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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왜 여성은 사회주의를 위해 싸워야 하는가?

연재_ 노동자계급 속에서 사회주의 페미니즘의 길을 개척하는 ‘빵과 장미’의 도전②

기사입력 2022.12.28 17:03 | 조회 6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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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드레아 다트리는 아르헨티나 사회주의노동자당(PTS)의 리더이며 여성단체 빵과 장미의 설립자다. 그의 책 <빵과 장미: 자본주의에서 젠더와 계급>은 스페인어, 이탈리아어, 프랑스어, 독일어, 영어로 번역 출간됐다.

     

    *          *          *

     

    사회주의가 여성의 삶과 발전, 행복에 어떤 이점을 줄 수 있는지에 대해 합의에 도달하는 건 어려운 문제다. 자본주의가 인류와 지구를 고통, 파괴, 야만으로 몰아간다는 진단에 대해 의견 일치를 보는 게 더 쉬울 것이다.

     

    15년 전에, 미국에서 가장 부유한 100명의 평균수입은 가난한 90%의 수입보다 108,765배나 높았다. 역사의 다른 시기와 비교해 본다면, 이와 같은 물질적 부의 격차 비율은 로마제국 절정기 원로원 의원과 노예 간의 격차와 맞먹는다고 말할 수 있다.

     

    2020년 이래, 전 세계를 황폐하게 만든 코로나19 팬데믹은 이 말도 안 되는 모순을 더 심화시켰을 뿐이다. 이를 보여주는 끔찍한 사례가 아마존이다. 아마존은 수많은 불안정 노동자를 고용한다. 이들은 기진맥진해질 정도로 일해야 하고, 노조 결성권을 보장받지 못하며, 형편없는 임금만 받으면서 경제가 움직이게 해준다. 그 사이에 이 회사의 소유주는 720억 달러의 재산을 추가로 손에 넣었다. 이 짧은 기간에 450만 명 이상이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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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코로나 사태로 노동자가 죽어 나가는 동안 아마존 자본가는 720억 달러(91)를 더 벌어들였다.

     

     

    코로나19가 촉발한 위기는 그 전부터 오랫동안 이어진 추세를 더욱 가속했다. 그것이 전부가 아니다. 이 위기는 자본주의 모순이 경제뿐만 아니라 생태와 재생산 영역에까지 걸쳐 있다는 점도 보여줬다. 수백만의 사람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생명보다 이윤이 중요하다는 끔찍한 자본주의 원리가 터무니없는 방식으로 드러났다. 거듭 자본주의 위기가 닥치면서 이 모순은 점점 더 견딜 수 없는 것이 된다. 여러 분석가들이 동의하듯이, 이 때문에 사회주의라는 발상이 심지어 제국주의 국가들의 심장부에서 살아가는 젊은 세대 속에서도 되살아나고 있다.

     

    꽉 묶인 매듭이 더 단단하게 묶이다

     

    코로나바이러스가 세상에 퍼지기 이전인 2019년에, 세계 노동가능인구의 절반은 여성이었다. 하지만 실제로는 전체 노동인구의 39%만이 여성이었다. 여성은 남성보다 더 불안정하고 비공식적인 조건에서 일하는 경우가 많았다. 특히 사하라사막 이남 아프리카, 동남아시아, 라틴 아메리카에서 그렇다. 일할 수 있는 여성의 21% 이상이 하루 내내 무급 돌봄노동에 종사한다. 같은 처지에 있는 남성이 1.5%에 불과한 것과 비교된다.

     

    같은 해에 20세 미만의 여성과 소녀 1,300만 명이 아이를 낳았다. 아직도 119개 나라에서는 임신 중지권이 제한된다. 오직 38개 국가에서만 임신한 노동자를 해고하는 게 금지돼 있다. 86개 나라에서는 아이를 양육하는 데 투여한 기간을 연금 산정하는 데에서 빼버린다. 2018년에 에이즈 바이러스에 감염된 채 살아가는 15세 이상의 사람 중 52%가 여성이었고, 그 비율은 1990년 이래 계속 증가하고 있다.

     

    팬데믹이 발발하면서, 기존의 성별 격차는 더욱 커지기만 했다. 2022년 초에 다보스에서 열린 세계경제포럼에서는 세계 성별 불평등을 없애는 데 135년 이상이 걸릴 거라고 추산했다. 2020년 추산보다 36년이 더 늘어난 수치다. 코로나19 팬데믹에 대응하는 정부 조치들은 그들이 성평등 목표라고 여기는 것들의 달성을 한 세대 뒤로 밀쳐놓는 데 성공했을 뿐이다.

     

    진짜로 공상적인 것은, 그저 자본주의가 자기 갈 길을 가게 내버려 둠으로써, 또는 좀 더 진보적인 버전으로는, 사회운동이 자기 모습을 내보이고 민주적인 국회의원들이 성별 격차를 줄이기 위한 법안을 통과시킴으로써 이 격차가 조만간 줄어들 거라고 믿는 것이다. 오늘날 미국에서 여성은 임신 중지권의 퇴행에 직면했다. 우리는 지난 몇 년간 스페인에서 이와 똑같은 밀물과 썰물을 봤다. 스위스에서는 결혼 평등* 통과된 반면, 아프가니스탄 여성은 외출하려면 몸 전체를 가리도록 다시 강요받게 됐다.

    [*결혼 평등법: 동성결혼을 포함해 다양한 성별의 결혼을 인정한다.]

     

    지금은 자본주의가 발전하는 시기가 아니다. 되풀이되는 위기를 거치며 버티는 상황이다. 이 체제가 회복되려면 생산력의 파괴라는 길을 거쳐야만 한다. 신자유주의 질서가 번영할 수 있을 거라는 꿈같은 상상을 할 수는 있더라도, 과연 누가 그 대가를 치르면서 어느 나라에서 번영이 이뤄질 수 있을까? 국제적인 돌봄 사슬이 그 답을 보여준다. 선진국 여성들이 직업이나 학문적인 커리어에서 남성을 따라잡을 수 있게 된 것은, 주로 그들의 노동력을 재생산하는 데 필요한 무급노동이 흑인이나 히스패닉계의 가난한 이주 여성에게 외주화됐기 때문이다.

     

    법률이나 국내 총생산 증가로 이 상황을 바꿀 순 없다. 이 현실은 자본주의가 가장 단단한 매듭으로 꽉 묶어놓은 것이다. 이 체제 안에서 그 매듭을 푸는 건 불가능하다.

     

    가중되는 무급노동

     

    자본가들이 가사노동을 직접 통제하지는 않는다. 그렇지만 자본가들은 노동력을 재생산하는 데 필요한 노동의 상당 부분을 사적 영역에 묶어둠으로써 이득을 본다. 이런 방식으로 임금은 임금노동자를 재생산하는 데 필요한 비용 전부를 커버할 필요가 없게 된다. 재생산노동의 일부는 임금노동자 자신에 의해, 그들의 집에서, 아무런 보수 없이 이뤄진다. 유급 고용의 형태로든 아니든, 이런 노동을 하는 압도 다수는 두말할 것 없이 여성이다. 다시 말해 대부분 여성이 가정에서 수행하는 무급 재생산노동은 자본가들이 임금노동 착취에서 끌어내는 잉여가치의 양을 간접적으로 늘려준다.

     

    여성 억압의 뿌리는 고대 계급사회의 등장에까지 거슬러 올라가지만, 이렇게 해서 자본주의는 잉여가치를 뽑아내는 구조에 복무하게 만드는 방식으로 이 종속관계를 재구성한다. 자본주의는 상품 생산에 대한 물신숭배를 낳고, 임금을 지급함으로써 잉여노동의 존재를 감춘다. 그와 동시에, 노동력이라고 알려진 특별한 상품의 재생산에 필요한 노동의 가정 내 구성요소를 생산 영역에서 분리된 것으로 묶어둔다. 이런 이유에서 몇몇 마르크스주의 페미니스트들은 가사노동 즉, 사회적 재생산을 위한 무급노동 또는 광범한 대중에게 그렇듯이 넓은 의미로 돌봄노동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을, 자본주의 사회의 진정한 산물이라고 주장한다.

     

    이 엄청난 불평등을 유지하려면 거대한 이데올로기적 압력이 가해져야 한다. 개인들이 이런 규범을 그들 자신의 욕망인 것처럼 받아들이도록 말이다. 다시 말해 사람들은 결국 여성이 하는 일을 무급노동이 아니라 사랑이라고 믿게 된다. 그런 점에서 특히 낭만적인 사랑 역시 자본주의의 발명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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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사노동, 돌봄노동이 당연히여성의 몫이라는 생각은 과연 당연할까?

     

     

    자본주의는 자연과 우주의 수수께끼를 풀 수는 있었지만, 여성이란 무엇이고, 좋은 여성은 어때야 하며, 여성의 권리와 의무는 무엇인지, 그리고 여성이 무엇을 갈망해야 하고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편견, 규칙, 고정관념은 완전히 제거하지 못한다. 성별 반계몽주의에는 무급노동이 사랑이며 이런 사랑은 여성에게 안성맞춤이라는 생각을 이데올로기적으로 정당화하는 내용이 다수 포함된다. 여성성에 관한 이 뿌리 깊고 대대로 내려오는 선입견에 어떤 측면에서라도 도전하는 여성은, 누구일지라도 조롱당하고, 멸시당하고, 굴욕을 겪고, 경제적이거나 법적인 위협을 받고, 구타당하거나 살해된다.

     

    바로 그렇기에 우리는 자본가 민주주의 아래서는, 심지어 가장 발전한 나라들에서조차, 그 어떤 사회개발 정책도, 그 어떤 남다른 경제번영도, 그 어떤 뛰어난 성평등 입법도 여성 억압을 완전히 제거하거나 여성을 해방할 수 없으며, 남성과의 전면적인 평등 또한 보장할 수 없다고 되풀이해서 말한다.

     

    마르크스, 엥겔스의 말을 빌리자면, 사회주의는 현 상태를 폐지하는 현실의 운동이다. 현 상태, 한 줌 소수가 터무니없이 큰 부를 챙겨가는 상태, 심지어 팬데믹을 겪는 동안에도 그런 일이 벌어지며 그 대가로 압도 다수가 점점 더 불안정한 노동으로 내몰리고, 노동력 재생산은 냉혹하게 여성의 무급노동에 내맡겨지는 그런 상태다.

     

    자본주의 시계에서 시간을 해방시키기

     

    경쟁을 향한 내적 충동으로부터 연료를 공급받는 자본주의는 상품을 생산하는 데 드는 사회적 필요노동 시간을 빠르게 감소시킨다. 더 적은 시간에 더 많은 상품을 만든다는 것은 더 저렴한 상품과 더 많은 소비를 뜻한다. 자본가들에게 이는 더 많은 이윤을 의미한다. 남성이든 여성이든 노동자 다수에게 이는 더욱더 거대한 강탈을 뜻한다. 이전에는 X개를 만들었고 지금은 같은 시간에 100개를 만드는데, 그걸 생산하는 사람은 똑같은 임금을 받는다.

     

    그들이 생산하는 만큼 임금을 받는 게 아니기 때문에 이런 일이 생긴다. 정확히 말하면, 그들의 노동력은 일정한 시간 동안 임대된다. 자본가들은 노동자계급 일부에 대한 초과 착취에 의존한다. 생산성 향상, 잔업, 한쪽에서 엄청난 다수 노동자가 실업이나 극도로 불안정한 일자리에 처해 있는 동안 다른 한쪽에서의 과도한 노동시간, 취업 노동자 임금삭감 등이 그 수단이다.

     

    과학과 기술이 발전하면서 상당히 높은 수준의 노동 생산성을 달성하는 게 가능해졌다. 이런 기술 덕분에, 사회의 존속을 위한 물질적 조건을 생산하고 재생산하는 데 필요한 노동시간을 대폭 줄이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 바로 그것이 우리가 사회주의자로서 제안하는 것이다. 모두가 예술, 과학, 스포츠, 다른 사람과 지구를 돌보는 일 등에서 자신의 인간적 능력을 발전시킬 수 있도록 필요노동을 최소한으로 줄이자는 것이다. 우리 모두 임금을 벌기 위해 지금 투여하는 것보다 훨씬 적은 시간을 들이면서 그렇게 일하게 될 것이다.

     

    물론 이런 변화는 자본가들의 이윤을 침해할 것이고, 그들은 그들의 특권을 제거하려는 어떠한 시도에도 저항할 것이다. 이는 그들의 법률, 법정, 경찰, 군대와 맞부딪치게 된다는 것을 뜻하고, 더 나아가 종교, 인종차별, 외국인 혐오, 여성혐오를 이용해 그들이 우리 계급에 덧씌운 분열과도 맞부딪친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 사회주의는 맹아의 형태로 자신을 드러내는, 착취의 굴레에서 자신을 해방하려는 노동자계급의 끊임없는 투쟁으로 자신을 드러내는 현실의 운동이다. 이 투쟁들은 유계결근으로 사장들에게서 시간 훔쳐내기부터 노동시간을 8시간으로 단축하기 위한 역사적인 투쟁에 이르기까지, 유급휴가와 노조결성권 쟁취에서부터 생산에 대한 노동자 통제의 수립에 이르기까지를 포괄한다. 그것은 반란을 일으킨 여성과 남성 노예들의 운동이다.

     

    혁명은 멈추면 패배한다

     

    자본주의를 뒤엎고 사회주의 사회의 토대를 놓는 것으로 충분히 여성 억압을 끝장낼 수 있을까? 그렇지는 않다. 그러나 그것은 필수적인 한 걸음이다.

     

    우리는 여성에 대한 차별을 유지하기 위해 재생산된 모든 성별 편견, 규칙, 고정관념이 자본주의에서의 사회적 재생산과 생산의 물질적 조건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고 앞서 지적했다. 권력을 장악하는 것보다 편견을 해소하는 것이 더 어렵다. 그런 편견은, 그것이 생겨날 수 있었던 물질적 조건이 심대하게 변화한 이후에도 끈질기게 남아 있을 거라고 보는 게 타당하다. 그러므로 스탈린주의자들과 그 밖의 사람들이 마르크스주의를 꼴사나운 경제주의적 희화로 왜곡하면서 주장했던 것과는 달리, 여성해방은 단지 권력의 심장부를 공격하고 생산수단을 사회화하는 것만으로 자동으로 얻어질 결과가 아니다.

     

    가내 노예제는 실제로 남성이 이미 쟁취한 권리를 여성이 평등하게행사하고 향유하지 못하게 막는다. 가사노동과 돌봄노동의 사회화는 이 가내 노예제의 폐지를 시작하기 위한 필수적인 기반이다. 공동주택과 식당, 세탁소, 학교, 유치원, 양로원, 재택 치료 등의 다양한 기관, 그리고 공원, 운동장, 클럽, 문화센터 같은 여가 공간을 만들어 가사노동과 돌봄노동을 가정 내의 사적 영역에서 끌어내 남성 여성 임금노동자가 수행하는 일자리로 전환해야 한다.

     

    무급 이중 노동에서 해방된 미래 세대들은 노동일을 최소한으로 줄이면서 점차 성차별적 편견을 해소해나갈 것이다. 사랑에 대해서도 무언의 희생, 보이지 않는 노동, 조건 없는 헌신에 결박되지 않은 것으로서 새로운 의미를 찾게 될 것이다.

     

    우리는 사회주의가 여성에게 즉각 낙원이 될 것이라고 약속하지 않는다. 그러나 분명한 진실이 있다. 기생충 같은 소수의 이익을 위해 인간 노동을 착취하는 일, 이 거대한 노동력을 재생산하기 위해 날마다 보이지 않는 무급노동에 여성을 종속시키는 일이 더 이상 일어나지 않는 그런 사회를 향한 투쟁은 우리의 삶을 더 살 만한 것으로 만드는 유일한 투쟁이라는 점이다! ‘현 상태의 일부가 될 것인가, 아니면 그 현 상태를 폐지하는 현실의 운동의 일부가 될 것인가? 선택하라.

     

    글쓴이 안드레아 다트리, 202238

    옮긴이 오연홍

    *로 표시한 각주는 옮긴이가 붙인 것이다.

    기사 원문

    https://www.leftvoice.org/why-should-women-fight-for-socialism/

    연재 소개

    페미니즘이라고 하면 남성 혐오갈라치기부터 떠올리는 사람들이 많다. 자유주의 페미니즘 또는 래디컬 페미니즘이 여전히 주류인 것도 맞다. 하지만 페미니즘에는 다른 길이 있다. 착취, 가난, 전쟁, 기후 위기로 점철된 자본주의라는 체제 안에서 남성과 더 잘 경쟁하기 위한 페미니즘이 아니라 자본주의 자체를 깨뜨려야 한다고 주장하는 페미니즘, 이를 위해 또 다른 누군가를 배제하는 게 아니라 모든 성별, 국적, 인종의 노동자와 청년이 똘똘 뭉쳐 함께 싸워야 한다고 외치는 페미니즘이 있다. 2003년에 아르헨티나에서 만들어지기 시작했고 지금은 독일, 볼리비아, 브라질, 칠레, 코스타리카, 스페인, 미국, 프랑스, 이탈리아, 멕시코, 페루, 우루과이, 베네수엘라에서도 활동하는 국제 빵과 장미네트워크가 그것이다. 한국에서 노동자계급에 기반한 변혁적 여성운동을 건설하려는 우리는 혁명적 페미니즘의 중요한 사례로 빵과 장미를 주목하면서, 이들의 주장과 실천을 소개하고자 한다.

     

    사회주의 페미니즘이란 이런 것이다(타티아나 코차렐리)

    왜 여성이 사회주의를 위해 투쟁해야 하는가?(안드레아 다트리)

    여성 노동자들이 ‘훌륭한 여성 CEO에 맞서 싸운 이유(타티아나 코차렐리)

    우리는 임신 중지권을 이렇게 쟁취했다(너새니엘 플라킨)

    혁명은 여성의 삶을 어떻게 바꾸는가?(안드레아 다트리)

    사회적 재생산과 사회주의 페미니즘(호세피나 마르티네스)

    페데리치의 주장에 대한 비판적 토론(호세피나 마르티네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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