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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국제선언: 미국과 이스라엘의 패배를 위하여! 트럼프와 네타냐후의 이란에 대한 제국주의 전쟁을 타도하라!트럼프와 네타냐후가 자행하는 제국주의 전쟁행위에 대한 연속혁명경향(CPR)의 국제선언을 소개한다. 노동자계급과 반제국주의 운동은 미국과 이스라엘의 제국주의적 군사침략을 패배시키기 위해 싸워야 한다. Left Voice에 3월 3일 게재된 영문판을 번역함. 미국과 이스라엘이 이란을 상대로 벌이는 (공습과 여러 도시에 대한 공격을 포함하는) 합동 군사 공격은 제국주의 침략전쟁이다. 우리는 트럼프의 전략 변화를 목격하고 있다. 트럼프 정부는 과거에 이란 핵 프로그램과 관련된 제한적인 목표에 집중했으나 이제 이란 민중을 완전히 패배시켜 백악관의 지시에 복종케 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다. 가자지구 팔레스타인 집단학살의 공동 책임자들인 워싱턴과 텔아비브가 벌인 합동 공격으로 이미 수백 명의 이란 민간인(이란 남부의 한 학교에서 사망한 수십 명의 여학생 포함)이 사망했고, 테헤란과 이란 전역의 기반 시설이 파괴되었으며, 아야톨라(최고 성직자) 겸 최고 지도자 알리 하메네이가 암살당했다. 또한 하메네이의 고문 알리 샴카니, 군 최고사령관 압돌라힘 무사비, 국방부 장관 아지즈 나시르자데, 혁명수비대 사령관 모하마드 파크푸르 등 정권의 정치·군사 지도부 일부도 제거되었다. 이는 예측 불가능한 사태 전개의 문을 열었다. 중동 전체를 잠재적 불안정으로 몰아넣는 심대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지역 전쟁으로 이어질 가능성도 충분히 있다. 피트 헤그세스 미 국방장관의 ‘공격이 언제 끝날지 모른다’는 발언은 이러한 가능성을 더욱 뒷받침한다. 이스라엘은 레바논과 수도 베이루트에 대한 공격을 시작하여 불과 몇 시간 만에 수십 명의 사상자를 냈다. 한편, 헤즈볼라는 하메네이 암살에 대한 보복으로 이스라엘을 향해 미사일을 발사하고 있다. 경제적으로는 유가가 10% 이상 상승함으로써 이 전쟁이 광범한 사회적 영향을 미칠 것임을 보여준다. 이번 공격의 초기부터 트럼프가 공언한 목표 가운데 하나는 군사적 수단을 통해 정권 교체를 시도하는 것이었다. 이는 2000년대 초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을 상대로 한 제국주의 전쟁에서 사용된 파괴적인 신보수주의 정책의 요소들을 차용한 것이다. 프랑스, 영국, 독일을 포함한 유럽 제국주의 국가들은 종속적인 입장에 서서 트럼프를 지원하여 이란 공격에 참여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이번 제국주의 침략은 미국의 무조건적 지원을 받는 네타냐후가 팔레스타인 민중에게 자행해 온 집단학살 및 민족청소 정책의 직접적인 연장선에 있다. 이란에 대한 공격은 2003년 이라크 전쟁 이후 최대 규모의 해군을 배치한 위협 속에서 몇 주간의 협상을 벌인 끝에 단행되었는데, 그 명분은 이란이 완전한 군축을 거부했다는 것이다. 미국은 이란의 핵 프로그램 해체뿐 아니라 이란의 유일한 실질적 방어수단인 탄도미사일 포기까지 요구했다. 이는 수십 년간 워싱턴의 가혹한 경제 제재로 억압받아 온 이란에게 완전히 항복하라는 요구였으며, 테러 국가인 이스라엘이 중동에서 군사적 지배력을 공고히 할 수 있게 하려는 것이었다. 가자지구에서 팔레스타인을 집단학살하고 서안지구에서 정착촌 확장을 통해 팔레스타인 토지를 강탈하고 있는 이스라엘은 자신들 뜻대로 지역 지도를 재편하기 위해 이란을 약화시키고 통제할 필요가 있다. 친제국주의적인 우호 정부를 수립하는 방식으로든 또는 시리아처럼 국가를 분열시키는 과정을 통해서든 말이다. 이란에 대한 제국주의 침략은 미국이 ‘서반구’에 대한 절대 지배라는 새로운 국가 안보 교리에 따라 베네수엘라를 상대로 벌이고 있는 식민주의적 자원착취 전쟁과 맥을 같이 한다. 이와 같은 제국주의적 호전성의 표현들은 기존의 자유주의 질서와 이른바 규칙기반 국제질서의 붕괴 속에서 가속화되는 미국의 패권적 쇠퇴를 되돌리려는 반동적 시도를 그 배경에 두고 있다. 이는 워싱턴의 명령에 도전하려는 세계 모든 이들에게 경고를 보내는 것을 목표로 한다. 트럼프가 쿠바 경제를 압박하는 것 또한 우연이 아니다. 쿠바에 대한 석유 보이콧을 선언한 미국은 이미 베네수엘라산 원유의 쿠바 수출을 금지하였고, 쿠바에 석유를 수출하는 국가들에 제재를 가했다. 이제는 이란산 원유의 쿠바 수출까지 줄이려 시도하고 있는데, 이는 1959년 쿠바 혁명의 성과 가운데 남아있는 부분마저 소멸시키려는 의도이다. 트럼프는 또한 중국의 석유 공급망을 차단하여 아야톨라 정권과의 특별한 관계를 깨뜨리려 하고 있다. 이러한 모든 이유로, 이란에서 미국과 이스라엘의 정치적·군사적 패배를 위해 싸우는 것이 필수적이다. 제국주의에 반대한다면, 사회주의자라면, 혁명적인 좌파라면, 미국과 이스라엘의 패배를 (그리고 그들을 지원하는 유럽 열강들의 패배를) 조건 없이 지지해야 한다. 다시 말해, 우리는 피억압 국가의 편에 서서 억압 국가에 맞서 싸워야 한다. 연속혁명경향(CPR)은 아야톨라 정권의 반노동자적이고 억압적이며 반동적인 체제로부터 절대적인 계급독립성을 유지하면서 이러한 반제국주의 입장을 옹호한다. 노동자계급, 여성, 그리고 이란 민중의 해방과 자유는 제국주의 국가인 미국과 여전히 집단학살을 자행하는 이스라엘의 폭격과 개입으로부터는 결코 얻을 수 없다. 지금까지 알리 하메네이가 이끌어온 신정적이고 초보수적인 정치체제는 이란의 노동자와 빈민 대중에게 가차 없는 적이다. 이 체제는 (2022년 젊은 쿠르드족 여성 마흐사 아미니 살해 사건으로 상징적으로 드러났던) 여성 박해, 쿠르드족 탄압, 그리고 노동자 파업 탄압에 책임이 있다. 지난 1월, 하메네이는 빈곤, 기아, 그리고 국가 경제위기의 결과에 맞서 정당한 요구를 내걸고 시위하던 수천 명의 시위대를 학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사실, 아야톨라의 신정 독재는 1979년 이란 혁명을 정치적으로 찬탈한 데서 비롯되었다. 이 혁명은 레자 팔라비와 미국을 몰아내고 노동자 평의회(쇼라)의 급속한 성장을 가져왔다. 이 평의회들이 더욱 발전했더라면 이 지역에서 아래로부터의 노동자계급 권력이라는 새로운 동력을 창출할 수 있었겠지만, 성직자 정권에 의해 잔혹하게 진압되었다. 이것이 바로 이 정권이 권력 유지를 위해 대중을 억압하는 근본적인 이유이다. 이러한 행태는 이란 내에서 제국주의에 맞선 저항과 투쟁을 위한 준비를 체계적으로 방해해 왔다. 이란의 노동자, 여성, 청년들이 아야톨라 정권의 반동적인 탄압에 직면하면서 (우리 시대의 가장 반혁명적인 세력들인) 미국 제국주의와 식민주의적 시온주의에 맞서는 것은 훨씬 더 어려운 일이다. 따라서 미국과 이스라엘의 패배는 이란 정부와 자본가계급으로부터 완전한 정치적 독립성을 가질 때만 실현될 수 있다. 여러 분석가들이 지적했듯이, 이란은 베네수엘라와 다르다. 이란이 위치한 중동 지역은 미국, 이스라엘, 그리고 유럽 제국주의(프랑스, 영국, 독일, 이탈리아, 스페인)가 자행한 수십 년간의 파괴로 황폐해진 불안정한 지역이고, 난민 위기로 에워싸인 지역이며, 오랫동안 제국주의적 개입에 맞서 싸워온 역사를 가진 지역이다. 더욱이, 1979년 혁명 이후 미국의 가혹한 경제 제재로 압박받아 온 이란은 비록 2023년 이후 (특히 친이란 민병대의 경우) 약화되기는 했지만, 베네수엘라보다 더 큰 군사적, 지정학적 자원을 보유하고 있다. 미국과 이스라엘의 공격에 대한 대응으로 이란은 이스라엘과 (카타르의 알 우데이드, 아랍에미리트의 알 다프라, 쿠웨이트의 알리 알 살렘, 이라크의 에르빌, 바레인의 제5함대 사령부 등) 여러 미군기지를 향해 탄도미사일을 발사했으며, 걸프만 원유 수송의 전략적 통로인 호르무즈 해협의 선박들을 공격했다. 이란의 미사일은 텔아비브의 건물들을 파괴하고 베이트 셰메시의 이스라엘인들과 미군 병사들을 사망에 이르게 했다. 이란에서는 수천 명의 시위대가 거리로 나와 제국주의적 공격에 항의했고, 파키스탄, 이라크, 인도에서는 민간인들이 미국 대사관과 영사관을 공격했다. 다시 말해, 전쟁의 양상과 결과는 이란의 저항 수준과 지속적인 보복 여부에 달려 있다. 트럼프는 위험한 도박을 감행했다. 전 세계 어느 곳에서도, 특히 중동에서는, 미국이 공습에만 의존해서 정권 교체 작전을 성공적으로 수행한 사례가 없다.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처럼 지상군을 투입한 곳에서도 역사적인 패배를 겪었고, 미국 주둔에 적대적인 세력을 만들어냈다. 이란에 대한 군사적 침공은 트럼프에게 간단한 선택지가 아니다. 그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 없지만, 이란의 광활한 영토, 전략적 요충지인 호르무즈 해협 봉쇄 가능성, 내부 자원 접근에 대한 제한, 그리고 미국에 대한 지역적 적대감은 군사적 침공을 더욱 어렵게 한다. 미국 안에서도 공화당 지지층을 포함한 미국인 대다수가 군사적 침공을 강력하게 반대한다. 게다가 트럼프의 국내 입지는 약화되었다. 경제는 예상보다 부진한 성과를 보이고 있으며, 행정부는 이민세관집행국(ICE)에 반대하는 전국적인 시위에 직면해 있다. 특히 미니애폴리스에서 일어난 경제적 셧다운은 트럼프 정부가 계급투쟁 영역에서 처음으로 패배를 겪게 만들었다. 트럼프가 ‘모든 전쟁을 끝내겠다’고 약속해 놓고서 중동에서의 대규모 전쟁에 개입하는 방향으로 입장을 바꾼 것은 이러한 모순을 더욱 심화시킬 수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일부 좌파 세력(예를 들어 프랑스의 NPA-L'Anticapitaliste)은 제국주의 개입과 이란의 반동 정권을 동렬에 놓는다. 이러한 입장은 억압국과 피억압국의 차이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의 기본 원칙을 이해하지 못한 것일 뿐만 아니라, 혁명가들은 그 지도부의 반동적 성격과 관계없이 피억압국의 편에 서야 한다는 의무 또한 간과하고 있다. 한편 미국의 민주사회주의자(DSA)와 같은 단체는 자국의 제국주의 정부와 이스라엘의 패배 필요성을 제기하지 않고 단순히 전쟁 종식만을 요구한다. 더 나아가, 그들은 마치 트럼프의 제도적 갈취와 협박이 (워싱턴이 펼쳐 온 동일한 경제·정치 외교로 이미 수십 년간 억압받아 온) 이란 민중의 고통을 해결할 수 있는 방안인 것처럼 미국이 ‘외교’의 길로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미국과 이스라엘의 패배를 위해, 피억압 이란의 승리를 위해, 이란 정권으로부터 완전한 정치적 독립성이라는 기초 위에서, 중동과 전 세계의 노동자와 피억압 민중의 국제적 운동을 시급히 발전시켜야 한다. 전 세계의 사회주의 좌파, 팔레스타인 연대운동, 그리고 반제국주의 운동은 이 과제를 수행하기 위해 행동으로 단결해야 한다. 이는 특히 (민중들이 트럼프에게 반이민 정책을 철회하도록 압력을 가한) 미국과 모든 핵심 국가들에서 더욱 중요하다. 이러한 정책은 미국을 베네수엘라와 쿠바에서 축출하고 팔레스타인에서 자행되는 집단학살을 종식시키기 위한 투쟁에서 필수적인 부분이다. 이란에 대한 제국주의 전쟁을 타도하라! 미국과 이스라엘의 패배를! 미군은 중동에서 철수하라! 팔레스타인 민중에 대한 집단학살을 타도하라! 전 세계 노동자계급과 청년이 주도하는, 제국주의 침략에 맞선 대규모 운동을 건설하라! 2026년 3월 2일 연속혁명경향-제4인터내셔널(CPR-FI) -
[발언] 저는 이제 동지들과 3.8 여성파업 현장에 서 있겠습니다[사진] 스튜디오 알 안녕하세요. 침묵보다 저항을 선택하며 오늘로 서울시교육청 앞 773일째 투쟁 중인 지혜복 교사입니다. A학교 성폭력 사안은 피해를 신고한 여학생들뿐만 아니라 가해자인 학생들까지 포함하여 성평등한 사회적 주체로 성장하는 과정이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런 계기로 만들어지지 못했습니다. 하여 저는 이 학교 성폭력 사안이 온전히 해결되어 학교 안 성평등 문화가 구축이 되고 포괄적 성교육 교육 과정이 도입되어야 한다고 요구하며 지금까지 싸우고 있습니다. 이 투쟁의 과정은 참여한 동지들의 개개인의 피해 경험을 털어놓고 울고 웃으며 각각이 주체가 되어 나선 모두의 투쟁이었습니다.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다’라는 의미를 다시 한 번 확인하고 새기는 시간이었습니다. 1969년 캐롤 하니쉬의 글 제목에서 알려진 이 문장은 1960년~70년대 여성 운동에 등장한 핵심 구호입니다. 당시 사회의 분위기는 성폭력이 개인 탓, 집안 문제, 성차별은 개인 능력 문제, 우울, 좌절은 개인 성격 문제 등 여성들의 문제는 사적 영역의 일로 치부되었습니다. 지금도 그런 경향은 여전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겪는 성차별과 성폭력의 문제는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 구조와 권력 관계의 문제라는 것을 우리 모두는 알고 있습니다. 불안정한 일자리, 성별 임금 차별, 가사, 육아 등 이중 노동의 부담, 여성과 성소수자, 트랜스젠더의 성차별과 성폭력, 임신중지권 제한 등은 가부장적 자본주의 체제가 만든 구조적 문제입니다. 학교와 가정, 일터 등 권력 관계가 작동하는 공간에서 개개인이 겪는 특수한 문제가 아니라 각각의 구조적 특성이라는 것이 드러났습니다. 개인의 삶에서 벌어지는 일은 사회적 권력 구조와 연결되어 있으며, 따라서 변화는 정치적 행동을 통해 가능합니다. 하여 우리는 정치적 행동을 통해 우리 삶을 바꾸기 위해서 여성 파업에 나섭니다. 개인적 경험으로 가두지 않고 사회의 구조적 변화를 만들기 위해 일손을 멈추고 38 여성 파업에 나섭니다. 3.8 여성파업을 통해 우리 존재의 사회적 역할을 드러내고 우리의 정치적 힘을 보여줄 것입니다. 역사 속에서 여성은 가부장제와 지배 계급이 강요한 차별과 불평등에 저항해 왔습니다. 여성과 성소수자의 권리를 외면하고 노동자 계급의 단결을 도모하는 것은 모순이며, 진정한 평등을 이룰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불가능합니다. 여성 의제가 곧 노동자 계급 의제이며, 여성 억압에 맞선 투쟁은 자본주의에 맞선 투쟁과 분리될 수 없습니다. 이윤을 위해 자본주의 체제는 성별마저 노동자 계급을 분열시키기 위한 또 하나의 방법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자본의 분열과 착취, 억압에 맞서 노동자 계급 전체가 성차별에 맞선 단결 투쟁에 나섭시다. 여성들 간 또한 남성이 여성 억압에 맞서 투쟁하지 못하도록 가로막는 자본주의가 만들어낸 균열을 우리 모두가 막아내고 함께 승리합시다. 여성 해방을 위한 투쟁은 전 세계 모든 나라에서 자본주의 모든 형태의 착취와 억압을 끝장내기 위한 것입니다. 자본주의 최고 단계인 제국주의 군사적 팽창은 여성에 대한 노동력 통제와 재생산 통제의 문제로 연결됩니다. 제국주의 체제에서 여성은 인질, 인구 재생산 통제, 전복된 집단의 상징, 성폭력을 포함한 폭력을 과시하는 대상으로 간주됩니다. 여성은 제국주의 권력과 자국의 가부장제 체계 사이에서 침묵당하고, 결국 여성 대상 잔혹 행위는 공동체 전체를 굴복시키고자 행해집니다. 3.8 세계 여성의 날은 모든 여성이 평등하고 안전하게 살 수 있는 사회를 만들기 위한 국제적 기념일입니다. 팔레스타인 전쟁뿐만 아니라 최근 미국의 이란 침공 등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전쟁, 앞으로 벌어질 전쟁 속에서 나타나는 여성 폭력은 개인이 아닌 사회 정치적 문제입니다. 3월 8일에 우리는 이 또한 조명하고 국제적 행동을 촉구하는 날이 되기를 바랍니다. 저는 이제 동지들과 3.8 여성파업 현장에 서 있겠습니다. 시교육청에 찾아온 연대 동지가 건넨 메리골드의 꽃말. 찾아올 행복은 반드시 오고야 만다는, 이 말은 우리에게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믿음으로 연결되는 꽃말입니다. 낙관적 전망을 가지고 동지들과 함께 거리에서 싸우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사회주의 기초학습#11] 오늘날 세계정세: 위기·파시즘·제국주의·전쟁에 맞선 노동자 국제주의위기와 전쟁의 시대, 국경과 인종, 성정체성 등으로 노동자를 갈라쳐 지배하는 극우와 민족주의의 광풍 앞에서 노동조합을 혁명적 기관으로 재편하는 것. 그래서 폭발적으로 터져나오는 계급투쟁을 조직된 노동자운동과 유기적으로 결합시키는 것, 그래서 계급투쟁을 혁명으로 전진시키는 것, 이것이 오늘날 혁명적 사회주의자의 과제이며, 자본주의를 철폐하고 인간해방을 이루고자 하는 모든 투사들에게 제안하는 혁명적 사회주의 전략이다. ※아래 글은 2025년 10월 9일 강연을 위해 작성되어, 그 이후 전개된 사건들을 포함하지 않고 있다. 서론: 위기, 전쟁, 혁명의 시대가 돌아왔다 1. 위기: 만성화된 자본주의의 장기불황 2. 극우와 파시즘의 성장 오늘날 극우세력의 특징 극우세력이 대안으로 부상하게 된 과정 ‘민주’정권과의 주고받기를 통해 성장하는 극우세력 3. 제국주의 패권대결, 전쟁과 학살 충돌하는 두 제국주의 국가: 미중 관계의 재편과정 위기, 전쟁, 혁명의 시대를 열어젖힌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는 제국주의 진영 간 충돌 팔레스타인 집단학살: 제국주의가 벌이는 가장 끔찍한 만행 트럼프 2기, 제국의 쇠퇴를 드러내는 강도적 패권행위 4. 폭발하는 저항: 계급투쟁의 시대가 돌아오다 계급투쟁의 귀환 계급투쟁의 시대를 혁명의 시대로 전진시키기 위한 사회주의자의 과제 서론: 위기, 전쟁, 혁명의 시대가 돌아왔다 11강은 오늘날의 세계정세를 다루는 시간이다. 그 전에 우리는 지난 9강과 10강을 통해, 자본주의 태동기부터 2021년까지의 시간을 살펴보았다. 9강과 10강을 통해 알 수 있었던 것은, 한편으로는 자본주의가 어떤 시기이든 자본의 이윤축적을 지상목표로 한다는 점에서는 본질적으로 동일하다는 것, 그러나 그 구체적인 작동양상은 계급투쟁의 성숙도, 착취와 수탈의 결합방식, 이윤율의 장기적 하락 등 여러 요인들이 영향을 미치면서 끊임없이 달라져왔다는 점이다. 그런데 이런 자본주의의 작동양상 변화는 자본주의의 모순의 축적 정도와 연결된 일정한 패턴을 갖고 있는데, 이를 이해하기 위해 다시 한 번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자본주의가 어떤 시대변화를 거쳐왔는지를 빠르게 훑어보자. [성장기: 자유경쟁과 부르주아 혁명의 시대] 봉건제로부터 출발해, 산업혁명 및 부르주아 정치혁명과 함께 태동한 자본주의는 역동성을 갖고 자신을 확장해왔고, 이는 자본가들의 자유경쟁과 주기적인 공황으로 표현됐다. 이 시기 아직 형성기에 있던 노동자계급은 거의 자기조직화하지 못했고, 따라서 하루 16시간 노동과 같은 무제한적인 자본의 착취가 벌어졌다. [모순 축적기: 독점과 제국주의 전면화의 시대] 19세기에 접어들며 노동자운동이 본격적으로 등장했다. 이와 함께 노동자계급의 사상인 마르크스주의도 정립됐다. 19세기는 자본주의의 축적의 주된 모순 표현형태가 주기적 공황에서 식민지 확장이란 형태로 바뀌어간 세기이기도 하다. 주기적 공황을 되풀이하며 자본의 집적과 집중이 심화될수록 유휴자본이 늘어났고, 이에 자본주의는 국내에서 낮아지는 이윤율을 회복하기 위해 제국주의 정책을 더욱 적극적으로 추진했다. 19세기 말 무렵에는 전 세계가 자본주의 강대국의 식민지로 뒤덮였고, 더 큰 팽창으로 나아가야하는 자본주의 국가들은 다른 강대국의 식민지를 빼앗는 ‘식민지 쟁탈전’에 돌입했다. [모순 폭발기: 세계전쟁, 대공황, 노동자혁명의 시대] 식민지 쟁탈전의 끝은 결국 전쟁이었다. 그것도 자본주의 이전의 국지적 전쟁과 비교할 수 없는, 자본주의가 발전시켜놓은 생산력과 연결망을 토대로 한 광범위한 파괴가 가능해진 세계전쟁이었다. 1914년 1차 세계대전은 오스트리아 황태자에 대한 어느 세르비아인의 암살 시도를 계기로 시작됐지만, 그 사건은 이미 넘치는 화약을 터뜨린 성냥개비였을 뿐, 세계대전으로 치닫게 한 근본적인 동력은 전쟁이 아니고서는 더 큰 이윤축적을 달성할 수 없는 자본주의 모순의 축적이었다. 제국주의 패권대결로 세계가 조만간 전쟁의 소용돌이로 빨려들어갈 것이란 건 단지 사회주의자들만이 아니라 세계정세를 분석하는 많은 이들에게 뻔히 보이는 사실이었다. 사회주의자들에게 중요한 것은, 어떻게 이 반동적인 전쟁을 막을 것이냐, 막지 못한다면 혁명으로 뒤집을 것이냐였다. 각국의 사회주의자들은 1907년 제2인터내셔널 대회(슈투트가르트 대회)에서 “전쟁을 막기위해 최선을 다하고, 전쟁이 터지면 계급투쟁으로 자본주의 체제를 전복하기 위해 투쟁한다”고 함께 결의했다. 그러나 막상 1914년 전쟁이 터졌을 때, 제2인터내셔널의 가장 중요한 당이었던 독일 사회민주당은 전쟁공채 발행에 찬성하며 무기력하게 민족주의 광풍에 휩쓸려버렸다. 로자 룩셈부르크 등을 비롯한 독일과 이탈리아 사회주의자 일부, 그리고 러시아 볼셰비키만이 이런 제2인터내셔널의 패배를 딛고 분명한 제국주의 전쟁 반대 구호를 내걸었다. “제국주의 전쟁을 혁명으로 뒤집자”는 구호 아래 실천을 조직했던 볼셰비키는 결국 1917년 러시아혁명을 성공으로 이끌며 세계 최초의 노동자국가를 세웠다. 그러나 뒤이은 1919년 독일혁명과 이탈리아혁명이 패배하면서, 노동자국가는 러시아 일국으로 고립되어 버렸다. 독일 사회민주당으로 대표되는 개량주의 노선은 이러한 혁명들을 패배로 이끄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로자 룩셈부르크 같은 혁명가들은 뒤늦게 독일공산당을 만들며 계급투쟁을 혁명으로 전진시키려 했지만, 결국 패배하고 독일 사회민주당이 보낸 자유군단에 의해 살해됐다. 인류 최초의 노동자국가 러시아는 내전과 고립이라는 혹독한 조건에서 온갖 어려움을 겪다가, 결국 스탈린의 반혁명에 의해 1930년대 후반 파괴되고, 이후 소련은 ‘사회주의’라는 외피를 쓴 국가자본주의로 변모했다. 소련 내 스탈린주의 노선의 오류는 이후 등장한 혁명적 기회들을 패배로 이끄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1926년 영국 삼각동맹 총파업의 패배, 1927년 중국혁명의 패배, 1930년대 초 독일 파시즘의 승리, 1936년 프랑스 혁명과 스페인 혁명의 좌절 등 주요한 혁명적 기회들이 차례대로 유실된 것은 코민테른의 ‘사회파시즘론’과 ‘인민전선’이라는 궤멸적 정책의 결과였다. 그리고 코민테른의 궤멸적 노선은 ‘소련의 일국적 생존’만을 우선시한 스탈린주의의 결과였다. 혁명이 분쇄된 자리에는 파시즘이 도래했다. 1933년 히틀러의 집권으로 결정적 기회를 얻은 파시즘은 노동자운동을 철저히 분쇄했다. 파시즘으로 노동자운동을 무력화시킨 자본주의의 다음 경로는 거침없는 대량파괴와 학살이었다. 자본주의는 1939년부터 1945년까지 진행된 2차 세계대전은 전세계적으로 8천만 명에 가까운 사망자를 낳았다. 끔찍한 학살과 파괴를 통해 자본주의는 그간 누적된 모순을 털어버리고, 청춘의 몸으로 돌아가 다시 이윤축적을 시작하게 되었다. [새로운 성장기: 전후호황과 개량주의의 시대] 세계대전과 대량학살을 통해 다시 청춘의 몸으로 돌아간 자본주의는 약 20여년 간 활기찬 성장(전후호황)의 시대를 구가했다. 그러나 축적된 기술을 바탕으로 훨씬 더 집중된 성장을 수행한 만큼, 이윤율 위기는 훨씬 더 빠르게 찾아왔다. 이는 1970년대 스태그플레이션(불황과 인플레이션이 동시에 발생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새로운 모순 축적기: 신자유주의, 세계화, 금융화 시대] 이에 대한 자본의 대응은 착취와 수탈을 획기적으로 강화해 이윤율을 회복하는 것이었다. 즉, 신자유주의, 세계화, 금융화였다.[1] 하지만 신자유주의, 세계화, 금융화로 착취와 수탈을 강화한지도 40여년이 지난 오늘날, 더 이상 신자유주의로도 해결하지 못하게 된 축적의 위기가 오늘날 위기와 전쟁의 시대를 다시 열어젖히게 됐다. [새로운 모순 폭발기: 위기, 전쟁, 혁명의 시대] 오늘날 세계정세의 특징은 무엇인가? 자본주의가 태동하던 자유경쟁 자본주의 시절부터 독점과 제국주의 시기를 지나 세계대전을 벌일 때까지, 자본주의가 모순을 축적하고 대량파괴로 이를 털어버리는 첫 번째 순환을 지나왔다면, 그 이후에 펼쳐진 두 번째 순환이 이제 폭발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는 점이다. 세계는 마치 1차 세계대전 이전, 더 이상 개척할 식민지를 찾지 못해 서로의 식민지를 두고 쟁탈전을 벌이던 제국주의 패권대결의 시기와 그 어느 때보다 유사해지고 있다. 미국과 중국을 핵심 축으로 하는 제국주의 패권국들은 세계에 대한 자기 영향력을 넓히기 위해 경쟁하고 있고, 이는 보호무역 확대, 기술전쟁, 관세전쟁과 같은 경제적 경쟁은 물론, 군비증강, 대리전, 식민지·약소국 지배개입 강화와 같은 정치군사적 경쟁으로도 터져나오고 있다. 각국에서는 이 냉혹한 경쟁의 시대에 더욱 노골적으로 ‘자국의 이익’을 지킬 수 있다고 맹세하는 극우세력들이 대중적 지지를 얻으며 성장해가고 있다. 동시에 자본주의가 그간 약속했던 안정적 질서가 깨지면서 노동자민중은 더욱 가혹한 생활조건의 하락과 생존의 위기를 강요받고 있고, 이는 각국에서 계급투쟁이 폭발하는 촉매제가 되고 있다. 이번 장에서는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 ‘위기, 전쟁, 혁명의 시대’의 면면을 살펴보고, 이 야만의 시대를 바꿔내기 위한 우리의 과제에 대해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1. 위기: 만성화된 자본주의의 장기불황 오늘날 자본주의는 거대한 위기에 빠졌다. 자본주의가 위기라는 건 무슨 뜻인가? 자본주의는 이윤 축적을 지상목표로 하는 체제다. 자본주의가 위기라는 건, 근원적으로 이윤 축적에 큰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자본주의는 왜 이윤 축적에 큰 문제가 발생했는가? 역설적으로 이는 자본주의가 너무 많이 성장했기 때문이다. 오늘날 엄청난 속도의 대량생산이 가능한 자본주의는, 이전만큼 빠른 속도로 더 성장하는데 큰 어려움에 봉착했다. 잇따른 기술혁신으로 생산성은 엄청나게 높아졌는데, 그 결과 왠만한 기술혁신으로는 더 이상 이윤율이 충분히 올라가지 않는다. 사실 이런 어려움에 봉착한지는 꽤 오래되었다. 이미 20여 년의 전후호황을 끝내던 무렵인 1970년대에 자본주의는 같은 이유로 근본적인 이윤율 하락 문제에 부딪혔다. 그 때 자본주의가 택한 해법이 신자유주의, 세계화, 금융화인데, 이 해법의 본질은 기술혁신이라기 보다는 노동자에 대한 착취와 수탈을 강화하는 것이었고, 그런 점에서 하락하는 이윤율에 대한 근본적 처방이 될 수 없었다. 경제적 측면에서 자본주의가 봉착한 막다른 길은, 40여년 간의 신자유주의 구조조정과 세계화를 통해 노동자들에 대한 착취수준을 획기적으로 끌어올렸음에도 불구하고, 이윤율은 충분히 올라가지 않는 오늘날의 현실을 통해 입증되고 있다.[2] 지난 40여년 간의 신자유주의 정책으로 노동자계급에 대한 착취와 수탈의 정도가 임계선까지 다가왔다는 것은 세계 곳곳에서 생존권 위기에 맞서 폭발하고 있는 계급투쟁의 존재를 통해서 드러난다. 착취와 수탈을 지금보다 더 강화시켰다가는 피지배계급이 혁명을 하겠다고 들고 일어날 수 있다. 그렇다면 기술혁신을 통한 생산성 증대로 이윤율을 높이는 방법을 찾아야하는데, 이것도 큰 어려움에 봉착해있다. 이것이 오늘날 자본주의 위기의 본질이다. 이 위기 앞에서 자본가계급은 어떤 선택을 하고 있는가? 자본가계급은 사회적 위기가 얼마나 심각하건, 자기 이윤을 획득하는 게 무엇보다 중요한 존재다. 세상이 멸망하기 직전까지도 자본가들은 이윤을 벌어들일 수 있는 수단을 찾는다. 그래서 오늘날 자본가계급이 하고있는 주요한 선택 중 하나는 금융수탈의 지속이다. 이미 2008년 금융위기를 통해, 금융수탈이 어떤 파괴적인 위기를 불러올 수 있는지 다시 한 번 전세계에 입증됐다. 그러나 자본가는 당장의 이윤을 포기할 수 없고, 생산적 투자에 돈을 쓰기보다는 상대적으로 높은 이윤율을 쉽게 보장해주는 금융투기에 열을 올린다. 금융위기가 대공황으로 이어지는 걸 막기 위해 취했던 양적완화와 초저금리 정책도 이를 부추겼다. 그 결과는, 2008년 금융위기 때보다 더욱 심각해진 주식, 부동산, 가상화폐 등 금융시장의 거품이다. 금융시장의 어마어마한 거품 반대편에는 만성화된 장기불황이 있다. 금융수탈의 파괴적 속성이 2008년 금융위기로 터져나왔을 때, 자본주의는 초저금리와 양적완화를 통해 금융위기가 대공황으로 치닫는 것은 가까스로 막아냈다. 하지만 대공황 대신, 이전 시기와 같은 성장률을 회복하지 못하는 대불황이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이는 자본주의의 본질적인 성장동력이 꺼져가고 있음을 드러낸다. 더군다나 전쟁, 기후위기, 보호무역 등 경제위기가 야기한 정치, 사회 위기는 공급망에 충격을 주며 더 큰 경제위기를 부른다. 공급망 교란과 (금융화로 인한) 화폐가치 하락 등으로 발생한 인플레이션은 노동자민중의 생활조건을 하락시키고, 이는 계급투쟁을 촉발시키며 자본주의를 한층 더 위기로 내몬다. 악순환의 반복이다. 신자유주의, 세계화, 금융화로는 타개가 불가능해진, 만성적인 자본주의의 장기불황이 오늘날 위기와 전쟁의 시대를 규정하는 근원적 토대다.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 마이클 로버츠는 오늘날 세계경제의 만성적 장기불황 상태를 아래와 같이 설명한다.[3] 미국 경제 전망조차도 많은 미국 측의 낙관론에도 불구하고 특별히 주목할 만한 수준은 아니다. 코메리카 은행의 수석 경제학자 빌 애덤스는 “금리가 하락 추세에 있고, 휘발유 가격이 작년보다 낮으며, 소득이 인플레이션보다 빠르게 증가하고 있기 때문에, 앞으로 1년 내 경기 침체 가능성은 2023년 초보다 낮아 보인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는 경제학자들이 평균적으로 “2024년 미국 경제 성장률이 1%에 그칠 것으로 예상한다”며, 이는 “장기 평균 성장률의 절반 수준이며, 2023년 예상치인 2.6% 대비 상당한 둔화”라고 인정했다. 따라서 최상의 시나리오에서도 경기 침체는 아니지만, 2024년에는 사실상 정체 상태에 머무를 전망이다. 조지아 주립대 경제학자 라지브 다완은 “이는 경기 침체(Recession)라기보다 성장 정지(Growth Stop)에 가깝다”고 말했다. G7 나머지 국가들은 상황이 더 나쁘다. 독일 경제는 2023년 0.3% 감소했으며, 제조업이 전년 대비 6~7% 위축되면서 올해 더 큰 하락을 보일 수 있다. 프랑스와 영국 경제는 2023년 4분기 마이너스 성장을 기록했다. 캐나다와 일본도 마찬가지이며, 이탈리아는 정체 상태다. 네덜란드, 스웨덴, 오스트리아, 노르웨이 등 여러 선진 자본주의 국가들은 이미 경기 침체에 빠져 있다. 소위 신흥 경제국들 역시 2020년 팬데믹 침체 이후 2022년 회복세를 보였으나, 현재 상당수 국가에서 성장세가 크게 둔화되었다. ... 선진 자본주의 국가 대다수 국민에게 물가는 팬데믹 종료 이후 평균 20% 상승했으며(현재도 상승 중) 아르헨티나(150%), 터키(50%) 등 많은 빈곤국 및 중소득국에서는 상황이 더욱 악화되었다. 그 결과 평균 가구의 실질 소득은 2019년 이후 감소했으며, 이는 사실상 수십 년 만에 가장 큰 생활 수준 하락이다. ... 세계은행은 최신 보고서에서 이를 요약했다. 미국에는 경기 침체가 없을지 모르지만, “세계 경제는 30년 만에 최악의 5년간 성장세를 기록할 전망이다”. ... 2024년 세계 무역 성장률은 팬데믹 이전 10년 평균의 절반 수준에 그칠 전망이다. 세계 상품 무역은 2023년 위축되며 지난 20년간 글로벌 경기 침체기를 제외한 첫 연간 감소세를 기록했다. 2021-24년 세계 무역 회복세는 지난 반세기 동안 글로벌 경기 침체 이후 가장 약한 수준으로 전망된다. 선진국 경제는 2023년 1.5%에서 1.2%로 성장률이 하락할 것으로 예상됐다. 많은 개발도상국 경제는 “5천억 달러가 넘는 부채 부담”과 축소되는 ‘재정 여력’(즉, 정부가 사회 복지 수요에 지출할 수 있는 능력)으로 여전히 발목이 잡혀 있다. 식량 불안정은 2022년 급증했으며 2023년에도 높은 수준을 유지했다.[4] 역사적으로 노동자에 대한 착취율을 끌어올리는 것보다 더 결정적인 자본주의의 성장동력은 기술혁신으로부터 나왔다. 자본가들은 노동자의 착취율 강화는 절대적 한계가 명확하지만, 기술혁신을 통해 노동생산성을 획기적으로 끌어올리는 것을 통해 이윤율 하락을 만회했다. 그러나 2강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기술혁신은 유기적 구성의 고도화를 부르고, 이는 결국 장기적인 이윤율 하락으로 이어진다. 오늘날 AI기술이나 5G, 전기차 등 이른바 ‘미래 먹거리 산업’에 대해 4차 산업혁명이니 하는 과장된 담론이 오가지만, 실제 이러한 기술혁신이 개선할 수 있는 이윤율 회복은 제한적이다. “소위 '위대한 7사'라 불리는 하이테크·소셜미디어 기업들과 에너지 거물, 은행들이 막대한 이익을 보고했음에도 불구하고, 나머지 경제 부문은 매우 낮은 이윤율을 경험하고 있다. 동시에 기업 부채는 매우 높고, 가계(모기지)와 기업(대출) 모두 차입 금리가 높은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 따라서 기업들은 가위날 두 개(낮은 이윤, 높은 금리) 사이에 끼인 상태다. 이윤과 금리라는 가위날은 경기 침체와 신용 경색의 위험을 내포한다. 특히 부채 수준이 은행 계좌가 아닌 소위 사모펀드와 '그림자 금융'에 숨겨져 있기 때문이다.”[5] 만성적 장기불황을 생산성 증대가 아니라 수탈로 만회하려는 흐름은 사회적 불평등의 확대로도 표현된다. 옥스팜은 극단적 부와 극단적 빈곤이 25년 만에 처음으로 동시에 증가했다고 지적한다. “일반인들이 식량 같은 필수품에 매일 희생하는 동안, 초부자들은 자신들의 가장 과감한 꿈조차 뛰어넘었습니다. 불과 2년 만에 이번 10년은 억만장자들에게 역대 최고의 시기가 될 전망입니다—세계 최상위 부자들을 위한 '20년대 번영기'가 도래한 셈이죠,”라고 옥스팜 인터내셔널의 가브리엘라 부허 사무총장은 말했다. 2020년 이후 팬데믹과 생활비 위기 속에서 새로 창출된 부의 63%(26조 달러)는 상위 1%가 독점한 반면, 나머지 37%(16조 달러)는 전 세계 나머지 인구가 나눠 가졌다. 하위 90%가 1달러의 부를 창출할 때마다 억만장자는 약 170만 달러를 벌어들인 셈이다. 억만장자들의 재산은 하루에 27억 달러씩 증가했다! 이는 지난 10년간 억만장자의 수와 재산이 두 배로 증가하는 등 역사적인 증가세를 보인 데 이어 발생한 현상이다. 동시에 현재 최소 17억 명의 노동자가 임금보다 물가 상승률이 더 높은 국가에서 살고 있으며, 8억 2천만 명 이상(지구 인구의 약 10분의 1)이 굶주림에 시달리고 있다. 여성과 소녀들은 종종 가장 적게, 가장 늦게 식사를 하며 전 세계 기아 인구의 거의 60%를 차지한다. 옥스팜은 세계은행의 말을 인용해 “우리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가장 큰 규모의 글로벌 불평등과 빈곤 증가를 목격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고 전했다.[6] 대불황에 대응하는 자본가들의 또 다른 반응은 노동개악, 긴축정책, 구조조정 등 신자유주의 시기에 이어온 정책을 한층 더 공세적으로 펼치는 것이다. 연금개악, 복지축소 등 프랑스나 독일, 영국과 같은 기존 제국주의 국가에서는 개량의 성과들을 빼앗기 위한 전투가 벌어지고 있다. 한편 올해 네팔, 인도네시아, 필리핀 등에서 벌어진 부패와 불평등에 맞선 시위가 드러내듯, 지난 시기 개량의 성과를 공유하지 못했던 주변부 노동자민중은 대불황 아래 훨씬 더 큰 생존권 위기를 경험하고 있다. ... 최빈국들은 현재 부유한 채권국에 대한 부채 상환에 의료비보다 4배 더 많은 비용을 지출하고 있다. 전 세계 정부의 4분의 3이 향후 5년간 7조 8천억 달러 규모의 긴축 정책에 따른 공공 부문 지출 삭감(의료 및 교육 포함)을 계획하고 있다.[7] [네팔의 경제상황] 정치 계급이 부유해지는 동안, 일반 시민들의 삶은 끊임없는 투쟁이다. 실업과 불완전고용은 특히 젊은 층에서 만연하다. 추정치에 따르면 실업률은 20~30%에 달한다. 정규 경제는 매년 졸업하는 수십만 명의 학생들을 흡수할 능력이 없다. 수백만 네팔인에게 유일한 탈출구는 이주이다. 네 가구 중 한 가구는 카타르, 말레이시아, 아랍에미리트, 인도 등에서 종종 불안정한 조건에서 일하는 친척들이 보내는 송금에 의존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이는 재능과 젊은 에너지의 지속적인 유출이다. 지난해만 해도, 약 74만 명의 노동자가 일자리를 찾아 국외로 떠났다. ... 현대 국가의 기둥이라 여겨지는 교육과 보건은 많은 이들에게 접근 불가능한 사치품이다. 공교육이 열악한 탓에 가족들은 질 좋은 사립교육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빚을 진다. 공공 의료 서비스는 불충분하며, 의료 비상사태는 가정을 영원히 파산으로 몰아넣을 수 있다. ... 이러한 불안정한 현실은 정치 계급과 그 추종자들의 사치스러운 삶과 극명히 대비된다. 여기서 네포베이비(영어로 ‘nepo-baby’, 즉 '친인척 우대주의의 산물(Nepotism)'이라는 용어에서 차용)라는 개념이 등장하는데, 네팔에서는 특히 마음을 상하게 하는 의미를 가진다. 이는 명백한 능력 없이도 의회 의석, 정당 지도부 자리, 국가 계약, 대사관 직위를 물려받는 권력 정치인의 자녀들을 가리킨다. 평범한 청년이 도하에서 경비원으로 일하기 위해 이민을 가야 하는 반면, 네포베이비들은 혈통만으로 특권과 권력의 삶을 누리며, 옛 체제 못지않게 특궈적인 현대적 정치 카스트 체제를 영속화한다.[8] 오늘날 자본주의가 노동자민중에게 얼마나 큰 위기를 전가하고 있는지는 한국의 현실을 통해서도 명징하게 알 수 있다. 한국은 1997년 IMF 위기를 기점으로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이 선도적으로 관철된 나라 중 하나이다. 정규직과 비정규직으로의 노동자계급의 분절은 전 세계 자본주의에서 배우고 싶어하는 훌륭한 초과착취 체제이다. 비정규직 제도가 30여년 간 지속되어온 결과는, 극단적으로 낮은 출생률로 표현되는 극심한 재생산 위기다. 자본주의가 체제 위기를 돌파하기 위해 사용한 해법이 또 다른 위기를 낳은 것이다. 2. 극우와 파시즘의 성장 앞서 살펴본 자본주의의 만성적 장기불황이 근원이 되어, 오늘날 여러 반동적인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특히 정치적 측면에서는 위기관리에 실패한 기존 자본가 정치세력들을 대신해 새로운 대안으로서 극우세력이 부상하고 있다. 오늘날 극우세력의 특징 우선 오늘날의 극우가 현상적으로 어떤 특징들을 갖고 있는지 살펴보자. 본질적으로 극우는 기존의 자본주의 위기를 훨씬 더 급진적인 방식으로 해결하길 원한다. 노동자민중에 대한 착취와 수탈을 훨씬 강화하고자 하고, 이를 위해 안티 페미니즘, 기후위기 부정 등 자본의 착취, 수탈 강화에 도움이 되는 문화전쟁, 이데올로기전쟁을 수행한다. 극우마다 양상은 다르지만, 일반적으로 극우는 트럼프와 같이 민족주의, 국수주의 이데올로기를 갖고 자국의 위기비용을 타국에게 전가하려고 하며, 군사력을 통해 이를 뒷받침하고자 하기 때문에 군비증강과 재무장을 추구한다. 노동자의 자유를 극단적으로 억압하며 자본의 자유를 극단적으로 추구하는 특징은 스스로를 ‘무정부자본주의자’라고 호칭하는 아르헨티나 극우 밀레이에게서 대표적으로 드러난다. 밀레이는 집권과 함께 △공공지출 대폭 축소 △공공사업 전면 유보 △에너지·교통보조금 삭감 △연방예산 동결 등 ‘경제비상조치’를 발표하고, 노동권, 임대차, 가격규제, 민영화, 교육, 연금, 관광, 위성인터넷 서비스, 의약품 판매, 무역, 외국인 토지매입 등 다방면에 걸친 대규모 규제완화를 위해 수백 개의 법률을 무력화하는 366개 조항의 ‘메가 대통령령’을 발표했다. 뒤이어 △공기업 사유화 △시위제한 명령권 △불법시위 처벌 강화 △환경규제 완화 △세금·연금·에너지·안보 관련 의회 권한의 대통령 양도 등이 포함된 664개 조항의 ‘옴니버스 법안’을 의회에 제출했다. 특히 노동권과 관련해 ‘메가 대통령령’은 △미등록 고용에 대한 벌금·처벌 폐지 △수습기간을 3개월에서 8개월로 연장 △업무시간 중 노조활동 금지 △필수부문(의료·교육·수도·가스·전기·항공·통신 등)은 파업시 75% 업무유지 △중요부문(운송·식품가공·물류·광산·우편 등)은 파업시 50% 업무유지 △파업 도중 작업장점거·출입봉쇄·기물파손하면 해고 △사업장 단위 조합비 자동공제를 개별 동의로 변경 △기존에 노조가 운영하던 조합원 의료보험에 보험사 진입 허용 등을 포함하고 있다. 임대차 관련해서는 △2020년부터 시행돼 오던 임대차 기간 3년 보장과 임대료 인상 제한 폐지 △미국 달러로 임대료 납부 요구 허용 등을 포함하고 있다. 모든 가격통제와 가격규제도 폐지했다. 리튬채굴 등을 위한 외국인 토지매입도 전면 허용했다.[9] 이러한 급진적 초과착취 계획이 실현되기 위해서는 노동자계급의 분열과 원자화가 필수적이다. 이를 위한 효과적인 수단은 노동자계급의 여러 정체성을 활용한 차별과 갈라치기다. 미국과 유럽에서 이는 주로 이민자 혐오와 추방 정책 등으로 나타난다. 이는 신자유주의 정책으로 인한 삶의 조건의 후퇴를 이민자 탓으로 돌림으로써, 노동자계급을 분절시키고 백인 노동자계급의 지지를 획득하는 효과적인 수단이다. 때로 극우는 이민자들을 공격하기 위해 페미니즘의 언어를 차용하는 등 ‘유연한’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유럽에서 이탈리아 조르자 멜로니 총리는 종교와 가족과 모성의 복원을 얘기하며 임신중지권을 부정하는 철저한 가부장제 옹호자인데, 여성의 권리를 위협하는 이슬람 이민자들을 내쫒아야한다는 식의 주장을 펼친다. 앨리스 바이델 독일 AfD(독일을위한대안. 급부상한 극우파 정당) 대표는 스스로 여성이며 여성과 동거를 하면서도, ‘LGBT사상’을 부정하고 이민자들을 내쫒아야한다고 주장한다. 국민전선 대표 마린 르펜은 무슬림 여성이 쓰는 히잡을 ‘가부장제의 상징’으로 몰아세우고, 이민자들은 ‘여성과 동성애자에 대한 무슬림의 공격’이라며 반이민정책을 펼친다. 이렇듯 페미니즘의 외피를 쓴 민족주의에서 가장 큰 피해를 입는 것은 제3세계 여성과 퀴어 노동자들이다. 이렇듯 때때로 페미니즘의 외피를 두르기도 하지만, 본질적으로는 안티페미니즘, 안티LGBT가 오늘날 극우의 중요한 슬로건이다. 극우가 성장할수록 반페미니즘 경향 또한 노골적으로 나타난다. 이는 가부장제를 강화하고 노동자의 분절된 상태를 공고히할 뿐더러, 특히 젊은 남성들을 극우정치로 인입시키는 문화적 수단이 되고 있다. 여성파업이 특히 강렬하게 벌어졌던 스페인에서도 안티페미니즘과 마초이즘이 극우의 핵심 슬로건이 되었다. 미국에선 보수 기독교의 문화전쟁과 연결된 극우파 운동의 성장과 함께, 트럼프가 임명한 대법관에 의해 (임신중지를 합법화했던) ‘로 대 웨이드’ 판결이 뒤집어졌고, 여러 주에서 임신중지권이 불법화되었다. 트럼프는 2기 행정부 집권 즉시 트랜스젠더의 스포츠 출전을 금지하는 법안에 서명했다. 미국에서는 도널드 트럼프가 수많은 반(反)트랜스 행정명령에 서명하여 트랜스 여성들을 남성 교도소에 수감하도록 강요하고, 트랜스 여성들의 여성 스포츠 참여를 금지하며, 성정체성 확인 치료에 대한 자금 지원을 중단했다. 주 정부들은 트랜스젠더가 자신의 성정체성에 맞는 화장실 사용을 금지하거나, 의사가 동성애자와 트랜스젠더를 차별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법안 등 자체적인 반트랜스 법안을 제정하고 있다. 최근 미국 연방 대법원은 테네시주의 미성년자 성정체성 확인 치료 금지법을 합헌으로 판결했다. 현재 의회에 상정된 예산 조정 법안(일명 ‘빅 뷰티풀 법안’)은 메디케어 기금으로 성정체성 확인 수술 및 호르몬 대체 요법(HRT)을 금지할 수 있어, 월 수백 달러의 비용을 스스로 부담하지 않는 한 27만 5천 명의 미국 트랜스젠더들이 사실상 성전환을 포기해야 할 위기에 처했다.[10] 기후위기 부정도 극우들의 중요한 공통점이다. 트럼프가 얼마 전 유엔 연설에서 기후위기를 전면 부정하면서 내세운 수사는 이들의 논리를 잘 보여준다. “탄소중립이니 하는 정책들은 국가경쟁력을 도태시킬 뿐이다. 어차피 다른 나라들은 화석연료를 쓰고 있고, 기후위기는 사기에 불과하고, 우리에겐 자국 경쟁력 강화가 우선이다”. 독일 AfD는 탄소중립 정책이 엘리트의 강요라 선동하며 파리협정 탈퇴를 주장한다. 브라질 보우소나루는 집권 이후 1년 만에 아마존 삼림 벌채를 22% 증가시켰고, 아르헨티나 밀레이는 “기후위기는 사회주의적 거짓말”이라 주장한다. 극우세력이 대안으로 부상하게 된 과정 다음으로 이런 극우세력들이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부상해온 과정을 살펴보자. 국가마다 편차는 있지만 큰 틀에서 2차 세계대전 이후 노동자계급이 일정한 계급투쟁으로 부르주아 민주주의와 일정한 개량을 쟁취했던 강대국들에서는, 중도우파와 중도좌파가 번갈아 집권을 이어왔다. 그런데 1970년대 위기를 겪은 뒤 신자유주의가 본격화 된 뒤에는, 보수주의/자유주의 우파가 집권하든, 개량주의 좌파가 집권하든, 집권세력들은 모두 하나같이 신자유주의의 집행자 역할을 해왔다. 신자유주의를 집행한 정치세력은 노동자민중의 신뢰를 잃으면서 상대편 정당에게 권력을 넘겨주었다. 그런 권력 주고받기를 몇십년 간 반복해오는 동안, 노동자민중은 누가 집권하든 신자유주의의 집행자 역할을 하는 기존의 정치세력 전반에 대한 분노와 환멸을 쌓아왔다. 그러다 2008년 세계금융위기와 그 대응과정이 결정적으로 노동자민중의 삶을 망가뜨렸고, 그 결과 자본주의를 관리하던 집권세력들은 중대한 정치적 위기에 봉착했다. 보수주의, 자유주의, 개량주의로 대표되는 우파/중도우파/중도좌파 정치세력이 모두 인기를 잃어버리면서, 그 자리를 대체하는 새로운 정치세력들이 부상했다. 2010년대 이후 이른바 정치적 양극화가 일어난 것이다. 정치적 양극화는 왼쪽으로도, 오른쪽으로도 진행됐다. 사실 극우파의 성장보다 더 빨랐던 건 왼쪽으로의 급진화였다. 2010년 프랑스 연금개악 반대파업, 2011년 아랍의 봄, 2011년 스페인 ‘분노한 자들’ 운동, 2011년 미국 월가점령운동, 2012년 그리스 긴축반대 총파업 등 2010년대 초반 1차 계급투쟁의 ‘귀환’을 타고, 기존의 집권블록 왼쪽에서 이른바 ‘신개량주의’ 좌파들이 성장했다. 이는 기존의 개량주의가 개량마저 포기하고 박탈하는 것에 맞서 개량이라는 목표를 복원하려는 시도였다. 독일의 좌파당, 프랑스의 불복프랑스, 스페인의 포데모스, 그리스의 시리자, 영국 노동당의 코빈, 미국 민주당의 샌더스 등이 이 범주에 포괄될 수 있었다. 라틴아메리카에서는 연성 좌파정권 물결을 뜻하는 핑크타이드로 나타났다. 그러나 신개량주의는 노동자계급이 아닌 고학력 지식인층이라는 소부르주아 대중을 기반으로 했고, 자본주의 철폐를 추구하지 않는 등 이념적 지향도 매우 소심했다. 특히 신개량주의의 대표격이던 그리스의 시리자가 2015년 집권한 뒤 이른바 트로이카(유럽연합·유럽중앙은행·국제통화기금)[11]의 압력에 굴복하여 긴축정책을 전면적으로 실행하면서, 세계적 차원에서 신개량주의의 기세가 결정적으로 꺾였다. 2010년대 계급투쟁의 물결과 함께 부상한 신개량주의 정치노선이 막다른 길을 보여준 것은 계급투쟁의 전진에 제동을 걸었고, 이후에는 정치적 양극화 중 오른쪽으로의 성장이 훨씬 두드러지게 됐다. 2010년대 중반부터 지난 10여 년 세계 정치를 뒤흔든 것은 집권블록의 오른쪽에서 등장한 극우 세력이었다. 2016년 트럼프의 미국 대통령 당선과 영국의 유럽연합 탈퇴는 결정적인 신호였다. 세계적으로 극우 세력의 핵심 구호는 보호주의와 이민자 추방이었다. 여성과 소수자에 대한 혐오, 기후위기 부정, 부정선거 음모론도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말도 안 되는 거짓 대안을 내밀면서도, 많은 나라에서 극우 세력은 삶의 고통에 시달리는 노동자·민중들 속에서 상당한 기반을 구축해 왔고, 희망을 잃어버린 청년들 속에서도 기반을 확대해 나가고 있다. 극우의 부상은 해를 거듭할수록 여러 지표에서 새로운 기록을 갱신하고 있다. 2010년대 중후반에 정치의 새로운 ‘돌풍’이라 소개되었던 여러 극우정당들이, 오늘날 제1당이 되며 권력을 쥐었거나, 권력의 코앞까지 다가왔다. 마린 르펜은 2014년부터 유럽연합 선거에서 세 번 연속 최다 의석을 확보했습니다. 그래서 큰 영향력을 얻었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선거적 성공에도 불구하고, 최근까지 국민연합은 지역적 존재감 부족으로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국민연합은 영향력 있는 주류 속으로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자본가들도 국민연합에 거리를 두었습니다. 국민연합은 2017년 대선 결선투표에서 800만 표를 얻었지만 이어진 총선에서는 8명의 의원만을 당선시켰습니다. 기존 주류 정당에 유리한 프랑스의 비민주적인 선거 시스템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이 2년 전에 바뀌었습니다. 이제 장벽은 무너졌고 국민연합은 2022년 총선에서 의원 89명을 당선시킨 정당으로 성장했습니다. 올해 6월에 치러진 유럽연합 선거에서 국민연합은 프랑스의 100개 주 가운데 96개 주에서 1위를 차지했습니다. 지역에 깊이 뿌리내린 정당이 되었음을 보여준 것입니다. 의회 해산 후 7월에 치러진 총선에서는 국민연합이 126명의 의원을 확보했습니다. 공화당 출신 동조세력을 포함할 경우 142명의 의원을 확보했습니다. 국민연합의 부상은 마크롱에 대한 엄청난 증오의 결과입니다. 마크롱은 르펜을 자신의 적, 자신의 맞수로 만들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르펜은 마크롱에 대한 차악이었습니다. 그렇게 되자 자본가들의 일부가 이제 르펜을 하나의 가능성으로 보기 시작했습니다.[12] 아래는 최근 유럽 주요국가들에서 약진하는 극우 정당들의 성장세를 정리한 표이다.[13] <최근 유럽 주요국에서 약진하는 극우 정당들> 대표 극우정당 현황 이탈리아 이탈리아의 형제들 (FdI) 22년 9월 총선 1위(26.0%)로 집권: 멜로니(총리) 스웨덴 민주당 (SD) 22년 9월 총선 2위(20.5%) 스페인 목소리 (Vox) 23년 7월 총선 3위(12.4%) 네덜란드 자유당 (PVV) 23년 11월 총선 1위(23.5%): 연정배제 프랑스 국민연합 (RN) 24년 6월 총선 1차 1위(33.2%), 2차 3위(의석) 독일 독일을 위한 대안 (AfD) 25년 2월 총선 2위(20.8%) 영국 개혁당 (Reform UK) 25년 6월 여론조사 1위(29%) ‘민주’정권과의 주고받기를 통해 성장하는 극우세력 그런데 오늘날 극우세력은 ‘민주정권과의 주고받기’를 통해 자신을 강화해간다는 특징이 있다. 이 점을 좀 더 살펴보자. 아래는 최근 극우세력이 집권한 주요 국가들의 정권 변화 흐름이다. <미국의 정권 변화> 중도우파 우파 중도우파 극우파 오바마 (민주당) 2009~2017 트럼프 (공화당) 2017~2021 바이든 (민주당) 2021~2025 트럼프 (공화당) 2025~2029 <아르헨티나의 정권 변화> 중도좌파 중도좌파 우파 중도좌파 극우파 키르치네르(남) (정의당) 2003~2007 키르치네르(여) (정의당) 2007~2015 마크리 (공화당) 2015~2019 페르난데스 (정의당) 2019~2023 밀레이 (자유지상당) 2023~2027 <브라질의 정권 변화> 중도좌파 중도좌파 우파 극우파 중도좌파 룰라 (노동자당) 2003~2010 후세프 (노동자당) 2011~2016 테메르 (민주운동당) 2016~2018 보우소나루 (사회자유당) 2019~2022 룰라 (노동자당) 2023~2026 <한국의 정권 변화> 우파 우파 중도우파 극우파 중도우파 이명박 (한나라당) 2008~2013 박근혜 (새누리당) 2013~2016 문재인 (민주당) 2017~2022 윤석열 (국민의힘) 2022~2024 이재명 (민주당) 2025~2030 이를 보면 분명한 경향을 확인할 수 있는데, 이른바 중도우파/중도좌파(‘민주’정권)가 집권한 뒤에는 우파가 집권하고, 서로 몇 차례 권력을 주고받는 과정을 거치며 극우파가 집권한다는 것이다. 이 과정은 큰 틀에서 이렇게 전개된다. ‘민주’정권은 권력을 쥐고서 노동자민중의 고통을 전혀 해결하지 못하고, 이에 실망한 민중들이 우파에게 표를 던진다. 그러나 우파도 노동자민중의 고통을 해결하지 못하기는 매한가지이고, 민중들은 다시 ‘민주’정권에 희망을 걸며 표를 던진다. 그러나 다시 ‘민주’정권에 실망한 민중들은 그 다음에는 더 화끈한 해결책을 약속하는 극우파에게 표를 던진다.[14] 다시 말하면, 인간의 얼굴을 앞세우지만 노동자·민중의 고통을 전혀 해결하지 못한 채 오히려 가중시키는 부르주아 민주주의 세력의 속성이 극우정권을 성장시키는 핵심 고리다. 한국의 사례에서 우리는 이 메커니즘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한국에서는 우경화된 정치지형으로 인해 중도좌파가 당선된 적은 없었지만, 87년 제한된 부르주아 민주주의를 쟁취한 이후, 우파(국민의 힘)와 중도우파(민주당)가 번갈아가며 권력을 주고받았다. 노태우, 김영상 정부는 주로 노동자들을 강경하게 탄압함으로서 노동개악이나 민영화 등의 조치를 통과시키려다가 격렬한 저항에 부딪쳐 그 시도가 좌절됐다. 반면, 김대중과 노무현은 노동자와의 ‘노사정 협의’와 같은 방식을 사용해가며 더 효과적으로 위기의 비용을 노동자민중에게 전가해왔다. 김대중 정부 때 정리해고제와 파견법 도입, 노무현 정부 때 비정규직의 제도화가 그 대표적인 성과다. 이른바 ‘민주정부’ 10년의 결과인 신자유주의 전면화와 비정규직 양산에 환멸을 느낀 민중들은, 경제성장을 약속하는 이명박 정부에게 표를 던진다. 그러나 이명박, 박근혜 시기 실상 재벌들을 위한 특혜와 민영화, 민주주의 탄압과 노동개악, 부정부패 등을 경험한 민중들은 박근혜 정부를 타도하고 다시 문재인 정부를 당선시켰다. 그러나 문재인 정부는 사상 최대의 부동산 폭등, 조국사태로 드러난 위선, 최저임금 산입범위 개악과 특별연장근로 무제한 허용 등으로 다시 한 번 민중의 환멸과 분노를 불러일으켰고, 이는 윤석열 당선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특히 여기서, 극우정권과 ‘민주’정권이 실제 집행하는 정책에서 큰 차이가 없다는 점도 짚어볼 필요가 있다. 사실 극우 정권이든, 그와 정권을 주고받는 중도좌파-중도우파-우파의 ‘민주’ 정권이든, 그들이 시행하는 정책은 크게 다르지 않다. 세계화와 관련해서는 일정한 차이가 존재하지만, 신자유주의와 긴축의 결합이 결국 그들 모두의 핵심 정책이다. 당연히 노동자·민중의 고통은 해결될 수 없고, 따라서 강한 환멸이 뒤따른다. 상대적으로 극우 정권에게는 파시즘 가능성에 대한 반발이 집중된다면, ‘민주’ 정권에게는 사회경제적 박탈에 대한 분노가 집중된다. 과거 부르주아 민주주의 안에서 중도좌파-중도우파와 우파가 서로 경쟁하고 대립하며 정권을 주고받던 것과 매우 비슷하게 이제 중도좌파-중도우파-우파와 극우가 서로 경쟁하고 대립하며 정권을 주고받는다.[15] 실상 트럼프 1기 이후 바이든의 집권도 ‘극우와 민주정권의 주고받기’를 한차례 더 진행하며 트럼프에게 더 큰 힘을 실어준 과정이었다. 바이든은 대중국 견제에 있어 트럼프의 제국주의적 정책기조와 다를바 없었고, 이민자와 유색인종을 향한 경찰폭력과 단속, 철도파업 금지령 발동 등 국내적으로도 위기의 비용을 노동자민중에게 떠넘긴다는 점에서 동일했다. 무엇보다 2023년 10월 7일 이후 이스라엘의 집단학살이 본격화되었을 때, 바이든 정부는 학살을 옹호하고 지원하는 제국주의 패권국으로서의 본질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바이든은 미국 노동자계급의 삶을 전혀 개선하지 못했고, 민주당의 ‘진보적’ 외피는 ‘학살자 조’라는 정당한 비난과 함께 끝장났다. 바이든의 이민정책, 기후정책, 트랜스젠더 권리를 둘러싼 몇가지 예를 살펴보자. 국토안보부는 미국-멕시코 국경에 장벽을 세우기 위해 26개의 환경 보호법을 무력화했다. 트럼프 시대의 가장 악명 높고 상징적인 악행이 바이든 정부 아래서도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바이든이 무시한 법들 중 일부는 이 프로젝트를 위해 행정부가 어떤 환경 보호와 인권을 희생하려 하는지 매우 명백히 보여준다. 여기에는 청정 공기법, 청정 음용수법, 아메리카 원주민 종교 자유법이 포함된다. “청정 공기”, “청정 음용수”, “종교 자유”는 바이든이 트럼프의 국경 장벽 건설을 계속하기 위해 무시한 보호 조치들 중 일부에 불과하다. 바이든은 또한 국경에 도착한 베네수엘라인들을 대상으로 한 직접 추방 비행편을 재개하고 있으며, 동시에 정권 교체 노력의 일환으로 트럼프가 베네수엘라에 부과한 제재를 계속 유지하고 있다. 베네수엘라에 대한 이러한 공격적 정책은 양당 모두의 지지를 받았으며, 알렉산드라 오카시오 코르테즈 같은 진보적 민주당원들조차도 지지했다. ... 사실 이건 놀랄 일도 아니다. 아이들을 우리에 가두고 가족을 갈라놓는 것부터, 망명권 금지 조치를 유지하고 확대하는 것까지, 바이든은 꾸준히 트럼프의 이민 정책에 동의해왔다. 그는 소셜미디어에서 국경 순찰대 예산 증액을 지지한다고 자랑했으며, 미국-멕시코 국경 횡단 사상 최다 사망자가 발생한 해는 바로 그의 행정부 아래인 지난해였다.[16] 바이든 행정부는 현재 트럼프 행정부가 같은 시점에 발급한 것보다 더 많은 가스·석유 시추 허가를 승인했다. 취임 2년 차 기준 수백 건을 넘어선 수치다. 최근 바이든이 화석 연료 산업을 위해 취한 두 가지 조치—알래스카의 윌로우 프로젝트 승인 및 멕시코만 시추권 경매—는 대통령이 기후 공약을 결코 이행하지 않을 것임을 확인시켜준다.[17] 4월 6일 바이든 행정부는 트랜스 청소년의 스포츠 참여와 관련된 타이틀 IX 규정 변경안을 제안했다. 이 규정 변경안은 공공 자금을 받는 모든 학교나 대학이 “전면 금지” — 모든 트랜스 청소년의 모든 스포츠 참여를 금지하는 조치 — 를 시행하는 것을 금지하지만, 학교가 종목별로 트랜스젠더 학생의 스포츠 활동을 금지하는 것은 허용할 것이다. 민주당이 이를 트랜스젠더 권리 승리라고 선전하고 있지만, 이는 소위 ‘진보적’ 정당이 트랜스젠더 친화적으로 보이려는 움직임을 제안하면서도 트랜스젠더 아동을 보호하기 위한 실질적인 조치를 취하지 않는 또 하나의 사례에 불과하다. ... 트랜스젠더, 특히 트랜스젠더 아동에 대한 전례 없는 공격이 벌어지는 와중에도 민주당은 의미 있는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트랜스젠더 권리 보호를 위한 확고한 입장을 취하기보다는, 바이든과 민주당은 뉴욕 타임스를 비롯한 다른 언론 매체들과 함께 트랜스젠더의 존재를 인정한다는 모호한 발언을 하는 한편, 반(反)트랜스 발언과 입법이 무분별하게 통과되도록 방치해왔다. 이번 개정안 제안은 또 하나의 사례다: 바이든과 민주당은 반트랜스 스포츠 입법에 대응하는 조치를 취했다고 주장하며 좌파 성향 유권자들의 표를 모을 수 있지만, 실제로는 어떤 실질적인 변화도 만들어내지 않는다. 선거 시즌이 코앞으로 다가온 만큼, 대통령은 공화당에 비해 포용성과 도덕적 우위를 유지하는 이미지를 구축하는 데 관심이 크다. 동시에 소위 ‘젠더 회의론자’ 성향의 중도층이나 민주당 유권자들의 표를 잃지 않도록, 이러한 반트랜스 공격에 대해 너무 강한 반대 입장을 취하지 않으려 한다. 트랜스젠더를 지지하는 발언을 하면서도 반(反) 트랜스젠더 행동을 취하는 이 섬세한 균형은 특히 스포츠 분야에서 바이든에게 중요하다. 전국이 스포츠 경기에 열광하는 가운데, 스포츠에서의 트랜스젠더 권리를 옹호하는 입장으로 중도 또는 우파 성향 유권자들을 소외시키는 것은 바이든의 득표율에 해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18] 지난해 12월 트랜스젠더 문제에 대한 여론이 우경화되자 조 바이든은 트랜스젠더 운동선수 보호 계획을 폐기하고 군인 자녀의 성정체성 확인 치료를 박탈하는 법안에 서명했다. 선거 운동 중 카말라 해리스는 트랜스젠더 권리 옹호 기회를 여러 차례 거절하며 단순히 “우리는 법을 따라야 한다”고 답변했다.[19] 이번엔 독일의 사례를 보자. AfD가 이번 총선에서 두 개의 주에서 압승을 거두면서, 이들은 자랑스럽게 “AfD는 효과가 있다”는 슬로건을 치켜들었다. 이는 ‘민주’정권인 기독교민주당, 사회민주당 등이AfD에서 내세우는 반이민, 재군사화 정책 등과 별반 차이가 없는 정책을 집행하고 있음을 의미하는 구호다. 즉 오른쪽에서 AfD가 강력하게 ‘옳은’ 주장을 하고 있기 때문에, 중도세력들이 그 쪽으로 끌려오고 있다는 점에서 ‘AfD는 효과가 있다’는 것이다. 다만 ‘민주’세력은 소심하고 부끄럽게 집행하는 정책들을, 극우세력은 대담하고 당당하게 한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선거 당일 밤 공영 TV 토론회에서 AfD의 베른트 바우만(Bernd Baumann) 의회 사무총장은 “AfD wirkt!”라고 선언했다. 이는 “AfD가 효과적이다”는 뜻으로, “BSW[20]와 CDU[21]가 이민 문제에 관한 우리의 핵심 요구를 채택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이는 사실이다: 모든 정당이 AfD의 정책을 받아들였다. 보수 정당인 기민당과 “좌파 보수” 성향의 BSW뿐만 아니라, 연방 정부 역시 추방을 더 많이 요구하며 AfD와 목소리를 맞추고 있다. 스스로를 “진보 연정”이라 칭하는 SPD[22], 녹색당, 자유민주당(FDP)[23]으로 구성된 연방 정부 역시 추방을 원한다. ... 이제 모든 정당이 망명법 개정과 심지어 헌법 개정을 요구하고 있다. 졸링겐 공격[24] 희생자들을 위한 추모식에서 독일 연방 대통령은 이민 감소가 “앞으로 몇 년간 최우선 과제여야 한다”고 말했다. 정부는 다른 솅겐 국가[25](즉, 거의 모든 국가)를 통해 입국한 망명 신청자에 대한 모든 지원금 지급을 중단하고 “침대-빵-비누” 이상의 것을 제공하지 않겠다는 방침이다. 독일 연방헌법재판소는 이미 이 조치가 독일 헌법 제1조(인간의 존엄성 불가침)를 위반한다고 판결한 바 있다. 그러나 이러한 헌법적·인도적 원칙들은 과시적 잔혹성에 대한 요구 앞에 희생되고 있다. CDU의 프리드리히 메르츠는 시리아와 아프가니스탄 출신 모든 망명 신청자를 거부하겠다고 밝혔고, CSU[26]의 마르쿠스 쇠더는 헌법에서 망명권을 완전히 삭제하겠다고 주장했다. 불과 10년 전만 해도 “범죄 외국인” 추방을 요구하는 목소리는 독일 정치의 변방에 있는 네오나치 정당 NPD에 국한되었다. 오늘날에는 녹색당조차 추방 시스템을 강화하기 위해 수십억 유로를 추가로 지출하려 한다. “민주 정당”에 투표하고 “극단주의”에 반대하라는 끝없는 호소는 효과가 없었다. 스스로를 민주주의자라 칭하는 모든 세력이 AfD의 극단적 제안들을 모두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다른 정당들이 AfD의 인종차별적 제안들을 모두 채택했다면, AfD가 대체 얼마나 나쁠 수 있겠는가? 많은 유권자들이 의문을 품었을 것이다.[27] 그런데 극우정권과 ‘민주’정권이 선거를 통해 권력을 주고받는 이러한 현상은, 다른 한편으로 1930년대 파시즘이 완연히 성장했을 때에는 아직 미치지 못한, 그러나 이를 향해 성장하고 있는 오늘날 극우의 상태를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물론 오늘날의 극우 세력은 독일 나치당 같은 고전적인 파시즘 세력과 마찬가지로 자본주의 위기가 극심해진 결과물이며, 몰락하는 대중의 광적인 지지를 바탕에 두고 있다는 점에서 본질적으로 동일하다. 그런데 오늘날 극우 세력이 위기와 고통의 주범이라고 지목하는 대상은 외국, 이민자, 자유무역, 세계화, 국제기구, 좌파, 주류 언론, 기성 정치인 등 상당히 혼란스럽다. 나라마다 편차도 크다. 노동자운동을 핵심적으로 겨냥했던 고전적인 파시즘과 크게 대비되는 지점이다. 오늘날 세계적으로 노동자운동이 상당히 취약한 상태에 있다는 점의 반영이기도 하다. 또한 오늘날의 극우 세력은 고전적인 파시즘 세력과 달리 무장 돌격대를 체계적으로 구축해 내지 못하고 있다. 이것은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자본주의 위기 전개가 국가의 총력 개입 때문에 1930년대 대공황과 달리 대불황이라는 슬로우모션의 형태를 띠는 것과 관련이 있어 보인다. 자본주의 위기에 따른 노동자·민중의 고통이 극심하지만 일거에 파산하는 대신 장기화된 불안정에 시달리는 양상을 띠는 것이다. 갈 곳 없는 퇴역군인들이 별로 없다는 점도 중요한 변수다. 극우 세력이 아직까지는 노동자운동을 핵심적으로 겨냥하지 않는 점과도 연결돼 있을 것이다. 그러다 보니 오늘날의 극우 세력은 부르주아 민주주의를 부분적으로 부정하고 위협하는 지점까지는 나아가지만, 정권을 잡아도 부르주아 민주주의를 끝장내지 못한다. 부르주아 민주주의 선거로 집권했다가 그 선거로 정권을 잃고 다시 그 선거로 정권을 되찾는다. 그런데 이와 같은 쳇바퀴는 극우 세력에게 걸맞지 않다. 극우 세력은 ‘화끈한 해결’을 대중에게 약속했고, 실제로도 뭐가 됐든 화끈하게 저질러보려고 한다. 그러나 고전적인 파시즘 세력에게 ‘화끈한 해결’을 가능하게 했던 무장 돌격대가 오늘날의 극우 세력에게는 없다. 여기서 친위쿠데타를 통한 군사파시즘 도입이 이 간극을 메우기 위한 수단으로 시도되고 있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친위쿠데타를 정당화하기 위한 이데올로기적 밑자락으로 부정선거 음모론을 활용하면서 말이다. 2021년 1월 미국의 의사당 폭동을 사주할 때 트럼프는 군부를 동원하지 못했다. 하지만 2023년 1월 브라질에서의 폭동은 쿠데타 요구 시위와 노골적으로 결합됐으며, 실제로 보우소나루-국방부장관-해군총사령관의 지휘 아래 쿠데타를 단행하려 했으나 육군총사령관의 거부로 실패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2025년 미국에서는 트럼프의 친위쿠데타 가능성에 대한 경고가 공공연하게 나오고 있으며, 특히 6월 로스엔젤레스의 이민자단속 항의시위에 주방위군과 해병대가 투입됐을 때는 많은 사람들이 이것을 친위쿠데타 자락 깔기로 인식했다. 2024년 한국에서 발생한 12·3 친위쿠데타도 이러한 세계적 맥락에서 재조명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어쨌든 2023년 브라질의 친위쿠데타도 2024년 한국의 친위쿠데타도 실패했다. 트럼프가 친위쿠데타에 나설 경우 성공할 수 있을지도 의문이다. 2025년 6월 로스엔젤레스 군대 투입 직후 미국에서 500만 명이 반트럼프 시위에 나설 정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분명한 사실이 있다. 세계적으로 극우 세력이 파시즘으로 진화할 방안을 찾기 위해 무척 애를 쓰고 있다는 점이다. 친위쿠데타가 여의치 않으면, 극우 세력은 무장 돌격대를 부활시킬 방법이라도 찾아내려 할 수 있다. 극우 정권과 ‘민주’ 정권의 권력 주고받기는 단순한 반복이 아니다. ‘민주’ 정권이 노동자·민중의 고통을 강화하는 만큼 극우 세력을 더욱 성장시키기 때문이다. 또한 파시즘으로 진화하려는 극우 세력의 시도가 점점 더 강화될 것이기 때문이다.[28] 또한 한 곳에서 극우의 성공은 다른 곳의 극우를 자극한다. 예컨대 이스라엘 극우 네타냐후의 집단학살은 모로코 군주, 인도 모디 총리, 프랑스 군부에게 영감을 주고 있다. 명백한 사례 중 하나는 모로코 군주국으로, 이스라엘이 서안 지구를 언급하는 방식과 거의 동일하게 서사하라를 논한다. 학살을 자행하는 이스라엘 국방군(IDF)과의 공동 군사 훈련을 조직하는 것 외에도, 텔아비브와 라바트 간의 경제적 유대, 특히 무기 계약이 번창하고 있다. 10월 7일 직전, 이스라엘은 사하라위 민족의 등 뒤에서 라바트와 스페인 제국주의 간 합의에 따라 1975년 병합된 전 식민지에 대한 모로코의 주권을 인정했다. 시온주의 정권의 급진화는 이로 인해 모로코 정권의 급진화를 더욱 부추겼으며, 왕정은 서사하라를 산업 및 에너지 허브로 만들려는 프랑스 제국주의의 전례 없는 지원을 계속 누리고 있다. 왕정은 따라서 사하라 난민들을 알제리나 모리타니로 되돌려보내는 방식으로 장벽 너머 영토의 20%에 대한 통제권을 확립하기 위해 잔혹한 작전을 벌일 유혹에 빠질 수 있다. ... “이스라엘의 방법”을 찬양하는 또 다른 국가는 물론 모디의 인도다. 시온주의는 힌두 우월주의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으며, V.D. 사바르카르와 M.S. 골왈카르 같은 초기 이론가들의 사상과도 연관된다. 이들은 시온주의 식민화를 찬양하며 동남아시아 전역을 통치하에 통합할 “아칸드 바라트(분할되지 않은 인도)”를 구상했다. 이 힌두식 '대이스라엘'의 지지자인 모디는 식민 국가의 방식을 꾸준히 적용해 카슈미르 주민들을 탄압해 왔으며, 더 넓게는 국내 무슬림 소수민족을 억압해 왔다. 베린트 시스템즈 같은 대량 감시 전문 이스라엘 기업들과의 협력부터 2019년 8월 카슈미르 자치권 중단에 이르기까지, 인도는 체계적으로 “이스라엘 모델”을 식민지화된 영토에 적용하고 있다. ... 프랑스에서 이스라엘과의 연대는 이슬람 혐오와 팔레스타인 지지자 탄압을 결합하는 것을 넘어선다. 이는 모디의 인도와 또 다른 공통점이다. 이 연대는 군대에도 스며들어, 특히 카낙 지역 청년들이 정착민 식민주의에 반기를 든 뉴칼레도니아 식민지에서 군부 내 반발에 직면하고 있다. 초군국주의 잡지 르 그랑 콘티넨에 익명으로 기고한 한 프랑스 군 장교는 군사화 경쟁에 돌입한 프랑스 군이 이스라엘 군을 본받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훨씬 열악한 장비의 군대들도 현장에서 가시적 성과를 내고 있다. 상대적으로 작은 국가들(핀란드, 이스라엘)은 제한된 국방 예산으로 많은 유럽 군대보다 더 큰 전시 군대를 구축하는 데 성공했다. 이러한 성과를 가능케 하는 주요 요인 중 하나는 전시 시 대규모 예비군 동원[29]과 군대 및 민간 사회 전반 간의 긴밀한 협력이다.” 프랑스 식민지 문제에 집착하는 한 군 장교에게, 이스라엘 내 만연한 인종주의로 인해 열 배로 증폭된 '현장에서의 가시적 효과'를 가진 이 학살적 군대의 위력은 의심할 여지없이 인상적이다.[30] 얼마 전 보우소나루는 쿠데타를 모의한 죄로 대법원에서 27년 형을 받았는데, 트럼프는 즉시 이 판결에 이의를 제기하며 보우소나루의 편을 들었다. 영국에서 얼마 전 벌어진 대규모 극우 집회에는 각국의 극우인사들이 참여했는데, 이처럼 미국과 서방의 극우파들은 일국적 단결을 넘어서 자신들의 인터내셔널을 구축하고 있다. 3. 제국주의 패권대결, 전쟁과 학살 지금까지 오늘날 자본주의 위기의 특징인 극우와 파시즘의 성장에 대해 살펴보았다. 자본주의 위기가 일국적 관계에서 드러나는 표현이 극우와 파시즘의 성장이라면, 국제관계에서는 제국주의 패권대결과 약탈, 전쟁과 학살이란 형태로 표현된다. 위기 앞에 놓인 자본주의 국가들은 자국의 노동자계급에 대한 공격만이 아니라, 타국의 자본가들에게 손실을 떠넘기기 위한 시도에도 골몰한다. 오늘날에는 이것이 미국과 중국이라는 양대 제국주의 국가의 패권대결 아래, 지역적 패권국들이 자신의 이해관계를 따라 각축전을 벌이는 국제질서의 재편을 통해 나타나고 있다. 충돌하는 두 제국주의 국가: 미중 관계의 재편과정 먼저 오늘날 지정학적 경쟁의 핵심인 미중의 관계가 지난 40년 간 어떻게 변화해왔는지를 간략히 살펴보자. 신자유주의와 함께 미국의 헤게모니가 아직 굳건하던 1980~2000년대에 중국은 ‘세계의 공장’으로 미국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다. 미중 파트너십은 냉전시기 소련을 고립시키기 위한 미국의 전략적 결정 아래 진행됐고, 미국과 중국 모두 이 관계에서 이득을 보았다. ‘차이메리카’라는 용어는 중국의 생산과 미국의 소비가 긴밀하게 연결된 하나의 구조로서 움직이던 당시 세계 자본주의 지형을 표현한다. 그러나 2000년대에 중국이 광폭성장을 하고, 2008년 금융위기로 미국이 휘청하면서 지형이 바뀌기 시작했다. 2010년대를 거치며 중국은 미국을 위협하는 명실상부한 세계 제2의 제국주의 강대국으로 부상했다. 이와 함께 중국을 견제하기 위한 미국의 시도 또한 본격화했다. 2009년 오바마 정부가 들어서고 2011년 “Pivot to Asia(아시아중심전략)”를 천명한 것을 시작으로,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 추진, 미 군사전력의 아시아 집중 및 동맹 강화 등 중국에 대한 견제를 시작했다. 2017년 트럼프 집권 이후에는 중국을 전략적 경쟁자로 규정하고, 훨씬 더 노골적이고 강경한 대중국 정책을 펼쳐왔다. 2018년에는 중국의 지식재산권 침해, 보조금, 무역 불균형을 문제 삼아 고율 관세를 부과하며 ‘무역분쟁’을 시작했다. 이어 화웨이, ZTE 등 중국의 5G와 통신인프라 기업을 미국 시장에서 배제하고, 중국 기업에 대한 반도체 장비와 소프트웨어 수출을 통제하고, 데이터안보 위협을 이유로 틱톡와 위챗 사용을 제한하는 등 ‘기술전쟁’을 벌였다. 경제적 견제와 함께 정치군사적 견제도 본격화했다. 오바마 시절에는 중국을 “파트너이자 경쟁자”로 호명했다면, 트럼프는 “전략적 경쟁자”라는 표현을 쓰며 오바마의 애매한 기조와 단절했다. 또 기존에 사용하던 ‘아시아-태평양(Asia-pacific)’이란 개념 대신 ‘인도-태평양(Indo-pacific)’이란 표현을 사용하기 시작했는데, 이는 일본, 인도, 호주와의 쿼드(Quads) 재활성화와 함께 중국을 견제하려는 의도가 노골적으로 담긴 표현이다. 그런데 중국과의 경쟁에서 우위를 달성한다는 목표는 바이든이 트럼프와 핵심적으로 공유하던 목표였다. 바이든 행정부는 트럼프가 해오던 반도체와 첨단기술에 대한 통제 정책을 이어갔고, 미국에서 반도체를 생산하고 10년 동안 중국투자를 포기해야 보조금을 지급하는 반도체지원법, 전기차-배터리 생산시설을 북미지역으로 이전해야 보조금을 지급하는 인플레이션 감축법을 실행했다. 트럼프 1기 때 부과한 관세도 대부분 그대로 유지했다. 정치군사적으로도 쿼드 강화, (미국, 영국, 호주의 안보협력기구인) AUKUS 출범, (2023년 캠프 데이비드협정 등을 통한) 미일한 동맹 강화, 나토 강화 등 미국의 동맹국들과의 관계를 강화하며 그 목표가 중국의 성장에 대한 대응임을 분명히 천명했다. 중국 또한 지난 십수년 간, 더욱 노골적으로 미국에 대한 도전의지를 드러내왔다. 중국의 핵심 슬로건 변화로 이를 확인할 수 있는데, 1980~90년대 ‘도광양회’(“빛을 감추고 힘을 기른다”, 자신의 힘을 드러내지 말고 조용히 국력을 축적하라는 전략)로부터 2000년대 “화평굴기(중국의 부상은 타국을 위협하지 않고 평화롭게 상호이익을 중시하며 성장한다는 뜻. 중국의 2001년 WTO 가입과 맞물리는 슬로건)”와 “조화세계”(내부적으로도 대외적으로도 조화로운 세계를 강조. 다자주의와 유엔 중심 질서에 대한 강조)를 지나, 2013년 시진핑 집권 이후 “중국몽”(과거 세계의 중심 역할을 했던 중국의 영광을 21세기에 되살리겠다는 것)과 “중국특색대국외교”(중국이 단지 ‘떠오르는 나라’가 아니라, 이제 ‘대국’으로서의 역할을 적극적을 수행하겠다는 것) “신형대국관계”(대국과 대국 사이의 새로운 형태의 관계, 즉 미국에게 협력적이면서도 대등한 대우를 요구하는 것)와 같은 슬로건으로, 그리고 시진핑 2기 이후 이제는 일대일로 정책과 함께 “인류운명공동체”(미국의 우선주의 정책들과 차별화하며, 국제사회에서 헤게모니적 리더십을 발휘하겠다는 뜻)와 같은 슬로건을 사용하는 등 점차 노골적으로 미국의 패권을 넘보는 위치로 성장해왔다. 특히 그 과정에서 중국은 희토류 공급망 확보와 전기차, 재생에너지 등 미래 산업에 대한 공격적 투자로 미국에 대한 일정한 산업적 우위를 확보해왔다. 특히 중국은 십수년 간 남미와 아프리카에서 대규모 투자를 통해 핵심광물에 대한 통제권을 늘려왔고, 오늘날 중국은 전 세계 희토류 생산량의 약 60%를 차지하고, 천연자원의 가공산업에서는 거의 90%의 점유율을 차지한다. 트럼프 대통령이 중국에 관세를 부과한 지 며칠 후 중국 정부가 흑연과 텅스텐을 포함한 20개 이상의 핵심 광물에 대한 수출 규제로 반격한 것은, 미국과의 무역전쟁에서 중국의 천연자원에 대한 우위가 얼마나 중요한 위협인지를 잘 보여준다. 아직 중국의 국방예산은 미국의 4분의 1 규모이지만, 중국의 해군력, 그리고 해군을 보강하는 조선 능력은 미국을 넘어섰다. 중국은 매년 7%이상 국방예산을 빠른 속도로 증액하고 있다. 미국도 이에 대응해 조선업 재건에 나서고 있는데, 특히 한국과의 관세협상에서 부각된 MASGA(“미국의 조선업을 다시 위대하게”) 구호로 드러나듯, 한국과 일본을 조선업 재건과정의 주요한 파트너로 삼고 있다.[31] 위기, 전쟁, 혁명의 시대를 열어젖힌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지금까지 미중 간 관계변화에 대해 살펴보았다. 그런데 미중 간 제국주의 패권대결은 단지 두 제국주의 강대국만의 대결이 아니다. 제국주의 패권대결은 세계를 진영으로 가르고, 세계 곳곳에서 이와 연결된 충돌을 심화시키고 대리전을 발생시키고 있다. 이를 대표적으로 드러내는 사건이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다. 우선 러우전쟁은 제국주의적 팽창 야욕을 가진 서방과 러시아가 부딪히며 발생한 반동적 전쟁이다. 이 반동적인 대리전은 그 자체가 지난 시기 제국주의 팽창의 결과이다. 한 측면에서, 러시아의 반동적인 군사적 대응을 만든 건 NATO의 동진정책이었다. 1990년에 미국 국무장관 제임스 베이커는 통일 독일에 나토군을 주둔시키며 “NATO는 동쪽으로 1인치도 더 나아가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이는 공문구에 불과했고, NATO는 지속적으로 새로운 회원구을 받으며 동진을 이어왔다. 1999년 폴란드, 헝가리, 체코가 NATO에 가입했고, 불가리아,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 루마니아, 슬로바키아, 슬로베니아가 2002년 공식 가입 초청을 받았으며 2년 후 가입 절차를 완료했다. 알바니아와 크로아티아는 2009년 가입했으며, 마케도니아는 2020년에 가입했다. 러시아와의 거대한 물리적 경계선인 우크라이나는 2008년 NATO 가입 과정인 Membership Action Plan(MAP)을 신청했으며, 유로마이단 이후인 2014년 가입 의사를 공식 목표화했다. 푸틴은 우크라이나 침공 당시 연설에서도 제임스 베이커의 말을 인용하며, NATO의 지속적인 동진 위협을 자신의 침략을 정당화하는 근거로 활용했다. 실제로 NATO는 소련 해체 이후에도 동진을 거듭했고, 러시아를 상대로 한 군사적 위협을 증대시켜왔다. 그렇다고 해서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이 정당화될 순 없으나, NATO의 지속적인 동진이 우크라이나 전쟁이라는 푸틴의 반동적 반응을 낳은 것은 분명하다. 나토는 회원국을 잠재적 침략으로부터 방어하는 것을 유일한 목적으로 하는 ‘방어적’ 동맹이라는 수사를 내세우지만, 실제로는 그간 미국 제국주의의 이익을 확대하기 위해 ‘인도적 지원’과 ‘민간인 보호’등을 명목으로 적극적인 ‘공격적 역할’을 수행해왔다. 대표적인 사례가 1999년 코소보 전쟁, 2001~2021년 아프가니스탄 전쟁, 2011년 리비아 내전 개입이다. 이는 결국 미국과 유럽이 세계에 대한 제국주의적 팽창의 도구로서 나토를 활용했음을 드러낸다. 즉 신자유주의 시기 동안 이어진 미국의 제국주의 전략이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을 일으킨 한 축이다. 그런데 러우전쟁을 발발시킨 다른 한 측면은 러시아의 팽창 야욕이다. 특히 우크라이나는 대러시아 제국 시기 오랫동안 러시아제정에 의해 억압받아온 민족억압의 역사를 가진 지역이다. 그래서 러시아혁명을 통해 제정러시아를 타도하고 노동자국가를 수립한 뒤 볼셰비키는 우크라이나의 민족자결권을 철저히 옹호했다. 그러나 스탈린 반혁명 과정과 그 이후 국가자본주의 소련에 의해, 우크라이나는 민족문화와 언어의 박탈, 수탈로 인한 대기근, 정치적 숙청 등 체계적 민족억압을 경험했다. 푸틴은 이러한 역사를 잇는 대러시아 민족주의의 계승자로, 우크라이나를 자결권을 가진 국가가 아니라 ‘수복해야할 대러시아의 영토’로 규정하고 우크라이나를 침략했다. 러우전쟁은 이전 시기 제국주의적 패권대결의 결과인 동시에, 제국주의 진영의 형성을 훨씬 더 가속화하는 촉매제로 기능했다. 러우전쟁의 결과의 한 측면은 나토의 부활과 강화였다. 트럼프 1기를 거치며 미국의 자국 우선주의 정책이 본격화되면서, 미국과 유럽의 전통적 동맹 관계가 느슨해졌고, 이에 따라 나토의 역할 또한 상당히 약화되었다. 그러나 러우전쟁 발발 이후, 러시아, 그리고 러시아와 연결된 중국을 견제하기 위한 바이든 행정부의 동맹강화 전략에 따라 나토는 다시 중요한 군사기구로 부활했다. 기존 유럽 동맹국과의 관계가 중심이던 나토에 한국, 일본, 호주 등 아시아 태평양 국가들을 포함하여 중국을 포위한다는 구상이 노골적으로 전개됐다. 트럼프 2기 행정부가 들어선 뒤 미국 우선주의 기조의 강화로 미국-서방 진영 동맹 내부의 갈등 또한 심화되고 있지만, 다른 측면에서는 트럼프가 동맹국들에게 나토방위비 분담을 노골적으로 요구하면서 각국의 재군사화가 더욱 촉진되고 있다. 얼마 전 나토의 GDP 5%로의 방위비 인상 결정은 이를 대표적으로 표현한다. 트럼프는 이제 나토에 이어 아시아 동맹국들에게도 GDP의 5%까지 국방비를 인상할 것을 요구하고 있는데, 한때 유명무실해질 것처럼 보였던 나토는 다시 미국과 서방진영을 대표하는 군사기구로서 작동하며, 각국의 군사화를 추동하는 수단이 되고 있다. 러우전쟁 결과의 다른 한 측면은 (북한이 하위파트너로 포괄되는 과정을 포함한) 러시아와 중국 사이 확고한 동맹의 형성이다. 본래 러시아와 중국은 이른바 같은 ‘공산권’ 국가이지만, 두 국가의 관계가 마냥 굳건하지는 않았다. 1949년 중국혁명 이전에 스탈린의 소련은 마오쩌둥의 농민주도 혁명론을 무시했고, 오히려 국민당 정부와 더 우호적 관계를 유지해왔기에, 그 때부터 마오쩌둥 주도의 중국공산당과 소련공산당 사이에는 긴장이 존재했다. 이 긴장은 중국공산당이 1949년 혁명으로 집권한 뒤, 1960년대 중소분쟁이 본격화되는 계기가 되었다.[32] 이후 1970년대에 들어서 중국은 소련을 견제하기 위해 미국과 먼저 손을 잡는 선택을 하게 된다. 중국이 미국과 손을 잡았는데, 소련과 관계가 좋을 수는 없었다. 그 뒤로 중소는 한동안 냉랭한 관계를 이어갔다. 그러다 1985년 고르바초프 집권 후 소련이 개혁개방 노선을 취하면서, 1989년 고르바초프의 베이징 방문을 계기로 중소관계를 정상화하게 된다. 이후 1990년대 소련이 해체된 후 러시아와 중국은 ‘건설적 파트너십’ 관계를 이어갔고, 2000년대에는 2001년 ‘중러 선린우호협력조약’을 체결하고 상하이협력기구에 주도적으로 참여하며 협력을 점차 심화해갔다. 그러다 2010년 들어서 2014년 러시아의 크림반도 합병 이후 서방제재를 받기 시작한 러시아가 중국과 경제, 외교적으로 더욱 밀착했고, 대규모 에너지 계약(‘시베리아의 힘 가스관’)과 군사협력 확대를 진행했다. 그리고 2022년 2월 베이징 올림픽 개막 직전에 시진핑과 푸틴은 공동성명을 내어 “중러 관계는 한계가 없다”고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공동성명 직후 벌어진 러우전쟁은 중러관계를 훨씬 더 밀착시켰다. “3일 만에 수도를 점령한다”던 러시아의 예측과 달리 전쟁은 장기화된 소모전이 되었다. 서방의 강력한 경제제재를 견디고 러시아가 지금까지 전쟁을 지속할 수 있는 힘은 중국의 지원으로부터 나왔다. 경제제재로 서방과의 무역로가 막힌 대신, 중국이 러시아의 가스와 원유를 사주고, 반도체칩 등 군사행동에 필요한 장비와 물자를 판매하고 있기 때문이다. 러우전쟁 발발 이전에도 러시아와 중국의 관계는 점점 밀착해가고 있었지만, 전쟁을 계기로 러시아는 중국의 지원 없이는 독자 생존이 어려워졌고, 러시아와 중국의 관계를 질적으로 도약시켰다. 한편 북한은 미국과의 협상카드로 오랫동안 핵개발을 추진해왔지만, 2019년 트럼프와의 ‘하노이 노딜’을 계기로, 미국 주도의 세계질서에 편입됨으로써 생존을 도모하는 전망이 결정적으로 불투명해지게 되었다. 그 뒤 북한이 찾은 생존전략은 중러동맹의 하위파트너가 되는 것이었다. 러우전쟁을 계기로 러시아로부터 각종 군사무기와 병력 등 ‘쓸모’를 인정받은 북한은 이 반동적 전쟁에 깊이 개입하며 자신의 생존을 도모하고 있다. 얼마전 5월 러시아의 전승절에 푸틴과 시진핑은 굳건한 동맹관계를 과시했고, 9월에 열린 중국 전승절에는 김정은과 푸틴이 각각 시진핑의 좌우에서 열병식을 관람하며, 북중러 삼각동맹이 굳건히 형성됐음을 과시했다. 이것이 러우전쟁이 가져온 사태의 다른 측면이다. 이 두 가지 사태전개가 서로 대립하며, 러시아 우크라이나 전쟁 이전보다 훨씬 더 격화된, 제국주의 패권대결의 양상이 벌어지게 되었다. 한 축에서는 미국이 서방 및 아시아 동맹국과 동맹을 강화하고 있고, 다른 한편에선 중국이 러시아 및 북한 등과의 동맹을 강화하고 있다. 특히 이러한 진영의 재편은 이들이 맞닿는 동아시아 지역을 위험한 화약고로 만들고 있다. 다시 말해 동아시아는 미중 간 패권대결 격화에 따른 열전의 중심지가 될 가능성이 높고, 그 핵심적인 격전지가 한반도가 될 가능성도 농후하다.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는 제국주의 진영 간 충돌 러우전쟁 만이 아니다. 미국서방진영과 중국러시아진영 사이의 충돌이 세계 곳곳에서 드러나고 있다. 아프리카에서 러시아와 중국의 영향력 급증은 미국을 비롯한 서방의 영향력 퇴조와 맞물리며 아프리카 대륙에서 제국주의 세력관계가 재편되는 상황을 초래했다. 재작년 니제르에서는 군부 쿠데타로 친러정권이 수립됐는데, 이를 두고 서방제국주의를 대변하는 서아프리카 경제공동체와 친러 군부세력이 장악한 말리와 부르키나파소가 대립하면서 군사적 충돌로 나아갈 뻔 했다. 올해 6월에는 이스라엘과 이란이 ‘12일 전쟁’을 진행했는데, 결국 트럼프의 휴전 압박 제스쳐에 일단 전쟁을 중단했지만, 이러한 사건들이 언제 우발적인 계기를 통해 또 다른 전쟁으로 나아갈지 모른다. 만약 중동에서 이스라엘과 이란의 전쟁이 터진다면, 이는 중동의 지역패권을 둘러싼 반동적 전쟁이자, 미중 간 제국주의 패권대결을 등에 업은 또 하나의 대리전이 될 것이다. 트럼프가 최근 ‘마약과의 전쟁’을 핑계로 라틴아메리카에 대규모 군사력을 배치하며 위협하는 것도 미중대결과 무관하지 않다. 미국은 최근 십여년 간 라틴아메리카에서 중국의 경제적 영향력이 커지는 것을 우려하고 있고, 표면 상의 이유는 ‘마약과의 전쟁’이지만, 실제로는 베네수엘라나 브라질 등 자기 말을 듣지 않는 정권에는 여차하면 군대를 보낼 수 있다는 위협을 하고 있다. 팔레스타인 집단학살: 제국주의가 벌이는 가장 끔찍한 만행 제국주의 국가들이 서로에게 세계 곳곳에서 충돌하는 것이 제국주의 국가 간 모순이 격화된 표현이라면, 팔레스타인에서 벌어지는 집단학살은 제국주의와 식민지 국가 간 모순이 격화된 표현이다. 2020년 집권한 네타냐후 정부는 서안지구를 합병하고 이스라엘 영토를 확장하기 위해 매우 잔인한 방법을 채택하는 극우세력이다. 이들은 2020년부터 서안지구에서 학살을 저지르기 시작했다. 제닌 난민캠프를 공격하고, 알-아크사 모스크를 여러차례 공격했다. 2020년부터 이런 야만적인 행위가 극우 정부에 의해 매우 난폭하게 확대됐다. 물론 이스라엘의 식민점령은 1948년부터 77년 간 이어져오고 있고, 이스라엘 극우정부든 ‘좌파’정부든 변함없이 식민정책을 유지해왔다. 즉 이스라엘이란 식민국가 자체가 문제의 근원이다. 그러나 2020년 네타냐후 극우정부의 출현으로 이스라엘은 더욱 ‘과격한’ 점령정책으로 나아갔다. 2023년 10월 7일의 공격은 2020년부터 이어진 이 모든 잔인한 폭력에 대한 대응이었다. 오늘날 가자에서는 매일같이 파괴와 폭격, 인위적 기근으로 인한 살해 소식이 실시간으로 이어진다. 네타냐후 정부는 가자학살을 멈출 계획이 없으며, 팔레스타인인의 절멸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 네타냐후 정부는 서안지구를 완전히 병합하겠다는 의도를 숨기지 않으며, 전례없는 속도로 정착촌을 확대하는 중이다. 이스라엘이 가자와 서안지구를 병합하고 ‘그레이터 이스라엘’을 향한 제국주의 팽창을 할 수 있는 것은 미국과 서방제국주의의 열렬한 지원 덕분이다. 특히 미국은 이스라엘에 대한 막대한 군사적 지원과 더불어, 집권세력에 관계없이 이스라엘의 자위권에 대한 변함없는 지지를 보냄으로써 그들의 학살을 정당화해주고 있다. 트럼프 2기, 제국의 쇠퇴를 드러내는 강도적 패권행위 트럼프 2기 행정부가 들어선 뒤, 트럼프는 강력한 ‘미국우선주의’를 내세우며, 동맹국들을 향해서도 깡패같은 약탈적 태도를 보이고 있다. 이것이 극적으로 드러난 하나의 사건은 올해 2월 트럼프와 우크라이나 대통령 젤렌스키와의 회담이다. 이 회담에서 트럼프는 노골적으로 젤렌스키에게 모욕을 주었다. 출입기자와 부통령 J.D.밴스는 젤렌스키에게 정장을 입고 오지 않았다느니, 미국에 대해 충분히 고마워하지 않았다느니 무례한 말을 쏟아냈고, 트럼프는 젤렌스키에게 “너는 (협상할) 카드가 없다”는 말을 반복하며 미국에 대한 굴종을 노골적으로 요구했다. 젤렌스키는 이날 화난 표정으로 광물협정에 서명하지 않고 회담장을 빠져나갔지만, 결과적으로 그는 미국의 요구를 수용할 수밖에 없었다. 지난 5월 결국 광물협정을 통해 미국은 우크라이나와 50%씩 출자해 ‘미국, 우크라이나 투자 재건펀드’를 만들어, 우크라이나의 광물과 에너지 자원 투자에 관여할 수 있게 됐다. 10년 간 광물산업 투자를 통해 얻은 순이익은 반반씩 나누되, 우크라이나의 재건을 위해 쓰기로 한다는 단서조항이 있지만, 실제 기반시설을 확충하고 광물산업이 본격적으로 가동되려면 10년 이상 필요하다는 점을 감안하면 미국이 광물협정에 따라 앞으로 많은 이익을 가져갈 것으로 보인다. 또한 미래에 미국의 미래 군사지원을 펀드 기여금으로 간주하자는 내용도 담겼다. 이어 지난 몇 달간 트럼프는 관세협정에서 이른바 동맹국들에게 무리한 조건을 강요하고 있다. 일본과의 협정에서 트럼프는 관세를 15%로 낮추는 대신, 5500억 달러의 대미투자를 강요했다. 이 내용에 따르면 일본은 2029년까지 미국 측에서 일방적으로 추천하는 프로젝트에 무조건 투자해야한다. 일본이 원금을 회수하는 시점까진 미국과 일본이 50%씩 이익을 배분하고, 그 이후에는 미국이 90%를 갖는다. 프로젝트가 실패하면 일본이 그 비용을 치러야하지만, 프로젝트가 성공을 거두더라도 돈을 댄 일본의 이익은 매우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트럼프는 현재 한국에도 일본과 동일한 투자조건으로 3500억 달러의 투자를 강요하는 중이다. 트럼프의 강도적 패권행위는 미국 제국주의의 쇠퇴를 반영한다. 위기에 빠진 군주는 폭군으로 변한다. 동맹국들을 향해 엄혹한 조건을 강요하는 것은 세계의 경찰을 자임했던 미국 제국주의가 더 이상 그런 헤게모니를 발휘할 수 없는 조건이 되었음을 뜻한다. 4. 폭발하는 저항: 계급투쟁의 시대가 돌아오다 계급투쟁의 귀환 지금까지 ‘위기와 전쟁의 시대’를 보여주는 현상들로서 자본주의의 만성적 장기불황, 극우와 파시즘의 성장, 제국주의 패권대결 격화와 이에 따른 약탈, 전쟁과 학살에 대해 간략히 살펴보았다. 여성, 소수자를 향한 전면적인 공격과 기후위기에 대한 무책임과 무능력 또한 오늘날 위기에 빠진 자본주의를 드러내는 중요한 요소들이나, 분량을 고려해 이번 교육자료에선 위에 짤막하게 언급한 정도로 넘어가고자 한다. 자본주의의 심화된 모순은 노동자민중의 생존권을 다양한 형태로 맹렬히 공격하고 있고, 이에 맞선 저항도 다양한 형태로, 종종 폭발적인 봉기의 형태로 벌어진다. 그래서 ‘위기와 전쟁의 시대’는 다른 한편 계급투쟁의 시대이기도 하다. 이 글에서 오늘날 주요한 계급투쟁의 전개양상을 모두 포착하기엔 너무 광범위하나, 주요한 몇가지 사건들과 함께 그 특징을 살펴보려 한다. 이미 위기와 전쟁의 시대가 시작되기 전인 2018~19년 무렵부터, 신자유주의에 맞선 칠레 봉기, 홍콩의 민주주의 투쟁, 프랑스의 노란조끼 운동 등으로 대표되는 ‘2차 계급투쟁의 물결’이 시작됐다. 이는 공히 신자유주의가 강요한 생존권위기에 맞선 폭발적인 투쟁이었다.[33] 이와 함께 여성파업 운동, 인종차별 반대운동, 기후정의운동 등 좁은 의미의 경제적 생존권을 넘어 사회적 차별과 억압에 맞서고, 사회 전체의 미래를 둘러싼 대중운동이 곳곳에서 벌어졌다. 이러한 대중운동은 특히 수많은 청년들이 사회적 차별과 억압, 기후위기의 원인인 자본주의 체제 그 자체에 대한 물음을 던지도록 했다. 곳곳에서 터져나오던 계급투쟁의 물결을 코로나 팬데믹으로 잠시 주춤하는 듯 했지만, 곧이어 팬데믹이 강요한 위기에 맞서 다시 폭발했다. 2020년 조지 플로이드의 죽음을 계기로 터져나온 미국의 인종정의 운동, 2022년 신장위구르자치구 우루무치시에서 발생한 아파트 화재사고[34]로 시작된 중국의 백지시위 등이 대표적인 사례였다. 2010년대 초반 계급투쟁의 물결은 폭발적으로 진행됐으나, 시위대는 대체로 미조직된 상태에 남아있었고, 노동운동의 주도권이 그다지 발휘되지 않았다. 노동자계급 대신 ‘분노한 자들’ ‘1%에 맞서는 99%’ 같은 모호한 개념들이 이를 대신한 것은 이러한 사태전개의 반영이었다. 반면 최근 몇 년동안 이어진 물결에서는 노동자들이 조직된 주체로서 보다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고, 투쟁에 나섰던 민중들도 계급으로 자신을 조직화하는 점이 특징적이다. 예컨대 미국에서의 급진적 투쟁의 물결은 광범위한 노조가입 운동과 맞물리고 있다. 페미니즘, 기후정의운동, 인종정의운동으로 급진화된 미국의 청년들이 노동조합에 대규모로 가입하며 ‘Gen-U(노조세대)’라는 신조어가 등장했다.[35] 2018~19년의 교사파업 물결부터 이어진 노조운동의 부활 이후 2021년에는 스트라이크토버(Striketober)라는 신조어까지 만들어졌다. 2022년에는 철도파업이 벌어져고, 2023년에는 오랫동안 잠들어있던 UAW(전미자동차노조)와 팀스터스 노조를 중심으로 한 파업투쟁이 벌어졌다. 라틴아메리카에서는 2019년 칠레, 콜롬비아, 볼리비아 등의 격렬한 시위에 이어 2024년 아르헨티나에서 밀레이 정권에 맞선 총파업이 벌어졌고, 파나마에서는 2025년 트럼프의 노골적인 제국주의 개입에 맞선 총파업이 벌어졌다. 2020년 태국, 2022년 스리랑카, 2024년 방글라데시, 2025년 인도네시아, 네팔, 필리핀 등으로 이어진 아시아의 민중투쟁도 이러한 계급투쟁 물결의 연장선에 있다. 이는 부정부패로 얼룩진 권위주의 정권에 맞선 민주주의 투쟁이자, 오랫동안 주변부 국가들에게 전가되어온 심각한 생존권 위기에 맞선 투쟁의 성격을 가진다. 한국에서 2024년 말에 벌어진 내란 쿠데타에 맞선 민주주의 투쟁도 이와 유사한 성격을 갖고 있다. 또한 2023년 10월 7일 이후로 세계적으로 팔레스타인 집단학살에 맞선 시위가 이어지고 있다. 집단학살이 시작된 직후부터 세계 곳곳에서 “즉각 휴전”을 요구하는 대규모 시위가 벌어졌고, 지난 2년 간 이어진 학살은 전세계 수많은 사람들에게 제국주의의 위선과 본질을 폭로하며, 이들을 급진화시켰다. 기후정의운동의 아이콘이었던 그레타 툰베리는 오늘날 가자로 향하는 선단에 몸을 싣고 팔레스타인 집단학살에 맞선다. 현재는 44개국에서 조직된 글로벌 수무드 함대가 구호품을 싣고 가자로 향하고 있고, 이와 함께 이탈리아에서는 80개 이상의 도시에서 파업과 시위가 벌어졌다. 앞선 사례들은 지난 몇 년간 벌어진 수많은 사건들을 축약한 일부에 불과하다. 생존권 위기, 극우화와 독재, 부정부패, 사회적 차별과 억압, 기후위기, 전쟁과 학살, 한마디로 오늘날 자본주의가 썩어가면서 만들어내는 온갖 야만적 행위에 맞선 투쟁이 전 세계에서 연이어 벌어지고 있다. 이 위기와 전쟁, 계급투쟁의 시대에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 앞으로도 자본주의 위기가 심화되는 한, 분노한 노동자민중의 산발적인 봉기는 계속 터져나올 것이다. 그런데 중요한 질문은, 이런 봉기의 물결이 일회적으로 끝나지 않도록 조직하는 것이다. 조직되지 않은 운동은 일순간 폭발적으로 터져나올 순 있지만, 시간이 지나면 사그라든다. 우리는 이러한 폭발적 순간들이 연결될 수 있도록, 다음의 폭발을 위한 진지를 적극적으로 조직해야한다. 계급투쟁을 승리로 이끌기 위한 과제를 두 가지로 나누어 강조하고 싶다. 계급투쟁의 시대를 혁명의 시대로 전진시키기 위한 사회주의자의 과제 첫 번째는 계급투쟁의 전진을 위하여 조직노동자운동을 ‘민중의 호민관’으로 재편하는 활동이다. 위기에 맞선 즉자적인 미조직된 노동자민중의 저항은 때때로 강렬하게 불타오르지만, 조직된 구심점이 없으면 금방 방향을 잃고 사그라든다. 거리에서 시작된 투쟁은 처음에는 지배계급은 국가권력을 향한 중대한 도전이 되지만, 거리에만 머무는 투쟁은 얼마 지나지 않아 진압될 수밖에 없다. 파업투쟁, 즉 거리에서 시작되곤 하는 격렬한 계급투쟁의 열기를 현장으로 전이시키는 것, 그래서 자본주의의 일상적 작동을 멈추는 것은 폭발하는 민중봉기를 승리로 나아가게 하는 핵심적인 전략이다. 지난 몇 년간 계급투쟁의 경험을 돌아보면, 조직노동자운동이 이러한 역할을 적극적으로 수행하는 경우에는, 운동이 훨씬 더 힘을 갖고 멀리 뻗어 나갔다. 반면 거리에서의 저항에 머무는 경우에는 당장의 성과를 내지 못하고 진압되는 경우가 더 컸다. 물론 그런 경우에도, 저항의 정신은 죽지않고 살아 봉기에 참여했던 민중을 급진화시킨다. 그리고 급진화된 민중이 계급으로 스스로를 자기조직화한다면, 다음 번 투쟁에서는 더 멀리 나아갈 수 있게 된다. 그래서 조직노동자운동이 민중봉기와 결합하여 ‘민중의 호민관’으로서 자신의 역할을 할 수 있도록 조직하는 것은 계급투쟁의 발전에 핵심적이다. 지난 몇 년간의 계급투쟁에서 혁명적 사회주의자들은 이를 실천하고자 분투해왔다. 폭발적으로 터져나왔던 지난 경험들 중 몇 가지를 살펴보자. [프랑스] 프랑스에서는 2023년 연금개악에 맞선 투쟁이 폭발적으로 벌어졌다. 연금개악의 핵심은 연금수령 개시연령을 62세에서 (2030년까지) 64세로 2년 상향하는 것이었다. 연금을 100% 수령하기 위한 기여 기간을 현행 42년에서 (2027년까지) 43년으로 연장하는 것도 포함돼 있다. 연금개악은 프랑스 노동자들이 쟁취해온 개량에 대한 공격을 상징했다. 이에 맞서 1980년대 이후 최대 규모의 총파업 시위가 벌어졌다. 그러나 아래로부터의 엄청난 동력과 달리, 8개의 노총 지도부는 총파업의 힘으로 마크롱 정부를 타도하는 게 아니라, 의회에서 야당들이 마크롱과 협상하는 데 힘을 싣어주는 전략에 골몰했다. 그래서 노총연대가 주도하는 총파업 시위들은 대규모이긴 하되 과격하지는 않게 노동자들의 불만을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방향으로 전개됐다. 그리고 노총 지도부 연합은 연속적인 총파업이 아니라 2주 마다 하루씩 일정한 간격을 두고 진행했다. 이는 마치 한국에서 민주노총이 1996~97년 총파업을 ‘수요파업’으로 전환하면서 동력이 끊어졌던 역사를 상기시킨다. 거리에서의 압력에 굴복하지 않는 ‘과격해진 자본가들’에 대적하려면 경제를 마비시키는 게 필요했고, 즉 (하루짜리가 아닌) 총파업을 해야 했다. 프랑스 사회주의 조직 ‘연속혁명’은 ‘총파업 네트워크’를 조직해 연금개악 반대투쟁을 더 멀리 전진시키고자 했다. 총파업 네트워크는 (노총 지도부가 제기하는 하루짜리 단발성 파업을 넘어) 무기한 총파업에 동의하는 노조원과 활동가들을 최대한 모아내서, 무기한 총파업을 향해 각 부문의 투쟁을 조율하고, 최대한 많은 부문으로 무기한 총파업을 확산시키는 걸 목표로 한 조직이었다. 아래는 총파업 네트워크가 어떻게 운영되었는지에 대해, 사회주의를향한전진 2023년 정치캠프에서 프랑스 사회주의자 아르뚜르가 발제한 내용의 일부이다.[36] 첫 번째로 총파업 네트워크는 요구의 확장(주로 임금과 연금문제의 결합)을 주된 목표로 내걸었다. 이주노동자, 저임금노동자, 청년노동자 등은 상대적으로 연금의 혜택을 덜 받는 처지에 놓여있는 노동자들과의 단결을 어떻게 실현할지에 관한 문제였다. 화이트칼라 노조, 계급화해적 노조까지 포함하고 있는 노총연합은 오직 연금개악안 반대라는 단일 의제로만 단결했다. 그 외에 다른 요구나 의제가 없었다. 문제는 연금개악이 노동자들에게 영향을 끼치는 정도는 동일하지 않다는 점이다. 많은 노동자들은 연금개악에 오직 최소한도로만 그 영향을 받았다. 게다가 임금 문제는 노동자계급의 핵심이지만, 노총연합은 6월 전에는 임금에 대해 한마디도 언급한 적이 없었다. 노총연합 지도부는 “너무 많은 요구 사항으로 운동을 분산하지 말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수백만 명의 노동자들을 무기한 파업으로 이끌 수 있는 것은 정확히 저임금 문제였다. 그래서 총파업 네트워크는 요구를 확장하는 것을 투쟁의 우선사항 중 하나로 설정했다. 특히 철도 노동자와 쓰레기수거 노동자가 임금인상과 연금개악 반대를 동시에 걸고 무기한 파업을 진행했는데, 우리는 이를 지지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임금과 연금, 이 두 가지 요구의 결합이 무기한 파업의 핵심이었다. 두 번째로 총파업 네트워크는 탄압에 맞선 연대를 조직했다. 정부에 맞선 투쟁에서 송곳처럼 먼저 뚫고나오는 조직들은 정부의 집중적인 공격 대상이 되었다. 마치 윤석열 정부가 안전운임제를 걸고 파업에 나선 화물연대에게 ‘업무개시명령’을 내리고, 조선소 도크를 점거하는 파업에 나선 거통고조선하청지회에 군대 투입을 요구했듯 말이다. 당시 프랑스에서는 파리의 쓰레기 수거노동자들, 그리고 정유공장 노동자들이 그런 탄압을 집중적으로 받았다. 파리에서 쓰레기 수거 노동자의 파업으로 쓰레기가 쌓이자,[37] 정부는 파업노동자들에게 업무복귀명령을 내렸다.[38] 징역형으로 위협하며 일에 복귀할 것을 강제했단 뜻이다.[39] 정유 노동자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정유공장 파업은 파리 공항에 오직 이틀치의 등유만 남길 정도로 큰 타격을 입혔다.[40] 공항이 폐쇄되는 걸 막기 위해 정부는 파업중인 정유 노동자에게 업무복귀명령을 내렸다. 경찰은 노동자의 집에 찾아가 노동자를 일터로 데려갔다. 이 모든 탄압은 운동을 급진화시키는 요소였다. 그러나 현장과 거리에서 이 모든 탄압을 겪으면서도, 노총연합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업무복귀명령'은 국가가 무기한 파업을 무너뜨릴 수 있는 수단이었다. 그러나 노총연합은 "업무복귀명령"(Requisition) 이라는 말을, 말 그대로 한 번도 언급하지 않았다. 매일 라디오나 TV에 나와 말할 기회가 있었지만 한 번도 그 단어를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 그래서 우리는 (노총연합 지도부에 끌려다니지 않고) 탄압에 대항할 조직화가 필요했고, 총파업 네트워크를 통해 이를 실행했다. 우리는 경찰서 바깥에서 시위를 조직했고, 집회 중 체포된 이들을 석방하라는 요구를 했다. 파리, 툴루즈, 보르도 등 중요한 도시들에서 이런 시위를 많이 벌였다.[41] 또한 업무복귀명령에 맞서, 총파업 네트워크를 활용해 우리는 프랑스에서 가장 큰 정유공장에 250명을 집결시켰다. 그날 경찰의 업무복귀명령을 막는 데는 성공하지 못했지만, 경찰이 밤새 치워버린 파업 대오를 다시 세웠다. 물질적 패배였지만, 도덕적 승리였다. 정유노동자들은 이 투쟁 덕분에 또 다른 15일 동안 파업을 이어나갔다. 세 번째로 총파업 네트워크는 파업노동자들의 총회를 통해 노동자 민주주의를 재건하려고 했다. 총회를 통해 조합원들 스스로의 토론을 통해 투쟁의 방향과 전략을 결정할 기회를 갖는 것은 관료적 지도부의 일방적인 결정에 맞서는데 사활적으로 중요했다. 총파업 네트워크는 파업노동자의 자기조직화의 기반을 다지려 시도했다. 자기조직화에 기반한 파업투쟁의 전통은 프랑스에서 1990년대 이후 사라졌고, 파업중인 노동자들을 한데 모은 총회를 개최하는 것은 매우 어려웠다. 파업노동자들 다수가 노총연합을 신뢰한 것도 자기조직화가 어려웠던 이유 중 하나였다. 하루씩 고립된 파업을 하는 노총연합의 전략은 파업노동자들의 어떤 총회도 효과적이지 않게 만들었다. 총회를 해도 노동자들이 투쟁일정에 대해 결정할 수 있는 게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철도와 정유산업에서 일하는 우리 동지들을 바탕으로, 총파업 네트워크를 통해 자기조직화의 예시를 제공하려 했다. 이와 함께 노총연합 지도부의 방침에 동의하지 않는 많은 노동조합 지도부와 활동가들을 결집시켰다.[42] 총파업 네트워크 조직화를 위해, 우리는 수 백명의 노동조합 활동가들이 연서명한 두 개의 글을 주요 신문에 발행했다.[43] 그리고 여러 노조 대의원이 무기한 파업을 지지하도록 안내했으며, 파업을 지속하기 위해 파업 기금을 마련했고, 탄압에 맞서는 시위와 집회를 수없이 조직했다. 무엇보다 서로 다른 여러 부문의 파업노동자들이 전략적 토론에 함께 참여했다는 점이 가장 중요하다. 총파업 네트워크는 150~200여 명의 사람들을 전국총회에 소집했다.[44] 그 중 대다수는 노동자들로, 정유, 철도, 쓰레기수거, 교사, 자동차, 화학, 금속, 파리 공항, 항공우주 산업, 원자력 발전소, 전력, 가스운송 부문이 참여했다. 관료주의에 의해 엄격히 통제되는 항만 노동자들을 제외하고, 무기한 파업에 참여한 모든 분야가 대표단을 보냈다. 그 중에는 (무려) 5,000명이 일하는 회사의 노동조합을 이끄는 노조 지도부도 참여했다.[45] 다수는 노동자들이었지만, 학생들과 활동가들도 많이 왔다. 2016년의 대중 운동에서 많은 관심을 받았던 한 철학자도 네트워크를 지지했다. 아델 에넬이라는 배우도 총파업 네트워크를 지지했다. 아델 에넬은 영화 산업의 성폭력에 맞서 싸운 것으로 프랑스 페미니스트 운동에서 매우 유명한 배우이다.[46] 2023년 프랑스의 사회주의자들은 이렇게 연금개악 반대투쟁에서 관료적 노조 지도부의 한계를 뛰어넘어 무기한 총파업을 건설하기 위해 분투했다. 그러나 관료적 지도부의 영향력을 결정적으로 뛰어넘지는 못했고, 당시 연금개악안은 마크롱이 의회를 무시하고 대통령의 ‘긴급명령권’을 발동해 통과시키는 것으로 관철됐다. 그러나 당시 ‘총파업 네트워크’를 통해 분투하고 대안을 만들어내고자 실천한 만큼, 계급투쟁의 열기는 완전히 가라앉지 않았고, 많은 이들이 전망을 잃고 좌절하는 대신 새로운 운동의 흐름을 형성하고 있다. 2025년 9월 현재 프랑스에선 다시 마크롱의 긴축정책에 맞서 백만명이 거리로 쏟아져나왔고, 계급투쟁은 계속 이어지고 있다. [한국] 다음으로 한국의 사례를 살펴보자. 윤석열의 집권과 극우화는 세계적으로 진전되는 극우세력 확산의 한 표현이었다. 한국 극우는 마가의 ‘부정선거론’과 ‘반중 담론’을 수용해 한국식으로 재구성했고, 이를 마가 쪽과 주거니 받거니 하며 키워왔다.[47] 윤석열 쿠데타는 그런 점에서 한 개인의 일탈적 행위라기보다 브라질 보우소나루 쿠데타와 이어지는 전세계 극우확산의 흐름에서 진행된 사건이었다. 이에 맞서 민주노총은 내란사태 초기 중요한 역할을 했다. 2월 24일, 전진에서 발표한 아래의 기사는 12.3내란에 대응하는 투쟁에서 조직노동자운동의 대표체로서 민주노총이 보여준 가능성과 한계, 과제에 대해 말하고 있다. 12·3 이후 지금까지 투쟁에서 민주노총의 역할은 모순적이었다. 한편으로는 상당한 역할을 해왔지만, 자신의 잠재력에 비해서는 매우 제한된 수준에 그쳤다. 민주노총은 12월 4일 새벽 3시를 기해 ‘윤석열 퇴진시까지 무기한 총파업’을 선언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5일, 6일, 11일 세 번에 걸쳐 금속노조와 공공운수노조를 중심으로 5만에서 10만 정도가 참여하는 제한된 총파업에 그쳤다. 민주노총은 주말 집회에서 주도적 역할을 맡았고 초기에는 상당수 조합원들이 주말 집회에 참여했다. 민주노총이 주말 집회에서 경찰 바리케이드를 밀어내고 길을 열어낸 모습은 광범한 미조직 대중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농민투쟁단이 남태령을 넘는 순간에도 길을 여는 역할을 했다. 1월 3~5일 한강진의 내란수괴 윤석열 체포·구속 투쟁에서도 민주노총 확대 간부와 조합원이 광장 대중과 함께 투쟁했다. 그러나 민주노총은 자신의 진정한 잠재력을 끌어내지 못했다. 민주노총이 위력적인 총파업을 조직해 냈다면, 폭발적인 광장투쟁으로 발전해 나갈 수 있었을 텐데, 민주노총은 그런 역할을 회피했다. 민주노총은 광장 청년대오의 환호에 자족할 뿐 총파업을 조직하려는 진지한 노력을 하지 않았다. 시간이 흐르면서, 광장에 참여하는 조합원의 대오도 크게 줄어들었다. 반면 12·3 이후 광장에 쏟아져 나온 청년 미조직 노동자들은 계엄과 내란의 소용돌이 속에서 역사의 주인으로 발돋움해 왔다. 윤석열의 계엄령 선포와 섬뜩한 포고령은 대중을 심각한 충격과 공포에 떨게 했다. 그러나 대중은 잠시 위축됐던 감정과 불안을 금세 떨쳐냈다. 거듭되는 집회와 거리 투쟁에서 엄청난 에너지를 뿜어내며 심리적 불안과 공포를 저항으로 승화했다. 계엄과 내란을 처음 경험한 청년 대중은 수천수만 노동자의 참여를 보며 심리적 안정감을 느꼈고 사회적 소수자와의 연대를 넓혀가며 자신감을 쌓아갔다. 저항의 날들이 더해질수록 지금껏 의심하지 않았던 자유민주주의 이념, 기존 보수정치가 쥐락펴락해 온 국가에 대한 의문을 싹 틔우며 지금과는 다른 새로운 세계에 대한 본능적 갈망을 분출했다. 광장의 청년 대중 다수는 미조직 비정규직 노동자와 실업자들이다. 이들은 한국 자본주의 체제에서 처음으로 부모 세대보다 가난해진 세대다. 온갖 형태의 비정규직과 실업의 굴레에 묶여 미래의 안정적 삶을 꿈꾸지 못하고 절망했다. 그러나 계엄과 내란 정세에서 역사의 무대로 뛰어나와 지금까지의 고통과 절망을 딛고 새로운 삶과 희망을 찾는 용기를 내고 있다. 광장의 청년 대중은 조직노동자에 대한 과거의 불신을 뒤로 하고 민주노총 조직노동자들에게 환호를 보냈다. 구사대와 용역깡패를 동원한 한화오션의 악랄한 노동탄압에 맞선 거통고 조선하청노동자들의 투쟁에, 1년 넘게 먹튀자본 닛토덴코에 맞서 고용승계를 요구하며 불탄 공장을 지키는 한국옵티칼하이테크 노동자들의 투쟁에, 어처구니없는 대법원 패소에도 불구하고 정리해고에 맞서 장기투쟁을 벌이는 세종호텔 노동자들의 투쟁에, A학교에서 벌어진 성폭력 축소은폐에 맞서다 학교에서 쫓겨나고 해임당한 지혜복 교사의 투쟁에 ‘말벌 동지들’의 지지와 연대가 쇄도하고 있다. 극우세력의 부상과 준동을 멈춰 세우고 분쇄하기 위한 확실한 방법은 여전히 노동자계급의 위력적인 총파업이고 그에 기초한 폭발적인 광장투쟁이다.[48] 지난 내란사태 때 사회주의를향한전진은 총파업공동행동을 구성하고, 민주노총이 헌재를 기다리지 말고 총파업으로 윤석열을 타도해야한다고 선전선동했다. 그리고 그 방향으로 단 하나의 현장에서라도 실질적인 파업을 조직하기 위해 분투했다. 하지만 2월 말까지 이러한 주장은 민주노총 내에서도 큰 동의를 얻지 못했다. “내란·극우세력 청산! 사회대변혁! 노동자세상 총파업 조직화 공동행동”(이하, 총파업 공동행동)에 모인 민주노총 대의원들은 2025년 사업계획에 대한 수정동의안을 발의했다. 민주노총 대의원 34명이 수정동의안에 연명했고, 현장조합원 91명이 지지 연명했다. ... [수정동의안] 1. 민주노총은 윤석열 즉각 파면, 국민의힘 해체, 내란·극우세력 청산, 사회대변혁을 위해 3월 경고파업을 광장의 미조직 대중과 함께하는 사회적 총파업으로 전개한다. 이를 위해 2월 하순까지 민주노총 가맹 산하 전 사업장 교육을 진행하고, 임시총회 등의 방법으로 파업을 결의한다. 만약 헌법재판소 탄핵 기각 시 즉각 총파업에 돌입한다. 첫 번째 수정동의안은 민주노총 대의원 다수의 반대에 부딪혔다. 특히, ‘헌법재판소 탄핵 이전 경고파업, 탄핵 기각 시 총파업’을 금속노조 정기대의원대회 준비 토론자료에 싣고 현장토론을 조직한 금속노조 중앙집행위 성원들이, 앞장서서 ‘현장이 움직이지 않아서 파업할 수 없다’고 핑계 대며 수정동의안을 적극 반대하는 진풍경이 펼쳐졌다. 탄핵 이전 경고파업을 추진한다면서도, ‘헌법재판소 탄핵 전후로 더 강력한 총파업을 조직하자’는 수정동의안을 반대하는 금속노조의 진정성을 그 누가 믿을 수 있겠는가. 이토록 엄중한 정세에서, 민주노총이 3월 사회적 총파업에 나서야 한다는 수정동의안에 재석 985명 중 178명 대의원이 찬성했다. 부결![49] 그러나 3월 중순에 들어서 헌재선고가 기약이 늘어지면서, 총파업공동행동의 주장은 대중적 반향과 논쟁을 일으켰다. 결국 3월 27일 민주노총 총파업이 결정되었다. 승리의 열쇠는 우리 손에 있다 탄핵조차 위태로운 상황을 끝낼 수 있는 힘, 나아가 세상을 바꿀 수 있는 힘은 여전히 광장에 나선 노동자 민중에게서 나온다. 윤석열 일당의 계엄 문건 어디에도 노동자 민중의 저항을 예상한 대목은 없었다. 화물연대, 건설노조 등을 악랄하게 탄압하며 자신감을 가졌던 윤석열의 머릿속에 민주노총 조합원들과 미조직 노동자들의 저항은 들어있지 않았다. 제거 대상은 이재명, 한동훈 등 의회 테두리 내에 있는 반대파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들만 제거하면 끝난다고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윤석열의 예상과는 달리 의회 바깥에서 노동자 민중의 힘이 번갯불처럼 나타나 내란 세력을 위협했다. 그 힘이 탄핵 가결을 이끌어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헌법재판소 일정을 쫓아다니지 말고 노동자 민중의 압도적 힘을 조직해야만 윤석열을 파면시키고 중단없이 사회대변혁을 밀어나갈 수 있다. ... 필사적인 도약은 가능하다! 민주노총은 3월 27일 총파업·총력투쟁을 선포했다. 금속노조는 전 조합원 2시간 이상 총파업을 결의했다. 헌재 판결이 지연되는 지금, 헌재를 지켜보고만 있어서는 안된다는 절박함이 모이고 있으며, 우리는 이를 더 확대해야 한다. 물론, 어느 현장에서나 총파업을 조직하기 쉽지 않다는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 관료주의가 넓게 퍼져 있고 임금인상, 고용안정 등을 위한 경제파업에서도 밀리고 있는 수많은 현장에서 윤석열 퇴진을 위한 정치파업이 쉬운 일은 결코 아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이제까지 볼 수 없었던 엄청난 격변을 마주하고 있다. 이 격변에서 밀리면 지금까지 쌓아온 노동자 민중의 모든 권리와 성과가 사라진다. 그래서 수많은 노동자가 절박한 마음으로 윤석열 퇴진을 열망한다. 너무나도 위급한 역사적 위기를 돌파하기 위해, 다른 측면으론 너무나도 소중한 역사적 기회를 움켜쥐기 위해 우리 모두 가장 적극적인 방식으로 현장을 조직하자. 3월 27일 하루 총파업을 도약의 계기로 만들자. 위로부터의 총파업 선언에 그치지 않기 위해, 실질적인 총파업 실현을 위해 현장 안팎에서 즉각적인 토론, 선전, 조직화 활동을 전개하자. 각 단위사업장 총회를 열고, 노동자 민중의 사회적 총파업으로 윤석열 타도를 결의하자.[50] 그러나 3월 27일 총파업은 힘있게 조직되지 못했고, 총파업공동행동도 관료적인 지도부를 뛰어넘어 현장에서 파업투쟁을 조직해가는 주도력을 충분히 발휘하지 못했다. 이후 4월 4일 헌재선고가 잡힌 뒤, 민주노총은 4월 3일 임시대의원대회를 열어 ‘헌재 기각 시 즉각 총파업’을 통과시켰다. 결국 4월 4일 헌재 선고 결과 윤석열은 탄핵되었다. 하지만 민주노총이 내란투쟁 전반에 걸쳐 주도권을 발휘하지 못함에 따라, 민주당이 이후 정세의 주도권을 잡았다. 대선시기 전투적이고 계급적인 노동자 후보가 등장하지 못했을뿐더러[51], 민주노총 집행부는 선거기간에도 민주당 지지방침을 고집하며 ‘민주’적 자본가계급과 연합하는 인민전선 전략에 깊이 빠져들었다. 그 결과 이재명 당선 이후 노동자운동 전반에 이재명 정부에 대한 환상과 의존성이 자라났다. 윤석열이 정치적 세력관계를 오판하여 무리한 쿠데타를 벌였고, 이에 맞선 격렬한 민중항쟁이 벌어지면서, 내란에 맞선 투쟁의 결과로 윤석열은 감옥으로 갔고 민주당이 다시 집권했다. 허나 더욱 격렬한 계급투쟁은 잠시 유예되었을 뿐이다. 그런데 지금과 같이 노동자운동이 이재명 정부에 의존적인 상황을 계속 극복하지 못한다면, 노동자계급은 독자적 정치세력으로 성장할 수 없으며, ‘민주’정권의 위선에 환멸을 느낀 민중들에게 ‘유일한 대안’처럼 보이는 더 성장한 극우파가 집권하게 될 것이다. 광장에 나왔던 수많은 미조직 노동자들은 본능적으로 조직된 노동자의 힘을 느끼고, “민주노총이 길을 연다” “금속노조가 선봉에 선다”는 구호에 환호하며 함께 했다. 다시 모순이 격화되어 그 다음 전면전이 벌어질 때까지, 노동자계급의 자기조직화를 얼마나 전진시키느냐에 따라 그 다음 한국의 계급투쟁의 향방이 결정될 것이다. 이상 계급투쟁이 격렬히 벌어지던 순간에 조직노동자운동의 재편을 위해 분투했던 프랑스와 한국의 사례를 잠시 살펴보았다. 프랑스와 한국 뿐 아니라, 미국, 칠레, 아르헨티나 등 많은 최근의 계급투쟁의 사례에서 비슷한 패턴을 관찰할 수 있다. 자본주의 국가의 위기 전가로 특정한 계기를 따라 폭발적인 민중봉기와 계급투쟁이 발생한다. 하지만 개량주의적 전망에 갇혀있는 노동조합 지도부, 그리고 개량주의 정치세력은 대정부투쟁에서 조직노동운동의 주도적 역할을 스스로 포기하거나 제한하고, (민주당 같은) 자본가 정당 혹은 개량주의 정당을 통한 의회에서의 협상에 의존한다. 이를 위한 협상카드로 조직노동자운동의 힘을 일부 동원하기도 하지만, 이러한 전망의 한계 때문에 부분적인 동원에 그치며, 폭발하는 계급투쟁을 가라앉히는 역할을 한다. 혁명적 사회주의 운동은 이러한 개량주의 노조관료에 맞서 아래로부터의 자기조직화를 활성화하고, 노동자 민주주의를 재건하고, 폭발적으로 분출하는 미조직 노동자들의 운동과 결합시키기 위해 분투한다. 이를 얼마나 전진시키느냐에 따라, 계급의 세력관계가 달라진다. 조직노동자운동을 계급투쟁을 이끄는 기관으로 재편하는 것은, 당면한 계급투쟁에서의 승리를 위한 사회주의자의 첫 번째 과제다. 다음으로는 첫 번째 과제와 긴밀히 결합된 사회주의자의 두 번째 과제에 대해 얘기해보고자 한다. 첫 번째 과제와 결합된 두 번째 과제는, 계급투쟁이 발전과정에서 전망을 잃지 않도록, 분명한 혁명적 사회주의 정치를 세우는 것이다. 혁명적 사회주의 정치의 정수는 무엇인가? 마르크스는 ‘공산당선언’에서 아래와 같이 정리한 바 있다. 공산주의자들은 프롤레타리아 일반과 어떤 관계에 있는가? ... 그들은 전체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이해관계와 동떨어진 이해관계를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어떤 특별한 원칙을 세우고 거기에 따라 프롤레타리아 운동을 짜 맞추려 하지 않는다. ... 그들은 프롤레타리아들이 각각 전개하는 다양한 국내 투쟁에서 국적과는 무관한 전체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공동 이해관계를 강조하고 관철하는 한편, 프롤레타리아 계급과 부르주아지 간의 투쟁이 거쳐온 여러 발전 과정에서 항상 전체 운동의 이해관계를 대변한다.[52] 사회주의자는 서로 다른 국가에서, 또 서로 다른 쟁점을 갖고 시작한 운동이, 실은 자본주의 체제라는 동일한 뿌리에서 비롯되었다는 점을 분명하게 이해하고, 이를 자본주의 체제에 맞선 공동의 투쟁으로 연결하고자 한다. 예컨대 여성파업 운동은 여성들이 당면한 차별과 억압에 맞선 투쟁이고, 기후정의운동은 기후위기에 맞선 투쟁이며, 팔레스타인 해방투쟁은 제국주의가 만든 식민억압과 학살에 맞선 투쟁이다. 윤석열의 내란에 맞선 투쟁은 극우정권의 민주주의 파괴에 맞선 투쟁이고, “이대로 살 수 없다”며 임금 30% 회복을 요구한 조선하청노동자의 파업투쟁은 생존권 투쟁이다. 그러나 가부장제, 기후위기, 제국주의, 극우파시즘, 비정규직 제도는 모두 자본주의라는 동일한 뿌리로부터 나온 위기의 표현들이다. 이 투쟁들을 하나의 투쟁으로 묶어내고 자본주의 체제를 향한 공동의 투쟁으로 발전시키는 것이 우리의 전략이다. 이렇듯 모든 부분적, 단계적 투쟁에서 늘 ‘전체 운동의 이해관계’를 대변하는 건 왜 중요한가? 자본주의가 계급투쟁을 완전히 뿌리뽑을 수 없을 때, 대신 일정한 틀에 계급투쟁을 가두고 종국에는 좌절시키기 위해 사용하는 핵심적인 전략이 부분적 투쟁을 부분에 머물도록 제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포섭전략은 이에 순응하는 포섭된 노동계급의 일부에게는 일정한 ‘당근’을 제공하면서, 가부장제, 인종차별, 민족억압 등과 결합하여 더 주변화된 성과 인종, 민족을 우선적으로 공격하는 형태로 나타난다. 사회주의자가 전체 운동의 이해관계를 대변한다는 것은, 모든 종류의 이러한 분열전략에 맞서 ‘모든 노동자의 이해관계’, 따라서 주변화되고 더욱 차별과 억압에 시달리는 노동자의 이해관계를 대변한다는 뜻이다. 특히 마르크스는 공산당 선언에서, 노동자들이 전개하는 다양한 투쟁에서 ‘국적과는 무관한’ 전체 노동자계급의 공동의 이해관계를 강조하고 관철해야한다고, 즉 다시 말하면 ‘노동자 국제주의’를 강조하는데, 이는 특히 오늘날 제국주의가 전쟁으로 치닫고 있는 현실에서 사활적인 중요성을 지닌다. 두 차례의 세계대전의 사례에서도 볼 수 있듯이, 전쟁은 극우의 성장과 함께 엄청난 민족주의의 광풍을 불러오기 때문이다. 그래서 혁명적 정치의 여러 측면들 중 노동자 국제주의 관점의 중요성을 이번 글에서 좀 더 살펴보려 한다. 얼마 전 조지아의 현대차 공장 건설현장에서 벌어진 이주노동자 단속 사례로부터 노동자 국제주의의 중요성을 생각해볼 수 있다. 미국 이민단속국(ICE)은 지난 9월 4일 조지아의 현대차 배터리 공장 건설현장에서 한국인 노동자 300명을 포함한 475명을 체포, 구금했다. 이는 LA등지에서 벌인 잔혹한 인간사냥에 이어 트럼프가 지속하고 있는 이주노동자에게 대한 공격의 한 사례였다. 그런데 조직노동운동의 지도부는 이런 반이민정책에 맞서 싸우기는 커녕, 트럼프식 민족주의에 포섭된 한계를 드러냈다. 노동운동 내 일부 세력들은 트럼프 정부와 더 나은 조건을 협상하려는 의도로, 이민자가 미국인의 일자리를 빼앗으며 공공의 안전을 위협한다는 우파의 허위 논리를 받아들였다. 팀스터스 노조(Teamsters, 미국 트럭운송노동조합)의 위원장 숀 오브라이언(Sean O’Brien)은 트럼프가 이민자들을 공격하는 동안 침묵을 지켰다. 그리고 반이민 정책과 노동개악, 미국우선주의 관세정책을 옹호하는 새 노동부 장관을 열렬히 지지했다. 전미자동차노조(UAW)의 위원장 숀 페인은 트럼프의 관세정책으로 미국에 공장이 신설되고 일자리가 늘어남을 찬양하며, 미등록 노동자들이 범죄자로 낙인찍히고 추방당하는 동안 침묵을 지켰다. 그 결과는 무엇인가? 노동자들 간의 단결이란 허울좋은 공문구에 불과하니, 그런 있지도 않은 것에 힘빼지 말고, 자국 산업의 경쟁력을 키워서 ‘우리 이익’을 지켜야한다는 실리주의 정서의 확산이다. 자국 산업을 지켜내기 위한 수단으로서 ‘국방력의 강화’ 또한 중요히 여겨진다. 위기의 시대에 전쟁으로향하는 민족주의 광풍은 그렇게 불어오는 것이다. 아래는 전국금속노조 한국GM지부 자유게시판의 ‘UAW 전미 자동차 숀 페인 위원장의 이중성’이란 글과 거기 달린 댓글 중 일부이다.[53] [UAW 전미 자동차 숀 페인 위원장의 이중성] 글쓴이: 노동자 세상 2025-07-11 (금) 23:37 조회 : 1448 한국에온 UAW숀페인 위원장 일행은 금속노조와 한국지엠지부를 방문하여 연대를 표시했다. 그러나 그는 자국인 미국의 트럼프가 시장주의를 표방하는 자유무역체제를 붕괴를 시키면서까지 깡패처럼 관세폭탄을 때린것을 UAW의 승리라고 떠들며 오프 쇼어링(해외생산기지)를 중단할것이다.며 미국 노동자들의 일자리확보를 UAW의 승리라고 떠벌였다. 그래놓고 정작 한국에 와서는 지엠의 정비 폐쇄,부지매각 투쟁을 하는 한국지엠노조에는 연대의 제스처를 벌이는 아주 추잡한 노조 관료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것도 모르고 금속노조와 한국지엠지부는 대단한 우군을 맞이한것처럼 환대를 하는 모습이 참으로 우려스럽다. ID: 정신차리자 2025-07-12 (토) 07:48 UAW는 절대 연대 할 수 없는 경쟁상대일뿐이다. UAW가 한국에 오는 목적은 연대가 아닌 전기차,하이브리드 중,소형차생산을 어떻게하면 미국에 설치 할 수 있을까 빼앗기위해 생각하러오는 견학일뿐 그 이상도 이하도 없다는것.. 미국놈들이 얼마나 잔인한가? 전쟁을 유도하고 무기 팔아먹고 재건사업들어가서 이득챙기고,. 미국 국력강하다고 관세때리며 힘없는 국가들에게 깡패놈들처럼 뚜두려패며 돈뺏고 있다. UAW도 미국 국민일 뿐이며 얼굴에 가면하나 걸치고 한국지엠에 견학온것 뿐이란을.. 노동조합은 정신차리길 바란다. ID: 초청? 2025-07-12 (토) 08:37 글내용처럼 이미 많은 언론이나 조합원들도 알고있는 팩트입니다. 협력이아닌 경쟁 상대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초청?? 좀 아이러니 한 경우죠. 제조공장에 일감에 대해서는 양보란 없습니다. 결국 먹고사는 문제이고 존폐의 문제죠. ID: 오호 2025-07-12 (토) 16:14 UAW 는 미국노동자들을 위한 노동조합입니다. 자국이 우선시 되는거죠... 그걸 몰랐을리가 없을겁니다. 몰랐다먼 순진하게 당한거죠...미국노동자들을 위한 노조에 확실한 답을 준겁니다. 얘네는 한국GM 이 어떻게 되든 관심없습니다. 오로지 자국 노동자들만 관심있죠... 헥터나 브라이언에게 힘만 더 실어준 격이 된 듯 합니다. 미국이 관세정책과 반이민정책으로 전 세계에 미치는 악영향을 고려할 때, 이에 대한 미국 노조관료들의 투항은 이미 노동자 국제주의에 매우 중대한 해악을 끼치고 있다. 특히 UAW 숀 페인 위원장의 사례는 중요한 시사점을 던진다. 그는 2023년에 이른바 ‘빅3(크라이슬러, 포드, GM)라 불리는 UAW의 대규모 자동차 공장에서 조합원들 사이의 민주주의를 활성화하고, 이중임금제 타파[54]를 주요 요구로 내걸고, 전투적으로 파업을 이끌면서 리더십을 인정받은 인물이다. 그는 UAW의 오랜 어용관료들의 지배를 타파하기 위해 만들어진 현장조직 “UAWD”[55]의 지지를 받았다. 빅3를 넘어 노동조합의 협상력을 높이기 위해 현대차, 폭스바겐, 혼다 등 무노조 사업장을 조직하겠다는 포부를 밝히기도 했다. 이런 전투적인 노조 지도자가 왜 트럼프의 관세정책을 지지하는가?[56] 그의 시야가 ‘미국 노동자계급의 단결’, 또는 ‘미국 자동차산업 노동자의 단결’에 머물러있기 때문이다. 미국이 오늘날과 같이 전세계를 상대로 강도적 패권행위를 벌이지 않는 시기에는, 협소한 조합주의를 넘어선 숀 페인의 ‘전투적 조합주의’ 전망만으로도 진보적으로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자본주의가 쇠퇴하며 온갖 위기가 분출하는 시기에 국제주의 관점을 갖지 못한 노동운동은 반동적 역할을 수행하게 된다. 페인과 넬슨 같은 진보적 노동 지도자들조차 샌더스나 바이든 같은 민주당 정치인들을 지지하고 미국 제국주의에 찬사와 지지를 보내며 이러한 쇼비니스트적 정치를 재생산하고 있다. 넬슨이 2019년 정부 셧다운 종식을 위해 공항 노동자 파업 조직을 돕겠다고 위협하며 대중의 주목을 받았을 때, 그녀는 마치 미군이 노동자 계급의 이익을 위해 싸울 수 있는 것처럼, 지금 당장 우리 나라를 위해 싸우고 있는 수많은 군인들이 급여를 받지 못하고 있다고 열변을 토했다. 마찬가지로, 바이든 방문 당일 연설에서 페인은 미 공군 B-24 폭격기 생산 공장을 “민주주의의 무기고”라고 칭했다. 페인은 또한 프랭클린 루스벨트의 가까운 동맹이었던 UAW 지도자 월터 루터를 본보기로 삼았다. 루터는 1940년 미군을 위해 UAW가 하루 500대의 항공기를 생산하는 계획을 자랑스럽게 감독했으며, 전쟁 중 파업 금지 조항을 옹호하여 무단 파업을 억제하고 전쟁 기계로부터 기업 이익이 계속 흘러들도록 했다. 따라서 루터를 지지했던 모든 노조 활동가들은 의도치 않게 5년 후 보잉이 제조한 다른 종류의 폭격기로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서 수십만 일본 민간인을 학살한 바로 그 제국주의 국가의 안정성과 화력 증강에 기여한 셈이었다.[57] 숀 페인의 입장이 노동조합 내 전투적 조합주의의 한계를 보여준다면, DSA의 주요 정치인들이 보여준 한계는 개량주의 정치의 한계를 드러낸다. DSA의 버니샌더스, 알렉산드리아 오카시오-코르테스(AOC)같은 정치인들은 ‘민주 사회주의’라는 슬로건 아래 지난 십여년 간 성장하면서, 미국 민주당 내에서 ‘사회주의자’의 영향력을 키워야한다고 주장했다. 지난 몇 년간의 계급투쟁 물결에서 성장한 개량주의 정치는 여러 측면에서 한계를 드러냈다. 그 중 이번 강의의 주제와 연관하여 살펴볼 결정적인 한계는 국제주의의 결여다. AOC와 샌더스 모두 팔레스타인에서의 학살을 위한 추가 자금 지원에 찬성표를 던졌다. 샌더스는 인권 단체들에 따르면 세계에서 가장 치명적인 국경인 미국-멕시코 국경의 군사화를 더욱 강화하기 위해 트럼프와 “협력하겠다”고 말했다. 샌더스와 AOC는 전국 공급망을 마비시킬 수 있었던 2023년 12월 잠재적 철도 파업을 무산시키는 데 일조했다. 몇 달 전 샌더스는 극우 성향의 전쟁광 정치인 마르코 루비오의 인준에 찬성표를 던졌다. “과두정권과 협력하겠다”고 약속하면서 어떻게 “과두정권과 싸울” 수 있겠는가?[58] 노동자 국제주의의 정신을 지키기 위해, 미국의 정주노동자들은 현대차 사례를 포함해 미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이주노동자 단속에 강력하게 맞서 싸워야한다. 비록 조직노동운동 지도부를 장악한 노조관료들은 위와 같이 트럼프에게 투항해버렸지만, 미국 내에서도 사회주의자들은 노동자 국제주의를 지켜내기 위한 내부투쟁을 치열하게 벌이고 있다. 실제 LA 대규모 이민단속 때에는 지역민과 노조원들이 이주노동자 납치와 추방을 막기 위해 자경단을 꾸리고 지역사회 단체 네트워크를 조직했다. 아래는 혁명적 사회주의자이자 SEIU(미국서비스노조) 조합원인 줄리아 월리스가 쓴 글과 발언의 일부이다. 하지만 주말 내내 눈에 띄지 않았던 것은 노동운동의 가시적 존재감이었다. 사람들은 “데이비드 후에르타를 석방하라”고 외쳤고, 내 SEIU 721 셔츠를 보자 주먹을 들어 올렸다. 군중 속 많은 이들이 노동의 중요성을 이해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그러나 다른 SEIU 회원들은 현수막도 노조 셔츠도 없이 왔다. 우리는 파업 최전선에서 경찰과 맞서왔다. 이제 동료들을 집회로 이끌고 ICE로부터 방어하는 일도 우리 몫이다. 한 사람의 상처는 모두의 상처다.[59] 지역사회 단체들은 이민 단속 현장에 떼로 몰려가 추방을 저지했다. 오하이오에서 나치들이 시위를 시도했으나 무장한 흑인 커뮤니티가 그들을 경찰 뒤에 숨어 도망가게 만들었다. 심지어 전 트럼프 지지자들로부터도 반발이 일고 있다. 이는 트럼프에 맞선 다양한 계층과 분야의 저항이 시작되었음을 의미한다. 트럼프는 정당성을 상실했고, 이로 인해 속도를 늦추고 있다. 예를 들어 트럼프는 1,500명의 유학생 이민자에 대한 비자 취소 명령을 철회했다. 트럼프의 초기 위협에 그는 어느 정도 후퇴할 수밖에 없었지만, 싸움은 계속되고 있다. ... 혁명적 좌파는 경제적 제국주의 통제 시도에 대한 가장 강력한 반대 세력이 되어야 한다. 우리는 어떤 국가 부르주아지에게도 정치적으로 굴복할 수 없다. 멕시코의 셰인바움 대통령처럼 트럼프에 대한 강력한 수사(修辭)를 펼치는 세력조차도 예외가 아니다. 우크라이나에서 러시아, 중국에 이르기까지 우리의 충성은 노동자 계급에 있으며, 유럽과 전 세계에서의 군사화 시도에 맞서는 데 있다.[60] 이러한 관점 아래 우리도 한국에서 할 일이 많다. 당장 얼마 전인 9월 16일, 울산에서 현대자동차 모듈화 단지 내 자동차부품업체 공장 안에서 대규모 미등록 이주노동자 단속이 벌어졌다. 태국 국적 노동자 42명 등 이주노동자들은 미란다원칙 고지도 받지 못한 채 사복경찰과 출입국관리소 단속 인력에게 체포되었고, 줄줄이 묶여 호송되었다. 한국에서 벌어지는 이와 같은 인간사냥에 분노하며, 이주노동자들을 향한 단속과 추방에 맞서야 한다. 또한 지난 관세협상 과정에서 이재명 정부는 ‘MASGA(미국 조선업을 다시 위대하게)’라는 슬로건을 핵심적으로 내세웠다. 즉 한국의 조선산업 노동자들이 앞으로 미군의 해군력 증강을 위해 중요한 역할을 하게된다는 뜻이다. 이미 HD현대는 미국 ‘팔란티어’ 기업과의 방산협력을 논의하고 있는데, 팔란티어는 AI전쟁기술을 갖고 이스라엘 방위군(IDF)과 전략적 파트너십을 체결하고 있는 기업이다. MASGA 딜이 실현되는 과정은 미국이 강화된 해군력으로 중국과의 전쟁위기를 가속화하고, 팔레스타인 집단학살에 한국의 자본가들이 더욱 깊이 연루되어 이윤을 버는 과정이 될 것이다. 2차 세계대전이 시작된지 얼마 되지 않은 1940년, 트로츠키는 ‘제국주의 쇠퇴 시대의 노동조합’이란 글을 마무리하지 못하고 스탈린이 보낸 자객에 의해 암살됐다. 그가 쓰던 초고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있다. 현시대의 노동조합은 자유 자본주의 시대처럼 단순히 민주주의의 기관이 될 수 없으며, 더 이상 정치적 중립을 유지할 수 없다. 즉, 노동계급의 일상적 요구를 충족시키는 데 그칠 수 없다. 그들은 더 이상 무정부주의적일 수 없다. 즉, 국가가 민족과 계급의 삶에 미치는 결정적 영향을 무시할 수 없다. 그들은 더 이상 개혁주의적일 수도 없다. 왜냐하면 객관적 조건이 진지하고 지속적인 개혁을 위한 여지를 전혀 남기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 시대의 노동조합은 제국주의 자본주의의 하위 도구로서 노동자들을 종속시키고 통제하며 혁명을 방해하는 데 이용되거나, 반대로 프롤레타리아 혁명 운동의 도구로 변모할 수 있다. ... 노동조합의 중립성은 자유 부르주아 민주주의와 함께 완전히 그리고 돌이킬 수 없이 과거의 유물이 되었다. ... 지금까지 말한 바에서 분명히 알 수 있듯이, 노동조합의 점진적 퇴화와 제국주의 국가와의 유착에도 불구하고, 노동조합 내에서의 활동은 그 중요성을 조금도 잃지 않을 뿐만 아니라, 여전히 모든 혁명 정당에게 이전과 마찬가지로, 어떤 의미에서는 그 어느 때보다도 더 중요한 과업으로 남아 있다. 핵심 쟁점은 본질적으로 노동자 계급에 대한 영향력 쟁탈전이다.[61] -- 위기와 전쟁의 시대, 국경과 인종, 성정체성 등으로 노동자를 갈라쳐 지배하는 극우와 민족주의의 광풍 앞에서 노동조합을 혁명적 기관으로 재편하는 것. 그래서 폭발적으로 터져나오는 계급투쟁을 조직된 노동자운동과 유기적으로 결합시키는 것, 그래서 계급투쟁을 혁명으로 전진시키는 것, 이것이 오늘날 혁명적 사회주의자의 과제이며, 자본주의를 철폐하고 인간해방을 이루고자 하는 모든 투사들에게 제안하는 혁명적 사회주의 전략이다. 끝. ※하단의 '관련기사'에서 기초학습 다른 시리즈를 찾아 읽어보세요. [미주] [1] 1979년 영국 마거릿 대처의 집권, 1981년 미국 로널드 레이건의 집권, 1983년 칠레 피노체트 군부 쿠데타 등은 신자유주의 시대의 도래를 상징하는 장면들이다. 자세한 내용은 10강을 참조. [2] 그런데 사실 생산성이 더 이상 획기적으로 증대될 수 없다는 것, 그래서 이윤율을 획기적으로 끌어올릴 수 없다는 것은 자본의 입장에서는 절망적인 사실일지 모르나, 사회적 필요의 관점에서는 하등 문제가 될 것이 없다. 8강(기후위기와 민주적 계획경제)에서 논하였듯이, 우리에겐 급속한 탈성장이 필요한 부문과, 급속한 성장이 필요한 부문(그러나 자본주의에서는 이윤에 도움이 별로 되지 않기 때문에 투자되지 않는 산업, 예컨대 돌봄과 의료산업 등)이 있다. 이윤의 축적이라는 목표로부터 자유롭게, 인류의 필요에 따라, 자연과의 공존을 고려한 계획적 생산체계를 구축하는 게 오늘날 경제의 핵심과제다. 이를 수행하기 위한 필요조건은 자본가계급의 모든 권력을 박탈하는 것이다. [3] 정확히 말하면 이는 마이클 로버츠의 주장이 아니라, 다보스포럼, 세계은행 등 자본가계급 경제엘리트들의 분석을 요약한 것이다. [4] Michael Roberts, 2024, Davos and the melting world economy, https://thenextrecession.wordpress.com/2024/01/16/davos-and-the-melting-world-economy/ [5] Michael Roberts and Jason Koslowski, 2025, Is a Major Slump on the Way? An Interview with Marxist Economist Michael Roberts, Left Voice, https://www.leftvoice.org/is-a-major-slump-on-the-way-an-interview-with-marxist-economist-michael-roberts/ [6] Michael Roberts, 2024, Davos and the melting world economy, https://thenextrecession.wordpress.com/2024/01/16/davos-and-the-melting-world-economy/ [7] 같은 글. [8] Redacción internacional, 2025, La rebelión de una generación contra la corrupción en Nepal, La Izquierda Diario, 양동민 역, 「네팔: 부패에 맞선 한 세대의 반란」, 사회주의를향한전진, https://socialism.jinbo.net/bbs/board.php?bo_table=news&wr_id=1269 [9] 양준석, 2024, 「아르헨티나, 극우정권의 초긴축 실험에 맞서 노동자의 반격이 시작되다!」, 사회주의를향한전진, https://socialism.jinbo.net/bbs/board.php?bo_table=news&wr_id=702 [10] Ben Marenlensky and Hilda Frost, 2025, Why Are Trans Rights Under Attack and What Can We Do About It?, Left Voice, https://www.leftvoice.org/why-are-trans-rights-under-attack-and-what-can-we-do-about-it/ [11] IMF, 유럽연합(EU), 유럽중앙은행(ECB)을 뜻한다. 그리스가 2001년 유로존에 가입한 뒤 그리스는 독일의 가격경쟁에 밀려 제조업이 붕괴하였고, 그 대신 관광산업을 활성화하기 위해 유로화 부채를 빌려 건설업 과잉투자가 벌어졌는데, 2008년 세계 금융위기 이후 트로이카는 그리스에 유로화 부채를 상환하라며 구제금융을 지원하는 댓가로 긴축정책을 요구했다. 이는 자본주의로 인해 발생한 금융위기의 비용을 그리스 노동자민중에게 전가하는 것으로, 이 긴축요구를 받을 것이냐, 거부할 것이냐가 급진좌파연합(시리자) 집권 이후 가장 중요한 쟁점이었다. (자세한 내용은 10강 참조) [12] Joa Kim, 2024, 양준석 역, 「극우파 저지에 매몰돼 신인민전선을 지지한 프랑스노총(CGT) - 계급적 원칙을 저버린 잘못된 사례」, 사회주의를향한전진, https://socialism.jinbo.net/bbs/board.php?bo_table=news&wr_id=1003 [13] 양준석, 2025, 「세계적인 극우 정권과 '민주' 정권의 주고받기, 어떻게 깨부술 것인가?」, 사회주의를향한전진, https://socialism.jinbo.net/bbs/board.php?bo_table=news&wr_id=1248 [14] 그런데 다른 대륙과 달리 아시아의 여러 나라에선 이런 극우와 민주정권의 주고받기가 잘 관찰되지 않는다. 이는 이미 아시아 여러 나라들에서 오랫동안 극우 정권이 집권하며 계급투쟁을 강력하게 억눌러오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제국주의 제2의 강대국인 중국에서 부르주아 민주주의는 심각하게 제약돼있고, 노동자들은 자주적인 노동조합 결성권도 없다. 이들 국가에서는 노동자들의 취약한 조직화 수준 때문에 심각한 착취와 수탈에도 불구하고 정치세력이 집권을 이어가고 있다. 하지만 중국에서 코로나 봉쇄 당시 억압적인 정책에 맞선 백지시위, 최근 몇 년 간 아시아 여러 국가들에서 연이은 민중투쟁은 아시아의 권위적 극우 정권들을 위기로 몰고 갈 가능성을 드러낸다. [15] 같은 글. [16] Samuel Karlin, 2023, Joe Biden Is Building Trump’s Border Wall, Left Voice, https://www.leftvoice.org/joe-biden-is-building-trumps-border-wall/ [17] M. Carlstad, 2023, Biden Won’t Stop Climate Change, Left Voice, https://www.leftvoice.org/biden-wont-stop-climate-change/ [18] Charlotte White, 2023, Biden’s New Title IX Proposal Is a Move to Whip Votes, Not Protect Trans Kids, Left Voice, https://www.leftvoice.org/bidens-new-title-ix-proposal-is-a-move-to-whip-votes-not-protect-trans-kids/ [19] Ben Marenlensky and Hilda Frost, 2025, Why Are Trans Rights Under Attack and What Can We Do About It?, Left Voice, https://www.leftvoice.org/why-are-trans-rights-under-attack-and-what-can-we-do-about-it/ [20] ‘자라 바겐크네히트 동맹(Bündnis Sahra Wagenknecht)’이라는 정당으로, 독일 좌파당(Die Linke)에서 2023년 갈라져나왔다. 이른바 ‘좌파’로 분류되지만, 이민자를 반대하며 실상 독일 노동자계급‘만’의 권리를 옹호하는 반동적 민족주의 노선을 취하고 있다. [21] 독일 기독교민주연합(Christlich Demokratische Union Deutschlands), 혹은 ‘기독교민주당’으로 불리는 우파 성향의 정당이다. [22] 독일 사회민주당(Sozialdemokratische Partei Deutschlands), 전통적 개량주의 중도좌파 성향의 정당이며, 2차 인터내셔널 당시 전쟁공채 발행에 찬성한 바로 그 사회민주당이다. [23] 독일 자유민주당(Freie Demokratische Partei), 자유주의를 내세우는 중도우파 정당이다. [24] 2024년 8월 23일, 시리아 난민이 서독 졸링겐 지역의 공공 축제장에서 칼로 3명을 살해한 사건이다. [25] 1985년 솅겐 협정(Schengen Agreement)을 통해 유럽 각국은 공통의 출입국 관리 정책을 사용하여 국경 시스템을 최소화해 국가 간의 통행에 제한이 없게 한다는 내용을 담은 협정을 체결했다. 솅겐국가는 이 조약이 적용되는 국가들을 의미한다. 즉, 독일로의 이동이 자유로운 인접 국가들을 의미한다. [26] 바이에른 기독교사회연합(Christlich-Soziale Union). 바이에른 주 지역정당으로, 기독교민주연합(CDU)과 유사한 정치성향을 가진 자매정당이다. [27] Nathaniel Flakin, 2024, Germany’s Center-Left Government Prepared the Victory of the Far-Right AfD, Left Voice, https://www.leftvoice.org/germanys-center-left-government-prepared-the-victory-of-the-far-right-afd/ [28] 양준석, 2025, 「세계적인 극우 정권과 '민주' 정권의 주고받기, 어떻게 깨부술 것인가?」, 사회주의를향한전진, https://socialism.jinbo.net/bbs/board.php?bo_table=news&wr_id=1248 [29] 필자가 경험한 바에 의하면 윤석열 정부 시기 예비군 훈련 교육영상에서도 ‘힘에 의한 평화’ 슬로건과 함께 이스라엘의 ‘전국민 군사화’에 따른 대규모 예비군 동원력을 본받아야할 점으로 강조했다. [30] Enzo Tresso, 2025, Israël, pointe avancée de la contre-révolution, Revolution Permanente, Translated by James Dennis Hoff, Left Voice, https://www.leftvoice.org/israels-genocide-is-fueling-reactionary-politics-around-the-world/ [31] 추격국인 중국이 미국의 쇠퇴에 비해 상대적으로 높은 경제성장률을 보이고 있지만, 중국 자본주의 또한 여러 위기에 봉착해있음을 지적하는 것 또한 필요하겠다. 즉 미국의 헤게모니가 추락하고 중국이 상대적으로 부상하고 있지만, 중국 또한 이미 쇠퇴적 양상을 여러 측면에서 보이고 있다. 오늘날 중국의 상황과 관련해서는 다른 기회를 통해 자세히 이야기하고자 한다. [32] 1953년 스탈린 사망 후 소련이 자국의 이익을 위해 미국과의 평화공존론을 내세우자 중국에서도 탈마오화가 일어날 수 있다는 위기감을 느꼈고, 1956년 폴란드와 헝가리의 대중봉기를 소련이 탱크로 진압하는 걸 보면서는 더욱 큰 위협을 느꼈다. 소련은 중국으로 하여금 농업생산에 집중하며 소련에게 종속된 하위파트너로서의 역할을 요구했다. 마오쩌둥은 대약진운동으로 소련의 영향력으로부터 벗어나 중국 자체의 독자적인 공업발전의 의지를 표명했다. 1964년 첫 번째 원자폭탄 실험, 1970년대까지 지속된 삼선건설 프로젝트 등도 소련으로부터 독립적인 ‘일국사회주의’를 추구하려는 시도였다. [33] 아래는 2019년 당시 폭발하던 계급투쟁을 묘사한 글의 일부다. “알제리와 수단에서 수십만 명, 어쩌면 수백만 명이 제국주의 지배자들에게 봉사하는 끝없는 독재에 맞서 들고 일어나, ‘아랍의 봄’에 새로운 숨결을 불어넣었다. 15년간의 전쟁과 미국의 점령으로 황폐해진 이라크에서는 실업과 궁핍한 생활조건에 항의하는 대중시위가 벌어졌다. 백 명 이상의 사망자가 발생할 정도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이 시위는 나흘간 이어졌다. 레바논에서도 비슷한 일이 벌어졌다. 분노한 사람들이 하리리 정부의 퇴진을 요구했다. 지구의 반대편에서는, 홍콩에서 수천 명이 몇 달째 시위를 이어왔다. 홍콩은 비즈니스 천국이지만, 인구의 압도 다수가 느끼는 사회적 불평등은 견디기 힘든 수준에 이르렀다. 스페인의 카탈루냐 독립운동도 다시 활성화됐다. 거기서는 스페인의 반동적인 군주정에 맞서는 진정한 반란이 진행 중이다. 스페인 정부는 카탈루냐 독립운동 지도자들을 처벌하기 위해 10년 이상의 징역형을 부과하려 한다. 이런 저항의 물결이 라틴아메리카에 당도했다. 이는 정세의 변화를 보여주는 신호다. 푸에르토리코에서는 대중이 반란을 일으켜 정부를 무너뜨렸고, 미국의 식민지배에 도전했다. 서반구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인 아이티에선 조베넬 모이즈 정부에 대항한 반란이 일어나 몇 달째 지속됐다.” Claudia Cinatti, 2019, The Return of the Class Struggle, Left Voice, 오연홍 역, 2019, 「번역 | 계급투쟁의 귀환」, 노동해방투쟁연대(준), https://nht.jinbo.net/bbs/board.php?bo_table=online1&wr_id=499. [34] 희생자들은 중국의 엄격한 코로나19 제한조치로 인해 화재현장을 탈출하지 못했다. [35] Sybil Davis, 2022, Social Justice Unionism: How ‘Generation U’ Is Building Class Solidarity , Left Voice, 양준석 역, 2022, 「번역 I 사회정의 노동조합주의: ‘U세대’가 계급적 연대를 구축하는 방법」, 노동해방투쟁연대(준), https://nht.jinbo.net/bbs/board.php?bo_table=online1&wr_id=1143 [36] Arthur, 2023, 사회주의를향한전진, 양동민 역, 「프랑스 사회주의자에게 직접 듣는 연금개악 반대 투쟁」, 2023 정치캠프 '위기·전쟁·혁명’ 자료집, 55p~83p, https://socialism.jinbo.net/bbs/board.php?bo_table=news&wr_id=513 [37] 3월 6일부터 수도권(일-드-프랑스, Île-de-France)에서 쓰레기 수거, 하수처리, 쓰레기 소각을 담당하는 청소노동자들이 갱신파업에 돌입했다. 3월 12일, 파리 시청은 수거되지 않은 쓰레기만 5,400톤이라고 발표했다. [38] (연금개악에 반대해 온) 극우정당 국민전선의 대표 마린 르펜도 쓰레기수거 업무복귀명령을 공개적으로 요구했다. 이에 학생, 은퇴자, 철도, 에너지 등 광범한 연대세력이 파업거점에 합류해 쓰레기수거 노동자들을 방어했다. [39] 업무복귀명령을 위반시 6개월 징역과 10만 유로 벌금(약 1억 4천만원)에 처해진다. [40] 3월 중하순, 정유공장 파업으로 공항의 연료가 2일치밖에 안 남아서 비행편 30%가 취소되는 상황이 벌어졌다. [41] 1월부터 3월까지 열린 많은 집회에서는 탄압이 크지 않았다. 집회는 대중적이면서, 매우 조직적이고, 또 매우 조용했다. 그러나 무기한 파업을 시작한 후, 특히 긴급명령권을 발동한 이후에 집회는 급진화했고, 탄압도 덩달아 심해졌다. 그래서 체포된 사람들의 석방을 위해 많은 시위를 벌이는 게 중요해졌다. [42] 연속혁명은 2차 총파업이 1월 31일(화)로 잡힌 상황에서 정유·철도·교사 등 핵심 부문들에서 31일부터 이틀짜리로 파업을 시작하되 매일 총회에서 연장 여부를 결정하는 파업방식(갱신파업)을 제안했다. 또 모든 노동자들을 모아낸 총회 또는 기업간·부문간 연합총회(총파업 네트워크)를 통해 아래로부터 주도성을 건설해 파업과 시위를 급진화하기 위한 실천들을 제안했다. 아울러 핵심 부문들의 적극적인 역할 속에서 조직력이 취약한 부문의 노동자들을 투쟁에 끌어들일 방안도 모색할 것을 제안했다. [43] 1월 28일, 연속혁명 주도로 노조원들·활동가들·개인들 300여 명이 연서명하여 무기한 파업 준비를 호소하는 칼럼을 르 저널 드 디망쉬(Le Journal du dimanche)에 발표했다. https://www.lejdd.fr/politique/tribune-retraites-300-syndicalistes-intellectuels-et-militants-appellent-generaliser-la-greve-132085 [44] 3월 2일 파리에서 150~200여명이 모인 총파업 네트워크 미팅이 진행됐다. [45] 이후 3월 13일 총파업 네트워크 주최로 정유·에너지·항만·철도 등의 갱신파업을 전체 총파업으로 발전시킬 긴급한 필요성에 응답하기 위한 토론회를 개최했다. 정유, 공항, 철도, 청소, 학생 등 600여 명이 참여했고, 파업 중인 부문의 대표자들이 다수 참석해 강력한 투쟁 분위기를 형성했다. 3월 21일에는 총파업 네트워크 주최 3차 토론회가 개최됐다. 파리교통공단, 국영철도, 청소, 핵발전소, 전기, 공항, 교육, 제조업(에어버스, 사이델, 사프란, 스텔란티스, 사노피, 생고뱅 등), 학생 등 300여 명이 참여했다. 이 토론회에서 △탄압에 맞서기 위한 광범한 연대망 구축 △연행자 발생시 경찰서 앞에서 대중적 항의 조직 △업무복귀명령 강제하려는 경찰 침탈에 맞서 수많은 대중들로 입구 틀어막기 등 강화되는 탄압에 맞설 방안들이 토론됐고, △승리의 가능성이 열렸다 △연금개악 철회를 넘어 불안정노동 철폐로 나아가야 한다 △이주민 정책 개악에 맞서야 한다 등의 주장들이 제기됐다. 토론자들은 △파업의 확산 △탄압에 맞선 방어전선 구축 △전면적인 총파업을 위한 행동위원회 건설 호소를 결의했다. [46] 아델 에넬은 13세 때 《악마들》로 데뷔하였고, 《라폴로니드: 관용의 집》, 《수잔》, 《싸우는 사람들》, 다르덴 형제의 《언노운 걸》, 셀린 시아마 감독의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에 출연하였다. 아델 에넬은 현재 가자로 향하는 글로벌 수무드 함대에 승선해있다. [47] https://www.hani.co.kr/arti/international/america/1215620.html [48] 양준석, 2025, 「12·3 이후 극우세력의 준동과 노동자계급의 대응방향」, 사회주의를향한전진, https://socialism.jinbo.net/bbs/board.php?bo_table=news&wr_id=1137 [49] 김미옥, 2025, 「민주노총 82차 정기대의원대회 후기 - 수정동의안에 담긴 정신을 실천하기 위해 싸워나갈 것이다」, 사회주의를향한전진, https://socialism.jinbo.net/bbs/board.php?bo_table=news&wr_id=1135 [50] 내란-극우세력 청산! 사회대변혁! 노동자세상 총파업 조직화 공동행동에서 2025년 3월 22일 발행한 「3월 27일 하루 총파업을 시작으로, 4월부터는 전면적인 사회적 총파업으로 윤석열 정권을 끝장내자!」 유인물 내용 중 일부이다. https://general-strike-network-korea.notion.site/3-22-1bda4691f4488057b28fe336047b5750?source=copy_link [51] “이번 대선에서 민주노동당 권영국 후보는 정의당보다 왼편의 세력, 즉 사회대전환연대회의 소속으로 출마해 완주했고, 34만 4,150표를 얻었다. 사회대전환연대회의가 민주당으로부터 독립적인 정치세력화를 표방했다는 점, 노동권 확대와 포괄적 차별금지법 제정 등 권영국 후보가 제시한 공약이 큰 틀에서 진보적이라는 점, 권영국 후보가 투쟁현장을 찾으며 노동자계급과의 연대 의지를 드러낸 점은 노동자 계급정치 확대의 측면에서도 분명 의미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권영국 후보의 한계 또한 분명했다. 과거 정의당의 민주당 종속성과 함께, 사회대전환연대회의 내 일부 세력의 민주당 종속성 역시 문제였다. 노동자의 희생을 통한 기업살리기에 민주노총을 동원하려는 시도였던 '코로나19 위기극복을 위한 노사정 합의안'을 문재인 정부와 손잡고 민주노총에 관철하고자 했던 세력이 버젓이 사회대전환연대회의에 포함된 상황은, ‘민주당과 독립적인 정치세력화’라는 후보의 의미를 퇴색시키기도 했다. 사회대전환연대회의 권영국 후보가 제시하는 공약 전반은 자본주의 안에서의 개혁, 그것도 불충분한 개혁에 머무르고 있으며 심화하는 자본주의 위기에 대한 인식 또한 결여하고 있었다. 그 결과, 최저 출생률과 최대 자살률이 상징하는 삶의 위기 앞에서도 자본주의 그 자체에 맞선 투쟁이 아니라 증세와 제도개혁을 통한 분배 확대를 요구하고 있을 뿐이다. 자본주의 자체에 문제제기 하지 않는 권영국 후보의 한계는, 노골적인 민족주의와 반생태적 내용으로 채워진 국방·통일·외교통상 공약에서도 고스란히 드러난다. 대중에게 무엇인가를 분배하기 위해서는 자본의 지불능력이 존재해야 한다는 사민주의의 본질적 한계가 반동적으로까지 드러난 대목이다. 석유·가스·희토류 등 러시아 극동 자원개발에 참여한다는 공약은 노골적 추출주의(extractivism)의 표현이라는 점에서 기후정의와 정면으로 충돌한다. 특히 '러시아 북극항로 개척'으로 조선·물류산업을 확대하겠다는 공약은, 북극항로 자체가 기후위기로 인한 해빙으로 열렸다는 점에서 기후재난을 이윤축적의 기회로 삼겠다는 반생태적 발상이다. 나아가 북극항로는 미·중·러 열강이 격돌하는 지정학적 투쟁 공간이라는 점에서, 제국주의 열강투쟁 격화라는 시대인식 자체를 결여하고 있다. 이런 시대인식의 부재는 ‘한국형 모병제 도입으로 30만 정예 강군 달성’이라는 공약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모병제는 전쟁의 시장화다. 필요한 것은 대대적 군축이지 모병제 도입이 아니며, 그 목적 또한 ‘정예 강군’ 육성이 아니다. 이것도 모자라 박근혜 정부의 '유라시아 이니셔티브'와 문재인 정부의 '한반도 신경제구상'을 계승하겠다는 공약은 황당하기까지 하다. 민주당으로부터의 독립성은 노동자계급 정치세력화의 출발이나, 노동자계급 정치세력화의 충분조건이 될 수는 없다.” 백종성, 2025, 「죽어야 할 것들이 살아남아 현실을 짓누른다 - 21대 대선이 드러낸 노동자계급의 과제」, 사회주의를향한전진, https://socialism.jinbo.net/bbs/board.php?bo_table=news&wr_id=1211. [52] 카를 마르크스&프리드리히 엥겔스, 1948, 『공산당 선언』, 2018, 책세상, 이진우 역. [53] 「UAW 전미 자동차 숀 페인 위원장의 이중성」, 전국금속노동조합 한국지엠지부 자유게시판, https://gmno.or.kr/bbs/board.php?bo_table=new2_03_1&wr_id=57549&sca=&sfl=&stx=&sst=&sod=&spt=0&page=30 [54] 일종의 미국식 비정규직 제도인데, 특정 시점 이후 입사자의 임금수준을 달리 책정하는 것이다. 실제 빅3 공장에는 여러 가지 요인에 따라 노동자들이 여러 개의 등급(tier)으로 나뉘어져있고, 차등적인 임금을 지급받는다고 한다. 이중임금제는 UAW가 2007년 합의한 결과에 따라 도입되었는데, 숀 페인 집행부는 이를 핵심 문제로 내걸고, 실제로 일정하게 차별을 완화한 단체협약을 체결했다. [55] “Unite All Workers for Democracy”(민주주의를 위한 모든 노동자의 단결)의 약자이다. UAWD는 지난 2025년 4월, 조직 내 좁혀지지 않는 이견으로 인해 해산을 결정했다. 아마도 이러한 결정은 숀 페인 위원장의 트럼프 민족주의 지지와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56] “전미자동차노조 위원장 숀 페인은 3월 26일 트럼프가 미국 시장에 들어오는 승용차와 트럭에 대한 주요 관세를 발표하자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수십 년간 노동자 공동체를 파괴해 온 자유무역 재앙을 끝내기 위해 행동에 나선 트럼프 행정부를 환영한다.” 전미자동차노조는 자동차 관세가 ‘미국 내 생산 회귀를 이끄는 가운데, 일자리를 해외로 이전하고 지역 경제를 황폐화한 정책으로부터 손해 입은 블루칼라 지역사회를 회복시키는 조치’라 주장한다. 숀 페인은 북미에서 판매되는 폭스바겐 자동차의 75%가 멕시코에서 생산된다며 고율 관세로 매우 짧은 시간에 이 생산을 다시 미국으로 가져올 수 있다고 강조했다.” 이용덕, 2025, 「애국주의 물결에 휩쓸리는 금속노조 - 지배자들과 한배를 타고 노동자의 생존권을 지킬 순 없다!」, 사회주의를향한전진, https://socialism.jinbo.net/bbs/board.php?bo_table=news&wr_id=1234 [57] James Dennis Hoff, 2024, Beyond Reform: The Limits of the New Labor Bureaucracy, Left Voice Magazine, April 2024, https://www.leftvoice.org/beyond-reform-the-limits-of-the-new-labor-bureaucracy/ [58] Julia Wallace, 2025, Julia Wallace: “Class Collaboration Is Working-Class Submission.”, Left Voice, https://www.leftvoice.org/julia-wallace-class-collaboration-is-working-class-submission/ [59] Julia Wallace, 2025, “Selena Would Be Right Here with Us”: Dispatches from Los Angeles, Left Voice, https://www.leftvoice.org/selena-would-be-right-here-with-us-dispatches-from-los-angeles/ [60] Julia Wallace, 2025, Julia Wallace: “Class Collaboration Is Working-Class Submission.”, Left Voice, https://www.leftvoice.org/julia-wallace-class-collaboration-is-working-class-submission/ [61] Trotsky, 1940, Trade Unions in the Epoch of Imperialist Decay, Fourth International Vol.2, 1941, https://www.marxists.org/archive/trotsky/1940/xx/tu.htm /* 스크롤 여백만 주고, 화면에는 안 보이게 */ .ftn-target { display: inline-block; /* 줄바꿈 안 생김 */ width: 0; height: 0; scroll-margin-top: 200px; } document.addEventListener("DOMContentLoaded", function () { // name="_ftn1", name="_ftn2", name="_ftnref1" ... 전부 대상 document.querySelectorAll('a[name^="_ftn"]').forEach(function(a) { var idValue = a.getAttribute("name"); // 이미 같은 id의 요소가 있으면 또 만들지 않음 if (!document.getElementById(idValue)) { var span = document.createElement("span"); span.id = idValue; span.className = "ftn-target"; a.parentNode.insertBefore(span, a); } }); }); /* 본문 각주 번호 + 아래쪽 각주 번호 색 지정 */ a[href^="#_ftn"] sup, a[href^="#_ftnref"] sup { color: #BF202D; } /* 밑줄이 보기 싫으면 */ a[href^="#_ftn"], a[href^="#_ftnref"] { text-decoration: none; } /* 마우스 올렸을 때 살짝만 강조하고 싶으면 (선택) */ a[href^="#_ftn"]:hover, a[href^="#_ftnref"]:hover { text-decoration: underline; } /* 페이지 전체가 오른쪽으로 넘치지 않게 */ html, body { max-width: 100%; overflow-x: hidden; } /* 본문 영역 폭 강제 고정 + 긴 단어/문장도 줄바꿈 */ #bo_v_con, .bo_v_con, .cke_editable, article { max-width: 100%; overflow-wrap: break-word; word-wrap: break-word; /* 구형 브라우저용 */ } /* 워드에서 붙은 이미지/표가 화면 밖으로 안 나가게 */ #bo_v_con img, #bo_v_con table, .bo_v_con img, .bo_v_con table, .cke_editable img, .cke_editable table, article img, article table { max-width: 100% !important; height: auto; } /* 워드가 p, span에 폭을 박아놓은 경우 강제로 해제 */ #bo_v_con p[style*="width"], #bo_v_con span[style*="width"], .bo_v_con p[style*="width"], .bo_v_con span[style*="width"], .cke_editable p[style*="width"], .cke_editable span[style*="width"], article p[style*="width"], article span[style*="width"] { width: auto !important; max-width: 100% !important; } /* 기본 blockquote 스타일 */ blockquote { border-left: 4px solid #c0392b; /* 사이트 분위기와 맞는 붉은 계열 */ padding: 12px 18px; margin: 20px 0; background: #fafafa; font-style: normal; color: #333; line-height: 1.6; } /* blockquote 안의 p 태그 정렬 */ blockquote p { margin: 0 0 10px 0; text-align: justify; } /* 마지막 p 태그 여백 제거 */ blockquote p:last-child { margin-bottom: 0; } -
[한노운사 연재 7회] 2부 전진과 격돌 (1988-1998) [1] 1988~89년 민주노조운동의 폭발적 성장1987년 대투쟁은 석 달 만에 사그라졌지만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1988~89년 노동자들은 폭발적인 투쟁을 이어가며, 계급의식과 단결을 발전시켜 나갔다. 민주노조가 양적으로 크게 확대됐을 뿐만 아니라, 지역별·업종별 연합조직 건설을 통해 질적으로도 크게 발전했다. 노동자들은 특히 정권과 자본의 탄압에 맞서는 과정에서 지역 차원의 연대투쟁과 정치투쟁을 강력하게 발전시켜 나갔다. (사진: 1988년 11월 13일 전국노동자대회. 한국전쟁 이후 처음으로 열린 전국노동자대회였다.) 이전 편 보기 2부 전진과 격돌 (1988-1998) [시대배경] 군사파시즘에서 신자유주의 질서로 [1] 1988~89년 민주노조운동의 폭발적 성장 [2] 1990~91년 전노협 건설과 민주주의 투쟁 [3] 민주노총으로 가는 길 [4] 1996~98년 노동법 대격돌 1) 지역별·업종별 민주노조 연합조직 건설 1987년 노동자대투쟁이 수그러든 이후에도 한동안 노동조합과 조합원 수가 크게 늘어났다. 1987년 6월 2,742개이던 노동조합 수는 1987년 말 4,104개, 1989년 말 7,861개까지 늘어났다. 1987년 6월 105만 명이던 조합원 수는 1987년 말 127만 명, 1989년 말 193만 명(조직률 19.8%)까지 늘어났다.[1] 특히 1987년 노동자대투쟁 동안에 상대적으로 대공장에 노동조합 설립이 집중됐던 것과 달리, 1988~89년 동안에는 수많은 중소 사업장에서 노동조합 설립이 봇물처럼 이어졌다.[2] 1987년 6월 이후 1989년 말까지 5천여 개의 노동조합과 88만 명의 조합원이 추가됐지만, 그 모두가 민주노조로 나아가지는 못했다. 1989년 말을 기준으로 민주노조운동은 제조업과 서비스업·사무전문직을 망라할 때 대략 1천 개의 노동조합과 40만 명의 조합원을 포괄하는 것으로 인식됐다. 1987년 노동자대투쟁 이후 민주노조들 사이에 형성된 유대는 1988~89년을 거치면서 지역별 또는 업종별로 민주노조들의 연합조직을 건설하는 흐름으로 이어졌다. 제조업 노동자들을 중심으로 전투적인 지역연대 투쟁을 주도한 민주노조들은 지역별 연합조직으로 결집했다. 1987년 12월 14일 ‘마산창원노동조합총연합’(마창노련)을 시작으로 진주, 서울, 인천, 성남, 전북, 대구, 경기남부, 광주, 부천, 부산·양산, 대전, 동광양, 구미, 울산, 거제 등 모두 16개 지역에서 ‘지역별노동조합협의회’(지노협) 형태의 민주노조 연합조직이 건설됐다. 각 지노협에서는 정권과 자본의 탄압에 맞선 직접적인 연대투쟁이 조직의 결성과 운영에서 중심 역할을 했다. 지노협 설립일 마산창원노동조합총연합(마창노련) 1987년 12월 14일 진주지역민주노동조합연합(진주노련) 1988년 4월 16일 서울지역노동조합협의회(서노협) 1988년 5월 29일 인천지역노동조합협의회(인노협) 1988년 6월 18일 성남지구노동조합총연합(성남노련) 1988년 6월 25일 전라북도노동조합연합회(전북노련) 1988년 8월 21일 대구경북지역노동조합연합(대경노련) 1988년 12월 7일 경기남부지역노동조합연합(경기노련) 1988년 12월 28일 광주지역노동조합협의회(광노협) 1989년 3월 5일 부천지역노동조합협의회(부노협) 1989년 7월 22일 부산지역노동조합총연합(부산노련) 1989년 9월 30일 대전지역민주노조협의회 준비위원회 1989년 말 거제지역노조탄압 공동대책위원회 구미지역노동조합대표자회의 동광양시민주노조협의회 울산지역노동조합협의회 준비위원회 실질적 상급단체의 필요성을 인식한 ‘청년노동자회’ 및 7·8월 대투쟁에서 급부상한 몇몇 노조대표자들은 1987년 11월 18일 ‘마창노련 추진위원회’를 구성하고, 민주적 조합운영과 조합활동을 위한 지역 연대조직의 기초를 다져나갔다. … 추진과정에는 경노협과 같은 노동운동단체나 지역활동가, 해고노동자 등 선진노동자 역량이 알게 모르게 영향을 주었던 것도 사실이었다. 실제 마창노련이 다른 지역보다 빨리 지역연대조직을 결성할 수 있었던 특수성 혹은 유리한 점이라고 한다면, 무엇보다 결성주체들이 대중적 토대를 갖고 있었다는 점과 노동운동 활동가와 연결될 수 있었던 점일 것이다. … {1988년 초} 마창노련은 첫 대중 연대사업으로 임투 공동교육을 계획하였다. 하지만 마창노련은 사무실도 없고 상근자도 없는 달랑 이름 하나뿐인 단체였다. … 마창노련은 가입비가 없었기 때문에 위원장들이 각자의 호주머니를 털어 겨우 운영비나 경비를 충당할 정도였다. 이런 악조건 속에서도 마창노련 초기 위원장들은 자발적, 적극적으로 나서 교육을 준비하였다. … 이러한 교육은 마창노련만이 아니라 마창지역 각종 단체들(경남노동자협의회, 가톨릭노동문제상담소, YMCA, 성공회, 남도민족교육원, JOC, 배움의 집 등)에서도 담당하였고, 어디나 신청자가 쇄도하여 선착순으로 짤라야 할 정도로 호응이 높았다. 단체에서의 노동자교육은 단지 임금교섭에 관한 지식이나 실무역량뿐만 아니라 노동자들의 의식향상에도 많은 공헌을 하였다. … 공동임투교육이 열화와 같은 성원으로 끝나자 조합원들에게도 광범위한 교육이 실시되어야겠다는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이리하여 1988년 2월 11일 <마창노련신문>이 창간되어 창간호 2만 부가 발행되었다. 노동자의 투쟁소식을 활자로 전달하는 신문이 거의 없었던 당시, <마창노련신문>은 단연 관심과 주목의 대상이 되었다. 노동자들에게는 가뭄의 단비였고, 특히 마창노련 조합원들에게는 ‘우리 신문’으로서의 자랑과 긍지 그리고 각별한 애정의 대상이었다. … 마창노련 신문이 발행되자 각 노조에서도 교육지, 노보 및 소식지, 대자보, 속보, 그밖에 ‘부서지’와 ‘현장지’ 등을 잇달아 경쟁적으로 발행하고, 긴급 사안에 따른 유인물도 자체적으로 제작 배포하는 등 교육선전 활동이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이처럼 각 노조마다 경쟁적으로 내용의 질적·양적 수준을 높이기 위한 욕구가 높아짐에 따라 마창노련 편집교류회와 교육선전국 활동도 활성화되어 교육선전과 편집에 관한 정보와 지식을 교환하고 의식 향상을 위한 자체 교육이 날로 확대되었다.[3] 1989년 8월 마창노련은 39개 노조, 3만 2천 명의 조합원을 포괄하는 조직으로 급성장하였다. … 마창지역 전체 노조의 12.5%에 불과하지만 조합원 수로는 마창지역 전체 조합원 중 약 1/3을 결집하고 있는 높은 수치였다. 나아가 공단에서는 조직노동자의 40% 이상을 포괄하고 있어 마창노련의 조직력은 타 지역 민주노조협의회에 비해 월등히 높았다. 또한 마창노련은 단위조합당 평균 조합원 수 약 800명으로 대공장이 조직의 기본축이었다. … 조합원 1천 명 이상인 노조도 11개(창원공단 4개)에 달했다. 여기에 마산과 창원 두 공단이 산업적 동일성이 뚜렷한 특성을 갖고 있어 공단 내의 광범한 중소부품업체를 하청계열화하고 있는 점을 감안하면 마창노련 가입 노조의 영향력은 엄청나게 컸다. 마창노련은 마창공투본을 결성하면서 미가입 사업장들까지 견인하여 활동에 참여하게 하였다. 그 결과 공동 임투 기간 동안 공투본 소속 조합원들은 마창투본의 방침을 충실하게 이행하는 경향을 보였고 급기야 마창노련 가입 여부가 노조의 성격을 민주냐 어용이냐로 판가름하는 기준이 되어갔다. 이는 마창노련이 명실상부한 사실상의 마창지역 노동자의 상급단체로 자리를 굳힌 것을 의미하였다. 이렇듯 창립 이후 2년 사이에 마창노련의 조직확대 기반은 엄청나게 넓어졌다. 이에 따라 조합원들의 연대의식과 투쟁의식도 몰라보게 급성장하였다. 이는 마창공투본 결성으로 선진사업장과 그렇지 못한 사업장 간의 활발한 교류가 이루어지고, 잦은 공동집회와 공동투쟁을 통해 각 노조와 간부들 간의 의식의 편차가 줄고 기본적인 수준에서 공동행동의 근거를 마련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연대활동 자체가 노조의 일상활동의 한 부분으로 자리잡게 되면서 노조간부만이 아니라 일반조합원들까지도 기업별 조합주의를 뛰어넘는 연대의식이 자연스럽게 몸에 배게 되었다. 이로 인해 조합원 중심의 조직력, 투쟁력이 강화되었음은 물론이다. 또한 공권력을 상대로 한 직접적인 대중투쟁 과정에서 3자 개입 개념이 사실상 무력화되고, ‘공안합수부 해체’나 ‘노태우정권 퇴진’ 요구 등 정치권력의 계급적 속성을 인식하게 되자 조합원들의 정치의식 변화 역시 뚜렷하게 드러났다.[4] ‘서울지역노동조합협의회’(서노협)는 1988년 5월 29일 서울지역의 45개 민주노조 1만 8,000여 명의 조직으로 출범하였다. 서노협은 몇몇 선진 운동가들의 논의를 통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맥스테크사 위장폐업 철회투쟁, 청계피복노조, 인쇄노조, 제화노조 등 일련의 지역노조 합법성 쟁취투쟁, 그리고 현대사회연구소 연구원 부당해고 철회에 맞선 지역 연대투쟁을 거치면서 탄생한, 그야말로 ‘투쟁을 통한 대중조직 건설’의 원칙을 성공적으로 관철시킨 조직이었다.[5] 사무전문직과 서비스업을 기반으로 한 민주노조들은 대체로 업종별 연합조직으로 결집했다. 1987년 11월 27일 ‘전국사무금융노동조합연맹’을 시작으로 출판, 화물, 언론, 병원, 시설관리, 지역의료보험, 교직원, 전문기술, 건설, 대학교직원 등 모두 11개 업종에서 ‘업종별노동조합협의회’(업종협) 형태의 민주노조 연합조직이 건설됐다. 각 업종협에서는 동일 직종의 유대감을 토대로 한 공동의 사업과제 모색이 중심 역할을 했다. 업종협 설립일 전국사무금융노동조합연맹 1987년 11월 27일 병원노동조합협의회(병원노련) 1987년 12월 12일 민주출판노동조합협의회(민출노협) 1988년 1월 19일 연구전문기술노동조합협의회 1988년 7월 16일 전국언론노동조합연맹(언론노련) 1988년 11월 26일 전국건설노동조합협의회 1988년 12월 10일 외국인기업노동조합협의회 1988년 12월 11일 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 1989년 5월 28일 전국대학교직원노동조합협의회 전국화물운송노동조합협의회 시설관리노동조합협의회 1987년 7·8월 이후 불과 1년여 사이에 결성된 180여 개의 병원노조는 신규노조로서의 어려움과 취약성을 공동으로 해결하기 위해 1987년 12월 12일 ‘병원노동조합협의회’(병원노협)를 결성했다. 병원노협은 단위노조 간의 정보와 경험의 교류, 지원활동을 추진하며 전국에 지역협의회를 조직하여 전국적 조직체로 결집되었다. 그러나 탄압에 대한 공동대처와 위장 휴·폐업, 부당노동행위에 대한 연대의 필요성이 높아지면서 협의회에 대한 요구는 커지는 반면 공식적 상급단체가 아닌 점, 단위노조 지원에 대해 외부불순세력 혹은 제3자 개입이라는 탄압을 받고 있었다는 점, 단위노조 간부가 병원노협 임원을 겸임함으로써 집행력이 제대로 확보되지 못한다는 점, 재정적으로 병원노협 분담금으로는 활동이 어려운 점을 들어 ‘병원노동조합연맹’(병원노련)을 건설하게 되었다.[6] 1987년에 3,749건을 기록한 파업 건수는 1988년에 1,873건, 1989년에 1,616건으로 거센 흐름을 이어갔다. 힘차게 지속된 노동자들의 파업은 대부분 1987년 대투쟁 때처럼 전투적인 공장점거로 시작됐고, 많은 사업장에서 파업의 시작부터 끝까지 총회 민주주의가 실질적으로 작동했다. 자본가들이 노동조합 지도자를 매수해 직권조인으로 파업을 종결시키려고 자주 시도했는데, 많은 경우 노동자들이 매수된 지도자를 불신임하고 새로운 지도부를 세워 파업을 이어갔고 종종 결국 승리하기도 했다. 또한 자본가들이 구사대와 전투경찰을 동원해 파업을 침탈하고 탄압하는 데 대해, 노동자들은 정당방위대·선봉대 등을 조직하여 맞섰고 나아가 사업장의 경계를 넘어선 연대투쟁을 활발하게 발전시켜 나갔다. 이 시기 가장 대표적인 노동자 투쟁은 1988~89년 현대중공업 128일 파업이었으며, 여기에 현대자동차를 비롯한 울산 지역 노동자들이 적극적으로 연대했다. 마산창원 지역 노동자들이 1988~89년에 벌인 몇 차례의 지역연대 총파업도 두드러진 투쟁이었다. 그 밖에도 부천, 서울, 인천, 경기남부 등에서도 지역 총파업이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2) 1988년 11월 최초의 전국노동자대회 1988년 10월 6일 전국의 민주노조들과 노동단체들은 노동악법 철폐가 노동자계급의 핵심적인 당면 투쟁과제임을 공유하고 ‘전국노동법개정투쟁본부’를 결성했다. ‘전국노동법개정투쟁본부’의 결성으로 박차를 가하기 시작한 노동법개정 투쟁의 열기는 드디어 10월 9일 전국의 3대 명산을 노동악법 철폐의 함성으로 뒤덮으며 11월 13일 전국 노동자의 총궐기를 예고하였다. 전국의 1만여 노동형제들이 북한산, 화왕산, 대둔산으로 총집결하여 노동자를 억압하는 현행 노동악법을 완전 철폐하여 노동해방의 그날을 앞당길 것과 이를 위해 전국적인 노동법개정 서명운동에 돌입할 것, 11월 13일 여의도로 진군하여 노동악법을 옹호하는 망국 민정당과 전국경제인연합을 규탄할 것을 결의하였다. 이어 각 지역에서는 웅변대회, 노래대회 등 다양한 행사로 노동법개정의 열기를 높여나갔으며, 이런 지역단위 활동의 성과를 한데 모아 10월 29~30일 양일에 걸쳐 서울, 인천, 광주 등 전국 6개 지역 5,000여 노동형제들이 노동악법 개정을 요구하며 가두시위 등 과감한 투쟁을 전개하였다. 한편, 10월 9일 이후 전국적으로 동시에 진행된 노동법개정 서명운동은 서명 개시 불과 한 달 만에 10만 명을 돌파하는 놀라운 성과를 보여주었다. 특히 11월 들어 시작된 가두서명은 전두환·이순자 구속처벌을 위한 서명운동과 결합되면서 폭발적인 대중의 지지를 받아 서울에서만 5일간 14,000여 명의 서명을 받아내는 성과를 이룩했다. 이러한 대중투쟁의 활성화에 힘입어 서울, 인천 등의 의장단은 11월 2~4일 간에 야3당 당사를 순회하며 야3당이 노동법개정 투쟁에 적극 동참해 줄 것을 요구하는 단식농성 투쟁을 벌였으며, 이러한 의장단의 헌신적인 투쟁에 대해 서노협 소속 노동자 2,000여 명이 국회의사당으로 집결, 노동법 개정을 요구하며 야3당의 기회주의적 작태를 규탄함으로써 11월 13일 전국 노동자들의 총투쟁을 향한 디딤돌 역할을 해냈다.[7] 1988년 11월 13일에는 ‘전태일 열사 정신계승 및 노동법개정 전국노동자대회’가 전국에서 결집한 5만 노동자의 참여 속에 서울에서 열렸다. 한국전쟁 이후 최초의 전국노동자대회였으며, 지금까지 매년 11월 지속되고 있는 전국노동자대회의 출발점이었다. 대회에 참가한 노동자들은 “이렇게 전국의 노동 형제들이 한자리에 모일 수 있었다는 것은 크나 큰 역사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인식했으며, “여기에 있는 우리 노동 형제뿐만 아니라 천만 노동 형제들의 가슴 속에 우리 전태일 선배님은 살아오고”[8] 있다면서 스스로를 전태일의 후예로 규정했다. 11월 13일 ‘전태일 열사 정신계승, 노동악법 개정 전국노동자대회’는 11월 12일 밤 연세대에서 전야제가 개최되면서 시작되었다. 저녁 8시에는 ‘전태일 노동상’ 시상식이 열려, 수상자인 권용목을 대신해 권처흥 아버님이 수상하였다. 밤 11시에는 조합원 2,000여 명이 참여한 가운데 ‘전태일 열사 정신계승, 노동악법 개정 전국노동자웅변대회’가 개최되었다. 서울, 인천, 부산, 울산, 부천, 전북 등 전국에서 선발된 9명의 연사가 참여한 이 대회에서는 인천지역의 허재호(인천 일용공노조 소속)가 1등인 노동해방상을 수상하였다. 한편 밤 11시에는 전국노동조합 대표자회의가 개최되어 전국 100여 곳의 단위사업장 위원장들과 20여 명의 노동운동단체 대표가 참여하여 11월 13일 대회전술과 투쟁방침을 확정지었으며, 11월 13일 새벽 2시에는 선봉대 발대식이 진행되었다. 또한 지방에서 상경한 대오가 계속해서 도착했는데, 새벽 3시경에는 마창지역 노동자들 800여 명이, 다음 날 아침 7시경에는 현대중공업 조합원 600여 명 등 각지에서 연세대로 속속 집결하였다. … 본 대회에 앞서 오전 10시에는 ‘노조탄압분쇄 전국노동자대회’가 사전 결의대회로 연세대 민주광장에서 5,000여 명의 조합원이 참여한 가운데 개최되었다. 오후 1시부터 시작된 본 대회 입장식은 한 시간 이상 소요되었으며 연세대 노천극장을 완전히 메웠다. 4만 명의 조합원들은 일사불란하게 “노동악법 철폐하여 노동해방 앞당기자” 등의 구호를 외치며 2시간에 걸친 집회를 마쳤다. 또한 집회를 마친 후, 녹십자병원을 비롯한 ‘위장폐업분쇄 공동투쟁위원회’ 소속 노동자들이 ‘노동해방’이라는 혈서를 쓰고, 그 혈서를 앞에 들고 여의도를 향해 진군하기 시작했다. 오후 3시 30분부터 시작된 행진은 “악법철폐”, “민주쟁취”, “노동운동 탄압하는 군부독재 끝장내자”, “구속 전두환, 퇴진 노태우”, “해체 전경련, 타도 민정당”, “악법철폐, 노동해방” 등의 구호를 외치며 여의도 국회의사당까지 2시간 동안 계속되었으며, 오후 6시 국회의사당 앞에서 열린 ‘망국 민정당 규탄 및 노동악법 개정 촉구대회’에는 대오가 더욱 불어나 대략 5만여 명이 참가하였다. 오후 8시에는 전경련 앞에서 각 대오별로 ‘노동악법 개정 반대하는 독점재벌 규탄대회’가 개최되었고, 귀가하던 노동자들에 대한 백골단의 폭행에 맞서 영등포역 앞에서 가두투쟁이 전개되었다.[9] 일찍이 그 누가 노동자들의 이 엄청난 힘을 상상이나 했겠는가? 보라, 저 끝없이 출렁이는 노동자의 물결을! … 전태일 열사의 어머니 이소선 여사의 말씀은 노동자들이 나아갈 길을 밝혀주는 것이었다. “인간답게 살고 싶다! 노동3권 보장하라! 한다고 누가 보장해 줍니까? 야당이 노동3권 보장하지 못해요. 너와 내가 하나가 되어 힘을 가지고 있으면 보장해 달라고 부르짖지 않아도 자연히 이루어진다고. 우리가 모든 것을 우리 힘으로 해야 된다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진짜 위대한 노동자인 것입니다.” … 연세대 노천극장은 발 디딜 틈이 없었다. 감격! 5만여 노동자들은 서로 부둥켜안은 어깨들에서 자신의 힘을 느꼈다. 민중의례와 대회 경과보고, 전국교사협의회 투쟁보고, 투쟁선언, 지지연설에 이어 선봉대 결의로 이어지는 대회 내내 노동자들은 목이 터져라 ‘계승하자 열사정신! 철폐하자 노동악법!’, ‘노동운동 탄압하는 군부독재 타도하자!’, ‘열사정신 계승하여 노동해방 쟁취하자!’를 외쳐댔다. 두 팔을 치켜 올리고 목이 터져라 부르는 노래, 노동자가 부르는 노래, 노동노래를 처음으로 대중적인 모임에서 부르게 된 것이다. ‘전태일 추모가’, ‘파업가’, ‘동지가’, ‘광주출정가’의 울림은 어느 때보다도 처절하고 힘찼다. 선봉대 선서 후 선봉대원들과 인천 세창물산 노동자들이 나와서 흰 광목천에 ‘노동해방’ 혈서를 써내려 갔다. 그 숙연했던 분위기, 피로 쓴 ‘노동해방’을 단상 앞에 들고 다함께 노동해방을 외쳤다. 노동자의 단결, 연대, 투쟁. 바로 이것이 노동해방이 아니겠는가? 드디어 행진을 시작했다.[10] 노동자들은 이날 발표한 투쟁 결의문을 통해 “지난해 7·8·9월 대투쟁 이후 노동자들의 힘에 놀란 독재 정권과 독점 자본의 무자비한 탄압에도 불구하고 전국 각지에서 5백여 개의 민주노조가 건설돼 단위 사업장을 뛰어넘는 강고한 연대가 구축되었다”고 밝히고, “여기 모인 4만여 노동자들은 노동악법을 기필코 개정하고 나아가 모든 노동탄압의 근원인 독재 정권을 타도하라는 1천만 노동자의 준엄한 명령을 받은 선봉으로서 독점재벌, 독재정권과의 투쟁을 가열차게 전개, 기필코 노동해방을 쟁취하고야 말겠다”고 선언하였다. 수만 명의 무장병력으로 연세대를 에워싸고 행진대열이 신촌 로타리에 이르렀을 때 행진 선두를 차단하려고도 했던 경찰은 노동자·시민들의 비장한 분위기와 위세에 눌려 곧바로 길을 열어주었으며, 신촌 로타리에 운집해 있던 시민들은 끝없이 이어지는 행진 대열을 향해 박수와 환호를 보내면서 합세, 선두가 서강대 앞을 지날 때는 행렬이 5만여 명으로 불어났다.[11] 연세대 본관 앞에서는 밤 11시부터 전야제가 시작되어 노래와 율동이 공연되었다. 그러나 13일 새벽 2시경에서야 연세대에 도착한 마창 노동자들은 애석하게도 공연을 관람하지 못한 채 내일의 집회를 위해 잠을 청해야만 했다. 연세대는 전국에서 모인 노동자들로 다리 뻗을 공간조차 없을 만큼 초만원이었다. “앉으면 침대요, 누우면 행복이라. 천장이 이불이요, 딱딱한 의자도 탁자도 모두가 잠자리다. 싫은 기색 하나 없이 새우잠을 잔다. 한순간 고통을 영원한 소망의 이불로 감싸고 떠오를 노동해방, 사람 사는 세상을 꿈꾸며 희망에 부풀어 새우잠을 잔다.”(창원 현대정공노조 김종복 홍보부장의 전국노동자대회 참관기) 새벽 6시에 일어난 마창 노동자들은 일제히 ‘노동악법 철폐’ 머리띠를 두른 뒤 아침 9시부터 구보행진으로 투쟁의 결의를 다졌다. 그리고 마창노련 깃발을 앞세우고 오전 10시부터 연세대 민주광장에서 열린 ‘노조탄압분쇄 전국노동자대회’에 참가하였다. 5천여 명의 조합원들은 어깨를 마주 걸고 주먹을 불끈 쥐면서 힘차게 구호를 외쳤다. … 노천극장에는 전국에서 4만 명이 넘는 노동자들이 빽빽하게 들어찼다. 한마디로 감격 그 자체였다. … 오후 1시부터 시작된 본대회 입장식은 한 시간 이상이나 걸렸다. 얼굴은 상기되었고 웃음이 가득 번졌다. 깃발이 등장할 때마다 박수가 요란하게 울렸다. “처음 노천극장에 입장할 때 마창노련의 파란 깃발이 맨 앞에 들어가는 걸 보니까 괜히 눈물이 났다. 그때처럼 우리의 깃발이 자랑스럽고 감격스러운 적이 없었다. 그 깃발 아래 머리띠를 매고 입장하는 얼굴들 모두 흥분으로 상기되어 있었다. 순간적으로 머릿속에는 87년 당시 구사대를 물리치고 얼싸안고 울었던 기억이 되살아났다. 그러면서 아 이것이 동지구나 하는 걸 새삼 깨달았다.” 울긋불긋한 깃발이 나부끼는 가운데, 강철같은 노동자 대오의 위용이 역사 앞에 확실하게 그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이었다. 이흥석 전국노동법개정투쟁본부 위원장(마창노련 의장)의 추도사가 낭독되는 동안 장내는 숙연한 분위기였고, “전태일 열사의 뜻을 이어받아 2천5백만 우리 노동자와 가족들의 힘으로 노동악법을 뜯어고쳐 노동해방을 기필코 쟁취할 것”을 전국 노동자들 앞에 선언할 때는 뜨거운 박수갈채가 쏟아졌다. 500여 명의 노동자 선봉대의 출정 선서식이 끝나자 갑자기 40여 명의 노동자들이 연단 위로 뛰어나왔다. 그들은 손가락을 깨물어 혈서를 쓰기 시작했다. 장내는 숨소리도 멈춘 듯 긴장감이 감돌았다. 하얀 광목 위로 붉은 핏방울이 떨어지면서 ‘노·동·해·방’ 네 글자가 선명하게 찍혀 나갔다. 혈서 쓰기를 마지막으로 대회를 마친 노동자들은 “타도 민정당! 해체 전경련!”, “전두환·이순자 구속!”, “노동악법 철폐!” 등의 구호를 외치며 대열을 가다듬었다. … 3시 30분경부터 여의도 국회의사당까지의 가두행진이 시작되었다. 행진의 맨 선두에는 붉은 피가 선명하게 찍힌 혈서 깃발을 가슴에 안은 투쟁본부 의장단이 앞장섰다. 그리고 이어서 “노동3권 쟁취하여 노동해방 앞당기자”, “노동악법 개정은 노동자의 힘으로” 등의 현수막과 만장을 든 500여 선봉대가 그 뒤를 따랐다. 1천여 명의 마창 노동자들은 21개 본대열의 최선두에 서서 마창노련 깃발, 단위노조 깃발, 현수막, 만장 등을 높이 치켜들고 연세대 정문을 향해 진군하였다. 차도에 나선 노동자들은 “노동악법 철폐”, “노동3권 쟁취”, “해체 전경련, 타도 민정당”, “구속 전두환, 처단 노태우” 등을 외치며 행진하였다. 서강대 앞을 지나 공덕동 로터리와 마포대교를 통과하여 여의도 국회의사당까지 진군하는 데만 2시간이 걸렸다. 연도에 늘어선 시민들은 시위대가 나누어준 선전물을 받아들고, 노동자 대오의 질서정연한 모습에 뜨거운 박수와 환호를 보내주었다. 연세대 정문을 통과할 때나 국회의사당 정문 앞에서나 마창 노동자들은 대열의 선두에서 저지하는 전투경찰에 맞서 몸싸움을 벌이기도 했다. 당초 이날 행진을 봉쇄하려던 당국은 전국 노동자들의 엄청난 위력에 놀라 순순히 길을 열어주지 않을 수 없었다. 경찰과 백골단은 시종일관 불안한 기색을 보이며 ‘가재걸음’으로 노동자들의 긴 대열을 뒤따라오다 몇 차례 얻어맞기도 하였다. … 시민들이 합세하여 5만여 명으로 불어난 강철 노동자 대오는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피곤한 기색 없이 오후 6시경 노동자 대오는 국회의사당 앞에 집결하여 ‘망국 민정당 규탄 및 노동악법 개정 촉구대회’를 거행하였다. 부산 고려피혁 김준환 위원장은 오늘의 전국노동자대회는 “그동안 죽어가고 구속되고 해고된 선배 동지들이 투쟁한 결과”라고 말해 숙연한 감동을 자아냈고, 양제복 대구 대동공업 위원장은 “이번에 노동법이 개정되지 않으면 국회의원들을 쓸어버리고 우리가 국회에 들어가 노동법을 통과시키자”고 말해 여의도가 흔들릴 정도의 박수와 환호를 받았다. 이어서 서노협 단병호 의장대행은 “오늘의 집회가 노동해방의 시금석이 될 것이며, 오늘의 집회에도 불구하고 민정당과 야권3당이 우리의 요구를 무시한다면 여당도 야당도 살아남지 못할 것”이라면서 “노동자를 무시하고 천대하고 핍박하는 그 어떠한 세력과도 싸워나가자”는 굳은 결의를 밝혀 열띤 환호를 받았다. “야권3당은 개정시안을 타협 없이 관철시킬 것”을 촉구하는 투쟁본부의 야권3당에게 보내는 공개서한이 채택된 뒤 집회는 끝났다. 그러나 지방 노동자들이 귀향을 서두르는 가운데, 7시 30분 전경련회관 앞에서는 “노동악법 옹호하는 독점재벌 규탄대회”가 열려, 권처흥(권용목 현대엔진 위원장의 부친)의 독점재벌 규탄연설이 즉석에서 이어졌다. 한편 귀가하던 노동자들을 폭행하는 백골단에 맞서 성난 노동자와 학생들은 영등포역 앞에서 격렬한 가두투쟁을 전개하기도 했다.[12] 현대중공업 민주파들에 있어서 11월 13일 노동법개정 전국노동자대회는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 11월 13일 대회에 452명의 현대중공업 노동자들이 집회에 참여, 그 조직성과 규율성으로 전국의 노동자들에게 깊은 감명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현대중공업 노동자들 자신도 집회에 모인 3만여 노동자들로부터 단결의 위력, 노동자의 전국적 연대에 대한 자각, 노동법개정의 필요성에 대한 자각을 하여 사업장 내에 보고대회를 사업부별로 개최하고 12월 15일에는 현대중공업노조 주최로 태화강 고수부지에서 ‘노동법개정 울산지역 집회’를 개최하기도 했다.[13] 1988년 4월 총선으로 등장한 여소야대 국회는 1988년 하반기 노동자들의 노동법 개정투쟁 압력을 반영하여 1988년 12월 노동관계법을 개정했다. 6급 이하 공무원의 단결권·단체교섭권을 보장하는 ‘노동조합법 개정안’, 방위산업체 쟁의행위를 공익사업 수준으로 허용하는 ‘노동쟁의조정법 개정안’, 15인 이상에서 5인 이상 사업장으로 근로기준법 적용범위 확대, 부당해고 등에 대한 노동위원회 구제제도 신설, 기준 근로시간을 48시간에서 44시간으로 단축, 연차유급일수 확대 등을 담은 ‘근로기준법 개정안’이 국회를 통과했다. 그러나 1989년 3월 노태우 정권이 노동조합법과 노동쟁의조정법에 대해서는 거부권을 행사하여 폐기되고, 근로기준법만 개정됐다. 한편, 지역별·업종별로 결집한 민주노조들은 11월 13일 전국노동자대회를 계기로 민주노조운동의 전국적 총결집을 향해 나아갔다. 1988년 12월 22일 지역별·업종별 연합조직들이 결집한 ‘지역·업종별 노동조합 전국회의’가 결성됐다. 그동안 노동조합을 비롯한 노동자 조직의 전국적 결속에 대한 주장은 80년초의 ‘전민노련’ 사건에서부터 서·인노의 ‘전노’ 주장에 이르기까지 나름대로의 강조점을 달리하고 상이한 포괄범위를 가지면서 꾸준히 전개되어 왔다. 하지만 이러한 주장과 시도들은 민주노조의 건설이 허용되지 않았던 당시의 현실 속에서 의도했던 결과를 낳지 못한 채 허망하게 끝나버리고 말았다. 하지만 87년 7, 8, 9월 이후의 가열찬 대중투쟁과 그 결산으로 이루어진 9개 지역노조협의회와 8개 업종별협의회는 ‘전노협’ 건설의 실질적 토대를 마련해 주었고, 87년 이후의 노동운동탄압분쇄투쟁, 노동법개정투쟁 등의 공동투쟁을 수행해 오면서 연대의 폭과 깊이를 더해갔다. 따라서 88년 하반기에 제기된 ‘전노협’ 논의는 노동대중들의 투쟁과정에서 제기된 실천적 내용을 담고 있었다는 측면에서 이전에 제기된 ‘전노’ 논의와는 그 궤를 달리한다고 할 수 있다. 전노협 논의가 시작된 것은 88년의 노동법개정투쟁이 한창 진행되던 와중이었다. 노동법개정 투쟁은 지금까지 지노협에서 수행해왔던 사업장 지원활동 등의 연대투쟁과는 달리 비록 낮은 수준이나마 정치투쟁의 영역에 속하는 것이었고 전국적 투쟁의 범주였기 때문에, 지노협의 열성조합원과 간부를 비롯한 지도역량들은 자연스럽게 전국적 조직화의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따라서 11월 13일 ‘전태일 열사 정신계승 및 노동악법개정 전국노동자대회’가 열리기 직전인 12일 밤, 전국에서 모인 100여 명의 노동조합 위원장과 20여 명의 노동운동단체 대표자들의 연석회의 석상에서 최초로 ‘전국노동조합협의회 연락위원회’를 만들자는 제안(서노협)이 나오게 되었다. 이 제안은 당시 막연하게나마 그 필요성을 피부로 느끼고 있던 노동조합 위원장들 사이에서 깊은 공감을 얻었고, 11월 28일부터 12월 1일까지 계속되었던 민주당사 농성투쟁 과정에서 한 차례 논의를 거친 후, 12월 22일 전주에서 1차 회의를 통하여 구체화되었다. 전주 회의에서는 ‘지역·업종별 노동조합 전국회의’를 상설화하고 그 산하에 노동법개정 및 임금인상 투쟁본부(투본)를 설치하여 노동조합과 전국노운협의 단일대오를 형성하기로 합의함으로써 귀중한 결실을 맺게 되었다.[14] 3) 1988~89년 현대중공업 128일 파업 1988년 12월 12일 울산 현대중공업에서 노동자들의 파업이 시작돼 1989년 4월 18일까지 128일 동안 전개됐다. 조합원 수가 1만 8천이 넘는 대규모 노동조합에서 벌어진 이 장기간의 공장점거 파업은 1988~89년 민주노조운동의 폭발적 성장을 상징적으로 대표했다. 128일 투쟁은 20세기 한국사에 등장한 자본과 노동 간의 갈등을 상징하는 거대한 전쟁이었다. 128일 파업이 시작된 피상적 계기는 현대중공업 88년 단체협약 체결투쟁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겉으로 드러난 계기에 불과한 것이었으며, 그 저변에는 87년 이후 현대재벌과 국가권력이 자행한 노동자 탄압에 대한 강렬한 저항이 깊이 자리하고 있었다. … 현대자본 측의 잔혹한 민주노조 탄압과 국가권력기관의 현대 노동자들에 대한 편파적인 태도는 현대 노동자들로 하여금 돈과 권력이 하나라는 정치적 각성을 분명히 하게 했고, 민주노조 사수를 위해서는 죽음도 불사하는 거대한 투쟁을 준비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다.[15] 노동자들의 핵심 요구는 주 44시간 근무제 도입, 상여금 600%로 인상, 각종 수당 신설·인상, 퇴직금누진제 실시 등의 단체협약 쟁취와 해고자 원직복직이었다. 특히 해고자 원직복직은 단체협약 못지않은 뜨거운 쟁점이었다. 1987년 노동자대투쟁 이후 현대중공업노조에서는 21명의 해고자가 발생했다. 회사가 일부 해고자들을 개인별로 회유하여 계열사로 선별복직 시켰지만, 10명이 이를 거부하고 원직복직을 주장하며 해고자로 남아 있었다. 특히 김진국 수석부위원장과 정영빈 여성부장은 1987년 대투쟁과 이후 지역연대 투쟁에서의 헌신적인 역할로 가장 상징적인 인물이 돼 있었다. 12월 8일 노동조합은 운동장에서 집회를 열고 파업 찬반투표를 실시했다. 재적 18,693명 중 14,703명이 참가해서 13,425명이 찬성했다. 재적 대비 70.9%, 투표 대비 91.3% 찬성이었다. 12월 12일 파업이 시작됐다. ◎ 직권조인에 맞선 파업지도부 건설 그런데 파업의 최대 걸림돌은 역설적이게도 노조 위원장 서태수였다. 애초에 그는 1988년 2월 전임 위원장의 추천을 받아 사측 후보들을 물리치고 3대 위원장에 당선됐다. 그러나 직후 교통사고를 당해 병원에 장기간 입원을 했는데, 그동안 회사 중역들이 뻔질나게 병실을 드나든 사실이 알려지면서 조합원들에게 불신을 받고 있었다. 오랫동안 노조를 비우고 있던 위원장은 노조가 파업을 결의하자 부랴부랴 복귀했다. 15일 아침에는 갑자기 회사측 최종안을 총회에 붙이겠다고 공고했다. 조합원들은 분노의 눈길로 위원장의 공고문을 바라보았다. 총회 회부 문제를 토의하기 위해 대의원 간담회가 열렸으나 노조에 몰려온 조합원들의 원성과 흥분된 분위기 때문에 거론조차 못하고 무산됐다. 17일에도 대의원 간담회를 열었지만 다시 무산됐다. 파업 6일째인 17일은 토요일이었다. 위원장은 15일 간담회 때 조합원 방청을 개방했다가 혼쭐이 난 경험을 살려 방청을 불허한 채 대의원 긴급간담회를 소집하고 회사측 최종안을 총회에 부치는 문제를 다시 들고 나왔다. 회의는 찬반이 팽팽히 맞서다 표결에 부쳐져 묘하게도 71:71 동수가 나왔다. 꼼짝없이 위원장의 캐스팅보트로 총회 회부가 결정될 판이었다. 그런데 어떻게 알았는지 일군의 조합원들이 몰려와 “해고자 복직은 안중에도 없어? 이 ××들” 하며 투표함을 박살냈다.[16] 총회 회부가 가로막힌 위원장은 18일 호텔에서 회사측 안에 직권조인했다. 19일부터 정상조업에 들어간다는 성명서를 남기고 잠적하기 직전 호텔에서 가진 TV 인터뷰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연말 상여금이라든지 우리가 단체협상에서 따낸 생산 장려금 19만 원, 그다음에 급여, 이런 게 전부 다 못 나간다고 못을 박았습니다. 그랬을 적에 투쟁도 좋고 뭐도 좋지만은, 우리가 지금 먹고 살기 위해서 회사 다니는데, 정말 상여금 안 나오고 격려금 안 나오고 급여 못 받으면, 사실 저희들이 노동운동이라는 건 실리와 권익을 위해서 하는 일인데 실리를 빼놓고 나면 뭐 있습니까?”[17] 19일 파업집회는 위원장에 대한 격렬한 성토장이 됐다. 대의원 간담회가 즉시 소집돼서 위원장의 잠적에 따른 유고 상태를 확인하고 위원장 권한을 이원건 조선부문 부위원장에게 부여했다. 이원건 위원장 권한대행은 파업계속 여부, 권한대행 체제 신임 여부에 대한 조합원의 뜻을 확인하기 위해 총회를 소집했다. 20일 실시된 조합원총회 투표에서 13,840명의 조합원이 참가하여 10,716명이 찬성, 77.4%의 찬성으로 파업을 계속할 것을 결의하고, 76%의 찬성으로 권한대행 체제를 인정했다.[18] 회사측이 20일 협상에서 다시 제시한 최종안에 대해서도 조합원총회에 찬반을 물었다. 21일 실시된 사측안 수용여부를 묻는 투표에서 15,677명의 조합원이 투표에 참가, 11,834명이 반대표를 던져 회사안을 부결시켰다.[19] 조합원대중은 자본의 농간을 단호히 분쇄하고 해고자 원직복직과 단체협약 쟁취를 향해 계속 전진하기를 강렬히 원했다. 조합원들의 확고한 뜻을 확인한 이원건 권한대행 체제는 24일 쟁의대책위원회 체계를 비상수습대책위원회(비대위)로 개편·정비했다. 조합원들의 요구와 단결력을 파업지도부를 중심으로 다시 응집시켜 낸 6일간의 과정이었다. 1만 2천명의 파업노동자들은 현대중공업 사내에 있는 종합운동장에서 농성과 사내 시위를 하면서 ‘원직복직, 단협쟁취’의 투쟁열기를 더욱 더 뜨겁게 달구어갔다. 조합원대중 앞에 수많은 ‘방안’이 제시되었고, 자신의 입장을 해명하고자 하는 수많은 시도가 이루어졌다. 어제 단상에 올랐던 노동자가 다음날에는 어용으로 몰리고, 오늘 단상에 올랐던 대의원 혹은 집행부가 다음날 다른 노동자에 의해 거부되었다. 조합원 대중들은 어느 누구의 말도 믿으려고 하지 않았다. 파업투쟁의 정당성과 순수성을 행동 속에서 쟁취해 나갈 자신들의 대변자를 요구했다. 다양한 입장과 인물들이 대중들 앞에서 파업투쟁의 현장에서 검증되어져 갔다. 집행부의 임원이든 대의원이든 조합원이든 모두 ‘파업투쟁전선’에서 조합원대중들에 의해 검증되고 심판되어졌다. ‘원직복직, 단협쟁취’의 명제는 그 누구에 의해서도 거부될 수 없는 현대중공업 조합원 전체의 통일된 대의였고 갈망이었다. 이 대의에 한 치의 오차라도 생기면 조합원 대중들에 의해 어용으로 낙인찍혀졌으며, 어떠한 절충도 타협도 용서되지 않았다. 어떠한 사적인 이해도 불순한 기도도 침투할 틈이 없었으며, 오직 단일한 계급적 이해=대의에 입각한 투쟁만이 조합원 대중들에 의해 승인되어졌다. 이 파업투쟁의 열기를 온 몸으로 안고 지도해 나갈 ‘투쟁지도부’를 노동자 대중들은 강렬하게 원하고 있었다. 며칠간의 대립과 혼란 끝에 마침내 ‘단협쟁취, 원직복직’의 슬로건하에 현대중공업 내 민주대의원, 민주열성조합원, 민주집행부가 파업투쟁전선의 한복판에서 연합하여 대중적 파업투쟁지도부=비상수습대책위원회를 창출했다.[20] 조직구성을 완료한 비대위는 26일 <파업투쟁속보> 제1호를 발행했다. 또한 1만 2천 조합원이 참여한 가운데 국회의원 노무현의 초청강연을 운동장에서 열었다.[21] 노무현은 1980년대 초중반 노동인권변호사로 활동하면서 부산에 기반을 두고 울산·창원·거제까지 해고노동자들을 지원한 경력이 있었다. 1988년 4월 총선에서 김영삼의 통일민주당 소속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었고, 11월부터 생방송으로 진행된 5공 청문회에서 정주영을 비롯한 재벌들과 전두환 군사정권의 유착을 거침없이 공략하여 큰 대중적 인기를 얻고 있었다. “여러분! 이번 여러분의 파업은 법률상 위법입니다. 그런데 법도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저 산동네의 철거민들을 보십시오. 그 사람들도 하루 종일 일하고 퇴근해서 따뜻하게 등 눕힐 수 있는 구들장이 필요하고 그 사람들 자식들도 밥 먹던 상이나마 행주로 닦아 책 놓고 공부할 수 있는 방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법에 위반되었다고 무허가라고 집을 뜯어 버립니다. 노점상들도 그렇습니다. 입에 풀칠을 하려고 나와 있는 노점상들을 도로교통법에 걸어 목판을 차버립니다. 그들 중 어떤 사람들은 집에 불이 나서 다섯 가구가 몽땅 타버렸는데 피해액이 백만 원도 안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들에게 목판 하나는 전 재산입니다. 밥 못 먹게 하는 법, 그것은 법이 아닙니다. 여러분! 헌법에도 노동3권을 명시해 놓고 다만 방위산업체는 안 된다고 합니다. 입만 열면 안보, 전쟁 위협을 하면서 비행기로 3분 거리에 있는 서울에 왜 63빌딩을 짓습니까? 방위산업체 쟁의는 안 된다고 하는 말은 대한민국 노동운동을 콱 밟아버려라 이런 뜻입니다. 그러므로 법은 정당할 때 지키고 정당하지 않을 때에는 지키지 않아야 합니다. 또 말로만 하지 말고 악법은 국민의 손으로 철폐시켜야 합니다. … 노동자가 하루만 놀면 온 세상이 멈춥니다. 그 잘났다는 대학교수, 국회의원, 사장님 전부가 뱃놀이 갔다가 물에 풍덩 빠져 죽으면 남은 노동자들이 어떻게든 세상을 꾸려나갈 것입니다. 그렇지만 어느 날 노동자가 모두 염병을 해서 자빠져 버리면 우리 사회는 그 날로 끝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법률, 경제, 사회관계 등 모든 것을 만들 때 여러분이 만듭니까? 아닙니다. 이제 여러분의 대표가 이런 것을 만들어야 합니다. 그게 바로 오늘 한국의 노동자가 말하는 ‘노동자가 주인되는 세상’입니다. 그런 사회를 위해 우리 다 함께 노력합시다.”[22] “이번 현대중공업 파업투쟁은 노동자 개개인이 물질적인 돈 몇 푼을 구걸하기 위한 싸움이 아니라, 현대중공업 2만 4천 노동자의 자존심, 더 나아가 이 땅의 일천만 노동자의 자존심을 건 노동해방, 인간해방, 진심으로 이 땅에서 사람 사는 세상을 만들어 인간적인 대접을 받기 위하여 소수의 독점재벌, 악덕재벌과 맞붙어 싸우는 첫걸음입니다.”[23] 한편 15일부터 ‘해고자복직 결사대’가 서울 본사 앞에서 상경투쟁을 벌이고 있었다. 16일에는 정주영 명예회장과 면담이 이루어졌지만, ‘개전의 정’과 ‘계열사 재입사’만 되풀이했다. 17일 정몽준 현대중공업 회장과의 면담도 소득이 없었다. 그런데 면담이라도 응해주던 회사측의 태도가 19일부터 강경하게 변했다. 사옥 앞마당에 결사대가 붙여놓은 현수막과 대자보 등을 관리자를 동원해 철거했다. 몸싸움 시비도 빈번해졌다. 울산에서 조합원들이 서태수의 직권조인을 거부하고 파업을 지속하기로 결정한 여파였다. 그러나 결사대는 시민홍보전을 나가고 파업 중인 노조를 격려방문하면서 활발한 활동을 이어 나갔다. ◎ 현대 자본의 잇따른 테러 바로 그 때 노태우 정권의 태도가 갑자기 공격적으로 선회했다. 노태우 정권은 9~10월 서울올림픽과 11~12월 5공 청문회가 진행되는 동안 상대적으로 유화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었다. 그런데 12월 28일 청와대 당정회의에서 대통령 노태우가 “최근의 법질서 문란행위와 노사문제 민생치안 부재 등에 대한 근본적인 대책을 마련하라”고 지시했다. “정부는 각종 흉악범과 폭력 파괴 행동은 법에 의해 엄격히 단속함으로써 선량한 시민이 마음 놓고 살 수 있도록 법과 질서를 확립할 것을 강력히 지시를 합니다.”[24] 이른바 ‘민생치안 특별지침’이 발표된 바로 다음날인 29일 현대중공업노조 상경 결사대가 공권력에 의해 전원 강제 연행당했다. 1989년 1월 2일에는 파업 중이던 풍산금속 안강공장에 공권력이 투입됐다. 다음 날에는 서울 모토로라코리아에도 공권력이 투입됐다. 현대중공업에도 공권력이 투입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었다. 파업지도부는 조합원 대표성을 강화하고 불법파업 시비를 줄이기 위해 6일 다시 한 번 조합원 총회를 개최했다. 서태수 위원장을 불신임하고 새로운 합법적 노조위원장을 선출하기 위한 총회였다. 1월 6일, 17,000여 조합원들이 출근(출근율 90%)하였으나, 조합원 중 설계부서와 지원부서를 제외한 대다수의 생산직 노동자들이 투표에 참여(9,500명), 95%의 찬성으로 규약개정 및 서태수 위원장 불신임안을 통과시켰으며, 91%의 찬성으로 이원건 권한대행을 명실상부한 새로운 위원장으로 탄생시켰다.[25] 그런데 노태우 정권보다 회사측이 먼저 노동자들을 공격했다. 노조파괴 전문가를 고용하고 서태수 측근의 어용 대의원들을 동원해서 8일 현대그룹해고자복직실천협의회(현해협) 사무실 등을 폭력 침탈하는 테러를 벌인 것이다. 1989년 1월 8일 새벽 3시 20분과 5시 30분 현대중전기 조합원들이 수련회를 하고 있던 석남사 산장과 울산 ‘현대해고자복직실천협의회’(현해협) 사무실에 복면을 하고 무전기·각목 등을 든 50여 명의 괴한이 습격해 권용목을 비롯한 23명의 조합간부 및 조합원, 해고노동자들을 무차별 폭행하고 달아났다. 석남사 산장, 현해협 사무실 두 곳을 차례로 습격한 괴한들은 고도로 훈련된 듯한 폭력을 사용해, 습격당한 노동자들은 타박상이 심한데도 외상은 별로 나타나지 않았다. 또한 이들은 무전기를 통해 끊임없이 송수신을 하였고, 철수할 때에도 무전기를 든 자의 지휘 하에 미리 대기시켜 놓은 차로 일사불란하게 철수하였다.[26] 현해협은 1988년 2월 현대엔진과 현대중공업 해고자들을 중심으로 결성됐는데, 형식상으로는 현대그룹 산하 각 사업장에서 쫓겨난 해고자들의 조직에 불과했지만, 실제로는 어용화된 집행부들을 대신하여 각 사업장의 현장 민주세력들을 지원하고 연결하면서 대중운동의 구심으로 기능하고 있었다. 1987년 대투쟁 과정에서 현대엔진, 현대중공업, 현대중전기, 현대미포조선, 현대종합목재, 현대정공, 현대자동차 등 현대그룹 계열사들에 노동조합들이 속속 들어섰으나, 그 집행부 대부분이 회사측의 개량화 공작에 넘어가 몇 달 만에 민주적 성격을 상실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1989년 1월에도 현해협은 현장의 노동자들로부터 강력한 신뢰를 받으면서 현대중공업과 현대엔진의 파업을 왕성하게 지원하고 있었다. 당시 현해협에는 권용목 엔진 전 위원장과 고세흥 등 엔진 해고자와 김진국 전 중공업 수석부위원장, 정병모 전 쟁의부장 등 중공업 해고자, 천창수 중전기 해고자, 그리고 학생운동 출신 노동운동가 3~4명이 중공업과 엔진 파업을 왕성하게 지원하고 있었다. 87년의 현대그룹노조협의회의 역할을 대신하며 지역 노동운동의 실질적인 구심역할을 하고 있던 현해협은 중공업, 엔진 노동자들로부터 거의 절대적 신뢰를 받고 있었다.[27] 테러 소식이 알려지자, 8일 현대중공업과 현대엔진 조합원들이 진상규명을 요구하며 울산시내에서 광범한 홍보작업에 나섰다. 9일 오전에는 1만여 명의 조합원이 현대중공업 운동장에서 테러규탄대회를 열었다. 이른바 ‘노조파괴 전문가’ 재미교포 제임스 리(본명 이윤섭)가 배후인물임이 곧 드러났다. 15일에는 울산에서 1·8 테러를 규탄하는 전국노동자대회가 열렸다. 자본가들의 잔인한 폭력성, 자본과 권력의 추악한 야합의 진면목을 보여준 1·8 테러는 전국 노동자들을 울산으로! 울산으로 몰려오게 하였다. 89년 1월 15일, 테러가 발생한 지 일주일 만에 울산 태화강 고수부지에 전국의 3만 노동자가 집결했다. ‘노동운동탄압 분쇄 및 현대테러 규탄 전국노동자대회’가 충천의 열기를 뿜으며 열리고 있었다. 문익환, 백기완, 이소선, 김근태, 이부영 씨 등 재야원로 및 지도급 인사들과 단병호 서울지역 노조협의회 의장을 비롯한 많은 전국 노조대표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이 대회는 1·8 테러로 부러진 오른팔에 깁스를 한 채 연단에 올라선 권용목 씨가 사람들의 마음을 휘어잡는 탁월한 연설력을 유감없이 보일 때 절정에 달했다.[28] 파업 노동자들은 매일 운동장에 집결해 ‘폭력테러만행 규탄집회’를 열었다. 사내 시위와 시내 가두행진을 벌였고, 울산경찰서와 검찰청 앞에서 구속자 석방 촉구 항의시위도 조직했다. 규약개정 및 임원선출에 관한 변경신고서를 울산시청에 접수하며 법적 투쟁도 병행해 나갔다. 18~19일 노동조합은 3대 대의원 선거를 실시하여 ‘파업투쟁 대의원’을 선출했다. 조합원들은 상당수의 어용 대의원들이 1·8 테러에 직접 개입한 사실에 경악했다. “폭력대의원 축출하고 민주대의원 선출하자”, “민주대의원 선출하여 민주노조 강화하자”는 게 조합원들의 열화와 같은 목소리였다. 각 부서마다 파업의 선봉에서 열성적으로 활동하던 조합원들이 대거 대의원으로 선출됐다. 어용 대의원들을 축출하고 파업투쟁 대의원들로 대체하면서 노동조합 조직력이 크게 강화됐다. 또한 조직력을 극대화하기 위한 방안으로 소위원 제도를 적극 구축해 나갔다. 소위원들은 파업투쟁의 혈관과 같은 존재였다. 대의원 한 사람이 100명의 조합원을 일일이 챙기기는 매우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각 반에 소위원을 두고 20명 단위로 추가선출된 소위원들이 대의원을 통해 모든 상황들을 부서 조합원들에게 자세히 알리고 단결을 도모하면서 파업투쟁의 조직력은 급격히 살아났다. 평소 한 작업장에서 십수 년을 함께 일해온 사람들로 조직화된 소위원 조직은 조합원 한 사람 한 사람의 의견이 파업지도부에 전달될 수 있는 민주적 통로 역할을 충실히 했고, 조합원 전체가 파업에 적극 동참하는 고무적인 결과를 낳았다. 대의원들과 마찬가지로 소위원들에게도 소위원 명찰을 달게 하여 책임감을 부여하고, 소위원 자체의 조직화를 꾀해 발대식과 소위원회 임원진도 자체 선출케 했다. 이러한 조치들은 소위원 조직의 자발적 동력을 형성했고 이 소위원 조직의 동력이 이후 구사대 폭력 등 폭력탄압에도 굳건히 파업대오를 유지시킨 128일 파업의 가장 견고한 힘이었다.[29] 노동조합은 파업기금 마련을 위해 일일찻집 행사를 열었는데, 조합원과 계열사 노동자들이 적극 호응해 약 3백만 원을 모아냈다. 노동조합 정상화 이후 변제한다는 약속 아래 1인당 5천 원짜리 파업채권을 발행해서 약 3천만 원의 재정을 마련했다. 1·8 테러 이후에는 전국의 노동자들이 지원금과 각종 지원물품을 보내왔다. 2월 12일에는 현해협을 중심으로 현대그룹 각 사업장의 현장 민주세력들이 현대중공업과 현대엔진의 파업투쟁을 지원하기 위해 ‘현대계열사 연대투쟁본부’를 결성했다. 그런데 21일 또다시 테러가 발생했다. 이번에는 백주 대낮에 대규모의 구사대가 무차별적으로 자행한 식칼테러였다. 1월 8일 살인적 폭력테러를 자행한 뒤에도 서태수 전 노조위원장을 계속 감싸고 돌던 현대그룹과 현 정권은 2월 21일 백주 대낮에 또다시 식칼까지 동원하여 현대중공업 노동자들에게 살인적 만행을 저질렀다. 비폭력을 외치는 노동자들에게 회사관리자와 경비대 등 1천여 명은 닥치는 대로 식칼을 휘둘러 박원일, 진재원은 옆구리에 길이 10cm가량 찔려 중태에 빠지고 이우강은 눈을 다쳐 실명 위기에 처했으며, 백골단 등 전경 5개 중대는 회사측의 폭력만행을 지켜보며 방관했다.[30] 2월 21일, 현대독점재벌의 관리직 사원과 경비대로 구성된 2,000여 명의 구사대는 경찰 10개 중대 1,500여 명이 지켜보는 가운데 현대중공업 정문 앞에서 평화시위를 하고 있는 파업노동자들을 식칼로 찌르고, 쇠파이프로 두들겨 패고, 각목으로 무참하게 짓밟은 ‘식칼테러 만행’을 저질렀다. … 현대독점재벌의 폭력에 대한 분노보다도, 독점재벌에 대한 환상에 사로잡혀 왔었다는 자신들의 삶에 대한 분노가 오히려 더 현대중공업 파업노동자들을 치떨게 했다.[31] 1·8 테러에 이어 또다시 벌어진, 더 큰 규모의 2·21 식칼테러는 노동자들을 경악하게 했다. 21일 오후에 열린 집회는 사측에 대한 격렬한 분노의 분위기로 휩싸였다. 파업 지도부의 비폭력 원칙을 비판하는 목소리도 여러 차례 터져 나왔다. 그런데 경찰은 이 사건 수사에 전혀 적극성을 띠지 않았다. 식칼이 난무하는 폭력이 자행되고, 사람들이 혼수상태에 빠지고, 옆구리에 칼을 맞아 전치 12주 이상의 중상을 당하는 폭력이 백주 대낮에 벌어졌음에도 경찰은 수사조차 하지 않으려 했다. 언론 또한 사측의 명백한 테러폭력을 이른바 ‘노노싸움’으로 치부할 뿐이었다. 현대중공업 노동자들은 파업 기간의 수많은 사건들을 겪으면서 경찰, 노동부, 시청 등 정부기관과 언론을 철저히 불신하게 됐지만, 특히 2·21 테러 사건에 대한 대응을 지켜보면서 그렇게 됐다. 잔인한 테러 소식은 칼에 난자당한 노동자들의 사진 포스터를 통해 급속히 가족들과 계열사 노동자들에게 번져갔다. 분노한 가족들의 파업집회 참가가 급증해 1천 명에 육박할 정도가 됐다. 가족들은 사장실로 몰려가 상여금 등 체불임금 지불을 요구하며 농성을 벌이는가 하면 오좌불 숙소 앞에서 빈대떡 장사를 하여 파업기금을 마련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가족들의 적극적인 동참은 이후 공권력이 투입된 이후에 전개된 시가투쟁 때 가족과 주민들이 적극 나서 주먹밥을 만들고 이웃들의 성금을 모금하는가 하면 스스로 화염병을 만들어 노동자들에게 나누어주는 ‘해방구 광주 아낙네’의 면모를 유감없이 보여주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32] 2·21 테러 직후인 23일 ‘상경 결사대’ 1진 491명이 정주영 명예회장과 담판을 짓기 위해 서울에 도착했다. 계동사옥 앞에 텐트를 치고 농성에 돌입한 상경 결사대는 가두홍보를 통해서 파업투쟁의 정당성을 선전해 나갔다. 서울지하철노조 등을 방문하면서 연대활동도 강화해 나갔다. 서울 지역의 노동조합과 민주단체들의 지지방문도 끊이지 않았다. 예상했던 대로 정주영 회장은 쉽게 만나주지 않았다. 결사대는 일단 홍보작업에 주력하기로 하였다. 2·21 식칼테러를 알리는 홍보물을 작성하여 시내 곳곳을 헤매 다니며 시민들을 붙잡고 설명도 하고 호소도 하고 모금도 하였다. 갑자기 화려한 서울 시내 한복판에 온몸에 덕지덕지 구호와 사진을 붙인 검푸른 현대작업복의 노동자들 모습을 시민들은 호기심 어린 눈으로 바라보았다. … 울산에서 올라온 2·21 식칼테러 고발 칼라포스터는 시민홍보에 큰 힘이 되었다. ‘국민의 양심으로 폭력테러 추방하자’는 제목의 이 포스터는 현대 구사대의 테러장면을 생생히 보여주는 사진들과 테러에 희생당한 노동자들의 처참한 모습을 담고 있었는데, 시민들은 이 포스터를 몸에 붙이고 다니는 노동자들을 보고 “이것이 사실이냐”고 묻곤 했다.[33] 비에 흥건히 젖은 텐트에서 새우잠을 자면서, 파업기금이 없어 라면으로 끼니를 때우면서, 철거민들이 정성스럽게 지어준 주먹밥을 눈물겹게 먹으면서, 서울지역의 노동조합과 민주단체의 뜨거운 지원을 보고 겪으면서, 서울 결사대는 자신들의 투쟁이 다만 자신들의 이해만을 위한 투쟁이 아니라 1천만 노동자를 위한 투쟁 그리고 자신들처럼 이 땅의 피억압계급인 도시빈민·농민들을 위한 투쟁이라는 점을 계동사옥 앞 투쟁의 한복판에서 뼈저린 자각에 자각을 거듭해 갔다. 노태우 정권에 의해 억압받고 착취당하는 1천만 노동자의 선봉으로, 민주주의를 수호하고 민중의 이해를 온몸으로 대변하여 투쟁해 나갈 투사로, 노동해방의 전사로 상경결사대 노동자들은 단련되어 갔다. 왜 노동자간의 연대투쟁은 필요하며, 왜 철거민과 농민들과의 연대가 필요하며, 왜 민주세력과 연대하여 노태우 정권과 독점재벌을 타도해야 하는지를 깨달아 갔다. 이는 87년 9월 상경 때에는 체험하지 못했던 자각이었다. 노태우 정권과 독점재벌에 대항하여, 천만 노동자의 선봉에 서서 투쟁하기에 우리들의 노동자로서의 의식은 얼마나 미약한가? 우리들의 조직은 얼마나 허술한가? 다시는 이러한 미약한 의식과 조직으로 노태우 정권과 독점재벌에 대항해서 투쟁해서는 승리할 수 없다. 투철한 노동자의식, 그리고 강력한 투쟁조직만이 우리 노동자를 승리로 이끌 수 있다는 점을 서울 한복판에서 상경 결사대는 자각해갔다. 이러한 자각만으로도 이미 이번의 파업투쟁은 노동자들의 승리였다.[34] 마침내 3월 6일 정주영 회장과 면담이 이루어졌다. 오전 10시 강당에 모인 노동자들 앞으로 정주영 명예회장이 정몽준 현대중공업 회장과 이명박 현대건설 회장을 대동하고 나타났다. 무대 중앙에 마련된 탁자에 앉은 그는 면담이라기보다 훈시에 가까운 자신의 얘기만 했다. 질문하는 노동자들의 이름과 부서를 일일이 확인하며 질문에 대한 답변이 아닌 자신의 방북 얘기와 6·25 얘기로 일관하던 그는 약 1시간이 지나 몸을 일으켰다. 그가 남긴 말 중에 그래도 희망적인 것은 “대화라면 언제든지 하자”라는 것뿐이었다.[35] 오후 4시에 다시 2차 면담이 성사됐다. 그러나 정주영의 태도는 변함이 없었다. “내가 너희들이 내려가라고 해서 내려가고 올라오라고 해서 올라오는 사람이야? 재작년처럼 운동장에 세워놓고 날 능욕하려는 거야 뭐야? 지금 울산에는 사장이 있고 이사와 중역들이 있다. 그 사람들이 현대중공업 파업을 충분히 잘 알고 일을 잘 처리할 수 있다. 내가 그 사람들에게 일임을 다 했는데 내가 다시 내려간다는 것은 그 사람들을 무시하는 것밖에 되지 않아. 난 내려가지 않아. 그리고 너희들이 공산주의를 알아? 단체행동을 하는 건 좋은데 왜 빨간 띠를 매는 거야. 다른 좋은 색깔도 많잖아!”[36] 면담은 “너희들은 조합원의 대표가 아니다”라는 정주영의 말과 함께 결렬됐다. “앞으로도 계속 얘기하자”는 그의 말이 공허하게 맴돌았다. 그리고 8일과 9일에 걸쳐 1천5백 명이 넘는 전경과 백골단, 관리자들에 의해 농성장이 침탈됐다. 258명이 연행되고 결사대 지도부 6명이 구속됐다. 연행을 피한 100여 명과 2진 결사대 50여 명이 민주당사와 평민당사에서 농성을 계속하며 현대그룹의 잔인한 노동자탄압을 서울 시민들에게 줄기차게 알려나갔다. ◎ 공권력 투입에 맞선 결사항전 상경 결사대의 정주영 면담이 돌파구를 찾지 못하자, 파업지도부는 공권력 투입을 피하기 위한 최후의 방안으로 ‘임시총회 소집권자 지명요청’을 시청에 내기로 했다. 애초 1월 25일 노동부가 파업지도부를 찾아와 ‘임시총회 소집권자 지명요청’을 하라고 요구했었다. 노동조합이 1월 6일 조합원 총회를 통해 서태수를 불신임하고 이원건을 새 위원장으로 선출했음에도 노동부는 이것을 인정하지 않으면서 노동조합 지도부를 새로 구성하고 싶으면 법에 정한 절차를 밟으라는 논리였다. 그러나 노동조합이 소집권자 지명요청을 한다는 것은 노동조합 스스로 1·6 조합원 총회와 이원건 위원장 체제의 정당성을 부정하는 것이라는 점, 그런 상태에서 (다른 많은 비슷한 사례에서처럼) 울산시가 조속히 소집권자를 지명하지 않을 경우 노동조합이 지도부 없이 표류하게 된다는 점 때문에, 노동조합은 소집권자 지명요청을 거부했었다. 그런데 뚜렷한 협상의 돌파구를 찾지 못하는 가운데 공권력 투입이 임박해 오자 소집권자 지명요청을 내는 쪽으로 파업지도부가 선회한 것이다. 여기에는 울산시가 ‘3일 안으로 소집권자를 지명해 주겠다’고 약속했다는 야당 국회의원들의 전언도 영향을 미쳤다. 3월 13일 노동조합은 11,400명이 서명한 소집권자 지명요청서를 시청에 접수시켰다. 그러나 울산시는 25일에야 답을, 그것도 ‘반려한다’고 주었다. 서태수가 총회를 소집할 의사가 있다고 하니 소집권자가 필요하지 않다는 논리였다. 결국 노동조합이 제대로 농락당한 셈이었다. 회사는 기다렸다는 듯이 “불법지도부가 스스로 불법임을 인정했다”고 대대적으로 선전하면서 파업지도부와 절대로 협상하지 않겠다는 기존 입장을 다시 한 번 되풀이했다. 아울러 조속한 시일 내에 공권력 투입을 요청하겠다고 했다. 이른바 ‘민생치안 특별지침’ 이후 노동자·민중의 투쟁을 강경하게 탄압하는 노태우 정권의 기조는 계속되고 있었다. 3월 16일에는 고건 서울시장의 교섭 거부에 맞서 파업에 돌입한 서울지하철에 바로 공권력이 투입돼 농성 조합원 2천 400명이 연행됐다. 공권력 투입이 임박해 오면서 지도부가 갈피를 못 잡는 것과 다르게, 조합원들은 이미 결사항전을 준비하고 있었다. 이제 남은 것은 공권력에 맞선 장렬한 항전뿐이었다. 이 사회의 모든 지배세력이 시시각각 현대중공업 노동자들의 목을 조여오고 있었다. 전국 각지에서 수천만 원의 성금과 쌀·라면 등 상상도 못한 엄청난 지원을 보내온 것에 눈물겨워 했지만, 그들이 공권력에 맞서 조합원들을 대신해 싸워줄 수는 없는 일이었다. 3월 21일 공권력 투입이 임박했음을 신문방송이 연일 보도하는 가운데 현대중공업 파업이 100일째를 맞고 있었다. 8천여 명의 노동자들이 모여 ‘공권력 개입 결사반대 및 소집권자 지명 촉구대회’를 열고 있었다. 이날 집회에는 울산대 총학생회와 대구지역 대학생대표자협의회 및 민주단체들이 참여해 열기를 고조시켰고, 이날 성금만도 1천만 원에 가까운 많은 액수였다. 또한 광주 금호고등학교 학생들이 흰 손수건에 ‘노동자 형님들 힘내세요! 쟁취! 승리!’라고 피로 쓴 손수건과 함께 격려편지를 보내와 노동자들의 심금을 울려주기도 했다. 집회하는 동안 중공업 상공에는 몇 번씩 경찰 헬기가 정찰선회하며 공권력 투입이 임박했음을 알려주었다.[37] 25일을 넘어서자 공권력 투입은 기정사실화되어 초읽기에 들어갔다. 파업노동자들도 이제 남을 사람만 남게 되어 약 3~4천 명만이 집회에 참석하고 있었다. 이들은 평화적 타결의 희망이 사라진 후에도 끝까지 투쟁할 것을 결의한 현대중공업의 진정한 투사들이었다. 그들의 평균 나이는 예상보다 훨씬 많았다. 대부분이 젊은 사람들일 거라는 일반의 예상을 뒤엎고 반수 이상이 40대를 전후한 장기근속자들이었다. 왜 중고등학교 다니는 자식을 둔 한 가정의 가장들이 해고나 구속, 심지어 죽을지도 모르는 최후의 공권력과의 투쟁을 마다하지 않고 떨쳐 일어섰는가. 이에 대한 답은 그들의 지난날의 삶을 이해하지 않고서는 나올 수가 없다. 갑판 위에서 떨어져 죽어가고, 탱크 안에 갇혀 질식사하고, 대형 블록 밑에 깔려 노동에 찌든 몸이 오징어가 되고, 진폐에 걸렸음에도 회사에 탄로나면 해고될까 봐 눈치보며 생명줄을 이어가고, 여름이면 40도가 훨씬 넘는 철판 위에서 겨울이면 바닷바람 쌩쌩부는 야적장에서 하루를 벌어먹으며 감내해야 했던 천대와 멸시. 현대가 그들에게 남긴 것은 30~40만 원. 임금의 대가치고는 너무나 비인간적인 것이었다. 그런 그들에게 87년은 다시 태어나는 부활이었고, 민주노조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것이었다. 인간으로서 다시 태어나게 했던 노동조합이 거대한 자본과 권력 앞에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해 있는데 과연 그들의 행동이 무엇이겠는가! 결사항전! 인간으로서의 자존심을 다시는 뺏기지 않기 위해 노동자들은 분연히 일어서 거대한 골리앗과 맞선 것이다.[38] 파업 109일째인 3월 30일 새벽 5시, 결국 현대중공업에 115개 중대 1만 5천 명의 경찰병력이 투입됐다. 헬리콥터, 해상함정 8대, 화학소방차 6대 등 특수장비까지 동원된 육·해·공 삼면 입체 작전이었다. 공권력 투입 직전 파업지도부가 세운 전술은 조합원들을 현장에서 미리 빼내 가두에서 집요하게 투쟁을 이어간다는 것이었다. 파업대오는 새벽의 공기를 가르며 질서정연하게 전하동의 오좌불 숙소로 이동했다. 1만 5천 명을 투입한 진압작전은 술에 취해 텐트에 쓰러져 자고 있던 단 한 명의 노동자만을 체포한 채 허탈하게 끝났다. 그러나 새벽 라디오뉴스는 ‘현대중공업 파업근로자 전원 연행’이라고 설레발을 치고 있었다. 당황한 경찰은 정오를 기해 오좌불 숙소를 공격했다. 자연스럽게 현대중공업 조합원들의 가두투쟁도 시작됐다. 현대엔진노조가 파업을 단행하면서 1천 5백 명의 조합원들이 가두투쟁에 가세했다. 오후 들어 현대중공업 인근의 간선도로에서는 전경들과 노동자들 사이에 최루탄·투석 공방이 격렬하게 벌어졌다. 경찰이 퇴각하는 노동자들을 쫓아 밀집 주택지인 만세대아파트 깊숙이까지 최루탄을 쉴 새 없이 쏘아대자 주민들도 격렬한 항의에 나섰다. 공권력 투입 첫날부터 5월 광주를 방불케 하는 격렬한 시가전이 완강하게 전개됐다. 한일은행 앞 도로, 중전기 앞 도로, 동울산우체국 앞 도로 등이 노동자들에 의해 점거됐다. 현대계열사 노동자들이 점차 합세하면서 시위대는 점점 더 불어났다. 공권력을 투입하면 파업이 종결될 것으로 기대했던 경찰과 회사는 번져가는 가두투쟁에 당황하기 시작했다. 오후 4시가 되자 시내에서 동구로 들어오는 길목인 성내검문소를 완전 차단하고 모든 차량의 통행을 금지시켰다. 5시 반이 넘어서자 경찰이 대대적인 반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현대중공업 담 안쪽으로 밀려들어갔던 전경병력과 백골단들이 공격을 개시하면서 간선도로 곳곳에서는 양측 간의 밀고 밀리는 공방전이 가열됐다. 날이 어두워지면서 시위는 더욱 격렬해져 전경버스 한 대와 회사차 한 대가 시위대에 의해 전소되었고, 전하파출소도 시위대의 공격으로 직원들이 모두 철수해야 했다. 저녁 8시가 되자 시위대가 만세대아파트 입구의 공터로 모여들었다. 공터 바로 옆에 현해협 사무실과 오좌불 숙소가 있었고, 인근에 동울산시장과 현대 노동자들의 집단거주지인 만세대아파트가 있었기 때문에 집회장소로는 더할 나위 없이 적합한 곳이었다. 누가 먼저였는지는 몰라도 이곳이 ‘민주광장’으로 불리기 시작했다. 공권력 폭압진압 규탄집회는 곳곳에서 재채기 소리가 난무하는 가운데 뜨거운 열기로 시작되었다. 집회에 참석한 3천여 명의 노동자들의 얼굴엔 뿌듯한 긍지가 넘쳐흘렀다. 1만 5천의 경찰진압에 여지없이 깨질 것만 같던 파업이 오히려 보다 강력하게 가두에서 계속되었던 오늘 하루가 그렇게 자랑스러울 수가 없었던 것이다. 열광적인 분위기 속에서 내일 오전 8시에 만날 것을 약속하고 집회는 끝났다. 이날 하루 동안 연행된 노동자 수만 해도 697명이었다. 이날의 가두투쟁에는 현대자동차, 중전기, 미포조선, 정공, 종합목재 등 계열사 노동자들도 다수 참가했다. 현대중공업 공권력 투입으로 조업이 자연스럽게 중단되자 각 사의 노조활동가들이 자발적으로 노동자들을 모아 가두투쟁에 동참한 것이다. 비록 각 계열사 노조가 공식적으로 연대투쟁을 선언할 만큼 강력하지 못했지만 대신에 각사의 노조원들이 스스로 대열을 형성하여 중공업 인근의 가두투쟁 현장으로 행진해 와 매일 중공업 노동자들과 함께 공권력 철수투쟁을 전개한 것이다.[39] 31일 아침 출근시간이 되자 전날 약속한 대로 만세대아파트 민주광장에 노동자들이 모여들었다. 가두투쟁 조직이 놀라운 속도로 형성됐다. 현대중공업 노동자들은 부서별로 인원을 파악했다. 계열사 노동자들도 사업장별로 대열을 정비했다. 노동자들은 현해협 지도부가 지시한 각각의 장소로 신속히 이동해서 오전의 가두투쟁을 전개했다. 현해협은 각 계열사 대표를 뽑아 임시지도부 체제를 갖추고 사무실에 상황실을 설치했다. 오토바이를 동원해 기동반과 연락병을 두었다. 가족들은 시위대의 식사를 담당했다. 지원단체들은 구호약품을 가지고 와 의료반을 만들었다. 50여 명의 대학생들도 지원투쟁에 나섰다. 영남지역 대학의 학생들이 현대중공업 파업이 공권력에 강제 진압되자 총학생회의 결의 아래 울산 현지에 결사대를 파견했고, 현대영업소를 타격하는 격렬한 양상을 보여주었다. 노동자들은 자신들을 돕기 위해 내려온 학생들을 맞아 자신들의 작업복을 입히고 잠자리를 마련해주는 등 배려를 아끼지 않았다. 만인에 평등해야 할 법도, 경찰도, 언론들도 모두 노동자들을 벼랑으로 내몰고 있는 상황에서 노동자들에게 호의를 베푼 것은 노동자들과 학생들을 위시한 민주화운동세력밖에 없었다. 파업 초기부터 수천만 원에 이르는 성금과 지원물품을 보내주고, 사회 곳곳에서 현대의 잔인한 테러탄압을 국민들에게 알렸던 민주화운동세력들의 도움은 파업을 지탱하는 데 커다란 힘이 되었다. 가두투쟁 현장에서의 학생들은 매우 용감했다. 비처럼 쏟아지는 최루탄에도 끄떡하지 않고 노동자 시위대를 보호하고 백골단과 맞서 싸우는 모습은 노동자들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다. 그들은 백골단을 결코 겁내지 않았다. 백골단이 움직이기 시작하면 무조건 도망만 하던 노동자들도 학생들을 보고 많은 것을 배웠다. 화염병 던지는 법도 터득했다.[40] 이틀째 가두투쟁은 전날보다 더 조직적이고 격렬하게 전개됐다. 전경과의 대치선이 한일은행 앞 도로, 동울산우체국 앞 도로, 중전기 앞 도로, 명덕시장 주변 등지에 형성됐다. 오전에 가장 격렬한 시위가 벌어진 곳은 한일은행과 중전기 사이의 간선도로였다. 최루탄과 투석의 공방전이 일진일퇴를 거듭하다 노동자 수가 불어나면서 간선도로 곳곳이 점거됐다. 간선도로의 한편은 약 4km의 현대중공업 담이고, 다른 한편은 주택가였다. 전경들은 시위대의 위세에 밀려 회사 안으로 밀려들어 갔다. 그런데 미처 퇴각하지 못한 전경대가 시위대에 포위됐다. 노동자들은 전경들의 무장을 해제시키고, 그 자리에 있던 전경수송차 2대와 전경 이동에 사용되던 현대 통근버스를 불태우고 현대중공업 정문을 향해 진격했다. 노동자들의 목표는 현장을 되찾는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3~4천의 시위대가 1만 4천여 명에 달하는 전경들을 당할 수는 없었다. 백골단을 앞세우고 반격에 나선 전경들에 의해 시위대는 다시 간선도로 주택가 골목으로 밀렸다. 점심시간이 되자 시위대가 집결지인 민주광장으로 돌아왔다. 점심은 주먹밥이었다. 어느덧 현해협 사무실 앞에는 가마솥이 걸리고 20~30명의 가족들이 주먹밥을 만들기 시작했다. 허기진 배를 주먹밥으로 때우고 노동자들은 다시 오후의 투쟁에 나섰다. 오후가 되자 노동자들의 숫자가 더욱 불어났다. 각 계열사가 동구 일대의 가두시위로 조업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동구의 유일한 입구인 성내삼거리의 교통이 통제되고 있었고, 일대에 깔린 최루가스와 격앙된 분위기로 노동자들은 일손을 잡을 수 없었다. 연대투쟁에 동참하려는 계열사 노동자들이 자발적으로 작업을 거부하고 가두시위에 나섰다. 계열사 노동자들이 합세한 시위대는 중전기 앞 도로를 점거하고 사내진입을 시도하여, 약 100여 미터까지 치고 들어가기도 했다. 이 때 노동자들은 도로를 향해 서 있는 회사 건물의 유리창을 모두 박살내기도 하고 일부는 인근의 민정당사 유리창을 깨기도 했다. 시위가 계속되면서 부상자의 숫자도 늘어만 갔다. 대부분 최루탄 파편 또는 백골단의 집단구타 때문이었다. 이날 가두투쟁에 참여한 인원은 약 8천 명에 이르렀다. 가두시위 3일째인 4월 1일은 토요일이었다. 오전부터 민주광장에 모인 2천여 노동자들이 간단한 출정식을 갖고 가두시위에 나섰다. 오후가 되자 토요일 오후 근무를 거부하고 몰려나온 현대자동차 노동자 3천여 명이 동구를 향해 진출했다. 현대자동차 노동자들이 성내삼거리에서 전경과 대치하다 인근 산을 넘어 동구로 진입한다는 소식은 시위대를 크게 고무시켰다. 대부분의 계열사가 토요일 근무를 휴무하거나 노동자들이 거부했기 때문에 동구 일대는 검푸른 작업복의 현대노동자들로 빽빽이 들어찼다. 30일 공권력 투입으로 시작된 울산 동구의 가두시위가 갈수록 확대되고 있었다. 현대자동차 조합원들도 ‘민주노조실천노동자회’(민실노), ‘민주노동자실천협의회’(민실협) 소속 노동자들을 중심으로 지원투쟁을 다녔다. 현장조직들은 현대엔진노조 투쟁에 집행부의 동참을 호소하며 소극적으로 대응했던 것에 반성하면서 집행부에 기대하기보다는 조합원들과 함께 거리로 나갔다. 4월 1일 토요일, 오전 근무를 마친 3천여 명의 조합원이 가두로 진출했다. 염포검문소, 종합목재 앞에서 최루탄을 쏘며 평화행진을 가로막는 경찰과 대치한 후 만세대 시위에 합류했다. 종합목재, 미포조선, 중전기, 엔진 등에서 집단적으로 참여했고, 시위 대열은 2만여 명에 달했다. 4월 2일 만세대 투쟁 현장에서는 ‘현대자동차노동자협의회’(현자노협)를 결성했다. 현대중공업 연대투쟁에서 승리하고 다가올 임금인상 투쟁을 비롯한 각종 권익투쟁과 현자노조의 민주적 발전을 위해 투쟁할 것을 결의했다. … 현자노협은 현대중공업 노동자들의 파업을 방관하는 이영복 집행부를 비판하면서 7,000여 명의 조합원이 참여하는 ‘노조 비공인 파업’을 벌이는 등 연대 지지 투쟁을 벌였다. … 현대자동차 노동자들은 현대중공업 투쟁에 참여하면서 연대투쟁의 소중함을 깨달았다. 울산 전역이 전쟁터가 되어 싸움이 계속되는데도 꿈쩍 않고, 오히려 실익 없는 투쟁에 참여할 수 없다는 집행부 입장을 거부하며 투쟁했다. 한편, 연대투쟁을 주도했던 현장조직들은 조합원들의 신뢰를 받는 계기가 되었다.[41] 도로 곳곳에서 격렬한 가두시위가 계속되다 오후 4시에 8천여 명의 노동자들이 만세대 민주광장에 모여 ‘공권력 격퇴를 위한 현대노동자 출정식’을 가졌다. 이 집회에는 이부영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 의장이 참석해 현대노동자들의 피어린 생존권투쟁을 지지하여 열렬한 박수를 받기도 했다. 집회를 마친 노동자들은 가두로 진출, 밤늦게까지 격렬한 시위를 벌였다. 현대중공업에 대한 공권력 투입은 민주노조운동 전반에 거센 규탄투쟁을 불러일으켰다. 특히 가장 선봉지역으로 꼽히던 마산·창원 지역에서의 규탄투쟁은 울산 못지않은 격렬한 가두투쟁 양상을 보여주었다. 수출자유지역 광장에 모인 5천여 노동자들이 심야까지 화염병을 던지며 경찰과 치열한 공방전을 벌였다. 학생들의 지원투쟁 또한 뜨겁게 달아올랐다. 현지 지원 결사대를 울산에 급파하는가 하면, 전국에서 현대자동차 영업소 타격투쟁을 벌였다. 2일부터 백골단이 적극적인 공세에 나서면서, 가두시위 양상이 복잡해졌다. 이전까지는 주로 도로를 경계로 대치하는 양상이었는데, 이제 백골단이 골목 안까지 진출하면서 소규모 대치전이 골목 여기저기서 전개됐다. 노동자들과 전경, 백골단이 얽히고설키는 산발시위가 시작된 것이다. 백골단들은 시위대를 쫓아 주택가 깊숙이까지 진출하여 주민들이 보는 앞에서 무자비한 폭행을 가하는가 하면 시장 안쪽에 사과탄을 던지는 등 마치 점령지에 주둔한 군인들처럼 행세했다. 백골단들의 잔인한 행동은 지역 주민들을 가두시위에 적극 동참하게 만들었다. 지역 여론도 매우 험악해져 갔다. 백골단의 만행 소식은 동구 전역에 퍼졌고, 이를 분개하는 사람들의 소리도 높아졌다. 동구 전체가 백골단의 만행에 분개하면서 가족들의 참여가 놀랍게 변해갔다. 주로 현대중공업 파업지도부 가족들이 담당하던 시위대 식사를 주민들이 손수 지어 현해협으로 날라 왔다. 동네마다 성금을 모아 직접 현해협에 찾아와 전달했다. 울산 동구는 5월 광주를 급격히 닮아가고 있었다. 상황실의 전화는 주민들의 지원전화와 경찰병력 이동상황을 알리는 제보전화로 쉴 틈이 없었다. “여기 만세대 126동인데요. 지금 전경들이 125동 앞에 있는 시위대를 포위하려고 옆으로 이동하고 있어요. 빨리 도와주세요.” “4천세댄데요. 지금 사람들이 밀리고 있어요. 사람들을 빨리 보내세요.” “여기 명덕인데요, 빨리 오세요. 우리가 김밥과 돈을 좀 모았어요. 빨리 가져가 먹고 힘내세요.” “고생하네요. 학생들이 잠자리가 필요하다고 하던데 우리 집에 보내주세요. 만세대 114동 000호예요.” 이들 모두가 아주머니들의 목소리였다. 한번은 명덕에서 급하게 오라는 아주머니의 전화를 받고 기동대가 달려갔더니 여러 명의 아주머니들이 모여 세 상자의 박스를 내왔다. 안을 살펴보니 화염병이었다. 기동대원이 어떻게 만들었냐고 하니까 시위하는 사람 붙잡고 물어서 만들었다는 것이었다. 비록 불량이 많아서 반 이상을 다시 손을 보아야 했지만 주민들의 동참은 이렇듯 시위대의 식사에서부터 성금모금, 빈병 수집, 화염병 제조에 이르기까지 적극적으로 변해갔던 것이다. 어느 아주머니는 ‘우리도 무기를 들어야 한다’는 말까지 하기도 했다. … 하루의 투쟁일과는 오후 7시경 만세대 민주광장에서 마무리 집회로 끝이 나는데 집회가 끝나기 10분 전부터는 현해협 사무실 앞에는 때아닌 십수 명의 아주머니들로 북적거렸다. 지원 나온 학생들을 자기 집으로 데려가 재우려는 것이었다. 동구 일대는 낮에는 시위대의 수중에 있어 학생들이 안전했으나 밤이 되면 경찰의 통제로 들어가기 때문에 연행될 가능성이 많았다. 따라서 투쟁지도부는 학생들의 안전에 신경을 많이 썼는데 주민들이 나서서 학생들을 재워주고 있었다. 삼삼오오 학생들을 데리고 가는 아주머니들의 모습을 지켜보면서 현해협 간부들은 이 싸움이 비록 힘에 의해 멀지 않아 진압되겠지만 결코 패배한 싸움이 아니라는 확신을 확인하곤 했다.[42] 한편 회사측은 진압경찰에게 막대한 지원을 제공했다. 외국인 숙소가 경찰의 작전본부로 사용됐다. 1만 4천여 진압병력에게는 최고급 식사를 제공했다. 관리자들을 시위대 속에 침투시켜 정보를 수집한 뒤 경찰에 매일 넘겨주었다. 진압작전을 지휘하는 경찰 고위간부들에게는 수천만 원 대의 수고비를 찔러주었다. 기자들에게도 온갖 편의를 제공하면서 여론을 호도했다. 현대중공업 앞 다이아몬드 호텔의 객실을 기자들에게 제공하고 매일 회사측이 작성한 보도자료를 건네주면서 회사측의 일방적 입장만이 보도되게 했다. 한겨레신문을 제외한 모든 기사들은 회사측이 제공한 자료를 그대로 베껴 작성됐다. 정상조업률이 74%니 80%니 하면서 마치 절대 다수의 노동자들이 조업하고 있는데 일부 극렬세력만 시위하고 있는 것처럼 보도하여 노동자들의 격분을 불러일으켰다. 언론의 이와 같은 보도 태도를 보고 많은 사람들은 광주 얘기를 꺼냈다. 직접 겪어보니 어떻게 해서 광주 시민들이 ‘폭도’가 되었는지 알겠다는 것이었다. 하루하루의 격렬한 투쟁을 겪으면서 노동자들과 주민들은 80년 광주를 가슴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43] 2일 마무리 집회에 공권력 투입 이후 처음으로 파업지도부가 모습을 드러냈다. 5천여 명의 노동자와 주민들이 모인 이날 집회는 이원건 위원장의 출현으로 동구가 떠나갈 듯한 열기를 내뿜었다. 그러나 파업지도부에 대한 비판의 소리도 만만치 않았다. 매일의 투쟁이 많은 부상자를 속출시키며 확대되고 있음에도 파업지도부 간부들의 모습은 극히 소수를 제외하고 거의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지도부로서의 행동지침도 없었다. 정영빈 씨만이 <파업투쟁속보>를 지속적으로 발행하며 고군분투하고 있었다. 파업지도부가 맡아야 할 투쟁지도는 처음부터 권용목 씨 등 현해협 간부들이 대신하고 있었던 것이다.[44] 공권력을 투입하면 현대중공업 파업이 종결될 것으로 기대했던 노태우 정권과 현대 자본은 투쟁의 양상이 다르게 전개돼 가자 당황했다. 그런 와중에 정국은 다시 한 번 급변하고 있었다. 3월 26일 문익환 목사 방북사건을 단호히 대처한다는 명분 아래 노태우 정권은 대대적인 공안정국을 조성했다. 4월 3일 안기부, 경찰, 보안사를 중심으로 ‘공안합동수사본부’가 설치돼서, 재야 민주인사와 학생운동 지도자 등 민주화 세력을 대대적으로 구속·수배했다. 4월 정국은 계엄령을 방불케 하는 살벌한 분위기로 치달아 갔다.[45] 민주노조운동 또한 핵심 공격대상이었다. 정권은 “전국 각 지역 공안합동수사본부에 불법 노사분규와 배후조종자 신고센터를 설치해 불순배후세력과 파괴행위 주동자를 색출해 엄단”하겠다고 발표했다. 또한 노동자 투쟁을 봉쇄하기 위해 파업과 직장폐쇄 기간 중 임금을 지급하지 못하게 하였고, 이를 따르지 않는 사업주는 지원 혜택을 규제하였다. “방위산업체, 기간산업, 병원, 운수업체 노사분규는 모두 불법”으로 규정했고, “3자 개입, 불법 폭력행위는 엄중 처벌”[46]하겠다고 선언했다. 정권의 공안통치는 울산의 투쟁에도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치안본부는 울산에 대규모 특공조, 체포조 형사대를 급파했다. 또한 울산 투쟁을 재야와 연계된 극렬투쟁으로 규정하고 오좌불 숙소와 현해협, 그리고 울산지역 임투지원본부, 울산사회선교협의회 등에 대한 압수수색을 실시하는 한편, 지원 연설한 이부영 전민련 의장과 권용목 씨 등 울산지역의 핵심적 지도자들 20여 명을 공개수배했다.[47] 그러나 울산의 투쟁은 여전히 확대되고 있었다. 백골단의 횡포가 이제 전 주민의 저항을 불러일으키며 노동자들은 물론 가족들 심지어 어린 학생들과 노인들까지 손에 돌을 쥐게 만들었다. 연 인원 1만여 명에 가까운 시위대가 간선도로 곳곳에서 도로를 점거하고서 격렬한 시위를 계속했다. 3일 저녁에도 어김없이 민주광장에 5천여 명의 노동자와 주민들이 모여 마무리 집회를 가졌다. 투쟁지도부는 대규모 특공, 체포조 투입에 대응하여 자체적인 프락치 색출 작업을 실시했다. 우선 시위대 내에 침투한 프락치를 색출하기 시작했다. 최초로 잡힌 프락치는 전하2파출소 소속의 순경 손삼열이었다. … 노동자들이 중년의 사나이를 붙잡고 “이놈은 남부서 형사계장이다…”라며 질질 끌다시피 해 현해협 사무실로 데리고 왔다. … 잠시 후 또 한 사람이 잡혀 왔다. … 백골단 소속 정보원이었다. … 얼마 후 이번에는 중년의 아저씨가 끌려왔다. … 이번에는 그를 끌고 오는 사람들이 노동자들이 아니라 아주머니들이 다수인 주민들이었다. 이 사람은 낮에 시위대가 백골단에 쫓겨 여기저기 흩어지면 노동자들이 숨어 있는 곳을 백골단에 알려주어 여러 사람이 백골단에게 죽도록 얻어터지며 붙잡히게 한 자였다. 주민들은 이런 광경을 목격하고 시위가 끝나자 그를 붙잡아 현해협까지 끌고 온 것이다. … 4일 저녁 집회 때에도 프락치 색출은 계속되었다. 30대 후반의 사람이 현해협으로 잡혀왔는데 신원을 확인하니 금강개발 총무과 직원이었다. … 이번에는 놀라운 자가 붙잡혀 왔다. … 몸을 뒤져보니 놀랍게도 그는 안기부 요원이었다.[48] 4일과 5일의 시위는 더욱 격화됐다. 백골단의 과잉진압은 주민들의 공분을 불러일으키며 투쟁에 기름을 붓고 있었다. 현대중공업에서는 대다수 노동자들이 현장을 빠져나와 조업이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대부분의 계열사들도 조업이 불가능한 상태에 이르렀다. 울산의 시위가 민중항쟁의 양상으로 발전해 나가자 정권은 공안·노동 관계부처 차관회의를 열고 필요할 경우 울산에 위수령을 포함한 강력한 공권력을 행사할 것을 결의했다. 치안본부는 추가적인 공권력 투입을 검토했다. 5일 저녁 전경 병력이 민주광장을 점거하고 집회를 봉쇄했다. 노동자, 가족, 주민, 심지어 어린 학생들과 노인들까지 1만여 명이 밤늦게까지 시위를 벌였다. 동구 일대 곳곳에서 경찰과 시위대가 격돌하면서, 많은 사람들이 다치고 연행됐다. 6일 국무총리, 안기부장, 각 부처장관 전원이 참석한 ‘좌익폭력세력 대책회의’가 열렸다. 이른바 ‘좌익폭력세력’에 대해 범정부적 차원에서 총력을 집중하여 정면대응한다는 강경방침을 세우면서, 울산의 시위에 대해서도 강력 대처하겠다고 발표했다. 이와 때를 같이 하여 경찰의 공격이 더욱 강화됐다. 아침부터 민주광장을 전경병력이 완전히 점령해 버리면서, 사실상 투쟁을 이끌던 현해협 야전사령부가 공간을 잃고 거리를 헤매게 됐다. 구심을 잃은 시위대는 우왕좌왕했다. 시위대의 조직력도 현격히 떨어졌다. 시위현장에서의 자발적 지도에 의해 시위가 전개되는 양상으로 변해갔다. 이날 이후부터 시위는 화정동 자유광장에서 시작되었다. 민주광장 탈환작전이 전개되기도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만세대 민주광장보다 주택가 안쪽에 위치한 화정동 공터를 ‘자유광장’이라 명명하고 끊임없이 시위를 계속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자유광장마저 경찰에 뺏기고 급기야는 가마터가 있는 일산동 공터까지 밀려갔다. 이곳을 ‘평화광장’이라 이름붙인 노동자들은 최후의 일인까지 용감히 싸웠다.[49] 4월 10일이 넘어가면서 시위는 소강상태에 빠져들었다. 그동안 약 1천 5백여 명의 열성 노동자들이 연행됐다. 나머지 노동자들도 매우 지쳐 있었다. 시위 참가자 수가 급격히 줄어들었다. 간간이 주민들의 항의농성이 전개되곤 했다. 그러나 현대중공업의 조업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노동자들은 출근부에 사인만 하고 회사를 나오거나 작업장 근처에서 옹기종기 모여 앞으로의 일에 대한 얘기만 나누고 있었다. 그동안 시위에 참여하지 않으면서 기회주의적인 태도를 보이던 대의원들이 모여 ‘수습위원회’란 이름으로 정상조업을 결정했다. 그들의 수습방안은 서태수는 물론 이원건 위원장까지 불신임 처리하고 24일 위원장 선거를 위한 조합원 총회를 개최한다는 것이었다. 4월 18일, 128일 파업의 깃발이 공식적으로 내려졌다. 피신해 있던 이원건 파업지도부 위원장이 ‘이제 조업에 들어가자!’는 성명서를 발표하고 현장조합원들이 지켜보는 현대중공업 정문 앞에서 경찰에 자진출두했다. 고난의 현대중공업 128일 파업투쟁! 87년 온갖 희생을 무릅쓰고 민주노조의 깃발을 움켜쥐고 달려온 현대중공업 노동자들의 자존심이었던 128일 장기파업은 현대의 잔인한 테러와 가공할 공권력의 힘 앞에 무참히 짓밟히면서 또다시 현대노동자들의 가슴 속에 깊은 한을 남기고 그 막을 내리고 있었다.[50] 힘에 밀린 조합원들은 현장에 복귀할 수밖에 없었다. 이 파업으로 투쟁 지도부 48명과 학생 8명이 구속되고 55명이 해고됐다. 무엇보다 해고자들을 복직시키려고 시작한 싸움인데, 되려 55명이 추가로 해고됐다. 그러나 현장으로 돌아간 조합원들의 가슴 속은 패배감보다는 자신감으로 흘러넘쳤다. 비록 해고자들은 복직시키지 못했지만, 그들이 발견한 것은 해고당한 동료의 복직을 위해 모든 것을 걸고 싸울 태세가 돼 있는 자신들의 자랑스러운 모습이었다. 아, 우리는 결코 외롭지 않구나. 1만 2천 파업대오가 이토록 서로를 끔찍하게 지켜낸다면, 당장의 승패를 떠나 장차 우리가 무엇인들 못할 게 있겠는가! 지도부를 잃은 상태였지만, 조합원 대중은 기가 죽지 않았다. 파업을 거치는 동안 탄생한 다양한 현장모임을 토대로 수백 명의 선진노동자가 기층 활동가로 성장하고 있었다. 파업대오가 갖고 있던 단결력은, 현장 복귀 이후에도 기층 활동가들을 중심으로 강고하게 유지됐다. 파업 기간 조·반장을 통한 자본의 말단 관리체계는 완전히 붕괴했고, 현장 복귀 이후에도 형식만 복구됐을 뿐 도무지 권위가 먹히지 않아 실제로는 작동불능이나 다름없었다. 생산에 심각한 차질이 지속되자, 결국 자본은 조합원 대중을 달래기 위해 어느 정도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몇 달 뒤 수습 지도부와 단체협약을 타결하면서, 현중 자본은 128일 파업 기간의 임금을 파업 참가일수를 기준으로 차등 지급하는 데 동의해야만 했다. 처절한 패배 속에서도 당당히 쟁취한 값진 승리였다. 128일 투쟁을 두고 누구도 패배라고 말하지 않았다. 그것은 위대한 승리였다. 이러한 128일 파업투쟁은 많은 것을 남겼다. 그 중에서 가장 소중한 것은 조합원들의 가슴 속에 민주노조의 정당성을 온몸으로 체득하며 이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깨닫게 된 것이었다. 이러한 각성은 현장조직의 건설로 표출되었다. 거의 모든 부서에 ‘○○부서 동지회’가 조직되었다. 128일 투쟁이 공권력이라는 물리력에 여지없이 무너졌지만 투쟁이 지나간 현장의 분위기는 위축된 것이 아니라 파업 이전보다 훨씬 관리자들의 통제가 발을 못 붙일 정도로 민주화되어 있었다. 각 부서의 내부 문제는 부서원들과 사전 협의 없이는 거의 해결될 수 없었다. 128일 파업 이전에는 현대중공업에는 이렇다 할 현장조직이 없었다. 그러나 장기파업을 끝낸 현장에는 엄청난 잠재력을 지닌 조직들이 폭넓게 형성되면서 민주노조의 소중한 자양분을 제공하고 있었다. … 해고자 복직문제는 해고기간의 임금이 전액 지급되고 해고기간도 근속연수에 산입 되었으며 전 조합원에게 지급되었던 파업기간 임금도 지급되면서 일단락 되었다. 87년 첫 해고자들을 계열사에 개별 복직시키고 이를 거부한 해고자에 대해서는 복직불가 원칙을 고수했던 것에 비해 획기적인 조치가 아닐 수 없었다. 임금인상 역시 … 예년에 비해 많은 인상률을 보이며 총회에서 58.04%의 찬성으로 통과되었다. 또한 송명주 집행부는 서태수 집행부로부터 어이없게도 조합원 자격을 박탈당했던 파업지도부 간부들을 노조원으로 전원 복귀시키고 조합의 명예를 더럽힌 1·8 테러 가담자, 서태수 3대 집행부 임원 및 측근 상집위원들에 대해 조합원 자격을 박탈했다. 이러한 민주노조로서의 정상화 작업은 송명주 위원장 개인의 능력이 아니라 128일 투쟁의 성과였다. 투쟁 이전보다 수십 배 배가된 조합원들의 의식과 조직력은 사측으로부터 양보안을 쟁취하는 결정적 힘이 되었던 것이다.[51] 1988~89년 현대중공업 128일 파업은 현대중공업 내부적으로 민주노조가 조합원대중 속에 확고하게 뿌리내리는 계기가 되면서 거대 현대중공업노조를 반석 위에 올려놓았고, 나아가 전국의 민주노조운동이 폭발적으로 성장하는 기폭제가 됐다. 4) 1989년 마창노련의 창원대로 투쟁 1988~89년 민주노조운동의 폭발적 성장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또 하나의 사례는 1989년 3~4월 마창노련의 지역 연대투쟁이었다. 마창노련 8년의 역사 가운데 1989년만큼 역동적인 투쟁과 승리로 장식된 해는 없었다. 동시에 1989년만큼 구속, 수배, 해고, 폭력테러, 압수수색 등 탄압이 극심한 해도 없었다. 그만큼 1989년은 마창노련에 있어서 승리와 좌절이 명암처럼 엇갈린 한 해였다.[52] 창립 1주년을 갓 넘어선 마창노련은 1989년 2월 2일 ‘마산·창원 노동법개정 및 임금인상투쟁본부’를 주도적으로 발족시켰다. 1989년 임금투쟁에서 개별 기업의 고립분산성을 극복하고, 중간노조들을 견인하며, 임금협상과 노동법개정운동을 결합하고, 지역 차원에서 공동활동을 하기 위해서였다. 투쟁본부는 총 65개 노조를 포괄했는데, 마창노련 산하 노조가 38개, 바깥에 있는 노조가 27개였다. 투쟁본부 발대식에는 1만 2천 명이라는 기록적인 숫자의 조합원들이 참여했다. 투쟁본부는 임금인상 공동요구안 마련, 쟁의기금 확보, 정당방위대 구성, 조합간부 공동교육 등 임금투쟁 준비활동을 전개했다. 또한 단위노조들을 수출자유지역은 1·2지구, 창원공단은 3·4·5지구로 편제하여 지구별로도 활동하게 하였다. 그 성과가 3월 24일 ‘노조탄압 분쇄 및 89임투 전진대회’에서 여실히 드러났다. 마창지역 노동자들은 각 노조별로 집단조퇴를 결행하고 출정식을 거행한 후 전원 머리띠를 묶고 대열을 형성하고 나서 구호를 외치면서 행진을 시작하였다. “같이!” 하고 한 간부가 선창하면 조합원들은 “죽자! 죽자! 죽자!”를 세 번 반복하였다. 그때마다 힘차게 허공을 향해 뻗쳐나간 팔뚝에서는 무쇠와 같은 힘이 넘쳤고 이를 본 시민들은 달리는 차 안에서도 손을 흔들어 주었다. 도도하고 거센 파도를 일으키면서 집회장을 향해 전진하는 노동자의 대열은 끝없이 이어졌다. “마창단결! 완전쟁취!” … 무엇보다 이날 집회의 특별한 감격은 마창노련 역사상 처음으로 열린 전 조합원총회였다. 이승필 마창노련 조직국장(대림자동차노조 위원장)은 힘차게 조합원총회 성원을 보고하였다. “마창노련 전 조합원 3만 2천 명 중 오늘 참석한 조합원은 2만 5천 명입니다. 따라서 전 조합원 2/3 이상의 출석으로 총회가 성립되었음을 공표합니다!” 우리나라 역사상 최대 규모의 지역 노동자 연대집회이자 조합원총회가 힘차게 성사되는 순간이었다. … 마창노련 최초의 ‘조합원총회’. 1989년 3월 24일 수출지역 후문 옆 삼각공원에서 임투 전진대회를 겸해서 열린 마창노련 조합원총회, 2만 2천여 명의 노동자들이 모인 이날 집회는 마창지역 노동운동 사상 최대 규모의 연대집회이자 조합원총회였다.[53] 이렇게 마창노련이 힘차게 임투준비를 진행하고 있을 때, 정권과 자본은 3월 16일 서울지하철노조의 파업투쟁을 공권력으로 짓밟은 데 이어 또다시 3월 30일 현대중공업 파업투쟁에 1만 5천 경찰병력을 투입했다. 울산에서는 연일 가두투쟁이 벌어졌고, 서울과 부산 등 전국 각지에서도 현대중공업 탄압에 대항하는 집회와 가두투쟁이 격렬하게 이어졌다. 마창노련 노동자들도 격렬한 항의 투쟁에 나섰다. 창원 현대정공 조합원들은 3월 30일 출근과 동시에 파업에 돌입하여 가두진출을 저지하는 300여 명의 백골단과 전경에 맞서 격렬한 투석전을 벌였으며 마창 선봉대는 시내 파출소와 현대자동차 영업소, 리바트가구점 등을 타격하였다. ㈜통일노조 등 마창노련 조합원들도 중식시간을 이용, 규탄집회를 갖고 퇴근 뒤 자발적으로 수출지역 후문 앞 노동자민주광장에 2천여 명이 집결하여 폭력경찰의 무자비한 최루탄 난사에도 불구하고 돌과 화염병을 던지며 전투적인 가두투쟁을 벌였다.[54] 4월 3일과 4월 7일 이틀 동안 수출지역 후문 노동자민주광장과 창원대에서 각각 ‘마산창원 지역 및 현대중공업노조 탄압분쇄 결의대회’가 열렸다. 집회는 “노동운동 탄압하는 노태우정권 타도하자!”는 구호와 함께 가두투쟁으로 발전하여 돌과 화염병, 그리고 최루탄이 난무하는 공방전 속에서 격렬하게 전개되었다. 또한 4월 9일 일요일, 창원대 민주광장에서는 ‘현대중공업노조 탄압규탄 및 89 임투승리 전진대회’(전국 동시다발)가 1만여 마창 노동자의 참여 속에 열렸다. 집회를 마친 오후 5시부터 학생 등 1천여 노동자들은 파업 중인 부산산기를 향해 가두행진에 나섰고, 경찰차를 불태우며 투석전을 벌이는 등 격렬한 접전을 벌였다. 19명의 연행자가 발생하자 노동자와 학생 등 500여 명은 재집결하여 창원대 봉림관에서 농성을 벌인 끝에 결국 연행자 전원을 석방시켜 냈다.[55] 4월 10일에는 세신실업 구사대폭력에 맞선, 나중에 하나의 전설로 회자된 매우 인상적인 연대투쟁이 전개됐다. 세신실업(창원공장)노조는 1월 7일부터 단체협약 투쟁에 들어갔다. 회사측이 교섭요구를 묵살하고 2월 18일 공장폐쇄를 단행하자, 노조는 즉각 직장폐쇄 철회를 요구하며 파업농성을 시작했다. 회사측은 2월 21일 구사대를 투입해 폭력사태를 유발하고 정방대원 2명이 구속되게 했다. 이에 마창투본 제3지구는 2월 25일과 3월 9일, 각 2천여 명이 참석한 연대집회를 열고 세신실업노조의 파업투쟁을 격려·지원했다. 그런 상황에서 4월 10일 구사대가 다시 한 번 대규모로 투입됐다. 새벽 5시, 세신실업 조합원 50여 명이 농성장에서 곤히 자고 있을 때 구사대 200여 명이 농성장 건물 옆 철조망을 뚫고 침입하여 삽시간에 농성장을 아비규환으로 만들어버린 것이었다. 구사대들은 조합원들이 몸을 일으키기도 전에 무조건 닥치는 대로 개 패듯이 패고, 밧줄로 묶고, 콘크리트 바닥에 엎어놓은 채 워커발과 각목으로 구타하였다. 이들이 미친개마냥 휘두르는 몽둥이에 노조간부와 조합원, 그리고 아주머니까지도 피투성이가 되어 바닥에 나뒹굴게 되었다. … 구사대들은 노조사무실 집기들을 깡그리 부수고 서류를 강탈하거나 불태워버렸고, 조합원들을 강제로 끌고 가 식당에 감금하고, 노조간부 10명을 경찰에 넘겨버렸다. … 세신실업 구사대 난입 소식은 삽시간에 전 마창지역으로 퍼져나갔다. 부산산기에서 지원농성을 하던 마창노련 선봉대를 비롯하여 타코마노조 정방대가 들이닥쳤고, 대원강업 조합원 300여 명은 통근버스에서 이 소식을 듣자마자 버스를 그대로 돌려 달려왔고, 금성사2공장노조는 총회를 하던 중 소식을 듣자마자 조합원 200명이 달려왔다. 그밖에 대림자동차, ㈜통일, 삼미금속, 부산산기노조 등 순식간에 정방대원 700여 명이 속속 세신실업 앞으로 모여들었다. 현장은 엉망이었다. 현수막은 갈기갈기 찢겨져 있었고, 구사대 몇 명이 사내를 청소하러 왔다갔다 하는 가운데 본관 앞에는 조합원 몇 명이 무릎을 꿇린 채 각목과 쇠파이프로 계속 난타당하고 있었다. 이를 지켜본 마창 노동자들의 눈에 불이 번쩍였다. “동지여, 내가 있다!” 700여 정방대원들은 대오를 짜고 ‘퍽!’ 하는 신호음(타코마 정방대가 가투 때 포획한 사과탄 5발을 터뜨리며 정문 돌파함)에 맞춰 정문으로 한꺼번에 돌진해 뛰어 들어갔다. 동시에 측면에서는 준비한 화염병과 돌을 던지며 우레와 같은 함성을 지르며 달려들었다. 순식간에 정방대원들은 정문을 돌파하였다. 당황한 구사대들은 마치 불을 만난 짐승들처럼 이리저리 흩어져 달아났고 경호대가 새총으로 위협사격을 하자 구사대 몇몇은 두려운 나머지 2미터나 되는 가시철망 담을 뛰어넘으면서 손이 찢기는 줄도 모르고 도망치기에 안간힘을 다했다. 정방대원들이 50여 명의 구사대를 체포하고 현장을 탈환하는 데는 5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식당에 감금되어 있던 농성 조합원들도 즉시 구출되었다. 붙잡힌 구사대들이 작성한 진술서를 통해 구사대 조직과 배경, 그리고 침투과정이 낱낱이 폭로되어 회사측의 노조말살 음모공작이 백일하에 드러나게 되었다. (세신실업 구사대는 창원공장 홍두식 공장장 외 20명과 양산 41명, 그리고 서울, 대구, 부산, 대전, 광주, 경기, 제주도 등 영업부 소속 사원과 영업소장 등 61명으로 구성되었다. 이들은 4월 8일 부산 애린 유스호스텔에 집결하여 영업부 교육을 빙자한 창원공장 노조 침탈훈련을 받았다. …) 구사대에게 구타당해 중경상을 당한 세신실업 조합원들을 생각하면 울분을 식히기 어려웠으나 마창노련 정방대는 훌륭하게 자제력을 보여주었다. 구사대는 지휘계통과 폭력행사에 따라 단순 가담자는 풀어주고 악질 구사대와 지휘자는 구분하여 남겨 두었다. 어느새 회사의 연락을 받고 전경버스 6대가 달려왔다. 전경들은 모두 진압복으로 갈아입고 세신실업 정문 앞에 도열하기 시작했다. 긴장이 감도는 순간이었다. 마창노련 정방대원들은 여성노동자와 일부를 돌려보낸 뒤 정예부대를 앞세워 경찰과 정면 대치하였다. 의장단은 경찰서장, 시장과 협상을 벌여 경찰에 강제연행된 세신실업노조 간부 10명과 구사대와의 교환문제를 논의한 끝에 우선 노조간부 6명과 구사대 10명과의 첫 번째 교환을 시도하기로 하였다. 오후 4시 30분경 먼저 구사대를 내보낸 뒤 노조간부를 기다렸으나 경찰에 대한 불신 때문에 초조감과 불안감은 더했다. 마침내 노조간부 6명이 당당하고 늠름하게 돌아왔다. 그러나 돌아온 간부들의 모습은 말이 아니었다. 옷은 피투성이였고 온 몸은 피멍으로 물들었다. 구사대를 석방하고 싶은 마음이 없었으나 간신히 분노를 참고 나머지 구사대 7명을 또다시 교환조건으로 내보냈다. 오후 7시 30분경 김명길 위원장과 사무장 등 간부 4명이 풀려남으로써 연행자 전원이 석방되었다. “다른 때 같았으면, 그대로 구속시켜 버렸을 겁니다. 하지만 우리가 ‘그렇게만 해봐라. 동맹파업도 불사하겠다’며 대의원을 소집하고 그랬죠. 창원경찰서장이랑 한참 고민하더니 저녁때 다 풀어줍디다.” 이 사건을 계기로 마창지역 노동자는 연대투쟁의 위력과 중요성, 그리고 투쟁에 대한 자신감을 확실하게 깨닫게 되었다. 아울러 마창노련 및 마창공투본을 중심으로 한 지역연대투쟁이 크게 활성화되면서 진짜 임투 분위기가 뜨기 시작했다. 여담이지만 이 사건 이후 마창 노동자는 “구사대에게는 깨지지 않는다”는 ‘불패의 신화’란 자랑스런 명예를 얻은 대신, 회사측 관리자들 사이에서는 “구사대에 끼었다가 귓방망이나 얻어터지고 불명예나 뒤집어쓰느니 가만히 있으면 중간이나 간다”는 소신론이 파다해졌다는 일화가 전해졌다. 경찰은 세신실업 부위원장과 정방대원이 함께 잡혀오자 부위원장은 풀어주면서도 정방대원으로 밝혀진 일반조합원은 오히려 구속할 정도로 정방대를 두려워하고 경계하였다.[56] 공안합동수사본부를 앞세운 정권의 공격은 계속됐다. 4월 16일에는 단병호 전국투본 본부장이 구속됐다. 22일에는 (창원 ㈜통일 해고자인) 문성현 전국노운협 공동의장이 구속되고 (마창노련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던) 경남노동자협의회(경노협) 사무실이 압수수색을 당했다. 이런 상황에서 마창노련은 “구속자 석방, 공안합수부 해체, 고문경관 처벌”에서 “노태우 정권 퇴진”까지 정치적 요구를 내걸고 폭발적인 가두투쟁을 줄기차게 전개했다. 그 정점에는 4월 하순 일주일 이상 매일 1만 명 이상의 조합원들이 창원을 가로지르는 창원대로 곳곳에서 전투경찰에 맞서 격렬한 가두투쟁을 전개한 ‘창원대로 대투쟁’이 있었다. 투쟁이 전개되는 동안 언론에서는 연일 마산·창원 지역의 투쟁을 대문짝만하게 보도했고, 항간에는 마산·창원 지역에 위수령이 발효될지 모른다는 유언비어가 퍼지기도 했다. 마창노련 8년 역사에서 가장 역동적이고 규모가 큰 투쟁이었다. 그 전초전은 4월 19일 연행된 금성사 1공장 조합원 6명을 구출하기 위해 시작된 연대 가두투쟁이었다. 연행자가 38명까지 늘어났지만, 노동자들이 보여준 폭발적인 가두투쟁에 깜짝 놀란 경찰은 결국 연행자를 모두 석방할 수밖에 없었다. 파업 8일째인 4월 18일 금성사 1공장 2천 5백여 조합원은 ‘임금인상투쟁 결의대회’와 ‘구자경 럭키금성그룹회장 모의장례식’을 가진 뒤 만장, 상여, 허수아비 등을 앞세우고 회사 밖으로 진출, 회사 주위를 돌며 1시간 동안 평화적인 시위를 벌이면서, “임금 52.3% 인상”의 구호를 외치며 회사측의 성의있는 협상 자세를 촉구했다. 그런데 KBS(창원)가 금성사 임투 보도과정에서 회사측 보도자료만 인용하여 왜곡보도한 데 항의하여 다음날 4월 19일 금성사 1공장 조합원들이 KBS를 항의방문하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조합원 6명이 경찰에 불법 연행되자 분노한 금성사 1공장 1천 5백여 조합원은 연행자 구출을 위해 즉각 창원경찰서로 진출하였고 최루탄을 쏘며 저지하는 경찰과 투석전을 벌였다. 경찰의 거친 폭력진압에 밀린 금성사 조합원들은 ㈜통일 1공장 안으로 피신하게 되었고, 경찰은 ㈜통일 작업장 안에까지 들어와 최루탄을 쏘며 과잉진압을 하였다. 작업장에 최루탄 냄새가 진동하자 격분한 ㈜통일 조합원들은 전원 작업을 중단하고 뛰쳐나와 돌과 화염병으로 폭력경찰과 맞서 투석전을 벌이면서 싸움은 격화되었다. 오후 5시경, 파업 중인 금성사 2공장 2천여 조합원과 인근의 효성기계, 대원강업, 루카스, 램트레이딩, 부산산기 등에서 조합원들이 뛰쳐나와 합세, 내동상가 쪽에서 경찰을 공격하며 치열한 접전을 벌였다. 이렇듯 내동상가 쪽과 창원대로 쪽 양쪽에서 노동자들이 양동작전으로 경찰에 치명적인 타격을 가하자, 당황한 경찰은 다연발탄 철갑차량 2대를 동원하여 앞이 안 보일 정도로 지랄탄을 난사하고, 30여 명의 노동자를 폭력적으로 연행해 갔다. 투쟁은 시가전을 방불케 하는 전투로 바뀌었고 퇴근하는 노동자들까지 합세하여 불어난 노동자군단은 더욱 사기가 충천하여 전투는 점차 격렬해져 갔다. 결국 경찰은 노동자들의 격렬한 저항에 밀려 더 이상 진압능력을 상실한 채 오후 8시경 황급히 철수하게 되었다. 승리한 노동자들은 힘찬 진군가를 부르며 파업사업장으로 돌아갔다. 한편 경찰의 폭력진압 과정에서 광대뼈와 이빨이 부러지고, 넘어진 여성노동자까지 무참히 짓밟혀 10여 명의 부상자가 발생했으나, 금성사 1공장 조합원 6명을 포함한 연행자 38명은 자정 무렵 창원경찰서장과의 협상으로 전원 석방되었다. 이 투쟁을 통해 완전승리를 쟁취한 마창 노동자들은 끝까지 투쟁하면 승리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게 되었다.[57] 4월 24일은 창원대로 대투쟁이 시작된 날이었다. 이날 마산수출자유지역 후문 노동자민주광장에서는 ‘마창투본 쟁의결의 및 방산특위 발대식’이 열릴 예정이었다. 그러나 경찰은 창원에서 마산으로 넘어가는 모든 길목을 차단하고서 집회 개최 자체를 방해했다. 경찰에 가로막힌 노동자들은 창원대로 전체를 사이에 두고 콜타르 드럼통에 불을 붙여 굴리면서 격렬한 가두투쟁을 벌였다. 이날 창원대로에서는 발대식에 참석하기 위해 오전 근무를 마치고 집단조퇴한 노동자들이 정문 밖으로 진출하려다가 행진도 시작하기 전에 경찰과 맞닥뜨려야 했다. 경찰은 아예 마산으로 통하는 모든 길목을 차단하고 이에 저항하는 노동자를 향해 엄청난 양의 최루탄을 마구 난사하였다. ㈜통일 조합원들은 창원대로 앞에 있는 한국기계연구소 앞까지 나와 싸웠으나 점차 밀리게 되었다. 그때 마침 도로포장용 콜타르 드럼통을 발견한 몇몇 조합원과 정방대원들은 드럼통에 불을 지르자고 제안하였다. 드럼통에 불을 붙여보니 시키먼 연기가 솟아올랐고 좀 있으려니까 ‘펑’ 하는 엄청난 폭발음과 함께 파편조각들이 사방으로 튀어 솟구쳤다. 방심하고 있던 노동자 몇 명이 엄청난 폭발력으로 인해 화상을 입고 병원으로 실려 갔다. 비록 위험부담이 많긴 하지만 경찰병력과 대항하려면 이 정도의 무기가 필요한 것이 사실이었다. 콜타르 드럼통의 위력적인 폭발력을 실감한 노동자들은 결국 콜타르 드럼통에 불을 붙인 후 굴리기 시작하였다. 대로를 향해 진군하려던 경찰은 ‘펑’ 하는 폭발음과 함께 시커먼 연기가 하늘 위로 구름처럼 솟아오르자 혼비백산하여 도망쳤고, 이후 감히 창원대로 쪽으로 접근할 엄두도 내지 못한 채 건너편 먼발치에서 대치하게 되었다. ‘펑펑펑’ 터지는 폭발음과 시커먼 연기와 함께 치솟는 화염기둥, 거기에다 최루탄의 매운 연기, 화염병과 돌의 난무 등으로 창원대로 전체는 화약과 폭탄으로 뒤덮인 그야말로 전쟁터 그 자체였다. 이날 하루 동안 무려 63개의 드럼통이 폭발하였다. 이로 인해 유사시 활주로로 활용할 수 있게 포장된 10차선 창원대로 전체가 차량통행이 완전 차단되었다. 차에서 내려 걸어 나온 시민들과 일반노동자들까지 합세하자 시위대는 더욱 불어났다. 창원대로를 가운데 두고 공단지역 쪽으로는 작업복 차림의 노동자군대가, 일반 주거지역에는 전투복 차림의 경찰군대가 대치하면서 군사분계선을 형성하였다. 이따금 공단지역 안쪽에서 구호와 노랫소리가 간간이 들려오면 곧장 ‘따따따따’ 하면서 다연발 최루탄 터지는 소리가 메아리처럼 대답했다. 한 정방대원은 그날 가장 기억에 남는 건 “돌”이라고 말할 정도로 창원대로는 아스팔트가 아닌 돌길로 화했다. “돌이 무려 무릎 정도까지 쌓여 있었다. 보도블록은 다 깨뿌아 하나도 남은 게 없었고, 달리기라면 누구보다 자신 있었지만 거기서는 아무도 달리지 못했다. 그 정도로 돌을 많이 던졌다.” 얼마나 격렬한 전투였는지를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이 투쟁은 워낙 투쟁범위가 넓고 광범위해서 한 사람이 보고 겪은 것만으로는 전체를 파악하기 어렵다. 창원대로와 그 이면 도로가 다 전투지역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창원공단 전체 노동자가 거리로 쏟아져 나왔을 정도로 많은 인원이 동원되었으며, 시간 역시 오후 1시경부터 시작된 전투가 밤늦게까지 계속되었다. 경찰은 창원대로가 막히자 바둑판처럼 이어진 공단길로 진입을 시도하였으나 모든 공단길은 파업사업장이 막고 있어 진입조차 할 수 없었다. 이로 인해 경찰은 거의 무장해제 상태나 다름이 없었다. 특히 내동상가 옆 이면도로에는 예비군 훈련 때 쓰는 모래주머니로 방어벽을 쌓아 진지를 구축해 놓았는데, 방어벽은 하나가 아니라 3, 4단계 정도로 구축하여, 1차선에서 싸우다 밀리면 2차선으로, 3차선으로 계속 옮기면서 싸웠다. 도로가 완전 불바다였기 때문에 경찰은 멀리 창원대로 건너편에서 최루탄만 쏘아대곤 했다. ‘따따따따’ 하는 콩 볶듯한 최루탄 소리가 나면 노동자들은 재빨리 방어벽 밑으로 수그려 피했다가 다시 나와 싸우곤 했다. 완전 전쟁터였다. 또한 기아기공 앞 쪽은 기아기공, 대림자동차, 금성사 1공장 조합원들이 창원대로를 사이에 두고 경찰과 계속 밀고 밀리는 싸움을 하고 있었다. 워낙 불을 많이 질렀기 때문에 경찰은 도로까지 나오지 못하고 있었는데 노동자들은 베어링이나 볼트를 넣어서 쏘는 새총을 사용하여 멀리 있는 전투경찰에게 위협을 가하기도 하였다. 또한 금성사 1공장에서는 1987년 대투쟁 때 지게차를 동원한 투쟁 경험을 살려 이번에는 경찰의 지랄탄을 막기 위해 방패용 철판을 부착한 지게차를 동원하기도 하였다. 심지어 현대정공에서는 탱크를 몰고 나가자는 의견도 나왔으나 ‘위수령 발동’ 유언비어 및 경찰에게 빌미를 주지 말자는 점 등을 고려하여 포기하였다는 이야기도 들렸다. 창원경찰서장이 직접 창원대로에서 진두지휘를 할 만큼 정권에게는 심각한 상황이었던 것이다.[58] 24일 노동자들이 창원대로 가두투쟁에서 보여준 폭발적인 힘에 당황한 경찰은 연행자들을 무차별 구타하고 전자봉으로 고문까지 하는 끔찍한 범죄를 저질렀다. 4월 24일 콜타르 드럼통 폭발로 부상당한 ㈜통일 조합원과 간호하던 노동자가 응급실에 들이닥친 경찰에 의해 강제연행 되었다. 그 과정에서 중상으로 응급실에 누워 있던 ㈜통일노조의 임종호는 탈출하여 연행을 면하였으나(이후 수배됨) 또 다른 조합원은 도망 중 산에서 연행되었다. 또한 금성사 조합원은 집회에 참석하기 위해 도보행진 중 세신실업 앞에서 전경의 불신검문 끝에 몸수색을 받고 새총 및 수상한 무기를 소지했다는 이유로 경찰에 연행되었다. 이렇게 연행된 조합원들은 경찰차 안에서부터 전경들에게 안전모, 워커발, 경찰봉 등으로 전신을 무수히 구타당한 뒤 또다시 창원경찰서 지하실에 끌려가 9시간여 동안 전신구타는 물론 전자봉 고문까지 당하게 되었다. 경찰은 창원대로 투쟁에서 받은 수모에 대한 보복으로 이같이 구타와 전기고문을 자행하면서 드럼통에 불을 붙인 사람의 이름과 새총 소지 목적 등을 진술하라며 무고한 노동자를 방화범으로 몰고 가려 했다. 그중 4월 26일 구속영장이 발부된 정택구 ㈜통일 조합원은 경찰이 무릎을 꿇게 한 후 턱과 팔목을 책상 위에 올려놓고 길이 1미터가량 되는 경찰 전자봉으로 팔과 허벅지, 어깨 등 온몸을 지져대 고통과 공포를 참다못해 전자봉을 빼앗아 도망 다니기도 했다. 불구속으로 석방된 금성사 조합원은 악몽 같은 고문과정을 이렇게 털어놨다. “입안에도 전자봉을 넣어 전신을 사시나무 떨게 하듯 하는 전기고문을 수십 회 반복했습니다. 또한 바늘침으로 등과 허벅지 등 전신을 고문하여 육중한 몸이 견디다 못해 지상에서 30센티씩 펄쩍펄쩍 뛰어오르기도 했습니다. 일행 11명 모두 이렇게 고문을 당해야 했습니다.”[59] 머리 전체와 목과 손을 흰 붕대로 감싼 처참한 사진과 함께, 전자봉 고문 소식이 퍼지자 마산·창원 노동자들의 분노가 폭발했다. 마창투본 5지구 대표자회의는 ‘시가전적 가투’를 조직하기로 결의했다. 26일 오후부터 격렬한 가두투쟁이 다시 시작됐다. 마창 노동자들은 폭력경찰을 처단하기 위해 창원경찰서로 향했다. 그러나 경찰서에 도착하기도 전에 금성사 앞, ㈜통일 앞, 현대정공 앞에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고 금성사 1, 2공장, ㈜통일, 대림자동차 등의 노동자 1만 명은 ㈜통일, 한국기계연구소 앞, 창원대로에서 구속자 석방을 요구하며 창원경찰서로 진출을 시도하다 이를 저지하는 경찰에 맞서 격렬한 투쟁을 벌였다. 그러나 경찰은 보복이라도 하듯 오후 5시 반 경부터 무차별적으로 최루탄을 난사했고, 백골단을 앞세워 폭력으로 강제해산을 기도하였다.[60] 27일 오전 창원호텔에서 전기고문당한 조합원들의 기자회견이 열렸다. 이후 이흥석 본부장 등 마창투본 간부들과 정당방위대 40여 명이 민주당 진상조사단 및 기자들과 함께 창원경찰서로 향했다. 정문을 차단하고 민주당 진상조사단만 들여보낸 경찰은 갑자기 백골단 수십 명을 동원해 이흥석 본부장과 네 명의 간부를 집단폭행하며 연행했다. 노동자들의 투쟁은 마창투본 본부장을 구출하기 위한 투쟁으로 더 크게 불타올랐다. 이흥석 본부장이 백골단에 의해 강제연행되는 한 장의 사진은 전 마창 노동자를 격분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다. 투쟁의 불길은 급속하게 구속자 석방투쟁으로 옮겨 붙었다. 4월 27일 마창투본 산하 40여 개 노조는 오후 2시경 임시총회, 집단조퇴, 작업거부 등 형태로 전원 가두로 진출하여 살인정권 타도와 구속자 석방을 요구하며 격렬한 투쟁을 벌였다. 구호는 “공안합수부 해체하고 우리 동지 석방하라”, “전기고문 진상규명하고 책임자를 처벌하라”에서 어느새 “살인마 노태우정권 퇴진하라”는 구호로 바뀌었고 투쟁은 격렬해졌다. 기아기공 등은 가음정동 일대에서, 5지구 금성사 1공장과 대림자동차 조합원 약 7천 명은 금성사 앞에서, 3지구는 ㈜통일 1공장 정문 앞에서, 그리고 효성기계, 금성사 2공장, 금성산전, 대원강업, 세신실업, 삼미금속 노동자 5천여 명은 내동상가 옆 도로를 완전 점거하였고, 현대정공 노동자 800여 명도 효성중공업 입구까지 가두진출하고, 각각 경찰의 최루탄과 다연발탄 철갑차량에 대항하여 돌과 화염병을 던지며 격렬한 전투를 벌였다. 연일 교통이 막힌 창원대로는 앞이 안 보일 정도로 뿌연 최루탄 가스로 가득 찼다. 한편 수출지역에서는 타코마노조를 중심으로 한 20개 노조 조합원 4천여 명이 수출지역 정문 쪽으로 진출하면서 저지하는 경찰에 맞서 “구속자 석방”, “공안합수부 해체”, “노동쟁의조정법 철폐” 등을 외치며 격렬한 전투를 벌였다. 정방대를 중심으로 가두로 진출한 노동자들은 노동자탄압에 앞장섰던 민정당 을지구 사무실과 수출 역내 파출소를 타격하고, 이번에는 불법구속에 항의하기 위해 검찰청으로 진출하던 중 또다시 경찰의 저지를 받자 남성동파출소와 자산동파출소에 돌과 화염병을 던져 각 파출소를 박살내기도 했다. “씨말리자 씨말리자 폭력경찰 씨말리자!”며 폭력경찰에 대항하는 구호를 외치던 노동자의 입에서는 어느새 “노태우정권 타도!”와 “노동자가 앞장서서 민주사회 앞당기자!”는 정권에 대항하는 구호가 터져 나왔다.[61] 27일 오후 격렬한 가두투쟁이 벌어지고 있던 그 시각에 공안합동수사본부 요원 20여 명이 마창노련 사무실 압수수색에 나섰다. 그들은 사무실뿐 아니라 개인 소지품까지 낱낱이 수색하여 깡그리 압수해 싣고 갔다. 사무실 칠판에 적힌, “타도 노태우, 축출하자 미일외세” 같은 투쟁 구호들도 베껴 갔다. 이날 밤 늦게 마창투본은 세신실업노조 사무실로 장소를 옮겨 산하 40개 노조 대표자들이 참가한 가운데 긴급 대표자회의를 열었다. 마창투본은 본부장의 구속과 사무실 압수수색에 대응하여 28일부터 각 지구 단위노조별로 시차적 동맹파업에 들어갈 것을 결의했다. 마창투본 전체 대표자회의의 결의에 따라 마창투본 각 노조는 4월 28일 일제히 동맹파업에 들어간 뒤 곧바로 가두투쟁에 돌입하였다. 금성사 1공장과 대림자동차 노동자 2천 명은 회사 앞 창원대로를 차단하고 경찰과 대치, 돌과 화염병을 던지며 최루탄에 맞서 투쟁하였다. 또한 효성중공업과 ㈜통일 노동자 4천 명은 회사 주변 일대의 도로를 점거하고 항의 농성하였고, 기아기공, 삼미금속 노동자 3천 명은 창원대로에서 고문경찰관 처벌을 요구하며 창원경찰서 쪽으로 나가려다 경찰이 최루탄을 쏘며 저지하자 돌과 화염병을 던지며 격렬하게 투쟁했다. 또한 수출지역 내 타코마, 중천, 수미다 등 20여 노조에서 노동자 3천 명이 수출지역을 빠져나와 시내 진출을 시도하다가 경찰의 최루탄에 밀려 민주광장에서 연좌농성을 벌였고, 이 중 300여 명이 수출지역 후문 앞 양덕파출소와 관리사무소에 돌을 던져 유리창과 사무실 집기를 부수었다. … 4월 29일 총파업 이틀째였다. 수출지역 후문 민주광장에서 열린 ‘노동운동 탄압분쇄 및 노태우정권 퇴진 결의대회’에는 한국중공업 3천여 명과 타코마 1천여 명이 참가하는 등 열기를 더했다. 그러나 집회는 지리멸렬한 연설 일변도로 이어졌고 노동자가 당면한 문제들과는 동떨어진 내용으로 일관하여 많은 노동자들이 집회를 이탈하는 결과를 낳았다.[62] 28일과 29일 마창투본이 전개한 지역 총파업은 중요한 의의를 갖는 투쟁이었다. 특히 마창노련 미가입 사업장까지 포함된 마창투본 공식회의에서 시가전적 전투가 결의됐다는 점에서 그전의 자연발생적 투쟁과는 분명 다른 의미가 있었다. 그러나 그동안 연일 계속된 가두투쟁으로 인한 부상과 피로 때문에 많은 노동자들이 지쳐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정확한 전술과 올바른 선전선동이 조직되지 못하면서 안타깝게도 투쟁력이 소진되고 말았다. 30일에는 세계노동절 기념 노동자대회가 마산수출자유지역 후문 앞 민주광장과 창원 세신실업에서 각각 열릴 예정이었다. 그러나 경찰은 공안합동수사본부에서 유포한 ‘5월 1일 총파업설’을 토대로 집회를 원천봉쇄했다. 마산·창원 지역 노동자들은 노조별 또는 지구별로 집회를 가진 후 가두로 진출하여 저녁까지 경찰에 맞서 치열한 접전을 벌였다. 이 창원대로 대투쟁을 마창투본은 이렇게 기록했다. 노동운동 탄압분쇄를 위해 4만여 명의 노동자가 연대하여 4월 24일 이후 1주일이 넘는 동안 실질적인 동맹파업을 결행(각 사업장마다 정상조업이 전혀 안 되는 상태)하고 그중 5천~1만여 명이 필사적인 규탄시위를 갖는 일은 대한민국 정부수립 이후 처음 있는 일이다. 아울러 강제납치, 무더기 구속, 수색, 압수, 전기고문, 살인, 폭행, 대대적 공권력 투입 등 현재와 같은 노동운동의 전국적 탄압 또한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다.[63] 상반기 투쟁 이후 마창노련은 지도부와 간부 60여 명이 구속·수배당하면서 일시적 마비상태에 빠지기도 했다. 이런 상황에서 구속자 가족들도 구속자석방투쟁의 주체로 나섰다. ‘마산·창원 구속자석방 및 수배조치해제를 위한 가족대책위원회’(마창구가위)에 동참한 가족들은 5월 22일부터 25일까지 민주화가족협의회(민가협)와 함께 서울에서 평민당사 농성투쟁을 전개했다. 동시에 5월 23일부터 29일까지 마산에 있는 민주당 강삼재 의원 사무실에서도 점거농성을 벌였다. 원래 마산 농성은 서울 농성 일정에 맞춰 25일 해산할 예정이었으나 27일에서 다시 29일로 두 차례나 연장할 정도로 가족들의 참여와 호응이 높았다. 가족들은 점거농성 투쟁을 통해 괄목할 만한 의식의 변화와 발전을 이루게 되었다. 구속자가족위원회 이가숙 회장은 남녀가 함께 ‘노동해방’을 위해 싸워나가야 한다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남편의 구속이 삶의 커다란 전환점이 되었다. 남편 직장(현대정공, ㈜통일, 기아기공, 삼미금속 등)을 견학한 뒤 훨씬 더 남편을 잘 이해하게 되었고 앞으로는 가족협의회를 노조의 한 부서로 만들고, 임금협상 때도 가족의 일원으로서 사장에게 직접 생활의 고충을 털어놓을 수 있도록 발전시켰으면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강제로라도 노조에서 교육을 시켜 아내에 대한 고루하고 편협한 생각들을 남편들 머리에서 싹 없애버렸으면 한다.”[64] 마창노련이 창원대로 대투쟁을 전개하고 있을 때, 다른 지역에서도 노태우 정권의 노동탄압에 맞선 투쟁이 적극적으로 조직됐다. 부천지역에서는 4월 15일 구속자 석방을 요구하는 지역총파업을 전개했다. 4월 9일 부천지역 노동자 2천여 명이 ‘노동운동탄압분쇄 및 부천지역 임금인상 완전쟁취 전진대회’를 개최한 후 행진하는 과정에서 경찰의 침탈로 20여 명이 연행됐다. 이에 10일과 11일 경찰에게 항의투쟁을 전개하던 부천투본 본부장과 상황실장이 연행·구속되고 많은 노동자가 구타를 당해 크게 다쳤다. 12일 저녁 부천지역 노조 간부 2백여 명이 모여 지역총파업을 결의했다. 15일 ‘구속동지 석방과 노조탄압 분쇄’를 내걸고 총파업을 결행한 49개 노조 4천여 명의 조합원은 백골단을 비롯한 경찰에 맞서 치열한 가두투쟁을 전개했다. 서울지역노동조합협의회(서노협)는 4월 14일 ‘제3자 개입금지 위반’으로 연행돼 16일 구속된 단병호 전국투본 본부장 겸 서노협 의장의 석방을 요구하며 20일 서울지역 총파업을 단행했다. 총파업에는 47개 노조가 파업, 총회, 잔업거부 형태로 가담했다. 저녁에 동아건설 창동공장과 구로공단에서 열린 집회에는 3천 5백여 명이 참여했다. 4월 30일 세계노동절(메이데이) 100주년 기념 전국노동자대회가 전국투본 주도로 준비되고, 진행됐다. 1959년 이승만 정권이 노동절을 메이데이에서 대한노총 결성일인 3월 10일로 바꾸고 1963년 박정희 정권이 그 명칭마저 ‘근로자의 날’로 바꿔버리면서, 한국의 노동자들은 오랫동안 노동절을 빼앗긴 상태였다. 1989년 세계노동절 대회를 통해 노동자들은 41년 만에 노동절을 되찾았다. 정부의 원천봉쇄 방침에 맞서, 노동자들은 연세대, 서강대, 한양대, 동국대 등에 분산 집결한 뒤 서울 시내에서 치열한 가두투쟁을 전개했다. 5월 28일에는 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이 결성됐다. 그러나 노태우 정권의 집요한 탄압으로 교사 1만여 명이 노조탈퇴 각서를 써야 했고, 이를 거부한 교사 1,550명이 해직됐다. 전교조는 치열한 투쟁을 통해 1만 4천여 명의 조합원과 3만여 명의 후원회 조직을 사수해 냈다. 11월 12일, 전노협 건설을 위한 전국노동자대회가 열렸다. ‘천만 노동자 총단결로 전노협을 건설하자!’, ‘악법 철폐! 건설 전노협!’의 구호가 전면에 내걸렸다. 1989년 한 해 동안 602명이라는 사상 최대의 구속 노동자가 발생했지만, 폭발적으로 성장하는 노동자투쟁의 기세는 꺾지 못했다. 1989년 지역·업종별 구속 노동자 수 서울 인천 부천 성남 경기 광주 전북 청주 태백 전교조 55 52 53 49 31 3 3 1 18 70 부산 울산 마창 거제 진주 대구 포항 구미 계 30 61 95 25 2 28 24 2 602명 다음 편 보기 [1] 고용노동부 통계에 따르면, 1989년 193만 명(조직률 19.8%)으로 정점에 올랐던 조합원 수는 이후 꾸준히 하락해 1998년 140만 명(조직률 12.6%)까지 떨어졌다. 이후 조합원 수가 점진적으로 회복돼 2015년 194만 명으로 26년 만에 1989년 수치를 넘어섰지만, 그 사이 전체 노동자 수가 크게 늘어 조직률은 10.2%에 불과했다. 박근혜 퇴진 촛불항쟁을 경과하며 2016~21년 조합원 수가 큰 폭으로 늘어 2021년 293만 명(조직률 14.2%)으로 새로운 정점을 찍었다. [2] 그럼에도 1991년 기준 노동조합 조직률은 300인 이상 사업장의 경우 60.0%, 100~299인 사업장의 경우 26.3%, 50~99인 사업장의 경우 9.5%, 50인 미만 사업장의 경우 0.1%였다. [3] 김하경, 1999, 『내 사랑 마창노련』 상권, 60~71쪽. [4] 김하경, 1999, 『내 사랑 마창노련』 상권, 194~195쪽. [5] 전국노동조합협의회 백서 발간위원회, 2003, 『전노협백서 제1권 1987~1988 - 기나긴 어둠을 찢어버리고』, 논장, 407쪽. [6] 전국노동조합협의회 백서 발간위원회, 2003, 『전노협백서 제1권 1987~1988 - 기나긴 어둠을 찢어버리고』, 논장, 454~455쪽. [7] 전국노동조합협의회 백서 발간위원회, 2003, 『전노협백서 제1권 1987~1988 - 기나긴 어둠을 찢어버리고』, 논장, 482쪽. [8] 노동자뉴스제작단, 2011, <한국노동운동사 100년의 기록>(영상) 3부. [9] 전국노동조합협의회 백서 발간위원회, 2003, 『전노협백서 제1권 1987~1988 - 기나긴 어둠을 찢어버리고』, 논장, 478~480쪽. [10] 노동운동역사자료실. [11] 박용수, 1989, 사진집 『민중의 길』. [12] 김하경, 1999, 『내 사랑 마창노련』 상권, 124~128쪽. [13] 울산노동정책교육협회, 1995, 『울산지역 노동운동의 역사 (1987~1995)』 1권, 16쪽. [14] 전국노동운동단체협의회, 1989, 「전노협을 어떻게 건설할 것인가?」, 『공장에서 전국으로 전진하는 노동운동』, 61~62쪽. [15] 이수원, 1994, 『현대그룹 노동운동, 그 격동의 역사』, 대륙, 145~148쪽. [16] 이수원, 1994, 『현대그룹 노동운동, 그 격동의 역사』, 대륙, 158~159쪽. [17] 현대중공업노동조합, 1999, 현대중공업노동조합사 3부작 ‘미포만의 붉은 해’ 2부 <두 개의 파업>(영상). [18] 이수원, 1994, 『현대그룹 노동운동, 그 격동의 역사』, 대륙, 162쪽. [19] 이수원, 1994, 『현대그룹 노동운동, 그 격동의 역사』, 대륙, 162쪽. [20] 울산노동정책교육협회, 1995, 『울산지역 노동운동의 역사 (1987~1995)』 1권, 17~18쪽. [21] 훗날 대통령 노무현의 언행과 이날 그의 연설은 매우 상반된 관점을 보여준다. [22] 이수원, 1994, 『현대그룹 노동운동, 그 격동의 역사』, 대륙, 171~172쪽. [23] 울산노동정책교육협회, 1995, 『울산지역 노동운동의 역사 (1987~1995)』 1권, 21쪽. [24] MBC, 1988/12/28, <노태우 대통령, 고위 당정회의서 민생치안대책 마련 지시>. [25] 울산노동정책교육협회, 1995, 『울산지역 노동운동의 역사 (1987~1995)』 1권, 25쪽. [26] 전국노동조합협의회 백서 발간위원회, 2003, 『전노협백서 제2권 1989년 - 이제는 하나다! 전노협』, 논장, 139~140쪽. [27] 이수원, 1994, 『현대그룹 노동운동, 그 격동의 역사』, 대륙, 175~178쪽. [28] 이수원, 1994, 『현대그룹 노동운동, 그 격동의 역사』, 대륙, 186~187쪽. [29] 이수원, 1994, 『현대그룹 노동운동, 그 격동의 역사』, 대륙, 189쪽. [30] 전국노동조합협의회 백서 발간위원회, 2003, 『전노협백서 제2권 1989년 - 이제는 하나다! 전노협』, 논장, 140쪽. [31] 울산노동정책교육협회, 1995, 『울산지역 노동운동의 역사 (1987~1995)』 1권, 37쪽. [32] 이수원, 1994, 『현대그룹 노동운동, 그 격동의 역사』, 대륙, 204쪽. [33] 이수원, 1994, 『현대그룹 노동운동, 그 격동의 역사』, 대륙, 206~207쪽. [34] 울산노동정책교육협회, 1995, 『울산지역 노동운동의 역사 (1987~1995)』 1권, 40쪽. [35] 이수원, 1994, 『현대그룹 노동운동, 그 격동의 역사』, 대륙, 208쪽. [36] 이수원, 1994, 『현대그룹 노동운동, 그 격동의 역사』, 대륙, 209쪽. [37] 이수원, 1994, 『현대그룹 노동운동, 그 격동의 역사』, 대륙, 219쪽. [38] 이수원, 1994, 『현대그룹 노동운동, 그 격동의 역사』, 대륙, 225~226쪽. [39] 이수원, 1994, 『현대그룹 노동운동, 그 격동의 역사』, 대륙, 237쪽. [40] 이수원, 1994, 『현대그룹 노동운동, 그 격동의 역사』, 대륙, 239쪽. [41] 금속노조현대차지부, 2009, 『현자노조 20년사』, 90~91쪽. [42] 이수원, 1994, 『현대그룹 노동운동, 그 격동의 역사』, 대륙, 242~243쪽. [43] 이수원, 1994, 『현대그룹 노동운동, 그 격동의 역사』, 대륙, 245쪽. [44] 이수원, 1994, 『현대그룹 노동운동, 그 격동의 역사』, 대륙, 245쪽. [45] 공안합동수사본부는 6월 19일까지 77일 동안 총 317명을 구속하고 126명을 불구속입건했다. [46] 노동자뉴스제작단, 2011, <한국노동운동사 100년의 기록>(영상) 3부. [47] 이수원, 1994, 『현대그룹 노동운동, 그 격동의 역사』, 대륙, 245~247쪽. [48] 이수원, 1994, 『현대그룹 노동운동, 그 격동의 역사』, 대륙, 246~248쪽. [49] 이수원, 1994, 『현대그룹 노동운동, 그 격동의 역사』, 대륙, 253쪽. [50] 이수원, 1994, 『현대그룹 노동운동, 그 격동의 역사』, 대륙, 255쪽. [51] 이수원, 1994, 『현대그룹 노동운동, 그 격동의 역사』, 대륙, 284~286쪽. [52] 김하경, 1999, 『내 사랑 마창노련』 상권, 139쪽. [53] 김하경, 1999, 『내 사랑 마창노련』 상권, 148~150쪽. [54] 김하경, 1999, 『내 사랑 마창노련』 상권, 154쪽. [55] 김하경, 1999, 『내 사랑 마창노련』 상권, 154~155쪽. [56] 김하경, 1999, 『내 사랑 마창노련』 상권, 156~159쪽. [57] 김하경, 1999, 『내 사랑 마창노련』 상권, 163~165쪽. [58] 김하경, 1999, 『내 사랑 마창노련』 상권, 167~170쪽. [59] 김하경, 1999, 『내 사랑 마창노련』 상권, 170~171쪽. [60] 김하경, 1999, 『내 사랑 마창노련』 상권, 172쪽. [61] 김하경, 1999, 『내 사랑 마창노련』 상권, 173~174쪽. [62] 김하경, 1999, 『내 사랑 마창노련』 상권, 175~176쪽. [63] 마산·창원 노동법개정 및 임금인상투쟁본부, 1989/05/15, <마창투본소식> 제6호. (김하경, 1999, 『내 사랑 마창노련』 상권, 178쪽에서 재인용) [64] 김하경, 1999, 『내 사랑 마창노련』 상권, 192쪽. /* 스크롤 여백만 주고, 화면에는 안 보이게 */ .ftn-target { display: inline-block; /* 줄바꿈 안 생김 */ width: 0; height: 0; scroll-margin-top: 200px; } document.addEventListener("DOMContentLoaded", function () { // name="_ftn1", name="_ftn2", name="_ftnref1" ... 전부 대상 document.querySelectorAll('a[name^="_ftn"]').forEach(function(a) { var idValue = a.getAttribute("name"); // 이미 같은 id의 요소가 있으면 또 만들지 않음 if (!document.getElementById(idValue)) { var span = document.createElement("span"); span.id = idValue; span.className = "ftn-target"; a.parentNode.insertBefore(span, a); } }); }); /* 본문 각주 번호 + 아래쪽 각주 번호 색 지정 */ a[href^="#_ftn"] sup, a[href^="#_ftnref"] sup { color: #BF202D; } /* 밑줄이 보기 싫으면 */ a[href^="#_ftn"], a[href^="#_ftnref"] { text-decoration: none; } /* 마우스 올렸을 때 살짝만 강조하고 싶으면 (선택) */ a[href^="#_ftn"]:hover, a[href^="#_ftnref"]:hover { text-decoration: underline; } /* 페이지 전체가 오른쪽으로 넘치지 않게 */ html, body { max-width: 100%; overflow-x: hidden; } /* 본문 영역 폭 강제 고정 + 긴 단어/문장도 줄바꿈 */ #bo_v_con, .bo_v_con, .cke_editable, article { max-width: 100%; overflow-wrap: break-word; word-wrap: break-word; /* 구형 브라우저용 */ } /* 워드에서 붙은 이미지/표가 화면 밖으로 안 나가게 */ #bo_v_con img, #bo_v_con table, .bo_v_con img, .bo_v_con table, .cke_editable img, .cke_editable table, article img, article table { max-width: 100% !important; height: auto; } /* 워드가 p, span에 폭을 박아놓은 경우 강제로 해제 */ #bo_v_con p[style*="width"], #bo_v_con span[style*="width"], .bo_v_con p[style*="width"], .bo_v_con span[style*="width"], .cke_editable p[style*="width"], .cke_editable span[style*="width"], article p[style*="width"], article span[style*="width"] { width: auto !important; max-width: 100% !important; } /* 기본 blockquote 스타일 */ blockquote { border-left: 4px solid #c0392b; /* 사이트 분위기와 맞는 붉은 계열 */ padding: 12px 18px; margin: 20px 0; background: #fafafa; font-style: normal; color: #333; line-height: 1.6; } /* blockquote 안의 p 태그 정렬 */ blockquote p { margin: 0 0 10px 0; text-align: justify; } /* 마지막 p 태그 여백 제거 */ blockquote p:last-child { margin-bottom: 0; } -
[토론회 자료집] 2026년 3.8 여성파업 제안 토론회: 지금 여기에 실질적 성평등을2026년 3.8 여성파업 제안 토론회: 지금 여기에 실질적 성평등을 ※아래 첨부파일에서 자료집을 다운받으실 수 있습니다. 1부 - 정세분석 사회: 조건희(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발제1 : 국제 정세와 여성을 비롯한 소수자권리의 후퇴 (명숙, 인권운동네트워크 바람) 발제2 : 이재명 정권의 기조와 노동탄압 (배예주, 사회주의를향한전진) 발제3: 여성파업의 의미와 요구 (유지원, 변혁적여성운동네트워크 빵과장미) 2부 - 지금 여기, 현장의 목소리로 여성파업을 조직하다 사회: 김지현 (학생사회주의자연대) 발제 1 : 이하나 (공공운수노조 희망연대본부 저축은행중앙회통합콜센터 상담사) 발제 2 : 김현주 (공공운수노조 한국마사회지부 과천지회장) 발제 3 : 이지애 (보험설계사지부 조합원) 발제 4 : 김미진 (장애여성공감 활동가) 발제 5 : 남지은 (한국이주여성인권센터 사무국장) 발제 6 : 사루 (행동하는성소수자인권연대 성소수자노동권팀 공동팀장) 일시: 2026년 2월 27일(금) 17시 장소: 서울 중구 정동길 3 민주노총 15층 회의 토론회 영상 다시보기 -
3.8 여성파업 정세와 투쟁방향, 윤석열에 이은 이재명 정부의 구조적 착취와 억압윤석열에서 이재명으로 기울어진 운동장, 불평등의 기울기가 작아졌는가? 이재명 정부의 구조적 착취와 억압, 싸우는 여성 노동자의 힘이 필요하다! 광장에서 목이 터져라 외친 평등, 차별 철폐, 권리, 노동, 민주주의는 어디에 있는가? 한국은 OECD 국가 중 성별 임금격차가 가장 높은 국가이자, 노인빈곤률과 고령여성 빈곤률 모두 가장 높은 국가다. 자살률은 가장 높고 출생률은 가장 낮은 국가다. 성소수자 권리는 최하위권이다. 이재명 정부 들어 젠더 불평등과 노동자 민중의 고통스러운 현실이 나아가졌는가? 기울어진 운동장, 불평등의 기울기가 조금이라도 줄어들었는가? 세계적으로 경제, 사회, 정치, 재생산, 기후 등 위기의 시대, 전쟁의 먹구름이 드리워져 있다. 이재명 정부는 전략산업 육성과 노동개악, 사회적 대화-노사협조주의 강화, 남성 역차별을 해소하는 성평등, K-방산 등 성장 정책을 표방하며 2026년 성장하는 자본주의를 말하고 있다. 자본의 몫을 키우면, CEO가 아닌 여성과 성소수자의 권리가 보장되고 노동자민중의 고통이 줄어든다고? 이재명 정부와 자본의 이러한 행보는 노동과 권리, 여성과 성소수자, 평등을 지우고 있다. 이재명 정부의 성장주의 정책의 핵심은 체제의 위기, 그 책임을 노동자 민중에게 더 노골적으로 전가하는 자본가 살리기다. 구조적 성차별을 없애려는 대책도 없다. 젠더평등의 기반을 허무는 이러한 행보는 윤석열을 비롯해 역대 정부 정책의 연장선이다. 평등은 정부와 자본에 맞서지 않고 진전될 수 없다. 정부, 자본과의 상생이나 기존 정당에 대한 투표하는 것으로 구조적 성차별, 여성의 이중굴레가 해결되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수사에 현혹되지 않고 격화되는 위기와 책임 전가에 맞서고자 한다. 지금 바로 여기에 실질적 성평등이 필요하다. 그리고 싸우는 여성 노동자의 투쟁으로 쟁취하려 한다. 3월 8일 국제여성의날, 여성파업을 일으키는 투쟁. 절실한 요구로 절박한 투쟁에 나선다. 구조적 성차별 타파, 여성과 성소수자, 장애인, 이주민 등 사회적 약자에 대한 혐오와 차별의 일소, 노동권 보장, 젠더 평등, 전쟁 종식, 노동자 민중의 단결을 위해 여성 노동자가 앞장선다. 함께 싸우자! 1. 불평등을 향한 투쟁에 힘입어 등장한 이재명 정부 ‘구조적 성차별은 없다’던 윤석열 정부는 광장에 나선 노동자 민중, 특히 여성과 성소수자의 힘으로 탄핵당했다. 윤석열 정부의 경제 및 노동정책의 핵심은 ‘전략산업 육성을 통한 경제 성장’과 ‘노동시장 유연화를 통한 효율성 제고’ 두 축이었다. 그리고 ‘여성가족부 폐지’로 상징되듯 젠더갈등과 백래시를 부추겼다. 반노동, 반여성, 반성소수자, 반공과 극우 이데올로기를 조장했다. 이를 통해 빈익빈 부익부, 비정규직, 성별임금격차, 일자리, 경력단절, 가난과 차별 등 불평등 사회에 가득 찬 분노와 저항을 다른 곳으로 돌리며 노동자 민중의 단결을 가로막고 저항을 무력화하는 정책을 구사했다. 이에 대한 반영으로 내란 광장에서 여성과 성소수자, 노동자 민중은 ‘평등’, ‘민주주의’, ‘차별 철폐’, ‘노동’, ‘권리’ 등을 강조하면서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빼앗긴 노동자로, 여성으로, 성소수자로,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권리가 보장되는 평등사회를 간절히 외쳤다. 비록 조직된 노동자의 조직인 민주노총이 총파업에 나서지 못했지만, 4개월 동안의 투쟁이 윤석열을 탄핵시켰다. 이에 힘입어 조기 대선으로 이재명 정부가 출범했다. 이재명 정부는 집권 초기부터 현재까지 ‘성장’을 강조하고 있다. 패권적 전쟁 위기 심화에 ‘도약과 성장’, ‘실용과 국익, 친기업’을 내세운다. 자본이 돈을 많이 벌어 성장하는 것으로 사회의 불평등과 빈곤, 비정규직, 실업, 차별과 혐오, 착취와 억압이 어떻게 해소된다는 것일까? 이전의 정부들과 무엇이 다른 걸까? 이재명 정부는 선거공약에서부터 ‘성평등’에 침묵했다. 취임 후 여성가족부 장관 잡음 끝에 원민경 여성인권 변호사 임명하고 고용노동부 장관에 김영훈 전 민주노총 위원장 임명하여 이전 정부와 차별성을 보여주려 하였으나 그렇지 않았다. 이후 10월 14일 국무회의에서는 ‘특정 영역 남성 역차별’을 여러 차례 언급하며 성평등가족부의 업무로 남성 역차별 해소를 주문했다. ‘포괄적 차별금지법’은 실종되었다. 광장의 노동자민중이 사회대개혁의 첫 번째 요구로 꼽은 것이 차별금지법 제정이었다. 그러나 이재명 정부는 포괄적 차별금지법을 거론조차 하지 않고 있다. 2025년 12월 11~23일 이뤄진 부처별 ‘2026년도 업무계획 보고’에서도 차별금지법은 거론되지 않았다. 한 언론사가 차별금지법 입법 계획을 질문하자 성평등가족부는 “법무부가 주관 부처”라고 말했고, 법무부는 “입법할 계획 없다”고 답변했다. 내란 광장에도 고공농성을 한 세종호텔 해고 노동자들, 한국옵티칼하이테크 해고 노동자들의 투쟁은 정부의 약속에도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았다. A학교 투쟁, 현대자동차비정규직 이수기업, 서면시장 번영회, 기아차 청소노동자 부당징계 등 여러 투쟁사업장 문제도 마찬가지다. 건강보험고객센터 노동자들은 문재인 정부 시절부터 윤석열, 이재명 정부에 이르기까지 6년을 싸웠다. 그러나 이전 정부가 약속한 소속기관 정규직 전환이 여태 지켜지지 않아 김금영 지부장의 청와대 앞 단식농성이 진행 중이다. 노조법 2조, 3조가 개정되었다지만 진짜 사장인 정부가 비정규직 여성 노동자, 장애인·이주 여성 노동자의 생존권을 외면하고 있다. 이런 모습을 이재명 정부의 민낯이라 부르기엔 지나친가? 2. 격화하는 미·중 제국주의 패권 경쟁 속에 한국 “우아한 위선의 시대가 가고, 정직한 야만의 시대가 왔다.” 본격적으로 이재명 정부의 정세를 살피기 전, 격화하는 제국주의, 미·중 패권 경쟁 속에 한국이 있다는 점을 짚어야 한다. 2022년 2월 러시아와 나토가 우크라이나에서 출구 없는 대리전을 시작하면서 세계자본주의는 다시 ‘위기·전쟁·혁명의 시대’로 들어섰다. 2023년 10월 이후 이스라엘이 가자의 팔레스타인 민중을 집단학살하면서 동시에 중동 곳곳으로 전쟁을 확산시켰다. 2025년 1월 이후 트럼프는 관세를 앞세워 세계 곳곳을 약탈하고 미국의 대도시들을 사실상의 계엄 상태로 몰아넣으면서 마치 조폭 깡패가 힘자랑하듯 제국주의 최강국의 힘을 휘둘렀다. 미국 트럼프 행정부는 약화하는 세계 패권을 복원하려 베네수엘라 침공과 마두로 대통령 부부 납치, 그린란드 식민 지배와 캐나다 합병 주장, 이란에 대한 폭격 협박, 시리아 정부의 쿠르드족 집단 학살 지지, 쿠바 에너지 봉쇄, 가자 평화위원회 출범과 이사회 소집 등을 벌였다. 중앙아시아 아프리카, 남아메리카 등의 나라에서는 중국 정부의 경제 및 자원 수탈이 이어지고 있다. 미·중 패권 대결이 격화되면서 자신의 패권을 강화하려는 무차별적 시도들이 국제 노동자 민중을 비탄과 고통 속으로 내몰고 있다. 지난 4년 동안, 가깝게는 1991년 소련 붕괴 이후, 멀게는 1945년 2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 유지돼 오던 국제질서의 ‘규범’들이 하나둘 흔들리면서 세계는 점점 더 깊은 혼돈 속으로 빠져들었다. 강대국 간의 충돌은 점점 더 노골적으로 표출되고 있고, 전쟁과 학살은 점점 더 세계인의 일상 속으로 파고들고 있다. 쇠퇴기 자본주의 경제위기와 제국주의 패권 대결은 극우세력과 손잡으며 각 나라의 노동자 민중을 분열시키면서 저항을 약화하려 하고 있다. 이러한 세계의 변화를 ‘우아한 위선의 시대가 가고 정직한 야만의 시대가 왔다’[1]고 말한 한 교수의 표현이 요즘 세태의 정의가 되었다. 미·중 패권대결은 자본주의 만성적 축적 위기의 산물이자 축적의 위기를 가속화하는 요인이다. 2018년 미·중 패권대결이 본격화한 이후 미국은 우세한 힘을 갖고 중국을 압박하여 추가적인 성장을 차단하려 했지만, 시간이 갈수록 미국과 중국의 격차가 줄어들었다. 현재 달러 패권과 군사 패권이라는 결정적인 양 측면에서 미국이 분명한 우위를 갖고 있다고 요약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패권 대결은 군사적 긴장을 끌어올렸다. 쇠퇴기 자본주의가 경제, 사회, 재생산, 기후 위기에서 전쟁 위기로 빠져들며 미국의 해양세력과 중국의 대륙세력이 가장 직접적으로 가장 팽팽하게 맞부딪치고 있는 지역, 한국이 위치한 동아시아의 긴장도가 매우 높아졌다. 이러한 상황의 한복판에 한국이 있다. 3. 전략산업 육성과 노동개악으로 ‘성장, 도약의 자본주의’ 표방한 이재명 정부 =코스피는 6000을 찍었는데, 내 지갑은? ‘우아한 위선의 시대가 가고 정직한 야만의 시대’에 이재명 정부의 경제는 최근 잘 나가고 있다. 노동자 민중의 살림살이는 나빠졌다. 제국주의 열강 투쟁이 무역장벽을 확대하면서 한편에서는 한국 자본의 위기로, 다른 한편에서는 거대한 기회로 작용하고 있다. 2026년 한국경제 성장률 전망치는 1.8%(한국은행)~2%(정부)로, 2025년 0.97%에 비해 회복세다[2]. 내수 개선과 반도체산업 호조 등이 상승 전망의 근거다. 2026년 삼성전자와 하이닉스 영입이익 전망이 각각 170조 원 이상에 달하는 전대미문의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 작년 6월 이후 코스피 지수 상승률은 글로벌 증시에서 1위를 기록하고 있다. 건설, 석유화학, 철강 등 침체가 이어지고 있지만 일부 첨단산업 대자본이 심화하는 전쟁 위기 등을 기회로 막대한 이윤을 축적하는 것이다. 전반적 이윤축적 위기의 지속 가운데 일부 대자본의 약진이 이어지고 있다. 자본과 노동의 격차가 갈수록 커지고 있다. 해마다 경제는 성장하고 시중 유동성(M2)은 7~8%씩 늘어난다. 한국 상위 10% 자산 점유율은 전체 자산의 65%를 독식하고 있다. 하위 50%는 1%대다. 계급이 대물림되고 있다. 다주택자 상위 20%는 전체 주택 자산의 약 78%를 보유하고 있다. 급여생활자 중에 연봉이 1억 원이 넘는 사람이 140만 명을 넘었다. 소득이 올라 한국 임금노동자의 평균 연봉은 4500만 원이 됐다. 성장은 자본의 이야기다. 실제 노동자들을 소득순으로 나열해 제일 가운데 있는 사람의 소득인 중위 연봉은 3417만 원(월 284만 원)으로 확 줄어든다. ‘284만원’. 임금노동자는 사실은 한 달에 '284'만 원[3]을 번다. 불평등은 고착화되었다. 기울어진 운동장의 기울기는 갈수록 커지고 있다. =자본을 위한 도약과 성장, 노동개악 말은 “국민 행복”인데, 성장 정책은 자본을 향한다. 힘없고 돈 없는 노동자 민중은 먹고살기가 힘들다. 제대로 된 일자리도 없다. 그러나 이재명 정부는 2026년 1월 21일 신년 기자간담회에서 ‘도약과 성장’을 강조하며 2026년을 대한민국 대도약의 원년으로 만들겠다고 밝혔다. 주요 정책은 △반도체특별법 등 노골적 전략산업 지원과 전략산업 노동권 억압 △노동구조개혁TF 출범 등 전체 노동자를 대상으로 한 노동개악 실행 △지역소멸에 대응 명분으로 자본 특혜를 확대하는 ‘5극 3특 국가균형성장전략’ 추진 △대중의 불만을 달래는 상법개정 등 대대적 주식시장 부양, △규제·금융·공공·연금·교육·노동 6대 핵심 분야에서 구조개악 등이다. 이중 전략산업 지원과 노동개악의 주요 내용은 △AI·반도체 등 전략산업 자본에 대한 노골적 특혜 지원과 규제완화 △전략산업 특별연장근로 확대 등 노동권 억압 △기간제 비정규직 노동자 사용기간 3년 이상으로 확대 △직무급제 확대 등 평생 저임금 구조화, 서열 고착화 등으로 구성된다. 여기에 더해 △일자리는 벤처기업 창업으로 만들고 △저출생과 고령화는 일부 지원 재정을 강화하는 방식으로 국가가 직접 챙기겠다고 한다. =정부, 자본과의 대화로? 특별법으로? 이재명 정부는 이러한 노동개악을 사회적 대화, 노사정 합의를 통해 관철한다고 밝히고 있다. 그 대가로 ‘5인 미만 사업장 근기법 적용확대’ 등 일부 노동권 확대 방안을 제시하고 있다. 그런데 이재명 정부의 첫 노동정책 사업이었던 노조법 2조·3조 개정은 권리를 축소하는 시행령 탄압과 함께 집행되었다. 이뿐 아니라 노동자이나 근로기준법조차 적용받지 못하는 특수고용, 플랫폼, 프리랜서 노동자의 노동기본권에 대하여 근로기준법 확대 적용, 최저임금법 확대 적용이 아닌 ‘특별법’을 들고나왔다. 김영훈 장관이 올해 노동절(5.1) 이전 입법을 함께 완료하겠다는 ‘근로자 추정제’는 "근로자 개념을 넓히는 것은 아니"라고 거듭 강조하고[4] 있다. 정부는 자본의 요구에 응답해 특고·플랫폼 노동자에 대한 근로기준법 적용제외, 노동3권 박탈을 영구화하는 가짜 노동권 확대 정책을 펼쳐 열악한 노동자들의 분노를 통제하고자 한다. =윤석열에 이은 이재명 이재명 정부와 자본은 역대 정부, 자본가계급과 하나도 다를 게 없다. 생산영역에서 노동자를 더 많이 착취하기 위하여 친자본 정책과 더불어 기존 노동법 개악에서 노동자들의 저항을 회피할 수 있는 지침과 시행령 정치로, 특별법으로 노동조건을 악화시키며 노동기본권을 박탈하는 것이다. 사회 재생산에 대한 정부와 자본의 책임을 노동자민중에게 떠넘기고, 특히 여성에게 일터와 집에서의 이중굴레를 여전히 강요하고 있다. 탐욕으로 심화한 지역의 불균등성을 저출생, 지방소멸 대책은 자본에게 특혜를 주며 노동권과 노동자민중의 제반 권리를 침해하는 각종 규제 완화 특구 조성이다. 불평등의 구조를 강화하고 저항을 무력화하는 정책에 한국노총뿐 아니라 민주노총이 손잡고 있다. 자본가계급과 상층의 노조 관료가 손잡고 노동자 민중의 권리를 후퇴시키게 되면, 가장 열악한 처지에 있는 여성의 권리는 더 후퇴한다. 여성, 성소수자, 장애인, 이주노동자 등 사회적 약자가 기울어진 운동장의 바깥으로 더 밀려나게 되는 것이다. 4. 여성 노동자의 이중굴레, 차별과 억압을 외면하는 이재명 정부 =깊은 구조적 성차별, 여성이 겪는 차별과 고통의 무게 한국의 구조적 성차별은 백번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한국의 여성 노동자는 1,300만 명이 넘는다. 임금노동자는 1천만 명 수준이고 노동자의 이름을 빼앗긴 특수고용, 플랫폼, 프리랜서, 가사사용인 노동자가 최소 3백만 명으로 추정된다. 노동자 민중으로 살아가는 여성은 한 줌 자본가계급을 제외하고 세상의 절반이다. 그러나 가부장적 자본주의 사회는 여성에게 일터에서는 더 적은 임금의 초과 착취를, 집에서는 무급 가사돌봄 노동을 강요함으로 생산과 재생산 영역에서 더 차별받게 만들고 있다. -한국은 2024년을 기준으로 33년째 OECD 국가 중 남녀 임금 격차 1위다. 성별임금격차는 OECD 평균이 11%인 반면 한국은 30% 수준이다. 비유하자면, 남성 노동자가 284만 원(중위소득)을 벌 때, 여성 노동자는 199만 원(최저임금)을 버는 것이다[5]. 저임금노동자는 남성에 비해 여성이 2배나 많다[6]. 남성 노동자는 3명 중 1명이 비정규직이고, 여성은 2명 중 1명이 비정규직[7]이다. 소위 ‘여성이 하는 일’, 여성 다수 직종은 저임금이다. 노동자 2명 중 1명은 직장에서 성차별 경험[8]했다. 여성 노동자의 76% “직장 내 승진·배치 차별 있다”고 답했다. 경력단절을 보여주는 M자 곡선이 줄었다고는 하나, 여성 10명 중 6명 경력단절 경험했고, 결혼·출산을 주요 원인[9]으로 꼽았다. 맞벌이 부부라도 여성이 남성보다 집안일을 112분 더 한다. 여성은 노인이 되어서도 남성보다 40% 가난하다. 개인의 소득격차 원인 1위는 “성별”[10]이었다. 여성 3명 중 1명은 살면서 1번 이상의 여성폭력을[11] 겪는다. 딥페이크 성착취 등 사이버 성범죄는 전년대비 50%나 급증했다. 2021년에 낙태죄가 비범죄화되었는데도 아직 안전하고 건강보험이 적용되는 임신중지가 허용되지 않고 있다. 게다가 한국은 OECD 국가 중 아직도 포괄적 차별금지법이 없는 두 나라 중 한 곳이다. 이러한 실상은 한국 사회의 구조적 성차별이 얼마나 깊고 심각한지를 보여준다. 한 가지 눈여겨봐야 하는 통계가 또 있다. 최근 세계보건기구(WHO) 사망통계 등을 분석한 연구의 의하면 한국 20~39세 여성의 자살률은 세계에서 가장 높다. 자본주의 이데올로기가 강화되면서 극우세력의 동시 성장으로 여성 혐오, 성소수자 혐오, 이주민과 장애인 혐오도 부추겨지고 있다. 여성이 겪는 고통은 숫자로 다 표현되지 않는다. 전쟁 때보다 낮은 한국의 출생률,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성별 임금격차, 청년 N포 세대의 절망에 이재명 정부는 응답하지 않고 있다. 여성에게 착취와 억압을 강요하는 가부장적 자본주의 구조를 고치기는커녕 고착화를 밀어붙이고 있다. =남성 역차별 해소가 ‘이재명’표 성평등 민주주의? 이재명 정부의 젠더정책 1호는 ‘남성 역차별 해소’를 성평등가족부의 업무로 주문한 것이다. 윤석열이 ‘여성가족부 해체’하겠다는 논리나 여가부를 존속시켰지만, ‘남성 역차별 해소’가 필요하다는 논리는 별반 다르지 않다. 포괄적 차별금지법은 일언반구도 없다. 사회의 차별을 인정하고 차별 없는 세상을 추구한다는 가치조차 법으로 명시하기를 외면하고 있다. 성별 정체성과 성적 지향이 차이만 해도 현실에서 차별과 혐오의 대상이 된다. 성소수자의 97.1%가 한국 사회를 살기 좋지 않다고 느낀다. 성소수자 노동자는 4명 중 1명이 ‘일터 내 차별’로 우울증을 앓고 있으며, 이는 평균보다 4배나 높은 수치다. 성소수자는 노인이 되어서도 빈곤·질병·고독에 돌봄의 소외까지 일생을 차별받는다. ‘남성 역차별’ 언급부터 여성 혐오, 성소수자 혐오 선동을 부채질하는 이재명 정부는 AI는 강조하면서 날로 늘어나는 디지털 성착취 범죄에는 이를 막기 위한 지원책이 턱없이 부족하다. ‘디지털성범죄 피해 통합지원단’ 운영 예산은 쥐꼬리만 하다. 스토킹 범죄는 전년보다 12.3%나 증가했고 여성 10명 중 2명이 친밀한 관계의 폭력피해를 겪고 있다. ‘국민 행복과 안전’을 말하면서 비동의강간죄 도입, 포괄적 성교육 의무는 도입되지 않고 있다. A학교 지혜복 교육노동자가 아직 학교로 돌아가지 못한 현실은 정부가 젠더폭력으로부터 안전한 일터와 거리, 학교, 온라인 공간을 만들기 위해 일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준다. =일터의 성차별 해소 ‘하는 척’만 하는 정부 성별 임금 격차 해소를 위한 고용평등 임금공시제를 500인 이상 민간기업에 2027년부터 도입한다고 밝혔다. 여성 노동자 2명 중 1명은 10인 미만 소규모 사업장에 종사한다. 정부는 성차별 임금 실태를 드러내는 것조차 제한한다. 일터의 성차별은 임금뿐 아니라 채용, 승진, 직무, 노동안전 등 모든 분야에 걸쳐 있으나 이러한 현실을 감추려 한다. 고용노동부의 여성 일자리 등 성평등한 노동정책을 담당하는 부서인 여성고용정책과를 폐지했다. 일터의 성차별에 대해 다룰 유일한 부서를 정부가 없앤 것은 일터의 성평등을 노력할 의지가 거의 없다는 뜻이다. 여성·노동단체들이 노동부 내 전담부서 마련을 촉구하는데도 변화는 없었다. 일터의 성차별에 대한 고용노동부 정책은 출산과 육아에 대한 약간의 지원 제도인데 현장에는 이러한 제도도 사용할 수 없는 노동자가 더 많다. 학교급식법 개정안이 지난 1월 통과되었다. 많은 여성노동자가 폐암으로 죽고 나서야 마련된 법이다. 그러나 수많은 사업장의 급식노동자에게는 해당하지 않는다. 여성 노동자의 건강권은 산재신청 신청과 보장 강화, 생리휴가 유급화, 산업안전의 성평등 기준 적용, 상병휴가와 수당 도입, 노조할 권리 보장 등으로 다양하게 제기될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정부 정책은 없다. 성평등가족부는 폐지되지 않았으나, 다른 부처에 비해 예산과 권한이 빈약한 건 그대로다. 예산은 전체 정부 예산의 0.2% 내외(2026년 2조 87억 원으로 0.27%)다. 그조차도 대부분(80% 이상)이 아이돌봄, 한부모 가족 지원, 청소년 등 '가족 및 청소년 정책'에 사용된다. 그러니 실제로 성평등과 여성의 권리 보장 등 여성 정책사업 비중이 작다. 성차별/성희롱 사건에 대한 부처의 실체적 조사권이 없다. 이제는 ‘남성 역차별’ 업무까지 떠맡았다. 성폭력 피해를 입었거나 한부모 가정 등 더 열악한 여성에게 일시적 지원 정책 등에 그치고 있다. 정부는 ‘ILO 190조 괴롭힘 협약’ 비준하겠다고 했지만 감감무소식이다. 190호 협약은 근로자의 계약 형태와 관계없이 일터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신체적ㆍ정신적ㆍ성적ㆍ경제적 해를 끼치는 행위와 관행을 금지하는 내용이다. 가사사용인, 특수고용·플랫폼·프리랜서 여성 노동자를 포함해 일터에서 차별당하거나 괴롭힘 피해를 겪는 사안을 실질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근거가 되고 근로기준법, 산업안전보건법 등 노동법 개정 투쟁과 노조할 권리 보장과도 연결되니 정부는 이를 회피하고 일터법 제정 등으로 법적 실효성을 무력화하려 한다. 정부는 일터의 성차별에 대해 자본을 규제하거나 어떠한 책임도 지우지 않으려 한다. =이재명 정부의 돌봄은 ‘윤석열 정부의 돌봄산업화 AI 버전’ 사람이 살아가는 데 필수적인 가사돌봄을 개인에게 떠맡기고 시장화하여 국가의 일정한 지원과 정책으로 이용 비용을 낮추는 방안만 찾고 있다. 노인이나 질환자 돌봄의 요양보호사에 저임금 이주노동을 투입하기 위한 시범사업을 진행 중이다. 가사사용인은 근로기준법상 노동자에게 계속 제외되어 있다. 서울시사회서비스원은 재설립되지 못하였다. 정부는 가사돌봄에 대한 공공성, 사회적 책임 강화와 공적 일자리를 마련을 외면하고 있다. 공공병원 설립과 공공 의료와 돌봄 강화, 건강보험 국고지원 확대 정책과 예산이 없다. 노인과 장애인으로 축소한 돌봄통합지원법을 4월부터 시행하는데 그마저도 국가 돌봄 책임 강화와 거리가 멀다. 국고 예산[12]과 지원인력이 빈약하여 말뿐인 정책이 되고 있다. 장애인은 시민으로 이동하는 권리를 외면당하고 있고 최저임금 적용에서 제외하는 근로기준법 7조는 바뀌지 않았다. 정부는 장애인건강권법 2017년 시행 이후 9년만에 최근 장애인건강보건관리 종합계획을 수립했으나 구체적으로 의료서비스를 종합할 체계가 없는 나열식 수사라는 평가다. 장애인의 삶과 노동, 돌봄을 연결하는 구상은 없다. 세계적으로 유래를 찾을 수 없는 한국의 초저출생, 국가 소멸 예고에 이재명 정부는 인구 컨트롤타워 신설하고 대통령이 직접 위원장을 맡는 저출산·고령화 대책 기구(인구미래부)를 신설했다. 노동력 제공 인구를 확보하기 위해 이성애 정상가족 중심으로 출산과 육아에 일정한 경제적, 제도적 지원을 추가하는 정책으로 일관하고 있다. 여전히 구조적 성차별의 원인은 손대지 않고 있다. 일터의 성차별 해소, 비정규직 철폐와 최저임금 대폭 인상, 공공 돌봄 일자리 확충 등은 정책에도 예산에도 없다. 그저 주로 여성이 전담하는 무급노동이자 개인이 시장에서 거래하는 가사돌봄 정책, 저임금-무권리 저평가 정책이 유지될 뿐이다. 그러니 이재명 정부의 돌봄 정책이 ‘돌봄 로봇’이 추가된 걸 빼면 윤석열 정부 정책과 똑같다는 비판은 과할 게 없다. 로봇을 도입해 ‘공공 로봇 개’가 장애인이나 교통약자의 이동권을 지원하고, ‘공공 아틀라스’가 아이들의 통학길을 도와주겠다는 구상이 아니다. =전쟁과 기후위기 등의 반동적 정책으로 성차별 강화 한국의 국방비는 GDP 대비 세계 5위 수준이다. 전쟁 중인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그리고 사우디아라비아와 미국(3.4%)에 이어 2.8%를 차지한다. 이는 영국, 중국, 일본보다 높은 수준이다. 그런데 정부는 2026년 국방비를 전년 대비 8.2% 증가 더 증액했다.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집단학살에 협력하고, 가자 평화위원회 참가까지 저울질하면서 이재명 정부는 ‘실리 외교’를 내세워 팔레스타인 집단학살에 가담하고 제국주의 전쟁의 위기를 부추기고 있다. 전쟁은 구조적 폭력으로 노동자민중에게, 특히 여성에게 더 많은 희생을 강요한다. 전쟁 무기로 돈을 더 벌어 한국의 GDP가 올라가면 젠더차별이 해소된다고 주장하는 건가. 이재명 정부는 기후정의를 내던졌다. 2025년 11월 11일 2035년 온실가스 53% 감축을 결정했다. 신규 핵발전소 2기 건설 추진을 발표했다. 이는 기후위기 완화와 온실가스 고배출 국가로서의 책임을 방기하는 것이다. 이미 시작된 석탈발전소 폐쇄에 노동자들의 고용과 지역의 생존권 보장 대책을 마련하고 있지 않다. 석탄발전소에 일하는 비정규직 남성 노동자의 고용 문제는 대두되나, 급식과 청소일을 해온 여성 노동자의 고용은 제대로 드러나지 않는다. 기후위기는 경제적 불평등을 더 심화하고 공공 서비스 축소로 인한 돌봄의 위기로 이어진다. 난민과 이주민 등에 인종화된 폭력, 기후위기 부정론을 선동하고 사회적 혐오를 부추기는 극우세력에 의한 민주주의의 위기, 강제 이주와 분쟁으로 인한 폭력과 성폭력 증가 등을 낳는다. 여성과 성소수자가 빈곤과 혐오에 가장 취약해지는 것이다. 자본가 살리기를 위한 탐욕의 기후부정의 정책은 구조적 성차별을 동시에 강화하고 있다. 5. 지금 바로 여기에 실질적 성평등을! 싸우는 여성 노동자가 세상을 바꾼다! 2023년 덕성여대 청소노동자들이 준비했던 최저임금 30%인상을 위한 여성 노동자 파업 시동은 2024년 3월 8일 국제여성의날, KEC지회와 건강보험고객센터지부 여성 노동자의 선도적 파업과 많은 여성 노동자, 여성 활동가, 성소수자 동지들의 단결로 한국에서 첫 여성파업을 이뤄냈다. 이후 내란 광장의 한복판에서 여성과 성소수자, 노동자, 미조직 청년 노동자의 윤석열 몰아내고 평등 세상을 만들자는 열망으로 2025년 여성파업을 일으켰다. 아직 여성파업의 힘은 작고, 노동자 민중의 구조적 성차별에 깨부수고 가부장적 자본주의를 뒤엎기 위한 투쟁도 부족하다. 여성 노동자에게 권리, 민주주의, 평등은 여전히 멀리 있다. 하지만 우리가 처한 현실이 매일매일 우리는 투쟁으로 내몰고 있다. 가부장적 자본주의는 여성 억압의 가해자다. 이에 우리는 노동자로 살아가는 대다수 여성과 성소수자, 이주민, 장애인의 목소리로 저항한다. 모든 착취와 억압, 차별과 혐오에 반대한다. 절박한 우리의 삶은 선거로, 시혜로, 대화로 가부장적 자본주의의 착취와 억압이 사그라들기를 기대할 수 없다는 증거다. 지금 바로 여기에, 실질적 성평등을! 착취와 억압으로 얼룩진 세상, 싸우는 여성 노동자가 세상을 바꾼다! 비록 작은 힘이더라도, 여성파업으로 이재명 정부와 자본의 착취와 억압에 함께 맞서자. 3월 8일, 단결의 힘을 보여주자. 여성 노동자가 앞장서서 2026년 정부와 자본에 맞선 투쟁의 포문을 열자. 평등세상으로 한 걸음 나아가자! [토론회 다시 보기] https://www.youtube.com/live/544nk3bGaFw [1] 서울대학교 통일평화연구원 이문영 교수 [2] 2025년 달러 기준 GDP는 0.9% 감소 예상 [3] 국세청, 2024년 귀속 근로소득 신고 자료 [4] 오민규, 노동자 개념 안 다룬 'K-근로자 추정제'…알맹이 빠진 제도 개혁의 함정([오민규의 인사이드경제] 유럽의 고용관계 추정제 vs 한국식 모방 입법, 프레시안26.02.20) [5]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따르면 2024년 기준 한국 정규직 여성의 중위소득은 남성보다 29.0% 낮다. [6] 한국여성정책연구원, 성별 임금 격차 관련 성인지 통계(2025.08.31.) 한국 저임금노동자 비율은 지난해 여성 23.8%, 남성 11.1%로 여성이 남성에 비해 저임금 노동에 2배 이상 더 많이 종사한다. [7] 한국노동사회연구소, 비정규직 규모와 실태 보고서 2025-16호(2025.12.01.) 통계청의 ‘경제활동인구조사 부가조사’(2025.8)를 분석한 결과, 남자는 정규직이 796만 명(66.6%), 비정규직이 399만 명(33.4%)으로 정규직이 2배 많다. 여자는 정규직이 516만 명(49.3%), 비정규직이 530만 명(50.7%)으로 비정규직이 조금 많다. 남성 비정규직보다 여성 비정규직이 131만 명 많다. [8] 직장갑질119, 직장인 1000명 조사(2025.05.18) [9] 민주노동연구원, ‘고용상 성차별 경험과 성별 임금 격차 인식 관련 설문조사’(2025년4월) [10] 경제개발협력기구 OECD, ‘가진 자와 못 가진 자-기회의 격차를 줄이는 방법’ 보고서(2025.09.22.) 가계소득에서 기회 불평등의 60% 이상은 부모의 사회·경제적 환경에서 비롯되었고, 개인 소득 차이를 설명하는 가장 큰 요인은 성별이었다. [11] 성평등가족부 ‘2024년 여성폭력 실태조사(2025.04.24) [12] 사업비가 91억 원(529억→620억)으로 최종 증액되었고 모든 지자체에 나누도록 결정됨. 지자체당 사업비(국고기준)는 평균 2억 9천만 원에서 2억 7천만 원으로 2천만 원이 줄어드는 꼴이 되었다. /* 스크롤 여백만 주고, 화면에는 안 보이게 */ .ftn-target { display: inline-block; /* 줄바꿈 안 생김 */ width: 0; height: 0; scroll-margin-top: 200px; } document.addEventListener("DOMContentLoaded", function () { // name="_ftn1", name="_ftn2", name="_ftnref1" ... 전부 대상 document.querySelectorAll('a[name^="_ftn"]').forEach(function(a) { var idValue = a.getAttribute("name"); // 이미 같은 id의 요소가 있으면 또 만들지 않음 if (!document.getElementById(idValue)) { var span = document.createElement("span"); span.id = idValue; span.className = "ftn-target"; a.parentNode.insertBefore(span, a); } }); }); /* 본문 각주 번호 + 아래쪽 각주 번호 색 지정 */ a[href^="#_ftn"] sup, a[href^="#_ftnref"] sup { color: #BF202D; } /* 밑줄이 보기 싫으면 */ a[href^="#_ftn"], a[href^="#_ftnref"] { text-decoration: none; } /* 마우스 올렸을 때 살짝만 강조하고 싶으면 (선택) */ a[href^="#_ftn"]:hover, a[href^="#_ftnref"]:hover { text-decoration: underline; } /* 페이지 전체가 오른쪽으로 넘치지 않게 */ html, body { max-width: 100%; overflow-x: hidden; } /* 본문 영역 폭 강제 고정 + 긴 단어/문장도 줄바꿈 */ #bo_v_con, .bo_v_con, .cke_editable, article { max-width: 100%; overflow-wrap: break-word; word-wrap: break-word; /* 구형 브라우저용 */ } /* 워드에서 붙은 이미지/표가 화면 밖으로 안 나가게 */ #bo_v_con img, #bo_v_con table, .bo_v_con img, .bo_v_con table, .cke_editable img, .cke_editable table, article img, article table { max-width: 100% !important; height: auto; } /* 워드가 p, span에 폭을 박아놓은 경우 강제로 해제 */ #bo_v_con p[style*="width"], #bo_v_con span[style*="width"], .bo_v_con p[style*="width"], .bo_v_con span[style*="width"], .cke_editable p[style*="width"], .cke_editable span[style*="width"], article p[style*="width"], article span[style*="width"] { width: auto !important; max-width: 100% !important; } -
[성명] 미국 제국주의와 이스라엘은 이란 민중에 대한 공격을 즉각 중단하라!2월 28일, 이스라엘과 미국은 이란에 대한 대규모 공습을 가했다. 오늘 오전 이란 이슬람공화국 지배자 하메네이를 살해했다고 밝혔고, 이란 통신사도 하메네이의 죽음을 보도했다. 최소 200대 이상의 전투기가 참전했고, 500개의 표적을 향해 공격이 자행됐다. 미국은 공습의 목표가 이란의 핵시설 및 탄도미사일 체계 타격을 넘어, 정권교체임을 노골적으로 밝혔다. 테헤란 시를 비롯해 수많은 민간거주시설이 폭격당했다. 하메네이 외에도 이슬람 혁명수비대 사령관 모하마드 파크푸르, 국방장관 아미르 나시르자데, 하메네이 최고 지도자 측근인 알리 샴카니 등이 살해된 것으로 알려졌다. 이란 적신월사에 따르면 이번 공습 이후 이란 내 최소 201명이 사망했고, 747명이 부상을 당했다. 이란 31개 주 중 24개 주가 공격을 받았다. 수많은 민중들이 이번 공격에 살해됐다. 남부 호르모즈간 주 미나브에 위치한 여학생 초등학교를 겨냥한 공격으로, 다수의 초등학생을 포함해 최소 108명이 사망했다. 파르스 주 라메르드 시 체육관도 공격당해, 어린이들을 포함해 최소 15명 이상이 사망했다. 트럼프는 하메네이 살해 후 입장을 내며 뻔뻔하게도 자신이 이란 국민들에게 자유를 가져다주었다고 얘기하지만, 그는 중동에 대한 제국주의 야욕을 위해 어린이들마저 무참히 살해한 학살자다. 한국은 미국과 이스라엘의 제국주의 침공앞에 침묵하고 있다. 이미 한국정부는 트럼프가 만든 기만적인 ‘(가자) 평화위원회’에 지난 20일 옵저버로 회의에 참석하고, “가자지구 평화 증진을 위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주도적 노력을 지지해왔다”고 밝히며 미국의 중동 패권 강화 행보를 승인하고, 나아가 평화위원회 가입을 적극 검토하고 있다. 미국은 이스라엘과 함께 가자를 폐허로 만들어놓고, 그 이름도 기만의 극치를 보여주는 ‘평화위원회’를 통해 팔레스타인에 대한 제국주의 수탈과 억압을 정당화하려 한다. 한국정부는 이란에 대한 제국주의 침략 앞에 침묵하고, 평화위원회 가입은 적극 검토하며 제국주의 학살과 수탈에 공모하고 있다. 유럽연합은 긴급 외무이사회를 소집해 이란 정권의 이웃 국가들에 대한 무차별 공격을 규탄했다. 캐나다는 성명을 통해 “미국이 취한 조치를 지지한다”고 밝혔고, 호주 총리는 SNS에 미국의 공격을 지지하는 글을 남겼다. 서구 제국주의 세력들은 미국과 이스라엘의 제국주의 침략이 가져온 끔찍한 결과에 대해 동조하거나 침묵하며, 중동 전체를 전쟁으로 몰고가는 데 공모하고 있다. 아랍에미리트 군주국은 이란의 보복에 대해 응징할 권리를 보유한다고 밝혔다. 모로코 정권은 아랍에미리트, 카타르 등 “형제 아랍국가들과 연대”하겠다며, 이 정권들이 이란에 취하는 모든 ‘정당한 조치’를 지지한다고 밝혔다. 아브라함 협정을 통해 미국과 이스라엘의 중동패권을 승인하는 댓가로, 모로코는 서사하라 민족들에 대한 식민지배를, 아랍에미리트는 유럽제국주의와의 긴밀한 연계 속에서 수단에 대한 지배와 수탈을 용인받았다. 이 반동적 아랍 국가들은 미국과 이스라엘의 제국주의적 침략을 외면하며 이득을 얻고, 팔레스타인 집단학살을 지속시키는 또 다른 공범들이다. 제국주의자들은 이란을 침공할 어떤 권리도, 자격도 없다. 이들은 침략의 구실로 이란의 반동적 신정체제를 들먹이며 ‘자유를 가져다주겠다’고 지껄인다. 그러나 미국은 모로코, 아랍에미리트, 사우디아라비아 같은 나라들이 전제적 정치체제를 갖고 자국민과 주변 식민지 민중들을 억압하는 것은 적극 지원한다. 이들의 목적은 오직 자신에게 굴종하는 정권의 수립일 뿐, 아랍 민중의 삶과 민주주의에는 아무런 관심도 없다. 올해 초 하메네이 정권에 맞선 대규모 파업과 시위에서, 이란 노동자민중들은 줄곧 “미국 제국주의는 이란으로부터 손 떼라”고 요구해왔다. 미국의 지배개입은 반동적 하메네이 정권의 폭력과 탄압에 구실을 제공하고, 이란 민중들에게는 더욱 가혹한 제국주의의 멍에만을 강요한다. 이란의 반동적 신정체제를 무너뜨리고 해방사회로 전진하는 것은 오직 이란 노동자민중들의 투쟁을 통해 가능하다. 미국은 이란 정권교체를 통해 중동에서의 제국주의 통제를 강화하고자 하며, 그 최종 목적은 중국과의 패권대결에서 우위를 점하는 것이다. 이번 이란 공격으로 미국 제국주의는 중국과의 전면전을 향해 한걸음을 더 내딛었다. 오늘날 중동 지역에서 벌어지고 있는 팔레스타인 집단학살, 제국주의 침략과 전쟁은 내일 동아시아에서의 전면전으로 이어질 것이다. 미국과 이스라엘은 이란에 대한 제국주의 침략을 즉각 중단하라! 이란 정권과 독립적으로 제국주의 침략에 맞서는 이란 노동자민중과 연대한다! 노동자민중의 국제연대로 트럼프 정권과 네타냐후 정권을 타도하고, 야만적인 학살과 전쟁을 중단시키자! 2026.03.01. 사회주의를향한전진 -
[후기] 국민건강보험고객센터지부 단식농성 15일차, 계급적 연대로 직접고용 쟁취하자!국민건강보험공단 고객센터 노동자들은 정규직 전환을 위해 6년간 투쟁해왔다. 건보공단의 비정규직화 정책으로 고객센터 노동자들은 십수 년간 불안정한 노동 조건에 시달려왔다. 이들의 투쟁은 한국 노동자의 절반 이상을 옥죄는 비정규직화와 여성 차별에 맞서는 것이다. 오늘(2월 24일)로 김금영 국민건강보험고객센터지부장의 단식 투쟁 15일째를 맞았다. 2월 10일, 국민건강보험고객센터 정규직 전환 쟁취 결의대회 이후 김금영 국민건강보험고객센터지부장이 단식농성에 돌입했고, 오늘로 15일 째 단식농성을 지속하고 있다. 국민건강보험공단 고객센터 노동자들은 십수 년간 매우 불안정하고 열악한 조건에서 일해왔다. 2000년대에 진행된 신자유주의 비정규직화의 흐름속에서, 건보공단 또한 2006년 고객센터 업무를 외주화했다. 정규직 노동자들은 연차에 따른 임금인상을 보장받았지만, 외주화된 고객센터 노동자들은 십년을 일해도 임금은 늘 최저임금 언저리였다. 회사는 노동자들에게 콜수 경쟁을 강요했다. 노동자들은 경쟁에서 좋은 평가를 받아 인센티브를 받으려면 가능한 한 빨리 전화를 끊어야 했다. 콜수 압박 때문에 고객에게 깊이 있고 친절한 상담을 제공하기 어려웠다. 외주하청 비정규직 구조는 노동자의 노동조건뿐만 아니라, 전체 사회의 이익에도 해로운 것이었다. 그러나 (공공부문 비정규직 제로를 약속했던) 문재인 정부부터, 윤석열 정부, 현재 이재명 정부에 이르기까지, 모든 정권이 온전한 정규직 전환을 거부하는 동일한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외주하청 구조가 만연한 고객센터 산업의 노동자 대부분은 여성이다. 고객센터 산업은 외주하청이라는 중간착취 구조를 이용해, 여성 노동력을 초과착취하는 또 하나의 명백한 사례다. 공공기관인 국민건강보험공단(NHIS) 역시 동일한 메커니즘으로 여성노동자를 초과착취하는 데 동참해왔다. 현재 직접고용 협상 과정에서 정부와 국민건강보험공단은 노동자들이 근무해온 연차 인정을 거부하고 있고, 상대적으로 경력이 적은 일부 노동자들에게는 직접 고용을 위해 시험을 치르고 경쟁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반면 노조는 단 한 명도 소외되지 않도록 모든 노동자들의 직접 고용을 요구하고 있다. 김금영 국민건강보험고객센터지부장은 2월 11일부터 무기한 단식 투쟁을 진행하고 있다. 국민건강보험고객센터지부 노동자들의 정규직 전환을 쟁취 투쟁은, 고객센터 산업에서 초과착취당하는 모든 여성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차별을 철폐하는 투쟁, 나아가 모든 비정규직 제도를 철폐하는 투쟁의 일부이다. 이 소중한 투쟁을 엄호하고 계급적 연대투쟁으로 비정규직 철폐, 여성차별 철폐로 나아가자! [English] Instagram에서 이 게시물 보기 사회주의를 향한 전진(@marchtosocialism)님의 공유 게시물 national Health insurance service customer center workers, has fought for 6 years for direct employment. they suffered for dozens of years of precarious working conditions, due to irreguarization by NHIS. their fight is to against this irregularization and discrimination on women, that shackles more than half of workers in South Korea. Today(24th Feb) is 15th day since the start of hunger strike by Union Leader Kim Keum-yeong. Hi I'm dolmeng and I'm here at the Rally for direct employment of national Health insurance service customer center workers, who has fought for 6 years, to abolish irregular working system and win the direct employment, since the previous democratic government. The Customer center workers of national health insurance service, NHIS, has worked for dozens of years at very unstable and precarious conditions. As NHIS has outsourced the job, the workers have got no increase of wage, and only got around minimum wage, even though they have worked for more than 10 years unlike other regular workers in NHIS. The company has forced workers to compete each other, lining them with the quantity of calls they receive. It also made workers difficult to counsel the client in depth and kindly, because workers feel pressured to hang up the call as fast as possible, to get the good grade at the competition, to get incentive bonuses. So this outsourced system is not only bad for working conditions but also bad for the social interest of people. The government, since the previous democratic government of moon jae in, and right wing government Yoon Seok yeol, to now Lee jae-myeong, another domocratic government, all the governments are holding the same position of refusing the direct employment. Most of the workers at customer center industries are women, and the outsourcing system is prevailing in this industry, and it's another obvious example of over-exploiting the women labor using the discriminate structure. NHIS, the public institution, is using the same mechanism to over-exploit women. Now in the negotiation process of direct employment, the Government and NHIS is refusing to acknowledge the years that workers has worked, and they're also insisting that some of the workers with relatively little experience should take exam and compete, to be directly employed. While the union is demanding the direct employment of all workers, leaving no one behind. Today union leader, Kim Keum-yeong, decided to go on hunger strike until the demands are achieved. winning the direct employment of these workers, and abolishing all the irregular working system will be the great step forward for the fight against all discrimination, especially for women irregular workers suffering precarious working condition in customer center industry. March to Socialism will also struggle together. 투쟁! -
[기고] ‘노동자는 혼자가 아니라 하나다’ GM부품물류센터 부당해고 철회 투쟁의 기억도무지 질 수가 없는 기세로 싸워냈던 약 70일간의 부당해고철회 투쟁을 돌아본다. ‘우리는 혼자가 아니라 하나’라는 말이 약간 모순적인 듯 보이면서도 그래서 더 오래 기억에 남았다. 자본에 맞선 노동자의 투쟁은 그 어느 순간에나 전체 노동자의 싸움일 수밖에 없으니, 당신들이 고립되거나 외롭고 힘겹게 싸우도록 놔두지 않겠다는 거. 세종시 연기면 공단로 6에는 ‘한국지엠세종중앙물류센터’가 있다. ‘중앙’물류센터라고는 하지만 국내에 한국지엠 물류센터는 세종시에 있는 것 하나뿐이다. 그간 한국지엠이 차근차근 부품·물류센터를 통폐합해왔기 때문이다. 이곳에서 정비 등에 필요한 부품들이 전국으로 보내진다. 미국 등 해외 수출 업무도 함께 담당하고 있다. 1차 하청업체인 우진물류에서는 120여 명이 일했다. 이 하청노동자들은 20년을 일해도 최저임금을 받을 정도로 열악한 현장을 바꾸기 위해 노동조합을 만들었고, 2025년 11월 파업을 전개했다. 한국지엠은 하청노동자들의 노조와 파업을 파괴하기 위해 업체폐업, 집단해고라는 칼을 꺼냈다. 2025년 12월 31일부로 하청노동자들은 전원해고됐다. 정수유통이란 업체가 새로 왔지만, 노동자들의 고용승계는 한국지엠과의 계약서에 들어가지 않은 내용이므로, 고용승계는 불가능하다고 했다. 20여 년간 수차례 업체가 바뀌면서도 이어져 온 (투쟁을 통해 쟁취해온) ‘고용승계 관행’이 깨졌다. 그 뒤 부당한 해고를 거부하고, 외투 자본인 원청의 횡포에 맞서겠다고 선언한 96명이 물류센터에 남아 싸움을 시작했다. 지역사회를 필두로 한 공동대책위가 구성되었다. 그렇게 한 명의 이탈자도 없이, 해고된 날로부터 현장으로 돌아가는 날까지 단 하루도 물류센터를 비우지 않았다. (1월 16일 저녁, GM와 정수유통의 불법 물량반출을 저지하기 위해 GM부품물류지회 노동자들이 대열을 갖춰 이동하고 있다. - 편집자 주) ‘도급계약 종료’라든가, ‘정리해고’라든가. ‘희망퇴직’도 그렇고, ‘발탁채용’이나 ‘바이아웃’[1]이라는 단어는 얼마나 무해한가. 자본의 언어는 언제나 본질을 흐린다. 해고는 해고일 뿐 다른 무언가가 될 수 없다. 우리는 일터라는 단어 옆에 삶터라는 단어를 놓는다. 하루 열 시간, 열두 시간 머무는 장소가, 생계를 꾸려나가기 위한 노동이, 매일매일 만나고 관계를 쌓는 내 곁의 사람들이, 삶의 주요 구성요소가 아니라면 무어란 말인가? 무엇보다 우리는 노동자다. 그래서 일터는 삶터고 해고는 살인이다. 학연, 지연, 혈연을 따져가며 관계를 맺는 사람이 좋은 사람일 리 없겠지만. 그럼에도 GM부품물류지회에 연대하게 된 이유 중 하나가 지역의 일이기 때문임을 부정할 수는 없겠다. 나는 평생 충청남도 이곳저곳을 오가며 살았고, 지금은 천안에 살고, 세종시 조치원읍에 있는 대학을 나왔다. 아무렴 120명이 집단해고 됐다는 데 ‘동네 주민’으로서 안 나설 수 없지. 늘 (서울을 포함한) 타지로 연대를 다니는 데 익숙한 내게 내 지역의 일에 결합하는 일은 새삼 낯설면서 또 기쁜 일이기도 했다. ‘찢겨진 노란봉투법을 정부로 보냅니다’라는 타이틀을 걸고 진행한 대정부 항의 행동도 한몫했다. 비록 우리 맘에 꼭 맞는 형태의 법안은 아니었지만, 또 나는 소위 ‘노동운동판’에 기웃대기 시작한 지 이제 일 년 갓 넘겼지만, 그간 얼마나 많은 비정규직 하청노동자들이 피눈물을 흘려왔는지 알았기 때문에 너무 간절하고 또 너무 소중한 법이었다. 그럼에도 첫걸음이었다. 암만해도 노동해방 사회가 당장에 도래한다거나 할 수야 없겠지만, 오랫동안 기울어져 있던 무게추를 이제야 되돌려놓는 첫걸음. 원청 한국지엠 모 상무가 지난가을 파업을 준비하던 세종물류센터 노동자들을 만나 ‘진짜 사장 나오래서 나오지 않았으냐’고 말했다고 한다. 수의계약은 늘 해오던 것이니 올해도 정상적으로 이어질 것이고, 이삼 년 뒤에는 정규직이 될 수도 있다고. 그러니 ‘초치지 말라’고. 한달 뒤 한국지엠은 하청노동자 전원에게 해고를 통보했다. 글로벌 자본에게 노란봉투법쯤은 무시해도 좋을 무엇이었는지도 모른다. 백이십 명 노동자들의 삶도, 그들과 연결된 수백 명의 삶도, 고작해야 노동자의 삶이므로, 도무지 고려의 대상이 되지 못했는지도 모른다. 꺼진 불도 다시 보자… 는 표어를 문득 떠올린다. 저들은 하청노동자들의 마음속에 피어난 ‘노동조합’이라는 불길을 꺼트리고 싶었을 것이다. 이건 해고가 아니라 ‘계약 종료’라는 말로, 다만 정 억울하면 ‘발탁채용’이나 ‘바이아웃’ 같은 방안도 고려해보겠다고, 선심 쓰듯 얼버무린 그 같잖은 언사들이 마음속 불꽃에 장작을 집어넣는 줄도 모르고. 작년 이맘때 나는 거통고(금속노조 거제통영고성조선하청지회) 동지들과 ‘무지개 조선소’에서 연대투쟁호를 만들고 있었다. 노동운동판, 이라는 곳에 본격적으로 기웃대기 시작한 계기가 되었던 작업이었다. GM세종물류센터에 상징물 제작 전 사전답사를 온 신유아 동지를 마주쳐, 작업을 함께하잔 제안을 들었을 때 내가 떠올린 것도 무지개 조선소였다. 멋모르고 함께하겠다고 나섰다가 단단히 코가 꿰이고 말았던 그거. 아무렴 그리기나 만들기는 늘 좋아해 왔으니까, 좋아하는 행위를 좋아하는 사람들을 위해 하는데 즐겁지 않을 리가 없다는 확신이 있었다. 물류센터이니만큼 상징물은 지게차가 될 거라고 했다. 동지·연대·고용승계·투쟁·단결·원청교섭·정규직 전환이라고 적힌 일곱 개의 상자를 얹은 지게차. 그리고 파지 골판지를 오려 만든, 백수십여 개의 지게차 모양 피켓들. 작업 기간은 딱 이틀이었다. 일고여덟 명이 이틀 내내 달라붙어 큰 지게차를 만들고, (물류센터 사수조를 제외한) 다른 조합원들은 오전에 시간을 내 피켓을 만들었다. 비정규직이제그만공동투쟁에서 주최하는 1박2일 집회에서 내보이는 걸 목표로, 일정이 빠듯하다고 생각했지만 다행히 무탈하게 완성했다. 피켓은 이틀 내내 꼬박 만들 것을 각오했는데, ‘오후 잔업’을 하지 않겠다는 조합원들의 결의로 순식간에 완성해버렸다. 조합원들이 그림 그리기나 만들기, 꾸미기를 싫어하면 어떡하지, 걱정했던 것이 무색하게도 공대위 동지들을 포함해 모두가 적극적으로 나서주었다. 나는 주로 피켓과 상자 작업을 했는데, 작업을 좀 하다 뒤돌아보면 (조립식) 지게차가 순식간에 턱턱 만들어져있어서 깜짝 놀랐다. 바퀴를 달 때는 고생을 좀 했지만, 노련한 동지들이 이런저런 재료를 가져와 시도해보고, 타카를 박고 덧댈 목재를 자르고 칼집을 내고 스티로폼을 끼워가며 ‘각’을 맞추는 모습을 보면서, ‘일터의 노동자는 무적이구나’ 생각했던 기억이 난다. 일터의 주인은 노동자, 라는 말을 이런 순간에 실감하게 될 줄은 몰랐다. (토지의 주인이든 건물의 주인이든. 계약서상 고용주든 실질적인 사업주든) 소위 ‘소유주’라고 불리는 그 누구를 데려와도 이런 일을 해낼 수는 없을 것이다. 자재의 위치와 용도, 목적과 쓸모를 기억하고 찾아내고 적절하게 배치하는 일. 각각의 자재들이 할 수 있는 역할을 생각해내고 실질적인 가치를 지닌 무언가로 만들어내는 일. 자르고 썰고 잇고 붙이고 결합하고 조립하고 생산하는 일. ‘이렇게 일 잘하고 일 좋아하는 사람들을 쫓아내려 들다니’라는 말을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뱉으면서, 그 순간들에 함께할 수 있어서 얼마나 즐거웠는지. 우리 투쟁의 상징물이 곧 일터의 상징물이라는 거. 자본과 권력이 빼앗으려 했으나 우리 손으로 다시 만들어내서라도 손에 쥔 그거. 조명을 달아 반짝이는 그 주황색 지게차. (1월 16일, 불법 물량반출을 저지한 뒤 GM부품물류지회 조합원들과 연대자들이 지게차를 끌고 이동하고 있다 - 편집자 주) 비록 집회 당일 물량 불법 반출 문제로 또 한참을 싸우느라 우리 계획대로 대오 앞에서 짠하고 점등식을 하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수십 명의 손길이 닿은 그 지게차가 얼마나 예뻐 보였는지. 고작 이삼일이었지만, 하루종일 붙어서 뭘 했다고 괜스레 친밀해진 기분이 드는 것도 좋았다. 점거농성 중이기 때문일까, 매일 동고동락하는 지회 동지들의 관계도 무척 끈끈해진 듯 보였는데 그들 틈에 슬그머니 자리 잡고 같이 웃고 있다 보면 제법 즐거웠다. 나만의 싸움이 아니라는 건 부담일까 위안일까. 노조법 개정안 시행을 코앞에 둔 시점에서 시작된 이 싸움, 여기서 지면 지난 수십 년 애써 만들어낸 노조법 개정안이 유명무실해질지도 모른다든가 하는 게. 때로 내가 힘들고 지쳐서 포기하고 싶은 순간에, 내 옆의 사람이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에 나도 끝까지 가볼 수밖에 없다는 게. 집단과 조직, 단체, 공동체의 조건에 대해서 종종 생각한다. 노동‘조합’은 그중 무엇이어야 하는가, 하는 질문에는 사람마다 생각이 다르겠지만. 그리고 흔히 중앙 내지 본조, 사무처라고 부르는 기관들과 현장의 조직이 지녀 마땅한 성격 또한 다를 테고. 여하간에 나는 현장의 노동조합이 ‘이익집단’이 되지 않기 위해 중요한 건 공동체성이라는 생각이 든다. 규율과 규약, 원칙과 질서, 방향성…. 만큼이나, 우리가 ‘함께’ 싸우고 함께 승리하는 존재라는 자각이. 언젠가 모 대의원 동지가 발언으로 했던 말을 자주 곱씹었다. ‘우리는 혼자가 아니라 하나’라는 말. 어딘가 약간 모순적인 듯 보이면서도 그래서 더 오래 기억에 남았다. 자본에 맞선 노동자의 투쟁은 그 어느 순간에나 전체 노동자의 싸움일 수밖에 없다는 거, 그러니까 당신들이 고립되거나 외롭고 힘겹게 싸우도록 놔두지 않겠다는 거. 지난 12월 말, GM부품물류지회와 공대위가 ‘고용노동부 장관 만납시다!’를 이야기하며 서울 고용노동청을 하룻밤 점거했을 때. 스튜디오 알 동지와 함께 점거 장소에 갔다가, 저녁 집회를 마치고 집으로 갔다가, 다음날 새벽녘에 일어나 출근길 선전전에 함께하러 다시 서울에 올라갔을 때. 노동조합을 만든 지 이제 다섯 달 되었다는, 그래서 노조 조끼가 아직 반들반들하고 깨끗한, 해고를 열흘 앞둔 그들을 만나러 가면서 나는 무엇을 생각했는가. 거기에 왜 가야만 한다고 생각했나. 무엇도 아닌 나를 보여주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게 내가 할 수 있고 해야만 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금속노조도 하물며 민주노총도 아니고, 어디 정당이나 시민단체 소속도 아니고, 딱히 활동가라고 스스로를 칭하지도 않고, 이름 앞에 붙여 마땅한 그 어떤 수식어도 없이 나는 당신들의 싸움에 함께하고 싶었다. 나를 등 떠밀어 그들 앞에 데려다 놓은 것은 오직 양심뿐이다. 자본이 틀렸고 노동자가 옳다는 믿음이다. 이 싸움이 정당하다고, 그러니까 지면 안 된다고 말하기 위함이다. 명절을 약 열흘 앞두고 GM부품물류지회는 한국GM으로부터 해고 철회 및 이후의 고용승계 등을 담은 합의서를 받아냈다. 해고 직후 동지들이 외쳤던 구호가 있다. ‘1월의 어느 날에 현장으로 돌아가자’. 내가 들은 구호 중 제일 낭만적인 구호. 일주일 정도 넘기긴 했지만, 그들은 자신들의 다짐대로 현장으로 돌아갔다. 나도 얼떨결에 여기저기서 축하를 잔뜩 받았다. 내가 뭘 했다고 축하를 받나, 싶은 생각도 없진 않았지만, 승리보고대회에서 지게차를 같이 만들었던 동지가 악수를 청해오며 ‘수연씨, 고생했어요’라고 말했을 땐 솔직히 코가 찡해졌다. 물론 이들의 투쟁은 계속되어야 한다. ‘1차전이 끝났으니 2차전을 시작하겠다’는 동지들의 말마따나, 턱없이 낮은 기본급을 비롯해 바꿔내야 할 현장의 문제들이 있고, 불법 파견 문제도 있고, 직영정비소 폐쇄 등 한국GM 철수설과 관련된 사안들에도 대응해야 한다. 하지만 내 동지들은 잘 싸울 것이다. 도무지 질 수가 없는 기세로 싸워냈던 약 70일간의 부당해고철회 투쟁을 겪었으니까. 우리는 함께 싸우는 법을 알고, 함께 승리하는 법도 안다. GM부품물류지회 동지들이 가장 좋아했고, 가장 많이 외친 구호는 이거였다. 단결하는 노동자는 패배하지 않는다. 그들은 구호가 선언에 불과하지 않는다는 걸 증명해냈다. 단결로 틔우고 연대로 지켜낸 불씨는 이제 막 타오르기 시작했다. [1] 바이아웃은 본래 주식시장에서 기업의 지분을 다량으로 인수하거나 아예 기업을 통째로 인수하는 것을 뜻하는 말인데, ‘돈을 주고 통제권을 장악한다’는 의미가 파생하여 임대계약, 고용관계 등에서 돈으로 잔존권리를 사들여 임대기간을 조기종료하거나, 고용의무를 청산하는 것을 뜻하는 말로도 쓰이게 됐다. 즉 GM부품물류센터의 사례에서 ‘바이아웃’은 돈을 주고 고용관계를 청산하는 것을 뜻하며, 실질적으로는 희망퇴직과 동일한 의미이다. /* 스크롤 여백만 주고, 화면에는 안 보이게 */ .ftn-target { display: inline-block; /* 줄바꿈 안 생김 */ width: 0; height: 0; scroll-margin-top: 200px; } document.addEventListener("DOMContentLoaded", function () { // name="_ftn1", name="_ftn2", name="_ftnref1" ... 전부 대상 document.querySelectorAll('a[name^="_ftn"]').forEach(function(a) { var idValue = a.getAttribute("name"); // 이미 같은 id의 요소가 있으면 또 만들지 않음 if (!document.getElementById(idValue)) { var span = document.createElement("span"); span.id = idValue; span.className = "ftn-target"; a.parentNode.insertBefore(span, a); } }); }); /* 본문 각주 번호 + 아래쪽 각주 번호 색 지정 */ a[href^="#_ftn"] sup, a[href^="#_ftnref"] sup { color: #BF202D; } /* 밑줄이 보기 싫으면 */ a[href^="#_ftn"], a[href^="#_ftnref"] { text-decoration: none; } /* 마우스 올렸을 때 살짝만 강조하고 싶으면 (선택) */ a[href^="#_ftn"]:hover, a[href^="#_ftnref"]:hover { text-decoration: underline; } /* 페이지 전체가 오른쪽으로 넘치지 않게 */ html, body { max-width: 100%; overflow-x: hidden; } /* 본문 영역 폭 강제 고정 + 긴 단어/문장도 줄바꿈 */ #bo_v_con, .bo_v_con, .cke_editable, article { max-width: 100%; overflow-wrap: break-word; word-wrap: break-word; /* 구형 브라우저용 */ } /* 워드에서 붙은 이미지/표가 화면 밖으로 안 나가게 */ #bo_v_con img, #bo_v_con table, .bo_v_con img, .bo_v_con table, .cke_editable img, .cke_editable table, article img, article table { max-width: 100% !important; height: auto; } /* 워드가 p, span에 폭을 박아놓은 경우 강제로 해제 */ #bo_v_con p[style*="width"], #bo_v_con span[style*="width"], .bo_v_con p[style*="width"], .bo_v_con span[style*="width"], .cke_editable p[style*="width"], .cke_editable span[style*="width"], article p[style*="width"], article span[style*="width"] { width: auto !important; max-width: 100% !important; } -
[한노운사 연재 6회] 2부 전진과 격돌 (1988-1998) [시대배경] 군사파시즘에서 신자유주의 질서로1987년 노동자대투쟁 이후 민주노조운동은 폭발적 성장을 이어갔다. 정권과 자본의 탄압에 맞서 지역별·업종별 연합조직을 건설하고 전노협을 건설해 냈다. 민주노조운동은 역동적인 연대투쟁과 지역·전국 총파업을 통해 스스로를 지켜냈다. 민주노조운동은 중소 제조업을 넘어 대기업과 공공부문으로 확대됐고, 마침내 1995년 민주노총을 건설했다. 그런데 민주노총 건설 과정에서 전투적·변혁적 세력을 대신해 타협·개량주의 세력이 주도권을 장악했다. 1996~98년 노동법을 둘러싸고 양대 계급의 대격돌이 펼쳐졌다. 민주노총의 위력적인 총파업이 한국사회를 한 달 동안 뒤흔들었으나 성과는 초라했다. 곧바로 닥친 IMF 외환위기를 빌미로 정리해고제와 근로자파견제가 마침내 도입됐다. 1996~98년의 대격돌에서 노동자계급이 패배하면서 비정규직 전면화로 가는 길이 열렸다. 이전 편 보기 2부 전진과 격돌 (1988-1998) [시대배경] 군사파시즘에서 신자유주의 질서로 [1] 1988~89년 민주노조운동의 폭발적 성장 [2] 1990~91년 전노협 건설과 민주주의 투쟁 [3] 민주노총으로 가는 길 [4] 1996~98년 노동법 대격돌 [시대배경] 군사파시즘에서 신자유주의 질서로 한국 자본주의의 정치·경제·사회 체제는 1980년대 후반에서 1990년대 후반까지 10여 년의 과도기를 거쳐 군사파시즘에서 신자유주의 질서로 이동했다. 이전 시기 30여 년 이상 한국 자본주의를 지탱하던 여러 요소들이 한꺼번에 큰 격변에 휩싸인 결과였다. 1989~91년 소련·동유럽 붕괴와 함께 세계적으로 냉전 질서가 해체되고 신자유주의 질서로 대체됐다. 국가 지원 아래 비대하게 성장한 독점재벌이 국가와의 관계를 재정립하며 세계 시장으로 진출했다. 1987년을 기점으로 노동자계급이 대규모로 진출하고 부르주아 민주주의가 확산됐다. 이 과도기 동안 자본은 과거의 병영적 노동통제를 대신하여 신경영전략과 사회적 합의주의를 추진했다. 또한 신자유주의 질서로 본격 진입을 대비하며 대대적인 노동법 개악에 나섰다. 1997년에 닥친 IMF 외환위기는 신자유주의 질서로 이행하는 결정적 전환점이 됐다. 1) 냉전종식과 신자유주의 질서의 세계화 1985년 소련공산당 서기장이 된 고르바초프는 소련과 동유럽의 이른바 ‘사회주의’ 국가들에 누적된 모순을 타개하고자 페레스트로이카(개혁)와 글라스노스트(개방) 정책을 폈지만, 공산당 일당독재 체제의 몰락을 피할 수 없었다. 1989년 8월 폴란드에 비공산당 정부가 들어섰고, 11월 동·서 베를린을 가르던 장벽이 무너졌으며, 1990년 10월 동독이 서독에 흡수 통합됐다. 마침내 1991년 12월 소련이 해체됐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줄곧 지속되던 미국 주도 서방진영 대 소련 주도 동방진영의 냉전이 서방진영의 승리로 종식됐다. 미국은 세계의 유일 패권국가가 됐다. 미국은 냉전 시기 대척점에 서 있던 한국을 특별 관리했다. 한편으로 정치군사적 종속관계를 지속적으로 강요했지만, 경제적으로는 상당한 특혜를 제공했다. 한국에게 유례없는 규모의 경제·군사원조를 제공했고, 한국 자본의 빠른 성장을 돕기 위해 자국 시장도 열어주었다. 그러나 냉전의 종식과 함께 이러한 특별대우도 끝났다. 한국은 냉전 체제에서 누렸던 지정학적 특권을 더 이상 유지할 수 없게 됐다. ‘친미 쇼윈도’로 보호·육성되던 한국 자본은 세계시장의 무한경쟁에 냉혹하게 내던져졌다. 때로는 미국 정부, 국제통화기금(IMF), 세계은행과의 양자 협상에서, 때로는 GATT와 세계무역협정(WTO)의 다자 협상에서 압력이 줄기차게 전달됐다. 그 내용은 똑같았다. 세계를 뒤덮은 신자유주의를 수용하여 한국 경제를 개방하라는 것이었다. 마침내 1997년 IMF 외환위기는 신자유주의 질서 정립을 위한 전면적 구조조정을 한국 사회에 강요했다. 한국도 이러한 전 지구적 전환에서 예외가 될 수 없었다. 여러 신흥시장처럼 한국도 거대한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물결에 휩쓸려 들어갔다. 1990년대 내내 한국 정부는 경제를 자유화하라는 국제적 압력에 시달린다. 압력은 여러 방향에서 들어왔다. … 외부 세력이 요구한 경제개혁의 구체적인 내용은 소위 워싱턴 컨센서스와 똑같았다. … 재정수지 적자를 GDP의 1~2 퍼센트 내로 운영 … 공공 지출을 친성장적 투자로 최대한 전환 … 금융시장을 탈규제화 … 환율에 경쟁 체제 도입 … 무역 자유화 … 외국인 직접투자 유치 … 국공유기업들을 민영화 … 탈규제 … 소유권의 법적 보호 … 이러한 정책적 권고 사안들은 IMF가 1997년 위기 때 구제금융 조건으로 제시한 항목들과 거의 일치한다. 차이가 있다면, 1997년 이전에는 이러한 구조조정이 점진적으로 추진된 반면, 1997년 위기 이후에는 엄청난 속도로 진행되었다는 것이다.[1] 2) 독점재벌의 비대한 성장 1980년대 말 한국은 국내총생산(GDP) 기준 세계 15위 국가로 성장했다. 산업화가 시작되던 1960년대 초에는 가장 저개발된 국가 중 하나였지만, 이제 과잉 도시화와 농촌 공동화를 걱정하는 상황이 됐다. 그와 같은 급속한 산업화의 과정은 동시에 거대한 자본축적과 독점자본 형성의 과정이었고, 그 결과 비대한 재벌들이 등장했다. 군사정권의 지원과 보호 아래 성장한 재벌들은 1980년대 중후반 국가로부터 독립하여 자체적인 전망을 수립하고 이해관계를 추구할 뿐만 아니라 나아가 직접적 또는 간접적으로 국가를 주도하려는 의지를 보이기 시작했다. 그것을 일차적으로 상징하는 것은 재벌의 독자적인 연구기관 설립과 운영이었다. 재벌들의 결집체인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 산하 한국경제연구원은 1967년에 설립됐지만, 1980년대 중후반 정부 산하 연구기관들과 별도로 독자적인 경제분석과 산업정책을 활발히 제시하기 시작했다. 재벌그룹별로도 앞 다투어 독자적인 연구기관을 설립했다. 대우경제연구소(1984년), 쌍용경제연구소(1985년), 삼성경제연구소(1986년), 현대경제사회연구원(1986년), 럭키금성경제연구원(1986년), 동양경제연구소(1987년), 기아경제연구소(1989년) 등이 이 시기에 집중적으로 설립됐다. 비대한 재벌은 과거처럼 정부의 지시에 순응하지 않게 됐으며, 1980년대 은행의 민영화 이후 정책금융의 위력이 감소하면서 재벌을 통제할 수 있는 정부의 수단도 줄어들었다. 재벌은 각종 명목의 ‘준조세’뿐만 아니라 그동안 자신들을 육성하는 데 기여했던 보호와 규제조차도 거추장스럽게 여기게 됐다. 그리하여 1980년대로 들어서면서 이미 민간주도형 경제로의 이행이 주장되기 시작했으며, 1980년대 말 이후 ‘규제완화’는 재벌의 제1의 슬로건이 된다.[2] 일부 재벌들은 정치권력을 획득하기 위해 직접 정치에 뛰어들기도 했다. 특히 현대그룹은 자신의 역량을 총동원하여 1992년 4월 총선에서 국민당을 창당하고 12월 대선에서 총수 정주영을 후보로 내세웠다. 대우그룹의 김우중도 정계 진출을 공공연히 모색했다. 정치의 전면에 직접 나서지 않더라도 재벌들은 이데올로기적 영향력을 크게 강화함으로써 자신의 의도대로 정부 정책을 견인하기 시작했다. 삼성그룹은 그 대표 주자였다. 비대해진 재벌은 1990년대 들어 세계시장 진출을 적극 추진했다. 1990년대 들어 도시화 속도가 현저히 둔화되는 등 한국 안에서는 신규 산업투자로 원활한 수익을 얻기가 훨씬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재벌들은 공격적으로 세계시장에 뛰어들었다. 그동안 자신들을 선도하던 일본의 세계적인 제조업체들도 이제 경쟁상대로 인식했다. 1989년 대우그룹 총수 김우중은 『세상은 넓고 할 일은 많다』는 책을 펴냈다. 1993년 삼성그룹 총수 이건희는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회의를 열고 “마누라와 자식 빼곤 다 바꿔라”고 말했다. 이처럼 냉전 종식으로 세계질서가 변화하면서 세계시장의 무한경쟁에 뛰어들도록 강요당했을 때, 한국의 재벌들은 적극적인 세계시장 진출을 통해 능동적으로 대응하고자 했다. 선진국 클럽으로 간주되던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을 김영삼 정권 주도로 추진한 것은 그와 같은 한국 자본가들의 기세를 정치적으로 표현한 것이었다.[3] 그러나 1990년대 재벌들의 적극적인 세계시장 진출은 공격적 투자를 위한 과도한 차입, 무한경쟁에 따른 수익성 저하로 오히려 재벌들을 심각한 위기에 빠뜨렸다. 결국 이는 한국의 외환보유고를 고갈시키며 1997년 IMF 외환위기를 불러오는 결정적 원인이 됐다.[4] 3) 노동자계급의 진출과 부르주아 민주주의 확산 1987년 노동자대투쟁은 살인적인 저임금과 장시간 노동에 기초한 고강도 착취체제를 붕괴시켰다. 민주노조의 폭발적 확산은 실질임금의 급속한 상승과 노동시간 단축으로 귀결됐다. 제조업 분야에서 1987~91년의 실질임금 인상률은 12.5%로 1982~86년의 5.4%에 비해 두 배가 넘었다. 병영적 노동통제에 입각한 일방적 노사관계가 대립적 노사관계로 대체됐다. 1987년 이후 부르주아 민주주의가 꾸준히 확산됐다. 1987년 대통령 직선제가 시행됐고, 1993년 문민정부가 출범했으며, 1995년 지방자치제가 시행됐다. 김영삼 정권은 1993년 군부 내 사조직 ‘하나회’를 해체했다. 5공화국 시기 부정부패와 비자금에 대한 사법처리가 진행됐다. 1995년에는 민중들의 투쟁을 바탕으로 12·12 군사반란과 5·18 광주학살에 대해서도 사법처리가 진행돼 전두환 무기징역, 노태우 17년의 징역형이 선고됐다.[5]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경실련·1989), 환경운동연합(1993), 참여연대(1994) 등의 시민단체들도 속속 등장했다. 군사파시즘에 맞섰던 1987년 6월 민중항쟁은 군사파시즘을 온전히 철폐하지 못하고 절반의 승리만을 거둔 채 마무리됐다. 이후 노동자계급의 진출과 부르주아 민주주의 확산은 군사파시즘의 요소들을 더욱 약화시켰다. 그러나 국가보안법, 기무사, 안기부 등의 존재를 통해 군사파시즘은 완전히 척결되지 않은 채 부르주아 민주주의 속에 잔존했다. 따라서 한국의 정치체제는 일단 군사파시즘에서 벗어나긴 했지만 부르주아 민주주의조차 온전히 실현하지 못한 채 (자본가계급에 대한 온갖 특혜와 노동자·민중에 대한 사회경제적 대공세를 특징으로 하는) 신자유주의 질서라는 또 다른 억압적 정치제제로 귀결됐다. 4) 자본의 대응 - 신경영전략, 사회적 합의주의, 노동법 개악 1987년 노동자대투쟁으로 기존의 병영적 노동통제가 붕괴하자, 자본가계급은 이를 대체할 새로운 노동통제 체제를 구축해야 했다. 자본가들은 변화한 조건에 대응하는 기업 단위의 새로운 통제전략으로서 이른바 ‘신경영전략’을 추진했다. 이를테면 대우조선은 열심히 일하면 잘 살게 해주겠다며 ‘희망90S운동’을 들고 나왔고, 현대중공업은 반 단위 자율생산체계를 확립한다며 ‘두레활동’을 내세웠다. 1987년 이후 무너진 자본의 현장장악력을 회복하고 자본의 새로운 헤게모니를 구축하려는 전략적 실천이었다. 신경영전략의 주요 내용은 고용유연화, 작업조직 재편, 생산공정 합리화, 능력주의 인사·임금제도 도입, 기업문화 혁신 등이었다. 자본가들은 체계적인 노무관리를 실시하면서 노동조합의 현장 기반을 잠식해 들어갔다. 또한 노동조합과 파업의 기세를 약화시키기 위해 파업기간 ‘무노동 무임금’ 적용, 노조간부 고소고발, 손해배상 청구소송 등의 공세를 폈다. 김영삼 정권의 등장과 함께 사회적 차원에서 자본가계급이 꺼내든 새로운 전략은 ‘사회적 합의주의’였다. 민주노조운동은 1990년대 들어 자본가계급의 반격과 경기침체가 맞물리면서 여러모로 고전하고 있었지만 여전히 상당한 전투력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사회적 합의’라는 형식을 통해 격렬한 노자대립을 피하면서 생산성과 경쟁력을 향상시킬 수 있는 새로운 틀을 만들어 내고자 했다. 정권과 자본의 의도는 처음에는 1993~94년 경총과 한국노총의 임금인상 합의로 나타났다. 그러나 민주노조운동에 대한 통제력을 전혀 갖고 있지 못한 한국노총과의 합의는 아무런 실익이 없었다. 오히려 민주노조운동은 한국노총에 대한 규탄 속에서 민주노총 건설의 동력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사회적 합의’를 이루고자 한다면, 어떤 식으로든 민주노조운동 세력을 끌어들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 분명해졌다. 한편 김영삼 정권은 1994년 11월 호주 시드니에서 열린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 순방길에 ‘세계화’를 선언했다. 1995년 1월에는 ‘세계화추진위원회’를 구성하고 8월에는 ‘세계화의 비전과 전략’을 발표하면서, 한국 자본주의를 세계 자본주의의 ‘신자유주의 세계화’ 흐름 속에 편입시키기 위한 준비를 진행해 나갔다. 1996년 4월 김영삼 정권은 정리해고제와 근로자파견제 도입을 골자로 하는 노동법 개악을 추진하면서 민주노총에 ‘사회적 합의’를 제안했다. 민주노총은 노동법 개정의 희망을 안고 ‘노사관계개혁위원회’(노개위)에 참여했다. 그러나 김영삼 정권이 제안한 ‘사회적 합의’의 실체는 일방적으로 자본가계급을 편드는 내용에 노동자계급이 들러리를 서라는 것이었다. 민주노총은 ‘사회적 합의’를 거부하고 노개위를 탈퇴했다. 1996년 12월 26일 김영삼 정권은 집권 신한국당을 통해 노동법 개악안을 국회에서 새벽 날치기로 통과시켰다. 그러나 민주노총 총파업이 한 달가량 거세게 전개되자 한발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김대중이 이끌던 국민회의와 신한국당의 재협상 결과 정리해고제와 근로자파견제 도입 2년 유보 등 날치기 통과된 노동법에서 극히 일부 내용만이 수정된 채로 재개정된 노동법이 1997년 3월 통과됐다.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광포한 흐름은 1997년 말 IMF 외환위기라는 초유의 사태로 한국 자본주의를 휩쓸고 들어왔다. 초국적 금융자본의 외채 상환 요구가 봇물처럼 밀려오자 유동성 위기에 빠진 한국 정부는 IMF에 긴급지원을 요청하여 1997년 12월 3일 IMF와 구제금융 지원에 합의했다. 구제금융을 계기로 한국의 경제정책 전반이 IMF의 관리체제 아래 놓였고, 이를 빌미로 신자유주의 공세가 대대적으로 시작됐다. 새로 대통령에 당선된 김대중 주도로 1998년 1월 15일 구성된 ‘노·사·정 위원회’는 자본가계급의 신자유주의 대공세를 위한 이데올로기적·제도적 기반을 마련하는 수단이었다. 민주노총을 포괄한 노사정위원회는 1998년 2월 6일 ‘경제위기 극복을 위한 사회협약’에 합의했다. 그런데 그 핵심 내용은 민주노총 총파업 때문에 2년 유보 상태에 있던 정리해고제와 근로자파견제를 ‘경제위기 극복’을 위해 즉시 도입한다는 것이었다. 다음 편 보기 [1] 박형준, 2013, 『재벌, 한국을 지배하는 초국적 자본』, 책세상, 320~321쪽. [2] 정성진, 2005, 『마르크스와 한국 경제』책갈피, 134쪽. [3] 한국은 OECD에 1996년 12월 12일 가입했다. OECD는 1961년 유럽과 북미의 선진 20개국을 포괄하며 출발했는데, 이후 일본(1964), 핀란드(1969), 호주(1971), 뉴질랜드(1973), 멕시코(1994), 체코(1995), 헝가리(1996), 폴란드(1996)가 한국보다 먼저 가입했다. 2025년 현재 38개국이 가입해 있다. [4] IMF 외환위기를 거치며 30대 재벌 가운데 16개가 몰락했다. [5] 그러나 1997년 12월 대통령 김영삼은 대통령 당선자 김대중의 건의를 받아 전두환과 노태우를 특별사면했다. /* 스크롤 여백만 주고, 화면에는 안 보이게 */ .ftn-target { display: inline-block; /* 줄바꿈 안 생김 */ width: 0; height: 0; scroll-margin-top: 200px; } document.addEventListener("DOMContentLoaded", function () { // name="_ftn1", name="_ftn2", name="_ftnref1" ... 전부 대상 document.querySelectorAll('a[name^="_ftn"]').forEach(function(a) { var idValue = a.getAttribute("name"); // 이미 같은 id의 요소가 있으면 또 만들지 않음 if (!document.getElementById(idValue)) { var span = document.createElement("span"); span.id = idValue; span.className = "ftn-target"; a.parentNode.insertBefore(span, a); } }); }); /* 본문 각주 번호 + 아래쪽 각주 번호 색 지정 */ a[href^="#_ftn"] sup, a[href^="#_ftnref"] sup { color: #BF202D; } /* 밑줄이 보기 싫으면 */ a[href^="#_ftn"], a[href^="#_ftnref"] { text-decoration: none; } /* 마우스 올렸을 때 살짝만 강조하고 싶으면 (선택) */ a[href^="#_ftn"]:hover, a[href^="#_ftnref"]:hover { text-decoration: underline; } /* 페이지 전체가 오른쪽으로 넘치지 않게 */ html, body { max-width: 100%; overflow-x: hidden; } /* 본문 영역 폭 강제 고정 + 긴 단어/문장도 줄바꿈 */ #bo_v_con, .bo_v_con, .cke_editable, article { max-width: 100%; overflow-wrap: break-word; word-wrap: break-word; /* 구형 브라우저용 */ } /* 워드에서 붙은 이미지/표가 화면 밖으로 안 나가게 */ #bo_v_con img, #bo_v_con table, .bo_v_con img, .bo_v_con table, .cke_editable img, .cke_editable table, article img, article table { max-width: 100% !important; height: auto; } /* 워드가 p, span에 폭을 박아놓은 경우 강제로 해제 */ #bo_v_con p[style*="width"], #bo_v_con span[style*="width"], .bo_v_con p[style*="width"], .bo_v_con span[style*="width"], .cke_editable p[style*="width"], .cke_editable span[style*="width"], article p[style*="width"], article span[style*="width"] { width: auto !important; max-width: 100% !important; } /* 기본 blockquote 스타일 */ blockquote { border-left: 4px solid #c0392b; /* 사이트 분위기와 맞는 붉은 계열 */ padding: 12px 18px; margin: 20px 0; background: #fafafa; font-style: normal; color: #333; line-height: 1.6; } /* blockquote 안의 p 태그 정렬 */ blockquote p { margin: 0 0 10px 0; text-align: justify; } /* 마지막 p 태그 여백 제거 */ blockquote p:last-child { margin-bottom: 0;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