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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위원회 기획연재 - 노동자의 삶과 철학 2] 우리는 어떻게 자유롭고 발전된 개인이 될 수 있는가?

기사입력 2022.12.20 10:42 | 조회 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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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알게 모르게 개인주의가 만연한 세상에서 산다. 정상에 오른 스티브 잡스와 같은 인물에게 찬사를 보내며 닮고 싶어 한다. 개인별 역량에 따라 받는 돈이 천차만별인 프로스포츠 제도도 개인주의 철학을 모델로 삼는다. 이러한 개인주의는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에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 대개의 경우 개인주의와 이기주의를 등치시키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원래 등장했던 개인주의는 이기주의와는 결이 다른 입장이었다. 


    개인주의 철학의 등장과 변천


    개인주의는 한때 공동체주의와 양립 가능한 사상이었고 자유와 평등을 향한 지향을 상징했다. 부르주아 시민혁명의 등장은 개인의 권리와 가치를 전면에 부상시켰다. 지배-피지배계급으로 나뉜 사회 체제를 지탱하기 위한 도구로서의 개인이 아니라, 그 자체로 목적으로 취급받아야 하는 존재로 개인의 가치를 전면에 부각시켰다. 루소의 ‘사회계약론’은 그 단적인 표현이었다. 사회는 자유로운 개인들의 합리적 계약의 산물이고, 만일 이 사회가 개인들이 자유로운 합의를 통해 만들어낸 사회계약을 위배한다면 그 사회를 거부하고 해체할 권리가 시민들에게 주어진다는 견해는 당시로서는 가히 혁명적인 것이었다. 그래서 이 사회계약론은 부르주아 시민혁명의 팸플릿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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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회계약론, 부르주아 혁명의 팸플릿

     

    부르주아 시민혁명의 역사적 진보성을 굳이 거론하지 않더라도, 개인의 가치를 부각시키면서 사회를 이러한 개인들의 집단적 합의 결과로 접근하는 발상, 그리고 이 발상에 담겨 있는 개인과 사회 사이의 관계에 대한 새로운 접근법은 충분한 역사적 의미를 갖는다. 이런 접근법은 개인의 가치만이 아니라 사회에 대한 정의에서 신기원을 이루었다. 


    이러한 초기 개인주의는 마치 아담스미스의 노동가치설처럼, 역사적 진보성을 띠었다. 개인의 권리와 가치를 부각시켰다는 측면에서만이 아니라 이러한 개인들이 구성하는 사회에 대해 새롭게 정의하면서, 개인과 사회 사이의 관계를 재설정할 수 있는 새로운 방향에 대해 근본적 질문을 던졌기 때문이다. 어떻게 하면 개인의 자유권과 권리, 행복추구권을 침해하지 않으면서도 사회가 존재할 수 있는지, 거꾸로 어떻게 하면 사회가 이러한 개인의 가치를 실현시키는 진정한 도구로 자리매김될 수 있는지에 대한 고민이 담겨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이것은 사회라는 장막 뒤에 가려져 있던, 억압당하고 착취당하고 있던 다수 개인의 고유성과 가치에 대한 본질적 성찰과 의미 설정을 가능케 했다는 점에서 인류의 진보를 반영했다. 그리고 이것이 가능했던 것은 부르주아 시민혁명 시기에 개인주의 철학이 반(反)사회적 성격을 띠었던 것이 아니라 철저하게 사회에 대한 고민을 반영했다는 점, 그것도 사회의 퇴보가 아니라 진보를 반영했다는 점 때문이다. 


    하지만 개인주의 철학은 부르주아 시민혁명이 특정한 역사적 국면에서 반영했던 진보성과 함께, 그 한계성 또한 고스란히 반영했다. 그 한계성은 이 철학이 대변했던 개인들이 바로 자본가들 즉 착취자들이었다는 사실에서 비롯되었다. 이들의 계급적 이해관계와 이들이 발 딛고 있는 삶의 토대는 불가피하게 개인과 사회 사이의 관계에서 긴장과 모순, 대립을 잉태했다. 소수 자본가들의 자유권과 권리 보호는 다수 노동자 민중의 무권리와 억압을 초래했다. 그 결과 부르주아 개인의 이해와 사회 전체의 이해, 특히 다수 노동자 민중의 이해 사이에는 격렬한 충돌과 대립이 야기될 수밖에 없었다. 


    자본주의가 본격화하고, 이러한 모순이 전면화하면서 부르주아들의 개인주의 철학은 질적으로 변화하기 시작했다. 그들의 개인주의 철학은 지금은 사회와의 진정한 연결성을 상실하고 이기주의와 밀접한 관련을 갖게 되거나 이기주의로 변질하게 되었다. 자본가들의 이기적 행위가 사회 전체가 경제적으로 발전하는 원동력이 된다는 ‘보이지 않는 손’과 같은 자유주의 이론이 존재하기는 했지만, 자본주의 체제의 반동화가 심화됨에 따라 그러한 외피조차 약화되면서 부르주아 개인주의 철학은 반사회적 이기주의 철학으로 이행했다.


    자본주의 사회가 진보적일 때 등장했던 개인주의 철학이 반동적인 야만주의 철학으로 퇴보해가는 것은 자본주의 사회의 쇠퇴를 이데올로기 차원에서 상징한다. 이러한 야만주의적 퇴보는 자본주의의 미성숙 때문이 아니라 자본주의가 완전히 성숙한 결과물이다. 초기 진보적 시기에 자본주의는 개인의 권리를 신장시켰다. 가혹한 착취가 작동하기는 했지만, 더 나은 경제적 삶을 제공했고 민주주의적 권리도 확대되었다. 하지만 쇠퇴하는 자본주의 체제는 실업의 공포, 미래에 대한 불안감, 부모 세대보다 더 열악한 자식 세대, 불평등의 확대를 선물하고 있다. 이러한 체제에서 다수 개인의 권리와 자유는 무참히 파괴되고 있다. 생존에 대한 공포감에 떨고 있는 사람들에게 어떤 권리를 말할 수 있을 것인가?


    이런 상황은 정치적 영역에도 영향을 미친다. 자본주의가 성숙한 결과, 모순이 폭발하면서 위기에 봉착하자 자본주의는 스스로 천명했던 개인주의에 대해서조차 적대적인 체제로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그들에게 중요한 건 전체 사회구성원들의 권리와 자유권이 아니라 오직 극소수 자본가들과 지배자들의 권리뿐이기 때문이다. 가령 나치즘과 파시즘은 모든 개인 권리를 파괴하면서, 자본주의 체제를 보호하는 전체주의적 억압 체제로 모습을 드러낸 바가 있다. 제국주의 패권전쟁도 마찬가지다. 이 패권전쟁에서 지켜지는 개인의 권리는 도대체 어디에 있는가? 어디에도 없다. 잔인한 대량 학살, 전시 통제 등을 두고 어떻게 개인의 권리와 자유권을 말할 수 있단 말인가? 


    개인주의 철학의 탄생이 진정 개인의 권리와 자유권을 사회가 보호해야 한다는 문제의식에서 비롯되었고, 바로 그런 의미에서의 개인주의 철학의 진보성을 말할 수 있다면 그것의 계승자는 자본주의가 아니라 바로 사회주의다. 사회주의는 진보적 시기에 자본주의 이데올로그들이 만들어냈던 개인주의 철학을 사회와의 진정한 관계 속에서 보완하고 발전시켜 공동체주의와 결합시켜내고자 한다. 


    개인과 사회


    현실에서 개인과 사회 사이에는 밀접한 상호 관련성이 존재한다. 이 점은 사회적 존재로서 인간이 탄생한 이래 자명한 사실이었다. 아테네인은 시민의 의무를 다하지 않는 사람과 사리사욕을 앞세우는 사람을 이디오테스(idiotes)라 불렀는데, 이는 바보(idiot)라는 말의 어원이 되었다. 이기주의적 세계관을 주장하는 사람은 당시 그리스에서나 지금에서나 바보가 맞다. 개인과 사회를 분리해 서로 대립시키는 이기주의 사상을 깨뜨리지 못하면 빈곤, 실업, 불평등, 차별, 기후위기 등 오늘날 개인과 사회 모두를 덮치고 있는 시급한 쟁점과 제대로 맞설 수 없기 때문이다.


    개인의 성공과 실패, 개인이 이룩한 성취와 실패 모두는 그 개인이 의식하든 의식하지 않든 그것과 관련을 맺고 있는 수많은 사회적 관계망, 즉 사회에 크게 의존한다. 개인이 이룩한 성공을 과대평가하면서 엄청난 보상을 정당화하는 입장은 그 성공이 사회, 즉 타인들에 크게 힘입은 것임을 외면하는 셈이다. 스티브잡스의 성공은 인류가 수천 년 동안 공동으로 축적해온 과학적 성취들, 휴대폰의 생산망을 따라 협력하는 수십만 노동자들의 세계적 생산망, 도로·전기 등 사회적 기반시설과 같은 사회적 요소들을 빼놓고는 전혀 성립하지 않는 것이다. 


    물론 그것이 어떤 개인이 성취한 것과 사회 전체에 기여한 것의 가치를 무시하는 건 아니다. 사회적 발전은 그 속에서 살아가는 수많은 개인들의 기여가 없다면 불가능할 것이다. 요점은 개인과 사회는 긴밀한 상호작용 속에 놓여 있다는 사실이다. 모히칸족과 같은 아메리카 인디언들에게는 “나”(개인)가 없었고, “우리”만이 있었다. 이것은 옳지 않다. “나”와 “우리” 모두가 존재해야 한다. 그리고 이 둘은 충돌하고 배격하는 것이 아니라 “조화”로워야 한다. “우리”(사회)는 “나”(개인)를 존중하고, “나”는 “우리”를 존중함으로써 함께 번영해야 한다. 마르크스가 말했듯이 “각 개인의 자유로운 발전이 전체 사회의 발전을 위한 조건이 되며, 사회의 발전이 각 개인의 자유로운 발전의 조건이 되는 사회”, 바로 그것이 노동자가 해방되는 사회주의 사회의 궁극적 목표다.


    이러한 궁극적 목표는 부르주아 개인주의가 그 계급적 한계 때문에 야만적 이기주의로 전락시켰던 개인주의의 참된 요소들을 사회와의 연관 속에서 건강하게 회복시킨다. 그리하여 사회와의 조화로운 관계 속에서 개인의 가치를 재조명한다.  

     

    노동자가 주인이 되는 세상은 개인주의를 배격하는가?


    노동자가 세우려고 하는 공동체 사회는 개인의 선택과 개성, 자유를 배격하고, 사람들을 전체주의 논리에 따라 똑같이 만들어버릴 것이라고 자본가들은 주장한다. 그러나 이것은 누워서 침 뱉기다. 사람들 각각의 개성을 말살하고 자유를 억압하는 체제가 바로 자본주의 체제다. 사장들은 마음껏 쓰고 마음껏 착취할 자유를 누린다. 그러나 노동자들은 임금노예제도에 갇혀서 자유를 잃고 살아가야 한다. 고된 강제노동의 굴레에 갇혀 지내는 것이다. 생산이 오직 자본가들의 이윤을 높이는 것에 맞춰 이뤄지므로 엄청난 수의 노동자들의 개성과 창조성은 매장되고, 관리자들의 작업지시와 획일화되고 단조로운 노동이 득세한다. 학교 교육도 이런 자본주의 생리에 맞춰 획일적 통제 교육으로 채워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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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반면 노동자의 공동체 사회는 개인의 가치와 자유를 존중한다. 오히려 이것을 훼손하지 않아야만 공동의 사회적 협력이 진정 발휘될 수 있다. 사회주의가 반대하는 것은 노동자 민중을 희생시키면서 자행되는 자본가들의 이기주의일 뿐, 개인의 개성과 자유가 결코 아니다.  


    개인의 가치를 진정 실현시키는 사회주의 사회


    오히려 노동자 혁명은 압도적 다수 개인의 자유와 개성을 진정 실현하게 만든다. 노동자들이 직장의 주인이 됨으로써 노동자는 스스로 작업 환경을 배치하고 창조적 노동에 종사할 수 있게 된다. 이것은 개인의 개성을 신장시킬 것이다. 여기서 특히 중요한 것이 ‘실행과 구상’의 통합이다. 자본주의에서는 ‘실행’ 기능은 노동자들에게 부여되는 반면, 전반적인 생산계획과 운영계획, 작업배치 등 ‘구상’ 기능은 관리자들과 경영진이 독점한다. 이것은 노동자 소외의 원천이 되고, 노동은 자유롭지 않고 구속된 강제노동으로 전락한다. 노동자 조직들에 대한 전 사회적인 차원의 계획화 및 작업장에서의 노동자 자주관리가 실현되는 사회주의는 구상과 실행의 기능을 통합함으로써 이러한 소외를 극복하고, 노동자들에게 참된 자유와 개성을 부여한다. 직장의 주인이 됨으로써 노동자는 스스로 작업 환경을 배치하고 창조적 노동에 종사할 수 있게 된다.


    인간이 자유로움을 느끼고 개성을 발휘하는 것은 정신적 활동과 육체적 활동의 결합을 필수조건으로 요구한다. 하지만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육체노동과 정신노동이 분리되어 있다. 매일 똑같은 일을 기계적으로 반복할 경우 노동에 대해 활력도 즐거움도 느끼지 못하게 되며, 정신적으로 황폐해지게 된다. 육체 또한 특정 부분을 지나치게 사용함으로써 그 부분이 손상되며, 다른 부분은 반대로 너무 사용하지 않아 퇴화한다. 노동자가 주인이 되는 사회에서는 육체노동과 정신노동을 적절하게 결합해 육체와 정신을 고르게 발달시킴으로써 조화로운 인간을 형성할 것이다. 


    다음으로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도시와 농촌의 대립이 심각하다. 도시인들은 자연으로부터 멀어짐으로써 정서적으로 메마르게 된다. 농촌 사람들은 정치, 문화생활로부터 멀어짐으로써 낙후된 상태에 머물게 된다. 노동해방 사회에서는 농업과 공업을 적절히 조화시킬 것이며, 이 과정은 노동자들을 육체적, 정신적, 정서적인 모든 측면에서 고르게 발전시키는 핵심 과정 중 하나가 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자유로운 삶, 개성의 전면적인 발전에는 노동시간 단축이라는 물질적 조건이 필요하다. 사회주의 사회에서 노동자들은 짧은 노동을 마친 후에는 문화예술을 폭넓게 향유하고, 다양한 정치 사회 활동에 참여하게 될 것이다. 이때가 되면 비로소 자본주의가 개인의 천부적 소질과 재능들을 얼마나 많이 억압, 왜곡, 변형시켜왔는지가 확연히 드러날 것이다. “오전에는 공장이나 농장에서 일한다. 오후에는 월요일에는 자주관리위원회 회의에 참여하고, 화요일에는 산업계획위원회 회의에 참여한다. 수요일 오후에는 대학에 가서 과학과 공학을 기술과 접목해 신기술을 개발하는 회의에 참석한다. 목요일 오후에는 중학교, 고등학교를 방문해 일일 교사로 활동한다. 금요일, 토요일, 일요일 등 휴일에는 문화예술 모임에서 시를 발표하고 인터넷을 통해 전 세계의 친구들과 화상 대화를 하며 다양한 취미 활동, 스포츠 활동에 참여하게 될 것이다.” 


    전업적인 공장 노동자도, 꽃가게 점원도, 사회단체 활동가도, 시인도, 교사도, 과학자도, 정치인도 아니면서 그 모든 일을 함께하는 새로운 유형의 인간이 탄생할 것이다. 이때 노동과 예술, 체육과 놀이, 과학과 기술, 구상과 실행 등이 자연스럽게 결합할 것이며, 모든 사람은 유기적으로 발전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노동은 삶의 참다운 행복이 되며, 진정으로 자유로운 삶 속에서 개인의 자유와 개성이 비로소 실현될 것이다. 나아가서 모두가 일자리를 갖고 불평등이 제거됨으로써 결혼과 연애는 “재산이나 사회적 지위”를 따지지 않는 “오직 애정에만 기초한, 개인들의 자유로운 선택”이 된다. 이러한 세상은 더 이상 막연한 유토피아가 아니다. 지난 2~3백 년 동안 자본주의 아래에서 노동자들이 이룩해낸 놀라운 생산력 발전은 풍요로운 공동체 세상을 가능하게 해주는 든든한 객관적 토대다. 사회적 생산력 발전을 통한 노동시간 단축이 그 핵심에 놓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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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동시간을 줄여야 자기실현적 노동이 가능하다

     

     

    자유로운 개인의 조건 - 사회화된 인류


    어떤 개인도 사회의 도움 없이는, 사회적 연관 없이는 한 발짝도 전진할 수 없고, 진정한 자유로움에 도달할 수도 없다. 자본가들만 하더라도, 그들 스스로는 이해할 수 없는 자본주의 경제법칙과 경쟁법칙의 노예가 된다. 사회의 운동법칙을 정확히 이해하고, 그것을 통해 만인의 공동체적 발전을 꾀하면서 그 일부인 자기 자신(개인)의 발전을 꾀하는 존재만이 비로소 자유로운 개인이 될 수 있다. 


    “사회의 발전이 각 개인의 자유로운 발전의 조건이 되는 사회”, 이것이 개인주의의 숭고한 목표를 실현할 수 있는 필수적 조건이다. 하지만 그 목표는 “각 개인의 자유로운 발전이 전체 사회의 발전을 위한 조건이 되는 것” 즉 사회와 손을 맞잡고 사회를 전진시키는 혁명적 실천 속에서만 온전하게 실현될 수 있다. 우리는 그걸 “자유로운 인간들의 의식적 공동체” 즉 노동자가 주인이 되고 해방된 세상이라고 부른다. 


    “포이어바흐는 ‘종교적 심성’ 그 자체가 하나의 사회적 산물이라는 것을, 그리고 그가 분석한 추상적 개인이 사실은 일정한 사회형태에 속해 있다는 것을 보지 못했다. 직관적 유물론, 즉 감성을 실천적 활동으로서 파악하지 않는 유물론이 얻을 수 있는 최고의 것은 시민사회 내에서의 개별적 인간에 대한 직관이다. 구태의연한 유물론의 입지점은 시민사회이며, 새로운 유물론의 입지점은 인간적 사회 또는 사회화된 인류이다.”<마르크스, 포이어바흐에 관한 테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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