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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코 고상할 수 없는 ‘사서(司書)’ 일을 하는 노동자들의 외침

기사입력 2023.09.20 15:05 | 조회 4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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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구청 앞 집회 참가자에게 경찰과 구청이 구청 내 화장실을 이용하지 못하게 한다.

    - 용변이 너무 다급했던 참가자는 노상방뇨를 한다.

     

    이때 경찰과 구청은 참가자에게 어떤 입장을 보일까? 해당 참가자를 연행할까?

     

    물론 참가자가 노상방뇨를 한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양천구청과 양천경찰은 양천구청 앞에서 연좌해 집회를 진행하는 참자가들에게 구청 내 출입은 물론 구청 내 화장실 사용조차 막았다. 양천구청 둘레는 경찰들이 지켜 섰고, 곳곳에 ‘위험 출입금지’라는 문구가 적힌 접근금지 테이프를 둘렀다. 하물며 사적 건물인 주유소조차도 화장실을 무료로 개방하는데 공공기관인 구청이 화장실 사용조차 하지 못하게 하는 것은 공공의 안녕보다 개인의, 특정 세력의 안녕을 지키려는 처사라고밖에 볼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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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분 VS 48시간

     

    “저는 공대를 졸업했습니다. 도서관 사서가 되기로 결심한 이유 중 하나가 사서는 책에 둘러싸여 책을 보다가 이따금 이용자가 문의를 하면 답해 주면 되는 ‘꿀직업’으로 생각했기 때문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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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월 19일에 열린 ‘양천구청의 노동자 폭력 진압 규탄 집회’에 참여한 노원구의 한 사서 이야기다. 하지만 그 생각이 환상이었음을 깨닫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양천구청의 노동자 폭력 진압 규탄 집회’의 ‘노동자 폭력 진압’은 지난 9월 13일에 벌어졌다. 이날 양천문화재단에 소속되어 사서로 일하는 노동자들은 양천구청 1층 로비에서 평화롭게 연좌해 구청장 면담을 요구하고 있었다. 15분이 지나자 양천구청의 요구로 출동한 경찰들이 폭력을 휘두르며 노동자 10명을 연행했다. 이 과정에서 2명의 노동자가 팔과 다리에 큰 부상을 입었다. 심지어 한 노동자는 뼈가 살을 찢고 나오기까지 했다. 경찰은 연행한 노동자들을 48시간 동안 구금했다. 연행으로 부상당한 노동자들이 병원 치료를 요구하자, 경찰은 수갑을 차야만 병원에 갈 수 있다고 했다. 결국 노동자들은 수갑을 찬 채로 병원을 방문해야 했다. 연행된 10명 중 1명은 공공운수노조 서울지부 지부장이었는데 그는 양천서 정보과와 구청 행정지원국장이 주선한 교섭 자리에 참석하려고 이동하다가 연행됐다. 그런가 하면 이기재 양천구청장은 이러한 폭력사태는 묵과한 채 양천문화재단 노동자들의 요구를 불법으로 몰며, 근거 없는 주장과 노조혐오를 담은 게시물을 자신의 SNS에 게재했다.

     

    양천문화재단은 양천구의 출연기관으로, 공공도서관과 문화시설 등을 위탁 운영하고 양천구민에게 공공문화서비스를 제공한다. 양천구는 양천문화재단의 지도감독기관이며, 양천구청장은 재단의 이사장을 임명하고, 양천구는 양천문화재단 노동자들의 인사, 보수, 정원 등 노동조건의 거의 모든 것들에 대한 권한을 갖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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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꿀직업’일 수 없었던 사서

     

    다른 자치구의 문화재단에 소속된 노동자들의 노동조건과 처우도 열악한 편이지만 양천문화재단 노동자들의 경우는 더하다. 대부분의 구립도서관 사서들은 책 대출과 반납 관련 업무, 책 관련 각종 문화 프로그램 기획과 진행 업무는 기본으로 수행한다. 여기에 이용자들을 응대하는 서비스직 업무도 하는데 이 과정에서 대면 업무로 인한 감정노동과 스트레스가 어마어마하다. 악성 민원에도 시달린다. 인력이 부족해 청소 업무까지 맡다 보니 사서들은 도서관 운영에 필요한 모든 일을 떠안고 있는 실정이다. 이로 인해 손목질환, 허리디스크 등의 질병을 앓기도 한다.

     

    양천문화재단 노동자들은 최저임금 수준의 기본급을 받는다. 임금인상률은 물가인상률에 한참 미치지 못한다. 몇 년을 일해도 월급은 제자리 수준이다. 노원문화재단 노동자들은 연 120%의 명절수당이라도 받지만 양천문화재단 노동자들은 그마저도 받지 못한다. 노동조건과 처우가 이처럼 열악하다 보니 양천문화재단에서는 작년 한해 동안만 정원의 30%에 가까운 노동자들이 퇴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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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리버스터, 쏟아지는 이야기들

     

    ‘양천구청의 노동자 폭력 진압 규탄 집회’는 1부와 2부로 진행됐다. 1부는 집중집회와 필리버스터로, 2부는 투쟁문화제로 구성되었다. 필리버스터의 이야기가 이어지면서 전체 집회는 예정 시각보다 40여 분 늦게 마무리되었다. 집회에는 양천문화재단 노조 조합원들과 노원문화재단 노조 조합원들을 비롯해 여러 사업장의 노동자 150여 명이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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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리버스터 시간에 참여한 한 노동자는 “경찰이 ‘민중의 지팡이’라는데 이번 일을 겪고보니 잘 모르겠다”고 말했다. 또 다른 노동자는 “성별, 지위를 막론하고 누구나 사용할 수 있는 기관에서 일한다는 사명감으로 일을 한다. 그런데 노동자들의 처우를 모른 체하고 면담 요청마저 불응하는 기관의 태도를 보며 사명감이 떨어지고 있다”고 이야기했다. “공공기관에 대한 신뢰, 도서관에 대한 신뢰를 지키기 위해 사서로 일해왔다. 구청도, 경찰도 신뢰할 수 있는 기관, 신뢰를 주는 기관이 되었으면 한다”고 말한 노동자도 있었다.

     

    오대희 공공운수노조 서울시사회서비스원지부장은 “서사원 노동자들의 처지와 양천문화재단 노동자들의 처지가 법적 사장과 현장의 사장이 다르다는 점에서 더 많이 닮았다”고 이야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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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전히 미심쩍은 양천문화재단, 양천구청

     

    집회가 이어지는 동안 양천문화재단 노동자들과 양천구청 담당자, 양천문화재단 본부장과 영영관리팀장과의 면담이 진행되었다. 면담에서 명절수당은 25%로 이야기되었고, 장기근속수당은 신설 가능성에 대해서만 구두로 이야기되었다.

     

    노동자들은 그나마 양천구청과 양천문화재단 측이 면담에 응했다는 점에서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하지만 구두로만 정리된 내용으로 논의를 더 진전시킬 수 없으니, 문서로 내용을 정리해 달라고 요청한 상황이다. 장기근속수당을 포함해 노조 측 요구 중 반영 및 실행하기 어려운 내용들은 그 이유 역시 문서로 정리해 주면 전체적인 내용을 총회에서 논의해 답변을 내놓겠다고 노조는 입장을 정리했다. 사측은 9월 21일까지는 문서를 준비하겠다고 답변했다.

     

    하지만 중요한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다. 면담 자리에서 양천구청은 경찰의 연행 과정에서 부상을 당해 팔과 다리에 깁스를 한 노동자의 병가 처리를 받아들이지 않겠다고 답했다. 처음에는 “규정 상 불가능하다”고 말하더니, 규정을 찾아서 보여주자 “규정에는 ‘할 수 있다’고 되어있지 ‘해야 한다’라고 되어있지 않다”라고 말해 현장에 있던 노동자들의 분노를 자아냈다. 구청은 ‘우선 연차를 쓰고, 그래도 부족하면 그 때 병가를 검토해보겠다’고 말했는데, 이마저도 유급병가가 아니라 무급병가를 검토해보겠다는 뜻이었다. 다친 노동자와 같은 도서관에서 근무하는 노동자들도 발언대에 나와 “오늘 아침부터 ‘다친 000 조합원의 병가처리가 통과되지 않으면 어떡하나’란 생각에 하루종일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며, 동료를 다치게 하고 책임도지지 않는 양천구청을 향해 분노의 목소리를 높였다. 김윤수 공공운수노조 서울지부 조직부장은 “다친 노동자의 병가에 대해 확실한 답이 없다면, 사측이 노동조합과 교섭할 태도가 있다는 진정성을 믿을 수 없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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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변에서 다들 연대할 준비를 하고 있으니, 즐겁게 투쟁했으면 좋겠습니다”

     

    이 날 오후 3시 집중집회부터 4시 필리버스터, 7시 문화제까지 쉬지 않고 진행된 일정에, 공공운수노조 서울지부의 여러 단위를 비롯한 많은 노동자와 사회단체가 참여했다. 7시 문화제에는 특히 많은 단위들이 참여해 연대발언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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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변선영 서울지부 광운대분회장은 5년 전 용역업체가 파산하며 체불된 임금을 받기 위해 투쟁했던 이야기를 공유하고, 현재 새로운 용역업체에 의해서도 체불된 임금을 받기 위해 투쟁을 시작한다는 이야기를 전하며 양천문화재단분회 노동자들의 투쟁을 격려했다. 복수노조 사업장이라 소수노조의 위치에 있는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투쟁하려 한다는 광운대분회장은 양천문화재단분회 노동자들을 지지하기 위해 늦게까지 자리를 지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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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발언중인 김윤숙 분회장


    김윤숙 서울지부 서울도시가스분회 분회장은 자신 또한 경찰에 의해 연행된 경험, 수차례 경찰서로부터 전화가 오고 조사에 불려다니던 경험을 소개하며, 처음에는 두려웠지만 지금은 당당하게 나의 집회할 권리와 노동조합할 권리를 이야기한다고 얘기해 양천문화재단분회 노동자들의 사기를 북돋았다. 그리고 가장 힘들 때 무엇보다 옆에 있는 동료가 가장 큰 힘이 된다며, 단결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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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정아 유천초 해고노동자는 발언 이후 '바위처럼' 몸짓을 통해 참가자들을 일으켜세웠다.

     

    남정아 전교조 유천초분회 해고노동자는 강원도 교육감과의 면담약속을 받고 찾아갔다가 24시간 만에 강원도교육청에서 경찰에 의해 연행당했던 자신의 경험을 소개하며, 모범을 보여야 할 국가행정기관이, 노동자들에게 지급해야 할 수당도 제대로 지급하지 않으며 착취하는 모습을 미래 세대에게 물려줄 수 없다고 강조했다.

     

    김나리 서울지부 노원문화재단분회 부분회장은 ‘사서 노동자의 노동조건 개선이 지역주민들과 함께하는 양질의 도서관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한 것이기도 하다’면서, 양천문화재단 사서 노동자들이 그 점을 꼭 기억했으면 한다고 강조했다.

     

    안종헌 서울지부 노원문화재단 분회장은 ‘도서관계가 여러분을 주목하고 있다’며, ‘우리도 투쟁을 시작할 땐 우리만 바꾼다고 생각하고 시작했는데, 그게 아니더라. 노원만큼 너무나 힘들고 열악한 곳이 많다는 걸 투쟁하고서야 알게 됐다’며, ‘다음에는 무릎을 꿇어서라도 다른 조합원들을 데리고 연대하러 오겠다’, ‘든든한 동료들이 있고, 주변에도 많은 이들이 함께 연대할 준비를 하고 있으니 잊지 말고, 즐겁게 투쟁했으면 좋겠다’며 노원문화재단분회도 함께 투쟁하겠다는 의지를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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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중가수 이해규 동지가 문화제를 빛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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