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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여성 노동자들이 ‘훌륭한 여성 CEO’에 맞서 싸운 이유다국적 기업인 펩시코에는 여성 CEO가 있고, 회사 내 다문화정책으로 상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아르헨티나 펩시코 공장의 여성들은 펩시코와 결전을 치르고 있다. 이들의 투쟁은 회사 내에서 여성의 개인적인 성공이란 노동자에게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기사를 쓴 타티아나 코차렐리는 브라질 출신의 사회주의자로 미국 <레프트보이스>에서 활동하고 있다. * * * 인드라 크리슈나무르티 누이(Indra Krishnamurthy Nooyi)는 인도계 미국인으로서,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큰 식품·음료 회사인 펩시코의 CEO다. 이 회사에서는 펩시, 레이즈, 퀘이커, 도리토스, 스타벅스 음료, 세븐업, 치토스, 아쿠아피나, 마운틴듀, 게토레이, 트로피카나 같은 제품을 만든다. 2016년에 펩시코는 매출액 628억 달러를 달성했고, 1,590억 달러의 시장가치를 지녔으며, 어림잡아 264,000명의 노동자를 고용했다. 그 정도로 비중 있는 글로벌 기업의 CEO라는 점에서, 누이가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여성으로 두어 차례 지명된 것도 놀랄 일이 아니다. 누이는 한 개인으로서 최고 수준의 성공을 거둔 재계 인물이 될 수 있었을 뿐 아니라, 기업 내에서 유색인과 여성이 진출할 수 있는 길을 열었다. 현재 펩시코의 고위급 임원 중 27%가 여성이며, 36%가 유색인이다. 의심할 바 없이 기업들이 평균적으로 보여주는 것 이상의 다양성을 보여준다. 영국에서 펩시코는 여성이 일하기 좋은 상위 50개 기업 중 하나로 뽑혔다. 신문 <더타임즈>와 <오퍼튜니티나우>는 펩시코가 “일터의 젠더 평등을 주도해가고 있”으며, 이것은 부분적으로 여성 중간 관리자들이 고위급 임원 자리로 나아갈 수 있도록 지원하는 ‘성공을 위한 전략’ 프로그램 덕분이라고 말한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누이가 여성의 역량 강화(임파워먼트*)를 위한 모델이며, 유색인을 포함한 여성이 원하는 것을 달성하기 위해 인종차별과 성차별의 장벽을 허물어뜨릴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인이다. 어떤 사람들은 여기서 더 나아가, 페미니스트의 모델 격으로 다른 여성을 위해서도 길을 열어줬기 때문에 그의 역량 강화가 결코 개인적인 성취만을 뜻하지 않는다고 주장할지도 모른다. [*임파워먼트: 권한을 부여하고 역량을 키우며 동시에 의욕과 성과, 효능감 등을 증진시키는 과정을 함축하는 개념으로 정치, 경영, 페미니즘 운동 등 다양한 영역에서 사용된다. 이 글에서는 ‘역량 강화’로 옮겼다.] 누군가는 우리의 할머니 세대가 최고 지위로 나아가지 못하도록 가로막았던 과거의 장벽은 사라진 지 오래이며, 새로운 평등의 시대에 접어들었음을 누이의 삶이 입증한다고 주장할 것이다. 이런 논리로 보면, 여전히 여성이 직면하는 난관이 있다 해도, 그 난관을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을 누이 같은 여성이 빛나는 사례처럼 보여주는 것이다. 이런 종류의 페미니즘은 의미 없는 막다른 길이다. 누이가 진보를 위한 등대로 서 있는 동안 전 세계 여성들은 문맹, 폭력, 저임금, 끔찍한 노동조건에 고통을 겪고 있다. 누이 같은 사람들 앞에서 수많은 여성의 신체와 정신이 문자 그대로든 상징적 의미로든 육중한 기계설비의 무게에 바스러지고 있다. 그곳에서 누이를 억만장자로 만들어 주는 상품들이 생산된다. 지금 다수의 여성 노동자들이 해고에 맞선 투쟁을 조직하고 있는 이곳 아르헨티나 펩시코 공장보다 이런 현실을 더 뚜렷하게 드러내 주는 곳은 없다. 이 투쟁은 린인(Lean In) 페미니즘*의 문제점을 부각시키며, 세계의 여성들이 진짜로 전진할 수 있는 길을 가리키는 다른 종류의 페미니즘을 전형적으로 보여준다. [*린인 페미니즘: 페이스북과 메타의 최고운영책임자였던 셰릴 샌드버그의 책 <린인 Lean In>에서 유래한 표현으로, 여성이 스스로 자신의 커리어를 계발하려는 의지와 노력을 통해 성공할 수 있다는 능력주의, 자유주의 시각을 담고 있다.] 펩시코에서 일하는 여성들 지난 수년간 펩시코는 공장의 노동자들을 무지막지하게 착취했다. 그들 대부분은 여성 하청 노동자였고 하루에 12시간 넘게 일했다. 10년간 그 공장에서 일해왔고 사회주의노동자당(PTS) 당원이기도 한 카탈리나 발라게르는 이렇게 말한다. “이곳의 많은 여성이 자녀가 있다는 얘기를 안 해요. 해고될 거라는 생각 때문이에요. 아이를 갖게 되거나 홀로 아이를 키워야 하는 상황이면 어떻게든 돈을 벌어야 하니까 더 가혹하게 착취당할 수밖에 없다는 것도 알게 됐고요.” 카탈리나가 끔찍한 노동조건을 묘사해줬다. 12시간 노동, 주말 근무, 짧은 휴식 시간, 저임금, 위험한 작업조건. “임신하게 되더라도, 일자리를 잃지 않기 위해서는 다른 노동자들과 똑같이 일해야 합니다. 우리는 오랫동안 똑같은 단조로운 동작을 해왔어요. 똑같은 자세로 몸뚱이를 구부려 왔고요. 우리는 기계에 붙어있는 부품이에요. 기계가 과자 봉지를 뱉어내면 우리는 죽을 때까지 그것을 상자에 담아야 합니다. 담고 또 담고, 매일 똑같은 일을 하면서 몸뚱이가 망가지고 있어요.” 해고에 맞서 투쟁하는 펩시코 노동자들 2001년에 그는 노조를 만들려 했다는 이유로 다른 몇몇 동료들과 함께 공장에서 쫓겨났다. 일자리를 되찾기 위한 투쟁이 1년 반 동안 이어졌고, 변호사 일을 하는 사회주의노동자당 동지도 힘을 보탰다. 그들은 학생들과 다른 사업장 노동자들의 연대를 조직하면서 법정 밖에서 투쟁했다. 카탈리나의 얘기를 들어보자. “우리는 대학 연구자, 심리학자, 사회학자들과 함께 조사를 했습니다. 여성 노동자로 살아간다는 게 어떤 것인지 얘기했고요. 여성 노동자로 살아가는 것의 복합적인 의미를 다루는 훌륭한 결과물을 만들어낼 수 있었습니다. 얼마나 돈을 벌고 얼마나 쓰는지, 공장에서 얼마나 오래 일하고 집에서는 또 얼마나 오래 일하는지, 이런 게 다른 여성 노동자와 말문을 트는 좋은 방법이기도 했습니다. 이를 통해 다른 여성 노동자들도 노동조건을 바꾸는 데 나서게 됐어요.” 결국 카탈리나는 일자리를 되찾았다. 그뿐 아니라 펩시코는 망신당하지 않기 위해 뭔가 조치를 취해야 했다. 그들은 하청 노동자에 대한 초과 착취를 중단했고, 구호단체에 특별 기부금을 내기 시작했으며, 장애인을 고용하기도 했다. 하지만 진정한 승리는 펩시코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의 의식이 성장했다는 점이었다. “투쟁하면서 정직당하고 해고되거나 위협받는 대가를 치러야 했습니다. 하지만 이 체제가 주는 고통 속으로 내몰리기를 원하지 않는 수많은 여성의 의식이 투쟁하며 변화하는 이상, 우리는 백만 번이라도 또다시 싸울 거에요.” 카탈리나의 얘기다. “폭력, 분노, 고통을 겪으면서, 우리는 투쟁해야 하고 조직해야 한다고 배웠습니다.” 트로츠키주의 정당인 사회주의노동자당 당원이기도 했던 몇몇 동료 노동자들과 카탈리나는 현장위원회를 만들었고, 지도부로 신임을 얻었다. 현장위원회 지도부로서 그들은 임산부 휴가, 안전을 위한 노동조건 개선, 하청제도 폐지 등 몇 가지 양보를 쟁취해냈다. 현장위원회는 공장에서 내부 민주주의와 참여를 확대하는 방식으로 투쟁 방향을 함께 결정하기 위해 정기적으로 총회를 소집했다. 여성의 권리를 위해 투쟁하는 펩시코 노동자들 특히 펩시코 노동자들은 펩시코와 그 밖의 공장에서 여성 노동자의 권리를 위해 투쟁했다. 예를 들어 2010년에는, 크라프트식품 회사의 여성위원회와 함께 “하청 불안정 노동은 폭력이다”라고 적힌 플래카드를 들고 도로봉쇄 시위를 벌였다. 또한 3월 8일 세계 여성의 날에는 파업을 조직했고, 해마다 6월 3일에는 여성 살해에 반대하는 니우나메노스(Ni Una Menos) 시위에 참여하기 위해 파업을 했다. 지난 화요일 펩시코 노동자를 위한 대규모 시위가 열렸을 때 카탈리나는 “한 명도 더 일자리를 잃을 순 없다”고 적힌 점퍼를 입고 나왔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 노동하는 여성은 폭력이 가정 안에서만 일어나는 게 아니라는 걸 알고 있습니다. 작업장에서도, 그리고 정부에서 우리를 대변한다고 하는 자들에 의해서도 폭력이 가해져요. 정부는 그들 자신의 이익을 지킬 뿐이고, 우리에게 최악의 굴욕과 최악의 생활 조건을 강요합니다.” 작업장에서는 남성과 여성 노동자들이 노동자로서의 권리만이 아니라 여성의 권리를 위해 함께 단결한다. “우리는 남성과 여성 노동자의 단결을 바탕으로 전진해 왔어요. 사장이 공장 문에 해고통지서를 붙여놨을 때 그가 성별을 가리지 않는다는 걸 몸소 보여줬기 때문이에요. 우리가 결정하고, 스스로 조직하고, 총회를 열고, 거기에서 투표하고, 투쟁합니다. 남성 노동자들과 나란히요. 남성 노동자 앞에 서는 것도 아니고, 뒤에 서는 것도 아니에요. 우리의 권리를 위해 굳건하게 나란히 섭니다.” 여성 노동자가 겪는 차별, 모욕, 폭력을 거듭 목도해 온 남성 동료 노동자들은 관리자와 사장에 맞서 여성 노동자와 함께 투쟁한다. 펩시코에서 벌어진 대결 경제위기가 지속되는 가운데 정부는 긴축 조치를 취하고, 해고는 계속 늘어나는 상황에서, 펩시코는 부에노스아이레스 공장을 폐쇄하기로 결정했다. 공장에 출근한 600명의 노동자는 해고통지서가 붙어있는 것을 보게 됐다. 수많은 노동자가 결코 치유되지 않을 질병, 통증, 부상을 겪으면서 오랫동안 몸 바쳐 일하고 조직해온 공장이었다. 이 노동자들은 공장에서 늘 해오던 바로 그것을 하기로 결정했다. 반격에 나서는 것이다. 노조 관료들은 이 투쟁을 지원하지 않았다. 그래도 펩시코 노동자들은 누이가 이끄는 미국계 다국적 기업에 대항하기 위해 공장을 점거하기로 결정했다. 그들은 아르헨티나와 세계 곳곳에서 연대해준 수많은 노동자, 연구자, 학생과 함께 피켓 시위와 도로봉쇄 시위를 벌이고, 인터뷰를 하고, 연대 문화제를 열면서 지역사회의 지지를 끌어냈다. 크게 주목을 받은 불매운동과 국제연대 운동도 조직했고, 이 투쟁을 지지하는 탄원서 서명운동도 벌였다. 노벨평화상 수상자인 아돌포 페레스 에스키벨, 오월광장어머니회*, 니우나메노스 운동 참가자들, 인권단체와 학생운동단체, 노동자단체의 수많은 활동가들이 펩시코 노동자를 지원하기 위해 나섰다. [*오월광장어머니회: 1976년에서 1983년까지 아르헨티나 군사독재 시기에 실종된 사람들의 어머니들이 만든 단체. 군부가 좌파 척결을 내걸고 벌인 ‘더러운 전쟁’으로 3만 명 가까이 실종됐다.] 7월 중순, 공장을 점거 중이던 펩시코 노동자들이 폭력적으로 퇴거당했다. 경찰이 최루액과 고무총탄을 쏘고 곤봉을 휘두르며 노동자와 지지자들을 공격했다. 노동자와 학생들을 공격하는 경찰의 모습이 TV로 생중계됐다. 한 민간 컨설팅회사가 추정하기로는 2,000만 명 이상이 펩시코 노동자 침탈 영상을 봤고, 트위터에 글을 쓰고 읽었다. 아르헨티나 전체 인구의 절반에 가까운 수치다. 경찰의 침탈에 맞서 펩시코 노동자와 연대 대오가 저항하고 있다. 언론 보도가 쏟아지고 대중적인 압박이 거세지는 상황에서 강제 퇴거가 집행된 지 2시간 만에, 노동법원에서 노동자에게 유리한 판결이 나왔다. 법원은 회사에 노동자들을 복직시키라고 명령했다. 하지만 펩시코는 여전히 법원의 판결을 따르지 않고 있다. 공장 점거는 끝났지만, 노동자들은 투쟁을 계속하고 있다. 7월 18일, 전투적인 노조 지부, 학생단체, 인권단체, 니우나메노스 운동을 벌이며 세계적으로 알려진 페미니즘 단체 등에서 나온 30,000명의 참가자들이 국회를 향해 행진했다. ‘#모두함께펩시코에맞서싸우자’라는 해시태그가 6시간 동안 널리 확산됐다. 노동자들은 펩시코에 대항하는 투쟁을 이끌기 위해, 그리고 긴축과 해고에 맞서기 위해 농성 천막을 세웠다. 최전선에 선 노동자계급 여성들 펩시코 여성 노동자들이 보여준 것은, 정부에서든 기업에서든 사회의 최상층에 여성이 있다고 해서 그것이 노동자계급 여성의 해방을 뜻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이다. 펩시코 CEO인 누이는 유색인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펩시코에서 착취가 조금이라도 줄어드는 조건을 만들어주는 것은 아니다. 권력을 쥔 자들의 성별을 바꾸는 것은 상징적인 행위에 불과하며, 압도 다수의 여성에게는 아무런 실질적인 의미가 없다. 펩시코 CEO로서 누이의 지위, 332억 원이 넘는 엄청난 연봉, 그가 관리직으로 끌어올리려는 모든 여성과 유색인의 엄청난 연봉은 카탈리나와 전 세계 수많은 여성 노동자가 등골 빠지게 일한 결과다. 카탈리나가 혹사당하고 저임금에 시달린 대가로 누이는 부를 누린다. 카탈리나와 동료 노동자들의 노동을 쥐어짜 주주들에게 이윤을 보장함으로써 누이는 CEO라는 지위를 유지한다. 카탈리나가 더 장시간 일할수록 임금은 더 떨어지고 일자리는 더 불안정해지는 반면, 펩시코는 더 많은 이윤을 챙겨간다. 그럴수록 누이는 더 ‘훌륭한’ CEO가 된다. <포브스>가 펩시코를 여성 노동자에게 가장 좋은 직장이라고 선정했을 때, 세상의 모든 카탈리나 같은 여성이 등골 빠지게 노동하고, 기계의 부속품처럼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고려하기라도 했을까? 바로 지난해 힐러리 클린턴은 미국 여성들에게 자신이 여성 역량 강화의 상징이며, 자신이 대통령으로 뽑히는 것이 모든 여성의 승리라고 설득하려 애썼다. 그 여성 역량 강화란 펩시코 CEO나 부에노스아이레스 주지사가 보여준 것 같은 종류의 역량 강화다. 그것은 “역량을 강화한 여성”에게 억눌리고 착취당하는 펩시코의 여성 노동자, 남성 노동자의 아내나 연인, 세상의 모든 여성 노동자에게 아무 의미 없는 역량 강화다. 그렇지만 펩시코 투쟁은 새로운 종류의 페미니즘에 주목하도록 이끌어준다. 그것은 노동자계급에 기반을 두고 있으며, 전투적이고, 저들의 허구적인 평등 조치를 거부하는 페미니즘이다. 이 페미니즘은, 여성 노동자의 적은 사장들이며, 그 사장이 남성인지 여성인지는 중요하지 않다는 점, 펩시코의 여성 노동자들이 그랬듯이 여성 노동자는 같은 처지에서 일하는 그들의 남성 동료들과 뭉쳐야 한다는 점을 이해한다. 오늘날 노동시장에는 역사상 그 어느 때보다 많은 여성이 나와 있다. 노예 같은 노동과 성차별에 맞서 노동자계급 여성이 스스로를 조직한다면, 이것은 거대한 힘의 원천이 될 수 있다. 펩시코 노동자들이 보여주는 새로운 종류의 페미니즘은 노동자계급의 연대에 바탕을 둔다. 이 페미니즘은 개별적인 남성, 자본가, 정부의 모든 폭력에 대항해 노동자계급과 여성을 방어한다. 개인적인 역량 강화가 아니라, 자신의 권리와 이 사회의 모든 피억압 민중의 권리를 지키기 위한 노동자계급의 역량 강화를 추구하는 페미니즘이다. 또한 이 페미니즘은 한 사람의 권리를 침해하는 것은 곧 우리 모두의 권리를 침해하는 것이며, 누군가 억압받고 착취당한다면 우리 모두가 사슬에 묶여 있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이러한 페미니즘은 임신한 여성 노동자의 권리를 위해, 그리고 모두의 안전한 노동조건을 위해 현장위원회에서 남성 동료들과 함께 단결한다. 누군가는 이런 종류의 페미니즘이 세력이 없고, 이상적이며, 주도력을 가질 수 없다고 주장한다. 나는 이런 종류의 페미니즘이야말로 모든 여성의 권리를 쟁취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페미니즘은 허구적인 성과가 아니라 진짜 승리를 바라며, 소수의 행운아를 위한 빵 부스러기가 아니라 노동자계급과 피억압 민중을 위해 세상을 쟁취하기를 바라는 그런 페미니즘이다. 글쓴이 타티아나 코차렐리, 2017년 8월 16일 옮긴이 오연홍 *로 표시한 각주는 옮긴이가 붙인 것이다. 기사 원문 https://www.leftvoice.org/women-workers-vs-intersectional-exploitation/ 연재 소개 페미니즘이라고 하면 ‘남성 혐오’나 ‘갈라치기’부터 떠올리는 사람들이 많다. 자유주의 페미니즘 또는 래디컬 페미니즘이 여전히 주류인 것도 맞다. 하지만 페미니즘에는 다른 길이 있다. 착취, 가난, 전쟁, 기후 위기로 점철된 자본주의라는 체제 안에서 남성과 더 잘 경쟁하기 위한 페미니즘이 아니라 자본주의 자체를 깨뜨려야 한다고 주장하는 페미니즘, 이를 위해 또 다른 누군가를 배제하는 게 아니라 모든 성별, 국적, 인종의 노동자와 청년이 똘똘 뭉쳐 함께 싸워야 한다고 외치는 페미니즘이 있다. 2003년에 아르헨티나에서 만들어지기 시작했고 지금은 독일, 볼리비아, 브라질, 칠레, 코스타리카, 스페인, 미국, 프랑스, 이탈리아, 멕시코, 페루, 우루과이, 베네수엘라에서도 활동하는 국제 ‘빵과 장미’ 네트워크가 그것이다. 한국에서 노동자계급에 기반한 변혁적 여성운동을 건설하려는 우리는 혁명적 페미니즘의 중요한 사례로 ‘빵과 장미’를 주목하면서, 이들의 주장과 실천을 소개하고자 한다. ① 사회주의 페미니즘이란 이런 것이다(타티아나 코차렐리) ② 왜 여성이 사회주의를 위해 투쟁해야 하는가?(안드레아 다트리) ③ 여성 노동자들이 ‘훌륭한 여성 CEO’에 맞서 싸운 이유(타티아나 코차렐리) ④ 우리는 임신 중지권을 이렇게 쟁취했다(너새니엘 플라킨) ⑤ 혁명은 여성의 삶을 어떻게 바꾸는가?(안드레아 다트리) ⑥ 사회적 재생산과 사회주의 페미니즘(호세피나 마르티네스) ⑦ 페데리치의 주장에 대한 비판적 토론(호세피나 마르티네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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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왜 여성은 사회주의를 위해 싸워야 하는가?안드레아 다트리는 아르헨티나 사회주의노동자당(PTS)의 리더이며 여성단체 ‘빵과 장미’의 설립자다. 그의 책 <빵과 장미: 자본주의에서 젠더와 계급>은 스페인어, 이탈리아어, 프랑스어, 독일어, 영어로 번역 출간됐다. * * * 사회주의가 여성의 삶과 발전, 행복에 어떤 이점을 줄 수 있는지에 대해 합의에 도달하는 건 어려운 문제다. 자본주의가 인류와 지구를 고통, 파괴, 야만으로 몰아간다는 진단에 대해 의견 일치를 보는 게 더 쉬울 것이다. 딱 15년 전에, 미국에서 가장 부유한 100명의 평균수입은 가난한 90%의 수입보다 108,765배나 높았다. 역사의 다른 시기와 비교해 본다면, 이와 같은 물질적 부의 격차 비율은 로마제국 절정기 원로원 의원과 노예 간의 격차와 맞먹는다고 말할 수 있다. 2020년 이래, 전 세계를 황폐하게 만든 코로나19 팬데믹은 이 말도 안 되는 모순을 더 심화시켰을 뿐이다. 이를 보여주는 끔찍한 사례가 아마존이다. 아마존은 수많은 불안정 노동자를 고용한다. 이들은 기진맥진해질 정도로 일해야 하고, 노조 결성권을 보장받지 못하며, 형편없는 임금만 받으면서 경제가 움직이게 해준다. 그 사이에 이 회사의 소유주는 720억 달러의 재산을 추가로 손에 넣었다. 이 짧은 기간에 450만 명 이상이 사망했다. 코로나 사태로 노동자가 죽어 나가는 동안 아마존 자본가는 720억 달러(약 91조)를 더 벌어들였다. 코로나19가 촉발한 위기는 그 전부터 오랫동안 이어진 추세를 더욱 가속했다. 그것이 전부가 아니다. 이 위기는 자본주의 모순이 경제뿐만 아니라 생태와 재생산 영역에까지 걸쳐 있다는 점도 보여줬다. 수백만의 사람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생명보다 이윤이 중요하다는 끔찍한 자본주의 원리가 터무니없는 방식으로 드러났다. 거듭 자본주의 위기가 닥치면서 이 모순은 점점 더 견딜 수 없는 것이 된다. 여러 분석가들이 동의하듯이, 이 때문에 사회주의라는 발상이 심지어 제국주의 국가들의 심장부에서 살아가는 젊은 세대 속에서도 되살아나고 있다. 꽉 묶인 매듭이 더 단단하게 묶이다 코로나바이러스가 세상에 퍼지기 이전인 2019년에, 세계 노동가능인구의 절반은 여성이었다. 하지만 실제로는 전체 노동인구의 39%만이 여성이었다. 여성은 남성보다 더 불안정하고 비공식적인 조건에서 일하는 경우가 많았다. 특히 사하라사막 이남 아프리카, 동남아시아, 라틴 아메리카에서 그렇다. 일할 수 있는 여성의 21% 이상이 하루 내내 무급 돌봄노동에 종사한다. 같은 처지에 있는 남성이 1.5%에 불과한 것과 비교된다. 같은 해에 20세 미만의 여성과 소녀 1,300만 명이 아이를 낳았다. 아직도 119개 나라에서는 임신 중지권이 제한된다. 오직 38개 국가에서만 임신한 노동자를 해고하는 게 금지돼 있다. 86개 나라에서는 아이를 양육하는 데 투여한 기간을 연금 산정하는 데에서 빼버린다. 2018년에 에이즈 바이러스에 감염된 채 살아가는 15세 이상의 사람 중 52%가 여성이었고, 그 비율은 1990년 이래 계속 증가하고 있다. 팬데믹이 발발하면서, 기존의 성별 격차는 더욱 커지기만 했다. 2022년 초에 다보스에서 열린 세계경제포럼에서는 세계 성별 불평등을 없애는 데 135년 이상이 걸릴 거라고 추산했다. 2020년 추산보다 36년이 더 늘어난 수치다. 코로나19 팬데믹에 대응하는 정부 조치들은 그들이 성평등 목표라고 여기는 것들의 달성을 한 세대 뒤로 밀쳐놓는 데 성공했을 뿐이다. 진짜로 공상적인 것은, 그저 자본주의가 자기 갈 길을 가게 내버려 둠으로써, 또는 좀 더 진보적인 버전으로는, 사회운동이 자기 모습을 내보이고 민주적인 국회의원들이 성별 격차를 줄이기 위한 법안을 통과시킴으로써 이 격차가 조만간 줄어들 거라고 믿는 것이다. 오늘날 미국에서 여성은 임신 중지권의 퇴행에 직면했다. 우리는 지난 몇 년간 스페인에서 이와 똑같은 밀물과 썰물을 봤다. 스위스에서는 결혼 평등법*이 통과된 반면, 아프가니스탄 여성은 외출하려면 몸 전체를 가리도록 다시 강요받게 됐다. [*결혼 평등법: 동성결혼을 포함해 다양한 성별의 결혼을 인정한다.] 지금은 자본주의가 발전하는 시기가 아니다. 되풀이되는 위기를 거치며 버티는 상황이다. 이 체제가 회복되려면 생산력의 파괴라는 길을 거쳐야만 한다. 신자유주의 질서가 번영할 수 있을 거라는 꿈같은 상상을 할 수는 있더라도, 과연 누가 그 대가를 치르면서 어느 나라에서 번영이 이뤄질 수 있을까? 국제적인 돌봄 사슬이 그 답을 보여준다. 선진국 여성들이 직업이나 학문적인 커리어에서 남성을 따라잡을 수 있게 된 것은, 주로 그들의 노동력을 재생산하는 데 필요한 무급노동이 흑인이나 히스패닉계의 가난한 이주 여성에게 외주화됐기 때문이다. 법률이나 국내 총생산 증가로 이 상황을 바꿀 순 없다. 이 현실은 자본주의가 가장 단단한 매듭으로 꽉 묶어놓은 것이다. 이 체제 안에서 그 매듭을 푸는 건 불가능하다. 가중되는 무급노동 자본가들이 가사노동을 직접 통제하지는 않는다. 그렇지만 자본가들은 노동력을 재생산하는 데 필요한 노동의 상당 부분을 사적 영역에 묶어둠으로써 이득을 본다. 이런 방식으로 임금은 임금노동자를 재생산하는 데 필요한 비용 전부를 커버할 필요가 없게 된다. 재생산노동의 일부는 임금노동자 자신에 의해, 그들의 집에서, 아무런 보수 없이 이뤄진다. 유급 고용의 형태로든 아니든, 이런 노동을 하는 압도 다수는 두말할 것 없이 여성이다. 다시 말해 대부분 여성이 가정에서 수행하는 무급 재생산노동은 자본가들이 임금노동 착취에서 끌어내는 잉여가치의 양을 간접적으로 늘려준다. 여성 억압의 뿌리는 고대 계급사회의 등장에까지 거슬러 올라가지만, 이렇게 해서 자본주의는 잉여가치를 뽑아내는 구조에 복무하게 만드는 방식으로 이 종속관계를 재구성한다. 자본주의는 상품 생산에 대한 물신숭배를 낳고, 임금을 지급함으로써 잉여노동의 존재를 감춘다. 그와 동시에, 노동력이라고 알려진 특별한 상품의 재생산에 필요한 노동의 ‘가정 내 구성요소’를 생산 영역에서 분리된 것으로 묶어둔다. 이런 이유에서 몇몇 마르크스주의 페미니스트들은 가사노동 즉, 사회적 재생산을 위한 무급노동 또는 광범한 대중에게 그렇듯이 넓은 의미로 돌봄노동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을, 자본주의 사회의 진정한 산물이라고 주장한다. 이 엄청난 불평등을 유지하려면 거대한 이데올로기적 압력이 가해져야 한다. 개인들이 이런 규범을 그들 자신의 욕망인 것처럼 받아들이도록 말이다. 다시 말해 사람들은 결국 여성이 하는 일을 무급노동이 아니라 사랑이라고 믿게 된다. 그런 점에서 특히 낭만적인 사랑 역시 자본주의의 발명품이다. 가사노동, 돌봄노동이 ‘당연히’ 여성의 몫이라는 생각은 과연 당연할까? 자본주의는 자연과 우주의 수수께끼를 풀 수는 있었지만, 여성이란 무엇이고, 좋은 여성은 어때야 하며, 여성의 권리와 의무는 무엇인지, 그리고 여성이 무엇을 갈망해야 하고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편견, 규칙, 고정관념은 완전히 제거하지 못한다. 이 ‘성별 반계몽주의’에는 무급노동이 사랑이며 이런 사랑은 여성에게 안성맞춤이라는 생각을 이데올로기적으로 정당화하는 내용이 다수 포함된다. 여성성에 관한 이 뿌리 깊고 대대로 내려오는 선입견에 어떤 측면에서라도 도전하는 여성은, 누구일지라도 조롱당하고, 멸시당하고, 굴욕을 겪고, 경제적이거나 법적인 위협을 받고, 구타당하거나 살해된다. 바로 그렇기에 우리는 자본가 민주주의 아래서는, 심지어 가장 발전한 나라들에서조차, 그 어떤 사회개발 정책도, 그 어떤 남다른 경제번영도, 그 어떤 뛰어난 성평등 입법도 여성 억압을 완전히 제거하거나 여성을 해방할 수 없으며, 남성과의 전면적인 평등 또한 보장할 수 없다고 되풀이해서 말한다. 마르크스, 엥겔스의 말을 빌리자면, 사회주의는 ‘현 상태를 폐지하는 현실의 운동’이다. 이 ‘현 상태’란, 한 줌 소수가 터무니없이 큰 부를 챙겨가는 상태, 심지어 팬데믹을 겪는 동안에도 그런 일이 벌어지며 그 대가로 압도 다수가 점점 더 불안정한 노동으로 내몰리고, 노동력 재생산은 냉혹하게 여성의 무급노동에 내맡겨지는 그런 상태다. 자본주의 시계에서 시간을 해방시키기 경쟁을 향한 내적 충동으로부터 연료를 공급받는 자본주의는 상품을 생산하는 데 드는 사회적 필요노동 시간을 빠르게 감소시킨다. 더 적은 시간에 더 많은 상품을 만든다는 것은 더 저렴한 상품과 더 많은 소비를 뜻한다. 자본가들에게 이는 더 많은 이윤을 의미한다. 남성이든 여성이든 노동자 다수에게 이는 더욱더 거대한 강탈을 뜻한다. 이전에는 X개를 만들었고 지금은 같은 시간에 100개를 만드는데, 그걸 생산하는 사람은 똑같은 임금을 받는다. 그들이 생산하는 만큼 임금을 받는 게 아니기 때문에 이런 일이 생긴다. 정확히 말하면, 그들의 노동력은 일정한 시간 동안 임대된다. 자본가들은 노동자계급 일부에 대한 초과 착취에 의존한다. 생산성 향상, 잔업, 한쪽에서 엄청난 다수 노동자가 실업이나 극도로 불안정한 일자리에 처해 있는 동안 다른 한쪽에서의 과도한 노동시간, 취업 노동자 임금삭감 등이 그 수단이다. 과학과 기술이 발전하면서 상당히 높은 수준의 노동 생산성을 달성하는 게 가능해졌다. 이런 기술 덕분에, 사회의 존속을 위한 물질적 조건을 생산하고 재생산하는 데 필요한 노동시간을 대폭 줄이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 바로 그것이 우리가 사회주의자로서 제안하는 것이다. 모두가 예술, 과학, 스포츠, 다른 사람과 지구를 돌보는 일 등에서 자신의 인간적 능력을 발전시킬 수 있도록 필요노동을 최소한으로 줄이자는 것이다. 우리 모두 임금을 벌기 위해 지금 투여하는 것보다 훨씬 적은 시간을 들이면서 그렇게 일하게 될 것이다. 물론 이런 변화는 자본가들의 이윤을 침해할 것이고, 그들은 그들의 특권을 제거하려는 어떠한 시도에도 저항할 것이다. 이는 그들의 법률, 법정, 경찰, 군대와 맞부딪치게 된다는 것을 뜻하고, 더 나아가 종교, 인종차별, 외국인 혐오, 여성혐오를 이용해 그들이 우리 계급에 덧씌운 분열과도 맞부딪친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 사회주의는 맹아의 형태로 자신을 드러내는, 착취의 굴레에서 자신을 해방하려는 노동자계급의 끊임없는 투쟁으로 자신을 드러내는 현실의 운동이다. 이 투쟁들은 유계결근으로 사장들에게서 시간 훔쳐내기부터 노동시간을 8시간으로 단축하기 위한 역사적인 투쟁에 이르기까지, 유급휴가와 노조결성권 쟁취에서부터 생산에 대한 노동자 통제의 수립에 이르기까지를 포괄한다. 그것은 반란을 일으킨 여성과 남성 노예들의 운동이다. 혁명은 멈추면 패배한다 자본주의를 뒤엎고 사회주의 사회의 토대를 놓는 것으로 충분히 여성 억압을 끝장낼 수 있을까? 그렇지는 않다. 그러나 그것은 필수적인 한 걸음이다. 우리는 여성에 대한 차별을 유지하기 위해 재생산된 모든 성별 편견, 규칙, 고정관념이 자본주의에서의 사회적 재생산과 생산의 물질적 조건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고 앞서 지적했다. 권력을 장악하는 것보다 편견을 해소하는 것이 더 어렵다. 그런 편견은, 그것이 생겨날 수 있었던 물질적 조건이 심대하게 변화한 이후에도 끈질기게 남아 있을 거라고 보는 게 타당하다. 그러므로 스탈린주의자들과 그 밖의 사람들이 마르크스주의를 꼴사나운 경제주의적 희화로 왜곡하면서 주장했던 것과는 달리, 여성해방은 단지 권력의 심장부를 공격하고 생산수단을 사회화하는 것만으로 자동으로 얻어질 결과가 아니다. ‘가내 노예제’는 실제로 남성이 이미 쟁취한 권리를 여성이 ‘평등하게’ 행사하고 향유하지 못하게 막는다. 가사노동과 돌봄노동의 사회화는 이 ‘가내 노예제’의 폐지를 시작하기 위한 필수적인 기반이다. 공동주택과 식당, 세탁소, 학교, 유치원, 양로원, 재택 치료 등의 다양한 기관, 그리고 공원, 운동장, 클럽, 문화센터 같은 여가 공간을 만들어 가사노동과 돌봄노동을 가정 내의 사적 영역에서 끌어내 남성 여성 임금노동자가 수행하는 일자리로 전환해야 한다. 무급 이중 노동에서 해방된 미래 세대들은 노동일을 최소한으로 줄이면서 점차 성차별적 편견을 해소해나갈 것이다. 사랑에 대해서도 무언의 희생, 보이지 않는 노동, 조건 없는 헌신에 결박되지 않은 것으로서 새로운 의미를 찾게 될 것이다. 우리는 사회주의가 여성에게 즉각 낙원이 될 것이라고 약속하지 않는다. 그러나 분명한 진실이 있다. 기생충 같은 소수의 이익을 위해 인간 노동을 착취하는 일, 이 거대한 노동력을 재생산하기 위해 날마다 보이지 않는 무급노동에 여성을 종속시키는 일이 더 이상 일어나지 않는 그런 사회를 향한 투쟁은 우리의 삶을 더 살 만한 것으로 만드는 유일한 투쟁이라는 점이다! ‘현 상태’의 일부가 될 것인가, 아니면 ‘그 현 상태를 폐지하는 현실의 운동’의 일부가 될 것인가? 선택하라. 글쓴이 안드레아 다트리, 2022년 3월 8일 옮긴이 오연홍 *로 표시한 각주는 옮긴이가 붙인 것이다. 기사 원문 https://www.leftvoice.org/why-should-women-fight-for-socialism/ 연재 소개 페미니즘이라고 하면 ‘남성 혐오’나 ‘갈라치기’부터 떠올리는 사람들이 많다. 자유주의 페미니즘 또는 래디컬 페미니즘이 여전히 주류인 것도 맞다. 하지만 페미니즘에는 다른 길이 있다. 착취, 가난, 전쟁, 기후 위기로 점철된 자본주의라는 체제 안에서 남성과 더 잘 경쟁하기 위한 페미니즘이 아니라 자본주의 자체를 깨뜨려야 한다고 주장하는 페미니즘, 이를 위해 또 다른 누군가를 배제하는 게 아니라 모든 성별, 국적, 인종의 노동자와 청년이 똘똘 뭉쳐 함께 싸워야 한다고 외치는 페미니즘이 있다. 2003년에 아르헨티나에서 만들어지기 시작했고 지금은 독일, 볼리비아, 브라질, 칠레, 코스타리카, 스페인, 미국, 프랑스, 이탈리아, 멕시코, 페루, 우루과이, 베네수엘라에서도 활동하는 국제 ‘빵과 장미’ 네트워크가 그것이다. 한국에서 노동자계급에 기반한 변혁적 여성운동을 건설하려는 우리는 혁명적 페미니즘의 중요한 사례로 ‘빵과 장미’를 주목하면서, 이들의 주장과 실천을 소개하고자 한다. ① 사회주의 페미니즘이란 이런 것이다(타티아나 코차렐리) ② 왜 여성이 사회주의를 위해 투쟁해야 하는가?(안드레아 다트리) ③ 여성 노동자들이 ‘훌륭한 여성 CEO’에 맞서 싸운 이유(타티아나 코차렐리) ④ 우리는 임신 중지권을 이렇게 쟁취했다(너새니엘 플라킨) ⑤ 혁명은 여성의 삶을 어떻게 바꾸는가?(안드레아 다트리) ⑥ 사회적 재생산과 사회주의 페미니즘(호세피나 마르티네스) ⑦ 페데리치의 주장에 대한 비판적 토론(호세피나 마르티네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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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사회주의 페미니즘이란 이런 것이다편집자 주 페미니즘이라고 하면 ‘남성 혐오’나 ‘갈라치기’부터 떠올리는 사람들이 많다. 자유주의 페미니즘 또는 래디컬 페미니즘이 여전히 주류인 것도 맞다. 하지만 페미니즘에는 다른 길이 있다. 착취, 가난, 전쟁, 기후 위기로 점철된 자본주의라는 체제 안에서 남성과 더 잘 경쟁하기 위한 페미니즘이 아니라 자본주의 자체를 깨뜨려야 한다고 주장하는 페미니즘, 이를 위해 또 다른 누군가를 배제하는 게 아니라 모든 성별, 국적, 인종의 노동자와 청년이 똘똘 뭉쳐 함께 싸워야 한다고 외치는 페미니즘이 있다. 2003년에 아르헨티나에서 만들어지기 시작했고 지금은 독일, 볼리비아, 브라질, 칠레, 코스타리카, 스페인, 미국, 프랑스, 이탈리아, 멕시코, 페루, 우루과이, 베네수엘라에서도 활동하는 국제 ‘빵과 장미’ 네트워크가 그것이다. 한국에서 노동자계급에 기반한 변혁적 여성운동을 건설하려는 우리는 혁명적 페미니즘의 중요한 사례로 ‘빵과 장미’를 주목하면서, 이들의 주장과 실천을 소개하고자 한다. ① 사회주의 페미니즘이란 이런 것이다(타티아나 코차렐리) ② 왜 여성이 사회주의를 위해 투쟁해야 하는가?(안드레아 다트리) ③ 여성 노동자들이 ‘훌륭한 여성 CEO’에 맞서 싸운 이유(타티아나 코차렐리) ④ 우리는 임신 중지권을 이렇게 쟁취했다(너새니엘 플라킨) ⑤ 혁명은 여성의 삶을 어떻게 바꾸는가?(안드레아 다트리) ⑥ 사회적 재생산과 사회주의 페미니즘(호세피나 마르티네스) ⑦ 페데리치의 주장에 대한 비판적 토론(호세피나 마르티네스) * * * 이 기사는 아르헨티나에서 ‘빵과 장미’의 성장에 초점을 맞춘다. 2003년에 처음으로 아르헨티나 전국여성대회에 참가했을 때 ‘빵과 장미’는 40명에 불과했지만, 지금은 수천 명의 여성 노동자와 함께 거리와 현장에서 투쟁하는 조직으로 성장했다. 한 명의 성전환 여성이 회사에서 화장실을 이용할 권리를 누릴 수 있도록 다른 노동자들이 연대하며 파업을 벌였다. 크라프트식품 노동자들은 동료 여성 노동자를 성적으로 괴롭힌 관리자에 맞서 파업을 했다. 2017년 3월 8일에는, 세계 여성의 날을 기리기 위해 펩시코 공장 노동자들, 교사들, 공항 노동자들이 파업을 벌였다. 사회주의 페미니즘 단체인 ‘빵과 장미’는 이 모든 투쟁에서 일정한 역할을 했다. ‘빵과 장미’는 아르헨티나에서 여성의 권리, 모든 노동자의 권리, 또 다른 유형의 억압에 맞서 노동자계급에 뿌리를 내리고 함께 움직이는 페미니즘 운동을 건설하는 데 기여했다. ‘빵과 장미’란 무엇인가? ‘빵과 장미’는 아르헨티나에서 처음 만들어졌고 지금은 볼리비아, 브라질, 칠레, 멕시코, 스페인 같은 나라에서도 활동하는 사회주의 페미니즘 단체다. 우리는 이 고통스러운 자본주의 체제를 끝장내야만 전 세계 여성의 삶에 만연한 성차별을 끝장낼 수 있다는 확고한 신념에 바탕을 둔다. 우리는 즉각적인 민주개혁을 위해, 그리고 임신을 중지할 권리, 남성과 동등한 수준으로 생활임금을 받을 권리, 폭행과 강간, 학대를 피할 수 있는 권리 등 여전히 누리지 못하고 있는 권리를 위해 투쟁한다. 그러나 자본주의 안에서 여성과 성 소수자가 진짜로 해방되는 건 불가능하다는 사실도 아주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사회주의 혁명을 향해 나아가려 한다. 우리는 노동자계급이 혁명의 주체라고 여긴다. 이들은 자본주의 체제 전체를 깨부술 수 있고, 자본주의의 잿더미 위에서 새로운 사회주의 사회를 건설할 수 있다. 우리는 노동자계급이 페미니즘 운동과 단결하고, 흑인, 원주민, 성 소수자 등 또 다른 억압받는 사람들의 운동과 단결함으로써 무적의 세력이 될 수 있다고 여긴다. ‘빵과 장미’는 페미니즘 운동이 노동자계급과 연결되고 노동자계급의 요구를 채택하도록 밀어가면서, 아르헨티나의 광범한 페미니즘 운동 안에서 사회주의 진영을 형성하려 한다. 또한 우리는 네스토르와 키르치네르 정부 같은 탈신자유주의 세력을 포함한 자본가정당들을 통해서는 여성이 전진할 수 없다는 점을 페미니즘 운동이 이해하도록 독려한다.* 키르치네르 세력이 정권을 쥐고 세월이 흘렀지만, 아르헨티나인들은 여전히 임신 중지권을 누리지 못한다. 브라질 상황과 똑같다. 노동자당이 집권하고 여러 해가 흘렀는데도 여전히 임신 중지권이 보장되지 못하고 있다. [*네스토르 키르치네르는 2003년부터 2007년까지, 크리스티나 페르난데스 데 키르치네는 2007년부터 2015년까지 대통령으로 있으면서 신자유주의 정책에 반대했다. 아르헨티나 여성운동의 주류는 키르치네르 같은 페론주의 세력을 지지하는 입장에 머무르고 있다.] 2000년대 초까지 대체로 아르헨티나 좌파는 여성 쟁점에 대해 거의 입을 열지 않았다. 페미니즘적인 토론은 대학에 국한됐고, 노동자와 좌파 단체들이 여성 쟁점을 진지하게, 또는 비중 있게 다루는 경우는 드물었다. ‘빵과 장미’는 여성의 권리를 다루고 투쟁하는 마르크스주의 정치를 명료하게 드러내기 위해 태어났다. 따로 동떨어진 여성운동을 옹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솟구쳐 오르는 노동자투쟁의 흐름 속에서 여성의 권리를 명확하게 표현하고자 ‘빵과 장미’가 등장했다. 그와 동시에, ‘빵과 장미’는 노동자계급의 혁명적 사회주의 전망을 움켜쥐고 여성운동에 복무한다. 그 첫걸음으로, 2001년 사회주의노동자당(PTS)의 여성들이 <빵과 장미>라는 제목으로 사회주의 페미니즘에 관한 책을 썼다. 2001년은 대량 해고, 인플레이션, 정권의 동요로 점철되면서, ‘피케테로스’(피켓 든 사람들이라는 뜻)라고 불린 실업자 운동의 조건이 형성됐다. 그해 12월, 노동자와 중간계급 일부가 대규모 시위와 반란을 일으켰다. 사회주의노동자당의 투사들은 특히 브루크만 공장의 여성들에게서 영감을 얻었다. 브루크만은 2001년에 사장이 버리고 간 의류공장인데, 그 뒤 대부분 여성인 노동자들이 그곳을 접수했다. 초기 몇 년간 경찰이 끊임없이 이 노동자들을 쫓아내려 했다. 사회주의노동자당은 언제나 이 노동자들과 함께 최전선을 지켰고, “여기에 사장 없이 일하는 노동자들이 있다”, “브루크만은 노동자의 것이다, 그게 싫다면, 엿이나 먹어라!” 같은 구호를 외쳤다. 2002년에는, 사회주의노동자당의 노동자들이 네우켄 지방의 세라믹타일 공장인 사논을 접수하는 데 뛰어들었다. 그곳에서 그들은 여성 노동자와 이들의 배우자, 가족까지 조직하면서 공장 내에 여성위원회를 만들었다. 브루크만과 사논은 2000년대 초 공장접수 물결의 일부였다. 노동자들은 공장폐쇄를 받아들이기를 거부하면서, 공장을 접수하고 생산을 시작했다. 재가동된 공장들을 위한 전국 집회가 열렸을 때부터, 개별로 온 사람들과 더불어 여러 조직에서 온 여성들이 노동자계급 여성의 요구를 제기하면서 여성위원회에 참가했다. 2003년에는, ‘빵과 장미’가 처음으로 전국여성대회에 참가했다. 이 대회는 30년 넘게 개최되면서 전국에서 여성과 페미니스트들을 불러 모았다. 당시에 ‘빵과 장미’ 참가단은 고작 40명에 불과했다. 우리와 함께한 여성들은 자유롭고 안전한 임신 중지권을 요구했다. 가장 최근의 여성대회가 2017년 10월에 열렸을 때, ‘빵과 장미’는 전국에서 모여든 4,000명의 여성과 성 소수자들을 이끌고 참가했다. 2017년 전국여성대회에 모인 ‘빵과 장미’ 참가자들 ‘빵과 장미’라는 이름은 1912년 미국 메사추세츠 주 로런스에서 임금삭감에 맞서 투쟁한 여성들의 빵과 장미 파업에서 따왔다. 우리는 빵과 장미를 내건 요구가 강력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우리는 임금을 올리고 노동시간을 줄이는 등 노동자로서 권리를 요구한다. 우리는 아이를 기를 권리, 임신 중지권, 길거리에서 괴롭힘당하지 않을 권리 등 여성으로서도 권리를 요구한다. 우리는 예술을 즐기고, 여행하고, 가족이나 친구와 함께할 수 있는 여가를 요구한다. 우리는 충만하고 아름다운 삶을 살아갈 권리를 요구한다. 그것은 빵을 위한 권리이며, 또한 장미를 위한 권리다. ‘빵과 장미’는 사회주의노동자당의 투사들이 조직한 것이지만, 사회주의노동자당에 속하지 않은 사람들도 포함한다. 이것은 여성과 성 소수자의 단체다. 그러나 우리는 끊임없이 작업장과 대학의 남성 동지들과 함께하기 위해 노력한다. 우리는 터프(TERF, 트랜스젠더를 배척하는 래디컬 페미니즘) 경향을 거부하며, 트랜스젠더의 권리를 지지하고 함께 뭉친다. ‘빵과 장미’를 창립했을 때부터, 우리는 대학은 물론 노동자계급 속에 더 깊게 뿌리내리고자 했다. 우리는 노동자계급 속에서 여성의 권리, 성 소수자의 권리를 위해 사람들을 결집하고자 한다. 그런 활동의 몇 가지 사례를 소개한다. 노동자계급 속에서 활동하는 ‘빵과 장미’ ‘빵과 장미’는 전국 곳곳의 공장과 작업장에서 여성위원회를 만들고자 한다. 이 여성위원회는 여성 노동자들로 구성되며, 남성 노동자의 배우자나 어머니, 딸도 포함한다. 이런 유형의 위원회는 세계산업노동자연맹(IWW)이 조직한 파업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세계산업노동자연맹은 여성위원회 조직을 지원하면서 여성이 노동자투쟁에 참여하고, 정치활동에 관여하고, 노동자투쟁에 영향받은 다른 여성들과 연결될 수 있도록 돕는 역할을 했다. 이는 많은 여성이 혼자 또는 약간의 지원을 받으며 집안일을 하고 애를 돌보느라 겪는 고립을 깨뜨리는 것이며, 가정의 문제를 공동의 영역으로 끌어내는 것이기도 하다. 가정에서 ‘여자가 할 일’이라는 것을 없애고 그런 일을 사회화된 방식으로 다룰 수 있는 공적 영역으로 끌어내려는 것이다. 아르헨티나에서 ‘빵과 장미’는 몇몇 작업장에서 이뤄진 여성위원회 건설을 도왔다. 크라프트 공장 사례를 보면, 한 여성 노동자가 관리자에게 성적인 괴롭힘을 당하자 여성위원회가 파업을 조직하는 데 나섰다. 그 여성 노동자는 원래 회사 내부절차를 거쳐서 이 문제를 고발했는데, 고발을 했다는 이유로 오히려 회사에서 정직을 당했다. 해당 관리자를 쫓아낼 때까지 야간근무조 노동자들이 파업에 들어가기로 결정했다. 파업 다섯 시간 만에 그 관리자는 쫓겨났다. 남성 노동자의 아내들과 함께 여성위원회가 조직되기도 했다. 2014년에 노동자가 통제하기 시작한 인쇄공장 도널리 사례다. 노동자의 통제를 관철하는 데 여성이 중심적인 버팀목 구실을 했다. 규찰대에 참여했고, 노동자 통제에 지역사회의 지지를 끌어모았다. 이들 여성의 상당수가 이후 도널리 공장의 노동자가 됐다. 노동자의 자녀들을 위해 아침 5시부터 밤 10시까지 어린이집이 가동됐다. 이곳의 노동자들은 니우나메노스 운동(Ni Una Menos, ‘한 명도 더 잃을 순 없다’)과 3.8 여성의 날 투쟁에도 참여했다. 남성들과 성차별 문제를 토론하기 위해 공장 안에서 워크샵도 열었다. 니우나메노스 운동과 ‘빵과 장미’ 오늘날의 아르헨티나 여성운동은 거대한 니우나메노스 운동을 거치며 모양새를 갖췄다. 전국에서 수많은 여성이 거리로 나왔다. 니우나메노스라는 말은 멕시코에서 시작됐다. 사장과 정부, 마약 카르텔이 수출자유지역의 저임금 하청공장에서 일하는 여성들의 살해에 함께 연루됐다. 여성 살해는 멕시코에 한정된 게 아니었고, 오래지 않아 아르헨티나에서도 몇 차례 크게 공론화된 여성 살해가 일어난 뒤 페미니스트들이 같은 구호를 채택했다. 아르헨티나에서 처음으로 니우나메노스 시위가 일어난 2015년에는 30만 명이 국회 앞에 모여 여성 살해를 규탄했다. 그때부터 해마다 수많은 이들이 모여 시위를 벌였다. 때로는 1년에 한 차례 이상의 운동이 일어나기도 했다. ‘빵과 장미’는 국가가 정당화해주고 재생산하는 여성에 대한 폭력의 기나긴 사슬 마지막 고리가 여성 살해라고 간주한다. 라틴 아메리카 대부분의 나라와 마찬가지로, 아르헨티나에서 임신 중지권은 합법화되지 못했다. 이 때문에 수많은 여성이 목숨을 잃는다. 지난해에는 한 여성의 석방을 요구하는 대규모 시위가 일어났다. 그 여성은 불법으로 임신 중지를 한 뒤, 살인죄로 고발됐다. 정부는 가정폭력에 맞서겠다며 립서비스를 늘어놓지만, 이를 위한 예산은 빈약하고 가정폭력을 겪는 여성을 위한 국가의 지원은 부재하거나 형편없는 수준이다. 미국에서도 그렇듯이, 여성이 성차별적 폭력에 피해를 겪었을 때 이들은 국가에 의해 또다시 피해를 겪는다. 그들은 경찰이고, 법원이며, 피해자가 거짓말하고 있다고 말하는 자들, 피해자의 이야기를 무시하고 피해자에게 책임이 있다고 말하는 자들이다. 이것은 가난이라는 제도적 폭력에 덧붙는 또 하나의 제도적 폭력이다. 거대한 니우나메노스 운동 덕분에, 노동자계급 속에서 여성운동에 대한 자각과 지지가 생겨났다. 그 결과로, 국제 여성의 날에 아르헨티나 여러 산업부문에서 파업이 조직됐다. 펩시코 공장에서 파업은 아침 5시부터 시작됐다. (파업을 회피하려는) 기존 노조 지도부에 반대하는 입장의 현장위원회가 총회를 소집했고, 투표를 거쳐 파업이 성사됐다. 부에노스아이레스공항에서는 라탐항공 노동자들이 체크인 서비스를 중단했다. 여기에서도 노조 지도부에 반대하는 경향이 총회를 조직해서 파업을 밀어붙였다. 교사들은 3.8 여성의 날 바로 전날에 파업과 대규모 시위를 벌였다. 여러 부문의 교사들이 파업을 조직하기 위해 노조에서 내부투쟁을 벌였고,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는 이에 성공한 여러 사례가 있었다. 이런 파업에서 ‘빵과 장미’ 회원들은 기존 지도부에 반대하는 현장위원회에 참여했으며, 3.8 여성의 날 파업을 조직하기 위한 투쟁에서 다른 모든 성별의 동료들과 함께 단결했다. 펩시코 투쟁과 니우나메노스 운동 펩시코 공장은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도 가장 급진적인 축에 속하는 곳으로서, 여성의 권리를 지지하며 여러 차례 파업을 벌였다. ‘빵과 장미’ 회원들의 리더십에 힘입어, 현장위원회는 하청 제도에 반대하고, 출산휴가를 늘리며, 노동조건을 개선하기 위한 투쟁을 이끌었다. 지난달 말에 이 노동자들은 공장이 문을 닫는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600명이 실업자가 될 판이었다. 대부분 여성인 이 노동자들은 일자리를 지키기 위해 공장을 점거하기로 했는데, 이후 경찰이 투입되면서 폭력적으로 밀려났다. 600명의 펩시코 노동자들은 해고됐고, 공장은 폐쇄됐다. 노조는 이들의 투쟁을 지원하지 않고 있지만, 이 노동자들은 지금도 공장을 점거하고 있다. 이 노동자들 다수는 일자리를 지키기 위한 자신의 투쟁이 여성의 권리를 위한 투쟁의 한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니우나메노스(‘한 명도 더 잃을 순 없다’)가 펩시코 공장의 폐쇄에 반대하는 투쟁을 뜻하기도 한다고 말한다. 이 투쟁의 리더인 카티 발라게르는 연대집회에 모인 30,000명의 참가자들 앞에서 ‘한 명도 더 일자리를 잃을 순 없다’고 적힌 점퍼를 입어 보였다. Ni Una Menos Sin Trabajo, ‘한 명도 더 일자리를 잃을 순 없다’ 성차별과 성 소수자 혐오에 맞선 투쟁이 노동자계급을 전진시킨다 ‘빵과 장미’는 사회주의노동자당의 투사들과 이 당에 속하지 않은 사람들이 함께 만든 단체다. 하지만 사회주의노동자당 내에서 ‘빵과 장미’ 회원들만이 가부장제와 동성애 혐오, 성전환자 혐오에 맞서 싸우려는 것은 아니다. 이 투쟁에는 모든 당원이 달라붙는다. 억압에 맞선 이러한 투쟁이 작업장에서 벌어진다면 그것은 노동자계급의 전진을 뜻한다고 우리는 생각한다. 그런 사례가 마디그라프 공장에서 만들어졌다. 지난 몇 년간 그 공장을 노동자가 통제했다. 그 이전에는 사장이 오직 남성만 고용해서 일하게 했다. 여기서 한 노동자가 자신이 성전환 여성이라는 사실을 밝혔는데, 사장은 이 여성이 여자 화장실을 이용하지 못하게 막았다. 노동자들은 이 여성이 여자 화장실을 이용할 권리를 보장하기 위해, 그리고 사장에게 성전환 혐오에 맞서 들고 일어설 것이라는 점을 보여주기 위해 파업을 조직했다. 마디그라프에서 일하는 한 노동자가 이렇게 얘기했다. “이 경험을 하면서 노동자 한 사람 한 사람의 의식이 더 성장했고, 작업장에서 집단적인 의식도 성장했습니다. 덕분에 지금까지 공장에서 못 본 체하며 덮어놨던 사안에 대해서도 사장과 맞서 싸우기로 결단할 수 있게 됐습니다.” 이 일이 있고 몇 년 지난 뒤 이곳은 노동자가 통제하는 공장이 됐다. 성전환 노동자를 지지하며 파업을 벌이자는 주장을 제기한 사람들의 다수는 사회주의노동자당 투사들이었다. 그들은 ‘빵과 장미’ 회원들은 아니었지만, 성차별, 가부장제, 동성애 혐오와 성전환 혐오에 대해 규칙적으로 토론하고 정치적인 활동을 벌인다. ‘빵과 장미’와 좌파노동자전선(FIT) 여성 쟁점을 다루는 것은 현장 투쟁이나 페미니즘 운동으로 국한되지 않는다. 오히려 사회주의노동자당은 투쟁적인 활동의 모든 측면에서 여성 쟁점을 대중적인 규모로 다루고자 한다. 선거에서 여성 쟁점을 다루는 것도 여기에 포함된다. 사회주의노동자당은 좌파노동자전선을 이루는 세 개 정당* 중 하나다. [*좌파노동자전선은 2011년 사회주의노동자당(PTS), 사회주의좌파(IS), 노동자당(PO)이 함께 결성했고, 2019년에 노동자사회주의운동(MST)이 추가로 참여했다.] 좌파노동자전선이 선거에 나가는 것은, 사회주의로 가는 길을 선거로 열어갈 수 있다고 믿어서가 아니라, 수백만의 사람들에게 다가설 수 있는 연단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국회에 한 명의 의원이 있고, 주의회와 지방의회에 십수 명의 의원이 있다. 우리는 그 의석을 활용해서 자본가정당들을 규탄하고, 노동자와 청년, 여성의 투쟁을 지지하며 관심을 끌어모으려 한다. 중요한 점은, 선거에서 당선된 모든 우리 의원은 교사와 같은 수준의 수당*만 받고 나머지는 투쟁하는 노동자들에게 기부한다는 점이다. [*아르헨티나 교사들의 평균연봉은 한국 교사들의 3분의 1 수준이다.] 2019년 10월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개최된 좌파노동자전선 집회 대통령선거 때 전국에 중계된 TV토론회가 있었다. 대통령 후보 중에는 여성들도 있었지만, 사회주의노동자당 후보로 나온 니콜라스 델카뇨가 유일하게 임신 중지권 얘기를 꺼냈다. 그와 더불어 지방과 연방 의회에서 활동하는 모든 좌파노동자전선 의원들이 여성의 권리를 다룬다. 우리는 여성에게 가해지는 폭력에 대응하는 ‘전국비상계획’에도 공동주관으로 참여한다. 이것은 예산도 제대로 배정되지 않고 폭력 피해에 즉각 대응도 못하는 기존의 취약한 보호 방안을 대체하기 위한 것이다. 니콜라스 델카뇨는 가정폭력 피해자가 단기간 사용할 수 있는 주택을 확보하고, 부유세를 걷어 여성이 집을 구할 수 있도록 정부 보조금을 지원하는 법안을 제안했다. 좌파노동자전선은 현재 취업 중인 노동자가 가정폭력을 겪을 때 유급휴가를 받을 수 있는 법안을 제안했다. 여성이 전문가의 상담과 지원을 받을 수 있게 하는 법안도 제출했다. 이것은 여성에 대한 폭력에 대응하기 위해 좌파노동자전선이 내놓은 수많은 제안의 일부일 뿐이다. 사회주의노동자당은 더 나아가 당 강령의 모든 측면과 연관 지으며 사회주의 페미니즘 쟁점들을 토론한다. 예를 들어, 가장 최근의 중간선거에서 사회주의노동자당은 6시간 노동제와 생활이 가능한 수준의 최저임금을 위한 운동을 제안했다. 이것을 토론하는 방식 중 하나는 이 운동을 여성에게 부과되는 이중 노동, 그러니까 직장으로 일하러 가고 그다음에는 집으로 일하러 가는 것과 같은 여성 쟁점과 연계하는 것이다. 사회주의 페미니즘과 노동자계급 때때로 다른 나라의 역동적인 좌파 운동에 대해 들을 때, 우리는 한편으로 놀랍다는 생각도 하지만, 미국에서 그렇게 하기는 불가능하다는 생각도 하게 된다.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는 데에는, 노조 관료제가 너무나 단단하게 자리 잡았고, 노동자계급은 극심한 패배를 겪었으며, 국가권력은 아주 강력하고, 사회주의자들은 너무나 취약하다는 등의 이유가 있다. 이 모든 것이 사실이다. 미국에서 운동을 조직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라틴 아메리카나 다른 어떤 곳에서도 마법이 작동하는 것은 아니다. 아르헨티나에서 3.8 여성의 날에 파업이 벌어진 것은 좌파가 노동자계급 속에서 끈질기게 조직했기 때문이다. ‘빵과 장미’는 40명으로 시작했지만 지금은 여성대회에 4,000명이 참가할 정도로 성장했다. 40명이었던 이 단체는 이제 파업을 일으키기 위해, 여성의 권리를 위해, 노동자의 권리를 위해 전국 곳곳의 현장에서 투쟁한다. 미국에서도 그 교훈을 이어가야 한다. 자본주의 국가로부터, 자본가정당들로부터 독립적인 운동을 조직하는 것만이 우리가 전진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는 교훈을. 글쓴이 타티아나 코차렐리, 2017년 7월 24일 옮긴이 오연홍 *로 표시한 각주는 옮긴이가 붙인 것이다. 기사 원문 https://www.leftvoice.org/this-is-what-socialist-feminism-looks-lik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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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삶, 자유” - 여성살해에 맞선 이란 여성들의 시위, 남성들도 함께 싸운다“여성, 삶, 자유”, “독재자에게 죽음을”, “내 누이를 죽인 자는 내 손에 죽을 거다”, “우리의 인내심은 바닥났다”, “가난, 부패, 폭압”, “왕이든 최고지도자든, 압제자에게 죽음을!” 지금 이란을 뒤흔들고 있는 시위 현장에서 외쳐지는 구호들이다. 지난달 13일 이란의 수도 테헤란에서 20대 여성 마흐사 아미니가 히잡을 제대로 쓰지 않았다는 이유로 도덕경찰에게 폭행당하며 끌려갔고, 3일 만에 목숨을 잃었다. 경찰은 이 여성이 갑작스런 심장마비로 사망했다고 둘러댔다. 그러나 가족들은 마흐사 아미니의 건강에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고 반박했다. 목격자들은 도덕경찰이 곤봉으로 아미니의 머리를 구타했다고 말한다. 항의 시위가 격렬해지자 이란의 라이시 대통령은 뒤늦게 ‘유감’을 표명하면서도, 최루탄과 물대포를 쏘고 실탄까지 사용하면서 시위를 진압했다. SNS와 인터넷도 차단했다. 현재까지 2,000명 이상이 체포됐다. 130명을 넘어선 사망자 숫자는 계속 늘어나는 중이다 남성들도 함께 싸운다 이번 이란 시위에서 유달리 눈에 띄는 장면의 하나로, 여성만이 아니라 수많은 남성 노동자, 학생들이 함께 여성 살해를 규탄하는 투쟁에 나섰다는 점을 꼽을 수 있다. 남성들은 투쟁에 나선 여성들에게 박수와 환호를 보내고, 경찰에게 돌을 던지고, 날아드는 고무총탄을 몸으로 막았다. BBC와 인터뷰한 여성은 “하늘을 향해 히잡을 흔드는 동안 남성들이 우리를 둘러싸고 보호하는 모습에 감동 받았다. 연대를 확인해 기쁘다”고 말했다. 이전부터 히잡 강제 착용에 반대했던 한 이란 남성은 이런 글을 인스타그램에 올렸다. “히잡을 안 쓴 여성이 불명예스러운 게 아니다. 우리 어머니, 여동생, 그리고 이 땅의 여성들이 이런 억압과 제약 속에 지내도록 그냥 두고 보는 게 진짜 불명예스러운 것이다.” 이 남성의 글은 우리에게도 묵직한 울림을 준다. 일터에서, 학교에서, 길거리에서, 공중화장실에서, 집 안에서 숱한 여성이 스토킹 당하고 폭행당하고 살해당하는 한국의 상황에서도 다수의 남성 노동자, 민중이 기꺼이 여성의 편에서 함께 싸우지 못하는 우리의 현실이 쓰라리다. 이란 남성들도 여성들과 함께 싸우고 있다. 마흐사 아미니의 죽음에 항의하는 한 남성이 손을 치켜들고 있다. 사진출처: AFP 제국주의 개입과 이란 정권 둘 다에 반대해야 이란 정권은 처음에는 ‘쿠르드족’을(사망한 여성이 쿠르드계였다), 그다음에는 ‘미 제국주의의 음모’를 투쟁의 배후로 지목했다. 미국의 오랜 경제 제재는 이란 경제를 피폐하게 만들었고 그 피해는 누구보다도 노동자, 민중에게 무겁게 전가됐다. 자국 내에서 벌어지는 인종차별과 경찰에 의한 살해, 반동적인 낙태죄 부활, 노조 탄압, 가공할 만한 빈부격차에 대해서는 입을 다문 채 이란의 여성 인권을 들먹이는 미국 지배자들의 역겨운 제국주의적 개입에 대해서는 철퇴를 가해야 마땅하다. 그러나 1983년에 히잡을 착용하지 않은 여성은 채찍 74대를 맞게 하는 처벌을 도입하고, 이후 최대 2개월의 징역형이나 벌금형을 추가한 것, 2005년에 이른바 도덕경찰, 공식 명칭 지도순찰대를 창설해 여성의 복장과 화장 등에 한층 더 폭력적인 억압체제를 도입한 것, 올해 8월 공공장소에 설치된 CCTV를 이용해 히잡을 쓰지 않은 여성을 단속하기로 한 결정 등은 전적으로 이란 정권의 성차별적, 폭압적 실체를 숨김없이 드러내 준다. 미국을 중심으로 한 제국주의 열강의 ‘개입’이 이와 같은 억압체제를 바꿀 수 없다는 점은 미국이 20년 전쟁 끝에 야반도주하듯 철수한 아프가니스탄에서 명백히 확인됐다. 이번 투쟁의 전면에 나선 여성들과 함께 남성들이, 노동자와 학생들이 똘똘 뭉쳐 대규모 항쟁의 힘으로 밀어붙이는 만큼 이란의 현실은 바뀌기 시작할 것이다. 모순들이 쌓이고 서로 엮여 있을 때 하나의 사건이 순식간에 거대한 투쟁으로 번졌다는 것은 그만큼 통제할 수 없는 모순들이 켜켜이 쌓이고 서로 엮여 왔다는 걸 뜻한다. 반대로 이는 자본주의 위기와 모순이 만성적으로 누적된 상황에서는 작은 불씨 하나로도 폭발적인 항쟁이 일어날 수 있다는 점을 가르쳐준다. 2019년의 칠레항쟁도 그랬다. 시위대는 “30페소가 아니라 30년이다”라고 외쳤다. 지하철 요금 30페소(약 50원) 인상이 투쟁의 방아쇠를 당겼는데, 그 밑바닥에는 수십 년간 쌓인, 아니 칠레에서 자본주의가 굴러가기 시작한 이래 끝없이 누적된 계급 간 빈부격차와 부패에 대한 울분이 깔려 있었다. 고용불안과 저임금, 열악한 의료체계, 보잘것없는 연금, 가장 비싸면서도 형편없는 수준의 교육, 경찰과 고위관료와 기업들의 유착과 부패, 수도 민영화 등 모든 게 엉망진창인 칠레 사회를 빙산에 비유한 그림이 유행처럼 나돌았다. 2011년 이집트항쟁의 이면에도 30년 동안 장기집권한 무바라크 정권의 폭정과 모든 부를 독점한 자들에 대해 켜켜이 쌓인 분노가 있었다. 그 토대 위에서 이집트인들이 주식으로 먹는 빵(아이쉬)의 원료인 밀가루 가격이 폭등했다. 2010년 여름, 기후위기 탓에 이집트의 핵심 밀가루 수입원인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에 이상고온, 가뭄, 산불이 이어져 밀가루 생산량이 절반 가까이 줄었고, 가격이 폭등했다. 그 타격이 고스란히 이집트 노동자, 민중에게 전가됐다. 타흐리르 광장에 모인 시위대 속에서 “빵, 자유, 인권”이라는 구호가 터져 나왔다. 도처에 얽혀 있는 투쟁의 실마리를 붙잡고 그리고 이제 이란에선 여성 살해를 규탄하는 저항이 정권을 겨냥하는 전국적인 시위로 확산됐다. 이란에서도 느닷없이 이런 투쟁이 일어난 것은 아니다. 최근 몇 년만 보더라도, 2017년 물가폭등과 경제난에 시달리던 민중의 시위, 2018년에 경제난과 정부의 부패를 규탄하며 재개된 총파업과 시위, 같은 해 6월 깨끗한 식수가 제대로 공급되지 않는 책임을 물으며 일어난 시위, 2019년 11월부터 2020년까지 두 배로 폭등한 기름값 인상에 항의해 전국적으로 벌어진 시위, 2021년 7월 다시 물 부족에 항의하는 시위, 그리고 2022년 5월엔 우크라이나 전쟁의 영향으로 밀가루 가격이 폭등하고 일부 식료품 가격이 300%까지 치솟는 상황에서 파업과 시위가 터져 나왔다. 시위가 발발할 때마다 이란 정권은 최루탄과 실탄 사격으로 응수했다. 어느 시위에서나 사망자가 생겼다. 2019년 시위에선 1,500여 명이 사망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이 정권이 결코 노동자, 민중의 생명을 지켜줄 생각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 데 충분한 시간이었을 것이다. 히잡을 쓰지 않았다는 이유로 삶을 빼앗긴 한 여성의 죽음을 보며, 이제는 여성뿐만 아니라 수많은 남성도 함께 분노하고 싸움을 시작하게 만든 것은 다름 아니라 이란 정권이다. 우리는 미국을 비롯한 제국주의 열강의 개입에 반대하고 규탄하면서도, 이란 정권이 아니라 이란 노동자 민중의 편에, 투쟁하는 여성의 편에 서야 한다. 더 나아가 여성 살해를 비롯해 다양한 유형의 성차별적 억압, 만성불황에 따른 생계난, 실질임금 하락과 불안정한 일자리, 인종차별, 기후위기, 식량난, 제국주의 패권 갈등과 전쟁 등 온갖 모순이 뒤얽히며 이 시대를 절박한 위기의 시대로 몰아가고 있는 현실을 똑똑히 직시해야 한다. 자본주의 위기의 시대를 걷어내고 새로운 시대를 열어젖히자. “두려워하라, 두려워하라, 우리는 함께 한다” 10월 5일, 한국에서도 이란 여성들의 투쟁을 지지하는 기자회견이 이란대사관 앞에서 열렸다. 기자회견에는 <사회주의를 향한 전진>도 공동주최단위로 참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