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십 년간, 마르크스주의는 계급 대립에만 천착할 뿐 여성이나 유색 인종, LGBTQ+에 대한 억압 같은 다른 형태의 억압은 무시한다는 주장이 마치 상식처럼 통용되어 왔다. 실제로 스탈린주의로부터 사회민주주의 전통에 이르는, 그리고 오늘날 미국민주적사회주의자들(DSA)까지 포함하는 자칭 마르크스주의자들은 특수한 억압의 중요성을 경시하고 노동자계급 중 상층에만 유리한 경제주의 전략을 고수해 왔다. 그러나 성적·젠더적 억압에 대한 스탈린주의 및 사회민주주의의 반동적 입장은 마르크스주의의 유산을 조금도 반영하지 않는다. 혁명적 노동자 운동의 역사를 조금만 들여다보아도 이는 분명하다. 오히려 러시아의 혁명적 사회주의는 10월 혁명을 통해 LGBTQ+ 차별의 물적·이데올로기적 토대를 근본적으로 변혁하는 길을 선도했다. 반동적 일탈이 발생한 시점은 정당과 조직들이 사회주의를 표방하면서도 혁명적 전망을 포기하고 자본주의 세계와 타협하려 했을 때였다. 이 같은 역사적 통찰은, 특히 세계 최고의 자본주의의 “민주주의”를 자처하는 미국에서 퀴어 인권을 향한 새로운 공격이 거세지는 오늘날, 해방을 위해 우리에게 어떤 정치가 필요한지 분명히 알려 줄 수 있다.
볼셰비키의 전진
19세기 후반 러시아의 양대 핵심 도시인 상트페테르부르크와 모스크바에는 게이 문화권이 형성되었다. 목욕탕 같은 사교 공간이 생겨났고, 언어 코드(예컨대 ‘뚀뜨끼(tetki)’라는 단어는 대략 ‘아줌마’로 번역되는데, 게이 당사자와 비당사자 모두가 게이를 가리킬 때 이 단어를 사용했다)와 복장 코드의 요소들, 그리고 적어도 사적 공간에서는 크로스 드레싱도 존재했다. 역사가 댄 힐리는 혁명기 러시아와 소비에트 연방 시기 동성애의 역사를 다룬 저작 『혁명기 러시아의 동성애적 욕망』에서 이렇게 적는다. “제정 러시아나 소련의 이러한 동성애 하위문화가 해외에서 수입되거나 공산주의의 실정으로 만들어진 것이라는 주장은 이성애 중심적이고 민족주의적인 쇼비니즘에 다름 아니다.”[1]
한편으로 남성 간 성행위는 러시아 정교회 규율상 불법이었다. 1917년까지 합의에 의한 “남색”은 시베리아 유형감이었다. 그러나 이 같은 위협이 일관적으로 적용되지는 않았다. 1917년 차르 체제의 법전이 폐지되면서 동성애는 사실상 비범죄화되었고, 1922년 새로운 법전이 채택된 후 신생 소비에트 국가의 공식 법률 문서에서 “남색”에 대한 언급은 완전히 사라졌다. 이로써 소비에트 연방은 18세기 혁명기 프랑스에 이어 세계 최초로 동성애를 합법화한 국가 중 하나가 되었다. 반면 바이마르 공화국에서는 동성애를 범죄화한 제국 시대의 악명 높은 175조가 여전히 효력을 유지했고 파시즘 하에서 더욱 강화되었으며, 독일연방공화국이 이를 최종 폐지한 것은 1994년에 이르러서였다. 소비에트 연방이 동성애를 비범죄화하고 수십 년이 지난 뒤의 일이다.
다른 여성과 연애 또는 성적 관계를 맺은 여성들은 러시아에서 공적 영역에 진입하기가 상대적으로 어려웠고, 따라서 응집력 있는 공동체를 형성하기도 어려웠다. 이 문제에 관해서는 사료도 적은데, 여성 간 성행위는 처벌 대상이 아니어서 이를테면 법원 기록 등이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경제적으로 독립한 여성들은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전통적 이성애 가족을 넘어서는 관계를 맺는 데 성공했다. 10월 혁명 이후 내전기의 군사적 분위기 속에서 많은 여성이 남성적인 스타일을 선택했는데, 한편으로는 혁명에 충성하고 혁명을 수호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동성애자 여성이 다른 여성의 관심을 끌기 위한 코드이기도 했다. ‘트랜스섹슈얼리티’와의 경계는 종종 모호했다. 1923년 모스크바 스베르들로프 대학에서 실시한 섹슈얼리티에 관한 설문에는 이런 응답이 있었다. “나는 남자가 되고 싶다. 거세하고 남성 분비샘을 이식하는 과학적 방법이 발견되기를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다.”[2] 1920년대에 실제로 이 같은 수술이 시행되었지만, 의료 기술이 아직 초보적이었던 탓에 성공 여부는 의문이었다. 의학적 개입과 별도로 많은 이들이 자신의 젠더 정체성을 변경할 기회를 적극 활용했다. 적절한 신분증을 발급받고, 원래 이름을 남성형으로 개명하고, 복장과 외모를 바꾸었다. 이와 더불어 동성애와 젠더의 기원과 본질에 관한 과학적 논쟁이 활발하게 이루어졌는데, 당시 이 둘은 밀접하게 연관된 것으로 널리 인식되었다. 생물학자 니콜라이 콘스탄티노비치 콜초프(Nikolai Konstantinovich Koltsov)는 이렇게 단언했다. “물론 하나의 ‘중간 성’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무한한 수의 중간 성들이 존재할 뿐이다.”[3]
예브게니 표도로비치 M.은 17세이던 1915년에 남성 정체성을 취하기 시작했다. 혁명기에 그는 공문서상의 이름을 변경하고 비밀경찰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1922년 예브게니는 새로운 신분증을 가지고 사료에 S.로 기록된 어떤 여성과 결혼했다. 정체성 변경 사실이 알려진 후에도, 이 부부를 “자연에 반하는 범죄”로 기소한 지방 법원 소송은 기각되었고 혼인은 유지되었다. 법원은 이 결합이 상호 합의에 의한 것이므로 합법이며 배우자의 젠더 정체성은 무관하다고 판결했다. 이 부부는 S.가 직장 동료와의 관계로 낳은 아이와 함께 수년간 가족으로 함께 살았다.[4] 혁명적 각성과 전통적 규범 거부라는 대의는 볼셰비키 엘리트들의 전유뮬이 아니었고, 예브게니 같은 사람들에게도 전례 없는 수준의 자기 결정권을 주었다.
부르주아 역사학계는 볼셰비키가 차르 체제의 법전을 폐지하면서 동성애를 합법화할 의도가 전혀 없었다고 주장한 바 있다. 예를 들어 시몬 카를린스키는 10월 혁명이 1905년 혁명과 1917년 2월 혁명에서 성취한 동성애 인권을 되돌리고 부정했다고 주장하면서, 최초의 “남색” 비범죄화는 곁가지 정도로 취급했다.[5] 그러나 힐리는 1991년 소비에트 문서고 개방과 함께 접근 가능해진 법무인민위원부의 기록에 근거하여 다음과 같은 명확한 결론에 도달한다:
이 문서들이 남색 조항을 상세하게 다루지는 않지만, 성인들 간의 합의에 따른 행위를 비범죄화하겠다는 원칙적 의도는 분명히 드러난다. 이 같은 의도는 1918년 사회주의 형법을 기초하려 한 최초의 시도부터 1922년 법안의 최종 채택에 이르기까지 일관되게 표명되었다.[6]
남성 동성애를 비범죄화함으로써 볼셰비키는 노동 운동의 오랜 전통 위에 자리 잡았다. 이를테면 1898년 독일 사회민주당의 지도자 아우구스트 베벨은 의회에서 동성애 해방을 요구한 최초의 정치인이었다. 그보다 3년 앞서서 사회주의자들은 오스카 와일드가 동성애 혐의로 재판에 회부되었을 때 그를 옹호하기도 했다. 에두아르트 베른슈타인은 동성애가 “자연”에서 일탈한 것이라는 관념을 날카롭게 비판하면서 동성애는 오히려 “굳건히 유지되어 온 허구적 규범”으로부터의 일탈로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남성과 남성 간의 유사한 계약이 형사 처벌을 받아야 할 합리적 근거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했다.[7] 동성애 합법화를 요구한 것은 사회주의자들만이 아니었다. 그러나 10월 혁명 이후 사회주의자들은 이러한 요구를 내거는 데 그치지 않고 실제로 실행한 유일한 세력이었다.
1923년 모스크바 사회위생연구소 소장 그리고리 바트키스(Grigorii Batkis) 박사가 집필한 소책자 「러시아의 성 혁명(The Sexual Revolution in Russia)」은 혁명 직후 몇 년간 볼셰비키의 공식 입장을 엿보게 해 준다. 그는 이렇게 적는다.
소비에트 법제는 누구도 해를 입지 않고 누구의 이익도 침해되지 않는 한에서는 성적 문제에 대한 국가와 사회의 절대적 불개입을 선언한다. 유럽 법제에서 공공 도덕을 해치는 범죄로 규정된 동성애, 남색, 그 밖의 다양한 성적 만족의 형태들에 관련해서, 소비에트 법제는 이를 소위 “자연적” 성교와 정확히 동일하게 취급한다. 모든 형태의 성교는 사적인 문제다.[8]
물론 신생 소비에트 연방에서 모든 편견이 하루 만에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편견은 수십 년, 수백 년에 걸친 차르 체제의 후진성 안에 깊이 뿌리 내리고 있었다. 더욱이 볼셰비키의 합법화 정책이 소비에트 연방 전역으로 확대된 것도 아니었다. 예컨대 1926년에 제정된 우즈베크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법전은 여전히 동성애를 금지하는 조항들을 담고 있었다. 중심부라 할 수 있는 유럽 쪽 러시아에서는 동성애를 소수의 선천적 특성으로 이해했다면, 주변부에서는 사회적 조건에서 비롯된 현상으로 파악했다. 힐리는 이를 “소비에트 연방이 스스로 표방한 성적 전위주의와 변방 지역에서의 실제 정책 사이의 모순”이라고 부른다.[9] 게다가 1920년대 동안 도시 중심부의 무도회장과 집회장 이용은 점점 줄었는데, 이는 보통 사적 영역으로의 후퇴로 해석된다. 하지만 이 같은 해석은 동성애자 남성들이 소비에트 공화국에서 중요한 공적 역할을 수행했다는 사실과 모순된다. 귀족 가문 출신으로 1906년 동성애를 긍정하는 최초의 커밍아웃 소설 『날개』를 쓴 작가 미하일 쿠즈민(Mikhail Kuzmin)은 혁명에 동조하여 페트로그라드 예술가 협회 의장을 역임했다. 그는 커밍아웃한 게이였던 게오르기 치체린(Georgy Chicherin)과 친분이 있었는데, 치체린은 1918년부터 1930년까지 소비에트 외무부 장관에 상응하는 직책인 외무인민위원을 지냈다.
레닌의 몇몇 발언은 볼셰비키가 섹슈얼리티 문제에 대해 고루한 입장을 취했다는 주장의 근거로 인용되곤 한다. 1915년 프랑스의 사회주의자 이네사 아르망(Inessa Armand)과 주고받은 서신에서 레닌은 “사랑의 자유”라는 소책자 문구에 대해 반대 입장을 개진했다.[10] 여러 줄에 걸쳐서 그는 이 문구가 물질적 계산, 종교적 편견, “법과 법원과 경찰의 족쇄”로부터의 자유를 제대로 전달하지 못하며, “연애의 진지한 요소”로부터의 자유 혹은 “출산”으로부터의 자유로도 해석될 수 있는데 이는 부르주아적 요구라고 주장했다. 힐리 또한 이 구절들(그리고 레닌 사후에 클라라 체트킨이 레닌의 말이라며 전한 유사한 발언들[11])을 보건대, 성생활에서 “개인적 비정상성”을 지닌 이들은 그것을 사적 영역에 두고 혁명에 헌신해야 한다는 것이 레닌의 진의였을 수도 있다고 추론한다.[12] 셰리 울프는 『섹슈얼리티와 사회주의』에서 이러한 “레닌 사상에 대한 다소 작위적인 독해”를 강하게 거부하면서, 그것이 레닌을 금주하는 금욕주의자로 묘사하는 냉전기 희화화의 산물이라고 지적한다.[13] 실제로 아르망에게 보낸 레닌의 편지들은 스탈린 치하인 1939년에야 비로소 출간되었는데, 힐리가 각주에 적은 내용에 따르면 이는 “1930년대 가족 정책의 변화는 레닌주의에서 기원했다”고 암시하기 위한 것이었다.[14]
스탈린주의 반동
볼셰비키의 기대와는 달리,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혁명적 분위기가 유럽을 휩쓸면서 사회주의 국가가 잇따라 출현하는 일은 1923년까지도 일어나지 않았다. 자본주의 세력에 포위된 상황, 세계 대전에 이어 내전을 겪으면서 수년간 지속된 물질적 궁핍, 그 결과로 소비에트 산업 프롤레타리아트가 대대적으로 위축된 현실 속에서 행정의 전 영역에 걸쳐 광범위한 관료제가 뿌리내렸고, 이 관료제는 국가의 고립 상태를 “일국 사회주의”라는 이론적 지위로까지 격상시키려 했다.
관료 집단에게는 자본주의 서방과 공존하며 자기를 보존하는 것이 이익이었고 이는 노동력 수요 증가와 맞물렸으며, 출생률을 끌어올리는 정책으로 이어졌다. 공공 보육 시설, 세탁소, 국영 식당을 설립해 가족의 사회적 재생산 기능을 불필요한 것으로 만들어서 가족을 철폐하려던 노력은, 전통적 가족 규범과 젠더 규범을 공고화하는 시도로 바뀌었다. 1938년 축출되기 전까지 소비에트 사법부의 주요 직책을 역임한 아론 솔츠(Aron Solz)는 한 노조 기관지에 이렇게 썼다. “소비에트 여성은 남성과 동등한 권리를 갖는다. 그러나 그녀는 저 위대하고 명예로운 자연적 의무에서 면제되지 않는다. 그녀는 어머니이며, 생명을 낳는다.”[15]
1934년, 문화 예술 영역에서 스탈린의 대변인이었던 작가 막심 고리키는 동성애 재범죄화를 이데올로기적으로 정당화했다. 그는 동성애가 청년들을 타락시킨다고 주장하면서, 러시아의 “순수성”이라는 신화와 “과도하게 문명화된” 서방의 퇴폐를 대비시켰다. 그에 따르면 서방의 퇴폐와 동성애는 파시즘을 낳은 토양이었다. 그의 주장은 다음의 악명 높은 선언에서 절정에 달했다. “동성애자들을 없애라. 그러면 파시즘이 사라질 것이다.”[16]
1922년 동성애 비범죄화가 젠더나 섹슈얼리티에 기반한 모든 형태의 억압을 극복하려는 폭넓은 노력의 일부였던 것과 마찬가지로, 1930년대의 반동적 개혁 역시 동성애 박해에서 멈추지 않았다. 성매매도 다시 범죄화되었고 임신중지는 금지되었으며 당 중앙위원회의 여성부는 해체되었다. 레온 트로츠키는 이 같은 금지 정책들을 “경찰의 권력을 쥔 사제의 철학”이라 묘사했다.[17] 이러한 모성 숭배로의 전환에 이어서 실재하는 정치적 반대파, 그리고 상상 속의 반대파에 대해서까지 잔혹한 박해가 시작되었다. 『빵과 장미』에서 안드레아 다트리가 서술한 바에 따르면, 여성 정치와 관련하여 갓 탄생한 노동자 국가의 초기 법령들과 이후 관료제가 내놓은 개탄스러운 조치들 사이에는 명백한 단절이 있다. 관료 집단에게 “혁명은 반혁명으로 맞서야 한다”는 점은 분명했다.[18] 수많은 사람들에 대한 강제 이주, 투옥, 고문, 살해를 통해 이 같은 파열이 심화되었다.
혁명적 내용이 탈각된 코민테른의 도움으로 스탈린주의 관료 집단은 1920년대 중반부터 자신들의 반동적 이데올로기를 전 세계 공산당에 이식했다. 혁명기 쿠바에서는 공산당 관료 집단이 게이 남성들을 체포·투옥하고 HIV 감염인들을 국영 요양소에 강제 수용했으며, 1980년 마리엘 보트리프트(Mariel Boatlift)를 통해 수천 명의 퀴어를 추방했다. 동성애를 범죄화한 모든 조항이 법전에서 삭제된 것은 1986년이 되어서였다. 중국에서는 마오의 사후에야 공식적으로 동성애가 금지되었지만, 그 이전에도 다른 남성과 성적 관계를 추구한 남성들은 “난동죄”로 기소될 수 있었고, 마오와 그의 동맹 세력이 촉발한 이른바 문화 대혁명 시기에 특히 그러했다.
이로써 전 세계 공산당들은 이후 수십 년간 좌파 전체에 강력한 보수적 영향력을 행사했다. 이렇게 생겨난 좌파 내의 퀴어 적대는 오랫동안 스탈린주의 조직들에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예컨대 미국의 트로츠키주의 사회주의노동자당(SWP) 역시 스톤월 항쟁을 전후한 시기, 즉 급진화된 성소수자 해방 운동이 태동하던 바로 그 시점에 동성애자와 트랜스를 조직에서 “비공식적으로” 배제했다. SWP 청년 조직은 성소수자 배제 정책을 심지어 공개적으로 선언하기까지 했지만, 이는 실행 불가능한 것으로 판명되었다. 이 조직은 1975년 소책자를 통해 미국 내 동성애자 권리를 옹호하는 입장으로 선회했지만, 카스트로 정권이 공개적인 동성애 표현을 금지하고 있던 당시 쿠바에까지 이를 요구하는 것은 “문화 제국주의”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1959년 쿠바 혁명 이전까지 쿠바에서 동성애는 합법이었다. 쿠바인들이 유독 보수적이라거나 심지어 모두가 이성애자라는 생각은 당시에도 인종주의적 고정 관념일 뿐이었다.
이 같은 입장을 취한 트로츠키주의 조직은 SWP만이 아니었다. ‘광부들을 지지하는 레즈비언과 게이들(Lesbians and Gays Support the Miners)’ 활동으로 1984년 영국 광부 대파업에 연대하고 영화 『프라이드(Pride)』에 영향을 준 레이 굿스피드(Ray Goodspeed)는 한 인터뷰에서 당시 자기 조직의 태도를 이렇게 전한다. “내가 속해 있던 ’밀리턴트(Militant)’는 동성애자의 권리를 부르주아적 관심사로 간주했고, 노동자들이 그런 문제를 받아들이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내가 커밍아웃했을 때 이상한 반응을 보인 것은 당 간부들뿐이었고, 정작 노동자계급 사람들은 딱히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였다.”
SWP는 트로츠키주의의 혁명적 유산을 계승한다고 자임하면서도 이 문제에 관해서는 공공연하게 반동적 입장을 고수했다. 그러나 이는 단순히 SWP의 일탈이 아니라 마르크스주의 정치 방법론으로부터 이탈한 귀결이었다. 이러한 이탈은 “객관주의”의 심화, 즉 계급의 정치적 전위가 수행해야 할 역할을 상대화하고 주어진 현실에 순응하는 태도로 나타났다. SWP는 당시 미국 노동자계급의 상당 부분에 자리 잡고 있던 후진적 의식을 이행기적 요구로 끌어올리기는커녕 보수주의에 영합했다. 이 조직이 쿠바에 무비판적이었던 탓에, 쿠바 혁명의 성취에 대한 옹호와, 동성애자를 박해하고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를 억압한 관료 집단에 대한 옹호가 뒤섞여 버렸다.
유산
1917년 이후 볼셰비키의 동성애 정책에서 지속적으로 드러나는 모순은 젊은 소비에트 국가가 처해 있던 물질적 결핍과 국제적 고립이라는 맥락을 보아야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오늘날 이렇게 역사적으로 특수한 조건들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으며, 제2차 세계 대전의 엄청난 파괴를 딛고 이루어진 생산력의 비약적 발전은 새로운 사회주의 건설 시도를 전례 없이 유리한 위치에 놓을 것이다. 이를테면 신생 소비에트 국가에서는 재생산 노동을 사회화하려는 시도가 좌초할 수밖에 없었고 이성애 규범적 가족을 철폐하려는 기획도 초기 단계에 머물러 있었지만, 이러한 기획을 뒷받침할 경제적 조건은 오늘날 비교가 안 될 만큼 우월하다. 젠더 억압과 성적(sexual) 억압으로부터의 해방 가능성은 분명히 존재한다.
소비에트 연방의 동성애 합법화는 성 해방의 역사에서 하나의 이정표였을 뿐 아니라, 부르주아 국가의 모든 제도로부터 독립하여 스스로를 조직하는 마르크스주의의 힘을 보여 주는 증거이기도 했다. 레닌이 1902년에 썼듯이, 이러한 운동은 “어느 계급이 영향을 받든 간에 모든 폭정, 억압, 폭력, 학대에 응답하도록 훈련된” 운동이다.[19] 오늘날 미국에서는 성소수자들이 쟁취한 것을 되돌리려는 시도가 계속되는데, 이는 자본주의의 틀 안에서 진정한 민주주의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입증한다. 사회를 근본적으로 변혁하고자 하는 혁명적 사회주의 투쟁은 전 세계 자본가들의 자칭 “민주주의”가 이제껏 성취해 온 수준을 훨씬 뛰어넘는 인정과 자유를 퀴어와 함께 쟁취할 수 있다.
Left Voice에 2022년 7월 17일 게재된 글을 번역함.
저자: Marco Blechschmidt, Niko Weber
번역: 강성윤
[1] Dan Healey, _Homosexual Desire in Revolutionary Russia: The Regulation of Sexual and Gender Dissent_ (Chicago: Chicago University Press, 2001), 48.
[2] 같은 책, 63.
[3] 같은 책, 166.
[4] 같은 책, 68–72.
[5] Simon Karlinsky, “Russia’s Literature and Culture: The Impact of the October Revolution,” in _Hidden from History: Reclaiming the Gay and Lesbian Past_, edited by Martin Bauml Duberman, Martha Vicinus, and George Chauncey Jr., 357 (New York, 1989).
[6] Healey, _Homosexual Desire_, 116.
[7] Eduard Bernstein, “The Judgement of Abnormal Sexual Intercourse,” _Die Neue Zeit_ 13/2 (1895), 228-233.
[8] Sherry Wolf, _Sexuality and Socialism: History, Politics, and Theory of LGBT Liberation_ (Chicago 2009), 91.
[9] Healey, _Homosexual Desire_, 162.
[10] V. I. Lenin to Inessa Armand, January 17, 1915, in _Lenin Collected Works_, vol. 35, (Moscow, 1976), 180–81.
[11] Clara Zetkin, _Reminiscences of Lenin_ (New York, 1934).
[12] Healey, _Homosexual Desire_, 113.
[13] Wolf, _Sexuality and Socialism_, 93.
[14] Healey, _Homosexual Desire_, 301.
[15] Victoria I. Sakevich and Boris P. Denisov, _Birth Control in Russia: Overcoming the State System Resistance_(Moscow, 2014), 9.
[16] Healey, _Homosexual Desire_, 189–90.
[17] Leon Trotsky, _The Revolution Betrayed: What Is the Soviet Union and Where Is it Going?_ (New York, 1937).
[18] Andrea D’Atri, _Bread and Roses. Gender and Class under Capitalism_ (London 2021), 96.
[19] V. I. Lenin, _What Is to Be Done? Burning Questions of our Movement_, in _Lenin’s Collected Works_, vol. 5 (Moscow, 1961),347–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