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기사 목록
-
[한노운사 연재 14회] 3부 패배와 퇴보 (1998-2008) [3] 비정규직 문제를 둘러싼 대결비정규직은 악조건 속에서도 스스로 노조를 결성하고 투쟁에 나섰다. 1999년부터 2002년까지 예열기를 거친 뒤 2003년부터 2007년까지 비정규직 투쟁이 본격적으로 분출했다. 수백, 수천, 때때로 수만 단위의 대중투쟁이 곳곳에서 끈질기게 펼쳐졌다. 비정규직 문제를 둘러싼 사회적 이데올로기 전선에서도 비정규직 노조운동은 도덕적 우위를 갖고 상당한 대치전선을 형성해 냈다. 2004년부터 2006년까지 비정규직 제도를 둘러싼 정치투쟁이 치열하게 전개됐다. 민주노총은 비정규직 노조운동이 투쟁을 통해 만들어낸 요구들을 집약하여 ‘비정규직 권리보장 입법안’을 제출했다. 노무현 정권은 한나라당과 손잡고 ‘비정규직 보호입법’이라는 허울 아래 기간제법을 제정하고 파견법을 개악했다. 민주노총은 수차례의 총파업을 조직했지만 진정한 투쟁동력을 건설해내지는 못했다. 이전 편 보기 3부 패배와 퇴보 (1998-2008) [시대배경] 신자유주의 구조조정 [1] 구조조정과 정리해고에 맞선 투쟁 [2] 민주노조운동의 후퇴와 비정규직 확산 [3] 비정규직 문제를 둘러싼 대결 [4] 민주노조운동의 위기 [5] 노동자 정치세력화 열망과 민주노동당 1) 1999~2002년 비정규직 투쟁 비정규직이 빠르게 늘던 1990년대 후반부터 비정규직 노조운동이 시작됐다. 1999~2001년 사이에 한라중공업 사내하청, 학습지교사, 골프장 경기보조원, 방송사 비정규직, 한국통신 계약직, 캐리어 사내하청 등에서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노동조합을 결성하여 투쟁에 나섰다. 이 시기에는 아직 사회적으로 비정규직 문제의 심각성이 공론화되지 못했고, 운동 주체들의 준비 또한 많이 부족했다. 정규직 노조운동은 노동자계급의 대의에 반하는 태도들을 곳곳에서 서슴없이 드러냈다. 비정규직 주체들은 활동가들의 역량도 부족했고 대중적으로도 아직 자기 투쟁에 대한 자신감을 충분히 갖지 못했다. 이 시기에 등장한 비정규직 노조들은 대다수가 현실의 벽을 넘지 못한 채 역사 속으로 사라져야만 했다. 1999년 3월 사내하청 대량해고에 맞서 급하게 결성된 한라중공업사내하청노조는 최초로 등장한 비정규직 노조였다. 사내하청 대량해고는 정규직에 대한 대량 정리해고로 이어졌다. 8월 10일부터 72일간 한라중공업 정규직 노조가 정리해고에 맞서 파업을 전개했다. 사내하청 노조는 정규직 노조의 파업에 연대하며 사내하청 노조의 요구(노조간부 현장출입, 고소고발·손배 취하, 사내하청 직영화 등)를 파업 요구로 포함시켜 달라고 요청했지만, 정규직 노조는 받아들이지 못했다. 정규직 노조의 파업이 9월 7일부터 점거파업으로 발전했지만, 사내하청 노조는 정규직 노조의 만류로 점거파업에 합류하지 못했다. 옥쇄파업을 진행하면서 한라중공업 노동조합은 매일 야간집회와 조합원 교육프로그램을 통해 현장노동자를 단련시켰지만, 하청이나 비정규직 문제는 한 번도 다루지 않았다. … 민주노총 광주전남지역본부가 중심이 된 한라중공업 파업지지와 경찰투입 저지를 위한 목포역 천막농성 기자회견문과 민주노총 기자회견문에 ‘하청노조의 활동보장과 하청의 직영화’라는 문구가 들어갔을 뿐이고, 현장 안에서 개최된 민주노총 집회 때 했던 한 번의 발언만이 하청노조가 한라중공업노조 파업투쟁에 공식적으로 참여한 유일한 경우였다.[1] 1999년 11월 재능교육 학습지교사들이 노동조합을 건설했다. 재능교육교사노조는 설립 후 3주 만에 1천2백여 명을 조직해서 32일간 파업을 전개함으로써, 비정규직의 대중적 조직화가 가능함을 확인한 첫 사례가 됐다. 2000년 7월에는 특수고용 노동자 최초로 단체협약을 쟁취했다.[2] 2000년 4월 부산지역일반노조가 ‘노동자는 하나다’라는 슬로건 아래 결성됐다. 기존 산별노조의 한계를 넘어서서 업종·사업장·고용형태에 상관없이 지역을 기반으로 중소·영세·비정규직 노동자들을 조직하는 새로운 형태의 노동운동을 표방했다. 2001년에는 창원, 진주, 서울 등에도 일반노조 설립이 이어졌다. 우리에게 노동조합은 그림의 떡이었다. 중소 영세·하청기업 노동자 및 임시·계약직, 파견·용역노동자에게 정규직노동자들의 노조활동은 아무런 관련이 없었다. 그러나 우리에게도 노조는 이제 더 이상 남의 이야기가 아니다.[3] KBS 등 방송사의 파견노동자들이 파견법 시행 2주년을 앞둔 2000년 5월 해고예고통보를 받고 방송사비정규노조를 결성했다. 방송사들은 2년마다 파견노동자를 교체했지만, 노조가 끈질기게 싸운 결과 2004년 KBS의 운전직 파견노동자를 KBS 자회사에 직접고용하게 했다. 방송사비정규노조의 투쟁은 파견법의 실태를 폭로하고 파견법 철폐의 요구를 대중화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2000년 6월 롯데호텔노조가 ‘일방중재조항 폐지, 임금 인상, 계약직 정규직화’를 요구하며 파업에 돌입했다. 김대중 정권은 술을 마신 전경들을 투입해 롯데호텔 농성장을 강제진압 했는데, 임산부에게까지 무차별적인 폭력을 휘둘렀다. 74일 동안 파업을 이어간 롯데호텔노조는 ‘3년 이상 근속한 계약직의 정규직화’를 쟁취했다. 역시 2000년 6월 물류센터의 파견노동자를 조직한 이랜드노조가 ‘불법도급전환 반대, 임금 인상, 근무조건 개선, 비정규직 정규직화’를 요구하며 파업에 돌입했다. 2001년까지 265일 동안 파업을 이어간 이랜드노조는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끈질긴 연대투쟁을 통해 ‘3년 이상 근속한 비정규직의 정규직화’를 쟁취했다. 2000년 9월 전국건설운송노조가 설립돼 레미콘 노동자 2천8백 명이 가입했다. 2001년 4월부터 12월까지 여의도에 레미콘 차량 수백 대를 집결시켜 놓고 노조 인정 및 단체협약 체결, 매주 일요일 휴무 등을 요구하며 전면파업을 전개했다. 파업을 통해 사업장마다 상당한 운송비 인상의 성과를 거뒀지만, 수십억의 손배가압류를 짊어져야 했다. 2000년 11월 ㈜SK의 저유소에서 인력파견업체 인사이트코리아 소속으로 2년 동안 일해 온 노동자들이 ‘계약직으로 신규채용’하겠다는 SK측 제의를 거부했다가 해고되자 노조를 결성하고 소송을 제기했다. 인사이트코리아 노동자들은 끈질긴 투쟁 끝에 2003년 대법원에서 위장도급이기에 실제로는 ㈜SK가 직접 고용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판결을 통해 승리했다. 1998년부터 정규직 1만여 명을 강제 명예퇴직으로 내몬 한국통신은 2000년 6월부터 11월까지 전국의 계약직 7천 명 전원에게 해고를 통보했다. 오랫동안 정규직이 될 희망을 안고 저임금과 차별을 견뎌 온 계약직 노동자들은 2000년 6월 한국통신계약직노조를 설립한 뒤, 12월 13일부터 원직복직과 임금 현실화를 내걸고 파업투쟁에 나섰다. 정규직으로 구성된 한국통신노조가 18일부터 강제 명예퇴직 철회와 민영화 중단을 요구하며 사흘 동안 파업에 나섰을 때 계약직 노조는 당연히 연대투쟁을 기대했지만 정규직 노조는 연대를 거부했다. 계약직 노조는 28일 한국통신 본사 2층 로비를 점거했다. 2001년 1월 16일에는 한강철교 고공농성에 나섰다. 2월 1일에는 정규직화 쟁취로 파업의 목표를 올렸다. 3월 9일 새벽 목동전화국을 점거했다. 5월 8일 114를 담당하는 정규직들이 분사화에 맞서 파업에 돌입했다. 계약직 노조는 각 지역에서 114를 담당하는 계약직들을 조직했다. 6월 11일 114를 담당하는 계약직도 파업에 돌입했다. 그러나 16일 114 정규직들은 집단적 전환배치와 징계 최소화를 조건으로 분사화를 수용하면서 파업을 끝냈다. 공동투쟁을 해왔던 계약직들과 아무런 상의도 없었고, 합의안에 114 계약직들에 대한 어떤 언급도 없었다. 8월 28일 계약직 노조는 국회 의원회관 옥상에서 기습농성을 벌였다. 10월 28일에는 국회 본회의장에 진입해서 ‘한국통신 계약직 문제 해결하라’고 절규했다. 한국통신 계약직 노동자들은 처절한 투쟁을 전개했지만 돌파구를 찾지 못했다. 2002년 5월 12일, 노조 해산을 조건으로 도급업체 취업 알선을 수용하며 517일간의 투쟁을 마무리했다. 2001년 캐리어사내하청노조는 사내하청 600명 가운데 450명을 조직한 뒤 정규직 전환을 내걸고 투쟁에 나섰다. 애초 사내하청 노조의 조직화를 적극 지원했던 정규직 노조는 회사가 자본을 철수하겠다고 위협하자 고용불안 위기의식에 빠져 태도를 정반대로 뒤집어 사내하청 노동자들을 탄압했다. 4월 26일 투쟁하는 사내하청들을 정규직들이 회사 밖으로 내쫓았다. 5월 1일에는 농성중인 사내하청들에게 정규직 구사대가 심각한 폭력을 행사했다. 캐리어는 구사대 폭력, 파견법 위반, 블랙리스트 작성 등으로 사회적 질타를 받게 되자 7월에 사내하청 74명의 정규직화를 발표했다. 그러나 정규직화 명단에서 노조활동 적극 가담자 30여 명을 제외하고 하청업체 관리자를 포함하는 등 사내하청 노조를 부정하는 성격의 조치였다. 비정규직 노조운동을 태동시켰던 치열한 투쟁들이 2001년까지 대부분 패배한 가운데 2002년에는 이렇다 할 투쟁들이 거의 진행되지 않는 소강상태를 보였다. 그러나 2002년은 사회적으로 비정규직 문제의 심각성이 본격적으로 공론화되는 시기였다. 특히 12월 치러진 대통령 선거 공간에서 ‘동일노동 동일임금’ 등 비정규직 문제 해결 방안에 대한 논란이 주요한 정치적·사회적 의제로 등장했다. 비록 조직적인 저항이 잠시 주춤해졌지만, 비정규직의 급격한 확산과 극심한 차별·억압에 대한 대중적인 분노가 밑바닥부터 들끓고 있었다. 많은 비정규직 활동가들은 지난 투쟁의 패배로부터 교훈을 끌어내고 새로운 대중적 분출을 준비하면서 여러 비정규직 현장에서 수면 아래의 조직화 작업을 진행하고 있었다. 2002년에 비정규직 노조운동은 겉으로는 소강상태를 보였지만, 사회적 조건 성숙이나 주체적 준비라는 측면에서 속으로는 발전을 이어가고 있었다. 2) 2003~07년 비정규직 투쟁 2003년 이후 비정규직 노조운동은 한국 사회에 뚜렷이 모습을 드러냈다. 제조업과 건설업을 비롯한 여러 영역에서 새로 비정규직 노조들이 결성됐고 대중적인 투쟁들이 펼쳐졌다. 새롭게 등장한 비정규직 주체들은 그 규모와 범위, 파급력에서 이전 시기를 훨씬 뛰어넘었다. 새로운 주체들이 나타나자 그동안 힘겹게 조직을 유지해 왔던, 주로 특수고용과 공공부문의 직접고용 노동자들로 이루어진 기존의 비정규직 노조들도 새롭게 활기를 띠었다. 지입제 차주로서 화물차를 운행하는 특수고용 노동자들이 2002년 전국운송하역노조 산하 화물연대를 결성한 뒤 2003년 5월 도로비 인하, 유가 인하, 지입제와 다단계 알선 폐지 등을 요구하며 파업에 나섰다. 화물연대 파업은 전국의 물류시스템을 마비시키며 사회적으로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고, 노정 합의를 이끌어냈다. 화물연대는 하반기에도 다시 파업에 나섰지만 노무현 정권의 집중적인 탄압을 받고 패배했다. 2003년 11월 노무현 정권이 화물연대 파업에 대처할 방안으로 화물자동차운수사업법에 업무개시명령 제도 도입 안을 제출하자 여야 합의로 신속히 법제화됐다.[4] 2003년에는 현대자동차 아산공장과 울산공장, 금호타이어, 현대중공업 등 대공장 사내하청 노조들이 속속 건설됐다. 현대자동차 전주공장과 기아자동차 화성공장 등에는 사내하청 노동자들의 모임이 만들어졌다. 2004년 2월 현대중공업 사내하청 노동자 박일수의 분신자결은 그가 남긴 생생한 유서와 함께 사회적으로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하청노동자도 인간이다. 사람답게 살고 싶다. 어차피 하청비정규직 노동자일 수밖에 없는 나의 신분에 한 점 부끄럽지 않다. 노동자신분에 보람과 긍지, 자부심도 있었다. 하지만 한 인간으로서 이 사회에 또는 현대 ××공장에 하청 비정규직 노동자로 산다는 것은 인간임을 포기해야 하는 것이며, 현대판 노예로 살아가야 하는 것이며, 기득권 가진 놈들의 배를 불려주기 위해 제물로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 나는 더 이상 참을 수 없다. 현대 ××공장에서 벌어지고 있는 부정과 부패, 착취, 비리. 직영 노동자들이 하청 비정규직 노동자에게 대하는 행패와 멸시. 고위관리직 이사부터 하위관리직 팀장 반장까지 안 썩은 곳이 없고 상납이라는 추악한 고리에 향락접대에 연결 안 된 ××들 없다. 윗물이 그러하다 보니 협력업체 총무경리까지 노동자임금 도둑질하기에 혈안이 되어 있다. 이런 현실 피해자는 하청노동자다. 상납되는 검은 돈은 하청 비정규직 노동자의 피를 빨고 돈 잔치를 하고 있고, 향락 접대비도 하청 비정규직 노동자 땀과 피로 술 퍼마시고 ××하는 것이다. … 대한민국 노동법은 자본을 위한 법이고 하청 비정규에게 생색만 내는 노동법이다. 현대 어용 노동조합은 그네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한 노동조합이고 노동자는 하나다는 원칙은 말장난일 뿐 열악한 하청 비정규직 노동자는 안중에도 없다. 태어나면서 귀족노동자 하청노동자로 태어나지 않았고 어떡하다보니 직영노동자 하청 비정규직 노동자로 살 뿐인데 직영노동자라 하여 하청 비정규직 노동자를 기만하고 멸시할 자격은 없다. 이런 현대 ××같은 풍토가 개선되어야 한다. … 이런 현실이 세상에 밝혀지고 대수술이 없는 한 하청 비정규직 노동자는 희망과 발전은 기대할 수 없다. 하청 비정규직 노동자에게는 손가락이나 빨아라라는 차별경영을 비통한 마음으로 당하면서 또 한 번 상대적 빈곤감과 박탈감을 피눈물 나는 심정으로 울분을 달랬어야 했다. … 현대 ××공장 사내 복지시설을 하청 비정규직 노동자가 사용할 수 있는 곳은 식당, 샤워실, 화장실, 커피자판기다. 그 많은 복지시설은 직영노동자만 사용한다. 직영노동자 탈의실과 하청노동자 탈의실에서부터 소외감을 갖는다. 하청노동자는 컨테이너 박스에서 옷을 갈아입고 한여름 점심시간 쉴 곳이 없어 그늘 찾아 헤맨다. 한겨울 점심시간 쉴 곳이 없어 바람피할 곳을 찾아 헤맨다. 직영노동자는 시설 잘되어있는 건물내부에 휴식을 취한다. 이렇듯 직영노동자에 비해 하청 비정규직 노동자는 차별을 받는다. 직영노동조합 단체협약을 보면 백가지도 넘는 복지혜택, 문화의료혜택, 자녀교육혜택, 주거혜택 헤아릴 수 없이 많지만 하청 비정규직 노동자는 정해진 시급, 일급 이외에는 아무 것도 없다. 하청 비정규직 노동자 90%가 불법파견근로현장에 투입되다 보면 직영노동자에게 작업지시 받는다. 작업하기 더럽고 어렵고 힘든 곳은 하청노동자에게 투입시킨다. 이토록 비인간적이고 불합리적인 대우를 받고 있는 것이 현대 ××공장 현실이다. 직영노동자 몇백명 중에 한두 사람은 인간적인 사고와 공동체의식, 인격적으로 노동자는 하나라는 생각, 측은지심 시각으로 하청 비정규직 노동자의 현실을 가슴 아프게 바라보는 직영노동자 없지는 않다. 그러나 그것은 빙산의 일각이다. 그리고 하청 비정규직 현실이 변하는 데에는 도움이 안 된다. 그리고 현대 ××공장 외부 일반적인 사람들, … 이 나라 지도자들, 법을 집행하는 고급공무원들, 노동자 바람박이를 해줘야할 노동부 공무원들도 몰라서 안하고 알아도 안한다. 이것이 대한민국 현실이다. 그렇다고 하여 세상이 이렇다 하여 나도 그렇게 살 수는 없다. 이 나라가 요만큼이나 민주화가 된 것은, 세상이 쥐꼬리만큼 변하게 된 것은, 이 사회 구조를 아파하고 정직한 노동의 대가가 안 주어지는 이 현실에 약자가 보호받아야 되는 법이 외면한 현실에 … 그럼에도 약해지지 않고 타협하지 않고 모순된 현실을 개선하고자 개혁하고자 사랑하는 처자식 남겨두고 홀로 외롭게 세상을 고통스럽게 떠나버린 열사들이 있었기에 쥐꼬리만큼이나마 이 사회가 노동자의 환경이 변한 것이다. 나도 앞서간 열사들의 고뇌와 희생에 같은 심정이다. 나의 한 몸 불태워 하청 비정규직 노동자의 열악한 환경이 착취당하는 구조가 개선되길 바란다. 악질 협력업체 사장 박진용 같은 사람이 이 사회에 발붙일 곳 없어야 한다. 부디 하청 비정규직 노동자도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진실된 노동의 대가가 보장되는 일터가 되기를 간절히 소망한다.[5] 2004년 노동부로부터 1만여 공정 전체 불법파견 판정을 끌어낸 현대차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2005년 불법파견 정규직화와 노동조합 인정을 요구하며 전면적인 투쟁에 나섰다. 1월 울산공장의 파업과 잔업거부 투쟁으로 100여명이 해고당하고 납치·폭행과 구속이 줄을 잇는 상황에서도 울산·아산·전주를 합쳐 3천여 명의 조합원을 조직하여 9월까지 현대자동차를 상대로 장기간의 대중적 투쟁을 펼쳤다. 2005년 기아자동차 화성공장의 사내하청 노동자 1천여 명은 정규직 노조의 임단협 투쟁이 마무리된 뒤에도 몇 차례 독자파업을 벌인 끝에 사내하청 노조로서는 처음으로 단체협약을 체결해 냈다. 현대하이스코 사내하청 노동자 1백여 명은 노조 결성 뒤 폐업을 빌미로 대량해고가 자행되자 집단 크레인 농성과 지역연대를 통해 해고자 전원복직, 72억 손해배상 청구 철회, 비정규직 노조활동 보장을 쟁취했다. 하이닉스매그나칩 사내하청 노동자 1백여 명은 노조 결성을 이유로 집단해고를 당한 뒤에도 불법파견 판정을 얻어내며 강고한 장외 파업투쟁을 벌였다. 현대자동차 전주공장, 동희오토, 기륭전자, GM창원공장 등에서도 사내하청 노조가 속속 결성되어 투쟁에 나섰다. 2004년 노조를 건설한 울산의 건설플랜트 노동자 1천여 명이 2005년 단체협약 체결과 노동조건 개선을 요구하며 다단계 하도급 구조에 맞서 원청 SK자본을 상대로 전투적인 가두시위, 고공 점거농성, 집단 상경투쟁 등 강고한 파업투쟁을 76일 동안 벌였다. 울산 건설플랜트 노동자들은 탄압을 이겨냈고, 노동조합은 뿌리를 내렸다. 울산건설플랜트노조는 울산 지역 석유화학 단지의 여천, 온산, 용연 공단 등지의 공장 건설 현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이다. 이들은 배관, 용접, 제관, 비계, 기계, 계전, 보온 등의 직종을 가지고 주로 정유공장과 석유화학 공장, 발전소나 제철소, 조선소 등 국가기관 사업 설비의 건설과 유지 보수를 담당하는 일을 한다. 대부분의 건설플랜트 노동자들은 30년이 넘게 산업 역군으로 불리며 이 나라 경제 성장의 동력으로 일해 왔다. 그렇지만 이들의 근무 조건은 아직도 30년 전과 별반 다를 바가 없다. 새벽밥을 먹고 현장에 오면 탈의실조차 없어 도로에서 옷을 갈아입고, 쇳가루와 시멘트, 가루가 날리는 난장에서 비가와도 피할 곳 없이 밥을 먹고 일했다. 그것도 자기 돈 내서 먹는 도시락이다. 하루 일 마치고도 땀에 젖은 몸 씻을 샤워장은 고사하고 세면장 하나 없이 살았다. 세면장은커녕 화장실마저도 제대로 없는 상황이었다. 상황이 이러하니 근로계약서를 본 사람도 제대로 없고, 퇴직금을 제대로 받아본 이도 드물었다. 근로기준법상의 주휴나 연차, 휴가, 각종 수당 등은 꿈도 꾸지 못하는 실정이었다. 간혹 작업 중에 사고로 다치거나 죽게 되어도 제대로 된 산재 보상을 기대할 수도 없었다. … 계속되는 단체 협상 요구를 무시하고, 업체들은 오히려 사찰과 해고, 노조 탈퇴서 등을 요구하면서 노동조합의 활동을 막고 있었다. 2005년 들어 노동조합은 업체들의 교섭 해태에 대응하기 위해 총파업을 결의하게 된다. 그러나 총파업 첫날부터 조합원에 대한 홍보 활동조차 할 수 없었다. 첫날부터 회사 출입문 앞에서 기다리는 것은 완전 무장한 전투 경찰들이었다. 전투 경찰의 비호 아래 업체들은 파업이 이루어질 수 없도록 대체인력을 투입시키고 있었다. 대체인력 투입에 항의하는 조합원을 경찰들이 막고 있었다. … 계속되는 대체인력 투입과 이를 오히려 보호하고 있는 공권력의 폭력에 나날이 긴장감은 높아갔다. 법에 정해진 노동자의 정당한 단체 행동권마저 가로막고 있는 공권력에 대한 분노가 날이 갈수록 높아졌다. 그리고 파업 대오로 모여드는 조합원들은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다. 오히려 파업이 계속될수록 조합원들의 눈빛과 각오도 결연해져 갔다. … 플랜트 노동자들의 요구는 교섭을 하자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교섭 대상인 업체는 자신들이 교섭 대상이라는 것조차 인정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런 상황을 지도해야 할 노동부와 시청은 플랜트 노동자들의 목소리를 철저히 외면하고 있었다. 교섭이 이루어지지 않는 근본적인 이유는 국내 거대 그룹인 SK의 압력과 건설노조를 무력화하려는 폭력적 공권력에 있었다. … 공권력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조합원들은 더욱 강한 단결력으로 파업 대오를 유지하고 있었다. 공권력은 초반부터 물리력을 통한 파업 와해 작전을 폈으나 이것이 여의치 않자 노골적인 폭력으로 노동조합을 죽이려 들었다. … 계속되는 SK의 교섭 해태와 본질을 왜곡하는 언론의 호도 속에 파업의 정당성을 알리기 위한 결단이 필요한 상황이었다. SK 본사 앞으로 두 차례에 걸친 상경 투쟁을 진행하며 SK의 노동 탄압을 알려내고 있던 노동조합은 마침내 서울 마포 SK건설 타워크레인에 점거 농성을 들어가게 된다. 이것은 전국적인 여론 형성을 위한 결단이었다. 그리고 다음 날인 5월 1일 울산 SK 공장 내 베셀 타워를 다시 점거하게 된다. … 연이은 4월 1일 남부서 폭력 사태, 4월 8일 전 조합원에 대한 시청 폭력 연행, 4월 28일 노동부 앞 폭력 진압, 그리고 5월 5일 남부서에서의 가대위에 대한 폭력 행위까지 노동조합은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계속되는 탄압 속에 살아남기 위해서는 무장을 하고 거리로 나서지 않을 수 없었다. … 5월 17일 단위 노조의 어려운 한계 속에서도 울산 플랜트 노동자들의 파업을 엄호하기 위해 현장의 작업을 멈추고 달려온 여수와 포항, 전남동부경남서부 플랜트 노동자들의 눈물겨운 연대는 지역과 단위노조의 한계를 뛰어넘는 실질적인 연대파업을 만들어냈다.[6] 덤프트럭을 운전하는 특수고용 노동자들이 2004년 건설운송노조 산하 덤프연대를 결성하여 2005년 최대 1만여 명이 참여한 파업투쟁을 세 차례나 벌였다. 산업인력공단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2005년 정규직 전환 및 차별 시정을 요구하며 66일 동안 파업을 벌였다. 철도공사의 자회사에 고용돼있던 KTX 승무원들이 2005년 철도노조에 가입한 뒤 2006년 3월부터 철도공사 직접고용과 정규직 전환을 요구하며 파업을 벌였다. 철도공사, 국회, 국가인권위원회, 서울시장 후보 선거사무소들에 대한 점거농성, 서울역 단식농성, 서울역 고공농성 등 다양한 형태의 투쟁을 이어나간 KTX 승무원들은 2008년 9월 서울역 연좌시위를 마지막으로 대중투쟁을 마무리하고 법률투쟁으로 전환했다.[7] 대구경북건설노조는 2006년 적정임금 지급, 불법 다단계 하도급 철폐, 상습 임금체불 근절 등을 요구하며 6월부터 35일간 파업을 벌였다. 포항건설노조는 주5일제 시행과 불법 다단계 하도급 철폐를 요구하며 7월부터 83일간 파업을 벌였다. 이 과정에서 포스코의 대체인력 투입에 반발하며 8일 동안 포스코 본사 점거농성을 벌였다. 2007년 7월 1일 기간제법 시행을 앞두고 이랜드그룹이 계약직의 외주화를 추진하자, 그에 맞서 이랜드일반노조가 6월 30일 홈에버 상암점 점거를 시작으로 510일간 파업을 이어나갔다. 같은 이랜드그룹에 맞선 뉴코아노조는 뉴코아 강남점을 점거하면서 이랜드·뉴코아 공동투쟁을 만들어 나갔다. 기아자동차 비정규직지회는 원청과의 단체교섭을 요구하며 8월말 9일간의 공장점거 파업을 전개했다. 비정규직 노조들은 ‘전국비정규직노동조합연대회의’(전비연)라는 전국 조직으로 결집하여 단위노조의 투쟁을 넘어 사회정치적 투쟁에 나섰다. 비정규직들은 열악한 노동조건의 개선을 위해, 그리고 노조를 유지하기 위해 ‘비정규직 고용’ 자체의 문제점을 부각시켜야 한다는 점을 배우게 되었다. 처음에는 자연발생적으로 시작된 비정규직 노조 간 ‘품앗이 투쟁’이 차츰 목적의식적으로 법제도적 탄압 돌파를 위한 ‘비정규직 공동투쟁’을 조직하려는 노력으로 발전해갔다. 이런 노력으로 2000년 민주노총 서울본부에 서울지역비정규직노조연대회의가 구성되었고, 2002년 민주노총에 특수고용대책회의가 구성되었다. … 2003년 8월 전국비정규직노조대표자연대회의 구성을 위한 첫모임이 진행되었다. … 2003년 9월 27일 ‘전국비정규직노조대표자연대회의(준)’가 발족했고, 첫 번째 주요 사업으로 전국비정규직노동자대회를 개최하기로 하였다. … 2003년 10월 26일 열린 전국비정규직노동자대회에서 당시 근로복지공단 비정규직노조 이용석 광주본부장이 분신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 이렇게 하여 노동법상 근로자성 인정을 공동요구로 하는 특수고용 노조, 원청의 사용자책임 인정을 공동요구로 하는 간접고용 노조, 올바른 공공부문 비정규직 대책을 공동요구로 하는 공공부문 노조 등 법제도 개선 요구를 중심으로 하는 비정규직노조 연대운동의 질서가 형성되고, 느슨한 네트워크를 구성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2004년 1월 30~31일 열린 비정규직 간부수련회를 통해 전국비정규직노동조합연대회의(준)이 출범하였다.[8] 전비연을 중심으로 한 비정규직 주체들은 2004년 9월 열린우리당 점거농성, 11월 국회 타워크레인 점거농성 등 ‘비정규직 관련 개악법안 저지와 비정규직 권리보장 법안 쟁취를 위한 투쟁’을 앞장서 이끌면서, 2004년 11월 민주노총이 비정규직 법안 관련 총파업에 나서도록 끌어내는 등 사회적 영향력과 운동적 위상을 빠른 속도로 강화해 나갔다. 2005년 10월 16일, 6만여 명의 조합원을 포괄하는 비정규직 노조들의 연대체인 ‘전국비정규직노동조합연대회의’가 정식 발족했다. 전비연은 2006년 8월 25일 사내하청노조 공동 파업을 조직하는 등 비정규직 공동투쟁을 조직하기 위해 노력했다. 3) 2003~06년 현대차 비정규직의 불법파견 정규직화 투쟁 2003년, 현대차에서 비정규직이 스스로 노조를 설립했다. 발단은 3월 19일 현대차 아산공장에서 한 사내하청 노동자가 월차를 쓰려고 했다가 하청업체 관리자에게 식칼로 아킬레스건을 공격당하는 식칼테러를 당한 사건이었다. 같은 업체 노동자들로부터 시작된 비공인파업으로 아산공장이 중단됐고, 28일 금속노조 현대자동차아산공장사내하청지회가 결성됐다. 아산공장의 불길은 생산의 주력인 울산공장으로 넘어왔다. 4월 28일 울산공장의 한 사내하청 노동자가 ‘현대자동차 비정규직 인간선언’이라는 유인물을 뿌리면서 사내하청 노동자들의 주체적 단결을 호소한 게 출발점이 됐다. 세계 초일류 기업, 그러나 기계만도 못한 하청 노동자! 세계 초일류 기업을 자처하고 나선 현대자동차는 사상 최대의 흑자를 기록하며 눈부신 질주를 하고 있다. 그러나 몇 십억의 흑자를 내는 현대자동차 내에는 언제 짤릴지 모르는 고용불안과 비인간적 대우에 시달리며 하루하루 고통과 절망 속에 살아가는 하청 노동자들이 있다. 하청이기 때문에 법에 다 나와 있는 노동자의 권리조차도 무시된다. 연차 사용은 그저 꿈이나 꿀 수 있는 것이고 월차 하나 쓰는데도 아쉬운 소리에 온갖 눈치 봐야 한다. 똑같은 공정에서 일한다 하더라도 직영 노동자들에게 지급되는 안전장비를 지급받지 못한다. 작업 중에 다쳐도 쉽게 산재신청을 내야겠다는 하청 노동자는 찾아보기 어렵고 업체와 싸워 산재를 신청했다 하더라도 미운 털 박혀 해고 대상이 되거나 어디 구석으로 전환배치되기 십상이다. 하다못해 기계도 고장나면 기름칠하고 보수하는데 우리 하청 노동자는 쓰다가 고장나면 버리는 소모품과 다름없는 취급을 당한다. 명절에는 그저 불효자가 되어 고향길에 오르고, 더럽고 힘들고 어려운 공정에서 뼈 빠지게 일해도 임금은 정규직 노동자들의 40%도 되지 않는다. 2·3차 업체 하청 노동자들의 상황은 더 열악하다. 석면을 다루는 공정에서 일을 하더라도 환풍시설 하나, 몸을 씻을 시설 하나 없다. 딱 최저생계비만큼 지급되는 임금은 근속연수가 2년이 되어도 인상될 줄 모르며, 일년 전에 지급한다던 안전화는 아직까지도 소식이 없다. 말만 만근이지 만근수당은 어느새 철야만근수당이 되어 정취를 하더라도 철야를 하지 않으면 지급되지 않는다. 법에도 나와 있다는 취업규칙은 구경조차 한 일이 없다. 왜 우리가 죄인처럼 머리를 조아려야 하는가? 명절 때면 고향에서 만난 선후배나 어르신들이 “어디에 다니냐”고 물으면 아주 자랑스럽고 당당하게 “저는 현대자동차 사내하청에 다닙니다”라고 자신있게 대답할 하청 노동자가 과연 얼마나 되겠는가? 대부분이 적당한 말로 얼버무리거나 그도 아니면 현대자동차에 다닌다고 할 것이다. 왜 이렇게밖에 대답할 수 없는 걸까? 그것은 우리 스스로가 비참함을 느끼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우리 하청 노동자의 비참한 현실은 로또복권 당첨률에 맞먹는 본청의 신규사원 채용공고에 대한 실낱같은 희망으로, 정규직 노동조합에 대한 막연한 기대만으로 바꾸어 낼 수 없다. 비정규직 노동자여, 이제 우리도 인간임을 선언하자! 하청노동자에게 가해지는 부당함, 죄인 아닌 죄인으로 숨죽이고 고개 숙이며 살아온 많은 날들. 이러한 굴레들은 그저 앉아서 기다린다고 바뀌지 않는다. 하청 노동자 스스로 우리의 권익확보와 노조건설의 일념으로 일어설 때만 우리는 당당한 인간으로, 당당한 노동자로 살아갈 수 있다. 한 사람 한 사람 개개인은 힘이 없다. 그러나 이 한 사람 한 사람이 모여 목소리를 높이고 싸워 나간다면 하청 노동자에게 가해지는 그 어떤 부당함에도 맞설 수 있다. 아산 하청 노동자들은 당당하게 노동조합을 만들었다! 지난 3월 19일, 현대자동차 아산공장에서는 월차 한 번 쓰겠다던 하청 노동자에게 폭행이 가해지더니 급기야는 발목을 칼로 긋는 천인공노할 식칼테러가 발생하였다. 이것이 단순히 어느 또라이같은 관리자의 행패가 아님을 우리는 분명하게 알고 있다. 아산의 하청 노동자들은 월차라도 한 번 쓰려면 병원 진단서에 시말서·반성문에 온갖 아쉬운 소리를 해야만 했다. ‘하청’이라는 이유만으로 당연한 권리들도 행사하지 못한 채 죄인처럼 머리를 조아려야 했다. 세화산업 노동자들은 동료에게 가해진 테러에 분노하며 하나 둘 모여들었다. 어떻게 하면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해야만 죄인처럼 살아야 하는 지금의 현실을 바꿀 수 있을까? 답은 하나였다. 모두들 일손을 놓고 우리도 인간이라며 목청을 돋구어 부당함에 맞서기 시작했다. 하나의 업체에서 끊긴 컨베이어는 서서히 멈추어 갔고 아산공장 전체 가동이 중단되었다. 그리고 3월 28일 이 하나하나의 힘들이 모이고 모여 ‘아산 하청 노조’(금속노조 현대아산사내하청지회)가 만들어졌다. 사측에서는 온갖 협박, 공갈로 하청노조를 말살하려 하지만 아산의 하청 노동자들은 스스로의 피와 땀으로 만든 노동조합을 지켜내기 위해 죽을힘을 다하고 있다. 아산에서의 하청노조 건설은 우리 하청 노동자들도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이제 아산 하청 노동자들이 보여준 그 희망을 우리의 것으로 만들어 나가자! … 비정규직도 인간이라고 우리의 목소리를 외칠 수 있기까지 우리는 얼마나 숨죽여 기다려 왔는가! 바로 지금이야말로 현대자동차 하청 노동자들이 인간다운 삶을 위해 떨쳐 일어설 때이다. 앞장서 나서는 것은 늘 외롭고 두려운 것이다. 그러나 동료들의 눈빛 속에 이글거리는 분노의 불길들을 보라! 87년 희생을 각오하고 앞장서 투쟁하는 자들이 있음으로써 오늘날의 정규직 노조가 설 수 있었다. 우리의 힘을 모아 하청 노동자들의 자주적인 조직 ‘현대자동차 비정규직 투쟁위원회’를 결성하여 이제 더 이상 하청 노동자들이 노예가 아님을, 기계에 속한 부품이 아님을 당당하게 보여주자![9] 5월 2일, 80여 명의 사내하청 노동자들이 모여 ‘현대자동차 비정규직투쟁위원회’(비투위)를 결성했다. 비투위 결성 두 달 만인 7월 8일, 127명의 발기인이 모여 ‘현대자동차 비정규직노동조합’을 설립했다. 설립총회를 마친 비정규직노조는 일부 정규직 활동가들의 도움을 받으며 조합원 가입을 받았는데, 24시간 만에 약 500여명이 조합원으로 가입했다. 그러나 노조 건설에 나선 비정규직에게 현대차노조가 준 선물은 비정규직 노조 건설이 “현자노조 결정에 반하는 사항”이므로 “심각한 우려와 함께 … 재고해 줄 것을 강력 희망하며 요구한다”는 내용을 담은 노조홍보물의 배포였다.[10] 현대차노조의 입장이 현장에 알려지자 비정규직노조 가입 흐름은 바로 중단됐다. 현대차노조가 내세운 명분은 노조 규약을 개정해서 비정규직이 현대차노조에 ‘직가입’할 수 있게 하겠으니 기다려 달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비정규직의 독자노조 결성을 방해하는 데 무게가 실린 무책임한 약속이었다. 실제로 비정규직노조는 현대차 단일노조 건설을 추구하는 한시적인 노조임을 규약에 명시하여, 비정규직노조 건설이 ‘직가입’과 상충되지 않음을 분명히 했다. 반대로 현대차노조는 2006년 6월 산별노조 전환 전까지 ‘직가입’을 위한 규약 개정을 시도조차 하지 않았으며, 산별노조로 전환한 뒤에도 금속노조의 공식 방침인 ‘1사1조직’에 따른 조직편제(비정규직지회와의 통합)를 세 차례나 부결시켰다. 현대차노조는 비정규직의 독자적인 대규모 조직화를 두려워했다. 언제든 비정규직을 정규직 고용의 방패막이로 사용할 수 있으려면, 비정규직이 무기력하게 미조직 상태로 있어야 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현대차에서는 신차 투입으로 사업부 차원에서 맨아워 협상을 할 때마다 거의 매번 수십에서 수백 명의 사내하청이 정규직 노사의 합의에 의해 정리해고 당해야 했다.[11] 이런 일이 사내하청 대규모 투입 이후 사업부를 번갈아 가며 1년에 한두 차례씩 꾸준히 발생했으며, 심지어 2010년 대법원의 불법파견 판결 이후인 2011년에도 발생했다. 어려운 조건에서 활동을 이어가던 비정규직노조는 2004년 불법파견 진정을 주요 사업의 하나로 추진했다. 2003년 12월 금속연맹 정기대의원대회에서 2004년 상반기 주력사업으로 결의된 ‘릴레이식 불법파견 진정사업’의 일환이기도 했다. 비정규직노조는 불법파견을 진정한 이후 이를 입증하기 위해 현장 자료들을 광범하게 수집, 제출하는 등 치열한 노력을 펼쳤다. 현대차노조도 나중에 불법파견 진정에 합류했다. 비정규직노조가 제기한 불법파견 판정이 유력해지자 회사는 다시 한 번 비정규직노조의 주력을 현장에서 제거하려는 계략에 나섰다. 2004년 7월 회사와 5공장 대의원회는 42개 공정을 직영화하기로 합의했다. 이 과정에서 비정규직에 대한 고용보장 또한 합의했지만, 회사는 이를 악용했다. 42명 정리해고자 명단에 안기호 위원장을 비롯한 핵심 활동가들을 다수 포함시킨 것이다. 7월 23~24일 결국 정리해고가 단행되자, 해고당한 조합원 11명은 7월 27일부터 산타모 식당 앞에서 무기한 철야농성에 돌입했다. … 5공장 비정규직 정리해고가 불법파견 판정을 눈앞에 두고 비정규직노조의 주력을 제거하려는 회사의 계략임이 널리 알려지면서, 정규직 활동가들도 이 투쟁에 점점 공감하고 나섰다. … 기나긴 추석휴가를 무사히 돌파해 냄으로써, 5공장 비정규직 해고자들의 투쟁은 승기를 잡았다. 5공장 비정규직 정리해고 철회투쟁은 어느덧 민주노총과 민주노동당을 비롯하여 전국의 수많은 노동자들의 시선을 모으는 투쟁이 되었다. 10월 5일에는 이수호 민주노총 위원장이 직접 지지 방문에 나서기도 했다. 마침내 10월 7일, 회사와 현대차노조 사이에 합의가 이뤄지면서 5공장 정리해고 철회 투쟁은 승리로 끝났다. 비정규직노조 안기호 위원장의 단식투쟁이 38일차에 이른 날이었다. 5공장 비정규직 정리해고 철회 투쟁은, 불법파견 판정 앞에서 비정규직노조의 주력을 지켜냈다는 의미도 있지만, 사실 그 이상의 의미를 갖고 있었다. 만일 5공장 비정규직 정리해고가 통용됐다면, 회사는 이후 불법파견 해법이랍시고 소수 공정의 정규직화를 내걸고 수시로 비정규직 노조간부들을 정리해고하는 탄압을 자행할 수 있었을 것이다. 5공장 비정규직 정리해고 철회 투쟁은 회사가 더 이상 그런 술책을 쓸 수 없게 차단해 냈다는 의미가 있었다.[12] 결국 12월 16일, 노동부가 현대차 울산공장 101개 업체 7천 175명, 아산공장 12개 업체 1천 109명, 전주공장 12개 업체 950명 등 현대차 국내 생산공장 세 곳 모두에서 125개 업체 9천 234명이 불법파견이라고 판정했다.[13] 거대 자본인 ‘현대’가 현대자동차 산하 하청업체 노동자들을 전원 불법파견 형태로 고용하고 있었던 사실이 드러났다. … 이번 판정결과는 민주노총에서 주장해온 제조업 사내하청은 곧 불법파견이라는 사실을 입증해준 것이며, 현대자동차가 정규직으로 고용해야 할 노동자 1만여 명을 불법적인 파견근로 형태로 사용함으로써 엄청난 초과착취와 차별을 자행해왔음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는 사례이다. … 민주노총은 지난 1998년 이른바 ‘파견법’이 시행된 이후 현장에서 도급을 위장한 무수한 불법파견이 발생하고 있다고 제기해왔다. 우리는 그동안 이를 모르쇠 해오던 행정관청이 뒤늦게 불법의 확인과 시정에 나서고 있는 사실을 주목하고 있다. 행여 이러한 노동부의 움직임이 파견업종 전면 확대를 핵심으로 하고 있는 파견법 개정안의 정당성을 확보하려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지울 수 없다. … 파견업종 전면 확대와 불법파견에 면죄부를 주는 정부의 비정규 관련 법안은 즉시 폐기되어야 한다. … 민주노총은 다음과 같이 요구한다. … 현대자동차는 이미 법적인 지위는 사실상 정규직이고, 현대자동차의 노동자인, 불법파견으로 판정 난 전원을 즉각 직접고용·정규직화 하라![14] 현대차 비정규직노조는 2005년 불법파견 정규직화 투쟁을 대대적으로 전개해나감으로써 비정규직 조직화의 물꼬를 새롭게 트고자 했다. 불법파견 철폐와 정규직화를 내걸고 1월 18일부터 파업농성을 벌이며 처절한 투쟁을 전개했다. 1월 18일 5공장 원·하청 노동자 200여 명이 출근투쟁에 참여했다. 출근투쟁을 마친 비정규직 대오는 의장52부 대흥기업·평원산업 탈의실로 이동하여 파업동참을 설득했다. 의장52부 비정규직들은 이미 그 전날 방문 때부터 파업에 합류할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었다. 결국 도장5부 50여 명, 의장52부 50여 명, 의장51부 중심의 기존 선봉대 20여 명 등 총 120여 명이 파업을 결행하기로 결의가 모아졌다. 탈의실에서 농성투쟁이 시작됐다. 처음에 합류하지 못했던 노동자들이 원·하청 관리자의 탄압을 뚫고 속속 결합하면서 파업대오는 150여 명으로 늘어났다. 비정규직 150여 명이 전격 파업에 들어가자 52라인은 가다서다 하다가 10시경 완전히 멈춰 섰다. … 5공장이 전격 파업에 돌입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1·2·3공장 비정규직들은 20일로 예정됐던 잔업거부를 이틀 앞당겨 18일부터 바로 돌입했다. 1·2·3공장을 망라해서 주간조 420명이 잔업거부에 동참했다. 잔업시간에 1·2·3공장 라인 또한 끊어졌다. 오후 6시 5공장 정문 앞에서 잔업을 거부한 비정규직 대오들이 집결하여 집회를 열었다. 집회를 마친 대오는 5공장 농성장으로 합류하여 전체 결의대회를 가졌다.[15] 18일 오전 8시부터 5공장 의장부 업체 탈의실에서 시작된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파업투쟁은 뜨거운 열기로 가득 차 있었다. 처음에 80~90명으로 시작된 파업결의대회가, 원하청 관리자의 탄압을 뚫고 속속 결합하는 주간조 동지들로 결국 150여 대오로 불어났을 때, “우리 비정규직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과 투쟁의지로 탈의실 전체가 후끈 달아올랐다. 곧이어 150여 노동자들은 4개 조로 나뉘어 이번 파업투쟁의 규율을 스스로 정하고 파업투쟁 승리를 위한 실천방침 토론을 전개했다. 각자 자신의 조에 명칭을 정했는데, 이름하여 ‘불사조’, ‘사생결단조’, ‘무적탱크조’, ‘천하무적조’! “바지사장 찢어놓고 우리 권리 우리가 찾자!” “빡씨게 싸워서 우리 모두 승리하자! 무임승차 하지말자!” “눈치 보지 말자! 싸울 땐 싸우자! 정정당당하자!” 각자 특색 있는 구호로 무장하고 조별 깃발을 제작하며 ‘이런 게 바로 노동자들의 힘이구나!’ 하는 것을 배우기 시작했다. 정규직 대소위원들 또한 5공장 비정규직 동지들의 투쟁에 지지엄호를 결정하고 ‘노동자는 하나’라는 원칙을 말이 아니라 실천으로 옮기고 있었다. 이제 시작이다! 5공장 파업을 선봉으로 전 공장으로 확산시키고 원하청 공동투쟁으로 기필코 전원 정규직화 쟁취하자!![16] 그러나 현대차노조는 비정규직노조의 투쟁을 외면했다. 대체인력 투입을 용인하여 비정규직 파업이 무력화되는 것을 방치했고, 관리자·경비들이 수백 명씩 공장 안에 몰려다니며 비정규직에게 집단 폭행을 하는 것도 방치했다. 현대차노조와 비정규직노조가 일시적으로 관계를 개선하고 원하청 연대회의를 결성하여 6월에 공동의 조직화 사업을 진행함으로써 울산·아산·전주 비정규직노조들의 조합원수가 울산 2천 명 등 전체 3천 명 수준으로 확대되기도 했다. 그러나 8월에 비정규직노조가 투쟁에 나섰을 때 현대차노조는 다시 회사의 폭력적 탄압을 방치했다. 2005년 1월 비정규직노조가 5공장 농성투쟁을 시작한 직후부터 회사는 거침없이 폭력을 행사해 왔다. 3월부터는 정규직에게까지 폭력적 노무관리를 확대해 왔다. 회사의 폭력은 너무 심각한 사건이 발생하면 잠시 주춤해졌지만, 얼마 못 가서 바로 재개되는 양상을 되풀이하고 있었다. 회사가 전례 없이 폭력적 노무관리를 전개하자, 정규직 현장 활동가들은 이를 강력히 규탄했다. 다양한 단위에서 출근투쟁을 조직했고, 천막농성을 전개했다. 본관 앞 열사광장에 농성천막 6동이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진풍경이 펼쳐지기도 했다. 그런데 회사의 폭력은 8월 25일 비정규직노조의 파업 직전에 극점에 이르렀다. 비정규직노조 파업의 기세를 꺾기 위한 의도된 폭력이었다. 8월 24일 밤 9시부터 25일 새벽 7시까지 3공장의 2차 하청업체 현대세신과 신한·계림 조합원들 그리고 노조간부들에게 회사는 관리자들을 통해 집단폭행·성추행·납치 등 일련의 폭력을 자행했다. 회사는 그 와중에 비정규직노조 사무국장을 납치하여 집단폭행하고 경찰에 넘기기도 했다. 회사의 극악한 폭력은 다시 한 번 사회적으로 파장을 일으켰다.[17] 마침내 불법파견 철폐 투쟁 과정에서 해고당한 비정규직(류기혁)이 자결하는 극단적인 사태가 벌어졌으나, 그 상황에서조차 현대차노조는 열사니 아니니 하는 논쟁을 일으키며 비정규직 투쟁에 대한 연대를 거부했다.[18] 비정규직노조는 100명 이상의 해고자가 발생한 2005년 투쟁에서 아무 성과를 얻지 못하면서 큰 타격을 입었다. 현대차 비정규직노조는 2006년에도 투쟁을 이어갔다. 비정규직노조는 불법파견 철폐와 단체협약 쟁취를 내걸고 독자적인 임단협 투쟁에 나서 생산라인을 멈춰 세우는 파업을 여러 차례 펼쳤다. 그러나 중재를 하겠다고 나선 현대차노조는 비정규직노조 지도부가 투쟁을 유보한 채 스스로 요구안을 대폭 삭감하고 결국 알맹이 없는 합의에 이르도록 유도했다. 비정규직노조 조합원들이 강력 반발했고, 비정규직노조 위원장의 사퇴와 비상대책위 구성으로 이어졌다. 그런데 비정규직노조 비대위가 재파업을 추진하자 현대차노조가 이를 주저앉히기 위해 모든 영향력을 행사했다. 결국 허리가 꺾인 비정규직노조의 파업은 성사되지 못했다.[19] 2005년의 불법파견 철폐투쟁과 2006년의 독자 임단투가 모두 실패로 끝난 상황에서, 2007년 1월 검찰이 현대차의 불법파견에 대해 무혐의 처분을 내렸다.[20] 많은 조합원들이 노조를 떠나 다시 500명 수준으로 돌아갔다. 현대차 비정규직노조는 대중투쟁 동력을 상실한 가운데 최소한의 집행력도 유지하기 어려운, 깊은 침체 상태에 빠져들었다. 비정규직은 1987년 이전 노동조합이 없던 시절 노동자의 모습을 고스란히 재현하고 있었다. 그런 비정규직이 급격히 증가하여 노동자의 과반수를 차지하게 된 2000년대 초반은 민주노조운동에게 중요한 갈림길이었다. 한편에는 노동조합의 문호를 비정규직에게 과감히 개방하는 길, 다시 말해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노동조합을 위해 기존의 민주노조운동이 역량을 집중하여 적극 지원하고 엄호하는 길이 있었다. 다른 한편에는 기존 조합원의 지위를 지키는 데 몰두하는 길, 다시 말해 비정규직에 대한 자본의 초과착취에 눈감는 또는 심지어 협력하고 담합하는 길이 있었다. 불행히도 후자의 길이 더 일반적인 양상으로 전개됐다. 현대차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전자의 길을 열고자 하는 흐름이 없지는 않았지만, 후자의 힘에 크게 밀렸다. 다만 그 과정은 단순하지 않았다. 노동자 총단결의 길을 열고자 하는 흐름은 비록 세가 밀리긴 했지만 끊임없이 노력했고 도전했다. 덕분에 노동조합은 일방적으로 후자의 길만을 걷지는 않을 수 있었다. 그러나 한계 또한 분명했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투쟁에 정규직노조는 늘 어정쩡한 모습으로 서 있었다. 노골적으로 연대를 저버리지는 않았지만, 진정으로 함께 피땀 흘리고 눈물 적시는 공동의 투쟁 주체이지는 못했다. 2003년부터 본격화된 현대차 비정규직의 단결과 투쟁은 바로 그런 조건 위에서 전개됐다. 노동조합에 가입했다는 이유만으로 하루하루를 사측의 협박과 조롱 속에서 보내야 했던 류기혁의 모습은 대량해고, 징계, 고소고발, 손배가압류, 각종 폭력에 직면해야 했던 비정규직 모두의 모습이기도 했다. 한 때 민주노조운동 전반에서 큰 주목을 받기도 했지만, 그 시절 현대차 비정규직의 투쟁은 결국 패배했다. 류기혁의 죽음은 그 고통스런 패배의 표현이자 상징이었다. 비정규직노조는 점점 사그라졌고 100명에 가까운 해고자를 남긴 채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21] 현대차에서 비정규직 운동은 정규직 운동의 15년 역사를 이어받지 못한 채 밑바닥에서부터 다시 시작해야 했다. 다수의 비정규직은 초보적인 계급의식도 갖추지 못한 채 한 발 떨어져 눈치만 살폈다. 비정규직 운동은 비정규직의 절실한 염원을 담아내긴 했지만, 정규직의 한계를 딛고 넘어설 만큼은 성장하지 못했다. 계급적 단결의 대의를 저버린 정규직의 모습이 튀어나올 때마다 비정규직은 결정적으로 흔들렸고, 결국엔 다시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4) 2004~06년 비정규직 입법과 노사관계 로드맵을 둘러싼 대결 2004년부터 2006년까지 비정규직 입법과 노사관계 로드맵을 둘러싸고 치열한 계급 간 정치투쟁이 전개됐다. 한편에는 노동자들을 대표하여 비정규직 권리보장과 전체 노동자의 온전한 노동3권을 요구하는 민주노총이 있었다. 반대편에는 자본가들을 대표하여 비정규직 확산과 전체 노동자의 노동권 약화를 도모하는 노무현 정권이 있었다. 2003년 노무현 정권은 출범 직후부터 ‘국제기준에 부합하는 방향으로 노사관계제도 개선’을 국정과제로 제시했다. 5월 노동부가 노사관계학자 15명을 위촉해서 ‘노사관계제도 선진화 연구위원회’를 구성했다. 연구위원회는 9월 중간보고와 12월 최종보고를 통해 ‘노사관계 법·제도 선진화방안’(노사관계 로드맵)을 내놓았다. 노사관계 로드맵은 노동관계법 전반에 걸친 34개 과제로 구성됐는데, △노동자 파업권 약화 △사용자 대항권 강화 △정리해고 요건 완화 △부당해고 금전보상 허용 등이 그 요지였다. 9월 중간보고가 나오자 노사정위원회가 10월부터 민주노총의 불참 속에 노사관계 로드맵을 논의했다.[22] 그러나 2004년 4월 한국노총 지도부가 자신들이 지지한 녹색사민당의 총선 패배에 대한 책임을 지고 사퇴하면서 논의가 중단됐다. ◎ 2004년 비정규직 입법 전선의 형성 2004년 2월 출범한 민주노총 이수호 집행부는 노사정 대화를 통한 사회적 교섭에 처음부터 적극적이었다. 다만 이수호 집행부는 기존 노사정위원회를 대체하는 새로운 사회적 교섭기구를 추진하겠다는 방침이었다. 그러면서 △노사정 대등 운영 △기구의 독립성과 합의사항 이행 △산업·업종별 협의 틀 마련을 새로운 사회적 교섭기구의 원칙으로 제시했다. 6월 4일 민주노총, 한국노총, 경총, 대한상의, 노동부, 노사정위원회의 대표자가 참여하는 1차 노사정대표자회의가 열렸다. 7월 6일 2차 노사정대표자회의는 노사정위원회 개편방안에 대해 △노사정위원회 성격 △논의의제 △명칭 △참여주체 △업종별 협의회 등 5개 핵심 쟁점을 놓고 집중 논의를 진행하기로 했다. 한편 7월 12일, 민주노총은 △상시업무 정규직화와 비정규직 사용 제한 △동일노동 동일임금 보장 △파견법 폐지와 불법파견 근절 △특수고용 노동자의 노동권 보장 등을 요지로 ‘비정규직 권리보장 입법안’을 민주노동당[23]을 통해 국회에 제출했다. 이번 입법안은 사회적으로 심각한 비정규노동자 문제 해결을 위해 무분별하게 확산되고 있는 비정규 사용의 억제와, 부당한 차별의 철폐, 권리보장의 방향을 제시하고 있음. … 1) 상시업무 정규직화와 비정규직 사용제한 … 2003년 현재 전체 노동자의 55.4%에 이르는 782만명이 비정규직임 … OECD 국가 중에서도 가장 높은 수준 … 따라서 비정규직 고용을 엄격하게 제한해야 함. 이를 위해서는 ‘상시적으로 필요한 업무’는 정규직으로 고용하고, 객관적이고 합리적인 이유가 있을 경우에만 비정규직을 사용하도록 제한해야 함. 즉, △출산·육아 또는 질병·부상 등으로 발생한 결원을 대체할 경우 △계절적 사업의 경우 △일시적, 임시적 고용의 필요성이 있는 경우 등으로 비정규직(임시직) 고용의 이유를 근로기준법에 명문화 함. [근로기준법 제23조(근로계약기간) 개정] 2) 동일노동 동일임금 보장과 최저임금 현실화 … 2003년 현재 비정규직의 임금은 정규직의 51%임. 다른 노동조건의 차별은 더욱 심해 퇴직금, 상여금, 연장근로수당 등이 적용되는 비정규직은 10~16%에 불과함. 나아가 국민연금, 건강보험, 고용보험 등 사회보험의 경우도 30% 미만의 비정규직만 적용되고 있음. 비정규직이 당하는 이러한 부당한 차별을 없애기 위해서는 동일노동 동일임금을 법적으로 보장하는 것이 절실함. 구체적으로는 △근로형태의 차이를 이유로 고용 및 근로조건상 차별대우 금지 △동일 사업(사업장) 내의 동일가치 노동에 대하여 동일임금 지급 등을 명문화함. [근로기준법 제5조(균등처우) 개정] 3) 파견법 폐지와 불법파견 근절 … 1998년에 제정된 파견법에 따라 그 이전까지 불법이었던 파견용역업체나 도급업체 등에 의한 중간착취를 합법화하고, 도급·사내하청 등의 이름으로 불법파견을 양산하고 있음. 또한 사용자들이 노동법상 사용자의 책임을 결정권한이 없는 파견업체에 떠넘겨 회피함으로써 파견업체(하청업체) 노동자들은 노동법상 권리를 보장받지 못하고 있음. 따라서 파견제를 폐지하고 불법파견을 근절하고 사용사업주가 노동법상 사용자 책임을 질 수 있도록 제도가 개선되어야 함. 이를 위해서 △현행 파견법의 폐지 △불법파견 시 해당 노동자 직접고용 △파견과 도급의 구분 기준 강화 △사용사업자의 노동법상 사용자 책임 명시함. [파견근로자보호등에관한법률 폐지 및 직업안정법 개정] 4) 특수고용 노동자 노동권 보장 … 특수고용 노동자들에게는 노동조합이 인정되지 않거나, 노동조합이 있더라도 사용자들이 노동조합 활동과 단체협약을 부정하는 사례가 빈발하고 있음. 임금·노동조건의 보호와 단결권·단체교섭권·쟁의권 등 노동3권이 부정되어 열악한 노동조건과 사용자의 부당노동행위에 그대로 노출되어 있음. … 따라서 근로기준법과 노동조합법의 ‘근로자 정의’ 규정에서 독립사업장 형태의 노동자를 추가해 명문으로 규정함. 아울러 … 노조활동 등을 이유로 한 ‘도급계약 해지’를 부당노동행위로 규정함. [근로기준법과 노동조합및노동관계조정법 개정][24] 7월 중순, 노동위원회가 서울지하철, 도시철도, 인천지하철, LG정유 등에 잇따라 직권중재를 결정하면서 파업을 불법으로 내몰았다. 21일, 민주노총 이수호 위원장이 “직권중재와 구속 위협에 처해 있는 조합원들과 이라크 파병강행을 막아내지 못한 상황에 대해 책임을 통감”한다며 삭발을 하고 단식농성을 시작했다. 30일 민주노총은 8월 6일로 예정됐던 3차 노사정대표자회의를 “무기한 유보하자”고 각 단위에 통보했다. 8월 17일, 열린우리당 원내대표 천정배가 노사정위원회를 방문해 “노사정위에서 결정된 사안은 국민적 합의로 인식해 최대한 존중하겠다”고 밝혔다. 25일, 민주노총이 중앙집행위원회를 열어 노사정대표자회의를 조속히 재개하고 9월 21일 임시대의원대회에 ‘사회적 교섭방침’ 안건을 상정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31일 열린 민주노총 중앙위원회는 ‘사회적 교섭방침’ 안건의 상정 시기를 2005년 1월 정기대의원대회로 연기했다. 한편, 2004년 9월 10일 노무현 정권이 이른바 ‘비정규직 보호입법’이라는 이름 아래 기간제법 제정안과 파견법 개정안을 입법예고했다. 기간제법 제정안은 기간제 노동자를 3년 이내의 범위에서 보편적으로 사용할 수 있게 허용하는 내용이었다. 파견법 개정안은 파견 기간을 초과한 파견노동자는 직접 고용된 것으로 간주한다는 기존 ‘고용의제’ 조항을 직접 고용해야 한다는 ‘고용의무’로 완화하는 내용이었다. 기간제 근로자 사용기간을 3년 이내로 제한하고, 3년을 초과하여 사용할 경우에는 정당한 이유 없이 계약기간 만료만을 이유로 고용종료 금지 … 파견기간을 기간제 근로 사용기간에 맞추어 최장 2년에서 최장 3년으로 연장 … 현행 고용의제 규정을 고용의무 방식으로 전환하되 불법파견에 대해서도 고용의무 적용[25] 16일, 전국비정규직노조연대회의(전비연) 대표자 15명이 집권여당인 열린우리당 의장실 점거농성에 들어갔다. 전비연 대표자들은 노무현 정권이 제출한 이른바 ‘비정규직 보호입법’을 ‘비정규직 확산법안’이라고 규정했다. 비정규직 당사자들이 법안을 반대하며 열린우리당 점거농성에 들어간 것은, ‘비정규직 보호입법’이라는 그럴싸한 이름을 내걸고 실제로는 비정규직을 대폭 확대하려던 노무현 정권의 위선적 구상에 상당한 타격을 안겼다. 1주일 동안 점거농성을 이어간 전비연 대표자들은 ‘비정규직 확산법안 철회와 비정규직 권리입법 쟁취’를 주장하며 △파견법 철폐와 불법파견 정규직화 △비정규직 사용제한과 상시고용 비정규직 정규직화 △특수고용 노동자에게 노동법·노동3권 보장 △원청 사용자성 인정 △이주노동자 노동허가제 실시를 5대 입법요구로 내걸었다. 전비연 대표자들의 열린우리당 점거농성이 계속되는 가운데 21일 열린 민주노총 대의원대회는 노무현 정권의 비정규직 확산법안 철폐를 위해 11월 하순에 총파업에 돌입하기로 결의했다. 심상치 않다. 11월 노동계 총파업을 앞둔 지금 숨 막히는 긴장감이 흐르고 있다. 10월 10일 전국비정규노동자대회에서 양대노총 위원장은 분노로 치를 떨며 ‘결사투쟁’을 외쳤다. 바로 다음날, 김대환 노동부 장관은 기다렸다는 듯 맞받아쳤다. “총파업은 실정법 위반이다.” 이대로 가면 노사정 대타협은 고사하고 ‘대파국’이 불을 보듯 뻔하다. 으레 그렇듯이 경고도 없이 ‘선제공격’을 날린 건 정부였다. 그런데 그 ‘한방’이 예사롭지가 않았다. 9월 10일 노동부가 발표한 소위 ‘비정규보호법안’이 그것이다. 이 ‘판도라의 상자’가 열리자 사람들의 입이 딱, 벌어지고 말았다. 파견근로의 규제를 사실상 모두 풀어버리고 기간제 근로의 독소조항들도 가득 품고 있었기 때문이다. 법안은 순식간에 노동계를 발칵 뒤집어놓았다. 양대노총은 “말이 비정규직 ‘보호’ 법안이지 비정규직을 일상화하고 정규직 노동자들을 비정규직화 하겠다는 의도”라며 총파업을 선언했다. ‘타협’을 말하던 이들의 입은 얼어붙었다. 말이 필요 없었다. 법안의 문구 하나 하나가 정부의 의지를 대변해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 민주노총 이수호 집행부는 출범 당시부터 사회적 교섭을 강조해왔다. “노무현 정부에게는 최상의 노동계 파트너”라는 평가도 받았다. 그러나 올 초부터 정부의 잇따른 직권중재와 파업에 대한 강경대응이 이어지면서, 분위기는 급속히 냉각되었다. 급기야 8월 31일 민주노총 중앙위원회는 노사정대표자회의에 다시 참석키로 한 중앙집행위의 결정을 뒤집는 일이 벌어졌다. 올 10월 노사정위 복귀가 점쳐지던 이수호 체제는 불과 몇 달 사이 총파업을 결의하는 ‘초강성노조’가 됐다. 사실 9월 초만 하더라도 정부가 민주노총의 노사정위 복귀를 간절히 바라기 때문에 어떤 식으로든 ‘유화 제스처’가 나올 것으로 기대됐었다. 하지만 이제 민주노총은 노사정위에 참여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상황이다. 이번 비정규법안으로 퇴로마저 차단당한 것이다.[26] 11월 26일, 노무현 정권의 비정규직 확산법안이 국회 환경노동위원회에 상정되는 데 맞서 민주노총이 6시간 총파업을 전개했다. 전국에서 15만 7천 명의 조합원이 참여했다. 민주노총은 법안 통과 강행시 12월 2일부터 무기한 총파업에 돌입하겠다고 선언했다. 전비연은 국회 앞 타워크레인 점거농성에 들어갔다. 긴장이 고조된 상황에서 29일, 국회 환경노동위원회가 비정규직 확산법안을 정기국회에서 통과시키지 않기로 결정했다. 민주노총은 12월 2일로 예정했던 총파업을 유보했다. 전비연의 국회 앞 타워크레인 점거농성도 종료됐다. ◎ 2005년 사회적 교섭과 어설픈 타협안 2005년 1월 20일, 민주노총 이수호 집행부는 예정대로 정기대의원대회에 ‘사회적 교섭방침’ 안건을 상정했다. 1998년 민주노총 지도부가 노사정위원회에서 정리해고 도입을 합의해 준 쓰라린 역사를 갖고 있는 상황에서, 게다가 노무현 정권의 반노동자적 성격이 명확하게 드러난 상황에서, 사회적 교섭은 당연하게도 격렬한 반대에 부딪쳤다. 다음날 새벽까지 이어진 대의원대회는 결국 유회됐다. 이수호 집행부는 2월 1일 대의원대회를 재소집해 같은 안건을 다뤘다. 격렬한 논쟁 끝에 토론을 종결하고 표결을 선언한 순간, 대회장은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사회적 합의주의·노사정 담합 분쇄 전국노동자투쟁위원회’(전노투)가 단상을 점거하고 시너를 뿌렸다. 소화기 분말 가루가 자욱하게 분사됐고, 철제의자가 날아다녔다. 몸싸움도 벌어졌다. 언론은 민주노총 대의원대회가 폭력으로 얼룩졌다고 대문짝만하게 보도했다. 이수호 집행부는 3월 15일 대의원대회를 다시 소집했다. 이번에는 개회를 선언하기도 전에 물리적 충돌이 발생했다. 이수호 집행부가 배치한 질서유지대와 전노투를 중심으로 한 사회적 교섭 반대파가 집단 몸싸움을 벌였다. ‘사회적 교섭 폐기’, ‘총파업 조직’, ‘이수호 위원장 사퇴’ 같은 구호들이 대회장에 울려 퍼졌다. 결국 이수호 집행부는 대의원대회를 생략한 채 3월 17일 중앙집행위원회를 통해 노사정 교섭 추진을 결정했다. 1. 대대무산에 대하여 - 대의원대회를 물리력으로 무산시키려는 행동은 어떠한 명분과 정당성으로도 합리화될 수 없는 행위이다. 민주노총의 지도집행력 회복을 위한 강력한 조치가 필요하다. 2. 중집 결정사항 1) 민주노총은 비정규직 보호를 위하여 총파업에 돌입한다. 비정규 개악안 저지와 권리보장 입법쟁취를 위한 4.1 총파업 및 투쟁에 총력 집중한다. 2) 위원장의 책임 하에 비정규관련 노·사·정 교섭틀을 확보하고 전조직적 논의와 의견수렴을 통해 지도집행력을 회복한다. 3) 위원장의 책임 하에 노사정대표자회의를 통해 비정규직 보호법안을 최우선과제로 논의한다. 노사정교섭방침과 관련하여는 추후 적절한 시점에 대의원대회를 소집하여 승인여부를 결정한다.[27] 4월 1일, 민주노총이 비정규 개악안 폐기와 권리보장 입법 쟁취, 불법파견 정규직화를 요구하며 총파업을 전개했다. 13만 조합원이 참여했다. 그리고 6일, 국회 환경노동위원회를 매개로 노사정 교섭이 재개됐다. 노·사·정 대표자회의 결정사항 1. 노사정은 오늘부터 시작된 국회 환노위 주관의 대화가 비정규직 보호입법을 위한 실질적인 논의의 장이 될 수 있도록 한다. 2. 앞으로 실무대화 진행은 환노위 법안심사소위원장이 주관한다. 3. 국회 환노위는 노사정 대화를 최대한 존중한다. 2005년 4월 6일 국회환경노동위원장 이경재, 한국노동조합총연맹 위원장 이용득,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 위원장 이수호, 한국경영자총협회 회장 이수영, 대한상공회의소 회장 박용성, 노동부장관 김대환[28] 이런 상황에서 4월 11일 국가인권위원회가 비정규직 관련 입법안에 대해 의견서를 발표했다. 국가인권위원회 의견서는 노무현 정권이 발표한 비정규직 확산법안과 민주노총이 제출한 비정규직 권리보장 법안의 중간에 위치해 있었다. 그런데 민주노총은 환영의 뜻과 함께 “이번 국가인권위원회의 의견이 현재 노사정대표자회의에서 논의되고 있는 비정규입법안 논의 과정에도 적극적으로 수용되어 비정규노동자의 진정한 보호와 권리보장을 {위한} 제대로 된 법안이 마련되길 기대한다”고 밝혔다. 그동안 특히 사회적 약자의 인권과 관련해 의미 있는 의견을 내온 국가인권위원회가 현재 쟁점이 되고 있는 비정규직 관련 입법안에 대한 의견서를 내놓았다. 우리는 이번 의견서가 비정규직 문제해결에 대하여 핵심적이고 중요한 방향을 제시했다는 점에 주목하고 이를 환영한다. 이번 의견서는 △임시계약직의 사유제한으로 비정규직의 무분별한 사용을 제한하고, △동일가치노동 동일임금 규정으로 차별을 폐지하라는 것이 그 핵심이라 할 수 있다. 중간착취와 불법파견을 낳고 있는 파견제의 폐지안을 내지 않은 점이나 정부가 안을 제출하지 않은 특수고용노동자 노동권 보장에 대한 언급이 없는 등 아쉬운 부분도 없지 않으나 전체적으로 중요한 방향을 제시했다고 할 수 있다. … 정부가 국회에 제출한 안은 국가인권위원회의 이런 권고안의 방향과는 사뭇 다르다. ‘보호’를 위한 법안이라는 겉 표현과는 달리, △임시계약직(기간제) 사용 사유의 무제한 허용 △파견 비정규직의 전면 허용 △동일가치노동 동일임금 규정 없는 실효성 없는 차별해소 방안 △비정규직 노동3권 외면 등을 기조로 하고 있어 비정규직을 더욱 확산하고 차별해소 효과는 미미할 뿐만 아니라, 비정규직의 노동권을 박탈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이번 국가인권위원회의 의견이 현재 노사정대표자회의에서 논의되고 있는 비정규입법안 논의 과정에도 적극적으로 수용되어 비정규노동자의 진정한 보호와 권리보장을 {위한} 제대로 된 법안이 마련되길 기대한다.[29] 이렇듯 ‘환영’과 ‘기대’의 입장을 표명함으로써, 민주노총은 자신의 입법요구를 국가인권위원회 의견서 수준으로 사실상 축소했다. 국가인권위원회 의견서가 배제한 파견법 폐지와 특수고용 노동자 노동권 보장은, 이후 민주노총의 요구에서 사실상 사라졌다.[30] 6월까지 진행된 노사정대표자 교섭은 아무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종결됐다. 8월 26일, 금속연맹이 불법파견 정규직화, 성실교섭, 비정규직 노동기본권 보장을 요구하며 6시간 정치총파업을 단행했다. 9만여 명의 조합원이 참여했다. 10월 6일, 민주노총·한국노총과 경총이 노사정 교섭의 불씨를 다시 살려 보려고 ‘노사 대토론회’를 사상 처음으로 열었다. 한국 경제는 1997년 말 발생한 외환위기를 성공적으로 극복했으나, 최근 수년간 불균형 성장의 또 다른 문제점으로 대기업과 중소기업, 수출부문과 내수부문, 성장산업과 사양산업 등 경제전반에서 양극화가 심화되고 있는 가운데, 노동시장 영역에서도 정규직-비정규직간 격차 확대 등으로 실업자와 근로빈곤층(working poor)의 고통이 심화되는 등 구조적인 취약성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여기에 과거 수십 년 간 정부 주도의 경제성장 정책이 시행되는 과정에서 노사관계 영역에서도 ‘관 주도’의 관행과 문화가 깊이 뿌리내린 가운데 사회적 대화 영역에서 노사 간의 자율적이고 직접적인 노력은 전무한 형편이었습니다. 이것은 우리나라 시민사회의 성숙도와 기업 및 노동운동의 성장과 조응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에서 노사 모두에게 하나의 숙제로 인식되어 왔습니다. 특히 이 같은 주체적 측면의 취약성은 최근 노-정 관계가 깊은 갈등 국면에 빠지면서 사회통합의 주체 구실을 해야 할 노사정이 오히려 갈등과 대립의 문화를 반복하고 있다는 국민들의 비판에 직면하고 있으며, 이로 인해 올해 6월 이후 사회적 대화가 전면 중단되는 등 안타까운 현실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에 양대노총과 경총은 생산과 대화의 실질적인 핵심 주체로서의 자신의 역할을 반성적으로 재인식하면서 우리 사회의 핵심적인 과제들을 놓고 노(勞)와 사(使)가 직접 만나 해법을 찾아보자는 데 뜻을 같이 했고, 이 같은 취지에서 <노사 대토론회>를 개최하게 되었습니다.[31] 그런데 6일, 민주노총 강승규 수석부위원장이 택시운송사업조합연합회로부터 5천만 원 금품을 수수한 게 드러나 긴급체포돼 7일 구속됐다. 이수호 위원장은 11일 ‘하반기 투쟁을 책임진 뒤 조기 선거를 실시하겠다’고 했으나 현장으로부터 강력한 비판과 질타가 줄을 잇자 20일 위원장직을 사퇴했다. 민주노총은 전재환 금속연맹 위원장을 중심으로 한 비상대책위 체제로 전환됐다. 11월 10일, 열린우리당 초청 노사대표자 간담회를 시작으로 민주노총·한국노총과 경총 사이에서 실무급 노사교섭이 진행됐다. 30일 마지막 노사교섭까지 결렬된 날, 한국노총이 정부 법안의 골격을 수용하는 최종안을 발표했다. 1안) 기간제 근로를 1년간 사용한 이후에 갱신되는 1년간은 사용사유를 제한하여 기간제 근로를 2년으로 제한하고 계속 근로기간이 2년을 초과하여 지속된 경우에는 즉시 고용의무를 부과함. 2안) 기간제 근로 계약이 반복갱신된 기간을 포함하여 계속근로기간이 2년을 초과하여 지속된 경우 그 근로 계약은 기간을 정하지 않은 무기근로계약으로 간주함.[32] 민주노총의 비정규직 권리보장 입법안과 노무현 정권의 비정규직 확산법안에서 기간제 관련 핵심 쟁점은 ‘사용사유 제한’이냐, ‘사용기간 제한’이냐에 있었다. 민주노총은 엄격히 제한된 경우에만 기간제 사용을 허용하자는 것이었고, 노무현 정권은 보편적인 기간제 사용을 허용하되 사용기간을 3년 이내로 제한하자는 것이었다. 두 입장은 비정규직의 대대적 확산을 차단할 것이냐 아니면 촉진할 것이냐 하는 점에서 큰 차이가 있었고, 따라서 노·사·정의 사회적 교섭으로는 결코 좁혀질 수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한국노총이 내놓은 1안은 민주노총이 주장하는 사용사유 제한에 입각하되 그 적용을 첫 번째 1년에는 하지 않고 두 번째 1년에만 하자는 것이었다. 2안은 정부가 주장하는 사용기간 제한에 입각하되 그 시기를 3년에서 2년으로 단축하자는 것이었다. 한국노총의 최종안은 형식적으로는 민주노총 안과 정부 안을 절충한 것이었지만 실제로는 정부 안의 손을 들어주면서 민주노총을 고립시키기 위한 안이었다. 1안은 사용사유 제한의 취지를 전혀 살릴 수 없는데다가 현실적이지도 않은 안이었기 때문이다. 다음날인 12월 1일, 녹색연합, 민주언론운동시민연합, 환경운동연합, 참여연대, 한국YMCA전국연맹, 한국여성단체연합, 함께하는시민행동의 7개 시민단체가 ‘기간제 고용을 2년 한도로 허용하고 2년 후 무기계약으로 전환’하는 방안을 ‘비정규직법안 핵심쟁점에 대한 7개 시민단체 조정안’으로 발표했다. 한국노총 최종안의 2안과 같은 것이었다. 역시 민주노총을 고립시키기 위한 행보였다. 지난 1년 동안 민주노총은 투쟁동력을 단호하게 건설해 내는 대신 합리적 타협을 기대하며 사회적 교섭에 매달렸다. 그런데 민주노총이 맞닥뜨린 것은 사회적 교섭 테이블에서 민주노총의 고립이었다. 민주노총은 다시 한 번 민주노총의 입장을 분명히 했다. 우리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절박한 상황을 고려하여 조속한 입법화가 필요하다고 보지만 그 내용 역시 올바른 원칙하에 처리되어야 한다고 본다. 그런 의미에서 다음과 같은 입법 원칙 및 방향을 밝힌다. 1. 정부의 기간제 법안 폐기 및 기간제 엄격 사유제한 … 2. 동일노동 동일임금의 원칙 … 3. 파견법 철폐 및 불법파견 정규직화 … 4. 특수고용 노동자성 인정, 노동3권의 보장 … 5. 간접고용에서 원청의 사용자책임 인정 … 지금 한국노총이 제안하는 수정안은 이러한 원칙에서 벗어나 있기 때문에 비정규직문제의 해결에 실질적인 도움이 되기 어렵다고 판단한다. 현 국면에서 민주노총과의 합의 없이 수정안을 제출하는 것은 공조파기를 의미한다. … 민주노총은 이번 국회에서 비정규권리보장입법을 반드시 쟁취하기 위해 12월 1일부터 진행되는 총파업을 포함하여 모든 노력을 다할 것이다.[33] 12월 1일과 2일, 민주노총은 노사교섭 결렬에 항의하며 총파업을 단행했다. 1일에는 6만 명, 2일에는 2만 명이 참여했다. 5일부터 7일까지는 확대간부 파업을 하면서 3천 명의 상경대오를 조직하여 국회·경총·전경련 앞에서 ‘비정규 악법 국회통과 저지 및 비정규 입법 쟁취를 위한 상경투쟁’을 전개했다. 8일, 다시 총파업을 단행해 6만7천 명이 참여했다. 그런데 8일 국회 환경노동위원회 법안심사소위 논의 과정에서 민주노동당 단병호 의원이 기간제 사용사유를 기존 4개에서 10개로 대폭 확대한 수정안을 제출했다. 1. 출산 육아 또는 질병 부상 등으로 인해 발생한 결원을 대체할 경우 2. 계절적 사업의 경우 3. 사업의 완료 또는 특정한 업무의 완성에 필요한 기간을 정한 경우 4. 그 밖에 일시적·임시적 고용의 필요성이 객관적으로 인정되는 경우 5. 휴직·파견 등으로 결원이 발생해 당해 근로자가 복귀할 때까지 그 업무를 대신할 필요가 있는 경우 6. 학업·직업훈련 등을 이수함에 따라 그 이수에 필요한 기간을 정한 경우 7. 전문적 지식·기술의 활용이 필요한 경우와 정부의 복지정책·실업대책 등에 의해 일자리를 제공하는 경우로서 대통령령이 정하는 경우 8. 수출 주문의 예외적 급증이 발생한 경우 9. 기업의 일시적 업무량이 증가한 경우 10. 안전조치를 위한 긴급한 작업을 위하여 필요한 경우[34] 단병호 의원의 수정안 제출은 민주노총 지도부와 긴밀히 교감한 결과였으며, 한국노총과 사전 조율을 거친 것이었다. 비정규직권리보장입법을 둘러싸고 막바지 교섭이 진행 중이다. 민주노총은 그동안 비정규직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조항으로 기간제 사용시 사유제한과 불법파견 고용의제 등을 계속 주장해왔다. 이번에 입법을 하기 위한 시한이 얼마 남지 않은 상태에서 8일 오전 8시 30분 민주노동당 권영길 대표의 초청으로 양대노총 위원장은 간담회를 갖고 사용사유 제한에 대해 논의하였다. 민주노동당은 사용사유 제한의 원칙은 지키되 그 범위를 10가지로 제한하는 수정안을 제안하였다. 한국노총은 이에 환영의 의사를 표하였고 민주노총 역시 민주노동당과 양노총의 동일한 입장으로 제시되는 것이 현 시기 필요하다고 판단한다. 이제 정치권에서 답할 차례이다. 한나라당과 열린우리당은 어렵게 의견을 단일화해서 제안한 만큼 비정규직 문제의 진정한 해결을 위한다면 당리당략에 의한 접근이 아니라 진정성을 가지고 민생을 위한 정치적 판단을 해야 할 것이다.[35] 사회적 교섭 테이블에서 궁지에 몰린 민주노총은 총파업을 하겠다고 뛰쳐나갔다. 하지만 총파업은 누구도 위협할 수 없는 초라한 수준이었다. 국회라는 교섭 테이블에 다시 돌아온 민주노총은 민주노동당 단병호 의원의 수정안을 통해 어설픈 타협안을 내밀었다. 그러나 민주노총의 의지박약과 무기력을 자인하는 어설픈 타협안은, 노무현 정권도 자본가들도 받아들일 이유가 없었다. 민주노총의 어설픈 타협안은 그동안 주장해 온 사용사유 제한의 정당성을 스스로 약화시켰고, 결과적으로 노무현 정권의 사용기간 제한(보편적인 기간제 사용) 입장을 사실상 수용한 것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8일 환경노동위원회 법안심사소위는 단병호 의원의 협조 아래 한국노총 등의 수정안을 반영한 정부 안을 통과시켰다. 비정규직법이 국회에서 심의 중인 가운데 민주노동당 내부에서 수정안을 둘러싼 논란이 벌어졌다. 수정안 철회를 요구하는 이들은 지난 15일 토론회를 연 데 이어 18일 중앙위에서 결의문 채택을 요구하고 나섰다. 이들은 기간제 노동과 관련해서는 당초 근기법 개정을 통한 엄격한 비정규직 사유제한 도입 등 비정규직 철폐안을 제출했으나 법안 심사과정에서 정부가 제출한 기간제법 형식에 따른 일부 조항 의결에 참여했고, 사유제한의 폭도 기존 4가지에서 10가지로 확대하는 등 양보했다고 지적했다. 또 당초 파견법 폐지를 내건 민주노동당이 환노위 법안심의 과정에서 사실상 파견법 존치를 전제로 불법파견 적발시 고용의제 확보 등을 제시했다고 비판했다.[36] 이제 비정규직 확산법안(기간제법 제정안과 파견법 개정안)은 국회 환경노동위원회, 법사위원회, 본회의를 속속 통과하며 입법 처리를 완료할 수순만 남아 있었다. ◎ 2006년 비정규직 확산법과 노사관계 로드맵의 통과 2006년 2월 21일 민주노총 조준호 보궐 집행부가 당선됐다. 그런데 그 직후인 27일, 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이 국회 경위권을 발동한 가운데 환경노동위원회를 개최하여 비정규직 확산법안을 통과시켰다. 민주노총의 허를 찌른 기습처리였다. 민주노총은 즉각 총파업에 돌입했다. 28일 10만3천 명이 참여했다. <비정규법안의 문제점> 1. 날치기 과정 : 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이 야합하여 통과시킴 - 2. 22. 한나라당, 민주노동당, 민주당, 국민중심당 등 야4당은 국회에서 원내대표회담을 열고 비정규직법 처리를 차기 임시국회로 미루기로 합의함 - 그런데, 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은 밀실에서 야합하여 2. 27. 국회 환경노동위원회 전체회의를 전격적으로 개최하여 통과시킴 - 사상 유례가 없는 환노위 질서유지권을 발동하고 항의하는 민주노동당 의원들을 폭력적으로 끌어내고 강행하였음 - 환노위 국회의원인 단병호 의원마저도 국회 경위를 동원하여 자리에서 끌어내고는 이를 임의로 무효표로 처리함 2. 기간제 비정규직의 무제한 사용·확대를 초래하는 내용의 법안이 통과 … - 결국, 이제 2년 이내의 계약직은 우리 사회에서 상징적이고 정상적인 고용형태가 될 것임 3. 파견노동이 사실상 전면 확대하고 불법파견에 면죄부를 주는 법안이 통과됨 … - 불법파견에 면죄부를 주고 있는 법안임. 즉, 불법파견을 해도 2년까지는 봐주고 반드시 2년이 지나야 고용의제도 아니고 고용의무를 지도록 하였음. 고용의무는 안 따르면 그만이고 과태료 3000만원만 내면 되도록 해버렸음. 사용자들은 마음 놓고 불법파견을 사용할 수 있게 되었음. … 4. 오히려 차별을 용인하고 실효성 없는 차별시정절차를 담고 있을 뿐임[37] 민주노총은 3월 2일에도 총파업을 이어가 18만 명이 참여했다. 1996~97년 총파업 이후 최대 규모의 조합원이 참여한 총파업이었다. 3일, 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이 비정규직 법안의 후속 처리를 4월 임시국회로 연기했다. 민주노총 총파업도 4월로 유보됐다. 3월 15일, 4차 노사정대표자회의가 재개돼 노사관계 로드맵을 논의했다.[38] 민주노총은 비정규직 법안 재논의와 장기투쟁사업장 문제해결 등을 전제조건으로 요구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불참했다. 4월 10일부터 14일까지 민주노총이 비정규직 법안 강행처리 저지, 노사관계 로드맵 폐기, 무상교육·무상의료 쟁취, 한미FTA 협상 중단을 내걸고 산하 연맹별 순환파업을 전개했다. 특히 14일 금속연맹 총파업에는 12만 조합원이 참여했다. 21일, 국회 법사위원회가 비정규직 법안을 처리하려 하자 민주노총이 총파업을 단행해 10만5천 명이 참여했다. 법사위원회의 비정규직 법안 처리가 27일로 연기되자 민주노총은 총파업을 유보했다. 대신 국회 법사위에서 비정규직 법안이 처리되면 그 다음날부터 무기한 전면 총파업에 들어가기로 했다. 27일, 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의 관계 악화 때문에 법사위원회가 열리지 못했다. 대신 5차 노사정대표자회의가 열려 노사정위원회 명칭을 ‘경제사회발전노사정위원회’로 개정하는 등의 노사정위원회 개편방안과 노사관계 로드맵의 첫 번째 합의사항으로서 노동위원회 개편방안을 발표했다. 5월 16일, 민주노총 중앙집행위원회에 조준호 집행부가 노사정대표자회의 복귀 문제를 논의에 부쳤다. 격론 끝에 23일 속개된 중앙집행위원회는 집행부가 제출한 사업계획에서 “노사정대표자회의 참여를 통해 노사관계 로드맵의 반노동자성을 폭로하고, 노사관계 민주화 방안과 특수고용 노동기본권 등을 쟁점화 한다”는 부분을 삭제했다. 금속, 공무원, 공공, 전교조, 사무금융 등 대규모 연맹들이 줄줄이 노사정대표자회의 복귀에 대해 반대 또는 회의적이라는 입장을 냈기 때문이다. 대신 민주노총 중집은 ‘노사관계 로드맵 저지를 위한 6월 21일 총파업’을 결의했다. 그러나 6월 13일 열린 중앙위원회는, 6월 21일 총파업이 각 산별연맹의 자체 일정 때문에 사실상 불가능함을 확인했다. 그러자 노사정대표자회의 불참 방침을 전면 재검토하자는 주장이 강하게 제기됐고 찬반 논쟁 끝에 19일 중집에 결정을 위임했다. 19일 열린 중집은 노사정대표자회의 복귀를 10분 만에 만장일치로 결정했다. 민주노총이 노사정대표자회의 복귀를 결정하기까지 노무현 정권은 ‘민주노총의 사회적 교섭 참여를 기다린다’는 메시지를 여러 차례 내보내고 있었다. 민주노총이 복귀하자마자 노사관계 로드맵 논의가 빠르게 진행됐다. 21일 실무회의를 거쳐 7월 6일 6차 노사정대표자회의가 열렸다. 7월 12일, 민주노총이 한미FTA 협상 저지, 노사관계 로드맵 저지, 특수고용 노동권 보장을 요구하며 총파업을 벌였다. 9만4천 명이 참여했다. 21일, 민주노총이 노무현 정권의 노사관계 로드맵에 대응하여 대안적 노사관계 구축을 위해 ‘민주적 노사관계 구축의 4대 방향, 8대 핵심요구안’을 제출했다. 민주적 노사관계의 4대 방향 1. 국제적 노동기준의 보장 … 2. 비정규 노동자와 산별노조의 노동기본권 보장 … 3. 노사자치의 보장 … 4. 고용안정의 보장 … 8대 핵심요구안 요지 1. 공무원·교수·교사의 노동3권 보장 … 2. 비정규 노동자 노동3권 보장 … 3. 산별교섭 보장과 산별협약의 제도화 … 4. 복수노조하 자율교섭 보장 … 5. 직권중재조항 폐지와 긴급조정제도 요건 강화 … 6. 손배가압류 및 업무방해죄 적용 금지 … 7. 노조전임자 임금지급 금지조항 폐지 … 8. 고용안정 보장[39] 8월 10일, 8차 노사정대표자회의가 열렸다. 이 날까지 전체 논의과제 40개 가운데 23개에 대해 의견일치를 봤고, 나머지 17개는 9월 4일까지 논의하기로 했다. 26일, 9차 노사정대표자회의에서 복수노조와 노조 전임자 문제가 처음으로 다뤄졌다. 9월 2일, 한국노총과 경총이 복수노조 허용과 노조 전임자 임금지급 금지를 5년 유예하자고 사전 합의하여 의견을 냈다. 9월 11일, 민주노총을 제외하고 한국노총, 경총, 대한상의, 노동부, 노사정위원회 대표자들이 긴급 노사정대표자회의를 열어 이른바 ‘노사관계 선진화 방안’에 전격 합의했다. 그 내용은 △기업단위 복수노조 허용 3년 유예 △노조전임자 임금지급 금지 3년 유예 △필수공익사업장에 직권중재를 폐지하되 필수유지업무제도 운용 및 쟁의기간 대체인력의 채용·하도급 허용 △필수공익사업장 확대(혈액공급, 항공, 폐․하수처리, 증기·온수공급업) △부당해고 벌칙조항 삭제 △정리해고 사전통보기간을 60일에서 50일로 단축 등이었다. 단호하게 투쟁동력을 건설하는 대신 노사정 교섭을 통한 사회적 합의를 모색해 온 민주노총은 다시 한 번 결정적으로 뒤통수를 얻어맞았다. 11일 오후 4시 서울 여의도 동양증권 빌딩 21층 노사정위원회. 한국노총과 정부, 사용자단체가 수십 명의 기자들 앞에서 로드맵에 대한 노사정 합의 결과를 발표하며 서로 손을 굳게 잡고 미소를 짓고 있었다. 같은 시간 동양증권 빌딩 앞에는 20명도 안 되는 사람들이 초라한 모습으로 앉아 있었다. 마이크 소리는 제대로 들리지도 않았고, 맥 빠진 구호와 힘없는 투쟁가가 건물 안팎을 가득 메운 경찰들 사이로 맥없이 울려 퍼지고 있었다. 노사정 합의 소식을 뒤늦게 전해들은 금속연맹과 금속노조 간부들 30여 명이 회의를 중단하고 달려왔지만 초라한 풍경은 그대로였다. “한국노총과 자본의 야합을 결코 좌시하지 않고 투쟁해 나가겠다”는 연설자들의 외침은 공허하게 메아리칠 뿐이었다. 노동조합이 없는 89%, 1천3백만 노동자들의 노동조합 선택권을 또 다시 유린하고, 정리해고 사전 통보기간을 단축해 해고를 쉽게 만들고, 필수공익사업장 확대와 대체근로 인정으로 파업을 어렵게 만드는 법안과 노조간부 임금을 맞바꾼 ‘희대의 야합’이 벌어진 날, 그 많은 민주노총 간부들은 어디에 있었을까? … 한국노총 야합보다 더 절망스런 일이 민주노총의 무기력이다. 민주노총은 지난 주 한국노총과 사용자단체에게 ‘5년 유예 합의’라는 뒤통수를 맞고도 아무런 준비를 하지 않았을 뿐더러, 주말에 벌어진 노사정의 ‘음모’에 아무런 대비도 하지 않았고, 이날 오후 2시 매우 ‘형식적인 집회’를 잡아놓았을 뿐이었다. … “천만노동자 팔아먹은 밀실야합 박살내자” 민주노총 간부들이 길을 가로막으며 ‘노사정야합’을 규탄했고, 일부 간부들은 이용득 위원장 앞에 드러누워 “나를 밟고 가라”고 외쳤지만, 한국노총 간부들과 이용득 위원장은 경찰의 호위를 받으며 ‘당당하게’ 정부가 지어준 한국노총 건물로 들어갔다. 민주노총이 이런 사태를 막기 위해 전국노동자대회를 열고 강력하게 저항했다면, 최소한 가까운 지역의 간부들을 비상소집해 노사정 야합을 막는 투쟁을 했다면, 한국노총처럼 비상대표자회의를 열어 농성을 벌이면서 ‘야합’에 대비했다면 한국노총이 ‘부끄러운 합의’를 하고도 떳떳하게 걸어 나오는 사태를 목도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허탈하고 참담하고 부끄러운 9월 11일이었다.[40] 11월 15일, 민주노총이 노동법 개악 저지와 노사관계 민주화 입법 쟁취, 비정규 권리보장 입법 쟁취, 한미FTA 협상 저지, 산재보험법 전면 개혁을 내걸고 총파업을 벌였다. 13만 8천 명이 참여했다. 22일에도 총파업을 벌여서 14만 4천 명이 참여했다. 29일, 국회 법사위원회가 비정규직 법안을 강행 처리하려 하자 민주노총이 다시 총파업에 나섰다. 16만이 참여했다. 민주노동당 의원들과 당직자들은 법안 처리를 물리적으로 저지하기 위해 법사위원회를 점거했다. 30일, 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이 국회 본회의를 열어 기간제법 제정안과 파견법 개정안을 통과시켰다. 민주노동당이 농성 중인 법사위원회를 건너뛰어 의장 직권으로 본회의에 상정해 표결 처리한 것이었다. 30일에도 민주노총은 총파업을 이어갔다. 12만 2천 명이 참여했다. 이번에 날치기 통과된 비정규법은 △임시계약직(기간제) 사용 사유의 무제한 허용 △파견 비정규직의 전면 허용 △실효성 없는 차별해소 방안 △비정규직 노동3권 외면 등을 기조로 하고 있어 비정규직을 더욱 확산하고 차별해소 효과는 미미할 뿐만 아니라, 비정규직의 노동권을 박탈하는 법이다. 정부와 양당은 이제 모든 노동자를 비정규화하여 빈곤과 고용불안의 수렁으로 몰아넣은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우리는 이번 비정규악법을 절대로 인정할 수 없으며 줄기찬 개정투쟁을 지속적으로 전개할 것이고 곧 국회에서 심의에 들어갈 노동법 개악안 저지를 위한 총력투쟁을 강력하게 전개할 것이다.[41] 12월 6일, 민주노총이 노동법 개악저지와 날치기 비정규법 전면무효를 내걸고 총파업에 들어갔다. 15만 명이 참여했다. 7일과 8일에는 국회 환경노동위원회에서 노사관계 로드맵 법안을 다루는 데 맞서 1박 2일 전 간부 상경투쟁을 전개했다. 그러나 법안은 통과됐다. 노무현 정부와 보수양당은 우리가 주장한 민주적 노사관계방안을 끝내 수용하지 않고 노동법개악을 자행하였다. 1500만 노동자의 간절한 염원을 저버리고 오늘 노동법 개악안을 국회환경노동위원회 전체회의에서 강행처리했다. 지난 11월 30일 국회 본회의에서 비정규 확산법 날치기통과에 이어 또 다시 노사관계 법·제도 선진화 방안이라는 기만적인 이름으로 노동법을 개악한 것이다. 이로써 우리나라의 신자유주의 노동유연화제도는 법적으로 완비된 것과 다름없다. 비정규악법으로 비정규노동자를 무제한 확산시키는 길을 열었으며 노동법 개악으로 정규직노동자의 비정규직화를 가속화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이번 통과된 노동법 개악안은 복수노조를 3년 동안 금지하여 노동자의 자주적 단결권을 침해하고, 비정규노동자의 교섭권확보를 봉쇄하였으며, 부당해고의 벌칙조항을 삭제하고, 정리해고 통보일을 60일에서 50일로 축소하여 부당해고를 남발할 수 있게 하였다. 여기에 혈액공급과 항공운수를 포함하여 필수공익사업장을 확대하고, 필수공익사업장의 직권중재제도를 폐지하는 대신에 파업참가자 1/2에 대하여 대체근로를 허용하여 파업권을 제한하였으며, 결국 필수공익사업장노동자의 노동유연화 장치를 만든 것이다. 따라서 앞으로 사용자들의 전횡과 독단이 무소불위로 자행될 것이며 노동자들의 권리는 심각하게 무력화될 것이다. 또한 노조전임자 임금지급금지 조항을 노사자율로 하자는 상식적이고 보편타당한 우리의 주장을 무시하고 3년 동안만 유예하였으며, 공무원노동자의 노동기본권은 거론조차 되지 않았다. 그리고 산별교섭 제도화와 특수고용 노동자의 노동권 보장 문제도 추후 논의하는 것으로 정리하여 이후 노사관계의 갈등과 혼란이 극심해질 가능성을 남겨놓았다. … 우리는 이번에 환경노동위원회 전체회의에서 통과된 노동법 개악안을 절대로 용납할 수 없으며, 본회의 통과를 저지하기 위한 총력투쟁을 진행할 것이며 비정규악법철폐투쟁을 줄기차게 전개해 나갈 것이다.[42] 그런데 8일 민주노총이 국회 환경노동위원회의 노사관계 로드맵 법안 처리를 저지하기 위해 전 간부 상경투쟁을 진행하던 바로 그 시각에, 환경노동위원회 소속 단병호 의원은 법안 처리에 협력하고 있었다. 민주노총 조합원들이 비정규직 법안 통과에 항의하면서 국회 진격투쟁에 돌입하고 있던 바로 그 순간, 국회 환노위에서는 놀랄만한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민주노동당 단병호 의원이 환노위에서 로드맵 법안 처리에 합의하고 있었던 것이다. 열린우리당 의원인 우원식 법안소위장은 “오늘 합의는 역사적으로 대단히 큰 의미가 있다. 여야 노동계가 최초로 합의해서 통과시킨 것이다. 오늘 합의는 끝없이 벌어지는 (노사)갈등을 대화를 통해 해결할 수 있다는 근거를 마련했다”고 평가했다. 이른바 노동자들을 대표한다는 민주노동당이 비정규직 법안 통과에 맞서 노동자투쟁을 조직하는 선봉에 서기는커녕, 비정규직 법안 이상으로 노동운동을 공격하는 악법인 로드맵 법안을 암묵적으로 추인해주는 범죄를 저지르고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한국노동운동을 정치적으로 대표한다고 하는 민주노동당이 노동자계급의 힘을 얼마만큼 싹둑 잘라내고 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다. … 민주노동당은 “반대를 명확히 하되 일부 완화된 수정안이 통과되는 것이 더 낫다”는 판단 하에 환노위 통과를 인정했다. 이것은 애초부터 노동자의 투쟁을 조직해서 자본의 공세에 저항하는 노선 대신 ‘일부 완화된 수정안’을 받아들이는 것이 더 낫다는 실리주의적 투항노선을 민주노동당이 채택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 노동자들을 선거 때 표를 던지는 정도의 힘을 가진 존재 이상으로는 여기지 않는 의회주의 노선의 필연적인 결정판이다. 물론 이것은 민주노동당의 단독 범죄는 아니다. 민주노총의 노조관료들이 공범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했다. 보건의료산업노조 지도부는 노조의 합법적 쟁의권을 조금이라도 보호하기 위해서 ‘파업참가자의 50%까지 대체근로 허용, 정리해고제 사전통보기간 현행 60일에서 50일로 단축, 필수공익사업장 항공사 포함 등’의 독소 조항들이 담긴 로드맵 법안 통과를 ‘양해’하도록 민주노동당 지도부에 종용했다. 결국 민주노동당과 민주노총 관료들 사이의 분업구조가 적나라하게 모습을 드러냈다. 노동조합 관료층은 노동자의 힘을 조직하는 대신 의회주의 정당의 국회의원들에게 의지하고, 이 의회주의 정당의 이른바 노동자들을 대표한다는 국회의원들은 자본가 정당들과의 밀실협약과 거래에 의지하여 노동자의 절박한 생존권과 권리들을 헌납하는 전 세계적으로 악명 높은 분업구조가 나타난 것이다. … 노동자의 힘의 원천인 단결투쟁력을 파괴하거나 그것을 아주 제한적 수준(이른바 교섭을 위한 압력 수단)에만 묶어둔 채 모든 것을 교섭장에서의 자본과의 협상에만 의존하는 노조관료층의 노선을 민주노동당은 의회 차원에서 확대재생산하고 있을 뿐이다. … 이제 막 등장해서, 기껏해야 국회의원 몇 명 정도 배출한 것에 지나지 않은 민주노동당이 벌써부터 이런 모습을 보인다면 미래에 그들이 취할 모습은 더욱 명확해진다. 이런 상황에서는 노동자들을 계급적으로 결집시키는 그릇인 노동자의 정치적 성장은 가로막힐 뿐만 아니라 해체될 수밖에 없다. 문제는 이것이 단순히 민주노동당의 성장가능성을 제거해버린다는 차원을 넘어서서 한국 노동자계급의 잠재력을 무참히 매장해버리는 결과로 이어진다는 것이다.[43] 11일, 민주노총 조준호 위원장이 노동법 개악안 저지를 위해 단식농성에 돌입했다. 12일부터 14일까지 연맹별로 총파업을 포함한 총력투쟁을 전개하고, 본회의가 예정된 15일에는 민주노총 차원의 총파업을 단행하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실제로는 12일부터 14일까지 연맹별 간부상경투쟁 정도가 진행됐고, 15일 총파업도 연기됐다. 민주노총은 다시 19일부터 22일까지 연맹별 간부상경투쟁을 진행했다. 민주노총의 무기력한 투쟁을 비웃듯이, 22일 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은 국회 본회의에서 노사관계 로드맵 법안을 통과시켰다. 오늘 국회 본회의에서 노동법 개악안을 처리할 예정이다. 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은 지난 8일 상임위에서 강행처리한 노동법 개악안을 법사위 통과와 함께 본 회의까지 초고속 통과시키려 하고 있다. 그동안 한나라당이 개방형 이사제 폐지를 위해 사학법 재개정 주장으로 국회파행을 유도하는 몽니를 부리다가 가까스로 본회의를 열기로 합의한 결과가 노동법 개악안과 파병연장안을 처리하는 것이다. 한해를 마무리하고 새해 희망을 염원하는 지금 또 다시 보수양당의 반노동 만행은 우리 사회를 절망에 빠뜨리고 있다. 사용자의 불법적 노조파괴와 노동탄압은 기승을 부리고 있는데 이를 통제할 제도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측의 불법횡포를 합법화해주려는 부정의에 앞장서고 있는 것이 현 국회의 자화상이다. 노무현 신자유주의 노동착취 정부는 거대 재벌들과 외국자본의 배만 불리고 노동자는 사지로 내몰고 있다. 전체 노동자의 절반도 안 되는 정규직을 눈엣가시처럼 못 마땅히 여기며 어떻게든 비정규직화 시키고 비정규직노동자의 차별과 빈곤을 고착시키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다. 뿐만 아니라 시위에 참여한 노동자를 때려죽이고도 5개월이 지나도록 책임은커녕 사과조차 하지 않는 인면수심을 보여주고 있다. 그런데도 보수 정치판은 정치모리배 속성에서 한 발짝도 벗어나지 못하고 당리당략에만 몰두하며 민생은 안중에도 없고 빈곤과 차별, 속박과 불안으로 온 사회가 멍들어 가는 속에서 부패정치만 일삼고 노동악법만 생산하고 있다.[44] 비정규직 확산법안 저지와 비정규직 권리보장입법 쟁취를 위해, 그리고 노사관계 로드맵 저지와 민주적 노사관계 쟁취를 위해 1996~97년 총파업 이후 최대 규모로 전개됐던 민주노총의 2004~06년 총파업은 결국 소기의 성과를 얻지 못했다. 그동안 민주노총은 열 번이 훨씬 넘는 총파업을 전개했다. 그러나 비정규직 확산법과 노사관계 로드맵의 통과를 끝내 막지 못했다. 왜 그랬을까? 형식적으로는 많은 총파업을 했지만, 1996~97년 총파업과 달리 실제로는 위력적인 총파업이 전혀 아니었기 때문이다. 총파업을 하는 시늉만 했을 뿐, 악법을 꼭 막아내고 노동자의 요구를 반드시 쟁취하겠다는 확고한 의지를 갖고 총파업을 전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건 왜 그렇게 됐을까? 첫째, 민주노총의 중핵인 대기업 정규직 노조들이 단위사업장 차원의 임금·단체협약에만 함몰돼 있었기 때문이다. 대기업 정규직 노조들은 광범한 미조직·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삶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될 비정규직 법안에 대해서도 노동법의 변화에 대해서도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민주노총의 총파업 지침에 따라 형식적으로 파업에 임할 뿐 절실하게 조합원들을 설득해 나가지 않았고, 따라서 파업참여 조합원의 대다수는 집회에 참여하지 않고 그냥 퇴근했다. 둘째, 총연맹으로서 민주노총은 비정규직 입법과 노동법 개정에 대해 신경을 쓸 수밖에 없었지만, 단호한 투쟁에 근거한 해법을 추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민주노총 지도부가 추구한 해법은 노무현 정권과의 ‘적절한 타협’이었다.[45] 총파업은 협상의 수단일 뿐이었기에 노무현 정권과의 관계나 국회 상황에 따라 걸핏하면 유보됐다. 산하 노조들을 독려하여 위력적인 총파업을 건설함으로써 노동자의 요구를 반드시 관철시키겠다는 단호한 의지를 민주노총 지도부는 갖고 있지 않았다. 2004년 9월 노무현 정부가 이른바 ‘비정규직 보호법안’을 입법예고한 후 민주노총은 2006년 한 해에만 총파업 돌입 총 14회, 연인원 181만4천368명이 참가한 것으로 보고됐다. 하지만 96~97년 총파업 투쟁 이후 최대라는 2006년 총파업 투쟁은 정부 법안의 골자를 바꾸지도 못했고, 비정규직 고용에 관한 민주노총 소속 노조의 태도를 변화시키지도 못했다. … 2000년대 이후 민주노총 조합원들은 자신의 임금을 방어하거나 혹은 개선할 수 있었지만, 90%의 미조직 노동자들과의 격차가 확대되는 것은 사실상 방관했다. 그 결과 임금과 고용을 방어하는 노동조합 본연의 역할이, 정권과 자본에 의해 집단이기주의로 몰렸는데도 뾰족한 대책이 없는 것이 지금의 상황이다.[46] 비정규직 보호입법이 국회에서 논란이 되었던 2004~06년 동안만 보더라도, 하이닉스매그나칩 사내하청 투쟁, 울산플랜트노조의 투쟁, 완성차 사내하청노조들의 투쟁, 덤프연대의 투쟁 등 비정규직 노동자 투쟁이 폭발하였으나 이것과 권리입법 쟁취투쟁이 결합되지 못했다. 2005년 ‘비정규직 보호입법’과 ‘사회적 교섭’이 논란이 되는 와중에도 비정규직 노조들은 92명의 구속자, 1362명의 해고자(계약만료통보로 인한 해고 제외), 1498억 원의 손해배상·가압류(하이스코의 72억원 제외) 등 무자비한 탄압을 받았으나, 민주노총은 비정규직 노동기본권 문제를 쟁점으로 만들고 권리입법투쟁과 연결시키지 못했다. 비정규직 노조조차도 권리입법 투쟁에 매진하였다고 볼 수는 없다. 비정규직노조 대표자 수준에서는 정세에 대한 공유나 어느 정도의 공동실천이 이루어졌으나, 대표자를 넘어 해당 노조에까지 긴장감이 형성되지는 못했다. 단위 사업장의 현안을 놓고서는 그야말로 치열한 투쟁을 전개하였으나, 권리입법투쟁에 있어서는 그만큼 적극적으로 임하지 않았다. 노동조합 유지 자체가 어렵고 사용할 수 있는 전술이 극히 제한되어 있는 비정규직노조의 조건을 고려한다 하여도, 비정규직 노조마저도 자신의 현안과 권리입법 투쟁을 별개의 것으로 바라보았던 것이다.[47] 5) 2007~08년 이랜드일반노조의 계약직 정규직화 투쟁 2006년 말에 제정된 기간제법은 2007년 7월 1일부터 시행됐다. 기간제법 시행을 앞두고 전국 곳곳에서 수많은 계약직 노동자들이 해고당했다. “2년을 초과하여 기간제 근로자로 사용하는 경우에는 그 기간제 근로자는 기간의 정함이 없는 근로계약을 체결한 근로자로 본다”는 기간제법 제4조 2항 때문이었다. 기간제법 시행을 앞둔 자본가들의 대응은 크게 두 방향에서 이루어졌다. 대세를 이룬 대응방안은 계약직이 수행하던 업무를 용역·도급 등의 간접고용으로 대체(외주화)하는 것이었다. 기존의 계약직이 용역·도급으로 전환되기도 했고, 아예 새로운 노동자로 대체되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2년 이상 경력자를 포함해 많은 계약직이 해고당했다. 이와 관련 경총은 2007년 5월 「비정규 인력의 합리적 활용과 법적 대응방안」이라는 문서를 통해 “비정규 인력이 담당하는 업무를 도급화해서 해결하는 방법이 가장 현실적”이라고 방향을 제시했다. 또 하나의 방향은 직군분리를 통한 무기계약직 도입이었다. 기간제법 제정을 둘러싸고 사회적 논란이 벌어지는 동안 “기간의 정함이 없는 근로계약을 체결한 근로자”는 사실상 정규직을 뜻하는 것이라고 많은 이들이 받아들였다. 그러나 자본가들은 무기계약직이라는 새로운 직군을 도입해서 (기간제법의 차별금지 조항을 비껴갈 수 있는) ‘합리적 차별’의 근거를 마련했다. 통상 무기계약직은 임금과 처우는 계약직과 같고 고용만 보장되는 것으로 설계됐다. 그 무기계약직조차 2년 이상 일한 계약직 가운데 소수만이 될 수 있었다. 그런데 기간제법 시행을 하루 앞둔 6월 30일, 이랜드일반노조 조합원들이 계약직 정규직화와 고용보장을 핵심 요구로 내걸고 홈에버 월드컵점에서 점거농성을 시작했다. 7월 20일까지 이어진 이 점거농성은 사회적으로 뜨거운 관심을 받았다. 언론보도가 집중됐고, 노동자·민중의 지지와 연대가 쏟아졌다. 특히 2006년 말 비정규직 확산법안의 통과를 막아내지 못하고서 의기소침해 있던 민주노총이 이 투쟁에서 새로운 희망을 발견하고 달라붙었다. 1980년 이랜드라는 패션브랜드로 시작하여 급성장을 거듭한 이랜드그룹은 2006년 프랑스계 대형할인매장 까르푸를 인수하여 홈에버로 이름을 바꾸면서 뉴코아·홈에버·2001아울렛 등을 거느린 거대 유통그룹이 됐다. 까르푸가 이랜드그룹으로 인수합병되면서 이랜드노조와 까르푸노조가 통합하여 2006년 12월 이랜드일반노조를 결성했다. 이랜드그룹에는 뉴코아노조가 또 있었지만, 역사와 조건의 차이 때문에 노조를 통합하지는 않고 공동투쟁을 진행하기로 했다. 이랜드일반노조로 통합된 이랜드노조와 까르푸노조는 정규직 중심의 노조가 계약직에게도 문호를 열고 계약직의 노동조건 개선과 정규직화를 위해 투쟁해 온 공통의 역사를 갖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2006년 까르푸 매각과 비정규직법 개악을 겪고 2007년 기간제법 시행이 다가오자 계약직들이 고용불안을 느끼고 노조에 대거 가입했다. 이랜드그룹은 기간제법 시행을 앞두고 산하 기업들에서 1천여 명의 계약직을 해고하고 용역으로 전환했다. 한편 홈에버가 6월 15일 “3천여 명의 비정규직 중 2년 이상 된 1천여 명을 직무급제 정규직으로 전환한다”고 발표했는데, 직무급제 정규직은 무기계약직을 뜻했다. 그런데 까르푸 시절 노조가 쟁취한 단체협약에는 “18개월 이상 근무한 계약직은 계약기간 만료 때 계약을 해지하지 못한다”는 조항이 있었다. 즉 18개월 이상이면 자동으로 무기계약직이 되는 것인데, 2년 이상 경력자를 채용 절차를 거쳐 무기계약직으로 전환하겠다는 것이었다. 노조는 회사 방침에 대해 “노조파업을 무력화시키고 노동자를 분열시키기 위한 악질 사기극”이라고 비판했다. 이랜드일반노조와 뉴코아노조는 기간제법 시행을 앞둔 이랜드그룹의 계약직 대량해고와 외주화(아웃소싱), 분리직군제 도입에 맞서 공동투쟁을 시작했다. 두 노조는 6월 10일, 17일, 23일 공동파업을 전개했다. 특히 23일에는 이랜드그룹에서 가장 많은 매출을 기록하는 홈에버 월드컵점을 점거했다. 1층은 이랜드일반노조가, 2층은 뉴코아노조가 계산대를 점거하고 고객들에게 양해를 구했다. 24일에는 뉴코아 강남점에서 매장 진입을 시도했다. 26일에는 뉴코아 야탑점과 홈에버 야탑점, 27일에는 뉴코아 일산점과 홈에버 일산점에서 파업을 벌였다. 뉴코아노조는 조합원 대다수가 정규직이었지만, 이랜드일반노조는 조합원 다수가 고용불안에 쫓겨 막 노조에 가입한 계약직들이었다. 파업도 집회도 처음이었다. 아직 별다른 교육도 받지 못한 상태였다. 기간제법의 시행을 하루 앞둔 30일 오후 12시 30분, 이랜드일반노조 조합원 600여 명이 홈에버 월드컵점 점거농성에 들어갔다. 노조의 핵심 요구는 3개월 이상 근무자 고용보장, 2년 이상 근무자 정규직 전환, 사내도급 중단, 민형사징계 면제 등 네 가지였다. 매장을 점거하고 앉은 여성노동자들은 “우리가 언제 그런 법을 만들어 달랬다고 비정규직법을 만들어서 우리를 길거리로 내쫓냐”고 분노했다. … 대부분의 여성노동자들은 기혼이었다. 특히, 캐셔들 가운데는 40대 이상이 많았다. 이들 중에는 이혼하거나 사별해서, 또는 홀로 벌어서 생활하는 여성 가장으로 생계를 책임지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들에게는 한 달 일해 받는 80만 원이 유일한 생계비였다. 그런데 갑자기 회사가 계약을 중단하고 퇴사시키면서 생계를 위협받고 있었다.[48] 오후 4시, 민주노총·민주노동당·학생 등 연대대오 100여 명이 결합했다. 오후 9시, 뉴코아 강남점의 킴스클럽을 봉쇄하다 온 뉴코아노조 조합원 700여 명이 합류했다. 애초 이랜드일반노조 지도부의 계획은 1박2일 점거농성이었다. 그러나 점거 첫날부터 조합원들은 ‘힘들게 들어왔는데 이대로 나갈 수 없다’는 입장을 보였다. 지도부는 고심하다가 분회토론과 전체 토론을 통해 결정하기로 했다. 분회 토론과 전체 토론에서는 ‘무기한 점거’ 의견이 쏟아졌다. 결국 조합원 투표에서 압도적으로 무기한 점거농성을 결정했다. 조합원 스스로의 결정이었다. 조합원들은 이후 경찰병력에 의해 끌려나오기까지 21일 동안 힘차게 점거농성을 이어갔다. 투쟁 주체는 다수가 당시 ‘아줌마’, ‘주부사원’으로 불리던 40대 전후의 기혼 여성노동자들이었다. … 이들 대부분은 510일 투쟁 이전에는 노조활동의 경험이 없었고, 작업장 안에서도 일에 쫓겨 몇몇 자신의 주변 동료 이외의 사람들과는 서로 얼굴만 아는 정도였다. 또 일자리를 지키기 위해 관리자들이 시키면 시키는 대로 일해 왔다. 그런데 월드컵점 점거농성장에서 이들은 자신들의 요구와 결의로 지도부의 1박2일 계획을 전복시켜서 진행한 20일 투쟁과정에서 새로운 경험을 하였다. 매장의 주인이 자신들이라는 것을 확인한 것이다. 거대한 매장이 여성노동자들이 손을 놓는 순간 멈춰 섰고, 스스로가 꾸려 나가는 공간이 된 것이다. 그 과정에서 이들은 다양한 연대세력들을 만났고 이들의 발언과 여러 강의를 통해 노동자의 권리를 이해했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이들이 같이 일했던 동료인 여성노동자들을 알아갔다는 것이다. 교대해서 집에 가면 냉장고를 털어 농성하는 동료를 위해 음식을 만들어 바리바리 싸왔다. 농성장에서는 자발적으로 나선 이들이 매끼 수백 명의 밥과 국을 하면서도, 그것이 동료들을 위한 투쟁이라며 기꺼이 했다. 그렇게 만들어진 음식으로 수십 끼를 같이 먹으며 이들은 ‘식구’가 되어 갔다. 무엇보다 이들에게는 서로 이야기를 나눈 밤이 있었다. 20일 밤을 계산대 사이사이에 모여 서로 살아온 이야기와 현실 문제, 현장 문제와 위축되어 대응하지 못했던 자신들의 모습 등 수년을 같이 일해도 나누지 못했던 삶과 현장의 이야기를 쏟아냈다. 그 과정에서 여성노동자들은 서로에게 ‘또 다른 나’를 발견했고, 진한 동료애로 서로를 껴안을 수 있었다. 이들은 ‘여성’으로 그리고 ‘노동자’로 일과 가사노동·돌봄노동을 병행해야 하는 조건에 있는 동료들의 상황을 누구보다도 잘 이해할 수 있었다.[49] 7월 8일, 이랜드일반노조와 뉴코아노조 그리고 민주노총이 오전 10시부터 오후 10시까지 이랜드계열 전국 유통매장에 대한 매출타격투쟁을 벌였다. 전국적으로 5천여 명이 연대투쟁에 나서면서, 애초 계획한 12개를 넘어 20개 매장에서 점거농성을 벌였다. 회사는 점거농성이 벌어지면 매장을 닫는 것으로 대응했다. 뉴코아노조는 이날 회사와 경찰의 대응이 전국적으로 분산된 틈을 활용하여 뉴코아 강남점을 점거하고 농성을 시작했다. 민주노총은 11일부터 20일까지를 전국 불매운동 1차 집중시기로 정하고 80만 조합원에게 뉴코아 아울렛, 뉴코아 백화점, 킴스클럽, 홈에버, 2001아울렛 등 이랜드그룹 5개사에 대한 불매운동에 참여할 것을 지침으로 내렸다. 13일, CBS가 홈에버 월드컵점 점거농성에 대한 여론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비정규직 파업 사태의 책임이 정부에 있다는 의견은 31.9%, 사업주에 책임이 있다는 의견은 24.4%였다. 정부와 사업주의 책임이라는 의견이 절반을 넘어 55.3%에 이른 반면 노조에 책임이 있다는 의견은 23.2%였다. 16일, 민주노총과 민주노동당을 중심으로 시작된 이랜드 불매운동에 참여연대, 한국여성단체연합, 녹색연합 등 57개 시민사회단체가 합류했다. 20일, 경찰병력이 홈에버 월드컵점과 뉴코아 강남점의 농성장을 침탈해서 농성자들을 모두 연행했다. 점거농성을 시작한 지 월드컵점은 21일, 강남점은 13일만이었다. 9시 50분, 조합원들이 앉은 곳을 제외한 전 매장 안에 들어온 경찰이 경고방송을 시작했다. 경찰의 방송 소리에 모두 입에 호루라기를 꺼내 물고 불어대기 시작했다. 그러고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구호를 외쳤다. “일하게 해달라는데 공권력투입 웬 말이냐.” “비정규직도 사람이다. 노무현 정권 물러나라.” … 국회의원들은 체포영장이 발부된 김경욱 위원장을 가운데 두고 경찰의 강제연행에 항의했다. … 경찰은 5~6명씩 달려들어 남성조합원들을 먼저 연행하기 시작했고, 여경들은 여성조합원들을 한 명씩 끌어냈다. 조합원들은 뿔뿔이 끌려 나가기 직전 “경찰 조사 받고 나오는 대로 다시 싸우자”고 서로의 손을 움켜쥐었다. … 연행 시작 1시간도 채 못 된 10시 55분, 강제해산을 위한 경찰의 진압작전은 위원장의 연행으로 종료됐다. 위원장은 끝까지 놓지 않았던 조합원과 마지막 포옹을 하고 경찰에 검거됐다.[50] 이날 민주노총은 농성장 공권력 침탈에 항의하며 전국 12개 이랜드계열 유통매장에서 항의투쟁을 전개했다. 각 매장마다 수백여 명의 민주노총 조합원들이 항의투쟁에 동참해서 산발적인 매장 진입과 점거, 결의대회, 기자회견 등을 진행했다. 21일, 민주노총이 이랜드계열 전국 유통매장에 대한 2차 매출제로투쟁을 벌였다. 오전 10시부터 오후 10시까지 전국 33개 매장 앞에서 집회와 기자회견을 했고, 다른 28개 매장에서도 1인 시위와 불매운동을 벌였다. 22일, 이랜드일반노조가 홈에버 중동점을 기습 점거했다가 철수했다. 20일 연행됐다 석방된 조합원들까지 300여 명의 조합원들이 참여했다. 23일에는 뉴코아 강남점 앞 시위, 24일에는 홈에버 월드컵점 타격투쟁이 전개됐다. 27일, 홈에버 월드컵점 앞에서 ‘비정규 노동자 대량해고 이랜드규탄 민주노총 총력결의대회’가 열렸다. 3천여 명이 참여했다. 집회를 마친 노동자들은 매장 진입을 시도하다 이를 가로막는 경찰들과 격렬한 몸싸움을 벌였다. 월드컵점의 셔터가 20일 공권력 투입 이후 처음으로 다시 내려졌다. 29일, 뉴코아노조와 이랜드일반노조 조합원 600여 명이 뉴코아 강남점을 다시 점거하고 점거농성을 이어갔다. 31일 새벽, 경찰이 투입돼 농성 조합원들을 모두 연행했다. 이날 민주노총은 이랜드-뉴코아 투쟁과 관련해서 긴급 산별대표자회의를 열고 투쟁수위를 높이기로 결정했다. 8월 13일부터 문제해결 때까지 1천여 명의 ‘이랜드 타격투쟁 중앙선봉대’를 운영하기로 했다. 18일에는 5만여 명이 참가하는 노동자대회를 전국동시다발로 개최하고 21일에는 이랜드-뉴코아 투쟁을 단일 안건으로 임시대의원대회를 개최하기로 했다. 8월 5일, 민주노총이 이랜드계열 전국 유통매장에 대한 3차 매출타격투쟁을 벌였다. 전국 12개 매장에서 타격투쟁이 전개됐는데, 홈에버 전주점을 200여 명의 조합원이 일시 점거했다. 노동자의힘, 다함께, 문화연대, 민교협, 인권단체연석회의, 이윤보다인간을 등 노동사회단체들이 ‘비정규직법 폐기와 뉴코아-이랜드투쟁 승리’를 위해 세종로 소공원에서 시국농성에 돌입했다. 9일, 민주노동당이 당의 사활을 걸고 이랜드사태 해결, 비정규악법 재개정 및 비정규 노동자들의 권리보장을 위한 투쟁에 나서겠다고 선언했다. 16일, 민주노총의 1천인 선봉대 발대식이 홈에버 목동점에서 열렸다. 700여 명이 참석했다. 17일, 민주노총 선봉대 400여 명이 비정규악법 전면 재개정과 이랜드그룹 박성수 회장 구속을 요구하는 항의서한을 대통령에게 전달하기 위해 청와대를 향했으나 광화문 인근에서 경찰에게 저지당했다. 18일, 민주노총이 전국동시다발 노동자대회를 열어 전국 11개 지역에서 이랜드계열 유통매장 12곳을 봉쇄했다. 서울역에 모인 3천 명은 둘로 나뉘어 홈에버 월드컵점과 뉴코아 강남점을 봉쇄했다. 전국적으로 9천 7백 명이 참여했다. 21일, 민주노총 임시대의원대회가 열렸다. 민주노총은 이랜드일반노조와 뉴코아노조 조합원들의 투쟁에 전 조직 역량을 모으기로 했다. 우선 이랜드일반노조와 뉴코아노조 조합원 800여 명에게 1인당 월 50만원씩의 생계비를 9월부터 12월까지 지원하기로 했다. 이에 필요한 월 4억 원의 투쟁기금은 민주노총과 산하조직의 모금 등으로 충당하기로 했다. 또한 추석 직전인 9월 15일부터 21일까지를 집중타격투쟁 기간으로 잡고 단위노조 대의원 이상 2만여 명이 참석하는 전국동시다발 매장봉쇄투쟁을 진행하기로 했다. 특히 9월 18일과 19일은 전 간부가 서울로 상경해 수도권 12개 매장을 전면 봉쇄하는 투쟁을 벌이기로 했다. 민주노총 80만 조합원의 힘으로 860만 비정규 문제를 해결하자! 오늘 우리는 80만 조합원의 대표자격으로서 이랜드 투쟁의 승리를 위한 총력투쟁에 나설 것을 힘차게 결의하였다. 이랜드 문제는 이 땅 860만 비정규직 문제 그 자체이다. 우리는 민주노총의 이름으로 이랜드 투쟁의 승리를 위해 강력한 지지연대투쟁에 나서 비정규직 완전철폐를 위한 승리의 대항쟁에 불을 지펴 갈 것이다. 오늘의 결의를 시작으로 지난 두 달여간 보여 왔던 계급적 단결과 연대정신 그 이상의 투쟁력을 발휘하여 승부를 내야 할 때다. 지금부터 9월말까지 한 달 간의 기간이 이랜드 투쟁의 최대 승부처이며 분수령이다. 바로 이 기간에 투쟁에 최대 집중하여 비정규직을 탄압하는 악덕기업이 이 땅에 설 자리가 없도록 바로 우리 손으로 바꿔나가자. 이에 우리는 이랜드 투쟁의 완전승리를 위해 다음과 같이 힘차게 결의한다. 하나, 우리는 비정규직 철폐를 위해 이랜드투쟁이 승리할 때까지 지역별 매장봉쇄투쟁을 비롯한 모든 투쟁에 전조직적으로 나설 것을 힘차게 결의한다. 하나, 우리는 전조직적인 이랜드 불매운동을 확산하며 전 국민적인 불매운동으로 발전시켜 나갈 것을 힘차게 결의한다. 하나, 우리는 9월말 추석 전 매출봉쇄 집중투쟁, 불매운동 강화, 이랜드 투쟁기금 조성 등 대의원대회 결의사항을 가맹산하조직, 단위노조 등에 이르기까지 철저히 사수해 나갈 것을 힘차게 결의한다. 하나, 우리는 이랜드뿐만 아니라 비정규 투쟁사업장 문제 해결을 위한 적극적인 연대투쟁을 조직하고 860만 비정규 노동자 조직화를 위한 사업에 박차를 가해 나갈 것을 힘차게 결의한다. 하나, 우리는 이랜드 지지투쟁에 머물지 않고 하반기 비정규법 전면 재개정 쟁취투쟁을 전개하며, 노무현정권의 비정규정책과 신자유주의 세계화정책 폐기를 위해 강력한 하반기 투쟁을 전개해 나갈 것을 힘차게 결의한다.[51] 22일, 전북 농민들이 쌀 27가마를 이랜드일반노조와 뉴코아노조에 전달했다. 29일에는 전국농민회총연맹이 쌀 50여 포대를 두 노조에 전달했다. 24일, 이랜드일반노조, 뉴코아노조, 철도노조 KTX 승무원지부, 금속노조 기륭전자분회의 조합원 1천여 명이 기륭전자 정문 앞에 모여 ‘비정규 여성노동자 공동투쟁 연대결의대회’를 가졌다. 25일, 민주노총이 전국 11개 이랜드계열 유통매장에서 6차 매출제로투쟁을 벌였다. 26일, 이랜드일반노조 조합원 250여 명이 홈에버 월드컵점을 기습 점거했다가 철수했다. 31일, 민주노총이 16일부터 활동한 1천인 선봉대의 해산식을 가졌다. 매일 두 곳씩 이랜드계열 매장의 봉쇄를 목표로 했던 선봉대 활동은 나름 의미가 있었지만, 한계도 분명했다. 선봉대 1천 명을 각 연맹별로 할당했지만, 실제로 선봉대에 참여한 숫자는 평균 478명에 그쳤다. 각 연맹에서는 연맹 간부들을 선봉대에 배치하는 방식으로 대응했다. 현장 조합원들 속으로는 전혀 파고들지 못했다. 민주노총 1천인 선봉대가 운영되는 동안 이랜드일반노조와 뉴코아노조의 파업참여 조합원은 평균 494명이었다. 9월 3~4일, 민주노총이 중앙집행위원회를 갖고 이랜드계열 전국 유통매장에 대한 추석기간 집중타격투쟁을 12일과 13일, 15일과 16일 두 차례 진행하기로 결정했다. 8일, 민주노총과 이랜드-뉴코아 노조가 국회 앞에서 1천3백여 명이 참가한 가운데 집회를 가진 뒤 홈에버 월드컵점과 뉴코아 강남점으로 이동해 봉쇄투쟁을 전개했다. 이랜드그룹은 민주노총의 추석기간 집중투쟁을 앞두고 교섭에 나섰는데, 뉴코아에 대해서는 외주화 철회 등의 진전된 안을 낸 반면 홈에버에 대해서는 완강한 태도를 고수하면서 두 노조를 분리하려는 술책을 썼다. 결국 11일 두 노조는 각각 노조 총회를 갖고 교섭을 분리하기로 결정했다. 뉴코아노조는 민주노총의 추석기간 집중투쟁이 예정된 12일부터 14일까지 매장타격투쟁을 유보하고 교섭에 집중하기로 했다. 반면 이랜드일반노조는 매장타격투쟁에 집중하기로 했다. 뉴코아노조의 교섭 타결 가능성이 회자되면서 민주노총의 추석기간 집중투쟁 동력은 크게 이완됐다. 12일부터 14일까지 이랜드일반노조는 민주노총과 함께 매장타격투쟁을 전개했다. 12일에는 중계점, 13일에는 일산점·중동점·병점점, 14일에는 목동점과 시흥점에 집중했다. 그 기간 교섭에 집중하기로 했던 뉴코아노조는 타결에 이르지 못했다. 15일, 민주노총이 1박2일로 예정된 이랜드-뉴코아 2차 집중타격 상경투쟁 일정을 시작했다. 여의도에 1천여 명이 모여 결의대회를 가진 뒤 홈에버 월드컵점으로 이동해 봉쇄투쟁을 전개했다. 16일 새벽 1시, 이랜드일반노조 조합원 200여 명이 홈에버 면목점을 기습 점거했다. 소식을 전해들은 연대 대오 100여 명이 농성현장에 합류했다. 새벽 4시경 경찰병력이 투입돼 조합원들을 폭력적으로 연행했다. 대오를 이끌던 홍윤경 직무대행이 맨 먼저 끌려 나왔다. 홍윤경 직무대행은 연행되기 직전 “경찰의 군홧발이 여성노동자를 짓밟을 수는 있지만 우리는 짓밟혀 쓰러지지 않는다”고 외쳤다. … 뒤이어 조합원들이 줄줄이 전투경찰들과 긴급히 투입된 100여 명의 여경들에 의해 폭력적으로 연행됐다. 경찰 투입 20여 분만에 상황은 끝났다. 조합원들이 앉았던 자리에는 깔고 앉았던 박스만이 남아 있었다.[52] 추석 대목은 이랜드그룹 전체 매출의 30% 이상을 차지하고 있었다. 따라서 민주노총의 이랜드계열 전국유통매장에 대한 추석기간 집중타격투쟁은 결정적인 승부처였다. 만일 민주노총이 8월 21일 임시대의원대회에서 결의한 대로 9월 15일부터 21일까지 2만여 명이 참석하는 전국동시다발 매장봉쇄투쟁을 전개했다면 이랜드 자본에게는 엄청난 압박이 됐을 것이다. 그러나 이 결정적인 승부처에서 민주노총은 전혀 총력을 집중하지 않았다. 이랜드그룹이 흘리는 교섭타결 가능성에 현혹돼서, 또는 스스로 한 대의원대회 결의조차 우습게 여기는 잘못된 관행에 빠져서 투쟁동력 건설을 방기했다. 실제로 진행된 집중타격투쟁은 애초의 결의와는 너무나 달랐다. 이랜드 자본을 전혀 압박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민주노총은 8월 21일 임시대의원대회에서 “지금부터 9월말까지 한 달 간의 기간이 이랜드 투쟁의 최대 승부처”라면서 “지난 두 달여간 보여 왔던 계급적 단결과 연대정신 그 이상의 투쟁력을 발휘하여 승부를 내야 할 때”라고 했다. 따라서 “대의원대회 결의사항을 가맹산하조직, 단위노조 등에 이르기까지 철저히 사수해 나갈 것을 힘차게 결의”했다. 그러나 결과는 그와 전혀 달랐다. 민주노총 스스로 “이 땅 860만 비정규직 문제 그 자체”라고 했던 이랜드-뉴코아 투쟁을 패배로 몰고 간 결정적인 지점이었다. 이후에도 이랜드일반노조와 뉴코아노조의 파업투쟁은 계속 됐다. 그러나 결정적인 승부처를 놓치고 난 뒤, 두 노조의 투쟁은 하염없는 장기전으로 빠져들었다. 민주노총의 연대 동력은 크게 가라앉았다. 상황을 반전시킬 계기도 만들어내지 못했다. 승리의 전망을 놓쳐버린 힘든 싸움이었지만, 이랜드일반노조 조합원들은 2008년 11월 13일까지 총 510일 동안 끈질기게 투쟁을 이어 나갔다. 여성노동자들은 아이들을 챙기고 가사노동을 하면서 또 나이 든 부모의 병간호를 맡아 하면서도 510일을 견디고 저항했다. 남편과 갈등하거나 시부모의 비난을 받으면서도 ‘노동자’인 자신의 위치를 지키기 위해 투쟁의 현장으로 나왔다. 더욱이 가장으로서 가정의 경제를 책임져야 했기에 투쟁이 길어지자 밤에는 아르바이트를 하고 낮에는 투쟁의 자리를 지켰다. 이들은 자신의 일자리를 지키기 위한 것만이 아니라, 자식의 세대, 다음 세대까지 비정규직을 물려줄 수 없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 여성노동자들은 월드컵점 점거농성에서 쌓인 ‘동료애’를 바탕으로 서로 의지하기도 하고, 동료에게 의리를 지키기 위해 긴 투쟁을 이어 나갔다. 이들은 노동자로서 안정된 조건에서 일하고 싶다는 기본적인 요구를 하던 동료들을 끌고 간 이랜드자본과 정부의 탄압에 분노했다. 즉, 동료애와 분노는 동전의 양면처럼 여성노동자들이 강하고 질기게 510일을 거리에서 저항하게 했던 힘이었다.[53] 2008년 8월 29일 뉴코아노조가 파업 434일 만에 회사와 합의하고 현장으로 복귀했다. 계약만료된 계약직 36명의 재고용, 노조간부 18명의 해고 수용, 노조간부 대상 손해배상소송 철회(노조와 민주노총 등 연대단위를 대상으로 한 손해배상소송은 유지), 2010년까지 무파업이 요지였다. 노조 간부를 포함해 조합원 대부분이 정규직인 뉴코아노조가 500일 가까이 비정규직 문제를 놓고 벌였던 ‘아름다운 투쟁’은 결국 뉴코아 사측의 완승으로 끝난 셈이다. 이번 합의로 뉴코아 노사의 극단적 갈등은 종료됐지만, 같은 이랜드그룹의 홈에버를 상대로 아직 파업을 이어가고 있는 이랜드일반노조는 큰 부담을 안게 됐다. … 뉴코아노조가 이 같은 합의안에 도장을 찍은 배경과 관련해 경제적 문제 등의 현실적 어려움이 작용한 것으로 알려졌다. 김형근 민주노총 서비스연맹 위원장은 “더 연대가 붙기도 어렵고 사회적 이슈로 주목 받는 것도 한계가 온 상황에서 시간만 보내는 것은 한계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또 다른 노동계 관계자는 “정규직인 뉴코아 간부들이 오랜 파업에서 비롯된 경제적 어려움과 각종 손배소로 인해 아파트까지 가압류되는 등 어려움을 많이 겪었다”며 “그런 환경들이 노조 간부들로 하여금 ‘어떻게든 이 상황을 정리하고 싶은’ 마음으로 내몬 것 같다”고 말했다. 결국 최근 유행처럼 번지고 있는 파업 중인 노동자에 대한 수십억 대의 손해배상 소송이 노조를 무릎 꿇게 한 셈이다.[54] 11월 13일 이랜드일반노조도 회사와 합의하고 현장으로 복귀했다. 끝까지 투쟁한 조합원 180여 명의 현장 복귀, 16개월 이상 근무한 계약직의 무기계약직 전환이라는 성과를 얻었다. 그러나 노조간부 12명의 해고를 노조와 당사자가 수용한다는 참혹한 내용이 포함됐다. 총회 때 찬반투표를 했는데, 전 반대했죠. … 투쟁이 패배할 수는 있는데, 사직서를 받는 대신에 돈을 받는 거잖아요? … 투쟁을 마무리하면서 실력이 안 되면 해고자들을 복직 못 시키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거지. 나머지 조합원들이 현장에 복직해서 추후를 도모할 수는 있잖아요? 그렇게라도 들어가야지요. 그런데 그걸 넘어서서 사직서를 받는 방식은 아예 해고자들을 내치는 거잖아요. 회사는 “해고자들을 잘라내라. 이 강성들을”, 거기에 동의해 준 거지요. 그러니까 단순히 사직서 쓰는 차원이 아니죠. 그런데도 통과됐죠. 조합원들이 경제적 어려움이 극에 달하고 있었기 때문에 끝내는 게 중요했어요. “이후를 도모하자” 이런 것도 없어요. 솔직히 말하면 “무조건 끝내자” … 합의 없이 투쟁을 마무리하고 싶으면 비해고자들을 복귀 전술을 쓰고 해고자들은 남아서 이 비해고자들이 적응할 수 있게 도와주고, 조직을 복원하는 데 활동가로서 충분히 할 수 있어요. 그런 전술을 쓸 수 있는데, 이 전술을 안 쓰고 임금인상을 받아 복직자들한테 명분을 준다는 의미죠. 대신에 … 해고자를 내친다는 거예요. … (서형태, 병점)[55] 다음 편 보기 [1] 김기일(비정규직전국모임 대표), 1999, 「비정규직 노동자의 입장에서 본 한라중공업 파업투쟁」, 『민주노동과 대안』 12월호. [2] 대법원은 일찍이 1996년 4월 판결을 통해 학습지교사의 근로기준법상 노동자성을 부정했다. 학습지교사의 노동조합법상 노동자성은 오랜 투쟁과 법적 다툼 끝에 2018년 6월 대법원 판결을 통해 인정됐다. [3] 부산지역일반노동조합, 2000/04/01, 「창립결의문」. [4] 화물연대 파업에 대한 업무개시명령은 2022년 11월 윤석열 정권에 의해 처음 발동됐다. [5] 박일수(현대중공업 사내하청 노동자), 2004/02/14, 「유서」 [6] 울산건설플랜트 노조, 2005, <2005 울산건설플랜트 파업투쟁 때려! - 76일간의 파업일지>(영상) [7] KTX 승무원들은 2010년 1심과 2011년 2심에서 ‘철도공사와 직접 근로관계가 인정된다’고 하여 승리했으나 2015년 대법원이 직접 근로관계를 인정하지 않으면서 최종 패소했다. 그런데 2018년 ‘양승태 대법원 사법농단’ 사건이 터지면서 KTX 대법 판결이 박근혜 정권 청와대와 대법원이 협조한 사례 가운데 하나였던 것으로 밝혀진다. 2018년 철도공사가 철도노조와 KTX 해고 승무원 복직을 합의했다. [8] 윤애림, 2016, 「2000년대 비정규직 연대운동과 노동기본권 쟁취 투쟁- 전국비정규직노조연대회의의 권리입법 투쟁을 중심으로」, 『산업노동연구』 22권 1호, 191~192쪽. [9] 안기호(현대자동차 사내하청 노동자), 2003/04/28, 「비정규직도 인간이다! 인간답게 살아보자! - 현대자동차 비정규직 인간선언」. [10] 현대차노조, 2003/07/08, 「비정규직 독자노조 추진에 대한 우리의 입장 - 현대자동차노동조합 상무집행위원 일동」, <중앙쟁대위 속보>. 2002~03년 현대차노조는 ‘중앙파’인 민노투 집행부가 이끌었다. 한편 2003년 7월 하순 현대차노조 위원장이 사측에게 파업중단 요청과 함께 2억 원을 받은 사실이 2007년 1월 사측에 의해 폭로됐다. 그가 사측에게 돈을 받은 시점은 정규직 노조의 방해를 딛고 비정규직 노조가 설립된 지 불과 보름 정도 뒤였다. 뇌물 수수 사실이 폭로되면서 구속된 그는 징역 2년을 선고받아 복역했다. [11] 맨아워(Man-Hour)는 한 사람이 한 시간에 하는 일의 양이다. 완성차 조립공정에 신차가 들어오면 전체 작업공정이 달라지는데, 이에 따라 맨아워 조정이 이뤄진다. 통상 자본은 신차 투입을 계기로 자동화, 외주모듈화, 노동강도의 수준을 높임으로써 작업에 투입되는 노동자의 숫자를 줄이려고 했다. 맨아워 협의에 임한 정규직 대의원들이 줄어드는 작업자의 수를 사측과 합의하면, 사측은 그 수만큼 사내하청 노동자를 정리해고 했다. [12] 서영호·양봉수 열사회, 2025, 『현대차 열사·희생자 백서』, 류기혁 편. [13] 이 때 생산공정 비정규직의 8~90%를 차지하는 1차 하청 전체가 불법파견 판정을 받았다. 현대차에는 이들 말고도 생산공정에 2·3차 하청이 존재했으며, 그밖에도 식당·청소·통근버스·조경·경비 등 다양한 분야에 사내하청이 존재했다. [14] 민주노총, 2004/12/09, 「현대자동차 사내하청 노동자 전원 불법파견 확인... 즉각 정규직화 해야」. [15] 서영호·양봉수 열사회, 2025, 『현대차 열사·희생자 백서』, 류기혁 편. [16] 현대차 비정규직노조, 2005/01/18, 「생산을 멈춘 5공장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파업현장」, <현자비정규직노조>. [17] 서영호·양봉수 열사회, 2025, 『현대차 열사·희생자 백서』, 류기혁 편. [18] 2004~05년 현대차노조는 다시 ‘현장파’인 민투위 집행부가 이끌었다. 민투위 집행부는 2001년에 7·5 총파업에 불참한 데 이어 2004~05년에는 비정규직의 불법파견 철폐 투쟁을 배신했다. [19] 2006년 현대차노조는 ‘중앙파’인 민노회 집행부가 이끌었다. 결과적으로 현대차에서 국민파·중앙파·현장파는 번갈아 가며 비정규직을 배신했다. [20] 이후 2005년 비정규직 해고자들이 현대차를 상대로 근로자지위를 확인해 달라며 제기한 민사소송에서도 지방법원과 고등법원은 자본의 손을 들어주었다. 그러나 2010년 7월 대법원은 ‘현대차 사내하청은 불법파견’이라는 취지로 사건을 파기환송했다. [21] 서영호·양봉수 열사회, 2025, 『현대차 열사·희생자 백서』, 류기혁 편. [22] 노무현 정권은 정권 초기인 2003년 3월, 민주노총 지도위원을 역임한 김금수를 노사정위원장으로 임명하면서 민주노총을 노사정위원회에 다시 끌어들이고자 했으나 민주노총은 여전히 불참하고 있었다. 민주노총 안에는 사회적 교섭에 찬성하는 세력이 많았지만, 1998년 2·6 정리해고 도입 합의 같은 쓰라린 경험 때문에 노사정위원회 복귀를 쉽사리 밀어붙일 수 없었다. [23] 2004년 4월 총선에서 민주노총의 전폭적 지지를 받은 민주노동당은 국회의원 10명을 당선시켰다. 진보정당에서 국회의원 당선자가 나온 것은 1961년 박정희 군사쿠데타 이후 처음이었다. [24] 민주노총·민주노동당, 2004/07/07, 「비정규 노동자 보호와 권리보장을 위한 입법안 주요 요지」. [25] 노동부, 2004/09/16, 「비정규직 입법안의 주요 내용」. [26] 박권일, 2004/11/15, 「노무현은 왜 비정규직을 버렸나」, <월간 말>. [27] 민주노총, 2005/03/17, 「[보도] 민주노총 중집 결정사항에 대하여」. [28] 민주노총, 2005/04/06, 「[보도] 노·사·정, 정당 대표자회의 결정사항」. [29] 민주노총, 2005/04/14, 「[논평] 비정규입법 관련 국가인권위원회 의견을 환영한다」. [30] 특히 노무현 정권의 파견법 개정안이 파견기간 초과시 ‘고용의제’를 ‘고용의무’로 완화하는 내용을 담고 있던 상황에서, 민주노총은 공식 입장(권리보장 입법안)으로는 파견법 폐지를 주장했지만, 실제 행동에서는 파견법 개악을 반대하는 수준, 즉 기존 파견법의 ‘고용의제’를 방어하는 수준에 머물렀다. [31] 민주노총, 2005/10/05, 「[보도자료] 사상 첫 ‘노사 대토론회’ 개최」. [32] 한국노총, 2005/11/30, 「비정규직 관련법 제·개정을 위한 최종안」. [33] 민주노총, 2005/11/30, 「[기자회견] 노사교섭 결렬에 깊은 유감을 표한다」. [34] 민주노동당 단병호 의원이 2005년 12월 8일 국회 환경노동위원회 법안심사소위에 제출한 수정안. 1번부터 4번까지는 2004년 7월 제출한 비정규직 권리보장 입법안에 담긴 내용이고, 5번부터 10번까지가 새로 추가된 내용이었다. [35] 민주노총, 2005/12/08, 「[논평] 이제 정치권이 답할 차례이다」. [36] 매일노동뉴스, 2005/12/19, 「민주노동당, ‘비정규직법 수정안’ 놓고 논란」. [37] 민주노총, 2006/02/28, 「[보도자료] 비정규법안의 문제점과 총파업의 정당성」. [38] 노사관계 로드맵은 2003년 12월 최종보고가 제출된 이후 2년 넘게 사회적 교섭에서 논의되지 못했다. 노무현 정권은 2006년 1월 당정 협의를 통해 노사관계 로드맵을 24개 과제로 압축한 뒤, 4월 임시국회 상정을 추진하고 있었다. [39] 민주노총, 2006/07/21, 「민주적 노사관계 구축의 4대 방향, 8대 핵심요구안」. [40] 박점규, 2006/09/12, 「한국노총 야합보다 더 절망스런 민주노총의 무기력」, <레디앙>. [41] 민주노총, 2006/11/30, 「[성명] 보수양당의 반노동 비정규악법 날치기처리는 역사적 심판을 받을 것이다」. [42] 민주노총, 2006/12/08, 「[성명] 노동자의 기본권을 무력화하는 노동법 개악안 통과를 규탄한다」. [43] 노동해방연대, 2007/02/01, 「한발 한발, 그러나 고지를 향해 똑바로!」, 『노동해방』 53호. [44] 민주노총, 2006/12/22, 「[기자회견문] 1500만 노동자는 보수양당을 반드시 심판할 것이다」. [45] 김대중 정권 시절을 거치는 동안 자주성이 심각하게 훼손됐던 ‘민주노조운동’은 노무현 정권 시절 동안 자주성을 더욱 상실했다. 김금수·박태주·김영대 등 노무현 정권에는 민주노총에 더욱 직접적인 영향력을 가진 노동운동 출신 인사들이 포진한 까닭이기도 했지만, 정부 측 인사들의 일상적인 개입과 영향력 행사를 너무나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된 민주노총의 주체적 상태 때문이기도 했다. [46] 윤애림, 2015/01/29, 「2015년 민주노총 총파업은 2006년과 어떻게 다른가」, <매일노동뉴스>. [47] 윤애림, 2016, 「2000년대 비정규직 연대운동과 노동기본권 쟁취 투쟁- 전국비정규직노조연대회의의 권리입법 투쟁을 중심으로」, 『산업노동연구』 22권 1호, 224쪽. [48] 유경순, 2020, 『2007~2008년 이랜드홈에버 여성노동자들의 저항과 연대 - 510일』 1권, 봄날의박씨, 296~298쪽. [49] 유경순, 2020, 『2007~2008년 이랜드홈에버 여성노동자들의 저항과 연대 - 510일』 1권, 봄날의박씨, 18~20쪽. [50] 유경순, 2020, 『2007~2008년 이랜드홈에버 여성노동자들의 저항과 연대 - 510일』 1권, 봄날의박씨, 398~399쪽. [51] 민주노총, 2007/08/21, 「제41차 임시대의원대회 결의문」. [52] 유경순, 2020, 『2007~2008년 이랜드홈에버 여성노동자들의 저항과 연대 - 510일』 1권, 봄날의박씨, 514쪽. [53] 유경순, 2020, 『2007~2008년 이랜드홈에버 여성노동자들의 저항과 연대 - 510일』 1권, 봄날의박씨, 18~20쪽. [54] 프레시안, 2008/08/31, 「‘434일 만의 타결’ 뉴코아 노사, 이면 합의 있었다」. [55] 유경순, 2020, 『2007~2008년 이랜드홈에버 여성노동자들의 저항과 연대 - 510일』 2권, 봄날의박씨, 392~393쪽. 병점 분회장이던 서형태는 애초 사직서 제출자 12명에 포함됐지만 이를 거부하고 유일한 해고자로 남았다. /* 스크롤 여백만 주고, 화면에는 안 보이게 */ .ftn-target { display: inline-block; /* 줄바꿈 안 생김 */ width: 0; height: 0; scroll-margin-top: 200px; } document.addEventListener("DOMContentLoaded", function () { // name="_ftn1", name="_ftn2", name="_ftnref1" ... 전부 대상 document.querySelectorAll('a[name^="_ftn"]').forEach(function(a) { var idValue = a.getAttribute("name"); // 이미 같은 id의 요소가 있으면 또 만들지 않음 if (!document.getElementById(idValue)) { var span = document.createElement("span"); span.id = idValue; span.className = "ftn-target"; a.parentNode.insertBefore(span, a); } }); }); /* 본문 각주 번호 + 아래쪽 각주 번호 색 지정 */ a[href^="#_ftn"] sup, a[href^="#_ftnref"] sup { color: #BF202D; } /* 밑줄이 보기 싫으면 */ a[href^="#_ftn"], a[href^="#_ftnref"] { text-decoration: none; } /* 마우스 올렸을 때 살짝만 강조하고 싶으면 (선택) */ a[href^="#_ftn"]:hover, a[href^="#_ftnref"]:hover { text-decoration: underline; } /* 페이지 전체가 오른쪽으로 넘치지 않게 */ html, body { max-width: 100%; overflow-x: hidden; } /* 본문 영역 폭 강제 고정 + 긴 단어/문장도 줄바꿈 */ #bo_v_con, .bo_v_con, .cke_editable, article { max-width: 100%; overflow-wrap: break-word; word-wrap: break-word; /* 구형 브라우저용 */ } /* 워드에서 붙은 이미지/표가 화면 밖으로 안 나가게 */ #bo_v_con img, #bo_v_con table, .bo_v_con img, .bo_v_con table, .cke_editable img, .cke_editable table, article img, article table { max-width: 100% !important; height: auto; } /* 워드가 p, span에 폭을 박아놓은 경우 강제로 해제 */ #bo_v_con p[style*="width"], #bo_v_con span[style*="width"], .bo_v_con p[style*="width"], .bo_v_con span[style*="width"], .cke_editable p[style*="width"], .cke_editable span[style*="width"], article p[style*="width"], article span[style*="width"] { width: auto !important; max-width: 100% !important; } /* 기본 blockquote 스타일 */ blockquote { border-left: 4px solid #c0392b; /* 사이트 분위기와 맞는 붉은 계열 */ padding: 12px 18px; margin: 20px 0; background: #fafafa; font-style: normal; color: #333; line-height: 1.6; } /* blockquote 안의 p 태그 정렬 */ blockquote p { margin: 0 0 10px 0; text-align: justify; } /* 마지막 p 태그 여백 제거 */ blockquote p:last-child { margin-bottom: 0; } -
[번역] 퀴어 억압은 자본주의의 심장에 새겨져 있다LGBTQ+ 억압은 자본주의적 생산 및 재생산 구조에 깊이 각인되어 있다. 사회주의만이 퀴어 해방, 나아가 모두의 성적 해방을 위한 토대를 만들 수 있다. 2004년에는 미국인의 60퍼센트가 동성 결혼에 반대했다. 지금[2019년]은 61퍼센트가 동성 결혼을 지지한다. 민주당 대선 경선에서 높은 인기를 끌었던 후보 중 한 명은 커밍아웃한 게이 남성이었고, 오늘날 젊은 세대의 절반 이상은 자신을 비이성애자로 정체화한다. 굉장한 변화가 있었음은 분명하다. 그러나 정치 권력의 최상부에 올라선 이들과 여전히 억압으로부터 가장 큰 타격을 입는 이들의 격차는 엄청나게 크다. 퀴어가 CEO가 되고 권력의 중심에 진입하는 바로 그 나라에서, 흑인 트랜스 소녀는 생존을 위한 성노동에 내몰리고 레즈비언은 ‘교정’이라는 이름으로 강간당하며 트랜스 여성 록사나 에르난데스는 이민자 구금시설에서 목숨을 잃는다. LGBTQ+ 억압의 위력은 여전히 무시무시하며, 트랜스, 유색인, 빈곤층에게 특히나 강력하다. 우리가 쟁취한 권리와 소수의 특권은 다수의 비참한 현실을 더욱 선명하게 드러낼 뿐이다. 이 모순을 앞에 두고서 LGBTQ+ 해방은 사다리 같은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까? 새로운 권리를 하나씩 쟁취할 때마다 퀴어는 해방에 한 발짝 더 가까워지는 것일까? 아니면 LGBTQ+ 억압은 사회 구조 자체에 각인되어 있어서 자본주의 체제 전체를 깨부수지 않는 한 결코 흔들리지 않는 것일까? 노동 착취에 기반한 체제인 자본주의는 광범위한 인간 해방의 가능성을 열었다. 실제로 오늘날 우리가 이해하는 LGBTQ+ 정체성 자체가 자본주의의 역사적 산물이다. 그러나 이 체제는 자유, 해방, 정의라는 자신의 약속을 절대다수의 사람들에게 이행할 수 없다. 퀴어에게 가해지는 LGBTQ+ 억압은 자본주의적 생산과 재생산 모두의 산물이며, 특히 노동 소외와 핵가족이 요구하는 경직된 젠더 역할에서 비롯된다. 따라서 LGBTQ+ 해방, 더 나아가 넓은 의미의 성적 해방은 자본주의 체제 안에서는 불가능하다. 억압은 이 체제 안에 지울 수 없을 정도로 깊이 새겨져 있다. 반면에 사회주의는 LGBTQ+ 억압을 종식시킬 물적 토대를 제공한다. 젠더와 섹슈얼리티의 사회적 구성 어떤 인권 옹호자들은 LGBTQ+가 어느 시대에나 존재해 왔으며, 우리는 “이렇게 태어났기 때문에” 권리를 누릴 자격이 있다고 주장한다. 마르크스주의 이론가 존 디에밀리오는 이 같은 입장을 “영원한 동성애자라는 신화”라고 부르는데, 현실은 이보다 훨씬 복잡하다. 동성 간 욕망과 젠더 유동성은 역사 전반에 걸쳐 전 세계 다양한 문화권에서 존재해 왔지만, 그것의 사회적 역할과 수용 정도는 시대에 따라 극적으로 달랐다. 어떤 문화에서는 동성 간의 성적 관계가 의례적 역할을 수행했고, 다른 문화에서는 논바이너리적 존재가 특별한 능력을 지닌다고 생각했다. 자본주의 이전 유럽 사회에도 “크로스 드레싱 금지법”과 수많은 남색(Sodomy) 금지법이 존재했지만, 봉건제 하에서는 공고한 LGBTQ+ 정체성이 존재하지 않았고 범죄화된 행위가 있을 뿐이었다. 디에밀리오의 주장에 따르면, 자본주의 노동 체제야말로 “20세기 후반의 수많은 남성과 여성이 스스로를 게이라 부르고, 자신들이 유사한 남녀 공동체의 일원임을 인식하며, 그 정체성을 기반으로 정치적으로 조직화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이런 이유에서, 역사를 되돌아보며 전혀 다른 맥락과 문화에 속한 사람들에게 LGBTQ+ 꼬리표를 붙이는 것은 옳지 않다. 『역사에서 감추어진 것들(Hidden from History)』 서론에서 주장하듯이, “지금 우리가 이해하는 것과 같은 동성애자 역할은 근대에 발전한 것인데, 이것이 유일하게 가능한 방식의 동성애자 역할은 아니다.” 역사적 고찰의 대상은 퀴어 정체성만으로 국한되지 않는다. 근대적 가족의 형성, 근대적 젠더 역할, 이성애라는 개념 자체 역시 역사적 구성물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이러한 구성물들을 낳는가? 마르크스주의적 관점에서, 젠더·섹슈얼리티·가족·사랑이 조직되는 방식은 상당 부분 인간의 생산 관계에 기반한다. 우리가 먹을 것을 확보하고, 공동체를 조직하며, 하루의 대부분을 쏟는 방식을 결정하는 그 관계 말이다. 엥겔스의 『가족, 사유 재산, 국가의 기원』은 생산의 발전과 가부장적 가족의 발전을 연결하고, 사유 재산이야말로 남성에 대한 여성 종속에 기반한 가족 단위를 만들어 낸 핵심이라고 주장한다. 엥겔스가 부정확한 인류학 연구를 바탕으로 삼은 것은 사실이지만, 역사의 흐름에 대한 전반적 성찰은 옳다. 가정 대신 작업장이 생산의 장이 되면서, 자본주의는 새로운 종류의 가족 관계를 탄생시킨다. 가족에게 필요한 재화가 한때는 가정에서 생산되었지만, 이제 다른 곳에서 생산되어 구매된다. 가정은 노동자 계급의 재생산 단위로, 노동자를 먹이고 입히며 아이들을 노동자 계급의 일원으로 길러내는 장소로 남는다. 한편 남성은 원자화된 임금 노동자가 되어, 고향을 떠나 어디서든 자신의 노동력을 팔 수 있게 되었다. 가부장제는 이 배치 속에 각인되어 있으며, 여성은 임금 노동이라는 짐을 지든 아니든 간에 가정 내 무급 노동을 떠맡는다. 이 사적 소유와 노동력 판매 체제로부터 근대 민주주의가 출현했고, 개인의 자유와 평등이라는 이상, 노동 시장에서는 모든 이가 평등하며 누구에게든 자신의 노동력을 판매할 “자유”가 있다는 관념도 생겨났다. 존 디에밀리오가 주장하듯 자본주의의 선택 개념은 가족 구성에도 영향을 미쳤다. 파트너십은 점차 욕망과 친화성이라는 근대적 이상에 기초하게 되었다. 그러나 자본주의에서 “선택”과 “자유”는 언제나 양날의 검이다. 자본주의 역사 전반에 걸쳐 “만인을 위한 자유와 평등”이 의미하는 것은 곧 법에 새겨진 인종 차별, 성차별, 동성애·트랜스 혐오였고, 이것은 국가의 억압 기구에 의해 강화되었다. 오늘날 우리가 누리는 “자유”는 학교, 가족, 교회 같은 사회 제도에 의해 제한되며, 이 제도들은 사람들에게 “허용 가능한” 성적·젠더 규범을 주입하려 한다. 선택의 자유는 경찰, 감옥, 법률 같은 억압적이고 인종주의적인 기구에 의해서도 제한되며, 자본주의의 경직되고 잔혹한 경쟁 구조 안에 가두어져 있다. 사회적 낙인과 억압 또한 자유를 제약한다. 식민주의는 젠더와 성적 역할을 가장 잔혹하고 폭력적인 방식으로 강제했다. 자본주의적 생산 양식이 원주민 공동체에 이식되었고 토지는 약탈당했으며 원주민은 값싼 노동력으로 사용되었다. 식민자들은 군대를 동원해 논바이너리 구성원들을 표적 공격하고, 원주민에게 가톨릭으로의 개종을 강제하고, 기숙 학교에서 원주민에게 규범적 성별 역할을 주입하는 등 집단 학살에 준하는 행위를 저질렀다. 그러나 삶에서 선택할 권리에 관한 자본주의적 관념은 19세기 중반에 이르러 동성 파트너십이라든가 출생 시 지정된 것과 다른 젠더를 “선택”할 가능성을 열었다. 존 디에밀리오의 주장에 따르면, “가구에서 경제적 자립을 박탈하고 섹슈얼리티와 출산의 분리를 촉진함으로써 자본주의는 일부 남성과 여성이 동성에 대한 성애적·감정적 끌림을 중심으로 개인의 삶을 조직할 수 있는 조건을 만들어 냈다.” 마찬가지로 수전 스트라이커(Susan Stryker)는 디에밀리오가 자본주의 체제의 “동성애자”에 대해 묘사한 것과 동일한 과정이 트랜스 구성원들에게도 적용되었다고 『트랜스젠더의 역사(Transgender History)』에서 주장한다. 사람들이 공동체 바깥으로 이주할 자유를 갖게 되면서 출생 시 지정되지 않은 젠더로 자신만의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가 전진하는 과정에서 피억압자들은 자본주의가 약속한 평등한 권리를 쟁취하기 위해 싸웠다. 불평등을 나타내는 명백한 법률적 지표 상당수는 피억압 민중의 운동으로 타파되었다. 이를테면 미국에서 여성과 유색 인종은 법 앞의 평등을 거의 완전히 쟁취해 냈다. 그러나 법적 평등이 곧 삶의 평등은 아니다. 자본주의는 자신의 구조 속에 새겨진 억압을 유지하면서도 형식적 평등은 기꺼이 양보하는 경우가 많다. 인종 차별, 성차별, 동성애 혐오, 트랜스 혐오가 바로 그렇다. 자본주의적 재생산과 성적 비참함 자본주의에서 가족 단위는 선행하는 가부장적 체제에 뿌리를 두고 있다. 가족은 이성애 규범적 젠더 역할에 기초하는데 이 역할은 “과학”과 “생물학”을 근거로 삼는다고 여겨진다. 여성은 요리, 청소, 육아, 빨래 같은 재생산 노동에 맞는 생물학적 성향을 지닌다는 것이다. 무급 가사 노동에서 “여성의 역할”은 자본주의의 톱니바퀴를 돌리는 데 필수적이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자본주의 체제는 성별 역할, 특히 가족 영역 안에서 이루어지는 무급 육아와 가사 노동에 막대한 이해 관계를 가지고 있다. 자본가가 노동자 계급의 재생산 비용을 직접 지불해야 한다면 이윤이 감소할 것이기 때문이다. 여성이 (생물학적으로) 어머니이자 돌봄 제공자가 될 운명이라는 이데올로기는 동성 커플, 출산하지 않는 여성, 전업주부 아버지, 그 외의 비전통적 본보기들까지 우리 사회에 반례가 넘치도록 있는데도 끈질기게 지속되어 왔다. 자본주의 태동기부터 흑인 여성은 흑인 남성과 나란히 가장 혹독하고 가혹한 노동에 내몰렸다는 명백한 사실에도 이 이데올로기는 지속되어 왔다. 오히려 이 사실은 흑인을 병리화하는 데 이용되어, 제도적 인종주의에 맞서 싸우거나 배상을 요구하는 대신 핵가족을 통해 흑인이 빈곤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주장이 생겨났다. 여성 해방 운동과 LGBTQ+ 권리 운동 이후 가족과 젠더 역할이 좀 더 유동적으로 변한 것은 사실이지만, 시스–이성애 규범적 가족 모델은 여전히 건재하며 퀴어 억압을 재생산하고 있다. 자본주의 이데올로기는 낭만적 가족 파트너십이 사랑을 바탕으로 선택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생활비를 나누어 지불할 파트너를 찾아야 한다는 막대한 경제적 유인이 존재하여, 운 좋으면 지루하고 최악의 경우 폭력적인 관계에 매이게 된다. 이는 동일 노동에 더 적은 임금을 받는 여성에게, 특히 유색 인종 여성과 노동자 계급 여성에게 더욱 절박한 현실이다. 이 구조는 각 가족이 사회 전체의 최선이 아니라 자신의 “사랑하는 사람들”만의 최선을 위해 행위하는 분위기를 조성함으로써 자본주의에 복무한다. 자본주의는 가족의 경제적 필요와 더불어 낭만적 가족 이데올로기를 퍼뜨린다. 태어나는 순간부터 “올바른” 젠더 역할이 주입되며, 우리는 사랑하는 파트너가 자본주의의 소외를 치료하여 우리를 온전하고 완전하게 만들어 줄 수 있다고 세뇌당하는데, 이것은 특히 여성을 겨냥한 메시지다. 전통적 가족 단위는 소외되고 고립된 세계 한가운데에서 지지의 공간이 될 수 있지만, 동시에 일부일처제가 강제하는 성적 비참함의 단위이기도 하다. 마르크스주의 성 연구자 빌헬름 라이히는 『성 혁명』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결혼 제도의 모순은 결혼의 성적 이익과 경제적 이익이 충돌하며 비롯된다…완전히 충족된 성생활을 영위하는 사람이 결혼 도덕의 조건(평생 오직 한 명의 파트너)에 복종할 가능성은 낮으므로, 즉 성-경제적으로 불가능하므로, 첫 번째로 요구되는 것은 성적 욕구의 고질적인 억압, 특히 여성에 의한 억압이다. 가족은 우리의 성적 욕망과 충돌하는 필수적 경제 단위다. 라이히의 설명처럼 가족 구조는 욕망을 억압하기 위한 구조이며, 여기에 나는 동성 간 욕망 및 젠더 탐색에 대한 억압을 덧붙이고 싶다. 그러나 모범적인 “전통적” 가족이란 노동자 계급 대다수에게 신기루에 가깝다. 노동자 계급은 물려줄 사유 재산이 없고, 노동 시장에 뛰어들어야 하는 여성에게는 경직된 성별 역할을 강제할 수 없으며, 너무 어린 나이에 일을 시작하거나 동생들의 부모 역할을 떠맡아야 하는 노동자 계급 아이들에게는 “순수한 어린 시절”이 없다. 대량 투옥, 추방, 서구 제국주의가 강제한 이주로 인해 해체된 가족들의 경우는 더더욱 그렇다. 부유한 여성은 관리자 역할을 하면서 다른 여성들(대개 흑인, 갈색 피부, 이민자 여성)을 조직해 가정 내 가사 노동을 맡긴다. 여성 해방 운동이 전개되고 (남성의) 가족 임금이 해체되면서 점점 더 많은 여성이 노동 시장에 진입하는데, 이것이 자본가의 이윤 추구와 결합하면서 전통적 가족 단위는 무너지고 있는 듯하다. 자본주의가 핵가족 구조에 의해 떠받쳐지는 동시에 핵가족 구조를 파괴한다는 모순은 “가족 수호” 이데올로기가 출현하는 조건이 되는데, 이 같은 이데올로기는 대개 가짜 생물학적 결정론에 기반한다. 정치인들은 부모에게(보통 어머니 또는 흑인 아버지에게) 자녀와 더 긴 시간 함께하지 않는다고 훈계하고, 우파는 가족의 해체를 애도한다. 국가는 총기 난사, 부실한 교육, 아동 비만 증가 등 모든 사회적 병폐의 원인을 가족의 붕괴로 돌린다. 민주당과 공화당 모두 가족을 향해 손가락질하면서도, 자본주의적 경제 조건은 언제나 가족을 잠식했으며 현재의 사회적 재생산 위기 또한 자본주의 위기의 직접적 산물이라는 사실은 외면한다. LGBTQ+ 억압과 부르주아 가족 LGBTQ+는 가부장적 가족 단위의 근간을 이루는 생물학적 결정론이 틀렸음을 그 자체로 입증한다. 직업을 가진 여성들, 입양, 체외 수정 등의 사례가 이미 생물학적 결정론의 기만성을 입증하지만, LGBTQ+는 “전통적 가족을 파괴한다”는 이유로 우파에 의해 특별히 표적이 되어 왔다. 그리고 어떤 차원에서는 그것이 사실이다. LGBTQ+는 출생 시 여성으로 지정된 사람이 반드시 여성은 아니라는 점을 보여 준다. 여성인 사람이 반드시 남성에게 끌리는 것은 아니며, 반드시 자녀를 보살피는 어머니일 필요도 없고, 집안을 돌보도록 생물학적으로 결정된 존재도 아니다. 바로 이 불편한 사실들 때문에 자본주의에게는 LGBTQ+를 억압하고 주변화하면서 우리가 “정상”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것이 중요하다. 미국의 수많은 제도들은 전통적 가족 및 젠더 모형에 특히 깊이 빠져 있고, 일부 동성 커플을 주변부에 받아들인 것만으로는 이 모형이 유의미하게 대체되지 않았다. 많은 것이 변했지만, 의류 매장의 아동용품 코너를 걷기만 해도 젠더 역할 고정 관념이 여전히 만연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기독교는 가족 단위가 중요하다고 설교하고, 대부분의 교회에서 동성 관계는 죄악이다. 학교 역시 젠더 규범을 떠받치는 데 일조한다. 이를테면 학교가 정의한 남아와 여아 구분에 따라 화장실 앞에 줄을 서도록 요구하며, 많은 학교는 트랜스 아동들이 자신의 젠더에 맞는 화장실을 사용하는 것조차 허용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주류에 편입한 LGBTQ+ 구성원들은 가족을 파괴하지 않았다. 게이와 레즈비언 정체성이 부분적으로 정상화되었지만, 동성 간 욕망과 젠더 탐색을 억압하는 체계는 여전히 굳건하다. 물론 이 정상화는 게이 크루즈, 프라이드 깃발, 레인보우 아디다스 스니커즈에 이르는 수십억 달러 규모의 틈새 시장을 창출하기도 했다. 이 같은 정상화는 근저의 시스-이성애-가부장적 체제를 위협하지 않는 한에서만 허락된다. 말하자면 가족 단위가 여전히 자본주의 사회의 기본 구성 요소로 기능하는 한에서, 두 남성의 결혼도 허용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 선택적 정상화는, 경찰에 저항하는 스톤월의 뿌리로부터 급진적 퀴어 운동의 노골적 섹슈얼리티와 이성애 규범성 거부에 이르기까지 LGBTQ+ 운동의 가장 전복적인 측면들을 길들이면서 작동했다. 정상화는 또한 퀴어들의 사교를 위한 비상품화된 공간을 파괴하면서 진행되었다. 뉴욕의 더 피어스(The Piers)처럼 주로 유색 인종 퀴어들이 어울리고 유혹하고 섹스하던 장소들 말이다. 피어스를 비롯해 전국 각지에서, 주로 유색 인종 퀴어가 모이던 공공 공간은 경찰의 단속과 젠트리피케이션의 대상이 되었다. 프랑스의 트로츠키주의자 장 니콜라가 주장했듯, “부르주아지가 게이에게 이성애자와의 형식적 평등이라는 지위를 부여하고, 심지어 동성 커플을 제도화하는 데까지 나아갈 수 있다 해도—그럼으로써 게이 정체성의 환상은 강화된다—실질적 평등을 확립하기란 무한히 더 어려울 것이다. 그것은 사회 유기체 전체 내에 동성애적 구성 요소가 있음을 인정하는 것일 텐데, 이는 남성적 지위와 남성성에 대한 너무나 급진적인 도전이어서 가족과 부르주아 문화 전체의 근본적 격변으로 이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LGBTQ+의 욕망과 젠더를 사회에 온전히 통합하려면, 일부 사회적 태도의 변화만이 아니라 사회 체제 자체의 전환이 필요하다. 자본주의적 생산이 만드는 성적 비참함 그러나 LGBTQ+ 억압은 자본주의적 사회 재생산의 일부일 뿐 아니라 자본주의적 생산에 새겨진 성적 비참함의 일부이기도 하다. 이 체제는 자기 몸 외에는 아무것도 소유하지 못해 시장에 노동력을 팔 수밖에 없는 절대다수에 대한 착취에 의존한다. 이것이 인구 대다수의 소외와 성적 비참함의 물적 토대다. 마르크스가 『경제학–철학 수고』에서 설명하듯이, “노동은 노동자에게 외적이다. 즉, 노동은 노동자의 본질에 속하지 않는다. 따라서 노동자는 자신의 노동 속에서 자기를 긍정하지 않고 부정하며, 행복이 아니라 불행을 느끼며, 자신의 육체적·정신적 에너지를 자유롭게 발전시키는 것이 아니라 육체를 소모시키고 정신을 황폐화시킨다.” 이것이 소외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욕망, 창의성, 생각을 부정하고 억누르고 무시하면서 하루를 보낸다. 노동자는 자신의 몸과 정신을 회복 불가능한 방식으로 소진시키면서 하루의 대부분을 보낸다. 무엇보다 가장 고되고 소외된 노동을 수행하는 이들은 흔히 미등록 이주민과 유색 인종이다. 젠더적·성적 비참함은 이 같은 일상의 물적 조건에서 파생된다. 즉, 하루의 대부분을 바치는 소외된 노동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그러나 소외는 작업장에서 멈추지 않는다. 소외는 우리의 삶과 정신 전체를 지배하며, 섹슈얼리티 안으로까지 흘러들어간다. 그리고 시간 부족 문제가 있다. 일하고, 쉬고, 아이를 돌보고, 성적 관계든 아니든 친밀한 관계를 맺기에 충분한 시간이 말 그대로 존재하지 않는다. 쾌락을 부정하면서 소외된 노동으로 점철된 하루를 보내고, 퇴근 후에 기진맥진한 몇 시간 동안 그 소외를 깨고 자기 자신이나 타인과 의미 있는 유대를 쌓기란 지극히 어렵다. 그러나 노동 시장은 우리 몸을 망가뜨리고 시간을 잠식하는 데서 그치지 않는다. 자본주의 이데올로기 기구는 특정한 젠더 표현과 수행을 노동 시장의 요구와 결부시키며, 이를 생산적 시민의 조건으로 제시한다. 간단한 예시를 하나 들면, 다음 두 광고의 시간 차는 불과 10년이다: “우리는 할 수 있다!”는 1943년 J. 하워드 밀러가 웨스팅하우스 일렉트릭을 위해 제작한 포스터다. 제2차 세계대전 한복판에서 여성 노동자의 사기를 고취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걸 여자도 열 수 있다고요?”는 1953년 알코아 알루미늄의 광고다. 첫 번째 광고는 수많은 남성이 제2차 세계 대전에 참전한 상황에서 산업 노동에 여성이 필요했던 역사적 시기를 반영한다. 두 번째 광고는 저가 상품의 대량 생산에 기반한 새로운 경제의 산물로, 노동 시장에서 축출된 여성에게 가정으로 돌아갈 것을 요구했다. 그리하여 불과 10년 사이에 여성은 근육을 자랑하던 존재에서 케첩 병도 열지 못하는 존재로 전락했다. 마찬가지로, 가족을 위해서 불평 없이 희생하는 남성 가장이라는 구성물은 자본주의에 막대한 이윤을 안겨 주었다. 이를테면 앨런 시어스(Alan Sears)가 『몸의 정치(Body Politics)』에서 설명하듯, 20세기 초 포드는 “부양 가족을 먹여 살리는 능력과 힘들고 고통스럽고 지루한 노동을 견디는 능력에 기반한 남성적 자부심”을 고취했다. 인종화된 젠더 구성물 역시 자본주의 체제를 떠받친다. 흑인 남성을 범죄자로, 흑인 여성을 강인한 존재로 구성함으로써 교도소 체제 안팎에서 극도로 착취당하는 노동력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이러한 젠더 역할에 순응하지 않는 것은 종종 LGBTQ+에 대한 사회적 징벌, 때로는 물리적 징벌을 의미했다. 이 경직되고 사회적으로 강요된 젠더 역할은 개인적 표현이나 탐색을 가로막는다. 이것은 모든 사람에 대해서, 특히 여성, LGBTQ+, 여성이자 LGBTQ+인 우리에 대해서 젠더적·성적으로 억압하는 체제의 일부다. 자본주의 특유의 자유와 억압의 혼합물은 대다수 사람들에게 성적 비참함의 체계를 만들어 낸다. 1960년대 후반 장 니콜라는 “동성애자”에 대한 낙인이 퀴어를 노동 시장에서 축출하는 역할을 하며, 이 원리가 “동성애적” 욕망을 스스로 억누르는 “이성애자”로 정체한 사람들에 대해서도 규율 효과를 갖는다고 썼다. 결국 사회가 규정한 협소한 역할에 순응하지 않는 사람들은 주류 노동 시장에서 주변화되기 때문이다. 오늘날 미국에서도 젠더 비순응적인 사람들은, 심지어 일부 게이나 레즈비언까지도, 특정 직종에서 배제되고 승진을 거부당하며 직장에서 계속 차별받는다. 사회적 기준에 맞지 않는 많은 이들은 일자리에서 완전히 거부당하는데, 수많은 유색 인종 트랜스의 경우가 바로 그렇다. 유색 인종 트랜스는 흔히 실업 또는 불완전 고용 상태의 산업 예비군으로 남는다. 이 사실은 모든 이의 욕망을 규율한다. 광범위한 젠더적·성적 경험이 인구 대다수에게 차단되고, 계속해서 LGBTQ+를 주변화함으로써 이러한 경험이 수치심과 비밀의 영역으로 밀려난다는 뜻이다. 사회주의와 성적 해방 LGBTQ+ 억압은 핵가족 단위와 근대 노동의 소외를 통해 강요되는 일반화된 비참함과 깊이 연관된다. 일부 게이 남성이(그리고 그보다 훨씬 적은 수의 레즈비언이) 기업과 정치의 영역에서 사다리를 오른다 해도, LGBTQ+ 주변화는 자본주의의 생산·재생산 관계에 각인되어 있으므로 점진적인 권리 축적만으로는 LGBTQ+ 해방에 불충분하다. 아무리 많은 법이 통과되더라도 LGBTQ+ 억압은, 더 넓게는 섹슈얼리티의 억압은, 이 체제 안에서 해결될 수 없다. 따라서 LGBTQ+ 해방을 위해서는 가족의 해체와 소외된 생산으로 유지되는 자본주의 체제의 해체가 모두 필요하다. 사회주의는 퀴어 해방의 필수 조건이다. 이미 『공산당 선언』에서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가족의 종식을 사회주의 정치의 중요한 부분으로 제시했다. 사회주의가 사랑이나 로맨스의 종말을 요구한다는 뜻은 아니다. 경제적·정치적 단위로서의 가족의 종식을 의미하는 것이다. 누구의 생존도 연인 관계를 유지하는 것으로 좌우되지 않도록 보장하는 것—가족의 종식이란 곧 파트너 없이도, 혹은 해로운 파트너를 떠나더라도 살아갈 수 있는 물적 안전을 제공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를테면 볼셰비키는 온 힘을 다해 이 문제에 매달렸다. 그들은 새로운 물적 토대 위에 새로운 사회가 형성됨에 따라 가족이 국가처럼 차츰 소멸하기를 기대했다. 이런 의미에서 적어도 당이 스탈린화되기 이전까지의 볼셰비키는 부르주아 가족 구조를 구식으로 만들겠다는 의식을 지니고 있었다. 1917년 러시아에서 그들은 진부한 가사 노동을 개인의 손에서 거두어 (이제 민주적으로 운영되는) 국가의 손에 맡기고자 했다. 그러나 스탈린의 정치는 여성에 대해서든 LGBTQ+에 대해서든 볼셰비키의 정치와는 전혀 달랐다. 가족의 종식에 관해 쓴 니콜라이 크릴렌코(Nikolai Krylenko) 같은 이론가들은 체포되어 살해되었고, “남색”과 성노동은 범죄화되었다. 스탈린 정부는 전통적 성별 역할을 강제하기 시작했다. 1944년 스탈린은 “모성 영예 훈장(Order of Maternal Glory)”을 제정해 출산한 자녀 수에 따라 여성을 서열화했다. 볼셰비키당 내 좌익 반대파(Left Opposition)의 지도자 레온 트로츠키는 스탈린을 강력하게 비판했으며, 이러한 비판은 제4인터내셔널의 형성 과정에서 명확히 표현되었다. 트로츠키는 『이행 강령』에서 이렇게 쓴다. 기회주의 조직들은 본성상 노동 계급의 상층부에 관심을 집중하며, 따라서 청년과 여성 노동자를 무시한다. 그러나 자본주의의 쇠퇴는 임금 노동자이자 가정주부인 여성에게 가장 강력한 타격을 가한다. 제4인터내셔널의 각 부문은 노동 계급의 가장 착취받는 층에게서, 즉 여성 노동자들에게서 지지 기반을 찾아야 한다. 트로츠키는 가족의 종식과 가사 노동 사회화를 인간 해방의 필수 조건으로 본 이후의 마르크스주의자들과 초기 볼셰비키들을 이어 주는 고리다. 이 같은 사회에서는 예컨대 누군가에게 저녁을 만들어 주는 일이 사회적 책임이 아니라 사랑과 애정의 표현이자 하나의 선물이 될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젠더 역할과 어쩌면 젠더 그 자체마저 물적 토대를 상실한다. 젠더 역할에 대한 사회적 요구가 사라지면서 다수의 젠더, 젠더의 부재, 유동하는 젠더, 이 유동성에 기반한 새로운 형태의 섹슈얼리티의 가능성이 열리게 된다. 생산 노동이 재조직되는 과정 또한 성적 소외의 종식에 기여할 것이다. 기술은 우리 모두가 더 적은 시간 일하면서도 모든 이에게 충분할 만큼 생산할 수 있는 조건을 창출한다. 현재 실업 상태거나 수감 중이거나 사회적으로 불필요한 일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수를 고려하면 이 점은 더욱 명백하다. 사회주의 계획 경제는 더 이상 직장에서 질식당하지 않는 우리의 시간과 창조적 잠재력을 해방시킬 것이다. 마르쿠제는 『에로스와 문명』에서 이 같은 미래를 구상했다. “필요 노동에 전용되어야 하는 본능적 에너지의 양은 (노동 자체가 완전히 기계화되고 합리화되어) 매우 적어질 것이므로, 외부적 힘에 의해 더 이상 유지되지 않는 광범위한 억압적 제약과 변형이 붕괴할 것이다. … 생의 본능인 에로스가 전례 없는 수준으로 해방될 것이다.” 단축되고 덜 고된 노동은 사람들이 자신의 몸과 연결되었다고 느끼게 만들 것이며, 휴식하고 유혹하고 섹스할 시간을 줄 것이다. 완전한 성적 자유를 얻기 위해서는, 우리가 결코 구경하지 못할 이윤을 위한 임금 노동의 폭정으로부터 우리의 시간이 해방되어야 한다. 공산주의는 생산과 재생산 영역에서의 소외된 노동으로부터 우리를 해방시킬 것이다. 이윤이 아니라 인간의 필요와 욕망 위에 세워진 사회는, 무의미한 노동 대신 하루 대부분을 예술적이고 창조적인 활동에 쓸 수 있게 해 줄 것이다. 정신 노동과 육체 노동 사이의 간극을 해소하고, 더 나은 사회를 건설하는 데 모든 기술을 사용할 것이다. 마르크스가 『독일 이데올로기』에서 주장하듯이 공산주의는 구속 없이 이것저것 해 볼 자유를 약속한다. “오늘은 이것을 하고 내일은 저것을 하는 것, 아침에는 사냥하고 오후에는 낚시하고 저녁에는 소를 돌보고 저녁 식사 후에는 비평을 쓰지만, 사냥꾼이나 어부나 목동이나 비평가가 되지는 않는 것”이 가능할 것이다. 어쩌면 이 자유는 우리의 젠더와 섹슈얼리티에도 적용되어, 낮에는 부치 다이크, 밤에는 드래그 퀸, 주말에는 도미나트릭스로 살 수도 있을 것이다. 가족의 폐지, 재생산 노동의 사회화와 함께 젠더 역할이 불필요해지고 자유 시간이 점점 더 늘어남에 따라, 우리의 젠더와 섹슈얼리티의 가능성, 우리의 젠더적·성적 해방의 가능성은 무한해진다. 사랑과 섹슈얼리티를 핵가족의 속박으로부터 해방시킴으로써 우리는 연대에 기반한 새로운 사회를 건설할 것이다. 볼셰비키 지도자 알렉산드라 콜론타이는 『날개 달린 에로스에 길을(Make Way for the Winged Eros)』에서 이 발상을 탐색하기 시작한다. 그는 이기심이 자본주의 체제가 작동하는 데 필수적이라고 주장하면서, 사회주의 사회에서는 공동체적 사랑의 토대 위에 사회가 건설될 것이라고 말한다. 그는 이렇게 쓴다. 새로운 공산주의 사회는 동지애와 연대라는 원칙 위에 건설되고 있다. 연대란 공동의 이익에 대한 자각에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집단의 구성원들을 잇는 지적·정서적 유대에도 달려 있다. 연대와 협력 위에 사회 체제를 건설하려면 사람들이 사랑과 따뜻한 감정을 느끼는 능력이 필수적이다. 따라서 프롤레타리아 이데올로기는, 노동자 계급의 모든 구성원이 같은 계급의 다른 구성원들의 고통과 필요에 응답하고, 타인에 대한 섬세한 이해와 개인과 집단의 관계에 대한 깊은 의식을 가질 수 있도록, 교육하고 고무하고자 한다. 이 모든 ‘따뜻한 감정들’—섬세함, 연민, 공감, 호응하는 마음—의 원천은 하나다. 이 감정들은 협소한 성적 의미의 사랑이 아니라 넓은 의미의 사랑의 여러 측면이다. 사랑과 욕망이 진정으로 자유로워질 이 미래 각본에서, 우리의 젠더와 섹슈얼리티는 어떻게 작동할까? 쏟아져 나오는 새로운 정체성들을 위한 새로운 이름을 가지게 될까? 아니면 이름 따위는 전혀 필요 없게 되고, 로자 룩셈부르크가 전망했듯이 “모든 인간이 사회적으로 평등하고, 인간적으로 다르며, 완전히 자유로운 그런 세계”에서 살게 될까? 레프트보이스(Left Voice)에 2019년 7월 5일 게재된 기사를 번역함. 글쓴이: Tatiana Cozzarelli 번역: 강성윤 /* 스크롤 여백만 주고, 화면에는 안 보이게 */ .ftn-target { display: inline-block; /* 줄바꿈 안 생김 */ width: 0; height: 0; scroll-margin-top: 200px; } document.addEventListener("DOMContentLoaded", function () { // name="_ftn1", name="_ftn2", name="_ftnref1" ... 전부 대상 document.querySelectorAll('a[name^="_ftn"]').forEach(function(a) { var idValue = a.getAttribute("name"); // 이미 같은 id의 요소가 있으면 또 만들지 않음 if (!document.getElementById(idValue)) { var span = document.createElement("span"); span.id = idValue; span.className = "ftn-target"; a.parentNode.insertBefore(span, a); } }); }); /* 본문 각주 번호 + 아래쪽 각주 번호 색 지정 */ a[href^="#_ftn"] sup, a[href^="#_ftnref"] sup { color: #BF202D; } /* 밑줄이 보기 싫으면 */ a[href^="#_ftn"], a[href^="#_ftnref"] { text-decoration: none; } /* 마우스 올렸을 때 살짝만 강조하고 싶으면 (선택) */ a[href^="#_ftn"]:hover, a[href^="#_ftnref"]:hover { text-decoration: underline; } /* 페이지 전체가 오른쪽으로 넘치지 않게 */ html, body { max-width: 100%; overflow-x: hidden; } /* 본문 영역 폭 강제 고정 + 긴 단어/문장도 줄바꿈 */ #bo_v_con, .bo_v_con, .cke_editable, article { max-width: 100%; overflow-wrap: break-word; word-wrap: break-word; /* 구형 브라우저용 */ } /* 워드에서 붙은 이미지/표가 화면 밖으로 안 나가게 */ #bo_v_con img, #bo_v_con table, .bo_v_con img, .bo_v_con table, .cke_editable img, .cke_editable table, article img, article table { max-width: 100% !important; height: auto; } /* 워드가 p, span에 폭을 박아놓은 경우 강제로 해제 */ #bo_v_con p[style*="width"], #bo_v_con span[style*="width"], .bo_v_con p[style*="width"], .bo_v_con span[style*="width"], .cke_editable p[style*="width"], .cke_editable span[style*="width"], article p[style*="width"], article span[style*="width"] { width: auto !important; max-width: 100% !important; } /* 기본 blockquote 스타일 */ blockquote { border-left: 4px solid #c0392b; /* 사이트 분위기와 맞는 붉은 계열 */ padding: 12px 18px; margin: 20px 0; background: #fafafa; font-style: normal; color: #333; line-height: 1.6; } /* blockquote 안의 p 태그 정렬 */ blockquote p { margin: 0 0 10px 0; text-align: justify; } /* 마지막 p 태그 여백 제거 */ blockquote p:last-child { margin-bottom: 0; } /* 본문 안 링크 스타일 */ #gpt-article a { color: #cc0000 !important; text-decoration: none !important; } #gpt-article a:hover { color: #990000 !important; } // https://로 시작하는 링크만 target="_blank" 적용 document.addEventListener("DOMContentLoaded", function () { const links = document.querySelectorAll('#gpt-article a[href^="https://"]'); links.forEach(link => { link.setAttribute("target", "_blank"); link.setAttribute("rel", "noopener noreferrer"); }); }); -
[성명] 고진수를 즉각 석방하라! 감옥에 가야할 자는 주명건과 정근식이다!2026년 4월 17일, 세종호텔 해고노동자 고진수 동지가 구속되었다. 서울서부지법 양은상 영장전담 부장판사는 고진수 동지가 “도주의 우려가 있다”며 구속영장을 발부했다. 고진수 동지는 코로나를 핑계로 정리해고된 뒤 지금까지 세종호텔 앞에서 줄곧 투쟁해왔다. 언제나 공개적으로 당당하게 투쟁해온 고진수가 도주의 우려가 있다는 말은 터무니 없다. 그리고 용산경찰서, 검찰, 양은상 부장판사도 이를 모를리 없다. 호텔 앞에서, 거리에서, 연대의 현장에서 공개적으로 당당히 투쟁해왔기에 받은 부당탄압이 오늘의 구속영장이기 때문이다. 공익제보자를 구속시키는 것이 부담이 되었는지, 정작 고공농성을 실행한 지혜복 교사는 구속영장을 청구하지도 않았다. 반면 이번 투쟁에 단지 연대한 세종호텔 고진수 지부장을 구속시킨 저들의 속내는 분명하다. 이번 일을 기회로 삼아 세종호텔 투쟁을 약화시키겠다는 것이다. 판사 집안으로 법조계와 강력한 카르텔을 형성하고 있는 주명건의 비열한 공격이다. 한편 취임 때부터 A학교 문제로부터 도주해온 정근식은, 고진수 지부장의 구속이 자신과는 전혀 무관하다는 둥, 지혜복 교사가 화해권고안을 수용하기만 하면 모든 것이 해결된다는 둥 기만적인 말을 쏟아내고 있다. 지혜복 교사에 대한 형사고발을 유지하고, A학교 성폭력 축소·은폐와 지혜복 교사 탄압을 주도한 책임자들에 대한 징계를 거부하고, 정근식이 집단연행하고 폭행한 피해자들에 대한 어떤 사과도 없이, 처벌받아야 마땅한 자가 ‘화해’를 논하고 있다. 고진수 지부장을 즉각 석방하라! 처벌받아야할 것은 성폭력 사안 해결을 위해 투쟁해온 지혜복 교사와 연대해온 고진수 지부장이 아니라, 수십년 간 세종대학교와 세종호텔에서 제왕처럼 군림하며 노동자를 착취하고서, 민주노조를 파괴하기위해 정리해고한 주명건이다. A학교 성폭력을 축소은폐하고, 공익제보자를 탄압해온 정근식이다. 노동자를 탄압하는 이들에 맞서, 세종호텔 해고노동자들이 일터로 돌아가고, 지혜복 교사가 A학교로 돌아가고, 어떤 노동자도 부당하게 해고되지 않고 어떤 성폭력 피해자도 2차 가해의 고통 속에 방기되지 않는 그날까지 힘차게 싸워나가자. 2026년 4월 18일 사회주의를향한전진 -
‘남편이 일하다 다치면, 도울 수 없다는 사실’ 영남권도 혼인평등소송 시작!조선소에 다니는 이현중(가명) 노동자와 오승재 공무원 노동자는 부부다. 울산 남구청에 ‘혼인신고서’를 접수했는데 ‘불수리처분’을 받았다. 동성이라는 이유다. 1987년 노동자대투쟁 이후 민주노조는 일터와 사회에서 노동자를 향한 차별에 대항하며 조금씩 ‘평등세상’을 향해 나아갔다. 하지만 아직 바꾸지 못한 게 태반이다. 그중 하나가 인구 20명 중 1명으로 존재하는 성소수자가 여느 부부들처럼 사랑하고 생활공동체로 사는 삶이 차별당하는 문제다. 이현중 조선소노동자와 오승재 공무원노동자가 이에 불복해 혼인평등소송을 제기하는 기자회견이 4월 8일 울산가정법원 앞에서 열렸다. ‘노동자 도시 울산, 사랑도 평등하게’라는 제목으로 무지개행동과 민주노총 등 총 23개 단위[1]가 공동주최로 나섰다. 참가자들은 “헌법이 요구한다. 혼인평등 실현하라!”, “동성부부 혼인신고 지금당장 수리하라”를 외치며 부산과 대구, 울산 영남권 세 곳에서 동성부부 혼인을 인정할 것을 요구했다. 남편이 일하다 다치면, 도울 수 없다는 사실 OECD 국가의 2/3가 동성혼을 인정하고 있다. 한국에서는 오로지 성별이분법에 근거해 주민등록번호 ‘1’번 남성과 ‘2’번 여성의 혼인만 인정된다. 이러한 차별을 없애고자 한국에서 지난 2024년 10월 처음으로 동성부부 11쌍이 헌법이 보장하는 혼인의 권리를 성소수자에게도 보장하라는 동성혼 법제화에 나섰다. 2025년 2월에는 서울북부지방법원의 동성결혼 불인정 위헌법률심판제청신청 기각에 따른 헌법소원심판도 제기했다. 이제 보수적이라는 울산, 부산, 대구에서도 성소수자 동성부부들이 나선 것이다. 울산 혼인평등소송의 원고인 ‘오승재’ 공무원 노동자는 당당히 마이크를 잡았다. “보수적인 분위기에서 냉대와 혐오를 당할까 걱정이 많았다. 그러나 제가 만난 울산 사람들은 우리 부부를 있는 그대로 존중하고 받아들였다. 공직사회 특성상 커밍아웃하고 결혼 사실을 알리는 것이 쉽지 않았지만, 동료를 믿었고 그 믿음을 틀리지 않았다. 어떤 동료 직원은 기꺼이 혼인신고의 증인을 자처했고, 상사로부터는 축하와 응원의 편지를 받았다. 세상은 우리 부부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준비가 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남편이 일하는 조선소에서는 자주 산업재해가 발생한다. 저를 만나기 전 남편도 산업재해를 경험한 적이 있다. 앞으로 일하다 다치는 일은 없어야 하겠지만, 법적으로 배우자 자격을 인정받지 못한다면 도울 수 있는 일이 없다는 사실은 마음을 아프고 시리게 한다. 우리는 이미 부부이고, 서로의 배우자다. 이 당연한 사실을 확인해달라. 우리 부부가 지역 사회에서 더불어 살아갈 수 있도록 차별의 마침표를 찍어달라” 불평등한 혼인이 어찌 작은 차별일까. 건강보험 피부양자 자격은 겨우 산 하나를 넘었다. 하지만 가족수당, 경조사휴가, 세제 혜택, 각종 제도와 지원정책, 병원 입원과 수술, 임신과 출산, 입양, 양육 그리고 장례와 상속 절차에 이르기까지 ‘혼인’에서 제외되는 불평등은 성소수자 부부의 실존과 삶을 직접적으로 타격한다. 그러기에 ‘남편이 조선소에서 산재를 당할 때 배우자로서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동성부부의 호소는 끔찍한 차별의 고통일 수밖에 없다. 혼인평등소송과 민주노조 울산에서 열린 혼인평등소송 기자회견에 민주노총은 임원과 상근자, 공공운수노조 교육공무직 노동자 정도만 참가했다. 대부분은 사회단체 활동가들이었다. 대구와 부산의 사진을 봐도 기자회견 사진에 노동조합 조끼가 거의 보이지 않는다. 영남권 혼인평등소송 원고의 대부분이 노동자인데도 말이다. 성소수자는 TV와 유튜브에 나오는 연예인으로만 살지 않는다. 노동자로, 노인으로, 청년으로 이웃으로 똑같이 살아간다. 성별 정체성과 성적 지향은 태어날 때부터 얼굴 생김새가 다른 것처럼 다양하다. 그러나 남성은 이렇고 여성은 이래야 하며, 남녀가 결혼해서 정상적 가족을 꾸려야 한다는 가부장적 이데올로기는 노동자민중에게 커다란 관념을 주입해왔다. 가부장적 자본주의가 더 착취하기 쉬운 노동력과 노동력 재생산을 위해 성차별을 구조화하며 성소수자를 혐오, 배격, 차별을 강화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동성혼 합법화는 있는 그대로 애정에 기반한 생활공동체 부부를 인정하라는 요구이자, 가부장적 자본주의 사회의 가족제도에 변화를 만드는 일이기도 하다. 노동자가 처음 노동자국가를 만들었던 1917년, 제정 러시아의 법률을 폐지해 동성애가 비범죄화됐다. 이후 1922년 동성애를 합법화했다. 1923년~1930년 동성애자였던 게오르기 치체린이 인민외무위원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당시 모스크바 사회위생연구소 소장은 '러시아의 성혁명' 보고서를 발표하며, "동성애는 완전히 자연스러운 것"이고 "법적, 사회적 존중을 받을 필요가 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하지만 1930년대로 접어들며 스탈린에 의해 혁명이 질식당하며, 성소수자의 권리 또한 질식됐다. 스탈린 치하 소련은 1934년 동성애를 다시 금지시키고, 성매매를 범죄화했다. 사회주의 혁명이 패배한 조건 위에서도, 자본주의가 강제하는 차별과 억압에 맞선 투쟁은 멈추지 않고 이어졌다. 1960년대 후반 인종차별 반대, 페미니즘 운동, 반전운동과 함께 등장한 1969년 스톤월 항쟁을 비롯해, 성소수자의 권리를 향한 투쟁이 줄기차게 이어졌다. 이러한 투쟁의 결과로 동성혼 합법화가 2001년 네덜란드에서 다시 시작되었다. 동성혼 합법화는 유럽, 북미, 남미 등으로 나아갔고 아시아에서는 2019년 대만, 2024년 태국을 포함해 현재 39개 나라에서 동성혼을 보장하고 있다. 한국에서 성소수자에 대한 혐오와 편견은 지난 30년간 인권운동과 성소수자운동의 영향으로 줄고 있다. 40~47%가 동성혼 합법화를 찬성한다고 한다. 민주노조 운동도 사회적 차별과 억압, 착취에 맞서며 부족하나마 성소수자 운동과 노동운동을 연결하고 있다. 민주노총 내 성소수자 조합원 모임, 성소수자를 포용한 단체협약, 노동조합 기구로서 성소수자위원회 등도 있다. 하지만 학교, 일터, 사회의 다양한 차별 중 혼인에 대한 차별조차 아직 무너뜨리지 못하고 있다. 윤석열 내란에 맞선 한강진 투쟁에서 휘날리던 금속노조 무지개 깃발 (사진: 금속노조) 혼인평등도 차별금지법도 모든 차별에 맞서는 노동자투쟁 노동조합의 단체협약에 동성부부도 결혼축하금을 받고 결혼휴가를 적용받는 조항이 있나? 거의 없다. 이유는 법이 없어서? 아니다. 민주노조는 법을 만들어지기 전에 현장 노동대중의 힘으로 투쟁하고 단협을 만들고 법을 만드는 투쟁을 해왔다. 성소수자 노동자의 차별에 대해 노조에서 토론하고 교육하고, 사측과 싸운 적이 있나? 이 역시 거의 없을 것이다. 노동조합도 사회에서 ‘배운대로’가 익숙해서다. 낯선 것에 대한 거리감, 다름에 대한 경계, 부지불식간의 차별, 감염된 혐오. 여기에 더해 '생각해보지 않았다'며 성소수자가 겪는 차별의 문제를 뒤로 미루거나 부차적으로 치부한 한계가 겹치며 소수자의 권리를 등한시한 게 사실이다. 그러나 민주노조가 자본가계급과 이제껏 싸우면서 깨달은 건 저들의 분열책동에 맞서 ‘흩어지면 죽는다’, ‘우리의 무기는 단결'이라는 원칙이다. 성소수자, 여성, 이주민, 장애인 등 사회적 소수자 노동자민중과 단결할 때 노동자계급은 더 큰 힘으로 자본에 맞서 세상을 바꿀 수 있다. 더 미룰 수 없다. 이재명 정부는 광장의 제1요구인 ‘포괄적 차별금지법 제정’을 말도 꺼내지 않는다. 그러면서 자본을 향한 규제완화와 세금 퍼주기에 이전 정부와 다르지 않은 노동정책을 밀고 있다. 최근에는 기간제법 운운하며 비정규직 사용을 늘리려 한다. 정부의 말잔치와 자본의 탐욕, 혐오정치에 협의가 아닌 투쟁이 필요하다. ‘성명서 정치’가 아닌 실질적 투쟁으로 모든 노동자를 포괄하는 노동기본권, 모든 사회적 소수자를 포괄하는 인권 보장을 위해 단결하자. 영남권 혼인평등소송 소식을 현장에 전하고 내부를 돌아보며 인식강화부터 시작해보자. 민주노조가 성소수자에게 안전한 공간인지, 성소수자가 학교와 사회 일터에서 차별받지 않게 얼마나 싸워왔는지 돌아보고 혼인평등을 단체협약 등 현장투쟁과 연결하자. 인종, 국적, 고용형태, 장애, 성별, 성별 정체성과 성적지향 등 모든 차별을 없앨 수 있도록 포괄적 차별금지법 제정 투쟁 역시 사회와 현장을 연결해 앞장서자. 착취와 차별 없는 세상은 우리 손으로 만들어진다. (사진: 노동과세계) [1] 한국성소수자인권단체연합 무지개행동 · 모두의 결혼 · 사단법인 울산인권운동연대 ·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공익인권변론센터 · 건강사회를위한약사회 울산지부 · 노동당울산시당 · 변혁적여성운동네트워크 빵과장미 · 사단법인 성평등 · 사단법인 울산장애인부모회 · 사단법인 울산여성의전화 · 사단법인 울산여성회 · 사회주의를향한전진 울산지역위원회 · 울산민족예술인총연합 · 울산새생명교회 · 울산시민연대 · 울산진보연대 · 울산환경운동연합 ·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 울산지역본부 ·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 법률원 울산사무소 · 정의당 울산시당 · 정책과비전포럼 · 진보당 울산시당 · 평화통일교육센터 (총 23개 단위) /* 스크롤 여백만 주고, 화면에는 안 보이게 */ .ftn-target { display: inline-block; /* 줄바꿈 안 생김 */ width: 0; height: 0; scroll-margin-top: 200px; } document.addEventListener("DOMContentLoaded", function () { // name="_ftn1", name="_ftn2", name="_ftnref1" ... 전부 대상 document.querySelectorAll('a[name^="_ftn"]').forEach(function(a) { var idValue = a.getAttribute("name"); // 이미 같은 id의 요소가 있으면 또 만들지 않음 if (!document.getElementById(idValue)) { var span = document.createElement("span"); span.id = idValue; span.className = "ftn-target"; a.parentNode.insertBefore(span, a); } }); }); /* 본문 각주 번호 + 아래쪽 각주 번호 색 지정 */ a[href^="#_ftn"] sup, a[href^="#_ftnref"] sup { color: #BF202D; } /* 밑줄이 보기 싫으면 */ a[href^="#_ftn"], a[href^="#_ftnref"] { text-decoration: none; } /* 마우스 올렸을 때 살짝만 강조하고 싶으면 (선택) */ a[href^="#_ftn"]:hover, a[href^="#_ftnref"]:hover { text-decoration: underline; } /* 페이지 전체가 오른쪽으로 넘치지 않게 */ html, body { max-width: 100%; overflow-x: hidden; } /* 본문 영역 폭 강제 고정 + 긴 단어/문장도 줄바꿈 */ #bo_v_con, .bo_v_con, .cke_editable, article { max-width: 100%; overflow-wrap: break-word; word-wrap: break-word; /* 구형 브라우저용 */ } /* 워드에서 붙은 이미지/표가 화면 밖으로 안 나가게 */ #bo_v_con img, #bo_v_con table, .bo_v_con img, .bo_v_con table, .cke_editable img, .cke_editable table, article img, article table { max-width: 100% !important; height: auto; } /* 워드가 p, span에 폭을 박아놓은 경우 강제로 해제 */ #bo_v_con p[style*="width"], #bo_v_con span[style*="width"], .bo_v_con p[style*="width"], .bo_v_con span[style*="width"], .cke_editable p[style*="width"], .cke_editable span[style*="width"], article p[style*="width"], article span[style*="width"] { width: auto !important; max-width: 100% !important; } /* 기본 blockquote 스타일 */ blockquote { border-left: 4px solid #c0392b; /* 사이트 분위기와 맞는 붉은 계열 */ padding: 12px 18px; margin: 20px 0; background: #fafafa; font-style: normal; color: #333; line-height: 1.6; } /* blockquote 안의 p 태그 정렬 */ blockquote p { margin: 0 0 10px 0; text-align: justify; } /* 마지막 p 태그 여백 제거 */ blockquote p:last-child { margin-bottom: 0; } /* 본문 안 링크 스타일 */ #gpt-article a { color: #cc0000 !important; text-decoration: none !important; } #gpt-article a:hover { color: #990000 !important; } // https://로 시작하는 링크만 target="_blank" 적용 document.addEventListener("DOMContentLoaded", function () { const links = document.querySelectorAll('#gpt-article a[href^="https://"]'); links.forEach(link => { link.setAttribute("target", "_blank"); link.setAttribute("rel", "noopener noreferrer"); }); }); -
[성명] 이재명정부·서울시교육청·경찰의 폭력 탄압을 규탄한다! 지혜복 교사와 연대자들을 즉각 석방하라!4월 15일 새벽 4시 지혜복 교사가 서울시교육청 옥상 고공농성에 돌입했다. 서울시교육청의 불법 부당한 전보와 해임에 항의하며 거리 투쟁 815일째 천막농성 344일을 이어왔다. 오랜 기간의 정당한 투쟁 결과, 지난 1월 말 법원은 지혜복 교사에 대한 전보가 부당하다고 판결하여 공익제보자 지위를 인정했다. 법원의 전보 취소 판결은 해임취소로 이어질 게 명백함에도 서울시교육청은 지혜복 교사 해임취소, 피해자-부상자 회복지원, 포괄적 성교육 도입, 전보 원칙 개정, 불법행위자 징계, 형사고발 취소 등의 정당한 요구를 묵살하며 해결책을 제시하지 않았다. 서울시교육청과 정근식 교육감이 보인 불법 부당한 행태에 항의한 지혜복 교사의 고공농성과 함께 연대자들의 저항은 백번 천번 정당하다. 그럼에도 서울시교육청 관료들과 경찰은 지혜복 교사를 비롯해 12명을 폭력 연행하는 만행을 반복하고 있다. 정당한 저항에 대한 탄압은 더 큰 분노와 투쟁을 촉발할 뿐, 연이어 폭력 탄압으로 결코 투쟁을 잠재울 수 없다. 이재명 정부는 지혜복 교사와 연대자들의 폭력연행을 사죄하고 즉각 석방하라! 정근식 교육감과 서울시교육청은 지혜복 교사의 요구를 수행하고 즉각 복직 조치를 이행하라! 2026년 4월 15일 사회주의를향한전진 -
[성명] 말뿐인 학살 규탄은 공모의 또 다른 이름이다! 평화활동가 여권 무효화 지금 당장 철회하라!이재명 정부는 기만적인 본색을 감추지 못했다. 지난 3월 외교부가 ‘가자로 향하는 천 개의 매들린호(TMTG)’ 한국지부 해초 활동가의 여권을 무효화했고, 4월 서울행정법원은 이 정치 탄압에 사법적 알리바이를 제공했다. 이는 단순한 행정 조치가 아니다.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집단 학살에 맞서는 국제주의 연대 활동을 국가 권력으로 질식시키는 노골적 억압이며, 제국주의 질서에 충실히 복무하겠다는 이재명 정권의 계급적 선언이다. 기억하라. 지금까지 유럽과 남미, 아랍과 북미의 수많은 활동가들이 가자 봉쇄를 뚫기 위해 선단을 띄웠다. 그러나 자국민 활동가의 여권을 무효화하는 방식으로 연대의 돛을 꺾은 나라는 없었다. 한국이 사실상 최초다. 이 수치스러운 기록은 한국 자본가 정권이 팔레스타인 해방운동에 가진 깊은 적대감과 제국주의 질서에 대한 철저한 종속을 폭로한다. 입으로는 집단 학살을 비판하지만 실제로는 학살에 저항하는 자국민을 무국적 상태로 내던지는 것, 이것이야말로 제국주의 질서에 편입된 자본가 정권이 구사하는 양면술의 교과서적 사례다. 이번 탄압은 결코 돌출 행동이 아니다. 이재명 정부는 지난 2월 트럼프가 꾸며낸 기만극인 “가자 평화위원회”에 옵서버로 기어들어 가서 “트럼프 대통령의 주도적 노력을 지지한다”며 아첨했다. 한국은 여전히 이스라엘과 정상적인 외교 관계를 유지하며 단 한 건의 제재도 부과하지 않았다. 한국석유공사는 가자 지구 천연가스 약탈에 연루되어 있고, 한국 군수 산업체들은 집단 학살이 자행되는 이 순간에도 이스라엘과 무기 부품 거래를 이어가며 시온주의 군산 복합체와의 공급망을 촘촘히 엮어왔다. 한국의 기술은 팔레스타인 어린이들의 머리 위에 떨어지는 폭탄의 일부로, 봉쇄선을 지키는 무기의 부품으로 가자에 도달하고 있다. 여권 무효화는 이 공모의 사슬을 지키고 거슬리는 목소리를 잘라내려는 조치다. 사회주의자로서, 국제주의자로서 우리는 분명하게 선언한다. 팔레스타인 해방 투쟁은 시온주의 국가 이스라엘과 미국 제국주의, 그리고 한국을 포함해 이에 기생하는 모든 자본주의 국가에 맞서는 세계 노동자 민중의 공동 투쟁이다. TMTG의 항해는 봉쇄를 직접 뚫어 내는 국제주의 실천이며, 바로 그 때문에 제국주의 종속 정권에게는 반드시 꺾어야 할 깃발이다. 해초 활동가에 대한 이번 탄압은 한 명의 활동가에 대한 공격이 아니라 팔레스타인 연대 운동 전체에 대한, 나아가 제국주의 전쟁에 맞서는 모든 노동자 민중에 대한 경고 사격이다. 여권은 무효화해도 국제연대는 무효화할 수 없다. 우리는 해초 활동가와 TMTG 한국지부, 그리고 팔레스타인 해방을 위해 항해하는 모든 연대자들과 함께 이 탄압을 분쇄하고 이재명 정권의 제국주의 공모에 정면으로 맞설 것이다. 해초 활동가에 대한 여권 무효화 조치를 즉각 철회하라! 이스라엘과의 무기 거래·자본 협력·외교 관계를 전면 단절하라! 노동자 민중의 국제연대로 제국주의 전쟁체제 타도하자! 2026년 4월 14일 사회주의를향한전진 -
가자지구·이란 참상 폐허 위에 선 우골탑, 한국 대학에서 팔레스타인 연대운동은 더욱 강고해져야 한다.지난 3월 신학기를 맞아 여러 대학에서 취업박람회가 열렸다. 취업박람회에는 팔레스타인 집단학살과 불법점령 등 여러 전쟁범죄에 연루된 기업들도 참여했다. 이에 집단학살 연루 기업들이 취업박람회에 참여하는 것을 규탄하는 집회와 저항행동이 각 대학에서 펼쳐졌다. 본 기사는 집단학살 연루 기업의 취업박람회 참여 규탄 행동이 전개된 경과와 배경, 후기를 담은 프레시안 연속 기고 기사의 보강판이다. 프레시안 기사 ‘가자지구·이란 참상 폐허 위에 선 우골탑, 대한민국 대학교들(2026.04.11.)’의 내용 일부를 기고자가 직접 수정/보완하여 사회주의를향한전진 온라인 기사로 게재한다. 이란 미나브 초등학교에 벌어진 참극, 그리고 이스라엘의 ‘교육학살’ 2026년 2월 28일, 이스라엘과 미국이 이란 침공을 개시했다. 침공 첫날 아침 10시경, 이란 남부 미나브 시 샤자라 타이예베 여자 초등학교에 세 차례의 토마호크 미사일이 떨어졌다. 토마호크 미사일은 미 해군 함정에서 발사되었다. 오차 범위가 고작 몇 미터에 불과한 미국산 토마호크 미사일이 정조준한 것은 수업이 한창인 학교였다. 이 폭격으로 170여명이 살해당했고, 대부분은 여성과 어린이들이었다. 제국주의자들이 마치 자유를 빼앗긴 인질처럼 묘사하던 사람들, 제국주의자들이 직접 해방시켜주겠노라 호언장담하던 사람들, 바로 이들을 제국주의자들이 직접 죽인 것이다. 이란 미나브 초등학교 학살 사망자를 위해 조성된 공동묘지 미나브 초등학교 학살이 고의라는 증거는 날이 갈수록 분명해지고 있다. 지난 3월 10일, 트럼프 미 대통령은 이란의 민간 기반 시설을 가리키며 "우리는 이란이 다시는 국가로서 재건될 수 없도록 쉽게 파괴할 수 있는 목표물들을 제거할 것“이라며 위협했다. 대학 등 수많은 민간 시설이 포화에 뒤덮였다. 미국과 이스라엘은 3월 28일 테헤란 과학기술대와 이스파한 공과대학을 폭격했다. 4월 6일에는 이란의 주요 과학기술 대학인 테헤란 샤리프 공과대학교에도 폭격이 이어졌다. 이란 과학기술부는 2월 28일 전쟁 발발 이후 최소 30개 대학이 공격을 받았다고 밝혔다. 참혹하다. 동시에 낯익은 광경이다. 이스라엘이 학교 등 민간 시설을 표적으로 삼으며 철저하게 파괴하고, 미국 등 서방 국가들이 이를 외면하는 모습은 가자지구 집단학살이 이어지는 내내 셀 수 없이 반복되었다. 교육 클러스터 및 유노샛(UNOSAT) 자료에 따르면, 가자지구 학교의 97%가 이스라엘의 공격으로 피해를 입었다. 2023년 10월 7일 이후 가자지구 전체 학교 건물 중 432개(76.6%)가 “직격탄” 피해를 입어 약 469,222명의 학생과 17,564명의 교사가 영향을 받았다. 가자지구 학교 건물의 91.8%(564개 중 518개)는 기능을 회복하기 위해선 완전한 재건 또는 대규모 복구 작업이 필요하다. 유엔 인도주의업무조정국(OCHA)은 2023년 10월 27일 기준 가자지구 625,000명 이상의 학생과 22,500명 이상의 교사가 있다고 보고했다, 현재 이들은 교육받고 교육할 권리를 전적으로 박탈당했다. 2025년 9월 유엔 인권최고대표사무소(OHCHR) 보고서는 팔레스타인 교육부 및 고등교육부 발표를 인용하여 2023년 10월 7일 이후 가자지구에서 17,237명 이상의 초중고등학생과 1,271명의 대학생, 그리고 967명의 교육 관계자가 살해되었다고 밝혔다. 여기에는 대학도 예외가 아니다. 팔레스타인 통신사 와파에 따르면, 가자지구의 고등 교육 기관 12곳이 파손되거나 파괴되어 대학교육이 완전히 중단되었다. 학습의 터전을 전적으로 상실한 가자지구 학생들은 피난민 캠프와 천막을 거점으로 열악한 환경에서 교육을 이어나가고 있다. 파괴된 학교와 교원을 포함한 교육 인프라를 재건하는 작업에는 최소 몇 달, 수년이 소요될 것으로 예상된다. 가자지구 집단학살로 파괴된 알 아크사 대학 정문과 파괴 이전 모습 학교, 대학 등 교육기관을 대상으로 한 무차별적 폭격과 학살을 통틀어 교육학살(Scholasticide)이라 칭한다. 교육학살은 옥스퍼드 대학 카르마 나불시(Karma Nabulsi) 박사가 2008~09년 이스라엘의 가자지구 공격 당시, 학교, 교육부 등 교육과 관련된 건물이 표적이 된 상황을 묘사하고자 고안한 용어다. 교육학살은 교육 시스템, 즉 수 세대의 지적·사회적·문화적 역량을 기르고 재생산하는 체계에 대한 고의적 파괴다. 이는 이스라엘이 추구하는 인종청소-아파르트헤이트, 정착민 식민주의 정책의 연장선이다. 파괴된 교육 인프라는 현지 교육의 ‘열악하고’ ‘열등한’ 교육 여건으로 비추어진다. 이는 제국주의적 교육 제도와 인프라의 도입을 촉구하는 명분이 된다. 교육 시스템의 재건 과정에서, 독립적인 교육의 가능성은 서구와 이스라엘의 식민주의적 헤게모니로 대체된다. 미국과 이스라엘은 이와 같은 전략을 이란 침략전쟁에도 동원하며, 중동 사회 전체로 확장하려 하고 있다. ‘대이스라엘(Greater Israel)’을 위한 전쟁기계에 한국 대학과 기업이 협력하고 있다 이스라엘의 집단학살과 침략전쟁은 누구에 의해, 어떻게 지탱될 수 있는가. 그 배경에는 미국을 비롯한 제국주의 국가들의 정치적, 외교적 후원이 있다. 잠시 50년 전으로 돌아가보자. 1967년 6월 5일, 이스라엘은 이집트, 요르단, 시리아를 상대로 폭격과 함께 선제공격을 가했다. 6일만에 이스라엘의 승리로 끝난 이 전쟁을 누군가는 6일 전쟁, 누군가는 제3차 중동전쟁으로 부른다. 팔레스타인과 아랍 민중은 이 전쟁을 나크사(Naksa)라고 부른다. ‘패배’ 혹은 ‘악화’를 뜻하는 아랍어 단어이다. 이스라엘은 1967년 전쟁 이후 가자지구와 요르단강 서안지구를 포함한 팔레스타인 전역과 이집트 시나이반도, 그리고 시리아 골란고원을 군사점령했다. 군사점령의 결과, 1948년 나크바로 고향을 잃은 팔레스타인 민중들은 나크사 이후 또 다시 삶의 터전을 상실했다. 제국주의와 시온주의의 멍에는 더욱 무거워졌다. 이스라엘은 제국주의의 중동 거점으로써 설립된 정착민 식민주의 체제이자 프로젝트다. 제국주의의 중동 거점이 북아프리카의 사하라 사막부터 이란의 자그로스 산맥까지 영향을 뻗는 것, 그 결과로 제국주의 패권이 중동 전역을 장악하는 것, 그것이 ‘유프라테스 강부터 이집트 강까지’라는 ‘대이스라엘(Greater Israel)’ 프로젝트의 실체다. 1967년 전쟁을 통해 시온주의자들의 꿈은 거의 실현될 뻔했다. 그리고 이번 집단학살과 이란 침략전쟁, 그리고 레바논 폭격을 통해 그 꿈을 미국과 서방 국가들이 지지하고 있다는 사실이 명백해졌다. 미국과 이스라엘의 이란 침공에 앞서 마이크 허커비 주이스라엘 미국대사는 이스라엘에 중동 전역에 대한 ‘성경적’ 권리가 있다는 망언을 남겼다. 1967년 당시 이스라엘의 정치적, 외교적 뒷배로 남았던 미국은, 이제 이스라엘과 나란히 침략군의 선두에 서고 있다. 이스라엘이 레바논 폭격으로 민간인과 UN 평화유지군을 살해하고 있는 와중에도 제국주의 국가들은 이를 방관하고 있다. 제국주의 첨단 무기 지원과 기술 협력 역시 이스라엘이 전쟁과 학살을 지속할 수 있는 원동력이다. 이스라엘의 모든 전장이 제국주의 국가들의 신무기 실험장이다. 1967년 전쟁 당시, 기습적 선제공격으로 이집트 공군을 궤멸시킨 것은 이스라엘 공군 소속 프랑스산 미라쥬 III 전투기였다. ‘채찍(שוט, sho’t)’이라는 이름의 영국산 센추리온 전차, ‘공성추(מגח, Magach)’라는 이름의 미국산 패튼 전차가 시나이반도와 골란고원을 뒤덮었다. 2026년 이란 침략전쟁도 마찬가지다. 미국과 이스라엘의 상징을 달은 F-35 전투기와 정밀 유도 무기가 학교 등 민간 시설을 조준하며 무차별적인 폭격을 이어가고 있다. 왼쪽부터 순서대로, 1967년 전쟁 당시 이스라엘의 주력 전차였던 영국산 센추리온 전차 기반의 '숏(Sho't)' 전차, 팔레스타인 민중의 저항을 진압하는데 동원된 이스라엘군의 미국산 패튼 전차 기반 '마가크(Magach)' 전차, 1967년 전쟁 당시 이스라엘군이 운용한 프랑스 다쏘(dassault)사의 미라쥬 III 전투기 이제는 그 군사기술의 전시장에 한국 기업들이 함께하고 있다. 2025년 10월 프란체스카 알바네제 유엔 특별보고관이 발표한 ‘가자 집단학살: 집단적 범죄’ 보고서는 F-35 스텔스 전투기에 부품을 공급한 19개국 중 하나로 한국을 명시하고 있다. HD현대, LIG넥스원, 한국항공우주산업, 한화시스템, 한화에어로스페이스, 현대로템 등 한국 기업들이 항공, 전자전, 드론, 로봇 등 첨단기술 분야에서 협력을 이어가고 있다. 이들 기업은 취업박람회, 현장실습 등을 비롯한 다양한 방식으로 대학에 침투하고 있다. 이스라엘군이 운용중인 F-35 라이트닝 전투기 공모의 규모와 구체적 협력의 측면에 있어 취업박람회는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 그러나 기업이 대학에 침투할 때, 취업박람회는 강력한 도구가 된다. 취업박람회는 학생들의 이해관계를 명목으로 협력을 정당화한다. 집단학살 공모기업과 학생 사이의 접촉면이 늘어나고 친숙해지는 가운데, 집단학살 공모가 마치 일상적이고 정상적인 일인 것처렴 여겨진다. 이것이 바로 집단학살을 ‘정상화(Normalization)’하는 시도이다. 이러한 공모가 대학에서 용납되어선 안된다. 모든 학살 공모자들을 대학에서 쫓아내는 것이 ‘실질적인 연대’의 실현이다 팔레스타인 민중들, 특히 대학의 학생들과 교직원, 학계 종사자들은 이스라엘이 저지르는 교육학살에 대해 ‘이 학살에 대한 모든 공모 행위를 종식’할 것을 촉구하고 있다. 2025년 7월 발표된 가자 대학 총장들의 공개 서한은 ‘상징적 연대의 시대는 지났으며. 이제 실질적이고 체계적이며 지속적인 협력’이 필요하다고, 이제는 단순한 선언을 넘는 연대가 필요하다고 분명히 말하고 있다. 그 구체적인 협력이란 팔레스타인 해방을 단호히 지지하고 이스라엘의 집단학살을 멈춰 세우는 것이다. 대학에서는 이를 학술보이콧 운동을 통해 실현할 수 있을 것이다. 학술보이콧이란 이스라엘 국가기구와 집단학살에 공모하는 기업과의 관계를 끊어내고 퇴출시키는 운동을 의미한다. 전 세계 곳곳에서 팔레스타인 민중의 목소리에 부응하는 대학들의 움직임이 이어지고 있다. 2024년 4월 17일 미국 컬럼비아 대학을 시작으로 전 세계 대학에서 전개된 점거농성 물결 아래, 대학의 이스라엘과의 투자관계 철회, 집단학살 공모기업과의 협력을 중단하라는 요구가 빗발쳤다. 2023년 UC 버클리 대학 정문 아래를 지나는 팔레스타인 연대 대오 행렬 2024년 4월 28일 미국 오리건주 포틀랜드 대학(PSU)에서는 학생들이 수개월간의 시위와 점거농성을 벌인 끝에 이스라엘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군수업체 보잉과의 관계를 잠정적으로 단절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2024년 5월 샌프란시스코 주립대학교는 2주간의 학생 시위 끝에 무기 산업에 대한 투자를 철회하기로 결정하고, 그 과정에서 투자 철회 대상 기업 목록에 있는 캐터필러, 록히드 마틴, 레오나르도, 팔란티어의 보유 주식을 매각했다. 2024년 12월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대학교(UvA) 교직원 다수를 대표하는 노동조합인 FNV는 4일간의 파업을 벌였다. 교직원 조합원의 84%가 참여한 이 파업은 이스라엘에 대한 학문적 보이콧을 위한 최초의 공식 노동조합 파업이다. 파업의 결과로 2025년 7월 암스테르담 대학교는 집단학살에 연루된 기업과의 관계 단절과 물품 조달 중단을 약속했다. 2024년 5월 전개된 암스테르담 대학 교직원노동자들의 파업 집회 2025년 6월 아일랜드 더블린 트리니티 칼리지(TCD)는 아일랜드에서 최초로 이스라엘 기업에 대한 지분을 완전히 매각하라는 권고를 수용하고 이스라엘에 본사를 둔 기업과의 모든 관계를 단절하기로 결정했다. 2025년 8월 27일, 캘리포니아 대학 버클리 캠퍼스(UC 버클리) 전기공학 및 컴퓨터과학과 강사인 페이린 카오(Peyrin Kao)는 이스라엘의 가자지구 학살에 기술이 이용되는 것에 항의하며 38일간 단식투쟁을 전개했다. 단식투쟁 기간 동안 집단학살에 과학기술이 동원되지 않길 바라는 이공계 학생과 교직원들을 중심으로 'STEM for Palestine‘이라는 이름의 단체가 결성되었다. UC 캠퍼스들은 2005년부터 2022년까지 국방부, 록히드 마틴, 레이시온, 제너럴 아토믹스, 보잉, 그리고 이스라엘 국방부로부터 총 56억 달러의 연구비를 지원받았다. 2017년부터 2022년까지 UC 캠퍼스들은 총 1,428건의 군사 자금 지원 연구 보조금을 받았다. 대학 당국은 페이린 카오에게 2026년 봄 학기 동안 무급 정직 처분을 내리고, 팔레스타인 연대에 참여한 학생 및 교직원 160명의 명단을 트럼프 정권에 제출했다. 카오의 복직을 위한 투쟁이 계속되고 있는 가운데, 'STEM for Palestine’은 4월 7일 버클리 캠퍼스에서 집단학살 공모기업을 배제한 "대안적 진로 박람회(CALternative Career Fair)"를 개최했다. 학술보이콧이 유효하게 관철된 대학의 사례를 살펴보면, 학부생 뿐만 아니라 대학원생, 강사, 교직원 등 학내 노동자를 포괄하는 대학구성원들의 연대가 형성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연대는 단순한 힘의 합력을 넘어 대학과 자본을 실질적으로 압박할 수 있는 힘을 창출할 수 있다. 대학의 연구와 강의를 전담하는 대학원생과 강사노동자, 학교를 유지보수하고 사무를 관리하는 시설, 교직원 노동자와의 연대는 대학의 학술적 보이콧 이행을 위한 압력을 만들어낼 수 있다. 한국 대학에서도 이스라엘의 집단학살 종식과 팔레스타인 해방을 촉구하는 노동자들과 학생들의 연대가 이루어지고 있다. 2024년 10월 4일 고려대학교 학생들은 고려대학교와 이스라엘 대사관과 대학 등 기관, 집단학살 공모 기업의 협력 중단을 촉구하며 본관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었다. 여기에는 공공운수노조 서울지부 고려대분회 소속 청소/경비/주차 노동자들이 함께했다. 같은 자리에는 현대건설기계 하청업체에서 노조를 조직하다가 직장폐쇄와 함께 일터에서 쫒겨난 해고노동자가 함께하며 목소리를 높였다. 집회에 참여한 노동자와 학생들은 이스라엘에 팔레스타인 가옥을 파괴하는 굴삭기를 수출하고, 대학에서 채용설명회, 산학협력 등을 매개로 대학기업화 행보를 가속하는 HD현대를 규탄했다. 대학 안팎의 노동자들과 연대하며 팔레스타인 연대운동에 대한 공통의 입장과 실천을 쌓아나가는 것이 절실한 과제다. 우리의 대학은 팔레스타인 앞에서 떳떳할 수 있는가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교육학살에 맞서 당당히 말한다. ‘우리는 이 대학들을 텐트에서 세웠고. 우리 동료들의 도움을 받아 텐트에서 다시 한 번 대학을 재건할 것입니다’. 가자지구의 학생과 교사, 교직원들은 파괴된 학교 건물을 대신해 천막에서 교육을 이어가며 팔레스타인 민중의 굳건한 ‘수무드(저항)’ 정신을 스스로 증명하고 있다. 한편, 학교를 폭격하고 학생과 교사들을 천막으로 내몬 장본인이 누구인가를 반드시 직시해야 한다. 이스라엘과 그 배후에 놓인 제국주의의 타도 없이 재건은 요원한 일이다. 팔레스타인 교육계의 선언은 팔레스타인을 넘어 전 세계의 대학, 학문공동체가 어떤 공간이어야 하는지 묻고 있다. 팔레스타인 대학의 구성원들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 대학은 단순한 건물들의 집합이 아닙니다. 우리는 학생, 교수진, 직원으로 구성된 학문공동체로 살아 숨 쉬며 우리의 사명을 이어가겠다는 결의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4월 5일 팔레스타인 집단학살 연루 기업의 대학 취업박람회 참여를 규탄하며 연세대 정문 앞에서 열린 기자회견 집단학살 연루 기업들과 협력하는 우리의 대학은 지금 진정으로 안녕한가. 우리는 대학에서 집단학살로 이윤을 거두는 기업들에 굴종하는 대신, 무엇을 꿈꾸고 무엇을 할 수 있을까. 학술보이콧 운동은 팔레스타인 해방을 향한 연대인 동시에 우리의 대학과 학문공동체를 향한 문제제기이기도 하다. 대학은 때때로 우골탑, 상아탑 등 타자의 희생 위에 세워진 공간으로 비유되곤 한다. 대학은 공동체의 헌신과 노력으로 만들어진 산물인 동시에 공동체 그 자체이다. 집단학살 공모 기업과 한국 대학은 다른 공동체의 파괴를 대가로 번영을 도모하고 있진 않은가. 가자지구 대학의 폐허, 이란 미나브 초등학교의 잔해 앞에 대학의 일원으로서 우리는 과연 떳떳한가. 그렇지 않다면, 집단학살을 지탱하고 있는 구체적인 공모의 탑을 지금 당장 무너뜨리자. 고려대학교에 걸린 취업박람회 보이콧 현수막 -
[번역] 총회란 무엇인가? 진정한 민주주의를 위한 안내서부르주아 민주주의라는 공허한 농담에 맞서서, 총회는 진정한 노동자 권력의 실질적 토대 역할을 수행한다. 총회는 노동자의 ‘의견 수렴’을 위한 전술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극우와 대결하며 억압과 착취로부터의 해방을 쟁취하는 데 필요한, 강력하고 민주적인 틀을 갖춘 전략 그 자체다. 오늘날 우리는 정치인들과 주류 언론으로부터 “민주주의”에 관해 귀가 닳도록 듣는다. 불과 1년 전, 카멀라 해리스는 미국이 “세계 역사상 가장 위대한 민주주의 국가”라고 주장했다. 한편 트럼프는 두 번째 임기 취임 연설에서 자신이 복귀함으로써 민주주의와 자유가 회복될 것이라고 역설했다. 민주당은 트럼프가 “우리의 민주주의”에 대한 위협이라고 외치면서, 자신들이 차악처럼 보이도록 트럼프를 이용하고 있다. 트럼프가 온갖 방식으로 민주적 권리를 공격하고 있다는 것은 사실이지만, 트럼프 이전에는 노동자 계급과 피억압 민중을 위한 진정한 민주주의가 존재했다는 생각은 정말이지 가소롭다. 결국 우리 대다수에게 정치 권력과 진정한 민주주의는 먼 나라 이야기처럼 느껴진다. 우리의 일터는 사실상 사장이 권력을 독점하는 독재 체제이며, 선거철마다 던지는 한 표는 아무것도 바꾸지 못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것은 의도된 설계다. 우리가 직장에서, 지역 사회에서, 국가 전체에서 경험하는 것은 실질적 민주주의가 아니라 부르주아 민주주의다. 이것은 본질적으로 반민주주의이며, 블라디미르 레닌이 선언했듯이 “자본주의 하에서 언제나 제한적이고, 왜곡되고, 허위이며 위선일 수밖에 없는, 부자들에게는 천국이요 착취당하는 자들에게는 올가미이자 기만”인 체제인 것이다. 전 세계적으로 이러한 형태의 부르주아 민주주의가 헤게모니를 장악했고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민주적 권리가 일부 존재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관대한 체제 덕분이 아니라 민권 운동 같은 계급 투쟁이 지배 계급의 손을 억지로 움직인 결과다. 바로 지금, 이 권리마저도 미국을 비롯한 전 세계 극우 지도자들에게 공격받고 있다. 지배 계급에게 이익이 되기만 하면 이른바 민주주의의 이름으로 우리의 권리가 순식간에 위협받고, 공격당하고, 후퇴할 수 있음을 우리는 목격하고 있다. 부르주아 민주주의가 인민의 의지를 가장한 계급 지배 기구에 불과하며 결코 민주주의가 아니라면, 대안은 무엇인가? 직접적이고 참여적이며 다수를 주체로 세우는 민주주의를 우리는 어떻게 실천할 수 있는가? 진정한 민주주의란 무엇인가? 그것은 노동자 계급의 자기 조직화 형태, 바로 총회다. 총회라는 전통을 세움으로써 우리는 극우에 맞서서 아래로부터의 투쟁을 정련하는 노동자 민주주의, 제국주의의 심장부에서 트럼프, 이민세관단속국(ICE), 제국주의에 맞서 싸우는 노동자 민주주의를 건설할 수 있다. 총회의 힘으로 우리는 개별 노조, 일터, 대학의 한계를 넘어 우리의 요구를 쟁취하는 전투적 공동 전선을 형성할 수 있다. 총회란 무엇인가? 총회란 집단 토론, 의사 결정, 행동을 위한 열린 회의 공간이다. 대중 민주주의의 장이자 실질적 권력 기관인 총회는 대부분 투쟁 속에서 자생적으로 출현하며, 일터, 지역, 캠퍼스가 공동의 싸움으로 활성화될 때 자연스럽게 형성된다. 부르주아 민주주의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폐쇄적 위원회나 의사 결정 기구와 달리, 총회는 해당 투쟁에 영향을 받는 공동체 전체에 열려 있어야 한다. 총회는 산업별·직종별·노조별로 노동자를 고립시키는 자본주의의 인위적 분할을 거부하며, 결과에 이해 관계가 있는 모든 사람을 한곳에 결집시킨다. 예를 들어 지역 총회는 주거, 치안, 상호 부조 문제 등을 다룰 수 있다. 학생들과 교육자들은 자신들의 구체적인 투쟁을 조직하기 위해 총회를 결성하곤 한다. 그리고 이 형태들은 상호 배타적인 것이 아니다. 의료 투쟁에서 총회는 병원 노동자, 인근 지역 환자, 그들의 가족 구성원을 모두 포괄할 수 있는데, 이는 그들의 문제가 불가분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인식하기 때문이다. 교사 총회에는 학부모와 학생이 당연히 포함될 수 있다. 교육을 위한 싸움은 곧 공동체의 싸움이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체제에서 투쟁은 서로 중첩된다. 바로 이 점이 총회를 효과적인 것으로 만들어 주는데, 총회는 자본주의가 만들어 낸 인위적 분할을 허물고, 영향을 받는 당사자들을 토론과 의사 결정의 장으로 초대하며, 모두가 각자 기여할 방법을 지니고 있음을 인정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총회는 지역 현안을 다루는 데 한정될 필요가 없다. 뉴욕시의 의료 노동자와 환자들의 총회가 푸드 스탬프 삭감에 항의하는 시위를 결의할 수도 있고, 파업 중인 스타벅스 노동자들에 대한 연대를 결의할 수도 있는 것이다. 기층 총회들은 대의원 평의회, 즉 소비에트(러시아어로 “평의회”를 뜻한다)를 통해 힘을 연합해서 더 광범위한 영향력을 확보할 수 있다. 여러 지역 총회에서 선출하고 즉시 소환 가능한 대의원들이 소비에트에 모여 시 단위, 지역 단위, 전국 단위로 사안을 조율한다. 이 구조는 기층의 직접적이고 민주적인 통제를 희생하지 않으면서도 지역의 투쟁들을 결합할 수 있다. 모든 형태의 총회는 고립된 불만 사항들을 모아서 실질적 권력을 향한 집단 기획으로 전환하는 기제다. 총회는 그 밖에 어떤 성격을 지니는가? O 자유롭고 열린 토론 진정한 민주적 의사 결정을 촉진하기 위해, 총회는 보통 자유롭고 개방적인 사상 토론에 상당한 시간을 할애한다. 다양한 정치적 입장, 경향, 분파들이 당면 주제를 둘러싼 토론 및 논쟁 과정에서 총회 전체에 생각과 견해를 제시할 수 있다. 토론의 목표는 단순한 다수결이 아니라, 설득과 논증을 통해 가장 효과적인 행동 방침에 집단적으로 도달하는 것이다. O 위임을 활용하는 직접 참여 자본주의 하의 일터는 물론 대부분의 노조마저 위계적 조직 구조를 가진 경우가 흔하지만, 총회에서 최고 수준의 의사 결정권과 지도력은 기층 구성원에게 있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발언하고, 의견을 나누고, 행동을 제안하고, 주요 결정에 투표할 권리가 모든 구성원에게 동등하게 주어진다는 의미다. 작은 목표를 수립하는 결정이든 파업 여부처럼 큰 결정이든 마찬가지다. 특정 회의(예를 들면 공장에서 사측과의 회의)에 참석할 사람을 총회에서 투표로 선출할 경우 선출된 이들은 총회를 대표하며, 자신의 독자적 판단에 따라 표결하지 않고 총회로부터 부여받은 위임 사항을 수행한다. 이는 관료적 지도부가 흔히 저지르는 밀실 거래를 방지한다. O 소환 가능한 순환 대의원제 통제되지 않는 소수가 권력을 장악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어떤 대의원이든 총회의 결정을 대변하지 못하거나 총회의 이익에 반하는 행동을 할 경우 총회가 소환하고 교체할 수 있다. 이는 민주제 기층의 권력을 지키기 위한 것으로, 오늘날 우리가 시행하는 (사실상 과두제인) “대의 민주제”의 구조와 정확히 반대된다. 그리고 동일한 인물이 계속 지도부를 맡지 않도록 소환 가능한 대의원들은 순환 배치된다. O 다수결 규율 충분한 토론을 거친 후 구성원들이 투표하면 다수의 결정이 총회 전체의 방침이 된다. 반대 의견을 가진 구성원들도 피켓 라인이나 집단 행동 등 공개 행동 중에는 다수 결정을 따라야 한다는 기대가 있지만, 내부적으로는 자신의 입장을 계속 주장하고 향후 회의에서 다수를 자기 입장으로 설득할 권리를 가진다. 이 원칙을 확장하면, 총회는 자신이 속한 구조에 유기적으로 뿌리내리고 있기 때문에(이를테면 특정한 일터, 학교, 지역의 노동자들이 총회에 참여하기 때문에) 총회의 모든 구성원은 집단적 결정이 “실행”되도록 책임질 뿐 아니라 자신과 유기적으로 연결된 더 넓은 노동자 대중을 추동하는 역할도 맡는다. 이 같은 제도가 빚어 내는 노동자 대중은 부르주아 민주주의가 만들어 내는 것보다 훨씬 더 역동적이고 헌신적이다. 총회는 혁명 조직이나 미래의 사회주의 사회를 구성하는 기본 단위가 될 수 있다. 총회는 전술이 아니라 전략이다. 총회 내부의 민주적 절차는 구성원들에게 권한을 부여하고 이들이 직접 참여하도록 설계된, 급진적 민주주의가 생명력을 얻는 공간이다. 겉보기에는 민주적인 듯하지만 실제로는 의사 결정 권한 부여를 위한 민주적 구조가 없는 타운홀 미팅과는 다르다. 이처럼 실질적 권한 없는 대표성이라는 허울이야말로 관료적 지도부가 바라는 것이고, 노조 지도부가 자신들의 이미지를 개선하는 전술로 타운홀 미팅을 자주 활용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런 경우에 관료적 지도부가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총회를 전용하며, 세력 관계를 뒤흔드는 조직화라는 총회 본연의 잠재력은 가로막히고 만다. 총회 구조를 통한 건설과 조직화는 부르주아 민주주의(즉 반민주주의)로부터 진정한 민주주의, 말하자면 마르크스주의자들이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 혹은 노동자 민주주의라고 부르는 것으로 이행하는 구조를 만들어 내는 출발점이 될 수 있다. 총회는 노동자 계급의 자기 조직화를 발전시키고 우리의 투쟁 방법을 개발하는 수단이다. 총회는 투쟁에서 계급적 독립성을 구축하는 데 필수적이며, 우리를 인위적으로 분열시키고 투쟁을 가로채서 자본주의적 “민주주의” 제도로 돌려보내려는 부르주아 지도부 및 노조 관료들의 포섭에 저항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다. 현실 세계의 총회 1917년 러시아 혁명은 진정한 노동자 민주주의가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직접적 대안이 될 수 있음을 소비에트 국가를 통해 보여 주었다. 작가 존 리드가 기록했듯이, “러시아 전역의 모든 도시와 마을에서” “고도로 복잡한 정치 구조”가 출현했으며, 그것은 “절대다수 인민의 지지를 받았고, 역사상 그 어떤 신생 인민 정부 못지않게 잘 작동”하고 있었다. 이 구조 안에서 노동자, 병사, 농민의 평의회(즉 총회)가 일터와 지방 자치 차원에서 모두 존재하며 노동과 생활에 관련된 결정을 내렸다. 이 과정은 민주적이었고, 소수의 자본가가 아닌 다수를 위해 무엇을 생산할지 결정했다. 동시에 “지역 소비에트들은 대표자를 선출해서 전국 소비에트에 보냈고, 이 전국 소비에트는 볼셰비키 지도부가 외교 정책 등 전 러시아에 영향을 미치는 결정으로 고심할 때 방향을 제시하며 힘을 보탰다.” 리드는 소비에트 연방에서 발전한 이 같은 구조가 역사상 가장 민주적이고 대응력 있는 체제 중 하나였다고 기록한다. 이 사례를 통해 우리는 대규모로 실현된 총회의 진정한 잠재력을 확인할 수 있다. 혹자는 이렇게 물을 것이다. “좋다. 하지만 그건 1917년 이야기 아닌가? 오늘날의 총회는 어떤 사례가 있는가?” 좀 더 작은 규모의 사례를 보자면, 2001년 아르헨티나 금융 위기 직후 노동자들은 사논(Zanon)이라는 세라믹 타일 공장을 점거했으며, 오늘날까지도 이곳을 직접 관리·운영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총회는 의사 결정의 장이 되었고, 늘 그렇듯 전투적인 평조합원을 포섭하려는 노조 관료의 시도에 맞서 싸우기 위해 활용되었다. 2006년에는 멕시코 오아하카에서 총회가 생겨났다. 교원 노조가 파업에 돌입하자 경찰은 평화 시위대를 향해 발포했고, 노동자들이 반격에 나서 경찰을 도시 밖으로 몰아냈다. 수개월 동안 “노동자 계급과 교원 노조를 포함한 지역 공동체 단위들이 오아하카 민중 총회(APPO)라고 알려진 광범위한 운동의 일환으로 대규모 민주적 총회를 통해 도시를 운영했다.” 좀 더 최근인 2024년에는 뉴욕시립대학교 교직원 노조(PSC-CUNY) 소속 평교원 노동자들이 시티칼리지(CCNY) 가자 연대 캠프에서 총회를 개최하여, 캠프를 조직한 학생들의 다섯 가지 요구 사항을 지지할 것을 만장일치로 의결했다. 학생, 교원, 지역 주민 모두가 이스라엘의 가자 학살에 맞선 조직화를 어떻게 진전시킬 것인지 공개적이고 민주적인 방식으로 논의할 수 있었다. 같은 해에 미국 최초의 약물 과다 복용 예방 센터인 온포인트NYC(OnPoint NYC)의 조직된 노동자들이 사측의 직장 폐쇄에 대응하여 건물 밖에 자체 진료소를 설립하기로 결정한 것도 부분적으로는 총회의 힘이었다. 최근 디트로이트에서는 “민중 총회”가 결성되어 수백 명의 사람들이 ICE와 트럼프 행정부에 맞설 전략을 토론하고 행동에 나서기로 결의했다. 왜 지금 총회인가? 오늘날 세계 정세는 요약하면 군사주의, 제국주의, 위기다. 극우가 부상하고 있다. 그러나 병원에서 파업을 조직하는 간호사들이든 이탈리아에서 전국 총파업을 촉발한 항만 노동자들이든, 노동자 계급은 반격에 나서고 있다. 노동자와 피억압 민중이 저항을 조직할 때 이들의 노력은 자본주의 정당들과 연관된 관료 조직에 의해 포섭되거나 축소되거나 왜곡되곤 한다. 총회를 통한 조직화는 진정으로 개방적인 정치적 토론, 논쟁, 민주적 의사 결정을 가능하게 만들어서 이 같은 포섭에 맞서 싸우는 핵심 수단이다. 민주적 방법을 통해 노동자 계급은 우리 모두를 해치는 체제에 맞서야 한다는 필연적 결론에 도달할 수 있으며, 계급 투쟁을 조직으로 결집시킬 수 있다. 오늘날 우리는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위기도 목격하고 있다. 유권자들이 더 이상 자신의 대표에게 대표성을 느끼지 못하게 되면서 지배 계급 정당에 의문을 품기 시작한다. 이는 미국 정당과 유권자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계급 탈정렬 현상과 민주당의 위기에서 드러난다. 이탈리아 마르크스주의자 안토니오 그람시가 유기적 위기라 부른 것과 같은 위기는 체제를 약화시키고 전통적 정당들로 하여금 새로운 정치 현상에 대응하도록 압박한다. 대중은 전통적 정당과 제도에 대한 신뢰를 계속 잃어 가고, “민주적”인 것으로 알고 있던 반민주적 제도 하에서 벼랑 끝으로 내몰린다. 이는 부르주아 민주주의 자체에 대한 신뢰 상실로도 이어질 수 있는데, 마르크스가 지적했듯이 그것은 “피억압자들이 몇 년에 한 번씩 억압 계급의 어떤 대표자가 의회에서 자신들을 대표하고 억압할 것인지를 결정하도록 허용되는” 체제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총회는 혁명적 대안이 될 수 있다. 좌파 관료들의 주장처럼 전통적인 부르주아 (반)민주주의 구조를 보완하거나 돕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구조에 맞서 싸우고 궁극적으로 그것을 완전히 대체하기 위해서다. 총회 구조는 전 세계적으로 진정한 노동자 계급 정당을 건설하는 토대가 된다. 자본주의 정당들이 끊임없이 대중을 배신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는 지금, 노동자 계급에게 자본에 종속되지 않은 자신만의 전투적 정당이 필요하다는 사실은 그 어느 때보다 명백하다. 진정한 노동자 계급 정당이 있었다면 과연 조란 맘다니 같은 “사회주의자” 정치인이 시온주의자를 정책 위원으로 앉혔을까? 보편적 의료 보장 약속을 철회했을까? 지금 맘다니의 여러 지지자들은 그의 최근 행보에 분노하면서도 여전히 희망을 걸고 있다. 그가 학살에 가담하는 민주당의 일원인데도 말이다. 총회와 같은 자기 조직화 도구가 있다면 우리는 이미 배신을 시작한 인물에게 희망을 걸 필요가 없다. 대신 동료 노동자, 학생, 지역 주민과 함께 일어나 우리의 요구를 토론하고 함께 싸워 쟁취할 수 있을 것이다. 총회를 통해서, 우리는 정치에 관해 토론하고 논쟁하는 다수의 목소리를 구체화할 진짜 사회주의 지도자를 선출할 것이다. 노동자 계급 정당 내부에서 총회는 “혁명의 학교” 역할을 할 수 있으며, 구성원들은 그 안에서 전략을 토론하고 집단적 결정을 내리고 지도부에 책임을 묻는 법을 배우게 된다. 노동자가 세계를 움직인다. 생산 현장에서 우리가 지니는 힘은 우리를 전략적 혁명 계급으로 만들고, 우리가 없으면 지배 계급은 아무것도 가지지 못한다. 총회는 우리의 노동력을 어떻게, 어떤 목적으로 사용할 것인지 혹은 사용하지 않을 것인지 집단적으로 결정할 수 있게 하며, 자본을 전복하는 데 필요한 실질적이고 민주적인 힘을 부여할 것이다. 자본주의 위기와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세계에서 총회는 단순한 비판이나 대안 전술 이상의 것을 제시한다. 총회는 실천이다. 총회는 수동적인 스포츠 관전에 불과한 부르주아 민주주의에서 벗어나, 우리 자신의 삶과 투쟁을 능동적으로 설계하는 수단이다. 일터, 학교, 지역에서 개방적 토론, 직접 위임, 책임성의 구조를 구축함으로써 우리는 오늘의 싸움을 능동적으로 조직한다. 그리고 그 이상을 해낸다. 우리는 진정한 노동자 민주주의의 틀을 만들기 시작하며, 투쟁 속에서 착취 없는 사회를 다스리는 데 필요한 도구를 창조하는 것이다. 총회는 단순히 회의가 아니라, 자본주의가 쇠퇴하는 시대에 쟁취할 가치가 있는 미래의 토대다. 2025년 12월 26일, Left Voice에 게재된 기사를 번역함. 글쓴이: Mike Pappas and Pola Posen 번역: 강성윤 /* 본문 안 링크 스타일 */ #gpt-article a { color: #cc0000 !important; text-decoration: none !important; } #gpt-article a:hover { color: #990000 !important; } -
[한노운사 연재 13회] 3부 패배와 퇴보 (1998-2008) [2] 민주노조운동의 후퇴와 비정규직 확산1996~97년의 역사적인 총파업으로도 정리해고제와 근로자파견제 도입을 막아내지 못하고 나아가 1998년 이후 구조조정과 정리해고를 앞세운 자본가들의 파상적인 신자유주의 대공세에 패배를 거듭한 결과, 2000년대 초반에 이르러 민주노조운동 전반은 심각한 후퇴와 변질에 직면하게 됐다. IMF 외환위기 때 펼쳐진 신자유주의 공세로 비정규직 비율이 전체 노동자의 절반 이상으로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비정규직은 1987년 이전 같은 열악한 임금·노동조건과 고용불안에 시달렸다. 민주노조운동의 주력이 된 대기업과 공공부문의 정규직은 전체 노동자의 상위 20% 정도에 불과했다. 비정규직을 대대적으로 노조로 조직하면서 비정규직이 겪는 초과착취와 차별을 타파하고 나아가 비정규직 제도 자체의 철폐를 향해 전진하는 것이 민주노조운동의 결정적인 과제가 됐다. 그러나 민주노조운동은 이 과제를 제대로 수행해 내지 못했다. 이는 다시 민주노조운동의 퇴행과 관료화를 급격히 가속시켰다. 이전 편 보기 3부 패배와 퇴보 (1998-2008) [시대배경] 신자유주의 구조조정 [1] 구조조정과 정리해고에 맞선 투쟁 [2] 민주노조운동의 후퇴와 비정규직 확산 [3] 비정규직 문제를 둘러싼 대결 [4] 민주노조운동의 위기 [5] 노동자 정치세력화 열망과 민주노동당 1) 잇따른 패배가 야기한 민주노조운동의 후퇴와 변질 1987년 노동자대투쟁 이후 전노협 건설로 나아갔던 한국의 민주노조운동은 자주성·민주성·전투성·연대성·변혁성에 대한 지향을 실천하면서 어용 한국노총과는 전혀 다른 유형의 노동조합운동을 거대한 대중적 흐름으로 만들어 냈다. 1980년대 후반부터 1990년대 초반까지 전노협으로 대표되는 민주노조운동은 자본의 착취와 탄압에 맞서 노동자의 인간다운 삶을 열어가는 모든 노동자들의 살아있는 희망이었고, 그 자체로 노동해방을 향한 노동자들의 힘찬 전진이었다. 그러나 타협·개량주의 세력의 주도권 아래 민주노총이 건설되고, 곧이어 신자유주의 대공세에 패배를 거듭하면서, 민주노총으로 포괄된 민주노조운동 전반은 심각하게 후퇴했다. 전노협 운동의 특징이었던 자주성·민주성·전투성·연대성·변혁성에 대한 지향은 이제 사실상 껍데기만 남게 됐다. 이처럼 민주노조운동 전반이 심각한 후퇴와 변질을 겪게 된 것은, 무엇보다 자본의 신자유주의 대공세에 패배를 거듭하면서 민주노총으로 포괄된 민주노조들의 구성과 지향이 사실상 구조조정에서 살아남은 대기업 정규직만의 운동으로 축소돼 버렸기 때문이었다. 또한 지도부의 배신을 통해 투쟁이 패배하는 양상을 거듭 되풀이함으로써, 1987년 노동자대투쟁 이래 발전시켜 왔던 민주노조운동의 원칙과 기풍이 심각하게 무너져 내렸기 때문이었다. ◎ 패배의 원인과 결과 맹렬한 성장을 거듭하던 한국 자본주의는 1990년대 중반을 분기점으로 위기와 쇠퇴의 시기로 접어들었다. 그만큼 자본가들의 공격이 더욱 집요하고 악랄해졌다. 물론 그 이전에도 한국의 자본가들은 전 세계에서 가장 끔찍하게 노동자들을 착취하고 억압했으며, 노동자들의 투쟁을 철저하게 탄압했다. 그래서 20세기 후반부에 세계에서 가장 빠른 속도로 자본주의 경제를 발전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1987년 노동자대투쟁 이후 폭발적으로 성장한 민주노조운동은 자본의 탄압을 상당 정도 무력화했으며 자본가들에게 적지 않은 양보를 강제해 냈다. 대략 1980년대 후반부터 1990년대 중반까지 자본가들은 민주노조운동에 대한 탄압을 계속 퍼부으면서도 노동자들의 끈질긴 투쟁력에 밀려 경제적으로는 상당한 양보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과정에서 전노협 소속 노조가 있던 중소자본 가운데 상당수는 아예 공장을 폐업하거나 중국·동남아 등지로 옮기기도 했다. 하지만 막대한 이윤을 거둬들이던 대기업 자본가들은 민주노조의 전투성을 약화시킬 방편으로 상당한 경제적 양보를 하면서 이 시기를 보냈다. 그러나 IMF 외환위기를 계기로 한국 자본주의가 충격적으로 위기에 내몰리면서부터 자본가들의 태도는 완연히 바뀌었다. 구조조정과 정리해고를 앞세운 자본가들의 공격은 그야말로 ‘대공세’였다. 한동안 자본가들의 경제적 양보에 익숙해 있던 노동자들은 갑자기 바뀐 자본가들의 태도에 크게 당황했다. 자본가들의 신자유주의 대공세는 노동자들에게, 특히 그 지도부에게 이전보다 훨씬 더 큰 용기와 시야, 대담한 전망과 자신감을 요구했다. 그러나 엄혹한 사태를 헤치고 나갈 역량을 갖추지 못한 지도부는 결국 노동자들의 열망을 책임지지 못하고 자본가들에게 투항하며 배신하고 말았다. 이러한 사태전개는 민주노총 건설 과정에서 타협·개량주의 노선이 전투적·변혁적 노선을 밀어내고 민주노조운동의 주도권을 장악한 것과 밀접히 관련돼 있었다. 만일 민주노조운동이 민주노총 건설 과정에서 전투적·변혁적 노선을 계승하고 발전시켜 나갔다면, 이후 자본가들의 대공세에 맞설 능력과 태세를 갖춘 지도자들을 상당한 규모로 준비시킬 수 있었을 것이다. 민주노조운동이 타협·개량주의에 흠뻑 젖어 들어가는 대신 전투적·변혁적 노선을 잘 견지했다면, 자본가들의 경제적 양보가 일시적인 후퇴에 불과한 것일 뿐 머지않아 노동자들에게 대공세를 펼칠 것이라는 점을 잊지 않으면서 그에 걸맞은 준비태세를 갖출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현실에서 벌어진 일은 정반대였다. 민주노조운동의 주도권을 장악한 타협·개량주의 노선은 자본가들의 일시적 양보를 확고한 성과이자 엄청난 변화인 것처럼 착각했다. 민주노조운동 지도부 대다수가 ‘이제 굳이 힘들게 싸우지 않아도 자본가들로부터 적당히 양보를 얻어낼 수 있겠다’는 생각에 빠져들며 정신상태가 해이해져 가는 것과 정확히 교차하면서 자본가들의 대공세가 시작됐다. 그래서 민주노조운동 지도부 대다수는 엄혹한 사태를 헤치고 나갈 역량과 태세를 더욱 갖출 수 없었다. 민주노총이 출범하던 1990년대 중반부터 대략 2000년대 초반까지 대기업 정규직 노동자들은 정리해고를 앞세운 자본의 무자비한 공격에 맞서 매우 치열하게 투쟁을 전개했다. 그러한 투쟁들 속에서 노동자들은 자본의 당면한 공세를 물리치는 것만이 아니라 노동자의 세상을 향한 거침없는 전진을 희망하고 노래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 투쟁들은 거의 하나같이 처참하게 패배했다. 노동자대중은 생존과 권리를 지키려는 강렬한 열망을 행동으로 보여주었지만 지도부의 투항과 배신을 이겨내지 못했고 결국 투쟁 전열이 무너지면서 패배하는 양상이 거듭해서 되풀이됐다. 운명적인 투쟁들이 지도부의 거듭된 투항과 배신을 이겨내지 못하고 처참한 패배로 귀결되자, 대기업 정규직의 가슴 속에는 민주노조운동의 대의와 가능성에 대한 극심한 회의와 실망이 깊이 아로새겨졌다. 민주노총 출범 이후 몇 년 동안 자본의 대공세를 둘러싸고 벌어진 치열한 전투에서 노동자들이 처참하게 패배한 결과, 특히 투쟁의 지도부가 대중의 열망을 배신하고 자본가들에게 투항하면서 민주노조운동의 정당성과 기풍이 심각하게 훼손되는 형태로 패배한 결과, 대기업 정규직은 보수화와 개인주의화의 늪에 깊이 빠져들었다. 노동자들의 단결과 투쟁을 통해 노동자의 생존과 권리를 당당하게 지켜내고 나아가 착취와 억압을 타파할 새로운 세상을 향해 뚜벅뚜벅 전진할 수 있다면, 그것을 마다할 노동자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말만 그럴싸할 뿐 실제로는 결코 이루어질 수 없는 꿈에 불과하다면, 더 이상 그 꿈에 노동자들은 매력을 느끼지 못할 것이다. 노동자들의 단결과 투쟁이 불가능하다면, 현실을 살아가는 노동자로서는 치열한 생존경쟁의 한복판에서 스스로 살아남을 길을 찾아야 한다. 동료들을 제쳐서라도 자본가에게 자신의 존재가치와 능력을 인정받아야 하며, 자본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불안한 미래를 지켜줄 것은 돈밖에 없기 때문에 더욱 돈에 집착해야 한다. 바로 이것이 민주노조운동에 실었던 강렬한 열망과 기대가 처참한 회의와 실망으로 되돌아 온 뒤, 대기업 정규직의 마음속에서 펼쳐진 논리구조였다. 대기업 정규직의 보수화와 개인주의화는 단순히 확대된 개량 때문에 벌어진 일이 결코 아니었다. 만일 민주노조운동 지도부가 대기업 정규직 노동자대중의 투쟁 의지를 올곧게 받아 안고 제대로 발전시켜 나갔다면, 확대된 개량은 대기업 정규직의 보수화가 아니라 더욱 확장된 급진화로 또한 개인주의화가 아니라 계급적 단결의 고취로 얼마든지 이어질 수 있었다. 대기업 정규직의 보수화와 개인주의화는 현장에 대한 유형·무형의 통제권이 노동자들로부터 자본가들에게 되돌아간 정도, 다시 말해서 노동자들의 가장 기초적인 단결력이 해체된 정도와 거의 정확하게 비례했다. 그러므로 대기업 정규직의 보수화와 개인주의화는 저항과 투쟁의 상상력마저 거세당한 채 주어진 현실에 무기력하게 적응하게 된 현실의 표현이었다. 한편으로 비정규직보다는 낫다는 안도감과 뒤틀린 우월감에 사로잡혀 있고, 다른 한편으로 정리해고를 당하거나 비정규직으로 전락할까봐 두려움에 시달리고 있을 뿐, 자신의 처지와 운명을 근본적으로 바꾸려는 의지도 열망도 자신감도 다 잃어버린 대기업 정규직의 초라한 자화상이었다. ◎ 자주성의 상실 ‘자주성’은 자본과 정권의 지배·개입을 철저히 배격함으로써 오로지 노동자들을 위하고 노동자들의 뜻대로 운영되는 노동조합을 가능케 함으로써 민주노조를 어용노조와 구분시키는 출발점이었다. 그러나 2000년대 초반에 이르러 이른바 ‘민주노조’의 대다수는 자본과 정권의 영향력이 일상적으로 개입하고 작용하는 상태로 전락했다. 무엇보다 개별 단위노조에서부터 자본의 개입과 영향력 행사가 일상화 됐다. 대기업 정규직을 중심으로 이른바 ‘힘 있는 민주노조’가 있는 모든 사업장에는 노동조합 현직 간부들은 물론이요 전직 간부들에 대해서까지 경영진부터 말단 관리자가 총동원된 그물망 같은 담당관리 체계가 작동하게 됐다. 그러한 사업장들에서 자본의 노무관리 부서는 노동조합의 대의원대회·운영위원회 등 주요 논의 내용을 실시간으로 파악하고 나아가 노동조합 논의 과정 자체에 때론 노골적으로 때론 은밀하게 ‘하지만 매우 깊이’ 영향력을 행사했다. 이러한 자본의 일상적인 지배·개입은 노조간부들에 대한 엄청난 특혜·향응·금품 제공으로 지탱됐다.[1] 2000년 현대차노조가 ‘대우자동차 해외매각 반대’를 내건 완성차 노조들의 공동파업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한겨레신문 광고비 3천만 원을 회사에게 받은 돈으로 납부한 사실이 나중에 밝혀지면서 집행부가 중도 사퇴한 사건은 자본으로부터의 자주성이 얼마나 심각하게 무너져 있는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었다.[2] 자본의 지배·개입 아래 놓인 노동조합은 당연히 제 기능을 발휘할 수 없었다. 얼핏 상당한 힘을 가진 것처럼 보이던 대기업 정규직 민주노조들은 비정규직 문제나 지역적·전국적 연대처럼 자본이 쉽게 용납하지 않는 사안 앞에 서면 너무나 초라하고 비겁하게 꼬리를 내렸다. 대부분의 대기업 정규직 민주노조들은 자본이 설정해 준 한계 속에서만 목소리를 높일 수 있는 ‘부처님 손바닥 안의 손오공’이 돼 버렸다. 민주노총에 대한 정권의 개입과 영향력 행사 또한 일반화됐다. 노동운동 경력을 가진 정권 측 인사들이 민주노조운동의 주요 지도자들을 일상적으로 접촉하며 크고 작은 사안들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은 민주노조운동 상층에서 공공연한 일이 됐다. 2001년 10월 민주노총 대의원대회에서 정부 보조금을 받기로 결정한 것은 자주성 상실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건이었다. 당시 정부 보조금을 받자는 주장은 ‘국민들이 낸 세금을 우리가 못 받을 이유가 없다’는 논리를 앞세웠다. 그러나 이는 반노동자적인 정부가 민주노총을 길들이기 위해 얼마든지 보조금 중단 여부를 갖고 장난칠 수 있다는 점을 도외시한 논리였다.[3] 정부 보조금을 받기 시작한 2002년 초, 민주노총은 2001년 김대중 정권 퇴진 투쟁에 대해 부끄러움도 없이 ‘과도한 결정’으로 스스로 평가했다. ◎ 민주성의 상실 ‘민주성’은 민주노조가 갖는 힘의 근원이었다. 모든 노동자들을 노동조합으로 단결시키고 전체 조합원의 적극적인 참여로 사업과 투쟁을 전개하면서 노동자 민주주의를 활짝 꽃피움으로써 민주노조는 강력한 힘을 발휘할 수 있었다. 그러나 2000년대 초반에 이르러 이른바 ‘민주노조’ 전반은 배제·차별·무관심·관료주의로 점철된 가운데 노동자 민주주의의 형식적인 잔재들만이 앙상하게 남은 상태로 전락했다. 1987년 노동자대투쟁이 탄생시킨 민주노조는 일반적으로 직종과 지위를 떠나 사업장 안에 있는 모든 노동자들을 단결시켰다. 즉 노동조합이긴 하되, 일종의 노동자평의회와 같은 노동조합이었다. 이를테면 1987년 노동자대투쟁의 진원지 역할을 했던 울산 현대중공업에서 탄생한 민주노조 조합원의 20% 남짓은 당시 사내하청업체에 소속된 이른바 도급 노동자들이었다. 가장 열악한 처지에 있는 도급 노동자들을 포괄했을 뿐만 아니라 이들이 가장 열성적으로 투쟁에 앞장섰기 때문에 당시의 민주노조는 출발과 동시에 다른 많은 부분에서의 성과와 더불어 도급 노동자들을 전원 정규직으로 전환시키는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 그러나 2000년대 초반에 이르러 이른바 ‘민주노조’들의 모습은 완전히 달라졌다.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을 둘러싼 전투에서 패배하고 후퇴한 결과 대기업 정규직 노조들은 같은 사업장 안에서 다수의 비정규직 노동자들과 공존하게 됐다. IMF 외환위기 이후 사회 전체적으로 비정규직이 급속히 확산된 가운데, 사내하청 노동자들은 노동조합이 버티고 있는 제조업 대공장 안에서도 전체 노동자의 30~70%에 이르는 엄청난 비중을 차지하게 됐다.[4] 그런데 대기업 정규직 노조들은 같은 사업장 안에서 공존하게 된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단지 고용형태가 다르다는 이유로 배척했다. 한 사업장 안에서 절반밖에 안 되는 임금으로 더 고되게 일하는 노동자들, 그것도 대체로 더 젊은 노동자들을 배제하는 노동조합은, 너무나 당연하게도 자본을 상대로 제대로 힘을 쓸 수 없었다. 한때 한국 사회에서 가장 높은 수준의 보편성을 구현했던 민주노조운동의 민주주의는, 신분과 재산이 일정 수준 이하에 있는 하층민에게는 선거권도 주지 않던 초기 부르주아 민주주의 같은 저급한 수준으로 후퇴해 버렸다. 더 열악한 노동자들을 구조적으로 배제함으로써 노동자의 정신을 저버린 이른바 ‘민주노조’는 노동조합으로 묶인 노동자들로부터도 더 이상 진정한 활력을 모아낼 수 없었다. 대공장 정규직 노조들은 대부분 조합원들의 차가운 무관심과 수동성에 직면함으로써 노동자 민주주의의 기반 자체를 거의 상실했다. 임원·대의원 선거와 임금·단체협약 찬반투표 등 투표 형태로 이루어지는 조합원 총회에는 조합원 80~90%의 참여를 끌어낼 수 있었지만, 이를 넘어서서 노동조합의 일상적인 사업과 투쟁에 대한 조합원의 참여도는 심각한 수준으로 추락했다. 수백 명 또는 수천 명, 심지어 수만 명이 모이는 집회들을 일상적으로 치러낼 수 있게 했던 조합원의 적극성과 열정은 대부분의 사업장에서 거의 사라졌다. 현장에서 이루어지던 수많은 토론과 대화, 아래로부터 올라오는 비판과 제안으로 넘쳐대던 노동조합들은 이제 현장 조합원들의 무거운 침묵과 냉소에 짓눌리게 됐다. 민주노총과 산하 연맹의 대의원대회가 성원 미달로 유회되거나 간신히 성원을 채웠다가 도중에 성원 부족으로 유회되는 일은 너무나 흔한 일상사가 돼 버렸다.[5] 현장 조합원들의 차가운 무관심과 수동성은 노동자들의 보수화와 개인주의화가 심각하게 진행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창이었다. 그런데 ‘개량의 떡고물’을 일정하게 향유하는 대기업 정규직 노동자들만이 아니라 그로부터 배제되어 있는 중소기업 노동자들과 비정규직 노동자들 또한 보수화와 개인주의화의 양상이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는 노동자들의 보수화와 개인주의화가 (‘확대된 개량’이 아니라) 지도부의 잇따른 배신적 투항으로 패배를 거듭하는 민주노조운동에 대한 노동자들의 극심한 회의와 실망에 그 원인이 있기 때문이었다. 나아가 노동자운동 전반이 민주노조운동에 대한 실망을 극복할 수 있는 새로운 희망을 제시해 내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노동자들 속에서 민주노조운동에 대한 환멸과 회의를 일상적으로 재생산하고 그래서 노동자들의 무관심과 수동성을 더욱 부추긴 것은, 단위노조로부터 상급단체에 이르기까지 노조간부들 전반에 퍼져 나간 관료주의였다. 원래 민주노조운동에서 노조간부가 된다는 것은 구속과 해고를 당연지사로 감수하며 끝없는 헌신과 희생을 각오해야 하는 그런 일이었다. 당연히 상당한 결의가 된 이들만이 노조간부로 나설 수 있었고, 따라서 노조간부들을 바라보는 조합원들의 가장 일차적인 심정은 신뢰와 존경이었다. 그러나 실질적인 투쟁을 회피하게 된 대기업 정규직 노조들에서는 이제 노조간부가 되기 위해 구속과 해고를 각오할 필요가 없어졌다. 오히려 노조간부들 앞에는 일반 조합원들이 누릴 수 없는 온갖 특권이 펼쳐졌으며, 심지어 향응과 금품마저 제공됐다. 물론 그것은 조합원을 팔아먹고 비정규직을 팔아먹고 연대를 거부한 대가들로 주어지는 것이었지만, 민주노조의 세련된 외형은 그러한 본질을 적당히 은폐시켜 주었다. 관료주의에 물든 노조간부들은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 모든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어쨌든 그들의 지위를 좌우하는 것은 노조 선거이므로 그들은 최대한 큰 세력을 형성하여 유리한 입지를 확보하려고 온갖 지저분한 파벌 싸움에 몰두했다. 한편으로는 국민파·중앙파·현장파로 대별되는 운동적 노선의 경계가 작동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운동적 노선보다 선거 이해관계를 앞세우는 이합집산이 끊임없이 되풀이됐다. ◎ 전투성의 상실 ‘전투성’은 민주노조가 자본에게 후퇴를 강제하는 위력의 원천이었다. 초창기 민주노조들은 노동자들의 요구를 쟁취하기 위해서라면 어떤 어려움도 마다않고 과감하게 도전했으며, 처절한 패배를 당할지언정 결코 쉽게 물러서지 않았다. 그러나 2000년대 초반에 이르러 이른바 ‘민주노조’들은 수많은 ‘투쟁’으로 뒤덮인 겉포장과 달리 자본의 지배를 위협하는 실질적인 투쟁은 사실상 찾아보기 어려운 상태가 됐다. 2000년대 초반에도 민주노총으로 포괄된 ‘민주노조’들은 수많은 투쟁을 했다. 단위노조는 임금·단체협약 투쟁에서부터 구조조정에 맞선 투쟁으로 정신이 없었고, 민주노총과 각 연맹은 수많은 과제들을 내걸고 몇 달이 멀다 하며 총파업을 벌였다. 그러나 그 무렵 민주노총으로 포괄된 ‘민주노조’들의 투쟁을 바라보면서 현장 노동자들이 느끼던 심정을 압축적으로 드러낸 두 가지 표현이 있었다. ‘짜고 치는 고스톱’과 ‘뻥파업’이었다. 대기업 정규직 노조들이 임금·단체협약 투쟁에 돌입하면 집행부가 어느 즈음에 어떤 내용의 잠정합의를 들고 올 것인지 대다수 조합원들이 구구절절 예언을 했는데, 조합원들의 예언은 신기하게도 십중팔구 족집게처럼 들어맞았다. 그러나 사태의 본질을 알게 되면, 이 놀라운 예지능력은 전혀 신기한 것이 아니었다. 자본의 지배를 위협하는 실질적인 도전은 없이 단지 투쟁했다는 생색을 낼 수 있는 적당한 지점까지 시늉을 내고 자본이 쉽게 양보할 수 있는 지점에서 합의를 도출하는 게 대기업 정규직 노조들의 임금·단체협약 투쟁에 깔려 있는 공식이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투쟁’에서 구조조정, 실질 노동시간, 노동강도, 비정규직 등 자본의 본질적 이해관계들을 침해하는 진정한 쟁점들은 늘 뒤로 밀리다가 어느 순간 흐지부지 사라지기 마련이었고, 그저 몇 푼 더 얹은 돈이 그것들을 대신했다. 이것이 ‘짜고 치는 고스톱’이었다. 이러한 투쟁들에 참여하는 노동자들에게서 어떤 신명이 날 리가 없었다. 집회에 참여한 노동자 수도 적거니와 참여한 노동자들이라고 해봐야 힘차게 팔 흔드는 것조차 곧장 짜증을 냈다. ‘파업은 노동자의 학교’라는 말도 전혀 어울리지 않았으니, 파업을 해봐야 어떤 프로그램도 없고 그저 퇴근하기 바빴기 때문이다. 수많은 투쟁으로 일상이 가득 차 있으나 실질적인 투쟁이 없기는 민주노총 또한 마찬가지였다. 몇 달이 멀다 하고 민주노총은 이러저러한 사안을 내걸고 총파업을 선언했다. 그러나 그러한 총파업의 대부분은 진지하게 조직하고 준비한 투쟁이 아니었으며, 그저 당장의 필요에 따라 이리 붙이고 저리 붙여서 급조된 투쟁일 뿐이었다. 그러한 총파업은 당연히 힘차게 전개될 리가 없었다. 사태를 더욱 악화시킨 것은 아래로부터 진지하게 조직하고 준비했던 1996~97년 총파업을 지도부가 배신했던 경험이었다. 대부분의 현장활동가들은 민주노총의 총파업 계획이 발표돼도 또 배신당할 거라는 불신 때문에 그 준비에 진정으로 몰두하려 하지 않았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민주노총의 총파업은 걸핏하면 유보되거나 실행돼도 실질적인 파괴력이 거의 없는 ‘무늬만 총파업’에 그치고 말았다. 그래서 민주노총의 총파업을 가리켜 실질적인 투쟁은 없이 뻥만 치는 파업이라고 ‘뻥파업’이라 하였던 것이다. 실질적인 투쟁의 실종 때문에 민주노총 등이 주관하는 집회는 재미없고 맥 빠지는 분위기로 가득 찼다. 집회 순서는 대회사·투쟁사·연대사·결의문 등으로 천편일률적으로 이어지고, 이러저러한 직함을 가진 연사들이 다 아는 것 같은 얘기들만 한참 늘어놓다가 내려갔다. 중간 중간 끼어드는 노래와 율동은 잠시 지루함을 덜어줄 뿐이었다. 집회가 시작해서 끝날 때까지 연단에 서는 자들과 노동자들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두터운 벽이 가로놓였다. 노동자들은 그저 연설을 듣고 구호를 따라 외치고 박수만 쳤다. 노동자들의 의견을 발표할 기회는 거의 존재하지 않았고, 노동자들 또한 기대하지 않았다. 다 같이 일어서서 율동이라도 함께 하면 가장 적극적으로 참여한 셈이었다. 집회에서 노동자들은 주체가 아니라 철저히 대상화된 존재일 뿐이었다. 물론 그 시절에도 비정규직 투쟁을 비롯하여 자본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는 실질적인 투쟁들이 없지 않았다. 그러한 투쟁들 속에서 노동자들은 더없이 진지하고 열정에 가득 차 있었다. 최선의 단결력과 투쟁력을 만들어 내기 위해 노동자들은 모든 신경을 집중했다. 그러한 투쟁들이야말로 비록 작은 규모라 하더라도 자본의 지배를 실질적으로 위협하며, 의미 있는 성과를 쟁취할 수 있게 했다. 설령 패배하더라도 더 큰 승리를 향한 자양분이 됐다. 그러나 2000년대 초반 이후 대기업 정규직 노조들에 일반화된 가식적인 투쟁은 자본에게 전혀 실질적인 위협이 되지 않았으며, 따라서 아무 것도 바꿀 수 없었다. ‘투쟁’이라고 다 진짜 투쟁은 아니었다. ◎ 연대성의 상실 ‘연대성’은 민주노조운동을 통해 노동자계급을 새로운 역사의 주인으로 형성하는 수단이었다. 민주노조들은 자본에 의해 강요된 분할을 단호히 거부하고 담장을 넘어 지역을 넘어 모든 노동자가 하나임을 살아 움직이는 실천으로 확인해 나갔다. 그러나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에서 살아남은 자들만의 운동으로 쪼그라든 대기업 정규직 노조운동은 담장 밖의 연대는 고사하고 담장 안의 비정규직과의 연대조차 거부하는 비참한 수준으로 전락했다. 대기업 정규직 노조운동의 연대성 상실은 이른바 ‘가장 강력한 민주노조’로 살아남았던 현대차노조에서 가장 극적인 형태로 나타났다. 1998년의 정리해고 사태로부터 1년이 조금 지난 1999년 하반기, 현대차는 전혀 새로운 국면 앞에 섰다. 내수와 수출이 모두 예상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회복됐다. 생산량이 판매량을 따라가지 못하자 현대차 자본은 다급해졌다. 1년 6개월 무급휴직을 받은 2천여 명이 1년여 만에 현장으로 조기 복귀했다. 2000년 3월 결코 인정하지 않을 것 같던 일반 정리해고자들의 복직마저 받아들일 정도로 현대차 자본은 다급했다.[6] 그러나 그것으로는 태부족이었다. IMF 외환위기 이전 수준 이상의 생산인력이 요구되는 상황이었으나, 1997년 말에 2천 7백여 명의 사내하청 노동자들을 쫓아내고 1998년에 희망퇴직으로 8천여 명을 쫓아낸 상태였다. 불과 2년여 만에 1만 명 이상의 노동자들을 다시 충원해야 하는 상황이 왔다. 1998년에 회사가 했던 약속들에 따르면 희망퇴직자를 우선적으로 재고용해야 했다. 그러나 현대차 자본은 정규직을 재고용하는 것이 아니라 값싸고 언제든 다시 정리할 수 있는 비정규직으로 자리를 채우고 싶었다. 현대차 자본에게는 사태가 거기까지 진행돼야 ‘정리해고-비정규직화’라는 1998년의 구상이 완성되는 셈이었다.[7] 그런데 회사가 급격한 생산 확대를 너무나 절실히 필요로 하게 된 상황은, 노동조합의 입장에서 보자면 1998년의 패배를 만회할 수 있는 호조건을 의미했다. 1998년에 정리해고를 강행한 것에 대해 자본으로부터 강도 높은 사과를 받아 내고, 향후 또다시 위기가 오더라도 ‘노동시간 단축과 일자리 나누기에 입각한 고용보장’을 확약하도록 자본을 강제할 수도 있었다. 또한 부족한 인원은 희망퇴직자를 우선 복귀시키고 그래도 부족하면 정규직 신규채용을 하도록 관철시킬 수도 있었다. 그러나 현대차노조는 전혀 다른 길을 선택했다. 노조 위원장은 전체 조합원 집회에서 핏대를 올리며 “내 목에 칼이 들어와도 반드시 사내하청을 들여 놓겠다”는 발언을 서슴없이 내뿜었다.[8] 아직 1998년 정리해고 저지투쟁의 패배가 안겨준 정신적 충격으로부터 헤어나지 못한 조합원들은 ‘앞으로도 노동조합은 정리해고를 막을 수 없을 것’이라는 패배주의에 사로잡혀 있었다. 수동적이고 소극적인 현장 분위기 속에서 소수만이 반대 목소리를 냈을 뿐 다수 조합원들은 집행부의 기조를 수용했다. 결국 2000년 6월 현대차노조는 정규직 조합원의 고용을 보장받는 대신 부족한 생산인력은 사내하청 형태의 비정규직을 대거 투입하여 해결하기로 사측과 합의했다. 이른바 ‘완전고용보장 합의서’라는 어울리지 않은 제목을 단 이 합의서는 향후 고용위기가 발생할 경우 ‘비정규직을 정규직 고용의 방패막이로 사용한다’는 합의를 바탕에 깔고 있었다. 정규직의 완전고용 또한 그런 의미에서 보장한다는 것이었으며, 동시에 희망퇴직으로 밀려나간 옛 동료들의 재고용 가능성을 사실상 차단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해서 투입된 사내하청이 불과 몇 달 만에 전체 생산직의 30%를 넘는 1만여 명으로 급격히 확대됐다. 현대차노조와 회사의 합의는 명목상 IMF 외환위기 이전 사내하청 비율인 16.9%까지 투입을 허용한다는 것이었지만, 실제로는 현장 대의원의 동의 아래 개별 선거구 단위로 물밀 듯이 사내하청이 투입됐다. 그런데 사내하청은 정규직과 같은 사업장에서 같은 일을 하는데도 철저히 차별받았다. 임금은 정규직의 절반밖에 되지 않았다. 작업복이나 안전화는 정규직보다 훨씬 못한 품질로 지급받거나 또는 그마저도 지급받지 못했다. 일하다 다쳐도 산재를 신청할 엄두도 낼 수 없었고, 월차휴가 한 번 마음 놓고 쓸 수 없었다. 작업장에는 욕설과 반말이 서슴없이 날아다녔다. 정규직과 완전히 섞여 일하면서도 상대적으로 힘들고 어려운 공정을 떠맡아야 했다. 자타가 공인하는 가장 강력한 민주노조가 있다는 현대차에서 비정규직은 온갖 차별과 비참한 노동조건을 겪어야 했다. 정규직과 비정규직은 결코 하나의 노동자가 아니었다. 그러나 거의 모든 정규직 활동가들이 이러한 차별에 눈을 감았다. 아직 스스로 조직화하지 못했던 비정규직은 세상을 향해 자신들의 처지를 드러내는 것조차 제대로 할 수 없었다. 그렇게 비정규직의 현실이 방치되고 은폐되는 상태가 비정규직 스스로 노조를 설립하는 2003년까지 3년 가까이 지속됐다. 하청노동자들은 대부분 6개월 단위로 재계약을 했고, 그때마다 고용불안에 시달렸다. 대다수 하청업체가 동일한 양식의 근로계약서를 사용했는데, 거기에는 “관리자의 지시에 절대 따라야 하며 지시불이행 3회시 권고사직”, “퇴사시 7일전에 사직예고 통보의무, 양자 합의 후 결정”, “결근시 최소 전날까지 결근계 제출”, “근태불량, 지시불이행 등으로 시말서 2회 제출시는 스스로 사직”, “소급 1개월 내에 품질문제 3회 발생시는 어떠한 조치에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음”, “입사 3개월 수습기간 중 근무태도 불량과 업무 달성도가 떨어질 경우 어떠한 조치에도 아무런 이의를 제기할 수 없음”, “작업불량 유발자는 징계 해고” 등 사실상 노예계약이라 할 만한 조항들이 버젓이 들어 있었다. 정규직과 사내하청의 임금격차 또한 심각했다. 하청노동자 임금은 비슷한 시기 입사한 정규직에 비해 60% 정도에 머물렀다. 기본시급에서도 차이가 있었지만, 연장·야간·휴일 등 시간외 근로에 적용되는 통상시급에서는 차이가 더 벌어졌다. 하청노동자들은 수당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상여금은 명목상 400~600%를 지급한다고 했지만, 실제로는 그러지 못한 경우가 많았다. 입사 후 1년이 지나야 상여금을 온전히 지급하거나 작업실수를 빌미로 상여금을 삭감하곤 했기 때문이다. 복지 측면에서도 차별이 심각했다. 이를테면 정규직은 통근버스를 이용하고 작업복을 회사에서 세탁해 주었지만, 하청노동자들은 그런 혜택을 누리지 못했다. 1차 하청은 대부분 정규직과 뒤섞여서 작업을 했는데, 그러면서도 공공연한 차별에 시달렸다. 하청노동자는 대부분 더 어렵고 힘든 공정에서 작업해야 했는데, 정규직들은 반 단위로 작업 로테이션을 돌 때 하청노동자가 맡은 더 어렵고 힘든 공정은 빼고 돌았다. 반별로 써클룸·휴게실·탈의실 같은 공간이 배정돼 있었지만, 하청노동자는 이 공간을 쓰지 못하는 경우도 많았다. 2·3차 하청업체들은 대부분 작업공간이 독립돼 있었는데, 과거에 정규직이 일할 때보다 작업자 수가 줄어든 경우도 많았고, 발암물질을 사용하는데도 환풍기 하나 없이 작업을 하기도 했다. 2·3차 하청은 1차 하청에 비해서도 차별 받았다. 야간 근무 때 1차 하청은 정규직과 함께 야식 빵을 지급받았지만, 2·3차 하청은 받지 못했다. 추석 때 1차 하청은 상품권을 받았지만, 2·3차 하청은 소주 2병만 받았다. 하청노동자들에게 법정 최저기준을 지키지 않는 경우도 많았다. 일부 하청업체들은 법정 최저시급에도 못 미치는 임금을 지급하기도 했는데, 주로 여성 노동자들이 그 대상이었다. 4대 보험을 안 들어주는 경우도 꽤 많았다. 일요일 특근의 경우 노동시간의 70%, 토요일 특근의 경우 30%만을 인정해주는 업체도 있었다. 하기휴가를 무급으로 적용하는 업체도 있었고, 월차휴가·생리휴가를 사전에 신청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결근처리하기도 했다. 관리자들과 일부 정규직의 폭언과 폭력에도 시달려야 했다. 고3 실습생들은 허술한 기숙사에 모아놓고 수시로 철야근무를 강요했는데, 그 결과 36시간 내지 그 이상의 연속노동을 강제당하는 경우가 허다했다. 하청노동자는 열악한 작업환경에서 일을 하면서도 안전보호구 하나 제대로 지급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도장공장에서 일하는 하청노동자는 허술한 방진마스크 때문에 공장 안의 모든 유해물질을 들이마셔야 했다. 작업복이나 안전화도 제때에 교체받지 못했다. 안전교육을 채용시 그리고 월 2시간씩 하게 돼 있었지만, 제대로 되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하청업체에는 안전교육 담당자도 따로 없었고, 안전교육이 잔업시간에 배치될 경우 교육은 하지 않은 채 확인서명만 받고 퇴근시켜 버리는 경우가 많았다. 안전교육을 한다 해도 대부분 품질향상이나 불량지적 같은 엉뚱한 내용으로 채워졌다. 결국 하청노동자는 수시로 산업재해 위험 앞에 내몰릴 수밖에 없었다. 2001년 한해에만 현대자동차에서 4명의 하청노동자가 산업재해로 사망했다.[9] 2000년 이후 UPH는 끊임없이 증가하여 2년이 지난 지금 시간당 생산대수가 30% 이상씩 증가한 상황이다. 그동안 사측은 … 일방적으로 UPH 상승을 밀어붙여 보고 현장의 문제제기가 있으면 M/H 협상을 통해 전환배치와 하청투입으로 해결하는 방식으로 대응해왔다. … 문제는 실질 노동강도가 증가되고 있음에도 현장 조합원들은 노동강도 강화를 몸으로 느낄 수 없다는 것이다. 이는 … 정규직 노동자의 체감 노동강도 강화가 비정규직 노동자에게로 이전되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이다. 결국 … 조합원들은 … 노동강도 강화를 적당히 수용하면서 하청투입을 선호하는 현상이 나타나는 것이다.[10] 사측은 하청의 필요성을 현장에서 유포하면서 68차 임시대대의 결정(추가투입 인원은 반드시 정규직으로)을 무력화하기 위한 공작을 진행하고 있다. 최근 현장에서 하청 투입 문제와 관련하여 … 어떤 부서에서는 조합원 서명을 받아 노동조합에 하청 투입을 요구하는 작태가 있는가 하면 … 하청투입을 요구하는 조합원 투표도 추진하고 있다. 또한 일부 대의원들은 하청투입에 반대하는 대의원은 고립시키면서 하청투입을 합의해내는 상황도 나타나고 있다. 사측이 … 현장여론을 조작하면서 하청투입을 요구하게 만들고, 심지어는 대의원까지 그런 요구에 함께 하도록 작업하고 있는 것이다.[11] 현대차에서 벌어진 일들은 거의 모든 사업장에서 비슷한 형태로 되풀이됐다. 현대차처럼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정규직 고용의 방패막이로 쓰겠다며 노동조합이 대놓고 자본과 합의하는 일은 흔하지 않았지만, 본질적으로는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 가운데서도 2000년 말 한국통신계약직노조의 투쟁에 최소한의 연대 집회마저 거부했던 한국통신노조의 배신적 행태, 2001년 5월 캐리어사내하청노조의 조합원들을 직접 폭행하는 구사대 역할마저 서슴지 않았던 캐리어노조의 만행은 두드러진 것이었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게 쏟아지는 차별과 억압에 눈을 감고,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투쟁을 서슴없이 배신하면서도 별다른 죄의식을 느끼지 못할 정도로, 2000년대 초반의 이른바 ‘민주노조’들은 추악하게 변질돼 있었다. ◎ 변혁성의 상실 ‘변혁성’은 민주노조운동을 통해 새로운 세상으로 전진하고자 하는 열망의 표현이자 끝없는 헌신과 희생의 원천이었다. 초창기 민주노조들은 (비록 그 개념이 충분히 명료하지는 못했다 하더라도) ‘노동해방’을 거침없이 꿈꾸고 노래했다. 그러나 2000년대 초반에 이르렀을 때 이른바 ‘민주노조’들은 노동해방과 근본적인 사회변혁을 더 이상 꿈꾸거나 노래하지 않았다. 민주노총은 출범 시점부터 전노협이 내걸었던 ‘노동해방’ 대신 ‘사회대개혁’을 내걸었다. 민주노동당이 출범하고 난 뒤에는 ‘세상을 바꾸자’는 구호가 널리 사용됐다. ‘사회대개혁’과 ‘세상을 바꾸자’는 구호 속에 담긴 것은 자본주의 모순에 정면으로 도전하면서 근본적인 사회변혁을 추구하는 대담한 의지가 아니었다. ‘자본주의 틀 안에서 조금씩 세상을 바꿔가는 것만으로 충분하거나 또는 그것만이 가능하고 현실적인 것’이라는 개량주의적인 환상이었다. 1998년부터 한국 사회에 거세게 휘몰아친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광풍은 세계 최장의 노동시간, 세계 최고의 자살률, 세계 최저의 출산율로 대표되는 것처럼 한국 사회를 세계 어느 곳보다 살기 힘든 곳으로 변모시켰다. 급격한 비정규직 확산과 심각한 사회 양극화 속에서 노동자·민중이 처해 있는 현실은 그 어느 때보다 그 어느 곳보다 더욱 더 자본주의 모순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근본적인 사회변혁을 절실히 요구했다. 그러나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광풍을 헤쳐 오면서도 민주노총으로 포괄된 ‘민주노조’ 운동 전반은 그 출범부터 안고 있던 개량주의적 환상 속에 깊이 빠져든 채 좀처럼 헤어나지 못했다. 변혁성을 상실함으로써 자본주의 모순에 정면으로 도전할 의지와 능력을 갖추지 못한 ‘민주노조’ 운동은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광풍 앞에서 근본적인 한계를 드러낼 수밖에 없었다. 구조조정과 정리해고를 앞세운 자본의 공세에 숱한 패배를 거듭할 수밖에 없었다. ‘민주노조’ 운동 전반을 휘감게 된 개량주의적 환상, 즉 변혁성의 상실은 자주성·민주성·전투성·연대성의 상실을 가져온 근본 원인이기도 했다. 또한 ‘민주노조’ 운동이 대기업 정규직 노동자들만의 운동으로 쪼그라든 채 전체 노동자들을 대표하지 못하고 광범한 노동자·민중의 희망으로 서지 못하게 한 근본 원인이기도 했다. 2) 현장조직운동의 가능성과 퇴행 ◎ 노조간부와 현장활동가들의 노선 분화 1990년대를 거치면서 민주노조운동 내 노조간부와 현장활동가들 사이에서 뚜렷한 노선 분화가 전개됐다. IMF 외환위기와 신자유주의 공세가 본격화한 1990년대 후반까지, 노조간부와 현장활동가들은 크게 세 개의 경향으로 뚜렷이 분화됐다. 민족해방파를 모태로 한 원조 타협·개량주의 - ‘국민파’ 1980년대 중반 학생운동에서 다수를 장악한 민족해방파(NL)는 민주노조운동 안에서도 상당한 세력을 형성했다. 그러나 전노협이 건설되고 강력한 기세를 유지하는 동안 전노협 안에서 민족해방파의 영향력은 그다지 크지 못했다. 전노협 건설 시기에 민족해방파의 상당수가 ‘한국노총 민주화’론을 주장하며 전노협에 결합하지 않은 까닭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전노협을 중심으로 거침없이 성장하는 선진노동자들의 계급의식을 민족해방파의 민족주의 노선으로는 감당해 낼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그 시기에 민족해방파는 전투성·급진성의 강도가 약했던 사무전문직과 일부 대공장을 중심으로 영향력을 유지했다. 1992년 대통령 선거에서 민족해방파는 ‘범민주후보 단일화’라는 명목으로 다시 한 번 ‘김대중에 대한 비판적 지지’를 선언하면서 학생운동과 민중운동의 많은 역량을 김대중 후보 선거운동으로 몰고 들어갔다.[12] 1992년 ‘민주대개혁과 민주정부 수립을 위한 전국노동자선거대책본부’(노동자선대본)가 전노협, 업종회의, 현대자동차·대우자동차·풍산금속 등의 대공장 노조, 수도권 노동단체 연석회의 등 노동단체들의 참여로 구성됐다. 그러나 전노협의 다수는 김대중 후보를 지지하라는 전국연합의 정치방침을 동의할 수 없었고, 따라서 노동자선대본은 전국연합의 결정을 앞장세워 전노협의 이름을 끌어넣긴 했지만, 실제로는 민족해방파의 영향력 아래 있던 노동자들만 모인 선거운동 기구가 됐다. 노동자선대본은 민족해방파의 영향력 아래 있던 노동자들이 전국적으로 세력을 결집시키는 중요한 계기가 됐다. 그 뒤 이들은 전노협 안팎에서 공동 대응을 펼치면서 전노협 한계론을 널리 확산시켜 나가는 주역으로 활약했다. 민족해방파의 영향력 아래 있던 노조간부·현장활동가들은 민주노조운동에서 원조 타협·개량주의 세력이었다. 전노협 안에서는 주도권을 잡아본 적이 없었지만, 민주노총 건설과정에서 민주노조운동의 주도세력으로 부상했다. 이들은 민주노총 출범과 함께 ‘국민과 함께 하는 노동운동’을 적극 주창하게 되는데, 이를 계기로 이른바 ‘국민파’로 널리 알려지게 됐다. 민주노총 1기 국민파 지도부는 1996~97년 노개투 총파업이 초라한 결과만을 남기는 과정에서 결정적 역할을 했다. 스스로를 광범위한 민족주의 운동의 일부로 인식하면서 노동자계급의 단결된 투쟁력보다 국민 여론을 우선했기 때문이다. 민주노총을 계속 이끌던 국민파 지도부는 1998년 2월 노사정위원회에서 정리해고 도입에 합의한 후 대의원대회에서 압도적으로 탄핵 당했다.[13] 청산주의에 휩쓸리며 새로 등장한 타협·개량주의 - ‘중앙파’ 전투적·변혁적 노선을 견지하던 노조간부와 현장활동가들 가운데 상당수가 1991년 소련 붕괴와 1993년 ‘문민정부’를 표방한 김영삼 정권의 출범 이후 타협·개량주의 노선으로 전환해 갔다. 1987년 노동자대투쟁 이후 사회주의 운동의 직간접적 영향력 아래서 한창 성장해 가던 선진노동자들에게 소련의 붕괴는 해명할 수 없는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하지만 그들을 더욱 심각한 혼란에 빠뜨린 것은 사회주의 운동을 휩쓴 청산주의 물결이었다. 특히 인민노련·삼민동맹·노동계급 세 정파의 통합으로 1991년 6월 출범한 ‘한국사회주의노동자당창당준비위원회’(한사노창준위)가 8월에 소련 붕괴를 겪은 뒤 하반기 내부 논의를 통해 빠르게 청산주의로 전환한 사건은 가장 직접적인 악영향을 미쳤다. 박노해와 같은 걸출한 인물을 앞세워 시끌벅적하게 사회주의 운동을 주창하고 있던 ‘남한사회주의노동자동맹’(사노맹)이 차츰 청산주의 흐름으로 돌아선 과정도 만만치 않은 악영향을 미쳤다. 이처럼 1992년과 1993년을 거치며 한사노창준위와 사노맹 등 과거 사회주의자들 가운데 다수가 청산주의에 빠져 개량주의 정치노선을 들고 나오자 그 영향력 아래 있던 선진노동자들도 다수가 그들을 따라 타협·개량주의 노선으로 전환했다. 사회주의 운동의 간접적 영향력 아래 있으면서 한동안 전노협의 전투적 노선을 대표했던 상층 노조간부들 또한 타협·개량주의 노선으로 합류했다. 이 흐름은 전노협 초대 위원장 단병호와 걸출한 학생출신 활동가로서 마창노련과 서노협에서 큰 영향력을 갖고 있던 문성현·심상정으로 대표됐다. 이들은 애초 전노협 강화론과 전노협 한계론이 공개적인 논쟁을 시작했을 때 전노협 강화론에 서 있었으나 이후 사실상 전노협 한계론으로 노선을 수정해 나갔다.[14] 이들이 전노협 시기에 선진노동자들 속에 쌓은 두터운 신망 때문에 많은 노동자들은 그들의 타협·개량주의로의 전환을 몇 년 동안 명확히 판단하지 못했다. 이들은 민주노총 건설 이후 정리해고를 비롯한 자본의 신자유주의 공세 앞에서 대중의 투쟁의지를 배신하며 굴욕적인 타협을 주창하고 나섬으로써 자신들의 타협·개량주의 노선으로의 전환을 스스로 입증했다. 이처럼 사회주의 운동의 직간접적인 영향력 아래 있다가 청산주의 흐름을 따라 타협·개량주의로 전환한 노조간부·현장활동가들은 IMF 외환위기를 거치면서 노동조합 중앙의 상층 지도부를 중심으로 한 세력이라는 뜻의 이른바 ‘중앙파’를 형성하게 됐다. 그런데 중앙파를 구성하게 된 여러 작은 흐름들이 중앙파라는 하나의 큰 흐름으로 결집한 것은 1998년에 이르러서였다. 이들은 이미 1993년 무렵에 각기 타협·개량주의 노선으로 전환하였지만, 노동자운동의 핵심 전망으로 진보정당과 산별노조를 각기 배타적으로 주장함으로써 서로 대립하는 등 한동안 분열된 상태에 놓여 있었다. 결국 이들은 진보정당과 산별노조를 동시에 추진하자는 통합된 전망을 통해 하나로 결집할 수 있었다. 실천적으로 볼 때 중앙파를 하나로 묶어세운 결정적 계기는 1998년 현대자동차 정리해고 저지투쟁에서 ‘최소화된 정리해고’라는 배신적 투항을 함께 옹호하고 합리화한 사건이었다. 전투적·변혁적 지향을 가진 선진노동자들 - ‘현장파’ 1993년 말에 이르렀을 때, 전노협에서 전투적·변혁적 노선을 견지하는 세력은 상층 지도부에서는 소수파가 됐다. 그러나 현장에서는 전투적·변혁적 세력이 여전히 상당한 기반을 갖고 있었다. 또한 1993년부터 1995년까지 힘차게 뻗어 나간 민간부문과 공공부문 대기업 노동자들의 파업을 거치면서, 이들 대기업 노동자운동 속에서 새롭게 상당한 기반을 구축하게 됐다. 특히 대공장의 전투적인 선진노동자들은 1995년부터 자본의 신경영전략에 맞선 현장투쟁 속에서 현장조직을 건설해 나갔다. 이러한 현장조직은 타협·개량주의 노선이 노동조합 상층부에서 뚜렷하게 주도권을 장악해 가는 데 맞서 ‘현장권력 쟁취! 계급적 연대!’를 기치로 아래로부터 전투적·변혁적 세력이 구축돼 나가는 데서 매우 중요한 기반이 됐다. 이렇게 사회주의자들의 직간접적인 영향력 아래 있으면서 전투적·변혁적 노선을 견지했던 선진노동자들은 현장을 중심으로 아래로부터 투쟁을 조직해 나간다는 의미의 이른바 ‘현장파’를 형성하게 됐다. 현장파는 정리해고를 비롯한 자본의 신자유주의 공세 앞에서 국민파와 중앙파가 배신적 투항을 거듭하자 이를 강력하게 규탄하면서 역동적으로 민주노조운동의 주도권을 획득했다. 특히 1998년 2월 민주노총 대의원대회에서 1기 지도부 탄핵을 주도했다. 그러나 현장파 또한 많은 한계를 드러내면서 얼마 못 가서 주도권을 잃었다. 2000년대에 들어서서 현장파의 다수는 국민파와 중앙파의 뒤를 이어 비슷한 관료적 타락과 변절의 길을 걸었다. ◎ 현장조직운동의 전개 1990년대 중반 이후 민주노조운동 전반이 자본의 신자유주의 공세에 패퇴를 거듭하는 과정에서, 현장조직운동은 노동자들이 아래로부터 결집한 힘으로 타협·개량주의 지도부의 한계와 오류를 질타하고 전투적·변혁적 대안을 모색하던 중요한 수단이었다. 그러나 많은 가능성을 보여주며 등장했던 이 시기 현장조직운동은 오래지 않아 자기 한계를 여실히 드러내며 추락과 변질의 길을 걸었다. 1990년대 초반까지 선진노동자 조직 노동조합 공식 체계로부터 독립된, 선진노동자들의 독자적인 조직 운동은 일찍이 1980년대 말부터 다양한 형태로 등장했다. 선봉대·소위원회 등이 노동조합 체계 안으로 포괄되어 존재했다면, 다양한 수준의 학습모임, 부서별 활동가 모임, 노조민주화추진위원회 등은 노동조합 공식 체계 밖에 존재했다. 1990년대 초반까지 이러한 선진노동자 조직들은 대체로 한 사업장 안에서도 다양한 형태로 복수로 존재하였으며, 연대투쟁이 활성화된 지역에서는 지역 단위로 존재하기도 했다. 이 시기 선진노동자들은 (노동조합 공식 체계에서 어떤 직책을 맡고 있는가와 상관없이) 자발적인 헌신과 실천을 통해 조합원들 속에서 민주노조운동의 실질적인 선봉 대오로 그 역할을 인정받았다. 선봉대와 소위원회 같은 일부 선진노동자 조직이 노동조합 공식 체계 속에 자리를 잡게 된 것도 그 반영이었다. 이 시기에는 노동조합 지도부가 전체 조합원의 뜻과 어긋나거나 배신할 경우 그 지도력이 상대적으로 쉽게 부정당했다. 그런 경우 전투적·변혁적 선진노동자들이 조합원대중 속에서 실질적인 지도력을 인정받으면서 파업을 비롯한 격렬한 투쟁들을 직접 이끄는 사례도 드물지 않았다.[15] 이 시기에 선진노동자 조직에 참여했던 현장활동가들은 대체로 전투적·변혁적 기세로 충만해 있었고, 학습과 실천을 결합시키며 노동자의식을 맹렬하게 발전시켜 나갔다. 그들 가운데 상당수는 사회주의 운동으로부터 직간접적인 영향을 받았으며, 가장 선진적인 노동자들은 스스로 사회주의 운동에 동참하기도 했다. 1990년대 중반 국민파 타협·개량주의에 맞선 현장조직 운동의 본격화 그런데 1990년대 중반에 이르러 상황이 많이 달라졌다. 한편에서 전투적·변혁적 노선이 일부 대기업 노동자운동 속으로 확산되기도 했지만, 민주노조운동 전반으로 보자면 타협·개량주의 세력이 빠르게 확산돼 민주노조운동 전체의 주도권을 거머쥐게 됐다. 특히 타협·개량주의 세력의 주도권 아래 민주노총이 출범해 나가는 과정은 타협·개량주의 세력의 기세를 한껏 부풀리고 있었다. 민주노조운동 전반에서 타협·개량주의 세력이 확장되는 것을 반영하여, 현장활동가들 속에서도 타협·개량주의 세력이 늘어나고 있었다. 이제 현장활동가들의 조직은 더 이상 전투적·변혁적 기세만으로 충만하지 않았고, 전투적·변혁적 기세가 약화되는 것과 비례하여 노동조합 공식 체계를 능가했던 노동자들 속에서의 실질적인 지도력도 약화되거나 소멸돼 갔다. 하지만 여전히 현장활동가들 속에서는 전투적·변혁적 흐름들이 우세했다. 특히 울산을 중심으로 한 일부 제조업 대공장 노동자운동에서 그러한 경향이 강하게 존재했다.[16] 이런 상황에서, 국민파로 대표되는 타협·개량주의 세력이 민주노총과 대다수 대공장 노조들의 집행부를 장악해 나가자, 전투적·변혁적 선진노동자들을 중심으로 한 현장활동가들은 사업장별로 단일조직을 건설하는 흐름으로 나아갔다. 대표적으로 울산에서는 1995년을 거치며 ‘현대자동차 민주노동자투쟁위원회’(민투위), ‘현대중공업 전진하는 노동자회’(전노회), ‘현대정공 부서동지회연합’(동지회), ‘울산남부지역 노동자연합 추진위원회’(남연추) 등이 출현했다. 이른바 현장조직의 본격적인 등장이었다.[17] 현장조직들은 지역과 전국 차원에서 연대 기구 건설로 나아갔다. 가장 먼저 울산에서 1996년을 거치며 ‘울산지역 현장조직대표자회의’가 건설됐다. 1996~97년 노개투 총파업이 민주노총 지도부의 배신적 행태로 허망하게 종결된 직후인 1997년 3월에는 전국의 10여개 현장조직들이 모여 ‘전국현장조직대표자회의’(전국회의)를 건설했다. 이 시기의 현장조직들은 대체로 전투적·변혁적 선진노동자들이 주도했다. 현장조직들은 1996~97년 총파업을 준비하고 실행하는 데서 헌신적으로 앞장섰다. 또한 민주노총 지도부와 현총련 등에 의해 적극적으로 주창되던 ‘국민과 함께 하는 노동운동’, 기아자동차노조 집행부가 회사 부도사태에 직면하여 내세운 ‘회사 살리기’ 등의 투항적인 개량주의 노선을 강력히 비판했다. 위기를 노동자에 대한 공격으로 극복하고자 하는 자본의 계급성에 대해 경제 살리기, 노사화합이라는 몰계급성으로 답하는 민주노총 상층의 태도에서 자본의 승리는 예정된 것이었다. 자본과의 비타협적인 투쟁으로 건설되고 사수된 전노협에 대해 활동가들이 가졌던 ‘내가 곧 전노협이다’라는 일체감은 노사협조주의 세력들이 민주노총 상층의 다수를 차지하면서 약화되고 있다. 기업별로 노조민주화 투쟁과 자본에 맞서는 투쟁을 하면서 활동의 고유영역을 찾았던 현장조직은 이제 전국적인 결집을 도모하면서 남한 노동운동의 계급적 발전을 고민해야 하는 운동의 무게를 하나 더 짊어지게 됐다.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이러한 중차대한 임무를 기꺼이 받아들일 것이다. … 하나, 우리는 자주성, 전투성, 계급성, 연대성으로 대변되는 자랑스러운 민주노조운동의 정신을 되살리고 발전시키기 위해 분투할 것을 결의한다. 하나, 우리는 현장조직운동 세력들의 지속적인 결합을 모색하여 현장조직운동을 확대, 강화, 발전시키기 위해 노력할 것을 결의한다. 하나, 우리는 노사협조주의의 다른 이름인 '국민과 함께 하는 노동운동'을 비판하고 민주노총을 올바르게 세워내기 위해 투쟁할 것을 결의한다. 하나, 우리는 현장에서의 끊임없는 실천투쟁을 통해 노동자의 계급적 단결에 복무하는 아래로부터의 산별노조 건설에 박차를 가할 것을 결의한다. 하나, 우리는 제도권 진출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닌 노동자계급의 완전한 해방을 위한 노동자의 정치세력화를 도모할 것을 결의한다.[18] 그러나 현장조직들 내부에도 타협·개량주의 세력이 이미 상당히 형성돼 있었다. 이로 인해 현장조직들은 일정한 내부 분란을 겪어야 했다. 가장 분란이 심했던 현대자동차 민투위의 경우 1997년 8월에 노조 선거를 앞두고 조직원의 절반가량이 이탈하여 국민파 노선의 새로운 현장조직 ‘실천하는 노동자회’(실노회)를 결성했다. 현장조직의 지역적·전국적 연대 사업 또한 잘 이루어지지 않았다. 전국회의의 경우 참석자가 적어 회의 진행조차 쉽지 않은 경우가 많았다. 성명서 발표, 토론회 개최, 전국노동자대회 전야제에서의 독자집회 정도가 1997년 전국회의 사업의 사실상 전부였다. 1998년 잠시 민주노총의 주도권을 획득한 전투적·변혁적 세력 그런데 IMF 외환위기를 향해 치달아가던 1997년 하반기에, 전국회의에 소속된 현장조직들이 현대자동차, 기아자동차, 대우자동차, 아시아자동차, 현대정공, 한라중공업, 캐리어, 기아정기 등 다수의 대공장에서 대거 노조 집행부를 장악하게 됐다. 대부분 현장조직의 실천력과 조직력을 앞세운 젊은 활동가들이 노사협조주의(타협·개량주의) 성향의 쟁쟁한 명망가들을 제치고 당선되는 양상이었다. 자본의 공격과 생존권 위기를 직감한 노동자들이 노동조합의 대응력을 극대화하기 위해 가장 전투적인 세력을 선택한 결과였다. 이런 기세를 몰아 전국회의 소속 현장조직들은 민주노총 1기 지도부가 노사정위원회에서 정리해고 도입을 합의해 준 데 맞서 1998년 2월 9일 민주노총 대의원대회에서 1기 지도부를 탄핵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국민과 함께 하는 노동운동’을 앞세운 민주노총 지도부의 타협·개량주의 노선이 정리해고 도입 합의라는 참혹한 결과로 귀결된 상황에서, 이와 같은 전국회의 현장조직들의 부상은 매우 신선한 충격이었다. 그 충격은 1998년 3월말에 열린 민주노총 2기 임원 선거에도 그대로 반영됐다. 선거권을 가진 대의원의 다수가 국민파의 영향력 아래 있었으나, 예상을 깨고 전국회의를 중심으로 전투적·변혁적 세력이 주도하여 내세운 이갑용-고영주 후보조가 당선됐다. 위기의 순간에 극적으로 등장함으로써, 전투적·변혁적 세력은 작은 역량을 갖고도 민주노총 전체를 이끌어 나갈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총자본의 신자유주의 공세에 맞서 전투적·변혁적 노선에 입각하여 민주노총의 총반격 투쟁을 주도해 나갈 수 있는 가능성을 획득한 것이었다. 중앙파의 배신적 이탈 그러나 민주노조운동 전반에 대한 전투적·변혁적 세력의 주도권은 형성될 때만큼이나 빠르게 소멸됐다. 먼저 단호한 기세로 5월말 총파업까지 이끌어 나가던 민주노총 2기 지도부가 금속연맹, 공공연맹, 현대차노조 등 주요 단위들을 이끌던 중앙파의 압력에 굴복해 노사정위원회로 복귀하면서 더 이상 전투적·변혁적 노선을 일관되게 실천할 수 없게 됐다. 전국회의 소속 현장조직들도 심각한 문제를 드러냈다. 전국회의 소속 현장조직들이 배출했던 대공장 노조 집행부들이 1998년을 경과하면서 구조조정과 정리해고에 맞선 투쟁 속에서 투항적인 배신을 거듭했다. 현장조직 출신 대공장 집행부들은 중앙파의 논리로 자기 입장을 정리해 나갔다. 이들은 “강력한 투쟁으로 생존권을 사수하겠다”고 약속함으로써 조합원들의 지지를 얻어 집행부를 장악할 수 있었지만, 그러한 투쟁을 실제로 결행할 수 있는 전망과 태세를 제대로 갖추고 있지는 못했다. 따라서 자본의 공격이 점차 구체화되자 노동자의 생존권을 포기하는 투항적인 길로 나아갈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 때 노동자의 생존권을 팔아먹는 굴욕적인 노사협조주의 노선을 그럴싸하게 합리화하는 논리구조가 바로 중앙파의 ‘정리해고 최소화’, ‘현실 가능한 것을 목표로’, ‘정리해고 저지 대신 산별협약 추진’ 노선이었다. 현장조직 출신 대공장 집행부들은 중앙파의 논리를 따라 투항적인 배신의 길을 함께 걸으면서 서로를 합리화해 주었다. 중앙파의 이탈은 현장조직의 분화로 이어졌다. 많은 현장조직에서 중앙파가 이탈해 별도의 현장조직을 만들었다. 한 사업장에서 국민파·중앙파·현장파의 현장조직들이 따로따로 존재하는 경우가 많아졌고, 하나의 조직을 유지하는 경우에도 내부의 경계선이 뚜렷해졌다. 2001년 4월 국민파 경향의 현장조직들이 전국적으로 결집하여 ‘민주노동자 전국회의’를 결성했다. 중앙파 경향의 현장조직들도 자신들만의 전국적 네트워크를 가동해 나갔다. 전국회의는 현장파의 성격을 분명히 하는 조직이 됐다. 현장파의 추락 중앙파 세력과 분리된 현장파 현장조직은 중앙파가 떠나간 빈자리를 새로운 선진노동자들로 채워 넣으면서 빠르게 전열을 재구축했다. 2000년 하반기 현대차노조의 국민파 집행부가 ‘광고비 대납 사건’으로 사퇴한 이후 2001년 현장파 민투위 집행부가 등장한 것은 현장파의 세력 회복을 상징했다. 현장파가 전투적·변혁적 노선을 실천함으로써 타협·개량주의 세력의 배신적 투항과 다른 길이 존재함을 보여줄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다시 한 번 왔다. 그러나 절호의 기회는 현장파의 위상을 결정적으로 추락시키는 참사로 귀결됐다. 현장파의 가장 대표적인 현장조직이던 민투위가 배출한 현대차노조 집행부는 2001년 계급투쟁의 결정적 분기점이었던 7·5 총파업에 불참했다. 신자유주의 구조조정 분쇄와 김대중 정권 퇴진을 내건 전국적인 노동자투쟁 전선에 대한 노골적인 배신이었다. 현장파의 실천은 국민파·중앙파의 타협·개량주의와 구분되지 못했다. 현장파 또한 전투적·변혁적 노선을 감당할 수 없는 세력으로 추락하고 있음을 단적으로 보여준 사건이었다. 현장조직운동의 한계 중앙파의 배신적 이탈이나 현장파의 추락은 무엇보다 이 시기 현장조직 운동이 가진 사상적·실천적 취약함에서 비롯됐다. 현장조직은 노사협조주의(타협·개량주의) 지도부가 저지르는 투항적 배신에 강하게 분노하고 규탄했다. 그러나 지도부의 투항적 배신에 대한 현장조직의 분노는 현장으로부터 올라오는 건강한 감성이긴 했지만, 그러한 분노가 계급적 본능을 넘어 체계적인 사상과 노선으로 나아가 계급적·변혁적 실천으로 정립되지는 못했다. 너무나 명백한 투항적 배신에는 분노하면서도 그러한 투항적 배신의 원인을 체계적으로 규명하고 극복하기 위한 사상적·실천적 노력에는 게을렀다. 현장조직은 (적어도 초기에는) 자기 조직 출신인가에 상관없이 집행부가 투항적인 배신으로 나아가는 것을 강력하게 질타하고 비판했다. 그런데 집행부에 대한 현장조직의 질타와 비판은, 현장조직 자신의 사상적·실천적 한계를 인식하고 이를 극복하려는 도전으로 이어져야 했으나 그러지 못했다. 현장조직은 현장으로부터 올라오는 노동자들의 계급적 본능에 따라 자본주의 위기와 자본가들의 공격에 정면으로 맞서려는 전투적·변혁적 지향으로 출발했지만, 집행부를 장악했을 때는 사상적·실천적 취약함으로 인해 자본주의 위기가 가하는 거대한 압력에 마찬가지로 굴복하면서 투항하고 말았던 것이다. 현장조직운동의 변질 현장파마저 전투적·변혁적 노선으로부터 사실상 이탈해 버리자, 현장조직 전반의 성격은 심각한 변화를 겪게 됐다. 이제 진지한 운동적 지향이 아니라 노조 집행부 장악을 향한 이전투구가 거의 대부분의 현장조직을 지배하게 됐다. 현장파가 보여준 말과 실천의 불일치를 토대로 어지간한 현장조직들마다 거침없이 그럴싸한 말들을 책임질 의사도 없이 내뱉을 수 있게 되면서, 전혀 실천되지 않는 말장난들로 치장한 현장조직들의 위선과 기만이 사업장마다 범람하게 됐다. 국민파·중앙파·현장파 안에서도 다시 두세 개로 현장조직들이 분화돼 나가고 어용 세력들마저 두세 개의 현장조직을 만들고 나오면서, 한 사업장에 10여 개에 가까운 현장조직이 난립하기도 했다. 수많은 말잔치와 달리 대다수 현장조직들은 자본의 신자유주의 공세에 대한 실질적 굴종, 노사협조주의와 관료주의의 확산, 비정규직 등 투쟁하는 노동자들에 대한 연대 방기 등에서 비슷한 모습을 드러냈다. 또한 선거를 둘러싼 파벌적 관계들을 전체 조합원 속으로 확장함으로써 대중을 끊임없이 분열시켜 나갔다. 대다수 현장조직들은 관료주의에 빠진 노조간부들의 근거지로 전락해 버렸고, 이러한 현실은 민주노조운동에 대한 조합원대중의 실망과 냉소를 더욱 부추겨 나갔다. 3) 비정규직의 급격한 확산 IMF 외환위기 이전에도 한국의 비정규직 비율은 꽤 높았다. 1990년대 초중반에 비정규직은 대체로 전체 노동자의 40% 정도를 차지하고 있었다. IMF 외환위기 이전 비정규직의 주축은 업무 특성상 일일고용이 만연한 건설·항만 노동자들, 근로계약의 과정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던 영세사업장 노동자들이었다. 그런데 상시지속업무를 하는 대규모 제조업체, 즉 대공장에도 비정규직이 존재했다. 특히 조선업과 철강업은 1970년대 초반 산업이 출발할 때부터 직영과 함께 사내하청·외주하청·일용공 등으로 통칭되는 사내 비정규직을 상당한 규모로 운영했다. 이를테면 현대중공업의 경우, 1972년 3월 현대건설 조선사업부 체제로 울산조선소 기공식이 열리고 얼마 지나지 않은 1973년 7월부터 ‘위임관리제’라는 이름으로 사내하청 제도가 도입됐다. 1973년 12월 ‘현대조선중공업’을 정식 설립하기도 전이었다. 사원 대우를 해주겠다며 모집한 직영 기능공의 대다수를 사내하청으로 전환하는 조치에 노동자들은 크게 분노했다. 1974년 9월 19일 현대조선 노동자 3천 명이 참여한 파업에서도 ‘도급제 폐지’가 핵심 요구였다. 그러나 위임관리제 전환은 강행됐고, 전환이 완료된 10월말 전체 기능직 가운데 직영공은 3,929명(26.6%), 사내하청은 10,852명(73.4%)이었다.[19] 현대중공업 사내하청은 1977년 12월 17,500명까지 늘었다가 경제위기를 거치며 1981년 12월 6,000명으로 줄었다. 1980년대 초반 해양부문 합병과 사업 확장으로 직영공이 6,000명에서 17,000명으로 급증했다가, 1985~86년 조선업 불황으로 다시 직영공 2,000명, 사내하청 2,000명이 감원됐다. 그래서 1987년 노동자대투쟁이 터졌을 때 현대중공업에는 직영공 15,000명과 사내하청 4,000명 정도가 일하고 있었다.[20] 그런데 1987년 이전에는 정규직과 비정규직 사이에 임금, 노동조건, 작업장 내 지위 등에서 차이가 크지 않았다. 모든 노동자들이 저임금과 장시간·고강도 노동, 폭력적인 현장통제에 시달리며 극히 열악한 삶을 살아야 했기 때문이다. 비정규직의 고용이 상대적으로 더 불안정하긴 했지만, 정규직이라고 딱히 안정적인 것도 아니었다. 노동자들은 고용안정보다 지옥 같은 현장에서 탈출하기를 원했다. 일자리는 어디를 가나 열악했다. 대신 일자리를 새로 구하는 것은 크게 어렵지 않았다. 그래서 1987년 이전 노동자들은 정규직과 비정규직 사이에서 서로 이질감을 느끼지 않았다. 1987년 노동자대투쟁 때 사내하청 노동자들이 직영 노동자들과 함께 자연스럽게 노동조합 건설에 동참했고, ‘하청 직영화’ 등의 요구를 함께 내걸고 관철했다.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1987년 노동자대투쟁을 선도했던 현대중공업 노동조합이었다. 반면 자동차산업 등에서는 1987년 이전에 사내하청이 비생산 업무에서만 제한적으로 활용됐다. 따라서 1987년 노동조합을 설립할 때 비정규직 의제가 따로 등장하지 않았다. 한국 사회에서 비정규직이 산업 전반으로 본격 확산되기 시작한 것은 1990년대 초반이었다. 노동자들은 1987년 노동자대투쟁과 이후 몇 년 간의 격렬한 파업투쟁을 통해 민주노조를 건설·강화했고, 임금을 획기적으로 인상시켰으며, 노동조건을 개선시켜 나갔다. 전국적으로 수천 명이 해고당하는 등 큰 희생을 치르긴 했지만, 노동자들에게는 위대한 전진의 시간이었다. 몇 년 동안 하염없이 밀리던 자본가들은 마침내 체제를 정비하고 이른바 ‘신경영전략’을 앞세워 1990년대 초반부터 대대적인 반격에 나섰다. 노동조합을 약화시키고 이윤을 회복하기 위한 온갖 대책들이 버무려진 신경영전략의 핵심 가운데 하나가 바로 비정규직의 확산이었다. 1990년대 초반 비정규직은 먼저 사무전문직에서부터 크게 확산됐는데, 흔히 용역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비정규직은 곧바로 제조업 전반으로 확대됐는데, 여기서는 소사장제와 사내하청이라는 이름이 함께 쓰였다. 사내하청은 불과 몇 년 만에 일정 규모 이상의 제조업체 전반에 깊이 파고들었다. 이를테면 1994년 한국중공업에는 사내하청 업체가 500여 개에 이르렀고, 쌍용중공업에는 80여 개, 현대정공 창원공장에는 20여 개의 사내하청 업체가 있었다. 현대중공업에서는 1987년 노동자대투쟁 때의 노사합의에 따라 1989년 하청 직영화가 완료되고 하청업체가 완전히 사라졌지만, 1990년대 들어 하청이 다시 생겨나더니 1996년에는 하청노동자 수가 직영의 31.7%로까지 늘어났다. 1990년대 제조업 사내하청의 확대는 주로 사측의 일방적 방침에 따라 또는 사측의 현장 생산관리 부서와 노조의 현장 대의원들 사이의 합의를 통해 이루어졌다. 사내하청 문제가 노사간의 단체교섭에서 다루어진 경우는 거의 없었다. 사내하청에게 넘어간 자리는 대부분 노동자들이 꺼리는 위험하고 힘든 작업공정이었다. 1987년 노동자대투쟁 이후 노동자들의 의식이 높아지고 안전에 대한 관심이 강화되면서 위험하고 힘든 작업에 대한 기피 현상이 크게 확대됐다. 그런데 자본은 위험하고 힘든 작업공정을 시설투자를 통한 공정개선으로 극복하지 않고 더 취약한 노동자들을 투입하여 해결하려 했다. 대기업의 경우 주로 하청이관을 통해 하청노동자들이 투입됐다면, 중소기업의 경우 주로 산업연수생 제도를 통해 이주노동자들이 투입됐다. 사내하청 노동자들의 임금은 정규직의 6~70% 선에 머물렀다. 이 시기 하청노동자들의 임금을 끌어내린 주역은 하청업자들의 중간착취였다. 1994년 <주간내일신문>이 밝힌 바에 따르면, 어느 제조업체의 사내 하청업자는 하청노동자 1인당 원청으로부터 48만 2,790원을 지급받았지만, 30만 4,170원만을 임금으로 지급함으로써 17만 8,620원을 중간착취하고 있었다. 원청으로부터 받은 금액의 63%만을 임금으로 지급하고 무려 37%를 중간착취한 셈이다.[21] 그 무렵 창원 현대정공의 한 하청 사장은 “하청노동자 한 사람당 10만원으로 보면 된다. 20명 정도면 내 수입이 한 달에 2백만원 되고, 30명 되면 3백만원 된다”고 말했다. 1990년대 제조업 전반으로 확대된 사내하청은 위험하고 힘든 일을 도맡아 하면서도 훨씬 더 적은 임금을 받는 노동자들이 됐다. 1987년 이전과 달리 정규직과 사내하청 사이에는 임금, 노동조건, 작업장 내 지위에서 뚜렷한 차이가 존재했다. 현대자동차는 1990년대 초반부터 생산부문에서도 하청화 및 외주화를 꾸준히 진행했다. 하청이관은 처음에는 서브라인 공정에서부터 시작됐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메인라인 공정 여기저기로 파고들었다. 상대적으로 위험하고 힘들어서 조합원들이 기피하는 작업공정이 하청이관의 우선 대상이었다. 장비 자동화를 명분으로 조합원들을 전출 보낸 뒤 그 자리에 하청을 투입하는 경우도 많았다. 회사는 1990년대 초반 이후 생산직 신규채용을 사실상 중단한 가운데, 현장에서 자연감소·산재·훈련·교육 등으로 결원이 발생해도 보충해 주지 않으면서 그 자리에 사내하청을 투입하도록 종용하고 유도했다. 1990년대 중반 급격히 증가한 사내하청 노동자는 1994년 말 기준으로 3,232명에 이르렀다. 이후 울산공장의 하청노동자 수는 1996년 3월 3,800여 명, 1997년 12월 3,486명으로 IMF 외환위기를 빌미로 대규모 정리해고가 단행될 때까지 비슷한 규모를 유지했다.[22] 노동조합은 사내하청 확대에 대처하는 데서 큰 한계를 드러냈다. 대체로 사내하청 확대가 기존 정규직 조합원들의 고용을 위협하고 노동조합을 약화시킬 거라는 점에서 반대하긴 했지만, 사측의 일방적인 하청이관이나 현장단위 노사담합을 중단시킬 정도로 적극적인 행동에 나서지는 못했다. 기업별 노조의 의식과 형식에 갇힌 까닭에 사내하청 노동자들을 조직하고 대변하려는 노력을 거의 하지 못했다. 결국 사내하청 확대는 가장 위험하고 힘든 일을 하면서도 더 적은 임금을 받지만 노동조합에서는 오히려 배제되고 있는 노동자들을 양산하는 과정이었다. 사내하청 확대는 노동조합을 약화시키고 자본의 이윤을 회복한다는 신경영전략의 목표에 아주 잘 부합하는 수단이었다. 김영삼 정권은 집권 초반인 1993년부터 용역·사내하청의 확대를 제도적으로 뒷받침하기 위해 정리해고 법제화와 근로자파견법 제정을 중심으로 노동법 개정을 추진했다. 1996년 12월 26일 신한국당의 날치기 노동법에 맞선 1996~97년 총파업의 핵심 이슈도 정리해고 법제화와 근로자파견법 제정 문제였다. 1997년 3월 여야합의 노동법 재개정 때 2년 유예됐던 정리해고제와 근로자파견법은, 1998년 2월 IMF 외환위기가 시작되는 충격 속에서 김대중 당선자 주도로 노동법이 재개정될 때 결국 도입됐다. 근로자파견법은 1998년 7월 1일부터 발효됐다.[23] IMF 외환위기가 한국 사회를 휘몰아친 몇 년 동안, 대규모 정리해고와 맞물려 비정규직이 사회 전반으로 급격하게 확산됐다. 비정규직은 전체 노동자의 절반을 넘어서면서 일반적인 고용형태가 됐다. 특히 새롭게 사회에 뛰어드는 청년들은 대부분 비정규직으로 인생을 시작할 수밖에 없게 됐고, 비정규직에서 벗어나는 게 하늘의 별따기처럼 어려운 일이 됐다. IMF 외환위기 이후 비정규직 문제의 심각성은 그 이전과 차원이 달랐다. 불과 몇년 사이에 전체 노동자의 15~20% 정도가 정규직에서 비정규직으로 전락하여 비정규직 비율이 55~60% 정도로 치솟았다. 또한 고용안정성·임금·노동조건에서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차이가 매우 크게 벌어졌다. IMF 외환위기 이후 모든 점에서 심각한 차별을 받는 비정규직의 보편화는 한국의 노동자계급을 정규직과 비정규직이라는 두 개의 서로 다른 집단으로 뚜렷하게 분할시켰다. 비정규직이라는 단어 또한 ‘상당한 임금과 안정된 고용, 일정한 권리를 누리는 소수 노동자들’(정규직)과 달리 ‘구조적인 무권리와 고용불안 아래 신음하는 다수 노동자들’을 가리키는 의미로 사회적으로 통용되기 시작했다. 비정규직은 민간부문과 공공부문을 망라하며 제조업·건설업·서비스업 등 전 산업에 걸쳐 등장했는데, 그 유형이 매우 다양하지만 크게 네 가지 형태로 나타났다. 첫째, ‘직접고용’ 비정규직이다. 이들은 주로 공공부문·금융업·사무전문직에서 나타났는데, 실제 사용자가 직접 고용 당사자로 나서긴 하지만, 계약직·임시직 등으로 고용 기간이 한시적이고 불안정했다. 비정규직 가운데서 가장 많은 숫자를 차지했다. 둘째, ‘간접고용’ 비정규직이다. 이들은 주로 제조업과 건설업에서 나타났는데, 하청업체에 고용돼 있으나 실제 사용자인 원청으로부터 실질적인 업무지시와 노무관리를 받았다. 특히 제조업의 사내하청은 본질적으로 근로자파견제에 입각한 파견노동자들이지만, 제조업 직접생산 공정에 파견근로가 금지된 관계로 도급의 외양으로 위장해서 나타났다. 셋째, ‘특수고용’ 비정규직이다. 이들은 주로 건설·물류·민간서비스 등에서 일정한 자격을 요하는 업무에서 나타났는데. 외견상 자영업자로 돼 있으나 실제로는 특정 사용자와 실질적인 지배종속관계에 있었다. 특수고용 비정규직은 과거 기업에 고용된 노동자들이었으나 1990년대 중후반을 거치면서 외견상 자영업자로 강제 전환된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넷째, ‘일용고용’ 비정규직이다. 이들은 주로 영세한 제조업·건설업·서비스업에서 나타났는데, 정상적인 고용계약을 생략한 채 그날그날 또는 단기간 고용이 이루어지는 형태였다. 비정규직의 임금은 동일한 노동을 하는 정규직에 비해 40~70% 정도였다. 비정규직 다수의 임금은 전체 노동자 임금 평균의 40% 수준인 법정 최저임금에 간신히 턱걸이하거나 심지어 미달했으며, 국민연금·의료보험·산재보험·고용보험 등 4대 사회보험에도 제대로 가입돼 있지 않은 경우가 많았다. 휴일·휴가를 비롯해서 근로기준법에 규정된 최소한의 법적 권리들마저 침해받는 경우도 많았다. 한국노동연구원에 따르면, 상용직 대비 임시직, 일용직, 파견용역직의 임금 수준은 2001년 53.9%, 42.9%, 69.4%에서 2005년 50.7%, 36.9%, 61.5%로 눈에 띄게 하락했다. 이것은 김대중 정권과 노무현 정권을 거치는 동안 자본가계급과 노동자계급 사이의 양극화만이 아니라 노동자계급 내부 정규직과 비정규직 사이의 양극화가 함께 진행됐음을 뜻했다.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임금 격차가 점점 벌어진 것은 자본가들의 공격이 노동자계급 안에서 좀 더 취약한 계층에 집중된 까닭이었다. 자본가들은 노동조합 같은 저항의 무기를 가진 대기업 정규직에게는 고용과 임금을 보장하되 노동강도를 높이는 정도로 착취를 강화했지만, 저항의 무기를 갖지 못한 노동자들은 상시적인 고용불안에 시달리는 비정규직으로 몰아넣고서 극도의 저임금과 고강도 노동을 강요하며 막대한 초과착취에 나섰다. IMF 외환위기 이후 노동자계급 안에서 일어난 양극화는 노동자계급을 경제적으로뿐만 아니라 사회적으로도 분할시켰다. 노동자계급의 사회적 분할은 자본가들의 분할통치 전략으로 가속됐다. 자본가들과 보수언론 그리고 정부는 비정규직의 열악한 처지가 마치 정규직 때문에 비롯된 것인 양 정규직 노조를 ‘집단이기주의’로 몰아붙이며 이데올로기적으로 융단폭격을 퍼부었다. 노동자계급 내부의 양극화는 훨씬 더 근본적인 자본가계급과 노동자계급 사이의 양극화를 은폐하거나 희석시키기 위한 도구로 사용됐다. 자본가들은 비정규직 임금이 정규직의 절반밖에 안 된다는 사실을 자본가 이윤이 노동자 임금의 수백수천 배에 이른다는 사실을 감추는 수단으로 적극 활용했다. 자본가들의 분할통치 전략은 비정규직의 분노가 자본가가 아닌 정규직을 겨냥하도록 유도하려는 것이었다. 그래서 비정규직이 정규직에 대한 원망과 분노에 사로잡혀 자본주의 본질을 꿰뚫는 계급의식과 자본가들에 맞선 계급투쟁으로 다가서지 못하게 하려 했다. 1990년대 중반 이후 노동유연화 정책은 일자리와 소득 상실 위협으로 노동자의 집단성을 해체하는 방향으로 진행되어왔다. 법령상 보장된 노동기본권을 보장받지 못하는 비정규직의 문제는, 1987년 이후 노동자 투쟁으로 현실적 의미를 얻은 노동기본권을 다시 부정하려는 전략의 결과로 이해되어야 한다. 더욱이 이 과정은 ‘노동시장 양극화’라는 프레임으로 조직 노동자의 노동기본권을 집단 이기주의로 윤색하는 정치 이데올로기와 결합되어 그 파괴적 효과가 증폭되었다.[24] 비정규직의 노동조합 조직률은 매우 낮아서, 노무현 정권 출범 무렵 사실상 0% 수준이었다가, 노무현 정권 시절 상대적으로 활발히 조직화가 진척됐지만 겨우 1% 정도로밖에 올라서지 못했다.[25] 특히 법률적으로 노동자성을 인정받지 못한 특수고용 노동자들과 원청 사용자성을 인정받지 못한 간접고용 노동자들은 노동조합 결성 자체를 인정받지 못하거나 교섭과 파업이라는 가장 기본적인 활동 자체가 사실상 불법으로 취급돼 큰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1990년대 말부터 분출한 비정규직 조직화는 다음과 같은 공통의 어려움에 부딪쳤다. 우선, 노조를 결성하자마자 법제도를 활용한 정부와 사용자의 탄압에 시달렸다. 비정규직들은 대개 근로계약기간이 정해져 있고, 평상시에는 반복적 재계약을 통해 상시 사용하다가도 사용자가 원할 때에는 언제든지 재계약을 거절하는 방식으로 합법적으로 해고할 수 있다는 점을 악용하여, 노조에 가입하면 재계약을 거절하는 것이 사용자들의 대응공식이 되었다. 특수고용 노동자의 경우 노동법상 ‘근로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간접고용 노동자의 경우 실제 사용자인 원청이 노동법상 ‘사용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이들은 노동3권을 보장받지 못했다. 자본은 근로자지위확인의 소·노조 부존재 확인의 소 등 각종 소송, 집회금지·업무방해 금지 가처분 등 각종 가처분 소송, 손해배상 청구·(가)압류 등 사법적 수단을 적극 활용하였다. 정부 역시 노조설립 신고제를 활용한 조직 결성 방해, 단체행동에 대한 공권력 투입, 법제도 개악(화물운송 특수고용노동자에 대한 업무개시명령제 도입 등)으로 노동기본권을 억압했다.[26] 특수고용 노동자의 노동자성 인정 문제나 원청의 사용자성 인정 문제가 아예 논의의 대상조차 되지 못한 데에는, 노사정간의 불리한 역관계도 물론 작용하였겠으나 그보다는 아예 논의의 대상으로도 삼지 않겠다는 정부·자본의 완강한 태도가 자리잡고 있다. 비정규직 관련 법률의 시행과 함께, 비정규직은 주기적인 고용불안을 경험하게 되고 노동조합을 통한 집단적 문제해결보다는 개인적인 경쟁력 확보와 관리자에게 줄서기로 내몰리게 되었다.[27] 4) 현대중공업노조의 침몰 1987년 노동자대투쟁의 진원지였던 현대중공업노조는 1995년 민주노총을 건설할 무렵까지 이 땅 민주노조운동의, 아니 천만 노동자계급의 명실상부한 대표주자였다. 대공장 노조로서는 드물게 전노협의 전투적·변혁적 운동과 강력하게 흐름을 같이 했다. 특히 1990년 현대중공업노조의 골리앗 파업은 노동자들의 가슴속에 뜨거운 감동을 남겼다. 현대중공업노조는 노동자·민중에게 사랑과 존경의 대상이기까지 했다. 사랑한다 현대중공업 노동조합 동지들이여 우리들의 결사투쟁은 이다지도 끝이 없구나 사나이 한 평생 노동자로 태어나 투쟁과 투쟁으로 살아온 우리 이것이 나의 길 노동자의 길 아아아 골리앗이여 서러워 울지 말아라 아아아 골리앗이여 노동자의 깃발이여[28] 그러나 1990년대 중반을 거치며 운명의 저울추가 반대로 넘어갔다. 1987년 이후 매년 이어지던 파업이 1994년을 끝으로 멈췄다. 1995년 어용 세력이 대의원의 절반을 넘기 시작하더니 1990년대 후반이 되자 90% 이상에 이르렀다. 2002년 마침내 집행부가 어용에게 넘어갔고, 2004년 박일수 열사투쟁에서 저지른 만행 때문에 금속연맹에서 제명당했다. 자신감과 활력으로 넘쳐나던 현장은 침묵과 한숨만이 가득했다. 일하다 다쳐도 산재신청조차 못할 정도로 얼어붙었다. 말 그대로 ‘절망의 공장’이었다. 어둠의 세월은 깊고도 길어 마치 영원할 것만 같았다. 한때 한국 노동자운동의 거침없는 전진을 대표했던 현대중공업 노동조합은 이제 노동자운동의 패배와 좌절을 상징했다. 왜 그렇게 되었을까? 여러 이유가 있었다. 먼저 정권과 자본의 집요한 탄압이 있었다. 거듭되는 대규모 구속과 해고는 평범한 가족을 가진 노동자들에게 결코 적지 않은 상처와 피로감을 남겼다. 조폭에 다름없는 대규모 경비대가 현장 안팎에서 활동가들을 감시하고 걸핏하면 폭력을 휘둘렀다. 현중 경비대의 고삐 풀린 사설 폭력에 경찰은 대놓고 눈을 감았다. 어용 세력을 육성하려는 체계적인 시도가 있었다. 다물교육을 활용해서 조장·반장들을 극우 민족주의로 무장시켰다. 회사가 잘 돼야 나라가 잘 되는데, 노조가 회사를 방해하니 악의 무리라는 논리였다. 고된 노동을 하는 현장 활동가에게 편한 외곽 부서로 이동시켜 주겠다고 회유해서 무력화하거나 어용으로 돌려놓았다. 조합원대중과 가족들까지 체계적으로 포섭하고 관리했다. 부서 관리자들은 조합원의 경조사를 꼼꼼히 챙기며 정서적으로 파고들었다. 모든 조합원의 성향을 분석해 투표나 집회 같은 일이 있을 때마다 일일이 점검하고 압박했다. 지역에 문화센터를 건립해서 조합원 가족들의 문화적 욕구를 선점하면서 애사심과 중산층 허위의식을 불어넣었다. 하지만 그 모든 문제의 근원에는 ‘전망 상실’의 문제가 있었다. 1991년 소련 붕괴는 노동자운동 전반에 엄청난 사상적 혼란을 가져왔다. ‘노동해방’ 대신 ‘사회대개혁’을 부르짖는 타협·개량주의가 급격히 득세했다. 노동자를 착취하고 억압하는 또 다른 반동체제로 전락해 온 소련의 역사와 본질을 직시해 내고, 그래서 노동자계급 해방투쟁의 깃발은 소련의 붕괴와 상관없이 더욱 드높이 휘날려야 한다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사상적 힘이 그 시절 한국 노동자운동 속에는 매우 약했던 까닭이었다. 스스로를 “노동해방 선봉”으로 자부하던 현대중공업 선진노동자들도 대다수가 심각한 사상적 혼란에 휩싸였다. ‘노동해방’이라는, 너무나 뚜렷해 보였던 목표가 흐릿해지자 자신감·투지·규율·능동성·적극성 등등 모든 것이 달라져 버렸다. 이전에는 아무 것도 아니었던 자본의 탄압과 회유가 결코 무시할 수 없는 힘으로 다가왔다. 선진노동자들이 능동성을 잃어가는 만큼 자본의 관리체계가 노동자대중에 대한 영향력을 회복해 갔다. 투쟁의 거리에서 함께 했던 노동자의 문화가 생기를 잃어가는 만큼 가족들은 문화센터의 교양강좌로 눈을 돌려갔다. 주도권을 쥐기 시작한 자본이 결정적으로 완승을 거둘 수 있게 한 것은 비정규직, 즉 사내하청 문제였다. 사내하청의 광범한 재확산은 기세가 주춤해진 노동조합의 힘을 결정적으로 약화시키는 카운터펀치였다. 현대중공업에서 사내하청 문제는 오랜 역사를 갖고 있었다. 1973년 7월부터 ‘위임관리제’라는 이름으로 사내하청 제도가 도입됐다. 1987년 노동자대투쟁이 터졌을 때 현대중공업에는 직영공 15,000명과 사내하청 4,000명 정도가 일하고 있었다. 1987년, 56일간 파업을 벌인 현대중공업 노동자들은 사내하청을 직영으로 전환시켰다. 사내하청 노동자들 스스로가 노동자대투쟁에 ‘하도급 철폐, 하청의 직영화’를 요구하며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파업지도부 ‘민주노조개편대책위’는 17개 요구조건 가운데 12번째로 ‘하도급 직영화’를 명시했다. 1973년 위임관리제 전환 이후 14년 만에 거둔 승리였다. 그러나 현대중공업 자본은 1989년 하반기부터 ‘외주업체’라는 이름으로 다시 스멀스멀 사내하청을 들이기 시작했다. 직영공 대비 사내하청 비율은 1991년 8.6%에서 1996년 31.7%, 2000년 50.5%, 2005년 80.3%, 2010년 127.4%로 계속 늘어났다. 1990년대 중반 현장권력을 둘러싸고 노동조합과 자본이 치열하게 각축을 벌이던 시기에, 노동조합은 사내하청 확산에 침묵하고 외면했다. 당장 내 발등에 떨어진 불이 급하다는 식의 태도였다. 1987년 노동자대투쟁의 정신으로부터 명백한 후퇴였다. 노동해방의 원대한 전망을 놓쳐버리고 조합주의의 좁은 시야에 갇힌 결과이기도 했다. 현장의 모든 노동자를 단결시키지 못하고서, 그것도 가장 열악한 노동자를 끌어안지 못하고서, 노동조합이 힘을 가질 수 있기를 기대하는 것은 헛된 욕심이었다. 현장권력을 완전히 상실해 버린 2000년대 초반에 가서야 뒤늦게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지만, 여전히 소극적인 수준을 벗어나지 못했다. 사내하청이 늘어나면서 파업의 파괴력도 크게 제한되었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정규직 조합원의 위축된 심리상태였다. 바로 옆에서 일하는 사내하청 노동자가 ‘정규직’ 되는 것을 소원으로 여기는데, 어찌 정규직 노동자가 자신이 겪는 착취와 억압을 온전히 직시하고 분노할 수 있을 것인가! 현대중공업노조가 노동해방의 전망을 확고하게 견지하지 못했던 것은 불가항력적인 측면이 있었다. 그 시절 노동자운동 전반이 갇힌 한계로부터 현대중공업노조도 자유로울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대중공업노조가 노동자의 분할을 방치한 것은 결정적인 실책이었다. 스스로가 이미 1987년에 실현했던 바를 지켜내지 못하고 후퇴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1990년대 중반 현대중공업에서 노동조합을 넉다운시킨 자본의 ‘신경영전략’ 공세는, 1990년대 후반 전체 자본가계급의 신자유주의 공세를 위한 실용 교본이 되었다. 현대중공업에서 벌어진 자본 대 노동의 전투가, IMF 외환위기를 계기로 전 사회적인 수준에서 자본가계급 대 노동자계급 사이에서 벌어졌다. 현대중공업보다 더 잘 싸운 사업장도 있었다. 공공부문에서는 저항 과정에서 몇 개의 대규모 민주노조가 새로 등장하기도 했다. 어쨌거나 현대중공업처럼 치명적인 패배를 당한 곳은 그리 많지 않았다. 하지만 2000년대 초반까지 벌어진 이 사회적 전투에서 노동자계급은 패배했다. 승리한 자본가계급은 ‘정리해고와 비정규직의 자유 사용권’을 획득했다. 노동자운동 전반이 패배하게 된 방정식은 현대중공업에서와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았다. 1996~97년 총파업과 이후 여러 사업장 투쟁에서, 노동자대중은 생존권을 위협하는 자본의 공세에 맞서 폭발적인 투쟁으로 떨쳐 일어섰다. 하지만 지도부 대다수는 타협·개량주의에 갇혀 ‘기업이 망하고 나라가 망하는 데 방법이 없다’는 자본의 논리를 넘어서지 못하고 자본의 공세를 사실상 수용하고 말았다. 현대중공업처럼 완전히 어용노조로 넘어간 사업장은 많지 않았지만, 대다수 민주노조에서 관료화가 심각하게 진행됐다. 개량주의에 갇힘으로써 전망을 상실한 지도부는 빠르게 관료적으로 타락해 갔다. 희망을 잃은 대중은 계급운동의 대의에 회의를 품고 조합주의·부문주의로 빠르게 퇴행했다. 현장 곳곳에서 그리고 사회 전반에서 비정규직이 엄청난 속도로 확산되는 가운데, 노동자운동은 사실상 상위 20% 대기업 정규직만의 운동으로 쪼그라들고 말았다. 정규직 운동의 후퇴와 교차하면서, 2000년대 초반부터 비정규직 노조들이 여러 곳에서 등장하여 처절한 도전에 나섰다. 하지만 역부족이었다. 비정규직은 대부분 조직화되기도 어렵고 자신감도 부족했다. 정규직의 연대와 엄호도 거의 받지 못했다. 위축된 비정규직 대중은 전망 자체가 ‘정규직화’ 수준을 넘어서지 못했다. 다음 편 보기 [1] 노조간부들이 입사청탁·금품수수로 저지른 각종 비리가 대대적으로 폭로되면서 세상에 널리 알려진 것은 2005년 이후였다. 그러나 이미 2000년대 초반에 자본이 광범한 수준에서 대기업 정규직 노조 간부들을 특혜·향응·금품으로 포섭하고 있다는 양심고백들을 곳곳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2] 당시 현대차노조는 국민파 집행부가 이끌고 있었다. 국민파 집행부는 광고비 대납 의혹이 제기되자 노조 대의원대회에 상집간부 가족의 전세금을 빌린 것이라는 허위 자료를 제출하기까지 했다. [3] 민주노총 차원의 결정이 있기 전에 이미 많은 지역본부가 지방자치단체로부터 각종 명목의 재정 지원을 받고 있었다. 그래서 ‘여기저기서 지원금을 받아썼고 지금도 받아쓰고 있는데 민주노총 대의원대회에서 받지 말자고 결정하면 어떻게 하냐’는 논리가 대의원대회를 압도했다. 2002년에 9억 7천만 원으로 시작된 정부 보조금은 2005년에 30억 원으로 늘어나 민주노총과 산하 연맹들이 사용하는 사무실의 전세 보증금으로 사용됐다. [4] 이 무렵 노동조합이 영향력을 미치지 못하는 곳에서는 현대모비스·동희오토 등을 필두로 생산직 100%가 사내하청 노동자들로 채워진 공장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5] 상급단체 대의원은 대체로 단위노조 간부들이라는 점에서 상급단체 대의원대회의 무산 사태는 일차적으로 단위노조 간부들 전반의 관료화 때문이었지만, 그 배경에는 조합원들의 무관심이 놓여 있었다. [6] 현대차는 대다수가 여성인 식당 정리해고자들의 복직만큼은 끝내 받아들이지 않으려 했다. 그러나 식당 정리해고자들은 노조의 어정쩡한 태도 또한 강력히 질타하는 처절한 투쟁 끝에 2000년 6월 ‘현장으로 이동시 정규직 복직, 노조식당 잔류시 정규직 수준으로 임금·노동조건 회복과 자녀 중 1명 정규직 추천권’ 등 원직복직에 준하는 성과를 얻었다. [7] 1998년 7월 1일 근로자파견법이 발효될 때부터 제16조 2항과 시행령 제4조에는 ‘정리해고를 한 후 2년 이내에는 해당 업무에 파견근로자를 사용할 수 없다’는 내용의 조항이 존재했다. 또한 제5조 1항에는 ‘제조업 직접생산공정에는 근로자파견을 할 수 없다’는 내용의 조항이 존재했다. 그러므로 현대차 자본이 2000년에 대규모 사내하청 투입을 추진한 것은 자본을 위해 만들어진 근로자파견법에 입각해 보더라도 명백한 불법이었다. [8] 1999~2000년 현대차노조는 ‘국민파’인 실노회 집행부가 이끌었다. 실노회 집행부는 몇 달 뒤 이른바 ‘광고비 대납 사건’으로 중도사퇴했다. [9] 서영호·양봉수 열사회, 2025, 『현대차 열사·희생자 백서』, 류기혁 편. [10] 현대차 민주노동자투쟁위원회, 2002/05/07, <노동자의길> 신문. [11] 현대차 민주노동자투쟁위원회, 2002/11/20, <민투위 비정규직 사업팀> 유인물. [12] 1992년 대선에서 민족해방파의 ‘범민주후보 단일화’ 노선 반대편에는 1987년 민중후보 운동을 계승하는 (백기완을 후보로 내세운) ‘사퇴하지 않는 민중후보’ 노선이 있었다. 전노협은 그 둘을 절충한 ‘민족민주진영의 독자후보를 전제로 한 민주대연합 모색’을 다수 의견으로 정리했다. 그러나 민중운동 전반을 포괄하던 ‘민주주의 민족통일 전국연합’(전국연합)에서 확고한 주도권을 갖고 있던 민족해방파는 전노협의 입장을 묵살하고 전국연합을 통해 ‘범민주후보 단일화’를 대통령 선거 방침으로 결정했다. [13] 2000년대 이후 ‘국민파’는 민족해방파의 친북적 이념에 대한 수용 여부와 노조 관료화에 대한 태도에 따라 일정한 분화를 겪게 된다. 이 과정에서 민족해방파의 이념에 보다 충실한 현장활동가들은 ‘국민파’ 대신 ‘자주파’로 자신을 규정하고자 했다. [14] 이들이 전노협 한계론으로 넘어간 것은 1993년을 거치며 전노협 안에서 전노협 한계론이 다수파를 형성하게 되는 결정적인 분기점이 됐다. [15] 가장 대표적인 사례로는 1988~89년 현대중공업 노동자들이 노조 위원장의 직권조인에 굴복하지 않고 비상대책위원회를 구성하여 128일 동안이나 파업을 이어 나갔던 ‘128일 파업’, 1989년 4월 마창노련 선봉대와 단위노조 정방대를 중심으로 구속노동자 석방 등을 요구하며 창원대로 전역에서 격렬한 가두투쟁을 이어나갔던 ‘창원대로 투쟁’, 1990년 현대중공업 골리앗 파업을 진압하러 가는 전경들에 맞서 현대자동차 노동자들이 심야부터 오전까지 격렬한 가두투쟁을 벌이면서 자발적 비공인파업에 나섰던 ‘4·28 연대투쟁’ 등을 들 수 있다. [16] 1990년대 초반 이후 전노협의 근간이었던 중소사업장 노조의 다수가 산업 구조조정의 여파 속에서 폐업당하며 사라져 간 점, 전노협 상층의 다수가 타협·개량주의 노선으로 전환한 점 등으로 인해 1990년대 중반에 이르렀을 때 전노협 사업장의 대부분은 침체 상태에 빠져 있었다. [17] 현장조직 건설은 자본의 신경영전략에 맞서 현장투쟁을 강화하기 위한 것이기도 했다. 이 점에서도 현장조직은 노사협조주의로 치닫는 타협·개량주의 노조 지도부와 충돌할 수밖에 없었다. [18] 전국현장조직대표자회의, 1997/09/27, 「전국현장조직대표자회의 대중토론회 결의문」. [19] 신원철, 2003, 「사내하청공 제도의 형성과 전개: 현대중공업 사례」, 『산업노동연구』 제9권 제1호, 120쪽. [20] 정이환, 1992, 「제조업 내부 노동시장의 변화와 노사관계」, 112쪽. [21] 현자노동자신문, 1994/06/01, 「불법 파견노동자 대책은」. [22] 서영호·양봉수 열사회, 2025, 『현대차 열사·희생자 백서』, 류기혁 편. [23] 근로자파견법이 제정되는 과정에서 노동자들이 끈질기게 저항한 덕분에 노동자들의 반발을 무마하기 위한 조항이 일부 포함됐다. 대표적으로 ‘제조업 직접생산 공정에서는 원칙적으로 파견노동자를 쓸 수 없다’라든가 ‘2년 이상 근무한 파견노동자는 정규직으로 간주한다’(고용의제)는 조항이 있었다. 이러한 조항들은 2000년대 이후 제조업 사내하청 노동자들이 불법파견 판정·판결을 이끌어내고 직접고용·정규직화를 주장하며 투쟁할 수 있는 법률적 기반으로 작용했다. 한편 한국의 근로자파견법 도입은 일본을 본뜬 것이었는데, 일본에서는 1985년에 근로자파견법이 도입됐다. 하지만 일본의 경우 2004년에 파견법이 개정되면서 제조업 파견이 허용되고 파견기간이 최대 3년으로 연장된 것과 달리, 한국에서는 근로자파견법 제정 직후부터 불법파견 투쟁이 광범하게 전개됨으로써 자본가들이 제조업 파견의 합법화를 추진할 동력을 형성하지 못했다. [24] 윤애림, 2016, 「2000년대 비정규직 연대운동과 노동기본권 쟁취 투쟁- 전국비정규직노조연대회의의 권리입법 투쟁을 중심으로」, 『산업노동연구』 22권 1호, 225쪽. [25] 같은 시기 전체 노동자의 노동조합 조직률은 10%를 약간 넘었다. [26] 윤애림, 2016, 「2000년대 비정규직 연대운동과 노동기본권 쟁취 투쟁- 전국비정규직노조연대회의의 권리입법 투쟁을 중심으로」, 『산업노동연구』 22권 1호, 190~191쪽. [27] 윤애림, 2016, 「2000년대 비정규직 연대운동과 노동기본권 쟁취 투쟁- 전국비정규직노조연대회의의 권리입법 투쟁을 중심으로」, 『산업노동연구』 22권 1호, 224쪽. [28] 김호철 작사·작곡, 1990, <골리앗의 그림자> 1절. /* 스크롤 여백만 주고, 화면에는 안 보이게 */ .ftn-target { display: inline-block; /* 줄바꿈 안 생김 */ width: 0; height: 0; scroll-margin-top: 200px; } document.addEventListener("DOMContentLoaded", function () { // name="_ftn1", name="_ftn2", name="_ftnref1" ... 전부 대상 document.querySelectorAll('a[name^="_ftn"]').forEach(function(a) { var idValue = a.getAttribute("name"); // 이미 같은 id의 요소가 있으면 또 만들지 않음 if (!document.getElementById(idValue)) { var span = document.createElement("span"); span.id = idValue; span.className = "ftn-target"; a.parentNode.insertBefore(span, a); } }); }); /* 본문 각주 번호 + 아래쪽 각주 번호 색 지정 */ a[href^="#_ftn"] sup, a[href^="#_ftnref"] sup { color: #BF202D; } /* 밑줄이 보기 싫으면 */ a[href^="#_ftn"], a[href^="#_ftnref"] { text-decoration: none; } /* 마우스 올렸을 때 살짝만 강조하고 싶으면 (선택) */ a[href^="#_ftn"]:hover, a[href^="#_ftnref"]:hover { text-decoration: underline; } /* 페이지 전체가 오른쪽으로 넘치지 않게 */ html, body { max-width: 100%; overflow-x: hidden; } /* 본문 영역 폭 강제 고정 + 긴 단어/문장도 줄바꿈 */ #bo_v_con, .bo_v_con, .cke_editable, article { max-width: 100%; overflow-wrap: break-word; word-wrap: break-word; /* 구형 브라우저용 */ } /* 워드에서 붙은 이미지/표가 화면 밖으로 안 나가게 */ #bo_v_con img, #bo_v_con table, .bo_v_con img, .bo_v_con table, .cke_editable img, .cke_editable table, article img, article table { max-width: 100% !important; height: auto; } /* 워드가 p, span에 폭을 박아놓은 경우 강제로 해제 */ #bo_v_con p[style*="width"], #bo_v_con span[style*="width"], .bo_v_con p[style*="width"], .bo_v_con span[style*="width"], .cke_editable p[style*="width"], .cke_editable span[style*="width"], article p[style*="width"], article span[style*="width"] { width: auto !important; max-width: 100% !important; } /* 기본 blockquote 스타일 */ blockquote { border-left: 4px solid #c0392b; /* 사이트 분위기와 맞는 붉은 계열 */ padding: 12px 18px; margin: 20px 0; background: #fafafa; font-style: normal; color: #333; line-height: 1.6; } /* blockquote 안의 p 태그 정렬 */ blockquote p { margin: 0 0 10px 0; text-align: justify; } /* 마지막 p 태그 여백 제거 */ blockquote p:last-child { margin-bottom: 0; } -
연서명은 민주적 토론의 수단이며, 운동의 확대를 위해서도 필요하고 정당하다올해 사업계획에 대한 차별금지법제정연대 전체회의를 앞두고, 사회주의를향한전진은 사업계획에 포함된 OSF 기금 수령의 건에 대해 반대 연서명을 받았다. 이는 논의를 보다 폭넓게 촉진하고, 나아가 차별금지법 제정운동을 더욱 폭넓게 조직하기 위한 과정이었음을 밝히고자 한다. 연서명과 같은 수단들은 대의제 민주주의가 가질 수 밖에 없는 필연적 한계를 보완하는 장치이며, 직접 민주주의를 실현하기 위한 매개다. '압박'과 '동원'은 민주주의의 불가분한 요소다 2024년 3월 민주노총 대의원대회장, 대회를 시작하기에 앞서 일련의 대의원들, 그리고 이에 동참하는 대의원 자격이 없는 평조합원들과, 조합원도 아닌 ‘외부인’들이 모여 현수막을 펼치고 피켓팅을 하고 구호를 외치며 선동발언을 한다. “회계공시 거부하고 자주성을 지킵시다!” “국적과 인종을 넘어 노동자는 하나! 민주노조가 지켜야할 원칙입니다!” 한 대의원은 조합원 3명과 같이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올라오는 대의원들 바로 앞에서 피켓팅을 하며 말을 건넨다. 어떤 이들은 대의원대회 좌석 하나하나마다 준비한 유인물을 배치한다. 이는 당시 대의원대회를 앞두고 민주노총에서 벌어진 논쟁적인 사건들에 관한 행동이었다. 당시 윤석열 정부가 민주노총에게 회계공시를 강요하였는데, 민주노총 집행부 다수, 일부 산별노조는 이를 불가피하게 수용해야한다는 입장을 취했다. 그래서 이에 반대하는 동지들이 ‘회계공시를 받는 것은 민주노조의 자주성을 잃어버리는 것’이라며 반대 의사를 표명한 것이다. 또 당시로부터 얼마 전인 2023년 12월, 건설노조 대구경북건설지부가 ‘불법고용 이주노동자 단속 촉구’를 내걸고 대구출입국외국인사무소 앞에서 집회를 했었다. ‘사람이왔다_이주노동자차별철폐네트워크’ 설립의 한 계기가 되기도 했던 해당 사안을 두고, 미등록 이주노동자를 함께 조직하고 싸워야 할 단결의 대상이 아닌 추방의 대상으로 보는 이러한 시각에 반대하는 의견을 담아, 175개 단체와 894명의 개인이 1월 19일 공동성명을 발행했고, 그 연장선에서 대의원대회 앞에서 피켓팅을 진행했다. 이러한 피켓팅을 보면서 민주노총 집행부, 건설노조 집행부, 회계공시 수용이나 건설노조의 이주민 단속촉구 집회에 찬성하던 대의원들은 어떤 마음으로 지나갔을까? 아마도 적잖이 불편했을 것이다. 아무리 대인배라도 자신의 결정과 입장을 반대하는 이야기를 대놓고 하는 반대파들의 존재가 썩 편하기는 어렵다. ‘저 구호 하나에 담기지 않는 어려운 사정들이 얼마나 많은데…’ 회계공시를 받을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고, 미등록 이주노동자 추방을 촉구할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나름의 이유도 있는 것인데, 그런 본인들의 입장을 헤아려주지 않아 억울하다고 느낄 수도 있다. 대의원대회장에서 선동하는 모습을 보고 대의원들의 생각이 바뀌어서, 추진하려던 안건이 부결될까봐 걱정이 되고 압박을 느낄 수도 있다. 다른 예를 보자. 지난 윤석열 탄핵 정국 이후 대선 시기, 민주노총 집행부는 "‘진보정당과 연대연합을 실현한 후보’를 지지한다"는, 즉 민주당 이재명 후보를 민주노총 지지후보로 결정하고자 하는 입장을 가졌었다. 이는 중집 내부에서부터 격렬한 반대에 부딪혔고, 이에 당시 민주노총 집행부는 민주노총 지지후보를 아예 내지 않는 방향으로 대응했다. 이에 민주노총 내 일부 단위에서는 ‘민주노총이 즉각 지지후보를 결정해야한다’는 취지의 연서명을 받았고, 349명의 민주노총 활동가들이 연서명을 모아 발표했다. 이 모든 행위는, 회의장(대의원대회, 중앙집행위원회 등)을 벗어나, 해당 사안에 대해 대중들의 참여를 촉구한다는 점에서 ‘대중동원(mobilization)’ 행위의 일종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행위는 상기하였듯 반대입장을 가진 단위들에게는 압박으로 느껴질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것은 민주주의가 아닌가? 이것은 민주주의다. 정확히 이러한 동원과 압박은, 대의제 민주주의가 가질 수 밖에 없는 필연적 한계를 보완하기 위한 수단들이며, 직접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매개다. 노동자 민주주의 계급투쟁의 역사는 민주주의를 확대해온 역사였다. 운동 내부에 민주주의를 도입하고 이를 체화하는 과정은 노동자계급이 스스로를 계급으로 조직하는 과정의 정수이기도 하다. 자본주의 체제 아래 노동자계급은 늘 자본의 독재 아래 살아간다. 자본가가 통치하는 모든 작업장의 기본 원리는 상명하복이며, 이런 환경 속에 보통의 노동자는 자신의 의견을 말하고 표현하는 법조차 잊어버린채로 살아간다. 노동자계급이 ‘쇠사슬에 묶인 노예’에서 ‘세상의 주인’으로 거듭나는 과정은 ‘시키는대로 일하고 주는대로 받고 살라’는 자본가의 독재에 맞서, 스스로 생각하고, 스스로 내린 결단에 따라 ‘살아 움직이며 실천하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민주노조 운동은 바로 노동자계급을 그런 존재로 조직해가는 운동이다. 그래서 노동자들의 단결의 기구인 노동조합은, 그것이 민주노조라면, 의사결정에 있어 자본가들의 방식과 전혀 다른 형태를 취해야한다. 그 핵심은 아래로부터의 자유로운 의견표현이 전면적으로 보장되고, 서로 다른 의견이 끊임없이 경합하는 가운데 총의를 모아나가는 것이다. 그런데 일상적 시기의 단위노조부터, 혁명적 시기에 등장하는 노동자평의회까지, 일정한 숫자 이상의 사람들이 모인 운동기구는 불가피하게 대의제 형식을 취할 수밖에 없다. 대의제 형식은 민주주의의 전면적 실현이라는 측면에서, 여러가지 필연적 약점을 가진다. 예컨대 간부(집행부, 대의원 등)와 평조합원 간에는 정보의 비대칭성이 존재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간부들의 의견으로 수렴되지 못하는 평조합원의 의견이 토론에 반영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래서 민주노조 운동은 대의제의 약점을 보완하고, 직접 민주주의에 근접하기 위한 다양한 기술적 수단들을 발전시켜왔다. 그런 기술적 수단들의 핵심은 논의가 상층 대의제 기구에 머물지 않고, 각 단위현장으로 퍼져나가도록 만드는 것이다. 예컨대 민주노총 중집을 구성하는 단위들 중 전국결집 정파에서는 매 중집 때마다 ‘중집 스케치’를 SNS 채널에 발행한다. 중집에서 어떤 안건이 다뤄졌으며, 그 중 특히 주목해서 봐야하는 안건이 무엇인지 소개한다. 예컨대 얼마 전 발행된 ‘0319 민주노총 중집 스케치’ 글에서는, 민주노총 정책실이 국회 사회적 대화기구에서 잠정합의해 온 합의안의 승인 여부를 두고 벌어진 논쟁을 소개한다. 앞면에서는 ‘산업 경쟁력 강화를 위한 AI’와 관련한 협의 내용에 대해, 이것이 자본에게 원하는 결과만 가져올 뿐이라며 격렬한 반대의견들이 제출되었음을 소개하고 있다. 뒷면에서는 6월 지방선거를 앞두고 민주노총 선거방침을 둘러싼 양측의 의견을 소개하고 있다. 이러한 ‘신문’은 논의가 중집으로만 축소되지 않도록 하는 훌륭한 대의제의 보완물이다. 중집에서 진행되는 논의에 직접 참여하지 못하는 다수 조합원 대중으로 하여금 논쟁의 구도를 이해하고, 적극적으로 자신의 판단을 내릴 수 있도록 한다. 피켓팅, 현수막, 연서명, 공동성명 발표, 안건발의 등도 그러한 기술적 수단의 일부이다. 심지어는 집행부를 상대로 항의농성을 하기도 한다. 이런 수단들은 특히 격렬한 논쟁이 벌어질 때 활용되곤 한다. 예컨대 2020년 당시 김명환 민주노총 집행부가 문재인 정부와의 사회적 대화를 통과시키려고 했을 때, 여러 단위가 민주노총 건물에서 농성을 진행하고, 중집 회의장에 들어가 피켓팅을 하며 사회적 합의에 대한 반대의사를 표명했다. 해당 사회적 합의는 “코로나19 위기로 인한 매출 급감 등 경영위기에 직면한 기업에서 근로시간 단축, 휴업·휴직 등 고용유지를 위해 필요한 조치를 취하는 경우 이에 적극 협력한다”는 내용을 포함하는 등, 계급의 이익을 저버리는 매우 심각한 사안이었기 때문이다. 사진 출처: [현장 영상] 민주노총 강경파 ‘노사정 합의’ 반대…김명환 위원장 ‘사실상 감금’ - 한겨레 신문 결국 노사정 합의안은 대의원 과반의 반대로 부결되었고, 김명환 집행부는 사퇴했다. 당시 자본가 언론들은 ‘직선제로 뽑힌 위원장’의 결단을 ‘방해한다’며 민주주의가 유린되고 있다고 말했는데, 당시 논쟁은 자본가 언론들과 민주노조 운동 사이 노동자 민주주의에 대한 분명한 시각 차이를 드러낸다. 자본가 언론은 김명환 위원장의 말을 활용해, “지금 반대파들이 민주주의를 유린하고 있다!”고 보도하고 있다. 하지만 어제 오후까지 ‘노사정 합의안 폐기 및 대대 안건 부결’ 성명에 서명한 대의원은 전체 1,480명 중 과반인 810명에 달한다. 또 민주노총 부위원장 7명 중 6명, 16개 산별노조 중 9개, 16개 지역본부 전체가 반대하고 있다. 수많은 현장 간부들과 현장조직들이 여기에 합세하고 있다. 과연 누가 민주노총에서 민주주의를 유린하고 있는가? 다수 간부들의 의지를 거역하고 대대를 강행해 야합안을 밀어붙이려 발악하고 있는 김명환 위원장인가, 아니면 다수의 의지를 모아서 민주노총을 바로 잡으려는 사람들인가? 자본가 언론들은 말한다. “김명환 위원장은 직선제로 뽑힌 사람이다. 그런데 ‘꼬리’들이 이 ‘몸통’을 뒤흔들고자 하고 있다.” 그러나 지금 상황은 ‘꼬리’에 불과한 김명환 집행부가, ‘몸통’인 민주노총 조합원 다수의 의지를 거역하고 있는 것이다. - 공동성명 | 민주노총 임시대대, 압도적 부결로 민주노총을 바로 세워냅시다! 논쟁적인 안건에 따라오는 피켓팅, 연서명, 심지어 항의농성과 같은 행위들은 표면적으로는 상층 대의기구에 속한 이들을 향한 호소이나, 본질적으로는 운동을 구성하고 있는 대중들을 향한 호소이다. “우리는 이 안건이 이렇게나 심각한 문제를 갖고 있다고 판단합니다. 동지들, 이 운동의 주인으로서 우리 운동이 이렇게 가도 되는지 판단해주십시오”라고, 대의기구에 속한 이들에게는 물론 전체 조합원 대중에게, 좀 더 넓게는 (노동조합 조직여부를 떠나) 계급 전체에 호소하는 행위이다. 민주노조 운동의 주인은 노동자계급이기 때문이다. 차별금지법 제정운동이 너르고 단단해지려면 이번 차별금지법 제정연대에서 OSF재단 기금을 받아 수입의 77%를 충당하는 내용을 포함한 사업계획 건을 올렸을 때, 사회주의를향한전진이 연서명을 추진한 것은 이런 운동의 민주주의 전통 위에서 택한 행동이다. OSF재단의 기금을 받자는 제안이 갖는 의미가 그만큼 중대하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논쟁적인 안건이라면 그에 걸맞게 격렬하게 논쟁하는 게 민주주의다. 우리의 논쟁은 차별금지법 제정연대 전체회의로 축소될 수 없다. 우리의 관점에서, 차별금지법 제정운동의 주체는 차별받고 억압받는 모든 피억압민중들이다. 차별금지법을 제정하는 것은, 그리고 그 법이 미국에서처럼 트럼프의 집권을 막지 못하고 각 주의 트랜스젠더 성별정정을 불법화하는 걸 막지도 못하는 유명무실한 법이 아니라, 진정한 효력을 가진 법으로 작동하도록 만드는 것은 차별금지법 운동을 향한 노동자민중들의 전면적 자기조직화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그래서 우리는 이 논의가 집행위, 또는 전체회의 구성원들을 넘어 대중적으로 논의돼야 한다고 생각했으며, 이 운동에 참여하는 모든 주체들에게 연서명이란 방식을 통해 이 논쟁에 입장을 정할 것을 호소한 것이다. 차별금지법 제정을 진심으로 염원하는 여러 단위들, 특히 차별금지법 제정운동을 주도해온 집행위원회가, 전진이 연서명을 받아 제출한 것이, ‘전체회의에서 여러 맥락의 의견개진을 어렵게 했으며’ 차제연의 ‘의사소통 체계에 대한 불신’을 갖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며 유감의 입장을 발표했다. 우리는 차제연 집행위 단위들이 그간 차별금지법 제정을 위해 최선을 다해 투쟁해온 헌신과 노고를 존중한다. 특히 여러 성소수자 운동 단위들은 차별금지법 제정운동의 선봉으로서 온갖 탄압을 앞서서 견디며 투쟁해왔다. 그 운동의 역사를 존중하지 않는 게 아니다. 오히려 그 운동의 역사를 존중하기 때문에, 그 운동이 자본이 자신의 지배를 감출 도구로 쓰이도록 두지 말자고 호소하는 것이며, 이 논쟁을 차별금지법 제정을 염원하는 대중들과 함께 진행해야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연서명한 개인과 단위들, 그리고 연서명을 추진한 전진을 ‘운동의 외부’로 호명하는 여러 입장에 대해서도 유감을 표할 수밖에 없다. 27개 연서명 공동발의단체들은 각자의 현장에서 차별에 맞서 헌신적으로 투쟁해왔다. 예컨대 27개 공동발의단위 중 하나인 현대중공업 사내하청지회는 바로 지금도 현장에서 이주노동자 차별에 맞서 투쟁하고 있다. 전진의 활동가를 포함해, 연서명에 참여한 많은 퀴어 당사자들도 있다. ‘OSF가 아니라 노동자민중의 손을 잡고 차별금지법을 제정하자’는 목소리를 내는 이들 또한 성소수자 운동의 일부다. 차별금지법이 '차별에 맞선 운동'이라면, 비록 그것이 직접적으로 법안을 제정하기 위한 투쟁의 형태를 띄지 않았을지라도, 차별에 맞선 투쟁을 해온 이들 모두 이 운동의 일부이다. 그래서 "지금은 점으로 흩어져있는, 차별에 맞서 싸운 노동자들의 레퍼런스를 포괄적 차별금지법 제정 운동이라는 선으로 이어낼 선전과 선동. 전술이 필요하다." 혁명과 민주주의 1917년 러시아혁명의 과정을 생생히 묘사한 르포 ‘세계를 뒤흔든 열흘’의 작가 존 리드의 생애를 다룬 영화 ‘레즈’에서는 아래와 같은 장면이 등장한다. 존 리드가 1920년 9월 아제르바이잔 바쿠에서 열린 동방민중대회에 참여하기 위해 갔는데, 존 리드의 동의 없이 지노비예프가 연설문을 감수하며 ‘계급전쟁(Class war)’을 ‘성전(Holy war)’로 고쳐쓴 것이다. 존 리드는 지노비예프에게 자기 글을 동의없이 고치지 말라고 요구하며 아래와 같이 말한다. “이견이 없어지면 혁명은 죽는겁니다. 이견을 제기하는 게 혁명이니까! (when you purge the dissent, you kill the revolution. revolution is dissent!)” 지노비에프와 리드가 논쟁하는 이 장면은 영화적 재현일 뿐 실제 사실과는 좀 다른 것 같다. 이 기사에선 이 장면을 통해 감독이 말하고자 했던 의도에 대해서만 얘기해보려 한다. 해당 장면에 뒤이어 곧바로 열차는 백군의 습격을 받아 탈선한다. 해당 장면은 나에겐 러시아혁명이 당과 소비에트 민주주의의 후퇴와 함께 어떻게 좌절되었는지를 보여주는 메타포로 여겨진다. 이 시기 러시아혁명의 심장이던 노동자평의회(소비에트)가 점차 열리지 않게 되었고[1], 볼셰비키는 1921년 크론슈타트 반란을 겪은 뒤 당내 분파활동을 일시적으로 금지하는 조치를 통과시켰는데, 이는 이후 영구화되어 당내 민주주의를 탄압하는 무기가 됐다. 즉 혁명이 스탈린 관료체제로 변질되고 퇴보하는 과정은, 곧 반대의견이 자유롭게 개진될 자유가 완전히 사라지는 과정이었다. 노동자 민주주의의 전면적 개화는 어떤 모습일까? 상층 대의기구의 깔끔한 합의 아래, 대중들이 통일되고 절제된 요구를 내거는 모습일까? 나는 절대 그렇지 않으리라 생각한다. 수백종류의 서로 다른 주장을 하는 유인물이 광장에 휘날리고, 평의회와 같은 중요한 대의기구의 결정을 앞두고서는 대회장에서 오만가지 이견이 충돌하며, 그 혼란 속에서 모든 노동자들이 자신의 입장을 정하고 스스로 살아 움직이며 판단을 내리는 것. 그 지난한 과정을 거쳐 다수파의 의견이 결정되고, 그럼에도 소수파가 그에 반대할 선전선동의 자유를 잃지 않는 것. 그래서 경험과 실천 속에서 다수파는 자신의 주장이 옳음을 입증하는 시험대에 오르고, 사태의 전개에 따라 소수파가 더 큰 동의를 얻으면 언제든 다시 다수파가 돼 집행권력을 장악할 수 있는 것. 그것이 내가 생각하는 혁명의 모습이며, 미래 사회를 이끌어갈 노동자평의회 다당제의 모습이다. 지금 여기에서부터, 그런 방식으로 운동을 조직하는 것. 그것만이 차별금지법 제정을 가능케할 것이고, 나아가 착취와 차별, 억압을 철폐한 사회로 나아가는 길이라고 믿는다. ---- [1] 초창기 전러시아소비에트 대회는 1년에 1회 이상 개최되었다. 그러나 1922년부터 2년에 한번 꼴로 개최되다가, 1931년 이후에는 4년 뒤인 1935년에 한번 열리더니, 그 다음 특별대회를 통해 해산돼버렸다. 1920년대 말 이래 소비에트 대회는 모두 만장일치로 통과되었으며, 단 하나의 기권표도, 반대연설도 없었다. 스탈린이 주도하는 공산당이 경제 5개년 계획을 이미 집행하기 시작한 뒤, 소비에트는 이를 사후 승인하는 기구로 전락했다. /* 스크롤 여백만 주고, 화면에는 안 보이게 */ .ftn-target { display: inline-block; /* 줄바꿈 안 생김 */ width: 0; height: 0; scroll-margin-top: 200px; } document.addEventListener("DOMContentLoaded", function () { // name="_ftn1", name="_ftn2", name="_ftnref1" ... 전부 대상 document.querySelectorAll('a[name^="_ftn"]').forEach(function(a) { var idValue = a.getAttribute("name"); // 이미 같은 id의 요소가 있으면 또 만들지 않음 if (!document.getElementById(idValue)) { var span = document.createElement("span"); span.id = idValue; span.className = "ftn-target"; a.parentNode.insertBefore(span, a); } }); }); /* 본문 각주 번호 + 아래쪽 각주 번호 색 지정 */ a[href^="#_ftn"] sup, a[href^="#_ftnref"] sup { color: #BF202D; } /* 밑줄이 보기 싫으면 */ a[href^="#_ftn"], a[href^="#_ftnref"] { text-decoration: none; } /* 마우스 올렸을 때 살짝만 강조하고 싶으면 (선택) */ a[href^="#_ftn"]:hover, a[href^="#_ftnref"]:hover { text-decoration: underline; } /* 페이지 전체가 오른쪽으로 넘치지 않게 */ html, body { max-width: 100%; overflow-x: hidden; } /* 본문 영역 폭 강제 고정 + 긴 단어/문장도 줄바꿈 */ #bo_v_con, .bo_v_con, .cke_editable, article { max-width: 100%; overflow-wrap: break-word; word-wrap: break-word; /* 구형 브라우저용 */ } /* 워드에서 붙은 이미지/표가 화면 밖으로 안 나가게 */ #bo_v_con img, #bo_v_con table, .bo_v_con img, .bo_v_con table, .cke_editable img, .cke_editable table, article img, article table { max-width: 100% !important; height: auto; } /* 워드가 p, span에 폭을 박아놓은 경우 강제로 해제 */ #bo_v_con p[style*="width"], #bo_v_con span[style*="width"], .bo_v_con p[style*="width"], .bo_v_con span[style*="width"], .cke_editable p[style*="width"], .cke_editable span[style*="width"], article p[style*="width"], article span[style*="width"] { width: auto !important; max-width: 100% !important; } /* 기본 blockquote 스타일 */ blockquote { border-left: 4px solid #c0392b; /* 사이트 분위기와 맞는 붉은 계열 */ padding: 12px 18px; margin: 20px 0; background: #fafafa; font-style: normal; color: #333; line-height: 1.6; } /* blockquote 안의 p 태그 정렬 */ blockquote p { margin: 0 0 10px 0; text-align: justify; } /* 마지막 p 태그 여백 제거 */ blockquote p:last-child { margin-bottom: 0; } /* 본문 안 링크 스타일 */ #gpt-article a { color: #cc0000 !important; text-decoration: none !important; } #gpt-article a:hover { color: #990000 !important; } // https://로 시작하는 링크만 target="_blank" 적용 document.addEventListener("DOMContentLoaded", function () { const links = document.querySelectorAll('#gpt-article a[href^="https://"]'); links.forEach(link => { link.setAttribute("target", "_blank"); link.setAttribute("rel", "noopener noreferrer"); }); });
