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이후 국제 계급투쟁이 고조되고 있는 상황에서, 혁명적 조직을 재건하기 위한 레닌주의 조직관은 엘리트주의 조직관이나 주변화된 편협한 집단을 육성하는 조직관과는 정반대임을 분명히 해야 한다. 레닌주의 조직관은 노동자계급의 가장 진보적이고 정치적으로 자각한 부문을 (혁명의 준비를 목표로 하며 투쟁하는 대중과 지속적으로 대화하는) 중앙집권적인 당으로 결집시켜 내는 것으로 요약될 수 있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이는 투쟁으로 떨쳐 일어서는 노동자들에게 (수십 년간 지배계급과의 화해 정책과 “사회적 대화”에 얽매여 있는) 노동자운동의 관료적 지도부와는 다른 독립적인 정치적·조직적 전망을 제시하는 것에서 시작된다.
레닌주의 정당의 문제를 다시 논의하려면 적어도 두 가지 유형의 해석 체계를 살펴봐야 한다. 첫 번째는, 불행히도 오랫동안 지속되어 온 체계인데, 레닌주의를 권위주의와 동일시하고, ‘레닌주의 정당’을 전체주의적 집착의 씨앗을 품고 있으며 스탈린주의를 예고하는 ‘자칭 엘리트(또는 전위)’의 독재와 동일시하는 것이다. 국제적 반동의 맥락에서 이러한 해석이 지속되면서, 역사적으로 레닌주의와 연관된 세력들조차 레닌주의 정당에 대한 신뢰도를 떨어뜨리는 데 일조해 왔다. 이를테면 프랑스의 ‘반자본주의 신당’(NPA) 내 세력, 특히 과거 ‘제4인터내셔널 연합사무국’ 경향의 프랑스 지부였던 ‘혁명적 공산주의 동맹’(LCR) 출신과 그 국제적 동조자들에게 레닌주의 정당은 기껏해야 무력한 민속 설화의 일종이거나, 최악의 경우 어떤 수를 써서라도 극복해야 할 본질적으로 종파적인 개념으로 여겨진다.
최근 들어 레닌주의 정당에 대한 논쟁은 영어권 학계의 연구, 특히 라스 리(Lars Lih)의 연구 덕분에 새로운 양상을 띠게 되었다. 그는 레닌의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한 면밀한 연구를 통해 <레닌의 재발견: 맥락 속에서 본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훌륭한 저서를 출간했다.[1] 이 책은 레닌의 <무엇을 할 것인가>가 새로운 조직 개념을 체계적으로 설명하는 ‘지침서’라고 오랫동안 여겨져 온 통념에 근본적으로 도전한다. 리의 연구는 많은 심도 있는 논의를 불러일으켰지만,[2] 레닌이 제2인터내셔널과 결별한 이후에도 마지막까지 ‘러시아판 사회민주주의자’였다고 주장하는 논지는 심각한 비판을 받기도 했다. 리의 해석은 레닌의 공헌 중 가장 독창적이고 정치적으로 결정적인 특징들마저 간과하는 경향이 있으며, 심지어 ‘레닌주의 당 개념’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고까지 주장한다.[3]
21세기의 레닌과 ‘레닌주의’
무엇이 레닌주의가 아닌지에 대해 말하는 것은 21세기에 레닌주의를 논하는 시작점일 수 있다. 러시아 혁명 100주년을 기념하던 2017년, 스테판 쿠르투아는 일부 자유주의 이데올로그들이 조장하는 편견을 드러내는 제목의 프랑스어 저서, <레닌: 전체주의의 창시자>를 출간했다.[4] 쿠르투아 편의 정치 진영에서 레닌을 악마화하는 것은 새로운 일이 아니다. 미국의 역사학자이자 트로츠키주의 활동가인 폴 르블랑은 그의 저서 <레닌과 혁명정당>에서 “볼셰비키 혁명의 승리부터 현재까지, 자본주의 현상 유지를 추구하는 자유주의·보수주의 이데올로그들은 레닌과 그의 저작들이 (특히 혁명정당 개념이) 법, 질서, 기본적인 인간 존엄성, 그리고 서구 문명을 끔찍하게 위협한다는 인식을 퍼뜨리기 위해 막대한 자원을 투입해 왔다”고 지적한다.[5] 레닌이 왜 세계 자본가계급에게 증오와 공포를 불러일으키는가는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다. 본질적으로 그가 비난받는 이유는 10월 사회주의 혁명을 승리로 이끌었고 그럼으로써 모든 세대에게 희망을 불어넣었다는 사실로 귀결된다.
그런데 ‘레닌에게 돌아가기’를 더 어렵게 하는 것은 공산주의 운동 내부에서 비롯된 강력한 왜곡들이다. 레닌 사후 노동자국가에서 관료적 반혁명을 주도했던 스탈린은 레닌의 사상을 체계적으로 인용함으로써 자신을 정당화하려 했다. 스탈린주의는 맥락에서 벗어나 발췌한 레닌의 인용구들을 영원한 진리로 둔갑시켜 남용하면서 ‘레닌주의’라는 가면 아래 교조적이고 경직된 사상 체계를 구축했다.[6] 이러한 방대한 이론적·정치적 수정 작업은 국제 공산주의 운동에 깊은 영향을 미쳤으며, 다니엘 벤사이드가 지적했듯이 “당의 개념에 대한 레닌의 구체적인 공헌을 (볼셰비키화[7] 및 획일주의와 동일시되는) 성문화된 ‘레닌주의’와 혼동하는 경향”[8]을 만들어냈다. 레닌주의 정당에 대한 자유주의와 스탈린주의의 묘사는 본질적으로 레닌을 권위주의적인 인물로, 즉 ‘위로부터 강요되는’, ‘철통같은 규율을 가진’, ‘비판이 허용되지 않는’ 당의 설계자로 묘사한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보인다. 이러한 맥락에서, “많은 혁명적 사고를 가진 사람들이 이런 게 레닌주의라면 레닌주의는 자신들을 위한 게 아니라고 결론지었다”라고 르블랑이 쓴 것은 타당성이 있다.[9]
하지만 레닌을 고정된 틀에 가두려 했던 많은 상투적인 문구들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혁명 조직을 어떻게 건설할지 고민하는 사람들에게 레닌은 여전히 없어서는 안 될 인물이다. 피에르 브루에가 <볼셰비키당: 소련 공산당의 역사>에서 정확하게 지적했듯이, 그 이유는 단순하지만 심오하다.
레닌이 이끈 당은 비할 데가 없는 역사적 수단이었다. 1917년 2월 혁명 이후 수만 명의 지하 활동가들이 다시 연결되기 시작했고, 8개월도 채 안 되어 광범한 노동자대중과 (그보다는 더 적은 정도의) 농민들이 그들 자신의 것으로 인정하는 조직을 구축해 냈다. 이 당은 임시정부에 맞서 권력을 장악하고 유지하기 위한 투쟁을 이끌었다. 레닌과 그의 동지들은 분파투쟁과 탄압을 통과하며, 처음에는 더 유리한 조건에 있었던 다른 사회주의자들이 결국 실패했던 곳에서 성공을 거두었다. 사회주의 정당들이 존재한 이래 처음으로 그들 중 하나가 승리한 것이다.[10]
우리가 레닌에게 돌아갈 것을, 즉 그의 조직 이론과 실천으로 돌아갈 것을 제안하는 것은 현 시대를 대응할 그러한 ‘역사적 수단’이 그 어느 때보다 시급하게 요구되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위기가 심화하고 있고, 좌우 양측의 급진화와 많은 정부들의 권위주의화가 진행되는 가운데, 계급투쟁이 세계적으로 격화되고 있다. 그런데 ‘새로운’ 급진 좌파는 이러한 투쟁의 흐름을 부르주아 국가에 맞서고 자본주의의 한계를 뛰어넘는 방향으로 이끌어갈 비전을 제시하지 못했다. 그리스의 시리자나 스페인의 포데모스 같은 ‘새로운’ 정치 프로젝트들은 순식간에 신자유주의 정책의 집행자로 전락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레닌에게 돌아가기’는 (현 상황에 대한 즉각적인 해결책으로서가 아니라) 현 상황이 제시하는 기회를 포착하고 이를 활용하여 (보수주의와 궁극적으로 파시즘으로 빠져들 위험을 극복하면서) 21세기 사회주의 혁명의 길을 열어갈 수 있는 전투 조직을 어떻게 (재)구축할지에 대해 사유하는 데 자극이 될 수 있다.
이 글에서 우리는 1895년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 창당부터 1917년 10월 혁명까지 레닌 생애 동안 일어난 볼셰비즘 역사 속 여러 사건과 논쟁들을 살펴보면서 레닌에게 다시 주목한다. 이를 통해 우리는 (벤사이드가 “혁명 속의 혁명”이라고 표현한) 당 문제에 대한 레닌의 공헌이 갖는 의미를 되새겨 볼 것이다.
레닌은 당 이론을 체계적으로 펼친 적은 없다. 하지만 조직에 대한 레닌의 이론적 개념과 볼셰비즘의 실천 사이에는 일관성이 있었다. 이러한 일관성은 당시 지배적이었던 사회민주주의 전통을 넘어서는 새로운 전통을 예고했다. 레닌은 1914년까지 늘 사회민주주의를 (특히 독일 사회민주주의를) 언급했지만, 러시아 혁명의 특수한 발전조건과 그 자신의 이론적·정치적 궤적은 결국 계급·당·지도력 간의 관계를 재정립하고 혁명의 역동성 속에서 당의 역할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도록 이끌었다.
20세기 첫 10년 동안 레닌은 국제 사회민주주의 운동 안에서 19세기 말 이후 지배적이던 견해, 즉 진정한 대중정당을 건설하기 위해 (특히 독일에서) 단결을 우선시하는 노선을 옹호했다. 그러므로 처음에는 하나의 경향으로, 그 다음에는 하나의 분파로, 그리고 1912년 이후에는 독자적인 정당으로 존재했던 볼셰비키 조류와 이를 이끈 레닌은 제2인터내셔널 안에서 불가피하게 논쟁에 휩쓸렸다. 하지만 1914년 여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 제2인터내셔널 지도자들이 자국 자본가계급의 편에 서서 전쟁에 가담하는 배신을 저지르자 레닌은 유리한 위치에 서게 되었다. 이는 레닌이 1917년 러시아 혁명 과정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할 수 있게 해준 요인이기도 했다.
러시아 사회민주주의 안에서 레닌주의 조직 개념과 볼셰비즘의 실천이 발전해 나간 주요 ‘단계’들을 살펴보자.
20대의 레닌: 러시아 전역을 위한 신문
사회주의 혁명을 향한 레닌의 투쟁은 러시아에서의 자본주의 발전이라는 특수하고도 어려운 조건 위에서 전개되었다.[11] 차르 체제의 완강한 탄압 때문에, 러시아의 자유주의 정치운동은 취약했고,[12] 노동자운동과 민중운동은 혁명적 경로를 추구하게 되었다.[13] 19세기 후반 러시아 혁명운동을 주도한 (민중주의 조류인) 나로드니키는 농촌의 불만을 기반으로 삼으려 했으나 농민 대중의 무관심에 곧 낙담하여 테러적인 방법으로 전환했다. 이는 러시아에서의 정치적 분화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으며, 특히 나로드니키 활동가였던 형 알렉산드르 울랴노프가 차르 알렉산드르 2세 암살 시도 혐의로 정권에 의해 처형된 사건은 레닌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1880년대 러시아에서 마르크스주의가 발전하게 된 것은 주로 이러한 민중주의 조류(그리고 나중에는 ‘합법적 마르크스주의’ 조류)에 대한 반발에서 비롯되었다. 게오르기 플레하노프는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저서를 러시아어로 번역하는 선구적인 노력을 했다. 1881년, 플레하노프는 러시아 최초의 진정한 마르크스주의 단체인 ‘노동자해방단’을 창설했다. 레닌은 곧이어 이 단체에 합류하여 이를 진정한 정당으로 탈바꿈시키고자 했다. 레닌의 역할은 처음부터 결정적이었다. 브루에는 이렇게 설명한다.
플레하노프가 이끈 눈부신 이론적 투쟁 이후, 그의 제자들과 동료들에게는 실천적인 문제가 대두되었다. 모든 조직, 심지어 초보적인 조직조차도 전제정치라는 엄청난 장애물에 부딪혔기 때문에, 러시아 사회민주주의자들은 (마르크스의 사상을 따라) 세상을 단순히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변혁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는 데 더욱 매진해야 했다. 이러한 노력을 가장 잘 표현한 인물은 바로 젊은 울랴노프, 즉 레닌이었다.[14]
결정적인 첫걸음은 1898년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 창립대회였다. 그러나 실제로는 당은 통일된 상태와는 거리가 멀었고, 당을 구성하는 지역 조직들은 여전히 널리 흩어져 있었다. 레닌은 “러시아 사회민주주의는 이 엄청난 진전을 이루는 데 당장의 모든 힘을 소진한 듯하며, 이전의 고립된 지역 조직들의 활동으로 되돌아갔다”[15]고 썼다. 1895년부터 1903년까지 레닌은 사회민주주의 운동의 “아마추어적인” 방법론과 싸우며 “단일한 당의 활동으로 통일”을 실현하기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였다. 이는 레닌의 첫 번째 주요한 투쟁이었다.[16]
레닌에게는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 번째, 차르 전제정치라는 중앙집권적인 괴물에 맞서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할 수 있으려면, 당은 반드시 고립되고 분산된 그룹들의 활동을 성공적으로 집중시켜 내야 했다. 레닌은 이렇게 썼다.
단일 정당으로의 통합만이 우리가 분업과 역량 효율화의 원칙을 체계적으로 준수할 수 있게 해 줄 것이다. 이는 전제 정부의 억압과 광적인 탄압에 맞서 손실을 줄이고 최대한 견고한 방어벽을 구축하기 위해 반드시 달성해야 할 목표이다.[17]
두 번째는 신생 노동자운동이 수행한 개별 투쟁들의 성과를 조율함으로써 (정당이 없다면 고립된 채로 남을) “모범적 의미”를 공고히 하는 것이었다. 레닌은 계속해서 말한다.
이러한 아마추어적인 성격 때문에 러시아 노동자운동의 많은 투쟁들은 순전히 지역적인 사건으로 남아 러시아 사회민주주의 전체의 한 사례로서의 가치, 러시아 노동자운동 전체의 한 단계로서의 의미를 크게 잃어버린다. … 만일 이러한 형태의 혁명적 투쟁들이 당 전체의 기관을 통해 통합되지 않는다면, 그 의미의 90%를 잃게 될 것이고, 공통된 경험을 축적하며 전통과 연속성을 수립하는 당을 만들어내지 못할 것이다.[18]
따라서 당은 착취당하고 억압받는 자들의 투쟁 경험을 집중시켜 내고 일관성과 연속성을 부여하는 “촉매제” 역할을 한다. 파업 역시 마찬가지인데, 파업은 노동자계급과 혁명가들을 위한 전쟁 학교, 즉 “노동자들이 적과 싸우는 법을 배우는 학교”[19]로 여겨진다. 레닌의 야망과 그가 스스로에게 부여한 과제의 어려움을 가늠하기 위해서는 러시아의 거대한 영토와 당시 경제적·문화적 발전 수준이 매우 낮았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이렇게 사회민주주의 세력을 통합하는 데 있어 가장 효과적인 도구로 빠르게 떠오른 것은 신문이었다. 레닌은 이렇게 썼다.
오직 당 기관지의 창설을 통해서만, 혁명의 대의를 위해 ‘특정 분야에서 활동하는 투사’에게 자신이 ‘전체 당원과 함께’ 행진하고 있다는 의식, 자신의 일이 당에게 직접적으로 필수적이라는 의식, 자신이 러시아 노동자계급과 전체 민중의 가장 악랄한 적을 목 졸라 죽일 올가미를 형성하는 사슬의 고리 가운데 하나라는 의식을 심어줄 수 있다.[20]
이처럼 20세기 초, 레닌은 당에 대한 자신의 개념을 처음으로 개략적으로 제시했다. 즉, 당의 기본 과제는 노동자계급 운동에 공통적이고 조직된 방향을 제시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개념은 당시 국제 사회민주주의, 특히 조직적인 측면에서 가장 앞서 있던 독일 사회민주주의의 당 개념과 대체로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한편 레닌은 러시아 사회민주주의 운동의 통일을 위한 투쟁과 병행해서 당시 제2인터내셔널을 갈라놓고 있던 강령적 논쟁에도 개입했다. 당시 베른슈타인의 수정주의로 대표되는 기회주의 경향에 맞서 첫 번째 공공연한 전투가 전개되고 있었는데, 그러한 기회주의 경향은 불가피하게 러시아에도 일부 영향을 미쳤다.
1902~03년: <무엇을 할 것인가>와 당의 첫 번째 분열
1903년에 개최된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 제2차 대회는 “진정한” 통일을 이룰 대회로 기대되었다. 그러나 오히려 이 대회는 (소수파를 뜻하는) 멘셰비키와 (다수파를 뜻하며 레닌이 이끈) 볼셰비키가 처음으로 분열하는 대회가 되었다. 레닌은 이 대회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무엇을 할 것인가>[21]를 집필했다. 근본적으로 이 저서는 레닌이 “경제주의자”라고 부른 알렉산드르 마르티노프가 이끈 집단과의 논쟁이지만, 당시 전개되는 상황에 대한 대응을 포함하고 있었다.[22]
<무엇을 할 것인가>는 특히 이른바 마르크스-레닌주의 전통 안에서 레닌의 조직 개념에 대한 교조적이고 ‘신화화된’ 해석의 중심축 역할을 해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레닌의 조직 개념을 이해하는 데 필수적이다. 이 책이 불러일으킨 모든 논쟁을 다룰 수는 없으므로, 여기서는 레닌이 발전시킨 두 가지 주요 사상에 대해, 즉 첫째로는 의식성과 자발성의 상호관계에 대해, 둘째로는 노동자계급이 (그리고 그 선두에 선 사회민주주의가) 정치투쟁에 헌신해야 한다는 주장에 대해 초점을 맞출 것이다.
레닌은 <무엇을 할 것인가> 전반에 걸쳐 노동자들이 혁명적 의식을 “자발적으로” (다시 말해 순전히 자본주의의 발전과 그 위기를 통해) 얻을 수 있다는 생각에 대해 논쟁을 벌인다. 그는 대중의 자발성이 전능하다는 믿음, 즉 “자발성에 대한 굴복”을 막다른 길이라고 규정하며, 이는 러시아 사회민주주의가 조직적 과제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게 한다고 지적한다. 레닌에 따르면, 자발성은 계급의식의 변덕에 사로잡히게 한다. 계급의식은 직선적으로 발전(장기간의 점진적이고 끊임없는 발전)하는 게 아니라, 마치 진자처럼 오르락내리락하기 때문이다. “자발성에 의한 정치적 의식성의 압도 역시 자발적으로 이루어졌다.” 나아가 레닌은 계급의식이 어떤 중립적인 토대 위에서 발전하는 게 아니라, 자본가계급이 노동자계급보다 이데올로기적 수단을 천 배나 우월하게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는 역사적으로 결정된 틀 안에서 형성된다는 점을 상기한다.
그러나 독자는 왜 자발적인 운동, 즉 최소 저항의 경로를 따라가는 운동이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의 지배로 이어지는지 의문을 제기할 것이다.[23] 그 이유는 간단하다. 부르주아 이데올로기는 사회주의 이데올로기보다 기원이 훨씬 오래되었고, 더 완전한 형태로 발전했으며, 훨씬 더 많은 전파수단을 보유하고 있기 때문이다.[24]
레닌은 자발성을 숭배하는 자들에 맞서 “막대를 구부리기 위해” 이렇게 썼다. “그러므로 우리 사회민주주의의 과제는 자발성과 싸우는 것이다.” 리가 지적했듯이, 레닌이 그런 주장을 편 이유는 (일부의 해석과는 달리) 대중의 자발성에 대한 불신이 아니었다. 반대로 노동자와 민중이 대규모 봉기에 나설 것이라는 확신이었고 그에 대해 혁명가들이 대비하지 못할 것에 대한 우려였다. 레닌을 사로잡았던 것은 바로 혁명가들의 준비 부족과 조직된 사회민주주의 세력의 후진성이었지, 대중의 자발성에 대한 불신이나 혐오가 아니었다. <무엇을 할 것인가>의 마지막 장에서는 몇 가지 실천적인 결론을 제시한다. 여기서 레닌은 아마추어적인 방법에 맞선 자신의 생각을 급진적으로 전개하여 “중앙집권화”와 전업 활동가에 중심적 의미를 부여한다.[25] 또한 노동조합 같은 광범위한 노동자 조직과 당이라는 혁명가 조직이 어떻게 구분되어야 하는지를 설명한다.
<무엇을 할 것인가>에서 또 다른 주목할 만한 측면은 (이번에는 직접적으로 강령적인 차원에서) 마르티노프와 벌이는 논쟁이다. 레닌은 마르티노프가 노동자계급을 향한 정치선동을 “노동력 판매조건(노동조건 및 생활조건) 개선을 위한 노동자들의 고용주에 맞선 집단적 투쟁”으로 축소함으로써 그 범위를 좁히고 빈곤하게 만들었다고 비판했다. 물론 레닌에게 있어 노동자계급의 경제투쟁과 일상투쟁은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었지만, 혁명적 관점에서 계급의식을 날카롭게 하는 데에는 불충분했다. 적어도 두 가지 이유에서 정치투쟁이 절대로 필수적이었다. 첫째, 자본주의 사회의 모든 양상을 이해하고 그 근본적인 반동적 성격을 파악할 수 있도록 노동자계급과 혁명가를 교육하기 위해서다. 둘째, 노동자혁명의 승리에 필수적인 동맹을 구축하기 위해서다. 따라서 레닌은 다음과 같이 썼다.
계급적 정치의식은 오직 밖으로부터만, 즉 경제투쟁 밖으로부터만, 노동자와 고용주 간의 관계 영역 밖으로부터만 노동자들에게 전달될 수 있다. 이러한 지식을 얻을 수 있는 유일한 영역은 모든 계급과 계층이 국가 및 정부와 맺는 관계의 영역, 모든 계급 간의 상호 관계의 영역이다.[26]
사회민주주의자의 이상은 노동조합 간부가 아니라 인민의 호민관이어야 한다. 즉 어디에서 나타나든, 어떤 계층이나 신분에 영향을 미치든, 모든 폭정과 억압에 대응할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 이러한 모든 폭정과 억압의 양상을 종합하여 경찰 폭력과 자본주의 착취라는 하나의 그림으로 그려낼 수 있는 사람, 아무리 사소한 사건이라도 자신의 사회주의적 신념과 민주적 요구를 만천하에 드러내고, 노동자계급 해방 투쟁의 세계사적 의미를 모든 이에게 명확히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27]
여기서 근본적으로 드러나고 있는 것은 자본주의 체제를 무너뜨리기 위해서는 노동자계급이 헤게모니적 지위를 구축해야 한다는 확신, 다시 말해 경제적·조합주의적 입장에만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착취당하고 억압받는 모든 이들의 요구를 지지하는 동맹을 구축해야 한다는 확신이다.[28]
앞서 말했듯이, 레닌의 <무엇을 할 것인가>는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 제2차 대회를 준비하는 토론의 일부였다. 이 대회는 강령적인 관점에서 (특히 경제주의자들이 소수파로 전락하는 등) 진전을 이루었지만, 조직 문제에서 예상치 못한 의견 차이가 나타났다.[29] 논쟁은 특히 당 규약 제1조, 즉 당원 자격 요건을 명시한 조항을 둘러싸고 집중되었다. 레닌이 제시한 안은 마르토프가 제시한 안과 충돌했다. 레닌의 안이 당원들의 당 활동 ‘참여’를 강조한 것과 달리, 마르토프의 안은 단순히 ‘협력’만을 요구했다.[30] 레닌의 안은 통과되지 못했지만, 당 지도부와 당 기관지 이스크라의 편집부 선출에서는 레닌과 그 지지자들이 과반수를 차지했다.[31] 마르토프 안 지지자들은 나중에 지도부 선출 투표가 사고였다고 주장하며 이의를 제기했고, 이를 구실로 레닌 지지자들과 결별했다.[32]
제2차 대회 이후 몇 달 동안 멘셰비키는 레닌에 대한 비난을 거세게 퍼부으며 분열의 원인을 그의 “관료적이고, 형식주의적이며, 전제적인 중앙집권적 개념”[33] 탓으로 돌렸다. 이듬해 레닌은 <일보 전진, 이보 후퇴>라는 장문의 글에서 대회의 사건들을 회고하면서, 두 분파와 그들의 조직 개념 사이의 일관성을 보여주었다. “[조직에 속하지 않지만] 어떤 식으로든 당을 돕는 사람들”을 당원이라고 부르는 것을 찬성한다고 말한 멘셰비키와 악셀로드의 조직 개념에 반대하여,[34] 레닌은 이렇게 선언했다.
나는 그것으로 다음과 같은 나의 기대와 요구를 분명하고 정확하게 나타내려고 한 것이다. 즉, 계급의 전위로서 당은 가능한 한 조직되어야 한다는 것, 당은 적어도 최소의 조직에나마 복종할 용의가 있는 요소만을 가입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반면에 나의 논적은 조직된 요소와 조직되지 않은 요소, 즉 지도에 따르는 자와 그렇지 않은 자를 하나로 뭉뚱그려 버린다.[35]
레닌은 또한 자신의 입장을 본질적으로 음모론적이거나 종파적인 개념이라고 왜곡하는 풍자에 대해서도 반박했다.
노동자계급의 전위로서 당은 계급 전체와 혼동되어서는 안 된다. … 당 조직이 오직 전업 혁명가로만 구성되어야 한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극히 제한되고 비밀스러운 조직에서부터 매우 광범하고 자유로운 느슨한 조직에 이르기까지 모든 종류, 모든 등급, 모든 색채의 다양한 조직이 필요하다.[36]
여기서 우리는 서로 다른 동심원들로 이루어진 조직체계를 발견할 수 있다. 결론적으로 레닌이 제안한 것은 ‘전위주의’ 당 개념(또는 그의 반대자들이 자주 비난했듯이 ‘블랑키주의’ 당 개념)이라기보다는, (계급 안에서 가장 의식적이고 단호한 부분인) 전위를 포괄하는 당과 대중 간의 관계를 재정립하는 것이었다. 이 때 레닌이 명시적으로 국제 사회민주주의를 겨냥하지는 않았지만, 그의 당 개념이 당시 국제 사회민주주의에서 유행하던 당 개념들과의 단절로 나아가는 간접적인 첫걸음이었다는 점은 흥미롭다. 레닌의 당 개념은 국제적인 차원을 포함하여 여러 차례 비판을 불러일으켰으며, 그중에서도 로자 룩셈부르크의 비판이 가장 유명하다.[37]
마지막으로, 레닌은 당규를 둘러싼 논쟁의 쟁점을 설명하는 데 큰 중요성을 두었지만,[38] 그것이 당 분열의 충분한 이유가 된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마르크스-레닌주의자들의 주장과는 달리, 분열을 주도한 것은 멘셰비키였다. 르블랑의 설명처럼, 레닌이 볼셰비키와 멘셰비키 간의 진정한 통합이라는 생각을 포기한 것은 1904년 가을이 되어서였다.[39]
이 일화는 당의 단결 문제에 대한 레닌의 입장을 잘 보여준다. 레닌은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분리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은 아니었다.[40] 하지만 또한 레닌은 기회주의 세력이 중요한 사안에 대한 정치적·강령적 양보를 획득하는 수단으로 당의 단결이 이용되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역사가 할 드레이퍼는 이렇게 요약한다.
레닌의 접근 방식은 다음과 같았다. 단결은 중요하지만, 다수의 승리를 좌절시키는 대가를 치르면서까지 단결해서는 안 된다. 단결은 중요하지만, 언제나처럼 민주적인 토대 위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우파는 다음 당 대회에서 승리하기 위해 노력할 수는 있지만, 분열하지 않는 대가로 정치적 양보를 요구해서는 안 된다.[41]
1905년 혁명: 당과 대중
1905년은 레닌의 이론적·정치적 궤적에 있어 결정적인 전환점이었다. 레닌 자신이 언급했듯이, 제1차 러시아 혁명은 다양한 사상을 실천적 경험 속에서 시험해 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42] 이러한 측면에서, 1905년은 볼셰비키의 강령적 주장이 멘셰비키의 강령적 주장을 압도한 해였으며, 레닌이 혁명적 과정 속에서 전위와 대중의 관계를 재검토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당시 사회민주주의 진영 전반에서 다가오는 혁명에 관한 전략적 논쟁이 벌어졌다. 노동자운동 내 대부분의 흐름은 다가올 혁명의 내용이 (민주적 과제와 농업 과제를 가진) 부르주아적인 것이라는 데 동의했다. 하지만 이 혁명에서 노동자계급이 수행해야 할 역할을 둘러싸고 볼셰비키와 멘셰비키가 갈라졌다. 유럽의 자본주의 발전 ‘단계’를 러시아에 기계적으로 적용한 멘셰비키는 자유주의자들(카데츠로 알려진 입헌민주당)이 주도하는 부르주아 혁명을 사회민주주의가 열심히 동행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와 반대로, 멘셰비키와 트로츠키의 견해 사이에서 중간적인 입장을 취했던 레닌은 혁명적 사회민주주의가 주도권을 잡고 대중의 분노를 봉기의 방향으로 이끌어야 한다고 주장했다.[43] 거대한 대중 행동의 시기는 이러한 이론들이 실천 속에서 시험되게 하였고, 1905년의 경험은 이러한 논쟁들을 해결할 기회를 제공했다.
(이제 멘셰비키의 사상을 표현하는) 새 <이스크라>는 사건들의 영향을 받아 실제로는 자기 반대파의 입장을 채택하고 있다. 다시 말해 멘셰비키 자신의 결의가 아니라 제3차 대회[44]의 결의에 따라 행동하고 있다. 혁명적 사건의 흐름보다 잘못된 교리를 더 잘 비판하는 것은 없다.[45]
레닌이 당의 재통합, 특히 볼셰비키와 멘셰비키의 재통합을 다시 주장한 것은 혁명의 진행 과정이 필연적으로 멘셰비키를 왼쪽으로, 따라서 볼셰비키의 입장으로 이끌 것이라는 믿음에 기초해서였다.
대중적 압력을 완화하기 위해 차르는 내무부 장관 불리긴에게 입법 의회인 두마를 구성하라고 지시했다. 선출 원칙이 매우 부적합했던 이 첫 번째 두마는 사회민주당원들 사이에서 활발한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볼셰비키는 적극적인 보이콧을 주장했고, 사회민주당 조직의 다수가 이에 찬동했다. 이들은 헌법적 허상에 맞서기 위한 선전·선동 캠페인을 펼쳤다.[46] 그러나 멘셰비키는 보이콧 결의안에 찬성하지 않았다.[47] 레닌은 당시 러시아 밖에 거주하고 있었지만, 특히 상트페테르부르크와 모스크바에서 일어난 러시아 노동자계급의 파업과 거리 시위를 면밀히 주시했다.[48]
1905년 혁명의 가장 큰 혁신이자 (마르셀 리브만의 표현으로) “가장 독창적인 창조물”은 단연 소비에트의 등장이었다. 처음에는 공장 단위로, 나중에는 지구 단위로 선출된 이 대규모 노동자평의회는 혁명 기간 동안 등장하여 여름 동안 여러 도시로 확산되었다. 가장 널리 알려진 상트페테르부르크 소비에트는 1905년 10월에 결성되었으며, 25만 명의 노동자들이 보낸 대표들을 모아냈다.[49] 이러한 평의회는 투쟁에 참여하는 대중의 다양한 활동을 광범위하게 조직하고 조정할 수 있게 해 주었다.
멘셰비키 활동가들과 달리, 볼셰비키 활동가들은 처음에는 이러한 새로운 조직체에 대해 크게 당황했다. 브루에가 지적했듯이, “실제로 볼셰비키 활동가들은 새로운 혁명적 환경에 느리게 적응했다. 비밀스럽게 활동하던 이들은 어떻게 웅변가가 되고 군중을 모아야 하는지 하루아침에 알지 못했다.” 많은 역사학적 자료들은 볼셰비키 활동가들 사이에 주저함 또는 거의 불신에 가까운 감정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심지어 상트페테르부르크 지역 조직은 소비에트가 노동자계급을 낮은 발전 수준에 머물게 할 위험이 있다는 결의안을 채택하기까지 했다. 이러한 관점은 레닌의 생각과 거리가 멀었다. 레닌은 해외에 있었지만 볼셰비키 활동가들의 소비에트에 대한 편견과 싸우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라딘 동지가 ‘노동자대표 소비에트냐, 당이냐’라고 질문을 제기한 것은 잘못된 것 같다. 나는 질문을 이런 식으로 하는 것 자체가 잘못되었으며, ‘노동자대표 소비에트와 당 모두’라는 결정이 반드시 내려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유일한 질문이자 매우 중요한 질문은 소비에트와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의 임무를 어떻게 나누고 어떻게 결합하느냐이다.[50]
레닌의 관점에서 볼 때, 소비에트는 혁명 과정의 발전을 촉진하기 위해 당과 연계되어야 했다.
“노동자대표 소비에트는 총파업을 통해, 총파업과 연계하여, 그리고 총파업의 목적을 위해 탄생했다. … 정치투쟁을 이끌어 나가기 위해서는 (뒤에서 논의할 방향으로 재조직된) 소비에트와 당 모두가 동등한 수준에서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생각한다.”[51]
소비에트의 출현은 레닌에게 조직(전위)과 대중의 자발성 사이의 변증법적 개념을 이론적으로 심화하는 진정한 계기가 되었다. 혁명 계급의 투쟁에서 탄생하고 그 안에서 형성된 이 조직들을 당의 결정에 종속시키려 했던 볼셰비키 간부들에게 레닌은 오히려 그 조직들을 확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내 생각에 정치적 지도력을 제공하는 혁명적 중심인 노동자대표 소비에트는 지나치게 광범위한 조직이 아니라, 오히려 지나치게 협소한 조직이다.”[52] 혁명 과정에 대한 이와 같은 새로운 개념은 레닌의 사상에서 결코 사라지지 않았으며, 1917년 러시아혁명 때 레닌이 취하게 될 방향뿐만 아니라 코민테른 초기 노동자 공동전선 전술에 대한 논쟁까지 예고하는 것이었다. 이는 행동하는 노동자계급의 단결을 위한 투쟁과 그 혁명적 지도력을 위한 정치적 투쟁이라는 혁명 방정식의 두 항 사이의 관계를 이분법적으로 바라보지 않는 레닌의 관점을 보여준다.
1905년 혁명을 평가하면서 레닌은 당의 진정한 재조직을 주장했다. 레닌은 혁명이 쟁취한 민주적 진전을 주목했다. 이러한 진전은 매우 제한적이었지만 합법 활동과 당의 민주화를 가능하게 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가 있었다.[53] 레닌은 “볼셰비키 위원들”[54]의 보수적 태도에 맞서 싸웠고, 그들에 대항하여 당의 “문호개방”[55]을 주장했다. 레닌은 지역 조직을 확대하고 선거 원칙을 적용하는 새로운 조직운영 방식이 당에게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우리 당의 활동 조건이 급격하게 변화하고 있다. 집회의 자유, 결사의 자유, 언론의 자유가 획득되었다. 물론 이러한 권리들은 매우 불안정하며, 지금의 자유가 마냥 계속되리라고 믿는 것은 범죄는 아닐지라도 어리석은 짓이 될 것이다. 결정적인 투쟁은 아직 오지 않았으며, 이 투쟁을 위한 준비가 최우선 과제이다. 당의 비밀 조직은 유지되어야 한다. 그러나 동시에 현재 상대적으로 넓어진 활동 범위를 최대한 활용하는 게 반드시 필요하다. 비밀 조직 외에도, 새롭게 합법적이거나 준합법적인 당 조직들을 (그리고 당과 연계된 조직들을) 많이 설립하는 게 반드시 필요하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새로운 조건에 맞춰 당의 활동을 조정하거나 새로운 문제에 대처하는 게 불가능하다.[56]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1905년은 당에 민주주의를 도입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 전까지는 러시아의 정치적 상황 때문에 당내 민주주의가 매우 제한적이었다. 혁명은 이러한 상황을 바꾸었고, 볼셰비키는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민주적 중앙집권제”라는 개념을 당에 도입했다. 이는 <무엇을 할 것인가>에서 제시된 중앙집권제에 민주주의를 더한 것이었다. 이후 레닌은 당내 민주주의의 주요 옹호자가 되었다. “비판의 자유와 행동의 통일”에 관한 볼셰비키 중앙위원회 결의에 날카롭게 반발[57]하며, 레닌은 민주적 중앙집권제를 다음과 같이 정식화했다.
민주적 중앙집권제와 지방 당 조직의 자율성 원칙은 구체적인 행동의 통일성을 해치지 않는 한, 보편적이고 완전한 비판의 자유를 포괄한다. 반대로, 당이 결정한 행동의 통일성을 방해하거나 어렵게 만드는 모든 비판은 배제된다.[58]
1905년 혁명과 소비에트의 출현은 레닌이 혁명적 역동성 속에서 당과 대중의 관계를 재정립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1903년 당 대회 이후 레닌은 “자발적 요소”를 과소평가한다는 비난을 받았는데, 1905년 혁명에서 레닌은 오히려 자발적 요소에 결정적인 중요성을 부여했다. 자발성(대중)과 조직(전위)의 관계는 변증법적 관점에서 고찰되어야 한다. 때로는, 특히 상황이 급변하는 시기에는 자발적 요소가 조직적 요소보다 앞서 나갈 수도 있다. 레닌은 “노동자대중은 지도자들보다 먼저 투쟁의 객관적 조건 변화와 파업에서 봉기로의 전환 필요성을 감지했다”[59]고 썼다. 그러나 레닌은 당에 대한 자신의 개념을 더욱 풍부하게 발전시켰지만, 1903년 멘셰비키와 분리하게 만든 지점에 대해서만큼은 근본적으로 동일한 관점을 유지했다. 즉, 혁명의 시기에도 (어쩌면 특히 혁명의 시기에) 통일되고 중앙집권화된 당의 존재가 결정적인 문제라는 것이다.
레닌은 노동자계급 전위의 결집체라는 당의 개념을 포기하지 않으면서도, 정치 상황이 바뀐 만큼 볼셰비키 간부들이 언제 어디서나 대중과 만나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계급/대중과 당/전위 사이의 기계적인 관계가 아니라, 벤사이드가 말했듯이 “당과, 계급이 축적한 경험 사이의 끊임없는 교류”를 보여준다. 이는 레닌의 당 개념에서 어떻게 당이 큰 유연성을 가질 수 있는지를 말해준다. 그것은 정치 상황의 변화를 포착하여 스스로를 갱신하면서 보수화를 피할 수 있는 당의 능력이다. 따라서 조직은 자발성을 가로막는 방벽이 되지 않고, 오히려 그 규율 덕분에 변화하는 상황에 신속하게 적응할 수 있게 된다. 헝가리 마르크스주의 철학자 루카치는 이렇게 설명했다.
당의 역할은 결코 추상적으로 고안된 전술을 대중에게 강요하는 게 아니다. 오히려 당은 대중의 투쟁으로부터 그리고 투쟁을 수행하는 방식으로부터 끊임없이 배워야 한다. … 이론에서의 모든 독단과 조직에서의 모든 경직성은 당에 치명적이다.[60]
이러한 관점은 대다수 독일 사회민주주의자들의 관점과 명확한 대조를 이룬다. 그들은 대중의 자발성을 당이 때때로 동원할 수 있는 보조적인 힘으로 여겼지만, 본질적으로는 여전히 노동자계급의 “미조직” 요소이자 “미성숙”의 표현으로 간주했다. 이는 특히 1910~13년 로자 룩셈부르크와 안톤 판네코크가 1905년 러시아 혁명에 대한 평가를 바탕으로 ‘대중파업’ 논쟁을 제기했을 때, 칼 카우츠키가 이들에 맞서면서 옹호한 입장이었다. 레닌은 당시 이 논쟁을 직접 파악하지 못했던 것으로 보이지만, 그가 옹호했던 입장이 카우츠키보다는 룩셈부르크의 입장에 훨씬 더 가까웠다는 것은 분명하다.
1905년 혁명은 볼셰비키와 멘셰비키 간의 화해를 확고히 하고 가속화시켰다. 혁명은 두 세력 간의 정치적·강령적 차이점을 명확히 드러냈지만, 레닌은 멘셰비키가 상황적 압력에 굴복하여 볼셰비키의 정치노선에 따를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확신했다.[61] 1905년 혁명 과정에서 볼셰비키와 멘셰비키는 같은 편에 서서 투쟁했기 때문이다. 만약 정치투쟁이 필요하다면, 그것은 통일된 당의 틀 안에서 전개될 수 있고 그렇게 되어야만 한다고 레닌은 생각했다.
우리는 우파 사회민주주의자들의 이러한 경향에 맞서 가장 단호하고 공개적이며 무자비한 이데올로기 투쟁을 벌여야 한다. … 그러나 통일된 당 안에서 전개되는 이러한 이데올로기 투쟁은 조직을 분열시켜서는 안 되며, 노동자계급의 행동 통일을 방해해서도 안 된다.[62]
1906년 4월 스톡홀름에서 통합 당 대회가 열렸다. 거기서도 레닌을 이끈 것은 (새로운 정치상황에 대한 분석과 함께) 다가오는 혁명을 단호하게 준비해야 한다는 그의 확신이었다.[63]
내일이든 아니면 모레든 사건들이 어떤 식으로든 우리를 불가피하게 봉기하도록 불러낼 것임을 기억하자. 행동의 시기가 왔을 때 유일하게 중요한 문제는 우리가 준비되고 통일된 상태에 있느냐 아니면 방심하고 분열된 상태에 있느냐일 것이다.[64]
1907~12년: 반동의 시대와 최종 분열
1906년 4월 스톡홀름에서 열린 통합대회에서 다수파는 멘셰비키였다. 당원 3만 4천 명을 대표하는 멘셰비키 대의원 62명과 당원 1만 4천 명을 대표하는 볼셰비키 대의원 46명이 참석했다. 레닌과 볼셰비키는 분파를 유지했지만, 레닌은 그 목표가 새로운 정당 건설이 아니라 단호한 전술을 실행하기 위한 당내 블록이 되는 데 있다고 선언했다. 1907년 5월 런던 대회에서는 내부 세력관계가 뒤집혀 볼셰비키가 근소한 차이로 다수파가 되었다. 이는 멘셰비키가 1905년의 혁명적 행동들을 부인한 점과 볼셰비키 간부들의 결속력 및 조직적 노력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였다.
그러나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은 곧 훨씬 더 불리한 새로운 상황에 직면하게 되었다. 1907년 하반기부터, 그리고 특히 1908년에, 정권이 사회민주주의 운동에 대한 가혹한 탄압을 전개했다. 노동자운동과 파업 건수가 급감했고, 당 위원회들이 해체되었으며, 체포와 추방이 잇따랐다. 브루에는 러시아 사회민주당 당원 수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1907년 모스크바에는 당원 수가 수천 명에 달했으나 1908년 말에는 500명, 1909년 말에는 150명으로 줄어들었고, 1910년에는 조직이 완전히 해체되었다. 전국적으로도 당원 수가 약 10만 명에서 1만 명 미만으로 감소했다.”[65] 1905~06년의 혁명적 시기가 지나간 뒤, 반동이 가혹하게 밀어닥쳤고, 사회민주주의 운동은 전국적으로 쇠퇴했다.
이러한 새로운 상황은 당의 잔존 세력 내부에서 긴장과 의견 불일치를 심화시키는 데 특히 일조했다. 1905년 혁명의 성과와 새로운 상황에서 어떤 정책을 채택할 것인지에 대한 논쟁이 다시 불거졌다. 의견 불일치는 주로 제3차 두마에 대한 정책과 당의 불법 활동 지속에 관한 정책을 둘러싸고 구체화되었다. 볼셰비키 내부에서도 멘셰비키 내부에서도 의견 차이가 발생하여 새로운 세력 구도가 형성되었다. 볼셰비키 내부에서 레닌은 보그다노프가 이끄는 ‘소환파’에 맞서 소수파의 입장을 고수했다. 소환파는 오로지 불법 활동만을 고집하면서 두마를 보이콧해야 한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그러나 레닌은 당시 상황에서 혁명가들이 합법적이든 준합법적이든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세력을 규합하고 강령을 널리 알릴 필요성을 주장했다. 따라서 레닌은 제3차 두마의 반동적 성격을 인정하고 헌법적 환상에 맞서 싸우면서도, 멘셰비키와 함께 선거 보이콧에 반대하는 표를 던지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보그다노프 지지자들은 볼셰비키 내에서 노동조합 가입을 포함한 모든 합법적 활동에 반대하는 경향인 ‘최후통첩파’와 합류했다. 멘셰비키 측에서는 비밀 활동 포기와 불법 행동에 대한 원칙적 거부를 주장하는 반대 경향이 나타났다. 이러한 ‘청산파’ 경향에 맞서 레닌은 멘셰비키 내 플레하노프 파벌과 연합하여 내부 전선을 구축하려고 했다. 청산파들은 1908년 12월 당 대회에서 공세를 시작했다.
{청산파들의 공세는} 일부 당 지식인들이 어떻게 해서든 기존의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을 청산하고 형태가 모호한 합법 조직으로 대체하려는 시도다. 이러한 합법 조직으로의 변화는 당의 강령, 전술, 전통을 명확하게 포기하는 결과를 가져올 수밖에 없다.[66]
이처럼 1908년부터 1912년까지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은 양적으로 약화되었을 뿐만 아니라 여러 내부 갈등에 시달렸다. 이러한 일련의 정치적 과정들이 초래한 반동적인 상황은 당내 단결을 향한 압력으로 작용했다. 레닌은 “단결의 본질과 의미에 대한 근본적으로 다른 두 가지 관점”을 지적하면서, 볼셰비키와 멘셰비키 양측에 존재했던 화해적 경향에 맞서 싸웠다.
단결에 대한 한 가지 관점은 ‘특정 개인들, 집단 및 기관들’의 ‘화해’를 최우선 과제로 삼는다. 당 활동의 방향에 대한 그들의 견해 일치는 부차적이다. 의견 차이가 발생한 뿌리, 범위, 객관적 조건에 대해 밝히는 대신 의견 차이에 대해 침묵을 지켜야 한다고 본다. … 그러나 단결에 대한 또 하나의 관점은 오래전부터 여러 가지 심오한 객관적 원인들이 러시아 사회민주주의의 두 주요 분파에 변화를 가져오기 시작했고, 지금도 꾸준히 그러한 변화를 일으키고 있다고 본다. 이러한 변화는 때로는 일부 ‘특정 개인들, 집단 및 기관들’이 원치 않거나 심지어 인지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지만, 단결을 위한 이념적·조직적 토대를 마련해 가고 있다.[67]
다시 말해, 레닌에게 있어 당의 단결과 결속은 러시아 사회민주주의에 만연했던 강령적·정치적 논쟁에 대응하지 않고서는, 청산파(기회주의)와 소환파(극좌주의)라는 상반된 위협에 맞서 “양면 투쟁”을 벌이지 않고서는 이루어질 수 없었다. 1910년 이후, 특히 1911년과 1912년에 계급투쟁이 부활하면서, 레닌은 새로운 혁명적 사건이 다가오고 있다는 확신을 갖고 자신의 관점을 더욱 날카롭게 다듬었다. 혁명가들은 다음 혁명적 격변에 대비해야 했고, 이는 견고하게 구축된 조직 없이는 불가능했다. 이러한 관점을 바탕으로 레닌은 1912년 1월 프라하 대회를 계기로 청산파의 배제를 선언하고, 최대한 광범위한 합법 노동자조직들의 네트워크로 둘러싸인 불법 사회민주주의 세포를 구축하기 시작했다. 이로써 볼셰비키는 마침내 독자적인 정당이 되었다. 이와 관련하여 르블랑은 이렇게 지적한다.
이러한 분리 계획은 <무엇을 할 것인가>나 <일보 전진, 이보 후퇴>에서 제시되었던 어떤 정식보다도 더 심오한 수준에서 독일 사회민주주의라는 고전적 모범에서 벗어난 것이었다.[68]
이 결정은 국제 사회민주주의 진영 안에서 강한 반발을 불러일으켰으며, 로자 룩셈부르크와 카우츠키로부터도 비판을 받았다. 카우츠키는 볼셰비키가 다른 성격의 정당을 만들고 있다고 비난했다.
1917년: 혁명의 당
볼셰비키는 형성 초기부터 상당히 다양한 조직 형태를 거치며 발전해 왔다. 특히 1917년 2월부터 10월까지, 볼셰비키 역사상 가장 격동적인 8개월 동안 이러한 경향은 더욱 두드러졌다.
1917년 3월 초, 차르 체제 붕괴로 이어진 봉기 이후에도 투쟁은 가라앉지 않았다. 파업이 잇따랐고, 새로 지명된 임시정부는 상황을 통제할 힘이 없었다. 처음부터 임시정부는 1905년 모델을 따라 부활한 소비에트와 맞서야 했다. 소비에트는 개량주의자들(멘셰비키와 사회혁명당)이 주도했다. 여러 면에서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는 (그리고 전국 각지에서 등장한 모든 소비에트는) 잠재적으로 더 큰 힘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 힘을 행사하기를 거부하고 부르주아 정부에 조언하고 압력을 가하는 데 그쳤다.
1905년 혁명과 마찬가지로 1917년 2월 혁명도 혁명가들을 놀라게 했다. 페트로그라드에서 볼셰비키 당은 금속 노동자 알렉산더 슐랴프니코프를 중심으로 조직된 “중앙위원회 산하 러시아국”이 이끌고 있었다. 이 지도부는 사건에 뒤처져 있었고,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파악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3월 12일 시베리아 유배에서 돌아온 중앙위원 스탈린과 카메네프가 도착하자, 당은 조국 방위 및 임시정부에 대한 조건부 지지와 압력 행사 입장으로 나아갔다.[69] 이러한 입장은 1917년 3월 7일부터 12일까지 스위스에서 레닌이 써서 보낸 내용과 정반대였다.[70]
4월 3일 페트로그라드로 돌아온 레닌은 멘셰비키 입장으로 기울어진 자신의 당에 맞서 곧바로 투쟁에 나섰다. ‘봉인 열차’에서 내리자마자 가진 첫 연설에서 레닌은 2월 혁명이 노동자계급의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고, 혁명이 중간에 멈출 수는 없으며, 노동자계급이 대다수 병사들과 연대하여 민주주의 혁명을 프롤레타리아 사회주의 혁명으로 전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레닌은 이렇게 말했다.
매 순간, 매일, 모든 유럽 제국주의의 붕괴를 기대할 수 있다. 우리가 성취한 러시아 혁명은 이러한 붕괴의 시작을 알렸고 새로운 시대의 토대를 마련했다. 세계 사회주의 혁명 만세![71]
다음 날, 레닌은 <4월 테제>를 발표하여 당과 혁명이 나아갈 방향을 제안했다. 임시정부를 지지하지 않고 그에 맞서 단호히 투쟁한다. 어떠한 “혁명적 방위주의”(혁명의 방어를 내걸고 전쟁 지속)에도 반대한다. 멘셰비키와의 화해에 반대한다.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 소비에트를 토대로 혁명 정부를 수립하여 러시아를 사회주의의 길로 이끈다.[72] 레닌의 이러한 입장은 중앙위원 다수의 입장과 상반되었지만, 간부들과 일선 당원 다수의 지지를 받았고 그 지지가 나날이 확대되었다.
레닌은 놀라울 정도의 빠른 속도로 승리했다. 레닌의 입장은 제1차 페트로그라드 볼셰비키 협의회(4월 14일 또는 22일)에서 상당히 명확하게 채택되었고, 이어 4월 24일부터 29일까지 열린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볼셰비키) 제7차 대회에서 채택되었다.
당의 급진적 기층에 의지했던 레닌은 그들을 억제하면서 상황을 통제하기 위해 노력해야만 했다. 정치적·사회적 위기가 계속 악화되면서, 시위가 폭동으로 발전했다(4월 20일과 21일 첫 폭동 발생). 노동자계급과 페트로그라드 주둔군 내부에는 임시정부를 가능한 한 빨리 전복시키고자 하는 세력이 상당수 존재했다. 7월 3일부터 5일까지 이어진 준봉기적 나날들은 이러한 열망이 최고조에 달한 시기였다. 정권 장악에 성공할 가능성이 충분히 확보되지 않은 상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움직임이 나타났다.
이 시기 볼셰비키 당은 ‘절대 권력을 가진 지도부가 이끄는 획일적인 집단’이라는 이미지와는 정반대의 모습을 보였다. 소비에트나 공장위원회처럼, 볼셰비키 당은 우파, 좌파, 중간파 경향들이 끊임없이 이동하고 재편성되는 초민주적인 방식으로 운영되었다. 실천적으로는 연방주의와 자율성의 요소도 강하게 드러났다. 지역조직 또는 부문조직들은 자신들의 권한과 선택을 옹호했고, 때로는 중앙위원회에 반기를 들었다. 수도에서 내려지는 주요 결정들은 종종 장시간의 토론 끝에 중앙 지도부와 이러한 반(半)자치조직들이 타협에 이른 결과였다.
페트로그라드에서는 두 조직이 핵심이었다. 당을 이끈 페트로그라드 위원회는 수도의 공장과 거주 지역에서 당의 일상 활동을 조직했다. 군사조직의 지도부는 (시기에 따라) 약 21만 5천 명에서 30만 명에 이르는 주둔군 내의 정치활동과 조직활동을 지휘했다. 이 두 조직은 (특히 군사조직은) 7월의 날들에 많은 책임이 있었다. 7월 봉기는 한편으로는 대중의 혁명적 자발성과, 다른 한편으로는 혁명 세력, 주로 볼셰비키들이 내린 결정이 결합된 결과였다. 레닌과 트로츠키는 부분적으로 반대하는 의견을 냈지만, 결국 자신들이 조직하지도 않았고 진정으로 원하지도 않았던 이 사건을 함께 감당했다.[73]
2월부터 10월까지 볼셰비키 당은 두 가지 동시적인 변혁을 겪었다. 첫째, 수만 명의 노동자 전위들을 끌어들였다. 2월 혁명 직전 2만 명으로 추산되었던 당원 수는 10월 혁명 직전 10만 명을 넘어섰다. 이들은 당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었고, 어떤 의미에서는 당을 혁명적으로 변화시켰다. 둘째, 통합 대회로 알려진 제6차 대회(1917년 7월 26일~8월 3일)를 통해, 당은 과거 볼셰비키 또는 멘셰비키로 활동했거나 독립적으로 활동했던 다양한 집단 및 개인들과 합병했다. 가장 중요한 세력은 트로츠키를 포함하여 4,000명의 회원을 보유한 ‘메즈라이온치’(구역연합)였다.[74] 이전에 레닌은 여러 차례 비꼬는 어조로 트로츠키를 언급하며 그와 함께라면 아무것도 불가능할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이후 트로츠키는 당의 지도부, 혁명의 지도부, 신생 노동자국가의 지도부로서 거의 레닌의 분신과 같은 존재가 되었다.
레닌에게 결정적인 기준은 혁명 그 자체였다. 강령은 추상적인 개념이 아니라 혁명적 사건의 불길 속에서 실제로 적용되어야 할 것이었다. 이와 관련하여, 1917년을 거치면서 트로츠키가 당에 대한 레닌의 입장에 동의했고 레닌 또한 혁명의 사회주의적 역동성에 대한 트로츠키의 결론에 타당성을 인정했다는 이야기가 종종 나온다. 물론 어느 정도는 사실이지만, 트로츠키주의와 레닌주의의 혁명관이 종종 주장되는 것만큼 크게 다르지는 않았다는 점도 강조되어야 한다. 레닌은 이미 1905년에 이렇게 역설했다. “민주주의 혁명이 일단 성취되었을 때, 우리는 바로 의식적이고 조직된 노동자계급의 역량을 갖고 사회주의 혁명의 길로 즉시 나아갈 것이다. 우리는 중단 없는 혁명을 추구한다. 우리는 도중에 멈추지 않을 것이다.”[75]
7월의 날들 이후 반동과 탄압의 시기가 이어졌고, 볼셰비키들은 다시 은신해야 했다. 하지만 이러한 상황은 몇 주 만에 완화되었고, 코르닐로프가 쿠데타를 시도한 8월 말에는 완전히 역전되었다. 임시정부의 케렌스키 총리가 새로 총참모장으로 임명한 코르닐로프의 쿠데타 시도와 실패는 마침내 임시정부의 신뢰를 무너뜨렸고 진퇴양난 속에 빠뜨렸다. 임시정부를 계속 지지했던 개량주의자들도 마찬가지 상황에 빠졌다.
9월, 볼셰비키가 거침없이 부상했다. 볼셰비키는 페트로그라드를 시작으로 모스크바와 다른 여러 지방에서 소비에트의 다수당이 되었다. 트로츠키는 1905년에 이어 다시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의 의장이 되었다. 레닌은 이러한 새로운 상황을 인식하고 환영하면서도 볼셰비키 지도자들에게 지체 없이 봉기 준비를 시작할 것을 계속해서 압박했다. 혁명의 승리로 가는 길이 열렸고, 10월 24~25일 전국 소비에트 대회가 공식적으로 권력을 장악했다.
이렇게 매우 간략히 요약한 1917년 2월부터 10월까지의 사건 전개는 훨씬 더 자세하게 이해될 필요가 있다. 바로 이를 통해 우리는 혁명을 추구하고 준비하는 당·지도부와 대중의 자기조직화가 결합함으로써 사회 혁명의 과정이 만들어진다는 것을 구체적이고도 실질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76]
레닌주의와 레닌주의 조직이 노동자계급 운동의 상당 부분에 지침이 되고 이상이 되고 모델이 되었다면, 이는 분명 1917년에 그들이 거둔 승리 때문이었다. 볼셰비즘의 승리는 증오이든 열광이든, 반감이든 헌신이든 간에 모든 곳에서 레닌주의가 주목받게 만들었다.[77]
레닌의 당: "새로운 유형"의 당?
서두에서 제기했던 질문으로 돌아가 보자. 레닌은 혁명적 조직의 개념을 새롭게 하는 데 어느 정도 기여했을까? 이 글에서 우리는 “레닌주의 당”에 관한 체계적인 이론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레닌주의 당”의 결정적인 성격이라고 간주될 수 있는 획일적인 형태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반대로 우리는 레닌이 정치 상황의 변화에 대응하기 위해 끊임없이 재정립해 나간 과정을 강조했다. 스탈린주의가 <무엇을 할 것인가>를 “레닌주의 당”의 완성된 지침서로 해석하는 것과 달리, 레닌은 1914년 이전까지는 “새로운 유형”의 당을 건설하려 한다고 선언하지 않았으며, 최소한 이론적 수준에서는 독일 사회민주주의를 국제 사회민주주의의 가장 진보된 부분으로 간주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레닌은 종종 (계급·당·지도부 간의 관계, 대중의 자발성, 당의 단결 문제 등에서) 당시 국제 노동자운동 내 대다수의 견해와 상충되는 독특한 입장을 발전시키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또한 그럼으로써 제2인터내셔널 내부에서 룩셈부르크나 카우츠키 등으로부터 혹독한 비판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레닌은 이 시기에도 자신의 방향이 국제 사회민주주의의 방향과 일치한다고 확신했으며, 조직에 대한 자신의 개념을 차르 러시아라는 틀을 넘어 일반화하려 하지 않았다.
1914년까지는 지배적인 정통 이론으로부터 부분적인 단절에 가까웠다. 레닌의 접근은 러시아의 특수성에 의존했으며, 보편적인 이론으로 발전되지 않았다. … 1914년 이후부터 더 체계적으로 되었다.[78]
제1차 세계대전을 계기로 제2인터내셔널의 뿌리 깊은 모순이 드러나면서 국제 노동자운동의 완전한 재편이 시작되었다. 1914년 여름, 유럽 주요 열강의 참전으로 노동자 정당들은 중대한 딜레마에 직면했다. 국가적 단결을 거부하고 불법 단체로 선포되어 비밀 조직으로 전락할 위험을 감수할 것인가, 아니면 자국 자본가계급의 이해관계에 동조할 것인가. 몇몇 예외를 제외하고, 제2인터내셔널의 지도자들 대부분은 ‘사회적 쇼비니즘’의 기치 아래 전쟁자금 조달에 찬성표를 던지면서 1907년 슈투트가르트 대회에서 재확인했던 노동자 국제주의 원칙을 저버렸다.
레닌은 처음 그 소식을 들었을 때 믿을 수 없었고, 혁명운동 내부에 분열을 조장하려는 중상모략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노동자계급 조직이 (특히 그 지도부가) 사회주의 혁명과 계급연대의 이익을 배신했다는 사실이 명백해지자, 레닌은 이 상황을 파악하는 것을 최우선 과제로 삼았다. 이 배신의 역사적 의미를 파악하고 실천적인 결론을 (특히 조직적인 측면에서) 도출하는 것이 시급하고 필수적이었다. 레닌은 이렇게 썼다.
대부분의 사회민주당들, 특히 제2인터내셔널에서 가장 크고 영향력 있는 독일 사회민주당은 총참모부, 정부, 그리고 자본가계급의 편에 서면서 노동자계급을 배신했다. 이는 세계사적 중요성을 가진 사건이며, 철저한 분석이 필요하다.[79]
이 비극은 레닌에게 심오한 정치적 재무장의 기회를 제공했다. 1914~15년, 레닌은 프로이센의 장군이자 군사 이론가인 카를 클라우제비츠의 저작을 심층적으로 연구하고 비판적으로 수용했으며, 헤겔을 주의 깊게 읽고 그의 변증법을 재검토했다.[80] 레닌이 도달한 핵심 사상 중 하나는 제국주의 전쟁이 이전의 "평화적 발전" 시기와 단절되는 전환점이 되었고 따라서 전반적인 역사적·전략적 틀에 대한 재개념화가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이와 관련하여 레닌은 이렇게 썼다.
유럽 전쟁은 매우 심오한 역사적 위기이자 새로운 시대의 시작을 뜻한다. 여느 위기와 마찬가지로, 이 전쟁은 뿌리 깊은 모순을 악화시키고 표면으로 드러냈다. … 제2인터내셔널은 (시작점을 1889년으로 또는 1870년으로 잡느냐에 따라) 25년 또는 45년 동안 사회주의의 영향력을 확대하고 사회주의 세력에 기초적인 조직을 제공하는 매우 중요하고 유익한 역할을 수행했지만, 역사적 소임을 다하고 소멸했다.[81]
제국주의 시대와 1914년에 시작된 위기 앞에서, 레닌은 노동자운동 내 기회주의의 역할을 재평가하게 되었다. 전쟁 이전에도 레닌은 국제 사회민주주의 내 기회주의에 맞선 투쟁을 이미 여러 차례 제기했다. 예를 들어, 1907년에 출간된 모음집 <12년간>의 서문에서 레닌은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 창당부터 시작된 당내 정치적 논쟁을 설명했다. 그가 사회민주노동당을 분리하여 독자적인 조직을 창설하게 된 것도 바로 이러한 기회주의와의 투쟁 때문이었다. 레닌은 제2인터내셔널의 다양한 지부들에도 비슷한 경향이 존재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1914년의 비극으로 달라진 것은 노동자운동 내 이러한 기회주의 경향의 중요성이었다. 레닌은 이렇게 썼다.
거대한 전쟁이 만들어 낸 위기는 모든 장막을 찢어버렸고, 관례를 쓸어버렸으며, 오랫동안 곪은 고름을 터뜨렸다. 그리고 자본가계급의 동맹으로서 기회주의의 진정한 역할을 폭로했다.[82]
다시 말해, 레닌이 볼 때 기회주의는 반혁명적 역할을 역사적으로 입증했으며, 더 이상 그때까지 그랬던 것처럼 “한 정당 내의 ‘있을 법한 목소리’”[83]로 여겨질 수 없었다. 기회주의에 맞선 투쟁의 성격이 바뀌었고, 레닌은 이로부터 정치적·조직적 결론을 도출했다. 더 이상 같은 조직 내의 여러 경향 간의 싸움으로만 볼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노동자정당으로부터 기회주의를 완전히 조직적으로 분리하는 것이 필수적으로 되었다.” 바로 이러한 이유로 레닌은 일찍이 1914년 8월 제2인터내셔널과의 결별을 주장하고 기회주의(또는 ‘사회적 쇼비니즘’과 계급화해)에 맞서는 인터내셔널의 재조직에 착수했다. 이는 짐머발트 회의(1915), 키엔탈 회의(1916)를 거쳐 제3인터내셔널의 창설(1919)로 이어졌다.
1914년의 배신으로부터 레닌이 얻은 근본적인 교훈은 바로 이러한 새로운 정치적 분리선에 입각해 정치적·전략적으로 기회주의와 구별되는 조직을 국내적·국제적으로 건설해야 할 필요성이었다. 새로운 상황에 맞게 행동하기를 거부하고 사회적 쇼비니즘과의 투쟁을 하나의 당 안에서 수행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자들, 즉 ‘중도파’(특히 가장 심각한 “배신자”였던 카우츠키)는 레닌이 볼 때 혁명조직 재건의 길에 놓인 장애물이었고, 따라서 그들과 싸워야 했다. 레닌은 이렇게 썼다.
기회주의와 혁명적 사회민주주의 사이에서 (독일 사회민주당 내 ‘중도파’처럼) 갈팡질팡하는 것과 제2인터내셔널의 파산을 은폐하거나 외교적 수사로 위장하려는 것은 노동자계급에게 최악의 행위를 하는 것이다.[84]
이론적·실천적 차원에서 1914년의 단절은 “제2인터내셔널 마르크스주의”[85]와의 단절, 그 수장인 카우츠키와의 단절, 그리고 혁명을 점진적(“진화적”)이고 거의 “자연적”(“유기적”)인 과정으로 보는, 즉 카우츠키의 표현을 빌리자면 “준비되는 게 아닌” 것으로 보는[86], 그래서 사회민주주의를 “시대에 뒤떨어진 사회주의”(또는 “수동적 급진주의”)[87]로 이끈 카우츠키의 혁명 개념과의 단절을 의미했다. 카우츠키의 개념에 따르면, 조직은 소극적이고 끈질기게 힘을 축적한 결과로만 형성된다. 레닌은 (관료화되기 이전인) 초창기 제3인터내셔널이 이론적·정치적으로 재정립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레닌은 제국주의 전쟁을 (그가 ‘제국주의 시대’라고 부른) 새로운 시대로의 진입을 알리는 신호로 여겼다. 이 시대의 정치적 시간은 더 이상 “똑같고 공허한” 것이 아니라, 단절, 균열, 그리고 “위기”로 특징지어졌다. (1905년부터 성숙되어 온 레닌의 “혁명적 위기” 개념은 이 시기에 비로소 완전한 중요성을 갖게 되었다.) 이러한 위기 속에서, 당은 상황을 유리하게 이용하고 대중의 에너지를 국가에 대항하는 방향으로 이끌기 위해 어떻게 개입해야 하는지 알아야 했다.[88] 이러한 맥락에서 당은 더 이상 계급의식의 등기부나 수동적인 세력 축적체가 아니라, 사회주의 혁명이라는 전략적 목표를 잊지 않고 어떤 상황이 발생하든 다양한 전술을 개발하고 적용하면서 근본적인 역할을 하는 진정한 전략적 주체가 되어야 했다. 리는 레닌이 1914년 이후에도 “1914년 이전의 카우츠키”를 계속 언급했다고 지적[89]하는데, 이는 1914년에 발생한 단절과 모순되지 않는다. 또한 에밀리오 알바몬테와 마티아스 마이에요가 정확하게 지적했듯이, <무엇을 할 것인가>만을 통해 레닌주의 당 개념을 “재발견”하는 것을 정당화하는 것도 아니다.
이는 단지 당의 “모델”에 관한 문제가 아니라, 당의 과제를 실행하는 데 필요한 전략적 작업에 관한 문제이다. “사회적 쇼비니즘”에 맞선 그러한 투쟁들과 분리된 방식으로는 레닌의 당 개념의 기원을 이해할 수 없다.[90]
* * *
오늘날, 사회민주주의 정당들과 스탈린주의 공산당들은 신자유주의와의 결탁과 소련 붕괴의 결과로 크게 후퇴했다. 이들 노동자계급 조직들이 부르주아 국가에 점점 더 통합된 지도부의 영향력 아래로 노동자운동을 길들이는 도구로 변모한 것은 노동자운동에 심각한 결과를 초래했다. 노동자운동은 연이은 패배를 겪었으며, 특히 1968년 국제적인 혁명운동의 실패, 신자유주의 시대의 제국주의 반격과 부르주아 복고 이후 혁명적 연속성의 단절로 이어졌다. 이러한 모든 상황은 세계 노동자계급이 객관적 차원에서는 전례 없는 발전을 이루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조직력과 계급의식에 지속적인 악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최근 들어 여러 징후들이 노동자계급의 특정 부문과 대중 전반에서 주체적 재구성을 예고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가설은 2019년 이후 국제 계급투쟁이 고조되는 맥락을 주목한다. 이 국제 계급투쟁은 때때로 대중파업으로 이어지는 봉기와 반란, 부르주아 법치주의의 한계에 도전하는 대중적 급진주의, 그리고 체계적 인종차별과 지구 파괴에 맞서 청년층의 상당한 부문이 폭넓게 정치화되는 현상을 결합하고 있다. 이러한 요소들은 아직 단편적이지만 매우 중요하며, 혁명의 전망을 포기하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소중한 기회가 될 수 있다. 진정한 전투 조직이 출현할 수 있느냐는 이러한 전위 부문들과의 결합 능력에 크게 달려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혁명적 조직을 재건하기 위한 레닌주의 조직관은 엘리트주의 조직관이나 주변화된 편협한 집단을 육성하는 조직관과는 정반대임을 분명히 해야 한다. 레닌주의 조직관은 노동자계급의 가장 진보적이고 정치적으로 자각한 부문을 (혁명의 준비를 목표로 하며 투쟁하는 대중과 지속적으로 대화하는) 중앙집권적인 당으로 결집시켜 내는 것으로 요약될 수 있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이는 투쟁으로 떨쳐 일어서는 노동자들에게 (수십 년간 지배계급과의 화해 정책과 “사회적 대화”에 얽매여 있는) 노동자운동의 관료적 지도부와는 다른 독립적인 정치적·조직적 전망을 제시하는 것에서 시작된다.
원저자: 마리나 가리시 (프랑스 ‘연속혁명’ 활동가)
2021년 6월 12일에 프랑스 연속혁명(RP Dimanche)에 처음 게재됨
2021년 10월 3일 미국 레프트보이스(Left Voice)에 번역된 글을 재번역
[1] Lars Lih, Lenin Rediscovered: What Is to Be Done? in Context (Leiden: Brill, 2005).
[2] 이를테면 다음을 보라: Historical Materialism 18, no. 3 (2010).
[3] 1891년 독일 사회민주당의 에르푸르트 대회에서 채택된 ‘에르푸르트 강령’은 제2인터내셔널 안에서 큰 권위를 가졌는데, 리는 레닌이 이 강령에 충실했다는 뜻에서 레닌을 ‘에르푸르트인’이라고 부른다.
[4] Stéphane Courtois, Lénine, l’inventeur du totalitarisme (Paris: Perrin, 2017).
[5] Paul Le Blanc, Lenin and the Revolutionary Party (Chicago: Haymarket Books, 2016).
[6] 이것은 ‘마르크스-레닌주의’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전형적인 예로, 스탈린의 저서 <레닌주의의 기초>가 있다. 이 책에서 스탈린은 당에 관해서 “당은 분파의 존재와 양립할 수 없는 의지의 통일체”라거나, “당은 기회주의적 요소를 제거함으로써 강해진다”고 말한다.
[7] ‘볼셰비키화’는 1924년 이후 코민테른이 스탈린의 지시를 강요하고 공산당 내 비판의 권리를 극적으로 제한하는 방향으로 이동하면서 내건 구호이다.
[8] Daniel Bensaïd, Stratégie et parti (Paris: Les Prairies ordinaires, 1986).
[9] Le Blanc, Lenin and the Revolutionary Party.
[10] Pierre Broué, Le parti bolchevique, histoire du P.C. de l’U.R.S.S. (Paris: Editions de Minuit, 1963).
[11] 아주 간단히 설명하자면, 러시아에서의 자본주의 발전은 러시아 특유의 후진성과 서구 자본주의 사회의 가장 선진적인 요소들이 불균등하게 결합되었다는 데, 그리고 차르 전제정치 아래서 최소한의 정치적 자유조차 누리지 못했다는 데 그 특징이 있었다. 러시아 자본주의 발전의 이러한 특수성은 레닌주의의 전개과정을, 나아가 러시아 사회민주주의 내부의 논쟁 전반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하다. 이 문제에 대해 더 자세히 알아보려면 다음을 보라. Broué, Le parti bolchevique; Leon Trotsky, The History of the Russian Revolution (1930).
[12] 러시아 자본가계급은 반자유주의적 전제정치, 대규모의 지주계급, 서구 자본가계급이라는 한 쪽의 압박과 가난한 농민 대중, 이미 상당히 집중된 신생 노동자운동이라는 다른 쪽의 압박 사이에 끼인 가운데 느리고 어렵게 발전했다. 노동자운동의 급진화를 두려워했던 자본가계급은 전제정치와 타협하는 길을 모색하게 되었다.
[13] 브루에가 쓴 것처럼, 혁명가들은 “(알렉산드르 2세가 말했듯이) 오로지 아래로부터의 혁명을 피할 목적으로 위로부터 스스로를 변화시키는 체제, 비록 평화적일지라도 어떤 형태든 반대를 허용하는 것은 자살 행위라고 여기는 체제에 맞닥뜨렸기 때문에, 폭력혁명 외에는 다른 길이 남아있지 않았다.” (Broué, Le parti bolchevique).
[14] Broué, Le parti bolchevique.
[15] 레닌, 1899, <우리의 당면 과제>.
[16] 레닌은 이어서 “이러한 통일을 이루고, 적절한 형태를 발전시키며, 편협한 지역적 고립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것, 이것이 러시아 사회민주주의자들의 당면한 가장 긴급한 과제”라고 말하면서, “지금 필요한 것은 이러한 모든 지역적 활동을 단일한 당의 활동으로 통합하는 것뿐”이라고 덧붙였다. 다른 곳에서 레닌은 “그러므로 문제는 이미 진행되고 있는 활동을 ‘아마추어적’ 방식으로 계속할 것인지, 아니면 하나의 당 활동으로 조직하여 그 모든 활동이 하나의 공통된 기관으로 온전히 반영되도록 할 것인지에 있다.”라고 썼다. (레닌, 1899, <하나의 긴급한 문제>)
[17] 레닌, 1899, <우리의 당면 과제>.
[18] 레닌, 1899, <우리의 당면 과제>.
[19] 레닌, 1900, <파업에 대하여>.
[20] 레닌, 1899, <우리의 당면 과제>.
[21] 벨기에의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자 마르셀 리브만은 이 책에 대해 “혁명적 계획을 실행할 수단을 건설하고자 노력하는 마르크스주의자의 사상을 가장 일관성 있게 설명한 책”이라고 평가했다. Marcel Liebman, Leninism under Lenin (Chicago: Haymarket Books, 2016), 29; first published in French in 1973.
[22] 리는 레닌이 “경제주의자”라는 꼬리표를 정치투쟁을 벌이는 담론적 장치로 사용했다고 썼다. “<무엇을 할 것인가>에서의 논쟁은 경제주의 자체에 대한 반대가 아니다. 이스크라 지도부 내 주요 경쟁자들을 공격하기 위한 수단으로 경제주의를 이용하는 논쟁이다. 레닌은 경쟁자들에게 ‘경제주의자’라는 꼬리표를 붙일 수 있다면 그들의 신뢰도를 떨어뜨릴 수 있을 것이라고 정확하게 예측했다.” (Lih, Lenin Rediscovered, 11).
[23] 리브먼이 지적했듯이, “레닌의 비판은 노동자계급의 자발적인 행동보다는 그 의식, 즉 자연발생적이고 본능적이며 결과적으로 결함이 있는 의식에 더 초점을 맞추었다.” (Liebman, Leninism under Lenin, 30.)
[24] 레닌, 1902, <무엇을 할 것인가>, 제2장. 마르크스가 <독일 이데올로기>에서 이미 제시한 개념을 여기서 다시 발견한다.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는 모든 시대에 지배적인 이데올로기이다. 즉, 사회에 대한 물질적 지배력을 가진 계급은 동시에 정신적 지배력을 가진 계급이다.”
[25] 레닌이 말하는 전업 활동가의 개념은 당에서 급여를 지급하는 상근 활동가와 혼동해서는 안 된다. 레닌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혁명적 활동에 전념할 활동가들을 모집하고 훈련하는 것이다.
[26] 레닌, 1902, <무엇을 할 것인가>, 제3장. 레닌이 카우츠키로부터 빌려 온 “오직 밖으로부터만”이라는 이 표현은 수많은 해석과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지면 관계상 자세히 다루지는 않되, 레닌이 카우츠키의 표현에 다른 의미를 부여했다는 점만 언급해 둔다. 레닌에게 있어 “오직 밖으로부터만”의 의미는 혁명운동 안에서 소부르주아 지식인의 역할을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계급의식을 발전시키기 위한 정치투쟁의 필요성을 역설하는 것이었다. 참조: Hal Draper, “The Myth of Lenin’s ‘Concept of the Party’ or What They Did to What Is to Be Done?”; Daniel Bensaïd, “Strategy and Politics: From Marx to the Third International,” Historical Materialism 28, no. 3 (2020): 230–66.
[27] 레닌, 1902, <무엇을 할 것인가>, 제3장.
[28] 노동자 헤게모니라는 이 개념은 나중에 그람시가 더욱 발전시켰다.
[29] 아이러니하게도 두 의견 모두 같은 이스크라 경향의 성원들이 제안했다.
[30] 레닌, 1904, <일보 전진, 이보 후퇴>. 마르토프가 정식화하고 대회에서 채택된 안은 다음과 같다.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 당원이란 당의 강령을 인정하고, 당을 재정적으로 지지하며, 당 조직 가운데 하나의 지도 아래 당을 정규적으로 직접 지원하는 사람이다.” 레닌의 안은 다음과 같다. “당원이란 당의 강령을 인정하고, 당을 재정적으로 지지하며, 당 조직 가운데 하나에 직접 참여하는 사람이다.”
[31] 미래의 볼셰비키들은 대회 초반에는 소수였지만, 예상치 못한 사건으로 대회 말미에는 다수파(볼셰비키)가 되었다. 대회 종료 직전, 7명의 대의원이 대회를 떠났다. 그중에는 유대인 사회주의자 조직인 분트 소속 대의원 5명이 포함되어 있었는데, 이들은 러시아 당의 다수(미래의 볼셰비키 대부분을 포함)가 “연방” 체제를 통해 분트에게 완전한 자율성을 부여하지 않는 것에 불만을 품었다. 그 뒤를 이어 “경제주의자” 대표 2명도 다른 이유로 대회를 떠났다. 그래서 대회 초반의 다수가 소수파(멘셰비키)가 되고, 반대로 소수가 다수파(볼셰비키)가 되었다.
[32] 제2차 당 대회 이후 몇 주 동안, 레닌의 제안에도 불구하고 마르토프가 이끄는 멘셰비키는 편집부에 더 많은 멘셰비키 인사를 포함시키지 않으면 이스크라와 협력하지 않겠다고 고집했다. 처음에는 레닌과 동맹 관계였던 플레하노프도 결국 마르토프 분파의 요구에 굴복하여 (멘셰비키에 우호적인) 기존 편집진을 다시 영입했다. 레닌은 이스크라 편집부에서 사임하기로 결정하고 ‘이스크라 편집부에 보내는 편지’와 ‘내가 이스크라 편집부에서 사임한 이유’를 포함한 여러 공개서한을 발표했다.
[33] 레닌이 <일보 전진, 이보 후퇴>에서 자신에게 쏟아진 비난을 묘사한 내용이다.
[34] 레닌의 인용에 따르면 악셀로드는 이렇게 말했다. “물론 우리는 가장 먼저 당의 가장 적극적인 요소의 조직, 즉 혁명가의 조직을 만들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계급의 당이기 때문에, 비록 적극적이지는 않더라도 당에 의식적으로 동조하는 사람들을 당의 대열에서 배제해서는 안 된다.” 이에 대해 레닌은 이렇게 답했다. “우리가 계급의 정당이라는 사실이 어떻게 어떤 논리로 당에 소속하는 사람과 당에 동조하는 사람을 구분할 필요가 없다는 결론을 정당화할 수 있는가? 정반대이다. 의식 수준과 활동 수준에 차이가 있기 때문에 당으로의 접근 정도 또한 구분되어야 한다. 우리는 계급의 당이므로, 계급의 거의 전체가 (그리고 전시나 내전 시에는 계급의 전체가) 우리 당의 지도 아래 행동해야 하고, 가능한 한 우리 당에 긴밀하게 동조해야 한다. 그러나 자본주의 체제 아래서 계급 전체 또는 계급의 거의 전체가 사회민주당과 전위의 의식 수준과 활동 수준까지 고양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추수주의’에 불과하다. 현명한 사회민주주의자라면 자본주의 아래서는 (미성숙한 층에게 더 수용되기 쉽고 더 초보적인) 노동조합 조직조차도 계급 전체 또는 계급의 거의 전체를 포괄할 수 없다는 사실을 결코 의심하지 않을 것이다. 전위와 전위에게 이끌리는 대중 사이의 구분을 잊고, 전위가 끊임없이 더 넓은 대중을 선진적인 수준으로 끌어올려야 하는 의무를 잊는 것은 스스로를 속이는 것이며, 우리 과제의 거대함을 외면하고 그 과제를 축소하는 것이다. 당에 소속하는 자와 동조하는 자의 차이, 자각된 능동적인 자와 소극적으로 조력하는 자 사이의 차이를 지워버리는 것이야말로 바로 그러한 눈감기, 그러한 망각이다.” (레닌, 1904, <일보 전진, 이보 후퇴>)
[35] 레닌, 1904, <일보 전진, 이보 후퇴>.
[36] 레닌, 1904, <일보 전진, 이보 후퇴>.
[37] 룩셈부르크가 자신의 논문 <러시아 사회민주주의의 조직 문제>에서 제기한 유명한 논쟁은 레닌의 반박을 불러일으켰고, 카우츠키는 이 논문을 독일 사회민주당의 이론지인 《새시대》에 게재하기를 거부했다. 더 자세한 내용은 다음을 보라. Daniel Guérin, Rosa Luxemburg and Revolutionary Spontaneity; Le Blanc, Lenin and the Revolutionary Party.
[38] 레닌은 또한 멘셰비키와 볼셰비키 간의 이러한 논쟁을 국제 사회민주주의의 맥락에서 위치지우고자 다음과 같이 썼다. “조직 문제에 있어서 기회주의의 이러한 근본적인 특징들(자율주의, 귀족적 또는 지식인적인 무정부주의, 추수주의, 지롱드주의)이 적절히 변형되어 전 세계 모든 사회민주주의 정당에서, 혁명적 진영과 기회주의 진영으로 분열되어 있는 곳이라면 어디에서나(그런 분열이 없는 곳이 있을까?), 관찰될 수 있다는 점은 매우 흥미롭다.”
[39] Le Blanc, Lenin and the Revolutionary Party.
[40] 그렇지 않다면 이후 러시아 사회민주당을 통일하려 한 그의 결심이나 스웨덴에서 열린 통합대회 직전 그의 입장(아래에서 논의될 내용)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겠는가?
[41] Hal Draper, “The Myth of the Lenin’s ‘Concept of the Party’…”
[42] “투쟁에서의 경험은 다른 상황에서 수년간의 선전 활동보다 더 빠르고 심오하게 깨달음을 준다.” (레닌, 1905, <정치파업과 모스크바의 가두투쟁>); “혁명적 시기는, 정치적 사태전개의 아찔한 속도와 정치적 충돌의 격화 덕분에, {사상을} 실천적으로 시험해 볼 기회를 제공한다.” (레닌, 1905, <혁명은 가르친다>)
[43] 1905년 혁명 이후에도, 레닌은 다가올 혁명이 “그 혁명이 가져오는 경제적·사회적 내용 때문에”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이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레닌, 1907, <농업문제와 혁명세력>). 하지만 레닌은 자본가계급이 완전한 승리를 거둘 경우 자본가계급 자신에게 위협이 되기 때문에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을 성공적으로 이끌 수 없을 것이라면서, 따라서 노동자계급이 “노동자와 농민의 혁명적·민주적 독재”를 수립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레닌이 1905년 여름 <민주주의 혁명에서 사회민주주의의 두 가지 전술>에서 제시한 이 정식은 멘셰비키와 트로츠키의 개념 사이에서 중간적인 입장에 있었다. 트로츠키는 이미 1906년 <평가와 전망>에서 연속혁명 이론의 초기 버전을 제시했다. 레닌은 1917년 초, 특히 <4월 테제>를 계기로 이중권력이 혁명의 부르주아적인 첫 번째 단계와 “노동자와 빈농이 권력을 장악해야 할” 다가오는 두 번째 단계 사이의 “이행” 상황을 반영한다고 역설하면서 트로츠키가 이전부터 견지하던 견해와 수렴하게 되었다.
[44] 1905년 4월에 열린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 제3차 대회에는 볼셰비키만 참여했다. 멘셰비키도 같은 해에 모임을 가졌는데, 그것은 협의회로 불렸다.
[45] 레닌, 1905, <혁명은 가르친다>.
[46]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 중앙위원회, 분트, 라트비아 사회민주노동당, 폴란드 사회민주당, 그리고 우크라이나 혁명당이 참여한) 사회민주주의 정당과 조직들의 협의회는 만장일치로 두마에 대한 적극적인 보이콧 전술을 채택했다. …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 중앙위원회가 채택하고 우리가 <프롤레타리아>에서 옹호했던 전술의 기본 원칙은 … 이제 하나의 유감스러운 예외를 제외하고 러시아 사회민주주의 운동 전체의 전술적 근간을 이루고 있다. 독자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그 예외는 <이스크라>와 멘셰비키이다.” (레닌, 1905, <정치적 조직화에 대한 첫 번째 평가>)
[47] 이러한 정치적 우유부단함을 보면서, 레닌은 멘셰비키가 “사회민주주의 내부의 기회주의 진영”이라는 자신의 견해를 더욱 확고히 하게 되었다.
[48] “상트페테르부르크와 모스크바에서 혁명적 사회민주주의 슬로건을 채택한 급진적인 학생들은 두마에 들어간 ‘입헌민주주의’ 개량주의자들의 저열함을 혐오하는 모든 민주 세력의 선봉대이다.” (레닌, 1905, <정치파업과 모스크바의 가두투쟁>)
[49] 1905년 혁명 당시 독립적인 멘셰비키 활동가였던 트로츠키는 상트페테르부르크 소비에트 의장으로 선출되었다.
[50] 레닌, 1905, <우리의 과제와 노동자대표 소비에트>.
[51] 레닌, 1905, <우리의 과제와 노동자대표 소비에트>. “대중운동이 확산될수록 각 계급의 진정한 본질이 더욱 명확히 드러날 것이며, 당은 사건을 뒤따라 다니는 것이 아니라 계급을 이끌고 조직하는 역할을 더욱 절실히 수행해야 할 것이다. … 사회 운동의 새로운 흐름이 더욱 넓어질수록 이러한 흐름을 위해 새로운 통로를 만들 수 있는 강력한 사회민주주의 조직의 중요성은 더욱 커진다.” (레닌, 1905, <새로운 과제와 새로운 세력>)
[52] 레닌, 1905, <우리의 과제와 노동자대표 소비에트>.
[53] 합법 활동은 이후 러시아 사회민주주의 안에서 논쟁과 갈등의 대상이 되었다.
[54] 레닌은 암기한 공식만을 거듭 되풀이하는 사람들을 조롱했다.
[55] 당의 문호개방을 걱정하는 볼셰비키 간부들에게 레닌은 이렇게 답했다. “동지들, 위험을 과장하지 말자. 사회민주주의는 이미 이름을 알렸고, 하나의 흐름을 만들어 냈으며, 사회민주주의 노동자 간부들을 양성해 냈다. 이제 영웅적인 노동자계급이 투쟁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점을, 또한 명확한 목표를 가진 조직 안에서 순수한 사회민주주의 정신으로 일관되게 투쟁할 수 있는 능력을 행동으로 증명했다. 그러니, 우리 당에 속한 노동자들, 또는 내일 중앙위원회의 초청으로 입당할 노동자들 100명 중 99명이 사회민주주의자일 것이라는 사실을 의심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노동자계급은 본능적으로, 자발적으로 사회민주주의적이며, 사회민주주의가 10년 넘게 기울인 노력은 이러한 자발성을 의식으로 바꾸는 데 크게 기여했다. 동지들, 허상을 만들어내지 말라! 활력 있고 성장하는 모든 당에는 언제나 불안정, 동요, 흔들림의 요소들이 존재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이러한 요소들은 영향을 받을 수 있으며, 확고하고 견고한 핵심 사회민주주의자들의 영향력에 굴복할 것이다.” (레닌, 1905, <당의 재조직>)
[56] 레닌, 1905, <당의 재조직>.
[57] 1906년 볼셰비키 중앙위원회는 “비판의 자유와 행동의 통일”에 관해 이런 결의를 채택했다. (1) 당 기관지와 당 회의에서 모든 당원은 자신의 개인적인 의견과 개별적인 관점을 자유롭게 표명할 완전한 권리가 있다. (2) 공개적인 정치 집회에서 당원들은 당 대회 결정에 반하는 선동을 삼가야 한다. (3) 어떠한 당원도 그러한 집회에서 당 대회 결의에 반하는 행동을 촉구하거나, 당 대회 결정과 부합하지 않는 결의안을 제안해서는 안 된다.” 이에 대해 레닌은 “중앙위원회가 비판의 자유는 부적합하게도 너무 좁게, 행동의 통일은 부적합하게도 너무 넓게 규정했다”고 비판하면서 이렇게 제안한다. “당 강령의 원칙이라는 범위 안에서의 비판은 당 회의뿐만 아니라 공개 집회에서도 완전히 자유로워야 한다. 이러한 비판, 또는 그러한 ‘선동’(비판은 선동과 뗄 수 없기 때문)은 금지될 수 없다. 당의 정치적 행동은 통일되어야 한다. 구체적인 행동의 통일을 해치는 어떠한 ‘호소’도 공개 집회나 당 회의, 또는 당 간행물에서 용납될 수 없다. … 예를 들어보자. 당 대회는 당이 두마 선거에 참여해야 한다고 결정했다. 선거에 참여하는 것은 매우 구체적인 행동이다. 선거 기간 중에는 어느 곳의 당원도 기권을 촉구할 권리가 없다. 또한 이 기간 동안 선거 참여 결정에 대한 ‘비판’은 용납될 수 없는데, 이는 사실상 선거 캠페인의 성공을 위태롭게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선거가 공고되기 전에는, 어디에 있든 당원들은 선거 참여 결정에 대해 비판할 완전한 권리를 가진다.” (레닌, 1906, <비판의 자유와 행동의 통일>)
[58] 레닌, 1906, <비판의 자유와 행동의 통일>.
[59] 레닌, 1906, <모스크바 봉기의 교훈>.
[60] Georg Lukács, The Thought of Lenin: The Relevance of the Revolution, [1924], Gonthier, 1972.
[61] “우리 당의 우파는 현재 러시아에서 진행 중인 부르주아민주주의 혁명의 완전한 승리를 믿지 않는다. 오히려 그러한 승리를 두려워하며, 인민 앞에 그러한 승리의 슬로건을 단호하고 명확하게 제시하지 않는다. 그들은 오직 자본가계급만이 독자적으로 부르주아 혁명을 ‘만들어낼’ 수 있다거나, 오직 자본가계급만이 부르주아 혁명을 이끌어야 한다는, 마르크스주의를 저속하게 왜곡한 본질적으로 잘못된 생각에 끊임없이 사로잡혀 있다. 부르주아 혁명의 완전하고 결정적인 승리를 위한 전위 투사로서의 노동자계급의 역할을 우파 사회민주주의자들은 이해하지 못한다. … 따라서 우파 사회민주주의자들은 봉기에 대해 (완곡하게 말해서) 회의적인 태도를 보이며, 10월과 12월의 경험에 대해 그리고 당시 발전했던 투쟁의 형태들에 대해 무시하려는 경향을 보인다. 따라서 그들은 헌법적 환상에 맞서는 투쟁, 즉 진정한 혁명적 시기로 나아가려면 늘 먼저 겪게 되는 투쟁에서 우유부단하고 소극적인 태도를 보인다.” (레닌, 1906, <통합 당 대회에 관한 보고>)
[62] 레닌, 1906, <통합 당 대회에 관한 보고>.
[63] 당이 혁명적 기회에 대비하도록 하기 위해 레닌이 진정으로 몰두했던 것은 마르크스주의를 결정론적이고 자연주의적으로 해석했던 제2인터내셔널, 특히 카우츠키의 관점과 뚜렷이 대조된다. 카우츠키는 이렇게 말했다. “사회민주당은 혁명정당이지만, 혁명을 일으키는 정당은 아니다. 우리는 우리의 목표가 오직 혁명을 통해서만 달성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이 혁명을 일으키는 것이 우리에게 달려 있지도 않고, 우리의 적들이 그것을 막을 수도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혁명을 촉발하거나 준비하려는 어떤 의도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리고 우리가 마음대로 혁명을 일으킬 수 없기 때문에, 언제, 어떤 상황에서, 어떤 형태로 혁명이 일어날지 전혀 말할 수 없다.” (Jean Quétier, “The Question of Will in Karl Kautsky,” La Pensée, no. 380, 2014)
[64] 레닌, 1905, <모스크바 사건들의 교훈>.
[65] Broué, Le parti bolchevique
[66] 레닌, 1910, <평론가의 노트>.
[67] 레닌, 1910, <평론가의 노트>.
[68] Le Blanc, Lenin and the Revolutionary Party.
[69] 참조: Alexander Rabinowitch, Prelude to Revolution. The Petrograd Bolsheviks and the July 1917 Uprising (Bloomington: Indiana University Press, 1968, reprinted 1991); Broué, Le parti bolchevique; E. H. Carr, The Bolshevik Revolution, 1917–1923, vol. 1 (London: Pelican Books, 1966).
[70] 레닌, 1917, <멀리서 보내는 편지>.
[71] Nicolas Soukhanov, La Révolution russé (Paris: Éditions Stock, 1965)
[72] 레닌, 1917, <4월 테제>.
[73] 참조: Trotsky, The History of the Russian Revolution.
[74] 여기에는 모이세이 우리츠키, 아돌프 요페, 아나톨리 루나차르스키, 다비드 랴자노프 등 다른 주요 볼셰비키 지도자들도 포함되었다.
[75] 레닌, 1905, <농업문제에 대한 사회민주주의의 태도>.
[76] 트로츠키는 당·지도부와 대중의 결합을 피스톤과 증기라는 비유를 통해 설명한 바 있다. “대중 속에서 일어나는 정치적 과정을 연구해야만, … 정당과 지도자들의 역할을 이해할 수 있다. 그들은 독립적인 요소는 아니지만, 혁명 과정에서 매우 중요한 요소이다. 지도하는 조직이 없다면 대중의 에너지는 피스톤 상자 안에 갇히지 않은 증기처럼 흩어져 버릴 것이다. 하지만 결국 세상을 움직이는 것은 피스톤이나 상자가 아니라 증기이다.” (Trotsky, The History of the Russian Revolution.)
[77] Liebman, Leninism under Lenin, 147.
[78] Bensaïd, Stratégie et parti.
[79] 레닌, 1914, <제2인터내셔널의 실패>.
[80] 이와 관련해 다음을 참조: Emilio Albamonte and Matias Maiello, Socialist Strategy and the Art of War; Stathis Kouvelakis, “Lenin as Reader of Hegel: Hypotheses for a Reading of Lenin’s Notebooks on Hegel’s The Science of Logic,” in Lenin Reloaded: Toward a Politics of Truth, ed. by Sebastian Budgen, Stathis Kouvelakis, and Slavoj Žižek (Durham, NC: Duke University Press, 2007), 164.
[81] 레닌, 1914, <죽은 쇼비니즘과 살아 있는 사회주의>.
[82] 레닌, 1915, <제2인터내셔널의 붕괴>.
[83] 레닌, 1915, <제2인터내셔널의 붕괴>.
[84] 레닌, 1914, <전쟁과 러시아 사회민주주의>.
[85] 이에 대해서는 다음을 참조: Karl Korsch, Anti-Kautsky; Georg Lukács, The Thought of Lenin; Georg Lukács, History and Class Consciousness, Éditions de Minuit, 1960 [1923]; Collectif, “A New Conception of the World.” Gramsci and Marxism, Éditions sociales, 2021.
[86] 이 글의 주63) 참조.
[87] 안톤 판네코크가 대중파업을 둘러싸고 카우츠키와 논쟁을 벌일 때 사용했던 표현. 참조: Henri Weber, Socialism, the Western Way.
[88] 덧붙여 말하자면, 국가 문제에 있어서도 레닌의 공헌은 결정적이었으며, 역시 카우츠키의 개념에 반대했다. 참조: 레닌, 1917, <국가와 혁명>; 레닌, 1918, <프롤레타리아 혁명과 배신자 카우츠키>.
[89] Lars Lih, “Kautsky as Marxist data base”, Historical Materialism, 2008-2011.
[90] Albamonte and Maiello, Socialist Strategy and the Art of Wa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