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 퀴어해방은 어디를 향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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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라인신문

[번역] 퀴어해방은 어디를 향하는가

스톤월 항쟁 50주년을 맞은 LGBTQ+ 운동은 수많은 보수적 압력에 직면해 있다. 혁명적 대안은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가?

  • 강성윤
  • 등록 2026.04.06 10:18
  • 조회수 385

 

올해[2020년]는 스톤월 항쟁 50주년이 되는 해다. 기업들은 이때를 틈타 대대적인 핑크워싱에 나섰다. 무지개 운동화, 머그, 티셔츠가 쏟아졌다. 자긍심의 달 기간 동안 뉴욕 경찰은 뱅크 오브 아메리카, 웰스 파고를 비롯한 거대 기업들과 나란히 공식 프라이드 퍼레이드에서 행진했다. 바로 그 같은 달에, 레일린 폴란코(Layleen Polanco)는 라이커스 섬의 교도소 독방에서 사망했다. 오늘날 LGBTQ+ 운동이 품고 있는 모순을 이보다 더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사례는 없을 것이다. 무지개로 치장한 경찰이 행진하는 동안, 유색인 트랜스 여성 활동가는 경찰에게 구금된 채 목숨을 잃었다.

 

주변화로부터 자본주의와의 동화(Assimilation)로 이토록 빠르게 이행한 집단은 역사상 유례가 없다. 불과 50년 만에, 우리를 구타하고 강간하고 체포하던 경찰이 우리의 퍼레이드에서 함께 행진하게 되었다. LGBTQ+ 운동의 태동기부터 동화 문제는 분열의 중심이었다. 우리는 기존 체제에 편입되기를 원하는가, 아니면 체제 자체를 바꾸기를 원하는가? 바로 이 지점에서, 혁명적 사회주의자들은 자본주의를 타도하고 모든 형태의 억압에 맞서 싸우는 전략을 제시함으로써 중요한 기여를 할 수 있다.

 

동화주의와 호모파일 운동

 

동화주의 조직들은 “단일 이슈” 중심이라는 성격을 지닌다. 그들은 LGBTQ+ 의제를 가장 협소한 틀에서 정의하고, 따라서 트랜스젠더, 유색 인종, 노동 계급을 배제하는 결과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다. 이 단체들은 로비 같은 전술을 택하고, 퀴어니스의 여러 측면 가운데 성적으로 가장 전복적인 부분들을 순화하려 한다. 민주당 정치인들과 거액 후원자들의 눈 밖에 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그 밑바탕에 깔린 이데올로기는 이렇다. 미국이 불완전하긴 하지만, 사법부와 의회 같은 기존 제도가 그것을 완성할 수단을 제공한다는 것이다. 정의란 사다리와 같아서, 가로대를 하나씩 올라가듯 권리를 축적해 나가면 결국 평등에 도달할 수 있다는 논리다.

 

현대 퀴어 운동의 역사는 스톤월에서 시작된 것처럼 그려지는 경우가 종종 있고, 전체 운동이 오로지 급진적 과거에 뿌리를 두고 있는 것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이것은 LGBTQ+ 역사에 대한 오독이다. 게이 운동의 일부는 처음부터 심각하게 동화주의적이었다. 미국 최초의 퀴어 운동 단체 중 하나인 매터신 협회(Mattachine Society)는 1950년에 설립되었다. 이들은 섹스라는 단어를 언급하지 않기 위해 “호모파일(homophile) 운동”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하지만 이런 단체는 매터신만이 아니었다. 특히 주목할 만한 사례는 빌리티스의 딸들(Daughters of Bilitis)인데, 이들은 매터신 협회 창립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레즈비언 조직화에 나섰다.

 

호모파일 조직들은 사회의 끔찍한 억압을 배경으로 등장했다. 1953년 미국 대통령 아이젠하워는 “성도착”을 공직 해임 사유로 규정하는 행정 명령을 발동했고, “자색 공포(Lavender Scare)”로 알려진 이 시기에 수백 명이 해고되었다. 단 한 개 주를 제외한 모든 주가 동성 간 성행위를 불법으로 명시했다. 클럽 단속이 일상적으로 이루어졌고, 경찰은 LGBTQ+ 당사자들을 구타하고 체포했으며 이들의 이름을 지역 신문에 공개하기도 했다. 1950년대의 초기 LGBTQ+ 조직화는 자색 공포에 더해 적색 공포라는 맥락 위에서 이루어지기도 했는데, 당시에 동성애와 공산주의는 빈번하게 동일시되었다. “성도착자”는 의지가 박약하고 쉽게 타락하며, 따라서 “공산주의의 위협”에 굴복할 수 있다는 논리였다.

 

매터신 협회는 전직 공산당원이 설립했으며, 게이들에게 소속감을 부여하고 “규율 있고, 도덕적이며, 사회적으로 책임감 있는 동성애 윤리를 발전”[1]시키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1950년대 및 60년대 초의 억압적 환경 속에서 매터신 협회는 많은 게이 남성과 소수 레즈비언에게 생명줄 같은 존재였고, 정기 간행물 『매터신 리뷰』를 통해 전국적으로 수천 명에게 다가갔다.

 

낸 알라미야 보이드가 『무엇이든 허용되는 도시』에서 설명했듯, 매터신은 회원들을 선량하고 품행 바른 미국 시민으로 묘사하려고 애썼다. 매터신 지도부는 “매터신 구성원들이 젠더 경계 위반과 동성애를 뒤섞는 관행과는 거리가 멀다고 인식시키고자 했다. 그리고 유색 인종 커뮤니티의 행동주의 및 정치 투쟁과도 거리를 두었다.”[2] 그들은 아메리칸 드림에 대한 신뢰를 북돋았고, 『매터신 리뷰』에 실린 한 편지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우리가 동성애자라고 해서 성조기가 늘어선 광경을 보고 느끼는 자부심과 명예가 남들보다 덜하지는 않습니다.”[3]

 

매터신은 1953년을 기점으로 뚜렷하게 우경화되었다. 창립자 중 다수가 전직 공산당원이었음에도 조직의 한 분파가 적극적인 반공주의 노선을 취하려 한 것이다. 결국 내부 투쟁을 거쳐 다섯 명의 창립자 중 세 명이 사임했으며, 이들 가운데는 단체의 지도자 해리 헤이(Harry Hay)도 있었다. 1956년에 이르러 매터신 협회는“공산주의자 및 공산주의 활동에 변함없이 반대하며, 그 어떤 공산주의 단체나 위장 조직도 자신들의 단체 명칭을 이용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을 것”[4]이라고 선언했다.

 

매터신 협회가 반공주의를 표방한 한편, 코민테른의 지령을 따르던 미국 공산당은 반LGBTQ+ 노선을 취했다. 1918년 볼셰비키는 “동성애”를 비범죄화했지만 1933년 스탈린은 이를 다시 범죄화했다. 이는 10월 혁명의 해방 이념에 대한 엄청난 배신이었으며, 전 세계 공산당들이 이 같은 배신을 저질렀다. 공산당의 동성애 혐오 및 트랜스 혐오 정책이야말로, 헤이가 한때 사회주의 조직 활동에 참여했지만 그 활동을 이후 자신이 구축한 게이 운동과 연결시키지 못한 이유였다.

 

스톤월과 급진적 퀴어들

 

“마치 댐이 무너지듯, 스톤월은 소수의 남녀가 의식적으로 조직화하여 20년간 조금씩 이룬 진전이 자발적 분노의 물결로 분출한 폭발이었다.” 셰리 울프는 『섹슈얼리티와 사회주의』에서 이렇게 적는다.[5] 스톤월은 블랙 파워, 반전, 페미니즘 운동으로 점철된 급진적 시대의 일부였다. 스톤월은 1968년의 전 지구적 폭발, 즉 프랑스의 5월, 멕시코 학생 운동, 구정 대공세, 스탈린주의 관료 체제에 맞선 대중 투쟁 이후 1년 만에 일어났다.

 

이런 종류의 항쟁이 스톤월 뿐이었던 것은 아니다. 1959년에는 로스앤젤레스의 쿠퍼 도넛에서 폭동이 있었고, 1966년에는 샌프란시스코에서 컴프턴스 카페테리아 폭동이 일어났다. 그러나 스톤월이 새로운 점은 항쟁 이후에 이루어진 조직화의 성격이었다.

 

스톤월은 매터신 협회와 정반대였다. 스톤월은 분노했고, 유색 인종과 트랜스젠더의 것이었으며, 일탈적이었고, 폭동이었다. 스톤월 참전자 짐 포랫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그들(호모파일 운동)에게 악몽이었다. 그들은 착하고 받아들일 만하고 현상 유지에 협조하는 미국인이 되기로 작정한 사람들이었고, 우리는 아니었다. 우리는 받아들일 만한 존재가 되는 데 전혀 관심이 없었다.”[6] 실제로 스톤월 폭동 첫날 밤 이후 매터신 협외의 반응은 스톤월 인 앞에서 침착함과 차분함을 촉구하는 글을 써 붙이는 것이었다.

 

게이 해방 전선(Gay Liberation Front, GLF)은 스톤월 항쟁에서 탄생한 가장 중요한 단체였다. GLF의 신문 『더 랫(The Rat)』은 이 운동의 정신을 다음과 같이 응축했다. “우리는 모든 사람의 완전한 성적 해방은 기존 사회 제도가 폐지되지 않는 한 실현될 수 없다는 자각 속에서 결성된 혁명적 동성애자 남녀 집단이다. 우리는 성적 역할과 우리 본성에 대한 정의를 강요하려는 사회의 시도를 거부한다.”[7] 그러나 혁명이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 합의되지는 않았다. 앨런 시어스가 「퀴어 반자본주의」에서 주장하듯, 새로운 운동은 가시성, 전투성, 그리고 규범적 성 역할 및 젠더 역할에 대한 투쟁을 강조했다. 시어스에 따르면 이 시기는 “에로스의 영역을 해방의 장으로 상정한” “성적 유토피아주의”의 시대, 규범성 그 자체가 적수인 시대였다.[8]

 

새로운 퀴어 운동의 정치적 초점이 “면전에 들이대는” 섹슈얼리티의 급진성이었던 한편, 이 운동의 일부 요소들은 교차적이고 반제국주의적이기도 했다. 베트남의 민족 해방 전선을 떠올리게 하는 게이 해방 전선의 이름 자체가 반제국주의를 향한 명백한 신호였다. GLF는 선언했다. “우리는 모든 피억압자와 우리를 동일시한다. 베트남의 투쟁, 제3세계, 흑인, 노동자… 이 썩어빠지고 더럽고 비열하고 망할 자본주의 음모에 억압받는 모든 이들과.”[9] 마찬가지로 GLF는 특히 흑표당과의 관계를 모색하여 지도부와 만남을 갖고 흑표당의 1970년 대회에 참석했다. 그러나 GLF의 전망에서 조직된 노동 계급은 대체로 부재했다.

 

GLF에게 동화주의에 맞서 싸운다는 것은 자본의 상층부에서 이루어지는 대의 정치에 맞서 싸운다는 것을 의미했다. 『컴 아웃』 신문은 이렇게 썼다. “우리는 담쟁이로 덮인 별장과 대기업 일자리라는 무익한 ‘아메리칸 드림’을 좇는 게이 부르주아지가 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미국 사회의 어떤 영역에서든 동성애자가 배제되는 것 또한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10] 일부는 명시적으로 반자본주의적이기까지 했다. 시카고 GLF의 회원이었던 한 사람은 이 운동이 “미국 군산 복합체가 지배하는 세계 자본주의는 개혁하거나 개선할 대상이 아니라, 파괴한 다음 평등과 정의의 체제로 대체해야 할 대상이라는 정치적 관점을 갖고 있었다”[11]고 증언한다.

 

그러나 GLF는 오래가지 못했다. 모든 이에게 열려 있고 합의제로 운영된 회의는 통제 불가능했다. 퀴어라는 사실이 참석자들 간의 정치적 합의를 보장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혁명이 목표라면,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리고 적은 누구인가? 일부 페미니스트들이 주장하기 시작한 것처럼 남성이 적인가? 아니면 일부 급진적 퀴어들이 말하기 시작한 것처럼 이성애자가 적인가? 아니면 자본주의 국가인가? GLF는 이 질문들에 대해 각기 다른 입장을 취한 단체들로 분열했는데, ‘급진적 레즈비언들(Radicalesbians)’, ‘거리의 복장 도착자 행동 혁명가들(Street Transvestites Action Revolutionaries), ‘게이 활동가 동맹(Gay Activist Alliance)’ 등이 그것이다.

 

이 단체들은 혁명적 수사를 표방했지만 정치적 사유의 상당 부분에서 자본주의 국가 개념을 결여했으며, 이들이 구상한 “혁명”은 주로 문화적인 것이었다. 이들은 “게이 파워”나 레즈비언 분리주의를 유효한 전략으로 간주했다. 많은 이들이 “이성애적 가치”와 “이성애 사회”를 적으로 삼았는데, 이는 애초에 사회를 이성애 및 시스젠더 규범성 중심으로 조직한 자본가 계급과 국가로부터는 분리된 입장이었다.

 

호모파일 운동 태동기의 스탈린주의처럼 피델 카스트로 또한 사회주의와 새로운 퀴어 운동이 거리를 두게 만들었다. 1965년 카스트로는 LGBTQ+ 당사자들을 “생산 증대 부대”로 알려진 강제 수용소에 수감했다. 미국 좌파의 상당수는 카스트로 정부에 무조건적 지지를 보냈는데, 그들은 공산당과 쿠바 연대 여단들처럼“동성애”가 부르주아적이라고 주장하거나, 쿠바에서 LGBTQ+의 권리를 위해 싸우는 것이 “문화 제국주의”라고 주장했다. 물론 미국의 혁명가들은 미 제국주의의 공격으로부터 쿠바 혁명을 방어해야 한다. 그러나 그것이 LGBTQ+ 당사자들을 강제 수용소에 가둔 비민주적 관료제에 대한 지지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LGBTQ+ 운동의 비영리 산업화

 

급진적 퀴어 조직 운동이 잠잠해지는 것처럼 보이던 바로 그때 에이즈 위기가 시작되었다. 정부가 위기를 인정하지 않는 동안 에이즈는 퀴어 커뮤니티를 초토화했고, 기독교 우파는 에이즈가 동성애자 죄인들을 쓸어버리기 위해 찾아온 게이 질병이라고 떠들었다. 이 같은 맥락 위에서 신자유주의 시대의 개막과 함께 급진적 퀴어 조직화가 다시 부상했다. 1980년대 후반 액트업(ACT UP)은 정부의 에이즈 무대응, 그리고 에이즈 위기로부터 이윤을 취하는 기업의 탐욕에 맞선 직접 행동에 집중했다.

 

이후 퀴어 운동은 “주변의 모든 것이 후퇴하는 와중에도 어떻게든 전진했다.”[12] 신자유주의가 진군하는 가운데, LGBTQ+ 당사자들의 행동주의, 자본 앞의 형식적 평등이라는 이데올로기, 핑크워싱이 약속하는 이윤이 함께 작용하여 게이와 레즈비언에 대한 가장 차별적인 법률 일부가 폐지되었다. 2003년이 되어서야 연방 차원에서 폐지된 “남색” 금지법 같은 것들 말이다. 2015년 LGBTQ+ 당사자들은 미국 전역에서 결혼할 권리를 쟁취했다. 지금은 커밍아웃한 게이 남성이 민주당 대선 경선의 유력 후보다. 자본주의는 몇몇 게이와 레즈비언을 권력 상층부에 받아들이고 게이·레즈비언 섹슈얼리티를 상품화할 만큼 유연한 체제임을 스스로 입증하는 동시에 노동 계급 퀴어와 유색 인종 퀴어를 주변화했다. 실제로 LGBTQ+ 당사자들은 단일한 집단이 아니며, 우리 중 일부가 더 많은 권리를 획득할수록 우리 사이의 인종적, 계급적 차이는 더욱 선명해진다.

 

지난 30년간 두 가지 중대한 변화가 일어났다. 하나는 정부의 공공 복지가 대폭 삭감되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게이와 레즈비언 정체성이 일정 정도 정상화되었다는 것이다. 그 결과 LGBTQ+ 운동은 거의 완전히 비영리 산업 복합체 안에 편입되었다. 이는 비영리 단체가 전반적으로 급증한 현상의 일부인데, 1965년 3천 개에 불과했던 비영리 단체는 오늘날 150만 개가 되었다. 비영리 산업 복합체는 오늘날 동화 논쟁이 벌어지는 아주 협소한 무대다. 특히 휴먼 라이츠 캠페인(Human Rights Campaign, HRC)이라는 비영리 단체가 호모파일 운동의 유산을 계승하고 있다. 다른 일부 비영리 단체는 스톤월의 유산을 이어가려 하지만, 가장 급진적인 단체들조차 끊임없는 보수적 압력 아래 놓여 있다.

 

휴먼 라이츠 캠페인

 

HRC는 매터신 협회가 감히 꿈도 꾸지 못했을 만큼 훨씬 덜 적대적인 환경에서, 훨씬 더 많은 자원을 가지고 조직 활동을 벌인다. 연간 수입이 4,500만 달러를 넘으며, 시티뱅크와 애플 같은 기업 후원자를 두고 있다. 그럼에도 HRC의 목표는 과거 호모파일 운동의 목표와 놀랄 만큼 유사하다. 바로 자본주의적·가부장적 체제로 동화되는 것이다.

 

매터신 협회처럼 HRC는 가장 협소한 의제에 집중한다. 그들은 동성혼을 쟁취하기 위해 싸우고 LGBTQ+ 군복무 금지에 반대한다. 트랜스젠더는 일관되게 논의에서 배제되는데, HRC가 트랜스젠더를 포함하지 않는 고용 비차별 법안을 지지한 것이 단적인 예다. HRC는 게이와 레즈비언도 존중받을 만한 애국자임을 보여 주려 한다. HRC는 민주당 선거 운동을 하고 미국에서 가장 사악한 자본가들과 밀착한다. 2017년에는 아마존 노동자들이 최저 수준의 임금을 받으면서 비인간적 조건에서 일하고 있는데 제프 베이조스에게 “평등상”을 수여하기까지 했다.

 

호모파일 운동 시대의 자본가들과 달리 지금 미국 자본가 계급의 상당수는 정말로 게이 갈라에 참석하고 싶어 한다. 사비를 털어 조직 활동에 쏟아부었던 호모파일 운동 지도자들과 달리 HRC CEO는 연봉이 50만 달러에 달한다. HRC는 모든 권력과 자원을 동원하여 주류 LGBTQ+ 운동의 의제를 통제하며, 민주당 선거 운동을 통해 달성할 수 있는 협소한 요구 사항들로 운동을 제한한다.

 

퀴어 해방 비영리 단체

 

LGBTQ+ 관련 비영리 단체가 모두 HRC 같은 유형은 아니다. 일부 단체는 훨씬 더 교차적이고 급진적인 정치를 표방한다. 예를 들면 실비아 리베라 법률 프로젝트(Sylvia Rivera Law Project), 오드리 로드 프로젝트(Audre Lorde Project), 경제 정의를 위한 퀴어들(Queers for Economic Justice) 같은 곳들이다. 어떤 이들은 이 단체들을 퀴어 해방 조직이라고 불렀다. 이 단체들은 스톤월의 꿈이 신자유주의 시대에 발현된 것이다. 스톤월 시대의 조직들과 마찬가지로 이들에게는 해방을 위한 응집력 있는 전략이 부재하며, 무엇보다도 이들은 기금 확보를 위한 끝없는 경쟁 속에 갇혀 있다.

 

이 단체들도 교도소 산업 복합체, 이민 체제, 신자유주의 하에서 후퇴하는 공공 복지 문제 등을 포괄하는 퀴어 해방 전망을 내놓았다는 점에서는 공로가 있다. 스톤월 시대의 조직들처럼 일부는 자본주의 비판도 제시한다. 이들은 딘 스페이드(Dean Spade)가 “상향식 사회 정의”라고 부른 것, 말하자면 조직이 가장 주변화된 이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문제를 가장 먼저 다루면 그 위의 모든 계층에도 이익이 될 것이라는 입장을 지향한다.

 

이 비영리 단체들은 사람들에게 해방된 미래를 상상해 보라고 하지만, 전략 측면에서 이들이 제시하는 것은 개혁을 위한 계획뿐이다. GLF 구성원들처럼 이 단체들에서 활동하는 진보적 퀴어들은 자신들의 목표에 대해서도, 목표를 달성할 전략에 대해서도 합의하지 못한다. 문화적 변화가 목표인가? 아니면 공공 복지의 확대인가? 명확한 정치적 합의가 결여된 상황에서 비영리 단체에 가해지는 보수적 압력을 견디기는 더욱 어렵다.

 

이 비영리 단체 중 상당수는 퀴어 커뮤니티에 중요하고 절실한 서비스를 제공한다. 하지만 『게이 주식회사(Gay Inc.)』에서 멀 빔(Myrl Beam)이 주장하듯, 이런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한 기금을 확보할 필요성 자체가 물질적·보수적 압력이 된다. 비영리 단체 활동가 로건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보조금을 받게 해 준 바로 그 제도를 전복하는 것이 곧 우리의 사명이 된다면, 문제는 어려워질 수밖에 없다. 우리가 사용하는 도구는 우리가 해체하려는 구조를 유지하기 위해 설계된 것이기 때문이다.”[13] 비영리 단체에서 일하는 많은 사람들이 이 사실을 알고 있다. 좌파적 의도를 가지고 있더라도, 비영리 단체는 자본주의를 끝내지 않은 채, 착취와 억압으로부터 자유로운 사회를 실제로 만들어 내지 않은 채, 영원히 서비스만 제공하면서 존속할 수 있다. 이것이 퀴어 해방 비영리 단체들의 문제다. 이들은 결코 퀴어 해방을 실현하지 못할 것이다.

 

소수의 이윤을 위해 다수를 착취하는 사회에서 퀴어 해방은 불가능하다. 이것이 우리의 권리가 사다리가 아닌 이유이며, 우리의 권리가 해방을 향해 축적될 수 없는 이유이며, 교차적 착취와 무지개 CEO가 우리를 해방시킬 수 없는 이유이다. 다수의 퀴어에게, 즉 노동 계급에 속하며 그중 상당수는 유색 인종인 퀴어에게, 게이 대통령이 탄생한들 생계 때문에 허덕이는 현실은 바뀌지 않기 때문이다. 퀴어 섹슈얼리티 전유와 상품화에서 명백히 드러나듯, 우리의 섹슈얼리티 그 자체가 해방의 장이 아닌 이유이기도 하다. 하지만 최하층을 위한 개혁 및 복지를 쟁취하는 투쟁과 교차성만으로는 퀴어 해방을 이루기에 충분하지 않다. 자본주의 비판만으로는 자본주의로부터 해방되기에 충분하지 않다.

 

퀴어 해방은 이윤을 위해서가 아니라 사람을 위해서 건설된 사회, 우리의 모든 물질적 필요가 충족되는 사회, 더 나아가 자유 시간을 보장하며 우리의 창조적 잠재력을 해방하는 사회, 바로 공산주의 사회에서만 가능하다.

 

사회주의 혁명을 위한 투쟁

 

우리의 억압과 착취는 문화만 바꾸어서는 끝낼 수 없다. 우리의 억압은 교도소, 경찰, 학교 같은 자본주의 국가의 제도들에, 그리고 국가 안에서 기독교가 수행하는 역할에 뿌리박고 있다. 그것은 주로 여성으로부터 무급 재생산 노동을 추출하는 데 필수적인 젠더 역할에, 그리고 직장 안팎의 총체적 소외에 뿌리박고 있다. 그것은 성적으로 비참한 사회에, 말하자면 직장에서 몸과 마음이 닳고 닳아 집에 돌아오면 그림자만 남는 그런 사회에 뿌리박고 있다. 개혁으로 이 상황을 벗어날 수는 없다. 자본가 계급의 자산을 몰수하는 혁명, 우리의 젠더와 섹슈얼리티와 인류 전체를 해방하는 대규모 문화적 변혁의 물질적 토대를 창출하는 혁명이 필요하다. 이것이 공산주의의 목표다.

 

자본주의 국가가 무적으로 보일지 모르지만, 노동 계급은 강하다. 우리는 모든 것을 생산하고 자본주의 전체를 작동시킨다. 그러므로 노동 계급은 혁명의 원동력이다. 전체 체제를 무릎 꿇리고, 집단적·민주적 통제 하에 체제를 다시 가동시킬 수 있는 유일한 힘이다. 오늘날 노동 계급은 세계 인구의 다수를 차지하며, 유색 인종, 장애인, 퀴어, 여성, 그리고 물론 백인 시스젠더 남성들로 구성되어 있다.

 

그러나 “대자적” 노동 계급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노동 계급이 혁명을 이끌기 위해서는 피트 부티지지 같은 자본주의의 토큰이 아니라 자신이야말로 LGBTQ+ 당사자들에 대한 억압을 포함한 사회의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음을 보여 주어야 한다. 노동 계급과 모든 피억압 집단의 동맹이야말로 사회주의 혁명의 필수적 토대다.

 

다행히 오늘날 점점 더 많은 젊은이들이 사회주의자이거나 사회주의에 관심을 갖고 있다. 이들은 지금의 체제가 우리에게 비참함만 안겨 준다는 사실을 안다. 하지만 우리의 목표가 사회주의라면, 그것도 스탈린이나 카스트로의 동성애 혐오적이고 트랜스 혐오적인 관료제와는 전혀 다른 사회주의라면, 우리는 누구로부터 혹은 어떤 사례로부터 배울 수 있는가?

 

잔혹한 동성애 혐오라는 스탈린주의의 유산에 맞서는 사회주의의 역사가 존재한다. 이미 1895년에 공산주의자들은 오스카 와일드를 옹호하고 동성애 합법화를 지지한 유일한 집단이었다. 소비에트 연방에서 볼셰비키는 1919년에 이를 실행했다. 그러나 소련이 관료화되면서 젠더와 섹슈얼리티에 관련된 성과를 포함하여 러시아 혁명의 승리들이 점점 더 많이 뒷걸음질했다. 이 시기에 레온 트로츠키와 좌익 반대파(Left Opposition)가 이 반혁명에 맞서 싸웠다. 그 결과 스탈린주의에 대한 모든 반대는 “트로츠키주의”로 알려지게 되었고, 세계 곳곳의 좌익 반대파는 스탈린주의자들에게 살해당했다. 트로츠키도 1940년에 살해당했다.

 

트로츠키주의는 마르크스와 볼셰비키 혁명의 해방적 사상을 계승하며, 자본주의를 타도하고 억압 없는 사회를 건설하기 위한 이론과 전략을 제시한다. 물론 트로츠키주의의 기치를 내세운 모든 조직이 피억압 집단에 대해 올바른 정치를 견지한 것은 아니지만, 트로츠키주의라는 틀은 분명히 해방을 위한 이론과 전략을 조직할 수 있다.

 

트로츠키는 가장 억압받는 이들을 조직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이행 강령』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기회주의 조직들은 본성상 노동 계급의 상층부에 관심을 집중하며, 따라서 청년과 여성 노동자를 무시한다. 그러나 자본주의의 쇠퇴는 임금 노동자이자 가정주부인 여성에게 가장 강력한 타격을 가한다. 제4인터내셔널의 각 부문은 노동 계급의 가장 착취받는 층에게서, 즉 여성 노동자들에게서 지지 기반을 찾아야 한다.” 개혁만을 추구하거나 부스러기를 얻기 위해 자본가들과 협상한다면, 협상의 대가로서 가장 억압받는 이들이 필연적으로 팔려 나가며, 국제주의가 필연적으로 팔려 나간다. 이것이 동화주의적이고 개량주의적인 정치의 결론이다.

 

공산주의라는 미래

 

공산주의가 정확히 어떤 모습일지는 아무도 모른다. 우리가 공산주의 사회에 관해서 말할 수 있는 것은 착취와 국경과 감옥을 종식시키는 사회, 레일린 폴란코가 잘 살 수 있었을 사회라는 것뿐이다. 공산주의 하에서 우리는 노동 착취와 직장에서의 소외를 끝내고 막대한 자유 시간을 얻게 될 것이다. 헤르베르트 마르쿠제는 『에로스와 문명』에서 이런 미래를 구상했다. “필요 노동에 전용되어야 하는 본능적 에너지의 양은 (노동 자체가 완전히 기계화되고 합리화되어) 매우 적어질 것이므로, 외부적 힘에 의해 더 이상 유지되지 않는 광범위한 억압적 제약과 변형이 붕괴할 것이다. … 생의 본능인 에로스가 전례 없는 수준으로 해방될 것이다.”

 

마찬가지로 공산주의 사회에서 가사 노동은 사회화될 것이다. 양육, 요리, 모든 재생산 노동을 공동체가 담당할 것이며, 개인이 수행하더라도 그것은 필요에 의한 노동이 아니라 사랑에 의한 노동이 될 것이다. 볼셰비키와 몇몇 초기 마르크스주의자들이 구상했듯이 사회 구성 단위로서의 (이성애 가부장적) 가족은 사라질 것이다. 공산주의 사회에서 젠더 역할의 물질적 토대는 사라질 것이며, 그 이후에 무엇이 올지는 아무도 정확히 알 수 없다.

 

마르크스가 『독일 이데올로기』에서 주장하듯이 공산주의는 “오늘은 이것을 하고 내일은 저것을 하는 것, 아침에는 사냥하고 오후에는 낚시하고 저녁에는 소를 돌보고 저녁 식사 후에는 비평을 쓰지만, 사냥꾼이나 어부나 목동이나 비평가가 되지는 않는 것”이 가능한 사회를 약속한다. 이는 젠더와 섹슈얼리티에도 적용할 수 있을 것이다. 공산주의는 우리가 원하는 만큼의 자유와 유연성을 가지고 우리의 젠더와 섹슈얼리티를 살아갈 자유를 줄 것이다.

 

글쓴이: Tatiana Cozzarelli

역자: 강성윤

2020년 4월 19일 Left Voice에 발행된 기사를 번역함

 

 


[1] Van Grosse, The Movement of the New Left 1950-1975 (New York: St. Martin’s Press, 2005), 40.

[2] Nan Alamilla Boyd, Wide Open Town (Berkeley: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2003), 179.︎

[3] “An Open Letter to Senator Dirksen,” Mattachine Review, no. 1 (January/February 1955).

[4] “Aims and Principles,” Mattachine Review, no. 2, special issue (January 1956).

[5] Sherry Wolf, Sexuality and Socialism (Chicago: Haymarket Books, 2009).

[6] Martin Duberman, Stonewall (New York: Plume, 1994), 229.

[7] Wolf, Sexuality and Socialism, 129.

[8] Alan Sears, “Queer Anti-capitalism: What’s Left of Lesbian and Gay Liberation?,” Science & Society, vol. 69, no. 1 (January 2005), 91-112.

[9] Wolf, Sexuality and Socialism, 129.

[10] “Editorial 1.” Come Out! Selections from the Radial Gay Liberation Newspaper (New York: Times Change Press, 1970).

[11] Fred Eggan, “Dykes and Fags Want Everything: Dreaming with the Gay Liberation Front” in That’s Revolting! Queer Strategies for Resisting Assimilation (Berkley: Publishers Group Press: 2004).

[12] Elizabeth Wilson, “Is Transgression Transgressive?” in Activating Theory, ed. J. Bristow and A.R. Wilson (London: Lawrence and Wishart, 1993): 107-117.

[13] Myrl Beam, Gay Inc: The Non-Profitization of Queer Politics (Minneapolis: University of Minnesota Press,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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