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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가 양당의 권력 교대, 지겨운 쳇바퀴를 어떻게 벗어날 것인가?윤석열 정부 심판으로 끝난 22대 국회의원 선거 4월 10일 실시된 22대 국회의원 선거는 정부 여당의 참패로 끝났다. 민주당·민주연합 175석, 국민의힘·국민의미래 108석, 조국혁신당 18석, 개혁신당 3석, 새로운미래 1석, 진보당 1석이 최종 성적표다. 이론의 여지 없이, 윤석열 정부를 심판하겠다는 정서가 이번 선거를 압도했다. 윤석열 정부는 선거 승리를 위해 몇 달간 김건희 씨를 잠적시키고, 전국 순회 민생토론회를 스물네 차례 개최하며 총력을 다했지만 별 소용이 없었다. 정부 여당 참패의 핵심 원인은 물론 윤석열이다. 윤석열은 반동적인 신자유주의 경제학자 밀턴 프리드먼의 <선택할 자유>를 자신의 인생 책으로 꼽는다. (아마 인문사회도서 중에서 윤석열이 유일하게 읽은 책일 것이다.) 최저임금제를 반대했던 프리드먼을 좇아 윤석열은 대선에서 최저임금 미만을 받고 일할 수 있는 자유를 옹호했다. 집권 후에는 철 지난 신자유주의 부자 감세 정책을 펼치면서 재정 건전성 타령을 그치지 않았다. 카르텔 타도 운운한 윤석열의 한마디에 R&D 예산이 33년 만에 삭감된 게 바로 엊그제 일이다. 그랬던 윤석열이 민생토론회에서는 무차별적 재정 투입을 공언하고 다녔으니, 이것만큼 구역질 나는 일이 또 있겠는가? 민생토론회에서 제시된 240개 정책을 모두 집행하려면 900조 원이 넘게 든다고 한다. 선거에 악영향을 줄까 봐 법정 기한까지 어겨가며 뒤늦게 발표한 ‘2023회계연도 국가결산’에 따르면 지난해 재정 적자는 87조 원이다. 적자 규모가 예산상 계획이던 58조 원보다 29조 원이나 늘었는데, 물론 부자 감세로 인한 세수 감소가 주 원인이다. 윤석열은 일말의 부끄럼도 없이 현실성 없는 공수표를 남발하며 관권선거를 벌인 것이다. 선거기간 내내 진행된 민생토론회. 사진: 대통령실 이런 철면피한 뻔뻔함을 생각하면, 875원 대파 논란과 이종섭 도피 출국 건은 소소한 에피소드에 불과해 보일 지경이다. 대중의 분노에 기름을 부은 두 사안이 아니더라도 노동자 민중의 생활조건을 개선할 수 없는 윤석열 정부의 몰락은 예정된 일이었다. 물가 폭등, 2년 연속 실질임금 하락, ‘건폭’ 몰이로 대표되는 노동조합 탄압, 선거용으로 기획됐던 의대 증원 카드의 실패, 황상무의 언론인 회칼 테러 발언, 연이은 입틀막 사건 등 윤석열 정부를 심판해야 할 이유는 차고 넘쳤다. 만약 윤석열 정부에 맞설 정치적 대안이 뚜렷했다면 윤석열 정부는 훨씬 더 참혹하게 몰락했을 것이다. 불행하게도 대중이 현 정부에 맞서 선택할 수 있었던 대안은 고작 민주당이었다. 불과 2년 전, 부동산 폭등과 내로남불 입시 비리 등으로 윤석열에게 권력을 내줘야 했던 바로 그 민주당 말이다. 진보정당 운동의 한 시대가 끝났다 2년 전 민주당을 심판했던 대선에서도, 윤석열 정부를 심판했던 이번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진보정당은 대중에게 대안적 정치세력으로 인정받지 못했다. 정의당은 이번 선거에서 원외정당으로 전락했다. 정의당은 4년 전 비례정당 투표에서 9.67%를 득표해 5석을 획득했지만, 이번 선거에서는 2.14% 득표로 한 석도 얻지 못했다. 박근혜 탄핵 촛불 직후 2017년 대선에서 6.17%를 득표했던 4선 의원 심상정은 이번엔 자신의 지역구에서 3위(18.41%)에 그치며 정계 은퇴를 선언해야 했다. 정의당의 몰락은 문재인 정부 시절 내내 민주당 2중대로서의 성격을 벗어나지 못한 결과다. 정의당은 민주노조 운동이 침체하자 조직 노동자들과의 조직적 연대를 강화하기보다는 더 많은 득표를 위해 무정형의 대중에 영합하려는 전략을 취했다. 조국의 입시 비리 논란이 대두했을 때 이도 저도 아닌 갈지자 행보를 보인 이유다. 정치적 계급으로 조직되지 않은 대중이 민주당이 아니라 정의당에 표를 줄 리 만무하다. 정의당의 몰락이 예견됐을 때 제일 먼저 당을 탈출한 것은 이 시기 영입됐던, 단지 대중에게 상품성이 있었던 정치인들이다. 사진: 연합뉴스 진보당의 굴종은 더 처참하다. 진보당은 조직 노동자 운동에 상당한 기반을 갖췄다는 점에서 정의당에 비견되는 장점이 있다. 그러나 진보당은 민주당의 위성정당에 참여하며 노동자계급의 독자적 정치세력화라는 깃발을 스스로 짓밟아 버렸다. 진보당은 민주당과 연합하며 '윤석열 정권 심판'이라는 명분을 내세웠지만 터무니없는 소리다. 김대중 정부 시절부터 노동탄압으로 일관해 온 민주당 역시 노동자들이 심판해야 할 대상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한국의 정치 지형에서 선거를 통해 대중의 정치의식이 단계적으로 발전할 것이라 여기는 건 큰 착각이다. 이번 선거엔 윤석열을 심판했으니, 다음 선거엔 좀 더 왼쪽으로 이동해 진보정당에 표를 주겠다고 생각할까? 아니다. 민주당을 심판한다며 다시 국힘에 표를 던질 것이다. 이미 노무현 정부 이후 이명박 정부의 등장, 문재인 정부 이후 윤석열 정부의 등장에서 반복되었던 역사적 경험이다. 사진: 울산시의회 한국전쟁 이후 노동자운동이 절멸됐던 한국 사회에서 노동자계급이 다시 역사의 주체로 등장한 것은 1987년 노동자 대투쟁이다. 일체의 자주적 노동자투쟁이 봉쇄됐던 1987년에는 민주노조 건설과 최소한의 노동조건 개선 투쟁도 곧바로 국가권력과의 일전(一戰)을 불사하는 것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었다. 노동자들이 자연스럽게 ‘노동자 정치세력화’의 깃발을 움켜쥐었던 이유다. 1996~97 총파업은 민주노조 투쟁의 성과를 바탕으로 한국 노동자계급이 가장 높은 곳에 다다랐던 투쟁이다. 그 성과물의 하나가 진보정당의 건설이었다. 2004년 단번에 10명의 의원을 국회에 입성시켰던 민주노동당은, 정치적 타당성은 차치하더라도 그 자체로 노동자 정치세력화의 열망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후대의 역사가는 진보정당 운동의 한 시대가 끝났다고 선언할 시점으로 이번 선거를 꼽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정의당이 몰락하고 진보당이 민주당에 굴종한 원인으로, 과거 민주노동당 분당, 통합진보당 사태 등의 정치적 사건을 지목한다면 번지수를 한참 잘못 찾은 것이다. 진보정당 운동 몰락의 근본 원인은 노동자 계급투쟁의 퇴조에 있다. 1987년 노동자 대투쟁에서 1996~97 총파업까지, 국가권력에 맞선 전투성과 사업장 울타리를 뛰어넘는 연대성을 유감없이 발휘하며 ‘악법을 어겨서 깨뜨리던’ 민주노조 운동의 활력이 사라진 지 오래다. 관료주의의 강화, 사업장 내 임단투에 갇히는 ‘합법’ 파업 등이 한국 노동자운동의 현주소다. 노동자계급이 자기 고유의 방식으로 헤게모니를 행사하지 못하고 오히려 사회적으로 고립되는 상황이 되자, 진보정당 운동 역시 덩달아 방향성을 상실한 것이다. 미국식 자본가 양당체제의 확립, 그러나 정치적 불안정성 한국은 이제 미국식 자본가 양당체제가 확고하게 자리 잡았다고 평가할 수 있다. 선진 자본주의 국가들에 비해 뒤늦게 시작된 한국 노동자투쟁의 첫 번째 시기는 결국 노동자계급의 독자적 정치세력화에 실패한 채 마무리되는 것으로 보인다. 20세기 초반 미국의 노동자계급이 독자적 노동자정당의 건설에 실패하고 민주-공화 양당체제에 손발이 묶였던 것처럼, 오늘날 한국의 노동자계급도 자본가 양당체제에 결박된 것이다. 자본가계급의 독재를 유지하는 데서 민주당, 국힘 양당은 아무런 차이가 없다. 최저임금을 아예 업종별로 차등 적용하자고 지껄이는 국힘이나, 이를 반대한다면서도 국회 다수 의석으로 최저임금 산입범위를 개악하고 제도의 거대한 사각지대를 남겨두는 민주당 사이에 무슨 차이가 있겠는가? 단지 민주당은 노동자계급에 대한 유연성이라는 외양을, 국힘은 노동자계급에 대한 비타협성이라는 외양을 띠고 있다는 점에서만 차이가 있을 뿐이다. 노동자 민중의 생활조건이 개선되기 힘든 쇠퇴기 자본주의에서 대중이 현 정부에 격렬한 반감을 터뜨리는 일은 늘 반복될 수밖에 없다. 이런 상황에서 자본가 양당이 권력을 교대하는 과정은 그 자체로 노동자 민중의 반정부 투쟁을 항상 체제 내로 묶어두는 안전장치가 된다. 노동자계급은 자본가 양당의 비본질적 차이에 의미를 부여할 것이 아니라, 모든 종류의 자본가 정치세력으로부터 정치적 독립성을 확보하기 위해 분투해야 한다. 이것은 시대를 뛰어넘는 불변의 원칙이다. 노동자계급의 정치적 독립 추구가 더 보수적인 세력의 당선으로 이어진다는 주장에 대해 마르크스는 이렇게 반박했다. “반동에게 승리의 가능성을 줄지 모른다고 하는 민주주의자들의 허튼소리에 농락당해서는 안 된다. 그러한 모든 공문구들은 결국 프롤레타리아트를 기만하기 위해서 하는 소리들이다. 독자적인 진출을 통해 프롤레타리아 당이 이루게 되는 진전은 몇 명의 반동 분자들이 대의 기관에 들어감으로써 생길 수 있는 불이익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동맹에 보내는 중앙위원회의 1850년 3월의 호소>). 월 100만 원에 가사 노동자를 도입하자는 조정훈이나, 페미니즘을 ‘망상에 가까운 피해의식’이라 떠들었던 이준석이 아무리 꼴 보기 싫다 해도, 그 대안이 민주당에 투표하는 것일 수는 없다. 노동자계급의 계급적 이익은 모든 종류의 자본가 정치세력과 명확히 구별되기 때문이다. 한편 겉으로는 확고해 보이는 한국의 자본가 양당체제가 내적으로는 상당한 불안정성을 보인다는 점도 아울러 주목해야 한다. 2022년 윤석열이 당선됐던 대통령 선거는 1987년 대통령 직선제 개헌 이후 최초로 5년 만에 상대 당에 정권을 내준 선거였다. 이번 국회의원 선거 역시 1987년 이후 집권 여당이 가장 무력하게 참패한 선거다. (2016년 20대 총선에서 새누리당은 122석으로 제2당이 되었지만, 제1당인 민주당의 123석과 차이가 크지 않았다.) 기후변화로 인한 재난이 속출하고(최근의 농산물 가격 급등은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 저출생으로 사회 소멸이 예견되는 시대, 경쟁에서 패배한 이들에게 사회적 지원 대신 멸시와 혐오가 쏟아지는 쇠퇴기 자본주의에서는 어떤 정치세력도 미래를 장담할 수 없다. 최근 몇 년간 청년층의 정치의식이 급선회하는 현상은 이를 잘 드러낸다. 청년들을 어느 깃발 아래 서게 할 것인가? 20세기 후반까지 한국의 선거판에서 가장 주요한 변수가 지역주의였다면, 21세기에는 지역주의가 한결 옅어졌다는 점을 부인할 수 없다. 민주당과 국힘이 박빙의 접전을 펼쳤던 부울경 선거 결과가 이를 보여준다. 현재 지역주의를 대신하고 있는 것은 세대별 정치의식이다. 경제성장의 과실을 체험하고 반공 이데올로기를 내면화한 6~70대 이상 고령층은 확고하게 국힘을 지지한다. 다른 한편 80년대 민주화투쟁 등 집단적 정치 경험을 공유하는 4~50대 중년층은 민주당의 주요 지지 기반이다. 이들이 양당의 고정 지지층 35%를 각기 차지한다. 반면 경제성장도, 민주화 투쟁의 경험도 없는 2~30대 청년층은 현 집권 세력을 심판하기 위해 상대 당에 투표하는 데 아무런 거리낌이 없어 보인다. 물론 2010년대 페미니즘 리부트를 거치며 집단적 정치의식을 형성한 여성들은 계속해서 민주당에 견고한 지지를 보내고 있다. (그래도 지난 대선에서 20대 여성의 33.8%, 30대 여성의 43.8%는 윤석열에 투표했다.) 반면 2022년 대선에서 윤석열 당선의 일등 공신이었던 2~30대 남성들(지난 대선에선 20대 남성의 58.7%, 30대 남성 52.8%가 윤석열에 투표했다)이 이번 선거에서 보여준 선회는 자못 두드러진다. 2022년 대선 방송 3사 출구조사 결과 이번 선거 출구조사에 따르면, 비례대표 선거에서 20대 남성의 투표 결과는 민주당 26.6%, 조국혁신당 17.9%, 국힘 31.5%이다. 20대 여성은 민주당 51%, 조국혁신당 18.5%, 국힘 16.7%다. 30대 남성은 민주당 28.8%, 조국혁신당 23.6%, 국힘 29.3%이며, 30대 여성은 민주당 38.2%, 조국혁신당 23.2%, 국힘 20.3%였다. 지난 대선에서 윤석열에 표를 던졌던 상당수가 반대편으로 돌아선 것이다. 특히 2~30대 청년층이 최우선시하는 ‘공정 경쟁’의 원칙(이것은 비인간적 경쟁으로 고통받는 청년층이 가장 일그러진 형태로 자신의 고통을 표현한 것이다)을 훼손한 조국에게도 18~23%의 지지를 보낸 것은 놀랍기까지 하다. 오늘날 자본주의 체제에서 청년층이 경험하는 고통의 객관적 크기를 실감하게 한다. 2024년 총선 방송 3사 출구조사 결과 청년층이 선거마다 보여주는 급선회는 앞으로 한국 자본주의가 정치적 불안정성을 상수로 하게 될 것이란 점을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그러나 왜 이들 청년층이 고작 자본가 양당 사이에서 정치적 대안을 찾아야 하는가? 청년층은 자본의 이윤 질서를 털끝 하나 건드릴 수 없는 양당에서는 절대 진정한 대안을 찾을 수 없다. 이들에게 경쟁, 혐오, 차별이 아니라 협력, 연대, 단결이라는 노동자계급의 정치적 대안을 알려야 한다. 청년층에서 정치적 불안정성이 확대되는 것은 이들 사이에서 노동자계급의 정치가 부상할 수 있는 공간이 창출된다는 뜻이기도 하다. 트로츠키는 “모든 혁명정당은 상승하는 계급의 젊은 세대로부터 가장 주요한 지지를 획득한다. 부패한 정치세력은 청년을 자신의 깃발 아래로 결집시킬 능력을 상실한다. 정치의 전선에서 차례로 후퇴하는 부르주아 민주주의 정당들은 청년층을 혁명이나 파시즘에 넘겨줄 수밖에 없다”고 썼다(<배반당한 혁명>). 실제로 청년들이 역사의 전면에 나서는 것은 혁명의 서막을 뜻했다. 1917년 10월 혁명 직전 개최된 볼셰비키 6차 당대회(1917년 8월 6~16일)에 참석한 대의원 171명 중에서 18세~29세까지의 대의원은 46%, 39세까지의 대의원은 92%에 이른다. 이들 청년층이 당에 가입한 기간은 평균 8년 3개월이었으며, 절반에 가까운 79명(46%)이 2월 혁명 당시 투옥, 유배, 망명, 수배 상태에 있었을 정도로 단련된 투사들이었다. 노동자들의 정치적 계급의식은 어떻게 발전하는가? 양당이 가진 35%의 고정 지지층, 상대 당에 대한 혐오 정서는 한동안 한국 정치판을 좌우하는 기본 변수가 될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노동자들이, 특히 청년 노동자들이 새로운 노동자 정치세력화의 주역으로 등장할 것이라 기대하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그러나 어떠한 자본가 정치세력도 노동자 민중의 삶을 실질적으로 개선할 수 없다는 점은 분명하다. 자산·소득의 불평등 심화, 혐오와 차별의 확대 속에서 노동자계급은 진정한 대안을 찾으려는 시도를 멈추지 않을 것이다. 여기서 4~50대 중년층이 확고한 민주당 지지세를 보이는 이유를 다시 생각해 보자. 윤석열과 곧 손절할 것으로 보이는 <조선일보>는 4~50대 중년층을 ‘진보 중년’이라 부르며 탄식을 늘어놓는다(<조선일보>, “누릴 거 다 누리고 깨어있는 척… ‘진보 중년’을 아십니까(2024. 3. 24.)”). “통상 40대는 자산을 모으고 자녀를 키우며 안정을 희구하는 경향과 함께 보수화되는 연령 효과(age effect)가 나타나는 시기”인데도, “이 땅의 4050은 연령 효과를 거스르는 첫 변종 세대”라는 것이다. 생각해 보면 <조선일보>가 한탄할 만도 하다. 바로 윗세대는 전쟁의 폐허에서 경제를 재건하며 반공 이데올로기를 내면화하며 살아왔는데, 정작 경제성장의 혜택을 누리는 4~50대는 뚜렷한 반국힘 정서를 보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것은 대중의 정치의식이 어떻게 생명력을 획득하고 견고해지는지를 보여주는 단면이다. 4~50대는 1980년대 민주화 투쟁, 1990년대 초반 민주노조 투쟁과 1996~97 총파업, 2002년 미군 장갑차 촛불과 노무현 당선, 2008년 광우병 촛불, 2016~17년 박근혜 탄핵 촛불 등을 경험해 온 세대다. 바로 집단적 정치투쟁의 경험이 이들의 확고한 정치의식을 만들어 낸 것이다. 노동자계급의 독자적 정치세력화를 향한 정치적 계급의식 역시 이러한 대중투쟁의 경험을 통해 형성된다. 노동자들은 자본에 맞서는 투쟁을 전개하는 과정에서 노동자계급의 이익이 모든 종류의 자본가 정치세력과 구별된다는 것을 경험으로 각인한다. 그러나 자본에 맞선 투쟁이 법과 사업장의 테두리 내에서 관료적으로 통제되는 형식적 파업 정도에 그친다면 이런 효과는 기대할 수 없다. 자본주의 체제 내로 순치(馴致)된 투쟁을 통해서는 민주당에 의존하는 악습만 더 강화될 뿐이다. 자본가들의 이윤 획득에 전면적 타격을 가하는 노동자계급의 진정한 능력을 보여줄 때만 노동자계급의 정치적 계급의식은 획기적으로 발전할 수 있다. 물론 한국의 노동자 운동은 지금도 최저임금 인상을 내걸고서는 ‘합법’ 파업을 할 수 없을 정도의 후진적 법 제도에 고통받고 있다. 사업장 범위를 넘어 정치적 요구를 내세운 파업이나 연대 파업이 불법인 것도 여전하다. 자본주의 체제의 전면적 위기가 아니고서는 노동자계급의 상층 부문이 실제 투쟁에 나서리라 기대하기 어려운 것 또한 사실이다. 그러나 이것은 오늘날 사회주의자들과 노동자 투사들이 확고한 목표의식 아래 더욱 분발해야 함을 뜻할 뿐이다. 노동조합 내부에서 관료적 통제에 반대하고 노동자 민주주의의 원칙을 철저하게 관철하는 것, 협소한 조합주의적 이익이 아니라 전체 계급의 이익에 복무하는 투쟁을 헌신적으로 조직하는 것이 필요하다. 여성, 이주민에 대한 차별에 단호히 반대하며 노동자계급의 총단결을 호소하는 것도 필수적이다. 사업장 울타리를 넘어 가장 열악한 밑바닥 노동자들과 연대하는 실천적 기풍을 만들어야 한다. 이렇게 형성된 노동자계급의 새로운 활력은 진정한 노동자 정치세력화의 열망을 다시 불러일으킬 것이며, 선거를 노동자 정치를 널리 알리는 정치적 공간으로 자리잡게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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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쟁에서 승리할 수 없다면 결혼도 출산도 꿈꾸지 말라? 3·8 여성파업으로 미친 세상에 파열구를!결혼은 상위 20%의 전유물? 결혼과 출산은 온전히 개인의 자유로운 선택에 따른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렇지 않다. 사회적 관계 속에 놓이지 않은 추상적 개인은 없기 때문이다. 2022년 12월 한국노동연구원은 <노동과 출산 의향의 동태적 분석>이라는 보고서를 발간했다. 누구나 직감하겠지만 결혼도 우선 먹고살 만해야 할 수 있다. 결혼 의향을 통계적으로 분석한 결과, 정규직 청년의 결혼 계획 승산이 비정규직 청년보다 37% 높았다. 또한 사업체 규모가 클수록, 월평균 임금이 300만 원을 초과했을 때, 3년 내 결혼 계획 승산이 반대의 경우보다 유의미하게 증가하는 것이 확인된다. 결혼 여부가 개인의 경제적 상태에 따라 좌우된다는 것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통계는 남성의 임금 수준별 혼인율 통계다. (이 연구는 남성에 한해 임금 수준과 혼인율을 조사했는데, 성별분업 체계에서 남성은 결혼 이후 노동시장에서 경쟁력이 높아지는 ‘혼인 프리미엄’을 갖기 때문이다.) 2017~2019년 기준, 31세~35세 남성 노동자 중 임금 수준 상위 10%의 혼인율은 76%, 하위 10%의 혼인율은 31%에 그친다. 36~40세의 경우, 상위 10%의 혼인율은 91%, 하위 10%의 혼인율은 47%에 불과하다. 아래 그래프는 임금 수준과 혼인율이 정비례 관계임을 나타내고 있다. 출처 : 한국노동연구원, <노동과 출산 의향의 동태적 분석> 2022. 12. 지난해 말 통계청이 행정자료를 분석해 내놓은 ‘2022년 신혼부부통계 결과’도 마찬가지다. 초혼 신혼부부의 2022년 연간 평균소득은 6,790만 원에 이르며, 특히 맞벌이 부부의 평균소득은 8,433만 원이다. 맞벌이 부부의 경우 연간 평균소득이 1억 원 이상인 경우가 27.1%, 7천만 원 이상~1억 원 미만인 경우가 28.6%에 이른다. 가구소득이 7천만 원 이상인 경우가 55.7%로 절반을 넘는 것이다. 이를 다음과 비교해 보자. 통계청의 소득 10분위별 가구당 가계수지(2022년 4분기 기준)에 따르면, 전체 평균 가구소득은 연 5,800만 원에 그친다. 소득 8분위 가구에 이르러서야 연 7,745만 원, 소득 9분위는 연 9,668만 원을 기록한다. (최상위 10분위 가구는 1억 5,344만 원에 이른다.) 즉 2022년 신혼부부의 절반 이상은 소득 상위 2~30% 가구에 소속된 셈이다. 결국 각자도생의 자본주의 경쟁에서 승자의 지위를 차지한 상위 2~30%에게나 결혼의 자유가 허락됐다고 말해도 지나치지 않다. 다 떠나서 주택가격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는데, 미래를 담보할 수 없는 불안정 저임금 노동자들은 신혼집 장만부터가 실현 불가능한 미션이다. 내 자식을 경쟁에서 승리시킬 수 없다면 출산은 무책임한 짓? MZ세대들이 주된 이용자인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가난하면서 애를 낳는 것은 무책임하다’는 논리가 득세한 것은 하루이틀 된 얘기가 아니다. ‘낳음 당했다’라는 신조어는 이 정서를 그대로 드러낸다. 오늘날의 쇠퇴하는 자본주의 체제에서 경쟁의 승자는 각종 혜택을 만끽하고 사회적 자원을 독점하지만, 경쟁의 패배자는 최소한의 권리조차 박탈된 채 사회 바깥으로 내몰린다. 하루하루 이를 폭력적으로 체험하는 이들은 ‘낳음 당했다’란 표현으로, 무한경쟁에서 자식을 지원할 재력도 능력도 없으면서 나를 낳아버린 부모에게 원망을 드러낸다. 이들에게 출산과 양육은 삶의 기쁨일 수 없으며, 자신의 고통을 대물림한다는 죄책감과 공포를 불러일으킬 뿐이다. 올해 초 글로벌 가구업체 이케아가 2023년 한 해 동안 38개국 소비자를 대상으로 한 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물론 가구를 더 팔아치우기 위한 목적에서 이뤄진 조사다.) ‘식구들과 함께 웃는 시간이 즐겁다’는 문항에 긍정적으로 대답한 비율은 전체 평균이 33%인데 비해 한국은 14%로 최하위로 그쳤다. ‘집에서 자녀·손주를 키우는 게 기쁘다’는 문항에 대한 긍정 비율도 8%로 역시 세계 최하위를 기록했다(전체 평균은 22%). 한국의 노동자 민중에게 출산과 양육은 막대한 고통을 감수하며 굳이 선택할 이유가 없는, ‘비합리적’이고 ‘무모한’ 짓이 된 것이다. 특히 한국 특유의 입시 사교육 경쟁은 고통을 극대화한다. 2022년 기준 가구 월평균 사교육비는 41만 원이다. 그런데 이는 평균의 함정에 불과한데, 가구 소득별로 사교육비는 엄청난 편차를 보이기 때문이다. 월 소득이 800만 원 이상인 가구의 평균 사교육비는 64.8만 원으로, 200만 원 미만 가구의 평균 사교육비 12.4만 원의 6배가 넘는다. 입시 경쟁에서 투자액(?)만큼 성과가 산출된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일이다. 2020년 기준, 월평균 가구소득 700~1,000만 원 가정 학생의 특목고 진학 비율은 100~300만 원 가정 학생의 특목고 진학 비율보다 2.5배 높다. 반대로 월평균 가구소득 1,000만 원 이상 가정의 학생 중 전문계고 진학 비율은 4.1%에 그치지만, 100만 원 미만 가정 학생의 전문계고 진학 비율은 10배인 43.7%다. 사회적으로는 소수에 불과한 부유층과 경쟁의 승자들이 SNS 등에서 자랑스레 휘두르는 ‘공정 경쟁’의 깃발을 바라보며 대다수의 노동자 민중은 이렇게 생각한다. 저들과 경쟁할 만큼 내 자식을 지원해 줄 수 없다면 아예 출산을 포기하는 것이 최소한의 책임감이라고. 이 엄혹한 경쟁 질서에서 내 자식이 경쟁의 승자가 되고 행복할 가능성은, 내 자식이 ‘루저’가 되고 ‘삼백충’이 돼 혐오와 멸시의 대상이 될 가능성보다 결코 높지 않으니까. 약자들이 서로를 비난하고 멸시하는 사회 2023년 합계출산율은 0.72명을 기록했다. 특히 전년도 4분기 합계출산율은 0.65명으로, 올해 합계출산율은 0.68명으로 예상된다. 바야흐로 “투쟁하는 계급들이 함께 몰락”(마르크스·엥겔스, <공산당 선언>)하는 단계로 접어들었다고 해야 할까? 저출생으로 인한 인구구조의 격변이 불러일으킬 사회적 파장을 누구도 부인하지 못한다. 특히 이주민에 대한 혐오와 차별이 공공연해질 것이며, 이는 노동자의 국제적 단결이라는 원칙을 심각하게 훼손할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혐오와 차별이 우선 여성들에게 가해졌다는 점은 주목해야 할 일이다. 몇 년 전부터 횡행하는 ‘맘충’이란 표현이 단적인 예다. 저출생으로 나라가 망하게 된 판국에도, 아이가 식당에서 음식물을 흘렸다는 이유로, 아이를 어린이집에 보내놓고 카페에 갔다는 이유로, 여성은 남편에 기생하는 ‘맘충’으로 비하된다. 임신과 육아를 이유로 경력이 단절되는 여성이 부지기수인데도, 생애주기 내내 여성 노동자가 남성 노동자보다 적은 임금을 받는데도, 무급 가사노동과 육아 책임이 여성에게 전가되는데도, 가장 약자인 여성이 오히려 혐오와 멸시의 대상이 된다. 공동체적 연대와 협력이 완전히 해체된 사회, 각자도생이 유일무이한 생존 방식이 된 사회에서 약자들은 이렇게 서로의 살을 물어 뜯으며 고통을 견딘다. 소비자의 권리, 승자의 권리만이 절대적 권리다. 마치 자신은 어릴 적 누군가에게 한 번도 피해를 주지 않았던 것처럼, ‘노키즈존’은 제값을 지불한 소비자가 마땅히 누려야 할 권리로 치부된다. 내가 낸 세금으로 월급을 받는 보육교사들이 노조를 만드는 건 내 자식의 돌봄을 내팽개치는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 또 수년 간 자신을 희생(?)한 대가로 얻어낸 각종 자격증과 정규직의 훈장은 승자가 누려야 할 불가침의 특권이다. 그래서 비정규직 노동자가 정규직이 되겠다는 것은 자신의 성취에 무임승차하겠다는 반사회적 떼쓰기다. 의대 정원 증원은 전공의 시절 주 80시간 노동을 견디면서도 승자의 특권을 수호해 온 의사들에게 감히(!) 사회가 도전하는 일이다. 저출생을 해결할 수 없는 자본가 정부, 3·8 여성파업으로 미친 세상에 파열구를 내자! 이런 미친 세상에서 저출생이 필연이 아닐 리 있겠는가? 까딱하면 비난과 혐오의 대상으로 굴러떨어질지 모르는 살얼음판 같은 세상에서 누가 행복한 미래를 꿈꾸며 아이를 낳을 수 있겠는가. 자본가 정치세력은 틈만 나면 저출생 문제를 해결하겠다 떠들지만, 저들은 이 아비규환과 각자도생의 각축장에서 벌어진 저출생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윤석열 정부나 민주당이 저출생 대책이라고 내놓는 정책들은 자본가 계급에게 이 사회를 운영할 역량이 없음을 증명하는 수백 가지 사례 중 하나에 불과하다. 저출생을 해결하기 위한 정답이 멀리 있나? 그렇지 않다. 간단하다. 한마디로 모든 노동자가 미래를 꿈꿀 수 있어야 한다. 고용형태가 안정적이어야 하며, 노동시간은 규칙적이며 짧아야 하고, 충분한 생활임금을 벌 수 있어야 한다. 강요된 성별분업 없이 남녀 양육자 모두가 경력단절과 소득의 손실 없이 육아에 전념할 수 있어야 한다. 또한 이 사회에서 성장하는 후세대 모두가 인간으로서 누려야 할 기본권을 예외없이 보장받아야 한다. 내 자식이 살아가는 인생이 냉혹한 경쟁의 승패로 점철되는 것이 아니라, 연대와 협력 속에 느끼는 기쁨으로 충만할 것이란 확신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자본가 정부는 이것을 할 수 없다. 노동자 민중에게 인간다운 삶을 보장하는 것은, 자본의 이윤을 침해한다는 것과 동의어이기 때문이다. 자본의 이윤 질서를 수호하는 것이 존재 목적인 자본가 정부로서는 수용 불가능한 얘기다. ‘지방 발전으로 경쟁을 완화하겠다’, ‘셋째를 낳으면 1억 원을 주겠다’ 등 변죽만 울려대는 이유다. 진짜 희망은 노동자들 스스로에게 있다. 약자에 대한 멸시와 혐오가 아니라 연대와 협력이 넘치는 사회, 누구라도 인간인 이상 단 한 명의 예외도 없이 존엄성을 보장받는 사회, 노동자가 실업과 저임금의 공포 대신 안정된 고용과 생활임금을 보장받을 수 있는 사회, 이로써 출산과 양육의 결정이 온전히 개인의 자유로운 선택에 따르게 되는 사회, 출산과 양육을 결정한 노동자들이 죄책감과 공포를 느끼는 대신 충만한 삶의 기쁨을 누릴 수 있는 사회는 바로 노동자들이 만들 수 있다. 3월 8일, 이 사회에서 가장 고통받는 여성 노동자들이 파업에 나선다. 여성은 일터에서 여성이라는 이유로 채용 경쟁에서 밀려나고, 저임금에 고통받고, 임신·출산을 이유로 해고되고, 승진 대상에서 제외된다. 여성은 무급 가사노동, 육아 책임을 온전히 부담하면서도 ‘맘충’이란 비난과 혐오의 대상이 된다. 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장 열악한 지위를 가진 노동자들이 파업에 나서는 것이다. 노동자들 개개인이 서로를 물어뜯는 경쟁에 몰두함으로써 이득을 얻는 것은 자본가 계급뿐이다. 그 대신 노동자들이 하나의 계급으로서 단결하고 투쟁할 때 이 미친 세상을 대신할 완전히 새로운 세상을 만들 수 있다는 점을 역사는 몇 번이나 보여주었다. 3·8 여성파업은 이 미친 세상에 파열구를 내고 새로운 세상으로 진군하는 위대한 출발점이 될 것이다. 그 길에 모두 함께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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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기후 레닌주의를 향하여!원문 기사 https://www.leftvoice.org/for-climate-leninism/ 나다니엘 플라킨 2023년 10월 1일 안드레아스 말름은 기후 비상사태에 대응하기 위한 “생태적 레닌주의”를 요구한다. 좋다. 하지만 레닌주의란 무엇보다 자본가 국가를 분쇄하는 것을 뜻한다. 거대 재앙의 위험이 … 임박했다. 모든 신문이 이것을 되풀이해 쓰고 있다. … 결의안들은 … 재앙을 피할 수 없다는 점, 재앙이 아주 가까워졌다는 점, 재앙에 맞서기 위해 극단적 조치가 필요하다는 점, 파멸을 피하려면 민중의 “영웅적 노력”이 있어야 한다는 점 등을 인정한다. 모두가 재앙을 말하고 있으며, 모두가 재앙을 인정한다. 모두가 그렇게 해야 한다고 결정했다. 그러나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다. … 누구나 조금만 주의를 기울여 생각하면, 재앙에 맞설 방법들이 있다는 것, 재앙에 맞서기 위한 조치들이 더없이 분명하고, 간단하며, 완벽하게 실현 가능하고, 민중의 힘이 온전히 닿는 곳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 조치들이 실행되지 않는 것은, 전적(全的)으로 그 실현이 한 줌 자본가들의 막대한 이윤에 영향을 줄 것이기 때문이란 점도 알 수 있다. - 레닌 레닌은 이 글을 1917년 10월에 썼다. 이 글에서 레닌은 러시아에서 다가오는 기근의 위험성을 다루고 있다. 그러나 몇 가지 사소한 생략을 제외하고서 보면, 위 인용은 지금 우리가 처한 상황을 묘사한다. 기후재앙이 진행 중이라는 걸 모든 사람이 안다. 지난 가을 COP27 기후 회의에서는 사실상 모든 부르주아 정치인들이 참여한 엄숙한 선언도 있었다. 그러나 아무것도 실행되지 않는다. 필요한 조치들은 간단하지만, 자본가들의 이윤을 침해한다. 그래서 아무것도 실행되지 않는다. ‘멸종저항(Extinction Rebellion, XR)’은 여러 나라에서 도로를 막아섰다. 독일에서는 여러 활동가 단체가 정부의 행동을 강제하기 위해 시민 불복종 운동에 참여하고 있다. ‘엔데 겔란데(Ende Gelände, 길이 없음)’는 석탄 광산을 점거했다. 최근에는 ‘레츠테 게네라치온(Letzte Generation, 마지막 세대)’ 회원들이 강력 접착제로 자기 몸을 도로에 붙여 교통을 방해했다. 두 단체 모두 끔찍한 탄압을 받고 있다. ‘레츠테 게네라치온’은 “범죄 음모”로 수사받고 있으며 심지어 “기후 테러”라는 비난까지 받고 있다. 이들의 전술은 과격해 보이지만 놀랍게도 그 요구는 온건하다. 이들은 정치인들이 “과학에 귀를 기울이고”, 아우토반에 속도 제한을 도입하며, 그밖에 소소한 조치를 시행할 것을 요구한다. 정부의 행동을 강제하기 위한 시민 불복종 전략의 주요 이론가는 스웨덴 학자 안드레아스 말름이다. (1) 그의 책 <파이프라인을 폭파하는 방법>은 뉴욕타임스 오피니언 기사와 장편 영화에 이르기까지 세계적인 주목을 받았다. 코로나 봉쇄 기간에 쓴 두 번째 책 <코로나, 기후, 오래된 비상사태>에서 말름은 기후 비상사태에 대응하기 위한 “전시 공산주의”, “생태적 레닌주의”를 촉구했다. 레닌주의자로서, 우리는 좋아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레닌주의란 말름이 제안하는 것보다 훨씬 많은 것을 의미한다. 누구도 평화주의자가 아니다 무엇보다도 <파이프라인을 폭파하는 방법>은 클릭을 유도하는 미끼에 불과하다. 사실 말름은 화석연료 기반 시설을 어떻게 파괴할 수 있는지 한마디도 하지 않는다. 그 대신 말름은 왜 더 많은 사람이 그렇게 하지 않는지 의문을 가진다. 존 랭커스터의 질문처럼 말이다. 기후변화를 강력히 체감하는 사람들이 그런 종류의 일을 하기엔 너무 착하고 교육을 너무 많이 받은 것일까? 아니면 어느 정도의 기후변화를 가장 강력히 체감하는 사람들조차 기후변화라는 사실 자체를 믿지 못하는 것일까? 기후운동의 많은 영역에서 평화주의는 절대적인 것으로 다뤄진다. 예를 들어 환경운동가 빌 맥키벤은 마틴 루터 킹, 간디, 넬슨 만델라의 정신과 같은 비폭력주의가 유일하게 효과적이라고 주장한다. 빌 맥키벤은 지구를 구하고 싶어 한다. 다만 그 운동이 누군가의 재산을 털끝만큼도 건드리지 않을 때만 그렇다. ‘미래를 위한 금요일’은 역사상 가장 예의 바른 저항 운동으로 명성이 높다. ‘레츠테 게네라치온’은 주황색 안전조끼를 입고 도로를 막으며, 운전자들의 폭행에 소극적으로 대응한다. 재미난 것은, 이런 극단적인 평화주의로도 우익 정치인들이 “폭력”, “테러리즘”이란 비난을 쏟아내는 것을 막지 못했단 것이다. 말름은 자기 책에서 부르주아 사회의 평화주의 신화를 해체한다. 자본가 정치인들은 억압받는 사람들의 “폭력”을 비난하지만, 경찰과 군대 같은 특별한 무장기관의 엄청난 폭력은 정당화한다. 진보적 변화를 향한 운동은 권력과의 폭력적 대결을 결코 피할 수 없다. 예컨대 만델라는 수십 년의 옥살이를 금욕적으로 견딘 성자(聖者)로 기억될지 모르지만 실제로는 아파르트헤이트 정권에 맞서 폭탄 테러를 감행한 무장조직 ‘움콘토 위 시즈웨’의 수장이었다. 지금은 만델라를 평화주의의 상징으로 떠받드는 전 세계의 정부들은 이전에는 만델라의 “테러리즘”을 비난했다. 만델라 자신도 “나는 비폭력 시위가 효과적인 한에서만 비폭력 시위를 호소했다”고 말했다. 마틴 루터 킹도 마찬가지로 항상 총을 휴대했다. 다수의 유명한 “평화주의자”에게, 비폭력이란 특정한 상황에서의 전술적 선택일 뿐이었다. 평화주의는 결코 절대적인 것이 아니다. 말름은 최대한 많은 사람을 살해하려고 산탄총을 들고 모스크에 들어갔던 노르웨이인 나치의 사례를 예로 든다. 세 명의 노인이 범인을 제압했는데, 꼼짝 못 하게 범인을 짓누르고 머리를 가격하면서 그렇게 했다. 진정한 평화주의자라면 나치의 두개골을 멍들게 하는 “폭력”을 거부했을 것이다. 물론 합리적인 사람이라면 누구나 대량 학살을 막기 위한 작은 대가로써 그런 폭력을 사용하는 데 동의했을 것이다. 따라서 모든 사람은 평화주의에 예외를 두고 있는 셈이다. 말름이 말했듯이, “예외를 인정하는 평화주의자는 ‘정의로운 전쟁론자’다.” (‘정의로운 전쟁 이론’은 어떤 전쟁이 정당한가를 다루는 군사 윤리학이다. - 옮긴이) 마르크스주의자는 결코 평화주의자가 아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폭력이 정치적으로 목표한 것이 무엇인지, 폭력을 압제자가 행한 것인지 피억압자가 행한 것인지에 따라, 모든 폭력이 동일하지 않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고 있다. 나치 경비병에 맞서 봉기한 부헨발트 강제수용소 수감자들이 사용한 폭력에 반대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리고 말름이 설득력 있게 주장하듯이, 우리는 기후변화에 대해 달리 생각할 여유가 없다. 자본주의 체제는 모든 인간을 살해하는 방향으로 우리를 몰아가고 있다. 그런 결과를 막기 위해 어느 정도의 폭력이 정당화된다는 것은 분명하다. 이런 현실적 태도가 절망적 기후위기에 대한 유일한 대안이다. 조나단 프랜즌 같은 부유한 자유주의자들은 지구의 파괴를 멈추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걸 수용하라고 한다. 적절하게도 말름은 이런 생각에 충격을 받았다. 적어도 어떤 이들에게는 싸우는 법을 배우기보다 죽는 법을 배우는 게 더 쉽고, 전투적 저항을 생각하는 것보다 자신이 소중히 여기는 모든 것의 종말을 (체념하고) 받아들이는 게 더 쉽다. 비록 상황이 “절망적”이라 하더라도, 우리를 인간답게 만드는 것은 투쟁이다. 냇 터너(1831년 미국 버지니아주에서 흑인 노예 반란을 이끌었다 – 옮긴이)와 바르샤바 게토 투사 등의 행동도 “절망적”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수 세기가 지난 지금까지도 우리에게 영감을 불러일으킨다. 베르톨트 브레히트가 썼듯이, “모든 것을 잃었다면, 당신은 투쟁해야만 한다!” 전시 공산주의 그러나 말름이 제안하는 시민 불복종과 태업의 목표는 무엇인가? 이런 것들이 전술이라면, 전략은 무엇인가? <파이프라인을 폭파하는 방법>은 2단계, 즉 폭발물이 터진 다음에는 무엇을 할 것인지로 나아가지 않는다. 공산주의자 출신인 말름은 자기 출신을 모호하게 만든다. 말름은 책에서 러시아 혁명가 레온 트로츠키와 독일의 좌파 테러리스트 울리케 마인호프(1934~1976, 독일 적군파의 창설자 - 옮긴이)를 인용하지만 그들의 이름은 후주(後註)로 처리된다. 책에서 그들은 각각 파시즘의 위험성을 경고하는 “목소리”, “서독 칼럼니스트(!)”로 축소된다. (2) 말름은 코로나 팬데믹을 거치며 확실히 급진화 돼, 다음 책에서 부끄러운 줄 모르고 붉은 깃발을 휘둘렀다. 책의 부제는 <21세기의 전시 공산주의>이며, 본문은 레닌, 트로츠키, 볼셰비키, 혁명에 관한 언급으로 가득 차 있다. 말름은 특히 흥미로운 비유 하나를 제시한다. 기후재앙에서 인류를 구원하기 위한 전시(戰時) 동원을 상상하면 통상 우리는 2차 세계대전 때의 미국 전시생산국(WPB)을 떠올린다. (3) 그러나 더 나은 역사적 사례가 있다. 러시아혁명 이후 신생 소비에트연방은 21개 제국주의 국가 군대의 침략을 받았다. 볼셰비키는 노동자계급의 취약한 권력을 방어하기 위해 “전시 공산주의”를 필요로 했다. 볼셰비키는 농민들로부터 곡물을 징발하기 위해 가차 없는 무력을 사용했는데, 이것이 적군(붉은군대, 赤軍)과 도시에 식량을 공급하기 위한 유일한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반동과 파시즘을 억제하기 위해 다른 선택지는 없었다. 향후 불타는 지구에서 살아남기 위한 필사적 투쟁에서도 이와 유사하게 엄청난 희생이 요구될 것이다. 말름은 재미난 지적을 한다. ‘트로츠키는 장갑열차를 타고 전방 지역들을 이동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 열차는 나무 장작, 즉 재생에너지를 연료로 했다. 적군(赤軍)은 친환경적이었다!’ (4) 전시 공산주의는 진정한 민중 혁명이 가진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의 힘을 해방시켰다. 1789년 파리에서, 1791년 프르토프랭스에서(카리브해의 프랑스 식민지였던 생도맹그에서 노예제를 폐지하고 아이티 공화국을 세운 혁명을 가리킨다 – 옮긴이), 1917년 페트로그라드와 모스크바에서, 1936년 마드리드와 바르셀로나에서 역사가 반복적으로 보여준 것처럼 말이다. 러시아에서 적군(赤軍)은 내전에서 승리했는데, 이는 수백만 명의 노동자, 농민이 그들 자신의 해방을 위해 투쟁했기 때문이다. 노동자, 농민은 농장과 공장, 그리고 국가권력을 장악했으며, 자신들이 쟁취한 것을 지키기 위해 모든 것을 기꺼이 희생했다. 이것이 전 세계 생산 시스템에 급진적이고 즉각적인 변화를 도입하는 데 필요한 혁명적 동원(動員)이다. 말름의 “전시 공산주의” 기획에는 삼림벌채 중단, 운송수단의 탄소 배출 감축, 석유 재벌에 대한 몰수와 같은 일련의 “매우 엄격한 제한과 중단”이 포함돼 있다. 화석연료 자본이 전체 사회의 통제를 받게 되면, 국가는 화석연료 추출을 중단시킬 뿐 아니라 대기 중 탄소를 제거하기 위해 새로 확보한 자원을 이용할 것이다. 그러나 말름의 “생태적 레닌주의”는 한계적이다. 사실 말름의 “생태적 레닌주의”는 사민주의에 대한 향수로 잘 알려진 <자코뱅>에서 유일하게 긍정적으로 언급되는 레닌주의다. 말름은 레닌주의란 용어를 규율 있는 정치적 운동이란 뜻으로 사용한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보자면, 예수회, 사이언톨로지스트, 일본 제국주의 군대 등 수많은 운동이 하나의 대의를 위해 헌신해 왔다. 레닌주의란 노동자계급이 자본가 국가를 타도하고 사회주의를 건설하기 위해 노동자 정부를 건설한다는 특정한 강령을 실현하기 위한 규율에 관한 것이다. 레닌주의와 국가 레닌 최고의 저작은 1917년 혁명 도중의 짧은 소강기에 쓰였다. <국가와 혁명>에서 레닌은 국가가 사회의 중립적 관리자가 아니라는 점을 해명했다. 국가는 한 계급이 다른 계급을 억압하기 위한 도구다. 자본가 국가는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를 수호하며, 노동자계급과 가난한 사람들을 억압한다. 이런 의미에서 보자면, 가장 민주적인 공화국조차 부르주아 독재 체제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노동자계급이 처음으로 정치권력을 획득한 1871년 파리 코뮌의 사례를 연구했고, 노동자계급이 단순히 기존 국가 기구를 장악하는 데 그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 대신 노동자계급은 부르주아 국가를 분쇄하고, 이를 노동자 평의회와 같은 자주적 조직체에 기반한 프롤레타리아 국가로 대체해야만 한다. 레닌은 노동자 국가가 단지 반쪽의 국가라고 덧붙였다. 코뮌 유형의 국가는 사회의 절대 다수에 기반해 있으며, 그 목적이 이전의 자본가들에 맞서 노동자권력을 수호하는 데 있다. 따라서 관료 기구적 방식은 그다지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새로운 사회주의 사회가 발전함에 따라 노동자들은 점차 스스로 모든 행정업무를 처리하게 될 것이며, 모든 형태의 국가는 불필요해지고 사멸할 것이다. (5) 말름은 레닌의 주장에 일정 부분 동의한다. 기후재앙을 멈추자면 인류의 이익을 위해 행동해야 할 때 자본가 국가 스스로 “본질적 무능”을 드러냈다고 말름은 지적한다. 자본가 국가의 유일한 목표는 부르주아가 더 많은 자본을 축적할 수 있도록 보장하는 것이다. 그것이 지구와 모든 사람이 불타는 것을 뜻할지라도 말이다. 또한 말름은 특히 종말적 위기에 직면하게 되면 국가권력이 하루아침에 폐지될 수 있다고 보는 무정부주의자의 환상을 거부한다. 말름은 “실제적 전환에 어느 정도의 강압적 권력이 요구된다는 것은 언제나 진실로 드러난다.”고 썼다. 말름은 레닌의 주장을 동의하며 인용한다. “우리는 (특정한 이행기에) 국가가 필요하다. 이것이 우리를 무정부주의자와 구별하는 지점이다.” 이 정도는 진지한 사회주의자들 모두가 분명히 알아야 하는 것이다. 노동자계급은 자본가 권력을, 경찰이나 감옥과 같이 자본가들을 보호하기 위한 모든 기구를 분쇄할 것이다. 이렇게 하기 위한 유일한 수단은 폭력이며, 한 계급이 다른 계급에 맞서 폭력을 체계적으로 사용하는 것이 바로 우리가 말하는 노동자 국가다. 그러나 말름은 레닌을 인용하면서 자기 생각에 맞추기 위해 다음 문장을 누락한다. 우리는 국가가 필요하다. 하지만 부르주아가 필요로 하는 국가, 즉 경찰력, 군대, 관료제(관료집단)와 같은 정부 기구가 인민에게서 분리되어 인민을 억압하는 국가는 아니다. 모든 부르주아 혁명은 단지 그러한 국가 기구를 완성했을 뿐이며, 그것을 한 정당의 손에서 다른 정당의 손으로 옮겼을 뿐이다. 반면 프롤레타리아트가 현재 혁명의 성과를 유지하고 더 나아가 평화, 빵, 자유를 쟁취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국가 기구, 마르크스의 표현을 빌리자면 “기성(旣成)”의 국가 기구를 분쇄하고, 경찰력, 군대, 관료제가 무장한 전체 인민과 통합된 새로운 국가로 대체해야만 한다. 그렇다. 지구 온난화 시대에 인류 생존을 위한 투쟁에는, 수십억 명이 자본가 권력의 마지막 흔적까지 파괴하기 위해 조직되는 이런 종류의 혁명적 동원이 필요하다. 불타오르는 세계에 적응해 나가고 가능한 한 많은 것을 구하기 위해, 인류의 전체 생산수단을 민주적 통제 아래 두어야만 한다. 그러나 말름의 “레닌주의”는 국가를 분쇄한다는 사상을 의도적으로 생략한다. 말름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방금 자본가 국가가 이런 조치들을 취해나가는 데서 본질적 무능을 보인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다른 형태의 국가는 존재하지 않는다. 소비에트에 기반한 노동자 국가는 하룻밤 새 기적적으로 탄생하지 않는다. 프롤레타리아트의 민주적 기구라는 이중권력은 설령 실현되더라도 조만간 실현될 것 같지 않다. 그것을 기다리는 것은 망상이고 범죄적이므로, 우리가 함께할 것은 늘 자본의 순환에 결박(結縛)돼 있는 음울한 부르주아 국가다. 이를 견디자면 대중적 압력이 가해져야 한다. 이로써 국가 내에 응축된 힘의 균형이 바뀌고, (국가) 기구들이 결박을 풀고 움직이기 시작하도록 강제될 것이다 … 그러나 이것이 국가를 파괴하고 새로운 국가를 건설한다는 고전적 강령에서 벗어나 있다는 점은 분명할 것이다. 그 강령은 레닌주의가 자신의 사망 기사를 쓰는 데 충분하게(혹은 너무도 충분하게) 보이는 여러 요소 중 하나다. 이것은 쓰리 카드 몬테(three-card monte, 세 장의 뒤집힌 카드 중에서 ‘머니 카드’를 찾기 위해 돈을 걸게 하는 속임수 게임 – 옮긴이)와 이치가 같다. 말름은 레닌의 급진적 이미지를 소환하는 걸 즐기지만, “국가의 파괴”는 거부한다. 말름은 자본가 국가에 “전시 공산주의” 수행을 요구하는 동시에, 바로 그 국가가 탄소 배출을 감축하기 위한 최소한의 조치조차 시행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말름은 “소비에트에 기반한 노동자 국가”가 “하룻밤 만에 탄생하지 않는다”고 하지만, 누구도 하룻밤 만에 노동자 국가를 탄생시키려 작정한 적은 없다. 정반대다. 레닌주의의 핵심 테제는 그러한 국가는 오로지 수많은 노동자의 의식적 노력에 의해서만 건설될 수 있으며, 노동자들의 에너지는 혁명 정당을 통해 집중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레닌주의자들이 투쟁하는 목적이다. 다른 한편 말름은 개량주의(“유로코뮤니스트”) 이론가 니코스 풀란차스에 대한 충성을 드러낸다. 비록 그 이름을 각주에서도 언급하지 않았지만 말이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국가를 “전체 부르주아계급의 공동 업무를 관리하는 위원회”라고 주장한 반면, 풀란차스는 국가가 사실 “계급적 힘들의 응축체”라고 반박했다. (6) 다시 말해 풀란차스는 국가 기구가 여러 계급 사이 투쟁의 장이며, 노동자계급은 국가 내부에서 힘의 균형을 바꿀 수 있고 궁극적으로 국가를 장악할 수 있다고 보았다. 이는 결국 노동자계급이 부르주아 국가 내부에서 권력을 얻을 수 있다는 오래된 개량주의 이론을 쓸데없이 장황하게 표현한 것에 불과하다. 국가에 대한 이런 관점은 “레닌주의” 이론가 말름을, ‘멸종저항’, ‘엔데 겔란데’, ‘레츠 제너레이션’ 같이 비(非) 사회주의자 활동가들의 운동과 확실하게 하나로 묶어주는 것이다. 이들 모두는 시민 불복종을 통해 국가가 기후재앙에 맞서 비상조치를 시행하도록 강제하려 든다. 말름은 이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이해한다. 그러면서 대안은 없다고 주장한다. 즉 우리의 유일한 희망이 완전히 불가능하다는 걸 역사와 이론이 보여주었다. 결국에 이것은 프랜즌이 주장했던 기후 절망의 “사회주의자” 버전일 뿐이다. 폭탄을 든 자유주의자 트로츠키가 지적한 대로, 부르주아가 노동자들의 이익을 위한 정책을 시행하도록 강제하기 위해 노동자계급에게 필요한 에너지는, 노동자계급이 정치권력을 잡기 위해 필요한 에너지보다 더 크다. (7) 말름은 노동자계급이 부르주아 국가를 파괴하고 사회주의를 건설할 시간이 없다고 말한다. 우리는 정반대로 주장한다. 소규모 태업, 자본가 정부가 어떻게든 우리 목표에 복무할 것이라는 환상적 희망에 노력을 기울이면서, 자본가 국가가 불에 기름을 끼얹도록 놔둘 시간이 없다는 것이다. “전시 공산주의” 논의의 결말 무렵에서 말름은 레닌주의자보다는 사회민주주의자에게 커다란 지지를 표명한다. 2019년에 제레미 코빈이 영국 총리가 되고, 2020년에 버니 샌더스가 미국 대통령이 되는 것만큼 지구에 더 좋은 일은 없을 것이다. 말름은 브라질 룰라 정부도 마찬가지로 칭찬한다. 말름이 그런 개량주의 정부가 인류를 구원할 수 있다고 보는지 정확하지는 않다. 그보다 말름은 그런 정부가 민중의 압력을 받아 “자기 자신을 뛰어넘어” 자본주의를 폐지하기를 희망한다. 룰라는 브라질 지도자로 이제 세 번째 임기 중에 있지만 아마존 파괴는 계속되고 있다. 그러한 부르주아 국가가 민중의 압력을 받아 갑자기 반자본주의 조치를 취할 것이라고 보는 희망이 바로 말름과 제4인터내셔널 통합서기국의 동료들이 시리자와 포데모스를 지지하게 된 이유다. 이로써 노동자계급이 얻은 것은 사회주의 대신, 배신과 사기 저하뿐이었다. 즉 “레닌주의자” 말름은 <자코뱅>이 지지하는 바로 그 사회민주주의 정치인들에게 희망을 걸고 있다. 말름에게 직접 행동의 최종 목적은 탄소 배출 감축에 진지하게 임할 개량주의 정부를 선출하는 것이다. 이것은 백여 년 전에 레닌이 지적했던 것을 다시 확인해 준다. 말름과 같이 “행동에 의한 선전”(propaganda of the deed, 주로 19세기 말 20세기 초 무정부주의자들의 지배계급에 대한 테러를 뜻한다. 이 전술은 1881년 런던 국제 아나키스트 대회에서 승인되었다. - 옮긴이)을 촉구하는 “혁명가들”은 “폭탄을 든 자유주의자”에 지나지 않는 경우가 더 많다는 것이다. 크리스 마이사노는 <자코뱅>에 기고한 글에서 말름에게 “파이프라인을 폭파하지 말라”는 신랄한 반응을 내놓는다. 부르주아 정부가 그린뉴딜 정책을 시행하도록 하는 게 목표라면, 부르주아적 전술을 유지할 필요가 있다고 그는 설득력 있게 주장한다. 이를테면 예비선거에서 좌파 후보를 후원하고 의회 의원들에게 로비하는 것들이다. 사회민주주의적 목표는 사회민주주의적 수단을 요구하며, 화려해 보이는 태업 행위는 단지 방해가 될 뿐이다. 자본가 국가가 전시 공산주의를 시행하게 한다는 말름의 계획에는 못돼먹은 점도 있다. 1918~21년 러시아에서 노동자들은 그들이 쟁취한 권력을 방어하기 위해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희생을 요구받았다. 말름은 비슷한 희생을 요구하지만, 권력 없이 희생을 요구한다. 말름이 자본가 국가를 그대로 유지하면서 동시에 “매우 엄격한 제한과 중단”을 요구할 때, 이는 자본가들의 이윤을 보호하면서 노동자들의 생활 조건을 공격하는 것을 뜻할 뿐이다. 사실 이것은 부르주아 정부가 이미 시행하고 있는 것이다. “녹색” 긴축경제란, 부자들은 24시간 내내 개인 제트기를 띄워놓을 수 있지만 가난한 사람들은 “기후 보호”라는 명목으로 비행기 이용을 포기하라는 것을 뜻한다. 이런 종류의 긴축경제는 전시 공산주의와 아무 상관이 없다. 제대로 말하면 그건 1차 세계대전 기간 독일 제국의 정책에 더 가깝다. 크리스암트(전쟁청)의 독재 아래 정말 전 사회적 동원이 이뤄졌다. 대중은 전방의 참호에서 웅크려야만 했고, 군수 공장에서 장시간 노동했으며, 순무 배급을 받기 위해 긴 줄을 서야 했다. 전염병으로 아이들은 파리떼처럼 죽어갔다. 그러나 부르주아 정치인들이 국가적 희생을 분담할 것을 요구하는 동안, 투기꾼들은 샴페인을 마시며 기록적인 이윤을 얻었다. 독일 사회민주당(SPD)에서 가장 우파적인 목소리를 냈던 일부는 이러한 국가 경제 관리가 사회주의로 나아가는 단계라고 믿었다. 그들은 이것을 “전쟁 사회주의”라고 불렀다. 돌이켜보면 우리는 분명히 알 수 있는데, 자본가 국가의 일시적 경제 통제는 더 큰 야만을 가능하게 했을 뿐이다. 자본가 국가를 옹호하는 말름은 사실 (러시아의) “전시 공산주의”보다는 (독일의) “전쟁 사회주의”에 훨씬 가까운 것처럼 보인다. 기후 레닌주의란 무엇인가? 말름이 정식화한 “생태적 레닌주의”는 놀라울 정도로 온건하다. 말름의 두 책에는 반자본주의적 전망이 빠져있다. 오히려 말름은 상당한 숫자의 사람들이 태업에 참여하면 기후 행동이 실현된다고 여긴다. 말름이 언급하는 구체적 사례는 SUV (8) 자동차 타이어 바람 빼기, 일시적으로 석탄발전소 점거하기 등이다. 최근에 활동가들이 월마트 상속자 한 명의 호화 요트에 주황색 페인트를 뿌린 것처럼, 의도적으로 거대 자본가를 표적으로 삼기도 한다. 그런 행동에 대해, 심지어 파이프라인을 폭파하는 행동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든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설령 기후 운동이 파이프라인을 매일 폭파하더라도 화석연료 자본의 기계는 멈추지 않고 돌아갈 것이다. <자코뱅>의 크리스 마이사노 같은 개량주의자는 이것이 바로 우리가 정치권력이 필요한 이유라고 말한다. 옳다. 그러나 크리스 마이사노는 코빈, 샌더스, 룰라가 부르주아 국가를 맡는 것이 노동자계급의 권력 장악을 뜻한다고 본다. 비록 급진적 전술을 옹호하지만 말름도 여기에 동의하는 것으로 보인다. 문제는 진정성 있는 개량주의자가 정부 수반이 되더라도 자본가 국가는 눈앞의 재앙을 다루는 데서 “본질적 무능”의 상태로 남아있다는 것이다. “생태적 레닌주의”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말름은 세 가지 정의를 내린다. (1) “징후의 위기를 원인의 위기로 바꾸는 것”, 즉 자본주의가 일으킨 재앙을 변화의 기회로 삼는 것. (2) “속도를 가장 중요한 미덕으로 여기는 것”. (3) “국가를 이 방향으로 이끌기 위해 모든 기회를 붙잡고, 요구되는 만큼 급격하게 평소의 관행과 단절하며, 재앙을 만들어 가고 있는 경제 영역을 공공의 직접적 통제 아래로 복속시키는 것.” 정확히 이 중 아무것도 틀리지 않았다. 그러나 말름의 레닌주의는 사회민주주의 개량주의와 거의 비슷하게 들리며, 단지 일정표가 훨씬 빠를 뿐이다. 이건 사실 “잘못된 방법이지만, 더 빠른” 최대출력(Max Power) 방식이다. 반면 로자 룩셈부르크는 개량과 혁명이 서로 반대되는 강령이란 점을 지적했다. 정치권력 장악 및 사회혁명에 대비(對比)하여 입법 개혁의 방법을 지지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같은 목표를 향해 좀 더 평온하고, 고요하고, 느리게 나가는 길을 선택한 것이 아니다. 그들은 목표가 다르다. 그들은 새로운 사회의 건설을 지지하는 대신, 낡은 사회의 표면적 변경을 지지하는 것이다. 이를 기억하고 진정한 기후 레닌주의를 구성하는 다섯 가지 견해를 추가로 살펴보자. 1. 노동자계급 중심성 우리는 세계 경제 전체를 급진적으로 변화시켜야 한다. 그러나 어떤 사회적 주체가 모든 것을 변화시킬 수 있겠는가? 개개의 파이프라인을 폭파하기 위해 몇 달 동안 지하에 숨어있는 활동가들은 절대 대중의 힘을 가질 수 없다. 레닌주의는 노동자계급, 즉 자기 노동력을 판매해 자본주의를 돌아가게 하는 사람들이 다른 사회를 향한 투쟁을 이끌 수 있는 사람들이란 점을 인식한다. 프롤레타리아트는 부르주아를 분쇄하기 위해 모든 억압받고 착취당하는 민중과 동맹으로 연합할 수 있다. 적지 않은 기후 활동가들은 노동자계급이 급진적 변혁의 주체라는 점을 거부할 것이다. (“그것은 150년 전 마르크스주의의 교리일 뿐이다!”) 그들은 석탄 광부들을 대표하는 노동조합이 최소한의 기후 행동에도 가장 악랄하게 반대했던 독일 기후운동의 구체적 경험을 지적한다. 이와 비슷하게, 금속노동조합은 문명 전체가 그렇듯이 자신들의 일자리 또한 기후변화로 파괴될 것이란 점엔 관심을 두지 않은 채 그저 자동차산업 조합원의 일자리만 방어해 왔다. 이것은 (제대로 된 - 옮긴이) 조직이 없으면 노동자계급이 자기 잠재력을 실현할 수 없다는 것을 증명한다. 지금 대부분의 노동자조직은 돈 많은 관료들이 운영하고 있다. 이 관료들은 자본가들과 거래함으로써 특권을 누린다. 노동자들은 독립된 정치적 주체로서 투쟁할 때 비로소 세상을 뒤바꿀 자기 힘을 드러내게 된다. 프랑스 그랑퓌 토탈 정유공장 노동자들이 구체적 사례다. 토탈 노동자들은 다국적 기업의 “그린워싱” 행각의 일환으로 해고될 것이란 통보를 받았다. 그 대응으로 토탈 노동자들은 평조합원위원회를 조직했다. 그들은 원유 정제를 계속하기 위해, 즉 지구를 계속 불태우기 위해 투쟁하지 않았으며, 또한 “녹색 자본주의”의 이름으로 거리로 내몰리는 것도 수용하지 않았다. 토탈 노동자들은 기후 활동가들과 연합하여 자신들의 일자리를 위해, 그리고 노동자 통제 하의 에너지 산업전환을 위해 투쟁했다. 정유 노동자들이 청정에너지를 위해 투쟁하는 것을 상상해 보라! 이것은 노동자 자기조직화의 “마법”과 사회주의 사상 덕분에 가능한 일이다. 그랑퓌 정유공장은 작은 사례에 불과하다. 자기 작업장을 점거하고 자신들이 모두의 이익을 위해 생산을 재조직할 수 있다는 점을 깨달은 노동자들의 사례는 수두룩하다. 그런 사례들은 세계를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운영할 수 있다는 것, 즉 한 줌 억만장자 기생충의 이윤을 극대화하는 게 아니라 모든 인민의 필요를 충족시키는 방식으로 운영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레닌주의는 혁명 정당의 지도를 받는 노동자계급이 세계를 변혁할 수 있다는 것을 드러낸다. 2. 부르주아 국가를 타도하는 혁명 말름은 자본가 국가가 기후 재앙을 해결하는 데서 “본질적 무능”을 드러낸다고 올바르게 주장한다. 위에서 주장했듯이, 레닌은 노동자들이 어떻게 자본가 국가를 파괴할 수 있는지 보여줬다. 이는 모든 혁명 과정에 등장하는 경향이 있는, 노동자 평의회와 같은 노동자계급 자기 조직화의 기반 위에서 가능하다. 오늘날 혁명가들은 노조 관료와 사회운동에 맞서 싸우면서 노동자 자기조직화를 추진해 나가야만 한다. 3. 혁명 정당 또한 레닌주의는 노동자계급이 결정적 행동을 통해서만 역사적 임무를 완수할 수 있다는 점을 인식한다. 이를 위해 가장 의식적이고 결연한 투사들로 구성된 정당, 즉 전위 전당이 필요하다. 이 정당은 선거에 참여할 수 있겠지만, 무게중심은 계급투쟁에 있을 것이다. 레닌주의는 전투적 정당을 건설하고자 한다. 4. 비계(飛階)로서의 언론 레닌주의는 혁명 정당을 건설하기 위한 비계(飛階)가 혁명적 언론이라는 점을 보여줬다. 노동자들은 투쟁의 경험을 공유하고 이로부터 교훈을 이끌어내기 위해 자신들만의 매체를 만들어야 한다. 한 세기 전에 이것은 신문을 의미했다. 오늘날 혁명적 매체는 모든 기술적 가능성을 활용해야 한다. 5. 국제주의 레닌주의는 사회주의 변혁이 일국(一國) 차원에서 일어날 수 없다는 것을 인식한다. 기후재앙의 시대에 “일국 사회주의”라는 스탈린주의 사상은 그 어느 때보다 터무니없어졌다. 말름은 모든 자본주의 국민국가가 무기한 존속될 것이라고 가정한다. 반면 레닌은 러시아혁명을 사회주의 세계 공화국으로 나아가는 첫 번째 걸음으로 보았을 뿐이다. 레닌주의가 국제적으로 조직돼야 하는 이유가 이것이다. 간단히 말해 기후 레닌주의란 모든 부르주아 국가의 완전한 파괴를 요구하는 것이다. 쉬운 일은 아니다. 그러나 그것은 기후재앙을 멈추기 위해 유일하게 현실적인 선택이다. 우리가 사회주의를 향한 노동자계급 정당을 건설하기 위해 투쟁하는 이유가 이것이다. 절망에 맞선 레닌주의 지난 몇 년간 기후 운동은 어느 정도 사기 저하를 겪고 있다. ‘미래를 위한 금요일’이 전 세계 수백만 젊은이들을 불러일으킨 지 수년이 지났다. 그들은 젊은이들의 절박한 외침에 감동한 자본가 정치인들이 마침내 과학에 귀 기울일 것이라 기대했다. 그러나 각 정부(政府)는 계속하여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정부가 민주적이라고 생각했던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거의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즉 절망에 빠지기 쉽다. 핵심은 그들이 자본가 국가의 지도자들임을 이해하는 데 있다. 그들의 유일한 임무는 자국 자본가들이 자본을 늘리고 다른 자본가들과의 경쟁에서 이기도록 보장하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지구가 불타오른다 해도, 이건 정말 그들의 문제가 아니다. 그들이 계속해서 자동차, 고속도로, 석탄 공장을 건설하는 이유가 이것이다. 그들이 과학을 믿지 못해서 그런 게 아니다. 사실 그들은 우리보다 더 나은 과학적 보고를 받고 있을 것이다. 문제는 기후재앙을 해결하는 데 필요한 긴급 조치들이,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표현을 따르자면 “소유권의 전제적(專制的) 침해”를 요구한다는 것이다. 어떤 자본가 국가도 그렇게 하지 않는다. 그리고 수많은 시민 불복종으로도 그것을 바꿀 수 없으며, 바꾸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자본가 국가가 적이란 사실을 이해하게 되면, 우리는 노동자계급이 자본가 국가를 무너뜨릴 수 있고 무너뜨려야만 한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된다. 세계에는 화석연료 자본의 기계를 갑자기 멈출 수 있는 수십억 명의 노동자들이 존재한다. 브레히트를 다시 인용하자면, “당신이 자신의 상황을 이해했다면, 누가 당신을 막을 수 있겠는가?” 여기에서 전략이 도출된다. 레닌주의는 자본주의에 맞선 투쟁을 조직하기 위한 이론적 도구를 제공한다. 서두에 인용한 1917년 책자에서, 레닌은 “자본가들과의 철저하고 일관된 단절”을 촉구하며 글을 맺는다. 레닌은 유일한 희망이 사회주의 혁명에 놓여 있다고 주장했다. 멸망하느냐, 아니면 [혁명을 향해] 전력으로 나아가느냐. 이것이 역사가 제시한 선택지다. 자본가 국가를 타도하느냐, 아니면 우리 모두 불타버릴 것이냐. 이것이 선택지다. 후주(後註) 1. 말름은 가끔 트로츠키주의자로 언급된다. 말름이 오늘날 트로츠키주의 운동의 우익을 형성하며 개량주의 입장을 가진 제4인터내셔널 통합서기국의 회원이기 때문이다. 2. 말름은 이렇게 썼다. “‘항의(protest)는 나는 이것이 싫다고 말하는 것이다. 저항(resistance)은 내가 싫어하는 것을 끝장내는 것이다. 항의는 내가 더 이상 이것에 동의하지 않겠다고 거부하는 것이다. 저항은 다른 누구도 동의하지 않도록 내가 확실히 하는 것이다.’ 1968년에 한 서독 칼럼니스트는 이렇게 썼다.” 사실 서독 칼럼니스트는 적군파의 창설자인 마인호프다. 말름은 결론 부분에서 이렇게 쓴다. “1930년대 초반, 독일이 나치의 권력 장악으로 끝날 비탈길로 미끄러지고 있다는 것이 그 달에 이르러 점점 분명해졌다. ‘얼마나 귀중하고, 돌이킬 수 없는 시간을 잃어버렸는가! 사실 시간은 많이 남지 않았다.’ 가장 집요하게 위험을 경고하고 청중들에게 그 위험과 맞서 싸우는 데 노력을 아끼지 말라고 촉구했던 목소리 중 하나가 외쳤다.” 그 ‘목소리’는 바로 레온 트로츠키다. 3. 우리는 <레프트보이스>에서 이런 비유를 했다. “2차 세계대전 기간 미국 경제는 전시생산국(WPB)의 중앙 계획에 굴복했다. 예컨대 1942년 2월 22일, 미국에서는 모든 자동차 생산이 중단됐다. 대략 하룻밤 사이에 모든 자동차산업 역량은 탱크와 비행기 생산을 위해 전환됐다. 오늘날 민간 자동차 제조업체들은 화석연료에서 전환하자면 수십 년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우리에게는 수십 년이란 시간이 없다. 생산은 즉시 사회적 통제 아래 급진적으로 변화돼야 한다.” 로버트 벨라노·나다니엘 플라킨, ‘그린뉴딜은 우리를 구할 수 없다. 계획경제는 가능하다’, <레프트보이스> 4호. 4. 안타깝지만, 계속해서 인용될 법한 이 비유가 잘된 것은 아니다. 나무 장작을 태우는 것은 재생 가능하지 않으며, 새로운 나무를 키워 탄소를 회수하는 것은 수십, 수백 년이 걸리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문학적 의미에서 이 비유가 여전히 맘에 든다. 5. <국가와 혁명>은 훌륭한 저작이다. 간결하고 읽기에 어렵지 않다. 아직 못 보았다면 꼭 읽어보라! 6. 풀란차스는 국가를 “계급과 계급 분파 사이 힘의 관계가 물질적으로 응축된 것”으로 보았다. 독일어로 된, 풀란차스에 대한 마르크스주의 비판은 스테판 슈나이더가 <계급 대 계급>에 쓴 ‘국가를 파괴할 것인가, 강화할 것인가?’를 보라. 7. 1848년 혁명에 대해 쓴 글에서 트로츠키는 부르주아에 대해 이렇게 썼다. “이 이탈자들이 자신들의 의무를 다하도록 강제하기 위해서는, 프롤레타리아 쪽에서 임시 노동자정부를 세우는 데 필요한 것보다 더 많은 에너지와 성숙함이 필요했을 것이다.” 8. 이것은 SUV 자동차를 오로지 부유층만 보유했던 2007년 스웨덴에서 취했던 행동이다. SUV 자동차가 널리 보급된 오늘날 미국에서 이런 일을 벌이면, 주로 노동자계급에게 영향을 미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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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가 강요한 정신질환, 각자도생 대신 집단적 변혁을!얼마 전 넷플릭스 드라마 <정신병동에도 아침이 와요>가 상당한 인기를 끌었다. 종합병원 정신병동에서 일하는 의료인들의 이야기인데, 사람들의 공감을 자아냈던 것은 정신질환으로 입원한 환자들의 사연이다. 한때는 우리 주변의 평범한 누군가였을 그들을 아프게 한 것은 비인간적 자본주의 체제다. 장시간 노동과 과중한 업무 부담으로 공황장애를 앓는 청년 노동자, 직장 상사의 폭언‧갑질에 불안장애가 생긴 중년 노동자, 취업난에 수년간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다 실패하고 망상 증세를 보이는 청년, 평생 주변의 시선을 의식하며 강요된 삶을 버티다 조울증에 빠진 중년 여성 등의 이야기는 그렇게 낯설지 않은 소재다. 드라마는 각자도생의 자본주의로 극심히 고통받는 사람들을 섬세히 묘사하고, 이를 극복하는 인간의 따뜻한 연대를 낭만적으로 그려낸다. 그러나 공허하다. 남의 처지를 헤아리고 도움의 손길을 보낼 여유가 있는 사람들 자체가 드문 것이 오늘날 우리의 현실이기 때문이다. 드라마에서도 통장 잔고가 아홉 자리이고 당연하듯 수입차를 끌고 다니는 의사들이나 그런 모습을 보여줄 뿐이다. 노동자 대중투쟁의 퇴조는 가장 억압받고 고통받는 사람들이 한데 뭉쳐 비인간적 경쟁체제라는 거악(巨惡)을 뒤엎을 수 있다는 낙관적 열망까지도 함께 앗아가 버렸다. 오늘보다는 내일이 더 나을 것이라는 소박한 희망조차 사라진 시대, 그것이 오늘날의 자본주의다. 집단적 자살, 저출산 11월 30일 한국은행이 발표한 경제전망보고서에는 <초저출산 및 초고령사회: 극단적 인구구조의 원인, 영향, 대책>이라는 제목의 중장기 심층연구 결과가 수록돼 있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초저출생의 원인은 “청년들이 느끼는 ‘경쟁압력’과 고용·주거·양육 측면의 ‘불안’” 때문으로 분석되었다. 양질의 일자리가 부족하고 취업 경쟁이 심화된 상태에서, 경쟁압력 체감도가 높은 청년들일수록 희망 자녀수가 유의하게 낮게 나타났다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취업을 못하거나 취업을 했더라도 비정규직 노동자인 청년들은 결혼 의향이 낮았지만, 공공기관에 취업하거나 공무원인 경우에는 결혼 의향이 높았다. 미혼 사유, 무자녀인 사유를 당사자에게 물어본 결과, ‘취업, 생활안정, 집 문제’ 등 “결혼하고 싶지만 상황이 여의치 않아서”라고 응답한 비율이 가장 높았다. 전국 20~39세 청년 2천 명을 상대로 온라인 설문을 실시한 결과는 미래에 대한 희망이 사라진 청년 세대의 인식을 그대로 드러낸다. 설문 응답자의 84.9%는 지난 10년간 우리 사회의 불평등이 더욱 심각해졌다고 평가했으며, 87.4%는 향후 10년간 불평등이 더욱 심화될 것이라 전망했다. 개인 노력에 의한 계층 이동의 가능성이 낮다고 응답한 비율은 67.8%, 자신의 세대보다 자녀 세대의 사회경제적 지위가 높아질 가능성이 낮다고 응답한 비율은 61.6%에 이르렀다. 국제 금융자본의 두목 가운데 하나인 라가르드 유럽중앙은행 총재가 몇 년 전 한국의 재앙적 저출생을 두고 “한국은 마치 집단적 자살사회와 같다”고 표현한 건 잘 알려진 일이다. 그나마 출산율이 1명을 넘었던 때의 발언이니, 합계출산율이 0.7명(2023년 3분기)까지 떨어진 지금에는 그 표현의 적절성을 더욱 부정할 수 없게 되었다. 자본주의에서 희망을 잃어버린 사람들 한국의 저출생이 미래의 희망을 잃은 사람들의 소극적 자살이라는 점은, 실제 자살자 수 통계를 통해서도 다시 확인된다. 2022년 한국의 자살 사망자 수는 12,906명으로, 인구 10만 명당 자살사망률은 25.2명에 이른다. 10대부터 30대까지의 사망 원인 1위가 자살이라는 점, 한국의 자살률이 OECD에서 단연 1위라는 점은 주지의 사실이다. (국제 비교를 위해 OECD 기준인구로 연령 구조 차이를 제거한 표준화 사망률을 따졌을 때, OECD 평균은 10.6명, 한국은 22.6명이다.) 인간은 공동체 속에서 협력하고 연대하며 자신의 장점을 발휘할 때 행복감을 느끼기 마련이다. 비인간적 줄 세우기가 유일한 사회 구성 원리로 받아들여지는 시대, 경쟁의 승자에게는 넘치는 보상이 주어지지만 경쟁의 패자에게는 기초적 권리조차 박탈하는 것이 ‘공정과 정의’로 옹호되는 시대에, 제정신을 부여잡고 살라는 것 자체가 너무도 가혹한 요구일지 모른다. 보건복지부의 ‘2023 고립·은둔 청년 실태조사’에 따르면 전국에 1만 2,105명의 고립·은둔 청년(19세~39세)이 확인된다고 한다. 이 중 504명은 아예 방 밖으로 나오지 않는 고위험군이다. 고립·은둔 청년의 81%는 대학 이상의 고등교육을 받은 사람들이다. 이들이 고립·은둔을 선택하는 첫 번째 이유는 취업 등 직업 관련 어려움(24.1%)이었다. 임금 노동자의 54.7%(2023년 상반기 기준)가 300만 원 미만의 임금을 받는데도 ‘삼백충’이란 비하 표현이 버젓이 통용되는 시대에 청년들이 아프지 않을 도리가 없다. 윤석열 정부의 구역질 나는 ‘정신건강정책’ 심각성은 자본가 정부조차 외면할 수 없는 지경이다. 윤석열은 지난 12월 5일 ‘정신건강정책 비전선포대회’라는 것을 주재했다. 윤석열은 “급속한 산업 발전, 1인 가구의 증가, 가족을 비롯한 공동체의 붕괴, 과도한 경쟁 등으로 정신건강 문제가 심각해졌지만 국가 차원의 본격적인 투자가 거의 없었다”며, “정신건강 문제를 중요한 국가 아젠다로 삼고 적극 해결책을 강구”하겠다고 떠벌렸다. 구역질 나는 수작이다. 저들이 저출생의 심각성이나 정신건강 대책의 시급성을 떠드는 것은 어디까지나 자본 축적의 전제가 되는 노동력 인구의 양적·질적 저하를 걱정하는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정신건강정책 비전선포대회’에서 한 참석자가 “직장생활 스트레스가 정신건강을 넘어 생산성에도 문제를 야기하며, 개인의 정신건강은 기업의 경쟁력을 넘어 국가의 경쟁력에도 영향을 미친다”고 발언한 것, 윤석열이 “정신건강 문제는 ‘사회안보’에 해당하는 문제”라고 지껄인 것은 이런 맥락이다. 자본의 이윤을 철두철미하게 수호하는 자본가 정부는 정작 수많은 사람을 병들게 하는 자본의 이윤 질서에 대해서는 털끝만큼도 건드릴 생각이 없다. 오히려 무한경쟁과 부당한 차별을 ‘정의와 공정’으로 포장하며, 성평등의 절박한 요구는 ‘더 이상 구조적 성차별은 없다’는 말로 뭉개버리고, 노동시간 단축과 일자리 나누기 대신 장시간 유연 노동시스템을 강제하는 것이 현 자본가 정부다. 그런 자들이 “일상적 마음돌봄 체계”를 구축해 “예방부터 치료, 회복에 걸친 전 과정의 지원체계를 획기적으로 전환”하겠다고 떠드는 것은 꼴불견이다. 죽지 말고 함께 살자 누군가 아직 이 세상이 살만하다고 느낀다면, 그것은 자신의 계급적 지위 또는 계급 ‘내’에서의 위치를 객관화하지 못한 탓이라 해야 옳다. 경쟁에서 살아남은 소수의 승자를 제외한 나머지 패배자들에게, 한국의 자본주의는 이미 지옥이다. 불안정 고용과 저임금으로 고통받음에도 경쟁의 승자들이 자랑스레 내뿜는 성공 논리 앞에 무력하게 침묵해야 하는 사회에서 불행과 우울은 피할 수 없는 숙명이다. 모두의 ‘정신건강’은 잃어버린 인간다움을 회복하는 것을 통해서만 실현될 것이다. 경쟁에서 살아남은 소수가 사회적 특권을 독점하고 경쟁에서 패배한 절대 다수는 일체의 권리에서 배제된다면, 잘못은 경쟁에서 패배한 사람들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경쟁 질서 그 자체에 있다. 내가 느끼는 고통이 혼자만의 것이 아니라 자기 노동력을 판매해야 생존 가능한 노동자계급 다수의 보편적 고통이라는 것, 노동자계급의 빈곤과 박탈 맞은 편에는 노동자계급으로부터 거대한 부를 앗아간 한 줌의 자본가계급이 있다는 것, 저들 자본가계급이 누리는 무제한적 권력에는 어떠한 정당성도 없다는 것, 노동자계급이 사소한 차이를 넘어 거대한 단결을 실현하면 자본가 세상을 뒤엎고 새로운 사회를 건설할 수 있다는 것, 이것을 인식하고 실천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상실한 인간성을 다시 되찾을 수 있다. 한마디로 노동자 계급투쟁의 복구를 통해서만 한국 사회의 각종 병리 현상은 비로소 치유 가능하다. 미조직 노동자들에게, 그리고 청년 노동자들에게 집단적 노동자투쟁이 하나의 ‘선택지’조차 아닌 시대에 막연한 얘기처럼 들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다른 길도 없다. 세계 곳곳에서 오랜 침묵을 깨뜨리고 노동자 계급투쟁이 진전하고 있는 지금, 한국에서도 그러한 길이 반드시 열릴 것이다. 자본주의에 더 이상 활로가 없다는 점은 명명백백(明明白白)하기 때문이다. 사회주의자들과 전투적 조직노동자 운동이 앞장서 전체 노동자들과 가난한 청년들, 차별과 억압에 고통받는 민중을 대변해 싸워나갈 때 거대한 노동자투쟁의 물결은 기필코 우리 앞에 다시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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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대 정원 확대로는 부족하다. 이윤 논리를 대신할 무상공공의료가 필요하다!사진: 경향신문 1987년 대통령직선제 개헌 이래 집권했던 역대 자본가 정권은 비록 껍데기일지언정 무언가 시대정신을 표방했다. 1992년 김영삼의 ‘군부독재 청산’, 1997년 김대중의 ‘민주주의와 시장경제’, 2002년 노무현의 ‘비정규직 보호’ 등이 그것이다. 2007년 이명박은 ‘7·4·7 경제성장’을 내세웠으며, 2012년 박근혜조차 ‘경제민주화’를 들고나와 표를 획득했다. ‘촛불정부’를 표방한 2017년 문재인도 다르지 않다. 유일하게 예외인 정권이 있다. 현 윤석열 정부다. 윤석열이 대체 무엇을 하겠다는 것인지 단번에 떠올릴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오로지 반(反) 민주당 정서로 집권하더니 뚱딴지같이 ‘공산전체주의’에 맞선 이념 투쟁을 강조했을 뿐이다. 최상석에 앉아 술자리를 주재하고 싶어서, 나랏돈으로 해외 유람을 다니고 싶어서 대통령을 했다는 시쳇말이 진실일지도 모른다. 정치철학이 없으니 그게 무엇이든 제대로 추진되는 정책도 없다. 보험료율과 소득대체율이라는 고갱이를 모두 빠뜨린 안을 ‘국민연금 개혁안’이라고 포장하는 뻔뻔함을 보라. 정치공학에 따른 지지율 계산과 외국 정상과 셀카를 찍는 포퓰리즘 정치가 윤석열 정부의 전부라 해도 무엇이 틀리겠나. 그런 윤석열 정부조차 어쩔 수 없이 추진해야 하는 정책이 있다. 바로 의대 입학정원 증원이다. 한국 의사 수는 OECD 평균을 한참 밑돈다 턱없이 부족한 한국의 의사 숫자 지난 10월 윤석열은 “지역·필수의료를 살리고 초고령 사회를 대비하기 위해 의료인력 확충과 인재 양성은 필요조건”이라며 의대 정원을 늘리겠다는 입장을 공식화했다. 의사 숫자가 턱없이 부족한 현실이 더는 외면할 수 없는, 발등에 떨어진 불이 되었기 때문이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은 2035년 부족한 의사 수를 2만 7,232명으로 예측한 바 있다. 전문가들의 분석도 엇비슷하다. 김진현 서울대 보건경제학 교수는 한국에서 인구 1천 명당 활동의사 수는 2.3명(한의사 제외 때는 2.0명)으로, OECD 회원국 평균 3.5명의 65.7%(한의사 제외 57.1%) 수준이라고 밝혔다. 특히 한국의 경상의료비(전 국민이 1년 동안 보건의료를 이용하는 데 지출한 총액)는 2022년 209조 원에 달하는 등 1인당 의료이용량이 OECD 평균의 두 배 수준에 이른다. 1인당 의료이용량과 고령사회로의 진입 속도 등을 고려하면 한국의 의사 숫자 부족은 수수방관할 수준이 아니다. 흥미로운 관전 포인트는 윤석열 정부가 자신의 주요 지지기반이기도 한 특권층 의사 집단의 반발을 어떻게 누그러뜨릴 것인가 하는 점이다. OECD의 ‘2023년 보건통계’에 따르면, 한국 봉직의의 연간 임금소득은 19만 2,749달러(약 2억 4,600만 원, 2020년)로, 관련 통계를 제출한 OECD 회원국 28개국 중 가장 많다. 또 개원의 소득은 29만 8,800달러(약 3억 8,200만 원, 2020년)으로 역시 OECD 최상위권이다. 한국에서 의사가 된다는 것은 이처럼 부와 사회적 지위를 평생 보장받는다는 것을 뜻한다. 비인간적 입시경쟁교육 체제에서 수많은 학부모들이 초등학생 자녀를 의대 입학반에 보내는 현실이 드러내듯이 말이다. 의사 집단은 자신들이 누리는 특권을 포기할 생각이 조금도 없다. 문재인 정부 시절, 수련의들이 주 80시간의 살인적 노동에 시달리면서도 공공의대 설립을 통한 의사 증원은 ‘공정성 훼손’이라며 결사반대했던 것처럼 말이다. 대한의사협회는 당장에 의대 정원을 3,000명 늘려야 한다고 주장한 김윤 서울대 교수(의료관리학)의 징계를 추진하고 있으며, 활동의사 수가 10년 전에 비해 2만 1,611명 증가해 증가율로는 OECD 평균의 1.41배라는 궤변을 늘어놓으며 의대 정원 증원을 막으려 들고 있다. 노동자들의 생존권 투쟁에는 ‘불법’이라는 딱지를 남발하며 악질 선동을 서슴지 않았던 윤석열 정부가 의사들의 다이아 밥그릇 지키기에는 어떻게 나올지 두고 볼 일이다. 의대정원 확대 대응을 위한 긴급의료계 대표자 회의. 출처: 대한의사협회 의사 숫자가 늘어난다고 문제가 해결될까? 그러나 노동자들이 주목해야 하는 것은 단순히 의대 정원을 늘리는 문제가 아니다. 의사 숫자가 대폭 늘어나봤자, 오늘날 한국 사회가 맞닥뜨린 의료격차, 의료공백은 절대 해소되지 않기 때문이다. 시야를 넓혀 보자. 오늘날 수많은 노동자 민중이 생활고에 시달리는 이유는 이 사회 전체의 생산력이 부족한 까닭인가? 내로라하는 선진국 영국에서 25%의 국민이 끼니를 거르거나 줄이는 이유는 절대적 식량 생산량이 부족해서가 아니다. 한편에서는 재화가 무분별하게 낭비되지만, 반대편에서는 필수재의 부족 현상이 상시로 벌어지는 까닭은 자본주의가 이윤 논리로 움직이는 체제이기 때문이다. 예컨대 자본은 목전에 당도한 기후재난조차 아랑곳하지 않은 채 전쟁 무기 개발, 쓸데없는 마케팅, 금융투기 등에는 천문학적인 자원을 투자한다. 반면 재생에너지 생산이나 인류의 기본 생활을 보장하기 위한 생필품 생산에는 충분한 자원이 투입되지 않는다. 돈이 안 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단순히 의사 숫자가 늘어난다고 해도 의료격차와 의료공백이 자연히 해소될 거라 기대하기 어렵다. 현재 급선무로 지적되는 지방 공공의료기관의 의료공백 문제를 보자. 보건복지부 자료에 따르면 지방의료원 35곳은 의사 정원 1,330명보다 87명이 부족하며, 국립대병원 17곳은 정원 8,942명보다 무려 1,940명이 부족한 것으로 집계되고 있다. 지방의료원 35곳 중 23곳에서 휴진 과목이 발생하고 있으며, 속초의료원의 경우 18개 진료과목 중 신경외과·정형외과 등 6개 진료과가 개점휴업 상태다. 의대 정원을 늘려 신규 의사를 대량으로 배출하더라도, 이들 중 인구 이천만 명이 넘는 광역수도권 또는 대도시를 두고 저출생으로 소멸 위기에 놓인 지방에서 병원을 차릴 의사가 과연 얼마나 있겠는가? 진료과목별로 적정 의사 수를 계획적으로 배치하고, 진료과목의 특성에 맞춰 의료인력의 적정한 노동강도를 보장하는 일이 단순히 배출되는 의사 수를 늘리는 것만으로 가능하겠는가? 전면적 무상공공의료 체계를 향해 의료공백을 해소하고, 이주민·정주민의 차별 없이 모든 인민이 의료 혜택을 보편적 기본권으로 누리기 위해서는 의료 영역에서 일체의 영리 추구 행위를 중단시켜야 한다. 생명을 구하는 데 헌신하려는 의사를 대규모로 양성하고, 이들을 의료 수요에 맞춰 지역별·부문별로 계획적으로 배치하며, 진료과목마다 적정한 노동강도를 보장하고 제대로 된 경제적 보상을 제공하기 위해서는 의료 부문을 전면 국영화해야 한다. 이것은 자본주의 역사를 돌이켜보더라도 특별히 급진적인 요구도 아니다. 20세기 초반 강력한 노동자투쟁을 기반으로 형성됐던 서구의 무상의료 체계가 단적인 예다. 무상공공의료 체계를 위한 재원은 제약자본의 신약 제조 지적재산권 독점을 철폐하는 등 그간 의료·제약자본이 누려온 천문학적인 이윤을 몰수하면 충분히 마련할 수 있다. 금융자본이 돈벌이 수단으로 운영하는 의료실비보험을 건강보험으로 통폐합해 과잉진료를 예방하고 꼭 필요한 사람에게 맞춤형 의료서비스를 제공하게 하는 것도 필수적이다. 또한 공공의료체계에서 계획적으로 배치된 의료인력은 사후 치료보다는 질병 예방에 초점을 맞춤으로써 의료 역량의 불필요한 낭비도 막아낼 것이다. 결국 이 모든 문제의 핵심은 명료하다. 자본의 이윤이 우선이냐, 아니면 돈 걱정 없이 모든 인민이 온전히 치료받을 권리가 우선이냐 하는 것이다. 아픈 사람을 긍휼히 여기고 돕고자 하는 마음, 이것은 모든 사람이 가진 자연적 본성이다. 치료받을 권리마저 돈벌이의 논리로 재단하는 자본주의, 그 야만을 이제는 중단시켜야 한다. 사진: 노동과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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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주의 경쟁 격화와 동아시아 전쟁 위기 - “당신은 전쟁에 관심이 없을지 몰라도, 전쟁은 당신에게 관심이 있다.”이 글은 사회주의를향한전진이 8월 12~13일 개최한 2023 정치캠프 ‘위기‧전쟁‧혁명’의 2일차 메인 세션 “제국주의 경쟁 격화와 동아시아 전쟁 위기”의 논의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발제문과 토론문은 전진 홈페이지 자료실에서 내려받을 수 있다.) 격화하는 미중 패권 경쟁 8월 18일 미국 대통령 별장인 캠프 데이비드에서 한미일 3국 정상회의가 열렸다. 한미일 자본가 정부의 수뇌들은 소위 “규칙 기반 국제질서에 부합하지 않는 행동” 운운하며 또다시 중국을 정면으로 겨냥했다. 핑계로야 늘 북핵을 먼저 내세우지만, 미 제국주의가 찍어 누르려는 진짜 주적이 중국이라는 것을 모르는 이는 아무도 없다. 이들은 “남중국해에서의 중화인민공화국에 의한 불법적 해상 영유권 주장”과 “대만해협에서의 평화와 안정”을 위협하는 “일방적 현상 변경 시도에 강하게 반대”하며, “한미동맹과 미일동맹 간 전략적 공조를 강화”해 “3자 훈련을 연 단위로, 훈련 명칭을 부여해 여러 영역에서 정례 실시”하겠다고 밝혔다. 오늘날 제국주의 양강의 하나인 중국 역시 물러설 기미가 없다. 19일 중국 환구시보는 “캠프 데이비드 정상회의가 신냉전으로 나아가는 진군나팔을 부는 격”이라 비난했다. 특히 “미국은 한국과 일본을 속여서 이들이 자국의 국익을 기꺼이 포기하고, 미국을 위해 신냉전의 제일선에 보초를 서도록 하는 데 목적이 있다”며 미 제국주의의 하위 파트너 일본과 한국에 강력한 경고를 보냈다. 앞서 중국 싱하이밍 주한대사가 민주당 이재명과 만난 자리에서 “중국 패배에 베팅하는 이들은 나중에 반드시 후회한다”며 외교적 관례에 어긋나는 설화(舌禍)를 일으킨 것도 잘 알려진 일이다. 이처럼 미중 간 긴장이 지속적으로 고조되는 와중에도, 천둥벌거숭이 같은 윤석열 정부는 미중전쟁의 최전선에 서는 것을 마다하지 않은 채 한미일 삼각동맹에 올인하고 있다. 21일 윤석열은 “‘안보가 위험하다’는 식의 주장이 있다는데, 3국 협력을 통해 우리가 강해지면 외부의 공격 리스크가 줄어드는데, 어떻게 안보가 위험해진다는 것이냐”며 도리어 큰소리를 쳤다. 하기야 날이 갈수록 제국주의 대리전 성격을 명확히 하는 우크라이나 전쟁 현장을 방문해 뚱딴지같이 “생즉사(生卽死), 사즉생(死卽生)의 각오”와 같은 소리를 늘어놓았던 치에게 대체 무엇을 기대하겠는가. 미중 패권 경쟁으로 동아시아 전쟁 위기가 현실화하는 과정에서 열린 이번 정치캠프와 토론회의 의미는 그래서 결코 적지 않다. 동아시아 노동자 민중의 국제연대야말로 노동자 민중의 진짜 안전보장을 위한 유일한 길이기 때문이다. 발제: “당신은 전쟁에 관심이 없을지 몰라도, 전쟁은 당신에게 관심이 있다.” 오연홍 동지는 트로츠키가 남긴 말로 알려진 문구를 인용하며 발제를 시작했다. 격화하는 미중 패권 경쟁의 양상을 살펴볼 때 노동자 민중이 전쟁 위기에 무관심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는 것이다. 최근 일대일로 사업을 벌이며 팽창주의를 취하는 중국 자본주의의 모습은 중국 자본주의의 축적 논리 자체에 기반한 것이며, 이는 “세력권의 재분할을 향한 도전을 지시”하게 된다. 중국 자본주의의 이러한 요구는 미국 자본주의 입장에서는 “살점을 떼어달라”는 요구와 다르지 않다. 이미 20세기 초반, 제국주의 강대국 사이의 세력권 재분할이 야만적 세계대전으로 치달았던 참혹한 비극을 인류는 생생히 경험했다. 당시 레닌은 강대국마다 불균등한 자본주의 발전 속도 때문에 벌어지는 자본 축적과 세력권 분할 사이의 불균형을 없애는 데서 전쟁 말고는 다른 어떤 수단도 없을 것이라 예견한 바 있다. 오연홍 동지 역시 경쟁하는 세력들이 충돌하며 세력 관계의 재조정이 이루어지는데, 그 결과가 각 세력의 힘에 조응하는 합당한 재조정인지 검증하는 길은 서로의 힘을 직접 시험해보는 것일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물론 전쟁에서 가장 격심하게 희생되는 계급은 언제나 노동자들이다. 오연홍 동지는 구체적으로 대만해협의 위기가 미중 간의 전쟁으로 번진다는 가정 아래, 한국은 어떤 시나리오를 검토하더라도 제국주의 전쟁의 한복판에 휘말려 들어간다고 역설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에게 던져진 질문은 전체 노동자 민중이 “제국주의 경쟁이 부추기는 전쟁 위기에 때늦지 않게 대응하면서, 이 위기를 끝장낼 수 있을까?”가 된다. 역사는 이미 해답을 제시한 바 있다. 1917년 러시아혁명이다. 오연홍 동지는 “제국주의 경쟁과 전쟁이 국가권력 수준의 충돌인 이상 노동자가 국가권력을 손에 넣어야 실질적인 대응이 이루어질 수 있다는 점은 당연한 일”이라며, “결정적인 반제반전 운동은 곧 노동자혁명을 향한 운동”이라고 강조했다. 지금 당장 우리 눈 앞에 펼쳐진 노동자 운동의 상태나 일상을 장악한 자본주의 정신을 보면 너무 먼 얘기처럼 들릴 수도 있지만, 오늘날 자본주의가 전쟁 위기를 비롯한 모든 종류의 위기를 동시다발로 일으키며 우리의 생존을 위협한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따라서 대중의 정서가 급진적으로 바뀔 수 있는 변화가 일어날 때 “우리가 총체적인 정치 대안을 제시하는 세력으로 대중 앞에 설 수 있는가 하는 점”이 핵심이다. 노동자 운동의 계급적, 정치적, 국제적 역량을 발전시키기 위한 구체적 실천이 필요하다. 토론: 노동자계급의 국제주의적 연대를 향하여! 발제에 이어 세 동지의 토론이 진행됐다. 먼저 금속노조 대우조선지회의 김정열 동지가 조선업 현장에서 이주노동자를 조직해온 계급적 연대 사례를 발표했다. 김정열 동지는 거제노동안전보건활동가모임 간사로서 노동자 건강권 활동도 하고 있는데, 특히 석면 산업이 제3세계 국가로 이전되는 과정을 지적하면서 제국주의 수탈이 현재에도 이어지고 있음을 지적했다. 이어 조선업 하청업체에 대거 고용된 이주노동자를 조직하는 활동을 소개하면서, 성별‧직종‧고용 형태에 따른 차별이 여전한 현장에서 이주노동자 차별을 이야기하는 것 자체가 상당히 어려운 일이라 토로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노동자 국제주의 원칙 아래 계급적 연대를 지속적으로 실천하는 것의 의미는 대단히 크다. 참석자들 모두 같은 뜻으로 김정열 동지에게 큰 박수를 보냈다. 다음으로 금속노조 아사히비정규직지회 차헌호 동지가 “사드 투쟁으로 경험한 제국주의와 전쟁 위기”라는 주제로 2017년부터 8년째 이어오고 있는 성주 사드기지 투쟁에 연대한 경험을 발표했다. 사드 투쟁 현장에서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 국가권력의 야만적 폭력이 자행된다며, 그럼에도 왜 ‘좌파’ 동지들은 사드 투쟁에 잘 오지 않는지에 대한 의문을 제기했다. (이에 관해 오연홍 동지는 노동자들이 주도하는 반제반전 운동뿐만 아니라 노동자들이 주도하는 기후정의 운동, 노동자들이 주도하는 페미니즘 운동 역시 턱없이 부족하다며, 넓게 보면 노동자 운동이 조합주의적, 경제주의적 약점과 한계를 뚫고 나가기 위한 의식적 실천이 부족했다고 지적했다.) 또 아사히비정규직지회가 2015년부터 일본을 방문해 일본 노동자들과 함께 아사히글라스 본사에서 연대투쟁을 벌인 경험을 소개하며, 일본 노동자들이 자발적으로 아사히글라스 본사에 항의하는 투쟁을 보고 배운 덕분에 2019년 도로공사 톨게이트 투쟁 때 아사히비정규직지회도 김천 도로공사 본사 연대집회를 할 수 있었다고 밝혔다. 마지막으로 학생사회주의자연대의 김종형 동지는 전쟁이 터지면 가장 큰 희생을 치를 계층이 청년‧학생인데도 왜 청년층이 전쟁 위기에 무관심하며 나아가 중국과 제3세계 국가에 혐오 정서를 보이는지를 분석했다. 김종형 동지는 애국주의와 국가주의가 청년‧학생에게 강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지적했는데, 청년층이 미국과 일본과 같은 제1세계 국가들에 대해서는 긍정적인 시각을 보인다는 점을 고려하면 최근 청년층을 지배하는 능력주의가 국제관계를 인식하는 데서 어떻게 발현하는지에 대한 분석도 필요해 보인다. 참가자 토론: 중국과 러시아는 제국주의 국가인가? 간단한 질의응답 이후 진행된 플로어 토론에서는 먼저 울산 노동자 동지들이 진행해 온 미얀마 항쟁 국제연대에 대한 상황 공유가 있었다. 울산의 한국 노동자들이 미얀마 항쟁에 지속적으로 연대하는 실천을 벌이면서, 미얀마 이주노동자들이 과거에는 한국 사업주에게 저항하지 못했지만 지금은 사업주들에게 저항하는 모습을 보인다는 것, 이를 스스로도 가장 달라진 모습이라고 이야기한다는 사례가 공유됐다. 노동자 국제주의를 실천해 나가는 것은 이처럼 멀리 있는 일이 아니다. 이어진 참가자 토론의 주요 주제는 중국과 러시아를 제국주의 국가로 규정하는 것이 타당한가 하는 점이었다. 이날 토론회에 참석한 ‘볼셰비키그룹’ 동지들은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를 철폐하는 것이 사회주의자의 근본 지향인데, 중국은 기간산업의 70% 이상이 국영기업으로, 국가 소유가 지배적인 사회다, 즉 사적 소유가 철폐된 사회이기 때문에 미국과 갈등을 일으킨다는 취지로 주장했다. 이는 중국을 모종의 노동자국가로 이해하는 논리다. 또한 볼셰비키그룹 동지들은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에 대해서도, 러시아는 최저임금이 베트남보다 낮고 기술력이 후진적이기 때문에 제국주의로 규정할 수 없다, 미국을 정점으로 한 제국주의는 금융자본의 초과이윤을 극대화하기 위한 팽창정책을 의미하는데, 서방 제국주의가 푸틴을 반대하는 것은 푸틴이 서방 금융자본의 착취를 제한하기 때문이다, 사회주의자는 미 제국주의와 하수인의 패배를 위해 싸워야 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이에 관해 사회주의를향한전진 동지들의 반박이 이어졌다. 첫째, 중국이 자본주의, 제국주의 국가인지 여부다. 발제자 오연홍 동지는 사회주의자들이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 폐지를 위해 투쟁하는 이유는 법률적 소유 형식의 변경을 위해서가 아니라, 노동자들이 자기 노동을 전혀 통제하지 못하는 현실에 반대하고 노동자들의 자주적 사회 운영을 실현하려는 취지라고 응답했다. 중국을 모종의 노동자국가라고 부르면 무엇보다도 중국에 진출한 자본가들이 제일 먼저 비웃을 것이라며, 중국은 노동자계급의 자주적 통제와 전혀 무관한 나라라고 지적했다. 다음으로 러시아를 제국주의로 규정할 수 있는지에 대해, 전진 동지들은 1차 세계대전기에 러시아는 현재보다도 더 낙후한 후진 자본주의 국가였음에도 레닌은 러시아를 제국주의라고 규정했는데, 이는 당시 러시아가 주로 금융자본의 힘에 의존한 다른 제국주의 열강 유형과는 달리 주로 군사력을 동원해 식민지를 강점하고 세계 패권을 추구했기 때문이며, 오늘날 러시아가 선진 기술은 취약할지라도 레닌이 ‘군사적 제국주의’라고 표현했던 속성을 그대로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러시아를 제국주의로 규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더 나아가 ‘1980년대 대중적인 반미반핵 운동으로 한반도에서 쫓겨난 미군의 전략 핵잠수함이 수십 년 만에 부산항에 입항했지만 이번에는 대중적 분노가 터져 나오지 않는다. 그 사이 북한의 핵무장이 이뤄지고, 중국의 제국주의적 굴기가 있었기 때문이다. 반제반전 운동에 취약했던 좌파 운동의 반성은 있어야 하나, 북한의 핵무장과 중국의 제국주의 속성에 대해 말하지 않는 통일운동은 더이상 청년층을 감동시킬 수 없다’는 발언이 있었다. 또 다른 동지는 ‘노동자 국제주의란 노동자계급의 국제적 단결을 이루는 것이다. 중국과 러시아는 노동자계급의 국제적 단결을 억압하며, 자국에서 자주적인 노동조합 운동과 파업권조차 인정하지 않는다. 그런 상황에서 노동자들에게 중국과 러시아를 방어해야 한다, 이 나라는 제국주의가 아니라고 말할 수는 없다. 사회주의란 사적 소유를 철폐하는 것이지만 동시에 노동자계급에게 우리가 지향하는 사회가 어떤 사회인지를 대답하는 것이다’라는 의견을 밝혔다. 제국주의 진영의 분할과 대립이 가속화할수록, 제국주의 양대 진영의 지배계급 모두에 반대하고 자국 지배계급의 패배를 향해 진군하려는 노동자 국제주의 운동은 어설픈 양비론으로 매도되기 십상이다. 오연홍 동지가 언급했듯이, 1차 세계대전 한복판에서 ‘제국주의 전쟁을 내전으로’라는 구호를 내세웠던 혁명가 레닌이 러시아에서 ‘독일의 간첩’이라는 비난을 받았던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다른 길은 없다. 오직 노동자계급의 혁명적 국제연대가 미증유의 전쟁으로부터 인류를 구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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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저임금30%인상 연속기고] 최저임금 투쟁주체, 어떻게 확대할 것인가노동자들이 투쟁으로 쟁취한 최저임금 제도의 위력은 보편성에 있다. 성별‧직종‧고용형태‧국적을 불문하고 어떤 노동자라도 동일한 최저수준의 임금을 받아야 한다는 최저임금 제도는 그 자체로 노동자들의 계급단결의식을 북돋운다. 자본가들이 틈만 나면 최저임금의 업종별, 지역별 차등적용을 부르짖는 이유가 이것이다. 저들은 최저임금 제도의 보편성을 허물어뜨림으로써 노동자들 사이의 분열과 갈등을 조장하려 든다. 노동자들의 분열이야말로 자본의 천년왕국을 건설하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이다. 반면 노동자들의 거대한 위력은 오로지 단결에서 나온다. 전체 노동자들이 ‘단 한 명의 예외도 없이 모든 노동자들에게 최저임금을 전면 보장하라’는 요구를 내걸고 싸우는 것이 꼭 필요한 이유다. 출처: 참여와 혁신 플랫폼‧특수고용 노동자들에게 최저임금을 지급하라 현행 최저임금법은 시간급(時間給)을 기본으로 정해져 있는데, 플랫폼‧특수고용 노동자들의 경우 노동시간을 정확히 산정하기 어렵다는 이유로 최저임금 적용이 배제되고 있다. 그러나 이는 같잖은 핑계에 불과하다. 오늘날의 플랫폼‧특수고용 노동자들이 그런 것처럼, 노동시간이 아니라 작업 성과물의 개수나 작업량에 따라 임금을 지급하는 ‘성과급제’ 또는 ‘도급제’는 자본주의 역사에서 아주 오래된 임금 지급 형태이기 때문이다. 마르크스가 지적했듯이 ‘성과급제’ 또는 ‘도급제’는 임금이 노동자들의 개별적 능력 차이에 따른 것처럼 보이게 해 노동자들의 경쟁을 촉진하고, 그 결과 노동시간을 연장하고 임금을 인하하는 지렛대 구실을 한다. 그러나 사업장 전체로 보면 개인적 차이는 상쇄되고 평균적으로 일정한 노동시간에 일정한 노동생산물이 산출된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즉 ‘성과급제’ 또는 ‘도급제’는 언제든지 ‘시급제’로 환산 가능한 임금 지급 방식이다. 근로기준법 제47조(도급 근로자)가 “사용자는 도급이나 그 밖에 이에 준하는 제도로 사용하는 근로자에게 근로시간에 따라 일정액의 임금을 보장하여야 한다”라고, 또 최저임금법 제5조제3항이 “임금이 통상적으로 도급제나 그 밖에 이와 비슷한 형태로 정하여져 있는 경우로서 제1항에 따라 최저임금액을 정하는 것이 적당하지 아니하다고 인정되면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바에 따라 최저임금액을 따로 정할 수 있다”라고 명시해 둔 이유가 이것이다. 이미 최저임금위원회는 2021년 『플랫폼 노동자의 생활실태를 통해 살펴본 최저임금 적용방안』 연구용역을 진행해, 플랫폼 노동자의 평균 수입 125.2만원(택배노동자 198.2만원, 가사서비스노동자 17.6만원, 음식배달노동자 160.4만원, 대리운전기사 39.9만원)을 평균 노동시간으로 나눠 산정한 평균 시급이 2022년 최저시급 9,160원에도 못 미치는 수준임을 확인한 바 있다. 그런데도 지금까지 플랫폼‧특수고용 노동자들에 대한 최저임금 적용을 미적거릴 이유가 무엇이란 말인가? 즉각 노동시간에 따른 최저임금을 전면 적용해야 하며, 이때 플랫폼 앱에 로그인한 시간부터 로그아웃한 시간 전체를 노동시간으로 간주해야 한다. 노동자가 시간에 대한 자기 통제권을 상실한 채 사용자의 지휘ㆍ감독 아래 놓여있는 대기시간은 본래 노동시간이기 때문이다(근로기준법 제50조제3항). 나아가 실노동시간 측정이 어렵거나 기준을 정하기 어려운 경우에도 전체 작업량에 대한 평균적 노동시간을 측정하여 단위 작업량에 대한 최저 보수를 지급하도록 해야 한다. 현장실습노동자들에게 근로기준법을 적용하고 최저임금을 지급하라 사업 운영에 필요한 노동자의 숙련 향상을 위한 교육 책임은 당연히 자본에 있다. 근로기준법 제77조(기능 습득자의 보호)조차 “사용자는 양성공, 수습, 그 밖의 명칭을 불문하고 기능의 습득을 목적으로 하는 근로자를 혹사…시키지 못한다”고 정해 이 점을 명확히 하고 있을 정도다. 그러나 직업교육 훈련이라는 허울 아래 최소한의 근로기준법도, 최저임금도 적용되지 못한 채 합법적으로 ‘혹사’ 당하는 노동자들이 있다. 바로 특성화고 현장실습생 노동자들이다. 영화 ‘다음 소희’의 모티브가 된 2017년 전주 콜센터 현장실습생 사망 사건, 같은 해 제주 음료공장 현장실습생 사망 사건, 2021년 여수 요트업체 현장실습생 사망 사건 등 잇따른 산재사망 사고가 보여주듯, 이들은 명목상으로만 ‘직업교육훈련생’ 신분일 뿐 여타 노동자들과 전혀 다를 바 없이 임금노동을 수행하고 있다. 그러나 직업교육훈련촉진법의 적용을 받는 이들에게는 기초적인 노동법도 적용되지 않는다. 현재 현장실습 노동자들은 근로기준법의 휴게시간 등 일부 규정과 산재보험법 정도만 적용되고 있다. (그나마 영화 ‘다음 소희’의 영향으로 직장 내 괴롭힘 금지 등 근로기준법 일부 조항을 10월부터 추가 적용하도록 직업교육훈련촉진법이 개정됐으나, 근로기준법의 핵심 조항은 여전히 미적용된다.) 최저임금 역시 적용되지 않아 한 달 치 ‘수당’으로 고작 50만 원을 받는 현장실습 노동자들이 부지기수다. 이마저도 근로기준법상 임금에 해당하지 않아 수당을 떼이고도 노동청에 신고조차 못 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출처: 부산청소년노동인권네트워크 이 터무니없는 야만적 현실을 언제까지 지켜보아야 하겠는가? 현장실습 노동자들에 대한 직업교육훈련촉진법 적용은 한마디로 국가폭력에 불과하다. 직업교육이라는 허울 아래 무제한적 착취를 허용하는 현행 현장실습생 제도는 마땅히 폐지돼야 한다. 물론 이것은 현장실습생 노동자들이 스스로를 노동자계급의 일원으로 조직하고 자주적으로 권리를 쟁취하는 과정을 통해 이뤄져야 한다. 지금 즉시 현장실습 노동자들에게 최저임금법을 포함한 모든 노동법을 전면 적용하는 것이 필요한 이유다. 나아가 유해‧위험작업, 야간노동을 완전히 금지하고 현장실습생 노동자들의 노조할 권리를 전면적으로 보장하는 것도 필요하다. 특성화고 현장실습생 노동자들은 다음 세대의 노동자운동을 이끌어갈 주역들이기도 하다. 현장실습 노동자들에 대한 최저임금 전면 적용, 노조할 권리 등 노동기본권 완전 보장은 현장실습 노동자들의 계급의식을 성장시키는 첩경이 될 것이다. 현장실습 노동자 초과착취에 맞서는 조직노동운동의 실천이 중요하다. 현장실습 노동자들이 사업장에 채용될 경우, 노동조합과 활동가조직은 현장실습 노동자들의 임금과 노동조건을 면밀하게 살피고 연대를 조직해야 한다. 동일노동 동일임금 지급, 고위험 업무와 야간노동 금지, 사업장 단체협약이 명시한 노동조건 동일 적용, 현장실습 이후 정규직 채용 등을 요구하자. 연장시급으로 최저임금도 못 받는 하청 노동자들에게 최저임금을 지급하라 문재인 정부가 최저임금법을 개악해 최저임금 산입범위를 확대함으로써 최저임금 인상 효과를 무력화한 것은 잘 알려진 일이다. 실제로 많은 사업장에서 법 개악 이후 정기 상여금이 월 최저임금에 녹아들었다. 그런데 여기서 끝이 아니다. 최근 연장시급이 최저임금에도 못 미치는 사업장이 속출하고 있다. 최저임금의 산입범위는 최저임금법에 따라 정해지는 데 비해 통상임금은 근로기준법 시행령의 해석에 따라 그 범위가 정해진다. 즉 현재 법률적으로 최저임금과 통상임금의 개념이 통일돼 있지 않아 통상임금이 최저임금에 못 미쳐도 위법이 아니다. 따라서 최저임금이 9,620원이더라도 통상임금의 고정성 요건을 가지고 장난을 치면 통상임금은 8,000원으로 맞춰두는 것도 가능하다. 예컨대 기본급 1,672,000원, 보전수당 338,580원으로 월 2,010,580원을 지급하는 사업장이 있다 치자. 이때 최저임금은 9,620원(=2,010,580원÷209시간)이다. 그런데 보전수당은 임금 지급일에 재직하는 노동자에게만 지급한다는 조건을 붙여두면, 보전수당 338,580원은 고정성 요건을 충족하지 못해 통상임금에서 제외된다. 즉 통상임금은 8,000원(=1,672,000원÷209시간)에 그치게 된다. 따라서 근로기준법 제56조제1항에 따라 연장근로에 대해 “통상임금의 100분의 50 이상을 가산”해 지급할 때 50% 가산분으로 4,810원(=9,620원×50%)이 아니라 4,000원(=8,000원×50%)를 지급할 수도 있는 것이다. 자본가 정부의 고용노동부는 여기서 한 발 더 나갔다. “시간급 통상임금이 시간급 최저임금보다 낮더라도 통상임금을 기준으로 연장근로에 대한 임금(100%) 및 가산수당(50%)을 산정”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즉 위의 예에서, 8시간 이내 노동에 대해서는 9,620원의 시급을 받던 노동자가 8시간을 초과해 일을 하게 되면 기본 시급으로 8,000원만 받아도 무방하다는 것이다. 이것이 2023년 한국지엠 부평공장 하청업체 더원테크에서 벌어지는 일이다. 자본가 정부는 통상임금과 최저임금의 개념을 일치시켜야 할 기본적 의무조차 유기한 채, 자본가들의 최저임금 위반을 묵인하고 조장하고 있다.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을 하든, 한 시간의 노동에 대해 무조건 최저임금 이상을 지급하라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요구다. 출처: 한국지엠 부평비정규직지회 모든 노동자들의 연대로 최저임금 30% 인상 쟁취하자 이 밖에도 최저임금 제도가 온전히 적용되지 않는 노동자들이 부지기수다. 노동자성 자체가 부정되는 프리랜서 노동자, 노동 능력이 떨어진다는 이유로 최저임금의 22~27%만 받는 장애인 노동자, 비닐하우스 숙소를 제공받으면서도 최저임금의 15~20%를 갈취당하는 이주노동자들이 그렇다. 최저임금이 적용된다 해도 허울뿐인 경우도 허다하다. 2018년~2022년 8월까지 5년 동안 고용노동부가 근로감독으로 적발한 12,907건의 최저임금 위반 건수 중에 사법처리 비율은 고작 0.6%, 단 72건에 그쳤던 것처럼 말이다. 물가 폭등으로 인한 실질임금 하락, 확대되는 소득 불평등 앞에서 최저임금 30% 인상을 요구하는 것은 완전히 정당하다. 그리고 이를 실현하는 유일한 길은 최저임금 투쟁주체를 확대하며 모든 노동자의 연대총파업을 조직하는 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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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전한 노조법 2·3조개정 연속기고] 왜 노조법 2‧3조 개정을 요구하는가?사진: 연합뉴스 자기 노동력을 매일 판매해야 생존할 수 있는 노동자들이 나 홀로 자본의 독재에 맞서기란 불가능하다. 조금이라도 입바른 소리를 내는 순간 자본가들은 즉각적으로 해고를 단행할 것이기 때문이다. 노동자의 취업과 실업에 독재권을 행사하는 자본가들에 맞서자면, 노동자들이 하나로 뭉쳐 집단으로서 사용자에 맞서는 것이 필수적이다. 노동조합은 인간답게 살고자 하는 노동자들이 본능적으로 만들어낸 단결의 무기이며, 자본의 전횡에서 노동자들을 지켜내기 위한 방어의 구심이다. 물론 노동조합을 조직할 권리는 하늘에서 거저 떨어지지 않았다. 노동조건 개선을 위해 다른 노동자와 결합하거나 파업에 나서면 3개월의 징역 또는 2개월의 중노동형에 처했던 단결금지법을 1824년 폐지시킨 이후에도, 세계 곳곳에서 셀 수 없는 노동자들이 노동조합을 건설하고 지키기 위해 고귀한 피를 흘렸다. 한국 민주노조 운동의 역사 또한 다르지 않다. 그러나 앞선 노동자들이 피로써 쟁취한 노동조합의 권리는 결코 반석 위에 놓인 탄탄한 권리가 아니다. 자본가들은 노동조합을 무력화하고 노동자들의 단결을 훼손하기 위해 치밀한 공작을 계속해왔다. 오늘날 한국에서 그것은 ① 하청노동자, 플랫폼‧특수고용노동자의 노동3권 봉쇄, ② 민사상 손배 가압류를 통한 노조 파괴로 구체화 되어있다. 노조법 2‧3조 개정투쟁은 노동조합을 분쇄하려는 자본의 공격에 맞서 노동조합을 방어하고 전체 노동계급의 단결로 나아가려는 투쟁이다. 노조법 2조 – 하청노동자, 플랫폼‧특수고용노동자의 노조할 권리 보장법 하청 노동자들의 노동조건 일체를 결정하는 자는 원청 자본가다. 형식적인 근로계약을 체결한 대가로 이윤의 부스러기를 나눠 먹을 뿐인 하청 바지사장들이 노동조건 결정에 실질적 권한이 없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일이다. 하청 노동자들의 임금은 누가 정하는가? 원청 자본가다. 원청 자본가가 용역계약, 도급계약이라는 명목으로 하청 바지사장과 체결한 계약의 인건비 총액을 노동자 숫자로 나눈 것이 하청 노동자의 임금이다. 하청 노동자들의 노동시간은 누가 통제하는가? 원청 자본가다. 하청 노동자의 노동시간은 원청의 생산일정과 작업물량에 맞춰 고무줄처럼 늘어나고 줄어든다. 하청 노동자들의 해고는 누가 결정하는가? 원청 자본가다. 물량이 줄어들었다거나 노조가 생겼다는 이유로 하청업체와의 계약을 해지해버리는 식으로 말이다. 그렇다면 이 모든 과정에서 진짜 사장인 원청 자본가는 하청 노동자들에 대한 노동법상 책임을 단 하나라도 부담하는가? 하청 노동자들이 진짜 사장인 원청 자본가를 상대로 단체교섭을 요구하고 파업에 나설 수 있는가? 모두 아니다. 원청 자본가는 자신은 하청 노동자들과 근로계약을 체결한 적이 없으니 아무런 책임도 없다는 소리만 앵무새처럼 반복하며 뻗댈 뿐이다. 이 터무니없는 간접고용 구조의 모순 앞에서 수많은 하청 노동자들이 진짜 사장의 책임을 요구하며 온몸을 내던졌다. 자본가 정부의 법원조차 “하청 근로자의 노무에 대하여 실질적인 지배·결정권을 보유하는 원청 사업주의 우월적 지위를 고려하면 하청 근로자의 근로조건에 대한 지배·결정의 범위는 원청 사업주의 의사결정에 따라 좌우될 수밖에” 없으므로, “근로조건에 대한 실질적 지배·결정권을 갖는 원청 사업주를 노동조합법상 사용자로 해석”해야 한다는 판결(서울행법 2023. 1. 12. 선고, 2021구합71748)을 내놓게 된 이유다. '원청 사업주 CJ대한통운을 노조법상 사용자로 해석하는 것이 노조법 입법 목적, 정의와 형평에 부합.' 사진: 전국택배노조 그러나 판결은 판결일 뿐이다. 원청 자본가의 책임을 인정한 판결 앞에서도 자본가들은 넘치는 돈을 소송 비용으로 쏟아부으며 시간 끌기로 일관할 것이 불 보듯 뻔하다. 노조법 2조의 ‘사용자’ 정의에 ‘노동자의 노동조건, 수행업무 또는 노동조합 활동에 사실상의 영향력 또는 지배력을 행사하거나 보유하고 있는 자’를 포함시키는 법 개정이 즉각적으로 필요한 이유다. 플랫폼‧특수고용노동자의 노조할 권리 보장을 위해 노조법상 노동자의 범위를 확대하는 것이 필요한 이유 역시 크게 다르지 않다. 이미 대법원이 수차례에 걸쳐 “노동조합법상 근로자에 해당하는지는 노무제공관계의 실질에 비추어 노동3권을 보장할 필요성이 있는지의 관점에서 판단하여야 하고, 반드시 근로기준법상 근로자에 한정된다고 할 것은 아니다”라고 판결했음에도 자본가들은 귀를 틀어막는다. 플랫폼‧특수고용노동자들이 노조를 만들어 단체교섭을 요구하면 수년이 소요되는 대법원 확정판결까지 받아오라며 버티기 일쑤다. 스스로를 노동자로 호명하고 노동조합을 조직했다는 사실만큼 “노동3권을 보장할 필요성”을 확증하는 일이 어디 있겠는가? 노조법 2조의 ‘근로자’ 정의에 “노동조합을 조직하거나 노동조합에 가입한 자는 근로자로 추정한다”는 문구를 추가해서 플랫폼‧특수고용노동자의 노조할 권리를 즉각적으로 보장해야 한다. 사진: 비정규직 이제그만 공동투쟁 노조법 3조 – 노조 파괴 금지법 파업으로 자본 이윤에 손해가 발생했다는 말은, 평상시 자본의 이윤이 노동자들의 집단적 노동으로 창출된다는 진실을 뒤집어 보여준 것에 지나지 않는다. 파업은 세상의 진짜 주인이 누구인지를, 거들먹거리던 자본가들이 실상은 한 줌 기생충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모두에게 명백히 보여준다. 이 때문에 한국의 자본가들은 파업권을 무늬뿐인 권리로 만들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기울여왔다. 이른바 ‘합법’ 파업의 범위를 좁혀 ‘불법’ 딱지를 붙인 다음, 천문학적인 민사상 손해배상을 걸어 노조를 파괴해온 수법이 그것이다. 낙타가 바늘귀를 통과하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합법’ 파업의 범위를 보자. 한국에서 노동조합이 최저임금 인상 또는 물가 억제를 요구하며 파업을 벌이는 것은 불법이다. 전체 노동자들의 생존권에 직결되는 문제인데도 말이다. ILO 결사의자유 위원회가 “최저임금의 인상, 단체협약의 인정 및 경제정책의 변화(물가억제, 실업해소)를 요구하는 총파업은 정당하며 노동조합 단결체의 통상적인 활동 범위에 속한다”고 밝히고 있는 것과 정반대다. 하청 노동자가 원청 사용자를 상대로 노조 인정을 요구하며 쟁의행위를 벌이는 것 역시 불법이다. 이 점에 관해 ILO 결사의자유 위원회는 한국 정부에 명시적으로 “원청과의 단체교섭 성사를 위해 노동조합 인정을 요구하는 목적의 사내하청 노동자의 파업은 불법이 아니며 이를 이유로 한 해고는 ILO협약 위반”이라는 권고를 내렸음에도 자본가 정부는 묵묵부답이다. 또 구조조정에 반대하거나 노동법‧단체협약 위반에 항의하는 파업이 불법인 것도 마찬가지다. 저들 마음대로 ‘불법’ 딱지를 붙이고 난 다음에는 무슨 일이 이어지는가? 노동자들이 한평생 구경할 수도 없는 천문학적인 금액의 손해배상 청구다. “이대로 살 순 없지 않습니까?”라고 절규했던 대우조선 하청 노동자 5명에게 원청 대우조선 자본이 470억 원의 손해배상을 청구했던 야만적 현실이 모든 것을 설명한다. 노동자 5명이 평생 벌어들일 임금을 모두 모아도 470억 원 배상이 가능하겠는가? 손배 청구의 목적은 노조 깨기에 불과하다. 노조를 탈퇴한 노동자들에게만 선택적 손배 취하를 해온 자본가들의 관행이 보여주듯이 말이다. 노조법 3조 개정은 툭하면 ‘불법’ 딱지를 붙이며 손배 가압류를 통해 노조를 깨려는 자본가들의 범죄적 시도를 박살내기 위한 것이다. 자본가들이 저들 맘대로 필요에 따라 갖다 붙이는 ‘합법’과 ‘불법’의 잣대를 집어치우고 ‘모든 파업권을 보장하라! 모든 손배 가압류를 금지하라!’는 요구를 현실화하는 투쟁이다. 손 하나 까딱하지 않은 채 노동자들의 노동을 착취해 이윤을 얻어온 자본가가 ‘너희가 일하지 않아 내가 손해를 보고 있다’고 떠드는 것 이상으로 뻔뻔한 일이 또 있을까? 쟁의행위의 정당성 범위를 획기적으로 넓히고 손배 가압류를 통해 노조를 깨려는 시도를 원천 봉쇄할 수 있도록 노조법 3조를 개정해야 한다. 법이 개정되면 비정규직‧특수고용노동자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노조법 2‧3조 개정 투쟁은 단순한 법 개정 투쟁이 아니다. 노동3권을 빼앗겨왔던 하청 노동자, 플랫폼‧특수고용노동자들의 노조할 권리를 쟁취함으로써 실질적인 노동계급 총단결 투쟁의 토대를 건설하는 투쟁이다. 살인적 손배 가압류로 노동조합을 분쇄해 온 자본가들의 범죄 행위를 중단시키고 파업할 권리가 모든 노동자의 정당한 무기임을 선언하는 투쟁이다. 따라서 제대로 된 노조법 2‧3조 개정은 민주당과 같은 자본가 정치세력에 기대는 방식이 아니라, 사업장 칸막이를 뛰어넘은 노동자 단결과 총파업으로만 실현될 수 있다. 총파업의 성과로 제대로 개정된 노조법 2‧3조는 모든 노동자의 노동3권을 실질적으로 보장함으로써 더 전면적인 계급적 연대를 촉진하는 유용한 무기로 기능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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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미국과 중국 간의 전쟁은 정말 가능한가?믹 암스트롱(Mick Amstrong) 2023년 4월 16일 미국과 중국 사이에 전쟁을 향한 기운이 고조되고 있다. 조 바이든 대통령의 민주당과 공화당 양쪽의 언사는 그 어느 때보다 격렬하다. 미국의 군사비 지출이 급증하고 있으며, 중국 기업과 중국산 제품에 대한 무역 제한 및 기타 제재가 증가하고 있다. 미국만 그러고 있는 게 아니다. 일본은 최근 무기 구입 예산을 550억 달러로 20%나 대폭 증액하는 등 군사력을 급속하게 확장하는 중이다. 이미 일본보다 더 큰 비중으로 군사비를 지출하고 있는 한국은 향후 5년간 매년 6.8%씩 무기 구입 지출을 늘려나갈 것이다. 거의 모든 유럽 국가들도 군비 증강에 나서고 있다. 호주도 뒤처지지 않고 있는데, 앨버니지 정부는 오커스(AUKUS, 미국, 영국, 호주의 3국 군사동맹 – 옮긴이) 핵추진 잠수함에 4,000억 달러가 넘는 금액을 쏟아붓기로 결정했다. 중국도 전혀 물러서지 않는다. 중국은 최근 수십 년간 단호하게 전투 능력을 현대화하고 강화해 왔다. 그러나 강대국 사이에서 대규모 전쟁이 정말 일어날 것인가? 전면 핵전쟁이 아니더라도 대규모 전쟁에서 피할 수 없는 끔찍한 규모의 죽음과 파괴는 확실히 미국 지배계급 또는 중국 지배계급의 이익은 아니지 않을까? 당연히 상식이 승리하고 강대국들이 벼랑 끝에서 물러나 서로 양보하는 외교적 해법에 도달하지 않을까? 이것은 또 다른 세계대전의 가능성에 당연한 두려움을 느끼는 수천만 선량한 사람들이 가진 희망 깃든 정서이며 이해할 만하다. 제정신을 가진 사람이라면 1차 세계대전과 2차 세계대전을 학교 운동장 싸움쯤으로나 보이게 할 규모의 전면전을 보고 싶어할 리 있겠는가? 문제는 자본주의가 기업들, 기업을 뒷받침하는 국가들 사이의 경쟁으로 움직인다는 것이다. 경쟁은 이윤, 시장 점유율, 투자처, 무역 경로에 대한 통제권, 원자재에 대한 접근권을 놓고 벌어진다. 이 냉혹한 경쟁은 자본주의 국가의 권력과 부를 경쟁국에 맞서 발전시키거나 방어하기 위해 야만적 전쟁의 토대를 반복해서 마련한다. 향후 4~5년 내에 미국과 중국 사이에 전면전이 벌어진다는 건 가장 가능성이 높은 시나리오는 아니다. 양쪽 모두 아직 그럴 준비는 돼 있지 않다고 생각한다. 좀 더 가능성이 높고 여전히 매우 위험한 시나리오는 장기간의 긴장 고조, 동맹 강화, 양측의 군사력 증강으로 인해 어떤 시점에서 대결이 불가피할 것으로 보이는 상황이다. 대결은 어떤 오판이나 전혀 예측하지 못한 사건으로도 쉽게 터져 나올 수 있다. 1차 세계대전이 바로 그런 경우다. 1914년 1월 보스니아의 수도 사라예보에서 잘 알려지지 않은 세르비아 민족주의자가 오스트리아 대공 프란츠 페르디난트를 암살했을 때, 불과 6개월 후 전체 사망자 수가 1,500만~2,200만 명에 이르는 인류 역사상 가장 치명적인 전쟁이 발발할 것이라 상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사건은 걷잡을 수 없이 소용돌이쳤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통치자들은 세계대전을 일으킬 의도까지는 없었지만 세르비아에 가혹한 최후통첩을 보내는 것으로 대응했다. 오스트리아의 동맹국인 독일 제국은 처음에는 이 싸움이 발칸반도의 또 다른 국지적 분쟁에 그칠 것이며 영국은 여기에 관여하지 않을 것이라 여겼다. 그러나 남부 슬라브족의 보호자를 자처한 짜르 러시아는 오스트리아에 맞서 총동원령을 내렸다. 그러자 독일은 러시아에 선전포고했다. 이 분쟁에서 중립을 지키라는 독일의 최후통첩에 프랑스가 응하지 않자, 독일은 프랑스에 선전포고하고 벨기에를 침공했다. 독일의 벨기에 침공은 이어서 위선적으로 약소국 벨기에의 보호자를 자처하던 영국을 자극해 독일에 선전포고하게 했다. 이것은 호주, 캐나다, 인도 등 대영제국의 모든 나라들을 즉각적으로 전쟁에 끌어들였다. 터키는 독일 편에 서고 일본은 영국 편에 서면서 전쟁은 계속 이어졌다. 이탈리아는 한동안 참전하지 않았지만 결국 오스트리아 영토의 일부를 약속받으며 연합군 편에 합류했다. 기회주의자인 미국 제국주의자들은 다른 주요 강대국들이 거의 소진될 때까지 기다렸다 참전했고, 그 결과 미국은 유럽에 대한 마지막 제국주의 분할에서 결정적 역할을 하게 됐다. 1차 세계대전은 제국주의 세력 균형의 구조적 변동에서 비롯된 것으로, 어떤 면에서는 오늘날 벌어지는 모습과 유사하다. 가장 먼저 고도로 산업화된 자본주의 국가였던 영국은 오랫동안 “바다를 지배”했던 해군의 지원을 받아 광대한 식민지 제국을 건설했다. 하지만 1890년대부터 영국은 새로운 강대국 미국과 독일의 도전을 받으면서 서서히 상대적 쇠퇴에 접어든다. 오늘날 미국과 비슷하게 말이다. 영국과 기타 구(舊) 제국주의 강대국들(프랑스, 네덜란드, 벨기에, 포르투갈)은 그들끼리 세계를 분할했다. 이것은 가장 급속한 산업 성장이 이루어진 유럽 강대국 독일에게는 사실상 제국을 구축할 공간도, 새로운 시장과 더 많은 이윤을 획득할 지역도 거의 남아있지 않음을 뜻했다. 독일 제국주의는 식민지, 종속국, 무역 파트너를 확보하기 위해 뻗어나가면서 필연적으로 구(舊) 제국주의 강대국들에 맞서야만 했다. 오늘날 중국이 미국에게 그러하듯이 말이다. 독일 제국의 통치자들은 독일 거대 자본가들의 재촉을 받으며 “세계에서 독일의 입지”를 확립하기 위해서는 군대를 대폭 강화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외교 또는 “평화적인” 무역과 투자에만 의존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 결과 독일은 영국의 해상 지배에 도전하기 위한 전함 함대를, 더 이후에는 영국 상선을 공격하기 위한 잠수함 전단을 만드는 데 산업력을 집중했다. 영국은 “드레드노트” 전함을 건조해 응수했다. 프랑스는 징집병의 군 복무 기간을 2년에서 3년으로 늘려 독일 군대와 보조를 맞췄다. 러시아는 독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오스만 제국과의 잠재적 전쟁을 염두에 두고, 국영 무기 공장을 건립하고 철도 체계를 설계했다. 전쟁으로 가는 길이 넓어지고 있었다. 계속 이어진 폭발적 사건, 외교적 분쟁, 동맹의 변화, 국지적 전쟁이 상황을 더욱 고조시켰다. 1899~1902년 보어 전쟁, 1905년과 1911년 독일이 프랑스 지배에 도전한 모로코 위기, 1911~1912년 이탈리아-터키 전쟁, 그로부터 촉발됐으며 강대국들이 지역의 추종자들을 부추겨 벌어진 발칸 반도에서의 두 차례 큰 전쟁(제1차 발칸전쟁, 제2차 발칸전쟁을 말한다 – 옮긴이)이 그것이다. 위의 사례들에서 전쟁은 확대되지 않았고 결국 외교적 타협이 이루어졌다. 비록 발칸 반도의 전쟁에서 수많은 인명이 희생됐지만 말이다. 그러나 냉소적인 외교 거래와 절충안은 결정적 충돌을 얼마간 유예시켰을 뿐이다. 경쟁국들의 대립은 점점 날카로워지고 있었다. 언제라도 폭발할 수 있을 만큼 누적됐던 모든 압력이 사라예보에서 암살 사건이 일어나면서 마침내 전면적으로 폭발했다. 1914년 이후 자본주의 세계 질서는 의심할 여지 없이 크게 변화했다. 제국주의 세력의 균형은 매우 달라졌다. 새로운 강대국들이 등장했고, 옛 식민지 제국은 오래전에 사라졌으며,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더 파괴적인 무기 체계가 배치됐다. 하지만 자본주의의 근본적인 경쟁 논리는 확고하게 유지되고 있다. 자본주의는 여전히 노동자의 노동에 대한 착취에 기반하고 있으며, 이윤 획득이 인간의 모든 필요보다 우선하는 제도다. 자본주의의 잔인한 경쟁 논리는 빈곤과 타락, 반복되는 경제 위기, 환경 파괴, 시장‧투자 기회와 원자재 접근을 둘러싼 지속적인 충돌을 낳는다. 그 결과는 반복되는 전쟁 발발이다. 2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 수없이 벌어진 파괴적인 전쟁들은 지금까지는 완전한 전면전으로 이어지지 않았다. 또 핵무기의 시대에 상호확증파괴(MAD)가 핵무장 강대국 사이에 또 다른 세계대전의 가능성을 극히 낮춘다고 자주 주장된다. (상호확증파괴: 핵무기의 선제적 사용은 쌍방 모두의 파괴를 확증하는 상황이 되므로 핵무기를 동시에 보유한 2개국 간에는 핵전쟁이 발발하지 않게 된다는 가설 – 옮긴이) 상호확증파괴(MAD)는 두 초강대국 러시아와 미국 사이에 이른바 데탕트가 유지되는 데 도움이 되었다. 러시아와 미국은 상대적으로 엇비슷한 파괴 능력을 갖추고 있었다. 그러나 1962년 10월 쿠바 미사일 위기 당시에는 핵전쟁을 간신히 피할 수 있었을 뿐이다. 사소한 오판도 아마겟돈을 불러올 수 있었다. 미국의 상대적 쇠퇴와 중국의 부상으로 지난 20년 동안 제국주의 세력의 균형이 결정적으로 바뀌었고, 이는 훨씬 더 불안정하고 불확실한 상황을 만들어냈다. 1969년 시작된 미국과 소련의 “데탕트”는 이미 오래전에 사라졌다. 또한 상호확증파괴(MAD)는 강대국들이 상대에게 핵무기를 사용하는 것을 극도로 주저하게 했지만, 우크라이나 전쟁 발발은 막지 못했다. 우크라이나 전쟁은 2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 유럽 심장부에서 일어난 가장 거대한 군사적 충돌이다. 우크라이나 전쟁은 이른바 재래식 무기가 얼마나 거대한 파괴력을 갖추고 있는지를 보여주었다. 지금까지 우크라이나 전쟁은 유럽으로 확대된 전쟁이나 핵전쟁을 촉발하지는 않았지만, 미래의 대규모 재래식 전쟁은 충분히 그렇게 될 수 있다. 중국은 미국과 전쟁을 벌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으며, 떠오르는 강대국이기에 장기전을 벌이는 것이 겉보기엔 합리적일 수 있다. 그러나 중국 자본가계급은 오판하거나 자만에 빠질 수도 있으며, 미국에 의해 너무 심하게 압박당하고 있다고 느낄 수도 있다. (진주만 공격을 앞두고 일본 통치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아니면 중국 통치자들은 내부의 정치적 긴장 때문에 대만 침공과 같은 모험에 나설 것을 강요받을 수도 있다. 미국 지배계급으로서는 중국이 너무 강해지기 전인 어느 시점에 중국을 공격하는 것이 더 낫다고 결정할 수도 있다. 또는 중국을 무역 제재로 아주 강하게 압박할 수도 있고, 그들 역시 내부의 정치적 이유로 전쟁을 일으킬 수 있다. 전쟁은 반드시 사전에 숙고되고 계획되는 것이 아니다. 경쟁은 자본주의의 핵심이기 때문에 전쟁 발발의 가능성이 언제나 존재한다. 그리고 군사력 증강은 그 자체의 논리를 가지기 마련이다. 전쟁을 피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외교나 통치자들의 선의에만 의존할 수는 없다. 또한 가만히 앉아서 무슨 일이 일어날지 기다리고만 있을 수도 없다. 우리는 지배자들에게 도전하는 대중적 반전 운동의 토대를 마련해 나가야 한다. 전쟁은 호주, 중국, 미국, 일본 노동자계급의 이익이 아니다. 모든 자본주의 전쟁이 그랬듯이, 부유한 자본가 투기꾼들이 이윤을 얻는 동안 노동자들은 죽어가고 희생될 뿐이다. 이라크 전쟁을 앞두고 수십만 시위대가 호주의 모든 주요 도시에서 전쟁에 반대하며 거리로 나섰다. 최근의 여론 조사에 따르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중국과의 전쟁을 원하지 않는다. 즉 반전 정서가 형성되고 있다. 향후 몇 년간 이러한 정서를 강력한 운동으로 조직해 나가려면, 전쟁을 찬성하는 주류 정당들에 맞서 단호한 사회주의 대안을 건설하는 것이 핵심 과제다. [원문기사] https://redflag.org.au/article/war-between-us-and-china-really-possib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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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7 제국주의 진영에 밀착하는 윤석열 정부, 지금 당장 국제연대를 조직하자사진: 대통령실 지난 5월 19일부터 21일까지 일본 히로시마에서 G7 정상회의가 열렸다. G7은 미국을 필두로 한 서방 제국주의 진영의 국제기구다. 20일 발표된 G7 공동성명은 이들이 얼마나 뻔뻔스러운 위선자인지를 여실히 드러낸다. 예컨대 저들은 ‘핵무기 없는 세상이 궁극적 목표’라 밝혔지만 정작 실전 배치한 핵탄두 수가 가장 많은 나라는 미국이다(2022년 기준 1,744기). 또 G7은 민주주의의 가치를 공유한다고 떠벌리지만, G7 회원국 이탈리아의 정상은 파시스트 멜로니 총리다. 멜로니는 이탈리아의 정체성을 지키겠다며 자국에서 난민과 성소수자에 대한 공격을 강화하는 중이다. 기후위기에 가장 큰 책임이 있는 자들이 “빈곤 감소와 기후 및 자연 위기 해결이 서로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음을 인식”했다고 떠드는 것도 웃기는 일이다. 이번 G7 정상회의의 주요 의제는 러시아 제재와 중국 견제 문제였다. 이번 정상회의에는 전쟁 당사국인 우크라이나와 7개 회원국 외에도, 한국, 호주, 인도, 브라질, 인도네시아, 베트남, 코모로연방(아프리카), 쿡제도(태평양) 등 8개 초청국이 참여했다. 이것은 중국‧러시아에 맞서 서방 진영의 결속을 강화하며, 글로벌 사우스에 대한 영향력을 지키겠다는 의지를 보여준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G7은 공동성명에서 “러시아의 불법 침략 전쟁에 맞서 우크라이나를 필요한 기간 지원”하겠다고 밝혔다. 또 공동성명과는 별도로 ‘우크라이나에 관한 G7 지도자들의 성명’도 발표됐는데, 여기서 G7은 “우크라이나가 필요로 하는 재정적, 인도적, 군사적, 외교적 지원을 필요한 만큼 제공”할 것이며 러시아와 러시아를 지원하는 세력을 추가 제재하겠다고 밝혔다. 실제로 G7 회의 개최 직전 미국과 서방 동맹국은 미국산 F-16 같은 4세대 첨단 전투기를 우크라이나에 지원하겠다고 발표한 바 있다. 무기만 대주면 이번에 상실한 영토의 수복을 넘어 2014년 빼앗긴 크림반도를 되찾을 때까지 전쟁을 계속하겠다는 젤렌스키의 요구가 일정 부분 받아들여진 것이다. 이상의 사실은 나토의 동진과 러시아의 침공으로 촉발된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갈수록 제국주의 대리전 성격을 명확히 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 점을 간과한 채, 러시아 침공의 부당성을 규탄한다며 미국과 서방 제국주의 진영을 편드는 잘못된 길로 빠져서는 안 된다. 얼마 전 좌파를 자임하는 사회진보연대는 “우크라이나의 항전을 지원하는 것은 국제사회의 책무”라며, 윤석열이 지난 4월 19일 ‘조건에 따라 우크라이나 전쟁에 살상무기를 지원할 수도 있다’고 입장을 밝힌 것을 옹호하기까지 했다. 마르크스주의는 “전쟁은 단지 다른 수단의 개입에 의한 정치적 관계의 계속”이라는 클라우제비츠의 명제를 수용해, “어떠한 전쟁도 주어진 시기에 관련 강대국들의 – 그리고 이들 나라 내부의 각 계급들의 – 정치의 계속(레닌, <제2인터내셔널의 붕괴>)”이라고 이해한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규탄하고 즉각적인 철군을 요구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전쟁 발발 이전 나토의 동진으로 상징되는 미국과 서방 제국주의의 개입이 전쟁 원인의 절반이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즉 러시아와 서방의 패권 경쟁이야말로 전쟁의 근본 원인이었다. 설령 전쟁이 우크라이나의 승리로 끝난다 해도(그럴 가능성은 매우 적어 보이지만), 미국과 서방 제국주의의 영향력이 강화되고 이에 결탁한 우크라이나 지배계급이 권력을 되찾는 방식을 통해서는 우크라이나에서 궁극적인 평화를 실현할 수 없다. 이에 관해서라면 미소 대리전 성격을 띠었던 1950~53년 한국전쟁 종전 이후, 미제국주의의 전초기지가 된 남한에서 노동자 민중이 군사독재 체제의 야만적 탄압을 받았음을 상기하는 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물론 러시아 제국주의는 전쟁을 중단하고 즉각 철수해야 한다. 그러나 러시아 제국주의의 패배는 핵심적으로 자국 노동자계급의 성장과 대중적 반전 투쟁의 전개 여부에 달려 있다. 제국주의 전쟁에서 노동자들의 임무는 자국 지배계급에 반대하는 국제연대를 건설하는 것이지, 서로 대립하는 제국주의 진영 중 그나마 어느 쪽이 더 나은지를 고르는 데 있지 않다. 미중 패권경쟁 이것은 미중 쟁투에 대한 태도에서도 마찬가지다. G7은 공동성명에서 “우리의 정책 접근은 중국을 해하거나 중국의 경제적 진보와 발전을 방해하려는 것이 아니”라며, 중국과 “디커플링’(de-coupling, 관계 분리)” 대신 “디리스킹(de-risking, 위험 감소)”을 추구하겠다고 밝혔다. 이런 표현에는 미국과 달리 중국과 균형적 관계를 모색하려는 프랑스 등 유럽 국가들의 이해관계가 다소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G7은 대만 문제에서는 기존과 다르지 않은 강경한 태도를 보였다. 공동성명에서 G7은 “자유롭고 개방적인 인도 태평양을 지지하고 무력이나 강압에 의한 일방적인 현상 변경 시도에 반대”한다는 점을 명확히 했다. 당연히 중국은 강력히 반발했다. 20일 중국 외교부는 “주요 7개국들이 대만해협의 평화를 수호한다고 매번 말하면서 ‘대만 독립 반대’를 일절 언급하지 않는 것은 사실상 ‘대만 독립’ 세력을 묵인하고 지지하는 것”이라며, “강렬한 불만과 결연한 반대”의 뜻을 드러냈다. 미국과 서방 진영은 ‘자유와 민주주의’가 보장되는 진영으로, 중국과 러시아는 ‘권위주의’에 기반한 비민주적 통치체제로 구별한 뒤, 그래도 후자보다는 전자가 낫지 않냐는 식으로 정치적 태도를 결정해서는 안 된다. 물론 노동자계급 운동의 발전 과정에서 민주적 권리는 중요하다. 그러나 “아무리 민주적인 국가라 할지라도 그 헌법에 노동자를 향해 군대를 출동시킬 가능성, 계엄령을 선포할 가능성 등을 자본가계급에게 보장하는 단서와 빠져나갈 구멍을 마련해 놓지 않은 국가는 단 하나도 없다(레닌, <프롤레타리아 혁명과 배신자 카우츠키>).” 패권 쟁투를 벌이는 제국주의 진영 사이의 비본질적 차이에 주목할 것이 아니라, 노동자계급과 제국주의 자본가계급 사이에 놓인 본질적 적대에 우선 주목해야 한다. 자본가계급의 어느 한 분파에 의탁하는 방식으로, 노동자계급 운동은 절대 성장할 수 없다. 미제국주의 진영의 선봉이 된 윤석열 정부 노동자계급이 견지해야 할 국제주의 원칙은 향후 한반도를 포함한 동아시아가 미중 제국주의 양강이 벌이는 패권전쟁의 실제 전장이 될 수 있기 때문에 더욱 사활적 원칙이 된다. 즉 대만독립을 둘러싼 미중전쟁이 현실이 될 경우 미중 모두 한반도의 지정학적 중요성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여기에 남북 지배계급의 적대적 대립이 변수로 끼어들면 동아시아 노동자 민중의 안위는 그야말로 시계 제로의 상태에 빠져들게 될 것이다. 이 때문에 노회한 부르주아 계급의 두뇌들마저 잇따라 경고를 보내는 실정이다. 특히 이들은 한국 자본의 이윤을 위해서도 중국과 대립 일변도로 가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2008년 금융위기 직후 한국 자본주의가 중국의 경제성장에 힘입어 상대적 안정을 얻었던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작금의 윤석열 정부는 천둥벌거숭이처럼 미제국주의 진영에 밀착하는 일에 일말의 주저함이 없다. 한미일 안보협력을 위해 강제징용 피해자들에 대한 ‘제3자 변제’라는 기상천외한 해법까지 내놓았던 윤석열 정부는, 더 나아가 미국의 도청 묵인, 후쿠시마 오염수 방류 용인 등 한미일 삼각 동맹의 강화를 위해서는 양잿물도 마시겠다는 태도로 일관하고 있다. 윤석열 정부가 같잖은 명분으로 내세우고 있는 것은 한미일이 ‘자유와 민주주의’란 가치를 공유한다는 것이다. 그 정도 표현으로는 모자랐는지, 국민의힘 김민수 대변인은 이번 G7 회의를 통해 “대한민국이 심리적 G8 국가 반열에 올랐다”는 21세기 버전 소중화(小中華)론을 내세웠다. 저들은 한국 사회에 만연한 ‘국뽕’ 정서를 자극하고, 나아가 대중의 반중 혐오정서를 십분 활용해 궁극적으로 노동자들의 계급단결의식을 흐트러뜨릴 것이 뻔하다. 국제주의 노동자계급 연대운동, 지금 당장! 동아시아 노동자계급 국제연대의 수준이 아직 높지 않음은 부인하기 힘든 현실이다. 이것은 제국주의 양 진영 모두와 단호히 결별하고 자국의 지배계급에 맞선 투쟁을 벌여야 한다는 국제주의자들의 주장을 마치 무기력한 양비론처럼 보이게도 한다. 그러나 다른 대안은 없다. 자국의 지배계급에 결연히 맞서며 노동자계급의 국제연대를 실현하는 것만이 위기의 시대로 접어드는 오늘날 자본주의에서 진정한 평화를 실현하는 유일한 길이다. 바로 지금 당장, 이를 향한 실천을 체계적으로 시작해야 한다. 전면적 위기의 시대가 닥쳐오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날과 그때를 알지 못하느니라(마태복음 25: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