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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레닌주의 당 개념: 신화와 실제2019년 이후 국제 계급투쟁이 고조되고 있는 상황에서, 혁명적 조직을 재건하기 위한 레닌주의 조직관은 엘리트주의 조직관이나 주변화된 편협한 집단을 육성하는 조직관과는 정반대임을 분명히 해야 한다. 레닌주의 조직관은 노동자계급의 가장 진보적이고 정치적으로 자각한 부문을 (혁명의 준비를 목표로 하며 투쟁하는 대중과 지속적으로 대화하는) 중앙집권적인 당으로 결집시켜 내는 것으로 요약될 수 있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이는 투쟁으로 떨쳐 일어서는 노동자들에게 (수십 년간 지배계급과의 화해 정책과 “사회적 대화”에 얽매여 있는) 노동자운동의 관료적 지도부와는 다른 독립적인 정치적·조직적 전망을 제시하는 것에서 시작된다. 레닌주의 정당의 문제를 다시 논의하려면 적어도 두 가지 유형의 해석 체계를 살펴봐야 한다. 첫 번째는, 불행히도 오랫동안 지속되어 온 체계인데, 레닌주의를 권위주의와 동일시하고, ‘레닌주의 정당’을 전체주의적 집착의 씨앗을 품고 있으며 스탈린주의를 예고하는 ‘자칭 엘리트(또는 전위)’의 독재와 동일시하는 것이다. 국제적 반동의 맥락에서 이러한 해석이 지속되면서, 역사적으로 레닌주의와 연관된 세력들조차 레닌주의 정당에 대한 신뢰도를 떨어뜨리는 데 일조해 왔다. 이를테면 프랑스의 ‘반자본주의 신당’(NPA) 내 세력, 특히 과거 ‘제4인터내셔널 연합사무국’ 경향의 프랑스 지부였던 ‘혁명적 공산주의 동맹’(LCR) 출신과 그 국제적 동조자들에게 레닌주의 정당은 기껏해야 무력한 민속 설화의 일종이거나, 최악의 경우 어떤 수를 써서라도 극복해야 할 본질적으로 종파적인 개념으로 여겨진다. 최근 들어 레닌주의 정당에 대한 논쟁은 영어권 학계의 연구, 특히 라스 리(Lars Lih)의 연구 덕분에 새로운 양상을 띠게 되었다. 그는 레닌의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한 면밀한 연구를 통해 <레닌의 재발견: 맥락 속에서 본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훌륭한 저서를 출간했다.[1] 이 책은 레닌의 <무엇을 할 것인가>가 새로운 조직 개념을 체계적으로 설명하는 ‘지침서’라고 오랫동안 여겨져 온 통념에 근본적으로 도전한다. 리의 연구는 많은 심도 있는 논의를 불러일으켰지만,[2] 레닌이 제2인터내셔널과 결별한 이후에도 마지막까지 ‘러시아판 사회민주주의자’였다고 주장하는 논지는 심각한 비판을 받기도 했다. 리의 해석은 레닌의 공헌 중 가장 독창적이고 정치적으로 결정적인 특징들마저 간과하는 경향이 있으며, 심지어 ‘레닌주의 당 개념’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고까지 주장한다.[3] 21세기의 레닌과 ‘레닌주의’ 무엇이 레닌주의가 아닌지에 대해 말하는 것은 21세기에 레닌주의를 논하는 시작점일 수 있다. 러시아 혁명 100주년을 기념하던 2017년, 스테판 쿠르투아는 일부 자유주의 이데올로그들이 조장하는 편견을 드러내는 제목의 프랑스어 저서, <레닌: 전체주의의 창시자>를 출간했다.[4] 쿠르투아 편의 정치 진영에서 레닌을 악마화하는 것은 새로운 일이 아니다. 미국의 역사학자이자 트로츠키주의 활동가인 폴 르블랑은 그의 저서 <레닌과 혁명정당>에서 “볼셰비키 혁명의 승리부터 현재까지, 자본주의 현상 유지를 추구하는 자유주의·보수주의 이데올로그들은 레닌과 그의 저작들이 (특히 혁명정당 개념이) 법, 질서, 기본적인 인간 존엄성, 그리고 서구 문명을 끔찍하게 위협한다는 인식을 퍼뜨리기 위해 막대한 자원을 투입해 왔다”고 지적한다.[5] 레닌이 왜 세계 자본가계급에게 증오와 공포를 불러일으키는가는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다. 본질적으로 그가 비난받는 이유는 10월 사회주의 혁명을 승리로 이끌었고 그럼으로써 모든 세대에게 희망을 불어넣었다는 사실로 귀결된다. 그런데 ‘레닌에게 돌아가기’를 더 어렵게 하는 것은 공산주의 운동 내부에서 비롯된 강력한 왜곡들이다. 레닌 사후 노동자국가에서 관료적 반혁명을 주도했던 스탈린은 레닌의 사상을 체계적으로 인용함으로써 자신을 정당화하려 했다. 스탈린주의는 맥락에서 벗어나 발췌한 레닌의 인용구들을 영원한 진리로 둔갑시켜 남용하면서 ‘레닌주의’라는 가면 아래 교조적이고 경직된 사상 체계를 구축했다.[6] 이러한 방대한 이론적·정치적 수정 작업은 국제 공산주의 운동에 깊은 영향을 미쳤으며, 다니엘 벤사이드가 지적했듯이 “당의 개념에 대한 레닌의 구체적인 공헌을 (볼셰비키화[7] 및 획일주의와 동일시되는) 성문화된 ‘레닌주의’와 혼동하는 경향”[8]을 만들어냈다. 레닌주의 정당에 대한 자유주의와 스탈린주의의 묘사는 본질적으로 레닌을 권위주의적인 인물로, 즉 ‘위로부터 강요되는’, ‘철통같은 규율을 가진’, ‘비판이 허용되지 않는’ 당의 설계자로 묘사한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보인다. 이러한 맥락에서, “많은 혁명적 사고를 가진 사람들이 이런 게 레닌주의라면 레닌주의는 자신들을 위한 게 아니라고 결론지었다”라고 르블랑이 쓴 것은 타당성이 있다.[9] 하지만 레닌을 고정된 틀에 가두려 했던 많은 상투적인 문구들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혁명 조직을 어떻게 건설할지 고민하는 사람들에게 레닌은 여전히 없어서는 안 될 인물이다. 피에르 브루에가 <볼셰비키당: 소련 공산당의 역사>에서 정확하게 지적했듯이, 그 이유는 단순하지만 심오하다. 레닌이 이끈 당은 비할 데가 없는 역사적 수단이었다. 1917년 2월 혁명 이후 수만 명의 지하 활동가들이 다시 연결되기 시작했고, 8개월도 채 안 되어 광범한 노동자대중과 (그보다는 더 적은 정도의) 농민들이 그들 자신의 것으로 인정하는 조직을 구축해 냈다. 이 당은 임시정부에 맞서 권력을 장악하고 유지하기 위한 투쟁을 이끌었다. 레닌과 그의 동지들은 분파투쟁과 탄압을 통과하며, 처음에는 더 유리한 조건에 있었던 다른 사회주의자들이 결국 실패했던 곳에서 성공을 거두었다. 사회주의 정당들이 존재한 이래 처음으로 그들 중 하나가 승리한 것이다.[10] 우리가 레닌에게 돌아갈 것을, 즉 그의 조직 이론과 실천으로 돌아갈 것을 제안하는 것은 현 시대를 대응할 그러한 ‘역사적 수단’이 그 어느 때보다 시급하게 요구되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위기가 심화하고 있고, 좌우 양측의 급진화와 많은 정부들의 권위주의화가 진행되는 가운데, 계급투쟁이 세계적으로 격화되고 있다. 그런데 ‘새로운’ 급진 좌파는 이러한 투쟁의 흐름을 부르주아 국가에 맞서고 자본주의의 한계를 뛰어넘는 방향으로 이끌어갈 비전을 제시하지 못했다. 그리스의 시리자나 스페인의 포데모스 같은 ‘새로운’ 정치 프로젝트들은 순식간에 신자유주의 정책의 집행자로 전락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레닌에게 돌아가기’는 (현 상황에 대한 즉각적인 해결책으로서가 아니라) 현 상황이 제시하는 기회를 포착하고 이를 활용하여 (보수주의와 궁극적으로 파시즘으로 빠져들 위험을 극복하면서) 21세기 사회주의 혁명의 길을 열어갈 수 있는 전투 조직을 어떻게 (재)구축할지에 대해 사유하는 데 자극이 될 수 있다. 이 글에서 우리는 1895년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 창당부터 1917년 10월 혁명까지 레닌 생애 동안 일어난 볼셰비즘 역사 속 여러 사건과 논쟁들을 살펴보면서 레닌에게 다시 주목한다. 이를 통해 우리는 (벤사이드가 “혁명 속의 혁명”이라고 표현한) 당 문제에 대한 레닌의 공헌이 갖는 의미를 되새겨 볼 것이다. 레닌은 당 이론을 체계적으로 펼친 적은 없다. 하지만 조직에 대한 레닌의 이론적 개념과 볼셰비즘의 실천 사이에는 일관성이 있었다. 이러한 일관성은 당시 지배적이었던 사회민주주의 전통을 넘어서는 새로운 전통을 예고했다. 레닌은 1914년까지 늘 사회민주주의를 (특히 독일 사회민주주의를) 언급했지만, 러시아 혁명의 특수한 발전조건과 그 자신의 이론적·정치적 궤적은 결국 계급·당·지도력 간의 관계를 재정립하고 혁명의 역동성 속에서 당의 역할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도록 이끌었다. 20세기 첫 10년 동안 레닌은 국제 사회민주주의 운동 안에서 19세기 말 이후 지배적이던 견해, 즉 진정한 대중정당을 건설하기 위해 (특히 독일에서) 단결을 우선시하는 노선을 옹호했다. 그러므로 처음에는 하나의 경향으로, 그 다음에는 하나의 분파로, 그리고 1912년 이후에는 독자적인 정당으로 존재했던 볼셰비키 조류와 이를 이끈 레닌은 제2인터내셔널 안에서 불가피하게 논쟁에 휩쓸렸다. 하지만 1914년 여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 제2인터내셔널 지도자들이 자국 자본가계급의 편에 서서 전쟁에 가담하는 배신을 저지르자 레닌은 유리한 위치에 서게 되었다. 이는 레닌이 1917년 러시아 혁명 과정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할 수 있게 해준 요인이기도 했다. 러시아 사회민주주의 안에서 레닌주의 조직 개념과 볼셰비즘의 실천이 발전해 나간 주요 ‘단계’들을 살펴보자. 20대의 레닌: 러시아 전역을 위한 신문 사회주의 혁명을 향한 레닌의 투쟁은 러시아에서의 자본주의 발전이라는 특수하고도 어려운 조건 위에서 전개되었다.[11] 차르 체제의 완강한 탄압 때문에, 러시아의 자유주의 정치운동은 취약했고,[12] 노동자운동과 민중운동은 혁명적 경로를 추구하게 되었다.[13] 19세기 후반 러시아 혁명운동을 주도한 (민중주의 조류인) 나로드니키는 농촌의 불만을 기반으로 삼으려 했으나 농민 대중의 무관심에 곧 낙담하여 테러적인 방법으로 전환했다. 이는 러시아에서의 정치적 분화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으며, 특히 나로드니키 활동가였던 형 알렉산드르 울랴노프가 차르 알렉산드르 2세 암살 시도 혐의로 정권에 의해 처형된 사건은 레닌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1880년대 러시아에서 마르크스주의가 발전하게 된 것은 주로 이러한 민중주의 조류(그리고 나중에는 ‘합법적 마르크스주의’ 조류)에 대한 반발에서 비롯되었다. 게오르기 플레하노프는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저서를 러시아어로 번역하는 선구적인 노력을 했다. 1881년, 플레하노프는 러시아 최초의 진정한 마르크스주의 단체인 ‘노동자해방단’을 창설했다. 레닌은 곧이어 이 단체에 합류하여 이를 진정한 정당으로 탈바꿈시키고자 했다. 레닌의 역할은 처음부터 결정적이었다. 브루에는 이렇게 설명한다. 플레하노프가 이끈 눈부신 이론적 투쟁 이후, 그의 제자들과 동료들에게는 실천적인 문제가 대두되었다. 모든 조직, 심지어 초보적인 조직조차도 전제정치라는 엄청난 장애물에 부딪혔기 때문에, 러시아 사회민주주의자들은 (마르크스의 사상을 따라) 세상을 단순히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변혁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는 데 더욱 매진해야 했다. 이러한 노력을 가장 잘 표현한 인물은 바로 젊은 울랴노프, 즉 레닌이었다.[14] 결정적인 첫걸음은 1898년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 창립대회였다. 그러나 실제로는 당은 통일된 상태와는 거리가 멀었고, 당을 구성하는 지역 조직들은 여전히 널리 흩어져 있었다. 레닌은 “러시아 사회민주주의는 이 엄청난 진전을 이루는 데 당장의 모든 힘을 소진한 듯하며, 이전의 고립된 지역 조직들의 활동으로 되돌아갔다”[15]고 썼다. 1895년부터 1903년까지 레닌은 사회민주주의 운동의 “아마추어적인” 방법론과 싸우며 “단일한 당의 활동으로 통일”을 실현하기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였다. 이는 레닌의 첫 번째 주요한 투쟁이었다.[16] 레닌에게는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 번째, 차르 전제정치라는 중앙집권적인 괴물에 맞서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할 수 있으려면, 당은 반드시 고립되고 분산된 그룹들의 활동을 성공적으로 집중시켜 내야 했다. 레닌은 이렇게 썼다. 단일 정당으로의 통합만이 우리가 분업과 역량 효율화의 원칙을 체계적으로 준수할 수 있게 해 줄 것이다. 이는 전제 정부의 억압과 광적인 탄압에 맞서 손실을 줄이고 최대한 견고한 방어벽을 구축하기 위해 반드시 달성해야 할 목표이다.[17] 두 번째는 신생 노동자운동이 수행한 개별 투쟁들의 성과를 조율함으로써 (정당이 없다면 고립된 채로 남을) “모범적 의미”를 공고히 하는 것이었다. 레닌은 계속해서 말한다. 이러한 아마추어적인 성격 때문에 러시아 노동자운동의 많은 투쟁들은 순전히 지역적인 사건으로 남아 러시아 사회민주주의 전체의 한 사례로서의 가치, 러시아 노동자운동 전체의 한 단계로서의 의미를 크게 잃어버린다. … 만일 이러한 형태의 혁명적 투쟁들이 당 전체의 기관을 통해 통합되지 않는다면, 그 의미의 90%를 잃게 될 것이고, 공통된 경험을 축적하며 전통과 연속성을 수립하는 당을 만들어내지 못할 것이다.[18] 따라서 당은 착취당하고 억압받는 자들의 투쟁 경험을 집중시켜 내고 일관성과 연속성을 부여하는 “촉매제” 역할을 한다. 파업 역시 마찬가지인데, 파업은 노동자계급과 혁명가들을 위한 전쟁 학교, 즉 “노동자들이 적과 싸우는 법을 배우는 학교”[19]로 여겨진다. 레닌의 야망과 그가 스스로에게 부여한 과제의 어려움을 가늠하기 위해서는 러시아의 거대한 영토와 당시 경제적·문화적 발전 수준이 매우 낮았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이렇게 사회민주주의 세력을 통합하는 데 있어 가장 효과적인 도구로 빠르게 떠오른 것은 신문이었다. 레닌은 이렇게 썼다. 오직 당 기관지의 창설을 통해서만, 혁명의 대의를 위해 ‘특정 분야에서 활동하는 투사’에게 자신이 ‘전체 당원과 함께’ 행진하고 있다는 의식, 자신의 일이 당에게 직접적으로 필수적이라는 의식, 자신이 러시아 노동자계급과 전체 민중의 가장 악랄한 적을 목 졸라 죽일 올가미를 형성하는 사슬의 고리 가운데 하나라는 의식을 심어줄 수 있다.[20] 이처럼 20세기 초, 레닌은 당에 대한 자신의 개념을 처음으로 개략적으로 제시했다. 즉, 당의 기본 과제는 노동자계급 운동에 공통적이고 조직된 방향을 제시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개념은 당시 국제 사회민주주의, 특히 조직적인 측면에서 가장 앞서 있던 독일 사회민주주의의 당 개념과 대체로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한편 레닌은 러시아 사회민주주의 운동의 통일을 위한 투쟁과 병행해서 당시 제2인터내셔널을 갈라놓고 있던 강령적 논쟁에도 개입했다. 당시 베른슈타인의 수정주의로 대표되는 기회주의 경향에 맞서 첫 번째 공공연한 전투가 전개되고 있었는데, 그러한 기회주의 경향은 불가피하게 러시아에도 일부 영향을 미쳤다. 1902~03년: <무엇을 할 것인가>와 당의 첫 번째 분열 1903년에 개최된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 제2차 대회는 “진정한” 통일을 이룰 대회로 기대되었다. 그러나 오히려 이 대회는 (소수파를 뜻하는) 멘셰비키와 (다수파를 뜻하며 레닌이 이끈) 볼셰비키가 처음으로 분열하는 대회가 되었다. 레닌은 이 대회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무엇을 할 것인가>[21]를 집필했다. 근본적으로 이 저서는 레닌이 “경제주의자”라고 부른 알렉산드르 마르티노프가 이끈 집단과의 논쟁이지만, 당시 전개되는 상황에 대한 대응을 포함하고 있었다.[22] <무엇을 할 것인가>는 특히 이른바 마르크스-레닌주의 전통 안에서 레닌의 조직 개념에 대한 교조적이고 ‘신화화된’ 해석의 중심축 역할을 해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레닌의 조직 개념을 이해하는 데 필수적이다. 이 책이 불러일으킨 모든 논쟁을 다룰 수는 없으므로, 여기서는 레닌이 발전시킨 두 가지 주요 사상에 대해, 즉 첫째로는 의식성과 자발성의 상호관계에 대해, 둘째로는 노동자계급이 (그리고 그 선두에 선 사회민주주의가) 정치투쟁에 헌신해야 한다는 주장에 대해 초점을 맞출 것이다. 레닌은 <무엇을 할 것인가> 전반에 걸쳐 노동자들이 혁명적 의식을 “자발적으로” (다시 말해 순전히 자본주의의 발전과 그 위기를 통해) 얻을 수 있다는 생각에 대해 논쟁을 벌인다. 그는 대중의 자발성이 전능하다는 믿음, 즉 “자발성에 대한 굴복”을 막다른 길이라고 규정하며, 이는 러시아 사회민주주의가 조직적 과제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게 한다고 지적한다. 레닌에 따르면, 자발성은 계급의식의 변덕에 사로잡히게 한다. 계급의식은 직선적으로 발전(장기간의 점진적이고 끊임없는 발전)하는 게 아니라, 마치 진자처럼 오르락내리락하기 때문이다. “자발성에 의한 정치적 의식성의 압도 역시 자발적으로 이루어졌다.” 나아가 레닌은 계급의식이 어떤 중립적인 토대 위에서 발전하는 게 아니라, 자본가계급이 노동자계급보다 이데올로기적 수단을 천 배나 우월하게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는 역사적으로 결정된 틀 안에서 형성된다는 점을 상기한다. 그러나 독자는 왜 자발적인 운동, 즉 최소 저항의 경로를 따라가는 운동이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의 지배로 이어지는지 의문을 제기할 것이다.[23] 그 이유는 간단하다. 부르주아 이데올로기는 사회주의 이데올로기보다 기원이 훨씬 오래되었고, 더 완전한 형태로 발전했으며, 훨씬 더 많은 전파수단을 보유하고 있기 때문이다.[24] 레닌은 자발성을 숭배하는 자들에 맞서 “막대를 구부리기 위해” 이렇게 썼다. “그러므로 우리 사회민주주의의 과제는 자발성과 싸우는 것이다.” 리가 지적했듯이, 레닌이 그런 주장을 편 이유는 (일부의 해석과는 달리) 대중의 자발성에 대한 불신이 아니었다. 반대로 노동자와 민중이 대규모 봉기에 나설 것이라는 확신이었고 그에 대해 혁명가들이 대비하지 못할 것에 대한 우려였다. 레닌을 사로잡았던 것은 바로 혁명가들의 준비 부족과 조직된 사회민주주의 세력의 후진성이었지, 대중의 자발성에 대한 불신이나 혐오가 아니었다. <무엇을 할 것인가>의 마지막 장에서는 몇 가지 실천적인 결론을 제시한다. 여기서 레닌은 아마추어적인 방법에 맞선 자신의 생각을 급진적으로 전개하여 “중앙집권화”와 전업 활동가에 중심적 의미를 부여한다.[25] 또한 노동조합 같은 광범위한 노동자 조직과 당이라는 혁명가 조직이 어떻게 구분되어야 하는지를 설명한다. <무엇을 할 것인가>에서 또 다른 주목할 만한 측면은 (이번에는 직접적으로 강령적인 차원에서) 마르티노프와 벌이는 논쟁이다. 레닌은 마르티노프가 노동자계급을 향한 정치선동을 “노동력 판매조건(노동조건 및 생활조건) 개선을 위한 노동자들의 고용주에 맞선 집단적 투쟁”으로 축소함으로써 그 범위를 좁히고 빈곤하게 만들었다고 비판했다. 물론 레닌에게 있어 노동자계급의 경제투쟁과 일상투쟁은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었지만, 혁명적 관점에서 계급의식을 날카롭게 하는 데에는 불충분했다. 적어도 두 가지 이유에서 정치투쟁이 절대로 필수적이었다. 첫째, 자본주의 사회의 모든 양상을 이해하고 그 근본적인 반동적 성격을 파악할 수 있도록 노동자계급과 혁명가를 교육하기 위해서다. 둘째, 노동자혁명의 승리에 필수적인 동맹을 구축하기 위해서다. 따라서 레닌은 다음과 같이 썼다. 계급적 정치의식은 오직 밖으로부터만, 즉 경제투쟁 밖으로부터만, 노동자와 고용주 간의 관계 영역 밖으로부터만 노동자들에게 전달될 수 있다. 이러한 지식을 얻을 수 있는 유일한 영역은 모든 계급과 계층이 국가 및 정부와 맺는 관계의 영역, 모든 계급 간의 상호 관계의 영역이다.[26] 사회민주주의자의 이상은 노동조합 간부가 아니라 인민의 호민관이어야 한다. 즉 어디에서 나타나든, 어떤 계층이나 신분에 영향을 미치든, 모든 폭정과 억압에 대응할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 이러한 모든 폭정과 억압의 양상을 종합하여 경찰 폭력과 자본주의 착취라는 하나의 그림으로 그려낼 수 있는 사람, 아무리 사소한 사건이라도 자신의 사회주의적 신념과 민주적 요구를 만천하에 드러내고, 노동자계급 해방 투쟁의 세계사적 의미를 모든 이에게 명확히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27] 여기서 근본적으로 드러나고 있는 것은 자본주의 체제를 무너뜨리기 위해서는 노동자계급이 헤게모니적 지위를 구축해야 한다는 확신, 다시 말해 경제적·조합주의적 입장에만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착취당하고 억압받는 모든 이들의 요구를 지지하는 동맹을 구축해야 한다는 확신이다.[28] 앞서 말했듯이, 레닌의 <무엇을 할 것인가>는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 제2차 대회를 준비하는 토론의 일부였다. 이 대회는 강령적인 관점에서 (특히 경제주의자들이 소수파로 전락하는 등) 진전을 이루었지만, 조직 문제에서 예상치 못한 의견 차이가 나타났다.[29] 논쟁은 특히 당 규약 제1조, 즉 당원 자격 요건을 명시한 조항을 둘러싸고 집중되었다. 레닌이 제시한 안은 마르토프가 제시한 안과 충돌했다. 레닌의 안이 당원들의 당 활동 ‘참여’를 강조한 것과 달리, 마르토프의 안은 단순히 ‘협력’만을 요구했다.[30] 레닌의 안은 통과되지 못했지만, 당 지도부와 당 기관지 이스크라의 편집부 선출에서는 레닌과 그 지지자들이 과반수를 차지했다.[31] 마르토프 안 지지자들은 나중에 지도부 선출 투표가 사고였다고 주장하며 이의를 제기했고, 이를 구실로 레닌 지지자들과 결별했다.[32] 제2차 대회 이후 몇 달 동안 멘셰비키는 레닌에 대한 비난을 거세게 퍼부으며 분열의 원인을 그의 “관료적이고, 형식주의적이며, 전제적인 중앙집권적 개념”[33] 탓으로 돌렸다. 이듬해 레닌은 <일보 전진, 이보 후퇴>라는 장문의 글에서 대회의 사건들을 회고하면서, 두 분파와 그들의 조직 개념 사이의 일관성을 보여주었다. “[조직에 속하지 않지만] 어떤 식으로든 당을 돕는 사람들”을 당원이라고 부르는 것을 찬성한다고 말한 멘셰비키와 악셀로드의 조직 개념에 반대하여,[34] 레닌은 이렇게 선언했다. 나는 그것으로 다음과 같은 나의 기대와 요구를 분명하고 정확하게 나타내려고 한 것이다. 즉, 계급의 전위로서 당은 가능한 한 조직되어야 한다는 것, 당은 적어도 최소의 조직에나마 복종할 용의가 있는 요소만을 가입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반면에 나의 논적은 조직된 요소와 조직되지 않은 요소, 즉 지도에 따르는 자와 그렇지 않은 자를 하나로 뭉뚱그려 버린다.[35] 레닌은 또한 자신의 입장을 본질적으로 음모론적이거나 종파적인 개념이라고 왜곡하는 풍자에 대해서도 반박했다. 노동자계급의 전위로서 당은 계급 전체와 혼동되어서는 안 된다. … 당 조직이 오직 전업 혁명가로만 구성되어야 한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극히 제한되고 비밀스러운 조직에서부터 매우 광범하고 자유로운 느슨한 조직에 이르기까지 모든 종류, 모든 등급, 모든 색채의 다양한 조직이 필요하다.[36] 여기서 우리는 서로 다른 동심원들로 이루어진 조직체계를 발견할 수 있다. 결론적으로 레닌이 제안한 것은 ‘전위주의’ 당 개념(또는 그의 반대자들이 자주 비난했듯이 ‘블랑키주의’ 당 개념)이라기보다는, (계급 안에서 가장 의식적이고 단호한 부분인) 전위를 포괄하는 당과 대중 간의 관계를 재정립하는 것이었다. 이 때 레닌이 명시적으로 국제 사회민주주의를 겨냥하지는 않았지만, 그의 당 개념이 당시 국제 사회민주주의에서 유행하던 당 개념들과의 단절로 나아가는 간접적인 첫걸음이었다는 점은 흥미롭다. 레닌의 당 개념은 국제적인 차원을 포함하여 여러 차례 비판을 불러일으켰으며, 그중에서도 로자 룩셈부르크의 비판이 가장 유명하다.[37] 마지막으로, 레닌은 당규를 둘러싼 논쟁의 쟁점을 설명하는 데 큰 중요성을 두었지만,[38] 그것이 당 분열의 충분한 이유가 된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마르크스-레닌주의자들의 주장과는 달리, 분열을 주도한 것은 멘셰비키였다. 르블랑의 설명처럼, 레닌이 볼셰비키와 멘셰비키 간의 진정한 통합이라는 생각을 포기한 것은 1904년 가을이 되어서였다.[39] 이 일화는 당의 단결 문제에 대한 레닌의 입장을 잘 보여준다. 레닌은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분리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은 아니었다.[40] 하지만 또한 레닌은 기회주의 세력이 중요한 사안에 대한 정치적·강령적 양보를 획득하는 수단으로 당의 단결이 이용되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역사가 할 드레이퍼는 이렇게 요약한다. 레닌의 접근 방식은 다음과 같았다. 단결은 중요하지만, 다수의 승리를 좌절시키는 대가를 치르면서까지 단결해서는 안 된다. 단결은 중요하지만, 언제나처럼 민주적인 토대 위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우파는 다음 당 대회에서 승리하기 위해 노력할 수는 있지만, 분열하지 않는 대가로 정치적 양보를 요구해서는 안 된다.[41] 1905년 혁명: 당과 대중 1905년은 레닌의 이론적·정치적 궤적에 있어 결정적인 전환점이었다. 레닌 자신이 언급했듯이, 제1차 러시아 혁명은 다양한 사상을 실천적 경험 속에서 시험해 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42] 이러한 측면에서, 1905년은 볼셰비키의 강령적 주장이 멘셰비키의 강령적 주장을 압도한 해였으며, 레닌이 혁명적 과정 속에서 전위와 대중의 관계를 재검토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당시 사회민주주의 진영 전반에서 다가오는 혁명에 관한 전략적 논쟁이 벌어졌다. 노동자운동 내 대부분의 흐름은 다가올 혁명의 내용이 (민주적 과제와 농업 과제를 가진) 부르주아적인 것이라는 데 동의했다. 하지만 이 혁명에서 노동자계급이 수행해야 할 역할을 둘러싸고 볼셰비키와 멘셰비키가 갈라졌다. 유럽의 자본주의 발전 ‘단계’를 러시아에 기계적으로 적용한 멘셰비키는 자유주의자들(카데츠로 알려진 입헌민주당)이 주도하는 부르주아 혁명을 사회민주주의가 열심히 동행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와 반대로, 멘셰비키와 트로츠키의 견해 사이에서 중간적인 입장을 취했던 레닌은 혁명적 사회민주주의가 주도권을 잡고 대중의 분노를 봉기의 방향으로 이끌어야 한다고 주장했다.[43] 거대한 대중 행동의 시기는 이러한 이론들이 실천 속에서 시험되게 하였고, 1905년의 경험은 이러한 논쟁들을 해결할 기회를 제공했다. (이제 멘셰비키의 사상을 표현하는) 새 <이스크라>는 사건들의 영향을 받아 실제로는 자기 반대파의 입장을 채택하고 있다. 다시 말해 멘셰비키 자신의 결의가 아니라 제3차 대회[44]의 결의에 따라 행동하고 있다. 혁명적 사건의 흐름보다 잘못된 교리를 더 잘 비판하는 것은 없다.[45] 레닌이 당의 재통합, 특히 볼셰비키와 멘셰비키의 재통합을 다시 주장한 것은 혁명의 진행 과정이 필연적으로 멘셰비키를 왼쪽으로, 따라서 볼셰비키의 입장으로 이끌 것이라는 믿음에 기초해서였다. 대중적 압력을 완화하기 위해 차르는 내무부 장관 불리긴에게 입법 의회인 두마를 구성하라고 지시했다. 선출 원칙이 매우 부적합했던 이 첫 번째 두마는 사회민주당원들 사이에서 활발한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볼셰비키는 적극적인 보이콧을 주장했고, 사회민주당 조직의 다수가 이에 찬동했다. 이들은 헌법적 허상에 맞서기 위한 선전·선동 캠페인을 펼쳤다.[46] 그러나 멘셰비키는 보이콧 결의안에 찬성하지 않았다.[47] 레닌은 당시 러시아 밖에 거주하고 있었지만, 특히 상트페테르부르크와 모스크바에서 일어난 러시아 노동자계급의 파업과 거리 시위를 면밀히 주시했다.[48] 1905년 혁명의 가장 큰 혁신이자 (마르셀 리브만의 표현으로) “가장 독창적인 창조물”은 단연 소비에트의 등장이었다. 처음에는 공장 단위로, 나중에는 지구 단위로 선출된 이 대규모 노동자평의회는 혁명 기간 동안 등장하여 여름 동안 여러 도시로 확산되었다. 가장 널리 알려진 상트페테르부르크 소비에트는 1905년 10월에 결성되었으며, 25만 명의 노동자들이 보낸 대표들을 모아냈다.[49] 이러한 평의회는 투쟁에 참여하는 대중의 다양한 활동을 광범위하게 조직하고 조정할 수 있게 해 주었다. 멘셰비키 활동가들과 달리, 볼셰비키 활동가들은 처음에는 이러한 새로운 조직체에 대해 크게 당황했다. 브루에가 지적했듯이, “실제로 볼셰비키 활동가들은 새로운 혁명적 환경에 느리게 적응했다. 비밀스럽게 활동하던 이들은 어떻게 웅변가가 되고 군중을 모아야 하는지 하루아침에 알지 못했다.” 많은 역사학적 자료들은 볼셰비키 활동가들 사이에 주저함 또는 거의 불신에 가까운 감정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심지어 상트페테르부르크 지역 조직은 소비에트가 노동자계급을 낮은 발전 수준에 머물게 할 위험이 있다는 결의안을 채택하기까지 했다. 이러한 관점은 레닌의 생각과 거리가 멀었다. 레닌은 해외에 있었지만 볼셰비키 활동가들의 소비에트에 대한 편견과 싸우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라딘 동지가 ‘노동자대표 소비에트냐, 당이냐’라고 질문을 제기한 것은 잘못된 것 같다. 나는 질문을 이런 식으로 하는 것 자체가 잘못되었으며, ‘노동자대표 소비에트와 당 모두’라는 결정이 반드시 내려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유일한 질문이자 매우 중요한 질문은 소비에트와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의 임무를 어떻게 나누고 어떻게 결합하느냐이다.[50] 레닌의 관점에서 볼 때, 소비에트는 혁명 과정의 발전을 촉진하기 위해 당과 연계되어야 했다. “노동자대표 소비에트는 총파업을 통해, 총파업과 연계하여, 그리고 총파업의 목적을 위해 탄생했다. … 정치투쟁을 이끌어 나가기 위해서는 (뒤에서 논의할 방향으로 재조직된) 소비에트와 당 모두가 동등한 수준에서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생각한다.”[51] 소비에트의 출현은 레닌에게 조직(전위)과 대중의 자발성 사이의 변증법적 개념을 이론적으로 심화하는 진정한 계기가 되었다. 혁명 계급의 투쟁에서 탄생하고 그 안에서 형성된 이 조직들을 당의 결정에 종속시키려 했던 볼셰비키 간부들에게 레닌은 오히려 그 조직들을 확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내 생각에 정치적 지도력을 제공하는 혁명적 중심인 노동자대표 소비에트는 지나치게 광범위한 조직이 아니라, 오히려 지나치게 협소한 조직이다.”[52] 혁명 과정에 대한 이와 같은 새로운 개념은 레닌의 사상에서 결코 사라지지 않았으며, 1917년 러시아혁명 때 레닌이 취하게 될 방향뿐만 아니라 코민테른 초기 노동자 공동전선 전술에 대한 논쟁까지 예고하는 것이었다. 이는 행동하는 노동자계급의 단결을 위한 투쟁과 그 혁명적 지도력을 위한 정치적 투쟁이라는 혁명 방정식의 두 항 사이의 관계를 이분법적으로 바라보지 않는 레닌의 관점을 보여준다. 1905년 혁명을 평가하면서 레닌은 당의 진정한 재조직을 주장했다. 레닌은 혁명이 쟁취한 민주적 진전을 주목했다. 이러한 진전은 매우 제한적이었지만 합법 활동과 당의 민주화를 가능하게 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가 있었다.[53] 레닌은 “볼셰비키 위원들”[54]의 보수적 태도에 맞서 싸웠고, 그들에 대항하여 당의 “문호개방”[55]을 주장했다. 레닌은 지역 조직을 확대하고 선거 원칙을 적용하는 새로운 조직운영 방식이 당에게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우리 당의 활동 조건이 급격하게 변화하고 있다. 집회의 자유, 결사의 자유, 언론의 자유가 획득되었다. 물론 이러한 권리들은 매우 불안정하며, 지금의 자유가 마냥 계속되리라고 믿는 것은 범죄는 아닐지라도 어리석은 짓이 될 것이다. 결정적인 투쟁은 아직 오지 않았으며, 이 투쟁을 위한 준비가 최우선 과제이다. 당의 비밀 조직은 유지되어야 한다. 그러나 동시에 현재 상대적으로 넓어진 활동 범위를 최대한 활용하는 게 반드시 필요하다. 비밀 조직 외에도, 새롭게 합법적이거나 준합법적인 당 조직들을 (그리고 당과 연계된 조직들을) 많이 설립하는 게 반드시 필요하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새로운 조건에 맞춰 당의 활동을 조정하거나 새로운 문제에 대처하는 게 불가능하다.[56]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1905년은 당에 민주주의를 도입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 전까지는 러시아의 정치적 상황 때문에 당내 민주주의가 매우 제한적이었다. 혁명은 이러한 상황을 바꾸었고, 볼셰비키는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민주적 중앙집권제”라는 개념을 당에 도입했다. 이는 <무엇을 할 것인가>에서 제시된 중앙집권제에 민주주의를 더한 것이었다. 이후 레닌은 당내 민주주의의 주요 옹호자가 되었다. “비판의 자유와 행동의 통일”에 관한 볼셰비키 중앙위원회 결의에 날카롭게 반발[57]하며, 레닌은 민주적 중앙집권제를 다음과 같이 정식화했다. 민주적 중앙집권제와 지방 당 조직의 자율성 원칙은 구체적인 행동의 통일성을 해치지 않는 한, 보편적이고 완전한 비판의 자유를 포괄한다. 반대로, 당이 결정한 행동의 통일성을 방해하거나 어렵게 만드는 모든 비판은 배제된다.[58] 1905년 혁명과 소비에트의 출현은 레닌이 혁명적 역동성 속에서 당과 대중의 관계를 재정립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1903년 당 대회 이후 레닌은 “자발적 요소”를 과소평가한다는 비난을 받았는데, 1905년 혁명에서 레닌은 오히려 자발적 요소에 결정적인 중요성을 부여했다. 자발성(대중)과 조직(전위)의 관계는 변증법적 관점에서 고찰되어야 한다. 때로는, 특히 상황이 급변하는 시기에는 자발적 요소가 조직적 요소보다 앞서 나갈 수도 있다. 레닌은 “노동자대중은 지도자들보다 먼저 투쟁의 객관적 조건 변화와 파업에서 봉기로의 전환 필요성을 감지했다”[59]고 썼다. 그러나 레닌은 당에 대한 자신의 개념을 더욱 풍부하게 발전시켰지만, 1903년 멘셰비키와 분리하게 만든 지점에 대해서만큼은 근본적으로 동일한 관점을 유지했다. 즉, 혁명의 시기에도 (어쩌면 특히 혁명의 시기에) 통일되고 중앙집권화된 당의 존재가 결정적인 문제라는 것이다. 레닌은 노동자계급 전위의 결집체라는 당의 개념을 포기하지 않으면서도, 정치 상황이 바뀐 만큼 볼셰비키 간부들이 언제 어디서나 대중과 만나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계급/대중과 당/전위 사이의 기계적인 관계가 아니라, 벤사이드가 말했듯이 “당과, 계급이 축적한 경험 사이의 끊임없는 교류”를 보여준다. 이는 레닌의 당 개념에서 어떻게 당이 큰 유연성을 가질 수 있는지를 말해준다. 그것은 정치 상황의 변화를 포착하여 스스로를 갱신하면서 보수화를 피할 수 있는 당의 능력이다. 따라서 조직은 자발성을 가로막는 방벽이 되지 않고, 오히려 그 규율 덕분에 변화하는 상황에 신속하게 적응할 수 있게 된다. 헝가리 마르크스주의 철학자 루카치는 이렇게 설명했다. 당의 역할은 결코 추상적으로 고안된 전술을 대중에게 강요하는 게 아니다. 오히려 당은 대중의 투쟁으로부터 그리고 투쟁을 수행하는 방식으로부터 끊임없이 배워야 한다. … 이론에서의 모든 독단과 조직에서의 모든 경직성은 당에 치명적이다.[60] 이러한 관점은 대다수 독일 사회민주주의자들의 관점과 명확한 대조를 이룬다. 그들은 대중의 자발성을 당이 때때로 동원할 수 있는 보조적인 힘으로 여겼지만, 본질적으로는 여전히 노동자계급의 “미조직” 요소이자 “미성숙”의 표현으로 간주했다. 이는 특히 1910~13년 로자 룩셈부르크와 안톤 판네코크가 1905년 러시아 혁명에 대한 평가를 바탕으로 ‘대중파업’ 논쟁을 제기했을 때, 칼 카우츠키가 이들에 맞서면서 옹호한 입장이었다. 레닌은 당시 이 논쟁을 직접 파악하지 못했던 것으로 보이지만, 그가 옹호했던 입장이 카우츠키보다는 룩셈부르크의 입장에 훨씬 더 가까웠다는 것은 분명하다. 1905년 혁명은 볼셰비키와 멘셰비키 간의 화해를 확고히 하고 가속시켰다. 혁명은 두 세력 간의 정치적·강령적 차이점을 명확히 드러냈지만, 레닌은 멘셰비키가 상황적 압력에 굴복하여 볼셰비키의 정치노선에 따를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확신했다.[61] 1905년 혁명 과정에서 볼셰비키와 멘셰비키는 같은 편에 서서 투쟁했기 때문이다. 만약 정치투쟁이 필요하다면, 그것은 통일된 당의 틀 안에서 전개될 수 있고 그렇게 되어야만 한다고 레닌은 생각했다. 우리는 우파 사회민주주의자들의 이러한 경향에 맞서 가장 단호하고 공개적이며 무자비한 이데올로기 투쟁을 벌여야 한다. … 그러나 통일된 당 안에서 전개되는 이러한 이데올로기 투쟁은 조직을 분열시켜서는 안 되며, 노동자계급의 행동 통일을 방해해서도 안 된다.[62] 1906년 4월 스톡홀름에서 통합 당 대회가 열렸다. 거기서도 레닌을 이끈 것은 (새로운 정치상황에 대한 분석과 함께) 다가오는 혁명을 단호하게 준비해야 한다는 그의 확신이었다.[63] 내일이든 아니면 모레든 사건들이 어떤 식으로든 우리를 불가피하게 봉기하도록 불러낼 것임을 기억하자. 행동의 시기가 왔을 때 유일하게 중요한 문제는 우리가 준비되고 통일된 상태에 있느냐 아니면 방심하고 분열된 상태에 있느냐일 것이다.[64] 1907~12년: 반동의 시대와 최종 분열 1906년 4월 스톡홀름에서 열린 통합대회에서 다수파는 멘셰비키였다. 당원 3만 4천 명을 대표하는 멘셰비키 대의원 62명과 당원 1만 4천 명을 대표하는 볼셰비키 대의원 46명이 참석했다. 레닌과 볼셰비키는 분파를 유지했지만, 레닌은 그 목표가 새로운 정당 건설이 아니라 단호한 전술을 실행하기 위한 당내 블록이 되는 데 있다고 선언했다. 1907년 5월 런던 대회에서는 내부 세력관계가 뒤집혀 볼셰비키가 근소한 차이로 다수파가 되었다. 이는 멘셰비키가 1905년의 혁명적 행동들을 부인한 점과 볼셰비키 간부들의 결속력 및 조직적 노력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였다. 그러나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은 곧 훨씬 더 불리한 새로운 상황에 직면하게 되었다. 1907년 하반기부터, 그리고 특히 1908년에, 정권이 사회민주주의 운동에 대한 가혹한 탄압을 전개했다. 노동자운동과 파업 건수가 급감했고, 당 위원회들이 해체되었으며, 체포와 추방이 잇따랐다. 브루에는 러시아 사회민주당 당원 수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1907년 모스크바에는 당원 수가 수천 명에 달했으나 1908년 말에는 500명, 1909년 말에는 150명으로 줄어들었고, 1910년에는 조직이 완전히 해체되었다. 전국적으로도 당원 수가 약 10만 명에서 1만 명 미만으로 감소했다.”[65] 1905~06년의 혁명적 시기가 지나간 뒤, 반동이 가혹하게 밀어닥쳤고, 사회민주주의 운동은 전국적으로 쇠퇴했다. 이러한 새로운 상황은 당의 잔존 세력 내부에서 긴장과 의견 불일치를 심화시키는 데 특히 일조했다. 1905년 혁명의 성과와 새로운 상황에서 어떤 정책을 채택할 것인지에 대한 논쟁이 다시 불거졌다. 의견 불일치는 주로 제3차 두마에 대한 정책과 당의 불법 활동 지속에 관한 정책을 둘러싸고 구체화되었다. 볼셰비키 내부에서도 멘셰비키 내부에서도 의견 차이가 발생하여 새로운 세력 구도가 형성되었다. 볼셰비키 내부에서 레닌은 보그다노프가 이끄는 ‘소환파’에 맞서 소수파의 입장을 고수했다. 소환파는 오로지 불법 활동만을 고집하면서 두마를 보이콧해야 한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그러나 레닌은 당시 상황에서 혁명가들이 합법적이든 준합법적이든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세력을 규합하고 강령을 널리 알릴 필요성을 주장했다. 따라서 레닌은 제3차 두마의 반동적 성격을 인정하고 헌법적 환상에 맞서 싸우면서도, 멘셰비키와 함께 선거 보이콧에 반대하는 표를 던지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보그다노프 지지자들은 볼셰비키 내에서 노동조합 가입을 포함한 모든 합법적 활동에 반대하는 경향인 ‘최후통첩파’와 합류했다. 멘셰비키 측에서는 비밀 활동 포기와 불법 행동에 대한 원칙적 거부를 주장하는 반대 경향이 나타났다. 이러한 ‘청산파’ 경향에 맞서 레닌은 멘셰비키 내 플레하노프 파벌과 연합하여 내부 전선을 구축하려고 했다. 청산파들은 1908년 12월 당 대회에서 공세를 시작했다. {청산파들의 공세는} 일부 당 지식인들이 어떻게 해서든 기존의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을 청산하고 형태가 모호한 합법 조직으로 대체하려는 시도다. 이러한 합법 조직으로의 변화는 당의 강령, 전술, 전통을 명확하게 포기하는 결과를 가져올 수밖에 없다.[66] 이처럼 1908년부터 1912년까지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은 양적으로 약화되었을 뿐만 아니라 여러 내부 갈등에 시달렸다. 이러한 일련의 정치적 과정들이 초래한 반동적인 상황은 당내 단결을 향한 압력으로 작용했다. 레닌은 “단결의 본질과 의미에 대한 근본적으로 다른 두 가지 관점”을 지적하면서, 볼셰비키와 멘셰비키 양측에 존재했던 화해적 경향에 맞서 싸웠다. 단결에 대한 한 가지 관점은 ‘특정 개인들, 집단 및 기관들’의 ‘화해’를 최우선 과제로 삼는다. 당 활동의 방향에 대한 그들의 견해 일치는 부차적이다. 의견 차이가 발생한 뿌리, 범위, 객관적 조건에 대해 밝히는 대신 의견 차이에 대해 침묵을 지켜야 한다고 본다. … 그러나 단결에 대한 또 하나의 관점은 오래전부터 여러 가지 심오한 객관적 원인들이 러시아 사회민주주의의 두 주요 분파에 변화를 가져오기 시작했고, 지금도 꾸준히 그러한 변화를 일으키고 있다고 본다. 이러한 변화는 때로는 일부 ‘특정 개인들, 집단 및 기관들’이 원치 않거나 심지어 인지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지만, 단결을 위한 이념적·조직적 토대를 마련해 가고 있다.[67] 다시 말해, 레닌에게 있어 당의 단결과 결속은 러시아 사회민주주의에 만연했던 강령적·정치적 논쟁에 대응하지 않고서는, 즉 청산파(기회주의)와 소환파(극좌주의)라는 상반된 위협에 맞서 “양면 투쟁”을 벌이지 않고서는 이루어질 수 없었다. 1910년 이후, 특히 1911년과 1912년에 계급투쟁이 부활하면서, 레닌은 새로운 혁명적 사건이 다가오고 있다는 확신을 갖고 자신의 관점을 더욱 날카롭게 다듬었다. 혁명가들은 다음 혁명적 격변에 대비해야 했고, 이는 견고하게 구축된 조직 없이는 불가능했다. 이러한 관점을 바탕으로 레닌은 1912년 1월 프라하 대회를 계기로 청산파의 배제를 선언하고, 최대한 광범위한 합법 노동자조직들의 네트워크로 둘러싸인 불법 사회민주주의 세포를 구축하기 시작했다. 이로써 볼셰비키는 마침내 독자적인 정당이 되었다. 이와 관련하여 르블랑은 이렇게 지적한다. 이러한 분리 계획은 <무엇을 할 것인가>나 <일보 전진, 이보 후퇴>에서 제시되었던 어떤 정식보다도 더 심오한 수준에서 독일 사회민주주의라는 고전적 모범에서 벗어난 것이었다.[68] 이 결정은 국제 사회민주주의 진영 안에서 강한 반발을 불러일으켰으며, 로자 룩셈부르크와 카우츠키로부터도 비판을 받았다. 카우츠키는 볼셰비키가 다른 성격의 정당을 만들고 있다고 비난했다. 1917년: 혁명의 당 볼셰비키는 형성 초기부터 상당히 다양한 조직 형태를 거치며 발전해 왔다. 특히 1917년 2월부터 10월까지, 볼셰비키 역사상 가장 격동적인 8개월 동안 이러한 경향은 더욱 두드러졌다. 1917년 3월 초, 차르 체제 붕괴로 이어진 봉기 이후에도 투쟁은 가라앉지 않았다. 파업이 잇따랐고, 새로 지명된 임시정부는 상황을 통제할 힘이 없었다. 처음부터 임시정부는 1905년 모델을 따라 부활한 소비에트와 맞서야 했다. 소비에트는 개량주의자들(멘셰비키와 사회혁명당)이 주도했다. 여러 면에서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는 (그리고 전국 각지에서 등장한 모든 소비에트는) 잠재적으로 더 큰 힘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 힘을 행사하기를 거부하고 부르주아 정부에 조언하고 압력을 가하는 데 그쳤다. 1905년 혁명과 마찬가지로 1917년 2월 혁명도 혁명가들을 놀라게 했다. 페트로그라드에서 볼셰비키 당은 금속 노동자 알렉산더 슐랴프니코프를 중심으로 조직된 “중앙위원회 산하 러시아국”이 이끌고 있었다. 이 지도부는 사건에 뒤처져 있었고,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파악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3월 12일 시베리아 유배에서 돌아온 중앙위원 스탈린과 카메네프가 도착하자, 당은 조국 방위 및 임시정부에 대한 조건부 지지와 압력 행사 입장으로 나아갔다.[69] 이러한 입장은 1917년 3월 7일부터 12일까지 스위스에서 레닌이 써서 보낸 내용과 정반대였다.[70] 4월 3일 페트로그라드로 돌아온 레닌은 멘셰비키 입장으로 기울어진 자신의 당에 맞서 곧바로 투쟁에 나섰다. ‘봉인 열차’에서 내리자마자 가진 첫 연설에서 레닌은 2월 혁명이 노동자계급의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고, 혁명이 중간에 멈출 수는 없으며, 노동자계급이 대다수 병사들과 연대하여 민주주의 혁명을 프롤레타리아 사회주의 혁명으로 전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레닌은 이렇게 말했다. 매 순간, 매일, 모든 유럽 제국주의의 붕괴를 기대할 수 있다. 우리가 성취한 러시아 혁명은 이러한 붕괴의 시작을 알렸고 새로운 시대의 토대를 마련했다. 세계 사회주의 혁명 만세![71] 다음 날, 레닌은 <4월 테제>를 발표하여 당과 혁명이 나아갈 방향을 제안했다. 임시정부를 지지하지 않고 그에 맞서 단호히 투쟁한다. 어떠한 “혁명적 방위주의”(혁명의 방어를 내걸고 전쟁 지속)에도 반대한다. 멘셰비키와의 화해에 반대한다.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 소비에트를 토대로 혁명 정부를 수립하여 러시아를 사회주의의 길로 이끈다.[72] 레닌의 이러한 입장은 중앙위원 다수의 입장과 상반되었지만, 간부들과 일선 당원 다수의 지지를 받았고 그 지지가 나날이 확대되었다. 레닌은 놀라울 정도의 빠른 속도로 승리했다. 레닌의 입장은 제1차 페트로그라드 볼셰비키 협의회(4월 14일 또는 22일)에서 상당히 명확하게 채택되었고, 이어 4월 24일부터 29일까지 열린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볼셰비키) 제7차 대회에서 채택되었다. 당의 급진적 기층에 의지했던 레닌은 그들을 억제하면서 상황을 통제하기 위해 노력해야만 했다. 정치적·사회적 위기가 계속 악화되면서, 시위가 폭동으로 발전했다(4월 20일과 21일 첫 폭동 발생). 노동자계급과 페트로그라드 주둔군 내부에는 임시정부를 가능한 한 빨리 전복시키고자 하는 세력이 상당수 존재했다. 7월 3일부터 5일까지 이어진 준봉기적 나날들은 이러한 열망이 최고조에 달한 시기였다. 정권 장악에 성공할 가능성이 충분히 확보되지 않은 상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움직임이 나타났다. 이 시기 볼셰비키 당은 ‘절대 권력을 가진 지도부가 이끄는 획일적인 집단’이라는 이미지와는 정반대의 모습을 보였다. 소비에트나 공장위원회처럼, 볼셰비키 당은 우파, 좌파, 중간파 경향들이 끊임없이 이동하고 재편성되는 초민주적인 방식으로 운영되었다. 실천적으로는 연방주의와 자율성의 요소도 강하게 드러났다. 지역조직 또는 부문조직들은 자신들의 권한과 선택을 옹호했고, 때로는 중앙위원회에 반기를 들었다. 수도에서 내려지는 주요 결정들은 종종 장시간의 토론 끝에 중앙 지도부와 이러한 반(半)자치조직들이 타협에 이른 결과였다. 페트로그라드에서는 두 조직이 핵심이었다. 당을 이끈 페트로그라드 위원회는 수도의 공장과 거주 지역에서 당의 일상 활동을 조직했다. 군사조직의 지도부는 (시기에 따라) 약 21만 5천 명에서 30만 명에 이르는 주둔군 내의 정치활동과 조직활동을 지휘했다. 이 두 조직은 (특히 군사조직은) 7월의 날들에 많은 책임이 있었다. 7월 봉기는 한편으로는 대중의 혁명적 자발성과, 다른 한편으로는 혁명 세력, 주로 볼셰비키들이 내린 결정이 결합된 결과였다. 레닌과 트로츠키는 부분적으로 반대하는 의견을 냈지만, 결국 자신들이 조직하지도 않았고 진정으로 원하지도 않았던 이 사건을 함께 감당했다.[73] 2월부터 10월까지 볼셰비키 당은 두 가지 동시적인 변혁을 겪었다. 첫째, 수만 명의 노동자 전위들을 끌어들였다. 2월 혁명 직전 2만 명으로 추산되었던 당원 수는 10월 혁명 직전 10만 명을 넘어섰다. 이들은 당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었고, 어떤 의미에서는 당을 혁명적으로 변화시켰다. 둘째, 통합 대회로 알려진 제6차 대회(1917년 7월 26일~8월 3일)를 통해, 당은 과거 볼셰비키 또는 멘셰비키로 활동했거나 독립적으로 활동했던 다양한 집단 및 개인들과 합병했다. 가장 중요한 세력은 트로츠키를 포함하여 4,000명의 회원을 보유한 ‘메즈라이온치’(구역연합)였다.[74] 이전에 레닌은 여러 차례 비꼬는 어조로 트로츠키를 언급하며 그와 함께라면 아무것도 불가능할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이후 트로츠키는 당의 지도부, 혁명의 지도부, 신생 노동자국가의 지도부로서 거의 레닌의 분신과 같은 존재가 되었다. 레닌에게 결정적인 기준은 혁명 그 자체였다. 강령은 추상적인 개념이 아니라 혁명적 사건의 불길 속에서 실제로 적용되어야 할 것이었다. 이와 관련하여, 1917년을 거치면서 트로츠키가 당에 대한 레닌의 입장에 동의했고 레닌 또한 혁명의 사회주의적 역동성에 대한 트로츠키의 결론에 타당성을 인정했다는 이야기가 종종 나온다. 물론 어느 정도는 사실이지만, 트로츠키주의와 레닌주의의 혁명관이 종종 주장되는 것만큼 크게 다르지는 않았다는 점도 강조되어야 한다. 레닌은 이미 1905년에 이렇게 역설했다. “민주주의 혁명이 일단 성취되었을 때, 우리는 바로 의식적이고 조직된 노동자계급의 역량을 갖고 사회주의 혁명의 길로 즉시 나아갈 것이다. 우리는 중단 없는 혁명을 추구한다. 우리는 도중에 멈추지 않을 것이다.”[75] 7월의 날들 이후 반동과 탄압의 시기가 이어졌고, 볼셰비키들은 다시 은신해야 했다. 하지만 이러한 상황은 몇 주 만에 완화되었고, 코르닐로프가 쿠데타를 시도한 8월 말에는 완전히 역전되었다. 임시정부의 케렌스키 총리가 새로 총참모장으로 임명한 코르닐로프의 쿠데타 시도와 실패는 마침내 임시정부의 신뢰를 무너뜨렸고 진퇴양난 속에 빠뜨렸다. 임시정부를 계속 지지했던 개량주의자들도 마찬가지 상황에 빠졌다. 9월, 볼셰비키가 거침없이 부상했다. 볼셰비키는 페트로그라드를 시작으로 모스크바와 다른 여러 지방에서 소비에트의 다수당이 되었다. 트로츠키는 1905년에 이어 다시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의 의장이 되었다. 레닌은 이러한 새로운 상황을 인식하고 환영하면서도 볼셰비키 지도자들에게 지체 없이 봉기 준비를 시작할 것을 계속해서 압박했다. 혁명의 승리로 가는 길이 열렸고, 10월 24~25일 전국 소비에트 대회가 공식적으로 권력을 장악했다. 이렇게 매우 간략히 요약한 1917년 2월부터 10월까지의 사건 전개는 훨씬 더 자세하게 이해될 필요가 있다. 바로 이를 통해 우리는 혁명을 추구하고 준비하는 당·지도부와 대중의 자기조직화가 결합함으로써 사회 혁명의 과정이 만들어진다는 것을 구체적이고도 실질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76] 레닌주의와 레닌주의 조직이 노동자계급 운동의 상당 부분에 지침이 되고 이상이 되고 모델이 되었다면, 이는 분명 1917년에 그들이 거둔 승리 때문이었다. 볼셰비즘의 승리는 증오이든 열광이든, 반감이든 헌신이든 모든 곳에서 레닌주의가 주목받게 만들었다.[77] 레닌의 당: "새로운 유형"의 당? 서두에서 제기했던 질문으로 돌아가 보자. 레닌은 혁명적 조직의 개념을 새롭게 하는 데 어느 정도 기여했을까? 이 글에서 우리는 “레닌주의 당”에 관한 체계적인 이론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레닌주의 당”의 결정적인 성격이라고 간주될 수 있는 획일적인 형태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반대로 우리는 레닌이 정치 상황의 변화에 대응하기 위해 끊임없이 재정립해 나간 과정을 강조했다. 스탈린주의가 <무엇을 할 것인가>를 “레닌주의 당”의 완성된 지침서로 해석하는 것과 달리, 레닌은 1914년 이전까지는 “새로운 유형”의 당을 건설하려 한다고 선언하지 않았으며, 최소한 이론적 수준에서는 독일 사회민주주의를 국제 사회민주주의의 가장 진보된 부분으로 간주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레닌은 종종 (계급·당·지도부 간의 관계, 대중의 자발성, 당의 단결 문제 등에서) 당시 국제 노동자운동 내 대다수의 견해와 상충되는 독특한 입장을 발전시키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또한 그럼으로써 제2인터내셔널 내부에서 룩셈부르크나 카우츠키 등으로부터 혹독한 비판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레닌은 이 시기에도 자신의 방향이 국제 사회민주주의의 방향과 일치한다고 확신했으며, 조직에 대한 자신의 개념을 차르 러시아라는 틀을 넘어 일반화하려 하지 않았다. 1914년까지는 지배적인 정통 이론으로부터 부분적인 단절에 가까웠다. 레닌의 접근은 러시아의 특수성에 의존했으며, 보편적인 이론으로 발전되지 않았다. … 1914년 이후부터 더 체계적으로 되었다.[78] 제1차 세계대전을 계기로 제2인터내셔널의 뿌리 깊은 모순이 드러나면서 국제 노동자운동의 완전한 재편이 시작되었다. 1914년 여름, 유럽 주요 열강의 참전으로 노동자 정당들은 중대한 딜레마에 직면했다. 국가적 단결을 거부하고 불법 단체로 선포되어 비밀 조직으로 전락할 위험을 감수할 것인가, 아니면 자국 자본가계급의 이해관계에 동조할 것인가. 몇몇 예외를 제외하고, 제2인터내셔널의 지도자들 대부분은 ‘사회적 쇼비니즘’에 빠져 전쟁자금 조달에 찬성표를 던지면서 1907년 슈투트가르트 대회에서 재확인했던 노동자 국제주의 원칙을 저버렸다. 레닌은 처음 그 소식을 들었을 때 믿을 수 없었고, 혁명운동 내부에 분열을 조장하려는 중상모략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노동자계급 조직이 (특히 그 지도부가) 사회주의 혁명과 계급연대의 대의를 배신했다는 사실이 명백해지자, 레닌은 이 상황을 파악하는 것을 최우선 과제로 삼았다. 이 배신의 역사적 의미를 파악하고 실천적인 결론을 (특히 조직적인 측면에서) 도출하는 것이 시급하고 필수적이었다. 레닌은 이렇게 썼다. 대부분의 사회민주당들, 특히 제2인터내셔널에서 가장 크고 영향력 있는 독일 사회민주당은 총참모부, 정부, 그리고 자본가계급의 편에 서면서 노동자계급을 배신했다. 이는 세계사적 중요성을 가진 사건이며, 철저한 분석이 필요하다.[79] 이 비극은 레닌에게 심오한 정치적 재무장의 기회를 제공했다. 1914~15년, 레닌은 프로이센의 장군이자 군사 이론가인 카를 클라우제비츠의 저작을 심층적으로 연구하고 비판적으로 수용했으며, 헤겔을 주의 깊게 읽고 그의 변증법을 재검토했다.[80] 레닌이 도달한 핵심 사상 중 하나는 제국주의 전쟁이 이전의 "평화적 발전" 시기와 단절되는 전환점이 되었고 따라서 전반적인 역사적·전략적 틀에 대한 재개념화가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이와 관련하여 레닌은 이렇게 썼다. 유럽 전쟁은 매우 심오한 역사적 위기이자 새로운 시대의 시작을 뜻한다. 여느 위기와 마찬가지로, 이 전쟁은 뿌리 깊은 모순을 악화시키고 표면으로 드러냈다. … 제2인터내셔널은 (시작점을 1889년으로 또는 1870년으로 잡느냐에 따라) 25년 또는 45년 동안 사회주의의 영향력을 확대하고 사회주의 세력에 기초적인 조직을 제공하는 매우 중요하고 유익한 역할을 수행했지만, 역사적 소임을 다하고 소멸했다.[81] 제국주의 시대와 1914년에 시작된 위기 앞에서, 레닌은 노동자운동 내 기회주의의 역할을 재평가하게 되었다. 전쟁 이전에도 레닌은 국제 사회민주주의 내 기회주의에 맞선 투쟁을 이미 여러 차례 제기했다. 예를 들어, 1907년에 출간된 모음집 <12년간>의 서문에서 레닌은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 창당부터 시작된 당내 정치적 논쟁을 설명했다. 그가 사회민주노동당을 분리하여 독자적인 조직을 창설하게 된 것도 바로 이러한 기회주의와의 투쟁 때문이었다. 레닌은 제2인터내셔널의 다양한 지부들에도 비슷한 경향이 존재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1914년의 비극으로 달라진 것은 노동자운동 내 이러한 기회주의 경향의 중요성이었다. 레닌은 이렇게 썼다. 거대한 전쟁이 만들어 낸 위기는 모든 장막을 찢어버렸고, 관례를 쓸어버렸으며, 오랫동안 곪은 고름을 터뜨렸다. 그리고 자본가계급의 동맹으로서 기회주의의 진정한 역할을 폭로했다.[82] 다시 말해, 레닌이 볼 때 기회주의는 반혁명적 역할을 역사적으로 입증했으며, 더 이상 그때까지 그랬던 것처럼 “한 정당 내의 ‘있을 법한 목소리’”[83]로 여겨질 수 없었다. 기회주의에 맞선 투쟁의 성격이 바뀌었고, 레닌은 이로부터 정치적·조직적 결론을 도출했다. 더 이상 같은 조직 내의 여러 경향 간의 싸움으로만 볼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노동자정당으로부터 기회주의를 완전히 조직적으로 분리하는 것이 필수적으로 되었다.” 바로 이러한 이유로 레닌은 일찍이 1914년 8월 제2인터내셔널과의 결별을 주장하고 기회주의(또는 ‘사회적 쇼비니즘’과 계급화해)에 맞서는 인터내셔널의 재조직에 착수했다. 이는 짐머발트 회의(1915), 키엔탈 회의(1916)를 거쳐 제3인터내셔널의 창설(1919)로 이어졌다. 1914년의 배신으로부터 레닌이 얻은 근본적인 교훈은 바로 이러한 새로운 정치적 분리선에 입각해 정치적·전략적으로 기회주의와 구별되는 조직을 국내적·국제적으로 건설해야 할 필요성이었다. 새로운 상황에 맞게 행동하기를 거부하고 사회적 쇼비니즘과의 투쟁을 하나의 당 안에서 수행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자들, 즉 ‘중도파’(특히 가장 심각한 “배신자”였던 카우츠키)는 레닌이 볼 때 혁명조직 재건의 길에 놓인 장애물이었고, 따라서 그들과 싸워야 했다. 레닌은 이렇게 썼다. 기회주의와 혁명적 사회민주주의 사이에서 (독일 사회민주당 내 ‘중도파’처럼) 갈팡질팡하는 것과 제2인터내셔널의 파산을 은폐하거나 외교적 수사로 위장하려는 것은 노동자계급에게 최악의 행위를 하는 것이다.[84] 이론적·실천적 차원에서 1914년의 단절은 “제2인터내셔널 마르크스주의”[85]와의 단절, 그 수장인 카우츠키와의 단절, 그리고 혁명을 점진적(“진화적”)이고 거의 “자연적”(“유기적”)인 과정으로 보는, 즉 카우츠키의 표현을 빌리자면 “준비되는 게 아닌” 것으로 보는[86], 그래서 사회민주주의를 “시대에 뒤떨어진 사회주의”(또는 “수동적 급진주의”)[87]로 이끈 카우츠키의 혁명 개념과의 단절을 의미했다. 카우츠키의 개념에 따르면, 조직은 소극적이고 끈질기게 힘을 축적한 결과로만 형성된다. 레닌은 (관료화되기 이전인) 초창기 제3인터내셔널이 이론적·정치적으로 재정립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레닌은 제국주의 전쟁을 (그가 ‘제국주의 시대’라고 부른) 새로운 시대로의 진입을 알리는 신호로 여겼다. 이 시대의 정치적 시간은 더 이상 “똑같고 공허한” 것이 아니라, 단절, 균열, 그리고 “위기”로 특징지어졌다. (1905년부터 성숙되어 온 레닌의 “혁명적 위기” 개념은 이 시기에 비로소 완전한 중요성을 갖게 되었다.) 이러한 위기 속에서, 당은 상황을 유리하게 이용하고 대중의 에너지를 국가에 대항하는 방향으로 이끌기 위해 어떻게 개입해야 하는지 알아야 했다.[88] 이러한 맥락에서 당은 더 이상 계급의식의 등기부나 수동적인 세력 축적체가 아니라, 사회주의 혁명이라는 전략적 목표를 잊지 않고 어떤 상황이 발생하든 다양한 전술을 개발하고 적용하면서 근본적인 역할을 하는 진정한 전략적 주체가 되어야 했다. 리는 레닌이 1914년 이후에도 “1914년 이전의 카우츠키”를 계속 언급했다고 지적[89]하는데, 이는 1914년에 발생한 단절과 모순되지 않는다. 또한 에밀리오 알바몬테와 마티아스 마이에요가 정확하게 지적했듯이, <무엇을 할 것인가>만을 통해 레닌주의 당 개념을 “재발견”하는 것을 정당화하는 것도 아니다. 이는 단지 당의 “모델”에 관한 문제가 아니라, 당의 과제를 실행하는 데 필요한 전략적 작업에 관한 문제이다. “사회적 쇼비니즘”에 맞선 그러한 투쟁들과 분리된 방식으로는 레닌의 당 개념의 기원을 이해할 수 없다.[90] * * * 오늘날, 사회민주주의 정당들과 스탈린주의 공산당들은 신자유주의와의 결탁과 소련 붕괴의 결과로 크게 후퇴했다. 이들 노동자계급 조직들이 부르주아 국가에 점점 더 통합된 지도부의 영향력 아래로 노동자운동을 길들이는 도구로 변모한 것은 노동자운동에 심각한 결과를 초래했다. 노동자운동은 연이은 패배를 겪었으며, 특히 1968년 국제적인 혁명운동의 실패, 신자유주의 시대의 제국주의 반격과 부르주아 복고 이후 혁명적 연속성의 단절로 이어졌다. 이러한 모든 상황은 세계 노동자계급이 객관적 차원에서는 전례 없는 발전을 이루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조직력과 계급의식에 지속적인 악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최근 들어 여러 징후들이 노동자계급의 특정 부문과 대중 전반에서 주체적 재구성을 예고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가설은 2019년 이후 국제 계급투쟁이 고조되는 맥락을 주목한다. 이 국제 계급투쟁은 때때로 대중파업으로 이어지는 봉기와 반란, 부르주아 법치주의의 한계에 도전하는 대중적 급진주의, 그리고 체계적 인종차별과 지구 파괴에 맞서 청년층의 상당한 부문이 폭넓게 정치화되는 현상을 결합하고 있다. 이러한 요소들은 아직 단편적이지만 매우 중요하며, 혁명의 전망을 포기하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소중한 기회가 될 수 있다. 진정한 전투 조직이 출현할 수 있느냐는 이러한 전위 부문들과의 결합 능력에 크게 달려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혁명적 조직을 재건하기 위한 레닌주의 조직관은 엘리트주의 조직관이나 주변화된 편협한 집단을 육성하는 조직관과는 정반대임을 분명히 해야 한다. 레닌주의 조직관은 노동자계급의 가장 진보적이고 정치적으로 자각한 부문을 (혁명의 준비를 목표로 하며 투쟁하는 대중과 지속적으로 대화하는) 중앙집권적인 당으로 결집시켜 내는 것으로 요약될 수 있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이는 투쟁으로 떨쳐 일어서는 노동자들에게 (수십 년간 지배계급과의 화해 정책과 “사회적 대화”에 얽매여 있는) 노동자운동의 관료적 지도부와는 다른 독립적인 정치적·조직적 전망을 제시하는 것에서 시작된다. 원저자: 마리나 가리시 (프랑스 ‘연속혁명’ 활동가) 2021년 6월 12일에 프랑스 연속혁명(RP Dimanche)에 처음 게재됨 2021년 10월 3일 미국 레프트보이스(Left Voice)에 번역된 글을 재번역 [1] Lars Lih, Lenin Rediscovered: What Is to Be Done? in Context (Leiden: Brill, 2005). [2] 이를테면 다음을 보라: Historical Materialism 18, no. 3 (2010). [3] 1891년 독일 사회민주당의 에르푸르트 대회에서 채택된 ‘에르푸르트 강령’은 제2인터내셔널 안에서 큰 권위를 가졌는데, 리는 레닌이 이 강령에 충실했다는 뜻에서 레닌을 ‘에르푸르트인’이라고 부른다. [4] Stéphane Courtois, Lénine, l’inventeur du totalitarisme (Paris: Perrin, 2017). [5] Paul Le Blanc, Lenin and the Revolutionary Party (Chicago: Haymarket Books, 2016). [6] 이것은 ‘마르크스-레닌주의’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전형적인 예로, 스탈린의 저서 <레닌주의의 기초>가 있다. 이 책에서 스탈린은 당에 관해서 “당은 분파의 존재와 양립할 수 없는 의지의 통일체”라거나, “당은 기회주의적 요소를 제거함으로써 강해진다”고 말한다. [7] ‘볼셰비키화’는 1924년 이후 코민테른이 스탈린의 지시를 강요하고 공산당 내 비판의 권리를 극적으로 제한하는 방향으로 이동하면서 내건 구호이다. [8] Daniel Bensaïd, Stratégie et parti (Paris: Les Prairies ordinaires, 1986). [9] Le Blanc, Lenin and the Revolutionary Party. [10] Pierre Broué, Le parti bolchevique, histoire du P.C. de l’U.R.S.S. (Paris: Editions de Minuit, 1963). [11] 아주 간단히 설명하자면, 러시아에서의 자본주의 발전은 러시아 특유의 후진성과 서구 자본주의 사회의 가장 선진적인 요소들이 불균등하게 결합되었다는 데, 그리고 차르 전제정치 아래서 최소한의 정치적 자유조차 누리지 못했다는 데 그 특징이 있었다. 러시아 자본주의 발전의 이러한 특수성은 레닌주의의 전개과정을, 나아가 러시아 사회민주주의 내부의 논쟁 전반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하다. 이 문제에 대해 더 자세히 알아보려면 다음을 보라. Broué, Le parti bolchevique; Leon Trotsky, The History of the Russian Revolution (1930). [12] 러시아 자본가계급은 반자유주의적 전제정치, 대규모의 지주계급, 서구 자본가계급이라는 한 쪽의 압박과 가난한 농민 대중, 이미 상당히 집중된 신생 노동자운동이라는 다른 쪽의 압박 사이에 끼인 가운데 느리고 어렵게 발전했다. 노동자운동의 급진화를 두려워했던 자본가계급은 전제정치와 타협하는 길을 모색하게 되었다. [13] 브루에가 쓴 것처럼, 혁명가들은 “(알렉산드르 2세가 말했듯이) 오로지 아래로부터의 혁명을 피할 목적으로 위로부터 스스로를 변화시키는 체제, 비록 평화적일지라도 어떤 형태든 반대를 허용하는 것은 자살 행위라고 여기는 체제에 맞닥뜨렸기 때문에, 폭력혁명 외에는 다른 길이 남아있지 않았다.” (Broué, Le parti bolchevique). [14] Broué, Le parti bolchevique. [15] 레닌, 1899, <우리의 당면 과제>. [16] 레닌은 이어서 “이러한 통일을 이루고, 적절한 형태를 발전시키며, 편협한 지역적 고립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것, 이것이 러시아 사회민주주의자들의 당면한 가장 긴급한 과제”라고 말하면서, “지금 필요한 것은 이러한 모든 지역적 활동을 단일한 당의 활동으로 통합하는 것뿐”이라고 덧붙였다. 다른 곳에서 레닌은 “그러므로 문제는 이미 진행되고 있는 활동을 ‘아마추어적’ 방식으로 계속할 것인지, 아니면 하나의 당 활동으로 조직하여 그 모든 활동이 하나의 공통된 기관으로 온전히 반영되도록 할 것인지에 있다.”라고 썼다. (레닌, 1899, <하나의 긴급한 문제>) [17] 레닌, 1899, <우리의 당면 과제>. [18] 레닌, 1899, <우리의 당면 과제>. [19] 레닌, 1900, <파업에 대하여>. [20] 레닌, 1899, <우리의 당면 과제>. [21] 벨기에의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자 마르셀 리브만은 이 책에 대해 “혁명적 계획을 실행할 수단을 건설하고자 노력하는 마르크스주의자의 사상을 가장 일관성 있게 설명한 책”이라고 평가했다. Marcel Liebman, Leninism under Lenin (Chicago: Haymarket Books, 2016), 29; first published in French in 1973. [22] 리는 레닌이 “경제주의자”라는 꼬리표를 정치투쟁을 벌이는 담론적 장치로 사용했다고 썼다. “<무엇을 할 것인가>에서의 논쟁은 경제주의 자체에 대한 반대가 아니다. 이스크라 지도부 내 주요 경쟁자들을 공격하기 위한 수단으로 경제주의를 이용하는 논쟁이다. 레닌은 경쟁자들에게 ‘경제주의자’라는 꼬리표를 붙일 수 있다면 그들의 신뢰도를 떨어뜨릴 수 있을 것이라고 정확하게 예측했다.” (Lih, Lenin Rediscovered, 11). [23] 리브먼이 지적했듯이, “레닌의 비판은 노동자계급의 자발적인 행동보다는 그 의식, 즉 자연발생적이고 본능적이며 결과적으로 결함이 있는 의식에 더 초점을 맞추었다.” (Liebman, Leninism under Lenin, 30.) [24] 레닌, 1902, <무엇을 할 것인가>, 제2장. 마르크스가 <독일 이데올로기>에서 이미 제시한 개념을 여기서 다시 발견한다.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는 모든 시대에 지배적인 이데올로기이다. 즉, 사회에 대한 물질적 지배력을 가진 계급은 동시에 정신적 지배력을 가진 계급이다.” [25] 레닌이 말하는 전업 활동가의 개념은 당에서 급여를 지급하는 상근 활동가와 혼동해서는 안 된다. 레닌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혁명적 활동에 전념할 활동가들을 모집하고 훈련하는 것이다. [26] 레닌, 1902, <무엇을 할 것인가>, 제3장. 레닌이 카우츠키로부터 빌려 온 “오직 밖으로부터만”이라는 이 표현은 수많은 해석과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지면 관계상 자세히 다루지는 않되, 레닌이 카우츠키의 표현에 다른 의미를 부여했다는 점만 언급해 둔다. 레닌에게 있어 “오직 밖으로부터만”의 의미는 혁명운동 안에서 소부르주아 지식인의 역할을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계급의식을 발전시키기 위한 정치투쟁의 필요성을 역설하는 것이었다. 참조: Hal Draper, “The Myth of Lenin’s ‘Concept of the Party’ or What They Did to What Is to Be Done?”; Daniel Bensaïd, “Strategy and Politics: From Marx to the Third International,” Historical Materialism 28, no. 3 (2020): 230–66. [27] 레닌, 1902, <무엇을 할 것인가>, 제3장. [28] 노동자 헤게모니라는 이 개념은 나중에 그람시가 더욱 발전시켰다. [29] 아이러니하게도 두 의견 모두 같은 이스크라 경향의 성원들이 제안했다. [30] 레닌, 1904, <일보 전진, 이보 후퇴>. 마르토프가 정식화하고 대회에서 채택된 안은 다음과 같다.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 당원이란 당의 강령을 인정하고, 당을 재정적으로 지지하며, 당 조직 가운데 하나의 지도 아래 당을 정규적으로 직접 지원하는 사람이다.” 레닌의 안은 다음과 같다. “당원이란 당의 강령을 인정하고, 당을 재정적으로 지지하며, 당 조직 가운데 하나에 직접 참여하는 사람이다.” [31] 미래의 볼셰비키들은 대회 초반에는 소수였지만, 예상치 못한 사건으로 대회 말미에는 다수파(볼셰비키)가 되었다. 대회 종료 직전, 7명의 대의원이 대회를 떠났다. 그중에는 유대인 사회주의자 조직인 분트 소속 대의원 5명이 포함되어 있었는데, 이들은 러시아 당의 다수(미래의 볼셰비키 대부분을 포함)가 “연방” 체제를 통해 분트에게 완전한 자율성을 부여하지 않는 것에 불만을 품었다. 그 뒤를 이어 “경제주의자” 대표 2명도 다른 이유로 대회를 떠났다. 그래서 대회 초반의 다수가 소수파(멘셰비키)가 되고, 반대로 소수가 다수파(볼셰비키)가 되었다. [32] 제2차 당 대회 이후 몇 주 동안, 레닌의 제안에도 불구하고 마르토프가 이끄는 멘셰비키는 편집부에 더 많은 멘셰비키 인사를 포함시키지 않으면 이스크라와 협력하지 않겠다고 고집했다. 처음에는 레닌과 동맹 관계였던 플레하노프도 결국 마르토프 분파의 요구에 굴복하여 (멘셰비키에 우호적인) 기존 편집진을 다시 영입했다. 레닌은 이스크라 편집부에서 사임하기로 결정하고 ‘이스크라 편집부에 보내는 편지’와 ‘내가 이스크라 편집부에서 사임한 이유’를 포함한 여러 공개서한을 발표했다. [33] 레닌이 <일보 전진, 이보 후퇴>에서 자신에게 쏟아진 비난을 묘사한 내용이다. [34] 레닌의 인용에 따르면 악셀로드는 이렇게 말했다. “물론 우리는 가장 먼저 당의 가장 적극적인 요소의 조직, 즉 혁명가의 조직을 만들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계급의 당이기 때문에, 비록 적극적이지는 않더라도 당에 의식적으로 동조하는 사람들을 당의 대열에서 배제해서는 안 된다.” 이에 대해 레닌은 이렇게 답했다. “우리가 계급의 정당이라는 사실이 어떻게 어떤 논리로 당에 소속하는 사람과 당에 동조하는 사람을 구분할 필요가 없다는 결론을 정당화할 수 있는가? 정반대이다. 의식 수준과 활동 수준에 차이가 있기 때문에 당으로의 접근 정도 또한 구분되어야 한다. 우리는 계급의 당이므로, 계급의 거의 전체가 (그리고 전시나 내전 시에는 계급의 전체가) 우리 당의 지도 아래 행동해야 하고, 가능한 한 우리 당에 긴밀하게 동조해야 한다. 그러나 자본주의 체제 아래서 계급 전체 또는 계급의 거의 전체가 사회민주당과 전위의 의식 수준과 활동 수준까지 고양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추수주의’에 불과하다. 현명한 사회민주주의자라면 자본주의 아래서는 (미성숙한 층에게 더 수용되기 쉽고 더 초보적인) 노동조합 조직조차도 계급 전체 또는 계급의 거의 전체를 포괄할 수 없다는 사실을 결코 의심하지 않을 것이다. 전위와 전위에게 이끌리는 대중 사이의 구분을 잊고, 전위가 끊임없이 더 넓은 대중을 선진적인 수준으로 끌어올려야 하는 의무를 잊는 것은 스스로를 속이는 것이며, 우리 과제의 거대함을 외면하고 그 과제를 축소하는 것이다. 당에 소속하는 자와 동조하는 자의 차이, 자각된 능동적인 자와 소극적으로 조력하는 자 사이의 차이를 지워버리는 것이야말로 바로 그러한 눈감기, 그러한 망각이다.” (레닌, 1904, <일보 전진, 이보 후퇴>) [35] 레닌, 1904, <일보 전진, 이보 후퇴>. [36] 레닌, 1904, <일보 전진, 이보 후퇴>. [37] 룩셈부르크가 자신의 논문 <러시아 사회민주주의의 조직 문제>에서 제기한 유명한 논쟁은 레닌의 반박을 불러일으켰고, 카우츠키는 이 논문을 독일 사회민주당의 이론지인 《새시대》에 게재하기를 거부했다. 더 자세한 내용은 다음을 보라. Daniel Guérin, Rosa Luxemburg and Revolutionary Spontaneity; Le Blanc, Lenin and the Revolutionary Party. [38] 레닌은 또한 멘셰비키와 볼셰비키 간의 이러한 논쟁을 국제 사회민주주의의 맥락에서 위치지우고자 다음과 같이 썼다. “조직 문제에 있어서 기회주의의 이러한 근본적인 특징들(자율주의, 귀족적 또는 지식인적인 무정부주의, 추수주의, 지롱드주의)이 적절히 변형되어 전 세계 모든 사회민주주의 정당에서, 혁명적 진영과 기회주의 진영으로 분열되어 있는 곳이라면 어디에서나(그런 분열이 없는 곳이 있을까?), 관찰될 수 있다는 점은 매우 흥미롭다.” [39] Le Blanc, Lenin and the Revolutionary Party. [40] 그렇지 않다면 이후 러시아 사회민주당을 통일하려 한 그의 결심이나 스웨덴에서 열린 통합대회 직전 그의 입장(아래에서 논의될 내용)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겠는가? [41] Hal Draper, “The Myth of the Lenin’s ‘Concept of the Party’…” [42] “투쟁에서의 경험은 다른 상황에서 수년간의 선전 활동보다 더 빠르고 심오하게 깨달음을 준다.” (레닌, 1905, <정치파업과 모스크바의 가두투쟁>); “혁명적 시기는, 정치적 사태전개의 아찔한 속도와 정치적 충돌의 격화 덕분에, {사상을} 실천적으로 시험해 볼 기회를 제공한다.” (레닌, 1905, <혁명은 가르친다>) [43] 1905년 혁명 이후에도, 레닌은 다가올 혁명이 “그 혁명이 가져오는 경제적·사회적 내용 때문에”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이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레닌, 1907, <농업문제와 혁명세력>). 하지만 레닌은 자본가계급이 완전한 승리를 거둘 경우 자본가계급 자신에게 위협이 되기 때문에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을 성공적으로 이끌 수 없을 것이라면서, 따라서 노동자계급이 “노동자와 농민의 혁명적·민주적 독재”를 수립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레닌이 1905년 여름 <민주주의 혁명에서 사회민주주의의 두 가지 전술>에서 제시한 이 정식은 멘셰비키와 트로츠키의 개념 사이에서 중간적인 입장에 있었다. 트로츠키는 이미 1906년 <평가와 전망>에서 연속혁명 이론의 초기 버전을 제시했다. 레닌은 1917년 초, 특히 <4월 테제>를 계기로 이중권력이 혁명의 부르주아적인 첫 번째 단계와 “노동자와 빈농이 권력을 장악해야 할” 다가오는 두 번째 단계 사이의 “이행” 상황을 반영한다고 역설하면서 트로츠키가 이전부터 견지하던 견해와 수렴하게 되었다. [44] 1905년 4월에 열린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 제3차 대회에는 볼셰비키만 참여했다. 멘셰비키도 같은 해에 모임을 가졌는데, 그것은 협의회로 불렸다. [45] 레닌, 1905, <혁명은 가르친다>. [46]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 중앙위원회, 분트, 라트비아 사회민주노동당, 폴란드 사회민주당, 그리고 우크라이나 혁명당이 참여한) 사회민주주의 정당과 조직들의 협의회는 만장일치로 두마에 대한 적극적인 보이콧 전술을 채택했다. …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 중앙위원회가 채택하고 우리가 <프롤레타리아>에서 옹호했던 전술의 기본 원칙은 … 이제 하나의 유감스러운 예외를 제외하고 러시아 사회민주주의 운동 전체의 전술적 근간을 이루고 있다. 독자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그 예외는 <이스크라>와 멘셰비키이다.” (레닌, 1905, <정치적 조직화에 대한 첫 번째 평가>) [47] 이러한 정치적 우유부단함을 보면서, 레닌은 멘셰비키가 “사회민주주의 내부의 기회주의 진영”이라는 자신의 견해를 더욱 확고히 하게 되었다. [48] “상트페테르부르크와 모스크바에서 혁명적 사회민주주의 슬로건을 채택한 급진적인 학생들은 두마에 들어간 ‘입헌민주주의’ 개량주의자들의 저열함을 혐오하는 모든 민주 세력의 선봉대이다.” (레닌, 1905, <정치파업과 모스크바의 가두투쟁>) [49] 1905년 혁명 당시 독립적인 멘셰비키 활동가였던 트로츠키는 상트페테르부르크 소비에트 의장으로 선출되었다. [50] 레닌, 1905, <우리의 과제와 노동자대표 소비에트>. [51] 레닌, 1905, <우리의 과제와 노동자대표 소비에트>. “대중운동이 확산될수록 각 계급의 진정한 본질이 더욱 명확히 드러날 것이며, 당은 사건을 뒤따라 다니는 것이 아니라 계급을 이끌고 조직하는 역할을 더욱 절실히 수행해야 할 것이다. … 사회 운동의 새로운 흐름이 더욱 넓어질수록 이러한 흐름을 위해 새로운 통로를 만들 수 있는 강력한 사회민주주의 조직의 중요성은 더욱 커진다.” (레닌, 1905, <새로운 과제와 새로운 세력>) [52] 레닌, 1905, <우리의 과제와 노동자대표 소비에트>. [53] 합법 활동은 이후 러시아 사회민주주의 안에서 논쟁과 갈등의 대상이 되었다. [54] 레닌은 암기한 공식만을 거듭 되풀이하는 사람들을 조롱했다. [55] 당의 문호개방을 걱정하는 볼셰비키 간부들에게 레닌은 이렇게 답했다. “동지들, 위험을 과장하지 말자. 사회민주주의는 이미 이름을 알렸고, 하나의 흐름을 만들어 냈으며, 사회민주주의 노동자 간부들을 양성해 냈다. 이제 영웅적인 노동자계급이 투쟁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점을, 또한 명확한 목표를 가진 조직 안에서 순수한 사회민주주의 정신으로 일관되게 투쟁할 수 있는 능력을 행동으로 증명했다. 그러니, 우리 당에 속한 노동자들, 또는 내일 중앙위원회의 초청으로 입당할 노동자들 100명 중 99명이 사회민주주의자일 것이라는 사실을 의심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노동자계급은 본능적으로, 자발적으로 사회민주주의적이며, 사회민주주의가 10년 넘게 기울인 노력은 이러한 자발성을 의식으로 바꾸는 데 크게 기여했다. 동지들, 허상을 만들어내지 말라! 활력 있고 성장하는 모든 당에는 언제나 불안정, 동요, 흔들림의 요소들이 존재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이러한 요소들은 영향을 받을 수 있으며, 확고하고 견고한 핵심 사회민주주의자들의 영향력에 굴복할 것이다.” (레닌, 1905, <당의 재조직>) [56] 레닌, 1905, <당의 재조직>. [57] 1906년 볼셰비키 중앙위원회는 “비판의 자유와 행동의 통일”에 관해 이런 결의를 채택했다. (1) 당 기관지와 당 회의에서 모든 당원은 자신의 개인적인 의견과 개별적인 관점을 자유롭게 표명할 완전한 권리가 있다. (2) 공개적인 정치 집회에서 당원들은 당 대회 결정에 반하는 선동을 삼가야 한다. (3) 어떠한 당원도 그러한 집회에서 당 대회 결의에 반하는 행동을 촉구하거나, 당 대회 결정과 부합하지 않는 결의안을 제안해서는 안 된다.” 이에 대해 레닌은 “중앙위원회가 비판의 자유는 부적합하게도 너무 좁게, 행동의 통일은 부적합하게도 너무 넓게 규정했다”고 비판하면서 이렇게 제안한다. “당 강령의 원칙이라는 범위 안에서의 비판은 당 회의뿐만 아니라 공개 집회에서도 완전히 자유로워야 한다. 이러한 비판, 또는 그러한 ‘선동’(비판은 선동과 뗄 수 없기 때문)은 금지될 수 없다. 당의 정치적 행동은 통일되어야 한다. 구체적인 행동의 통일을 해치는 어떠한 ‘호소’도 공개 집회나 당 회의, 또는 당 간행물에서 용납될 수 없다. … 예를 들어보자. 당 대회는 당이 두마 선거에 참여해야 한다고 결정했다. 선거에 참여하는 것은 매우 구체적인 행동이다. 선거 기간 중에는 어느 곳의 당원도 기권을 촉구할 권리가 없다. 또한 이 기간 동안 선거 참여 결정에 대한 ‘비판’은 용납될 수 없는데, 이는 사실상 선거 캠페인의 성공을 위태롭게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선거가 공고되기 전에는, 어디에 있든 당원들은 선거 참여 결정에 대해 비판할 완전한 권리를 가진다.” (레닌, 1906, <비판의 자유와 행동의 통일>) [58] 레닌, 1906, <비판의 자유와 행동의 통일>. [59] 레닌, 1906, <모스크바 봉기의 교훈>. [60] Georg Lukács, The Thought of Lenin: The Relevance of the Revolution, [1924], Gonthier, 1972. [61] “우리 당의 우파는 현재 러시아에서 진행 중인 부르주아민주주의 혁명의 완전한 승리를 믿지 않는다. 오히려 그러한 승리를 두려워하며, 인민 앞에 그러한 승리의 슬로건을 단호하고 명확하게 제시하지 않는다. 그들은 오직 자본가계급만이 독자적으로 부르주아 혁명을 ‘만들어낼’ 수 있다거나, 오직 자본가계급만이 부르주아 혁명을 이끌어야 한다는, 마르크스주의를 저속하게 왜곡한 본질적으로 잘못된 생각에 끊임없이 사로잡혀 있다. 부르주아 혁명의 완전하고 결정적인 승리를 위한 전위 투사로서의 노동자계급의 역할을 우파 사회민주주의자들은 이해하지 못한다. … 따라서 우파 사회민주주의자들은 봉기에 대해 (완곡하게 말해서) 회의적인 태도를 보이며, 10월과 12월의 경험에 대해 그리고 당시 발전했던 투쟁의 형태들에 대해 무시하려는 경향을 보인다. 따라서 그들은 헌법적 환상에 맞서는 투쟁, 즉 진정한 혁명적 시기로 나아가려면 늘 먼저 겪게 되는 투쟁에서 우유부단하고 소극적인 태도를 보인다.” (레닌, 1906, <통합 당 대회에 관한 보고>) [62] 레닌, 1906, <통합 당 대회에 관한 보고>. [63] 당이 혁명적 기회에 대비하도록 하기 위해 레닌이 진정으로 몰두했던 것은 마르크스주의를 결정론적이고 자연주의적으로 해석했던 제2인터내셔널, 특히 카우츠키의 관점과 뚜렷이 대조된다. 카우츠키는 이렇게 말했다. “사회민주당은 혁명정당이지만, 혁명을 일으키는 정당은 아니다. 우리는 우리의 목표가 오직 혁명을 통해서만 달성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이 혁명을 일으키는 것이 우리에게 달려 있지도 않고, 우리의 적들이 그것을 막을 수도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혁명을 촉발하거나 준비하려는 어떤 의도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리고 우리가 마음대로 혁명을 일으킬 수 없기 때문에, 언제, 어떤 상황에서, 어떤 형태로 혁명이 일어날지 전혀 말할 수 없다.” (Jean Quétier, “The Question of Will in Karl Kautsky,” La Pensée, no. 380, 2014) [64] 레닌, 1905, <모스크바 사건들의 교훈>. [65] Broué, Le parti bolchevique [66] 레닌, 1910, <평론가의 노트>. [67] 레닌, 1910, <평론가의 노트>. [68] Le Blanc, Lenin and the Revolutionary Party. [69] 참조: Alexander Rabinowitch, Prelude to Revolution. The Petrograd Bolsheviks and the July 1917 Uprising (Bloomington: Indiana University Press, 1968, reprinted 1991); Broué, Le parti bolchevique; E. H. Carr, The Bolshevik Revolution, 1917–1923, vol. 1 (London: Pelican Books, 1966). [70] 레닌, 1917, <멀리서 보내는 편지>. [71] Nicolas Soukhanov, La Révolution russé (Paris: Éditions Stock, 1965) [72] 레닌, 1917, <4월 테제>. [73] 참조: Trotsky, The History of the Russian Revolution. [74] 여기에는 모이세이 우리츠키, 아돌프 요페, 아나톨리 루나차르스키, 다비드 랴자노프 등 다른 주요 볼셰비키 지도자들도 포함되었다. [75] 레닌, 1905, <농업문제에 대한 사회민주주의의 태도>. [76] 트로츠키는 당·지도부와 대중의 결합을 피스톤과 증기라는 비유를 통해 설명한 바 있다. “대중 속에서 일어나는 정치적 과정을 연구해야만, … 정당과 지도자들의 역할을 이해할 수 있다. 그들은 독립적인 요소는 아니지만, 혁명 과정에서 매우 중요한 요소이다. 지도하는 조직이 없다면 대중의 에너지는 피스톤 상자 안에 갇히지 않은 증기처럼 흩어져 버릴 것이다. 하지만 결국 세상을 움직이는 것은 피스톤이나 상자가 아니라 증기이다.” (Trotsky, The History of the Russian Revolution.) [77] Liebman, Leninism under Lenin, 147. [78] Bensaïd, Stratégie et parti. [79] 레닌, 1914, <제2인터내셔널의 실패>. [80] 이와 관련해 다음을 참조: Emilio Albamonte and Matias Maiello, Socialist Strategy and the Art of War; Stathis Kouvelakis, “Lenin as Reader of Hegel: Hypotheses for a Reading of Lenin’s Notebooks on Hegel’s The Science of Logic,” in Lenin Reloaded: Toward a Politics of Truth, ed. by Sebastian Budgen, Stathis Kouvelakis, and Slavoj Žižek (Durham, NC: Duke University Press, 2007), 164. [81] 레닌, 1914, <죽은 쇼비니즘과 살아 있는 사회주의>. [82] 레닌, 1915, <제2인터내셔널의 붕괴>. [83] 레닌, 1915, <제2인터내셔널의 붕괴>. [84] 레닌, 1914, <전쟁과 러시아 사회민주주의>. [85] 이에 대해서는 다음을 참조: Karl Korsch, Anti-Kautsky; Georg Lukács, The Thought of Lenin; Georg Lukács, History and Class Consciousness, Éditions de Minuit, 1960 [1923]; Collectif, “A New Conception of the World.” Gramsci and Marxism, Éditions sociales, 2021. [86] 이 글의 주63) 참조. [87] 안톤 판네코크가 대중파업을 둘러싸고 카우츠키와 논쟁을 벌일 때 사용했던 표현. 참조: Henri Weber, Socialism, the Western Way. [88] 덧붙여 말하자면, 국가 문제에 있어서도 레닌의 공헌은 결정적이었으며, 역시 카우츠키의 개념에 반대했다. 참조: 레닌, 1917, <국가와 혁명>; 레닌, 1918, <프롤레타리아 혁명과 배신자 카우츠키>. [89] Lars Lih, “Kautsky as Marxist data base”, Historical Materialism, 2008-2011. [90] Albamonte and Maiello, Socialist Strategy and the Art of War /* 스크롤 여백만 주고, 화면에는 안 보이게 */ .ftn-target { display: inline-block; /* 줄바꿈 안 생김 */ width: 0; height: 0; scroll-margin-top: 200px; } document.addEventListener("DOMContentLoaded", function () { // name="_ftn1", name="_ftn2", name="_ftnref1" ... 전부 대상 document.querySelectorAll('a[name^="_ftn"]').forEach(function(a) { var idValue = a.getAttribute("name"); // 이미 같은 id의 요소가 있으면 또 만들지 않음 if (!document.getElementById(idValue)) { var span = document.createElement("span"); span.id = idValue; span.className = "ftn-target"; a.parentNode.insertBefore(span, a); } }); }); /* 본문 각주 번호 + 아래쪽 각주 번호 색 지정 */ a[href^="#_ftn"] sup, a[href^="#_ftnref"] sup { color: #BF202D; } /* 밑줄이 보기 싫으면 */ a[href^="#_ftn"], a[href^="#_ftnref"] { text-decoration: none; } /* 마우스 올렸을 때 살짝만 강조하고 싶으면 (선택) */ a[href^="#_ftn"]:hover, a[href^="#_ftnref"]:hover { text-decoration: underline; } /* 페이지 전체가 오른쪽으로 넘치지 않게 */ html, body { max-width: 100%; overflow-x: hidden; } /* 본문 영역 폭 강제 고정 + 긴 단어/문장도 줄바꿈 */ #bo_v_con, .bo_v_con, .cke_editable, article { max-width: 100%; overflow-wrap: break-word; word-wrap: break-word; /* 구형 브라우저용 */ } /* 워드에서 붙은 이미지/표가 화면 밖으로 안 나가게 */ #bo_v_con img, #bo_v_con table, .bo_v_con img, .bo_v_con table, .cke_editable img, .cke_editable table, article img, article table { max-width: 100% !important; height: auto; } /* 워드가 p, span에 폭을 박아놓은 경우 강제로 해제 */ #bo_v_con p[style*="width"], #bo_v_con span[style*="width"], .bo_v_con p[style*="width"], .bo_v_con span[style*="width"], .cke_editable p[style*="width"], .cke_editable span[style*="width"], article p[style*="width"], article span[style*="width"] { width: auto !important; max-width: 100% !important; } /* 기본 blockquote 스타일 */ blockquote { border-left: 4px solid #c0392b; /* 사이트 분위기와 맞는 붉은 계열 */ padding: 12px 18px; margin: 20px 0; background: #fafafa; font-style: normal; color: #333; line-height: 1.6; } /* blockquote 안의 p 태그 정렬 */ blockquote p { margin: 0 0 10px 0; text-align: justify; } /* 마지막 p 태그 여백 제거 */ blockquote p:last-child { margin-bottom: 0; } /* 본문 안 링크 스타일 */ #gpt-article a { color: #cc0000 !important; text-decoration: none !important; } #gpt-article a:hover { color: #990000 !important; } // https://로 시작하는 링크만 target="_blank" 적용 document.addEventListener("DOMContentLoaded", function () { const links = document.querySelectorAll('#gpt-article a[href^="https://"]'); links.forEach(link => { link.setAttribute("target", "_blank"); link.setAttribute("rel", "noopener noreferrer"); }); }); -
[번역] 퀴어해방은 어디를 향하는가올해[2020년]는 스톤월 항쟁 50주년이 되는 해다. 기업들은 이때를 틈타 대대적인 핑크워싱에 나섰다. 무지개 운동화, 머그, 티셔츠가 쏟아졌다. 자긍심의 달 기간 동안 뉴욕 경찰은 뱅크 오브 아메리카, 웰스 파고를 비롯한 거대 기업들과 나란히 공식 프라이드 퍼레이드에서 행진했다. 바로 그 같은 달에, 레일린 폴란코(Layleen Polanco)는 라이커스 섬의 교도소 독방에서 사망했다. 오늘날 LGBTQ+ 운동이 품고 있는 모순을 이보다 더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사례는 없을 것이다. 무지개로 치장한 경찰이 행진하는 동안, 유색인 트랜스 여성 활동가는 경찰에게 구금된 채 목숨을 잃었다. 주변화로부터 자본주의와의 동화(Assimilation)로 이토록 빠르게 이행한 집단은 역사상 유례가 없다. 불과 50년 만에, 우리를 구타하고 강간하고 체포하던 경찰이 우리의 퍼레이드에서 함께 행진하게 되었다. LGBTQ+ 운동의 태동기부터 동화 문제는 분열의 중심이었다. 우리는 기존 체제에 편입되기를 원하는가, 아니면 체제 자체를 바꾸기를 원하는가? 바로 이 지점에서, 혁명적 사회주의자들은 자본주의를 타도하고 모든 형태의 억압에 맞서 싸우는 전략을 제시함으로써 중요한 기여를 할 수 있다. 동화주의와 호모파일 운동 동화주의 조직들은 “단일 이슈” 중심이라는 성격을 지닌다. 그들은 LGBTQ+ 의제를 가장 협소한 틀에서 정의하고, 따라서 트랜스젠더, 유색 인종, 노동 계급을 배제하는 결과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다. 이 단체들은 로비 같은 전술을 택하고, 퀴어니스의 여러 측면 가운데 성적으로 가장 전복적인 부분들을 순화하려 한다. 민주당 정치인들과 거액 후원자들의 눈 밖에 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그 밑바탕에 깔린 이데올로기는 이렇다. 미국이 불완전하긴 하지만, 사법부와 의회 같은 기존 제도가 그것을 완성할 수단을 제공한다는 것이다. 정의란 사다리와 같아서, 가로대를 하나씩 올라가듯 권리를 축적해 나가면 결국 평등에 도달할 수 있다는 논리다. 현대 퀴어 운동의 역사는 스톤월에서 시작된 것처럼 그려지는 경우가 종종 있고, 전체 운동이 오로지 급진적 과거에 뿌리를 두고 있는 것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이것은 LGBTQ+ 역사에 대한 오독이다. 게이 운동의 일부는 처음부터 심각하게 동화주의적이었다. 미국 최초의 퀴어 운동 단체 중 하나인 매터신 협회(Mattachine Society)는 1950년에 설립되었다. 이들은 섹스라는 단어를 언급하지 않기 위해 “호모파일(homophile) 운동”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하지만 이런 단체는 매터신만이 아니었다. 특히 주목할 만한 사례는 빌리티스의 딸들(Daughters of Bilitis)인데, 이들은 매터신 협회 창립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레즈비언 조직화에 나섰다. 호모파일 조직들은 사회의 끔찍한 억압을 배경으로 등장했다. 1953년 미국 대통령 아이젠하워는 “성도착”을 공직 해임 사유로 규정하는 행정 명령을 발동했고, “자색 공포(Lavender Scare)”로 알려진 이 시기에 수백 명이 해고되었다. 단 한 개 주를 제외한 모든 주가 동성 간 성행위를 불법으로 명시했다. 클럽 단속이 일상적으로 이루어졌고, 경찰은 LGBTQ+ 당사자들을 구타하고 체포했으며 이들의 이름을 지역 신문에 공개하기도 했다. 1950년대의 초기 LGBTQ+ 조직화는 자색 공포에 더해 적색 공포라는 맥락 위에서 이루어지기도 했는데, 당시에 동성애와 공산주의는 빈번하게 동일시되었다. “성도착자”는 의지가 박약하고 쉽게 타락하며, 따라서 “공산주의의 위협”에 굴복할 수 있다는 논리였다. 매터신 협회는 전직 공산당원이 설립했으며, 게이들에게 소속감을 부여하고 “규율 있고, 도덕적이며, 사회적으로 책임감 있는 동성애 윤리를 발전”[1]시키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1950년대 및 60년대 초의 억압적 환경 속에서 매터신 협회는 많은 게이 남성과 소수 레즈비언에게 생명줄 같은 존재였고, 정기 간행물 『매터신 리뷰』를 통해 전국적으로 수천 명에게 다가갔다. 낸 알라미야 보이드가 『무엇이든 허용되는 도시』에서 설명했듯, 매터신은 회원들을 선량하고 품행 바른 미국 시민으로 묘사하려고 애썼다. 매터신 지도부는 “매터신 구성원들이 젠더 경계 위반과 동성애를 뒤섞는 관행과는 거리가 멀다고 인식시키고자 했다. 그리고 유색 인종 커뮤니티의 행동주의 및 정치 투쟁과도 거리를 두었다.”[2] 그들은 아메리칸 드림에 대한 신뢰를 북돋았고, 『매터신 리뷰』에 실린 한 편지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우리가 동성애자라고 해서 성조기가 늘어선 광경을 보고 느끼는 자부심과 명예가 남들보다 덜하지는 않습니다.”[3] 매터신은 1953년을 기점으로 뚜렷하게 우경화되었다. 창립자 중 다수가 전직 공산당원이었음에도 조직의 한 분파가 적극적인 반공주의 노선을 취하려 한 것이다. 결국 내부 투쟁을 거쳐 다섯 명의 창립자 중 세 명이 사임했으며, 이들 가운데는 단체의 지도자 해리 헤이(Harry Hay)도 있었다. 1956년에 이르러 매터신 협회는“공산주의자 및 공산주의 활동에 변함없이 반대하며, 그 어떤 공산주의 단체나 위장 조직도 자신들의 단체 명칭을 이용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을 것”[4]이라고 선언했다. 매터신 협회가 반공주의를 표방한 한편, 코민테른의 지령을 따르던 미국 공산당은 반LGBTQ+ 노선을 취했다. 1918년 볼셰비키는 “동성애”를 비범죄화했지만 1933년 스탈린은 이를 다시 범죄화했다. 이는 10월 혁명의 해방 이념에 대한 엄청난 배신이었으며, 전 세계 공산당들이 이 같은 배신을 저질렀다. 공산당의 동성애 혐오 및 트랜스 혐오 정책이야말로, 헤이가 한때 사회주의 조직 활동에 참여했지만 그 활동을 이후 자신이 구축한 게이 운동과 연결시키지 못한 이유였다. 스톤월과 급진적 퀴어들 “마치 댐이 무너지듯, 스톤월은 소수의 남녀가 의식적으로 조직화하여 20년간 조금씩 이룬 진전이 자발적 분노의 물결로 분출한 폭발이었다.” 셰리 울프는 『섹슈얼리티와 사회주의』에서 이렇게 적는다.[5] 스톤월은 블랙 파워, 반전, 페미니즘 운동으로 점철된 급진적 시대의 일부였다. 스톤월은 1968년의 전 지구적 폭발, 즉 프랑스의 5월, 멕시코 학생 운동, 구정 대공세, 스탈린주의 관료 체제에 맞선 대중 투쟁 이후 1년 만에 일어났다. 이런 종류의 항쟁이 스톤월 뿐이었던 것은 아니다. 1959년에는 로스앤젤레스의 쿠퍼 도넛에서 폭동이 있었고, 1966년에는 샌프란시스코에서 컴프턴스 카페테리아 폭동이 일어났다. 그러나 스톤월이 새로운 점은 항쟁 이후에 이루어진 조직화의 성격이었다. 스톤월은 매터신 협회와 정반대였다. 스톤월은 분노했고, 유색 인종과 트랜스젠더의 것이었으며, 일탈적이었고, 폭동이었다. 스톤월 참전자 짐 포랫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그들(호모파일 운동)에게 악몽이었다. 그들은 착하고 받아들일 만하고 현상 유지에 협조하는 미국인이 되기로 작정한 사람들이었고, 우리는 아니었다. 우리는 받아들일 만한 존재가 되는 데 전혀 관심이 없었다.”[6] 실제로 스톤월 폭동 첫날 밤 이후 매터신 협외의 반응은 스톤월 인 앞에서 침착함과 차분함을 촉구하는 글을 써 붙이는 것이었다. 게이 해방 전선(Gay Liberation Front, GLF)은 스톤월 항쟁에서 탄생한 가장 중요한 단체였다. GLF의 신문 『더 랫(The Rat)』은 이 운동의 정신을 다음과 같이 응축했다. “우리는 모든 사람의 완전한 성적 해방은 기존 사회 제도가 폐지되지 않는 한 실현될 수 없다는 자각 속에서 결성된 혁명적 동성애자 남녀 집단이다. 우리는 성적 역할과 우리 본성에 대한 정의를 강요하려는 사회의 시도를 거부한다.”[7] 그러나 혁명이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 합의되지는 않았다. 앨런 시어스가 「퀴어 반자본주의」에서 주장하듯, 새로운 운동은 가시성, 전투성, 그리고 규범적 성 역할 및 젠더 역할에 대한 투쟁을 강조했다. 시어스에 따르면 이 시기는 “에로스의 영역을 해방의 장으로 상정한” “성적 유토피아주의”의 시대, 규범성 그 자체가 적수인 시대였다.[8] 새로운 퀴어 운동의 정치적 초점이 “면전에 들이대는” 섹슈얼리티의 급진성이었던 한편, 이 운동의 일부 요소들은 교차적이고 반제국주의적이기도 했다. 베트남의 민족 해방 전선을 떠올리게 하는 게이 해방 전선의 이름 자체가 반제국주의를 향한 명백한 신호였다. GLF는 선언했다. “우리는 모든 피억압자와 우리를 동일시한다. 베트남의 투쟁, 제3세계, 흑인, 노동자… 이 썩어빠지고 더럽고 비열하고 망할 자본주의 음모에 억압받는 모든 이들과.”[9] 마찬가지로 GLF는 특히 흑표당과의 관계를 모색하여 지도부와 만남을 갖고 흑표당의 1970년 대회에 참석했다. 그러나 GLF의 전망에서 조직된 노동 계급은 대체로 부재했다. GLF에게 동화주의에 맞서 싸운다는 것은 자본의 상층부에서 이루어지는 대의 정치에 맞서 싸운다는 것을 의미했다. 『컴 아웃』 신문은 이렇게 썼다. “우리는 담쟁이로 덮인 별장과 대기업 일자리라는 무익한 ‘아메리칸 드림’을 좇는 게이 부르주아지가 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미국 사회의 어떤 영역에서든 동성애자가 배제되는 것 또한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10] 일부는 명시적으로 반자본주의적이기까지 했다. 시카고 GLF의 회원이었던 한 사람은 이 운동이 “미국 군산 복합체가 지배하는 세계 자본주의는 개혁하거나 개선할 대상이 아니라, 파괴한 다음 평등과 정의의 체제로 대체해야 할 대상이라는 정치적 관점을 갖고 있었다”[11]고 증언한다. 그러나 GLF는 오래가지 못했다. 모든 이에게 열려 있고 합의제로 운영된 회의는 통제 불가능했다. 퀴어라는 사실이 참석자들 간의 정치적 합의를 보장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혁명이 목표라면,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리고 적은 누구인가? 일부 페미니스트들이 주장하기 시작한 것처럼 남성이 적인가? 아니면 일부 급진적 퀴어들이 말하기 시작한 것처럼 이성애자가 적인가? 아니면 자본주의 국가인가? GLF는 이 질문들에 대해 각기 다른 입장을 취한 단체들로 분열했는데, ‘급진적 레즈비언들(Radicalesbians)’, ‘거리의 복장 도착자 행동 혁명가들(Street Transvestites Action Revolutionaries), ‘게이 활동가 동맹(Gay Activist Alliance)’ 등이 그것이다. 이 단체들은 혁명적 수사를 표방했지만 정치적 사유의 상당 부분에서 자본주의 국가 개념을 결여했으며, 이들이 구상한 “혁명”은 주로 문화적인 것이었다. 이들은 “게이 파워”나 레즈비언 분리주의를 유효한 전략으로 간주했다. 많은 이들이 “이성애적 가치”와 “이성애 사회”를 적으로 삼았는데, 이는 애초에 사회를 이성애 및 시스젠더 규범성 중심으로 조직한 자본가 계급과 국가로부터는 분리된 입장이었다. 호모파일 운동 태동기의 스탈린주의처럼 피델 카스트로 또한 사회주의와 새로운 퀴어 운동이 거리를 두게 만들었다. 1965년 카스트로는 LGBTQ+ 당사자들을 “생산 증대 부대”로 알려진 강제 수용소에 수감했다. 미국 좌파의 상당수는 카스트로 정부에 무조건적 지지를 보냈는데, 그들은 공산당과 쿠바 연대 여단들처럼“동성애”가 부르주아적이라고 주장하거나, 쿠바에서 LGBTQ+의 권리를 위해 싸우는 것이 “문화 제국주의”라고 주장했다. 물론 미국의 혁명가들은 미 제국주의의 공격으로부터 쿠바 혁명을 방어해야 한다. 그러나 그것이 LGBTQ+ 당사자들을 강제 수용소에 가둔 비민주적 관료제에 대한 지지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LGBTQ+ 운동의 비영리 산업화 급진적 퀴어 조직 운동이 잠잠해지는 것처럼 보이던 바로 그때 에이즈 위기가 시작되었다. 정부가 위기를 인정하지 않는 동안 에이즈는 퀴어 커뮤니티를 초토화했고, 기독교 우파는 에이즈가 동성애자 죄인들을 쓸어버리기 위해 찾아온 게이 질병이라고 떠들었다. 이 같은 맥락 위에서 신자유주의 시대의 개막과 함께 급진적 퀴어 조직화가 다시 부상했다. 1980년대 후반 액트업(ACT UP)은 정부의 에이즈 무대응, 그리고 에이즈 위기로부터 이윤을 취하는 기업의 탐욕에 맞선 직접 행동에 집중했다. 이후 퀴어 운동은 “주변의 모든 것이 후퇴하는 와중에도 어떻게든 전진했다.”[12] 신자유주의가 진군하는 가운데, LGBTQ+ 당사자들의 행동주의, 자본 앞의 형식적 평등이라는 이데올로기, 핑크워싱이 약속하는 이윤이 함께 작용하여 게이와 레즈비언에 대한 가장 차별적인 법률 일부가 폐지되었다. 2003년이 되어서야 연방 차원에서 폐지된 “남색” 금지법 같은 것들 말이다. 2015년 LGBTQ+ 당사자들은 미국 전역에서 결혼할 권리를 쟁취했다. 지금은 커밍아웃한 게이 남성이 민주당 대선 경선의 유력 후보다. 자본주의는 몇몇 게이와 레즈비언을 권력 상층부에 받아들이고 게이·레즈비언 섹슈얼리티를 상품화할 만큼 유연한 체제임을 스스로 입증하는 동시에 노동 계급 퀴어와 유색 인종 퀴어를 주변화했다. 실제로 LGBTQ+ 당사자들은 단일한 집단이 아니며, 우리 중 일부가 더 많은 권리를 획득할수록 우리 사이의 인종적, 계급적 차이는 더욱 선명해진다. 지난 30년간 두 가지 중대한 변화가 일어났다. 하나는 정부의 공공 복지가 대폭 삭감되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게이와 레즈비언 정체성이 일정 정도 정상화되었다는 것이다. 그 결과 LGBTQ+ 운동은 거의 완전히 비영리 산업 복합체 안에 편입되었다. 이는 비영리 단체가 전반적으로 급증한 현상의 일부인데, 1965년 3천 개에 불과했던 비영리 단체는 오늘날 150만 개가 되었다. 비영리 산업 복합체는 오늘날 동화 논쟁이 벌어지는 아주 협소한 무대다. 특히 휴먼 라이츠 캠페인(Human Rights Campaign, HRC)이라는 비영리 단체가 호모파일 운동의 유산을 계승하고 있다. 다른 일부 비영리 단체는 스톤월의 유산을 이어가려 하지만, 가장 급진적인 단체들조차 끊임없는 보수적 압력 아래 놓여 있다. 휴먼 라이츠 캠페인 HRC는 매터신 협회가 감히 꿈도 꾸지 못했을 만큼 훨씬 덜 적대적인 환경에서, 훨씬 더 많은 자원을 가지고 조직 활동을 벌인다. 연간 수입이 4,500만 달러를 넘으며, 시티뱅크와 애플 같은 기업 후원자를 두고 있다. 그럼에도 HRC의 목표는 과거 호모파일 운동의 목표와 놀랄 만큼 유사하다. 바로 자본주의적·가부장적 체제로 동화되는 것이다. 매터신 협회처럼 HRC는 가장 협소한 의제에 집중한다. 그들은 동성혼을 쟁취하기 위해 싸우고 LGBTQ+ 군복무 금지에 반대한다. 트랜스젠더는 일관되게 논의에서 배제되는데, HRC가 트랜스젠더를 포함하지 않는 고용 비차별 법안을 지지한 것이 단적인 예다. HRC는 게이와 레즈비언도 존중받을 만한 애국자임을 보여 주려 한다. HRC는 민주당 선거 운동을 하고 미국에서 가장 사악한 자본가들과 밀착한다. 2017년에는 아마존 노동자들이 최저 수준의 임금을 받으면서 비인간적 조건에서 일하고 있는데 제프 베이조스에게 “평등상”을 수여하기까지 했다. 호모파일 운동 시대의 자본가들과 달리 지금 미국 자본가 계급의 상당수는 정말로 게이 갈라에 참석하고 싶어 한다. 사비를 털어 조직 활동에 쏟아부었던 호모파일 운동 지도자들과 달리 HRC CEO는 연봉이 50만 달러에 달한다. HRC는 모든 권력과 자원을 동원하여 주류 LGBTQ+ 운동의 의제를 통제하며, 민주당 선거 운동을 통해 달성할 수 있는 협소한 요구 사항들로 운동을 제한한다. 퀴어 해방 비영리 단체 LGBTQ+ 관련 비영리 단체가 모두 HRC 같은 유형은 아니다. 일부 단체는 훨씬 더 교차적이고 급진적인 정치를 표방한다. 예를 들면 실비아 리베라 법률 프로젝트(Sylvia Rivera Law Project), 오드리 로드 프로젝트(Audre Lorde Project), 경제 정의를 위한 퀴어들(Queers for Economic Justice) 같은 곳들이다. 어떤 이들은 이 단체들을 퀴어 해방 조직이라고 불렀다. 이 단체들은 스톤월의 꿈이 신자유주의 시대에 발현된 것이다. 스톤월 시대의 조직들과 마찬가지로 이들에게는 해방을 위한 응집력 있는 전략이 부재하며, 무엇보다도 이들은 기금 확보를 위한 끝없는 경쟁 속에 갇혀 있다. 이 단체들도 교도소 산업 복합체, 이민 체제, 신자유주의 하에서 후퇴하는 공공 복지 문제 등을 포괄하는 퀴어 해방 전망을 내놓았다는 점에서는 공로가 있다. 스톤월 시대의 조직들처럼 일부는 자본주의 비판도 제시한다. 이들은 딘 스페이드(Dean Spade)가 “상향식 사회 정의”라고 부른 것, 말하자면 조직이 가장 주변화된 이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문제를 가장 먼저 다루면 그 위의 모든 계층에도 이익이 될 것이라는 입장을 지향한다. 이 비영리 단체들은 사람들에게 해방된 미래를 상상해 보라고 하지만, 전략 측면에서 이들이 제시하는 것은 개혁을 위한 계획뿐이다. GLF 구성원들처럼 이 단체들에서 활동하는 진보적 퀴어들은 자신들의 목표에 대해서도, 목표를 달성할 전략에 대해서도 합의하지 못한다. 문화적 변화가 목표인가? 아니면 공공 복지의 확대인가? 명확한 정치적 합의가 결여된 상황에서 비영리 단체에 가해지는 보수적 압력을 견디기는 더욱 어렵다. 이 비영리 단체 중 상당수는 퀴어 커뮤니티에 중요하고 절실한 서비스를 제공한다. 하지만 『게이 주식회사(Gay Inc.)』에서 멀 빔(Myrl Beam)이 주장하듯, 이런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한 기금을 확보할 필요성 자체가 물질적·보수적 압력이 된다. 비영리 단체 활동가 로건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보조금을 받게 해 준 바로 그 제도를 전복하는 것이 곧 우리의 사명이 된다면, 문제는 어려워질 수밖에 없다. 우리가 사용하는 도구는 우리가 해체하려는 구조를 유지하기 위해 설계된 것이기 때문이다.”[13] 비영리 단체에서 일하는 많은 사람들이 이 사실을 알고 있다. 좌파적 의도를 가지고 있더라도, 비영리 단체는 자본주의를 끝내지 않은 채, 착취와 억압으로부터 자유로운 사회를 실제로 만들어 내지 않은 채, 영원히 서비스만 제공하면서 존속할 수 있다. 이것이 퀴어 해방 비영리 단체들의 문제다. 이들은 결코 퀴어 해방을 실현하지 못할 것이다. 소수의 이윤을 위해 다수를 착취하는 사회에서 퀴어 해방은 불가능하다. 이것이 우리의 권리가 사다리가 아닌 이유이며, 우리의 권리가 해방을 향해 축적될 수 없는 이유이며, 교차적 착취와 무지개 CEO가 우리를 해방시킬 수 없는 이유이다. 다수의 퀴어에게, 즉 노동 계급에 속하며 그중 상당수는 유색 인종인 퀴어에게, 게이 대통령이 탄생한들 생계 때문에 허덕이는 현실은 바뀌지 않기 때문이다. 퀴어 섹슈얼리티 전유와 상품화에서 명백히 드러나듯, 우리의 섹슈얼리티 그 자체가 해방의 장이 아닌 이유이기도 하다. 하지만 최하층을 위한 개혁 및 복지를 쟁취하는 투쟁과 교차성만으로는 퀴어 해방을 이루기에 충분하지 않다. 자본주의 비판만으로는 자본주의로부터 해방되기에 충분하지 않다. 퀴어 해방은 이윤을 위해서가 아니라 사람을 위해서 건설된 사회, 우리의 모든 물질적 필요가 충족되는 사회, 더 나아가 자유 시간을 보장하며 우리의 창조적 잠재력을 해방하는 사회, 바로 공산주의 사회에서만 가능하다. 사회주의 혁명을 위한 투쟁 우리의 억압과 착취는 문화만 바꾸어서는 끝낼 수 없다. 우리의 억압은 교도소, 경찰, 학교 같은 자본주의 국가의 제도들에, 그리고 국가 안에서 기독교가 수행하는 역할에 뿌리박고 있다. 그것은 주로 여성으로부터 무급 재생산 노동을 추출하는 데 필수적인 젠더 역할에, 그리고 직장 안팎의 총체적 소외에 뿌리박고 있다. 그것은 성적으로 비참한 사회에, 말하자면 직장에서 몸과 마음이 닳고 닳아 집에 돌아오면 그림자만 남는 그런 사회에 뿌리박고 있다. 개혁으로 이 상황을 벗어날 수는 없다. 자본가 계급의 자산을 몰수하는 혁명, 우리의 젠더와 섹슈얼리티와 인류 전체를 해방하는 대규모 문화적 변혁의 물질적 토대를 창출하는 혁명이 필요하다. 이것이 공산주의의 목표다. 자본주의 국가가 무적으로 보일지 모르지만, 노동 계급은 강하다. 우리는 모든 것을 생산하고 자본주의 전체를 작동시킨다. 그러므로 노동 계급은 혁명의 원동력이다. 전체 체제를 무릎 꿇리고, 집단적·민주적 통제 하에 체제를 다시 가동시킬 수 있는 유일한 힘이다. 오늘날 노동 계급은 세계 인구의 다수를 차지하며, 유색 인종, 장애인, 퀴어, 여성, 그리고 물론 백인 시스젠더 남성들로 구성되어 있다. 그러나 “대자적” 노동 계급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노동 계급이 혁명을 이끌기 위해서는 피트 부티지지 같은 자본주의의 토큰이 아니라 자신이야말로 LGBTQ+ 당사자들에 대한 억압을 포함한 사회의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음을 보여 주어야 한다. 노동 계급과 모든 피억압 집단의 동맹이야말로 사회주의 혁명의 필수적 토대다. 다행히 오늘날 점점 더 많은 젊은이들이 사회주의자이거나 사회주의에 관심을 갖고 있다. 이들은 지금의 체제가 우리에게 비참함만 안겨 준다는 사실을 안다. 하지만 우리의 목표가 사회주의라면, 그것도 스탈린이나 카스트로의 동성애 혐오적이고 트랜스 혐오적인 관료제와는 전혀 다른 사회주의라면, 우리는 누구로부터 혹은 어떤 사례로부터 배울 수 있는가? 잔혹한 동성애 혐오라는 스탈린주의의 유산에 맞서는 사회주의의 역사가 존재한다. 이미 1895년에 공산주의자들은 오스카 와일드를 옹호하고 동성애 합법화를 지지한 유일한 집단이었다. 소비에트 연방에서 볼셰비키는 1919년에 이를 실행했다. 그러나 소련이 관료화되면서 젠더와 섹슈얼리티에 관련된 성과를 포함하여 러시아 혁명의 승리들이 점점 더 많이 뒷걸음질했다. 이 시기에 레온 트로츠키와 좌익 반대파(Left Opposition)가 이 반혁명에 맞서 싸웠다. 그 결과 스탈린주의에 대한 모든 반대는 “트로츠키주의”로 알려지게 되었고, 세계 곳곳의 좌익 반대파는 스탈린주의자들에게 살해당했다. 트로츠키도 1940년에 살해당했다. 트로츠키주의는 마르크스와 볼셰비키 혁명의 해방적 사상을 계승하며, 자본주의를 타도하고 억압 없는 사회를 건설하기 위한 이론과 전략을 제시한다. 물론 트로츠키주의의 기치를 내세운 모든 조직이 피억압 집단에 대해 올바른 정치를 견지한 것은 아니지만, 트로츠키주의라는 틀은 분명히 해방을 위한 이론과 전략을 조직할 수 있다. 트로츠키는 가장 억압받는 이들을 조직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이행 강령』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기회주의 조직들은 본성상 노동 계급의 상층부에 관심을 집중하며, 따라서 청년과 여성 노동자를 무시한다. 그러나 자본주의의 쇠퇴는 임금 노동자이자 가정주부인 여성에게 가장 강력한 타격을 가한다. 제4인터내셔널의 각 부문은 노동 계급의 가장 착취받는 층에게서, 즉 여성 노동자들에게서 지지 기반을 찾아야 한다.” 개혁만을 추구하거나 부스러기를 얻기 위해 자본가들과 협상한다면, 협상의 대가로서 가장 억압받는 이들이 필연적으로 팔려 나가며, 국제주의가 필연적으로 팔려 나간다. 이것이 동화주의적이고 개량주의적인 정치의 결론이다. 공산주의라는 미래 공산주의가 정확히 어떤 모습일지는 아무도 모른다. 우리가 공산주의 사회에 관해서 말할 수 있는 것은 착취와 국경과 감옥을 종식시키는 사회, 레일린 폴란코가 잘 살 수 있었을 사회라는 것뿐이다. 공산주의 하에서 우리는 노동 착취와 직장에서의 소외를 끝내고 막대한 자유 시간을 얻게 될 것이다. 헤르베르트 마르쿠제는 『에로스와 문명』에서 이런 미래를 구상했다. “필요 노동에 전용되어야 하는 본능적 에너지의 양은 (노동 자체가 완전히 기계화되고 합리화되어) 매우 적어질 것이므로, 외부적 힘에 의해 더 이상 유지되지 않는 광범위한 억압적 제약과 변형이 붕괴할 것이다. … 생의 본능인 에로스가 전례 없는 수준으로 해방될 것이다.” 마찬가지로 공산주의 사회에서 가사 노동은 사회화될 것이다. 양육, 요리, 모든 재생산 노동을 공동체가 담당할 것이며, 개인이 수행하더라도 그것은 필요에 의한 노동이 아니라 사랑에 의한 노동이 될 것이다. 볼셰비키와 몇몇 초기 마르크스주의자들이 구상했듯이 사회 구성 단위로서의 (이성애 가부장적) 가족은 사라질 것이다. 공산주의 사회에서 젠더 역할의 물질적 토대는 사라질 것이며, 그 이후에 무엇이 올지는 아무도 정확히 알 수 없다. 마르크스가 『독일 이데올로기』에서 주장하듯이 공산주의는 “오늘은 이것을 하고 내일은 저것을 하는 것, 아침에는 사냥하고 오후에는 낚시하고 저녁에는 소를 돌보고 저녁 식사 후에는 비평을 쓰지만, 사냥꾼이나 어부나 목동이나 비평가가 되지는 않는 것”이 가능한 사회를 약속한다. 이는 젠더와 섹슈얼리티에도 적용할 수 있을 것이다. 공산주의는 우리가 원하는 만큼의 자유와 유연성을 가지고 우리의 젠더와 섹슈얼리티를 살아갈 자유를 줄 것이다. 글쓴이: Tatiana Cozzarelli 역자: 강성윤 2020년 4월 19일 Left Voice에 발행된 기사를 번역함 [1] Van Grosse, The Movement of the New Left 1950-1975 (New York: St. Martin’s Press, 2005), 40. [2] Nan Alamilla Boyd, Wide Open Town (Berkeley: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2003), 179.︎ [3] “An Open Letter to Senator Dirksen,” Mattachine Review, no. 1 (January/February 1955). [4] “Aims and Principles,” Mattachine Review, no. 2, special issue (January 1956). [5] Sherry Wolf, Sexuality and Socialism (Chicago: Haymarket Books, 2009). [6] Martin Duberman, Stonewall (New York: Plume, 1994), 229. [7] Wolf, Sexuality and Socialism, 129. [8] Alan Sears, “Queer Anti-capitalism: What’s Left of Lesbian and Gay Liberation?,” Science & Society, vol. 69, no. 1 (January 2005), 91-112. [9] Wolf, Sexuality and Socialism, 129. [10] “Editorial 1.” Come Out! Selections from the Radial Gay Liberation Newspaper (New York: Times Change Press, 1970). [11] Fred Eggan, “Dykes and Fags Want Everything: Dreaming with the Gay Liberation Front” in That’s Revolting! Queer Strategies for Resisting Assimilation (Berkley: Publishers Group Press: 2004). [12] Elizabeth Wilson, “Is Transgression Transgressive?” in Activating Theory, ed. J. Bristow and A.R. Wilson (London: Lawrence and Wishart, 1993): 107-117. [13] Myrl Beam, Gay Inc: The Non-Profitization of Queer Politics (Minneapolis: University of Minnesota Press, 2018). /* 스크롤 여백만 주고, 화면에는 안 보이게 */ .ftn-target { display: inline-block; /* 줄바꿈 안 생김 */ width: 0; height: 0; scroll-margin-top: 200px; } document.addEventListener("DOMContentLoaded", function () { // name="_ftn1", name="_ftn2", name="_ftnref1" ... 전부 대상 document.querySelectorAll('a[name^="_ftn"]').forEach(function(a) { var idValue = a.getAttribute("name"); // 이미 같은 id의 요소가 있으면 또 만들지 않음 if (!document.getElementById(idValue)) { var span = document.createElement("span"); span.id = idValue; span.className = "ftn-target"; a.parentNode.insertBefore(span, a); } }); }); /* 본문 각주 번호 + 아래쪽 각주 번호 색 지정 */ a[href^="#_ftn"] sup, a[href^="#_ftnref"] sup { color: #BF202D; } /* 밑줄이 보기 싫으면 */ a[href^="#_ftn"], a[href^="#_ftnref"] { text-decoration: none; } /* 마우스 올렸을 때 살짝만 강조하고 싶으면 (선택) */ a[href^="#_ftn"]:hover, a[href^="#_ftnref"]:hover { text-decoration: underline; } /* 페이지 전체가 오른쪽으로 넘치지 않게 */ html, body { max-width: 100%; overflow-x: hidden; } /* 본문 영역 폭 강제 고정 + 긴 단어/문장도 줄바꿈 */ #bo_v_con, .bo_v_con, .cke_editable, article { max-width: 100%; overflow-wrap: break-word; word-wrap: break-word; /* 구형 브라우저용 */ } /* 워드에서 붙은 이미지/표가 화면 밖으로 안 나가게 */ #bo_v_con img, #bo_v_con table, .bo_v_con img, .bo_v_con table, .cke_editable img, .cke_editable table, article img, article table { max-width: 100% !important; height: auto; } /* 워드가 p, span에 폭을 박아놓은 경우 강제로 해제 */ #bo_v_con p[style*="width"], #bo_v_con span[style*="width"], .bo_v_con p[style*="width"], .bo_v_con span[style*="width"], .cke_editable p[style*="width"], .cke_editable span[style*="width"], article p[style*="width"], article span[style*="width"] { width: auto !important; max-width: 100% !important; } /* 기본 blockquote 스타일 */ blockquote { border-left: 4px solid #c0392b; /* 사이트 분위기와 맞는 붉은 계열 */ padding: 12px 18px; margin: 20px 0; background: #fafafa; font-style: normal; color: #333; line-height: 1.6; } /* blockquote 안의 p 태그 정렬 */ blockquote p { margin: 0 0 10px 0; text-align: justify; } /* 마지막 p 태그 여백 제거 */ blockquote p:last-child { margin-bottom: 0; } /* 본문 안 링크 스타일 */ #gpt-article a { color: #cc0000 !important; text-decoration: none !important; } #gpt-article a:hover { color: #990000 !important; } // https://로 시작하는 링크만 target="_blank" 적용 document.addEventListener("DOMContentLoaded", function () { const links = document.querySelectorAll('#gpt-article a[href^="https://"]'); links.forEach(link => { link.setAttribute("target", "_blank"); link.setAttribute("rel", "noopener noreferrer"); }); }); -
노동절에 공무원 노동자가 쉬기까지... 모든 노동자가 노동기본권을 갖는 날까지...2026년 3월 31일, 노동절이 공휴일로 지정[1]되었다. 얼마 전까지 한국의 노동법 체계에 존재하는 법정 유급휴일은 ‘주휴일’과 ‘근로자의날’[2]이 유일했다. 이제 노동절은 모든 이가 쉬는 날, ‘공무원 노동자도 쉬는 날’이 되었다. 여기에는 이재명 정부의 위선과 노동자운동 포섭전략이 있지만, 무엇보다 공무원 사회에서 민주노조를 건설하고 투쟁한 노동자투쟁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노동절 공휴일 지정에 많은 노동자가 공무원 노동자들이 피눈물로 쓴 민주노조의 역사를 떠올렸을 것이다. 우리는 노동자가 투쟁한 역사와 의미를 반드시 새겨야 한다. ‘공무원도 노동자다!’ 공무원 노동자들은 2002년 3월 전국공무원노조 설립부터 국가통제와 공권력 침탈에 맞섰다. 2004년 총파업 대량해고, 이후 연금개악 저지투쟁, 공공성 강화 투쟁, 노동기본권 쟁취 투쟁, 해고자(해직자) 복직 투쟁 등 500여 명이 해고되고, 수천 명이 징계받는 등 숱한 탄압을 뚫고 투쟁을 이어왔다. 사진: 매일노동뉴스 기사 캡처 17년 해고 투쟁한 공무원 노동자의 심경 공무원노조 해고자로 17년 투쟁 끝에 2021년 복직한 전국공무원노동조합 울산지역본부 동구지부장인 이수현 동지의 소감이 매우 궁금했다. “공무원도 노동자라는 요구를 드디어 정부 측에서 인정했다는 것과 5.1. 휴무를 할 수 없었던 교사, 특수고용직노동자 등 노동절 휴일을 함께 즐길 수 있어 기쁘다” “그동안은 ‘근로자의날’ 공무원 노동자 휴식은 단체교섭을 통해 5월 중에 하루를 쉴 수 있었지만, 노동조합이 없는 자치단체는 쉴 수 없었다. 이제는 법정 공휴일로 지정되어 모두 같은 날 휴식권이 보장되어 뿌듯하다” 간결한 문장 속에 얼마나 많은 투쟁과 의미가 서려 있을까. 이 순간 어떤 투쟁이 떠오르는지도 궁금했다. “2003년 노동조합 활동을 할 수 없는 공무원조합법을 연가투쟁으로 무력화 시켰던 투쟁과 공무원 노동기본권 쟁취를 위한 2004년 총파업, 2차례의 연금개악저지 투쟁, 해고자 원직복직 투쟁이다” 2003년 공무원들의 노조결성을 허용하겠다고 공약한 노무현 정부가 출범했지만, 돌아온 건 530명의 해고와 3천 명의 징계였다. 하지만 공무원 노동자는 탄압을 무릅쓰고 2004년 4만 5천 명의 총파업 투쟁을 벌이며 ‘노동자’로서 정권과 타협하지 않는 ‘민주노조’의 길을 갔다. 남은 136명의 해고자가 선두에서 오랜 투쟁을 펼친 끝에 해고자들은 문재인 정부 시절 복직했다. 약 20년 공무원노조 희생자원상회복투쟁위원회(회복투)로 투쟁하는 동안 해고노동자들은 공무원노조의 선봉에서 민주노조의 원칙을 지키고 실천했다. 수십 차례 농성장을 ‘폈다 접었다’를 반복했다. 전국을 뛰어다녔다. 지역과 민주노총 차원에서도 전투적 민주노조 운동의 일원으로서 계급적 단결과 연대를 실천하는 투사로 활동했다. 하지만 이재명 정부 시절, 아직 회복되지 않은 피해와 노동기본권 등을 위해 투쟁을 이어가고 있다. “해고자 복직 당시 해고 기간 중 법외노조 시절은 공무원 근무 경력에 포함되지 않아 해고자 대부분 십 년 이상 경력을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그에 따라 임금 차이, 퇴직수당 미지급, 연금가입 기간이 짧아져 수령금액이 정상적인 복무기간에 비해 많이 부족하다. 금고형을 받았던 퇴직자는 연금을 절반 수준만 받고 있기도 하다. 이에 따라 근무 경력 인정으로 수당 및 연금을 정상화하고자 청와대 앞에서 회복투 성원들이 일인시위를 하고 있다” 노동기본권과 평등사회로 나아가는 날까지 이재명 정부는 누구보다 친기업 정권으로서 역할을 다하며 말로는 ‘친노동’을 치장한다. ‘근로자의날’ 이름을 ‘노동절’로 바꾸고, 노동절을 ‘공휴일’로 지정했지만, 헌법에 보장된 공무원과 교사 노동자의 노동기본권을 보장하지 않고 있다. 특수고용과 플랫폼, 프리랜서, 가짜 3.3노동자에게 노동자의 이름조차 빼앗은 채 노동권을 보장하지 않고 있다. 근로기준법을 모든 노동자에게 적용하면 될 일을 자본의 편에서 줄곧 외면하고 있다. 자본가 누구도 반대하지 않는 ‘일하는사람기본법’, ‘노동절 정부행사’ 등으로 ‘노동자를 위하는 대통령’인 척 사기 치며, 대화 테이블로 민주노조의 투쟁과 저항을 거세하려 든다. 노동절에 공무원이 쉬게 되었지만, 반쪽자리도 되지 못한다. 군무원, 근로감독관 등 아직 모든 공무원 노동자가 노조할 권리를 가지지 못했다. 노동삼권 중 단체행동권은 아직도 금지되어 있다. 사회 공공성과 노동기본권이 강화되고 정권의 도구가 되지 않고 부정부패로부터 자유로운 투명한 공직사회는 정부가 자본의 이해와 멀어질 때 가능할 것이다. “공무원 노동조건이 OECD 평균 수준이하로 국제기관으로부터 공무원 교사 노동기본권 보장 권고를 정부가 받고 있지만, 큰 변화가 없는 게 현실이다. 노동조합은 자체적으로 조합원들에게 공무원 노동자성에 대한 교육과 인식을 높이는 사업을 지속적으로 진행하고 있다. 노동조합의 끊임없는 투쟁이 중요한데, 정부가 결단해야 한다.” 이수현 동지의 지적처럼 사용자인 정부의 결단은 대중적 노동자투쟁 없이 생기지는 않을 것이다. 그는 ‘공무원 노동자가 쉬는 노동절’에 만족하지 않았다. 노동자의 이름을 되찾지 못한 노동자들의 권리를 위해 사회적으로 노동권이란 인식을 높이기 위한 다양한 노동자 투쟁과 활동이 있어야 한다면서 “조그만 사업장이니까, 사장들이 힘드니까, 가족적 사업장이니까 등 어떤 조건이라서 안 된다”는 자본과 정부의 노동권 침해에 맞서야 한다고 강조했다. 공무원 해고자 동지들의 투쟁을 상기하고자 이수현 동지가 해고 투쟁 당시 SNS에 올린 사진을 보았다. ‘최저임금 1만원! 비정규직 철폐! 2016년 전국노동자대회’에 참가자들이 넓게 펼쳐 든 ‘노동기본권 보장’ 현수막. 같은 해 울산노동자 총파업대회에서 해고노동자들이 공무원 노동자의 요구를 쓴 피켓을 들고 현장동지들과 파업집회에 참가한 사진. 최근 전국공무원노동조합 홈페이지에서 보았던 사진과 대비되는 느낌이었다. 노동절이 ‘공휴일’로 지정된 날, 노조 집행부는 국회 본회의를 방청하고 민주당 이용우 의원 등과 기념사진을 찍었다. 정치기본권 쟁취를 위해 사용자단체인 민주당 TF단과 정책간담회를 연 사진도 있었다. 10년이란 시간을 거스를 수는 없지만, 모든 노동자를 위한 대의, 민주노조의 원칙, 계급적 연대의 정신을 회복하고 10년 전보다 더 크게 단결할 수는 있지 않을까. 법이 있다고 노동절에 유급으로 편히 쉴 수 있는 노동자는 많지 않다. 그런 점에서 ‘어떤 조건이라서 안 된다는 저들의 금기를 넘어야 한다’는 이수현 동지의 이야기는 많은 숙제를 남긴다. 공무원 노동자가 쉬는 ‘노동절’ 쟁취를 기념해 고용형태, 젠더, 국적과 인종, 경력 등에 상관없이 평등하게 일하고 평등하게 권리를 보장받을 수 있는 길을 함께 찾아가자. 모든 노동자가 노동자의 이름으로 권리를 누리는 다음 ‘노동절’까지! 최저임금 1만원! 비정규직 철폐! 2016년 전국노동자대회 사진: 이수현 [1] 2026년 3월 26일 국회 행정안전위원회 전체회의, 노동절을 법정 공휴일로 지정을 내용으로 하는 공휴일에 관한 법률(공휴일법) 개정안을 처리했다. 이후 노동절을 법정 공휴일로 지정하는 법안이 31일 오후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다. 이로써 노동절 휴무는 이번 노동절부터 시행된다. [2] 5인 이상 사업장은 법정공휴일(대체공휴일을 포함한 명절, 국경일 등)이 2020년부터 단계적으로 유급휴일이 되었다. /* 스크롤 여백만 주고, 화면에는 안 보이게 */ .ftn-target { display: inline-block; /* 줄바꿈 안 생김 */ width: 0; height: 0; scroll-margin-top: 200px; } document.addEventListener("DOMContentLoaded", function () { // name="_ftn1", name="_ftn2", name="_ftnref1" ... 전부 대상 document.querySelectorAll('a[name^="_ftn"]').forEach(function(a) { var idValue = a.getAttribute("name"); // 이미 같은 id의 요소가 있으면 또 만들지 않음 if (!document.getElementById(idValue)) { var span = document.createElement("span"); span.id = idValue; span.className = "ftn-target"; a.parentNode.insertBefore(span, a); } }); }); /* 본문 각주 번호 + 아래쪽 각주 번호 색 지정 */ a[href^="#_ftn"] sup, a[href^="#_ftnref"] sup { color: #BF202D; } /* 밑줄이 보기 싫으면 */ a[href^="#_ftn"], a[href^="#_ftnref"] { text-decoration: none; } /* 마우스 올렸을 때 살짝만 강조하고 싶으면 (선택) */ a[href^="#_ftn"]:hover, a[href^="#_ftnref"]:hover { text-decoration: underline; } /* 페이지 전체가 오른쪽으로 넘치지 않게 */ html, body { max-width: 100%; overflow-x: hidden; } /* 본문 영역 폭 강제 고정 + 긴 단어/문장도 줄바꿈 */ #bo_v_con, .bo_v_con, .cke_editable, article { max-width: 100%; overflow-wrap: break-word; word-wrap: break-word; /* 구형 브라우저용 */ } /* 워드에서 붙은 이미지/표가 화면 밖으로 안 나가게 */ #bo_v_con img, #bo_v_con table, .bo_v_con img, .bo_v_con table, .cke_editable img, .cke_editable table, article img, article table { max-width: 100% !important; height: auto; } /* 워드가 p, span에 폭을 박아놓은 경우 강제로 해제 */ #bo_v_con p[style*="width"], #bo_v_con span[style*="width"], .bo_v_con p[style*="width"], .bo_v_con span[style*="width"], .cke_editable p[style*="width"], .cke_editable span[style*="width"], article p[style*="width"], article span[style*="width"] { width: auto !important; max-width: 100% !important; } /* 기본 blockquote 스타일 */ blockquote { border-left: 4px solid #c0392b; /* 사이트 분위기와 맞는 붉은 계열 */ padding: 12px 18px; margin: 20px 0; background: #fafafa; font-style: normal; color: #333; line-height: 1.6; } /* blockquote 안의 p 태그 정렬 */ blockquote p { margin: 0 0 10px 0; text-align: justify; } /* 마지막 p 태그 여백 제거 */ blockquote p:last-child { margin-bottom: 0; } -
[번역] 페미니즘, 교차성, 그리고 마르크스주의'교차성(Intersectionality)'은 학계, 페미니스트 활동가, 그리고 사회운동에서 빈번하게 사용되는 단어다. 테리 이글턴(Terry Eagleton)이 지적했듯이, "계급, 인종, 성별"은 "현대의 성 삼위일체"다.[1] 교차성에 대한 담론은 많지만, 그 용어의 정의는 종종 불분명하다. 그것은 이론인가, 아니면 경험적인 묘사인가? 그것은 개인적 주체성의 영역에서 작동하는가, 아니면 지배 시스템을 분석하는가? 그리고 궁극적으로, 이 개념은 교차하는 억압의 원인에 대해 무엇이라 설명하고 있으며, 무엇보다 해방을 향한 경로에 대해서는 무엇을 말하는가? 젠더, 인종, 계급 사이의 관계에 대한 고찰은 마르크스주의 논쟁과 좌파 사이에서 오래전부터 존재해 왔지만, 교차성이라는 개념이 오늘날의 개념으로 처음 정의된 것은 1989년 흑인 법률가이자 페미니스트인 킴벌리 크렌쇼(Kimberlé Crenshaw)[2]의 기사에서였다. 그 기사에서 그녀는 미국의 차별금지법(anti-discrimination law)과 관련해 이러한 질문들에 답하고자 했다. 이 시작은 의심할 여지 없이 이 개념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는데, 이는 나중에 살펴볼 것이다. 그러나 이 개념의 가장 중요한 전례는 ‘콤바히 리버 컬렉티브(Combahee River Collective)'와 같은 1970년대 흑인 페미니스트들의 작업에 있는데, 이들은 당대의 정치적 급진화와 제2차 페미니즘 물결 속에서 해방 운동에 대한 "교차적" 비판을 제기했다. 이 글에서 나는 교차성 개념의 역사적 배경, 초기의 정식화, 그리고 포스트모더니즘의 부상과 함께 개념이 변화한 과정, 그리고 오늘날 이 개념을 둘러싸고 사회 운동 내에서 진행 중인 논쟁을 간략하게 요약할 것이다. 또한 교차성 이론을 마르크스주의와 비판적으로 대조할 것이다. 1. 콤바히 리버 컬렉티브와 흑인 페미니스트들 1977년에 발표된 '콤바히 리버 컬렉티브 선언문'은 노예로 태어나 노예제 폐지론자로 살아온 해리엇 터브먼(Harriet Tubman)이 1863년 적들의 포화 속에서 750명의 노예를 해방시키는 용맹한 군사 작전을 지휘한 것에 대한 헌사의 의미를 담은 명칭이다. 그녀는 미국 남북 전쟁 중 군사 작전을 지휘한 유일한 여성이었다. 1970년대 흑인 페미니스트들은 자신들을 19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흑인 여성 투쟁의 역사적 일부라고 생각했다. 안젤라 데이비스(Angela Davis)는 그녀의 저서 『여성, 인종, 계급』[3]에서 미국 노예제 폐지 운동 당시 흑인 여성 투쟁의 역할을 언급했다. 1851년 오하이오 여성 대회에서 여성 참정권을 위해 싸운 소저너 트루스(Sojourner Truth)의 연설은 역사의 한 장으로 남았다. 한 남자가 여성이 "약한 성별"이기 때문에 투표할 수 없다고 주장하자, 소저너 트루스는 강렬한 답변을 내놓았다: 나는 쟁기질을 하고, 씨를 뿌리고, 곳간에 작물을 쌓아올릴 때 어떤 남자에게도 뒤지지 않았소! 그런데도 나는 여성이 아니오? 나는 남자만큼 일할 수 있었고, (먹을것이 있기만 하다면) 남자만큼 먹을 수 있었고, 채찍질도 똑같이 견뎌낼 수 있었소! 그런데도 나는 여성이 아니오? 나는 열세 명의 아이를 낳았고, 그들 대부분이 노예로 팔려 나가는 것을 보았소... 그래도 나는 여성이 아니오? 그녀의 대답은 여성이 약하고, 정치적 시민권을 행사할 수 없는 "천성적으로" 열등한 존재라는 관념에 기초해 "여성성(femininity)"을 구축한 가부장적 서사에 대한 반박이었다. 동시에 그것은 흑인이고 노동자인 여성의 요구를 무시한 많은 백인 여성 참정권론자들에 대한 도전이기도 했다. 1970년대 중반, 백인 페미니즘 운동과 흑인 해방 조직에서 부정적인 경험을 한 일단의 흑인 여성들은 이러한 전통을 되살려 자신들만의 투쟁 집단을 형성하기로 결정했다. '콤바히 리버 컬렉티브 선언문'의 발표와 함께, 흑인 페미니스트들은 백인 페미니즘, 흑인 운동, 그리고 '전국 흑인 페미니스트 기구(NBFO)'의 부르주아 흑인 페미니즘에 동시에 의문을 제기했다. 그들의 출발점은 계급, 인종, 젠더라는 세 요소에 뿌리를 둔 '동시적인 억압'에 대한 공통된 경험이었다. 여기에 그들은 ‘성적 억압’(sexual oppression)을 추가했다. 이로부터 그들은 급진적 페미니즘이 헤게모니를 쥐고 있던 페미니즘 운동을 향해 비판의 날을 세웠다. 이러한 페미니즘 조류는 사회적 모순을 "성적 계급(sexual classes)"[4] 간의 대립으로 해석하고, 다른 모든 구조보다[5] 가부장제(patriarchy)라는 지배 구조를 우선시했다. 흑인 페미니스트들은 인종과 계급보다 성적 억압 또는 젠더 억압을 우위에 두는 것에 의문을 제기하면서, "성별 전쟁"을 조장하는 노골적인 분리주의 경향에 대해서도 논쟁을 벌였다. 이 분리주의 경향은 1970년대 후반 페미니즘 운동에서 힘을 얻었다. 흑인 페미니스트들은 이러한 유형의 페미니즘을 백인 중산층 여성의 이익에 따라 움직이는 운동으로 정의했다. 그들은 또한 정체성에 대한 어떤 종류의 생물학적 결정론도 반동적인 입장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주장했다. 우리는 페미니스트이자 레즈비언이지만, 진보적인 흑인 남성들과 연대감을 느끼며, 분리주의자인 백인 여성들이 요구하는 분열을 지지하지 않는다. 벨 훅스(bell hooks)는 저서 『모두를 위한 페미니즘』에서 그 시절 "자매애의 유토피아적 비전"과 가부장제에 대한 비역사적 정의가 인종 및 계급에 관한 논쟁에 의해 도전받았다고 주장한다. 그녀는 이 시기를 평가하며 "여성이 하나의 성적 계급/카스트를 구성한다는 개념을 불러일으키며 공통의 억압이라는 기치 아래 운동을 조직하려 했던 백인 여성들이, 여성들 사이의 차이를 인정하는 것을 가장 꺼려했다"고 단언한다. 그녀는 또한 운동 내 분리주의 조류와의 논쟁을 강조한다. 그들은 모든 여성을 피해자로 나타내기 위해 모든 남성을 적으로 묘사했다. 남성들에 대한 이러한 주목은 개별 페미니스트 활동가들의 계급적 특권과, 계급 권력을 증대시키려는 그들의 욕망으로부터 주의를 돌리게 했다.[6] '콤바히 리버 컬렉티브 선언문'은 흑인 여성과 흑인들의 해방을 위한 투쟁을 자본주의 체제에 대항하는 투쟁과 분리될 수 없는 것으로 특징지었다. 그렇기에 저자들은 사회주의를 위한 투쟁을 명시적으로 지지했다: 우리는 모든 억압받는 인민의 해방이 가부장제뿐만 아니라 자본주의와 제국주의라는 정치-경제 체제의 파괴를 필요로 한다는 것을 인식한다. 우리가 사회주의자인 이유는 노동이 노동을 수행하고 제품을 만드는 사람들의 집단적 이익을 위해 조직되어야 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페미니즘 혁명과 반인종주의 혁명이 동반되지 않는 사회주의 혁명이 우리의 해방을 보장해 줄 것이라고는 믿지 않는다. 마르크스주의와 관련하여 그들은 "특정한 경제적 관계"에 관한 마르크스의 이론에 근본적으로 동의한다고 주장했지만, "흑인 여성으로서의 우리의 구체적인 경제적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서 그 분석이 더 확장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비록 그들이 사회주의 혁명의 필요성을 표명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집단으로서 제안한 실천적 과제는 주로 자기 인식 워크숍과 그들 지역사회 내 흑인 여성들의 구체적인 권리를 위한 투쟁에 국한되었다는 점을 유의해야 한다. '정체성 정치'라는 개념은 흑인 여성들이 억압을 경험하는 구체적인 방식에 대한 대응으로서 선언문에 등장한다. 자신의 정체성을 인식하는 것은 이후 다른 해방 운동과 결합하기 위해 필요한 단계로 간주된다. 경제적, 성적, 인종적 지배가 결합된 체제에 맞서 싸우기 위해, 독자적인 정체성을 형성하는 것과 다른 억압받는 이들과 연대하는 일 사이에는 긴장이 존재한다. 그러나 몇 년 후, 신자유주의와 포스트모더니즘의 부상으로 사회적, 정치적, 사상적 맥락이 급격하게 변화하면서 '교차성(intersectionality)'이라는 개념은 새로운 의미를 띠게 되었다. 사회의 근본적인 변혁이 전망에서 사라지면서, 집단적 행동의 기회는 흩어지는 경향을 보였고, 대신 차별화된 '정체성'과 자본주의 사회 내에서 이를 인정받으려는 정책적 요구가 늘어나기 시작했다. 2. 차별의 범주로서의 교차성 킴벌리 크렌쇼는 1989년에 교차성 개념을 처음 정의했다. 그녀는 인종 차별과 성 차별을 '경험과 분석의 상호 배타적인 범주'로 분리해서 취급하는 것이 법리, 페미니즘 이론, 그리고 반인종주의 정치에 문제적인 결과를 초래했다는 점을 강조했다." 따라서 그녀는 "흑인 여성 경험의 다차원성과 이러한 경험을 왜곡하는 일차원적 분석”을 대비시켜야 한다고 제안했다. 그녀는 (인종, 젠더, 성적 지향, 계급 중 무엇이든 간에) 단일한 차별 축에 기반한 개념화는 흑인 여성을 정체화와 차별 종식의 가능성으로부터 지워버리며, 분석을 각 집단의 특권적인 구성원들의 경험으로 제한한다고 지적했다. 인종 차별은 성별이나 계급적 특권을 가진 흑인들의 관점에서 보여지는 경향이 있고, 반면 성 차별을 다룰 땐 경제적 자원을 가진 백인 여성에게 초점이 맞춰진다. "교차적 경험은 인종차별과 성차별의 합보다 크기 때문에, 교차성을 고려하지 않는 어떤 분석도 흑인 여성이 종속되는 특정한 방식을 충분히 다룰 수 없다." 그녀의 분석에서 크렌쇼는 흑인 여성들이 제기한 여러 소송이 사법부에 의해 어떻게 간단히 기각되었는지 검토한다. '드그라펜리드 대 제너럴 모터스(DeGraffenreid v. General Motors)' 사건에서 다섯 명의 여성은 다국적 기업인 GM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는데, 이들은 흑인 여성으로서 더 나은 직책으로의 승진이 거부되었기 때문에 고용 차별을 받았다고 주장했다. 법원은 그들이 "흑인 여성"이라는 이유로 차별받았음을 입증할 수 없다고 주장하며 소송을 기각했다. 그들이 특별한 차별을 받은 집단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대신 법원은 인종적 혹은 성별적 차별이 발생했는지에 대한 조사에는 동의했다. 그러나 "두 요소의 결합"은 인정하지 않았다. 결국 법원은 GM이 여성을 —백인 여성을— 고용했기 때문에 젠더 차별이 없다고 판단했고, 회사가 흑인을 —흑인 남성을— 고용했기 때문에 인종 차별도 없었다고 판단했다. 흑인 여성들의 소송은 실패했다. 법원은 이 소송을 인정하는 것이 "판도라의 상자"를 여는 일이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크렌쇼는 교차성 개념의 목적이 흑인 여성들이 단일 축 개념 틀로는 다루지 못하는 복잡한 형태의 차별을 경험할 수 있다는 점을 인식하는 데 있다고 지적한다. 1980년대 후반, 교차성 개념은 "차별" 경험의 복잡성을 다루기 위한 범주로 등장하였으며, 이는 국가가 "다양성 정책"을 규제할 수 있도록 하는 새로운 판례법 확립을 목적으로 했다. 나중에 미국 사회학자이자 흑인 페미니즘 학자인 패트리샤 힐 콜린스(Patricia Hill Collins)는 교차성을 "교차하는 억압들에 의해 특징지어지는, 역사적으로 특정한 지배 구조 내에서 구축되는 것"으로 정의했다.[7] 그녀의 견해에 따르면, 교차성은 다른 "사회 정의 프로젝트들”과의 결합(convergence)이나 연합(coalition)을 추구하는 사회 정의 프로젝트를 의미한다. 교차성 개념은 이후 학계 내에서 "여성학"의 틀이 확장되는 과정 속에서, 많은 흑인, 라틴계, 아시아계 페미니스트 지식인들에 의해 발전되었다. 교차성은 컨퍼런스와 심포지엄, 연구 부서에서 유행어가 되었다. 경제, 법률, 사회, 문화 및 공공 정책 분야에서 교차성 연구를 발전시키기 위한 NGO(비정부기구)들이 만들어졌다. 젠더, 인종, 계급이라는 세 요소에 성적 취향, 국적, 연령, 기능적 다양성과 같은 다른 억압의 축이 추가되었다. 이는 여러 집단과 공동체가 직면한 구체적인 억압의 가시성을 높여주었다. 그러나 이는 역설적으로 자본주의 사회 구조에 대한 체념의 분위기 속에서 발전했다. 자본주의 사회 구조는 도전할 수 없는 것으로 여겨지게 되었다. 3. 교차성, 정체성 정치, 그리고 다중적 차이 학계에서 교차성 연구의 부상은 신자유주의 하에서 지적, 정치적 기류를 완전히 뒤바꾼 새로운 역사적 단계의 시작과 함께 진행됐다. "부르주아 복고"[8] 또는 신자유주의 호황기로 불리는 이 시기는, 전 세계적으로 노동자들이 쟁취한 결실에 대한 전방위적인 공격이 자행된 시기였다. 노동조합 및 노동계급 정치 지도부의 변절(이탈) 아래, 민영화와 규제 완화 정책이 맹렬하게 추진됐다. 이는 노동계급 내부의 파편화를 심화시켰고 계급 주체성의 거대한 상실로 이어졌다. 이 새로운 맥락 속에서, 콤바히 리버 컬렉티브의 흑인 페미니스트들과 사회주의자들이 견지했던 급진주의는, 포스트모더니즘적 관점에 따라 주체의 분절화를 심화시키는 틀 속에서 교차성을 정식화하는 방향에 자리를 내주게 되었다. 교차성이라는 아이디어는 "다양성(diversity)" 및 "정체성 정치(identity politics)"와 더욱 유사해졌다. 이러한 정식화는 지배 관계를 "문화화"하는 과정 속에서, 초점을 집단에서 개인으로, 물질에서 주체로 이동시켰다. 그것은 억압받는 집단의 투쟁이 근본적으로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자기 인식— "맥락적 지식" —을 획득하는 것 을 포함하며, 이를 통해 특권 집단(남성, 백인 여성, 이성애 여성 등)이 자신의 특권을 "해체"하고 다양성을 인정하도록 한다는 개념을 일반화한다. 포스트모더니즘의 "문화적 전환"의 틀 속에서, 정체성은 오직 담론 속에서만 구축되고, 저항의 가능성은 대항 서사를 확립하는 일에만 제한된다. 그러나 이러한 관점은 계급 착취에는 적용될 수 없다. 생산 수단을 소유한 자들 —은행가와 자본가들— 이 자기 성찰을 통해 그들의 권력을 "해체"할 것이라고 기대할 수 있는가? 실제로는 이 제안은 인종차별, 이성애 중심주의, 성차별을 종식시키기 위한 전략으로서 무용하다. 이러한 "지배의 축"들은 자본주의의 물질적, 구조적 관계와 얽혀 있지 않은, 문화적 또는 이데올로기적 영역에서만 작동하는 별개의 실체가 아니기 때문이다. 반대로, 이러한 억압의 토대가 되는 자본주의적 사회 관계를 근본적으로 변혁할 가능성을 고려하지 않은 채, 억압받는 정체성들만을 끊임없이 늘려나가는 방식은 활동에서 "게토화"와 분열의 관행을 낳았다. 프라티바 파마르(Pratibha Parmar)는 그녀의 저작에서 이 문제를 경고했다: 억압받는 정체성들을 모아서 쌓아올리는데 치중한 결과, 이는 결국 억압의 위계를 낳게 되었다. 이러한 줄 세우기는 파괴적일 뿐만 아니라 분열적이었으며 운동을 마비시키는 것이었다. ... 많은 여성이 게토화된 "라이프스타일 정치"로 후퇴했으며 사적이고 개인적인 경험을 넘어서지 못하고 있다.[9] 이러한 무력함의 상응물로서, 자본주의 체제는 '다양성'의 폭발적 증가를 정체성의 시장으로 이용하였다. 그리고 그 정체성들이 총체로서의 사회 구조에 도전하지 않는 한 그들을 동화시킬 수 있었다. 테리 이글턴은 포스트모더니즘에 관해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포스트모더니즘의 유일하고 가장 오래남을 성과— 성적 취향, 젠더, 민족성 문제를 정치적 의제에 확고히 자리매김시켜, 강력한 노력 없이는 이 문제들을 지워버리는 것을 상상조차 불가능하게 만들었다는 점—는, 계급, 국가, 이데올로기, 혁명, 물질적 생산양식을 다루는 더 고전적인 형태의 정치적 급진주의를 대체한 것에 불과했다.[10] 그러나 이글턴은 각주에서 이러한 이슈들을 정치적 의제에 올려놓은 것은 포스트모더니즘 지식인들이 아니라, 그 이전에 1960년대와 70년대의 투쟁을 통해 전개된 사회 운동의 실천이었다고 분명히 했다. 이 정치적 급진화의 물결이 좌절되자, 인종, 젠더, 섹슈얼리티 담론은 전면에 등장한 반면, 계급은 점점 더 비가시화되었다(일부 저자들은 노동계급 그 자체의 소멸에 대해 쓸 정도였다). 4. 계급 정치로부터의 후퇴 계급/인종/젠더 세 요소에서 계급은 희석되거나, 마치 소득에 따른 사회적 계층이나 직업 유형처럼 단지 또 하나의 정체성이 되어버리는 경향이 있었다. 마르타 E. 히메네스(Marta E. Giménez)[11]는 콜린스를 인용하며, '교차성 이론의 특징적인 요소 중 하나는 "이러한 연결 고리들을 이론화하기 위해서는 ‘억압들 사이의 동일함이라는 잠정적 가설을 지지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추정'인데, 이는 계급 관계의 특수성을 제거하는 결과로 이어진다고 언급한다. 이러한 견해에 반해, 인종, 젠더, 계급은 직접적으로 비교할 수 있는 범주가 아니라는 점을 지적할 필요가 있다. 이것이 우리가 고통에 위계를 세워야 한다거나, 사람들의 주관적 경험에 무엇이 가장 중요한지 결정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목표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억압과 착취 사이의 관계에 대한 더 깊은 이해를 얻는 것이다. 예를 들어 계급, 인종, 젠더는 "평등"과 "차이"와 관련하여 매우 다르게 작동한다. 역사적으로 부르주아지는 계급의 "사회적 차이"를 "자유 계약"이라는 "평등주의" 이데올로기 뒤에 가능한 한 숨기려 해왔다. 그러나 그들은 ‘차이’를 확고히 하기 위해 인종차별과 성차별을 이용한다. 이 “차이”는 생물학적 또는 '자연적'인 조건의 결과라고 여겨진다. 이러한 논리는 자원 배분과 권리 접근의 불평등을 정당화하고, 특정한 노동 분업의 지속, 또는 간단히 말해 수백만 명의 사람들을 비인간화하여 노예화하는 것을 옹호하기 위해 사용된다. 해방적 관점에서, 목표는 피부색, 출생지, 생물학적 성별, 또는 성적 선택의 어떠한 차이도 억압, 모욕, 또는 불평등의 근거로 사용될 수 없도록 하고, 동시에 다양성을 인정하고 사회적 협력의 틀 안에서 모든 개인의 창조적 잠재력의 발전을 촉진하는 것이다. 그러나 계급 차이의 경우, 목표는 계급 자체를 완전히 제거하는 것이다. 노동계급은 자본주의 사회 관계에 맞선 투쟁을 통해 생산 수단의 사적 소유를 철폐하고자 하며, 이는 계급으로서 부르주아의 소멸, 그리고 모든 계급 사회를 종식시킬 가능성을 수반한다. 자본주의 사회를 구조화하는 것은, 이러한 모순을 보이지 않게 만들려는 시도 너머에 있는, 생산 수단의 소유자와 임금을 대가로 자신의 노동력을 팔 수밖에 없는 자들 사이의 사회적 차이다. 가부장적 관계—자본주의보다 수천 년 전에 등장한—와 인종차별은 비역사적인 실체가 아니라, 자본주의 사회 관계의 틀 안에서 새로운 형태와 특정한 사회적 내용을 갖게 되었다. 자본주의는 가부장적 편견을 활용하여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 사이, 즉 생산 영역과 가정 영역 사이의 전례 없는 차별화를 확립한다. 가정에서 여성은 보이지 않는 노동을 통해, 노동력의 사회적 재생산이란 과업의 큰 부분을 지속적으로 수행한다. 자본의 재생산을 위해서 말이다. 새로운 사회 관계 아래 재편된 가족, 결혼, 이성애 규범성과 같은 제도들은 여성의 이러한 역할을 사회화하고 자연스러운 것으로 만든다. 성별 억압의 다양한 양상과, 수백만 명의 여성이 겪는 폭력과 여성 살해 등의 고통스러운 현실은 단순히 계급 관계로만 “환원”될 수는 없다. 하지만 억압과 착취라는 범주를 연결하지 않고서는, 이를 제대로 설명해낼 수도 없다. 인종차별은 수백만 명의 인간을 노예로 만드는 것을 이데올로기적으로 정당화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계몽주의가 "인간의 권리"의 기초로서 "자유", "평등", "박애”라는 사상을 드높인 것과 같은 시기에 말이다. 인종차별은 제국주의 국가들의 거대한 식민주의 사업, 그리고 미국에서 원주민들을 상대로 자행된 것과 같은 내부적 대량 학살을 동반하고 강화했다. 미국 남북 전쟁과 노예제 폐지 이후에도, 인종주의는 나라 인구의 상당수를 "2등 시민"이자 "2등 노동자"로 취급하여 배제하는 데 활용되어왔다. 이는 미국 노동계급 내부의 분열을 조장한다. 결과적으로 흑인 페미니스트들이 지적했듯이, 인종 억압과 성별 억압은 자본주의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절묘하게 결합된다. 미국 내 흑인 및 라틴계 여성 노동자들의 임금 격차가 더 크다는 점이나, 흑인 청년들에 대해 압도적으로 높은 수위의 제도적·경찰 폭력이 존재하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것은 또한 유럽 내 이주민들에 대한 인종차별적이고 외국인 혐오적인 정책들을 옹호하는 데 이용된다. 유럽에서 이주민들은 2등 노동자로 취급받으며 기본적인 사회적, 민주적 권리를 박탈당하고 있다. 5. 마르크스주의와 교차성 『자본론』에서 마르크스는 "검은 피부의 노동자에게 낙인을 찍고 있는 곳에서는 흰 피부의 노동자도 해방될 수 없다"고 썼다. 그 이전 작업에서 그와 프리드리히 엥겔스는 유토피아 사회주의자 푸리에의 말을 살짝 바꾸어 "사회적 진보, 역사적 시기의 변화는 여성이 자유를 향해 나아가는 정도에 비례하여 일어나며, 사회 질서의 쇠퇴는 여성의 자유가 감소하는 정도에 비례하여 일어난다"고 지적했다. 『영국 노동계급의 상태』에서 엥겔스는 대규모로 자본주의 생산 영역에 진입해 억압과 착취라는 이중의 고통을 경험하고 있던 노동자 여성들의 현실을 구체적으로 분석했다. 『가족, 사유재산, 국가의 기원』에서 엥겔스는 친구(마르크스)가 수행한 미완의 인류학 연구를 이어받아 역사 속의 가족 제도와 여성 억압에 대한 분석을 발전시켰다. 혁명적 마르크스주의는 착취와 억압 사이의 관계를 다른 방식으로도 분석해 왔다. 예를 들어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영국 프롤레타리아트의 권리가 아일랜드 노동자들의 억압에 기초한다면 그들은 해방될 수 없다고 주장했다. 나중에 레닌은 다른 민중을 억압하는 민중은 해방될 수 없다고 주장하며 식민지 억압에 맞선 투쟁뿐만 아니라 민족자결권을 옹호했다. 교차성 이론에 대한 비판에서, 리즈 보걸은 '교차성'이라는 용어가 대중화되기 전부터 1960년대와 70년대의 사회주의 페미니스트들이 이미 가부장제, 인종차별, 그리고 자본주의 사이의 교차 지점을 강조해 왔다고 옳게 주장한다. 그러나 플로라 트리스탄, 엥겔스, 클라라 체트킨, 그리고 러시아 혁명가들과 다른 많은 이들에 이르기까지, 그 시기보다 훨씬 전부터 사회주의 페미니즘 사상의 오랜 전통이 발전해 왔다는 점에 주목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는 중요한 국제 사회주의 여성 회의와 농민 및 노동자 여성 조직과 강령으로 이어졌다. 1938년 레온 트로츠키가 작성하고 제4인터내셔널이 채택한 '이행 강령'의 구호에는 "여성 노동자와 청년에게 길을 열어야”하며, "노동계급의 가장 착취받는 층 사이에서 지지"를 구해야 한다는 과제가 포함되어 있다. 교차성 이론가들은 종종 마르크스주의를 "계급 환원주의"로 간주하며 비판한다. 그러나 "계급 분석"의 중심성을 옹호하는 것은, 단순히 노동조합의 임금 인상 투쟁 같은 활동에만 스스로를 제한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계급에 대한 조합주의적(corporatist), 경제주의적, 혹은 좁은 의미의 전투적 조합주의(syndicalism)적 관점이다. 20세기의 많은 스탈린화된 공산당들과 노동조합 관료들의 관행이 이러한 좁은 조합주의 정치에 기반하여, "계급 정치"와 억압에 맞선 운동 사이의 골을 깊게 만든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마르크스주의가 계급 착취와 성별 억압, 인종차별, 식민지 억압, 그리고 이성애 중심주의의 '교차'를 고려하지 않았다는 주장은, 스탈린주의와 마르크스주의를 억지로 동일시할 때에나 가능한 일이다. 계급 분석은 자본주의 사회를 구조화하는 관계들을 드러내는 것을 목표로 한다. 그런데 이는 자본 축적을 위한 잉여 가치 추출(Extraccion)뿐만 아니라, 가정 내 여성 재생산 노동의 전유, 거대 독점 기업으로의 자본 집중, 금융 자본의 확장, 그리고 세계대전과 약탈로 이어지는 제국주의 국가 간의 경쟁에도 기반한다. 또한 자본이 어떻게 착취를 극대화하고 노동계급 대열 내의 분열을 유발하기 위해 인종차별적, 여성혐오적, 외국인혐오적 이데올로기를 부추기면서, "차이"를 활용하고 확립하는지 분석한다. 이러한 계급 분석은 "경제 환원주의적" 관점을 표현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정치적, 사회적 요소들의 상호작용을 포함하며 계급 관계와 인종차별, 가부장제, 이성애 중심주의 사이의 연결에 대한 더 깊은 이해를 가능하게 한다. 동시에 이 계급 분석은 21세기에 그 어느 때보다 다양하고, 인종화되고, 여성화된 노동계급이 내부 분열과 파편화를 극복해낸다면, 자본주의를 철폐하고 자유로운 생산자들의 새로운 사회를 조직하기 위한 기초로서 경제, 산업, 운송 및 통신 시스템 전체를 통제 아래 둘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음을 시사한다. "계급 정치"로부터의 후퇴는 사실상 자본주의 체제에 맞선 투쟁을 포기하는 것을 의미하며, 그것 없이는 인종, 젠더, 또는 섹슈얼리티에 기초한 착취와 억압으로 인한 끔찍한 불의를 끝내는 것이 불가능하다. 2008년 자본주의 위기 이후, 신자유주의 정책에 맞선 새로운 저항 운동의 출현과 함께, 페미니스트 활동가들, 반인종주의자들, 그리고 청년 운동의 일부 부문들은 다양한 억압받는 집단들 사이의 연합을 형성하기 위해 새로운 의미에서 "교차성" 개념을 옹호해 왔다. 예를 들어 2018년 3월 8일 스페인에서 파업을 조직한 여성 운동은 스스로를 "반자본주의, 반인종주의, 반식민주의, 그리고 반파시즘" 운동으로 규정했다. 이는 여러 갈래의 투쟁을 하나로 모으는 계기가 된 중요한 진전이었으며, 노동자 민중을 뿔뿔이 흩어놓으려는 파편화의 논리에 정면으로 맞선 커다란 흐름이었다. 그러나 자본주의를 타도하기 위한 공통의 전략과 연결되지 않는다면 저항 운동들의 합이나 "교차"만으로는 불충분하다. 자본주의를 타도하기 위한 공통의 전략 없이는 인종차별이나 가부장적 억압을 끝내는 것이 불가능하다. 이것은 다양한 "운동"이나 "정체성"을, 성별이 거세된 추상화된 노동계급과 서로 대치시키려는 것이 아니다. 역사상 노동계급이 젠더와 인종 측면에서 지금처럼 다양했던 적은 없었다. 여성은 이미 노동계급의 50%를 차지하고 있으며, 그중 흑인, 라틴계, 아시아계 여성이 다수이다. 그렇다면 헤게모니 전략의 핵심은 젠더, 인종, 섹슈얼리티에 기초한 모든 억압에 맞선 투쟁을 단호하게 통합하는 계급 정치의 중심성을 회복하는 것이다. 이는 자본주의가 분열시킨 것들을 결합하고, 노동계급 내부의 단결을 공고히 하며, 특정한 억압에 맞서 싸우는 운동들과의 연대를 강화하는 정책을 펴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관점은, 수탈자를 수탈하기 위한 투쟁과 함께, 비로소 진정한 해방사회로 전진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2019년 2월 24일, 스페인어판 콘트라푼토(Contrapunto)에 최초 게재. 2023년 7월 11일, 레프트보이스(Left Voice)에 번역된 글을 재번역. 원저자: 호세피나 마르티네즈(Josefina L. Martínez) 영어 번역: 마리셀라 트레빈(Marisela Trevin) 한국어 번역: 해인 [1] Terry Eagleton, Against the Grain: Essays 1975–1985 (London, UK: Verso, 1986). [2] Kimberlé Crenshaw, “Demarginalizing the Intersection of Race and Sex: A Black Feminist Critique of Antidiscrimination Doctrine, Feminist Theory, and Antiracist Politics,” in Feminist Legal Theory: Readings in Law and Gender, ed. by Katharine T. Bartlett and Rosanne Kennedy (New York, NY: Routledge, 1991). [3] 앤절라 Y.데이비스, 『여성, 인종, 계급』, (황성원 역, 아르테, 2016) [4] 1970년 수라미스 파이어스톤의 급진적 페미니즘이든, 1980년 크리스틴 델피의 물질주의적 페미니즘이든 마찬가지이다. 슐라미스 파이어스톤, 1970, “성의 변증법”, (김민예숙, 유숙열 역, 꾸리에, 2016). 크리스틴 델피, 1980, “주적”, (이민경, 김다봄 역, 봄알람, 2022) [5] 케이트 밀렛이 『성 정치학』, 1970, (김유경 역, 쌤앤파커스, 2020)에서 제시한 개념. [6] 벨 훅스, 2000, 『모두를 위한 페미니즘』, (이경아 역, 문학동네, 2017) [7] Patricia Hill Collins, Black Feminist Thought: Knowledge, Consciousness and the Politics of Empowerment (New York, NY: Routledge, 1990), 127. [8] Emilio Albamonte and Matías Maiello, “At the Limits of the ‘Bourgeois Restoration,’” Left Voice, December 24, 2019. First published in Spanish in 2011. [9] Pratibha Parmar, “Black Feminism: The Politics of Articulation,” in Identity: Community, Culture, Difference, ed. by Jonathan Rutherford (London, UK: Lawrence & Wishart, 1990), 107. [10] 테리 이글턴, 1996, 『포스트 모더니즘의 환상』, (김준환 역, 실천문학사, 2000) [11] Marta E. Giménez, Marx, Women, and Capitalist Social Reproduction: Marxist Feminist Essays: (Leiden, Netherlands: Brill Publishers, 2019 /* 스크롤 여백만 주고, 화면에는 안 보이게 */ .ftn-target { display: inline-block; /* 줄바꿈 안 생김 */ width: 0; height: 0; scroll-margin-top: 200px; } document.addEventListener("DOMContentLoaded", function () { // name="_ftn1", name="_ftn2", name="_ftnref1" ... 전부 대상 document.querySelectorAll('a[name^="_ftn"]').forEach(function(a) { var idValue = a.getAttribute("name"); // 이미 같은 id의 요소가 있으면 또 만들지 않음 if (!document.getElementById(idValue)) { var span = document.createElement("span"); span.id = idValue; span.className = "ftn-target"; a.parentNode.insertBefore(span, a); } }); }); /* 본문 각주 번호 + 아래쪽 각주 번호 색 지정 */ a[href^="#_ftn"] sup, a[href^="#_ftnref"] sup { color: #BF202D; } /* 밑줄이 보기 싫으면 */ a[href^="#_ftn"], a[href^="#_ftnref"] { text-decoration: none; } /* 마우스 올렸을 때 살짝만 강조하고 싶으면 (선택) */ a[href^="#_ftn"]:hover, a[href^="#_ftnref"]:hover { text-decoration: underline; } /* 페이지 전체가 오른쪽으로 넘치지 않게 */ html, body { max-width: 100%; overflow-x: hidden; } /* 본문 영역 폭 강제 고정 + 긴 단어/문장도 줄바꿈 */ #bo_v_con, .bo_v_con, .cke_editable, article { max-width: 100%; overflow-wrap: break-word; word-wrap: break-word; /* 구형 브라우저용 */ } /* 워드에서 붙은 이미지/표가 화면 밖으로 안 나가게 */ #bo_v_con img, #bo_v_con table, .bo_v_con img, .bo_v_con table, .cke_editable img, .cke_editable table, article img, article table { max-width: 100% !important; height: auto; } /* 워드가 p, span에 폭을 박아놓은 경우 강제로 해제 */ #bo_v_con p[style*="width"], #bo_v_con span[style*="width"], .bo_v_con p[style*="width"], .bo_v_con span[style*="width"], .cke_editable p[style*="width"], .cke_editable span[style*="width"], article p[style*="width"], article span[style*="width"] { width: auto !important; max-width: 100% !important; } /* 기본 blockquote 스타일 */ blockquote { border-left: 4px solid #c0392b; /* 사이트 분위기와 맞는 붉은 계열 */ padding: 12px 18px; margin: 20px 0; background: #fafafa; font-style: normal; color: #333; line-height: 1.6; } /* blockquote 안의 p 태그 정렬 */ blockquote p { margin: 0 0 10px 0; text-align: justify; } /* 마지막 p 태그 여백 제거 */ blockquote p:last-child { margin-bottom: 0; } /* 본문 안 링크 스타일 */ #gpt-article a { color: #cc0000 !important; text-decoration: none !important; } #gpt-article a:hover { color: #990000 !important; } // https://로 시작하는 링크만 target="_blank" 적용 document.addEventListener("DOMContentLoaded", function () { const links = document.querySelectorAll('#gpt-article a[href^="https://"]'); links.forEach(link => { link.setAttribute("target", "_blank"); link.setAttribute("rel", "noopener noreferrer"); }); }); -
차별금지법 쟁취 노동자투쟁, 이렇게 하자가부장적 자본주의 체제 하에서 차별과 억압은 단일한 개개별의 것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자본주의 권력이 섬세한 가공을 거쳐 제조한 갈라치기의 기준은 서로 화합하며 유기적으로 노동자계급을 양분한다. 그렇기에 자본주의 생산을 멈춰 세우고 노동자민중의 물리적 압력을 무엇보다 생생히 전달할 수 있는 총파업 투쟁, 총파업 투쟁으로 대표되는 강력한 현장에서부터의 운동만이 우리의 답이 될 수 있다. 지금은 점으로 흩어져있는, 차별에 맞서 싸운 노동자들의 레퍼런스를 포괄적 차별금지법 제정 운동이라는 선으로 이어낼 선전과 선동. 전술이 필요하다. 만약 KEC의, 톨게이트의, 한국마사회의, 120만 민주노총과 그에 연대하는 민중들의 총파업 구호로 '포괄적 차별금지법 제정'이 쓰일 수 있다면 어떨까? 그 순간을 상상해보자. 투쟁의 힘으로 밀어 올리는 포괄적 차별금지법이 이상주의자의 낙관론이라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오늘날 유일한 문제는 우리가 어떻게 전진하느냐에 달려있다. 1. 포괄적 차별금지법 운동의 경과 한국 사회에서 포괄적 차별금지법 제정 요구가 처음으로 수면 위 부상한 것은 노무현 시기다. 보다 정확히 하자면 앞선 1997년, 김대중 당시 새정치국민회의 총재가 이른바 「3금 법안」의 국회 추진 발표 기자회견 등을 통해 '차별금지'를 명시하는 법안을 형상화하기는 했으나. 당시 맥락에서의 '차별금지'란 성별과 학력, 출신 지역에 대해서만 주요 논의가 국한되었던지라 오늘날 운동사회가 논의하는 포괄적 차별금지법에 비해서는 근원적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金총재는 이날 오후 춘천 한림대 사회교육원 초청 강연에 앞서 미리 배포한 연설문에서 『우리 사회의 통합을 가로 막고 있는 중앙과 지방, 여성과 남성, 장애인과 비장애 인간의 사회, 경제적 불평등, 기회 불균등의 시정이 시급하다』면서 이같이 강조했다.", 1997년 6월 11일자 조선일보 보도.) 반면 노무현 정권에 이르러 '사회적' 차별금지법이란 새 수식을 얻게 된 차별금지법은 본격적으로 그의 대선 공약집에도 이름을 올린다. ("「사회적 차별금지법」을 제정하고 「국가차별시정위원회」를 설치하는 등 사회적 차별을 해소하기 위한 실질적인 법적·제도적 장치를 마련하겠습니다." 16대 대통령선거 핵심 공약 / 4대비전 20대 기본정책 150대 핵심 과제 - 당당한 대한민국 떳떳한 노무현, 새천년민주당 발행 자료 발췌) ▲ (좌) 「3금 법안」의 추진을 발표하는 김대중 새정치국민회의 총재 (새정치국민회의 김대중 총재, 정치보복-차별대우 금지법 제정 선언, 1997년도 9월 10일 KBS.) (우) 16대 대통령선거 핵심 공약 / 4대비전 20대 기본정책 150대 핵심 과제 - 당당한 대한민국 떳떳한 노무현 속 사회적 차별금지법 언급 페이지. 노무현 사료관.) 이은 2006년 7월. 국가인권위가 '차별금지법 권고법안'을 권고하면서 차별금지법은 다시 언급된다. ("「권고법안」이 금지의 대상으로 하는 차별의 사유는 성별, 장애, 나이, 인종, 학력, 성적지향 등 20개이며, 고용, 재화, 용역, 교통수단, 상업 시설, 토지, 주거시설의 공급이나 이용, 교육기관의 교육 및 직업훈련, 그리고 법령과 정책의 집행에 있어서 특정 개인이나 집단을 차별하는 공권력의 행사(行事) 또는 불행사(不行事)를 차별의 영역으로 하고 있다(안 제2조 제1항)." 『「차별금지법 권고법안」 권고』 중, 2006년도 7월 24일.) 해당 권고 법안에서 드디어 인종, 성적지향 등이 구체 언급되었다. 현시점 포괄적 차별금지법 제정 담론이 합의한 차별 금지의 대상까지 영역이 확장된 것이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2007년에는 법무부가 '차별금지법 제정안'을 실제 입법 예고하는 데에 이르른다. 그러나 2007년 10월 2일까지만 해도 입법 예고안에 포함되어있던 7가지 차별 항목들은 (성적 지향, 학력, 가족형태 및 가족상황, 병력, 출신국가, 언어, 범죄 및 보호처분 전력) 바로 다음 달인 11월 초 법제처로 넘어가며 삭제된다. 법무부는 “입법 예고 이후에도 전문 수정은 당연히 가능하고 마지막 국문회의를 거쳐 최종적으로 정부안이 제출되는 것”이라며 “공청회 후 일부의 반발을 계기로 검토한 것은 맞지만 애초 20개 항 모두 각각 열거해야 할 차별 사유로 보지 않았기 때문에 기준을 세워 재검토한 것” (누더기 된 소수자 보호 차별금지법, 2007년도 11월 20일, 주간경향) 이라 밝혔지만. 실상은 성적 지향 항목 명시에 대한 기독교 세력의 극렬 반대 때문이었다. 허울뿐인 허수아비로 전락한 노무현 정권의 '사회적' 차별금지법은 갑론을박에 휩싸였다가 2008년 5월 17대 국회가 종료하며 지난한 계류의 시간으로 들어선다. 차별금지법은 2008년, 2011년, 2012년에 각각 민주당, 민주노동당, 통합진보당 의원들을 주축으로 발의가 시도되나 모두 해당 국회의 회기 만료로 폐기되었다. 자본은 모든 주체에 대한 직/간접 차별을 법적 제재하는 포괄적 차별금지법 대신 일부 주체에 대한 차별만을 조정하는 개별적 차별금지법 제정으로 한국 노동자민중의 목줄을 살짝 풀어주었다. 한국 자본주의는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 「근로기준법」, 「고용정책 기본법」, 「파견근로자보호 등에 관한 법률」, 「남녀고용평등과 일·가정 양립 지원에 관한 법률」 등 노동관련법, 「여성발전기본법」, 「아동복지법」, 「장애인복지법」, 「장애인차별금지 및 권리구제 등에 관한 법률」, 「방송법」, 「교육기본법」[1] 을 차례로 입법시켰다. 하지만 이 모든 법이 제정되는 한편 국가인권위원회의 인력 조직 축소가 이명박 정부 대에 예고된 것은 단순 개별적 차별금지법의 제정이 자본과 정부의 '차별금지' 시늉에 불과함을 드러냈다. 그마저도 박근혜 정권에 들어서며 민주통합당을 주축으로 한 두 번의 차별금지법안이 철회되고, 차별금지법 제정은 7년의 암묵 속에 잠긴다. 그러던 2013년, 유엔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권리규약 위원회(UN Committee on Economic, Social and Cultural Right·사회권 위원회)가 10일(현지시간) 최종권고에서 결사의 자유 보장과 포괄적차별금지법 제정을 권고하며 차별금지법 논의는 마침내 암흑기에서 벗어나는 듯 보였다. 하지만 한국 자본과 정부는 UN의 권고에도 침묵 카드를 택했다. 촛불 이후 당선된 문재인 정부는 아예 자신의 공약집에서 '차별금지법'의 존재 자체를 지웠다. 문재인은 국가인권위법의 존재를 언급하며 부수적으로 포괄적 차별금지법을 제정할 필요가 없다고 입장을 밝혔으나. 두 법 간 차이와 한계는 너무나도 명백한 것이었다. ("그러나 「국가인권위원회법」상 차별금지조항에 대해서는, ① 법체계상의 관점에서 볼 때, 차별금지의 법적 근거가 조직법의 성격을 띠는 「국가인권위원회법」에 명시되어있다는 점13), ② 차별개념과 관련한 국제적 기준들은 대체로 직접차별과 함께 간접차별도 포함시키고 있음에 반해, 「국가인권위원회법」은 간접차별을 명시하지 않고 있다는 점, ③ 성희롱을 차별행위의 한 유형에 포함시키는 것은 주목할 만하지만, 인종에 따른 괴롭힘 등 차별적 괴롭힘을 차별행위의 한 유형에 포함시키지 않고 있다는 점, ④ 보복행위(차별행위에 대한 합법적 방어활동에 관여하였다는 이유로 당사자에게 가해지는 적대적 행위)도 차별행위의 한 유형에 포함 시키지 않고 있다는 점 등에서 「국가인권위원회법」을 일반적 차별금지법으로 이해하기는 어렵다." 2012년도 11월 20일, 법제처 게시 『사회적 취약계층에 대한 권리보호 및 지원체계 구축을 위한 법제 정비 연구』 인용) 연이은 법제정의 불투명화에도 이 법을 갈망하는 한국 노동자민중의 열기는 사그라들지 않았다. 2017년 기자회견을 통해 재출범한 차별금지법제정연대는 "나중으로 미룰 수 있는 인권은 없다"는 슬로건을 내세우며 포괄적 차별금지법 제정을 향한 투쟁의 도화선에 불을 붙였다. 2020년 6월, 정의당 장혜영 의원이 차별금지법을 대표 발의했고 국가인권위가 「평등 및 차별금지에 관한 법률 시안」을 제시했다. 2021년 5월에는 차별금지법제정연대가 주도해 입법을 촉구하는 10만명 서명 시민행동이 진행되었고, 같은 해 6월 민주당을 주축으로 「평등에 관한 법률안」이 제시되었다. ▲ 2021년 5월 24일 시작된 차별금지법 제정하자! 10만행동 국민청원. 해당 청원은 22일 만인 6월 14일, 10만 명의 서명을 달성했다. (『차별금지법 제정 국민동의청원 ‘10만 명’ 달성… 시민의 뜻 증명』, 2021년도 6월 14일 비마이너 보도 참조.) 그런가 하면 2021년, 20대 대선 후보 주자로 나선 윤석열 당시 국민의힘 대통령선거 후보는 포괄적 차별금지법 논의에 대한 입장을 묻는 질문에 '신중론'을 가장한 반대표를 던졌다. 문재인 대에 희망 고문으로 묵살되던 포괄적 차별금지법이 다시 강경 반대의 입장에 가로막힌 셈이었다. 윤석열은 아예 2021년 12월 14일 관훈토론회 석상에서 차별금지법을 신중히 검토해야 하는 니유는 "헌법의 해석 작업과 맞닿아 있기 때문”이라며, "(차별금지법은) 개인의 성향이 아니라 헌법에서 보장하는 자유와 평등을 어떻게 조화해야 하느냐에 관한 문제", "평등만 강조해서는 안 된다"[2]는 어처구니 없는 말을 쏟아냈다. 이후 당선된 그가 인권위원회 수장에 포괄적 차별금지법 제정 반대 의사를 표명해 온 안창호 전 헌법재판관을 기용한 것은 윤석열의 '신중 검토'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확인할 수 있는 계기였다. 거대양당 중 누가 정권을 잡느냐와 무관하게 차별금지법은 2006년 국가인권위 권고부터 2017년 소위 '촛불 정권'에 이르기까지 일관적으로 계류되었다. 박근혜를 퇴진시키고 당선된 문재인 정부가 포괄적 차별금지법을 외면했던 전철을 이재명 정부 역시 그대로 밟았다. 2025년 5월 18일 제21대 대통령선거 후보자 1차 토론회 권영국-이재명 간 포괄적 차별금지법 관련 주도권 토론은 처참한 수준이었다. (▶ 권영국/민주노동당: 우선 이재명 후보께 묻겠습니다.(…)이재명 후보께서는 차별금지법 제정에 동의하십니까? ▶ 이재명/더불어민주당: (…)차별금지법 관련해서는 차별이 어떤 특정 요소에 의해서 생기는 것, 방치하는 것 바람직하지는 않기는 한데. 방향은 저는 맞다고 보지만 지금 현재는 너무 현안들이 복잡한 게 많이 얽혀 있어서 이거로 새롭게 논쟁, 갈등이 심화되면 지금 당장 해야 할 일을 하기 어렵다는 말씀을 드립니다.[3])거대양당 중 누구도 포괄적 차별금지법을 자신들의 숙제로 생각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 한국 자본주의 정치 체계의 '선의'에 기대 차별금지를 쟁취할 수는 없다는 사실만이 박근혜-문재인-윤석열-이재명의 교체 주기 속에서 확정된 것이었다. 2. 재단되고, 이용되고, 압축되는 포괄적 차별금지 비정규직 보호법 제정으로 수많은 비정규직 노동자를 양산한 노무현 정권의 공약집에 "비정규직 노동자의 차별을 시정하"는 사회적 차별금지법 제정이 들어있었다는 블랙 코미디는 무엇을 시사할까? (좌) 2026년 3월 25일부터 4월 3일까지 개최된 진보당 손솔 의원실의 "차별금지법 제정을 위한 손솔의 작전회의 – 캠퍼스를 가다" 포스터. (우상단) 2026년 1월 12일 서울 여의도 국회 소통관에서의 차별금지법 발의 기자회견 중 손솔. (사진=뉴시스). (우하단) 광장대선연합정치시민연대-제정당 연석회의 공동 선언 발표 기자회견. 가장 좌측이 진보당 대선 후보자였던 김재연. (사진=뉴스핌). 그것은 설령 어떤 좋은 내용의 법이라 하더라도 자본주의 체제에 의해 얼마든지 그 실력과 힘을 상실할 수 있으며, 그저 겉 포장에 지나지 않는 낱말들의 연속으로 전락할 수 있다는 의미를 가진다. 아래로부터 조직된 노동자민중의 투쟁 압력이 아닌 상부 정치의 표현 과정으로 법이 제정될 때. 입법 투쟁은 자본의 말장난으로 전락해버린다. 입법을 향한 노동자민중의 절실함은 정치가들이 쓸, 좀 더 인간적인 가면의 재료로만 사용된다. 예시를 더 살펴보자. 대통령 선거 국면은 자본주의 정치 질서 하에서 각 정당의 본질이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시기 중 하나다. 이러한 시기에 이재명과의 단일화를 선택한 김재연 후보와 진보당은, 포괄적 차별금지법이라는 핵심 요구를 스스로 후퇴시키며 진보 4당 (조국혁신당, 진보당, 기본소득당, 사회민주당) 의 이재명 지지 선언문에서 이를 삭제하는 선택을 감행한 바 있다. 차별금지법 제정을 통해 존엄한 일상을 보장하겠다고, 자신을 지지한 당내 60% 이상의 지지자들 앞에 천명한 지 21일 만이었다. 이는 단순한 전술적 선택이 아니었다. 자본주의 정치 아래 차별과 착취를 벗어나고자 하는 노동자민중의 의지가 심지어는 진보 정당에 의해서조차 어떤 식으로 체제와 '합의'될 수 있는지를 보이는 훌륭한 일례였다. 물론 보다 중요한 것은 그 이후인 이재명 정부 출범 시기, 손솔을 앞세워 다시 차별금지법 발의를 내세웠던 진보당의 행보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은 진보당이 당 차원에서 포괄적 차별금지법 제정을 일관되게 추진할 의지와 전략을 갖고 있기 때문이라기보다, 오히려 특정 주체가—예시로 손솔로 대표되는 진보당식 청년정치—가 이를 자신들의 정치적 입지 강화 수단으로 활용하려는 시도로 볼 수 있다. 이들은 동세대 2030 청년세대의, 나아가 노동자민중이 밝히는 광장의 빛은 가지고 싶어 할지언정 그 빛을 어둠 속에 내놓기 위해 목숨 걸고 자본주의 체제에 맞서 싸우고 싶어 하지는 않는다. 이는 진보 운동이 거대 양당 중심의 자본주의 정치 구조에 편입될수록, 그리고 투쟁을 자본주의 체제 내부의 절차로 환원할수록 필연적으로 드러나는 한계이기도 하다. 결국 책임지고 싸워야 할 노동자민중이 법안 발의 자체를 투쟁의 전부로 오인하는 순간, 투쟁의 키를 자본주의 정치가들에게 쥐여주는 순간. 현실의 권력 관계를 뒤흔드는 힘은 사라지고 의회주의적 환상만이 남게 된다. 우리가 분명히 해야 할 것은, 포괄적 차별금지법은 결코 ‘누가 발의하느냐’의 문제가 아니라는 점이다. 그것은 노동자·민중의 집단적 힘에 의해 쟁취되어야 할 권리이며, 제도 정치의 흥정 대상이 될 수 없다. 중요한 것은 법 문구가 아니라, 차별을 재생산하는 가부장적 자본주의 구조에 맞선 현장의 투쟁이 어떻게 조직되고 확대되는가이다. 포괄적 차별금지법 제정은 이러한 투쟁의 산물로서만 의미를 갖는다. 과제는 분명하다. 제도 정치의 협상과 단일화에 기대를 거는 것이 아니라, 노동자·민중 스스로의 힘으로 투쟁을 조직하고 전면화하는 것이다. 이제 ‘작전회의’는 정치가의 국회가 아니라 노동자의 현장에서, 노동자·민중의 집단적 실천 속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3. 진정한 차별금지법 쟁취, 어떻게 할 것인가 전 세계적으로 구조적 차별은 심화하고, 청년세대 우경화에 가세하는 혐오 논리들은 가중되는 시기다. 그러나 작금의 세계에 절망만 있는 것은 아니다. 전국 비청소년 1,000명을 대상으로 2020년 6월 23일 국가인권위가 실시한 국민인식조사 결과를 보면 응답자의 88.5%는 차별 금지를 법제화하는 데 찬성했다. 2019년 3월 인권위가 실시한 국민인식조사에 반해 15.6%포인트 증가한 찬성 수치였다. 같은 응답자의 73.6%는 “동성애자, 트랜스젠더 등과 같은 성소수자도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존중받아야 하고 동등한 대우를 받아야 한다”고 답하기도 했다. 비청소년 10명이 있다고 할 때, 이 중 8명 또는 9명은 이미 포괄적 차별금지법 제정에 찬성한다는 셈이다. 자본과 권력은 '사회적 합의'를 말하지만, 최소한의 사회적 합의는 이미 6년도 전에 만들어졌다. 지금 필요한 것은 극우화된 혐오 논리를 이기고, 차별과 억압을 넘어설 수 있는 담대한 투쟁과 구상이다. 현장 노동자들에게서 그 구상의 가능성을 찾자고 제안한다. 포괄적 차별금지법 제정 운동이라는 명확한 이름에 묶이지 않았을 뿐. 현장의 조직된 노동자들은 이미 오랜 시간 가부장적 자본주의 사회의 구조적 차별에 맞서 싸워왔다. 비슷한 시기 현장에 입사한 남자 동기들이 모두 직책을 달고 과장, 부장이 되는데 여성이란 이유로 승진하지 못해 "OO 씨"라는 이름에 갇혀야 했던, 그래서 “제가 하는 업무보다 퀄리티가 높은 것이냐?”고 묻자 면접관에게 “그 남자 사원은 가장이니 이해하라” 는 말을 들어야 했던 KEC 여성 노동자들은 투쟁으로 2019년 인권위 차별 시정 권고를 받아냈다. 2024년 12월 "귀걸이가 길다"며 떼라고, "머리가 지저분하다"며 묶으라고 부당한 외모 통제를 가했던 한국마사회에 맞서서도 여성 노동자들은 싸웠다. 노동자의 화장법, 머리 모양, 손톱, 복장, 액세서리류까지 멋대로 하려 들던 사측은 조직된 노동자와 연대 시민들의 끈질긴 항의 끝에 고객 응대 매뉴얼에서 급하게 해당 사항을 제외했다. 공공부문 비정규직 정규직화 가이드라인이라는 이름으로 자회사를 통해 비정규직화를 강화하려했던 문재인 정부의 횡포에 맞서 싸웠던 톨게이트 여성 노동자들의 이야기도 마찬가지다. 여성이 다수였던 톨게이트 사업장 노동자들은 노동의 비정규직화를 강제하는 자본과 정부에 맞서 싸웠고, 투쟁으로 이겨냈다. 외에도 흑인·라틴계 학생이 절대 다수인 저소득 지역 학교에서 발생하는 구조적 교육 불평등 개선을 파업 요구안으로 내걸었던 2019년 시카고 교사 파업[4], 시애틀을 시작으로 LGBTQ+ 노동자 권리 보장을 전면에 내걸며 전개되었던 2023년 스타벅스 파업[5], 성소수자·여성·이주노동자 차별 금지 요구가 포함되어 있었던 2010년대 영국 공공부문 파업 등. 구조적 차별의 주 대상이 되는 사회적 소수자에 대한 연대를 위해 총파업 투쟁으로 나선 조직 노동자들의 사례 역시 있었다. 가부장적 자본주의 체제의 구조적 성차별에 맞선 국제 여성파업의 사례도 빼놓을 수 없다. 아이슬란드의 여성들은 유급노동과 무급 가사노동을 동시에 중단하는 총파업을 통해, 가사, 돌봄 노동을 여성에게 전가해 온 체제에 맞섰다. 스페인에서는 수백만 명의 여성들이 노동, 돌봄, 소비, 교육 전반을 멈추는 전면적 파업에 나서며 임금격차, 성폭력, 가부장적 질서에 맞선 집단적 저항을 조직했다. 스위스에서도 여성 노동자들은 동일임금과 노동의 저평가에 맞서 대규모 파업을 벌이며 구조적 성차별을 정면으로 문제 삼았다. 더해 이러한 투쟁들은 공통적으로, 비록 각 나름의 한계는 가지고 있을지언정 '아래로부터 조직된', '차별과 억압에 맞선' 노동자민중의 투쟁이라는 이상적 상의 현실 가능성을 보여준다. 가부장적 자본주의 체제 하에서 차별과 억압은 단일한 개개별의 것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자본주의 권력이 섬세한 가공을 거쳐 제조한 갈라치기의 기준은 서로 화합하며 유기적으로 노동자계급을 양분한다. 그렇기에 자본주의 생산을 멈춰 세우고 노동자민중의 물리적 압력을 무엇보다 생생히 전달할 수 있는 총파업 투쟁, 총파업 투쟁으로 대표되는 강력한 현장에서부터의 운동만이 우리의 답이 될 수 있다. 지금은 점으로 흩어져있는, 차별에 맞서 싸운 노동자들의 레퍼런스를 포괄적 차별금지법 제정 운동이라는 선으로 이어낼 선전과 선동. 전술이 필요하다. 만약 KEC의, 톨게이트의, 한국마사회의, 120만 민주노총과 그에 연대하는 민중들의 총파업 구호로 '포괄적 차별금지법 제정'이 쓰일 수 있다면 어떨까? 그 순간을 상상해보자. 투쟁의 힘으로 밀어 올리는 포괄적 차별금지법이 이상주의자의 낙관론이라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오늘날 유일한 문제는 우리가 어떻게 전진하느냐에 달려있다. [1] 목록은 2012년도 11월 20일, 법제처 게시 『사회적 취약계층에 대한 권리보호 및 지원체계 구축을 위한 법제 정비 연구』를 참조하였음 [2] 발언 전부 『윤석열 "차별금지법, 신중히 검토해야... 평등만 강조하면 안 돼"』, 2021년도 12월 14일, 한국일보 보도 인용. [3] 제21대 대통령선거 후보자토론회 초청 1차 (경제), 중앙선거방송토론위원회 자료 인용. [4] 『Chicago Teachers Demand Affordable Housing as Strike Begins - The union is negotiating on issues that go beyond those typically addressed through collective bargaining』, 2019년도 10월 17일. Truthout. [5] 『Starbucks workers plan strike over Pride displays, company accuses union of spreading false information』, 2023년도 6월 23일. PBS news. /* 스크롤 여백만 주고, 화면에는 안 보이게 */ .ftn-target { display: inline-block; /* 줄바꿈 안 생김 */ width: 0; height: 0; scroll-margin-top: 200px; } document.addEventListener("DOMContentLoaded", function () { // name="_ftn1", name="_ftn2", name="_ftnref1" ... 전부 대상 document.querySelectorAll('a[name^="_ftn"]').forEach(function(a) { var idValue = a.getAttribute("name"); // 이미 같은 id의 요소가 있으면 또 만들지 않음 if (!document.getElementById(idValue)) { var span = document.createElement("span"); span.id = idValue; span.className = "ftn-target"; a.parentNode.insertBefore(span, a); } }); }); /* 본문 각주 번호 + 아래쪽 각주 번호 색 지정 */ a[href^="#_ftn"] sup, a[href^="#_ftnref"] sup { color: #BF202D; } /* 밑줄이 보기 싫으면 */ a[href^="#_ftn"], a[href^="#_ftnref"] { text-decoration: none; } /* 마우스 올렸을 때 살짝만 강조하고 싶으면 (선택) */ a[href^="#_ftn"]:hover, a[href^="#_ftnref"]:hover { text-decoration: underline; } /* 페이지 전체가 오른쪽으로 넘치지 않게 */ html, body { max-width: 100%; overflow-x: hidden; } /* 본문 영역 폭 강제 고정 + 긴 단어/문장도 줄바꿈 */ #bo_v_con, .bo_v_con, .cke_editable, article { max-width: 100%; overflow-wrap: break-word; word-wrap: break-word; /* 구형 브라우저용 */ } /* 워드에서 붙은 이미지/표가 화면 밖으로 안 나가게 */ #bo_v_con img, #bo_v_con table, .bo_v_con img, .bo_v_con table, .cke_editable img, .cke_editable table, article img, article table { max-width: 100% !important; height: auto; } /* 워드가 p, span에 폭을 박아놓은 경우 강제로 해제 */ #bo_v_con p[style*="width"], #bo_v_con span[style*="width"], .bo_v_con p[style*="width"], .bo_v_con span[style*="width"], .cke_editable p[style*="width"], .cke_editable span[style*="width"], article p[style*="width"], article span[style*="width"] { width: auto !important; max-width: 100% !important; } /* 기본 blockquote 스타일 */ blockquote { border-left: 4px solid #c0392b; /* 사이트 분위기와 맞는 붉은 계열 */ padding: 12px 18px; margin: 20px 0; background: #fafafa; font-style: normal; color: #333; line-height: 1.6; } /* blockquote 안의 p 태그 정렬 */ blockquote p { margin: 0 0 10px 0; text-align: justify; } /* 마지막 p 태그 여백 제거 */ blockquote p:last-child { margin-bottom: 0; } -
[한노운사 연재 11회] 3부 패배와 퇴보 (1998-2008) [시대배경] 신자유주의 구조조정1998년부터 2002년까지 구조조정과 정리해고를 앞세운 자본가들의 신자유주의 대공세에 맞서 노동자들이 거센 반격에 나섰다. 노동자들은 아래로부터 역동적인 투쟁들을 만들어냈지만, 취약한 지도력을 극복하지 못하고 패배했다. 투쟁의 패배와 민주노조운동의 후퇴는 비정규직의 대대적인 확산으로 이어졌다. 그런데 자본가들의 계획과 달리 비정규직에서도 민주노조운동이 시작됐고, 2003~07년 비정규직 투쟁이 거세게 타올랐다. 2004~06년에는 비정규직 입법을 둘러싼 대회전이 펼쳐지기도 했다. 그러나 민주노총의 주력인 대기업 정규직이 계급적 전망을 상실하고 타협적·관료적 경향에 깊이 빠져들면서 계급적 단결투쟁으로 뒷받침되지 못한 비정규직의 도전은 패배를 거듭해야 했다. 자본가들의 대공세에 맞선 노동자들의 대대적인 반격은 광범한 노동자들 속에서 노동자 정치세력화의 열망을 불러일으켰고 민주노동당을 등장시켰다. 하지만 민주노조운동의 위기를 정치적인 영역에서 확대재생산한 민주노동당은 노동자계급의 미래를 열 수 없었다. 이전 편 보기 3부 패배와 퇴보 (1998-2008) [시대배경] 신자유주의 구조조정 [1] 구조조정과 정리해고에 맞선 투쟁 [2] 민주노조운동의 후퇴와 비정규직 확산 [3] 비정규직 문제를 둘러싼 대결 [4] 민주노조운동의 위기 [5] 노동자 정치세력화 열망과 민주노동당 IMF 외환위기는 한국 자본주의 전체를 뒤흔든 큰 충격이었다. IMF를 배후에 둔 초국적 금융자본은 한국 자본주의의 전면적인 구조조정을 요구했다. 한국 자본가들은 신자유주의 세계 질서를 헤쳐 나갈 경쟁력을 획득하기 위해 고강도 착취체제를 구축하는 데 이 압력을 이용했다. 대량 정리해고와 비정규직의 급격한 확산이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의 핵심 수단이었다. 1)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을 이끈 김대중 정권 김대중 정권은 1998년 이후 5년 동안 금융 개혁, 기업 개혁, 공공부문 개혁, 노사관계 개혁 등의 이름 아래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을 거침없이 단행했다. 김대중 정권에 의한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은, 한편으로 국가와 독점재벌 주도 아래 발전해 온 한국 자본주의를 초국적 자본이 주도하는 신자유주의 세계 질서의 유기적인 일부로 재편하는 것이면서, 동시에 노동시장 유연화와 노조 무력화를 통해 노동자계급에 대한 착취와 억압을 새롭게 강화하는 것이었다. 그 결과, 한국의 경제와 사회 전반은 불과 몇 년 사이에 이전에 경험하지 못한 엄청난 변화를 겪게 됐다. 김대중은 IMF를 앞세운 초국적 금융자본에게 한국의 금융시장을 개방하겠다고 취임 전부터 약속했다. 외국 금융기관이 국내 금융기관을 인수할 수 있도록 법을 개정했다. 외국 자본을 끌어들이기 위해 각종 규제를 철폐하고 외국인투자촉진법을 제정했다. 시중은행 8개 가운데 한미은행, 외환은행, 서울은행, 제일은행 4개를 외국 자본에 팔아 넘겼다. 정부가 공적 자금을 쏟아 부어 살려 놓은 은행 지분을 싼 값에 사들인 외국 자본은 이후 주가 시세 차익으로 엄청난 돈을 챙겼다. 외환은행을 인수한 론스타는 2년 만에 5조 원, 제일은행을 인수한 뉴브리지캐피탈은 5년 만에 1조 2천억 원, 한미은행을 인수한 칼라일은 3년 만에 7천억 원을 벌어들였다. 외국인의 상장주식 투자한도를 폐지하고 기업 인수·합병을 허용했다. 그 결과 상장주식에 대한 외국 자본의 보유 지분이 1991년 3.3%, 1997년 14.6%에서 2004년 말에 42%로 증가했다. 한국은 헝가리(73%)와 멕시코(46%)에 이어 세계에서 세 번째로 외국 자본의 주식보유 비중이 높은 나라가 됐다. 2005년 4월 기준 삼성전자(54%), 포스코(66%), 국민은행(78%), SK텔레콤(48%), 현대자동차(48%), KT(49%), 에스오일(48%) 등 한국의 주요 대기업에서 외국 자본이 주도적 지위를 점하게 됐다. 김대중 정권은 부실 금융기관 구조조정도 대대적으로 단행했다. 시중은행 3개, 지방은행 2개, 종금사 17개, 증권사 7개, 보험사 4개가 퇴출됐다. 퇴출된 금융기관들은 대부분 다른 금융기관들에 의해 인수·합병됐다. 김대중 정권은 ‘부실기업 정리’ 명목으로 대대적인 기업 구조조정 또한 단행했다. 30대 재벌 가운데 16개가 무너졌다. 쓰러진 기업을 다른 기업이 헐값에 인수하면서, 5대 재벌이 더욱 비대해졌다. 상당수 기업은 외국 자본의 먹이가 됐다. 인수·합병 과정에서는 통상 20~30%의 인력감축이 진행됐다. 쓰러지지 않은 기업들도 일시적인 경영위기가 발생했다거나 또는 경영위기가 예상된다는 이유만으로도 대규모 정리해고를 속속 단행했다. 부실 금융기관과 부실기업 구조조정 과정에서 155조 원의 ‘공적자금’이 투입됐다. 이것은 해당 금융기관과 기업을 인수한 측에게 천문학적인 특혜가 주어졌음을 뜻했다.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의 결과 주주 자본주의, 즉 주식 가치를 높이기 위해 단기 수익을 극대화하는 경영 시스템이 일반화했다. 이것은 인수·합병과 구조조정의 일상화를 뜻했다. 정리해고, 외주화, 분사, 비정규직화, 연봉계약제 등으로 노동자들이 극심한 고용불안과 임금저하로 내몰리는 동안, 구조조정을 진두지휘한 경영진들은 연봉 인상과 스톡옵션으로 떼돈을 버는 일들이 자연스러운 일상이 됐다.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은 세계화의 전면적 수용을 뜻했다. 세계시장의 피 말리는 생존경쟁이 강요되면서 기업들 사이의 명암도 극명하게 갈라졌다. 삼성전자와 현대자동차처럼 세계적 경쟁력을 가진 대기업들은 세계 자본주의 질서 속에서 또 하나의 초국적 자본으로 성장하며 마음껏 세계를 질주하게 됐다. 반면 내수에 의존하거나 부품을 생산하는 중소기업들은 세계화의 그늘로 전락하여 대기업에게 수직 하청계열화하지 않고서는 생존을 도모하기 어렵게 됐다. 김대중 정권은 공공부문 구조조정도 대대적으로 단행했다. 한국통신, 포항제철, 한국중공업, 담배인삼공사 같은 공기업들을 매각하여 민영화(사유화)했다. 전력산업과 철도산업은 분할매각 방식이 추진됐다. 전력산업의 경우 화력발전 부문을 6개 발전회사로 재편한 뒤 분할매각을 추진했고, 철도산업의 경우 철도운영을 시설관리와 분리하여 분할매각을 추진했다. 그러나 두 경우 모두 노조의 반대 투쟁에 가로막혀 ‘시장형·준시장형 공기업’ 상태에서 멈춰 섰다. 가스와 공항관리 부문도 비슷하게 멈춰 섰다. 지방자치단체들은 상하수도, 도로유지보수, 공원관리, 환경미화 등의 업무를 대대적으로 민간에 위탁하고 용역업체로 전환했다. 이와 같은 민영화(사유화) 과정에서 공공부문 노동자들이 대규모로 정리해고 당했다. 1998~2000년에만 공공부문 노동자 13만 1천 명이 감축됐다. 김대중 정권은 노동시장 유연화도 대대적으로 추진했다. 1998년 2월 정식 출범 이전에 노사정위원회를 통해 정리해고제와 근로자파견제의 조기 도입을 관철시켰다. 정리해고제 도입 직후이자 IMF 외환위기의 충격이 가장 컸던 1998년에는 1년 동안 직·간접 형태의 정리해고가 334만 6천 건 발생했다. 세부적으로 살펴보면, ‘경영상 해고’ 즉 직접적인 정리해고에 따른 실업이 85만 건, ‘직장의 휴·폐업’에 따른 실업이 65만 2천 건, ‘일거리가 없어서 및 사업경영 악화’에 따른 실업이 184만 4천 건이었다.[1] 직·간접적 정리해고로 쫓겨난 노동자들은 대부분 고용불안과 저임금에 시달리는 비정규직이 됐다. IMF 외환위기를 거치는 3~4년 동안 전체 노동자 가운데 비정규직이 차지하는 비율이 40%에서 56%로 급증했다. 비정규직 가운데 70%는 여성이었다. 정규직과 비정규직을 망라하여 세계 최장의 노동시간이 유지되는 가운데, 노동강도가 더 증가했고, 현장통제도 더 심해졌다. 현장에 버티고 있는 노동자들도 일상적인 고용불안에 시달렸다. 노조탄압이 심해지면서 노동자들이 투쟁으로 획득한 단체협약이 휴지조각이 되는 사례도 적지 않았다. 신종 노조탄압 수단으로서 손해배상·가압류가 김대중 정권의 독려 속에서 널리 사용돼 나갔다.[2] 청년들의 취업 환경도 급격히 악화됐다. 외환위기 직후 청년 취업인구의 77%가 비정규직이 됐고, 청년실업자가 전체 실업자의 43%를 차지하게 됐다. 1997년 211조 원이던 가계부채가 2002년 424조 원으로 급증했다. 인위적인 내수 확대를 위해 김대중 정권이 추진한 신용카드 남발 정책까지 겹치면서 2004년 신용불량자 수가 400만 명에 이르렀다. 신용불량자, 비정규직, 실업자, 조기 퇴직자, 장애인, 영세상인 등을 중심으로 극빈층이 크게 증가했으며, 중간계급의 몰락이 빠르게 전개됐다. 1998년 이후 김대중 정권이 밀어붙인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으로 노동자·민중의 삶은 벼랑으로 내몰렸다. 노동자·민중이 IMF 외환위기의 부담을 고스란히 짊어지는 동안, 정작 그 위기를 불러온 자본가계급은 어느 때보다 막대한 부를 거머쥐었고 세계적 수준의 고강도 착취체제를 구축해 냈다. 2) 신자유주의 질서를 안착시킨 노무현 정권 2003년 이후 노무현 정권 시기에도 신자유주의 공세가 거침없이 계속됐다. 한국 자본주의가 1990년대 중반을 분기점으로 이전의 성장기를 지나 세계 자본주의 전반의 흐름과 마찬가지로 위기와 쇠퇴로 허덕이게 되자, 한국 자본가들은 전 세계 자본가들과 마찬가지로 정리해고, 비정규직화, 임금복지삭감, 노동권축소 등의 파상적인 공세를 노동자들에게 계속해서, 아니 시간이 갈수록 더욱 거세게 퍼부었다. 그런데 김대중 정권 시기 대량 정리해고 물결이 여러 차례 한국 사회를 격렬하게 뒤흔들었던 것과 달리, 노무현 정권 시절에는 대부분의 구조조정이 일상적인 형태로 잘게 쪼개져 상시적으로 진행됐다. 그래서 겉으로는 큰 이슈로 잘 드러나지 않았지만, 실제로는 김대중 정권 시기 이상으로 신자유주의 공세가 더욱 날카롭고 집요하게 펼쳐졌다. 노무현 정권은 신자유주의 공세를 더욱 진전시킬 수 있도록 법률과 제도를 보완했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것으로는 △비정규직 관련법 제정·개정 △이른바 ‘노사관계 선진화’ 로드맵에 입각한 노동관계법 개정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협상 추진과 타결이 있었다. IMF 외환위기 이후 모든 산업에서 자본가들은 엄청난 숫자의 일자리를 하청화(분사화)하거나 계약직·임시직 등으로 대체했다. IMF 외환위기 이전에 전체 노동자의 40% 정도였던 비정규직 비율은 노무현 정권이 들어설 무렵 60% 수준으로 치솟았다. 심각한 차별과 초과착취로 고통당하는 비정규직의 문제가 불과 몇 년 만에 가장 심각한 사회적 의제로 떠오른 상황에서 노무현 정권이 출범했다. 대통령 선거 때 “비정규직의 눈물을 닦아주겠다”던 노무현의 공약은 2004년 시작된 비정규직 관련 입법 논의로 이어졌고, 2006년 11월 30일 비정규직 관련 3개 법안이 국회를 통과하는 것으로 마무리됐다. 그런데 이렇게 통과된 법안들은 △2년 이내 계약직 사용을 광범하게 허용하는 기간제법 제정 △2년 초과 파견노동자에 대해 ‘직접고용 간주’에서 ‘직접고용 의무’로 그 권리를 약화시키는 파견법 개정 △관련 노동위원회법 개정 등이 주요 골격이었다. 노무현 정권은 비정규직 입법의 추진 목적으로 ‘차별 시정’을 내세웠지만, 실제로는 자본가들이 더욱 자유롭고 광범하게 비정규직을 사용할 수 있도록 법적 기반을 마련해 주는 것이었다. 결과적으로 노무현 정권을 거치는 동안 비정규직의 처지는 전혀 개선되지 않았고, 오히려 더욱 암울해졌다. 2003년 이른바 ‘사용자 대항권’ 논란으로부터 시작된 ‘노사관계 선진화’ 로드맵 논의는 2006년 9월 11일 한국노총·경총·대한상의·노동부·노사정위원회 5개 기관 대표자들의 ‘노사관계 선진화를 위한 노사정 대타협 선언’으로 이어졌다. 노사정 대표 5자가 합의한 주요 내용은 △복수노조 허용과 전임자임금지급 금지 3년 유예 △필수공익사업장에 대해 직권중재제도를 폐지하는 대신 필수유지업무제도를 도입하여 50%까지 대체근로 허용 △부당해고 처벌 조항 삭제 △정리해고 사전 협의기간을 60일에서 50일로 단축 등이었다. 이 합의에 따라, 2006년 12월 30일 관련 노동관계법이 개정됐다. 2006년 1월 한미 FTA 협상의 본격 추진을 선언한 노무현 정권은 1년 남짓한 협상을 거쳐 2007년 4월 2일 타결에 이르렀다. 한미 FTA 협상의 본질은 한국의 재벌들이 미국 시장에 보다 자유롭게 접근할 수 있는 기회를 얻는 대신, 의료민영화 등 미국 자본이 자신의 돈벌이를 위해 한국의 법과 제도를 마음껏 유린할 수 있도록 제도적 기반을 열어주는 데 있었다.[3] IMF 외환위기로 30대 재벌 가운데 16개가 쓰러질 정도로 위기를 겪었던 한국 재벌들은 김대중 정권 시기를 지나는 동안 정권의 도움 아래 노동자에게 고통을 전가함으로써 위기를 수습할 수 있었다. 그렇게 전열을 정비한 한국 재벌들은 노무현 정권 시기 동안 삼성전자와 현대자동차를 앞세워 세계적인 초국적 기업으로 발돋움했다. 이들의 눈부신 약진은 무엇보다 비정규직에 대한 초과착취와 수직 종속된 납품업체 노동자들에 대한 초과착취[4]를 통해 엄청난 이윤을 뽑아낸 데서 비롯됐다. 재벌들은 세계화의 흐름을 타고 해외시장을 겨냥하며 세계 곳곳으로 진출해서 값싸고 고분고분한 노동력을 끌어 모아 현지공장을 설립했다. 재벌들의 신규 투자는 해외로 집중됐다. 일부 재벌 계열사들과 상당수 중소기업은 싼 임금을 찾아 국내 공장을 폐쇄하고 중국과 동남아시아로 빠져 나갔다. 여기에 중국이 초국적 자본의 해외직접투자를 독보적으로 빨아들이면서 한국에는 초국적 자본의 신규 투자가 거의 사라졌다. 이 모든 과정은 노무현 정권 시절 ‘제조업 공동화’ 문제가 사회적 의제로 떠오르게 했다.[5] 한국 기업은 생산 비용을 줄이고 소비 시장을 개척하기 위해 아시아, 북미, 특히 중국으로 생산기지를 이전하고 있다. 투자는 주로 제조업과 도소매업에 집중돼 있고, 투자 방식은 독자(獨資)나 지분통제를 선호한다. 최근 몇 년간 한국 삼성전자, LG전자, 현대자동차 등 유명 기업이 대(對) 중국 투자를 늘리면서 한국의 대중 투자액은 어느 정도 확대됐지만 기술 양도에서는 여전히 유보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다. 현재, 정부, 기업, 경제단체, 연구기관, 국민 등 한국의 각계각층에서는 한국 산업, 주로 제조업이 해외, 특히 중국으로 대거 이전하는 ‘제조업 공동화’를 걱정하고 있다. 수많은 기업의 해외 이전으로 국내 고용 기회가 줄어들 뿐 아니라 한국의 선진기술이 다른 나라, 특히 중국으로 유출될 것을 우려하고 있다. 한국 정부는 ‘제조업 공동화’ 대응 방안을 적극적으로 모색하고 있다. 그러나 기업은 노사관계, 생산 원가, 시장 용량 등 각종 객관적인 여건의 제약과 시장경제 원리에 따라 경제적 이익을 고려한 선택이기 때문에 생산지 이전 추세는 줄지 않고 있다. 과거 한국 대기업이 중국으로 제조업을 이전한 것은 단순히 생산 원가를 줄이려는 목적에서였지만 지금은 중국의 거대한 소비 시장을 겨냥해서다. 또한 세계 500대 기업 대부분이 이미 중국에 진출해 중국을 기점으로 전 세계 마케팅과 R&D 네트워크를 구축했다. … 한국 기업의 해외투자는 당분간 중국에 몰리겠지만 중국이 거시조정 정책을 시행하고 에너지/자원 부족이 심화되며 동부지역 인건비가 상승하게 되면 한국 기업은 향후 중국을 기점으로 남아시아, 동남아시아로 생산시설을 이전할 것이다.[6] 이렇게 제조업 고용이 상대적으로 감소한 대신, 서비스 부문의 고용은 조금씩 늘어났다. 그런데 서비스 부문의 일자리는 제조업보다 비정규직 비율이 더 높았다. 결국 모든 산업을 통틀어 볼 때, 노무현 정권 시기 일자리가 거의 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새롭게 만들어진 일자리의 대부분은 비정규직이었다. 비정규직의 급격한 확산이 불러온 노동자계급의 구매력 감소와 그에 따른 소비위축, 그리고 국내 신규투자 부진으로 내수경기는 김대중 정권 시기 후반부터 구조적인 침체에 빠져들었다. 내수경기를 일으키려고 부양책이 사용됐지만, 일시적인 효과에 그칠 뿐 그 후유증이 더 컸다. 특히 김대중 정권 후반기에 내수 진작책으로 사용된 신용카드 남발 정책은 일시적으로 소비 붐을 일으켰을 뿐 결국 400만의 신용불량자를 일거에 양산하면서 노무현 정권으로 하여금 더 큰 소비위축 위기와 씨름하도록 만들었다. 노무현 정권은 공식적으로는 인위적인 내수 진작책을 사용하지 않는다고 했지만, 실제로는 ‘국토 균형발전’을 앞세운 경제특구·혁신도시·기업도시·행정도시 등의 온갖 개발 사업을 추진하면서 이를 내수 진작책으로 사용했다. 내수 위축 속에서 신규투자를 꺼리던 유휴자본들은 전국 곳곳에 개발 붐을 일으키며 부동산 거품으로 상당한 수익을 챙겼다. 부동산 거품으로 벼락부자들이 속출하면서 고급 소비시장을 중심으로 내수 경기가 어느 정도 활성화되기도 했다. 그러나 부동산 개발로는 내수 위축을 해결할 수 없었다. 무분별한 난개발은 환경파괴와 민중생존권 박탈을 초래했다. 이처럼 노무현 정권이 말로는 부동산 가격을 잡겠다고 하면서 실제로는 대대적인 부동산 개발에 나선 결과 수도권을 중심으로 땅값·집값이 엄청난 규모로 상승했다. 노무현 정권은 뒤늦게 종합부동산세, 분양가상한제, 투기과열지구 등 규제정책을 실시했지만 부동산 폭등을 진정시킬 수 없었다. 그 와중에 고위공직자 대다수가 부동산 차익으로 재산을 크게 불린 것까지 폭로됐다. 노무현 정권 시기 부동산 가격 폭등과 그 과정에서 보여준 정권의 무능과 위선은 정권의 지지 기반을 무너뜨리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2005년, 전체 토지의 31%를 상위 1%가, 59%를 상위 5%가 독점했다. 2006년 서울 강남에는 한 채에 수십억 원씩 하는 아파트가 즐비하고 심지어 평당 5천만 원이 넘는 아파트가 등장하는데, 다른 한편에서는 움막, 동굴, 판잣집, 공사장 임시막사 등 주택의 요건을 갖추지 못한 거주 공간에 전국적으로 무려 11만 명이 살고 있었다. 노무현 정권 시기 한국 노동자들의 삶은 OECD에서 가장 열악한 수준이었다. 세계 최장의 노동시간, 세계 최고의 자살률, 세계 최저의 출산율이라는 세 가지 통계는 노동자들의 삶을 압축해서 보여주었다. 2005년 한국 노동자들의 연간 실질 노동시간은 2,351시간(주당 45.21시간)으로 OECD 국가들 가운데 여전히 단연 최장시간을 기록했다. 한국 노동자들은 OECD 평균인 1,670시간보다 무려 40%나 더 일했으며, 2위 폴란드의 1,970시간보다도 381시간이나 더 일했다.[7] 한국의 자살률은 1994년 인구 10만 명 가운데 9.5명에 불과했으나, 1998년 18.6명으로 급증했다가 2000년 13.7명으로 소폭 하락한 뒤 다시 상승해 2005년 24.8명으로 정점을 찍으면서 OECD 1위를 기록하기 시작했다. 불과 한 세대 전까지 ‘둘만 낳아 잘 기르자’는 가족계획운동을 정부가 벌일 만큼 고출생 사회였던 한국은 IMF 외환위기 이후 급격히 저출생 사회로 변모했다. 1995년 72만 명을 기록했던 한국의 출생아 수는 이후 몇 년 사이에 빠르게 줄어들어 2001년 56만 명, 2002년 50만 명을 기록한 뒤, 2005년 44만 명으로 급감했다.[8] 2007년 한국의 합계출산율은 1.19명으로, 전 세계 155개 국가 가운데 홍콩(0.95명), 우크라이나(1.14명), 슬로바키아(1.14명)에 이어 4위를 기록했다.[9] IMF 경제위기 이후 자살률과 출산율의 급격한 변화는 신자유주의 공세를 통해 한국 사회가 얼마나 빨리 ‘살고 싶지 않은 사회’로 치달아 갔는가를 단적으로 보여주었다. 이처럼 노동자들의 삶이 급격히 악화된 반면 자본가들은 더욱 엄청난 부를 누렸다. 한국의 자본소득분배율은 1980년대 18.1%, 1990~96년 18.4%를 기록했으나 IMF 외환위기를 거치며 엄청난 속도로 늘어나 2004년에 31.6%를 기록했다.[10] 반면 1980년대 81.9%, 1990~96년 81.6%였던 노동소득분배율은 2004년 68.4%에 그쳤다. 2000년부터 2004년까지 5년 동안 노동자들의 임금과 소규모 자영업자들의 소득증가율은 2.4%로 평균 경제성장률 5.6%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한 반면, 자본의 소득증가율은 무려 18.9%로 경제성장률의 세 배를 웃돌았다. 그 결과 최상위 계층 10%와 최하위 계층 10%의 소득격차는 2001년 8.2배에서 2005년 9.5배로 크게 벌어졌다. 2006년 사교육비를 포함하여 상위 10%가 지출하는 교육비는 하위 10%가 지출하는 교육비의 10배에 달하게 됐다. 사망위험·사망확률·평균수명 등에서 학력간·지역간·계급간 격차 또한 나날이 벌어졌다. 노무현 정권은 노동자·민중의 저항에 매우 폭력적으로 대응했다. 노무현 정권 시기에 구속된 노동자 수는 1,052명으로 노태우 정권 시기(1,973명)보다는 적었지만, 김영삼 정권 시기(632명)와 김대중 정권 시기(892명)보다 많았다. 2005년 11월 노무현 정권의 이중곡가제 폐지 추진에 맞서 서울 여의도에서 열린 농민시위 과정에서 두 명의 농민이 경찰의 방패에 맞아 목숨을 잃었다. 2006년 7월에는 포항에서 열린 노동탄압 규탄대회에서 한 노동자가 경찰의 진압봉과 방패에 맞아 사망했다. 2006년 5월 용산 미군기지를 평택으로 이전하는 과정에서 땅과 집을 강제수용 당하게 된 대추리 주민들의 반대시위에 1만 4천 명의 군대와 경찰이 투입돼 1천 명의 시위대를 폭력적으로 진압했다. 시위 진압에 군대를 동원한 것은 1980년 광주민중항쟁 이후 처음이었다. 다음 편 보기 [1] 최강식, 1999, 「우리나라 기업의 고용조정 실태 - 1998년 하반기 실태조사를 중심으로」, 4쪽. [2] 손배·가압류는 이전 시기에도 노동자를 탄압하는 수단으로 활용됐다. 하지만 김대중 정권은 손배·가압류를 노동자 탄압 수단으로 활용하라고 대대적으로 자본가들을 독려하고 나섰다는 점에서 이전 정권들과 달랐다. 이것은 김대중이 1980년대 초반 미국에 망명해 있는 동안 한창 신자유주의 공세의 초입부에 있던 미국 자본가계급이 어떻게 손배·가압류를 활용해 노동자를 탄압하는가를 보고 배운 데서 연유했다. 노동자들이 감옥 가는 것보다 손배·가압류로 집이 날아가고 주변의 삶이 파탄나는 것을 더 힘들어 한다는 걸 포착해서 악랄하게 활용한 것이었다. [3] 한미 FTA는 이후 2007년 6월 29일 1차 추가협상, 2010년 12월 4일 2차 추가협상을 타결한 뒤, 2011년 10월 21일 미국측 비준, 11월 22일 한국측 비준을 거쳐 2012년 3월 15일에 발효됐다. 그런데 2025년 4월 미국의 트럼프 행정부가 전 세계를 상대로 ‘보복관세’를 발표하면서 한국에는 25%를 적용하겠다고 했는데, 이는 사실상 한미 FTA를 파기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4] 1990년대 중반을 분기점으로 한국 자본주의가 쇠퇴기에 접어들면서 이윤율이 전반적으로 하락하자, 재벌들은 대다수 중소기업들을 이전보다 훨씬 더 심하게 수직하청계열구조 속으로 밀어 넣고서 거듭되는 납품단가인하 등을 통해 그들의 작은 이윤마저 점점 더 강하게 쥐어짜 강탈했다. 이것은 산업 전반에서 거의 모든 중소기업들이 비정규직 비율을 점점 더 심하게 늘리거나 중국 등으로 공장을 이동하도록 강제했다. [5] 노무현 정권 시기 자본가들은 ‘너무 강력하고 전투적인 노조’ 때문에 ‘제조업 공동화’가 발생했다고 주장했다. 자본가들은 제조업 위축의 실체를 과장하며 ‘제조업 공동화 노조 책임론’을 유포했다. 하지만 한국의 제조업이 위축된 것은 노조가 아니라 자본가들의 세계화 전략에 그 책임이 있었다. [6] 중국 신화사(新華社), 2007/05/18, 「韓 기업 해외투자, 당분간은 중국에 집중될 것」, <중국전문가포럼(CSF)>. [7]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2006/07/21, 「고용전망 보고서」. [8] 이후 한국의 출생아 수는 2015년까지 44만~50만을 오르내리다가 2016년부터 다시 급감하기 시작해 2017년 36만, 2020년 27만, 2023년 23만, 2024년 24만을 기록했다. [9] 유엔인구기금(UNFPA), 2007/06/27, 「세계인구 현황보고서」. 합계출산율은 ‘가임 여성이 평생 낳는 아이 수’를 뜻하며, 2007년 전 세계 평균은 2.56명, 선진국은 1.58명, 개발도상국은 2.79명, 저개발국은 4.80명을 기록했다. 한국의 합계출산율은 2018년 이후 1.0 미만으로 떨어졌으며, 2023년 0.72, 2024년 0.75로 세계 최저를 기록했다. [10] 한국은행, 2005/01/20, 「가계와 기업의 성장양극화 현상 : 현황·원인·대책」. 자본소득분배율은 국내총생산(GDP)에서 자본 소유자가 가져가는 배당·이자 등이 차지하는 비중을 말한다. /* 스크롤 여백만 주고, 화면에는 안 보이게 */ .ftn-target { display: inline-block; /* 줄바꿈 안 생김 */ width: 0; height: 0; scroll-margin-top: 200px; } document.addEventListener("DOMContentLoaded", function () { // name="_ftn1", name="_ftn2", name="_ftnref1" ... 전부 대상 document.querySelectorAll('a[name^="_ftn"]').forEach(function(a) { var idValue = a.getAttribute("name"); // 이미 같은 id의 요소가 있으면 또 만들지 않음 if (!document.getElementById(idValue)) { var span = document.createElement("span"); span.id = idValue; span.className = "ftn-target"; a.parentNode.insertBefore(span, a); } }); }); /* 본문 각주 번호 + 아래쪽 각주 번호 색 지정 */ a[href^="#_ftn"] sup, a[href^="#_ftnref"] sup { color: #BF202D; } /* 밑줄이 보기 싫으면 */ a[href^="#_ftn"], a[href^="#_ftnref"] { text-decoration: none; } /* 마우스 올렸을 때 살짝만 강조하고 싶으면 (선택) */ a[href^="#_ftn"]:hover, a[href^="#_ftnref"]:hover { text-decoration: underline; } /* 페이지 전체가 오른쪽으로 넘치지 않게 */ html, body { max-width: 100%; overflow-x: hidden; } /* 본문 영역 폭 강제 고정 + 긴 단어/문장도 줄바꿈 */ #bo_v_con, .bo_v_con, .cke_editable, article { max-width: 100%; overflow-wrap: break-word; word-wrap: break-word; /* 구형 브라우저용 */ } /* 워드에서 붙은 이미지/표가 화면 밖으로 안 나가게 */ #bo_v_con img, #bo_v_con table, .bo_v_con img, .bo_v_con table, .cke_editable img, .cke_editable table, article img, article table { max-width: 100% !important; height: auto; } /* 워드가 p, span에 폭을 박아놓은 경우 강제로 해제 */ #bo_v_con p[style*="width"], #bo_v_con span[style*="width"], .bo_v_con p[style*="width"], .bo_v_con span[style*="width"], .cke_editable p[style*="width"], .cke_editable span[style*="width"], article p[style*="width"], article span[style*="width"] { width: auto !important; max-width: 100% !important; } /* 기본 blockquote 스타일 */ blockquote { border-left: 4px solid #c0392b; /* 사이트 분위기와 맞는 붉은 계열 */ padding: 12px 18px; margin: 20px 0; background: #fafafa; font-style: normal; color: #333; line-height: 1.6; } /* blockquote 안의 p 태그 정렬 */ blockquote p { margin: 0 0 10px 0; text-align: justify; } /* 마지막 p 태그 여백 제거 */ blockquote p:last-child { margin-bottom: 0; } -
[한전KPS비정규직지회 김영훈 지회장 인터뷰] 김충현 협의체 합의 이후에도 발전노동자 직접고용-총고용보장 쟁취투쟁은 계속된다2025년 6월 2일, 서부발전 태안화력발전소에서 선반 작업을 하던 김충현 비정규직 노동자가 사망했다. 그의 죽음은 발전소 내 만연한 위험의 외주화 구조를 드러냈다. 여기에 더해 석탄화력발전소 폐쇄 흐름이 본격화했다. 예고된 화력발전소 폐쇄를 앞두고, 사측은 하청업체 노동자들을 단기계약직으로 전환하는 등 더 손쉬운 해고 방안을 모색하고 있다. 소수 관료가 "전력수급기본계획"이란 이름으로 밀어붙이고 있는 폐쇄 일정과 대체 건설 계획에는 발전소 노동자의 총고용 보장이 들어갈 여지는 없다. 고 김충현 노동자의 죽음을 안고, 한전KPS 비정규직지회를 비롯한 노동자들이 투쟁에 나섰다. "고 김충현 사망사고 재발 방지를 위한 발전산업 고용안전협의체"(아래 협의체)가 구성되었고, 한전KPS 하청노동자 전원 직접고용을 포함한 3가지 합의안을 도출했다. 하지만 정부와 사측은 합의안을 이행하고 있지 않다. 김충현 투쟁이 끝나지 않은 이유다. 다음 투쟁을 준비하고 있는 공공운수노조 한전KPS 비정규직지회 김영훈 지회장을 만나, 현재 상황과 과제를 들어보았다. 사진: 김충현 대책위 김충현 협의체에서 3가지 합의안이 도출되었습니다. 내용에 대해서 어떻게 평가하시나요? 한전KPS 하청노동자 650여 명 전원을 직접고용한다고 합의문에 명시한 건 성과라고 생각합니다. 장례식장에서부터 한전KPS, 정부와 싸운 결과기도 하고요. 현재 발전소 경상정비 분야의 하청업체는 1년짜리 쪼개기 계약을 이어오는 인력파견업체나 다름없어요. 노동자 안전을 담보할 수 있는 역량도 없죠. 한전KPS가 일을 시키면 우리 하청노동자들은 따를 수밖에 없는 구조인데, 한전KPS는 사고가 발생하면 하청업체와 노동자에게 그 책임을 전가해왔죠. 하청업체 역시 사고가 났을 때도 산재 처리 안 하고 숨겨왔고요. 안전과 직접고용이 연결되어야 하는 이유도, 실질적인 업무지시를 하는 원청의 업무 및 안전관리 시스템에 하청노동자들이 포함되어 보호받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청노동자들의 업무가 한전KPS 노동자들의 업무와 동일하기에, 한전KPS의 불법파견을 인정하고 일반직 4직급으로 직접고용하라는 법원 판결을 합의문에 명시하고자 했지만 잘 안되었습니다. 또한 구체적인 처우는 노사전협의체로 이월하게 되었습니다. 한전KPS는 별정직으로 가라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향후 가장 큰 쟁점이 될 거 같습니다. 사진: 김충현 대책위 합의문 두 번째 내용, 석탄화력발전소 폐쇄에 따른 노동자들의 고용 안정성 확보를 위해 노·사·전·정이 참여하는 사회적 논의 기구를 구성하기로 한 점은 직접고용에 비해 그 정도가 낮다고 생각해요. 발전소 폐쇄가 심각한 문제잖아요. 어떻게 보면 서로가 서로의 경쟁 상대가 되는 일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날 텐데, 일단 논의 테이블이라도 만들자 정도인 거죠. 저희를 포함해 많은 현장에서 발전소 비정규직 직접고용을 내걸고 투쟁해왔죠. 하지만 의제의 규모를 생각해보면 더 많은 투쟁이 있어야 했는데 그렇진 못했던 것 같습니다. 민간 경상정비 하청업체의 재공영화도 구호로는 많이 얘기했는데, 현장에서까지 전파되어 자기 요구로 내걸고 있지는 못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세 번째 합의 내용은 연료 환경 운전 분야의 1차 협력업체 노동자들에게 노무비를 전용 계좌로 직접 지급하는 것입니다. 2차 하청노동자들도 합의 대상으로 하려고 했지만 잘 안되었습니다. 이번에 조직화 사업하면서 여러 협력업체 노동자를 만나 직접노무비가 잘 지급되고 있는지 물어봤어요. 관련 내용을 잘 모르시더라고요. 임금산출내역서를 실제로 봤는데, 서인천처럼 시행되고 있지 않은 경우도 있었고요. 합의하고자 했으나 안 된 부분도 있어요. 한전KPS가 불법파견 1심에서 패소했음에도 시정조치를 취하기보다는 항소를 결정했습니다. 협의체에서 항소하지 말라는 권고를 시도했지만 결국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또 한국자유총연맹이 최대주주로 있는 한전산업개발의 주식을 한국전력이 매입하여 한전산업개발을 재공영화하려는 정책이 추진되다가 중단된 상태인데요, 협의체 차원에서 이를 완전히 철회하려고 했으나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사진: 김충현 대책위 한계와 아쉬움이 많은 합의지만, 정부 합의안을 끌어냈던 것에는 노숙농성을 포함한 노동자들의 투쟁이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투쟁을 조직하는 과정에서 어려움도 많으셨을 텐데요, 어떻게 동력을 유지하셨나요? 용산과 청와대 앞 노숙 농성, 타지역 한전KPS 하청노동자 조직화를 위해 저는 서울에 계속 머물러야 했어요. 그럴 때 태안 등 현장과 소통체계를 유지하는 게 가장 어려운 점 중 하나였어요. 농성을 시작하면서 조합원 간담회를 원래는 한 주에 한 번씩은 하자고 했지만 잘 안 되었어요. 정말 중요한 결정을 할 때는 내려가서 얘기하고 결정을 받아오긴 했는데, 그게 일주일에 한 번은 아니었어요. 그래도 현장과 아예 분리된 채 투쟁할 수는 없잖아요. 소통 역할을 정철희 분회장과 조유상 사무장이 주로 해주셨어요. 조합원들이 현장에서 한전KPS랑 같이 일하는 과정에서 압박을 받고 있기도 했는데, 두 분이 현장 의견들을 청취하고 대응했던 과정들이 있었죠. 국현웅 동지도 농성장에 붙박이로 계시면서 역할을 해주셨고요. 물론 투쟁을 조직하고 설득하는 과정이 순탄하지는 않았어요. 이렇게까지 매번 서울 올라가서 집회하고 투쟁하는 걸 조합원들이 힘들어하기도 했고, 불만도 있었죠. 정규직화에 대해서도 ‘별정직 받아야 하는 거 아니냐’는 이야기도 있었고요. 그럼에도 지금 상태에서 관철하지 않으면 예전이랑 똑같을 거라는 공감대가 있었어요. 끝까지 관철해야 한다는 점에 대해서 동의가 돼서 싸웠던 것 같아요. 사진: 김충현 대책위 김충현 투쟁을 겪으면서 조합원들이 가장 크게 바뀌었다고 생각하는 지점은 무엇인가요? 처음에 장례식장에 있을 때는 충격도 컸고 머리가 비어 있었어요. 그런 상태로 있다가 시간이 조금 더 지나면서 상황을 인지했던 것 같아요. 이거 큰 사건이 되겠구나, 직접적으로 삶과 연결이 되는 일이겠구나. 장례식장에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 방법을 잘 몰랐어요. 저도 조합원들도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처음 겪는 일이다 보니까 좀 어려워했던 것 같아요. 노동조합과 단체들에서 지원을 많이 해주셨고, 그 과정에서 현장 사람들이 이제는 싸우는 방법이라든지 이런 것들 이제는 좀 익숙해졌던 것 같아요. 다른 한편으로 트라우마 때문에 고생도 많이 하셨죠. 수개월 동안 아예 밖에 나와서 투쟁한 거잖아요. 그래도 그때 많이 깨달으신 게 있었던 것 같아요. 예전에는 그냥 머리로만 알았다가, 이제 진짜 우리가 스스로 나서지 않는 이상은 쫓겨날 수도 있겠단 점을 체감한 거죠. 조직화 사업 등 투쟁의 결과로 여러 지역에서 노동자들이 조직되는 성과가 있었는데, 그 과정에서 어떤 점을 느끼셨나요? 발전소 하청노동자들이 다 같이 모여서 힘을 합치는 과정이 필요한데 어려움이 많았어요. 물리적으로도 다 떨어져 있다 보니까 연락도 잘 안 되었고, 누가 어떻게 사는지도 몰랐죠. 이번에 협의체 면접조사나 설명회 같은 조직화 사업을 진행하면서 한 번씩 다 만나고 다녔잖아요. 그 사람들이 어떤 삶을 살아왔고 또 어떤 고심을 하고 있는지 등을 알아가는 과정들이 되게 뜻깊었었던 것 같아요. 한전KPS와의 계약 내용이 이상하거나 임금을 제대로 못 받아도 하청노동자들이 목소리를 사실상 못 냈거든요. 그런데 이 투쟁을 하면서 노동자들이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과도기적 단계에 접어들었다고 생각하고, 되게 뜻깊은 것 같습니다. 다른 지역 노동자들도 투쟁을 통해 조직되기 시작했어요. 저렇게 싸울 수 있다는 것도 사회적으로 알려졌고요. 감회가 새롭더라고요. 그런 부분들이 다른 사업소에도 차츰차츰 퍼져 나갔으면 좋겠어요. 사진: 한전KPS비정규직지회 2월 말, 전국의 발전소를 돌아다니면서 노동자들을 만나면서 합의내용을 설명하고 토론하는 자리를 만들었습니다. 진행하면서 느꼈던 소회나, 기억에 남는 사례를 공유해 주신다면? 최근에 쫓겨나신 분들을 보면서 마음이 좋지 않았어요. 한전KPS가 하청노동자를 해고했던 사례들을 협의체 진행하면서 뒤늦게 알게 된 거죠. 미리 알았더라면 대처할 수 있었을 텐데, 커버하지 못했던 게 스스로도 많이 한심스러웠고요. 설명회를 했던 첫 번째 이유는 현장 노동자들에게 합의 내용을 알리는 거였어요. 현재 이런 상황이고 한전KPS가 강제적으로 뭔가 계약을 해지하거나 불합리한 요구를 했을 때 알려주시라, 그래야 이런 상황을 타파할 수 있다는 걸 알리고자 했어요. 하청노동자 스스로 앞으로를 준비할 시간, 노조 가입도 고민하면서 스스로를 보호할 수 있는 자료를 준비하는 등의 시간을 확보하자는 게 두 번째였어요. 저희도 노조 만들기 전에도 자료 모아서 노동청에 신고도 하고 막 그랬거든요. 이런 경험들이 현장에 있는 사람들한테 되게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거든요. 노동조합은 대신 싸워주는 데가 아니잖아요. 스스로 싸우는 사람들이 만들어서 투쟁하는 곳이니까 한편으로는 스스로 싸울 수 있는 조건을 형성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뭘 들고 어떻게 싸워야 할지 모르니까 이런 자료들을 준비해서 들고 싸워야 한다는 거를 얘기하고자 했죠. 저는 제주, 남제주, 일산, 분당, 서울, 안동, 삼척 이렇게 갔다 왔는데요, 삼척 사례가 기억에 남아요. 앞에 안동 설명회가 끝나고 삼척으로 넘어가면서 준비 잘 되고 있냐고 발전소 쪽에 물어봤고, 오면 된다고 해서 갔죠. 그런데 가서 보니까 출입부터 협조가 안 되었어요, 출입 담당자도 나오지 않았고요. 들어보니까 옛날 발전사 부사장이 방문해서 순회하고 있었대요. 그런데 우리가 눈에 거슬리니까 못 들어가게 했던 거였죠. 한전KPS도 담당자를 뺑뺑이 돌리고 있었고요. 하청노동자들은 저희가 온 걸 아예 몰랐대요. 한전KPS 선에서 차단한 것 같더라고요. 그래서 현장 노동자들이 그 사실을 알고 우리는 설명회를 듣고 싶으니 나가겠다 하셨고, 입구에서 저희가 들어오는 걸 도와주려 하셨죠. 그런데 그분들도 발전소 출입 권한이 없어요. 발전소 본사에서 출입을 허가하지 않으면 안 되거든요. 결국 편의점 노상에서 설명회를 했어요. 바닷가 바로 앞이라서 바람도 불고 추웠는데, 거기서라도 하겠다고 해서 1시간가량 설명하고 왔어요. 하동발전소의 경우 한전KPS가 2024년 7월에 하청업체 노동자들을 단기 노무원으로 바꿨던 사례가 있는데요, 관련하여 자세히 설명해 주신다면? 하동화력발전소의 한전KPS 하청노동자들이 예전에는 27명이었어요. 여기도 태안처럼 곧 폐쇄를 앞둔 발전소인데, 그 과정에서 한전KPS가 하청업체를 떨궈내려 했던 거 같아요. 2024년, 한전KPS는 하청노동자들한테 상황이 어려우니 한전KPS의 단기 노무원으로 가는 것을 제안했고, 일부는 수용했고 일부는 거부했어요. 현재는 20여 명이 9개월짜리 단기 노무원으로 계세요. 9개월짜리 단기 노무원하고 3개월 퇴직급여 받으시고 다시 9개월 하고 이렇게 계약을 이어오다가, 하동 발전소가 26년에 폐쇄가 되니까 12월까지만 계약을 유지하고 더 이상 계약을 유지하지 않겠다는 말을 사측이 했나 봐요. 노동자들은 굉장히 억울해하시죠. 소송도 하고 기자회견도 하고 할 거 다 해야 하지 않겠느냐 정도 얘기하고 있어요. 발전소 폐쇄를 대비하는 사측의 자세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협의체 합의문 중에 직접고용이 완료될 때까지 한전KPS는 하청노동자와의 계약을 계속 연장한다는 내용이 있어요. 관련해서 노사전 협의체에서도 얘기해야 할 것 같아요. 현장에서도 싸움도 많이 해야겠죠. 그냥 되는 건 아니니까요. 사진: 김충현 대책위 직접고용을 다룰 노사전협의체가 난항이 예상됩니다. 발전소 폐쇄를 앞두고 한전KPS와 발전 5사를 상대로 투쟁이 필요할 거 같은데요, 이를 위해 현장에서 필요한 과제가 무엇이라 보시나요? 협의체 합의에 따르면 화력발전소의 경우 3월 31일까지 노사전협의체 회의를 완료해야 하는데, 사측에서는 노사전협의체 위원도 내지 않고 있습니다. 노사전협의체 테이블로 풀 수 있는게 맞나는 고민도 들고요. 정규직 내부 반발도 심한 것 같습니다. 발전소 설명회 할 때 한 협력업체 사무실에 방문했었는데요, 사무실 옆에 한전KPS 사내 게시판이 있었는데, 한전KPS 노동조합이 ‘공정’ 운운하면서 정규직화 반대한다는 내용의 성명이 붙어있더라고요. 김충현 중대재해 이전에도 발전소 폐쇄는 계속해서 이슈였습니다. 폐쇄 과정에서 민간 하청업체 노동자들이 희생양이 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 있어요. 그러기 위해선 하청노동자를 계속 규합해서 운동을 확대해야 할 것 같습니다. 결국 2라운드로 넘어가는 상황인 거 같아요. 합의 이후 저희 하청노동자들이 몇 주 투쟁을 쉬었죠. 다시 싸울 때가 된 것 같아요. 일단 직접고용이 전혀 되고 있지 않는 것에 대해 정부의 책임을 물어야 할 것 같아요. 여러 매체를 통해 한전KPS와 정부의 행태도 더 알려야 할 거 같고요. 원자력발전소 쪽에도 한전KPS 하청노동자들이 민주일반연맹 소속으로 조직되어 있는데, 소통을 잘해서 공동전선을 쳐야 할 것 같습니다. 사진: 김충현 대책위 -
[한노운사 연재 10회] 2부 전진과 격돌 (1988-1998) [4] 1996~98년 노동법 대격돌김영삼 정권의 날치기 노동법 개악에 맞서 1996년 12월말부터 한 달 가량 전개된 민주노총 총파업은 매우 위력적이었다. 총파업은 무엇보다 정리해고제와 근로자파견제 도입을 저지하기 위한 것이었다. 일반 여론의 지지도 압도적이었다. 자신감이 넘치던 김영삼 정권은 총파업 한 달 만에 식물정권으로 전락했다. 1987년 노동자대투쟁 이후 축적돼 온 민주노조운동의 역량이 한국 사회를 완전히 뒤흔들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지도부의 역량이 매우 어설펐고 결정적인 순간에 총파업을 중단시켜 버렸다. 역사적인 총파업이 소기의 성과를 거두지 못한 채 소멸한 뒤 여야 보수 정치권의 합의로 다시 통과된 노동법은 개악 조항과 독소 조항 대부분을 그대로 둔 채 정리해고제와 근로자파견제만 2년 유예하는 선에서 그쳤다. 총파업 이후 10개월 만인 1997년 말, 한국은 대통령 선거 한복판에 국제통화기금(IMF)에 긴급지원을 요청해야 하는 외환위기에 빠졌다. 대통령 당선자 김대중은 정리해고제 도입을 관철하기 위해 노사정 대타협을 주문했고, 노사정위원회에 참여한 민주노총 지도부는 정리해고제와 근로자파견제 조기 도입에 합의하고 말았다. 민주노총 대의원대회가 지도부를 불신임하고 합의를 무효화한 뒤 총파업을 결의했지만, 총파업은 실행되지 못했고 노동법 개악안은 그대로 통과됐다. 1996~98년 노동법을 둘러싼 대격돌에서 노동자계급은 패배했다. 그 대가는 엄청났다. IMF 외환위기 이후 이른바 ‘헬조선’이 되어버린 한국 사회, 즉 넘쳐나는 비정규직과 극단적인 저출생으로 가는 길이 활짝 열렸다. 이전 편 보기 2부 전진과 격돌 (1988-1998) [시대배경] 군사파시즘에서 신자유주의 질서로 [1] 1988~89년 민주노조운동의 폭발적 성장 [2] 1990~91년 전노협 건설과 민주주의 투쟁 [3] 민주노총으로 가는 길 [4] 1996~98년 노동법 대격돌 1) 1996~97년 노개투 총파업 1987년 노동자대투쟁 이후 민주노조운동은 ‘노동악법 철폐’를 줄기차게 주장했다. 가장 대표적인 악법은 1980년 신군부의 노동법 개악 때 도입된 이른바 ‘제3자 개입금지’였다. 연대투쟁에 나선 모든 노동자들을 옭아맬 수 있는 이 조항으로 수백 명의 노동자들이 옥고를 치러야 했다. ‘복수노조 금지’도 중요한 문제였다. 단위노조 수준에서의 복수노조 금지는 회사측으로 하여금 어용노조 설립이라는 간편한 수단을 통해 민주노조 설립을 봉쇄할 수 있게 보장했다. 상급단체 수준에서의 복수노조 금지는 어용 한국노총에 맞서는 민주노조운동의 전국적 총결집체인 전노협이나 민주노총 등이 법외노조로 내몰리게 만들었다. ‘교사 노동자와 공무원 노동자에 대한 노동3권(단결권·단체교섭권·단체행동권) 박탈’이나 ‘노동조합의 정치활동 금지’도 민주노조운동의 확대와 성장을 가로막는 중요한 악법 조항들이었다. 이러한 악법들의 철폐를 위해 꾸준히 투쟁해 온 민주노조운동은 1995년 민주노총을 건설해 낸 만큼 이제 더욱 전면적으로 노동악법 철폐 투쟁으로 나아가야 할 참이었다. 반면 자본가들은 민주노조운동을 더욱 옭아매고 무력화하기 위해 노동법의 추가 개악을 원했다. 대법원 판결 확정시까지 인정되던, ‘해고를 다투는 자의 조합원 자격’을 중앙노동위원회 판정까지로 단축시키고자 했다. ‘노조 대표자의 체결권’을 신설해서 노조 대표자가 조합원총회의 민주적 결정 없이 직권조인을 하더라도 법적으로 효력이 인정되게 하고자 했다. 기본적으로 금지돼 있던 ‘파업 대체인력 투입’을 해당 사업장 안에서는 허용하고자 했다. 무노동 무임금 정책을 아예 ‘파업시 임금지급 금지’로 법에 명문화하고자 했다. ‘노조 전임자 임금지급 금지’로 노조 상근자들을 대폭 축소시키고자 했다. 그런데 그게 다가 아니었다. 1990년대에 전 세계가 신자유주의 물결에 휩쓸리고 있었다.[1] 규제완화, 민영화(사유화), 부자감세, 복지축소 등과 함께, 신자유주의가 지닌 또 하나의 중요한 특징은 노동유연화였다. 미국과 유럽에서만 수백만 명의 노동자들이 정리해고를 당하고 있었다. 생산거점을 값싸고 고분고분한 노동자들을 찾아 국경을 가로질러 이동시키는 ‘생산의 세계화’와 기업의 장기적 전망보다 주주의 단기적 이익을 우선시하는 ‘주주 자본주의’가 정리해고 규모를 더욱 확대시키고 있었다. 1990년대 초반 냉전체제의 붕괴와 함께 세계시장의 무한경쟁에 냉혹하게 내던져진 한국의 독점재벌들은 세계를 휩쓰는 노동유연화 물결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자본의 국제경쟁력’을 갖추기 위해 자본가계급은 한국에서도 노동유연화가 도입되기를 원했다. 그것도 가장 고도화된 형태를 갖춤으로써 최고의 경쟁력을 얻고 싶었다. 다시 말해 ‘자유로운 정리해고’에 덧붙여 ‘극도로 유연한 (다시 말해 극도로 노동권이 박탈된) 노동자로서 비정규직의 전면적 확산’을 가능케 하고 싶었다. 자본가들의 욕망은 정리해고제와 근로자파견제 도입 추진으로 구체화됐다. 1996년에는 이렇게 노동법을 둘러싸고 노동자계급과 자본가계급의 이해관계가 서로 정면충돌하는 정세가 만들어졌다. ◎ 김영삼 정권의 신노사관계 구상과 노동법 개악 추진 1996년 4월 24일 대통령 김영삼은 “21세기 세계 일류 국가로의 도약을 위해 참여와 협력의 새로운 노사관계를, 노사간의 사회적 합의와 범국민적 합의를 통해 이루어 나가겠다”면서 이른바 ‘신노사관계 구상’을 발표했다. 신노사관계 구상에 따라 노동계, 재계, 공익 대표자 30명을 포괄하는 ‘노사관계개혁위원회’(노개위)가 대통령 직속으로 5월 9일 출범했다. 특히 노개위는 “투쟁과 분배 우선의 노동운동에서 벗어나 국민경제의 발전과 함께 가는 합리적이고 생산적인 노동운동”을 주문하면서, 아직 법외노조 상태로 있던 민주노총을 한국노총과 함께 노동계 대표로 포괄했다. 김영삼 정권이 추진한 신노사관계 구상의 요지는 노동자들이 줄기차게 요구해 온 △복수노조 허용 △제3자 개입금지 철폐 △교사·공무원의 단결권 허용을 전향적으로 검토할 테니, △정리해고제 △근로자파견제 △변형근로제 도입에 대한 사회적 합의를 이루자는 것이었다. 이와 같은 김영삼 정권의 신노사관계 구상 아래에는 한국 자본가계급의 이해관계가 놓여 있었다. 한국의 자본가계급은 1960년대 이래 장기호황을 가능하게 했던 축적구조가 1987년 노동자대투쟁을 거치면서 근본적으로 흔들린 뒤 자본-노동 관계를 재구축해야 하는 과제에 직면해 있었다. 게다가 1990년대 들어 세계화 흐름을 따라 세계 자본주의 무한경쟁에 더 깊게 편입되면서 그 필요성이 더욱 절박해졌다. 자본가들은 이른바 ‘신경영전략’을 도입하고 체계적인 노무관리를 실시하면서 노조의 현장 기반을 잠식해 들어갔다. 또한 무노동무임금 논리, 노조간부 고소고발, 손해배상 청구소송 등의 공세를 통해 노동조합과 파업의 기세를 일정하게 약화시킬 수 있었다. 하지만 자본가들은 더 나아가고 싶었다. 자본가들은 노동조합의 힘을 무력화하고 노동시장의 유연성을 높여 노동자를 개별화함으로써 완전한 통제권을 얻고자 했다. 그런데 1987년 대투쟁 이후 급속하게 성장한 민주노조운동은 1990년대 들어 지배계급의 공세 강화와 경기침체가 맞물리면서 여러모로 고전하고 있었지만 여전히 상당한 전투력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자본가들은 격렬한 노자대립을 피하고 ‘사회적 합의’라는 형식을 통해 생산성과 경쟁력을 향상시킬 수 있는, 그러면서도 실질적으로는 노동자들을 길들여 장기적인 자본축적에 유리하게 작용하는 틀을 만들어 내고자 했다. 자본가들의 이러한 의도는 처음에는 1993~94년 경총과 한국노총의 임금인상 합의로 나타났다. 그러나 민주노조운동에 대한 통제력을 전혀 갖고 있지 못한 한국노총과의 합의는 아무런 실익이 없었다. 오히려 민주노조운동은 한국노총에 대한 규탄 속에서 민주노총 건설의 동력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자본가들이 ‘사회적 합의’를 이루고자 한다면, 어떤 식으로든 민주노조운동 세력을 끌어들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 분명해졌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김영삼 정권이 ‘참여협력적 신노사관계’ 창출을 위한 사회적 합의 기구를 구상하게 되고, 이로부터 1996년 정권 주도로 ‘불법단체’인 민주노총을 포괄하는 노개위가 출범하게 된 것이었다. 민주노총은 노개위 참여를 둘러싸고 상당한 논란을 겪었다. 지도부를 중심으로 한 타협·개량주의 세력은 “노개위에 참여해서 협상을 벌여보자”, “협상을 통해 지킬 것은 지키고 따낼 것은 따내면 되지 않겠냐”고 주장했다. 반면 현장을 중심으로 한 전투적·변혁적 세력은 “노개위 참여는 민주노총 합법화와 정리해고 도입을 맞바꾸는 것으로 귀결될 것”, “노동법 개악을 저지하고 노동법 개정을 쟁취할 수 있는 길은 노개위 협상이 아니라 총파업 조직”이라고 주장했다. 결국 5월 2일 중앙집행위원회에서 노개위에 참가하기로 결정됐다. 7월 19일 민주노총은 단위노조 대표자수련대회를 열어 하반기 노동법개정투쟁 방안을 논의했는데, 이 자리에서 “(민주노총 합법화 등) 집단적 노동관계법의 개정과 (정리해고제 도입 등) 개별적 노사관계법의 개악을 맞바꿔서는 안 된다”는 단위노조 대표자 다수의 결의가 확인됐다. ◎ 총파업의 준비 과정 노개위는 몇 달 간 논의를 이어갔지만, 복수노조, 교사의 단결권, 쟁의기간 대체근로허용, 정리해고제, 근로자파견제 등 41개 핵심조항에 대해 더 이상 논의를 진척시키지 못하고 교착상태에 빠졌다. 사회적 합의라는 허울 아래 정리해고제와 근로자파견제를 반드시 관철하겠다는 김영삼 정권의 의지가 점점 분명해지자, 현장으로부터 올라오는 비판과 총파업 요구도 더욱 거세졌다. 결국 민주노총 지도부는 10월 2일 노개위에서 철수했다. 이미 9월 21일 ‘노동법개정투쟁 승리 결의대회’를 수도권·충청권·호남권·영남권 등 각 권역별로 개최했던 민주노총은 이제 본격적으로 총파업 준비에 들어갔다. 김영삼 정권의 정리해고·비정규직 도입 시도를 분쇄하기 위해 총파업으로 떨쳐 일어서자는 선동이 전국의 주요 대공장과 공단에서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총파업을 호소하는 유인물이 쏟아지고, 총파업 결의를 다지는 출근투쟁·중식투쟁·현장순회·사업장집회·지역집회가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정리해고제, 근로자파견제, 변형근로제, 파업권 제약에 맞선 투쟁은 생존권을 지키는 결사항전일 수밖에 없었다. 김영삼 정권과 자본가계급도 물러설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노동자계급도 물러설 수 없는 상황이었다. 현대차노조는 9월 18~23일 제10차 정기대의원대회를 열고 1996년 하반기 사업은 노동법개정투쟁에 집중하기로 결정했다. 준비기, 투쟁돌입기, 총력투쟁기 등으로 시기를 구분해 상급단체 및 전국 노동운동 세력과 공동투쟁을 전개하기로 했다. 이를 위해 모든 조직체계를 ‘노동법개정투쟁위원회’로 전환했다. … 노동법개정투쟁의 선봉대로서 노개투 실천단을 구성했다. 노개투 실천단의 역할과 임무는 △투쟁지침 실천 △각 사업부 실정에 맞게 대중적인 사업실천 △대국민 선전활동 적극 참여 △각종 집회에 참여해 조합원 참여를 조직 △정기적이고 지속적인 선전 선동 작업 △사회개혁투쟁의 적극 실천 등으로 부여됐다. 10월 8~14일까지 모집된 실천단은 총 2,424명으로 구성됐다. … 10월 1일부터 12월 12일 사이에 노개투 조합원 교육 및 간담회를 총 79회 조직했는데, 4,530명의 조합원이 참여했다. 10월 26일에는 노개투 마라톤대회를 열었다. 6인 1조로 68팀이 참여했다. 대시민 지역 선전활동을 7차례, 유권자 서명운동을 19차례 진행했다. 노개투 차량스티커 3천장을 제작해 조합원들에게 배부하기도 했다.[2] 10월 9일 울산지역 현장조직대표자회의와 울산해고자협의회는 ‘노동법 개악안 설명회 및 울산지역 노동법 개정 투쟁의 방향’이라는 주제로 토론회를 갖고 ‘노동법 개악 저지 및 개정 투쟁 울산지역 선봉대’ 발대식을 가졌다. 선봉대는 10월 14일부터 11월 8일까지 울산지역의 거의 모든 민주노조 사업장 정문에서 출퇴근 투쟁을 벌였으며 민주당사, 신한국당사, 정몽준 의원 사무실 등에 대한 항의 방문 투쟁을 전개해 나갔다.[3] 현장과 지역에서 전개된 총파업 준비에 발맞춰 권영길 민주노총 위원장은 11월 4일 명동성당에서 삭발과 함께 단식농성에 들어갔다. 현장과 지역에서 축적된 열기는 11월 10일 전국노동자대회로 모아졌다. 10만이 결집한 전국노동자대회에서 권영길 위원장은 “노동법 개악안 강행시 총파업 돌입”을 선언했다. 노동자들이 총파업을 준비하는 동안, 자본가들과 김영삼 정권은 노동법 개악을 향해 한 발 한 발 다가가고 있었다. 11월 12일 전경련은 “복수노조 허용과 제3자 개입금지 철폐에 반대한다”는 입장을 발표했다. 김영삼 정권은 쓸모가 없어진 노개위를 대신해서 14개 부처 장관으로 ‘노사관계개혁추진위원회’(노개추)를 구성하고 독자적인 노동법 개악안을 마련해 나갔다. 12월 3일 확정된 정부안은 “우리가 봐도 심했다. 표정관리 하느라 애먹었다”는 말이 자본가들 측에서 나올 정도로 강경했다. 노동자들도 총파업 준비에 더욱 매진하면서, 노동법 개정을 둘러싸고 자본가계급과 노동자계급 사이에서 팽팽하게 긴장이 고조되고 있었다. 현대차노조는 민주노총 지침에 따라 12월 3일 저녁 5시부터 조합원 결의대회를 열었다. 영하를 오르내리는 매서운 한파 속에 열린 야간집회였으나 1만여 명이 넘는 조합원들이 참여해 임투를 능가하는 열기를 보여주었다. … 이어 12월 4일 민주노총의 모든 단위노조들과 함께 노개투 승리를 위한 쟁의행위 찬반투표를 실시했다. 조합원 34,509명 가운데 31,572명(91%)이 투표해 29,695명이 쟁의행위에 찬성했다. 전체 조합원 대비 86%, 투표자 대비 94%의 높은 찬성률로 쟁의행위가 가결됐다.[4] 12월초에 전국의 현장은 폭발할 것 같은 긴장감으로 가득했다. 그런데 12월 초·중순을 지나가면서 김영삼 정권의 노동법 개악 수순이 착착 진행되는데도 민주노총 지도부는 예정된 총파업 돌입을 거듭 유보하고 있었다. 애초 대의원대회와 중앙위원회를 거치며 결의된 민주노총의 방침은 12월 13일을 기해 총파업에 돌입하되 그 전이라도 국회 상임위에 개악안이 상정된다면 총파업에 돌입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민주노총 지도부는 12월 10일 개악안의 상임위 상정 시점에도, 12월 13일의 총파업 돌입 예정 시점에도 총파업 돌입 지침을 내리지 않고 유보시켰다. 특히 12월 12일 민주노총 지도부는 임원·산별대표자회의를 소집하여 총파업 돌입의 마지노선으로 여겨졌던 13일의 총파업마저 유보하기로 결정해 버렸다. 민주노총 지도부의 ‘13일 총파업 유보’ 결정을 앞장서 이끈 것은 타협·개량주의 세력의 주요 근거지로서 이른바 ‘국민과 함께 하는 노동운동’을 적극 주창하고 있던 ‘현대그룹노동조합총연합’(현총련)이었다. 현총련은 “민주노총의 총파업 결정이 정부의 음모를 제대로 꿰뚫어 보지 못한 부분도 있었다는 것을 솔직히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며 “국회 운영상 연내 법 개정이 사실상 불가능함에도 정부와 여당이 이번 회기 내 처리방침을 밝힌 것은 우리의 파업을 유도해 민주노총을 와해시키려는 고도의 정치적 음모라고 판단한다”고 밝히고 “권영길 위원장의 냉철한 판단으로 13일 파업을 유보할 것”[5]을 공식 제기했다. 민주노총 지도부의 ‘13일 총파업 유보’ 결정이 내려지자, 현장으로부터 강력한 반발이 솟구쳐 올라왔다. 민주노총 총파업에 연대하여 전 민중적 투쟁으로 발전시키려고 준비하던 노동운동 단체들과 민중운동 세력들도 강력하게 문제제기를 하고 나섰다. “정부와 신한국당에서는 공식적으로 이번 정기국회에서 기필코 노동법 개악안을 통과시키겠다고 거듭 밝히고 있고 나아가 이러한 방침에 반대하는 당 소속 국회의원들에게 경고하는 등 아무런 입장의 변화가 없음은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 뿐만 아니라 지난 몇 개월 간 준비한 민주노총의 총파업투쟁을 정부가 유도하면서 조직까지 와해 위축시킬 수 있는 것으로 투쟁을 불신하고 총파업투쟁을 철회함으로써 조직을 보존, 사수한다는 논리까지 들먹이는 데 이르러서는 망연자실할 뿐입니다. … 몇 차례의 과정을 통해 민주노총 지도부에서 김영삼 정권의 노동법 개악 강행구도가 분명함에도 불구하고 전혀 설득력 없는 정세판단에 근거하여 총파업 투쟁 방침을 번복하자 현장단위에서는 민주노총 지도부는 물론 그동안 총파업 투쟁을 독려하고 조직하여 왔던 단위노조 대표자와 간부들조차도 조합원들로부터 불신을 받고 있으며, 이 과정에서 단위노조와 지역의 지도력이 이미 심각하게 타격을 받은 상태라는 것입니다.”[6] “12월 13일 예정했던 총파업을 철회한 민주노총의 결정에 대해 심각한 우려를 금할 수 없다. 이번 총파업투쟁의 목표는 정부의 노동법 개악안 강행 시도를 내년 2월 임시국회로 연기시키는 것이 아니라, 정부의 노동법 개악안을 완전히 철회시키는 것이고 더 나아간다면 그동안 민주노조운동에서 요구해 온 내용으로 노동법을 민주적으로 개정하는 데에 있다. … 노동법 개악을 저지하고 민주적으로 개정해 내는 힘은 40만 민주노총 조합원 동지들의 총파업투쟁과 그에 뒤따르는 민중연대투쟁에 있다. 국회 진행 일정이나 보수 여야 정당들 사이의 이해 다툼은 결코 중요한 변수가 될 수 없다. … 총파업투쟁을 통한 선제공격만이 노동법 개악을 막아 내는 유일한 길이다. … 세계 자본주의의 경쟁이 격화되어 가는 상황에서 한국 자본주의는 노동자와 기층 민중에 대한 착취도를 강화하는 것에서 활로를 찾고 있으며, 김영삼 정권이 앞서서 이를 추진하고 있다. 올해 극심해지고 있는 민중 생존권 압살과 공안탄압 또한 이에 맞서는 투쟁을 억누르려는 시도이다. 이번 총파업투쟁은 노동법 개악 저지를 일차 목표로 하고 있지만, 나아가 한국 사회의 진정한 민주적 개혁을 위한 힘찬 발걸음이기도 하다. … 만약 12월 13일 총파업이 감행되었을 경우 정부와 자본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고 이 땅의 지축을 뒤흔들 대규모 전국 총파업이 충분히 가능했을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다. 자본의 신경영전략 공세, 권력의 생산성 향상 이데올로기 공세와 공안탄압 분위기 조성, 총파업투쟁에 대한 협박, 그리고 촉박한 시일 등 어려운 조건 속에서 이렇듯 힘차게 총파업투쟁을 준비하고 조직해 온 노동형제 동지들의 저력과 추진력을 보면서 진정으로 뜨거운 동지적 신뢰와 경의를 보낸다. 지금은 12월 13일 총파업투쟁을 목표로 준비하고 조직해 온 투쟁동력이 흐트러지지 않고 총파업투쟁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총력 매진해야 할 때다. … 어느 것 하나라도 우리의 힘으로, 우리의 투쟁으로 쟁취해 내지 않으면 안 되며, 또 그러한 투쟁을 통해서만 조직은 강화되고 발전할 수 있다는 지난 10년 동안의 민주노조운동의 교훈을 절대 잊어서는 안 된다.”[7] 민주노총 지도부의 안일한 판단과 달리, 김영삼 정권과 신한국당이 연말연시를 틈타 노동법 개악안을 전격 통과시키려 한다는 게 점점 분명해졌다. 결국 민주노총은 12월 22~23일 전국투쟁본부 대표자회의를 열고 ‘연말 노동법 개악 기도가 포착되는 즉시 권영길 위원장 이름으로 총파업에 돌입한다’고 결정했다. 민주노총 산하 모든 노동조합은 성탄절 연휴가 끝나는 12월 26일부터 비상체계에 들어가기로 했다. ◎ 역사적인 노개투 총파업 1996년 12월 26일 새벽 6시, 마침내 김영삼 정권이 신한국당 의원 154명을 동원해 노동법 개악안을 국회에서 날치기로 통과시켜 버렸다. 이날 통과된 노동법은 △정리해고제 도입 △근로자파견제 도입 △노조전임자 임금지급 금지 △해고자의 조합원 자격 인정 기간을 대법 선고에서 중노위 판정까지로 단축 △조합원 총회와 상관없이 노동조합 대표자의 체결권 인정 △생산시설 점거 쟁의행위 금지 △유니온샵 적용시 쟁의기간 대체인력 채용 허용 △쟁의기간 임금지급 금지 및 요구의 금지 등 노동자의 권리를 억압하는 온갖 독소 조항으로 가득 차 있었다. 반면 노동자들이 줄기차게 요구해 온 사항들에 대해서는 △제3자 개입금지 존속 △복수노조 불인정 △교사·공무원의 노동3권 부정 △공익사업장 직권중재 존속 등으로 철저하게 무시하고 있었다.[8] 노동법 개악안 날치기 통과 직후 민주노총 지도부가 ‘26일 오전부터 무기한 총파업 돌입’을 선언하자 즉시 총파업의 거대한 불길이 전국 방방곡곡에서 솟구쳤다. 현장과 지역에서 수많은 노조간부와 활동가들이 몇 개월 동안 목이 다 쇠도록 총파업을 조직해 왔던 결과가 마침내 솟구치는 용암처럼 터져 올라왔던 것이다. 총파업의 기세는 거대했다. 1987년 노동자대투쟁 이래 성장해 온 한국 노동자계급의 역량을 유감없이 보여준 정말로 위대한 투쟁이었다. 민주노총의 자체 집계에 따르면, 1996년 12월 26일부터 1997년 1월 24일까지 3단계에 걸쳐 모두 531개 노조 40만 4천 54명이 한 번 이상 총파업에 참여했는데, 이는 민주노총 전체 조합원 49만 6천 908명의 81.3%에 이르는 규모였다. 또 이 기간 동안 하루 평균 163개 노조, 18만 4천 498명이 파업에 참가해 파업 참가 누적 규모가 모두 3천 422개 노조, 387만 8천 211명에 이르렀다. 파업 참가 규모를 산업·부문별로 살펴보면, 제조업(금속, 자동차, 현총련, 화학 등)은 169개 노조 19만 9천 932명, 비제조업(건설, 대학, 사무, 전문 등)은 260개 노조 9만 1천 768명, 공공부문(병원, 언론, 의보, 지하철, 화물 등)은 99개 노조, 11만 1천 479명에 이르렀다. 파업참가 총 규모의 산업·부문별 구성비를 살펴보면, 노동조합 수 기준으로 제조업 32%, 비제조업 49.2%, 공공부문은 18.8%였고, 조합원 수 기준으로는 제조업 49.6%, 비제조업 22.8%, 공공부문 27.7%였다. 총파업이 가장 정점에 올랐던 1월 15일에는 388개 노조, 35만 8천여 명이 파업에 참가했다. 전국 각지에서 대규모 집회가 열린 날은 총 30일이었으며, 여기에 참여한 총인원은 150만여 명이었다. 이 기간 민주노총이 제작, 배포한 대국민 선전물은 총 390만 부였다. 1단계 총파업 (12/26~12/31) 1996년 12월 26일 오전 8시 민주노총의 총파업이 선언되자마자 금속연맹, 자동차연맹, 현총련, 대학노련, 전문노련, 화학연맹 등을 중심으로 14만 3천여 명이 총파업에 돌입했다. 27일에는 병원노련 등이 합류하며 20만 6천여 명으로, 28일에는 서울지하철노조 등이 합류하며 22만 3천여 명으로 총파업이 확대됐다. 29일에는 ‘노동법 날치기 통과 규탄 및 김영삼 정권 퇴진 결의대회’가 열렸고, 31일에는 ‘노동자 시민 송년 한마당’이 열렸다.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은 26일 새벽 신한국당이 단독으로 노동법 개악안을 기습 날치기 통과시킨 반민주적 폭거에 대항, 1천 2백만 노동자와 온 국민의 분노를 모아 26일 오전부터 산하 전 단위노조에서 즉각 ‘무기한 총파업’에 돌입한다. 또 민주노총은 노동법, 안기부법 개악안을 날치기 통과시키는 만행을 서슴지 않는 집권여당인 신한국당을 해체시키고 김영삼 정권을 퇴진시키기 위해 각계 민주세력과 함께 범국민적 항쟁을 벌여나갈 것이다. … 이 땅의 양심을 가진 모든 국민들은 민주노총이 전개하는 국민 생존권 및 민주민권 수호를 위한 성전에 동참하기를 간절히 호소한다.[9] 12월 26일 현대차 조합원 1만여 명을 비롯해 현대미포조선, 현대중공업, 현대정공, 현대강관, 한국프랜지 등 울산지역 노동자들이 오후 1시 태화강변으로 집결했다. ‘노동법·안기부법 날치기통과 규탄 및 김영삼 정권 퇴진 노동자 시민 결의대회’에 참여한 대오는 3만여 명에 이르렀다. 12월 27일부터 현대차노조는 오전에 본관 집회 또는 사업부별 집회를 가진 뒤 오후에 태화강 둔치에서 열리는 지역 집회에 참석하는 형태로 투쟁전술을 운용했다. 본관 집회의 경우 12월 27일에는 1만 5천여 명, 12월 31일에는 1만 8천여 명이 모였다. 1차 총파업 기간 동안 울산지역은 거의 매일 계속된 지역 집회에 2~3만 명이 꾸준히 참석해 서울과 함께 전국 투쟁을 선도했다. 거리행진을 하게 되면 대열의 앞을 보아도 끝이 없고 뒤를 보아도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그래서 행진에 참여한 노동자들이 스스로 놀라고 힘을 얻곤 하였다.[10] 12월 26일부터 31일까지 1단계 총파업에 참여한 민주노총 조합원은 연인원 100만여 명에 달했다. 민주노총 총파업이 엄청난 기세로 뻗어나가자 현장으로부터 파업 요구가 빗발치는 것을 견디다 못한 한국노총도 27일부터 파업에 돌입하여 16만여 명이 파업에 나섰다. 그렇게 어느 날 갑자기 대지를 뚫고 솟구치는 용암처럼, 노동자계급의 총파업은 한국 사회 전체를 밑바닥부터 송두리째 뒤흔들기 시작했다. 예상치 못한 사태 전개에 자본가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고, 자신감에 넘쳐 날치기 통과를 강행했던 김영삼 정권은 총파업 투쟁의 위력으로 권력의 기반 자체가 급속히 흔들리기 시작하자 정신없이 허둥대고 있었다. 그런데 그 상황에서 민주노총 지도부가 “연말연시 시민 교통편의를 고려”하여 공공부문 파업을 중단시켰다. “국민의 지지를 이끌어 내고 투쟁동력의 전술적 배치와 운영을 입체적이고도 다양하게 구사”[11]하려는 맥락에서 결정했다는 설명이었다. {1996년 12월 30일} 권영길 민주노총 위원장은 지하철노조에 이어서 내일부터 병원노조들을 업무에 복귀하도록 하는 등 연휴 기간 동안 총파업을 잠정 중단하기로 했다고 밝혔습니다. 이에 따라 나흘째 전면 또는 부분 파업을 벌여온 서울대병원 등 전국 병원 노련 산하 12개 병원노조가 내일부터 업무에 복귀합니다.[12] {1996년 12월 30일} 어젯밤 11시 50분 서울지하철노조가 파업을 풀고 이틀 만에 근무지로 돌아간 데 이어 부산지하철노조도 오늘 오전 11시 정상 근무에 들어갔습니다. 이에 따라 서울과 부산의 지하철은 오늘 정상을 되찾았습니다. 노조 측의 이 같은 결정은 시민들의 교통 편의를 위해 신년 연휴 기간 동안 파업을 중단하기로 한 민주노총의 지침을 수용한 것입니다. 파업을 잠정 중단한 데 대해 일부 노조원들이 반발하기도 했지만 노조 집행부의 결정을 따르는 쪽으로 기울었습니다. (서울지하철노조 선전홍보부장) “조합원들 분위기는 좀 안타깝다. 계속 더 투쟁을 해야 된다라는 그런 분위기였습니다.” 지하철공사 측은 노조의 현업 복귀를 환영하면서 최대한 관대하게 처분하겠다는 뜻을 밝혔습니다. (서울지하철공사 관리이사) “그동안에 이틀 동안 파업을 했지만 자진해서 복귀를 전부 했기 때문에 그러한 점들이 충분히 참작이 될 것입니다.”[13] {1996년 12월 30일} 이수성 국무총리는 오늘 특별담화를 발표하고 … 파업의 자제를 당부하면서 근로자의 생활안정을 위해 특별법을 제정하겠다고 밝혔습니다. … (국무총리 이수성) “오늘 아침 서울 지하철 근로자들이 파업을 자제하기로 한 것은 대단히 감사하고 자랑스러운 결정이었습니다.”[14] 2단계 총파업 (1/3~1/14) 새해가 밝아 왔다. 정권과 자본은 새해 연휴를 기점으로 파업이 잦아들 것이라고 희망 섞인 예측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한번 솟구친 총파업의 열기는 새해 연휴의 공백마저 거뜬히 뛰어 넘었다. 1월 3일 금속연맹과 자동차연맹을 중심으로 파업이 다시 시작되더니, 6일에는 현총련과 전문노련이 다시 파업에 돌입했고, 사무노련과 건설노련이 새로 총파업에 결합했다. 7일에는 병원노련, 방송4사 노조, 의보노조 등이 파업에 돌입했다. 8일부터는 사무노련, 건설노련, 대학노련 등 사무전문직 노동자들이 본격적인 투쟁에 나서기 시작했다. 1단계 총파업의 중심축이 제조업이었다면, 2단계 총파업을 거치면서 사무전문직으로 확대되는 양상이었다. 1월 3일부터 14일까지 2단계 총파업에는 연인원 169만 5천여 명이 참여했다. 이처럼 3주 가까이 위력적인 총파업이 지속되자, 민주노총이 문제해결의 주체라는 대중적 분위기가 조성됐다. 각종 설문조사에서 총파업 지지도가 70%에 이르렀다. 시민들의 격려와 성금, 의견개진 전화가 쇄도했다. 가두행진 때도 시민들의 높은 지지가 표명됐다. 투쟁양상도 집회와 가두홍보의 틀을 벗어나 의료서비스, 차량정비서비스, 공단청소 등 시민과 함께 하기 위한 행동을 모색하며 대시민선전과 서명운동을 광범위하게 진행했다. 매일 전국 20여개 지역에서 집회, 가두행진, 시민홍보·서명이 진행됐다. 참여인원도 하루 평균 10~12만 명에 이르러 시내 중심지에서 위력적인 가두시위를 전개했다. 11개 지역(안양, 안산, 수원, 의정부, 천안, 광주, 대구, 경주, 포항, 울산, 진주)에서는 한국노총과 공동집회가 이뤄졌고, 포항에서는 공동투쟁체를 구성했다. 여론의 지지가 광범하게 표출됨에 따라 민주노총 조합원들은 승리에 대한 자신감 속에 더욱 힘찬 투쟁을 전개할 수 있었다. 반면, 정권은 자제심을 잃고 강경론에서 온건론·회유책을 오고가는 등 일관성 없는 대응으로 좌충우돌하는 양상을 보였다. 울산지역은 새해 연휴가 상대적으로 길어 6일부터 2단계 총파업이 시작됐다. 1월 6일 울산은 지역 집회를 하지 않고, 새해 연휴 이후 향후 투쟁에 대한 결의를 새롭게 다지고 민주노총의 파업 일정 등을 조합원에게 제대로 정리시키는 것이 중요하다고 판단해 각 사업장 집회로 대체했다. 이에 현대차노조는 오전 10시 본관 앞에 8천여 명의 조합원이 모인 가운데 결의대회를 열었고, 1월 7일부터 지역 집회에 참여했다. 지역 집회는 7일 1만 5천명, 8일 2만명, 9일 2만 5천명이 참여하면서 매일 최대 인원을 기록했다. 이때부터 ‘정권 퇴진’ 구호가 자연스럽게 대중적인 중심 구호로 부상했다.[15] 그런데 총파업이 연일 계속되자 준비가 안 됐거나 조직력이 취약한 사업장들은 점점 어려움을 겪게 됐다. 핵심 사업장들 역시 조·반장을 중심으로 부분조업에 들어가면서 마찰이 표면화하기 시작했다. 보수언론은 노동자들의 투쟁열기를 가라앉히기 위해 관리직과 조·반장, 하청 노동자들을 동원한 청소나 기계 정비를 ‘조업재개’라고 과장해서 선전했다. 그러한 상황에 대응하여 민주노총 지도부는 전면파업에서 부분파업으로 파업전술을 전환했다. 총파업의 중심에 있던 현대차노조도 8일부터 부분파업으로 전환하고 조업 시간을 확대하는 조치를 취했다. 그러나 많은 현장활동가들이 우려하며 문제를 제기했다. “한번 동력이 떨어지거나 투쟁 수위를 낮추면 다시 동력을 높이거나 투쟁수위를 높이기는 거의 불가능하다”는 이유였다. {1997년 1월 8일} 전면파업을 계속해온 울산 현대자동차노조가 오늘 밤 근무조부터 조업을 다시 시작하기로 했습니다. … 현대자동차노조는 오늘 오후 6시 대의원 비상간담회에서 야간조의 경우 8시간의 근로 시간 가운데 4시간 동안 조업을 하고, 주간조도 오전 10시부터 2시간 동안 조업을 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이와 함께 현총련 산하 각 노조들도 오는 14일까지 부분파업으로 투쟁 수위를 낮추기로 했습니다. 현대자동차노조는 전면파업에서 부분파업으로 투쟁 수위를 낮춘 것은 민주노총의 투쟁 수위 완급 조절 지침에 따른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그러나 태화강 둔치에서의 규탄 집회는 계속하면서 민주노총의 일정대로 오는 14일까지 노동법 백지화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공공부문 노조와 함께 총파업에 들어가기로 했습니다. 한편 울산지역 현총련 소속 노조 등 8개 노조는 오늘도 태화강변에서 노동법 철폐를 요구하며 규탄 집회를 갖고 오토바이 경적 시위도 벌였습니다.[16] {1997년 1월 9일} 민주노총은 정부에게 노동법을 스스로 처리하는 기회를 주고 수출을 위해 14일까지 파업 강도를 다소 낮추기로 했습니다. 민주노총은 오늘부터 수출산업인 자동차회사 노조들에게 조업에 참여하게 했고, 국민들의 불편을 고려해 병원노련 등의 근무자 수를 늘리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건설, 사무전문 노조는 예정대로 내일 파업에 들어가기로 했고, 명동성당 등에 경찰력을 투입할 경우 즉시 총파업에 들어갈 방침입니다.[17] 민주노총의 전술 전환으로 총파업의 기세가 흔들리는 조짐을 보이자, 김영삼 정권은 물리력으로 진압하려는 의도를 노골화했다. 10일, 정권은 명동성당에서 농성 중인 민주노총 지도부를 검거하겠다며 ‘명동성당 공권력 투입 방침’을 천명했다. 또한 전국 투쟁의 진원지인 울산의 파업대오를 깨뜨리기 위해 전경 병력으로 지역집회 행진대오를 침탈했다. 바로 그 때, 거리행진 도중 전경들과 대치한 상황에서 현대차노조 정재성 조합원이 스스로 몸에 불을 붙였다. 총파업 기간 내내 정재성은 소위원으로서 조합원들에게 집회 참석을 열정적으로 독려하고 있었다. 현장에서 유인물을 배포하기도 하고 “집에 가지 말고 다 참석해라”며 조합원들에게 선동하기도 했다. 현장을 돌아다니며 수시로 호루라기를 불곤 했다. 태화강 둔치 가서는 일일이 출석체크를 했다. 1997년 1월 10일 오전 정재성은 현장에서 만난 동료에게 “오늘 공권력이 치면 가만히 안 있을끼다”고 말했다. 동료는 으레 그런 말로 생각했지만, 정재성은 이미 바나나우유곽에 신나를 담아 둔 상태였다. 오후 2시 태화강 둔치에 1만 3천여 명이 모여 ‘노동악법 안기부법 전면 무효와 김영삼 퇴진을 위한 울산노동자결의대회’를 시작했다. 이어서 ‘민주주의와 국민생존권 사수를 위한 울산 노동자·시민 한마당’ 행사를 열었다. 집회가 끝나갈 무렵인 4시쯤 서울 명동성당에서 농성중인 민주노총 지도부에 대한 사전구속영장 발부 소식이 전해졌다. 4시 15분 집회가 마무리됐을 때 경찰은 이미 중무장을 하고 있었다. 대오는 계획대로 울산시청을 향해 행진을 시작했다. 맨 앞에 깃발과 만장이 가고, 그 뒤로 선봉대 2~3백명, 그 뒤로 본대오가 따라왔다. 이날 집회와 행진은 가족과 함께 하는 행사로 계획된 터라 행진대오 속에는 상당수의 어린이와 가족이 포함돼 있었다. 4시 20분 태화로터리 근처에서 경찰과 대치가 시작됐다. 미리 신고된 집회와 행진인데도 경찰이 막아섰다. 노동자들의 항의가 빗발치자 경찰이 최루탄을 발사했다. 방패와 방망이로 노동자들을 내려치기도 했다. … 7명이 부상을 입었다. 노동조합 방송차량도 파손됐다. 행진대오가 흐트러졌다가 4시 40분 다시 모이자 경찰이 또 최루탄을 쏘았다. 노동자들은 돌을 던지기 시작했다. 정재성이 대치상황 한복판으로 뛰어든 것은 바로 그때였다. 4시 50분 정재성은 미리 준비한 신나를 몸에 붓고 자신의 몸에 불을 당겼다. 주변에 있던 노동자들이 화들짝 놀라 급하게 달려들어 불을 껐다. 정재성은 구급차를 타고 가까운 울산병원으로 긴급후송됐다. 얼굴과 하반신을 중심으로 전신 30%에 2~3도 화상을 입었다. 5시 50분 울산병원이 치료를 못하겠다고 손을 들자 대구 동산병원으로 이송했다. 대구 동산병원에서 응급처치를 마친 뒤 밤 10시에 서울 한강성심병원을 향해 다시 출발했다. 정재성이 구급차로 실려간 뒤에도 행진대오와 경찰의 대치는 계속됐다. 태화강을 등지고 있던 행진대오는 뒤로 돌아 태화강을 건너 주리원백화점을 거쳐 성남동 일대에서 가두행진을 벌였다. 현대차 조합원 3천여 명은 계속 이동해서 공장 안으로 들어갔다. 정재성의 분신 직후인 5시를 기해 회사는 무기한 휴업을 공고했다. 정문이 폐쇄됐지만, 지역집회에 참석했던 조합원들과 야간조 출근한 조합원들이 정문을 뚫고 들어와 9시 노동조합 앞에 모여 집회를 열었다. 간단히 집회를 마치고 노조 지도부가 노개투위원회 회의를 갖는 동안에도 조합원들이 계속 모여들었다. 10시 30분 1만여 명의 조합원이 집결한 가운데 다시 집회를 열었다. ‘노동악법 전면 백지화 및 전 조합원 총력투쟁 결의대회’였다. 회사의 무기한 휴업에 맞서 노조는 전면파업을 선언했다. … 1월 11일 현대차 조합원들은 주야 근무조가 모두 지역집회에 참석했다. 지역집회에 참석한 3만여 명의 노동자들은 대부분 운동화에 마스크를 쓰고 면장갑을 끼고 결연한 표정으로 투쟁 의지를 보여주었다. 노동자들의 투쟁 분위기가 강경하자 정권은 공권력 투입이 또 다른 악수라고 판단해 중단했다. 1월 12일은 일요일인데도 ‘노동법·안기부법 무효화와 정재성 동지 회복 기원대회’에 2만여 명이 참석했고, 1월 13일에는 역대 최고의 인원이 참석했다.[18] 3단계 총파업 (1/15~1/18) 정부와 신한국당이 13일 ‘노동법 재개정 불가’, ‘영수회담 거부’, ‘민주노총 지도부 영장 집행’이라는 강경 일변도의 방침을 재확인하였다. 이는 아직도 민의의 소재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현 사태의 심각성을 애써 외면하는 용납할 수 없는 처사로서 민주노총은 분노에 앞서 과연 정권에게 국가 운영능력이 있는지를 심각하게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이에 민주노총은 오만하고 독선적인 김영삼 정권에게 국민의 뜻을 올바로 전달하기 위해서라도 15일 예정대로 ‘3단계 전면 총파업’을 단행한다. 정부와 신한국당이 노동계와의 TV토론과 대화를 제의하다가 하루도 지나지 않아 강경입장으로 복귀한 것은 그들의 토론과 제의가 얼마나 국민기만적인 것인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지난해 말 KBS 등의 노동법 개정에 관한 노·사·정 간의 토론을 정부여당이 세 번씩이나 방해하여 무산시킨 전례로 볼 때, 이미 많은 국민들은 신한국당의 TV토론 제안의 의도가 무엇인지를 반문하지 않을 수 없다. 민주노총은 현재 국제적 기준에 전혀 부합하지 않는 노동악법의 날치기 처리로 인한 국제적 항의물결이 확산되고, 이것이 우리 상품의 신용도를 떨어뜨리고 국제경쟁력을 약화시킬 수도 있음을 엄중히 경고한다. 아울러 우리는 정부가 날치기 노동악법을 전면 백지화하여 국제 사회와 여러 차례 약속한 국제적 기준과 관행에 맞는 노동법 개정을 단행함으로써 국가위신과 국제적 신뢰를 회복하기를 충심으로 권고하는 바이다. 민주노총은 14~15일 한국노총이 공공부문 주도의 총파업에 돌입한 것에 대해 1천 2백만 노동자의 이름으로 환영하며, 정부당국이 이 총파업을 이유로 노총 지도부를 사법처리한다면 이를 민주노총에 대한 침탈로 간주하고 강력하게 대응할 것임을 밝힌다. 또 한국노총이 국민 절대다수의 요구를 대변하여, 날치기 노동악법의 전면 무효화를 쟁취할 때까지 끝까지 민주노총과 함께 끝까지 투쟁해 나갈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는다.[19] 1997년 1월 15일 다시 무기한 총파업을 선언한 민주노총의 3단계 총파업이 시작됐다. 이날 388개 노조 35만 8천 명이 총파업에 참가하면서 총파업 기간 중 가장 많은 노조와 조합원들이 총파업에 참여했다. 제조업에서 18만 1천 536명, 비제조업에서 9만 1천 569명, 공공부문에서 9만 7천 681명이 참여했다. 서울 5만여 명을 비롯해 전국 20여 개 지역에서 16만여 명이 집회와 시위에 나섰다. 1월 15일 울산에서도 ‘노동법·안기부법 철회를 위한 3단계 총파업 승리결의대회’를 열었는데, 3만여 명이 참여했다. 상황은 정권과 자본이 수세적인 국면이었다. 따라서 투쟁 동력을 최대한 살려내 투쟁을 장기화하는 것이 필요했다. ‘질긴 놈이 승리한다. 끝까지 투쟁하자’라는 구호는 이 시기 상황과 노동자의 입장을 잘 표현해 주었다.[20] 18일까지 지속된 3단계 총파업에는 연인원 90만 5천여 명이 참여했으며, 한국노총도 연인원 42만 2천여 명이 파업에 참여했다. 민주노총의 3단계 총파업은 김영삼 정권에게 정치적 치명타를 안겼다. 드디어 김영삼 정권은 여야 영수회담을 추진하고 날치기 법안의 국회 재논의를 검토하겠다면서, 총파업의 위력에 눌려 궁지로 내몰리고 있음을 스스로 인정했다. 수요파업 전환 그런데 민주노총 지도부가 18일 무기한 총파업을 중단하고 ‘수요파업’으로 전환한다고 선언했다. 수요파업이란 정상조업을 진행하되 매주 수요일만 총파업을 이어나간다는 것이었다. 최근 정치권 등을 중심으로 현 사태 해결의 실마리를 찾아가는 것처럼 알려지고 있으나, 이 시간 현재 가시적인 성과는 전혀 없는 실정이다. 민주노총은 날치기 통과된 악법의 무효화와 노동법 재개정, 그리고 구속·수배 해제, 단위노조 간부들에 대한 고소·고발 철회, 탄압 중지가 없이는 결코 현 사태를 해결할 수 없을 것임을 다시 한 번 분명히 밝힌다. 민주노총은 그동안 국민생활 편의와 어려운 국가경제를 고려하여 공공부문 중심사업장의 파업을 무기한에서 2일간으로 단축, 투쟁의 완급을 조절하고, {신한국당} 이홍구 대표와의 TV토론을 수용하는 등 사태를 원만하게 해결하고자 최선의 노력을 다해 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부 여당은 여론을 호도하여 아직도 본질적 문제를 해결하는 데 전혀 성의를 보이지 않고 임기응변식 술책만 펴고 있다. 이에 민주노총은 정부 여당이 날치기 통과된 노동악법, 안기부악법을 무효화하고 노동법 재개정을 받아들일 것을 다시 한 번 강력히 촉구하며, 만일 이에 응하지 않을 경우 2월 18일부터 4단계 총력투쟁으로서 공공부문을 비롯한 모든 부문 사업장이 무기한 전면 총파업에 돌입키로 한다. … 민주노총은 ‘4단계 총파업투쟁’ 이전에 1월 20일부터 매주 수요일에는 <총파업의 날>로 정해 이날 하루 산하 모든 부문 사업장(공공부문 제외)이 총파업에 들어간다. 또 매주 토요일은 <국민과 함께 하는 날>로서 전국 동시다발로 대규모 범국민대회를 개최한다.[21] {1997년 1월 18일} 민주노총이 총파업을 풀기로 결정했습니다. 민주노총의 권영길 위원장은 정부 여당이 스스로 노동법을 철회하고 재개정할 수 있는 기회를 주기 위해 다음 달 18일까지는 무기한 총파업을 풀고 업무에 복귀하기로 했다고 밝혔습니다. 그러나 하루빨리 노동법을 재개정하도록 촉구하는 뜻에서 매주 수요일에는 파업을 벌이지만 방송사와 지하철 등 공공부문 노조는 제외한다고 밝혔습니다. 국민들의 불편을 최소한으로 줄이기 위해서라는 설명입니다. 주 한 차례 파업과 함께 매주 토요일 오후에는 전국에서 노조원들이 대규모로 참석하는 범국민 결의대회를 열어 투쟁을 계속하기로 했습니다. 민주노총은 다음 달 18일까지 정부가 노동법을 다시 개정하지 않거나 경찰 투입 등 강경 대응에 나설 경우 즉각 4단계 총파업에 들어가겠다고 밝혔습니다.[22] {1997년 1월 18일} 민주노총 지침에 따라서 그동안 가장 큰 규모로 파업을 해왔던 울산지역 현대 계열사 노조원들도 다음 주부터 다시 직장에 복귀하기로 했습니다. … 현총련을 비롯한 울산지역 민주노총 산하 노조들은 오늘 오후 태화강변에서 가진 노동법 반대 투쟁 집회에서 민주노총의 투쟁 지침에 따라서 다음 주부터는 조업에 복귀한다고 밝혔습니다. 이에 따라 현대자동차노조도 지난달 26일부터 계속해 온 파업을 중단하고 조업에 복귀하기로 해서 다음 주부터는 정상조업이 이뤄지게 됐습니다.[23] 민주노총이 ‘수요파업 전환’을 발표하자 19일 검찰은 명동성당 민주노총 지도부에 대한 사전 구속영장 집행을 당분간 유보하겠다고 밝혔다. 명동성당 주변에 포진하고 있던 경찰병력도 철수했다. 민주노총 지도부는 ‘수요파업 전환’의 이유로 ‘투쟁동력이 급격히 떨어진 상황에서 전체 투쟁전선을 일사불란하게 유지하며 장기전에 대비할 필요가 있다’는 판단을 제시했다. ‘금속연맹 대기업 사업장의 동력은 이미 바닥나 부분적으로 조업재개를 한 가운데 간부파업을 하는 정도고, 위력적인 투쟁을 벌이던 기아자동차 등 자동차연맹 사업장도 파업 참여율이 50% 정도로 급격히 떨어졌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수요파업 전환에 대한 강력한 비판이 전국 곳곳의 현장으로부터 제기됐다. ‘투쟁동력은 여전히 상승세이며, 오히려 투쟁수위를 높이는 적극적인 투쟁을 해야 한다’는 주장에서부터 ‘투쟁수위 조절은 필요하지만 정치적으로 중요한 시점이므로 계속 투쟁을 유지해야 한다’는 주장까지 다양한 비판적 의견들이 여러 지역에서 제출됐다. 총파업의 중심이었던 울산지역은 수요파업으로 전환하지 않아도 될 만큼 충분히 동력이 살아 있었다. 16일 지역 집회에는 3만여 명이 참여했다. 17일 현대차노조가 개최한 ‘정재성 동지 쾌유기원 및 노동법·안기부법 개악 무효화 선언대회’에도 1만 8천명의 조합원이 참여했다. 따라서 민주노총의 수요파업 전환 방침에 대해 울산지역 현장활동가들은 더 강력하게 비판적 의견을 냈다. ‘우리가 힘든 만큼 정권과 자본도 힘들다. 힘을 내서 다시 밀어야 된다. 대중동력도 폭발적이다.’ 울산지역의 22일 수요파업은 2만여 명이 참석해서, 파업 참여율과 집회 동원 역량에서 이전과 별 차이를 보이지 않았다. 현대정공의 경우 대의원 선거를 마치고 동력을 되살림으로써 12월 26일 총파업 첫날의 파업 참가율을 복원했다. 그러나 25일 토요일의 지역집회는 현대차의 특근으로 참석 인원이 1만 3천명으로 뚝 떨어졌다. 26일 민주노총과 한국노총의 연대집회는 소수만이 참석한 가운데 이완된 분위기로 진행됐다. 28일 민주노총은 수요파업마저 중단하기로 결정했다. 민주노총의 수요파업 전환은 조합원들에게 사실상의 총파업 중단으로 받아들여졌고 따라서 수요파업 전환 이후 오히려 투쟁동력이 급격히 소멸되고 말았다. 전체 전선이 이완되자 총파업에 참여한 사업장들은 고소고발, 손배가압류, 무노동무임금 등 자본의 반격에 개별로 힘겹게 대응해야 했다. “민주노총의 갑작스런 수요파업 전환 지침(무기한 총파업 철회)으로 조합원들은 총파업이 마무리 단계에 들어섰다고 생각하였으며, 이러한 혼란스러운 상황은 많은 사업장에서 사측의 정리해고, 대체근로, 무노동 무임금 책동에 무방비로 당하게 만들었다.”[24] 민주노총이 수요파업 전환으로 투쟁동력을 상실해 나간 이 시기, 보수 정치권은 노동자들을 배제한 채 ‘노동법 재개정을 통한 정국 수습’을 모색했다. 1월 21일 대통령 김영삼과 국민회의 총재 김대중이 여야 영수회담을 갖고 날치기 통과된 법안의 국회 재논의를 합의했다. 총파업이 중단된 가운데 여야가 임시국회에서 노동법 재논의를 시작하면서 노동법 개정의 주도권은 다시 한 번 노동자들의 손을 떠나 여야 정치권으로 넘어갔다. 4단계 총파업 (2/28) 민주노총은 애초 2월 18일로 예정했던 4단계 총파업을 ‘임시국회 본회의 기간’으로 연기했다가 다시 28일로 최종 결정했다. 28일 4단계 총파업은 전국에서 13만 2천 명이 참여해서 4시간 동안 진행됐다. 참가자 수나 분위기 등 모든 면에서 3단계 총파업까지의 열기와는 확연하게 차이가 났다. 노동법 재개악 신한국당과 국민회의·자민련 등 보수 정치권은 여야 협상을 거쳐 3월 10일 새로운 노동법을 국회에서 통과시켰다. 그런데 여야 합의로 통과된 노동법은 날치기로 통과된 노동법에서 △정리해고제 도입 2년 유예 △근로자파견제 도입 2년 유예 △쟁의기간 대체인력 채용 불허 △상급단체 복수노조 허용 △기업단위 복수노조 허용하되 5년 유예 △노조전임자 임금지급 금지 5년 유예 등 극히 일부 내용만을 수정한 것이었다.[25] 다시 말해서 12월 26일 날치기 통과된 노동법에 새로 담겼던 다수의 독소 조항들, 즉 △노조전임자 임금지급 금지 △해고자의 조합원 자격 인정 기간을 대법 선고에서 중노위 판정까지로 단축 △조합원 총회와 상관없이 노동조합 대표자의 체결권 인정 △생산시설 점거 쟁의행위 금지 △쟁의기간 임금지급 금지 및 요구의 금지 등이 그대로 남았다. 노동자들이 줄기차게 요구해 왔던 △제3자 개입금지 철폐 △복수노조 인정 △교사·공무원의 노동3권 인정 △공익사업장 직권중재 철폐 등은 다시 한 번 철저하게 무시됐다. 신한국당과 국민회의, 자민련 등 여야 국회의원들은 전국 노동자의 역사적인 총파업 투쟁으로 만들어 놓은 재개정 기회를 철저히 정치적 이해득실에 따라 흥정으로 마무리하고 말았다. 우리는 이번에 통과된 노동악법은 여야합의라는 허울을 뒤집어쓴 제2의 날치기였다고 규정하고 악법조항에 대해서는 결코 수용할 수 없다는 사실을 분명히 밝혀둔다.[26] 노동자들이 배제된 가운데 자본가 정치세력들끼리 협상을 벌인 만큼 당연한 결과였다. 특히 ‘강인한 민주투사’ 이미지를 갖고 있던 김대중이 이끌던 국민회의(오늘날의 민주당)는 자본가정당으로서 자신의 계급적 본질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노동법 재개정을 위해 임시국회가 열릴 때 민주노총은 2박 3일 국회 항의방문 투쟁을 조직했지만, 전국에서 400여 명밖에 참석하지 않았다. 투쟁 동력이 바닥난 민주노총은 무기력을 곱씹을 수밖에 없었다. 결국 역사적인 총파업은 노동법 개악을 끝내 막아내지 못한 채 마무리됐다. ◎ 노개투 총파업의 결산 노개투 총파업은 소기의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지만, 노동자들이 총파업을 통해 위력적인 정치투쟁을 벌일 수 있다는 가능성만은 분명히 확인했다. 노개투 총파업은 김영삼 정권에게 정치적 치명상을 안겼다. 김영삼 정권은 총파업 직전까지만 해도 강력한 정국 주도권을 갖고 있었지만, 총파업으로 치명적 타격을 입고 이어 한보철강 사태와 황태자 노릇을 하던 아들 김현철의 구속을 거치면서 식물 정권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노개투 총파업의 위력은 노동자계급은 물론이요, 전체 민중을 결집시켰다. ‘노동법·안기부법 개악철회와 민주기본권 수호를 위한 범국민대책위원회’가 1월 10일 소집한 비상시국 사회단체 연석회의에는 862개 단체가 참여했다. 대학교수들의 시국선언이 잇따랐고, 변호사 554명은 ‘노동법개정은 위법이기 때문에 무효’라고 선언했다. 문화예술계 인사 333명은 ‘노동법·안기부법 개정 백지화’를 요구했고, 여성들도 총파업 지지 선언에 동참했다. 교수와 변호사들이 거리 행진과 항의 농성에 나섰고, 종교인들도 시국 법회·기도회·미사를 통해 신도들과 함께 거리에 나섰다. 1월 16일자 한길리서치의 ‘총파업에 대한 국민여론조사’에서는 65.6%가 민주노총 총파업을 지지하고, 93.8%가 공권력 사용을 반대하며 대화를 통한 해결을 지지했다. 비슷한 시기 한겨레신문 여론조사에서는 75.0%가 총파업을 지지하고, 83.3%가 정부의 강경대응에 반대했다. 74.3%가 노동법 개정이 무효라는 주장에 동의했고, 84.6%가 노동법 재개정 요구에 동의했다. 일부 법학교수들이 노개투 총파업을 ‘헌법질서 수호를 위해 저항권을 행사한 적법한 파업’이라고 규정하자, 창원지방법원과 대전지방법원의 판사들이 노동법·안기부법의 국회 통과절차에 대한 위헌 제청에 나설 정도였다. 그러나 노개투 총파업은 결정적인 순간에 중단됨으로써 그 위력에 걸맞은 성과를 전혀 얻지 못했다. 정리해고제와 근로자파견제를 2년 유예시키고 민주노총 합법화의 근거를 확보하는 초라한 결과만이 남았다. 총파업이 허망하게 중단된 이후 투쟁에 앞장섰던 현장 일선의 노조간부와 활동가들에게 대대적인 탄압이 쏟아졌다. 1월말까지 전국적으로 469명의 노조 간부가 고소고발 당했다. 수많은 노동자들이 징계위원회에 회부됐고, 상당수가 해고됐다. 현대차와 기아차를 비롯한 상당수 사업장에 무노동 무임금이 적용됐고, 손배가압류가 대다수 사업장에서 행해졌다. 그러나 민주노총 지도부에게는 아무 일이 없었다. 1월 21일의 여야 영수회담에서 김영삼은 민주노총 지도부에게 발부된 사전 구속영장을 집행하지 않겠다고 약속했고, 실제로 권영길 위원장을 비롯한 민주노총 지도부는 거대한 총파업을 이끌고서도 아무런 탄압을 받지 않았다. 현장 일선의 수많은 노조간부와 활동가들에게 대대적인 탄압이 퍼부어진 것과 너무나 대조되는 상황이었다. 총파업은 왜 패배했는가? - ‘국민과 함께 하는 노동운동’ 노선의 필연적 귀결 민주노총을 중심으로 전개된 총파업은 김영삼 정권에게 정치적 치명상을 안기는 매우 위력적인 것이었다. 따라서 만일 민주노총이 확고한 의지와 자신감을 갖고 총파업을 끈질기게 지속했다면, 나아가 더욱 확대시켰다면, 얼마든지 민주노총과 정권의 직접 담판을 통해 개악된 노동법의 철회는 물론이요, 노동자들의 노동법 개정 요구까지도 관철시켜 볼 수 있는 가능성이 있었다. 그러나 민주노총 지도부는 결정적인 순간에 총파업을 중단하고 여야 협상에 모든 것을 떠넘겨 버렸다. 결국 역사적인 총파업을 하고서도 노동법 개악을 거의 막아내지 못하는 말도 안 되는 결과가 남았다. 역사적인 총파업의 허망한 패배는, 당시 민주노총 지도부가 주창하고 있던 이른바 ‘국민과 함께 하는 노동운동’ 노선의 필연적 귀결이었다. ‘국민과 함께 하는 노동운동’ 노선을 가진 세력, 즉 ‘국민파’의 기본적인 사고 구조는, 노동자들의 단결된 힘에 의거한 강력한 투쟁을 통해서가 아니라, 국민 여론의 호응에 의거한 대화와 협상을 통해서 노동자들의 요구를 실현해 나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국민파는 ‘노동자계급 총단결 총투쟁’이라는 노동자계급 노선이 아니라, 국가주의·국민주의·민족주의라는 소부르주아 노선에 깊이 함몰돼 있었다. 총파업이 전개되는 동안 민주노총 지도부의 목표는 ‘총파업 위력의 극대화’가 아니라 ‘우호적인 여론 유지’에 있었다. 그래서 총파업 동력을 강고하게 유지·확대해야 할 상황에서 여러 차례 여론의 호응을 끌어내기 위해 일부러 투쟁수위를 낮췄다. 12월 29일 부산교통공단노조가 총파업에 합류하면서 서울과 부산의 지하철이 모두 멈춰 서게 됐을 때, 민주노총 지도부는 “시민에게 불편을 줘서는 안 된다”며 지하철과 병원을 비롯한 공공부문 파업을 중단시켰다. 또한 1997년으로 넘어가는 신정 연휴 기간에는 전체 총파업을 중단시켰다. 새해 들어 총파업이 다시 살아나 광범위하게 확산돼 나갈 때, 민주노총 지도부는 1월 7일 돌입 예정이던 지하철·한국통신·화물 등의 공공부문 파업을 15일로 연기시켰고, “정부에게 노동법을 스스로 처리하는 기회를 주고 수출을 위해” 8일 제조업의 전면파업을 부분파업으로 전환시켰다. 15일 총파업이 최대 규모를 기록하며 다시 한 번 기세등등하게 뻗어나가려 할 때, 민주노총 지도부는 결정적으로 찬물을 끼얹었다. 공공부문 파업을 16일까지로 한정시켰고, 18일에는 “정부 여당이 스스로 노동법을 철회하고 재개정할 수 있는 기회를 주기 위해” 총파업을 중단하고 수요파업으로 전환시켰다. 민주노총 지도부는 수요파업 전환의 이유로 ‘투쟁동력 하강’을 들었지만, 실제로는 총파업 자제를 통해 협상 분위기를 조성하는 게 여론 흐름에 유리할 것이라는 계산으로 내려진 결정이었다. ‘임박한 여야 협상에 대한 기대감이 국민 여론의 흐름’이며 ‘민주노총의 경직된 무효화 요구는 국민정서에 배치된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자본가들의 강력한 영향력 아래서 그때그때 요동치는 여론의 흐름에 끌려 다니느라 민주노총 지도부는 총파업 동력을 계속 약화시켰고, 결국 역사적인 총파업이 허망하게 소멸되도록 결정타를 날려버린 것이었다. 민주노총 지도부의 노선은 투쟁 전술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민주노총의 지침은 평화적인 지역집회와 가두행진으로 일관했다. 노동자대중의 능동성을 드높이고 투쟁동력을 확대하기 위해서는 더 적극적인 실천계획이 필요했다. 그러나 투쟁 전술을 발전시키기 위한 아래로부터의 창의적인 모색과 활발한 시도가 이뤄지지 못했다. 지도부는 협소한 투쟁지침에 입각해서 대중의 행동을 통제하려 했다. 이는 대중의 능동성이 분출하며 더 폭발적인 투쟁으로 전진하는 것을 가로막았다. 현장에서 터져 나온 투쟁동력이 지배계급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긴 했지만, 강력한 투쟁이 언제까지나 계속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선도적으로 치고 나온 대공장을 넘어서서 투쟁동력을 확대하기 위한 실천계획이 있어야 했다. 특히 공단 조직화를 위한 계획과 실천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그러나 시내를 중심으로 한 평화적인 지역집회에 모든 실천계획이 집중됐다. 공단 조직화 사업은 고사하고 자기 사업장 투쟁동력을 강화하는 것조차 지역집회에 가로막힌다는 불만이 나올 지경이었다. 울산지역 투쟁의 성공 이유 … 넷째, 투쟁전술이 지극히 대중적이고 창조적이었다는 점이다. 우선 투쟁이 시작됨과 동시에 대중적으로 천명한 ‘피해의 극소화 원칙’이 갖는 효과이다. 이러한 지도부의 기본 방침은 중간적인 대의원들이 비교적 마음 놓고 활동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피해의 최소화 원칙은 이번 투쟁을 통해 현장의 역량이 초토화되어서는 안 되고 위원장과 현총련 의장, 대의원 대표까지로 구속을 제한한다며 일반 대의원들은 함부로 나서지 말고 조합원들은 이들을 보호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것이 대중 집회에서 천명되자 조합원들이 열광적 지지를 보내주었고 일부 활동가들도 상당히 고무적인 태도를 보였다. 각오와 결의가 떨어지는 활동가들을 투쟁의 시기에 보호하려고 하는 것은 이들의 열의를 불러일으키는 데 상당한 기여를 한다는 것을 잘 말해주는 것이라 하겠다. 다음으로 비폭력 평화전술의 위력이다. 쓸데없는 선제공격을 하지 않고 군중의 위세로 경찰력을 무력화시킨 비폭력 평화전술은 여론을 좋게 만들고 중후진 조합원들의 참여를 보장하는 데 적극 기여하였다. 의식이 높지 않은 조합원들의 경우 공권력과의 충돌은 상당히 부담이 가는 것이다. 울산지역의 경우 대중적인 세를 기반으로 모든 집회를 합법적으로 쟁취함으로써 조합원들이 부담 없이 집회에 참가할 수 있었다. 다음으로 우리가 중요하게 볼 것은 가족들의 참여를 유도한 것과 다양한 쟁의 프로그램 개발이다. 울산지역의 경우 매일 같이 대규모 지역 집회를 개최하다 보니 집회에 식상해 하거나 긴장감이 떨어져 자칫 동력이 떨어질 가능성이 있었다. 이때 제기된 것이 “가족과 함께 하는 노동법 개정투쟁”이었으며, 이 방침이 공표되자 가족 단위의 집회 참석 인원이 많게는 수천 명에 이를 정도였고 조합원 집단 거주지의 가족들이 무료로 커피를 제공하는 등 전폭적 대중적인 지지를 받았다. 가족들의 투쟁 참가는 조합원들에게 자신감과 긍지를 불어넣었고 가족들은 이번 투쟁의 의미를 깊게 새기는 결과를 가져와 투쟁에 대한 전폭적인 지지를 획득하였다. 이는 투쟁의 장기화에 따른 부담을 최소화하는 데 일조하였다. 또한 조합원 가족 노래자랑, 장기자랑, 자녀들의 노래 공연과 우유마시기 대회 등 다양한 가족 참여 행사를 배치함으로써 조합원 가족들에게 집회가 친밀하게 다가서도록 했으며 개사곡 경연대회, 도전 50곡, 구호 경연대회, 3행시 경연대회, 박터뜨리기, 단심줄 꼬기 등의 행사를 통해 조합원들의 자발적인 참여를 유도했다. 또한 오토바이 부대는 기동력을 앞세워 다양한 전술(사업장 내의 투쟁 분위기를 고조시키기 위한 사내 행진, 대중적인 행진이 불가능한 신한국당 당사 항의투쟁이나 시청 항의방문 투쟁, 투쟁기간 중 동구와 남구에 대한 선전, 우리의 위세를 과시하는 가두 오토바이 행진)을 구사했으며 지도부 사수에 커다란 역할을 했다.[27] 이번 총파업투쟁의 두드러진 특징 중의 하나는 민주노총 중앙의 지침에 대해 산하 일선노조에서 잘 지키려 하였고 대중들도 민주노총의 지침이라면 일단은 지키고 따라야 한다는 분위기였다. 이런 모습은 지역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일단 집회가 시작되면 모든 것은 지도부의 지침에 따라 움직이는 분위기였다. 그러나 이것은 양면성을 갖는 것이다. 민주노총의 지도력이 서고 중심이 잡힌다는 것은 기업별노조 체계를 극복하고 투쟁의 집중성을 살릴 수 있다는 긍정적인 측면을 갖는 반면, 지나치게 지도부 중심의 투쟁, 지도부 중심의 집회를 고집할 경우 참여대중의 자발성을 점차 약화시키면서 마침내 대중동력의 침체를 가져올 소지도 다분히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집회 본대회가 시작되기 전에 프로그램의 부족으로 많은 여유시간이 있었다. 그러나 이 여유시간을 활용하여 집회에 참석한 조합원 중에서 이번 총파업 투쟁에 대하여 자신이 갖는 느낌이라거나 제안 등을 자유롭게 발표하도록 하였으면 집회 분위기가 더욱 더 고조되었으리라 믿는다. 그러나 지도부에서는 지도부 외에 사전 계획되지 않은 조합원이 마이크를 잡을 경우 지도부의 방침에 어긋나는 선동을 할 수도 있을 것이라는 우려 때문이라고 짐작이 가고 또 이 점에 대해 지도부의 고민도 이해되지 않는 바도 아니지만, 지나치게 우려했다고 생각한다. 중요한 것은 대중은 확실하게 지도부를 믿고 있기 때문에 그러한 선동을 하는 사람에 대해 대중은 나름대로 정확한 판단을 할 것이라고 믿는 것이다. 또 다른 예로는 지도부는 지나치게 ‘비폭력 평화행진’을 강조했다. 물론 여론이 총파업에 대해 우호적이고 경찰이 의도적으로 폭력사태를 유발하려 하지 않는 상황에서 비폭력 평화집회와 가두행진을 통해 일반 국민을 더욱 더 우호적이게 만들 수도 있지만, “비폭력을 깨고 폭력행위를 유발하려는 자는 적의 프락치로 볼 것이다”는 식의 강요와 억압은 대중의 자발성을 억압하고 지도부의 지시에 무조건 따라하는 맹종자를 만들 뿐이다. 노동운동 내부에서 필요한 것은 주체적으로 판단하고 자발적으로 실천하는 대중이다. 지도부의 지시에 맹종하는 조합원은 언젠가 지도부가 무너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 오면, 그대로 함께 무너지고 만다. 우리는 투쟁을 통해 주체적인 노동자, 미래의 간부를 길러내야 한다. 그러므로 비폭력 평화행진의 필요성을 강조하되, 지나쳐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특히 “지도부의 비폭력 지침을 따르지 않으려면, 필요 없으니 집회에 오지 마라”는 식의 언어폭력은 좋지 않으며 충분한 대화를 통해 설득하고 어느 정도 의견을 진지하게 듣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본다. … 울산지역 총파업투쟁에서의 주력은 현대자동차노조를 중심으로 한 민주노총 진영이었다. 반면 한국노총 내부도 총파업투쟁에 소극적인 지도부(한국노총 울산지부)에 대해 산별연맹 또는 단위노조 대표자들이 회의 석상에서 불만을 터뜨리는 등 내부에 동요가 심했고, 민주노총 지역투본에 대해 기대와 신뢰를 보내는 편이었다. 이런 기회를 살려 한국노총의 주요 지역기반인 남부 화학단지와 효문연암 지역의 자동차 부품단지에 대해 집중적인 선전전이나 가두행진을 벌인다면 지역노동자 전체가 총파업 분위기에 휩쓸릴 수 있고, 민주노총의 영향권 내로 들어올 수 있는 상황이었다. 특히 남부 화학단지 내 민주노총 사업장인 섬유산업의 태광산업노조가 대의원의 총파업 결의에도 불구하고 위원장의 거부로 파업에 돌입하지 못하는 상황이었고, 민주노총 가입을 공언한 역시 섬유산업의 동양나이론(최근 효성티앤씨로 회사이름 바꿈) 노조가 파업열기나 요구에도 불구하고 사측의 탄압으로 어려움을 겪으면서 정문 앞에서 공동집회를 열어 지원을 요청하였는데도 이를 받아주지 못한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현실이었다. 효문연암 지역의 경우 노조의 약 3분의 1이 민주노총에 가입해 있어 지역투본에서 보다 효과적으로 선전전과 시위를 벌였더라면 이후 보다 많은 사업장에서 민주노조를 세울 수 있는 기틀이 되었을 것이다. … 노동법개정 총파업을 예상하면서 민주노총은 노동법 개정투쟁의 선봉부대로서 ‘실천단’을 구성하도록 지침을 내렸다. 실천단은 단위사업장 내에서 노동법 개정투쟁에 조합원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하도록 선전하는 일, 그리고 나아가 지역 또는 연맹별로 공동의 선전과 실천부대로서 중요한 역할을 맡겼다. 그래서 실천단에는 단위사업장의 대의원 또는 소위원을 비롯한 중간 활동가들이 많이 참여했다. 그러나 대개의 지역에서와 마찬가지로 울산지역에서도 실천단은 자기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실천단이 할 수 있고 또 해야 할 일들은 많았다. 취약지역 노동자들에 대한 선전과 설득작업, 지역주민들에 대한 선전과 설득작업, 가두행진 대열에서의 선동, 질서의 유지, 집회에서의 분위기 고조를 위한 선동 등 할 일은 많았다고 본다. 그러나 총파업투쟁이 지도구심이 폭넓게 형성되지 못하고 일부 사업장이 주도하는 식으로 전개되고 또한 완전히 지도부 중심으로 진행되면서 중간활동가 또는 실천단이 제 역할을 제대로 찾지 못했다. … 1월 19일까지 총파업 기간 25일 중 신정연휴 기간과 토요일 혹은 일요일을 제외하고 약 18일간 대규모 집회를 열었다. 이 자리에는 최소한 2만이 넘는 조합원들이 매일 참석하였다. 그래서 이 자리에서 지도부가 계획과 뚜렷한 방향을 갖고 연설을 진행했더라면 엄청난 산교육의 현장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못했다고 본다. 날치기를 주도한 신한국당의 해체를 선동하고 김영삼 정권의 퇴진을 소리높여 외쳤지만 신한국당과 김영삼정권의 배후에 있는 자본에 대한 실체의 폭로와 규탄은 약했다. 그래서 일부 사업장 노조에서는 파업을 하면서도 “이번 싸움은 노사간의 싸움이 아니라 정부와의 싸움이므로 현장에서 충돌하지 말라”는 지시가 내려져 현장관리자들이 조합원들을 개별적으로 각개격파하여 작업에 복귀토록 하는 것을 보고만 있어야 했다. 역으로 현장관리자나 부서장들도 “노사간의 싸움도 아닌데, 왜 우리 회사가 피해를 입어야 하느냐?”며 조합원들을 설득하기도 했다. 또 하나 민주노총이 조직적 목표로 설정한 산별노조의 건설이라는 대과제를 대중들에게 집단적으로 선전할 절호의 기회였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제대로 선전하지 못했다. 지나치게 “신한국당 해체”, “김영삼정권 퇴진”에만 매달려 우리의 중요한 과제 하나를 놓쳐버렸다. “이번 총파업투쟁은 기업별노조임에도 불구하고 민주노총이라는 조직적 무기가 있었기에 가능하였다. 만일 우리에게 산별노조라는 무기까지 있었더라면 얼마나 힘차게 되었겠는가”, “우리는 우리의 이웃 사업장이 사측의 탄압으로 조합원들이 총파업에 동참하고 있지 못해도 아무런 지원을 해주지 못하고 있다. 만일 우리가 지금 산별노조로 같은 노조 조직의 조합원이라면 우리가 기업의 울타리를 넘지 못하고 가만히 있겠는가” 등 충분히 공감이 가는 선동과 선전이 가능하였다고 본다. 바로 이것이 총파업투쟁이 끝난 후 우리 민주노조 진영이 챙겨야 할 소중한 부분임에도 불구하고 거의 전혀 이러한 선전과 선동이 없었던 점은 대단히 아쉬운 대목이다.[28] “민주노총은 … 대중들의 투쟁요구와 투쟁의지 나아가 정세를 역동적으로 변화, 발전시키기 위한 적극적인 노력이 부재하였다. 대부분 지나치게 평화적인 집회와 가두행진을 종용함으로써 조합원 대중을 동원의 대상으로 전락시키기 일쑤였다. 판에 박힌 집회 내용과 가두투쟁 전술은 역사적인 정치 총파업을 자신감 있게 전개하고픈 많은 조합원 대중들을 대단히 실망시켰다. 이것은 뒤늦게 분출하는 대중들의 요구를 통제하지 못해 전개되는 양상으로 나타났고 장기간 현장 총파업 투쟁을 유지하는 사업장의 어려움을 극복하는 좋은 조건과 많은 기회를 잃어버렸다.”[29] 총파업과 노동자 국제연대 세계 각국의 노동자운동은 한국의 노개투 총파업에 큰 의미를 부여했다. 이미 10년 이상 자본의 신자유주의 공세에 밀리면서도 좀처럼 투쟁의 돌파구를 찾지 못하던 세계 노동자들에게 1996~97년 한국의 노개투 총파업은 1995년 프랑스 공공부문 총파업의 맥을 잇는 또 하나의 희망이었다. 따라서 22개 국가에서 총파업 지지 시위가 벌어질 정도로 활발한 국제연대가 이뤄졌다. 특히 호주 운송하역노조는 한국 수출입 선박에 대한 하역거부를 국제적인 투쟁전술로 제안하기도 했다. 그런데 민주노총 지도부는 이 제안을 ‘정중하게 거절’했다. 국가경쟁력에 지장을 주는 행위는 국민 여론에 좋지 않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노동자계급의 국제주의가 아니라 소부르주아적인 국가주의·국민주의·민족주의가 표출되는 또 하나의 지점이었다. 민주노총 지도부는 국제연대에 있어서도 매우 잘못된 태도를 취했다. 총파업과 노동자 정치세력화 1996~97년 노개투 총파업은 노동자 정치세력화에 있어서 일대 전환점이 됐다. 노개투 총파업은 비록 승리하지 못했지만 광범한 노동자들 속에서 노동자계급의 잠재력을 자각하게 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1987년 노동자대투쟁 때에도 노동자계급의 잠재력에 대한 대중적 각성의 기회가 있었지만, 전반적인 대중의식이 너무 초보적이었던 탓에 전노협을 중심으로 한 민주노조 조합원들을 제외하고는 그 경험이 거의 유실돼 버렸다. 그러나 1987년 노동자대투쟁 이후 10여 년에 걸친 민주노조운동의 역사를 거치면서 전반적인 대중의식이 일정하게 성장해 온데다가 한 달 가까이 조직적인 총파업이 갖는 위력을 경험하면서 민주노조운동 안팎의 광범한 노동자들 속에서 노동자계급의 잠재력에 대한 자각이 일어나게 된 것이었다. 그런데 민주노총 지도부는 총파업이 소기의 성과를 얻지 못한 이유가 “단 한 석의 국회의원도 없었기 때문”이라면서, 노동자 정치세력화의 방향을 선거와 의회 중심으로 몰고 나갔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총파업의 힘이 국회의원 수백 명을 합친 것보다 훨씬 더 강력했다는 사실이다. 수백 명의 국회의원을 다 합친 것보다도 훨씬 더 강력했던 총파업의 힘을 스스로 무너뜨린 민주노총 지도부가 “단 한 석의 국회의원”을 거론하는 것은 궤변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혁명적인 대안 지도력을 세워내지 못한 한국의 노동자계급은 개량주의 민주노총 지도부가 이끄는 의회주의 노동자 정치세력화의 길로 이끌려 나아갈 수밖에 없었다. 역사적인 총파업을 허망한 패배로 이끌고서도 총파업의 후광을 화려하게 뒤집어 쓴 권영길 민주노총 위원장은, 1997년 말 대선에서 민주노총 결의로 대통령 후보로 나섰고, 2000년 민주노동당 창당과 함께 당 대표가 됐다. ‘국민과 함께 하는 노동운동’ 세력, 즉 국민파는 역사적인 총파업을 패배로 이끈 과오를 범하고서도 아무런 반성을 하지 않았고, 따라서 아무런 배움도 없었다. 총파업의 소멸 이후 대대적인 탄압으로 현장이 얼어붙었기 때문에, 아래로부터 올라오는 비판과 문제제기도 그들의 주도권을 위협할 만큼 강력하지는 못했다. 불행하게도 그 때문에 여전히 민주노총에서 주도권을 거머쥐고 있던 국민파는 결국 IMF 외환위기가 몰아닥쳤을 때 한국 노동자운동의 역사에서 결코 묻힐 수 없는 역사적 과오를 저지르고 말았다. 2) 1997~98년 IMF 경제위기와 노사정의 정리해고 합의 총파업이 막바지에 이르고 있던 1997년 1월 23일 한보철강이 부도를 냈다. 1991년 수서비리 사태를 통해 부패한 정경유착의 대표주자로 이미 악명을 떨쳤던 한보였다. {1997년 1월 23일} 극심한 자금난에 시달리던 한보 철강이 오늘 끝내 부도로 쓰러졌습니다. 한보 철강이 그동안 얻어 쓴 빚은 4조가 넘습니다. 사회적인 그리고 경제적인 여파가 엄청날 것으로 우려되고 있습니다.[30] 그런데 한보가 무리한 사업 확장을 위해 더 거대한 정치권 로비와 불법 대출로 금융기관 자금을 대규모로 조달해 온 사실이 드러났다. 특히 그 정경유착의 정점에는 대통령 아들로서 황태자 노릇을 하던 김현철이 있었다. 5월 17일 김현철이 구속되면서 김영삼 정권은 식물정권으로 전락했다. 7월 15일 8위 독점재벌 기아가 부도방지협약 대상으로 지정되면서 사실상의 부도를 냈다. 부도방지협약(부도유예협약)은 4월말 금융기관들이 ‘일시적인 자금난을 겪는 대기업들이 금융기관들의 자금회수 공세로 연쇄부도로 치닫는 사태를 막기 위해’ 도입한 협약이었다. 이 협약의 존재 자체가 심각한 경제위기 국면으로의 진입을 뜻했다. {1997년 7월 15일} 재계 서열 8위인 기아그룹이 부도방지협약 대상으로 지정됐습니다. 사실상의 부도인 셈인데 10대 재벌도 안심할 수 없다는 항간의 얘기가 현실로 드러나 충격은 더합니다. 우리 경제에 미치는 영향도 깊고 클 것 같습니다.[31] 기아그룹의 부도는 한국 독점재벌의 위기가 심각한 수준에 이르렀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었다. 1990년대 초반 냉전체제 해체와 함께 세계시장의 무한경쟁에 냉혹하게 내던져진 한국의 독점재벌은 오히려 자신감을 갖고 과거 한국에서 성장하던 방식 그대로 세계무대에서 행동했다. 최대한 많은 빚을 내 최대한 빠르게 사업을 확장함으로써 많은 이윤을 거두고 빚도 갚아나가는 방식이었다. 독점재벌은 국내외 금융기관들로부터 엄청난 부채를 끌어당겼다. 그러나 세계시장은 한국시장처럼 독점재벌의 독무대가 아니었다. 독점재벌의 이윤은 엄청난 부채를 감당하기에 충분치 않았다. 결국 영업으로는 흑자인데 대출 원리금을 상환하고 나면 적자인 상태가 점점 심화됐다. {1997년 7월 15일} 재벌 가운데 부채가 가장 많은 곳은 현대그룹, 무려 43조 3천억 원입니다. 삼성은 37조 원입니다. 다음으로 LG, 대우, 선경의 순위입니다. 빚이 많을수록 재계 서열이 높아집니다. 은행감독원이 밝힌 49개 재벌의 작년 부채 규모는 1년 만에 61조 원이 늘어난 296조 원입니다. 한라와 조양상선은 부채 비율이 2천 퍼센트, 뉴코아는 천 퍼센트를 넘을 정도로 빚더미에 올라 있습니다. 빚더미 경영의 결과는 올해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 부채 비율이 8천 퍼센트가 넘는 진로, 자기자본을 다 까먹은 삼미와 대농은 부도가 났거나 부도방지업체로 선정됐습니다. 제 뒤에 보이는 기아그룹도 10조 원에 가까운 금융권의 빚에 시달리다 결국 부도유예협약의 적용을 받게 됐습니다. 빚으로 덩치만 키웠지 작년에 재벌 그룹들은 천 원어치 물건을 팔아 빚을 갚고 평균 2원밖에 이윤을 남기지 못한 것으로 분석됐습니다. 재벌의 자기자본 비율은 평균 20%. 자산이 100억 원이라면 20억 원만 자기 돈이고 나머지는 빚이라는 얘기입니다.[32] 위기에 빠진 독점재벌이 금융기관의 자금회수 시도로 연쇄도산에 빠지는 것을, 국내에서는 부도유예협약을 통해 막을 수 있었다. 그러나 해외 금융기관의 자금회수에는 속수무책이었다. 독점재벌이 해외 금융기관에게 무차별 자금회수를 당하면서 한국의 외환보유고가 빠르게 사라져 갔다. 마침내 11월 중순을 지나면서 한국의 외환보유고가 바닥나 국가 전체가 대출금 상환에 응할 수 없는 상태, 즉 ‘모라토리엄’ 직전에 내몰렸다. 갚아야 할 외채는 아직도 1천 5백억 달러나 남아 있었다. 모라토리엄을 피하기 위해, 한국 정부는 국제통화기금(IMF)에 긴급 자금지원을 요청했다. {1997년 11월 21일 저녁 10시, 임창용 경제부총리} 정부는 최근 겪고 있는 금융 외환시장에서의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하여 국제통화기금에 유동성 조절 자금을 지원해 줄 것을 요청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33] IMF에게서 자금을 빌려오는 것은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다. IMF는 구제금융을 제공하는 대가로 ‘재정긴축, 금융구조조정, 노동시장 유연성 확보’ 등의 조치를 한국 정부에 요구했다. IMF와 그 뒷배인 미국이 대놓고 한국의 경제주권을 침탈하겠다는 것이었다. 한국 정부는 IMF가 제시한 요구들을 전적으로 수용했다. {1997년 12월 3일} 길고도 험난했던 IMF 자금 지원 협상이 오늘 밤 완전히 타결됐습니다. 오늘 밤 7시 40분쯤 임창열 경제부총리와 깡드시 IMF 총재는 협상을 마치고 세종로 정부종합청사 대회의장으로 나와서 협상의 타결 소식을 전했습니다. 깡드시 총재는 이 자리에서 한국에 지원할 자금 규모는 모두 550억 달러로 결정됐다고 말했습니다.[34] IMF와의 협상 타결은 기업의 연쇄부도를 막지 못했다. ‘극심한 경제위기’를 공식화함으로써 오히려 연쇄부도를 더 촉진했다. 1달러 8백 원 정도 하던 환율이 연일 폭등해 1달러 2천 원을 육박했다. 주식은 폭락했다. {1997년 12월 6일} 기업들이 연쇄부도로 쓰러지고 있습니다. 어제 고려증권에 이어서 오늘은 재계 12위인 한라그룹이 부도를 냈습니다. … 작년 매출액 5조 3천억 원, 재계 서열 12위인 한라는 조선과 자동차부품 산업 등을 주축으로 하고 있어 엄청난 파장이 예상되고 있습니다. 한라그룹의 총 부채는 은행권 3조 원, 제2금융권 3조 4천억 원 등 모두 6조 4천억 원입니다. 이로써 올해 대기업의 부도로 금융기관이 떠안게 된 부실 채권은 30조 원이나 됩니다.[35] 외환위기가 발생하고 IMF 협상이 진행되던 시간은 대통령 선거의 와중이기도 했다. 12월 18일 김대중이 대통령으로 당선됐다. 19일 김대중은 기자회견을 갖고 ‘IMF와 적극적으로 협력해 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1997년 12월 22일} 김대중 대통령 당선자는 오늘 립튼 미국 재무차관과 보스워스 주한 미국 대사가 참석한 가운데 IMF 대책 회의를 갖고 새 정부는 IMF 협약을 100% 준수하겠다고 밝혔습니다. 김대중 당선자는 또 IMF와의 협약을 경제체질 개선의 계기로 삼겠다고 밝혔습니다. 김대중 당선자와 미국 측은 임금 조절을 통해 실업 위기를 넘기지 못할 때는 최소 범위에서 실업이 불가피하다는 데 의견을 같이 했습니다. 정리해고제 도입을 사실상 수용한 셈입니다.[36] 김대중은 ‘IMF협약을 이행하고 외국인 투자를 유치하기 위해선 정리해고제 도입이 불가피하다’고 주장했다. 1997년 3월 10일자로 재개정 노동법이 통과되면서 정리해고제가 2년 유예됐기 때문에 정리해고제는 1999년 3월에 도입되게 돼 있었다. 그런데 김대중은 정리해고제를 바로 도입해야 한다면서 이를 논의하기 위한 틀로 ‘IMF체제 극복을 위한 노사정위원회’를 12월말 제안했다. 1996년 김영삼 정권이 노동법 개악을 위해 노개위를 제안했을 때와 비슷한 모양새였다. 하지만 의도가 더 노골적이었다. 노사정위원회는 IMF 외환위기를 빌미로 자본가들의 신자유주의 공세를 본격화하기 위한 이데올로기적·제도적 기반을 마련하는 수단이었다. 민주노총이 선택해야 할 길은 명확했다. 노사정위원회를 단호히 거부하고 정리해고제 도입에 맞선 총파업 조직화의 길로 나아가야 했다. 그러나 민주노총은 노사정위원회에 들어갔다.[37] 1998년 1월 15일 경제위기 극복을 위한 노·사·정 간의 고통분담을 논의하기 위해 노사정위원회가 구성됐다. 노동자를 대표하는 민주노총과 한국노총, 사용자를 대표하는 전경련과 경총, 정부를 대표하는 재경원과 노동부, 그리고 여야 4당을 포괄했다. {1998년 1월 19일} 노사정위원회는 오늘 전체 회의를 열어 경제난 극복을 위한 합의문과 이를 위한 10개 의제를 발표할 예정이었습니다. 그러나 회의에서는 이른바 고용조정 문제, 즉 정리해고제를 합의문 안에 포함시킬 것인지의 여부가 노사 간의 주요 쟁점으로 부각됐습니다. 사용자 측은 고용조정과 근로자파견제를 합의문 안에 명시할 것을 주장했으나 노동자 측, 특히 민주노총 측이 이를 완강하게 거부했습니다. (배석범 민주노총 위원장 직대) “민주노총은 고용조정, 다시 말해서 정리해고 그건 받아들일 수가 없습니다.” 오늘 회의에서 정부 측은 IMF 협약을 준수한다는 내용으로 타협안을 제시했으나 끝내 의견 절충에 실패했습니다. 합의문 작성에 관해서는 오늘 진전이 없었습니다. 내일 오전 11시에 본 위원회를 다시 개최키로 했습니다.[38] 1998년 1월 20일, 노사정위원회는 ‘경제위기 극복을 위한 노·사·정 간의 고통분담에 관한 공동선언문’을 발표했다. 쟁점이 됐던 정리해고 문제는 ‘해외자본 투자유치를 위한 제반 조건을 마련한다’는 간접적인 표현으로 에둘러졌다. 그러나 노사정위원회 논의가 정리해고 도입 ‘합의’를 강제하기 위해 나아가고 있다는 것은 분명했다. {1998년 2월 1일} 노사정위원회 간사인 국민회의 조성준 의원은 오늘 노사정위원회가 내일까지 쟁점 사항에 대한 일괄 타결을 보지 못할 경우 새 정부의 독자안을 2월 임시국회에 제출해 처리하겠다고 밝혔습니다. … 이 같은 국민회의측의 입장은 노사정의 합의 이후 처리한다는 지금까지의 입장에서 강경 방침으로 선회한 것입니다. 이 같은 국민회의측의 방침이 알려지자 노동계는 강력히 반발하고 나섰습니다. 특히 민주노총 측은 강행 처리할 경우 파업도 불사하겠다는 입장을 정리했습니다. (고영주 노사정위원회 민주노총측 전문위원) “정리해고제나 근로자파견제를 노동계의 동의 없이 국회에서 강행 처리한다면 상당한 저항에 부딪힐 것이고, 민주노총은 즉각적으로 파업에 들어가는 것으로 지금 결정을 해놓고 있는 상황입니다.” 지난달 발족 이래 수차례 회의를 거듭하면서 입장 차이를 좁히지 못했던 노사정위원회는 이로써 중대 전기를 맞이하게 됐습니다.[39] 마침내 2월 6일, 노사정위원회는 ‘경제위기 극복과 재도약을 위한 사회협약’에 합의했다. 사회협약의 핵심 내용은 정리해고제와 근로자파견제를 ‘경제위기 극복’을 위해 즉시 도입한다는 것이었다. 잠정합의의 내용은 노동기본권을 보장(공무원과 교원의 단결권 보장, 정치자금법 개정으로 노조의 정치활동 보장, 실업자의 초기업단위 노조 가입 허용 등)받는 대신 노동계는 정리해고와 근로자파견의 법제화에 동의하고, 기업은 구조조정을 촉진하는 대신 경영투명성 확보에 노력하며, 정부는 고용·실업 대책, 물가안정, 임금안정과 노사협력 증진, 그리고 사회보장제도의 확충(고용보험 1인 이상 확대 실시, 임금채권보장제도 도입)에 노력한다는 것이었습니다.[40] {1998년 2월 6일} 마침내 진통을 거듭하던 노사정위원회가 대타협을 이뤄냈습니다. 노사정위원회는 오늘 아침 본회의를 열어 경제위기 극복과 재도약을 위한 노사정 공동 선언문을 채택했습니다. 무려 18시간의 마라톤협상 결과 우여곡절의 진통 끝에 이뤄낸 대타협이었습니다. 노사정위원회는 선언문에서 근본적인 개혁을 단행하지 않고서는 현재의 경제 위기를 극복할 수 없다는 데 인식을 같이 하고 이를 위한 공정한 고통분담에 협력하기로 합의했다고 밝혔습니다. (한광옥 노사정위원장) “노사정 세 주체의 살을 깎는 살신성인의 결단과 양보, 국가 위기 극복이라고 하는 공동의 절박한 목표를 위해 고통분담을 통한 대타협에 도달하였다는 사실을 강조 드립니다.” 노사정위원회는 먼저 정리해고를 전 산업에 걸쳐 즉각 실시할 수 있도록 하고 기업의 인수·합병 등 긴박한 경영상의 이유를 정리해고의 요건으로 명시하는 데 합의했습니다. 또 근로자파견제는 노사 양측의 입장을 절충해서 예외 대상과 지정 대상을 함께 명시하기로 했습니다. 고용조정에 따른 실업대책 재원은 당초 4조 4천억 원에서 5조 원으로 확충했습니다. 위원회는 또 전교조를 내년 7월부터 합법화해서 허용하고 올해 상반기 안에 노조의 정치활동을 보장하기로 했습니다. 그러나 노조전임자 임금지급 문제와 대기업의 경영 투명성 확보를 위한 재벌개혁 문제 등은 끝내 이견을 좁히지 못해 2차 과제로 넘겼습니다.[41] 민주노총 지도부가 ‘정리해고 도입’을 합의했다는 소식은 전국의 현장을 일거에 뒤흔들었다. ‘노사정 합의는 도저히 인정할 수 없다’, ‘가슴이 너무 답답하다’, ‘민주노총 지도부가 노동자 팔아먹었다고 생각한다’ 등등 격렬한 성토의 목소리가 현장 곳곳에서 터져 나왔다. 각 지역과 연맹, 단위노조에서 노사정 합의를 반대하고 민주노총 지도부를 성토하는 성명이 빗발쳤다. 민주노총 지도부가 7일로 예정됐던 부분파업과 집회를 노사정 합의에 따라 취소했지만, 만도기계 노조가 부분파업을 강행했으며, 대전과 대구지역에서는 집회를 강행하여 노사정 합의 반대를 천명했다. 노사정 합의 보도를 접한 한라중공업노조 조합원 50여 명은 8일 상경하여 민주노총 사무실에서 ‘노사정 합의안 전면거부’를 요구하며 철야농성에 들어갔다. 민주노총 지도부의 노사정 합의에 대한 현장의 강력한 반발은 9일 민주노총 임시대의원대회에서 폭발했다. 이날 대회가 시작되기 전부터 대회 장소인 성균관대 유림회관에서는 1층에서 한라중공업노조, 현장조직 모임, 전해투가 함께 사전 집회를 하고, 다른 한쪽에서는 서울지하철노조가 집회를 하면서 “어용 지도부 물러가라”를 외치는 등 격앙된 분위기로 가득 찼다. 대회는 3시부터 시작될 예정이었다. 그러나 배석범 직무대행 등 민주노총 지도부가 나타나자 조합원들이 분을 못 이겨 야유와 욕설을 퍼부으면서 대회 진행이 30분가량 늦춰졌다. 먼저 노사정 합의안에 대한 설명이 진행됐다. 이어서 오전에 중앙위원회에서 결정한 대로 ‘노사정 합의안 추인 여부와 부결될 경우 지도부가 사퇴하는 안’에 대해 찬반토론을 진행했다. 찬반토론에서 대다수 대의원들은 ‘필요하다면 타협할 수 있지만 절대로 타협할 수 없는 게 있다’, ‘조합원의 목을 치는 정리해고제는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다’며 지도부를 강하게 성토했다. 소수는 ‘나라가 망한다는데 도리가 있느냐’며 현실론을 폈다. 표결이 진행됐다. 노사정 합의안은 찬성 54명, 반대 184명으로 압도적으로 부결됐다. 회계감사를 제외한 민주노총 1기 지도부 전원[42]이 불신임을 받아 총사퇴했다. 민주노총 건설 과정에서 민주노조운동의 주도권을 거머쥔 타협·개량주의 세력, 그 가운데서도 특히 국민파가 숱한 과오를 거듭해 온 끝에 결국 노동자들로부터 준엄하게 심판받는 역사적 순간이었다. {1998년 2월 9일} 민주노총은 오늘 유림회관에서 대의원 대회를 열고 찬반투표를 통해서 노사정위원회의 합의 사항을 부결했습니다. 대의원들은 노사정위원회에서 지도부가 합의해 준 정리해고 도입 등 협약 내용은 무효라고 주장하고 집행부 사퇴 등을 요구했습니다.[43] 노사정 합의 추인을 거부한 민주노총은 임시국회의 노동법 개악을 저지하기 위해 비상대책위원회 체제로 전환하여 13일 총파업 투쟁에 돌입하기로 하고 단병호 금속연맹 위원장을 비상대책위원장으로 만장일치로 추대했다. {1998년 2월 10일} 민주노총이 지난 금요일 타결된 노사정 합의를 사흘 만에 거부하고 총파업을 선언하고 나섰습니다. … 노사정 대타협에 합의한 집행부가 물러나고 비상대책위원회가 구성됐습니다. 노사정 합의의 원천 무효를 확인하고 오는 13일 전국적인 총파업에 들어가겠다고 결의했습니다. (단병호 민주노총 비대위원장) “노사정 합의로 이루어졌던 안은 그것은 안 된다라고 하는 것은 명확합니다.” 일선 노동계의 예기치 않은 거센 반발로 고용조정 관련 법안의 국회 처리가 진통을 겪게 됐습니다. 상설기구인 노사정위원회의 앞날도 불투명합니다. 대규모 총파업으로 이어져 노동계와 정치권의 정면충돌 사태와 함께 경제 살리기에 차질을 빚을까 우려됩니다. 노사정위원회는 긴급 대책회의를 통해 노사정 합의는 여전히 유효하다고 밝히고 고용조정 법안을 예정대로 처리하는 등 정면 대응하기로 했습니다.[44] 그러나 민주노총 비대위는 12일 밤 총파업을 전격 철회했다. 정리해고제와 근로자파견제는 결국 14일 임시국회를 통과하며 법제화 됐다. 정리해고제는 근로기준법 개정을 통해 즉시 도입됐고, 근로자파견제는 ‘파견근로자보호등에관한법률’(파견법) 제정을 통해 1998년 7월 1일부터 효력이 발생했다. {1998년 2월 13일} 오늘 새벽 0시 민주노총의 파업 방침이 극적으로 뒤집히던 순간 민주노총 지도부의 표정은 침통했습니다. 파업 철회 결정을 내리기까지 숱한 우여곡절이 있었음을 암시하는 듯 했습니다. (단병호 민주노총 비대위원장) “13일 오후부터 전개하기로 한 총파업 방침을 철회합니다.” 어제 오전 회의 시작 때만 해도 비상대책위는 정리해고의 입법화를 저지하기 위해서는 파업을 밀어붙여야 한다는 강경파가 주도했습니다. 점심도 거른 채 산별 연맹과 각 지역본부 대표 등 30여 명은 국민회의 당사로 몰려가 파업 결의를 다졌습니다. 그러나 3시에 속개된 오후 회의부터 2선으로 물러나 있던 온건파가 제동을 걸고 나왔습니다. 파업 결의 사업장이 전체의 6분의 1밖에 안 된 데다 지금의 경제 상황이 또다시 파국으로 치달을 경우 국민적 비난은 물론 민주노총 조직마저 와해될 수 있다고 강하게 주장했습니다. 위원장의 굳은 얼굴, 줄담배를 태우는 간부들, 시간이 흐를수록 지도부는 파업을 하루 앞둔 모습이라고 보기엔 몹시 초조했습니다. (민주노총 간부) “총파업이라는 최후 방어수단을 강구할 수밖에 없는 고통스러운 논의이기 때문에 길어지고 있습니다.” 파업 철회는 이때부터 가닥이 잡혀갔습니다. 밤 8시 40분, 비대위 위원 20여 명이 퇴장했고, 핵심 지도부 8명은 막판 조율을 계속했습니다. 최종 결론은 파업 철회. 14시간의 격론과 고심 끝에 내린 한밤의 결단이었습니다. 그러나 민주노총은 파업을 철회했다 하더라도 임시국회에서 정리해고 법안의 처리를 지켜본 뒤 노사정 합의안 반대 투쟁을 계속하겠다는 입장을 강조했습니다.[45] 물론 총파업 동력을 급하게 조직해 내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민주노총 비대위의 총파업 철회는 정리해고제와 근로자파견제 도입이라는 역사적 사건 앞에서 또 한 번 노동자들을 결정적으로 배신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당시까지 그 실체가 충분히 드러나지 않고 있었지만, 1998년을 거치며 국민파에 필적하는 또 하나의 주요한 타협·개량주의 세력으로 가시화하는 이른바 ‘중앙파’가 갖는 한계를 적나라하게 드러낸 최초의 사건이었다. 결국 민주노총 건설 과정에서 민주노조운동의 주도권을 타협·개량주의 세력이 장악한 것은 1996년부터 1998년 2월까지 신자유주의 대공세의 초입부에 벌어진 노동자계급의 총력 방어전이 참담한 패배로 귀결되게 만든 핵심 원인이 되고 말았다. 김대중 정권과 자본가들은 ‘나라가 망하게 생겼으니 고통분담이 불가피하다’며 민주노총 지도부에게 정리해고제와 근로자파견제 수용을 압박했다. ‘지금 대한민국이라는 배가 바다에서 가라앉게 생겼다, 배를 살리려면 잠깐 30%를 내려놓을 수밖에 없다, 먼저 배를 살린 뒤에 배가 안정되면 다시 30%를 구할 수 있다, 그렇게 해야 모두가 산다’ 같은 논리를 사용했다. 노동자계급의 세계관 대신 국가주의·국민주의·민족주의라는 소부르주아적 세계관에 함몰돼 있던 타협·개량주의 세력은 김대중 정권의 그럴싸한 논리를 이겨낼 수 없었다. 하지만 현장 노동자들은 정리해고제와 근로자파견제 도입에 결코 동의하지 않았다. 민주노총이 할 일은 ‘나라 살리기’나 ‘회사 살리기’가 아니라 ‘노동자 살리기’여야 한다는 주장이 크게 인기를 끌었다. 계급적 직관이 반영된 간명한 대안이었다. 이후에 실제로 벌어진 일들은 김대중 정권과 자본가들의 논리가 얼마나 추악한 거짓인지를 여실히 입증했다. 나라가 망할 판이라고 했지만, 노동자들이 정리해고와 비정규직 전환으로 피눈물을 쏟은 IMF 외환위기 동안 자본가계급은 그 어느 때보다 많은 돈을 벌어들였다. 내버려진 ‘30%’는 국가 경제가 회복된 이후에도 결코 구제받지 못했다. 오히려 누군가를 내버려도 된다는 쪽으로 길이 열리고 나니 국가경제가 잘 돌아가는데도 점점 더 많은 이들이 내버려졌다. 다음 편 보기 [1] 세계적인 차원에서 보자면, 자본가계급이 1980년대부터 실행한 신자유주의 공세는 노동자계급에 대한 착취·수탈의 강화를 통해 위기로부터 탈출하려는 전략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의 대량파괴와 대량학살을 통해 그 이전 시기에 누적됐던 모순을 상당 부분 털어낸 세계 자본주의는 새롭게 거대순환을 시작했다. 그러나 자본의 유기적 구성의 고도화와 세계적인 경쟁 격화에 따라 이윤율이 점차 하락한 끝에 1970년대에 극심한 경제위기에 빠져들었다. 바로 이 1970년대 경제위기로부터 벗어나려는 자본가계급의 대응전략이 신자유주의 공세의 출발점이었다. 세계화·금융화와 결합된 신자유주의 공세는 노동자·민중에게 엄청난 희생을 강요한 대신, 자본가들에게는 30년 가까이 장밋빛 미래를 열어주었다. 그러나 2008년 금융위기는 신자유주의·세계화·금융화가 내재한 모순을 폭발시켰다. 이후 세계 자본주의는 갈수록 위기가 더 심화되는 상황 속에서 허우적거리고 있다. [2] 서영호·양봉수 열사회, 2025, 『현대차 열사·희생자 백서』, 정재성 편. [3] 서영호·양봉수 열사회, 2025, 『현대차 열사·희생자 백서』, 정재성 편. [4] 서영호·양봉수 열사회, 2025, 『현대차 열사·희생자 백서』, 정재성 편. [5] 현총련, 1996/12/11, 「엄중한 시기에 즈음한 우리의 제안」. [6] 민주노총 대구·부산양산·대전충남·충북·부천시흥·경기남부 6개 지역 투쟁본부, 1996/12/16, 「민주노총 지도부에 각성을 촉구하며 - 다시 한 번 강고한 노동법개악 저지를 위한 총파업투쟁을 제안합니다」. [7] 민중운동탄압 분쇄와 민주기본권 쟁취를 위한 범국민대책회의, 1996/12/13, 「노동법개악 저지 전국 총파업투쟁의 힘찬 전진을 위해 40만 민주노총 노동형제에게 드리는 글」. [8] 이날 함께 통과된 안기부법 개정안 또한 국가보안법상의 찬양고무죄와 불고지죄에 대한 수사권까지 안기부에 부여하는 등 안기부의 권능을 대폭 강화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9] 민주노총, 1996/12/26, 「총파업 선언 기자회견문」. [10] 서영호·양봉수 열사회, 2025, 『현대차 열사·희생자 백서』, 정재성 편. [11] 민주노총, 1996/12/30, 「권영길 위원장이 조합원 동지들께」. [12] MBC, 1996/12/30, <민주노총 새해 연휴기간 파업중단 발표>. [13] MBC, 1996/12/30, <서울지하철노조와 부산지하철노조, 파업 잠정중단>. [14] MBC, 1996/12/30, <이수성 국무총리 특별담화문 발표, 파업 자제와 협조 당부>. [15] 서영호·양봉수 열사회, 2025, 『현대차 열사·희생자 백서』, 정재성 편. [16] MBC, 1997/01/08, <울산 현대자동차노조, 부분 조업 결정>. [17] MBC, 1997/01/09, <한국노총, 14일부터 시한부 파업 결정>. [18] 서영호·양봉수 열사회, 2025, 『현대차 열사·희생자 백서』, 정재성 편. [19] 민주노총, 1997/01/14, 3단계 전면 총파업 돌입에 관한 기자회견문. [20] 서영호·양봉수 열사회, 2025, 『현대차 열사·희생자 백서』, 정재성 편. [21] 민주노총, 1997/01/18, 「수요파업 전환에 관한 기자회견문」. [22] MBC, 1997/01/18, <민주노총 총파업 중단 결정>. [23] MBC, 1997/01/18, <울산지역 현대계열사 노조, 다음 주부터 조업복귀>. [24] 김남수, 2006, 「노동자 속에 숨어 있는 무서운 힘 - 87년 노동자대투쟁과 96·97년 총파업」. [25] 1997년 재개정 노동법에서 2년 유예됐던 정리해고제와 근로자파견제는 IMF사태 초기인 1998년 2월초 민주노총까지 참여한 노사정위원회에서 조기 도입하기로 합의됐다. 민주노총이 지도부를 불신임하며 합의를 파기했지만 그대로 법제화됐다. 이에 따라 정리해고제는 1998년 2월부터, 근로자파견제는 1998년 7월부터 시행됐다. 5년 유예됐던 기업단위 복수노조 허용과 노조전임자 임금지급 금지 조항은 민주노총을 제외한 노·사·정 합의에 따라 2001년 말 다시 5년 더 유예, 2006년 말 다시 3년 더 유예됐다가 2009년 말 이명박 정권 주도로 더 개악됐다. 이에 따라 노조전임자 임금지급 금지는 타임오프라는 통제 장치를 덧붙여 2010년 7월 1일부터, 기업단위 복수노조 허용은 교섭창구 단일화라는 통제 장치를 덧붙여 2011년 7월 1일부터 시행됐다. [26] 현대차 민주노동자투쟁위원회, 1997/03/14, 「여야합의 노동악법 결코 수용할 수 없다」, <민투위>. [27] 현대차노조, 1997, 『현자노조 사업보고 1996~97』, 461~463쪽. [28] 천창수, 1997/01/20, 「울산지역 총파업투쟁에서 아쉬운 점들」, 영남노동운동연구소, 『연대와 실천』 1월호. [29] 전국 구속·수배·해고노동자 원상회복 투쟁위원회, 1997/01/28, 「민주노총 총파업 투쟁에 대한 전해투 중간 평가서」. [30] MBC, 1997/01/23, <한보철강 부도, 경제계 큰 파문>. [31] MBC, 1997/07/15, <기아 사실상 부도, 부도방지협약 대상 지정>. [32] MBC, 1997/07/15, <기아 부도 위기는 과도한 부채 때문>. [33] KBS, 1997/11/21, <국제통화기금 지원 요청 긴급 기자회견>. [34] MBC, 1997/12/03, <[IMF 협상 타결] IMF, 긴급 자금지원>. [35] MBC, 1997/12/06, <한라그룹 부도>. [36] MBC, 1997/12/22, <김대중 대통령 당선자 IMF 대책회의 정리해고제 수용>. [37] 사실 노사정위원회는 민주노총이 먼저 제안한 것이었다. 1997년 12월초 IMF 외환위기에 따른 경제위기가 가시화하자 민주노총은 이에 대응하기 위한 사회적 합의기구 구성을 먼저 제안했다. 김대중의 노사정위원회 제안은 민주노총의 제안에 대한 화답의 성격을 갖고 있었다. [38] MBC, 1998/01/19, <노사정위원회 첫 회의 결렬, 정리해고 쟁점>. [39] MBC, 1998/02/01, <노사정위원회 고용조정 강행 방침, 노동계 강력 반발>. [40] 이원보, 2005, 「한국노동운동사 8 - 1987년 이후의 노동운동」, 『노동사회』 5월호. [41] MBC, 1998/02/06, <노사정위원회, 국가위기 극복 위한 고통분담 대타협 큰 결실>. [42] 당시 사퇴한 민주노총 1기 지도부는 배석범 위원장 직무대행, 허영구 부위원장, 이영희 부위원장, 배범식 부위원장, 김영대 사무총장이었다. 권영길 위원장은 1997년 12월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면서 먼저 사퇴한 상태였다. [43] MBC, 1998/02/09, <민주노총, 노사정위원회 합의 거부>. [44] MBC, 1998/02/10, <민주노총, 노사정 합의 거부 총파업 선언>. [45] MBC, 1998/02/13, <민주노총 파업 철회, 파국은 피했다>. /* 본문 안 링크 스타일 */ #gpt-article a { color: #cc0000 !important; text-decoration: none !important; } #gpt-article a:hover { color: #990000 !important; } // https://로 시작하는 링크만 target="_blank" 적용 document.addEventListener("DOMContentLoaded", function () { const links = document.querySelectorAll('#gpt-article a[href^="https://"]'); links.forEach(link => { link.setAttribute("target", "_blank"); link.setAttribute("rel", "noopener noreferrer"); }); }); /* 스크롤 여백만 주고, 화면에는 안 보이게 */ .ftn-target { display: inline-block; /* 줄바꿈 안 생김 */ width: 0; height: 0; scroll-margin-top: 200px; } /* 본문 각주 번호 + 아래쪽 각주 번호 색 지정 */ a[href^="#_ftn"] sup, a[href^="#_ftnref"] sup { color: #BF202D; } /* 밑줄이 보기 싫으면 */ a[href^="#_ftn"], a[href^="#_ftnref"] { text-decoration: none; } /* 마우스 올렸을 때 살짝만 강조하고 싶으면 (선택) */ a[href^="#_ftn"]:hover, a[href^="#_ftnref"]:hover { text-decoration: underline; } /* 페이지 전체가 오른쪽으로 넘치지 않게 */ html, body { max-width: 100%; overflow-x: hidden; } /* 본문 영역 폭 강제 고정 + 긴 단어/문장도 줄바꿈 */ #bo_v_con, .bo_v_con, .cke_editable, article { max-width: 100%; overflow-wrap: break-word; word-wrap: break-word; /* 구형 브라우저용 */ } /* 워드에서 붙은 이미지/표가 화면 밖으로 안 나가게 */ #bo_v_con img, #bo_v_con table, .bo_v_con img, .bo_v_con table, .cke_editable img, .cke_editable table, article img, article table { max-width: 100% !important; height: auto; } /* 워드가 p, span에 폭을 박아놓은 경우 강제로 해제 */ #bo_v_con p[style*="width"], #bo_v_con span[style*="width"], .bo_v_con p[style*="width"], .bo_v_con span[style*="width"], .cke_editable p[style*="width"], .cke_editable span[style*="width"], article p[style*="width"], article span[style*="width"] { width: auto !important; max-width: 100% !important; } /* 기본 blockquote 스타일 */ blockquote { border-left: 4px solid #c0392b; /* 사이트 분위기와 맞는 붉은 계열 */ padding: 12px 18px; margin: 20px 0; background: #fafafa; font-style: normal; color: #333; line-height: 1.6; } /* blockquote 안의 p 태그 정렬 */ blockquote p { margin: 0 0 10px 0; text-align: justify; } /* 마지막 p 태그 여백 제거 */ blockquote p:last-child { margin-bottom: 0; } -
빅테크 자본에 투자하는 소로스 펀드는 집단학살에서 자유롭지 않다차별금지법제정연대에서 ‘열린사회재단(Open Society Foundation)’으로부터 사업기금을 지원받을지 여부를 논의하고 있다. 이를 결정하기 위한 26일 전체회의를 앞두고, 차제연 집행위는 “자금의 출처가 중대한 인권 침해에 직접 연루된 경우, 기금 수령 조건이 특정 집단·의제에 대한 침묵을 요구하는 경우, 기금의 운용방식이 포괄적 차별금지법의 제정이라는 차제연의 목적에 명백하게 반하거나 해가 되는 경우에는 연대체 차원의 최소 기준선에 위배된다고 판단하여야”하며, “이러한 기준에 비추어볼 때 OSF가 차제연 차원의 최소 기준선을 위배하는 기금에 해당하지는 않는다고 판단”하였다. 이에 OSF 기금신청 제안을 반대하는 연서명이 진행되고 있다. 필자는 조지 소로스라는 국제 금융자본가와 그 자선사업기구인 열린사회재단이, 오늘날 팔레스타인에서 벌어지는 학살을 포함해, 빅테크 자본들이 세계를 파괴하고 노동자민중을 위기로 몰아넣는 자본주의 체제 지배계급의 불가분한 일부임을 말하고 싶다. 2025년 4분기, '소로스 펀드 매니지먼트'의 포트폴리오를 보여주는 웹사이트 화면 갈무리 열린사회재단의 시초축적은 금융수탈이다 열린사회재단(OSF)의 기금의 원천은 소로스 펀드 매니지먼트로부터 나온다. 소로스 펀드 매니지먼트는 금융자본이다. 금융자본은 어떻게 부를 축적하는가? 금융자본의 이윤은 노동자민중이 창출한 부를 자본이 착취해 강탈한 결과의 일부다. 특히 금융자본은 단지 산업자본의 착취를 지원하는 것을 넘어, 시세차익을 통해 이익을 얻는 고유의 수탈적 방식을 발전시켜왔다. 그래서 우리는 이를 ‘금융수탈’이라 부른다. 금융자본이 천문학적인 이윤을 벌어들이는 만큼, 노동자민중은 상대적으로 가난해진다. 소로스 펀드는 실제로 어떻게 이윤을 획득해왔는가? 예컨대 그는 1973년 4차 중동전쟁 이후, 방산기업에 대한 수요가 늘어날 것이라 예측하며 방위산업체 주식을 쓸어담아 수익을 냈다. 마치 오늘날 이란 침략전쟁으로 한국 방산주들이 뛰고 있는걸 보고, 여기에 투자해 돈을 버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노동자민중이 군축과 평화를 요구로 내걸고 투쟁할 때, 그는 전쟁산업의 성장에 투자하는 댓가로 돈을 벌었다. 소로스 펀드의 가장 유명한 수익창출 일화는 외환투자와 공매도다. 소로스는 1992년 영국 파운드화 공매도를 통해 한 달만에 1조 2천억원 가까운 수익을 올렸다. 그가 벌어들인 천문학적 이윤은 땅에서 솟았는가? 아니다, 영국노동자민중이 노동으로 만들어낸 부를 수탈한 것이다. 마찬가지로 아시아 외환위기 때, 태국, 말레이시아 등 위기에 내몰린 저개발국의 통화를 공격해 돈을 벌었다. 헤지펀드는 위기를 더욱 심화시킴으로써 돈을 번다. 위기가 발생할 것처럼 보이면 위기에 ‘베팅’함으로써, 위기를 더욱 심화시키고 그 과정에서 돈을 번다. 금융투기꾼들이 좋아하는 말처럼 세상에 ‘공짜는 없고’, 그가 수탈한 부 만큼의 손실을 고스란히 노동자민중이 경제위기로 감당해야한다. 그 과정이 직접적으로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복잡한 연쇄과정을 거친다고 해서, “소로스 펀드의 이윤은 노동자민중의 피땀을 강탈한 것”이라는 명제가 거짓이 되지는 않는다. 그가 천문학적 부를 거머쥔 것은, 천문학적인 수탈의 결과다. 노동자민중의 사회적 생산물을 수탈하는 것, 그것 외에 금융자본의 이윤에 다른 원천은 없다. 빅테크 자본의 돈줄인 소로스 펀드, 오늘날 집단학살에서 자유로운가? 이것이 소로스가 ‘자선사업’을 할 수 있게된 과거의 축적에 관한 이야기라면, 오늘날은 어떨까. 2025년 4분기, 소로스 펀드의 포트폴리오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건 소위 AI, 빅테크 기업들이다. 포트폴리오 1위는 아마존, 2위는 구글, 5위는 마이크로소프트 등이다. 소로스 금융자본이 투자하여 이익을 분배받는 이 빅테크 자본들은 어떤 자본들인가? 자연과의 대사를 고려하지 않는 데이터센터의 과잉건설로 지역환경을 파괴하고, 물과 전기를 낭비하며, 천연가스와 원자력 사용을 부활시키는데 앞장서는 기업들이다. 소로스 펀드가 AI를 넘어 ‘우주’ 산업에 투자하려고 한다는 얘기도 나온다. 우주에서 추출산업을 지속하겠다는 허황된 기술절대주의로 세계가 공멸을 향해 나아가는 현실을 덮으려는 게 스페이스X, 아마존, 구글 등 우주 탐사기업이 하고있는 역할이다. 더욱이 소로스 펀드의 투자를 받는 빅테크 자본들은 미국과 이스라엘에게 클라우드 서비스와 AI기술 등 집단학살을 위한 군사기술을 제공하고 있는 기업들이다. 대표로 소로스 펀드의 포트폴리오에서 가장 많은 지분(7.30%)을 차지하는 아마존을 보자. BDS운동이 정리한 자료에 따르면 아마존은 프로젝트 님부스를 통해 구글과 함께 이스라엘 정부와 군에 클라우드 컴퓨팅 서비스와 인프라를 제공한다. 아마존이 제공하는 클라우드는 수만 개의 표적을 실시간으로 업데이트하는 ‘표적 데이터베이스’로 사용된다. 기존에 이스라엘은 자체 클라우드를 운영해왔는데, 2023년 10월 가자지구 침공 이후 ‘전례없는 컴퓨팅 성능’이 필요해 아마존으로부터 클라우드를 구매했다고 한다. 즉 집단학살을 가속할 ‘필요성’이 생겼는데, 아마존이 이를 현실화할 클라우드 기술을 제공해준 덕택에 AI의 지원을 받는 신속한 집단학살이 가능해졌다는 이야기이다. 이스라엘이 라벤더, where’s daddy 등 AI시스템을 활용해 가자지구 주민들의 ‘살해 목록’을 작성하고 공격한다는 이야기를 들어보았을 것이다. 가자지구 언론인 무함마드 알 므하위시는 빅테크가 제공하는 기술이 어떻게 그의 삶의 모든 부분을 감시해왔으며, 학살에 사용되고 있는지, 아래와 같이 증언한다. +972 매거진과 로컬 콜(Local Call)의 보도에 따르면 알고리즘은 사람들을 추측되는 위험도에 따라 분류했다. 분류 점수 한 점 차이로 사람의 생사가 갈릴 수 있었다. 정보기관 관련인들은 기자들에게 이러한 시스템 중 하나는 개인을 팔레스타인 무장 단체와의 연관성에 따라 점수를 매겼으며, 수만 명의 이름을 다루었다. 폭격 승인 명령은 빠르게는 30초 이내에 떨어질 수 있었다. 다른 프로그램은 건물을 유형과 수용 인원에 따라 분류하여 폭격 대상을 선정했다. 뉴욕타임스 보도에 따르면, 8200부대의 현역병과 구글, 마이크로소프트 및 메타와 같은 회사에서 일하는 예비군들의 협력으로 제작된 AI 도구들이 아랍어로 작성된 문자 메시지와 SNS 게시글을 분석했다. 그러한 분류 시스템이 무장 단체와 연관된 것으로 추정되는 인사가 집에서 쉬고 있을 때 표적으로 삼을 수 있는 시스템과 협력하면, 단지 이들과 인접한 곳에 있었다는 것만으로 일가족이 멸절되는 사태로 이어졌다. ... 전쟁이 시작되고부터, 나는 알자지라, The Nation, 그리고 +972 매거진과 같은 언론을 통해 가자지구에 대해 보도해 왔다. 2023년 10월 말 무렵, 내 핸드폰은 내가 작성한 기사를 인용하며 살해 협박을 하는 문자들로 가득했다. … 12월 6일, 나는 가족들의 얼굴을 보기 위해 집에 들렀다. 내가 걸어 들어가는 순간, 누군가 전화를 걸었다. 상대는 아랍어로 말하며 자신을 데이비드로 소개했다. 이스라엘 군 소속이라고 했다. 그는 나를 하비비(아랍어로 “자기야/얘야” 정도의 뜻)로 부르며, 내 가족뿐만 아니라 이웃들로 가득한 삼 층 건물을 대피시킬 시간이 이십 분 정도 있다고 했다. … 달리 갈 곳도 없는 우리들을 억지로 이동시키려는 수작일 수도 있었다. 우리는 머무르기를 택했다. 이튿날 오전 7시 30분, 나는 찻잔으로 손을 가져가며 내 아들의 발소리가 복도를 도드닥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굉음은 경고 없이 날아왔다. 집은 그대로 내려앉았다. 나는 천장이 쪼개지거나 벽이 무너지는 것도 보지 못했다. 그저 갑작스러운 무게, 콘크리트와 쇠가 나를 납작하게 눌렀다. 내 두 팔이 붙박혔고, 두 다리가 갇혔고, 내 입과 폐로 먼지가 들어찼다. 내 아내와 아들을, 부모님을 불렀다. 처음에는, 돌아오는 답이 없었다. 그때 내가 닿을 수 없는 어딘가에서 작은 목소리가 들렸다. “아빠.” 아들이 살아있었다. 하지만 나는 아이에게로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시간이 흐리멍덩해졌다. 어딘가 위에서 돌들이 움직였다. 흐린 음성들. 나는 정신을 잃었던 것 같다. 구조자들이 마침내 잔해를 깨고 들어왔을 때, 빛이 파고들어 왔다. 손들이 잔해를 긁어냈다. 그들은 내가 의식을 되찾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나를 끄집어냈다. 그들은 내 아내와 아들을 꺼냈다. 네 사람이 죽었다. 사촌 둘과 이웃 둘. 이웃 하나는 폭탄이 떨어지는 순간 우리 집 문 앞을 지나가고 있었을 뿐이었다. 그들은 내가 내 집에 있음을 알았다. 아마도 내 핸드폰으로 나를 거기까지 추적했다. 시스템은 내 동선을 먼저 특정했을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나를 기준으로 그 반경 내 모두를 이스라엘군 기준 감수할 만한 부차적 희생으로 집계했다. ... 그는 내 삶을 거슬러 올라가기 시작했다. 나의 학적, 일, 그리고 내가 기사를 작성한 장소들. 앗-쉬파, 알-아우다, 앗-다라즈. 이를 순서대로 읊었다. 그는 내 친척에 관해 물었다. 내가 망설이자, 그가 대신 내 사촌들의 이름을 읊었다. 내 가족들이 피신 중인 대피소가 있는 지역을 특정했다. 내가 답하든 얼버무리든 그의 노트는 이를 모두 기록했다. 심문은 수 시간 이어졌다. 끝도 없이 이어지는 것 같았던 그 시간 중 한 가지는 분명해졌다. 그 심문관 눈앞에 있는 스크린에는 내 삶의 사본이 담겨있었다. 쉼 없는 감시, 수집한 전화 통화, 카메라, 그리고 위성 좌표로 쌓아 올린 판본이. 그리고 그는 내 아들에 대해 말하기 시작했다. “라픽은 아직 잘 있습니까? 가슴은 좀 괜찮고?” 그 순간 나는 정신이 아득해졌다. 그건 내 집안 깊숙한 곳에서 끌어올려진 질문이었다. 이 질문은 나를 2022년으로 돌려보냈다. 라픽은 고작 산후 11달이었고, 우리는 아랍에미리트공화국에 있었다. 라픽은 폐렴에 걸려 두바이 병원에서 이틀을 보내야 했다. 대단한 일은 아니었다. 아이는 괜찮았다. 하지만 여기에, 나는 글에서 다루지도 않았고 언론에 내보내지도 않은 내 삶의 내밀한 사항이, 나타났다. 심문관은 그걸 체크 박스 짚고 넘어가듯 입에 올렸다. 내 아들의 짧은 병원 신세에 대해 어딘가에서 들었을 것이다. 아랍에미리트공화국 병원 기록에서? 내 통화 기록에서? 내 이메일 사본에서? 그들이 내 머릿속에 들어온 것처럼 느껴졌다. 무함마드 알 므하위시의 글 전문을 꼭 읽어보았으면 좋겠다. 이렇게 아마존을 비롯한 미국 빅테크 자본들은 가자주민들에 대한 완전한 감시, 추적, 학살에 필요한 기술을 제공한다. 소로스 펀드는 바로 그 빅테크 자본에 투자해 수익을 내고 있다. 한편 열린사회재단(OSF)은 10월 7일 이후 자행된 집단학살에 대해 언급할 때, ‘하마스의 잔혹한 공격을 규탄‘하고, ‘이스라엘에게는 자위권이 있다’라는 문장을 삽입한 다음, ‘이스라엘이 지나친 복수를 하며 가자의 인도적 위기를 초래하고 있음’을 우려하고 휴전과 두 국가 해법 등등에 대해 얘기한다. 열린사회재단이 팔레스타인 집단학살에 대해 발행한 성명 전반에서 식민지배의 현실을 지우는 양비론적 세계관을 확인할 수 있다. 우리는 이러한 세계관이 어떻게 식민점령의 현실을 가리고 집단학살을 용인하는지, 그래서 조지 소로스가 거액을 후원한 바이든 정부가 어떻게 이스라엘에 대한 실질적 지원을 유지하며 ‘학살자 조’라 불리게 되었는지 지난 몇년 간 목격했다. 양 당사자 간의 문제로 보게 되면 양비론을 피할 수 없다. 양비론은 어느 순간, 이스라엘이 지나치긴 하지만 팔레스타인도 일정한 원인을 제공했다는 원인과 결과를 전도시키는 밑그림으로 작용한다. 팔레스타인이 저항하지 않으면 이스라엘이 식민화를 멈출 것이라는 기이한 논리로 귀결될 수 있는 것이다. 논리적으로도 역사적으로도 틀린 사고지만, 지금은 특히 발화자의 의도와 무관하게도 집단학살 정당화 논리와 일치하기 때문에 한층 위험한 관점이다. 상기하였듯 소로스 펀드는 빅테크 자본에 투자해 돈을 번다. 빅테크 자본은 지구를 파괴하고, 팔레스타인을 파괴한다. 한편 소로스 펀드의 돈에 의해 운영되는 열린 사회 재단은 가자지구의 ‘인도적 위기’를 우려하고, 이스라엘에게 자제를 촉구한다. 그리고 인종정의에, 여성의 권리에, LGBT의 권리에 후원한다고 말한다. 팔레스타인의 여성과 성소수자가 빅테크 자본의 공모에 의해 감시, 추적당해 죽어가는 동안 말이다. 이 현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OSF 자선사업은 조지 소로스의 손에 묻힌 피를 닦아내는 손수건이다”는 말 외에 나는 이 현실을 이해할 말을 찾을 수가 없다. 이것이 총체적 진실이다. 빅테크 자본을 포트폴리오에 담아 돈을 버는 소로스 펀드 매니지먼트와 열린사회재단은 동일한 체제의 앞뒷면이다. 만약 조지 소로스와 유사하게, ‘자선사업’을 많이 해온 빌게이츠가 운영하는 재단으로부터 후원을 받자는 논의가 이뤄졌다면 어땠을까? 빌게이츠는 앱스타인과 직접 연루돼 여성들을 착취했고, 이스라엘과 공모하는 핵심기업인 마이크로소프트의 창립자이다. 그의 자선단체로부터 돈을 받자는 결정은 훨씬 더 쉽게 반대에 부딪혔으리라 상상한다. 그런데 단지 좀 더 교묘하고, 좀 더 연루의 사슬이 길 뿐, 소로스 재단과 빌게이츠 재단이 질적으로 다르다고 말할 수 있을까? 삼성대자본이 비슷한 방식으로 삼성인권재단을 운영한다면 어떨까. (그런 자선사업을 삼성이 하는지는 모르지만 상상해보는 것이다) 삼성이 한편에선 고 김치엽 님을 포함한 반도체 노동자들을 죽음으로 내몰고, 베트남으로 노조파괴를 수출하고 오염, 산재를 외주화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인권을 말하며 시민단체를 후원한다면 우리는 이를 받을 수 있는가. 그리고 그 대답이 ‘아니오’라면, 삼성은 가깝고 소로스는 멀게 느껴진다 하여 소로스 재단의 후원을 받을 수는 없다. 차별금지법 제정을 위한 대중적 노동자운동에 나서자 이 글을 통해 해당 ‘자금의 출처가 중대한 인권 침해에 직접 연루된 경우’인지에 대한 판단을 재고해주실 것을 차별금지법 제정연대에 참여하는 동지들에게 요청드린다. 이 세계에 착취와 차별과 억압이 오늘도 유지될 수 있는 것, 학살과 전쟁이 벌어지고 유지될 수 있는 것은 조지 소로스를 포함한 한 줌의 자본가들이 이 세상에 대한 결정권을 쥐고 좌지우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가 자선사업이라고 내놓는 그의 부는 금융수탈을 통해 노동자민중에게서 강탈해간 부이며, 노동자민중의 운동은 그런 시혜와 동정을 거부하며 여기까지 왔다. 단지 과거의 축적과정만이 아니라, 바로 지금 오늘날에도, 이 금융자본가가 자선사업을 지속할 수 있는 부의 원천은 지구를 파괴하고 팔레스타인인을 학살하는 과정에 적극 연루돼 있으며, 그로부터 수익을 얻고 있다. 사실 차별금지법제정연대에 함께하는 동지들, 차별과 억압에 맞서 함께 싸워온 동지들이 이 정도 사실을 모를 동지들이 아님을 알고 있다. 동지들에게 OSF의 후원을 받지 말자고 호소하는 걸 넘어, 차별금지법 제정을 위한 대중적 노동자운동을 현실로 충분히 만들어내지 못한 것에 대해 필자 또한 크나큰 책임감을 느낀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우리의 운동이 금융투기자본의 후원을 받는 길로 가서는 안된다는 판단을 뒤집을 수는 없다. “상당수 노동자 민중운동 세력은 차별금지법 제정운동을 중요 과제로 여기지 않았거나, 중요 과제로 여기는 경우에도 이를 지역으로, 현장으로 확대하려는 노력을 다 하지 못했습니다. 차별금지법 제정운동 재정이 부족하다면, 바로 이런 이유일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차별금지법제정연대가 OSF 기금을 받는 대신 노동자 민중운동 진영과 함께 더 넓은 운동을 조직하자고 제안합니다. 차별금지법 제정을 위한 공동투쟁을, 재정지원을 모든 노동자 민중운동 진영에 요구합시다. 차별금지법 제정을 위한 대중적인 노동자 운동을, 사회적 총파업을 조직합시다. 이를 통해 정부에 포괄적 차별금지법 제정을 관철해냅시다.” ‘비판의 무기는 무기의 비판을 대신할 수 없다’는 오래된 구절이 뼈아프게 다가온다. 비판에는 책임이 뒤따르는 법이다. “인권운동과 노동자민중운동의 굳건한 연대를 통해 포괄적 차별금지법을 쟁취해 냅시다. 그 길에 사력을 다해 연대하겠습니다.”라는 반대 연명 제안문의 마지막 말을 곱씹어본다. 나 또한 사력을 다할 것임을 다짐한다. 3월 26일, ‘[사회주의를향한전진 정세집담회] 차별금지법 쟁취 노동자 투쟁, 이렇게 하자!’를 진행한다. 해당 정세집담회를 계기로 더 큰 차별금지법 쟁취 노동자 운동을 만들어나가고자 한다. /* 기본 blockquote 스타일 */ blockquote { border-left: 4px solid #c0392b; /* 사이트 분위기와 맞는 붉은 계열 */ padding: 12px 18px; margin: 20px 0; background: #fafafa; font-style: normal; color: #333; line-height: 1.6; } /* blockquote 안의 p 태그 정렬 */ blockquote p { margin: 0 0 10px 0; text-align: justify; } /* 마지막 p 태그 여백 제거 */ blockquote p:last-child { margin-bottom: 0; } /* 본문 안 링크 스타일 */ #gpt-article a { color: #cc0000 !important; text-decoration: none !important; } #gpt-article a:hover { color: #990000 !important; } // https://로 시작하는 링크만 target="_blank" 적용 document.addEventListener("DOMContentLoaded", function () { const links = document.querySelectorAll('#gpt-article a[href^="https://"]'); links.forEach(link => { link.setAttribute("target", "_blank"); link.setAttribute("rel", "noopener noreferrer"); }); }); -
[정세집담회] 차별금지법 쟁취 노동자 투쟁, 이렇게 하자!※자료집은 첨부파일에서 다운받으실 수 있습니다. 전 세계적인 극우화, 제국주의 흐름의 확산과 함께, 소수자를 향한 차별과 억압이 심화하고 있습니다. 트럼프는 성별정정 치료 불법화 및 트랜스젠더의 권리를 억압하는 다양한 법안을 통과시켰고, 독일에서 누구보다 강경한 반이민 정책을 내세우는 극우 정당 AfD의 당수 앨리스 바이델은 레즈비언 정치인이면서 동시에 수많은 이주민 여성과 소수자를 길거리로, 불안정하고 위험한 일자리로, 죽음으로 내몰고 있습니다. '일본 최초의 여성 총리' 다카이치는 부부별성제, 동성혼 법제화에 반대하며 일본 군국주의와 가부장제 강화에 앞장서고 있습니다. 노동자계급이 주체가 되어, 차별과 억압에 맞서는 운동을 확대해야할 때입니다. 한국에서 차별금지법 제정 운동은 내란에 맞선 광장에서 성소수자, 여성, 이주민, 비정규직 등 차별의 굴레에 시달려온 이들을 묶어내는 구호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차별금지법 제정운동이 모든 차별을 철폐하는 투쟁으로 나아가려면, 노동자운동 속에서 차별금지법 제정투쟁을 확대하기 위한 전략과 계획이 필요합니다. 차별금지법 쟁취를 위한 노동자투쟁의 전망을 함께 이야기해봅시다. - 일시: 3월 26일(목) 19:00 - 장소: 민주노총 15층(서울 중구 정동길 3 경향신문사) / ※온라인 Zoom 참가 병행 - 발제: 유지원 (사회주의를향한전진 여성운동위원회) - 토론1: 도명화 (전국민주연합노조 톨게이트지부 조합원) - 토론2: 이예지 (전 단국대 죽전캠퍼스 성소수자모임 아웅다웅 대표, 현 공공운수노조 전국교육공무직본부 경기지부) - 사회: 이청우 (사회주의를향한전진 공동집행위원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