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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아파르트헤이트 아래 민주주의는 없다

기사입력 2023.05.20 15:36 | 조회 4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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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 Photo: Ohad Zwigenberg/AP

     

    건국 75주년이 된 지금, 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한 거대한 시위가 이스라엘을 뒤흔들고 있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결코 민주주의 국가가 아니었고, 민주주의 국가가 될 수도 없다.


     - 너새니얼 플라킨, 사데우스 그린

    2023년 5월 15일



    지난 몇 달 동안 이스라엘은 75년 역사상 가장 큰 내부 위기에 직면해 있다. 수십만 명이 텔아비브, 예루살렘 및 기타 도시에서 이스라엘 국기를 흔들며 거리에 나섰다. 총파업으로 공항이 하루 동안 폐쇄되었고, 예비군들은 근무 신고를 거부하고 있다. 베냐민 네타냐후 총리는 이스라엘이 내전의 위험에 처해 있다고 경고했다.


    이 운동은 정부의 ‘사법개혁’ 계획에 대응해 시작됐다. ‘사법개혁’이란 네타냐후와 그의 극우 연합 파트너들이 대법원을 이스라엘 의회 크네세트(Knesset)의 직접적 통제 아래 두려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법원의 반대를 넘어 그들의 우익 프로젝트를 실행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시위대는 사법부의 독립, 더 나아가 민주주의를 수호하고자 한다.


    제국주의 매파이자 시온주의의 열렬한 지지자인 미국의 논평가 토머스 프리드먼은 사법개혁이 “우리가 알던 이스라엘이 사라진다”는 것을 뜻한다고 경고했다. 프리드먼은 자칭 “유대인 국가”가 중동에서 유일한 민주주의 국가라고 칭송해왔다. 그러나 독립된 법관으로 상징되는 “법치(法治)”가 없다면 민주주의는 사라질 것이다.


    역설


    “이스라엘 민주주의”를 위한 이 운동은 여러 측면에서 역설적이다. 핵심 요구는 민주적 통제를 받지 않는 기관인 대법원이 (앞으로도 - 옮긴이) 민주적 통제에서 자유로워야 한다는 것이다. 사회주의자들이 늘 주장해 왔듯이, “독립적인” 사법부는 민주주의와 아무런 관련이 없다. 오히려 그 반대다. 법관을 민주적 통제에서 독립시키는 것은, 법관이 지배계급에 의존하게 하는 데 도움이 될 뿐이다. (미국 대법원은 그 극적인 실례를 지금 보여주고 있는데, 판사들은 유권자와 멀어질수록 우익 억만장자들과 가까워지고 있다.) 프리드먼이 지적했듯이, 이스라엘 법원이 민주적 의사결정의 성가신 간섭 없이 일관되게 작동하는 것에 이해관계를 가진 이들은 주로 투자자들, 즉 자본가들이다.


    ‘천년왕국’ 광신자들로 구성된 현 정부에 비하면 이스라엘 대법원은 몇 밀리미터 왼쪽에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이는 법복(法服)을 입은 판사들이 자유주의 원칙을 구현하고 있기 때문은 아니다. 이 역시 반대다. 최근 몇십 년에 걸쳐 이스라엘 사회는 오른쪽으로 기울어져 왔다. 대법원은 몇십 년 전에 있었던 힘의 균형을 대변한다. 그렇다고 해서 특별히 자유주의적인 것은 아니다. 불과 2년 전에 이 “민주적” 법원은 이스라엘이 모든 시민이 아니라 “유대인의 국가”임을 선언하는 ‘유대민족 국가법(State of the Jewish People)’을 승인했다.


    여러 친제국주의적 인권 단체가 지적하듯이, 한 민족에게만 “민주주의”를 보장하는 이런 종류의 민족 분리정책에는 명칭이 있다. 아파르트헤이트가 그것이다.


    피터 베이나트는 <뉴욕타임즈>에서 “유대인 국가이자 민주주의 국가라는 개념은 현실에서 모순”이라고 주장했다. 계속해서 베이나트는 “민주주의란 인민에 의한 정부를 말한다. 유대인 국가는 유대인에 의한 정부일 뿐이다. 요르단강과 지중해 사이 유대인이 인민의 절반을 구성할 뿐인 나라에서, 두 번째 원칙(유대인 국가)은 첫 번째(민주주의 국가)를 집어삼킨다”고 말했다.


    이 문제는 이스라엘 시민들, 즉 완전한 시민권을 가진 약 700만 명의 유대인들과 기껏해야 이등 시민으로서 이스라엘 여권을 가진 200만 명의 팔레스타인인들만의 문제는 아니다. 나아가 사실상 아무런 권리도 없는 수십만 명의 이민자가 있다. 또 다른 200만 명의 팔레스타인인들은 가자 지구라는 야외 감옥에 살면서 이스라엘 미사일에 의해 정기적으로 살해되고 있다. 300만 명 이상의 팔레스타인인들이 이스라엘 정착촌으로 영토가 분할된 요르단강 서안지구에서 군사 점령하에 살고 있다. 1948년과 1967년의 시온주의 강제 이주 전쟁으로 쫓겨난 약 400만 명의 팔레스타인인이 이스라엘 국경 밖에서 살고 있다. 민주주의의 또 다른 기본 요구는 팔레스타인인이 자신의 출신 도시와 마을로 돌아가는 것을 허용하는 것이다.


    에후드 올메르트 전 이스라엘 총리는 2007년 “동등한 투표권”이 “이스라엘 국가의 종말”을 뜻한다고 말했다. “민주주의”라는 국가에서 전 수장(首長)의 주목할 만한 자백이다. 즉 가장 기초적인 민주주의 원칙이 이스라엘 국가의 근본적 성격과 모순된다는 것이다.


    “자유주의”, “사회주의” 시온주의


    오늘날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시위대는 네타냐후 정부가 성소수자의 권리를 공격하고, 여성의 권리를 후퇴시키고, 파시스트 민병대를 무장시키고, 팔레스타인인에 대한 폭력을 강화하는 것을 올바르게 우려하고 있다. 그러나 이들이 가장 민주적이지 않은 국가기관인 대법원에 유권자 다수의 결정(현 정부 – 옮긴이)으로부터 자신들을 보호해달라고 요청하는 것은 주목할 만하다. 가장 확실한 민주적 해법은 민족과 관계없이 이스라엘의 모든 사람에게 투표권을 확대하는 것이다. 그러나 모든 팔레스타인인에게 민주적 권리를 확대하는 것은 시온주의 국가 자체를 약화시킬지도 모른다. 민주주의 원칙과 시온주의 원칙은 상반된다.


    1948년 이후 이스라엘은 오른쪽으로 거대한 선회를 해왔다. 시온주의 국가의 건국자들은 스스로를 사회민주주의자이자 무신론자로 여겼다. 처음 수십 년 동안은 좌파 정당들이 크네세트에서 다수를 차지했다. 그러나 이런 자유주의적 합의는 무너져 내렸고, 가장 최근의 선거에서 사회민주주의 정당 ‘아보다(Avoda)’는 단 4석에 그쳤다. 또 좌파 정당 ‘메레츠(Meretz)’는 의회에 입성조차 하지 못했다. 과거 유대인 무신론자들이 세웠던 나라는 극우 종교 광신도들에 의해 점령당했다.


    토마스 프리드먼은 자유주의 시온주의가 점차 사라지는 것을 애도하지만, 자유주의는 언제나 환상이었다. 테오도르 헤르츨(Theodor Herzl, 1860~1904, 오스트리아 제국의 유대계 언론인, 시온주의의 주창자 – 옮긴이)로 돌아가 보면, 시온주의 운동의 목표는 팔레스타인에 유대인 국가를 세우는 것이었다. 그들은 “나라 없는 민족을 위한, 민족이 없는 나라”를 발견한 것처럼 가장하고 싶어 했지만, 유대인 국가를 세우려면 원주민을 추방해야 한다는 사실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이것이 1948년에 벌어진 일이다. 나크바(아랍어로 ‘대재앙’이라는 뜻 – 옮긴이) 기간 70만 명 이상의 팔레스타인인들이 고향에서 쫓겨났다. 자유주의자, 사회민주주의자, 심지어 스스로를 마팜 마르크스주의자(마팜은 히브리어 약자로, 통합노동자당을 뜻한다 – 옮긴이)라 불렀던 이들까지 시온주의의 모든 세력이 이 범죄에 가담했다.


    “좌파” 시온주의는 언제나 환상이었다. 그들은 집단 농장(키부츠)을 기반으로 사회주의 사회를 건설하면서, 동시에 원주민을 축출하고 민족적 동질성을 유지하겠다는 목표를 내걸었다. 그런 게 있다면 반동적 “사회주의”에 불과하다. 유대인이 아닌 사람들을 체계적으로 배제하는 국가는 언제나 더욱 반동적인 형태의 유대인 정체성으로 이어지게 된다. 오늘날 우리가 목격하는 극우 이데올로기는 헤르츨과 벤 구리온(Ben Gurion, 1886~1973, 시온주의자, 이스라엘 초대 총리 – 옮긴이)이 시작한 일의 궁극적 결과다. 비록 그들은 사악하고, 냉소적이며, 파시스트적인 후손들을 보면 분명히 경악하겠지만 말이다.


    “자유주의” 시온주의는 식민주의 정책과 민족 청소를 실행하면서 언제나 인도주의적 문구를 늘어놓았다. 이 거짓 담론은 세계 제국주의 패권국가의 지원을 확보하는 데서 중요했다. 미국 국무부에게 이스라엘은 미국이 중동을 지배할 수 있게 해주는 불침항모(不沈航母)다. 제국주의자들은 자기 졸개들이 인도주의적 목소리를 내길 원한다. 그러나 오늘날 이스라엘 파시스트들은 인권 구호를 기꺼이 내다 버릴 만큼 충분히 강해졌다고 느낀다. 그들은 시온주의 국가가 무엇에 기반해 있는지를 공개적으로 말하고 있다. 무력으로 보장되는 유대인 우월주의가 그것이다. 토마스 프리드먼의 말에도 불구하고, 이것이 우리가 항상 알고 있던 바로 그 이스라엘이다. 


    계급 적대감


    이스라엘 국가는 항상 자본주의 사회였지만, 초기에는 강력한 조합주의적 요소와 심지어 사회주의적 문구도 존재했다. 키부츠 외에도 히스타드루트(Histadrut) 노동자 연맹은 노동조합이자 주요 고용주 역할을 하는 거대한 조합주의 조직으로 운영되었다. 이스라엘 유대인 대중은 팔레스타인인을 수탈하고 착취해 어느 정도 이익을 얻었고, 유대인들 사이 부의 격차는 상대적으로 낮은 수준에서 유지됐다. 빼앗은 토지가 많을수록, 이스라엘 사회는 더 많은 식량을 재배하고 판매하고 소비할 수 있었다.


    75년 동안 이스라엘 국가에서는 조합주의 구조가 약화되고 신자유주의 정책이 도입됐다. 한때 두 번째로 큰 고용주이자 노동자 대다수를 “대변하던” 히스타드루트는 완전히 사라졌다. 1980년대부터 이스라엘 자본은 노동자들을 상대로 공세를 펼쳤다. 긴축정책과 자유시장 경제가 부상하면서, 이스라엘 노동자들은 계급 경계를 따라 점차 양극화되었다. 2011년 이스라엘 텐트 시위가 보여주듯이 말이다. 2021년 <예루살렘포스트>는 이스라엘 유대인의 17%가 빈곤율 이하로 살고 있다고 보도했다. <CNN>이 지적했듯이, “미국과 이스라엘은 선진국 중 최악의 불평등을 겪고 있다.” 이스라엘에서는 상위 10%의 임금 노동자가 가장 가난한 계층보다 약 15배 많은 소득을 올리고 있다. 이스라엘 여권을 소유한 팔레스타인인들의 경우 빈곤율이 훨씬 높은데, 그들은 이스라엘 유대인보다 약 50% 적게 벌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대중의 지속적인 빈곤과 불평등 심화는 시온주의가 현재 위기에 처한 근본 원인 중 하나다. 유대인 노동자들은 유대인 우월주의 체제에서 “선택받은 민족”으로서 특권을 누리고 있지만, 주류 정당들에서 그들의 이익을 대변하는 목소리는 점점 더 줄고 있다. 대략 70명의 이스라엘 억만장자가 부를 바탕으로 사회를 지배하고 있으며, 이스라엘은 1인당 억만장자 수가 가장 많은 국가 중 하나다. 사기가 저하되고, 분노하고 있으며, 이 지역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사회주의 지도력을 갖지 못한 많은 이스라엘인은 정치적으로 우경화했다. 팔레스타인인을 시온주의 국가의 결점을 감추는 희생양으로 삼으면서 말이다.


    이런 흐름은 미국에서 우익 포퓰리즘이 부상하는 것과 유사하다. 수십 년 동안 생활 수준이 저하되면서 상당수 미국 백인이 이민자, 흑인, 성소수자, 기타 소수자를 사회의 근본적인 병폐로 지목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스라엘 유대인 노동자들은 권력을 쥔 억만장자 계급보다는 팔레스타인 노동자계급의 형제자매들과 훨씬 더 많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반시온주의 운동을 향한 투쟁


    미국 노동자계급과 마찬가지로, 이스라엘 유대인 노동자계급은 수십 년 동안 인종주의적, 민족주의적 세뇌에 중독돼왔다. 제국주의 군사 보조금은 이스라엘의 영구적인 전쟁 경제를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되지만, 대부분의 이스라엘인은 이웃 국가와 벌어지는 끝없는 분쟁 때문에 거의 이익을 얻지 못한다. 이스라엘 노동자들이 군사주의, 민족 청소, 빈곤, 문화적 적대감을 극복하고자 한다면 팔레스타인 민족 해방 투쟁에 연대해야만 한다.


    최근 시위운동에서 드러난 매우 진보적 발전 중 하나는 ‘반(反)아파르트헤이트 연합’의 결성이다. 이 깃발 아래 수백 명, 때로는 수천 명의 활동가들이 시위에 참여한다. 소수이지만 눈에 띄는 움직임이다. 장군, 스파이, 우익 정치인이 이끄는 “민주주의” 운동 속에서, 반(反)시온주의 활동가들은 팔레스타인과 공산주의 깃발을 흔들며 유대인 우월주의에 기반한 민주주의는 있을 수 없다고 지적한다. 이러한 용감한 활동은 전 세계 사회주의자들의 전폭적 지지를 받을 만하다. 그러나 이들이 시위대의 소수를 차지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팔레스타인인, 사회주의자, 성소수자 등은 저항 행동을 할 때 언어적, 물리적 공격의 위협에 맞닥뜨린다. 공격은 극우 정부 지지자뿐만 아니라 경찰, 심지어 시위 주최자들로부터 행해진다. 반(反)시온주의 운동은 이스라엘에서 소수의 견해로 남아 있는데, 이것은 미국에서 진정한 반제국주의 운동이 소수의 견해로 남아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많은 팔레스타인인과 반(反)시온주의 좌파들이 지금의 “민주주의” 시위에 공감하지 않는 것은 이해할 만하다. 이 시위는 이스라엘 국기로 가득하고, 부르주아계급의 주요 부문, 심지어 보안 기구의 요소들까지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민주주의, 평등, 그리고 사회주의


    어린 시절부터 이스라엘 유대인들은 반유대주의가 너무 강력해 박해를 피하려면 유대인의 민족국가가 필요하다고 배운다. 그러나 이스라엘 국가는 유대인을 시온주의 국가의 범죄와 동일시하게 만들어 반유대주의를 강화하고 있다. 대부분의 유대인은 이스라엘 국가 밖에서 살고 있으며 갈수록 더 많은 유대인 청년이 시온주의와 그 범죄에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이 지역의 민중은 끝이 없어 보이는 전쟁과 증오의 순환에서 어떻게 벗어날 수 있을까? ‘천년왕국’ 세력은 세계 자체가 수천 년밖에 되지 않았기 때문에(성경의 천지창조설에 따르면 지구의 역사는 고작 수천 년이다 – 옮긴이) 다른 종교 종파 사이의 분쟁이 영원할 거라고 확신한다. 물론 실제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분쟁은 제국주의와 식민주의의 결과로, 불과 100년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필요한 것은 민주주의에 대한 진정한 관점이다. 이것은 팔레스타인의 모든 개인이 정치에서 동등한 발언권을 가져야 한다는 뜻만은 아니다. 그 이상의 의미가 있다. 한 세기 동안 제국주의 열강은 이 지역의 광대한 자원을 무자비하게 착취해왔다. 진정한 민주주의는 모든 제국주의 기업을 몰수하고 이 부를 민중의 통제 아래 두는 것을 의미한다. 이렇게 하면 반동적 독재 정권을 세우고, 지배를 유지하기 위해 서로 다른 종교와 민족을 이용해 온 주류세력을 제거할 수 있다. 이것은 오로지 혁명적 수단과 사회주의 전망을 통해서만 성취할 수 있다.


    이스라엘 국가는 오직 배타적 민족국가가, 역사상 가장 끔찍한 범죄가 기록된 반유대주의의 위협으로부터 민중을 보호할 수 있다고 선언한다. 그러나 시온주의의 역사는 그 반대의 사실을 보여준다. 이스라엘의 정착 식민주의(settler-colonial) 정책은 유대인을 끊임없는 위협에 처하게 한다. 유대인들은 자기 주변 수억 명 사람들과 영원한 분쟁을 겪으며 거대한 벙커에서 살아야 한다고 듣고 있다. 최근 몇 년 동안 최대 백만 명에 이르는 이스라엘인들이 외국 여권을 취득했다. 이것은 국가에 대한 큰 신뢰 표시는 아니다.


    유대인 혁명가들이 수세대에 걸쳐 주장했듯이, 반유대주의를 끝장내는 진정한 방법은 세계혁명을 통해 계급사회를 폐지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시온주의라는 반동적 민족주의 사상에서 벗어나야 한다. 이스라엘 노동자들은 종종 그 지역의 노동자계급 형제자매들에 비해 엄청난 특권을 누리고 있다. 이것이 그들의 “민주주의” 시위가 주변 국가의 노동자와 억압받는 민중들 사이에서 거의 반향을 일으키지 못한 이유 중 하나다. 그러나 중동에서 계급투쟁이 상승할 때마다 적어도 이스라엘 노동자 중 소수는 모두를 위한 평화와 민주주의를 가져다줄 사회주의 변혁을 위해 전적으로 싸울 준비가 돼 있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예를 들어, 이것은 1968년 이후 이스라엘 신좌파가 정확히 보여준 일이다.


    사회주의자로서 우리는 팔레스타인 민족 해방 투쟁을 지지하고 이스라엘 노동자들이 시온주의에서 벗어나 그 투쟁을 지지하도록, 모든 것을 다할 것이다. 팔레스타인과 전 세계의 트로츠키주의자들은 민족과 종교에 관계없이 모든 노동자에게 동등한 권리를 보장하는 사회주의 팔레스타인을 위해 항상 싸워왔다.

     

    [원문] 

    https://www.leftvoice.org/theres-no-democracy-under-aparthei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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