서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도 싸우고 있다”고 했다. 여성파업집회에 참가한 호피(Hófí)는“ 나는 아이슬란드 여성이기 때문에 여기에 있다. 아이슬란드는 천국처럼 이야기되지만 아직은 그렇지 않다. 노동시장에는 여성만 일하고, 임금이 낮은 일자리가 많이 있다. 이 나라는 충분히 부유한 나라이고, 더 낫게 분배할 수 있다”고 말했다. 파업 참가자들은 여성이 주로 하는 무급 재생산 노동도 강조했다. 주최 측은 캠페인을 통해 미리 남성들에게 ‘하루 동안 남편, 아버지, 형제, 삼촌들이 아침과 점심 도시락 준비, 친척 생일 기억하기, 시어머니 선물 사드리기, 자녀 치과 예약하기 등 가족과 가정에 관련된 일을 책임감을 갖고 맡아달라’고 전했다. 수많은 여성이 유급 휴가를 얻으며 파업에 참여했지만, 응급 구조와 의료 업무 그리고 이주노동자가 많은 직종, 저임금 직종의 여성 노동자는 이번에도 참여할 수 없었다.

     

    자본가들은 빼먹지 않고 2023년 여성파업에 특별한 메시지를 보냈다. 아이슬란드기업연합(SA)을 이끄는 최초의 여성인 시그리두르 마그레트 오드스도티르는 말로는 여성파업의 대의를 지지한다면서 여성파업에 대한 반대 의사를 명확히 밝혔다. “여성들이 사용자와 합의 없이 모든 일터에서 파업하면 아이슬란드 사회에 큰 악영향을 미친다.” 그는 여성CEO로서 여성파업 대신 사용자와 대화로 해결하라고 주문했다. 그리고 파업 이후 11월에 열린 ‘레이캬비크 글로벌 포럼’에서 외교부 장관 비야르니 베네딕손은 “의사 결정 위치에 있는 남성들이 젠더평등을 실현하는 게 아주 중요하다”고 말했다.

     

    1975년부터 2023년까지 무려 48년간의 오랜 여성파업의 역사는 여성 차별과 억압을 거대한 대중적 운동으로 돌파하며 큰 변화를 만들어 냈다. 첫째, 사회 전체와 모든 이들에게 세상의 절반을 떠받치는 여성 노동의 힘을 보여주는 계기를 거듭 제공함으로써 남성 중심의 가부장적 인식에 경종을 울리고 변화의 필요성을 제기했다. 동시에 여성 노동자 민중 사이에서 페미니즘운동을 부상시켰고 성별 임금 격차에 대한 인식을 높였다.

     

    둘째, 1975년 여성파업에서부터 유치원을 늘리라는 공공 돌봄 요구를 이뤄냈다. 돌봄 비용의 85% 정부 지원, 교사 1명당 아동 5명 보육 등으로 안전한 공공 돌봄을 강화시키며 여성이 무급 재생산 노동에서 점차 벗어나 사회적 생산 노동의 주체로 정체성을 확립하게 했다. 남성이 돈 버는 일을 하고 여성이 집안일을 한다는 근본적 성별 역할 구분을 깨뜨리며 여성이 과거보다 사회를 향해 더 목소리를 낼 수 있게 만들었다.

     

    셋째, 노동자의 대부분이 노동조합에 가입10)하는 분위기 속에서 여성의 사회진출, 노동인구 증가가 여성 노동자의 노동조합 가입 증가로 이어졌다. 여성 노동자도 노동조합의 당당한 구성원으로 활동함으로써 사용자와 정부를 상대로 저항하고, 노동조합의 경제적 요구와 젠더적 요구를 결합하면서 노동조건을 향상해 나가게 됐다. 국제노총(ITUC)이 평가하는 글로벌 권리 지수(Global Right Index)에서 아이슬란드는 1등급인데 여성 노동자의 노동권에 대한 확장된 보장이 없다면 최고 등급은 가능하지 않았을 것이다.

    10) 1938년 노동법이 발효된 이래 노동조합 가입은 공식적으로는 아니지만 사실상 의무화됐다. 1980년 제정된 근로기준법에 따라 모든 단체협약은 조합원 여부와 관계없이 모든 사람에게 일반적으로 적용되도록 하는 '에르고 옴니스 원칙(모든 사람을 향하여, 모든 사람에게 적용 원칙)'이 적용되어 노동시장에서 모든 사람에게 최소한의 권리를 보장하게 됐다.

     

    넷째, 여성파업은 사회의 다양한 차별을 걷어 내야 한다는 정치의식을 성장시켰다. 여성 총리와 여성 의원의 등장, 여성의 높은 투표율 등이 그 자체로 자본주의 사회 작동 원리에서 벗어난 게 아니지만 그러한 표현의 하나다. 여성의 90%가 파업으로 사회를 멈추며 주체적 정치 행동을 한다는 것만으로 높이 발전한 정치 인식을 보여 준다.

     

    다섯째, 여성파업은 사회의 정세 변화에 조응하며 노동권을 중심으로 여성의 생존권과 다양한 삶의 권리를 위한 요구와 저항력을 확장했다. 이는 여성의 권리뿐만 아니라 동성결혼 합법화, 개인이 결정할 수 있는 성별 정정 등 성소수자의 권리를 포함해 소수자 인권을 신장시켰다.

     

    여섯째, 여성에게 맡겨진 독박 가사·돌봄 역할에 순응하지 않고 투쟁함으로써 돌봄을 중심으로 사회 재생산 노동의 사회화 정도를 증가시켰다. 보육, 의료 서비스 등 공적 돌봄이 강화됐다. 2000년부터 시행한 육아휴직 의무할당제와 같이 보육 돌봄에 관한 기업의 휴가나 휴직제도의 변화를 촉진하면서 정부와 자본이 책임져야 할 몫을 명확히 했으며, 가정 내의 무급 재생산 노동을 배분할 필요성을 제기했다.

     

    일곱째, 성과 재생산 영역에서 여성의 자기 결정권이 강화됐다. 여성과 연인들에게 결혼, 임신, 출산이 사회적 통제와 압력에 따른 결과가 아니라 자신이 선택할 수 있는 권리로 변모했다. 전체 출산 아동 10명 중 약 7명(69.4%)이 비혼 출산 아동일 정도로 여성은 자신의 선택에 따라 아이를 낳지 않거나 낳을 수 있게 됐다.

     

    여덟째, 국제 여성운동에 큰 영향을 미쳤다. 노동자계급의 파업과 같이 사회적 생산과 재생산 영역을 마비시키는 여성 노동의 파업이 여성의 요구와 투쟁의 힘을 드러내는 효과적이고 높은 수준의 저항 방법임을 각인시켰다.

     

    이 밖에도 여성파업은 사회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아이슬란드 여성에게는 여전히 여성 차별과 억압을 없애기 위해 싸워야 할 과제가 남아 있다.

     

     

    여성의 눈물

     

    저항이 만든 사회적 변화에도 자본이 통제하는 기업에서는 여성 차별이 쉽게 사라지지 않고 있다. 대표적 문제가 바로 임금이다. 자본주의 사회가 굴러가는 기본 동력인 임노동관계에서 성별 임금 차별이 발생한다는 것은 일터는 물론 사회 곳곳에서 여성 차별과 억압이 존재한다는 가장 확실한 증거가 된다. 아이슬란드 남성과 여성의 노동소득에서 노동시간, 고용형태, 산업과 교육 수준 등 요인을 고려하지 않고 비교해 보면 그 격차는 2010년 32.9%, 2019년에는 25.5%로 여성이 더 낮다. 그 이유는 시간제 노동, 비정규직 노동에 여성의 비중이 높고, 여성이 다수인 직종의 임금이 남성 노동자에 비해 낮기 때문이다. 실제로 임금이 낮은 직종의 75%는 여성의 비중이 월등히 높은 교육, 보건, 돌봄, 청소와 식당, 마트 등 서비스와 관광 분야 등이다. 여성 노동자는 보건의료와 사회복지사의 75%, 교육 분야의 73%, 서비스와 판매의 57%를 차지한다. 여성의 노동이 상대적으로 저평가되면서 소득과 연동되는 노후 연금도 여성이 더 낮을 수밖에 없어 여성의 상대적 빈곤은 일생에 영향을 미친다.

     

    그뿐 아니라 집에서 이뤄지는 무급 재생산 노동 역시도 아직은 여성이 더 많이 부담해 더 나은 일자리로 진입할 수 있는 물리적 조건에 장해물로 작용한다. 여성이 절반의 노동력을 제공하고 있지만, 불안정한 노동조건을 강요당하며 생산 영역에서의 착취와 재생산 영역에서 무급 가사노동이라는 이중 굴레에 고통받는 현실은 다른 자본주의 사회와 다르지 않다.

     

    그런데 여성의 저임금에 ‘이주노동자’라는 이름이 하나 더 붙으면 임금이 더 하락해 버린다. 이주노동자는 사실상 이중임금제를 적용받고, 노동권을 침해받는 경우11)도 많다. 2008년 금융위기 이후 관광업 등에 이주노동자 취업이 증가했고 정부가 노동력 부족을 적극적 이주노동자 수용으로 보완하면서 2023년에는 이주노동자가 전체 노동자의 16.2% 규모가 될 만큼 증가했다. 전체 여성 노동인구의 약 22%가 이주노동자다. 그런데 이주노동자에 대한 노동권 보장은 그 수를 따라가지 못한다. 2018년 아쿠레이리대학교 연구에 따르면 정규직 노동자의 월 평균 임금은 72만 1,000ISK(크로나)였는데 이주노동자의 60%는 40만 ISK 이하였다. 이주 여성 노동자의 임금은 아이슬란드 여성 노동자보다 훨씬 더 낮고 이주 남성 노동자보다 낮았다. 한부모 이주노동자는 노동시장에서 더 취약한 처지에 있다. 아이슬란드에서도 ‘정주 남성 노동자 > 정주 여성 노동자 > 이주 남성 노동자 > 이주 여성 노동자’의 서열화된 임금 차별을 확인하기가 어렵지 않다.

    11) 에플링노동조합(Efling union)은 2017년에 발생한 부당노동행위의 60%가 이주노동자를 상대로 벌어졌다고 보고했다.

     

    2023년 여성파업이 제기한 중요 사항 중 하나는 여성에게 가하는 성에 기반한 폭력이었다. 아이슬란드에서는 살인 사건이 적은 편이지만 젠더폭력 사건만큼은 그렇지 않다. 전체 여성의 40%가 신체적 또는 성적 폭력을 당한 적이 있고, 전체 여성의 4분의 1은 강간 또는 강간 미수 등의 심각한 젠더폭력을 경험했다.12) 2022년에는 여성 노동자의 3분의 1이 직장 내 성희롱이나 성에 기반한 폭력13)을 당했다고 보고했다. 젠더폭력은 공연예술이나 언론 등에서 알려진 여성인 경우나 관광, 법조, 보안, 제조, 수리업에서 일하는 여성 노동자에게 가장 높았고, 교대근무나 불규칙적이고 장시간 일하는 직종에서 흔하게 발생했다.

    12) 2018년 아이슬란드대학교의 연구, 공중보건전문가이자 역학자인 우누르 안나 발디마르스도티르와 아르나 훅스도티르의 연구팀

    13) Risk factors for workplace sexual harassment and violence among a national cohort of women in Iceland: a cross-sectional study, The Lancet Public Health, volume7, september 2022.

     

    2022년 다른 통계는 젠더폭력 피해자의 62% 이상이 18세 미만이고, 92% 이상이 여성이라고 보고했다. 수도 레이캬비크의 여성 쉼터는 정원이 꽉 찬 경우가 많고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가정폭력 범죄도 급증했다. 이주민 여성은 젠더와 인종문제가 겹치며 젠더폭력의 위험에 더 많이 노출되고 있으며 트랜스젠더 여성을 포함한 성소수자에 대한 혐오에서 비롯된 젠더폭력 사건도 끊이지 않는다. 디지털 젠더폭력의 피해자도 늘고 있다.

     

    이러한 폭력 가해자의 절대적 다수는 남성이며, 95.6%가 18세부터 29세 사이의 청년 남성이다. 아이슬란드는 여성파업에 힘입은 젠더평등의 문화가 있고, 2011년부터 유치원,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에 이르는 모든 교육기관에서 젠더평등 수업을 시행하는 나라다. 여성에게 동등한 정치적, 경제적 권리가 있고 국회의원과 기업 이사회 임원의 절반이 여성인 나라에서 여성과 소수자에게 가해지는 젠더폭력이 매우 심각한 실상은 ‘북유럽(노르딕)의 역설’이라고 불릴 정도다.

     

    젠더폭력의 참상 앞에서 여성들은 2017년 10월부터 #미투(#MeToo)운동에 나서기도 했다. 정치권, 온갖 산업의 재계 고위직, 미디어와 스포츠, 예술계 등 여러 사회 분야에서 일어난 추악한 폭력이 끊임없이 폭로됐다. 미투운동이 확산하며 장애 여성, 이주노동자, 돌봄 노동자, 가사 노동자와 노동조합 조합원이 아닌 저임금 불안정 고용상태에서 일하는 여성 노동자의 증언도 페이스북 등 온라인 공간에서 잇따랐다. 서비스 분야 일터에서의 젠더폭력 가해자는 사업장 내 남성이나 남성 고객이었는데 노동조합 간부인 드리파 스내달은 “남성 고객은 여성 노동자에게 젠더폭력을 행사할 비용도 지불했다고 여긴다. 젊은 여성이 위계적 계층구조의 맨 아래 있다”는 현실을 전하기도 했다. 미투운동은 2022년까지도 이어졌다.

     

    미투운동이 가시화되면서 피해생존자와 페미니스트에 대한 혐오와 백래시14)가 심각하게 벌어지기도 했다. 이전에도 백래시는 젠더 차별을 줄이는 진보한 정책이 생길 때마다 퍼져나간 바 있다. 젠더폭력 사건의 미투운동에서는 페미니스트들에게 살해 협박이 가해지는 경우마저 종종 일어났다. 피해생존자를 향한 그나마 낮은 수준의 혐오인 ‘그걸 왜 지금 와서 말하냐’는 광범위한 백래시는 오히려 여성들이 꾸준히 비판해 온 경찰과 사법부의 문제점을 가시화하기도 했다. 2021년 조사에 따르면 성폭력을 당한 여성의 10%만이 경찰에 사건을 신고했는데 그 이유는 사법부와 경찰을 신뢰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아이슬란드 역시 경찰에 신고된 성폭력 사건 대다수가 재판에 넘겨지지 않았고 재판에서 유죄판결도 드물었다.15) 2018년부터 3년간 성폭행 사건 항소심 중에서 형량을 줄이거나 무죄를 선고한 경우는 40%나 됐다.

    14) '세계 최고의 남성 페미니스트' 중 1명으로 뽑힌 적이 있는 시그뮌 뒤르 다비드 귄로이그손 전 총리가 술집에서 정치인들과 함께 미투운동을 비난하고 여성 혐오를 쏟아낸 일도 있었다.

    15) 2022년 랜싯 공중보건(The Lancet Public Health)에 실린 연구

     

    전문가들은 사법 시스템에서 남성 중심적 사고가 지배적16)이라 지적하며, 성별 격차 해소만으로 젠더폭력 범죄를 줄일 수 없어 사법 체계를 개혁17)해야 한다고 했다. 어떤 연구자들은 젠더평등으로의 발전이 남성의 분노를 자극하는 기제가 되어 남성이 여성을 향한 폭력으로 자신의 우월성을 증명하려고 한다며 원인을 분석하기도 했다. 젠더 교육이 열악한 탓에 권력 구조를 함께 가르치는 젠더 교육이 대안18)으로 제시되기도 했다.

    16) 미 외교전문지 ‘포린폴리시’

    17) 성폭행 생존자들과 함께 일해 온 변호사이자 사회민주당 의원인 헬가 발라 헬가도티르(Helga Vala Helgadóttir)

    18) 아이슬란드대학교 교육대학의 역사학자이자 조교수인 이리스 엘렌버거

     

    여성들은 사회가 젠더폭력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해 주지 못한다고 생각하고, 인권법원에 아이슬란드 정부를 집단 제소하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도 크게 달라진 게 없다. 2023년 여성파업의 광장에서 여성들은 “사법부도 공범이다”라고 외치고 ‘강간범은 바로 너!(A Rapist in your Path, 원제 Un Violador en Tu Camino)’라는 노래를 불러야 했다.

     

    여성에게 파라다이스는 없다

    가부장적 자본주의 세상을 바꾸기 전까지

     

    브루클린대학 정치학과 교수 재닛 존슨은 아이슬란드 사회가 여성운동이 강하고 표면상으로 훌륭한 변화와 공식적 평등의 수준이 높지만, 비공식 석상에서 결정을 내리는 것은 여전히 남성이라며 그것이 공식적 젠더평등을 상쇄한다고 비판했다. 가부장적 자본주의가 존재하는 한 여성에게 파라다이스인 사회가 가능할까?

     

    2021년 9월 아이슬란드 총리실 산하 성별 임금 격차 TF는 2년여에 걸친 조사를 통해 ‘여성의 일 가치 재평가(Verðmætamat kvennastarfa)’ 권고안을 낸 바 있다. 정부는 성별 고정관념에 따라 ‘남성적 직업’과 ‘여성적 직업’을 나누는 것은 ‘과학적이지 않’다고 전제하며 지난 10년 동안 관련 교육을 진행했지만 의미 있는 변화가 없다고 평가했다. 결론으로는 법과 제도로 차이를 좁혀야 한다고 제시했다. 2023년 여성파업에 참여한 총리는 우리가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면 젠더평등에 도달하는 데 300년이 걸린다고 말했다. 정부는 법과 제도가 있다면 성에 기반한 차별과 억압을 모두 없앨 수 있다고 기대한다. 마치 그동안 법과 제도가 없었던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아이슬란드 정부가 누누이 강조하는 ‘젠더평등이 경제 발전에 이롭다’는 입장은 분명한 자본주의 논리다. 페미니즘으로 표현하면 매우 익숙한 자유주의 페미니즘 논리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누가 뭐라 해도 아이슬란드 사회가 젠더평등 가치를 추구하게 만든 것은 정치인이나 기업가가 아니라 여성운동과 노동조합운동이다. 여성운동 세력들은 1975년 최저임금을 받는 노동자계급 여성에게 달려가 파업의 전망을 제시한 레드스타킹스와 가장 열악한 처지에서 일하는 여성 노동자 운동에 힘입어 여성파업을 성사함으로써 주요한 사회세력으로 자리를 잡았고 꾸준히 여성의 차별을 없애기 위한 활동을 해 나갔다. 지금도 수많은 여성과 함께한다. 노동조합운동 역시 여성파업의 주요한 주체로 역할을 해 왔다. 1975년부터 여성파업을 현실로 만들어 냈다. 이후 2023년까지 노동조합은 여성파업의 준비부터 참가자 대다수를 조직하는 일까지 꾸준히 활동해 왔다. 사업장과 각 산업 부문에서 여성 노동자의 권리를 위해 투쟁해 오고 있다. 그런데 이 두 운동은 아이슬란드 정부와 지배계급을 향해 가부장적 자본주의를 그대로 둔 채 성별 역할 분리, 성별 임금 격차, 성에 기반한 차별과 억압을 없앨 수 있는지에 대한 의문을 던지지 않는다. 최소한 지금까지는 말이다.

     

    북유럽식 자본주의 이데올로기가 강한 가운데 이들 운동 역시 자본주의 경제성장을 목표로 평등하고 공정한 분배를 추구한다. 사회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세력 중 하나인 노동조합운동은 노사 윈윈(win-win)을 우선하는 조합주의, 노사협조주의 노선을 취한다. 청년-중년층 여성은 ‘선택에 자유가 있고, 원하는 사람이 될 수 있다’는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가 스며든 신념으로 젠더평등을 요구한다. 최근 10월 24일 여성파업 기념 시위들과 2023년 여성파업에 참여한 여성들의 인터뷰에서도 정부를 신뢰한다는 표현이나 분배의 평등을 제기하는 목소리를 쉽게 들을 수 있다.

     

    반면 여성 노동자 민중의 눈물은 마르지 않았다.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직장 내를 포함한 심각한 젠더폭력 수치는 가부장적 여성 혐오 정서의 민낯을 보여 주고 있다. 동일 임금인증제가 시행된 후에도 성별 임금 격차는 2019년 25.5%에서 2022년 21%로 4.5%를 좁혔을 뿐이다. 첫 여성파업 이후 거의 반세기가 지났어도 전통적 여성 노동은 여전히 저평가되고 있다. 또 이전에는 모든 계급 여성이 무급으로 수행하던 많은 일이 이제 중산층 이상의 고소득 가정에서는 가난한 노동자계급 여성과 이주 여성 노동자에게 아웃소싱되고 있다. 게다가 이주 여성 노동자들은 모든 일자리에서 가장 낮은 위치에 있다. 무엇보다 요동치는 국제정세와 경제위기가 있다. 2023년 2월 인플레이션은 10.2%로 2008년 금융위기 당시 고점을 찍은 2009년 9월 인플레이션 10.8% 이후 최고점을 기록했다. 이후 낮아지긴 했지만 세계 경제의 대불황과 기후위기, 전쟁 속에서 언제든 경제위기가 닥칠 위험성이 높다. 가부장적 자본주의가 여성과 노동자가 일군 지금의 권리를 언제 걷어찰지 모른다.

     

    그래도 아이슬란드 여성 노동자 민중에게는 1975년부터 여성파업으로 저항해 온 소중한 역사와 저력이 있지 않은가. 저임금 일자리의 여성 노동자와 이주노동자, 모든 성을 넘어서 단결한 노동자 투쟁이 국제적 차원에서 벌어지는 변혁적 여성운동과 노동자계급 운동을 만난다면 아마도 1975년보다 훨씬 큰 힘을 발휘할 수 있을 것이다. 여성이 멈추면, 세상이 멈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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