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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자의 힘은 강하다! 철도파업, 함께 싸워 승리하자!사진: 철도노조 9월 14일부터 4일간, 철도노조가 파업에 돌입한다. ‘교육개악·연금개악·노동개악’을 3대 과제로 내세운 윤석열 정부는 대체인력 및 대체수송차량 투입, 불법 엄단 등을 내세우며 공격을 예고했다. 이미 연금개악이 수면 위로 올라오는 상황에서, 이번 공방전은 윤석열 정부의 3대 개악 모두에 맞선 전투의 향방을 가늠할 중요한 무대다. 철도노조가 내건 3대 핵심 요구는 모두가 정당하며, 전체 노동자 민중의 공동 요구와 결부돼있다. KTX-SRT 통합, 민영화 분쇄 KTX-SRT 분리 운영은 경쟁체제 도입을 앞세운 자본가 정부의 철도 쪼개기에서 비롯됐다. 수서역에서 출발하는 SRT와 서울역에서 출발하는 KTX로 분리해 운영하는 이원체제는 수많은 문제점을 잉태해왔다. 분리운영에 따른 낭비는 철도 요금 인상의 빌미가 되었고, 철도 산업 노동자들의 처지를 악화하는 배경 중 하나였다. 가령 운전 분야를 제외한 여타 분야를 전혀 갖추지 못한 채, 오직 경쟁체제 도입을 명분으로 만들어진 ㈜SR은 외주용역화를 밀어붙였다. 고객센터 업무를 민간위탁했고, 신규 발주한 14편성의 차량정비업무를 로템에 위탁하고 있다. 그럼에도 적자 운영을 면치 못하는 상황이다. 이러한 외주용역화는 정부의 완강한 부인에도 불구하고, 이미 SR 설립이 간접적 민영화임을 극명히 보여준다. 고객센터 업무와 정비 업무가 민간기업 운영으로 넘어간 것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철도산업의 민영화를 추진하는 경로가 ㈜SR의 실체다. 게다가 지속되는 적자 확대를 빌미로, 자본가 정부는 국민의 부담 경감을 내세우며 SR의 전면적인 민영화로 나아갈 것이다. 이는 철도공사도 마찬가지다. 작년 6월 윤석열 정부 첫 공공기관 경영평가에서 철도공사는 공기업 중 유일하게 최하 등급인 'E'(아주 미흡)를 받았다. 잇따른 철도 사고와 함께, 부채가 2017년 14조 8,808억원에서 지난해 18조 6,608억원으로 늘었다는 것이 이유였다. 하지만 이러한 부채 확대는 역설적으로 철도공사가 공공성을 담당한 결과이다. 철도공사는 승객들이 많지 않지만 반드시 운영해야 하는 노선들, 가령 무궁화호, 새마을 등을 운행한다. 이 분야들은 모두 적자여서, KTX 수입으로 철도공사가 적자를 메우는 구조다. 반면 SR은 오직 고속철도만 운영해 철도 공공성에 하등 기여하지 않는다. 이런 불합리한 구조를 활용해, 자본가 정부는 철도공사 적자와 국민부담 경감을 내세우며 경쟁체제를 강화하고 민영화의 명분을 확대하고자 한다. 결국 SR과 철도공사로 이원화한 경쟁체제는 철도공사 적자 누적을 명분으로 철도공공성을 훼손하면서 민영화를 밀어붙이기 위한 수순인 셈이다. 이번 파업에서 철도노조가 내건 ‘KTX-SRT 통합’ 요구는 민영화 계획에 맞서 철도산업의 공공성을 지켜내기 위한 정당한 요구다. 이는 철도요금 인하와 적자 완화를 위한 조치이기도 하다. KTX-SRT 이원화에 따른 낭비만 없어도, 적자 폭은 크게 준다. 나아가 철도공공성 확대를 위해, 정부가 내세우는 ‘적자’ 논리 자체에 질문을 던질 필요가 있다. 공공부문은 사회구성원 전체의 이해와 요구를 대변해 운영해야 하고, 따라서 자본주의 회계기준에서 적자는 당연하기 때문이다. 진정한 논점은 이 비용을 어떻게 조달할 것인가인데, 그 핵심은 어느 ‘계급’이 그 비용을 부담할 것인가다. 자본가 정부는 그 비용을 국민, 즉 노동자 민중과 철도 노동자들에게 청구하려 하는 반면, 철도노동자들과 노동자 민중은 그 비용을 자본가들과 가진자들에게 법인세 인상과 기업의 철도사용료 인상 등으로 청구하고자 한다는 것이 진정한 논점이다. 철도노동자들과 함께, 우리는 후자를 단호하게 지지한다. 사진: 철도노조 경쟁체제·직무급제 분쇄 윤석열 정부는 기만적인 경쟁체제를 확대할 방법만 찾는다. 소위 ‘국민 부담 경감’을 내세운 SR-철도공사 경쟁체제는 적자 타령과 함께 끝없이 확대되고 있다. 국토교통부는 9월 1일부터 전라선·동해선·경전선 SRT 3편성을 확대하고, 주중 경부선 SRT 운행 열차를 축소했다. 하루 2회 운영에 그쳐 실효성이 미미한 전라·동해·경전선에 SRT를 투입하고, 승객이 많은 수서~부산 운행을 줄여 불편을 가중하는 조치였다. 철도노조는 승객들의 불편을 감안해 수서~부산 KTX 투입을 제안했지만, 경쟁체제 확대에 혈안인 정부는 거부로 일관하고 있다. 하지만 KTX와 SRT는 동일한 차종이며, 지금도 SRT가 고장나면 KTX를 수서까지 운행한다. 수서에서 KTX를 SRT와 연결해 중련열차로 운행한다면1), 아주 간단하게 좌석공급을 획기적으로 늘릴 수 있다. 그럼에도 정부가 철도노조의 제안을 단칼에 거부하는 상황은 KTX-SRT 경쟁체제를 확대하겠다는 강경한 의지 말고는 설명할 수 없다. 경쟁체제 확대로 철도산업 노동자들을 밑바닥으로 내몰고, 장기적으로 민영화 확대라는 자본가 정부의 목적을 관철시키겠다는 것이다. 1) 중련운행. 두 개 이상의 열차를 하나로 연결하는 방식. 하지만 이것은 정부가 경쟁체제 도입 명분으로 제시한, ‘국민 편익 향상’과도 정면으로 위배된다. 최명호 철도노조 위원장의 말처럼, “경쟁체제를 도입했던 이유가 국민 편익을 향상시킬 수 있다고 해서 도입을 했는데, 이제는 거꾸로 경쟁 체제 유지가 목적으로 둔갑해 국민 불편은 어쩔 수 없다”고 한다. 결국 국민 불편 해소는 빈껍데기고, 본질은 경쟁체제 확대를 통한 노동자 공격이다. 실제로 SR 출범 이후 철도공사 적자가 (당연히) 확대되자, 정부는 적자를 이유로 인건비를 축소해왔다. 정부는 인건비 감축을 명분으로 연간 1,400여 명 정도의 추가 필요인력을 채용하지 않았는데, 이는 사고 증가와 노동조건 악화로 이어지고 있다. 임금인상 최소화는 두말할 것도 없다. 인력 확충이 제대로 되지 않은 상황에서, 철도노조가 쟁취한 4조 2교대마저 제한적·파행적으로 운영되고 있다. 온전한 4조 2교대 도입의 필수 전제인 인력충원이 이뤄지지 않아 인력난이 심해진 상황에서, 숙련도가 떨어지는 노동자들이 투입되면서 잦은 사고가 발생해왔다. 철도사고는 2021년 48건에서, 2022년 66건으로 늘었다. 열차 궤도 이탈만 세 차례나 있었다. 최근 사고로 사망한 철도공사 직원만 4명이다. 특히 작년 오봉역 사망사고의 경우, 빈번한 중대사고의 원인이 어디에 있는지 극명하게 드러냈다. 사망사고를 일으킨 화물열차 기관사는 수습 직원이었고, 3인 1조로 해야 하는 작업을 2인 1조로 하다 사고가 발생했다. 인력부족이 초래한 전형적인 인재였다. 그런데 이 인재에 대해 정부의 대처는 적반하장이었다. 범인은 처벌되기는커녕 추가 살인을 준비하고 있다. 국토교통부는 오봉역 사고를 핑계로 철도공사에 3조 2교대로의 근무형태 환원을 명령했다. 이런 철면피한 범죄행각은 직무성과급제 도입으로 철도노조 내부로까지 경쟁체제를 확대하려는 시도로 이어지고 있다. 여기서도 핑곗거리는 같다. 철도공사는 경영손실과 정부의 강도 높은 혁신 요구에 따라 자체 개혁방안을 마련했다고 발표했는데, 직무·성과 중심 직무급제 고도화를 핵심 추진방안으로 제시했다. 동일 직급이라도 직무난이도와 업무강도 등에 따라 급여 수준을 차등화하겠다는 것이다. 이미 2급 이상 직원에게 적용하고 있는 성과연봉제를, 3급 이하의 전 직원으로 확산하겠다는 것이다. KTX-SRT 경쟁체제 도입과 함께, 내부적으로는 직무성과급제 확대를 통해 경쟁체제를 전면화하고자 하는 것이다. 노동자를 원자화시켜 노조를 약화하고, 노동자의 피와 땀을 갈아 넣어 자본가들에게 헐값의 철도서비스를 선물하고, 민영화까지 밀어붙이겠다는 선언이다. 나아가서 철도 직무급제 확대는 윤석열 정부의 직무급제 도입과 노동개악의 물꼬를 여는 것이다. 이에 맞서 철도노조가 제기하는 “4조 2교대 완전 실현”, “인력충원”, “직무급제 철폐” 요구는 철도노조 사수와 함께, 윤석열 정부의 노동개악에 맞서 전체 노동자운동을 대변하는 요구다. 사진: 철도노조 정당한 투쟁, 파업의 파괴력을 끌어올리자! 철도노조는 정당한 투쟁을 멈출 생각이 없다. 그러나 자본가 정부도 노동개악과 민영화를 중단할 생각이 없고, 오히려 확대할 궁리만 하고 있다. 철도노조의 요구는 전체 노동자 민중의 요구를 대변한다. 반면 자본가 정부의 요구는 자본가들과 가진자들의 요구를 대변한다. 반대 방향에서 두 계급의 열차가 달려오고 있다. 오직 전투의 결과만이 앞으로 어떤 길이 펼쳐질 것인지를 결정할 것이다. 철도노동자들을 중심으로 전체 노동자계급의 투쟁력을 극대화해 승리의 길을 열어야 한다. 우선 투쟁 전면에 선 철도노동자들의 투쟁력을 극대화해야 한다. 여기서 가장 큰 걸림돌은 자본가 정부의 공격이다. 철도노조의 파업투쟁은 막대한 파괴력을 발휘해왔다. 이 파괴력을 경감시키기 위해 노무현 정부가 도입한 필수유지업무제도다. 66%가량의 운송율 유지를 전제로, 필수인력을 선정해 파업권을 박탈하고, 이것도 모자라 대체인력 투입까지 합법화하는 필수유지업무제도는 철도 파업의 허리를 절단하는 대표적인 노동악법이다. 이 필수유지업무제도는 공공부문 핵심사업장 노조들의 파업 위력을 약화시키는 결정적 수단이 되어왔고, 그 직격탄을 맞아 철도노조 파업이 발휘하는 힘은 상당히 약화되어왔다. 단 2-3일 파업만으로 철도산업 전반을 마비시킬 수 있었던 철도파업은, 필수유지업무제도 도입 이후 장기파업으로 투쟁 효과를 누적시키지 않고서는 제대로 위력을 발휘할 수 없는 상황으로 바뀌었다. 당장 필수유지업무제도를 정면으로 거부하고 모든 조합원이 함께 전면파업에 돌입할 수 없다면 말이다. 그 점에서 한시적 파업만으로 철도노동자들이 가진 힘을 충분히 드러낼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 물론 파업의 단기 효과를 사실상 좌우하는 운전 분야의 낮은 파업찬성률도 감안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운전 분야의 낮은 파업찬성률은 전 노조집행부 양보교섭의 결과다. 전 집행부는 대법원 판결로 인정받은 통상임금마저 포기했고, 이는 연봉총액 기준 3% 이상의 임금에 대한 영구적 삭감을 받아들이는 굴복이었다. 이것은 철도 파업의 중심축으로 기능해온 운전 분야의 투쟁력과 노조에 대한 신뢰를 무너뜨린 결정적 요인이었다. 역설적으로 전 집행부와 달리 투쟁의 길을 선택한 현 집행부가 단호한 결의를 증명한다면, 운전 분야 노동자들의 파업투쟁 열의는 빠르게 회복될 가능성이 있다는 말이다. 반면 차량을 비롯한 노동자들의 파업 찬성률은 상대적으로 높았다. 운전 분야와 비교할 때, 이 노동자들의 파업 파괴력은 긴 파업을 통해 온전히 드러날 수 있다. 따라서 운전 분야로 파업열기를 확대하고, 차량·운수·전기 노동자들의 파업 파괴력을 누적시키기 위해 보다 장기적인 투쟁을 진지하게 고민할 필요가 있다. 게다가 파업 과정에서 파업노동자들의 분노와 투쟁결의는 얼마든지 빠르게 높아질 수 있다. 물론 정부와의 정면대결을 뜻하는 장기투쟁은 조합원 자신의 결의가 뒷받침되어야 가능할 것이다. 따라서 파업을 확대하는 전망을 토론하고, 조합원들이 주체적으로 결정하도록 하는 것이 파업과정에서 필요해 보인다. 그에 더해, 필수유지업무로 파업에 참여하지 못하는 필수유지인력의 투쟁력을 결합시키는 것이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정부는 파업 파괴력을 약화하고자 대체인력 투입을 공공연하게 천명하고 있다. 정부는 필수유지인력 9,300명에 더해, 대체 기관사·군인력 포함 대략 6,000여 명의 대체인력 투입을 예고했다. 필수유지업무에 묶인 60% 이상의 조합원들이 태업과 대체인력 투입 저지 현장투쟁을 벌이며 철도노조으ㅇ 전체가 하나로 단결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것은 필수유지업무제도 도입으로 동강 난 파업의 허리를 이어내는 고리가 될 것이다. 파업을 준비하며 진행한 안전운행투쟁에서, 철도노동자들은 이 가능성을 이미 증명했다. 서울차량지부·호남고속차량지부·부산고속차량지부·구로승무지부 등에서 벌어진 현장투쟁에서, 철도노동자들은 철도법을 능동적으로 활용해 다양한 태업을 성공적으로 진행했다. 가령 서울차량지부에서는 안전운행투쟁, 즉 태업을 공격하기 위해 관리자와 대체인력은 물론 철도경찰까지 투입되었지만, 조합원들은 끝까지 대체인력 투입을 저지하며 투쟁을 전개했다. 파업투쟁 과정에서 이런 투쟁의지를 모아 다양한 현장투쟁을 전개할 수 있다면, 파업에 직접 참여하는 노동자들의 전면적 투쟁과 직접 참여하지 못하는 노동자들의 태업·대체인력 저지투쟁을 하나로 결합할 수 있다. 이는 철도노동자들의 단결로 파업의 힘을 배가할 수단이 될 것이다. 사진: 철도노조 노동개악에 맞서 전선을 확장하자! 철도산업이 사회 전반에 영향을 미친다는 점을 고려할 때, 이번 철도파업은 윤석열 정부의 노동개악에 맞서는 결정적 무대다. 또한, 철도파업의 성패는 10월, 11월 공공운수노조 공동파업 기세에 커다란 영향을 미칠 것이다. 철도파업은 전체 노동자들의 연대로 전진해야 한다. 돌아보자. 작년 화물연대 파업투쟁 당시, 연관산업인 철도노조의 연대투쟁은 미약했다. 이번에는 달라야 하지 않겠는가. 화물·교통부문 노동자들의 연대와 단결이 중요하다. 철도와 함께 대도시 승객수송의 핵심축인 도시철도, 지하철, 버스노동자들도 철도파업에 대한 지지와 연대를 확대해야 한다. 철도파업에 연대하는 화물·교통부문 노동자들의 준법투쟁 역시 적극 고려해야 한다. 나아가 철도노조 파업에 대한 정부의 공격이 전면화하면, 공공부문 연대총파업을 비롯해 민주노총 총파업도 열어두어야 한다. 이런 계급적 연대투쟁을 능동적으로 확산하기 위해, 철도노동자들이 연관산업 노동자들과 투쟁사업장 노동자들의 연대를 독려하는 사업장 순회도 고려할 수 있을 것이다. 나아가 민영화 중단, 건강보험 보장성 확대, 연금개악 반대 등의 요구로 파업을 준비하는 공공부문 노동자들과의 적극적인 연대행동도 개척할 필요가 있다. 이런 연대행동은 이번 철도파업을 넘어, 공공운수노동자 공동파업과 노동개악에 맞선 민주노총 투쟁전선을 확장하는 중요한 발걸음이 될 것이다. 철도노동자들의 파업투쟁은 모든 노동자의 투쟁이다. 굳센 노동자 연대로 윤석열 정부에 맞선 노동자 투쟁전선을 열자. 노동자의 힘은 거대하다. 이 힘의 전면적 동원을 겁내지 말자! 사진: 철도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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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전한 노조법 2·3조 개정 연속기고] 모든 노동자의 연대투쟁으로 손배가압류 철폐하자원청을 상대로 싸울 권리가 없는 하청노동자들에게 손배가압류 철폐는 더욱 절박하다 간접고용 하청노동자, 특수고용·플랫폼노동자에게 손배가압류 철폐가 더욱 절박한 이유 손배가압류의 목적은 분명하다. 바로 투쟁하는 노동자와 노동조합을 지옥 같은 지경으로 내몰아, 손과 발을 묶는 것이다. 쟁의행위는 자본의 이윤 창출을 멈추어 노동자들의 요구를 쟁취하는 강력한 수단이다. 국제노동기구(ILO) 이사회 보고서마저도 지적하듯 “파업은 본질적으로 업무에 지장을 주고 손해를 발생시키는 행위”다. 결국 손배가압류는 쟁의행위를 봉쇄해, 노동조합을 무력화시키는 장치일 뿐이다. 이 장치는 원청노동자와 하청노동자, 특수고용직 노동자를 막론하고 모든 투쟁하는 노동자를 위협한다. 2014년 쌍용차 파업 참여 노동자들에게 내려진 47억원의 손해배상, 2019년 현대중공업 물적분할에 맞선 파업에 대한 92억원 손해배상 등 정규직 노조도 비껴가지 못했다. 물론 손배가압류의 본질이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날 때는 바로 하청노동자, 특수고용노동자, 플랫폼노동자를 겨눌 때이다. 2022년 여름 뜨겁게 전개된 대우조선 하청노동자 파업이 마무리된 이후, 대우조선 원청은 하청노동자 5명에게 470억의 손해배상을 청구했다. 사용자가 아닌 대우조선 원청을 향한 파업으로 손해를 끼쳤으니 배상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현대자동차·기아자동차 비정규직 노조가 전개한 파업들에도 동일하게 적용되었던 행태다. 바지사장 뒤에 숨은 진짜 사장에 맞서 투쟁할 권리, 원청 사용자성이 인정되지 않은 결과 하청노동자들의 투쟁은 애초부터 손배가압류 융단폭격에 무방비로 노출되어 있다. 역으로, 손배가압류는 원청사용자성을 인정받고자 싸우는 하청노동자의 손발을 묶는 강력한 족쇄로 작동한다. ‘하청노조 탈퇴나 불법파견 소송 철회’를 조건으로 손배소 취하를 제안하는 원하청 자본의 작태는 이를 여실히 드러낸다. 플랫폼노동자들의 원청사용자성 인정 투쟁 역시 하청노동자 투쟁과 다르지 않다. 플랫폼 자본은 스스로를 ‘중개자’일 뿐이라고 한다. 플랫폼노동자들은 독립적인 사업자이고 플랫폼 기업에 고용된 것이 아닌바, 애초 플랫폼노동자에 대한 사용자 책임 같은 것은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플랫폼노동자에게 일을 배정하고, 노동과정을 감시하고, 수락률과 평점 등으로 통제하는 주체는 플랫폼 자본이다. 따라서 플랫폼 자본을 진짜 사장으로 인정하게 만드는 투쟁과 손배가압류의 사슬을 끊어내는 투쟁은 플랫폼노동자들에게도 뗄 수 없는 하나다. 특수고용노동자도 마찬가지다. 가령 화물연대의 경우, 노동자성 자체를 인정받지 못하는 상황에서 모든 쟁위행위가 불법이 된다. 화물연대의 성명서처럼, “화물노동자의 투쟁이 지나간 자리에는 언제나 각종 손배 청구서가 휘날린다.” 사진: 연합뉴스 노동3권은 거래대상이 아니다 - 손배가압류 철폐투쟁, 모든 노동자가 나서자 손배가압류로 자본이 얻는 이익이 막대한 만큼, 자본과 국가권력은 손배가압류를 유지하고 집행하고자 필사의 노력을 다한다. 민주당 역시 마찬가지다. 민주당은 문재인 정부 시절이든 지금이든 180석에 달하는 국회 의석을 가지고도 손배가압류 법안을 유지해 왔다. 이제는 심지어 각 조합원의 ‘귀책사유와 기여도에 따라 손해배상 부담액을 개별 산정’하는 개악안을 들이밀며 통과시키려 한다. 민주당이 노조법 2조 개정안을 일부 수용했으니, 손배가압류에 대해서는 노동자가 양보하라는 투다. 그러나 손해배상 개별책임은 투쟁에 앞장서는 노동자를 사지로 내모는 행위이며, 비정규불안정 노동자의 노동3권은 거래대상이 아니다. 단위노동조합의 힘만으로 손배가압류 철폐투쟁을 전면화할 수 없다. 원청사용자성을 부정함으로써 하청·특수고용·플랫폼노동자의 노동3권을 봉쇄하려는, 나아가 모든 노동자의 노동3권을 제약하려는 자본 모두를 무릎 꿇려야 하기 때문이다. 자본가 정당인 민주당에 의존할 수도 없고, 의존해서도 안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손배가압류 철폐는 노동3권을 실질화하는 계급투쟁이며, 간접고용 하청노동자, 특수고용·플랫폼노동자 모두의 단결과 공동투쟁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정규직 노동자들 또한 노동조합의 핵심권리인 쟁의권을 사수하기 위해 손배가압류 철폐투쟁에 나서야 한다. ‘원청사용자성 쟁취, 특수고용노동자 노동자성 인정, 손배가압류 철폐’를 내건 민주노총 총파업에 원하청노동자 모두가 결집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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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전한 노조법 2·3조개정 연속기고] 자회사 노동자, 직접고용 정규직 전환투쟁으로 나아가자자회사는 덩치 큰 용역회사에 불과하다. 사진: 매일노동뉴스 ‘자회사 정규직’이라는 허구 자회사는 계열사 중 종속기업에 해당한다. 자기 지분과 우호 지분을 합해 51%를 넘기면 대주주로 확정돼 경영권을 갖는다. 형식적으로는 모회사로부터 독립적인 회사이지만, 사실은 모회사에 완전히 종속된 기업이다. 자회사 설립에는 여러 목적이 있지만, 최근 가장 흔한 유형은 기존의 용역·하청업체를 자회사로 만들어 비정규직 정규직화 투쟁, 특히 ‘불법파견 정규직화 투쟁’을 무력화하기 위함이다. ‘불법파견’이 불거지면, 현행 법률 아래에서는 원청이 정규직화 의무를 피하기 어렵다. 자본이 이런 법률적 제약을 무력화하며 합법적으로 비정규직을 양산할 수 있는 제도적 꼼수가 바로 자회사 설립이다. 기존의 임금과 노동조건을 크게 변화시키지 않으면서도, ‘간접고용 비정규직’이 아니라 ‘자회사 정규직’이라는 합법적 외양을 취하는 것이다. 그 뒤 자회사 전환에 응하지 않으면 해고하겠다고 협박해, 불법파견 철폐투쟁의 싹을 자르는 것이다. 이런 꼼수의 길을 연 것은 역설적으로 ‘공공부문 비정규직 정규직화’를 공약으로 내건 문재인 정부였다. 소위 정규직 전환을 완료한 공공기관 중 70% 이상이 자회사로 전환한 유형이었고, 전환대상자가 1천 명 이상인 경우는 그보다 훨씬 높았다. 가령 덩치 큰 용역업체에 불과한 자회사를 정규직 전환으로 인정하면서, 문재인 정부는 도로공사의 톨게이트 노동자 1,500명 집단해고를 조장했다. 자회사 전환 카드를 동원해 가스공사나 건강보험 자본의 정규직 전환 거부와 노조파괴를 부추기기도 했다. 자본가 정부가 앞장서자, 민간 대자본도 적극 가담했다. SK브로드밴드 사례가 대표적이다. SK브로드밴드 인터넷 설치·수리·상담 업무를 하던 하청노동자들은 2014년 SK브로드밴드비정규직지부를 결성했다. 노조 출범과 함께,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진짜 사장 SK 책임으로 직접고용·정규직 전환!’을 줄기차게 외치며 싸워왔다. 문재인 정부가 들어선 2017년 7월, SK브로드밴드는 직고용으로 비정규직 문제를 해결하겠다며 지분 100% 자회사 ‘홈앤서비스’를 만들었고 이후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소속을 자회사로 급격하게 전환했다. 민간기업 최초의 자회사 전환이었다. 수년간 원청의 사용자 책임과 직접고용을 요구한 간접고용 하청노동자들에게, 자회사 행이 강요됐다. 이후 자회사 꼼수는 전면화되었다. 현대모비스가 ‘생산 전문 통합계열사’란 명목으로 자회사 설립을 밀어붙였다. 가증스럽게도 현대모비스는 자회사 설립 목적이 불법파견 리스크 해소에 있음을 숨기지도 않았다. 현대제철 자회사 추진은 그 목적이 무엇인지 더욱 선명하게 드러냈다. 2021년 7월 6일, 현대제철 자본은 ‘현대ITC’ 설립을 발표하고 채용공고를 냈다. 채용조건은 불법파견 소송 취하와 부제소동의서 제출이었다. 동시에 현대제철은 14개 업체 ‘도급계약 종료’를 통보했다. 자회사 채용공고에 응하지 않는 노동자들의 일자리를 날려버리겠다는 협박이었다. 결국 자회사 설립 이유는 직접고용 정규직화 투쟁에 대한 탄압임이 드러났다. 이에 맞서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50일 넘게 파업투쟁을 벌였지만, 현대제철 자본은 자회사를 밀어붙였다. 현대제철 자회사 반대! 비정규직 철폐! 직접고용 쟁취! 원청 대체근로, 국가가 장려하는 하청노동자 파업 파괴 현대제철비정규직지회의 투쟁은 자회사 전환의 본질과 함께, 자회사 전환에 맞서는 노동자 투쟁을 무력화하는 악법도 드러냈다. 그중 핵심이 바로 하청노동자 파업에 대한 원청 대체근로 허용이다. 현행법상 파업대체인력 투입은 분명 불법이다. 그러나 노동부 행정해석은 ‘원청은 하청노동자의 사용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하청노조 파업에 원청의 대체인력 투입을 허용한다. 이것은 하청노조 파업을 무력화하는 핵심 장치가 되었고, 결국 현대제철 비정규직지회의 투쟁은 승리하지 못한 채 종료해야만 했다. 이는 톨게이트 노동자 투쟁이나 SK브로드밴드 비정규직지부 투쟁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났던 일이다. 현재 수많은 하청노조와 자회사 노조가 대규모 사업장에서 핵심 공정들을 담당하고 있고, 파업의 위력은 강력하다. 이를 무력화해 ‘직접고용 정규직화 투쟁’을 차단하는 장치가 바로 원청 대체근로 허용이다. 원청 사용자성을 인정하지 않는 현행 노조법이 원청 대체근로를 존속시키고 있다. 그러므로 노조법 2·3조 개정을 통한 원청 사용자성 인정은 자회사 꼼수를 박살 내고 ‘직접고용 정규직 전환’을 밀어붙이는 핵심 수단이다. 원청자본에 맞선 투쟁 없이, 그 어떤 개선도 없다 이미 자회사로 전환된 사업장들에서 자회사 제도는 덩치만 큰 하청회사임이 여실히 증명되고 있다. 원청 모회사와 자회사 사이의 계약조건은 자회사가 자회사 노동자들에게 지불할 수 있는 임금과 노동조건 모두를 규정한다. 자회사 경영권을 틀어쥔 원청에게 자회사와의 값싼 계약은 식은 죽 먹기보다 쉽다. 이렇게, 원청은 자회사 노동자들을 기존 간접고용 하청노동자와 하등 다르지 않게 합법적으로 초과 착취한다. 자회사 전환을 수용케 하는 미끼로 잠시 작은 당근을 준 뒤, 끊이지 않는 착취 강화로 자회사 노동자들의 삶과 노동조건은 계속 추락하고 있다. 자회사는 법적 고용관계와 실질적인 사용관계를 분리해 간접고용을 은폐하는 장치일 뿐이다. 자회사로 전환된 사업장에서도 원청자본과의 투쟁 없이는 아무런 개선도 일어날 수 없는 이유다. ‘원청 사용자성 인정’과 ‘원청 대체근로 금지’는 덩치 큰 하청회사에 지나지 않는 자회사 체제를 박살 내고 직접고용 정규직 전환을 쟁취하기 위한 핵심 무기다. 노조법 2·3조 개정투쟁이 자회사 노동자들에게 중요한 이유다. 자회사 전환을 거부하며 217일 파업을 전개한 톨게이트 노동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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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저임금30%인상 연속기고] 물가-임금연동제로 자본가들에게 물가폭등의 책임을 묻고, 모든 노동자의 생존권을 지키자!물가-임금연동제 요구는 한국 노동자들에게 상당히 낯설다. 하지만 요즘처럼 물가가 급격하게 치솟는 상황에서, 물가-임금연동제는 노동자의 삶을 지키기 위해 반드시 치켜들어야 하는 절실한 요구다. 통계청에 따르면 2023년 1월 소비자물가지수는 110.11(2020년=100)로, 전년 동월 대비 5.2% 상승했다. 물가의 기조적 흐름을 보여주는 근원물가는 5.0% 상승했다. 2009년 2월(5.2%) 이후 14년 만의 최고 수준이었다. 그 뒤 유가가 진정되면서 약간 완화되기는 했지만, 여전히 4월 소비자 물가상승률은 3.7%, 근원물가상승률은 4.6%에 달한다. 정부가 공공요금 추가 인상을 단행할 경우 물가상승 폭은 더 커질 수 있다. 표면적인 물가인상률에 더해, 최근의 물가 상승을 공공요금 인상이 이끌었다는 점도 주목해야 한다. 가난한 노동계급에게는 전체 생계비 중에서 전기·가스·수도 등 공공 필수소비재가 차지하는 비중이 훨씬 더 높다는 점에서, 물가인상이 노동계급에게 미치는 영향력은 훨씬 더 크다. 물가 폭등, 노동자가 책임질 이유가 없다! 이처럼 물가가 폭등하는 상황에서 노동자의 삶은 더욱 빈곤해진다. 물가 인상에 따라 명목임금의 상당 부분이 사라지면서, 실질임금이 크게 떨어지기 때문이다. 가령 명목임금이 3% 오르더라도, 물가인상률이 4% 이상이면 실질임금은 1% 이상 하락한다. 이것은 부당하다. 물가 폭등은 노동자들이 일으킨 것이 아니다. 자본가들을 지원하기 위한 천문학적 화폐공급,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과 미중 갈등 등이 초래한 공급망 위기, 소비자에게 부담을 전가하는 독점자본가들의 상품가격 인상 조치 때문에 인플레이션이 발생했다. 이처럼 물가 폭등은 바로 자본가계급과 자본가 정부, 즉 자본주의 체제가 낳은 것이다. 그 책임은 자본가계급이 져야 한다. 하지만 자본가들은 그 책임을 가난한 노동자들에게 전가하면서, 오히려 막대한 이익을 챙기고 있다. 지난해 2022년 상반기 유가가 폭등하자, 국내 4대 정유사(SK이노베이션, GS칼텍스, 현대오일뱅크, 에쓰오일)의 영업이익은 12조원을 넘어 사상 최대였다. 이제 그들에게 책임을 물어, 노동자 민중의 생존권을 지켜내야 한다. 물가-임금연동제 요구는 바로 그런 필요 속에서 세계 노동자운동이 치켜든 요구였다. 물가-임금연동제를 둘러싼 투쟁 물가-임금연동제의 원리는 간단하다. 물가인상률만큼 자동으로 임금이 인상되게 제도화하는 것이다. 이것은 노동자들이 임금투쟁으로 획득한 성과를 물가가 인상돼도 지켜낼 수 있게 한다. 가령 협약임금인상률이 5%인데 물가가 5% 오른다면, 물가-임금연동제를 적용해 5%를 추가로 올리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임금인상 투쟁의 성과를 온전히 지켜내면서, 임금을 실질적으로 인상할 수 있게 된다. 이런 이유로 세계의 노동자들은 물가인상 시기에 물가-임금연동제 요구를 내걸고 투쟁했고, 노동자 생존권을 지켜냈다. 1952년에 도입해 놓은 물가-임금연동제 덕분에, 1970년대부터 시작된 높은 인플레이션에도 불구하고 1968-1983년 사이 최저임금의 구매력은 130% 증가했고, 프랑스 노동자 평균임금도 50% 높아졌다. 신자유주의 대공세 시절, 프랑스 자본가계급이 제일 먼저 물가-임금연동제를 폐지한 이유도 이 때문이었다. 지금도 물가-임금 연동제는 보기 힘든 것이 아니다. 이미 여러 국가에서 물가폭등 상황에 대응해, 노동자들이 투쟁으로 물가-임금 연동제를 쟁취하고 있다. 작년 6월 캐나다 휘슬러 대중교통 운수노조는 물가 연동 임금제 도입을 관철하며 파업을 종료했다. 10월에는 브리티시컬럼비아주 일반노조(BCGEU)와 병원노조(Hospital Employees’ Union)가 일반 임금 인상과 함께 물가 연동 생활비 인상안을 포함해 임단협을 체결했다. 미국에서는 농기계 제조회사 존 디어가 3개월마다 인플레이션에 연동해 임금을 자동으로 높이기로 했다. 1921년 12월에는 켈로그 노동자들도 생활비연동조정(COLA) 규정이 포함된 단체협상안을 마련했다. 특히 아르헨티나의 타이어산업 노동자들은 5개월 동안 파업으로 2022년 9월 ‘물가상승률+10%’의 임금인상을 쟁취했다. 2022년 아르헨티나의 물가상승률이 90%에 이르렀지만, 임금이 100% 인상됨으로써 타이어산업 노동자들은 노동자 생존권을 사수할 수 있었다. 그들이 할 수 있었다면, 한국의 노동자들도 할 수 있다! 물가-임금연동제와 전체 노동자계급 총단결 물가-임금연동제를 시행하는 가장 좋은 방안은 모든 노동자를 대상으로 한 국가적 적용이다. 노동자는 물가-임금연동제의 국가적 시행을 강제해야 한다. 그래서 정규직이든 비정규직이든, 대기업 노동자든 중소기업 노동자든, 조직된 노동자든 미조직 노동자든 모든 노동자가 혜택을 보게 해야 한다. 특히 민주노조운동이 계급대표성을 획득하기 위해서는 미조직 노동자들과 가장 가난한 노동자들 모두를 포괄해, 전체 노동자계급을 대변하는 임금투쟁으로 전진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최저임금 30% 인상 요구와 함께, 물가-임금연동제 요구는 물가 폭등 상황에서 전체 노동자계급의 공동 생존권을 지켜내는 가운데, 민주노총이 전체 노동자계급의 대표성을 거머쥐기 위한 핵심 요구인 것이다. 물가-임금연동제 요구는 불가능한 것이 아니다. 단결해 투쟁하면 얼마든지 쟁취할 수 있다. 이미 세계의 많은 노동자가 물가-임금연동제의 혜택을 누리고 있다. 미국에서는 애리조나, 콜로라도, 메인, 미네소타, 몬태나, 오하이오 등의 주가 최저임금을 물가에 연동해 자동으로 올리고 있고,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의 상당수 국가도 연금이나 최저임금을 물가와 연동해 자동으로 인상하는 제도를 두고 있다. 한국에서도 국민연금은 물가인상률에 자동으로 연동되게 설계돼 있다. 벨기에와 룩셈부르크 등에서는 민간부문과 공공부문 모두에서 물가-임금연동제가 보편적으로 적용되고 있다. 가장 최근에는, 아르헨티나의 타이어산업 노동자들이 5개월 동안 파업으로 2022년 9월 ‘물가상승률+10%’의 임금인상을 쟁취했다. 2022년 아르헨티나의 물가상승률이 90%에 이르렀지만, 임금이 자동으로 100% 인상됨으로써 아르헨티나 타이어산업 노동자들은 노동자 생존권을 사수할 수 있었다. 그들이 할 수 있었다면, 한국의 노동자들도 할 수 있다! 인플레이션의 희생양이 되기를 거부하고, 전체 노동자들의 권리를 함께 대변하겠다는 결의로 단호하게 투쟁한다면, 물가-임금연동제의 국가적 시행을 충분히 강제할 수 있다! 물가-임금연동제가 자본가계급의 부담을 높이는 조치라고 주장한다면, 그것은 맞는 말이다. 그렇다. 한 줌 착취자들의 이익을 위해 노동자계급이 희생당할 이유가 없다. 유일하게 정당한 요구는 노동자계급의 생존을 지키는 것이다. 최저임금 30% 인상과 함께, 물가-임금연동제를 통해 우리는 그것을 실현하고자 한다. 나아가 우리는 기업과 부유층에 대한 확대 과세로 공공요금 안정을 위한 재원을 마련할 것을 단호하게 요구한다. 2022년 9월 물가-임금연동제를 쟁취한 아르헨티나 타이어산업 노동자들 2021년 말 물가-임금연동제를 쟁취한 미국 켈로그(왼쪽), 존 디어(오른쪽) 노동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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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위원회 기획연재 - 노동자의 삶과 철학 4] 자본주의와 스포츠스포츠는 스포츠일 뿐, 자본주의와 무슨 관계가 있냐고 질문할 수 있다. 하지만 자본주의는 노골적인 착취만이 아니라 다양한 방식으로 우리 삶에 영향을 미친다. 스포츠도 그중 하나다. 중립적인 것처럼 보이는 스포츠에까지도 자본가계급의 열망은 깊숙이 배어 있기 때문이다. 지배자들이 스포츠를 얼마나 중요한 수단으로 여기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전형적인 사례로 중국을 들 수 있다. 중국은 2008년 베이징 올림픽을 개최하기 이전, 8년간 매년 4조 원 이상의 돈을 투입했다. 중국이 이처럼 천문학적인 돈을 투입한 이유는 중국자본주의의 경제적 정치적 위상을 세계 속에 드높이고, 그와 함께 중국 국민들에게 제국주의적 야심을 심고 국가자본주의 체제와 하나로 통합시키기 위함이었다. 한마디로 불평등 확대에 따라 점차 잠에서 깨어나고 있는 중국 노동자들의 각성 및 중국에서의 계급투쟁을 잠재우기 위한 것이다. 한국에서도 2002년에 김대중 정권은 “월드컵을 볼모로 파업을 해서는 안 된다”며 월드컵을 이용해 노동자의 투쟁을 가로막으려 했다. 월드컵의 창시자 줄 리메는 “축구야말로 계급이나 인종의 구분 없이 모두를 한마음으로 만들어 세계를 행복한 한 가족으로 단합시켜 줄 것”이라고 말했다. 이처럼 스포츠에도 사회 체제의 논리가 깊이 침투해 있다. 스포츠에 대해서도 우리가 계급적 관점으로 날카롭게 접근해야 하는 이유다. 스포츠의 역사 고대 그리스의 레슬링 스포츠를 역사적으로 분석하는 건 스포츠에 대한 정치적 접근에서 좋은 출발이 될 수 있다. 역사적 분석을 통해 우리는 스포츠가 사회와 어떤 관련성을 갖고 발전해왔는지를 파악하고, 스포츠를 사회적 맥락에서 검토할 수 있게 된다. 선사시대에는 레슬링이나, 집단 군무 같은 형태의 스포츠가 존재했다. 이것은 사냥이나 수렵과 같은 당시의 생산을 뒷받침하는 육체적 단련을 여가, 오락과 접목하는 형태였다. 또한 스포츠는 어린 아이들이 어른이 될 수 있도록 준비시키는 도구였다. 그런데 당시의 스포츠는 아프리카 흑인들의 군무와 같은 집단적 형식으로 진행되는 경우가 많았다. 이처럼 팀으로 하는 스포츠는 부족이 외적과 싸울 수 있는 능력을 훈련하고, 협동하는 능력을 키우고 소속감을 강화하는 중요한 수단이었다. 특히 협동 작업이 필요한 사냥 노동을 훈련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이처럼 선사시대 스포츠는 당시의 생산방식 및 사회적 요구와 연결되어 작동했다. 스포츠에 미치는 이러한 사회적 요소는 당시의 성역할 분담도 반영되었다. 여성과 남성 사이의 당시 성역할 분담을 반영해, 사냥·전쟁과 결합된 스포츠는 남성 스포츠의 성격이 강했다. 그러나 스포츠와 긴밀히 연결된 집단 군무에서는 여성들이 배제되지 않았다. 당시의 무계급 사회에서 여성들은 공동체의 당당한 일부였고, 당연히 공동체적 통합력을 키워가는 수단이었던 집단 군무에 여성들은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이러한 선사시대 스포츠는 계급사회가 형성되면서 지배계급의 도구로서의 성격을 강하게 띠어갔다. 가령 고대 검투사 스포츠는 로마인과 비로마 식민지인, 노예주와 노예들을 구별하는 수단이었다. 아울러 스포츠는 노예들이나 식민지인의 저항 에너지를 스포츠를 통해 희석하고 ‘휘발’시키는 수단이 되었다. 가령 검투사 스포츠의 경우, 노예들을 서로 분열시키고 생존을 위해 서로 죽이도록 내몰아 노예들의 집단적 저항의지를 꺾어버리는 수단이었다. 생산에서 여성과 남성 사이의 성역할 분담을 넘어서서 여성에 대한 가부장제적 지배를 강화하고, 사실상 노예의 처지로 여성들을 내모는 수단이란 측면에서도 스포츠의 변화가 본격화되었다. 여성들은 모든 형태의 스포츠로부터 사실상 배제되었고, 집단 군무처럼 여성과 남성이 스포츠에 함께 참여하는 것은 소멸해갔다. 스포츠는 남성의 우월성을 드러내는 방식으로 작동해야 했으므로, 철저히 근육량이 많은 남성들에게 유리한 종목들, 가령 달리기·멀리던지기와 같은 종목들이 개발되었다. 근대 자본주의 스포츠 자본주의 사회가 등장함으로써, 스포츠는 계급적 성격을 유지하면서도 자본주의 체제의 이해와 요구를 반영하는 방식으로 큰 변화를 거치게 되었다. 근대 스포츠와 관련된 대표적인 이론가 중 한 명인 알렌 구트만은 근대 자본주의 스포츠의 핵심은 프로테스탄트 윤리 의식이 스포츠에 접목된 것이라고 규정했다. 프로테스탄트 윤리는 자본가계급의 대표적 이데올로기인데, 그것은 자본가들은 이윤 축적을 위해 최선을 다하고, 노동자들은 근검절약하면서 열심히 노동하는 것이 신의 소명에 부응하는 윤리적인 삶의 태도라는 입장이다. 이 입장에 따르면 조금도 쉬지 않고 열심히 일하면서 더 많은 생산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노동자들이 윤리적인 노동자가 된다. 이런 윤리관이 스포츠에 투영되면 “기록을 향한 경주”가 나타난다. 스포츠를 기록을 향한 끊임없는 도전으로 규정해 기록에 따라 순위를 매기고, 신기록 달성을 위대한 성과로 찬양하는 것은 자본가계급이 노동자들에게 주입하고자 하는 프로테스탄트 윤리에 딱 들어맞는 것이었다. 또한 이것은 자본주의 축적의 속도에 맞춰 노동자들의 생산성을 끌어올리기 위한 목적에도 잘 들어맞는 것이었다. 아울러 이처럼 기록에 따라 순위를 매기는 것은 “자본주의 공정성”을 유포하는 데서도 유용했을 뿐만 아니라, 여성에 비한 남성의 우월성을 부지불식간에 주입하는 장치이기도 했다. 특히 노동자들이 이룩하는 성과에 따른 “차등적 임금체계”를 정당화하고, 노동자들을 서로 경쟁시키는 체제를 공정한 체제로 포장하는 데서 스포츠는 기여할 수 있었다. 공정한 룰에 따른 처절한 경쟁을 통해 승자를 축복하고, 공정하게 매겨진 순위를 받아들이도록 하는 것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스포츠가 부지불식간에 노동자들에게 주입하는 이데올로기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선사시대 무계급 사회의 스포츠와는 명확히 대비되는 것이었다. 선사시대 스포츠는 순위를 매기는 것이 아니라 함께 협력하면서 집단주의를 발전시키고 생산에 적합한 능력을 자연스럽게 키워나가는 놀이였다. 반면 자본주의 사회에서 스포츠는 냉혹한 경쟁의 링이 되었고 승자와 패자가 나뉘는 분리의 장이 되도록 강요되었다. 아울러 스포츠는 제국주의적 패권경쟁의 도구가 되었다. 19세기에 영국을 비롯한 유럽 자본주의 국가들은 산업 혁명만큼이나 스포츠에서도 거대한 변화를 만들어냈다. 당시 유럽의 제국주의는 전 세계에 크리켓, 축구·볼링·하키·승마·테니스, 그리고 많은 겨울 스포츠를 세계 전역에 보급했다. 세계인의 축제라고 치장되는 올림픽은 제국주의 지배를 정당화하는 수단으로 도입되었다. 현대 올림픽은 유럽, 특히 영국의 스포츠를 기준 삼아 시작되었다. 이는 철저히 “백인 위주의 스포츠”, “유럽인 위주의 스포츠”, “남성 중심의 스포츠”가 스포츠의 주류이자 공식 스포츠로 승인되는 것을 의미했다. 올림픽에서는 “페어 플레이” 정신이 강조되었는데, 이것은 역설적으로 스포츠의 결과를 정당한 것으로 강요하기 위한 전제가 되었다. 이것은 백인, 유럽인, 남성의 우월의식을 유포하는 수단이 되었고, 식민지 지배를 정당화하는 우월적 장치로 작동했다. 스포츠의 공정한 결과에 순응하듯이, 우월한 백인 남성에 복종하는 것을 대중 특히 식민지인들에게 내면화시키는 도구가 된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공정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왜냐하면 올림픽에서 채택된 스포츠 종목들 대부분이 백인 남성들, 특히 상류층 백인 남성들에게 유리한 종목들이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초기 올림픽에서는 여성들의 참여가 배제된, 남성만의 올림픽으로 운영되었다. 올림픽의 이러한 정치적 의미는 ‘근대 올림픽의 아버지’라 불리는 프랑스의 쿠베르탱에게서 가장 극명하게 발견된다. 그가 올림픽을 부활시킨 목적은 강력한 프랑스 군대를 만들고 싶었기 때문이다. 더 강한 힘으로 적을 무찌를 수 있는 용맹한 군대를 키우고, 국수주의를 확대하기 위해서 그는 올림픽을 부활시켰다. 이것은 고대 올림픽 이후 오랜 기간 사라졌던 올림픽이 왜 19세기 막바지에 부활했는지 정확히 설명해준다. 19세기는 식민지를 정복하기 위해 영국, 프랑스, 독일 등 제국주의 국가의 우월성을 확신시키며 세계를 피비린내 나는 경쟁의 링으로 전락시켜야 할 절실한 필요가 제국주의 지배자들에게 충만했던 시기였다. 자본주의의 제국주의로의 진화와 근대 올림픽의 등장은 이렇게 맞물렸다. 가장 전형적인 사례는 1936년 베를린 올림픽이다. 독일 파시즘은 베를린 올림픽을 ‘아리안인종’의 우월성을 과시하고, 파시스트들의 유대인 대학살 정책을 정당화하는 제국주의 캠페인으로 악용했다. 스포츠와 헤게모니 그람시는 스포츠가 기존의 경제적·정치적 지배 구조에 대중이 자발적으로 순응해가는 과정, 즉 자본가계급이 사회적 헤게모니를 형성하는 장치 중 하나라는 점을 제기했다.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같은 자본주의 가치관, 식민지와 여성에 대한 지배의 정당화 수단으로 스포츠가 작동하는 것은 그람시의 주장을 뒷받침한다. 그런데 그것만이 아니다. 스포츠는 자본주의 질서가 자리잡는 데서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스포츠는 사교의 중요한 수단이기 때문이다. 우선 스포츠를 통해 대지주 계층과 신흥 자본가 엘리트 계층이 융합했다. 골프나 테니스, 승마 등 시간이 많고 상당한 토지와 더불어 비싼 장비가 있어야 즐길 수 있는 이른바 귀족 스포츠는 대지주들과 신흥 자본가들이 사교를 통해 하나로 융합하는 계기가 되었다. 노동자계급 내에서도 스포츠는 노동귀족적 정서를 확대하는 수단이었다. 금전적·시간적 여유를 갖고 있는 노동귀족층들을 중간계급과 동화시키면서 탈노동계급화시키는 문화적 장치 중 하나가 스포츠였다. 이들에게 노동자가 아닌 중간계급적 의식을 유포하는 대표적인 장치가 일반 노동자들은 쉽사리 즐길 수 없는 부르주아적 귀족 스포츠에 이들을 끌어들이는 것이었다. 이처럼 자본주의 스포츠는 착취 계급들을 서로 융합시키는 수단일 뿐만 아니라, 노동자계급의 상층부인 노동귀족층을 대대적으로 육성하고 이들을 노동자대중으로부터 떼어내는 자본가계급의 헤게모니 장치로 작동해왔다. 대량 생산, 그리고 대중매체의 발달이 관중 스포츠의 영역을 넓힌 것도 주목할 수 있다. 일반 노동자들이 직접 스포츠를 즐길 수 있는 기회는 많지 않았으므로, 그 대신 관중이 되어 스포츠를 게임처럼 즐기는 문화가 확대되었다. 관중 스포츠의 확대는 과도 노동으로 육체적 능력이 과도하게 소진되어 버린 상태에 있는 노동자들의 노동력을 재생산하는 데서 관중 스포츠가 오히려 적합하다는 계산도 반영되었다. 이것은 몇 가지 효과를 낳았는데, 우선 스포츠가 운동전문가들의 영역으로 자리 잡으면서 프로스포츠와 스포츠 산업이 널리 확대된 것을 들 수 있다. 이것은 기록을 향한 도전, 경쟁적 우월주의, 남성주의를 유포하는 강력한 수단이 되었다. 다음으로 트로츠키가 지적했듯이, 과거 검투사 경기와 마찬가지로, 이러한 관중 스포츠는 노동자계급의 에너지를 스포츠 관람을 통해 휘발시키는 도구였다. 아울러 이러한 관중 스포츠는 노동자의 계급성을 스포츠 집단주의로 왜곡시키는 수단이었다. 노동자들은 동료 노동자들과 어깨 거는 게 아니라 같은 지역, 같은 국가의 타 계급과 일체감을 형성하게 되기 때문이다. “민족주의”나 “회사에 대한 충성심”을 배양하는 효과적인 장치가 된 것이다. 나아가서 “지배자들은 ....... 권투, 축구, 경주 같은 스포츠로 이루어진 인위적인 통로를 통해 노동자계급의 가장 뛰어난 열정을 부자연스럽게 억누르고 무마할 수 있었다”고 트로츠키는 지적했다. 오늘날 영국, 브라질, 아르헨티나 등에서 월드컵·축구 프로리그에 대한 열광의 물결은 그런 지적이 결코 낡은 게 아님을 보여준다. 그들 나라에서 축구는 노동자계급의 관심을 정치에서 스포츠로 이동시키고, 역동적인 저항 에너지를 스포츠라는 통로로 흡수해 정기적으로 태워버리며, 노동자계급의식을 마취시키는 수단으로 활용되어 왔다. 이처럼 자본주의 사회에서 스포츠는 아주 은밀한 방식으로 자본가계급의 헤게모니를 확대하고, 제국주의적 침략과 자본주의 경쟁시스템, 자본주의 가부장제를 뒷받침하면서 노동자의 계급성과 저항에너지를 거세하는 도구로 작동하고 있다. 새로운 가능성 하지만 자본주의 사회에서 스포츠는 새로운 가능성도 잉태하고 있다. 생산성 발전에 의해 늘어나는 여가 시간을 통해서 대중적인 스포츠가 탄생하는 토대가 열리고 있다. 소수 자본가들이나 중간계급의 전유물이 아니라 노동자대중이 스포츠에 직접 참여하고 누릴 수 있는 기회가 확대되고 있는 것이다. 나아가서 노동자계급의 집단주의적 문화의 일부로 스포츠가 재정립되면서, 노동자계급의 에너지를 사회주의를 향한 에너지로 발전시킬 수 있는 수단으로 스포츠가 기여할 여지가 존재한다. 실제로 유럽에서 혁명적 운동이 발전했을 때 노동자들이 만들어낸 다양한 대중 스포츠 조직들이 조직화의 거점이 되기도 했고, 특히 노동자민병대를 구성하는 한 구성 요소로 노동자 스포츠 클럽들이 작동하기도 했던 모범 사례가 있다. 즉 스포츠가 새로운 계급적 규정을 얻게 되면서, 노동자 헤게모니의 일환으로 작동할 가능성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지배 계층의 의도와는 다르게 노동자 스포츠 문화가 발전할 가능성에 주목해야 한다. 스포츠라는 문화적 영역에까지 침투해 들어온 계급사회의 요소를 지워버리면서, 노동자의 집단적 문화를 확산하는 수단으로 스포츠를 능동적으로 재구성하면서 새로운 공동체주의적 세계관을 형성하는 수단 중 하나로 발전시키는 전망을 추구해야 하는 것이다. 트로츠키와 그람시는 이러한 가능성에 주목했던 마르크스주의자들 중 하나였다. 그들은 부르주아 스포츠를 넘어서서, 스포츠가 노동자들의 역동적인 에너지를 반영하고 새로운 세계관을 형성할 수 있다는 점 뿐만 아니라, 조직화의 거점 중 하나로서도 스포츠에 접근하려 했다. 가령 그람시는 공산당의 다양한 문화적 헤게모니 장치 중 하나로 노동자 스포츠 기구들이 당에 의해 조직되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그런 전망을 구체화하고 더욱 발전시키는 건 오늘날 사회주의자들과 노동자 투사들의 과제다. ‘기록주의’와 ‘경쟁주의’를 극복하고, 스포츠를 통해 육체와 정신의 균형적 발전을 꾀하며 집단주의적 의식을 강화하는 전망은 충분히 열려 있다. 최고의 기록을 목적으로 하고 타인과의 경쟁을 조장하는 스포츠가 아니라, 함께 어울리고, 유희의 기능과 함께 각각의 육체적, 정신적 에너지의 발전을 꾀하면서 집단활동의 즐거움을 느낄 수 있는 스포츠야 말로 스포츠가 탄생한 역사적 의미에 부합하는 것이다. 이것은 우선 스포츠 활동이 시간적, 금전적 여유를 가진 이들만 향유하는 걸 넘어서서 노동자 대중이 직접 참여해 스스로 즐기는 대중문화로 발전해야 가능하다. 이것의 토대는 노동시간 단축이고, 노동자들이 저렴하게 즐길 수 있는 공공적 스포츠 시설들을 확대하는 것이다. 대다수 노동자들은 장시간 죽어라고 일해야 하기 때문에 스포츠 활동을 통해 신체를 단련할 기회를 거의 갖지 못한다. 사회주의 사회는 노동시간을 획기적으로 단축하고 생활임금을 보장하며, 다양한 공공 스포츠 시설들을 세움으로써 스포츠 활동 시간을 획기적으로 늘려, 생산노동과 스포츠 사이의 긴밀한 연관을 회복시킬 것이다. 이러한 대중적 스포츠의 발전을 통해서, 계급사회가 조장해온 기록주의·경쟁주의를 극복함으로써 스포츠는 각자의 개성을 발전시키고 생산노동에 대한 건강한 적응력을 확대하며, 새로운 집단주의적 세계관을 널리 확대하는 수단으로 재탄생할 수 있다. 그것은 스포츠를 통해 인류가 얻고자 했던 진정한 목적을 회복하는 일일 것이다. 이처럼 스포츠가 계급사회의 오물을 벗어던지고 참된 의미를 회복하게 될 때 대중스포츠와 고급스포츠 사이의 관계도 재구성될 것이다. 오늘날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뛰어난 스포츠 능력을 가진 이들에 의해 만들어지는 엘리트스포츠가 성행하고 있다. 이것은 “대리주의적 문화”를 확산하면서 노동자 민중을 스포츠를 향유하는 주체가 아니라 관객으로 전락시킨다. 또한 자본주의 상업시스템과 연결되면서, 엘리트스포츠는 프로스포츠가 되어 상품 판매의 도구로 전락한다. 나아가서 이러한 엘리트스포츠는 “기록을 향한 열광”과 “무한한 경쟁”을 강력하게 부추기고, 그러한 자본주의적 세계관을 유포하는 헤게모니 장치의 중심으로 작동하고 있다. 이러한 대리주의적 스포츠 시스템은 노동자 민중이 스포츠 활동에 직접 참여하는 다양한 대중적 스포츠를 통해 극복되어야 한다. 하지만 이것이 뛰어난 스포츠 능력을 가진 엘리트들이 만들어내는 스포츠를 추방하는 걸 뜻하는 건 아니다. 훌륭한 음악을 감상하는 것은 항상 인류가 만들어낸 소중한 문화의 요소 중 하나로 남아 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뛰어난 스포츠 능력을 가진 이들이 만들어내는 스포츠 문화도 중요한 유산으로 남게 될 것이며, 이것을 감상하는 것도 대중의 유희이자 권리 중 하나로 존재할 것이다. 이러한 스포츠는 대중이 직접 향유하는 스포츠를 대체하는 게 아니라 그것을 보완하는 방식으로 재편될 것이다. 모든 문화의 발전에서와 마찬가지로, 이러한 대중 스포츠의 발전은 고급 스포츠의 발전을 저해하는 게 아니라 그것을 가능케 하는 강력한 지지대가 될 것이다. 가령 브라질이나 아르헨티나에서 뛰어난 축구 선수들이 탄생할 수 있는 원동력은 그 나라들에서 축구가 넓은 대중적 기반을 확보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수많은 대중적 클럽들의 번성은 훌륭한 능력을 가진 사람들이 탄생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수단이다. 그러므로 스포츠가 진정으로 대중이 향유하는 스포츠로 발돋움하면 할수록, 그러한 대중적 기반 위에서 멋진 스포츠 능력을 가진 인자들이 더욱 많이 탄생할 것이다. 역으로 그러한 고급 스포츠의 발전은 대중의 흥미와 열정을 고무해서 스포츠를 더욱 대중화하는 수단이 될 것이다. 이처럼 대중문화와 고급문화는 서로 배제하는 게 아니라 서로를 고무하는 수단이 될 수 있는데, 사회주의는 그러한 상호관계를 전면적으로 발전시켜 대중스포츠와 고급스포츠 모두를 개화시킬 것이다. 다만 사회주의 사회에서 고급스포츠는 상업주의적인 스포츠 스타시스템을 극복하는 방향에서 수립될 것이다. 또한 “기록을 향한 경쟁주의”를 넘어서서, 함께 즐기고 노력하는 과정의 가치를 배우며 집단주의적 협력정신을 고무하는 과정으로 관중 스포츠도 재편될 것이다. 맹아 그러한 가능성을 보여주는 맹아 중 하나는 페미니스트 운동이나 반인종주의 운동에서 발견할 수 있다. 과거에 스포츠는 남성만의 전유물로 여겨졌고, ‘열등한’ 여성은 스포츠에 적합하지 않은 것으로 치부되었다. 예를 들어 1896년 올림픽에 여성은 한 명도 참가하지 못했다. 하지만 20세기에 이르러 여성들의 권리가 확대되면서, 여성의 스포츠 참여가 크게 발전하기 시작했다. 1922년 8월 20일 프랑스 파리에서 첫 번째 여성 올림픽이 열렸다. 이것은 스포츠는 남성만의 전유물이라는 계급사회의 규정을 돌파하는 출발점이 되었다. 이후 올림픽에서 여성 종목들이 대폭 확대되었다. 베이징에서 열린 2008년 하계 올림픽에서 여성이 137개 종목에 걸쳐 출전하기에 이르렀다. FIFA 여성 월드컵과 같은 여성의 국제 스포츠 행사가 계속 성장하고 있다. 이처럼 스포츠 분야에서 여성이 참가하게 되면서, 스포츠를 통해 여성과 남성을 분리시키고 가부장제를 확산시켜왔던 자본주의 스포츠 시스템에 커다란 균열이 발생했다. 반인종주의나 반제국주의의 성과도 스포츠 분야에 반영되었다. 백인 위주의 스포츠 종목들에서도 유색 인종의 참여가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또한 올림픽 등에서 소수 인종들이 즐겨온 스포츠 종목들이 상당 부분 정식 게임에 포함되고 있다. 여전히 백인에게 유리한 것은 사실이지만 스포츠가 더 이상 백인의 우월성을 일방적으로 강요하는 수단으로 작동하지 못하게 된 것이다. 1960년 로마에서 1회 대회가 열린 장애인 올림픽(패럴림픽)도 그 연장선에 있다. 여성과 장애인을 포함하는 이러한 스포츠 경기의 발전은 “기록주의”와 “경쟁주의”를 극복하고 스포츠의 참된 정신을 회복하는 중요한 기회가 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성과들에도 불구하고, 자본주의 하에서 스포츠가 갖고 있는 본질적 성격은 여전히 작동하고 있다. 이것은 사회주의 사회 건설을 통해 궁극적으로 극복할 수 있을 것이지만, 그것만큼 중요한 건 사회주의를 수립할 수 있는 노동자의 문화와 세계관을 스포츠 분야에서도 어떻게 만들어갈 것인가이다. 그것을 위한 토대에서 가장 주목할 부분이 노동자대중이 직접 참여하는 대중 스포츠가 일정하게 형성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노동자 투쟁의 결과, 노동자들이 쟁취한 노동시간 단축의 효과 및 최소한의 임금인상 효과를 반영한다. 아울러 불구화된 노동에서 느끼는 소외감을 스포츠를 통해 해소하려는 노동자들의 열망도 반영한다. 마지막으로 스포츠 경기를 통해 집단주의를 형성하고 경험하고자 하는 욕구도 반영한다. 이런 성과와 열망들을 반영해, 노동자 스포츠 문화를 형성해가기 위해서는 다음의 지점들에 대한 실천적 고민과 다양한 창조적 시도가 필요할 것이다. 1) 노동자계급의 에너지를 휘발시키는 장치가 아니라 에너지를 증폭시키는 장치로 스포츠를 활용할 수 있는 방안은? 2) 부르주아 엘리트 스포츠를 넘어서서, 노동자가 직접 누리는 대중적 스포츠를 확대하는 방안은? 3) 스포츠를 통해 주입되는 자본가계급의 세계관을 뛰어넘어, 스포츠를 통해 노동자계급의 세계관을 확대할 수 있는 구체적 방법은? 4) 노동자의 세계 올림픽, 노동자(노동조합) 리그 등을 통해 기록 중심이 아니라 노력과 과정 중심의 스포츠, 집단주의를 강화하는 스포츠의 모범을 만들 수는 없을까? 5) 스포츠 동우회 등 다양한 스포츠 조직들을 관제 기구가 아니라, 노동자 연대와 조직화의 기구로 활용할 수 있는 전망은? 6) 스포츠에서 남성주의 극복 방안은? 이런 고민들에 대해 구체적인 답을 제공하는 게 이 글의 목적은 아니다. 그런 답을 내오기 위해서는 다양한 창의적 도전과 실천적 경험이 필요할 것인데, 이 글은 그것을 자극하기 위한 고민의 실마리 정도를 제기할 뿐이다. 이후 스포츠와 관련해서도 다양한 시도들이 축적되면서, 이러한 질문들에 대한 구체적 답을 누군가 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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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위원회 기획연재 - 노동자의 삶과 철학 2] 우리는 어떻게 자유롭고 발전된 개인이 될 수 있는가?우리는 알게 모르게 개인주의가 만연한 세상에서 산다. 정상에 오른 스티브 잡스와 같은 인물에게 찬사를 보내며 닮고 싶어 한다. 개인별 역량에 따라 받는 돈이 천차만별인 프로스포츠 제도도 개인주의 철학을 모델로 삼는다. 이러한 개인주의는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에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 대개의 경우 개인주의와 이기주의를 등치시키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원래 등장했던 개인주의는 이기주의와는 결이 다른 입장이었다. 개인주의 철학의 등장과 변천 개인주의는 한때 공동체주의와 양립 가능한 사상이었고 자유와 평등을 향한 지향을 상징했다. 부르주아 시민혁명의 등장은 개인의 권리와 가치를 전면에 부상시켰다. 지배-피지배계급으로 나뉜 사회 체제를 지탱하기 위한 도구로서의 개인이 아니라, 그 자체로 목적으로 취급받아야 하는 존재로 개인의 가치를 전면에 부각시켰다. 루소의 ‘사회계약론’은 그 단적인 표현이었다. 사회는 자유로운 개인들의 합리적 계약의 산물이고, 만일 이 사회가 개인들이 자유로운 합의를 통해 만들어낸 사회계약을 위배한다면 그 사회를 거부하고 해체할 권리가 시민들에게 주어진다는 견해는 당시로서는 가히 혁명적인 것이었다. 그래서 이 사회계약론은 부르주아 시민혁명의 팸플릿이 되었다. 부르주아 시민혁명의 역사적 진보성을 굳이 거론하지 않더라도, 개인의 가치를 부각시키면서 사회를 이러한 개인들의 집단적 합의 결과로 접근하는 발상, 그리고 이 발상에 담겨 있는 개인과 사회 사이의 관계에 대한 새로운 접근법은 충분한 역사적 의미를 갖는다. 이런 접근법은 개인의 가치만이 아니라 사회에 대한 정의에서 신기원을 이루었다. 이러한 초기 개인주의는 마치 아담스미스의 노동가치설처럼, 역사적 진보성을 띠었다. 개인의 권리와 가치를 부각시켰다는 측면에서만이 아니라 이러한 개인들이 구성하는 사회에 대해 새롭게 정의하면서, 개인과 사회 사이의 관계를 재설정할 수 있는 새로운 방향에 대해 근본적 질문을 던졌기 때문이다. 어떻게 하면 개인의 자유권과 권리, 행복추구권을 침해하지 않으면서도 사회가 존재할 수 있는지, 거꾸로 어떻게 하면 사회가 이러한 개인의 가치를 실현시키는 진정한 도구로 자리매김될 수 있는지에 대한 고민이 담겨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이것은 사회라는 장막 뒤에 가려져 있던, 억압당하고 착취당하고 있던 다수 개인의 고유성과 가치에 대한 본질적 성찰과 의미 설정을 가능케 했다는 점에서 인류의 진보를 반영했다. 그리고 이것이 가능했던 것은 부르주아 시민혁명 시기에 개인주의 철학이 반(反)사회적 성격을 띠었던 것이 아니라 철저하게 사회에 대한 고민을 반영했다는 점, 그것도 사회의 퇴보가 아니라 진보를 반영했다는 점 때문이다. 하지만 개인주의 철학은 부르주아 시민혁명이 특정한 역사적 국면에서 반영했던 진보성과 함께, 그 한계성 또한 고스란히 반영했다. 그 한계성은 이 철학이 대변했던 개인들이 바로 자본가들 즉 착취자들이었다는 사실에서 비롯되었다. 이들의 계급적 이해관계와 이들이 발 딛고 있는 삶의 토대는 불가피하게 개인과 사회 사이의 관계에서 긴장과 모순, 대립을 잉태했다. 소수 자본가들의 자유권과 권리 보호는 다수 노동자 민중의 무권리와 억압을 초래했다. 그 결과 부르주아 개인의 이해와 사회 전체의 이해, 특히 다수 노동자 민중의 이해 사이에는 격렬한 충돌과 대립이 야기될 수밖에 없었다. 자본주의가 본격화하고, 이러한 모순이 전면화하면서 부르주아들의 개인주의 철학은 질적으로 변화하기 시작했다. 그들의 개인주의 철학은 지금은 사회와의 진정한 연결성을 상실하고 이기주의와 밀접한 관련을 갖게 되거나 이기주의로 변질하게 되었다. 자본가들의 이기적 행위가 사회 전체가 경제적으로 발전하는 원동력이 된다는 ‘보이지 않는 손’과 같은 자유주의 이론이 존재하기는 했지만, 자본주의 체제의 반동화가 심화됨에 따라 그러한 외피조차 약화되면서 부르주아 개인주의 철학은 반사회적 이기주의 철학으로 이행했다. 자본주의 사회가 진보적일 때 등장했던 개인주의 철학이 반동적인 야만주의 철학으로 퇴보해가는 것은 자본주의 사회의 쇠퇴를 이데올로기 차원에서 상징한다. 이러한 야만주의적 퇴보는 자본주의의 미성숙 때문이 아니라 자본주의가 완전히 성숙한 결과물이다. 초기 진보적 시기에 자본주의는 개인의 권리를 신장시켰다. 가혹한 착취가 작동하기는 했지만, 더 나은 경제적 삶을 제공했고 민주주의적 권리도 확대되었다. 하지만 쇠퇴하는 자본주의 체제는 실업의 공포, 미래에 대한 불안감, 부모 세대보다 더 열악한 자식 세대, 불평등의 확대를 선물하고 있다. 이러한 체제에서 다수 개인의 권리와 자유는 무참히 파괴되고 있다. 생존에 대한 공포감에 떨고 있는 사람들에게 어떤 권리를 말할 수 있을 것인가? 이런 상황은 정치적 영역에도 영향을 미친다. 자본주의가 성숙한 결과, 모순이 폭발하면서 위기에 봉착하자 자본주의는 스스로 천명했던 개인주의에 대해서조차 적대적인 체제로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그들에게 중요한 건 전체 사회구성원들의 권리와 자유권이 아니라 오직 극소수 자본가들과 지배자들의 권리뿐이기 때문이다. 가령 나치즘과 파시즘은 모든 개인 권리를 파괴하면서, 자본주의 체제를 보호하는 전체주의적 억압 체제로 모습을 드러낸 바가 있다. 제국주의 패권전쟁도 마찬가지다. 이 패권전쟁에서 지켜지는 개인의 권리는 도대체 어디에 있는가? 어디에도 없다. 잔인한 대량 학살, 전시 통제 등을 두고 어떻게 개인의 권리와 자유권을 말할 수 있단 말인가? 개인주의 철학의 탄생이 진정 개인의 권리와 자유권을 사회가 보호해야 한다는 문제의식에서 비롯되었고, 바로 그런 의미에서의 개인주의 철학의 진보성을 말할 수 있다면 그것의 계승자는 자본주의가 아니라 바로 사회주의다. 사회주의는 진보적 시기에 자본주의 이데올로그들이 만들어냈던 개인주의 철학을 사회와의 진정한 관계 속에서 보완하고 발전시켜 공동체주의와 결합시켜내고자 한다. 개인과 사회 현실에서 개인과 사회 사이에는 밀접한 상호 관련성이 존재한다. 이 점은 사회적 존재로서 인간이 탄생한 이래 자명한 사실이었다. 아테네인은 시민의 의무를 다하지 않는 사람과 사리사욕을 앞세우는 사람을 이디오테스(idiotes)라 불렀는데, 이는 바보(idiot)라는 말의 어원이 되었다. 이기주의적 세계관을 주장하는 사람은 당시 그리스에서나 지금에서나 바보가 맞다. 개인과 사회를 분리해 서로 대립시키는 이기주의 사상을 깨뜨리지 못하면 빈곤, 실업, 불평등, 차별, 기후위기 등 오늘날 개인과 사회 모두를 덮치고 있는 시급한 쟁점과 제대로 맞설 수 없기 때문이다. 개인의 성공과 실패, 개인이 이룩한 성취와 실패 모두는 그 개인이 의식하든 의식하지 않든 그것과 관련을 맺고 있는 수많은 사회적 관계망, 즉 사회에 크게 의존한다. 개인이 이룩한 성공을 과대평가하면서 엄청난 보상을 정당화하는 입장은 그 성공이 사회, 즉 타인들에 크게 힘입은 것임을 외면하는 셈이다. 스티브잡스의 성공은 인류가 수천 년 동안 공동으로 축적해온 과학적 성취들, 휴대폰의 생산망을 따라 협력하는 수십만 노동자들의 세계적 생산망, 도로·전기 등 사회적 기반시설과 같은 사회적 요소들을 빼놓고는 전혀 성립하지 않는 것이다. 물론 그것이 어떤 개인이 성취한 것과 사회 전체에 기여한 것의 가치를 무시하는 건 아니다. 사회적 발전은 그 속에서 살아가는 수많은 개인들의 기여가 없다면 불가능할 것이다. 요점은 개인과 사회는 긴밀한 상호작용 속에 놓여 있다는 사실이다. 모히칸족과 같은 아메리카 인디언들에게는 “나”(개인)가 없었고, “우리”만이 있었다. 이것은 옳지 않다. “나”와 “우리” 모두가 존재해야 한다. 그리고 이 둘은 충돌하고 배격하는 것이 아니라 “조화”로워야 한다. “우리”(사회)는 “나”(개인)를 존중하고, “나”는 “우리”를 존중함으로써 함께 번영해야 한다. 마르크스가 말했듯이 “각 개인의 자유로운 발전이 전체 사회의 발전을 위한 조건이 되며, 사회의 발전이 각 개인의 자유로운 발전의 조건이 되는 사회”, 바로 그것이 노동자가 해방되는 사회주의 사회의 궁극적 목표다. 이러한 궁극적 목표는 부르주아 개인주의가 그 계급적 한계 때문에 야만적 이기주의로 전락시켰던 개인주의의 참된 요소들을 사회와의 연관 속에서 건강하게 회복시킨다. 그리하여 사회와의 조화로운 관계 속에서 개인의 가치를 재조명한다. 노동자가 주인이 되는 세상은 개인주의를 배격하는가? 노동자가 세우려고 하는 공동체 사회는 개인의 선택과 개성, 자유를 배격하고, 사람들을 전체주의 논리에 따라 똑같이 만들어버릴 것이라고 자본가들은 주장한다. 그러나 이것은 누워서 침 뱉기다. 사람들 각각의 개성을 말살하고 자유를 억압하는 체제가 바로 자본주의 체제다. 사장들은 마음껏 쓰고 마음껏 착취할 자유를 누린다. 그러나 노동자들은 임금노예제도에 갇혀서 자유를 잃고 살아가야 한다. 고된 강제노동의 굴레에 갇혀 지내는 것이다. 생산이 오직 자본가들의 이윤을 높이는 것에 맞춰 이뤄지므로 엄청난 수의 노동자들의 개성과 창조성은 매장되고, 관리자들의 작업지시와 획일화되고 단조로운 노동이 득세한다. 학교 교육도 이런 자본주의 생리에 맞춰 획일적 통제 교육으로 채워져 있다. 반면 노동자의 공동체 사회는 개인의 가치와 자유를 존중한다. 오히려 이것을 훼손하지 않아야만 공동의 사회적 협력이 진정 발휘될 수 있다. 사회주의가 반대하는 것은 노동자 민중을 희생시키면서 자행되는 자본가들의 이기주의일 뿐, 개인의 개성과 자유가 결코 아니다. 개인의 가치를 진정 실현시키는 사회주의 사회 오히려 노동자 혁명은 압도적 다수 개인의 자유와 개성을 진정 실현하게 만든다. 노동자들이 직장의 주인이 됨으로써 노동자는 스스로 작업 환경을 배치하고 창조적 노동에 종사할 수 있게 된다. 이것은 개인의 개성을 신장시킬 것이다. 여기서 특히 중요한 것이 ‘실행과 구상’의 통합이다. 자본주의에서는 ‘실행’ 기능은 노동자들에게 부여되는 반면, 전반적인 생산계획과 운영계획, 작업배치 등 ‘구상’ 기능은 관리자들과 경영진이 독점한다. 이것은 노동자 소외의 원천이 되고, 노동은 자유롭지 않고 구속된 강제노동으로 전락한다. 노동자 조직들에 대한 전 사회적인 차원의 계획화 및 작업장에서의 노동자 자주관리가 실현되는 사회주의는 구상과 실행의 기능을 통합함으로써 이러한 소외를 극복하고, 노동자들에게 참된 자유와 개성을 부여한다. 직장의 주인이 됨으로써 노동자는 스스로 작업 환경을 배치하고 창조적 노동에 종사할 수 있게 된다. 인간이 자유로움을 느끼고 개성을 발휘하는 것은 정신적 활동과 육체적 활동의 결합을 필수조건으로 요구한다. 하지만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육체노동과 정신노동이 분리되어 있다. 매일 똑같은 일을 기계적으로 반복할 경우 노동에 대해 활력도 즐거움도 느끼지 못하게 되며, 정신적으로 황폐해지게 된다. 육체 또한 특정 부분을 지나치게 사용함으로써 그 부분이 손상되며, 다른 부분은 반대로 너무 사용하지 않아 퇴화한다. 노동자가 주인이 되는 사회에서는 육체노동과 정신노동을 적절하게 결합해 육체와 정신을 고르게 발달시킴으로써 조화로운 인간을 형성할 것이다. 다음으로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도시와 농촌의 대립이 심각하다. 도시인들은 자연으로부터 멀어짐으로써 정서적으로 메마르게 된다. 농촌 사람들은 정치, 문화생활로부터 멀어짐으로써 낙후된 상태에 머물게 된다. 노동해방 사회에서는 농업과 공업을 적절히 조화시킬 것이며, 이 과정은 노동자들을 육체적, 정신적, 정서적인 모든 측면에서 고르게 발전시키는 핵심 과정 중 하나가 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자유로운 삶, 개성의 전면적인 발전에는 노동시간 단축이라는 물질적 조건이 필요하다. 사회주의 사회에서 노동자들은 짧은 노동을 마친 후에는 문화예술을 폭넓게 향유하고, 다양한 정치 사회 활동에 참여하게 될 것이다. 이때가 되면 비로소 자본주의가 개인의 천부적 소질과 재능들을 얼마나 많이 억압, 왜곡, 변형시켜왔는지가 확연히 드러날 것이다. “오전에는 공장이나 농장에서 일한다. 오후에는 월요일에는 자주관리위원회 회의에 참여하고, 화요일에는 산업계획위원회 회의에 참여한다. 수요일 오후에는 대학에 가서 과학과 공학을 기술과 접목해 신기술을 개발하는 회의에 참석한다. 목요일 오후에는 중학교, 고등학교를 방문해 일일 교사로 활동한다. 금요일, 토요일, 일요일 등 휴일에는 문화예술 모임에서 시를 발표하고 인터넷을 통해 전 세계의 친구들과 화상 대화를 하며 다양한 취미 활동, 스포츠 활동에 참여하게 될 것이다.” 전업적인 공장 노동자도, 꽃가게 점원도, 사회단체 활동가도, 시인도, 교사도, 과학자도, 정치인도 아니면서 그 모든 일을 함께하는 새로운 유형의 인간이 탄생할 것이다. 이때 노동과 예술, 체육과 놀이, 과학과 기술, 구상과 실행 등이 자연스럽게 결합할 것이며, 모든 사람은 유기적으로 발전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노동은 삶의 참다운 행복이 되며, 진정으로 자유로운 삶 속에서 개인의 자유와 개성이 비로소 실현될 것이다. 나아가서 모두가 일자리를 갖고 불평등이 제거됨으로써 결혼과 연애는 “재산이나 사회적 지위”를 따지지 않는 “오직 애정에만 기초한, 개인들의 자유로운 선택”이 된다. 이러한 세상은 더 이상 막연한 유토피아가 아니다. 지난 2~3백 년 동안 자본주의 아래에서 노동자들이 이룩해낸 놀라운 생산력 발전은 풍요로운 공동체 세상을 가능하게 해주는 든든한 객관적 토대다. 사회적 생산력 발전을 통한 노동시간 단축이 그 핵심에 놓여 있다. 자유로운 개인의 조건 - 사회화된 인류 어떤 개인도 사회의 도움 없이는, 사회적 연관 없이는 한 발짝도 전진할 수 없고, 진정한 자유로움에 도달할 수도 없다. 자본가들만 하더라도, 그들 스스로는 이해할 수 없는 자본주의 경제법칙과 경쟁법칙의 노예가 된다. 사회의 운동법칙을 정확히 이해하고, 그것을 통해 만인의 공동체적 발전을 꾀하면서 그 일부인 자기 자신(개인)의 발전을 꾀하는 존재만이 비로소 자유로운 개인이 될 수 있다. “사회의 발전이 각 개인의 자유로운 발전의 조건이 되는 사회”, 이것이 개인주의의 숭고한 목표를 실현할 수 있는 필수적 조건이다. 하지만 그 목표는 “각 개인의 자유로운 발전이 전체 사회의 발전을 위한 조건이 되는 것” 즉 사회와 손을 맞잡고 사회를 전진시키는 혁명적 실천 속에서만 온전하게 실현될 수 있다. 우리는 그걸 “자유로운 인간들의 의식적 공동체” 즉 노동자가 주인이 되고 해방된 세상이라고 부른다. “포이어바흐는 ‘종교적 심성’ 그 자체가 하나의 사회적 산물이라는 것을, 그리고 그가 분석한 추상적 개인이 사실은 일정한 사회형태에 속해 있다는 것을 보지 못했다. 직관적 유물론, 즉 감성을 실천적 활동으로서 파악하지 않는 유물론이 얻을 수 있는 최고의 것은 시민사회 내에서의 개별적 인간에 대한 직관이다. 구태의연한 유물론의 입지점은 시민사회이며, 새로운 유물론의 입지점은 인간적 사회 또는 사회화된 인류이다.”<마르크스, 포이어바흐에 관한 테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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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위원회 기획연재 - 노동자의 삶과 철학1] 우리는 이기주의를 벗어날 수 없는 것일까?사회주의를 적대시하는 사람들이 흔히 써먹는 얘기가 있다. “인간 본성과 안 맞는 사회주의는 망할 수밖에 없거나 전체주의적인 억압체제가 될 수밖에 없어! 결국 이기적 경쟁체제인 자본주의가 정답이야!” 썩 그럴 듯한 말이다. 사회주의란 혼자만 잘살겠다는 것이 아니라 모두 함께 잘살려 하는 것이고, 그래야 개인도 행복해질 수 있다는 공동체적 철학에 바탕을 둔 체제다. 그런데 만약 인간 본성이 개인의 이익에만 집착하고 타인과의 협력과 공존을 거부한다면, 자본주의와 다른 사회는 불가능할 것이다. 이러한 생각들은 흉악 범죄나 야만적 사건들을 듣고 보면서 확고한 생각으로 자리잡히곤 한다. 게다가 자신과 주변을 돌아봐도 이기주의적 생각은 흔히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을 종교가 파고들어 확대한다. 가령 기독교는 원죄설을 통해 그런 생각을 퍼뜨린다. 또한 여러 종교는 신과 달리, 인간은 날 때부터 이기주의적이거나 악한 본성을 가지고 태어났다고 설교한다. 이러한 악한 본성은 인간 스스로의 노력을 통해서는 극복할 수 없고, 오직 종교에 귀의해 신의 용서를 구해야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이다. 과연 인간 본성은 이기적인가? 또 이기적 태도는 결코 변할 수 없는 것인가? 딱 정해진 인간 본성은 과연 존재하는가? 인간 본성을 둘러싼 대표적인 입장에는 성선설, 성악설, 성무선악설이 있다. 성선설과 성악설은 인간의 본성이 태어날 때부터 정해져 있다는 입장이다. 반면 성무선악설은 사람의 본성은 선천적으로 착하거나 나쁘지 않으며, 오직 환경에 의하여 그 성격이 결정된다고 보는 입장이다. 성선설은 성악설과 마찬가지로 대중의 실제 경험을 반영한다. 자신의 목숨이 위태로운 재난 상황에서 우리는 자기 목숨을 희생해서 타인들을 구하는 훌륭한 미담을 목격한다. 또한 맹자의 ‘측은지심’처럼 우리는 불행한 처지에 놓인 사람들을 보면 연민을 느끼고 돕고자 하는 마음을 느낀다. 성무선악설도 마찬가지로 실제 경험에 의해 뒷받침된다. 일란성 쌍둥이이지만, 나고 자라는 환경에 따라 사람들의 모습은 천차만별하게 바뀌기도 한다. 어떤 입장이 올바른지 보여주는 사례는 널려 있다. 원시공동체에서 살아왔던 아메리카 인디언들에게는 개인이 토지를 소유한다는 것은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들에게는 “나 혹은 나의 것”이라는 단어가 없었고, “우리 혹은 우리의 것”이란 단어만 존재했다. 토지나 재산 등을 대부분 공동으로 소유 운영했던 과거의 사회환경이 이들의 본성을 그렇게 만들었던 것이다. 하지만 인디언들의 후예들이 지금 지니고 있는 사고방식은 어떤 것일까? 이들은 ‘나의 것’이란 확고한 관념을 갖고 있을 것이다. 이들이 편입된 자본주의 사회체제가 이들의 본성을 변화시킨 것이다. 결국 사회 환경이 인간의 본성을 좌우하는 것이다. 거꾸로 사회가 바뀌면 인간 본성도 바뀌는 것이다. 심지어는 사회적 환경으로부터 격리되어 길러지는 존재는 인간의 기본적인 속성마저 갖지 못하고 동물적 상태로 굴러 떨어진다. 인간 사회로부터 분리돼 늑대 무리 속에서 길러진 늑대소년의 사례는 그 점을 극명히 보여준다. 늑대소년은 인간 사회로 복귀한 이후에도 언어능력과 사회성을 배우지 못했고 윤리성을 갖지 못한 채 늑대 무리를 그리워하다가 죽고 말았다. 인간이 인간으로 성장하는 것도 결국 사회적 환경 속에서임을 알 수 있다. 인간 본성론에 대한 역사적 고찰 공자, 노자, 맹자, 순자, 루소, 흄, 칸트 등 동서양을 막론하고 위대한 철학자들이 인간 본성에 대해 깊이 탐구했던 것에는 중요한 의미가 숨어 있다. 상반된 입장들에도 불구하고 이들 모두가 공히 주목했던 목적이 있었다. 선한 인간 본성을 살려내는 방식이든, 악한 인간 본성을 훈육이나 법률적 강제력을 통해 제압하고 통제하는 방식이든, 순수한 백지 상태의 인간 본성을 전제하는 방식이든, 그들 모두가 인간 본성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했던 진정한 이유는 교육이나 법 등의 “사회적 영향력”을 통해서 인간의 특성을 바람직한 방향으로 변화 발전시키기 위해서였다. 결국 이들 모두는 인간의 특성이 사회에 의해 영향 받는다는 점을 정확히 인식하고 있었으며, 또한 결과적으로 볼 때 인간의 특성을 변화시키는 것이 가능하다는 점도 받아들였다. 그래서 이들 모두가 가장 고민했던 것은 어떠한 사회적 영향력을 통해 인간을 윤리적·사회적 존재로 고양시킬 것인가였다. 마르크스주의는 위대한 철학자들의 이러한 고민과 문제의식을 더욱 높은 수준으로 발전시켰다. 인간이라는 존재는 사회의 등장과 함께 형성되었고 사회의 변화 속에서 마찬가지로 변화해왔다. 그러므로 변하지 않는 본질적 성격이라는, 말 그대로의 의미에서 “본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사회는 끊임없이 변화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변하지 않는 사실이 있다. 인간은 “사회적 존재”라는 본질적 성격을 갖는다는 사실이다. 만일 인류가 등장한 이래 변하지 않는 인간 본성이 있다면, 그것은 “사회적 존재로서의 인간 본성”일 것이다. 마르크스주의는 이러한 점들을 종합해서, 인간을 “사회적 제 관계의 총체”라는 개념으로 정식화하고 있다; “인간적 본질은 어떤 개개인에 내재하는 추상이 아니다. 그것은 현실적으로 사회적 관계들의 총체이다.” <마르크스, 포이어바흐에 관한 테제> 자본주의 사회가 만들어내는 인간형 주어진 사회에서 보편적으로 존재하는 인간의 특성을 알고자 한다면, 우리는 모든 개인들을 둘러싸고 있는 공통의 사회적 환경에 주목해야 한다. 이 사회적 환경에서 핵심은 “어떻게 생산하고, 생산수단을 어떻게 소유하며, 생산물을 어떻게 분배하고 있는지”를 둘러싼 생산양식이다. 인간의 일차적 생존조건은 물질적 생산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생산양식이라는 토대 위에서 정치, 문화, 윤리 등의 상부구조가 자라나오고, 그 속에서 인간의 특성이 결정된다. 가령 서양의 성경에서 가장 비난하고 있는 인간형은 ‘고리대금업자’다. 이들은 타인의 고통을 이용해 개인적 부를 축적하는 사람들로 가장 배격하고 비난해야 할 사회악으로 묘사된다. 그런데 이 ‘고리대금업자’는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훌륭한 기업가로 칭송받는다. 돈을 대출해주고 높은 이자를 수취하며, 심지어는 이자를 갚지 못한다는 이유로 집까지 몰수해버리는 ‘은행’은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기업의 꽃이다. 노동자를 최대한 자르고, 비정규직을 확대하며, 노동강도를 높여 자본가 이윤을 극대화시키는 것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효율성의 모범’이며 ‘기업가 윤리의 실현’으로 인정된다. 타 기업이나 타인을 짓밟고 경쟁에서 승리하는 것은 인간 승리의 모범으로 인정된다. 착취를 정당화하고 무한경쟁의 원리 하에서 작동하는 자본주의 체제가 이런 의식들을 매일 대량으로 만들어내고 있다. 방송이나 신문, 학교 등은 이런 자본주의 의식을 대량으로 보급하며 재생산해낸다. 그래서 사람들은 “옛날과 달리 피도 눈물도 없는 세상이 되고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타인을 착취하고 짓밟아서라도 개인의 이익을 극대화해야 한다는 “이기적 본성”이란 사실 착취와 경쟁에 의해 작동하는 자본주의 체제가 대량으로 만들어낸 것이다. 또한 이 “이기적 본성”은 자본주의 체제를 지배하는 “자본가계급의 의식과 가치관” 즉 자본주의 생산양식의 특성을 반영하는 것이다. 이로부터 왜 오늘날 사람들의 대다수가 인간 본성이 이기주의라는 생각에 동조하게 되는지도 설명할 수 있게 된다. 재난 상황에서 목격하게 되는 이타주의적 희생은 물론 오늘날 자본주의 사회에서도 경험할 수 있다. 그럼에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인간 본성이 이기주의적이라고 생각하는 이유는 그런 이타주의적 행위는 상당히 드물게 경험하는 반면, 이기주의적 행위는 늘 경험하는 현상이기 때문이다. 다름 아니라 자본주의적 조건이 그걸 강제한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 피도 눈물도 없이 노동자들을 착취하는 자본가들의 모습은 늘 경험하는 것이다. 뿐만 아니다. 자신과 주변 사람들의 경우에도 일상적인 모습은 이기주의적으로 보인다. 생존을 위해 타인들과 경쟁하는 처지에 놓여 있고, 불가피하게 타인들의 삶보다는 자신의 삶에 일차적으로 집착하는 게 현실로 보이기 때문이다. 새로운 인간형의 등장과 사회의 변화 사회가 근본적으로 바뀐다면, 인간형도 근본적으로 바뀔 수밖에 없다. 노동자운동이 만들어낼 새로운 인간형은 단결해 투쟁하는 노동자계급의 본성을 따를 수밖에 없다. 노동자가 주인이 되는 사회는 온갖 착취를 배격하는 체제다. 어떤 이유로도 정당한 자기 노동을 통하지 않고 획득하는 불로소득은 인정하지 않는다. 인간 특성은 “타인에 대한 착취를 통한 개인의 이익 창출을 절대 인정하지 않고, 오직 스스로의 정당한 노동을 통한 수익만을 인정”하는 새로운 유형으로 바뀔 것이다. 이러한 새로운 사회는 무한대의 경쟁 대신 사회구성원들의 협동을 통해 상호 이익의 극대화 원리를 따라 작동한다. 이에 따라 “경쟁을 통해 타인을 짓밟는 이기주의”는 거부되고, “서로 협동하면서 공동의 이익을 추구하는 공동체적 인간”이 개화할 것이다. 인간의 특성이 이처럼 사회체제의 성격에 따라 변화하는 것이라면, 진정 골치 아픈 것은 “사회체제의 변화는 새로운 사회체제에 조응하는 새로운 인간형이 등장하지 않는다면 불가능하다는 점”과 관련되어 있다. 그런데 사회체제의 변화가 준비됨과 나란히 이러한 변화를 낳을 수 있는 새로운 인간형이 등장함으로써 문제는 해결된다. 이 새로운 인간형은 기존 체제에 반발하고 새로운 체제 건설을 희망하는 “혁명 계급”에 의해 창조된다. 자본주의 사회를 낳았던 사람들은 자본가계급이었다. 이들은 자본주의 혁명 이전에 이미 ‘기업가 윤리’ 즉 ‘이기주의’로 무장하고 있었다. 자본주의 혁명을 통해 이들은 자신들의 탐욕스런 이기적 속성을 전 사회적 차원에서 보편화했다. 반면 새로운 체제를 창조해낼 혁명 계급은 바로 노동자계급이다. 그런데 노동자계급은 이미 자본주의 사회 내에서 ‘이기주의’를 뛰어넘어 ‘공동체적 의식’을 만들어나가고 있다. 자본주의 사회 내에서 계속 확대되는 사회적·집단적 생산과정, 그리고 이 생산과정과 밀접히 연결된 노동자들이 공통적으로 놓인 사회적 조건이 공동체적 집단주의를 노동자계급 속에서 끊임없이 확대하기 때문이다. 또한 이러한 집단주의 속에서만 노동자들은 자본가계급에 맞서 자신의 공동이익을 수호할 수 있게 된다. 노동자 투쟁을 들여다본다면 상황은 아주 분명해진다. 이기주의로 철두철미하게 무장한 자본가들은 대량해고, 살인적인 노동강도, 무한대의 경쟁, 비정규직 제도를 들이민다. 반면 이에 맞서는 노동자들은 “노동하지 않는 자들의 불로소득을 인정할 수 없다. 또한 생산은 노동자들이 협동하여 수행하는 것이므로 그 성과는 노동자들 전체에게 돌아와야 한다. 한 두 명의 이익을 위해서 수백, 수천, 수만 명이 희생당할 수는 없다. 모두가 함께 사는 길을 찾아야 한다.”고 외친다. 실제 투쟁의 과정에서 노동자들은 “형제, 누이보다 더 끈끈한 공동체적 의식”으로 무장한다. 물론 이러한 변화 과정이 손쉽게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진실을 말하자면, 노동자들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태어나고 자랐으며 살고 있다. 따라서 알지 못하는 사이에 자본주의 사회가 심어준 이기주의가 노동자들 속에도 스며들어 있다. 이 이기주의는 노동자 조직과 노동자 투쟁을 부식시키면서 패배와 분열로 이끄는 요인이 된다. 그 결과 노동조합과 같은 노동자 조직들이 관료화되고 약화되거나 노동자 투쟁이 거듭되는 패배를 겪게 되면, 많은 투쟁하는 노동자들도 “인간은 원래 이기주의적이야. 그래서 이렇게 패배하는 거야. 그러니 사회주의는 이상적이기는 하지만 실현불가능해!”라는 좌절감에 빠져들기도 한다. 하지만 자본가의 이기주의와 노동자의 이기주의는 발생의 토대가 다르다. 모든 인간은 자신과 가족의 생존을 도모해야 한다. 그런데 이런 ‘생존욕’을 자본주의는 이기주의로 둔갑시킨다. 자본주의 경쟁제도가 그걸 강제한다. 노동자들만이 아니라 대부분의 인간은 타인과 경쟁하면서 생존하는 삶을 두려워하고 가장 큰 스트레스를 받는다. 하지만 자본주의는 경쟁을 구조화한다. 비좁은 일자리를 둘러싼 취업 경쟁을 강요하고, 회사 내에서도 동료들과 경쟁하도록 부추긴다. 사회적 본성을 갖고 있는 인간은 이러한 상황이 고통스럽다. 그럼에도 순응해야 한다. 이 사회의 실권을 쥐고 있는 자본가들이 그런 경쟁 제도를 강요하기 때문이다. 그래야 노동자들을 분열시키고 마음대로 통제할 뿐만 아니라 효율적으로 착취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노동자들은 생존을 위해서 주변 노동자들과 경쟁하도록 강요당한다. 마치 과거 노예제 사회에서 검투사들이 생존을 위해 동료 노예 검투사들을 죽여야 하듯이 말이다. 이런 검투사들에게 이기주의적 인간이라고 비난한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이들은 이기주의적 속성을 반영하는 게 아니라 본능적 생존욕을 반영할 뿐이다. 노동자들 또한 마찬가지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경쟁에서 살아남아야 한다는 생존의 절박함, 바로 그것이 이기주의를 노동자들에게 강요한다. 노동자운동이 집단적 단결을 통한 사회적 해법을 제기하지 못하는 상황에서는 자본주의 경쟁체제가 강요하는 생존 압력은 더욱 강하게 작동한다. 원자화된 노동자 민중은 격렬한 경쟁체제에 빨려 들어가 나라도 살아야 한다는 생존에 몰두할 수밖에 없다. 특히 실업문제가 심각한 상황에서, 젊은 층의 경우 생존을 위한 경쟁체제에서 일단 살아남고 이기고 봐야 한다는 절박함이 더욱 강하다. 이것은 사회적 약자에 대한 혐오 분위기로 확대되기도 한다. 경쟁에서 승자가 되는 게 유일한 해법이라면, 승자를 찬미하고 약자들을 패배자로 매도하면서 배척하는 분위기가 확대되는 게 자연스럽기 때문이다. 이렇게 강요된 이기주의는 노동자들의 생존 조건이 바뀌면 자연스레 극복되기 시작한다. 가령 경쟁체제가 아니라 협동체제로 생산이 운영되고, 작업장이 노동자들의 공동 소유라면 어떻게 될까? 이 경우 개별 노동자의 생존조건은 바로 협동의 원활함과 효율성이다. 생존을 위해서라도 노동자들은 전체 노동자들과 협력할 수밖에 없다. 실제로 현장의 집단적 노동과정에서 노동자들이 배우는 건 이기주의가 아니라 집단주의고 동료애다. 노동자 투쟁은 이러한 상황을 더욱 적극적으로 만들어낸다. 모두가 한몸으로 단결해서 싸워야만 공동의 이익을 지켜낼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노동자 투쟁에서도 이기주의는 모습을 드러낸다. 이것을 조장하는 건 여기서도 자본가들이다. 노동자 투쟁을 깨기 위해 자본가들은 온갖 감언이설과 협박을 늘어놓는다. 해고 위협까지 서슴지 않는다. 이것은 또다시 노동자의 본능적 생존욕구를 이기주의적인 방향으로 유도하곤 한다. 단결을 통해 모두의 생존을 함께 지켜낼 수 있다는 확신이 강화되고, 투쟁의 역관계가 노동자들에게 유리해지면 그런 수법은 먹히지 않는다. 노동자들은 생존을 위해서라도 강력한 집단주의적 태도를 확대하며, 자기 혼자 살 길을 찾는 이기주의적 동료를 단호하게 비판하고 응징한다. 반면 투쟁이 불리해지고 자본가의 협박이 먹히게 되거나 단결이 약화되면, 이기주의적 요소가 빠르게 확대된다. 정리하면, 노동자들의 노동의 조건, 그리고 생존의 조건은 이기주의를 극복하고 공동체주의를 채택하도록 이끈다. 하지만 자본주의 체제와 자본가들은 생존을 위해서 동료를 배신하고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하도록 노동자들에게 강요한다. 이 두 요소 사이에 맹렬한 투쟁이 일어난다. 노동조합과 투쟁이 전진할 때 선진노동자들은 전자의 모습에 감격한다. 노동조합과 투쟁이 후퇴하면 자본가들이 불어넣는 이기주의가 강화되므로 선진노동자들은 비관주의에 빠져들기도 한다. 이런 후퇴 상황이 오래 지속되면 비관주의는 더욱 강화되고, 선진노동자들은 인간의 본성에 대한 심각한 회의주의에 빠져든다. 하지만 인간의 속성이 고정되어 있지 않다는 점을 이해하는 게 중요하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자들의 속성은 결국 자본가계급 대 노동자계급 사이의 계급투쟁에 의해 좌우된다. 이 계급투쟁에서 노동자 조직이 전진하고 투쟁이 승리하도록 이끄는 것이 결국 노동자들의 속성을 공동체주의로 이끄는 길이다. 그렇기에 앞서 있는 노동자들의 실천이 중요하다. 공동체주의에 입각해 이들이 실천적 모범을 보이고, 공동체주의의 원리를 따라 노동자 조직을 발전시키고 투쟁을 성공적으로 전진시킴으로써 변화가 일어날 수 있다. 그런 변화를 통해 노동자들이 자본주의가 심어준 이기주의적 오물을 뱉어내면서 공동체주의를 발전시키는 과정이 바로 노동자운동의 발전 과정이며, 노동자계급이 사회주의를 실현하는 주체로 성장해가는 과정이다. 사회주의가 인간 본성이 이기주의적이라는 주장에 반대하는 것이 지금 자본주의 하에서 살아가는 노동자들 속에서 이기주의가 말끔히 청소되었다는 걸 말하는 게 아니다. 사회주의는 노동자 조직이 공동체주의를 발전시키고, 노동자 투쟁을 통해 자본가계급이 심어준 이기주의를 극복해가는 일련의 과정을 통해서 공동체적 인간형이 탄생해갈 수 있음을 주장할 뿐이다. 이러한 변화 과정은 사회주의가 건설되고 이 사회에서 태어나고 자란 새로운 세대에 의해 가장 완전한 방식으로 실현될 것이다. 높은 데 올라가면 다 똑같아진다? 인간 본성이 이기주의적이라는 관념, 그리고 그 연장선에서 사회주의와 같은 공동체 세상은 불가능하다는 관념을 확대시키는 중요한 경험적 요인 중 하나는 바로 “높은 데 올라가면 다 똑같아진다”는 것이다. 이런 관념은 권력을 달라고 선거에서 요구할 때와 권력을 잡은 뒤 실제 행동하는 것 사이에 하늘과 땅 만큼 거대한 차이가 존재하는 부르주아 정치인들의 사기 행각에 대한 경험 속에서 생겨난다. 그런데 더 중요한 경험이 있다. 바로 노동자 대표자들과 관련된 것이다. 노동자를 위한다고 약속했지만, 막상 대통령, 국무총리, 장관이 된 뒤에는 노동자를 배신한 사람들에 대한 경험들이다. 한국의 경우, 건강한 활동가였지만 막상 노조위원장 등 노동조합의 중요 직책들을 맡은 뒤 조합원 위에 군림하고 투쟁 약속을 헌신짝처럼 버리는 자들에 대한 경험이 중요하게 작동한다. 이런 아픈 경험들 속에서 건강한 활동가나 조합원들은 “높은 데 올라가면 다 똑같아진다”고 느끼고 좌절한다. 이런 좌절은 이기주의적 인간 본성에 대한 믿음으로 이어진다. 물론 이것은 명백히 실재하는 객관적 경험들이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그렇게 되는 현상은 상당히 자연스러운 것이다. 있는 곳이 다르면, 생각도 바뀌기 때문이다. 그들을 둘러싼 사회적 환경이 바뀌게 되면, 이것은 그들에게 강한 영향을 미치기 마련이다. 가령 대기업 노조의 위원장이나 산별노조의 중요 직책을 맡게 되면, 조합원이나 현장 활동가 시절에 그들을 둘러싼 환경과는 전혀 다른 사회적 환경이 작동한다. 고된 노동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고, 현장 조합원들과의 일상적 관계도 약화되기 쉽다. 그 대신 경영진이나 사장을 만나는 기회가 많아진다. 일상적 교섭장에서 그들과 대화하며 보내는 시간이 늘어나고, 교섭장에서 그들을 설득할 논리를 개발하는 데 몰두하기 쉽다. 회사 경영상황이나 회사의 생존전략, 시장상황, 이윤율 등이 교섭장에서 거론되는 주요한 화두들이다. 이것은 현장노동자들과 함께할 때, 듣고 고민하던 것과는 완전히 다른 것이다. 이처럼 사회적 환경의 급격한 변화는 개인에게 강력한 영향력을 미친다. 그래서 불과 1~2년도 지나지 않아서 그 개인이 노동자적 개인에서 부르주아적 개인으로 변화하는 일이 흔하게 일어나게 된다. 마르크스주의는 이에 대해 이런 부르주아적 환경에 맞선 개인의 분투와 노력만을 강조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러한 변화가 불가피하거나, 최소한 빈번하게 일어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인간은 사회적 환경에 크게 영향 받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해법은 무엇일까? 바로 개인의 노력과 함께, 사회적 환경을 변화시키는 구조적 해법을 모색하는 것이다. 현장 조합원들의 아래로부터의 민주적 통제, 그리고 현장조직이나 사회주의 노동자 당에 의한 통제를 강화하는 것이다. 그래서 부르주아적 환경의 영향력을 상쇄하고 압도할 수 있을 만큼의 노동자적 환경을 조성하는 것이다. 높은 데 올라가도 결코 변질하지 않게 만들 대중적 통제력, 활동가들의 통제력을 강화하는 것이다. 이러한 공동체적 사회 환경을 의식적으로 만들어냄으로써 노동운동은 개인에 대한 영향력을 강화하고, 이를 통해 이기주의적·자본주의적 성격이 노동자 조직에서 확대되지 못하도록 강제해낸다. 물론 이러한 환경적·구조적 접근이 반드시 필요하지만, 이것이 부르주아적 환경의 영향력을 넘어서려는 개인의 의식적 노력이 갖는 가치를 조금이라도 폄하하는 건 아니다. 마르크스주의가 제시하는 인간 개념에서도 중요한 것은 단순히 사회적 환경을 거울처럼 수동적으로 반영하는 인간의 특성이 아니다. 사회적 환경에 의해 규정되지만, 거꾸로 사회를 결정하는 능동적 요소로서의 인간이다. 즉 개인이 사회에 미치는 능동적 영향력과 사회가 개인에 미치는 영향력은 서로 긴밀히 결합되어 있는 하나의 총체다. “환경의 변화와 교육에 관한 유물론적인 학설은 환경이 인간에 의해 변화되고 교육자 자신이 교육받아야만 한다는 사실을 잊고 있다. ........ 환경의 변화와 인간의 활동 또는 자기 변화의 일치는 오직 혁명적 실천으로써만 파악될 수 있으며, 또 합리적으로 이해될 수 있다.” <마르크스, 포이어바흐에 관한 테제> 노동자가 나아가야 할 실천의 핵심은 분명하다. 환경의 변화와 인간의 자기 변화를 하나의 총체로 유기적으로 결합시키는 것이다. 진정 자기 변화를 꾀하는 사람이라면 자신을 둘러싼 사회적 환경의 변화를 위해 실천해야 한다. 거꾸로 사회적 환경의 변화를 꾀하는 사람이라면 자기 변화에 조금도 게으르지 않아야 한다. 바로 그것이 노동자의 혁명적 실천의 본령이다. 이러한 노동자운동의 실천을 통해서 인간의 성격은 이기주의적 요소를 끊어내고 공동체주의적 방향으로 끊임없이 전진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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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로운 한반도를 위해, 핵무장이 아닌 평화를 향한 세계 노동자 총단결!한미 연합공중훈련 ‘비질런트 스톰’(Vigilant Storm)이 11월 5일 종료됐다. 북한은 이 훈련에 대항해 수십 발의 미사일을 서해로 쏘아댔고, 무력 시위 성격이 짙은 군용기 집단 비행도 감행했다. 그러자 미군은 미국의 3대 전략폭격기 중 하나인 B-1B 2대를 훈련 마지막 날에 투입했다. 이에 맞서 북한은 5일 오전 서해상으로 단거리 탄도미사일(SRBM) 4발을 발사했다. 이번 사태의 표면에 드러난 가공할 만한 무기 체제보다 더 주목해야 할 것은 한반도를 둘러싼 세계적 차원의 군사적 대립이다. 이번 긴장 상황은 우크라이나에서 발발한 제국주의 패권전쟁이 끝 모를 충돌로 이어지고 있는 상황에서 발생했다. 또한 무력을 동원하는 걸 포함해, 대만에 대한 통일 의지를 시진핑 정부가 공식적으로 천명하면서 미국과 중국 사이의 충돌에 대한 긴장감이 고조되는 상황에서 발생했다. 큰 맥락에서 볼 때 10월 말에서 11월 초까지 한반도에서 전개된 긴장 사태는 세계적 차원에서 진행되고 있는 제국주의 두 진영 사이의 고조되는 패권 대립의 연장선에 있다. 구소련 몰락 이후 유일한 패권국으로 세계를 호령해왔던 미국의 압도적인 경제적 우위는 허물어지고 있다. 이것을 보완하기 위해서 미 제국주의의 군사적 우위는 더욱 압도적이어야 한다. 이것은 한반도의 군사적 의미가 미 제국주의에 더욱 중요해지는 걸 뜻한다. 한반도는 한미일 군사력을 동원해 중국 내륙을 육상에서 직접 치고 들어가는 결정적인 지정학적 위치에 있기 때문이다. 이번 비질런트 스톰 훈련은 사실 미 제국주의가 중국 정부에 보내는 위협이었다. 남북 지배자들 남북 지배자들의 운명은 이러한 제국주의 패권 대립에 깊숙이 종속되어 있다. 1950년에 발발한 한국전쟁, 그 뒤 남북한에서 일어난 변화 모두가 그랬다. 한국전쟁은 미국과 소련의 대리전에 다름 아니었다. 그 뒤 수십 년간 남한에서 일어났던 급속한 경제 발전은 제국주의 패권 경쟁에서 ‘쇼윈도우’ 효과를 노리며 미국이 대대적으로 남한을 경제적으로 지원한 것에 힘입었다. 1990년대 초반 구소련 붕괴 후 냉전 체제가 해체되자, 세계 자본주의의 성장 엔진을 갈구했던 미 제국주의와 서방은 소련을 고립시키는 데 공헌했던 중국에 경제 발전 기회를 열어 주었다. 세계 차원의 수직적 분업 체계 속에서 중국은 대규모 자본을 유치해 산업 발전을 가속화했고, 미국과 서방은 독점자본의 중국 진출을 통해 막대한 이익을 거둬들였다. 이러한 밀월 기간에 남한 자본도 거대한 수혜를 입었다. 중국으로의 대대적인 자본 진출과 무역 수출이 이뤄졌고, 이것은 1980년대 중반 이후 이윤율 저하와 맞닥뜨리기 시작했던 남한 자본에 새로운 도약의 기회가 되었다. 이렇게 남한 자본이 미 제국주의와 중국 제국주의 모두에 경제적으로 양다리를 걸치게 되면서, 남한 정부는 외교적으로도 양자 사이에서 위태로운 줄타기를 시도했다. 하지만 최근 경제적 밀월이 깨지고 격렬한 패권대결이 본격화하자 남한 정부는 두 제국주의 진영 사이에서 선택을 강요받게 되었고, 미 제국주의 진영에 더욱 깊숙이 편입되고 있다. 이 기간에 북한은 고립된 섬처럼 세계 경제로부터 격리되었다. 한미일 군사동맹을 견제하고, 미 제국주의의 직접적 공격을 여과하는 완충장치의 필요성 때문에 중국은 북한에 대해 일정하게 경제 지원을 해왔다. 그럼에도 급속한 경제적 축적 과정에 돌입하고 있었던 중국 지배자들에게는 북한에 충분한 지원을 할 수 있는 여력이 없었고, 그럴 의지도 없었다. 이것은 북한에서 경제 침체가 가속화하고, 남한과의 경제적 격차가 빠르게 벌어지는 배경이 되었다. 북한 체제에 위기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울 수밖에 없었다. 이런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북한 지배자들이 꺼내든 카드가 바로 핵무기 개발이었다. 한편으로 이것은 민족주의를 내세워 지배의 정당성을 끌어내기 위한 대중 통제수단이었다. 다른 한편으로 이것은 ‘핵’이라는 수단을 동원해 북한의 기존 지배 체제의 안전을 보장하는, 중국·베트남식 개혁개방과 같은 정치 경제적 이익을 두 제국주의 패권 다툼에서 끌어내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이런 전술은 양날의 검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가뜩이나 부족한 북한의 사회적 자원을 핵 개발에 쏟아붓는 것은 북한 노동자들의 막대한 희생과 고통을 불러오는 것이었다. 이것은 일시적으로는 유지될 수 있지만, 장기적으로는 북한 지배 체제를 위협하는 위험 요소였다. 핵 개발과 탄도미사일 실험을 확대하고, 이런 압력 수단을 동원해 제국주의 세력과 ‘빅딜’을 성사시켜야 할 필요성이 그들에게 더욱 절박해져 왔다. 비록 막판에 틀어지기는 했지만, 트럼프 정부와 북한 정부 사이의 빅딜 협상은 그것의 단적인 표현이었다. 빅딜 협상이 깨진 것은 우선 미국이 과거 남한에게 제공했던 것만큼 강력한 경제적 보상을 해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미국 정부가 북한 정부에게 요구했던 빅딜의 조건은 중국을 목 밑에서 겨누는 비수로 북한이 작동하겠다는 확실한 약속이었다. 북한 정부에게 이것은 중국으로부터 받는 원조마저 끊기는 것, 아울러 중국과의 거대한 긴장 관계를 감수한다는 것을 뜻했다. 북한 체제를 베트남처럼 회생시키고 발전시킬 수 있는 충분한 경제적 지원 약속을 미국으로부터 보장받지 못하는 상황에서 이런 선택은 위험천만했고, 결국 빅딜은 불발로 끝났다. 그 뒤 북한 지배자들은 중국 제국주의 편으로 기울고 있다. 남북한 지배자들이 두 제국주의 진영 사이에서 위태로운 곡예를 하면서 일정한 평화를 추구하는 막간극은 더 이상 상영될 수 없었다. 이것은 무얼 뜻하는가? 또다시 한반도에 제국주의 패권전쟁의 피바람이 몰려들고 있다. 한반도의 운명은 남북한 지배자들이 아니라 세계적 차원의 거대한 흐름에 의해 결정될 것이다. 오늘날의 민족자결권 반동화된 관료적 지배 체제가 피할 수 없는 자체 모순의 결과, 북한 지배계급은 모험주의 행각에 몰두하고 있다. 바로 핵무장이다. 형식적으로 볼 때 비록 반동 체제임에도 북한과 같은 약소국의 민족자결 요구는 지극히 정당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에 대한 지지는 그 국가의 자주적 무장의 권리에 대한 지지를 뜻하고, 자연스레 이것은 북한의 핵무장에 대한 지지로 연결되어야 하는 듯 보인다. 핵무장은 제국주의 패권국인 미 제국주의에 맞선 정당한 민족적 저항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모든 이론은 회색이고, 오직 푸르른 건 저 생명의 나무이다.” 우리는 민족자결권에 대해 오늘날의 세계 자본주의와 세계 혁명 투쟁의 과제 속에서 구체적으로 접근해야 한다. 오늘날의 상황은 어떤가? 모든 자본주의 나라들이 미국 제국주의 진영 대 중국·러시아 제국주의 진영 사이에서 중위, 하위 파트너로 선택을 강요받고 있다. 강력한 제국주의 모국이 아닌 경우에도 모든 자본주의 국가들이 전체적으로 볼 때 제국주의 진영의 한 부분을 떠맡도록 강요되고 있다. 러시아 제국주의의 침략에 맞선 우크라이나의 민족해방 구호를 살펴보자. 미국과 서방 제국주의로부터 독립적일 뿐만 아니라 그것에 맞서면서, 사회주의 혁명의 한 부분으로 러시아 제국주의에 맞서 투쟁하는 노동자계급의 ‘민족자결’ 요구는 사실상 지금의 우크라이나에서는 존재하지 않는다. 실제로 존재하는 건 ‘민족자결’을 앞세워 조국방위 전쟁을 제기하지만, 미 제국주의 진영의 한 사슬을 이루면서 제국주의 패권전쟁의 한 축을 차지하는 반동적인 우크라이나 지배계급의 흐름뿐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기본적으로 우크라이나 정부가 수행하는 전쟁을 미·서방 제국주의 진영을 대변하는 대리전에 불과하다고 규정하며, 지지하지 않는다. 민족자결권을 내건 흐름에 대해 접근할 때 또 하나 놓칠 수 없는 핵심은 그 흐름이 피억압 대중의 주도권과 자주성을 반영하느냐 여부다. 1970년대 베트남 민족해방전쟁을 지지하는 반면, 오늘날 우크라이나 지배계급이 내거는 위선적인 민족자결을 지지하지 않는 핵심 이유다. 북한 체제가 제기하는 ‘핵무장’도 그러한 맥락 위에 놓여 있다. 북한만이 아니라 중동, 아프리카 국가들에서 볼 수 있듯이, 지배계급이 추구하는 민족자결권이 사실상 제국주의 패권 진영의 일부로 편입되는 것으로 귀결되는 게 오늘날의 특징이다. 2003년 이라크 북부의 쿠르드족 독립운동이 단적인 사례가 될 수 있다. 이라크 정부의 탄압으로부터 민족자결을 확보하고자 했던 그들은 이라크를 침공한 미국에 협력해 약간의 자치권을 확보하는 노선을 채택했다. 반대로 오늘날 진정으로 민족자결권을 실현하는 전망은 노동자 세계 혁명이라는 전망의 일부분으로 통합될 수밖에 없다. 민주주의 혁명의 사회주의 혁명으로의 성장 전화라는 연속혁명의 정식은 노동자계급 주도로 민족자결권의 완전한 실현을 세계 사회주의 혁명과 유기적으로 결합시킨다는 연속혁명 전망으로까지 범위를 확장해야 한다. 북한의 핵무장 북한의 핵무장에 대해서도 우리는 시대적 맥락 속에서, 그리고 노동자계급의 혁명적 운동과 단결을 촉진하는가라는 구체적 맥락 속에서 분석하고 판단해야 한다. 우선 북한의 핵무장은 제국주의 틈바구니에서 체제 생존을 도모하는 북한 지배계급의 이해를 반영한다. 민족자결을 내세우지만 사실상 이 핵무장은 북한 노동자계급의 엄청난 희생과 고통을 대가로 이뤄지고 있고, 제국주의 강대국과의 거래를 통해 북한 지배계급의 생존을 위한 경제적 토대를 확보하려는 야비한 목적에 종속되어 있다. 거래에서 값어치를 높이기 위해서 북한 지배계급은 핵을 모험주의적 투기 수단으로 활용하고 있다. ICBM과 같은 장거리 미사일의 사거리를 높여가는 과정은 모험주의의 가속페달을 벼랑 끝을 향해 계속 밟는 것이다. 체제 위기가 그만큼 심각해지고 있으며, ‘골든타임’이 얼마 남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미국 본토에 대한 타격이 가능한 장거리 핵미사일이 기술적으로 완성되기 직전에, 미 제국주의는 북한에 대한 전쟁을 벌일 충분한 명분을 갖고 방아쇠를 당기게 될 것이다. 이 전쟁의 결과는 아주 분명하다. 북한은 미 제국주의의 지배하에 떨어지게 될 것이고, 이것은 중국을 위협하기에 충분할 것이다. 이런 전쟁의 걸림돌이 될 수 있는 건 단 하나다. 바로 중국의 개입으로 사실상 세계대전으로 비화할 위험성이다. 그런데 이건 중국 지배자들로서는 최악의 시나리오다. 개입하지 않으면 북한을 미국에 넘겨주는 것이다. 개입한다면? 원하지 않는 세계대전 혹은 준세계대전을 감수하게 된다. 아직 미국의 패권에 정면으로 도전하기에는 불리한 상황에서 중국의 패권 전술은 힘을 더 축적할 때까지 당분간 충분히 기다리고 인내하면서, 미 제국주의에 도발 명분을 주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중국 지배자들은 북한이 전쟁의 화약고가 아니라, 단지 미국의 중국 봉쇄를 차단하는 완충 지대로 남아 있기만을 희망한다. 그런 이유로 중국은 10월 28일 유엔총회 제1위원회(군축·국제안전 담당)에서 북한이 실시한 6차례 핵실험을 규탄하고 핵무기 프로그램을 포기할 것을 촉구하는 결의안 초에 찬성표를 던졌다. 하지만 점증하는 모순과 체제의 불안정성 앞에 서 있는 북한 지배계급에게는 한가로이 기다릴 여유가 없다. 핵무장 강화를 통해서 북한 지배계급은 중국 지배계급을 압박해 충분한 원조를 끌어내야 한다. 그게 여의치 않다면 미국과 새로운 빅딜을 시도할 것이다. 어떤 선택이든 북한 지배계급의 모험주의는 한반도 전체를 제국주의 패권전쟁의 한복판으로 밀어 넣는 짓이다. 다음으로 북한의 핵무장은 남북 노동자계급을 격렬한 상호 대립으로 떠밀고, 남북 지배자들의 무장 확대와 공안 통치, 노동자운동에 대한 공격의 빌미를 낳고 있을 뿐이다. 특히 북한의 핵무장을 빌미로 우익 세력이 파시즘으로 진화하면서 남한 노동자운동을 강하게 공격할 명분을 제공할 것이다. 다른 무엇보다도 현재의 상황에서 한반도에서 전쟁이 일어난다면, 두 번째 거대한 전쟁 앞에 분열되어 서로 대량 학살하게 되는 남북한 노동자계급 사이의 분열은 무엇보다 거대한 재앙일 것이다. 여기서는 노동자계급의 혁명적 단결을 약화시키는 걸림돌을 제거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민족자결권이 갖는 역사적 의의는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그와 반대로 남한 노동자운동이 수십 년간의 투쟁 속에서 건설해온 노동자의 자주적 조직들, 쟁취해온 민주적 권리들을 단 한 순간에 잿더미로 만들면서 군대와 파시즘 세력의 군홧발이 남한을 지배하게 만들 것이고, 남한을 미국의 패권에 더욱 강하게 붙들어 맬 것이다. 관료적 통제와 억압 때문에 자주적인 노동자운동 자체가 원천 봉쇄되어 있는 북한 노동자들의 상황, 아직 혁명적 국제주의 노선에 입각해 혁명투쟁에 나설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한국 노동자운동의 상황은 그것 말고 다른 결과를 당장에는 기대할 수 없게 만든다. 반면 미 제국주의는 언제든 효과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꽃놀이 패’를 손에 쥐게 된다. 북한 지배자들의 핵무장을 알리바이로 삼아, 미 제국주의는 중국을 겨냥한 패권전쟁의 일환으로 언제든 북한을 공격할 명분을 손에 쥐게 된다. 특히 북한의 핵무장은 미중 패권대결이 군사적 대결로 불타오를 때, 가령 중국의 대만 침공이 현실화되는 순간 대리전의 빌미가 돼 한반도 전체를 제국주의 전쟁터로 내몰 것이다. 이 모든 것이 현재 북한에서 이뤄지고 있는 핵무장이 현실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 역할이다. 이것은 혁명적 사회주의가 민족자결권을 지지하는 이유에 전혀 부합하지 않는다. 핵무장은 오로지 북한 지배계급의 위기 극복 프로그램으로서만, 그것도 거대한 모험주의적 책동으로만 작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북한 지배계급이 동원하는 전술 북한 지배계급으로서도 이 모험주의 도박은 위험천만하다. 그들의 지배 체제를 송두리째 붕괴시킬 위험이 크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그런 위험을 최소화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게 된다. 하지만 그들이 동원하는 수단은 남북한 노동자계급의 단결된 힘과 혁명적 잠재력이 아니다. 반대로 모험주의의 판돈을 키우는 것이다. 그들이 동원하려는 첫 번째 수단은 제국주의 패권 대립의 한 축인 중국 제국주의를 방패로 동원하는 것이다. 이번 한미 연합공중훈련 ‘비질런트 스톰’에 대항한 북한의 행위에 그 점이 고스란히 반영돼 있다. 11월 5일 중국 영토와 사실상 맞닿아 있는 ‘동림’에서 처음으로 미사일을 발사한 것은 의미심장하다. 중국 최근접지역에서 미사일을 발사하면 미군의 맞대응도 그 지역을 미사일로 폭격하는 게 될 수밖에 없다. 북한과의 전쟁을 결정했다면 말이다. 이것은 중국이 이 전쟁에 개입할 수밖에 없도록 자극할 것이다. 한마디로 북한 지배계급은 북한에 대한 전쟁이 중국이 참전하는 세계대전으로 발전할 가능성을 활용함으로 북한 지배 체제를 보호하는 안전판을 만들려고 한다. 북한 지배계급이 동원하려는 두 번째 수단은 미군의 피해 없이는 북한을 공격할 수 없다고 경고하는 것이다. 이것은 초저각도 단거리 미사일 발사에 반영돼 있다. 이 미사일들은 분명히 오산 미군 공군기지와 평택 미군기지를 겨냥한다. 미국 본토를 타격하는 핵미사일이 기술적으로 완성되기 이전에 미국이 북한을 공격한다면, 한국 내 미군기지를 폭파시켜 대응하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의 결과는 무엇일까? 미군기지는 한국인이 대규모로 거주하는 오산시와 평택시 한복판에 자리 잡고 있다. 결국 미군기지를 미사일로 타격하는 것은 미군만이 아니라 한국 노동자 민중을 대규모로 살상하는 결과를 가져올 수밖에 없다. 이는 한미일 군사동맹이 어떤 상태에 있든, 남한의 즉각적인 전쟁 개입을 불러올 것이고, 남한의 노동자 민중을 전쟁과 파시즘의 군홧발 아래로 일거에 밀어 넣을 것이다. 결국 북한 지배계급은 모험주의 책동이 자신들에게도 야기할 수 있는 체제 붕괴의 위험을 줄이기 위한 수단으로 세계대전과 한반도의 거대한 전쟁을 볼모로 삼고 있는 것이다. 한반도 노동자계급의 요구 우리는 민족자결권을 확대하기보다는 오히려 제국주의 침략의 빌미만 제공하며 민족자결권을 위협할 수 있는 북한의 핵무장에 동의하지 않는다. 또한 남북한 노동자계급과 전 세계 노동자계급의 혁명적 단결을 약화시키는 수단으로 작동할 수 있는 북한 핵무장에 반대한다. 우리는 북한의 핵무장을 반대하면서도, 북한의 민족자결권을 보호할 수 있는 길, 특히 전 세계 노동자계급의 혁명적 단결을 촉진하며 남북한 사회주의 연방공화국, 나아가 세계 사회주의 연방공화국으로 연결될 수 있는 길을 기필코 찾아야 한다. 두 제국주의 진영 모두에 맞서 투쟁하면서 전 세계 노동자들을 혁명적으로 단결시킬 수 있는 길을 찾아야 한다. 무엇이 그러한 길이 될 수 있는가? 우리는 다음과 같은 길을 남북한 노동자계급에게 제안한다. - 북한의 핵무장 포기와 한반도에서 미군 철수! 모든 국가에서 핵무장 철폐! - 전쟁을 조장하는 모든 조약 철폐! 한미 상호방위조약 철폐! - 휴전 협정 폐기하고, 종전 선언 및 평화협정 체결! 남북 상호불가침 조약 제정! - 한반도에서 미국과 남한, 북한의 대규모 군사작전 금지! - 남한과 북한에서 군비 축소! 노동자를 위한 복지 기금 조성! - 북한에 대한 인도주의적 지원! 식량과 의약품, 에너지를 즉각 북한에 제공하라! - 북한에 대한 모든 제국주의 개입을 중단하라! 북한에 대한 경제봉쇄 철폐하라! - 북한과 남한에서 공안기구 철폐! 사상의 자유, 노동자 조직의 완전한 권리 보장! - 남북한 자유 왕래 보장! - 미 제국주의도, 중국 제국주의도 아닌 평화를 향한 노동자계급의 국제적 단결! - 남한과 북한 모두에서 노동자혁명을 통한 사회주의 한반도 건설! 사회주의 세계연방 공화국 수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