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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언니들과 흩어지고 싶지 않아요" 서울신용보증재단고객센터 박영임 조합원의 이야기

이훈(성공회대 학생) mtosocialism@gmail.com
기사입력 2023.07.13 17:40 | 조회 6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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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편집자 주: 지난 2023년 4월 18일, 희망연대본부 서울신용보증재단고객센터지부 소속 2명의 노동자가 해고철회를 요구하며 신용보증재단 건물의 캐노피 위에 올라갔다. 그 중 한 사람이었던 서울신용보증재단고객센터지부 박영임 조합원을 성공회대학교 학생인 이훈씨가 인터뷰했다.

     

    강원도 정선에서 나고 자란 영임씨는 성격이 순했다. 어른들 말씀, 선생님 말씀 잘 듣는 착하고 바른 학생이었다. 학교 숙제 한 번 빼먹는 일이 없었고 규칙을 어기지 않았다. 어찌나 성격이 말랑말랑한지 고등학생 때 미술 전공을 준비하던 영임씨에게 학원 선생님이 “영임이는 데생을 잘해서 똑같이 그리는 건 잘하는데 예술적인 감각이 약간 없는 편이야. 혹시 건축쪽으로 진학하면 어때?”라고 권하자, 영임씨는 선생님 말씀대로 했다. 영임씨는 이후 건축회사, 홈쇼핑과 카드사의 고객센터, 프랜차이즈 카페 매니저 등으로 일하며 지냈다. 직업은 다양했으나 그때마다 주말에도 출근하거나 출퇴근 시간이 명확하지 않거나 일이 심각하게 많은 등 어려움이 컸다.

     

    2014년 12월, 구직사이트를 바라보면서 영임씨는 ‘부디 남들 다 쉬는 ‘빨간 날’에 나도 좀 쉬고 싶다‘고 생각했다. 출퇴근도 규칙적이길 바랐다. 그런데 마침 구직사이트에 나온 곳이 ‘서울신용보증재단 고객센터’였다. 공공기관이라 남들처럼 출퇴근이 일정하고 주말과 공휴일에 쉬는 곳이었다. 영임씨는 그 장점에 매료됐다. 얼른 지원했고 약 한 달의 수습기간을 거쳐 12월 29일, 정식 입사했다.

     

    입사 후 영임씨는 회사에 딱히 불만을 가진 적이 없다. 월요일과 공휴일 다음날엔 연차를 못 쓰게 하는 것도, 9시가 출근 시간이면서 8시 45분까지 출근하지 않으면 지각 처리하는 것도, 한 달에 한 번 시험을 보고 점수가 인센티브 평가 기준이 되는 것도, 콜이 길어져서 점심 식사를 늦게 하러 가도 1시엔 반드시 돌아와서 대기해야 하는 것도, 연차를 쓸 때 연차를 써야 한다는 증명 서류를 내게 하는 것도 다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다. 괜찮았다. 콜센터란 곳은 원래 그런 곳이니까, 관리자들의 말도 일리 있게 들렸으니까 다 괜찮았다. 연차가 몰리는 날엔 알아서 눈치껏 연차를 안 쓰면 되었다. 시험은 싫었지만 홈쇼핑과 카드사에서 직원들이 시험보는 걸 봤기에 시험은 ‘원래’ 보는 거니까 괜찮았다. 그렇게 영임씨는 관리자 입장에서 참 착하고 순했다.

     

    2018년 11월 18일, 재단의 사람들이 찾아왔다. 갑자기 찾아와선 전원 회의실로 모이라고 했다. 25명의 상담사와 5명의 관리자 모두 모였다. 재단 사람들은 정규직화에 대한 의견을 듣겠다고 했다. 당시 서울시장이 공공기관 콜센터의 노동자들을 정규직화하는 작업을 진행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영임씨와 동료들은 그 사실을 잘 몰랐고 재단 직원들은 노동자들의 무지를 이용했다. ‘정규직으로 모두가 입사하는 건 아닐 수 있다’는 말을 강조했다. 정규직으로 전환되는 과정에 일부는 해고될 수 있다며 겁을 줬다. 영임씨는 실직자보단 비정규직이 낫다고 생각했다. 모두가 같은 생각이었다. 해고 위협에 겁먹은 노동자들은 얼떨결에 그냥 하청업체 소속으로 남겠다고 했다.

     

    2020년 9월, 희망연대노동조합이 찾아왔다. 상담노동자의 권리가 적힌 팜플렛을 나눠주었다. 그걸 본 언니들은 우리가 그동안 법적으로 보장된 권리도 못 누렸다며 조금씩 모여서 수군거렸다. 한 명, 두 명씩 희망연대노동조합에 가입했고 얼떨결에 영임씨도 노동조합에 가입했다. 2020년 10월 21일, 총 25명의 상담노동자 중 24명이 가입한 서울신용보증재단고객센터지부가 출범했다. 노동조합은 꾸준히 삶의 변화를 가져왔다. 9시 출근시간에 맞춰서 출근할 수 있었고 가위바위보와 증명서류 없이 연차를 쓸 수 있었고 화장실 가기도 빠듯한 10분짜리 휴식시간은 20분으로 늘어났다. 모두 노동조합에 대한 만족도가 높아지고 있었다. 그러나 큰 산이 남아있었다. 월급이었다. 당시 서울신용보증재단 고객센터의 임금은 서울시 생활임금 및 이를 기준으로 한다던 서울신용보증재단의 답변과 달리  남들이 들으면 깜짝 놀랄만큼 터무니없이 낮았다. 월급을 올려야 했다. 요구는 역시 소박했다. 서울시가 정한 생활임금이었다. 그러나 2021년 여름이 다되도록 월급은 오를 기미가 없었고 교섭은 진전이 없다가 결국 파투났다. 하반기부터 부분파업, 태업에 이어 노숙 투쟁과 전면 파업에 돌입했다. 서울신용보증재단 건물 앞과 서울시청 앞에서 피켓팅, 농성을 이어갔다. 영임씨는 한겨울에 피켓을 잡고 서서 생각했다. ‘그동안 우리는 이렇게 취급받아도 되는 사람이었던 거야. 우리가 이렇게 취급받아도 되는 사람이라서 회사가 이런 식으로 취급했던 거야.’ 영임씨는 자신과 동료들이 이렇게 취급받은 이유를 깨달은 시원함과 이제야 깨달았다는 자괴감이 동시에 들었다. 자괴감을 느끼며 피켓을 잡은 한겨울이 참 추웠다. 파업 5일차, 사측은 생활임금을 지급하겠다며 파업을 멈추라 했다. 승리였다. 하지만 승리의 짜릿함보단 1년이나 했던 임금교섭의 시간이 떠올랐다. ‘이게 이렇게 오래 걸릴 일이었나.’ 이겨놓고도 드는 자괴감은 참 복잡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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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2년 1월 파업 투쟁 중 노래에 맞춰 손을 흔드는 박영임 조합원


    투쟁이 일단락되었으니 당분간은 조용히 다닐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2023년 3월, 서울시의원 한 분이 서류를 하나 노조에 건네주었다. 서울신용보증재단과 하청업체 사이에 오간 인원감축 계획이었다. 노조는 곧바로 재단과 하청업체에 이게 무슨 일인지 물었다. 사측은 ‘아직 인원에 대한 계획이 전혀 없다’며 시치미를 뗐다. 그러나 4월, 노조가 입수했던 자료와 토씨 하나 틀리지 않은 해고 공지가 나왔다. 최근 입사자 순서대로 8명을 구조조정하겠다는 거였다. 영임씨는 연차가 높았기 때문에 대상이 아니었지만 만약 이번에 해고가 이뤄진다면, 다음엔 김민정(초대 지부장) 언니나 임지연(현 지부장) 언니같은 사람들도 해고될 거 같았다. 강하게 주장하는 언니들이 해고된다면 남은 조합원들이 해고되는 건 순식간일 게 뻔했다. 영임씨는 자신을 지키기 위해 그리고 후배, 언니들을 지키기 위해 투쟁에 동참했다. 그러나 영임씨는 투쟁이 쉽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동료들은 대부분 결혼해서 아이가 어리거나 편찮으신 부모님을 모시고 있었다. 투쟁을 결의하는 총회에서 지부장이 여러 투쟁 방식을 브리핑하는 걸 들으며 영임씨는 생각했다. ‘언니들이 밤에 천막에서 자고, 굶고, 머리 깎을 수 있을까? 만약 해고를 막아내기 위해 그런 투쟁이 필요해진다면, 내가 하는 게 좋겠다.’ 실제로 영임씨는 약 한 달간 진행한 천막농성 중 대부분의 밤을 책임졌다. 투쟁을 이끌겠다는 뜨거운 다짐 같은 게 아니었다. 해야 할 일이 있고 적합한 환경에 있는 사람이 자신뿐이니 하는 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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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공농성을 시작하고 찾아온 밤의 풍경


    노동조합은 파업에 돌입하며 해고 철회 투쟁을 시작했지만 사측은 어쩔 수 없다는 이야기만 반복할 뿐이었다. 18일 새벽, 영임씨는 진기숙 조직부장과 이야기를 나누던 중 제대로 ‘욱’했다. 핫팩과 사다리를 챙겼고 함께 다음날 순식간에 재단 정문 캐노피에 올라갔다. 아침이 되자, 만나주지도 않던 재단 직원들, 하청업체 직원들이 다 몰려왔고 정치인들과 소방차, 경찰차까지 잔뜩 왔다. 연대자들도 몇백 명씩 와서 힘을 보태주었다. 그때 영임씨는 다시 느꼈다. ‘아, 이렇게 해야 하는 거구나. 우리는 그동안 그렇게 취급받아도 되는 사람이라서 만나주지도 않았던 거구나.’ 익숙한 깨달음과 자괴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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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공에 올라간 박영임 정책부장의 시선. 조합원과 연대자가 함께 피켓팅을 하고 있다.


    위에서 내려다보니 조합원들이 애타서 발을 동동 구르는 게 보였다. 사측과 만나고 온 지부장의 실망한 어깨가 보였다. 열 받아서 올라오긴 했는데, 막상 올라오니 괜히 조합원들을 더 힘들게 한 거 같아서 미안했다. 조합원들이 간단한 간식과 김밥을 올려주었지만 입맛이 없어서 기숙 언니랑 한 알씩 겨우 나눠 먹었다. 캐노피에서 하루를 보낸 후 사측은 노사전협의체를 꾸리고 해고를 다시 고민해보겠다고 약속했다. 그렇게 영임씨와 기숙씨는 캐노피에서 내려왔다. 그러나 하루만에 사측은 태도를 바꿨고 해고를 유지하겠노라 뻔뻔히도 말했다. 결국 8명의 조합원은 단식을 결의했다. 영임씨도 함께였다. 영임씨는 고공과 단식이 힘들지 않았냐는 질문에 “아뇨 제가 지구력이 좋아요”라고 간단히 답했다. 영임씨는 해고를 막아내기 위해 해야 하는 일을 차근차근 하나씩 해나가는 사람이었다. 영임씨는 해고 철회를 위해 해야 하는 투쟁이 있다면 누군가는 해야 하고, 그게 누구일지 고민할 땐 ‘내가 아니어도 된다. 하지만 할 사람이 마땅치 않다면 내가 안 할 이유도 없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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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식 3일차인 박영임 정책부장이 발언을 하고 있다.


    영임씨를 인터뷰하면서 느껴지는 건 마음이 하얀 사람이란 거다. 어렸을 적 모범상 좀 받았을 사람, 노조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상사에게 쭉 예쁨받으며 살았을 사람이다. 누군가 뉴스에서 본 ‘폭력적인’ 노동조합의 이미지와 정반대인 사람을 떠올리라고 하면, 가장 먼저 머릿속에 떠오를 법한 사람이다. 사람들은 노동조합을 하는 사람은 ‘이기적’이라서 노조 가입 후 이것저것 따진다고 말하곤 한다. 혹은 마르크스와 계급투쟁 같은 어려운 말에 푹 빠진 ‘빨갱이’들이나 하는 거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영임씨는 노동조합을 왜 하냐는 질문에 ‘언니들과 흩어지고 싶지 않아요. 언니들이 되게 좋아요’라고 답했다. 약 10년간 옆에서 일하면서, 노동조합을 하면서 동료들과 친해졌다. 성격 좋고 잘 맞는 언니들이 해고당해서 실직자가 되도록 놔두고 싶지 않다. 이리로 저리로 강제 전보 당해서 흩어지는 것도 싫다. 자신을 지키고 언니들을 지키고 싶다. 그러기 위해 필요한 것을 차근차근해왔고 지금도 하고 있을 뿐이다. 이들을 지키기 위해 굶어야 한다면 굶고 길바닥에서 자야 한다면 잔다. 언니들과 흩어지고 싶지 않다는 소박한 마음을 이루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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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사 합의 후 천막을 정리한 조합원들이 서울신용보증재단 앞에서 찍은 단체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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