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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위원회 기획연재 - 노동자의 삶과 철학1] 우리는 이기주의를 벗어날 수 없는 것일까?

공동체적 인간은 어떻게 형성되는가?

기사입력 2022.12.13 13:59 | 조회 6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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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회주의를 적대시하는 사람들이 흔히 써먹는 얘기가 있다. “인간 본성과 안 맞는 사회주의는 망할 수밖에 없거나 전체주의적인 억압체제가 될 수밖에 없어! 결국 이기적 경쟁체제인 자본주의가 정답이야!”

     

    썩 그럴 듯한 말이다. 사회주의란 혼자만 잘살겠다는 것이 아니라 모두 함께 잘살려 하는 것이고, 그래야 개인도 행복해질 수 있다는 공동체적 철학에 바탕을 둔 체제다. 그런데 만약 인간 본성이 개인의 이익에만 집착하고 타인과의 협력과 공존을 거부한다면, 자본주의와 다른 사회는 불가능할 것이다. 

     

    이러한 생각들은 흉악 범죄나 야만적 사건들을 듣고 보면서 확고한 생각으로 자리잡히곤 한다. 게다가 자신과 주변을 돌아봐도 이기주의적 생각은 흔히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을 종교가 파고들어 확대한다. 가령 기독교는 원죄설을 통해 그런 생각을 퍼뜨린다. 또한 여러 종교는 신과 달리, 인간은 날 때부터 이기주의적이거나 악한 본성을 가지고 태어났다고 설교한다. 이러한 악한 본성은 인간 스스로의 노력을 통해서는 극복할 수 없고, 오직 종교에 귀의해 신의 용서를 구해야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이다. 

     

    과연 인간 본성은 이기적인가? 또 이기적 태도는 결코 변할 수 없는 것인가?


    딱 정해진 인간 본성은 과연 존재하는가?


    인간 본성을 둘러싼 대표적인 입장에는 성선설, 성악설, 성무선악설이 있다. 성선설과 성악설은 인간의 본성이 태어날 때부터 정해져 있다는 입장이다. 반면 성무선악설은 사람의 본성은 선천적으로 착하거나 나쁘지 않으며, 오직 환경에 의하여 그 성격이 결정된다고 보는 입장이다. 

     

    성선설은 성악설과 마찬가지로 대중의 실제 경험을 반영한다. 자신의 목숨이 위태로운 재난 상황에서 우리는 자기 목숨을 희생해서 타인들을 구하는 훌륭한 미담을 목격한다. 또한 맹자의 ‘측은지심’처럼 우리는 불행한 처지에 놓인 사람들을 보면 연민을 느끼고 돕고자 하는 마음을 느낀다. 

     

    성무선악설도 마찬가지로 실제 경험에 의해 뒷받침된다. 일란성 쌍둥이이지만, 나고 자라는 환경에 따라 사람들의 모습은 천차만별하게 바뀌기도 한다. 

     

    어떤 입장이 올바른지 보여주는 사례는 널려 있다. 원시공동체에서 살아왔던 아메리카 인디언들에게는 개인이 토지를 소유한다는 것은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들에게는 “나 혹은 나의 것”이라는 단어가 없었고, “우리 혹은 우리의 것”이란 단어만 존재했다. 토지나 재산 등을 대부분 공동으로 소유 운영했던 과거의 사회환경이 이들의 본성을 그렇게 만들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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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디언 땅 팝니다." 1887년 도스법(Dawes Act)으로, 원주민 공유지는 개별 사유지로 할당된다. 토지사유제를 받아들인 원주민만 '시민'이 될 수 있었다.

     


    하지만 인디언들의 후예들이 지금 지니고 있는 사고방식은 어떤 것일까? 이들은 ‘나의 것’이란 확고한 관념을 갖고 있을 것이다. 이들이 편입된 자본주의 사회체제가 이들의 본성을 변화시킨 것이다. 결국 사회 환경이 인간의 본성을 좌우하는 것이다. 거꾸로 사회가 바뀌면 인간 본성도 바뀌는 것이다.

     

    심지어는 사회적 환경으로부터 격리되어 길러지는 존재는 인간의 기본적인 속성마저 갖지 못하고 동물적 상태로 굴러 떨어진다. 인간 사회로부터 분리돼 늑대 무리 속에서 길러진 늑대소년의 사례는 그 점을 극명히 보여준다. 늑대소년은 인간 사회로 복귀한 이후에도 언어능력과 사회성을 배우지 못했고 윤리성을 갖지 못한 채 늑대 무리를 그리워하다가 죽고 말았다. 인간이 인간으로 성장하는 것도 결국 사회적 환경 속에서임을 알 수 있다. 


    인간 본성론에 대한 역사적 고찰


    공자, 노자, 맹자, 순자, 루소, 흄, 칸트 등 동서양을 막론하고 위대한 철학자들이 인간 본성에 대해 깊이 탐구했던 것에는 중요한 의미가 숨어 있다. 상반된 입장들에도 불구하고 이들 모두가 공히 주목했던 목적이 있었다. 선한 인간 본성을 살려내는 방식이든, 악한 인간 본성을 훈육이나 법률적 강제력을 통해 제압하고 통제하는 방식이든, 순수한 백지 상태의 인간 본성을 전제하는 방식이든, 그들 모두가 인간 본성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했던 진정한 이유는 교육이나 법 등의 “사회적 영향력”을 통해서 인간의 특성을 바람직한 방향으로 변화 발전시키기 위해서였다. 


    결국 이들 모두는 인간의 특성이 사회에 의해 영향 받는다는 점을 정확히 인식하고 있었으며, 또한 결과적으로 볼 때 인간의 특성을 변화시키는 것이 가능하다는 점도 받아들였다. 그래서 이들 모두가 가장 고민했던 것은 어떠한 사회적 영향력을 통해 인간을 윤리적·사회적 존재로 고양시킬 것인가였다. 마르크스주의는 위대한 철학자들의 이러한 고민과 문제의식을 더욱 높은 수준으로 발전시켰다. 


    인간이라는 존재는 사회의 등장과 함께 형성되었고 사회의 변화 속에서 마찬가지로 변화해왔다. 그러므로 변하지 않는 본질적 성격이라는, 말 그대로의 의미에서 “본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사회는 끊임없이 변화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변하지 않는 사실이 있다.  인간은 “사회적 존재”라는 본질적 성격을 갖는다는 사실이다. 만일 인류가 등장한 이래 변하지 않는 인간 본성이 있다면, 그것은 “사회적 존재로서의 인간 본성”일 것이다. 마르크스주의는 이러한 점들을 종합해서, 인간을 “사회적 제 관계의 총체”라는 개념으로 정식화하고 있다; “인간적 본질은 어떤 개개인에 내재하는 추상이 아니다. 그것은 현실적으로 사회적 관계들의 총체이다.” <마르크스, 포이어바흐에 관한 테제>


    자본주의 사회가 만들어내는 인간형


    주어진 사회에서 보편적으로 존재하는 인간의 특성을 알고자 한다면, 우리는 모든 개인들을 둘러싸고 있는 공통의 사회적 환경에 주목해야 한다. 이 사회적 환경에서 핵심은 “어떻게 생산하고, 생산수단을 어떻게 소유하며, 생산물을 어떻게 분배하고 있는지”를 둘러싼 생산양식이다. 인간의 일차적 생존조건은 물질적 생산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생산양식이라는 토대 위에서 정치, 문화, 윤리 등의 상부구조가 자라나오고, 그 속에서 인간의 특성이 결정된다. 


    가령 서양의 성경에서 가장 비난하고 있는 인간형은 ‘고리대금업자’다. 이들은 타인의 고통을 이용해 개인적 부를 축적하는 사람들로 가장 배격하고 비난해야 할 사회악으로 묘사된다. 그런데 이 ‘고리대금업자’는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훌륭한 기업가로 칭송받는다. 돈을 대출해주고 높은 이자를 수취하며, 심지어는 이자를 갚지 못한다는 이유로 집까지 몰수해버리는 ‘은행’은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기업의 꽃이다. 노동자를 최대한 자르고, 비정규직을 확대하며, 노동강도를 높여 자본가 이윤을 극대화시키는 것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효율성의 모범’이며 ‘기업가 윤리의 실현’으로 인정된다. 타 기업이나 타인을 짓밟고 경쟁에서 승리하는 것은 인간 승리의 모범으로 인정된다.


    착취를 정당화하고 무한경쟁의 원리 하에서 작동하는 자본주의 체제가 이런 의식들을 매일 대량으로 만들어내고 있다. 방송이나 신문, 학교 등은 이런 자본주의 의식을 대량으로 보급하며 재생산해낸다. 그래서 사람들은 “옛날과 달리 피도 눈물도 없는 세상이 되고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타인을 착취하고 짓밟아서라도 개인의 이익을 극대화해야 한다는 “이기적 본성”이란 사실 착취와 경쟁에 의해 작동하는 자본주의 체제가 대량으로 만들어낸 것이다. 또한 이 “이기적 본성”은 자본주의 체제를 지배하는 “자본가계급의 의식과 가치관” 즉 자본주의 생산양식의 특성을 반영하는 것이다.


    이로부터 왜 오늘날 사람들의 대다수가 인간 본성이 이기주의라는 생각에 동조하게 되는지도 설명할 수 있게 된다. 재난 상황에서 목격하게 되는 이타주의적 희생은 물론 오늘날 자본주의 사회에서도 경험할 수 있다. 그럼에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인간 본성이 이기주의적이라고 생각하는 이유는 그런 이타주의적 행위는 상당히 드물게 경험하는 반면, 이기주의적 행위는 늘 경험하는 현상이기 때문이다. 다름 아니라 자본주의적 조건이 그걸 강제한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 피도 눈물도 없이 노동자들을 착취하는 자본가들의 모습은 늘 경험하는 것이다. 뿐만 아니다. 자신과 주변 사람들의 경우에도 일상적인 모습은 이기주의적으로 보인다. 생존을 위해 타인들과 경쟁하는 처지에 놓여 있고, 불가피하게 타인들의 삶보다는 자신의 삶에 일차적으로 집착하는 게 현실로 보이기 때문이다. 


    새로운 인간형의 등장과 사회의 변화


    사회가 근본적으로 바뀐다면, 인간형도 근본적으로 바뀔 수밖에 없다. 노동자운동이 만들어낼 새로운 인간형은 단결해 투쟁하는 노동자계급의 본성을 따를 수밖에 없다.


    노동자가 주인이 되는 사회는 온갖 착취를 배격하는 체제다. 어떤 이유로도 정당한 자기 노동을 통하지 않고 획득하는 불로소득은 인정하지 않는다. 인간 특성은 “타인에 대한 착취를 통한 개인의 이익 창출을 절대 인정하지 않고, 오직 스스로의 정당한 노동을 통한 수익만을 인정”하는 새로운 유형으로 바뀔 것이다.


    이러한 새로운 사회는 무한대의 경쟁 대신 사회구성원들의 협동을 통해 상호 이익의 극대화 원리를 따라 작동한다. 이에 따라 “경쟁을 통해 타인을 짓밟는 이기주의”는 거부되고, “서로 협동하면서 공동의 이익을 추구하는 공동체적 인간”이 개화할 것이다.


    인간의 특성이 이처럼 사회체제의 성격에 따라 변화하는 것이라면, 진정 골치 아픈 것은 “사회체제의 변화는 새로운 사회체제에 조응하는 새로운 인간형이 등장하지 않는다면 불가능하다는 점”과 관련되어 있다.


    그런데 사회체제의 변화가 준비됨과 나란히 이러한 변화를 낳을 수 있는 새로운 인간형이 등장함으로써 문제는 해결된다. 이 새로운 인간형은 기존 체제에 반발하고 새로운 체제 건설을 희망하는 “혁명 계급”에 의해 창조된다. 자본주의 사회를 낳았던 사람들은 자본가계급이었다. 이들은 자본주의 혁명 이전에 이미 ‘기업가 윤리’ 즉 ‘이기주의’로 무장하고 있었다. 자본주의 혁명을 통해 이들은 자신들의 탐욕스런 이기적 속성을 전 사회적 차원에서 보편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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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르주아계급은 자신의 고유한 모습에 따라 하나의 세계를 창조했다" - 공산당 선언

     

    반면 새로운 체제를 창조해낼 혁명 계급은 바로 노동자계급이다. 그런데 노동자계급은 이미 자본주의 사회 내에서 ‘이기주의’를 뛰어넘어 ‘공동체적 의식’을 만들어나가고 있다. 자본주의 사회 내에서 계속 확대되는 사회적·집단적 생산과정, 그리고 이 생산과정과 밀접히 연결된 노동자들이 공통적으로 놓인 사회적 조건이 공동체적 집단주의를 노동자계급 속에서 끊임없이 확대하기 때문이다. 또한 이러한 집단주의 속에서만 노동자들은 자본가계급에 맞서 자신의 공동이익을 수호할 수 있게 된다. 


    노동자 투쟁을 들여다본다면 상황은 아주 분명해진다. 이기주의로 철두철미하게 무장한 자본가들은 대량해고, 살인적인 노동강도, 무한대의 경쟁, 비정규직 제도를 들이민다. 반면 이에 맞서는 노동자들은 “노동하지 않는 자들의 불로소득을 인정할 수 없다. 또한 생산은 노동자들이 협동하여 수행하는 것이므로 그 성과는 노동자들 전체에게 돌아와야 한다. 한 두 명의 이익을 위해서 수백, 수천, 수만 명이 희생당할 수는 없다. 모두가 함께 사는 길을 찾아야 한다.”고 외친다. 실제 투쟁의 과정에서 노동자들은 “형제, 누이보다 더 끈끈한 공동체적 의식”으로 무장한다.


    물론 이러한 변화 과정이 손쉽게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진실을 말하자면, 노동자들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태어나고 자랐으며 살고 있다. 따라서 알지 못하는 사이에 자본주의 사회가 심어준 이기주의가 노동자들 속에도 스며들어 있다. 이 이기주의는 노동자 조직과 노동자 투쟁을 부식시키면서 패배와 분열로 이끄는 요인이 된다. 그 결과 노동조합과 같은 노동자 조직들이 관료화되고 약화되거나 노동자 투쟁이 거듭되는 패배를 겪게 되면, 많은 투쟁하는 노동자들도 “인간은 원래 이기주의적이야. 그래서 이렇게 패배하는 거야. 그러니 사회주의는 이상적이기는 하지만 실현불가능해!”라는 좌절감에 빠져들기도 한다. 


    하지만 자본가의 이기주의와 노동자의 이기주의는 발생의 토대가 다르다. 모든 인간은 자신과 가족의 생존을 도모해야 한다. 그런데 이런 ‘생존욕’을 자본주의는 이기주의로 둔갑시킨다. 자본주의 경쟁제도가 그걸 강제한다. 노동자들만이 아니라 대부분의 인간은 타인과 경쟁하면서 생존하는 삶을 두려워하고 가장 큰 스트레스를 받는다. 하지만 자본주의는 경쟁을 구조화한다. 비좁은 일자리를 둘러싼 취업 경쟁을 강요하고, 회사 내에서도 동료들과 경쟁하도록 부추긴다. 사회적 본성을 갖고 있는 인간은 이러한 상황이 고통스럽다. 그럼에도 순응해야 한다. 이 사회의 실권을 쥐고 있는 자본가들이 그런 경쟁 제도를 강요하기 때문이다. 그래야 노동자들을 분열시키고 마음대로 통제할 뿐만 아니라 효율적으로 착취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노동자들은 생존을 위해서 주변 노동자들과 경쟁하도록 강요당한다. 마치 과거 노예제 사회에서 검투사들이 생존을 위해 동료 노예 검투사들을 죽여야 하듯이 말이다. 이런 검투사들에게 이기주의적 인간이라고 비난한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이들은 이기주의적 속성을 반영하는 게 아니라 본능적 생존욕을 반영할 뿐이다. 

     

    노동자들 또한 마찬가지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경쟁에서 살아남아야 한다는 생존의 절박함, 바로 그것이 이기주의를 노동자들에게 강요한다. 노동자운동이 집단적 단결을 통한 사회적 해법을 제기하지 못하는 상황에서는 자본주의 경쟁체제가 강요하는 생존 압력은 더욱 강하게 작동한다. 원자화된 노동자 민중은 격렬한 경쟁체제에 빨려 들어가 나라도 살아야 한다는 생존에 몰두할 수밖에 없다. 특히 실업문제가 심각한 상황에서, 젊은 층의 경우 생존을 위한 경쟁체제에서 일단 살아남고 이기고 봐야 한다는 절박함이 더욱 강하다. 이것은 사회적 약자에 대한 혐오 분위기로 확대되기도 한다. 경쟁에서 승자가 되는 게 유일한 해법이라면, 승자를 찬미하고 약자들을 패배자로 매도하면서 배척하는 분위기가 확대되는 게 자연스럽기 때문이다. 


    이렇게 강요된 이기주의는 노동자들의 생존 조건이 바뀌면 자연스레 극복되기 시작한다. 가령 경쟁체제가 아니라 협동체제로 생산이 운영되고, 작업장이 노동자들의 공동 소유라면 어떻게 될까? 이 경우 개별 노동자의 생존조건은 바로 협동의 원활함과 효율성이다. 생존을 위해서라도 노동자들은 전체 노동자들과 협력할 수밖에 없다. 실제로 현장의 집단적 노동과정에서 노동자들이 배우는 건 이기주의가 아니라 집단주의고 동료애다. 노동자 투쟁은 이러한 상황을 더욱 적극적으로 만들어낸다. 모두가 한몸으로 단결해서 싸워야만 공동의 이익을 지켜낼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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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물론 노동자 투쟁에서도 이기주의는 모습을 드러낸다. 이것을 조장하는 건 여기서도 자본가들이다. 노동자 투쟁을 깨기 위해 자본가들은 온갖 감언이설과 협박을 늘어놓는다. 해고 위협까지 서슴지 않는다. 이것은 또다시 노동자의 본능적 생존욕구를 이기주의적인 방향으로 유도하곤 한다. 단결을 통해 모두의 생존을 함께 지켜낼 수 있다는 확신이 강화되고, 투쟁의 역관계가 노동자들에게 유리해지면 그런 수법은 먹히지 않는다. 노동자들은 생존을 위해서라도 강력한 집단주의적 태도를 확대하며, 자기 혼자 살 길을 찾는 이기주의적 동료를 단호하게 비판하고 응징한다. 반면 투쟁이 불리해지고 자본가의 협박이 먹히게 되거나 단결이 약화되면, 이기주의적 요소가 빠르게 확대된다. 


    정리하면, 노동자들의 노동의 조건, 그리고 생존의 조건은 이기주의를 극복하고 공동체주의를 채택하도록 이끈다. 하지만 자본주의 체제와 자본가들은 생존을 위해서 동료를 배신하고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하도록 노동자들에게 강요한다. 이 두 요소 사이에 맹렬한 투쟁이 일어난다. 노동조합과 투쟁이 전진할 때 선진노동자들은 전자의 모습에 감격한다. 노동조합과 투쟁이 후퇴하면 자본가들이 불어넣는 이기주의가 강화되므로 선진노동자들은 비관주의에 빠져들기도 한다. 이런 후퇴 상황이 오래 지속되면 비관주의는 더욱 강화되고, 선진노동자들은 인간의 본성에 대한 심각한 회의주의에 빠져든다.  


    하지만 인간의 속성이 고정되어 있지 않다는 점을 이해하는 게 중요하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자들의 속성은 결국 자본가계급 대 노동자계급 사이의 계급투쟁에 의해 좌우된다. 이 계급투쟁에서 노동자 조직이 전진하고 투쟁이 승리하도록 이끄는 것이 결국 노동자들의 속성을 공동체주의로 이끄는 길이다. 그렇기에 앞서 있는 노동자들의 실천이 중요하다. 공동체주의에 입각해 이들이 실천적 모범을 보이고, 공동체주의의 원리를 따라 노동자 조직을 발전시키고 투쟁을 성공적으로 전진시킴으로써 변화가 일어날 수 있다. 그런 변화를 통해 노동자들이 자본주의가 심어준 이기주의적 오물을 뱉어내면서 공동체주의를 발전시키는 과정이 바로 노동자운동의 발전 과정이며, 노동자계급이 사회주의를 실현하는 주체로 성장해가는 과정이다. 


    사회주의가 인간 본성이 이기주의적이라는 주장에 반대하는 것이 지금 자본주의 하에서 살아가는 노동자들 속에서 이기주의가 말끔히 청소되었다는 걸 말하는 게 아니다. 사회주의는 노동자 조직이 공동체주의를 발전시키고, 노동자 투쟁을 통해 자본가계급이 심어준 이기주의를 극복해가는 일련의 과정을 통해서 공동체적 인간형이 탄생해갈 수 있음을 주장할 뿐이다. 이러한 변화 과정은 사회주의가 건설되고 이 사회에서 태어나고 자란 새로운 세대에 의해 가장 완전한 방식으로 실현될 것이다. 


    높은 데 올라가면 다 똑같아진다?


    인간 본성이 이기주의적이라는 관념, 그리고 그 연장선에서 사회주의와 같은 공동체 세상은 불가능하다는 관념을 확대시키는 중요한 경험적 요인 중 하나는 바로 “높은 데 올라가면 다 똑같아진다”는 것이다. 이런 관념은 권력을 달라고 선거에서 요구할 때와 권력을 잡은 뒤 실제 행동하는 것 사이에 하늘과 땅 만큼 거대한 차이가 존재하는 부르주아 정치인들의 사기 행각에 대한 경험 속에서 생겨난다. 


    그런데 더 중요한 경험이 있다. 바로 노동자 대표자들과 관련된 것이다. 노동자를 위한다고 약속했지만, 막상 대통령, 국무총리, 장관이 된 뒤에는 노동자를 배신한 사람들에 대한 경험들이다. 한국의 경우, 건강한 활동가였지만 막상 노조위원장 등 노동조합의 중요 직책들을 맡은 뒤 조합원 위에 군림하고 투쟁 약속을 헌신짝처럼 버리는 자들에 대한 경험이 중요하게 작동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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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런 아픈 경험들 속에서 건강한 활동가나 조합원들은 “높은 데 올라가면 다 똑같아진다”고 느끼고 좌절한다. 이런 좌절은 이기주의적 인간 본성에 대한 믿음으로 이어진다. 물론 이것은 명백히 실재하는 객관적 경험들이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그렇게 되는 현상은 상당히 자연스러운 것이다. 있는 곳이 다르면, 생각도 바뀌기 때문이다. 그들을 둘러싼 사회적 환경이 바뀌게 되면, 이것은 그들에게 강한 영향을 미치기 마련이다. 가령 대기업 노조의 위원장이나 산별노조의 중요 직책을 맡게 되면, 조합원이나 현장 활동가 시절에 그들을 둘러싼 환경과는 전혀 다른 사회적 환경이 작동한다. 고된 노동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고, 현장 조합원들과의 일상적 관계도 약화되기 쉽다. 그 대신 경영진이나 사장을 만나는 기회가 많아진다. 일상적 교섭장에서 그들과 대화하며 보내는 시간이 늘어나고, 교섭장에서 그들을 설득할 논리를 개발하는 데 몰두하기 쉽다. 회사 경영상황이나 회사의 생존전략, 시장상황, 이윤율 등이 교섭장에서 거론되는 주요한 화두들이다. 이것은 현장노동자들과 함께할 때, 듣고 고민하던 것과는 완전히 다른 것이다. 

     

    이처럼 사회적 환경의 급격한 변화는 개인에게 강력한 영향력을 미친다. 그래서 불과 1~2년도 지나지 않아서 그 개인이 노동자적 개인에서 부르주아적 개인으로 변화하는 일이 흔하게 일어나게 된다. 마르크스주의는 이에 대해 이런 부르주아적 환경에 맞선 개인의 분투와 노력만을 강조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러한 변화가 불가피하거나, 최소한 빈번하게 일어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인간은 사회적 환경에 크게 영향 받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해법은 무엇일까? 바로 개인의 노력과 함께, 사회적 환경을 변화시키는 구조적 해법을 모색하는 것이다. 현장 조합원들의 아래로부터의 민주적 통제, 그리고 현장조직이나 사회주의 노동자 당에 의한 통제를 강화하는 것이다. 그래서 부르주아적 환경의 영향력을 상쇄하고 압도할 수 있을 만큼의 노동자적 환경을 조성하는 것이다. 높은 데 올라가도 결코 변질하지 않게 만들 대중적 통제력, 활동가들의 통제력을 강화하는 것이다. 이러한 공동체적 사회 환경을 의식적으로 만들어냄으로써 노동운동은 개인에 대한 영향력을 강화하고, 이를 통해 이기주의적·자본주의적 성격이 노동자 조직에서 확대되지 못하도록 강제해낸다. 


    물론 이러한 환경적·구조적 접근이 반드시 필요하지만, 이것이 부르주아적 환경의 영향력을 넘어서려는 개인의 의식적 노력이 갖는 가치를 조금이라도 폄하하는 건 아니다. 마르크스주의가 제시하는 인간 개념에서도 중요한 것은 단순히 사회적 환경을 거울처럼 수동적으로 반영하는 인간의 특성이 아니다. 사회적 환경에 의해 규정되지만, 거꾸로 사회를 결정하는 능동적 요소로서의 인간이다. 즉 개인이 사회에 미치는 능동적 영향력과 사회가 개인에 미치는 영향력은 서로 긴밀히 결합되어 있는 하나의 총체다. 


    “환경의 변화와 교육에 관한 유물론적인 학설은 환경이 인간에 의해 변화되고 교육자 자신이 교육받아야만 한다는 사실을 잊고 있다. ........ 환경의 변화와 인간의 활동 또는 자기 변화의 일치는 오직 혁명적 실천으로써만 파악될 수 있으며, 또 합리적으로 이해될 수 있다.” <마르크스, 포이어바흐에 관한 테제>


    노동자가 나아가야 할 실천의 핵심은 분명하다. 환경의 변화와 인간의 자기 변화를 하나의 총체로 유기적으로 결합시키는 것이다. 진정 자기 변화를 꾀하는 사람이라면 자신을 둘러싼 사회적 환경의 변화를 위해 실천해야 한다. 거꾸로 사회적 환경의 변화를 꾀하는 사람이라면 자기 변화에 조금도 게으르지 않아야 한다. 바로 그것이 노동자의 혁명적 실천의 본령이다. 이러한 노동자운동의 실천을 통해서 인간의 성격은 이기주의적 요소를 끊어내고 공동체주의적 방향으로 끊임없이 전진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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