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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언] 노동절, 우리는 끓어오르는 분노를 안고 이 자리에 섰습니다정권은 바뀌었지만 노동자의 삶은 바뀌지 않았다. 화물연대 서광석 열사가 목숨을 잃었다. 고진수 동지가 구속당했다. A학교 투쟁, 세종호텔 투쟁, 울산 워릭·덕스 어학원 원어민 강사 노동자들의 투쟁, 그리고 현대차 자본과 경찰 폭력에 맞서 이수기업 해고노동자들이 싸우고 있다. 자본이 요구하면 공권력이 집행하고, 노동자가 희생당하는 현실을 끝장내기 위해 노동자들은 함께 싸워야 한다. 지난 노동절, 현대차 비정규직지회 이수기업 해고자 정성훈 동지의 사전 발언을 소개한다. 우리는 오늘, 희망이 아닌 참담한 배신감과 끓어오르는 분노를 안고 이 자리에 섰습니다. 또 한 명의 동지가 우리 곁을 떠났습니다. BGF자본과 이를 비호하는 공권력의 추악한 결탁이 화물노동자의 소중한 목숨을 앗아갔습니다. 자본의 탐욕이 노동자를 사지로 내몰 때, 국가는 어디에 있었습니까? 정권이 바뀌면 노동자의 삶도 바뀔 것이라 믿었던 우리의 기대는 이제 처절한 절망과 분노로 돌아왔습니다. 민주당과 이재명 정부는 출범 당시 노동자의 눈물을 닦아주겠다며 온갖 달콤한 약속을 쏟아냈습니다. 하지만 지금 무엇이 변했습니까? 간판만 바뀌었을 뿐, 자본과 결탁한 공권력의 칼날은 조금도 무뎌지지 않았습니다. 지금도 노동자의 삶은 여전히 벼랑 끝 낭떠러지입니다. 서울에서 성폭력 피해학생을 보호하려다 억울하게 해임되시고 부당전보 승소판결을 받고도 교육감과 경찰에 의해 무자비하게 진압당하고 연행되신 지혜복 선생님과 연대시민들, 세종호텔 자본과 사법부에 낙인찍혀 아무 죄도 없이 구속까지 당한 고진수 지부장 동지도 있습니다. 울산에선 비자제도의 허점을 이용해 연차 사용을 못하게 막고 수당도 떼어먹고, 이에 저항하여 노조를 결성하자 보복해고시킨 워릭·덕스 어학원 원어민 강사 동지들, 전혀 법의 보호를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 이수기업 해고노동자들도 똑똑히 기억합니다. 현대차 자본의 구사대와 울산 북부서 경찰의 폭력 앞에 무자비하게 짓밟히고 폭행당했던 야만적인 순간들을 우리는 절대 잊지 않습니다. 전 국민이 지켜보는 국정감사장에서 김영훈 노동부 장관은 책임지고 현대차 구사대 폭력사건을 조사하고 국회에 보고하겠다고 호언장담했습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어떻습니까? 자본의 폭력 앞엔 무기력하고, 노동자의 절규 앞엔 오만한 '말뿐인 행정'입니다. 우리를 폭력으로 짓밟았던 구사대와 경찰들 그 누구도 책임지지 않았고, 처벌받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이재명 정부가 말하는 정의입니까? 권력의 자리에 앉아 '노동 존중'을 입에 담으면서도, 정작 자본의 폭거 앞에서는 눈을 감는 비겁한 행태를 이제는 끝장내야 합니다! 우리가 목격하고 있는 현실은 여전히 자본이 명령하고 공권력이 집행하며 노동자가 희생당하는 야만의 연속일 뿐입니다. 정치권이 자본의 눈치를 보며 노동자의 삶을 정치적 소모품으로 이용하는 한, 이 땅의 민주주의는 한 발짝도 나아갈 수 없습니다. 우리는 구걸하지 않습니다. 빼앗긴 권리를, 기만당한 우리의 삶을 투쟁의 이름으로 다시 쟁취할 것입니다. 더 이상 억울하게 죽는 노동자가 없어야 합니다. 더 이상 우리의 권리를 빼앗길 수 없습니다. 단결된 노동자의 힘만이 이 추악한 결탁의 고리를 끊어낼 수 있습니다. 우리가 뭉치면 세상이 멈추고, 우리가 싸우면 세상이 바뀝니다. 승리할 때까지 끝까지 함께 싸웁시다! -
[한노운사 연재 16회] 3부 패배와 퇴보 (1998-2008) [5] 노동자 정치세력화 열망과 민주노동당자본가들의 신자유주의 대공세와 그에 맞선 노동자들의 격렬한 투쟁은 한국 사회 전반에 계급투쟁의 격랑을 몰고 왔다. 노동자들의 투쟁은 성공적인 결과를 얻지는 못했지만, 광범한 계급적 자각을 낳았다. 노동조합에 대해 말하는 것조차 불온하게 간주되던 사회에서 광범한 노동자들이 ‘노동자 정치세력화’라는 구호에 호응하기 시작했다. 노동자 정치세력화의 열망은 민주노동당을 탄생, 성장시켰다. 그러나 노동자들의 투쟁을 패배로 귀결시키고, 민주노조운동을 후퇴와 위기로 내몰았던 똑같은 요인이 노동자 정치세력화에도 작용했다. 노동자 정치세력화의 열망은 제대로 뻗어나가지 못했다. 이전 편 보기 3부 패배와 퇴보 (1998-2008) [시대배경] 신자유주의 구조조정 [1] 구조조정과 정리해고에 맞선 투쟁 [2] 민주노조운동의 후퇴와 비정규직 확산 [3] 비정규직 문제를 둘러싼 대결 [4] 민주노조운동의 위기 [5] 노동자 정치세력화 열망과 민주노동당 1) 민주노동당 창당에 담긴 이중적 성격 2000년 1월 30일 민주노동당이 창당됐다. 민주노동당의 등장은 한국전쟁 이래 극히 우경화된 한국 정치의 지형 속에서 그 자체로 상당한 의미를 갖는 사건이었다. 창당 무렵에 이미 1만 명 이상의 당원을 확보한 민주노동당은 한국전쟁 이래 처음으로 ‘진보적 이념을 표방하면서도 노동자들 속에 상당한 기반을 확보한 정당’으로 등장했다.[1] 민주노동당 이전에도 한국 정치에 진보정당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1950년대에는 진보적 민족주의를 표방하며 일정한 대중적 지지를 확보했던 진보당이 있었다. 그러나 진보당은 노동자들 속에서 뚜렷한 기반을 갖지는 못했으며, 이른바 진보당 사건을 통해 당수 조봉암이 1959년에 간첩죄로 사형당하면서 붕괴했다.[2] 1990년 11월에 출범한 민중당은 진보적 이념을 내걸긴 했지만 민주노조운동으로 결집한 노동자들 속에서조차 지지 기반을 확장하지 못했으며, 1992년 3월 총선에서 저조한 득표로 법적 해산을 당하면서 해체됐다. 민중당의 좌절은 한편으로 당시 전체 민중운동의 다수파인 민족해방파가 ‘민중의 독자적 정치세력화’를 거부하고 김대중에 대한 비판적 지지로 일관함으로써 야기된 것이기도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스스로 표방한 개량주의 노선 때문이기도 했다. 민중당은 저급한 출세주의에 빠진 당권파를 중심으로 소련 붕괴 이전부터 공공연히 개량주의 노선을 표방하였는데, 오히려 이 때문에 변혁적 지향으로 꿈틀대던 전노협으로부터 심한 반발과 견제에 직면할 수밖에 없었으며, 그로 인해 민주노조로 결집한 노동자들 속에서조차 뚜렷한 지지 기반을 확보할 수 없었다. 1950년대 진보당과 1990년대 초반 민중당으로 대표되는 진보정당 좌절의 역사와 달리, 민주노동당은 그 출발부터 비교적 순탄한 길을 걸어 나갈 수 있었다. 여기에는 민주노동당 창당이 민주노총의 조직적 결정에 의해 추진됐다는 사실이 결정적 역할을 했다. 1997년 7월 민주노총은 대의원대회를 통해 12월 대통령 선거에 후보를 내세우고 향후 진보정당 창당에 나서기로 결의했다. 1. 민주노총은 제 민주세력과 함께 1997년 대선에 국민후보를 추대, 이를 위한 선거대책기구를 구성하고 인적·물적 역량을 동원키로 결의한다. 2. 민주노총은 대중적 합의를 바탕으로 노동자가 적극 참여하고 각계각층의 민주적이고 양심적인 세력과 함께 하는, 우리 사회의 민주적 개혁을 실현하고 노동자의 이익과 요구를 철저히 대변하는 새로운 정당 건설의 토대를 구축한다.[3] 1997년 8월 민주노총은 전국연합·진보정치연합 등과 함께 ‘민주와 진보를 위한 국민승리21’(국민승리21)을 결성하고, 9월에는 권영길 민주노총 위원장을 대통령 후보로 추대하면서 본격적인 선거운동에 돌입했다. 민주노총의 조직력을 총동원했지만, 권영길 후보는 민주노총 조합원 수보다도 적은 30만 표(1.2%)를 얻는데 그쳤다. 그런데 득표의 많고 적음을 떠나 정말 심각했던 것은 선거운동의 내용이었다. 권영길 후보의 선거운동 전반을 지배했던 것은 몰계급적 애국주의였다. 국민승리21이 내세운 국민후보 권영길의 핵심 슬로건은 ‘일어나라 코리아!’였다. 노동자는 간 데 없고 그 자리를 온통 ‘국민’과 ‘국가’가 채운 것이다. 민주노총 1기 지도부가 표방하고 있던 ‘국민과 함께 하는 노동운동’ 노선의 정치적 표현이었던 이 몰계급적 애국주의는, 마침 IMF 외환위기 앞에서 자본가들이 ‘국가의 생존’을 명분으로 노동자 생존권에 대한 대규모 공격을 퍼부으려던 상황에서 노동자계급의 사상적 무장해제를 스스로 선언하는 것이나 다름없는 매우 심각한 노선이었다. 대통령 선거가 막바지로 치달음과 동시에 IMF 외환위기가 가시화하던 1997년 12월초에 민주노총이 먼저 ‘경제위기 극복을 위한 사회적 합의기구’ 구성을 제안하고 나선 것도, 김대중의 대통령 당선 직후 구성된 노사정위원회를 통해 1998년 2월초 민주노총 지도부가 정리해고 도입에 합의했던 것도 바로 이 몰계급적 애국주의의 연장선에 있었다. 몰계급적 애국주의가 지배하는 선거운동에 당연히 현장으로부터 많은 반발이 올라왔다. 특히 ‘일어나라 코리아!’라는 슬로건의 등장은 현장의 반발에 불을 붙였다. 일부 지역에서는 노동자들이 선거운동 거부를 선언하고 길거리에 나붙은 ‘일어나라 코리아!’ 현수막을 제거하러 다니기도 했다. 대통령 선거가 끝나고 1998년 5월에 민주노총은 대의원대회를 통해 “국민승리21을 확대 재편하여 노동자 중심의 진보정당 건설을 위해 적극 지원·연대한다”고 진보정당 건설 추진을 다시 한 번 결의했다. 그러나 대통령 선거에서의 몰계급적 애국주의에 대한 현장의 반발에 덧붙여 민주노총 1기 지도부가 정리해고 도입을 합의했다가 불신임당한 것 때문에, 국민승리21을 중심으로 추진되던 진보정당 건설 흐름은 상당한 위기에 빠져 있었다. 그런데 1998년 6월 지방선거에서 울산을 중심으로 민주노총 지지 후보들이 상당한 성과를 거두면서 상황이 다시 반전됐다. 1만 명의 정리해고를 강행하겠다는 자본에 맞서 치열한 투쟁을 벌이고 있던 현대차 노동자들을 중심으로 울산 지역의 민주노총 조합원들이 6월 지방선거에서 민주노총 지지 후보들에게 대거 표를 몰아줌으로써 2명의 구청장과 8명의 시·구의원을 당선시킨 것이었다. 노동자들의 조직적인 지원을 받은 후보들이 공직 선거에서 대거 당선된 것은 한국전쟁 이래 최초의 사건이었다. ‘노동자 중심의 진보정당이 한국 정치의 척박한 구조 속에서도 현실적으로 성공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최초로 보여준 것이었다. 여기에 ‘정리해고 반대’를 선거운동 전면에 내걸었고 또 그래서 승리했다는 점은 대통령 선거에서의 몰계급적 애국주의가 야기한 현장의 반발을 어느 정도 누그러뜨리는 결과를 가져왔다. 하지만 국민승리21을 모태로 한 진보정당 건설은 여전히 창당 동력을 충분히 결집시키지 못한 채 주춤거리고 있었다. 이에 다시 민주노총이 1999년 4월 중앙위원회를 통해 ‘진보정당 창당 추진위원회’를 결성하기로 결의하고, 4월 18일과 6월 13일 두 차례 민주노총·전국빈민연합·국민승리21 등을 중심으로 진보정당 창당 추진대회가 개최됨으로써, 비로소 국민승리21을 넘어선 창당 주체가 형성될 수 있었다. 이제 순풍을 타게 된 진보정당 건설 흐름은 이후 8월 29일 ‘(가칭)민주노동당 창당준비위원회’ 결성을 거쳐, 2000년 1월 30일 민주노동당 창당에 이르게 됐다. 그런데 민주노동당 창당에는 개량주의 세력이 창당을 주도했다는 하나의 측면과 1996~97년 총파업과 IMF 외환위기를 거치면서 광범한 노동자들의 정치의식이 성장했다는 또 하나의 측면이 모순적으로 결합돼 있었다. ◎ 개량주의 세력이 주도한 민주노동당 창당 1997년부터 2000년까지 민주노동당 창당 과정을 주도한 것은 명확히 개량주의 세력이었다. 1997년 결성된 국민승리21을 통해 결집한 이들은 다양한 인적 구성을 갖고 있었지만, 그 대표적인 세력은 민주노총의 1기 국민파 지도부와 진보정당추진위원회(진정추) 세력이었다.[4] 권영길 위원장으로 대표되는 민주노총의 1기 국민파 지도부는 1996~97년의 역사적인 총파업에서 심각한 과오를 범했다. 그들은 총파업 투쟁의 실질적인 준비와 공세적인 돌입을 회피했을 뿐만 아니라, 총파업 과정에서도 끊임없이 투쟁의 열기를 가라앉히고 결정적인 순간에 총파업을 중단시켜 버림으로써 역사적인 총파업이 소기의 성과를 얻지 못하고 허망하게 소멸되도록 만든 장본인이었다. 그런데 그들은 총파업이 소기의 성과를 얻지 못한 이유가 “단 한 석의 국회의원도 없었기 때문”이라고 강변했다. 수백 명의 국회의원을 다 합친 것보다도 훨씬 더 강력했던 총파업의 힘을 스스로 무너뜨려 놓고서, 그들은 겨우 “단 한 석의 국회의원”을 거론하며 궤변을 늘어놓았다. 그러나 총파업 이후 권영길 위원장은 국민적 인기를 누리는 유명 스타가 되었다. 비록 소기의 성과를 얻지는 못했지만 총파업이 보여준 위력은 언론과 여론의 시선을 한동안 민주노총에 집중시켰다. 게다가 늘 국민 여론을 고려하며 투쟁의 수위를 낮추고 심지어 결정적인 순간에 총파업을 중단하는 권영길 위원장의 ‘유연한’ 지도력은 부르주아 언론의 구미에 딱 들어맞았다. 부르주아 언론은 연일 그를 최고의 노동운동 지도자라고 칭송했고, 그렇게 해서 그는 대단한 국민적 스타가 되었다. 권영길로 대표되는 민주노총 1기 국민파 지도부는 노동자투쟁을 이끌 지도력은 없었지만 정치적 감각과 판단력만큼은 수준급이었다. 그들은 총파업을 거치며 급격히 높아진 노동자들의 정치의식과 부르주아 언론의 환대를 잘 활용하여 대선 참여와 진보정당 건설이라는 새로운 목표를 제시함으로써, 총파업 실패로 인한 대중의 허탈감을 노동자 정치세력화에 대한 기대감으로 전환시키는 데 성공했다. 여기에 이러한 사태 전개를 하늘이 준 기회로 여기며 진정추 세력이 온 몸을 던져 뛰어들었다. 진정추 세력의 핵심 인물들은 1996년 4월 총선을 앞두고 노무현이 주도하는 꼬마 민주당에까지 합류해 들어갔다가 총선 이후 파탄지경에 빠져 있었다. 1991년 한국 사회주의 운동의 최대 조직이었던 한사노창준위를 건설했다가 소련 붕괴 직후 사회민주주의 노선으로 전환했던 이들은 1992년의 진정추와 1995년의 진보정치연합(진정련)을 거치면서 점점 더 우경화돼 1996년 총선에서는 사회민주주의 노선조차 견지하지 못하고 자유주의 부르주아 정치세력의 품안에 뛰어든 것이었다. 우경화를 거듭하며 노동자계급을 머릿속에서 지워버렸던 이들은, 그러나 총파업을 통해 노동자계급의 위대한 힘을 목도하게 되자, 언제 그랬냐는 듯이 다시 노동자 정치세력화를 외치는 사회민주주의자로 돌아왔다. 그런데 1987년과 1992년 대통령 선거에서의 민중후보 운동부터 시작해서 민중당·한국노동당·진정추·진정련·개혁신당·민주당을 거치며 풍부한 실전 경험을 확보한 그들의 뛰어난 정치기술은, 대선 참여와 진보정당 건설을 선언한 민주노총 1기 국민파 지도부에게도 더없이 필요한 것이었다. 그렇게 해서 그 두 세력 간에 강고한 정치적 연합이 이루어졌다. 이들을 중심으로 개량주의 세력 전반이 민주노동당 창당에 적극 참여하며 주도적 역할을 했다. 1990년대 중반을 지나며 형성된 그들의 개량주의적 환상은 IMF 외환위기 아래 파상적으로 전개되는 신자유주의 공세 앞에서도 오히려 더욱 고착되는 경향을 보이고 있었다. 개량주의자들은 여전히 정권과 자본에 맞선 치열하고 공세적인 노동자투쟁이 아니라 제도적 타협에 의한 점진적 개량을 간절히 소망했고, 그들에게 ‘노동자 정치세력화’는 그런 제도적 타협의 길로 들어서기 위한 주요한 수단이었다.[5] 국민승리21, 국민후보, ‘일어나라 코리아’ 등으로 대표되는, 1997년 대통령 선거에서의 몰계급적 애국주의는 민주노동당 창당을 주도한 개량주의 세력이 가진 사상과 노선의 실체를 유감없이 드러낸 것이었다. 그것은 정확히 따져 보자면 사회민주주의에도 못 미치는 수준이었다. 그들이 너무나 사랑했던 ‘국민’이라는 용어는 원래 ‘황국신민(皇國臣民)’의 줄임말로 일제강점기 일본 제국주의자들이 조선 민족을 포섭하여 대동아 전쟁으로 내몰기 위해 사용한 용어였다. 이처럼 국민이라는 용어에 담긴 친일성과 군국주의에 대한 문제제기가 진보적 민족주의자들을 중심으로 꾸준히 지속됐고, 그래서 1995년 8월 김영삼 정권이 광복 50주년을 기념하여 일제 잔재를 청산한다며 1941년부터 사용돼 온 ‘국민학교’라는 초등교육기관의 명칭을 ‘초등학교’로 바꾼 바 있었다. 그런 점에서 1995년 11월 출범한 민주노총의 1기 지도부가 표방한 ‘국민과 함께 하는 노동운동’이나 1997년 대통령 선거에서의 ‘국민승리’ ‘국민후보’ 등의 용어는 몰계급적일 뿐만 아니라 진보적 민족주의보다도 못한 지극히 후진적이고 보수적인 것이었다. 그러므로 이들 개량주의 세력의 창당 열망과 주도력만으로는 민주노동당은 결코 창당에 이르지 못했거나 창당했더라도 민주노총의 조직적 지원에 힘입은 대중적 기반을 확보하지 못했을 것이다. 실제로 이들 개량주의 세력의 개량주의적·사회민주주의적·애국주의적 환상은 IMF 외환위기라는 객관적 조건과도 너무나 어울리지 않았기에, 만일 그러한 노선만으로 일관되게 나아갔다면 얼마 못가서 노동자들 속에서 차갑게 외면당하고 말았을 것이다. ◎ 광범한 노동자들의 정치의식 성장 민주노동당이 노동자들 속에서 상당한 대중적 기반을 확보하며 창당될 수 있었던 것은 1996~97년 총파업과 IMF 외환위기를 거치면서 광범한 노동자들의 정치의식이 성장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이 정치의식은 주로 노동자계급의 정체성과 잠재력에 대한 자각에 근거한 것이었으며, 근본적인 사회변혁에 대한 지향은 불투명한 것이었다. 그런 점에서 1990년대 후반에 광범한 노동자들 속에 확산된 이 정치의식은 1990년대 초반에 전노협을 중심으로 한 민주노조 조합원들이 갖고 있었던 정치의식, 즉 ‘천만 노동자 총단결로 노동해방 앞당기자’는 구호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정도로 변혁적 지향성이 강했던 그 정치의식보다는 수준이 낮은 것이었다. 하지만 1990년대 초반의 ‘변혁적’ 정치의식이 전노협을 중심으로 한 민주노조 조합원들 위주로 형성되었던 것과 달리, 1990년대 후반의 ‘계급적’ 정치의식은 광범한 노동자들 속에 형성된 것이었다. 광범한 노동자들 속에서 계급적 정치의식이 확산되게 만든 결정적인 계기는 1996~97년 총파업이었다. 김영삼 정권의 날치기 노동법 개악에 맞선 1996~97년 총파업은 비록 승리하지 못했지만 광범한 노동자들 속에서 노동자계급의 잠재력을 자각하게 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1987년 노동자대투쟁 때에도 노동자계급의 잠재력에 대한 대중적 각성의 기회가 있었지만, 전반적인 대중의식이 너무 초보적이었던 탓에 전노협을 중심으로 한 민주노조 조합원들을 제외하고는 그 경험이 거의 유실돼 버렸다. 그러나 1987년 노동자대투쟁 이후 10여 년에 걸친 민주노조운동의 역사를 거치면서 전반적인 대중의식이 일정하게 성장해 온데다가 한 달 가까이 조직적인 총파업이 갖는 위력을 경험함으로써 민주노조운동에 포괄되지 않은 노동자들 속에서조차 노동자계급의 잠재력에 대한 광범한 자각이 일어나게 된 것이었다. 여기에 김대중이 이끄는 보수야당이 노동법 재개정 협상에서 애초의 날치기 노동법과 별로 다르지 않은 결과를 만들어 낸 것은 보수야당의 계급적 실체에 대한 광범한 각성을 불러왔다. 또한 이후 IMF 외환위기와 자본가들의 신자유주의 공세를 맞닥뜨린 것은 정권과 자본의 공세에 저항하기 위해 노동자계급의 단결력을 극대화해야 한다는 계급적 방어본능을 광범한 노동자들 속에 불러 일으켰다. 그런데 계급적 자각은 있으나 변혁적 지향은 갖추지 못한 이 정치의식, 과학적 신념보다는 계급적 본능이 주도하는 이 정치의식은 양면적 가능성을 갖고 있었다. 한편으로 변혁적 지향을 분명히 하지 못하고 개량주의적 환상에 이끌려 다닐 위험성을 갖고 있다면, 다른 한편으로 실천적 검증을 통해 노동자계급에게 도움이 되는 길과 해악이 되는 길을 뚜렷하게 구분해 낼 수 있는 계급적 직관력을 발휘할 가능성 또한 갖고 있었다. 따라서 이 양면적인 계급적 정치의식은 광범한 노동자들이 선거에서 집단투표에 나서는 것을 기본으로 하되, 어떤 정치적 방향으로 이끌리는가에 따라 집단투표가 최대의 실천이 되게 할 수도 있고 대중적 정치투쟁으로 나아가는 출발점이 되게 할 수도 있는 양면적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었다. 어쨌든 광범한 노동자들 속에 확산된 이 계급적 정치의식은 자연스럽게 노동자를 대표하는 정당의 출현을 요구하고 기대하는 열망으로 모아졌다. 광범한 노동자들에게 ‘노동자 정치세력화’라는 용어는 바로 그 열망을 표현하는 수단이었다. 그 열망은 1997년 대통령 선거에서 민족해방파로 하여금 더 이상 김대중에 대한 비판적 지지를 노골적으로는 지속할 수 없도록 만들었다. 그리고 그 열망을 가장 먼저 위력적으로 표출시킨 것은 1998년 6월 지방선거에서 민주노총이 내세운 후보들에게 그 면면과 실체를 따지지 않고 압도적인 지지를 보낸 울산지역 노동자들이었다. 1998년 무렵의 선거에서 노동자 대중이 폭발적인 열기로 진보 정치세력을 지지했던 것은 무엇보다 민주노조운동에 대한 신뢰, 그리고 민주노조운동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고 인식한 진보 정치세력에 대한 신뢰 때문이었다. IMF 경제공황이 몰고 온 생존권 위협에 대한 절박한 위기의식도 상당한 작용을 했지만, “정리해고 저지”로 요약되는 민주노조운동과 진보 정치세력의 약속을 굳게 믿었기 때문에, 절박한 위기의식이 진보정치에 대한 폭발적 지지로 연결되는 것도 가능했던 것이다. 당시의 선거들에서 수많은 노동자대중은 나름대로 확신과 자신감을 갖고 누가 특별히 시키지 않아도 스스로 가족과 주변의 이웃·친지들을 설득하고 조직하러 다녔다. 현장의 분위기는 진보 정치세력에 대한 압도적 지지로 자연스럽게 결집되었고, 온갖 수로를 통해 작동하는 밑바닥 노동자들의 설득구조는 지역의 분위기 또한 확연히 휘어잡았다.[6] 이처럼 민주노동당은 개량주의 세력의 주도성과 노동자들의 계급적 정치의식 성장이라는 양 측면이 서로 모순적으로 결합하고 작용하는 과정을 거치며 창당에 이르게 됐다. 2) 민주노동당의 약진과 추락 IMF 외환위기 이후 극심한 사회 양극화로 표현된 자본주의 모순의 심화는 짧은 시간 동안 민주노동당의 약진과 추락을 차례로 만들어 냈다. 자본주의 모순의 심화로 울부짖는 노동자·민중의 요구를 결집하고 분출시킬 정치적 주체에 대한 노동자·민중의 갈망은 민주노동당의 눈부신 약진을 불러왔다. 그러나 그에 대한 의지와 능력이 없음을 알아챈 노동자·민중의 실망은 다시 민주노동당을 빠르게 추락시켜 버렸다. ◎ 민주노동당의 약진 민주노동당의 약진은 2002년 6월 지방선거에서부터 시작됐다. 창당 직후 치러진 2000년 4·13 총선에서는 울산 북구와 창원을 선거구에서 접전을 벌이기도 했고, 2001년까지 치러진 각종 보궐선거들에서 이따금 선전하기도 했지만, 민주노동당의 약진은 좀처럼 뚜렷하게 가시화되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2002년 6·13 지방선거에서 민주노동당은 2명의 구청장을 포함한 45명의 당선자를 냈다. 특히 정당명부 비례대표 선거에서 전국적으로 134만여 표(8.1%)를 얻은 것은 약진의 본격적인 신호탄이었다. 2002년 12월 대통령 선거에 1997년에 이어 다시 출마한 민주노동당 권영길 후보는 민주당 노무현 후보와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의 막판 대접전 속에서도 96만 표(3.9%)를 얻으면서 1997년 대통령 선거 때의 30만 표(1.2%)에 비해 괄목할 만한 성장을 확인하며 약진의 흐름을 이어갔다. 민주노동당의 약진이 최고조에 오른 것은 2004년 4·11 총선 때였다. 민주노동당은 정당명부 비례대표 선거에서 277만 표(13.0%)를 얻으며 단번에 제3당으로 튀어 올랐다. 울산 북구와 창원을 2개의 선거구에서 지역구 당선자를 내고 8명을 비례대표에 당선시켜 10명의 국회의원을 배출함으로써, 민주노동당은 한국전쟁 이래 최초로 국회의원을 배출한, 그것도 한꺼번에 10명이나 배출한 노동자정당이 됐다. 총선에서의 약진은 민주노동당의 주가를 한껏 끌어올렸고, 총선 직후 몇 달 동안은 여론조사 지지율이 20%를 넘어서기까지 했다. 바야흐로 민주노동당의 전성시대가 활짝 열린 셈이었다. ◎ 민주노동당의 추락 그러나 민주노동당의 약진은 그리 오래 가지 못했다. 조승수 의원이 선거법 위반 대법원 판결로 국회의원직을 상실하면서 치러지게 된 2005년 10·26 울산 북구 재선거에서 정갑득 후보를 내세운 민주노동당은 당력을 총집중하였으나 한나라당 후보에게 패배했다. 민주노동당 입장에서 전국 최고의 아성인 울산 북구에서 당력을 총집중하고도 1천 800여 표(3.6%) 차이로 결국 패배한 것은 2004년 4·11 총선 이후 한껏 들떠 있던 민주노동당에게 큰 충격을 안겨 주었다. 10·26 재선거 패배로 충격에 빠진 민주노동당은 그에 대한 책임을 지고 대표를 포함한 최고위원회가 총사퇴해야 했다. 하지만 민주노동당의 추락은 이제 시작일 뿐이었다. 2006년 5·31 지방선거는 민주노동당이 이제 구조적인 위기에 빠져 들었음을 보여주었다. 물론 5·31 지방선거에서 민주노동당이 일방적인 후퇴만을 드러낸 것은 아니었다. 당선자 수가 2002년의 45명에서 81명으로 늘었고, 정당명부 비례대표 선거에서도 210만여 표(12.1%)를 얻으며 2004년 총선 때에 비해 약간 후퇴하는 정도를 기록했다. 그러나 수치만으로는 잘 드러나지 않는 중요한 사실이 있었다. 2006년 5월 지방선거는 한국 정치 역사상 가장 충격적인 결과를 만들어 낸 선거였다. 서울·경기·인천의 광역의원 선거구 234곳에서 한나라당이 100% 당선되는 등, 집권당인 열린우리당의 상상하기 힘든 참패와 한나라당의 압도적인 대승이 너무나 뚜렷이 대비되는 선거였다. 특히 2004년 4월 총선에서 열린우리당이 과반수를 장악했던 것을 놓고 보면 겨우 2년 사이에 한국 정치 지형에 엄청난 변화가 일어났음을 보여주는 선거였다. 5·31 지방선거 결과는 대통령 노무현을 정점으로 하는 열린우리당에 대한 노동자 민중의 심판이었다.[7] 특히 2002년 대선과 2004년 총선에서 노무현과 열린우리당에게 엄청난 기대와 지지를 보내 주었으나 신자유주의 정책으로 일관함으로써 사상 최악의 사회 양극화라는 참혹한 결과를 안긴 데 대한 준엄한 심판이었다. 그런데 심각한 사회 양극화를 초래한 열린우리당에 대한 심판은 민주노동당 같은 노동자 정당의 약진으로 나타난 것이 아니라 또 하나의 자본가정당이며 오히려 더욱 보수적인 한나라당의 압승으로 귀결됐다. 사상 최악의 사회 양극화라는, 즉 어느 때보다 노동자정당의 정치적 기반이 강력하게 확대될 수 있는 사회적 조건 아래 치러진 선거에서, 또한 계급적 문제를 주된 이슈로 하여 한국 정치 역사상 가장 역동적인 지형 변화가 일어난 선거에서, 오히려 민주노동당은 정치적 성장에 결정적인 제동이 걸리는 모순적인 상황이 펼쳐진 것이었다. 게다가 선거 결과를 세밀하게 살펴보면 그 의미는 더욱 심각했다. 그동안 민주노동당이 취약했던 여러 지역에서 2002~04년의 전반적 약진이 뒤늦게 반영된 것과 달리, 민주노동당의 가장 강력한 기반인 울산에서는 8년 동안 장악했던 북구·동구 두 곳의 구청장 선거에서 모두 패배하는 등 오히려 노동자들의 지지가 축소됐다. 즉 약진했던 과거와 추락하는 미래의 모순적인 결합이 외관상의 현상유지로 나타났던 것이다. 민주노동당의 추락은 2007년 대통령 선거에서 더욱 가속됐다. 세 번째 출마한 권영길 후보는 300만 표를 운운하던 목표치와 달리 71만 표(3.0%)를 얻는 데 그침으로써 2002년 대통령 선거의 96만 표(3.9%)보다 오히려 후퇴했다. 그런데 저조한 득표보다 훨씬 더 심각했던 것은 선거를 치르면서 노동자정치의 최소 원칙마저 저버린 점이었다. 9월 20일 권영길 후보가 중소기업협동조합중앙회를 방문해서 중앙회 임원들과 “시종일관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간담회를 진행했다. 여기서 권영길 후보는 “중소기업인 여러분께 항상 존경하는 마음을 가져 왔으며 감사의 인사를 드린다”고 했다. 또한 “민주노동당과 중소기업이 동지적 관계를 가지기를 원한다”고 했다. 민주노동당은 중소기업 자본가들의 동지이면서 동시에 중소기업 노동자들의 동지가 될 수 있다는 말인가? 10월 15일 민주노동당 문성현 대표가 한국노총에 보내는 공식 사과문을 김선동 사무총장을 통해 전달했다. 2006년 9월 11일 한국노총이 ‘노사관계 로드맵’ 노사정 야합에 참여한 것을 놓고 문성현 대표가 “한국노총은 이제 노동자의 이름을 버려야 한다”고 했던 발언을 사과한 것이었다. 민주노동당의 사과는 한국노총이 정책연대 대상후보에 민주노동당을 포함시키는 전제 조건으로 사과를 요구했기 때문이었다. 한국노총이 10월 8일자로 사과요구 공문을 보내 16일까지 회신하라고 하자 15일 직접 찾아가서 사과 공문을 전달했다. 한마디로 말해 ‘표’를 얻으려고 민주노동당은 어용 한국노총의 발밑에 납작 엎드렸다. 민주노동당의 2007년 대선 참패는 그 본질을 스스로 만천하에 까발리는 기폭제가 됐다. 대선 참패 이후 민주노동당은 시끌벅적한 책임 공방을 벌였지만, 자본주의 모순의 심화로 절규하는 노동자들의 정치적 열망을 배신한 데 대한 어떤 진지한 반성도 찾아볼 수 없었다. 노동자들의 정치적 열망을 똑같이 배신한 자주파(민족주의)와 평등파(사회민주주의) 사이에 반성 없는 추악한 패권 다툼만이 계속됐을 뿐이었다. 민주노동당이 개량주의와 의회주의의 길을 걸음으로써 노동자들의 정치적 열망을 배신했던 것은 자주파만의 책임이 아니었다. 대선 참패 이후 목소리를 높인 평등파 또한 개량주의와 의회주의를 주도했던 또 하나의 주역이었다. 대선 참패 이후 평등파가 민주노동당을 집단 탈당하여 진보신당을 창당했지만, 노골적으로 개량주의와 의회주의를 주창한다는 점에서는 다를 게 하나도 없었다. 자주파와 평등파는 자본주의 모순의 심화로 절규하는 노동자들의 정치적 열망을 정면으로 배신한다는 점에서 동전의 양면일 따름이었다. 대선 참패와 반성 없는 추악한 패권 다툼 속에서 민주노동당의 위상은 결정적으로 추락했다. 한동안 민주노동당은 노동자들의 정치적 열망을 개량주의와 의회주의라는 잘못된 길로 이끌면서도 마치 노동자 정치세력화의 유력한 희망인 듯 행세했다. 그것은 1987년 노동자대투쟁과 1996~97년 노개투 총파업을 거치며 성장해 온 노동자대중의 정치적 열망을 민주노동당이 상당 부분 흡수해 낸 까닭이었다. 그러나 그동안 민주노동당에 참여하거나 지지했던 수많은 노동자들이 2007년 대선 이후 민주노동당을 박차고 나오거나 지지를 거둬들였다. 10년 가까이 민주노동당이 노동자 정치세력화의 유력한 대안인 것처럼 행세하던 시대는 그렇게 끝났다. ◎ 민주노동당은 왜 추락했나? 사상 최악의 사회 양극화를 불러온 노무현 정권에 대한 노동자·민중의 분노가 한나라당의 압도적인 승리와 이명박의 집권으로 귀결되는 과정에서 민주노동당이 약진하기는커녕 오히려 추락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단적으로 말해서 민주노동당에 대한 노동자·민중의 실망, 즉 자본주의 모순의 심화로 울부짖는 자신들의 요구를 앞장서 결집하고 분출시킬 의지와 능력을 민주노동당이 갖고 있지 않다고 판단하게 된 노동자·민중의 실망 때문이었다. 그러한 노동자·민중의 실망은 민주노동당을 압도적으로 장악하고 있던 사회민주주의·민족주의 노선의 개량주의적이고 의회주의적인 한계로부터 필연적으로 야기된 것이었다. 개량주의 세력의 주도로 창당되고 그 주도권이 날로 강화된 민주노동당은, 자본가들의 신자유주의 공세에 정면으로 맞서는 노동자정치투쟁 전선을 앞장서 구축해내는 역할을 철저히 거부했다. 특히 민주노동당은 1996년 이후 자본가들의 신자유주의 대공세의 핵심이 정리해고·비정규직 제도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정리해고·비정규직 제도의 철폐를 내건 역동적인 대중정치투쟁을 조직하려는 어떤 노력도 하지 않았다. 반면에 민주노동당은 노동자 정치세력화를 온갖 개량주의·의회주의 환상 속에 가두어 버렸고, 광범한 노동자들의 성장하는 계급적 정치의식을 그저 선거에서의 집단투표로 제한시켜 버림으로써 그 진정한 분출과 성장을 오히려 가로막았다. 한동안 민주노동당은 노동자·민중에게 극심한 사회 양극화를 앞장서 해결할 신선한 정치적 대안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었고 그러한 기대는 지지율의 급격한 상승으로 연결됐다. 하지만 민주노동당의 개량주의적·의회주의적 접근은 오히려 의미 있는 사회적 변화를 전혀 만들어 내지 못하는 무능함만을 노동자·민중에게 보여주게 됐고, 심지어는 자본가 정치세력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는 극심한 배신감마저 들게 만들었다. 이를테면 부유세, 무상의료·무상교육, 비정규직 권리보장 입법 등 민주노동당이 신자유주의 공세에 맞서 제출했던 나름의 대안적 전망들은 한때 민주노동당의 약진을 뒷받침하는 데 상당한 역할을 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민주노동당의 핵심의제에서 아예 사라져 버리거나 또는 스스로 후퇴를 거듭하면서 누더기가 돼 버렸다. 2004년 총선에서 민주노동당이 국회의원 10명을 당선시킬 때, 민주노동당은 무상의료·무상교육과 부유세를 성공적으로 쟁점화했다. 민주노동당이 내건 무상의료·무상교육은 광범한 노동자·민중에게 큰 호응을 받았다. IMF 외환위기 이후 수많은 노동자·민중이 경쟁력과 효율성의 논리에 밀려 삶이 파괴당했다. 그보다 더 많은 노동자·민중이 최소한의 생존조건도 보장되지 않는 ‘불가피한 희생자’로 내밀리지 않으려고 발버둥을 쳐야 했다. 그런 상황에서 무상의료·무상교육은 가뭄에 단비와도 같은 희망으로 다가왔다. 무상의료·무상교육의 재원을 마련하겠다며 부유세를 내건 것도 큰 호응을 받았다. 어차피 노동자·민중이 더 낼 수 있는 돈도 없었다. IMF 외환위기를 겪으며 수많은 노동자·민중의 삶이 파괴될 때, 가진 자들의 재산이 엄청나게 불어났다는 사실도 모두가 알고 있었다. 무상의료·무상교육과 부유세는 한국 정치의 향방을 가르는 쟁점으로 부상할 가능성을 충분히 갖고 있었다. 그러나 민주노동당은 자신이 던진 이 쟁점을 감당할 능력이 전혀 안 됐다. 무엇보다도 민주노동당의 개량주의 노선 그 자체가 근본적인 걸림돌이었다. 민주노동당에게는 지지율을 올리고 그래서 국회의원 수를 늘리는 게 최고의 가치였다. 그런 민주노동당에게 무상의료·무상교육과 부유세가 부메랑이 돼 돌아왔다. 자본가계급이 보수언론을 동원해서 무상의료·무상교육과 부유세에 붉은 이미지를 덧씌우며 집요하게 공격하고 나선 것이다. 온건한 이미지를 지키려고 애를 쓰던 민주노동당은 무상의료·무상교육과 부유세를 구체화하는 과정에서 급진적 성격을 최대한 제거해 나갔다. 결국 민주노동당의 무상의료·무상교육과 부유세는 여의주 없는 용이 되고 말았다. 자본의 이윤추구를 절대시하는 자본주의 원리에 정면 도전하지 않으면서, 제대로 된 무상의료·무상교육과 부유세를 도입할 방법은 없었다. 구체화의 과정에서 그 내용이 현저히 약화되자, 무상의료·무상교육과 부유세 자체가 광범한 노동자·민중의 관심으로부터 멀어져 갔다. 정치적 쟁점으로서의 긴장감 또한 사라졌다. 핵심 쟁점을 스스로 포기하면서, 민주노동당의 정치는 정처 없이 표류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2005~06년을 거치며 한국 정치는 일찍이 겪지 못했던 거대한 소용돌이에 휩쓸리고 있었다. IMF 외환위기 이후 견딜 수 없는 삶의 고통과 긴장이 계속되자, 광범한 노동자·민중의 분노가 거대하게 축적됐다. 그 분노는 2006년 5·31 지방선거에서 폭발했다. 노동자·민중은 삶의 고통에 대한 책임을 노무현 정권에게 물었다. 집권여당인 열린우리당은 서울·인천·경기의 수도권 세 지역에서 지역구 광역의원을 단 한 명도 당선시키지 못했다. 한국 정치 역사상 유례를 찾을 수 없을 정도로 충격적인 참패였다. 그런데 신자유주의 정책의 집행자 노무현 정권을 심판하면서 노동자·민중이 선택한 새로운 희망은 민주노동당이 아니라 한나라당이었다. 노동자·민중에게 민주노동당은 노무현 정권에 가장 철저하게 맞서는 대안이 아니라, 그 아류로 인식됐다. 심지어 민주노동당 스스로도 그렇게 행동했다. 사회 양극화를 심화시킨 주범으로서 노무현 정권과 열린우리당에 대한 노동자·민중의 분노가 왜 5·31 선거에서는 민주노동당의 약진과 병행되지 않은 채 한나라당의 일방적 승리로 귀결된 것일까? 그 원인은 거의 전적으로 민주노동당 스스로에게 있다. 신자유주의 집행자, 노무현 정권과 열린우리당에 대한 노동자·민중의 분노 앞에서 새로운 전망을 제시하는 대안 주체로 다가서지 못했을 뿐 아니라 심지어 열린우리당과의 차별성을 스스로 애써 부정하기까지 한 까닭이다. … 민주노동당이 선거 기간 중 발표한 ‘진보개혁세력 대표주자 교체론’은 그 전형적 사례다. 열린우리당의 신자유주의 정책이 대다수 노동자·민중을 삶의 벼랑 끝으로 밀어붙이고 있으며 그로 인해 누적된 대중의 분노가 하늘을 찌르려 하는 이 심각한 정세에서, 신자유주의 집행자 열린우리당에 맞선 대중적 항쟁의 주도자로 나서야 할 진보정당이 오히려 ‘진보개혁세력’이라는 범주를 통해 “민주노동당은 결국 열린우리당과 한 묶음”이라고 자기 정체성을 천명한 것이다. 한나라당 서울시장 후보로 오세훈이 전격 등장하는 과정이 상징하듯이, 사회경제적 문제를 담아내지 못하는 형식적인 민주주의와 개혁은 현 시점의 한국 정치에서 이미 주된 쟁점이 아니다. 따라서 열린우리당의 신자유주의를 일정하게 비판한다 하더라도 진보개혁세력이라는 낡은 규정과 어법 속에 빠져 있는 한, 민주노동당은 결코 사회 양극화 속에 절망하고 있는 노동자·민중과 진정어린 상호소통을 확장해 갈 수 없었던 것이다. 문제가 더욱 심각한 것은, 이러한 정체성 혼란이 우발적인 실수가 아니라는 점이다. 2004년 12월에도 국가보안법 철폐 투쟁을 둘러싸고 ‘열린우리당 2중대’ 논란이 벌어졌으며, 국회에서 비정규직법을 둘러싼 치열한 대치가 지속되고 있음에도 열린우리당과의 공조가 수차례 거듭되어 왔기 때문이다. … 2002~04년 민주노동당의 약진을 가능케 했던 … 대중적 약속들이 그동안 민주노동당 내에서 어떻게 취급되어 왔는가? 부유세와 무상의료·무상교육은 어느덧 당의 핵심 의제에서 사실상 사라져 버렸고, 비정규직 권리보장 입법안은 비정규직 법안 처리 공방 속에서 스스로 후퇴를 거듭하면서 반쯤 누더기가 되어버린 것이 냉정한 현실 아닌가! 중간층 눈치 보기와 물타기로 점철된 정책의 구체화 과정, 아래로부터 대중 동력을 형성해 오는 집요한 노력의 부재, 아니 그 이전에 대중과의 약속을 지키겠다는 확고한 의지 자체의 결여 등등. 그 원인을 어떻게 설명하든, 이전에 민주노동당이 가장 그럴싸하게 내걸었던 대중적 약속들은 그간의 과정을 거치며 사실상 공수표가 되어 버린 것이다.[8] 05년에는 비정규직 법 민주노동당 수정안, 그리고 06년에는 로드맵 열우당 수정안 야합. 단병호 의원이 국회에서 원칙을 훼손했던 사례들이다. 하필이면 공교롭게도 날짜가 둘 다 똑같이 12월 8일이다. 05년 비정규직 법 민주노동당 수정안의 경우, 노무현 정권의 비정규직 법 개악 저지 투쟁에서 전선을 교란시켰다. 당시에 사유제한을 확대한 수정안은 추후 개악 시에는 결과적으로 개악에 일정정도 동참한 꼴이 될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 투쟁전선에서 투쟁하고 있는 주체들의 사기를 꺾게 되어, 결국 그 어떤 명분도 실리도 잃어버리는 것이었다. 06년 이번 로드맵 야합의 경우에는, 전선을 교란했을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 환노위 전체회의에서 로드맵 법안 통과에 실질적으로 동의한 것이었고 그 과정에서 자본가계급과 야합이 있었다. 그 결과 06년 투쟁을 패배했어도 아주 굴욕적으로 패배하게 만들었다. 이로써 단병호 의원은 노동자정당에서 국회에 파견한 노동자의원으로서 의회에서 자본가계급과 투쟁하기보다는, 자본가계급과 노동자계급 사이에서 관리자로서 역할을 하고 말았다. 의회주의에 철저히 물들었다고밖에 달리 설명할 길이 없다.[9] 결국 민주노동당의 추락은 자본주의 모순의 심화로 벼랑 끝에 내몰린 노동자들에게 개량주의적이고 의회주의적인 허상만을 제시할 뿐 노동자들을 당당한 투쟁의 주체로 일으켜 세우지 못했던 민주노동당 스스로가 자초한 것이었다. 민주노동당은 자본주의 모순의 심화로 울부짖는 노동자들을 자본가들의 총공세에 맞서 현장과 거리에서의 직접적인 정치투쟁 전선으로 이끌어 내려는 어떤 진지한 시도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노조관료들을 기반으로 개량주의와 의회주의에 철저히 매몰되면서 신자유주의 집행자 노무현 정권의 2중대 역할만을 수행할 뿐이었다. 따라서 민주노동당은 노무현 정권에 대한 노동자·민중의 분노를 앞장서 모아내고 분출하는 주체가 되기는커녕 오히려 노무현 정권과 한 묶음으로 노동자·민중에게 심판당하는 처지가 되고 말았던 것이다. 3) 역사적 가설 ‘노동자 정치세력화를 향한 대중적 열망’으로 뒷받침된 민주노동당이 개량주의 정당으로 고착된 것은, 창당 초기부터 개량주의 세력이 주도권을 장악한 때문이었다. 이것은 악순환을 낳았다. 민주노동당의 개량주의 성격이 노골화할수록 민주노조운동 내부의 타협적·관료적 인물들이 출세의 욕망을 품고 물밀 듯이 민주노동당으로 밀려들어 갔다. 반면 전투적·변혁적 선진노동자들은 점점 더 민주노동당과 거리를 두었다. 그렇게 해서 민주노동당은 개량주의 정당으로 빠르게 고착돼 갔다. 전투적·변혁적 선진노동자들은 노동자 정치세력화에 대한 열망이 강했지만 초기부터 다수가 민주노동당에 참여하지 않았다. 한편으로는 개량주의 주도세력에 대한 거부감 때문이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민주노동당이 노동자계급의 정치적 전진에 기여하도록 활용할 방안에 대한 전망 부재 때문이었다. 전투적·변혁적 선진노동자들이 사실상 참여하지 않으면서 민주노동당이 노동자계급의 정치적 전진에 기여할 가능성은 사라졌다. 그런데 민주노동당이 노동자계급의 정치적 전진에 기여할 길은 애초부터 없었을까? 개량주의 세력에게서 주도권을 빼앗아, 사회주의자들과 전투적·변혁적 선진노동자들이 민주노동당으로 모여든 ‘노동자 정치세력화를 향한 대중적 열망’을 틀어쥘 길은 없었을까? 민주노동당이 역사적 의의를 갖기 위해서는 민주노동당보다 앞선 지점에서 문제가 바로잡혀야 했다. 만일 전투적·변혁적 선진노동자들이 1990년대 초중반 민주노조운동 내부 노선투쟁에서 승리하고 주도권을 장악했다면, 그리고 민주노동당의 역사적 의의를 해명하면서 올바로 활용할 전망을 세울 수 있었다면, 많은 것이 달라졌을 수 있다. 1996~97년 총파업은 훨씬 더 성공적인 투쟁이 될 수 있었고, 민주노동당은 제대로 된 노동자계급정당으로 형성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 그 시기에는 매우 쉽지 않은 일이었다. 1990년대 초중반을 거치면서 민주노조운동의 주도권이 전투적·변혁적 세력에게서 타협·개량주의 세력에게로 이동한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그 배경에는 소련 붕괴라는 세계사적 사건이 몰고 온 극심한 사상적 혼란이 놓여 있었다. 그 시절 거대한 청산주의 물결을 거부하고 간신히 살아남은 극소수 사회주의자들은 사상적·실천적 전망을 근본에서부터 하나씩 다시 세워가야 했다. 또한 선진노동자들은 총체적 전망과 연결되지 못한 막막함 속에서도 전투적·변혁적 지향을 포기하지 않으려 고군분투하고 있었다. 4) 대안 지도력으로 서지 못한 사회주의 세력 1987년 노동자대투쟁 이후 폭발적으로 성장한 한국의 노동자운동은 세계에서 가장 악랄하게 노동자들을 착취하고 억압하던 한국의 자본가들에게 적지 않은 양보를 강제해 냈다. 1990년대 중반까지 자본가들은 노동자운동에 대한 탄압을 계속 퍼부으면서도 노동자들의 끈질긴 투쟁력에 밀려 경제적으로는 상당한 양보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IMF 외환위기를 계기로 한국 자본주의가 충격적으로 위기에 내몰리면서부터 자본가들의 태도는 완연히 바뀌었다. 자본가들이 정리해고를 앞세워 무자비하게 신자유주의 대공세를 펼치자, 노동자들은 1990년대 중반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매우 치열하게 투쟁으로 맞섰다. 정리해고 법제화에 맞섰던 1996-97년 총파업, 정리해고에 맞섰던 1998년 현대차·만도기계 파업, 1999년 한라중공업 파업, 2001년 대우차·효성·태광 파업, 발전소를 비롯한 국가기간산업 사유화(민영화)에 맞섰던 2002년 발전 파업은 이 시기의 가장 대표적인 투쟁이었다. 특히 대기업 정규직이 주를 이뤘던 그러한 투쟁들 속에서, 노동자들은 자본의 당면한 공세를 물리치는 것만이 아니라 노동자의 세상을 향한 거침없는 전진을 노래하고 희망했다. 그러나 그 투쟁들은 줄줄이 패배했다. 노동자들은 생존과 권리를 지키려는 강렬한 열망을 행동으로 보여주었지만, 지도부의 투항과 배신을 이겨내지 못하고 투쟁 전열이 무너지면서 결국 패배하는 양상이 거듭해서 되풀이됐다. 1990년대 중반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퍼부어진 자본가들의 신자유주의 대공세는 노동자들에게, 특히 그 지도부에게 이전보다 훨씬 더 큰 용기와 시야, 대담한 전망과 자신감을 요구했다. 나라와 기업의 운명이 경각에 달렸다는 논리로 노동자들에게 희생을 강요하는 것에 맞서, 노동자들의 생존권은 어떤 경우에도 내줄 수 없으며 더 이상 당신들이 우리의 생존권을 책임질 수 없다면 이제 노동자가 나라와 기업을 이끌고 가겠다는 대담한 의지와 자신감이 필요했다. 그러나 그 시절 민주노조운동의 지도부는 전반적으로 엄혹한 사태를 헤치고 나갈 역량을 갖추지 못했으며, 결국 노동자들의 열망을 책임지지 못하고 자본가들에게 투항하며 배신할 수밖에 없었다. 1996~97년 총파업 이후 2000년대 초반까지 자본가들의 신자유주의 대공세가 펼쳐진 이 시기는 만일 노동자들이 전열을 추슬러 총반격에 나설 수 있었다면 자본의 공격으로부터 노동자의 생존권을 지켜낼 뿐만 아니라 오히려 노동자운동의 거대한 성장과 사회변혁을 향한 힘찬 전진으로 나아갈 수도 있는 가능성을 가진 시기였다. 노동자들은 역사적인 1996~97년 총파업에서 그리고 이후에도 몇 차례 역동적인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노동자들은 이러한 역동적 가능성을 제대로 펼쳐내지 못하고 타협·개량주의 세력의 지도력에 갇혀 거듭되는 투항적 배신에 좌절하며 패배를 되풀이하고 말았다. 노동자들의 역동적인 가능성이 힘차게 뻗어나가려면 타협·개량주의 지도력과 달리 전투적·변혁적 전망과 기세를 극대화한 대안 지도력을 중심으로 자본가들의 신자유주의 공세에 정면으로 맞서는 강고한 노동자정치투쟁 전선을 구축하는 것이 절실히 필요했다. 이렇게 자본가들의 신자유주의 공세에 정면으로 맞서는 노동자정치투쟁 전선을 앞장서 구축해 냄으로써 타협·개량주의 지도력을 대체하는 대안 지도력으로 스스로 서는 것이 이 시기 사회주의 세력에게 주어진 객관적 과제였다. 그러나 사회주의 세력은 그러한 역할을 수행해 내지 못했다. 이 시기에는 민주노총으로 결집한 수십만 조합원들도 상당한 능동성과 건강한 활력을 갖고 있었다.[10] 또한 광범한 노동자들 속에서 계급적 정치의식이 빠르게 성장하고 있었다. 따라서 총자본의 신자유주의 세계화 공세에 정면으로 맞서는 위력적인 노동자정치투쟁 전선을 구축해 낼 가능성이 얼마든지 열려 있었다. IMF 외환위기를 계기로 노동법 개악과 구조조정·정리해고의 공격을 퍼부으며 노동자들을 벼랑으로 내모는 총자본에 맞서, 노동자들이 현장과 거리에서 펼치는 직접적인 정치투쟁을 통해, 정리해고·임금삭감·비정규직화 저지 등 노동자들의 권리를 단호하게 지켜낼 뿐만 아니라, 나아가 △정리해고제 철폐 △비정규직 철폐 △노동시간 단축으로 일자리 나누기 △손배·가압류 폐지 △무상의료·무상교육·부유세 등으로 반격을 전개하여 사회변혁을 향해 역동적으로 전진해 나가는 길도 얼마든지 열려 있었다. 그러나 사회주의 세력은 이러한 노동자정치투쟁 전선을 앞장서 구축해 내지 못했다. 타협·개량주의 지도부의 오류와 한계를 비판하는 데서는 날카로웠지만, 그러한 비판을 넘어 스스로를 대안 지도력으로 세워 내지는 못했다. 현장조직 운동을 중심으로 일부 선진노동자들 속에 어느 정도 전투적·변혁적 기세를 불어넣을 수는 있었지만, 타협·개량주의 지도부의 투항적 배신에 분노하는 선진노동자들이 그러한 계급적 본능을 체계적인 사상과 노선으로 발전시켜 내도록 이끌지는 못했다. 또한 일부 선진노동자들을 넘어서서 광범한 노동자들에게 직접 다가가며 공세적인 노동자정치투쟁 전선의 필요성과 전망을 강력하고 끈질기게 제시해 낼 필요가 있었으나, 그러지 못했다. 이 시기에 노동자정치투쟁 전선을 앞장서 구축해 내지 못함으로써, 사회주의 세력은 노동자계급 운동의 객관적 요구에 부응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스스로도 부분적인 퇴보를 포함한 전반적인 정체를 피할 수 없었다. 현장의 선진노동자들에게 사상적·실천적 전망을 열어주는 데서도 큰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었고, 그로 인해 현장파의 운동적 몰락에도 중요한 원인을 제공했다. 또한 개량주의 세력의 든든한 근거지가 되어 노동자운동 전반을 정체와 후퇴로 내모는 민주노동당에 대당할 만한 대안 정당이나 정치조직을 세워내지도 못했다. 물론 1990년대 초반을 강타한 청산주의의 물결로부터 간신히 살아남아 그 후 어렵게 몇 년을 헤쳐오고 있던 사회주의자들에게 노동자정치투쟁 전선을 앞장서 구축해 낸다는 것은 사실 매우 버거운 일이었다. 가장 현명하게 상황을 대처해 나갔다고 하더라도 그러한 역할을 온전히 수행해 내는 것은 결코 쉽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만일 사회주의 세력 전반이 통일된 대응력을 갖춤으로써 잠재적인 역량을 극대화할 수 있었다면 그러한 역할을 수행해 내는 것도 꼭 불가능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각 세력이 가진 이러저러한 편향과 결함들도 통일된 흐름 속에서는 어느 정도 균형을 이루고 상호 보완되면서 풍부한 요소를 가진 장점으로 승화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시기 사회주의 세력은 공개 영역과 비공개 영역 모두에서 다양한 그룹으로 분열된 상태를 극복하지 못했고, 따라서 중요한 역사적 국면에서 자신의 역할을 제대로 수행해내지 못했다. 다만 2000년대 초반 이후 매우 척박한 조건을 뚫고 비정규직 운동이 건설되는 과정에서 사회주의 세력과 사회주의 현장활동가들은 주도적인 역할을 수행해 냈다. 한국 노동자운동이 정규직 운동의 패퇴에 따른 극심한 위기를 딛고 비정규직 운동을 중심으로 재건돼 나갈 수 있도록 소중한 초석을 놓은 셈이었다. ※한국노동자운동사 4부(2008~2017, 고난과 재건)와 5부(2017~2024, 폭풍 속의 표류)는 몇 달 간의 휴지기 이후 이어서 연재될 예정입니다. [1] 민주노동당의 당원 수는 창당 이후 꾸준히 늘다가 2004년 4월 총선을 거치면서 비약적으로 늘어나 8만여 명에까지 이르렀다. [2]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는 2007년 9월 “조봉암이 1956년 대통령 선거에서 이승만 정권에 위협적인 정치인으로 부상하자, 경찰과 군이 정권의 의도에 따라 조봉암 등을 체포해 사형에 이르게 했다”는 조사결과를 의결하고, 조봉암과 유가족에게 국가가 사과하고 피해 구제와 명예 회복을 위한 적절한 조치를 취할 것을 권고했다. 대법원은 2011년 1월 이 사건에 대한 재심을 통해 조봉암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3] 민주노총, 1997/07/24, 제6차 임시대의원대회 결의사항. [4] 민주노동당 창당 이후 초기 4년 동안, 민주노총의 1기 국민파 지도부를 대표하는 권영길은 당 대표를 역임했고, 진정추 세력을 대표하는 노회찬은 부대표와 사무총장을 역임하며 실권을 행사했다. [5] 그러나 현실은 자본주의 위기가 깊어짐에 따라 자본가들이 개량주의자들과 타협할 의사와 능력이 더욱 사라지는 상황이었다. 개량주의자들은 자본과의 타협을 추구했지만 ‘개량의 떡고물’조차 얻어올 게 없었으며, 그들에게 강요된 것은 자본가들의 공세를 합리화해 주는 ‘개량 없는’ 개량주의일 뿐이었다. 이러한 딜레마는 2000년대를 지나면서 민주노동당의 진로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6] 양준석, 2006/06/20, 「울산에서 민주노동당은 왜 ‘계급투표’에 실패했는가?」 [7] 한나라당 박근혜 대표의 피습 사건과 같은 우연적 요소들이 사태를 더욱 극적으로 만든 측면도 있었지만, 5·31 지방선거가 드러낸 정치적 의미의 핵심은 대통령 노무현을 정점으로 하는 열린우리당에 대한 노동자·민중의 심판이었다. [8] 양준석, 2006/06/20, 「울산에서 민주노동당은 왜 ‘계급투표’에 실패했는가?」 [9] 노동해방실천연대, 2007/01/26, 「민주노동당, 노동자 배신 정당으로 전락할 것인가」, 『해방』 20호. [10] 몇 년 동안 구조조정에 맞선 강력한 투쟁들이 펼쳐졌지만 결국 지도부의 배신으로 패퇴하고 나자, 민주노조 조합원들은 2000년대 초반 이후 심각한 수동성과 보수화에 빠져든다. 하지만 그렇게 되기 전까지 1996~97년 총파업으로부터 몇 년 동안 민주노조 조합원들이 보여준 능동성과 활력은 분명 대단한 것이었다 /* 스크롤 여백만 주고, 화면에는 안 보이게 */ .ftn-target { display: inline-block; /* 줄바꿈 안 생김 */ width: 0; height: 0; scroll-margin-top: 200px; } document.addEventListener("DOMContentLoaded", function () { // name="_ftn1", name="_ftn2", name="_ftnref1" ... 전부 대상 document.querySelectorAll('a[name^="_ftn"]').forEach(function(a) { var idValue = a.getAttribute("name"); // 이미 같은 id의 요소가 있으면 또 만들지 않음 if (!document.getElementById(idValue)) { var span = document.createElement("span"); span.id = idValue; span.className = "ftn-target"; a.parentNode.insertBefore(span, a); } }); }); /* 본문 각주 번호 + 아래쪽 각주 번호 색 지정 */ a[href^="#_ftn"] sup, a[href^="#_ftnref"] sup { color: #BF202D; } /* 밑줄이 보기 싫으면 */ a[href^="#_ftn"], a[href^="#_ftnref"] { text-decoration: none; } /* 마우스 올렸을 때 살짝만 강조하고 싶으면 (선택) */ a[href^="#_ftn"]:hover, a[href^="#_ftnref"]:hover { text-decoration: underline; } /* 페이지 전체가 오른쪽으로 넘치지 않게 */ html, body { max-width: 100%; overflow-x: hidden; } /* 본문 영역 폭 강제 고정 + 긴 단어/문장도 줄바꿈 */ #bo_v_con, .bo_v_con, .cke_editable, article { max-width: 100%; overflow-wrap: break-word; word-wrap: break-word; /* 구형 브라우저용 */ } /* 워드에서 붙은 이미지/표가 화면 밖으로 안 나가게 */ #bo_v_con img, #bo_v_con table, .bo_v_con img, .bo_v_con table, .cke_editable img, .cke_editable table, article img, article table { max-width: 100% !important; height: auto; } /* 워드가 p, span에 폭을 박아놓은 경우 강제로 해제 */ #bo_v_con p[style*="width"], #bo_v_con span[style*="width"], .bo_v_con p[style*="width"], .bo_v_con span[style*="width"], .cke_editable p[style*="width"], .cke_editable span[style*="width"], article p[style*="width"], article span[style*="width"] { width: auto !important; max-width: 100% !important; } /* 기본 blockquote 스타일 */ blockquote { border-left: 4px solid #c0392b; /* 사이트 분위기와 맞는 붉은 계열 */ padding: 12px 18px; margin: 20px 0; background: #fafafa; font-style: normal; color: #333; line-height: 1.6; } /* blockquote 안의 p 태그 정렬 */ blockquote p { margin: 0 0 10px 0; text-align: justify; } /* 마지막 p 태그 여백 제거 */ blockquote p:last-child { margin-bottom: 0; } -
[136주년 세계 노동절 유인물] 서광석 열사 정신 계승! 원청교섭 쟁취! 가자, 7월 총파업![1면] 서광석 열사 정신 계승! 원청교섭 쟁취! 가자, 7월 총파업! 열사의 죽음, 특정 악질기업의 일탈이 아니다 2026년 4월 20일, 화물노동자 서광석 열사가 진주 CU물류센터 앞 원청교섭 투쟁 중 사망했다. CU편의점에 물류를 배송하는 화물노동자들은 하루 13시간, 월 325시간에 달하는 과로와 심야노동에 시달려왔다. 휴가 때조차 대체차량 비용을 노동자 개인이 부담해야 했다. 그런데도 BGF자본은 자신이 원청사용자가 아니라며 교섭을 거부했다. 원청교섭을 요구한 노동자들에게는 2억 원대 손해배상 청구까지 들이밀었고, 비조합원을 동원해 투쟁을 파괴하려 했다. CU편의점으로 들어가는 물류는 BGF리테일 → BGF로지스 → 지역물류센터 → 하청운송사 → 화물노동자로 이어지는 5단계 하도급 구조로 운영된다. 노동부 장관조차 사건의 본질이 ‘다단계 구조’에 있다고 말할 정도다. 다단계로 착취당하던 화물노동자들은, 노동과정과 노동조건을 실제 결정하는 BGF리테일에 교섭을 요구했지만, BGF리테일은 계약당사자가 아니라며 교섭을 거부했다. 이에 맞서다 산화한 서광석 열사의 죽음은, 단지 BGF라는 일개 악질기업의 일탈이 아니라, 한국 원청자본의 보편적 행위가 낳은 참사다. 생산과정과 노동조건을 지배·결정하면서도, 다단계 하청구조 뒤에 숨어 사용자 책임을 부정해온 원청자본의 살인이다. 원청자본은 거부하고, 정부는 방조한다 개정 노조법 시행 이후 원청자본의 행보는 분명하다. 첫째, 사용자성 자체를 부정한다. 둘째, 교섭요구 사실공고를 거부하거나 지연한다. 셋째, 교섭에 응하더라도 의제를 노동·안전·보건 등 최소한으로 좁혀 투쟁을 제어하려 한다. 4월 23일 기준, 민주노총 소속 노동조합들은 원청사업장 571곳에 교섭요구 공문을 발송했지만, 교섭요구 사실을 공고한 사업장은 46곳에 그쳤다. 이재명 정부가 ‘사용자’인 공공부문도 민간부문과 하등 다르지 않다. 이재명 정부는 “공공부문 모범사용자”가 되겠다고 말했지만, 공기업 중 교섭요구를 공고한 기관은 두 곳에 불과하다. 정부와 고용노동부는 원청자본의 교섭의무를 강제하기는커녕, 복잡한 절차와 의도적인 소극적 해석으로 원청자본의 교섭해태를 부추긴다. △교섭요구 △교섭요구 사실공고 △교섭노조 확정공고 △교섭단위 분리신청 △노동위원회 시정신청 △노동부 판단지원위원회 검토 등 원청교섭 절차는 원청자본의 책임을 부정하고, 교섭을 지연하며, 현장투쟁을 소진시키는 수단이다. 왜 자본은 원청교섭을 이토록 철저하게 탄압하는가 비정규직노동자들의 악전고투로 법이 바뀌었고, 최소한의 경로가 열렸다. 그러나 하청노동자들은 여전히 ‘진짜 사장’과 교섭하기 위해 목숨걸고 싸워야 한다. 그 과정에서 국가와 자본이 열사를 죽였다. 왜 자본은 원청교섭을 완강히 거부하며 철저히 탄압하는가? 그것은 원청교섭 투쟁이 발전할 경우 자본이 공들여 구축한 다단계 하청구조, 오늘도 무수한 비정규직을 양산하는 한국 자본가들의 이윤축적 구조에 대한 집단적 분노로 번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원청교섭 쟁취투쟁은 험난하다. 그러나 바로 그렇기에 싸워야 한다. 실제로는 원청자본이 지배하는 노동자를 다단계 하청노동자로, 특수고용노동자로, 프리랜서로, ‘개인사업자’로 규정하며 그저 굶어죽지 않을 정도로, 심지어 실제로 굶어죽을 정도로 착취해온 한국 자본주의의 다단계 착취구조 자체를 바꾸는 투쟁으로 나아가자. 7월 총파업으로 진짜 사장을 교섭장에 세우자 민간부문과 공공부문 하청노동자, 특수고용·플랫폼·프리랜서노동자 모두가 함께 요구해야 한다. 모든 노동자의 노동자성을 인정하라! 모든 노동자의 노동기본권을 보장하라! 원청은 교섭에 나와라! 정부와 공공기관은 사용자 책임을 인정하라! ‘2등 노동자’ 양산하는 일터기본법이 아니라 근로기준법과 노조법을 모든 노동자에게 전면 적용하라! 서광석 열사의 죽음에 대한 분노를 원청교섭 쟁취투쟁으로 모으자. 현장과 지역에서 원청자본의 책임 회피를 폭로하자. 원청교섭 사업장 공동투쟁을 조직하자. 7월 15일 총파업으로 진짜 사장을 교섭장으로 끌어내자. `※화물연대 투쟁기금 모금에 함께해주세요 국민은행 028001-04-290833 (전국공공운수사회서비스노조 화물) [2면] 차별에 맞서 싸워 온 노동자가 차별금지법 제정에 앞장서자! ‘노동자니까’, ‘장애인·성소수자·이주노동자니까’ 136주년 국제노동절은 구조적으로 차별을 양산하는 자본주의 체제에 맞서 노동자가 부탁이 아닌 ‘투쟁으로’ 현장을, 법을, 사회를 바꿔온 역사를 증명한다. 자본과 정부는 우리 머리 꼭대기에서 ‘노동자니까’라는 이유로 착취와 억압을 일삼고 일터를 근간으로 사회 모든 영역에서 노동자민중을 갈라놓지만, 노동자는 단결을 위해 노력한다. ‘비정규직’은 고용과 임금만이 아니라 출산·육아, 돌봄 환경과 인간적인 존엄성까지 차별받는다. 그런데도 저들은 ‘플랫폼노동자니까’, ‘장애인이니까’, ‘이주노동자니까’, ‘여성이니까’, ‘성소수자니까’, ‘고졸이니까’, ‘어린 친구니까’라며 다양한 모습으로 살아가는 노동자민중을 손가락질하게 만들며 단결을 가로막아왔다. 성별, 인종, 성적 지향, 성 정체성, 장애, 나이 등은 개인의 취사선택이 아니다. 그러나 이를 이유로 교육, 일자리, 의료, 가족·인간관계, 의식주, 이동, 각종 사회서비스 등 모든 삶의 권리를 차별하고 있다. ‘차이’가 아닌 ‘차별’의 심화 인구 20명 중의 1명인 성소수자의 95%가 직장에서 일상적 무시나 모욕을 겪었다. 트랜스젠더라는 이유로 채용이 취소된 사례나 “게이 같다”는 말을 듣는 경우도 부지기수다. 중증장애인에게는 법적으로 최저임금을 안 줘도 되고, 장애 여성의 임금은 남성 장애인의 53% 수준에 불과하다. 색동원 사건처럼 성폭력에 무방비로 노출되는 일도 반복되고 있다. 산재사망률 OECD 1위의 한국에서 이주노동자 산재 사망은 정주노동자의 3배다. 반말과 욕설은 기본이고 임금을 떼이고 매를 맞는다. 조선소 대기업에서도 밥값을 차별당하고 강제노동에 시달린다. 청소년이 일터에서 노동인권을 침해당한 경험은 약 50%, 5명 중 1명은 임금체불을 당했다. 성별임금격차가 OECD 압도적 1위(29%)인 한국에서 비정규직으로 일하는 여성은 남성보다 131만 명이나 많다. 가사노동을 여성이 도맡는 비율은 73.3%로 3년 전보다 증가했다. 비정규직 임금은 정규직 대비 53.6%로 그 격차가 역대 최대로 벌어졌다. 특수고용·플랫폼·프리랜서 노동자는 노동절이 공휴일로 지정되어도 유급휴가가 없고, 출산·육아휴가도 꿈같은 얘기다. 심화하는 자본주의 체제의 위기에 사회적 약자, 소수자들은 가장 먼저 삶의 벼랑에 내몰리고 있다. ‘차별 대우’ 없애려 노조하듯, 차별금지법 제정에 노동자가 앞장서자! 특수고용 화물노동자 서광석 열사, 트랜스젠더 군인 변희수 하사, 이주노동자 뚜안 님, 폐암으로 쓰러진 급식노동자, 태안화력 김충현 비정규직 노동자, 사장의 성폭력과 경찰의 면죄부에 죽음으로 내몰린 여성청소년노동자, 시설과 집에 고립돼 사망한 장애인....이 모든 죽음에 자본주의 사회의 차별과 억압이 놓여있다. 이 죽음들은 정부와 자본의 악랄함을 보여주는 동시에, 노동자투쟁이 부족했음을 말해준다. 많은 노동자가 현장의 ‘차별 대우’를 없애려 노조하듯, 이제는 차별을 강요하는 사회의 구석구석을 바꾸기 위해 나서야 한다. 이재명 정권은 자본과 혐오세력의 눈치를 보며 광장의 1호 의제인 ‘차별금지법 제정’을 외면하고 있다. 투쟁보다 자본과 정부에 의탁하고, 전체 노동자민중보다 자신의 사업장 위주로 생각하는 노동운동 경향은 차별사회를 강요하는 저들의 생각과 다를 바 없다. '노동절'이란 이름만 되찾아선 안 된다. 집을 나서 이동하고, 이력서를 작성하고, 동료에게 나에 대해 솔직하게 말하고, 가족·지인과 저녁 식사 약속을 잡고, 아플 때 보호자와 입원 수속을 밟을 수 있는 소소한 일상조차 빼앗긴, 차별의 최전선에 있는 노동자들의 권리를 되찾아야 한다. "부당한 차별 대우를 하지 말라"는 ‘포괄적 차별금지법’ 제정에 노동자가 앞장서자. 일터와 사회에서 ‘인간답게 살아보자’는 투쟁을 확장하자. 노동해방은 모든 차별과 억압, 착취를 없애는 그 끝에 있다 ※차별금지법 제정 투쟁에 앞장서온 '차별금지법제정연대'를 후원해주세요 우리은행 1006-201-507617 차별금지법제정연대 [광장에서 펼쳐보는 차별금지법 Q&A] (2025) 소책자 보기: https://equalityact.kr/2025qna/ 제작: 차별금지법제정연대 ※미국과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에 대한 집단학살, 이란에 대한 침략전쟁이 지속되고 있습니다. 전쟁과 학살, 제국주의에 맞서 HD현대, 한화, 한국석유공사의 집단학살 공모를 끝내기 위해 투쟁합시다! -
[한노운사 연재 15회] 3부 패배와 퇴보 (1998-2008) [4] 민주노조운동의 위기한국 자본주의가 1990년대 중반을 분기점으로 쇠퇴기에 접어들자 자본가들은 IMF 외환위기를 계기로 정리해고 도입과 비정규직 확산으로 대표되는 신자유주의 공세를 전면화했다. 그로부터 몇 년 만에 비정규직은 전체 노동자계급의 절반을 훌쩍 넘어서게 됐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민주노조운동은 정리해고 도입을 막아내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비정규직 확산과 비정규직에 대한 착취·억압·차별의 심화를 방치했다. 이는 민주노조운동에도 심각한 위기와 퇴보로 되돌아갔다. 대기업 정규직만의 운동으로 쪼그라든 ‘민주노조운동’은 가장 착취당하고 억압받을 뿐만 아니라 노동자계급의 다수를 차지하게 된 비정규직들을 외면한 채 어느 정도 살 만한 소수만을 위하는 ‘집단이기주의’ 운동으로 사회적으로 취급받게 됐고, 스스로도 그렇게 빠져들었다. ‘민주노조운동’의 계급적 대표성 상실과 사회적 정당성 약화는 조직력 약화로 이어졌다. ‘민주노조운동’의 한계를 절감한 데 따른 패배주의와, 비정규직으로 굴러 떨어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결합하면서 대기업 정규직 속에는 보수적인 개인주의가 팽배해졌다. 대기업 정규직 ‘민주노조운동’의 대중적 기반은 빠르게 무너져 내렸다. ‘민주노조운동’의 약화는 대기업 정규직에도 자본의 더 강화된 공세를 가능케 했고, 이는 ‘민주노조운동’을 더욱 약화시켰다. 이전 편 보기 3부 패배와 퇴보 (1998-2008) [시대배경] 신자유주의 구조조정 [1] 구조조정과 정리해고에 맞선 투쟁 [2] 민주노조운동의 후퇴와 비정규직 확산 [3] 비정규직 문제를 둘러싼 대결 [4] 민주노조운동의 위기 [5] 노동자 정치세력화 열망과 민주노동당 2005년 10월 20일 강승규 수석부위원장 비리사태에 따른 민주노총 집행부 총사퇴 기자회견이 열린 서울 영등포 민주노총 기자회견장에서 피켓시위를 벌이던 반대파 조합원이 기자회견장에서 밀려나와 부숴진 피켓과 함께 복도에 서 있다. © 시민의신문 양계탁 1) 정규직과 비정규직으로 분할돼 자본주의에 사로잡힌 노동자들 IMF 외환위기 이후 한국의 노동자들은 정규직과 비정규직으로 분할됐다. 비정규직이 최저생활로 내쫓기며 ‘빈곤화’하는 동안, 대기업 정규직은 ‘개량화’하는 역설적인 과정이 동시에 일어났다. 노동자들의 분할은 경제적 분할을 넘어 사회적 분할로 발전했다. 이는 정규직과 비정규직 모두가 자본주의 체제에 고통스럽게 사로잡혀 있으면서도 쉽사리 사태의 본질을 인식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대기업 정규직들은 대체로 1987년 노동자대투쟁 이후 민주노조운동의 성장과 쇠락이라는 경험을 집단적으로 함께 했다. 1987년 이후 한동안 대기업 정규직들은 ‘노동자들이 단결하고 투쟁하면 많은 것을 성취할 수 있으며 나아가 세상을 송두리째 바꿀 수도 있다’는 희망과 자신감을 공유했다. 그러나 IMF 외환위기 시기 대규모 정리해고 공세 앞에서 한편으로 민주노조가 갖는 힘의 한계를 절감하고 다른 한편으로 지도자들의 배신에 절망하거나 길들여졌다. 대기업 정규직들의 의식에는 결정적인 변화가 일어났다. 대기업 정규직들의 뇌리 깊숙이에는 ‘신자유주의 세계화라는 거대한 흐름 속에서 자본이 무자비한 공세로 나오는데 노동자들이 아무리 노동조합으로 단결하고 투쟁하더라도 이겨낼 수 없다’는 패배적인 의식이 강하게 자리 잡혔다. 하지만 대기업 정규직들은 자본의 대규모 정리해고 공세에 맞서 만만치 않은 저항력을 보여주기도 했다. 이 때문에 일상적 구조조정의 시기로 넘어온 이후 자본의 공세는 주로 비정규직에 집중됐으며, 정규직에 대한 공세는 임금과 고용을 보장하는 대신 노동강도를 높이는 형태로 펼쳐졌다. 상대적으로 높은 임금을 받음으로써 일정한 여유자금까지 굴릴 수 있게 된 다수 대기업 정규직들은 2000년대 초반 이후 금융자본이 주도한 부동산·주식 거품 팽창에 합류하면서 덩달아 명목상 자산가치가 급등했다. 처음에는 주식에 손대다가 낭패를 보는 경우도 많았지만, 나중에는 거품이 워낙 팽창한 탓에 부동산과 주식에 뛰어들어 번 돈이 임금 소득과 엇비슷한 경우도 그리 드물지만은 않게 됐다. 다수의 대기업 정규직들은 갑자기 많은 돈을 만지게 되자 씀씀이가 크게 늘어났고 그럴수록 물질적 과시욕과 더 많은 소비에 빠져들었다. 노동자들이 정규직과 비정규직으로 분할된 현실은 대기업 정규직의 의식에 큰 영향을 미쳤다. 다수의 대기업 정규직들은 비정규직의 비참한 삶을 바라보며 연민이나 연대의식을 느끼는 것 이상으로 상대적으로 나은 노동조건과 소비능력을 가진 자신에 대한 우월감과 안도감을 느꼈다. IMF 외환위기의 충격적인 경험을 잊지 못하는 대기업 정규직들은 어느 날 갑자기 정리해고 위협 앞에 다시 서게 될지 모른다는 두려움을 늘 떨치지 못했다. 그런데 그럴수록 다수의 대기업 정규직들은 정리해고 당할 가능성을 줄이고 정리해고 당하기 전까지 최대한 벌어두기 위하여 회사가 잘 나가고 우리 부서에 보다 많은 일감을 끌어올 수 있도록 적극 협력해야 한다는 ‘노사협조주의’와 ‘물량지상주의’에 빠져들었다. IMF 외환위기 이후 대기업 정규직들의 의식은 과거의 상당히 선명했던 노동자 의식과 매우 다르게 뒤죽박죽 완전히 헝클어져 버렸다. 나날이 강화되는 노동 강도는 그들의 삶을 더욱 지치게 만들었지만, 갈수록 비인간적인 노동으로 내모는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의식은 좀처럼 성장하지 못했다. 한 때 초보적인 수준이나마 어느 정도 형성됐던 정규직의 계급의식은 ‘해 봤지만 안 되더라’는 패배주의, ‘돈 쓰는 재미’에 허우적거리는 소비주의, ‘비정규직에 비하자면 이게 어디냐’는 배부른 노예의 심리, ‘벌 수 있을 때 악착같이 벌어야 한다’는 초조함 따위에 갉아 먹히며 왜곡과 타락, 나아가 해체의 과정을 밟아갔다. IMF 외환위기 이후 1500만 노동자의 절반을 넘어 850만에 이른 비정규직은 정규직에 비해 상대적으로 다양한 사회적 구성을 가졌다. 처음부터 비정규직으로 일한 젊은 노동자들, 정규직으로 있다가 비정규직으로 밀려난 나이든 노동자들, 정년퇴직 이후에 다시 비정규직으로 일하는 늙은 노동자들, 가사노동의 부담까지 이중으로 안고 사는 여성 노동자들, 학비나 용돈을 마련하려는 학생 노동자들, 높은 학력에도 안정된 일자리를 구하지 못하는 지식인 노동자들, 소규모 자영업을 하다 몰락한 노동자들, 농사를 짓다 망한 노동자들, 머나먼 한국으로 돈 벌러 온 이주 노동자들 등등. 그 고용형태 또한 가지각색이었지만, 비정규직은 늘 고용불안에 시달려야 했다. 대다수 비정규직의 임금은 법정 최저임금을 넘나들거나 그보다 약간 높은 수준에 걸쳤다. 노동 강도 또한 매우 높았다. 갈수록 인간 이하의 삶으로 내몰리지만, 비정규직의 굴레를 벗어날 길이 도무지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비정규직이 놓여 있는 비참한 조건이 곧 선명한 노동자 의식을 만들어 주지는 않았다. 비정규직은 대체로 1987년 이후 펼쳐진 민주노조운동을 경험하지 못했다. 대다수 비정규직은 노동자들의 단결과 투쟁이 만들어 내는 힘을 최소한의 수준에서도 경험하지 못했다. 이질적인 사회적 구성과 불안한 고용 그리고 작업장의 분산 등은 초보적인 단결마저 더욱 어렵게 했다. 그래서 비정규직은 초보적인 노동자 의식조차 쉽사리 세우지 못했다. 노동자들이 정규직과 비정규직으로 분할된 현실은 비정규직의 의식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정규직을 ‘마녀사냥’하는 자본가들의 이데올로기 융단폭격 속에서, 상당수 비정규직은 자신들이 처한 비참한 현실의 책임이 자본주의 체제나 자본가가 아니라 ‘집단이기주의에 빠진’ 정규직에게 있다고 여겼다. 정규직에 대한 부러움과 원망 그리고 분노는 비정규직이 자본주의 본질을 꿰뚫는 계급의식의 형성으로 좀처럼 나아가지 못하도록 방해했다. 오늘날 민주노조운동은 심각하게 병들어 있다. ‘노동계급의 단결’을 실현하려는 정신은 심각하게 퇴행하여 대중운동 자체가 사업장·고용형태 등 갖가지 울타리 속에 갇힌 채 분열되어 있다. 외형적으로는 산별연맹을 넘어 산별노조 건설이 대세로 되는 시대지만, 민주노조운동이 폭발적으로 터져 나오던 80년대 후반 대중적으로 실현되었던 계급적 연대의 수준은 흘러간 옛이야기가 되어버렸다. 여기에 기아·현대자동차노조 일부 타락한 간부들의 취업비리와 민주노총 전 수석부위원장의 비리 사건이 겹쳐져, 민주노조운동의 위기는 더욱 깊은 수렁으로 빠져들고 있다. 마치 망망대해에 떠있는 난파선처럼 방향을 잃어버린 노동자들은 어디에서 희망을 찾아야 할지 고통스러워하고 있다. 노동자계급의 단결과 연대, 투쟁의 정신이 심각하게 후퇴한 현실의 민주노조운동 속에서 비정규직노동자투쟁은 심각한 고립과 박탈의 장벽에 부딪혀야 했고 자본과 정권에 의해 각개격파 당해야 했다.[1] 비정규직 노조운동은 도덕적 우위는 갖고 있되 대중적 힘은 아직 갖고 있지 못했다. 자본가들이 노동조합 건설과 활동이 거의 불가능하도록 설계하여 법과 제도로 옭아매고 있는 비정규직들 속에서 노동조합의 뿌리를 내려간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다. 비정규직 대다수가 정규직에 대한 부러움과 원망 그리고 분노에 사로잡힌 채 자본주의 본질을 꿰뚫는 계급의식으로까지 나아가지 못함으로써, 비정규직 운동은 스스로 큰 힘을 만들어 내지 못했고 정규직 운동의 한계를 넘어 노동자계급 전체를 결집시키는 구심점으로도 서지 못했다. 2) 현대차노조의 위기 현대차노조는 1995년 양봉수 열사 분신투쟁을 계기로 민주노조를 재건하여 1996~97년의 노개투 총파업에서 핵심 투쟁동력으로 역할하면서 민주노조운동의 중심으로 부상했다. 여기에 1999년 현대자동차서비스와 현대정공 자동차생산부문의 현대자동차 통합을 계기로, 현대자동차서비스노조와 현대정공노조까지 통합되면서 더욱 덩치가 커졌다. 현대차노조는 조합원 수가 3만에서 4~5만으로 늘었고, 울산공장·아산공장·전주공장의 생산직·사무직에 판매·정비·연구 분야까지 다양한 직군들을 망라하게 됐다. 단일 자동차공장으로는 세계 최대 규모인 울산공장을 주된 기반으로 하면서도 ‘한라에서 설악까지’라는 노보 이름처럼 전국적 조직망을 갖게 됐다. 현대차노조는 민주노조 재건 이후 1996년부터 2008년까지 매년 임금·단체협약·고용을 둘러싸고 파업을 전개했다.[2] 현대차노조의 파업은 노조의 조직력과 컨베이어 작업의 특성이 결부되면서 거대한 공장의 생산을 확실히 중단시키는 힘을 갖고 있었다. 또한 5~6천 명에서 1~2만 명 정도가 모이는 자체 조합원 집회를 수시로 개최할 수 있는 힘도 갖고 있었다. 2000년대 초중반 현대차노조가 가진 투쟁력은, 민주노총 산하 제조업 단위노조 대다수의 투쟁력이 부실해진 상황과 맞물리면서 상대적으로 더욱 돋보였다. 따라서 그 시기 현대차노조는 민주노총과 금속연맹이 전개하는 다양한 총파업에서 핵심 동력 역할을 했다. 현대차노조의 중심적 위치를 뒷받침하는 또 하나의 요소는 ‘노동자 정치세력화’였다. 2000년대 초중반 현대차노조 조합원들이 밀집 거주하는 울산 북구는, 민주노총의 후원을 받은 민주노동당이 국회의원, 구청장, 시의원, 구의원을 절반 이상 휩쓸었다.[3] 그러나 2000년대 중반 현대차노조는 여러 측면에서 위기에 직면했다. ‘현대차의 내부 상황을 들여다보면 현대중공업 못지않게 무너졌다’는 목소리도 심심치 않게 나왔다. 현장 노동운동이 거의 초토화되고 수십 명의 고립된 활동가들만이 남은 채 노동조합 자체가 완전한 노사협조주의로 전락한 현대중공업의 노동운동과, 민주노총의 중심 사업장으로 여전히 역할하고 있는 강력한(?) 노동조합을 가진 현대자동차의 노동운동은, 적어도 현 시점에서는 분명히 큰 차이가 있다. 그러나 “이미 중공업 못지않게 다 무너졌다”는 탄식을 근거 없는 비관주의로만 몰아붙이기에는 사태의 전개가 그리 단순하지 않아 보인다. 전·현직 노조간부들이 채용비리에 연루되어 줄줄이 구속되고, 조합원의 2/3가 노조간부들의 ‘빨간 조끼’를 특권과 관료주의의 부정적인 상징으로 인식하며, 비정규직과 현장 활동가들에 대한 관리자·경비들의 폭력이 일상화되고 있는 최근의 상황 전개는 현대자동차노조가 겪고 있는 ‘위기’의 폭과 깊이가 결코 간단치 않음을 보여준다. 현대자동차노조가 만만치 않은 위기를 겪고 있다는 것은, 노조 스스로가 혁신위원회 구성에 나설 만큼 이미 ‘공식적이고 공공연한’ 사실이다.[4] ◎ 위기의 근원 - 1998년의 패배와 대안의 부재 1998년 이전에 현대차노조 조합원들은 여러 차례 ‘가장 전투적인 노선과 세력’을 선택했다. 그 시기에는 ‘전투적이고 계급적일수록 대중적인’ 상황이 흔하게 벌어졌다. 조합원들은 기존 집행부의 직권조인, 노사협조주의, 투쟁회피를 단호하게 비판하며 점점 더 전투적인 세력을 집행부로 밀어 올렸다. 상당한 명망을 가진 이들도 조합원들의 투쟁의지를 제대로 받아 안지 못하면 한 번에 무너지는 것을 자주 볼 수 있었다. 도중에 조합원들이 어용 집행부를 다시 선택하는 일이 있었지만, 그것은 민주 집행부의 투쟁회피에 대한 실망 때문이었다. 비 온 뒤에 땅이 더 굳어지는 것처럼, 1995년 어용 집행부 아래서 벌어진 양봉수 분신과 비공인파업을 거치면서 조합원들의 마음에는 민주노조가 더 굳세게 뿌리내렸다. 1996~97년 노개투 총파업과 1998년 정리해고 저지투쟁에 열성적으로 참여하던 조합원들의 가슴 속에는 민주노조를 통해 세상과 삶을 바꿔내겠다는 열망과 자신감이 가득했다. 그러나 1998년의 패배는 조합원들의 의식에 큰 타격을 가했다. 조합원들은 1998년의 패배를 ‘노동조합은 앞으로도 정리해고를 막아내지 못할 것’이라는 의미로 받아들였다. 그렇게 열심히 잘 싸웠는데도 패배했는데, 앞으로는 패배의 경험 때문에 그만한 투쟁도 만들어지지 않을 것이고 따라서 패배가 더욱 불가피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민주노조로 단결한다면 세상을 바꿔내고 우리의 삶을 지켜낼 수 있으리라는 믿음이 깨져 나갔다. 이제 민주노조를 믿을 수 없다면, 각자가 살 길을 찾아야 했다. ‘일상적인 고용불안’에 시달리게 된 조합원들은 머지않아 회사가 다시 정리해고의 칼날을 겨누기까지 최대한 많은 돈을 벌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제 노동조합에게 바라는 것은 과거와 같은 ‘민주노조를 통한 위대한 투쟁과 변화’가 아니라 (어떤 방법을 써서든) 당장 한 푼이라도 더 벌게 도와달라는 것이었다. 조합원들이 이렇게 냉소적인 태도를 굳히게 된 데에는 패배의 상처를 극복할 진정한 대안을 제시하는 활동가들이 현대차노조 안에 사실상 부재했다는 점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1998년의 패배는 정리해고를 결코 받아들일 수 없다는 조합원들의 투쟁의지를 지도부가 배신하는 형태로 전개됐다. 만일 현대차노조 안에서 전투적·변혁적 활동가들이 1998년의 노조 지도부가 가졌던 투항적 노선을 단호하게 비판하면서 강고한 계급적 단결투쟁의 건설이라는 대안을 명확히 제시하고 일관되게 실천해 나갔다면, 상황은 많이 달랐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되지 못했다. 현대차노조 안에도 전투적·변혁적 지향을 가진 활동가들이 상당한 규모로 존재했다. 1995년 현장조직 민투위로 결집한 이들 현장파 활동가들은 1996~97년 노개투 총파업과 1998년 정리해고 저지투쟁을 아래로부터 주도했다.[5] 그러나 2001년 민투위 집행부는 김대중 정권의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에 맞선 대반격의 분수령이 될 수도 있었던 7·5 총파업에 불참하여 사실상 무산시킴으로써 계급적 단결투쟁의 대의를 정면으로 배신했다. 2004~05년의 민투위 집행부는 비정규직 노조가 100여 명의 해고자를 내며 처절한 투쟁을 이어가는 데도 사실상 외면했는데, 역시 계급적 단결투쟁의 대의에 대한 정면 배신이었다.[6] 민투위 활동가들은 왜 자신의 주장을 일관되게 실천하지 못했을까? 그 핵심 원인은 사상적으로 견결하게 단련되고 무장하지 못한 점에 있었다. 현장 조합원들 사이에서 전투적인 분위기를 주도하면서 투항적이고 타협적인 지도부를 비판하는 것과 노동조합 집행부를 맡아 정권과 자본의 십자포화를 뚫고 전투적·변혁적 노선을 관철해 나간다는 것은 차원이 다른 문제였다. 민투위 활동가들은 비판적 현장활동에는 능숙했지만, 계급적 단결투쟁을 과감하고 단호하게 이끌고 나갈 준비는 돼 있지 않았다. 물론 민주노조에 큰 희망을 걸었던 조합원들에게 결정적인 좌절감을 안긴 책임이 현장파 활동가들에게만 있지는 않았다. 중앙파 집행부는 1998년 정리해고 저지투쟁에서 투항적 노선을 고집함으로써 자멸적 패배를 초래했다. 국민파 집행부는 2000년 사내하청 대규모 투입을 주도했고, 한겨레신문 광고비 대납 사건을 일으켰다.[7] 그런 점에서 현대차노조 조합원들에게 ‘1998년의 패배’란 1998년 정리해고 저지투쟁에서의 패배를 정점으로 하되, 1996~97년 노개투 총파업의 패배, 1998년 2월 민주노총의 정리해고 노사정 합의, 2000년 사내하청 대규모 투입과 광고비 대납 사건, 2001년 현대차노조의 7·5 총파업 불참 등 일련의 사건들로 이어진 복합적이고 총체적인 패배였다. 조합원들의 의식을 변화시킨 또 하나의 변수는 회사의 집요하고 치밀한 이데올로기 공세였다. 회사는 1998년 투쟁 이후 다양한 사내 언론 매체를 구축하고 일상적 이데올로기 공세를 지속적으로 전개했다. 회사가 펼친 이데올로기 공세의 핵심은 고용불안을 조장하는 것이었다. 국내외 경제사정이 어려워서 회사 전망이 불투명하다는 선전은 수시로 되풀이되는 단골 메뉴였다. 조합원들이 갖게 된 두려움, 즉 회사가 어려워지면 머지않아 또 정리해고가 올 것이고 그 때는 노조가 더 형편없이 막지 못할 것이라는 두려움을 회사는 십분 활용했다. 회사가 어렵다는 분위기가 확산될수록 조합원들은 고용불안에 시달렸고 악착같이 돈을 벌어야겠다는 심리 상태로 빠져들었다. 2000년대 초중반 현대차는 창사 이래 최대 매출, 최대 순익의 기록을 거듭 갈아치우면서 초국적 자본으로 도약[8]하고 있었지만, ‘회사 전망이 불투명하다’는 집요한 선전은 조합원들 사이에서 상당한 효과를 보았다. 회사의 이데올로기 공세는 종업원 의식을 강화하고 계급적 단결투쟁을 차단하기 위한 것이기도 했다. 고용이 안정되려면 회사가 잘 나가야 하니, 회사의 경쟁력을 위해 조합원이 양보하고 협력해야 한다고 선전했다. 현대차의 울타리를 벗어난 연대투쟁이나 총파업 참여는 조합원(종업원)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남의 일 관여’나 ‘정치투쟁’일 뿐이라고 규정하면서 회사의 경쟁력을 약화시켜 고용불안을 초래할 것이라고 공격했다. 비정규직 투쟁이 시작된 이후에는 사내하청을 집요하게 ‘다른 회사 사람’으로 규정하며 정규직 사이에서 단결과 연대 의식이 성장하지 못하도록 방해했다. ◎ 위기의 양태 - 계급적 전망을 상실한 채 물량확보에 몰두 현대차노조 조합원들이 빠져든 ‘일상적인 고용불안’ 정서는 ‘물량을 확보해야만 고용을 지킬 수 있다’는 생각으로 이어졌다. 대다수 활동가들 역시 조합원들의 고용을 보장해주기 위해서는 물량을 확보하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활동가들이 점점 더 물량확보 투쟁과 신차확보 투쟁에 집중하면서 ‘물량이 곧 고용’이라는 왜곡된 논리가 확대재생산 됐다. 당장 한 푼이라도 더 많은 임금을 중요시하게 된 조합원들은 1998년 이전과 달리 잔업과 특근을 선호하게 됐다. 조합원들은 ‘벌 수 있을 때 최대한 벌기 위해’ 최대한의 잔업과 특근을 원했다. 잔업과 특근을 할 만큼 충분한 물량이 있는 한 자신이 ‘잘릴’ 염려는 없다고 위안할 수 있다는 점에서도 잔업과 특근을 원했다. 요즘 … 어느 사업부 할 것 없이 … 빨간 날짜는 빈틈없이 공장을 가동시키고 있다. 이런 실정이다 보니 한 달 특근이 5~8개는 우습게 넘고 있다. … 현장의 대·소위원들도 특근에 있어 어떠한 큰 사안이나 큰 명분 없이 특근거부가 조직되는 것은 예전처럼 쉬운 일이 아니라서 원칙적 문제제기에 맴돌고 있는 실정이다. 특근을 희망하는 현장의 요구 또한 만만치 않아 현장의 대소위원들의 입장이 곤란한 지경까지 온 것이다.[9] 대의원대회에서 일요 특근을 안 하기로 결의했지만 일부 공장에 특근이 이루어지면서 일어나는 불협화음이 조직력 훼손을 우려할 만큼 심각한 수준으로 확대되고 있다. … 조합원들은 특정사업부나 부서의 특근 소식에 예민하게 반응하고 집행부나 대의원, 활동가를 대상으로 불만을 토로한다. 심지어는 급여수준은 노동조합 지침에 따르는 정도에 반비례한다는 자조적인 비난이 … 고개를 들고 있고, 특근하지 말자는 대의원에게 ‘왜 우리만 희생양이 되어야 하냐’고 따지는 조합원도 많다고 한다.[10] 계속되는 철야 특근은 시급제 노동자들의 육체만이 아니라 정신까지 갉아먹어 이제는 ‘내 철야 내가 하는데 노동조합이 뭔 상관이냐’, ‘너거 마음대로 철야 거부하냐’는 등의 반발 때문에 현장의 간부와 노동조합은 철야를 함부로 제한하지 못한다.[11] 2003년 주5일제(주40시간제)가 도입됐지만, 실제로는 연간 3,000시간에 육박하는 노동시간이 2000년대 초중반 내내 현대차에서 계속됐다. 주야맞교대를 하면서 주당 60~70시간의 장시간 노동을 하는 게 일반적이었다. 그러다 보니 현대차에서만 매년 10명을 넘나드는 과로사가 계속 발생했다. 지금 전 공장이 철야 특근으로 밤을 새고 있다. … 각 사업부별 공장장에게 경쟁 심리를 조장하여 생산량 달성에 순위를 매겨 미달성 사업부 공장장은 잘라버리겠다는 협박을 서슴지 않는다. … 집행부에서는 각 사업부 특성에 맡겨 사업부 대의원회에서 알아서 하라는 입장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노동조합이 조합원의 건강권을 포기하고 과로에 목숨을 걸도록 하는 아주 무책임한 일이 아닐 수 없다. … 노동조합이 이렇게 휴일 특근 철야를 부추기는 양상은 절대 바람직하지 못하다. 01년 울산공장에서는 총 19명의 과로사가 발생하였다. … 올해도 벌써 7명의 조합원이 과로사로 목숨을 잃었다.[12] 물량확보에 대한 조합원의 몰두는 생산계획 달성이라는 자본의 이해관계와 정확히 일치했다. 현대차 자본은 생산계획 달성을 최우선의 목표로 삼았는데, 생산계획은 생산설비가 허용하는 최대치로 설정됐다. 이런 사측의 생산계획을 노동자들이 스스로 달성하기 위해 노력하고, 나아가 더 많이 생산할 것을 요구하게 된 것이었다. 당연히 그 과정에서 신규인원 충원, 노동시간 단축, 휴식시간 확보, 노동강도 저하 같은 요구들은 제대로 제기될 수 없었다. 노조가 물량확보에 몰두하면서, ‘투쟁’을 하면서도 잔업·특근을 계속하거나 회사의 생산계획을 모두 달성하는 어처구니없는 모습도 나타났다. 역으로 회사는 잔업·특근을 시혜적으로 베풀거나 또는 뺏어버림으로써 물량을 갖고 노동자들을 통제할 수 있게 됐다. 작년 12월 회사 측은 3공장 대의원회에 8개의 토·일 철야생산을 요청하였고, 성탄절도 철야생산을 요청하였다. … 올해 1월에는 내수시장 위축으로 철야생산을 할 수 없다고 한다. … 문제는 갑작스레 철야생산이 없어지다 보니 현장조합원들이 고용불안을 심각하게 생각한다는 것이다. … 현장조합원들은 물량감소로 또다시 고용위기가 오는 것 아니냐며 불안해한다. … 현장에서는 ‘일 없을 때는 알아서 조심해야 한다’는 말이 공공연하게 나돌고 있다.[13] 작년 3공장 조합원들은 주말에도 … 몸이 부서지도록 일을 했다. 또한 일이 많을 때 한 푼이라도 벌어놔야, 나중에 일거리가 없고 회사에서 내팽개치더라도 최소한의 준비를 위해 죽을 둥 일을 했다. 사측은 조합원들의 불안한 심리와 주말 특근에 맞춰진 생활임금을 이용하여 생산물량이 없다는 핑계로 17대 대의원들을 시험하면서 현장을 사측이 원하는 대로 만들려 하고 있다. … 조합원들의 불안감을 이용하여 사측이 물량을 조절할 경우 파업 한 번 할 수 있을지 걱정이 된다. … 이대로라면 사측에 의하여 눈치도 채지 못하고 현장권력이 잠식당할 것만 같다.[14] 4공장 조합원들이 … 수개월째 8+10 근무형태가 계속되고 있다. … 4공장 고용안정대책위가 구성되어 단협을 준수할 것을 요구하며 철야농성에 돌입한 바 있다. … 4공장 물량부족 사건의 발단을 보면, 지난 2000년 그레이스 차종을 기아 광주공장으로 이관할 당시 사측은 … 신규모델 투입을 약속했으나 일방적으로 신차 개발을 취소하였고, 02년에는 수출물량을 … 일방적으로 터키로 이관했다. … 사측이 이 문제에 대해 진정 책임지는 자세라면 8+10의 근무형태가 계속 이어져서는 안 된다. … 사측은 … 타 사업부에 대해 … ‘4공장을 봐라. 일이 있을 때 특근 등 열심히 일을 하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15] 지난주 3공장 대의원회는 치열한 논쟁 끝에 철야근무를 하기로 결정했다. … 잔업을 끊은 사업부 대표가 고소고발 되고 강병태 소위원이 해고가 결정되었음에도 철야를 강행한다니 이해가 되지 않는다. 더구나 이번 철야는 재고비축 철야로서 … 투쟁해야 할 시기에 철야를 하는 것은 옳은 일이라 할 수 없다.[16] 불과 한 달 전까지만 하더라도 2공장에 대해 10-10 근무에 철야를 강요하던 사측이 갑자기 4월 생산계획 설명회에서는 … 재고가 쌓여 8-8근무를 시킬 수밖에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 이는 사측의 고도화된 술수로 조합원의 생존권을 유린하는 작태이자 기만행위이다. … 이는 사측이 … 전반적인 물량 축소를 통해 현장을 혼란에 빠뜨리고 불파 문제를 비롯한 모듈 협상과 CM카 조기투입을 위한 각종 협상에서 우위를 점하기 위한 얄팍한 술수이다.[17] 사측은 안전사고로 인한 라인 정지에 대한 어떠한 면책합의도 없다며, 5명의 대·소위원들이 고소고발, 손해배상, 징계를 받아들이지 않을 경우, 5공장 전체 조합원들에 대해 잔업과 특근을 취소하겠다며 협박했다.[18] 노조가 물량에 몰두하며 생산에 적극 협조한 것은 회사에 큰 이득을 안겨 주었지만, 회사의 욕심은 그에 그치지 않았다. 회사가 보기에 현대차노조 조합원들의 임금은 너무 높았다. 회사는 노조의 힘이 미치지 않는 공간으로 생산을 최대한 이동시키고자 했다. 사내하청을 확대하거나, 사외에서 제작되는 모듈의 비율을 확대하는 게 그 방안이었는데, 비정규직 노조가 2003년에 출범한 이후로는 모듈외주화 확대가 주된 방안이 됐다.[19] 회사는 각 사업부에 신차가 투입될 때마다 모듈외주화 비율을 점점 높여 나갔다. 회사는 각 사업부에 신차를 배정해서 물량을 보장해 주는 대가로 그와 같은 일상적 구조조정을 관철시켰다. 신차가 투입될 때마다 모듈외주화 확대에 맞선 투쟁이 사업부별로 진행됐지만, 회사의 의도가 거의 그대로 관철됐다. 회사는 종종 복수의 사업부에 동일한 물량 배정을 약속함으로써 사업부 간 물량경쟁을 유도했는데, 노조 내부의 분열을 조장하여 더욱 용이하게 구조조정을 관철하기 위해서였다. 신차 JM카 투입을 앞두고 사측의 일방적 합의사항 파기로 인해 2공장 대의원회가 2주째 천막 철야농성을 벌이고 있다. 문제는 회사가 JM카 생산을 2공장 물량으로 합의해 놓고, 뒤로는 5공장에 20만대 생산설비 체제를 갖추는 식으로 이중 합의를 통해 물량을 가지고 노노 분열을 조장하고 있다는 것이다. 회사는 그동안 물량 이관이 있을 때마다 해당 사업부에 선 물량보장 후 약속파기를 하는 수법으로 장난을 쳐왔다. 이것은 2공장 트라제, 3공장 라비타, 4공장 그레이스 물량이전에서 잘 말해주고 있다.[20] 모듈외주화로 현대차에서 일감이 빠져 나간 곳은 현대모비스와 현대글로비스를 중심으로 철저히 수직계열화 돼 있는 소규모 부품하청업체이거나 또는 비정규직으로만 구성된 현대모비스 모듈조립공장이었다. 이런 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은 대체로 법정 최저임금에 턱걸이하는 수준이었으며, 열악한 근로조건과 높은 노동강도 때문에 6개월 근속이면 왕고참 취급을 받을 정도로 유동성이 심했다. 동일한 물량을 놓고 현대차 안에서 정규직이 작업하는 경우와 부품하청업체에서 비정규직이 작업하는 경우를 비교하면, 노무비가 두세 배 정도 차이가 났다. 그러나 모듈외주화 확대에 대한 현대차노조의 대응은 사실상 무대책이었다. 신차투입 협상이 시작될 때마다 ‘모듈외주화 저지’의 목소리들이 쏟아지지만, 머지않아 결국 현재의 고용을 (그것도 대개 사내하청을 제외한 정규직만의 고용을) 보장받는 선에서 회사의 모듈외주화 계획을 거의 그대로 수용하며 타결됐다. 그리곤 무관심이었다. 모듈외주화로 빠져 나간 일감이 어떤 조건의 노동자들에 의해 만들어지는지, 그들이 처한 열악한 노동조건이 자신들의 미래와 어떤 상관이 있을 것인지 최소한의 관심도 없었다. 이미 절반 가까운 물량이 모듈 작업으로 처리되는 상황에서, ‘모듈외주화 저지’만으로 사태에 대처할 수는 없었다. 모듈 작업이 이루어지는 공정의 노동자들을 노동조합으로 조직해 내고 그들의 노동조건이 현대차 내부의 노동조건과 유사한 수준까지 개선될 수 있게 하는데, 현대차노조는 누구보다 사활적인 이해관계를 갖고 달려들어야 했다. 그러나 2000년 무렵 현대차에서 모듈화가 공론화되기 시작한 뒤 자본은 생산과정에 엄청난 변화를 만들어 갔지만, 모듈공정 노동자 조직화 등에 대한 현대차노조의 대응은 거의 아무 것도 진전된 게 없었다. 현대차노조 전반이 계급적 전망을 상실한 채 눈앞의 물량확보에만 몰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정규직 임금의 60%밖에 받지 못하는 사내하청, 강제적인 단가인하의 부담을 고스란히 떠안는 부품하청업체 노동자들에 대한 초과착취를 성공적으로 관철시키며, 현대자동차 자본은 엄청난 이윤을 챙겼다. 그러나 현대차노조는 계급적 전망의 부재를 고스란히 드러냈다. 사내하청의 임금 인상을 생색내기 수준에서 건드렸을 뿐, 부품하청업체 노동자들이 강요당하던 초과착취 문제에 대해서는 거의 무대책으로 일관했다. 현대차노조의 계급적 전망 상실은 사회적 고립의 위기로 돌아왔다. 특히 총자본과 보수언론의 이데올로기 공세를 넘어 광범한 노동자·민중으로부터 고립돼 가는 위기였다. 현대차노조 조합원들은 2000년대 초반을 경과하면서부터 명절에 고향 가는 발걸음이 예전 같지 않아졌다. 고향에 가서 친척·친구들과 나누는 이야기들이 결코 즐겁지 않았기 때문이다. 예전에는 현대차노조가 정권과 자본의 무수한 탄압에 맞서 노동자·민중의 선봉에서 투쟁하는 존재로 간주됐기에 고향의 친척·친구들로부터 격려를 받았고, 투쟁의 무용담을 늘어놓기도 했다. 하지만 상황이 달라졌다. 현대차노조의 권리 향상은 전체 노동자·민중의 권리 향상과 별 상관이 없으며, 심지어 전체 노동자·민중의 권리를 침해한다는 비난까지 받게 됐다. 예전에는 선봉 투사로 추켜세우던 고향의 친척·친구들이 이제는 보수언론의 논리들을 줄줄 읊어대며 냉소적인 비난을 퍼붓기 시작했다. 현대차노조 조합원들이 가까운 친지들에게까지 느끼게 된 ‘사회적 고립’은 일차적으로 ‘현대차노조를 비롯한 대기업 노조의 이기적인 행동이 경제를 망친다’는 보수언론의 집중적인 이데올로기 공세 때문이었다. 하지만 과거에 안 먹히던 이데올로기 공세가 먹히게 된 이유가 있었다. 노동자계급 내부의 양극화였다. 정규직과 비정규직, 대기업과 중소영세기업 노동자들 사이의 격차가 IMF 외환위기 이후 갈수록 벌어졌다. 실업과 개인파산도 만만치 않은 수준이었다. 물론 그러한 양극화를 불러온 것은 일차적으로 자본의 책임이었다. 하지만 민주노조운동 또한 그러한 양극화를 해결하기 위해 어떤 식으로든 자기 역할을 요구받았다. 자본가계급은 보수언론을 앞세워 중소영세 비정규직을 위해 대기업 노조가 양보하라고 공격했다. 하지만 그것은 자본가계급에게만 좋은 일이기에 민주노조운동이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방향이었다. 민주노조운동이 가야 할 길은 중소영세 비정규직의 요구를 전면적으로 함께 내걸고 제대로 투쟁하는 것이었다. 현대차노조가 1998년의 패배를 올바로 극복하고자 했다면 그와 같은 계급적 단결투쟁에서 전망을 찾았을 것이다. 그러나 계급적 전망을 상실한 현대차노조는, 다른 대기업 노조들과 마찬가지로 그렇게 하지 않았다. 2000년대 초중반 현대차노조는 민주노총과 금속연맹이 조직한 수많은 총파업의 핵심 동력이었으며 그러한 총파업에는 중소영세 비정규직의 요구 또한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현대차노조는 민주노총과 금속연맹의 총파업 지침에 따라 형식적으로 파업에 임할 뿐 실제 총파업 요구에 대해서는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조합원들을 진지하게 설득해 나가지 않았기에 총파업에 참여한 조합원의 대다수가 집회에 참여하지 않고 그냥 퇴근했다. 이것은 대다수 조합원이 강렬한 의지를 갖고 지역 집회와 가두시위에 열성적으로 참여했던 1996~97년 총파업과 매우 달랐다. 11월 30일 비정규직 법안이 국회에서 통과되었다. 모든 것은 예상했던 바대로 진행되었다. 서로 죽일 듯이 물어뜯던 자본가 정당들은 이 법안이 통과되는 과정에서는 아주 조용했고, 형제처럼 평온했다. 법안의 내용은 이미 오래 전에 공지되었던 것 그대로였다. 부르주아 언론의 기만적인 대응도 마찬가지였다. 법안 통과시 총파업 투쟁을 경고했던 민주노총 지도부의 대응도 예상했던 바대로 진행되었다. ‘엄포용 기자회견’이 있고, 몇몇 사업장이 시한부 파업에 돌입했다. 현대차, 기아차 등 그나마 현장조직력이 살아 있다고 하는 극소수 사업장이 이른바 ‘정치파업’에 돌입한다. 그러나 파업의 열기는 낮고 그것마저도 생산타격과는 거리가 멀다. 한두 번의 시한부 투쟁이 끝나자 총파업 투쟁은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진다. 일부 비정규직 노조들이 분노에 찬 투쟁을 펼치지만, 그 힘은 아직 대단히 제한적이다. … 이런 상황이 민주노총의 꼭대기에 있는 조준호 국민파 기회주의 지도자들 때문이라고는 더 이상 말할 수 없다. … 현대차, 기아차와 같은 핵심 대공장 집행부에게 책임을 돌리는 것도 원인을 정확히 진단하는 것이 아니다. … 그 원인은 훨씬 더 깊은 곳에 있다. 조직 노동자들 속에서, 특히 조직 노동자의 중핵인 대기업 정규직 노동자들 속에서 ‘노동자 계급의식’이 실종되어 있다. 다수 노동자의 단결을 위해 헌신하고, 바로 이 단결의 확대 여부에 입각해 투쟁의 성패를 판단하는 노동자계급의 정신으로 이들이 무장해있지 않은 것이다. 이처럼 노동자계급의 단결을 이룩할 구심이 작동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는, 비정규직 법안 통과 정도가 아니라 그 이상의 공세 앞에서도 한국 노동운동이 결코 현 상황 이상의 모습을 보일 수 없다. 조금씩 움터 나오는 비정규직 노동자투쟁에서 실종된 구심을 대체할 희망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인가? 이것 또한 장담할 수 없다. … 97년 노개투 총파업의 패배, 그리고 연이어 일어난 대량의 정리해고에 무너져 내리면서 대기업 정규직 노동자 의식의 퇴행은 더욱 본격화되었다. … 단사 내의 이익, 혹은 일부 부서의 이익과 같은 조합주의적이고 실리주의적인 이익에만 갇혀버린 운동은 백년 천년이 지나도, 아무리 거대한 탄압이 휘몰아쳐도, 아무리 전국적이고 계급적인 쟁점이 부상하더라도 결코 노동계급적 운동으로 전진하지 못한다. 오히려 진실을 말하자면, 노동자계급의 정신이 실종된 운동은 그 본성상 지속적인 분열을 확대재생산할 수밖에 없다. 처음에는 단사 내의 단결에만 머물지만, 이어지는 시기에는 단사 내 정규직과 비정규직으로 분할되고, 다음으로는 정규직 내에서 부서별, 직종별 분열로 나아가며, 최종적으로는 개별화된 상태로 이행한다. … 당장 실제로 전개할 수 있는 투쟁의 범위와 무관하게, 노동자들이 스스로를 조직하고 투쟁에 나서는 정신이 ‘노동자계급의 단결 정신’에 얼마나 부합하는가에 의해서만 현재의 상황과는 다른 모습을 기대할 수 있다. 당장 힘이 부쳐서 커다란 투쟁으로 전진하지는 못하더라도, 그래서 단 4시간짜리 부분파업 심지어는 총회투쟁에 머물지라도, 여기에 합류하는 노동자들을 실질적으로 지배하는 정신이 무엇인가에 의해 그 투쟁의 성격은 달라진다. 노동자대중이 자기 투쟁을 전체 노동자계급 투쟁의 일부로 간주하는 법을 배우게 될 때, 그리고 다른 모든 곳에서 일어나는 노동자투쟁들을 전체 노동자계급 투쟁의 한 부분으로 받아들이고 최선을 다해 지지하고 지원해야 한다는 숭고한 책임감을 발전시킬 수 있을 때에만 노동운동은 비로소 계급적 방향으로 전진할 수 있다. 이것은 노동대중의 한복판에서 실천하면서 노동대중의 삶과 정신을 장악해가는 현장 활동가들의 계급적 의식이 없다면 결코 실현될 수 없다. … 모든 분열에 반대하고, 노동자계급 전체의 관점에서 대중이 사고하고 투쟁하며 매일의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일관되게 지도할 뿐만 아니라, 스스로 바로 그러한 행동의 모범을 모든 삶에서 실천해나가는 노동자의식으로 무장한 활동가들 없이는 이 상황을 결코 타개할 수 없다.[21] 현대차노조 집행부가 집중한 것은 자체 임금·단체협약 투쟁이었고, 실제 현장에서 조합원들과 활동가들이 몰두한 것은 물량확보였다. 당연하게도 광범한 노동자·민중에게 현대차노조는 양극화를 해결하기 위해 어떤 실질적인 노력도 하지 않는 것으로 인식됐고, 따라서 현대차노조의 ‘강력한’ 투쟁은 ‘그들만의 배부른’ 투쟁이라는 보수언론의 공격이 그대로 먹혀들었던 것이다. ◎ 위기의 고착 - 노조의 관료화와 부실화 2000년대 초중반 현대차노조 활동가들 전반은 관료주의적 타성에 깊이 빠져들었다. 현대차 노사 간의 교섭구조를 통해 해결될 전망이 보이지 않는 일들은 아예 손을 대려고 하질 않았다. 노사 간의 교섭구조를 통한 해결 가능성 여부가 실질적인 활동의 기준이 되어 버리자, 암묵적으로 자본이 설정한 반경 안으로 활동의 폭이 철저히 갇혀 버렸다.[22] 흐르지 않는 물은 썩기 마련이듯이, 정체된 노동조합 내부에 관료주의적 특권이 만연하고 심지어 부패와 비리마저 스며드는 것은 필연적인 경과였다. 현대차노조는 사회적으로 ‘그들만의 배부른’ 투쟁을 하고 있다고 비난받았지만, 정작 조합원들로부터도 갈수록 신뢰를 상실해 가고 있었다. 조합원들의 화살은 일차적으로 노조간부들의 특권과 관료주의, 나아가 부패와 비리에 대한 질타로 모아졌다. 특히 2005년 전·현직 노조 간부들이 채용비리로 줄줄이 구속되자, 노조간부들에 대한 조합원들의 실망감이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가 됐다.[23] 특권과 관료주의에 대한 조합원들의 질타는, 노동조합이 투쟁을 통해 확보한 권리나 투쟁의 상징물이라 하더라도 노조간부들이 전용해 온 것들에 대해서는 강한 거부감을 드러내는 양상으로 나타났다. 근무시간 중 대의원 활동에 대한 근태 인정, 전·현직 주요 노조간부들의 개인차량 사내 출입, 노조간부들이 착용해 온 ‘빨간 조끼’ 등이 특히 문제가 됐다.[24] 지금 노동조합 간부들의 모습은 어떠한가! 각종 선거에서 표를 구걸하고 당선만 되면 임기 동안 회사와 조합원 사이를 오가며 … 좋은 게 좋다는 식으로 적당히 해결한다. 노동조합의 각종 의결기구에서 의결된 사항이 마치 누가 보고라도 한 듯 금방 정보가 회사 측에 누출되고 … 빨간 조끼만 입으면 정문은 아무 때나 통과할 수 있도록 회사 측은 방치하고 있고 … 조합원들도 이젠 활동가를 존경하지 않는다.[25] 언제부터인가 대의원은 야간 근무를 하지 않고 특혜를 누리는 자리로 전락하고 있다. … 모 사업부는 … 대의원 당선되고 장갑 끼는 것 못 봤다는 소리가 나오는 실정이다.[26] 윤리강령 제정으로 대의원들의 특혜를 차단하고 현장활동을 혁신하는 계기로 만들어야 한다. 대의원 야간 근무하기, 회사와 술 안 마시기, 각종 회의결과 조합원 보고하기 등 하나씩 바꾸어야 한다.[27] 대의원들은 선거 때에만 투사가 되고 … 당선되면 작업장에도 투쟁 현장에도 보이지 않는다. … 기본적인 근태 문제를 확실하게 해야 한다. 각종 합의를 소위원, 조합원의 참여 속에서 합의하고 합의서는 공개해야 한다.[28] 노조 간부들의 특권과 관료주의에 대한 조합원들의 질타는 조합원들의 근본적 요구를 해결하는 데 노조가 상당히 무능력하거나 무관심하다고 여기는 가슴 깊은 실망감과 연결돼 있었다. 이를테면 조합원들은 잠재적인 고용불안으로 연결되는 해외공장 건설이나 모듈화 확대 등에 대해 노조가 뾰족한 대책 없이 끝없이 밀리고 있다고 여겼다. 수천 명에 달하는 근골격계 환자가 발생하고 1년에 10여명이 과로사로 죽어 나가는 데도 주5일제 도입 이후에도 주당 실질노동시간이 60~70시간에 달하는 것, 40대 이상의 조합원이 절반을 넘어섰는데도 생명을 갉아먹는 야간노동이 주야맞교대를 통해 계속되는 것에도 불만이 컸다. 현장에서의 선전문과 노동조합의 목소리는 점점 조합원들이 실리만 원한다라고 하면서 … 조합원들이 가지는 서글픔과 비참한 마음을 모르고 조합원들을 돈만 밝히는 실리주의자로 왜곡하고 있다. … 조합원들을 과로사로 내몰고 특근으로 내몬 것은 활동가들의 지도력 부재와 미래가 없는 정체된 활동 때문이다. 조합원들이 돈만 밝히는 실리주의자가 아니라 활동가들이 나태해진 것이다.[29] 조합원들이 ‘고용안정’에 매몰되면서 스스로 발목을 잡히자, 회사는 조합원들의 고용불안 의식을 더욱 부추기고 이용해, 물량조절·물량이동·외주화 등의 ‘생산유연화’와 비정규직화 등의 ‘고용유연화’를 가속시켰다. 이를 통해 생산성을 극대화하고, 이윤을 극대화했다. 물론 생산유연화와 고용유연화에 맞선 투쟁이 없지 않았다. 일상적 구조조정에 맞선 투쟁이 여기저기서 이어졌고, 비정규직도 투쟁에 나서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러한 투쟁들은 고용불안에 매몰된 노조의 전체 상황을 바꿔내지 못했고, 따라서 고립돼 각개격파됐다. 회사의 자신감이 커질수록 회사의 의도대로 순순히 따르지 않는 노동자들을 대하는 회사의 태도는 점점 더 거칠어졌다. 자신감을 갖게 된 회사는 생산 우선주의를 앞세워 목표한 생산량에 타격을 주는 행위에 대해 공격적으로 대응하기 시작했다. 현장투쟁을 수행한 활동가들을 징계하거나 해고하는 한편, 적극적으로 고소고발 및 손배가압류를 걸었다. 또한 경비대를 동원하고 첨단장비를 이용해 활동가들의 동향을 파악했다. 소지품 검사 등을 통해 일상적 통제를 하고 나아가 물리적 폭력을 가함으로써 활동가들을 위축시켰다. 이러한 현상은 시간이 갈수록 더욱 심해졌다. 4공장에서 노동조합 사찰 문건 및 노동조합 활동 개입에 대한 문건이 발견됐다. … 전 사업부에서 과장급 이상이 선무활동을 했다는 증거가 드러나고 있다. … 조합원 사찰내용은 충격적이다. 누구랑 어디서 무엇을 어떻게 왜 했는지에 대해 상세히 기록되었다. ‘가정방문 해서 협조 확약’, ‘경비 지원하면 협조 의사’, ‘가정방문 했으나 불투명’, ‘등산 함께 간 뒤 협조 확약’ 등의 사례들은 부당노동행위를 조직적으로 자행하고 있는 것과 같다.[30] 아산공장은 노동조합 간부와 하청지회 간부들에 대한 미행, 감시, 사찰 업무를 보는 경비대를 설치 운영하였다. … 또한 출퇴근시 정문과 쪽문에 검사대를 설치하고 소지품 검사를 실시했다. … 더 나아가 식당입구에 사측의 무인카메라가 24시간 작동되고 있다. … 노동조합 간부들의 식당 홍보 투쟁에서 하청지회의 중식투쟁, 일상적으로 식사하는 조합원까지 사측의 감시사찰 대상이었던 것이다.[31] 최근 1,2,3,4,5공장에 지원실이라는 것이 생겼는데 지원실장으로 발령받은 자들의 면면이 기가 막힌다. 판매본부에서 노동조합 탄압의 선두에 섰던 사람들이 졸지에 임원으로 승진되어 전진배치된 것이다. 이들 중에는 무술유단자와 폭력전과자까지 있다. 지원팀은 현장을 탄압하고 활동가들을 감시하고 사찰하던 곳이었다. 그런 지원팀을 지원실로 강화하여 본격적인 현장탄압을 시작하려는 것이다.[32] 또한 회사는 관리자들을 동원해 조합원들을 개별 접촉하여 인간관계를 쌓아 나갔다. 관리자들은 회식자리와 향우회·동호회 등을 적극 활용했다. 이렇게 확보한 영향력을 바탕으로 회사는 노조의 선거나 총회에 개입했다. 이러한 개입은 실제로 많은 효과를 거두었다. 회사 관리자들이 요즘 들어 부쩍 현장조합원들과 친한 척 하면서 현장의 동향을 파악하기 위해 밤낮을 가리지 않고 현장을 돌고 있다. … 회사 관리자들은 불파 투쟁과 05년 임단투에서 노동조합을 무력화시키기 위해 현장을 누비고 있는데 정작 노동조합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안타깝다. … 모두들 현장이 힘들다 하고 현장이 어용화가 되었다고 하지만 이것의 원인은 사측 관리자들이 밤낮을 설치며 현장을 뒤집고 다닌 탓일 것이다.[33] ◎ 2007년 성과금 공방 2007년 1월, 회사의 성과금 미지급을 계기로 현대차 노사 간에 전례 없는 충돌이 발생했다. 이 사건은 끝없는 위기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노조를 결정적으로 약화시켜 보고자 한 회사의 도발이었다. 노조가 가진 치명적인 약점들이 드러났지만, 현대차노조 조합원들은 강력한 단결력을 발휘하며 노조를 지켜냈다. 그러나 노조는 깊은 내상을 입었다. 2006년 7월 26일, 현대차 노사가 임금협약을 타결하면서 연말 성과금을 생산목표 달성과 연계하여 ‘목표 달성시 150%, 95% 이상시 100%, 90% 이상시 50%를 지급’하기로 했다. 그런데 공식 발표와 달리 노사협상 과정에서 회사가 ‘합의서 내용은 대외용이고 성과금은 생산실적과 상관없이 150%를 주겠다’고 구두로 약속했다.[34] 12월 28일, 회사가 생산목표 달성에 실패했다며 연말 성과금을 100%만 지급하겠다고 노조에 전달했고, 29일 실제로 100%만 지급했다.[35] 연말 성과금의 생산성 연동을 관철함으로써 ‘생산성 연동임금제’로 가는 길을 확실히 열겠다는 의지의 표명이었다. 노조 집행부가 ‘조합원 선물비리’로 조기 사퇴하게 된 어수선한 노조 상황을 틈탄 기습이기도 했다. 2007년 1월 3일 노조간부 80여 명이 회사의 울산공장 시무식장에서 분말소화기를 분사하며 행사를 방해했다. 노조는 성과금 특별교섭을 요구하며 잔업거부에 들어갔다. 4일 회사는 노조의 성과금 특별교섭을 거부하고, 시무식 폭력사태와 관련해 노조간부 22명을 고소했다. 노조는 즉각 본관로비 철야농성에 돌입했다. 5일 노조가 성과금 보충교섭을 요구했지만, 8일 회사가 보충교섭을 거부하고 노조를 상대로 10억 원의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제기했다. 노조는 10일 노조간부 1천 5백 명이 양재동 현대차 본사 상경투쟁을 벌인 뒤, 12일 임시대의원대회를 열어 ‘15일부터 파업 돌입’을 결의했다. 그런데 15일 오전 노조의 파업돌입을 몇 시간 앞두고 전직 노조 위원장이 배임수재 혐의로 검찰에 긴급체포 됐다. 2003년 7월 하순 임단협 협상을 잘 진행해 달라는 요청과 함께 회사 부회장에게서 2억 원을 받은 혐의였다. 현대차 비자금 조성 건으로 검찰 수사를 받은 부회장이 검찰에게 정보를 넘긴 것인데, 돈을 건넨 회사 임원은 공소시효가 만료됐지만 돈을 받은 노조 위원장은 공소시효가 남아 있는 상태였다. 현 노조 위원장은 2003년 당시 노조 사무국장이어서 같이 의심을 받을 수 있는 상황이었다. 노조의 파업을 와해시켜 보려는 회사의 치명적인 노림수였다. 그러나 15일 현대차노조는 주간조와 야간조 모두 4시간 파업을 성공적으로 치러냈다. 회사의 의도를 읽어낸 조합원들은 ‘어쨌거나 노조는 지켜내야 한다’는 위기의식으로 똘똘 뭉쳐 평소보다 더 강한 기세로 파업에 합류했다. 16일 노사협상이 시작됐다. 17일 주간조가 6시간 파업을 벌인 뒤, 오후에 노사가 합의에 이르렀다. 노조가 생산목표 미달분 만회에 협력하는 조건으로 회사가 50% 성과금을 지급하기로 하면서 사태가 일단락됐다. 2006년 성과금 50% 지급문제로 불거진 현대자동차 노사대결은 한국 노동운동의 현주소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모든 부르주아 언론의 맹폭격 앞에서 현자 노동조합은 사회적으로 고립되었다. 다행히도 노동조합이 와해되는 것을 어떻게든 막고자 했던 현자 노동자들의 분투에 의해 최악의 상황은 피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런 상황이 지속된다면, 한국 노동운동의 상징적 구심인 현대차에서도 현중과 같은 일이 전개되지 않으리라 장담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더욱 중요한 사실은 현대차 노동조합이 겨우 위기를 넘겼지만, 한국 노동운동의 상징으로 부각되고 있는 현자 노동조합의 도덕적 권위가 전체 노동자 앞에서 무너짐으로써 한국 노동운동이 거대한 상처를 입었다는 점이다. 이것은 노사협조주의 노선, 그리고 조합주의 노선의 필연적 결과물이다. 우선 현자를 비롯한 대개의 대기업 사업장들에서 독버섯처럼 번져나가고 있는 ‘생산 성과와 연동된 특별성과금 관행’을 지적해야 한다. ‘타결장려금’과 함께 이것은 노사협조주의를 조장하는 대표적인 도구다. 사실상 임금의 한 부분에 지나지 않지만, 기본급이나 정기상여금이 아니라 생산 성과와 연동된 특별성과금을 위해서 노동자들은 자발적으로 생산에 협력해야만 한다. 관행적으로 전부를 지급해왔다는 사실이 이러한 본질을 조금이라도 희석시키는 것은 아니다. 이번에도 분명히 드러났지만, 특별성과금 형태의 임금구조는 언제든지 자본이 명분을 가지고 노동자의 임금을 도둑질할 수 있도록 허용할 뿐만 아니라 회사의 번영이 노동자의 더 나은 조건 획득과 연결될 수 있다는 환상을 노동자들 속에서 조장한다. 만약 이러한 노사협조주의적 발상이 만들어낸 특별성과금 따위의 임금구조를 허락하지 않았다면, 자본이 ‘성과미달’이라는 이유로 노동자의 노동의 대가를 갈취하려는 짓거리 따위는 일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최소한 노동자들은 누구라도 부정할 수 없는 명백한 근거, 즉 정당한 노동에 대한 최소한의 합법적 대가라는 관점에서 공세적으로 투쟁에 나설 수 있었을 것이다. 다음으로 ‘구두합의’와 같은 ‘비공식적인 밀실협상의 전통’을 거론해야 한다. 모든 합의내용은 조합원대중에게 공개되어야 하고, 이 합의는 명백히 ‘서면합의’ 형식을 취해야 한다. 법률적 구속력이 없고, 언제든지 손바닥 뒤집듯이 철회할 수 있는 구두합의는 노동자투쟁의 성과를 무로 돌릴 수 있으며, 자본이 필요한 시기에는 언제든지 활용할 수 있는 수단을 제공하는 것이다. 나아가서 이 구두합의는 밀실협상의 관행과 떼려야 뗄 수 없이 연결되어 있다. 이러한 노사협조주의적 약점과 함께 이번 공방전을 좌우했던 결정적인 요소로 지적해야 할 부분은 바로 ‘계급적 관점’이다. 현대차노조가 전체 사회적으로 고립되었던 것(즉 다수의 노동자 민중으로부터 지지를 받지 못했던 것), 심지어는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연대에 나섰던 현대차 비정규직 노동자들로부터도 진심어린 지지를 끌어내지 못했던 것은 현대차 정규직 노동운동이 이제껏 취했던 조합주의 노선이 초래한 비극이었다. 이것은 현대차 정규직 노동자들의 자신감에도 영향을 미쳐, 겉보기와는 달리 이번 공방전 내내 현대차 노동자들은 주도권을 발휘하지 못했고 충분히 당당한 모습을 보이지 못했다. 오직 이번 공방전에서 일방적으로 밀린다면 노조 파괴로 연결되고, 이것은 노동자의 생존권을 지키는 마지막 보루가 붕괴될 수밖에 없었기에 현대차 노동자들은 투쟁에 힘을 실었던 것이다. 투쟁에 나선 노동자들이 도덕적 주도권을 확실히 움켜쥐지 못하는 것, 그것도 한국 노동운동의 상징적 구심인 현대차 노동자들이 자신들의 투쟁이 전체 노동자로부터 지지를 끌어내지 못하고 오히려 의혹의 눈초리에 직면하고 있다는 것은 한국 노동운동의 거대한 비극이 아닐 수 없다. 이것이 갖는 의미는 만약 현대차 노동조합이 다르게 행동해왔고 다른 쟁점으로 전투를 치렀을 경우를 가정한다면 더욱 분명해진다. 현대차 불법파견 판정이 내려졌을 때, 그리고 올해 현대차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향해 울산공장에서 고용불안 공격이 덮쳤을 때, 현대차 정규직 노동조합이 전면적인 총파업을 전개하면서 비정규직 노동자의 요구를 대변했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비정규직 개악법안에 맞서 전체 노동자의 요구를 내건 단호한 총파업투쟁을 지속했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만약 노사협조주의적인 특별성과금 따위를 위해서가 아니라 기본급으로 임금인상을 확고히 쟁취하고, 임금인상분의 일부를 투쟁사업장 연대기금으로 내고자 했다면, 그런데 이것에 대해 자본이 전면적인 공격을 가했다면 과연 어땠을까? 그것은 모든 자본가 언론의 주둥아리를 닫게 만들었을 것이다. 모든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현대차 노동조합의 투쟁을 통해 한국 노동운동에서 희망을 발견하게 되었을 것이다. 현대차 정규직 노동자들의 자부심은 얼마나 높았을 것이며, 여기에 연대하는 현대차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얼마나 숭고한 의무감에 불탔을 것인가! 그 대신 한국 노동운동의 상징적 구심이 다수 노동자의 의혹에 찬 눈초리와 마주치고, 한줌 착취자들의 언론과 정부에 의해 마구 난도질당하면서 고립되는 이 참혹한 현실만큼 비참한 현실이 어디에 있겠는가? 현대차의 노사협조주의적 지도부는 50%의 특별상여금 지급, 그것도 생산 차질분을 전부 만회하겠다는 약속의 대가로 얻어진 그 성과 앞에 승리라고 박수칠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그들이 잊고 있는 것은 그 표면적인 성과의 뒷면에서 한국 노동자계급 전체가 입은 거대한 피해이다. 장기적으로 볼 때, 이것은 현대차 정규직 노동자들까지도 혹독한 대가를 치르도록 강요할 것이다. 현대차 자본이 위기에 직면해 더욱 포악해지고, 그래서 공장을 상당히 오랜 시간 정지시키더라도 경찰과 검찰, 정부의 힘을 동원해 노동자들을 공격해야만 하는 결정적인 상황이 도래하게 될 때, 이 같은 고립은 현대차 노동자들을 덮치는 재앙의 진원지가 될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오직 썩어문드러진 조합주의 지도자들만이 이것을 승리 혹은 무승부라고 부를 수 있다. 이런 식으로, 아직 충분히 투쟁할 수 있는 여력이 있고, 아직 노동조합에 대한 신뢰를 거두지 않았으며, 게다가 전직 위원장이 수억 원을 받아 처먹는 통탄할 만한 사건에 직면해서도 노동조합을 사수하기 위해 파업지침을 사수하는 현대차 노동자대중을 가장 불리한 조건에서 전면전을 치르도록 몰아붙이는 개량주의 지도자들의 범죄행위가 지속된다면 아무리 강철 같은 노동대중도 장기적으로는 결국 분쇄될 수밖에 없다. 노동운동의 선봉장이 다수의 노동자대중으로부터 지탄의 대상이 되고, 오히려 다수 노동대중이 노동운동의 선봉장에 대한 정부의 공세를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는, 이 비통한 현실이 지속된다면 한국 노동운동이 약 20년간 쌓아올린 성과의 마지막 한 부분까지 결국 무너져 내릴 수밖에 없다.[36] 3) 산별노조 전환과 1사1조직 타협·개량주의 세력의 주도권 아래 민주노총이 건설되고, 곧이어 자본가들의 신자유주의 대공세에 패배를 거듭하면서, 민주노총으로 포괄된 민주노조운동 전반은 심각하게 후퇴했다. 전노협 운동의 특징이던 자주성·민주성·전투성·연대성·변혁성에 대한 지향은 2000년대 초반 이후 민주노조운동 안에서 매우 약화됐다. 민주노총으로 포괄된 민주노조운동 전반의 후퇴는 2000년대 중반에 이르러 심각한 수준의 관료화와 타락으로 나아갔다. 그러나 단위노조부터 상급단체까지 광범하게 포진한 노조관료들은 위기의 총체성을 인정하고 그 원인을 근본적으로 파악하려는 진솔한 노력 없이 끝없는 이전투구와 관성적 대응에 머물렀다. 민주노조운동의 위기를 극복할 핵심 방안이라고 노조관료들이 오랜 시간 주장했던 것은 이른바 ‘산별노조 전환’이었다. 몇 년 동안 거듭된 시도 끝에 2006년 6월 금속산업에서 현대차·기아차·대우차 등 핵심 대기업 노조들의 산별노조 전환 투표가 성공함으로써, 산별노조 전환은 큰 고비를 넘게 됐다.[37] 그러나 민주노총이 추진한 산별노조 전환은 민주노조운동의 위기를 극복하는 데 전혀 도움이 되지 못했다. ‘산별노조 전환’ 논리 속에는 민주노조운동이 대기업 정규직만의 노동조합을 넘어서서 광범한 미조직 노동자들을 포괄해 나가야 한다는 정당한 문제의식이 들어 있었다. 그러나 민주노총의 산별노조 전환에는 그 의미를 전혀 살릴 수 없는 온갖 함정들, 나아가 위기를 더욱 심화시킬 함정들로 가득 차 있었다. 민주노총의 산별노조 전환은 대기업 정규직의 협소한 이해관계를 전혀 떨쳐버리지 못한 채 오히려 그러한 협소한 이해관계가 지배하는 형태로 이루어졌다. 이를테면 금속산업의 산별노조인 금속노조는 규모가 큰 대기업의 경우 지역지부에 속하지 않고 별도의 기업지부를 구성하도록 인정함으로써 조합원들을 통일된 기준으로 편제하는 것도 못하는 우스꽝스러운 조직형태를 갖게 됐다.[38] 말이 산별노조 전환이지 실제로는 기업별노조 체계가 그대로 유지되는 것이었다. 한 사업장 안에 있는 같은 산별노조 조합원인데도 정규직과 비정규직 사이의 차별이 산별노조 전환 이후에도 여전히 계속되고 당연시됐다. 많은 경우 한 사업장의 정규직과 비정규직을 하나의 조직체계로 통합하는 것조차 이루어지지 않았다. 해당 사업장의 비정규직 다수가 여전히 미조직 상태인데도 그냥 방치됐다. 그러니 정규직과 비정규직 사이에 존재하는 임금과 단체협약에서의 차이를 해소하기 위한 도전은 거의 시도조차 되지 못했다. 같은 사업장 안에 있는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차별조차 극복하려 하지 않는 노동조합이 광범한 미조직 노동자들을 조합원으로 조직해 나간다는 것은 당연히 불가능한 일이었다. 결국 민주노총이 추진한 산별노조 전환은, 광범한 미조직 노동자들의 조직화를 위해 전진하는 진정한 의미의 산별노조 건설과는 전혀 거리가 먼 것이었다. 대기업 정규직의 기업별노조들을 형식적으로 묶어놓고서 ‘산별노조’라는 허울을 내거는 우스꽝스런 조직을 만들어냈을 뿐이었다. 2006년 금속산업 대기업 노조들의 산별노조 전환으로 거대 산별노조가 된 금속노조는 민주노총을 대표하는 산별노조가 됐다. 금속노조는 2006년 12월 통합대의원대회에서 한 사업장 안의 모든 조합원을 직종이나 고용형태 등을 가리지 않고 단일한 조직체계로 통합한다는 ‘1사1조직’을 조직편제 원칙으로 확정했다. 그러나 1사1조직의 추진과정은 ‘산별노조’로서 금속노조가 가진 허구성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물론 일부 사업장에서는 1사1조직을 통해 사내 비정규직을 새롭게 조직하는 모범적인 모습이 나타나기도 했다. 하지만 금속노조를 좌지우지하는 대기업 지부들에서의 상황은 매우 달랐다. 금속노조 현대차지부의 대의원대회는 2007년 1월과 6월, 2008년 10월 세 번에 걸쳐 1사1조직 규칙개정을 모두 부결시켰다. 2007년 1월 현대차지부의 임시대의원대회는 비정규직 3주체(울산·아산·전주)가 1사1조직 관련 단일안을 만들지 못하고 △비정규직의 별도 집행기구를 두는 안 △비정규직을 정규직과 같은 선거구로 편제하는 안 △확대운영위원회로 위임하는 안 등 복수안을 가져오자 ‘비정규직 3주체의 단일안을 가져오라’며 세 안을 모두 부결시켰다. 2007년 6월 임시대의원대회는 가입대상 중 2·3차 사내하청 포함 여부, 판매부문 딜러와 정비부문 그린서비스 종사자 포함 여부 등을 놓고 격론을 벌인 끝에 부결시켰다. 2008년 10월 임시대의원대회는 비정규직의 별도 집행기구 없이 정규직과 같은 선거구로 편제하는 안이 상정됐지만, 가입대상 범위에 대한 질의, 준비부족과 선거권·피선거권 부여에 따른 혼란 등을 우려하는 반대발언이 이어진 끝에 또다시 부결시켰다. 이와 달리 기아차지부는 2008년 4월 1사1조직을 가결시켰다. 그러나 그 실내용은 계급적 단결이라는 산별노조의 정신과는 거리가 멀었다. 기아차지부에서 1사1조직의 실제 의미는 정규직 노조의 통제권 밖에서 독자적인 투쟁을 이어가던 사내하청 노조를 무력화하는 과정이었기 때문이다. 기아차에서도 비정규직 조직화가 2003년부터 시작됐다. 다만 사내하청 노동자들이 메인라인보다 서브라인에 집중돼 있는 사업장 특성에 따라 활동 초점이 불법파견 정규직화 투쟁보다 업체투쟁과 임단투에 집중됐다. 2003년 4월 기아차 화성공장의 비정규직 활동가 4명과 정규직 활동가 2명이 ‘노동해방을 위한 기아자동차 비정규직 현장투쟁단’을 결성하고, 업체별 회원조직화에 나섰다. 회원조직화의 기제는 고용·노동조건과 관련된 다양한 업체별 사안들을 둘러싼 업체투쟁이었다. 2003년에는 기광, 성원실업, 신성물류에서, 2004년에는 세화실업, 보성에서 업체투쟁이 조직됐다. 2년 동안 현장투쟁단은 5개 업체 350여 명을 회원으로 조직했다. 2005년 6월 4일 현장투쟁단을 토대로 금속노조 기아자동차비정규직지회가 설립됐다. 450여 명으로 출발한 조합원 수가 설립 직후 19개 업체 1천여 명으로 급격히 증가했다. 임단투에 들어간 비정규직지회는 여러 차례 독자파업을 성사시켰다. 그런데 기아차노조의 임투가 종결되자 9월 28일 400여 명의 용역깡패가 비정규직지회 파업을 공격했다. 회사의 파업파괴 공작에 맞서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연대투쟁이 전개됐고 비정규직지회의 투쟁은 오히려 상승세를 탔다. 하지만 10월 7일 노동탄압 분쇄와 원하청 공동투쟁 승리를 위한 기아차노조의 파업찬반투표가 부결됐다. 회사의 분열 공세와 비정규직지회의 독자파업을 부담스러워 하는 기아차노조의 태도 때문이었다. 비정규직지회의 투쟁은 하강세를 타기 시작했다. 20일 비정규직지회의 핵심동력이던 신성물류를 시작으로 7개 업체에 도급계약 해지가 공고됐다. 비정규직지회 조합원들이 노조를 탈퇴하기 시작됐다. 25일 비정규직지회 간부들과 선봉대 20여 명이 조립1공장을 기습점거하고 파업을 전개했으나 기아차노조가 비정규직지회의 투쟁을 ‘일방적인 투쟁’이라며 비판했다. 투쟁력이 고갈된 비정규직지회는 기아차노조의 중재를 받아들여 하청업체들과 집단교섭을 체결했다. 2006년, 비정규직지회는 원청 사용자성 쟁취를 내걸고 임단투를 준비했다. 7월 20일 이후 주2회 이상 독자파업으로 생산을 타격하며 사측을 압박했다. 투쟁이 최고조에 이르렀을 때 조합원 수가 1천 300여명으로 늘어나기도 했다. 그러나 기아차노조가 2005년과 마찬가지로 비정규직지회의 독자파업과 투쟁 장기화에 불만을 표시했다. 어쨌든 정규직노조의 중재로 9월 18~19일 비정규직지회, 기아차노조, 기아차가 참여한 교섭테이블이 열렸고, 비정규직지회는 회의록 형태의 고용보장합의서를 얻어냈다. 2005년과 2006년의 임단투를 거치며 기아차 화성공장에서는 비정규직지회의 주체성과 독자적 전술구사를 둘러싼 기아차노조와 비정규직지회 간의 긴장과 갈등이 점차 깊어졌다. 회사는 비정규직지회를 대대적으로 탄압하는 한편, 정규직에게 고용불안 이데올로기 공세를 폈다. 이런 상황에서 산별노조로 전환한 금속노조 기아차지부가 2007년 2월 비정규직지회와 통합방침을 일방적으로 발표하고 4월 30일부터 사내하청 노동자들을 상대로 개별적으로 직가입 신청을 받기 시작했다. 비정규직지회는 이에 대해 지회의 투쟁을 통제하려는 의도라고 비판하며 강력히 반발했다. 비정규직지회는 사내하청의 개별 가입 방식으로 비정규직지회가 기아차지부에 흡수될 경우 비정규직지회가 가진 기존의 조직력과 투쟁력을 상실할 것이라고 봤다. 5월 29일 금속노조 중앙집행위원회가 비정규직지회 조합원을 포함하는 직가입 사업을 중단하라고 결정했으나, 기아차지부는 개별 직가입을 이어갔다. 6월 12일 비정규직지회가 총회를 열어 ‘지회의 자주적 요구안 수립 보장, 현장파업권 인정, 2‧3차 하청 가입 보장, 지회의 자주적 조직체계 인정, 지부단위에서 비정규할당제 30% 보장’을 조건으로 하는 계급적 조직통합안을 결의하고 기아차지부에 제안했다. 그러나 기아차지부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비정규직지회는 독자 임단투를 전개하는 동시에 기아차지부의 일방적 직가입 추진에 항의하는 활동을 이어나갔다. 기아차지부와 비정규직지회 간의 긴장과 갈등이 고조되는 가운데, 8월 23일 비정규직지회가 도장공장 점거파업을 시작했다. 그런데 점거파업 9일째인 31일, 기아차지부의 어용 성향 조합원들이 구사대로 돌변해 비정규직지회의 파업현장에 난입하여 비정규직지회와 현장조직의 천막을 불태우는 등 폭력을 행사했다. 8·31 사태 이후 긴장은 극에 달하고 현장은 얼어붙었다. 기아차지부 조합원들의 분위기가 크게 경직됐고, 활동가들의 연대도 위축됐다. 비정규직지회는 금속노조의 중재를 받아들여 기아차지부와 ‘선통합 후논의’에 합의했다. 2008년 4월 기아차지부, 5월 비정규직지회 대의원대회에서 각각 규칙개정이 통과되면서 1사1조직 통합이 완료됐다. 기아자동차지부는 1사1조직으로의 전환은 이루어냈으나 그 과정에서 정규직지부와 비정규직지회 간의 갈등이 극단적으로 고조되어 여러 가지 문제점을 드러내기도 했다. … 1사1조직화가 강한 자체 투쟁역량을 보유하고 있는 사내하청 단위에 대한 통제기제로 활용될 수 있는 여지가 있다는 점이 확인되었다. 실제로 조직통합 전 기아자동차비정규직지회는 독자파업을 통해 원청사의 생산에 타격을 줄 정도의 상당한 조직력과 투쟁력을 갖추고 있었으며, 그렇기 때문에 1사1조직 논의가 지속되는 내내 사내하청 단위의 독자적인 조직과 쟁의권을 보장할 것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요구는 받아들여지지 않았으며, 정규직 노조의 강도 높은 개별가입 캠페인과 1사1조직으로의 전환 드라이브 하에서 결국 조직통합은 지회해체 후 사내하청 노동자들의 개별적인 지부가입의 형태로 이루어졌다. 하기에 1사1조직화 자체의 일정한 의의와 성과에도 불구하고, 기아자동차의 사례는 “지회의 조직력과 투쟁력을 깨”고 “단체행동권을 제한하”며 “비지회만으로 라인 못 세우게 하기 위해서” 정규직 노조가 조직통합을 주도했다는 혐의를 완전히 부정할 수만은 없는 것이다.[39] 2000년대 초중반을 지나면서 대기업 정규직을 중심으로 ‘민주노조운동’의 위기와 추락이 계속됐지만, 민주노조운동을 재건해 내려는 노력 또한 지속됐다. 특히 계급적 전망을 상실한 대기업 정규직 운동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을 바탕으로 비정규직 투쟁에 헌신적으로 결합하려는 정규직 활동가들이 전국의 여러 사업장에서 나타났다. 관료화된 ‘민주노조운동’의 실상을 폭로하고 상층 노조관료들에 도전하며 노동자 민주주의를 회복하려는 여러 노력들도 나타났다.[40] 하지만 이런 노력들은 안타깝게도 ‘민주노조운동’ 전반의 위기와 추락을 되돌려 놓을 수 있을 만큼 강력한 힘을 만들어 내지는 못했다. 다음 편 보기 [1] 전국비정규직노조연대회의(전비연), 2005/10/16, 「출범선언문」. [2] 현대차노조는 1987년 노조설립 이후 2008년까지 1994년을 제외하고는 모두 파업을 전개했다. 2009~11년 무파업을 기록한 뒤, 2012~17년 연속해서 파업을 전개했고, 2018~24년 다시 무파업을 기록했다. [3] 현대중공업노조 조합원들을 기반으로 하는 울산 동구, 창원공단의 금속노조 조합원들을 기반으로 하는 창원(을)도 노동자들의 지지 기반이 상당한 지역이었지만 울산 북구만큼은 아니었다. [4] 양준석, 2005/08/27, 「현대자동차노조의 노동운동 내 위상과 현재적 과제」. [5] 민투위 활동가들은 다수가 1998년 구조조정에서 정리해고·무급휴직 대상자가 됨으로써 1998년 투쟁 패배 이후 1년 남짓 현장을 떠나 있어야 했지만, 복귀 이후 빠르게 현장 기반을 재건했다. [6] 민투위는 산별노조 전환 뒤인 2007~09년 금속노조 현대차지부 집행부를 다시 배출하는데, 이번에는 ‘실질임금 삭감, 노동강도 강화, 고용 불안 없는’ 주간연속2교대를 실현하겠다는 공약과 달리 노동자의 권리를 대폭 하락시키는 주간연속2교대 도입을 합의함으로써 끝내 정규직마저 배신했다. [7] 2000년 생산이 회복됨에 따라 노조가 유리해진 국면에서, 노조 집행부가 1998년의 구조조정을 되돌리는 단호한 투쟁에 나서는 대신 고용불안 논리에 따라 사내하청 대규모 투입에 앞장선 것은 조합원들의 ‘일상화된 고용불안’ 정서를 더욱 고착화하는 결과를 낳았다. [8] 현대차는 1997년 튀르키예 공장, 1998년 인도 공장, 2002년 중국 베이징 공장, 2005년 미국 앨라배마 공장, 2007년 체코 공장을 속속 준공하며, 세계 곳곳으로 생산 기지를 확대해 나갔다. 이후에도 현대차는 2010년 러시아 공장, 2012년 브라질 공장, 2017년 베트남 공장, 2022년 인도네시아 공장 등을 준공하며 해외 생산거점을 계속해서 확대시켰다. 현대차는 해외 생산거점 확대 과정에서 부품하청업체들의 중국 동반 진출을 독려하기 위해 2005년 납품물량의 40%를 중국에서 역수입해 공급하라는 ‘바이백’ 지침을 내리기도 했다. [9] 현대차 자주노동자회, 2002/09/04, <자주노동자> 신문. [10] 현대차 실천하는노동자회, 2003/02/26, <실노회> 신문. [11] 현대차 자주노동자회, 2003/10/22, <자주노동자> 신문. [12] 현대차 민주노동자투쟁위원회, 2002/08/14, <노동자의길> 신문. [13] 현대차 자주노동자회, 2004/01/27, <자주노동자> 신문. [14] 현대차 민주노동자투쟁위원회, 2004/04/14, <노동자의길> 신문. [15] 현대차 민주노동자투쟁연대, 2004/09/08, <민노투> 신문. [16] 현대차 민주노동자투쟁위원회, 2005/03/22, <노동자의길> 신문. [17] 현대차 민주노동자투쟁연대, 2005/04/20, <민노투> 신문. [18] 현대차노조 5공장 대의원회, 2005/07/05, <5공장 대의원회> 유인물. [19] 모듈이란 작은 부품들을 하나의 덩어리로 묶은 조립단위를 말한다. 이를테면 칵핏모듈은 인판넬, 계기판, 오디오, 공조시스템, 스위치, 에어백 등을 하나로 묶어 구성된 조립단위다. 과거에는 각각의 부품이 완성차 조립라인에서 조립됐지만, 모듈외주화가 되면 사외 부품사가 조립한 모듈을 공급받기 때문에 완성차 조립라인의 작업량이 그만큼 줄어든다. [20] 현대차 민주노동자투쟁연대, 2003/04/29, <민노투> 신문. [21] 최영익, 2007/02/01, 「한발 한발, 그러나 고지를 향해 똑바로!」, 『노동해방』 53호. [22] 현대차노조의 활동이 자본이 설정한 반경 안으로 갇혀 버렸음을 보여주는 하나의 사례로 경영권 세습에 대한 무대응이 있었다. 2000년대 초중반 현대차 그룹은 정몽구에서 정의선으로 경영권 부자세습을 준비했다. 2001년 물류업체 글로비스(정의선 지분 60%)를 설립하고, 2002년 건설업체 엠코(글로비스 지분 60%)를 설립하여 현대차 일감을 떼거지로 몰아주었다. 글로비스 등의 회사 가치 극대화로 주식 가격이 몇십 배로 폭등하면서, 정의선은 경영권 세습에 필요한 비용을 손쉽게 확보해 나갔다. 그런데 이것을 문제 삼는 현대차노조의 목소리는 거의 없었다. 실제로 현대차 그룹의 경영권 세습은 소액주주의 권리 침해라는 측면에서 참여연대 등으로부터 일정한 공격을 받기는 했을지언정, 정작 현대차노조로부터는 사실상 어떤 제동도 걸리지 않았다. 2006년 정몽구 회장이 비자금 문제로 구속됐을 때도 노조는 별다른 대응을 하지 않았다. [23] 일부 노조간부들이 회사의 생산직 채용과정에 영향력을 행사하면서 채용희망자들로부터 금품을 수수한 ‘채용비리’는 2005년 1월 기아차에서부터 불거져 5월에는 현대차로 번졌다. 10월에는 민주노총 수석부위원장이 택시운송사업조합연합회로부터 수천만원의 금품을 수수한 게 드러나 구속되고 민주노총 지도부가 총사퇴하는 사건까지 터졌다. [24] 2000년대 중반 현대차노조에서는 ‘빨간 조끼’를 착용하고 다니는 노조간부들이 조합원들 사이에서 ‘빨조’라는 이름으로 공공연히 지칭됐다. 원래 노조간부들이 일상적으로 빨간 조끼를 착용하고 다니는 것은 민주노조의 힘과 투쟁의지를 상징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제 그 빨간 조끼를 착용한 노조간부들이 온갖 특권과 향응을 게걸스럽게 빨아먹는다며 비아냥대는 의미의 ‘빨조’로 불리게 됐던 것이다. [25] 현대차 실천하는노동자회, 2003/02/26, <실노회> 신문. [26] 현대차노조 공동소위원회, 2005/04/13, <공동소위원회> 유인물. [27] 현대차 자주노동자회, 2005/06/02, <자주노동자회> 유인물. [28] 현대차노조 공동소위원회, 2005/06/08, <공동소위원회> 유인물. [29] 현대차 자주노동자회, 2003/11/05, <자주노동자> 신문. [30] 현대차노조 4공장 소위원회, 2003/08/21, <4공장 소위원회> 유인물. [31] 현대차 자주노동자회, 2004/05/04, <자주노동자> 신문. [32] 현대차 민주노동자투쟁위원회, 2005/03/22, <노동자의 길> 신문. [33] 현대차 민주노동자투쟁위원회, 2005/03/22, <노동자의 길> 신문. [34] 현대차는 1991년 이후 생산목표 달성 여부와 상관없이 성과금을 지급했고, 생산실적과 연동한 성과금 지급 합의는 2006년이 처음이었다. [35] 현대차는 2006년 161만 8천 268대를 생산하여, 생산목표인 164만 7천대의 98.3%를 달성했다. [36] 최영익, 2007/02/01, 「한발 한발, 그러나 고지를 향해 똑바로!」, 『노동해방』 53호. [37] 대표적으로 2006년 6월 28~29일 실시된 현대차노조의 산별노조 전환투표는 71.5% 찬성으로 3분의 2를 넘겨 가결됐다. 2003년 6월에 실시된 1차 산별노조 전환투표는 62.1% 찬성에 그쳤었다. [38] 기업지부는 처음에 3년 동안만 시행하는 한시적 조치로 도입됐지만, 2009년과 2011년 두 차례 연장된 끝에 기본 조직체계로 굳어졌다. [39] 김보성, 2011, 「자동차업종 사내하청 조직화투쟁의 쟁점과 평가」 [40] 이러한 노력은 민주노총 위원장 직선제와 대의원대회 비정규직 할당제 도입 등 제도혁신 운동으로도 나타났다. /* 스크롤 여백만 주고, 화면에는 안 보이게 */ .ftn-target { display: inline-block; /* 줄바꿈 안 생김 */ width: 0; height: 0; scroll-margin-top: 200px; } document.addEventListener("DOMContentLoaded", function () { // name="_ftn1", name="_ftn2", name="_ftnref1" ... 전부 대상 document.querySelectorAll('a[name^="_ftn"]').forEach(function(a) { var idValue = a.getAttribute("name"); // 이미 같은 id의 요소가 있으면 또 만들지 않음 if (!document.getElementById(idValue)) { var span = document.createElement("span"); span.id = idValue; span.className = "ftn-target"; a.parentNode.insertBefore(span, a); } }); }); /* 본문 각주 번호 + 아래쪽 각주 번호 색 지정 */ a[href^="#_ftn"] sup, a[href^="#_ftnref"] sup { color: #BF202D; } /* 밑줄이 보기 싫으면 */ a[href^="#_ftn"], a[href^="#_ftnref"] { text-decoration: none; } /* 마우스 올렸을 때 살짝만 강조하고 싶으면 (선택) */ a[href^="#_ftn"]:hover, a[href^="#_ftnref"]:hover { text-decoration: underline; } /* 페이지 전체가 오른쪽으로 넘치지 않게 */ html, body { max-width: 100%; overflow-x: hidden; } /* 본문 영역 폭 강제 고정 + 긴 단어/문장도 줄바꿈 */ #bo_v_con, .bo_v_con, .cke_editable, article { max-width: 100%; overflow-wrap: break-word; word-wrap: break-word; /* 구형 브라우저용 */ } /* 워드에서 붙은 이미지/표가 화면 밖으로 안 나가게 */ #bo_v_con img, #bo_v_con table, .bo_v_con img, .bo_v_con table, .cke_editable img, .cke_editable table, article img, article table { max-width: 100% !important; height: auto; } /* 워드가 p, span에 폭을 박아놓은 경우 강제로 해제 */ #bo_v_con p[style*="width"], #bo_v_con span[style*="width"], .bo_v_con p[style*="width"], .bo_v_con span[style*="width"], .cke_editable p[style*="width"], .cke_editable span[style*="width"], article p[style*="width"], article span[style*="width"] { width: auto !important; max-width: 100% !important; } /* 기본 blockquote 스타일 */ blockquote { border-left: 4px solid #c0392b; /* 사이트 분위기와 맞는 붉은 계열 */ padding: 12px 18px; margin: 20px 0; background: #fafafa; font-style: normal; color: #333; line-height: 1.6; } /* blockquote 안의 p 태그 정렬 */ blockquote p { margin: 0 0 10px 0; text-align: justify; } /* 마지막 p 태그 여백 제거 */ blockquote p:last-child { margin-bottom: 0; } -
[번역] 우파에 맞서서 승리하는 법: 밀레이에 맞선 아르헨티나 노동운동에서 얻은 교훈싸움이 끝나려면 아직 멀었지만, 아르헨티나의 병원 노동자들, 교사들, 대학 교직원과 학생들은 자기 조직화, 계급적 독립성, 현장 조직화를 무기 삼아 긴축 프로그램과 예산 삭감에 맞설 수 있음을 보여 주었다. 두 번째 대통령 임기를 맞이한 트럼프는 적극적이고 신속하게 노동 계급을 공격 중이며, 특히 이민자 공동체, 성소수자, 유색인, 팔레스타인 연대 운동을 표적으로 삼고 있다. 많은 이들이 반격에 나서지만, 흔히 그렇듯 최선의 방법이 무엇인지 의견이 갈린다. 아르헨티나에서 좌파 투쟁가들과 정치 활동가들이 축적해 온 경험은 미국에서 투쟁 방향을 설정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 왜 아르헨티나를 주목해야 하는가? 한편으로, 아르헨티나에서는 급진적 자유 시장주의를 표방하는 우파 정부의 실험이 현재 진행형으로 펼쳐지고 있다. 주변부에서 벌어지는 이러한 움직임은 중심부 국가들의 우파가 정책을 쇄신하는 데 영감을 제공하곤 했다. 이를테면 1970년대 칠레에서 피노체트가 추진한 프로그램은 전 지구적 신자유주의의 초기 실험이었다. 다른 한편으로, 노동계급 조직화와 저항의 최전선을 경험할 수 있는 곳 또한 주변부 국가들이다. 특히 아르헨티나에는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혁명적 좌파연합 중 하나가 존재하며, 계급투쟁과 사회운동의 역사가 풍부하기 때문에 집단적 저항의 기억, 노동계급의 투쟁방법에 대한 신뢰, 직접행동이라는 전통을 남겨 놓았다. 밀레이, 부르주아 야당, 좌파 먼저 오늘날 아르헨티나의 주요 정치 행위자들을 개괄해 보자. 정치 무대에 갑자기 등장한 하비에르 밀레이는 매우 연극적인 인물이다. 논쟁적인 자유주의 경제학자였던 그는 오스트리아학파 경제학을 옹호하면서 분노를 폭발시키는 모습으로 텔레비전 시청자들을 사로잡았다. 밀레이는 자신을 정치적 아웃사이더로 브랜딩했지만, 그의 인기가 높아진 데는 미디어 재벌 에두아르도 에우르네키안의 힘이 상당 부분 작용했다. 나아가 2023년 대선 승리는 낡은 정치 브로커들과 극도로 실용주의적이고 원칙 없는 권력 협상을 벌인 결과였다. 그럼에도 밀레이의 담론과 정책이 워낙 기이했고 지난 20년간 나라를 지배해 온 두 연합(키르치네르주의와 “변화를 위한 연합(Juntos por el Cambio)”)에 맞서는 “아웃사이더”를 자임했기 때문에, 그는 대통령 임기가 시작된 후에도 반기득권 수사의 혜택을 계속 누렸다. 아래에서 설명하겠지만, 그의 경제 노선은 본질적으로 정부 긴축, 규제 완화, 자본가계급 특혜 정책의 새로운 판본이며, 노동자조직 악마화와 노동자투쟁 탄압을 수반한다. 밀레이와 그를 지지하는 운동을 낳은 국내적인 토양이 분명히 있지만, 이것이 일국에 국한된 현상은 결코 아니다. 헝가리의 빅토르 오르반, 도널드 트럼프, 이탈리아의 조르자 멜로니로 이어지는 전 지구적 우파 정부 물결의 일부다. 하비에르 밀레이는 이스라엘 정부와 가자에서 벌어지는 집단 학살의 확고한 지지자이기도 하다. 밀레이에 대항하는 부르주아 야당으로는 중도 및 중도좌파 정치인들을 포괄하는 잡탕과 같은 페론주의 연합, 그리고 “변화를 위한 연합”의 중도우파 잔여 세력이 있다. 후자는 두 정당으로 분열되었는데, 역사적으로 자유주의적이며 중산층 기반인 급진시민연합(UCR)과 마우리시오 마크리 전 대통령의 공화주의제안(PRO)이다. 밀레이는 선거운동 기간 동안 바로 이 두 주류 정당을 맹공격함으로써 담론을 형성했다. 이들은 곧 “정치 카스트”였다. 그러나 밀레이는 결선 투표를 며칠 앞두고 마크리와의 거래를 통해 내각의 몇 자리를 내주고 마크리 지지자들의 표를 확보했다. 그중 대표적인 인물이 2023년 PRO의 대선 후보였던 파트리시아 불리치로, 이후 밀레이 정부 치안부 장관에 임명되었다. 페론주의는 빅텐트 조직으로, 후안 D. 페론의 부르주아 민족주의적 개발주의를 느슨하게 계승한 정치 이념을 내세운다. 키르치네르주의는 세기 전환기 이후 페론주의 내에서 지배적 분파로 자리 잡은 중도좌파 정치 기획으로, 처음에는 네스토르 키르치네르가, 그의 사망 이후에는 그의 부인 크리스티나 페르난데스 데 키르치네르가 이끌었다. 2003년부터 2015년까지 집권했으며 2019~2023년에는 더 광범위한 (비키르치네르주의) 페론주의 연합의 일부로서 다시 권력을 잡았다. 키르치네르주의는 아르헨티나 현대사에서 가장 심각했던 경제적·정치적 위기를 딛고 부상했다. 그 위기는 2001년 민중 봉기로 페르난도 데 라 루아 대통령이 축출되며 막을 내렸다. 이런 배경 때문에 키르치네르주의는 대중운동과 전투적 노동계급에 많은 부분에서 양보할 수밖에 없었고, 새로운 정치적 지지 기반을 구축하기 위해 포괄적 복지 정책과 일정 수준의 경제적 재분배를 실시했으며, 사회운동과 인권 단체를 포섭했다. 키르치네르주의의 핵심 과제는 국가 제도의 정당성을 회복하여 사회 질서를 복원하고 자본 축적을 위한 조건을 재설정하는 것이었다. 크리스티나 키르치네르 임기 말인 2015년에, 그리고 알베르토 페르난데스와 키르치네르 행정부 시기인 2019~2023년에는 더더욱, 빈곤율이 치솟았고 인플레이션율도 폭등했으며, 이들의 정치 기획에 대한 환멸감이 모든 사회 계층에 깊숙이 침투했다. 밀레이의 집권을 이해하려면 키르치네르주의에 대한 깊은 실망감을 반드시 고려해야 한다. 아울러 2015~2019년 마크리의 과도기 정권이 (미온적으로나마) 노동운동을 길들이려 시도하고 단편적 긴축(마크리는 충격 요법에 대비되는 “점진주의”를 내세웠다)을 실시하여 투자를 유치하고 경제를 부양하려다 실패한 점도 기억해야 한다. 아르헨티나의 반자본주의 좌파는 대다수 국가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중요도와 대중적 인지도를 자랑한다. 2011년 창설 이래 좌파노동자전선(FIT-U)은 민중의 권리를 위해 싸우는 정치 세력으로 자리매김해 왔다. FIT-U는 현재 연방 의회에서 5석, 주 의회 및 지방 의회에서 수십 석을 차지하고 있는데, 이는 모두 노동계급의 계급적 독립성을 바탕으로 쟁취한 것이다. 이 같은 계급 독립 정치는 좌파전선 원내 교섭 단체가 밀레이 정부의 모든 조치에 하나도 빠짐없이 전부 반대한 유일한 교섭 단체라는 사실에서도 드러난다. 나아가 소속 의원 전원이 교사 수준의 소득만 자신이 갖고, 나머지 세비는 노동자 투쟁과 사회적 투쟁에 기부하겠다고 서약했다. 좌파전선의 유명 인사들은 전국적으로 알려져 있으며, 언제나 투쟁하는 노동자들과 나란히 서 있는 사람들로 인식된다. 이를테면 전 대선 후보이자 연방 의원인 니콜라스 델 카뇨와 미리암 브레그만은 모두 좌파노동자전선 소속 사회주의노동자당(PTS) 당원으로, 의회에서 정부의 탄압을 끊임없이 고발하는 동시에 현장 투쟁에 연대한다. 이들이 노동운동가들, 연금 삭감에 항의하는 퇴직자들, 병원 해체에 맞서는 의료 노동자들과 함께 최루액을 맞고 후추 스프레이를 맞은 것은 한두 번이 아니다. 좌파노동자전선의 활동 무대는 의회로 국한되지 않는다. 소속 활동가들은 전국 수백 개 노조 지부에서 지도자나 조직가로 활동하고, 수십 개 대학에서 조직을 이끌며, 강력한 여성운동 조직에서도 가장 전투적인 대열에 속해 있다. 바로 이런 것들이, 그리고 특히나 노동운동에서 맡고 있는 역할이 좌파노동자전선 주요 단위인 PTS 활동의 핵심이다. 행위함으로써, 또 행위하지 않음으로써 아르헨티나의 정치 상황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국내 행위자가 하나 더 있다. 바로 노조 관료들이다. 아르헨티나 노동운동은 역사적으로 라틴 아메리카에서 가장 강력한 축에 속했으며, 400만 명에 달하는 조합원(전체 노동인구의 약 25퍼센트, 공식 고용 노동자의 거의 40퍼센트)을 자랑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노조는 통상 페론주의 성향의 관료적 분파가 장악하고 있으며, 이들은 자신의 특권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어떤 정치인과도 기꺼이 거래할 준비가 되어 있다. 아르헨티나에는 노동조합 총연맹이 두 개 있다. 가장 크고 가장 관료적인 CGT, 그리고 CGT에서 갈라져 나온 전투적이고 (약간이나마 더) 민주적인 CTA다. 이 상급 노동 조직들은 국가 경제를 마비시킬 힘을 갖고 있지만, 지도부는 (종종 용역 깡패까지 동원하면서) 조합원의 참여와 민주적 의사 결정 과정을 가로막고, 파업 조직을 회피할 구실을 늘 궁리한다. 마지막으로, 정부 결정에 영향을 미치는 핵심 외부 행위자를 빼놓으면 전체 구도가 완성되지 않는다. 국제통화기금(IMF)이다. IMF는 역사적으로 전 지구적 차원에서 자유 시장 및 긴축 정책을 밀어붙이는 데 주요한 역할을 해왔다. 특히 라틴 아메리카에서 IMF는 “최후의 대부자”, 말하자면 국채 매입자를 찾지 못하는 나라에 신용이라는 생명줄을 제공하는 지위 덕분에 공공 정책에 대해 압도적 영향력을 행사해 왔다. IMF 대출에는 통상 “조건부 이행 사항”이 붙는데, 여기에는 대개 재정 적자 축소 또는 해소, 사회 지출 삭감, 자유 무역 장벽 최소화 등의 요구가 포함된다. 중간 선거를 앞둔 밀레이 정부 밀레이 정부는 임기 초부터 자랑할 만한 핵심 성과를 하나 거두었는데, 바로 인플레이션을 잡은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정권 안정의 주된 토대다. 걷잡을 수 없는 인플레이션은 지난 10년간 아르헨티나를 짓눌러 온 문제였다. 마크리 집권기(2015~2019년)에 연 40퍼센트였던 물가상승률은 2023년 알베르토 페르난데스 임기 마지막 해 200퍼센트를 돌파하며 치솟았다. 이례적으로 심각한 인플레이션은 이토록 불안정한 경제 환경에서 국내외 자본의 투자를 가로막아 재계를 위축시켰을 뿐 아니라, 모든 국민에게 거대한 불안의 원천이 되었다. 임금은 물가를 따라가지 못했고, 가격을 예측할 수 없는 노동자 가정은 극도로 불안해졌다. 역대 정부가 가격 통제를 시도했지만 효과는 없었다. 하비에르 밀레이는 취임하자마자 가격을 자유화하고, 과열된 경기를 식히기 위한 친시장 정책과 여러 조치를 통과시켰다. 포퓰리즘적 “아웃사이더” 담론을 내세웠지만 그의 경제 정책은 교과서적인 신자유주의 충격 요법 그 자체였다. 집권 첫 주에 정부는 자국 통화를 50퍼센트 평가 절하하고 가격을 자유화했으며, 이로 인해 실질임금이 급락했다. 공공 지출 총액을 29퍼센트 삭감했고, 연방 정부의 주요 감축 조치는 13개 부처 폐지(또는 “차관급”으로 격하), 모든 공공 인프라 사업 동결, 보건·교육·과학 분야 지출 대폭 삭감 등을 포함했다. 2025년 6월까지 정부는 공무원 5만 명을 해고했다(취임 당시 공무원은 총 20만 5천 명이었다). 물가는 초기에 급등한 이후 안정되었고, 인플레이션은 2023년 12월 월 약 25퍼센트에서 1년 뒤 월 2.5퍼센트 수준으로 떨어졌다. 그러나 치러야 할 대가는 혹독했다. 경기 냉각 정책에는 필연적으로 침체의 위험이 따르는데, 아르헨티나는 사회적·경제적 상황자체가 이미 참담했다. 2025년 상반기에 부분적으로 회복되기는 했으나 밀레이 집권 첫 해 경제 활동은 3.5퍼센트 감소했고, 2023년 11월부터 2024년 8월 사이에 거의 14만 개의 일자리(민간 부문 전체 고용의 2.2퍼센트)가 증발했다. 초기 정책들이 시행된 직후 빈곤율은 역대 최고 수준으로 치솟았고, 이후 감소하기는 했으나 이미 높았던 2023년 빈곤율 언저리에서 고착되었다. 2025년 6월 기준으로 실업률은 최근 4년 중 최고치인 7.9퍼센트까지 올라섰고, 비공식 고용을 비롯한 각종 불안정 노동은 전례 없는 수준에 이르렀으며, 소득 불평등을 나타내는 지니 계수는 이전의 0.41에서 0.47로 뛰어올랐다. 여러 논평가들은 대규모 봉기가 일어나 정부를 벼랑 끝으로 몰아넣을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민중의 묵묵한 인내가, 특히 가장 취약한 처지에 놓인 이들의 바로 그 인내가 역대 정권에 대한 실망이 얼마나 깊었는지 드러내는 또 하나의 척도가 되었다. 눈에 띄게 나빠진 경제 여건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밀레이에게 자신들의 삶을 더 나아지게 만들 기회와 더 많은 시간을 기꺼이 주려 했다. 밀레이의 목표는 판을 엎고 다시 투자를 끌어모아 대폭 경제 성장을 이루는 것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그의 구상은 노동과 자본의 관계를 새로 짜는 것, 말하자면 노동자의 권리를 빼앗고 임금을 깎아내리는 것이며, 이를 통해 착취와 이윤 창출의 기회를 늘리고 확대하려 한다. 그러나 이 목표를 달성하려면 먼저 아르헨티나 노동계급과 그 조직들, 그리고 과거 투쟁으로 쟁취한 것을 지키려는 의지에 결정적 패배를 안겨야 한다. 대부분의 전국 단위 노조가 관료적 성격을 띠고 있다 해도, 지도부는 여전히 지지 기반을 이루는 목소리들에 응답하지 않을 수 없다. 현장 조합원들의 핵심적인 권리가 박탈당하면 조직적 운동에 나서라는 거대한 압력이 지도부에 가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2025년 들어 밀레이 정부는 정권의 정당성을 심각하게 훼손하는 여러 스캔들에 맞닥뜨렸다. 첫 번째는 리브라($Libra) 스캔들로, 하비에르 밀레이 본인이 소셜 미디어 X에서 해당 암호 화폐를 홍보한 뒤 투기꾼들이 투자 회수 사기를 통해 2억 5천만 달러를 챙긴 사건이다. 이어서 마약 유통업자들의 뇌물과 연루된 부패 사건이 터졌는데, 음성 녹음에는 하비에르의 여동생이자 대통령 최측근 자문인 카리나 밀레이가 직접 연루되어 있다. 가장 최근에는 밀레이의 정당인 자유전진(La Libertad Avanza)의 간판이자 부에노스아이레스 주 중간선거 첫 번째 후보였던 호세 루이스 에스페르트가 마약 사건에 휘말려 선거운동 도중 후보직을 사퇴했고, 연방 판사에 의해 자금세탁 혐의로 기소되었다. 경제는 도약하지 못하고, 국제수지 적자와 결부된 모순이 심화되면서 단기 및 중기 경제 전망에 먹구름을 드리우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 재무부가 200억 달러를 구제금융으로 제공하겠다는 도널드 트럼프의 발표는 밀레이에게 단기적이기는 하지만 절실한 생명줄이다. 게다가 트럼프는 또 다시 타국의 정치에 개입하려는 시도의 일환으로, 밀레이가 선거에서 승리해야만 대출을 승인하겠다고 못 박았다. 좌파전선의 전 의원이자 전국 지도자인 미리암 브레그만이 비난했듯이, 이 합의는 미국 제국주의에 대한 종속이 심화된다는 의미다. 이 같은 상황에서도 정부는 강경한 태세를 유지하면서 타협 불가 이미지를 내세우려 한다. 그러나 밀레이 취임 이후 계급투쟁의 윤곽을 드러낸 중요한 운동이 몇 차례 있었다. 두 차례의 총파업, 교육을 지키기 위한 대규모 시위, 성소수자의 권리와 공공 의료를 위한 대규모 시위, 운수·교사·공무원 파업, 그리고 주요 도시 전역에서 열린 대중 집회가 그것이다. 이 모든 투쟁 가운데 지금 특별히 주목하고 싶은 세 가지가 있다. 정부를 후퇴시키는 데 성공했거나, 정부에 맞서 싸우는 방법에 관해 중요한 시사점이 있는 사례들이기 때문이다. 대학이 반격하다 아르헨티나에서 공립대학들의 권위는 상당하다. 등록금이 전액 무료임에도 공립대학 학위는 대부분의 경우 사립대학 학위보다 높이 평가된다. 2024년 10월 정부는 공립대학을 겨냥했다. 이것이 첫 번째 공격은 아니었다. 밀레이가 취임 직후 내놓은 2024년 예산안에서 연방 정부가 전국적으로 직접 지원하는 국립대학 재정이 대폭 삭감되었다. 페소화 기준 예산은 2023년 수준에서 동결되었지만, 연간 288퍼센트의 인플레이션을 감안하면 거의 70퍼센트 삭감과 다르지 않았다. 2024년 4월, 50만에서 100만에 이르는 사람들이 공립대학을 지키기 위해 거리로 쏟아져 나왔고, 이는 지난 20년간 가장 큰 대중운동 가운데 하나였다. 그러나 10월에 대통령은 한술 더 떠서 의회가 통과시킨 고등교육 긴급 재정지원 법안에 거부권을 행사했다. 반응은 즉각적이었다. 하나둘 시작된 대학 점거가 들불처럼 전국으로 번졌다. 운동이 정점에 이르렀을 때 학생들은 전국 30개 국립대학에서 80곳 이상의 건물 점거를 조직했고, 교원 및 비교원 직원의 임금 인상과 대학 예산 전반의 증액을 요구했다. 노동조합과 대학생 연합은 두 차례의 전국 파업과 주요 도시에서의 대규모 행진을 조직했다. 이 강력한 운동 앞에서 정부는 빠르게 뒷걸음질쳤다. 밀레이는 공립대학에 등록금을 부과하겠다는 암묵적 위협을 교묘하게 내비쳤으나, 충돌이 시작된 지 불과 며칠 만에 공립대학 무상 원칙을 폐기하지 않겠다고 직접 나서서 밝힐 수밖에 없었다. 이 운동에 불을 붙이고 힘을 실어 준 것은 수십만 명의 학생, 교사, 교수, 대학 직원들로 이루어진 풀뿌리 조직이었다. 이들은 건물을 점거하고 민주적 토론과 의사 결정을 위한 공간을 만들어 냈다. 각 학교의 활동가 수백 명이 총회에 모여서 토론하고 다음 행동을 표결로 정했다. 좌파 일각에서는 이 같은 사례를 이상화하거나 저절로 생긴 현상처럼 여기는 경향이 있지만, 좌파 정치 활동가들은 이러한 자기 조직화 기구들을 구축하고, 발전시키고, 쟁취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좌파노동자전선 소속 PTS 당원들은 가장 급진적인 형태의 민주적 의사 결정을 위해 쉼 없이 싸웠다. 이 투쟁 국면에서 영향력 있는 목소리를 낸 조직과 기관으로는 전국대학간위원회(CIN, 전국 대학 총장 협의체), 대학 노조 연합(Frente Sindical Universitario), 그리고 학생운동 대표들이 있었다. CIN의 구성원은 대부분 오래된 두 부르주아 정당(페론주의와 급진시민연합)에 소속된 총장들로, 직접 행동을 만류하거나 약화시키려 했고 학부 건물 점거에 공개적으로 반대했으며 일부 학교에서는 원격 수업으로 전환하여 운동을 고립시키려 했고 관심을 오로지 의회에서의 예산 협상으로 집중시키려 했다. 대학 노조 지도부도 투쟁의 의지를 보이지 않았다. 두 차례의 매우 성공적인 파업과 전국 행진 이후 정부가 약세를 보이던 시점에 그들은 세 번째 전국 교육 행진 소집을 거부했다. 학생 조합은 당연히 학생들의 도덕적 열기와 투쟁 의지에 더 민감하기 때문에 많은 점거 현장에 참여하고 점거를 이끌었다. 이를테면 부에노스아이레스 대학교 철학부 학생 조합 사무총장인 루카 본판테는 CIN의 타협적 노선을 거듭 규탄하면서, 지속적인 직접 행동과 전국적 학생운동 조율을 촉구했다. 그러나 전국 조직과 다수의 주·지방 조직에서 학생 조합 지도부는 대부분 급진시민연합과 페론주의가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들은 점거를 적극적으로 말리면서 초점을 2025년 대학 예산을 둘러싼 의회 논의로 돌리려 했다. 학생들과 대학 노동자들에게 허락된 역할은 의원들의 토론과 표결을 지켜보는 수동적 구경꾼에 불과했다. 이 투쟁의 핵심 교훈은 직접 행동과 자기 조직화야말로 대학 운동의 진정한 동력이었다는 것이다. 반면 노조와 학생 조합의 관료들은, 제도적 경로를 우선시했기 때문이든 아니면 자신들의 손을 벗어날지도 모르는 광범위한 대중운동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든 간에, 운동의 급진적인 칼날을 무디게 하고 가로막기만 했다. 게다가 주류 부르주아 정당 성향을 가진 조직들은 아래로부터의 운동을 거스를 수 없을 때만 행동에 동참하고, 그 와중에도 운동을 해체하고 고립시키고 잠재우기 위해 모든 수단을 동원했으며, 투쟁의 현장과 동떨어진 의회 논의로 대화의 장을 옮기기 위해 애썼다. 꼼짝도 하지 않는 병원 교육과 더불어 의료 부문 또한 밀레이 행정부 출범 초부터 공격 대상이었다. 일부 추산에 따르면, 병원 예산은 최대 54퍼센트까지 삭감되었다. 고등 교육을 공격한 것과 비슷한 시기에 밀레이 행정부는 더 작고 만만해 보이는 표적을 겨냥했다. 바로 연방 정부 관할로 운영되는 부에노스아이레스 소재 정신건강 병원이었다. 보나파르트 병원은 아르헨티나에서 유일하게 정신질환과 중독에 대해 여러 분야의 통합 치료를 수행하는 전문 병원이다. 이 공격은 우연이 아니었다. 이 기관에서 전문가들이 수행하는 작업은 아르헨티나의 어떤 의료 시설과도 다르다. 의사, 사회복지사, 치료사, 사회과학자, 음악치료사 등이 협력해서 정신건강 환자에게 총체적 치료법을 제공한다. 인권 활동가이자 오월광장어머니회 소속인 라우라 보나파르트의 이름을 딴 이 병원은 진보적이고 평등한 의료의 상징이다. 2024년 10월 4일 금요일, 병원 노동자들은 입원 병동과 응급실을 폐쇄하라는 정부 공문을 받았다. 몇 시간 뒤, 이 조치들은 다음 주 월요일에 실행될 병원 최종 폐쇄의 서막에 불과하다는 소식이 여러 경로를 통해 들려 왔다. 공무원 노조(ATE)가 긴급 회의를 소집했고, 곧이어 총회에서 자신들의 몸으로 병원을 지키기로 표결했다. 점거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팔짱 끼고 가만히 있을 수는 없다는 사실을 그들은 알고 있었다. 최대한 관심을 끌어야만 했다. 정부는 평화로운 시위에도 물리력을 행사할 의지가 있음을 이미 충분히 입증했다. 보나파르트 노동자들은 언제든 폭력적으로 진압당할 수 있다는 것을 충분히 알면서도 병원에 남기로 결정했다. 이들은 지체 없이 바로 그날 거리로 나가 전단을 돌리며 지역 사회의 지지를 호소했다. 숨 가쁜 속도로 다음 날인 토요일 저녁 연대 음악회를 조직했고, 여러 밴드가 투쟁에 연대하며 무대에 올랐다. 환자들과 인근 지역 및 그 너머 주민들의 뜨거운 지지가 쏟아지며 조직화에 힘이 실렸다. 10월 7일 월요일에는 병원을 “껴안는” 연대 집회에 수백 명이 모였고, 기자회견에는 국회의원, 인권 활동가, 노조 지도자들이 함께했다. 맨 처음 회의를 소집한 것은 노조 현장위원회였지만, 현장 조합원들이 스스로 나서서 병원을 조직하고, 각기 다른 과제(언론 대응, 연대, 환자 돌봄 등)를 조율할 위원회를 꾸리고, 투쟁 전략을 결정했으며, 노조 공식 지도부는 이를 따를 수밖에 없었다. 정신 건강 전문가 훌리에타 슈발리에의 회고에 따르면, 병원 직원이자 조합원으로 지낸 11년 중에 어떤 행동을 할지 “직접 투표로 결정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고용 형태, 조합원 여부, 소속 부서와 관계없이 모든 노동자가 총회에 모여 매 결정마다 거수로 표결했다. 투쟁 첫 2주 동안 총회는 거의 매일 열렸다. 훌리에타는 자신들이 보건 부문 안팎에서 투쟁하는 다른 노동자 집단들과 빠르게 힘을 합쳐야 한다는 것을 곧바로 깨닫게 된 과정에 관해서도 이야기한다. 포사다스 병원, 가라한 병원, 철도 노동자, 공항 노동자 등이 연대의 대상이었다. 전국적으로 벌어지는 대학 투쟁에도 주의를 기울여 의과 대학에 대표단을 파견하고 싸우는 부문들 사이에 다리를 놓았다. 이러한 연대는 곧 결실을 맺었고, 보나파르트 병원은 정부에 맞선 대중 행동과 저항의 진원지가 되었다. 일주일도 지나지 않아 정부는 한발 물러서서 병원을 계속 운영하겠다고 약속할 수밖에 없었다. 임박한 폐쇄 위험은 넘겼지만 정부가 병원 “구조조정”을 고집했기 때문에 노동자들은 경계를 풀지 않았다. 많은 사람들이 정부의 구조조정은 병원을 서서히 고사시키려는 시도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병원 존치를 공개적으로 약속한 것은 정부의 명백한 패배였고, 보나파르트 병원은 전국적으로 밀레이에 대한 저항의 상징이 되었다. 보나파르트 병원 직원들을 대표하는 두 노조의 지도부는 단결, 결집, 민주적 의사 결정을 요구하는 현장 조합원들의 목소리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노조 대표들이 정부 당국과 만나 모든 일자리와 부서를 포함한 병원 존치 합의에 서명하면서 정부와 함께 “구조조정”을 추진하는 데 동의해 버렸다. 구조조정이란 통상 해고와 부분 폐쇄를 포함하는 긴축의 완곡한 표현이다. 이후 병원 총회는 어떠한 형태의 구조조정에도 반대한다고 표결했고, 이는 현장 조합원들이 자기 지도부보다 더 왼쪽에 서 있음을 보여 주었다. <일간 좌파>와의 인터뷰에서 보나파르트 병원 핵심 조직가 중 한 명인 하비에르 리오스는 이 투쟁의 가장 중요한 교훈을 다음과 같이 정리했다. 정부를 후퇴시킬 수 있었던 것은 현장 조합원의 힘, 지역 사회와의 유대 구축, 병원의 벽(과 인력) 너머로 확산된 광범위한 능동적 저항 운동 덕분이었다. 그 결과 서로 다른 투쟁들이 서로를 자극하고, 기금을 모으고, 서로의 현장에 달려가고, 가장 넓은 의미의 노동계급 연대를 체현하는 운동이 만들어졌다. 부에노스아이레스 교사들이 파업하다 부에노스아이레스 주 교사 파업은 누가 우리의 동지이며 누가 우리의 적인지 선명하게 보여 준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파업은 5월에 시작되었다. 부에노스아이레스 주 최대 공립 교사 노조인 수테바(SUTEBA)가 정부와의 잠정 합의안을 발표하고 표결에 부친 뒤였다. 잠정 합의안은 광범위한 반발을 불러일으켰고, 소수의 교사를 대표하는 노조인 FEB가 파업을 소집하도록 추동했다. 부에노스아이레스 주 정부는 현재 중도 좌파 경제학자 악셀 키실로프가 이끌고 있다. 크리스티나 페르난데스 데 키르치네르 정부의 경제부 장관이었던 그는 현재 페론주의 내 지배적 분파인 키르치네르주의의 주도권을 두고 크리스티나와 다투고 있다. 지난 9월 부에노스아이레스 주 중간 선거에서 키실로프의 후보들이 밀레이 측 대리인들에게 큰 타격을 입힌 뒤 야당 내에서 그의 입지가 높아졌다. 키실로프는 밀레이에 대한 저항의 선봉을 자처하면서 부에노스아이레스 주가 밀레이의 경제 노선에 맞서는 “방패” 역할을 한다고 주장해 왔다. 그러나 FEB가 파업을 선언하자마자 키실로프는 파업에 참여하는 교사들에 대해 결근을 이유로 임금을 삭감하겠다고 발표했다. 이 위협은 파업을 무력화하기에는 역부족이었지만, 키실로프가 어느 편에 서 있는지 분명히 드러냈다. 수테바 지도부는 언제나 그렇듯 보수적 역할을 맡았고, 조합원의 극히 일부에게만 의견을 물었으면서도 잠정 합의안이 압도적 다수의 동의로 통과되었다고 둘러댔다. 수테바 내 좌파 분파인 물티콜로르가 파업에 합류하겠다고 선언했고, 부에노스아이레스 주 내 최대 지구의 조합원 압도적 다수가 파업 호소에 응했다. 이러한 결과는 놀랍지 않다. 부에노스아이레스 주 교사들은 생계를 위해 두 곳, 심지어 세 곳의 일자리를 가진 경우가 허다하다. 수테바가 협상한 임금 인상은 고작 4퍼센트(수개월 후 7퍼센트로 상향)였고, 2025년 물가상승률이 (작년보다 나아진 수치임에도) 27퍼센트에 이를 것으로 전망되는 상황에서 이 인상분은 사실상 감소한 소득분을 메우기조차 턱없이 부족하다. 이는 이미 빈약한 임금을 또다시 깎는 것이나 다름없다. 생활비를 감안하면, 부에노스아이레스는 실제로 전국에서 교사 임금이 가장 낮은 세 개 주 가운데 하나다. 교사들에 대한 키실로프의 적대 행위는 그가 가진 정치적 입장의 민낯을 드러낸다. 키실로프는 겉보기에는 밀레이의 노골적 신자유주의와 매우 다르지만, 여러 근본 요소와 목표의 상당 부분을 공유한다. 전투적 수사를 내세우지만, 부에노스아이레스 주 경제 정책은 밀레이와 마찬가지로 국내외 투자를 끌어들이는 것에 기초한다. 이를 위해 키실로프는 관광업, 제조업, 광업 부문에서의 대규모 자본 투자에 대해 향후 30년간 파격적인 세금 감면을 제공하는 등 여러 경제적 특혜를 내놓았다. 그리고 이에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그의 노선이 IMF 및 기타 국제 금융 기구에 대한 아르헨티나의 종속에 도전하기는커녕 오히려 이를 고착시킨다는 점이다. 고용주들에게 밀레이의 집권은 공세에 나서라는 신호였다. 그들은 노동운동가를 해고하고, 더 낮은 임금으로 협상하고, 노동 강도를 높이려 하고 있다. 부에노스아이레스 주에서 진행 중인 수많은 노동자투쟁에 대한 주 정부의 답변은 “강제 조정” 조치였다. 말하자면 노동자에게는 업무 복귀를, 고용주에게는 괴롭힘, 불법해고, 임금삭감 중단을 강제하는 조치다. 문제는, 노동자들은 직장을 잃을 위험 때문에 이 조치에 따라야 하는 반면, 고용주들은 아무런 제재 없이 이를 무시할 수 있고 실제로 종종 그렇게 한다는 것이다. 결국 강제 조정은 고용주의 이익을 위해 노동자투쟁을 무력화하는 몽둥이 구실을 할 뿐이다. 다시 말해, 부에노스아이레스 주 키실로프 행정부는 밀레이의 정책에 대한 그 어떤 “방패”도 되어 주지 않는다. 진보적 수사로 포장되었을 뿐, 자본 투자에 보상하고 저임금을 유지하고 투쟁하는 노동자를 규율하는 정책의 온건한 판본이다. 그러나 부에노스아이레스 주 교사들은 투쟁을 이어가고 있다. 키실로프의 임금 삭감이 위법하다는 법원 판결에 힘입어, 물티콜로르와 반대파 지부들은 정부와 로베르토 바라델 예하 수테바 지도부에 대한 광범위한 불만의 통로 역할을 하고 있다. 물티콜로르 지도자이자 전 연방 의원인 나탈리아 곤살레스 셀리그라의 발언에 따르면, 수테바 지도부는 “사실상 키실로프 행정부의 연장선에 있는 듯하다.” 이 사례가 무엇보다 잘 보여 주는 것은, 수사가 아무리 좌파적이어도 부르주아 정치인은 자본주의 게임의 규칙 안에서만 움직인다는 사실이다. 좌파는 시장과 노동자를 중재하겠다고, 양쪽 모두를 만족시키겠다고 약속하는 국가 관리자에게 희망을 걸어서는 안 된다. 역사적 경험이 입증하듯, 시장의 압력 하에서는 투자와 기업 이윤을 촉진하려는 충동이 민중의 안녕보다 언제나 우선한다. 이 사례에서도 역시 노조 관료층은 운동을 잠재우는 역할을 맡고 있다. 미국 좌파를 위한 전망과 교훈 우파 정부의 공세에 맞서려면 정치적 차이를 잠시 잊어야 한다는 말을 우리는 드물지 않게 듣는다. “지금은 전략을 논할 때가 아니라 민주주의를 지킬 때”라고 말하는 이들이 있다. 권위주의 정부의 파렴치한 공격에 맞서서 가능한 한 가장 넓은 운동을 능동적 저항으로 조직해야 한다는 것은 맞다. 그러나 이것이 차이를 숨기라는 뜻은 아니다. 오히려 강력한 좌파야말로 극우에 대한 최선의 방어다. 이 글에서 다룬 사례들은 좌파 활동가들이 밀레이에 맞선 싸움을 선도하는 모습을 가득 담고 있다. 부에노스아이레스 대학교 철학부 학생 조합 사무총장 루카 본판테는 PTS 당원이며, 보나파르트 병원의 하비에르 리오스, 교사 활동가이자 전 의원인 나탈리아 곤살레스 셀리그라도 마찬가지다. 이는 우연이 아니다. 혁명적 활동가들은 투쟁 현장에 전략적으로 자리 잡고, 동료 노동자, 학생, 사회운동 활동가를 조직하며, 노동계급의 힘을 강화하는 타협 없는 강령을 제시하고, 자기 조직화 기구 건설을 추동한다. 바로 이러한 노력이 방어적 투쟁에 힘과 예리한 칼날을 부여한다. 이것이 수십 년에 걸친 끈질긴 조직화의 결실이라는 점도 강조할 만하다. PTS는 1990년대에 혹독한 시절을 겪었다. 활동가는 전국에 수백 명뿐이었고 대중적 인지도는 미미했다. 그러나 혁명 정당, 전투적 정당을 건설한다는 전략적 목표가 1988년 창당 이래 모든 투쟁과 모든 전술적 결정에 방향을 제시했다. 2000년대와 2010년대에 아르헨티나 좌파 대부분이 키르치네르주의를 지지하거나 그쪽에 합류했지만, PTS는 정치적 독립을 유지한 소수 조직 가운데 하나였고 이들 대부분은 현재 좌파전선에 통합되어 있다. PTS가 지금 이 투쟁들에 내부적으로 개입하면서 급진적 목소리를 내고 사회주의적·반제국주의적 강령을 제시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원칙에 입각한 조직화와 당 건설을 위한 끊임없는 노력 덕분이다. 좌파전선은 IMF를 비롯한 전 지구적 금융 기구들과 제국주의적 종속으로부터 근본적으로 단절되어야 한다고 제안하는 유일한 전국적 세력이다. 이 투쟁들이 밀레이 정부를 압박할 수 있었던 것은 다음을 실천했기 때문이다. 자기 조직화 기구를 만들어 민주적 의사 결정을 가능하게 하고, 노조 및 여타 운동의 관료적 지도부에 이의를 제기하거나 그들의 결정을 공개적으로 거부했다. 현장 조합원의 힘을 키우고 지역 사회와 강한 유대를 맺음으로써 정부의 공격에 맞선 광범위한 지지를 이끌어 냈다. 진보적 수사와 소소한 양보를 제시하면서 시장의 지배를 유지하고 재정 균형을 위해 필요할 경우 노동자를 규율하는 차악의 정부를 수용하기를 거부했다. 미국 좌파는 이러한 경험을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이 같은 실천이 재현된다면 트럼프에 저항하는 운동을 더욱 강화하는 동시에, 두 자본주의 정당 모두로부터 독립적인 좌파의 토대를 닦을 수 있을 것이다. 예컨대 전국 단위 노조 지도자들은 대체로 이민국(ICE)에 의한 이주민(또는 이주민처럼 보이는) 노동자 납치와 공포 조성을 외면했을 뿐 아니라, 연방 공무원에 대한 대규모 해고와 노조가 교섭으로 쟁취한 권리의 박탈에 맞서 단호한 투쟁을 조직하는 데도 실패했다. 노조 관료들을 가차 없이 비판하고 노조 내부에 반대파와 새로운 흐름을 만드는 것은 오늘날 절박한 과제다. 오늘날 미국 좌파에게 특히 어려운 과제는 조란 맘다니 현상을 어떻게 대할 것인가이다. 자신을 민주적 사회주의자로 규정하는 맘다니의 선거운동은 뉴욕 시 노동계급과 좌파 전반에 기대를 불러일으켰다. 동시에 기성 정치권과 보수 정치인들에게는 강한 반발을 일으켰다. 맘다니의 공약은 의심할 여지 없이 진보적이며, 뉴욕 시 노동계급 가정의 삶의 질을 개선하고 숨통을 틔워줄 수 있을 것이다. 좌파는 노동계급의 권리를 확장하고 자본의 힘을 억제하는 조치들을 지지할 수 있고 또 지지해야 하며, 필요하다면 대중운동에 나설 수도 있다. 그러나 맘다니 개인에게 정치적 지지를 보내고 그의 캠프에 결집하는 것은 오류일 것이다. 그가 11월에 당선되더라도, 취임 직후 시내 대기업을 만족시키라는 즉각적 압력에 직면할 것이고 자기 공약의 가장 급진적인 부분에서 타협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는 이미 뉴욕 시의 정치 브로커들이나 재계 엘리트들과 교류하면서, 자신이 그들의 부와 이익에 위협이 된다는 우려를 불식시켰다. 민주당에서 출마한 좌파 성향의 자칭 민주적 사회주의자들, 이를테면 버니 샌더스와 알렉산드리아 오카시오 코르테스 같은 정치인들의 전례를 보면, 그들이 현 상태에 도전하거나, 시장의 명령에서 벗어나거나, 독립적인 노동계급 정치 조직의 발판을 제공할지도 모른다는 환상은 사라질 것이다. Left Voice에 2025년 10월 26일 발행된 기사를 번역함. 저자: Remo Erdosain 번역: 강성윤 /* 스크롤 여백만 주고, 화면에는 안 보이게 */ .ftn-target { display: inline-block; /* 줄바꿈 안 생김 */ width: 0; height: 0; scroll-margin-top: 200px; } document.addEventListener("DOMContentLoaded", function () { // name="_ftn1", name="_ftn2", name="_ftnref1" ... 전부 대상 document.querySelectorAll('a[name^="_ftn"]').forEach(function(a) { var idValue = a.getAttribute("name"); // 이미 같은 id의 요소가 있으면 또 만들지 않음 if (!document.getElementById(idValue)) { var span = document.createElement("span"); span.id = idValue; span.className = "ftn-target"; a.parentNode.insertBefore(span, a); } }); }); /* 본문 각주 번호 + 아래쪽 각주 번호 색 지정 */ a[href^="#_ftn"] sup, a[href^="#_ftnref"] sup { color: #BF202D; } /* 밑줄이 보기 싫으면 */ a[href^="#_ftn"], a[href^="#_ftnref"] { text-decoration: none; } /* 마우스 올렸을 때 살짝만 강조하고 싶으면 (선택) */ a[href^="#_ftn"]:hover, a[href^="#_ftnref"]:hover { text-decoration: underline; } /* 페이지 전체가 오른쪽으로 넘치지 않게 */ html, body { max-width: 100%; overflow-x: hidden; } /* 본문 영역 폭 강제 고정 + 긴 단어/문장도 줄바꿈 */ #bo_v_con, .bo_v_con, .cke_editable, article { max-width: 100%; overflow-wrap: break-word; word-wrap: break-word; /* 구형 브라우저용 */ } /* 워드에서 붙은 이미지/표가 화면 밖으로 안 나가게 */ #bo_v_con img, #bo_v_con table, .bo_v_con img, .bo_v_con table, .cke_editable img, .cke_editable table, article img, article table { max-width: 100% !important; height: auto; } /* 워드가 p, span에 폭을 박아놓은 경우 강제로 해제 */ #bo_v_con p[style*="width"], #bo_v_con span[style*="width"], .bo_v_con p[style*="width"], .bo_v_con span[style*="width"], .cke_editable p[style*="width"], .cke_editable span[style*="width"], article p[style*="width"], article span[style*="width"] { width: auto !important; max-width: 100% !important; } /* 기본 blockquote 스타일 */ blockquote { border-left: 4px solid #c0392b; /* 사이트 분위기와 맞는 붉은 계열 */ padding: 12px 18px; margin: 20px 0; background: #fafafa; font-style: normal; color: #333; line-height: 1.6; } /* blockquote 안의 p 태그 정렬 */ blockquote p { margin: 0 0 10px 0; text-align: justify; } /* 마지막 p 태그 여백 제거 */ blockquote p:last-child { margin-bottom: 0; } /* 본문 안 링크 스타일 */ #gpt-article a { color: #cc0000 !important; text-decoration: none !important; } #gpt-article a:hover { color: #990000 !important; } // https://로 시작하는 링크만 target="_blank" 적용 document.addEventListener("DOMContentLoaded", function () { const links = document.querySelectorAll('#gpt-article a[href^="https://"]'); links.forEach(link => { link.setAttribute("target", "_blank"); link.setAttribute("rel", "noopener noreferrer"); }); }); -
[인터뷰] “서광석열사가 바라는 대로 끝까지 투쟁해서 꼭 이겨서 돌아가겠습니다” - 화물연대 서울경기지역본부 편의점지부 CU지회 윤정욱지회장4월 25일, CU진주물류센터 앞 서광석열사가 돌아가신 도로를 둘러 ‘열사정신 계승! CU 투쟁승리! 공권력 살인폭력 규탄! 화물연대 총력투쟁 결의대회’가 열렸다. 공공운수노조 화물연대는 9천 명이 모였다고 했는데, 실제 현장에서는 1만 명도 넘게 보였다. 진중하게 뿜어져 나오는 노동자들의 분노와 결기는 서로를 더욱 뜨겁게 연결하는 듯했다. 결의대회를 마치고 서울경기지역본부 편의점지부 CU지회 윤정욱 지회장을 만났다. 윤정욱 지회장은 “서광석열사에게 너무 죄송하다, 자본과 경찰이 너무 원망스럽다”는 말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저희라면 그렇게 할 수 있었을까”라는 질문은 “연대와 조직, 동지를 믿고 끝까지 싸우겠다”는 결의로 이어졌다. 윤정욱 지회장의 열사와 동지를 향한 절절한 마음, 4만5천 화물노동자와 모든 노동자의 대의를 향하는 단호한 목소리와 자본가를 꿰뚫어 보는 깊은 눈빛을 글로는 담을 수 없다. 다만, 최전선에서 싸우는 CU화물노동자의 이야기를 부족하나마 옮겨본다. 인터뷰는 노동조합이 투쟁해온 시간 순서대로 싣는다. 4.25 결의대회 후 문화제에 참가 중인 화물연대 서울경기지역본부 편의점지부 CU지회 윤정욱 지회장 질문1. 노동조합을 만든 이유와 계기를 말씀해주세요. 윤정욱 CU지회장: 나는 CU편의점에 물건을 공급하는 화물노동자로 안성센터에서 일한다. CU를 운영하는 BGF리테일은 BGF로지스와 운송사를 거쳐 화물노동자에게 지역별 센터에서 편의점까지의 화물운송 일감을 맡긴다. CU안성센터와 화성센터에 지회가 생긴지는 얼마 안 된다. 안성센터에서 작년 8월 9일 41명 중에 40명이 노조에 가입했다. 화성센터는 한 달 정도 뒤에 가입해서 하나의 지회가 되었다. 노동조합에 가입해 투쟁하게 된 계기는 별거 없다. 진짜 ‘인간답게’, ‘사람답게’ 살아보고 싶어서다. 여기 지금 다닌 지는 11년째고, 패밀리마트 때부터 오래 일한 분들도 있는데 처우가 그때랑 지금이랑 달라진 게 없다. 오히려 후퇴했고 일은 많아졌다. 상하차 이외에 다른 업무들이 너무 많다. 센터가 작다, 뭐가 없다 핑계를 대면서 화물노동자가 할 일이 아닌 걸 시켰다. 코스를 잘라버리는 등 갑질도 심했다. CU노동자들은 노동환경과 처우 개선을 위해 단결해서 노조를 결성한 것이다. 새 차 가격이 7천만 원, 냉동차는 1억이다. 그런데 370만 원 운송료를 받으면 차값 최소 70에 지입료, 보험료, 뭐 떼고 하면 한 220~230만 원. 그것도 2회전을 해서 버티려고 했다. 하루 빠지면 월급이 14만 원씩 빠져서 아파도 진짜 기어 다니면서 일하는 사람이 많다. 코로나 때는 코로나 걸려서도 일했다. 당시 편의점이 호황이었다. 물량이 많아 회사가 쉬지를 못하게 했다. 격리하는 화물노동자에게 배송시킨 상황도 포착했었다. 그때 CU 영업이익이 엄청 늘어난 걸로 알고 있다. 고생이란 고생은 노동자가 다 했다. 매년 월급이 5만 원씩 오른다. 그러면서 잡다한 일들도 점점 늘어났다. 공병 수거라든지 행사 반품, 행사 상품 분류 등이 많다 보니까 노동자들이 많이 힘들어한다. 예를 들어서 발렌타인데이, 빼빼로데이, 화이트데이, 추석, 설날, 어버이날 등 행사가 한 대차 나오면 화물노동자가 하나하나 리스트를 보면서 다 분류해야 한다. 그러니 이직률도 높다. CU자본은 돈 아끼려고 사람 안 쓰고 화물노동자한테 공짜노동까지 강요하는 것이다. GS나 세븐일레븐은 불합리한 점이 개선되어 상하차만 하면 된다. 노조가 먼저 만들어진 영향이 컸다고 본다. CU 다녔던 사람이 GS로 가서 알려준 얘기를 듣고서는 ‘CU가 더 큰 회사고 같은 업종인데 어떻게 그래?’라고 했다. 직접 확인하면서 우리도 이러면 안 되겠다고 생각하고 참고했다. 질문2. 파업 후 투쟁은 어떻게 진행되었습니까? 윤정욱 CU지회장: 솔직히 작년 8월, 9월달에 노동조합에 가입하고 이렇게 총파업을 하게 될 줄 몰랐다. CU편의점 화물노동자들은 안성화성센터, 나주센터, 원주센터, 진주센터가 있고, 이번에 제주센터에서도 가입했다. CU전체 화물노동자를 2,500명~2,800명 정도로 추산하는데 약 7~8%가 화물연대 조합원이고 파업하고 있다. 자본은 지난달 안성화성센터에서 선전전을 한 후 물량 두 개 하던 걸 반으로 줄여놨다. 우리한테 통보 한마디 없이 축소해버렸다. 차에 실린 물량을 센터에 내려놓았더니 물건은 가져가 놓고 매가(판매가) 기준으로 2억 원 손해배상을 때렸다. 노조를 인정하지 않고 협박했지만 조합원들이 흔들림 없이 믿고 파업했다. 우리는 회사원들하고 달라서 일을 안 하면 다음 달 월급이 한 푼도 없다. 4월 5일부터 파업해서 딱 21일 차다. 이렇게 시작한 게 20여 일밖에 안 됐고 끝까지 싸워서 돌아가야 한다. 파업을 준비할 때 ‘우리가 모두를 위해 싸운다고 비조합원이 같이 싸우겠냐?’는 얘기도 있었는데, 지금 안 하면 ‘GS나 세븐일레븐보다 10년 도태된다’, ‘구조를 개선해야 한다’고 다들 결의에 차서 시작했다. 조합원들의 의지가 대단하다. 물량 저지 투쟁을 해왔다. 그러면 센터의 반장들이 자본에게 대체 차량 기사를 구해준다. 만약 자본이 안성하고 화성 물량을 다른 센터로 이관시킬 때, 같은 노동자면 ‘우리는 해주지 말자’, ‘같이 위해서 싸우지 못할망정 우리라도 도와주지 말자’ 이렇게 되는데, 반장들이 ‘돈 더 준다’, ‘안 하면 잘라버리겠다’는 식으로 협박과 회유를 하면서 기사를 구해주는 거다. 그런데 그곳의 화물노동자들은 ‘왜 진작 오지 이제 왔냐’고 말한다. 지금 이 사태가 끝나면 가입하겠다고 많이 이야기한다. 지금은 같이하지 못하지만 지지하고, 독려하는 노동자들이 많다. CU에 제일 안 좋은 제도가 반장 제도인데, 반장에게 일과 사람을 자를 수 있는 인사까지 현장의 권력을 다 주는 제도라서 서로 감시하고 분열시키면서 노조를 못 하게 하는 거다. 꼭 없앨 생각이다. 처음에는 CU화물노동자 2500명을 위해서 시작한 투쟁이 지금은 그 이상, 화물 노동자 전체의 투쟁이 되었다. 서광석동지가 연대하다가 고인이 되셨다. 너무 죄송하고 평생 마음에 빚을 졌다. 본부장님이 큰 힘을 주고 있으며, 화물연대 조직을 비롯해 수많은 동지의 연대의 힘으로 싸우고 있다. 우리는 절실하다. 그래서 지금 아니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질문3. 1월부터 7차례 교섭을 요구했는데, 사측이 거부한 이유, 그리고 사측 태도에 대해 얘기해 주세요. 윤정욱 CU지회장: 사측이 이전엔 한두 평도 안 되는 막사에 히터와 에어컨 하나 달아주던 걸, 노동조합이 생기니 (휴게실로) 컨테이너를 하나 해줬다. 엄청나게 생색을 냈다. 우리는 3월 노란봉투법 시행 전인 11월부터 얘기하자고 했고, 1월부터 교섭공문을 7차례나 보냈다. 그런데 들은 게 없다, 화물노동자가 일방적으로 차를 세웠네 마네 그런 거짓말을 해댔다. 자본은 진짜로 대단한 사람들이다. 새벽에 나와서 밤낮 안 가리고 일하고, 잠도 못 자고, 가족 얼굴 못 보면서 일한다. 일요일 하루 쉬고 명절에 하루 쉬니까 양가를 다 가지도 못하고 그나마 꼴랑 휴일도 일요일과 겹치면 추석날이라도 그냥 쉬는 날 없는 거고. 많은 것도 바라지도 않고 그냥 하루 더 쉬자, 그런 걸 개선하자고 했다. 절대 무리한 요구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런데 회사 쪽에서는 절대! 대화조차 거부했다. 화물노동자를 사람으로 보지 않는 것 같다. 노동조합도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노동조합 들었다고 2회전 물량까지 빼앗아 다른 센터로 이관하고, 탄압하고. 그냥 살지 말라는 거다. 지금은 서광석열사의 죽음으로 사회적 이미지 때문에 끌려 나온 것 같다. CU BGF리테일, 로지스 쪽에서 얘기하자고 해놓고도 뒤에서 딴짓하고 있다. 질문4. 서광석 열사의 죽음 당시 상황과 경찰 폭력에 대하여 말씀해 주십시오. 조합원들의 심정도 같이 얘기해 주십시오. 윤정욱 CU지회장: 참담했다. 저는 진천 허브 센터에 있었는데 언론에 공개된 영상, 여기서 직접 찍은 영상들을 봤다. CU투쟁에 연대하러 온 동지가 그렇게 고인이 되어 조합원들이 처음에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했다. ‘당장 가자, 당장 가자, 지금 가서 우리가 하자’며 분노에 가득 차 있었다. 서로 감정을 좀 누르고 본부장 지침에 따라 CU진주센터로 내려왔다. 뭐라 말 못할 정도로 고인과 유족에게 죄송했다. 우리가 할 일을 연대한 동지가 하면서 고인이 되신 게. ‘정말 저희라면 그렇게 할 수 있었을까’생각했다. CU자본과 경찰이 너무 원망스럽다. 이것은 사고가 아니라 명백한 살인이다. 다른 센터에 가서 물량 저지를 여러 번 했지만, 각본대로 나온다. 그런데 굳이 역주행해서 저렇게 무리하게 나간 거는 분명히 사측이 경찰하고 모의한 결과일 것이다. 사측 입장에선 어떻게든 물량을 빼내야 하니까. 얼마나 아팠을까. 그 차가 얼마나 무거운데. 그 안에 짐이 몇 톤이 실려 있는데.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 마음이 너무 아프고 너무 죄송스럽고 평생 가슴에 간직하면서 빚을 졌다는 생각으로 살 것이다. CU조합원 모두 다 그런 생각이다. 연대와 단결, 투쟁 정신이 정말 존경스럽다. 질문5. 지금 실무교섭이 이루어지고 있는데 한편으로 CU가 가처분 신청을 넣는 등 탄압이 상당한 것 같습니다. CU는 교섭도 아니고 ‘만남’이라고 선을 긋고 있죠. 지금 쟁점은 어떤 것입니까? 윤정욱 CU지회장: CU자본은 교섭하자 해놓고 다시 말을 바꿔 ‘협의’라고 한다. ‘점주, 가맹점주들을 위해서 나왔다’고 한다. CU는 성실교섭을 해야 한다. 쟁점이랄 게 없다. 왜냐면 우리가 크게 바라는 게 없어서다. 돈을 100만 원 올려달라는 게 아니라 처우 개선만 좀 해달라고 하는 거다. CU 홍씨 일가와 오너들은 몇십억 몇백억씩 가져가면서 화물노동자에게 한 달에 10만 원~20만 원 올려주는 걸 아까워한다. CU가 교섭하지 않는 이유는 이거다. 자신들이 ‘교섭’으로 노동자와 이야기하면 노동자를 평생 개돼지로 못 써먹으니까! 노동자를 개돼지로 부려서 많은 이익을 보고 있는데 ‘교섭’하면 돈이 문제가 아니고 평생 개돼지로 부려 먹지 못할까 봐 교섭을 거부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번 파업으로 CU화물노동자의 노동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드러났다. 비조합원이 대부분이고 (CU 화물노동자의) 고작 7~8% 정도만 민주노총 공공운수노조 화물연대 조합원으로서 파업했다. 그런데도 이 정도 타격을 줄 수 있으면 우리가 얼마나 소중한 노동을 하는 노동자인가. 사측은 이를 인정하고 반성해야 한다. 질문6. 노동부는 처음에 화물연대를 ‘자영업자 단체’로 간주하며 이번 투쟁에 대해 교섭 자체가 노조법 상 교섭이 아니라며 선을 그었습니다. ‘이번 사안을 노란봉투법상 원·하청 교섭 문제로 보기 어렵다’고 판단했죠. 엊그제 고용노동부 장관 김영훈이 “특수고용직 노동자가 형식적으로는 자영업자라 하더라도 경제적으로 종속된 관계라면 노동자로 볼 수 있다는 판례가 있다”며 “형식보다 실질을 중시해야 한다”고 얘기하긴 했지만, 얘기하긴 했지만, 명확한 태도는 없습니다. 이런 태도에 대한 생각은? 윤정욱 CU지회장: 노동부가 우리 보고 자영업자라고 말하는 건 노동조합도 제대로 인정하지 않는 거다. 그래놓고 라디오에선 또 ‘리테일이 원청입니까?’ 물어보니 ‘네’ 그랬다더라. 말을 자꾸 바꾸는 게 주위의 압박이 심해선가? 리테일이 원청으로서 결정 권한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복잡한 건 몰라도 이거 하나는 확실히 알고 있다. 우리는 확실히 노동자다! 우리가 왜 CU 모든 화물노동자의 저임금, 장시간, 고강도 노동에 오만가지 공짜노동을 개선하려 파업을 하겠는가. 고용노동부는 이 하나를 명확히 알아야 한다. 이번 기회에 특수고용노동자의 문제를 관심있게 보고 노동자성을 인정하면 좋겠다. CU투쟁을 선례로 원청을 원청으로서, 사용자로서 명확히 책임지게 만들어야 한다. 고용노동부장관이 그런 걸 좀 했으면 좋겠다. 질문7. 이번 투쟁의 목표에 대해 말씀해 주시길. 원청 교섭 요구를 통한 투쟁 요구가 있고, 열사 투쟁의 성격도 함께 갖고 있습니다. 윤정욱 CU지회장: 우선 고인이 되신 서광석 열사가 빨리 하루 좋은 곳으로 가실 수 있게 해결이 잘 되는 것이 첫 번째 목표다. 화물노동자는 생계가 매우 어려워서 현장 복귀가 빠를수록 좋다. 하지만 열사의 한을 풀 수 있는 협상이 안 되면 돌아갈 생각 없다. CU투쟁으로 열사가 돌아가셨다. 열사투쟁은 CU투쟁이 묻히는 게 아니다. 산 사람은 어떻게든 산다. 돌아가신 분들은 어떻게 하나. 조합원들은 산 자가 열사의 원한을 풀어드려야 한다는 생각이 굳건하다. 둘째, 투쟁이 조금 오래 걸리고, 힘든 싸움이 되더라도 처우 개선을 지금 안 하면 안 된다. 어떻게든 원청 CU자본에게 꼭 본때를 보여주고 싶다. ‘우리만 좋게 하자, 귀족노조 하자’는 게 아니다. 모든 화물노동자를 위해 서광석열사가 바라는 대로 끝까지 투쟁해서 꼭 이겨서 돌아가겠다. 질문8. 전국의 노동자들에게 하고 싶은 얘기는? 윤정욱 CU지회장: 화물 노동자가 하는 일은 다르더라도 똑같은 처지라 생각한다. 사안이 생길 때 앞서서 투쟁하는 사람도 있고, 뒤로 빠져 있는 사람도 있고, 같이 연대하고 싶지만 못하는 사람도 있고, 적극적으로 하는 사람도 있다. 그래도 뜻은 다 같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노동자의 처우가 개선되려면, 우리가 목소리를 내려면 민주노총이나 화물연대에 무조건 가입하라는 건 아니지만 용기를 내서 동조하고 지지하면 좋겠다. 그래야 노동자의 권리가 나아지는 방향으로 빨리 변할 거다. 처음에 이 투쟁을 결의하면서 전국적 투쟁을 하자고 했을 때 어떤 조합원들이 ‘아니 왜 우리가 힘들게 싸워서 다른 노동자들까지 올려주냐’, ‘우리만 잘 먹고 잘 살면 된다’는 식의 이야기를 했다. 그때 본부장 동지가 정리를 해준 게 ‘그러면 지금 CU노동자들도 야간에 화물차 톨게이트비 면제받지 않냐? 화물복지카드 유가보조금 혜택 받지 않냐, 그때 우리가 싸우지 않은 것과 똑같은 거다’라고 말했다. 그 말씀으로 한 번에 다 정리가 됐다. 모든 화물 노동자들이 다 똑같다고 생각한다. 권리를 보장받으려면 함께 연대해야 하고, 노동자가 존중받는 사회를 사회에서 살려면 ‘니가, 내가’가 아니고 하나가 되어야 한다고 한다. 화물연대 2만 5천 명이 싸우지만 45만 전체 화물 노동자를 위한 싸움을 하자고 강조하고 싶다. 그리고 CU투쟁으로 인해서 희생되고 다치신 분들께 죄송하고, 평생 마음에 빚을 안고 항상 기억하겠다. 끝까지 우리 연대를 믿고 조직을 믿고 동지를 믿고 투쟁하겠다. 연대하는 모든 동지에게 감사하고 많은 걸 배운다. 꼭 이겨서 CU노동자들도 계속 교육하고 조직하면서 어려운 곳에 함께하겠다. ---- 인터뷰에 응해주셔서 깊이 감사드립니다. 우리도 최선을 다해 이 싸움 함께하겠습니다 -
[성명] 기업 범죄 방패막이 사법부, 변하지 않는 체제의 실체 - 아리셀 참사 주범 박순관 4년 선고에 부쳐22일 수원고등법원은 1심에서 15년을 받은 아리셀 대표이사 박순관에게 징역 4년, 똑같이 1심에서 징역 15년을 받은 그의 아들 박중언 총괄본부장에게 징역 7년을 선고했다. 23명이 죽었는데도 4년이라니 유가족들은 울부짖었다. "이주노동자들이 죽었다고 이런 판결을 내린 건가? 아니면 우리가 돈도 없고 권리 없고 사는 게 힘들어서 이런 판결을 내리는 거냐"라며 오열했다. 법원은 “참사가 발생한 공장 3동 2층에 비상구 및 비상통로의 설치·유지·이용 의무가 없다”라며 살인자들에게 면죄부를 줬다. 또한, 안전보건관리체계가 전혀 수립되지 않아 23명의 노동자가 사망했음을 인정하면서도 동시에 “피고인들이 위험성을 외면하고 이익 추구에만 몰두하였다거나, 안전을 위한 조치를 방치하였다고는 보이지 않는다”라는 해괴한 논리를 폈다. 재벌과 보수언론은 그동안 엄살을 떨어왔다. 2022년 1월 법 시행부터 2025년 9월까지 중대재해 유죄판결 중, 실형은 8%에 불과하다. 이번 판결은 중대재해처벌법을 무력화하려는 사법부의 일관된 모습이면서도, 가장 극악한 사례다. 법은 자본가의 생산수단에 대한 소유권을 보호함으로써 노동자들의 고혈을 짜내는 것을 정당화했다. 자본가들의 수많은 범죄에 처벌하는 시늉만 했다. 예를 들어, 천 억이 넘는 비자금을 조성하고 수천 억대의 배임과 횡령을 저지른 정몽구에게 집행유예를 선고하기도 했고. 역시 천 억이 넘는 세금을 포탈하고, 수 조원의 차명주식과 자금을 운영한 이건희에게 불구속 기소 결정을 내리기도 했다. 노동자들의 정당한 투쟁은 무수히 짓밟았다. 노동자 민중이 고통당해야 했던 것은 법치주의가 없어서가 아니라 바로 그 법치주의라는 헛된 선동 뒤에 숨어있었던 자본의 무자비한 공격 때문이었다. 지금도 법원은 CU 투쟁에 나선 화물연대 조합원 두 명에 대한 구속영장을 발부했다. 경찰은 CU를 철저히 보호하기 위해 대체인력 투입을 저지하는 노동자들을 폭력적으로 짓밟았다. 그 과정에서 서광석 열사가 목숨을 잃었다. 관료적이고 억압적인 법원, 검찰, 경찰의 본질은 조금도 바뀌지 않았다. 유가족에게는 피눈물을 흘리게 하고, 자본가에게는 솜방망이 처벌만 내리는 체제, 다단계 하청구조를 이용한 착취는 무한대로 허용하고, 파업은 경찰을 투입해 짓밟는 체제는 뒤집어져야 한다. 23명의 죽음을 잊지 말자. 노동자 민중의 힘으로 정의를 다시 세우자. 강력한 처벌을 위해 싸우자. 자본가의 이윤이 아니라 노동자의 안전과 생명이 우선인 사회를 만들기 위해 단결하자! 투쟁하자! 2026년 4월 23일 사회주의를향한전진 -
“유족 앞에 무릎 꿇릴 때까지 싸울 것이다” - 진주 CU현장으로 모인 화물노동자의 거대한 분노4월 20일, 화물연대 광양컨테이너지부장 서광석 동지의 사망 소식은 화물노동자의 운전대를 멈추게 했다. 진주 정촌에 있는 CU물류센터 정문에서 좌측으로 약 100미터에 이른 길은 이전에는 평범한 도로였을 테다. 하지만 지금은 CU원청 자본과 정부가 ‘살기 위해’ ‘노조하다가’ 무참히 ‘살해당한’ 서광석 열사를 떠나보낸 현장이자, 전국 화물노동자의 애끓는 분노가 모이고 투쟁이 살아 숨 쉬는 현장이 되었다. 현장에 도착한 4월 20일 자정께부터 21일 17시 화물연대 집회를 마칠 때까지, 노동자는 그곳으로 모이고 또 모였다. 밤새 CU BGF 공장 정문을 지키고 또 지켰다. 서광석 열사가 떠난 자리 옆을 지키고 일손을 놓고 진주로 오는 인원을 점검하고 투쟁을 이야기하고 뉴스를 확인하고 집회하고 토론하고 회의하고 피켓을 들고 주위를 청소하고 음식을 나눠 먹고 투쟁 복장을 챙기고 구호를 외쳤다. 때로는 울다가 때로는 눈물을 삼켰다. 구호로 심경을 토해내고 이를 악물었다. 4월 20일에 약 300명의 인원은 21일 아침부터 계속 불어나더니 11시 약식집회에는 900명에 이르렀다. 4월 21일 17시에 열린 ‘열사정신 계승! 살인기업 CU BGF 규탄! 살인진압 경찰 공권력 규탄! 화물연대 결의대회’는 대오가 3천을 넘기며 예정 시간보다 일찍 시작되었다. 집회가 진행되는 동안에 대오는 계속 불어났다. 화물노동자 2,700명, 연대 대오까지 4천여 명이 “서광석을 살려내라”고 외쳤다. 경찰은 노동자들이 분노로 쓰러트린 공장 펜스 대신 방패로 무장하고 시종일관 자본을 지켜주었다. “저기에 가면, 아직 핏자국이 선명합니다” 밤늦게서야 도착한 CU진주물류센터(CU BGF로지스) 앞은 밤샘농성 중이었다. 어두워졌지만 동영상에 나온 바로 그 공장문과 도로였다. 오전까지 현장에서 투쟁하던 화물연대 노동자 서광석 지부장이 하루아침에 고인이 되어 영정사진 속에서 화물연대 노동자와 연대동지를 맞이하는 현실이 기막혔다. 화물연대 노동자들의 심경이 어떨지 상상하기 힘들었다. 뜯어낸 정문 안팎에서 화물연대 동지들이 농성을 이어가고 서광석 열사와 같은 지부 동지들이 번갈아가며 영정사진을 들었다. 비슷하게 도착한 동지들과 일행을 이루었고, 화물연대 임원 동지가 상황을 설명해주었다. “어제 같이 있었는데”, “저기에 가면, 아직 핏자국이 선명합니다.” 그 말을 들은 후에는 다른 말들이 잘 기억나지 않았다. 옷매무새를 다듬고 영상 속 길을 걸어 사고장소까지 갔다. 하얀색 분필의 선들, 그리고 검은 핏자국이 검붉게 느껴졌다. 묵념하는 마음이 타들어갔다. CU자본과 경찰이 얼마나 끈끈했던 걸까. 생각보다 차가 작았고 차고가 높지 않았다. 영상이 그려져서 고통이 배가됐다. 원청교섭 하자는데, 손해배상에 해고(계약해지). 정부는 CU자본의 ‘공권력 투입 요청’에 기꺼이 응답했다. 차로 사람을 밀고가게 사주하고, 사람들이 차에 치였는데도 대체차량을 빼내기에 급급했던 공권력과 자본. 저들은 야만을 여과 없이 보여주었다. 노동자들은 열사의 죽음에 대한 분노와 생각을 쏟아냈다. “운전하는 사람이 앞에 사람이 있는데 운행을 할 수가 없어”, “동영상 보셨어요? 동영상을 몇 번이고 돌려봤는데”, “경찰이 차를 계속 가라고 하잖아”, “사람이 차에 끌려 들어갔는데도 그를 구하려는 우리는 밀쳐내고 차들을 보내잖아, 인간이 아니야”, “위에서 시키지 않았으면 그럴 수 없다”, “사고낸 운전자만 잡아넣으면 억울해서 안 된다”, “이건 사고가 아니다. 구조적 살인이다” “실감이 안 납니다” 눈을 붙이러 간 노동자들도 많았지만, 4~50여 명 노동자는 정문 앞쪽을 떠나지 않았다. 서광석 열사와 같이 노조하던 ‘동지’가 갑자기 ‘유족’이 된 광양컨테이너지부 동지들은 현실이 믿기지 않았다. 하나같이 “실감이 안 납니다”고 말했다. 지부 동지들은 덤덤하시다가 울다가, 또 서로를 챙기다가 고개를 떨구시기도 했다. 조용히 사진 속 얼굴을 만지기도 했다. “엊그제 만났는데”, “노동운동을 오래 열심히 한 동지인데”, “동료들을 잘 챙기던 동지인데”, “앞에 서지만 않았더라면”, “같이 모임도 하고 있는데”, “내년 환갑까지만이라도 살았으면 덜 억울할텐데” 그리고 “실감이 안 난다” “‘사망’이라는 소식을 듣고 운전대에서 손을 놓았습니다. 파업지침이 내려지고 광양에서 컨테이너를 몰고 그대로 달려왔습니다. 병원으로 바로 갔습니다. 유족분들이 오열하셨습니다. 보고도 믿기지 않습니다. 저도 그런데 가족의 심정은 어떻겠습니까. 이 싸움은 원청교섭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CU자본이 유족 앞에 무릎 꿇고 사죄할 때까지 우리는 끝까지 싸울 겁니다.” 영정을 든 한 간부 노동자는 피맺힌 결의를 말해주었다. 차분하고 단호한 동지의 목소리가 하늘에 닿는 듯했다. CU살인기업, 이재명 살인정권 바로 옆 주택가에 버려진 박스로 피켓을 만들기 시작했다. 피켓이 하나둘 만들어지니, 누가 말하지 않았는데도 CU진주물류센터 앞에 도열한 노동자들은 피켓을 들었다. “공권력의 살인이라는 문구를 써달라”, “서광석을 살려내라”, “유족 앞에 무릎 꿇라고 써달라” 등 피켓 문구를 요구하며 함께 만들기도 했다. 피켓이 잘 보이지 않을 것 같으면 서로 이렇게 들자고 하고, 피켓이 없으면 더 챙기기도 했다. 17시 집회가 열리기 전까지 정문 앞 농성조가 피켓을 이어 들었다. 아침 8시 투쟁 일과가 시작되기 전, 노동자들은 부러진 나뭇가지와 맨손으로 정문 앞과 도로 주변을 쓸고 청소했다. 그 풍경은 마치 새벽에 장례식장 빈소를 청소하고 정돈하는 모습 같았다. 오전에 되고 사람들이 모여들면서 서광석 열사가 쓰러진 장소가 밟힐까 불안했다. 부러진 이동식 경찰바리케이드 조각과 도로 위에 있던 교통꼬깔을 모아 표식을 했다. 그랬더니 화물노동자들이 경찰바리케이드를 통째로 옮겨 열사의 피가 지워지지 않게 보호했다. 열사가 떠난 자리 4월 21일 11시, 경남경찰청 앞에서는 화물연대 16개 지역본부와 중집, 공공운수노조, 사회단체 등이 참여한 기자회견이 열렸다. 같은 시각 CU진주 현장에서도 집회가 열렸다. 화물노동자들은 일사분란하게 ‘고 서광석조합원 분향소’가 차려진 무대차량을 바라보고 앉아 ‘투쟁’을 외쳤다. 집회에서 사회자는 먼저 CU투쟁과 열사투쟁을 하나로 진행한다고 전달했다. “우리가 서광석이다. CU BGF 박살내자! 화물악법철폐투쟁 결사투쟁” 사회자는 CU편의점 화물노동자가 노동자성을 보장받지 못하는 특수고용노동자로 얼마나 착취당하는지 폭로하며 CU자본과 공권력에게 서광석 열사 죽음의 책임을 물었다. “1회전을 하면 6-7시간이 걸리고 점포수 14-16개. 그런데 월대 270만원 받는다. 그래서 2회전을 한다. 그럼 13-14시간 운행한다. 운수도 상하차도 한다. 1회전을 하면 굶어 죽는다. 2회전을 하면 도로에서 죽는다” “살려달라고, 죽지 않게 해달라고 대화 요구했다. 대화를 요구했더니 계약해지를 날렸다”, “경찰이 입고 쓰는 물건도 화물노동자가 운송해준 거다. 그런데 이것이 2026년을 살고있는 화물노동자의 현실이다” 발언자로 나선 여러 지부 임원들은 절절하게 투쟁을 토해냈다. “지금은 눈물을 흘리지 않고 안타깝게 억울한 죽음이 헛되지 않게 투쟁하자”, “어제 아침 경찰이 CU대문을 막고 사람이 부족한 상황이었다. 그리고 서광석동지의 아픈 소식이 들렸다. 화물연대의 정신으로 CU자본 박살내자. 승리할 때까지 이 자리를 사수하자”, “친일자본 CU자본이 쉽게 굴복하지 않을 테지만 서광석동지가 하늘에서 지켜본다. 끝까지 투쟁하자!” 전날 경찰에 연행됐다가 석방된 노동자도 마이크를 잡았다. “열사의 정신으로 이번 투쟁 승리하자. 진주CU분회는 4명이지만 4백 명, 4천 명이 되고 이길 것이다. 승리할 때까지 싸울 것이기 때문이다”, “물류를 멈춰 세상을 바꾸자” 화물연대 진군가와 파업가가 웅장하게 울려 퍼졌다. 자영업자 개소리 정부는 다단계 하도급 구조의 책임자이자 공범이다. 특수고용·플랫폼·프리랜서노동자의 노동자성을 아직도 보장하지 않는 공범이다. 노동자가 투쟁으로 개정한 노조법, 원청사용자 편에서 시행령부터 원청 대자본의 온갖 부당한 노조탄압을 비호하고 방관하는 공범이다. 그러다가 죽을 만큼 힘겹게 일하는 특수고용 화물노동자를 국가폭력으로 죽였다. 반노동을 감추려는 정부는 립서비스가 통하지 않을까 봐 고용노동부 장관을 급히 보내더니, 고용노동부는 하루도 되지 않아 화물노동자는 ‘자영업자’라고 떠들었다. ‘화물연대는 노조 아님’, 그저 ‘자영업자가 대화할 구조가 없는 게 문제의 원인’이라고 했다. 화물노동자들은 분명히 말했다. “구조적 타살”이라고! 현장에서는 “자영업자 개소리다”고 했다. 그리고 “김영훈이 그런 말을 하면 안 되지” 등의 반응이 이어졌다. 공공운수노조는 성명을 내어 ‘사태해결을 가로막는 자영업자 논리에 눈이 멀어있는 정부도, 모두 서광석 열사를 죽인 공범이다’고 규탄했다. 이재명 살인정부의 손에 피도 마르기 전에 ‘화물연대’가 노조가 아니라며 원청을 비호하는 모습에 ‘윤석열’이 떠올랐다. ILO권고가 어쨌든, 2022년 파업 당시 화물연대를 ‘사용자단체’로 규정하고 탄압한 기억을 화물노동자들이 더 생생하게 기억할 것이다. 원청을 위해 바리케이드 친 공권력의 모습대로 정부는 서광석 열사의 죽음을 피해가면서, 원청을 비호하기 위해 실질적 저지선을 치려 했다. 17시 화물노동자 결의대회가 있기 전까지 화물연대 외의 노동조합과 연대대오는 적었다. 원청교섭을 요구하며 투쟁하는 노동자 규모를 민주노총은 10만 명이라고 했다. 2026년 진짜 사장, 대원청 투쟁을 하는 노동자는 많으나 열사가 살해당한 소식을 듣고 달려오는 몸은 무거운 듯했다. 민주노총 지침을 여러 번 확인했지만, 속보 외에 지침은 따로 없었다(이후 4월 22일, 민주노총은 사업장 열사 분향소 설치와 현수막 게시, 조문 안내 등의 내용을 담은 지침을 냈다). 끝이 보이지 않는 대오, 내가 서광석이다! 17시가 되기도 전에 CU진주물류센터 앞 도로는 사람들도 넘쳤다. 무대차량 앞 분향소 옆으로 화환이 둘러쳐졌다. 자리가 없었다. 16시부터 대오정리를 반복해 당겨 앉고, 또 당겨 앉았다. 그렇게 무대 앞부터 서광석 열사가 떠난 자리 넘어까지 대오가 3천 명에 이르면서 집회는 10여 분 일찍 시작됐다. 수많은 인파에도 노동자들은 비장하고 엄중했다. 사실 화물연대는 이 투쟁이 지속될 것을 고려해, 이날 전국을 동원한 것은 아니라고 했다. 그런데도 대오는 계속 늘어났다. CU물류센터를 지나 GS물류센터 입구에 이르는 2백여 미터 도로를 가득 메웠다. 묵념, 그리고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부르고 화물연대 김동국 위원장의 긴 발언이 있는 동안 노동자들은 울기도 하고 “투쟁!”, “살려내라!” 등을 크게 외치기도 했다. “고의적으로 공권력이 CU와 합작해서 살인한 것입니다. 악덕 CU보다 경남경찰청장을 더 죽여버리고 싶다. 경찰청장이 사퇴하지 않으면 이 싸움 접을 수 없다. 화물연대는 화물연대다운 투쟁을 해야 합니다. 대화에는 대화로, 탄압에는 저들보다 더 악랄하게” 공공운수노조 엄길용 위원장은 윤석열 탄핵 광장에서 열사가 남긴 말을 상기시켰다. “헌법파괴의 시작, 업무개시명령 즉각 폐지, 안전운임제 재입법과 확대”, “화물연대가 앞장서겠다” 광장에서 노동운동을 시작한 청년 연대동지들은 연신 눈시울을 붉혔다. 열사와 10일 전 마지막 술자리를 했다는 광주전남 이행섭 본부장은 “사람이 죽었는데, 사람을 죽여놓고 말 한마디 없는 것이 지금의 권력과 정권이다, 이 투쟁 끝까지 가야 된다”고 강조했다. 서울경기지역 장정훈 본부장은 “삶에 편리한 편의점이지만, 배송노동자는 새벽 2-3시에 출근해서 저녁 6-7시에 퇴근한다. 배라도 덜 곯고자 노조에 가입한 게 무리냐”며 “꼭 사람이 죽어야만 우리 화물노동자를 찾아주는 정치다. 고용노동부 장관 왔다 가서 기대했는데, 우리를 다시 자영업자라고 한다”고 비판했다. 김동환 울산본부장은 “죽을 때까지 4월 20일을 잊을 수 없을 것 같다. 정말 억울한 죽음이 되지 않게 투쟁하자”고 했다. “내가 서광석이다! 열사의 한을 풀어내자”, “살려내라, 살려내라, 서광석을 살려내라!” 방송 스피커 장비의 높은 볼륨이 아닌 노동자의 육성, 대오의 커다란 분노가 하늘에 울렸다. 서광석 열사 곁에서 현장의 화물노동자들은 진실로 끝까지 싸운다고 결의했다. 1시간의 집회가 끝나고 1시간의 헌화가 이어진 사이 현장의 노동자들은 자연스럽게 CU물류센터 정문을 막고 선 경찰을 밀었다. 노동자를 죽이고도 26개 중대, 1,500명을 동원한 정부를 향한 몸짓이었을 것이다. 사회자의 요구로 노동자들이 빠지자, 경찰은 다시 CU자본을 지키는 방패를 이어 붙였다. ‘노동절’ 이름은 되찾았다. 그러나 노동자의 이름과 권리는 아직까지 찾지 못했다. 2026년 국제노동절을 열흘 앞두고 노조한다고, 원청교섭 하잔다고 살해당했다. 그것도 모자라 ‘자영업자 단체’ 해법을 제시받고 있다. 하지만 진주CU 현장에서 생생히 느낄 수 있었다. 열사의 한을 풀고, CU자본과 정부를 유족 앞에 무릎 꿇리게 할 사람은 정치꾼이나 노조관료가 아니라 오직 투쟁하는 노동자라는 사실을! 화물연대 뿐 아니라 원청에 맞서 투쟁하는 노동자들의 힘을 집중하자. 민주노조 노동자가 앞장서자. CU살인기업, 이재명 살인정권 노동자가 심판하자! 서광석을 살려내라! -
[발언] 원청교섭 사업장 선봉 파업과 금속노조 총파업으로 원청교섭 쟁취하자!금속노조는 지난 4월 15일 서울 양재동 현대차 본사 앞에서 '현대차그룹을 시작으로! 원청교섭 쟁취! 금속노조 결의대회'를 열었다. 원청교섭에 나선 금속노동자들이 현대차그룹 본사 앞 집회를 열고 항의 투쟁을 전개하게 된 이유는 현대차그룹 산하기업 단 한 곳도 원청교섭에서 나서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금속노조 박상만 위원장은 "오늘 금속노조 투쟁은 단순한 임금 인상만을 위한 투쟁이 아니며, 모든 노동자의 총고용을 지키고 원청교섭 쟁취의 원년을 만드는 싸움이다"라고 밝혔다. 또한 "자동차·철강·조선·전자 업종별 공동파업과 정의선이 원청교섭에 나올 때까지 7월 15일, 8월 26일, 9월 3일 총 세 번의 총파업으로 세상을 뒤흔들겠다"라는 계획을 알렸다. 이날 연설에 나선 금속노조 지부와 지회 지도부들은 이구동성 현대차그룹과 각 사업장 자본의 교섭 거부를 규탄하고 금속노동자 단결투쟁을 호소했다. 결의대회를 마친 금속노조 지도부와 지부·지회 임원과 간부들은 '개정 노조법 이행·원청교섭 촉구 교섭요구안 및 항의서한'을 전달하려 했지만, 현대차 자본은 철저하게 외면하며 문전박대했다. 정의선이 회장으로 있는 현대글로비스는 현대자동차, 현대제철, 현대모비스, 현대위아, 현대트랜시스와 함께 현대차그룹의 최첨단 자동화와 로봇 투입을 통한 구조재편으로 완성차·부품사·서열 물류사 노동자 대량해고, ‘대학살’을 기획하고 있는 중추 기업이다. 현대글로비스 울산지회, 전주지회, 광주지회는 현대글로비스를 상대로 교섭 공문을 발송했으나 자본은 교섭 요구 공지조차 하지 않는 작태를 부리고 있다. 이날 현대글로비스 울산지회 김미옥 지회장의 금속노조 결의대회 발언문을 소개한다. [발언문] 동지들! 반갑습니다. 현대글로비스 울산지회 지회장 김미옥입니다. 힘찬 투쟁으로 인사드리겠습니다. 투쟁! 지금 자본가들은 공동 모의하여 교섭을 지연하거나 거부하며 노동자들을 철저히 우롱하고 있습니다. 현대자동차, 현대제철, 현대모비스, 현대위아, 현대글로비스 등 현대차 자본은 완고하게 교섭 거부로 패악을 벌이고 있습니다. 거의 매일 언론에 나오는 현대차 정의선은 올해 원청교섭에서 총자본의 선봉장을 자처하고 있습니다. 우리 노동자들은 개정 노조법의 허술함과 이재명 정부의 시행령 때문에, 자본가들이 순순히 교섭에 나오지 않을 거라 예상했습니다. 우리는 수많은 말과 공문으로 자본가들을 교섭에 끌어낼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동지들! 또한 고용노동부의 절차적 해석과 결정이 원청교섭을 보장하지 않으며, 노동자들의 생존권과 고용안정을 지켜주지 않는다는 것도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 노동자들의 강력한 투쟁으로 압박하지 않으면, 자본가들은 더욱더 버틸 것이며, 우리는 교섭에서 원청 자본의 얼굴을 볼 수 없을지 모릅니다. 우리가 자본가들의 이윤을 침해하는 강력한 총파업으로 자본가들을 교섭으로 끌어내야 합니다. 오늘 집회를 마치고 각 지역으로 돌아가면, 원청교섭에 나선 모든 지회, 현대차 산하 지회들이 일치단결하여 현장조합원들을 조직화 연대를 이어가면서 금속노조 7월 총파업을 반드시 조직해 냅시다! 현대차 자본은 2026년 1월, 미국 조지아주에 "로봇 메타플랜트 응용 센터"를 개설했습니다. 이곳은 공장 투입 이전에 로봇을 학습하고 검증하는 '로봇 훈련소'와 같습니다. 이미 아틀라스 100대를 모아놓고 테스트 중이라고 합니다. 테스트를 마친 아틀라스는 2028년 메타플랜트 부품 분류와 서열작업에 투입될 예정입니다. 또한 2030년에는 메타플랜트 조립공정에 투입할 예정이며, 이후 현대차 국내외 모든 공장에도 투입할 계획을 세우고 있습니다. 아틀라스 투입은 부품 분류·서열에서 시작하여 조립과 서비스로 투입될 것이기 때문에, 오늘 집회에 참여한 모든 사업장 우리 노동자의 생존권과 일자리를 위협할 게 불 보듯 뻔한 일입니다. 현대차 정의선은 무엇을 도대체 꿈꾸는 것입니까? 현대차 공장에는 이미 프레스, 차체, 도장에 산업로봇과 협동 로봇이 일자리를 대체했습니다. 이제 부품 물류와 서열, 의장까지 자율 운반 차량, 자율이동로봇, 4족 보행 로봇, 아틀라스까지 투입하여, 주 7일 동안 매일 24시간 공장을 가동되는 "불빛 없는 공장"를 세계화하는 것입니다. 2030년은 길지 않은 시간입니다. 이제 4년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현대차 자본은 또한 울산 1공장과 42라인을 통합하는 재건축 계획을 밝혔습니다. 재건축 기간을 40개월로 잡았습니다. 재건축 공장은 최첨단 자동화와 로봇을 투입하여 인원은 최소화하고 생산성과 효율성을 최대화한 유연생산 공장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렇다면 재건축 과정에서 현대차 하청노동자와 촉탁직, 그리고 부품사와 서열업체 노동자들의 생존권과 고용 문제가 발생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미 현대차 정의선의 노동자들에 대한 대량해고, 대학살은 시작된 것입니다. 우리는 현대차 정의선의 불빛 없는 공장계획을 가만히 손 놓고 지켜볼 수 없습니다. 현대차 자본이 교섭에 나와서 완성차 원하청 노동자, 부품사와 서열업체 노동자의 생존권과 총고용 보장에 대한 대안을 제시해야 합니다. 우리도 자본가들에 맞서 모든 노동자의 생존권과 총고용 보장을 위한 투쟁을 시작해야 합니다. 올해 원청교섭 투쟁은 노동자들의 사활이 걸린 투쟁입니다. 원청교섭을 쟁취하여 모든 자본가와 이재명 정부에게 모든 노동자의 생존권과 총고용 보장을 책임지게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동지들! 우리의 정당하고 절박한 투쟁에 현대차 산하 지회들이 선봉에 섭시다! 원청교섭 쟁취 투쟁에 나선 모든 지회가 선봉에 섭시다! 우리 스스로가 파업의 선봉에 설 때, 원하청 공동파업도 가능할 것입니다. 또한 위력적이고 실질적인 금속노조 7월 총파업도 조직할 수 있습니다. 금속노조 18만 7월 총파업으로 원청 자본을 교섭 석상에 끌어내어 우리 모든 노동자의 생존권과 고용안정을 책임지게 합시다. 총파업 투쟁으로 총고용을 쟁취하자! 투쟁! -
[번역] 마르크스주의, 스탈린주의, 퀴어혐오수십 년간, 마르크스주의는 계급 대립에만 천착할 뿐 여성이나 유색 인종, LGBTQ+에 대한 억압 같은 다른 형태의 억압은 무시한다는 주장이 마치 상식처럼 통용되어 왔다. 실제로 스탈린주의로부터 사회민주주의 전통에 이르는, 그리고 오늘날 미국민주적사회주의자들(DSA)까지 포함하는 자칭 마르크스주의자들은 특수한 억압의 중요성을 경시하고 노동자계급 중 상층에만 유리한 경제주의 전략을 고수해 왔다. 그러나 성적·젠더적 억압에 대한 스탈린주의 및 사회민주주의의 반동적 입장은 마르크스주의의 유산을 조금도 반영하지 않는다. 혁명적 노동자 운동의 역사를 조금만 들여다보아도 이는 분명하다. 오히려 러시아의 혁명적 사회주의는 10월 혁명을 통해 LGBTQ+ 차별의 물적·이데올로기적 토대를 근본적으로 변혁하는 길을 선도했다. 반동적 일탈이 발생한 시점은 정당과 조직들이 사회주의를 표방하면서도 혁명적 전망을 포기하고 자본주의 세계와 타협하려 했을 때였다. 이 같은 역사적 통찰은, 특히 세계 최고의 자본주의의 “민주주의”를 자처하는 미국에서 퀴어 인권을 향한 새로운 공격이 거세지는 오늘날, 해방을 위해 우리에게 어떤 정치가 필요한지 분명히 알려 줄 수 있다. 볼셰비키의 전진 19세기 후반 러시아의 양대 핵심 도시인 상트페테르부르크와 모스크바에는 게이 문화권이 형성되었다. 목욕탕 같은 사교 공간이 생겨났고, 언어 코드(예컨대 ‘뚀뜨끼(tetki)’라는 단어는 대략 ‘아줌마’로 번역되는데, 게이 당사자와 비당사자 모두가 게이를 가리킬 때 이 단어를 사용했다)와 복장 코드의 요소들, 그리고 적어도 사적 공간에서는 크로스 드레싱도 존재했다. 역사가 댄 힐리는 혁명기 러시아와 소비에트 연방 시기 동성애의 역사를 다룬 저작 『혁명기 러시아의 동성애적 욕망』에서 이렇게 적는다. “제정 러시아나 소련의 이러한 동성애 하위문화가 해외에서 수입되거나 공산주의의 실정으로 만들어진 것이라는 주장은 이성애 중심적이고 민족주의적인 쇼비니즘에 다름 아니다.”[1] 한편으로 남성 간 성행위는 러시아 정교회 규율상 불법이었다. 1917년까지 합의에 의한 “남색”은 시베리아 유형감이었다. 그러나 이 같은 위협이 일관적으로 적용되지는 않았다. 1917년 차르 체제의 법전이 폐지되면서 동성애는 사실상 비범죄화되었고, 1922년 새로운 법전이 채택된 후 신생 소비에트 국가의 공식 법률 문서에서 “남색”에 대한 언급은 완전히 사라졌다. 이로써 소비에트 연방은 18세기 혁명기 프랑스에 이어 세계 최초로 동성애를 합법화한 국가 중 하나가 되었다. 반면 바이마르 공화국에서는 동성애를 범죄화한 제국 시대의 악명 높은 175조가 여전히 효력을 유지했고 파시즘 하에서 더욱 강화되었으며, 독일연방공화국이 이를 최종 폐지한 것은 1994년에 이르러서였다. 소비에트 연방이 동성애를 비범죄화하고 수십 년이 지난 뒤의 일이다. 다른 여성과 연애 또는 성적 관계를 맺은 여성들은 러시아에서 공적 영역에 진입하기가 상대적으로 어려웠고, 따라서 응집력 있는 공동체를 형성하기도 어려웠다. 이 문제에 관해서는 사료도 적은데, 여성 간 성행위는 처벌 대상이 아니어서 이를테면 법원 기록 등이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경제적으로 독립한 여성들은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전통적 이성애 가족을 넘어서는 관계를 맺는 데 성공했다. 10월 혁명 이후 내전기의 군사적 분위기 속에서 많은 여성이 남성적인 스타일을 선택했는데, 한편으로는 혁명에 충성하고 혁명을 수호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동성애자 여성이 다른 여성의 관심을 끌기 위한 코드이기도 했다. ‘트랜스섹슈얼리티’와의 경계는 종종 모호했다. 1923년 모스크바 스베르들로프 대학에서 실시한 섹슈얼리티에 관한 설문에는 이런 응답이 있었다. “나는 남자가 되고 싶다. 거세하고 남성 분비샘을 이식하는 과학적 방법이 발견되기를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다.”[2] 1920년대에 실제로 이 같은 수술이 시행되었지만, 의료 기술이 아직 초보적이었던 탓에 성공 여부는 의문이었다. 의학적 개입과 별도로 많은 이들이 자신의 젠더 정체성을 변경할 기회를 적극 활용했다. 적절한 신분증을 발급받고, 원래 이름을 남성형으로 개명하고, 복장과 외모를 바꾸었다. 이와 더불어 동성애와 젠더의 기원과 본질에 관한 과학적 논쟁이 활발하게 이루어졌는데, 당시 이 둘은 밀접하게 연관된 것으로 널리 인식되었다. 생물학자 니콜라이 콘스탄티노비치 콜초프(Nikolai Konstantinovich Koltsov)는 이렇게 단언했다. “물론 하나의 ‘중간 성’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무한한 수의 중간 성들이 존재할 뿐이다.”[3] 예브게니 표도로비치 M.은 17세이던 1915년에 남성 정체성을 취하기 시작했다. 혁명기에 그는 공문서상의 이름을 변경하고 비밀경찰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1922년 예브게니는 새로운 신분증을 가지고 사료에 S.로 기록된 어떤 여성과 결혼했다. 정체성 변경 사실이 알려진 후에도, 이 부부를 “자연에 반하는 범죄”로 기소한 지방 법원 소송은 기각되었고 혼인은 유지되었다. 법원은 이 결합이 상호 합의에 의한 것이므로 합법이며 배우자의 젠더 정체성은 무관하다고 판결했다. 이 부부는 S.가 직장 동료와의 관계로 낳은 아이와 함께 수년간 가족으로 함께 살았다.[4] 혁명적 각성과 전통적 규범 거부라는 대의는 볼셰비키 엘리트들의 전유뮬이 아니었고, 예브게니 같은 사람들에게도 전례 없는 수준의 자기 결정권을 주었다. 부르주아 역사학계는 볼셰비키가 차르 체제의 법전을 폐지하면서 동성애를 합법화할 의도가 전혀 없었다고 주장한 바 있다. 예를 들어 시몬 카를린스키는 10월 혁명이 1905년 혁명과 1917년 2월 혁명에서 성취한 동성애 인권을 되돌리고 부정했다고 주장하면서, 최초의 “남색” 비범죄화는 곁가지 정도로 취급했다.[5] 그러나 힐리는 1991년 소비에트 문서고 개방과 함께 접근 가능해진 법무인민위원부의 기록에 근거하여 다음과 같은 명확한 결론에 도달한다: 이 문서들이 남색 조항을 상세하게 다루지는 않지만, 성인들 간의 합의에 따른 행위를 비범죄화하겠다는 원칙적 의도는 분명히 드러난다. 이 같은 의도는 1918년 사회주의 형법을 기초하려 한 최초의 시도부터 1922년 법안의 최종 채택에 이르기까지 일관되게 표명되었다.[6] 남성 동성애를 비범죄화함으로써 볼셰비키는 노동 운동의 오랜 전통 위에 자리 잡았다. 이를테면 1898년 독일 사회민주당의 지도자 아우구스트 베벨은 의회에서 동성애 해방을 요구한 최초의 정치인이었다. 그보다 3년 앞서서 사회주의자들은 오스카 와일드가 동성애 혐의로 재판에 회부되었을 때 그를 옹호하기도 했다. 에두아르트 베른슈타인은 동성애가 “자연”에서 일탈한 것이라는 관념을 날카롭게 비판하면서 동성애는 오히려 “굳건히 유지되어 온 허구적 규범”으로부터의 일탈로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남성과 남성 간의 유사한 계약이 형사 처벌을 받아야 할 합리적 근거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했다.[7] 동성애 합법화를 요구한 것은 사회주의자들만이 아니었다. 그러나 10월 혁명 이후 사회주의자들은 이러한 요구를 내거는 데 그치지 않고 실제로 실행한 유일한 세력이었다. 1923년 모스크바 사회위생연구소 소장 그리고리 바트키스(Grigorii Batkis) 박사가 집필한 소책자 「러시아의 성 혁명(The Sexual Revolution in Russia)」은 혁명 직후 몇 년간 볼셰비키의 공식 입장을 엿보게 해 준다. 그는 이렇게 적는다. 소비에트 법제는 누구도 해를 입지 않고 누구의 이익도 침해되지 않는 한에서는 성적 문제에 대한 국가와 사회의 절대적 불개입을 선언한다. 유럽 법제에서 공공 도덕을 해치는 범죄로 규정된 동성애, 남색, 그 밖의 다양한 성적 만족의 형태들에 관련해서, 소비에트 법제는 이를 소위 “자연적” 성교와 정확히 동일하게 취급한다. 모든 형태의 성교는 사적인 문제다.[8] 물론 신생 소비에트 연방에서 모든 편견이 하루 만에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편견은 수십 년, 수백 년에 걸친 차르 체제의 후진성 안에 깊이 뿌리 내리고 있었다. 더욱이 볼셰비키의 합법화 정책이 소비에트 연방 전역으로 확대된 것도 아니었다. 예컨대 1926년에 제정된 우즈베크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법전은 여전히 동성애를 금지하는 조항들을 담고 있었다. 중심부라 할 수 있는 유럽 쪽 러시아에서는 동성애를 소수의 선천적 특성으로 이해했다면, 주변부에서는 사회적 조건에서 비롯된 현상으로 파악했다. 힐리는 이를 “소비에트 연방이 스스로 표방한 성적 전위주의와 변방 지역에서의 실제 정책 사이의 모순”이라고 부른다.[9] 게다가 1920년대 동안 도시 중심부의 무도회장과 집회장 이용은 점점 줄었는데, 이는 보통 사적 영역으로의 후퇴로 해석된다. 하지만 이 같은 해석은 동성애자 남성들이 소비에트 공화국에서 중요한 공적 역할을 수행했다는 사실과 모순된다. 귀족 가문 출신으로 1906년 동성애를 긍정하는 최초의 커밍아웃 소설 『날개』를 쓴 작가 미하일 쿠즈민(Mikhail Kuzmin)은 혁명에 동조하여 페트로그라드 예술가 협회 의장을 역임했다. 그는 커밍아웃한 게이였던 게오르기 치체린(Georgy Chicherin)과 친분이 있었는데, 치체린은 1918년부터 1930년까지 소비에트 외무부 장관에 상응하는 직책인 외무인민위원을 지냈다. 레닌의 몇몇 발언은 볼셰비키가 섹슈얼리티 문제에 대해 고루한 입장을 취했다는 주장의 근거로 인용되곤 한다. 1915년 프랑스의 사회주의자 이네사 아르망(Inessa Armand)과 주고받은 서신에서 레닌은 “사랑의 자유”라는 소책자 문구에 대해 반대 입장을 개진했다.[10] 여러 줄에 걸쳐서 그는 이 문구가 물질적 계산, 종교적 편견, “법과 법원과 경찰의 족쇄”로부터의 자유를 제대로 전달하지 못하며, “연애의 진지한 요소”로부터의 자유 혹은 “출산”으로부터의 자유로도 해석될 수 있는데 이는 부르주아적 요구라고 주장했다. 힐리 또한 이 구절들(그리고 레닌 사후에 클라라 체트킨이 레닌의 말이라며 전한 유사한 발언들[11])을 보건대, 성생활에서 “개인적 비정상성”을 지닌 이들은 그것을 사적 영역에 두고 혁명에 헌신해야 한다는 것이 레닌의 진의였을 수도 있다고 추론한다.[12] 셰리 울프는 『섹슈얼리티와 사회주의』에서 이러한 “레닌 사상에 대한 다소 작위적인 독해”를 강하게 거부하면서, 그것이 레닌을 금주하는 금욕주의자로 묘사하는 냉전기 희화화의 산물이라고 지적한다.[13] 실제로 아르망에게 보낸 레닌의 편지들은 스탈린 치하인 1939년에야 비로소 출간되었는데, 힐리가 각주에 적은 내용에 따르면 이는 “1930년대 가족 정책의 변화는 레닌주의에서 기원했다”고 암시하기 위한 것이었다.[14] 스탈린주의 반동 볼셰비키의 기대와는 달리,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혁명적 분위기가 유럽을 휩쓸면서 사회주의 국가가 잇따라 출현하는 일은 1923년까지도 일어나지 않았다. 자본주의 세력에 포위된 상황, 세계 대전에 이어 내전을 겪으면서 수년간 지속된 물질적 궁핍, 그 결과로 소비에트 산업 프롤레타리아트가 대대적으로 위축된 현실 속에서 행정의 전 영역에 걸쳐 광범위한 관료제가 뿌리내렸고, 이 관료제는 국가의 고립 상태를 “일국 사회주의”라는 이론적 지위로까지 격상시키려 했다. 관료 집단에게는 자본주의 서방과 공존하며 자기를 보존하는 것이 이익이었고 이는 노동력 수요 증가와 맞물렸으며, 출생률을 끌어올리는 정책으로 이어졌다. 공공 보육 시설, 세탁소, 국영 식당을 설립해 가족의 사회적 재생산 기능을 불필요한 것으로 만들어서 가족을 철폐하려던 노력은, 전통적 가족 규범과 젠더 규범을 공고화하는 시도로 바뀌었다. 1938년 축출되기 전까지 소비에트 사법부의 주요 직책을 역임한 아론 솔츠(Aron Solz)는 한 노조 기관지에 이렇게 썼다. “소비에트 여성은 남성과 동등한 권리를 갖는다. 그러나 그녀는 저 위대하고 명예로운 자연적 의무에서 면제되지 않는다. 그녀는 어머니이며, 생명을 낳는다.”[15] 1934년, 문화 예술 영역에서 스탈린의 대변인이었던 작가 막심 고리키는 동성애 재범죄화를 이데올로기적으로 정당화했다. 그는 동성애가 청년들을 타락시킨다고 주장하면서, 러시아의 “순수성”이라는 신화와 “과도하게 문명화된” 서방의 퇴폐를 대비시켰다. 그에 따르면 서방의 퇴폐와 동성애는 파시즘을 낳은 토양이었다. 그의 주장은 다음의 악명 높은 선언에서 절정에 달했다. “동성애자들을 없애라. 그러면 파시즘이 사라질 것이다.”[16] 1922년 동성애 비범죄화가 젠더나 섹슈얼리티에 기반한 모든 형태의 억압을 극복하려는 폭넓은 노력의 일부였던 것과 마찬가지로, 1930년대의 반동적 개혁 역시 동성애 박해에서 멈추지 않았다. 성매매도 다시 범죄화되었고 임신중지는 금지되었으며 당 중앙위원회의 여성부는 해체되었다. 레온 트로츠키는 이 같은 금지 정책들을 “경찰의 권력을 쥔 사제의 철학”이라 묘사했다.[17] 이러한 모성 숭배로의 전환에 이어서 실재하는 정치적 반대파, 그리고 상상 속의 반대파에 대해서까지 잔혹한 박해가 시작되었다. 『빵과 장미』에서 안드레아 다트리가 서술한 바에 따르면, 여성 정치와 관련하여 갓 탄생한 노동자 국가의 초기 법령들과 이후 관료제가 내놓은 개탄스러운 조치들 사이에는 명백한 단절이 있다. 관료 집단에게 “혁명은 반혁명으로 맞서야 한다”는 점은 분명했다.[18] 수많은 사람들에 대한 강제 이주, 투옥, 고문, 살해를 통해 이 같은 파열이 심화되었다. 혁명적 내용이 탈각된 코민테른의 도움으로 스탈린주의 관료 집단은 1920년대 중반부터 자신들의 반동적 이데올로기를 전 세계 공산당에 이식했다. 혁명기 쿠바에서는 공산당 관료 집단이 게이 남성들을 체포·투옥하고 HIV 감염인들을 국영 요양소에 강제 수용했으며, 1980년 마리엘 보트리프트(Mariel Boatlift)를 통해 수천 명의 퀴어를 추방했다. 동성애를 범죄화한 모든 조항이 법전에서 삭제된 것은 1986년이 되어서였다. 중국에서는 마오의 사후에야 공식적으로 동성애가 금지되었지만, 그 이전에도 다른 남성과 성적 관계를 추구한 남성들은 “난동죄”로 기소될 수 있었고, 마오와 그의 동맹 세력이 촉발한 이른바 문화 대혁명 시기에 특히 그러했다. 이로써 전 세계 공산당들은 이후 수십 년간 좌파 전체에 강력한 보수적 영향력을 행사했다. 이렇게 생겨난 좌파 내의 퀴어 적대는 오랫동안 스탈린주의 조직들에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예컨대 미국의 트로츠키주의 사회주의노동자당(SWP) 역시 스톤월 항쟁을 전후한 시기, 즉 급진화된 성소수자 해방 운동이 태동하던 바로 그 시점에 동성애자와 트랜스를 조직에서 “비공식적으로” 배제했다. SWP 청년 조직은 성소수자 배제 정책을 심지어 공개적으로 선언하기까지 했지만, 이는 실행 불가능한 것으로 판명되었다. 이 조직은 1975년 소책자를 통해 미국 내 동성애자 권리를 옹호하는 입장으로 선회했지만, 카스트로 정권이 공개적인 동성애 표현을 금지하고 있던 당시 쿠바에까지 이를 요구하는 것은 “문화 제국주의”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1959년 쿠바 혁명 이전까지 쿠바에서 동성애는 합법이었다. 쿠바인들이 유독 보수적이라거나 심지어 모두가 이성애자라는 생각은 당시에도 인종주의적 고정 관념일 뿐이었다. 이 같은 입장을 취한 트로츠키주의 조직은 SWP만이 아니었다. ‘광부들을 지지하는 레즈비언과 게이들(Lesbians and Gays Support the Miners)’ 활동으로 1984년 영국 광부 대파업에 연대하고 영화 『프라이드(Pride)』에 영향을 준 레이 굿스피드(Ray Goodspeed)는 한 인터뷰에서 당시 자기 조직의 태도를 이렇게 전한다. “내가 속해 있던 ’밀리턴트(Militant)’는 동성애자의 권리를 부르주아적 관심사로 간주했고, 노동자들이 그런 문제를 받아들이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내가 커밍아웃했을 때 이상한 반응을 보인 것은 당 간부들뿐이었고, 정작 노동자계급 사람들은 딱히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였다.” SWP는 트로츠키주의의 혁명적 유산을 계승한다고 자임하면서도 이 문제에 관해서는 공공연하게 반동적 입장을 고수했다. 그러나 이는 단순히 SWP의 일탈이 아니라 마르크스주의 정치 방법론으로부터 이탈한 귀결이었다. 이러한 이탈은 “객관주의”의 심화, 즉 계급의 정치적 전위가 수행해야 할 역할을 상대화하고 주어진 현실에 순응하는 태도로 나타났다. SWP는 당시 미국 노동자계급의 상당 부분에 자리 잡고 있던 후진적 의식을 이행기적 요구로 끌어올리기는커녕 보수주의에 영합했다. 이 조직이 쿠바에 무비판적이었던 탓에, 쿠바 혁명의 성취에 대한 옹호와, 동성애자를 박해하고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를 억압한 관료 집단에 대한 옹호가 뒤섞여 버렸다. 유산 1917년 이후 볼셰비키의 동성애 정책에서 지속적으로 드러나는 모순은 젊은 소비에트 국가가 처해 있던 물질적 결핍과 국제적 고립이라는 맥락을 보아야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오늘날 이렇게 역사적으로 특수한 조건들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으며, 제2차 세계 대전의 엄청난 파괴를 딛고 이루어진 생산력의 비약적 발전은 새로운 사회주의 건설 시도를 전례 없이 유리한 위치에 놓을 것이다. 이를테면 신생 소비에트 국가에서는 재생산 노동을 사회화하려는 시도가 좌초할 수밖에 없었고 이성애 규범적 가족을 철폐하려는 기획도 초기 단계에 머물러 있었지만, 이러한 기획을 뒷받침할 경제적 조건은 오늘날 비교가 안 될 만큼 우월하다. 젠더 억압과 성적(sexual) 억압으로부터의 해방 가능성은 분명히 존재한다. 소비에트 연방의 동성애 합법화는 성 해방의 역사에서 하나의 이정표였을 뿐 아니라, 부르주아 국가의 모든 제도로부터 독립하여 스스로를 조직하는 마르크스주의의 힘을 보여 주는 증거이기도 했다. 레닌이 1902년에 썼듯이, 이러한 운동은 “어느 계급이 영향을 받든 간에 모든 폭정, 억압, 폭력, 학대에 응답하도록 훈련된” 운동이다.[19] 오늘날 미국에서는 성소수자들이 쟁취한 것을 되돌리려는 시도가 계속되는데, 이는 자본주의의 틀 안에서 진정한 민주주의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입증한다. 사회를 근본적으로 변혁하고자 하는 혁명적 사회주의 투쟁은 전 세계 자본가들의 자칭 “민주주의”가 이제껏 성취해 온 수준을 훨씬 뛰어넘는 인정과 자유를 퀴어와 함께 쟁취할 수 있다. Left Voice에 2022년 7월 17일 게재된 글을 번역함. 저자: Marco Blechschmidt, Niko Weber 번역: 강성윤 [1] Dan Healey, _Homosexual Desire in Revolutionary Russia: The Regulation of Sexual and Gender Dissent_ (Chicago: Chicago University Press, 2001), 48. [2] 같은 책, 63. [3] 같은 책, 166. [4] 같은 책, 68–72. [5] Simon Karlinsky, “Russia’s Literature and Culture: The Impact of the October Revolution,” in _Hidden from History: Reclaiming the Gay and Lesbian Past_, edited by Martin Bauml Duberman, Martha Vicinus, and George Chauncey Jr., 357 (New York, 1989). [6] Healey, _Homosexual Desire_, 116. [7] Eduard Bernstein, “The Judgement of Abnormal Sexual Intercourse,” _Die Neue Zeit_ 13/2 (1895), 228-233. [8] Sherry Wolf, _Sexuality and Socialism: History, Politics, and Theory of LGBT Liberation_ (Chicago 2009), 91. [9] Healey, _Homosexual Desire_, 162. [10] V. I. Lenin to Inessa Armand, January 17, 1915, in _Lenin Collected Works_, vol. 35, (Moscow, 1976), 180–81. [11] Clara Zetkin, _Reminiscences of Lenin_ (New York, 1934). [12] Healey, _Homosexual Desire_, 113. [13] Wolf, _Sexuality and Socialism_, 93. [14] Healey, _Homosexual Desire_, 301. [15] Victoria I. Sakevich and Boris P. Denisov, _Birth Control in Russia: Overcoming the State System Resistance_(Moscow, 2014), 9. [16] Healey, _Homosexual Desire_, 189–90. [17] Leon Trotsky, _The Revolution Betrayed: What Is the Soviet Union and Where Is it Going?_ (New York, 1937). [18] Andrea D’Atri, _Bread and Roses. Gender and Class under Capitalism_ (London 2021), 96. [19] V. I. Lenin, _What Is to Be Done? Burning Questions of our Movement_, in _Lenin’s Collected Works_, vol. 5 (Moscow, 1961),347–30. /* 스크롤 여백만 주고, 화면에는 안 보이게 */ .ftn-target { display: inline-block; /* 줄바꿈 안 생김 */ width: 0; height: 0; scroll-margin-top: 200px; } document.addEventListener("DOMContentLoaded", function () { // name="_ftn1", name="_ftn2", name="_ftnref1" ... 전부 대상 document.querySelectorAll('a[name^="_ftn"]').forEach(function(a) { var idValue = a.getAttribute("name"); // 이미 같은 id의 요소가 있으면 또 만들지 않음 if (!document.getElementById(idValue)) { var span = document.createElement("span"); span.id = idValue; span.className = "ftn-target"; a.parentNode.insertBefore(span, a); } }); }); /* 본문 각주 번호 + 아래쪽 각주 번호 색 지정 */ a[href^="#_ftn"] sup, a[href^="#_ftnref"] sup { color: #BF202D; } /* 밑줄이 보기 싫으면 */ a[href^="#_ftn"], a[href^="#_ftnref"] { text-decoration: none; } /* 마우스 올렸을 때 살짝만 강조하고 싶으면 (선택) */ a[href^="#_ftn"]:hover, a[href^="#_ftnref"]:hover { text-decoration: underline; } /* 페이지 전체가 오른쪽으로 넘치지 않게 */ html, body { max-width: 100%; overflow-x: hidden; } /* 본문 영역 폭 강제 고정 + 긴 단어/문장도 줄바꿈 */ #bo_v_con, .bo_v_con, .cke_editable, article { max-width: 100%; overflow-wrap: break-word; word-wrap: break-word; /* 구형 브라우저용 */ } /* 워드에서 붙은 이미지/표가 화면 밖으로 안 나가게 */ #bo_v_con img, #bo_v_con table, .bo_v_con img, .bo_v_con table, .cke_editable img, .cke_editable table, article img, article table { max-width: 100% !important; height: auto; } /* 워드가 p, span에 폭을 박아놓은 경우 강제로 해제 */ #bo_v_con p[style*="width"], #bo_v_con span[style*="width"], .bo_v_con p[style*="width"], .bo_v_con span[style*="width"], .cke_editable p[style*="width"], .cke_editable span[style*="width"], article p[style*="width"], article span[style*="width"] { width: auto !important; max-width: 100% !important; } /* 기본 blockquote 스타일 */ blockquote { border-left: 4px solid #c0392b; /* 사이트 분위기와 맞는 붉은 계열 */ padding: 12px 18px; margin: 20px 0; background: #fafafa; font-style: normal; color: #333; line-height: 1.6; } /* blockquote 안의 p 태그 정렬 */ blockquote p { margin: 0 0 10px 0; text-align: justify; } /* 마지막 p 태그 여백 제거 */ blockquote p:last-child { margin-bottom: 0; } /* 본문 안 링크 스타일 */ #gpt-article a { color: #cc0000 !important; text-decoration: none !important; } #gpt-article a:hover { color: #990000 !important; } // https://로 시작하는 링크만 target="_blank" 적용 document.addEventListener("DOMContentLoaded", function () { const links = document.querySelectorAll('#gpt-article a[href^="https://"]'); links.forEach(link => { link.setAttribute("target", "_blank"); link.setAttribute("rel", "noopener noreferrer");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