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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파시즘은 그렇게 작동하지 않는다

제이슨 스탠리의 책 <파시즘은 어떻게 작동하는가>는 파시즘에 대한 자유주의적 접근의 위험성을 보여준다.

Madeleine Freeman
기사입력 2022.11.23 18:21 | 조회 2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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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편집자 주> 11월 초 미국의 중간선거에서 트럼프가 주도하는 공화당의 ‘붉은 바람’은 예상보다는 덜했다. 그럼에도 공화당은 민주당과 거의 비슷한 성적을 거뒀고 하원을 장악하는 데 성공했으며 트럼프는 2024년 대선 도전을 공식 선언했다. 여기에 그동안 트럼프의 후광 아래서 소수자 억압 정책을 주도했고 이번에 플로리다 주지사로 재선된 디샌티스가 도전장을 내밀고 있다. 트럼프주의가 트럼프 개인을 넘어서서 여전히 막강한 힘을 발휘하는 형국이다. 그렇다면 트럼프주의는 파시즘인가? 트럼프주의를 격퇴하는 길은 자유주의 민주당의 선거 승리에 있는가? 2021년에 작성된 <레프트보이스>의 이 글은 그 질문에 답한다.


    파시즘은 그렇게 작동하지 않는다

    매덜린 프리먼, 2021년 3월 7일

    “제이슨 스탠리의 책 <파시즘은 어떻게 작동하는가>는 파시즘에 대한 자유주의적 접근의 위험성을 보여준다.”

     


    2016년 도널드 트럼프의 당선은 미국과 국제 지형 모두에서 분수령이 됐다. 그것은 2008년 이후 미 제국의 가파른 쇠퇴와 위기에서 새로운 한 걸음을 내딛는 것이었다. 미국 자본주의의 전통적인 신자유주의 지도자들은 미국을 다각적인 위기로 몰아갔고, 위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트럼프가 인기를 끌고 자본가계급 일부의 지지를 받았다는 사실은 이 기성 정치인들에 대한 반발이 우익 쪽에서 점점 더 커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신호였다. 국제적으로 볼 때 미국은 제국주의 헤게모니의 쇠퇴와 중국 같은 강대국의 성장에 직면했다. 국내에서는 커져가는 불평등, 그리고 오바마 대통령이 은행과 기업들을 구제하는 동안 생활 형편이 극도로 나빠진 노동자계급과 ‘중간계급’의 불만에 직면했다. 트럼프는 뻔뻔한 태도로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같은 약속을 내뱉으며 불만에 찬 일부 소부르주아들에게 우익 포퓰리즘의 목소리를 내게 해줬다. 그들 대부분은 백인이고, 대체로 대도시 바깥에 살고 있으며, 우익이 줄곧 그래왔듯이 이주민이나 주변화된 사람들, 좌파 등을 희생양으로 삼고자 안달이 난 사람들이다.


    정치와 경제에서 혼란이 발생하면 자연스럽게 이데올로기적 기구에서도 표현이 된다. 자유주의 이론가와 학자들은 자유 민주주의로서 미국이 계급 간 긴장을 누그러뜨릴 수 있을 거라는 자신들의 관점에 매달린 채, 트럼프의 부상과 미국의 전통적 지도자들에 대한 반발을 해명하려고 허둥댄다. 그들은 아무 데서나 인종차별과 외국인 혐오를 쏟아내고 말과 행동으로 자유주의자들의 위선적인 ‘정치적 올바름’을 거부하는 우익 포퓰리스트(트럼프)에게 힐러리 클린턴이 패배한 이유가 무엇인지 설명하려고 고심한다. 그들은 트럼프를 ‘파시스트’라고, 민주주의를 파괴해서 권력을 쥐려는 예비 독재자라고 불렀다. ‘폭정을 막아내기’를 바라는 ‘깨어있는 시민’을 겨냥한 안내서가 큰 인기를 끌었다. 티모시 스나이더가 쓴 책 <압제에 대하여: 20세기의 20가지 교훈>이 대표적이다. 이런 자유주의적 선전은 무엇보다 트럼프의 등장을 낳은 비민주적인 제도와 사회경제적 관계에 대한 믿음을 회복시키려고 애쓴다.


    2018년에 나온 제이슨 스탠리의 책 <파시즘은 어떻게 작동하는가: 우리의 정치와 그들의 정치>는 대학가와 자유주의 매체들에서 대성공을 거뒀다. 스탠리는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민주주의’가 어떻게 트럼프 같은 인물을 등장시킬 수 있었는지, 그리고 세계 곳곳에서 권위주의적인 우익 정치인들이 어떻게 권력을 손에 넣고 있는지에 대한 자유주의자의 답변을 내놓는다. 불행한 사태가 어떻게 초래될 수 있는지 궁금해하는 사람들에게, <파시즘은 어떻게 작동하는가>는 미국에서 완전한 면모를 갖춘 파시즘의 진군에 맞서자고 경고하며, 트럼프의 우익 정치가 표준으로 자리 잡는 것을 막고 민주적 규범을 지켜내자고 깨어있는 시민들에게 호소한다.


    2020년, 그러니까 코로나19 팬데믹이 시작될 무렵이면서 대통령선거 직전이던 시기에 자신의 책을 문고판으로 재출간하면서 스탠리는 2018년에 정식화한 현상이 전 세계에서, 특히 트럼프 임기 동안 미국에서 더욱 심화됐다고 주장한다. 그는 ‘차악론’을 정당화하는 자유주의 철학을 제시한다. 그것은 트럼프와 공화당을 파시즘적 권위주의 진영으로 놓고, 정확히 반대편에 조 바이든과 민주당(이름이 직접 거론되지는 않았지만)을 민주주의와 자유의 진영으로 놓는다.


    ‘선전’에 대한 스탠리 자신의 규정 즉, “다른 반대되는 목표 아래로 사람들을 통합하기 위해 고상한 이상을 담은 언어를 사용하는“ 정치적 도구라는 관점을 따르자면, <파시즘은 어떻게 작동하는가>는 자유주의적 선전을 보여주는 적나라한 사례다. 이 책은 트럼프에 반대해 투표하는 것, 그리고 근본적으로 인종차별적이며 착취에 기반한 미국 정치제도를 거듭 정당화하는 것이 전 세계 우익 운동의 고양을 우려하는 사람들이 내려야 할 유일한 이성적 결론인 것처럼 색칠한다. 선거운동을 벌이면서 바이든은 ‘평등’과 ‘공감’에 대한 자유주의적 가치를 들먹였다. 스탠리는 이와 똑같은 호소를 하면서, 트럼프의 등장을 초래했으며 수백 년간 압도 다수에 대한 착취와 억압을 보장해온 바로 그 전통적인 민주주의 제도와 사회경제적 관계에 대한 우리의 헌신을 재확인해야 한다고 강변했다. 


    미국, 미얀마, 헝가리, 러시아의 현시기 우익 운동을 독일의 나치, 이탈리아의 무솔리니 등 교과서적인 사례와 비교하면서, 그리고 정치인들이 민주주의적 가치를 공격하며 정치 권력을 확보하기 위해 어떻게 인종차별과 변화하는 사회 조건에 대한 불안을 이용하는지 설명하면서, 스탠리는 특정한 일국적 환경에 적용되는 파시즘의 일련의 ‘전술’을 보편적인 것으로 끌어 올리려 한다. 1월 6일 국회의사당 습격과 두 번째로 실패한 트럼프 탄핵 시도에 뒤이어, 스탠리는 계속 존재하는 파시즘 정치의 위협에 눈을 부릅뜨고 있어야 하며 극우의 등장에 맞서 미국 민주주의 제도를 지키고 개혁하기 위해 ”민주주의에 대한 끝없는 헌신을 다짐“해야 한다고 시민들에게 경고하면서 언론 매체에서 대결을 이어가려 한다.


    트럼프가 권좌에서 내려왔지만, 스탠리의 이론은 바이든 정권이 대표하는 신자유주의 세계질서를 거듭 정당화하는, 그리고 바이든 정권을 향한 아래로부터의 투쟁 가능성을 차단하는 이데올로기적 도구로서 여전히 의미가 있다. 스탠리는 전 세계에서 일어나는 우익 운동이 주변화된 사람들의 안전과 자주권을 어떻게 실제로 위협하는지 적절하게 지적한다. 하지만 우익 정치의 모든 사례를 이런저런 형태의 ‘파시즘’으로 격상시키면서, 스탠리는 약간 더 친절한 가면을 쓴 부르주아 정치인들을 언제나 ‘차악’으로 정당화할 ‘파시즘’의 항구적인 위협을 창조해낸다.


    달리 말하면, 스탠리는 본래의 위상에 맞게 정확히 작동하는 부르주아 국가의 구조에 ‘파시즘’이라는 딱지를 붙임으로써, ‘파시즘은 어떻게 작동하는가’뿐만 아니라 ‘파시즘이란 무엇인가’에 대해서도 잘못된 성격 규정을 내린다. 그는 추상적으로 파시즘을 ‘민주주의’의 대립물로 간주하고는, 이 이분법을 관념의 세계로 끌고 간다. 그렇게 함으로써 스탠리는 근본적인 무언가를 놓쳐버린다. 파시즘과 자본가 민주주의는 계급적인 속성이 전혀 없는 ‘중립적’인 체제가 아니라는 점 말이다. 둘 다 자본가계급이 생산수단에 대한 자신의 지배를 지속시키고 노동자계급과 억압받는 사람들에게 질서를 강제하기 위해 활용하는 체제일 뿐이다.


    전체주의와 민주주의 그리고 ‘권력’


    ‘파시즘’을 둘러싼 자유주의자들의 논의에서 스탠리가 제시한 의견의 핵심은 파시즘 체제와 ‘파시즘 정치’를 구분하는 것이다. 파시즘 체제란 완전하게 모습을 갖춘 정치적 현상으로서, ”권위주의 지도자가 대변하는 민족과 더불어 (종족, 종교, 문화 등) 다양한 특성을 나타내는 극단적 민족주의“로 구성된다. 파시즘 정치란 반지성주의, 성적인 갈망, 신화적인 과거에 대한 호소에 이르는 넓은 범위의 권위주의 전술로서, 특정한 국가에서 ”권력을 획득하기 위한 메커니즘“으로 채택된다. 트럼프 정권과 폴란드 대통령 안제이 두다 같은 지도자들을 동일한 수준으로 간주하면서, 스탠리는 전 세계 우익 정치인들의 외국인 혐오, 인종차별, 성차별, 그 밖의 편견에 찬 수사와 정책들을 ‘파시즘’적인 것으로 규정한다.


    예를 들어 그는 미국의 큐어넌이나 헝가리의 ‘소로스 반대’ 캠페인* 같은 사례처럼, 국내 정치 수준에서 음모론을 제기하는 것을 예비 파시즘 독재자들이 권력을 획득하고 반동적인 입법을 추진하기 위해 사용하는 전술이라고 규정한다. 이런 정치인들은 진실에 대한 전면적인 공격을 감행하면서 과학과 부르주아 세계질서에 맞서고, 그럼으로써 자신을 ‘전통적인’(흔히 ‘반동적인’ 또는 ‘편견에 찬’이라는 말의 완곡한 표현) 사회구조의 수호자로 포장한다.

    [*소로스 반대 캠페인: 막강한 영향력을 지닌 금융자본가 조지 소로스가 글로벌리즘을 앞세워 헝가리를 해체하려 한다며 헝가리 내에서 그와 연관된 단체들의 활동을 금지시킨 극우 민족주의 운동. 이 캠페인을 주도한 빅토르 오르반 총리는 애초에 소로스 재단의 재정 지원을 받으며 성장했다.]


    스탠리의 설명에 따르면, 본질적으로 파시즘이란 분열의 정치다. 그것은 공감과 다원주의라는 자유주의적 이상과는 대조적으로, 다수 집단이 민족적, 인종적, 종교적 ‘타자들’에 의해 침탈당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이용해, 한 인물이 권력을 강화하고 유지하는 데 봉사한다. 스탠리는, 파시즘 정치가 항상 파시즘 체제로 이어지는 것은 아닐지라도, 파시즘이 깊게 뿌리내리고 있으며 자본가 민주주의 사회를 끊임없이 위협하고 있다고 결론짓는다. 실제로 그는 과거의 흑인 차별정책에서 대규모의 격리와 강제 추방에 이르기까지, 미국 정치제도 안에서 파시즘 정치가 오랜 기간 지위를 유지해 왔다고 주장한다.


    역사 속에서 전체주의와 민주주의를 두 개의 지배적인 세력으로 간주하는 고전적인 구분법을 사용하면서, 스탠리는 파시즘의 구체적인 현상을 이른바 ‘자유’와 ‘평등’이라는 이상을 표방하는 자본가 민주주의의 반정립인 것처럼 초역사적으로 규정한다. 미국의 트럼프, 브라질의 보우소나루, 인도의 모디 같은 정권으로 구현된 전 세계 우익 포퓰리즘의 아주 구체적인 현상들을 건드리면서도, 그는 이 우익 운동의 원천과 그들에 맞선 투쟁을 이데올로기의 영역으로 밀어내버린다. 거기에서는 반동과 혐오 진영이 한쪽에 서 있고 자유주의 진영이 반대쪽에 서서 전투를 벌인다.


    그러나 이것은 허구적인 이분법이다.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자유’를 이용할 권리를 자유주의 부르주아 정치인들이 독점하고 있는 것은 결코 아니다. 역사적으로 파시스트들과 그 지도자들 역시 권력을 손에 쥐고 유지하기 위한 방식으로 ‘자유’라는 그리고 ‘압제’에 반대한다는 추상적인 미사여구를 사용했다. 현시기 네오나치 단체나 다른 맹아적인 파시스트 조직의 강령에서 이 점을 명확하게 볼 수 있다. 분명히 히틀러와 무솔리니는 노동자들과 억압받는 사람들이 쟁취하기 위해 싸워온 모든 민주주의적 구조를 파괴하면서 동시에 ‘자유’를 외쳤다. 모두를 위한 ‘자유’란 없다는 것, 바로 이 지점이 스탠리의 관점이 넘지 못하는 한계다.


    잘 알려져 있듯이 레닌은 우리가 자유를 말할 때 항상 그 자유가 ‘누구의 자유인지, 무엇을 할 수 있는 자유인지’ 물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파시스트들은 소수의 선택된 인종, 종족, 또는 종교 집단의 자유를 원한다고 말한다. 이는 압도 다수의 노동자와 피억압 민중의 자유를 부정하고, 자본가들에게 가능한 최대치의 자유를 보장하기 위한 것이다. 이와 반대로 자유주의자들은 일련의 다양한 정체성을 위한 자유를 원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것 역시, 다른 일련의 역사적 조건 아래서 자본가들에게 가능한 최대치의 자유를 보장하기 위한 것이다.


    스탠리는 노동자계급 운동과 혁명적 사태 전개를 저지하는 방법으로서 파시즘이 등장하는 데에서 전 세계 자본주의의 정치 경제적 위기가 수행하는 중심적인 역할을 과소평가한다. 파시즘은 추상적으로 민주주의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의 안정을 되찾고 자본가계급의 정치권력과 경제권력을 확고하게 유지하기 위해 일시적으로 자본가 민주주의를 억누르는 것이다.


    그러나 스탠리가 초점을 맞추는 것은 완전히 면모를 갖춘 파시즘 체제가 아니다. 그가 주목하는 것은 현시기 자유 민주주의 속에서 그가 포착하는 파시즘의 전조이며, 이를 바탕으로 그는 자유주의와 파시즘 사이에 뚜렷하게 선을 긋는 것이다. 자유 민주주의 국가에서 작동하는 ‘파시즘 정치’의 요소들을 뽑아냄으로써, 스탠리는 이 현상을 자본주의에 복무하는 민주주의의 직접적인 결과물이 아니라 민주주의로부터의 일탈이라고 추상적으로 채색할 수 있게 된다.


    그런 시각의 한계는 미국의 맥락에서 파시즘을 바라보는 그의 관점에서 특히 분명하게 나타난다. 그는 미국 ‘민주주의’와 미국 자본주의의 토대 자체에 내포돼 있는 체계적인 인종차별을, 권력을 다투는 반동적인 개인들의 ‘파시즘 정치’라는 일탈 때문으로 잘못 인식한다.


    인종차별과 파시즘


    인종차별과 극단적인 편견은 파시즘이 어떻게 작동하는가에 대한 스탠리의 견해에서 가장 중요하다. 아마도 이것이 ‘파시즘 정치’에 대한 그의 관점에서 가장 호소력 있는,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가장 잘못 파악된 요소일 것이다. 스탠리는 인종차별을 우익 이데올로기와 정치의 추진력이라고 적절하게 규정한다. 어떤 면에서는, 그가 체계화된 인종차별을 묘사하기 위해 ‘파시즘’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것은 그럴싸하다. 우익 운동이 역사적으로 억압받고 주변화된 사람들에게 가하는 위험성이 얼마나 긴급한지 환기시켜 주기 때문이다. 그런데 다시 그는 이 파시즘 정치를 중립적이고 모든 사람의 이해를 위해 작동하도록 개선해나갈 수 있는 이상적인 ‘민주주의 국가’와 대립시킨다. 계급적 이해에 복무하는 무기로서 구체적이고 물질적인 현상으로 인종차별을 바라보는 대신, 스탠리는 인종차별의 근본 원인을 ‘위계’와 ‘권위주의’라는 공허한 관념으로 환원한다. 미국의 맥락에서 볼 때, 이런 관점을 취함으로써 그는 미국 민주주의가 확립되는 데에서 그리고 미국이 세계적인 제국주의 열강으로 발전하는 데에서 흑인에 대한 인종차별과 외국인 혐오가 수행한 역할을 상당히 과소평가하며, 현시기 미국 국가와 양대 정당이 인종차별과 유색인에 대한 초과 착취로 얼마나 이득을 보는지도 간과한다. 구조적 인종차별은 인종차별적인 정치인들이 만든 몇몇 나쁜 정책의 결과가 아니다. 그것은 미국 자본주의의 토대 자체에 내포돼 있다.


    미국에 대해 다루면서 스탠리는 W. E. B. 두보이스와 안젤라 데이비스 같은 급진적인 흑인 운동가의 작업에 종종 의지하는데, 그 과정에서 인종차별의 구조적 성격에 대한 이들의 관점을 미국 파시즘이라는 그림에 결부시킨다(심지어 그렇게 하는 과정에서 이들의 정치에 내포된 가장 반자본주의적인 측면들을 지워 없애기까지 한다). 그는 남북전쟁 후 재건 시대가 노예제에서 해방된 흑인 노동자계급을 어떻게 변모시켰는지, 그래서 남부와 북부 자본가들의 이해에 계속 복무시켰는지 살펴본다. 그는 미국의 감옥 시스템에 흑인이 대량 감금되는 상황을 직설적으로 다룬다. 그러나 이것을 명백한 ‘파시즘’ 또는 맹아적인 파시즘 현상이라고 부르면서 그는 인종차별을 오직 ”우리 대 그들이라는 이분법을 확립하고 기성의 위계적인 고정관념을 강화하는“ 수단이라고만 설명한다. 그와는 달리, 인종차별의 실체는 자본주의가 광범한 노동자들을 체계적으로 착취하고 노동자들이 서로 싸우게 만드는 방식이라는 데 있다.


    달리 말하면, 그는 미국 민주주의와 인종차별의 깊은 연관을 간과하며, 그 결과 그의 관점은 인종차별에 맞서 싸우는 데에서 아무런 전망도 보여주지 못한다. 미국 민주주의는 인종차별과 온갖 종류의 극단적 편견 위에서 번영하는 자본가들의 이해에 복종하고 있으며, 이것이 인종차별을 가능케 했다. 스탠리에 따르면 지금의 공화당은 트럼프의 등장을 초래한 사회 현상에 적응하면서 ”이러한 전략을 더욱더 빈번하게 채택한다.“ 스탠리는 정치인들이 가부장적 고정관념을 이용하거나 역사적으로 인종차별적 선거구 개편이 이뤄져 왔다는 것을 사례로 든다. 하지만 이것은 파시즘이 아니다. 이것은 정확히 본래의 방식대로 움직이는 자본가 민주주의일 뿐이다. 그리고 공화당과 민주당 둘 다 이로부터 이득을 얻으면서 이런 관행과 정책을 영속화한다.


    궁극적으로 스탠리는 인종차별 정책으로 썩어빠진 민주주의 국가를 중립적인 기구인 것처럼 포장한다. 그가 체계화된 인종차별의 해결책으로 내놓는 유일한 방안은 인종차별적이며 뿌리까지 썩어있는 제도를 개혁하는 것뿐이다. 이로써 그는 자본가들의 이익을 증대시키는 방법으로써 자본가 민주주의 국가가 유색인과 그 밖의 주변화된 사람들을 어떻게 표적으로 삼는지를 지워버린다. 인종차별은 오직 파시즘만이 지배하는 영역이 아니다. 그것은 자본주의 자체의 근본적인 구성 요소다.


    파시즘은 실제로 어떻게 작동하는가?


    스탠리의 시각과는 달리, 파시즘은 자유 민주주의가 낳은 정치에서의 형식적인 ‘평등’과 경제적 ‘불평등’에 대한 반동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노동자계급의 도전을 받은 자본주의가 자신의 지배력을 유지하기 위한 최후의 몸부림이다. 파시즘은 계급적 성격을 지니고 있다. 스탠리의 설명과는 반대로, 파시즘은 단지 광란하는 독재자가 선택된 소수의 민족, 인종, 종족의 권력과 지배를 추구하며 애쓴 결과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무솔리니는 어떻게 승리했는가>에서 트로츠키가 설명했듯이, 파시즘은 ”의회라는 가림막과 더불어 경찰과 군대라는 자본가 독재의 ‘통상적인’ 자원이 더 이상 사회의 균형 상태를 유지하기에 충분하지 않은 그 순간에 등장한다. 파시즘 정권의 순서가 도래한다. 파시즘이라는 대행인을 통해 자본주의는 광란하는 소부르주아 대중과 몰락하고 절망에 빠진 룸펜프롤레타리아 무리를 움직이게 한다. 바로 금융자본이 이 무수한 인간들을 절망과 광기로 몰아넣었다.“


    파시즘은 노동자계급이 만든 제도와 조직에 대한 전면적인 공격이다. 20세기에 파시즘은 인종적·민족적·정치적 집단학살 형태를 취하면서, 자본주의가 노동자와 피억압 민중의 운동에 맞서 자신의 안정성을 지킬 수 있는 여지를 더 넓히기 위해 노동자계급 내에 심어놓은 분열을 더욱 악화시켰다. 자국 자본가들의 이해에 복무하기 위해 단일정당 체제를 바탕으로 단호하게 통치하려는 우두머리가 정치권력을 장악함으로써 이 과정이 촉진됐다. 나치당이 권력을 장악한 뒤 처음으로 한 일은 오랜 역사를 지닌 독일 노동자들의 조직을 공격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노동조합 회관을 봉쇄했고 노조 지도자들을 체포했으며, 자주적인 노동조합을 나치당과 자본가들이 직접 통제하는 ‘독일노동전선’*으로 갈아치웠다.

    [*공식적으로 노동조합은 아니었지만 어용노조 역할을 했고, 회원 수는 1938년에 2,000만 명을 넘어섰다.]


    설사 스탠리가 파시즘을 전적으로 자유 민주주의에 적대적인 무언가로 간주하더라도, 그는 파시즘이 표적으로 삼는 것은 노동자계급 조직들이라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그 역시 분명히 논의 과정에서 파시스트 정치인들의 노동조합 공격을 다뤘다. 그러나 스탠리는 이런 인식의 위아래를 뒤집는다. 노동자계급 조직들에 대한 공격은 독재자의 끓어오르는 권력욕 앞에서 부차적이라는 것이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파시스트 정치인들은 분열 정책에 저항하는 데에서 이런 연대가 효과적이라는 것을 이해하고 있으며, 따라서 노동조합을 해체하려고 한다. 파시즘 정치는 ‘특권층’을 비난하면서도 계급투쟁의 중요성을 최소화하려 한다.“ 스탠리는 파시즘이 노동조합을 해체하려는 이유에 대해 ”다양한 각도에서 서로 차이가 있는 사람들을 묶기 위해 사회가 찾아낸 주된 구조이기 때문“이며, ”파시즘 정치에 따르면, 세계 자본주의라는 바다에서 노동자들 각자가 자신을 부양해야 하는 처지로 방치되고 그 결과 지도자 집단에 대한 종속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노동조합은 반드시 분쇄돼야 한다“고 주장한다. 스탠리는 노동조합을 자본주의가 강요한 분열에 맞서는 단결의 장으로서 올바르게 규정한다. 비록 노동자계급의 단결을 위한 기구가 아니라 추상적인 인류 전체의 통합을 위한 것으로 미끄러뜨리고 있기는 하지만 말이다. 그러나 파시즘은 단지 경제 영역에서 큰 피해를 유발해 사람들을 전능한 지도자에게 더 강하게 결속시키려는 목표로만 노동조합을 공격하는 것이 아니다. 파시즘은 노동자계급의 자주성을 억누르고, 국내에서뿐만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세계 자본주의 속에서 더 나은 위치를 차지하기 위해, 극심한 폭력과 탄압을 동반하며 노동조합을 표적으로 삼는다.


    파시즘은 인간의 공감 능력을 해치는 이데올로기의 변화만을 뜻하지 않는다. 그것은 경제적인 사회관계에서 방향성을 갖는 또 다른 형태의 자본주의다. 트로츠키가 말했듯이 ”파시즘이 승리를 거둔 뒤에, 금융자본은 곧바로 통치를 위한 모든 기관과 제도, 행정부, 국가 교육기관을 마치 바이스로 꽉 물듯이 자신의 수중에 직접 끌어모은다. 군대, 지자체, 대학, 학교, 언론, 노동조합, 협동조합 등과 함께 국가기구 전체가 여기에 포괄된다. 국가가 파시즘 체제로 바뀐다는 것은 무솔리니가 만들어놓은 패턴에 따라 통치의 형태와 방식이 바뀐다는 것만을 뜻하지 않는다. 그런 차원의 변화는 궁극적으로 소소한 역할을 할 뿐이다. 오히려 대부분의 경우 가장 중요한 점은 노동자 조직들이 궤멸된다는 데 있다. 노동자계급은 모래 같은 상태가 된다. 대중 속으로 깊게 파고들며 노동자계급의 독립적인 조직화를 가로막는 행정체계가 만들어진다.“


    다시 말해서 파시즘은 자본주의의 경제적, 사회적, 정치적 구조에 거대한 위기가 닥친 상황에서 노동자계급의 자기조직화와 운동에 맞서는 자본가계급의 반동이다. 그것은 자유 민주주의의 대립물이 아니라, 자유 민주주의가 계급 적대를 억제하는 데 실패한 결과다. 파시즘은 국가를 움직이는 데에서 기업과 경제활동을 최우선으로 두는 또 다른 지도자가 이끄는 자본주의다.


    그러나 파시즘은 애초에 불안정한 형태의 통치체제이고, 자본가들이 선호하는 방식도 아니다. 트로츠키의 유명한 문구처럼 ”어떤 사람이 어금니에 치통이 있다고 해서 그 이를 뽑는 것을 좋아하지는 않듯이, 대자본가들도 파시즘을 좋아하지는 않는다.“


    스탠리는 자본가계급을 위해 경고해준다


    다른 자유주의 이론가들과 마찬가지로, 스탠리는 대중이 우익에 맞서 싸우려면 부르주아 제도를 지지하며 자본가 민주주의에 참여해야 한다고 제안한다. 바로 이 점이 자유주의자들의 근본적인 오류다. 투표함은 노동자계급과 자본가계급 사이의 ‘위대한 중재자’가 아니다. 그것은 노동자계급이 자신의 이해관계를 도외시하면서, 자신을 억압하는 조건에 동의하게 만드는 자본가계급의 수단이다. 사실 부르주아 제도를 신뢰하는 것이야말로 권력으로 나아가려는 미래의 파시스트들을 위해 길을 닦아주는 것이다.


    궁극적으로, 스탠리는 파시즘에 대항하기 위해 평범한 시민들을 향해 호소하고, ”공감을 끌어내기 위한 기획을 지속해온“ 사회운동과 공감력을 키우는 자유주의 교육의 중요성에 대해 호소하고 있지만, 파시즘이라는 문제에 대한 그의 진짜 ‘해결책’은 훨씬 간단하다. ”적나라한 경제적 불평등이 파시즘의 악선동에 아주 좋은 조건을 만들어내기“ 때문에, 자본주의는 파시즘의 사회적 토대를 놓는 계급 적대를 완화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이런 자가당착에 이용당하는 사람들 대부분은 항상적인 파시즘의 위협에 맞서기 위해 ”공통의 인류라는 감각을 유지“하면서 자신들을 억압하는 자들과 손을 잡는 수준으로 추락한다.


    그의 책 마지막 장에서 스탠리는 단지 암시하는 수준에서일지라도 자신의 자유주의적, 이상주의적 구상을 넘어선다. 그리고 실제로 파시즘을 낳는 것은 계급투쟁이라는 사실을 인정한다. ”민주적인 정치체제와 위계질서로 작동하는 사적 기업들의 경제로 구성된 사회에는 진정한 긴장이 있다“고 그는 말한다. 지독하게 에둘러 표현한 것이기는 하지만, 스탠리의 말에는 진실의 핵심이 담겨 있다. 자본주의 사회가 스스로 위기와 모순을 만들어낸다는 것, 이 위기에 대한 대응이나, 위기를 해결하려는 자본주의의 몸부림이 모든 종류의 반동적이거나 진보적인 현상을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물론 스탠리는 정치체제의 형태를 그것이 작동하는 경제체제와 완전히 분리된 것으로서 이해한다. 그래서 그의 해결책도 입법 활동이나 국가의 규제를 이용해 이 불평등을 완화하기 위한 시도로 국한된다.


    스탠리는 책을 끝맺으면서 우리가 경제, 정치, 생태적 균열이 중첩된 복합적인 위기의 시대에 살고 있다고 말한다. 이것은 필연적으로 불평등과 불의에 맞선 계급투쟁과 반란을 낳을 것이라고 그는 주장한다. 그의 글에 따르면 ”우리는 곧 빼앗긴 사람들의 국제적인 운동을 보게 될 것이며, 그것은 앞선 시대의 운동이 왜소해 보이게 만들 것이다.“ ‘우리’라는 표현을 쓰는 그가 말하려는 것은 이런 것이다. ”지배계급은 자본주의 체제와 이를 재생산하고 보호하는 국가의 안정성을 흔드는 위기를 해결할 방법을 반드시 찾아내야만 한다.“ 자본주의 위기가 노동자계급과 피억압 민중의 반란을 야기할 것이며, 그 반란은 결국 파시스트 반동 세력을 불러일으킬 것이라고 지배계급에게 경고해주는 것이다. 사실 불만에 찬 소부르주아들이 노동자계급에 대항해서 날뛰게 만드는 것은 자본가계급일 것이다. 계급 화해라는 환상에 매달리는 스탠리 같은 자유주의자에게 이런 일은 피해야 할 일이다. 비록 그가 파시즘의 부상이라는 문제에 대한 해결책 전체를 펼쳐 보이지는 않지만, 그는 우리 공통의 인류애를 교육하는 것과 더불어 정부가 사회안전망을 위한 기금을 마련해야 하고 경제적 불평등을 과감하게 줄여나가야 한다고 넌지시 제안한다.


    파시즘에 맞서 싸우는 다른 길


    파시즘에 관한 스탠리의 시각과, 파시즘이 실제로 어떻게 작동하는지에 관한 유물론적 분석을 구분하는 것은 단순히 단어의 뜻을 어떻게 정의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아니다. 트럼프와 전 세계 우익 운동이 어떤 지점에서 자본주의 위기라는 큰 그림과 맞아떨어지는지, 그리고 그들에 맞선 투쟁에서 향후 과제는 무엇인지, 이것이 중요하다. 명백히 ‘중립적’인 스탠리의 자유주의적 구상, 즉 파시즘이 발생하는 그 지점에서 실제로 맞서 싸우리라고 기대할 수 없는 그의 구상에서 도출되는 강령은 계급 화해를 추구한다. 스탠리는 우익 정책이 ‘표준’으로 자리 잡는 것을 막기 위해 모든 것을 파시즘이라고 부르면서, 그것을 끊임없는 위협으로 묘사하고, 이에 대항해 싸우려면 자본가 민주주의 제도로 단결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간단히 말해서, 이런 구상을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자본가 민주주의가 노동자계급에게 가하는 실질적인 위협이 어떤 것인지, 그리고 그것에 맞선 투쟁에서 누가 우리의 동맹자인지 잘못 판단하도록 내몰릴 것이다.


    스탠리의 책은 전형적인 자유주의 사고방식을 보여주지만, 그의 논리가 반자본주의 좌파에게도 영향을 줄 수 있다. 스탈린 공포정치를 거치며 소련이 퇴보한 결과, 많은 좌파 조직이 <파시즘은 어떻게 작동하는가>를 떠받치는 전체주의 대 민주주의라는 이분법을 받아들이면서, 파시즘을 제대로 규정하고 그것에 맞서 싸울 방법을 제시할 수 있는 계급 관계에 대한 분석을 포기했다.


    노동자계급과 피억압 민중이 세계적으로 고조되는 우익 운동의 위협에 맞서려면, 자신의 생존을 위해 분열을 조장하는 자본주의에 맞서 단결된 투쟁을 벌여야 한다. 즉 자본주의 사회의 작동에 타격을 가하고 반동 세력을 무릎 꿇릴 수 있는 노동자계급이 온 힘을 기울여 인종차별에 맞서, 또 종교적이거나 민족적인 소수자에 대한 박해에 맞서 싸워야 한다. 그런 투쟁을 위해서는 노조 관료제에 맞서 현장 조합원들이 주도하는 강력한 노동조합 운동이라는 토대와, 자신의 이해를 위해 투쟁할 힘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노동자계급의 자기조직화가 필요하다. 이 투쟁의 한복판에서 자본주의가 노동자계급을 저지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파시즘이나 파시즘적 억압의 일부 요소에 의지할 수도 있다. 우리가 지금 그런 순간에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런 상황이 닥친다 해도, 누가 우리의 동맹자이고 누가 아닌지 헷갈리면 안 된다. 자유 민주주의를 관장하는 자본가들의 이해관계 탓에 히틀러, 프랑코, 무솔리니 등이 권력을 쥘 수 있었다. 자본가들의 이해관계 때문에 지금 이 순간 세계 곳곳에서 참주선동을 일삼는 자들이 노동자와 빈민의 압도 다수를 억누르고 탄압할 수 있게 된 것과 꼭 마찬가지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파시즘이 언제라도 등장할 수 있다는 점에서는 스탠리가 옳을 수도 있다. 하지만 파시즘에 맞서 싸우려면 그것을 뿌리째 뽑아버리고 자본가계급을 수탈해야 한다. 그렇게 되면 자본가계급은 사회에 대한 지배력을 포기하느니 차라리 우익의 폭력과 증오에 기댈 것이다. 파시즘에 맞서 싸울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사회주의에 있다. 자본주의의 지배로부터 자신의 해방을 쟁취하기 위한 노동자계급과 피억압 민중의 단결된 행동이 그 길이다.


    번역: 오연홍


    원문

    https://www.leftvoice.org/thats-not-how-fascism-work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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